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C_IT_K1065_T_001
- 032_0369_a_01L대당서역기 서문
- 032_0369_a_01L大唐西域記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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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건대*1)천지의 광대함과 인류 종족의 상이함에 관해서는 『담천(談天)』1)에서도 그 끝을 다 궁구하지 못하였고, 『괄지(括地)』2)에서도 그 근원을 완전히 밝혀내지 못하였다. 따라서 방지(方志)3)가 미처 전하지 못하고, 중국의 정치가 아직 미치지 않은 곳에 대해서는 어떻게 모두 말로 다 할 수 있겠는가? - 032_0369_a_02L竊以穹儀方載之廣,薀識懷靈之異,『談天』無以究其極,『括地』詎足辯其原?是知方志所未傳,聲敎所不曁者,豈可勝道哉!
- 살펴보면 인도[天竺]라는 나라는 그 내력이 오래 되었는데, 성현이 많이 배출되었고 인의(仁義)가 풍속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사적이 오래 전에 끊긴 데다 중국에서도 아주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산경(山經)』4)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고 『왕회(王會)』5)에도 적혀 있지 않다. 박망(博望)이 서역으로의 새로운 길을 내었던 것은 단지 공죽(邛竹)만을 뜻에 두었을 뿐이었고,6) 곤명(昆明)의 길이 닫히고 어지럽혀지자 신지(神池)에서 힘을 다하여 훈련하였을 뿐이었다.7)
- 032_0369_a_06L詳夫天竺之爲國也,其來尚矣。聖賢以之疊軫,仁義於焉成俗。然事絕於曩代,壤隔於中土,『山經』莫之紀,『王會』所不書。博望鑿空,徒寘懷於印竹;昆明道閉,謬肆力於神池。
- 이리하여 마침내 부처님의 탄생을 알리는 징조가 항성(恒星)으로 나타나니8) 천세[千載]에 현묘함이 가득 찼고, 꿈에 밝은 해를 지닌 이가 나타나니 신비한 빛이 만 리(萬里)에 퍼졌다.9)
- 032_0369_a_10L遂使瑞表恒星,鬱玄妙於千載;夢彰佩日,祕神光於萬里。
- 이에 채음(蔡愔)10)이 도를 구하러 찾아가서 마등(摩騰)과 함께 낙양으로 들어와 경장(經藏)을 석실(石室)11)에 두었지만 아직 용궁의 깊숙한 곳까지 퍼지지는 못하였고, 부처의 상을 양대(凉臺)12)에 그리게 하였지만 어찌 취봉(鷲峯)13)의 아름다움을 다할 수 있었겠는가?
- 032_0369_a_11L曁於蔡愔訪道、摩騰入洛,經藏石室,未盡龍宮之奧,像畫涼臺,寧極鷲峯之羙。
- 그 이후 시정(時政)에 우환이 많아지고 환관이 권력에 편승하자 동경(東京:洛陽)이 혼란에 빠져 어지럽게 셋으로 나뉘어졌다. 또한 모후(母后)가 왕권을 찬탄하여 조정에 불화를 일으키니14) 나라의 질서[憲章]는 함락(函雒)15)에서조차 무너졌다. 변방에서는 봉화가 끊임없이 피어오르고 그것으로 인하여 4방에 보루가 수없이 쌓여 길이 막히게 되었으니, 하물며 이 나라에서 멀리 떨어진 곳을 어찌 갈 수 있었겠는가?
- 032_0369_a_14L自茲厥後,時政多虞。閹豎乘㩲,潰東京而鼎峙;母后成釁,翦中朝而幅裂。憲章泯於函、雒,烽燧警於䦕塞,四郊因而多壘,況茲邦之絕遠哉!
- 그런데 천만다행하게도 귀한 이가 세간에 나타나서 다소 기록을 남기게 되었지만 그 땅의 특징을 정확하게 전하지 못하고 한갓 『신경(神經)』16)만을 채록하였을 뿐이며, 진여(眞如)17)의 도리를 궁구하지 못하였다.
- 032_0369_a_17L然而釣奇之客,希世間至。頗存記注,寧盡物土之宜;徒採『神經』,未極眞如之旨。
- 그러다가 수나라가 통일을 하게 되어 이에 국토를 확장하고자 힘썼지만 오히려 서해(西海)18)를 돌아보면서 탄식을 하였고 동락(東雒)19)을 바라보며 아쉬워할 뿐이었다. 옥문(玉門)20) 밖에서 깃발을 휘날린 자는 정말 많았지만 총령(蔥嶺)21)의 고원을 쉽게 건넌 이에 대해서는 아마도 기록할 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어찌 설산(雪山)22)을 가리키면서 오랫동안 힘껏 달려가다가 용지(龍池)23)를 바라보면서 잠시 쉴 수가 있었겠는가? 이것은 전 왕조인 수나라의 덕이 세상에 드리워지지 않았고 위력이 멀리 미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 032_0369_a_19L有隋一統,寔務恢疆,尚且睠西海而咨嗟,望東雒而杼軸。揚旌玉門之表,信亦多人;利涉蔥嶺之源,蓋無足紀。曷能指雪山而長騖,望龍池而一息者哉!良由德不被物,威不及遠。
- 032_0369_b_02L그런데 우리 대당(大唐)이 천하를 다스리게 되어 황제의 나라를 열고 제왕의 다스림[帝圖]을 펼치기 시작하면서 하늘에는 불길한 혜성[攙搶]들이 사라지고 국가의 운명[天步]이 밝아지게 되었으니, 그 공적은 천지의 조화에 필적할 만한 것이었으며, 그 광명은 해와 달이 비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 육골(肉骨)이 맹수들의 먹이가 될 뻔하다가 다시 살아났고, 집안은 귀신들의 폐허로부터 다시 살아나 천수를 누리게 되었다. 외국인[異類]들은 고가(藁街)24)에 넘쳐나고 변방의 오랑캐 땅까지도 지배하게 되었으니 10주(洲)25)가 정원이고 환해(環海)가 연못이 되었다. 이것은 5제(帝)26)까지도 작게 여기며 상황(上皇)도 낮게 내려다 볼 정도의 일이었다.
- 032_0369_b_02L我大唐之有天下也,闢寰宇而創帝圖,掃攙搶而淸天步。功侔造化,明等照臨,人荷再生,肉骨豺狼之吻;家蒙錫壽,還魂鬼蜮之墟。摠異類於藁街,掩遐荒於輿地。菀十洲而池環海,小五帝而鄙上皇。
- 한편, 현장 법사는 어린 시절에 법문(法門)에 들고서부터 기원정사27)의 땅을 밟아보지 못한 것을 개탄하고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을 오래도록 가슴속에 품고서 녹야원을 향해 간절하게 마음으로 우러렀다. 불국토[淨境]로의 여행은 실로 오래도록 품었던 소망이었다. 마침내 당나라의 순박한 풍속이 서쪽을 교화하고 그들의 율법이 동쪽으로 귀의하게 되는 때를 맞아 정관(貞觀) 3년(629)에 석장을 짚고 길을 떠났다.
- 032_0369_b_08L法師幼漸法門,慨祇園之莫履;長懷眞迹,仰鹿野而翹心。褰裳淨境,實惟素蓄。會淳風之西偃,屬候律之東歸,以貞觀三年,杖錫遵路。
- 황제의 신령[皇靈]에 의지하고서 타국에 나아갔으니 온갖 험난한 길들도 마치 평지를 가는 것과 같았다. 선대 왕들의 혼령[冥助]의 힘을 빌려서 위험한 길을 건넜으니 어려움에 처해도 무사하게 지나갈 수 있었다. 추위와 더위를 견디어 내며 조금씩 나아가 마침내 인도에 도달하게 되었다.
- 032_0369_b_11L資皇靈而抵殊俗,冒重險其若夷;假冥助而踐畏塗,幾必危而已濟。暄寒驟徙,展轉方達。
- 진상(眞相)을 거듭 물으면서 보기 어려운 실상(實相)을 공(空)과 유(有)의 사이에서 보게 되었고, 정묘한 이치를 곰곰이 생각해서 듣기 어려운 정법을 생멸(生滅)의 경계에서 들었다. 그리하여 성품의 바다[性海]에서 모든 의심을 깨쳤으며 미혹의 나루터[迷津]에서 미묘한 깨달음을 얻었다. 이에 여러 경들을 바로잡아서 단 한마디의 말이라도 완전하게 따져 묻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곁들여 성스러운 불적을 답사하여 하나의 물건이라도 살피지 않은 것이 없었다. 오랜 세월 동안 세상을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귀로에 올라 19년(645) 정월(正月)에 장안에 도착하게 되었다. 법사께서 가지고 온 경론은 657부(部)이며 황제의 명을 받아서 번역하기에 이르렀다.
- 032_0369_b_14L言尋眞相,見不見於空有之間;博考精微,聞不聞於生滅之際。廓群疑於性海,啓妙覺於迷津。於是隱括衆經,無片言而不盡;傍稽聖迹,無一物而不窺。周流多載,方始旋返。十九年正月,屆于長安。所獲經論六百五十七部,有詔譯焉。
- 친히 다녀온 곳이 110국, 전해들은 것이 28국인데 이 중에 어떤 일은 앞 세대의 전적에서도 보이는 것이며, 어떤 나라 이름은 지금 시대에 처음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모두 당나라의 은택을 입게 되어 감동하지 않은 곳이 없었으며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 절하면서 귀복하게 되었다. 관리들에게 통역을 부탁하고 험준한 산길을 넘어서 예물을 가져와 바쳤으며, 조정에 참여하는 것을 영예로 생각하여 관대(冠帶)를 입고 무리를 이루었다.
- 032_0369_b_20L親踐者一百一十國,傳聞者二十八國。或事見於前典,或名始於今代。莫不餐和飮澤,頓顙而知歸;請吏革音,梯山而奉賮。歡闕庭而相抃,襲冠帶而成群。
- 032_0369_c_02L이와 같이 그 나라에서 나는 특산품이나 풍토ㆍ습속이나 산천의 차이를 멀리는 국전(國典)에 비추어 보고 가깝게는 사리에 밝은 어진 노인[故老]들에게 물어보면서 현장법사는 아득히 멀고 제각기 다른 것을 마치 현재 눈앞에 보는 것처럼 기술하여 수고스럽지 않도록 서책으로 엮어 상세하게 글로 옮겨 썼으니, 이것이 바로 1질(帙) 12권(卷)으로 이루어진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라는 이름의 책인 것이다.
- 032_0369_b_24L爾其物產風土之差,習俗山川之異。遠則稽之於國典,近則詳之於故老,邈矣殊方,依然在目。無勞握槧,已詳油素。名爲『大唐西域記』,一秩,十二卷。
- 생각해 보면 내가 쓴 서(序)는 일의 대강만을 다루는 데 지나지 않았으며 아주 일부분만을 기록했을 뿐이다. 변변치 않은 말솜씨와 천박한 도(道)를 지닌 나의 잘못이 있다면 보충해주길 바랄 뿐이다.
- 032_0369_c_05L竊惟書事記言,固已緝於微婉;瑣詞小道,冀有補於遺闕。
- 비서저작좌랑(秘書著作佐郞) 경파(敬播)28)가 이 서문29)을 쓴다.
- 032_0369_c_07L祕書著作佐郞敬播序之云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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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제1권 - 032_0369_c_08L大唐西域記卷第一 三十四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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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玄奘) 한역
변기(辯機) 찬록
이미령 번역 -
032_0369_c_09L三藏法師玄奘奉 詔譯
大摠持寺沙門 辯機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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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발지에서부터 인도 국경 사이의 나라들[34개국] -
032_0369_c_11L阿耆尼國
屈支國
跋祿迦國
笯奴故反赤建國
赭時國
㤄敷發反捍國
窣蘇沒反堵利瑟那國
颯秣建國
弭秣賀國
劫布呾那國
屈霜去聲你伽國
喝捍國
捕喝國
伐地國
貨利習彌伽國
羯霜去聲那國
呾蜜國
赤鄂衍那國
忽露摩國
愉色俱反漫國 鞠和衍那國鑊沙國
珂咄羅國 拘謎莫閉反陁國縛伽浪國
紇露悉泯健國
忽懍國
縛喝國
銳秣陁國
胡寔健國
呾剌健國
揭職國
梵衍那國
迦畢試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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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_0370_a_02L
널리 황유(皇猷)1)를 가려내고 멀리 황제들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면 처음 포희(庖犧)2)가 동방에 즉위하고 헌원(軒轅)3)이 중국을 다스린 것은 천하의 모든 백성을 기르고 영토를 나누기 위함이었다. 당요(唐堯)4)가 하늘의 명을 받아서 황제의 자리에 오르니 그 빛이 4방에 이르렀고, 우순(虞舜)5)이 지도 (地圖)를 받아서6) 천하를 다스리자 그 덕은 9주[九土]7)에 흘렀다. 이후부터는 서사(書事)의 서책만이 헛되이 전해져서 옛 현자들의 이야기는 아득하게 들리고, 다만 말을 기록한 역사만을 접해볼 뿐이었다. 어찌 이러한 시대가 도가 있던 시기와 합치된다고 할 수 있으며, 시운(時運)을 무위(無爲)의 시대와 비교할 수 있겠는가? - 032_0369_c_24L歷選皇猷,遐觀帝錄,庖犧出震之初,軒轅垂衣之始,所以司牧黎元,所以疆畫分野。曁乎唐堯之受天運,光格四表,虞舜之納地圖,德流九土。自茲已降,空傳書事之冊,逖聽前修,徒聞記言之史,豈若時逢有道,運屬無爲者歟。
- 우리 대당(大唐)의 천자께서는 황제의 자리에 올라서 시운을 타고 천하의 기강을 장악하시니, 사방천지가 하나가 되어 밝게 다스려졌다. 상고시대의 3황(皇)과 견줄 정도로 그 덕화가 4방에 두루 퍼졌다. 그리하여 현묘한 덕화가 흘러내리고 상서로운 바람이 아득하게 부니, 하늘[乾]과 땅[坤]이 만물을 덮거나 싣는 것과 같았으며 비바람이 만물을 고르게 적시는 것과 같았다.
- 032_0370_a_07L我大唐御極則天,乘時握紀,一六合而光宅,四三皇而照臨。玄化滂流,祥風遐扇,同乾坤之覆載,齊風雨之鼓潤。
- 동이(東夷)도 조공을 바치러 들어오고 서융(西戎)도 그 질서 속으로 편입되었다. 나라의 기틀을 세워 자손에게 전하였고 반란을 다스려서 바르게 한 것은 진실로 전대의 왕들을 아득하게 뛰어넘고 선대(先代)를 모두 포함할 정도였다. 같은 문자(文字)와 동일한 규범으로 다스려지게 하신 신업(神業)과 같은 이 공적에 대해서는 글을 쓰지 않으면 그 커다란 계략을 찬미할 수 없으며, 하나하나 분명히 말하는 것 이외에는 어찌 그 대업을 칭송할 수 있겠는가?
- 032_0370_a_10L與夫東夷入貢,西戎卽敍,創業垂統,撥亂反正,固以跨越前王,囊括先代。同文共軌,至治神功,非載記無以贊大猷,非昭宣何以光盛業?
- 현장은 오로지 서역을 유람하는 대로 그 풍토를 기록하였다. 비록 여러 나라의 풍속을 충분하게 나누어 밝히지는 못하였지만, 실로 그 땅에는 삼황오제의 시대 이상으로 천자의 은혜가 미치고 있었으며, 살아있는 것 모두가 은택을 입고 있었으니, 말을 할 수 있다면 누구라도 천자의 공적을 칭송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 032_0370_a_14L玄奘輒隨遊至,擧其風土,雖未考方辯俗,信已越五踰三,含生之疇,咸被凱澤;能言之類,莫不稱功。
- 당나라 조정으로부터 오천축국, 변경의 이민족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정삭(正朔)8)을 받아서 한결같이 천자의 덕화(德化)를 입어 무력의 공적을 찬양하며, 문덕(文德)의 성대함을 찬미하여 으뜸가는 화제로 삼고 있다. 이것은 전적을 자세하게 조사해보아도 예전에는 들어본 적이 없었던 것이며, 상고의 지리ㆍ역사를 비추어 보아도 어떤 것도 이것과 짝할 것이 없다. 여기에 서술하지 않으면 당조의 교화가 얼마나 성대한가를 전할 수 없을 것이니, 이제 보고들은 사실에 의거하여 여기에 실어 적어놓는 것이다.
- 032_0370_a_17L越自天府,曁諸天竺,幽荒異俗,絕域殊邦,咸承正朔,俱霑聲敎。贊武功之績,諷成口實;美文德之盛,鬱爲稱首。詳觀載籍,所未嘗聞;緬惟圖牒,誠無與二。不有所敍,何記化洽?今據聞見,於是載述。
- 032_0370_b_02L한편, 삭하세계(索訶世界)구역(舊譯)에서는 사바세계(娑婆世界)라고 하며, 또는 사하세계(娑訶世界)라고 하는데 모두 잘못된 것이다9) 삼천대천국토(三千大千國土)는 한 분의 부처님께서 교화하고 통솔하는 영역이다. 지금 하나의 해와 달이 널리 비추고 있는 4천하(天下)는 삼천대천세계10) 속에 자리하고 있는데, 모든 불세존은 이 모든 땅에 교화를 드리우시어 태어남과 죽음을 나타내시고 성현과 범부를 인도하신다.
- 032_0370_a_22L然則索訶世界舊曰娑婆世界,又曰娑訶世界,皆訛也三千大千國土,爲一佛之化攝也。今一日月所照臨四天下者,據三千大千世界之中,諸佛世尊皆此垂化,現生現滅,導聖導凡。
- 소미로산(蘇迷盧山)당나라 말로는 묘고산(妙高山)이라고 하며 구역(舊譯)에서는 수미(須彌)라고 한다. 또한 수미루(須彌婁)라고도 하는데 모두 잘못된 것이다11)은 네 가지 보배가 합하여 이루어졌고 대해(大海) 가운데에 있으며, 금륜(金輪)12) 위에 자리 잡고 있다. 그곳은 해와 달이 비추고 모든 천신[天]이 노닐며 머무는 곳이다. 일곱 개의 산과 일곱 개의 바다가 빙 둘러서 줄지어 있으며 산 사이의 바닷물은 여덟 가지의 공덕13)을 갖추고 있다. 일곱 개의 금산(金山) 밖에는 염해(鹽海)가 있다.
- 032_0370_b_04L蘇迷盧山唐言妙高山。舊曰須彌,又曰須彌,婁皆訛略也,四寶合成,在大海中,據金輪上,日月之所照迴,諸天之所遊舍。七山七海,環峙環列;山閒海水,具八功德。七金山外,乃鹹海也。
- 바다 가운데 중생이 거주할 수 있는 곳으로 대략 네 개의 섬이 있으니, 동쪽은 비제하주(毘提訶洲)구역에서는 불바제(弗婆提)라고 하고, 또 불우체(弗于逮)라고도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이고, 남쪽은 섬부주(贍部洲)구역에서는 염부제주(閻浮提洲)라고 하고, 또는 염부주(剡浮洲)라고도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이고, 서쪽은 구타니주(瞿陀尼洲)구역에서는 구야니(瞿耶尼)라고 하고 또한 구가니(劬伽尼)라고도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이고, 북쪽은 구로주(拘盧洲)구역에서는 울단월(鬱單越)이라 하고 또한 구루(鳩樓)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이다. 금륜왕(金輪王)은 4천하를 통치하며, 은륜왕(銀輪王)은 북구로주를 다스리고, 동륜왕(銅輪王)은 북구로주와 서구타니를 제외한 곳을 다스리며, 철륜왕(鐵輪王)은 오직 섬부주만을 다스린다.
- 032_0370_b_08L海中可居者,大略有四洲焉。東毘提訶洲舊曰弗婆提,又曰弗于逮,訛也南贍部洲舊曰閻浮提,洲又曰剡浮洲,訛也,西瞿陁尼洲舊曰瞿耶尼,又曰的伽尼,訛也,北拘盧洲舊曰鬱單越,又曰鳩樓。訛也。金輪王乃化被四天下,銀輪王則政隔北拘盧,銅輪王除北拘盧及西瞿陁尼,鐵輪王則唯贍部洲。
- 윤왕(輪王)14)이 대위(大位)에 오르려 할 때면 복에 감응하는 바를 따라서 커다란 윤보(輪寶)가 허공에 떠서 따라온다. 그 윤보에는 금ㆍ은ㆍ동ㆍ철의 차이가 있으며 통치하는 경계에도 4ㆍ3ㆍ2ㆍ1의 구별이 있다. 전륜왕이 즉위할 때 서응(瑞應)으로써 생겨나는 윤보의 종류에 따라 왕의 칭호가 결정된다.
- 032_0370_b_14L夫輪王者,將卽大位,隨福所感,有大輪寶,浮空來應,感有金、銀、銅、鐵之異,境乃四、三、二、一之差,因其先瑞,卽以爲號。
- 섬부주 가운데 있는 연못15)을 아나파답다지(阿那婆答多池)당나라 말로는 무열뇌(無熱惱)라고 하며 구역에서는 아뇩달지(阿耨達池)라고도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16)라고 한다. 향산(香山)17)의 남쪽과 대설산(大雪山)18)의 북쪽에 있으며 둘레는 8백 리이다. 금과 은과 유리(琉璃)와 파지(頗胝)19)가 그 언덕을 장식하며, 금모래가 가득 찼고 맑은 물결은 거울과 같다.
- 032_0370_b_17L則贍部洲之中地者,阿那婆答多池也唐言無熱惱舊。曰阿耨達池,訛也。在香山之南,大雪山之北,周八百里矣。金、銀、琉璃、頗胝,飾其岸焉。金沙彌漫,淸波皎鏡。
- 032_0370_c_02L8지보살(地菩薩)20)이 원력(願力)에 의해 용왕으로 변하여 그 연못 속에서 숨어 지내면서 그 속에서 청량한 물을 내뿜어 섬부주에 공급한다. 그리고 연못의 동쪽에 있는 은우(銀牛)의 입에서는 긍가하(殑伽河)21)구역에서는 항하(恒河) 또는 항가(恒伽)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가 흘러나와 연못을 한 바퀴 휘감아 돈 뒤에 동남쪽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연못 남쪽에 있는 금상(金象)의 입에서는 신도하(信度河)22)구역에서는 신두하(辛頭河)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가 흘러나와서 연못을 한 바퀴 휘감아 돈 뒤에 서남쪽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연못의 서쪽에 있는 유리마(琉璃馬)의 입에서는 박추하(縛芻河)23)구역에서는 박차하(博叉河)라고 하며 잘못된 것이다가 흘러 나와서 연못을 한 바퀴 휘감아 돈 뒤에 서북쪽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연못의 북쪽에 있는 파지사자(頗胝師子)의 입에서는 사다하(徙多河)24)구역에서는 사타하(私陀河)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가 흘러 나와서 연못을 한 바퀴 휘감아 돈 뒤에 동북쪽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혹은 땅 속으로 잠겨 흐르다가 적석산(積石山)25)으로 뿜어져 나온 것이 곧 사다하의 물줄기가 되니, 이것이 중국 황하(黃河)의 원천이라고도 한다.
- 032_0370_b_21L八地菩薩以願力故,化爲龍王,於中潛宅。出淸冷水,給贍部洲。是以池東面銀牛口流出殑巨勝反伽河舊曰恒河,又曰恒伽,訛也繞池一帀,入東南海;池南面金象口流出信度河舊曰辛頭河,訛也繞池一帀,入西南海;池西面琉璃馬口,流出縛芻河舊曰博叉河,訛也繞池一帀,入西北海;池北面頗胝師子口流出徙多河舊曰私陁河,訛也,繞池一帀,入東北海,或曰潛流地下,出積石山,卽徙多河之流,爲中國之河源云。
- 때로 윤왕(輪王)의 시운(時運)에 응하지 않을 때에는 섬부주 땅에는 네 명의 군주가 나온다. 남쪽은 상주(象主)의 영역인데 덥고 습기 찬 것이 코끼리에게 좋다. 서쪽은 보주(寶主)의 영역인데 바다에 임해 있어 보배로 가득 차있다. 북쪽은 마주(馬主)의 영역인데 춥고 풍세가 세찬 것이 말에게 좋다. 동쪽은 인주(人主)의 영역인데 온화하고 화창하여 사람이 많다.
- 032_0370_c_08L時無輪王應運,贍部洲地有四主焉。南象主則暑濕宜象,西寶主乃臨海盈寶,北馬主寒勁宜馬,東人主和暢多人。
- 그러므로 상주의 나라는 사납고 거칠며 학문에 열성적이고 특히 이술(異術)에 능숙해 있다. 복장은 두건을 두르고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다. 머리 모양은 가운데는 상투를 틀었고 나머지 머리카락은 4방으로 내려뜨렸다. 일족끼리 마을을 이루어 모여 살며 집은 여러 층으로 이루어졌다.
- 032_0370_c_12L故象主之國躁烈篤學,特閑異術,服則撗巾右袒,首則中髻四垂,族類邑居,室宇重閣。
- 보주의 고을은 예의가 없고 재물을 중시하며, 짧게 만들어진 좌임(左衽)26)을 입고 머리를 짧게 자르나 콧수염을 길게 기른다. 성곽과 같은 곳에서 거처하며 재물을 불리는 일에 힘쓴다.
- 032_0370_c_14L寶主之鄕,無禮義,重財賄,短製左衽,斷髮長髭,有城郭之居,務殖貨之利。
- 마주의 풍속은 천성이 매우 난폭하며, 성정(性情)은 살육을 서슴지 않으며, 모피로 만든 반구형(半球形)의 천막을 치고 새처럼 옮겨다니며 풀을 찾아 목축을 한다.
- 032_0370_c_16L馬主之俗,天資獷暴,情忍殺戮,毳帳穹廬,鳥居逐牧。
- 인주의 땅은 사람들이 기지가 있고 총명하며 인의(仁義)가 밝게 빛난다. 관대(冠帶)를 착용하고 우임(右衽)의 옷을 입으며 수레나 의복에도 질서가 있다. 고향을 떠나 타관살이 하는 것을 즐기지 않으며 직분에도 법도가 있다.
- 032_0370_c_17L人主之地,風俗機惠,仁義照明,冠帶右衽,車服有序,安土重遷,務資有類。
- 서(西)ㆍ남(南)ㆍ북(北)의 3주(主)는 동방(東方)을 숭상하는 풍속을 갖고 있어서 자신들이 사는 집과 방의 문은 동쪽으로 열게 되어있으며, 아침에 해가 뜨면 곧 동쪽을 향하여 절을 하지만 인주의 땅은 남쪽을 존귀하게 여긴다.
- 032_0370_c_19L三主之俗,東方爲上,其居室則東闢其戶,旦日則東向以拜。人主之地,南面爲尊。
- 032_0371_a_02L지방의 풍속은 각기 서로 다른데 이러한 것들이 그 대체적인 내용이다. 군신이나 상하의 예의, 헌장(憲章)이나 문궤(文軌)의 의식에 이르러서는 인주의 땅은 이에 덧붙일 것이 없다. 마음을 맑게 하고 탐욕에서 벗어나라는 훈계와, 생사를 벗어나는 가르침에 관한 도리는 상주의 나라가 가장 뛰어나다. 이 모든 것들은 전적들 속에서 밝혀 보고, 여러 지방의 풍속을 적은 서적 속에서 물어보고, 고금을 널리 살펴서 견문한 것을 자세하게 고찰한 것이다.
- 032_0370_c_22L方俗殊風,斯其大槪。至於君臣上下之禮,憲章文軌之儀,人主之地,無以加也。淸心釋累之訓,出離生死之敎,象主之國,其理優矣。斯皆著之經誥,問諸土俗,博關今古,詳考見聞。
- 한편, 부처님께서는 서방에서 나셨으나 법은 동국으로 흘렀는데, 통역한 소리가 와전되고 방언의 말이 잘못 전해졌다. 소리가 와전되면 그 뜻을 잃게 되고 말이 잘못 전해지면 곧 이치가 어긋나게 된다. 그러므로 “반드시 이름을 바로잡아야 한다”27)라고 한 것은 이치가 어긋나거나 와전되는 것이 없어야 한다는 점을 중히 여긴 것이다.
- 032_0371_a_03L然則佛興西方,法流東國,通譯音訛,方言語謬,音訛則義失,語謬則理乖。故曰:“必也正名乎”,貴無乖謬矣。
- 대체로 사람들은 강건함과 유연함을 지니고 있어 그 성품이 각각 다르며 말소리 또한 같지 않다. 이것은 곧 풍토의 기운이나 습속이 다르기 때문이다. 산천과 토산물의 상위나, 풍속과 성품의 차별에 대해 인주의 땅에서는 국사(國史)에 자세하게 실려있으며, 마주와 보주의 나라에서도 역사에 자세하게 실려있어서 간략하게나마 말할 수 있다. 상주의 나라에 이르러서는 이전의 일들이 자세하게 전해지지 않았으며, 어떤 책에서는 그 땅은 더위와 습기가 많다고 하고 어떤 곳에서는 그곳의 습속이 인자함을 즐긴다고 싣고 있는 등 지방지들에 실려있는 것들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다.
- 032_0371_a_06L夫人有剛柔異性,言音不同,斯則繫風土之氣,亦習俗之致也。若其山川物產之異,風俗性類之差,則人主之地,國史詳焉;馬主之俗,寶主之鄕,史誥備載,可略言矣。至於象主之國,前古未詳,或書地多暑濕,或載俗好仁慈,頗存方志,莫能詳擧。
- 어찌 도(道)에 행장(行藏)28)의 다함이 있겠는가? 다만 세상에는 추이(推移)의 기운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법칙을 흠모하여 귀화하거나 은혜를 입으러 찾아오는 사람들, 온갖 험난한 곳을 넘어서 옥문관(玉門關)29)을 두드리며 4방의 진귀한 물건을 바치며 천자가 기거하는 붉은 궁궐 문에 절하는 자들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이런 까닭에 도를 찾아서 멀리 여행을 하며 가르침을 구하는 틈틈이 여러 곳의 풍토를 적어두었던 것이다.
- 032_0371_a_13L豈道有行藏之致,固世有推移之運矣。是知候律以歸化,飮澤而來賓,越重險而款玉門,貢方奇而拜絳闕者,蓋難得而言焉。由是之故,訪道遠遊,請益之隙,存記風土。
- 흑령(黑嶺)30) 동쪽 지역은 한결같이 오랑캐의 습속이 아닌 것이 없으며, 비록 융인(戎人)과 같은 관습을 갖고 있다고 해도 부족들마다 무리를 이루어 경계를 긋고 독립적으로 살며 대개 그 땅에서 토착한다. 성곽을 만들거나 농업ㆍ목축에 종사하고 있다. 그들의 성품은 재화를 중시하며, 그 습속은 인의(仁義)를 경시한다. 혼인에는 정해진 법도도 없고 존비(尊卑)의 질서도 없다. 부인의 말이 힘을 가지며 남자의 지위는 낮다. 죽으면 그 유해를 태우며 상기(喪期)는 정해져 있지 않지만, 얼굴을 상처 내고 귀를 자르며31) 머리를 자르고 옷을 찢는다. 그리고 수많은 가축을 도살해서 혼령에게 제사지낸다. 길한 일에는 흰옷을 입고 흉사에는 검은 옷을 입는다.
- 032_0371_a_18L黑嶺已來。莫非胡俗。雖戎人同貫,而族類群分,畫界封疆,大率土著,建城郭,務殖田畜;性重財賄,俗輕仁義;嫁娶無禮,尊卑無次;婦言是用,男位居下。死則焚骸,喪期無數;釐面截耳,斷髮裂裳,屠殺群畜,祀祭幽魂。吉乃素服,凶則皁衣。
- 032_0371_b_02L풍속이 서로 비슷하여 간략하게 몇 가지를 들어보았다. 그러나 정치 제도는 각기 다르므로 그 지역에 따라 달리 서술하겠다. 그리고 인도의 풍속에 대해서는 뒤에 말할 것이다.
- 032_0371_a_24L同風類俗,略擧條貫;異政殊制,隨地別敍。印度風俗,語在後記。
- 고창(高昌)의 옛 땅32)을 출발하여 가까운 곳부터 시작한다면 곧 아기니국(阿耆尼國)구역에서는 언기(焉耆)라고 한다이 있다.
- 032_0371_b_03L出高昌故地,自近者始,曰阿耆尼國舊曰烏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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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기니국(阿耆尼國)
아기니국33)은 동서로 6백여 리이며 남북으로 4백여 리에 달하고, 나라의 큰 도성[大都城]은 둘레가 6~7리인데 4면으로 산에 둘러싸여 있고 길이 험하여 방어하기가 쉽다. 샘 줄기가 서로 교차하여 흐르므로 물을 끌어다 밭을 만들었다. 땅은 기장ㆍ보리ㆍ향조(香棗)34)ㆍ포도ㆍ배ㆍ능금 등 여러 과실을 심기에 적당하다. 기후는 온화하고 화창하며 풍속은 순박하고 정직하다. - 032_0371_b_04L阿耆尼國,東西六百餘里,南北四百餘里。國大都城周六七里。四面據山,道險易守。泉流交帶,引水爲田。土宜穈、黍、宿麥香棗、蒱萄、梨、柰諸菓。氣序和暢,風俗質直。
- 문자는 인도의 것을 모방하여 사용하고 있는데, 다소의 증감35)이 있다. 모직 옷[氈褐]을 입으며, 짧은 머리를 하고 두건을 쓰지 않는다. 화폐로는 금전과 은전, 그리고 작은 동전을 사용하고 있다. 왕은 그 나라 사람이다. 용맹하지만 계략을 세우는 데는 어둡고 스스로 병사를 일으켜서 적을 토벌하기를 좋아한다. 국가에는 기강이 없고 법은 정비되어있지 않다.
- 032_0371_b_09L文字取則印度,微有繒絹。服飾氈褐,斷髮無巾。貨用金錢、銀錢、小銅錢。王,其國人也,勇而寡略,好自稱伐,國無綱紀,法不整肅。
- 가람은 10여 곳이고 승도(僧徒)는 2천여 명인데 소승의 가르침인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36)를 배우고 익힌다. 불경의 교리와 계율은 일찍부터 인도의 것을 준수하였는데, 배우는 모든 사람은 그 문장을 가까이하여 여러 번 반복하여 익힌다. 계행과 율의가 정결하고 깨끗하여 부지런히 힘쓰지만, 세 가지 정육(淨肉)37)을 먹는 것을 허락하고 있으며 점교(漸敎)38)에 머물고 있다.
- 032_0371_b_12L伽藍十餘所,僧徒二千餘人,習學小乘敎說一切有部,經敎律儀,旣遵印度,諸習學者,卽其文而翫之。戒行律儀,潔淸勤勵。然食雜三淨,滯於漸敎矣。
- 이로부터 서남쪽으로 2백여 리를 가다가 작은 산 하나와 두 개의 큰 강을 넘으면 서쪽에 평원이 나오는데, 그로부터 7백여 리를 더 가다 보면 굴지국(屈支國)구역에서는 구자(龜玆)라고 한다에 이르게 된다.
- 032_0371_b_16L從此西南行二百餘里,踰一小山,越二大河,西得平川,行七百餘里,至屈居勿反支國舊曰龜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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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굴지국(屈支國)
굴지국39)은 동서로 천여 리이고 남북으로 6백여 리에 달하며, 나라의 큰 도성의 둘레는 17~18리이다. 땅은 기장과 보리 농사짓기에 좋고 메벼가 자라며 포도와 석류가 난다. 배와 능금, 복숭아와 앵두가 많으며, 황금과 동과 철과 납과 주석이 그 땅에서 난다. 기후는 온화하고 풍속은 질박하다. - 032_0371_b_19L屈支國,東西千餘里,南北六百餘里。國大都城周十七八里,宜穈、麥,有粳稻,出蒱萄、石榴,多梨、柰、桃、杏,土產黃金、銅、鐵、鈆、錫。氣序和,風俗質。
- 032_0371_c_02L문자는 인도에서 가져다 쓰고 있으며 다소의 개변(改變)이 있다. 특히 관현기악(管絃伎樂)에 관해서는 여러 나라에 그 이름이 높다. 비단이나 모직물로 만든 옷을 입으며 머리를 짧게 잘랐고 두건을 썼다. 화폐로는 금전과 은전, 그리고 작은 동전을 사용하고 있다. 왕은 굴지국 종족에서 나왔는데 지모(智謀)가 뛰어나지 못하여 세력이 강한 신하에게 핍박받고 있다. 자식을 낳으면 나무로 머리를 눌러서 납작하게 만드는 풍속이 있다.
- 032_0371_b_23L文字取則印度,粗有改變。管絃伎樂,特善諸國。服飾錦褐,斷髮巾帽。貨用金錢、銀錢、小銅錢。王,屈支種也,智謀寡昧,迫於强臣。其俗生子以木押頭,欲其遍遞也。
- 가람의 수는 백여 곳이며 승도는 5천여 명으로 소승의 가르침인 설일체유부를 익히고 배우고 있다. 불경의 교리와 계율은 곧 인도에서 배워 와서 따르고 있는데, 그들이 익히고 낭독하는 것은 바로 인도의 원문이다. 역시 점교에 머물고 있으며 세 가지 정육을 먹는다. 계행이 청결하고 배우기를 즐겨하며, 사람들은 다투어 공덕을 쌓는다.
- 032_0371_c_05L伽藍百餘所,僧徒五千餘人,習學小乘敎說一切有部。經敎律儀,取則印度,其習讀者,卽本文矣。尚拘漸敎,食雜三淨。潔淸耽翫,人以功競。
- 나라의 동쪽 변경에 있는 성의 북쪽에 천사(天祠)40)가 있다. 천사 앞에는 대용지(大龍池)가 있는데, 온갖 용들이 모습을 바꿔 가면서 암말과 서로 어울리다가 마침내 준마[龍駒]를 낳는다. 준마는 너무나 사나워서 쉽게 길들이지 못하지만 준마가 새끼를 낳으면 그 새끼는 길들여서 타고 다닐 수 있게 된다. 이런 까닭에 이 나라에는 훌륭한 말이 많이 생산된다.
- 032_0371_c_08L國東境城北天祠前,有大龍池。諸龍易形,交合牝馬,遂生龍駒,𢤱戾難馭。龍駒之子,方乃馴駕,所以此國多出善馬。
- 옛 선현들41)의 말에 의하면, 근래에 금화(金花)42)라고 불리는 왕이 있었는데 그는 나라를 잘 다스렸고 용을 감복시켜서 타고 다녔다. 왕이 장차 숨을 거두려할 때 용의 귀에 채찍이 닿자 용은 그로 인해 숨어 들어가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성 안에 우물이 없어서 이 연못의 물을 끌어다 써왔었는데, 용이 사람의 모습으로 변하여 여러 부녀자들과 몰래 어울렸다가 아이를 낳았으니, 그 아이는 굳세고 용감하여 달리는 말을 쫓아갈 정도였다. 이렇게 하여 점차로 퍼져서 결국 사람들은 전부 용의 종자가 되었다. 자신들의 힘을 믿고 위세를 부려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게 되었다. 그러자 왕은 돌궐족43)을 끌어 들여서 그 성의 사람들을 죽였는데, 젊은이와 늙은이를 가리지 않고 모두 살육하여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하였다. 그 성은 황무지가 되었으며 사람의 자취가 끊어지고 말았다.
- 032_0371_c_12L聞諸先志曰:“近代有王,號曰金花,政敎明察,感龍馭乘。王欲終沒,鞭觸其耳,因卽潛隱,以至于今。城中無井,取彼池水。龍變爲人,與諸婦會,生子驍勇,走及奔馬;如是漸染,人皆龍種,恃力作威,不恭王命。王乃引搆突厥,殺此城人,少長俱戮,略無噍類,城今荒蕪,人煙斷絕。
- 032_0372_a_02L황성(荒城)의 북쪽 40여 리를 가면 산기슭을 접하면서 하나의 강을 사이에 두고 두 개의 가람이 있는데 똑같이 조호리(照怙釐)44)라고 이름하지만 동서(東西)의 위치에 따라서 각기 동조호리ㆍ서조호리 라고 불린다. 불상의 장엄함은 도저히 사람의 솜씨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 승도들은 청정하게 재계하며 부지런히 정진한다. 동조호리(東照怙釐)의 불당(佛堂) 안에 옥석(玉石)이 있는데, 면적은 2척쯤 되며 황백색을 띠고 있어서 마치 대합조개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그 위에는 부처님의 발바닥이 새겨져 있는데45) 길이는 1척 8촌(寸)이고 너비는 약 6촌 남짓 된다. 재일(齋日)에는 등불을 환하게 밝히기도 한다.
- 032_0371_c_19L荒城北四十餘里,接山阿,隔一河水,有二伽藍,同名照怙釐,而東西隨稱。佛像莊飾,殆越人工。僧徒淸齋,誠爲勤勵。東照怙釐佛堂中有玉石,面廣二尺餘,色帶黃白,狀如海蛤。其上有佛足履之迹,長尺有八寸,廣餘六寸矣。或有齋日,照燭光明。
- 대성(大城)의 서문(西門) 밖 길에는 좌우에 각각 불상이 서 있는데, 높이는 90여 척이다. 이 불상 앞에서 5년에 한 차례씩 대회(大會)46)가 열린다. 해마다 추분(秋分)의 수십 일 동안 온 나라의 모든 승도들이 빠짐없이 이 모임에 참석하는데, 위로는 군왕으로부터 아래로는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모인다. 그들은 세속의 일을 잠시 접어두고서 재계(齋戒)를 받들어 모시며 경을 받고 법을 청해 듣는데, 이렇게 하루종일 하여도 지칠 줄 모른다. 모든 승가람의 장엄 불상들은 진귀한 보석으로 꾸며지고 비단으로 장식되어 가마에 실리는데 이것을 행상(行像)47)이라고 하며, 이런 가마들이 수천 대 동원되어 집회의 장소에 모여든다. 언제나 매달 15일과 그믐에는 국왕과 대신이 국사를 의논하는데, 고승을 방문한 뒤에야 이를 선포한다.
- 032_0372_a_03L大城西門外,路左右各有立佛像,高九十餘尺。於此像前,建五年一大會處,每歲秋分數十日閒,擧國僧徒皆來會集。上自君王,下至士、庶,捐廢俗務,奉持齋戒,受經聽法,渴日忘疲。諸僧伽藍莊嚴佛像,瑩以珍寶,飾之錦綺,載諸輦輿,謂之行像,動以千數,雲集會所。常以月十五日、晦日,國王、大臣謀議國事,訪及高僧,然後宣布。
- 회장(會場)의 서북쪽으로 강을 건너면 아사리이(阿奢理貳)당(唐)나라 말로는 기특(奇特)이라고 한다가람48)에 이른다. 이곳의 뜰과 건물이 널찍하게 탁 트였으며 불상은 솜씨 좋게 장식되어 있다. 승도들의 성품은 온화하고 조용하며, 부지런히 정진하고 게으르지 않다. 그들은 모두 나이가 지긋이 들었고 덕이 있으며 석학인 데다 재주도 높아, 뛰어난 인재들이 멀리서부터 이들의 뜻을 사모하여 이곳에 모여들었다. 국왕과 대신들, 그리고 서민과 부호들은 4사공양(事供養)49)을 해오면서 오래 전부터 경배를 더해 오고 있었다.
- 032_0372_a_12L會場西北渡河,至阿奢理貳伽藍唐言奇特。庭宇顯敞,佛像工飾。僧徒肅穆,精勤匪怠,竝是耆艾宿德,碩學高才,遠方俊彦,慕義至止。國王、大臣,士庶、豪右,四事供養,久而彌敬。
- 옛 선현들의 말에 의하면, 옛날 이 나라의 선왕(先王)은 3보를 숭배하고 공경하였다. 그가 장차 여러 지방을 유람하며 부처님의 유적지를 돌아보고 예배하고자 하여 동생에게 자신이 자리를 비우는 동안 국사를 돌봐 줄 것을 명하였다. 그 동생은 명령을 받은 뒤 남몰래 스스로 거세하여 훗날 생길 변고(變故)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였다. 그는 거세된 자신의 남근을 금상자에 넣어 봉한 뒤에 왕에게 가지고 가서 바쳤다.
- 032_0372_a_17L聞諸先志曰:昔此國先王,崇敬三寶,將欲遊方,觀禮聖迹,乃命母弟,攝知留事。其弟受命,竊自割勢,防未萌也。封之金函,持以上王。
-
왕이 물었다.
“대체 이것이 무엇인가?” - 王曰:‘斯何謂也?’
-
동생이 답하였다.
“돌아오시는 날에 열어 보십시오.” - 032_0372_a_21L對曰:“迴駕之日,乃可開發。”
- 왕은 이것을 받아서 집사에게 맡기고 군사를 딸려 지키도록 하였다.
- 卽付執事,隨軍掌護。
-
그 후 왕이 순례를 마치고 돌아오자 과연 모반을 일으키려는 어떤 자가 왕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왕께서 나라를 다스리도록 명하셨지만 왕의 동생은 왕궁 안에서 음란한 짓들을 하며 지냈습니다.” - 032_0372_a_22L王之還也,果有搆禍者,曰:“王令監國,婬亂中宮。”
-
왕이 이 말을 듣고 진노하여 동생을 엄벌에 처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동생이 말하였다.
“감히 죄를 피하여 도망치려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금상자를 한번 열어 보십시오.” - 032_0372_a_24L王聞震怒,欲置嚴刑。弟曰:“不敢逃責,願開金函。”
- 032_0372_b_02L왕이 곧 그것을 열고서 들여다보니 그 속에는 거세된 남근이 들어 있었다.
- 032_0372_b_02L王遂發而視之,乃斷勢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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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물었다.
“이 괴이한 물건으로 무엇을 밝히려고 하는 것이냐?” - 曰:“斯何異物?欲何發明?”
-
동생이 대답하였다.
“왕께서 옛날 4방으로 순례를 떠나실 때에 저에게 대신 국사를 다스리도록 맡기셨습니다. 저는 분명 참화(讒禍)가 있을 것임을 염려해서 스스로 거세를 하여 밝히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제 과연 증거를 세울 수 있게 되었으니, 부디 널리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 032_0372_b_03L對曰:“王昔遊方,命知留事,懼有讒禍,割勢自明。今果有徵,願垂照覽。”
- 왕은 크게 놀라고 기이하게 여겨서 동생에 대한 애정이 더욱 두터워졌으며, 왕의 동생이 후궁을 출입하는 것에 대해 금지하거나 거리낄 것이 없었다. 후에 왕의 동생은 길을 가다가 어떤 사람이 5백 마리의 소를 데리고 가는 것을 보았는데, 그 사람은 소들을 거세하려던 길이었다.
- 032_0372_b_05L王深驚異,情愛彌隆,出入後庭,無所禁礙。王弟於後,行遇一夫,擁五百牛,欲事形腐。
-
그는 이 광경을 보면서 생각하였다.
‘나 같은 처지의 중생을 만나니 감회가 더하는구나. 내가 지금 불구가 된 것도 어찌 숙업(宿業)이 아니겠는가?’ - 032_0372_b_07L見而惟念,引類增懷:“我今形虧,豈非宿業?”
- 그리고 나서 그는 재물을 주고 이 소떼들을 샀다. 그러자 자선(慈善)의 힘으로 인하여 남성(男性)이 점차 본래대로 회복되었다. 그는 몸이 정상으로 돌아온 뒤에는 결코 궁에 들어가지 않았다. 왕이 이상하게 여겨서 그 까닭을 물었다. 그러자 동생은 일의 자초지종을 설명해주었다. 왕이 이를 기이하고 특이하다고 생각하여 곧 가람을 짓게 하여 그의 아름다운 자취를 널리 알리고 미담을 후세에 전하게 한 것이다.
- 032_0372_b_09L卽以財寶,贖此群牛。以慈善力,男形漸具。以形具故,遂不入宮。王怪而問之,乃陳其始末。王以爲奇特也,遂建伽藍,式旌美迹,傳芳後葉。
- 이곳에서 서쪽으로 6백여 리를 가면 작은 모래사막이 나오는데, 그곳을 지나면 발록가국(跋祿迦國)구역에서는 고흑(姑黑) 또는 극흑(亟黑)이라고 한다에 이르게 된다.
- 032_0372_b_12L從此西行六百餘里,經小沙磧,至跋祿迦國舊謂姑黑又曰亟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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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발록가국(跋祿迦國)
발록가국50)은 동서로 6백여 리이고 남북으로 3백여 리에 이르며, 나라의 큰 도성은 둘레가 5~6리이다. 토산품이나 기후,51) 사람들의 성품이나 풍속, 그리고 문자와 법칙은 굴지국의 것과 똑같으며 언어는 조금 다르다.52) 모직과 베 제품은 아주 섬세하여 이웃 나라에서 귀중히 여길 정도이다. 가람의 수는 열 곳이고 승도의 수는 천여 명에 이른다. 소승의 가르침인 설일체유부를 배우고 익히고 있다. - 032_0372_b_14L跋祿迦國,東西六百餘里,南北三百餘里。國大都城周五六里。土宜氣序,人性風俗,文字法則同屈支國,語言少異。細氈細褐,鄰國所重。伽藍數十所,僧徒千餘人,習學小乘敎說一切有部。
- 032_0372_c_02L나라의 서북쪽으로 3백여 리쯤에 있는 모래사막을 건너면 능산(凌山)53)에 이른다. 이곳은 곧 총령(蔥嶺)의 북원(北原)이다. 많은 물이 동쪽으로 흐른다. 산골짜기에는 눈이 쌓여있는데 봄과 여름에도 얼음이 얼어있다. 이따금 얼음이 녹을 때도 있지만 이내 다시 결빙된다. 길은 몹시 험하고 찬바람이 매섭게 불어댄다. 사나운 용이 지나는 사람에게 해를 입히는 일이 많으므로 이 길을 지나는 사람은 검붉은 색의 옷을 입거나 조롱박을 갖고 있거나 큰 소리를 질러서는 안 된다. 만일 조금이라도 이것을 거스르면 재난을 만나게 되는데, 거센 바람이 미친 듯이 불어대고 모래가 휘몰아치며 돌멩이가 비처럼 쏟아진다. 이런 재난을 만나게 되면 죽게 되어 목숨을 부지하기가 어렵게 된다.
- 032_0372_b_20L國西北行三百餘里,度石磧,至淩山。此則蔥嶺北原,水多東流矣。山谷積雪,春夏合凍,雖時消泮,尋復結冰。經途險阻,寒風慘烈。多暴龍難,凌犯行人。由此路者,不得赭衣持瓠,大聲叫喚。微有違犯,災禍目睹。暴風奮發,飛沙雨石,遇者喪沒,難以全生。
- 산길을 4백여 리 가다 보면54) 대청지(大淸池)또는 열해(熱海)라고 하고 또는 함해(鹹海)라고도 한다55)에 이르게 된다. 둘레는 천여 리에 달하는데 동서로 길고 남북으로는 좁다. 4방이 산에 둘러싸여 있어서 수많은 물줄기들이 교차하며 모여든다. 물은 청흑색을 띠었고 쓴맛과 짠맛을 함께 지니고 있다. 호탕하게 흐르는 물은 큰 파도가 사납게 일어나 물보라를 일으키며 흐른다. 용과 물고기가 뒤섞여 살고 있으며 신령스럽고 괴이한 일들이 이따금 일어난다. 그러므로 오고 가는 나그네들은 그 복을 빌며 기도를 한다. 비록 어류가 많으나 감히 물고기를 잡지 않는다.
- 032_0372_c_04L山行四百餘里,至大淸池或名熱海,又謂鹹海。周千餘里,東西長,南北狹。四面負山,衆流交湊,色帶靑黑,味兼鹹苦,洪濤浩汗,驚波汨淴。龍魚雜處,靈怪閒起,所以往來行旅,禱以祈福。水族雖多,莫敢漁捕。
- 청지(淸池)의 서북쪽으로 5백여 리를 가다 보면 소엽수성(素葉水城)56)에 이른다. 성의 둘레는 6~7리이고 여러 나라의 장사치 오랑캐[商胡]57)들이 뒤섞여 살고 있다. 땅은 기장과 보리, 포도에 적합하며 숲은 우거져 있지 않다. 바람이 차서 사람들은 모직 옷[氈褐]을 입는다.
- 032_0372_c_09L淸池西北行五百餘里,至素葉水城。城周六七里,諸國商胡雜居也。土宜糜、麥、蒲萄,林樹稀疏。氣序風寒,人衣氈褐。
- 소엽의 서쪽으로는 수십 개의 외딴 성들이 있는데 각 성마다 각자의 우두머리를 옹립하고 있다. 비록 서로 명령을 내리거나 받지는 않지만 모두가 돌궐족에 복속되어 있다.
- 032_0372_c_13L素葉已西數十孤城,城皆立長,雖不相稟命,然皆役屬突厥。
- 소엽수성에서 갈상나국(羯霜那國) 사이의 땅 이름을 솔리(窣利)58)라고 하며 사람들 또한 그렇게 불린다. 문자와 언어59)도 그 명칭에 의거해서 그렇게 불리고 있다. 자원(字源)은 간략하며 본래 20여 개의 문자를 썼다가 점차 어휘가 늘어나서 언어의 사용이 더욱 다양해져 갔다. 약간의 기록이 남아있는데 문장은 세로로 읽는다. 서로 전수하는데, 스승과 제자 관계가 바뀌지 않는다.
- 032_0372_c_14L自素葉水城,至羯霜那國,地名窣利,人亦謂焉。文字語言,卽隨稱矣。字源簡略,本二十餘言,轉而相生,其流浸廣,粗有書記,豎讀其文,遞相傳授,師資無替。
- 의복은 털옷이나 고운 무명을 입는다. 위ㆍ아래 옷의 품은 좁으며 머리를 가지런하게 하여 정수리를 드러내거나 혹은 모두 삭발하여 비단을 이마에 두른다. 그들의 체형은 크지만 성품은 겁이 많으며, 풍속은 경박하고 참되지 못하다. 남을 교묘하게 속이는 일이 많으며 대체적으로 욕심이 많고 구하는 것이 많다. 부자간에도 이익을 계산하며 재산이 많은 것을 귀하게 여긴다. 높고 낮은 신분에 대한 차별이 없으며 비록 부유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옷과 음식이 거칠고 초라하며, 밭을 일구는 자와 이익을 추구하는 자가 반쯤 섞여 있다.
- 032_0372_c_18L服氈褐,衣皮㲲,裳服褊急。齊髮露頂,或摠翦剃,繒綵絡額,形容偉大,志性恇怯,風俗澆訛,多行詭詐,大抵貪求,父子計利,財多爲貴,良賤無差。雖富巨萬,服食麤弊。力田逐利者雜半矣。
- 032_0373_a_02L소엽성에서 서쪽으로 4백여 리를 가다 보면 천천(千泉)60)에 이른다. 천천은 그 땅이 4방 2백여 리에 달하는데, 남쪽으로는 설산을 바라보고 다른 3면은 평지에 접하고 있다. 그 땅은 물이 많아서 비옥하고, 숲은 울창하여 나뭇가지가 4방으로 퍼져 있다. 음력 3월에는 온갖 꽃들이 피어나 아름다운 비단과 같다. 샘이나 연못이 천(千) 곳이나 있어서 천천(千泉)이란 이름이 붙었다.
- 032_0372_c_23L素,葉城西行四百餘里,至千泉。千泉者,地方二百餘里,南面雪山,三陲平陸。水土沃潤,林樹扶疏,暮春之月,雜花若綺。泉池千所,故以名焉。
- 돌궐의 극한(可汗)61)이 언제나 더위를 피해 이곳으로 왔는데, 그 속에는 사슴떼들도 있었다. 그런데 사슴들은 방울과 고리 등으로 갖가지 장식을 하였으며, 길이 들어서 사람들과도 잘 어울렸고 놀라 달아나지도 않았다. 극한은 이 사슴들을 사랑하여서 군속들에게 명하기를, 사슴을 살해하면 그 죄를 물어서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런 까닭에 사슴떼들은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다.
- 032_0373_a_04L突厥可汗每來避暑。中有群鹿,多飾鈴鐶,馴狎於人,不甚驚走。可汗愛賞,下命群屬,敢加殺害,有誅無赦。故此群鹿,得終其壽。
- 천천의 서쪽으로 140~150리 가다 보면 달라사성(呾邏私城)62)에 도착한다. 성 둘레는 8~9리이고 여러 나라들의 장사치 오랑캐들이 한데 뒤섞여 살고 있다. 땅과 기후는 소엽과 거의 같다.
- 032_0373_a_08L千泉西行百四五十里,至呾邏私城。城周八九里,諸國商胡雜居也。土宜氣序,大同素葉。
- 남쪽으로 다시 10여 리를 더 가다 보면 작은 외딴 성이 나온다. 이곳에는 3백여 가구가 살고 있는데, 이들은 본래 중국인들이다.63) 옛날에는 돌궐족에게 약탈당하였지만 후에는 마침내 힘을 하나로 모아서 나라를 세워 함께 이 성을 지켰다. 그 성 안의 사람들의 주거나 의복, 행동거지는 돌궐족과 같지만 말이나 의례 등은 여전히 중국의 것을 유지하고 있다.
- 032_0373_a_10L南行十餘里,有小孤城,三百餘戶,本中國人也,昔爲突厥所掠,後遂鳩集同國,共保此城,於中宅居。衣服去就,遂同突厥;言辭儀範,猶存本國。
- 이로부터 서남쪽으로 2백여 리를 가다 보면 백수성(白水城)64)에 이른다. 성의 둘레는 6~7리에 달한다. 토산품이나 기후는 달라사성보다 훨씬 좋다.
- 032_0373_a_14L從此西南行二百餘里,至白水城。城周六七里。土地所產,風氣所宜,逾勝呾邏私。
- 서남쪽으로 2백여 리를 가다 보면 공어성(恭御城)65)에 이른다. 성의 둘레는 5~6리이고 높고 마른땅이나 낮고 습한 땅이나 모두 비옥하며 수목이 울창하다.
- 032_0373_a_16L西南行二百餘里,至恭御城。城周五六里,原隰膏腴,樹林蓊鬱。
- 이곳으로부터 남쪽으로 40~50리를 가다 보면 노적건국(笯赤建國)에 이른다.
- 032_0373_a_18L從此南行四五十里,至笯奴故反赤建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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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노적건국(笯赤建國)
노적건국66)은 둘레가 천여 리에 달한다. 땅은 비옥해서 농사짓기에 적합하다. 초목이 울창하고 꽃과 과일이 번성하며 포도가 많은데 역시 귀히 여겨진다. 성읍은 백여 곳이 있는데 각기 우두머리를 내세우고 있으며, 서로 왕래는 하지만 명령을 내리거나 받지는 않는다. 비록 땅에 경계를 긋고는 있지만, 이 성읍들을 통틀어서 노적건국이라고 한다. 이곳으로부터 서쪽으로 2백여 리를 가다 보면 자시국(赭時國)당나라 말로는 석국(石國)이라고 한다에 이른다. - 032_0373_a_19L笯赤建國,周千餘里。地沃壤,備稼穡,草木鬱茂,華果繁盛,多蒲萄,亦所貴也。城邑百數,各別君長,進止往來,不相稟命。雖則畫野區分,摠稱笯赤建國。從此西行二百餘里,至赭時國唐言石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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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자시국(赭時國)
자시국67)의 둘레는 천여 리에 달하고 서쪽은 엽하(葉河)68)에 접해 있다. 동서로 좁고 남북으로 길다. 토지와 기후는 노적건국과 같다. 성읍은 수십 개이며, 각각 우두머리를 세우고 있으나 전체적으로는 다스리는 왕은 없다. 그리고 돌궐족에 복속되어 있다. 이곳으로부터 동남쪽으로 천여 리를 가다 보면 발한국(㤄敷發反捍國)에 이른다. - 032_0373_a_24L赭時國,周千餘里。西臨葉河。東西狹、南北長。土宜氣序,同笯赤建國。城邑數十,各別君長,旣無摠主,役屬突厥。從此東南千餘里,至㤄敷發反捍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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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발한국(㤄捍國)
발한국69)의 둘레는 4천여 리에 달하며 4방으로 산이 에워싸고 있다. 토지는 비옥하고 농사가 번창한다. 꽃과 과일이 많으며 양과 말을 기르기에 좋다. 기후는 바람이 차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성질은 용맹하다. 언어는 주변 여러 나라들과 다르며, 얼굴은 못생겼다.70) 수십 년 이래 대군주가 없었으며 힘이 있는 부호들이 다투고 있어 서로 굴복하려고 하지 않는다. 강과 벼랑에 의지하고 웅거하여 살아가며 토지를 나누어서 수도를 각각 달리하고 있다. 이곳으로부터 서쪽으로 천여 리를 가면 솔도리슬나국(窣堵利瑟那國)에 이른다. - 032_0373_b_05L㤄捍國,周四千餘里,山周四境。土地膏腴,稼穡滋盛,多花菓,宜羊馬。氣序風寒,人性剛勇,語異諸國,形貌醜弊。自數十年,無大君長,酋豪力競,不相賓伏,依川據險,畫野分都。從此西行千餘里,至窣堵利瑟那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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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솔도리슬나국(窣堵利瑟那國)
솔도리슬나국71)의 둘레는 1,400~1,500리에 달하며 동쪽으로 엽하(葉河)에 닿아 있다. 엽하는 총령의 북원(北原)에서 출발하여 서북쪽으로 흐른다. 강물은 아주 넓고 혼탁하며 물살이 세차고 유속이 매우 빠르다. 땅과 풍속은 자시국과 같다. 스스로 왕을 세우고 있지만 돌궐족에 복속되어 있다. 이곳으로부터 서북쪽으로 가다 보면 커다란 모래사막이 나온다. 이곳은 물이 완전히 말라 있어서 풀이 전혀 자라지 않는데, 길이 끝없이 펼쳐져 있어 국경을 가늠하기 어려우며, 아득하게 큰 산을 바라보며 유골을 찾아내어 이로써 방향을 알게 되고 나가는 길을 찾아낼 수 있다. 5백여 리를 가다 보면 삽말건국(颯秣建國)당나라 말로는 강국(康國)이라고 한다에 이른다. - 032_0373_b_11L窣堵利瑟那國。周千四、五百里。東臨葉河。葉河出蔥嶺北原,西北而流,浩汗渾濁,汩淴漂急。土宜風俗,同赭時國。自有王,附突厥。從此西北入大沙磧,絕無水草。途路彌漫,疆境難測,望大山,尋遺骨,以知所指,以記經途。行五百餘里至颯秣建國唐言康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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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삽말건국(颯秣建國)
삽말건국72)의 둘레는 1,600~1,700리이고 동서로 길고 남북으로 좁다. 나라의 대도성의 둘레는 20여 리에 달하는데, 매우 험하고 견고하며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 여러 나라에서 나는 보배와 화폐들이 이 나라에 많이 모인다. 토지는 비옥하고 농사짓기에 적합하다. 숲은 울창하고 꽃과 열매가 무성하며 양질의 말[馬]을 많이 배출하고 있다. 그리고 옷감 짜는 기술이 다른 나라들보다 특히 뛰어나다. 기후는 화창하며 풍속은 사납다. - 032_0373_b_18L颯秣建國,周千六七百里,東西長,南北狹。國大都城周二十餘里,極險固,多居人。異方寶貨,多聚此國。土地沃壤,稼穡備植,林樹蓊鬱,花菓滋茂,多出善馬。機巧之技,特工諸國。氣序和暢,風俗猛烈。
- 032_0373_c_02L호국(胡國)들은 이 나라를 중심으로 삼아, 멀거나 가까운 나라들이 모두 이 나라의 의례 등을 본보기로 삼는다. 왕은 호기롭고 용감하여73) 인근의 국가들은 그의 명을 받고 있다. 병사와 말이 강성하며 대부분이 자갈(赭羯)74)들이다. 자갈들은 그 성품이 용맹하여 죽음을 마치 귀향하는 것과 같이 생각하므로 싸움에 임해서는 그들을 당해낼 수가 없을 정도이다. 이곳으로부터 동남쪽으로 가다 보면 미말하국(弭秣賀國)당나라 말로는 미국(米國)이라고 한다에 도착한다.
- 032_0373_b_24L凡諸胡國,此爲其中,進止威儀,近遠取則。其王豪勇,鄰國承命。兵馬强盛,多諸赭羯。赭羯之人,其性勇烈,視死如歸,戰無前敵。從此東南至弭秣賀國唐言米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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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미말하국(弭秣賀國)
미말하국75)의 둘레는 4~5백 리이며 강의 사이에 있다. 동서로 좁고 남북으로 길며, 토지와 풍속은 삽말건국과 같다. 이곳으로부터 북쪽으로 가면 겁포달나국(劫布呾那國)당나라 말로는 조국(曹國)이라고 한다에 이른다. - 032_0373_c_05L弭秣賀國,周四五百里。據川中,東西狹,南北長。土宜風俗,同颯秣建國。從此北至劫布呾那國唐言曹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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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겁포달나국(劫布呾那國)
겁포달나국76)의 둘레는 1,400~1,500리에 달하며 동서로 길고 남북으로 좁다. 토양과 풍속은 삽말건국과 같다. 이곳으로부터 서쪽으로 3백여 리 가다 보면 굴상이가국(屈居勿反霜居聲儞迦國)당나라 말로는 하국(何國)이라고 한다에 이른다. - 032_0373_c_08L劫布呾那國,周千四五百里,東西長,南北狹。土宜風俗,同颯秣建國。從此國西三百餘里,至屈居勿反霜去聲你迦國唐言何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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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굴상이가국(屈霜儞迦國)
굴상이가국77)의 둘레는 1,400~1,500리에 달하며 동서로 좁고 남북으로 길다. 토양과 풍속은 삽말건국과 같다. 이 나라에서 서쪽으로 2백여 리 가다 보면 갈한국(喝捍國)[당나라 말로는 동안국(東安國)이라고 한다에 이른다. - 032_0373_c_12L屈霜你迦國,周千四五百里,東西狹,南北長。土宜風俗,同颯秣建國。從此國西二百餘里,至喝捍國唐言東安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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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갈한국(喝捍國)
갈한국78)의 둘레는 천여 리에 달하며 토양과 풍속은 삽말건국과 같다. 이 나라로부터 서쪽으로 4백여 리 가다 보면 포갈국(捕喝國)당나라 말로는 수안국(守安國)이라고 한다에 이른다. - 032_0373_c_15L喝捍國,周千餘里。土宜風俗,同颯秣建國。從此國西四百餘里,至捕喝國。唐言守安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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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포갈국(捕喝國)
포갈국79)의 둘레는 1,600~1,700리에 달하며 동서로 길고 남북으로 좁다. 토양과 풍속은 삽말건국과 같다. 이 나라로부터 서쪽으로 4백여 리 가다 보면 벌지국(伐地國)당나라 말로는 서안국(西安國)이라고 한다80)에 이른다. - 032_0373_c_18L捕喝國,周千六七百里,東西長,南北狹。土宜風俗,同颯秣建國。從此國西四百餘里,至伐地國唐言西安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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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벌지국(伐地國)
벌지국81)의 둘레는 4백여 리에 달하며 토양과 풍속은 삽말건국과 같다. 이곳으로부터 서남쪽으로 5백여 리 가다 보면 화리습미가국(貨利習彌伽國)에 이른다. - 032_0373_c_21L伐地國,周四百餘里,土宜風俗,同颯秣建國。從此西南五百餘里,至貨利習彌伽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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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화리습미가국(貨利習彌伽國)
화리습미가국82)은 박추하(縛芻河)의 양 언덕을 따라서 있으며 동서로 20~30리, 남북으로 5백여 리에 달한다. 토양과 풍속은 벌지국과 같지만 말은 조금 다르다.83)
삽말건국으로부터 서남쪽으로 3백여 리를 가다 보면 갈상나국(羯霜去聲那國)당나라 말로는 사국(史國)이라고 한다에 이른다. - 032_0373_c_24L貨利習彌伽國,順縛芻河兩岸,東西二三十里,南北五百餘里。土宜風俗,同伐地國,語言少異。從颯秣建國西南行三百餘里,至羯霜去聲那國唐言史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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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갈상나국(羯霜那國)
갈상나국84)의 둘레는 1,400~1,500리에 달하며 토양과 풍속은 삽말건국과 같다. 이곳으로부터 서남쪽으로 2백여 리를 가다 보면 산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산길은 험난하고 시내를 따라 난 길은 위험하며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 나오지 않고 또한 물과 풀이 거의 없다. - 032_0374_a_05L羯霜那國。周千四五百里。土宜風俗,同颯秣建國。從此西南行二百餘里,入山。山路崎嶇,谿徑危險,旣絕人里,又少水草。
- 동남쪽으로 산길을 3백여 리 가다 보면 철문(鐵門)에 들어가게 된다. 철문은 좌우로 산을 끼고 있는데 산은 매우 높고 험하다. 비록 길이 있기는 하지만 좁은데다가 험하기까지 하다. 양쪽으로 돌로 만든 벽이 있는데 그 색이 철과 같다. 문짝에는 철로 만든 꺾쇠가 달려있다.85) 철로 만든 많은 방울은 여러 문짝에 매달려 있다. 이렇게 험하기 때문에 ‘갈상나’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
- 032_0374_a_09L東南山行三百餘里,入鐵門。鐵門者,左右帶山,山極峭峻,雖有狹徑,加之險阻,兩傍石壁,其色如鐵。旣設門扉,又以鐵鋦,多有鐵鈴,懸諸戶扇,因其險固,遂以爲名。
- 철문을 나오면 도화라국(覩貨邏國)86)에 이른다구역에서는 토화라국(吐火羅國)이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 이 땅은 남북으로 천여 리이고 동서로 3천여 리에 달한다. 동쪽은 총령(葱嶺)으로 막혀 있고 서쪽은 파라사(波刺斯)87)에 접해 있다. 남쪽은 대설산(大雪山)이 있고 북쪽은 철문에 의거해 있다.
- 032_0374_a_13L出鐵門,至睹貨邏國舊曰吐火羅國,訛也其地南北千餘里,東西三千餘里。東阨蔥嶺,西接波剌斯,南大雪山,北據鐵門。
- 박추하가 그 나라의 가운데를 가로지르면서 서쪽으로 흐르고 있다. 수백 년 이래로 왕족은 그 후사가 끊겼으며88) 우두머리들은 서로 힘을 겨루어 각각 제멋대로 군장(君長)을 내세우고 있다. 강과 산의 험준함에 의지하여 웅거하고 있으며 27국(國)으로 나뉘어져 있다. 비록 경계를 긋고 지역을 나누고는 있지만 모두 다 돌궐에게 복속되어 있다.
- 032_0374_a_16L縛芻大河中境西流。自數百年,王族絕嗣,酋豪力競,各擅君長,依川據險,分爲二十七國。雖畫野區分,摠役屬突厥。
- 기후는 본래부터 따뜻하며 질병 또한 많다. 늦겨울과 초봄 사이에 장마가 계속 이어지므로 이 지역의 남쪽인 남파(濫波) 이북에 위치한 나라들의 풍토에는 역시 열병[溫疾]이 많다. 승도들은 12월 16일에 안거에 들어가서 3월 15일에 안거를 해제한다. 이것은 모두 비가 많은 것에 기인한 것이며 또한 가르침에 적당한 시기를 따른 것이다.
- 032_0374_a_19L氣序旣溫,疾疫亦衆。冬末春初,霖雨相繼。故此境已南,濫波已北,其國風土,竝多溫疾。而諸僧徒以十二月十六日入安居,三月十五日解安居,斯乃據其多雨,亦是設敎隨時也。
- 032_0374_b_02L이 나라의 풍속은 사람들이 겁이 많고 겉모습이 비루하여도 어느 정도 신의(信義)는 알고 있어서 심하게 거짓말을 하거나 사기를 치지 않는다. 말이나 행동거지들은 다른 나라들과 조금 다르다. 25개의 자모(字母)를 갖고 점차 결합시키면서 모든 사물들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89) 글은 가로쓰기를 하는데 왼쪽으로부터 오른쪽으로 향한다. 문서와 기록이 점점 많아져서 솔리국(窣利國)보다 더 많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운 무명옷[氎]을 입지만 소수의 사람들은 털옷[褐]을 입는다. 금과 은으로 만들어진 화폐를 사용하며 모양은 다른 나라들과 다르다. 박추하를 따라서 북쪽 하류로 내려가면 달밀국(呾蜜國)에 이른다.
- 032_0374_a_24L其俗則志性恇怯;容貌鄙陋,粗知信義,不甚欺詐。語言去就,稍異諸國。字源二十五言,轉而相生,用之備物,書以撗讀,自左向右,文記漸多,逾廣窣利。多衣㲲,少服褐。貨用金、銀等錢,摸樣異於諸國。順縛芻河北下流至呾蜜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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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달밀국(呾蜜國)
달밀국90)은 동서로 6백여 리이고 남북으로 4백여 리이며, 나라의 큰 도성의 둘레는 20여 리이고 동서로 길고 남북으로 좁다. 가람은 10여 곳이며 승도들은 천여 명에 이른다. 모든 솔도파구역에서는 부도(浮圖)라고 하고 또는 투파(鍮婆)ㆍ탑파(塔婆)ㆍ사투파(私鍮簸)ㆍ수두파(藪斗波)라고 하는데 모두가 잘못된 것이다와 불존상(佛尊像)은 매우 신비롭고 기이하며 영험이 있다. 이곳으로부터 동쪽으로 가다 보면 적악연나국(赤卾衍那國)에 이른다. - 032_0374_b_07L呾蜜國,東西六百餘里,南北四百餘里,國大都城周二十餘里。東西長,南北狹。伽藍十餘所,僧徒千餘人。諸窣堵波,卽舊所謂浮啚也,又曰鍮婆,又曰塔婆,又曰私鍮簸,又曰藪斗波,皆訛也。及佛尊像,多神異,有靈鑑。東至赤鄂衍那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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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적악연나국(赤卾衍那國)
적악연나국91)은 동서로 4백여 리이고 남북으로 5백여 리에 달하며, 나라의 큰 도성의 둘레는 10여 리이다. 가람은 다섯 곳이고 승도들은 매우 적다. 이곳으로부터 동쪽으로 가면 홀로마국(忽露摩國)에 도달한다. - 032_0374_b_13L赤鄂衍那國,東西四百餘里,南北五百餘里,國大都城周十餘里。伽藍五所,僧徒尟少。東至忽露摩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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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홀로마국(忽露摩國)
홀로마국92)은 동서로 백여 리이고 남북으로 3백여 리에 달하며, 나라의 큰 도성의 둘레는 10여 리이다. 왕은 해소돌궐(奚素突厥)93)족이다. 가람은 두 곳이며 승도들은 백여 명이다. 이곳으로부터 동쪽으로 가면 수만국(愉朔俱反漫國)에 이른다. - 032_0374_b_16L忽露摩國,東西百餘里,南北三百餘里,國大都城周十餘里。其王奚素突厥也。伽藍二所,僧徒百餘人。東至愉朔俱反漫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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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수만국(愉漫國)
수만국94)은 동서로 4백여 리이고 남북으로 백여 리에 달하며, 나라의 큰 도성의 둘레는 16~17리 정도 된다. 왕은 해소돌궐족이며 가람은 두 곳이고 승도의 수도 아주 적다. 서남쪽으로 박추하에 임하여 가다 보면 국화연나국(鞠和衍那國)에 이른다. - 032_0374_b_20L愉漫國。東西四百餘里,南北百餘里。國大都城周十六七里。其王奚素突厥也。伽藍二所,僧徒寡少。西南臨縛芻河,至鞠和衍那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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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_0374_c_02L
21) 국화연나국(鞠和衍那國)
국화연나국95)은 동서로 2백여 리이고 남북으로 3백여 리에 달하며, 나라의 큰 도성의 둘레는 10여 리이다. 가람은 세 곳이며 승도의 수는 백여 명이다. 동쪽으로 가면 확사국(鑊沙國)에 이른다. - 032_0374_b_24L鞠和衍那國,東西二百餘里,南北三百餘里,國大都城周十餘里。伽藍三所,僧徒百餘人。東至鑊沙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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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확사국(鑊沙國)
확사국96)은 동서로 3백여 리이고 남북으로 5백여 리에 달하며, 나라의 큰 도성의 둘레는 16~17리이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가면 가돌라국(珂咄羅國)에 이른다. - 032_0374_c_04L鑊沙國。東西三百餘里,南北五百餘里。國大都城周十六七里。東至珂咄羅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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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가돌라국(珂咄羅國)
가돌라국97)은 동서로 천여 리이고, 남북으로 천여 리에 달하며 나라의 큰 도성의 둘레는 20여 리이다. 동쪽으로는 총령에 접해 가다 보면 구몌타국(拘謎莫閉反陀國)에 이른다. - 032_0374_c_07L珂咄羅國,東西千餘里,南北千餘里。國大都城周二十餘里。東接蔥嶺,至拘謎莫閉反陁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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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구몌타국(拘謎陀國)
구몌타국98)은 동서로 2천여 리이고 남북으로 2백여 리이며, 대총령(大葱嶺)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나라의 큰 도성은 둘레가 20여 리에 달한다. - 032_0374_c_10L拘謎陁國,東西二千餘里,南北二百餘里。據大蔥嶺中。國大都城周二十餘里。
- 서남쪽으로는 박추하에 접해 있고 남쪽으로는 시기니국(尸棄尼國)에 접해 있으며 남쪽으로 박추하를 건너면 달마실철제국(達摩悉鐵帝國)ㆍ발탁창나국(鉢鐸創那國)ㆍ음박건국(淫薄健國)ㆍ굴랑나국(屈浪拏國)ㆍ희마달라국(呬摩呾羅國)ㆍ발리갈국(鉢利曷國)ㆍ흘률슬마국(訖栗瑟摩國)ㆍ갈라호국(曷羅胡國)ㆍ아리니국(阿利尼國)ㆍ몽건국(瞢健國)에 이른다. 활국(活國)으로부터 동남쪽으로 가다 보면 활실다국(闊悉多國)과 안달라박국(安呾邏縛國)에 이르는데99) 이것에 관한 내용은 회기(廻記)100)에 있다. 활국으로부터 서남쪽으로 가다 보면 박가랑국(縛伽浪國)에 이른다.
- 032_0374_c_13L西南鄰縛芻河,南接尸棄尼國。南渡縛芻河,至達摩悉鐵帝國、鉢鐸創那國、淫薄健國、屈浪拏國、呬火利反摩呾羅國、鉢利曷國、訖栗瑟摩國、曷邏胡國、阿利尼國,瞢健國。自活國東南至闊悉多國、安呾羅縛國,事在迴記。活國西南至縛伽浪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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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박가랑국(縛伽浪國)
박가랑국101)은 동서로 50여 리이고 남북으로 2백여 리에 달하며, 나라의 큰 도성의 둘레는 10여 리이다. 남쪽으로 가다 보면 흘로실민건국(紇露悉泯健國)에 이른다. - 032_0374_c_19L縛伽浪國,東西五十餘里,南北二百餘里。國大都城周十餘里。南至紇露悉泯健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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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흘로실민건국(紇露悉泯健國)
흘로실민건국102)의 둘레는 천여 리에 달하며 나라의 큰 도성의 둘레는 14~15리이다. 서북쪽으로 가면 홀름국(忽懍國)에 이른다. - 032_0374_c_22L紇露悉泯健國,周千餘里。國大都城周十四五里。西北至忽懍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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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_0375_a_02L
27) 홀름국(忽懍國)
흘름국103)의 둘레는 8백여 리이고, 나라의 큰 도성의 둘레는 5~6리이다. 가람은 10여 곳이 있고 승도는 5백여 명이다. 서쪽으로 가면 박갈국(縛喝國)에 이른다. - 032_0374_c_24L忽懍國。周八百餘里。國大都城周五六里。伽藍十餘所,僧徒五百餘人。西至縛喝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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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박갈국(縛喝國)
박갈국104)은 동서로 8백여 리이고 남북으로 4백여 리이다. 북쪽은 박추하에 접해 있고 나라의 큰 도성의 둘레는 20여 리이다. 사람들은 모두 이곳을 가리켜서 ‘소왕사성(小王舍城)’이라고 부른다. 그 성은 매우 견고하지만 그곳에 사는 사람은 매우 적다. 그 땅에서 나는 토산품의 종류는 참으로 많으며, 수생 및 육생의 갖가지 꽃들은 그 종류가 너무나 많아서 일일이 열거하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가람은 백여 곳에 있으며 승도의 수도 3천여 명에 달하는데 모두가 소승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고 있다.105) - 032_0375_a_04L縛喝國,東西八百餘里,南北四百餘里,北臨縛芻河。國大都城周二十餘里,人皆謂之小王舍城也。其城雖固,居人甚少。土地所產,物類尤多,水陸諸花,難以備擧。伽藍百有餘所,僧徒三千餘人,竝皆習學小乘法敎。
- 성 밖의 서남쪽에는 납박(納縛)당나라 말로는 신(新)이라고 한다승가람106)이 있는데, 이 나라의 선왕(先王)이 지은 것이다. 대설산의 북쪽에 살고 있는 논(論)을 지은 논사107)들은 오직 이 가람만이 변함 없이 그 업(業)이 아름답다고 지적하고 있다. 불상은 이름난 보배로 조영되어 있고 당우(堂宇)는 진귀한 보석들로 장식되어 있다. 그러므로 여러 나라들의 군주들은 이것을 손에 넣고자 공격하여 겁탈하려 하였다. 그런데 이 가람에는 본래 비사문천상(毘沙門天像)108)이 있는데 그에게는 신령스러운 영험이 있어서 그의 보이지 않는 힘이 이 가람을 수호하고 있었다.
- 032_0375_a_10L城外西南有納縛唐言新僧伽藍,此國先王之所建也。大雪山北作論諸師,唯此伽藍美業不替。其佛像則瑩以名珍,堂宇乃飾之奇寶。故諸國君長,利之以攻劫。此伽藍素有毘沙門天像,靈鑑可恃,冥加守衛。
- 근래에 돌궐의 엽호극한(葉護可汗)의 아들인 사엽호극한(肆葉護可汗)109)이 그 부락의 힘을 모아 그 군사들을 이끌고 가람을 습격하여 귀중한 보배들을 약탈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이 가람에서 멀지 않은 곳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야영을 하였다.
- 032_0375_a_16L近突厥葉護可汗子肆葉護可汗,傾其部落,率其戎旅,奄襲伽藍,欲圖珍寶。去此不遠,屯軍野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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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그의 꿈에 비사문천이 나타나서 말하였다.
“너는 어떤 힘으로 감히 가람을 파괴하고자 하느냐?” - 032_0375_a_19L其夜夢見毘沙門天曰:“汝有何力,敢壞伽藍?”
- 그리고 나서 긴 창으로 찔러 극한의 등과 배를 관통하였다. 극한이 놀라서 깨어났는데 몹시 마음이 아팠다. 결국 군속들에게 꿈에서 본 재앙의 징조를 알린 뒤 서둘러 여러 스님들을 청하여 참회를 올리고자 하였다. 그러나 대답이 돌아오기도 전에 이내 그의 목숨은 끊어지고 말았다.
- 032_0375_a_20L因以長戟,貫徹胸背。可汗驚悟,便苦心痛,遂告群屬所夢咎徵,馳請衆僧,方申懺謝,未及返命,已從殞沒。
- 032_0375_b_02L가람 안의 남쪽 불당 속에는 부처님의 조관(澡罐)110)이 있는데 한 되의 양을 넉넉하게 담을 만하고, 온갖 색깔이 현란하게 아롱거려서 금인지 돌인지 이름 붙이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또 부처님의 치아[佛牙]도 있는데, 그 길이는 1촌(寸) 남짓하고 너비는 8~9푼[分]이 되며, 황백색을 띠었고 광택이 있고 깨끗하다.
- 032_0375_a_23L伽藍內南佛堂中有佛澡罐,量可斗餘;雜色炫燿,金石難名。又有佛牙,其長寸餘,廣八九分,色黃白,質光淨。
- 또 부처님의 빗자루[掃箒]가 있는데 가사초(迦奢草)111)로 만들어졌고, 길이는 2자[尺] 정도 되고 둘레는 7촌 정도 되며, 그 손잡이는 갖가지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다. 6재일(齋日)112)이 될 때마다 승속(僧俗)이 모두 모여서 이 세 가지 물건에 공양을 베푸는데 그 정성스러움에 감응하여 이따금 빛을 발하기도 한다.
- 032_0375_b_03L又有佛掃帚,迦奢草作也,長餘二尺,圍可七寸,其把以雜寶飾之。凡此三物,每至六齋,法俗咸會,陳設供養,至誠所感,或放光明。
- 가람의 북쪽에 솔도파가 있는데 높이는 2백여 척이나 되며, 금강니(金剛泥)가 칠해져 있고 온갖 보배가 어우러져 장식되어 있다. 그 속에 사리가 있는데 때때로 신령스러운 빛이 번쩍이기도 한다. 가람의 서남쪽에는 정사[精盧]가 있는데 세워진 이래로 오랜 세월이 지났다. 이 정사에는 멀리 떨어진 곳으로부터도 뛰어난 인재들이 몰려들어 기거하고 있는데, 그 중 4과(果)113)를 증득114)한 자들은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 032_0375_b_06L伽藍北有窣堵波,高二百餘尺,金剛泥塗,衆寶廁飾。中有舍利,時燭靈光。伽藍西南有一精廬,建立已來,多歷年所。遠方輻湊,高才類聚,證四果者難以詳擧。
- 그러므로 모든 나한들이 장차 열반에 들려 할 때면 신통력을 나타내어 대중들에게 이를 알려서 곧 솔도파를 세우게 하였다. 솔도파는 수백여 개에 달하여 그 기단이 서로 잇닿아 있을 정도였다. 성과(聖果)115)를 증득하였다고는 해도 끝내 신통한 변화를 나타내지 않은 자들의 솔도파의 수는 대략 수천 개를 헤아리지만 봉기(封記)를 세우지는 않았다. 지금은 승도가 백여 명에 이르는데 밤낮으로 정진하므로 범인(凡人)인지 성인(聖人)인지를 헤아리기 어렵다.
- 032_0375_b_11L故諸羅漢將入涅槃,示現神通,衆所知識,乃有建立,諸窣堵波基迹相鄰,數百餘矣。雖證聖果,終無神變,蓋亦千計,不樹封記。今僧徒百餘人,夙夜匪懈,凡聖難測。
- 큰 성의 서북쪽으로 50여 리를 가다 보면 제위성(提謂城)에 이르며, 성의 북쪽으로 40여 리를 가다 보면 파리성(波利城)이 있는데116) 성 안에는 각각 하나의 솔도파가 있으며 높이는 3길[丈] 남짓 된다.
- 032_0375_b_15L大城西北五十餘里至提謂城,城北四十餘里有波利城。城中各有一窣堵波,高餘三丈。
- 옛날 여래께서 불과(佛果)117)를 처음으로 증득하신 뒤 보리수에서 일어나셔서 녹원(鹿園)118)으로 나아가셨다. 그때 두 명의 장자가 부처님의 위광(威光)을 만나 자신들이 지니고 있던 노자를 모두 털어서 초밀(麨蜜)119)을 바쳤다. 그리고 나서 세존께 인간과 하늘의 복을 설해주기를 청하니, 최초로 5계(戒)와 10선(善)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법의 가르침을 듣고 나서 공양을 올려야 할 바를 청하니, 여래께서 마침내 그 머리털과 손톱을 그들에게 주셨다.
- 032_0375_b_18L昔者如來初證佛果,起菩提樹,方詣鹿園。時二長者遇被威光,隨其行路之資,遂獻麨蜜,世尊爲說人天之福,最初得聞五戒十善也。旣聞法誨,請所供養,如來遂授其髮、爪焉。
- 032_0375_c_02L두 장자가 장차 본국으로 돌아가서 어떻게 경례(敬禮)의 의식을 올려야 할 것인지를 여쭈자 여래께서는 승가지(僧伽胝)구역에서는 승기리(僧祗梨)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120)를 반듯하게 접어서 아래에 깔고 다음에는 울다라승(鬱多羅僧)121)을, 그 다음에는 승각기(僧却崎)구역에서는 승기지(僧祗支)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122)를 쌓고 이어서 발우를 엎어놓은 뒤에 석장(錫杖)을 세우셨다.
- 032_0375_b_23L二長者將還本國,請禮敬之儀式。如來以僧伽胝舊曰僧祇梨,訛也方疊布下,次鬱多羅僧,次僧卻崎舊曰僧祇支,訛也又覆鉢,豎錫杖。
- 이와 같은 차례로 솔도파가 만들어지니 두 사람은 명을 받들고 각자 자기의 성으로 돌아가서 성지(聖旨)의 의식을 본떠서 훌륭하게 세웠다. 이것이 바로 석가모니 법에 있어서 최초의 솔도파인 것이다.
- 032_0375_c_03L如是次第,爲窣堵波。二人承命,各還其城,擬儀聖旨,式修崇建,斯則釋迦法中最初窣堵波也。
- 성의 서쪽으로 70여 리를 가다 보면 솔도파가 또 있는데 높이는 2길[丈] 남짓하다. 옛날 가섭파부처님 시절에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큰 성으로부터 서남쪽으로 가서 설산의 후미진 곳으로 들어가면 예말타국(銳秣陀國)에 이르게 된다.
- 032_0375_c_05L城西七十餘里有窣堵波,高餘二丈,昔迦葉波佛時之所建也。從大城西南入雪山阿,至銳秣陁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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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예말타국(銳秣陀國)
예말타국123)은 동서로 50~60리이고 남북으로 백여 리에 달하며 나라의 큰 도성은 둘레가 10여 리이다. 서남쪽으로 가다 보면 호식건국(胡寔健國)에 이른다. - 032_0375_c_08L銳秣陁國。東西五六十里,南北百餘里。國大都城周十餘里。西南至胡寔健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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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호식건국(胡寔健國)
호식건국은 동서로 5백여 리이고 남북으로 천여 리에 달하며, 나라의 큰 도성은 둘레가 20여 리이다. 산과 하천이 많고 좋은 품질의 말[馬]이 많이 난다. 서북쪽으로 가다 보면 달랄건국(呾剌健國)에 이르게 된다. - 032_0375_c_11L胡寔健國,東西五百餘里,南北千餘里。國大都城。周二十餘里。多山川,出善馬。西北至呾剌健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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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달랄건국(呾剌健國)
달랄건국124)은 동서로 5백여 리이고 남북으로 50~60리에 달하며, 나라의 큰 도성의 둘레는 10여 리이다. 서쪽으로는 파라사국(波剌斯國)의 경계와 닿아 있다. 박갈국(縛喝國)으로부터 남쪽으로 백여 리를 가다 보면 게직국(揭職國)에 이르게 된다.125) - 032_0375_c_14L呾剌健國,東西五百餘里,南北五六十里。國大都城周十餘里。西接波剌斯國界。從縛喝國南行百餘里,至揭職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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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게직국(揭職國)
게직국126)은 동서로 5백여 리이고 남북으로 3백여 리이다. 나라의 큰 도성의 둘레는 4~5리이다. 토지는 척박하고 언덕들이 서로 연이어져 있다. 꽃과 과일이 적고 콩과 보리가 많이 자란다. 기후는 몹시 춥고 풍속은 강건하고 용맹스럽다. 가람은 10여 곳이 있고 승도는 3백여 명이 있는데 모두가 소승의 가르침인 설일체유부를 배우고 있다. - 032_0375_c_18L揭職國,東西五百餘里,南北三百餘里。國大都城周四五里。土地磽确,陵阜連屬,少花果,多菽、麥。氣序寒烈,風俗剛猛。伽藍十餘所,僧徒三百餘人,竝學小乘敎說一切有部。
- 032_0376_a_02L동남쪽으로 가면 대설산(大雪山)에 들어가게 되는데 산이 높고 계곡이 깊으며 바위와 봉우리가 몹시 위험스럽다. 바람과 눈이 연이어 불어닥치며 한여름에도 얼음이 언다. 쌓인 눈이 계곡을 메우고 있으며 길이 좁아서 걸어가기가 어렵다. 산신과 도깨비들은 사람들에게 제멋대로 난폭하게 굴거나 재앙을 내린다. 뿐만 아니라 강도 떼가 횡행하며 사람 죽이기를 업으로 삼고 있다. 이곳에서 6백여 리를 가다 보면 도화라국(覩貨邏國)의 경계를 벗어나서 범연나국(梵衍那國)에 이르게 된다.
- 032_0375_c_23L東南入大雪山,山谷高深,峯巖危險,風雪相繼,盛夏合凍,積雪彌谷,溪徑難涉。山神鬼魅,暴縱妖祟。群盜撗行,殺害爲務。行六百餘里,出都貨邏國境,至梵衍那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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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범연나국(梵衍那國)
범연나국127)은 동서로 2천여 리이고 남북으로 3백여 리에 달하며 설산 속에 자리 잡고 있다.128) 사람들은 산의 계곡에 의지하고 산의 형세를 따라서 마을을 이루고 있다. 나라의 큰 도성은 벼랑에 의지하고 계곡에 걸쳐있다. 길이는 6~7리에 달하며 북쪽은 높은 절벽을 등지고 있다. 보리가 자라며 꽃과 과일은 거의 나지 않는다. 목축하기에 적합하여서 양과 말이 많다. 기후는 매우 추우며 풍속도 강건하고 난폭하다. 많은 사람들이 가죽옷[皮褐]을 입는데 이 또한 적합하다. - 032_0376_a_05L梵衍那國。東西二千餘里,南北三百餘里,在雪山之中也。人依山谷,逐勢邑居。國大都城據崖跨谷,長六七里,北背高巖,有宿麥,少花果,宜畜牧,多羊馬。氣序寒烈,風俗剛獷,多衣皮褐,亦其所宜。
- 문자와 교화[風敎]와 화폐의 사용은 도화라국과 같지만129) 언어는 조금 다르며 겉모습은 아주 똑같다. 부처님에 대한 두터운 믿음은 다른 나라보다 훨씬 돈독하다. 위로는 3보에서 아래로는 백신(百神)에 이르기까지130) 정성과 마음을 온통 기울여서 공경하지 않는 것이 없다. 장사꾼은 자신들이 오갈 때면 천신(天神)이 길조를 나타내어 좋은 신통변화를 보여주도록 기원하며 복덕을 구한다. 가람의 수는 열 곳이고 승도는 수천 명에 이르며 소승의 설출세부(說出世部)131)를 배우고 있다.
- 032_0376_a_11L文字、風敎、貨幣之用,同都貨邏國。語言少異,儀貌大同。淳信之心,特甚鄰國。上自三寶,下至百神,莫不輸誠竭心宗敬。商估往來者,天神現徵祥,示祟變,求福德。伽藍數十所,僧徒數千人,宗學小乘說出世部。
- 왕성 동북쪽 산의 후미진 곳에 돌로 만들어진 부처님의 입상(立像)132)이 있다. 높이는 140~150척이며 금색이 찬란하게 빛나고 온갖 보배로 장식되어 눈을 어지럽힌다. 동쪽에 가람이 있는데 이 나라의 선왕(先王)이 세운 것이다. 가람 동쪽에는 유석(鍮石)으로 만들어진 석가모니부처님의 입상133)이 있는데 높이가 백여 척에 달한다. 몸을 가누어 각기 따로 주조한 뒤에 그것을 모두 합하여 완성한 것이다.
- 032_0376_a_16L王城東北山阿有立佛石像,高百四五十尺,金色晃曜,寶飾煥爛。東有伽藍,此國先王之所建也。伽藍東有鍮石釋迦佛立像,高百餘尺,分身別鑄,摠合成立。
- 032_0376_b_02L성의 동쪽으로 2~3리 떨어진 가람에는 부처님의 입열반와상(入涅槃臥像)이 있는데 길이는 천여 척에 달한다. 왕이 매번 이곳에서 무차대회(無遮大會)를 여는데 위로는 자신의 처자로부터 아래로는 나라의 귀중한 보물에 이르기까지 창고를 완전히 열어 베풀며 다시금 자기 몸을 다하여 베풀기도 한다. 군신과 관료들도 승려들에게 죄를 사해주기를 빌면서 베푼다. 이와 같은 일이 자신들이 해야 할 의무라고 생각한다.
- 032_0376_a_21L城東二三里伽藍中有佛入涅槃臥像,長千餘尺。其王每此設無遮大會。上自妻子,下至國珍,府庫旣傾,復以身施,群官僚佐就僧酬贖,若此者以爲所務矣。
- 부처님의 와상이 안치된 가람의 동남쪽으로 2백여 리를 가다 보면 대설산을 건너게 된다. 다시 동쪽으로 가다 보면 작은 내와 연못에 이르게 되는데 연못의 물은 거울처럼 맑고 나무들은 짙푸르고 무성하다. 승가람이 있는데 그곳에는 부처님의 치아와 겁초(劫初)134) 때의 독각(獨覺)의 치아가 있다. 길이는 약 5촌(寸)정도이고 너비는 4촌에서 조금 모자란다. 또한 금륜왕(金輪王)의 치아도 있는데 길이는 3촌, 너비는 2촌이다. 상낙가박사(商諾迦縛娑)135)구역에서는 상나화수(商那和修)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
- 032_0376_b_03L臥像伽藍東南行二百餘里,度大雪山,東至小川澤,泉池澄鏡,林樹靑蔥。有僧伽藍,中有佛齒及劫初時獨覺齒,長餘五寸,廣減四寸;復有金輪王齒,長三寸,廣二寸;商諾迦縛娑舊曰商那和修,訛也。
- 대아라한이 지니고 다녔던 쇠발우도 있는데 그 발우의 크기는 8~9되[升]의 양이 들어갈 만하다. 성현의 이러한 세 가지 유물은 모두 황금으로 만든 함 속에 넣어져 있다. 그리고 상낙가박사의 9조(條)136) 승가기의도 있는데 이것은 진붉은 색의 설낙가초(設諾迦草) 껍질을 겹쳐서 만든 것이다.
- 032_0376_b_09L大阿羅漢所持鐵鉢,量可八九升。凡三賢聖遺物,竝以黃金緘封。又有商諾迦縛娑九條僧伽胝衣,絳赤色,設諾迦草皮之所績成也。
- 상낙가박사는 아난의 제자이다. 전생에서 그는 설낙가초로 만든 옷을 안거가 해제되는 날 승가의 대중에게 보시하였다. 이 복의 힘으로 말미암아 그는 5백 생 동안 중음(中陰)137)으로 있거나 생음(生陰)으로 있거나 간에 언제나 이 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최후신으로서 태생하여 나왔을 때에도 그의 몸은 이미 어느 정도 자라있었고 옷도 그 몸에 따라 늘어났다. 아난의 제도를 받아 출가하게 되었을 때는 이 옷도 법복으로 변하였으며 구족계를 받을 때에 이르러서는 이내 9조 승가기가 되었다.
- 032_0376_b_12L商諾迦縛娑者,阿難弟子也。在先身中,以設諾迦草衣,於解安居日,持施衆僧,承茲福力,於五百身中陰、生陰,恒服此衣。以最後身,從胎俱出,身旣漸長,衣亦隨廣;及阿難之度出家也,其衣變爲法服;及受具戒,更變爲九條僧伽胝。
- 그리고 나서 적멸을 증득하고자 하여 변제정(邊際定)138)에 들었을 때 그는 지원력(智願力)을 발하여 이 가사가 석가모니의 유법(遺法)이 다하고 법이 다할 때까지 남은 후에야 비로소 변하여 없어지게 하였다. 지금은 약간 손상되어 있을 뿐이니 실로 징험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것으로부터 동쪽으로 가다 보면 설산에 들어가게 되며 흑령(黑嶺)을 넘어서 가필시국(迦畢試國)에 이르게 된다.
- 032_0376_b_18L將證寂滅,入邊際定,發智願力,留此袈裟,盡釋迦遺法。法盡之後,方乃變壞。今已少損,信有徵矣。從此東行入雪山,踰越黑嶺,至迦畢試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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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_0376_c_02L
34) 가필시국(迦畢試國)
가필시국139)의 둘레는 4천여 리에 달하며 북쪽으로는 설산을 등지고 있고 나머지 3면이 흑령(黑嶺)에 접해 있다. 나라의 큰 도성140)의 둘레는 10여 리이다. 곡식과 보리가 잘 자라며 과실나무가 많고 또 좋은 품질의 말과 울금향(鬱金香)141)이 난다. 다른 여러 나라들의 진귀한 물건들은 모두 이 나라에 모여 있으며 기후는 바람이 차고 사람들의 성품은 거칠다. 언사는 천박하고 혼인도 상스럽고 난잡하다. - 032_0376_b_22L迦畢試國,周四千餘里,北背雪山,三陲黑嶺。國大都城周十餘里。宜穀、麥,多果、木,出善馬、鬱金香。異方奇貨,多聚此國。氣序風寒,人性暴獷,言辭鄙藝,婚姻雜亂。
- 문자는 도화라국과 거의 똑같지만 습속이나 언어, 교화는 조금 다르다. 고운 무명으로[毛氎]으로 만든 옷이나 가죽옷[皮褐]을 입는다. 금전과 은전, 그리고 작은 동전의 화폐를 사용하는데 규격과 모양은 다른 나라와 차이가 있다.
- 032_0376_c_04L文字大同睹貨邏國。習俗、語言、風敎頗異。服用毛㲲,衣兼皮褐。貨用金錢、銀錢及小銅錢,規矩摸樣異於諸國。
- 왕은 찰제리종인데 지략이 있고 성격은 용맹하여 주변 나라들의 변경을 위협하여 10여 개국을 다스린다. 백성을 사랑으로 돌보며 3보를 공경한다. 해마다 1장 8척의 은불상을 만들며 또 무차대회도 함께 마련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두루 베풀고, 의지할 곳 없는 홀아비와 과부들에게 지혜롭게 보시한다.
- 032_0376_c_07L王,剎利種也,有智略,性勇烈,威懾鄰境,統十餘國。愛育百姓,敬崇三寶,歲造丈八尺銀佛像,兼設無遮大會,周給貧寠,惠施鰥寡。
- 가람은 백여 곳이 있고 승도는 6천여 명이 있는데 이들은 대부분 대승법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힌다. 솔도파와 승가람은 매우 넓으며 엄숙하고 깨끗하다. 천사(天祠)의 수는 열 곳이 있으며 이교도를 믿는 사람은 천여 명이 되는데 온몸을 완전히 벌거벗은 이[露形]도 있고, 몸에 회반죽을 바르거나[塗灰]142) 해골을 이어서 머리장식으로 만들어 쓴 사람들[連絡髑髏]143)도 있다.
- 032_0376_c_10L伽藍百餘所,僧徒六千餘人,竝多習學大乘法敎。窣堵波、僧伽藍崇高弘敞,廣博嚴淨。天祠數十所,異道千餘人,或露形,或塗灰,連絡髑髏,以爲冠鬘。
- 큰 성의 동쪽으로 3~4리를 가다 보면 북쪽 산 아래에 거대한 가람144)이 있는데 승도의 수는 3백여 명이다. 이들은 모두 소승법의 가르침을 배우고 있다.
- 032_0376_c_14L大城東三四里北山下有大伽藍,僧徒三百餘人,竝學小乘法敎。
- 옛 선현들의 말에 의하면, 옛날에 건타라국(健馱邏國)의 가니색가왕(迦膩色迦王)145)은 그 위력이 주변 나라들에 미치고 먼 곳에까지 그의 교화가 두루 퍼졌는데, 병사를 일으켜서 영토를 확장하여 총령의 동쪽에까지 이르렀다. 그러자 황하(黃河) 서쪽에 사는 오랑캐들은 왕의 위력을 두려워하여 스스로 인질을 보내서 볼모[質子]로 잡혀 있게 하였다.
- 032_0376_c_16L聞諸先志曰:“昔健馱邏國迦膩色迦王威被鄰國,化洽遠方,治兵廣地,至蔥嶺東,河西蕃維畏威送質。
- 가니색가왕은 볼모를 얻자 특별히 예를 갖추어 추위와 더위에 거처를 바꾸어 가며 지낼 수 있게 해주었다. 그리하여 겨울에는 인도의 여러 나라들에서 지내고 여름에는 가필시국으로 돌아왔으며 봄과 가을에는 건타라국에 머물렀다. 그래서 볼모의 세 계절 거처에 각각 가람을 지었으니, 그 중 하나가 바로 이곳이며 바로 여름을 지내기 위해 지은 별장이다. 그런 까닭에 여러 방의 벽에는 볼모를 그린 그림이 있는데 용모와 복식은 중국의 것과 똑같았다.
- 032_0376_c_19L迦膩色迦王旣得質子,特加禮命,寒暑改館,冬居印度諸國,夏還迦畢試國,春、秋止健馱邏國。故質子三時住處,各建伽藍;今此伽藍,卽夏居之所建也。故諸屋壁,圖畫質子,容貌服飾,頗同中夏。
- 032_0377_a_02L그 후 볼모는 본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지만 마음은 이전에 거처하던 곳에 있었다. 그는 몸은 비록 산천에 가로막혀 있었지만 변함없이 공양을 올렸다. 그러므로 지금의 승려들은 안거에 들어갈 때와 해제할 때마다 매번 법회를 크게 열어서 여러 볼모들을 위하여 복을 기원하고 선(善)을 행하는데, 그 일은 끊어지지 않고 전해져서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 032_0376_c_24L其後得還本國,心存故居,雖阻山川,不替供養。故今僧衆,每至入安居、解安居,大興法會,爲諸質子祈福樹善,相繼不絕,以至于今。
- 가람의 불원(佛院) 동문(東門)의 남쪽에 커다란 신왕상(神王像)146)이 있는데 그 상의 오른쪽 발 아래에 보물이 묻혀 있는 구덩이가 있다. 이것은 볼모가 묻은 것으로 그 명(銘)에는 가람이 낡고 무너지게 되면 이 보물을 가져다가 수리하도록 하라고 쓰여 있었다.
- 032_0377_a_05L伽藍佛院東門南大神王像右足下,坎地藏寶,質子之所藏也。故其銘曰:“伽藍朽壞,取以修治。”
- 한편 인근 변방에 탐욕스럽고 흉폭한 어떤 왕이 살고 있었는데, 그가 이 가람에 진귀한 보물이 많이 묻혀 있다는 소식을 듣고서 승려들을 모두 쫓아내고 발굴을 시작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그때 신왕(神王)의 관(冠) 속에 있던 앵무새의 상이 갑자기 날개를 세차게 퍼덕이며 크게 울어대자 땅이 진동하였다. 왕과 군인들은 그 기세에 놀라 물러나다가 쓰러지고 엎어지며 한참이 지나서야 일어날 수 있었다. 그들은 곧 자신들의 허물을 참회하고 돌아갔다.147)
- 032_0377_a_08L近有邊王,貪婪凶暴,聞此伽藍多藏珍寶,驅逐僧徒。方事發掘,神王冠中鸚鵡鳥像,乃奮羽驚鳴,地爲震動,王及軍人僻易僵仆,久而得起,謝咎以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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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의 북쪽 산꼭대기에는 석실(石室)이 몇 곳 있는데, 이곳은 볼모가 선정(禪定)을 익히던 곳이다. 그 속에도 여러 가지 보물이 숨겨져 있는데 그 옆의 명(銘)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이곳은 야차(藥叉)148)가 지키고 있다. 만일 이곳에 있는 보물을 꺼내서 가져가려고 하는 자가 있으면 야차가 신통력을 발휘하여 사자(師子)나 왕뱀ㆍ맹수ㆍ독충으로 그 모습을 변화시켜서 진노함을 나타낼 것이다.”
그런 까닭에 감히 그곳을 공격하여 보물을 가져가려는 사람이 없었다. - 032_0377_a_12L伽藍北嶺上有數石室,質子習定之處也。其中多藏雜寶,其側有銘,藥叉守衛。有欲開發取中寶者,此藥叉神變現異形,或作師子,或作蟒蛇、猛獸、毒虫,殊形震怒,以故無人敢得攻發。
- 석실의 서쪽으로 2~3리를 가면 큰 산봉우리 위에 관자재보살상(觀自在菩薩像)이 있는데, 어떤 사람이 지극한 정성으로 친견하기를 원하면 보살은 그 상으로부터 미묘한 색신(色身)을 나타내어 행자를 위로해 준다.
- 032_0377_a_17L石室西二三里大山嶺上有觀自在菩薩像,有人至誠願見者,菩薩從其像中出妙色身,安慰行者。
- 큰 성의 동남쪽으로 30여 리를 가면 갈라호라(曷邏怙羅)승가람이 있고 옆에는 백여 척이나 되는 솔도파가 있다. 이따금 재일(齋日)이 되면 빛을 발하기도 하고, 복발(覆鉢)의 세(勢)149) 위의 돌 틈 사이로 흑향유(黑香油)가 흘러나오기도 한다. 이따금 고요한 밤중에 음악 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 032_0377_a_20L大城東南三十餘里至曷邏怙羅僧伽藍,傍有窣堵波,高百餘尺,或至齋日,時燭光明。覆鉢勢上石隙閒流出黑香油,靜夜中時聞音樂之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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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_0377_b_02L노인들의 말을 들어보면 이 승가람은 옛날 이 나라의 대신이었던 갈라호라(曷邏怙羅)가 지은 것이다. 그가 승가람을 완성한 뒤에 어느 날 밤 꿈에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이렇게 말하였다.
“그대가 세운 솔도파에는 아직 사리가 없다. 내일 아침 사리를 바치려는 자가 있을 것이니 왕에게 청을 해보도록 하라.” - 032_0377_a_24L聞諸先志曰:昔此國大臣遏邏怙邏之所建也。功旣成已,於夜夢中,有人告曰:“汝所建立窣堵波,未有舍利,明旦有獻上者,宜從王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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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아침 일찍 조정에 들어가서 왕에게 나아가 청하였다.
“어리석고 우둔함을 무릅쓰고 감히 청하고자 하나이다.” - 032_0377_b_05L旦入朝進請曰:“不量庸昧,敢有願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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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물었다.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 王曰:“夫何所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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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이 답하였다.
“오늘 제일 먼저 헌상하는 자가 있다면 부디 그 자의 헌상품을 저에게 하사하여 주소서.”
그러자 왕은 그리하겠다고 답하였다. - 032_0377_b_06L對曰:“今有先獻者,願垂恩賜。”王曰:“然。”
- 갈라호라는 궁궐 문에 우두커니 서서 왕에게 물건을 헌상할 누군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어떤 사람이 사리병(舍利甁)을 들고 오는 것을 보았다.
- 032_0377_b_07L遏邏怙羅佇立宮門,瞻望所至。俄有一人持舍利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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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은 그 사람에게 물었다.
“헌상하려는 것이 무엇인가?” - 大臣問曰:“欲何獻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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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답하였다.
“부처님의 사리입니다.” - 032_0377_b_09L曰:“佛舍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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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이 말하였다.
“내가 그대를 위해 사리병을 지키고 있겠다. 그러니 그대는 먼저 왕에게 아뢰는 것이 좋겠다.” - 大臣曰:“吾爲爾守,宜先白王。”
- 갈라호라는 왕이 사리를 귀하게 여겨, 앞서 은혜롭게 하사하기로 한 약속을 후회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재빨리 가람으로 달려가서 솔도파에 올라갔다. 그의 지극한 정성에 감응한 것인지 그 돌로 만든 복발(覆鉢)이 저절로 열렸다. 대신은 그 속에 사리를 안치하고 난 뒤 재빨리 손을 빼내었지만 옷소매가 걸리고 말았다. 왕은 뒤늦게 사자를 보내어 쫓아가게 하였지만 돌은 이미 굳게 닫힌 뒤였다. 그리고 그 틈 사이로 흑향유가 흘러나왔던 것이다.
- 032_0377_b_10L遏邏怙羅恐王珍貴舍利,追悔前恩,疾往伽藍,登窣堵波,至誠所感,其石覆鉢自開,安置舍利,已而疾出,尚拘衣襟。王使逐之,石已掩矣。故其隙閒,流黑香油。
- 성의 남쪽으로 40여 리를 가다 보면 십폐다벌라사성(霫胥立反蔽多伐剌祠城)150)에 이른다. 대지가 크게 진동하여 산과 절벽이 무너져 내리는 일이 있었지만, 이 성의 주위로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 032_0377_b_15L城南四十餘里至霫胥立反蔽多伐剌祠城。凡地大震,山崖崩墜,周此城界,無所動搖。
- 십폐다벌라사성에서 남쪽으로 30여 리를 가다 보면 아로노산(阿路猱奴高反山)151)에 이른다. 낭떠러지가 가파르기 그지없고 바위 골짜기는 아득하게 깊다. 그 봉우리는 해마다 수백 척씩 더 높아져 조구타국(漕矩吒國)의 수나희라산(䅳士句反下同那呬羅山)과 아득하게 서로 마주보고 서있었는데 이내 무너져 내렸다.
- 032_0377_b_18L霫蔽多伐剌祠城南三十餘里,至阿路猱奴高反山,崖嶺峭峻,巖谷杳冥。其峯每歲增高數百尺,與漕矩咤國䅳士句反,下同那呬羅山髣髴相望,便卽崩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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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_0377_c_02L그 지방에서 전하는 기록에 의하면, 본래 수나천신(䅳那天神)이 먼 곳에서 이리로 와 이 산에 머물고자 하였다. 그런데 이 산에 살고 있던 산신이 화를 내면서 계곡을 마구 뒤흔들었다. 그러자 천신이 말하였다.
“서로 베풀고자 하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흔들리는구나. 조금이라도 나를 객으로 맞아준다면 이곳은 재보(財寶)로 가득 찰 터인데……. 이제 나는 조구타국의 수나희라산에 가야겠다. 해마다 내가 국왕과 대신의 제사와 헌공을 받을 때마다 자세히 눈여겨보도록 하라.”
그리하여 아로노산은 조금씩 높이를 더해갔고 이윽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곧 무너지고 말았다. - 032_0377_b_22L聞諸土俗曰:初,䅳那天神自遠而至,欲止此山。山神震怒,搖蕩谿谷。天神曰:“不欲相舍,故此傾動。少垂賓主,當盈財寶。吾今往漕矩咤國䅳那呬羅山,每歲至我受國王、大臣祀獻之時,宜相屬望。”故阿路猱山增高旣已,尋卽崩墜。
- 왕성 서북쪽으로 2백여 리를 가다 보면 대설산에 이른다. 산 정상에는 못이 있는데 비를 청하거나 맑은 날을 기원하면 구하는 대로 소원을 들어준다고 한다.
- 032_0377_c_06L王城西北二百餘里,至大雪山。山頂有池,請雨祈晴,隨求果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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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선현들의 말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옛날 건타라국에 아라한이 있었는데 그는 언제나 이 못의 용왕에게 공양을 받고 있었다. 그는 점심때가 되면 언제나 신통력을 써서 자신의 승상(繩床)152)에 앉은 채로 허공을 타고 날아올라 용왕에게로 가곤 하였다. - 032_0377_c_08L聞諸先志曰:“昔健馱邏國有阿羅漢,常受此池龍王供養。每至中食,以神通力,幷坐繩牀,凌虛而往。
- 그런데 어느 날 시자인 사미가 몰래 승상 아래에 숨어 들어가서 그것을 붙잡고 있었다. 아라한은 때가 되어 용궁에 도착하고 난 뒤에야 사미를 발견하였다. 용왕은 사미에게도 머물며 공양을 받기를 청하였다. 그런데 용왕은 아라한에게는 하늘의 감로밥[甘露飯]을 공양하였고, 사미에게는 인간세상의 음식을 주었다. 아라한은 밥을 먹고 난 뒤 곧 용왕에게 여러 가지 법의 요체를 설하였다.
- 032_0377_c_11L侍者沙彌密於繩牀之下,攀援潛隱,而阿羅漢時至便往,至龍宮乃見沙彌,龍王因請留食,龍王以天甘露飯阿羅漢,以人閒味而饌沙彌。阿羅漢飯食已訖,便爲龍王說諸法要。
- 한편 사미는 평상시와 다름없이 스승의 발우를 씻었는데 마침 발우에는 쌀알이 몇 알 붙어 있었다. 사미는 그 맛을 보고 나서는 놀라고 말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나쁜 마음을 먹게 되어 스승을 원망하고 용왕에게 분을 품으면서 ‘부디 모든 복의 힘이 이제 나타나서 이 용의 목숨을 끊을지어다. 그리하여 내가 스스로 왕이 될지어다’라고 소원을 품게 되었다.
- 032_0377_c_16L沙彌如常爲師滌器,器有餘粒,駭其香味,卽起惡願,恨師忿龍:“願諸福力,於今悉現,斷此龍命,我自爲王。”
- 사미가 이렇게 소원을 품었을 때 용왕에게 이내 두통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아라한이 법을 설하며 가르치고 달래 주자 용왕은 허물을 뉘우치고 스스로를 책하였다. 사미는 분노를 품은 채 용왕의 사죄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가람으로 돌아가서 지극 정성으로 발원하여 마침내 바라던 대로 그날 밤 목숨을 마치고 대용왕(大龍王)이 되었다.
- 032_0377_c_19L沙彌發是願時,龍王已覺頭痛矣。羅漢說法誨喩,龍王謝咎責躬;沙彌懷忿,未從誨謝。旣還伽藍,至誠發願,福力所致,是夜命終,爲大龍王。
- 032_0378_a_02L그는 맹렬한 위력을 날리면서 연못으로 쫓아 들어가 용왕을 죽이고 자신이 이 용궁에 살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전의 용왕에게 딸려 있던 이들을 소유하고 그 통명(統命)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지난 세상의 소원대로 폭풍우를 일으켜서 나무들을 모조리 뽑아버리고 가람을 파괴하려 하였다. 한편 당시 왕이었던 가니색가왕이 괴이하게 여겨서 아라한에게 이 일의 전말을 물으니, 아라한은 그 동안 있었던 일을 낱낱이 왕에게 고하였다.
- 032_0377_c_22L威猛奮發,遂來入池,殺龍王,居龍宮,有其部屬,摠其統命。以宿願故,興暴風雨,摧拔樹木,欲壞伽藍。時迦膩色迦王怪而發問,其阿羅漢具以白王。
-
왕은 곧 용을 달래기 위하여 설산 아래에 승가람을 짓고 높이가 백여 척에 이르는 솔도파를 세웠다. 그러나 용은 지난 세상의 분노를 풀지 못하고 끝내 거친 바람과 비를 일으켰다. 왕은 널리 구제하려는 마음을 일으켰지만 용은 분노의 독한 마음에 편승하여 난폭한 행동을 한 것이었다.
용왕이 승가람과 솔도파를 여섯 번 파괴하면 일곱 번을 다시 지었다. 마침내 가니색가왕은 공력을 들인 일이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을 치욕스럽게 여겼다. 그리하여 용의 못을 메워 버리고 그 용궁을 허물고자 즉시 병사들을 거느리고 설산 아래에 이르렀다. - 032_0378_a_03L王卽爲龍於雪山下立僧伽藍,建窣堵波,高百餘尺。龍懷宿忿,遂發風雨。王以弘濟爲心,龍乘瞋毒作暴,僧伽藍、窣堵波六壞七成。迦膩色迦王恥功不成,欲塡龍池,毀其居室,卽興兵衆,至雪山下。
-
그러자 용왕은 매우 두려워하며 늙은 바라문으로 변하여 왕의 코끼리를 못 가도록 잡아당기며 간하였다.
“대왕께서는 지난 세상에 선업의 근본을 닦으셨고 수승한 업인(業因)을 많이 심으셔서 사람의 왕이 되셨으니, 생각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없으십니다. 그렇거늘 오늘은 어찌하여 용과 다툼을 벌이려 하십니까? 용이란 것은 축생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라 비천하고 열등한 부류입니다. 그렇지만 큰 위력을 지니고 있어서 힘으로 다툴 수 없습니다. 용은 구름을 타고 바람을 부리며, 허공을 밟고 물 위를 걸어다니므로 인간의 힘으로 제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왕의 마음에 분노의 대상이 되겠습니까? 왕께서는 지금 온 나라의 병사를 일으켜서 한 마리 용과 싸우려고 하십니다. 만일 왕께서 이기신다 하여도 먼 곳에 있는 적을 정복했다는 위엄이 있는 것도 아닐 것이며, 패하신다면 대적하지 못한 수치스러움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왕을 위하여 생각해 보건대 병사를 데리고 돌아가시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 032_0378_a_09L時彼龍王深懷震懼,變作老婆羅門,叩王象而諫曰:“大王宿殖善本,多種勝因,得爲人王,無思不服。今日何故與龍交爭?夫龍者,畜也,卑下惡類,然有大威,不可力競。乘雲馭風,蹈虛履水,非人力所制,豈王心所怒哉?王今擧國興兵,與一龍鬪,勝則王無伏遠之威,敗則王有非敵之恥。爲王計者,宜可歸兵。”
- 그러나 가니색가왕은 이 말을 따르지 않았다. 그러자 용이 곧 못으로 돌아가서 뇌성벽력을 울리니, 폭풍이 쳐서 나무를 뽑아내고 모래와 돌이 비처럼 쏟아졌다. 운무가 자욱하게 끼어서 앞이 보이지 않자 군마(軍馬)가 놀라 바둥거렸다.
- 032_0378_a_17L迦膩色迦王未之從也。龍卽還池,聲震雷動,暴風拔木,沙石如雨,雲霧晦冥,軍馬驚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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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왕은 곧 3보에 귀의하면서 도움을 내려주실 것을 청하며 말하였다.
“지난 세상에 심은 많은 복의 힘으로 사람의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억센 적을 위험으로 제압하여 남섬부주를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저 축생인 용에게 굴복당하게 되었으니, 이는 실로 저의 박복(薄福)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디 모든 복의 힘이 오늘 나타나서 두 어깨에 거대한 불꽃과 연기를 내게 하여서 용을 물리치고 바람을 가라앉히며, 안개가 걷히고 구름이 열리게 해주소서.” - 032_0378_a_19L王乃歸命三寶,請求加護,曰:“宿殖多福,得爲人王,威懾强敵,統贍部洲,今爲龍畜所屈,誠乃我之薄福也。願諸福力,於今現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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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_0378_b_02L그리고 나서 왕은 군사들에게 명하여 각기 돌 하나씩을 짊어지고 가서 용의 못을 메우게 하였다. 그러자 용왕이 다시 바라문으로 변하여 왕에게 거듭 간청하였다.
“저는 바로 이 못의 용왕입니다. 앞의 위엄을 두려워하여 이제 귀명(歸命)하겠으니, 오직 왕께서는 가엾이 여기시어 지난날의 허물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왕께서는 중생을 기르시고 사랑으로 감싸 안으시는 분인데 어찌하여 오직 저에게만 악해(惡害)를 가하려 하십니까? 왕께서 만일 저를 죽이신다면 저는 왕과 함께 악도에 떨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왕께서는 목숨을 해친 죄가 있게 되고, 저에게는 원한과 복수의 마음을 품은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업보와 선악에 대한 이치는 밝고 분명한 법입니다.” - 032_0378_a_23L卽於兩肩起大煙焰,龍退風靜,霧卷雲開。王令軍衆人檐一石,用塡龍池。龍王還作婆羅門,重請王曰:“我是彼池龍王,懼威歸命,唯王悲愍,赦其前過。王以含育,覆燾生靈,如何於我獨加惡害?王若殺我,我之與王,俱墮惡道,王有斷命之罪,我懷怨讎之心。業報皎然,善惡明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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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왕은 용과 약속하기를 훗날 다시 죄를 짓는다면 그 때는 결코 용서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하였다. 그러자 용이 말하였다.
“저는 악업을 지었기 때문에 용의 몸을 받았습니다. 본래 용의 성품이란 사납고 악한 것이어서 제 스스로도 제어하기가 힘이 듭니다. 성내는 마음이 혹 일어난다면 장차 제어하는 것을 잊고 말 터이니, 왕께서 이제 다시 가람을 지어주신다면 감히 허물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한 사람을 보내어서 산꼭대기에서 망을 보게 하여 주십시오. 그리하여 검은 구름이 일어나면 급히 건퇴(揵槌)153)를 두드리게 하십시오. 그러면 저는 그 소리를 듣고서 악한 마음을 가라앉힐 것입니다.” - 032_0378_b_07L王遂與龍明設要契,後更有犯,必不相赦。龍曰:“我以惡業,受身爲龍,龍性猛惡不能自持,瞋心或起,當忘所制。王今更立伽藍,不敢摧毀。每遣一人,候望山嶺,黑雲若起,急擊揵搥,我聞其聲,惡心當息。”
- 그러자 왕이 곧 가람을 다시 지었고 솔도파를 세웠으며,154) 사람을 시켜서 구름의 기미를 지켜보게 하였는데, 이 일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끊어지지 않고 있다.
- 032_0378_b_13L其王於是更修伽藍,建窣堵波,候望雲氣,於今不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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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옛 선현들의 말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솔도파 속에 한 되[升] 남짓한 여래의 골육사리(骨肉舍利)가 있는데 신통력을 일으키는 일에 대해 일일이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어느 때인가 솔도파 안에서 홀연히 연기가 일더니 잠시 후 맹렬한 불길이 솟아올랐다. 사람들은 솔도파가 잿더미가 되었다고 말하면서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렇게 한참 지난 뒤 불이 꺼지고 연기가 사라지자 사람들은 사리를 보게 되었는데, 사리는 흰 구슬이 달린 깃발처럼 되어서 표주(表柱)155)를 빙빙 돌면서 서서히 위로 올라갔다가 높은 구름 사이에서 빙빙 휘감아 돌면서 다시 아래로 내려왔다고 한다. - 032_0378_b_14L聞諸先志曰:“窣堵波中,有如來骨肉舍利,可一升餘,神變之事,難以詳述。一時,中窣堵波內忽有煙起,少間便出猛焰,時人謂窣堵波已從火燼,瞻仰良久,火滅煙消,乃見舍利如白珠幡,循環表柱,宛轉而上,升高雲際,縈旋而下。
- 왕성의 서북쪽으로 커다란 강이 있는데 그 남안(南岸)에는 옛 왕[舊王]의 가람156)이 있다. 안에는 석가보살의 어렸을 때의 젖니가 있는데 길이는 1촌(寸) 남짓하다. 이 가람의 동남쪽으로 또 하나의 가람이 있는데 구왕(舊王)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이곳에는 여래의 정수리뼈[頂骨] 한 조각이 있는데 너비는 1촌 남짓하고 황백색이며 모공이 분명하다.
- 032_0378_b_20L王城西北大河南岸舊王伽藍內,有釋迦菩薩弱齡齠齔,長餘一寸。其伽藍東南有一伽藍,亦名舊王,有如來頂骨一片,面廣寸餘,其色黃白,髮孔分明。
- 032_0378_c_02L또 여래의 머리카락이 있는데 머리털 색깔은 감청색이고 나선모양으로 오른쪽으로 휘감아 돌려져 있다. 그것을 잡아당겨서 길이를 재면 1척 남짓하고 둥글게 말리면 반 촌(寸) 정도 된다. 6재일(齋日)157)이 될 때마다 왕과 대신은 이 세 가지 물건에 꽃을 뿌리며 공양을 올린다.
- 032_0378_c_02L又有如來髮,髮色靑紺,螺旋右縈,引長尺餘,卷可半寸。凡此三事,每至六齋,王及大臣散花供養。
- 정골가람의 서남쪽에 옛 왕비[舊王妃]의 가람이 있는데 그 속에는 금동으로 만들어진 솔도파가 있다. 높이는 100여 척에 달한다. 그 지방에서 전하는 기록에 의하면 이 솔도파 속에는 불사리가 1되[升] 남짓 있는데, 매월 보름이면 그날 밤 둥근 빛을 내뿜는데 노반(露盤)158)이 환히 빛나다가 새벽이 되면 그 빛은 차츰 솔도파 속으로 거두어져 들어간다.
- 032_0378_c_04L頂骨伽藍西南有舊王妃伽藍,中有金銅窣堵波,高百餘尺。聞諸土俗曰:“其窣堵波中有佛舍利升餘,每月十五日,其夜便放圓光,燭燿露盤,聯暉達曙,其光漸斂,入窣堵波。
- 성의 서남쪽에는 비라사락산(比羅娑洛山)당나라 말로는 상견(象堅)이라고 한다159)이 있는데 산신이 코끼리 모습을 띠고 있기 때문에 상견(象堅)이라 부른다고 한다.
- 032_0378_c_09L城西南有比羅娑洛山唐言象堅。山神作象形,故曰象堅也。
- 옛날 여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 상견신(象堅神)이 세존과 1천200명의 대아라한을 받들어 청하였다. 산꼭대기에 거대한 반석이 있었는데 여래께서는 이곳에 앉으셔서 산신의 공양을 받으셨다. 그 후 무우왕(無憂王)160)이 곧 그 반석 위에 솔도파를 세웠으니, 그 높이가 백여 척에 달하였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이것을 일러서 상견솔도파(象堅窣堵波)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속에는 여래의 사리가 한 되 남짓 들어있다고 한다.
- 032_0378_c_11L昔如來在世,象堅神奉請世尊及千二百大阿羅漢,山巓有大磐石,如來卽之,受神供養。其後無憂王卽磐石上起窣堵波,高百餘尺,今人謂之象堅窣堵波也。亦云中有如來舍利,可一升餘。
- 상견솔도파의 북산(北山) 바위 아래에 용천(龍泉)이 하나 있는데, 이곳은 여래께서 신의 공양을 받고 난 뒤에 아라한과 함께 이곳에서 입을 헹구고 양지(楊枝)161)를 씹던 곳이다. 이 양지가 곧 뿌리내려 지금은 무성한 숲이 되었다. 훗날 사람들은 이곳에 가람을 세워서 이름을 비탁거(鞞鐸佉)당나라 말로는 작양지(嚼楊枝)라고 한다라고 붙였다.
- 032_0378_c_16L象堅窣堵波北山巖下有一龍泉,是如來受神飯已,及阿羅漢於中漱口嚼揚枝,因卽種根,今爲茂林。後人於此建立伽藍,名鞞鐸佉唐言嚼楊枝。
- 이곳에서 동쪽으로 6백여 리를 가다 보면 산골짜기가 잇달아 이어지며 바위와 봉우리들이 가파르고 험하다. 그리하여 흑령을 넘어서 북인도의 경계로 들어서게 되면 남파국(濫波國)에 도달하게 된다북인도의 경계이다.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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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_0378_c_20L自此東行六百餘里,山谷接連,峯巖峭峻,越黑嶺,入北印度境,至濫波國北印度境。
大唐西域記卷第一
甲辰歲高麗國分司大藏都監奉勅彫造
- 1)1)*각주는 상당량을 미즈타니시죠(水谷眞成)가 저술한 『대당서역기』(중국고전문학대계 제22권, 平凡社)에 의거하였다. 여기에서는 여러 학자들의 다양한 학설을 싣고 있으나 본 책에서는 생략하였다.
- 1)전국시대(戰國時代) 제(齊)나라 추연(騶衍)이 우주천체에 대해서 저술하였다고 하는 천문서적으로 담천연(談天衍)이라고도 불린다.
- 2)2)『괄지상도(括地象圖)』의 약칭이다. 우(禹)가 얻었다고 전해지는 고대의 지리서로서 오래 전에 없어졌으나 당(唐)나라 초기에 위왕(魏王) 이태(李泰)가 소덕언(蕭德言)과 고윤(顧胤) 등에게 명하여 『괄지지(括地志)』 550권과 서략(序略) 5권을 편찬하였다. 현장이 여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 3)3)지방지(地方志)를 말한다. 전국 혹은 한 지역의 거리, 풍속, 교육, 산물, 인물, 명승, 고적 등의 특징과 연혁에 대해 기록한 책이다.
- 4)4)중국 고대 지리서인 『산해경(山海經)』을 말한다. 『산해경』은 18권으로 이루어졌으며 작자와 시대가 미상이다. 구두로 전해지던 것이 전국시대에 성문화(成文化)되었고 진한(秦漢)시대에 증보되었다.
- 5)5)『일주서(逸周書)』의 편명(篇名)으로 주공(周公)이 낙읍(洛邑)을 세운 뒤 제후들을 모아서 팔방회동(八方會同)하여 각각 그 직위를 내렸을 때에 법을 후세에 전하고자 지은 것이다.
- 6)장건(張騫)이 대하(大夏)에 있었을 때에 촉포(蜀布)와 공죽장(邛竹杖)을 보고서 그 유래를 묻게 되었는데 그것이 인도를 거쳐서 건너온 것이란 것을 알았다. 그는 인도와 교통할 수 있는 길이 촉(蜀)에 있다고 생각하여 한(漢)나라 무제(武帝)에게 서남(西南) 경략(經略)을 건의하였다. 박망(博望)은 무제(武帝)가 장건을 박망이라는 지역에 파견하면서 내린 봉호(封號)이다. (『사기(史記』 「서남이전(西南夷傳」)
- 7)무제(武帝)는 인도로 통하는 길이 운남(雲南)의 곤명(昆明)에 의해 방해받자, 그들을 정벌하기 위해 곤명지(昆明池)를 본떠서 장안의 서남쪽에 연못을 파서 수전(水戰) 훈련을 하였다. (『한서(漢書』 「무제기(武帝紀)」)
- 8)주(周)나라 소왕(昭王) 24년 4월 8일에 궁전이 진동하며 우물이 넘쳐흘렀고 그 날 밤 항성이 나타났다. 태사(太史) 소요(蘇繇)가 “서방에 성인이 나타난 것이다”라고 점을 쳤다.(『논형(論衡)』) 이것을 통해서 보면 서주 시대부터 이미 성인 석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9)『위서(魏書)』 「석로지(釋老志)」에 “효명제(孝明帝)가 꿈에 금인(金人)을 보았는데 금인의 정수리에 백광(白光)이 있었으며 궁전의 뜰을 날고 있었던 것을 보았다. 그리하여 신하들에게 물으니 ‘그 금인은 바로 부처라고 하는 이’라고 답하였으므로 그림을 그리게 하였다”라고 되어있다. 이것은 중국에 불교가 전해지는 계기가 된 것을 뜻하는 내용이다.
- 10)후한(後漢) 명제(明帝)의 명을 받아서 대월지(大月氏)에 가서 중인도 승려 가섭마등, 축법란과 함께 67년(영평 10)에 42장경과 불상을 가지고 돌아와 낙양에 백마사(白馬寺)를 세웠다.(『魏書』 「釋老志」)
- 11)채음이 불경 『사십이장(四十二章)』을 가지고 오자 명제(明帝)가 난대석실(蘭臺石室) 제14칸에 두도록 명하였다고 한다. (『고승전(高僧傳)』 권1 「섭마등전(攝摩騰傳)」)
- 12)양대(凉臺)는 본래 한명제(漢明帝)가 더위를 피해 독서하던 곳으로 청량대(淸凉臺)의 준말이다. 지금의 낙양 백마사 후원(後院)이 바로 그곳이라고 전해진다. 채음이 서역에서 불상을 얻어오자 명제는 곧 화공에게 명하여 그림을 그리게 한 뒤에 이것을 청량대 속과 현절릉(顯節陵) 위에 두게 하였다고 한다. (『고승전(高僧傳)』 권1 「축법란전(竺法蘭傳)」)
- 13)영취산(靈鷲山)을 말한다. 중인도에 있는 산 이름으로 석가여래가 설법하던 곳이다. 산 모양이 독수리 같다는 데서, 또 일설에는 독수리가 많이 산다는 데서 지어진 이름이다.
- 14)동한(東漢) 후기에 정권을 잡기 위한 치열하고 어지러웠던 실정을 의미한다. 환관과 외적들이 투쟁을 벌여 서로를 죽였는데 동탁(董卓)이 낙양에 도착한 뒤에는 낙양이 완전히 파멸되어 삼국이 분열된 형국을 이루었다. 모후(母后)는 등황후(鄧皇后)를 가리킨다.
- 15)함곡관(函谷關)과 낙양(洛陽)을 뜻한다.
- 16)고대의 괴기소설집인 『신이경(神異經)』을 가리킨다. 한(漢)의 동방삭(東方朔)이 지었다고 하며, 진(晉)의 장화(張華)가 주를 달았다고 하는데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모두 황당무계한 일들을 기록하였으나 문채(文彩)가 유려하여 후대에 사부(詞賦)를 짓는 사람들이 많이 인용하였다.
- 17)범어 tatahātā의 번역으로 사물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말한다. 사물의 본체로서 진실로 영원불변한 것이란 의미로 진여라고 이름한 것이다. 여여(如如)ㆍ여실(如實)ㆍ여(如) 등으로 부르며, 대승(大乘)에서는 만유(萬有)의 본체를 일컫는다.
- 18)『후한서』 권88 「서역전(西域傳)」에 서해(西海)라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것은 흑해(黑海) 또는 이해(裏海) 혹은 페르시아만이나 지중해, 넓게 서쪽 변방의 해양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 19)동락은 보통 낙양을 의미하지만 이본(異本)에는 동리(東離)로 되어있다. 동리는 서역의 국명으로 『후한서』 권88 「서역전」에 “동리국은 사기성(沙奇城)에 있으며 천축(天竺)의 동남쪽 3천여 리에 위치한 대국이다. 그 국토의 모든 것은 천축과 같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후자로 보는 것이 타당한 것 같다.
- 20)옥문관(玉門關)의 줄임말로써 감숙성(甘肅省) 돈황(燉煌) 서쪽에 있는 관문의 이름이다. 장안과의 거리가 2천 600리이다. 예로부터 서역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 21)세계의 지붕이라 일컬어지는 파미르고원을 말한다. 남쪽은 북인도에 닿았고, 동서의 두 갈래로 나뉘어 힌두쿠시산맥과 카라코름산맥이 되고, 북으로 뻗은 줄기는 과거에 서역이라고 하던 지방을 동쪽과 서쪽으로 나누면서 천산산맥과 접하였다.
- 22)히말라야 산을 말한다.
- 23)23)) 아뇩달지(阿耨達池)를 가리킨다. 무열뇌(無熱惱)ㆍ청량(淸凉)이라고 번역한다. 설산의 북쪽, 향취산의 남쪽에 있다. 혹은 히말라야 산중의 항하(恒河)의 수원(水源)을 가리키기도 하며 서장의 모나사루완호를 말하는 것이라고도 한다.
- 24)한나라 때 장안성(長安城) 남문(南門) 안에 있는 거리 이름으로 소수민족과 외국인들을 거주시켰던 곳이다.
- 25)선인(仙人)이 살았다고 하는 섬으로 『해내십주기(海內十洲記)』에 의하면 조주(祖洲), 영주(瀛洲), 현주(玄洲), 염주(炎洲), 장주(長洲), 원주(元洲), 유주(流洲), 생주(生洲), 봉린주(鳳麟洲), 취굴주(聚窟州)를 말한다.
- 26)고대 중국에 있었던 전설상의 다섯 황제로, 일반적으로 황제(黃帝)ㆍ전욱(顓頊)ㆍ제곡(帝嚳)ㆍ당요(唐堯)ㆍ우순(虞舜)을 말한다.
- 27)범어로는 Jetavana-Vihāra이고 기원정사(祇洹精舍)라고도 한다. 기타원림수달정사(祇陀園林須達精舍)의 약칭이다. 중인도 사위성에서 남쪽으로 1마일 떨어져 있다. 기수급고독원에 지은 절의 이름이다. 수달 장자가 정사를 지어서 부처님과 제자들에게 공양하였다.
- 28)비서저작좌랑이란 문서를 담당하는 비서성(秘書省) 저작랑(著作郞)의 속관(屬官)이다. 경파는 포주(蒲州) 하동(河東) 사람으로 당나라 정관(貞觀) 초에 진사(進士)가 되었다. 『수서(隋書)』와 『진서(晉書)』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또한 안사고(顔師古)의 『한서주(漢書注)』를 다시 40편(篇)으로 편찬하였다. 고종(高宗) 영휘(永徽) 초년에 칙명을 받아 허경종(許敬宗)과 함께 『서역도지(西域圖志)』 60권을 쓸 정도로 서역통이었다. 후에 어떤 일에 연루되어서 좌천당하여 안주자사(安州刺史)를 지내다 세상을 떠났다. (『당서(唐書)』 권198, 『구당서(舊唐書)』 권189)
- 29)이 경파(敬播)의 서(序)는 고려대장경본 이외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으며 송장본(宋藏本)이나 그 밖의 것에는 연국공(燕國公) 장열(張說)의 서(序)를 달고 있다.
- 1)천자가 천하를 다스리기 위하여 세우는 계책이나 교화를 말한다.
- 2)중국 전설상의 임금으로 3황(皇) 중의 한 사람이다. 처음으로 백성에게 어렵(漁獵)ㆍ농경ㆍ목축을 가르치고 8괘(卦)와 문자를 만들었다고 한다. 복희(伏犧)라고도 한다.
- 3)중국 고대 전설상의 임금인 황제(黃帝)를 말한다. 하남성 신정현 헌원(軒轅)이란 언덕에서 살았기 때문에 헌원씨라고 한다. 또 일설에는 수레의 헌(軒)ㆍ원(轅)을 정리하고 의관(衣冠)을 갖추었기 때문에 헌원씨라고 한다고 한다. 이것이 황제가 중국 통치를 시작한 것을 가리킨다고 한다. 또는 소전(小典)의 아들로 성(姓)은 공손(公孫)이며 유웅(有熊)에 나라를 세워 유웅씨라고도 한다.
- 4)요(堯) 임금을 말한다. 제곡(帝嚳)의 둘째 아들로 이름은 방훈(放勳)이다. 도(陶)에 봉해졌다가, 후에 당(唐)으로 옮겼으므로 도당씨(陶唐氏)라고도 한다. 태평성세를 이루었으나 아들 단주(丹朱)가 현명하지 못해 순(舜)에게 전위(傳位)하였다.
- 5)순(舜) 임금을 말한다. 성은 요(姚), 이름은 중화(重華)이며, ‘우(虞)’는 그의 조상이 봉해진 나라 이름이다. 효성이 극진하였고, 요(堯)임금으로부터 왕위를 선양 받아 포판(蒲阪)에 도읍 하였으며, 남쪽을 순시하다가 창오(蒼梧)에서 세상을 떠났다.
- 6)『제왕세기(帝王世紀)』에는 “순임금 시절에… 곤륜(崑崙)의 북쪽에 옥산(玉山)의 신이 있었는데… 이름하여 서왕모(西王母)라고 한다. 순임금의 덕을 흠모하여 백환(白環)을 헌상하고 익지(益地)의 지도를 바쳤다”라고 하였다.
- 7)구주란 기(冀)ㆍ연(兗)ㆍ청(靑)ㆍ서(徐)ㆍ양(揚)ㆍ형(荊)ㆍ예(豫)ㆍ양(梁)ㆍ옹(雝)의 아홉 땅을 말한다. (『상서(尙書)』 「우공편(禹貢篇)」)
- 8)제왕이 새 왕조를 열고 새로 반포하는 역법(曆法)을 말한다. 고대에는 왕조가 바뀌면 반드시 정삭을 고쳤다. 한무제 이후 지금까지는 하(夏)나라의 제도를 쓰고 있는데 하나라의 정월은 지금의 음력 정월이다. 여기에서는 대당력(大唐曆)을 말한다.
- 9)범어 sahā의 음역으로 인(忍)ㆍ감인(堪忍)ㆍ능인(能忍)이라 번역한다. 석존이 나신 이 세상, 곧 이 땅의 중생은 여러 가지 번뇌를 참고 나가야 하고 또 성자들은 여기서 피곤함을 참고 교화를 해야 하므로 이 세상을 ‘감인(堪忍)’이라 한다. 처음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염부제(閻浮提)의 뜻으로 썼지만 뒤에는 석가불의 교화가 삼천대천세계에 미친다고 생각하여 백억의 수미산세계를 총칭해서 사바라 하며, 따라서 석존은 사바의 본사(本師)라 한다.
- 10)수미산을 중심으로 그 주위에 네 개의 대주(大洲)가 있고, 그 둘레에 9산(山)과 8해(海)가 있는데 이것이 우리들이 사는 세계로 하나의 소(小)세계라 한다. 위로는 색계의 초선천에서부터 아래로는 큰 지하의 풍륜(風輪)까지 이르는 범위를 말한다. 이 세계 가운데는 해ㆍ달ㆍ수미산ㆍ4천하ㆍ사천왕ㆍ33천ㆍ야마천ㆍ도솔천ㆍ태화자재천 등을 포함한다. 이 한 세계를 천 개를 모은 것은 중천(中天)세계, 중천세계를 다시 천 개 합한 것을 대천(大天)세계라 한다. 이 대천세계는 천 개를 3회 합한 것이며, 소ㆍ중ㆍ대의 3종의 천(千)세계가 되므로, 삼천세계, 또는 삼천대천세계라 한다. 삼천(三千)의 세계라는 의미가 아니라, 천(千)의 삼승(三乘)의 수(數)가 세계라는 의미이다.
- 11)범어로는 Sumeru-parvata이다. 4주(洲) 세계의 중앙인 금륜(金輪) 위에 우뚝 솟은 높은 산이다. 이 산의 주위에 7산(山) 8해(海)가 있고 또한 철위산이 둘러있으며, 물 위에 보이는 것이 8만 유순이고, 물 속에 잠긴 것이 8만 유순이라고 한다. 꼭대기는 제석천(帝釋天), 중턱은 4왕천(王天)의 주처(住處)라 한다.
- 12)고대 인도의 우주론에서 세계 최하위인 허공(虛空) 위에 풍륜(風輪)이 있고, 그 위에 수륜(水輪), 그 위에는 금륜(金輪)이 있다고 한다. 금성지륜(金性地輪) 혹은 단순히 지륜(地輪)이라고도 한다. 산이나 바다나 섬은 이 금륜상에 존재한다고 한다. 금륜의 최하단을 금륜제(金輪際)라 한다.
- 13)달고[甘], 차고[冷], 따뜻하고[輭], 가볍고[輕], 청정하고[淸淨], 냄새나지 않으며[不臭], 마실 때 목을 자극하지 않고[飮時不損喉], 마시고 난 뒤에 배앓이를 하지 않는[飮已不傷腹] 여덟 가지의 특성을 지닌 공덕수(功德水)를 말한다.
- 14)전륜성왕(轉輪聖王)의 약칭이다. 몸에 여래의 32상을 갖추고 하늘에서 윤보(輪寶)를 감득(感得)하여 즉위하며 이 왕이 나아가는 곳마다 윤보가 앞에서 굴러 땅을 고르고 4방을 위엄으로 정복하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한다.
- 15)원문에 지(地)로 되어 있으나 지(池)의 오자로 생각된다. 『대당서역기교주』에 보면 『고본(古本)』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다고 한다.
- 16)아뇩달지는 범어로 Anavatapta이다. 긍가(殑伽)ㆍ신도(信圖)ㆍ박추(縛芻)ㆍ사다(徙多)의 네 강의 근원이다. 설산의 북쪽, 향취산의 남쪽에 있다. 혹은 히말라야 산중의 항하(恒河)의 수원(水源)을 가리키기도 하고 서장의 모나사루완호(湖)를 말한 것이라고도 하나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 17)향산은 향취산(香醉山) 또는 향적산(香積山)으로도 번역한다. 지금의 히말라야산 속에 있는 마나사 호수 북안(北岸)에 솟아있는 카일라사산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 18)히말라야산을 가리킨다.
- 19)수정(水晶)을 말한다.
- 20)보살 수행의 차례를 52가지로 분류할 때, 그 중 제41위(位)에서 50위까지를 10지(地)라고 하는데, 8지는 그 중 여덟 번째에 해당한다.
- 21)지금의 갠지스강을 가리킨다.
- 22)인더스강을 가리킨다.
- 23)지금의 암 다리야를 가리킨다.
- 24)지금의 얄칸드강을 가리킨다. 본서(本書) 제12권에는 사다하에 인접해 있거나 그 원류(源流)에 대한 내용이 설명되어 있다.
- 25)청해성(靑海省)의 아무네 마틴산맥이라고 이야기되고 있다. 황하의 원천에 대해 『산해경(山海經)』 등에서는 곤륜(崑崙)이라고 하고 장건(張騫)은 우전하(于闐河)로 여기고 있으며, 당대(唐代)의 『현응음의(玄應音義)』 권24, 『혜림음의(慧琳音義)』 권39 등에서는 사다하를 황하의 원천으로 보고 있다.
- 26)왼쪽 섶을 오른쪽 섶 앞으로 하여 옷을 입는 것을 말한다. 즉 오랑캐의 옷 입는 방식을 뜻하며, ‘야만의 풍속’ 또는 ‘야만의 나라’를 이르기도 한다.
- 27)자로가 “위나라 군주가 선생을 기다려 정사를 하려고 하십니다. 선생께서는 장차 무엇을 우선 하시렵니까”라고 묻자 공자는 “반드시 명분을 바로잡겠다”라고 말하였다[子路曰, 衛君待子而爲政, 子將奚先? 子曰, 必也正名乎!]. (『論語』「子路」)
- 28)세상에 나가 도를 행하는 일과 물러나서 숨는 일을 말한다. “공자께서 안연에게 일러 말씀하셨다. ‘써주면 도를 행하고 버리면 은둔하는 것이다. 오직 나와 너만이 이것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用之則行, 舍之則藏, 惟我與爾有是夫]. (『論語』「述而」)
- 29)감숙성 돈황의 서쪽에 있는 관문 이름으로 한나라 무제 때 설치되었고 서역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이다.
- 30)권1의 범연나(梵衍那)로부터 가필시(迦畢試)에 이르기 위해 건너야 되는 산, 아프가니스탄의 중앙부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산맥으로서, 동북동(東北東)으로 힌두쿠시와 연결된다. 고대 그리이스 문헌에 등장하는 파로파미소스(Paropamisos)일 것으로 추측된다. 이곳의 이북(以北)은 호족(胡族)이며, 이남(以南)은 인도로 들어가는 곳이어서 경계가 되고 있다.
- 31)과부로 지내면서 개가하지 않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귀를 자른다[截耳]는 말은 양(梁)나라 위경유(衛敬瑜)의 아내인 왕씨가 귀를 잘라서 개가(改家)하지 않을 것을 맹세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 32)지금의 신강성(新彊省) 토로번(吐魯番:투르판) 동남동에 위치한 객라화탁(喀喇和卓:카라코쟈)이다. ‘고창’이라는 명칭은 후한시대부터 보인다. 고창국의 왕 국씨(麴氏)는 현장이 돌아가는 길에 방문한 뒤인 정관(貞觀) 14년(640)에 태종에 의해 멸하였다. 이곳에서 옛 땅이라고 한 것은 그것을 의미한다. 또한 고창은 예로부터 한인(漢人)이나 한문화(漢文化)의 세력권이었기 때문에 현장은 『대당서역기』의 기술을 무엇보다도 먼저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 시작하였던 것이다. 장안(長安)으로부터 고창에 이르는 도중의 기록은 『자은전(慈恩傳)』에 자세하게 실려있다.
- 33)지금의 카라샤르 지방이다. 천산(天山)에서 흘러내리는 해도하(海都河)가 바그라시쿨(Bagrash-kul)로 들어가는 지대를 차지하고 있다. ‘아기니’라는 말의 의미는 ‘땅 끝의 나라, 변경국’이라는 설과 ‘아그니(agni:불, 또는 불의 신)’를 의미한다고 하는 설이 있다.
- 34)대추의 일종이다.
- 35)원문에는 증견(繒絹)이라고 되어있으나 『釋帖』 등에 의하면 증감(增減)으로 되어있다.
- 36)소승 20부파 가운데 하나로서, 또는 살바다부(薩婆多部)ㆍ설인부(說因部)ㆍ유부(有部)라고도 한다. 근본상좌부(根本上座部)로부터 분파하였다. 근본상좌부가 경과 율을 주로 하고 있는 것에 비해서 설일체유부는 논(論)을 주로 하고 있으며, 대비바사(大毘婆沙)ㆍ6족(足)ㆍ발지(發智)ㆍ구사(俱舍)와 같은 논에 의한 교의를 취하고 있다.
- 37)3정(淨)이라고 하는데 소승의 계율에서 비구가 먹을 수 있도록 허락된 육류(肉類)로서, 첫째는 자신(비구)을 위해서 그 동물을 죽이는 것을 보지 않은 것, 둘째는 자신을 위해서 죽였다고 듣지 않은 것, 셋째는 자신을 위해서 죽인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가지 않은 것이다.
- 38)대승돈교(大乘頓敎)와 대비해서 차례로 단계를 거쳐서 깨달음에 이르는 소승교의 가르침을 말한다.
- 39)지금의 고차(庫車:쿠챠, Kuchā)지방이다. 또는 구자(龜玆)ㆍ구자(丘玆)ㆍ굴자(屈玆)ㆍ굴자(屈茨)ㆍ구자(邱玆)ㆍ고차(苦叉)ㆍ고선(苦先)ㆍ곡선(曲先)ㆍ구지낭(俱支囊) 등으로 표기된다.
- 40)원래는 마혜수벌라(摩醯首伐羅:Maheśvara) 즉 대자재천(大自在天)을 제사지내는 사당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 굴지국의 천사는 조로아스터교의 그것을 가리키는 것 같다.
- 41)원문에는 선지(先志)라고 되어있는데 『고본(古本)』에는 기구(耆舊)라고 되어있다.
- 42)『당서(唐書)』 「구자전(龜玆傳)」에 당나라 태종(太宗)과 같은 시대에 구자왕 ‘소벌첩(蘇伐疊)’(618~630 연간에 즉위하여 644~647 연간에 사망)의 아버지로서 ‘소벌발사(蘇伐勃駛)’라고 하는 왕이 있었던 것을 기록하고 있다. 뒤의 내용에서 등장하는 돌궐족을 끌어들였다는 왕은 바로 소벌첩이고, 금화왕은 바로 그 부왕이었던 소벌발사를 말한다.
- 43)6세기 중엽 알타이산맥 부근에서 일어나 유목민족으로 6세기에서 8세기까지 중국 북방의 광대한 지역에서 세력을 떨쳤다.
- 44)이 가람은 현재의 고차(庫車)의 북북동쪽으로 약 2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소파십(蘇巴什, Subash) 부근, 동창하(銅廠河)의 동서 양안(兩岸)에 있는 사적(寺跡)이라고 한다. 현장은 이 가람 이름에 대해서 아무런 설명도 하고 있지 않지만 펠리오는 가니색가왕(迦膩色迦王)이 소월지(小月氏) 사람인 점에서 이 절 이름을 토화라(吐火羅, Tochara)어로 해석하여 ‘작리(雀離) 조호리(照怙釐)’와 같은 음을 생각하고 있다. 의미는 ‘탑ㆍ사원’이다.
- 45)이른바 ‘불족석(佛足石)’이다. 석가모니의 발바닥 모양을 돌에 새기고 천폭륜상(千輻輪相) 등의 발바닥 무늬를 표현한 것을 말한다. 부처님께서 유행하고 법륜을 굴리셨던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불상이 나타나기 이전부터 존승되어왔다.
- 46)반사우슬(般闍于瑟)ㆍ반차파슬(般遮婆瑟)ㆍ반차월사(般遮越師)ㆍ무차회(無遮會)라고도 한다. 5년마다 도속(道俗)이나 빈부를 가리지 않고 대중을 공양하는 재회(齋會)이다.
- 47)불상을 안치한 가마나 수레를 끌고 수많은 사람들을 친견하게 하면서 사람들의 죄를 없애주는 행사이다. 이 ‘행상’은 생전의 부처님께서 걸어다니는 모습을 친견한 사람들은 과거 천겁(千劫)의 지극히 무거운 악업의 죄까지도 없앨 수 있다고 하는 견해를 부연한 『관불삼매해경(觀佛三昧海經)』 권6에 의한 것으로 생각된다. 대체로 부처님 탄신일에 거행된다. 중국 북위시대에 행해진 이 행사의 상황에 대해서는 『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 속에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법현전(法顯傳)』에는, 인도의 행사로서는 중인도 마갈국(摩竭國) 파련불성(巴連弗城)의 행사, 서역의 것으로서는 우전국(于闐國)의 행사 모습을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 48)48)이 가람은 지금은 고목토납(庫木土拉, Kumtura)의 건너편 언덕에 있는 Duldra- Aqur로 불리고 있는 폐지(廢址)로 추정되고 있다. 펠리오는 이곳에서 ‘서고(書庫)’를 발굴하여 대량의 브라흐미 문서와 그 밖의 것을 수집하였으며, 이로써 서(西)토칼리어, 즉 고차어(庫車語) 해명의 단서를 잡았던 곳이다.
- 49)음식ㆍ의복ㆍ의약ㆍ침구 등 일상 생활에 소비되는 네 가지 공양을 말한다.
- 50)구칭(舊稱)인 고묵(姑墨)ㆍ극묵(亟墨)은 한(漢)나라에서부터 보이던 이름인데, 뜻은 모래ㆍ사진(砂塵)이다.
- 51)이 지방 일대는 수많은 작은 하천이 합해져서 아극소(阿克蘇)강이 되며, 이 강이 탑리목(塔里木, 타림)강으로 흘러드는 위치에 있으며 따라서 토지는 비옥하여 농업과 목축도 매우 번성하다. 『통전(通典)』에 의하면 동ㆍ철ㆍ유황 등의 광산물도 생산되고 또 기후도 온화하여 인근에서 가장 부유한 지방으로 꼽히는 곳이다.
- 52)문자는 구자국(龜玆國)과 똑같은 이른바 Slanting Brahmi Script이며, 언어도 서(西)토칼라어인데 구자국에 비하면 다소 방언적인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 53)빙산(氷山)의 뜻이다. 오늘날 아극소(阿克蘇) 북방에 솟아있는 천산산맥의 주봉(主峰)인 6,995미터의 칸텡그리(Khantengri)봉과 7,439미터의 포베다(Pobeda) 봉 등이 언제나 빙설을 이고 있으며 대빙하가 흐르고 있어 이 산맥을 가리키는 것은 틀림없지만 이곳을 어느 통로로 넘었는가에 대해서는 이론이 있다. 아극소 부근으로부터 이 산을 넘는 통로로 예로부터 유명한 곳이 두 곳 있는데, 하나는 아극소 북방의 산간을 통하는 3,630미터의 ‘무차르트 다완(Muzart Dawan)’으로서 도중에 백룡(白龍)과 흑룡(黑龍)의 두 산 사이의 얼음이 언 길을 지나야 하는 지극히 험난한 길이며, 또 하나의 길은 아극소의 서쪽 80킬로미터에 위치한 오십(烏什) Uch-Turfan 근방으로부터 서북쪽으로 산길을 지나야 하는 4,280미터의 ‘베델(Bedel)고개’이다.
- 54)이 4백여 리의 험난한 산길을 현장은 “7일이 지나서야 비로서 산을 지났다. 도반들 가운데 얼어죽은 사람이 13~14명이고 소나 말의 피해는 더욱 심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자은전(慈恩傳)』_
- 55)지금의 이시크 쿠르호수를 가리킨다. 천산산맥 북쪽에 있으며 북쪽으로는 Kungey Alatau, 남쪽으로는 Cherskey Alatau의 두 산맥 사이에 있는 지역에 있다. 깊이 720미터, 둘레 약 500킬로미터에 달하며, 약 80개의 작은 하천이 유입하며 물이 빠져나갈 배수구가 없는 염호(鹽湖)이다.
- 56)『자은전』에는 ‘소엽성(素葉城)’이라고 되어있다. 이 도시는 Frunze의 동쪽 약 40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 오아시스 도시인 투크마크 근방으로 추정되고 있다. 10세기에도 2만 명의 전사(戰士)가 있었다고 할 정도로 커다란 부락이다. 현장이 방문할 당시 돌궐의 엽호가한(葉護可汗, Yabgu qaghan)은 구자국 북방의 Yulduz 계곡으로부터 이 지방으로 그 왕정(王庭)을 옮겼다. 그 세력이 매우 강력하여서 중앙아시아를 넓게 영유(領有)하였는데 남쪽으로는 가필시국까지 세력권 내에 두었다. 현장이 타림분지로부터 곧바로 파미르를 넘어서 입축(入竺)하지 않고 부득이 우회로를 택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이 극한 아래에서 서역 제국을 여행할 때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함이었다고 생각된다. 단, 이 극한은 현장을 만난 직후에 살해되고 서돌궐(西突厥)마저도 결국은 당나라 고종에게 토멸되었다(657). 『자은전』에는 현장을 만났을 때의 광경 등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한어(漢語)와 기타 여러 나라 말에 능통한 소년을 선발하여 가필시국까지 현장을 배웅하게 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 57)다음 항목에 등장할 소그드인들을 중심으로 한 상인 무리들을 가리킨다. 이 지역은 천산 북로를 Semirechye를 통과해서 서쪽으로 가는 무역로(貿易路), 서방에서 몽고 등 동쪽으로 가는 무역로, 중국에서 현장이 지나왔던 무역로가 서로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한 국제적인 상업도시였으며, 서돌궐의 왕정(王庭)이 천산의 북쪽으로부터 이 지역으로 서천(西遷)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 58)동양사에 있어 유명한 Soghdiana이다. 통칭 Soghd, Soghdian이라 불리는 것은 Oxus(암 다리야)와 Jaxartes(실 다리야)의 두 개의 큰 강 사이에 있는 지역으로서, 브하라ㆍ사마르칸드를 하안(河岸)으로 갖는 소그드(Zaravshan)강과 KishㆍNasaf를 갖는 Kashka darya(이 두 강은 모두 사막 속으로 사라진다)에 의한 비옥한 지방을 가리키는 것이다. 하지만 멀리 동북쪽의 소엽성(素葉城)까지 포함하여 현장이 소리(窣利)의 땅이라고 하고 있는 것은 당시 상업 무역로에 놓여 있었던 까닭에 소그드인이 많은 상업 식민지를 형성하고 있었던 상황에 의한 것으로 추측된다. 예전에는 속익(粟弋)[『後漢書』]ㆍ속특(粟特)[『北史』] 등으로 표기되었으며, 당대(唐代)에는 속리(速利)[『南海寄歸內法傳』]ㆍ소리(蘇哩)[『梵語雜名』]ㆍ손린(孫鄰)[『梵語千字文』] 등으로 표기되고 있다.
- 59)소그드인은 이란계 민족으로 9세기 최전성기에 달해 있었으며 동(東)투르키스탄으로부터 몽고와 중국 본토로까지 거주하는 자가 많았고, 그 언어는 일종의 국제어로까지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결국 13세기 초엽에 징기스칸의 침입에 의해 거의 근절되기에 이르러 지금은 겨우 러시아 영토인 Tadjikstan의 Yagnob강 유역지방으로 피난을 간 자들의 자손들만이 살아남았다. 소그드 문자는 시리아의 아람 문자를 기반으로 한 문자이며, 그 소그드 문자로부터 위그루 문자가 안출(案出)되었다. 보통 횡서로 쓰여지는데 현장이 말하는 것처럼 세로 읽기도 사용되고 있었다.
- 60)『자은전』에는 “이곳에서 서쪽으로 4백여 리 가면 병률(屛律)에 도착한다. 이곳에서는 천천(千泉)이라고 부른다. 땅은 4방 수백 리에 달하며 연못이 많고 또한 기이한 나무들이 우람하며 숲이 깊어서 청량하다. 즉, 극한(可汗)의 피서지였던 곳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 61)몽고어로 왕(王)을 뜻한다. 한(汗, Khan)은 극한의 준말이며 중국 서역에 있던 연연(礝礝)ㆍ돌궐(突厥)ㆍ회흘(回紇) 등 아시아 종족의 군주의 칭호이다.
- 62)『자은전』에는 ‘사(私)’를 ‘사(斯)’로 표기하고 있다. 『전한서(前漢書)』 「진탕전(陳湯傳)」에 등장하는 도뢰(都賴)로서, 지금의 Talas 강의 굴곡점(屈曲點)에 있는 Dzhambul의 근방에 그 폐지(廢址)가 있다. 당나라 천보(天寶) 10년(751) 고선지(高仙芝)가 대식(大食)과 싸워서 크게 패한 곳이다. (현재 Talas라 불리고 있는 도시는 이 Talas 강 상류의 Dzhambul로부터 동남동쪽으로 약 80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 있다.) 이슬람시대에 가장 번영하였던 곳이다. 이 지역도 소그드의 식민지였으며 최근 1936년과 1938년에 구소련의 손에 의해서 고고학적 조사가 이루어졌다.
- 63)달라사성 근방에 거주하는 중국인에 대해서는 『자치통감(資治通鑑)』 권193 「당기(唐紀)」, 태종 정관 5년(631)조(條)에, “수나라 말기에 수많은 중국인들이 돌궐족들에게 살해되었다. 그 후 돌궐이 항복하자 천자가 사신을 시켜서 금백(金帛)으로써 속죄하게 하였다. 5월 을축(乙丑), 관리의 상소가 있어 남녀 8만 가구를 얻었다”고 되어있다. 달라사 근방의 중국인도 여기에 포함되고 있었던 것 같다.
- 64)달라사(Dzhambul)로부터 남남서쪽으로 약 170킬로미터 가면 티무켄트시(市)에 도착한다. 백수성을 이 근방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11세기 초엽의 서적인 Mahmũd Al-Kāshgharī의 투르크어 사전을 비롯하여 근래의 많은 사람들은 티무켄트의 동쪽 약 15킬로미터에 위치한 Sayram을 지목하고 있다. Sayram은 중세 이슬람 시대에는 Isfidjab 또는 Ispījāb(‘白水’라는 뜻의 아라비아어)로 불리고 있어서 몽고 침입 후에 Sayram으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이에 비해서 티무켄트의 동북쪽으로 약 26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Mankent가 Ak-su(‘白水’라는 뜻의 투르크어)로도 불리고 있었던 까닭에 현장이 말하는 백수성을 이 Mankent라고 보는 사람도 있지만, 이 Mankent를 Ak-su로 보는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는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 65)공어(恭御)의 원래 지명을 자세하게는 알 수 없지만 본서(本書) 권 10에 등장하는 ‘고어타(恭御陀)’의 국명이 Koṅgoda(이 이름은 비명에도 나타나는 확실한 것이다)인 점으로 비추어 본다면 지금의 ‘공어’도 Koṅgo에 가까운 발음이었을 것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이 지방 일대는 성곽도시가 대단히 많이 있어서 그 하나하나가 현재 어느 곳에 해당하는지는 도저히 추정할 수 없다.
- 66)Nūjkand라고 하는데 분명하게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아마 중세 이슬람 문헌에 나타나는 Nūjkath, Nūjakath일 것으로 추측된다. 만약 그렇다면 실 다리야로 흘러드는 Chirchik강의 상류이며, 많은 작은 물줄기를 분출하는 지점인 Chirchik을 말하는 것이며, 타쉬켄트의 북동쪽 약 30킬로미터 떨어진 요지(要地)이다. 토지의 조건은 현장의 기술과 아주 비슷하다. 하지만 방위나 거리에 관해서는 다소 의문점이 있다.
- 67)옛날에는 자설(者舌)[『위서(魏書)』 서역전(西域傳)], 수나라와 당나라 시대에는 자지(柘支)라고도 표기하였다. 원대(元代)에는 찰적(察赤)이라고도 썼다. 중세 이슬람 문헌에는 지방명에나 도시명에 모두 사용되었다. 도시명으로서는 지금의 타쉬켄트Tashkent에 해당된다. 중세에는 Yaxartes(실 다리야) 이북에 위치한 최대의 도시였다고 한다.
- 68)약살수(藥殺水)[『수서(隋書)』, 『신당서(新唐書)』 지리지(地理志)]ㆍ엽엽천(葉葉川)[『자은전』]이라고도 표기한다.
- 69)발한(㤄捍)은 파낙나(破洛那)ㆍ발한나(拔汗那)[『위서』]ㆍ발한(沛汗)[『수서』]ㆍ발하나(跋賀那)[『혜초전(慧超傳)』ㆍ『혜림음의(慧琳音義)』]ㆍ발한(鏺汗)[『신당서』]으로도 표기한다. 서방의 문헌에 페르가나(Ferghāna)로 보이는 것에 대응한다. 옛날에는 대완국(大宛國)[『사기』ㆍ『한서(漢書)』ㆍ『진서(晉書)』]라고 하였는데 ‘대완’이라는 명칭에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어서 단정지어 논할 만한 것은 없다.
- 70)현장이 전해들은 것에 지나지 않는 말이기 때문에 깊이 논의할 것은 아니겠지만 페르가나는 본래 이란계 민족이 살고 있었던 곳 같다. 알렉산더 대왕도 이 지역을 침입하지는 않았다. 다만 쿠샨 왕조가 이 지역을 병탄하였지만 인종적으로는 거의 같은 계열이라고 보여지기 때문에 커다란 변화를 보였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한대(漢代)의 기사에 의하면, “대완(大宛)으로부터 이서(以西)쪽으로 하여 안식(安息)에 이르기까지는 나라마다 상당히 언어를 달리하고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풍속을 함께 하고 있어서 서로의 언어를 알고 있다. 그 나라 사람들은 모두 심안(深眼)이며 수염이 많이 자라고 장사에 능하며 아주 사소한 이익에도 다툰다. 풍속으로는 여자를 귀하게 여겨서 여자가 말하는 바에 따라 사람들은 곧 일의 옳고 그름을 결정짓는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 71)범어로는 sutrsna라고 한다. 『신당서(新唐書)』 「서역전(西域傳)」에, 이곳은 “또는 솔도사나(率都沙那)ㆍ소대사나(蘇對沙那)ㆍ겁포달나(劫布呾那)ㆍ소도식닉(蘇都識匿)이라고도 한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 72)현재의 사마르칸트 지역이다. 옛날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점령되어 파괴되었으며(기원전 329년), 그리이스 로마의 『지지(地誌)』에서는 “소그디아나의 일부의 수도 Maracanda”라는 이름으로 전해졌는데, 그 후 5세기 경까지는 사서(史書)에 이름이 등장하지 않았다. 한(漢)나라 전적에는 실만근(悉萬斤)[『위서』]ㆍ살말건(薩末鞬)[『신당서』]로도 표기되고 있으며 또한 강국(康國)[『수서(隋書)』ㆍ『신당서』]으로도 약칭되었다. 삽말건국(사마르칸트)에는 배화교(拜火敎)가 성행하고 있어서 불교 사원에도 승려가 살고 있지 않을 정도였다.
- 73)이른바 ‘구성소무(九姓昭武) Cub씨(氏)’의 본래 집안이며, 『당서(唐書)』 「강국전(康國傳)」 등에서는 ‘본래 월지인(月氏人)’으로 투르크계처럼 기록하고 있으며 그 왕의 성은 온(溫)이라고 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백성은 이란계 소그드인이다. 수대(隋代)에 돌궐에게 복속되었지만 서돌궐의 멸망 후 정관 5년(631)에는 당나라에 조공을 바쳤다.
- 74)『신당서(新唐書)』 「서역전(西域傳)」 안국(安國) Bukhara 항목에 “용감하고 강건한 자를 모아서 자갈(柘羯)을 이루었다. 자갈이란 중국에서 전사(戰士)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사람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때의 자갈(柘羯)은 자갈(赭羯)과 같은 말이다.
- 75)『자은전』에는 기재되어 있지 않으며 현장이 답사한 곳이 아니라 전해들은 나라이다. 미말하는 서방의 문헌에서 보이는 māymurgh, 즉 사마르칸트에서 약 3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 있는 나라이다.
- 76)범어로는 Kaputâna이라 한다. 이 나라도 『자은전』의 여정에는 실려 있지 않다. 따라서 앞의 항목 끝 부분에 ‘이곳으로부터 북쪽으로 가면’이라는 표현의 ‘이곳으로부터’라고 방향을 제시한 기점은 사마르칸트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 77)귀상닉(貴霜匿)[『당서(唐書)』]이라고도 표기된다. 서방문헌에서 말하는 kushānīya를 말하며, 사마르칸트의 서북쪽으로 약 40킬로미터 남짓 떨어진 지점으로 추측되며 또는 사마르칸트의 서북쪽으로 약 백 킬로미터 떨어진 Panj-shamba지방이라고도 추측하고 있다.
- 78)갈한국은 『당서』 「서역전(西域傳)」에 “동안(東安) 또는 소국(小國)이라고 하며 갈한(喝汗)이라고 하며 서방 문헌에서 Kharghānkath라고 표기하는 나라를 말한다. 나밀수(那密水, 이란어로 영예(榮譽)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Zaravshan강을 가리킨다)의 북쪽에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 79)위(魏)나라 때의 옛 지명은 육밀(忸密)[『당서』]이라고 하고, 또는 부화(副貨)[『위서』ㆍ『북사(北史)』], 포활(布豁)[『당서』]라고도 표기하였다.
- 80)중안국(中安國)ㆍ동안국(東安國)ㆍ서안국(西安國)의 안(安)은 “안국(安國)은 한(漢)나라 때의 안식국(安息國)이다”(『수서(隋書)』)라고 되어있는 것처럼 고명(古名)의 생략형이다.
- 81)본래의 이름이나 위치 등은 모두 미상이다.
- 82)서방 문헌에서 보이는 Chōrasmia, Khwārizm이다. 호사밀(呼似密)[『위서』]ㆍ화사미(火辭彌)[『신당서』 파사전(波斯傳)]ㆍ화심(火尋)ㆍ화리습미(貨利習彌)ㆍ과리(過利)[『신당서』 강국전(康國傳)]등으로 표기된다. 지금의 Khiva(암 다리야강의 서안)이라고 하는 설이 있다. 이 지방은 본래 페르시아쪽의 Jurjāniyah와 쿠르트 쪽의 Kath의 두 지구로 나뉘어졌는데 10세기 경까지는 Kath쪽이 중심이 되었다.
- 83)7세기 화리습미가국의 언어는 Khwārizm어라고 하여, 중기 이란어의 동부어군(東部語群)에 속하며, 소그드어나 동(東)투르키스탄의 Saka-khotanese 등과 근연(近緣) 관계에 있다. 오늘날 전해지는 자료는 많지는 않지만 구 소련의 조사대가 상당히 많은 수의 나무나 종이에 쓰여진 경제 관계 문서를 수집하였다.
- 84)아라비아 자료의 Kaṣṣārin, ‘Kaṣṣābīn, 그리고 페르시아 자료의 Kazurān, Kaṣṣābān에 해당하는 국명이다. 걸사(乞史)ㆍ거사(佉沙)[『당서』]로도 표기한다. 13세기 아라비아 자료에 의하면 또한 Kish, 새로운 철자로는 Kesh라고도 쓰고 있다. 사마르칸트의 남남서쪽으로 약 6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으며 2일간의 여정에 맞는 지점에 있다.
- 85)철문(鐵門)에 관한 내용은 『당서』 「서역전(西域傳)」 강국조(康國條)와 『자은전』에도 보이지만 후대의 기사로는 15세기의 클라비호의 기사도 상세하다. 그것에 의하면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옛날에는 실제로 철로 덮여진 커다란 관소(關所)의 문이 있었으며 그 절벽 사이에 난 길은 폐쇄되어 있어서 아무도 허가가 없이는 다닐 수 없었다고 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철문의 상황에 관한 역사상 최초의 기사는 바로 이 『대당서역기』일 것이다.
- 86)86)) 범어 문헌에는 Tukhāra, 그리이스어 문헌에는 Tochari로 기록되어 있다. 옛날 한(漢)나라 전적에는 두거륵(兜佉勒)[도안(道安),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ㆍ두거라(兜呿羅)[나집(羅什), 『대지도론(大智度論)』]ㆍ두사라(兜沙羅)[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 『잡아함경(雜阿含經)』]ㆍ토호라(吐呼羅)[『위서(魏書)』]ㆍ토화라(吐火羅)[『수서(隋書)』, 『북사(北史)』, 『당서(唐書)』]ㆍ토활라(土豁羅)[『신당서(新唐書)』]라고 표기하고 있다.
- 87)페르시아를 말한다.
- 88)이 지방은 한(漢)의 장건(張騫)이 다녀갔을 때의 박트리아[大夏] 왕조 이래, 원주민인 이란족은 대월지(大月氏)ㆍ귀상제국(貴霜帝國:쿠샨)ㆍ엽달족(嚈噠族:에프탈)ㆍ돌궐 등의 이민족에 의해 잇달아 정복되었다.
- 89)이 도화라국의 언어는 타림분지의 천산산맥 남쪽 기슭에서 쓰여졌던 이른바 토카리어(Tokharian)와는 관계가 없다. 이 지역의 언어는 이란어에 속하는 것이다. 이 지방에서는 글레코 박트리아기(期) 이래 그리이스어와 그리이스 문자가 쓰여지고 있으며 귀상(貴霜) 왕조에서는 크샨어도 그리이스 문자로 쓰고 있었다. 이 지방의 그리이스어는 일찍부터 사용되고 있지는 않았던 것 같지만 그리이스 문자는 광대한 지역에 걸쳐서 엽달기(嚈噠期)까지 그 화폐의 문자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곳에서는 통상의 그리이스 알파벳 24문자와 sh의 음가(音價)를 가진 것으로 생각되는 특별한 문자 하나를 합해서 도합 25문자가 보인다. 현장이 지적하고 있는 것은 이것으로 생각된다.
- 90)오늘날 구소련의 국경에 위치하고 있으며 암 다리야강을 남쪽으로 건너면 아프가니스탄 영토이다. 오늘날 지도상의 테르메즈(Termez, Tirmid)지역이다. 이곳은 이 지방에 있어 교통의 요충지에 해당하는 가장 중요한 도성이며 엄중한 성곽으로 에워싸여져 있었다고 이슬람의 지리학자는 전하고 있다. 몽고군의 파괴 후 신시가지는 구시가지의 북쪽 2마일 떨어진 곳에 만들어졌다.
- 91)전해들은 나라[傳聞國]이다.
- 92)역시 전해들은 나라이다.
- 93)‘해소’에 대한 원음(原音)은 미상이다. 돌궐의 종족명이라는 것 외에 달리 설명을 찾을 수 없다.
- 94)역시 전해들은 나라이며, ‘수만’은 이슬람의 지리학자가 밝힌 Shumān이며, 타지크공화국의 수도인 스탈리나바드(이전의 두샴베)로 추정된다.
- 95)전해들은 나라이다.
- 96)전해들은 나라이다.
- 97)전해들은 나라이다.
- 98)전해들은 나라이다. 이 나라는 프톨레미(Ptolemy)의 지리서(地理書)에 기록되어 있는 Komēdōn oreinē이며, 고대로부터 비단 무역통상로의 중요 지점이었다. 지금의 펀잡(암 다리야 강 상류)의 Darwāz 지방에 해당한다.
- 99)달마실철제국 이하 안달라박국까지의 13국에 대해서는 본서(本書) 제12권에 등장하고 있는데, 이 나라들은 전부 도화라국의 옛 땅이다.
- 100)『대당서역기』의 고본(古本)에는 방주(傍注)로서 ‘자은전야(慈恩傳也)’라고 되어 있는 것 같은데, 『대당서역기』보다 늦게 찬술된 『자은전』을 인용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따라서 ‘회기’라는 말은 ‘귀로(歸路)에 관한 기사(記事)’의 뜻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 101)101)) 전해들은 나라이다. 지금의 쿤 두즈의 서남쪽 약 60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으로, 쿤 두즈강의 하곡(河谷) 안에 Baghlān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이 명칭은 또한 그 지방의 이름으로도 사용하고 있다.
- 102)전해들은 나라이다. 이 나라에 관해서는 여러 서적에서 적당한 설명을 찾아내지 못하였다. 어쩌면 이 국명은 흘로국(紇露國)과 실민건국(悉泯健國)의 두 나라의 이름을 현장이 전해들은 그대로 하나의 나라로써 표기하였거나 또는 두 나라의 이름을 한 나라의 이름으로 묶어서 부르는 호칭법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 103)『자은전』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아마 전해들은 나라인 것 같지만, 이 지역은 현장이 답사한 활국(活國)으로부터 박갈국(縛喝國)으로 통하는 길 중간에 위치해 있으며 따라서 당연히 이 지역을 통과했을 것이다. 오늘날의 Tashkurgan 북교(北郊)에 있는 폐지(廢址)가 옛날의 Khulm이다.
- 104)고대의 박트리아, 지금의 Balkh이다. 한(漢)나라 문헌에는 예로부터 발저정(拔底廷)ㆍ박저정(縛底廷)ㆍ박저야(縛底耶)ㆍ박제(薄提)ㆍ박질(縛叱) 등으로 표기되어 왔다. 『자은전』에 의하면 현장은 박추강을 건너서 먼저 활국(活國)에 도착하였다. 활국은 돌궐의 엽호극한(葉護可汗)의 장자(長子)인 달도설(呾度設, 設은 관직명이다)이 살던 곳으로 이 사람은 고창왕(高昌王)의 매제(妹弟)였는데 현장은 이곳에 고창왕의 서신을 전달하였다. 뒤이어 달도설이 죽자 새로운 설(設)의 권유로 현장은 박갈국을 방문하기로 하였다.
- 105)이 나라의 불교는 기원전 3세기 아쇼카왕으로부터 시작해서 기원후 2세기 카니시카왕에 의해 성행되었다.
- 106)범어로는 nava-vihāra이며 신사원(新寺院)이라는 뜻이다. 『서역구법고승전(西域求法高僧傳)』에는 납바비하라(納婆毗訶羅)라고 표기되어 있다. 이슬람 지리서에도 이 사원을 nau-vihār라고 하고 있으며, 그 유적지와 불상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다.
- 107)불교의 이치를 깊이 연구한 논서를 지은 학자들을 가리키며 『자은전』에 의하면 현장이 이 나라를 방문하였을 때 소승학자인 반야갈라(般若羯羅 Prajñākara)나 그 밖의 사람들과 서로 문답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 108)범어로는 Vaiśravaṇa-deva이며, 인도의 신들 가운데 국토를 수호하던 신으로서 야차(野叉)와 나찰(羅刹)의 두 귀신을 거느리고 있다. 북방을 지키고 있으며 세상 사람에게 복덕을 주는 일을 맡았으므로 북방천(北方天)이라고도 불린다. 또한 늘 부처님의 도량을 수호하면서 불법을 들었으므로 다문천(多聞天)이라고도 한다.
- 109)『구당서(舊唐書)』 권194 하에 의하면 사엽호극한은 의심이 매우 많고 사람들의 참언(讒言)을 쉽게 믿는 사람으로서 통치력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부하에게 모반을 당하여 강거(康居:사마르칸트)로 도망쳤다가 결국 생을 마쳤다고 한다.
- 110)조병(澡甁)이라고도 한다. 범어로는 ‘군지(軍持)’라고 하는데 『현응음의(玄應音義)』에서는 “군지(軍持)란 바로 병(甁)을 말한다. 주둥이가 두 개 달리 조관(澡罐)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미륵보살이 왼손에 들고 있는 물병이 바로 조관인데, 이것은 비구가 언제나 지니고 다녀야 하는 물건 가운데 하나이다.
- 111)가사(迦奢)는 범어 kasá의 음역이다. 좌구(坐具)를 만드는데 사용되는 억새풀의 일종이다.
- 112)재가인(在家人)들이 신심(身心)을 청정히 하고자 팔재계(八齋戒)를 지키고 선사(善事)를 행하는 정진일(精進日)이다. 매달 8ㆍ14ㆍ15ㆍ23ㆍ29ㆍ30일의 6일이다. 이 날에는 사람마다 몸을 조심하고, 마음을 깨끗하게 하여 지계(持戒)하여야 한다고 한다.
- 113)근본불교에서 말하는 부처님의 제자가 얻게 되는 네 단계의 성과(聖果)로서 수다원과(須陀洹果)ㆍ사다함과(斯陀含果)ㆍ아나함과(阿那含果)ㆍ아라한과(阿羅漢果)이다. 아라한과는 성문제자로서는 가장 마지막 단계이며 이 단계에서 일체의 집착을 벗어 던지고 더 이상 배워야할 경지가 없으므로 ‘무학(無學)’이라고도 한다.
- 114)바른 지혜로써 진리를 깨달아 얻는 것을 말한다.
- 115)8정도(正道)와 6바라밀(波羅蜜)의 성도(聖道)를 닦아 얻은 성자(聖者)의 과(果)이다. 열반을 뜻한다.
- 116)제위(提謂)와 파리(波利)는 모두 예로부터 전해져 온 용어이며 새로 번역해 낸 용어가 아니다. 이것은 둘 다 인명이다. 제위는 이위(離謂)ㆍ제리부사(帝梨富娑)ㆍ제리부사(帝履富娑)ㆍ다바부사(多婆富娑)로도 표기된다. 파리는 또한 발리(跋梨)ㆍ발리가(跋梨迦)로도 표기된다.
- 117)수행한 인(因)으로 극과(極果)에 이르는 부처님의 지위를 말한다.
- 118)녹야원(鹿野園)을 말하며 범어로는 Mrgadāva이다. 중인도 바라나국 왕사성의 북동쪽에 있다. 지금 베나레스의 북쪽에 있는 사르나아드(Sarnath)의 유적이 곧 녹야원 터이다. 부처님이 성도한 지 삼칠일(三七日) 후에 처음 이곳에 와서 4제(諦)의 법을 설하고 교진여 등 다섯 비구를 제도하였다.
- 119)초(麨)란 곡류를 가루로 낸 음식물이다. 범어로는 달발나(怛鉢那)라고 하며 우유죽으로 번역된다. 밀(蜜)은 꿀을 가리킨다.
- 120)가사(袈裟)ㆍ대의(大衣)를 말한다.
- 121)상의(上衣)를 말한다.
- 122)겨드랑이를 감싸는 속옷에 해당하는 옷이다.
- 123)오늘날의 Balkh의 서남쪽으로 약 100킬로미터 떨어진 Āb-i-Safīd 강가의 Sar-i-Pul이 해당된다고 추측되고 있다. 이 지역은 이슬람기(期)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 지방의 중요한 도시이며, 영주(領主)의 겨울 거주지이기도 하였다. 『자은전』에 의하면 현장은 처음에는 이 예말타국과 다음에 등장하는 호식건국을 방문할 의도를 갖고 있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두 나라 국왕의 간청을 뿌리치지 못하여 방문하였다고 한다.
- 124)『자은전』에는 등장하지 않으며 현장이 답사한 곳이 아니라 전해들은 나라로 생각된다. 이슬람 문헌의 Ṭālaqān은 오늘날에는 지도상에 나타나지 않는다. 위치는 지금의 Maimana 부근의 Chāchaktū 근처에 있는 유적지가 이에 해당된다고 한다.
- 125)『자은전』의 여정에 의하면 현장은 예말타국과 호식건국을 방문한 뒤에 다시 박갈국으로 돌아가서 그곳에서 게직국으로 간 것으로 되어 있다.
- 126)원어는 Grachi 또는 Gaz이며, 지금의 Tamaris 계곡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127)범어로는 bāmiyan이며 『자은전』에 범연국(梵衍國)ㆍ범연왕(梵衍王)이라고 기술하고 있는 것은 bāmiyan에 대한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범양(范陽)[『위서』ㆍ『북사』]ㆍ범연(范延)[『수서』]ㆍ범인(犯引)[『혜초전(慧超傳)』]ㆍ범연(帆延)ㆍ망연(望衍)[『신당서』] 등으로 표기되고 있다.
- 128)범연나(바미얀)는 힌두쿠시와 Kōh-i-Bābā의 두 산맥 사이에 있는 동서로 좁고 긴 계곡 사이에 있으며 예로부터 동서 교통의 요충지였다.
- 129)범연나국은 거리상으로 보아서 가까운 카불(Kābul)보다도 오히려 멀리 떨어진 박트리아나 Khulm의 도화라 국가와 예로부터 깊은 관계가 있었다. 이것은 월지(月氏)라 불리는 혈연 관계와 지리적 환경에 의한 것이었다. ‘유(類)토카라(도화라)’라 불리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 130)이 지역의 잡신(雜信)의 상황은, 35미터에 달하는 석불의 불감(佛龕) 정상에 있는 태양신(Sūrya)이 이란적인 요소의 것이며, 고전적인 사삼 미술의 직계의 것이라는 점에서도 간취될 수 있다.
- 131)설출세부(設出世部, Lokottara-vādin)는 소승 20부파 가운데 하나이며 대중부가 최초로 분열된 것으로 보여진다. 세간법이나 출세간법은 모두 가명(仮名:虛妄)이고 실체는 없다고 주장하였던 것이 근본대중부였다. 하지만 열반 등의 출세간법이 가명이라는 것에 대해서 반대 의견을 내세우며 도(道)와 도과(道果)의 출세간법은 실유(實有)라고 주장한 것이 설출세부이다. 이 파는 중인도에서 서북인도에 걸쳐 성행하였다. 한편, 혜초(慧超, 727)가 방문하였을 당시의 범연나국은 ‘대소승법이 함께 행해지고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 132)53미터에 달하는 불상이다.
- 133)이 불상은 35미터에 달하는 입상이다. 앞서 53미터의 불상과는 약 4백 미터 떨어져 있다. 이슬람기(期)에는 이 두 개의 거대한 석불에 대해서 하나는 ‘적상(赤像)’, 다른 하나는 ‘백상(白像)’이라고 불렀다.
- 134)겁초(劫初)란 이 세계가 성립되기 시작한 때를 말한다.
- 135)범어로는 śānakavāsa이며 상나화수(商那和修)[『부법장인연전(付法藏因緣傳)』]ㆍ사나바사(舍那婆私)ㆍ사나바사(舍那婆斯) 등으로 음사되며 또는 삼부타(三浮陀)ㆍ삼보가(三菩伽)로도 표기되고 있다. 인도법장(印度法藏)의 제3조(祖)이다. 중인도 왕사성의 장자(長者)이며 부처님 입멸 후에 아난의 제자가 되었으며 말토라(秣菟羅)ㆍ범연나(梵衍那)ㆍ계빈(罽賓) 등의 지역을 유행하고 교화하였으며 문인(門人) 우파국다(鄔波鞠多)에게 법을 부촉하였다.
- 136)가사의 하나로 아홉 조각의 폭이 좁고 긴 베를 가로 이어 만든 것이다. 외출할 때나 그밖에 엄숙한 법회나 의식 때에 입는다.
- 137)중유(中有)라고도 한다. 죽은 뒤 다음의 생을 받아낼 때까지의 사이에 받는 음형(陰形)을 일컫는다. 대개 다음 생에 태어나기 전의 칠칠일(49일)을 중음이라고 한다.
- 138)변제(邊際)란 사물의 궁극을 의미하는 말이기 때문에 가장 뛰어난 선정을 의미한다.
- 139)카블의 북동쪽으로 약 72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 있는 Charikār로부터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 두 강의 합류점에 위치해 있으며 북쪽은 힌두쿠시, 서쪽은 Paghmān산맥, 남동쪽도 낮은 산으로 에워싸여 있는 분지이다. 가필시(迦畢試)는 또한 가비시(迦臂施)ㆍ가비시(迦毘施)ㆍ가비시(迦卑試)로도 쓰여지고 있다.
- 140)오늘날 베그람(Bēgrām)을 가리키며, 일찍이 가니색가왕의 여름철 도읍으로서 번영을 구가하였던 곳이다. 기원전 글레코 박트리아 시대로부터 쿠샨 시대 및 그 후의 다량의 화폐가 출토되어 보고되고 있다. 그러나 금세기에 들어와서는 1923년이래 프랑스의 고고학자에 의해서 광범위한 발굴조사가 행해져 쿠샨왕의 궁전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의 유적을 비롯하여 경이로운 온갖 보물들이 출토되었으며, 그것은 서쪽으로는 로마제국, 동쪽으로는 한(漢)제국에 이르는 1세기에서 5세기에 걸친 시기의 이른바 세계의 온갖 미술공예품의 정수였으며, 이 발견은 많은 보고논저(報告論著)를 통해 세상에 소개되었다. 그 하나하나는 현장의 ‘다른 여러 나라들의 진귀한 물건들이 모두 이 나라에 모여 있다’라는 말이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님을 입증해 주고 있다.
- 141)백합과에 속하는 다년초로 튤립의 일종이다. 혹은 미주(美酒)를 뜻하기도 한다.
- 142)대자재천(大自在天:시바신)을 만물의 창조신으로 여기고 온몸에 회반죽을 바르고 고행하며 승천을 구하는 외도이다.
- 143)도회외도와 마찬가지로 시바신을 신앙하고 있으며 시바신이 해골을 장식으로 삼고 있는 것을 본떠서 자신들도 그것을 착용하고 있다.
- 144)이 사원이 있었던 곳으로 생각되는 장소는 현재 그 지역의 사람들이 소위 ‘소산(小山, Kōh-i-bacha)’이라고 부르고 Ch. Masson이 ‘역사(力士)의 산(Kōh-i-Pahlvan)’이라고 부르며, 또는 탑이 있기 때문에 Kōh-i-Tōp이라고 불리고 있는 언덕인데 어느 것이 대가람인지는 분명하지는 않다. 또한 이 언덕의 북쪽 기슭에 있는 세 곳의 유적지 가운데 하나는 쇼토락(Shotorak)사원으로서, 편암제(片岩製)의 간다라식 불상 조각이 출토된 곳이다. 『자은전』에 의하면 이 사원은 ‘사락가(沙落迦)’라는 이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사락가’란 ‘사륵(沙勒)ㆍ소륵(疏勒)’ 즉 카쉬가르(Kāshgar)를 말하며 강 서쪽의 볼모는 카쉬가르에서 보낸 사람이었을 것이다.
- 145)범어로는 Kaniṣka이며 일명 카니시카왕으로 잘 알려진 월지족(月氏族)의 임금으로 간다라 왕국을 세워서 불교를 옹호한 그는 200년 경 왕위를 계승하였다. 불교에 귀의하여 진흥에 힘쓰고 나라의 세력을 확장한 임금으로 아쇼카왕과 더불어 호불왕(護佛王)으로 이름난 임금이다.
- 146)이 신왕상(神王像)은 보물을 수호하는 비사문(毘沙門)이라고 보는 설도 있다. 그런데 봉황을 이고 있는 비사문은 있지만 앵무를 이고 있는 예는 없다.
- 147)『자은전』에 의하면 현장이 이곳에 왔을 때 향을 사르고 가피를 내려 줄 것을 기도한 뒤에 사람들에게 파보게 하였더니 아무런 변고도 없이 지하 7~8척 되는 지점에서 황금 수백 근과 명주(明珠) 수십 과(顆)가 들어 있는 커다란 구리그릇을 하나 얻었다고 한다.
- 148)범어로는 Yaksa라고 하고 약차(藥叉)ㆍ열차(閱叉)라고 음역한다. 위덕(威德)ㆍ포악(暴惡)ㆍ용건(勇健)ㆍ귀인(貴人)ㆍ첩질귀(捷疾鬼)ㆍ사제귀(祠祭鬼)라고 번역한다. 라찰과 함께 비사문천왕의 권속으로 북방을 수호하며 천야차(天夜叉)ㆍ지야차(地夜叉)ㆍ허공야차(虛空夜叉)의 세 종류가 있다. 천야차ㆍ허공야차는 날아다니지만 지야차는 날아다니지 못한다.
- 149)복발(覆鉢)이란 발우를 엎어놓은 것과 같은 반구형의 탑신(塔身)을 말하며, 기단(基壇)의 위에 벽돌이나 돌을 쌓아 올린 것이다. 세(勢)의 의미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단순히 모양이나 형세를 의미하는 술어가 아닐까 생각한다.
- 150)Sphītavaras로 추정되고 있다. 현재 베그람의 남쪽으로 약 12킬로미터 떨어진 지역에 지금도 암석들이 산재해 있는 유적지가 있다.
- 151)아루나(Aruṇa)산이다. 카일라사(Kailāsa)산의 서쪽에 위치해 있으며 언제나 눈을 이고 있어서 등반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 152)줄로 짜서 만든 허름한 의자로 이 위에 깔개를 깔고 앉아서 좌선을 한다.
- 153)혹은 건추(揵椎)ㆍ건치(揵稚)ㆍ건치(揵雉)라고도 하며 쳐서 소리를 내는 종ㆍ방울ㆍ목탁 등을 총칭한다. 범어 ghaṇṭā의 음역이다.
- 154)이 가니색가왕이 세웠다고 하는 가람과 솔도파는 현재 베그람의 서쪽 12킬로미터 떨어진 Paghmān 산기슭의 작은 도시인 Charikar 근처, 산 입구의 사면(斜面)에 있는 Tōp-darrah의 골짜기에 있는 거대한 탑지(塔址)를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방향은 서북쪽이 아니라 서쪽에 해당하는 점이 다르다.
- 155)표주(標柱)ㆍ기간(旗竿)을 말하며 솔도파에 있어서는 복발 위의 평두(平頭:方龕) 안에 세워진 산개(傘蓋)를 지탱하는 기둥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 156)베그람의 유적도(遺跡圖)를 보면 고대 시가지의 북단에 남북으로 100미터, 동서로 200미터의 네모 반듯한 형태의, 벽돌로 만들어진 높은 성벽이 에워싸고 있는 지역이 있는데 이것을 ‘구도성(舊都城)’이라고 부르고 있다. 옛왕의 가람이 있었던 곳은 이 지역이다.
- 157)재가 신도가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며 정진하는 날로 매월 8ㆍ14ㆍ15ㆍ23ㆍ29ㆍ30 일을 가리킨다.
- 158)탑의 구륜(九輪)의 맨 밑에 있는 네모난 반(盤)이다.
- 159)이 산은 판즈쉬르강으로 흘러드는 Kōh-Daman강의 남쪽에 각각 고립되어 있는 세 개의 작은 구릉이 동서로 나란히 줄지어 서 있는데 그 동쪽 끝의 구릉은 보기에 따라서는 물가에서 웅크리고 앉은 코끼리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머리 부분에 해당하는 곳에는 돌을 쌓은 표시가 있고 등뼈를 나타내는 부분에는 고대의 건물이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고 한다.
- 160)범어로는 Aśoka라고 한다. 인도 마우리아 왕조의 제3대왕이다. B.C. 2세기에 전 인도를 통일하고 불교를 보호한 왕이다. B.C. 321년경에 인도에 공작 왕조를 개창한 찬드라 굽타 대왕의 손자며, 빈두사라왕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어려서 성품이 거칠고 사나워서 부왕의 사랑을 받지 못하였다. 부왕이 죽은 후 배다른 형인 수사마를 죽이고 즉위하였다. 광폭함을 그치지 않다가 칼링가를 정복하여 무수한 죽음의 대참사를 목격한 뒤, 부처님께 귀의하여 무력에 의한 정복을 중지하였다. 그리고 모든 인간이 지켜야 할 윤리인 Dharma에 의한 정치를 이상으로 삼고 이를 실현하는데 진력하였다.
- 161)비구가 지니는 18물(物)의 하나로 버드나무 가지의 끝을 씹어서 그 액으로 이를 닦고 입을 씻었다.
- 162)베그람으로부터 카불을 지나지 않고 Ālāsai고개를 지나서 Lamghān지방, 즉 고대 남파국으로 나왔던 것이다. 이 고개를 경계로 해서 기후나 풍토ㆍ산물 등 모든 것이 달라진다. 따라서 하블 대제(大帝)도 ‘신세계의 입구’라고 말하였고, 근래에는 ‘인도의 문’이라고도 불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