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阿毘曇心論卷第二

ABC_IT_K0959_T_002
028_0364_b_01L아비담심론 제2권
028_0364_b_01L阿毘曇心論卷第二


법승 지음
승가제바ㆍ혜원 공역
김 재천 번역
028_0364_b_02L尊者法勝造
晉太元元年僧伽提婆共惠遠於廬山譯


4. 사품(使品)
028_0364_b_04L使品第四

이미 모든 업에 대하여 설명했으니, 이제 모든 번뇌에 대하여 설명하겠다.

일체 존재[有]의 근본이니
업과 짝하여 온갖 고[百苦]를 낳는다.
아흔여덟 가지 사(使)는
문니(文尼, muni)의 말씀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비유하면 원수를 알지 못하면 곧 해를 받는 것과 같으니, 만약 알면 곧 [원수의 곁에서] 멀리 떠날 수 있다. 모든 번뇌도 역시 그러하여 마치 원한 있는 집과 같다고 알아야 한다.
028_0364_b_05L已說諸業諸煩惱今當說 一切有根本
業侶生百苦
九十八使者
文尼當說思
譬怨不識則害成若識則得離諸煩 惱亦然當知如怨家
【문】어떻게 아는가?

【답】일체의 번뇌의 부류[使品]는
두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견제(見諦)에서 끊어야 할 종류와
또한 사유(思惟)로 끊어야 할 종류이다.

만약 번뇌가 있으면 모두 견도(見道)에서 끊어야 하거나 사유(思惟)에서 끊어야 한다. 말하자면 견도를 따르는 것은 곧 견도에서 끊어야 하고 사유도를 따르는 것은 곧 사유로 끊어야 한다.
028_0364_b_10L云何知 一切諸使品
當知立二種
見諦所斷種
亦思惟所斷
若有使者盡見斷及思惟斷謂從見 道是見斷從思惟道是思惟斷

그 중에서 스물여덟 가지 번뇌는
고제(苦諦)를 봄에 장애가 된다고 말하니,
이른바 장차 고(苦)를 깨달을 때에는
단멸하고 다하여 하나도 남음이 없다.

견습(見習)에서 끊어야 할 것이 열아홉이고
멸도도 그와 같다고 알아야 하며,
세 가지를 더한 것1)은 견도에서 끊어지고
열 가지는 사유로써 그친다.
028_0364_b_14L於中 說二十八使
是繫在見苦
謂當見苦時
斷滅盡無餘
見習斷當知
十九滅亦然
增三見道斷
十說思惟止

이것이 말하자면 98가지 사(使)로서 이미 설명하였다. 종(種)과 계(界)를 이제 설명하겠다.

제1번뇌의 씨앗이
욕(欲)에 있음을 알아야 하니 그 종류는 열 가지이다.
두 가지는 각각 일곱 가지가 있고
나머지 여덟은 견도에서 끊어야 한다.

욕계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니
이 네 가지는 곧 사유로써 끊어야 한다.
나머지 두 계(界)에 대해서도
또한 분별해야만 한다.
028_0364_b_17L 是謂九十八使已說種界今當說 第一煩惱種
在欲當知十
二種種有七
餘八見道斷
在欲界當知
四是思惟斷
謂餘在二界
是亦當分別
028_0364_c_02L
‘욕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니 이 네 가지는 사유로써 끊어야 한다’고 함은 이 서른여섯 가지 사는 욕계에 매여 있다는 것이다.
‘나머지 두 계에 대해서도 또한 분별해야만 한다’고 함은 나머지 62가지 사 가운데 31가지는 색계에 매여 있고 31가지는 무색계에 매여 있음을 말한다.
이미 계에 대하여 설명하였으니 이제부터는 모든 사에 대하여 설명하겠다.

수변견(受邊見)과 사견(邪見)과
그리고 5아견(我見)과
두 가지 도(盜)를 마땅히 알아야 하니
이 번뇌를 견이라고 말한다.
028_0364_b_21L 在欲界當知四是思惟斷者此三十 六使是欲界繫謂餘在二界是亦當 分別者餘六十二使於中三十一色 界繫三十一無色界繫已說界諸使 今當說 受邊見邪見
及與五我見
二盜應當知
是煩惱說見

인(因)을 좇아 상속(相續)하기 때문에 모든 법성을 알지 못하나니, 그 중에는 혹은 항상한 모양[常相]이 있고 혹은 끊어지는 모습[斷相]이 있다. 단과 상은 바로 두 가지 치우침[邊]이라는 것이 세존의 말씀이다. 그중에서 만약 견해의 한 쪽만을 받아들인다면 이것을 수변견(受邊見)2)이라고 한다. 진실한 뜻을 비방한다면, 이런 견해는 바로 사견(邪見))이다. 만약에 유정의 인식작용[識類]에 대하여 어리석은 이가 그에 대하여 나라고 계교한다면 이를 일컬어 신견(身見)3)이라고 한다. 유루법을 제일이라고 받아들인다면 이런 견해는 바로 견도(見盜)4)이고 인(因)이 아닌 것을 인이라고 본다면 이런 견해는 바로 계도(戒盜)5)이다. 이 다섯 가지 번뇌는 곧 지혜의 성품[慧性]이니 그러므로 견이라고 한다.
028_0364_c_06L 從因相續不識諸法性於中或有常 或有斷相斷常是二邊世尊之所 於中若見受邊是謂受邊見誹謗 眞實義此見是邪見若有情識類愚 於中計我是謂身見有漏法受第一 此見是見盜非因見因此見是戒盜 此五煩惱是慧性故說見

욕(欲)과 유예(猶豫)와 진에(瞋恚)와
만(慢)과 치(癡)는 견(見)이 아니라고 말하니,
이 계(界)의 차별 때문에
옮겨 변하므로 종종의 이름이 생긴다.
028_0364_c_13L 欲猶豫瞋恚
慢癡說非見
是界差別故
轉行種種名

‘욕과 유예와 진에와 만과 치는 견이 아니다’고 함에서, 욕(欲)은 애(愛)의 염(念)ㆍ상(想)ㆍ사(思)로서 모든 행 가운데서 즐겨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유예는 앞의 소견과 같은 것을 혹시 하면서 사유하는 것을 말한다. 진에는 짓는 모양이 달라서 분노하는 것을 말한다. 만은 자신을 추켜세우는 것을 말하며, 치는 있는데도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이 다섯 가지 번뇌는 견이 아니라고 말하나니, 이것을 일컬어 모든 번뇌라고 한다.
‘이 계의 차별 때문에 옮겨 가며 변하므로 종종의 이름이 생긴다’고 함은 이 열 가지 번뇌는 혹은 고(苦)를 따라서 행하고, 혹은 습(習)을 따르거나 혹은 멸(滅)을 따르거나 혹은 도(道)를 따르는 것을 말한다. 그 가운데 만약 고를 따라서 행한다면 이것은 고를 보아 끊는[見苦斷] 것이며, 마찬가지로 도에까지 이르며, 나머지는 사유로써 끊는다.
028_0364_c_15L 欲猶豫瞋恚慢癡說非見者欲名受 念想思於諸行中樂著猶豫名如前 所見於中或思惟瞋恚名所作相違 忿怒慢名自擧癡名所有不識此五 煩惱說非見是謂一切諸煩惱是界 差別故轉行種種名者是十煩惱從苦行或從習或從滅或從道於中 若從苦行者是見苦斷如是至道思惟斷
028_0365_a_02L
아래세계는 온갖 것에 다 괴롭고
세 가지 견(見)을 떠나 나머지는 두 가지로 행한다.
도로써 두 가지 견을 제거하며
상계(上界)에서는 에(恚)를 행하지 않는다.
028_0364_c_24L下苦於一切
離三見行二
道除於二見
上界不行恚

‘아래세계는 온갖 것에 다 괴롭다’고 함에서 아래세계의 고는 욕계의 고를 말하는데, 그중에서 열 가지 번뇌를 모두 다 행한다는 것이다. 범부로서 어리석은 이는 욕계의 고에서 인을 잘 알지 못해서 끊어짐을 보고[見斷], 과를 잘 알지 못해서 항상함을 본다[見常]. 과를 비방하고 고를 비방하여 삿되게 보고, 고를 제일로 받아들여 견도(見盜)하며, 법을 법에서 말하고 인이 아닌 것을 인이라고 생각하여 계도(戒盜)한다. 자신의 견해만을 좋아하고 다른 이의 견해에 대하여는 성을 내며, 견해를 좇거나 혹은 스스로의 견해를 따라서 거만해지고 잘 알지 못하며 밝지 못하다[無明].
‘세 가지 견을 떠나 나머지는 두 가지로 행한다’고 함은 습(習)과 멸(滅)에서는 각각 일곱 가지로 행한다는 것이다. 신견(身見)은 나타나는 5음(陰)에서 행한다. 습이란 미세하여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가운데서 행하지 않으며, 멸도 역시 이와 같다. 수변견도 역시 현재에서 행한다. 계도는 계(界)에서 행하는데, 그것도 역시 습ㆍ멸이 아니다.
‘도제[道]로는 두 가지 견을 제거한다’고 했는데, 신견과 변견(邊見)은 도제에서는 행하지 아니하나니 유루의 경계이기 때문이다. 계도는 도제에서 행한다. 도제와 비슷하기 때문에 마지막 경지에 다다름을 이해하지 못하고 정도(正道)를 보지 못한다.
‘위 세계에서는 성냄[恚]을 행하지 않는다’고 함은 욕계의 분별과 같이 색계ㆍ무색계도 역시 그렇다는 것이다. 그 에를 제거할 때에 그 중에는 성냄이 없고 생각[意]은 그쳐 부드럽기 때문이다.
모든 견과 의(疑)는 사유로써 끊어지는 것이 아니다. 나머지 욕계의 네 가지는 사유로써 끊어지나니 색계는 셋, 무색계는 둘이다.
【문】어떻게 그것은 경계(境界)를 연(緣)하는가?
028_0365_a_03L 下苦於一切者下苦是欲界苦於中 行一切十煩惱凡愚於欲界苦不了 見斷不了果見常謗果謗苦邪見 苦受第一見盜謂法於法非因計因 戒盜自見欲他見恚從見中或從自 見擧慢不了無明離三見行二者及滅各七行身見行於現五陰習者 細微不現是故於中不行滅亦如是 受邊見者亦行於現戒盜行於界亦非習滅道除於二見者身見邊見 不行於道有漏境界故戒盜者行於 似道故終竟不解至不見正道界不行恚者如欲界分別色無色界 亦爾除其恚彼中無恚意止柔濡故 諸見及疑非思惟所斷餘欲界四思 惟所斷色界三無色界二

【답】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괴로움의 원인인
의(疑)와 견(見)과 무명은
온갖 종류의 사(使)로서
하나의 지(地) 중에 즐겨 존재한다.

고제를 보아 끊는 종류와 습(習)을 보아 끊어지는 의와 견과 무명이라는 이 번뇌는 두루 존재해 있고 일체의 다섯 종류는 자신의 경지에서 행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일체의 유루법은 바로 고ㆍ습의 성품이기 때문이다.
028_0365_a_19L云何彼 緣境界 普遍在苦因
疑見及無明
是一切種使
樂在一地中
見苦斷種及見習斷疑見及無明煩惱是普遍一切五種行於自地以者何一切有漏法是苦習性
028_0365_b_02L【문】왜 자신의 지에서 행하고 다른 지에서는 행하지 않는가?
【답】경계가 아니므로 위의 세계[上]에서는 행하지 않는다. 욕탐을 여의었기 때문에 아래의 세계[下]에서는 행해지지 않는다.
이것을 일컬어 욕계의 열한 가지로서 일체에 두루하는 번뇌[一切遍使]라고 한다. 색계ㆍ무색계도 역시 그러하다. 나머지는 일체에 두루한 것이 아니니, 자신의 종(種)을 경계로 하기 때문이다.
028_0365_b_02L故行於自地非他地非境界故行於上離欲故不行於下是謂欲界 十一一切遍煩惱無色界亦爾餘不 一切遍自種境界故
처음의 번뇌 다섯 가지와
네 가지로서 두 번째 것은
상계(上界)를 경계로 한다는 것은
미리혜(未離慧)의 말씀이다.

욕계에서 고제를 보아 끊어지는 사견(邪見)은 색계ㆍ무색계의 고제를 비방한다. 견도(見盜)는 제일이라고 받아들이고, 계도(戒盜)는 해탈의 방편이라고 받아들이니, 의심하고 미혹하며 밝지 못하고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견습으로 끊어지는 사견은 색계ㆍ무색계의 인을 비방하고, 견도는 인에 대하여 제일이라고 받아들이니, 의심하고 미혹하며 밝지 못하고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색계ㆍ무색계의 일체의 경지[地]에서 무소유처에 이르기까지도 이와 같다.
028_0365_b_06L 初煩惱五種
四說爲第二
境界於上界
未離慧所說
欲界見苦斷邪見謗色無色界苦見 受第一戒盜受解脫方便疑惑明不了見習斷邪見謗色無色界因 見盜於因受第一疑惑無明不了是色無色界一切地乃至無所有處

사(邪)와 의(疑)가 함께 생겨나거나
함께 생겨나지 않는 무명[不共無明]은
식지(息止)와 도제[道]의 두 가지로 끊으면
무루연이 됨을 알아야 한다.

멸제를 보아 끊는 사견은 멸제를 비방한다. 이것은 멸을 연(緣)하기 때문에 무루연이다. 이와 같이 멸제에 대하여 의혹하고, 그것과 상응하는 무명은 무루연이다. 마찬가지로 멸제를 보아 끊어지는, 함께 하지 않는 무명은 말하자면 열반을 바라지 않지만, 그것 역시 무루연이다.
견도에서 끊어지는 것도 또한 이와 같다. 이 열여덟 가지 사(使)는 무루연이다.
028_0365_b_13L 邪疑是俱生
及不共無明
息止道二斷
當知無漏緣
見滅斷邪見謗於滅是緣滅故無漏 如是疑惑於滅及彼相應無明無 漏緣如是見滅斷不共無明謂不欲於 涅槃彼亦無漏緣見道斷亦復如是 是十八使無漏緣
【문】왜 유루인 종류[種]는 모든 사에 묶이는가?

【답】만약 어떤 종류가 욕계에 있으면
일체의 두루하는 번뇌[使]이고
자기 경지[地]를 속박됨을 연하며,
위의 세계[界]에서도 또한 그러하다.

일체의 두루하는 번뇌는 자기의 경지[地]에서 일체의 종류를 연하여 부림을 당한다.
028_0365_b_20L云何有漏種諸 使所縛 若種在欲界
一切諸遍使
緣縛於己地
在上界亦然
諸一切遍使是於自地中緣使一切種
028_0365_c_02L
그 나머지 모든 결사(結使)6)
자신의 종류가 연이 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자신의 계(界)에서 부림을 당하며
그리고 이는 상응하는 부류[相應品]이다.

‘그 나머지 모든 결사는 자신의 종을 연하여 자신의 계를 묶는다’고 함은 일체의 두루하지 않는 번뇌는 스스로 종(種) 중에서 모든 법을 연한다는 것, 곧 그것을 묶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상응하는 부류이다’고 함은 일체에 두루한 것과 일체에 두루하지 않은 것이 일체의 자신의 부류[自品] 가운데에 상응하며 부림을 당하는 것을 말한다.
028_0365_b_24L 其餘諸結使
當知自種緣
所使於自界
及是相應品
其餘諸結使當知自種緣所使於自 界者一切不遍使自於種中緣諸法卽彼所使及是相應品者一切遍及 不一切遍是一切自品中相應所使

만약 무루의 소행(所行)과
타지를 연하는 번뇌라면
이는 상응하여 부림을 당한다.
경계를 해탈하기 때문이다.

‘만약 무루의 소행과 타지를 연하는 번뇌라면 이는 상응하여 부림을 당한다’고 함은 만약 사(使)가 무루를 연하고 위의 경지[地]를 연하는 것이라면 이는 자품에서 상응하여 부림을 당하는 것이지, 사에 연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경계를 해탈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는 경계를 반연하지 않는다. 무루의 모든 법은 일체 번뇌를 해탈하고, 위 경지의 모든 법은 아래 경지의 번뇌를 해탈한다.
028_0365_c_07L 若無漏所行
及他地緣惱
是相應所使
境界解脫故
若無漏所行及他地緣惱是相應所 使者若使無漏緣及上地緣是自品 相應所使非緣使所以者何境界解 脫故此使不緣於境界無漏諸法解 脫一切煩惱上地諸法解脫下地煩
【문】이러한 사는 마땅히 불선(不善)이라고 해야 하는가, 무기라고 해야 하는가?

【답】기신견(己身見)7)과 변견(邊見)8)
이들에 상응하는 무명이 있으니
이것은 욕계 안에서는 무기이며
색계ㆍ무색계도 일체가 (그러하다).
028_0365_c_15L此使當言不善爲無記 己身見邊見
此相應無明
是欲中無記
色無色一切
028_0366_a_02L
‘기신견과 변견과 이들에 상응하는 무명이 있으니 이것은 욕계 안에서는 무기이다’고 함은 욕계의 신견과 변견, 그리고 상응하는 무명은 바로 무기라는 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기신견은 자주 행하는데 만약 선하지 못한 일을 하면 욕계의 중생은 마땅히 즐거움이 없으니 많은 불선을 지었기 때문이다. 다시 다음에 만약 선하지 못하면 복(福)과 서로 어긋나나니, 이 가운데서 아(我)ㆍ인(人)을 헤아리고 복을 행하여 자신[我]으로 하여금 낙을 얻게 한다. 선하지 못한 것이란 선과는 다른 것이니, 그러므로 신견은 불선이 아니다.
단견(斷見)이란 무상(無常)하다고 보는 것으로 생사를 싫어하지만 이것도 역시 선하지 못한 것은 아니니, 그러므로 불선이 아니다. 유상견(有常見)도 역시 선과 다르지 않다. 마치 신견과 같아서 불선이 아니다. 나머지 욕계의 번뇌는 오로지 불선이다.
‘색계ㆍ무색계도 일체가 (그러하다)’고 함은 색계와 무색계의 모든 번뇌는 모두 무기라는 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정수(正受)가 파괴되기 때문이다. [또한] 불선이면 괴로움의 과보를 받으나 그 안에서는 괴로움의 느낌이 없기 때문이다.
028_0365_c_17L 己身見邊見此相應無明是欲中無 記者欲界身見邊見及相應無明是 無記所以者何己身見數數行若當 不善者欲界衆生應無有樂多作不 善故復次若不善者相違於福此中計我人行福令我得樂不善者相違 於善是以身見非不善斷見是無常 厭於生死是亦非不善是故非不 有常見亦不違善如身見是故非 不善餘欲界煩惱一向不善色無色一 切者色界無色界諸使盡無記所以 者何正受所壞故不善者受苦痛報 彼中無苦痛
【문】일체의 번뇌는 다 모두 자신이 소유하는 경계를 묶는가, 아닌가?

【답】탐욕과 진에와 만(慢)은
혹은 과거의 얽매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미래는 일체를 받고
나머지 2세(世)는 모두 받는다.
028_0366_a_07L一切諸煩惱盡縛自 所有境界爲不 貪欲瞋恚慢
知或過去縛
未來受一切
餘二世盡受

‘탐욕과 진에와 만은 혹은 과거의 얽매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함은 말하자면 과거의 애(愛)ㆍ에ㆍ만은 반드시 앞의 모든 자신의 경계에서 일어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애는 앞의 일체의 법 가운데서 일어날 수 없으니, 보이지 않는 것으로써 생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미래는 일체를 받는다’고 함은 말하자면 미래의 애ㆍ에ㆍ만은 일체의 유루법을 묶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일체의 유루를 연하기 때문이다.
‘나머지 2세는 모두 받는다’고 함은 견ㆍ의(疑), 그리고 무명은 모두 일체법을 연하므로 과거ㆍ미래의 모든 유루법을 묶는다는 것이다.
현재의 사는 정해지지 않았으므로 설명하지 않는다. 만약 어떤 자가 자상(自相)9)을 받으면, 그것은 마땅히 과거와 같이 말해야 한다.
028_0366_a_10L 貪欲瞋恚慢知或過去縛者謂過去 愛恚慢是不必於前一切自境界起愛者不能於前一切法中起非以不 見生故未來受一切者謂未來愛恚 縛一切有漏法所以者何緣一切 有漏故餘二世盡受者見疑及無明 摠緣一切法是故縛過去未來諸有 漏法現在使不定故不說若有者受自 彼應說如過去
028_0366_b_02L이미 여러 사의 경계를 설명했으니 이제 순서를 설명하겠다.

이것은 차례로 전전하여 생하는 것이니
자신의 경지[地]는 자신의 경지에서다.
위의 경지에서는 또한 아래의 경지를 생하나니
이 일은 마땅히 분별해야 한다.

‘이것은 차례로 전전하여 생하는 것이니 자신의 경지는 자신의 경지에서다’고 함은 일체의 번뇌는 자기 경지의 번뇌에서 차례로 연하여 하나하나 차례대로 일체를 생겨나게 함을 말한다.
‘위의 경지에서는 또한 아래의 경지를 생하나니 이 일은 마땅히 분별해야 한다’고 함은 범천 위에서 목숨이 끝나면 차례로 욕계의 일체를 생하는데, 만약 그 중에서 더러운 마음으로 목숨을 마치면 이 중에서 오로지 더러운 마음이 상속한다는 것이다. 일체의 경지가 이와 같다.
028_0366_a_19L已說諸使境界第今當說 次第是轉生
自地於自地
上地亦生下
此事當分別
次第是轉生自地於自地者一切諸 煩惱於自地煩惱次第緣可得一一 次第生一切上地亦生下此事當分 別者梵天上命終次第生欲界一切 若彼中穢污心命終此中一向穢污 心相續如是一切地
이미 여러 사의 제 모습을 설명했다. 이와 같은 번뇌를 세존께서 교화(敎化)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로 말씀하셨으니, 이제 분별하겠다.
【문】세존께서 일곱 가지 사(使)를 말씀하셨으니, 욕애ㆍ에ㆍ유애ㆍ만ㆍ견ㆍ의ㆍ무명이다. 이것은 무엇인가?

【답】욕계에 다섯 가지 탐욕이 있으니
이를 욕애사(欲愛使)라고 한다.
색계ㆍ무색계도 위에서와 같이
유애(有愛)라고 분별해야 한다.
028_0366_b_05L 已說諸使自相如此煩惱世尊教化 故多種說今當分別世尊說七使 欲愛有愛疑及無明此云 欲界五種欲
此說欲愛使
色無色如上
有愛當分別

‘욕계에 다섯 가지 탐욕이 있으니 이를 욕애사라고 한다’고 함은 견고ㆍ습(習)ㆍ멸ㆍ도ㆍ사유로써 끊어야 함을 말한 것이다.
‘색계ㆍ무색계도 위에서와 같이 유애라고 마땅히 분별해야 한다’고 함은 색계의 애는 다섯 종류이고, 무색계도 역시 그러하다는 것이다.

에는 곧 에사(恚使)로서
다섯 종류인데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교만과 무명은
열다섯 가지로서 삼계에 존재한다.

‘에는 곧 에사로서 다섯 종류인데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고 함은 진에(瞋恚)도 역시 이와 같이 다섯 가지라는 것이다.
‘교만과 무명은 열다섯 가지로서 삼계에 존재한다’고 함은 만(慢)은 욕계에 다섯 가지, 색계에 다섯 가지, 무색계에 다섯 가지이고, 무명도 역시 그러하다는 것이다.
028_0366_b_11L 欲界五種欲此說欲愛使者見苦習 滅道思惟斷色無色如上有愛當分 別者色界愛五種無色界亦爾 恚卽是恚使
五種如前說
憍慢及無明
十五在三界
恚卽是恚使五種如前說者瞋恚亦 如是五種憍慢及無明十五在三界 慢欲界五種色界五種無色界五 無明亦爾
028_0366_c_02L
견사(見使)는 서른여섯 가지로서
두루 삼계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의사(疑使)는 열두 가지가 있는데
여기에서 일곱 가지는 다른 이름이 있다.

‘견사는 서른여섯 가지로서 널리 삼계에 존재한다고 말한다’고 함은 욕계에 열두 가지의 견이 있으니 견고로 끊어야 할 것 다섯과 견습으로 끊어야 할 둘과 견멸로 끊어야 할 둘10)과 견도로 끊어야 할 셋11)을 말한다. 색계ㆍ무색계도 역시 그러하다.
‘의사는 열두 가지가 있다’고 함은 욕계에 네 가지가 있으니 견고ㆍ습ㆍ멸ㆍ도로써 끊는 것이다. 색계ㆍ무색계도 역시 그러하다.
‘여기에서 일곱 가지는 다른 이름이 있다’고 함은 이러한 번뇌를 액(扼)ㆍ수(受)ㆍ유(流)ㆍ누(漏)라고 한다는 것이다.
028_0366_b_20L 見使三十六
說普在三界
疑使有十二
此七有異名
見使三十六說普在三界者欲界十 二見五見苦斷二見習斷二見滅斷 三見道斷色無色界亦爾疑使有十 二者欲界有四見苦習滅道斷色無 色界亦爾此七有異名者此煩惱說 扼受流漏
【문】무엇 때문인가?

【답】액박(扼縛)과 수와 유
그리고 누는 모두가 무궁하며,
모든 액과 수와 유의 번뇌
이것을 누라고 한다.

일체 중생을 묶으므로 액이라고 하고, 생(生)과 구(具)12)를 받으므로 수(受)라고 한다. 일체의 중생을 아래로 흘러내리게 하므로 유(流)라고 한다. 일체가 한없이 새므로 누(漏)라고 한다.
이미 갖가지 모습을 설명했으니 이제 상응하는 근(根)에 대하여 설명하겠다.
028_0366_c_05L何以等故 扼縛及受流
漏一切無窮
諸扼及受流
煩惱是說漏
繫一切衆生故說扼受生具故說受 流下一切衆生故說流漏一切無窮 故說漏

모든 사(使)는 삼계에 있으면서
모두 호근(護根)과 상응한다.
경지[地]에 따라 모든 근과 사가
상응하는 것은 색신(色身)에서이다.

‘모든 사는 삼계에 있고 모두 호근과 상응한다’고 함은 98가지 사는 일체가 다 호근과 상응한다는 것이다. 모든 번뇌는 나중에 구함이 없는 것에 의존하여 그친다.
‘경지에 따라 모든 근과 사가 상응하는 것은 색유(色有)13)에서이다’고 함은 범천과 광요(光曜)에는 희근(喜根)이 있고, 그 지(地)의 모든 사는 희근에 상응하고 아울러 호근에 (상응한다). 그리고 변정(遍淨)에는 낙근(樂根)이 있고, 그 지의 모든 사는 낙근에 상응하고 아울러 호근에 (상응한다).
028_0366_c_10L已說種種相相應根今當說 諸使在三界
盡護根相應
隨地諸根使
相應於色身
諸使在三界盡護根相應者一切九 十八使盡護根相應諸煩惱後時依 於無求而止隨地諸根使相應於色 有者梵天及光曜有喜根彼地諸使 喜根相應及護根遍淨有樂根彼地 諸使樂根相應及護根
028_0367_a_02L
사견과 무명은
욕계 중에 낙과 고이다.
진에와 의는 오직 고이고
나머지는 오로지 낙이다.

‘사견과 무명은 욕계 중에 낙과 고이다’고 함은 욕계의 사견과 무명은 낙근에도 상응하고 아울러 고근에도 (상응한다는) 것이다. 사견이란 악업을 짓는 것을 기쁘게 여기고 맑은 업을 [짓는 것을] 근심한다. 그것과 상응하는 무명도 역시 그러하다.
‘진에와 의는 오직 고이다’고 함은 의는 근심과 슬픔을 근본으로 하는데 결정되지 않았으므로 희가 아니라는 것이다. 진에도 역시 그러하다.
‘나머지는 오로지 낙이다’고 함은 욕계의 나머지 사는 오로지 낙과 상응하므로 고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환희를 근본으로 한다.
028_0366_c_18L 邪見及無明
欲界中樂苦
瞋恚疑唯苦
謂餘一向樂
邪見及無明欲界中樂苦者欲界邪 見無明樂根相應及苦邪見者作惡業 爲喜淨業爲憂彼相應無明亦爾疑唯苦者憂慼爲本不決定故 不喜瞋恚亦爾謂餘一向樂者欲界 餘使一向樂相應非苦彼歡喜爲本

두 가지 훈(勳)은 몸에 견고하게 붙어 있고
견단(見斷)인 것은 오직 의에 상응한다.
욕계의 모든 번뇌는
이러한 근과 서로 호응한다.

‘두 가지 훈은 견고하게 붙어 있다’고 함에서 (훈이란) 모든 번뇌를 사유로 끊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것은 몸의 느낌[身痛]과 상응하며 마음의 느낌[心痛]과도 (상응한다). 그중에서 신통은 낙근과 고근이다. 심통은 희근과 우근이다. 호근과 함께 하는 모든 신통은 사유로 끊으니, 의(意)가 함께 한다.
‘견단인 것은 오직 의와 상응한다’고 함은 견제(見諦)로 끊어야 할 번뇌[結]로서 오직 뜻과 상응한다는 것이다.
‘욕계의 모든 번뇌는 이러한 근과 서로 호응한다’고 함은 욕계의 모든 번뇌를 말한다.
028_0367_a_03L 二勳堅著身
見斷唯應意
欲界諸煩惱
此根是相應
二勳堅著名諸煩惱思惟斷彼身痛 相應心痛於中身痛者樂根及苦根 心痛者喜根及憂根俱有護根一切 身痛思惟斷意俱有見斷唯應意者 見諦斷結唯意相應欲界諸煩惱此 根是相應者是謂欲界諸煩惱
이미 상응하는 근에 대하여 분별하였으니 이제 상번뇌(上煩惱)14)를 설명하겠다.

무참(無慙)과 무괴(無愧)
수(睡)와 회(悔) 그리고 간(慳)
질(嫉)과 도(掉)와 면(眠)은 번뇌가 왕성하니
그러므로 상번뇌라고 한다.

이 여덟 가지 일을 상번뇌라고 말한다. 모든 사(使)는 번뇌이다. 그중에서 위의 이러한 것들은 (모든 사) 중에서 따라서 일어난다. 이것들은 사의 티끌[垢]로서 사에 의존한다.
028_0367_a_11L已分 別相應根上煩惱今當說 無慚亦無愧
睡悔及與慳
嫉掉眠煩盛
故設上煩惱
此八事說上煩惱諸使是煩惱於中 此上從中起此是使垢依於使
028_0367_b_02L【문】무엇이 사의 티끌인가?

【답】일체의 번뇌와 함께 하는 것은
수(睡)와 도(掉)라고 말한다.
무참은 불선(不善)과 함께 하고
무괴도 역시 그러하다.

‘일체의 번뇌와 함께 하는 것은 수와 도라고 말한다’고 함에서, 도(掉)는 마음이 그치지 않는 것을 가리키는데 이는 일체의 번뇌와 상응한다. 번뇌는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수(睡)는 마음이 잠기는 것을 이름하지만 그것도 역시 일체의 번뇌와 상응한다. 마음이 잠김으로써 다시 번뇌를 생하기 때문이다.
‘무참은 불선과 함께 하고, 무괴도 역시 그러하다’고 함에서, 무참은 악을 행할 때 다른 사람에게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을 가리키고, 무괴는 자신이 악을 싫어하지 않고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상번뇌는 오로지 불선과 상응하므로 무기가 아니다.
028_0367_a_16L者使垢 一切煩惱俱
說睡及與掉
無慚不善俱
無愧亦復然
一切煩惱俱說睡及與掉者掉名於 心不止息是一切煩惱相應煩惱是 不止息眠雖名沈意彼亦一切煩惱 相應以沈心使生煩惱無慚不善俱 無愧亦復然者無慚名行惡時不慚 無愧名自惡不厭不著此二上煩 一向不善相應非無記

소위 고(苦)가 마음에 있는 것은
회(悔)이니 사유(思惟)로써 끊어야만 하고
면(眠)은 오직 욕의(欲意)에 있으며
나머지는 각자 건립한다.

‘소위 고가 마음에 있는 것은 회이니 사유로써 끊어야만 한다’고 함에서, 회(悔)는 선과 악을 지으면서 일이 이루어지지 않아 후회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을 희(喜)라고 말할 수 없으니 그 때문에 오로지 고와 상응한다. 이것은 마음[意]의 우근(憂根)과 상응하고, 악행으로부터 생하므로 사유로 끊어야 한다고 말한다. 고와 상응하므로 이는 욕계임을 알아야 한다.
‘면은 오직 욕의에 있다’고 함에서, 면(眠)은 마음이 닫혀 있기 때문에 면이라고 한다. 이는 오로지 욕계로서 의지(意地)에 있는 것이니 그것은 욕계에서 일체의 번뇌와 상응한다. 모든 번뇌는 마음이 닫혀 있을 때[眠時]에 행해지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각자 건립한다’고 함에서, 나머지란 이른바 두 개의 상번뇌인 질과 간을 말한다. 질은 다른 사람의 즐거움을 보고 열을 내는 것을 말하며 간은 지키고 아끼고 집착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것은 모두 스스로 건립되며, 나머지는 번뇌와 상응하는 것이 아니다.
028_0367_b_03L 謂苦在於意
悔思惟所斷
眠唯在欲意
餘各自建立
謂苦在於意悔思惟所斷者悔名作 善作惡事不成而悔不可說是喜故 一向苦相應是意憂根相應從惡行 生故說思惟斷苦相應故當知是欲 眠唯在欲意者眠意閉故眠是一 向欲界在意地彼於欲界一切煩惱 相應一切諸煩惱行於眠時餘各自 建立者謂餘二上煩惱嫉及慳嫉名 見他樂生熱慳名守護惜著彼俱自 建立非餘煩惱相應
【문】모든 번뇌는 몇 가지의 식(識)과 상응하는가?

【답】욕과 진에와 무명은
6식(識)에 의존함을 알아야 하니,
이른바 욕의 사유단이다.
색 중에서는 얻게 되는 것을 따른다.

‘욕과 진에와 무명은 6식에 의존함을 알아야 하니, 이른바 욕의 사유단이다’고 함은, 욕계의 사유로써 끊는 애ㆍ에ㆍ무명이 6식에 상응한다는 것이다.
‘색 중에서는 얻게 되는 것을 따른다’고 함은, 애ㆍ무명의 색계는 얻어지는 바에 따른다는 것이다. 범천 위에는 네 가지 식(識)15)이 있다. 그 중에서는 이들 두 번뇌는 네 가지 식과 상응한다. 나머지 번뇌는 의식 중에 있다.
028_0367_b_15L諸煩惱幾識 相應 欲瞋恚無明
當知依六識
謂欲思惟斷
色中隨所得
欲瞋恚無明當知依六識謂欲思惟 斷者欲界思惟所斷愛恚無明六識 相應色中隨所得者愛無明色界隨 所可得梵天上四識彼中此二煩惱 四識相應餘煩惱在意識中
028_0367_c_02L이미 모든 번뇌를 설명했으니, 이제부터는 끊는 방법을 설명하겠다.

일시에 번뇌를 끊고
그 중에서 해탈한다.
무량시(無量時)에 얻게 됨은
바른 지혜 가지신 분의 말씀이다.

‘일시에 번뇌를 끊고, 그 중에서 해탈한다’고 함은 이 번뇌는 무애도(無礙道)로써 일시에 끊으니, 이미 끊어 다시 끊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무량시에 얻게 됨은 바른 지혜 가지신 분의 말씀이다’고 함은 이러한 멸진을 얻는 일[得盡]은 자주 있다는 것이다. 즉 욕계 견단(見斷)의 다섯 가지 때가 있으니 자신과 네 사문과(沙門果)에서 번뇌가 다하는 깨달음[盡證]을 얻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일체는「현성품(賢聖品)」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028_0367_b_23L已說諸 煩惱如所斷今當說 一時斷煩惱
而於中解脫
無量時所得
正智之所說
一時斷煩惱而於中解脫者此煩惱 無㝵道一時斷非已斷復斷無量時 所得正智之所說者此得盡數數欲界見斷五時得盡證自分及四沙 門果如是一切如賢聖品說

욕계에서의 해탈을
성인은 네 가지 단지(斷智)라고 말씀하셨다.
색계ㆍ무색계를 떠나는 것은
다섯 가지 단지라고 알아야 한다.

영원히 다하여 나머지가 없다면 그것을 일컬어 단지라고 한다. 그 중에서 욕계의 견고와 견습으로 끊는 것으로써 무여해탈(無餘解脫)을 다 얻으면, 이는 첫 번째 단지이다. 멸제를 보아 끊는 것은 두 번째, 도제를 보아 끊는 것은 세 번째, 사유로써 끊는 것은 네 번째이다. 색계ㆍ무색계의 고제ㆍ습을 보아 끊는 것은 첫 번째 단지이고, 멸제를 보아 끊는 것은 두 번째, 도제를 보아 끊는 것은 세 번째, 색계의 사유로써 끊는 것은 네 번째, 무색계의 사유로써 끊는 것은 다섯 번째이다.
028_0367_c_08L 欲界中解脫
聖說四斷智
離色無色界
當知五斷智
永盡無餘謂之斷智於中若欲界見 苦習所斷若盡得無餘解脫是一斷 見滅斷二見道斷三思惟斷四無色界見苦習斷一斷智見滅斷二 見道斷三色界思惟斷四無色界思惟 斷五
【문】무엇 때문에 단(斷)을 단지라고 하는가?
【답】지혜의 과보이기 때문에 단지라고 한다. 구담(瞿曇, Gautama)이라는 성(姓) 중에 태어나면 역시 구담이라고 이름하는 것과 같이 이것도 또한 그러하다.
【문】이 모든 사(使)는 마음과 상응하는가, 상응하지 않는가?
【답】상응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다음과 같다].

마음[心]은 사번뇌(使煩惱)이니
장애가 되므로 정(淨)과는 다르다.
모든 묘선(妙善)은 얻을 수 있나니
상응하는 번뇌임을 알아야 한다.
028_0367_c_16L以何等故於斷分斷智果故說斷智如瞿曇性中生亦名瞿 此亦復爾此諸使爲心相應不相應相應所以者何 心爲使煩惱
障㝵淸淨違
諸妙善可得
當知相應使
028_0368_a_02L
‘마음은 사번뇌이다’고 함은 만약 사가 마음과 서로 호응하지 않는 것이라면 마음을 번민하게 하지 않을 것이고, 만약 마음을 번민하게 한다면 그 때문에 상응이라는 것이다.
‘장애’라고 함은, 만약 사가 마음과 서로 호응하지 않는 것이라면 모든 선법(善法)을 장애하지 않을 것이고, 만약 장애한다면 선법이 생겨나지 않을 것인데, 장애하지 않는 사가 생하기에 따라서 서로 호응한다는 것이다.
‘정과는 다르니, 모든 묘선은 얻을 수 있다’고 함은 만약 사가 서로 호응하지 않는 것이라면 선과 다르지 않을 것이고, 만약 선과 다르지 않다면 선한 마음도 또한 마땅히 생할 것이며, 만약 다르지 않으면 이는 번뇌의 성질이 아니니, 또한 마땅히 근심을 만들지 않을 것이고, 만약 다르다면 항상 서로 따라서 선을 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서로 따르지 않으면 곧 [번뇌는] 선을 생한다. 이러한 일로 인하기 때문에 이는 서로 호응하는 사인 것이다.
028_0367_c_21L 心爲使煩惱者若使心不相應不以 煩心若煩心者是故相應障㝵名若 使心不相應不障㝵諸善法若障㝵 善法不生不障㝵使生是故相應 淨相違諸妙善可得者若使不相應 不與善相違若不與善相違者善心 亦應生若不相應是煩惱性亦不應 作患若相違常相隨不生善不相隨 則生善因此事故是相應使

5. 현성품(賢聖品)
028_0368_a_07L賢聖品第五

이미「사품」을 설명하였으니, 이제부터는 「현성품」을 설명하겠다.

이와 같이 성인은 번뇌[勞]와
수많은 공포의 근본을 끊는다.
등방편정지(等方便正智)를
이제 설명하겠으니 잘 들으라.

마음이 안정되지 않고 산란한 자는 정견을 일으킬 수 없다. 그러므로

처음에 자신의 처소에서
마음을 묶어 안정되게 하고
또한 식족(識足)을 묶으려 노력하고
번뇌라는 원적[怨]을 다한다.
028_0368_a_08L已說使品賢聖品今當說 如此聖斷勞
衆恐怖之本
等方便正智
今當說善聽
不亭心者無能起正見是以始自身處所
繫縛心令定
亦欲縛識足
及盡煩惱怨

이들 방편은 몸에 대하여
진실한 모습은 항상 결정된 것이다.
모든 통(痛)과 이 마음과
법도 또한 이와 같이 관찰한다.
이 몸은 부정한 모습[不淨相]ㆍ무상한 모습[無常相]ㆍ괴로운 모습[苦相]ㆍ무아의 모습[無我相]이니, 이 모습은 결정코 진실하다. 그는 자신의 한곳에 마음을 묶어 마음의 산란함을 여의어야 비로소 진실로 몸의 모습을 관하게 된다. 다음에 통을 관찰한 뒤에 마음과 그것에 수반하고 의지하는 것과 그것에 상응하는 나머지 마음에 속한 법을 관찰하며, 또한 모든 심불상응행도 관찰한다. 그 본성 그대로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하는 것을 관찰한다. 이와 같이 하여 신(身)ㆍ통(身)ㆍ심(心)ㆍ법(法)의 의지(意止)16)를 차례로 일으킨다.
028_0368_a_14L是方便於身
眞實相常定
諸痛及此心
法亦如是觀
此身不淨相無常相苦相無我相相定眞實彼自身一處繫心離心亂 始眞實觀身相次觀痛後觀心彼伴 彼依及彼相應餘心數法觀亦諸心 不相應行如其性如其相所有如是 彼身法意正次第生
028_0368_b_02L
법 중에 들어가 총관(總觀)하고
모든 법상을 동일하게 관찰해야 하니,
이 넷은 곧 무상과
공ㆍ무아ㆍ비락(非樂)이라네.

‘법 중에 들어가 총관하고 모든 법상을 동일하게 관찰한다’고 함은 법의 의지(意止) 중에 들어가서 거룩하게 총괄하여 모든 행상(行相)을 관찰한다는 것이다. 모든 행상을 관찰하여 이미 증장(增長)하고 양지(養止)하며, 때 묻지 않은 지혜의 눈을 생하며, 일체의 신ㆍ통ㆍ심ㆍ법을 총괄하여 관찰한다.
028_0368_a_21L 入法中摠觀
同觀諸法相
此四是無常
空無我非樂
入法中摠觀同觀諸法相者入法意 止中彼聖摠觀諸行相觀諸行相已 增長養止生無垢智眼一切身 法摠觀
【문】어떻게 하여 그러한가?
【답】이 넷은 곧 무상이며, 공ㆍ무아ㆍ비락이다. 이 신ㆍ통ㆍ심ㆍ법은 전전(展轉)하여 서로 생겨나게 하므로 무상이고, 자재(自在)하지 않으므로 공이며, 주인이 아니므로 무아이며, 거칠고 후환거리이므로 고이다.

이를 좇아 난법(煖法)이라고 이름하니
곧 마음[意]에서 생겨난다.
행이란 열여섯 가지가 행이니
네 가지 진리[眞諦]를 똑바로 관찰한다.
‘이를 좇아 난법이라고 이름하니, 곧 마음에서 생겨난다’고 함은 그는 이와 같이 관찰하여 훌륭한 난법[善煖]을 생겨나게 하고, 그 중에서 당연히 무루 지혜의 불을 생하여 온갖 행의 섶을 태운다는 것이다.
028_0368_b_04L云何 此四是無常
空無我非樂
此身展轉相生故無常不自 在故空非主故無我惡災患故苦 從是名煖法
卽是意中生
行是十六行
正觀四眞諦
從是名煖法卽是意中生者彼如是 觀生善煖於中當生無漏智火能燒 一切行薪
【문】그것은 어떤 행이고 어떤 경계인가?
【답】행은 열여섯 가지 행[十六行]17)이고, 네 가지 진리[眞諦]를 똑바로 관찰하는 것이다. 그 행은 열여섯 가지이고, 경계는 네 가지 진리이다.
028_0368_b_12L彼何行何境界 行是十六行正觀四眞諦彼行是十六行境界四眞諦
네 가지 행으로 고제를 관찰한다. 이 고는 성품이 하열하여 인연 따라 생겨나므로 무상이다. 무상의 힘으로 파괴되므로 고이다. 안으로는 사람[人]을 떠나므로 공이요, 자재하지 않으므로 무아이다.
네 가지 행으로 습을 관찰하나니, 이 습은 서로 비슷한 과보를 만들므로 인(因)이 된다. 행이 상속하므로 습(習)이요, 일체의 생사가 무궁함을 얻으므로 유(有)이다. 서로 비슷하지 않은 일이 상속하므로 연이다.
네 가지 행으로 멸을 관찰하나니, 일체의 우환을 덮어 다하게 하므로 멸이라고 한다. 일체의 번뇌의 불을 제거하므로 지(止)이며, 일체법을 압도하므로 묘이며, 생사를 버리므로 이(離)이다.
네 가지 행으로 도를 관찰하나니, 이 도는 열반[非品]에 이르므로 도라고 한다. 뒤집어지지 않으므로 여(如)이며, 일체의 성인이 걸어온 것이므로 적(迹)이요, 생사의 우환으로부터 벗어나므로 승(乘)이다.
이는 말하자면 십육 행을 행하여 네 가지 진리를 경계로 하는 선근이므로, 그것을 일컬어 난법이라고 한다.
028_0368_b_14L四行觀 苦諦此苦性劣從因緣生故無常常力所壞故苦內離人故空不自在 故無我四行觀習此習成相似果故因相續習一切生死無窮可得故有相似事相續故緣四行觀滅此滅覆 一切患盡故滅除一切煩惱火故止 勝一切法故妙捨生死故離四行觀 此道至非品故道非顚倒故如切聖所履故迹生死患轉出故乘謂彼行十六行境界四眞諦善根謂 之煖法
028_0368_c_02L
저것이 일어나 이미 성립되면
정(頂)과 인(忍)을 생한다.
세제일법(世第一法)을 얻고
하나의 상(相)에 의지한다.

‘저것이 일어나 이미 성립되면, 정과 인을 생한다’고 함은 만약 이미 난법이 이루어지면, 그 안에서 또한 욕계에 있어서 최상[頂]의 선근을 일으키고 역시 십육 행으로 네 가지 진리를 관찰한다는 것이다. 난법보다 뛰어나므로 정이라고 한다. 이미 정을 더하면 선근을 생하나니, 이것을 일컬어 인이라고 하고, 역시 십육 행으로 네 가지 진제를 관찰한다. 견디고 참으므로 인이라고 한다.
만약 인이 이미 성립되었으면, 세제일법을 얻고 하나의 상에 의지한다. 일체 세속의 공덕 중에서 가장 뛰어나게 생하는 선근을 세간제일법이라고 이름한다. 열반의 문을 열기 때문에 또한 범부의 마음속에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제일법이라고 말한다.
028_0368_c_02L 彼起已成立
生頂及于忍
得世第一法
依倚於一相
彼起已成立生頂及于忍者若已成 煖法於中復於欲界生善根如頂十六行觀四眞諦勝煖法故說頂增上頂生善根名爲忍亦十六行觀 四眞諦堪任故說忍若忍已成立 得世第一法依倚於一相 一切世俗功德中最勝生善根名世 閒第一法開涅槃門故於凡夫意中 最勝故說第一法
【문】왜 하나의 상에 의지한다고 말하는가?
【답】범부의 마음속에 다시 견줄 수 있는 두 공덕은 없다. 만약 있다면 그것도 역시 마땅히 열반의 문을 열어야 할 것인데 열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의 상에 의지한다고 말한다.
【문】그것은 몇 가지 행과 몇 가지 연과 몇 가지 지(地)에 속하는가?

【답】그것은 고의 네 가지 행(行)을 행하며,
여섯 지(地)에 의지한다고 말한다.
028_0368_c_13L以何等故說依 倚於一相於凡夫意中更無有比 二功德若有者彼亦應開涅槃門而 不開是故說依倚於一相彼幾行 何緣何地所攝 彼行苦四行
說攝依六地

‘그것은 고를 행한다’고 함은 저것은 곧 고제를 연(緣)하고 나머지는 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네 가지 행’이란 말하자면 행의 고제의 경계로서 무상이 우두머리가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초무루심의 연과 같이 그것도 또한 그러하기 때문이다.
‘여섯 지에 의지하는 것에 속한다’고 함은 저 법은 여섯 가지 지를 포섭한다는 것이니 미래선ㆍ중간선ㆍ근본 4선이다. 욕계는 그렇지 않으니 정계(定界)가 아니기 때문이다. 무색계에서도 또한 그렇지 않으니 견도(見道)가 없기 때문이다.
028_0368_c_18L 彼行苦者彼卽緣苦諦非餘四行者 謂行苦諦境界無常爲首所以者何 如初無漏心緣彼亦復爾說攝依六 地者彼法攝於六地未來禪中閒禪 根本四禪非欲界不定界故非無色 無見道故
028_0369_a_02L【문】나머지 선근은 어떤 지에 포섭되는가?

【답】인(忍)도 역시 여섯 지에 포섭되고
나머지는 곧 일곱에 의지한다.

‘인도 역시 여섯 지에 포섭된다’고 함은 제순인(諦順忍)은 여섯 가지 지에 포섭된다는 것이니, 세간제일법과 같다.
‘나머지는 곧 일곱에 의지한다’고 함은 난(煖)과 정(頂)은 일곱 가지 지에 포섭된다는 것이다. 이 여섯과 욕계로서 아직 욕을 제거하지 않은 것이다. 욕계가 이미 욕을 제거하면 색계가 된다.
028_0368_c_24L餘善根何地所攝 忍亦攝六地
餘則依於七
忍亦攝六地者諦順忍六地所攝世閒第一法餘則依於七者煖及頂 七地所攝此六及欲界未除欲欲界 已除欲色界

세제일법 다음에
반드시 법인(法忍)을 왕성하게 일으키고
인 다음에 지(智)를 낳으니
모두 아래 경지의 고(苦)를 관찰한다.

‘세제일법 다음에 반드시 법인을 왕성하게 일으킨다’고 했는데, 세간제일법 다음에 무루법인이 생겨남을 일컬어 고법인(苦法忍)18)이라고 한다. 그것은 이전에 관찰하지 않고 지금 관찰할 때 견디고 참으므로 인이라고 말하며, 이것을 초무루무애도(初無漏無礙道)라고 한다.
‘인 다음에 지를 낳는다’고 함은 그 다음에 고법지(苦法智)를 생한다는 것이니, 동일한 경계로서 진실한 성품을 받는 해탈도이다.
028_0369_a_06L 世第一法次
必興起法忍
忍次生於智
俱觀於下苦
世第一法次必興起法忍者世閒第 一法次第生無漏法忍名苦法忍未曾觀今觀時堪任故曰忍是謂初 無漏無㝵道忍次生於智者彼次第 生苦法智同境界受眞實性解脫道
【문】그 인(忍)과 지(智)는 어떠한 연인가?
【답】모두 밑의 고를 관찰한다. 아래 경지의 고란 욕계의 고이니, 그것은 연이 같다.

위의 고도 역시 이와 같으며
인(因)ㆍ멸ㆍ도 역시 그러하다.
이러한 모든 법을 바르게 관찰하는 것을
열여섯 가지 정심(淨心)이라고 한다.
028_0369_a_13L 彼忍及智何緣 俱觀於下苦 下苦者欲界苦彼同緣 上苦亦如是
因滅道亦然
是正觀諸法
說十六淨心
028_0369_b_02L
‘위의 고도 역시 이와 같다’고 함에서 위의 고라는 것은 색계ㆍ무색계의 고를 말한다. 그것도 역시 이와 같이 인(忍)인 무애도와 지(智)인 해탈도를 일으키니, 고미지인(苦未知忍)과 고미지지(苦未知智)이다. ‘인(因)’이란 습제(習諦)이다. 그것도 역시 이와 같이 습법인(習法忍)ㆍ습법지ㆍ습미지인(習未知忍)ㆍ습미지지의 네 가지 도(道)를 일으키니, 마치 고와 같다. ‘멸’이라 했는데, 멸 역시 이와 같이 네 가지 도를 낳으니, 멸법인(滅法忍)ㆍ멸법지ㆍ멸미지인ㆍ멸미지지이다.
‘도 역시 그러하다’고 함은 도 또한 이와 같이 도법인(道法忍)ㆍ도법지ㆍ도미지인ㆍ도미지지(道未知智)의 네 가지 도를 낳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모든 법을 바르게 관찰하는 것을 열여섯 가지 정심이라고 한다’고 함은 곧 견법(見法)을 말하니, 이것은 견의 다른 이름이다.
028_0369_a_18L 上苦亦如是者上苦是色無色界苦 彼亦如是生忍無㝵道智解脫道未知忍及苦未知智因者是習諦亦如是生四道如苦習法忍習法智 習未知忍習未知智滅者滅亦如是 生四道滅法忍滅法智滅未知忍未知智道亦然者道亦如是生四道 道法忍道法智道未知忍道未知智 是正觀諸法說十六淨心者是見法 見法者謂之正觀是見異名

종법행(從法行)은 예리한 근이니
이것은 열다섯 가지 마음에 있다.
종신행(從信行)은 마땅히 알아야 하니
둔한 견도 그 속에 있다.

‘종법행은 예리한 근이니, 이것은 열다섯 가지 마음에 있다’고 함은 열다섯 가지 마음이 만약 이근이라면 이것을 종법행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종신행은 마땅히 알아야 하니 둔한 견도 그 속에 있다’고 함은 곧 열다섯 가지 마음이 만약 둔근이라면 이것을 종신행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028_0369_b_05L 從法行利根
此在十五意
從信行當知
鈍見亦在中
從法行利根此在十五意者彼十五 心頂若利根是說從法行從信行當 知鈍見亦在中者卽彼十五心頂鈍根是說從信行

아직 욕계의 욕을 여의지 못했으면
시과(始果)를 향해 나아가야 하고
6취(趣)를 버리면 두 번째에 이르고
세 번째 향(向)은 아홉 가지 무루이어야 한다.
‘욕계의 욕을 여의지 못했으면 시과를 향해 나아간다’고 함은 종신행과 종법행은 사문과(沙門果)를 향해 나아갈 때 만약 욕을 여의지 못했다 해도 함께 수다원과(須陀洹果)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6취를 버리면 두 번째에 이른다’고 함은 욕계의 번뇌에 아홉 종류가 있으니, 미미(微微)ㆍ미중(微中)ㆍ미상(微上)ㆍ중미(中微)ㆍ중중ㆍ중상ㆍ상미ㆍ상중ㆍ상상인데, 만약 범부일 때 이미 여섯 종류를 여의었고 그 뒤에 깨달음으로 나아가면 이는 함께 두 번째 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세 번째 향은 아홉 가지 무루이어야 한다’고 함은 만약 이미 아홉 가지를 여의면 이는 함께 아나함과(阿那含果)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028_0369_b_11L 未離欲界欲
趣向於始果
捨六趣至二
三向九無漏
未離欲界欲趣向於始果者彼從信 行及從法行趣沙門果時若未離欲 俱趣須陁洹果捨六趣至二者欲界 煩惱九種微微微中微上上中微中上上微上中上上彼若凡夫時已 離六種彼於後若趣證是俱趣第二 三向九無漏者若已離九種是俱 趣阿那含果
028_0369_c_02L
만약 열여섯 번째 마음에 이르면
이것을 과(果)에 머문다고 한다.
신(信)해탈은 연견(軟見)이고
견도(見到)는 이견(利見)이라고 설한다.

‘만약 열여섯 번째 마음에 이르면, 이것을 과에 머문다고 한다’고 했는데, 열여섯 번째 마음을 일컬어 도미지지심상응(道未知智心相應)이라고 하며, 그것이 생기고 나면 과에 머문다고 말하는 것이다. 아직 욕계의 욕을 여의지 못한 사람은 모두 수다원이다. 이미 6품을 여의었으면 모두 사다함(斯陀含)이고 9품을 다 여의었으면 모두 아나함이다.
‘신해탈은 연견이고, 견도는 이견이라고 설한다’고 함은 만약 그것이 나아갈 때 종신행의 둔근(鈍根)이라면 이는 신해탈이고, 만약 그것이 종법행의 이근(利根)이라면 이는 견도라는 것이다.
028_0369_b_21L 若至十六心
是名住於果
信解脫濡見
見到說利見
若至十六心是名住於果者十六心 名道未知智心相應彼生已說住於 未曾離欲界欲俱須陁洹已曾離 六品俱斯陁含盡離九品俱阿那含 信解脫濡見見到說利見者若彼趣 從信行鈍根是信解脫若彼從法 行利根是見到

사유단(思惟斷)을 다하지 못한 이는
일곱 번 생사를 왕래한다.
가가(家家)19)에 3진(盡)이 있고
모두 도적과(道迹果)에 있다.

‘사유단을 다하지 못한 이는 일곱 번 생사를 왕래한다’고 함은 저 신해탈과 견도가 아직 욕계의 사유로 끊어야 할 번뇌를 끊지 못한 이는 곧 살았다 죽었다 하기를 일곱 번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에는 천상에서 일곱 번 생하는 것과 인간 중에 [일곱 번 생하는 일이] 있으므로 극생의 생사가 일곱이라고 하는 것이다.
‘가가에 3진이 있다’고 했는데, 만약 세 종류인 상미(上微)ㆍ상중ㆍ상상이 다하면 이것을 ‘집집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천상과 인간 중에서, 혹은 두 집[二家]에 생하거나 혹은 세 집[三家]에 생하고 후에 반열반하기 때문에 가가라고 한다.
‘모두 도적과(道迹果)에 있다’고 함은 일곱 번의 생존을 다한 이[極七有]와 가가는 당연히 모두 수다원에 머문다고 하는 것이다.
028_0369_c_07L 未盡思惟斷
極生生死七
家家有三盡
俱在道迹果
未盡思惟斷極生生死七者彼信解 脫及見到未離欲界思惟所斷煩惱 是生生死七彼有天上七生及人中故說極生生死七家家有三盡者三種盡上微上中上上是說家家天上及人中或生二家或生三家般涅槃故說家家俱在道迹果者七有及家家當言俱住須陁洹
028_0370_a_02L
여섯 가지가 다하면 일왕래(一往來)이고
여덟을 여읜 것은 일종(一種)이라고 한다.
아홉이 멸진되면 불환(不還)이니
이미 욕의 더러운 진흙을 벗어났다.

‘여섯 가지가 다하면 일왕래이다’고 함은 만약 상(上)의 셋과 중(中)의 셋인 여섯 가지가 다하면 이는 사다함이니, 그에게는 나머지 한 번의 천상에 생하고 한 번 인간 중에 생하여 한 번 왕래하면 이미 반열반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다함이라고 한다.
‘여덟을 여읜 것은 일종(一種)이라고 한다’고 함은 만약 8품을 다하면 이는 한 가지 종이고, 그는 다만 한 번의 생을 남기고 나머지가 없으므로 일종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아홉이 멸진되면 불환이다’고 함은 만약 일체의 9품이 다하면 곧 아나함이니, 그는 욕계에 다시 오지 않으므로 아나함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이미 욕의 더러운 때를 벗어났기 때문이다.
028_0369_c_17L 六盡一往來
離八謂一種
九滅盡不還
已出欲污泥
六盡一往來者若有六種盡上三是斯陁含彼餘一生天上一生人 一往來已般涅槃故說斯陁含八謂一種者若八品盡是一種彼餘 唯一生無餘故說一種九滅盡不還 若一切九品盡是阿那含彼不復 來欲界故說阿那含所以者何已出 欲污泥

이와 같이 아홉 가지 번뇌가
만약 위의 여덟 지(地)에 있어도
그것은 두 가지 도(道)가 멸하는 것이니
[이는] 세존의 말씀이다.

‘이와 같이 아홉 가지 번뇌가 만약 위의 여덟 지에 있다’고 함은 난난(煖煖)으로부터 상상(上上)에 이르는20) 욕계의 아홉 가지 번뇌와 같이 위의 계(界)도 역시 이와 같다는 것이다. 여덟 지 가운데에는 범세(梵世)ㆍ광요(光曜)ㆍ변정(遍淨)ㆍ과실(果實)ㆍ무량공처ㆍ무량식처ㆍ무소유처ㆍ비상비비상처가 있다.
‘그것은 두 가지 도가 멸하는 것이니, [이는] 세존의 말씀이다’고 함은 이 일체 번뇌의 욕계와 색계ㆍ무색계는 두 가지 도가 멸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무애도(無礙道)로써 멸하고, 해탈도로써 깨달음을 얻는다.
028_0370_a_04L 如是九煩惱
若在上八地
彼雙道所滅
世尊之所說
如是九煩惱若在上八地者如欲界 九種煩惱煖煖至上上上界亦如是 八地中梵世光曜遍淨果實無量空 無量識處無所有處非想非非想 彼雙道所滅世尊之所說者此一 切煩惱欲界及色無色界雙道所滅 以無㝵道滅解脫道得證
【문】이 도는 세속이 되는가, 무루가 되는가?

【답】유구(有垢)ㆍ무구도(無垢道)이니
함께 능히 여덟 지를 여읜다.
그중에 머무름을 신증(身證)이라고 하니
소위 멸진정을 획득하는 것이다.

욕계의 지(地) 하나, 색계의 지 넷, 무색계의 지 셋은 세속도의 멸이고 또한 무루이다. 범부도 세속도에 따라 오히려 멀리 여읨을 얻는데 하물며 다시 성인을 이르랴. ‘그중에 머무름을 신증이라고 하니, 소위 멸진정을 획득하는 것이다’고 함은 여덟 지의 무욕(無欲) 중에 머무름이 학(學)의 멸진정을 얻는 것이고 이것이 신증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법으로서 열반과 비슷한 것을 몸이 촉달(觸達)하는 것이므로 신증이라고 하는 것이다.
028_0370_a_13L此道爲 世俗爲無漏 有垢無垢道
俱能離八地
住中說身證
謂獲滅盡定
欲界地一色界地四無色界地三世俗道滅亦無漏凡夫從世俗道尚 得遠離況復聖住中說身證謂獲滅 盡定者住於八地無欲中謂學得滅 盡定是身證所以者何法似涅槃所觸故說身證
028_0370_b_02L
금강유정(金剛喩定) 다음에
반드시 진지(盡智)를 얻는다.
뜻을 일으켜 나의 생을 다하고
일체의 누(漏)를 여읜다.

‘금강유정 다음에 반드시 진지를 얻는다’고 함에서, 금강유정이란 비상비비상처의 욕탐을 여읠 때의 아홉 번째 무애도(無礙道)인 최후의 학심(學心)을 가리킨다. 그중에서 일체의 모든 번뇌는 영원히 다하여 남음이 없다. 일체 성스러운 행위의 마지막이므로 금강유삼마제(金剛喩三摩提)라고 한다. 이 다음에 진지를 생하니, 최초의 무학지(無學智)이다.
‘뜻을 일으켜 나의 생을 다하고, 일체의 누를 여읜다’고 함은 그가 선정[定]을 일으켜 자신의 일체의 생은 다했음을 생각하는[意] 것이니, 그는 그때에 무착(無著)으로서 일체의 누에서 해탈한다고 하는 것이다.
028_0370_a_22L 金剛喩定次
必逮得盡智
生意我生盡
離於一切漏
金剛喩定次必逮得盡智者金剛喩 定名非想非非想處離欲時第九無 㝵道最後學心於中一切諸煩惱永 盡無餘一切聖行畢竟故說金剛喩 三摩提此次第生盡智最初無學智 生意我生盡離於一切漏者彼生定 意我一切生盡彼於爾時無著解脫 於一切漏
【문】무착에는 몇 가지가 있는가?

【답】무착은 여섯 종이 있으니
믿음을 따라 다섯 가지가 생기며
두 가지 지(智)를 체득하니
시해탈(時解脫)임을 알아야 한다.
028_0370_b_09L無著幾種 無著有六種
是從信生五
逮得於二智
當知時解脫

‘무착은 여섯 가지가 있다’고 함은 세존께서는 여섯 가지 무착을 말씀하셨으니, 퇴법(退法)ㆍ염법(念法)ㆍ호법(護法)ㆍ등주(等住)ㆍ필승진(必昇進)ㆍ부동법(不動法)이다. 그중에서 만약 연한 지혜[軟智]와 연한 정진[軟進]이라면, 이는 물러날 도구를 얻어 곧 물러나므로 퇴법이라고 한다. 유지와 유진으로서 자주 몸을 미워하고, 몸을 미워하고 나서는 부서짐을 생각하기 때문에 염법(念法)이라고 한다. 유지로서 널리 나아가고 힘을 다하여 항상 스스로 마음을 보호하므로 호법이라고 한다. 중지(中智)와 등진(等進)으로서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는 등 한결같이 중도(中道)에 머물기 때문에 등주(等住)라고 한다. 작은 예리함으로서 널리 나아가고 반드시 부동(不動)을 얻으므로 필승진(必昇進)이라고 한다. 예리한 지혜와 널리 나아감으로서 비로소 부동을 얻으므로 부동이라고 한다.
‘종신은 다섯을 생하고 두 가지 지를 체득한다’고 함은 그중에서 다섯은 이전의 믿음을 따라 행하는 것으로서 두 가지 지혜가 있다는 것이니, 진지(盡智)와 무학의 등견(等見)이다.
‘시해탈임을 알아야 한다’고 함은 시해탈로서 그것을 구할 때 아무 때나 바라는 것에 따라 선(善)을 배울[學] 수는 없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028_0370_b_11L 無著有六種者世尊說六無著退法 念法護法等住必昇進不動法於中 若濡智及濡進是得退具便退故說 退法濡智及濡進數數惡身惡身已 念壞故說念法濡智而廣進進力常 自護心故說護法中智及等進是不 增不損等住於中道故說等住少利 而廣進彼必得不動故說必昇進智及廣進是始得不動故說不動從信生五逮得於二智者於中五曾 從信行彼有二智盡智及無學等見 當知時解脫者彼當知時解脫是求 不能一切時隨所欲學善
028_0370_c_02L
부동법은 이근(利根)이고
이는 시해탈이 아니다.
세 가지 지(智)를 획득하고
등해탈(等解脫)을 성취한다.

‘부동법은 이근이고, 이는 시해탈이 아니다’고 함은 말하자면 오로지 이근인 것은 부동법인데 그것은 일시적인 해탈이 아닌 것으로서 능히 모든 때에 바라는 것을 따라 선을 배우니, 때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 가지 지를 획득한다’고 함은 그가 진지ㆍ무생지(無生智)ㆍ무학의 등견의 세 가지 지혜를 지닌다는 것이다.
‘등해탈을 성취한다’고 함은 소위 이들 다섯 가지 무착은 시해탈이고, 이는 바로 등의(等意)해탈을 성취한다는 것이다.
028_0370_b_24L 不動法利根
是不時解脫
獲得於三智
成就等解脫
不動法利根是不時解脫者謂一向 利根是不動法彼不時解脫能一切 時隨所欲學善不求時獲得於三智 彼有三智盡智無生智無學等見 成就等解脫者謂此五無著時解脫 是成就等意解脫謂不動法是成就 不動解脫

알아야 하니, 혜해탈(慧解脫)은
멸진정을 얻지 못한다.
오직 구해탈(俱解脫)이 있어
멸진정을 성취한다.

‘알아야 하니, 혜해탈은 멸진정을 얻지 못한다’고 했는데, 이들 여섯 가지 무착이 멸진정을 성취 못하는 것을 혜해탈이라고 한다. 이는 지혜의 힘으로 해탈하고 정력(定力)으로 해탈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구해탈이 있어 멸진정을 성취한다’고 함은 이 여섯 가지 무착이 멸진정을 얻으면, 이것을 구해탈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는 함께 하는 힘으로 해탈하니, 혜력과 정력이다.
이미 현성인(賢聖人)을 설명하였으니, 이제 법을 설명하겠다.
028_0370_c_10L 慧解脫當知
不得滅盡定
唯有俱解脫
成就滅盡定
慧解脫當知不得滅盡定者此六無 著若不成就滅盡定是說慧解脫慧力解脫非定力唯有俱解脫成就 滅盡定者此六無著若得滅盡定說俱解脫彼俱力解脫慧力及定力 已說賢聖人法今當說

믿음 따라 행하는 모든 법과
법을 따라 행하는 법과
성도(聖道)의 견제도(見諦道)가 있으니
이는 모두 동일한 모습이다.

믿음을 따라 행하는 법과 법을 따라 행하는 법을 곧 견도라고 말한다.
028_0370_c_18L 從信行諸法
及從法行法
聖道見諦道
是盡同一相
從信行法從法行法是說見道
028_0371_a_02L
그 중에서 모든 근법(根法)을
미지근(未知根)이라고 이름한다.
나머지 유학법(有學法)을 일컬어
부처님께서는 이지근(已知根)이라고 말씀하신다.

‘그 중에서 모든 근법을 미지근이라고 이름한다’고 함은 견도법 중에서 소위 근(根)과 근에 속한 마음[心]과 통(痛)과 신(信) 등 다섯 가지 근과 같은 것을 미지근(未知根)이라고 한다.
‘나머지 유학법을 일컬어 부처님께서는 이지근이라고 말씀하신다’고 함은 견도의 학법(學法)을 여읜 나머지 여러 학법 중에서는 곧 그 근을 이지근21)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028_0370_c_21L 於中諸根法
是名未知根
謂餘有學法
佛說已知根
於中諸根法是名未知根者於見道 法中謂根根數如心及痛信首五根 是未知根謂餘有學法佛說已知根 離見道學法諸餘學法中卽彼根 說已知根

알아야 하니 무지근(無知根)은
무학 가운데에 있다.
이미 과를 얻으면 곧 앞의 도를 버린다고
말해야만 하는 것이다.

‘알아야 하니 무지근은 무학 중에 있다’고 함은 무학법 중에서는 곧 그 근을 무지근(無知根)22)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미 과를 얻으면 곧 앞의 도를 버린다고 말해야만 한다’고 함은 이 무루법이 승진하여 과를 얻을 때는 앞의 무애도에 포섭된 것과 해탈도를 버린다는 것이다.
028_0371_a_05L 當知無知根
在於無學中
已得果便捨
前道應當說
當知無知根在於無學中者無學法 中卽彼根說無知根已得果便捨前 道應當說者此無漏法昇進得果時 捨無㝵道所攝及解脫道

이미 다하여 해탈하게 되면
얻는 것은 하나의 과에 포섭된다.
더럽지 않은 것으로서 아홉 번째를
멸진이라고 말해야 한다.

‘이미 다하여 해탈하게 되면 얻는 것은 하나의 과에 포섭된다’고 함은 무애도에서 해탈도에 이르는 그 중간에서 번뇌의 다함을 얻는데, 단지 과를 얻을 때는 일체의 번뇌가 다하여 하나의 해탈과(解脫果)를 얻는다는 것이다.
‘더럽지 않은 것으로서 아홉 번째를 멸진이라고 말해야 한다’고 함은 모든 번뇌는 아홉 가지 도로써 멸하는 것인데, 다만 더럽지 않은 것23)은 아홉 번째 무애도가 일시에 끊는 것이지 점차적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028_0371_a_11L 已盡爲解脫
得攝於一果
不穢污第九
滅盡應當說
已盡爲解脫得攝於一果者無㝵道 至解脫道於其中閒得煩惱盡但得 果時一切煩惱盡得一解脫果不穢污 第九滅盡應當說者說諸煩惱九種 道所滅但不穢污第九無㝵道一時 不漸漸
028_0371_b_02L
만약 서로 비슷한 이름이 있다면
그는 능히 부동을 획득한다.
무착과 벗어남을 믿는 것은
같은 성질로서 도를 증장한다.
‘만약 서로 비슷한 이름이 있다면 능히 부동을 획득한다’고 함은 말하자면 무착은 일체가 부동을 얻을 수가 없고, 필승진(必昇進)만이 그것을 얻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서로 비슷한 이름이다.
‘무착과 벗어남을 믿는 것은 같은 성품으로서 도를 증장한다’고 함은 말하자면 해탈을 믿는 데서 오로지 성품이 필승진인 것이 모든 근을 증익하고 견도(見到)를 얻는 것이지, 나머지는 아니라는 것이다.
028_0371_a_19L 若有相似名
彼能獲不動
無著及 信脫
彼同性增道
若有相似名彼能獲不動者謂無著 不能一切得不動性必昇進得彼是 相似名無著及信脫彼同性增道者 謂信解脫一向性必昇進是增益諸 根逮得見到非餘
【문】어떻게 하여 조금씩 진리를 보게 됨을 아는가?

【답】공덕과 악을 건립하여
차례로 진리를 본다.

공덕을 볼 때는 악(惡)을 보는 것이 아니고, 역시 악을 볼 때는 공덕을 볼 수도 없다. 또한 처음에 한꺼번에 그 악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고 또한 일시에 일체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다. 또한 총체적인 모든 공덕인 것도 아니고, 역시 일시에 합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공덕과 악을 건립하고 차례로 진리를 보는 것이다.
【문】어떻게 하여 유위ㆍ무위의 과를 아는가?
【답】무애도의 힘으로 유위와 무위의 과를 얻는다.
무애도의 힘으로 유위과와 무위과를 얻는다. 그러므로 무애도의 힘으로 유위와 무위의 과를 얻는 것이다.
028_0371_b_03L云何知漸漸見 建立功德惡
次第見眞諦
非以見功德時見惡亦不以見惡時 見功德亦非初摠觀彼惡亦非一時 一切厭亦非摠功德諸功德亦非一 時合是以建立功德惡次第見眞諦 云何知有爲無爲果以無㝵道 力得有爲無爲果無㝵道力得有爲 果及無爲果是故以無㝵道力得有 爲無爲果
阿毘曇心論卷第二
甲辰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彫造
  1. 1)곧, 스물두 가지를 말한다.
  2. 2)변견이란 세간의 단멸과 영원성을 주장하는 두 가지 치우친 견해를 말한다.
  3. 3)범어로는 satkāya-dṛṣṭi. 유신견을 말한다.
  4. 4)범어로는 ḍṛṣṭi-parāmarśa. 유루법을 가장 청정하다고 보는 견해이다. 견취(見取)라고도 한다.
  5. 5)범어로는 śilavrataparāmarśa. 유루행을 생천의 인이 된다고 보고 계착하는 견해이다. 계취(戒取)라고도 한다.
  6. 6)결(結, saṃyojana)은 ‘얽어 매임’을, 사(使, anuśaya)는 ‘내면에 깃든 악한 성향’을 가리킨다. 모두 번뇌의 다른 이름이다.
  7. 7)유신견(有身見, satkāya-dṛṣṭi)을 말한다.
  8. 8)범어로는 antagrāha-dṛṣṭi. ‘끝이 있다는 견해’를 말한다.
  9. 9)애ㆍ에ㆍ만을 자상번뇌라고 한다.
  10. 10)둘이란 모두 사견ㆍ견도를 말한다.
  11. 11)사견ㆍ견도ㆍ계도의 셋을 말한다.
  12. 12)여기에서는 감관(indriya)을 의미한다.
  13. 13)앞의 게송에서는 색신(色身)이다.
  14. 14)범어로는 upakleśa. 근본번뇌에 의해 일어나는 이차적 종속 번뇌를 말한다.
  15. 15)안식ㆍ이식ㆍ신식ㆍ의식의 넷을 말한다.
  16. 16)원문의 의정(意正)을 의지(意止)로 고쳐 읽는다. 의지란 염처(念處) 혹은 염주(念住)라고도 한다.
  17. 17)범어로는 ṣodaṡa-ākāra. 열여섯 가지 행상으로 4성제를 관찰하는 법을 말한다. 16행상(行相)이라고도 한다.
  18. 18)범어로는 duḥkhe dharma-jñāna-kṣāntiḥ. 고제를 관찰해 얻는 지혜인 고법지의 직전에 얻는 마음을 말한다. 고류지인(苦類智忍)이라고도 한다.
  19. 19)범어로는 kulaṁkula. ‘집에서 집으로 태어나는 자’라는 뜻으로, 이른바 사다함이 7번 다시 태어남을 의미한다.
  20. 20)원문의 유유(濡濡)를 난난(煖煖)으로 고쳐 읽는다.
  21. 21)수도위에서 무루의 아홉 가지 근을 가리킨다.
  22. 22)무학법 중의 무루의 아홉 가지 근을 가리킨다. 구지근(具知根)이라고도 한다.
  23. 23)번뇌를 제거하는 무기법과 유루의 선법 등을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