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C_IT_K0963_T_010
- 028_0690_a_01L존바수밀보살소집론 제10권
- 028_0690_a_01L尊婆須蜜論卷第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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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바수밀(尊婆須蜜) 지음
승가발징(僧伽跋澄) 등 한역
송성수 번역 -
028_0690_a_02L尊婆須蜜造
符秦罽賓三藏僧伽跋澄等 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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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게건도 ② - 028_0690_a_04L菩薩所集偈品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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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자 우바이(優婆夷)는 더듬으면서 물 길[水道]을 따라 걸었다. 이윽고 가다가 자벌레[尺蠖]가 되어서 갔으며 나아가 유상삼매(有想三昧)에 들어가자 다시는 능히 인연을 반연하여 소멸하는 유상무상(有想無想)이 보이지 않았으므로 그는 세존께 여쭈었다. - 028_0690_a_05L尊者優婆夷,謨以水道步,尋往作尺蠖行,乃至入有想三昧,更不復見緣能因緣,滅有想無想。彼問世尊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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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혼자 흐름[流]이 한량없사와
의지하지 않으면 건널 수 없나이다.
저를 위해 그 인연 말씀하시어
의지하여 저 언덕[피안]에 가게 하소서. -
028_0690_a_08L我獨流無量,
不依不能度,
與我說其緣,
所依度彼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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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혼자 흐름이 한량없다’라는 것은 혼자일 뿐이요 둘이 아니라는 것이며 연이 없는[無緣] 나고 죽는[生死] 흐름을 건널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유상무상(有想無想)을 건널 수 없다는 것이다.
또 말하면, 하나의 무명의 흐름[一無明流]을 건널 수 없다는 것이다.
‘저를 위해 그 인연 말씀하시어’라는 것은 넓은 눈[普眼]으로 두루 저 눈이 없는 이들을 반연하여 나고 죽는 흐름을 건너게 해 주시라는 것이니, 이것은 유상무상을 무명의 흐름을 건넌다는 것을 말한다. - 028_0690_a_10L我獨流無量者,獨一者謂不二,無緣生死流不能得度。復作是說:不能度此有想無想。復作是說:一無明流不能得度。與我說其緣者,普眼遍彼緣無眼度生死流,此謂有想無想度無明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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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용념정(不用念定)을 관하면서
그 것에 의지하여 흐름[流]을 건너라.
어떻게 욕애(欲愛)를 끊느냐 하면
애(愛)가 다하도록 그것을 관한다. -
028_0690_a_16L觀不用念定,
依彼而度流,
云何斷欲愛,
愛盡於彼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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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용념정을 관한다’라는 것은 무루(無漏)의 불용정(不用定)을 일으키는 것이니 무상(無常)하고ㆍ괴롭고[苦]ㆍ공(空)하고 내가 없다[無我]고 하는 이와 같은 관념(觀念)을 지으면 그의 신족(神足)이 전일(專一)하여지고 처소(處所)에 머무르게 된다. 이것을 바로 휴식(休息)한다고 한다.
다시 말하자면, 불용정을 관할 적에는 열반(涅槃)의 휴식을 관하게 된다. 이와 같이 하면 그대는 흐름을 건너고 거기서 탐애[愛]를 소멸한다. 마치 그 탐애가 먼저 다해진 것과 같다. - 028_0690_a_18L觀不用念定者,起無漏不用定,無常苦空無我。作如是觀念者,專精其神足住止處所,是謂休息。復作是說:觀不用定時,觀涅槃休息。如是汝度流,於彼而滅愛,猶如彼愛先盡。
- 028_0690_b_02L【문】3계(界)의 모든 탐애는 욕심[欲]에 염착(染著)하는가?
- 028_0690_b_02L問:三界諸愛,染著於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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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하자면, 탐애에 머무르면서 다하게 하고 또한 구(求)하면서 다하게 하여야 한다.
또 말하면, 그 탐애가 아직 다하지 못하면 모든 전(纏)은 달라붙고 머무르게 되나 외도로써 소멸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그릇된 이론을 버리고 여의면서 그가 착한 이론[善論]을 들으면 탐애는 자주자주 물러나게 된다. 이 때문에 세존께서는 그릇된 이론을 버리라고 말씀하셨다. - 028_0690_b_03L復作是說:住愛而使盡,亦當使求盡。復作是說:彼愛未盡,諸纏著住,非以外道而滅。去離非論,彼聽善論,愛數數使退。以是故世尊使告離非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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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가 다하도록 그것을 관한다’라는 것은 그는 열반에 대하여 타락한다는 생각[墮想]이 있어서 스스로가 지키고 지니는지라 이에 세존께서는 열반에서 휴식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온갖 욕심에서 탐애가 없게 되는 것은 불용정에 의하여 고요한 생각[寂想]으로 해탈하여 가장 수승해지는 것이니 거기에 머물러 일으키지 않게 된다.
온갖 욕심에서 탐애가 없게 되면 삼계에서 욕심이 다하고 욕계의 결(結)이 영원히 다하는 것이니 현성(賢聖)의 도로써 탐애를 다하게 되며, ‘불용정에 의지한다’라 것은 불용정삼매(不用定三昧)는 두루 유상무상(有想無想:非想非非想)과 그 밖의 세 가지에 의지하지 않는다. - 028_0690_b_07L愛盡於彼觀者,彼於涅槃有墮想,彼自守持。於是世尊說不涅槃休息。一切欲無愛,依不用定寂,寂想解脫最勝,住彼而不起。一切欲無愛者,於三界欲盡,欲界結永盡,以賢聖道盡愛。依不用寂定者,不依不用定三昧周有想無想及餘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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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열반에 의지하는 생각으로 해탈하는 것이 가장 수승하다면 생각은 유상무상에서 해탈하며, 또 열반의 휴식에 머무르면 거기에 머물러서 일으키지도 않고 거기서 물러난다고 해도 역시 일으키는 바가 없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 028_0690_b_13L若依涅槃想解脫最勝者,想解脫有想無想。若住涅槃休息者,彼住不起於彼退,亦無所起。世尊說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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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머무르면 일으키지 않으며
무수겁(無數劫) 동안 정안(淨眼)은
그 양쪽에서 해탈한 것이니
식(識)은 맹세코 전(傳)한 바를 안다. -
028_0690_b_16L彼住而不起,
無數劫淨眼,
於彼兩解脫,
識誓知所傳。
- ‘거기에 머무르면 일으키지 않으며 무수겁 동안 정안(淨眼)은’이라고 하는 것은 또한 오래도록 머물러야 한다는 대답이며 ‘그 양쪽에서 해탈했다’라는 것은 거기에서 반열반(般涅槃)했다는 것이다. ‘식은 맹세코 전한 바를 안다’라는 것은 “나는 거기서 물러났다 해도 또한 다시는 생기지 않았으며 생기는 데서도 맹세코 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 028_0690_b_18L彼住而不起無數劫淨眼者,答曰:亦當久住於彼兩解脫,於彼般涅槃。識誓知所傳,我於彼退轉亦復不生,不於生入而入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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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불이 바람에 불리어서
꺼져 없어지는 것을 셀 수 없듯이
능인(能仁)이 명색(名色)에서 벗어나며
꺼져 없어진 것도 셀 수 없느니라. -
028_0690_b_22L猶火風所吹,
沒滅不可數,
仁能名色脫,
沒滅不可數。
- 028_0690_c_02L‘마치 불이 바람에 불리어서 꺼져 없어지는 것이 셀 수 없다’는 것은 마치 그 불이 공중에서 꺼져 없어지지 않아도 또한 셀 수 없는 것과 같아서 동쪽 서쪽으로 갔다는 것이며, ‘능인이 명색에서 벗어났다’라는 것은 명(名)은 네 가지의 무색음[四無色陰]이요, 색(色)은 몸과 몸[身身]이니 그것이 함께하는 것을 명색이라고 한다.
- 028_0690_b_24L猶火風所吹沒滅不可數者,如彼火不於空中滅,亦不可稱數、若往東方西方。能仁名色脫者,名四無色陰、色身身,彼俱曰名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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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에 빠져도 반드시 밝음으로 돌아오므로
만일 빠지면 지금과 같이 없는데도
유상(有常)이라는 생각을 짓나이다.
정안(淨眼)이시여, 저에게 말씀해 주소서. -
028_0690_c_05L沒冥必還明,
若沒如今無,
作有常之想,
淨眼與我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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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에 빠져도 반드시 밝음으로 돌아온다’라는 것은 “어떤 것을 밝음이라 하는가?”라고 물으면 “마치 해의 광명이 비추는 것과 같다”고 하는 것이다.
‘만일 빠지면 지금과 같이 없다’라는 것은 항상 존재하거나 단멸(斷滅)하거나 간에 처소로 돌아가 청정한 무더기[淨聚]에 들어간다는 것이며 ‘정안이시여, 저에게 말씀하여 주소서’라는 것은 “저를 위하여 널리 펴 나타내소서. 세존께서는 알지 못하시는 것이 없나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 028_0690_c_07L沒冥必還明,問:云何爲明?猶如日明照。若沒如今無者,若有常若斷滅,還處入淨聚。淨眼與我說,與我布現,尊無所不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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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져 없어져서 셀 수 없는 것을
원컨대, 없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면
온갖 탐애[愛]는 흩어지고 여의리니
또한 온갖 뜻[一切義]도 흩어지게 하소서. -
028_0690_c_11L沒滅不可數,
願說所無者,
散離一切愛,
亦散一切義。
- ‘꺼져 없어져서 셀 수 없다’라는 것은 유한(有限)한 법 그것이 없다는 것이요, ‘원컨대, 없는 것이라고 말씀한다’라는 것은 모든 탐애가 다한다는 것이다. 모든 탐애는 유한한 수량[限數]이지만 거기에는 이런 탐애의 모든 음(陰)이 없다는 것이다. 행(行)을 말미암아 생기는 것은 모든 음의 한이 있는 수량이라 거기에도 이 음은 없다. ‘온갖 탐애가 흩어지고 여의리니 또한 뜻도 흩어지게 하소서’라는 것은 삼계의 탐애가 다하라는 것이다.
- 028_0690_c_13L沒滅不可數者,有限之法彼則無也。願說所無者,諸愛盡者諸愛限數,彼無有此愛諸陰。由行生者諸陰限數,彼無此陰。散離一切愛者,亦散一切義,三界愛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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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이나 석종의 아드님[釋種子]께 물었사오나
정안(淨眼)게선 수결(授決)하지 않으시므로
이제 세 번까지 이르렀나이다. 대선(大仙)이시여,
수결하소서. 저는 듣고 싶사옵니다. -
028_0690_c_18L二問釋種子,
淨眼不授決,
乃至三大仙,
授決我欲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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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이나 석종이 아드님께 물었사오니 정안께서는 수결하지 않으셨다’라는 것은, 그가 그때에 두 가지의 질문을 한 것이니 “어떻게 세간을 관하며 또한 죽고 나는[死生] 것을 보지 않는가?”라고 하였으나 세존께서는 수결(授決)을 주시지 않으셨다. 왜냐 하면 그를 가르치려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세 번을 말하면 수결하신다는 것을 듣고 그 중에서 말하기를 “이제 세 번까지 이르렀나이다. 대선이시여, 수결하소서. 저는 듣고 싶사옵니다”라고 한 것이다. - 028_0690_c_20L二問釋種子淨眼不授決,彼爾時作二問:云何觀世間,亦不見死生?世尊不與授決。何以故?欲教訓之。彼亦聞三語而授決,於中作是說,乃至三大仙授決我欲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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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_0691_a_02L지금 세상[今世]과 뒷 세상[後世]과
범천상(梵天上)과 모든 하늘[天]을
보아도 또한 아는 것이 없사오니
구담(瞿曇)의 넓으신 덕은 지극하나이다. -
028_0691_a_02L今世及後世,
梵天上諸天,
見亦無所知,
瞿曇者德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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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세상’이란 이 인간의 세상이요, ‘뒤의 세상’이란 악한 세계[惡趣]를 말하며, ‘범천(梵天)’이란 범가이천(梵迦夷天)을 말하고, ‘모든 하늘’이란 욕계의 하늘을 말한다.
‘보아도 또한 아는 것이 없다’라는 것은 어떻게 보겠는가? 라는 것이며 ‘구담의 넓으신 덕은 지극하나이다’라는 것은 세존의 명성(名聲)은 사방에 떨쳐 있으므로 이와 같이 세제(世諦)의 일체지(一切智)는 마치 전법륜(轉法輪)과 같아서 말씀하신 소리는 이에 범천에까지 들린다는 것이다. - 028_0691_a_04L今世者是人世,後世謂惡趣。梵天者謂梵迦夷天,諸天者謂欲界天。見亦無所知者,云何見?瞿曇普德至者,世尊聲振四方。如是世諦一切智,猶如轉法輪說聲,聞乃至梵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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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이와 같이 보고자 하면서
뜻이 들어갈 바[所歸]를 논(論)한다 하면
어떻게 세간을 관하면서
죽고 나는[死生] 것을 보지 않겠나이까? -
028_0691_a_09L若欲如是見,
義論之所歸,
云何觀世間,
而不見死生?
- ‘만일 이와 같이 보고자 한다’라는 것은 이와 같은 미묘한 지혜를 성취한다 해도 세간과 그리고 하늘과 범천은 보아 알지 못한다는 것이요 ‘뜻이 돌아갈 바를 논한다’라는 것은 수결(授決)의 돌아갈 바를 듣고 싶어한다는 것이며 ‘어떻게 세간을 관하면서 죽고 나는 것을 보지 않겠는가?’라는 것은, ‘어떻게 6입(入)을 관하면서 그 밖의 다른 경계를 내지 않겠는가?’라고 하는 것이다.
- 028_0691_a_11L若欲如是見者,如是成就妙智,世間及天、梵天而不知見。義論之所歸者,欲聞受決之所歸。云何觀世間而不見死生者,云何觀六入,不生餘境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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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간을 관하니 모두 다 공(空)이요
어리석은 왕도 또한 오로지 생각하며
그로써 아견(我見)을 능히 뽑아냈나니
이와 같이 하면 나는 곳[生處]을 초월한다. -
028_0691_a_15L觀世皆悉空,
愚王亦專念,
以能拔我見,
如是越生處。
- 세간을 관하건대 모두 공이요 또한 스스로도 어리석은 왕이라고 본 것이니, 그 때에 세존은 그들을 위하여 공(空)과 상(常)을 말씀하시기를 ‘오로지 염(念)을 이동(移動)하지 않으면 삿된 일[邪事]을 생각하게 되지 않고 의지(意止:念住) 중에서 논다’고 하신 것이며, ‘아견(我見)’이란 어리석은 몸에 대한 소견[身見]이요 그것을 소멸시켰다는 것이니 이와 같이 하면 죽는 곳[死處]을 건너고 또한 염부(閻浮)의 경계에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 028_0691_a_17L觀世皆悉空,亦自見愚王。爾時世尊爲說空,常專不移動念者,不念邪事遊意止中。我見者,是愚身見。而滅之,如是度死處,亦不生閻浮境界。
- 028_0691_b_02L존자 발소로(拔蘇盧)는 단멸(斷滅)과 유상(有常)을 들었으나 그 때에 세존께서는 수결(授決)을 주시지 않았으므로 그는 또한 제3구(句)의 자취로서 수결한다는 것을 듣고 그 가운데서 두 번이나 석가 종족의 아드님[釋種子]께 물었다는 것이다. ‘지금 세상’고 ‘뒤의 세상’이란 바로 욕계의 하늘[欲界天]이요 ‘범천’이란 범가이천이며 그리고 ‘하늘’이라고 하는 것은 그 밖의 색계의 하늘[色界天]이다.
- 028_0691_a_21L尊者拔蘇盧作是說:聞斷滅有常,爾時世尊不與授決。彼亦聞第三句迹而授決,於中作是說:二問釋種子。今世後世者是欲界天,梵天者梵迦夷天,及天者及餘色界天。
- ‘보아도 역시 알지 못한다’라는 것은 중적(中跡:中道) 중에 머물러 알지 못한다는 것이요, ‘이와 같이 보는 바[所見]를 초월한다’라는 것은 이와 같은 미묘한 지혜를 성취하여도 세간과 하늘을 알지 못하는 것이 마치 이 가운데서 또한 단멸(斷滅)과 유상(有常)에서와 같이 세간의 단멸과 유상을 관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죽고 나는[死生] 것을 보지 않겠는가?’라는 것은 “어떻게 단멸과 유상을 제외하고서 중적에 머물러 나고 죽는 언덕[生死岸]을 초월하겠는가?”라고 하는 것이며, ‘세간을 관하건대 모두 다 공이다’라는 것은 스스로 깨달을 바[所覺]에 돌아가 만일 단멸과 유상이면 그는 모두가 다 공(空)하다고 관하면서 그의 맨 끝[邊際]에 머문다는 것이니 이와 같이 “6입(入)을 말하면 곧 나고 죽는 언덕을 초월할 수 있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 028_0691_b_03L見亦不知者,住中迹中而不知。如是越所見者,成就如此妙智,世及天者不能解知。如此中亦斷滅有常,觀世斷滅有常而不見死生。云何除斷滅有常而住中迹越生死岸?觀世皆悉空者,自還所覺。若斷滅有常,彼觀皆悉空,住其邊際。如是觀六入,則能越生死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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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녀(天女)들이 에워싸는 곳과
또한 요사스런 도깨비에 친근(親近)하는
그 동산을 우혹(愚惑)이라 하나니
어떻게 편안한 처소를 얻게 되겠는가? -
028_0691_b_10L天女衆所圍,
亦親近妖魅,
彼園名愚惑,
云何獲安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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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녀들이 에워싸는 데’라는 것은 그 수행하는 사람에게 33천(天)의 천녀들이 에워싸서 하늘의 음악을 연주하는 것을 듣게 된다는 것이요, ‘또한 요사스런 도깨비에 친근하다’라는 것은 33천 거리의 어귀와 문지방의 좌우에는 과원(果園)과 묙욕하는 못[浴池]이 있는데 사천왕(四天王)의 여러 여귀(女鬼)들은 얼굴빛이 흉악하고 소리가 거칠어서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기뻐한다는 것이다.
‘그 동산을 우혹이라 한다’라는 것은 여러 동산에 있는 열매들은 맛이 아주 좋아서 그지없고 하늘의 5악(樂)은 스스로 즐겁게 하므로 사람들을 능히 미혹되게 한다는 것이요, ‘어떻게 편안한 처소를 얻게 되겠는가?’라는 것은 “어떻게 벗어날[出要] 수 있겠는가?”라고 하는 것이다. - 028_0691_b_12L天女衆所圍,彼修行人聞三十三天。天女衆所圍者,以天音樂亦親近妖魅。三十三天在街巷頭,門閾左右園果浴池。四天王有諸女鬼,顏色弊惡聲響麤獷,喜恐怖人。彼園名愚惑者,雜園果甚樂無極。天五樂自娛、園能惑人,云何獲安處者?云何得出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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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道]을 이름하여 평등하다고 하고
그 방소[方]를 두려워하지 않다고 하며
일은 또한 소리가 없다고 하고
깨닫는 법[覺法]을 두루 갖춘다고 한다. -
028_0691_b_19L彼道名曰等,
彼方名不恐,
事亦名無聲,
覺法名具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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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_0691_c_02L‘그 길을 이름하여 평등하다고 한다’는 것은 흐려서 어두운 것도 없고 또한 굽지도 않다는 것이요 ‘그 방소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라는 것은 열반(涅槃)을 방소[方]라고 하고 거기에는 생ㆍ노ㆍ병ㆍ사의 두려움이 없다는 것이다.
‘일은 또한 소리가 없다’라는 것은 지관(止觀), 이것을 일이라 하고 결의 집착[結著]이 없기 때문에 소리가 없다고 하며 또는 현성(賢聖)의 무루삼매(無漏三昧)이다. ‘깨닫는 법을 두루 갖춘다’라는 것은 깨닫는 것은 벗어남[出要]과 함께 상응해서이다. - 028_0691_b_21L彼道名曰等者,無曀亦不曲。彼方名不恐者,涅槃名曰方,於彼無生病老死之恐。事亦名無聲者,止觀是名事,無有結著故曰無聲。若賢聖無漏三昧覺法之具足者,覺出要與共相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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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慚)에도 또한 연(緣)이 있지 않고
염(念)은 사람을 도와 순종하며
지혜는 능히 수레[車]를 어거하고
등견(等見:正見)은 앞에서 인도하며 나아가게 한다. -
028_0691_c_04L慚亦不有緣,
念者將從人,
智慧能御車,
等見先導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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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慚)에도 또한 연이 있지 않다’라는 것은 모든 결(結)의 더러움[穢惡]을 부끄러워하는 것이니, 그것은 마치 배나 수레와 같으며 이와 같은 참을 반연하여 도의 뜻[道意]을 일으키면 다시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염(念)은 사람을 도와 순종한다’는 것에서 염은 마치 수레 위를 범 가죽으로 덮는 것과 같고 또는 표범 가죽으로 싸 놓아도 두려워서 그의 짬[便]을 얻지 못하고 친근할 수도 없다는 것이니 원수나 도적이 그의 짬을 얻지 못하게 하는 것이며 도와 순종한다는 것은 모든 악행(惡行)에 친근할 수 없게 한다는 것이다. - 028_0691_c_06L慚亦不有緣者,慚諸結穢惡,彼猶如船車,如是緣慚而起道意,不復思惟。念者將從人,猶如車以虎皮覆上,若豹皮纏恐不得其便不可親近,若怨家盜賊不得其便。如是念,將從不得親近諸惡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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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는 능히 수레를 어거한다’라는 것은 마치 수레를 시종하는 사람과 같고 좋은 수레와 같아서 이와 같은 도(道)에서의 지혜는 가장 으뜸이다.
‘이 도는 수레를 어거하는 것과 같다’라는 것은 도와 도가 아님을 아는 것이요, ‘마치 수레를 어거하는 것과 같다’고 함은 수레를 모시고 가면서 의당 나아가야 할 곳이면 곧 나아간다는 것이니 이와 같아서 지혜가 물러나려 할 적에는 곧 용맹스런 뜻을 일으키므로 뜻이 만일 치성(熾盛)하다면 곧 휴식(休息)하게 되는 것이며, 마치 ‘수레를 어거하는 것과 같다’고 하는 것은 나아갈 곳을 알면 곧 나아가는 것이니 이와 같이 지혜는 방편을 사유(思惟)한다.
‘등견(等見)은 앞에서 인도하며 나아가게 한다’는 것은 등견이 앞에 있어 도(道)를 수행하게 된다는 것이다. 세존께서 또한 말씀하시기를 ‘등견은 등지(等志:正思惟)를 낸다’고 하셨다. - 028_0691_c_12L智慧能御車者,猶如侍車人、如好車。如是道智慧最,是道猶如御車者,知道非道猶如御車者侍車而行,應進則進。如是智慧欲退時,便起勇猛意;意若熾盛便使休息。猶如御車者,知進便進,如是智慧思惟方便。等見先導前者,等見先在前而修行道。世尊亦說:等見生等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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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하자면, 그 현성인(賢聖人)은 여덟 가지 도의 도본(道本)으로 설명하기 때문에 참(慚)이라 하고 또한 이것은 그의 행(行)을 반연하여 증상계(增上戒)를 배우게 되므로 ‘염(念)은 사람을 도와 순종한다’고 한 것이며, 증상심(增上心)을 배우게 되므로 ‘지혜는 능히 수레를 어거한다’고 설명했다.
‘등견은 앞에서 인도하며 나아가게 한다’라고 하는 것은 다시 말하자면 그 수레는 바로 그의 처소요, 뭇 행으로 참(慚)을 두루 갖추게 하며 ‘이것이 그의 연(緣)이다’라는 것은 세 가지가 있으니 도(道)의 등어(等語:正語)와 등업(等業:正業)과 등명(等命:正命)이다. - 028_0691_c_19L復作是說:如彼賢聖人,八種道本亦說故曰慚。亦是彼緣行學增上戒,念者將從人也。學增上心,說智慧御車也,等見先導前者。復作是說:彼車是其處,衆行具足慚,是其緣者有三種:道等、語業、等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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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_0692_a_02L‘염은 사람을 도와 순종한다’는 것은 등념(等念:正念)이요, ‘지혜는 능히 수레를 어거한다’는 것은 등지(等志:正思惟)와 등방편(等方便:正精進)이다. ‘등견은 앞에서 인도하며 나아가게 한다’라는 것은 곧 등견(等見)이다.
다시 말하자면 ‘모든 지관(止觀) 이것은 식(食)이다’라는 것은 마치 본래 수레의 설명과 같고, ‘참(慚)도 또한 이것이 연(緣)이다’라는 것은 계(戒) 이것이 바로 식(食)이며, ‘염은 사람을 도와 순종한다’는 것은 지(止) 이것이 그의 식이요, ‘지혜는 능히 수레를 어거한다’는 것은 관(觀) 이것이 그의 식이다. - 028_0692_a_02L念者,將從人等念也。智慧能御車者,等志、等方便也。等見先導前者,卽等見也。復作是說:諸止觀是食者,如本車所說。慚亦是緣者,戒是其食。念將從人者,止是其食。智慧能御車者,觀是其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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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이는 이와 같은 탈 것[乘]이 있나니
뭇 백성[衆萌]의 남녀 무리
그들은 이와 같은 수레를 타고
머뭄이 없는 방소[無住方]에 가 이른다. -
028_0692_a_07L諸有如此乘,
衆萌男女類,
彼乘如此車,
往至無住方。
- ‘모든 이는 이와 같은 탈 것이 있나니, 뭇 백성이 남녀무리’라는 것은 그들은 이미 도(道)를 수행하고 있는 이들이며 그 탈 것으로써 ‘머뭄이 없는 방소에 가 이른다’는 것이니, 그들은 이미 도를 수행하고 있으면서도 아직 열반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곧 열반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 028_0692_a_09L諸有如此乘衆萌男女類者,彼已修行道,以乘往至無住方。彼已修行道,未至涅槃便使至涅槃也。
-
다섯은 끊었고 다섯은 이미 없앴으며
5상(上)을 수행하고
다섯의 수(數)를 비구가 초월했다면
이것을 바로 이미 흐름을 건넜다고 한다. -
028_0692_a_12L五斷五已滅,
修行五上者,
五數比丘過,
是謂已度流。
- ‘다섯은 끊었다’라는 것은 5개(蓋)요 ‘다섯은 이미 없앴다’는 것은 5하분결(下分結)이며 ‘5상을 수행한다’라는 것은 이것은 바로 5근(根)이요 ‘다섯의 수를 비구가 초월했다’라는 것은 이미 5상분결(上分結)을 초월했다는 것이며, ‘이것을 바로 흐름을 건넜다’라는 것은 이미 생사(生死)의 흐름을 건넜다는 것이다.
- 028_0692_a_14L五斷者,五蓋也。五已滅者,五下分結也。修行五上者,是五根也。五數比丘過者,已越五上分結。是謂度流者,已度生死流也。
- 다시 말하자면, ‘다섯은 끊었다’라는 것은 다섯 가지 사견[五邪見]이요, ‘다섯은 이미 없앴다’라는 것은 이것은 바로 다섯 가지 신결[五身結]이며 ‘5상의 것을 수행한다’라는 것은 다섯 가지 선종[五禪種]이다. ‘다섯 수를 비구가 초월했다’라는 것은 그 욕심의 수[欲數]를 건넜다는 것이니, 설명한 바와 같이 집착하는 욕심 이것을 욕심의 수라고 하며, ‘이것을 바로 흐름을 건넜다고 한다’는 것은 이미 욕류(欲流)를 건넜다는 것이다.
- 028_0692_a_18L復作是說:五斷者,五邪見也。五已滅,是五身結也。修行五上者,五禪種。五數比丘過者,已度彼欲數。如所說,著欲是謂欲數。是謂度流者,已度欲流。
- 다시 말하자면 ‘다섯은 끊었다’는 것은 5취(趣) 중의 결(結)이요 ‘이미 다섯을 없앴다’는 것은 이것은 5도(道)이며, ‘5상의 것을 수행한다’는 것은 다섯 가지 해탈[五解脫]에 든다는 것이다. ‘다섯의 수를 비구가 초월했다’는 것은 곧 그 5취(趣)를 초월한 것이며, ‘이것을 바로 흐름을 건넜다고 한다’는 것은 생사의 흐름을 건넜다는 것이다.
- 028_0692_a_22L復作是說:五斷者,五趣中結也。已滅五者,是五道也。修行五上者,五解脫入也。五數比丘過者,卽越彼五趣。是謂度流者,度生死流也。
- 028_0692_b_02L다시 말하자면 ‘다섯은 끊었다’는 것은 다섯 가지 마음의 속박[五心縛]이요, ‘이미 다섯은 없앴다’는 것은 마음의 다섯 가지 더러움[五穢]이며, ‘5상의 것을 수행한다’는 것은 다섯 가지의 염결[五念結]이요, ‘다섯 수를 비구가 초월했다’는 것은 마음의 다섯 가지의 속박[五縛]을 건넌 것이며, ‘이것을 바로 흐름을 건넌다고 한다’는 것은 생사의 흐름을 건넌다는 것이다.
- 028_0692_b_02L復作是說:五斷者,五心縛也。已滅五者,心五穢也。修行五上者,五念結也。五數比丘過者,已度心五縛也。是謂是度流者,度生死流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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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가지는 깨우고[覺] 그리고 잠자는[眼寐] 것이요
다섯 가지는 잠자고 그리고 깨우는 것이며
다섯 가지는 티끌 때[塵垢]를 받는 것이 있고
다섯 가지는 바로 청정한 행[淸淨行]이다. -
028_0692_b_06L五覺及眠寐,
五眠寐及覺,
有五受塵垢,
五是淸淨行。
-
‘다섯 가지는 깨우고 그리고 잠자는 것’이란 다섯 가지의 사견[五邪見]은 잠자는 것이요 다섯 가지 근[五根]은 잠을 깨우는 것이며 ‘다섯 가지는 잠자고 그리고 깨우는 것’이란 다섯 가지 근은 잠을 자는[睡眼] 것이요 다섯 가지의 사견은 잠을 깨우는 것이다.
‘다섯 가지는 티끌 때를 받는 것이 있다’는 것은 다섯 가지의 소견[五見]이요, ‘다섯 가지는 바로 청정한 행이다’는 것은 다섯 가지 근[五根]이다.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신결(身結)과 역결(力結)은 염의 처소(處所)요 하분(下分) 중의 선수(禪數)이며 상분(上分) 중의 해탈(解脫)이니 아나함(阿那含)에 들어간 범부인(凡夫人)이다. - 028_0692_b_08L五覺及眠寐者,五邪見睡眠、五根興寐。五睡眠及覺者,五根睡眠、五邪見覺寐。有五受塵垢者,五見也。是五淸淨行者,五根也。如是五身結力結念處所,下分中禪數、上分中解脫,入阿那含凡夫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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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지 않는[不樂] 가운데에 바삐 달리고
속박과 집착을 기르는 것은
마치 어둠에서 등불에 달려드는 것 같나니
보고 듣는 것은 하나로 짓는 것이다. -
028_0692_b_14L奔走不樂中,
養新新縛著,
猶奔冥燈火,
見聞一所作。
-
‘좋아하지 않는 가운데 바삐 달린다’는 것은 이미 유상(有常)에 달리는 것을 끊고 해탈하여 단멸(斷滅)을 좋아하지 않고 다시 단멸과 유상을 여의고서 유상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며 ‘새록새록 속박과 집착을 기른다’는 것은 생기는 소견[見]의 모든 속박을 더욱 늘게 하는 것을 말한다.
‘마치 어둠에서 등불에 달려든 것 같다’는 것은 마치 발승가층(鉢勝伽虫:불나방)이 등잔불에서 잠깐 쉬겠다는 생각에서요 몸을 버리고 여의겠다고 하여 떨어지는 것은 아닌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사견(邪見)을 지으며 잠깐 쉬겠다는 생각이 있는 것은 버리고 여의겠다는 생각을 하면 떨어진다는 것이다.
‘보고 듣는 것은 하나로 짓는 것이다’라는 것은 청정한 것을 보면 청정한 연[淨緣]이 있고 청정한 것을 들으면 청정한 연이 있으나 이와 같은 것은 온갖 모든 소견이란 것이다. - 028_0692_b_16L奔走不樂中者,已斷解脫奔有常,不樂斷滅;復離斷滅有常,不樂有常。養新新縛著者,謂所生見增益諸縛。猶奔冥燈火者,猶如鉢勝伽虫飛蛾,油燈休息想非捨離墮,作如是邪見有休息想,作捨離想墮。見聞一所作者,見淨有淨緣、聞淨有淨緣,如是一切諸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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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_0692_c_02L다시 말하자면 ‘좋아하지 않는 가운데에 바삐 달린다’는 것은 5욕(欲) 가운데를 좋아하지도 않고 한 가지의 욕심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요, ‘새록새록 속박과 집착을 기른다’는 것은 욕애(欲愛)의 속박에 떨어진다는 것이며, ‘보고 듣는 것은 하나로 짓는 것이다’는 것은 욕 중에 머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좋아하지 않은 가운데 바삐 달린다’는 것은 욕계를 좋아하지 않고 색계와 무색계 가운데서 바삐 달린다는 것이니 그 밖의 나머지도 또한 그와 같다. 달려 나아가는 바와 같은 것은 지금 깨닫는 바와 같다.
어떤 이는 “또한 다시 이 일은 결(結)에 달려가기를 좋아하지 않고 해탈(解脫)에 달려가 견고해지고 새로운 해탈을 향하여 견고해진다”고 말했다. - 028_0692_b_24L復作是說:奔走不樂中者,不樂五欲中不樂一欲。養新新縛著者,欲愛縛墮。見聞一所作者,住五欲中。復作是說:奔走不樂中者,不樂欲界,奔走色無色界中。餘亦如是,如奔所趣,如今所覺。或作是說:亦復此事不樂奔結,走解脫牢固,向新解脫牢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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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음은 세간을 덮어 씌우고
죽음에 에워싸이는 바가 되며
중생은 탐애[受]의 병을 앓고
법은 세간에 머무른다. -
028_0692_c_07L老覆蓋世間,
爲死所圍繞,
衆生患愛病,
法住於世間。
- ‘늙음은 세간을 덮어 씌운다’는 것은 덮어 씌워서 해탈을 얻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며, ‘죽음에 에워싸이는 바가 된다’는 것은 또한 달아나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니 설명한 바와 같다.
- 028_0692_c_09L老覆蓋世間者,所覆不得解脫。爲死所圍繞者,亦不得走避。如所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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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도 아니요 바다 속도 아니며
산과 돌 사이에 드는 것도 아니니
벗어나 머무르며 죽음을 받지 않는
어떠한 땅이나 방소도 없다. -
028_0692_c_11L非空非海中,
非入山石間,
無有地方所,
脫止不受死。
- ‘중생은 탐애의 병을 앓는다’는 것은 탐애의 속박에 얽혀서 삼계를 건널 수 없다는 것이며, ‘법은 세간에 머무른다’는 것은 세간의 여덟 가지의 법[八法]에 머무르는 것이니, 열 가지 선행의 자취[十善行迹]이어서 혹은 선(善)이기도 하고 혹은 불선(不善)이기도 하다.
- 028_0692_c_13L衆生患愛病者,愛縛所纏不能度三界。法住於世間者,住世八法,十善行迹或善或不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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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하자면 12인연(因緣)에 머문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고(苦)의 해(害)를 당하게 되므로 도(道)에 머무르게 된다”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일곱 가지의 법에 머문다”고 말한다.
어떤 이는 “그 일[事]이 어떻게 세간에 머무르겠는가?”라고 말한다. - 028_0692_c_16L復作是說:住十二因緣。或作是說:爲苦所害,使住道也。或作是說:住於七法。或作是說:其事云何住世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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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偈頌)의 연(緣)이 일(事)이 되고
문자(文字)는 단 맛이 되며
이름에 의하면 게송이 있고
짓는 것은 게송의 몸[身]이다. -
028_0692_c_19L偈頌緣爲事,
文字爲甘味,
依名而有偈,
造者偈之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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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의 연은 일이 된다’는 것은 뜻에 바라는 것을 곧 게송으로 지어서 부연하여 읊고 외는 것이요, ‘문자는 단 맛이 된다’는 것은 분류하면 문자가 있되 차례로 분간하면 널리 펴 행한다는 것이다.
‘이름에 의지하면 게송이 있다’는 것은 이름에 의하여 짓는 것이니 마치 10구게(句偈)와 같으며 ‘짓는 것은 게송의 몸이다’는 것은 게송을 짓는 것이 우두머리가 된다는 것이다. - 028_0692_c_21L偈頌緣爲事者,意欲便造偈敷演諷誦。文字爲甘味者,分有文字次第分間布行。依名而有偈者,依名造作,猶如十句偈。造者偈之身,造偈頌爲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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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_0693_a_02L여섯 가지로써 세간을 일으켰으니
여섯 가지는 이미 업(業)을 성취하였으며
여섯 가지는 세간의 법을 지었으니
여섯 가지로 고뇌(苦惱)를 받는 것이 있다. -
028_0693_a_02L以六興起世,
六已成就業,
六造世間法,
有六受苦惱。
- ‘여섯 가지로써 세간을 일으켰다’는 것은 여섯 가지 애신[六愛身]이요, ‘여섯 가지는 이미 업을 성취하였다’는 것은 여섯 가지 병신[六病身]이며, ‘여섯 가지는 세간의 법을 짓는다’는 것은 안으로 짓는 6입(入:六根)이요, ‘여섯 가지로 고뇌를 받는 것이 있다’라고 하는 것은 바깥[外]의 6입(入:六境)이다.
- 028_0693_a_04L以六興起世者,六愛身也。六已成就業者,六病身也。六造世間法者,造內六入也。有六受苦惱者,外六入也。
- 다시 말하자면 ‘여섯 가지가 세간을 일으킨다’는 것은 여섯 가지 애신[六愛身]이요, ‘여섯 가지는 이미 업을 성취하였다’는 것은 바깥의 6입이며 ‘여섯 가지는 세간의 법을 짓는다’는 것은 6진(塵)을 짓는 것이요, ‘여섯 가지로 고뇌를 받는 것이 있다’는 것은 여섯 가지의 통신[六通身:六受身]이다.
- 028_0693_a_07L復作是說:以六興起世者,六愛身也。六已成就業者,外六入也。六造世閒法者,造六塵也。有六受苦惱者,六痛身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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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방(方)은 사방이 아니요
상하(上下)는 가장 수승한 계(界)이어서
듣지도 못하고 깨달아 알지도 못하나니
법을 설하여 나로 하여금 깨나게 하도다. -
028_0693_a_11L四方非四方,
上下最勝界,
不聞不覺知,
說法使我寤。
- ‘사방은 사방이 아니요, 상하는 가장 수승한 계이다’라는 것은 당연히 결(結)의 성향(聲響)이라고 말해야 하고 ‘듣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한다’는 것은 쌓인 무더기[集聚]의 모양이기 때문에 처소도 없고[無所] 모를 것도 없다는 것이며 ‘법을 설하여 나로 하여금 깨나게 하도다’라는 것은 도심제(道審諦)와 출요(出要)의 업을 설명한다는 것이니, 세존께서는 근기를 아시어 법의 뜻을 설명하셔서 나로 하여금 제 때에 깨칠 수 있게 하신다.
- 028_0693_a_13L四方非四方上下最勝界者,當言結聲響。不聞不覺知者,集聚之相,故曰無所、無不知。說法使我寤者,說道審諦出要之業。世尊知根說法之義,使我時得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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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다하여 새로 짓지 않고
유(有)에 대하여 애착(愛着)이 없으며
종자가 다한 법[種盡法]은 생기지 않고
열반(涅槃)은 마치 등불이 꺼진 것과 같다. -
028_0693_a_18L本盡不造新,
於有無愛著,
種盡法不生,
涅槃猶燈滅。
- ‘본래 다하여 새로 짓지 않는다’는 것은 과거의 탐욕이 다한 것이요 ‘다시 새로 짓지 않는다’는 것은 미래의 탐욕이 다했다는 것이며, ‘유에 대하여 애착이 없다’는 것은 현재의 탐욕이 다했다는 것이요 ‘종자가 다한다’는 것은 식의 종자[識種]가 다했다는 것이며, ‘법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은 식처(識處)가 생기지도 않고 행구(行垢)를 제거한다는 것이다.
- 028_0693_a_20L本盡不造新者,過去貪欲盡。更不造新者,未來貪欲盡也。於有無愛著者,現在貪欲盡也。種盡者,識種及所生有種盡也。法不生者,彼識處不生,除去行垢。
- 028_0693_b_02L‘열반은 마치 등불이 꺼진 것과 같다’는 것은 일어나지 않은 것이 곧 열반이니 마치 등불이 꺼진 것과 같다는 것은 한량없이 동방(東方)과 다시 남방(南方)에 가 이른다는 것이니 이와 같아서 아라한은 반열반(般涅槃)하는 것이 한량없다.
- 028_0693_b_02L涅槃猶燈滅者,不起便涅槃。猶如燈滅者,不可限量。住至東方若後南方,如是阿羅漢般涅槃不可限量。
- 다시 말하자면 ‘본래부터 다했다’는 것은 과거의 결(結)이 소멸한 것이요, ‘새로이 짓지 않는다’는 것은 미래의 때[垢]가 다한 것이며 ‘유에 대하여 애착이 없다’는 것은 현재의 때가 다한 것이요, ‘종자가 다한다’는 것은 이것이 바로 때이며, ‘종자가 다한 법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은 다시 받아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다. 열반은 환하면서 때가 없는 것이요, 유(有)를 지어서 속박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028_0693_b_05L復作是說:本盡者,過去結滅。不造新者,未來垢盡。於有無愛著者,現在垢盡。種盡者,此垢。種盡不生法者,更不受住。涅槃者,㸌然無垢。猶燈滅者,不爲造有所縛。
- 다시 말하자면 ‘본래 다했다’는 것은 과거의 행(行)으로서 보(報)를 받을 만한 바의 것을 다했다는 것이요, ‘새로이 짓지 않는다’는 것은 새로이 때[垢]를 짓지 않는다는 것이며, ‘유에 대하여 애착이 없다’는 것은 행에는 다른 남은 것이 있어서이다.
- 028_0693_b_09L復作是說:本盡者,過去行盡所可受報者也。不造新者,新垢不造。於有無愛著者,行有餘。
-
또 말하자면 ‘본래 다했다’는 것은 인(因)이 다한 것이요 ‘새로이 짓지 않는다’는 것은 그 인에 대하여 과실(果實)이 없다는 것이며, 유에 대하여 애착한다‘는 것은 그것에서는 그와 다른 남은 것이 있어서이다.
또 말하자면 ‘본래 다했다’는 것은 6입(入)이 다하고 그리고 본래의 행[本行]이 공(空)하다는 것이요, ‘새로이 짓지 않는다’는 것은 새로이 행을 짓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머지의 것도 또한 그와 같다. - 028_0693_b_11L復作是說:本盡者,因盡也。不造新者,於彼因無有果實。於無愛著者,於彼有餘。復作是說:本盡者,六入盡及本行空。不造新者,不造新行。餘亦如是。
-
이 왕(王)의 수레는 썩어 못쓰고
몸도 또한 그와 같이 썩었거니와
참된 법은 썩어 못쓰지 않으며
자기에 있어서 평균(平均)함에서다. -
028_0693_b_15L此王車朽敗,
身亦如是朽,
眞法不朽敗,
於己而平均。
-
‘이 왕의 수레는 썩어 못쓰게 되었다’는 것은 파사닉왕(波斯匿王)의 수레가 몹시 썩어 있었기 때문에 광채가 없다는 것이요, ‘몸도 또한 그와 같이 썩었다’는 것은 이와 같이 몸도 갖추어져 있는 데[隱匿處]는 늙고 병듦의 핍박을 받아서 광채가 없다는 것이다.
‘참된 법은 썩어 못쓰지 않다’는 것은 또한 파리하거나 연약하지 않은 것이니, 왜냐 하면 자기에 있어서 평균(平均)하기 때문이다. ‘평균한 법’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도제(道諦)가 바로 그것이다. 모든 부처님의 설법(說法)은 바로 평균한 법이다. - 028_0693_b_17L此王車朽敗者,王波斯匿車在,深朽故無有光色。身亦如是朽者,如是身在隱匿處,爲老病所逼,無有光顏。眞法不朽敗者,亦不羸弱,何以故?於己平均。平均法,何者是?道諦是也。諸佛說法是平均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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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道)는 8등(等)을 묘함으로 삼고
성제(聖諦)에는 4구(句)가 있으며
욕심이 없는 법[無欲法]은 으뜸가고
두 가지 족(足)은 눈이 되어 준다. -
028_0693_b_23L道爲八等妙,
聖諦有四句,
無欲法爲上,
與二足作眼。
- 028_0693_c_02L‘도는 8등으로 묘함으로 삼는다’는 것은 온갖 모든 도(道)는 현성(賢聖) 8도로 으뜸을 삼는다는 것이요, ‘성제에는 4구가 있다’는 것은 온갖 모든 진리[諦]는 현성제(賢聖諦)로 으뜸을 삼고, 온갖 모든 법(法)은 열반의 휴식[息]으로 묘함을 삼는다는 것이며, ‘두 가지 눈이 되어 준다’는 것은 온갖 중생은 부처님으로 가장 성(聖)을 삼는 것이니 온갖 것을 죄다 아시기 때문이다.
- 028_0693_c_02L道爲八等妙者,一切諸道賢聖八道爲上。聖諦有四句者,一切諸諦賢聖諦爲上,一切諸法涅槃息爲妙。與二足作眼者,一切衆生,佛最爲聖,一切悉知。
- 【문】마치 실제로 열반의 도는 존재하는 것과 같거늘 무엇 때문에 두 가지의 일을 쌍(雙)으로 내는가?
- 028_0693_c_07L問:猶如實有涅槃道,何以故雙出二事?
-
존자 인다라(因陀羅) 사문의 이름으로 “구(求)하는 것은 도(道)가 되고 벗어남[出要]은 열반이 되며 공하지 않은 것은 진리[諦義]가 된다”라고 말하였다.
존자 비사카(毘舒佉)는 “마치 지(智)가 경계에서 회전하는 것처럼 도(道)도 또한 그와 같고 마치 지에 경계가 있는 것처럼 그와 같은 것은 진리[諦]요 열반이며, 마치 결을 끊는 것과 같고 지에 경계가 있는 것과 같아서 진리에도 또한 그와 같다”고 말했다. - 028_0693_c_08L於尊因陁摩羅沙門名作是說:求爲道,出要爲涅槃,不空爲諦義。毘舒佉作是說:猶如智於境界廻轉,道亦如是。猶如智有境界,如是諦涅槃猶如斷結。猶如智有境界,諦亦如是也。
-
각(覺:尋)의 거침[麁]과 각의 미세함과
뜻이 몹시 방자하여 두려워할 바는
이것은 지(智)로 깨닫는 것이 아니니
뜻은 간혹 모든 취(趣)로 달려 나간다. -
028_0693_c_13L覺麤亦覺細,
意盛慢所畏,
此非智所覺,
意或奔諸趣。
-
‘각의 거침’이란 불선(不善)이요, ‘각의 미세함’이란 선의 유루(有漏)이며 모든 유(有)를 받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각의 거침’이란 견제에서 끊을 바[見諦所斷]요, ‘각의 미세함’이란 사유에서 끊을 바[思惟所斷]이다.
또 말하자면, ‘각의 거침’이란 욕계와 상응하고 ‘각의 미세함’이란 색계와 상응한다. - 028_0693_c_15L覺麤者,不善也。覺細善有漏,受諸有也。復作是說:覺麤者,見諦所斷。覺細者,思惟所斷。復作是說:覺麤者,與欲界相應。覺細者,與色界相應。
-
또 말하자면 ‘각의 거침’이란 각의 욕[覺欲]이요 ‘각의 미세함’이란 각의 지[覺智]이다.
‘뜻이 몹시 방자하여 두려워할 바’란 스스로의 뜻[自意]이요 내는 바의 뜻[所生意]이며 내닫는 뜻[流馳意]이다. 내닫는 것[流馳]은 함께 상응하면서 깨닫고 아는 것[覺知]이니, 이와 같이 무명(無明)과 함께하는 지(智)는 그것에도 각(覺)이 있다. 저마다 달려나가면서 차츰차츰 깨닫고 알며 마음과 뜻은 언제나 어지럽다. - 028_0693_c_19L復作是說:覺麤,覺欲也。覺細者,覺智也。意盛慢所畏者,自意所生,意流馳意,流馳與相應覺知。如是與無明智,彼有覺也。各各馳走,展轉覺知心意常亂。
-
이와 같이 뜻이 깨닫고 알면서
번뇌가 없는 위의(威儀)와 염(念)이
마음과 뜻에 있고 치성(熾盛)하며
남음이 없음[無餘]은 모든 부처님의 멸(滅)이다. -
028_0693_c_23L如是意覺知,
無惱威儀念,
在心意熾盛,
無餘諸佛滅。
- 028_0694_a_02L‘이와 같이 뜻이 깨닫고 안다’는 것은 깨닫고 아는[覺知] 데에 평등하게 머물러 점차로 방편을 삼는다는 것이요, ‘번뇌가 없는 위의와 염’ 가운데에서 ‘위의’란 또한 깨닫지 않는 것[不覺]이요 ‘염’이란 한 가지의 일에만 마음을 쏟는다는 것이니, 마음이 이동하지 않으면서 머무는 것이 염(念)과 같아서 다름이 없다. ‘치성하다’는 것은 남김 없이 소멸하는 것이니 부처님이라야 영원히 소멸하게 한다.
- 028_0694_a_02L如是意覺知者。等住覺知漸爲方便。無惱威儀念者。威儀者亦不覺。念者。專其念。心不移動住者。如念無異。熾盛者無餘之所滅。佛能永滅。
-
【문】의심되는 데에 의심이 없고 몸의 욕사(欲使)를 끊으면 그것 또한 부처님인가?
【답】모든 부처님은 바로 법이며 모든 부처님께 친근(親近)하는 것은 여기에서의 계경(契經)이다.
또 모든 계(界)는 부처님만이 소멸시키는 바요, 성문(聲聞)은 모든 계를 소멸시킬 수 없다.
다시 말하자면 ‘남음이 없다[無餘]’라는 것은 모든 부처님의 경계이다. - 028_0694_a_06L問:疑無有疑、身絕欲使,彼亦是佛耶?答曰:諸佛是法,親近諸佛於此契經。復次諸界佛所滅,聲聞不能滅諸界。復作是說:無餘諸佛境界滅。
-
하늘은 멀고 땅은 끝이 없으며
큰 바다도 또한 끝이 없나니
해와 달의 광명이 내려오는 곳과
그리고 그것이 소멸하는 처소에
진실이 있고[有實] 진실이 없는[無實] 법의
이것을 바로 네 가지 극히 멂[四極遠]이라고 한다. -
028_0694_a_10L天遠地無邊,
大海亦無際,
日月降光處,
及其滅處所,
有實無實法,
是謂四極遠。
-
‘하늘은 멀고 땅은 끝이 없다’는 것은 게송에서 자세히 설명한 것이니, 이에 ‘소멸하는 처소’까지이다. 방소[方]가 먼 것은 다 같이 초월했다는 것이다.
‘진실이 있고 진실이 없는 법’이란, 이것은 바로 네 가지 극히 먼 것[四極遠]이니 스스로 지극히 먼 것은 이 법의 도(道)이며, ‘진실이 없는 법’이란 바로 더러운 때(垢)이다. - 028_0694_a_12L天遠地無邊者,偈廣說。乃至滅處,方遠俱越。有實無實法者,是四極遠自極遠,此法道,無實法是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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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하자면 ‘진실이 있는 법’이란 열 가지의 선(善)이요 ‘진실이 없는 법’이란 열 가지의 불선법(不善法)이다.
또 말하자면 ‘진실한 법’ 이것은 열반이요, ‘진실이 없는 법’ 이것은 생사(生死)이다. - 028_0694_a_15L復作是說:有實法十善,無實法十不善法。復作是說:實法是涅槃,無實法是生死。復作是說:實法是諦,無實法是諸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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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말하자면 ‘진실한 법’ 이것은 일곱 가지의 법[七法]이요, ‘진실이 없는 법’ 이것은 일곱 가지 그릇된 법[七非法]이다.
또 말하자면 ‘진실한 법’은 모든 부처님의 대요[要]로서 법교(法敎)를 부연하여 법마다 널리 밝히지 아니함이 없다. 평등한 법[等法:正法)이 곧 법교이며, 그것은 이에 오래지 않은 자연의 이치이다. - 028_0694_a_18L復作是說:實法是七法,無實法是七非法。復作是說:實法諸佛之要,敷演法教,無法不闡等法印法教也,彼於是不久自然之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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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바니마왕(優婆尼摩王)과
이미 잠에서 깨는[覺寤] 것과 달려가는 [馳走] 것이며
게송이 연과 세간의 멸해 다한 것과
생(生)ㆍ노(老)와 도(道)와 하늘의 멂[天遠]이다. -
028_0694_a_22L優婆尼摩王,
旣覺寤馳走,
偈緣世滅盡,
生老道二遠。
- 게건도 제2를 마친다.
- 028_0694_a_24L偈揵度第二品竟。
- 028_0694_b_02L14. 게건도 ③
- 028_0694_b_02L尊婆須蜜菩薩所集偈品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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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목숨 다하도록 어리석으면
모든 지혜 있는 이를 친근한다 해도
그는 법을 분명히 알지 못하는 것이
마치 국자의 자루[杓:용수]가 맛을 분멸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
028_0694_b_03L盡形壽愚癡,
親近諸智者,
彼不識了法,
猶杓不別味。
-
‘몸과 목숨을 다하도록 어리석다’는 것 중에서 어리석다라는 것은 착한 말과 나쁜 말의 뜻을 알 만한 이런 힘이 없는 것을 말하며, 그는 목숨을 다하기까지 모든 아는 이[知識]를 친근한다 해도 역시 법을 분명하게 알지 못한다.
지(智)는 잠깐 동안에 있는 것이라 모든 지를 친근하면 그는 법을 분명하게 아는 것이니 마치 혀가 맛을 모조리 분별하는 것과 같으며 지는 잠깐 동안에 있는 것이라 모든 지혜 있는 이를 친근하는 것이니 지(智)란 모든 음(陰)을 잘 지니고 선(善)에 잘 들어간 것을 말한다. - 028_0694_b_05L盡形壽愚癡,愚癡者謂之,無此力勢知善語惡語義。彼盡形壽親近諸知識,亦不解了法。智在須臾間,親近諸智,彼能識了法,猶舌盡別味。智在須臾間,親近諸智者,智者謂之諸陰善持善入善。
- 또 이 세력은 모든 기교(器敎)를 이룬다. 어리석은 이는 이런 세력이 없으므로 12인연을 알지 못한다고 하지만 지혜 있는 이는 이런 세력이 있으므로 13인연을 해설한다고 한다. 어리석은 이는 성제(聖諦)의 그릇을 이루지 못하지만 지혜 잇는 이는 네 가지를 헤아린다[數四]고 하는 것이니 네 가지로 진리를 연설하기[四演諦] 때문에 지는 잠깐 동안에 있는 것이라 모든 지혜 있는 이를 친근한다라고 한다.
- 028_0694_b_11L又此力勢成諸器教。愚癡者謂之無此力勢,不能解十二因緣。智者謂之有此力勢,說十二因緣。愚癡者不成聖諦之器,智者謂之數,四四演諦,故曰智在須臾間,親近諸智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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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죽을 데에서 죽지 않고
머물 데인데도 머물지 않음은
가난하나 또한 보시하기를 좋아해서이니
이 법에는 이치가 없는 것이 아니다. -
028_0694_b_15L彼於死不死,
住者亦不住,
於窮亦好施,
此法非無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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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죽을 데에서 죽지 않는다’는 것은 질투하는 가운데 질투로 죽을 데서 죽지만 보시하기 좋아하는 이는 질투의 집착에서도 죽지 않는다는 것이니 지혜의 목숨[智慧命]으로써 살아가게 된다.
‘머물 데인데도 또한 머물지 않는다’는 것은 마치 쫓기는 장사꾼이 길을 잃으면 나쁜 짐승이나 도둑의 해침을 입게 됨과 같으며, 길을 잃지 않은 사람이면 나쁜 짐승이나 도둑의 해를 당하지 않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것에는 이 보시하는 것이 으뜸이 된다. 빈궁하면서도 보시할 수 있다는 것은 그는 외롭고 곤궁한 이들을 가엾이 여겨서이니 이것은 아득히 멀고 오래된 때부터의 떳떳한 법[常法]이다. - 028_0694_b_17L彼於死不死者,於嫉妒中於妒死而死,好施者於妒著不死;以智慧命爲活,住者亦不住。猶如逐商人失道,爲惡狩盜賊所害。猶不失道人,不爲惡獸盜賊所害。此最是施。於貧能施者,彼愍孤窮,此久遠常法。
- 028_0694_c_02L어떤 이는 ‘그가 죽을 데에서 죽지 않는다’는 것은 간탐과 질투[慳嫉]로는 악취(惡趣) 중에서 죽지만 보시하기를 좋아하면 천상(天上)에 나게 되어 저축한 양식이 앞에 있게 된다는 것이니 마치 장사꾼이 양식이 모자랐을 적에 곧 곤액(困厄)을 만나는 것과 같다. 적은 데서도 보시할 수 있는 이 법이 바로 외롭고 궁하다는 것이니 “이것을 외롭고 궁한 법이라 한다”고 말했다..
- 028_0694_b_23L或作是說:於彼死不死者,慳嫉於惡趣中死,好施者生天上儲糧在前。猶如商人糧食乏少便遭困厄。於少能施者,此法是弧窮,是爲孤窮之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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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즐거이 목숨을 보존하게 된 이면
이는 구담(瞿曇)의 제자이다.
목숨을 보존하되 스스로 짧은 것과
무상(無常)함을 아는지라 보시하는 바를 구한다.. -
028_0694_c_04L本樂得存命,
此瞿曇弟子,
保命自知短,
無常求所施。
-
방석도 또한 무상하고
세간의 무상함을 깨닫고 아는지라
생활[命]에 만족할 줄 알고 채우기[滿] 쉽나니
본래 고(苦)의 근원을 다한다.. -
028_0694_c_06L坐具亦無常,
覺知世無常,
命知足易滿,
本盡苦原本。
- ‘본래 즐거이 목숨을 보존하게 된다’는 것은 그 때에 모든 하늘들은 모든 게으름을 피는 비구들을 위하여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여 “본래부터 즐거이 목숨을 보존하게 되면서 만족할 줄 알면 채우기도 쉽고 기르기도[養] 쉬워서 선락삼매(禪樂三昧)에 잘 머무르게 된다”고 말한다는 것이며 ‘무상함을 아는지라 보시하는 바를 구한다’는 것은 또한 남아 있게 하지 않고 구걸로써 생활하게 된다는 것이다.
- 028_0694_c_07L本樂得存命者,爾時諸天爲諸懈惓比丘說佛語:本樂得存命。知足易滿易養,禪樂三昧善居止。無常求所施者,亦不留遺餘,以乞求爲命。
- ‘방석도 무상하다’는 것은 나무 아래의 공터[空處]에 있으면서 그 안에서 유희(遊戱)하면 뜻이 한 곳에만 쓰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며, ‘세간의 무상함을 안다’는 것과 ‘본래 고의 근원을 다한다’는 것은 6입(入)의 무상함을 알아서 생사(生死)의 흐름을 건너게 된다는 것이다.
- 028_0694_c_11L坐具無常者,在樹下空處,遊戲其中,意不專一處。知世無常者,本盡苦原本,知六入無常度生死流。
- 다시 말하자면 ‘본래 즐거이 목숨을 보존하게 된 이면 이는 구담의 제자이다’라는 것은 본래부터 지혜로써 생명을 삼는다는 것이요 ‘무상한지라 보시하는 바를 구한다. 방석도 또한 무상하다’는 것은 무상하다는 생각으로써 구걸하고 다시 무상하다는 생각으로써 그 방석에 앉아 있는다는 것이다. ‘세간의 무상함을 깨닫는지라 본래부터 고(苦)의 근원을 다한다’는 것은 무원해탈(無願解脫)을 수행하여 지을 것이 없음을 깨달으면서 반열반(般涅槃)한다는 것이다.
- 028_0694_c_14L復作是說:本樂得存命者,此瞿曇弟子,本以智慧爲命,無常求所施。坐具亦無常者,以無常想乞求,復以無常想處彼坐具。覺世無常本盡苦原本者,修無願解脫,覺無所造而般涅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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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는 무엇으로써 아는가?
지혜는 반드시 어려움이 있지 않고
무엇으로써 지혜가 아는가 하면
이것을 이름 하여 바로 지혜라고 한다. -
028_0694_c_19L以何智慧知,
慧必不有難,
以何智慧知,
是謂名爲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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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_0695_a_02L‘무엇으로써 지혜는 아는가? 지혜는 반드시 어려움이 있지 않다’는 것은 어떤 지혜인가? 생각하는 그대로요[如想] 차이가 없다는 것이며, ‘무엇으로써 지혜는 아는가? 이것을 이름하여 바로 지혜라 한다’는 것은, 어떠한 것들로써 지혜는 아는가? 이미 안 것으로서 안다는 것이다.
만일 법에 어려운 것이 없고 모든 법에 두 가지 생각[二想]이 없으면 그 가운데 지혜는 무엇으로써 아는가 하는 이것을 바로 지혜라고 한다는 것이니 모든 법에는 두 가지 생각이 없고 두 가지로 생기는[二種生] 것이 없기 때문이다. - 028_0694_c_21L以何智慧知慧必不有難,是何智?如想無有異。以何智慧知是謂名慧者,以何等智慧?知已知而知者,若法無有難諸法無有二想,於中以何智慧知?是謂名爲智慧。諸法無有二想、無有二種生。
- ‘지혜는 무엇으로써 아는가 하는 이것을 이름하여 바로 지혜라고 한다’는 것은 이 지혜의 지(智)로 이미 알았다면 곧 이것은 알았다[知]는 것이니, 이것이 무슨 지혜인가? 마치 온갖 무상하다는 지[無常智]의 지(智)도 역시 무상하며 온갖 무아라는 지[無我智]도 역시 무아(無我)인 것과 같다. 마치 온갖 지[一切智]가 있으면 또한 앎이 있는[有如] 것과 같다.
- 028_0695_a_04L以何智慧知?是謂名爲智慧。此智慧智已知,便是其知,此是何智?猶如一切無常智,智亦無常;一切無我智,智亦無我。猶如有一切智亦有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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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어미가 있어서 낳은 것[生者]이 있다면
소[牛]를 나오고 소를 들어가게 하는 것이요,
또한 소가 자라고 크는 것도 있으리니
바란다면[欲者] 하늘에서 곧 비가 오리라. -
028_0695_a_08L有寡有生者,
出牛入牛者,
亦有牛長大,
欲者天便雨。
- ‘홀어미가 있어 낳은 것이 있다’는 것은 단니소(檀尼所)는 원래 홀어미였는지라 암소[牸牛]를 낳지 못하는데도 기억으로 유추해 앞에 있으면서 ‘뒤에는 소를 몬다[驅牛]는 것과 소가 자란다[牛長]는 것과 큰 소가 자란다[大牛長]’라고 한다면 홀어미는 없다는 것이니 낳는 것[生者]이 없으며 소를 나오게 하고 소를 들어가게 하는 것도 또한 없을 것이요 또한 소가 자라고 큰다[長大]는 것도 없다는 것이다. ‘바란다면 하늘에서 곧 비가 온다’는 것은 홀어미는 없다는 것이니 세존께서도 ‘온갖 것에 나타난 것이 없으면 취(取)할 바도 없다’라고 말씀하셨다.
- 028_0695_a_10L有寡有生,檀尼所由原,寡不生牸牛,憶來導引前,在後驅牛者。牛長者,大牛長無寡,無有生者,出牛入牛者亦復無也,亦無有牛長大。欲者天便雨,無寡。世尊作是說:一切無現無所取。
-
다시 말하자면 색계와 무색계의 결(結)은 다하지 않은 이가 없다는 것이요 남이 없는[無生] 이는 욕계에서 결을 다하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이다.
‘소를 기억한다[憶牛]’는 것은 무명(無明)이요, ‘들어가게 한다’는 것은 그와 상응한 심심법(心心法)이며 그것과 함께 회전하는 것은 심불상응행(心不相應行)이요, ‘소가 자라고 크게 한다’는 것은 여기에서 만(慢)이 다하고 할 일[所作事]을 다 마쳤다는 것이다. - 028_0695_a_15L復作是說:色無色界結無有不盡者,無生者,欲界無有結不盡者也。憶牛者,無明也。入者,彼相應心心法,與彼廻轉心不相應行。牛長大者,於此慢盡所作事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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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냄도 없고 찌꺼기도 없애고서
흐르는 물가에서 하룻밤을 묵나니
오두막은 한데[露]의 나를 크게 덮는구나.
만일 바란다면 하늘에선 비가 오리. -
028_0695_a_20L無怒除去穢,
流水側一宿,
廬露我大覆,
若欲天便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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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_0695_b_02L‘성냄도 없고 찌꺼기를 없애고서 흐르는 물가에서 하룻밤을 묵는다’는 것은 성내는 것도 없고 찌꺼기도 제거했다는 것을 나타낸다는 것이요 진에(瞋恚)가 다하고 큰 찌꺼기[大穢]도 제거되어 다했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며, ‘흐르는 물가에서 하루를 묵는다’는 것은 길을 가다가 거기서 묵게 된 것이니 소 치는 이[牧牛者]를 교화하고자 하는 것이다.
갖가지의 간사하고 거짓된 것은 모두가 몸에서의 간악한 것이어서 그것은 부정(不淨)한 소견의 뿌리이며 간사하다[姦]는 것은 식신(識身)이니 그것도 역시 다했다는 것이다. ‘나는 이미 불을 제거했으므로 세 가지 불[三火]이 꺼졌다’는 것이다. - 028_0695_a_22L無怒除去穢流水側一宿者,現無怒。除穢者,現瞋恚盡、大穢除盡。流水側一宿者,涉道於彼宿也。欲化牧牛者,種種奸僞盡身奸、彼不淨見根,奸是識身,彼亦盡也。我已除火,三火息。
-
나는 이미 옥실(屋室)을 보았기에
다시는 애착(愛着)을 일으키지 않는데
그대는 모조리 위협[脅勒]으로 꺾는지라
옥사는 모두가 파괴되었도다. -
028_0695_b_04L我已見屋室,
更不起愛著,
汝盡脅勒摧,
屋舍皆壞敗。
-
‘나는 이미 옥사를 보았다’는 것은 탐애[愛]로 만든 유(有)를 받는 것이 바로 옥사이다.
다시 말하자면 ‘옥사’란 이 사이의 만[間慢]이다.
다시 말하자면 ‘옥사’란 바로 유루의 행[有漏行]이다.
또 말하자면 ‘옥사’란 모든 식(息)을 일으키는 것이다. - 028_0695_b_06L我已見屋者,愛受諸有是屋舍。復作是說:屋舍者,此間慢也。復作是說:屋舍是有漏行。復作是說:屋舍者,起諸識。
-
‘다시 애착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은 다시 더 유(有)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대는 모조리 위협으로 꺾었다’는 것은 애욕(愛欲)이 이미 다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위협[脅勒]’이란 이 만(慢)과 상응한 법에 대하여 그것을 영원히 다했다는 것이다.
또 말하자면 ‘위협’이란 모든 행(行)을 일으키는 결(結)을 다했다는 것이다.
또 말하자면 ‘위협’이란 이 탐애를 다했다는 것이다. - 028_0695_b_10L更不起愛著者,更不復受有。汝盡脅勒摧者,愛欲已盡。復作是說:脅勒者,於此慢相應法彼永盡。復作是說:脅者,起諸行結彼盡也。復作是說:脅者,是愛彼盡。
-
‘옥사가 파괴되었다’는 것은 5성음(盛陰)을 다하여 남음이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옥사가 모두 파괴되었다’는 것은 신견(身見)을 다하여 남음이 없다는 것이다.
또 말하자면 ‘옥사’는 바로 무명(無明)인데 그는 다하여 남음이 없다는 것이다.
또 말하자면 ‘옥사’란 이것은 식이 머무르는 곳[識處住]인데 그는 다하여 남음이 없다는 것이다. - 028_0695_b_14L屋舍壞敗者,五盛陰,彼盡無餘。復作是說:屋舍皆壞敗者,身見,彼盡無餘。復作是說:屋舍是無明,彼盡無餘。復作是說:屋舍是識處住,彼盡無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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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잠을 잘 잘 수[眼寐] 있으면
또한 다시 근심[愛]이 보호되는 바며
마음이 언제나 선(禪) 중에서 즐기면
욕사(欲使)는 파괴되어 기쁘고 즐겁다. -
028_0695_b_18L人能善眠寐,
亦復憂所護,
心常樂禪中,
欲使壞娛樂。
- ‘사람이 잠을 잘 잘 수 있다’라고 하는 것은 아타라바시카법(阿吒羅婆尸佉法)의 수결(授決) 가운데서 자세하게 설명되었다. 아타라바(阿陀羅婆)는 “그도 또한 근심하지 않는 것이 마치 내가 근심하던 바와 같다”고 말하였으며, 세존께서 “그가 근심하지 않는 것이 마치 내가 근심하던 바와 같구나”라고 말씀하셨다.
- 028_0695_b_20L人能善眠寐者,阿咤羅婆尸佉法授決中廣說也。阿咤羅婆作是說:彼亦不作憂,如我所憂。世尊說:彼不作憂,如我所憂。
-
028_0695_c_02L그는 구걸(求乞)을 따르는 이라 하여
그가 비구라고는 하지 못하며
옥사의 법[屋舍法]을 받아 취하면
이와 같은 이는 비구가 아니다. -
028_0695_b_24L彼不爲比丘,
從彼乞求者,
受取屋舍法,
如是非比丘。
- 「비구계경(比丘契經)」에서 “그는 비구라고 할 것이 아니다”라고 한 것이니 비구가 비구로서 할 행(行)의 법을 짓지 못한다는 것이며 ‘가법(家法)’이란 ‘옥사(屋舍)를 받아 취하는 것’이니 모든 옥사의 행을 짓는다는 것이다. 걸식(乞食)을 한다 하여 비구가 되는 것도 아니다.
- 028_0695_c_03L比丘契經彼非爲比丘,不作比丘作比丘行法。家法者,受取屋舍作諸屋舍行,非以乞食爲比丘也。
-
복(福)이 있거나 악(惡)이 있거나 간에
제거하고 범행(梵行)을 닦고
연마하여 없애면서 받아 일으키지 않아야
그런 이를 바로 비구라 한다. -
028_0695_c_06L若有福有惡,
除去修梵行,
練滅受不起,
彼謂之比丘。
-
‘복이 있거나 악이 있거나 간에’라고 하는 것 중에서 복이란 바로 선유루(善有漏)의 행음(行陰)이요 악은 불선(不善)이다. ‘제거한다’란 이미 끊었다는 것을 말하며 ‘범행’이란 그 도(道)를 수행한다는 것이다.
‘연마하며 없애면서 받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은 온갖 악마들[魔家]을 항복받고 모든 결(結)을 항복 받는다는 것이요 행(行)이란 바로 머무른다는 것이며 ‘그를 바로 비구라 한다’는 것은 비구로서의 행법(行法)을 성취했다는 것이다. - 028_0695_c_08L若有福有惡者,福者是善有漏行陰,惡者不善。除去者,謂已斷也。梵行者,修行其道。練滅不受起者,降伏一切魔衆、降伏一切諸結。行者,是住也,彼謂之比丘成就比丘行法。
- 다시 말하자면 ‘복’이란 불용정(不用定:無所有處定)의 행이요 ‘악’이란 복이 없는 행이다. 이미 끊어 없애고서 범행을 닦는다는 것이니 이이(二二)의 3매(昧)는 이이가 같이 모인 것이다. ‘연마하여 없애면서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은 그것을 등진 행(行)의 도(道)요 의지(意止:四念處)라는 것이며, ‘그런 이를 바로 비구라고 한다’는 것은 모든 결(結)을 끊었다는 것이다.
- 028_0695_c_13L復作是說:福者不用定行,惡者無福行。已斷滅彼而修梵行,二二三昧二二共會。練滅不起者,背彼彼道意止,彼謂之比丘斷諸結。
-
푸른 수[靑數]는 흰 것[白]으로 덮은 것이며
한 바퀴살의 수레[一輻車]로 가면서
이것의 곁[邊]을 수승하게 살펴보지[勝觀] 않는다면
모든 흐름[流]의 결박(結縛)을 끊는다. -
028_0695_c_17L靑數白所覆,
一輻車而行,
不勝觀此邊,
斷諸流結縛。
- 자세한 설명은 「잡아함경(雜阿含經)」에서와 같다.
- 028_0695_c_19L廣說如『雜阿含』。
-
스물아홉 살에 수발타(修跋陀)야.
나는 출가하여 도를 행하고 배웠으며
나는 벌써 오십 년이 된 줄 아노니
그 중에서 배워라, 수발타야. -
028_0695_c_20L二十九修跋陁人,
我出家行學道,
我已知五十歲,
於中學修跋陁。
-
계율 선정의 행술(行術)을 닦고
혼자 걸으면서 사유하고 염(念)하여
법지(法智)를 부연하여 설명했나니
이것 외에는 사문이 없느니라. -
028_0695_c_22L戒定修行術,
獨步思惟念,
敷演說法智,
於此無沙門。
-
028_0696_a_02L‘계율’이란 신율(身律)과 구명(口命)이 청정한 것이요, 삼매란 모든 선(善)한 마음이며, ‘혼자 걸으면서 행한다’는 것은 바로 그의 일[事]이요, ‘술(術)’ 이것은 지(智)이다.
‘혼자 걸으면서 마음은 삼매를 사유하고 법지를 부연하여 설명했나니, 이것 외에는 사문이 없다’는 것은 지의 법[智法]이니 이것은 도(道)요 그것은 안으로 들어가며 밖으로는 사문이 없다는 것이다. - 028_0695_c_23L戒者,身律口命淸淨。三昧者,諸善心。獨步行者,是其事。術者,是智。獨步心思惟三昧,敷演說法智。於彼此無沙門者,智法是道,彼入內外無沙門。
-
【문】계(戒)와 행(行)에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답】계 이것은 유루(有漏)요, 행 이것은 무루(無漏)이다.
다시 말하자면 계 이것은 바로 학(學)이요, 행 이것은 바로 무학(無學)이다. - 028_0696_a_04L問:戒行有何差別?答曰:戒是有漏,行是無漏。復作是說:戒是學,行是無學。
-
삼매와 마음의 독처[心獨處]에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답하기를, 삼매 이것은 유루요, 한마음의 독처 이것은 무루이며, 삼매 이것은 학이요 한 마음의 독처 이것은 무학이다. - 028_0696_a_06L三昧、心獨處有何差別?答曰:三昧是有漏,一心獨處是無漏。三昧是學,一心獨處是無學。
-
다시 말하자면 계는 바로 증상계(增上戒)요 삼매는 바로 증상심(增上心)이며 행술(行術)은 증상지혜(增上智慧)이며 이것을 바로 견제도(見諦道)를 말하고 한 마음은 사유도(思惟道)이니, 이것은 견제도와 사유도를 말한다. 심히 깊은 법[甚深法]이니 이것에 조금만 들어가며 그 외에는 사문이 없다.
다시 말하자면, 계와 행은 이것이 증상계요 삼매와 독처는 증상심을 배우며 술(術)이란 증상지혜를 배우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지법(智法)이어서 조금만 들어가는 것과 같으며 그 외에는 사문이 없다. - 028_0696_a_09L復作是說:戒是增上戒,三昧是增上心行術,增上智慧是謂見諦道。一心思惟道,是謂見諦道思惟道。甚深法此少入,無外沙門也。復作是說:戒行是增上戒,三昧獨處學增上心術者學增上智慧。此是智法,如少所入,無外沙門也。
- 또 말하자면 계와 삼매는 설명한 것과 같다. 계에 대한 이런 수행은 증상행(增上行)을 배운다 하고 행술(行術)이란 바로 증상지혜이니, 이것은 증상지혜를 배운다 하여 독처(獨處)의 마음으로 사유하는 것은 바로 증상심(增上心)을 배운다고 하는 것이니 이것을 지법(智法)에 조금만 들어가는 것이요, 그 외에는 사문이 없다고 한다.
- 028_0696_a_15L復作是說:戒、三昧如所說。於戒是修行,謂學增上行。行術者,是增上智慧,是謂學增上智慧。獨處心思惟者,是謂學增上心。是謂知法少所入,外無沙門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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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량 있고 한량 없는 쌓임[集]으로
능인(能仁)은 모든 행(行)을 버리나니
스스로 안의 뜻[內情]을 삼가니
무명(無明)의 알[卵]은 스스로 파괴된다. -
028_0696_a_19L有量無量集,
能仁捨諸行,
自謹愼內情,
無明卵自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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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_0696_b_02L‘한량 있고 한량 없는 쌓임’이라 하는 것 중에서 ‘한량 있다’는 것은 바로 행보(行報)이니 유(有)를 낸 것이요 ‘모든 행’이란 이것은 수행(壽行)이니 그것을 버린다는 것이다.
‘능인’이란 바로 무학(無學)이요 능인이 안에서 즐기는[內樂] 것은 선의 해탈[禪解脫]이며 삼매의 즐거움[三昧樂]이다. 삼매 가운데서 스스로 삼가고 조심[謹愼]하면서 공(空)으로써 우두머리를 삼는 것이니 세 가지로 삼가고 조심하면 스스로 삼가는 것이 성취된다는 것이다.
‘무명의 일은 스스로 파괴된다’는 것은 마치 난막(卵膜)의 파괴와 같은 것이니 다시는 난막을 보게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와 같아서 세존은 수명(壽命)을 버리고 수명의 행(行)을 관(觀)하지 않으신다. - 028_0696_a_21L有量無量集者,有量是行報生有,諸行者是壽行捨之,能仁者是無學,能仁內樂者禪解脫三昧樂。三昧中自謹愼以空爲首,三謹愼自謹愼成就。無明卵自壞者,猶如壞卵𩌧也。不復觀卵𩌧,如是世尊捨壽命,不觀壽命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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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는 “‘한량’이란 바로 사람이요 ‘한량 없다’란 이것은 그 밖의 행[餘行]이며 행이란 모든 유(有)를 받는 행이다”라고 말했다.
‘안에서 스르로 즐긴다[有樂]’라는 것은 모든 도(道)를 즐긴다는 것이며 그 밖의 나머지도 역시 그와 같다. - 028_0696_b_04L或作是說:量者是人,無量者是餘行也。行者,受諸有行。內自樂者,樂諸道也。餘亦如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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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탐애가 머무는 곳이 없고
뜻이 점차로 트여 앎을 얻으면
그 탐애는 능인(能仁)이 없애나니
하늘과 사람은 알 수가 없네. -
028_0696_b_07L若愛無住處,
意漸得開解,
彼愛能仁除,
不知天及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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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탐애가 머무는 곳이 없다’는 것은 뜻[情]이 멋대로 거리낌 없이 놀면서 내닫는 것이니 거기에는 두 가지 탐애와 소견이 있다. ‘머무는 곳이 없다’는 것은 탐애를 말미암거나 또는 이것을 말미암음이며 뜻[意]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뜻의 탐애[意愛]와 뜻의 소견[意見]이다.
‘점차로[漸]’란 다 같이 두 세 가지 탐애를 초월하여 다한다는 것이며, ‘능인의 행(行)은 하늘과 사람은 알 수가 없다’는 것은 능인의 행을 하늘과 사람으로서는 알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 028_0696_b_09L若愛無住處者,情放逸流馳,彼有二種:愛、見也。無住處,若由愛、若由是。意有二種:意愛、意見也。漸者,俱越二三愛盡。能仁行天及人所不知,能仁行天及人所不能知。
- 다시 말하자면 ‘만일 탐애가 머무는 곳이 없다’는 것 중에서 탐애 이것은 욕애(欲愛)요 머무는 곳은 모든 소견[諸見]이며 ‘뜻이 점차로 트여 앎을 얻는다’는 것 중에서 뜻[意]이란 유애(有愛)요 점차로란 무명(無明)이니, 유(有)에서의 두 가지 애(愛)가 다했다는 것이며 ‘하늘과 사람은 알 수가 없다’란 모든 소견과 무명이 다했다는 것이다.
- 028_0696_b_14L復作是說:若愛無住處,愛是欲愛也;住處,諸見也。意漸得開解者,意是有愛,漸是無明。有二愛盡,天及人所不能知,諸見無明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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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안[內]에서 성을 냄이 없으면
유(有)와 유(有)에 곡식을 심어 거두도다.
거기에는 두려워할 걱정이 없나니
모든 하늘은 가보지 못한다. -
028_0696_b_17L若內無瞋怒,
有有獲種稷,
彼無恐畏惱,
諸天不往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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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_0696_c_02L‘만일 안에서 성을 냄이 없다’는 것은 스스로의 뜻에 성을 냄이 없다는 것이요, ‘유와 유에 곡식을 심어 거두게 된다’는 것은 중유(中有)의 유(有)를 바로 유라고 한 것이니 이 세간에서의 유이다.
‘거기에는 두려워할 걱정이 없다’는 것은 공(空)을 잘 닦았고 12인연에 밝다는 점이며 즐거움은 네 가지의 벗어나는 즐거움[四出要樂]으로써 성취한 것이다. ‘걱정이 없다’는 것은 남은 것[遺餘]이 없다는 것이니 재물의 근심에서 설령 남은 것이 있다 해도 재물 가운데서는 얻거나 잃거나 간에 역시 근심 걱정은 없다는 것이며, ‘모든 하늘은 가보지 못한다’는 것은 이미 열반을 취하여 5취(趣)를 보지 못한다는 점이다. - 028_0696_b_19L若內無瞋怒者,自喜無瞋恚。有有獲種稷者,中有有是謂有,於此間有。彼無恐畏惱者,善修空、善明十二因緣。樂者,四出要樂而成就。無惱者,無有遺餘也。財物之憂設有遺餘,財物之中若得若失亦無愁惱。諸天不往見者,已取涅槃不見五趣。
- 다시 말하자면 ‘만일 안에서 성냄이 없다’는 것은 진에(瞋恚)를 다했다는 것을 나타내고, ‘유와 유에 곡식을 심어 거두게 된다’는 것은 그 욕심이 다했다는 것을 나타내며, ‘거기에는 두려워할 걱정이 없다’는 것은 선(善)에는 근심할 것이 없고 어리석음이 다했다는 것을 나타내고, ‘모든 하늘은 가보지 못한다’는 것은 탐욕도 없고 성냄도 없고 어리석음도 없으며 이미 열반한 바라 열반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 028_0696_c_03L復作是說:若內無瞋恚者,現瞋恚盡。有有獲種稷者,現其欲盡。彼無恐畏惱者,善無有憂,現愚癡盡。諸天不往見者,無欲無瞋恚亦無愚癡,已所涅槃不見涅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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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가운데서 등정각(等正覺)은
스스로의 가르침과 오로지 바른 뜻이요
범(梵)의 자취 가운데서 놀고 다니며
항상 즐거우면서 마음은 멸하고 쉰다. -
028_0696_c_07L人中等正覺,
自訓專正志,
遊行梵迹中,
常樂心滅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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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가운데서’란 인간 세상에 태어난 이요, ‘등정각’이란 다 깨달아 모든 법을 안다는 것이며, ‘스스로의 가르침’이란 저절로 갖추어졌다는 것이요, ‘오로지 바른 뜻’이란 세 가지 삼매를 얻는 것이다.
‘범의 자취에 놀고 다닌다’는 것은 법의 중심(中心)을 공경하고 존중한다는 것이요, ‘항상 즐거우면서 마음은 멸하고 쉰다’는 것은 모든 삼매의 마음이 휴식을 얻었고 모든 결을 해친 마음이 휴식을 얻었고 그 안에서 즐긴다는 것이다. - 028_0696_c_09L人中者,生於人中。等正覺者,盡覺知諸法。自訓者,自然具。專正志者,得三三昧。遊行梵迹者,敬尊法中心。常樂滅息者,諸三昧心得休息,害諸結心得休息而樂其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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뭇 사람들이 공경하고 우러르는 바요
온갖 법[一切法]을 초월하였네.
모든 하늘[天]들도 또한 귀명(歸命)하나니
이 분을 무착(無著)이라고 들었다 한다. -
028_0696_c_14L衆人所敬仰,
盡超一切法,
諸天亦歸命,
是謂聞無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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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뭇 사람들이 공경하고 우러른다’는 것은 받들어 섬기면서 귀명한다는 것이요 ‘모조리 온갖 법을 초월했다’는 것은 모든 선법(善法)을 초월했다는 것이니 마치 모든 게송(偈頌)을 초월하고 또한 모든 불선법(不善法)을 건넌 것과 같다.
‘모든 하늘들도 역시 귀명한다’는 것은 모든 하늘들도 역시 받들어 섬기며 귀명한다는 것이며, ‘이 분을 무착이라고 들었다 한다’는 것은 그는 세존으로부터 부처님은 하늘과 사람들이 공경드리게 된다는 것을 들었다는 것이다. - 028_0696_c_16L衆人所敬仰者,承事歸命。盡超一切法者,越諸善法,猶如超諸偈頌,亦度諸不善法。諸天亦歸命者,諸天亦承事歸命。是謂聞無著者,彼從世尊聞,佛天人所供養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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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결(結)은 지나가 버렸고
동산에서 동산의 열매[園果]를 지나쳤나니
욕심에서 벗어난 즐거움은
마치 순금[眞金]을 단련하는 것과 같다. -
028_0696_c_21L一切結過去,
於園越園果,
於欲出要樂,
猶如鍊眞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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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_0697_a_02L‘온갖 결은 지나가 버렸다’는 것은 아홉 가지 결(結)을 건넜다는 것이니 이것을 바로 온갖 결은 지나가 버렸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세 가지의 결을 건넌 것도 지나가 버린 것이다.
‘동산에서 동산의 열매를 지나쳤다’는 것은 5욕(欲)으로 동산을 삼은 것이니 거기서의 탐애[愛]가 다하여 모든 탐애의 근심을 초월하고 모든 결(結)을 초월하며 유의 즐거움[有樂]을 초월했다는 것이다. - 028_0696_c_23L一切結過去者,度九結是謂一切結過去。復作是說:度於三結過去也。於園越園果者,五欲爲園,於彼愛盡,越諸愛患,越諸結越有樂。
- ‘욕심에서 벗어난 즐거움’이라는 것은 욕계에서 해탈하여 초선(初禪)을 즐긴다는 것이요, 또 ‘욕심 가운데서 벗어난 즐거움’은 청정한 곳의 즐거움이며 그 안의 것을 평등하게 즐긴다는 것이니, 이것을 바로 ‘욕심에서 벗어난 즐거움’이라고 한다. ‘마치 순금을 단련하는 것과 같다’는 것은 금(金)이 단련되어 찌꺼기와 때가 없고 지극히 묘한 것과 같다는 것이니, 이와 같이 여래(如來)는 이미 욕심을 초월하여 다하고 모든 번뇌가 없으시다는 것이다.
- 028_0697_a_04L於欲出要者,於欲解脫樂初禪。復次欲中出要樂淨處樂,等樂其中,是謂於欲出要樂。猶如鍊眞金者,如金被鍊,無有穢垢極妙,如是如來已越於欲盡無諸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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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불(佛)의 이름이 널리 퍼짐은
마치 해가 어둠을 없애는 것과 같고
세간에서 제일 높으신 것은
또한 마치 안명산(安明山:須彌山)과도 같다. -
028_0697_a_08L三佛名流布,
猶如日除冥,
於世第一尊,
亦如安明山。
- ‘삼불의 이름이 널리 퍼진다’는 것은 공덕과 명문(名聞)이 있는 세존은 사방의 위와 아래와 아가니타천(阿迦尼吒天)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명성이 들린다는 것이며, ‘마치 해가 어둠을 없애는 것과 같다’는 것은 해가 돋아 오를 적에 두루 세간을 비추는 것과 같은 것이니 어둠[冥]은 모두가 밝아지면서 그 은혜를 받지 않는 것이 없다. 이와 같아서 세존께서도 이미 정각(正覺)을 이루셔서 광명으로써 널리 3계(界)를 비추시는 것이다.
- 028_0697_a_10L三佛名流布者,功德聲聞世尊四方上下,乃至阿迦尼咤天皆聞其聲。猶如日除冥者,如日出時普照世間,冥皆爲明無不蒙其恩。如是世尊已逮正覺,以光明普照三界。
- ‘세간에서 제일 높으시다’는 것은, 이 때문에 명호를 세존(世尊)이라 한 것이며, 그 온갖 것에 실제로 밝게 비추게 되는 것이 ‘또한 안명산과 같다’는 것이니, 마치 수미산왕(須彌山王)이 뭇 산 가운데서 지극히 높고 가장 큰 것처럼 세존도 또한 그와 같으시며 온갖 중생 가운데서 게송을 지어 인도하신다.
- 028_0697_a_15L於世第一尊者,以此名爲尊,彼一切爲現照明。亦如安明者,如須彌山王於衆山中極高最大。世尊亦如是,於一切衆生中,而作偈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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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의 뜻을 설명해야 하고
또한 희망을 짓지 않으며
온갖 것을 용(龍)이라 한다면
진실로 이름을 여래(如來)라 하리라. -
028_0697_a_19L我當說其義,
亦不作悕望,
一切名龍者,
實名爲如來。
- ‘나는 당연히 그의 뜻을 설명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히 용의 공덕(功德)이어야 한다는 것이요, ‘또한 희망을 짓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존자 인다마나(因陀摩那)는 “이것은 뜻이 없는 말[無義語]이다”라고 말했고, 존자 마혜라(摩醯羅)는 “모든 여러 가지의 행(行)을 짓지 않는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 028_0697_a_21L我當說其義者,當龍功德。亦不作悕望,尊因陁摩那作是說:是無義語。尊摩醯羅作是說:不作諸衆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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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_0697_b_02L어떤 이는 “원수를 짓지 않는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설명한 것과 같다면 “또한 진에(瞋恚)가 없고 하는 일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또한 나쁜 행[惡行]을 짓지 않는다는 것이다.
‘온갖 것을 용이라 한다면 진실로 이름을 여래라 하리라’는 것은 모든 이들을 용이라고 이름한다면 온갖 것 중에서 여래가 가장 미묘한 용이라는 것이다. - 028_0697_a_24L或作是說:不作怨讎。如所說,亦無瞋恚而有所作。復作是說:亦不造惡行。一切名龍者,實名爲如來。諸有名龍者,於一切中如來最妙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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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히 참고 시새우지 않는 그는
용에게 두 발이 있는 것과 같으며
은근하게 범행(梵行)을 닦으면서
행한 바는 용이 남긴 자취이다. -
028_0697_b_05L能忍不嫉彼,
如龍有二足,
慇懃修梵行,
所行龍餘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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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히 참고 시새우지 않는 그는 용에게 두 발이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은 그는 마치 용과 코끼리가 앞 발을 숨긴 뒤에야 몸을 회전시킬 수 있는 것처럼 그와 같이 여래는 견고한 법신(法身)을 회전하게 된다는 것이다.
‘은근하게 범행을 닦으면서 행한 바는 용이 남긴 자취이다’라는 것은 마치 용과 코끼리가 뒷발을 숨긴 뒤에야 몸을 회전시킬 수 있는 것처럼 여래도 또한 그와 같아서 현성(賢聖)의 법복(法服)으로써 옛날의 모든 여래는 이미 견고한 법신을 얻고서 회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 028_0697_b_07L能忍不嫉彼如龍有二足者,彼猶龍象前腳已得隱然後身得廻,如是如來以牢固法身得廻轉。慇懃修梵行所行龍餘迹者,猶如龍象後腳以得隱然後身得廻轉,如來亦如是。賢聖法服曩昔諸如來,已得牢固法身得廻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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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큰 용과 코끼리 되고
호(護:捨)는 두 개의 흰 상아(象牙)가 되며
염(念)은 목이요 지혜는 머리이며
위의(威儀)는 법의 관[法觀]을 이용한다. -
028_0697_b_14L信爲大龍象,
護爲白雙牙,
念頸智慧頭,
威儀用法觀。
- ‘믿음은 큰 용상과 코끼리가 된다’는 것은 마치 용과 코끼리가 받아 취하는 것은 모두가 코로 말미암아 하는 것처럼 여래도 그와 같아서 믿음으로써 불선법(不善法)을 버리고 선법(善法)을 받아들이는 것이 마치 용과 코끼리가 코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삼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 028_0697_b_16L信爲大龍象者,猶如龍象受取皆由鼻。如來如是,以信棄不善法而攝善法,猶如龍象鼻最爲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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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자 담마다라(曇摩多羅)는 “이런 게송을 지은 것은 계경자(契經者)의 중대한 과실이다. 여래의 신(信)이라고는 말할 수 없으며 다시 스스로 인연(因緣)이 있다면 온갖 모든 지(智)는 수효를 세게[算數] 된다”고 말했다.
코끼리는 큰 용[大龍]이 되며 마치 용과 코끼리가 받아 취하는 것은 모두 코로 말마암아서 하는 것처럼, 여래도 또한 그와 같아서 모든 법수(法數)를 친근(親近)하고 또한 다시 분별하여 존재하는 색신(色身)을 관하며 청정한 행(行)인 여래의 호(護)도 그와 같은 것이니 현성(賢聖)의 팔품의 도[八品道:八正道]는 청정하여 티끌이나 때[塵垢]가 없다. - 028_0697_b_19L尊曇摩多羅作是,頌契經者之重過,不得言如來之信更自有因緣。一切諸智筭數,象爲大龍。猶如龍象受取皆由鼻,如來亦如是。親近諸法數,亦復分別觀有色身,淸淨行如來護亦復如是,賢聖八品道淸淨無塵垢。
- 028_0697_c_02L다시 말하자면, 마치 용과 코끼리의 어금니가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여래도 또한 그와 같아서 4등(等:無量心) 가운데에서 모든 기미(氣味)를 받고 취하여 곧 자재(自在)를 얻으신 여래의 어금니도 역시 그와 같이 용맹스럽고, 뭇 상호가 있는 여래 또한 그와 같아서 여섯 가지 선래[六善來]에 있어서도 당연히 뭇 상호와 장부의 재주[丈夫才]가 있어야 한다.
- 028_0697_c_02L復作是說:猶如龍象牙不可移動,如來亦如是,於四等中受取諸氣味便得自在。如來牙亦如是,勇猛有衆相。如來亦如是,於六善來,當有衆相好丈夫之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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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念)은 목’이라는 것은 마치 용과 코끼리의 목이 온갖 모든 맛(味)을 모조리 취하는 것처럼 여래의 신족(神足)도 그와 같아서 온갖 모든 법을 다 두루 갖추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마치 용과 코끼리의 목은 머리를 부지(扶持)하고 있는 것처럼 여래도 또한 그와 같아서 염(念)을 가장 으뜸으로 삼는다. - 028_0697_c_06L念頸者,猶如龍象頸,盡取一切諸味。如來神足亦復如是,一切諸法皆悉普具。復作是說:猶如龍象頸而扶持頭,如來亦如是,念最爲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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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는 지혜가 된다’는 것은 마치 용과 코끼리는 머리로써 목숨을 삼는 것처럼 여래도 또한 그와 같아서 지혜로써 생명을 삼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마치 용과 코끼리의 색신(色身) 가운데서 머리를 맨 위로 삼는 것처럼 여래도 또한 그와 같아서 법신(法身) 중에서 삼야삼불(三耶三佛)을 위로 삼는다. - 028_0697_c_10L頭爲智者。猶如龍象以頭爲命,如來亦如是,以智慧爲命。復作是說:猶如龍象色身之中頭最爲上,如來亦如是,法身之中三耶三佛最爲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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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는 법의 관[法觀]을 이용한다’는 것은, 어떤 이는 “이 일도 또한 그와 같아서 두 개의 눈[眼]은 법의 관을 이용한다. 마치 용과 코끼리는 좌우에 두 개의 어깨가 있는 것처럼 여래도 또한 그와 같아서 두 가지의 등신습(等身習)의 출요(出要)와 등신진(等身盡)의 출요가 있으며 자취가 소멸하면서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다시 말하자면 마치 용과 코끼리는 모든 법의 관[法觀]이 있으면 빠르게 아는 것처럼 여래도 또한 그와 같아서 뭇 상호가 있어서 중생을 안다. - 028_0697_c_14L威儀用法觀者,或作是說:此事亦如是,二眼用法觀。猶如龍象左右有兩肩,如來亦如是,有二種:等身習出要、等身盡出要,迹滅不復起。復作是說:猶如龍象有諸法觀速疾而知,如來亦如是,有衆相知衆生。
- 어떤 이는 “마치 용과 코끼리의 마음과 뜻을 뭇 모양이 있어서 걷거나 서 있거나 간에 모두 다 그것을 아는 것처럼 여래도 또한 그와 같이 색신 가운데서 머리로 맨 위를 삼고, 여래도 또한 그와 같아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는 법신 가운데서 맨 위를 삼는다”고 말했다.
- 028_0697_c_19L或作是說:猶如龍象心意有衆相,若步若行皆悉知之,如來亦如是。於色身中頭最爲上,如來亦如是,阿耨多羅三藐三菩提法身中最爲上。
- 028_0698_a_02L어떤 이는 “이것도 역시 그의 일[事]이니 법이 관에 들어가는 것이 있다. 마치 용과 코끼리의 좌우에 두 개의 어깨가 있는 것처럼 여래도 또한 그와 같아서 두 가지의 등습신(等習身)의 출요(出要)와 등진신(等盡身)의 출요가 있다”고 말했다.
- 028_0697_c_23L或作是說:此亦是其事,有入法觀。猶如龍象左右有二肩,如來亦如是,有二種:等習身出要、等盡身出要。
- 다시 말하자면 마치 용과 코끼리의 법의 관은 뭇 모양을 지어 코끼리를 어거할 적에 그의 모양을 아는 것처럼 여래도 또한 그와 같아서 역시 그의 모양을 알면서도 중생을 이해하신다.
- 028_0698_a_03L復作是說:猶如龍象法觀作衆相,御象知其相。如來亦如是,亦知其相解衆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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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는 “마치 용과 코끼리는 뜻으로 생각한 것을 모두 이룩하고서 가거나 서 있거나 간에 모두 그것을 아는 것처럼 본래 여래께서는 또한 이와 같은 것이 없으나 중생의 근본을 아신다”고 말했다. 또한 “그와 같은 것이 없으면서도 중생의 근본을 아신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마치 용과 코끼리는 뜻으로 생각하는 것을 가거나 서 있거나 간에 모두 그것을 알게 되는 것처럼 본래 여래께서 또한 이와 같은 것이 없으면서도 중생의 근본 모양[根相]을 아신다”고 말했다. - 028_0698_a_05L或作是說:猶如龍象,意之所念悉能成辦,若行若住皆悉知之。本無如來亦復如是,知衆生根本。或作是說:猶如龍象意之所念,若行若住皆悉知之。本無如來亦如是,知衆生根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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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는 “마치 이것은 중생의 근기를 아는 것과 같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마치 용과 코끼리는 뜻으로 생각하는 것을 서 있거나 가거나 간에 모두 다 알게 되는 것처럼 여래도 또한 그와 같아서 모든 근의 모양을 알고 모든 행(行)에 친근하여 중생 가운데서 법을 부연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잠자코 받아서 받들어 행하면 차츰차츰 상응하게 된다”고 말했다. - 028_0698_a_10L或作是說:猶如是知衆生根。或作是說:猶如龍象意之所念,若住若行皆悉知之。如來亦如是,知諸根相,親近諸行,於衆生中敷演法,默然承受奉行,展轉相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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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장(法藏)을 모두 원만하게 갖추어서
광명을 비추어 털어 제거하며
선(禪)에 들숨 날숨을 즐기면서
안으로는 스스로 잘 근신(勤愼)한다. -
028_0698_a_15L法藏皆滿具,
照明除拂去,
樂禪出入息,
內自善謹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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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장을 모두 원만하게 갖추었다’는 것은 마치 용과 코끼리는 배에다 약간의 음식이 들어가면 모두 그것에 의지하여 몸을 쳐들게 되는 것처럼 여래도 또한 그와 같아서 법 등의 모든 장(藏)은 법의 음식[法食]에 의지한다는 것이다.
‘광명을 비추어 털어 제거한다’는 것은 마치 용과 코끼리의 꼬리는 모기ㆍ등에ㆍ파리ㆍ벼룩을 털고 모두를 털어 제거하는 것처럼 여래도 또한 그와 같아서 몸 속에서 가르침을 부연하여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선(禪)의 들숨과 날숨을 즐기면서 안으로는 스스로 잘 근신한다’고 하는 것은 마치 용과 코끼리는 들이쉬는 숨과 내쉬는 숨으로써 그의 몸을 기르고 언제나 낙(樂)으로 여기는 것처럼 여래도 또한 그와 같아서 언제나 선으로써 그 몸을 기르시고 안으로 방편이 구족하시다는 것이다. - 028_0698_a_17L法藏皆滿具者,猶如龍象腹入若干種食皆依仰之,如來亦如是,法等諸藏依法食。照明除拂去者,猶如龍象尾拂蚊蝱蠅蚤皆能拂去,如來亦如是,身中敷演教。樂禪出入息內自善謹愼,猶如龍象以出入息而養其形常以爲樂。如來亦如是,常以四禪而養其形,內方便具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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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_0698_b_02L용(龍)은 다니면서 무성한 풀을 구하고
용은 머물러 위의(威儀)가 왕성하며
용은 누워서도 위의가 갖추어지고
앉아 또한 위의가 성취되나
온갖 용의 위의가 성취하게 되는
이것을 바로 용의 위의라 하다. -
028_0698_b_02L龍行求茂草,
龍住威儀盛,
龍臥威儀具,
坐亦威儀成,
一切龍威成,
是謂龍威儀。
- ‘용은 다니면서 무성한 풀을 구하고’에서부터 ‘이것을 바로 용의 위의라고 한다’에 이르기까지는 세존이 온갖 위의 중에서 계(戒)와 3매(昧)가 성취되고 얻는 삼매도 역시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 028_0698_b_04L龍行求茂草者乃至是謂龍威儀者,世尊於一切威儀中戒三昧成就,得三昧亦成就。
- 만일 위의가 성취되면 뜻은 더럽지 않은 것을 먹고 더러운 것은 먹지 않는 것이니 용은 먹으면서도 배를 헤아리고 목숨[命]은 또한 탐내지 않는다. 뜻은 더럽지 않은 것을 먹고 더러운 것은 먹지 않는다. 더러운 것을 먹는다고 함은 어떤 것인가? 탐내는 뜻이 일어남이 있으면서 삿된 생활과 함께 하는 것이니 그것이 바로 더러운 것이요 더러운 것이 없다는 것은 위의 일과 반대되는 경우이다.
- 028_0698_b_07L若威儀成就,意食不穢處而不食。龍食而量腹命亦不貪。意食不穢處穢處而不食者,穢處食者何等是?有貪意起與邪命俱,彼是穢處。無穢處者,反上事也。
- 저 여래는 더러운 밥을 없애 버리고 더러움이 없는 밥을 골라 감관[根]으로 하여금 충족하게 하면서 뭇 병이 없으신 것이 마치 고약(膏藥)을 상처에다 붙이는 것과 같고 또한 수레에다 기름을 치는 것과 같으며 여러 가지 약초를 복용하는 것과 같다. 탐착이 없기 때문에 탐하지 않는다고 한다.
- 028_0698_b_11L彼如來除去穢食,擇無穢食,使根充足而無衆病。猶如膏拊創,亦如膏車,服衆藥草無有貪著,故曰不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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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얻음으로써 주림을 끊고
남은 것을 저축하지 않으며
그 믿음으로 보시한 음식을 받고
주지 않은 것을 취하지[不與取]는 않는다. -
028_0698_b_14L以得食斷飢,
不畜積遺餘,
受彼信施食,
除彼不與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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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얻음으로써 주림을 끊는다’고 하는 것은 풀을 밥으로 삼고 풀로 가림으로써 옷을 삼는다는 것이며, ‘남은 것을 저축하지 않는다’는 것은 저축하지도 않고 형체가 드러나게 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니 베풀어 준 밥을 얻어 먹으면서 겨우 형체만을 보존하려 함이다.
‘그 보시의 음식을 받고 주지 않은 것은 취하지 않는다’는 것은 법으로써 구하여 취한다는 것이다.
또 마땅히 그 요점을 말하면 만일 남긴 것이나 가외 것을 얻으면 다시 저장함으로써 가업(家業)을 삼지만 저 여래는 모두 다 아시면서 그릇된 행[非行]을 제거하시기 때문에 모든 배고프고 목마름을 끊은 이라고 한다. - 028_0698_b_16L以得食斷飢者,草爲食覆爲衣。不畜積遺餘,不得畜積、不露形體,得施食纔欲存形。受彼信施食除彼不與取者,以法求取。復次當說其要。若得遺長,復次藏貯以爲家業,彼如來皆悉知除去非行,故曰斷諸飢渴者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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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결(結)을 끊었고
또한 모든 속박과 집착을 끊었으므로
그 분은 어느 곳[在在處]에 가시거나
역시 근심과 두려움의 환난이 없으시다. -
028_0698_b_22L斷諸一切結,
亦斷諸縛,著
彼行在在處,
亦無憂畏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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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_0698_c_02L‘온갖 결을 끊었다’는 것은 일곱 가지 결[七結]을 없앤 것이요, ‘또한 모든 속박과 집착을 끊었다’는 것은 세 가지 속박[三縛]을 없앴다는 것이다.
또 본래 여래는 결의 근[結根]이 없고 근(根)으로 하여금 영원히 다하여 속박과 집착이 없어 모든 조명(照明)을 일으키기 때문에 온갖 결을 끊었다고 하며, 여래는 모든 더러운 것을 보고도 마음에 물들거나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그 분은 어느 곳에 가시거나’라고 본다. - 028_0698_b_24L斷一切諸結者,滅七結也。亦斷諸縛著者,滅三縛也。復次本無如來結根,使根永盡無縛著,起諸照明,故曰斷諸一切結也。如來見諸穢心不染著,故曰彼行在在處處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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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음과 죽음과 목숨과 두 가지의 수(數)가 있음과
있음[有]과 성냄이 없음[無怒]과 가업을 봄[見家業]이며
잠을 잘 잠[善眼寐]과 두 비구와
풀로 가리는 옷[草覆衣]과 온갖 결사이다. -
028_0698_c_06L愚死命有二數,
有無怒見家業,
善眠寐二比丘,
草覆衣一切使。
- 게건도 제3을 마친다.
- 028_0698_c_08L偈揵度第三品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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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게건도 ④ - 028_0698_c_09L尊婆須蜜菩薩所集偈品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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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色)을 보면서도 즐거워함이 없고
욕심[欲]과 그리고 모든 탐(貪)도 없거늘
하물며 가죽 주머니에 똥을 담고서
다섯 가지 뜻으로 하여금 이동(移動)하게 하겠는가. -
028_0698_c_10L見色無娛娛,
無欲及諸貪,
況革囊盛糞,
使五意移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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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을 보면서도 즐거워함이 없다’는 것은, 왜냐 하면 세존께서 “하물며 가죽 주머니에 똥을 담고 있는 것인데”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그 애욕이 다했다는 것을 나타낸다. 천상의 음악이나 천녀라도 언제나 그것에게 욕심이 없거늘 하물며 가죽 주머니에 똥을 담고 있음에랴. 또 마하단제(摩訶檀提:梵志)의 속박을 끊으려고 한 것이요 자주 부처님 처소에 이르게 하려 하지 않음에서다”라고 말했다. - 028_0698_c_12L見色無娛娛者,何以故?世尊作是說。況革囊盛糞者,或作是說:現其愛盡,天樂天女常無欲於彼,況革囊盛糞。復次欲斷摩訶檀提梵志縛,不欲使頻至佛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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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지(梵志)는 만(慢)을 가득히 짊어지고
성냄은 연기[煙]요 해(害)는 재[灰]가 되며
입은 깨끗하면서도 마음은 불과 같아
마음은 불 구덩이의 장(藏)이다. -
028_0698_c_17L梵志慢滿擔,
怒煙害爲灰,
口淨心如火,
心者火坑藏。
- ‘범지는 만(慢)이 가득 찼다’는 것은 마치 무거운 짐을 지고서도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은 것처럼 그와 같이 만에 속박되어 있으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이요, ‘성냄은 연기’라는 것은 마치 먼저 연기가 있고 그런 뒤에야 불이 비로소 타게 되는 것처럼 그와 같이 잃게 되면 성을 냄이 있고 그런 뒤에야 비로소 가르침[敎]이 있는 것이니 마치 연기가 온갖 색(色)을 어지럽게 하는 것처럼 성내는 것도 또한 그와 같아서 뭇 색[衆色]을 어지럽게 한다는 것이다.
- 028_0698_c_19L梵志慢滿者,猶如負重擔不畏懼於人,如是慢所縛不畏懼。怒煙者,猶如先有煙然後火乃然。如是失有怒然後方有教。猶如煙亂一切色,怒亦如是而亂衆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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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_0699_a_02L‘해(害)는 재가 된다’는 것은 마치 재는 소용이 없는 물건인 것처럼 그와 같이 해도 역시 소용이 없는 물건이란 것이요, ‘입이 깨끗하다’는 것은 마치 깨끗한 것을 불에다 던지는 것처럼 그와 같이 혀[舌]는 모든 법을 자라고 늘게[長益] 한다는 것이다.
‘마음은 불 구덩이의 장(藏)이다’는 것은 마치 불을 제사하는[祠火] 처소와 같아서 이와 같이 마음은 지혜의 불[智火]에 타게 된다는 것이니 스스로 사람의 속에서 움직이는 광명은 마치 스스로 제일의 불과 같다는 것이다. - 028_0698_c_24L害爲灰者,猶如灰無用於物,如是害亦無用於物也。口淨者,猶如淨投火,如是舌長益於諸法。心者火坑藏者,猶如祠火處所,如是心爲智火所然。自動人中明者,猶如自第一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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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信]은 종자를 스스로 드러내고
지혜는 땅을 가는 쟁기가 되며
참괴(慚愧)는 마음이 속박되는 바요
마음의 손은 막대기를 붙잡는다. -
028_0699_a_06L信種自暴露,
智慧爲耕犂,
慚愧心所縛,
心手之執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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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종자를 스스로 드러낸다’는 것은 마치 먼저 싹부터 있는 것처럼 그와 같이 믿음이 도(道)가 되고 그러한 뒤에야 도를 수행한다는 것이요, ‘드러낸다’는 것 중에서 ‘폭(暴)’이란 한적한 데서 산다는 것이니 마치 줄기가 생기면 비를 맞아 윤택해지는 것처럼 그와 같이 선(善)한 공덕이 생기면 드러나서 윤택해진다는 것이다.
‘지혜는 땅을 가는 쟁기가 된다’는 것은 경작지[耕地]가 쌓여 모이는 것처럼 이와 같이 믿음은 뭇 선한 공덕을 이루고 이와 같이 지혜는 뭇 선한 공덕을 이룬다는 것이며, ‘간다[耕]’라고 하는 것은 결사(結使)이다. - 028_0699_a_08L信種自暴露者,猶如先有萌牙,如是信爲道然後行道。暴露者,暴爲閑居,猶如莖生得雨潤澤,如是生善功德以暴潤澤。智慧爲耕犂者,猶如集聚耕地,如是信成衆善功德,如是智慧成衆善功德。耕者結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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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괴’란 마치 쟁기의 멍에[軛]와 같아서 이와 같은 참괴는 지혜에 머무른다는 것이요, ‘마음이 속박된다’는 것은 세 가지 삼매가 그것이며 뜻의 속박[意縛]은 마치 수레의 바퀴살과 같아서 이와 같은 삼매는 이동(移動)하지 않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손은 막대를 붙잡는다’는 것은 마치 땅을 갈 적에는 막대기로 때리면서 내몰아 가는 것처럼 그와 같아서 염(念)은 결(結)을 갈 적에 잘 내몰게 된다는 것이다. - 028_0699_a_14L慚愧者猶如犂轢,如是慚愧住智慧。心縛者三三昧是,意縛猶如輻,如是三昧猶如不移動。手執杖者,猶如耕地杖用驅行,如是念耕結得善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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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가지런하고 입도 가지런한 것은
마치 가서 밥을 구하는 것 같으며
실(實)로 고르면서 찌꺼기[穢]를 버리고
말[語]을 받으면서 해탈한다. -
028_0699_a_18L身整口亦整,
猶如往求食,
實作擇去穢,
受語而解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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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가지런하다’는 것은 몸의 율의(律儀)요, ‘입이 가지런하다’는 것은 입의 율의이며, ‘마치 가서 밥을 구하는 것과 같다’는 것은 생활[命]하는 생활이 청정[命淸淨]하다는 것이다.
‘실로 고르면서 찌꺼기를 버린다’는 것은 지혜의 진리로써 모든 것을 갈아 없앤다는 것이요, ‘말을 받으면서 해탈한다’는 것은 마치 땅을 가는 쟁기는 사람이 일을 다 마치면 버리는 것처럼 그와 같이 평등하게 함께 상응하게 되면 그의 행(行)을 버린다는 것이니, 모든 것이 이미 소멸하면 곧 용맹스런 뜻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 - 028_0699_a_20L身整,身律儀也。口整者,口律儀。猶如往求食者,命命淸淨也。實作擇去穢者,以智諦耕除諸。受語而解脫者,猶如耕犂,人事辦則捨。如是等與相應而捨其行,諸已滅便有勇猛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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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_0699_b_02L용맹스럽게 함께 두 개의 멍에로
방편을 써서 편안한 곳 얻으며
이미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나니
이르는 데는 근심과 두려움이 없어진다. -
028_0699_b_02L勇猛共二軛,
方便獲安處,
已往不復還,
所至無憂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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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맹스럽게 함께 두 개의 명예로’라는 것은 마치소가 힘이 있어서 그 멍에를 버리지 않는 것처럼 그와 같이 용맹스런 힘은 그 멍에를 버리지 않는다는것이며, ‘방편을 써서 편안한 곳을 얻는다’는 것은 네 가지의 방편이 있는 것을 이미 다하면 이것을 열반이라고 하고 또한 이것은 안온한 곳[安穩處]이면서 용맹스런 뜻[志]이라는 것이다.
‘이미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은 세력이 있어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며, ‘이르는 데는 근심과 두려움이 없어진다’는 것은 이미 열반에 이르면 모든 근심과 두려움과 환난이 영원히 다하여 남음이 없다는 것이다. - 028_0699_b_04L勇猛共二軛者,猶如牛有力勢不捨其軛,如是勇猛之力亦不捨其軛。方便獲安處者,有四方便已盡是謂涅槃,亦是安隱處勇猛志。彼已往不復還者,有力勢不復還。所至無憂畏者,已到涅槃,諸憂畏患永盡無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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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밭을 갈아서 짓는
그것을 감로(甘露)와 과(果)라 하며
이와 같은 일[業]을 능히 참으면
온갖 괴로움에서 해탈하게 된다. -
028_0699_b_10L如是耕田作,
彼曰甘露果,
能忍如是業,
一切苦解脫。
- ‘이와 같이 밭을 갈아서 짓는다’고 하는 것 중에서 ‘짓는다’는 것은 이와 같이 도(道)를 수행한다는 것이요, ‘그것을 감로의 결과라 한다’는 것은 열반의 과(果)가 된다는 것이며, ‘이와 같은 일을 능히 참는다’는 것은 이 도를 수행한다는 것이요, ‘온갖 괴로움에서 해탈하게 된다’는 것은 3계(界)의 괴로움에서 해탈하게 된다는 것이다.
- 028_0699_b_12L如是耕田作者,作如是修行道也。彼曰甘露果,涅槃爲果。能忍如是業者,修行此道。一切苦解脫者,於三界苦而得解脫。
- 어떤 이는 “도의 가르침은 그의 지혜로 모든 결사(結使)를 끊게 되는 것이다. ‘몸이 가지런하고 입도 가지런한 것은 마치 가서 밥을 구하는 것과 같다’는 것은 등어(等語:正語)ㆍ등업(等業:正業)ㆍ등명(等命:正命)이며 ‘용맹스럽게 함께 두 개의 멍에로’라는 것은 등방편(等方便:正方便)이다. ‘염(念)은 막대기가 된다’는 것은 등념(等念:正念)이요 ‘뜻의 속박’이라는 것은 등삼매(等三昧:正定)이니, 이미 5근(根)을 설명한 것이다. ‘믿음은 종자’라는 것은 신근(信根)이요, ‘용맹스럽게 함께 두 개의 멍에’라는 것은 정진근(精進根)이며 ‘염은 막대기가 된다’는 것은 염근(念根)이요, ‘뜻의 속박’은 정근(定根)이며 ‘지혜는 제창하여 인도한다’는 것은 바로 혜근(慧根)이다”라고말했다.
- 028_0699_b_16L或作是說:道教於彼智慧斷諸結使,身整口亦整。猶如往求食者,等語、等業、等命。勇猛共二軛者,等方便也。念爲杖者,等念也。意縛者,等三昧也。已說五根,彼信種信根也。勇猛共二軛,精進根也。念爲杖者,念根也。意縛者,定根也。智慧唱導,是慧根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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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교묘한 방편을 생각하면서 구하고
또한 집에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뭇 기러기가 못으로 내닫듯 하면
흐름[流]을 다하면서 진에(瞋恚)가 제거된다. -
028_0699_b_23L專念巧便求,
亦不樂在家,
群鴈往奔池,
盡流除瞋恚。
-
028_0699_c_02L‘오로지 교묘한 방편을 생각하면서 구한다’는 것은 출가하여 도(道)를 배운다는 것이니 오로지 생각한다는 것은 생각을 매어 두어 옮아가지 않는다는 것이며, ‘또한 집에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집안에 살면서 은혜와 애욕[恩愛] 중에서 즐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뭇 기러기가 못으로 내닫듯 하면 흐름을 다하면서 진에가 제거된다’는 것은 마치 뭇 기러기가 큰 산과 숲을 버리고 그리워하는 정(情)이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니 이와 같이 그는 5욕(欲)을 없애 그리워하는 정이 없다는 것이다. 도(道)를 이용할 수 있는 바로 5욕을 소멸시키되 설명한 것과 같이 법으로 제거해야 하거늘 하물며 법이 아닌[非法] 것이겠는가? - 028_0699_c_02L專念巧便求者,出家學道。專念者,繫念不移。亦不樂在家者,不樂處家恩愛之中。群鴈往奔池盡流除瞋恚者,猶如群鴈捨大山林無戀慕情。如是彼滅於五欲無戀慕情,所可用道滅於五欲。如所說,法之所除,況非法也。
- 다시 말하자면 ‘오로지 교묘한 방편을 생각하면서 구한다’는 것은 언제나 한적한 데에 살기를 좋아하면서 좌선(坐禪)한다는 것이요 또한 ‘집에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3계(界)에서 중생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뭇 기러기가 못으로 내닫듯 하면 흐름을 다하면서도 진에(瞋恚)가 제거된다’는 것은 흐름[流]은 무명(無明)이 되고 도(道)를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무명을 제거하되 그 도도 또한 제거한다는 점이다.
- 028_0699_c_08L復作是說:專念求巧便者,常樂閑居坐禪。亦不樂在家者,不樂於三界衆生。群鴈往奔池盡瞋恚者,流爲無明,所可用道除無明,彼道亦除。
- 다시 말하자면 ‘오로지 교묘한 방편을 생각하면서 구한다’는 것은 도(道)를 수행하면서 뜻은 산중에 노닐고 있다는 것이요, ‘또한 집에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애착(愛著)을 멀리 여의는 것이니 설명한 것과 같이모든 통(痛:受) 중의 애욕은 이것이 바로 애욕이므로 이미 그것을 능히 버리고 또한 애착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028_0699_c_12L復作是說:專念巧便求者,而修行道遊居意山中。亦不樂在家者,遠離愛著。如所說,諸痛中愛,此是愛也。已能捨彼,亦不樂愛著。
- ‘뭇 기러기가 못으로 내닫듯 하면 흐름을 다하면서 진에가 제거된다’는 것 중에서 흐름이란 6입(入)이 된다. 설명한 바와 같이 장(長)이란 것의 눈[眼]은 식(識)의 흐름의 근원[流源]이 되는 것이니 그 6입을 소멸시킬 수 있는 것은 도(道)를 이용할 수 있으나 6입을 소멸하면 그 도도 역시 소멸한다는 것이다.
- 028_0699_c_16L群鴈往奔池盡流瞋恚者,流爲六入。如所說,長者眼爲識流源,彼能滅六入所可用道。滅六入者,彼道亦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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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강과 바다를 건너는 이는
다리를 놓고 저 언덕[彼岸]을 건너나니
속박 있는 나는 건너려고 하는데
지자(智者)는 먼저 저 언덕에 도달하였구나. -
028_0699_c_19L諸度江海者,
作橋度彼岸,
有縛我求度,
智者先達岸。
- ‘모든 강과 바다를 건너는 이’라는 것은 설명한 것과 같이 구담(瞿曇) 세존과 같은 이이며, 이학(異學)이 짐짓 가서 항수(恒水)를 받들 적에 수신(水神)이 게송으로 “그 강물은 항시 살뢰(薩牢)요 자주 시끄러운지라[頻閙] 다리를 놓을 것이니 모든 신족(神足)을 얻지 못해서요”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 028_0699_c_21L諸度江者,如所說,如瞿曇世尊,由異學故往受恒水,水神作是說偈。彼河恒薩牢,頻鬧作諸橋,諸不得神足。
- 028_0700_a_02L어떤 이는 “‘모두가 자구 시끄러움을 받는다’는 것은 결(結)은 자주 나는[頻生] 것이 되고 죽음은 살뢰(薩牢)가 되는 것이니 설명한 바와 같이 살라(薩羅)를 말미암아 이 못[池]이 있다는 것이요 ‘모든 다리를 놓는다’라는 것은 도(道)를 수행한다는 것이며 ‘산을 버린다’는 것은 5욕(欲)을 없앤다는 것이요 ‘속박은 뽑아 내고 건너기를 구한다’는 것은 외도(外道)가 도를 구하는 것이며 ‘지자(智者)는 먼저 언덕에 도달했다’는 것은 생사의 언덕[生死岸]을 건넜다는 설명이다”라고 말했다.
- 028_0699_c_24L或作是說:諸受頻鬧者,結爲頻生,死爲薩牢。如所說,由薩羅有是池。作諸橋,修行道也。捨山者,滅於五欲。縛拔求度者,外道求道。智者先達岸者,說度生死岸。
-
다시 말하자면 ‘모두가 자주 시끄러운 데를 건너다’는 것은 견제에서 끊어야 할 결이 소멸한 것이요 살라라고 함은 사유에서 끊어야 할 결이 소멸한다는 것이다.
‘다리를 놓는다’는 것은 도를 일으키는 것이요, ‘산을 버린다’는 것은 모든 개(蓋)를 소멸한다는 것이며, ‘속박[縛]을 뽑아 낸다’는 것은 도를 닦고 배운다는 것이요, ‘지자는 먼저 언덕에 도달했다’는 것은 나한(羅漢)은 생사(生死)를 건넜다는 것이다. - 028_0700_a_06L復作是說:諸度頻鬧者,見諦所斷結滅也。薩羅者,思惟所斷結滅也。作橋者,興起道也。捨山者,滅諸蓋。縛拔者,修學道。智者先達岸,羅漢度生死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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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견[見]에서 민첩하지 않은
이것이 바로 나의 제한(齊限)이며
그릇된 행[非行]은 능히 없애면서 가고
가루(家累)에 염착[染]하지 않는다. -
028_0700_a_09L不於見健疾,
是我之齊限,
非行能除往,
不染於家累。
- ‘소견에서 민첩하지 않다’는 것은 등지(等智)는 성취되어 재빠르면서 그 부정한 소견[不淨之見]에서는 재빠르게 듣지 않는다는 것이니, ‘재빠른 것이 아니다’는 것은 그의 변두리를 깨끗이 할 수 있고 그는 또한 욕심이 깨끗하며 하고 싶어하는 데서는 은근하고 계(界)도 또한 듣지 않고 장차 나아간다는 것이다. 왜냐 하면, ‘가루에 염착하지 않는다’는 것이니 그는 이런 소견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 028_0700_a_11L不於見健疾者,等智成就健疾。彼不淨之見,不聞健疾,非健疾者能淨其邊。彼亦欲淨於欲慇懃,界亦不聞將往。何以故?不染於家累者,彼不隨此見。
-
숲 기둥이 견고한 것과 같고
다른 이에게 그의 말을 다하며
욕심이 없고 선근(善根) 같은 것은
능인(能仁)도 역시 견고하다. -
028_0700_a_15L若林柱牢固,
於他盡其語,
若無欲善根,
能仁亦牢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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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기둥이 견고한 것과 같다’는 것은 존자 아나율(阿那律)의 수결(授決) 가운데서 자세히 설명한 것이니 마치 숲 기둥은 옮겨 움직일 수 없는 것처럼 그와 같이 그 존자는 헐뜯거나 칭찬하거나 간에 옮겨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다.
‘다른 이에게 그의 말을 다한다“는 것은 말은 안[內)에 있으면서 헐뜯기도 하고 다시 칭찬한 이도 있다는 것이며, ‘욕심이 없다’는 것은 모든 결사(結使)를 다한 것이요, ‘선근’이라는 것은 세 가지 삼매에서 이 삼매가 근본이라는 것이며, ‘농인도 역시 견고하다’는 것은 부처님이라는 소리요 무학의 지[無學智]이다. - 028_0700_a_17L若林柱牢固者,尊者阿那律授決中廣說。猶如林柱不可移動,如是彼尊者若毀罵若嘆譽不可移動。於他盡其語者,語在內若毀罵、復有嘆譽者。善無欲者,諸結使盡。善根者,於三三昧是三昧根。能仁亦復牢固者,佛聲無學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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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_0700_b_02L불이(不二)의 행(行)으로 강당(講堂)을 짓고
처자(妻子)를 기르는 것은 비구가 아니며
중생에게 성냄[瞋]을 고치지 않거니와
능인은 언제나 중생을 보호한다. -
028_0700_b_02L不二行作講堂,
養妻子非比丘,
於衆生不改瞋,
能仁常護衆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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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이의 행으로 강당을 짓는다’는 것은 사냥꾼[獵師]의 비유 가운데서 이미 설명하였다. ‘불이의 행으로 강당을 짓는다’는 것은 사냥꾼의 소행은 한가히 무리 중에 살고 있는 것이요 비구의 행은 무리 중에서의 무리[聚中聚]이며 한가롭게 살고 있는 사냥꾼의 하는 일은 행(行)이 아니지만 비구는 수호하는 어진 이[護賢]의 행이다.
‘처자를 기르는 것은 비구가 아니다’라는 것은 사냥꾼과 그리고 처자가 있는 비구는 그의 행이 아니요 오직 자기 자신들을 법의 무더기[法聚]로써 기르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며 그는 ‘중생에게 성냄을 고치지 않는다’는 것은 사냥꾼이 살생하는 일을 고치지 않는다는 것이요, ‘능인은 언제나 중생을 수호한다’는 것은 비구는 살해하려는 뜻[殺意]이 없다는 것이다. - 028_0700_b_04L不二行作講堂者,獵師喩中已說。不二行作講堂者,獵師所行閑居聚中,比丘行聚中聚。閑居獵師所爲非行,比丘護賢行,養妻子非比丘。獵師及妻子,比丘非其行,唯自養以法聚。彼於衆生不改瞋者,獵師不改於殺生。能仁常護衆生者,比丘無有殺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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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과 중간과 뒤에서
다른 이로부터 신시(信施)를 받고
또한 원한의 마음이 없으므로
능인도 또한 그를 보호한다. -
028_0700_b_11L於前中間後,
從他受信施,
亦無怨恨心,
能仁亦護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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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이라는 것은 먹지 않은[不食] 것이요, ‘중간’이라는 것은 반만 먹는[半食]것이며, ‘뒤’라고 하는 것은 남은 밥[餘食]이 아직 다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다른 이로부터 신시를 받는다’는 것은 비구는 밥을 얻어 먹는다는 것이다.
‘또한 원한의 마음이 없다’는 것은 또한 욕을 하지도 않고 또한 그의 몸을 상하지도 않으며 뻔뻔스러운 얼굴을 짓지도 않고, ‘나는 물건을 얻지 못했다’라는 말도 하지 않은 것이니 끝내 이런 법을 여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앞’이라고 하는 것은 좋고 맛있는 음식이요 ‘중간’이라 하는 것은 중간쯤 되는 음식이며 ‘뒤’라고 하는 것은 하찮은 음식이다. - 028_0700_b_13L於前者不食,中間者半食,後者餘食未盡。從他受信施,比丘得食。亦無怨恨心者,亦不罵、亦不能傷其形,不作强顏,不是語:我不得物,終不離此法。復作是說:於前者好微妙食,中者中食,後者下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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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로부터 신시를 얻는다’는 것은 다른 이로부터 신시(信施)를 받을 적에 나쁜 말을 하지도 않고 나쁜 음식을 얻을 곳이라 해도 피하지 않으며 또한 나쁜 음식을 얻게 될 곳이라는 말에 집착하지도 않고 또한 자주자주 가지도 않는 것이니, 그는 구걸하는 데 있어 모두가 다 두루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나쁜 것도 그의 뜻을 무너뜨릴 수 없고 좋은 것에도 애착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 028_0700_b_19L從他得信施者,從他受信施,不說惡語,所得惡食處亦不避,亦不執語所得惡食處,亦不頻往彼乞求皆悉遍。復作是說:惡不能壞其意,好不起愛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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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는 첫째가는 것[第一者]을 말하면서
야차(夜次)의 청정한 것은 청정한 것이 아니다.
무엇으로 여기서 해탈하는가?
남음이 없는[無餘] 것이 가장 좋다고 한다. -
028_0700_b_23L有說第一者,
夜叉淨非淨,
何爲此解脫,
無餘名曰善。
- 028_0700_c_02L‘어떤 이는 첫째가는 것을 말한다’는 것은 이것은 야차가 청정하다는 설명이니 마치 이 유상무상천(有想無想天)과 같고 ‘무엇으로 여기서 해탈하는가?’라고 하는 것은 이와 같은 남음이 없는 것이라는 것이니 지혜 있는 이[智者]는 방편으로써 청정함을 설명한다.
- 028_0700_c_02L有說第一者,此夜叉淨說,猶如此有想無想天。何爲此解脫者,如是無餘,智者方便說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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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프고 목마름은 첫째가는 병이요
행(行)은 첫째가는 괴로움이니
여실하게 이것을 알면
열반이 첫째가는 즐거움이다. -
028_0700_c_05L飢渴第一病,
行爲第一苦,
如實知是者,
涅槃第一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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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프고 목마름은 첫째가는 병’이라는 것은 단수(斷手)의 수결(授決) 가운데 이미 설명한 것이니 그 단수는 배고프고 목마름 같은 것을 크게 괴로운 것이라고 여기지 않았다는 것이요, ‘행은 첫째가는 괴로움이다’라는 것은 그의 행에는 약간의 종류가 있다는 것이다.
‘만일 사실대로 이것을 알면 열반이 첫째가는 즐거움이다’라는 것은 이와 같은 행을 능히 알고 짓는 행의 입[口]을 성취하지 않으면 거기에 곧 즐거움이 있다는 것이다. - 028_0700_c_07L飢渴第一病者,斷手授決中已說。彼斷手不大苦,如飢渴者。行爲第一苦者,彼行有若干種。若如實知此者涅槃第一樂,能知如是行,不成就所作行口,彼便有樂。
- 다시 말하자면 ‘배고프고 목마름은 첫째가는 병이다’라는 것은 언제나 속박당하고 있어서 이에 다스릴 수 없기에 이르렀다는 것이요, ‘행은 첫째가는 괴로움이다’라는 것은 여실하게 그것을 알면 이 모든 행을 알 수 있다는 것이며, ‘모든 행에서 열반이 첫째가는 즐거움이다’라는 것은 휴식(休息)으로 즐거움을 삼는 것이니 관할 바가 없는[無所觀] 것으로 즐거움을 삼아 영원히 즐긴다는 것이다.
- 028_0700_c_12L復作是說:飢渴第一病者,常爲所縛乃至不可治。行爲第一苦者,如實知之,能知此諸行。諸行涅槃第一樂者,休息爲樂,無所觀爲樂永樂。
- 다시 말하자면 ‘배고프고 목마름은 첫째가는 병이다’라는 것은 이것이 바로 고제(苦諦)요 ‘행은 첫째가는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은 무명(無明)은 행(行)에 연(緣)이 된다는 것이니 모든 우환(患)을 받는 이것을 바로 습제(習諦:集諦)라고 한다는 것이며, ‘이와 같이 사실대로 안다’는 것은 이것이 바로 도제(道諦)요, ‘열반은 첫째가는 즐거움이다’라는 것은 이것이 바로 진제(盡諦:滅諦)이다.
- 028_0700_c_16L復作是說:飢渴爲第一病者,是苦諦也。行爲第一苦者,無明緣行也。受諸患,是謂習諦也。如是實知者,是道諦也。涅槃第一樂者,是盡諦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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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괴(慙愧)는 범지(梵志)의 옷이요
범지의 손은 청정하며
물은 늘 흐르면서 머물지 않는데
혀로 벌려서 대야를 씻는다. -
028_0700_c_19L慚愧梵志衣,
梵志手爲淨,
水常流不住,
舌陳爲澡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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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_0701_a_02L‘참괴는 범지의 옷’이라는 것은 존자 대목건련(大目揵連)의 수결(授決) 가운데서 이미 설명한 것이니 마치 의복은 은밀한 곳을 가리는 데에 이용하는 것처럼 참괴도 또한 그와 같이 은밀한 곳을 가리게 된다는 것이다.
‘범지의 손은 청정하다’는 것은 마치 이미 청정해져서 불을 제사지내는 것처럼 나도 또한 그와 같이 청정한 행을 닦아 행(行)을 버리고 여읜다는 것이며, ‘물은 늘 흐르면서 머물지 않는데 혀를 벌려서 대야를 씻는다’는 것은 마치 대야를 씻음으로써 부정한 그릇이 씻어지는 것처럼 나의 혀도 그와 같아서 더러운 행을 제거하기를 밤낮으로 휴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028_0700_c_21L慚愧梵志衣者,尊者大目揵連授決中已說。猶如衣裳用覆蓋隱處,慚愧亦如是,覆蓋隱處。梵志手淨者,猶如已淨祀火,我亦如是,而修淨行去離行。水常流不住舌陳爲澡盥者,猶如以澡盥盪滌不淨器。我舌亦如是,除去穢行晝夜不休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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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을 제사지내면서 항상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속의 마음과 뜻에 의지함 때문이니
밤낮으로 부지런히 제사를 지내면
율의(律儀)는 절도를 잃지 않는다. -
028_0701_a_05L祀火有常想,
以依內心意,
晝夜勤祠祀,
律儀不失節。
- ‘불을 제사지내면서 항상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지관(止觀)으로 그 지혜의 불을 피운다는 것이요, ‘속의 마음과 뜻에 의지함 때문이다’라는 것은 스스로 마음에 의지하여 그것이 소멸할 수 있다는 것이며, ‘밤낮으로 율의를 수행하면 절도 있는 모든 근(根)을 잃지 않는다’는 것이다. 속으로 저것을 능히 사유하는 마음이 있으면 교훈(敎訓)을 입는다는 것이니 이것을 감춘다[藏匿]고 말한다.
- 028_0701_a_07L祀火有常想者,止觀彼然智火。以依內心意者,自依猗心彼能滅。晝夜修行律儀,不失節諸根,在內彼能思惟心被教訓,是謂藏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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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하자면 ‘숨은 곳’이란 몸과 입과 뜻이며, ‘율의의 교훈’이란 모든 계율이 구족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참괴(慙愧)는 범지의 옷’이라는 것은 선행(善行)이 일어나는 것을 나타내고, 범지의 손이 청정하고 물은 언제나 흐르면서 머무르지 않는데 ‘혀를 벌려서 대야를 씻는다’는 것은 혀[舌]의 선행이다. 제2의 게송은 마음의 선행을 말하고 세 가지 선행은 바라문을 이름한다. - 028_0701_a_11L復作是說:隱處者,身口意。律儀訓者,諸戒具足。復作是說:慚愧梵志衣者,現善行起。梵志手淨者,水常流不住。舌陳爲澡盥,舌善行。第二偈謂心善行。於三善行,名婆羅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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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慚)을 건너면[度] 늘 그를 꾸짖으면서
나는 그에게 언약을 주며
또한 행이 아닌 것[非行]을 짓지 않나니
그러므로 이는 내가 아닌[非我] 줄 알아야 한다. -
028_0701_a_16L度慚常呵彼,
我與況汝要,
亦不作非行,
當知此非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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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건넌다’는 것은 부끄러워해야 할 데서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그는 스스로도 친하지 않은 줄 알거늘 하물며 다른 이와 친하겠는가라는 것이며, ‘늘 그를 꾸짖는다’는 것은 친한 이가 아닌 원수가 나의 처소에 머물러 있는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에게 언약을 말한다’는 것은 모든 더러운 것[雜穢]이 있어 비록 삼간다 하더라도 중생을 좇는 것이므로 이것은 간악하고 더러운[姦穢] 것인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며, ‘또한 행이 아닌 것을 짓지 않는다’는 것은 모든 사이에 두터운[親厚] 일이 있어도 그는 괴롭히지 않고 짓는 일은 방편으로써 원수를 삼갈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 028_0701_a_18L度慚者,可慚而不慚。彼當知不自親,況當親餘者。常呵彼者非親者,當知是怨仇而住我所。我與汝說要者,諸有雜穢,雖愼從衆生,當知此奸穢。亦不作非行者,諸有親厚事彼不起惱,所作方便當知愼怨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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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_0701_b_02L뜻이 욕심을 여의지 않고
염(念)도 또한 만족해 함이 없으나
그것을 관하면서 능히 여의는 이면
그는 지혜를 두루 갖추었다. -
028_0701_a_24L於欲意不離,
念亦無厭足,
觀彼能離者,
彼具智慧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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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이 욕심을 여의지 않는다’는 것은 보살의 수결(授決) 중에서 이미 설명한 것이니 이에 ‘뜻은 욕심을 염(念)한다’는 데까지이다.
‘또한 만족해 함이 없다’는 것은 그 탐애[愛]를 버리고 여의지 못했다는 것이요, ‘능히 여읜다[能離]’는 것은 하고자 하는 생각[欲想]을 다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니 그 중에서 차례대로 관하여 그것이 다할 적에 이것을 말하여 그는 능히 여읜 이라고 한다.
‘그는 지혜를 두루 갖추었다’는 것은 욕심과 깨끗하지 못함과 저 애욕에 집착하는 모두를 관(觀)하는 것이다. - 028_0701_b_03L於欲意不離者,菩薩授決中已說。乃至意念欲心亦無厭足,不能去離彼愛。能離者現欲想盡,於中次第觀彼盡時,是說曰彼能離者。彼具慧乃足者,諸觀欲不淨,彼著愛欲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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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를 잘 살펴보고는
존자는 한층 더 하늘을 찬탄한다. -
028_0701_b_08L諦諦而善見,
尊者轉嘆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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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를 잘 살펴본다’는 것 중에서 진리[諦], 이것은 고제(苦諦)요 또한 습제(習諦)이며 증상제(增上諦)이며, 이것은 바로 도제(道諦)요 또한 진제(盡諦)이다.
다시 말하자면, 세 가지의 진리인 고제ㆍ습제ㆍ도제가 있고 증상(增上)인 이것은 진제이다.
다시 말하자면, 진리[諦] 이것은 바로 등제(等:世俗諦)요, 증상(增上)은 바로 제일의제(第一義諦)이다. - 028_0701_b_09L諦諦而善見者,諦是苦諦也習諦,增上諦是道諦也盡諦。復作是說:有三諦,苦諦、習諦、道諦,增上是盡諦。復作是說:諦是等諦,增上第一義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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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탈은 저것과 이것[此]에서 해탈하는 것인데
해탈하고도 다시 속박을 당하나니
현성(賢聖)은 해탈을 얻지 않으면서
어리석고 미혹한 데서 해탈한다. -
028_0701_b_13L解脫彼此脫,
解脫復見縛,
賢聖不見脫,
解脫於愚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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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一子)의 수결(授決) 가운데서 이미 설명하였다.
‘해탈은 저것과 이것에서 해탈하는 것’이라는 것은 거짓말 가운데서 해탈했으나 살생(殺生)에 물들어 있다는 것이요, ‘해탈을 하고서도 다시 속박을 당한다’는 것은 한 가지 해에서는 해탈하고서도 다시 다른 데에 물들게 된다는 것이다.
‘현성은 해탈을 얻지 않는다’는 것은 진리[諦]를 보고는 어리석고 미혹한 데서 해탈하였으나 계박(繫縛)에서 그는 해탈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단멸(斷滅)의 소견[見]에서는 해탈하였으나 유상(有常)의 소견에서는 속박된다는 것이다. - 028_0701_b_15L一子授決中已說。解脫彼此脫者,於妄語中解脫,爲殺所染。解脫復見縛者,於一害得脫,復爲他所染也。賢聖不得脫者,見諦而得解脫於愚惑,於縛繫彼不得解脫,如是斷滅見得解脫。有常見所縛。
- 이와 같은 것은 듣고 염(念)하는 가운데서 해탈을 얻는 것이니 이와 같이 신견(身見) 가운데서는 해탈을 얻었으나 망설임의 속박을 취하게 되고 탐욕(貪欲)에서는 해탈을 얻었으나 색애(色愛)의 속박을 당하게 되며 색애에서는 해탈을 얻었으나 무색애(無色愛)의 속박을 당한다는 것이다.
- 028_0701_b_21L如是聞念中得解脫。如是身見中得解脫,爲猶豫取縛。於貪欲得解脫,爲色愛所縛。於色愛得解脫,爲無色愛所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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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_0701_c_02L만일 긴 것과 짧은 것 중에서와
거칠고[麁] 미세한 것[細]과 좋고 나쁜 행에 대하여
세간에서 주거나 취하지 않으면
그 때문에 이름을 범지(梵志)라고 한다. -
028_0701_b_24L若於長短中,
麤細好惡行,
於世不與取,
故曰名梵志。
- ‘만일 긴 것과 짧은 것 중에서’라는 것은 길고 짧은 것으로 성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관(觀)한 바가 있으면 곧 긴 것이 있다는 것이요 조금이라도 관한 바가 있으면 곧 짧은 것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여래의 교계어(敎誡語)이다. 또 거친 것도 역시 성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028_0701_c_03L若於長短中者,答曰:長短不成就。於彼少有所觀便有長也,少有所觀便有短也。此如來教誡語也。又麤者亦不成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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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어떻게 헤아리기에 또한 성취하지 않는가?
【답】그 중에서는 양(量)을 말하지도 못하고 지닐 수도 없으며 또한 오는 것[來者]도 없다. 만일 받거나 주거나 취하지도 않으면 그것은 곧 거친 것도 성취하지 않는 것이요, 거기서는 또한 양이 있는[有量] 것을 다하지도 않은 것이며 청정한 행이 있어도 역시 조금의 성취만 있다. - 028_0701_c_07L問:云何量亦不成就耶?答曰:於中不說量不可持,亦無來者。若受不與取,彼則麤亦不成就,於彼亦不盡有量,有淸淨行亦有少成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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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모두에게 청정한 행의 성취는 있는 것인가?
【답】행(行)으로써 색(色)을 주거나 취하는 것이 아니요 그 중에서 청정하고 청정하지 않은 행의 그것을 곧 성취하는 것이니, 이것은 넓으신 혀[廣舌]로써 교계하신 말씀[敎誡語]이다.
‘때문에 범지라고 한다’는 것은 뭇 행을 두루 갖춘 이것을 바로 범지라고 한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모든 주거나 취하지 않은 결(結)을 일으키는 모든 결이 다한 것이니 이것을 바라문이라고 한다”고 말했다. - 028_0701_c_10L問:諸有淸淨行成就。答曰:非以行不與取色,於中淨不淨行彼則成就。是廣舌教誡之語。故曰梵志者,具足衆行是謂梵志。或作是說:起諸不與取結,諸結盡是婆羅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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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선(不善)이나 선(善)이 있는 것은
언제나 3불(佛)의 집에 의지하나니
머물지 않으면서 중생을 더하게 하는
그를 바로 유(有)에 의지한다고 한다. -
028_0701_c_15L不善而有善,
當依三佛家,
不住益衆生,
彼曰而依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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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선이나 선이 있다’는 것은 불선 가운데서 마치고는 곧 다른 곳에서 난다는 것이니 그는 먼저 본래의 생각을 없애고서 다시 다른 생각[餘想]을 얻는다는 것이며, ‘언제나 삼불의 집에 의지한다’는 것은 어머니의 태(胎)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머물지 않으면서 중생을 더하게 한다’는 것은 다른 이의 집[他家]에서 목숨을 마치고는 어머니의 태 안에 있으면서 자라고 큰다는 것이며, ‘그를 바로 유(有)에 의지한다’는 것은 의생(意生)에는 이런 선행(善行)이 있다는 것이다. - 028_0701_c_17L不善而有善者,於不善中終便生餘處。彼先滅本想,而更得餘想。常依三佛家者,不依母胎。不住益衆生者,於他家命終,在母胎長大。彼曰而依有,意生有是善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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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수(數)를 세상에서 바꾼다면
더 나은 것도 없거늘 하물며 지금의 세상이랴.
영원히 소멸하여 연기의 어둠[烟暗]이 없으면
그 중에서 즐기면서 해치지 않는다. -
028_0701_c_22L若數於世易,
無勝況當世,
永滅無煙曀,
於中樂不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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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_0702_a_02L만원자(滿願子:富樓那)는 그 중에서 수(數)를 구한 이이니 알면서도 세상을 소멸되게 한 이다. 모든 입(入)과 다르다는 것은 그것에 대하여 바깥이요, 다르지 않다는 것은 바로 안이다.
다시 말하자면, 다르다는 것은 바로 하늘이요, 다르지 않다는 것은 바로 지옥이다.
다시 말하자면, 다르다는 것은 색계와 무색계와 상응하고 다르지 않다는 것은 욕계와 상응한 것이니, 이 수(數)는 바로 무상(無常)과 고(苦)와 공(空)과 무아(無我)이며, 인과(因果)는 제 모양[自相]과 두루한 모양[遍相]이다. - 028_0701_c_24L滿願子於其中求數者,知而滅世者。諸入異於彼外,不異者是內。復作是說:異者是天,不異者是地獄。復作是說:異者色無色界相應,不異者欲界相應。此數是無常苦空無我,因果自相遍相。
- ‘더 나은 것도 없거늘 하물며 지금의 세상이랴’는 것은 무명의 소견[無明見]으로 아는 바이어서 마치 염착(染著)을 말하면서 악마에 속박되는 바라고 한 것과 같으며, 쉰다[息]라 하는 것은 세 가지 불이 그쳐 없어지면서[息滅] 휴식(休息)한다는 것으로서 언제나 영원히 고요하게 그쳐 없어지는 것이 있어서 ‘영원히 연기의 어둠[烟暗]도 소멸한다’는 것이니 진에(瞋恚)의 얽힌 바가 다했다는 것을 나타낸다.
- 028_0702_a_07L無勝況當世者,無明見所知,如說染著魔所縛。息者,三火息滅休息,常永寂有滅息,永煙曀滅,現瞋恚所纏盡。
- 다시 말하자면 안에서 반연하는 모든 결(結)이 다하여 연기의 어둠도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니 말한 바와 같이 탐애[愛]의 소행(所行)이며 유각(有覺:有尋)이 쉬는 것도 또한 연기의 어둠이 없는 것이니 말한 바와 같이 유각도 역시 연기이다.
- 028_0702_a_10L復作是說:現內緣諸結盡無煙曀,如所說愛所行也。有覺息亦無煙曀,如所說有覺亦煙。
- ‘해침이 없다’는 것은 세 가지의 해가 다했다는 것을 나타내고 ‘욕망이 없다’고 함은 이익의 욕망[利望]과 생활의 욕망[命望]이 다했다는 것을 나타내며 또 유의 애[有愛]가 다하여 능히 초월한 바가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 028_0702_a_12L無害者,現三害盡。無望者,現利望命望盡。復次現有愛盡,能有所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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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탈하여 떨어지고 다시 떨어지며
탐착(貪着)으로 다시 왔다 돌아오거니와
이미 기쁘고 즐거운 곳에 돌아오면
선(善)에서 선한 곳[善處]에 머무른다. -
028_0702_a_14L解脫墮復墮,
貪著復來還,
已還歡樂處,
於善住善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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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탈하고서 다시 떨어진다’는 것 중에서 해탈한다는 것은 욕계에서 해탈하고 또한 욕계의 결사(結使)에서 해탈한 것이요, 색계와 무색계의 탐애는 아직 다하지 못하여 거기에서 떨어져서 곧 태어난다는 것이다.
‘탐착으로 다시 왔다 돌아온다’는 것은 그는 차츰차츰 욕계의 상응한 결(結)을 제거하여 다하지 못하고 거기에 와서 머무르며 거기에서 방편으로 염착(染著)하면서 욕계의 모든 결사는 뽑아 내어 여의지 못했기에 다시 욕계의 결사를 일으켜 욕계에 와 이른다는 것이다. - 028_0702_a_16L解脫復墮者,解脫者於欲界脫,亦脫欲界結使,色無色界愛未盡,於彼墮墮便生。貪著復來還者,彼不能展轉除盡欲界相應,結來住彼,於彼方便染著,欲界諸結使不能拔離,復起欲界結使來至欲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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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기쁘고 즐거운 곳에 돌아왔다’는 것은 부처님의 성문(聲聞)인 그들은 이미 안온한 곳[安穩處]으로 돌아온 것을 말하니 나는 것[生]도 없고 병들고 죽는[病死] 근심도 없다는 것이며, ‘기쁘고 즐거운 곳’이라는 것은 현성(賢聖)의 팔품의 도[八品道:八正道]이다.
‘선에서 선에 머무른다’는 것은 삼매의 즐거움을 즐기며 그 중에서 놀며 다니는 것이니 영원히 안락한 곳으로 돌아온 이이다. - 028_0702_a_22L已還歡樂處者,謂佛聲聞彼已還安隱處,無生無病死之患。歡樂處者,賢聖八品道。於善住善,樂三昧樂於中遊行,永還安樂處者。
- 028_0702_b_02L다시 말하자면 ‘해탈하여 떨어지고 다시 떨어진다’라는 것은 수다원(須陀洹)에서 해탈을 얻고 지옥에 떨어졌다가 그는 하늘[天]에 떨어진다는 것이요, ‘탐착으로 다시 왔다 돌아온다’는 것은 욕계의 탐애가 아직 다하지 못하여 인간으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 028_0702_b_03L復作是說:解脫墮復墮者,於須陁洹得解脫墮地獄,彼墮天貪著復來還。欲界愛未盡,還來人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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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쁘고 즐거운 곳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지옥에 들어갈 것을 두려워하는 근심도 없다는 것이며, ‘즐겁다’는 것은 현성의 도(道)이며, ‘선에서 선에 머무른다’는 것은 온갖 모든 결(結)을 초월하여 열반에 돌아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떨어지고 다시 떨어진다’는 것은 단멸(斷滅)의 소견[見]이요 해탈(解脫)은 유상(有常)의 소견으로 떨어진다는 것이며, ‘탐착으로 다시 왔다 돌아온다’는 것은 지옥과 아귀와 축생은 유상과 단멸에서 해탈하면서 도(道)를 수행한다는 것이다. 그 밖의 나머지는 또한 그와 같다. - 028_0702_b_05L還歡樂處者,無有恐懼入地獄之憂。樂者,賢聖之道,於善住善者,越一切諸結,還於涅槃。復作說:墮復墮者,斷滅見,解脫有常見墮。貪著復來還者,地獄餓鬼畜生。於有常斷滅解脫,而修行道。餘者亦如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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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것[見]과 만(慢)과 믿음을 일으킴[起信]과 뜻[意]과
소견[見]과 게송 등과 전후(前後)이며
기갈[飢]과 의지함과 욕심과 그리고 진리와
해탈과 만원자(滿願子)이다. -
028_0702_b_11L見慢起信意,
見偈等前後,
飢依欲及諦,
解脫滿願子。
- 게건도 제4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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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_0702_b_13L尊婆須蜜菩薩所集偈揵度第四竟。
尊婆須蜜論卷第十
甲辰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彫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