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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고금불도논형 정권
서명사 석씨 찬집
박건주 번역
영휘(永徽:당 고종 초의 연호)의 치세가 대를 있게 된 이래, 고종황제는 누차 불교에 대한 깊은 신앙심을 발하여 불교에 귀의하였다. 도를 논하는 자리를 자주 열었고, 전왕(前王)의 뛰어난 전적들을 열람하였으며, 현달(顯達)한 이들이 행한 일들을 추구하였다. 북주(北周)와 수(隋)나라에서도 이를 이어 모두 삼교(三敎)의 논형(論衡:論戰)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그리고 진씨(晋氏)가 남천(南遷)한 이후 석종(釋宗:불교)이 으뜸가는 자리에 있게 되었으며, 북위와 북제(北齊)에서는 치황(輜黃:불교와 도교)이 대등하게 위치하였다. 이로 인해 강남지역에서는 현리(玄理)를 담론하고 규범을 지키는 일이 저절로 무너지게 되었고, 관중 지역에서는 황제가 직접 담론에 가담하였으며, 산동ㆍ하남 지역에서는 한 차례의 소란이 있었다. 그런 까닭에 누차 교의(敎義)는 다른 길을 격렬하게 부르짖게 되었다. 비록 도사들이 법륜(불교)에 대항하였으나, 끝내는 굴레 속에 빠지고 말았으며, 운니(雲泥:하늘과 땅의 차이, 다른 길)의 차별된 길이 끊어지고 말았다. 진실한 목소리를 따르는 자 드물게 되었고, 사람들은 연이은 혼란함 속에서 논변의 소용돌이에 빠지고 말았다. 이러한 지나간 자취를 돌이켜 보면 회환이 없지 않다. 황건(黃巾:도교도)에게 책임을 물으면 당시에는 입을 다물어 버리다가 나중에 논장(論場)에 나와 우리가 불교보다 더 뛰어나다고 외친다.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한 이들은 그 말을 따라 믿고 만다.
내가 자주 들은 내용을 여기에 기술하여 실록으로 편집하게 되었다. 사항이 황제와 관련되는 부분도 있는 까닭에 허황된 글은 버렸다.
1.금상(당 고종)께서 불(佛)ㆍ도(道) 이종(二宗)을 궁내에 불러들여 명리(名理)데 대해 자세하게 기술토록 한 일
현경(顯慶) 3년(658) 4월에 황제가 칙령을 내려 승려와 도사 각각 일곱 명을 궁내에 들어오게 하여 종의(宗義)에 대해 논의하게 하였다.
이 때 회은(會隱)법사는 오온(五蘊)1)의 뜻을 세우고, 신태(神泰)법사는 구단지(九斷知:九遍知)의 뜻을 세웠다. 도사 황이(黃頣)ㆍ이영(李榮)ㆍ황수(黃壽) 등이 차례로 논의하였는데도, 용어의 체(體)를 알지 못하니 꿈속의 바다를 헤매듯 망망(茫茫)해 하였다. 비록 말이 왔다 갔다 하였으나 구렁텅이에 빠져 돌아가지 못하였다. 다음에 황제가 칙령을 내려 도사를 보내게 하여 그들의 종의(宗義)를 세우게 하였다. 이영(李榮)이 ‘도가 만물을 낳는다’는 뜻을 세웠다.
대자은사(大慈恩寺)의 승혜(僧慧)스님이 논좌(論座)에 올라 먼저 말하였다.
“황제와 황후의 신공(神功)ㆍ성덕(聖德)으로 먼 변방의 이족(夷族)까지 모두 순화(順化)하였으며, 천하가 평안하고 맑아졌습니다.
어찌 곧바로 헌원(軒轅)과 복희(伏羲)를 가리면서 돋보이게 할 것이며, 또한 주(周)와 한(漢)을 한데 묶어서 말할 수 있겠는가?”
또 부처님께서 백성[黎元]을 교화하여 구제하심을 찬앙(讚仰)하였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글이 많으나 여기에 싣지 않는다.
승혜스님이 곧바로 이영에게 물었다.
“선생은 말하기를 ‘도가 만물을 낳는다’고 하였는데, 이 도(道)가 유지(有知)인 것인지, 무지(無知)인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대답하였다.
“『도덕경』에서 말하기를 ‘사람은 땅에 법(法:본받음, 근본으로 함)하고, 땅은 하늘에 법하며, 하늘은 도에 법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미 하늘과 땅이 도에 법하는데 어찌 무지(無知)라 하겠습니까?”
승혜스님이 비판하여 말하였다.
“이전에는 도를 만물의 어머니라고 말했으면서 이제는 만물이 도(道)로부터 생기지 않는다고 하는 셈입니다. 왜냐 하면 만약 도가 유지(有知)라면 오직 선(善)만을 생기게 할 것인데, 어째서 악(惡)도 생기게 하였습니까? 이에 의거하건대, 선과 악이 도에서 나오면서 오르고 내리며 어울려 혼잡한데, 모두 도가 생기게 하였다면 무지(無知)하다는 것이 됩니다. 만약 얼른 이해되지 않는다면 그러한 사례들을 널리 들어 보이겠습니다. 이를테면 인군(人君)이 아직 개벽이 안 되었을 때에는2) 왜 나오지 않았습니까? 금일 성주(聖主:황제)께서 백성을 아들처럼 양육해 주시며 번영의 기쁨을 주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예전에 탄생한 공공(共工)ㆍ치우(蚩尤)ㆍ걸(桀)ㆍ주(紂)ㆍ유왕(幽王:서주 말의 왕)ㆍ여왕(厲王:서주 말의 왕)의 무리들은 군생(群生)들을 잔혹하게 대하고, 도탄에 빠지게 하였습니다. 인신(人臣) 가운데 왜 후직(后稷)3)ㆍ설(偰)4)ㆍ기(虁)와 용(龍)5)의 무리들뿐만 아니라, 또한 비렴(飛廉)6)ㆍ악래(惡來)7)ㆍ기상(靳尙)8)ㆍ신(新, 9~23)나라의 왕망(王莽)의 무리들을 내어 군주에게 아첨하여 나라를 위란(危亂)에 빠뜨리게 한 것입니까? 날개로 날아다니는 족속 가운데 왜 난새ㆍ봉황과 같은 좋은 새들뿐만 아니라, 또한 올빼미ㆍ독수리와 같은 나쁜 새들을 생기게 하였습니까? 털 있는 동물들 가운데 왜 기린ㆍ천리마ㆍ몸이 붉고 꼬리가 검은 말뿐만 아니라, 또한 승냥이ㆍ여우ㆍ고슴도치와 같은 것을 생기게 하였습니까? 초목 가운데 왜 소나무ㆍ잣나무ㆍ노나무ㆍ계수나무ㆍ혜란ㆍ향초ㆍ난ㆍ국화와 같은 것뿐만 아니라, 또한 흑단ㆍ굴참나무ㆍ가죽나무ㆍ두루미냉이ㆍ쑥ㆍ가시나무와 같은 것을 생기게 하였습니까? 이미 만물을 혼생(混生)하고, 선악을 가리지 않았으니, 도는 무지(無知)입니다. 그러면 사물을 생기게 할 수 없을 텐데, 어게 천지가 도(道)에 법(法)한다고 할 수 있으며, 또한 만물이 모두 도(道)를 근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여래(如來)의 대성(大聖)ㆍ궁리(窮理)ㆍ진성(盡性)의 가르침에 근거한다면 천지만물은 중생의 업력(業力)으로 감응하는 것이며, 선업을 많이 쌓은 이는 유리(琉璃)로 된 땅과 황금으로 된 길, 옥의 가지로 울창한 길, 옥의 잎이 공중에 드리워져 있고, 감로로 양식을 채우며, 아름다운 옷을 좌석으로 하는 곳에 태어납니다. 악업을 많이 지은 자는 모래흙으로 된 땅에서 살고, 자갈로 된 길을 걸으며, 피[稗] 알갱이 밥으로 허기를 채우고, 마의(麻衣)로 몸을 가리며, 진흙탕 길을 걸어 다니고, 우숙(雨宿)하며, 늦가을에는 추수하고, 더운 여름에는 논밭을 갈며, 밤낮으로 뛰어다니며 관청에 올려 바치니, 모두 자업자득이라, 다른 사람이 그렇게 시킨 것이 아닙니다. 당신들은 마음이 어리석어 알지 못하면서 멋대로 도(道)가 만물을 생한다고 하나, 실제 도는 하나도 생기게 하지 않으니, 이 얼마나 불쌍한 일인가?”
이영(李榮)이 이 일장의 논변을 듣고 놀라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를 몰랐다. 혜립(慧立)스님이 때를 타서 놀려대었으나, 이영은 또한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 무안해 하며 자리에서 내려왔다.
다음에는 도사 황수(黃壽)가 자리에 올라와 노자의 명의(名義)를 내세웠다. 이에 대해 회은(會隱)법사가 몸매부새를 바로하고 항론하였다. 그 논란의 체(體)는 포폄(褒貶:칭찬하고 꾸짖음)을 우선으로 하면서, 도(道)의 명의(名義)를 비판하는 데 따른 감정을 거슬리게 될까 걱정하여 바로 황제에게 먼저 말하였다.
“황수(黃壽)는 황색 관(黃冠:도사들이 쓰는 관]을 쓰고 있으면서 나라를 좀먹는 여우나 쥐새끼 같은 무리들을 꺼려하고 피할 줄 모르고 섬기며 의지하고 있습니다. 국가(지금의 唐왕조)는 멀리 용덕(龍德:노자의 덕)의 뒤를 계승하였으며, 폐하께서는 바로 이로군(李老君:老子)의 후손인데, 어찌 일반인의 후손에게 공개적으로 조상[祖禰]의 이름을 이야기하십니까. 오천문(五千文:『도덕경』) 안에는 좋은 뜻이 많이 있어도 열거하여 성인(聖人)의 이름을 말할 수 없습니다. 죄를 헤아리고 형(形)을 논한다면 황수는 사형에 처해져야 하고도 남습니다.”
황제가 말하였다.
“이제 ㅔ다시 다른 의(義)를 세우도록 하라.”
황수가 이로 인해 예기(銳氣)가 꺾이고, 식은땀이 주르륵 흐르면서 어찌할 바를 몰라 비록 대론하여도 차례가 어긋나고 흐트러져서 서로 격론하기에 이르고 마침내 방향을 잃게 되었다. 승려들은 촛불을 켜는 것을 보고 바로 일어나서 사퇴(辭退)하였다.
황제가 말하였다.
“지금껏 여러 사(師)들이 대론하는 것을 보니, 양가(兩家)가 논의하는 종지가 매우 분명하지 못하다.”
혜립스님이 마침내 황제에게 말하였다.
“지금껏 양가(兩家)가 논의한 종지가 분명하지 못하였음은 진실로 성지(聖旨)와 같습니다. 왜냐하면 여러 스님들이 의(義)를 세웠으나 도사들이 그 근본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이에 부끄러워 말을 못하고 있다가 나중에 시끄럽게 터무니없는 말을 지껄이게 된 것입니다. 이를테면 스님[會隱]이 오온[五蘊]의 의(義)를 세운 것에 대해 황이가 음(蔭)의 이름으로 비판하였습니다만, 또한 이 음(蔭)은 ‘덮는다’는 뜻을 종(宗)으로 하는 것이고, 온(蘊)이란 적취(積聚)의 뜻입니다. 이를테면 색(色)에는 열한 가지의 취(聚)가 있으면 색이라는 이름 아래 존재하는 식(識)에는 여덟 가지의 취가 있으나, 모두 식이라는 한 이름 아래 있습니다. 모두를 통틀어서 온(蘊)의 뜻으로 합칭한 것입니다. 만약 음(蔭)의 이름으로 비판한다면 의리(義理)가 완전히 어긋납니다. 또한 신태(神泰)법사께서 구단지(九斷知:九遍知)의 뜻을 세웠는데 도사는 이 용어에 대해 지금까지 전혀 들어 보지 못한 터라 비록 위에서 토론하였으나 발문(發問)의 근거를 몰랐으며, 부끄러운 줄 모르고 쓸데없는 말을 함부로 지껄여댔습니다. 참으로 남월(南越)에 가려고 하면서 말의 고삐를 북쪽으로 이끄는 것과 같다 할 것이며, 삭방(朔方:북방)으로 가고자 하면서도 끝내 월(越:남방) 지역으로 나아가는 것9)과 같다 할 것입니다. 이영의 낭언(浪言)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 이로 인해 종지(宗旨)가 분명하지 않게 되고 성청(聖聽)을 더럽혔으니 잘못은 도사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불법의 대종(大宗)은 인연의 뜻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논에서는 ‘어느 하나의 법도 일찍이 인연으로 생기지 않은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를테면 눈으로 전각의 기둥을 보는 데는 반드시 다섯 가지 연(緣)을 갖추어야 합니다. 첫째로 식심(識心)이 어지럽지 않아야 하고, 둘재로 안근(眼根:눈)이 정상으로 있어야 하며, 셋째로 빛에 의지하여야 하고, 넷째로 대상[境]으로서 현전되어 있어야 하며, 다섯째로 중간에 가로막는 장애가 없어야 합니다. 반드시 이 연(緣:조건)을 갖추어야 비로소 기둥을 볼 수 있게 됩니다. 만약 빛이 없어지고, 용촉(龍燭)을 켜지 않는다면 비록 붉은 색 기둥이 있다 한들 어떻게 볼 수 있겠습니까? 또한 볍씨나 곡식의 씨앗이 따뜻한 계절에 물과 흙과 사람의 공(功)을 만나면 싹을 틔울 수 있지만, 한여름에 옹기 안에 넣어 두거나 겨울에 땅 속에 두면 연(緣)이 갖추어지지 않은 까닭에 결국 싹이 나오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 또한 이와 같아 안으로는 업혹(業惑)이 인(因)이 되고, 밖으로는 부모를 연(緣)으로 하여서야ㅑ 비로소 몸을 받아 태어나게 됩니다. 부모가 되는 연이 각기 어긋나면 끝내 태어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가축ㆍ물고기ㆍ새 등의 금수와 만물이 모두 이와 같이 인연으로부터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깊이 연기(緣起)에 들어가 모든 삿된 견해와 유(有)ㆍ무(無)의 이변(二邊:두 가지 치우친 견해)을 끊고, 다시는 이러한 습(習)을 쌓지 않도록 하고, 부처님의 지혜로 법의 실상(實相)을 궁구하도록 하라.’
그러므로 부처님을 무등각(無等覺)이라 하고, 하늘과 인간의 스승[天人師]이라 칭합니다. 외도의 무리들은 이렇지 않아서 모두 삿된 견해의 그물[網]로 마음을 덮고, 바늘로 눈을 찌릅니다. 혹은 ‘모든 존재[法]는 자연히 생긴 것이다’라고 말하니, 이는 곧 중국에서 노장(老莊)이 하는 말과 같으며, 혹은 ‘모든 존재가 자지천(自在天)으로부터 생겼다. 위뉴천(韋紐天)으로부터 생겼다. 명성(冥性)에서 생겼다’ 하고, 혹은 ‘무인(無因)으로 생겼다’거나, 혹은 ‘별자리가 만들었다’고 하나, 이러한 견해들은 모두 서방 이도(異道)들의 생각일 뿐입니다. 모두 존재의 근본을 모르는 것이며, 인연을 모르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믿고 있는 생각대로 아무렇게나 말하여 세속을 잘못 이끌며, 천인(天人)을 그 거짓됨과 삿됨에 미혹하게 합니다. 또한 성상(聖上:황제)께 삼성(三性)의 뜻을 설하니, 첫째는 변계성(邊計性)이고, 둘째는 의타기성(依他起性)이고, 셋째는 원성실성(圓成實性)입니다. 이렇게 외도가 세운 것이 실은 변계성(邊計性)이며, 그 내용들은 공화(空花)와 같고, 유래는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삼성(三性)에 대해 설명한 내용이 많이 있으나 여기에 다 갖추어 싣지 않는다. 앞에서 토론을 벌인 이래 식사할 무렵이 되어 승려와 도사, 그 옆에 두 줄로 서서 듣고 있던 신료(臣僚)들이 이미 밤이 되어 마쳐야 되겠다고 항제께 말씀을 드렸다.
황제가 말하였다.
“돌아가도 좋다.”
참석자들이 각기 숙소로 돌아가는 중에 잠깐 멈추게 하고 황제가 사자를 보내어 말하였다.
“스님들이 말씀하신 인연의 의(義)가 매우 훌륭한데 왜 일찍 논의하지 않았는가?”
이 때 삼장(三藏) 이하 모든 스님들이 기뻐하였다. 이는 국가가 힘들이지 않고 반란군을 쳐부순 것과 같고, 군사의 위세를 빌리지 않고도 성(城)이 함락되어 도살당하는 것을 막는 것과 같았으니, 이러한 일을 오늘에야 보게 된 것이다.
이 때 도사들은 온(蘊)과 음(蔭), 단지(斷知) 등의 뜻을 몰라 황제의 뜻에 따르지 못하였다. 산회한 후에 내급사(內給事) 왕군덕(王君德)이 말하였다.
“황제께서 말씀하시길 ‘도사들은 왜 불경(佛經)을 공부하지 않는가?’라 하셨습니다.”
이 말에 의거하건대 불교와 도교인들의 학업 우열을 판별하여 막힘을 뚫어 준 것이라 할 것이다. 실록(實錄)하면서 앞에서는 빈약하거나 너무 많다는 생각이 있어 내용을 충분히 갖추어 실었다.
2.황제[唐高宗]께서 서명사(西明寺)의 불사가 이루어지매 공덕이 원만히 이루어진 것을 기념하며, 불승(佛僧)을 처음 사찰에 들이고, 국가의 번영과 안녕을 기원하게 한 일 또한 승려와 도사를 내전으로 초빙하고, 친히 대론(對論)의 장에 참예하여 의리(義理)에 대한 논의를 관람한 일
현경(顯慶) 2년(657) 6월 12일, 서명사의 불사가 이루어지매 도속(道俗)이 운집하고, 당개(幢蓋)가 화려하게 장엄되었다. 다음 날 아침 맑고 좋은 날에 황제가 입사(入寺)하려고 할 즈음에 음악소리가 진동하고 향화(香華)가 공중에 휘날리는 모습이 북성에서 남쪽의 사찰에 이르는 10여 리의 도로에 가득하였다. 13일 맑은 아침 날에 황제의 어가가 안복문(安福門) 위에 이르니, 여러 귀족 관료가 아래에 미리 도열하여 있었고, 안에서 비단으로 만든 상(像)과 긴 깃발이 높고 넓게 펼쳐지니 모두들 놀라서 바라보았다. 큰 길에서 남쪽의 공로에 이르러서야 어람(御覽)의 행사가 모두 끝났다. 황제는 돌아온 후 곧바로 조칙을 내려 승려와 도사 각각 일곱 명씩을 들어오게 하고, 백복전(百福殿)에 행차하였다. 내관들이 승려는 동쪽에 앉게 하고, 도사는 서쪽에 앉게 하였다. 이 때 황제가 자리에 올랐다.
황제가 말하였다.
“불교와 도교의 이교(二敎)는 동일하게 선(善)에 돌아가고자 한다. 그러하니 범경(凡境:불교)은 허적(虛寂)하여, 무위(無爲)를 행하고, 현문(玄門:도교)은 심오하여 부덕(不德)에서 덕(德)을 이룬다. 사(師)들은 하늘에 대한 정성과 학문으로 고금을 비추어 뜻이 보배로운 가르침에 합치되도록 하며, 업광(業光)이 공(空)ㆍ유(有)에 함께 하도록 하고, 명리(名理)를 토론하여 서로 밝혀 나가도록 하시오.”
혜립스님이 대답하였다.
“폐하, 폐하의 밝고 깊으신 성품은 하늘로부터 흠명(欽明)한 것이오며, 역(曆)을 편찬하신 구공(九功)은 우하(虞夏:舜임금과 禹임금)를 포괄하고, 칠덕(七德)은 영유(贏劉:秦과 漢)보다 뛰어납니다. 마침내 천하가 태평하고 평안하게 되니, 이미 나라가 무사합니다. 폐하께서 현문(玄門:불교와 도교)을 보살펴 주시어 이렇게 치황(輜黃:승려와 도사)을 불러 명리(名理)를 고핵(考覈)하도록 해주셨습니다. 승려와 도사들인 이 목숨 다하여 다행으로 여기오며, 폐하의 은광(恩光)을 크게 입어, 마침내 자주 금문(金門:궁궐)에 들어오게 되었고, 자주 옥체(玉砌:궁궐)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두려운 것은 견문이 부족하고 좁으며, 사운(詞韻)이 졸렬하여 폐하께서 들으시는데 헛되이 번거로움만 끼쳐 드리고, 관람하실 만한 것이 되지 못할까 하는 것입니다. 엎드려 감사드리건대 죄송한 마음에 땀이 더욱 흐를 뿐이옵니다.”
황제가 말하였다.
“좋습니다. 사(師)들께서는 계위에 따라 앉으십시오.”
또 황제가 말하였다.
“사(師) 가운데 한 분이 먼저 자리에 올라 개재(開題)하여 주길 바랍니다.”
이 때 청도관(淸都觀)의 도사 장혜원(張惠元)이 황제에게 말하였다.
“주(周)나라의 종맹(宗盟:宗親)에서는 이성(異性)을 후예로 하였습니다. 폐하의 종성(宗性)은 주하(柱下:柱下史였던 老子를 가리킴)를 이은 후손입니다. 오늘 의(義)를 세워 논의하는데 도사가 먼저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또한 이하(夷夏:오랑캐와 중국)가 같지 않으니, 객(客)과 주(主)의 자리가 구별되어야 할 것입니다. 부디 도사를 선(先)으로 하시어 상좌(上座)에 자리하도록 하여 주십시오.”
황제가 오랫동안 침묵하였다. 혜립스님이 마침내 말하였다.
“가만히 생각건대, 모든 불ㆍ여래께서는 중성(衆聖)보다 덕이 높으시며, 그 도는 인천(人天)의 으뜸이십니다. 삼천대천세계에서 홀로 존귀하시고, 백억 사주(四洲)의 자부(慈父)이시옵고, 미망에 빠진 중생을 인도하여 구제하여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부처님 한 분 뿐이옵니다. 이 땅도 사바세계를 벗어나지 못하였으니, 곧 석가모니불의 조역(兆域:墓域)입니다. 장혜원이 어떻게 함부로 객주(客主)에 대해 말하고, 망령되게 화이(華夷)를 정할 수 있단 말입니까? 삼가 생각건대 폐하께서는 보살초지(菩薩初地)의 존(尊)을 굽히시어10) 남섬부주에 광림(光臨)하셨으며, 부처님의 부촉을 받아 성화(聖化)를 현양(顯揚)하고, 자비의 등불을 어두운 방에 밝히며, 고통의 바다에 지혜의 배를 띄우셨습니다. 『서경(書經)』에서 ‘황천(皇天)은 어느 누구를 특별히 친애하지 아니하고, 오직 덕 있는 자를 도와준다’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장혜원의 삿된 말은 따를 바가 못 됩니다.”
황제가 말하였다.
“좋습니다. 다시 바꾸도록11) 합시다.”
황제가 이에 승려를 선(先)으로 하였다. 이 때 회은(會隱)법사가 자리에 올라 사무외의(四無畏義)를 세워 말하고, 도사 일곱 명이 각기 논란을 폈으나, 여기에 기술할 만하지 못하여 이 내용에 대해서는 따로 전(傳)을 만들어 기재하였다. 다음에 도사 이영이 육통의(六洞義)에 대해 개진하면서 불법(佛法)의 육신통(六神通)에 대비하여 말하였다. 혜립법사가 논석에 올라 이영에게 육통(六洞)의 명수(名數)를 물었다. 답변이 끝나자 혜립법사가 따져 물었다.
“무릇 통(洞:통달)이라는 것이 어찌 사물에 통달하지 못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한 뜻은 없겠지요.”
대답하였다.
“그렇습니다.”
비판하여 말하였다.
“만약 사물에 통달함을 지니지 못한다면 그대로 통(洞)이라고 이름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노자가 사물에 통달하지 못한 것이겠습니다.”
대답하였다.
“노자는 상성(上聖)이시온대, 어찌 통(洞:통달)이 아니라 할 수 있겠습니까?”
따져 말하였다.
“만약 노자가 사물에 통달한 분이라면 왜 『도덕경』에 ‘천하의 대환(大患)은 내 몸의 환(患)과 같지 못한다. 만약 나아가 몸이 없다면 내가 어떻게 환(患)에 처하겠는가?’라고 했습니까? 이 말에 의거한다면 노자는 몸에 아직 걸림이 있다는 것인데, 어떻게 능히 만물에 통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영이 말하였다.
“사(師)는 말씀을 좀 부드럽게 하시어 서로 지나치게 배척하지 않도록 해주시지요. 제[榮]가 촉(蜀)에 있을 때 이미 사(師)의 이름을 들어습니다만 말을 나누지 못하다가 이제 궁정에서 친히 담론하게 되었습니다. 저와 사(師)는 모두 출가인이니 서로 비난과 공격을 하지 않도록 합시다.”
혜립법사가 대답하였다.
“선생의 그 말을 듣고 보니 잃어버린 아이를 찾고 있는 듯하군요. 고인(古人)이 ‘황진(黃塵) 세상에서는 칼과 창을 빌리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말하였습니다. 어지 밖에 나가서 따로 인사말을 나누겠습니까? 이 자리에서 끝내 반드시 사(邪)와 정(正)을 가려야 합니다. 방금 저와 마찬가지로 출가한 처지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렇다면 서로의 모습이 같은가에 대해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요. 선생은 살쩍에 난 털과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았고, 잠방이와 바지를 버리지 않았으며, 손에는 도부(桃符)를 쥐고, 허리에는 적대(赤袋)를 차고 있으며, 집집마다 다니면서 귀신을 안정시켜 준다 하고, 마을을 다니면서 아이들을 만져 주니, 본래 음사(淫祀)와 삿된 무당에 다르지 않거늘 어찌 우리와 같은 청허(淸虛)한 석자(釋子:佛子)와 같겠습니까?”
이영이 크게 노하여 말하였다.
“당신이 만약 머리카락 자른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면 왜 눈썹은 자르지 않는 것입니까?”
혜립법사가 말하였다.
“왜 눈썹을 깎겠습니까?”
이영이 말하였다.
“똑같은 털이기 때문이오.”
혜립법사가 말하였다.
“똑같은 털이어서 머리카락을 잘랐으니 또한 눈썹도 잘라야 한다면, 그대도 또한 똑같은 털인데 왜 귀밑털은 자르고, 콧수염은 자르지 않습니까?”
이영이 마침내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못하였다.
혜립법사가 부드럽게 말하였다.
“예전에 평진(平津:地名)이 십난(十難)으로 곤경에 처했을 때, 이영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가 논변한 덕으로 살게 되었으니, 고인(古人)의 논공(論功)에 고마움을 표해야 할 것입니다. 부끄러워함이 없다면 예전의 철인들이 즉시 자리를 피할 것입니다.”
주상(主上:황제)이 파안대소하였다. 이후 여러 승려들과 토론할 때에는 열기로 자리가 오랫동안 이어져 힘들게 될까 두려워하였다.
주상이 말하였다.
“좋았습니다.”
마침내 산회하고 각기 사찰과 도관에 돌아갔다.
삼장법사 현장(玄奘)스님은 서명사(西明寺)에서 승려들의 출가의식을 거행하느라 논석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14일 새벽녘12)에 황제의 칙사가 현장스님에게 보고하였다.
“일곱 분의 스님들께서 궁내에 들어와 도사들과 논의하였는데, 다섯 분이 토론하여 대승하였습니다. 유주사(幽州師:慧立법사)가 가장 뛰어났습니다. 두 분은 비록 토론하지는 않았으나 또한 일반적인 예에 따라 함께 승리한 것으로 합니다.”
혜립법사의 성은 조씨(趙氏)이고, 그 선조 백익(伯益)의 손자 조부(造父)가 주(周)의 목왕(穆王)에게 공을 세우고, 조성(趙城)에 봉(封)해져서 마침내 이를 씨명(氏名)으로 하게 되었다. 춘추시대의 조쇠(趙衰)와 조순(趙盾)은 먼 조상인데 동서로 관직에 따라 옮겨다닌 까닭에 북지(北地)의 신평인(新平人)이 되었다. 조부 예(禮)는 북주(北周)의 태중대부(太中大夫) 평동장군(平東將軍) 상주국(上柱國) 용문후(龍門侯)였고, 부친 의(毅)는 수(隋)의 비서랑(秘書郞) 사예(司隸) 자사(刺史)를 역임하였는데, 유교를 존숭하고 도교를 좋아하였다. 수문제(隋文帝)의 『기거주(起居注)』 25권과 『대업략기(大業畧記)』 3권을 찬(撰)하였는데, 모두 비각(秘閣)에 보관되었다. 홀로 독실하게 직필하여 사실을 드러내었다. 혜립법사는 곧 사예(司隸)의 셋째 아들이다. 어려서 다독(茶毒)을 앓았는데, 숙조(叔照)법사가 데리고 가서 사랑으로 길렀다. 15세 되던 해인 정관(貞觀) 3년(629)에 출가하여 유주(幽州)의 조인사(照仁寺)에 머물렀다. 항상 규범에 따라 행하였으며, 먼 데서 배움을 구하려 하지 않았고, 나면서부터 이해하는 것이 특별히 뛰어났었다. 세속에 물들지 않았고, 뜻은 항상 이전의 성인들을 앙모하였으며, 혜해(慧解)를 이루고자 하였다. 이에 경사(經史)를 빌려 내외를 열어 탐구하기를 스스로 쉼없이 하였으며, 고금의 많은 전적을 통람하였다. 먼 북방의 변경 지역[幽州]에 자리 잡은 지 20여 년 만에 성망과 영예가 높이 올랐으며, 그 영광이 서울에까지 이어져 자은사의 역경사업13)에도 참여하였다. 도한 깊은 산의 암혈(巖穴)도 두루 탐방하였다. 글과 논변이 매우 뛰어나 명성이 자자하니, 이로 인해 황제의 초빙을 받게 되었다. 영휘(永徽) 원년(당 고종 원년, 650)에 신성(申省:州에서 중앙의 中書省에 올린 문서)의 천거에 의하여 역경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미 지니고 있던 덕성의 향기가 더욱 그윽해지고 훌륭해졌다. 제경(帝京)에 이르게 된 이래 자주 궁궐에 나아가게 되었다. 항상 결재(潔齋)하고 행도(行道)하는 데 솔선하니 모두 따르게 되었다. 공업(功業)을 이루도록 이끈 것은 모두 혜립법사의 능력 때문이며, 도를 논하는 자리에서 불교측이 빛을 발휘한 것은 모두 혜립법사의 힘이었다. 전후의 여러 차례 논변에서 잘 갖추어 승려의 기품을 드러내었다. 이미 비교(非敎) 부분에서 기술하였으므로 여기에서는 줄이고 기술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논변은 많은 것을 갖추어 매우 풍부하였으며, 도를 말하고, 운수행각(雲水行脚)하는 일들이 이전의 틀을 넘어선 것이었다. 대개 논쟁으로 비판하고 다투는 때에는 상대방을 끝내 꺾어 눌러 경도(傾倒)하게 만들었다. 황제가 앞에서 쳐다보며 ‘이 사람은 누구인가?’하고 물으니, 혜가 ‘본래 유주(幽州)의 승려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황제가 항상 그를 중시하게 되었고, 옆에 두어 세속의 일을 맡기려고 하였다. 황제가 현장법사에게 자주 말하였다.
“유주사(幽州師:혜립법사)는 참으로 훌륭합니다.”
이 말에는 그럴 만한 뜻이 깃들어 있었다. 7월에 이르러 황제가 궁내에 조칙을 내려 홍려(鴻臚:典客을 맡는 관청)의 경(卿) 위경검(韋慶儉)에게 혜립법사를 서명사(西明寺)의 도유나(都維那)에 보임하도록 하였다. 혜립법사의 성품은 소란스러운 일에 익숙지 않아서 궁궐에 나아가 사퇴하였으나, 담당 관부가 이를 막아 황제에게 표(表)가 올라가지 않았다. 혜립법사는 이치에 따라 승무(僧務)를 이행하였으며, 도덕과 규범을 깨뜨리지 않았다.
3.황제께서 겨울에 가뭄이 들자 궁내에 재(齋)를 올려 기도하고, 불교와 도교 이종(二宗)을 초빙하여 논의하게 한 일
현경(顯慶) 3년(658) 겨울 11월에 황제께서 겨울에 눈이 오지 않는 것을 걱정하여 홍법(弘法)하고 기우제를 올려 눈이 내리도록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복장(福場)을 만들기 위해 고요한 곳을 골라 출입을 금하고 넓고 장엄한 법좌를 만들었다. 조칙을 내려 대자은사(大慈恩寺)의 사문 의부(義褒)와 동명관(東明觀)의 도사 장혜원(張惠元) 등을 궁내에 들어오도록 하여 별중전(別中殿)에서 도에 대한 강론을 하도록 하였다. 시작하는 때가 되니 궁궐 내외의 모든 이들이 법연(法筵)에 모였다. 불교와 도교측에서는 각기 가장 뛰어난 수행자를 찾아 나섰으니, 여기에 선발되면 이러한 영광은 영원히 없을 것이었다.
천자가 친히 의부스님께 어느 읍에서 오셨는지 물으니 그 자리에서 대답하였다. 이 때 도사 이영이 먼저 고좌(高座)에 올라 본제(本祭)의 의(義)를 세웠다.
황제가 의부스님께 말하였다.
“듣건대 사(師)께서는 논의에 능하다고 하니, 부디 고좌에 오르시어 함께 명리(名理)를 논해 주시길 청합니다.”
의부스님이 곧바로 자리에 올라 이영에게 물었다.
“이미 본제(本際)의 의(義)를 표제로 올렸는데, 도(道)가 제(際)를 근본으로 함을 본제(本際)라고 이름 하는 것입니까, 제(際)가 도(道)를 근본으로 함을 본제라고 이름하는 것입니까?”
대답하였다.
“양쪽이 모두 그렇다 할 것입니다.”
비판하여 말하였다.
“도(道)가 제(際)를 근본으로 한다 하였으니 제(際)가 도의 근본이 된다는 것인데, 또한 제(際)가 도를 근본으로 한다 하였으니 도가 제(際)의 근본이 되겠군요.”
대답하였다.
“왜 서로 통하지 않겠습니까?”
견주어 말하였다.
“만약 도를 본제(本際)와 함께 서로 통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또한 자연과 도(道)도 서로 법(法)할 수 있겠군요.”
대답하였다.
“도는 자연을 법하지만, 자연은 도를 법하지 않습니다.”
또 견주어 말하였다.
“만약 도는 자연을 법하는데 자연은 도를 법하지 않는다고 하면, 또한 도는 본제를 근본으로 하지만, 본제는 도를 근본으로 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군요.”
이에 도사들이 어려움에 봉착하여 도교가 추락할까 두려워하였다. 단지 입을 다물고 묵묵히 있을 뿐 더 이상 대답을 못하고 있었다.
의부스님이 곧바로 결론을 뒤집으며 비판하여 말하였다.
“그대들이 말하는 도는 본제를 근본으로 한다 하였으니, 결국 도(道)와 제(際)가 서로 근본이 된다 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도가 자연을 법한다 할 수 있을 것인데, 왜 도와 자연이 서로 법할 수 없다는 것입니까?”
이영이 거듭 견주어 설명해 주는 말을 들었으나, 그 비판을 알아듣지 못하였으며, 또한 결론을 이해하지 못하고, 바로 방자하게 조롱하며 말하였다.
“법사께서 저를 선생이라 불렀으니, 당신은 곧 저의 제자가 되겠군요.”
의부스님이 바로 그 말에 응하여 창피를 주며 말하였다.
“지금 성인의 말씀에 대하여 논의하는 것은 그릇됨과 바름을 거듭 밝혀서 황제의 마음을 밝혀 드리기 위함인데 비천한 조롱으로 황제의 귀를 더럽히고, 의(義)는 내동댕이쳤으니, 이는 진실로 가당치 않는 일입니다. 비록 말할 것도 않고 응대할 것도 없습니다만, 옛날에 전한 말이 있으니, 잠시 이로써 답할까 합니다. 저는 부처님을 스승으로 섬기니 저는 부처님의 제자입니다. 그대는 이미 선생(先生)이라 칭하였으니, 그대는 마땅히 도(道)보다 앞서 생한 것이 되군요. 저는 제자이고, 부처님은 저의 스승이십니다. 그대가 만약 도보다 앞서서 생하였다면, 그대는 마땅히 도의 상이 되겠군요.”
당시 도사들은 부끄러워하고 겸연쩍어하면서 대답을 못하고, 주미(麈尾)14)를 내려뜨리고 목소리는 풀이 죽어 있었다. 의부스님이 이에 부드럽게 말하였다.
“주미는 이미 힘없이 내려뜨려져 있고, 녹건(鹿巾)은 부러지려고 하며, 목소리는 이미 풀이 죽어 있고, 논의하는 예봉 또한 꺾이었구려.”
이영이 대답을 못하고, 뒤로 멈칫멈칫 물러나 자리에 앉았다. 황제가 생각해 보고 바로 의부스님께 법에 따라 자리에 오르시도록 하였으나 곧바로 사양하며 말하였다.
“의부는 강남의 변변치 못한 승려로서 산중에 있다가 천광(天光:황제의 은총)이 멀리 누추하고 어두운 임천(林泉)까지 비추심으로, 폐하께서 친히 이 자리에 참석하시어 보고 계시는데도, 경망되게 폐하의 명을 어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불ㆍ법ㆍ승의 보배는 위없는 복전(福田)이오며, 낙산(樂山)에 오르는 사다리이며, 고해(苦海)를 건너는 나루이옵니다. 법신(法身)은 상주(常住)하옵고, 나투인 현상[迹]은 흥망으로 전개됩니다. 상교(像敎:像法시대의 불교)가 유지되는 데는 황제의 힘이 있어야 하옵니다. 삼가 생각건대 폐하의 도(道)는 황제(黃帝)와 복희(伏羲)를 넘어서 있사오며, 덕은 요순(堯舜)보다 더 크옵고, 만기(萬機)를 크게 휘둘러 삼보(三寶)를 홍포하시고 계시옵니다. 황후께서는 궁내를 힘써 잘 가꾸시고, 황태자에 대한 칭송의 소리가 높사옵니다. 지금 비가 내리지 않고, 눈도 오지 않으니, 백성의 고통을 염려하시어 재(齋)를 설(設)하여 복을 기도하옵고, 궁정 안에 승당(勝幢)을 건립하며, 궁궐에 법좌(法座)를 개설하시어 도풍(道風)이 끊임없이 일어나서 불일(佛日)이 끊임없이 빛나도록 하시려고 명을 내리시어 승려와 도사가 각기 명리(名理)를 펴도록 하셨습니다. 옥계(玉階:궁궐)에서 옥경(玉京)15)의 가르침을 천명하고, 금궐(金闕)에서 금구(金口:부처님)의 말씀을 휘날리게 하셨으니, 이 경복(景福)으로써 성어(聖御:황제)를 장엄하고 있습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황제의 금륜(金輪)을 영원히 굴려서 옥경(玉鏡)이 항상 밝아 북극성과 같이 존경받으시며, 경사로움이 남악(南岳)보다 더 크시길 바라옵니다. 황후께서는 마음이 칠요(七曜:日月과 金木水火土의 일곱 별)처럼 밝으시고, 몸은 이의(二儀:음양)를 잘 통하시며, 육궁(六宮)을 잘 훈도하고 이끄시어 만국(萬國)의 어머니가 되시옵길 바라옵니다. 황태자께서는 문원(文苑)에 몰두하시고, 춘방(春坊:太子宮)을 빛내시어 아름다운 별들이 앞에 퍼져 있듯 하시고, 정치를 잘 도모하시어 무력(武力)을 굴복시키시옵소서. 저[義褒]는 바닷가 모퉁이에서 은거하다 뜻밖에 숭고하고 아름다운 자리에 참여하게 되어 두려운 마음으로 무외(無畏)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으며, 어눌한 말로 중대한 담론을 해석하게 되었습니다(이하 생략).
그러나 성지(聖旨)가 여기에 내려져 저에게 논제의 의(義)를 세우게 하셨습니다. 이제 그 표제의 의(義)를 제시하고자 하니 그것은 이름하여 마하반야바라밀(摩訶般若波羅蜜)의 의(義)라고 합니다. 이는 대승의 상가(象駕)이며, 방등(方等:대승)의 용진(龍津)이고, 보살ㆍ대사ㆍ여래의 지혜모(智慧母)입니다. ‘마하(摩訶)’란 ‘크다[大]’는 뜻이고, ‘반야(般若)’란 ‘혜(慧)’이며, ‘바라밀’이란 ‘피안(彼岸)에 이른다’는 뜻입니다. 무릇 현묘한 근원[玄府]은 그 심오한 정화(精華)를 말로 다 나타낼 수 없으므로 ‘크다’는 말에 기대어 이를 표시한 것이며, 수경(水鏡)으로는 그 맑고 밝음을 비유할 수 없어서 혜(慧)라는 말을 빌려서 이를 밝힌 것이고, 모두 이루어 그 끝을 얻을 수 없어서 ‘건넌다(度:渡)’는 말을 빌려 이를 칭하게 된 것입니다(이하 생략).“
도사 장혜원이 물었다.
“음(音)은 인도 발음인데 글자는 당나라의 글자입니다. 인도 발음의 글자를 당나라 글자로 번역하였는데, 이렇게 하여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의부법사가 대답하였다.
“글자는 당나라 글자이고 음(音)은 범음(梵音)입니다. 범음을 당나라 글자로 변역하였으니, 피차 모두 이익이 됩니다.”
또 비판하였다.
“인도 발음이 어떻게 사람을 이롭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대답하였다.
“부처님께서는 천축(天竺:인도)에서 나시어 범음으로 바른 가르침을 펴셨고, 중국에 전해져 그 이익이 매우 많은데 왜 이익이 안 된다고 하십니까?”
저들(도사들)은 더 이상 비판하여 되묻지 못하고, 통달하여 해석하지도 못하였다.
의부법사가 부드럽게16) 말하였다.
“도사들은 연로한데다가 이제 또 미쳐 버렸군요. 의(義)에 답하는 것이 이 모양인, 바로 그 자리에서 아무 생각도 않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장혜원이 말하였다.
“제가 어떻게 갑자기 미쳤다는 말입니까?”
의부법사가 부드럽게 말하였다.
“그대의 마음이 미치지 않았다면 어떻게 미친 말이 나오겠습니까? 물러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만 고집을 푸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의부법사가 부드럽게 말하였다.
“그대의 마음이 미치지 않았다면 어떻게 미친 말이 나오겠습니까? 물러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만 고집을 푸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장혜원이 마침내 다시 자리에 앉았다. 멀리 있던 도사가 뒤를 이어 논의하여 말하였다.
“반야는 어리석음이 없는 지혜인데, 왜 지(智)라고 칭한 것입니다.”
장혜원이 비판하여 말하였다.
“무엇이 우치인데, 지혜를 가지고 파괴한다는 것입니까?”
대답하였다.
“어리석은 사람은 도사(道士)이니, 이들을 지혜로써 파괴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장혜원이 말하였다.
“제가 어떻게 갑자기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습니까?”
대답하였다.
“반야는 어리석음이 없는 지혜이니, 어리석음을 파하는 데는 찬미하는 것이 지혜가 됩니다. 도사가 만약 어리석음을 없애려고 한다면 제가 지혜의 약을 건네 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 차례 뒤집어엎고 물리치니, 장혜원이 마침내 숨을 크게 들이쉬고 소리를 뱉으며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하면서 비판도 못하고 묵묵히 앉아 있기만 하였다. 의부법사가 그래서 더욱 부드럽게 말하였다.
“장선생인 미쳐서 도망가기 바쁘니 아름답게 도를 설명하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어리석음을 넘어설 여지도 없이 미친 어리석음에 이미 빠져 있으니, 이영이 다시 나서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로 인해 이영이 나서서 물었다.
“표제로 한 의(義)가 반야바라밀인데, 이것은 곧 피안(彼岸)도 아니고, 차안(此岸)도 아닐 텐데, 어떻게 피안에 이른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대답하였다.
“반야는 피안ㆍ차안이 따로 없으나, 찬미(讚美)하여 피안으로 건너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영이 말하였다.
“피안도 아니고, 차안도 아닌데, 찬미하여 피안으로 건너가게 한다면, 또한 당연히 피안도 아니고 차안도 아니니 찬미하여 차안에 이르게 되기도 하겠군요.”
대답하였다.
“비록 피안과 차안 모두 따로 없는 것이나, 피안을 찬탄하여 차안을 떠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영이 말하였다.
“피안만 찬탄하고, 차안은 찬탄하지 않으니, 또한 마땅히 차안이 없다면 피안도 없지 않겠습니다.”
대답하였다.
“피안을 찬탄하여 차안에서 벗어나게 함이요, 차안을 벗어나면 피안 또한 없게 됩니다.”
이영은 더 이상 비판하지 못하고 이어 조소(嘲笑)하며 말하였다.
“스님의 머리는 탄환(彈丸)처럼 생겨서 뜻을 해석하는 것도 둥글둥글하군요.”
의부법사가 바로 이어 말하였다.
“지금 탄환 한 발을 참새에게 쏘아 맞추고, 아울러 두 마리의 솔개와 올빼미까지 함께 맞추었고, 참새의 다리를 탄환으로 쏘았는데, 솔개와 올빼미의 허리까지 맞추게 되었도다. 이 때 이영은 이미 탄환 쏘는 기구를 발사하였다가 오히려 탄환에 맞았고, 장혜원은 이에 화살을 뽑아 주어 도와주려고 하였다.”
의부법사가 또 부드럽게 말하였다.
“이영은 스스로 탄환을 뽑지 못하였고, 장혜원은 미쳐서 엉뚱하게 도움을 주려고 하였습니다. 경거망동하여 한 번 우매한 말을 하니 어디에 도움이 될 바가 있겠습니까? 경거망동하여 곧바로 발언하는 것은……(이하 생략).”
의부법사가 다시 부드럽게 말하였다.
“두 사람이 한 사람을 도와 이 우매한 세 사람이 하나의 지혜를 이룬다는 말은 예전에 들어본 바 있으나, 이제 이 말에 따를 수 없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이 때 천자는 유쾌해 하고, 궁내가 떠들썩하였다. 이영이 고개를 숙이고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곧 말하였다.
“이렇게 의(義)를 해설하려고 왜 오지(吳地)의 먼 곳에서 여기까지 꼭 올 필요가 있었습니까?”
의부법사가 말하였다.
“삼오(三吳) 지역은 승지(勝地)라 본래 영현(英賢)들이 배출된 곳입니다. 그런데 어찌 엉뚱하게 멋대로 예전에 인물이 없었다고 합니까?(이하 생략.)”
말을 마치고 자리에 앉았다. 이 때에 이렇게 의부법사가 홀로 앞서 이끌어 나가니 황로(黃老:道士)들이 감히 항론하지 못하였다. 가히 궁정에서 의론을 크게 떨쳐 진동하였다 할 것이니, 제바(提婆)보살의 날과 다름없고, 황제의 궁정에 법음(法音)을 맑게 뿌린 것이 신자(身子:사리불)와 어찌 다르겠는가.
토론이 끝나고 서로 어울려 공관(公館)에 돌아가는데 의부법사가 도사들한테 말하였다.
“전차를 끄는 빠른 말[馬]도 혀[舌:言]에 미치지 못하고, 명언(明言)은 쉽지가 않습니다. 천하의 청론(淸論)에 어찌 한량이 있겠습니까? 청론은 빛나는 별들이 하늘에 있는 것과 같으며 강산의 진지(鎭地:요새)와 유사합니다. 모름지기 인용하여 말할 때는 반드시 야비한 말을 넣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야비한 말을 하며 어떻게 천안(天顔:황제의 얼굴)을 면대(面對)할 수 있겠습니까. 가벼이 궤변을 늘어놓아 법에서 벗어난다면 죄를 논하건대 불경죄(不敬罪)에 해당할 것입니다. 성상(聖上)의 자비심에 의뢰하여 저 잘 따르지 못하고 불경(不敬)한 죄에 대한 너그러운 용서를 빌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화를 피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도사들이 크게 부끄러워하였다. 장혜원이 말하였다.
“꼭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의부법사가 말하였다.
“지나간 일은 허물을 탓할 수 없지만 앞으로의 일은 오히려 추궁해야 할 것입니다. 부디 의방(義方)을 폭넓게 하여 명리(名理)를 상세히 총괄하여 보기 바랍니다. 어찌 불교와 도교의 차원 높은 가르침이 세속의 조류에 떨어지지 않겠습니까? 이기고 지는 것을 모두 잊어야 정리(情理)도 모두 버릴 수 있게 됩니다.”
필자[道宣]가 간략하게 기술하였다. 의부법사의 읟(義道)는 가히 뛰어난 것이었다 할 것이며, 당시 만대(萬大)의 사표로 존경받았다. 궁성에서 도사들을 꺾고, 황제 앞에서 제망(帝網:여기서는 한량없는 佛法)을 뜻함)을 펴는데 진(秦)의 군진(軍陣)을 힘들게 하지 않고, 병탄(倂呑)하고 합종(合縱)하였으니, 이는 운제(雲梯:높은 사닥다리)로써 도중(徒衆)들을 휘감아 이끌어 간 것이라, 아름다운 군주의 이야기라 할 것이며, 조종(祖宗)과 군주가 찬탄할 일이라 할 것이다.17) 이러함을 믿어야 한다.
4.상(당고종)이 동도(東都:낙양)에 행차하시어 서경(西京:장안)의 승려와 도사를 초빙하여 논의하게 한 일
현경(顯慶) 5년(660), 황제께서 동도에 행차하시어 마음을 불도(佛道)에 두고 의리(義理)를 숭상하셨으나,18) 담론을 통한 설명이 없이는 그 의리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조칙을 내려 대자은사의 승려 의부와 서명사의 승려 혜립에게 각 시자(侍者) 스님 두 명씩을 동쪽으로 낙양에 오게 하였다. 이들이 도착하니 예전과 같이 합벽궁(合壁宮)에 와서 황제를 봉견(奉見)하도록 하였다. 설명하면서 논의하였으나 황제가 그 뜻에 명확히 통하지 못하였다. 조칙을 내려 이 분들을 동도(東都)의 정토사(淨土寺)에 머물게 하였다. 의부법사는 여기에서 『대품(大品)』과 『삼론(三論)』을 강설하였는데, 그 명성과 존숭함이 화려하고 성대하였으며, 빛나는 성가(聲價)는 더욱 융성하였다.
의부법사의 성은 설시(薛氏)이고, 상주(象州) 진릉(晋陵) 사람이다. 대체로 제(齊)나라의 상(相) 맹상군(孟嘗君)의 후예이고, 대오(大吳)의 명신 종영(綜瑩)의 후손이다. 모습은 고아하였고, 품성은 청명하였으며, 어려서 출가하여 오랫동안 돌아다니며 훌륭한 가르침을 청문하였다. 처음에는 소주(蘇州)의 명(明)법사에게 감복하여 부지런히 교의를 배워 『대품반야경』과 『화엄경』을 모두 훌륭하고 청량(淸凉)하게 터득하여 암혈(巖穴)을 개명(開明)하였다. 또 진운산(縉雲山) 무주(婺州) 광(曠)법사를 찾아가 여러 해 동안 지내면서 심오한 뜻을 청문하고 회통하였다. 본래 성실하여 심오한 뜻을 끝까지 훤히 꿰뚫었다. 이에 여러 수행처를 30여 년간 두루 돌아다니면서 경전을 전하고, 논을 지으니, 배우는 이들과 도반들이 분주히 따랐다. 매번 오직 대승(大乘)의 지극한 가르침을 으뜸으로 삼았다. 본래 위수(渭水) 유역(長安 부근임)에서 지내다가 정처 없이 유랑하며 떠돌아다니다 양월(楊越) 지역에 이르렀다. 법사가 중원(中原)에서 안 계시게 되니, 아, 높이 우뚝하였던 중원이 실종되었도다. 나중에는 동양(東陽)의 금화산(金華山) 법당사(法幢寺)에 머물며 도를 널리 펴길 쉬지 않았다. 종일토록 입정(入定)하며 관심행(觀心行)을 오랫동안 이어갔다. 그렇게 지내다가 마침 대자은사의 현장법사가 청하여 여기에 거처하게 되면서 경읍(京邑:장안)에 법을 크게 떨치게 되었으니, 뛰어난 인재들이 그 풍모를 따르고 덕을 우러러보았다. 그 명성이 황제에게 전해져서 황제가 조칙을 내려 궁내에서 논의하는 자리에 초빙되었다. 이렇게 의부법사가 경사(京師:경읍, 장안)에 이르게 되니 깊이 스며 있던 우환이 일거에 사라졌다. 삼장법사 현장스님은 의부법사와의 격차에 시기하지 않고, 함께 불법의 대강을 설하면서 호법에 힘을 다하였다. 현장스님은 의부법사에게 터득한 바의 경론을 열 번 통강(通講)해 달라고 청하고, 주변의 문도(門徒)들을 돌아보며 모두 가서 듣도록 하라고 일렀다. 이 때 대자은사에 있으면서 웅대한 이법(理法)을 처음 열어 유(有)와 공(空)에 집착하는 성실종(成實宗)으로 분하(分河)되어 물 마시러 온 객들이 각각 따로 부(部)를 이루고 있었다. 계율을 설하는 이들은 인아집(人我執)에 매여 요란스럽게 하고 망막해 하며 놀라서 바라보았다. 모두들 공견(空見) 외도라고 말하였고 혹은 공화(空花)도인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버럭 크게 화를 내며 바람 따라 함께 무너지고 정신 없이 방황하다 길을 잃고 정도에 돌아가지도 못하였다. 의부법사가 이에 법을 비방하는 잘못을 훈계하고, 믿음을 으뜸으로 하는 길을 제시하며, 삼관(三關) 지역의 풍조를 책망하니, 모두들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 하고, 오과(五過)19)를 짓는 데로 이끌어 그 죄가 하늘에 가득하였다. 이에 의부법사가 이리저리 잘 설명하며 정교(正敎)의 구절을 비류(飛流)처럼 인용하여 능난하게 답변함이 전에 없었다. 이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공전의 성황을 이루고, 운우(雲雨)가 저절로 이르렀다. 천하가 덕음(德音)을 청문하고, 고관대작과 성내의 모든 이들이 그 도의 뛰어남에 감탄하고 칭송하니, 대법(大法)의 중흥이 바로 이 분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한 달쯤 지나서는 바로 황제에 의해 궁정에 초대받아, 도를 밝히고 친히 청언(淸言)을 한 것은 앞에서 간략히 서술한 바와 같다. 황제는 불법의 뜻에 밝지 못하였는데 법사의 해설을 기대하여 나중에 낙읍에 순행하여서는 거듭 법사를 논의하는 자리에 초빙하였다. 그리하여 그 영예로운 명성이 더욱 커지고 금고(今古)에 가득하게 되었다.
그런데 불의(不意)에 법주(法柱:의부법사)께서 홀연히 입적하시게 되니 인주(仁舟)가 사라졌도다. 병으로 인해 낙읍(洛邑)에서 입적하시니 천지가 슬픔으로 가득하고, 도속(道俗)이 함께 슬퍼하였다. 황제가 조칙을 내려 조문하고, 아울러 부증(賻贈)을 올리고 향읍(鄕邑)에 장사지내도록 하였다.
그 밖의 뛰어난 도를 전하는 자료에 대해서는 그 글을 다 얻지를 못하였다.
얻어진 대로 이를 편집하는 것은 유실될까 두려워서이다.
5.금상이 동도(東都:낙읍)에 계시면서 낙읍의 정태(靜泰)스님을 초빙하여 도사 이영(李榮)과 도에 대한 논의를 하게 한 일
현경5년(660) 8월 18일, 황제께서 조칙을 내려 정태스님과 도사 이영(李榮)을 낙읍의 궁중에 초빙하였다. 황제가 정태 스님께 물었다.
“『노자화호경(老子化胡經)』에서 노자가 호인(胡人)을 교화하였다고 하였는데, 그 일은 어떻게 된 것인가? 그 유래를 자세히 설명해 주기 바라오.”
정태스님이 자세히 말하였다.
“무릇 황왕(皇王)께서 이루시는 성대한 사업들을 그 행적이 매우 다양하옵니다. 혹은 명당(明堂)을 지어 어진 이를 모시고, 혹은 구실(衢室)에 임하시어 하문(下門)하시기도 하고, 혹은 백전(栢殿:궁전)에서 청문(請文)을 짓고, 혹은 봉산(蓬山)에서 고아한 논의의 자리를 여십니다. 그렇지만 명교(名敎:유교)의 장(場)으로 몰아가시며 진현(眞玄)의 장(場)에는 나아가지 않으시는데, 어찌 우리 황덕(皇德)이 양의(兩儀:음양)의 도를 고요하게 하고, 팔표(八表:八方 밖의 먼 異邦)를 청정하게 하며, 깊은 산의 회랑(回廊)에서 유유자적하며, 이교(二敎:불교와 도교)를 품에 안아 융화하고, 방외(方外)의 가르침을 제어하여 혜일(慧日)을 높이 떠오르게 할 수 있겠습니까? 군내의 사정을 살피시어 현풍(玄風)을 이끌어 창달하시고자 이렇게 승려와 도사들을 빈주(賓主)로 상대하여 토론하게 하셨습니다. 단지 저는 배운 것을 그대로 편집하여 말하는 데 지나지 않습니다만, 주변에서 아첨하여 얼음을 조각하고 나무를 주조(鑄造)하는 듯하다고 말합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부월(斧鉞:황제의 권한) 휘두르시는 것을 잠시 멈추시고, 흉금을 주고받으시길 바랍니다.”
황제가 물었다.
“도사들의 『화호경』에 노자가 호인(胡人)을 교화하고 부처가 되었다고 하는데, 이 일이 어떻게 된 것입니까?”
정태스님이 황제께 말하였다.
“『노자도덕경』의 두 편(道篇ㆍ德篇)과 『장자』의 내외편은 혹은 허무(虛無)를 주(主)로 하고, 혹은 자연을 종(宗)으로 하니, 확실히 불교와는 다릅니다. 그러나 이 일가(一家:노자와 장자의 도가)는 본래대로 조용히 여기가지 내려왔습니다만, 그 밖의 것들은 하우(下愚)한 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영보(靈寶:도교의 長生法)는 장릉(張陵)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오(娛)나라 때에 비로소 성행하게 되었으며, 상청파(上淸派)의 발단은 갈홍(葛洪)에 의해 이루어지고 제(齊)나라 시대에 바야흐로 행해졌고, 또한 포장(鮑靜)은 『삼황(三皇)』을 위조하였다가 사형에 처해졌으니, 이에 대해서는 『진사(晋史)』에 기술되어 있습니다. 대당(大唐)의 정관(貞觀) 연대에는 황제께서 명을 내려 이 『화호경(化胡經)』을 모두 불태워 버리도록 하셨습니다. 제가 『진대잡록(晋代雜錄)』 및 배자야(裵子野)의 『고승전(高僧傳)』에 의거하건대, 모두 말하기를 ‘도사 왕부(王浮)와 사문 백조(帛祖)가 대론(對論)하다 도사 왕부가 매번 지니까, 마침내 왕부(王浮)가 한서(漢書)의 서역전(西域傳)을 취하여 비슷하게 꾸며서 『화호경』을 만들었다’고 하였으며, 『수신기(搜神記)』와 『유명록(幽明錄)』 등에서도 또한 말하기를 ‘왕부가 이를 위조한 잘못을 저질렀다’고 하였습니다.”
도사 이영이 말하였다.
“정태스님은 무지하여 멋대로 이것저것 인용하고 있습니다. 제가 『화호경』에 의거해서 말하면 ‘노자가 호인(胡人)을 교화하다 부처가 되었다’고 하였고, 또 「노자서(老子序)」에서는 ‘노자가 서쪽으로 유사(流沙)에 갔다’고 하였습니다. 이로 보아 호인(胡人)을 교화하였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정태스님이 말하였다.
“이영은 거듭 『화호경』을 인용하고 있습니다만, 제가 이미 앞에서 그것이 위조된 것임을 지적하였습니다. 설령 이 경이 실록(實錄)이라 할지라도 그 내용으로 보면 노자는 반드시 부처님께 귀의한 대사(大師)이어야 할 것입니다. 『화호경』 가운데서 노자가 말하기를 ‘내 스승 석가문(釋迦文)께서는 훌륭히 니원(泥洹:열반)에 드셨다’고 하였고, 또 이영이 인용한 노자경의 서에는 노자가 서쪽으로 유사(流沙) 지역에 갔다는 이야기가 전혀 없습니다. 단지 윤희(尹喜)가 노자에게 말하기를 ‘이제 은거하실렵니까?’라고 하였을 뿐입니다. 이영의 대답은 황제께서 지시한 뜻에 부실(不實)하니, 청컨대 엄하게 규찰해 주시길 바라옵니다.
또 『장자』에서 말하기를 ‘노자가 죽으니 진(秦)에서 조문(弔問)하였다’고 하였고, 또 『서경잡기(西京雜記)』에서 말하기를 ‘노자를 괴리(槐里)에서 장사(葬事) 지내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들 자료는 모두 그 전거가 뚜렷하여 좋은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도사들이 지니는 여러 경들은 『노자』와 『장자』를 제외하면 모두 거짓이고 삿된 것이며, 슬쩍 부처님의 가르침을 절취하고 본따서 종횡으로 배열해 놓은 것으로, 수미(首尾)가 멋대로 왔다갔다하고, 진퇴(進退)가 오직 어긋나 있을 뿐입니다. 가령 이영이 말한 경문에 노자가 부처님께 귀의하였다는 내용이 없다면 폐하, 비각(秘閣)에도 또한 도경(道經)이 있으니, 청컨대 삼관학사(三觀學士)의 주장에 대해 그 시비(是非)를 판단함으로써 그 진실과 거짓을 밝혀 주시길 바라옵니다.”
이영이 말하였다.
“도인도 또한 멋대로 역경(譯經)하였으나, 백마사(白馬寺)에서의 역경에 의하건대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을 제외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도인의 위작(僞作)입니다. 가까이는 현장(玄奘) 또한 멋대로 경론을 번역하였습니다.”
정태스님이 황제께 말하였다.
“이영은 구차하게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고 있으나, 이는 사적(史籍)의 내용을 모르고 하는 말들입니다. 사적에 의거하면 가섭마등과 축법란이 처음 이 땅에 이르러서 여러 경을 크게 번역하였고, 그 후에 지루가참과 강승회(康僧會)ㆍ담마제(曇摩提)ㆍ구마라집의 여러 분들이 번역하였는데, 모두 연월(年月)이 자세히 명기되어 있습니다. 여러 나라의 사서(史書) 또한 이러한 사실들을 전하고 있습니다. 세속의 사(士)로서 섭승원(聶承遠)과 사령운(謝靈運) 등도 모두 번역하였으니, 이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에 자세히 전합니다. 어찌 이러한 불경의 번역들이 그대들의 위경(僞經)에 비교될 수 있겠습니까? 혹은 빨강 새가 주둥이로 먹이를 물고 가다 파랑새가 먹이를 씹고 있는 것을 보고 말을 하려다 마침내 물고 가던 먹이를 잃게 되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용한(龍漢:도교에서 말하는 五劫)에서 마침내 개역(改易)이 이루어져 적명(赤明:위 五劫 가운데 두 번째 劫)에 이른다는 설은 모두 공허한 것일 뿐이고, 아직 실재의 일을 존숭하고 있다는 것을 들어 보지 못하였습니다. 또한 이영이 말하기를 ‘근래 현장법사 또한 멋대로 경전을 번역하였다’고 하였으나, 자세히 생각건대 이 말에 따를 수 없습니다. 현장법사는 오랫동안 인도 전역을 두루 돌아다니시어 범어(梵語)에 능통하였고, 그 고아한 이론을 살펴보면 버금갈 자가 없었던 것입니다. 또한 현장법사의 번역은 우리 성조(聖朝:당나라)에 합치하며 이제(二帝:당의 高祖와 太宗)의 천문(天文)을 꾸몄고, 두 황제의 문장을 빛내었는데, 저 무지한 좨주(祭酒:여기서는 도사인 이영을 가리킴)가 자주 명예를 훼손하고 있으니, 이영의 죄를 논하건대 만 번 사형에 처하여야 마땅할 것입니다.”
이영이 황제께 말하였다.
“노자와 석가모니의 두 교(敎)는 모두 성인의 가르침이라, 저와 정태스님이 능히 설명할 수 있는 바가 아닐 것입니다.”
정태스님이 황제께 말하였다.
“이영은 스스로 설명할 수 없다고 하였으나, 저는 할 수 있습니다.”
이영이 다시 말하였다.
“제가 『도겁경(道劫經)』에 의거하여 말하겠습니다. ‘도(道)가 불(佛)을 낳았다’고 하였으니, 불(佛)은 도(道)보다 낮을 것이며, 호인(胡人)을 교화하였다는 것도 또한 단연코 빈 말이 아닐 것입니다.”
정태스님이 말하였다.
“도사들은 단월(檀越)이라 칭하면서 이미 승려의 말을 절취(竊取)하였고, 경에서 겁(劫)에 대한 글을 끌어다 쓰는데 이 또한 범어(梵語)를 훔쳐서 쓴 것입니다. 머리를 조아리며 교화를 받으면서도 오히려 황건(黃巾)을 쓰고 있습니다. 이미 불풍(佛風)의 교화를 점차로 받고 있으면서도 아직 승복을 입지 않고, 우리의 음식을 먹으면서도 좋은 말을 하지 않으니, 이렇게 불량한 사람들이 어찌 일찍 죽음에 이르지 않겠습니까? 겁(劫)이란 범어인데 어찌 도교의 말이겠습니까? 변경의 어떤 자가 그 이름을 절취한 것입니다.”
이영이 말하였다.
“대도(大道)는 공(空)하여 같은 것이거늘 왜 불(佛)이니, 도(道)니 합니까?”
정태스님이 황제께 말하였다.
“성인(聖人)의 바로 옆에서, 황제의 앞에서 비속한 말을 기틀로 삼으며, 민간의 저속한 말을 고아한 논의의 자리에서 지껄이고 있습니다. 고인(古人)이 상방(尙方:궁중 소속의 무기 제조처)에 마검(馬劍)의 제조를 청하였는데, 이제 그 칼로 저 나귀의 머리를 베어야 할 것입니다. 벌할 자를 벌하는 것은 인(仁)이며, 분명히 인(仁)이라 할 것입니다.”
이영이 말하였다.
“우리 장자(莊子)가 말하기를, ‘도(道)는 분뇨에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정태스님이 말하였다.
“그대가 도는 분뇨에도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아무렇게나 하천한 것에 의거하여 말한 것이고, 그대들이 말하는 도는 본래 청허(淸虛)한 것이거늘 왜 극상(極上)에 의거하여 말하지 않는 것입니까?”
또 이영을 질책하여 말하였다.
“그대들의 경에서도 도한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고 하여 아난(阿難)도 역시 나를 칭하고 있는데, 우리라고 하는 것이 왜 안 됩니까?”
정태스님이 말하였다.
“경에서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고 하는 것은 결집(結集)하여 전하게 되엇다는 뜻입니다. 또한 아난은 나[我]라는 상(相)이 없이 나라는 말을 빌려 나라고 한 것이지만, 그대가 말하는 나는 아상(我相)을 아직 제거하지 못하여 부득이하게 나를 나라고 한 것입니다. 또한 아난이 ‘나’라고 칭한 것은 후인(後人)에 상대하여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나’라고 칭하는 것은 엄의(嚴扆:황제)와 함께 하고 있는 자리에서 이러한 행태를 부릴 수가 없는 것이거늘 어떻게 죄를 피할 수 있겠습니까?”
이영이 할 말이 궁하게 되자 마침내 조소하여 말하였다.
“정태스님의 말은 당황함이 없이 침착하고 나는 활발하지 못하나, 당신은 너무 지나치게 내세우는군요.”
정태스님이 말하였다.
“이영은 속이 시커머니 어찌 구더기와 다르리오. 이영의 선사(先師)는 미적(米賊:후한 말의 五斗米道)이었으니, 이 또한 불량(不良)한 자들이지요.”
이영이 마침내 말하였다.
“당신의 머리는 표주박같이 생겼군요.”
이 밖에 이러한 유의 말들을 하였다.
정태스님이 황제께 말하였다.
“유면(旒冕:황제)의 면전에서 마땅히 고아한 논의를 펼쳐야 할 것이거늘 이렇게 요행을 입어 멋대로 심한 말을 지껄여대고 있으니, 감히 저도 또한 잠깐 이영의 머리에 대해 조롱을 좀 해 보겠나이다.”
황제가 바로 말하였다.
“다리[脚]에 대해 조롱해 보도록 하시지요.”
정태스님이 말하였다.
“도사 이영의 이마 앞에 늘어뜨려진 머리카락은 양(羊)의 머리에 비견되고 입 주위에 나 있는 수염은 또한 사슴 꼬리를 닮아서 안줏감으로 좋게 생겼습니다. 논의할 만한 것도 못 되는데 더욱이 이렇게 서로 조롱하고 있으니 얼마나 맹랑한 일입니까?”
정태스님이 다시 황제께 말하였다.
“성지(聖旨)를 받사와 다리에 대해 조롱해 보겠습니다.”
정태스님이 바로 말하였다.
“이영의 허리는 길어서 그 모양에 대해 설명할 것 같으면, 자주 복을 쑥 내밀고 뱀처럼 허리를 구부린 채로 손을 휘저으며 나귀가 바삐 발을 놀리듯 걷고, 발을 움직일 때는 학의 무릎이 흔들거리는 것 같습니다.”
이영이 느닷없이 이러한 조롱을 당하고는 자신도 모르게 말하였다.
“정태스님은 허리가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습니다.”
정태스님이 황제께 말하였다.
“저는 일 푼만 보태면 크게 긴 편이 될 것입니다.”
이영이 말하였다.
“그럼 이대로 계속 서로 조롱해 보기로 합시다.”
그리고는 낙신부(洛神賦)20)를 읊었다.
정태스님이 말하였다.
“그것은 송옥(宋玉)21)에 대한 말이지 진왕(陳王)에 대한 내용이 아닙니다. 이영은 의(義)에 대한 논의에서 꺾이고, 말이 궁해지매 당황하고 미혹에 빠져 있습니다. 이영은 촉군(蜀郡)의 사인(詞人)이고, 저는 낙양의 재인(才人)입니다.”
이영이 말하였다.
“가생(賈生)은 이미 죽었는데, 재인이 무슨 상관입니까?”
정태스님이 황제께 말하였다.
“엄(嚴) 땅의 양수(楊水)22)가 계속 흘러내리지 않는다면 강한(江漢:양자강과 漢水)의 물은 쇠약해질23) 것입니다. 이영은 촉군(蜀郡)24)의 사인(詞人)이면서 어찌 이렇게 스스로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영이 할 말이 없자 돌려서 말하였다.
“그렇게 양자강 물이 쇠약해진다면 어떻게 영휘(靈輝)로울 수 있겠습니까?”
정태스님이 말하였다.
“변방의 오랑캐가 부르는 노래나 파인(巴人)25)이 부르는 노래를 부르면서 스스로 악장(樂章)을 이루었다 하고, 새가 지저귀는 듯한 변방 이족(異族)의 알아듣기 어려운 말을 여유롭게 음악 감상하듯 하고 있군요.”
이영이 또 말을 바꾸어 말하였다.
“무슨 뜻으로 나를 이왕(李王)이라 부르는 것입니까? 대당(大唐) 천자라는 말이 있어 이왕이라 하는 것입니까?”
정태스님이 말하였다.
“그대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자신에게 해당되는 것입니까, 황제께 해당되는 것입니까? 만약 자신에게 해당되는 것이라면 그대는 어떤 사람입니까? 만약 황제께 해당된다면 황제를 왕이라 하고 황제라 칭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영이 말하였다.
“우리 경(『도덕경』)에서 말하기를 ‘나라에 사대(四大:道ㆍ天ㆍ地ㆍ王)가 있는데, 왕(王)이 그 하나를 차지한다’고 하였으니, 왕이라 하는 것이 어찌 잘못이겠습니까?”
정태스님이 말하였다.
“『관자(管子)』에 말하기를 ‘첫 번째로 밝은 이는 황(皇)이요, 도(道)를 관찰한 이는 제(帝)이고, 덕(德)에 통한 이는 왕(王)이다’라고 하였는데, 그대가 나라에 대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대의 교(도교)를 스스로 낮추는 것이 됩니다. 당신은 또 가만히 있질 못하고 황제를 왕이라 하였으니, 그대의 잘못은 지극히 큽니다.”
이영이 급하게 되어 자신도 모르게 곧바로 말하였다.
“정태스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정태스님이 황제께 말하였다.
“이영이 이미 제가 옳다고 하였으니, 삼가 황제 폐하께서 살펴주시길 바랍니다.”
이영이 말을 바꾸어 말하였다.
“대도(大道)의 노군(老君)을 황제께서 존숭하고 계시는데, 어떤 물건인지 파란 눈26)의 호인(胡人)의 자(子)인 삭발한 소아(小兒)가 서쪽 오랑캐에서 일어나, 동쪽의 중국을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정태스님이 말하였다.
“여래께서 출현하신 그곳은 천중(天中)이며, 우리 황제께서 다스리시는 이 땅은 바로 불법을 이을 땅으로 위촉받은 곳이니, 황제와 왕이 감화 받으면 반드시 통할 것인데 어찌 그곳 이곳을 따집니까? 만약 중화민족에 한정해 버린다면 그대 스스로 두우(杜郵)27)의 비극에 빠지게 될까 염려됩니다. 노자를 초나라 사람이라고 하는데, 어느 곳인지 아직 모릅니다. 또 이영은 앞에서 말하기를 ‘파란 눈의 호인(胡人)의 자(子)’라고 하였으나, 이는 총령(葱嶺:파미르 고원) 이동(以東)에서 하는 말로 이중경(李仲卿:이영)의 야비한 말에 지나지 않으니 또한 부처님의 사적(事蹟)과 무관한 것입니다. 비록 아무 말 못하고 대꾸도 하지 않고 있으나, 그대의 가(家:도교)의 더러운 법을 간략히 살펴보도록 합시다. 무지(無知)한 귀졸(鬼卒)이 가소로워 미쳐 날뛸 일이며, 혹은 몸이 지옥의 잿더미에 갇힐 일이며, 혹은 쇠똥으로 온몸이 뒤덮일 일이며, 혹은 등으로 물그릇을 들어 올릴 형국이며, 혹은 등으로 버들가지를 질 일이며, 혹은 머리카락을 풀다가 도리어 그것에 묶이게 된 꼴이며, 새끼를 묶다가 반대로 묶이게 된 꼴입니다. 측간(廁間)을 신주(神主)로 모시고, 부엌에 영(靈:䆴神)이 있다고 하여 스스로 그 신에게 신하와 노복(奴僕)이 되는 글을 지어 외우며, 또한 우매한 자들을 이끌어 초제(醮祭)를 모신다 하여 술과 안주를 거대하게 올려놓고, 은혜를 구한다면서 오직 금은보화를 모으고, 천조(天曹:天官, 星神)에 복을 구하여 예배하며, 북두칠성에 장수를 기원하여 예배합니다. 그리고 음사(淫祀) 기도하는 무리들이 가득하여 아직 없어지지 않고 있으며, 현혹하는 무리들은 기강(紀綱)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이에 더하여 또한 머리를 두드리고, 뺨을 치며, 판자(板子)를 입에 물고, 빨간 명주비단으로 세 곳을 묶으며, 신체에 있는 아홉 곳의 구멍을 닫는 방단법(方丹法)과 방중술 등은 부자간에도 부끄러움을 잊었으니 어찌 형제 사이에 부끄러움이 있겠는가? 이들 모두가 그대들 천사(天師)의 법인데 어찌 그대의 교(敎)가 아니겠는가?”
이영이 자기도 모르게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정태스님이 말하였다.
“이영이 이미 누차 ‘정태스님이 옳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어떻게 이를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황제 폐하께서 살펴 주시길 다시 청하옵니다.”
이영이 또 황제께 말하였다.
“정태스님이 말한 내용은 제가 의심컨대 사전에 계획하고 준비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둘이 함께 촛불에 대해 조롱해 보았으면 합니다. 그리하면 바로 임기능변의 논의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정태스님이 황제께 말하였다.
“저는 비록 덕은 없사오나 송(誦)이 될 만한 말은 합니다.”
그리고 이영에게 말하였다.
“그대가 촛불을 가지고 조롱해 보자고 하니, 그대가 이를 미리 계획하여 준비한 것이 아닌가? 촛불과 이영(李榮)은 무정이어서 같지만, 촛불이 그대보다 밝습니다.”
이영이 황제께 말하였다.
“도(道)와 불(佛)은 저와 정태스님 등의 말로는 드러날 수 없습니다.”
이영이 이 때 논의를 쉴 것을 청하였다.
정태스님이 황제께 말하였다.
“이영이 어려움을 알고 물러나겠다고 합니다. 삼가 다시 살펴 주시길 청하옵니다. 밤이 오래되고 또한 깊어졌습니다. 폐하께서 피로하실까 걱정됩니다.”
황제가 휴회를 명하였다. 이영이 드디어 단상 아래로 내려가면서 말하였다.
“갑니다.”
이 때 정태스님은 다리가 저려서 걷지를 못하고 잠시 멈추어 서 있었다.
정태스님이 혼잣말을 하였다.
“내가 이전에 풍비(風痹)를 앓은 적이 있어서.”
황제가 사람들로 하여금 정태스님을 부축하도록 하였다.
이영이 계단 아래에서 말하였다.
“정태스님은 이미 죽어서 두 사람이 부축하고 있습니다.”
정태스님이 말하였다.
“황제의 면전에서 논의할 때는 그 논리가 전율이 갈 정도의 것이 되어야 하거늘 다시 이렇게 지껄이니 얼마나 황제에 대한 존경의 예를 잃어버린 것인가?”
다음 날 황제가 급사(給事) 오아군덕(王君德)에게 명하여 이영을 질책하도록 하였다.
“너는 장안의 승려들과 함께 논의에 나서서 격한 말로 끊임없이 이어가며 논란을 벌였다. 무슨 뜻으로 정태스님과 함께 논의하면서 네 번이나 아무 대답을 못하였는가?”
이영은 사정이 급하게 되자 보고하여 말하였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폐하께서 즐거워하시지 않을까 해서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황제가 이영을 재주(梓州)에 돌아가도록 명하였다. 그의 형색은 초라하게 되었고 명성은 단번에 무너졌으며, 도사들의 기대주로 오직 이영을 꼽았건만 그는 이미 대론(對論)에서 실언하여 도교 전체의 명예를 실추시켰다.
정태스님은 본래 낙양인으로 원대한 식견을 지니고 있었고, 비록 간략하게 현리(玄理)에 통달하였으나 논변에 뛰어나 유명해졌다. 황제가 동도(東都:낙읍)에 ㅔ행차하여 자주 법사(法祀)를 행하였는데, 낮에는 만기(萬機:국가를 다스리는 일)를 주재하고, 저녁에는 도를 논하고 예(禮)를 송(誦)하였으며, 여가에는 불교와 도교의 근본 의종(義宗)에 편중(偏重)하여 논하였다. 도사 이영은 노종(老宗:도교)의 괴수(魁首)로서 자신의 관견(管見)을 믿고 황제가 마련한 토론의 자리에 참여하였다가 누차 강적에게 당하면서도 여전히 뛰어난 자리에 참석하므로 정태스님이 여러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자 예봉을 휘둘러 그를 분격(奮擊)하여 꺾어 버렸다. 꺾인 그의 모습은 고목(枯木)이 꺾여 넘어진 듯하였고, 목소리는 기어들어가 혓바닥이 달라 붙은 듯하였다. 정태스님에 면대(面對)하여 진술하다 스님이 날카롭게 공격하니 즉시 마음으로 굴복하고 혼비백산하였다. 하물며 황제의 면전에서 포폄(褒貶:칭찬과 꾸짖음)을 함부로 한 것은 충분히 한 가지로 논죄될 만한(극형으로 다스릴 만한) 일이었으니, 이는 천 년의 귀감이 되는 일이다.
처음에 정태스님은 뛰어난 언변으로 알려졌는데, 재술(才術)을 갖춘 것으로도 이름나게 되었다.
동대시랑(東臺侍郞) 상관의(上官儀)가 “시부(詩賦)에도 능합니다”라고 하니, 황제가 지어 보도록 하였다. 명에 응하여 곧바로 지어 올리니, 황제가 귀중하게 여기고, 스님을 등용하여 나라 일을 보게 하려고 하였다. 황제가 스님께 물어 보았다.
“환속하시면 어느 관직이든 드릴 테니 맡으시겠습니까?”
정태스님이 대답하였다.
“저는 본래 예전부터 항상 세속을 벗어나는 마음을 지녀 오면서 법왕(法王:부처님)께서 세속을 버리신 일에 조금이나마 가까이 가고자 하여 왔습니다. 비근한 예를 든다며 소부(巢夫)와 허유(許由)의 세속의 굴레를 벗어난 정신을 따르고자 하였습니다. 이영은 다를 만한 인물이 되지 못합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처음의 발심을 잃지 마십시오.”
황제가 크게 다행으로 여기고는 바로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동도(東都)의 경애사(敬愛寺)에 대덕(大德)이 아직 안 계시니 정태스님을 그곳에 모시도록 하였다. 그리고 시자(侍者) 몇 명을 취하여 따르도록 하고, 나머지 대덕 스님들에게도 한 명씩의 시자를 두도록 하였다. 정태스님에게는 다로 조칙을 내려 문안을 올리는 다섯 명의 사자(使者)를 입사(入寺)케 하였다. 이후에도 정태스님이 자주 궁궐에 초빙되어 올라간 영예로운 일에 대한 이야기가 많으나 여기에 기록하지 않는다.
6.대자은사(大慈恩寺) 사문 영변(靈辯)과 도사가 대론(對論)한 일
당 고종 용삭(龍朔) 2년(662) 12월 8일, 봉래궁(蓬萊宮)의 벽우전(碧宇殿)에서 영변(靈辯)은 황제께서 『정명경(淨名經:유마경)』의 제목에 대해 개제(開題)하라는 명에 답하여 올립니다.
“물었다.
‘생각으로 알 수 없는 도는 범부(凡夫)가 헤아릴 수 없고, 성인 또한 알지 못하는 것인가?’
답하였다.
‘범부와 성인이 모두 생각으로 알 수 없다.’
비판하여 말하였다.
‘지극한 이치와 현미(玄微)한 차원은 범인의 유(類)가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겠지만, 성인의 마음은 묘지(妙智)의 원대한 귀감인데 어찌 알지 못하는가?’
답하였다.
‘법성(法性)은 허융(虛融)하고, 도는 두루하지 않음이 없으며 사물의 이치는 평등한데, 어떤 법을 생각하여 알 수 있겠는가?’
비판하여 말하였다.
‘산(山)과 겨자씨에 모두 도(道)가 들어 있다는 뜻28)을 범부인 까닭에 생각하기 어려운 것이지, 대소(大小)에 모두 포용되어 있다는 이치를 성인이 어찌 헤아릴 수 없겠는가?’29)
답하였다.
‘생각으로 알 수 없는 도는 사물에 두루하지 않음이 없거늘 왜 하필이면 산과 겨자씨에 들어 있고 없음30)의 차이가 있는가? 범부와 성인으로 나뉘어 생각하고 생각하지 못함이 있는 것이다.’
비판하였다.
‘범지(凡智)와 성지(聖智)는 생각하고 생각하지 못함으로 나뉘지 않고, 범력(凡力)과 성력(聖力)은 도를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나뉘지 않는다.’
답하였다.
‘범부와 성인의 자취가 달라서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차이가 있는 것이고, 범부와 성인의 근본은 같아서 생각하고 생각하지 못함으로 나뉘지 않는다.’
비판하였다.
‘범부와 성인은 본래 무이(無二)여서 생각하고 생각하지 못함으로 나뉘지 않으며, 범인과 성인의 자취가 다르니 마땅히 생각할 수 있음과 없음의 차이가 있다.’
답하였다.
‘근본과 자취는 비록 다르지만 부사의(不思議:생각으로 알 수 없음)함은 같다.’
비판하였다.
‘이 말은 성자(聖子)의 근본과 자취가 다르다는 것인데, 왜 범부의 일에 관련시키는가?’
답하였다.
‘일체 중생이 그대로 열반상(涅槃相)이거늘 생각으로 알 수 없는 도가 어찌 성인과 범부를 구별하겠는가?’
비판하였다.
‘생각으로 알 수 없다는 것은 무이(無二)이다. 범부와 성인이 본래 차이가 없다면 생각으로 알 수 없다는 것도 이미 다르지 않거늘 범부와 성인의 자취가 어찌 두 가지인가?’
답하였다.
‘불이(不二)인 곳에서 이(二)를 설하는 것이니, 이(二) 또한 어디에 이본(異本)이 있다고 할 것인가?’
비판하였다.
‘그렇다면 역시 생각으로 알 수 없다고 해야 할 곳에서 생각으로 아는 곳을 말하고, 생각으로 알 수 있음을 말하면서 어찌 성인도 생각으로 알 수 없다고 할 수 있는가?’
답하였다.
‘불이(不二)인 곳에서 (二)를 설하니 무이(無二)이고 불이(不二)이다. 만약 (二)가 있다면 생각으로 알 수 없는 곳에서 생각으로 알 수 있음을 설하고, 생각으로 알 수 없는 데서 생각으로 알 수 있으며, 불이처(不二處)에서 이(二)를 설하면서 무이(無二)를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생각으로 알 수 없는 곳에서 생각으로 알 수 있음을 설하면서 생각으로 알 수 없음이 성립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비판하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왜 생각으로 알 수 있음을 세우는 데 머무는가? 생각으로 알 수 없음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왜 경(經)의 맨 앞에서 생각으로 알 수 없음을 설하는 것인가?”
답하였다.
‘사려(思慮)함을 끊기 위해서 생각으로 알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생각으로 알 수 없는 것이 어디에 따로 있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므로 『화엄경』에서 설하기를 ≺이와 같이 부사의(不思議)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부사의에 깊이 들어가면 사(思)와 비사(非思)가 모두 적멸(寂滅)이니라≻라고 한 것이다.’”
용삭 3년(663) 4월 14일 봉래궁 월피북정(月陂北亭)에서 도사 요의현(姚義玄) 등 다섯 명과 서명사(西明寺)의 승려 자립(子立) 등 네 명이 강론하였다. 날이 저물자 황제가 명을 내려 도인과 도사들은 각기 관사(觀寺)에 돌아가도록 하고, 따로 명을 내려 승려 영변(靈辯)과 도사 두 명을 머물게 한 후 15일이 되어서야 돌아가도록 하였다. 초 14일데 도사 방혜장(方惠長)이 『노자도덕경』을 토론의 개제(開題)로 하였다.
영변스님이 물었다.
“예전에 『도덕경』을 펼쳐 말하면서 오직 이것이 노자의 가르침에만 있는 것이라 하나 유교(儒宗)에도 또한 있습니다.”
도사 방혜장이 답하였다.
“『도덕경』에만 있고, 유교에는 없습니다.”
영변스님이 비판하여 말하였다.
“『효경(孝經)』에 말하기를 ‘지덕(至德)을 이루기 위해서는 도(道)를 알아야 한다’고 하였고, 『역경』에 말하기를 ‘일음(一陰)과 일양(一陽)을 도라고 한다’고 하였으니, 이로 보건대 분명히 유가에서도 드러나거늘 왜 노자의 가르침에만 있다고 합니까?”
도사 방혜장이 답하였다.
“자연의 도가 본(本)이며, 그 나머지는 말(末)입니다.”
비판하였다.
“그렇다면 자연의 도가 음양에 포섭되지 않는다는 것인데, 노자도 본래 음양으로 되었다 할 것이며, 또한 자연에 포함됩니다. 『주역(周易)』이 어찌 말(末)이 되겠습니까?”
답하였다.
“원기(元氣) 이래 대도(大道)가 본(本)이 되어 왔으며, 만물이 모두 도(道)에서 생하였으니 도는 만법(萬法)의 조(祖)입니다.”
비판하였다.
“도가 만물의 조(祖)라면 앞에서 한 말과 다르지 않으니, 노자와 『역경』의 말이 같은 뜻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이렇게 비판하며 몰아치니 방혜장이 답변하지 못하고 비웃으며 말하였다.
“예전에 열자(列子)가 잠깐 계함(李咸)을 만났는데 멍하니 심취(心醉)하여 황관(黃冠:도교를 뜻함)을 잠시 치복(輜服:불교를 뜻함)에 놓아 두고 자신도 모르게 혼미해졌다고 합니다.”
황제가 크게 웃으며 영변스님에게 다시 비판해 보도록 하였다.
영변스님이 황제께 말하였다.
“예전에 겨우 짤막한 지략(智畧)을 펼치다가 황건적이 와해되어 버렸는데, 지금 다시 신산(神算)에 의지한다면 저 도사들의 빨간 혓바닥이 장차 반드시 영원히 녹아 버릴 것입니다.”
황제가 또 웃었다. 영변스님이 또 물었다.
“앞에서 도가 만물의 조(祖)이고, 만상(萬象)을 능히 생한다고 하였는데 도는 무엇을 체(體)로 하는 것입니까?”
도사 방혜정이 대답하였다.
“대도(大道)는 형상이 없습니다.”
영변스님이 비판하였다.
“형상이 있으면 도가 있다 하겠고, 형상이 없으면 마땅히 도가 없다 할 것입니다.”
대답하였다.
“비록 형상이 없다고 하여 어찌 도가 있음을 부정하리오.”
비판하였다.
“형상 없이 존재할 수 있다면, 또한 형상이 있는 것이 없는 것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형상 있는 것은 없는 것이 아닌 것이니, 형상 없는 것이라면 도는 없을 것입니다.”
대답하였다.
“대도(大道)가 만물을 생하였으니 만법이 곧 그대로 도인데 어찌 도가 없다 할 수 있습니까?”
비판하였다.
“형상이 만약 도가 아니라면 형상 밖에 따로 도가 있고, 도가 능히 형상을 생하였다 하겠는데, 이미 형상을 가리켜 도라고 한다면 형상 밖에 따로 도가 없을 것이고, 도가 없는데 무엇이 형상을 생하였다고 할 것입니까?”
대답하였다.
“대도든 비록 형상이 없으나 형상이 없는 도가 능히 만법을 생한다는 것입니다.”
비판하였다.
“아들 외에 어머니가 있는 것을 보고는, 어머니가 아들을 능히 생하였음을 알거니와, 형상 밖에서 따로 도를 보지 못할 텐데 누가 그대들이 말하는 도가 형상을 생한다는 것을 알겠습니까? 그리고 앞에서 말하기를 ‘도가 능히 만법을 생하며, 만법이 곧 도이다’라고 하였으니, 또한 어머니가 아들을 능히 생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로 아들이 마땅히 바로 어머니가 되겠군요. 또 앞에서 말하기를, 도가 만법의 조(祖)라고 하였는데, 이는 스스로 저 경전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노자도덕경』에서 말하기를 ‘이름 없는 것이 만물의 시초이고, 이름있는 것이 만물의 어머니이다’라고 하였는데, 어머니라 하고 조(祖)라 한 것은 비록 그 말은 다르지만 근본은 같은 뜻입니다. 도가 이미 이름이 없는데 어찌 만물의 조(祖)라 할 수 있겠습니까?”
방혜장이 앞의 말을 모두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래서 오히려 비웃으며 말하였다.
“이미 뜻대로 되지 않았으면 잠자코 있을 일이지 왜 거꾸로 곡식의 껍질을 챙깁니까?”
영변스님이 대답하였다.
“미적(米賊)을 삼키고 있습니다.”
영변스님이 또 비판하였다.
“도에 형상이 없는데 형상을 가리켜 도라고 한다면 형상 또한 도라 할 수 있을 것이며, 도에 조(祖)가 없는데 형상을 가리켜 만물의 조(祖)라 할 수 있습니까?”
도사 방혜장이 대답하였다.
“도는 만물의 (祖)이고, 형상은 만물의 조(祖)가 아닙니다.”
영변스님이 비판하였다.
“도에 따로 형상이 있다면 만물의 모습이 그대로 도의 형상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도사 방혜장이 대답하였다.
“대도에는 형상이 없습니다.”
영변스님이 비판하였다.31)
“대도(大道)는 조(祖)가 아닙니다.”
대답하였다.
“도는 본래 이름이 없는데 억지로 이름을 세워 만물의 조(祖)라 한 것입니다. 어찌 조(祖)가 아니라 할 수 있겠습니까?
비판하였다.
“도가 본래 이름이 없는데 억지로 이름을 세웠다면, 또한 도가 본래 조(祖)가 아닌데, 억지로 만물의 조(祖)라 한 것이겠군요.”
대답하였다.
“그렇습니다.”
비판하였다.
“도가 본래 조(祖)도 아니고, 조(祖)가 아닌데, 억지로 이름하여 조(祖)라 하였다면, 또한 대도(大道)도 형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데, 억지로 형상이라 말한 것이겠군요.”
또 영변스님이 비판하였다.
“형상을 떠나서 따로 도가 없다고 하면서 형상이 아직 생기지 않았을 때에 도가 생겼다고 한다면 또한 이는 눈을 떠나서는 따로 눈동자가 없는데 눈동자가 아직 생기지 않았을 때에 눈이 본다는 것이 되겠군요.”
도사 방혜장이 대답하였다.
“도는 현미(玄微)한 것이고, 눈은 거친 것이어서 이의(二義:玄微와 거칢)가 다른데 어찌 같은 유로 대비를 하는 것입니까?”
비판하였다.
“형상은 질애(質礙)한 것이고, 도는 본래 허무(虛無)하여 유무(有無)의 성품이 어긋나는데, 양자를 동체(同體)라고 하는군요.”
방혜장이 또 대답하지 못하였다.
영변스님이 황제께 말하였다.
“제가 분에 넘치게 현문(玄門)의 토론에 참여하여 보니 실로 자인(慈忍)의 마음이 가득하여 죽은 참새를 만나도 다시 탄환을 쏘고 싶지 않습니다.”
황제가 크게 웃으며 훌륭하다고 칭찬하였다.
5월 16일 봉래궁에서 또 도사와 함께 논란을 벌였는데, 저 도사들의 대답이 상대편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 마땅히 기록해 둘 만한 것이 없다. 6월 12일에 봉래궁 봉래전(蓬萊殿)에서 논의가 펼쳐졌는데, 영변스님과 도사 이영이 함께 황제를 뵈었다. 황제가 이영에게 말하였다.
“양양(襄陽)의 도인(영변을 가리킴)은 정신이 좋으시니 말씀을 나누면서 그 가운데로 빠져 들지 않도록 하시지요.”
이영이 황제께 말하였다.
“공자도 일찍이 후생(後生)이 두렵다고 하셨는데 하물며 저는 이전의 철인(哲人) 같지 못합니다.”
영변스님이 황제께 말하였다.
“저는 진실로 후생(後生)이고, 이영인 본래 노(老)에 해당합니다[이는 이영이 노자가 만년에 갔었다고 하는 촉(蜀)에서 지낸 까닭에 이렇게 놀린 것이다].”
황제가 크게 웃으며 말하였다.
“이영이 이미 몰리고 있군요.”
이영이 『승현경(昇玄經)』을 개제(開題)하며 말하였다.
“도는 현(玄)하여 말이나 형상으로 나타낼 수 없습니다.”
영변스님이 물었다.
“현리(玄理)는 본래 적정하여 사려(思慮)와 정지(情智)로 헤아릴 수 없으며 묘도(墓道)는 이미 말이 끊어져 있다고 하면서 이에 대한 논의의 제목을 열 수 있는 것입니까?”
이영이 대답하였다.
“현(玄)은 비록 설할 수 없는 것이지만, 또한 말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비록 다시 말로 이를 설한다 하더라도 설한 바가 없습니다.”
영변스님이 비판하였다.
“현(玄)을 말로 설명할 수 있다면 마땅히 설명할 수 있다고 해야 하고, 여실히 설명할 수 없다면 마땅히 설명할 수 없다고 해야 할 것이거늘 왜 앞에서는 설명할 수 없다 하고, 이제 와서는 다시 설명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까?”
이영이 이 비판하는 말의 뜻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영변스님이 이영에게 말하였다.
“물고기와 토끼를 잡으려면 반드시 통발에 의지해야 하고, 현(玄)의 뜻을 추구하려면 언어나 형상의 도움을 받아야 하며, 말에 있어서 이미 밝힌다면 이치도, 믿음도 또한 미혹되어 흐릿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변스님은 또다시 앞에서의 비판을 말하였다.
이영이 대답하였다.
“현도(玄道)는 실로 말이 끊어졌는데, 말을 빌려 현(玄)을 설명하는 것이며, 현도를 설명하기도 하고 현도를 설명하지도 않기도 하나, 미묘한 지도(至道) 가운데는 설함도 없고, 설하지 않음도 없습니다.”
영변스님이 말하였다.
“그 말은 『중론(中論)』의 용수(龍樹)보살의 게송에서, ‘모든 부처님께서는 아(我)를 설하기도 하시고 혹은 무아(無我)를 설하기도 하시나, 제법실상(諸法實相) 가운데는 아(我)도 없고, 아(我)가 아닌 것도 없다’고 하였는데, 어찌 이와 같은 올바른 게송을 본떠서 그러한 삿된 말로 옮길 수 있으며, 보살의 말씀을 절취하여 자신들이 내세우는 말로 할 수 있습니까?”
이영이 말하였다.
“불교와 도교가 무엇이 다릅니까? 서역에서는 열반(涅槃)이라 하지만, 이곳에서는 이를 사멸(死滅)이라 하는 것일 뿐입니다.”
영변스님이 말하였다.
“반딧불과 햇빛은 같을 수 없습니다. 삿된 법과 정법이 어찌 같을 수 있겠습니까? 서역에서는 열반이라 하고 당(唐)에서는 이를 멸자(滅字)로 번역하였는데, 이는 현적(玄寂)의 묘경(妙境)이며 고요하고 담박한 허종(虛宗)입니다. 후신(後身)에서 업장[患累]을 모두 끊고 극지(極地)에서 무(無爲)를 증득하는 것입니다. 어찌 생사의 순환으로써 이를 대비할 수 있겠습니까? 그대가 아는 열반도 역시 멸하는 것이고 생사도 역시 멸하는 것이므로, 또한 두 가지 멸을 멸하는 것인즉, 이는 까마귀와 까치가 소리를 내고, 난새와 봉황이 또한 소리를 낸다고 하여 두 가지 소리가 마땅히 하나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두 새가 모두 소리를 낸다고 하나 청아함의 차별이 있는 것입니다. 이법(二法:생멸 열반)이 비록 똑같이 멸(滅)이라고 하나, 명적(冥寂)함이 같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을 꾸짖어 말하겠습니다. 당신이 만약 마음이 혼미하거나 눈에 백태가 끼어 현황(玄黃)을 구분 못하는 상태가 아니라면, 어찌 지인(至人)의 열반을 일반 생류의 생사와 같다고 여기는 것입니까?”
황제가 크게 웃으며 말하였다.
“앞에서는 도사가 먼저 주제를 치켜들었으니 이제는 바꾸어서 도사가 의(義)를 세워 비판하도록 하시오.”
도사 이영이 질문하였다.
“현리(玄理)를 설명할 수 있다고 하는데, 말로 현리를 설명할 수 있다 하더라도 체(體)는 설명할 수 없을 것인데,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영변스님이 대답하였다.
“물정(物情)을 깨닫고 나면 말을 빌려 설명할 수 있으니, 현(玄) 또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도사 이영이 비판하였다.
“현(玄)의 체(體)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말을 빌려 현을 설명할 수 있다면 현은 결국 설명할 수 있는 것이 되지만, 이는 허공에 박힌 가시는 뺄 수 없는데 억지로 손으로 빼면 공중에 박힌 가시가 마땅히 뽑힌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반문하였다.
“허공이 현(玄)입니까?”
도사 이영이 받아서 대답하였다.
“현이 아닙니다.”
영변스님이 받아서 비판하였다.
“이 현(玄)은 현과 비현(非玄) 모두를 포함할 수 있고, 만약 포함할 수 있다면 그 현은 올바른 것입니다. 비판하건대, 허공은 이미 현도 아니고 비현도 아니니, 허공의 체(體)는 현(玄)이 아닙니다. 이미 언설로 현을 설명할 수 있다고 하였으니 현과 비현을 함께 포함할 수 있을 것이며, 함께 포함할 수 있다면 그 현은 올바른 것입니다. (비판하건대, 허공은 이미 현도 아니고 비현도 아니니, 허공의 체는 현이 아닙니다. 이미 언설로 현을 설명할 수 있다 하였으니,32) 언설이 마땅히 현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언설이 비록 현은 아니지만 연설은 또한 현을 설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허공이 비록 현은 아니라 하더라도 어찌 허공과 현이 함께 할 수가 없겠습니까?”
도사 이영이 대답하였다.
“현은 미묘한 것인데 어떻게 허공으로 함께 한다 할 수 있겠습니까?”
비판하였다.
“현은 미묘한 것인데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또 그대들이 말하는 현리(玄理)는 설명할 수 없으며, 또한 설명할 수 있기도 합니다. 허공이 비록(空)과 비공(非空)을 함께 할 수 없으나 또한 마땅히 함께 할 수 있기도 합니다. 허공의 체는 함께 할 수 없으며, 함께 함도 아니고, 함께 함을 얻을 수도 없습니다. 현(玄)의 체(體)는 설명할 수 없으며, 설명함도 아니고 설명함을 얻을 수도 없습니다.”
이영이 답변할 수 없어서 바로 항의하는 소리로 말하였다.
“후한의 명제(明帝)가 도를 구하는 마음이 있어 사신을 보내어 오랑캐 승려를 입공(入貢)케 하였지요.”
영변스님이 말하였다.
“김일제(金日磾)33)는 새외(塞外)에서 출생하여 한조(漢朝)에 충신이 되었고, 장도릉(張道陵)은 촉(蜀)에서 성장하여 위(魏)나라 시대에 미적(米賊)이 되었지요.”
이영이 묵연히 있으면서 답하지 못하였다.
또 영변스님이 말하였다.
“조롱을 받았으면 속히 이해하도록 해야지 왜 그렇게 망설이고 있습니까?”
이영이 말하였다.
“이미 현지(玄旨)를 얻은 까닭에 잠자코 있는 것이오.”
영변스님이 말하였다.
“물고기의 눈은 명주(明珠)라 다르지요. 혓바닥을 묶어 두는 것이 입을 다무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황제가 크게 웃으며 더 비판하도록 하였다.
“현리(玄理)는 유심(幽深)하여 지인(至人)이어야 헤아릴 수 있거늘 도사들은 형편없이 미혹하면서도 아는 체합니다.”
이영이 대답하였다.
“현(玄)은 비록 유오(幽奧)하나, 지인은 깊이 알고 범부는 얕게 압니다.”
영변스님이 비판하였다.
“도사는 현리(玄理)를 배웠다고 하는데, 지인(至人)은 능히 깊이 아나 도사는 얕게 알며, 도사는 선법(仙法)을 배웠다 하는데, 선인(仙人)은 능히 높이 날지만 도사는 낮게라도 날아야 할 것이나 날지 못하고, 선인(仙人)은 높이도 날고 낮게도 날지만, 도사는 높게도 낮게도 날지 못합니다. 현리(玄理)를 아는 데는 얕고 깊음이 있으나 도사는 얕게도 깊게도 헤아리지 못합니다.”
이영이 대답하지 못하였다.
영변스님이 조롱하며 말하였다.
“『노자도덕경』의 양 권(道篇ㆍ德篇)을 깊이 연구하지도 않고, 『장자』 일곱 편은 언제 제대로 읽어 보지도 않고, 머리에는 죽은 곡식 껍데기만 쓰고 있으면서 무딘 도끼로 나무를 쪼아대려는 듯하군요.”
이영이 대답하지 못하자 영변스님이 또 조롱하며 말하였다.
“듣건대 그대(이영)는 촉도(蜀道)에서 왔다 하고, 촉도는 매우 험난하다고 하는데, 왜 오리라도 타고 장안에 오지 않고, 반대로 목에 칼[枷:목에 씌우는 형틀]을 쓰고 장안에 왔습니까? [황제가 이영을 경성에 들어오도록 한 날부터 목에 칼을 쓰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영이 말하였다.
“죽어서 재가 된다는 생각이나 몸의 형색이 고목과 같이 되어간다는 생각도 움직일 때나 앉을 때나 모두 잊고 있으니, 칼을 쓰는 것이 어찌 장애가 되겠습니까?”
영변스님이 말하였다.
“움직일 때나 앉을 때나 종신토록 잊고 있으니, 또한 칼을 쓴 채로 갈 수도 앉아 있을 수도 있으면 종신토록 칼을 쓰고 있을 수 있지요.”
영변스님이 조롱하며 말하였다.
“고목은 마땅히 두 번 죽을 수 있으나, 재[灰]는 그렇지 않지요. 이미 시골 농부의 오줌 세례를 받고 나서 또 혹리(酷吏:혹독한 관리)가 다스리는 현)縣)34)에 거주하게 되었군요.”
이영이 대답을 못하자 또 조롱하였다.
“기둥과 칼은 다른 계통인데, 이영은 거목으로 만든 기둥이 아니라 칼을 받쳐 들고 있지요. 입을 다문 채로 칼의 자루를 마주하고 있으니 실로 자리만 지키는 사람이나, 재능도 없이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과 같군요.”
이영이 화가 나서 말하였다.
“천자께서 이 이영을 알고 계서서 칼을 씌워 주셨으나, 당신 같은 도인들은 주상(主上)께서 어떻게 일찍이 생각이나 하셨겠는가?”
영변스님이 말하였다.
“천자께서 금년에 이영을 아셨고, 내년에도 역시 마땅히 이영을 아실 것입니다. 금년에 이미 이영에게 칼을 씌우셨으니, 내년에도 또한 이영에게 칼을 씌우실 것입니다. 성은(聖恩)이 바야흐로 끊임없을지니, 칼을 씌움도 어찌 끝날 때가 있겠습니까?”
또 말하였다.
“형벌을 가한 자세한 내용까지 천자께서 반드시 다 알고 계시지는 못할 것이니, 도사가 칼을 쓰게 된 일을 성인(聖人:황제)께서 어떻게 기억하고 계시겠습니까?”
또 말하였다.
“이영이 칼을 쓰는 것에 대해 성인(황제)께서 분명히 승낙하지 않으실 것입니다만, 만약 칼을 쓰게 된 일로 인해 이영의 죄를 아시게 되었다면 이는 또한 혼백이 알려 준 것이겠지요.”
이영이 부끄러워하면서도 노하여 날카로운 소리로 말하였다.
“도문(道門)의 영수(英秀)인 촉군(蜀君)의 이영을 웬 놈의 소승(小僧)이 감히 깔보는가?”
영변스님이 말하였다.
“이영 이영, 당신은 처음부터 웅대한 뜻과 맑은 기운이 부족한데 어찌 수고스럽게 화난 얼굴로 날카롭게 외쳐대는가?”
계속 조롱하여 말하였다.
“보잘것없는 촉(蜀) 땅의 노인네가 도문(道門)의 영걸이라고 이름을 훔쳤네. 머리 위의 뿔이나 부러뜨릴 일이지 무슨 일로 입 속으로 쫑알대는가?”
이영이 응대하지 못하고 단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도인은 어느 곳에서 노력하여 식사를 마련할 줄 아십니까?”
영변스님이 말하였다.
“여러 승려들은 본래 청결한 까닭에 마땅히 소채(蔬菜)로 식사를 합니다만, 도사들은 오직 초재(醮齋)35)를 중요시하여 반드시 단술과 구운 물고기를 들지요.”
이영이 말하였다.
“천궁(天宮)은 청정하거늘 무슨 뜻으로 물고기를 논하는 것입니까?
영변스님이 말하였다.
“지금까지 내내 함께 정결하게 이야기해 오다 왜 먹는 이야기를 하십니까? [논의를 한 시점은 중후반에 속하였다.]”
이영이 말하였다.
“기어 다니는 애벌레 같은 형만(荊蠻:荊 땅의 남쪽 오랑캐)이 어찌 내 적수가 될 수 있으리요?”
영변스님이 말하였다.
“주(周)나라의 덕이 옛날에는 아직 미치지 않았었으나, 점차 형만 당에 이르게 되고 황은(皇恩)이 멀리 이르게 되었지요. 지금은 오히려 촉(蜀) 지역을 오랑캐라고 봅니다.”
이영이 말하였다.
“마음 속에는 시커먼 것이 없는 듯하면서 가사(袈裟)는 왜 흑색입니까?”
영변스님이 말하였다.
“당신들은 마음속에는 이미 빨간 가시가 있고, 머리 위에는 나무껍질과 방석 조각으로 만든 자루를 쓰고 계시군요.”36)
영변스님이 이영을 조롱하여 말하였다.
“도사들이여, 마땅히 자세히 들으시오. 이 사문이 선물로 한 말씁 드리겠소. ‘홍학(鴻學)이 높이 날아가는데, 참새가 쓸데없이 혼자 재잘거리네.’”
이 앞에 여러 가지로 조롱한 내용이 많이 있으나 모두 기록하지는 못하였다. 영변스님이 조롱할 때마다 황상께서는 흔쾌히 웃으시며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7.모재(茅齋)에서 국학박사 범빈(范贇)과 담론한 서문
영변스님이 말하였다.
“옛날에 비성(毘城:비사리성) 장자(長者:유마거사)는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설하였고, 지금 황읍(皇邑:장안, 경읍)에 있는 선생[范贇]께서는 궁문 안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시니 지금의 모습과 옛날의 모습이 어찌 다르겠습니까? 범(范)선생께서는 유교[儒宗]에 통효(通曉)하시고, 아울러 도교와 불교에도 정심하시어 도관에서 현미(玄微)를 살피고, 불교의 법연(法筵)에서 공리(公理)를 담론하십니다. 소승(小僧)은 강좌(江左)에 가서 노닐다가 멀리 풍류를 생각하여 마침 관중(關中)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선생의 도덕을 흠모하는 마음 가득하였으나 아직 뜻을 전하지도 못하고, 뵙고 싶은 마음을 깊이 풀어 오다가 이것이 저의 소원이 되었습니다. 광음(光陰)은 잃기 쉽고 훌륭한 만남의 자리는 오래 가기 어려우니, 어찌 혜원(慧遠)과 은중감(殷仲堪)이 오로지 불법을 논하여 계합하고, 도림(道林)과 현도(玄度)가 스스로 터득하여 소요(逍遙)한 일만 있어야 하리요? 청컨대 각기 자신의 종(宗)에 근거하여 어떤 제목을 기치로 걸고, 함께 유미(幽微)한 법에 대한 생각을 펴고, 고찰하며, 비판하고, 설명하는 자리를 가졌으면 합니다.”
범윤이 말하였다.
“장자(莊子)의 책을 약간 열람해 본 적이 있습니다만, 그 안에 들어 있는 취지(趣旨)에 대해 질문하시면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영변스님이 물었다.
“『장자』 일곱 편은 번잡하고 너무 많아서 하나의 질문에 대해 깊이 살펴볼 수 없을 것입니다. 청컨대 따로 한 부분의 글을 주제로 걸어서 토론하였으면 합니다.”
범윤이 말하였다.
“『장자』 일곱 편은 번잡하고 너무 많아서 하나의 질문에 대해 깊이 살펴볼 수 없을 것입니다. 청컨대 따로 한 부분의 글을 주제로 걸어서 토론하였으면 합니다.”
범윤이 말하였다.
“『장자』의 제물지리(祭物之理)는 지금이나 예전이나 어려워해 온 문제입니다. 법사께서 이 의(義)를 중심으로 토론의 근본 주제를 열어 주시기 바랍니다.”
영변스님이 물었다.
“지금이나 예전이나 어려워해 온 문제인데 참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토론의 근본 주제로 열라고 하시니 감히 바로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재차 어리석음을 무릅쓰고 먼저 단구(短句)에 대해 진술해 보겠습니다. 추호(秋毫)와 태산(太山)을 유가나 묵가 모두 크고 작은 것으로 말하고 있는데, 장자는 그렇지 않다(크고 작고의 다름이 없음)고 하는데 이것이 어찌 맹랑한 말이 아니겠습니까?”
범윤이 말하였다.
“속인은 정(情)에 얽매여 시비(是非)를 생각하나, 장자는 크다거나 작다는 관념을 잊습니다.”
비판하였다.
“단지 속견(俗見)의 정(情)을 잊으면 되는 것이지요. 마땅히 저 태산과 추호의 질(質)은 같지 않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범윤이 말하였다.
“그 말의 뜻은 정(情)을 잊는데 있습니다.”
영변스님이 비판하였다.
“반드시 질(質)은 같지 않습니다.”
범윤이 말하였다.
“질(質)이 같음을 논하지 않고 어떻게 정(情)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비판하였다.
“추호가 이미 하늘을 찌를 듯한 봉우리가 아니고, 태산도 아직 티끌처럼 미세한 곳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추호와 태산이 균등하게 되는 것이 가능합니까?”
범윤이 말하였다.
“추호(秋毫)는 티끌 속에 들어갈 만큼 미세하나, 하늘을 찌를 듯한 봉우리를 부러워하지 않고, 산은 하늘을 찌를 듯한 봉우리가 있으나 티끌에 들어갈 수 있는 미세한 것을 얕보지 않습니다. 각기 자성(自性)이 그윽이 합치하는 까닭에 균등하다고 한 것입니다.”
영변스님이 비판하였다.
“사물이 비록 각기 그 극(極)에 있어서 그윽이 합치한다고 하더라도 대소(大小)의 체(體)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각기 자성(自性)이 그윽히 합치하는 까닭에 균등하다고 한 것입니다.”
영변스님이 비판하였다.
“사물이 비록 각기 그 극(極)에 있어서 그윽히 합치한다고 하더라도 대소(大小)의 체(體)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장주(莊周)가 비록 정(情)을 버림을 소중히 여겼다 하나, 자신도 모르게 물리(物理)에 거구로 미혹하게 되어 사물이 공허한 것이고 본래 질상(質象)이 없는 것으로 되어 버렸습니다. 태산과 추호의 차이를 논할 수 없게 되었으니, 이미 형상이 있다 한들 어게 양자의 균등함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범윤이 말하였다.
“그 균등함을 말한 것은 그 근본 뜻이 정(情)을 잊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데 있습니다. 만약 모습이 같은 것을 말하려고 했다면 어찌 사족(蛇足)이 아니겠습니까?”
비판하였다.
“앞에서 한 말은 모습이 균등함을 알아야 비로소 정(情)을 버릴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남을 수긍시키지 못하고 이제 와서 사족(蛇足)을 내세우나, 남을 그릇되게 하고 또한 자신을 잘못되게37) 하면서 또 모두들 태산은 크고 추호는 작다고 말하는군요. 『장자(莊子)』에 크고 작음이 균등하다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천존지비(天尊地卑)라 한 『주역(周易)』은 마땅히 그 존비(尊卑)를 혼동한 것이 될 텐데, 그 크고 작음이 균등하다는 장자의 말이 어떻게 성립할 수 있겠습니까?”
범윤이 말하였다.
“두 교(불교와 莊子)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유래가 달라서 균등의 이치가 본래 각기 다릅니다.”
영변스님이 비판하였다.
“『주역』은 본래 그 유래가 다르나 태산과 추호가 같을 수가 없어 본래 균등하지 않다고 합니다. 균등하지 않으니 마땅히 다르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다른 사물을 다르지 않다고 한다면 다르지 않는 것도 다르다고 할 수 있고, 다른 사물도 마땅히 같다고 할 수 있을 텐데, 어떻게 같지 않다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영변(靈辯)스님의 성(姓)은 안씨(安氏)이며, 양양(襄陽) 사람이다. 그 선조는 서역의 호족(胡族)38)이었다. 진(晋)나라 때 장안(長安)의 백록원(白鹿原)으로 이주하였다가 영가(永嘉, 307~312)연강의 말에 남쪽으로 피난 와서 양양에 자리 잡게 되었다. 대대로 덕을 쌓아 왔으며, 누대에 걸쳐 정업(淨業)을 닦아 왔다. 가문은 대대로 사농(士農)을 영위하며 곧고 순박한 가풍을 전해왔다. 영변스님은 강한(江漢:양자강 중류 유역)의 영령(英靈)이며, 형형(荊衡:형주 지역)의 수기(秀氣)로 기록되고 있다. 어려서 총명하고 지혜로웠으며 일찍이 논리에 능하였다.
15세에 출가하여 『삼론(三論)』과 여러 대승 경전을 학습하여 그 유미(幽微)한 뜻을 궁구하였다. 더욱이 백흑(白黑)의 시비 토론에 뛰어났다. 천골(天骨)이 드높고 밝았으며, 그 글의 풍운(風韻)은 냉정하고 맑았다. 이목구비는 항상 태연자약하며 허숙(虛肅)하였으나, 또한 날카롭고39) 추상같은 기상을 지녀서 태풍이 몰아치듯 하기도 하였다. 논변을 할 때마다 힘차게 튀어 오르듯, 신속히 상대편의 자질구레한 말을 몰아쳐서 떨쳐 버렸다. 또한 그의 논변은 마치 강물이 화살처럼 날아 흐르듯 하였고, 달빛이 아름답게 비치는 듯하였다. 영휘(永徽, 650~655) 연간에 잠시 동도(東都:낙양)에 유람 왔는데, 그의 명성이 천궐(궁궐)에 휘날리게 되어 황제의 명을 받아 대자은사(大慈恩寺)에 머무르게 되었다. 이어 궁내에 초빙되어 전후 수차례에 걸쳐 도사 이영(李榮) 등과 논의를 펼쳤다. 극한의 논변을 주고받으면서 영변스님은 엄숙하고 준엄하게 상대를 대하였으며, 종횡무진으로 웅변을 펼쳤다. 그 신기(神氣)의 높고 매서움과 정채(精彩)함으로 마주한 적을 눌러서 그 예봉을 꺾어 버리니, 그의 앞에는 강력한 진지(陳地)가 없었다. 상대편을 조롱하면서 한편으로는 익살을 피우는 여유를 보였다. 황제의 생각을 곧잘 이해하여 궁정의 토론 때마다 황제로부터 훌륭하다는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본래 겸손하여 더욱더 근신(勤愼)하며, 온아(溫雅)하여 여러 사람들의 방문을 사절하고, 여기저기 찾아다니지도 않았다. 동려(同侶)들도 그가 전한 것을 알 수 없어서 남아 있게 된 것은 백 가운데 하나도 되지 못하였다. 이전부터 이어진 경(卿:영변스님)의 웅장한 논의 가운데 오직 두 번의 논의에서 황제의 칭찬을 받았던 내용만 들었고, 불법을 변호한 조그만 내용만이 겨우 전해지고 있다. 영변스님이 도사에게 말한 “머리의 뿔이나 꺾어 버려라”라고 한 풍자는 계속해서 천 년을 깊이 헤아려 볼 사항이다.
대강의 내용을 표제로 하여 기재하였다. 단지 말이 오직 물리(物理)에만 응하고 유미(幽微)한 마음의 세계를 살피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이제 그 밖의 공(功)이 이루어지길 바랄 뿐이다.
집고금불도논형 정권 속부(續附)
서명사 석씨 찬집
박건주 번역
당(唐) 인덕(麟덕德) 원년(고종, 664년) 경사(京師)의 서명사(西明寺)에서 찬술(撰述)하였다.
당(唐) 용삭(龍朔) 원년(고종, 661년) 춘 3월 서화관(西華觀)의 도사 조산대부(朝散大夫) 곽행진(郭行眞)이 공경하는 마음으로 글을 지어 올립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불(佛)과 도(道)는 성인을 칭하는 것이며 모두 함원(含元:최초의 진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보승(寶乘:佛)과 영보(靈寶:道)는 모두 유식한 이들에게 고해(苦海)를 건너는 나루터를 열어 주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세속인의 성향에 따라 훈도의 일풍(一風)을 펴는 것은 장초(章醮:도교의 祭儀)의 길이며, 부처님께서 펴신 법망(法網)은 중생에게 뱃사공이 됩니다. 스스로 경전의 가르침을 총괄하여 이해하지 못하는데 누가 감히 함부로 비방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정성을 다한 마음으로 경전과 불상을 전하고자 하오니, 이 공덕으로 저의 기원이 끝없이 이루어지고, 깊은 믿음의 뿌리와 앞에 든 즉진(卽眞)의 정업(正業)이 열리길 바랍니다. 분명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당나라 용삭(龍朔) 원년에 경사(京師) 서화관의 도사 조산대부(朝散大夫) 곽행진(郭行眞)이 글을 지어 올립니다.
석존(釋尊)의 크나큰 교화와 자비의 가르침은 인천(人天)에 두루 펼쳐졌으며, 노자의 가르침은 적현(赤縣:중국)에서 기술되고 펼쳐졌습니다. 그런 까닭에 중국에서 지내면서 생사의 흐름을 면하지 못하던 이들이 번뇌를 여의고 집착을 여의어 공(空)ㆍ유(有)의 차원을 넘어서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회심(廻心)하여 귀의(歸依)하오며, 마음을 다하여 받들고 공경합니다. 불상을 만들고 경전을 서사(書寫)하여 아침ㆍ저녁으로 예배하며 선(善)과 함께 하길 원합니다. 항상 뜻이 독실하게 진승(眞乘:진실의 가르침)에 있지 않음이 없고, 도에 통하지 않음이 없으므로 범부의 식(識)에 걸림이 없으며, 모든 전래된 가르침을 다 배우겠습니다. 저의 이 발원을 굽어 살펴 주소서.
금동불(金銅佛) 다섯 구(軀), 십일면관음상(十一面觀音像) 두 구(軀), 여러 대승 경전을 함께 올립니다.
당나라 용삭(龍朔) 원년에 경사(京師) 서화관의 도사 조산대부 곽행진이 시방(十方)의 선각(先覺) 무극대성(無極大聖)님과 능인(能仁)의 화주(化主) 자씨법왕(慈氏法王)께 고합니다.
저는 품성이 범용(凡庸)하고, 천박하여 일반 서민과 다를 바 없습니다. 비록 모습은 형편없습니다만 마음으로 미륵(彌勒)을 염하고 있습니다. 주하사(柱下史:老子)의 도는 명후(明后:후한 명제) 이후에 성행하지 못하였고, 부처님께서는 천인사(天人師)이시니, 무변(無邊) 중생을 모두 덕화(德化)하시옵니다. 어찌 천(天)을 섬기는 이들이나 장초(章醮:도교)의 사(士)는 가야금과 바둑으로 즐기기를 버리지 못하고, 술과 고기 안주를 버리지 못하며,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풍륭(豊隆:雲師, 雷神)처럼 행동하고, 고치(叩齒:치아를 마주치는 도교의 行法)를 줄지어 행하는 것과 같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이러한 행을 하지 않고, 진실로 취하지 않겠나이다. 이제 믿음을 돌이켜 불교를 흠앙하며 경건히 경전과 불상을 만들어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나이다. 삼가 원하옵건대 이 어두운 밤이 열려 크게 밝아지고, 오랜 겁(劫)의 얽매임에서 떠나고, 무시(無始)의 윤회[流]의 묶임에서 벗어나며, 세세생생 근본에 돌아가는 행업을 홍포하고, 대대로 해탈(解脫)의 나루터에 나아가기를 동류(同流)와 함께 경앙(景仰)하나이다.
여기에 금동불상(金銅佛像) 다섯 구, 십일면관음상 두 구와 여러 대승 경전을 함께 올립니다.
당나라 용삭 원년, 경사 서화관의 도사 조산대부 곽행진이 글을 지어 올립니다.
제불대성(諸佛大聖)의 신통은 시방세계에 두루하고, 주하사(柱下史)의 인풍(仁風)은 오악(五嶽:중국)에 두루 빛이 되어 주었습니다. 양(梁)나라와 북위(北魏) 이전에는 아직 도가 제대로 행해지지 못하였으나, 북주(北周)와 북제(北齊) 이후에는 민간에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불교의 교화에 의하여 혼몽에 대해 거짓으로 꾸미는 것이 종지(終止)되고, 미묘한 이법(理法)에 통달하여 결국 명식(明識)의 거울을 밝혔습니다. 그런 까닭에 불법의 의(義)를 듣고 천선(遷善)하게 되었으니 영의(靈儀:佛像)를 받들어 조성하고 아울러 여러 경전을 마련하였습니다. 마땅히 높은 경지에 오르신 분들께서 아래 중생에게 홍포하여 예부터 전해진 지혜의 샘물을 베풀어 주시고, 복은 시작되고 죄는 끝나게 되도록, 생(生)의 두터운 장벽이 다하도록 해주옵소서. 삼가 자비의 은총 베풀어 주시고, 삿된 가르침 멀리하고,1) 훌륭한 방편을 얻으며, 깊은 골짜기에 정체(停滯)되지 않기를 원하옵니다. 아울러 칠각지(七覺支)의 지혜에 밝게 통하고, 삼명(三明)의 신통 발하며, 견집(見執)의 뿌리 뽑아 버리고, 의심의 산 물리치며, 애욕의 그물 찢어 버리고, 보배의 가르침 펴게 되기를 원하옵니다. 아, 동려(同侶)들과 함께 어찌 힘써 노력하지 않겠사옵니까?
당(唐) 용삭 원년, 경사의 서화관 도사 조산대부 곽행진이 글을 지어 올립니다.
무릇 음양(陰陽)의 맺어짐은 범속(凡俗)이 의지하는 바이나, 공ㆍ유를 넘어섬은 오직 성인에게만 있는 일입니다. 그 체경(體鏡)은 삼유(三有:欲有ㆍ色有ㆍ無色有)를 배제하여 초탈해 있습니다. 듣건대 오장(五藏)의 경은 하나를 얻는 데 있고, 유화하고 겸양하여 다투지 않음은 『도덕경』의 두 편에 보입니다. 이리하면 하늘과 땅을 존숭하고, 잠깐이라도 유위(有爲)에 빠지지 않아, 얽매임에서 벗어나 번뇌를 여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미혹의 성품이 개명(開明)되고 이로부터 덕행이 함께 하게 되니 운니(雲泥:하늘과 땅의 차이)가 같게 됩니다. 감히 정성을 기울여 존경의 마음으로 사경(寫經)하여 올립니다.
당나라 용삭 원년, 경사의 서화관 도사 조산대부 곽행진이 글을 지어 올립니다.
저는 일반 서민 출신으로 어쩌다 조정의 반열에 오르게 되어 예를 크게 받게 되었으며, 종장(宗匠)으로서 존경을 받아 왔습니다. 이러한 영예로운 평판에는 진실로 그렇게 된 연유가 있습니다. 저는 비록 세속에서 황관(黃冠:道敎)을 쓰고, 마음은 현화(玄化)에 있었습니다만, 삿된 가르침을 살펴보니 부처님께서 도(道)의 어버이였습니다. 후학들은 미혹하여 망령되게 우열을 다투고, 범부의 지견으로 순서를 설정하여 명확히 올바른 기준을 잡지 못하였습니다. 또한 부처님께서는 법왕(法王)이신데, 도교에서는 그 종조로서 주사(柱史:老子)를 칭하고, 부처님은 금색상(金色相)과 삼십이상(三十二相)의 기이함을 보이시는데, 도교에서는 하얀 머리에 코로부터 두 줄기가 흘러 내려오는 이상한 성광(聖光:모습)입니다. 일반 세속에서 들어본 바 없는 대라(大羅)는 어디에 있는 말인지 알 수 없으며, 도교에서 말하는 신통은 유정 중생을 교화하지 못하였으며, 옥경(玉京)은 본래 없는 것으로 이야기일 뿐입니다. 이제 부처님의 지각(至覺)에 귀심(歸心)하게 되어 경전과 불상을 조성하오니, 중생에게 전해져 파괴되어 없어지는 것을 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하오며, 아직 깨닫지 못하여 뒤처진 중생들이 마땅히 일승(一乘:불교의 최상)ㆍ일도(一道:도교의 최상)에 들어 항상 대동(大同)을 이루어 나가며, 구천(九天:도교)과 구유(九有:불교, 삼계를 九地로 나눈 것)가 함께 지극한 가르침을 도야하며 전수하길 기원하나이다.
당 용삭 원년에 경사의 서화관 도사 조산대부 곽행진이 『도덕경』 두 편을 살펴보았는데 불교를 비방한 내용은 없었습니다. 불교의 삼장(三藏)의 경문에는 이종(李宗:道家)에 대해 기술한 부분이 없었습니다. 후학들이 다투어 법왕(法王) 앞에서 아류(亞流)의 가르침을 내세우고, 닦고 받드는 법으로 우화(羽化) 신선(神仙)의 길에 더 많이 뜻을 두어서 이렇게 지극정성으로 글을 지어 올리나이다. 본래 선경(仙經)을 살펴보면 그 뜻은 마음을 바르게 하는 데 있거늘 어찌 복기(服氣)ㆍ삼록(三綠:三河籙, 河眞ㆍ河玄ㆍ河神)ㆍ삼원(三元:人元ㆍ地元ㆍ天元)에 있겠습니까? 세속인의 정(情)을 쫓아 망령되게 단서(丹書)와 옥검(玉檢)을 만들고, 재물을 쫓아 말을 해대었으니, 진한(秦漢)시대에는 이로 말미암아 비판을 받았고, 난대(欒大)와 서복(徐福:徐市)2)은 이로 인해 죽게 되었습니다. 이러한지라 뜻을 세워 경건한 마음으로 경전을 서사(書寫)하고 유통시켜서 두루 모든 이들이 견문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옵니다. 오직 이 마음뿐입니다.
당 용삭 원년에 경사 서화관의 도사 조산대부 곽행진이 글을 지어 올리나이다.
불경의 뜻은 인천(人天)에 우뚝 빼어나고, 도서(道書:도교의 전적)의 본말(本末)은 서역(西域:佛法)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어떻게 그러함을 아는가 하면, 『원양경(元陽經)』 같은 것은 『법화경』 등의 여러 불경을 모방한 것이고, 『서승경(西昇經)』의 여러 권(卷)은 세속의 가영(歌詠)을 본뜬 것이어서 그 문의(文義)에 대해 대관(大觀)해 볼 수 없습니다. 그 자세한 사정을 모두 기록하지 못합니다. 하물며 그 도서(道書)들은 황실의 보배이온데, 토속(土俗)3)의 정(情)이 많고, 노자의 고아한 뜻이 또한 많습니다. 바른 법에 의거하여 고쳐 Tm고, 『원양경』에 너무 오염됨이 없이 본래의 뜻대로 하여 받들어 지녀야 할 것입니다. 어찌 잘못된 교의에 빠지도록 내버려 둘 수 있겠습니까? 삼가 원하옵건대 성스러운 자비의 힘으로 후손들이 도의 길을 가는 데에 길을 잃고 헤매어서 마침내는 꿈 속의 바다에 흘러들지 않도록 해주옵소서.
금동불상 다섯 구, 십일면관음보살 두 구와 여러 대승 경전을 올립니다.
당 용삭 원년에 경사 서화관의 도사 조산대부 곽행진이 글을 지어 올리나이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도는 본래 형상이 없는 것인데 북위(北魏) 북주(北周) 시대에 형상을 띄게 되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오직 형상을 갖고 계시는데, 그 형상은 인천(人天)에 두루 퍼져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주하사의 모습은 그 빛이 눈으로 보기에 아직 충분하지 않고 능인(能仁:佛)의 모습은 유명(幽明)을 초출(超出)하였다 할 수 있기에 석상(石像)이 강물에 뜨고, 경전에서 불이 일어나며, 많은 유가(儒家)들이 이를 받드는 것은 여러 글에 전하는 바와 같고, 달라짐이 없습니다. 이렇게 경전과 불상을 조성하여 올리는 것은, 미륵불을 존숭하게 하며, 경전과 불상을 받들어 지녀서 끊어지지 않도록 함이며, 높은 분들의 뛰어남이 아래의 중생들에게 통하도록 하기 위함이며, 차생(此生)에서 견혹의 그물을 벗어 버리고, 내생(來生)에서는 정과(正果)이고, 모든 후손들에게 여기에 이르러 통달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당 용삭 원년에 경사 서화관의 도사 조산대부 곽행진이 글을 지어 올리나이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도란 원기(元氣)이니 형상으로 나투어진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대각(大覺)이라 칭해지며, 모두 경앙(景仰)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을 도부(道父)라 하고, 스님을 높은 분[上賓]이라 합니다. 성교(聖敎:불교)는 명문(明文)이라 숨겨져 있도록 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까닭에 경건한 마음으로 경전을 서사(書寫)하고 불상을 조성하여 받들어 전하는 것은 만고의 크나큰 뿌리를 심는 것이며, 백왕(百王)의 뛰어난 규범을 세우는 것입니다.4) 일승(一乘)의 가르침으로 그릇되고 옳음 위에 올라서서 훑어보며, 구천(九天)이 저 유명(幽明)을 받들어 배우고 훈화되도록 하고자 합니다.
당 용삭 원년, 경사 서화관의 도사 조산대부 곽행진이 글을 지어 올리나이다.
무릇 일국(一國)의 조종(祖宗)이 열리는 데는 한 사람의 성인이 나와야 하고, 일토(一土)의 모든 중생을 교화되는 데는 한 분의 부처님께서 깨달으셔야 합니다. 그런 까닭에 당우(唐虞:堯舜)ㆍ은(殷)ㆍ하(夏)의 왕조 변천에서 오운(五運)의 변환이 있었고, 과거ㆍ현재ㆍ미래의 삼제(三際)가 순환하며 대대로 다른 인재가 등장하는데, 어찌 노자(老子) 한 사람만이 겁겁(劫劫)토록 가르침을 펴서 제도하겠사옵니까? 그래서 불교에서는 다불(多佛)을 말하며, 모르는 이들을 위해 형상이 있는 것으로 칭하였습니다. 갈홍(葛洪:拘朴子)에 대한 꾸짖음은 유정(有情)의 공통된 의론입니다. 일찍이 주옹(周翁)이 말한 것을 보았는데, 이담(李聃)이 괴리(槐里)에 묻혔다 하고, 진(秦)나라 사람들이 실신하듯 통곡하였으나 이 말에 미혹되지는 않으며, 사마천은 유사(流沙)에서 윤희(尹喜)가 호인(胡人)으로 변했다고 하였으나 사리에 어긋나는 행적입니다. 그러나 석가모니께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대성(大聖)께서는 주(周:중국)의 모든 땅[提封]5)과 환해(環海)에 교의를 널리 밝히셨고, 진실로 진속(眞俗)을 함께 제도하셨습니다. 이에 저는 마침내 신심을 다한 정성으로 흠앙하오며, 봉존(奉尊)ㆍ귀계(歸戒)하옵고, 불상을 조성하고 경전을 서사(書寫)하여 저의 경건한 존경의 마음을 나타내고자 하옵니다. 유명(幽明)의 가르침 모두 화합하여 찬탄하오며, 이로써 도일(道日)이 더 크게 빛나고, 지혜가 밝지 못한 이들이 개명(開明)되며, 세존께서 영원히 홍범(弘範)의 가르침 밝게 펴 주시어 영현(英賢)으로 이끌어 주시길 원하옵니다.
당 용삭 원년에 경사 서화관의 도사 조산대부 곽행진이 글을 지어 올리나이다.
대체로 노자의 가르침은 유사(流沙)를 벗어나지 못하였으나,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그 교화행이 환해(環海)에 두루 미쳤고, 곧바로 넓게 설하거나 간략히 설하여 성(聖)의 체(體)를 온전히 깨닫게 하였으니 분명하여 미혹함이 없었습니다. 『도덕경』 두 편의 글은 아직 속진(俗塵)을 끊지 못하였으나, 삼장(三藏)의 경전은 그 이법(理法)이 스스로 진극(眞極)에 나아가게 합니다. 그러므로 정각(正覺)에 귀의하오며, 지극한 가르침[至乘]을 받아 지니옵니다. 불상을 조성하고 경전을 서사(書寫)하여 사속(士俗)에 유통시키고자 하오니, 근본에 돌아가는 도(道)가 하늘 가득히 정명(精明)해지고, 회향(廻向)의 문이 필경에 땅 위의 모범이 되길 기원하나이다. 이로써 천사도(天師道)의 사람들이 항상 예불(禮佛)하게 되고, 학명산(鶴鳴山)6)에서 은거하는 이들이 항상 부처님께 공경하고 예배하게 되며, 모령(茅嶺)7)의 나머지 도교도와 아직 진실을 깨닫지 못한 이들이 『서승경(西昇經)』 등의 도교 경전을 더욱 자세히 조사해 보아서 계속 그 설에 집착하지 않도록 해주옵소서.
당 용삭 원년에 경사 서화관의 도사 조산대부 곽행진이 글을 지어 올리나이다.
제가 예전부터 불법을 알고 싶어서 그 대열에 일찍 함께 하고 싶어 하였습니다. 모습은 비록 황로(黃老)이나 마음은 불교로 깊이 물들어 있었습니다. 경전과 불상은 복덕의 근본인지라 매사(每事)의 경영에서 얻은 수익으로 뛰어난 업을 지어서 저 생사의 모든 중생들이 통달하길 비나이다. 원하옵건대 반드시 죄는 다하고 복은 시작되며, 미혹은 다하고, 지혜는 밝아져서 모든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불법을 존숭하게 되길 비나이다.
당 용삭 원년에 경사 서화관의 도사 조산대부 곽행진이 글을 지어 올리나이다.
무릇 도일(道日)이 훼손되는 것은 그 뜻이 이를 극복해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배움에는 항상 스승이 없고 이치는 반드시 변천하는 모습에 의지하게 됩니다. 『도덕경』의 오천자(五千字)에서는 장초(章醮:도교의 祭儀)ㆍ영보(靈寶)ㆍ삼통(三洞)에 대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보잘것없는 방술(方術)을 전하는 황서(黃書:道書)와 적부(赤符)는 군중의 비판을 해소시켜 주지 못합니다. 현상(玄霜:仙藥)과 강설(降雪:仙藥)을 선전하기도 하고, 혹은 무(無)에 빠지기도 합니다. 불법의 지극함은 팔정(八正)의 나루터를 건너게 하고, 묘법(妙法)의 궁극적인 진리로서 팔도(八倒)의 미혹을 고요하게 이끌어 줍니다. 그런 까닭에 백왕(百王)이 불법을 받들어 교화하고, 사탑(寺塔)이 대천세계에 두루하며, 만대(萬代)에 이어지면서 승도(僧徒)가 천하에 가득합니다. 저는 오직 비속(卑俗)하지 않은 정도이지만, 전해 온 가르침을 받들고자 불상을 조성하고 경전을 서사(書寫)하여 모든 중생들에게 유통시키고자 하나이다. 원하옵건대 삼루(三漏)8)를 제거하고, 속히 삼신(三身:법신ㆍ보신ㆍ화신)을 친견하며, 속히 삼계(三界)를 뛰어넘고, 속히 삼유(三有)에서 자유자재하며, 저 높은 경계에 통달하고, 이 뜻이 이루어지이다.
당 용삭 원년에 경사 서화관의 도사 조산대부 곽행진이 글을 지어 올리나이다.
제가 듣건대, 도(道)는 본래 허통(許通)한 것이고, 그 뜻은 결착(結着)된 것을 부수어 없앤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자리는 영지(靈智)가 통조(洞照)하여 반드시 크게 귀의할 곳입니다. 예부터 동문(同門:곽행진과 같은 道敎徒)의 영재들이 모두 불교를 숭상하였으며, 나이 어린 세대로 우매한 제생(諸生)들이 분주하게 불교를 경멸하고 모욕하고 있는 것은 과거 철인의 가르침을 준수하지 않는 것입니다. 금과옥조(金科玉條)의 가르침을 읽지 않아서 이러한 견해가 생기니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장족(張族)의 삼사(三師:장릉ㆍ장형ㆍ장로) 같은 이들도 부처님을 예배하고 따랐으며, 도홍경(陶弘景, 456~536)과 구겸지(寇謙之)의 두 준걸은 불교를 포용하고 존숭하였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양(梁)과 위(魏)의 여러 서적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고, 여러 사례에 대해서는 촉천(蜀川) 지역의 기(紀)에 전하고 있습니다. 어찌 나무를 가리지 않고 자리를 잡겠습니까? 지극한 신(身)을 얻어 성(性)에 통달하오며, 그 신(神)을 알고서 깨닫게 됩니다. 불성(佛性)은 무너짐이 없는 까닭에 설법의 샘[泉]을 갖추고 있습니다. 불상의 조성과 경전의 서사(書寫)를 경건히 봉행하옵니다. 기원하는 말은 권말(卷末)에 진술하였습니다. 수없이 많은 사(士)들이 이 불도에서 모두 함께 깨닫게 되길 원합니다.
당 용삭 원년에 경사 서화관의 도사 조산대부 곽행진이 글을 지어 올리나이다.
무릇 일실(一實)의 도리(道理)는 천선(天仙)을 넘어서 있고, 대각(大覺)의 언의(言義)는 공(空)ㆍ유(有)를 모두 포용합니다. 진사왕(陳思王:曹植)의 『변도론(辯道論)』과 같은 것은 방사(方士)의 글을 실었고, 하안(何晏)의 감미로운 글은 성문(聖門)의 대열에 들지 못합니다. 그래서 도(道)에는 대소의 구별이 있으며, 성(聖)에도 오르고 내려가는 모습이 있습니다. 노자는 주사(柱史)의 관원이어서 입교(入敎)하였으나 그 주인이 되지 못하였고, 석가모니는 법왕의 자리에 오르셨고, 그 훈범(訓範)은 유명(幽明)을 모두 통괄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도덕경』 두편의 저술은 산에서 공부하는 논으로 전개되었고, 불법의 양 제(兩諦:世俗諦와 勝義諦)의 위대한 설법은 주씨지종(周氏之宗:중국)의 법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도교에 대해 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조사해 볼 수 있는 경우가 드물었습니다. 저는 정법[正則]을 따르게 되어 진승(眞乘)의 뜻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저 유정들이 상선(上善:불보살의 지혜)에 통해지고, 대도를 이해하며, 위없는 뜻을 내기를 기원하나이다.
집도금불도논형(4권) 중교서(重校序)
이 한 부(部) 네 권의 책을 살펴보건대, 이 가운데 제4권은 국본(國本)과 송본(宋本)이 같으며 오직 8지(紙)뿐이지만, 거란본은 훨씬 많아서 34지(紙)에 이른다. 비단 분량이 많고 적음의 차이뿐만 아니라 문장의 뜻 또한 서로 다른 부분이 있다. 또 그 앞 제3권의 국본과 송본은 같은데, 거란본은 본래 처음부터 끝까지 크게 다른데 무슨 까닭인가? 지금 앞뒤로 비교하고 검토해보니, 송본은 잘못하여 제3권을 잃어버리고, 엉뚱하게 제4권을 끌어다 제3권으로 하였으며, 제4권에서는 도사 곽행진이 도교를 버리고 불교에 귀의한 글 10여 단(段) 8지(紙)를 따로 인용하여 한 권으로 보충한 것이었다. 국본은 송본에 의거한 까닭에 마찬가지로 잘못되었다.
이제 이 한 부의 글을 자세히 살펴보니, 찬집(撰集)한 내용은 후한의 명제(明帝)에서부터 시작하여 당(唐)의 고종(高宗)에 이르기까지 역대 왕조에서의 불교와 도교의 논형(論衡:논쟁)을 기술한 것이다. 국본과 송본의 제3권에 있는 7조목의 사례는 당 고종 때의 사적(事蹟)이다. 제4권 8지(紙) 뒤에 이어 쓰인 10조목의 사례는 당 고조와 태종 때의 사적이다. 그래서 앞뒤가 바뀌어져 있는 셈이라 분명히 이렇게 될 수 없는 이치이니, 반드시 바로잡아야 할 일이다. 이제 거란본에 의거하여 고조(高祖)와 태종 때의 10조목의 사례를 제3권으로 하고, 고종 때의 7조목의 사례를 제4권으로 하여 올바르게 하였다. 그리고 곽행진이 도교를 버리고 불교에 귀의한 일에 대한 글은 끝에 붙였다.
수기(守其)가 서(序)하다. - 032_0516_c_01L集古今佛道論衡卷丁 星唐西明寺釋氏今上召佛道二宗入內詳述名理事一條上以西明寺成召僧道士入內論義事一條上以冬雪未降內立齋祀召佛道二宗論義事一條上幸東都召西京僧道士等於彼論義一條上在東都令洛邑僧靜泰與道士李榮對論一條上在西京蓬萊宮令僧靈辯與道士對論一條又在司成宣 范義頵宅難莊易義一條永徽嗣歷,屢發深衷,降意佛宗,徵延論道。覽前王之逸典,追賢達之行事,宋、魏兩朝,咸興談述,周、隋接運,俱暢論衡。然則晉氏南遷,以釋宗爲令族。魏朝北有齊緇黃而等駕。由是江表談玄規猷。自隔關河語極,淄澠一亂。所以屢有揚激,教義殊途。雖事拒輪,終歸陷網。雲泥路絕,聲采罕追。人代致混,論辯韜陷。顧斯陳迹,不無懷悼。致有黃巾,被責緘默。當時後出論場,昌言我勝。未登席者,隨言信之,輒以所聞,敍斯實錄。事連宸極,故絕浮詞。今上召佛道二宗入內詳述名理事第一顯慶三年四月下 勅。追僧、道士各七人,入內論義。時,會隱法師豎五蘊義,神泰法師立九斷知義,道士黃頤、李榮黃壽等,次第論義,竝以莫識名體,茫如夢海,雖事往返,牢落無歸。次下勅,遣道士豎義,李榮立道生萬物義,大慈恩寺僧慧立,登論座,先敍云:‘皇帝、皇后神功聖德,遠夷順化,宇內肅淸豈直掩映軒羲亦乃牢籠周漢云云又嘆仰佛化,戡濟黎元。’文多不載。便問榮云:‘先生云道生萬物,未知此道爲是有知,爲是無知?’答曰:‘道經云:人法地,地法天,天法道,旣爲天地之法,豈曰無知?’難曰:‘向敍道爲萬物之母,今度萬物不由道生,何者若使道,是有知則惟生於善?何故亦生於惡?據此善惡昇沈,叢雜摠生,則無知矣。如不通悟,請廣其類,至如人君之中,開闢之時,何不早生#今日 聖主,子育黔黎,與之榮樂?乃先誕共工、蚩尤、桀、紂幽厲之徒,而殘酷群生,授以塗炭。人臣之中,何不惟生稷、偰、夔、龍之輩,而復生飛廉、惡來、靳尚、新王之侶,諛諂其君,令邦國危亂哉?羽族之中,何不惟生鸞鳳善鳥,而復生梟鷲惡鳥乎?毛群之中,何不惟生騏、驥、騮、馬而復生豺狼、豪蝟乎?草木之中,何不惟生松、柏、梓、桂、蕙、蓀、蘭、菊而復生樠、櫪、樗、棘、葶、艾、蒺、茨乎?旣而混生萬物,不蠲善惡,則道是無知,不能生物,何得云天地取法,而爲萬物皆之宗始乎?據我如來大聖,窮理盡性之教也。天地萬物是衆生業力所感,善業多者,則琉璃爲地,黃金界道,瓊枝蔭陌,玉葉垂空,甘露充糧,綺衣爲座;惡業多者,則沙壤爲土,瓦礫爲衢,稗飯充虛,麻衣被體,泥行雨宿,霜穫暑耘,日夜驅馳,以供公府。皆自業自作,無人使之。吾子心愚,不識撗言,道生道,實不生,一何可愍?’李榮得此一徵,愕然不知何對立。時,乘機拂弄,榮亦杜口默然。於是𧹞然下座。次道士黃壽登座。豎老子名義。會隱法師將事整容,與其抗論。立惟論難之體,襃貶爲先。恐難道名,有所觸悞。卽奏云:‘黃壽身預黃冠,不知忌諱,城狐社鼠徒事,依憑國家。遠承龍德之後,陛下卽李老君之孫。豈有對人之孫,公談祖禰之名字?至如五千文,內大有好義。不能摽列,而說聖人之名。計罪論刑,黃壽死有餘。’及於是,蒙 勅云:‘是更豎別義。’壽因此挫銳,流汗失圖,雖事言對,次序乖越,遞相擊論,遂至逼瞑。僧等見,將燭來,便起辭退。 勅曰:‘向來觀師等兩家論義,宗旨未甚分明。’立遂奏云:‘向來、兩家議論,宗旨不明,誠如聖旨。何者?衆僧豎義,道士不識其源。旣恥無言,遂鏜闒漫語,至如僧豎五蘊義。黃賾以蔭名來難。且蔭以覆蓋爲宗,蘊以積聚爲義。如色有十一聚,在色名之下;識有八種,聚在一名之下。擧統以收稱爲蘊義。若以蔭名來難,義理全乖。又神泰豎九斷知義,道士生來未聞此名。雖上論座,不知發問之處。無以遮羞,遂浪作餘語。眞可謂欲適南越,而摠轡北冥。馬足雖行朔方,終非趣越之步。李榮浪語亦復如是。由是宗旨不明,塵黷 聖聽。過在道士。然佛法大宗,因緣爲義,故論云:未曾有一法,不從因緣生#且如眼見殿柱,須具五緣:一識心不亂,二眼根不壞,三藉以光明,四有境現前,五中閒無障。必具此緣,方得見柱。若使羲光已沒,龍燭未明。縱有朱楹,何由可見?又如禾子穀子,陽和之月遇水土人功,則能生牙。夏盛甕裏,冬委地中,緣不具故,畢竟不生。人亦如是,內則業惑爲因,外則父母爲緣,身方得生。父母乖各,終不得生。如是禽、魚、鳥、獸萬物皆爾,從因緣生。故經云:深入緣起,斷諸邪見,有無二邊,無復餘習,以佛智慧,窮法實相。是故號佛爲無等覺,爲天人師。外道之輩則不如是。皆悉邪網覆心,倒鍼刺眼。或言諸法自然而生,卽是此方老莊之義。或言諸法從自在天生,韋紐天生,冥性生,或言無因,或言宿作,此竝西方異道之計也。皆不知法本,不識因緣,信意放言,詿誤蒙俗,致使天人惑其飾詐。又對聖上,說三性義:一遍計性,二依他起性,三圓成實性。外道所立遍計性,收事等空花#由來非有。’廣解三性,言多不具。自上起來,經過食頃,僧及道士、陪侍臣、僚佐,兩行立聽,時旣夜久,息言奉辭。 勅云:‘好去。’各還宿所,經停少時,勅使告云:‘語師等因緣義大好。何不早論?’于時,三藏已下,莫不欣慶。斯則無勞廟略,碎蕩高旗,不藉軍威,堅城屠陷,見之今日矣。于時,以道士不識薀、蔭、斷知等義,莫允 帝情。散席之後,承內給事王君德云:‘ 勅語道士等,何不學佛經?’因斯以言釋李宗人,學業優劣,辯給通塞,實錄如前。貧富之懷,亦具瞻矣。上以西明寺成功德圓滿佛僧創入榮泰所期又召僧道士入內殿躬御論場觀其義理事第二顯慶二年六月十二日,西明寺成。道俗雲合,幢蓋嚴華。明晨良日,將欲入寺#簫鼓振地,香花亂空,自北城之達南寺十餘里中,街衢闐闥。至十三日淸旦# 帝御安福門上,群公僚佐備列于下,內出繡像長旛#高廣,驚於視聽。從於大街,沿路南往,竝皆 御覽。事訖方還,尋卽下勅,追僧道士各七人入。 上幸百福殿內,官引僧在東,道士在西#俱時上殿。 帝曰:‘佛、道二教,同歸一善。然則梵境虛寂,爲於無爲,玄門深奧,德於不德。師等拪誠碧落,學照古今,志契寶坊,業光空有,可共談名理,以相啓沃。’慧立奉對:‘陛下睿性自天,欽明纂曆,九功包於虞夏,七德冠於嬴劉。遂使天平地成,遐安邇肅。旣而宇內無事,垂慮玄門,爰詔緇黃,考覈名理。但僧、道士等,輕生多幸,濫沐恩光,遂得屢入金門,頻昇玉砌,所恐聞見,寡狹詞韻,庸疏虛煩,聽覽不足觀採,伏增悚汗。’降 勅云:‘好師等依位坐。’又勅云:‘師可一人上座開題。’時,淸都觀道士張惠元奏云:‘周之宗盟,異姓爲後。 陛下宗承柱下,今日豎義,道士不得不先。又夷夏不同,客主位別。望請道士於先上座。’ 帝沈默久之。立遂奏曰:‘竊尋諸佛如來德高#衆聖,道冠,人天,爲三千大千之獨尊,作百億四洲之慈父#引迷拯溺。惟佛一人此地未出。娑婆卽是釋迦之兆域。惠元何得濫言客主,妄定華夷?伏惟 陛下屈初地之尊,光臨贍部,受佛付囑#顯揚聖化,爇慈燈於闇室,浮慧舸於苦流。書云:皇天無親,惟德是輔。蓋此之謂歟!惠元邪說未可爲依。’勅云;‘好。’更遣上,仍僧爲先。爾時,會隱法師昇座,豎四無畏義。道士七人各陳論難,無足敍之。事在別傳。 次道士李榮開六洞義#擬佛法六通爲言。立昇論席,問榮六洞名數。答訖,徵云:‘夫言洞者,豈不於物通達無擁義耶?’答云:‘是。’難曰:‘若使於物通達無擁,名洞未委。老君於物得洞以不?’答云:‘是。’‘老君上聖何得非洞?’徵曰:‘若使老君,於物通洞者,何故道經云:天下大患,莫若有身。使我無身,吾何患也?據此則老君於身尚礙,何能洞於萬物?’榮云:‘師緩莫過相陵轢。榮在蜀日,已聞師名,不謂今在天庭得親談論。共師俱是出家人,莫苦相非駮。’立報曰:‘觀先生此語,似索孤息。古人云:黃塵之下,不許借槊。乍可出外,別敍暄涼#此席終須,定其邪正。向云:與立同是出家,撿形討事,焉可同耶?先生鬢髮不翦,褌袴未除,手把桃符,腰懸赤袋,巡門厭鬼,歷巷摩兒,本不異淫祀#邪巫。豈得同我淸虛釋子?’李榮大怒云:‘汝若以翦髮爲好,何不剔眉?’立曰:‘何爲剔眉?’榮曰:‘一種毛故。’立曰:‘一種是毛,剔髮亦剔眉。卿亦一種是毛,何爲角髮,不角髭?’榮遂杜默無對。立調曰:‘昔,平津困於十難#李榮死於一言,論德立謝,古人論功無慚,往哲於卽避席。’ 主上解頤大笑,次後諸僧與論,時熱,坐久恐勞, 主上且辭,勅云:‘好。’遂散還寺,觀三藏玄奘在西明寺度僧。不在論席。十四日平旦,勅使報奘云:‘七僧入內,與道士論議,五人論大勝。幽洲師最好,兩人雖未論議,亦應例是勝也。’立姓趙氏,其先伯益孫造,父有功於周穆王,封於趙城,遂因氏焉。趙衰、趙遁卽其遠祖,隨宦東西,故爲北地之新平人也。祖禮周太中大夫平東將軍上柱國龍門侯,父毅隨秘書郞司隸刺史,崇儒好道,撰文帝起居注二十五卷、大業略記三卷,竝藏秘閣,董孤直筆公有之矣。立卽司隸第三子也。幼鍾荼毒,有叔照法師攜接慈育。年十五,貞觀三年,出家住幽州照仁寺。擁以公貫,無由遠學。生知特達,不染俗流,志仰前良,謀猷慧解。迺假借經史內外披尋。自强不息,通鏡今古,一坐北荒二十餘載。聲榮藉甚,曜逸京皐。慈恩譯經,通訪巖穴,以文辯騰譽,致此徵延。永徽元年,擧以申省,依追參譯。旣染芝蘭芬郁逾美。自到 帝京,頻登閨輦,潔齊行道,率先摠至。所以導達功業,咸立之能;光暉論道咸立之力前後重錫備顯僧倫旣非教元,略而不述。然其聲辯包富,寫送雲行,事逾宿搆,蓋難與競。遂使挫拉,强禦傾倒。帝前顧問:‘此何人斯?’答曰:‘其本幽州僧也。所以帝偏眄睞允,副遺塵頻。告奘云:‘幽州師大好。’斯言有旨。至七月內, 勅鴻臚卿韋慶儉,補充西明寺都維那。性不習諠,詣 闕辭退,所司抑之,不爲通表。因理僧務,不墜彝倫。帝以冬旱內立齋祀召佛道二宗論議事第三顯慶三年冬十一月。上以冬雪未零,憂勞在慮。思弘法雨雩祈雪降,爰構福場,故能靜處中禁,廣嚴法座。下勅,召大慈恩寺沙門義襃、東明觀道士張惠元等入內,於別中殿,講道論,始于斯時也。內外宮禁,咸集法筵。釋李搜揚,選窮翹楚,卽斯榮觀,終古無之。天子親問襃所來,邑於座具答。時,道士李榮先昇高座,立本際義。勅襃云:‘承師能論義,請昇高座,共談名理。’便卽登座,問云:‘旣義摽本際,爲道本於際,名爲本際,爲際本道,名爲本際?’答云:‘互得進。’難云:‘道本於際,際爲道本,亦可際本於道,道爲際元。’答云:‘何往不通?’竝曰:‘若使道將本際,互得相通,返亦可自然與道互得相法。’答曰;‘道法自然,自然不法道。’又竝曰:‘若使道法於自然,自然不法道,亦可道本於本際,本際不本道。’於是道士著難,恐墜厥宗,但存緘默,不能加報。襃卽覆結,難云:‘汝道本於本際,遂得道際,互相本,亦可道法於自然,何爲道自不得互相法?’榮得重竝,旣不領難。又不解結,便浪嘲云:‘法師喚我爲先生,汝則便成我弟子。’襃應聲挫云:‘今對聖言論,申明邪正,用簡 帝心,芻蕘之嘲,塵黷 天聽,義須棄置,誠不可也。雖然無言不酬,古有遺誥,聊以相答。我以事佛爲師,我爲佛之弟子。汝旣稱爲先生,汝應先道而生#我爲弟子,佛是我師#汝若先道而生,汝則應爲道祖。’ 道士當時忸怩無對,麈尾垂,頓聲氣,俱下。襃因調曰:‘麈尾已萎鹿巾將折語聲旣耎義鋒亦摧李榮無對逡巡下席尋卽有 勅令襃依法登座便辭讓曰義襃江表庸僧山中朽蘀。天光遠被:‘漏影林泉輕抂、絲綸親臨,御覽然則,佛法僧寶,無上福田,梯蹬樂山,津梁苦海。法身常住,迹示興亡。像教住持,取資帝力。伏惟 陛下,道邁軒羲,德隆堯舜。遊刃萬機,弘顯三寶。 皇后懋續宮闈。皇太子聲高啓頌,今爲膏雨不降,瑞雪未零,憂勞黎庶,設齋祈福。紫庭之內,建立勝幢#黃屋之中,安施法座。欲使道風常扇,佛日連輝。爰 詔緇黃,各陳名理,玉階闡玉京之教,金闕揚金口之言。以斯景福,莊嚴聖御。伏願皇帝,金輪永轉,玉鏡恒明,等敬北辰,慶隆南嶽。 皇后心明七耀,體洞二儀,垂訓六宮,母儀萬國。 皇太子凝神望菀,作睿春坊,布彩前星,披圖下武。義襃海隅遺隱,忽廁嵩華,以有怯之心,登無畏之座,用木訥之口,釋解頤之談,云云。然則 聖旨斯臨,課虛立義。今示義目,厥號摩訶般若波羅蜜義。此乃大乘之象駕#方等之龍津。菩薩大師如來智母#摩訶大也。般若慧也。波羅蜜者到彼岸也。夫玄府不足盡其深華,故寄大以目之#水鏡未可喩其澄朗,假慧以明之,造盡不可得其崖極借度以稱之云云道士張惠元問曰:‘音是胡音,字是唐字,翻胡爲唐,此有何益?’答曰:‘字是唐字,音是梵音,譯梵爲唐,彼此俱益?’ 又難曰:‘胡音何能益人?’ 答曰:‘佛出天竺,梵音爲正教,流中夏利見甚多。云何無益?’ 彼進無難,返唱不通。襃體之曰:‘道士年耄,今復發狂。答義若此,頓不思量。’ 張曰:‘我那忽狂?’襃調曰:‘子心不狂,那出狂語?退亦佳矣。抒軸何爲?’張遂復座,姚道士次論義曰:‘般若非愚智,何以翻爲智?’答曰:‘爲欲破愚癡,嘆美稱爲智。 張責云何者,是愚癡而將智來破。’ 答曰:‘愚人是道士。將智以破之。’ 張曰:‘我那忽是愚?’答曰:‘般若非愚智,破愚嘆爲智。道士若亡愚,我智藥亦遣。’如是覆卻數番,張遂飮氣呑聲,周慞失守,無難坐默。襃因摠調云:‘張生則逃,狂無所姚道。又避愚無地,狂愚旣退,李可進關。’ 榮因問曰:‘義摽般若波羅蜜,斯乃非彼非此,何以言到彼岸?’答曰:‘般若非彼此,歎美爲度彼。’ 李曰:‘非彼非此,歎度彼岸。亦應非彼非此,歎到此岸。’答曰:‘雖彼此兩亡,歎彼令離此。’ 李曰:‘歎彼不歎此,亦應非此不非彼。’ 答曰:‘歎彼令離此,此離彼亦亡。’ 李榮更無難乃嘲曰:‘僧頭似彈丸,解義亦團欒。’襃接聲曰:‘今一彈彈黃雀,已射兩鴟鴞,彈彈黃雀,足射射鴟鴞腰。’于時,李旣發機被彈。張元乃拔箭助之。襃又調曰:‘李不自拔,張狂助亡姚生一愚。那不見助姚卽發言云云襃合調曰兩人助一人,三愚成一智。昔聞今始見,斯言無有從于時。’ 天子欣然,內宮諠合。 李榮俛首不已,便云:‘作如此解義,何須遠從吳地來?’襃云:‘三吳勝地,本出英賢,撗目茍身,舊無人物。’云云。言訖下座。當斯時也,獨御黃老,無敢抗言。可謂振論鼓於王庭,不異提婆之日灑法音於帝掖,何殊身子之秋,事罷相從,還棲公館?襃謂諸道士曰:‘駟不及舌,明言非易。天下淸論何有窮涯?等星曜之在天,類河山之鎭地。須便引用未待鄙言,何有面對 天顏,輕爲謔論?脫付法推,罪當不敬賴。聖上慈弘,恕其不逮不敬之罪。終難可逃。’道士等大慚。張元曰:‘不須述也。’襃曰:‘往不可咎,來猶可追。請廣義方,統詳名理。豈非釋李高軌不墜風流,勝負兩亡,情理雙遣者也?’筆者詳略襃之義道可曰,脫穎當時,准的萬代,碎黃巾於黃屋,不藉漢師,列帝網於帝前,無勞秦陣。是以雲梯嬰帶,徒聞姚主之談。呑倂合從,成祖宋君之美信矣。上幸東都又召西京僧道士等往論事第四顯慶五年, 車駕東都,歸心佛道,宗尚義理,非因談敍,無由釋會。下 勅追大慈恩寺僧義襃、西明寺僧惠立等,各侍者二人,東赴洛邑,登卽郵傳,依往至合壁宮奉見。敍論義旨,不爽經通。下 勅停東都淨土寺,襃卽於彼講大品、三論,聲華崇盛,光價逾隆。襃姓薛氏,常州晉陵人。蓋齊相孟嘗君之後,大吳名臣綜瑩之胤也。而天體高邈,履性淸明,少染緇衣,長遊聽采。初在蘇州明法師所,服勤教義,具美淸涼。大品、華嚴開明巖穴。又往縉雲山婺州曠法師所,經于多載,備問幽求,會體素誠,爽拔玄致。於是周流禹穴#三十餘年。傳經述論,學侶奔從。每惟大乘至教,元在渭陰,播蕩淳源,乃流楊越。嗟乎!高軌中原失蹤,後住東陽金華山法幢寺,弘道不倦,終日坐忘,思契伊心,長懷卒歲。會慈恩申請,宇內搜揚京邑髦彦,承風仰德,以名聞奏。下勅徵延,旣達京師,幽憂頓蕩。三藏玄奘不以形隔致猜,共敍大綱,護法爲務。請所學經論,通講十遍。顧謂門徒,竝往聽之。時在慈恩創開宏理,有空雙遣,藥病齊亡。于時執有毘曇、存空成實,分河飮水之客,別部說戒之徒,人我鏗然,欻然驚視。皆謂空見外道。或曰空花道人,遂卽負氣,衝天,莫不承風。摧轍喪魂,破膽失路、迷歸。襃乃誨以謗法之愆,示以信首之路,責以三關,則周慞無計,導以五過,則負罪彌天。辯給之口,引用飛流,能使答對無前,翔集雲雨,自戾止日。下,光問德音。宰輔傾城,道勝嗟賞,中興大法,斯人在斯。纔有一月,卽蒙勅召,中禁明道,躬閱淸言。如前略述。不爽華望,晩巡洛下,重復徵延。聲榮藉甚,彌隆今古。不意法柱忽崩,仁舟淪沒,因疾卒於洛邑。幽明結慘,道俗悲涼。下詔流問,幷給賻贈。令葬鄕邑,自餘道勝,未獲其文。隨得編之,恐有遺逸故耳。今上在東都有洛邑僧靜泰 勅對道士李榮敍道事第五顯慶五年八月十八日, 勅召僧靜泰、道士李榮,在洛宮中。 帝問僧曰:‘老子化胡經述化胡事,其事如何,可備詳其由緖。’靜泰奏言:‘詳夫皇王盛事其迹不同,或闢明堂以待賢,或臨衢室而問下,或賦淸文於柏殿,或延雅論於蓬山,竝驅名教之場,未踐眞玄之肆。豈若我皇德靜兩儀,道淸八表?巖廊多暇二教,融襟,控方外之輪,高昇慧日,理域中之躅,暢引玄風。爰詔緇黃,對揚賓主。但靜泰編學謏聞,雕冰鑄木肅承旒,宁斧鉞交襟。 聖旨問:‘道士化胡經云#老子化胡爲佛,此事如何?’靜泰奏言:‘老子二篇莊生內外,或以虛無爲主,或以自然爲宗,固與佛教有殊。然是一家恬素,降茲以外,制自下愚。靈寶創起,張陵吳時始盛。上淸肇端,葛氏齊代方行。亦有鮑靜,謬作三皇被誅。具明晉史。大唐貞觀之際,下 詔普焚此化胡經者,泰據晉代雜錄及裵子野高僧傳。皆云:道士王浮與沙門帛祖,對論每屈。浮遂取漢書西域傳,擬爲化胡經、搜神記、幽明錄等,亦云王浮造僞之過。’道士李榮云:‘靜泰無知,浪爲援引。榮據化胡經云:老子化胡爲佛。又老子序云:西適流沙,此卽化胡之事顯矣。’靜泰奏言:‘李榮重引化胡,靜泰前已指僞,縱令此經實錄,由須歸佛大師化胡經中#老子云:我師釋迦文,善入於泥洹。又榮引老子經序,竟無西邁流沙之論。但云尹喜謂老子曰:將隱乎據。榮對 詔不實,請付嚴科。又莊子云:老聃死秦矢弔之。又西京雜記云:老子葬於槐里。此竝典誥良證。又道士諸經唯有莊老,餘皆僞誑。偸竊佛教,安置縱撗,首尾蹈機,進退惟咎。假令榮經改無歸佛之語,陛下秘閣亦有道經,請對三觀學士,以定是非。卽源眞謬。’李榮云:‘道人亦浪譯經,據白馬將經,唯有四十二章。餘者竝是道人僞作。近亦有玄奘浪翻經論。’靜泰奏言:‘李榮茍事往來,莫知史籍據。騰蘭初至此地,大譯諸經,其後支迦樓之徒、康僧會之輩、曇摩提之屬、鳩摩羅之流#翻譯,皆有年月,詳諸國史。亦有俗士聶承遠、謝靈運等,皆翻譯,備詳群錄。豈比汝之僞經?或云朱鳥咮銜,或道靑烏吻噬,終散失於龍漢,卒改易於赤明,竝涉憑虛,未聞崇有。又榮所云近有玄奘,亦浪翻經。竊謂不可據。玄奘久遊五印,妙盡梵言,考之風雅,理無倫奪。又玄奘所譯,契我聖朝,藻二帝之天文,煥兩 皇之宸照。無知祭酒輒事毀譽。案榮之罪已合萬死。’李榮奏云:‘老、釋二教竝是聖言。非榮、靜泰卽能陳述。’靜泰奏言:‘榮自不能,泰卽能矣。’李榮重云:‘榮據道劫經云:道生於佛,佛還小道,化胡之事,斷亦不虛。’靜泰奏言:‘道士語稱檀越,已竊僧言。經引劫文,還偸梵語。蹶角受化,尚戴黃巾,旣漸佛風,不披緇服。食我桑椹,不見好音。人之無良,胡不遄死。劫是梵語,豈是道言?邊境有人,其名竊矣。’李榮云:‘大道空同,何佛,何道?’靜泰奏言:‘李榮體中無物,固是空同。’李榮自云:‘可無糞屎耶?’靜泰奏言:‘ 聖人之側,帝者之前,用鄙俚爲摳機。將委巷爲雅論,古人請尚方馬劍,今時可拂彼驢頭,刑於可刑,仁固仁矣。’李榮云:‘我莊子曰:道在糞屎。’靜泰曰:‘汝道在糞屎,此據縱下而言。汝道本淸虛,何不據極上而說?’又責榮云:‘汝面對宸極,而云我莊子耶?’李榮曰:‘汝經中亦云:如是我聞,阿難亦復稱我,我亦何妨?’靜泰曰:‘經云如是我聞,結集之語。又阿難無我,假言我。我汝我未除,不得我我。又阿難稱我,以對後人爾。今稱我親承嚴 扆此而不類何以逃辜?’李榮辭窮,遂嘲云:‘靜泰語莫慞惶。我未發汝剩揚。’靜泰云:‘李榮烏黮,何異蛣蜣?先師米賊,汝亦不良。’李榮遂云:‘汝頭似瓠蘆#等語云。’靜泰奏言:‘此對旒冕,宜應雅論。幸許劇談,敢欲間作,亦請嘲李榮頭。’聖旨便曰:‘可令連腳嘲。’泰曰:‘李榮道士額前垂髮,已比羊頭,口上生鬚,還同鹿尾。纔堪按酒,未足論文。更事相嘲,一何孟浪。’泰又奏言:‘向承 聖旨令連腳嘲。’便曰:‘李榮腰長,卽貌而述。屢申駝項,亟蹙蛇腰。擧手乍奮驢蹄,動腳時搖鶴膝。’李榮頻被嘲,急不覺云:‘靜泰不長不短。’靜泰奏云:‘靜泰加之一分,則太長。’ 李榮云:‘向共相嘲,便誦洛神之賦。’靜泰云:‘此關宋玉之語,未涉陳王之詞。義屈言窮,周慞迷妄,李榮是蜀郡詞人,泰是洛陽才子。’榮云:‘賈生已死,才子何關?’靜泰奏云:‘嚴楊不嗣,江漢靈衰,榮爲蜀郡詞人,一何自枉?’ 李榮無詞,又轉語云:‘箇是靈衰,那得靈輝?’靜泰云:‘夷歌嬥曲,自謂成章,鳥韻左言,用閑音賞。’李榮又轉語云:‘何意喚我爲李王?因言大唐天子,故是李王。’靜泰云:‘汝此語爲自屬耶?爲屬帝耶?如其自屬,爾是何人,如其屬帝,言王非 帝。’李榮云:‘我經云:域中有四大王居一焉。言王何過?’靜泰云:‘管子曰:明一者皇,察道者帝,通德者王,汝言域中有四大者,汝教自淺,汝復不閑,以帝爲王,汝過之極。’李榮旣急,不覺直云:‘靜泰言是。’靜泰奏言:‘李榮旣稱泰是。伏乞宸鑑。’李榮又轉語云:‘大道老君, 皇帝所尚,何物綠精,胡子剃髮,小兒起自西戎,而亂東夏。’靜泰云:‘如來出現彼處,爲天中,我 皇御宇,此閒爲地,正佛法有囑,委以 皇王,有感必通。何論彼此?若限以華裔,恐子自弊於杜郵。老是楚人,未知何地。又榮向云:綠精胡子。自是蔥嶺已東,李仲卿之鄙辭,亦無關於佛事。雖然無言不酬,請商略汝家之穢法,無知鬼卒可笑顚狂。或灰獄圍身,或牛糞塗體,或背擎水器,或脊負楊枝,或解髮卻拘,或交繩反繫,以廁溷而爲神主,將井竈而作靈師,自臣奴僕之辭,又引頑愚之稱。醮祭多陳酒脯,求恩唯索金銀,禮天曹而請福,拜北斗而祈壽。淫祀之黨,充斥未亡#衒惑之徒,罝网綱紀。加又扣頭搏頰,銜板纏緋,三點九閟之方,丹門玉柱之術,旣無慚於父子,寧有愧於弟兄?竝是汝天師之法,豈非汝之教耶?’李榮不覺,云:‘是。’靜泰云:‘李榮旣屢云泰是。如何不伏?重乞宸鑑。’李榮又奏云:‘靜泰所言,榮疑宿構。請共嘲燭,卽是臨機之能。’靜泰奏言:‘泰雖無德,言若成誦。’又語李榮云:‘汝欲嘲燭,汝宿構耶?燭與李榮無情,是同燭明勝汝。’李榮奏言:‘道之與佛,非榮、泰等之所言,委時又請休。’靜泰奏言:‘李榮知難而退,重乞天鑑。夜久更闌,恐疲 聖旨。帝令休榮,遂走下基云:‘去也。’于時,靜泰腳痹未行,少選停立。泰自奏言:‘靜泰先患風痹。’ 帝令人扶之。榮於階下云:‘靜泰已死。’兩人扶侍。泰云:‘帝者之前,理須戰慄,辭而復語,一何失敬也?’明日帝令給事王君德,責李榮曰:‘汝比共長安僧等論激,連環不絕,何意共僧靜泰論義,四度無答?’李榮事急報云:‘若不如此,恐陛下不樂。由是失厝,令還梓州。形色摧恧,聲譽頓折。道士之望,唯指於榮,旣其對論失言,擧宗落采。 泰本洛陽人,素有遠識之量,雖略通玄理,而以才辯見知。 上幸東都,多營法祀,晝覽萬機,夜通論道。禮誦餘暇,偏重義宗。道士李榮老宗魁首。恃其管見,親預徵延,屢遭勍敵,仍參勝席。故泰爲衆樂,推登鋒奮擊,挫拉若摧枯。潛聲如舌結面陳。泰是斯卽,心伏魂飛。況對天顏,襃貶足稱畫一?此則千載之龜鏡也。初以言辯見知,具問才術。東臺侍郞上官儀云:‘又能賦詩。’ 上令作之。應命便上。 帝重之,欲令觀國登庸。問:‘欲還俗不?須何等官?’泰荅:‘夙昔素心常懷出俗,遠同法王之棄俗。近喩巢許之解網#俗榮非其所慕。伏願不虧發趾之心。’ 上大幸之。便勅所司:‘東都敬愛寺大德未臨,可以泰居之。其所須侍者任取多少。’諸餘大德例止一人泰。別 勅垂顧,使將五人入寺。爾後頻登榮觀。事多不錄。大慈恩寺沙門靈辯與道士對論第六龍朔二年十二月八日,於蓬萊宮碧宇殿,靈辯奉 詔,開淨名經題目。問曰:‘難思之道唯凡不測,聖亦不知。’答:‘凡聖俱不思。’ 難:‘至理玄微,凡流容可不測,聖心懸鑑,妙智寧得不知?’荅:‘法性虛融,道無不遍,物理平等,何法可思?’ 難:‘山芥無容入之義,於凡故是難思。大小有苞含之理,在聖寧非不測?’荅:‘難思之道,物無不遍。何必山芥有納?凡聖分思不思。’ 難:‘凡智、聖智不分思不思,凡力、聖力不分納不納。’答:‘凡聖迹殊,容有納不納。凡聖本一,不分思不思。’ 難:‘凡聖本無二,不分思不思,凡聖迹有殊,應有議不議。’荅:‘本迹雖殊,不思議一也。’ 難:‘此是聖者本迹殊。何預凡夫事?’荅:‘一切衆生卽涅槃相,難思之道,詎簡聖凡?’難:‘難思無有二。可使凡聖本無別。難思旣不殊,凡聖迹寧兩?’答:‘不二處說二,二亦何所二?’難:‘亦可不思處說思,處說思,何得聖人亦不思?’荅:‘不二處說二,無二不二。若存二,可使不思處說思,不思得有思,不二處說二,無二不存,二無思處說思,不立思不思。’難:‘此乃何止不立思?亦不存不思,何得經首稱不思?’答:‘絕思慮故,言不思。非謂有不思故。華嚴經云:如是不思,議不可得深入,不思議思,非思寂滅。’三年四月十四日,於蓬萊宮月陂北亭,與道士姚義玄等五人,西明寺僧子立等四人講論。其日晩, 勅放道人、道士各還觀寺,別勅留僧靈辯及道士二人。至十五日乃放還。初十四日,道士方惠長開老經題,靈辯問曰:‘向陳道德唯止老教,亦在儒宗。’答:‘道經獨有,儒教所無。’ 難:‘孝經曰:有至德要道,易云:一陰一陽,謂之道。此則已顯於儒家。豈獨明於老氏?’答:‘自然之道#爲本,餘者爲末。’難:‘自然之道不欇在陰陽。老氏可爲本,陰陽亦苞於自然。周易豈爲末?’荅:‘元氣已來,大道爲本。萬物皆從道生。道爲萬法祖。’難曰:‘道爲物祖#不異前言。老易同歸。若爲遣難。惠長不能答。’因嘲之曰:‘昔,列子纔遇季咸,怳然心醉,黃冠暫逢,緇服不覺魂迷。’ 上大笑,令更難。靈辯奏曰:‘向者纔申短略,黃巾以成瓦解。今若更憑神筭,赤舌將必冰銷。’上又笑,重問曰:‘向云道爲物祖,能生萬象,以何爲體?’答:‘大道無形。’ 難:‘有形可有道,無形應無道。’答:‘雖復無形,何妨有道?’ 難:‘無形得有法,亦可有形。是無法有形不是無,無形不有道。’答:‘大道生萬物,萬法卽是道。何得言無道?’難:‘象若非是道,可使象外別有道。道能生於象,旣指象爲道,象外卽無道。無道說誰生?’ 答:‘大道雖無形,無形之道,能生於萬法’ 難:‘子外見有,母知母能生子,象外不見道,誰知汝道生?又前言道能生萬法,萬法卽是道,亦可如母能生子。子應卽是母。又前言道爲萬法祖,自違彼經教。老子云:無名天地,始有名萬物母。母祖語雖殊,根本是一義。道旣是無名,寧得爲物祖#惠長摠領前語不得。因嘲之曰:‘旣非得意,何爲杜默?已倒穀皮答呑米賊。’ 又難曰:‘道無有形指,象爲道形,亦可道無有祖。指象爲物祖。’答:‘道爲物祖,象非物祖。’ 難:‘道別有形,不得象,卽道形。答:‘大道無形。’大道非祖。’ 答:‘道本無名,强爲立名,爲物之祖。那得非祖?’難:‘道本無名,强爲立名,亦可道本#非祖,强爲物祖。’答:‘然。’難:‘道本非是祖,非祖强說祖。亦可大道無有形,無形强說形。’ 又難:‘離象無別道,象未生時,有道生,亦可離眼無別目。未有目時,有眼見。’ 答:‘道是玄微,眼爲麤法。二義不同,安得爲類?’ 難:‘象是質礙,道本虛無。有無性乖,若爲同體。惠長又無答。辯奏曰:‘靈辯忝預玄門,實懷慈忍。雖逢死雀,不願重彈。’ 上大笑稱善。 五月十六日,於蓬萊宮,又與道士論難。其道士對答不相領,當無可記錄。至六月十二日,於蓬萊宮蓬萊殿,論義。靈辯與道士李榮同奉見。上謂榮曰:‘襄陽道人有精神,好交言,無令墮其圍中。’榮奏曰:‘孔子尚畏後生,況榮不如前哲?’辯奏曰:‘靈辯誠爲後生,李榮故當是老以榮住在蜀 中故有此譏 上大笑曰榮已被逼榮開昇玄經題曰:‘道玄不可以言象詮。’ 辯問曰:‘玄理本寂,思慮情智。不可度量。妙道旣絕言詞。若爲得啓題目答,玄雖不可說,亦可以言說。雖復有言說,此說無所說。’ 難:‘玄若可言詮,卽當云可詮。如實不可詮,當云不可詮。何得向云不可詮,今復言可詮?’榮領難,不得辯。謂榮曰:‘求魚兔者,必藉於筌蹄;尋玄旨者,要資於言象。在言旣其謇,棘於理信,亦迷朦。又更爲述前難。’ 答曰:‘玄道實絕言。假言以詮玄,玄道或有說,玄道或無說。微妙至道中,無說無不說。’ 辯曰:‘此是中論龍樹菩薩偈,偈云:諸佛或說我,或說於無我,諸法實相中,無我,無非我。安得影茲正偈,爲彼邪言?竊菩薩之詞,作監齋之語?’榮曰:‘佛道何殊?西域名爲涅槃,止是此處死滅。’ 辯曰:‘螢光、日光不可一,邪法#正法安得齊?西域名涅槃,唐翻爲滅者,此乃玄寂之妙境,恬澹之虛宗。絕患累於後身,證無爲於極地。詎得以生死變謝,而相擬乎?子聞涅槃亦是滅,生死亦是滅#兩滅卽是齊。烏鵲亦有聲,鸞鳳亦有聲,二聲應可一。二鳥俱出聲,淸雅猶來別。二法雖同滅,冥寂本不均。’因呵曰:‘足下若不情昏菽麥,目闇玄黃,何爲以至人涅槃,同庶類生死?’ 上大笑曰:‘向者道士摽章,今乃翻。是道人豎義。’令難問:‘玄理是可詮,可使以言詮。玄理體是不可詮,如何得言詮?’答:‘曉悟物情,假以言詮。玄亦可詮。’ 難:‘玄體不可詮,假言以詮玄,玄遂可詮者,空刺不可拔。强以手來拔,空刺應可拔。’反問:‘空是玄不?’反答:‘非是玄。’反難:‘是玄可竝玄非玄#若爲得竝玄,正難空旣不竝。玄空體非是玄,言旣可詮,玄可竝玄非玄。若爲得竝玄,正難空旣不竝玄,空體非是玄。言旣可詮玄,言應得是玄。言雖不是玄,言亦可詮玄。空雖不是玄,何妨空竝玄?’答:‘玄是微妙。如何以空來竝?’ 難:‘玄是微妙。如何以言來詮?’ 又汝玄理不可詮,玄理亦可詮。空雖不可竝,空亦應可竝。空體不可竝,非竝不得竝。玄體不可詮,非詮不得詮。榮不能答,直抗聲曰:‘ 明王有道,致使番僧入貢。’辯曰:‘日磾生於塞外,爲忠臣於漢朝。道陵長自蜀中,作米賊於魏日。’榮默然不答。又謂之曰:‘得嘲急解,何事踟躕?’ 榮曰:‘旣得玄旨,所以杜默。’辯曰:‘魚目不類,明珠結舌,何關杜口?’上大笑,令更難。 難曰:‘玄理幽深,至人可測。道士庸昧,若爲得知。’答:玄雖幽奧,至人深知。凡則淺知。難:‘道士學玄理,至人能深知。道士得淺知,道士學仙法。仙人能高飛,道士應下飛。仙飛有高下,道士高下俱不飛。玄理有淺深,道士淺深#俱不測。’榮不能答。辯嘲之曰:‘老子兩卷本末硏尋,莊生七篇何曾披讀?頭戴死穀皮,欲似鈍啄木。’榮未及對。又嘲曰:‘聞君來蜀道,蜀道信爲難。何不乘鳧,遊帝里,翻被枷項入長安勅追榮入 京日著枷 榮曰死灰其慮槁木其形,行忘坐忘,著枷何妨?’辯曰:‘行忘坐忘,終身是忘,亦可行枷坐枷,終身著枷。’仍嘲之曰:‘槁木猶應重,死灰方未然。旣逢田甲尿,仍遭酷吏懸。’榮未答。又嘲曰:‘柱枷異支策,擎枷非椐梧,閉口臨枷柄,眞似濫吹竽。’榮恚曰:‘ 天子知有榮,乃與榮枷著。如汝道人之流, 主上何曾記錄?’辯曰:‘天子今年知有榮,來年亦應知有榮,今年旣與榮枷著,來年亦與榮枷著。聖恩方復未已,著枷豈有了時?’又謂曰:‘詳刑抵羅 天子未必皆知。道士著枷, 聖人何曾記識?’ 又謂曰:‘李榮著枷, 聖人必不承意。儻若因枷被識,亦猶以醜見知。’榮慚怒勵聲曰:‘道門英秀,蜀郡李榮,何物小僧敢欲相輕?’ 辯曰:‘李榮,李榮,先乏雄情爽氣,何勞瞋目勵聲?’仍嘲曰:‘區區蜀地老,竊號道門英,已摧頭上角。何用口中鳴?’榮不能酬。但曰:‘道人何所知?努力加飡飯。’ 辯曰:‘衆僧本來齋潔,故當飡飯進蔬。道士唯重醮祭,應須酌醴焚魚。’榮曰:‘天宮淸淨,何意論魚 辯曰向已同齋何爲語飯當論時 在中後榮曰:‘蠢爾荊蠻,詎堪爲敵?’ 辯曰:‘周德未被,往日蹔有荊蠻。皇澤遠覃,今時猶見蜀㺐。’ 榮曰:‘心裏若無烏泥,袈裟何爲得黑?’ 辯曰:‘心中旣有紫棘,頭上遂裹木皮。末席 辯嘲榮曰:‘道士當諦聽。沙門贈子言,鴻鶴已高逝,燕雀徒自喧。’已前雜嘲甚多,不能盡記。每嘲, 上皆垂恩欣笑。茅齋中與國學博士范贇談論序昔,毘城長者,遊談里巷之中。今皇邑先生迂駕蓬門之內,以今況古,夫何異哉?范先生洞曉儒宗,兼精李釋。未嘗不覈玄微,於道肆,談空理,於法筵,小僧往遊江左,遐想風流,適至關中,彌欽道德,尚未披敍。邂逅相逢,深適鄙懷,是所願也。旣而光陰易失,嘉會難留#豈可使慧遠,仲堪獨論象繫?道林、玄度自解逍遙,請各據宗,塗摽牓題目,以申考擊,共敍幽微云爾。 范曰:‘莊子之書頗曾披攬。其閒旨趣#待問當酬。’問曰:‘七篇繁廣,一問無由得窮。請更別擧章門,以申往復。’ 范曰:‘齊物之理今古以爲難。法師可依此義,以開宗轍。’ 問曰:‘今古若難,誠如所論,命開宗轍,未敢輒當,聊復竭愚,試陳短句,秋毫、太山,儒、墨咸稱大、小。莊生以爲不爾,豈非孟浪之談?’ 范曰:‘俗滯情於是非,莊生遂忘於大小。’難曰:‘但忘俗見之情,應不齊彼山毫之質。’ 范曰:‘意在忘情。’ 難曰:‘不須齊質。’ 范曰:‘不論齊質。情詎得忘?’難曰:‘秋毫旣無陵霄之峯,太山未有入塵之細。逼令均等,其可得乎?’ 范曰:‘毫有入塵之細,不羡陵霄之峯。山有陵霄之峯,不鄙入塵之細。各冥自性,故說爲齊。’ 難曰:‘物雖各冥其極,大小之體不無,莊周雖貴捐情,不覺飜迷物理,至如空虛,本無質,象不可論有差殊。山毫旣有形容,安得談其均等?’ 范曰:‘談其齊等,本貴忘情#若欲均形,豈非爲蛇畫足?’ 難曰:‘前言形均,始可情喪。未是悟他。今持畫足過,人翻爲自因。’更竝曰:‘山大毫小,莊書遂可齊其大小,天尊地卑,周易應可混其尊卑,莊生安得齊其大小?’范曰:‘二教所詮,由來是別,均齊之理本自不同,難易本是別#不得同。山毫本不齊,不齊應說異。異物旣不異,不異得說異。別物應可同。何得說不同?’靈辯,姓安氏,襄陽人也。其先西域古族。晉中朝時,徙居長安白鹿原。永嘉末,又南遷,因家于襄陽。宿殖德本,累脩淨業。家遞士農,門傳貞素。靈辯載江漢之英靈,胤荊衡之秀氣,幼而聰慧,早能言理。年十五出家,聽習三論、大乘諸經,究極幽微#尤長白黑。天骨峻爽,風韻凄淸。眉目口鼻之間,自然虛肅,常若秋崖含霽,霜松引飆。每至辯波騰迅,詞芒灑落。又如河箭飛流,月弦揚彩。永徽年中,蹔遊東都,聲馳天闕。尋奉 勅,住大慈恩寺。仍被追入內論義。前後與道士李榮等,亟經往復。靈辯肅對,宸嚴縱敷雄辯。神氣高邁,精彩抑揚,望敵摧鋒,前無强陣。嘲戲閒發,滑稽餘裕,頻解聖頤。每延優獎,然素懷謙挹,加復謹愼,溫枝絕訪。時莫能知。同侶所傳百不存一。昔次卿宏論,唯聞重席之賞。充宗小辯#纔傳折角之謠。尚想連環,沈吟千祀,略題梗槪#爲之記云。但恨言唯應物,理非獨詣,尋微之延,猶有餘功。集古今佛道論衡卷丁甲辰歲高麗國分司大藏都監奉勅彫造
- 032_0528_c_01L集古今佛道論衡卷丁 續附唐西明寺釋氏唐麟德元年於京師西明寺撰述維唐龍朔元年春三月,西華觀道士朝散大夫郭行眞敬造。眞惟佛道稱聖,咸作化於含元。寶乘靈寶,俱開津於有識。然則承俗訓,一風軌於醮章,佛垂法網,是舟師於形有。自非統括經誥,孰能輕擧?謹竭誠心,敬傳經像,用資景福,通祇無邊。啓深信之根前,喩卽眞之正業,可不然歟!維唐龍朔元年,京師西華觀道士朝散大夫郭行眞永所惟。釋尊弘化#慈誘,遍於人天#李老垂則,述作開於赤縣。故使在身在國,不免生死之流。離惱離著,超於空有之域。所以迴心歸向,奉敬無遺。造佛書經,晨昏禮謁。當願善無不在常,志篤於眞乘,道無不通#故莫滯於凡識#統諸來學,幸顧斯言。 金銅佛五軀、十一面觀音像二軀、幷諸大乘經。維唐龍朔元年,京師西華觀道士朝散大夫郭行眞自惟。昭告于十方先覺無極大聖,能仁化主,慈氏法王。行眞稟自凡庸,隸斯觀伍。形雖草化,心造彌勒。柱下周之史臣,道不振於明后。佛乃天人師,敬德化摠於無邊。豈有事天之夫、章醮之士,琴棋不釋,酒脯未遺?禹步而抗於豐隆,叩齒而排於列缺,誠所不取也。今改操迴信,欽仰佛宗,敬造經像,恩程心用。伏願啓斯厚夜,大敞明離,裂久劫之鄣纏,解無始之流縛。生生弘反本之業,代代出解脫之津。預有同流,景仰斯在。金銅佛像五軀、 十一面觀音像二軀、幷諸大乘經。維唐龍朔元年,京師西華觀道士朝散大夫郭行眞所造。仰惟諸佛大聖神通,遍於十方,柱下仁風,流扇光於五嶽。梁、魏已上,未聞道有儀形,周、齊已下,弘誘開於氓俗。是則擬佛陶化,終詐飾於昏蒙;達見通微,畢曉鏡於明識。所以聞義遷善,奉造靈儀,幷諸經誥。當使上弘下施,開遂古之濛泉;福始罪終,顯窮生之厚鄣。伏願恩隆慈施,不隔於邪林;方便善巧,無滯於幽谷。竝使解明七覺,慧發三明。拔見幢而偃疑山,裂愛網而陳寶駕。悠哉!同侶可不勉哉!維唐龍朔元年,京師西華觀道士朝散大夫郭行眞所造。夫以陰陽結搆,凡俗之所依持,空有驅除,惟聖於焉體鏡。排三有而超挺,聞乎五藏之經;在一得而守雌,見於二篇之作。是則尊天敬地,無忽於有爲,解縛離惱,寔開於惑性。由斯比德,事等雲泥。敢用傾誠,敬崇流施。寫經造像,無替暄涼。用此福因,津通有識,咸超見網,早越迷林。敬造金銅佛像五軀、 十一面觀音檀像兩軀、諸大乘經相續寫。維唐龍朔元年京師西華觀道士朝散大夫郭行眞所造。自惟生在微伍,忽廁朝班,弘之以厚禮,敬之以宗匠。斯之榮問,誠有其由。眞雖隸處黃冠,心存玄化,討尋邪誥。佛爲道父,後學迷生,妄存比競,擬人以倫,固難齊准。且佛爲法王,道稱柱史,佛垂金色相,開四八之奇。道見白頭鼻,流雙柱之異。聲光不聞於恒俗,大羅乃烏有之言。神通未化於物情,玉京本亡是之說。是用歸心至覺經像,留情傳於避壤。遠流未悟,當使一乘一道,常作化於大同;九天九有,共陶津於極教。維唐龍朔元年,京師西華觀道士朝散大夫郭行眞,尋道德二篇,不存於毀佛,脩多三藏,莫述於李宗。後學奔競,亞迹於法王前,脩奉法志,隆於羽化,是用丹誠奉述。元討於仙經,棲心正則。豈存於服氣?三錄三元,緣情而妄立;丹書玉撿,逐物而興言。秦漢由此而致譏,欒徐寄茲而取喪。是用馮心委志,敬寫流通。庶有見聞,咸存此意。維唐龍朔元年,京師西華觀道士朝散大夫郭行眞所造。自惟佛經詞義,迥拔於人天,道書本末,影像於西域。何以知然?至如元陽一經,響法華諸典,西升衆卷,類方俗詠歌,文義不可大觀,情事全非所錄。況復朱門玉柱之液靈薪?穢士俗之情高,蕪老君之雅識,還依正繕寫,不濫染於元陽,如本奉持。豈有淪於教義?伏願聖慈無㝵,垂降迷蹤,永作道於後昆,畢如流於夢海。金銅佛像伍軀、 十一面觀音菩薩二軀、諸大乘經。維唐龍朔元年,京師西華觀道士朝散大夫郭行眞所造。眞以道本無形,形之於周魏,佛惟有像,像布於人天。故柱下之容,未足光於視聽。能仁之相,可謂超出幽明。故使石像浮江,經生火聚。群儒奉之,如在書傳記而不渝。是使致敬彌勤,奉持難絕。用斯上善,通被下元。割見網於此生,獲正果於來際。貽諸末葉,通斯致焉。維唐龍朔元年,西華觀道士朝散大夫郭行眞造。眞以道惟元氣。非形像之照臨。佛稱大覺,統景仰之,尋則佛稱道父,僧曰上賓。聖教明文,無容隱匿。所以敬寫經像,傳奉未聞,開萬古之槃根,樹百王之逸軌,欲使一乘令駕,摠邪正之登臨,九天奉識,該幽明而翊化。維唐龍朔元年,京師西華觀道士朝散大夫郭行眞所造。惟夫一國朝宗,一人稱聖,一土陶化,一佛稱覺。故使唐、虞、殷、夏,五運推遷,過、現、未來三際循復#代代異材。豈惟一老,劫劫開濟?是稱多佛。無識敍稱,已形葛洪之誚。有情通議,早見周顒之說。是以李聃葬於槐里,秦戾哭而不迷。馬遷演於流沙,尹喜變而乖迹。未若釋氏大聖,湜封周於環海。教義弘明,誠濟會於眞俗。遂投誠欽仰,奉尊歸戒,造像書經,式表虔敬。當使幽明,叶讚心用之道,日隆現未,智開冥津之尊。將曉永垂弘範,貽則英賢。維唐龍朔元年,西華觀道士朝散大夫郭行眞敬造。蓋以老氏之教,不出流沙,釋君之宗,化行環海#卽日而敍,廣陜可知。窮神體聖,居然非惑。二篇之志言,未絕於俗塵;三藏之經,理自詣於眞極,所以歸依正覺,承受至乘。造佛書經,流通士俗,願反本之道,控精爽於天衢,迴向之門,畢權衡於地軸。是使天師受道,恒禮佛於鶴鳴。隱居立敬,常拜釋於茅嶺,自餘未悟,事等效尤,詳覈昇玄,無宜冰執。龍朔元年,西華觀道士朝散大夫郭行眞所造。眞夙知希,向早預法流,形雖黃老,心染緇釋。經像福本,每事經營,用資景業,通被存沒。必願罪終福始,惑盡智明。逮及黎元,咸資敬仰。維唐龍朔元年,西華觀道士朝散大夫郭行眞所造。夫爲道日損義,有存於克念。學無常師,理必資於遷善。至於道德五千言,不涉於章醮,靈寶三洞,事有微於方術,黃書赤符莫通於物議,玄霜絳雪,或陷於烏有。未若佛宗至極,坦八正之通津,妙法窮眞,靜八倒之迷藪。所以百王奉化,寺塔遍於大千;萬代承風,僧徒充於天下。行眞不惟鄙俚,奉佩遺筌,造像書經,流通兆庶,當願早傾三漏,早見三身,早騰三界,早御三有,通被高識,通斯意焉。維唐龍朔元年,京師西華觀道士朝散大夫郭行眞所造。眞聞道本,虛通義非#摧結靈智,洞照須知。大歸自古,同門英秀,咸尚佛宗,叔代暗識諸生,雷奔輕侮,是不遵往哲,不讀金科,遂生此見,未曰通敏。至如張族三師,相從拜佛,陶寇兩傑,攝敬釋宗。詳于梁#魏之書,備例蜀川之紀。豈非擇木而處,得至身而達性?知幾其神悟,佛性之非朽,故辯泉具,造像書經,敬勒願言,陳于卷末。庶同悟士,塵斯道哉!維唐龍朔元年,京師西華觀道士朝散大夫郭行眞所造。夫以一實之道,理越於天仙大覺之言。義該於空有,至如陳思辨道,乃涉方士之科。何晏敍甜,未在聖門之列。然則道有小大之別,聖亦昇沈之儀。老君柱史之員#立教非爲其主。釋乃法王之位,訓範統於幽明。故二篇述作,顯於山之論;兩諦大造,程於周氏之宗。所以沿古至今,罕能詳覈。余承正則,義取眞乘,造佛書經,無替心曲。用茲上善,通被識情。願解大道,發無上意。集古今佛道論衡卷丁集古今佛道論衡四卷重校序按此一部四卷之書,其第四卷,國本與宋本則同,唯八紙耳。丹本大多至三十四紙。非唯多小不同,文義亦不相涉。又前第三卷國本與宋本則同,丹本始終迥異者,何耶?今進退撿挍,宋本錯亂,失第三卷,妄引第四卷,爲第三卷。於第四卷,則傍引道士郭行眞捨道歸佛之文十餘段,凡八紙補爲一卷。國本依宋故同錯耳。今詳此一部,撰集之體,始自漢明帝,終至唐高宗。歷紀帝代,佛道論衡,而國本、宋本之第三卷凡七條事,卽唐高宗時事也。今於第四卷八紙,後所連寫十條之事。是高祖、大宗時事也。然則先後倒錯,勢必不然,理須正之。今依丹本,以高祖、大宗時十事,爲第三卷。高宗時七事爲第四卷,而正焉。其郭行眞捨道歸佛之文#幷附于尾云。守其 序。甲辰歲高麗國分司大藏都監奉勅彫造
- 1)모든 존재의 근간이 되는 다섯 가지 색(色:물질)ㆍ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이다.
- 2)본문은 ‘인군지중 개벽지시(人]君之中 開闢之時)’이나 뜻이 통하지 않는다. 이본(異本)은 ‘인군미개벽지시(人君未開闢之時)’인데 뜻이 분명하게 통하므로 그에 따른다.
- 3)주족(周族)의 선조. 요순시대 농관(農官)으로 있었다고 한다.
- 4)상족(商族)의 선조. 순임금의 신하였다고 한다.
- 5)순임금의 두 신하, 각각 약관(藥官)과 납언(納言)을 맡았다고 한다.
- 6)은(殷) 주왕(紂王) 때 아첨을 잘한 신하이다.
- 7)위의 비렴(飛廉)의 아들로 참언(讖言)을 잘한 간신이었다.
- 8)전국 시대 초나라의 신하이다.
- 9)원문은 종비취월(終非趣越)이나, 내용상 비(非)가 빠져야 옳다.
- 10)당 고종이 전생에 초지보살이었는데 불화(佛化)를 크게 펴기 위해 그 존(尊)을 굽히어 평범한 인간의 황제로 나투었다는 뜻이다.
- 11)본문은 ‘경견(更遣)’이나 뜻이 통하지 않으나, 이본(異本)은 ‘경체(更遞)’인데 쉽게 뜻이 통한다.
- 12)본문은 평일(平日)이나, 이본(異本)은 평단(平旦)인데, 내용상 후자가 옳다.
- 13)당시 삼장법사 현장스님이 주석하며 역경사업을 펼쳤다.
- 14)불주(拂麈)라고도 한다. 스님이나 도사가 번뇌를 털어낸다는 뜻으로 들고 다니는 먼지떨이 모양의 것. 낙타나 사슴의 꼬리털로 만든다.
- 15)보통 황제가 있는 곳을 뜻하나, 여기서는 보배로운 가르침으로 곧 불법을 가리킨다.
- 16)본문은 체지왈(體之曰)인데 뜻이 통하지 않으나, 이본(異本)의 조지왈(調之曰)은 뜻이 통한다. 조왈(調曰)은 본문의 여러 곳에서 나온다.
- 17)본문의 조송(調宋)은 듯이 통하지 않으나, 이본(異本)은 조종(祖宗)인데, 뜻이 통한다.
- 18)본문은 종상의리(宗尙義理)이나, 이본(異本)은 숭상의리(崇尙義理)인데, 후자가 옳을 것이다.
- 19)정교(正敎)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갖지 못하여 생기는 다섯 가지 잘못으로서 첫째는 옳게 믿지 못함, 둘째는 용기가 감퇴됨, 셋째는 사람을 속임, 넷째는 법을 비방함, 다섯째는 성법(聖法)을 소홀히 여김이다.한편 계율을 지키지 아니하여 생기는 다섯 가지 과실(過失)을 말하기도 하나, 여기서는 위의 경우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 20)삼국위(三國魏)의 조식(曹植)이 지은 부(賦)이다.
- 21)전국 시대 초나라 사람. 사부가(辭賦家). 굴원(屈原)의 제자라고도 한다. 후인은 그를 비수연민(悲愁憐愍), 또는 미남자(美男子)의 대명사로 칭한다.
- 22)양자강의 한 지류인 한수(漢水)에 합해지는 한 강줄기를 말한다.
- 23)본문은 영쇠(靈衰)이나 뜻이 통하지 않는다. 그러나 허쇠(虛衰)로 되어 있는 이본(異本)이 있는데, 뜻이 잘 통하므로 그에 따른다.
- 24)이 촉군은 앞에 든 지명 및 강과 같은 지역 또는 인근 지역이다.
- 25)오늘날 사천성 지역인 파촉(巴蜀)의 파인(巴人)을 말한다. 여기서는 곧 도사 이영의 출신지를 가리킨다.
- 26)원문은 녹정(錄精)이나, 이본(異本)의 녹정(錄睛)이 옳다.
- 27)전국 시대 진(秦)의 서울 함양 인근의 우정(郵亭)으로 장군 백기(白起)가 성내에 들어오지 못하고 대기하고 있다가 진왕(秦王)의 명으로 자결한 곳이다. 이 고사를 계기로 나중에 두우는 장군이 왕에 기피되어 죽게 됨을 뜻하게 되었다.
- 28)본문은 무용입지의(無容入之義)이나, 내용상 앞의 무(無)자가 없어야 한다.
- 29)본문은 비불측(非不測)이나, 내용상 앞의 비(非)자가 없어야 한다.
- 30)본문은 유납(有納)이나, 유납불납(有納不納)으로 된 이본(異本)이 있고, 내용상 후자가 옳다.
- 31)원문의 이 자리는 빈 칸으로 되어 있다. 이본(異本)에는 이 자리에 ‘난(難:비판한다)’자가 있고, 내용상이본(異本)과 같이 ‘영빈스님이 비판한다’란 구절이 있어야 하므로 그에 따른다.
- 32)이 괄호 안의 문단은 앞의 문단이 중복되어 있어 괄호 안에 넣어 표시하였다. 잘못 중복하여 기재된 것으로 보인다.
- 33)흉노 휴도왕의 태자로 전한 무제(武帝) 때에 한에 귀부하여 김성(金姓)을 받았다. 무제의 총애를 받아 고위직을 역임하고, 다음 황제의 보정(輔政)을 유촉받았다.
- 34)본문의 현(懸)은 현(縣)과 같다.
- 35)성신(星神)과 같은 도교의 신들에게 올리는 제사.
- 36)도사들이 쓰고 있는 황관(黃冠)을 빗대어 말한 것이다.
- 37)원문은 자인(自因)이나, 문맥상 통하지 않는다. 자구(自咎)로 된 이본(異本)이 있어 그에 따른다.
- 38)본문은 고족(古族)이나, 이본(異本)은 호족(胡族)이고, 후자가 더 분명하다.
- 39)본문의 추애(秋崖)보다는 이본(異本)의 이애(利崖)가 더 타당하다.
- 1)본문은 불격어사림(不隔於邪林)인데, 내용이나 문맥상 불(不)이 빠져야 할 것이다.
- 2)난대는 전한 무제(武帝) 때의 방사이고, 서복은 진시황 때의 방사이다. 두 사람 모두 불사약을 선전하다 거짓이 탄로나 처형되었다.
- 3)원문은 사속(士俗)이나, 이본(異本)의 토속(土俗)이 옳을 것이다.
- 4)원문은 미문개만고(未聞開萬古)이나, 여기에서 미문(未聞)이 빠져야 뜻이 제대로 통한다. 미문(未聞)은 연문(衍文)일 것이다.
- 5)원문은 식봉(湜封)이나, 이는 전 영역, 또는 봉역(封域)의 대체적인 면적을 뜻하는 제봉(提封)의 오자(誤字)로 보아야 할 것이다.
- 6)장릉(張陵)의 후한 순제(順帝) 때에 천사도(天師道)를 창립한 곳이다.
- 7)곧 모산(茅山)으로 모영(茅盈, 前漢)을 조사(祖師)로 하는 모산파(茅山派) 도교를 지칭한다.
- 8)삼계의 번뇌를 셋으로 나눈, 욕루(慾漏:욕계의 번뇌)ㆍ유루(有漏:색계ㆍ무색계의 번뇌)ㆍ무명루(無明漏:삼계의 癡번뇌)를 가리킨다.
- 536)9)남조의 제(齊), 양(梁) 때 인물. 『진령위업도(眞靈位業圖)』ㆍ『진고(眞誥)』 등의 도서(道書)를 저술하였고, 만년에는 불교에 귀의하여 오계를 받고, 유불도 삼교의 일치합류를 주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