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出三藏記集傅下卷第十五

ABC_IT_K1053_T_015
031_0424_a_01L
출삼장기집 제15권
031_0424_a_01L出三藏記集傅下卷第十五


석승우 지음[전] ⓩ
박상준 번역
031_0424_a_02L梁建初寺沙門釋僧祐 撰


법조법사전(法祖法師傳) 제1
도안(道安)법사전 제2
혜원(慧遠)법사전 제3
도생(道生)법사전 제4
불념(佛念)법사전 제5
법현(法顯)법사전 제6
지엄(智嚴)법사전 제7
보운(寶雲)법사전 제8
지맹(智猛)법사전 제9
법용(法勇)법사전 제10
031_0424_a_03L法祖法師傳第一道安法師傳第二慧遠法師傳第三道生法師傳第四佛念法師傳第五法顯法師傳第六智嚴法師傳第七寶雲法師傳第八智猛法師傳第九法勇法師傳第十

1. 법조법사전(法祖法師傳)
031_0424_a_13L法祖法師傳第一
031_0424_b_02L
백원(帛遠)의 자(字)는 법조(法祖)이고 속성은 만(萬)씨이며, 하내(河內) 사람이다. 아버지 위달(威達)은 유도(儒道)의 올바른 의리(義理)를 얻은 사람으로 그 이름이 알려졌는데, 주부(州府)에서 누차 그를 부르는 명을 내렸으나 한 번도 가지 않았다. 법조는 어려서 도심(道心)을 일으켜 아버지에게 출가할 뜻을 밝혔는데, 말이 조리 있고 간절하고도 지극하여 그의 아버지도 그의 뜻을 꺾을 수 없었으니, 결국 옷을 바꿔 입고 도를 따르게 되었다.
법조는 재주와 사려가 뛰어나고 철저하였으며, 영민하고 밝아 동류들보다 월등히 뛰어났다. 하루에 8, 9천 언(言)의 경(經)을 암송하였고, 방등(方等)을 연구하고 음미하여 깊고 미묘한 이치에 오묘하게 들어갔으며, 세속의 수많은 전적 또한 대부분 통달하였다. 이에 장안(長安)에 정사(精舍)를 짓고 강습하는 것으로 업을 삼았는데, 스님과 재가인으로 수학하는 사람이 거의 천 명을 넘었다.
진(晉)나라 혜제(惠帝) 말엽에 태재(太宰) 하간왕(河間王) 옹(顒)이 관중(關中)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는 마음을 비우고 법조를 존경하고 중히 여겼으며 스승의 예로써 대하여 항상 한가한 때나 고요한 밤이 되면 그 때마다 찾아와 도덕(道德)을 담론하곤 하였다. 이 때 서부(西府)가 처음 만들어져 뛰어난 인재들이 매우 많았는데, 말 잘하는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 복종하고 멀리에서 찾아왔다.
법조는 수많은 영웅들이 서로 다투고 전쟁이 시작되려는 것을 보고는 농우(隴右)1)로 몰래 은둔하여 고아한 지조를 보전하고자 뜻을 세웠다. 때마침 장보(張輔)가 진주자사(秦州刺史)가 되어 농상(隴上)2)을 진정시키러 가게 되자 법조는 그와 동행하게 되었다. 장보는 법조의 덕망이 높이 드러나 많은 사람들이 바라보고 귀의하는 대상임을 알고는 옷을 갈아입게 하여 자기의 요좌(僚佐)로 삼고자 하였다. 그러나 법조는 의지를 견고하게 하여 바꾸지 않았으니, 이로 인해 장보와 유감을 맺게 되었다.
그 주(州)에 먼저 있던 사람 중에 관번(管蕃)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법조와 논의하여 법조에게 여러 번 굴복당하였다. 관번은 깊이 치욕과 원한을 품고는 항상 참구(讒搆)를 일삼았다. 법조는 견현(汧縣)에 이르자 갑자기 여러 도인(道人)과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나에게 며칠 내로 전세의 죄업에 걸맞는 과보가 이르게 되리라.”
그리고는 곧 이별을 고하고 소서(素書)를 짓고 경전과 불상 및 자재 등을 모두 나누어 주었다. 다음날 새벽 장보에게 나아가 함께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갑자기 장보의 뜻에 거슬리게 되자 장보는 그를 잡아들여 벌을 주게 하였다. 대중들이 모두 괴이하게 여기며 한탄하자 법조가 말하였다.
“나는 이것으로 과보를 마치게 되었다. 이는 숙명이고 오래 전에 맺어진 것이지 오늘 갑자기 생긴 일이 아니다.”
이에 시방의 부처님 이름을 부르고는 말하였다.
“법조는 전생에 죄연(罪緣)이 있었는데, 이제 기쁘게도 그 과보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원컨대 이후로는 장보와 더불어 선지식(善知識)이 되어 그가 살인의 죄를 받게 되는 일이 없게 하소서.”
드디어 50차례 채찍질 당하자 문득 목숨을 마쳤다. 장보는 나중에 그 일을 낱낱이 듣고는 비로소 크게 한탄하였다.
그 전에 법조가 도(道)로 교화하여 그 명성이 관롱(關隴)3) 땅에 자자하였으니, 효함(崤崡)4)의 오른쪽 지역에서는 마치 신처럼 그를 받들었다. 이에 융인(戎人)과 진인(晉人)도 탄식하고 슬퍼하며 길 위로 눈물이 흐를 지경이었다. 농상(隴上)의 강호(羌胡)5)는 정예의 기병 5천을 거느리고 장차 법조를 맞이하여 서쪽으로 돌아가려고 하였는데, 중도에서 그의 피살 소식을 듣고는 일찍 다다르지 못한 것을 슬퍼하고 한탄하였다. 모든 이들이 격분하여 법조의 원수를 갚으려 하자 장보는 군대를 농상으로 파견하였고 강호(羌胡)는 날렵한 기병을 이끌고 이를 맞이하여 싸웠다. 이 때 천수(天水)6)에서 지난날 장보의 부하였던 부정(富整)이 결국 분노로 인해 장보를 참수하였다. 이에 많은 호인[胡]들은 이미 원한을 설욕한 것이 되자 잘했다고 칭찬하고는 돌아갔으며, 법조의 시신을 함께 나누어 각기 탑묘(塔廟)를 세웠다.
장보의 자(字)는 세위(世偉)이고, 남양(南陽) 사람이며 장형(張衡)의 후손이다. 비록 재주와 머리는 있었으나 잔인하여 이치로써 다스리지 않았다. 천수(天水) 태수(太守) 봉상(封尙)을 마음대로 살해하자 백성들은 의심하며 경악하였고, 난을 일으켜 그를 참수하였다. 관번(管蕃) 역시 가세가 기울고 어려워져 패가의 지경에 이르러 죽었다.
그리고 얼마 후 성은 이(李)이고 이름은 통(通)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말하였다.
“염라왕(閻羅王)의 처소에 있는 법조법사를 보았는데, 왕을 위하여 『수릉엄경(首楞嚴經)』을 강설하고 있었다. 법조법사가 말씀하시기를 ‘강의가 끝나면 마땅히 도리천(忉利天)에 왕생하게 되리라’고 하셨다. 또 좨주(祭酒) 왕부(王浮)와 일명 도사(道士) 기공(基公)이라는 사람을 보았는데 차례로 수갑과 형틀에 묶여 법조법사에게 참회를 구하였다.”
지난날 법조는 평소에 왕부(王浮)와 누가 사도(邪道)이고 누가 정도(正道)인지를 다투었는데, 왕부가 여러 차례 굴복을 당하였다. 그런데도 스스로 이를 인정하지 못하고 곧 『노자화호경(老子化胡經)』을 지어 불법을 근거도 없이 비방하였다. 재앙은 반드시 귀결되는 곳이 있기 때문에 죽고 나서야 비로소 참회할 생각을 한 것이었다.
손작(孫綽)의 『도현론(道賢論)』7)에서는 법조를 혜강(嵆康)에 필적시켰는데, 그 논(論)에서 말하였다.
“백조(帛祖)의 재난은 관번(管蕃)에게서 일어났고, 중산(中散)의 재앙은 종회(鍾會)에게서 만들어졌다. 두 현인은 모두 준수하고 뛰어난 기상을 지녔지만 자기 한 몸의 안전을 도모하는 생각에는 어두웠다. 또한 마음을 세상사 밖에 깃들이고 세상을 가벼이 여겨 재앙을 초래한 것도 거의 서로 다르지 않다.”
그가 세상에 칭해진 것이 이와 같았다.
법조는 이전에 많은 영역을 두루 섭렵하고, 범어[胡語]와 중국어[漢語]에 훌륭하게 통달하여 일찍이 『유태(惟逮)』ㆍ『제자본기(弟子本起)』ㆍ『오부승(五部僧)』 등 3부(部)의 경을 번역하였고, 또한 『수릉엄경(首楞嚴經)』을 주해하였다. 또한 이와 별도로 여러 부의 작은 경들을 번역하였는데, 난을 만나 분실되어 그 이름을 알 수 없다.
법조(法祖)의 아우인 법작(法作) 역시 어려서부터 이름을 떨쳤는데, 박사(博士)로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나이 25세에 출가하여 불교의 이치를 깊이 꿰뚫었고, 관롱(關隴)에 그 이름이 알려졌다.
당시 양주자사(梁州刺史)는 장광(張光)이었다. 법작(法作)의 형이 옷을 바꾸어 입는 것을 거부하여 장보(張輔)에게 죽임을 당한 것을 빌미삼아 장광도 역시 법작을 핍박하고 불도(佛道) 닦는 일을 그만두게 하였다. 그러나 법작은 뜻을 지키고 지조를 굳건히 하며 죽기를 맹세하였다. 결국은 장광에게 해를 입었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57세였다. 그는 『방광반야경[放光波若經]』을 주해하였고, 『현종론(顯宗論)』 등을 지었다.
장광(張光)의 자(字)는 경무(景武)이며 강하(江夏) 사람이다. 후에 무도(武都)가 되었는데, 저양(氐楊)의 난리에 적에게 포위되자 분개하며 죽었다.
당시 진(晉)나라 혜제(惠帝) 때에 우바새 위사도(衛士度)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도행반야경[道行波若經]』 2권을 역출하였다. 위사도는 본래 사주(司州) 급군급(汲郡汲)8) 사람이다. 문을 닫아 걸고 은거하며 안빈낙도의 생활을 하면서 항상 불법을 중심으로 삼았다. 그가 죽던 날, 청정하게 몸을 씻고 양치질하고는 천여 언(言)의 경(經)을 외운 후 스스로 옷을 시체 위에 덮듯이 하고 눕더니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031_0424_a_14L帛遠字法祖本姓萬氏河內人父威以儒雅知名州府辟命皆不行少發道心啓父出家辭理切至父不能奪遂改服從道祖才思儁徹敏朗絕倫誦經日八九千言硏味方等入幽微世俗墳索多所該貫乃於長造築精舍以講習爲業白黑稟受幾出千人晉惠之末太宰河閒王顒鎭關中虛心敬重待以師友之敬每至閑辰靖夜輒談講道德于時西府初建俊㐅甚盛能言之士咸服其遠達祖見群雄交爭干戈方始志欲潛遁隴右以保雅操會張輔爲秦州刺史鎭隴上祖與之俱行輔以祖名德顯衆望所歸欲令反服爲己僚佐固志不移由是結憾先有州人管蕃與祖論議屢屈於祖蕃深銜恥恨加讒搆祖行至汧縣忽語道人及弟子云我數日對當至便辭別作素書分布經像及資財都訖明晨詣輔共忽忤輔意輔使收之行罰衆咸怪祖曰我來畢對此宿命久結非今事也乃呼十方佛祖前身罪緣歡喜畢對願從此以後與輔爲善知識令受殺人之罪遂鞭之五十奄然命輔後具聞其事方大惋恨初祖道化之聲被於關隴崤函之右奉之若戎晉嗟慟行路流涕隴上羌胡率精騎五千將欲迎祖西歸中路聞其遇害悲恨不及衆咸憤激欲復祖之輔遣軍上隴羌胡率輕騎逆戰天水故帳下督富整遂因忿斬輔胡旣雪怨恥稱善而還共分祖尸起塔廟輔字世偉南陽人張衡之後雖有才解而酷不以理撗殺天水太守封尚百姓疑駭因亂而斬焉管蕃亦卒以傾險致敗後少時有一人李名通死而更蘇云見祖法師在閻羅王處爲王講首楞嚴經云講竟應往忉利天又見祭酒王浮一云道士基公次被鎖械求祖懺悔昔祖平素之與浮每爭邪正浮屢屈旣意不自乃作老子化胡經以誣謗佛法有所歸故死方思悔孫綽道賢論法祖疋嵆康論云帛祖舋起於管蕃散禍作於鍾會二賢竝以俊邁之昧其圖身之慮棲心事外輕世招治不異也其見稱如此祖旣博涉多閑善通胡漢之語常譯惟逮弟子五部僧等三部經又注首楞嚴經又言別譯數部小經値亂零失不知其名祖弟法作亦少有令譽被博士徵不就年二十五出家深洞佛理隴知名梁州刺史張光以作兄肯反服輔之所殺光又逼作令罷道作執志堅貞以死爲誓遂爲光所害春秋五十有七注放光波若經及著顯宗論等光字景武江夏人後爲武都氐楊難敵所圍發憤而死晉惠之世又有優婆塞衛士度譯出道行波若經二卷士度本司州汲郡汲人陸沈寒門安貧樂道常以佛法爲心當其亡日淸淨澡漱誦經千餘言後蓋衣尸臥奄然而卒

2. 도안(道安)법사전
031_0425_a_11L道安法師傳第二
031_0425_b_02L
석도안(釋道安)의 속성은 위(衛)씨이고 상산(常山)의 부류(扶柳) 사람이다. 12살이 되자 출가하였는데, 정신과 성품은 총명하고 민첩하였으나 형상과 모습이 몹시 누추하여 스승의 사랑을 받지 못하였다. 농막[田舍]에 배속되어 3년 동안 일하였는데도 부지런함을 잃지 않고 열심히 일하며 한 번도 원망하는 기색이 없었다. 독실한 성품으로 정진하고 재계(齋戒)를 빠짐없이 지켰으며, 여러 해가 지난 후에야 겨우 스승에게 아뢰어 경전을 청하게 되었다.
스승은 『변의경(辯意經)』 한 권을 주었는데, 이 책은 5천여 언(言) 남짓한 분량이었다. 도안은 경을 지니고 밭에 들어가 일하다가 쉬는 틈틈이 자세히 읽어보았다. 저녁이 되어 돌아와서는 경전을 스승에게 되돌려 주며 다시 다른 경전을 달라고 청하니, 스승이 말하였다.
“어제 준 경은 읽지 않고 오늘 또 다른 것을 구하느냐?”
도안이 대답하였다.
“이미 다 암송했습니다.”
스승은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믿지 않았다. 다시 『성구광명경(成具光明經)』 1권을 주었는데, 1만 언(言) 가량의 분량이었다. 도안은 이 경을 지니고 지난번처럼 밭에서 일하다가 쉬는 틈에 모두 읽고는 저녁에 돌아와 스승에게 돌려주었다. 이에 스승이경을 받아들고는 외워 보게 하였더니 한 글자도 틀리지를 않았다. 스승은 크게 놀라 감탄하고 그를 공경하며 달리 생각하게 되었다.
그 후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마음대로 널리 돌아다녔는데, 업(鄴)에 이르러 중사(中寺)로 들어가 불도징(佛圖澄)을 만나게 되었다. 불도징은 그를 만나보고는 감탄하였고, 그와 더불어 종일토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대중들은 그의 외형이 바라던 것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보고는 모두들 그를 가볍게 여기고 괴이하게 여겼다. 이에 불도징이 말하였다.
“이 사람의 원대한 식견은 너희들이 짝할 만한 것이 아니다.”
그 이전에 경전이 역출(譯出)된 지 오래되어 구역본(舊譯本)은 그 때의 언어와 차이가 있었으므로 경전의 깊은 뜻은 감춰지고 매몰되어 통하지 않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매번 강설(講說)할 때마다 오직 그 대의(大意)만을 서술하고 전독(轉讀)할 따름이었다. 이에 도안은 경전을 샅샅이 살펴 깊은 뜻을 캐내고 원대한 종지에 이르렀다.
그는 『반야도행품(般若道行品)』ㆍ『밀적금강경(密迹金剛經)』ㆍ『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 등 많은 경전을 주석(注釋)하였는데, 모두 문맥을 찾아 문구를 비교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뜻을 밝혀 의심스러운 부분을 골라내고 밝게 해석한 것이 모두 합하면 22권에 이른다. 심원하고 풍부한 뜻을 담은 서문은 깊은 종지를 묘하게 다 드러냈고, 앞뒤를 일관되게 한 조리는 문리(文理)를 회통(會通)시켰으니, 경전의 뜻이 극명해진 것은 실로 도안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또한 한(漢)나라 때부터 진(晉)나라 때까지 전래되어온 경전이 제법 많았는데 경전을 전한 사람의 이름은 기록되지 않았으니, 후세 사람들이 찾아보아도 그 연대를 추측할 수 없었다. 도안은 이에 명목(名目)을 모두 모아 전래된 시기와 전한 사람을 표기하고 신역(新譯)과 구역(舊譯)을 구별하여 경록(經錄)을 저술하였으니, 많은 경전에 근거가 있게 된 것은 실로 그의 공적을 말미암은 것이다.
이에 사방의 학자들이 다투어 찾아와 그를 스승으로 모셨으니, 그에게서 학업을 받은 제자는 법태(法汰)와 혜원(慧遠) 등 500여 명에 달했다. 석씨(石氏)의 난(亂)이 일어나게 되자 그는 대중들에게 말하였다.
“지금은 하늘이 재앙을 내려 가뭄이 극심하고 도적들은 곳곳에서 마음대로 설치고 있으니, 모여 있어도 승단을 건립할 수 없고 흩어지는 것도 옳지 못하다.”
드디어 대중을 거느리고 왕옥(王屋)9)의 여궤산(女机山)으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황하(黃河)를 건너 육혼(陸渾)10) 땅에 의지하여 산에 살면서 나무 열매를 먹으며 학문을 닦았다. 갑자기 모용준(慕容俊)11)이 육혼으로 쳐들어오자 결국은 남쪽에 있는 양양(襄陽)12)으로 투신하게 되었다. 길을 가다가 신야(新野)13)에 이르자, 다시 의논하며 말하였다.
“지금은 흉년이니, 나라 임금에게 의지하지 않는다면 법사(法事)를 건립할 수가 없다. 또한 교화의 주체인 승단도 모름지기 널리 퍼지게 해야 한다.”
그러자 모두들 말하였다.
“법사의 가르침에 따르겠습니다.”
이에 법태(法汰)를 양주(揚州)로 가게 하면서 말하였다.
“그곳에는 군자가 많아 풍류를 좋아하고 숭상한다.”
또 법화(法和)를 촉(蜀)으로 들어가게 하면서 말하였다.
“그곳의 산수는 한가하게 도를 닦을 만한 곳이다.”
그리고 도안과 제자 혜원(慧遠) 등 500여 명도 황하를 건넜다.
밤길을 가다가 천둥이 내려치는 폭우를 만나게 되었고, 번쩍이는 번갯불에 의지하며 나아가다가 앞쪽에 있는 인가를 발견하게 되었다. 문안을 들여다보니, 말을 매어 두는 말뚝이 한 쌍 있었고 그 사이에 1곡(斛)14)을 담을 만한 말구유가 하나 매달려 있었다. 도안이 문득 ‘임백승’ 하고 부르니 주인이 놀라 뛰어나왔는데, 과연 성은 임(林)이고 이름은 백승(伯升)이었다. 주인은 “당신은 신인(神人)이십니다” 하고는 후하게 접대하였다. 얼마 후 제자가 “어떻게 그 사람의 성과 이름을 아셨습니까?” 하고 물으니, 도안이 대답하였다.
“두 개의 나무가 있었으니 임(林)자가 되고, 구유[篼]는 백승(百升)을 담을 만한크기였다.”
드디어 양양(襄陽)에 머무르게 되자 습착치(習鑿齒)가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왔다. 자리를 잡고는 “사해(四海)에 알려진 습착치입니다”라고 자기를 소개하였다. 도안이”하늘에 닿은[彌天] 석도안입니다”라고 하였으니, 당시 사람들이 모두들 이를 두고 명답(名答)이라 하였다.
습착치가 일찍이 도안에게 배[梨] 수십 매(枚)를 선물로 보낸 적이 있었는데, 마침 대중들에게 강의하는 자리에 도착하였다. 도안은 곧 손수 배를 쪼개어 나누어 주었는데, 배가 다 없어졌을 즈음 모든 사람에게 고루 분배되어 조금도 차이가 없었다.
고평(高平)의 치초(郗超)는 심부름꾼을 보내 천 섬의 쌀을 보내고, 아름다운 글을 여러 장의 편지에 담아 깊이 은근한 마음을 보내었다.
도안은 회답 편지에서 말하였다.
“쌀이 떨어지고서야 기대함이 곧 번뇌가 된다는 것을 크게 깨달았습니다.”
습착치는 사안(謝安)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말하였다.
“이곳에 와서 석도안스님을 만났는데, 이 사람은 매우 뛰어난 분으로 평범한 도사(道士)가 아니었습니다. 스님의 문도(門徒)는 수백 명에 달하는데 재계와 강론에 게으르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보통사람들의 귀와 눈을 현혹시키는 신통변화의 기술도 없고, 수많은 소인들의 천차만별을 정돈할 수 있는 중후한 위엄과 큰 세력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스님의 문도는 엄숙하고 숙연하게 스스로 서로를 존경하며 양양(洋洋)하고도 가지런하였으니, 이는 내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일입니다. 그 분은 이치를 지니고 있어 간결하고 진솔하면서도 널리 섭렵한 바가 많았고, 내외의 뭇 서적들을 대략은 모두 편람하였으며, 음양(陰陽)과 산수(算數)에도 역시 모두 능통하였습니다. 불경에 있어서는 예전부터 그가 가장 뛰어나다고 여겨지고 있는데, 논의를 펼침이 마치 법란(法蘭)과 법조(法祖) 등의 부류와 같았습니다. 큰 이치로 통합하면서도 소소한 부분을 긍정하지 않음이 없었고, 만물을 통일하는 평등한 지혜는 세계 안에 있으면서도 자유자재로 치달려 나아갔습니다.
그대에게 그를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도 역시 매번 ‘그대를 한번 만나 볼 수 있었으면 하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당시의 현인들에게 존중받았던 것이 이와 같았다.
도안은 번면(樊沔)15)에 있던 15년 동안 해마다 항상 두 차례씩 『방광반야경(放光般若經)』을 강의하였는데, 한 번도 그만두거나 빠뜨린 적이 없었다.
환충(桓沖)의 요청으로 강릉(江陵)으로 나갔었는데, 주서(朱序)16)가 서쪽을 진정시키고는 다시 청하여 양양(襄陽)으로 돌아왔다.
부견(符堅)17)도 평소 그의 명성을 듣고 항상 이렇게 말하였다.
“양양에 석도안이란 스님이 있는데 그 분은 참으로 뛰어난 인물[名器]이시다. 이제 그 분을 이곳으로 모셔, 짐의 몸을 보좌하게 하고 싶구나.”
그 후 부견은 양양을 공략하였고, 도안과 주서(朱序) 모두 부견에게 사로잡혔다. 이에 부견은 복야(僕射)인 권익(權翼)에게 말하였다.
“짐이 십만의 군사로 양양땅을 거두었지만 얻은 것은 오직 한 사람과 반 사람뿐이다.”
권익이 말하였다.
“누구입니까?”
부견이 말하였다.
“안공(安公)이 한 사람이고, 습착치(習鑿齒)가 반 사람이다.”
도안은 도착하자 장안성(長安城) 안에 있는 오중사(五重寺)에 주석하였는데, 승단의 대중이 수천 명에 달하였으며 크게 법화(法化)를 넓혔다.
일찍이 위(魏)나라와 진(晉)나라의 사문들은 스승에 의거하여 자신의 성(姓)을 지었던 까닭에 성씨(姓氏)가 각기 달랐다. 도안은 큰 스승의 근본으로서 석가모니보다 더 존경스러운 분은 없다고 여겨 스님들의 성을 석씨(釋氏)로 짓게 하였다. 그 후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을 얻었는데 과연 칭하기를 “사방의 강물이 바다로 들어가면 강물의 이름은 없어지듯이 네 종성[四姓]도 사문이 되면 모두가 석가의 종족[釋種]으로 칭한다”고 하였다. 이처럼 스님께서 이미 현양하셨던 바는 경전의 말씀과도 부합되었으니, 마침내 이는 후대의 법식이 되었다.
도안은 밖으로도 많은 책을 섭렵하여 문장이 뛰어났다. 따라서 장안에서 의관을 갖춘 집안의 자제로서 시(詩)ㆍ부(賦)를 하는 사람은 모두 그에게 의지하여 명성을 이루었다. 학사(學士) 양홍중(楊弘仲)과 더불어 시(詩)의 풍아(風雅)를 논하였는데 모두 이치에 맞았다.
당시 부견은 석씨(石氏)의 난(亂)18)을 기화로 백성들의 호(戶) 수가 크게 늘어나고 사방을 거의 평정하기에 이르렀는데, 오직 동남쪽 한 모퉁이만 아직 항복 받지 못하고 있었다. 부견은 시신(侍臣)들과 담화를 나눌 때마다, 강좌(江左)를 평정하여 진나라 황제를 복야(僕射)로 삼고 사안(謝安)을 시중(侍中)으로 삼고 싶다는 말을 하였다.
부견의 아우인 평양공(平陽公) 부융(符融)과 조정대신 석월(石越)ㆍ원소(原紹) 등이 모두 간절하게 간하였으나 끝내 그의 마음을 되돌릴 수 없었다. 이에 대중들은 도안이 부견의 존경과 신임을 받는다고 여겨 마침내 함께 도안에게 청하였다.
“주상께서 장차 동남쪽으로 군사를 일으키려 하십니다. 공이 어찌 창생(蒼生)들을 위하여 한마디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때마침 부견이 동원(東苑)으로 나가면서 도안에게 가마에 올라 함께 타고 가기를 명하니, 이에 복야 권익(權翼)이 간(諫)하였다.
“신(臣)이 듣기로는 천자의 법가(法駕)에는 시중(侍中)이 모시고 타게 되어 있습니다. 도안(道安)은 형상을 허물어 승려가 된 자인데 어찌 수레에 오르게 하여 천자의 옆자리에 참석시킬 수 있겠습니까?”
부견은 무서운 얼굴빛을 띠며 말하였다.
“안공(安公)의 도와 덕은 존경할 만하니 짐은 천하와도 바꾸지 않을 것이다. 또한 가마를 함께 타는 것이 비록 영예라고는 하나 그에게는 한갓 냄새나는 썩은 고기에 불과할 것이다.”
곧 권익에게 명하여 도안을 부축해 가마에 오르게 하고는 이윽고 도안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짐은 장차 공과 함께 남쪽 오월(吳越) 땅으로 유행하고자 합니다. 6사(師:六軍)를 정비하여 순수(巡狩)19)하고, 회계(會稽)에 올라 창해(滄海)를 바라본다면 또한 즐겁지 않겠습니까?”
이에 도안이 대답하였다.
“단월(檀越)께서는 천명(天命)에 순응하여 세상을 거느리심에 8주(州)의 부유함이 있고, 중토(中土)에 자리잡아 4해(海)를 제압하고 있으며, 마땅히 정신을 무위(無爲)에 깃들이시니 그 융성함이 요순(堯舜)과 비견됩니다. 그런데도 지금 백만의 대군으로 아무 쓸모없는 저 땅을 얻고자 하십니까?
또한 동남지방은 지형이 낮고 기후가 사나워 지난날 순(舜)임금과 우(禹)임금도 그곳에 갔다가는 돌아오지 못하였고, 진시황도 갔다가는 돌아오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빈도가 나름대로 본 것이지 어리석은 마음으로 저들의 뜻에 찬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훌륭한 인척인 평양공과 중신인 석월이 모두 안 된다고 말씀드렸는데도 오히려 거절하셨습니다. 빈도는 가볍고 천한 사람이니 말씀드린다 하여도 반드시 윤허하지 않으시겠지만, 이미 후한 예우를 받고 있으니 어찌 감히 정성(精誠)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부견이 말하였다.
“땅이 넓지 않고 백성들이 다스리기에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장차 천심을 가려내어 대운(大運)의 소재를 밝히고자 할 뿐입니다. ‘시운에 순응하여 순수(巡狩)한다’고 한 것은 전대의 전적에도 또한 나타나 있습니다. 여래(如來)의 말씀 중에는 제왕이 사방을 순성(巡省)한다는 글이 없습니까?”
도안이 말하였다.
“만약 천자의 가마를 반드시 움직이고자 하신다면 잠시 낙양(洛陽)으로 행차하시어 위세를 높이고 정예(精銳)의 군사를 비축한 후에 격문(檄文)을 강남 땅으로 보내소서. 이와 같이 했는데도 그들이 복종하지 않는다면 그 때 그들을 토벌해도 늦지 않습니다.”
부견은 이 말에 따르지 않았다. 결국 평양공(平陽公) 부융(符融) 등 정예군 25만 명을 파견하여 선봉으로 삼고, 부견이 몸소 보병과 기병 60만 명을 거느리고 출병하였다.
부견의 군대가 강남에 도달할 무렵, 진(晉)은 정로장군(征虜將軍) 사석(謝石)과 서주자사(徐州刺史) 사현(謝玄)을 파견하여 그들에 대항하였다.
부견의 군대는 크게 패하였고 진(晉)의 군대가 도리어 북쪽으로 30여 리를 추격하였으니, 죽은 시체들은 서로를 베개 삼아 누울 지경이었다. 부융은 말에서 떨어져 목이 부러져 죽었고 부견은 단신으로 말을 타고 도망쳤으니, 도안이 간언한 말과 같이 되었다.
얼마 후 부견은 모용충(慕容沖)20)에게 포위되었는데 이 때 도안(道安)도 장안성 안에 함께 머물고 있었다. 위진(僞秦) 건원(建元) 21년(385) 2월 8일 재를 마친 후 병 없이 세상을 떠났고, 오급사(五給寺) 안에 장사지냈다.
031_0425_a_12L釋道安本姓衛常山扶柳人也年十二出家神性聰敏而形貌至陋不爲師之所重驅使田舍至于三年執勤就勞曾無怨色篤性精進齋戒無闕數歲之後方啓師求經師與辯意經一卷可五千餘言安齎經入田因息尋覽暮歸以經還師復求餘經師曰昨經不讀今復求耶對曰卽已闇誦師雖異之而未信也復與成具光明經一卷可減萬言齎之如初暮復還師執經覆之不差一字師大驚敬而異之後爲受具戒恣其遊方至鄴入中寺遇佛啚澄澄見而嗟歎與語終日衆見其形望不稱咸共輕怪此人遠識非爾儔也初經出已久而舊譯時謬致使深義隱沒未通至講說唯敍大意轉讀而已安窮覽經典鉤深致遠其所注般若道行安般諸經竝尋文比句爲起盡之及析疑甄解凡二十二卷序致淵妙盡玄旨條貫旣敍文理會通義克明自安始也又自漢曁晉經來稍多而傳經之人名字弗記後人追莫測年代安乃摠集名目表其時銓品新舊撰爲經錄衆經有據由其功四方學士競往師之受業弟法汰慧遠等五百餘人及石氏之乃謂其衆曰今天災旱蝗寇賊縱聚則不立散則不可遂率衆入王屋女杋山頃之復渡河依陸渾山食修學俄而慕容俊過陸渾遂南投新野復議曰今遭凶年不依國主法事難立又教化之體宜令廣布隨法師教乃令法汰詣楊州曰多君子好尚風流法和入蜀山水可以修閑安與弟子慧遠等五百餘人度河夜行値雷雨乘電光而進前得人家見門裏有一雙馬㭿㭿閒懸一馬篼可容一斛安便呼林伯升主人驚出果姓林名伯升謂是神人厚相賞旣而弟子問何以知其姓字安曰兩木爲林篼容伯升也遂住襄陽鑿齒聞而詣之旣坐而稱曰四海習鑿齒安曰彌天釋道安時人咸以爲名荅鑿齒常餉安梨數十枚正値講便手自割分梨盡人遍無參差者高平郗超遣使遺米千石修書累紙深致慇懃安答書曰捐米彌覺有待之爲煩鑿齒與謝安書曰來此見釋道安故是遠勝非常道士師徒數百齋講不惓無變化伎術可以惑常人之耳目無重威大勢可以整群小之參差而師徒肅肅自相尊敬洋洋濟乃是吾由來所未見其人理懷蕑衷所博涉內外群書略皆遍睹陰陽亦皆能通佛經故最是所長作義乃似法蘭法祖輩統以大無不肯稍齊物等智在方中馳騁也恨不使足下見之其亦每言思得一見足下爲時賢所重如此安在樊河十五載每歲常再遍講放光經未常廢闕沖要出江陵朱序西鎭復請還襄陽符堅素聞其聲每云襄陽有釋道安是名器方欲致之以輔朕躬後堅攻襄陽安與朱序俱獲於堅堅謂僕射㩲翼曰朕以十萬之師取襄陽唯得一人半翼曰誰耶堅曰安公一人鑿齒半人也旣至住長安城內五重僧衆數千人大弘法化初魏晉沙依師爲姓故姓各不同安以爲大師之本莫尊釋迦乃以釋命氏後獲增一阿鋡經果稱四河入海無復河四姓爲沙門皆稱釋種旣懸與經遂爲後式焉安外涉群書善爲文長安中衣冠子弟爲詩賦者皆依附致譽與學生楊弘仲論詩風雅有理致初堅承石氏之亂至是民戶殷富四方略定唯有東南一隅未能抗服堅每與侍臣談話未嘗不欲平一江左欲以晉帝爲僕射謝安爲侍堅弟平陽公融及朝臣石越原紹竝切諫終不能迴紹以安爲堅所敬乃共請曰主上將有事東南公何能不爲蒼生故一言耶會堅出東苑命安昇輦同載僕射㩲翼諫曰臣聞天子法駕侍中陪乘道安毀形寧可參廁乘輿堅懍然作色曰安公道德可尊朕將擧天下而不易雖輿輦之乃是爲其臭腐耳卽勅翼扶之而登輿俄而顧謂安公曰朕將與公遊吳越整六師而巡狩陟會稽而觀滄海不亦樂乎安對曰檀越應天御有八州之富居中土而制四海棲神無爲與堯舜比隆今欲以百萬之衆求厥田下下之土且東南地卑氣厲昔舜禹遊而不反秦皇適而弗以貧道觀之非愚心所同也平陽公懿戚石越重臣竝謂不可猶尚見貧道輕淺言必不允旣荷厚遇不盡誠耳堅曰非爲地不廣民不足治也將簡天心明大運所在耳順時巡狩亦著前典若如來言則帝王無省方之文乎安曰若鑾駕必動可蹔幸洛陽抗威畜銳傳檄江南如其不伐之未晚堅不從遂遣平陽公融等精銳二十五萬爲前鋒堅躬率步騎六十萬到頃晉遣征虜將軍謝石徐州刺史謝玄拒之堅軍大崩晉軍還逐北三十餘里死者相枕融馬倒隕首堅單騎而遁如所諫焉堅尋爲慕容沖所圍安同在長安城內僞建元二十一年二月八日齋畢無疾而卒葬五給寺中
031_0427_a_02L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은사(隱士)인 왕가(王嘉)가 그를 찾아와 문안을 드리니, 도안이 말하였다.
“세상일이란 이와 같으니 떠나는 일이 곧 그대에게도 닥치리라. 차라리 우리 함께 떠날까?”
왕가가 말했다.
“진실로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만 스승께서 일단 먼저 떠나십시오. 저는 다 갚지 못한 부채(負債)가 남아 있어 함께 떠날 수가 없습니다.”
그 후 요장(姚萇)21)이 장안을 얻게 되었을 때 왕가는 일부러 성 안에 남아 있었다. 요장은 부견과 서로 대항하는 상황이 너무 오래 지속되자, 이를 근심하여 왕가에게 물었다.
“내가 천하를 얻을 수 있겠는가?”
왕가가 대답하였다.
“거의 얻게 될 것입니다[略得].”
요장은 진노하며 말하였다.
“얻게 된다면 마땅히 ‘얻는다’고 말할 것이지, 어떻게 거기에 ‘거의[略]’란 말을 하는가?”
그리고는 마침내 그를 참수하였으니, 이것이 왕가가 말했던 부채였다. 요장이 죽은 뒤 그의 아들 략(略)이 마침내 부견을 죽이고 황제라 칭하였으니, 이것이 곧 왕가가‘거의 얻게 된다[略得]’고 말한 뜻이었다.
왕가의 자(字)는 자년(子年)이고 농서(隴西) 사람이다. 형상과 모습이 비루하여 마치모자라는 사람 같았고, 익살스럽게 웃고 떠들기를 좋아하였다. 그러나 오곡을 먹지 않고 청허(淸虛)하게 기(氣)를 마시고 살았으니, 모든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여 받들고 섬겼다. 그를 찾아가 운수가 좋은지 나쁜지를 물으면 왕가는 물음에 따라 응답하였는데, 그 말은 웃음을 자아냈고 몸짓은 광대와 같았으며 글은 비결[讖記]과 닮아 이해할 수 없었으나 일을 겪고 나서 살펴보면 그것들이 모두 효험이 있었다.
왕가가 죽게 되자, 그 날 언덕 위에서 그를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다. 법사와 은밀히 계합했던 신인(神人)들은 모두 이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앞서 도안은 구마라집(鳩摩羅什)이 서쪽 나라에 있다는 말을 듣고는, 함께 미묘한 말씀을 강석(講析)하기를 염원하여 부견에게 그를 모셔오도록 권하였다. 구마라집 역시 멀리서 도안의 도풍(道風)을 듣고는 “이 분은 동방의 성인이다”라고 말하며 항상 멀리서나마 그를 예배하였다.
도안이 처음 태어났을 때 왼쪽 팔 위에 한 촌 남짓한 크기의 살가죽이 있었는데 팔찌처럼 팔에 붙어 잡아당기면 위아래로 움직일 수 있었으나 오직 손에서 떼어낼 수는 없었다. 이로 인해 당시 사람들은 그를 인수보살(印手菩薩)이라 불렀다.
도안이 세상을 떠난 후 20년 후에야 구마라집은 비로소 장안에 이르렀으니, 구마라집은 서로 만나지 못한 것을 한탄하며 심히 슬퍼하고 비통해할 따름이었다.
일찍이 도안은 경전에 독실한 뜻을 두고 법을 펴는 데 힘썼으니, 그가 초청한 외국의 사문 승가발징(僧伽跋澄)ㆍ담마난제(曇摩難提)ㆍ승가제바(僧伽提婆) 등은 백만여 언(言)에 달하는 많은 경전을 역출하였다. 그는 항상 사문 법화(法和)와 함께 음(音)과 글자[字]를 판별하여 확정짓고 문장의 뜻을 상세하게 파헤쳤으니, 새로 역출한 수많은 경전들이 이로 인해 바로잡혔다.
손흥공(孫興公)22)은 『명덕사문론(名德沙門論)』에서 스스로 말하였다.
“석도안은 박식하고 재능이 많으며 경전의 분명한 이치에 통달하였다.”
그가 세상에 기록된 것이 이와 같았다.
석법화(釋法和)는 기주(冀州) 사람이고 고요하고 지조 있는 행동을 하였다. 젊어서 도안과 같은 스승 밑에서 공부하였는데, 논리의 요강을 표명하여 의심나고 막히는 부분을 이해하고 깨닫는 것에 매우 능하였다. 도안은 얻게 된 많은 경전을 항상 그와 함께 교열하였다.
후에 낙양(洛陽)으로 유행하였고, 또 승가제바(僧伽提婆)를 초청하여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는 경(經) 등을 거듭 역출하였다. 양평사(陽平寺)에 거처하였는데 80여 세에 위진공(僞晉公) 요서(姚緖)23)의 청으로 승려들을 모아 재를 열고 강의하였다. 제자들에게 타이르듯 말하였다.
“세속의 그물은 번뇌가 되어 쌓이는 괴로움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 무상(無常)이야말로 진정한 즐거움이니라.”
곧 의복을 가지런히 하고 탑을 돌며 예배하더니,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 옷으로 머리를 덮고는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당시 사람들이 그를 두고 ‘명(命)을 아는 사람’이라 하였다.
031_0426_c_10L未終之前王嘉往候安安曰世事如此行將及人與去乎嘉曰如所言竝行前吾有小債未了不得俱去及姚萇之得長安嘉故在城內萇與符堅相持甚久萇患之問嘉曰吾得天下不答曰萇怒曰得當言得何略之有遂斬嘉所謂負債者也萇死其子略方得殺堅稱帝所謂略得者也嘉字子隴西人形貌鄙陋似若不足滑稽好語笑然不食五穀淸虛服氣咸宗而事之往問善惡嘉隨而應答語則可笑狀如調戲辭似讖記不可領解事過皆驗及嘉之死其日有人於隴上見之法師之潛契神人皆此類也初安聞羅什在西域思共講扸微言安勸堅取之什亦遠聞其風謂是東方聖人恒遙而禮之初安生便左臂有一皮廣寸許著臂如釧將可得上下唯不得出手而已時人謂之印手菩薩安終後二十餘年而什方至什恨不相見甚悲悵焉初安篤志經務在宣法所請外國沙門僧伽跋曇摩難提及僧伽提婆等譯出衆百餘萬言常與沙門法和銓定音詳覈文旨新出衆經於是獲正興公爲名德沙門論目云釋道安博物多通才經名理其見述於世如此和冀州人凝靜有操行少與安公同師受學善能摽朗論綱解悟疑滯公所得群經常共挍之後遊洛陽請提婆重出廣說等經居陽平寺八十餘爲僞晉公姚緖所請集僧齋勅其弟子曰俗內煩惱苦累非一無常甚樂乃正衣服遶塔禮拜還詣坐所以衣覆首忽然而卒時人謂之知命

3. 혜원(慧遠)법사전
031_0427_a_23L慧遠法師傳第三
031_0427_b_02L
석혜원(釋慧遠)의 속성은 가(賈)씨며 안문(鴈門])24)의 누번(樓煩)25)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하였고 규장(珪璋)26)처럼 빼어났다. 13살 때부터 외삼촌인 영호씨(令狐氏)를 따라 허락(許洛:洛陽)에 유학한 까닭에 젊어서 유생이 되었다. 널리 6경(經)을 종합해 연구하였고,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에는 더욱 밝았다. 성품과 도량이 넓었으며 기풍과 감식(鑑識)이 밝고 뛰어났으니, 비록 경륜이 오래된 선비나 재주가 뛰어난 이라 할지라도 그의 깊은 조예에는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21살에 강동(江東)으로 건너가 범선자(范宣子)를 찾아 함께 가둔(嘉遁)27)하기로 약속하였는데, 왕로(王路)가 전란으로 막히게 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관좌(關左)에서 도안(道安)법사를 만나게 되었는데, 한 번 대면해 보고는 극진히 존경하며 진정한 자기의 스승으로 여겼다. 곧바로 동곳을 뽑고 머리를 깎고는 몸을 스승에게 맡기고 수업하였다.
불도(佛道)에 들어오고 나서는 행동을 준엄하게 하여 대중들과 휩쓸리지 않았다. 항상 불법의 강유(綱維)를 모두 거두어들이고자 하였고, 대법(大法)의 홍포를 자기의 임무로 여겼으며, 정밀히 사유하고 읽고 외우기를 밤낮으로 계속하였다. 사문 담익(曇翼)이 늘 등촉의 비용을 공급해 주었는데, 도안이 이 소문을 듣고 기뻐하며 말하였다.
“도사(道士)는 참으로 사람을 알아보는구나.”
혜원은 지혜와 이해력을 전생에 이미 마련해 놓고, 뛰어난 마음을 광겁(曠劫) 동안 쌓아 와서 정신의 밝음이 아득히 초월할 수 있었고, 심기(心機)의 감식(鑑識)이 멀고도 깊을 수 있었다. 무생실상(無生實相)의 현묘함과 반야중도(般若中道)의 오묘함, 즉색공혜(卽色空慧)의 비밀함과 연문적관(緣門寂觀)의 요점에 있어서 어떤 미묘한 의미도 분석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고, 어떤 깊은 의미도 드러내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또한 그 뜻은 이치에 명합(冥合)하였고, 말은 도에 계합(契合)하였다.
도안은 항상 감탄하며 말하였다.
“도가 동국(東國)에 유포되는 것은 혜원에게 달려 있다.”
그 후 도안을 따라 남쪽으로 번면(樊沔) 지방을 유행하였다. 진(晉) 태원(太元) 초(373)에 양양(襄陽)이 함락되어 도안이 관중으로 들어가게 되자 혜원은 심양(尋陽)으로 옮겨가 여산(廬山)에 띠집을 지었다.
031_0427_a_24L釋慧遠本姓賈鴈門樓煩人也弱而好書珪璋秀發年十三隨舅令狐氏遊學許洛故少爲諸生博綜六經善老莊性度弘偉風鑑朗拔雖宿儒才彦莫不服其深致焉年二十一度江東就范宣子共契嘉遁値王路屯阻有志不果乃於關左遇見安公一面盡敬以爲眞吾師也遂投簪落忘質受業旣入乎道厲然不群欲摠攝綱維以大法爲己任精思諷以夜續晝沙門曇翼每給以燈燭之費安公聞而喜曰道士誠知人矣遠藉慧解於前因資勝心於曠劫能神明英越機鑑遐深無生實相之般若中道之妙卽色空慧之秘門寂觀之要無微不扸無幽不暢共理冥言與道合安公常歎曰使道流東國其在遠乎後隨安公南遊樊晉太元之初襄陽失守安公入關遠乃遷于尋陽葺宇廬嶽
031_0427_c_02L강주자사(江州刺史) 환이(桓伊)가 혜원을 위해 전각과 승방을 지어 주었다. 이 산은 아홉 줄기로 뻗어나간 형세에 준봉(峻峰)이 솟구쳐 하늘을 찔렀고, 그윽하고 깊은 골짜기가 모여 신령하고 기이한 기운을 토해내기도 하고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혜원은 정사를 창건하면서 산수의 아름다움을 십분 활용하였다. 뒤로는 향로봉(香蛛峯)을 등에 업고 옆으로는 폭포가 떨어지는 계곡이 둘렸으며, 바위에 바위를 올려놓아 기단을 쌓고 다듬지 않은 소나무로 서까래를 마름질하였으니, 맑은 개울물은 섬돌을 에워싸고 흰 구름은 방에 가득하였다. 또한 절 안에 선림(禪林)을 따로 설치하였는데, 선림으로 가는 빽빽한 숲에는 안개가 엉키고 돌길은 이끼로 뒤덮였다. 이 풍광을 보고 그 길을 밟아 본 모든 사람들은 정신이 맑아지고 기분이 숙연해졌다.
혜원은 북천축(北天竺)에 부처님의 영상(影像)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기쁜 감회가 가슴에 교차하였다. 이에 산을 등지고 물을 임한 곳에 감실(龕室)을 만들고 붓놀림이 뛰어난 화공을 시켜 담담한 채색으로 그림을 그리게 하였다. 빛깔이 허공을 쌓은 듯하여 바라보면 연기나 안개와도 같았으며, 빛나는 형상이 밝고 아름다워 숨어 있는 듯하면서도 뚜렷이 나타나 있었다. 드디어 그 그림을 경도(京都)로 옮기자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 때 대중들을 거느리고 불도에 정진하여 저녁부터 새벽까지 중단하지 않았으니, 석가모니부처님께서 남기신 교화가 이에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부지런히 계율을 지켜 번뇌의 마음을 그친 선비와 속진(俗塵)을 끊고 맑은 믿음을 지닌 빈객들이 모두들 기약도 없이 찾아오고, 도풍(道風)을 바라보며 멀리서 모여들었다. 팽성(彭城)의 유유민(劉遺民)ㆍ안문(鴈門)의 주속지(周續之)ㆍ신채(新蔡)의 필영지(畢穎之)ㆍ남양(南陽)의 종병(宗炳) 등은 모두 세속을 버리고 영화를 멀리하고는 혜원에게 귀의하여 머무른 자들이다.
이에 혜원은 정사의 무량수불상(無量壽佛像) 앞에 재(齋)를 건립하여 서원을 세우고는 서방정토에 왕생하기를 함께 기약하였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바라옵건대 섭제(攝提:寅年)년 가을, 7월 무진삭(戊辰朔), 28일 을미(乙未)일에 법사 석혜원은 그윽하고 아득한 기운을 바르게 느끼고는 오래된 심회를 특별히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이에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으려는 동지(同志)와 번뇌를 그친 청신사(淸信士) 123명은 여산의 북쪽 반야대정사(般若臺精舍)의 아미타불상 앞에 모여 향과 꽃을 공경히 공양하며 서원하옵니다.
바라옵건대, 이 모임의 대중들은 인연과 조화의 이치에 이미 밝아 업(業)이 3세로 전해짐을 분명히 알고 있고, 감응을 옮길 수 있는 이치[數]에 이미 부합되었으니 선악의 보응(報應)도 반드시 일어날 것입니다. 걸어갈 때 팔이 서로 엇갈리는 사이에 시간이 과거로 사라지는 이치로 미루어 무상(無常)의 시기가 절박하다는 것을 깨달으며, 3시(時:과거ㆍ현재ㆍ미래)의 업보가 서로를 재촉함을 살피고는 험난한 악취(惡趣)에서 빠져 나오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뜻을 같이하는 제현(諸賢)들이 저녁이면 두려워하고 밤에도 부지런히 정진하며 우러러 제도(濟度)받기만을 생각하는 까닭입니다.
무릇 신(神)이란 감응으로는 교섭할 수 있어도 그 자취로는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신에 감응하는 사물이 있기에 아득히 먼 길도 지척이 되는 것이니, 만약 신을 찾으면서도 신주(神主)가 없다면 망망한 고해에서 어디를 나루로 삼겠습니까? 지금 다행히 모두들 부와 명예를 도모하지 않고28) 서방정토(西方淨土)에 마음을 모으게 되었고, 책을 살피고 믿음을 열어 밝은 마음이 저절로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에 기상(機象)29)은 꿈에 그리던 것과 통하니 그 기쁨은 아들이 찾아온 것보다 백배나 더합니다. 신령스런 도상(圖像)이 광채를 드러냄에 그 영상(影像)은 신의 솜씨에 비견되니, 이 공(功)은 이치로 이루어진 것이지 사람의 힘으로 이루어진 일이 아닙니다. 이는 실로하늘이 그 정성을 연 것이며 명계(冥界)에 계신 분들이 직접 오셔서 모인 것이니, 어찌 마음을 더욱 정밀하게 하고 거듭 사고하여 그 생각을 집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의 크고 빛나는 업적은 들쭉날쭉하고 공(功)과 복(福)도 같지 않으며, 비록 새벽에는 함께 기도하지만 저녁이면 제각기 돌아가 멀리 떨어져 있게 되니, 이것이 곧 우리의 스승과 벗들이 자못 슬퍼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이를 개탄하며 서로에게 명하여 법당에서 옷깃을 바로잡고서는 다 같이 한마음으로 그윽함의 극치에 심회를 머물고서, 이 동지들과 함께 절역(絶域)에서 노닐게 되기를 서원하옵니다.
이 가운데 무리에서 뛰어난 놀라운 사람이 있어 가장 먼저 신령한 세계에 오르게 되더라도, 구름 위 높은 산에서 홀로 잘났다 하고는 깊은 골짜기에 온전히 남아 있는 이들을 잊어버리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앞서 나아간 이들은 뒤에 오를 이들과 더불어 채찍질하여 바로잡는 도리를 항상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한 후에 대의(大儀)를 묘하게 관찰하고 마음을 열어 곧게 비추어 본다면 식(識)은 깨달음으로 새로워지고 형체는 조화로 말미암아 바뀌게 될 것입니다.
강물의 중류에서 연꽃을 깔고 앉아 옥가지 그늘 아래에서 시를 읊고 이야기하며, 8극(極)에 구름 같은 옷을 나부끼며 향기 짙은 바람에 배를 띄워 여생을 마치도록 자신의 몸이 편안하기를 생각하지 않고 더욱 화목하고자 힘쓰며, 마음은 즐거움을 뛰어넘어 스스로 흐뭇해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3도(塗)에 임하더라도 3도의 괴로움을 아득히 끊을 것이며, 오만하게 천궁에 오르더라도 천궁의 즐거움을 길이 사양할 것입니다. 뭇 신령의 뒤를 따라 그 법도를 이어가고, 태식(太息:궁극의 휴식)을 지향하며 태식에 이를 날을 기약할 것입니다.
이 도를 궁구함이여, 어찌 큰 일이 아니겠습니까!”
사도(司徒) 왕밀(王謐)과 호군(護軍) 왕묵(王默) 등도 모두 그의 풍모와 덕을 흠모하여 멀리서 스승으로 모시며 공경을 표하였다. 왕밀은 편지를 보내 말하였다.
“나이는 이제 47세밖에 안 되었는데 노쇠하기는 60세 노인과 같습니다.”
혜원이 이에 답하였다.
“옛 사람은 사방 한 자나 되는 큰 보석은 사랑하지 않았지만 촌음(寸陰)은 소중히 여겼습니다. 그 지닌 생각을 보니 오래 세상에 있지 못할 것 같습니다. 단월께서는 이미 순리를 실천하여 자성(自性)에서 노닐고, 부처님의 진리를 타고 마음을 제어하고 계십니다. 이로 미루어 생각해 보건대 무엇 하러 다시 나이를 부러워하겠습니까? 이 이치를 생각하신 지 오래라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이것으로 그저 보내오신 서신에 답장을 삼을 따름입니다.”
처음 경전이 강동(江東) 지방에 유포되었을 때에는 미비한 점이 많았고, 선법(禪法)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었으며, 율장(律藏)은 군데군데 빠져 있는 상태였다. 혜원은 교본(敎本)에 크게 뜻을 두고 있었기에 그 도가 결함된 것을 개탄하였고, 마침내 그의 제자인 법정(法淨) 등에게 여러 경전을 두루 찾아보도록 명하였다. 그들은 사막과 설산을 넘어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돌아왔는데, 모두 범어(梵語) 원본을 구해 왔으므로 전역할 수 있었다.
혜원은 항상 서역에서 온 나그네를 만날 때마다 곧 진정으로 측은히 여기며 안부를 물었고, 여러 차례 사신을 관중으로 보내어 선사(禪師)30)를 청하여 맞이하여서는 그 관중(關中)의 대중으로부터 쫓겨난 일을 해결해 주고 『선경(禪經)』을 전출(傳出)하도록 하였다.
또한 계빈국 사문 승가제바를 청하여 여러 경을 역출하였으니, 선법(禪法)과 경과 계가 모두 여산(廬山)에서 나오게 되었고 거의 백 권이나 되었다.
예전에 관중(關中)에서 『십송률(十誦律)』을 역출하였는데, 나머지 한 부분을 끝내지 못하고 불야다라(佛若多羅)가 세상을 떠났다. 혜원은 항상 그것이 미비된 것을 개탄하다가 그 후 담마류지(曇摩流支)가 진(秦)나라로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곧 편지를 보내 관중에서 나머지 부분을 다시 역출하도록 간청하였다. 따라서 『십송률』1부가 온전히 갖추어져 빠진 것이 없게 되었고, 진(晉)나라 땅에서 얻은 원본은 지금까지 서로 전수되고 있다. 총령(葱嶺) 밖의 현묘한 경전이 관중에서 훌륭하게 설해지게 되고 이 땅에 전래되어 모이게 된 것은 모두 혜원의 힘이다.
외국의 많은 승려들도 모두들 ‘한(漢)나라 땅에 대승의 도사가 있다’고 칭하며 향 피워 예배할 때가 되면 매번 동방을 향해 존경을 표하였다고 하니, 그의 신비한 자취는 진실로 가히 헤아릴 수 없다.
항상 지겸(支謙)과 축법호(竺法護)의 구역본으로는 오묘한 실상을 궁구할 수 없었는데, 이에 혜원이 『법성론(法性論)』을 저술하여 심오한 이치로 문장을 분석하였다. 구마라집이 이 논을 보고 찬탄하여 말하였다.
“변방의 나라 사람이라 아직 경전도 제대로 보았을 리가 없을 텐데 문득 어둠 속에서 이치와 계합하였으니 어찌 묘하지 아니한가?”
혜원은 자신을 책려하며 부지런히 도를 넓혔고, 삼가며 맹렬히 법을 위하였다. 여러 차례 구마라집에게 편지를 올려 때마다 경전의 요지를 질문하였고, 구마라집도 또한 그의 뛰어난 마음 씀씀이를 높이 여겨 만 리 길이지만 이웃에 있는 이처럼 그의 뜻에 따라 주었다.
요략(姚略)31)은 그의 덕풍과 명성을 흠모하고 그의 재능과 사상을 찬탄하여 간절한 뜻을 담은 편지를 보내고 해마다 믿음의 선물을 보내왔으며, 구자국(龜玆國)의 세루잡변석상(細鏤雜變石像)을 증정하여 그것으로 자기의 간곡한 마음을 표시하였다. 또한 요숭(姚嵩)을 시켜 그의 주상(珠像)을 바치게 하였다.
『석론(釋論)』이 처음 역출되자 요흥은 논을 보내고 아울러 편지를 보내 말하였다.
“이번에 새롭게 『대지도론(大智度論)』 번역을 마쳤습니다. 이는 용수보살의 저술인데다 또한 대승경전의 지귀(旨歸)이니, 마땅히 한 편의 서문을 지어 작자의 뜻을 널리 선양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곳의 여러 도사들은 모두 서로 다른 사람을 추천하고 사양하며 감히 손을 움직이는 사람이 없으니, 법사께서 서문을 지어 후세의 학자들에게 남겨 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에 혜원은 편지를 써서 말하였다.
“저에게 『대지도론』의 서문을 짓게 하여 작자의 뜻을 펴게 하시려 하나, 빈도가 듣기에 큰 내용을 품고 있는 글은 작은 종이에 담을 수 없고 깊은 샘의 물은 짧은 두레박 줄로는 퍼올릴 수 없다고 합니다. 내리신 글을 펴보던 날 높으신 명(命)에 부끄러운 마음만 들었습니다. 또한 몸이 약하고 병이 많아 부닥치는 일마다 그만둠이 있었고, 다시 뜻을 내지 못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사람을 보내어 알려주는 지중함을 인연으로 대략 품고 있는 생각만을 엮을 따름입니다. 훌륭한 연구를 위해서는 다시 여러 글 밝은 대덕들에게 부탁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의 높은 명성이 먼 나라에까지 알려진 것이 이와 같았다.
혜원은 항상 말하기를, “『대지도론』은 문구가 번다하고 광범위하여 처음 배우는 사람들은 뜻을 알기 어렵다”고 하였는데, 이에 번잡하고 혼란스러운 부분을 삭제하여 20권으로 찬술하였으며, 깊고 청아한 서문을 덧붙여 학자들에게 주었다.
그 후 환현(桓玄)은 임금의 위엄을 떨치게 되자 간절하게 초청하는 편지를 보내어 벼슬에 오르도록 권하였다. 혜원의 답변은 견고하고 바르며 확고부동하였고, 그 지조는 단석(丹石)보다도 굳어 끝내 그의 뜻을 굽힐 수 없었다.
얼마 후 환현은 승단의 대중을 가려내고자 그의 부하들에게 명령하였다.
“사문은 능히 경전의 가르침을 펴고 진술할 수 있어 의리를 유창하게 설법할 수 있거나, 혹 금행(禁行:戒行)을 반듯하게 닦아 큰 교화를 베푸는 데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이에 어긋나는 자들이 있다면 모두 승려생활을 그만두게 하고 집으로 돌려보내라. 오직 여산(廬山)만은 도덕이 있는 곳이니, 수사하거나 조사하지 말라.”
예전에 진(晉)나라 성제(成帝:326~334) 때 유빙(庾氷)이 정치를 보좌하였는데, 그는 사문도 왕가[王者]를 공경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 때 상서(尙書) 하충(何充)은 ‘공경의 예를 올리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주청하였고, 관리들의 의견도 하충 등과 같았다. 그러나 유빙의 문하생들이 유빙의 뜻을 본받아 이를 반박하였고, 서로 다른 의견이 분분하게 되어 끝내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031_0427_b_21L江州刺史桓伊爲造殿房此山儀形九流峻聳天絕棲集隱倫吐納靈異遠創建精洞盡山美卻負香鑪之峯傍帶瀑布之壑仍石疊基卽松栽構淸泉環白雲滿室復於寺內別置禪林樹湮凝石莚落合凡在瞻履皆神淸而氣肅焉遠聞北天竺有佛影欣感交懷乃背山臨流營築龕室妙算畫淡采圖寫色凝積空望似輕霧相炳瞹若隱而顯遂傳寫京都莫不嗟歎於是率衆行道昏曉不絕釋迦餘化於斯復興旣而謹律息心之士絕塵淸信之賓竝不期而至望風遙彭城劉遺民鴈門周續之新蔡畢穎之南陽宗炳竝棄世遺榮依遠遊遠乃於精舍無量壽像前建齋立共期西方其文曰惟歲在攝提秋七月戊辰朔二十八日乙未法師釋慧遠貞感幽冥宿懷特發乃延命同志息心淸信之士百有二十三人集於廬山之陰般若臺精舍阿彌陁像前率以香華敬廌而誓焉惟斯一會之夫緣化之理旣明則三世之傳顯遷感之數旣符則善惡之報必矣推交臂之潛淪悟無常之斯切審三報之相催知嶮趣之難拔此其同志諸賢所以夕惕霄勤仰思攸濟者也蓋神者可以感涉而不可以迹求感之有物則幽路咫尺茍求之無主則眇茫何津今幸以不謀而僉心西叩篇開信亮情天發乃機衆通於寢夢欣歡百於子來於是靈圖表輝景侔神造功由理諧事非人運茲實天啓其誠冥數來萃者矣可不剋心重精疊思以凝其慮哉然其景績參功福不一雖晨祈云同夕歸悠𨽦卽我師友之眷良可悲矣是以慨焉胥命整襟法堂等施一心亭懷幽極誓茲同人俱遊絕域其有驚出絕倫首登神界則無獨善於雲嶠忘兼全於幽谷先進之與後升免思彙征之然後妙覲大儀啓心貞照識以悟形由化草藉扶容於中流蔭瓊柯以詠言飄靈衣於八極汎香風以窮體忘安而彌穆心超樂以自怡三塗而緬謝傲天宮而長辭紹衆靈以繼軌指大息以爲期究茲道也不弘哉司徒王謐護軍王默等竝欽慕風德遙致師敬謐修書曰年始四十七而衰同耳順遠答曰古人不愛尺壁而重寸陰觀其所存似不存檀越旣履順而遊乘佛理以御心因此而推復何羡於遐齡耶想斯理久已得之爲復詶來訊耳初經流江東多有未備禪法無聞律藏殘闕大存教本憤慨道缺乃命弟子法淨遠尋衆經踰越沙雪曠載方還獲胡本得以傳譯每逢西域一賓懇惻諮訪屢遣使入關迎請禪師其擯事傳出禪經又請罽賓沙門僧伽提婆出數經所以禪法經戒皆出廬山幾且百卷初關中譯出十誦餘一分未竟而弗若多羅亡遠常慨其未備及聞曇摩流支入秦乃遣書祈請令於關中更出餘分故十誦一部具足無闕晉地獲本相傳至今外妙典關中勝說所以來集茲土者皆遠之力也外國衆僧咸稱漢地有大乘道士每至燒香禮拜輒東向致其神理之迹固未可測也常以支竺舊義未窮妙實乃著法性論理奧文詣羅什見而歎曰邊國人未見經便闇與理合豈不妙哉遠翹勤弘道懍厲爲法每致書羅什訪覈經典亦高其勝心萬里響契姚略欽想風嘆其才思致書慇懃信餉歲通以龜茲國細鏤雜變石像以申款心又令姚嵩獻其珠像釋論初出興送論幷遺書曰大智論新訖此旣龍樹所作又是方等旨歸宜爲一序以宣作者之意然此諸道士咸相推謝敢動手法師可爲作序以貽後之學遠答云欲令作大智論序以申作者之意貧道聞懷大非小渚所容深非短綆所測披省之日有愧高命又體羸多病觸事有廢不復屬意已其日爾久緣來告之重粗綴所懷至於硏究之美當復寄諸明德其名高遠國如此遠常謂大智論文句繁初學難尋乃刪煩翦亂令質文有撰爲二十卷序致淵邈以貽學者後桓玄以震主之威苦相近致乃貽書躬說勸令登仕遠答辭堅正礭乎不拔志踰丹石終莫能屈俄而玄欲沙汰衆僧教僚屬曰沙門有能申述經誥暢說義理或禁行修整足以宣寄大化其有違於此皆悉罷遣唯廬山道德所居不在搜簡之例成帝庾冰輔政以爲沙門宜敬王者書令何充奏不應敬禮官議悉同門下承冰旨爲駮同異紛然竟莫能
그 후 환현은 고숙(姑熟)32)에 있으면서 모두 공경하도록 하였고, 이에 혜원에게 편지를 보내 자기의 의견을 빠짐없이 서술하였다. 이에 혜원은 대법의 권위가 실추될까 두려워하여, 가사(袈裟)는 조정과 종묘에서 입는 옷이 아니며 발우는 낭묘(廊廟)에서 쓰는 그릇이 아니라는 뜻을 간절히 담아 답장하였다. 또한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을 저술하였는데, 글의 이치가 정밀하고 준엄하였다. 환현은 마음으로 감복하고 깨달아 결국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그가 불법을 보호하는 임무를 짊어지고 유지한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
임천(臨川) 태수(太守) 사령운(謝靈運)은 재주를 믿고는 속세를 업신여겼으며 추앙하거나 숭배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혜원을 한 번 만나보고는 숙연히 마음으로 감복하였다.
혜원이 여산의 언덕에 자리잡고부터 30여 년 동안 그의 그림자가 산 밖을 나가지 아니하였고, 그의 발자국은 속가에 들어가지 아니하였다. 따라서 손님을 전송하거나 노닐고 밟는 땅은 늘 호계(虎溪)를 한계로 삼았다.
의희(義熙) 말(416)에 여산정사(廬山精舍)에서 돌아가셨는데, 춘추는 83세였다. 시신을 소나무 아래에 그대로 노출시켜 풀이나 나무와 같아지게 하라고 유언을 하였다.
031_0429_a_08L及玄在姑孰欲令盡敬乃書與遠具述其意遠懼大法將墜報書懇切以爲袈裟非朝宗之服鉢盂非廊廟之器又著沙門不敬王者論辭理精玄意感悟遂不果行其荷持法任皆此類也臨川太守謝靈運負才傲少所推崇及一相見肅然心服卜居廬阜三十餘載影不出山迹不入俗故送客遊履常以虎溪爲界焉義熙末卒于廬山精舍春秋八十有遺命露骸松下同之草木
그 후 제자들은 유골을 거두어 장사지냈고, 사령운은 묘 옆에 비석을 세워 남기신 덕을 명문으로 새겼다. 혜원은 본래 문장을 잘 지었는데 그 사기(辭氣)는 청아하고 뛰어났으며, 자리에서의 담론은 내용이 정밀하고 요점만 가려서 말하였다. 이에 더하여 용모와 거동이 단정하고 풍채와 인품이 깨끗하고 시원하였다. 따라서 그의 상을 그림으로 그려서 절에 모시자 원근의 모든 사람들이 모범으로 삼고 우러러보았다.
그가 저술한 논(論)ㆍ서(序)ㆍ명(銘)ㆍ찬(讚)ㆍ시(詩)ㆍ편지[書] 등을 모은 문집은 10권 50여 편(篇)인데 모두 세상에서 존중받고 있다.
031_0429_a_18L旣而弟子收葬謝靈運造碑墓側銘其遺德焉初遠善屬文章辭氣淸越席上談精義簡要加以儀容端雅風釆灑故圖像于寺遐邇式瞻所著論集爲十卷五十餘篇竝見重於世

4. 도생(道生)법사전
031_0429_a_24L道生法師傳第四
031_0429_b_02L
축도생(竺道生)은 팽성(彭城) 사람이다. 집안은 대대로 벼슬을 지낸 문족이며, 아버지는 광척(廣戚) 수령을 지냈는데 고을에서 훌륭한 사람이라 불렸다. 도생은 어려서부터 지혜가 빼어났으며 총명함이 신이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비범한 그릇임을 알고 사랑하며 특별하게 여겼다. 당시 축법태(竺法太)스님의 덕업이 훌륭하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다. 아버지는 도생을 데리고 가서 귀의시켰고, 곧바로 옷을 바꿔 입고 수학하게 되었다.
법문(法門)에 들어오게 되자 영준하고 탁월하며 빼어났다. 경전을 펼쳐 읽음에 한 번만 보면 능히 암송하였고, 문구의 뜻을 깊이 음미하고는 곧 스스로 뜻을 해설하였다. 그런 까닭에 15살에 곧 강좌(講座)에 올랐다. 심오한 이치를 탐구하여 뜻을 찾아내고, 사고는 깊은 심원까지 꿰뚫었으며, 주고받으며 질문하고 논변함에 있어서는 그 말이 주옥(珠玉)처럼 맑았다. 따라서 비록 오랜 덕망 있는 학승이나 당대의 명사라 하더라도 모두 생각이 좌절되고 언변이 궁해져 능히 그에게 대적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비록 양동(楊童)이 현문(玄文)에 참여하고 노련(魯連)33) 나이가 구족계를 받을 시기에 이르자 비추어보는 안목이 날로 깊어졌으며, 강연하는 소리는 구하(區夏)에 두루 하였다. 왕공(王公)을 비롯한 귀인(貴人)ㆍ승사(勝士) 등이 모두 그의 명성을 듣고 자리를 마련하였으며, 만나기를 희망하는 선비들이 모두 천 리 밖에서 수레를 몰아 달려왔다. 도생은 풍취가 고상하고 조용하였으며,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 뛰어났다. 그 성품은 용맹하면서도 따뜻하였고, 기개는 맑으면서도 온화하였으므로 참예하여 말을 나눠본 적이 있는 사람은 심중을 털어 놓지 않는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용광사(龍光寺)에 머물며 휘장을 내리고 학업에만 전념하였다. 융안(隆安)연간(397~401)에 여산정사로 옮겨가 7년 동안 숨어살면서 그의 뜻을 구하였다. 항상‘입도(入道)의 요점은 혜해(慧解)를 근본으로 삼는다’고 여겼다. 따라서 수많은 경전을 우러러 숭상하고 한편으로는 잡론(雜論)을 참작하면서 만 리 먼 길이라도 법을 따르는 일이라면 멀고 험난함을 꺼리지 않았다.
031_0429_b_02L竺道生彭城人也家世仕子父爲廣慼令鄕里稱爲善人生幼而穎慧悟若神其父知非凡器愛而異之法太道人德業弘懿乃攜以歸依遂改服受學旣踐法門儁思卓拔讀經文一覽能誦硏味句義卽自解是以年在志學便登講座探賾索思徹淵泉吐納問辯辭淸珠玉宿望學僧當世名士皆慮挫辭窮能抗敵雖揚童之參玄文魯連之屈田巴無以過也年至具戒器鑑日躋講演之聲遍於區夏王公貴勝竝聞風造席庶幾之士皆千里命駕生風雅從容善於接誘其性烈而溫其氣淸而穆故豫在言對莫不披心焉住龍光寺下帷專業隆安中移入廬山精舍幽棲七年以求其志常以爲入道之要慧解爲本故鑽仰群經酌雜論萬里隨法不憚嶮遠
031_0429_c_02L드디어 시흥사(始興寺)의 혜예(慧叡)ㆍ동안사(東安寺)의 혜엄(慧嚴)ㆍ도량사(道場寺)의 혜관(慧觀) 등과 함께 장안(長安)으로 가 구마라집을 따라 수학하였는데, 관중의 승단 대중들은 모두 그의 빼어난 슬기를 칭찬하였다.
의희(義熙) 5년(409)에 도읍으로 돌아와 경사(京師)에 머물게 되었고, 이리저리 떠돌며 배우기 수년에 모든 경론을 두루 총괄하게 되었다. 대승의 근원인 용수(龍樹)의 가르침을 오묘하게 관철하였고, 겸하여 소도(小道)의 요점인 제바(提婆)의 가르침까지 종합하였으며, 갖가지 이설들을 널리 배우고 간략하게 하나의 이치로 귀결시켰다.
031_0429_b_21L遂與始興慧睿東安慧嚴道場慧觀同往長從羅什受學關中僧衆咸稱其秀義熙五年還都因停京師遊學積備摠經論妙貫龍樹大乘之源綜提婆小道之要博以異聞約以一
마침내 한숨을 쉬고 크게 탄식하며 말하였다.
“무릇 물상(物象)으로써 생각을 다하지만 참뜻을 얻으면 상은 잊어버리는 것이며, 말에 이치를 의탁하지만 진리에 들어가면 말은 쉬는 것이다. 경전이 동쪽 땅에 들어온 이래로 번역자들은 매우 거칠었고, 막힌 문구만을 지키는 사람은 많고, 원만한 참뜻을 보는 사람은 드물다. 만약 그물을 잊어버리고 고기를 잡을 수 있다면 비로소 더불어 도를 이야기할 수 있으리라.”
이에 공(空)과 유(有)를 교열하고, 인과(因果)를 연구하며 사유하여 비로소 선(善)은 응보(應報)를 받지 않고 돈오(頓悟)하면 성불한다는 설을 건립하였다. 이는 예전 학설을 그물 속에 가두어 버리는 오묘하고 깊은 취지가 있었다. 그러나 문구만을 고집하는 무리 중에 혐오와 질투를 내는 사람이 많았고, 이에 칭찬과 헐뜯는 소리가 복잡하게 서로 얽혀 일어나게 되었다.
또한 6권으로 된 『니원경(泥洹經)』이 먼저 경도(京都)에 도착하자, 도생은 불성(佛性)의 의미를 해부하고 분석하여 훤하게 깊고 미묘한 진리 속으로 꿰뚫고 들어갔다. 이에 곧 일천제(一闡提)도 모두 성불할 수 있다는 설을 세웠다.
당시는 『대열반경(大涅槃經)』이 아직 중국에 전해지지 않은 때였으니, 외롭게 선발로 밝힌 혼자만의 견해는 대중들의 마음에 거슬렸다. 이에 구본(舊本)을 배운 승려의 무리들은 그의 말이 경전에 어긋나는 사설(邪說)이라 하여 매우 심하게 비난하고 분개하였다. 마침내 이 사실을 대중들에게 밝히고 그를 승단에서 쫓아내었다.
도생은 사부 대중이 모인 자리에서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서원하였다.
“만약 제가 말한 것이 경의 뜻에 어긋난다면 청하건대 현재 이 몸에서 곧 문둥병이 나타나게 하여 주시고, 만약 저의 말이 실상과 서로 위배되지 않는다면 원컨대 목숨을 마치는 날 사자좌(獅子座)에 앉게 하여 주소서.”
말을 마치고는 옷을 털고 일어나 떠나버렸다. 별자리가 옮겨가듯 세월은 흘렀다. 원가(元嘉) 7년(430)에는 여악(廬岳)으로 들어가 바위산 깊이 그림자를 숨기고 있었는데, 편안한 모습이 스스로 체득한 바가 있었다. 이에 산중의 승단 대중들은 모두 공경하고 승복하였다.
031_0429_c_04L乃喟然而歎曰夫象以盡意得意則象忘言以寄理入理則言息自經典東流譯人重阻多守滯文鮮見圖若忘筌取魚則可與言道矣於是挍練空有硏思因果乃立善不受報及頓悟義籠罩舊說妙有淵旨而守文之徒多生嫌嫉與奪之聲紛然互又六卷泥洹先至京都生剖扸佛洞入幽微乃說阿闡提人皆得成于時大涅槃經未至此土孤明先獨見迕衆於是舊學僧黨以爲背經邪說譏忿滋甚遂顯於大衆擯而遣之生於四衆之中正容誓曰若我所說反於經義者請於現身卽表厲若與實相不相違背者願捨壽之據師子座言竟拂衣而逝星行命以元嘉七年投迹廬嶽銷影巖阿怡然自得山中僧衆咸共敬服
031_0430_a_02L얼마 후 『대열반경』이 경도에 도착하였는데, 그 속에는 과연 “천제(闡提)에게도 불성이 있다”고 설하고 있어 전에 그가 말한 내용과 부절(符節)처럼 계합하였다. 도생은 이 경을 얻게 되자 살펴보고는 곧 강석(講席)을 건립하였다.
송(宋)의 원가(元嘉) 11년(434) 겨울 11월 경자(庚子)일에 여산정사에서 법좌에 올랐을 때이다. 정신과 얼굴빛은 밝게 열려 있었고 덕음(德音)은 거세게 터져 나왔다. 여러 번 논의하면서 이치를 궁구하고 오묘함을 다하니, 보고 듣는 대중들은 모두 깨닫고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법석이 곧 끝나려 할 즈음에 불자(拂子)가 어지럽게 흔들리면서 땅에 떨어졌다. 단정하게 앉은 모습으로 의자에 기대어 돌아가셨는데, 마치 선정에 들어간 듯 얼굴빛이 달라지지 않았다. 도인(道人)과 속인(俗人)들은 놀라며 감탄하였고, 원근의 모든 사람들이 슬피 울었다.
031_0429_c_21L俄而大涅槃經至于京都果稱闡提皆有佛性與前所說若合符契生旣獲斯尋卽建講以宋元嘉十一年冬十月庚子於廬山精舍昇于法座神色開明德音駿發論議數番窮理盡妙觀聽之衆莫不悟悅法席將畢忽見麈尾紛然而墜端坐正容隱机而卒顏色不異似若入定道俗嗟駭遠近悲涼
이에 경사(京師)에 있던 모든 승려들도 자신들의 잘못을 마음속으로 참회하였고 추존하여 믿고 복종하였다. 그의 영묘한 식견의 지극함이 서상(瑞相)으로 증명된 것이 이와 같았다. 이어 그를 여산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이전에 도생은 혜예(慧叡)ㆍ혜엄(慧嚴)ㆍ혜관(慧觀) 등의 스님들과 동학으로 명성을 나란히 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은 이렇게 평하였다.
“도생과 혜예는 참된 성품[天眞]이 드러났고, 혜엄과 혜관은 깊은 흐름을 얻었다. 혜의(慧義)는 자만스럽게 앞으로 나섰지만 도연(道淵)34) 앞에서는 입을 다물었다.”
이처럼 도생과 혜예만이 천진하다는 지목을 받았으니, 그가 여러 사람 가운데 빼어나게 뛰어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전에 사문 법현(法顯)이 사자국(師子國)에서 미사색률(彌沙塞律)의 범본을 얻었는데, 미처 역출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다. 도생은 송나라 경평(景平) 원년(423) 11월에 용광사에서 계빈국 율사 불대집(佛大什)으로 하여금 범문을 잡고 우전국(于闐國)사문 지승(智勝)으로 하여금 번역을 하도록 청하였다. 이 미사색률이 밝게 드러나게 된 것은 거의 도생의 공로이다.
031_0430_a_07L於是京邑諸僧內慚自疚追而信服其神鑑之至徵瑞如此仍葬于廬山之阜初生與睿公及嚴觀同學齊名故時人評曰睿發天眞嚴觀窪流得慧義彭亨進寇淵于嘿塞及睿公獨摽天眞之目固已秀出群士矣初沙門法顯於師子國得彌沙塞律胡本未及譯出而亡生以宋景平元年十一月於龍光寺請罽賓律師佛大什執胡文于闐沙門智勝爲譯此律照明蓋生之功也
관중의 사문 승조(僧肇)가 처음으로 『유마경(維摩經)』을 주석하자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이를 음미하였는데, 그 후 도생이 다시 깊은 뜻을 발굴하여 새롭고 다른 내용을 드러냈으니 강석(講席)의 종장(宗匠)들이 모두 이를 헌장(憲章)으로 삼았다. 그는 『유마경(維摩經)』ㆍ『법화경(法華經)』ㆍ『니원경(泥洹經)』ㆍ『소품(小品)』 등 여러 경의 의소(義疎)도 저술하였는데, 세상에서 모두 이를 보물로 삼고 있다.
031_0430_a_17L關中沙門僧肇始注維摩世咸翫味及生更發深旨顯暢新異講學之匠咸共憲其所述維摩法華泥洹小品諸經義疏世皆寶焉

5. 불념(佛念)법사전
031_0430_a_21L佛念法師傳第五
031_0430_b_02L
축불념은 양주(涼州) 사람이다. 20여 세에 출가했는데, 학업의 뜻이 맑고 굳건하였다. 밖으로 드러난 태도는 온화하고 내면은 밝았으며, 민첩하게 통찰하는 식견이 있었다. 많은 경전을 외우고 익혔으며, 외전(外傳)들을 대략 섭렵하였는데, 창아(蒼雅)35)와 훈고(訓詁)에 더욱 밝고 통달하였다. 어려서부터 여러 곳으로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여 여러 풍속(風俗)을 골고루 보았고, 집안 대대로 서하(西河)에 살아 여러 지방의 말에 매우 밝았으니, 중국 말[華]과 오랑캐 말[戎]의 음(音)과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따라서 의학(義學)의 명예는 비록 적었으나 배운 바가 많다는 명성은 크게 드러났다.
부씨(符氏)의 건원(建元) 연간(365~384) 중에 외국의 사문 승가발징(僧伽跋澄)과 담마난제(曇摩難提)가 장안(長安)으로 들어오자, 부견의 비서랑(秘書郞) 조정(趙政)이 승가발징에게 『바수밀경(婆須蜜經)』을 역출해 줄 것을 청하였다. 당시의 명덕(名德) 가운데 이를 전역(傳譯)할 수 있는 사람이 없자 대중들은 모두 축불념을 추천하였다. 이에 승가발징이 범문을 잡고 축불념이 한문으로 번역하니, 의심나는 뜻의 진의(眞義)가 판가름 나고 음자(音字)는 바야흐로 분명하게 되었다. 담마난제가 다시 『왕자법익괴목인연경(王子法益壞目因緣經)』을 송출하자 축불념이 번역하고 아울러 이 경의 서문을 지었다.
031_0430_a_22L竺佛念涼州人也弱年出家志業堅外和內朗有通敏之鑑諷習衆經粗涉外學其倉雅詁訓尤所明練好遊方備貫風俗家世西河洞曉方華戎音義莫不兼解故義學之徒雖闕而洽聞之聲甚著符堅僞建元之中外國沙門僧伽跋澄及曇摩難提入長安堅秘書郞趙政請跋澄出婆須蜜經胡本當時名德莫能傳衆咸推念於是澄執梵文念譯胡質斷疑義音字方明曇摩難提又出王子法益壞目因緣經念爲宣譯幷作經序
건원 20년(384)에 이르러 조정(趙政)은 다시 담마난제에게 『증일아함경』과 『중아함경』을 송출해 줄 것을 청하였다. 그리고 의학(義學) 승려들을 장안성 안에 모두 모으고는 축불념에게 번역해 줄 것을 청하니, 부연하고 분석하며 연구하고 밝혀 나간 지 2년 만에야 끝을 맺었다. 위의 두 아함(阿含)이 세상에 빛을 드러낸 것은 축불념의 힘이다.
031_0430_b_12L至建元二十年政復請曇摩難提出增一阿含及中阿含於長安城內集義學沙門請念爲譯敷扸硏覈二載乃訖二含光顯念之力也
요흥(姚興)의 홍시(弘始) 초(399)에 이르러 경학(經學)이 크게 융성하자 축불념은 이어 『보살영락경(菩薩瓔珞經)』ㆍ『십주단결경(十住斷結經)』ㆍ『출요경(出曜經)』ㆍ『포태경(胞胎經)』ㆍ『중음경(中陰經)』 등을 역출하였다. 따라서 부견(符堅)과 요흥 2대에 걸쳐 번역하는 사람들의 종주(宗主)가 된 것이다. 안세고(安世高)와 지겸(支謙) 이후로는 축불념(竺佛念)을 뛰어넘는 이가 없었으니, 관중의 승려 대중들은 모두 함께 그를 칭찬하였다.
031_0430_b_15L至姚興弘始之初經學甚盛念續出菩薩瓔珞十住斷結及出曜胎經陰經於符姚二代爲譯人之宗自世支謙以後莫踰於念關中僧衆共嘉焉
그 후 장안에서 생을 마쳤는데 원근(遠近)의 승려와 속인들이 탄식하고 애석해 마지않았다.
031_0430_b_20L後卒於長安遠近白黑莫不歎惜

6. 법현(法顯)법사전
031_0430_b_21L法顯法師傳第六
031_0430_c_02L
석법현의 속성은 공(龔)씨이고, 평양(平陽) 무양(武陽) 사람이다. 법현에게는 형이 3명 있었는데 모두 7, 8세의 어린 나이로 죽었다. 그의 아버지는 재앙이 법현에게도 미칠까 두려워 3살 되던 해 바로 승적(僧籍)에 올려 사미(沙彌)가 되게 하였다.
몇 년 동안 집에 머물다가 병이 위독해져 다 죽게 되었는데, 사찰로 돌려보내자 하룻밤 자고 나니 병이 나았다.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아 어머니가 그를 만나보고 싶어도 만날 수가 없었다. 이에 어머니를 위해 사찰 문 밖에 작은 집을 지어 서로 왕래하는 것에 대신하였다. 10살 때 부친상을 당하자, 숙부는 그의 어머니가 늙고 남편도 없으니 자식도 없이 홀로 지낼 수는 없다 하여 그를 억지로 환속시키려 하였다.
이에 법현이 말하였다.
“본래 아버지가 계셔서 출가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티끌세상을 멀리 여의고자 도에 들어왔을 뿐입니다.”
그러자 숙부는 그 말을 옳다고 여기고 곧 그만두었다.
얼마 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장례를 모시는 그 지극함은 보통사람보다 훨씬 더했지만 장사(葬事)를 마치게 되자 곧바로 절로 돌아왔다.
전에 동학 수십 명과 논에서 벼를 베고 있었는데, 그 때 굶주린 도적들이 그 곡식을 탈취하려고 하였다. 여러 사미들은 모두 달아나 버렸지만 법현만은 홀로 남아 도적들에게 말하였다.
“만일 곡식을 원한다면 뜻대로 가져가도 좋다. 그러나 그대들은 과거에도 보시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배고프고 가난하게 된 것이니, 지금 또 남의 곡식을 빼앗는다면 아마도 내세에는 가난이 더욱 심해질 것이다. 빈도(貧道)는 미리 그대들을 걱정해 이야기해 줄 따름이다.”
말을 마치고는 즉시 돌아오니, 도적들은 곡식을 버리고 떠나갔다. 이에 수백 명의 대중 스님들 가운데 탄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20세에 구족계를 받게 되자 지조와 행실이 분명하고 결백하였으며, 위의와 범절이 바르고 엄숙하였다. 항상 경률(經律)에 서로 어긋나는 점이 있고 빠진 부분이 있는 것을 개탄하다가, 맹세코 찾아 구하겠다는 뜻을 세웠다.
동진(東晋) 융안(隆安) 3년(399) 동학인 혜경(慧景)ㆍ도정(道整)ㆍ혜응(慧應)ㆍ혜외(慧カ) 등과 함께 장안(長安)을 출발하여 서쪽으로 고비사막을 건넜다. 하늘에는 날아다니는 새가 없고 땅에는 돌아다니는 짐승도 없었으며, 사방을 둘러보아도 아득하기만 하여 어디로 가야할지 추측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오직 해의 움직임을 살펴 동서(東西)를 분간하고 죽은 사람의 해골로 길의 표지를 삼을 뿐이었다. 자주 열풍(熱風)이 불고 악귀가 나타났으니 이것을 만나게 되면 반드시 죽게 된다고 하였는데, 법현은 목숨을 인연에 맡기고 험난한 곳을 그대로 뚫고 지나갔다.
031_0430_b_22L釋法顯本姓龔平陽武陽人也法顯三兄竝齠齔而亡其父懼禍及之歲便度爲沙彌居家數年病篤欲死因送還寺信宿便差不復肯歸母欲見之不能得爲立小屋於門外以擬去來十歲遭父憂叔父以其母寡獨不立逼使還俗顯曰本不以有父而出家也正欲遠塵離俗故入道耳父善其言乃止頃之母喪至性過人葬事旣畢仍卽還寺常與同學數十於田中刈稻有飢賊欲奪其穀諸沙彌悉奔走唯顯獨留語賊曰欲須穀隨意所取但君等昔不布施此生飢貧今復奪人恐來世彌甚貧道豫爲君憂故相語耳言訖卽還賊棄穀而去衆僧數百人莫不歎服二十受大戒志行明潔儀軌整肅慨經律舛闕誓志尋求以晉隆安三與同學慧景道整慧應慧嵬等發自長安西度沙河上無飛鳥下無走獸四顧茫茫莫測所之唯視日以准東西人骨以摽行路耳屢有熱風惡鬼遇之必死顯任緣委命直過險
031_0431_a_02L얼마 후 총령(葱嶺)에 이르렀다. 총령은 겨울이나 여름이나 눈이 쌓여 있었으며, 혹독한 바람을 토해내고 모래와 자갈을 비처럼 흩뿌리는 악룡(惡龍)이 살고 있었다. 산길은 험하고 위태로웠으며 깎아지른 절벽은 천 인(仞)이나 되었다. 옛 사람들이 돌을 뚫어 길을 내고 절벽 옆으로 사다리를 걸쳐 놓았는데, 그런 제도(梯道)를 700여 군데나 건넜다. 또 동아줄을 매달아 만든 다리를 밟고 강을 건넌 것은 수십 차례나 되었다.
이어 소설산(小雪山)을 넘다가 매섭게 불어 닥치는 찬바람을 만났는데, 혜경(慧景)이 입을 다물고 벌벌 떨며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되자 법현에게 말하였다.
“제가 여기서 죽더라도 당신은 곧장 떠나십시오. 같이 죽어서는 안 됩니다.”
말을 마치자 곧 숨을 거두었다. 법현은 그를 어루만지고 울부짖으며 말하였다.
“원래의 계획을 이루지 못했는데 운명하시다니, 이를 어찌한단 말입니까.”
다시 혼자 힘으로 나아가 마침내 험준한 산을 넘었다.
무려 30여 국을 널리 돌아다니고서야 북천축(北天竺)에 이르렀다. 왕사성(王舍城)에도달하기 30여 리 전에 절이 하나 있었는데, 날이 어두워져 그 절에 머물게 되었다. 법현이 다음날 아침 기사굴산(耆闍崛山)으로 가려 하자 그 절의 스님이 충고하였다.
“길이 매우 험난하고 고생스러운 데다가 흑사자(黑師子)들이 많아 자주 사람을 잡아먹으니 어떻게 갈 수 있겠습니까?”
법현이 말하였다.
“멀리 수만 리를 건너온 것은 맹세코 영취산(靈鷲山)에 이르고자 해서입니다. 어찌 여러 해 동안의 정성을 여기까지 와서 버릴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험난하다 하여도 저는 두렵지 않습니다.”
대중들은 그를 만류할 수 없자 두 스님을 따라가도록 보냈다.
법현이 산에 이르렀을 때는 땅거미 지는 저녁이었으므로 거기서 하룻밤을 묵으려고 하자, 따라온 두 스님은 무서워하며 법현을 버려두고 돌아갔다. 법현은 산속에 홀로남아 향을 피우고 예배하면서 옛 자취를 우러러 느끼고 마치 부처님의 거룩한 모습을 뵙듯이 하였다.
밤이 되자 3마리의 흑사자가 다가와 법현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입술을 핥으며 꼬리를 흔들었다. 법현은 경문 외우는 것을 멈추지 않고 일심(一心)으로 부처님을 염하였다. 그러자 사자는 머리를 숙이고 꼬리를 내리더니, 법현의 발 앞에 엎드렸다. 법현은 손으로 사자들을 쓰다듬으며 축원하여 말하였다.
“네가 만일 나를 해치고자 하거든 내가 송경(誦經)을 마칠 때까지 기다려다오. 만일 나를 시험해 보는 것이라면 지금 즉시 물러가는 것이 좋겠다.”
사자들은 한참 있다가 사라져 버렸다.
이튿날 새벽, 다시 돌아오는데 길이 끊기고 깊은 숲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가시나무들이 빽빽이 우거지고 짐승들이 여기저기 날뛰는데, 다만 한 좁은 길이 있어 통행할 수 있었다. 미처 1리도 가지 못해 홀연히 한 도인을 만났다. 나이는 90세가량이고, 용모와 복장은 누추하고 소박했으며, 신비한 기운이 걸출하고 고상하였다. 법현은 비록 그의 고상한 운치를 느끼기는 하였지만 그 분이 신인(神人)인 줄은 깨닫지 못하였다. 잠시 후 앞으로 나아가다가 한 젊은 스님을 만나게 되자, 법현이 물었다.
“조금 전에 나이든 스님 한 분을 만났는데, 그는 누구입니까?”
젊은 스님이 대답하였다.
“두타제자(頭陀弟子) 대가섭(大迦葉)이십니다.”
법현은 그때서야 한참을 크게 한탄하고는 다시 그 장소에 갔지만 커다란 돌이 하나 굴 입구를 가로막고 있어 결국 들어갈 수 없었다. 법현은 이에 눈물을 흘리며 공경히 예를 올리고 떠났다.
또 가시국(迦施國)에 이르렀는데, 정사 안에 흰 귀를 가진 용이 있었다. 항상 대중 스님들과 약속하고 나라에 풍년이 들게 하였는데 모두 효험이 있었다. 사문들은 용을 위하여 용사(龍舍)를 짓고 아울러 복식(福食)을 베풀었다. 하안거(夏安居)를 마치는날이면 항상 용은 곧 한 마리의 작은 뱀으로 변화했는데 양쪽 귀가 모두 흰 빛이었다. 대중들은 모두 이것이 용이라는 것을 알아보고 구리 쟁반에 낙(酪)을 담아 그 가운데 놓았다. 상좌(上座)에서부터 하좌(下座)에 이르기까지 두루 이렇게 하고 나면 곧 용으로 변화하여 사라졌다. 해마다 한 번씩 출현하는데 법현도 이 용을 친견하였다.
뒤에 중천축(中天竺)에 이르러 마갈제국(摩竭提國) 파련불읍(波連弗邑) 아육왕탑(阿育王塔)의 남쪽 천왕사(天王寺)에서 『마하승기율(摩訶僧祇律)』을 얻고, 또 『살바다율초(薩婆多律抄)』ㆍ『잡아비담심론(雜阿毘曇心論)』과 『선경(綖經)』36)ㆍ『방등니원경(方等泥洹經)』 등을 구하였다.
법현은 그곳에서 3년 동안 체류하면서 범서(梵書)와 범어(梵語)를 배워 몸소 자신이 직접 서사하였다. 이에 경전과 불상을 지니고 상인(商人)들에게 의탁하여 사자국(師子國)에 도착하였다. 법현과 함께 동행했던 10여 명의 동료들은 곳곳에 체류하기도 하고, 혹은 죽기도 하여 머리 돌려 그림자를 뒤돌아보니 오직 자기 혼자뿐이었다. 그리하여 늘상 슬픔과 탄식을 품게 되었다. 때마침 옥으로 된 불상 앞에 한 상인이 진(晉)나라 땅에서 생산된 하얗고 둥근 부채 하나를 공양하는 것을 보고는 자기도 모르게 슬퍼져 눈물이 흘렀다.
2년 동안 머물면서 다시 『미사색률(彌沙塞律)』ㆍ『장아함경(長阿含經)』ㆍ『잡아함경(雜阿含經)』과 「잡장(雜藏)」을 얻었는데 모두 중국 땅에는 없는 것들이었다. 이윽고 상인들의 큰 배를 타고 해로를 따라 동토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배에는 200여명의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폭풍을 만나 배가 부서져 물이 새어들자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하며, 즉시 하찮은 여러 가지 물건들을 가져다 던져 버렸다.
법현은 그들이 경전과 불상을 던져 버릴까 두려워하여 오직 일심으로 관세음보살을 염하였고, 중국 땅의 대중 스님들에게도 귀의하였다. 폭풍은 13일 동안 밤낮으로 불어 선박을 어떤 섬 아래로 이르게 하였다. 선박 수리가 끝나자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그 때 먹구름이 끼고 비가 내리며 어두워져 어디로 가는지조차 알 수 없었으니, 오직 바람에 맡길 따름이었다. 만일 암초나 해적들을 만나게 된다면 한 사람도 온전할 수 없었다.
길 떠난 지 90일 만에 야바제국(耶波提國)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다섯 달 동안 머물고 다시 다른 상인들을 따라 동쪽 광주(廣州)로 나아갔다. 돛을 올린 지 한 달 남짓 되었을 때, 한밤중에 갑자기 큰바람이 불었고 배 안의 모든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게 되었다. 대중들이 모두 의논하여 말하였다.
“이 사문(沙門)을 태운 죄에 연루되어 우리들이 낭패(狼狽)를 당하는 것이니, 한 사람 때문에 온 대중을 다 죽게 할 수는 없다.”
그리하여 법현을 배에서 밀어내려고 하였다.
이 때 법현의 단월(檀越)이 성난 목소리로 상인들을 꾸짖어 말하였다.
“당신들이 만약 이 스님을 내려놓겠다면 응당 나도 함께 내려놓아야 할 것이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당신들은 곧 죽임을 당할 것이오. 중국의 제왕(帝王)은 부처님을 받들고 스님들을 공경하고 있소. 내가 중국에 이르러 왕께 고하면 반드시 당신들에게 벌을 내릴 것이오.”
상인들은 서로 쳐다보며 낯빛이 변하여 고개를 숙이고는 곧 그만두었다.
이미 식수도 떨어지고 양식도 바닥이 나서 오직 바람에 맡겨 조류를 따라 흘러갈 뿐이었다. 그런데 뜻밖에 어떤 언덕에 이르렀는데 여기에서 명아주 풀을 발견하였다.
이에 의거해 볼 때 중국 땅임이 분명하였으나 다만 어느 곳인지는 알 수 없었다.
곧 작은 배를 타고 포구에 들어가 마을을 찾아 사냥꾼 두 사람을 발견하였다. 법현이 물었다.
“이곳은 어느 지역입니까?”
사냥꾼이 대답하였다.
“이곳은 청주(靑州) 장광군(長廣郡) 뇌산(牢山) 남쪽 해안입니다.”
사냥꾼은 돌아가 태수(太守) 이억(李嶷)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이억은 평소 불법을 공경하여 믿고 있었는데 뜻밖에 사문이 멀리서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몸소 맞이하여 위로하였다. 법현은 경상(經像)을 모시고 그를 따라서 돌아갔다.
얼마 후 법현이 남쪽으로 돌아가고자 하자 청주자사는 법현에게 더 머물며 겨울나기를 청하였지만 법현은 말하였다.
“빈도(貧道)가 다시 돌아오기 어려운 땅으로 몸을 던진 것은 부처의 가르침을 세상에 크게 유통시키는 데에 뜻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기약한 바를 아직 이루지 못하였으니 여기에 오래 머무를 수는 없습니다.”
마침내 법현은 남쪽 경사(京師)로 가, 외국 선사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에게 나아가도량사(道場寺)에서 6권으로 된 『니원경(泥洹經)』ㆍ『마하승기율(摩訶僧祇律)』ㆍ『방등니원경(方等泥洹經)』ㆍ『선경(綖經)』ㆍ『잡아비담심론(雜阿毘曇心論)』의 번역되지 않은 부분 등 거의 백만여 언(言)을 번역하였다.
법현은 『대니원경(大泥洹經)』을 역출하게 되자 널리 유통시키고 교화시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보고 듣게 하였다.
그 성명(姓名)을 알 수 없는 한 집안이 양도(揚都)의 주작문(朱雀門) 근처에서 살고 있었는데, 대대로 바른 교화를 받들었다. 스스로 『대니원경』의 한 부를 서사하여 독송하고 공양하였는데, 따로 경실(經室)이 없어 그 경을 잡서(雜書)들과 함께 방에 놓아두었다.
그 후 어느 날 갑자기 바람과 불길이 일어나 그의 집에까지 번지게 되었다. 재물이 모두 타버렸지만 오직 『대반니원경(大般泥洹經)』만은 온전하였으니, 그을음도 묻지 않았고 책의 빛깔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이 사실은 양주(揚州) 곳곳에 알려졌고 모두들 신통하고 묘한 일이라고 감탄하였다.
법현은 뒤에 형주(荊州)에 이르러 신사(辛寺)에서 입적하였다. 춘추는 82세였고, 대중들이 모두 애석해 하고 서러워하였다. 그가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보고 들은 풍속은 별도의 전기(傳記:『法顯傳』)가 있다.
031_0430_c_23L有頃至蔥嶺嶺冬夏積雪有惡龍吐毒風雨沙礫山路艱危壁立千仞有人鑿石通路傍施梯道凡度七百餘挮又躡懸絙過河十所仍度小雪遇寒風暴起慧景噤戰不能前顯云吾其死矣卿可時去勿得俱殞言絕而卒顯撫之號泣曰本圖不果命也奈何復自力孤行遂過山險所經歷三十餘國至北天竺未至王舍城三十餘里有一寺逼暮仍停旦顯欲詣耆闍崛山寺僧諫曰路甚艱嶮且多黑師子亟經噉人何由可顯曰遠涉數萬誓到靈鷲寧可使積年之誠旣至而廢耶雖有嶮難不懼也衆莫能止乃遣兩僧送之旣至山中日將曛夕遂欲停宿兩僧危懼捨之而還顯獨留山中燒香禮翹感舊迹如睹聖儀至夜有三黑師子來蹲顯前舐脣搖尾顯誦經不一心念佛師子乃低頭下尾伏顯足前顯以手摩之呪曰汝若欲相害待我誦竟若見試者可便退去師子良久乃去明晨還反路窮幽深榛木荒梗禽獸交撗正有一逕通行而已未至里餘忽逢一道人年可九十服麤素而神明儁遠雖覺其韻高不悟是神人須臾進前逢一年少道顯問向逢一老道人是誰耶答曰頭陁第子大迦葉也顯方惋慨良久旣至山前有一大石撗塞室口遂不得入顯乃流涕致敬而去又至迦施精舍裏有白耳龍與衆僧約令國內豐熟皆有信效沙門爲起龍舍設福食每至夏坐訖日龍輒化作一小蛇兩耳悉白衆咸識是龍以銅盂盛酪置於其中從上座至下行之乃化去年輒一出顯亦親見此龍至中天竺於摩竭提巴連弗邑阿育王塔南天王寺得摩訶僧祇律又得薩婆多律抄雜阿毘曇心綖經方等泥洹等經顯留三年學胡書胡語躬自書寫於是持經像寄附商客師子國顯同侶十餘或留或亡顧影唯己常懷悲慨忽於王像前見商人以晉地一白團扇供養不覺悽然下停二年復得彌沙塞律長阿含阿含及雜藏本竝漢土所無旣而附商人大舶還東舶有二百許人値大暴風舶壞水入衆人惶怖卽取雜物棄之顯恐商人棄其經像唯一心念觀世音及歸命漢土衆僧大風晝夜十三日吹舶至島下治舶竟前時雨晦冥不知何之唯任風而已若値伏石及賊萬無一全行九十日達耶婆提國停五月日復隨他商趣廣州擧忛月餘日中夜忽遇大風擧舶震衆共議曰坐載此沙門使我等狼不可以一人故令一衆俱亡欲推棄之法顯檀越厲聲呵商人曰汝若下此沙門亦應下我不爾便當見殺漢地帝王奉佛敬僧我至彼告王當罪汝商人相視失色僶俛而止水盡糧竭唯任風隨流忽至岸見蔾藋菜依然知是漢地但未測何方乘小舩入浦尋村遇獵者二人顯問此何地耶獵人曰是靑州長廣郡牢山南岸獵人還以告太守李嶷嶷素敬信忽聞沙門遠至躬自迎勞顯持經像隨還頃之欲南歸時刺史請留過久顯曰貧道投身於不反之地在弘通所期未果不得久停遂南造京師就外國禪師佛大跋陁於道場譯出六卷泥洹摩訶僧祇律方等泥洹經綖經雜阿毘曇心未及譯者垂有百萬言顯旣出大泥洹經流布教化咸使見聞有一家失其姓名近朱雀門世奉正化自寫一部讀誦供養無別經室與雜書共屋後風火忽起延及其家資物皆盡唯泥洹經儼然具存煨燼不侵卷色無異京師共傳咸稱神妙後到荊州卒于新寺春秋八十有二衆咸慟惜其所聞見風俗別有傳記

7. 지엄(智嚴)법사전
031_0432_a_13L智嚴法師傳第七
031_0432_b_02L
석지엄이 어디 출신인지는 알 수 없다. 20살에 출가해서 곧 정근(精勤)함으로써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납의(納衣)만을 입고 좌선하며, 평생 풀이나 나무 열매만 먹고 살았다. 경전과 불법을 널리 구하고자 드디어 서역의 여러 나라로 떠돌게 되었다.
계빈국(罽賓國)에 이르러 선사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를 만나고서는 중국에도 이 법을 전하고 싶어 이에 간절히 요청하였다. 불타발타라는 그의 간절함을 가상히 여겨 결국 그와 함께 동쪽으로 길을 떠나게 되었다. 이리하여 설산(雪山)을 넘게 되었는데, 추위의 고통은 극심했고 산은 깎아지른 듯이 험준하였으며 얼음물을 마시고 나무를 먹으며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다. 몇 년이 지나서야 관중(關中)에 도착하였다.
그리고는 항상 불타발타라를 의지하며 따랐고 장안대사(長安大寺)에 머물렀다. 얼마 후 불타발타라가 진(秦)의 승려들에 의해 축출당하게 되니 지엄과 함께 서쪽에서 온 승중들도 모두 흩어져 관중을 떠나게 되었다. 이에 지엄은 산동(山東)의 정사에서 쉬면서 좌선하고 경을 외우며 힘써 정진하고 수학하였다.
동진(東晉) 의희(義熙) 12년(416)에 송(宋)의 무제(武帝)가 장안을 공략하여 승리하고 개선하는 도중에 산동을 통과하게 되었다.
031_0432_a_14L釋智嚴不知何許人弱冠出家便以精勤著名納衣宴坐蔬食永歲志欲廣求經法遂周流西域進到罽賓禪師佛馱跋陁志欲傳法中國乃竭誠要請跋陁嘉其懇至遂共東行是踰涉雪山寒苦嶮絕飮冰茹木於危殆緜歷數載方達關中常依隨跋陁止於長安大寺頃者跋陁撗爲秦僧所擯嚴與西來徒衆竝分散出仍憩山東精舍坐禪誦經力精修晉義熙十二年宋武帝西伐長安剋捷旋旆塗出山東
당시 시흥공(始興公) 왕회(王恢)가 어가를 호종하여 산천을 유람하고 있었는데, 지엄이 머물던 정사에 이르게 되었다. 지엄과 뜻을 같이하던 세 사람의 승려가 각기 승상(繩床)에 앉아 고요히 선정에 든 것을 보았다. 왕회가 다가가 한참동안 있어도 알아차리지를 못하자 손가락을 튀겼는데, 세 사람은 눈을 떴다가 잠시 후 도로 감아 버려 이야기를 나눌 수가 없었다.
왕회는 마음속으로 그들의 진귀함을 존경하여 여러 노인들에게 물어보았는데, 모두들 이렇게 말하였다.
“이 세 스님은 수년 동안 숨어 살면서 아직까지 산에서 나온 적이 없습니다.”
왕회는 즉시 송 무제에게 이 일을 아뢰고, 그들에게 도읍으로 올라오기를 청하였으나 아무도 가려는 사람이 없었다. 여러 번 간청한 뒤에야 두 사람이 지엄을 추천하여 따라가게 하였다.
왕회는 도를 추구하는 마음을 진실하고 독실하게 하였고 빠짐없이 예를 갖추어 그를 섬겼으며, 도읍으로 돌아와서는 즉시 시흥사(始興寺)에 주석하게 하였다. 지엄은 성품이 조용한 것을 좋아하여 세속의 번잡함을 피하고 싶어 하였다. 그러자 왕회는 그를 위하여 동쪽 교외에 다시 정사를 건립하였으니, 이곳이 바로 지원사(枳園寺)이다.
지엄은 전에 서역에서 돌아올 때 범본(梵本)의 여러 경전들을 구해 왔었는데 아직 번역되지 않고 있자, 송 원가(元嘉) 4년(427)에 이르러 사문 석보운(釋寶雲)과 함께 『보요경(普耀經)』ㆍ『광박엄정경(廣博嚴淨經)』ㆍ『사천왕경(四天王經)』 등 3부의 경을 역출하였다.
031_0432_b_03L始興公王恢從駕遊觀山川至嚴精舍見其同志二僧各坐繩牀禪思湛然恢至良久不覺於是彈指三人開眼俄而還閉不與交言恢心敬其奇訪諸耆老此三僧隱居積年未曾出山恢卽啓宋武延請還都莫肯行者屢請旣至二人推嚴隨行恢道懷素篤事甚備還都卽住始興寺嚴性虛靜志避囂塵恢乃於東郊之際更起精卽抧園寺也嚴前還於西域得胡本衆經未及譯寫到宋元嘉四年共沙門寶雲譯出普耀廣博嚴淨及四天王凡三部經
031_0432_c_02L지엄은 사찰에 머물며 별청(別請)을 받지 않았다. 이에 원근의 도속(道俗)들이 그를 공경하며 복종하였다.
그는 출가하기 전에 5계(戒)를 받고는 계율을 범한 적이 있었다. 그 후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았으나 항상 계를 받지 못했다고 의심하고 번번이 그 때문에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여러 해 동안 선관(禪觀)을 닦았으나 스스로 분명하게 결론지을 수가 없었다.
마침내 다시 바다를 건너 재차 천축국으로 가서, 여러 지혜가 밝게 통달한 분들에게 물었다. 아라한(阿羅漢)의 경지에 이른 비구를 만나 그 일을 낱낱이 물었으나 아라한도 감히 판결을 내리지 못했다. 아라한은 곧 지엄을 위해 선정에 들어 도솔궁(兜率宮)에 가서 미륵에게 여쭈니, 미륵은 “계를 받았다”고 대답하였다. 지엄은 크게 기뻐하였고 이에 곧 귀국길에 올랐다. 계빈(罽賓)에 이르렀을 때 병 없이 입적하였는데, 그때 나이 78세였다.
그 나라의 법도에, 득도한 스님이 돌아가셨을 때는 평범한 스님들과는 달리 특별히 한 장소에서 장사지내고 있었다. 당시 대중들은 지엄이 비록 고행(苦行)이 남다르기는 하나 그가 도를 깨달았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판단할 수 없다 하여 시신을 평범한 스님의 묘에 장사지내려고 하였다. 그렇게 결정하고는 지엄의 상여를 들어 올리려 하였으나 끝내 일어날 수 없었고, 여러 사람이 달려들었으나 움직이지 않기는 처음과 마찬가지였다. 이에 대중들은 놀라워하며 시험삼아 득도인(得道人)의 묘소로 향하는 것으로 바꾸어 보기로 하였다. 이렇게 하자 네 사람이 들었는데도 바람같이 옮겨졌고 마침내 폄장(窆葬)할 수 있었다.
그 후 지엄의 제자인 지우(智羽)ㆍ지달(智達)ㆍ지원(智遠)은 서역에서 돌아와 이 소식을 알리고 모두 외국으로 다시 돌아갔다.
031_0432_b_16L在寺不受別請近道俗敬而服之其未出家時常受五戒有所虧犯後入道受具足常疑不得戒每以爲懼積年禪觀而不能自了遂更汎海重到天竺諮諸明達値羅漢比丘具以事問羅漢羅漢不敢判決乃爲嚴入定往兜率宮諮彌彌勒答稱得戒嚴大喜躍於是步行至罽賓無疾而卒時年七十八外國之法得道僧無常與凡僧別葬一處嚴雖苦行絕倫而時衆未判其得道信不欲葬凡僧之墓抗擧嚴喪永不肯起又益人衆不動如初衆咸驚怪試改向得道墓所於是四人輿行駃如風遂得窆葬後嚴弟子智智達遠從西域還報此消息訖還外國

8. 보운(寶雲)법사전
031_0432_c_09L寶雲法師傳第八

석보운의 씨족(氏族)에 대해서는 자세하지 않은데, 전하는 말에 의하면 양주(涼州) 사람이라고 한다. 20세가량에 출가하여 정근(精勤)하며 배우고 수행하였다. 뜻이 운치 있고 굳세고 깨끗하여 세상 사람들과는 달랐으므로 젊어서부터 방정하고 순수하다고 이름이 났다. 법을 구하는 데에 간절하여 몸을 잊고 도에 목숨을 바쳤으며, 신령스러운 자취를 몸소 살펴보고 많은 경전을 널리 찾아보겠다는 서원을 세웠다.
마침내 동진(東晋) 융안(隆安) 초(397)에 멀리 서역으로 떠났으니, 법현(法顯)ㆍ지엄(智嚴)과는 앞뒤로 서로 이어지게 된다. 고비사막을 건너 설령(雪嶺)을 넘으면서 온갖 괴로움과 위험을 겪었으나 어려움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마침내 우전국(于闐國)을 지나 천축의 여러 나라들을 돌아다니며 신령스러운 이적을 두루 살펴보았다. 나찰의 들을 지나면서 하늘의 북소리를 들었으며, 석가모니께서 남긴 자취를 우러러 예배한 것이 많았다.
031_0432_c_10L釋寶雲未詳其氏族傳云涼洲人也弱年出家精勤有學行志韻剛潔偶於世故少以直方純素爲名而求法懇惻忘身侚道誓欲躬睹靈迹尋群經遂以晉隆安之初遠適西域與法顯智嚴先後相隨涉履流沙踰雪嶺勤苦艱危不以爲難遂歷于天竺諸國備睹靈異乃經羅剎之聞天鼓之音釋迦影迹多所瞻禮
031_0433_a_02L보운은 외국에 있으면서 두루 범서(梵書)를 배워 천축 여러 나라 말의 음과 글자와 뜻을 모두 익숙하게 익혔다. 뒷날 장안으로 돌아와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선사를 따라 수학하며 선문(禪門)의 도 닦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불타발타라선사가 갑자기 후진의 승려들에게 축출당하게 되자 그의 제자들도 모두 그 허물을 같이하게 되었으며, 석보운도 그곳을 떠났다. 여산(廬山)의 석혜원이 불타발타라가 추방당한 일을 해결하자 불타발타라와 함께 양주(揚州)로 돌아가 도량사(道場寺)에 편안히 머물렀다.
대중 스님들은 보운이 의지가 굳고 용맹하여 아주 먼 외국에 가서 도를 널리 폈다고 생각하여 흉금을 터놓고 의견을 물으면서 존경하고 좋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보운은 『신무량수경(新無量壽經)』을 번역했는데, 후기에 나온 여러 경전 중에는 보운이 번역한 것이 많았다. 항상 손에는 범본을 잡고 입으로는 진(晉)나라 말로 번역하였는데, 중국말과 범어에 모두 통달하여 음과 뜻이 바르고 적합하였으니 보운이 바로잡은 것은 대중들이 모두 믿고 따랐다.
이전에 관중(關中)의 사문 축불념(竺佛念)은 번역에 능하여 부견(符堅)과 요흥(姚興) 2대에 걸쳐 많은 경전을 역출하였다. 그러나 강좌(江左)에서는 범어 번역에 있어 보운을 능가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므로 동진(東晋)과 송(宋)의 시기에 법장(法藏)을 크게 유통시켰으며, 사문 혜관(慧觀) 등이 모두 벗이 되어 그를 훌륭하게 여겼다.
보운의 성품은 고요히 거처하는 것을 좋아하여 한적함을 늘 유지하였으니, 마침내 육합산사(六合山寺)로 가서 『불소행찬경(佛所行讚經)』을 번역하였다. 산에는 기근에 굶주린 백성들이 많았는데, 습속이 좀도둑질을 좋아하였다. 보운이 설법하여 잘 달래고 가르치니 대부분 허물을 고쳤고, 예로써 섬기고 공양하는 자가 열 집에 여덟, 아홉이나 되었다.
얼마 후 도량사의 혜관이 죽음에 임하여 보운에게 서울로 돌아와 절 일을 맡아 다스려 줄 것을 청하였다. 보운은 할 수 없이 돌아가서 1년 남짓 도량사에 머무르다가 다시 육합산으로 돌아갔다. 원가 26년(449)에 입적하였는데, 이 때 춘추는 70여 세였다. 그가 외국을 다녀왔던 일은 따로 전기(傳記)로 남아 있다. 징사(徵士) 예장(豫章)의 뇌차종(雷次宗)이 그 전기(傳記)의 서문을 지었다.
031_0432_c_19L雲在外域遍學胡書天竺諸國音字詁訓悉皆貫練後還長安隨禪師佛馱跋陁受業修道禪諷孜孜不怠而禪師撗爲秦僧所擯徒衆悉同其雲爾奔散會廬山釋慧遠解其擯共歸京師安止道場寺僧衆以雲志力堅猛弘道絕域莫不披衿諮問敬而愛焉雲譯出新無量壽晚出諸多雲所譯常手執胡本口宣晉語華戎兼通音訓允正雲之所定衆咸信服初關中沙門竺佛念善於宣譯於符姚二世顯出衆經江左練梵踰於雲故於晉宋之際弘通法藏門慧觀等咸友而善之雲性好幽居以保閑寂遂適六合山寺譯出佛所行讚經山多荒民俗好草竊雲說法教誘多有改惡禮事供養十室而八頃之道場慧觀臨卒請雲還都摠理寺任雲不得已而還居歲餘復還六以元嘉二十六年卒春秋七十餘其所造外國別有記傳微士豫章雷宗爲其傳序

9. 지맹(智猛)법사전
031_0433_a_18L智猛法師傳第九
031_0433_b_02L
석지맹은 옹주(雍州) 경조군(京兆郡) 신풍현(新豊縣) 사람이다. 품성이 단정하고 분명하였으며 행실을 맑고 깨끗하게 닦았다. 어려서부터 법복을 입고 학업을 닦는 데에 전념하여 풍송(諷誦)하는 소리가 밤낮으로 이어졌다. 외국의 도인이 석가의 유적(遺蹟)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또 서역에는 방등부(方等部)의 수많은 경전이 널려 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항상 개탄하고 애석해 하며 마음은 먼 곳으로 달려 나갔다.
‘만리 길도 지척이고 천 년의 세월도 따라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는, 드디어 위진(僞秦) 홍시(弘始) 6년(404) 무진(戊辰)년에 같은 뜻을 품은 사문 15명을 모아 결의하고 장안(長安)을 출발하였다. 강을 건너고 골짜기를 따라가기를 서른여섯 차례에 마침내 양주성(涼州城)에 이르렀다. 이후 양관(陽關)의 서쪽을 나서 고비사막으로 들어가니 2천여 리 땅에는 물도 풀도 없었고, 길에는 행인의 종적조차 끊어져 있었다.
031_0433_a_19L釋智猛雍州京兆郡新豐縣人也性端明礪行淸白少襲法服修業專諷誦之聲以夜續晝每見外國道人說釋迦遺迹又聞方等衆經布在西域常慨然有感馳心遐外以爲萬里咫尺千載可追也遂以僞秦弘始六年戊辰之歲招結同志沙門十有五人發迹長安度河順谷三十六渡至涼州城旣而西出陽關入流沙千餘里地無水草路絕行人
031_0433_c_02L겨울에는 추위가 극심하고 여름에는 매우 뜨거웠다. 이에 사람이 죽으면 뼈를 모아 행로를 표시하였으며, 낙타에 양식을 싣고 극심한 고난과 험난한 길을 헤쳐 나아갔다.
마침내 선선(鄯鄯)ㆍ구자(龜玆)ㆍ우전(于闐) 등 여러 나라를 거치면서 풍속을 두루 살펴보았다. 우전국으로부터 서남으로 2천 리를 가서 비로소 총령(葱嶺)에 오르게 되었으나 9명은 중도에서 그만두고 돌아가 버렸다. 석지맹은 남은 도반과 함께 1,700여리를 나아가 파륜국(波倫國)에 이르렀다. 세 차례나 설산(雪山)을 넘어야 했는데, 빙벽이 우뚝하였으니 높이가 백천여 인(仞)이나 되었다. 밧줄을 걸어 다리 삼아 허공을 타고 지나갔는데 내려다보아도 바닥이 보이지 않고 올려다보아도 하늘이 보이지 않았으며, 추위는 참으로 혹독하였고 전쟁터의 원혼들이 울부짖었다. 이는 한(漢)나라 때의 장건(張騫)과 감영(甘英)도 이르지 못한 곳이었다.
다시 남쪽으로 천 리를 가서 계빈국(罽賓國)에 도착하였고 다시 신두하(辛頭河)를 건넜는데 설산(雪山)이 벽처럼 우뚝 솟은 것이 이전보다 더욱 심하였다. 내려오는 길은 장기(障氣)가 많고 악귀가 길을 끊어 놓았으며 행인들도 많이 죽는 길이었다. 지맹은 지극한 마음이 투철하여 험난함을 겪으며 건널 수 있었다.
드디어 계빈성(罽賓城)에 이르렀다. 이 나라에는 늘 5백 나한이 있어서 항상 아뇩달지(阿耨達池)를 왕래하였다. 그 중에 큰 덕을 갖춘 나한이 있었는데, 석지맹이 온 것을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석지맹이 방토(方土)에 대해 묻자 그를 위하여 사천하(四天下)의 일을 말해 주었는데, 자세한 것은 『석지맹전(釋智猛傳)』에 나와 있다.
석지맹은 먼저 기사국(奇沙國)에서 부처님의 글이 새겨진 석타호(石唾壺)를 보았다. 또한 이 나라에서 부처님의 발우를 보았는데, 자줏빛의 광채가 사방으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석지맹은 향과 꽃을 공양하고 발우를 정대하고 발원하였다.
“발우가 만약 감응한다면 가벼워지게 하거나 무거워지게 하소서.”
이윽고 점점 발우가 무거워져 끝내는 힘으로 들 수 없어 상[案] 위에 내려놓자 다시 무거움을 느낄 수 없었다. 그의 도심(道心)이 감응한 바가 이와 같았다.
다시 서남쪽으로 1,300리를 내려가 가유라위국(迦惟羅衛國)에 이르러서 부처님의 머리카락과 치아 및 육계골(肉髻骨)을 친견하였는데, 부처님의 발자취가 찬란하게 보전되어 있었다. 또한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사라(沙羅)37) 숲과 마군을 항복시킨 보리수를 보았다. 석지맹은 기쁨이 마음속에 충만하여 하루 동안 공양하고 아울러 보배 일산[寶蓋]과 대의(大衣)를 항마상(降魔象)에 씌워드렸다. 그는 두루 돌아다니며 신령스러운 변이를 샅샅이 살폈는데, 하늘 사다리와 용의 못을 본 일 등 그 수는 이루 다 헤아릴 수도 없다.
후에 화씨성(華氏城) 아육왕(阿育王)의 옛 도읍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큰 지혜가 있는 나열종(羅閱宗)이라는 바라문(婆羅門)이 있었는데, 그의 온 집안이 불법을 널리 펴고 있었고, 왕에게 흠모와 존경을 받았으며, 순은으로 만든 3장(丈) 높이의 탑을 세웠다. 사문 법현이 이전에 그 집에서 6권 『니원경(泥洹經)』을 얻었었다. 그는 석지맹을 보고는 물었다.
“중국[秦] 땅에는 대승의 학문이 없습니까?”
석지맹이 대답하였다.
“모든 것이 대승의 학문입니다.”
나열이 놀라 찬탄하였다.
“드문 일이로다, 드문 일이로다. 어찌 보살께서 화현하신 것이 아니리오.”
석지맹은 그 집에서 범본(梵本) 『니원경(泥洹經)』 1부를 얻고, 또 『승기율(僧祇律)』 1부와 여러 경의 범본을 얻고는 널리 유통시킬 것을 서원하였다.
이에 곧 발길을 되돌려 갑자(甲子, 424)년에 천축을 출발하였는데 동행한 4명의 스님은 길에서 입적하였고, 석지맹과 담찬(曇纂)만이 함께 양주(涼州)로 돌아왔다.
031_0433_b_06L冬則嚴夏則瘴熱人死聚骨以摽行路駝負糧理極辛阻遂歷鄯鄯龜茲闐諸國備觀風俗從于闐西南行二千里始登蔥嶺而同侶九人退還遂進行千七百餘里至波淪國三度雪山冰崖皓然百千餘仞飛絙爲橋乘虛而過窺不見底仰不見天寒氣慘酷影戰魂慄漢之張騫甘英所不至也復南行千里至罽賓國再度辛頭河雪山壁立轉甚於前下多障氣惡鬼斷路行者多死猛誠心冥徹履險能濟旣至罽賓城恒有五百羅漢住此國中而常往反阿耨達池有大德羅漢見猛至止歡喜讚歎猛諮問方土爲說四天子事具在其傳猛先於奇沙國見佛文石唾壺又於此國見佛鉢光色紫紺四邊燦然猛花香供養頂戴發願鉢若有應能輕能重旣而轉重力遂不堪及下案時復不覺重其道心所應如此復西南行千三百里至迦羅衛國見佛髮佛牙及肉髻骨佛影佛迹炳然具存又睹泥洹堅固之林降魔菩提之樹猛喜心內充設供一日兼以寶蓋大衣覆降魔象其所遊踐究觀靈變天梯龍池之事不可勝數後至華氏城是阿育王舊都有大智婆羅門名羅閱宗族弘法王所欽重造純銀塔高三丈沙門法顯先於其家已得六卷泥洹及見猛問云秦地有大乘學不答曰悉大乘學羅閱驚歎曰希有希有將非菩薩往化耶猛就其家得泥洹胡本一部又尋得摩訶僧祇律一部及餘經胡本誓願流通於是便反甲子歲發天竺同行四僧於路無常唯猛與曇纂俱還於涼州
범본 『니원경(泥洹經)』을 역출하여 20권을 얻었다. 원가(元嘉) 14년(437)에 촉(蜀)으로 들어갔고, 16년(439) 7월에는 종산(鍾山) 정림사(定林寺)에서 전(傳)38)을 지었다. 지맹은 원가 말년(453)에 세상을 떠났다.
031_0433_c_19L譯出泥洹得二十卷以元嘉十四年入蜀六年七月七日於鍾山定林寺造傳猛以元嘉末卒

10. 법용(法勇)법사전
031_0433_c_22L法勇法師傳第十
031_0434_a_02L
석법용은 범어로는 담무갈(曇無竭)이라고 한다. 속성은 이(李)씨이고 유주(幽州) 황룡국(黃龍國) 사람이다. 어려서 사미가 되자마자 고행(苦行)을 닦았으며 계율을 지니고 경전을 암송하였으니, 스승과 스님들이 경탄하며 그를 기이하게 여겼다. 일찍이 법현(法顯)ㆍ보운(寶雲) 등 많은 스님들이 직접 불국(佛國)을 다녀왔다는 소문을 듣고는 개탄하며 몸을 돌보지 않고 불법을 구하겠다는 서원을 세웠다. 마침내 송(宋) 영초(永初) 원년(420)에 뜻을 같이하는 사문 승맹(僧猛)과 담랑(曇朗) 등 25명을 모아 번개(幡蓋)와 공양구(供養具)를 갖추고 북쪽지방을 출발하여 멀리 서쪽 방향으로 나아갔다.
031_0433_c_23L釋法勇者胡言曇無竭本姓李氏州黃龍國人也幼爲沙彌便修苦行持戒諷經爲師僧所敬異常聞沙門法顯寶雲諸僧躬踐佛國慨然有亡身之誓遂以宋永初之年招集同志沙門僧猛曇朗之徒一十有五人齎幡蓋供養之具發迹北土遠適西
031_0434_b_02L처음에는 하남국(河南國)에 이르렀고 이어 해서군(海西郡)을 벗어나 고비사막으로 들어가 고창군(高昌郡)에 도착하였다. 구자국(龜玆國)과 사륵국(沙勒國) 등 여러 나라를 경유하여 총령(葱嶺)과 설산(雪山)을 올라갔다. 잔도(棧道)는 험난하고 엉망이어서 나귀나 낙타는 통행이 불가능하였고, 층층이 쌓인 얼음은 높고 높았으며,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도 전혀 없었다. 장기(障氣:毒氣)가 많았고 아래로는 큰 강이 흐르고 있었는데 물살이 급하기가 마치 화살과 같았다.
동쪽과 서쪽의 산허리에 굵은 줄을 매어 다리로 삼았는데 그 거리가 5리나 되었다. 한 번에 열 사람이 건너가는데 반대쪽 기슭에 도착하면 연기를 피워 표시로 삼았고, 뒷사람은 이 연기를 보고 앞사람이 이미 도착했음을 알아 비로소 다시 나아갈 수 있었다. 만일 오랫동안 연기가 보이지 않으면 사나운 바람이 그 줄을 흔들어 사람이 강물 속으로 떨어졌음을 알았다.
총령을 넘은 지 3일이 지나 다시 설산(雪山)에 올랐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는 어디에도 발 디딜 곳이 없었으며, 절벽에는 곳곳에 오래된 말뚝 구멍이 서로 마주 대하고늘어서 있었다. 한 사람이 각각 네 개의 말뚝을 쥐고, 먼저 아래의 말뚝을 뽑아서는 손으로 잡을 윗 말뚝을 만들었는데, 이렇게 하기를 교대로 반복하였다. 3일이 지나서야 평지에 도착하였고, 동료들을 점검해 보니 12명을 잃었다.
계속 나아가 계빈국(罽賓國)에 이르러 부처님의 발우에 예배하였다. 1년 남짓 계빈국에 머무르는 동안 범서(梵書)를 배워 범어를 이해하게 되었으며, 범문(梵文)으로 된 『관세음보살수기경(觀世音菩薩受記經)』 1부를 구할 수 있었다.
담무갈과 동행길에 살아남은 사문 13인은 서쪽으로 길을 떠나 신두나제하(新頭那提河)에 이르렀는데 한(漢)나라 말로는 사자구(師子口)라 한다. 강을 따라 다시 서쪽으로 월지국(月氏國)으로 들어가 부처님의 육계골(肉髻骨)에 예배하였고, 자비수선(自沸水船)을 목도하였다.
그 후 단특산(檀特山) 남쪽에 있는 석류사(石留寺)에 이르렀는데 그곳에 머무르고 있는 승려 3백여 명은 삼승의 여러 가지 교학을 배우고 있었다. 담무갈은 이 사찰에 머물러 구족계를 받았다. 천축의 사문 불타다라(佛陀多羅)는 제(齊)나라 말로 불구(佛救)인데, 그 지방 승려들이 모두 ‘이미 도과(道果)를 증득했다’고 하는 분이었다. 담무갈은 불타다라를 청하여 화상(和尙)으로 삼고, 중국 사문 지정(志定)을 아사리(阿闍梨)로 삼았다. 그 절에서 머물며 석 달 동안 하안거를 지냈다.
다시 북천축을 출발하여 중천축(中天竺)으로 나아갔는데, 광활하고 인적이 끊어진 곳이었으므로 항상 석밀(石蜜)을 가지고 다니며 식량으로 삼았다. 그의 동행자 가운데 8명이 길에서 죽고 나머지 5명만이 동행하여 험난한 가시밭길을 밟고 나아갔다. 담무갈은 모시고 있는 『관세음경(觀世音經)』에 마음을 오로지 하고 생각을 집중시켰다.
차차 사위국(舍衛國)에 이를 무렵, 들판에서 야생 코끼리 한 떼를 만났다. 담무갈이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부르고 신명을 바쳐 귀의하자 곧 수풀 속에서 사자가 뛰쳐나왔고, 코끼리 떼는 놀라 두려워하며 달아났다.
그 후 항하(恒河)를 건너다가 또 한 무리의 들소 떼를 만났는데 울부짖으며 달려들어 사람을 해치려 하였다. 담무갈이 지난번처럼 신명을 바쳐 귀의하자 이에 솔개가 날아왔고, 들소들은 놀라 흩어져 결국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그의 정성스러운 마음에 감응하여 위험을 극복하고 건널 수 있게 한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
뒤에 남천축(南天竺)에서 배를 타고 바닷길로 광주(廣州)에 도착하였다. 그가 널리 돌아다닌 사적(事跡)은 별도의 전기(傳記)39)가 있다. 그가 번역한 『관세음수기경(觀世音受記經)』은 오늘날 경사(京師)에 전해진다. 그 후 어디에서 입적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031_0434_a_08L初至河南國仍出海西郡進入流到高昌郡經歷龜茲沙勒諸國登蔥嶺雪山棧路險惡驢駝不通冰峨峨絕無草木山多障氣下有大浚急如箭於東西兩山之脅繫索爲橋相去五里十人一過到彼岸已擧煙爲識後人見煙知前已度方得更進若久不見煙則知暴風吹索墮江中行蔥嶺三日方過復上雪山懸崖壁立無安足處石壁皆有故杙孔處處相對人各執四弋先拔下杙攀上弋展轉相代三日方過乃到平相待料撿同侶失十二人進至罽賓國禮拜佛鉢停歲餘學胡書竟便解胡語求得觀世音受記經梵文一部無竭同行沙門餘十三人西行到新頭那提漢言師子口河西入月氏國禮拜佛肉髻骨及睹自沸木舡後至檀特山南石留寺生僧三百雜三乘學無竭便停此寺受具足天竺沙門佛陁多羅齊言佛救方衆僧云其得道果無竭請爲和上漢沙門志定爲阿闍梨於寺夏坐三月日復北行至中天竺曠絕之處齎石蜜爲糧其同侶八人路亡五人俱行屢經危棘無竭所齎觀世音經常專心繫念進涉舍衛國中野逢山象一群無竭稱名歸命卽有師子從林中出象驚怖奔走後渡洹河値野牛一群鳴吼而來將欲害人竭歸命如初尋有大鷲飛來野牛驚遂得免其誠心所感在嶮克濟此類也後於南天竺隨舶汎海達廣所歷事迹別有記傳其所譯出觀世音受記經今傳于京師後不知所終出三藏記集傳下卷第十五甲辰歲高麗國分司大藏都監奉勅彫造
  1. 1)농우(隴右)는 농산(隴山)의 오른쪽 지역을 말하고, 당(唐)의 10도(道) 중의 하나이다.
  2. 2)농상(隴上)은 농우(隴右)와 같다. 감숙성(甘肅省)에 속한 땅이다.
  3. 3)섬서성(陝西省)에 있는 지역이다.
  4. 4)효산(*山)과 함곡관(函谷關)을 말하며 하남성(河南省)에 있다.
  5. 5)중국 서쪽 지역의 이민족을 말한다.
  6. 6)감숙성(甘肅省) 천수현(天水縣)을 말한다.
  7. 7)죽림칠현(竹林七賢)과 불교의 7도인(道人)을 비교한 논.
  8. 8)하남성(河南省) 급현(汲縣).
  9. 9)산서성(山西省) 원곡현(垣曲縣) 동북방(東北方) 100리의 땅이다.
  10. 10)하남성(河南省) 숭현(嵩縣).
  11. 11)5호(胡) 16국(國) 중 전연(前燕) 왕 모용황(慕容皝)의 둘째 아들이다. 모용황이 죽자 왕위를 이어받아 황제라 칭하고 업(鄴)에 도읍을 정하였다.
  12. 12)호북성(湖北省) 양양현(襄陽縣).
  13. 13)하남성(河南省) 신야현(新野縣)의 남쪽.
  14. 14)수량을 재는 단위로 1곡(斛)은 곧 백승(百升)이다.
  15. 15)번(樊)은 번성(樊城)이다. 한수(漢水)를 사이에 두고 양양(襄陽)과 마주하고 있다. 면(沔)은 면양(沔陽)이다. 양양 부근에 있다.
  16. 16)흥녕(興寧, 373~375) 중에 양주자사(梁州刺史)로 있으면서 양양을 진정시켰다.
  17. 17)전진(前秦)의 제3대 왕으로 28년 동안(357~384) 재위하였고 장안(長安)에 도읍을 정하였다.
  18. 18)석륵(石勒)이 반란을 일으켜 전조(前趙)를 무너뜨리고 후조(後趙)를 세워 황제를 칭한 사건. 아들인 석호(石虎) 때에 멸망하였다.
  19. 19)천자가 여러 지방을 돌며 민정을 살피는 일을 말한다.
  20. 20)서연(西燕)을 세우고 황제라 칭하였다.
  21. 21)5호 16국 중 후진(後秦)을 세운 인물이다.
  22. 22)손작(孫綽)의 자(字)는 흥공(興公)이다.
  23. 23)후진(後秦) 요장(姚萇)의 아우이다.
  24. 24)광무현(廣武縣), 즉 산서성(山西省) 대현(代縣)에 있다.
  25. 25)지금의 산서성(山西省) 낙정현(樂靜顯)의 남쪽 70리이다.
  26. 26)『시경(詩經)』에서는 “규(珪)와 같고 장(璋)과 같다”고 하였는데, 규(珪)와 장(璋)은 모두 예식에 사용하는 귀한 옥이다. 전(轉)하여 인품이 고상한 사람을 말한다.
  27. 27)의(義)를 온전히 하고 뜻[志]을 바르게 하기 위해서 세상을 피해 은둔하는 것을 말한다.
  28. 28)원문은 불모(不謀)이다. 『논어(論語)』에서 “군자는 도(道)를 도모하지, 먹을 것[食]을 도모하지 않는다”고하였다.
  29. 29)기연(機緣)이 되어 주는 상(象), 즉 여기서는 불상(佛像)을 말한다.
  30. 30)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선사를 말한다.
  31. 31)요장(姚萇)의 장자인 요흥(姚興)을 말한다. 후진(後秦)의 제2대 왕이다.
  32. 32)안휘성(安徽省)의 당도현(當塗縣)이다.
  33. 33)노중련(魯仲連)을 말한다. 노중련과 전파(田巴)는 전국시대 때 제(齊)나라의 웅변가였다. 이 전파(田巴)를 굴복시켰다고 하지만 그의 재주를 뛰어넘지는 못하였다.
  34. 34)원문에는 구연(寇淵)으로 되어 있는데 아마도 도연(道淵)의 오자인 듯하다. 「도연전(道淵傳)」은 『양고승전(梁高僧傳)』 제7권에 있다.
  35. 35)『삼창(三蒼)』과 『이아(爾雅)』를 말한다.
  36. 36)『선경(線經)』으로도 쓴다.
  37. 37)원문에는 견고(堅固)로 되어 있는데, 이는 아마도 Sala(沙羅樹)와 Sara(堅固)를 혼동한 것인 듯하다.
  38. 38)『역국전(歷國傳)』인데 지금은 유실되어 전해지지 않는다.
  39. 39)『외국전(外國傳)』 5권. 지금은 산실되어 전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