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雜阿毘曇心論卷第十一

ABC_IT_K0960_T_011
028_0523_a_01L잡아비담심론 제11권
028_0523_a_01L雜阿毘曇心論卷第十一
법구 지음
승가발마 등 한역
김형준 번역
028_0523_a_02L尊者法救造
宋天竺三藏僧伽跋摩等譯
10. 택품 ②
028_0523_a_04L擇品下
【문】지법(知法)ㆍ식법(識法)ㆍ명법(明法)이란 어떤 것인가?
028_0523_a_05L知法識法明法此云何
【답】지(知)란 일체법이다.
  식(識)과 명(明)도 그러하니
  지와 식과 명은
  각기 일에 따라 설명된다.
028_0523_a_06L 知者一切法
識明亦復然
知及意識明
彼各隨事說
고(苦)의 지혜로 고통을 알게 되고 나아가 도(道)의 지혜로 도를 알게 되니, 무루지1)는 분단해서 연하는 까닭이다. 선한 등지(等智)도 역시 고 내지 허공ㆍ수멸(數滅)ㆍ비수멸을 아니, 두루 모든 법과 인연하기 때문이다.
식(識)2)도 또한 일체법을 인식한다. 즉 눈의 인식은 색을 식별하고 몸의 인식은 촉감을 식별한다. 독자적인 모습[自相]을 거두어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의식(意識)은 눈과 색과 안식(眼識)을 인식한다. 이와 같이 일체법을 인식하니, 두루 연하기 때문이다.
028_0523_a_08L彼苦智知苦乃至道智知道無漏智 分段緣故善等智者亦知苦乃至虛 空數非數滅普緣一切法故識者亦 識一切法彼眼識識色乃至身識識 攝受自相故意識識眼色眼識是一切普緣故
명(明)3) 역시 일체법을 밝히니 그 같은 일을 따른다. 즉 고인(苦忍)4)과 고지(苦智)로 고를 밝히고 내지는 도인(道忍)과 도지(道智)로 도(道)를 밝히게 된다. 분단(分段)하여 연하기 때문이다. 선(善)한 유루의 지혜도 역시 고(苦) 내지 허공과 비수멸을 밝힌다.
028_0523_a_14L明者亦明一切法其事彼苦忍苦智明苦乃至道忍道 智明道分段緣故善有漏慧亦明苦 乃至虛空非數滅
【문】겁(劫)5)은 어떻게 지나가는가?
劫云何過
【답】도병(刀兵)과 병과 기근을
  중겁(中劫)이 지나간다고 하고
  땅을 제외한 세 종류를
  대겁(大劫)이 지나간다고 말한다.
028_0523_a_17L 刀兵病饑饉
說名中劫過
除地餘三種
說名大劫過
‘도병(刀兵)과 병과 기근을 중겁이 지나간다고 한다’라고 한 것은 세 종류의 중겁의 지남이 있음을 말한 것이다. 즉 전쟁과 병과 기근 등 세 가지 재난이 그것이다.
028_0523_a_19L 刀兵病饑饉說名中劫過者三種中 劫過謂刀兵病疫饑饉
028_0523_b_02L도병겁(刀兵劫)6)이란 이른바 사람의 수명이 십 년 밖에 못살 때가 되면 추악한 경계가 되어 탐하고 모든 사법이 행해지며 각기 해치려는 마음으로 살아가 손으로 풀이나 나무를 잡으면 그것이 모두 칼이 되어 서로를 살해하게 된다. 이와 같이 해서 7일이 지나면 도병(刀兵)의 중겁(中劫)이 지나가게 되는 것이다.
028_0523_a_21L刀兵劫者乃至人壽十歲時貪麤惡境界行諸 邪法各住害心手執草木皆成刀劍 更相殺害如是經七日刀兵中劫過
질역겁(疾疫劫)7)이란 역시 사람의 수명이 십 년 밖에 못살 때가 되면 여러 가지 질병이 많아지고 의사(醫師)나 처방약이나 병을 돌보는 사람이 없어진다. 그리하여 복덕이 박한 까닭에 병만 들게 되면 곧 죽는다. 이와 같이 해서 7개월 7일이 지나면 질역의 중겁이 지나게 되는 것이다.
028_0523_b_03L疾疫劫者亦壽十歲時多諸疾病有醫師方藥瞻病薄福德故遇病輒 如是經七月七日疾疫中劫過
기근겁(饑饉劫)8)이란 역시 사람의 수명이 십 년 밖에 못살 때가 되면 배고프고 목마른 일이 더욱 많아져 몸이 지극히 약해지고 온 하늘에 가뭄이 들어 심고 가꾼 곡식을 거두어들이지 못한다. 쌀알을 헤아려 가며 밥을 먹게 되고 사람의 뼈를 삶고 달여 그 즙(汁)을 마시게 된다. 이와 같이 해서 7년 7개월 7일이 지나면 기근의 중겁(中劫)이 지나게 되는 것이다.
028_0523_b_06L饉劫者亦壽十歲時饑渴增上體極 羸劣普天亢旱種殖不收數米而食煮人骨以飮其汁如是經七年七月 七日饑饉中劫過
다음과 같이 말하는 자가 있다. 곧, “만약에 금세에서 하룻낮ㆍ하룻밤 동안 살생을 하지 아니하는 계율을 지키기만 하여도 종극에 그 도병겁 가운데 태어나는 일은 없으며, 한 알의 가리륵(呵梨勒)의 열매를 승복전(僧福田)에 베풀어도 종극에 그 질역겁에 태어나는 일은 없다. 만약 한 끼의 밥을 승복전에 베푼다면 종극에 그 기근겁에 태어나지 않는다.”
028_0523_b_10L如是說者若於今 世一日一夜持不殺戒終不生彼刀 兵劫中一呵黎勒果施僧福田終不 生彼疾疫劫中若以一食施僧福田 終不生彼饑饉劫中
이 염부제(閻浮提)에는 악겁(惡劫)이 바뀌어 가며 일어나지만 다른 지방에서는 이와 비슷한 일이 적게 일어난다. 이틈에 도병겁이 일어나게 되듯이 그들에게는 단지 노여움만이 더욱 증가하게 된다. 다시 이틈에 질병겁이 일어나듯이 그들은 오직 병들고 약해져서 힘이 적어지기만 하며, 이틈에 기근겁이 일어나듯이 그들에게는 오직 배고픔과 목마름만 더해질 뿐이다.
028_0523_b_14L此閻浮提惡劫互 餘方則少有相似如此閒刀兵劫 彼唯瞋恚增上如此閒疾疫劫起 彼唯羸劣少力如此閒饑饉劫起唯增饑渴
【문】어떤 것이 대겁(大劫)이 지나가는 것인가?
云何大劫過
【답】땅을 제외한 세 종류를 대겁이 지나간다고 말한다. 세 가지 큰 재난의 종류를 대겁이 지나간다고 말하니, 불과 물과 바람이 그것이다. 땅[地]의 종류는 제외된다. 왜냐 하면, 땅은 예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예리하다면 대겁을 부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또한 땅의 종류가 겁을 부순다면 마땅히 제4선의 경지에 이르러야 하거늘 땅[地:境地]은 일찍이 제4선에 이른 일이 없다.
028_0523_b_18L除地餘 三種是名大劫過三大種說大劫過 謂火非地種何以故不利故者壞大劫復次地種壞劫者壞劫應 至第四禪而未曾至第四禪
【문】무슨 이유로 괴법은 제4선에 이르지 못하는가?
028_0523_b_22L何故 壞劫不至第四禪
028_0523_c_02L【답】정거천(淨居天)이기 때문이다. 그곳에서는 더 높은 경지가 일어나 곧 반열반에 들 만한 곳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아랫세계에 태어나지 않나니, 아랫세계는 비수멸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곳에 머물면서 괴겁을 겪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더욱 불어난 복력으로 그곳에 태어나는 까닭이다. 안으로 마음이 교란되는 일은 그 경지에 해당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니, 만약 그 경지에서 안으로 마음이 교란되는 일이 있다고 한다면 밖으로도 재난이 있게 된다.
028_0523_b_23L淨居天故彼無 上地生卽彼般涅槃故亦不下生地非數滅故若彼住經壞劫者亦不 增上福力生彼處故內擾亂非分 若彼地內有擾亂者則外有災患
초선(初禪)의 경지에서는 내적으로 각관(覺觀)의 불이 마음을 교란하는 까닭에 밖으로도 화재로 인해 불타게 된다.
제2선의 경지에서는 내적으로 기쁨의 물[喜水]이 마음을 교란하는 까닭에 밖으로도 물의 재난으로 인해 표류하게 된다.
제3선의 경지에서는 내적으로 출입식의 바람이 마음을 교란하는 까닭에 밖으로도 바람의 재난으로 인해 허물어지게 된다.
028_0523_c_04L彼初禪內有覺觀火擾亂故外爲火 災所燒第二禪內有喜水擾亂故外 爲水災所漂第三禪內有出入息風 擾亂故外爲風災所壞
【문】제4선에서 일찍이 아무것도 교란하는 것이 없었다면 어떻게 그것이 영원한 경지가 아니겠는가?
028_0523_c_08L第四禪未 曾有擾亂者何得不常
【답】찰나무상에 의해 허물어지는 까닭이다. 다음과 같이 말하는 자가 있다. 곧, “제4선의 경지는 정해지지 않은 채 상속된다. 그 하늘에 태어나는 일을 좇아 궁전도 함께 일어나며, 만약 하늘에서의 목숨이 끝나면 그 역시 사라진다.”
028_0523_c_09L剎那無常 所壞故如是說者第四禪地不定相 隨彼天生宮殿俱起若天命終彼 亦俱沒
【문】어떤 것이 겁(劫)이 다하고 최초로 생기는 일인가?
何等劫盡最初
【답】일곱 번의 불이 차례로 지나고
  그 후에 물의 재난이 일어난다.
  마흔아홉 번의 불과 일곱 번의 물을 겪고
  다시 일곱 번의 불 뒤에 바람의 재난이 온다.
028_0523_c_12L 七火次第過
然後一水災
七七火七水
復七火後風
‘일곱 번의 불이 차례로 지나간다’라고 한 것은 최초로 불의 겁이 일어남을 말한 것이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다. 곧, “만약 화겁이 일어날 예정이라면 그 때 사람의 수명이 팔만 년에 달하여 지옥에서 명이 끝난 사람도 다시 지옥에 태어나지 아니한다. 그러면 이것이 겁이 다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지옥에 한 중생도 머무는 일이 없게 되니, 이것을 이름하여 ‘지옥의 겁이 다하였다’라고 한다. 지옥의 겁진과 마찬가지로 축생과 아귀의 경우도 역시 이와 같은데, 만약 축생으로서 사람에게 쓸모가 있다면 사람의 겁과 함께 다하게 된다.
028_0523_c_14L 七火次第起者謂最初火劫起如是 說言若火劫將起爾時人壽八萬歲地獄命終者不復還生當知劫盡至地獄無有一衆生住是名地獄劫 如地獄劫盡畜生餓鬼亦如是畜生於人有用者與人俱盡
028_0524_a_02L이때에는 염부제에는 오직 한 사람이 있어 가르쳐 주는 이가 없이도 능히 초선(初禪)의 경지에 들어간다. 초선에서 일어나게 되면 그는 ‘떠남에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 몹시도 유쾌하고 즐겁구나’라고 소리 높이 외치게 된다. 이와 같은 음성이 전전하면서 서로 알려져 염부제에 두루 퍼지게 되면 모든 나머지 중생들도 스승의 가르침 없이 모두가 초선의 경지에 들어가게 되니, 마침내 염부제주에는 한 사람의 중생도 머무는 일이 없게 된다. 이것을 ‘염부제주의 겁이 다하였다’고 표현한다. 다만 울단월을 제외한 욕계의 모든 선취(善趣)도 역시 이와 같다. 울단월에서는 목숨이 끝날 때 선(禪)을 얻는 자가 없으니, 욕망을 벗어나는 것은 그들의 분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028_0523_c_20L是時閻 浮提唯有一人無有教者能入初禪 從初禪起已擧聲唱言離生喜樂甚 爲快樂如是音聲展轉相告遍閻浮 諸餘衆生亦無師教悉入初禪至閻浮提無一衆生住是名閻浮提 劫盡唯除鬱單曰欲界一切善趣亦 復如是鬱單曰命終無得禪者離欲 非分故
또 그때 초선의 경지를 얻은 한 중생이 아무도 가르치는 사람이 없는데도 제2선의 경지에 들어가 선에서 일어난 뒤 소리 높이 외치기를 ‘삼매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은 몹시도 상쾌하고 즐겁구나’라고 한다면 이와 같은 음성이 두루 범천(梵天)의 세계에 이르게 되며 나머지 모든 범천의 중생들도 역시 그와 같이하여 마침내 초선의 세계에는 한 사람의 중생도 머무는 이가 없게 되는데 이것을 이름하여 ‘중생 세계의 겁이 다하였다’고 표현한다. 이때 세계는 구원(久遠)의 허공세계가 되어 마침내 일곱 개의 해가 나타나게 된다.”
028_0524_a_05L又於彼時初禪一衆生無有 教者而入第二禪從禪起已擧聲唱 定生喜樂甚爲快樂如是音聲遍 至梵天餘諸衆生亦復如是乃至初 禪無一衆生住是名衆生世劫盡時世界久遠虛空乃至七日出
【문】어디서 나오는가?
028_0524_a_10L問曰 從何處出
【답】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겁이 이루어질 때 건타산(乾陀山)9) 뒤로 일곱 개의 일륜(日輪)이 머물고 있다가 그곳에서 나오게 된다”고 한다. 다시 말하기를 어떤 이는 “하나의 해가 나위어져 일곱 개가 된다”고 하고, 어떤 이는 “한 해에서 일곱 갑절의 열이 생기게 된다”라고 하며, 어떤 이는 “무간지옥으로부터 불이 솟아 나오는 것이다”라고 하고 있다.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은 중생들의 업의 힘 때문에 증상과(增上果)의 기세계(器世界)가 일어났다가 그 업이 다하면 이와 같은 교란이 생기고 나아가 범천(梵天)이 불타게 되는 것도 이와 같은 것이다.
028_0524_a_11L有說劫成時由乾陁山 後有七日輪住從彼而出有說一日 分爲七分復有說一日七倍熱復有 說從無閒地獄火出如是說者衆生 業力故增上果器世界起彼業盡如 是擾亂生乃至梵天燒燃如是
‘일곱 번 화재가 차례로 지나가고 그 후에 한 번의 수재가 일어난다’라고 한 것은 일곱 번 불이 지나간 뒤에 한 번의 물의 재난이 있으며 마침내 제2선의 경지를 허물게 되는 것이다.
028_0524_a_16L七火 次第過然後一水災者七火災過已 然後一水災乃至壞第二禪
【문】물의 재난은 어디서 일어나는가?
028_0524_a_18L水從 何處起
【답】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제3선의 가장자리로부터 뜨거운 잿물[灰水]이 비가 되어 쏟아진다”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수륜(水輪)이 솟아 나오게 된다”라고 하고 있다. 교란이 일어나는 일은 앞에서 설명한 내용과 같다.
028_0524_a_19L有說從第三禪際雨熱灰 復有說水輪涌出擾亂起如前說
‘마흔아홉 번의 불과 일곱 번의 물’이라 한 것은 일곱 번 화재가 차례로 지나간 뒤 한 번의 수재가 일어나며, 이와 같은 해서 마흔 아홉번의 화재와 일곱 번의 수재를 겪게 됨을 말한 것이다.
‘다시 일곱 번의 불 뒤에 바람의 재난이 온다’라고 한 것은 다시 일곱 번 불의 재난이 지난 뒤에 한 번 바람의 재난이 일어남을 말한 것이다. 물의 재난과 바람의 재난은 불의 재난으로부터 차례로 일어난다. 이것이 올바른 설[善說]이다.
028_0524_a_20L七七火七水者七火災次第過然後 一水災如是七七火災一七水災七火後風者復七火災過然後一風 水災風災從火災次第起此則善
028_0524_b_02L이 변정천(遍淨天)은 64 겁의 수명이 있다. 물의 재난으로 표류하다가 마침내 제2선에 이르러 바람의 재난으로 허물어 지게 되고 그리하여 마침내 제3선에 이르게 되면 백억(百億)의 사천하가 일시에 함께 허물어진다.
열아홉 개의 중겁(中劫) 사이에 세계는 허공으로 변하고, 한 중겁 사이에 기세간은 허물어지고 한 중겁 사이에 기세간이 이루어진다. 그후 열아홉 중겁 동안 차례로 다시 머물게 된다.
만약 처(處)의 최초가 허공이었다면, 그곳이 가장 나중에 머무는 곳이 된다. 또한 처의 최후가 허공이었다면 그곳이 가장 먼저 머무는 곳이 된다.
028_0524_b_02L是遍淨天六十四劫壽也水災所 漂乃至第二禪風災所壞乃至第三 百億四天下一時俱壞十九中劫 世閒空一中劫器世界壞一中劫器 世界成十九中劫漸次第住若處最 初空是處最後住若處最後空是處 最前住
【문】어떻게 하여 마음이 어지러워지는가?
云何心亂
【답】착란(錯亂)과 본업의 과보와
  공포와 상해(傷害)가 있는데
  가령 사지(四肢)를 해체함은
  성인은 물ㆍ불ㆍ바람이라 말한다.
028_0524_b_08L 錯亂本業報
恐怖及傷害
若彼解支節
聖說水火風
‘착란(錯亂)과 본업의 과보와 공포와 상해(傷害)가 있다’라고 했는데, 네 가지 인연으로 어지러워진다. 즉 4대(大)의 착란과 본업(本業)의 과보와 공포 및 몸을 상해하는 일이다.
4대가 착란이란 음식이 적합하지 아니한 까닭에 4대가 착란을 일으키게 되며, 4대가 착란을 일으키는 까닭에 그의 마음을 어지럽게 한다.
본업의 과보란 본지(本地)에서 지은 마음을 어지럽히는 업보가 이미 무르익게 된 것이다.
028_0524_b_10L 錯亂本業報怖畏及傷害者四因緣 心亂謂四大錯亂本業報恐怖及傷 害身四大錯亂者飮食不適故四大 錯亂四大錯亂故令彼心亂本業報 本造心亂業報已熟
【문】어떤 것이 그러한 것인가?
何者是
【답】매우 쇠해져서 화가 된 것을 전하여 남을 시름하게 하고 괴롭게 한다. 혹은 다시 욕설을 퍼부으면서 “너는 바보 미치광이며 마음이 어지러운 놈이다”라고 하고, 중생들을 구박하여 그들을 험한 환경에 떨어지게 하거나 산과 못을 불태우고 억지로 사람들에게 술을 먹이거나 혹은 망령된 생각으로 부처의 말을 설한다. 이와 같은 종류의 업이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과보를 얻는다.
028_0524_b_15L 好傳衰禍令他愁苦或復罵言汝癡 狂心亂驅迫衆生令墮嶮處焚燒山 澤强與人酒或以妄想倒說佛語是比業得心亂果
공포(恐怖)란 비인(非人)이 찾아오는 것을 보고 놀라고 두려워하며 무섭고 겁이 나는 까닭에 그의 마음이 어지러워지는 것을 말한다.
몸을 상하게 하고 해친다고 하는 것은 비인에게 두들겨 맞기 때문에 몸을 다치는 것이다. 즉 그가 부정(不淨)으로써 대중이 모인 장소나 불승의 탑을 더럽히기 때문에 그곳에 있던 비인이 성이 나서 그를 두들겨 패는 까닭에 마음이 어지러워지는 것이다.
028_0524_b_19L恐怖者見非人形 來驚畏恐怖故彼心則亂傷害身者 爲非人所打故彼以不淨污大衆會 處及佛僧塔故彼處非人瞋卽打彼則心亂
028_0524_c_02L이것은 범부의 경우를 말한 것으로, 성인은 본지에서 지은 업행의 과보로 마음이 어지러워지는 일이 없다. 만약 먼저 정해진 과보의 업을 심었다고 한다면, 먼저 그 과보를 받은 다음 그 후에 경지를 뛰어넘어 생사를 벗어나게 된다. 만약 일정하지 아니한 과보의 업을 심었다면 그 후 경지를 뛰어넘어 생사를 벗어날 경우에는 그 업은 곧 소멸된다.
028_0524_b_23L此說凡夫人聖人無本業 行報心亂若先種定報業者先受報 已然後超昇離生若種不定報業者 若超勝離生彼業則滅
마음이 어지럽다는 것은 욕계에 존재하는 일로서 저 지옥에서는 마음이 어지럽혀지지 아니한다. 항상 어지러운 곳이기 때문이다. 축생과 아귀와 사람은 마음이 어지럽다. 울단월은 여기서 제외된다. 욕계의 하늘 세계에서도 역시 마음이 어지럽혀진다.
028_0524_c_03L心亂者在欲 彼地獄不心亂常亂故畜生餓鬼 及人則心亂除鬱單曰欲界天亦有 心亂
【문】어떤 성인이 마음이 어지럽혀지는가?
何等聖人心亂
【답】수다원(須陀洹)ㆍ사다함(斯陀含)ㆍ아나함(阿那含)ㆍ아라한(阿羅漢)ㆍ벽지불(淪支佛)은 마음이 어지럽혀진다. 오직 부처의 마음만이 어지럽혀지지 않으니, 소리가 무너지거나 머리카락도 백발이 되거나 얼굴에 주름살이 생기거나 하지 않으며 점차 단계를 밟아서 열반으로 옮겨지는 일도 없다.
028_0524_c_06L須陁洹陁含阿那含阿羅漢辟支佛唯佛心 不亂聲不壞髮不白面不皺不漸般涅槃
세존은 마음을 교란하던 업을 오랜 옛날에 이미 모두 소멸한 채 묘행(妙行)을 행하셨기 때문이다. 어지럽히는 것은 의식(意識)으로서 오식(五識)을 어지럽히는 것이 아니다. 분별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유루심이 어지러워지지 무루심이 어지러워지는 것이 아니다. 진실한 행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가령 마음이 미쳐 어지럽다면 이를 산란(散亂)이라 말하는가? 이것은 네 구(句)로 설명해야 하리라.
028_0524_c_08L 世尊擾亂業久已滅盡行妙行故亂者 意識非五識心不分別故有漏心亂非無 眞實行故是故若說心狂亂是散亂 作四句
첫 번째 구는 이른바 미친 자의 선(善)한 유루심(有漏心)과 불은몰무기심이 그것이다.10)
두 번째 구는 자상(自相)으로 머무는 자의 염오심이다.11)
세 번째 구는 미친 자의 염오심이다.12)
네 번째 구는 자상으로 머무는 자의 선심 및 불은몰무기심이다.13)
028_0524_c_12L初句謂狂者善有漏心隱沒無記心第二句謂自相住者穢 污心第三句謂狂者穢污心第四句 謂自相住善心及不隱沒無記心
【문】어떤 요소[大]가 능히 사지관절을 해체하는가?
028_0524_c_15L 何等大能解支節耶
【답】가령 사지관절을 해체함은 성인은 물ㆍ불ㆍ바람이라 말한다. 즉 세 가지 구성 요소로 능히 사지 관절을 분해할 수 있다. 지대(地大)는 여기에 해당되지 않으니, 예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028_0524_c_16L若能解支節 聖說水火風三大能解支節非地大 不利故
화대가 사지 관절을 분해한다는 것은 목숨이 끝날 때 화대(火大)가 증가하여 두루 힘줄을 태운다는 것이다. 태우고 나서는 마디마디 분해되며, 마디마다 분해되고 나면 얼마 되지 아니하여 목숨이 끝난다.
수대(水大)가 사지관절을 분해한다고 하는 것은 뼈마디마다 분해될 때 먼저 힘줄을 썩게 한다는 것이다. 힘줄이 썩게 되면 나머지는 앞에서 말한 내용과 같다.
풍대(風大)가 사지 관절을 분해한다고 하는 것은 바람이 힘줄을 부서지게 한다는 것이다. 힘줄이 부서지고 나면 그 나머지 일은 앞에서 말한 내용과 같다.
사지관절이 해체되고 나면 하룻밤ㆍ하룻낮을 넘기지 못하고 목숨이 끝나니, 4대가 착란하는 까닭이다.
028_0524_c_18L火大解支節者謂命終時火 大增遍燒筋燒筋已節節解節節解 已不久命終水大解支節者謂節節 解時先令筋爛筋爛已餘如前說大解支節者令筋碎筋碎已餘如前 支節解已不過日夜命終四大錯 亂故
028_0525_a_02L지옥에서는 사지관절이 해체되는 일이 없다. 그곳에서는 사지 관절이 항상 해체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업보 때문에 죽지도 아니한다. 축생ㆍ아귀 및 세 방향에는 사지관절이 풀리는 일이 있다. 울단월을 제외하니, 그곳에는 죄업이 없기 때문이다. 하늘 세계도 또한 이와 같다.
범부와 성인은 사지관절이 해체된다. 오직 부처만이 여기서 제외된다. 죄를 짓고 업보를 받는 사람은 사지관절이 해체되지만 부처에게는 지은 죄의 업보가 없기 때문이다.
사지관절이 해체되는 일에 대한 설명을 마치고, 지금부터 경지가 물러나는 경우를 설명하겠다.
028_0525_a_02L地獄無解支節支節常解故報故不死畜生餓鬼及三方解支節 除鬱單曰無罪業故天亦如是凡夫 聖人解支節唯除佛罪報者解支節 佛無罪報故已說解支節退今當說
물러나는 법에 세 가지가 있나니
얻음과 얻지 못함과 익히고 행함[習行]이다.
혹 한 사람이 한 번 물러나기도 하고
얻지 못한 경우에는 두 곳에서 물러나게 된다.
저 익히고 행한 것에서 물러남은
세 종류의 성인도 모두 그렇게 된다.
028_0525_a_06L退法有三種
得未得習行
或一人一退
未得退說二
謂彼習行退
三聖俱亦然
물러나는 법에 세 종류가 있다. 즉 얻은 법에서 물러나는 경우와 법을 아직 얻지 못한 채 물러나는 경우와 익히고 행한 법에서 물러나는 세 종류가 그것이다.
얻은 법에서 물러난다고 하는 것은 얻은 공덕이 물러나야 할 인연을 만나 물러나는 것이다.
얻지 못하고 물러선다는 것은 마땅히 얻어야 할 공덕을 방일한 마음 때문에 얻지 못하는 경우를 말한 것이다.
익히고 행한 법에서 물러선다고 하는 것은 이미 얻은 공덕을 인연이 있기 때문에 익히고 행할 수 없게 되는 경우를 말한 것이다.
028_0525_a_08L 退法有三種得退未得退習行退退者所得功德遇退因緣則退未得 退者應得功德放逸故不得習行退 已得功德有因緣故不得習行
【문】어떤 사람이 어떤 일에서 물러서는가?
028_0525_a_12L 何等人何事退
【답】혹은 한 사람이 한 번 물러난다. 가령 얻었다가 물러나는 경우 이는 둔한 근기를 지닌 성문(聲聞)이 여기에 해당한다. 예리한 근기를 지닌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리한 근기를 지닌 사람은 삼매의 힘이 있는 까닭이다. 그런 까닭에 ‘혹은’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028_0525_a_13L或一人一退若得退 者是鈍根聲聞非利根利根者三昧 力故是故說
【문】어떻게 얻고 물러남을 아는가?
或云何知有得退
【답】두 종류의 아라한을 말하는 까닭이다. 이른바 법에서 물러나는 자와 물러나지 아니하는 자를 말한다. 가령 도에서는 물러나도 과보에서는 물러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왜냐 하면 번뇌를 끊고 얻은 것은 도와 합치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얻은 것은 도제(道諦)에 속한다. 그런 까닭에 도에서 물러나 번뇌를 끊지 아니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028_0525_a_15L說二種阿羅漢故謂退法不退法言道退果不退者不然何以故斷得 與道合故得者道諦攝是故道退非 斷者不然
【문】만약 번뇌의 종자에서 벗어났다면 어떻게 번뇌가 또 생기겠는가?
若言離煩惱種云何生者
【답】가령 처음 얻는 무루심은 그 이전의 원인이 없어도 생기듯이 그 또한 이와 같다고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자분인의 몫이 있기 때문이다. 끝없는 생사로부터 번뇌의 자분인의 몫이 생겨나는 것이다.
028_0525_a_19L應說如初無漏心無前因而生彼亦 如是復次有自分因分故從無際生 死煩惱自分因分生
번뇌는 세 곳에서 일어난다고 함은 맞는 말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왜냐 하면, 세 처에서 기번뇌(起煩惱)가 구족된다고 하는 까닭에 중생이 번뇌를 일으킴에 세 인연을 구족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른바 인(因)의 힘과 경계의 힘과 방편의 힘이 그것이다.
028_0525_a_22L言煩惱於三處 起非說者不然何以故爲起煩惱具 滿故說衆生起煩惱具有三因緣因力境界力方便力
028_0525_b_02L그 욕애(欲愛)의 번뇌가 아직 끊어지지 못하고 알려지지 않은 것이 곧 인의 힘이다.끊은 자는 장애가 없고 안 자는 해탈한다. 욕애에 얽어매여 집착된 법은 곧 경계의 힘이며, 그 부정사유(不正思惟)가 곧 방편의 힘이다. 이것을 그들은 뜻이라고 주장한다. 만약 그들의 경에 따른다면 부정사유는 앞의 부정사유가 그 몫이 아니라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앞서서 부정사유가 있었다면 이 생각은 끝없이 이어진다. 또한 선(善) 또는 무기심은 끝까지 일어나지 않는다. 가령 생겨난다면 해탈 역시 비분(非分)이 된다.
028_0525_b_02L彼欲愛使未斷 未知是因力◀斷者無㝵知者解脫▶欲愛纏所著法 是境界力彼不正思惟是方便力彼說意若從彼說不正思惟者前不 正思惟非分則不起若有前不正思 此則無窮又復善無記心至竟不 ◀若不正思惟相續無窮則餘念不得生也▶若不生者解脫亦 非分
모든 번뇌를 불태우면 도로 생겨나지 않아야 할 것이니, 마치 불로 나무를 태워 재로 만들면 끝까지 재가 되어 나무가 되지 않는 것과 같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라한이 지혜의 불로 번뇌라는 땔감을 불사르게 되면 다시는 번뇌를 일으키지 않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같이 되지는 아니할 것이다. 왜냐 하면 그러한 비유는 합당한 비유가 아니기 때문이다.
028_0525_b_09L燒諸煩惱不應還生如火燒木 灰至竟爲灰不復爲木如是阿羅 漢以智火燒煩惱薪不應復爲煩惱不應如是何以故譬不合故
어찌하여 땔감을 태우면 재가 남아 있는가? 만약 이와 같다면 아라한의 번뇌 가운데 나머지 재와 같은 것이 있는 것인가? 만약 남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라한이 아니다. 아직 번뇌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남아 있는 재가 없다고 한다면 위에서 한 비유와는 같지 않게 된다. 그러나 성인의 도는 불로 땔감을 불사르는 것과 같은 것은 아니다. 오직 성인의 도는 번뇌를 끊고 해탈을 얻고 작증(作證)을 얻는 일을 일으킬 뿐이다. 그가 만약 성인의 도를 떠난다면 역시 해탈득도 버리게 되고 결박을 얻는 일이 다시 일어나게 된다. 여러 물러나는 모습이 경설과는 다르니, 그 이유는 경전에서는 불시해탈(不時解脫)을 설하기 때문이라고 알아야 한다.
028_0525_b_12L云何如燒 薪有灰若如是阿羅漢煩惱有餘如 灰耶若有餘者非阿羅漢有煩惱故 若無者不如上譬然非彼聖道如火 燒薪但聖道起斷煩惱得解脫得作 彼若離聖道亦捨解脫得繫得還 如諸退相違經說當知說不時解 脫故
‘얻지 못한 경우 두 곳에서 물러나게 된다’라고 한 것은 만약 얻지 못하고 물러서는 경우란 성문과 벽지불을 말한 것이지 불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불은 일체의 가장 뛰어난 근으로 머물기 때문이다.
성문은 부처나 벽지불의 뛰어난 근을 얻을 수 없고 벽지불은 부처의 뛰어난 근을 얻을 수 없다. 그런 까닭에 얻지 못하고 물러서는 일이 있게 되는 것이다.
간략히 말한다면 모든 중생들이 만약 수행을 한다면 모두가 성인의 혜안(慧眼)을 얻게 되지만, 만약 수행을 하지 않고 이름과 색의 세계로 들어간다면 이것을 얻지 못한 채 물러선다고 하는 것이다.
028_0525_b_19L未得退說二者若彼未得退者 謂聲聞辟支佛非佛住一切最勝根 聲聞者不得佛辟支佛勝根辟支 佛不得佛勝根是故有未得退略說 一切衆生若修行皆應得聖慧眼不修行入名色者是爲未得退
【문】어떻게 얻지 못하고 물러섬을 알게 되는가?
028_0525_b_24L何知有未得退
028_0525_c_02L【답】부처의 말씀을 믿기 때문이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듯이 모든 하늘 및 세인(世人)이 지혜에서 물러선다면 명(名)과 색(色)에 물들고 집착한다. 성스런 진리를 보지 못하기 때문인 것이다.
028_0525_c_02L信佛說故如世尊 諸天及世人退於智慧者染著於 名色不見聖諦故
‘저 익히고 행한 것에서 물러남은 세 종류의 성인도 모두 그렇게 된다’라고 했는데 만약 익히고 수행하는 과정에서 물러나는 경우는 이른바 성문ㆍ벽지불ㆍ여래의 세 종류의 성인이 모두 여기에 해당된다. 중간에 여러 인연이 있는 까닭에 얻은 공덕이 늘 눈앞에 나타나게 할 수 없는 것이다.
028_0525_c_04L謂彼習行退三聖 俱亦然者若習行退者謂聲聞辟支 如來三聖悉有以中閒諸因緣故 所得功德不能常現在前
【문】어떻게 닦고 수행하는 데서 물러남을 알게 되는가?
028_0525_c_07L云何知 有習行退
【답】마음과 마음의 법의 물러섬을 설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곧, “이 네 종류의 마음과 마음의 법은 현법에 안락하게 머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말하니, 그 하나하나는 물러섬이 있다.” 그 자세한 것은 수다라에서 설명한 내용과 같다.
또한 말씀하기를 “흔들리지 아니하는 뜻의 해탈[不動意解脫]을 스스로 작증하고 성취하는 자, 그는 물러서지 않는 자이다”라고 하셨다. 그런 까닭에 세존께도 역시 익히고 수행하는 과정에서 물러서는 일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런 까닭에 말하기를 “세존은 미지(未至)14)의 경계에서 많이 노니셨지 근본지(根本地)가 아니다”라고 한다.
028_0525_c_08L說心心法退故如世尊 於此四種心心法得現法安樂住 我說彼一一退如修多羅廣說又復 不動意解脫身作證成就遊者不退以是故知世尊亦有習行退故說世尊多遊未至非根本地
왜냐 하면 욕계에 가까운 경계이기 때문이다. 비록 부동의해탈은 익히고 행하는 데서 물러서는 경우가 있어도 그러나 그는 얻어서 닦음을 성취하는 까닭에 그 일체가 현재할 때 득은 항상 따라 전개된다. 그 마음과 마음의 법은 현재의 세계에서 닦게 된다. 이른바 현재 눈앞에 나타내지 않는 이름하여 퇴(退)라 하는 것이다.
028_0525_c_13L何以 近欲界故雖不動意解脫有習行 退然彼成就得修故彼一切現在時 得常隨轉彼心心法者現在修謂不 現在前者名爲退
익히고 행한 것에서 물러서는 경우가 가장 많은 사람은 이른바 세존이시다. 그것은 왜냐 하면 공덕이 가이없기 때문이니, 마치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널리 모든 경계를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
다시 말하기를 “다른 이를 섭수하는 까닭에 부동(不動)이라 부르고 스스로 섭수하는 까닭에 마음과 마음의 법이라 부른다. 세존께서는 다른 사람을 섭수하지만 스스로를 섭수하는 일은 적다. 이와 같이 세존은 크게 연민하고 크게 버리시는 것이다.
028_0525_c_17L習行退最多者謂 世尊何以故功德無邊故如轉輪聖 王廣受境界又說攝他故名不動攝故名心心法世尊多攝他少自攝 如是世尊大悲大捨
【문】어느 곳이 물러나지 아니하는 곳인가?
何處不退
【답】모든 하늘 세계는 물러나지 않나니
  과보에서 물러나도 끝내 죽지 않고
  또한 그 업을 짓지 않는 것
  그 과에 머무는 자가 짓지 않는 바이다.
028_0525_c_21L 諸天則不退
果退終不死
亦不造 彼業
住果所不爲
028_0526_a_02L‘모든 하늘 세계는 물러나지 않는다’라고 한 것은 모든 하늘 세계에서는 물러서지 아니하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근이 예리한 자는 하늘 세계에서 과보를 얻는 까닭이니, 근기가 날카로운 사람은 물러서지 않는다.
또 가령 근기가 둔한 사람의 경우에도 과보를 얻은 다음에 하늘 세계에 태어난다면 물러나지 않나니, 생(生)을 경유하는 까닭이다. 성인이 생을 경유하면서도 물러나지 아니한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물러남의 조건은 성인의 몫이 아니기 때문이다.
028_0525_c_23L 諸天則不退者諸天不退以利根天 得果故利根者則不退若鈍根人得 果然後生天亦不退無生故聖人無 生不退此前已說退具非分故
세존은 다섯 종류의 물러나는 조건을 말씀하셨으니, 다사업(多事業) 등이 그것이다. 다섯 가지 물러나는 법은 하늘 세계에는 없나니 그런 까닭에 물러남이 없는 것이다. 하늘 세계에서는 물러나지 아니하는 까닭에 물러나는 일은 반드시 인간 세계 안에만 있음을 알아야 한다. 물러설 조건이 갖추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028_0526_a_04L世尊 說五退具多事業等五退法彼天則 是故不退以天不退故當知退者 必人中以退具可得故
‘과보에서 물러나도 끝내 죽지 아니한다’라 했는데, 과보에서 물러선 사람은 끝내 죽지 않고 반드시 다시 과보를 얻는다. 왜냐 하면, 아랫경지에 태어나면 그것은 비수멸(非數滅)이기 때문이다. 비수멸법은 끝내 다시 눈앞에 나타나지 아니한다. 이는 불생(不生)의 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보에 속하는 도는 결정된 도며 결정코 구경에 이르기 때문에 그리고 과보의 도는 소식처(蘇息處)인 까닭에 그곳 사람들은 소식을 얻는다. 또 과보의 장소는 스스로 잘 보호하기 때문이고 과보의 장소에서는 세 가지 인연 및 다섯 가지 인연이 갖추어지기 때문이니, 이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설명하였다.
028_0526_a_07L果退終不死 果退者終不死要還得果何以故 下地生非數滅故非數滅法終不更 現在前不生法故以果所攝道決定 及決定究竟故以果道蘇息處故人得蘇息又果處善自護故以果處 具三因緣及五因緣故前已說
그 세 가지 과보만 물러서지 수다원과(須陀洹果)에서 물러서는 것은 아니다. 견도(見道)의 단계에서 끊는 번뇌는 대치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견도에서 끊는 번뇌는 자아의 처소에 의지하여 전개되지만 거기에 자아는 없다. 그러나 수도(修道)에서 끊는 번뇌는 대치하는 일이며, 수도단의 번뇌는 청정한 곳에서 전개된다. 그런데 거기에는 청정한 생각도 있고 부정(不淨)한 생각도 있다. 그가 모든 행이 더럽다고 사유하고 욕망에서 벗어난 것에 대해 청정하다고 사유하면 부정을 밝히는 경지에서 물러나게 된다. 법에 대해서 나와 나의 것이라 사유하는 일 없이 무아(無我)의 견해에서 물러서게 되는 것이다.
028_0526_a_13L彼三 果退非須陁洹果見道斷煩惱非對治 事故見道斷煩惱依我處轉而無有 修道斷煩惱是對事修道斷煩惱 淨處轉彼有淨想不淨想彼思惟諸 行不淨得離欲淨思惟於見不淨退 無有法我我所思惟於非我見退
또한 수다원과는 방편으로 널리 앞에서 베풀고 계율을 지키고 닦는 등으로 해탈로 향한다고 비유할 수 있다. 수다원과는 견도(見道)의 단계에서 얻는 까닭에 도를 밝히는 단계에서 물러서는 일은 없다. 그 길은 빠른 길이며 날카로운 길이며 비상비비상처에서 대치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만약 아라한과에서 물러서서 수다원과에 이르게 되면 세 단계의 과보에서 물러선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대치하는 번뇌의 득(得)을 성취하기 때문이다.
028_0526_a_19L次須陁洹果方便廣前施戒修等向 解脫如是比又須陁洹果見道得故 無有見道退速道故利故非想非非 想處對治故若阿羅漢果退至須陁 洹果當知退三果彼對治煩惱得成 就故
028_0526_b_02L‘또한 그 업을 짓지 않는 것, 그 과에 머무는 자가 짓지 않는 바이다’라고 했는데, 가령 과보를 얻은 사람이 짓지 아니하는 업이라면 과보에서 물러선 사람도 역시 짓지 아니한다. 왜냐 하면, 부작률의(不作律儀)를 얻기 때문이며 성인의 도가 이미 악한 도를 소멸시켰기 때문이다. 마치 일찍이 약을 복용한 것과 같다. 그리고 또한 희망이 구족되었기 때문이며 그 사람은 소멸의 과보를 희망하고 악행(惡行)을 대치하는 까닭이다.
028_0526_b_02L亦不造諸業如彼住於果者得果人所不爲彼退果人亦不作以故得不作律儀故聖道已滅惡行 如曾服藥復次悕望具足故彼人 悕望滅果對治惡行故
【문】어떤 경지에 한해서 보살이라고 말하게 되는가?
齊何當言菩薩
【답】가령 여러 상호(相好)를 닦고
  방편으로 그 업을 일으키고
  여기서부터 더욱 증진하면
  이를 보살이라 부른다.
028_0526_b_06L 若修諸相好
方便起彼業
從是轉增進
說名爲菩薩
만약 어떤 중생이 있어 한 끼의 밥을 보시로써 결정심을 일으키고 무외(無畏)를 발해 “나는 마땅히 부처가 되리라”라고 하며, 능히 상보(相報)15)를 일으키고 그 업을 증장시킨다면, 이런 사람에 한해서 보살이라 부른다. 능히 이로부터 비슷한 모습으로 상속되는 업을 짓는 까닭이니, 만약 이와 같지 않다면 다만 헛된 이름만 있을 뿐이다.
028_0526_b_08L 若有衆生以一食施起決定心發無 畏言我當作佛能起相報增長彼業 齊是名菩薩以能從此作相似相續 業故若不如是但有空名
보살은 비록 처음에 불퇴심(不退心)을 일으키기는 해도 이는 보리(菩提)의 길을 결정지은 것이지 취(趣)이 결정된 것은 아니다취(趣)는 도(到)라 할 수 있으니, 취와 같은 이름인 것이다. 즉 상보의 업이 지어지고 나면 이것이 모든 조건이 결정된 것이다. 그런 까닭에 상보의 업에 한해서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그는 네 가지 인연에서 벗어난 사람이기 때문이니. 이른바 악취(惡趣)에서 벗어나는 일과 남자가 아닌 세계에서 벗어나는 일과 천한 씨족(氏族)에서 벗어나는 일과 불구(不具)의 근에서 벗어나는 일이 그것이다.
028_0526_b_12L菩薩雖有 初起不退心是則菩提決定非趣◀趣應言到與趣同名▶決定謂造相報業已是則俱決 是故齊相報業爲名以彼離四因 緣故謂離惡趣離非男離卑姓離不 具根
이 가운데 한 가지 인연, 즉 태어나면서 얻는 성질의 숙명을 아는 인연을 얻게 되면 태어나면서 자신의 숙명을 알게 되기 때문에 법문을 들으면 곧 그것을 받아들여 간직하게 되며, 이에 부수된 일들도 믿고 받아들여 중생들의 허물에서 벗어나게 된다.
3아승기겁(阿僧祗劫)을 건너고 다시 다음 백 겁 가운데에서 상보의 업을 심으니, 다만 석가모니는 제외된다. 석가모니 보살은 구 겁(劫)을 제외한 나머지 구십일 겁 동안 정진하셨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두개의 삼아승기(二阿僧祗)는 겁아승기가 아니다. 이른바 겁아승기(劫阿僧祗)와 생아승기(生阿僧祗)와 선행아승기(善行阿僧祗)가 된다”고 하였다.
028_0526_b_17L得一因緣謂生性識宿命以生 識宿命故聞卽受持眷屬信受離衆 生過度三阿僧祇劫於百劫中種相 報業除釋迦牟尼釋迦牟尼菩薩精 進故除九劫餘九十一劫有說二三 阿僧祇非劫阿僧祇謂劫阿僧祇阿僧祇善行阿僧祇
【문】상보(相報)의 업에는 어떠한 특성이 있는가?
028_0526_b_23L相報業爲何 等性
028_0526_c_02L【답】신업과 구업과 증상의업(增上意業)이 있다. 또한 이는 생각하는 지혜의 특성을 지니지 듣는 지혜의 특성을 지니지 않으니, 뒤떨어기 때문이다. 또한 닦는 지혜도 아니니, 욕계는 정해진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염부제(閻浮提洲)에만 존재하는 종류[種]이지 다른 지방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또한 이는 남자에게만 해당되지 여자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또한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셨을 때만 존재하지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시지 아니하셨을 때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 부처님을 만난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이지 부처님을 만나지 아니한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업을 지은 것에 연하는 것이지 다른 것에 연하는 것이 아니다.
028_0526_c_02L身業口業增上意業又是思 性非聞慧以劣故非修慧欲界不 定故閻浮提種非餘方男子非女人 佛出世非不出世見佛非不見佛造業非緣餘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하나의 사원(思願)은 서른두 가지의 상(相)을 심는 업으로, 그후의 갖가지 업으로 가득 채워진다”라고 하였다.
또 다른 사람은 말하기를 “하나에의 마음을 한 가지 행ㆍ한 가지 연으로 고정하여 수많은 사원이 눈앞에 나타난다. 그리하여 발바닥이 평평하여 편안하게 머물 수 있는 과보를 얻기를 염원하기도 하고 정수리에 육계(肉髻)가 생기게 되기를 원하기도 한다”라고 하였다.
그 하나하나의 상에는 백가지 복이 뒤따르게 되니, 그 복의 한량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한 사람의 전륜성왕(轉輪聖王)이 지닌 복을 하나의 복의 양이라 부른다”고 하였다.
028_0526_c_06L有說一思願種三十二 相業後種種業滿又復說一定心一 行一緣衆多思願現在前有願足下 安平住果有願乃至肉髻彼一一相 百福眷屬福量者有說一轉輪聖王 是名一福量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한 분의 제석천(帝釋天)의 복이다”고 하였고, 또 한 설에 의하면 “겁(劫)이 이루어졌을 때 모든 중생들의 업이 더욱 불어나 기세간(器世間)을 낳으니, 이것을 복량(福量)이라 부른다”고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부처님의 경지에 가까운 보살을 제외한 그밖의 모든 중생들의 복락자재(福樂自在)한 업 이것을 일복량(一福量)이라 부른다”고 하였다.
028_0526_c_11L又復說一帝釋福說劫成時一切衆生業增上器世界 是名福量有說除近佛地菩薩餘衆生福樂自在業是名一福量
부처님과 무학(無學)의 법이 곧 보리(菩提)이니, 즉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가 그것이다. 살타(薩埵)16)가 이 지혜를 구하는 까닭에 그것을 보리살타(菩提薩埵)17)라 부르며, 이 보리를 얻어 모든 법을 깨닫게 되는 까닭에 이름하여 부처[佛]라 부르는 것이다.
비록 상보(相報)의 업 뒤에 전륜성왕(轉輪聖王)을 얻는다 해도 그 성왕의 모습이란 나머지 업의 과보임을 알아야 한다.
028_0526_c_14L無學法是菩提謂盡智無生智薩埵 求此智故名菩提薩埵得此菩提一切法故名爲佛雖相報業後得轉 輪聖王而聖王相者當知是餘業報
【문】몇 종류의 살바다(薩婆多)가 있는가?
028_0526_c_18L幾種薩婆多
【답】한 종류는 이분(異分)의 차별이고
  혹은 상(相)의 이(異)라고 하며
  혹은 분분(分分)의 이(異)라고 하고
  다시 이(異)의 이(異)가 된다고 한다.
028_0526_c_19L 一種異分別
或有說相異
或說分 分異
或復說異異
이것이 네 종류의 살바다이다.
028_0526_c_21L 此四種薩婆多
028_0527_a_02L‘한 종류는 이분(異分)의 차별이다’라고 했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18) 곧, “모든 법이 세계를 좇아 전개될 때 분(分)을 달리하고 일을 달리하는 것은 아니다. 마치 우유가 변해서 낙(酪)이 되면 그 맛의 요익함을 버리게 되지만 그 색깔은 버리지 아니하는 것과 같다. 또한 금이나 은으로 만든 그릇이 깨져서 다른 그릇을 만들 경우 본래의 형태는 버리게 되지만 그 빛깔은 버리지 아니하는 것과 같다. 법이 미래에서 현재에 이르는 것도 또한 이와 같다. 그러니 마땅히 알아야 하니, 이것이 바뀌고 변하는 살바다(薩婆多)인 것이다.”
028_0526_c_22L一種異分別者彼說 諸法隨世轉時分異非事異如乳變 爲酪捨味力饒益不捨色如金銀器 破已更作餘器捨形不捨色法從未 來至現在亦如是當知此是轉變薩 婆多
또한 ‘상(相)의 이(異)라고 한다’고 한 것은 과거의 법은 과거의 모습과 합치하지만 미래와 현재의 모습에서 떠나지 아니한다. 마치 사람이 하나의 색에 집착하면 다른 색에는 집착하지 아니하는 것처럼 그 역시 이와 같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이 말에는 허물이 있다. 만약 과거의 모든 법이 미래와 현재의 법의 모습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라면 마침내는 어디에서 이루어지겠는가? 또한 합치한다는 내용이라면 세계가 어지러워진다. 가령 사람이 한 색에 집착하여 한 색에 애착을 느끼고 그것을 행하기도 하고 성취하기도 하면서 다른 나머지에 대해서는 성취하면서도 행하지 아니하게 될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것을 세계가 어지러워진다고 말한 것이며, 비유 역시 서로 어긋난다.
028_0527_a_04L相異者過去法與過去相合離未來現在相如人著一色非不著 彼亦如是此說有過若過去諸法 不離未來現在相者竟何所成亦成 合義若爾者則世亂如人著一色一色愛著亦行亦成就於餘成就而 不行是故彼說世亂譬亦相違
‘분분(分分)의 이(異)라고 한다’고 했는데, “모든 법이 세간을 좇아 전개될 때 각기 분분(分分)이 달라지지 일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곧 어지럽지 않게 건립된 세계이다. 왜냐 하면, 업이 다르기 때문이다. 법이 아직 업을 짓지 않은 것을 미래라 하고 업을 짓는 것을 현재라 하고 이미 업을 짓고 난 뒤를 과거라 한다.
028_0527_a_10L分分 異者說諸法隨世轉時分分異非事 此則不亂建立世何以故業別故法未作業說未來作業說現在作業 已說過去
‘이(異)의 이(異)가 된다’고 했는데, 말하기를 “여러 법이 세계를 좇아 전개될 때 앞과 뒤가 서로 기다리는 것이지 일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며, 분(分)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마치 한 여인을 ‘여자’라고도 부르고 ‘어머니’라고도 부르는 것과 같다. 앞뒤가 서로 기다리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즉 여자를 보면 그가 어머니임을 알게 되고 어머니를 보면 여자인 것을 알게 된다”라고 한다. 하지만, 이 말은 가장 어지럽게 건립된 세계이다. 그는 과거세의 한 찰나에 삼세가 존재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는 앞에서 일어난 모습을 보는 것을 미래라 하고 뒤에 일어난 모습을 보는 것을 현재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028_0527_a_14L彼異者彼說諸法隨世轉 前後相待非事異亦非分異如一 女人亦名女亦名母前後相待故觀女則知母觀母則知女此最亂建 立世彼說過去世一剎那有三世言觀前起相名未來觀後起相名現
【문】여러 스승들이 설한 진리[諦]의 무간등(無間等)은 각각 다르다. 살바다(薩婆多)19)와 바차부(婆蹉部)20)에서는 차례로 진리의 무간등을 설명하였고 담무득(曇無得)21) 등은 하나의 무간등만을 설명하였다. 어느 것이 진실한 이론인가?
028_0527_a_20L諸師說諦無閒等各各異薩婆 多及婆嗟部說次第諦無閒等曇無 得等說一無閒等何者爲實
【답】그것은 지금 마땅히 5지(支)로서 여실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5지(支)란 첫 번째는 종(宗)이며 두 번째는 인(因), 세 번째는 비유, 네 번째는 합(合), 다섯 번째는 결(結), 여섯 번째는 의(義)이다. 내용은 아래에 설하는 게송과 같다.
028_0527_a_22L今當 以五支如實說◀五支者一曰宗二曰因三曰譬四曰合五曰結六曰義如下偈說▶
028_0527_b_02L차례로 무간등이니
지(智)와 제(諦)는 모습이 다르기 때문이다.
병만 보고 옷은 보지 못하니
이 때문에 그 역시 그러하다.
028_0527_a_24L次第無閒等
智諦異相故
見甁不見衣
是故彼亦然
수행자는 먼저 고무간등(苦無間等)이고 마침내 도제(道諦)에 이르게 된다.
028_0527_b_03L 修行者先苦無閒等後乃至道
【문】왜 그러한가?
028_0527_b_04L
【답】지(智)와 제(諦)는 모습이 다르기 때문이다. 고제와 집제와 멸제와 도제의 지는 각기 다른 모습이다. 그 행(行相)이 다른 까닭이니, 만약 행이 고의 지혜라면 이 행은 다른 지혜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만약 그렇지 아니하다면 네 가지 지(智)를 세우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028_0527_b_05L智諦異相故苦集滅道智各異 行別故若行是苦智此行非餘智 若不爾者無四智建立
진리(諦) 역시 모습이 다르다. 핍박당하는 것이 고의 모습이고 생기(生起)는 집의 모습이며 적멸(寂滅)은 멸의 모습이며 출리(出離)는 도의 모습인 것이다. 다른 지(智)와 다른 상(相)의 진리이지 일무간등이 되는 것은 아니다.  비유하면 물병을 볼 때 옷은 보지 않는 것과 같으니, 병과 옷은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다. 모습이 다르기 때문에 병을 보았을 때 옷은 보이지 않고 옷을 보았을 때 병은 보이지 않는다. 사제(四諦)의 관계도 역시 이와 같다. 즉 모습이 다른 진리에 대해서 고를 볼 때는 나머지를 보지 못한다. 그리고 이와 같이 일체를 설명할 수 있으니, 그런 까닭에 차제무간등(次第無間等)이 되는 것이다.
028_0527_b_07L諦亦異相逼迫是苦相生起是集相寂滅是滅 出離是道相非不異智異相諦一 無閒等譬如見甁時不見衣以甁衣 異相故以異相故見甁不見衣見衣 不見甁彼亦如是於異相諦見苦時 不見餘如是一切是故次第無閒等
‘한 무간등을 설한다’라고 했는데 그것은 제(諦)에 있어서 하나의 무간등(無間等)을 설한다는 것이다. 왜냐 하면 성현(聖賢)을 믿는 까닭이다. 세존께서 설하신 바와 같다. 곧, “비구는 고(苦)에 대해 의심이 없으며 집에 대해서도 역시 의심이 없고 멸ㆍ도에 대해서도 역시 이와 같다.”
마치 등(燈) 하나가 그릇을 뜨겁게 하고 심지를 불태우고 기름을 소진하고 어둠을 깨뜨리는 네 가지 일을 함께 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한 지혜로 고를 알게 되면 마침내 도를 닦기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하나의 무간등이라고 하는 것이다.
028_0527_b_13L說一無閒等者彼說於諦一無閒等何以 信聖賢故如世尊說比丘於苦無 集亦無疑滅道亦如是如燈俱作 四事熱器燒炷油盡破闇如是一智知 苦乃至修道是故一無閒等
그 진혜와 진리의 모습이 다르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모든 지혜는 한 지혜의 모습으로 모든 법의 경계에서 무아행(無我行)을 짓는다. 마치 세존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다. 곧, “일체법은 무아이다. 지혜 있는 자는 능히 보나니, 그 괴로움을 싫어할 때 이것이 곧 도(道)이며 청정함이다.”진리의 모습도 역시 이와 같다.
028_0527_b_18L彼說智 諦異相者不然一相故一切慧一智 於一切法境界作無我行如世尊 一切法無我智慧者能見彼厭於 苦時是卽道淸淨諦相亦如是說
028_0527_c_02L병과 옷이 서로 다른 모습이라고 말한다면 그것도 또한 그렇지 않다. 왜냐 하면 자상(自相)에 대한 무간등은 비분(非分)이기 때문이다. 공통된 모습의 경계에 대한 무간등으로서 자상은 아니다. 즉 색 등의 5음은 허물어지는 모습으로허물어지는 모습은 곧 덧업는(無常) 모습이다공경계지(共境界智)의 일무간등이 된다. 만약 다르다면 스스로 허물이 낳는 것이다.
028_0527_b_22L衣異相者此亦不然何以故自相無 閒等非分故共相境界無閒等非自 謂色等五陰壞相◀壞相卽無常相▶共境界智一 無閒等若異者則自生過
차제무간(次第無間)을 주장하는 자는 말하기를 “그대가 현성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곧 밀어이다. 이 말에는 나머지 뜻이 있으니, 세존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다. 곧, ‘만약 고제에 의심이 없으면 모든 진리[諦]에도 의심이 없어진다.’이는 의문을 품고 수행하는 사람을 위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만약 그에게 고제에 대하여 무간등이 생긴다면 그의 의심은 끝까지 행해지지 아니할 것이다. 이는 비수멸인 까닭이다. 그밖의 이설을 제거하기 위한 까닭에 세존께서는 급고독수다라(給孤獨修多羅)를 설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장자(長者)여, 사성제(四聖諦)에서는 차례로 무간등하느니라.”
이와 같이 자세히 설명되는 것이다.
028_0527_c_03L次第無閒 者言汝言賢聖說者此則密語此說有 餘義如世尊說若苦無疑於一切無 爲彼疑行故說若彼苦無閒等生 彼疑至竟不行非數滅故爲除有餘 故世尊說給孤獨修多羅如是說 長者於四聖諦次第無閒等如是 廣說
거기에서 설해진 등불에 관한 설법의 경우, 등불에는 많은 특성과 많은 업의 허물이 있다. 나는 등이 하는 일을 취하지 아니한다. 만약 구분할 경우 그때 등은 스스로 등이란 이름을 버리게 된다. 이는 앞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그 밝음은 색입(色入)에 속하며 그 힘은 능히 어둠을 깨뜨리고 그 열은 촉입(觸入)에 속하여 능히 다른 일을 짓는다.
028_0527_c_10L所說如燈者燈有多性多業過 我不取燈事若分別時燈捨自名已說彼明色入攝力能破闇彼熱觸 入攝能作餘事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결정된 뜻이 허물어진다. 그러나 지혜는 이와 같은 것이 아니다. 만약 지혜도 이와 같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곧 허물이 있다. 만약 같은 모습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면 이것도 그렇지 않다. 행이 다르기 때문이다. 무상행(無常行)의 지(智)는 다르다. 고(苦)ㆍ공(空)ㆍ무아(無我) 등의 행 역시 그 지혜는 각각 다르니, 이와 같은 비유가 가능하다. 만약 그렇지 아니하다면 해탈의 문은 없을 것이다. 허물어지지 아니하는 행 이것이 해탈의 문이다잡관(雜觀)을 괴(壞)라 표현하는데, 세 가지 해탈은 관이 다르기 때문에 불괴(不壞)이다.
028_0527_c_13L若不爾者壞決定義 慧不如是若言同者則有過若言一 相者此亦不然行別故無常行智異空無我等行智亦各異如是比若不 爾者無解脫門不壞行是解脫門◀雜觀名爲壞三脫異觀故不壞▶
가령 그대가 말하듯이 ‘일체법을 연하여 무아행(無我行)을 삼는다’고 함은 모든 법을 한꺼번에 모두 비추어 보기 때문에 이것은 부정사유(不定思惟)의 분야가 된다. 정사유(定思惟)의 행은 각기 별도의 진리를 연한다. 그런 까닭에 ‘그 뢰로움을 싫어할 때가 곧 도청정(道淸淨)이다’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단순히 싫어하는 행으로 멸제ㆍ도제를 연할 수는 없으니, 멸제와 도제는 즐겨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028_0527_c_18L如汝說緣一切法作無我 以頓觀一切法故此則不定思惟 定思惟行各別諦緣是故不應說 彼厭於苦時是卽道淸淨不可以厭 行緣於滅道滅道是可樂事故
028_0528_a_02L모든 연이란 모든 것에 통하는 것이 아니니,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무아(無我)의 행으로 이 무아행을 행할 수 없는 까닭이니, 독자성은 스스로 비추어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역시 두 가지의 결정적인 특성도 없다. 또한 상응을 관찰하지도 않나니, 함께 한 가지 행과 한 가지 연이기 때문이다. 또한 공유하는 것을 관찰하지도 않나니, 함께 한 과보이고 한 가지의 결정적인 행이기 때문이다.
028_0527_c_22L一切 緣者不通一切相違故以無我行不 卽行此無我行故自性不自觀故無二決定性亦不觀相應共一行一 緣故亦不觀共有共一果一決定故
또한 말하기를 “모든 행이 무상(無常)하다고 해도 역시 무상행은 멸무간등을 이루지 못하니, 멸이란 영원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마땅히 알아야 하니, 그 행은 멀리 진리를 향하는 까닭에 말하는 것이다”라고 한다.
028_0528_a_03L又說一切行無常者亦非無常行滅無閒等滅者常故當知彼行遠向眞諦故說
말해진 바와 같이 이 중생들이 긴긴 밤을 몸ㆍ입ㆍ뜻으로 악행(惡行)을 성취함을 관해 이르기를, “이 중생은 곧 지옥과 그밖의 악한 세계의 중생들로, 실은 이것은 인간이 아니라 지옥이다”라고 한다. 지옥을 향해서 가고 있기 때문에 이같이 말한 것이다. 행의 경우도 이와 같다.
028_0528_a_06L如所說觀此衆生長夜 成就身口意惡行言此衆生卽是地 獄及餘惡趣實非此人卽是地獄向地獄故說彼亦如是
다시 또한 이것이 공(空)에 대한 무간등이라면 무원(無願)이나 무상(無相)을 말한 것이 아니다. 그곳에서 일체법의 경계는 비분(非分)이기 때문에 허물이 있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그런 까닭에 일체법의 무아행(無我行)은 부정사유인 것이다. 정해진 사유는 유루연(有漏緣)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해탈의 문은 소멸된다.
028_0528_a_09L又復是空無 閒等者則非無願無相彼一切法境 界非分故莫言有過是故一切法無我 行是不定思惟定思惟者有漏緣不爾者解脫門減
만약 자상에 대한 무간등은 비분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왜냐 하면 비추어 보기[觀] 때문이니, 이 비추어 보는 것은 자상과 공상에 대한 것이다. 즉 핍박당하는 모습은 곧 고(苦)의 모습이며, 3제(諦)를 비추어 보기 때문에 이는 자상이다. 또 음(陰)을 비추어 보기 때문에 이는 공통된 모습이다. 이와 같이 해서 일체를 알아야 하니, 모두 마음의 눈으로 비추어 보기 때문에 자상과 공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왜냐 하면, 관찰은 허물어지지 않는 까닭이니, 이는 앞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앞에서 중음(中陰)은 뒤에 곧 설명할 것이라 하였으니, 지금부터 그것을 설명하겠다.
028_0528_a_13L若言自相無閒等 非分者不然何以故以觀故是自相 共相謂逼迫相是苦相觀三諦故是 自相觀陰故是共相如是一切當知 皆以觀故說自相共相言不爾者何以故以不壞觀故前已說前說 中陰後當說今當說
【문】중음(中陰)은 있는 것인가? 아니면 없는 것인가?
爲有中陰爲無
 【답】알아야 하니, 중음은 있는 것이니
   이는 세존의 말씀이다.
   비유하면 마을 사이에 길이 있는 것과 같나니
   그것은 곧 모든 것의 지나침[過]이다.
028_0528_a_19L 當知有中陰
世尊之所說
譬如村閒道
彼則有俱過
028_0528_b_02L여기에서는 중음이 있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왜냐 하면 이것은 세존께서 말씀하신 일이기 때문이다. 세존의 말씀에 따르면 “사부(士夫)가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일곱 취에는 중반열반(中般涅槃)이 있다”고 하셨다. 만약 중음이 없다면 중반열반도 없을 것이다. 만약 중간 하늘이 있어 그로부터 반열반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하늘 세계로 가는 일에 대해서는 말씀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존께서는 수다라에서 사천왕(四天王)의 하늘에서 비상비비상에 이르기까지 설하시면서도 중간 하늘이 있다고는 말씀하시지 않았다.
028_0528_a_21L 此說有中陰何以故世尊所說故世尊說七士夫趣有中般涅槃若無 中陰者則無中般涅槃若言有中夭 從彼般涅槃者不然天趣中不說故 世尊修多羅說四天王天乃至非想 非非想處不說有中夭
다른 해석도 또한 허물이 있다. 즉 만약 살아서 반열반한다고 말한다면 부생천(復生天)이라는 표현이 있겠는가? 이와 같이 모든 것이 그러하니, 아나함(阿那含)의 경우도 역시 마땅히 이와 같이 허물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그것은 망상(妄想)으로 한 말이다. 만약 수명의 중간에 반열반한다고 말한다면 그것도 그렇지 않다. 울단월 및 후변(後邊)의 보살22)을 제외하고 많은 중생들은 타고난 수명을 다하지 못한 채 죽는데, 그렇다면 이것이 모두 중반열반이겠는가? 그런 까닭에 이러한 견해에는 허물이 있는 것이다.
028_0528_b_05L餘亦有過若說 生般涅槃復有名生天耶如是一切 阿那含亦應如是說過是故彼是妄 想說若言壽命中閒般涅槃者不然 除鬱單曰及後邊菩薩多有衆生不 盡壽而死此皆是中般涅槃耶是故 此皆有過
【문】이 중음이란 어떤 것인가?
此云何
【답】비유하면 마을 사이에 길이 있는 것과 같다. 마치 한 마을에서 다른 한 마을에 이르듯이 이와 같이 사음(死陰)으로부터 생음(生陰)이 되니, 사음에서 생음으로 향해 가는 일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아습파라연경(阿濕波羅延經)23)에서 “가령 저곳에서 오는 것과 같다”고 설하듯이, 이와 같이 자세히 설명되는 것이다. 만약 중음이 없다면 가고 오는 일이 없게 된다. 그런 까닭에 마땅히 중음은 있어야 하는 것이다.
028_0528_b_11L譬如村閒道 如從一村至一村如是死陰生陰死陰趣生陰亦如是如『阿濕波羅延 經』說若彼處來如是廣說若無中陰 者則無去來是故應有中陰
가령 다음과 같이 말하기 한다.
“유여(有餘)의 설을 제거하기 위하여 수다라가 있는 까닭이니, 이른바 세존께서 수다라와 게를 설해 말씀하시기를 ‘오무간(五無間)지옥에 떨어질 죄를 짓고 나서 차례로 무간지옥에 태어난다’라고 하셨다. 다시 또한 범지(梵志)를 위해 게송을 지어 말씀하시기를 ‘늙고 병들어 표류하여 염라대왕 있는 곳에 이르니, 범지여, 머물 곳 없고 또한 살아갈 양식도 없느니라’고 하셨다. 그런 까닭에 중음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렇지 않다.
028_0528_b_15L若言爲 除有餘說修多羅故世尊說修多羅 及偈言五無閒罪作已次第生無閒 地獄中又復爲梵志說偈言少爲老 病漂到於閻王所梵志無住處亦無 有資糧是故無中陰者此不然
028_0528_c_02L왜냐 하면, 지은 업으로 태어날 곳이 무간지옥인 까닭에 수다라(修多羅)와 게송으로 설법하신 것이다. 즉 무간지옥에 떨어질 업을 짓게 되면 반드시 먼저 무간지옥에 떨어지는 업보를 받고 그 다음에 나머지 다른 업보를 받게 된다. 또한 반드시 지옥의 세계 속에 태어나지 다른 세계에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대가 이해한 바에 따르자면, 세존께서는 수다라에서 말씀하시기를 “오무간지옥에 떨어질 업을 짓고 나면 다음 차례는 지옥 속에 태어난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반드시 다섯 무간지옥에 태어나게 된다는 것인가? 아니면 둘, 셋, 네 곳의 지옥에 태어난다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죄로 다시 또 다른 지옥에 태어난다는 것인가? 이 경과 게송의 참뜻을 알아야 한다.
028_0528_b_20L何以 業趣無間故說修多羅及偈謂作 無閒業已必先受無閒報然後受餘 業報亦必生地獄趣中非餘趣如汝 所解世尊說修多羅五無閒業作已 次第生地獄中爲要五無閒生地獄 爲二三四耶爲更餘罪生地獄中 當知此經及偈意
가령 그림자와 같으니, 이른바 달은 지극히 먼 곳에 있는데도 그 그림자는 물 속에 나타나는데, 이것은 저 달이 찾아와서 물 속에 이른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사음(死陰)과 생음(生陰)도 저 그림자와 같은 것이다. 중생이 태어나는데 무슨 중음의 작용이 필요하겠느냐고 한다면 그 역시 그렇지 않다. 왜냐 하면 달과 물은 함께 지나가는 것이고 함께 존재하는 것이지만 사음과 생음은 함께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그 주장에는 잘못이 있는 것이다. 안식(眼識)과 발바닥의 신식(身識)의 비유 역시 이와 같다. 만약 먼저 생음을 취하고 사음을 버리는 일이 마치 자벌레와 같다고 한다면 이 역시 그렇지 않다. 왜냐 하면 태어날 곳이 다르지 않고 두 인식이 합쳐져서 지나가는 길목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중음은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설해지고 있듯이 네 종류의 살바다(薩婆多)가 있다.
028_0528_c_04L 若言如影者如月極遠影現水中非彼月 來至水中如是死陰生陰如影衆生 何用中陰爲者此亦不然何以故 彼則有俱過月及水俱死陰生陰不 是故有過眼識足下身識譬亦如 若先取生陰而捨死陰如折樓虫 不然何以故趣不別及二識合過 是故說有中陰如所說四種薩婆
【문】모든 존재는 유(有)인가? 무(無)인가?
爲有一切有爲無
【답】알아야 하니, 일체는 존재하나
  일체에 모습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일체에는 일체가 없으니
  다른 모습의 법이 없는 것이다.
028_0528_c_13L 當知一切有
非有一切相
一切無一切
無有他相法
이 유(有)라는 것은 살바다(薩婆多)24)에서 내세우는 학설이다. 여기서 일체(一切)라 하는 것은 십이입(十二入)을 말하는 것이다. 그 모든 입(入)에는 독자적인 모습이 있을 뿐 다른 모습이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모습이 지어지는 바가 다르기 때문이다. 또한 짓는 업도 다르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028_0528_c_15L 此有是薩婆多所立一切者謂十二 彼諸入有自相非餘一切相所作 別故作業別前已說
‘일체에는 일체가 없다’라고 한 것은 학법(學法) 가운데는 학법만 있고 무학법(無學法)은 없으며, 무학법 가운데는 무학법만 있고 학법은 없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비유하면 허공 속에는 아무 자취가 없는 것과 같은 이 같은 비유인 것이다.
028_0528_c_18L一切無一切者 謂學法中有學法無無學法無學法 中有無學法亦無學法如空中亦無 有迹如是比
【문】여기서는 유(有)를 설하는데 어찌하여 무(無)가 있는가?
此說有云何無有
【답】다른 모습의 법은 없는 것이다. 가령 눈의 모습은 이것이 눈의 입처로서 다른 입처의 모습은 없는 것과 같다. 모습이 다르기 때문이니, 그런 까닭에 일체법을 서로 뒤섞이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028_0528_c_21L 無有他相法如眼相是眼入無餘入 相別故以是故說一切法不雜
일체의 세계는 모두 존재하니
그 응하는 곳과 어긋나지 않는다.
이는 모니의 말씀으로
성문승에는 부처는 없다.
028_0528_c_23L一切世悉有
不違其所應
牟尼之所說
聲聞僧無佛
028_0529_a_02L삼세(三世)에 살바다(薩婆多)25)가 있다는 것은 살바다(薩婆多)의 주장이다.
028_0529_a_02L有三世薩婆多此薩婆多所立
【문】왜 그러한가?
何故
【답】현재의 세계는 과거와 미래를 비추어 보기 때문에 마련된 세계다. 만약 과거와 미래가 없다면 현재의 세계도 없다. 현재의 세계가 없다면 유위(有爲)의 법도 또한 없나니, 그런 까닭에 삼세가 존재한다는 말에 잘못이 있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만약 구원한 옛날이 과거이고 다가올 앞날이 미래이니 이것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현재의 세계만이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그렇지 않다. 왜냐 하면, 업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028_0529_a_03L現在世者觀過去未來故施設若無 過去未來者則無現在世現在世無者 亦無有爲法是故有三世莫言有咎言久遠是過去當有是未來非是有 唯有現在者此不然何以故有業報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업도 있고 보도 있다”고 하셨는데 이것은 업보란 더불어 현존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업이 현재에 있다면 그 보(報)는 미래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또 만약 과보가 현재에 있다면 그 업은 과거의 세계에서 이미 지어졌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가령 세속의 설자(說者) 역시 “지은 자는 얻을 수 없다고 말한다”고 하며, 가령 “세속에도 업이 있고 그 과보도 있다고 말한다”고 한다면 이 역시 그렇지 않다.
028_0529_a_08L世尊說有業有報非是業報俱現 世尊說有業有報非是業報俱現 若業現在當知報在未來若報現 當知業已過去若言俗數說者說作者不可得若言俗數說有業有 報者此亦不然
세존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지은 자는 얻을 수 없다”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이 역시 세속의 설이 되겠는가? 신구(神口)로 말씀하신 바는 제일의공(第一義空)의 경전이거늘 그대는 망상으로 이것이 존재하는 까닭에 저것이 존재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비유일 따름이다.
028_0529_a_13L世尊亦說作者不可 此亦俗數說耶神口所說第一義 空修多羅而汝妄想說此有故彼有是比
만약 그대의 말처럼 영구한 옛날이 과거이며 앞으로 다가올 세계가 미래이다. 이는 존재[有]가 아니니, 오직 현재만이 존재한다고 한다면 다음과 같이말해서는 안된다. 곧, “나 역시 능히 현재일 수 있는 것은 이미 가버린 세계에서는 미래에 해당하고 앞으로 다가올 세계에서는 과거에 해당한다고 말한다.”이는 지혜 있는 사람의 말씀이 아니다.
028_0529_a_16L當知如汝說久遠是過去當有 是未來非是有唯現在是有者莫作 是說我亦能說現在者於旣往是未 於當有是過去此非智者說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만약 신근(信根) 등 5근(根)26)이 없다면 나는 이를 범부의 무리라고 말한다. 만약 학인(學人)이 번뇌에 결박당했다면 신근 등의 5근(根)이 눈앞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도와 번뇌는 함께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과거도 있고 미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만약 이와 다르다고 한다면 아마도 성인은 범부가 되어야 할 것이다. 또 만약 득(得)을 좇아 태어난다고 말한다면 이 역시 그렇지 않다. 무법(無法)을 얻는 것은 비분(非分)이기 때문이다.27) 그 근거하는 곳이 유(有)의 몫이 아니기 때문이다.
028_0529_a_19L如所說 若無信等五根我說是凡夫輩若學 人纏所纏信等五根不現在前道與煩惱 不俱故是故應知有過去未來若異 聖人應是凡夫若言得隨生此亦 不然無法得非分故依處非分故
028_0529_b_02L‘성문승에는 부처는 없다’고 했는데, 성문승은 부처를 포함하지 않는다. 왜냐 하면 삼보(三寶)는 줄어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세존이 성문승에 속한다면 마땅히 이보(二寶)만 있어야지 삼보는 아닐 것이다. 별체(別體)가 없는 까닭이다. 귀의ㆍ불괴정(不壞淨)ㆍ염 등도 역시 이와 같다. 해석에 잘못이 있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그런 까닭에 성문승은 부처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다.
028_0529_a_24L聞僧無佛者聲聞僧不攝佛何以故 三寶不減故若世尊聲聞所攝應有 三寶非三佛無別體故歸依及不壞 淨念等亦如是莫言有過是故聲聞 僧不攝佛
세존께서 경전에서 “교담미(★曇彌)야, 승에게 베푸는 일은 곧 나에게 공양하는 일이니라”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으니, 이 말씀은 비구승ㆍ성승(聖僧)ㆍ복전승(福田僧)을 말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세존께서는 그 삼승(三僧)에 속하는 것이다. 번뇌를 허문 까닭이고 성스런 까닭이며 최고의 복전이 되는 까닭이다. 성문승은 아니니, 스스로 깨달은 자이기 때문이다.
028_0529_b_06L如世尊修多羅說憍曇彌僧亦是供養我當知是說比丘僧福田僧世尊者彼三僧所攝破煩 惱故聖故第一義福田故非聲聞僧 自覺故
설령 넓은 글로 해설한다 하더라도
군생(群生)들은 큰 공포에 싸일 것이니
가장 뛰어나고 매우 깊은 모습을
나는 지금 다만 간략하게 설명하겠다.
028_0529_b_10L設令廣章句
群生大恐怖
無勝甚深相
我今但略說
만약 광범위하게 설명한다면 중생들은 무서워하고 두려워할 것이다. 그런 까닭에 지금 광범위한 설명은 하지 않겠다. 그 문장ㆍ문구의 심원(深遠)한 아비담(阿毘曇), 곧 밝고 청정한 지혜로 이해한 모든 이론의 음성의 오묘한 뜻을 여기에서 간략하게 설명하겠다.
028_0529_b_12L若廣說者衆生怖畏是故我今不廣 章句深達阿毘曇明淨智慧所解 諸論音聲妙義於此略說
옛날 여러 큰스님들이
무량한 뜻을 베풀어 설법하셨으니
나는 지금 이해하는 바에 따라
분별하여 일부분을 설하겠다.
028_0529_b_15L古昔諸大師
演說無量義
我今隨 所解
分別說少分
나는 지금 법승(法勝) 존자가 말한 가운데서 적은 지혜로써 사량(思量)하고 선집(選集)해서 문장ㆍ문구를 만들어 세워 모아그분이 남긴 법문을 펴고 진술하는 데 도움말이 되게 하였는데, 이는 교만심으로 명예와 칭송을 얻고자 한 것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그분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해설하였다.
만약 번뇌가 생긴다면 성인은 이것을 유루라고 설했다. 그러나 멸제(滅諦)ㆍ도제에서도 역시 번뇌가 생기지만 그렇다고 유루는 아니니, 번뇌를 늘어나게 하는 분야가 아니기 때문이다. 무루연에서는 번뇌가 줄어들어도 불어나지 아니함은 앞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그런 까닭에 나는 유루를 불어나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렇다고 무루연에서 하(下)ㆍ중(中)ㆍ상(上)의 번뇌가 불어나지 않느냐 하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그 의지처가 불어나기 때문이다.
028_0529_b_17L 我今於尊者法勝所說中以少智慧 思量撰集造立章句將以申述助宣 遺法非欲憍慢求名稱故如彼所說 若生諸煩惱是聖說有漏滅道亦生 煩惱而非有漏增煩惱非分故無漏 緣煩惱滅而不增前已說是故我說 增也無漏緣軟中上不增者不然增故
028_0529_c_02L결정코 이 논(論)에 있어서
문장ㆍ문구의 미묘한 뜻을 안다면
저 지혜의 무리 가운데에서
용맹하여 두려움이 없을 것이다.
028_0529_c_02L決定知此論
章句微妙義
於彼智慧衆
勇猛無所畏
이 논의 문장ㆍ문구의 의미에 대해서 능히 결정적으로 알고 훌륭히 분별해서 설명한다면, 그는 모든 지혜 있는 대중 가운데에서도 마음에 겁이 나고 두려워하는 것이 없을 것이다. 법의 모습을 잘 분별하기 때문이다.
028_0529_c_04L 於此論章句義味能決定知善分別說者 於諸智慧衆中心無怯畏解法相故
내가 지금 논을 증익한 것에는
그 마음에 탐냄이 없나니
지혜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쉽고 빠르게
적멸의 즐거움 얻게 하기 위해서다.
028_0529_c_07L我今增益論
其心無所貪
爲令智者樂
疾得寂滅樂
경의 본래 지극히 간략한 의설(義說)은 그 뜻이 깊고 넓어 받아 간직하기가 어렵다. 마치 허공을 논한 것과 같아서 요별(了別)하기가 어려움은 앞에서 이미 설명한 일이다.
그런 까닭에 이 논의 원본에 덧붙여 더욱 보탠 것이며, 그 내용은 경전의 의미에 따라 요지(了知)하기 쉽게 하였다. 내용을 알게 됨으로써 번뇌는 즉시 끊어지게 되는 것이다.
028_0529_c_09L 經本至略義說深廣難可受持如虛 空論難可了知前已說是故增益論 隨順修多羅義令易了知以知義 煩惱則斷
12. 잡아비담심론품(雜阿毘曇心論品)
028_0529_c_13L雜阿毘曇心論品第十一
이미 택품(擇品)에 대한 설명을 마쳤으니 지금부터 여러 이론을 설명하여 지혜 있는 사람들을 기쁘게 하겠다.
028_0529_c_14L已說擇品今當略說諸論令智者欣樂
율(律)ㆍ불률의(不律儀)를 떠나니
그리하여 율의를 얻는다.
그것에 인하여 뛰어남에 이르는 것이 아닌가.
능히 결정할 수 있는 자는 말하라.
028_0529_c_15L離律不律儀
而得於律儀
不因彼致勝
能決定者說
【답】있다. 즉 무색계에서 사라져 색계에 태어났을 때이다. 무색계의 범부를 계율을 지키는 사람도 아니고 계율을 지키지 않는 사람도 아니라고 표현한다. 무색계는 선악(善惡)의 율의의 분야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목숨이 끝나 색계에 태어날 때는 선(善)한 율의(律儀)를 얻나니, 색계의 율의는 마음과 함께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뛰어난 진전은 아니니 무색계는 색계보다 뛰어난 세계이기 때문이다.
028_0529_c_17L 謂無色界沒生色界時無色界 凡夫名非律儀非不律儀無色界善 惡律儀非分故從彼命終生色界時 得善律儀色界律儀與心俱故非勝 無色界界勝故
자못 사문과를 얻은
현성은 모든 허물 떠나
유위의 선(善)한 법을 얻어도
수습이라 하지 않는 경우 있는가.
028_0529_c_22L頗得沙門果
賢聖離諸過
得有爲善法
不名爲修習
028_0530_a_02L【답】있다. 즉 과보에 속하는 성인의 도가 소멸되고 나면 그 후에 물러서서 근을 증진(增進)하지 않고 다시 그의 먼저 과거에 과보에 속하는 도를 얻는다. 그것이 먼저 소멸되었기 때문에 닦은 것이 아니니, 현재의 인은 분야가 아니기 때문이며, 모든 허물을 벗어났다는 것은 세속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위란 무위가 아니며 선(善)이란 불선ㆍ무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028_0529_c_24L 謂果所攝聖道滅已然後退增進根還得彼先過去果所攝道先 滅故非修現在因非分故離諸過者 非世俗故有爲者非無爲故善者不善無記故
도가 아직 일어나지 아니하였을 때
모든 허물 멀리 벗어나
해탈하였을 때 악을 여의는가?
능히 결정할 수 있는 자는 말하라.
028_0530_a_06L道未興起時
遠離諸過咎
解脫時離惡
能決定者說
【답】그렇다. 즉 수행자가 금강삼매(金剛三昧)에 머물러 처음의 진지(盡智)를 제외한 모든 다른 무학법(無學法)이 아직 일어나지 아니하였을 때이다. 이는 도로 향하지 않기 때문이다. 해탈하였을 때는 모든 무학도로 단번에 해탈하고 처음으로 진지(盡智)가 생기는 때이다. 이것이 생할 때란 곧 해탈하는 때이다. 모든 허물과 악을 벗어난다는 것은 유루(有漏)가 아니기 때문이다.
028_0530_a_08L 謂修行者住金剛三昧除初盡 智諸餘無學法是未起時不向故脫時者一切無學道頓解脫初盡智 生時是生時是解脫時離諸過惡者 非有漏故
자못 광음천(光音天)에서 번뇌 일어나
이것이 그의 선정과 상응하여
청정한 초선에서 물러나며
게다가 퇴법을 얻는 경우도 있는가?
028_0530_a_13L頗光音纏起
是彼定相應
淸淨初禪退
而得於退法
【답】있다. 즉 아라한이 제2선의 경지에서 번뇌로 물러섰을 때가 진지(盡智)로 얻은 초선이다. 물러남과 진지가 합쳐지는 까닭이다. 물러섬의 훈수(熏修)가 있게 되는 것이니, 초선 및 제4선과 합쳐지는 까닭이다. 아나함(阿那含)도 역시 그렇게 된다. 청정이라 말하는 것은 명(明)이 물러선 것이며, 그 자리는 무학의 자리가 아닌 까닭이다.
028_0530_a_15L 謂阿羅漢第二禪纏退時盡智 所得初禪退與盡智合故又退熏修 初禪與第四禪合故阿那含亦爾淨者明所退非無學故
자못 진리를 밝히는 길목에서
그 모든 선한 법 얻어서
그 법이 곧 연을 지녀도
성지(聖智)의 연을 보지 못하는 경우 있는가?
028_0530_a_19L頗於見諦道
得彼諸善法
彼法是有緣
聖智不見緣
028_0530_b_02L【답】있다. 즉 고비지(苦比智)와 함께 일어난 욕계 등지(等智)의 고무간등(苦無間等)의 언저리에서 수행할 경우에도 역시 그 지혜의 연을 보지 못한다. 그 이유는 그는 욕계를 연하여도 고비지는 욕계를 연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집제ㆍ멸제의 무간등(無間等)의 언저리에서 수행할 경우에도 역시 그러하다. 도비인(道比忍)의 경우 3제(諦)를 연하는 지혜를 얻지만 그에 해당하는 진리를 비추어 보지는 못하니, 그 이유는 다른 경계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학법(學法)에 머물면서 무학법을 얻게 되면 얻은 것은 무학법이지 학법이 아니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법지(法智)의 품계에서 비지(比智)의 품계에 이르며, 비지의 품계에서 다시 법지의 품계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028_0530_a_21L 謂與苦比智俱欲界等智苦無 閒等邊修亦不見彼智緣以彼緣欲 而苦比智不緣欲界故集滅無閒 等邊亦如是道比忍得緣三諦智而 不觀彼諦住異境界故如住學法得 無學法得無學法非學法如是從法 智品至比智品比智品復至法智品
자못 과보 중에 유루의 지혜를
무루의 지혜로 끊게 되면
그 과보는 인이 일어난 곳이니
욕망을 벗어나지 못한 지혜도 있는가?
028_0530_b_05L頗果有漏慧
無漏慧所斷
彼果所因起
謂不離欲慧
【답】있다. 즉 성인이 욕계의 욕망에서는 벗어났으나 초선(初禪)의 욕망에서는 벗어나지 못한 때가 그것이다. 욕계에서 초선과의 화심(化心)은 욕망을 벗어나니, 욕계에 대한 애착이 다하기 때문이다.
초선의 지혜는 아직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초선에 대한 애착이 다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일체의 변화하는 마음도 이와 같아서 독자적인 경지의 과보를 제외하고는 그 내용을 따른다.
028_0530_b_07L 謂聖人離欲界欲未離初禪欲 欲界初禪果化心離欲欲界愛盡故 初禪慧未離欲彼愛未盡故一切化 心亦如是隨其義除自地果
자못 무애도(無碍道)에 머물러
모든 멸(滅)을 얻어서
이것과 서로 어긋나는 번뇌는
그것이 무루견(無漏見)이 아닌 경우도 있는가?
028_0530_b_11L頗住無㝵道
而得於諸滅
此相違煩惱
非彼無漏見
【답】있다. 즉 범부가 신통력을 닦았을 때가 그것이다. 무애도로 번뇌를 끊고 얻은 신통력은 번뇌와는 서로 어긋나며 모든 멸제를 얻게 되지만 무루(無漏)의 견해와 어긋나는 번뇌는 아니다. 왜냐 하면, 성인이 욕망에서 벗어났을 때는 법인(法忍)이 눈앞에 나타나는데 인(忍)과 서로 다른 번뇌의 소멸을 얻는 까닭이다.
028_0530_b_13L 謂凡夫人修神通時無㝵道斷 神通相違煩惱而得諸滅非無漏見 相違何以故聖人離欲時法忍現在 得忍相違煩惱滅故
자못 모든 번뇌의 소멸을
욕망에서 벗어난 자는 얻거늘
번뇌를 끊지 아니하고도
때 없이 번뇌 다한 경지를 얻을 수 있는가?
028_0530_b_17L頗諸煩惱滅
離欲者獲得
不斷於煩惱
而得無垢盡
【답】있다. 즉 높은 경지에서 목숨이 끝나 범천에 태어났을 때가 그것이다. 거기서는 욕계의 번뇌는 소멸될 수 있지만 범천의 번뇌는 끊지 않나니, 먼저 이미 끊었기 때문이다. 나머지 모든 경지의 경우도 이와 같다.
028_0530_b_19L 謂上地命終生梵天時得欲界 煩惱滅而不斷彼煩惱先已斷故一切地亦如是
자못 때 없이 청정한 경지를
일찍이 얻지 못했으나 지금 얻었는데
욕망을 벗어난 것도 아니고 물러선 것도 아니며
견도(見道)에 근거하지 않은 경우도 있는가?
028_0530_b_22L頗無垢淨地
未曾得而得
非離欲非退
不依於見道
028_0530_c_02L【답】있다. 즉 초선에서 욕망을 벗어난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초선과 그에 부수된 경지에 의지하여 순서를 뛰어넘어 위로 올라가서 생사의 번뇌에서 벗어나게 되면 도비지(道比智)가 생겨 3지(地)의 아나함과(阿那含果)를 성취하게 된다. 그 선정에서 일어나 제2선의 선정에 들어가면 제2선의 무루(無漏)를 얻게 된다. 그 무루를 얻을 때는 욕망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니, 그 이유는 먼저 초선에서 이미 욕망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또 물러선 것도 아니니, 뛰어난 진전이기 때문이다. 또 이는 도를 밝히는 단계도 아니니, 견도(見道)는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 경지보다 더 높은 경지나 근을 불어나게 하는 경우도 역시 이와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028_0530_b_24L 謂初禪離欲依初禪及眷屬超 昇離生道比智生成就三地阿那含 從彼定起入第二禪得第二禪無 得彼無漏時非離欲先離欲故退勝進故非見道見道究竟故當知 上地及增益諸根亦如是
자못 일찍이 얻지 못한 경지 얻으면서도
적멸(寂滅)의 경지 얻는다면
그것을 버리지 않고는 다른 것을 얻지 못하는지
만약 알 수 있다면 말하시오.
028_0530_c_07L頗獲未曾得
而得於寂滅
不捨彼不得
若能知者說
【답】그런 경우도 있다. 즉 고법인(苦法忍)과 이에 부수된 법으로 얻는 경지를 제외한 나머지 무루도에서 얻게 된다. 그 경지는 최초의 무루로서 모든 범부의 특징을 버리고 얻지 않는다. 나머지 다른 번뇌는 버리지 않나니, 먼저 이미 버렸기 때문이다.
028_0530_c_09L 謂除苦法忍眷屬得餘無漏道 彼初無漏捨一切凡夫性不得不捨先已捨故
만약 8인(忍)을 성취하고
또한 일곱 가지 지혜 성취한다면
이 모든 무루의 견해가
보지 못하는 무루(無漏)가 있는가?
028_0530_c_12L若成就八忍
亦成就七智
此諸無漏見
不見何無漏
【답】있다. 즉 이 사람은 도비인(道比忍)에 머물면서 모든 견도(見道)의 지혜를 성취하여 일체의 멸, 일체의 도를 보기는 해도 오직 도비인의 권속은 여기서 제외된다. 그 인은 자성을 볼 수 없는데 스스로 자신을 비추어 보지 못하기 때문이며 두 가지 본질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상응하는 것을 보지 못하니, 같은 행 같은 연이기 때문이다. 또한 공유하는 것을 보지 못하니, 하나의 과보이며 하나로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028_0530_c_14L 謂此人住道比忍成就一切見 道慧見一切滅一切道唯除道比忍 眷屬彼忍不見自性不自觀故無二 性故亦不見相應一行一緣故不見 共有一果一決定故
자못 일찍이 얻지 못한 법이
유루ㆍ언저리의 경계로서
오직 흔들리지 않는 자에게만 있다면
그는 능히 선법을 칠 수 있는가.
028_0530_c_19L頗法未曾得
有漏邊境界
唯有不動者
彼能擊善法
【답】있다. 즉 무상무상(無相無相)의 경지가 그것인데, 무궁한 생사에서는 일찍이 얻지 못한 경지다. 그런데도 공(空)이라는 성인의 도를 얻었기 때문에 유루(有漏)에 연한 것이라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비수멸이기 때문에 언저리 경계[邊境界]라 말한 것이다. 나머지는 분야가 아니기 때문에 오직 부동(不動)이라 말한 것이며, 공은 성인의 도인 까닭에 선법을 친다[擊善法]고 말한 것이다.
028_0530_c_21L 謂無相無相於無窮生死未曾 而得空聖道故說有漏緣非數滅 故說邊境界餘非分故說唯不動聖道故說擊善法
028_0531_a_02L아직 일어나지 아니하였던 사람에게
이미 무루의 지혜 일어났다면
뒷 인연이 아닌 앞서 생긴 인연인가를
알 수 있다면 말하시오.
028_0531_a_02L已起無漏慧
於彼未起者
前生非後因
若能知者說
【답】그렇다. 즉 앞서 불어난 원인이며 뒤에 생긴 약한 원인이 아닌 경우가 그것이니 그 과보가 비슷하거나 불어나게 되는 까닭이다.
028_0531_a_04L 謂前增非後軟因彼果相似及 增故
자못 여섯 경지의 욕망 벗어나
성인은 또한 그 과보 이루었어도
무루선을 이루지 못하는 일도 있는지
알 수 있다면 말하시오.
028_0531_a_06L頗離六地欲
聖亦成彼果
不成無漏禪
若能知者說
【답】있다. 즉 공처(空處)에서 욕망을 벗어난 사람이 미지선(未至禪)에 의지하여 경지를 뛰어넘어 높은 경지로 올라가서 생사의 번뇌를 벗어날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 경우 그에게는 고법인(苦法忍)은 생겼으나 도비지(道比智)는 아직 생기지 아니한 것이다. 여든아홉 가지의 사문의 과보를 얻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그 과보를 이루었다”라고 말한 것이다. 고법지(苦法智)는 고법인에 의지한 과보이며 공용(功用)의 과보이므로 고제(苦諦)를 밝힘으로써 끊게 되는 번뇌가 다하게 되는 것은 해탈의 과보이며 공용의 과보이다. 그러나 무루선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니, 아직 무루선은 얻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028_0531_a_08L 謂空處離欲依禪未至超昇離 苦法忍生道比智未生以八十九 沙門果故故言成彼果以苦法智是 苦法忍依果及功用果見苦所斷煩 惱盡是解脫果及功用果而不成無 漏禪未得故
자못 모든 무루의 법이면서
어떤 경계에 속하게 되어
능히 그 경계의 법이 생길 경우도
그 경계 속에 들어가지 않는 경우도 있는가?
028_0531_a_14L頗諸無漏法
而爲界所攝
能生彼法者
不入彼界中
【답】있다. 즉 무루계(無漏戒)이다. 그것은 경계에 속하지 번뇌에 포섭되는 것이 아니다. 계율이란 4대(大)로 만들어지니, 그 4대로 얻는 과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4대는 촉계(觸界)에 속하며 신식(身識)의 경계이기 때문이다.
028_0531_a_16L 謂無漏戒彼界所攝非漏所攝 戒者四大所造彼果故四大者觸界 所攝身識境界故
자못 한 가지의 대종(大種)이 소멸되고
선정의 경지에서 일어나지 아니할 때
두 가지 대종이 눈앞에 나타나는 경우도 있는가.
알 수 있으면 말하시오.
028_0531_a_19L頗一大種滅
於禪地不起
二大種在前
若能知者說
028_0531_b_02L【답】있다. 즉 성인이 욕계에 태어나 무루의 초선의 경지의 다음 차례로 유루의 초선이 눈앞에 나타난다. 여기서 한 종류의 4대(大)는 소멸된다. 이른바 욕계의 4대가 그것이니, 무루심 따라 바뀌어지는 까닭이다. 만약 그것이 생겨 눈앞에 나타난다면 곧 그 경지의 4대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두 종류의 4대가 현재에 나타난다고 한 것은 욕계와 초선의 경지의 4대가 나타남을 말한 것이다도와 함께 일어나는 계율을 무루의 수전(隨轉)이라 한다. 만약 그것이 욕계에 생기게 되면 곧 욕계의 4대로 만들어지게 된다. 그런 까닭에 이 4대(大)는 무루선과 함께 일어나고 함께 소멸하는 것이다.
028_0531_a_21L 謂聖人生欲界無漏初禪次第 有漏初禪現在前一種四大滅謂欲 界四大以無漏隨轉若於彼生現在 卽彼地四大造故二種四大現在 前者謂欲界及初禪地四大◀道共戒名無漏隨轉若於彼欲界生卽彼欲界四大造故此四大與無漏俱起滅也▶
자못 법이 세 가지 길에 인한다면
이는 세 가지의 자성으로서
이른바 세 종류가 한 경지이며
또한 세 경지에 존재하는 일도 있는가?
028_0531_b_04L頗法因三道
是三種自性
謂三種 一地
亦復在三地
【답】있다. 즉 무학(無學)의 지혜가 그것이다. 그 지혜는 견도(見道)와 수도(修道)와 무학도를 원인으로 삼는다. 진지(盡智)와 무생지와 무학의 등견(等見)이 그 지혜의 자성(自性)이다. 상ㆍ중ㆍ하의 분별 때문에 세 종류라고 말한 것이고 또 이 지혜는 무학의 경지에 속하는 지혜이기 때문에 한 경지[一地]라고 말한 것이며, 유각(有覺)ㆍ유관(有觀) 등으로 분별되기 때문에 “세 경지에 존재한다”라고 한 것이다.
028_0531_b_06L 謂無學慧以彼見道修道無學 道爲因盡智無生智無學等見是自 軟中上分別故說三種無學地所 攝故說一地有覺有觀等分別故在 三地
자못 유루의 수(受)가 있어
둘은 이루어져도 하나는 이루어지지 않고
두 근의 두 종류는 이루어져도
이를 신증(身證)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는가?
028_0531_b_11L頗有有漏受
二成一不成
二根二種成
是說爲身證
【답】있다. 즉 신증(身證)의 사람이 초선과 초선에 부수된 경지 및 제2선에 의지하며 근을 증진하는 경우이다. 이때 높은 경지는 눈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고근(苦根)과 유루의 낙근(樂根)이 성취되니, 이 사람은 먼저 제3선의 무루의 낙근을 얻었다가 근이 바뀌어진 까닭에 이를 버리고 다시는 얻지 못한다. 아랫경지에 의지하여 거기서 근을 증진하는 까닭에, 높은 경지인 학도(學道)는 닦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학의 과보를 얻게 되는 것과 같다.
028_0531_b_13L 謂身證人依初禪初禪眷屬及 第二禪增進根上地不現在前成就 苦根有漏樂根此人先得第三禪地 無漏樂以轉根故捨復未更得以依 下地增進根故不修上地學道如得 學果
한가지 우근(憂根)은 성취되지 않나니 이미 욕망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이 경우 희근(喜根)과 사근(捨根)은 각기 두 종류가 있게 되는데, 즉 유루와 무루가 그것이다. 이것이 모두 성취되니, 미지선(未至禪)과 중간선은 사근(捨根)에 포섭되는 까닭에 사근을 얻게 된다. 그리고 초선과 이선은 희근(喜根)을 거두어들이니, 그런 까닭에 희근도 얻게 되는 것이다.
028_0531_b_19L一憂根不成就離欲故喜根根各有二種謂有漏無漏是悉成就 以禪未至中閒攝捨根是故得捨根 初禪二禪攝喜根是故得喜根
아홉 경지의 번뇌 소멸하고
모든 선정 얻어도
무색정(無色定) 얻지 못하는가
혹은 다시 얻기도 하는가?
028_0531_b_22L九地煩惱滅
而得於諸禪
不得無色定
或復得當說
028_0531_c_02L【답】그런 경우가 있다. 즉 아라한은 능히 모든 선정을 얻어도 무색정을 얻지 못할 수가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선정도 얻고 또한 눈앞에 나타나지만 무색정은 성취하여도 행하지는 못한다.
028_0531_b_24L 謂阿羅漢能得禪定非無色禪亦得亦現在前無色者成就而不行
한 법에 허다한 특성 있으니
혹은 하나ㆍ셋ㆍ유ㆍ무이다.
그것이 무학의 법으로서
원인의 힘으로 장양(長養)되는 바이다.
028_0531_c_03L一法衆多性
或一三有無
彼是無學法
因力所長養
【답】그렇다. 즉 무지근(無知根)이 그것이다. 한 근을 건립하는 까닭에 ‘한 가지[一]라고 한 것이다. 또 아홉 근이 화합한 것이기에 ‘허다한 특성’이라 말한 것이다. 허다한 본질이 있기 때문에 하나가 아니나, 다 같이 한 무학의 경지인 까닭에 ‘한 경지’라고 말한다. 또한 각(覺)ㆍ관(觀)으로 분별되기 때문에 ‘세 경지’라고 말하는 것이다. ‘있다[有]’라고 한 것은 이름이 있다는 것이고 ‘없다[無]’라고 한 것은 별다른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학의 경지에서 얻는 것이기 때문에 ‘무학법(無學法)’이라 말한 것이며, 세 가지 원인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장양(長養)한다’고 말한 것이다.
028_0531_c_05L 謂無知根建立一根故說言一 九根和合故說衆多性以衆多性故 說非一一無學地故說一地覺觀分 別故說三地有者謂有名無者無別 無學得故說無學法三因成故說 因長養
어떤 한 법이 곧 유분(有分)으로서
그 나머지 유분과
비슷하게 생기고 머물고 허물어지는 경우가 있는가?
알 수 있다면 말하시오.
028_0531_c_11L頗法是有分
與彼餘有分
相似生住壞
若能知者說
【답】있다. 즉 색입(色入)은 곧 다른 유분으로서, 그 모습은 입처(入處)와 더불어 함께 생기고 머물고 소멸한다. 함께 동일한 과보이기 때문이니, 색입은 업을 짓지 않는 까닭에 여유분(餘有分)이라 말하게 되는 것이다. 그 모습은 법입(法入)에 속하기 때문에 곧 유분이다.
028_0531_c_13L 謂色入是餘有分彼相與入俱 生住滅共一果故色入者不作業故 說餘有分彼相者法入攝故是有分
모든 상응하는 법은
혹 다른 유분이라 하기도 하고
혹 또 부유분(復有分)이라고 하는 경우 있는가?
알 수 있다면 말하시오.
028_0531_c_16L頗諸相應法
或說餘有分
或復說有分
若能知者說
【답】있다. 즉 미래의 불생법(不生法)에서의 의입(意入)이 곧 다른 유분이다. 이것은 업을 짓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그밖의 마음의 법을 유분(有分)이라 하니, 그것은 법입(法入)에 속하기 때문이다.
028_0531_c_18L 謂未來不生法意入是餘有分 不作業故餘心法是有分法入攝故
두 종류의 아나함(阿那含)이
함께 한 경지에 태어나
제일법을 혹 이루어 함께
한 경지의 과보 얻게 되는 경우도 있는가?
028_0531_c_20L頗二阿那含
共生於一地
第一法或成
俱得一地果
028_0532_a_02L【답】있다. 즉 한 사람의 아나함은 제2선에 의지하여 경지를 뛰어넘어 높은 경지로 올라가서 생사의 번뇌에서 벗어나고, 두 번째 아나함은 제3선에 의지한다. 그들은 목숨이 끝나 함께 제3선의 경지에 태어나게 되는데, 그 2선에 의지해 경지가 뛰어올라 생사에서 벗어난 자는 선정의 경계가 증진된 까닭에 세간제일법(世間第一法)을 버린다. 곧 제3선에 의지하는 자는 성취된 경지를 버리지 않는 것이다. 이 경지보다 높은 모든 경지의 경우도 역시 이와 같다. ‘한 경지의 과보를 얻는다’라고 한 것은, 각관(覺觀)이 없는 선(禪)을 말한 것이다.
028_0531_c_22L 謂一阿那含依第二禪超昇離 第二阿那含依第三禪彼命終俱 生第三禪彼依二禪超昇離生者進禪故捨世閒第一法卽依第三禪 成就不捨上諸地亦如是得一地 果者謂無覺無觀禪
흔들리지 아니하는 법이
함께 같은 한 유(有)를 받으니
하나는 아홉 경지의 선유루(善有漏)를
성취하는데, 하나는 없는 경우도 있는가?
028_0532_a_05L頗有不動法
俱受於一有
一成就九地
善有漏一無
【답】있다. 하나는 욕계에 태어나고 하나는 초선에 태어나는 것이다. 욕계에 태어난 자는 아홉 경지의 유루(有漏)의 법을 성취하고, 초선의 경지에 태어난 자는 욕계의 경지를 제외한 여덟 경지의 유루의 법을 성취한다. 증가되고 버리면서 함께 한 유(有)를 부여받기 때문에 한 가지 유[一有]라 말한 것이다. 유루란 무루의 높은 경지에 태어남으로써 아랫경지의 법을 성취하기 때문에 유루라 말한 것이다.
028_0532_a_07L 謂一生欲界一生初禪生欲界 九地有漏法成就生初禪者八地 除欲界地增捨俱受一有故說一有 有漏者以無漏生上成就下故說有漏
한 찰나에 머물면서
세 해탈문을 얻거나 버릴 수 있고
혹은 다시 둘을 버리기도 하고
혹은 하나를 버렸다가 다시 얻는 일도 있는가?
028_0532_a_11L頗住一剎那
得捨三脫門
或復捨於二
一捨還復得
【답】있다. 즉 무색계에 태어나 곧 아라한과를 얻게 될 사람이 금강삼매에 머무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 경우 그는 무학의 세 가지 해탈문을 얻게 되며 학(學)의 세 가지 해탈문은 버리게 된다. 또한 멸수상정(滅受想定) 및 비상비비상처도 버리게 된다. 일체의 퇴분(退分)을 버리고 일체의 승분(勝分)을 얻게 되는 것이다한 생각 가운데서 버리기도 하고 혹은 얻기도 하는 까닭에 한 순간의 생각이라 말한 것이다. 멸수상정 및 비상(非想)의 단지(斷智)를 얻게 되는 것을 ‘둘을 버린다’고 말한 것이다. 물러서는 법을 버리고 뛰어난 법을 얻는 까닭에 하나를 버리고 하나를 얻는다고 한 것이다.
028_0532_a_13L 謂生無色界當得阿羅漢住金 剛三昧得無學三昧門捨學三脫門 捨滅受想定及非想非非想處捨一 切退分得一切勝分◀一念中亦捨亦得故言一念滅受想定及非想得斷知言捨二捨退得勝故捨一得一也▶
성문의 과보 이루어
성(聖)과 비성(非聖)의 경지 성취하여도
단지(斷智) 얻는 경우 있는가?
알 수 있다면 말하시오.
028_0532_a_18L頗成沙門果
成就聖非聖
而不得斷知
若能知者說
【답】있다. 즉 무간등인 고제의 지는 생겼으나 집제의 지는 아직 생기지 않은 경우이다. 그때에는 여든 아홉 가지 사문의 과보의 몫에 대해 성취해도 네 가지 사문의 과보는 성취되지 않으며, 또한 단지(斷智)를 얻지 못한다.
028_0532_a_20L 謂無閒等苦智生集智未生時於八十九沙門果分成就於四沙 門果不成就亦不得斷知
저 더없이 넓은 바다 건너려면
적은 힘 가진 자는 감당하지 못하니
지금 나는 능력에 따라
매우 깊은 뜻을 베풀어 설명했다.
028_0532_a_23L度彼無勝海
少力所不任
今我隨所能
宣說甚深義
028_0532_b_02L세간의 빈궁한 사람들
그들이 졸부가 될 수는 있어도.
무지(無智)는 그렇지 않나니
모름지기 큰 방편 필요하네
세간의 보물 얻기 쉬우나
지혜의 보배 얻기는 심히 어렵다.
028_0532_b_02L世閒貧窮人
彼可卒令富
無智則不然
要須大方便
世閒寶易得
慧寶甚難獲
그런 까닭에 마땅히 부지런히 배워서
점차로 매우 깊은 지혜 속에 들어가
바르게 열반 가는 길과
삿되고 미혹한 생사의 길을 알아야 하네
028_0532_b_04L是故應勤學
漸入甚深智
正解涅槃路
邪惑生死徑
지혜가 능히 어리석은 어둠을 소멸함은
마치 태양이 어둠을 제거함과 같으니
해탈을 구하는 까닭에
마땅히 부지런히 지혜 닦아야 하리라.
028_0532_b_05L慧能滅癡闇
如日除幽冥
爲求解脫故
當勤修智慧
살바다(薩婆多)28)의 비구가 아비담을 장엄한 게송이다. 원하건대 일체 중생의 지혜가 점차로 불어나서 신속히 해탈을 얻었으면 하네.
028_0532_b_06L薩婆多比丘莊嚴阿毘曇偈願令一 切衆生智慧漸增疾得解脫
雜阿毘曇心論卷第十一
甲辰歲高麗國分司大藏都監奉勅彫造
  1. 1)고ㆍ집ㆍ멸ㆍ도의 지혜를 말한다.
  2. 2)범어로는 vijñāna
  3. 3)범어로는 vidyā
  4. 4)고통을 인지하는 것
  5. 5)범어로는 kalpa. 겁이란 지극히 긴 시간을 가리킨다.
  6. 6)범어로는 ṡastrakalpa
  7. 7)범어로는 rogakalpa
  8. 8)범어로는 durbhikṣakalpa
  9. 9)범어로는 gandhamādanagiri. 설산(히말라야) 북쪽에 있다는 산으로, 향취산(香醉山)이라고도 한다.
  10. 10)광란이면서 산란이 아닌 경우.
  11. 11)산란이면서 광란이 아닌 경우.
  12. 12)광란이면서 산란인 경우.
  13. 13)광란도 아니고 산란도 아닌 경우.
  14. 14)아직 경지에 이르지 못한 경계
  15. 15)부처의 32상의 과보
  16. 16)범어로는 sattva
  17. 17)범어로는 bodhi-sattva
  18. 18)이하 법구(法救)의 주장.
  19. 19)범어로는 sarvāstivādin. 설일체유부(一切有部)
  20. 20)범어로는 vataiputrīya. 독자부(犢子部)
  21. 21)범어로는 Dharmaguptaka. 법장부(法藏部) 혹은 법밀부(法密部)
  22. 22)일생보처(一生補處)의 보살을 말한다.
  23. 23)범어로는 Aṡvalayana suutra.
  24. 24)일체유부(一切有部)를 말한다.
  25. 25)일체유(一切有)를 말한다.
  26. 26)신근(信根)ㆍ정진근(精進根)ㆍ염근(念根)ㆍ정근(定根)ㆍ혜근(慧根)
  27. 27)곧, 유(有)의 세계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8. 28)일체유부(一切有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