통합대장경

阿毘達磨集異門足論卷第二十

ABC_IT_K0946_T_020
024_1310_c_01L아비달마집이문족론 제20권
024_1310_c_01L阿毘達磨集異門足論卷第二十


존자 사리자 설
삼장법사 현장 한역
송성수 번역
024_1310_c_02L尊者舍利子說
三藏法師玄奘奉 詔譯


11. 십법품 ②
024_1310_c_04L十法品第十一之二

【문】 청변처정(靑遍處定)의 가행(加行)은 어떤 것인가? 관행(觀行)을 닦는 이는 어떤 방편으로 말미암아 청변처정에 깨달아 들어갈 수 있는가?
【답】 처음에 업(業)을 닦는 이가 처음으로 관(觀)을 닦을 적에는 이 세계에 있어서 혹은 푸른 나무를 취하기도 하고, 혹은 푸른 잎사귀를 취하기도 하며, 혹은 푸른 꽃을 취하기도 하고, 혹은 푸른 열매를 취하기도 하며, 혹은 푸른 옷을 취하기도 하고, 혹은 갖가지 푸른 꾸미개[靑莊嚴具]를 취하기도 하며, 혹은 푸른 구름을 취하기도 하고, 혹은 푸른 물을 취하기도 하며, 혹은 갖가지 그 밖의 다른 푸른 물건들을 취하기도 한다.
024_1310_c_05L靑遍處定加行云何修觀行者由何方便而能證入靑遍處定初修業者創修觀時於此世界或取靑樹或取靑葉或取靑花或取靑果或取靑衣或取種種靑莊嚴具或取靑雲或取靑水或取種種諸餘靑物
그는 이와 같은 푸른 것 등에 대하여 어느 하나의 모양을 취하여 뛰어나게 아는 힘[勝解力]으로써 ‘이것은 곧 아무 푸른 것의 모양이다’라고 생각을 잡아매어 사유(思惟)하고 가정적으로 생각[假想]하며 자세히 관찰하고 벌여 세우며[安位] 믿고 이해한다.
그는 이것에 대하여 뛰어나게 아는 힘으로써 ‘이것은 곧 아무 푸른 것이다’라고 생각을 잡아매어 사유하고 가정적으로 생각하며 자세히 관찰하고 벌여 세우며 믿고 이해함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곧 어지럽게 움직여서 모든 모양[相]에 내닫게 되므로 한 군데로 나아가 한 경계에 생각을 잡아매면서 ‘이 경계는 곧 푸른 것이요 다른 것이 아니다’라고 사유할 수 없게 된다.
024_1310_c_11L彼於如是隨取一相以勝解力繫念思惟假想觀察安立信解是某靑相彼由於此以勝解力繫念思惟假想觀察安立信解是某靑故心便散動馳流諸相不能一趣繫念一境思惟此境是靑非餘
그는 마음이 어지럽게 움직여서 모든 모양에 내닫게 되므로 한 군데로 나아가 한 경계에 생각을 잡아매면서 ‘이 경계는 틀림없이 푸른 것이다’라고 사유할 수 없는 까닭에 아직은 청변처정에 깨달아 들어갈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 어지럽게 움직여서 내닫는 마음을 가다듬기 위하여 하나의 푸른 모양[靑相]에 대하여 생각을 잡아매어 사유하되, ‘이것은 푸른 것이어서 노란 것 등으로는 변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것이니, 이런 모양을 사유하면서 용맹스럽게 정진하며, 나아가 마음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이어지게 하고 오래오래 머무른다. 이런 가행으로 말미암아 청정(靑定)에 들어가는 것이다.
024_1310_c_17L彼心散動馳流諸相不能一趣繫念一境思惟此境定是靑故未能證入靑遍處定爲攝散動馳流心故於一靑相繫念思惟謂此是靑非爲黃等思惟此相精勤勇猛乃至令心相續久住由斯加行能入靑定
024_1311_a_01L부지런히 힘써서 자주자주 이런 가행을 익힌 뒤에는 다시 나아가 이 선정의 방편을 수행하는 것이니, 가행으로 이끌어낸 도(道)에 대하여 자주자주 익히고 자주자주 닦으며 자주자주 많이 짓는 것이다.
이미 가행으로 이끌어낸 도를 자주자주 익히고 자주자주 닦으며 자주자주 짓게 되면 마음이 편안히 머무르고 평등하게 머무르며 가까이 머무르고 서로 이어져서 한 군데로 나아가 한 경계에 생각을 잡아매어 ‘이 경계는 틀림없이 푸른 모양이다’라고 사유하게 된다.
024_1310_c_22L精勤數習此加行已復進修行此定方便謂於加行所引生道數習數修數多所作旣於加行所引生道數習數修數多所作心便安住等住近住相續一趣繫念一境思惟此境定是靑相
마음이 편안히 머무르고 평등하게 머무르며 가까이 머무르고 서로 이어져서 한 군데로 나아가 한 경계에 생각을 잡아매어 ‘이 경계는 틀림없이 푸른 모양이다’라고 사유하면서 둘이 없고 옮아감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청정(靑定)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아직은 청변처정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문】 만일 아직 청변처정에 들어가지 못한 이면 이런 이의 청변처정에 대한 가행은 어떤 것인가? 관행을 닦는 이는 어떤 방편으로 말미암아야 청변처정에 증득하여 들어갈 수 있는가?
024_1311_a_06L由心安住等住近住相續一趣繫念一境思惟此境定是靑相無二無轉能入靑定而未能入靑遍處定若此未能入靑遍處定者靑遍處定加行云何修觀行者由何方便乃能證入靑遍處定
【답】 곧 앞에서 들어간 것과 같은 청정(靑定)에 의하여 마음을 따르고 조복하고 향해 나아가면서 점차로 유화(柔和)하게 하며 두루 유화하게 하여 한 군데로 나아가 안정하게 하고는 다시 ‘이 푸른 것은 점차로 더욱 광대해져서 동쪽ㆍ남쪽ㆍ서쪽ㆍ북쪽이 온통 모두가 다 푸르다’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 푸른 것은 점차로 더욱더 광대해져서 동쪽ㆍ남쪽ㆍ서쪽ㆍ북쪽이 온통 모두가 다 푸르다’라고 생각하는 까닭에 마음이 곧 어지럽게 움직여서 모든 모양에 내닫게 되므로 한 군데로 나아가면서 한 경계에 생각을 잡아매어 ‘이 경계는 온통 모두가 다 푸르다’라고 사유할 수 없게 된다.
024_1311_a_11L卽依如前所入靑定令心隨順調伏趣向漸次柔和周遍柔和一趣定已復想此靑漸次增廣東南西北遍皆是靑彼想此靑漸次增廣東南西北遍是靑故心便散動馳流諸相不能一趣繫念一境思惟此境遍皆是靑
그는 마음이 어지럽게 움직여서 모든 모양에 내닫게 되므로 한 군데로 나가면서 한 경계에 생각을 잡아매어 ‘이 경계는 온통 모두가 다 푸르다’라고 사유할 수 없는 까닭에 아직 청변처정에는 깨달아 들어갈 수 없다.
그러므로 그 어지럽게 움직여서 내닫는 마음을 가다듬기 위하여 두루 전체가 푸르다는 모양[遍靑相]에 대하여 생각을 잡아매어 사유하는 것이니, ‘이것은 두루 전체가 푸른 것이요, 두루 전체가 노란 것 등이 아니다’라고 한다.
024_1311_a_17L彼心散動馳流諸相不能一趣繫念一境思惟此境遍是靑故未能證入靑遍處定爲攝散動馳流心故於遍靑相繫念思惟此遍是靑非遍黃等
024_1311_b_01L이런 모양을 생각하면서 용맹스럽게 정진하며 나아가 마음을 끊임없이 이어지게 하고 오래오래 머무르는 것이니, 이런 가행으로 말미암아야 점차로 청변처정에 들어갈 수 있다. 부지런히 힘써서 자주자주 이 가행을 익힌 뒤에는 다시 나아가 이 선정의 방편을 수행하는 것이니, 가행으로 이끌어낸 도(道)에 대하여 자주자주 익히고 자주자주 닦으며 자주자주 많이 짓는 것이다.
024_1311_a_21L思惟此相精勤勇猛乃至令心相續久住由斯加行乃漸能入靑遍處定精勤數習此加行已復進修行此定方便謂於加行所引生道數習數修數多所作
이미 가행으로 이끌어낸 도를 자주자주 익히고 자주자주 닦으며 자주자주 많이 짓게 되면 마음이 곧 편안히 머무르고 평등하게 머무르며 가까이 머무르고 서로 이어져서 한 군데로 나아가 한 경계에 생각을 잡아매어 ‘이 경계는 두루 전체가 푸르다’라고 사유하게 된다.
마음이 편안히 머무르고 평등하게 머무르며 가까이 머무르고 서로 이어져서 한 군데로 나아가 한 경계에 생각을 잡아매어 ‘이 경계는 두루 전체가 푸르다’라고 사유하면서 둘이 없고 옮아감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이로부터 비로소 청변처정에 들어가게 된다.
024_1311_b_02L旣於加行所引生道數習數修數多所作心便安住等住近住相續一趣繫念一境思惟此境遍皆是靑由心安住等住近住相續一趣繫念一境思惟此境遍皆是靑無二無轉從此乃入靑遍處定
‘위[上]와 아래[下]’라 함은 위와 아래의 방위를 말한다.
‘곁으로 퍼진다[傍布]’고 함은 동쪽과 남쪽 등을 말한다.
‘둘이 없다[無二]’고 함은 그 사이에 뒤섞임이 없다는 것이다.
‘끝이 없고[無邊] 가가 없다[無際]’고 함은 끝과 가장자리를 측량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것이 다섯 번째’라 함은, 모든 선정 가운데서 점차와 순차와 서로 이어지는 차례의 순서로 다섯 번째가 되는 것이다.
‘변처(遍處)’라고 함은, 이 선정에 있는 온갖 착한[善] 물질ㆍ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을 모두 ‘변처’라고 한다.
024_1311_b_08L言上下者謂上下方言傍布者謂東南等言無二者謂無閒雜無邊無際者謂邊際難測是第五者謂諸定中漸次順次相續次第數爲第五言遍處者謂此定中所有善色受想行識皆名遍處
【문】 황변처정(黃遍處定)의 가행(加行)은 어떤 것인가? 관행(觀行)을 닦는 이는 어떤 방편으로 말미암아 황변처정에 깨달아 들어갈 수 있는가?
【답】 처음에 업(業)을 닦는 이가 처음으로 관(觀)을 닦을 때에는 이 세계에 있어서 혹은 노란 나무를 취하기도 하고, 혹은 노란 잎사귀를 취하기도 하며, 혹은 노란 꽃을 취하기도 하고, 혹은 노란 열매를 취하기도 하며, 혹은 노란 옷을 취하기도 하고, 혹은 갖가지 노란 꾸미개[莊嚴具]를 취하기도 하며, 혹은 노란 구름을 취하기도 하고, 혹은 노란 물을 취하기도 하며, 혹은 갖가지 그 밖의 노란 물건을 취하기도 한다.
024_1311_b_13L黃遍處定加行云何修觀行者由何方便而能證入黃遍處定初修業者創修觀時於此世界或取黃樹或取黃葉或取黃花或取黃果或取黃衣或取種種黃莊嚴具或取黃雲或取黃水或取種種諸餘黃物
024_1311_c_01L그는 이와 같은 등의 노란 것에 대하여 어느 하나의 모양을 취하여 뛰어나게 아는 힘[勝解力]으로써 ‘이것은 곧 아무 노란 것의 모양이다’라고 생각을 잡아매어 사유(思惟)하고 가정해서 생각[假想]하며 자세히 관찰하고 벌여 세우며 믿고 이해한다.
그는 이것에 대하여 뛰어나게 아는 힘으로써 ‘이것은 곧 아무 노란 것의 모양이다’라고 생각을 잡아매어 사유하고 가정적으로 생각하며 자세히 관찰하고 벌여 세우고 믿고 이해함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곧 어지럽게 움직여서 모든 모양에 내닫게 되므로 한 군데로 나아가 한 경계에 생각을 잡아매면서 ‘이 경계는 곧 노란 것이요 다른 것이 아니다’라고 사유할 수 없게 된다.
024_1311_b_19L彼於如是隨取一相以勝解力繫念思惟假想觀察安立信解是某黃相彼由於此以勝解力繫念思惟假想觀察安立信解是某黃故心便散動馳流諸相不能一趣繫念一境思惟此境是黃非餘
그는 마음이 어지럽게 움직여서 모든 모양에 내닫게 되므로 한 군데로 나아가 한 경계에 생각을 잡아매면서 ‘이 경계는 틀림없이 노란 것이다’라고 사유할 수 없는 까닭에 아직은 황변처정에 깨달아 들어갈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 어지럽게 움직이면서 내닫는 마음을 가다듬기 위하여 하나의 노란 모양[黃相]에 대하여 생각을 잡아매어 사유하되, ‘이것은 곧 노란 것이어서 푸른 것 등으로는 되지 않는다’라고 하는 것이니, 이런 모양을 사유하면서 용맹스럽게 정진하고 나아가 마음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이어지게 하고 오래오래 머무르면 이런 가행으로 말미암아 황정(黃定)에 들어갈 수 있다.
024_1311_c_02L彼心散動馳流諸相不能一趣繫念一境思惟此境定是黃故未能證入黃遍處定爲攝散動馳流心故於一黃相繫念思惟謂此是黃非爲靑等思惟此相精勤勇猛乃至令心相續久住由斯加行能入黃定
부지런히 힘써서 자주자주 익힌 뒤에는 다시 나아가 이 선정의 방편을 수행하는 것이니, 가행으로 이끌어낸 도(道)에 대하여 자주자주 익히고 자주자주 닦으며 자주자주 많이 짓는 것이다.
이미 가행으로 이끌어낸 도를 자주자주 익히고 자주자주 닦으며 자주자주 많이 짓게 되면 마음이 곧 편안히 머무르고 평등하게 머무르며 가까이 머무르고 서로 이어져서 한 군데로 나아가 한 경계에 생각을 잡아매어 ‘이 경계는 틀림없이 노란 모양이다’라고 사유하게 된다.
024_1311_c_07L精勤數習此加行已復進修行此定方便謂於加行所引生道數習數修數多所作旣於加行所引生道數習數修數多所作心便安住等住近住相續一趣繫念一境思惟此境定是黃相
마음이 편안히 머무르고 평등하게 머무르며 가까이 머무르고 서로 이어져서 한 군데로 나아가 한 경계에 생각을 잡아매어 ‘이 경계는 틀림없이 노란 모양이다’라고 사유하면서 둘이 없고 옮아감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황정(黃定)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아직은 황변처정(黃遍處定)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문】 만일 아직 황변처정에 들어가지 못한 이면 이런 이의 황변처정에 대한 가행(加行)은 어떤 것인가? 관행을 닦는 이는 어떤 방편으로 말미암아야 황변처정에 깨달아 들어갈 수 있는가?
024_1311_c_13L由心安住等住近住相續一趣繫念一境思惟此境定是黃相無二無轉能入黃定而未能入黃遍處定若此未能入黃遍處定者黃遍處定加行云何修觀行者由何方便乃能證入黃遍處定
【답】 곧 앞에서 들어간 것과 같은 황정(黃定)에 의하여 마음으로 하여금 따르고 조복하고 향해 나아가면서 점차로 유화(柔和)하게 하여 두루 유화하게 하여 한 군데로 안정하게 하고는 다시 ‘이 노란 것은 점차로 더욱더 광대해져서 동쪽ㆍ남쪽ㆍ서쪽ㆍ북쪽이 온통 모두가 다 노랗다’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 노란 것은 점차로 더욱더 광대해져서 동쪽ㆍ남쪽ㆍ서쪽ㆍ북쪽이 온통 모두가 다 노랗다’라고 생각하는 까닭에 마음이 곧 어지럽게 움직이면서 모든 모양에 내닫게 되므로 한 군데로 나가면서 한 경계에 생각을 잡아매어 ‘이 경계는 온통 모두가 다 노랗다’라고 사유할 수 없게 된다.
024_1311_c_18L卽依如前所入黃定令心隨順調伏趣向漸次柔和周遍柔和一趣定已復想此黃漸次增廣東南西北遍皆是黃彼想此黃漸次增廣東南西北遍是黃故心便散動馳流諸相不能一趣繫念一境思惟此境遍皆是黃
024_1312_a_01L그는 마음이 어지럽게 움직여서 모든 모양에 내닫게 되므로 한 군데로 나가면서 한 경계에 생각을 잡아매어 ‘이 경계는 온통 모두가 다 노랗다’라고 사유할 수 없는 까닭에 아직 황변처정에는 증득하여 들어갈 수 없다.
그러므로 그 어지럽게 움직여서 내닫는 마음을 가다듬기 위하여 두루 전체가 노랗다는 모양[遍黃相]에 대하여 생각을 잡아매어 사유하는 것이니, ‘이것은 두루 전체가 노란 것이요, 두루 전체가 푸른 것 등이 아니다’라고 한다. 이런 모양을 생각하면서 용맹스럽게 정진하며 나아가 마음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이어지게 하고 오래오래 머무르는 것이니, 이런 가행으로 말미암아야 점차로 황변처정에 들어갈 수 있다.
024_1312_a_01L彼心散動馳流諸相不能一趣繫念一境思惟此境遍是黃故未能證入黃遍處定爲攝散動馳流心故於遍黃相繫念思惟此遍是黃非遍靑等思惟此相精勤勇猛乃至令心相續久住由斯加行乃漸能入黃遍處定
부지런히 힘써서 자주자주 이런 가행을 익힌 뒤에는 다시 나아가 이 선정의 방편을 수행하는 것이니, 가행으로 이끌어낸 도(道)에 대하여 자주자주 익히고 자주자주 닦으며 자주자주 많이 짓는 것이다.
이미 가행으로 이끌어낸 도를 자주자주 익히고 자주자주 닦으며 자주자주 많이 짓게 되면 마음이 곧 편안히 머무르고 평등하게 머무르며 가까이 머무르고 서로 이어져서 한 군데로 나아가 한 경계에 생각을 잡아매어 ‘이 경계는 두루 전체가 노랗다’라고 사유하게 된다.
024_1312_a_07L精勤數習此加行已復進修行此定方便謂於加行所引生道數習數修數多所作旣於加行所引生道數習數修數多所作心便安住等住近住相續一趣繫念一境思惟此境遍皆是黃
마음이 편안히 머무르고 평등하게 머무르며 가까이 머무르고 서로 이어져서 한 군데로 나아가 한 경계에 생각을 잡아매어 ‘이 경계는 두루 전체가 노랗다’라고 사유하면서 둘이 없고 옮아감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이로부터 비로소 황변처정에 들어가게 된다.
‘위와 아래’라 함은 위와 아래의 방위를 말한다.
‘곁으로 퍼진다[傍布]’고 함은 동쪽과 남쪽 등을 말한다.
024_1312_a_12L由心安住等住近住相續一趣繫念一境思惟此境遍皆是黃無二無轉從此乃入黃遍處定言上下者謂上下方言傍布者謂東南等
‘둘이 없다[無二]’고 함은 그 사이에 뒤섞임이 없다는 것이다.
‘끝이 없고[無邊] 가가 없다[無際]’고 함은 끝과 가장자리를 측량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것이 여섯 번째’라 함은, 모든 선정 가운데서 점차와 순차와 이어지는 차례의 순서[數]로 여섯 번째가 되는 것이다.
‘변처(遍處)’라는 말은, 이 선정에 있는 모든 착한[善] 물질ㆍ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을 모두 ‘변처’라고 한다.
024_1312_a_16L言無二者謂無閒雜無邊無際者謂邊際難測是第六者謂諸定中漸次順次相續次第數爲第六言遍處者謂此定中所有善色受想行識皆名遍處
024_1312_b_01L【문】 적변처정(赤遍處定)의 가행(加行)은 어떤 것인가? 관행(觀行)을 닦는 이는 어떤 방편을 말미암아 적변처정에 증득하여 들어갈 수 있는가?
【답】 처음에 업(業)을 닦는 이가 처음으로 관(觀)을 닦을 때에는 이 세계에 있어서 혹은 붉은 나무를 취하기도 하고, 혹은 붉은 잎사귀를 취하기도 하며, 혹은 붉은 꽃을 취하기도 하고, 혹은 붉은 열매를 취하기도 하며, 혹은 붉은 옷을 취하기도 하고, 혹은 갖가지 붉은 꾸미개를 취하기도 하며, 혹은 붉은 구름을 취하기도 하고, 붉은 물을 취하기도 하며, 혹은 갖가지 그 밖의 붉은 물건을 취하기도 한다.
024_1312_a_20L赤遍處定加行云何修觀行者由何方便而能證入赤遍處定初修業者創修觀時於此世界或取赤樹或取赤葉或取赤花或取赤果或取赤衣或取種種赤莊嚴具或取赤雲或取赤水或取種種諸餘赤物
그는 이와 같은 붉은 것에 대하여 어느 하나의 모양을 취하여 뛰어나게 아는 힘[勝解力]으로써 ‘이것은 곧 아무것의 붉은 모양이다’라고 생각을 잡아매어 사유(思惟)하고 가정해서 생각하며 자세히 관찰하고 벌여 세우며 믿고 이해한다.
그는 이것에 대하여 뛰어나게 아는 힘으로써 ‘이것은 곧 아무것의 붉은 것이다’라고 생각을 잡아매어 사유하고 가정해서 생각하며 자세히 관찰하고 벌여 세우며 믿고 이해함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곧 산란하게 동요해서 모든 모양에 내닫게 되므로 한 군데로 나가면서 한 경계에 생각을 잡아매어 ‘이 경계는 곧 붉은 것이요 그 밖의 다른 것이 아니다’라고 사유할 수 없게 된다.
024_1312_b_03L彼於如是隨取一相以勝解力繫念思惟假想觀察安立信解是某赤相彼由於此以勝解力繫念思惟假想觀察安立信解是某赤故心便散動馳流諸相不能一趣繫念一境思惟此境是赤非餘
그는 마음이 어지럽게 움직여서 모든 모양에 내닫게 되므로 한 군데로 나아가 한 경계에 생각을 잡아매면서 ‘이 경계는 틀림없이 붉은 것이다’라고 사유할 수 없는 까닭에 아직은 적변처정에 깨달아 들어갈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 어지럽게 움직여서 내닫는 마음을 가다듬기 위하여 하나의 붉은 모양[赤相]에 대하여 생각을 잡아매어 사유하되, ‘이것은 곧 붉은 것이요 노란 것 등으로는 되지 않는다’라고 하는 것이니, 이런 모양을 사유하면서 용맹스럽게 정진하고 나아가 마음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이어지게 하고 오래오래 머무르면 이런 가행으로 말미암아 적정(赤定)에 들어가는 것이다.
024_1312_b_09L彼心散動馳流諸相不能一趣繫念一境思惟此境定是赤故未能證入赤遍處定爲攝散動馳流心故於一赤相繫念思惟謂此是赤非爲黃等思惟此相精勤勇猛乃至令心相續久住由斯加行能入赤定
부지런히 힘써서 자주자주 이런 가행을 익힌 뒤에는 다시 나아가 이 선정의 방편을 수행하는 것이니, 가행(加行)으로 이끌어낸 도(道)에 대하여 자주자주 익히고 자주자주 닦으며 자주자주 많이 짓는 것이다.
이미 가행으로 이끌어낸 도를 자주자주 익히고 자주자주 닦으며 자주자주 많이 짓게 되면 마음이 편안히 머무르고 평등하게 머무르며 가까이 머무르고 서로 이어져서 한 군데로 나아가 한 경계에 생각을 잡아매어 ‘이 경계는 곧 붉은 모양이다’라고 사유하게 된다. 마음이 편안히 머무르고 평등하게 머무르며 가까이 머무르고 서로 이어져서 한 군데로 나아가 한 경계에 생각을 잡아매어 ‘이 경계는 틀림없이 붉은 모양이다’라고 사유하면서 둘이 없고 옮아감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적정(赤定)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아직은 적변처정(赤遍處定)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024_1312_b_14L精勤數習此加行已復進修行此定方便謂於加行所引生道數習數修數多所作旣於加行所引生道數習數修數多所作心便安住等住近住相續一趣繫念一境思惟此境定是赤相由心安住等住近住相續一趣繫念一境思惟此境定是赤相無二無轉能入赤定而未能入赤遍處定
024_1312_c_01L【문】 만일 아직 적변처정에 들어가지 못한 이면 이런 이의 적변처정에 대한 가행은 어떤 것인가? 관행을 닦는 이는 어떤 방편으로 말미암아야 적변처정에 깨달아 들어갈 수 있는가?
【답】 곧 앞에서 들어간 것과 같은 적정(赤定)에 의하여 마음을 따르고 조복하고 향해 나아가 점차로 유화(柔和)하게 하며 두루 유화하게 하여 한 군데로 나아가 안정하게 하고는 다시 ‘이 붉은 것은 점차로 더욱더 광대해져서 동쪽ㆍ남쪽ㆍ서쪽ㆍ북쪽이 온통 모두가 다 벌겋다’라고 생각한다.
024_1312_b_22L若此未能入赤遍處定者赤遍處定加行云何修觀行者由何方便乃能證入赤遍處定卽依如前所入赤定令心隨順調伏趣向漸次柔和周遍柔和一趣定已復想此赤漸次增廣東南西北遍皆是赤
그는 ‘이 붉은 것이 점차로 더욱더 광대해져서 동쪽ㆍ남쪽ㆍ서쪽ㆍ북쪽이 온통 모두가 다 벌겋다’라고 생각하는 까닭에 마음이 곧 산란하게 동요해서 모든 모양에 내닫게 되므로 한 군데로 나가면서 한 경계에 생각을 잡아매어 ‘이 경계는 온통 모두가 다 벌겋다’라고 사유할 수 없게 된다.
그는 마음이 어지럽게 움직여서 모든 모양에 내닫게 되므로 한 군데로 나가면서 한 경계에 생각을 잡아매어 ‘이 경계는 온통 모두가 다 벌겋다’라고 사유할 수 없는 까닭에 아직 적변처정에는 깨달아 들어갈 수 없다.
024_1312_c_05L彼想此赤漸次增廣東南西北遍是赤故心便散動馳流諸相不能一趣繫念一境思惟此境遍皆是赤彼心散動馳流諸相不能一趣繫念一境思惟此境遍是赤故未能證入赤遍處定
그러므로 그 어지럽게 움직여서 내닫는 마음을 가다듬기 위하여 두루 전체가 붉다는 모양[遍赤相]에 대하여 생각을 잡아매어 사유하는 것이니, ‘이것은 두루 전체가 붉은 것이요 두루 전체가 노란 것 등이 아니다’라고 한다. 이런 모양을 생각하면서 용맹스럽게 정진하며 나아가 마음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이어지게 하고 오래오래 머무르는 것이니, 이런 가행으로 말미암아야 점차로 적변처정에 들어갈 수 있다.
024_1312_c_10L爲攝散動馳流心故於遍赤相繫念思惟此遍是赤非遍黃等思惟此相精勤勇猛乃至令心相續久住由斯加行乃漸能入赤遍處定
부지런히 힘쓰면서 자주자주 이런 가행을 익힌 뒤에는 다시 나아가 이 선정의 방편을 수행하는 것이니, 가행으로 이끌어낸 도(道)에 대하여 자주자주 익히고 자주자주 닦으며 자주자주 많이 짓는 것이다.
이미 가행으로 이끌어낸 도를 자주자주 익히고 자주자주 닦으며 자주자주 짓게 되면 마음이 곧 편안히 머무르고 평등하게 머무르며 가까이 머무르고 서로 이어져서 한 군데로 나아가 한 경계에 생각을 잡아매어 ‘이 경계는 두루 전체가 붉다’라고 사유하게 된다.
024_1312_c_14L精勤數習此加行復進修行此定方便謂於加行所引生道數習數修數多所作旣於加行所引生道數習數修數多所作便安住等住近住相續一趣繫念一思惟此境遍皆是赤
마음이 편안히 머무르고 평등하게 머무르며 가까이 머무르고 서로 이어져서 한 군데로 나아가 한 경계에 생각을 잡아매어 ‘이 경계는 두루 전체가 붉다’라고 사유하면서 둘이 없고 옮아감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이로부터 비로소 적변처정에 들어가게 된다.
‘위와 아래’라 함은 위와 아래의 방위를 말한다.
‘곁으로 퍼진다[傍布]’고 함은 동쪽과 남쪽 등을 말한다.
‘둘이 없다[無二]’고 함은 그 사이에 뒤섞임이 없다는 것이다.
024_1312_c_19L由心安住等住近住相續一趣繫念一境思惟此境遍皆是赤無二無轉從此乃入赤遍處定言上下者謂上下方言傍布謂東南等言無二者謂無閒雜
024_1313_a_01L‘끝이 없고[無邊] 가가 없다[無際]’고 함은 끝과 가장자리를 측량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것이 일곱 번째’라 함은, 모든 선정 가운데서 점차와 순차와 서로 이어지는 차례의 순서[數]로 일곱 번째가 되는 것이다.
‘변처(遍處)’라 함은, 이 선정에 있는 모든 착한[善] 물질ㆍ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을 모두 ‘변처’라고 한다.
024_1312_c_23L邊無際者謂邊際難測是第七者諸定中漸次順次相續次第數爲第言遍處者謂此定中所有善色受想行識皆名遍處
【문】 백변처정(白遍處定)의 가행(加行)은 어떤 것인가? 관행(觀行)을 닦는 이는 어떤 방편으로 말미암아 백변처정에 깨달아 들어갈 수 있는가?
【답】 처음에 업(業)을 닦는 이가 처음으로 관(觀)을 닦을 적에는 이 세계에 있어서 혹은 흰 나무를 취하기도 하고, 혹은 흰 잎사귀를 취하기도 하며, 혹은 흰 꽃을 취하기도 하고, 혹은 흰 열매를 취하기도 하며, 혹은 흰옷을 취하기도 하고, 혹은 흰 꾸미개를 취하기도 하며, 혹은 흰 구름을 취하기도 하고, 혹은 흰 물을 취하기도 하며, 혹은 갖가지 그 밖의 흰 물건을 취하기도 한다.
024_1313_a_04L白遍處定加行云何修觀行者由何方便而能證入白遍處定初修業者創修觀時於此世界或取白樹或取白葉或取白花或取白菓或取白衣或取種種白莊嚴具或取白雲或取白水或取種種諸餘白物
그는 이와 같은 등의 흰 물건에 대하여 어느 하나의 모양을 취하여 뛰어나게 아는 힘[勝解力]으로써 ‘이것은 곧 아무것의 흰 모양이다’라고 생각을 잡아매어 사유(思惟)하고 가정해서 생각하며 자세히 관찰하고 벌여 세우며 믿고 이해한다.
그는 이것에 대하여 뛰어나게 아는 힘으로써 ‘이것은 곧 아무것의 흰 모양이다’라고 생각을 잡아매어 사유하고 가정적으로 생각하며 자세히 관찰하고 벌여 세우며 믿고 이해함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곧 어지럽게 움직여서 모든 모양에 내닫게 되므로 한 군데로 나아가 한 경계에 생각을 잡아매면서 ‘이 경계는 곧 흰 것이요 그 밖의 다른 것이 아니다’라고 사유할 수 없게 된다.
024_1313_a_10L彼於如是隨取一相以勝解力繫念思惟假想觀察安立信解是某白相彼由於此以勝解力繫念思惟假想觀察安立信解是某白故心便散動馳流諸相不能一趣繫念一境思惟此境是白非餘
그는 마음이 어지럽게 움직여서 모든 모양에 내닫게 되므로 한 군데로 나아가 한 경계에 생각을 잡아매면서 ‘이 경계는 틀림없이 희다’라고 사유할 수 없는 까닭에 아직은 백변처정에 증득하여 들어갈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 어지럽게 움직여서 내닫는 마음을 가다듬기 위하여 하나의 흰 모양[白相]에 대하여 생각을 잡아매어 사유하되, ‘이것은 곧 흰 것이어서 붉은 것 등으로는 변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것이니, 이런 모양을 사유하면서 용맹스럽게 정진하며, 나아가 마음을 끊임없이 이어지게 하고 오래오래 머무르면 이런 가행으로 말미암아 백정(白定)에 들어가는 것이다.
024_1313_a_16L彼心散動馳流諸相不能一趣繫念一境思惟此境定是白故未能證入白遍處定爲攝散動馳流心故於一白相繫念思惟謂此是白非爲赤等思惟此相精勤勇猛乃至令心相續久住由斯加行能入白定
024_1313_b_01L부지런히 힘쓰면서 자주자주 이런 가행을 익힌 뒤에는 다시 나아가 이 선정의 방편을 수행하는 것이니, 가행으로 이끌어낸 도(道)에 대하여 자주자주 익히고 자주자주 닦으며 자주자주 많이 짓는 것이다.
이미 가행으로 이끌어낸 도를 자주자주 익히고 자주자주 닦으며 자주자주 많이 짓게 되면 마음이 곧 편안히 머무르고 평등하게 머무르며 가까이 머무르고 서로 이어져서 한 군데로 나아가 한 경계에 생각을 잡아매어 ‘이 경계는 틀림없이 곧 흰 모양이다’라고 사유하게 된다.
024_1313_a_21L精勤數習此加行已復進修行此定方便謂於加行所引生道數習數修數多所作旣於加行所引生道數習數修數多所作心便安住等住近住相續一趣繫念一境思惟此境定是白相
마음이 편안히 머무르고 평등하게 머무르며 가까이 머무르고 서로 이어져서 한 군데로 나아가 한 경계에 생각을 잡아매어 ‘이 경계는 틀림없이 흰 모양이다’라고 사유하면서 둘이 없고 옮아감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백정(白定)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아직은 백변처정(白遍處定)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문】 만일 아직 백변처정에 들어가지 못한 이면 이런 이의 백변처정에 대한 가행(加行)은 어떤 것인가? 관행을 닦는 이는 어떤 방편으로 말미암아야 백변처정에 깨달아 들어갈 수 있는가?
024_1313_b_04L由心安住等住近住相續一趣繫念一境思惟此境定是白相無二無轉能入白定而未能入白遍處定若此未能入白遍處定者白遍處定加行云何修觀行者由何方便乃能證入白遍處定
【답】 곧 앞에서 들어간 것과 같은 백정에 의하여 마음을 따르고 조복하며 향해 나아가 점차로 유화(柔和)하게 하며 두루 유화하게 하여 한 군데로 나아가 안정하게 하고는 다시 ‘이 흰 것은 점차로 더욱더 광대해지면서 동쪽ㆍ남쪽ㆍ서쪽ㆍ북쪽이 온통 모두가 다 희다’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 흰 것이 점차로 더욱더 광대해져서 동쪽ㆍ남쪽ㆍ서쪽ㆍ북쪽이 온통 모두가 다 희다’라고 생각하는 까닭에 마음이 곧 어지럽게 움직여서 모든 모양에 내닫게 되므로 한 군데로 나가면서 한 경계에 생각을 잡아매어 ‘이 경계는 온통 모두가 다 희다’라고 사유할 수 없게 된다.
024_1313_b_09L卽依如前所入白定令心隨順調伏趣向漸次柔和周遍柔和一趣定已復想此白漸次增廣東南西北遍皆是白彼想此白漸次增廣東南西北遍是白故心便散動馳流諸相不能一趣繫念一境思惟此境遍皆是白
그는 마음이 어지럽게 움직여서 모든 모양에 내닫게 되므로 한 군데로 나가면서 한 경계에 생각을 잡아매어 ‘이 경계는 온통 모두가 다 희다’라고 사유할 수 없기 때문에 아직 백변처정에는 깨달아 들어갈 수 없다.
그러므로 그 어지럽게 움직여서 내닫는 마음을 가다듬기 위하여 두루 전체가 흰 모양[遍白相]에 대하여 생각을 잡아매어 사유하면서 ‘이것은 두루 모두가 흰 것이요 두루 전체가 붉은 것 등이 아니다’라고 한다. 이런 모양을 사유하면서 용맹스럽게 정진하며, 나아가 마음으로 끊임없이 이어지게 하고 오래오래 머무르는 것이니, 이런 가행으로 말미암아야 점차로 백변처정에 들어갈 수 있다.
024_1313_b_15L彼心散動馳流諸相不能一趣繫念一境思惟此境遍是白故未能證入白遍處定爲攝散動馳流心故於遍白相繫念思惟此遍是白非遍赤等思惟此相精勤勇猛乃至令心相續久住由斯加行乃漸能入白遍處定
024_1313_c_01L부지런히 힘써서 자주자주 이런 가행을 익힌 뒤에는 다시 나아가 이 선정의 방편을 수행하는 것이니, 가행으로 이끌어낸 도(道)에 대하여 자주자주 익히고 자주자주 닦으며 자주자주 많이 짓는 것이다.
이미 가행으로 이끌어낸 도를 자주자주 익히고 자주자주 닦으며 자주자주 많이 짓게 되면 마음이 곧 편안히 머무르고 평등하게 머무르며 가까이 머무르고 서로 이어져서 한 군데로 나아가 한 경계에 생각을 잡아매어 ‘이 경계는 두루 전체가 희다’라고 사유하게 된다.
024_1313_b_21L精勤數習此加行已復進修行此定方便謂於加行所引生道數習數修數多所作旣於加行所引生道數習數修數多所作心便安住等住近住相續一趣繫念一境思惟此境遍皆是白
마음이 편안히 머무르고 평등하게 머무르며 가까이 머무르고 서로 이어지면서 한 군데로 나아가 한 경계에 생각을 잡아매어 ‘이 경계는 두루 전체가 희다’라고 사유하면서 둘이 없고 옮아감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이로부터 비로소 백변처정에 들어가게 된다.
‘위와 아래’라 함은 위와 아래의 방위를 말한다.
‘곁으로 퍼진다[傍布]’고 함은 동쪽과 남쪽 등을 말한다.
024_1313_c_03L由心安住等住近住相續一趣繫念一境思惟此境遍皆是白無二無轉從此乃入白遍處定言上下者謂上下方言傍布者謂東南等
‘둘이 없다[無二]’고 함은 그 사이에 뒤섞임이 없다는 것이다.
‘끝이 없고[無邊] 가가 없다[無際]’고 함은 끝과 가장자리를 측량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이것이 여덟 번째’라 함은, 모든 선정 가운데서 점차와 순차와 서로 이어지는 차례의 순서[數]로 여덟 번째라는 것이다.
‘변처(遍處)’라 함은, 이 선정에 있는 모든 착한[善] 물질ㆍ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을 모두 ‘변처’라고 한다.
024_1313_c_07L言無二者謂無閒雜無邊無際者謂邊際難測是第八者謂諸定中漸次順次相續次第數爲第八言遍處者謂此定中所有善色受想行識皆名遍處
【문】 공변처정(空遍處定)의 가행(加行)은 어떤 것인가? 관행(觀行)을 닦는 이는 어떤 방편으로 말미암아 공변처정에 깨달아 들어갈 수 있는가?
【답】 처음에 업(業)을 닦는 이가 처음으로 관(觀)을 닦을 때에는 이 세계에 있어서 혹은 집 위의 허공을 취하기도 하고, 혹은 땅 위의 허공을 취하기도 하며, 혹은 나무 위의 허공을 취하기도 하고, 혹은 바위 위의 허공을 취하기도 하며, 혹은 산 위의 허공을 취하기도 하고, 혹은 시내 가운데의 허공을 취하기도 하며, 혹은 골짜기 가운데의 허공을 취하기도 한다.
024_1313_c_11L空遍處定加行云何修觀行者由何方便而能證入空遍處定初修業者創修觀時於此世界取舍上空或地上空或樹上空或巖上空或山上空或川中空或谷中空
이와 같은 허공에 대하여 어느 하나의 모양을 취하여 뛰어나게 아는 힘[勝解力]으로써 ‘이것은 아무 데의 허공 모양이다’라고 생각을 잡아매어 사유(思惟)하고 가정적으로 생각[假想]하며 자세히 관찰하고 벌여 세우며 믿고 이해한다.
그는 이것에 대하여 뛰어나게 아는 힘으로써 ‘이것은 아무 데의 허공이다’라고 생각을 잡아매어 사유하고 가정해서 생각하며 자세히 관찰하고 벌여 세우며 믿고 이해함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곧 어지럽게 움직여서 모든 모양에 내닫게 되므로 한 군데로 나아가 한 경계에 생각을 잡아매면서 ‘이 경계는 바로 허공이요 다른 것이 아니다’라고 사유할 수 없게 된다.
024_1313_c_16L於此等空隨取一相以勝解力繫念思惟假想觀察安立信解是某空相彼由於此以勝解力繫念思惟假想觀察安立信解是某空故心便散動馳流諸相不能一趣繫念一境思惟此境是空非餘
024_1314_a_01L그는 마음이 어지럽게 움직여서 모든 모양에 내닫게 되므로 한 군데로 나아가 한 경계에 생각을 잡아매면서 ‘이 경계는 틀림없이 허공이다’라고 사유할 수 없는 까닭에 아직 공변처정(空遍處定)에 깨달아 들어갈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 어지럽게 움직여서 내닫는 마음을 가다듬기 위하여 하나의 허공 모양[空相]에 대하여 생각을 잡아매어 사유하되, ‘이것은 곧 허공이어서 의식[識] 등으로는 되지 않는다’라고 하는 것이니, 이런 모양을 사유하면서 용맹스럽게 정진하며, 나아가 마음을 끊임없이 이어지게 하면서 오래오래 머무르면 이런 가행으로 말미암아 공정(空定)에 들어가는 것이다.
024_1313_c_22L彼心散動馳流諸相不能一趣繫念一境思惟此境定是空故未能證入空遍處定爲攝散動馳流心故一空相繫念思惟謂此是空非爲識思惟此相精勤勇猛乃至令心相續久住由斯加行能入空定
부지런히 힘써서 자주자주 이런 가행을 익힌 뒤에는 다시 나아가 이 선정의 방편을 수행하는 것이니, 가행으로 이끌어낸 도(道)에 대하여 자주자주 익히고 자주자주 닦으며 자주자주 많이 짓는 것이다.
이미 가행으로 이끌어낸 도를 자주자주 익히고 자주자주 닦으며 자주자주 많이 짓게 되면 마음이 편안히 머무르고 평등하게 머무르며 가까이 머무르고 서로 이어져서 한 군데로 나아가 한 경계에 생각을 잡아매어 ‘이 경계는 틀림없이 허공의 모양이다’라고 사유하게 된다.
024_1314_a_04L精勤數習此加行已復進修行此定方便於加行所引生道數習數修數多所旣於加行所引生道數習數修數多所作心便安住等住近住相續一趣繫念一境思惟此境定是空相
마음이 편안히 머무르고 평등하게 머무르며 가까이 머무르고 서로 이어져서 한 군데로 나아가 한 경계에 생각을 잡아매어 ‘이 경계는 틀림없이 허공의 모양이다’라고 사유하면서 둘이 없고 옮아감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공정(空定)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아직은 공변처정(空遍處定)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문】 만일 아직 공변처정에 들어가지 못한 이면 이런 이의 공변처정에 대한 가행은 어떤 것인가? 관행을 닦는 이는 어떤 방편을 말미암아야 공변처정에 깨달아 들어갈 수 있는가?
024_1314_a_09L心安住等住近住相續一趣繫念一思惟此境定是空相無二無轉能入空定而未證入空遍處定若此未能入空遍處定者空遍處定加行云何修觀行者由何方便乃能證入空遍處定
【답】 곧 앞에서 들어간 것과 같은 공정(空定)에 의하여 마음을 따르고 조복하고 향해 나아가면서 점차로 유화(柔和)하게 하며 두루 유화하게 하여 한 군데로 나아가 안정하게 하고는 다시 ‘이 허공은 점차로 더욱더 광대해져서 동쪽ㆍ남쪽ㆍ서쪽ㆍ북쪽이 온통 모두가 허공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 허공은 점차로 더욱더 광대해져서 동쪽ㆍ남쪽ㆍ서쪽ㆍ북쪽이 온통 모두가 허공이다’라고 생각하는 까닭에 마음이 곧 어지럽게 움직여서 모든 모양에 내닫게 되므로 한 군데로 나가면서 한 경계에 생각을 잡아매어 ‘이 경계는 온갖 모두가 다 허공이다’라고 사유할 수 없게 된다.
024_1314_a_15L卽依如前所入空定心隨順調伏趣向漸次柔和周遍柔一趣定已復想此空漸次增廣南西北遍皆是空彼想此空漸次增東南西北遍是空故心便散動馳流諸相不能一趣繫念一境思惟此境遍皆是空
024_1314_b_01L그는 마음이 어지럽게 움직여서 모든 모양에 내닫게 되므로 한 군데로 나가면서 한 경계에 생각을 잡아매어 ‘이 경계는 온통 모두가 다 허공이다’라고 사유할 수 없는 까닭에 아직 공변처정에는 깨달아 들어갈 수 없다.
그러므로 그 어지럽게 움직여서 내닫는 마음을 가다듬기 위하여 두루 전체가 허공이라는 모양[遍空相]에 대하여 생각을 잡아매어 사유하는 것이니, ‘이것은 두루 전체가 허공이요 두루 전체가 의식[識] 등이 아니다’라고 한다. 이런 모양을 사유하면서 용맹스럽게 정진하며, 나아가 마음으로 끊임없이 이어지게 하고 오래오래 머무르는 것이니, 이런 가행으로 말미암아야 점차로 공변처정에 들어갈 수 있다.
024_1314_a_21L彼心散動馳流諸相能一趣繫念一境思惟此境遍是空未能證入空遍處定爲攝散動馳流心故於遍空相繫念思惟此遍是空非遍識等思惟此相精勤勇猛至令心相續久住由斯加行乃漸能入空遍處定
부지런히 힘써서 자주자주 이런 가행을 익힌 뒤에는 다시 나아가 이 선정의 방편을 수행하는 것이니, 가행으로 이끌어낸 도(道)에 대하여 자주자주 익히고 자주자주 닦으며 자주자주 많이 짓는 것이다.
이미 가행으로 이끌어낸 도를 자주자주 익히고 자주자주 닦으며 자주자주 짓게 되면 마음이 곧 편안히 머무르고 평등하게 머무르며 가까이 머무르고 서로 이어져서 한 군데로 나아가 한 경계에 생각을 잡아매어 ‘이 경계는 두루 전체가 허공이다’라고 사유하게 된다.
024_1314_b_04L精勤數習此加行已進修行此定方便謂於加行所引生數習數修數多所作旣於加行所引生道數習數修數多所作心便安住等住近住相續一趣繫念一境惟此境遍皆是空
마음이 편안히 머무르고 평등하게 머무르며 가까이 머무르고 서로 이어져서 한 군데로 나아가 한 경계에 생각을 잡아매어 ‘이 경계는 두루 전체가 허공이다’라고 사유해서 둘이 없고 옮아감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이로부터 비로소 공변처정에 들어가게 된다.
‘위와 아래’라 함은 위와 아래의 방위를 말한다.
‘곁으로 퍼진다[傍布]’고 함은 동쪽과 남쪽 등을 말한다.
024_1314_b_09L由心安住等住近相續一趣繫念一境思惟此境遍皆是空無二無轉從此乃入空遍處言上下者謂上下方言傍布者東南等
‘둘이 없다[無二]’고 함은 그 사이에 뒤섞임이 없다는 것이다.
‘끝이 없고[無邊] 가가 없다[無際]’고 함은 끝과 가장자리를 측량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것이 아홉 번째’라고 함은, 모든 선정 가운데서 점차와 순차와 서로 이어지는 차례의 순서[數]로 아홉 번째가 되는 것이다.
‘변처(遍處)’라고 함은, 이 공무변처정(空無遍處定)에 있는 모든 착한[善] 물질ㆍ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을 모두 ‘변처’라고 한다.
024_1314_b_13L言無二者謂無閒雜無邊無際者謂邊際難測是第九者謂諸定中漸次順次相續次第數爲第九遍處者謂此空無邊處定中所有善色受想行識皆名遍處
【문】 식변처정(識遍處定)의 가행(加行)은 어떤 것인가? 관행(觀行)을 닦는 이는 어떤 방편으로 말미암아 식변처정에 깨달아 들어갈 수 있는가?
【답】 처음에 업(業)을 닦는 이가 처음으로 관(觀)을 닦을 때에는 이 몸 안에 있어서 혹은 청정한 안식(眼識)의 모양을 취하기도 하고, 혹은 청정한 이식(耳識)의 모양을 취하기도 하며, 혹은 청정한 비식(鼻識)의 모양을 취하기도 하고, 혹은 청정한 설식(舌識)의 모양을 취하기도 하며, 혹은 청정한 신식(身識)의 모양을 취하기도 하고, 혹은 청정한 의식(意識)의 모양을 취하기도 한다.
024_1314_b_17L識遍處定加行云何修觀行者由何方便而能證入識遍處定初修業者創修觀時於此身中或取淸淨眼識相或取淸淨耳識相或取淸淨鼻識相或取淸淨舌識相或取淸淨身識相或取淸淨意識相
024_1314_c_01L이들의 모든 식(識)에 대하여 어느 하나의 모양을 취하여 뛰어나게 아는 힘[勝解力]으로써 ‘이것은 곧 아무 식의 모양이다’라고 생각을 잡아매어 사유(思惟)하고 가정해서 생각[假想]하며 자세히 관찰하고 벌여 세우며 믿고 이해한다.
그는 이것에 대하여 뛰어나게 아는 힘[勝解力]으로써 ‘이것은 곧 아무 식이다’라고 생각을 잡아매어 사유하고 가정적으로 생각하며 자세히 관찰하고 벌여 세우며 믿고 이해함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곧 어지럽게 움직여서 모든 모양에 내닫게 되므로 한 군데로 나아가 한 경계에 생각을 잡아매면서 ‘이 경계는 곧 식이요 다른 것이 아니다’라고 사유할 수 없게 된다.
024_1314_b_23L於此諸識隨取一相以勝解力繫念思惟假想觀察安立信解是某識相彼由於此以勝解力繫念思惟假想觀察安立信解是某識故心便散動馳流諸相不能一趣繫念一境思惟此境是識非餘
그는 마음이 어지럽게 움직여서 모든 모양에 내닫게 되므로 한 군데로 나아가 한 경계에 생각을 잡아매면서 ‘이 경계는 틀림없이 식이다’라고 사유할 수 없는 까닭에 아직 식변처정에 증득하여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 어지럽게 움직여서 내닫는 마음을 가다듬기 위하여 하나의 식 모양[識相]에 대하여 생각을 잡아매어 사유하되, ‘이것은 곧 식이어서 허공 등으로는 되지 않는다’라고 하는 것이니, 이런 모양을 사유하면서 용맹스럽게 정진하며, 나아가 마음으로 끊임없이 이어지게 하면서 오래오래 머무른다. 이런 가행으로 말미암아 식정(識定)에 들어가는 것이다.
024_1314_c_06L彼心散動馳流諸相不能一趣繫念一境思惟此境定是識故未能證入識遍處定爲攝散動馳流心故於一識相繫念思惟謂此是識非爲空等思惟此相精勤勇猛乃至令心相續久住由斯加行能入識定
부지런히 힘써서 자주자주 이런 가행을 익힌 뒤에는 다시 나아가 이 선정의 방편을 수행하는 것이니, 가행으로 이끌어낸 도(道)에 대하여 자주자주 익히고 자주자주 닦으며 자주자주 많이 짓는 것이다.
이미 가행으로 이끌어낸 도를 자주자주 익히고 자주자주 닦으며 자주자주 많이 짓게 되면 마음이 곧 편안히 머무르고 평등하게 머무르며 가까이 머무르고 서로 이어져서 한 군데로 나아가 한 경계에 생각을 잡아매어 ‘이 경계는 틀림없이 식의 모양이다’라고 사유하게 된다.
024_1314_c_11L精勤數習此加行已復進修行此定方便謂於加行所引生道數習數修數多所作旣於加行所引生道數習數修數多所作心便安住等住近住相續一趣繫念一境思惟此境定是識相
마음이 편안히 머무르고 평등하게 머무르며 가까이 머무르고 서로 이어져서 한 군데로 나아가 한 경계에 생각을 잡아매어 ‘이 경계는 틀림없는 식의 모양이다’라고 사유하면서 둘이 없고 옮아감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식정(識定)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아직은 식변처정(識遍處定)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문】 만일 아직 식변처정에 들어가지 못한 이면 이런 이의 식변처정에 대한 가행(加行)은 어떤 것인가? 관행을 닦는 이는 어떤 방편으로 말미암아야 식변처정에 깨달아 들어갈 수 있는가?
024_1314_c_16L由心安住等住近住相續一趣繫念一境思惟此境定是識相無二無轉能入識定而未能入識遍處定此未能入識遍處定者識遍處定加行云何修觀行者由何方便乃能證入識遍處定
024_1315_a_01L【답】 곧 앞에서 들어간 것과 같은 식정(識定)에 의하여 마음으로 하여금 따르고 조복하고 향해 나아가면서 점차로 유화(柔和)하게 하며 두루 유화하게 하여 한 군데로 나아가 안정하게 하고는 다시 ‘이 식은 점차로 더욱더 광대해져서 동쪽ㆍ남쪽ㆍ서쪽ㆍ북쪽이 온통 모두가 식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 식은 점차로 더욱더 광대해져서 동쪽ㆍ남쪽ㆍ서쪽ㆍ북쪽이 온통 모두가 식이다’라고 생각하는 까닭에 마음이 곧 산란하게 동요하면서 모든 모양에 내닫게 되므로 한 군데로 나가면서 한 경계에 생각을 잡아매어 ‘이 경계는 온통 모두가 곧 식이다’라고 사유할 수 없게 된다.
024_1314_c_22L卽依如前所入識定令心隨順調伏趣向漸次柔和周遍柔和一趣定已復想此識漸次增廣東南西北遍皆是識彼想此識漸次增廣東南西北遍是識故心便散動馳流諸相不能一趣繫念一境思惟此境遍皆是識
그는 마음이 어지럽게 움직여서 모든 모양에 내닫게 되므로 한 군데로 나가면서 한 경계에 생각을 잡아매어 ‘이 경계는 온통 모두가 곧 식이다’라고 사유할 수 없는 까닭에 아직 식변처정에는 깨달아 들어갈 수 없다.
그러므로 그 어지럽게 움직여서 내닫는 마음을 가다듬기 위하여 두루 전체가 식이라는 모양[遍識相]에 대하여 생각을 잡아매어 사유하는 것이니, ‘이것은 두루 전체가 식이요 두루 전체가 허공 등이 아니다’라고 한다. 이런 모양을 사유하면서 용맹스럽게 정진하며, 나아가 마음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이어지게 하고 오래오래 머무르는 것이니, 이런 가행으로 말미암아야 점차로 식변처정(識遍處定)에 들어갈 수 있다.
024_1315_a_05L彼心散動馳流諸相不能一趣繫念一境思惟此境遍皆識故未能證入識遍處定爲攝散動馳流心故於遍識相繫念思惟此遍是識非遍空等思惟此相精勤勇猛乃至令心相續久住由斯加行乃漸能入識遍處定
부지런히 힘써서 자주자주 이런 가행을 익힌 뒤에는 다시 나아가 이 선정의 방편을 수행하는 것이니, 가행으로 이끌어낸 도(道)에 대하여 자주자주 익히고 자주자주 닦으며 자주자주 많이 짓는 것이다.
이미 가행으로 이끌어낸 도에 대하여 자주자주 익히고 자주자주 닦으며 자주자주 많이 짓게 되면 마음이 곧 편안히 머무르고 평등하게 머무르며 가까이 머무르고 서로 이어지면서 한 군데로 나아가 한 경계에 생각을 잡아매어 ‘이 경계는 두루 전체가 식이다’라고 사유하게 된다.
024_1315_a_11L精勤數習此加行已復進修行此定方便謂於加行所引生道數習數修數多所作旣於加行數習數修數多所作心便安住等住近住相續一趣繫念一境思惟此境遍皆是識
마음이 편안히 머무르고 평등하게 머무르며 가까이 머무르고 서로 이어져서 한 군데로 나아가 한 경계에 생각을 잡아매어 ‘이 경계는 두루 전체가 식이다’라고 사유하면서 둘이 없고 옮아감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이로부터 비로소 식변처정에 들어가게 된다.
‘위와 아래’라 함은 위와 아래의 방위를 말한다.
‘곁으로 퍼진다[傍布]’고 함은 동쪽과 남쪽 등을 말한다.
024_1315_a_16L由心安住等住近住相續一趣繫念一境思惟此境遍皆是識無二無轉從此乃入識遍處定言上下者謂上下方言傍布者謂東南等
‘둘이 없다[無二]’고 함은 그 사이에 뒤섞임이 없다는 것이다.
‘끝이 없고[無邊] 가가 없다[無際]’고 함은 끝과 가장자리를 측량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이것이 열 번째’라 함은, 모든 선정 가운데서 점차와 순차와 서로 이어지는 차례의 순서[數]로 열 번째가 되는 것이다.
‘변처(遍處)’라 함은, 이 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에 있는 모든 착한[善]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을 모두 ‘변처’라고 한다.
024_1315_a_19L言無二者謂無閒雜無邊無際者邊際難測是第十者謂諸定中漸次順次相續次第數爲第十言遍處者謂此識無邊處定中所有善受想行皆名遍處
024_1315_b_01L【문】 10무학법(無學法)이라 함은 어떤 것인가?
【답】 첫째는 배울 것이 없는 이[無學]의 바른 소견[正見]이요, 둘째는 배울 것이 없는 이의 바른 생각[正思惟]이며, 셋째는 배울 것이 없는 이의 바른 말[正語]이요, 넷째는 배울 것이 없는 이의 바른 행위[正業]이며, 다섯째는 배울 것이 없는 이의 바른 생활[正命]이요, 여섯째는 배울 것이 없는 이의 바른 노력[正勤]이며, 일곱째는 배울 것이 없는 이의 바른 기억[正念]이요, 여덟째는 배울 것이 없는 이의 바른 선정[正定]이며, 아홉째는 배울 것이 없는 이의 바른 해탈[正解脫]이요, 열째는 배울 것이 없는 이의 바른 지혜[正智]이다.
024_1315_b_01L十無學法者云何爲十無學正見無學正思惟學正語無學正業無學正命無學正勤無學正念無學正定無學正解脫無學正智
【문】 어떤 것이 배울 것이 없는 이[無學]의 바른 소견[正見]인가?
【답】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에 속하지 않는 배울 것이 없는 이의 지혜를 배울 것 없는 이의 바른 소견이라 한다.
【문】 어떤 것이 배울 것이 없는 이의 바른 생각[正思惟]인가?
【답】 모든 성스러운 제자[聖弟子]가 괴로움[苦]에 대하여 괴로움이라 생각하고[思惟], 괴로움의 원인[集]에 대하여 괴로움의 원인이라 생각하며, 괴로움의 소멸[滅]에 대하여 괴로움의 소멸이라 생각하고,
024_1315_b_05L云何無學正見盡智無生智盡所不攝無學是名無學正見云何無學正思惟諸聖弟子於苦思惟苦於集思惟於滅思惟滅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道]에 대하여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라고 생각하면서 배울 것이 없는 이[無學]의 작의(作意)와 상응하는 모든 생각하고[思惟] 평등하게[等] 생각하고 가까이[近] 생각하며, 찾아 구하고[尋求] 평등하게 찾아 구하고 가까이 찾아 구하며, 미루어 찾고[推覓] 평등하게 미루어 찾고 가까이 미루어 찾되, 마음으로 법에 대하여 거칠게 움직여서 구르게[轉] 하는 것을 배울 것이 없는 이의 바른 생각이라 한다.
024_1315_b_09L於道思惟道無學作意相應所有思惟等思惟近思惟等尋求近尋求推覓等推覓近推令心於法麤動而轉是名無學正思惟
【문】 어떤 것이 배울 것이 없는 이의 바른 말[正語]인가?
【답】 모든 성스러운 제자가 괴로움에 대하여 괴로움이라 생각하고, 괴로움의 원인에 대하여 괴로움의 원인이라 생각하며, 괴로움의 소멸에 대하여 괴로움의 소멸이라 생각하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하여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라고 생각해서 배울 것이 없는 이의 작의와 상응하는 간택의 힘[簡擇力] 때문에 삿된 생활[邪命]에 나아가는 말[語]의 4악행(惡行)을 제외한 그 밖의 말의 악행에서 얻게 되는 배울 것이 없는 이의 멀리 여읨과[遠離] 뛰어나게[勝] 멀리 여의며, 가까이[近] 멀리 여의고,
024_1315_b_13L云何無學正語諸聖弟子苦思惟苦於集思惟集於滅思惟滅於道思惟道無學作意相應簡擇力除趣邪命語四惡行於餘語惡行所得無學遠離勝遠離近遠離
지극히[極] 멀리 여의며, 고요한[寂靜] 율의(律儀)이며, 조작(造作)이 없고 버리며[葉捨], 막아 수호하고[防護] 행하지 않으며[不行], 범하지 않는 것[不犯]과 그리고 배[船]ㆍ떼[筏]ㆍ교량(橋梁)ㆍ둑[堤塘]ㆍ담[牆]ㆍ해자[塹]와 제약(制約)하는 것에서 넘지도 않고 넘지도 않는 성품[不踰性]과 초월하지도 않고 초월하지도 않는 성품[不越性]과 무표(無表)의 어업(語業)을 바로 배울 것이 없는 이의 바른 말이라 한다.
【문】 어떤 것이 배울 것이 없는 이의 바른 행위[正業]인가?
【답】 모든 성스러운 제자가 괴로움에 대하여 괴로움이라 생각하고, 괴로움의 원인에 대하여 괴로움의 원인이라 생각하며,
024_1315_b_17L極遠寂靜律儀無作無造棄捨防護不行不犯舩筏橋梁堤塘牆塹於所制約不踰不踰性不越不越性無表語是名無學正語云何無學正業諸聖弟子於苦思惟苦於集思惟集
024_1315_c_01L괴로움의 소멸에 대하여 괴로움의 소멸이라 생각하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하여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라고 생각하면서 배울 것이 없는 이의 작의와 상응하는 간택의 힘 때문에 삿된 생활[邪命]에 나아가는 몸[身]의 3악행(惡行)을 제외한 그 밖의 몸의 악행에서 얻게 되는 배울 것이 없는 이의 멀리 여읨과 뛰어나게 멀리 여의며 가까이 멀리 여의고 지극히 멀리 여의며 고요한 율의이며, 조작이 없고 버리며 막아 수호하고 행하지 않으며 범하지 않는 것과 배ㆍ떼ㆍ교량ㆍ둑ㆍ담ㆍ해자와 제약(制約)하는 것에서 넘지도 않고 넘지도 않는 성품과 초월하지도 않고 초월하지도 않는 성품과 무표(無表)의 신업(身業)을 배울 것이 없는 이의 바른 행위라 한다.
024_1315_b_22L於滅思惟滅於道思惟道無學作意相應簡擇力故除趣邪命身三惡行於餘身惡行所得無學遠離勝遠離近遠離極遠離寂靜律儀無作無造棄捨防護不行不犯舩筏橋梁隄塘牆塹於所制約不踰不踰性不越不越性無表身業是名無學正業
【문】 어떤 것이 배울 것이 없는 이의 바른 생활[正命]인가?
【답】 모든 성스러운 제자가 괴로움에 대하여 괴로움이라 생각하고, 괴로움의 원인에 대하여 괴로움의 원인이라 생각하며, 괴로움의 소멸에 대하여 괴로움의 소멸이라 생각하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하여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라고 생각하면서 배울 것이 없는 이의 작의와 상응하는 간택의 힘 때문에 삿된 생활에 나아가는 몸[身]과 말[語]의 악행에서 얻게 되는, 배울 것이 없는 이의 멀리 여읨과 뛰어나게 멀리 여의며, 가까이 멀리 여의고 지극히 멀리 여의며,
024_1315_c_06L云何無學正命諸聖弟子於苦思惟苦於集思惟集於滅思惟滅於道思惟無學作意相應簡擇力故於趣邪命身語惡行所得無學遠離勝遠離近遠離極遠離
고요한 율의이며, 조작이 없고 버리며, 막아 수호하고 행하지 않으며, 범하지 않는 것과 배ㆍ떼ㆍ교량ㆍ둑ㆍ담ㆍ해자와 제약(制約)하는 것에서 넘지도 않고 넘지도 않는 성품과 초월하지도 않고 초월하지도 않는 성품과 무표(無表)의 신업(身業)ㆍ어업(語業)을 배울 것이 없는 이의 바른 생활이라 한다.
024_1315_c_11L寂靜律儀無作無造棄捨防護不行不犯舩筏橋梁隄塘牆塹於所制約不踰不踰性不越不越性無表身語業是名無學正命
【문】 어떤 것이 배울 것이 없는 이의 바른 노력[正勤]인가?
【답】 모든 성스러운 제자가 괴로움에 대하여 괴로움이라 사유하고, 괴로움의 원인에 대하여 괴로움의 원인이라 사유하며, 괴로움의 소멸에 대하여 괴로움의 소멸이라 사유하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하여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라고 사유하면서 배울 것이 없는 이의 작의(作意)와 상응하는 온갖 힘쓰고[勤] 정진(精進)하고 씩씩하고[勇健] 날래고[勢猛] 왕성하고[熾盛] 제어하기 어렵고 격려하는 뜻으로 쉬지 않는 것을 배울 것이 없는 이의 바른 노력이라 한다.
024_1315_c_14L何無學正勤諸聖弟子於苦思惟於集思惟集於滅思惟滅於道思惟道無學作意相應所有勤精進勇健勢猛熾盛難制勵意不息是名無學正勤
【문】 어떤 것이 배울 것이 없는 이의 바른 기억[正念]인가?
【답】 모든 성스러운 제자가 괴로움에 대하여 괴로움이라 사유하고, 괴로움의 원인에 대하여 괴로움의 원인이라 사유하며, 괴로움의 소멸에 대하여 괴로움의 소멸이라 사유하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하여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라고 사유하면서 배울 것이 없는 이의 작의와 상응하는 온갖 염(念)하는 것과 따라 염하며[隨念], 오로지 염하고[專念] 기억하며[憶念], 잊지 않고 잃지 않으며 빠뜨리지 않고 새지 않으며[不漏], 잃지 않는 법의 성품[不失法性]과 마음으로 분명하게 기억하는 성품[心明記性]을 배울 것이 없는 이의 바른 기억이라 한다.
024_1315_c_19L云何無學正念諸聖弟子於苦思惟苦於集思惟集於滅思惟於道思惟道無學作意相應所有隨念專念憶念不忘不失不遺不不失法性心明記性是名無學正
024_1316_a_01L【문】 어떤 것이 배울 것이 없는 이의 바른 선정[正定]인가?
【답】 모든 성스러운 제자가 괴로움에 대하여 괴로움이라 사유하고, 괴로움의 원인에 대하여 괴로움의 원인이라 사유하며, 괴로움의 소멸에 대하여 괴로움의 소멸이라 사유하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하여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라고 사유하면서 배울 것이 없는 이의 작의와 상응하는 온갖 마음의 머무르고 평등하게 머무르며 가까이 머무르고 편안히 머무르며 흩어지지 않고 어지럽지 않게 하는 섭지(攝止:奢摩他)와 등지(等地:三摩地)와 심일경성(心一境性)을 배울 것이 없는 이의 바른 선정이라 한다.
024_1316_a_01L云何無學正定諸聖弟子於苦思惟苦於集思惟集於滅思惟滅道思惟道無學作意相應所有心住等住近住安住不散不亂攝止等持心一境性是名無學正定
【문】 어떤 것이 배울 것이 없는 이의 바른 해탈[正解脫]인가?
【답】 모든 성스러운 제자가 괴로움에 대하여 괴로움이라 사유하고, 괴로움의 원인에 대하여 괴로움의 원인이라 사유하며, 괴로움의 소멸에 대하여 괴로움의 소멸이라 사유하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하여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라고 사유하면서 배울 것이 없는 이의 작의와 상응하는 온갖 마음의 승해(勝解)와 이미 낸 승해와 장차 낼 승해를 배울 것이 없는 이의 바른 해탈이라 한다.
【문】 어떤 것이 배울 것이 없는 이의 바른 지혜[正智]인가?
【답】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를 배울 것이 없는 이의 바른 지혜라 한다.
024_1316_a_05L云何無學正解脫諸聖弟子於苦思惟苦集思惟集於滅思惟滅於道思惟道無學作意相應所有心勝解已勝解勝解是名無學正解脫云何無學正盡智無生智是名無學正智
그때 사리자가 필추들에게 말하였다.
“구수(具壽)들이여, 마땅히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1법(法)에서 10법(法)까지 등각(等覺)을 나타내신 뒤에 모든 제자들을 위하여 널리 연설하시고 열어 보이셨습니다.
나는 대중들과 다 함께 화합하여 친히 세존 앞에서 이미 결집(結集)하여 다 마쳤습니다. 모든 필추들은 모두 마땅히 받아 지니고 다른 이를 위하여 연설하며 널리 유포(流布)시키어 부처님께서 멸도(滅度)하신 뒤에 어기는 일이 있지 않아야 하며, 장차 범행(梵行)에 따르는 법(法)과 율(律)로 하여금 오래도록 머물게 하며 한량없는 유정들을 이익되게 하고 안락하게 해야 하며 세간의 모든 하늘과 사람들을 가엾이 여기어 뛰어난 이익과 안락을 얻게 해야 합니다.”
024_1316_a_10L爾時舍利子告苾芻衆言具壽當知佛於一法乃至十法現等覺已爲諸弟子宣說開示我與大衆皆共和合親對世尊已結集竟諸苾芻衆皆應受持爲他演說廣令流布佛滅度後勿有乖違當令隨順梵行法律久住利樂無量有情哀愍世閒諸天人衆令獲殊勝義利安樂

12. 찬권품(讚勸品)
024_1316_a_18L讚勸品第十二
024_1316_b_01L
그때 세존께서는 사리자가 필추 대중을 위하여 법을 설하여 다 마친 것을 아시고 누우신 데서 일어나 몸과 마음을 조화롭게 하시면서 가사를 걸치시고 결가부좌한 후 사리자를 칭찬하셨다.
“참으로 훌륭하다. 그대는 지금 이 대관(臺觀)에서 필추 대중과 여래가 설한 증일법문(增一法門)을 화합하여 잘 결집하였구나. 그대는 지금부터 모든 대중들을 위하여 자주자주 이와 같은 법문을 널리 연설해야 하느니라. 이 법은 모든 하늘과 사람들로 하여금 오랜 세월 동안 이익과 안락을 느끼게 하리라.”
024_1316_a_19L爾時世尊知舍利子爲苾芻衆說法已訖從臥而起身心調暢整理衣服結加趺坐讚舍利子善哉善哉汝今善能於此臺觀與苾芻衆和合結集如來所說增一法門汝可從今爲諸大衆數復宣說如是法門此法能令諸天人等長夜證會義利安樂
세존께서는 다시 필추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들은 모두들 사리자가 설한 집이법문(集異法門)을 받아 지니고 독송해야 하느니라. 이와 같은 법문은 큰 선[大善]과 큰 이치[大義]와 큰 법[大法]과 맑고 흰 범행(梵行)을 능히 이끌며 다시 통혜(通慧)와 보리(菩提)와 열반(涅槃)을 깨달아 얻게 하니, 청정한 믿음으로 출가한 모든 선남자들이 이와 같은 법문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면 오래지 않아 반드시 할 일을 마치게 될 것이니라.”
그때에 박가범께서 이 말씀을 하여 마치시니, 모든 필추들은 기뻐 뛰면서 부처님 발에 머리 조아리고 믿고 받아서 받들어 행하였다.
024_1316_b_03L世尊復告苾芻衆言汝等皆應受持讀誦舍利子說集異法門如是法門能引大善大義大法淸白梵行復證通慧菩提涅槃淨信出家諸善男子受持讀誦如是法門不久定當辦所辦事時薄伽梵說是語已諸苾芻衆歡喜踊躍頂禮佛足信受奉行
說一切有部集異門足論卷第二十
甲辰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