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C_IT_K1398_T_001
-
038_0001_a_01L대당정원속개원석교록(大唐貞元續開元釋敎錄) 상권
원조(圓照) 찬집
사대 조정[四朝]의 분부에 따라서 번역한 경(經)ㆍ논(論) 및 염송법(念誦法)과 아울러 편찬한 소(䟽)ㆍ기(記)ㆍ비문(碑文)ㆍ표(表)ㆍ록(錄)ㆍ문집[集] 등은 모두 343권이다. 아울러 목록도 345권이 있다. 그 가운데 경ㆍ논 및 염송법은 193권이고, 경ㆍ논의 소의(䟽義 :주석)는 64권이며, 정원(貞元) 연간에 새로 모은 고금의 제령(制令)과 비문ㆍ표(表)ㆍ기(記) 등은 86권이다.[아울러 목록이 89권이다.]
162권의 경ㆍ논 및 염송법
현종조(玄宗朝, 712~742) 때 금강지(金剛智) 삼장은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로 증직1)된 스님으로, 시호는 대홍교(大弘敎) 삼장이다. 이 화상이 번역한 경ㆍ논 가운데 이미 목록에 들어간 것은 모두 1부(部) 4권이다.
금강정유가중약출염송법(金剛頂瑜伽中略出念誦法) 4권 모두 81장[紙][이것도 경이라고 한다.]
위의 책은 이미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에 들어가 있으므로 지금 여기 계산한 책 가운데에는 들어 있지 않다.
현종(玄宗) 시대에 번역한 경 가운데 잃어버렸거나 누락되어 고금의 목록에 아직 들어가 있지 아니한 것이 모두 5부 6권이다.
대위력오추슬마명왕경(大威力烏樞瑟摩明王經) 3권 35장
예적금강설신통대만다라니법술령요문(穢跡金剛說神通大滿陁羅尼法術靈要門) 1권 5장
예적금강법금백변법(穢跡金剛法禁百變法) 1권 3장
이상 3부 5권은 모두 북천축국(北天竺國) 삼장 사문(沙門) 아질달산(阿質達霰), 당나라 말로 무능승장(無能勝將)이 번역한 것이다.
보편지장반야바라밀다심경(普遍智藏般若波羅蜜多心經) 1권 2장
위의 책은 개원(開元) 26년(738)에 동천축국(東天竺國) 삼장 사문 법월(法月)이 번역하였고, 사문 이언(利言)이 범어의 번역을 붓으로 받아썼다. 지금 그것이 광택사(光宅寺)에 현존하고 있는데, 한림원[翰林]에서
천자의 조서를 기다리면서 혹 그 경본을 반야경부 용자호질(龍字號帙)2) 가운데 끼워 넣은 것 같다.
금강정경유가수습비로자나삼마지법(金剛頂經瑜伽修習毗盧遮那三摩地法) 1권 15장
천수천안관세음보살대신주본(千手千眼觀世音菩薩大身呪本) 1권 2장
천수천안관자재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심다라니주본(千手千眼觀自在菩薩廣大圓滿無碍大悲心陁羅尼呪本) 1권 3장
부동사자다라니비밀법(不動使者陁羅尼秘密法) 1권 11장
이상 4부 총 4권은 남천축국의 삼장 사문 발일라보리(跋日囉菩提)[당나라말로 번역하면 금강지(金剛智)이다.]가 번역하였고, 사문 지장(智藏)이 붓으로 받아썼다. 지장스님은 후에 호(號)를 따라 이름을 아목거발절라(阿目佉跋折羅)[당나라말로 번역하면 불공금강(不空金剛)이다.]라고 고쳤으며, 단지 불공(不空)이라고만 부르기도 하였다.
지장이 받아쓴 책은 모두 대력(大曆) 연간(766~779)에 작성된 목록에 편입되어 있다. 금강지 삼장은 개원(開元) 29년(741) 8월 15일에 동도(東都:洛陽)의 광복사(廣福寺)에서 세상을 마쳤다. 자세한 것은 행적의 기록[行記]과 탑명(塔銘)에 밝혀져 있다.
위에서 말한 8부의 책은 모두 1책 10권이다.
대종(代宗)조 대력 연간(766~779)에 특진시(特進試) 홍로경(鴻臚卿)3) 대광지불공(大廣智不空) 삼장이 주청(奏請)4)하여 현종(玄宗)ㆍ숙종(肅宗) 및 지금의 폐하 이래로 삼조(三朝)에 걸쳐 번역한 경은 모두 77부 총 101권 및 목록(目錄)만 모아 놓은 1권이 있다.
금강정유가진실대교왕경(金剛頂瑜伽眞實大敎王經) 3권 43장
금강정유가반야이취경(金剛頂瑜伽般若理趣經) 1권 8장
관자재보살수기경(觀自在菩薩授記經) 1권 13장
유가염주경(瑜伽念珠經) 1권 2장
기특불정경(奇特佛頂經)은 3권 68장
관자재보살최승명왕심경(觀自在菩薩最勝明王心經) 1권 22장
이상 6부 총 11권은 함께 제1질(帙)이다.
금강정유가문수사리보살경(金剛頂瑜伽文殊師利菩薩經) 1권 2장
아리다라아로력경(阿唎多羅阿魯力經) 1권 21장
보현행원찬(普賢行願讚) 1권 5장
지장보살문법신찬(地藏菩薩問法身讚) 1권 5장
출생무변문경(出生無邊門經) 1권 10장
대길상천녀경(大吉祥天女經) 1권 7장
저리삼매야경(底哩三昧耶經) 1권 14장
십일면관자재보살경(十一面觀自在菩薩經) 3권 24장
이상 8부 총 10권은 함께 제2질이다.
길상천녀십이명호경(吉祥天女十二名號經) 1권 2장
금강정유가십팔회지귀(金剛頂瑜伽十八會指歸) 1권 9장
금강정유가삼십칠존분별성위법문(金剛頂瑜伽三十七尊分別聖位法門) 1권이며, [서문과 아울러] 13장
보리장소설일자정륜왕경(菩提場所說一字頂輪王經) 5권 78장
보협경(寶篋經) 1권 6장
금강수명다라니경(金剛壽命陁羅尼經) 1권 2장
이상 6부 총 10권은 함께 제3질이다.
대공작명왕경(大孔雀明王經) 3권 50장
대운청우경(大雲請雨經) 2권 14장
우보다라니경(雨寶陁羅尼經) 1권 5장
양우리동녀경(蘘麌利童女經) 1권 4장
도간유경(稻簳喩經) 1권 8장
대보광박루각경(大寶廣愽樓閣經) 3권 45장
이상 6부 총 11권은 제4질이다.
보리장장엄경(菩提場莊嚴經) 1권 22장
제일체질병다라니경(除一切疾病陁羅尼經) 1권 1장
능정일체안다라니경(能淨一切眼陁羅尼經) 1권 2장
시염구아귀다라니경(施焰口餓鬼陁羅尼經) 1권 4장
삼십오불명경(三十五佛名經) 1권 2장
팔대보살만다라경(八大菩薩曼茶羅經) 1권 3장
엽의관자재보살다라니경(葉衣觀自在菩薩陁羅尼經) 1권 8장
가리제모경(訶利帝母經)5) 1권 3장
비사문천왕경(毗沙門天王經) 1권 4장
관자재보살설보현다라니경(觀自在菩薩說普賢陁羅尼經) 1권 7장
이상 10부 총 10권은 제5질이다.
문수문자모품경(文殊問字母品經) 1권 3장[경의 제목에서는 “문수문자모품제십사(文殊問字母品第十四)이다”라고 하였다.]
금강정연화부심염송법(金剛頂蓮花部心念誦法) 1권 33장
금강정유가천수천안관자재염송법(金剛頂瑜伽千手千眼觀自在念誦法) 1권 28장
무량수여래염송의궤(無量壽如來念誦儀軌) 1권 12장
아촉여래염송법(阿閦如來念誦法) 1권 10장
불정존승염송법(佛頂尊勝念誦法) 1권 8장
금강정승초유가보현보살염송법(金剛頂勝初瑜伽普賢菩薩念誦法) 1권 13장
금강왕보살염송법(金剛王菩薩念誦法) 1권 12장
보현금강살타염송법(普賢金剛薩埵念誦法) 1권 12장
금강정유가오비밀수행의궤(金剛頂瑜伽五秘密修行儀軌) 1권 12장
이상 10부 총 10권은 함께 제6질이다.
금강수명염송법(金剛壽命念誦法) 1권 3장
일자정륜왕유가경(一字頂輪王瑜伽經) 1권 6장
일자불정륜왕염송의궤(一字佛頂輪王念誦儀軌) 1권 12장
인왕반야염송법(仁王般若念誦法) 1권 15장
여의륜염송법(如意輪念誦法) 1권 8장
대허공장보살염송법(大虛空藏菩薩念誦法) 1권 5장
유가연화부염송법(瑜伽蓮花部念誦法) 1권 7장
성관자재보살심진언관행의궤(聖觀自在菩薩心眞言觀行儀軌) 1권 6장
관자재다라유가염송법(觀自在多羅瑜伽念誦法) 1권 13장
감로군다리유가염송법(甘露軍吒利瑜伽念誦法) 1권 18장
이상 10부 총 10권은 함께 제7질이다.
화엄입법계품사십이자관문(花嚴入法界品四十二字觀門) 1권 6장
문수찬법신례(文殊讚法身禮) 1권 3장
수보리심계의(受菩提心戒儀) 1권 3장
금강정유가삼십칠존례(金剛頂瑜伽三十七尊禮) 1권 4장
반야이취경석(般若理趣經釋) 2권 32장
대만다라십칠존석(大曼茶羅十七尊釋) 1권 3장
금강정유가호마의(金剛頂瑜伽護摩儀) 1권 8장
도부다라니목(都部陁羅尼目) 1권 4장
대승연생론(大乘緣生論)은 1권 10장
칠구지불모다라니경(七俱胝佛母陁羅尼經) 1권 19장
이상 10부 총 11권은 함께 제8질이다.
대허공장보살소문경(大虛空藏菩薩所問經) 8권 107장
위 1부 8권은 함께 제9질이다.
인왕경(仁王經) 2권 [임금이 쓴 서문이 포함되어 있다.] 35장
밀엄경(密嚴經) 3권 [임금이 쓴 서문이 포함되어 있다.] 51장
인왕염송의궤(仁王念誦儀軌) 1권 19장
인왕경소(仁王經䟽) 3권[
이 소는 두루 아래에 있는 소(䟽)ㆍ기(記)의 책[帙]속에 들어가 있다.]
이상 경전에 대하여 특진시(特進試) 홍로경(鴻臚卿) 삼장사문(三藏沙門)인 대광지불공(大廣智不空) 스님이 아뢰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선사(先師)이신 대홍교(大弘敎) 삼장화상을 받들어 섬겨오기를 24년 동안 하였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그 스님에게서 유가(瑜伽 : 密敎)의 법문을 받아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 후 오천축국[五天]을 돌아다니다가 아직 전수 받지 못한 법문과 여러 경ㆍ논을 찾아 구하여 다시 그것을 거듭 배우고 익혔습니다. 무릇 그곳에서 얻은 범본(梵本) 유가진언(瑜伽眞言)으로 된 경ㆍ논 5백 여부를 얻어서 이를 받들어 국가를 위하여 성인의 말씀을 소상하게 번역하여 널리 복되게 하였습니다.
천보(天寶) 5년(746) 그곳을 떠나 상도(上都)에 이르러 현종(玄宗, 712~755)황제에게 바쳤습니다. 그러자 황제께서 자애로운 명[恩命]을 내려 내전(內殿)에 관정도량(灌頂道場)6)을 건립하여 갖고 온 범어경전을 모두 번역하도록 하셨습니다. 그 후 숙종황제(肅宗皇帝, 756~762)께서 하늘의 뜻을 물려받아 성인의 자리를 이어받게 되자, 특별히 윤지(綸旨)를 받들어 내도량(內道場)에 호마법[護摩]과 관정법(灌頂法)을 건립하였습니다. 다시 나라를 위하여 경전을 번역하여 황제의 중생교화[皇化]를 도왔습니다.
그 동안 여러 번 두 성제(聖帝)의 자애로운 칙령을 받들어 선대 삼장의 모든 범어의 글을 찾아보고, 그 중에 문맥이 끊어졌거나 탈락한 것이 있으면 곧 수정하여 보완하고, 그 중에 번역하지 않은 것은 계속 번역할 수 있도록 주청하였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폐하께옵서는 황운(皇運)을 이어받으시어 크게 함령(含靈 :중생)들을 비호하시고 널리 복전을 여시니, 거듭 해와 달이 밝아지고 그 은혜의 물결은 먼 곳까지 덮었습니다. 또한 법의 비[法雨]는 두루 내려서 천하[四海]의 마음이 편안[宅心]하고 만방(萬方)이 번성[興載]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부처님의 부촉하심이 성군(聖君)에게 있다는 것을 더욱더 알게 되었습니다. 불공(不空)은 두터운 은택을 받아 영화와 은총[榮幸]이 실로 깊습니다. 간절히 스스로 생각해 보니 무엇으로 나라의 은혜를 갚는 길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먼저 선대 황제들는 성제(聖制)7)를 받들어 정밀하고 미묘한 말씀[微言]을 밝히기를 명하셨는데, 다시 폐하의 자애로운 명을 받아 선대제왕들의 유지를 받들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다시 번역본을 보내 크게 중생들을 제도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다시 사시(四時)8)에 간절히 정진한다고 하더라도 그 은혜의 만분의 일도 아직 갚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부지런히 밤낮으로 진언(眞言)과 대승 경전들을 자세히 번역하여 보잘것없는 미미한 효력이 있기를 바라며, 위로는 황도(皇道)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옵니다.
그 동안 번역한 『금강정유가법문(金剛頂瑜伽法門)』은 성불의 빠른 지름길입니다. 그것을 수행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단번에 범부의 경계를 뛰어넘어 피안(彼岸)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그 밖의 부(部)의 진언과 여러 부처님의 방편은 서로가 같지 않지만, 번역한 대승 경전들은 모두가 위로 나라를 도와 재난과 위험을 없애 버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별들의 운행은 어그러지지 않고 바람과 비가 순조롭게 내리고, 부처님의 힘을 우러러 믿게 되어 국가를 돕게 될 것입니다.
찬집(纂集)을 전후해서 번역을 마친 것은 개원
(開元) 연간에서부터 대력(大曆) 6년(771)에 이르기까지 모두 101권 77부와 서문과 목록 1권이 있습니다. 이를 받아쓴 스님과 속인의 이름을 써 넣어 이미 끝냈습니다. 이에 삼가 황제폐하의 탄신[降誕]하신 날에 인연하여 삼가 갖추어 받들어 진상하나이다. 진언의 복을 얻어 길이 성궁(聖躬 : 천자의 몸)을 수호하게 되기를 바라나이다. 대승의 위력은 길이 나라를 편안하게 할 것입니다. 아직 번역하지 못한 범본 경전 가운데 오직 나라의 복을 호지(護持)하고 생령(生靈)들을 윤택하게 할 수 있는 경이 있으면 계속 번역하겠습니다. 이루 헤아리지 못할 지극히 정성스러운 칙지(勅旨 : 천자의 명령)에 의하여 아뢰옵나이다.” 이어 이 경전들을 조정의 안 밖으로 널리 베풀고 모두를 일체경(一切經) 목록에 편입하게 하였다.
대력(大曆) 7년(772) 1월 16일, 사도겸중서령(司徒兼中書令) 신(臣) 자의(子儀)가 선포하였다. 그리고 중서시랑(中書侍郎) 평장사(平章事) 신 원재(元載)가 받들었으며, 중서사인(中書舍人)이 칙지를 받들고, 위와 같은 칙명이 이르자 이를 받들어 봉행하였다. 대력 7년 1월 10일, 시중문하시랑(侍中門下侍郎) 평장사(平章事) 왕진(王縉)이 급사중(給事中) 사부(祠部)에서 대광지불공(大廣智不空) 삼장에게
통지하였다. 첩(牒)에는 위와 같은 칙지를 받들게 하였고, 첩이 이르자 칙지대로 첩(牒)을 실행했다.
대력 7년 2월 9일, 금사(今史) 황보(皇甫)가 통첩을 온전히 하였으니, 주사(主事)는 유의(劉意)이며, 판관(判官)은 원외랑(員外郎) 왕수(王遂)이다. 지난 대력 6년(771) 10월 12일, 특진시(特進試) 홍로경(鴻臚卿) 삼장 사문 대광지불공이 표(表)를 올렸다. 그 달 22일에 이르러 중사(中使) 이헌성(李憲誠)이 칙지를 받들어 선포하였고, 불공 삼장에게 비단과 명주 등 모두 8백 필을 하사하였다. 경을 함께 번역한 열 사람의 대덕(大德)들에게는 각각 비단 30필을 하사하였다. 이때 대덕들은 이튿날에 감사드리는 글을 올렸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문 잠진(潛眞) 등은 삼가 말씀드립니다. 이달 22일에 중사 이헌성(李憲誠)이 이곳에 이르러 받들고 온 성지(聖旨)를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경전을 번역한 열 사람의 대덕들에게 각각 비단 30필을 하사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잠진은 아뢰옵나이다. 가르침을 드리우신 분은 법왕(法王)이시며, 법왕은 삼계(三界)의 왕으로서 자취를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가르침을 실행하신 분은 인주(人主:임금)이시며, 사해의 주인으로서 불교를 유포하고 전하셨습니다. 법왕이 아니었다면 사구(四句)의 글을 들을 길이 없었고, 폐하가 아니었다면 일승(一乘)의 진리를 천명할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보응원성(寶應元聖)이신 문무황제폐하(文武皇帝陛下)께서는 도가 천지와 합하여서 그 은혜가 초목에까지 미쳤습니다. 법륜을 굴려
팔극[極]9)을 부리고 관정(灌頂)10)을 높이 행하시며[稱尊], 자비로운 방편의 문을 멀리까지 미치게 하시니, 곧 부처님 법을 널리 펼치는[弘宣] 지위를 부촉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번역된 『인왕경(仁王經)』ㆍ『허공장보살소문경(虛空藏菩薩所問經)』ㆍ『밀엄경(密嚴經)』 등 80부의 경전은 모두가 원음(圓音 : 부처의 말씀)의 지극한 가르침이고 보배로운 세계[寶界]의 참 말씀[眞詮]입니다. 그러므로 감도 없고 옴도 없어 몸이 바로[卽身] 곧 상주(常住)의 몸이 되며, 멸하지도 아니하고 생하지도 아니하여 모든 부처님이 곧 자기 마음속의 부처입니다. 허공을 가리키며 보배의 창고[庫藏]라고 하여 색상(色相)의 장엄함을 나타냈고, 유가(瑜伽:密敎)의 무궁함을 펼쳐서 진언이 다함이 없음을 알게 하셨습니다. 스스로 재능과 행이 모두 아름답지 못하고 선정(禪定)과 지혜가 서로 융합되지 못한 사람이라면 어떻게 그 오묘한 종지를 발양하고 깊숙한 비밀을 널리 펼 수 있었겠습니까?
대광지불공(大廣智不空) 삼장께서는 두 나라 말에 능통하시고 행이 삼밀(三密)11)에 통하시며, 정만여래(淨滿如來)의 가지(加持)12)의 힘을 얻고, 보응명주(寶應明主 : 文武皇帝)의 널리 보호[弘護]의 인연을 입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이치와 논리가 밝게 드러나고 문구가 환히 밝혀졌습니다. 잠진(潛眞) 등은 영산(靈山)의 미세한 먼지이며 기수(祇樹)13)의 작은 나뭇잎 같은 존재로서 지식과 아는 것이 거칠고 비속하며, 학문과 재주가 용렬하고 천박합니다. 그러나 요행히 하늘의 돌보심을 입어 외람되게 경을 번역하는 자리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성인의 힘을 이어받고 엎드려 가피를 입고 칭찬과 은혜로 엮어 만드는 일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비록 어리석고 눈 먼 소경이라 하더라도 오히려 고맙고 위안됨을 알 것이옵니다. 그런데 하물며 위로 하늘의 자비와 계합하여 조정의 안팎에 선포함을 허락하셨고, 이어 비단을 하사하시어 어리석고 서툰 솜씨를 빛나게 하여 주심에 있어서이겠습니까. 모든 법문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 반갑고 다행한 마음을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머리 위에 받들고 어깨 위에 짊어지는 감격을 이루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영광이 지극합니다. 삼가 중사 이헌성에게 부쳐 감사하다는 내용의 표(表)를 받들어 아뢰옵나이다. 삼가 말씀드렸습니다.
대력 6년 10월 23일, 경전을 번역한 대덕 대흥선사(大興善寺) 상좌(上座) 사문 잠진 등이 표를 올리나이다.”
이에 보응원성 문무황제는 비답[批]을 내려 말하기를 “스님들의 도행은 정밀하고 깊으며, 지혜와 식견은 넓고 멀다. 삼승(三乘)의 깊은 뜻과 천대(千代)에 남긴 책들을 번역하고 유행시켜 집과 나라를 이롭게 하고 제도하였기에 부족하게나마 명을 내렸는데, 번거롭게 그 은혜를 감사하기에 이르렀구나.”라고 하였다. 이때는 대력 6년 10월 12일이었다. 표를 올려 진정하고 요청한 글은 목록에 들어가 있다.
이때 보응원성 문무황제는 그 표를 모두 다 살펴보고, 앞서와 같이 분부하였으며,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서 존중하면서 그 표에 회답하기를 다음과 같이 하였다.
“화상께서는 일찍이 선대조정을 섬기면서 널리 미묘한 교리[妙敎]를 천양하고, 이 경전[貝葉]을 펴서 널리 미혹한 세상[迷津]에 자세하게 보여주었다. 짐(朕)은 큰 계책을 이어받고, 그 슬기로운 종지를 공손히 받들었다. 화상께서는 다시 상세한 번역을 더하여 지금 권축(卷軸)을 끝 마쳐서, 길이 생령들을 제도하였으니, 깊이 기뻐하고 찬탄할 만한 일이다. 그 동안 번역된 경전은 조정의 안팎으로 펴고 일체경의 목록에 넣는 것이 좋겠다.”
이때 대광지불공 삼장은 이미 묵제(墨制:글로 된 制令)의 은총을 입었고 다시 유행시키라는 명이 있자, 뛸 듯이 두려워하며 삼가 표(表)를 올려 사례의 말을 진술하였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사문(沙門) 불공은 말씀드립니다. 중사(中使) 이헌성(李憲誠)이 성지(聖旨)를 받들어 선포하고 새로 번역한 경전의 목록을 보내라 하였습니다. 일도(一道)에 명령하여 경전을 진상하는 표로 이에 회답하였습니다. 그래서 일도(一道)에 칙명을 내려 이를 조정의 안팎에 시행하도록 특별히 명령하시고, 이어 이를 일체경목록에 넣게 하셨습니다. 이 칙지를 공경히 받들고 뛸 듯이 기뻐 기쁨과 은혜를 감당할 길이 없었습니다. 참으로 두렵고 참으로 황송하여 다시 감탄하고 다시 부끄러워하는 바입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폐하께서는 법왕의 부촉을 받들어 사람들 마음속의 소원을 채워 주셨으며, 보현보살의 비밀도장[密印]을 지니시고 천자(天子)의 바른 가르침[正敎]을 유행하게 하셨습니다. 또한 협진(浹辰)14)의 사이에 팔방(八方)에 태양같은 지혜를 밝히셨으며, 짧은 사이에 있어서도 크나큰 혜택을 만물에게 쏟아 부었습니다. 이는 곧 천하의 백성들에게도 매우 다행이온데 하물며 불공(不空)에 있어서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불공이 성전을 번역한 지가 40여 년이나 되었는데, 삼조(三朝) 이래로 편찬하여 엮은 공덕은 그 뜻이 불교를 펴서 전하는데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위로는 왕실을 돕고 아래로는 생령들을 윤택하게 하는 데 있었습니다. 어찌 하루아침에 오래 간직하고 있던 마음의 소원이 가득 채워질 줄이야 생각하였겠습니까? 성은은 광대하여 여러 겁이 지나도 갚기 어렵습니다. 하물며 다시 특별히 아직 번역되지 못한 범어본의 경전을 번역하도록 허락해주시니 기쁨과 슬픔이 갑절로 불어나게 됩니다. 감히 마음껏 힘을 다하여 성지를 받들어 지녀 계속해서 번역하여 진봉(進封)15)하겠습니다. 가슴에 품는 은혜가 지극하여 기쁘고 황송함을 이기지 못하여 삼가 중사 이헌성에 인연하여 표를 받들어 아뢰나이다. 사문 불공은 참으로 기쁘고 참으로 부끄러워 삼가 말씀드렸습니다.
대력(大曆) 7년 1월 27일, 특진시(特進試) 홍로경(鴻臚卿) 삼장 사문 대광지불공은 표를 올리나이다.”
이에 대하여 보응원성 문무황제는 비답(批答)을 내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화상은 오래전에 보리(菩提)를 증득하여 부처님의 지견(知見)에 든 사람이며, 번역된 경ㆍ논은 모두 정미한 종지를 통찰한 글이다. 이에 이 책의 시행을 명하고, 그 지혜의 비춤을 전하여 나라 안에 두루 보여서 중생들을 널리 제도하게 하였다. 아직 자비의 배가 빛나지도 아니하였는데 번거롭게 진사(陳謝)16)를 받기에 이르렀구나.”
표를 올려 감사를 마치자 다시 윤언(綸言 : 임금의 말)을 받들어 『대성문수사리보살불찰공덕장엄경(大聖文殊師利菩薩佛刹功德莊嚴經)』을 번역하였다. 지극정성으로 쉬지 않고 부지런히 번역하여 권축(卷軸)을 만들어 표(表)를 지어 진상하였다.
대성문수사리보살불찰공덕장엄경(大聖文殊師利菩薩佛刹功德莊嚴經) 1부 3권 51장
위 경은 불공(不空)이 먼저 윤지(綸旨)를 받들어 번역하게 하였다.
“황제의 은혜가 간곡하여 모두 이미 갖추어져있었기에, 당음(唐音)과 범어(梵語)를 참조ㆍ비교하여 말과 발음을 상세히 정하고, 년(年)ㆍ월(月)과 장소를 붓으로 받아써 내용을 증명하였으며, 승려와 속인의 이름도 모두 책 안에 기록하였습니다. 문수보살의 사적과 연기(緣起)와 근원의 유래는 처음 발심하였을 때부터 시작하여 정각(正覺)을 이루었을 때까지 정토를 장엄하신 일이 이 경에 모두 실려 있습니다. 모두 부처님의 이론과 바탕, 보살들의 수행문[行門]ㆍ법계의 유정(有情)ㆍ무생(無生)의 실상을 분명하게 표시되었습니다. 그 공덕은 광대하여 다른 경에서는 거의 그 짝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원컨대 이 수승한 인연이 위로 성조(聖祚 : 천자의 자리)를 돕기를 바라옵고, 이를 온 나라 안에 널리 보여서 생명들을 복되게 하여 주시길 엎드려 비나이다.
특별히 바라옵건대 천은(天恩)이 옳다고 생각되시는 곳에 새로 문수원(文殊院)을 설치하시어 큰 절에는 일곱 명의 승려, 작은 절에는 세 명의 승려를 파견하여 이 문수원 안에서 오래도록 나라를 위하여 이 경을 강(講)하여 밝히고 외워 익히게 하여, 빠진 것이 있으면 계속 채워 넣도록 하십시오. 이는 법등(法燈)이 계속 밝혀져 끊어지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 신령한 신(神)과 모든 부류의 사람들이 누군들 기뻐하는 마음이 없겠습니까? 다행히 전륜왕[輪王]이 탄신하신 날에 하늘세계와 인간세계가 함께 기뻐하고 기쁘게 축하하는 날입니다. 이 크나큰 복이 위로 산과 같이 오랜 수명을 더하게 되기를 바라나이다. 원컨대 법의 강물이 성인의 바다에 더해지게 하소서. 삼가 장계(狀啓)17)를 올려 진술하여 진상하며 아뢰옵나이다. 만약 천은으로 이를 윤허하신다면 묵칙(墨勅:붓으로 쓴 勅命)을 내려 주시기 바라나이다.”
이에 조정에서는 칙명으로 대력 8년 10월 13일의 특진시 홍로경 삼장사문 대광지 불공스님의 올린 표에 의거하여 시행토록 하였다. 그 달 그 날에는 삼장화상이 일찍이 도량안에 있었는데 칙명으로 삼장화상에게 비단ㆍ채단ㆍ명주 등 모두 700필을 하사하였고, 함께 경을 번역한 대덕인 잠진(潛眞) 등 열 명의 스님에게는 각각 비단 30필을 하사하여 선물을 충분히 베풀었다.
묘법연화경왕유가관지의궤(妙法蓮花經王瑜伽觀智儀軌)』 1권 25장
위 경은 전에 『인왕경(仁王經)』ㆍ『밀엄경(密嚴經)』과 통틀어 모두 5부, 합계 10권인데, 함께 10질(秩)로 엮었다.
새로 번역한 『인왕호국경(仁王護國經)』은 예전에 영태(永泰) 원년(元年:765)에 장계를 올려 청한 경이며, 『인왕경』을 범협(梵夾:불교의 경문)에 의거하여, 다시 옛 글을 번역하기를 바라서 만들어진 경전이다.
위는 흥선사(興善寺)의 삼장사문 불공(不空)이 주청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그 상주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부처님의 묘지(妙旨)는 그 지혜가 생령들에게 두루 미쳤으며, 『인왕보경(仁王寶經)』은 그 내용이 나라를 수호하는 일을 숭상한 것입니다. 전대에 번역한 것은 아직 논리가 융통되지 못하였고 미묘한 말씀을 윤색(潤色)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이 일은 밝은 성군(聖君)에게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보응원성 문무황제께옵서는 슬기로운 문장으로 천운을 열고, 깊고 밝으신 생각으로 시의 적절하게 펼쳤습니다. 이에 널리 진언(眞言 : 부처의 말씀)을 드러내어 밝히고, 상교(像敎 : 佛敎)를 널리 세상에 드날리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천자의 덕[皇風]을 멀리 떨치게 되었고, 불일(佛日)이 다시 밝아졌습니다. 늘 모든 어리석은 백성[黎元]들을 위하여 부처님 말씀을 소리 내어 읽고 외우게[講誦] 하셨습니다. 그 가운데 『인왕경』은 범협(梵夾)에 의거하여 옛 글을 다시 번역하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패엽(貝葉 : 經典)의 말이 영원히 빠지고 생략된 것이 없게 되었고, 부처님 말씀[金口]이 다시 더욱 소상하게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이어 청하옵건대 승(僧) 회감(懷感)ㆍ비석(飛錫)ㆍ자린(子隣)ㆍ건종(建宗)ㆍ귀성(歸性)ㆍ의숭(義崇)ㆍ도액(道液)ㆍ양분(良賁)ㆍ잠진(潛眞)ㆍ응진(應眞)ㆍ혜령(慧靈)ㆍ법숭(法崇)ㆍ초오(超悟)ㆍ혜정(慧靜)ㆍ원적(圓寂)ㆍ도휴(道休) 등을 내도량[內道場]에서 함께 번역하게 하옵소서. 복덕으로 덕 있는 임금이 다스리는 세상[聖代]을 돕고 은택이 생령들에게 미치게 하여 원수와 도둑이 길이 사라지고 온 나라 안이 더욱 화목[允穆]해져서 이것이 오랫동안[曠劫] 전해지게 한다면 그것으로 인하여 구호 받음이 진실로 깊을 것입니다.”
이에 중서문하(中書門下)에서는 사부(祠部)에 통첩하였다. 칙명을 받들어 마땅히 통첩이 이르는 대로 옛 통첩에 준하여 칙명을 시행하게 하라고 하였다. 영태(永泰) 원년(元年:765) 4월 2일자 통첩은 다음과 같다.
“중서시랑(中書侍郎) 동(同) 평장사(平章事) 두홍점(杜鴻漸), 중서시랑 동 평장사 원재(元載), 황문시랑(黃門侍郎) 동 평장사 왕진(王縉), 검교시중(檢校侍中) 이사(李使), 검교(檢校) 우복야(右僕射) 평장사사(平章事使) 검교(檢挍), 좌복야(左僕射) 평장사사(平章事使) 중서령(中書令) 곽자의(郭子儀)가 상서사부(尙書祠部)에 통첩한다. ‘『인왕경』은 범협에 의거하여 옛 문장을 흥선사(興善寺)의 사문 불공이 다시 번역하기 바란다.’고 하였다.”
통첩을 받든 중서문하에서는 칙명의 통첩이 위와 같았다. 그러므로 통첩이 이르자 칙명대로 예전 통첩에 준하여 영태(永泰) 원년 4월 4일에 사관(史官) 장제(張濟)가 통첩하게 하고, 주사(主事) 양헌(楊獻)과 낭중(郎中) 최의(崔漪)가 은지(恩旨)를 널리 반포하였다. 이에 경성(京城)의 의학(義學) 대덕인 양분(良賁) 등과 한림학사(翰林學士) 상구(常裘) 등에게 명하여 대명궁(大明宮) 남쪽 도원(桃園)에서 『인왕경』을 소상하게 번역하게 하고 아울러 『밀엄경(密嚴經)』 등을 교정하게 하였다. 4월 15일에 이르러 번역이 끝나니 이를 진상하였다. 이에 성군의 자비로 서문을 지어 그 제(題)한 글이 경의 첫머리에 있다. 이 경은 내궁에서만 펼쳐 열람되었고 아직 중외에는 선포되지 아니하였다.
이때 경성(京城)의 대덕들은 감로수가 내리기를 간절히 생각하길 목마른 사람이 마실 것을 생각하듯 하여 표를 지어 위에 진술하였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사문 승여(乘如) 등은 말씀드립니다. 승여 등이 듣기로는 해와 달이 우주[六合]를 운행하면 그 비춤을 구하는 것은 모든 생령이며, 비와 이슬이 하늘[九霄]에서 드리워지면 적셔 주기를 바라는 것은 초목이라 하였습니다. 이른바 하늘과 땅이 덮어 주고 실어주는 데는 차별이 없고 길러 주고 키워 주는 데는 사사로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기도 긴 바람에 안일할 수 있고 개구리와 파리도 큰 바다에 놀 수 있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보응원성 문무황제 폐하께옵서는 경사로움을 진겁(塵劫 : 무수히 긴 시간)에 이었고, 믿음을 하사(河沙 : 무수히 많은 수)세계에 심어 위엄이 마구니의 세계를 거두어 드리시고, 명성이 불찰(佛刹 : 극락 정토)에 유포되었습니다. 보위(寶位)의 중하신 자리에서 보게(寶偈 : 부처님 말씀)의 미묘함을 숭상하시고, 금륜(金輪)18)의 존귀한 자리에서 금구(金口 : 부처님)의 가르침을 더 높게 하셨습니다. 백왕천제(百王千帝)가 있다 하더라도 어찌 같은 해에 그 덕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승여(乘如) 등은 요행히 창성한 시운을 만나서 현문(玄門)을 두드려 몸담게 되었습니다. 항상 생각하기를 부처님의 게송을 노래하고 외움(諷誦)으로써 황제의 은택에 보답하고자 하였습니다.
엎드려 듣자옵건대, 요즘 은지(恩旨)를 내려 불공(不空)삼장 및 의학(義學) 사문들에게 청하시어 『인왕반야바라밀다경(仁王般若波羅密多經)』을 다시 번역하게 하여, 교리가 아울러 드러나고 성상(性相)이 두루 완만하여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경이 용궁(龍宮) 속에 봉함(封緘)되어 아직 녹원정사(鹿苑精舍)에는 반포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승(僧) 등은 죽음을 무릅쓰고 감히 청하고 아뢰옵나이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하늘의 자비로써 이 법보를 보여 주시고 아울러 경에 근거하여 100명의 법사를 초청하여 백고좌(百高座)를 설치하고 함께 문구의 맛을 베풀어 요망한 기운을 없애고자 하나이다. 저의 정성은 그러하옵나이다. 오직 성지(聖旨)로 재가하여 주시기 바라옵나이다. 정성에 넘쳐 간절히 목마른 심정을 이루 다할 수 없어서 삼가 우은대문(右銀臺門 : 궁의 대문)을 찾아가 표를 받들어 진정하고 청하며 아뢰옵나이다. 천자의 위엄을 가볍게 여기고 모독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엎드려 깊이 몸을 떨며 분수에 넘치는 말씀을 삼가 드렸습니다.
영태(永泰) 원년(元年) 8월 8일 대안국사(大安國寺) 상좌(上座) 임단대덕(臨壇大德) 승여 등은 표를 올리나이다.”
이에 대하여 보응원성 문무황제가 비답을 내렸다.
“『인왕진경(仁王眞經)』은 이치가 정밀하고 내용이 깊숙하여 그 교화가 현겁(賢劫)에 유포되어 창생(蒼生)에게 복과 이익이 되었고, 스님들은 이 경이 널리 퍼져 국토의 안녕을 돕는 것을 원하였다. 개강(開講)을 청한 일은 적당한 때에 은지(恩旨)가 있을 것이다. 23일을 취하여 자성사(資聖寺)와 서명사(西明寺) 등 두 절에 함께 백고좌를 설치하고 100명의 법사들을 초청하여 『인왕경』을 강의하게 하라. 아울러 100명의 대덕이 『밀엄경』 등을 돌려가면서 읽게 하고, 향화(香花)ㆍ음식ㆍ고악(鼓樂)ㆍ현가(絃歌) 등은 모두 유사(有司)에게서 내보낼 것이니 빠지고 모자라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
당시 시절이 가을비가 내리는 때에 속하여 자욱한 장마 비가 그치지 아니하였다. 이 일을 맡은 관청에서 주청하여 다시 날짜를 연기할 것을 청하였다. 그리하여 주청을 받들어 두 절의 백고좌는 먼저 23일에 경을 봉영[迎]하는 것을 멈추게 하고, 마땅히 장마로 날짜를 옮겨 26일에 이르러 경을 봉영하여 개강하였다. 그 동안 여러 소관 관청에서 제공한 물품 등은 사람에게 알려 계산해서 모아 고친 날짜에 준하여 절에 갖고 오게 하였다.
영태 원년 8월 22일에 좌감문위장군(左監門衛將軍) 지성사(知省事) 유청담(劉淸潭)이 기일을 고친 것을 선포하였는데, 그날 아침이 되자 하늘의 비가 아직 개이지 아니하여 은지(恩旨)로 다시 9월 1일로 연기되었다. 이날 양가(兩街)의 대덕들은 번(幡)과 꽃과 당(幢)으로 덮인 보배수레를 장엄하여 청결하게 준비하고 태상사(太常司)에서는 음악을 제공하고, 이원(梨園:宮內의 樂工들의 居所)과 장내(仗內:內宮儀仗隊) 및 두 교방(敎妨:左街ㆍ右街의 僧團)의 스님들이 은대문(銀臺門:奏狀을 접수하는 곳)에 이르러 온갖 놀이와 주악이 대단하였다. 이때 관군용사(觀軍容使 : 관직이름)와 처치신책군병마사(處置神策軍兵馬事)를 겸한 개부의동삼사(開府義同三司)와 아울러 좌감문위대장군(左監門衛大將軍)과 지내시성사(知內侍省事)와 내비룡구(內飛龍廐)ㆍ궁전(弓箭) 등의 사도들과 상주국(上柱國) 빙익군(憑翊郡) 개국공(開國公) 어조은(魚朝恩)이 여섯 군사(軍使)와 더불어 천룡팔부와 귀신의 모습을 하고 새 경을 호송하여 대내(大內)에서 나왔다.
그 경이 마침 대내에서 나올 무렵 채색구름이 공중에 떠올라 찬란하고 아름답고 기이한 서상이 밝게 나타났다. 사시(巳時)ㆍ오시(午時)가 되어 두 절에서 경을 여니 만백성들이 기쁜 마음이 되었고 상서로운 구름은 비로소 자취를 감추었다. 승려와 속인들은 하늘을 우러러보며 예사롭지 않은 경사를 보게 되었다.
이에 사문 불공이 표를 올려 천자의 은덕에 감사를 드리며 말하였다.
“사문 불공은 말씀드립니다. 불공은 전대의 수행자[修者]보다 도가 모자라고, 지난날의 현철한 스님에 비하여 학문이 모자라는데도, 외람되게 폐하의 부름[綸詔]을 받아 진경(眞經)을 번역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봄날에 얼음을 밟는 것과도 같고 마치 계곡의 맑은 물[泉谷]에 임한 것 같았습니다. 엎드려 생각하오니 폐하께서는 혜일(慧日 : 밝은 지혜)을 펼쳐서 자비의 구름을 그윽이 내리시고, 슬기로운 생각[睿思]을 바람같이 일으키어 용장옥윤(龍章玉潤)19)의 문장으로 몸소 서문을 지으시어 대천세계를 밝게 빛내셨습니다. 법우(法雨)가 구천(九天)에 흐르게 하고 백좌(百座)에 승당(勝幢)을 세우시니, 그 위의용지(威儀容止)20)가 완연히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영취산에서 내려오실 때 선비들과 서민들이 나란히 가득 모여듦과 같으며, 파사국(波斯國:페르샤) 사람들이 왕사성(王舍城)에 예배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경사스런 구름이 서상을 드리우고 맑은 기운이 공중에 떠올라서, 족히 크게 폐하의 태평성대를 나타내어 스스로 가없는 도움을 주셨습니다. 머리 위에 받들고 등에 지는 지극한 은덕을 이기지 못하여 삼가 표를 받들어 경축의 말씀을 진술하여 아뢰옵나이다. 사문 불공은 참으로 환희에 넘치며 삼가 말씀드리나이다.
영태(永泰) 원년 9월 2일 대흥선사(大興善寺) 사문 불공은 표를 올리나이다.”
이에 대하여 보응원성 문무황제는 회답하였다.
“화상께서는 멀리 연궁(蓮宮)에서 친히 패엽경(貝葉經)을 봉함하고 현묘한 가르침을 널리 펴서 창생들을 제도하여 이롭게 하였다. 번역이 성취되자 천인(天人)이 함께 모이고, 삼추(三秋)21)의 화창한 빛이 밝고 오색의 상서로운 구름이 피어나니, 참 진리[眞乘]를 드러내어 밝혀서 널리 퍼지게 하고 미묘한 이치와 계합하게 하였다. 얼마 전 지도와 깨우침에 인연하여 일찍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맺었는데, 이 정성스러운 마음이 감응(感應)하는 기적을 보게 되니 더욱 머리 위에 받들고 공경하는 마음이 깊어집니다.”
이때 좌우의 여섯 군사(軍使)들도 이 경사스러운 구름을 목도하고 역시 표를 진술하여 받들어 하례[奉賀]하였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신(臣) 선지(仙智) 등은 말씀드립니다. 어제 새로 번역한 『인왕호국반야바라밀다경』을 삼가 영접함에 경사스러운 구름이 감응해서 나타난 일이 있었습니다. 그 서기는 오색을 나타냈고 그 채색은 온 하늘에 흩어졌습니다. 혜일(慧日)이22) 둘러싸여 더욱 선명하였으며 상서로운 바람이 일어나서 성스러움을 표시하였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폐하께옵서는 대도(大道)로 만물의 의지처가 되게 하고 지극한 덕으로 만방에 임하시니, 그 정성이 신령에 감응하여 여기에 내려온 것입니다. 신 등은 분수에 넘치게 시위(侍衛)의 직책을 맡아 오랫동안 순조롭게 근무하는[淳風]하는 은택을 입다가, 몸소 이 정상(禎祥)을 보고 그 경사스럽고 기쁜 일[慶幸]을 이길 길이 없습니다. 삼가 우은대문(右銀臺門)에 나아가 표를 받들어 축하의 말씀을 진술하며 아뢰옵나이다. 신 선지(仙智) 등은 참으로 황공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또 조아리며 삼가 말씀드렸습니다. 영태(永泰) 원년 9월 2일 특진(特進) 우룡무군(右龍武軍) 대장군 지군사(知軍事) 상주국(上柱國) 서국공(徐國公) 신 유선지(劉仙智) 등은 표를 올리나이다.”
이에 대하여 보응원성 문무황제는 회답하였다.
“불이(不二)의 문은 일찍 전해져 비장(秘藏)되었는데 다시 그 뜻을 베푸니 그 말이 널리 유포되기를 바라게 되었다. 장차 패엽경의 글을 널리 베풀어 연궁(蓮宮)의 모임을 열자, 하늘에 서색이 떠오르고 해는 아름답고 경사스러운 구름이 일어났다. 신통한 현상을 나타내고, 그 길한 징조[瑞應]를 들어냄은 아마도 평화의 조짐을 나타내는 것일 것이다. 경하하고 위안이 되는 마음은 같으며 축하하는 마음은 알고 있다.”
이때 초하룻날부터 보름날까지 두 절에서는 경을 강의하고 하루 두 때 경문을 외면서 걷는 일[行道]을 하였다. 음식ㆍ차[茶]ㆍ약은 모두 소관 관청에서 나왔으며, 육률(六律)23)과 오음(五音)24)이 밤낮으로 끊어지지 아니하였다. 16일에 이르러 서명사(西明寺)에서 재(齋)를 산회하였다. 이때 고악현가(鼓樂絃歌)와 온갖 놀이가 하루 종일 계속되었다.
서명사에서 강론을 마치고 표를 받들어 하례[奉賀]의 뜻을 진술하였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서명사의 상좌 사문 회감(懷感) 등은 말씀드립니다. 특별히 은명을 받들고 백좌(百座)의 강론을 열어 『인왕호국반야바라밀다경』을 강의하여, 오늘로서 경을 두루 한 차례 강의하고 재를 마련하여 기쁘게 행사를 끝냈습니다. 이곳에 모인 모든 생령들은 손뼉치고 뛸 듯한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폐하께옵서는 천지를 다시 창조하시어 밝으심이 일월과 같사옵니다. 옷을 입는 여가에도 거듭 진경을 번역하시니, 황제의 마음과 부처님의 마음이 함께 한 진리로 돌아갔고, 당나라 말과 범어가 다른 지방 말로 차이가 없어졌습니다. 꽃을 꿴 것 같은 게송을 갖추어 듣게 되고, 등불을 전하는 스님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금승(金繩:帝王의 宮殿)의 경계에 미륵불이 하생하고, 옥경(王京 : 皇都) 가운데 전륜왕(轉輪王)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가을 하늘 아름다운 경관 속에 곡식을 심고 거두는 일도 곧 이루어지고, 오색구름이 공중에 떠오르니, 요망한 기운은 반드시 다 없어질 것입니다.
우리 황제는 지극한 성인이시고 부처님의 힘은 지극히 자비로우시니, 법은 항하사세계를 적셔 주시어 천하는 매우 행복하나이다. 저희 회감 등은 분수에 넘치게 부처님이 설법한 곳[祇樹]에 사니, 가슴이 뛰는 기쁨이 끝이 없습니다. 머리를 조아려 향을 사르나 어느 섬돌에 올라가 은혜를 보답하겠습니까? 그 공덕을 헤아려 별장(別狀)에 봉해서 진상하나이다.
삼가 표를 받들고 감사의 말씀을 진술하면서 아뢰옵나이다. 참으로 반갑고 참으로 기뻐서 삼가 말씀드렸습니다. 영태 원년 9월 15일 서명사(西明寺) 상좌 사문 회감 등이 표를 진상하나이다.”
이에 대하여 보응원성 문무황제는 비답을 내려 말하였다.
“스님들은 진경을 펴고 진술하여 미묘한 뜻을 널리 드려내었다. 어진 목숨들을 더욱 번성하게 하고 생령들을 구호하였다. 법회가 이미 끝났다니 마땅히 함께 경하하라.”
당시 복고회은(僕固懷恩)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천은(天恩)을 저버리고 멀리 영무(靈武)에서 오랑캐들을 모아 합쳐서, 경양(涇陽)지방을 근거로 국토를 침탈하고 능멸하였다. 이에 서명사(西明寺) 백좌(百座)의 대덕법사들이 함께 자성사[資聖]로 가서 칙명을 받들었다. 먼저 서명사의 백고좌의 법사 대덕들이 나란히 자성사의 불전을 찾아가 나라를 위하여 경을 전달하면서 걷는 일을 하였다. 그 자성사의 백고좌 법사 가운데서 양분(良賁) 등 50좌의 법사들이 전에 한 그대로 『인왕반야호국경』과 『밀엄경』 등을 강설하여 두루 창생들에게 미치게 하였다. 그 때 경성(京城)의 여러 사찰과 도관의 승려들과 도사 등은 모두 하루 두 때에 각기 있는 곳에서 경을 읽으면서 걷는 일을 하였다. 이어 삼강(三綱)에 명령하여 일을 마친 승려들은 오로지 경을 점검하고 교열[檢校]하는 일만을 맡아보게 하였다. 이는 오로지 수행에 힘쓰게 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지 소홀히 하고 태만히 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원종(李元琮)ㆍ가명관(賈明觀) 등이 전담하여 구당(句當:담당자)을 맡아보았다. 그리하여 영태 원년 9월 17일에 고품(高品)ㆍ이희일(李希逸)이 이를 선포하였다. 그 때 양가(兩街)의 대덕들과 백고좌의 법사들은 칙명에 따라 모두 자성사에 모여서 두 때에 강론하고 읊고 두 번 법좌에 올라 경을 읽으면서 걷는 일을 하였다. 그것은 오시(午時)와 해가 저물 때의 두 때이다. 이때 음악을 올려 베푼 것은 처음과 다르지 아니하였고, 밤이 된 후에는 모두가 큰 강당 안에 모여서 대중들이 다 함께 마하반야바라밀다를 칭념(稱念)하면서 나라를 위하고 집안을 위하여 근심과 두려움이 없게 되기를 기원하였다. 경성의 사찰과 도관에서의 전경ㆍ염송도 역시 그러하였다.
당시 제사관내하중(制使關內河中) 부원수(副元帥) 사도(司徒) 겸(兼) 중서령(中書令) 상주국(上柱國) 분양군왕(汾陽郡王) 곽자의(郭子儀)가 장절(杖節 : 命令書)을 가지고 출병하였다. 친히 군대의 규율을 총괄하여 황제가 사는 땅을 출발하여 저 경양(涇陽) 땅에 이르렀다. 이때 그는 황제의 위엄에 기대고 그 위력을 믿었으며, 또 이 경의 힘에 힘입었다. 양군이 교대로 진(陣)을 벌리고 멀리서 서로 바라보았는데, 징과 북 소리가 일어나자 칼과 창이 눈발처럼 날렸다. 이때 분양왕은 홀로 말을 타고 곧바로 앞으로 나가 우뚝 군대 앞에 서서 감격 어리게 “회은(懷恩)아, 물러가라”는 한마디 말을 하였다. 그러자 서융(西戎)과 북적(北狄)이 각자 서로 공격하여 열흘 사이에 왕국이 크게 안정되었다. 이로써 『인왕호국반야진경』은 성심(聖心)과 불심(佛心)으로 백성을 자식처럼 기르며 그 뜻은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게 된 후에 군대를 거두어들여 규율을 정돈하여 군사의 위세를 떨치면서 서울로 돌아왔다. 이에 친히 황제의 얼굴을 대하고 특별한 하사의 선물을 받았다.
황제는 자성사의 백고좌도량에 칙명을 내려 윤 10월 22일을 취해서 무차재(無遮齋)를 마련하여 이로써 경하하여 마치게 하였다. 이날 절 남쪽 문밖에 도량을 가설하니, 정일방(正一坊)에 동서 두 거리가 다 가득하였다. 빛나는 천막이 구름같이 펼쳐지고 깃발과 꽃이 하늘에 가득하고 아름다웠다. 부처님의 존용(尊容 : 얼굴)은 환연히 빛나서 그 광명이 사람들이 사는 마을을 비추었다. 스님들의 공양이 끝나자 육악(六樂)이 다투어 베풀어지고 온갖 놀이로 장소를 가득히 메웠으며 하루해가 다하도록 노래와 나팔을 불었다. 경성의 대덕들에게는 각각 30냥을 선물로 주었고, 불공삼장(不空三藏)에게는 9백 필의 명주ㆍ무명ㆍ비단ㆍ채단을 하사하였으며, 시자와 소승(小僧)들에게는 각각 50필의 옷감을 하사하였다.
또한 특별한 은지를 내려 자성사의 강당에 이름을 하사하여 ‘영태선법지당(永泰善法之堂)’이라 부르게 하였으니, 이는 곧 오랜 세월동안 영원히 전해질 고사(故事)다. 국경지대의 오랑캐가 경내로 침입하였을 때부터 밤으로 승도들을 모아 이 강당 안에서 함께 “마하반야바라밀다”를 염송케 하였더니 몇 달이 차지 아니하여 과연 태평한 세월을 얻게 된 것이다. 이는 곧 성인의 힘과 경의 위력으로 이 복된 감응을 얻게 된 것이다. 경을 번역한 백고좌의 스님에게는 선물로 진귀한 재물이 하사되었다. 불법이 동방에 흘러 들어온 이래 이날보다 더 나은 날은 없었다. 11월 1일에 이르자 은지(恩旨)가 뒤이어 이르렀다. 즉 불공삼장화상에게 칙서를 내려 이르렀다.
“고(故) 금강삼장(金剛三藏)은 하늘에서 받은 자품이 빼어나고 특별하였으며, 기품이 깊고 온화[冲和]하고, 지식은 사생(四生)을 통찰(洞察)하였으며, 마음은 육도(六度)25)에 근거하였다. 이에 멀리 서역에서 석장(錫杖)을 짚고 동쪽 땅에 오셔서 맑고 깨끗한 행실[梵行]은 몸에 두루 갖추었고 자비한 마음으로 중생들을 제도하였다. 깨달음의 꽃은 밖을 비추었고 지혜의 횃불은 안을 밝혀서 미혹한 중생들을 인도하고, 원적(圓寂)한 경지를 증통(證通)하여 은밀하게 법인(法印)을 전하고 열반을 시은(示隱)하셨다. 의발만 공연히 남아 있고 목소리와 모습은 길이 저 세상으로 가셨다. 그러나 그 가르침은 능히 후세에 드리워질 수 있다.”
예법[禮]에는 종말을 장식하는 제도가 있다. 마땅히 아름다운 이름을 표창하여, 영광된 추증과 일치하게 하여야 할 것이다.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의 직위를 추증하는 것이 좋겠다.”라 하고, 이어 “대홍교삼장(大弘敎三藏)”이란 법호를 하사하였다. 같은 날 또 큰 은지가 내려 다시 칙서가 불공법사에서 내려졌는데, 그 글은 다음과 같다.
“스님은 연궁(蓮宮)의 석종(釋種)이요, 향계(香界)의 도사(導師)로다. 성품은 진여로 표시되고, 학문은 비장(秘藏)에 정통하였다. 감원(紺園:寺刹)의 미묘한 뜻을 이어받고, 사의(四依)26)를 개시(開示)하였고, 금구(金口)의 미묘한 말씀을 번역하여 육취(六趣 : 六道)의 진량(津梁 : 나루터의 다리)을 만들었다. 몸에 불교의 경문[梵夾]을 지니고 멀리 유사(流沙)를 건너와서, 전한 등불은 더욱 밝았고 감로법(甘露法)은 깊게 중생들을 적셔 주었다. 불난 집[火宅:欲界]에 자비의 구름을 흩뿌렸고, 어두운 길에 지혜의 태양을 드높였다.
얼마 전에 몸소 수승한 인과의 넓은 뜻과 방편을 물어보고 영구히 의망(疑網 : 疑心)을 끊게 되어 나의 지혜의 싹을 틔우게 되었다. 비록 진세(塵世 : 俗世)를 벗어난 마음이라, 모두들 명예와 벼슬을 사양한다 하였다. 그렇지만 나라에서 포상하고 숭앙하는 규정은 현철한 사람을 정표하는 법이다. 그렇게 하여 아름다운 명에 응하게 하고 이로써 조정의 법과 일치하게 하는 것이니 ‘특진시(特進試) 홍로경(鴻臚卿)’의 벼슬을 내리는 것이 좋겠다.”
이어 ‘대광지불공삼장(大廣智不空三藏)’이란 법호를 하사하였다. 이에 대하여 불공삼장은 말하였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어머니가 자식으로 인해서 귀한 신분이 되는 것은 속가 예법의 불변의 규칙이나, 스승으로 인해서 제자가 명예를 얻는 일은 불문(佛門)에서는 거의 없는 일입니다. 공손히 영광된 명을 받고 기쁨과 두려운 감회로
머리 위에 받들고 두려워하며 표(表)를 올려 감사를 표시합니다.”
그 표는 다음과 같다.
“삼장사문 불공은 말씀드립니다. 이달 초하룻날 지으신 석명[錫]을 받들어 보니, 돌아가신 대화상 금강삼장에게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의 벼슬을 하사하시고, 이어 ‘대홍교삼장(大弘敎三藏)’이란 법호를 하사하셨으며, 나 불공에게는 ‘특진시(特進試) 홍로경(鴻臚卿)’이란 벼슬과 이어 ‘대광지불공삼장’이란 법호를 하사하셨습니다. 하늘에서 비가 한번 내리면 그 흐름이 뿌리와 잎을 적셔 주었고, 둥근 호광[圓毫]이 아름다움을 발하면 비춤이 유명(幽明 : 저승과 이승)의 세계에 미쳤습니다. 머리 위로 받드니 어쩔 줄을 몰라 슬픔과 기쁨이 교차합니다. 불공은 참으로 환희에 넘치며 처연하고 또 두렵습니다.
불공은 들었습니다. 부처님의 십호(十號)는 덕을 표시하는 특별한 호칭이며, 조정의 구경(九卿)27)은
코끼리가 강물을 건너가는 무거운 위치라 하였습니다. 돌아가신 대화상께서는 불법의 전통을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 전하는
일에 흡족하시었으니, 참으로 이것으로 그 남기신 유교와 공적을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불공의 문도는 선사의 뒤를 잇기만 했는데, 부끄럽고 헛되게 함께 크나 큰 사사로운 은혜를 입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마치 연(燕)나라의 돌이 형산의 옥과 뒤섞여 빛나는 것과 같고, 제(齊)나라의 대나무 장대로 함부로 상강의 퉁소를 불어대는 것과도 같습니다. 영예가 살아있는 사람과 돌아가신 분에게 아울러 미쳤으며, 총애가 스승과 제자에게 함께 미쳤습니다. 다만 폐하의 명령을 받들고 두렵고 놀라서 우러러보고 말씀드리려 해도 얼굴이 붉어져 부끄럽습니다. 하물며 출가하여 삭발하고 먹물 옷 입은[落彩] 스님은 본래 영욕을 잊고 깨끗한 정성으로 나라에 보답하는 것이 스님된 사람의 일반적인 법규입니다.
폐하께옵서는 널리 금륜(金輪)을 움직이시어, 간곡히 와력(瓦礫)28)을 거두어 궁중의 금원(禁苑:御苑)에서 편안하게 선(禪)을 하게 하시고, 포숭(褒崇)29)하여 특별하게 예우를 하셨습니다. 비록 산을 업을 만한 힘은 없지만 가까운 손님에게 발자취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높은 사례[高謝]는 법의 흐름을 기울게 하고, 욕심이 적은 맑은 자취에 오점(汚點)을 찍게 되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세 번 사양하는 말을 주청하여 구중궁궐을 번거롭게 하였습니다. 이는 저의 간곡한 정성을 깊이 비추어 보시길 바란 것이지, 어찌 확고한 불발의 의지로 말씀드린 것이겠습니까?
양이 모는 수레에 탄 어린아이를 부끄럽게도 ‘광지(廣智)’라 하시니 그저 망연하옵고, 사슴이 노니는 정원에 사는 낮은 재질을 지닌 사람을 ‘홍로경(鴻臚卿)’에 임명하니 매우 부끄럽습니다. 감격하여 머리 위에 받드는 지극함을 이기지 못하여 삼가 표를 받들어 감사의 말씀을 진술하면서 아뢰옵나이다. 사문 불공은 참으로 기쁘고 참으로 황공하옵니다. 삼가 말씀드렸습니다. 영태 원년 11월 5일 특진시 홍로경 대광지불공삼장 대흥선사 사문 불공이 표를 진상하나이다.”
이에 대하여 보응원성 문무황제는 회답하였다.
“화상께서는 도를 쌍림(悉林)30)에서 은밀하게 받았고, 공부는 바른 깨달음[正覺]을 뛰어넘었다. 멀리 천축국에서 오셔서 부처님 말씀[眞言]을 포교하였다. 그래서 얼마 전에 귀의하여 친히 부처님의 부촉을 받을 수 있었다. 포숭(褒崇)의 법은 예의로서 벼슬을 내리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수(印綬)31)의 영예를 더하게 하고, 스승과 제자 간의 공경을 중히 여기는 것이다. 아울러 우러러 받들어 증직(贈職)을 내려고 추증하여 영광의 뜻이 표명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인왕진경(仁王眞經)』이 번역되자 바로 그것을 목록에 편입하여 주기를 청하였고, 이에 다시 『문수불찰공덕장엄경(文殊佛刹功德莊嚴經)』을 진상하게 되었다. 그가 죽은 해에 이르기까지 번역한 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금강정승초유가경중약출대락금강살타염송의궤(金剛頂勝初瑜伽經中略出大樂金剛薩埵念誦儀軌) 1권 11장
대락금강살타수행성취의궤(大樂金剛薩埵修行成就儀軌) 1권 15장
대약차녀환희모병애자성취법(大藥叉女歡喜母幷愛子成就法) 1권 12장
보편광명대수구다라니경(普遍光明大隨求陁羅尼經) 2권 32장
금강정초승삼계경설문수오자진언승상(金剛頂超勝三界經說文殊五字眞言勝相) 1권 3장
오자다라니송(五字陁羅尼頌) 1권 8장
성염만덕가위노왕입성대신험염송법(聖閻曼德迦威怒王立成大神驗念誦法) 1권 8장
문수사리보살근본대교왕금시조왕품(文殊師利菩薩根本大敎王金翅鳥王品) 1권 1장
불공견삭비로자나불대관정광진언(不空羂索毗盧遮那佛大灌頂光眞言) 1권 2장
이상 9부 모두 10권의 경ㆍ법은 함께 제11책으로 엮었다.
성가니분노금강동자보살성취의궤경(聖迦抳忿怒金剛童子菩薩成就儀軌經) 3권 48장
대위노오추삽마성취의궤(大威怒烏蒭澁摩32)成就儀軌) 1권 10장
불설마리지천경(佛說摩利支天33)經) 1권 4장
금강정경일자정륜왕성불의궤(金剛頂經一字頂輪王成佛儀軌) 1권 8장
불위우진왕설왕법정논경(佛爲優塡王說王法政論經) 1권 9장
대방광여래장경(大方廣如來藏經) 1권 18장
불설일계존다라니경(佛說一髻尊陁羅尼經) 1권 14장
속질입험마혜수라천설가루라아미사법(速疾立驗摩醯首羅天說迦婁羅34)阿尾奢35)法) 1권 6장
이상 8부 경ㆍ법 모두 10권은 함께 제12질이다.
대일경략섭염송수행법(大日經略攝念誦隨行法) 1권[또한 『오지략염송용행법(五支略念誦容行法)』이라고도 한다.] 2장
대비로자나성불신변가지경략시칠지염송수행법(大毗盧遮那成佛神變加持經略示七支念誦隨行法) 1권 3장
목환경(木槵經) 1권 1장
문수오자염송법(文殊五字念誦法) 1권[제명에는 “『금강정경유가문수사리보살의궤공양법(金剛頂經瑜伽文殊師利菩薩儀軌供養法)』이라”고 하였다.]
7장인데, 범자(梵字)를 포함하면 14장이다.
만수실리동자보살오자유가법(曼殊室利童子菩薩五字瑜伽法) 1권 및 범자(梵字) 2장
금강정항삼세대의궤(金剛頂降三世大儀軌) 1권[또한 『관자재심진언일체여래연화대만다라품(觀自在心眞言一切如來蓮花大曼茶羅品)』이라고도 한다.] 4장
문수사리보살급제선소설길흉시일선악수요경(文殊師利菩薩及諸仙所說吉凶時日善惡宿曜經) 2권[상권은 전에 번역되었고, 하권은 나중에 번역되었다. 서문이 있고 모두 40장이다.]
『금강정경관자재왕여래수행법(金剛頂經觀自在王如來修行法)』 1권 6장
『금강정유가중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론(金剛頂瑜伽中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論)』 1권[또한 『유가총지교문설보리심관행수지의(瑜伽摠持敎門說菩提心觀行修持儀)』라고도 한다.] 7장
이상 9부 경ㆍ논ㆍ법 모두 10권은 함께 제13질이다.
유가금강정경석자모품(瑜伽金剛頂經釋字母品) 1권 2장
수습반야바라밀보살관행염송의(修習般若波羅蜜菩薩觀行念誦儀) 1권 7장
인왕반야다라니석(仁王般若陁羅尼釋) 1권 7장
성취대비관자재연화부유가염송법문(成就大悲觀自在蓮花部瑜伽念誦法門) 1권[또한 『관자재대비성취유가(觀自在大悲成就瑜伽)』라고도 한다.] 12장
대공작명왕화상단장의궤(大孔雀明王畫像壇場儀軌) 1권 4장 여(餘)
금강수광명관정경최승입인성무동존대위노왕염송의궤법품(金剛手光明灌頂經最勝立印聖無動尊大威怒王念誦儀軌法品) 1권 11장
말리지제바화만경(末利支提婆花鬘經) 1권 11장
대성천환희쌍신비나야가법(大聖天歡喜雙身毗那夜伽法) 1권 3장
관자재보살여의륜유가(觀自在菩薩如意輪瑜伽) 1권 9장
금륜왕불정략염송법(金輪王佛頂略念誦法) 1권 3장
금강정유가항삼세성취극심밀문(金剛頂瑜伽降三世成就極深密門) 1권 3장
이상 11부 경ㆍ법 모두 11권은 함께 제14질이다.
대광지불공삼장화상의 본래의 법명은 지장(智藏)이다. 호는 불공금강(不空金剛)이다. 범어(梵語)로는 아목거발절라(阿目佉跋折羅)36)라고 한다. 본래 서역 사람이다. 예전에 대홍교금강지삼장화상(大弘敎金剛智三藏和上)을 섬겨 진언을 품수 받고, 24년 동안 제자가 되어
더욱 가르침을 받았다. 대사가 죽은 후에 다시 오천축국을 찾아가 범본 유가(瑜伽)를 모두 자세히 열람하였다. 그 후 두루 돌아다니면서 유람하다가 제경(帝京:長安)에 이르렀다. 혹은 하서(河西)지방에서 교화하기도 하였고, 혹은 영남(嶺南)지방에서 거처하기도 하였다. 혹은 관내(關內)에 거주하기도 하였고, 혹은 왕궁에서 거처하기도 하면서 먹고 잘 틈도 없이 진경(眞經)을 번역하였다.
천보(天寶) 말년(末年, 755)에 오랑캐가 관내로 침입해 들어와서 붙들려서, 지덕(至德) 2년(757)에 되어서야 경락(京洛:서울)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이때 화상은 친히 성지(聖旨)를 받아 관정사(灌頂師)가 되었는데, 왕비와 공주들이 섬돌에서 내려와서 맞이하고 육궁(六宮)의 권속들이 줄지어 예배하였다. 그 후 삼조(三朝:玄宗ㆍ肅宗ㆍ代宗)에 걸쳐 총애를 받아 항상 도량을 세우고, 그윽하고 미묘한 경전을 상세하게 고증하는 등 손에서 책을 놓지 아니하였다. 내궁에서 번역한 것은 마치는 대로 위로 아뢰었다. 그 가운데 혹 이미 베풀어 행해진 것도 있었고, 혹 아직 궁중 금원[禁]에 남아 있는 것도 있었다. 그 가운데 이미 얻게 된 것은 앞에서 기록한 것과 같이 모두 기록하였으나, 아직 얻지 못한 것은 한마음으로 구하고 찾을 뿐이었다.
화상은 부지런히 힘쓰고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이렇게 많은 세월을 겪어오다가 대력(大曆) 9년(774)에 이르자, 미미한 질병의 증세가 보였다. 이에 제사(制使:宮中에서 파견한 使臣)가 수고롭게 방문하고, 황제는 이름난 의원을 내려 보내어 침과 약을 쓰기를 새벽에서 저녁까지 계속하였다. 그러나 병이 낫지 않자 극히 불안해하여 하늘의 자비가 간곡히 그곳에 임하기를 관봉(官封)37)으로 칙서를 내렸다.
“
대도(大道)가 행하는 것은 다른 모습으로 같이 합치된다. 이것은 임금된 사람의 지극한 도리이며. 모두가 정법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번뇌를 막아 주는 안식의 성[化城]에서는 모두 같은 이치인데 어찌 유(儒)ㆍ불[釋]의 길이 다르겠는가? 그런 까닭에 전대의 제왕들도 숭봉하지 아니한 적이 없었으며, 법의 가르침을 널리 밝히는 것은 시대와 더불어 같이 행해져야 한다.
특진시 홍로경 대흥선사 삼장사문 대광지 불공스님은 나의 종사(宗師)이며, 또한 모든 사람들의 배[舟]의 노[檝]이다. 그는 삼학(三學)을 초월하여 깨달았고, 앉아서는 보는 것[見取]에서 벗어났으며, 만행을 닦아 지녔다. 항상 변화하고 멸하는 것[化滅]을 보여주었고, 계율을 잡고도 속박되지 않았으며, 계율을 수호하는 것으로 위의를 삼았다. 그는 계속해서 거룩한 가르침의 뜻을 밝혀오면서 임금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나는 지난날 선조(先朝) 때 일찍이 도의 요체[道要]를 듣고, 부촉을 받아 맡게 되면서 항상 귀의하였다. 늘 경전을 손에 잡고 내전에서 법을 열게 되면 앞자리에 앉아 책상에 기대 교서(膠序:學校)의 예와 같게 하였다. 그의 도풍에 순응하는 것은 공동산[崆峒]38)에서의 물음에 비유할 수 있었다. 묘음(妙音)은 원만하게 설명하고, 밀행(密行)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물음을 당하여 그것에 대해 혹 설명할 때에는 시작과 끝을 모두 밝혀서, 어지럽고 잘못된 것[昏妄]을 씻어 없애고, 마귀와 원수를 조복(調伏)시켰다. 또한 천인(天人)은 도문(度門)에서 마음을 씻게 되고, 용과 귀신은 신인(神印)의 직책을 받았다. 진실로 기(氣)로써 질병을 소멸하였고, 복덕으로 경사스러운 일[吉祥]을 이루게 하였다. 참으로 생각하면 우리들을 널리 이롭게 한 것이 많았으니 어찌 나만을 이롭게 한 것에 그치겠는가? 일찍이 명하여 벼슬을 내려 그것으로 두터운 예의를 표시한 일이 있으나, 스승에게서 얻은 것이 많았고 도를 맛봄이 더욱 깊었다. 그래서 다시 생각해서 억지로 이름 지어 이전의 뜻을 밝혀 두고자 한다. 무릇 오묘한 세계에는 장엄한 땅이 있고, 내품(內品)에는 과지(果地)가 다르다.
덕을 숭상하는 마음을 근본에 두고, 공경함은 시대의 법전에 따르겠다. 스님에게 개부의동삼자(開府儀同三司)의 작위를 내린다. 이어 숙국공(肅國公)에 봉하고, 식읍(食邑) 3,000호를 내리며, 나머지는 예전과 같이하라. 대력(大曆) 9년(774) 6월 11일.”
삼장화상은 다시 은총을 입어 관봉(官封)이 새로 증가하게 되었다. 그러나 기력은 더욱 미약해져서 황제를 알현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15일에 이르러 표를 올려 하직을 고하였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사문 불공은 말씀드립니다. 불공은 어려서 선사(先師)를 섬겨 이미 24년이 지났으며, 일찍이 황제의 은택을 받아 30여 년이 되었습니다. 유가(瑜伽)의 법문을 펴, 여러 성군(聖君)의 은혜로운 돌보심[恩眄]을 받았습니다. 폐하께옵서 제왕의 자리에 임어(臨御)하시게 되면서 각별한 사은(私恩)이 더욱 깊어졌습니다. 그리고 황합(黃閤)39)을 내리시어 거기에서 한가하게 거주하게 하였고, 자미(紫微:天帝의 궁궐)에서 내려오셔서 도를 물으셨습니다. 쌓인 은혜가 중첩되면서 세월이 이어져 왔습니다. 비록 다시 간절하게 정진한다 하더라도 어찌 그 은혜의 만분의 일이라도 갚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슬과 번갯불은 머물기 어렵고, 물풀과 버들은 쇠하기 쉽습니다. 한 번 베개에 엎드리게 되면, 봄부터 여름까지 폐하의 깊은 돌보심으로 존문(存問:안부의 물음)이 두 번, 세 번 거듭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중사(中使)와 명의(名醫)가 도로에서 서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다만 이 고황(膏肓)의 병40)은 비록 침과 약을 쓴다 해도 고치기 어렵습니다. 또한 생멸하는 육체를 어찌 연연하고 아낀다 하여 튼튼해질 수 있겠습니까? 문득 어젯밤 이후로 갑자기 기력이 더욱 쇠약해진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몸이란 자기의 소유물이 아니라, 순식간에 숨이 끊어지려 하고, 마음과 정신이 혼미해지고 있습니다. 멀리 성조(聖朝)를 떠나려니 연모하는 정을 이루 다할 수 없습니다.
불공은 지금 나이가 중수(中壽)41)를 넘었으니, 요절하였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지난날 남해를 건너 오천축국을 두루 유행하면서, 아직 듣지 못한 것을 찾아보고, 해득하지 못하였던 것을 익혀, 거기에서 얻은 금강정유가(金剛頂瑜伽) 십만 게송과 여러 부의 진언 및 경ㆍ논 등 50여만 게송을 모두 번역하여, 조금이나마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아직 숙원이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홀연히 생애가 이미 다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불공이 한탄을 하는 이유입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폐하께옵서는, 모든 부처님의 자비와 지혜가 내려, 아래로는 사람들의 원하는 바를 쫓아가십니다. 불공은 저번에 『대성문수불찰경(大聖文殊佛刹經)』을 진상하였는데, 성정(聖情)으로 조정의 안팎에 배포함을 허락하셨습니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애처롭고 가엾게 여기시어 임종의 말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황가(皇家)의 복을 기원하옵고 만겁에 길상이 많기를 기원하오니 실로 이것은 스님된 사람의 생사의 영화와 행복[榮幸]이옵니다. 오고(五鈷)42)의 금강령저(金剛鈴杵)는 선사께서 전하신 물건이며, 아울러 은반자(銀盤子)ㆍ보리자(菩提子)ㆍ수정염주(水晶念珠) 및 합자(合子)를 모두 표에 따라 삼가 진봉(進奉)하나이다.
종이를 대하니 슬픈 눈물이 어지럽게 흐르고, 길이 성대(聖代)를 떠나게 되니 지극한 연모의 정을 이루 다할 수 없습니다. 삼가 감사(監使) 이헌성(李憲誠)에게 표를 받들어 올려 이별의 말씀을 진술하여 아뢰옵나이다. 사문 불공은 참으로 슬프고 참으로 그립습니다. 삼가 말씀드렸습니다. 대력 9년 6월 15일, 개부의동삼사 숙국공 삼장사문 대광지불공이 표를 올리나이다.”
이에 대하여 보응원성 문무황제는 회답하였다.
“화상께서는 수행이 십지(十地) 보살43)의 경지에 올랐고, 오천축국에서 오셔서 유가(瑜伽)44)를 펼쳐 베푸시고, 불교의 경문[梵夾]을 널리 알리었다. 만 리를 두루 돌아다니시고, 삼조(三朝)를 거치시면서 빛나게 성인의 말씀을 번역하였고, 친히 스승의 뒤를 이어 그 업을 물려받았다. 문(文)이 왕성한 때[下武之興運]를 만나 전날의 법등을 계승하고 이어받아 넓은 보살의 마음으로 중생들을 위하였다. 병이 낫지 않았다기에 위문을 한 바 있으나 큰 슬픔은 더욱 깊었다. 소청한 대로 조치함이 마땅하다.”
그때 개부의동 삼사시 홍로경 숙국공 대광지불공삼장화상은 표를 올려 진정하기를 “성은에 눈물이 드리워집니다.”라고 하였다. 묵제(墨制)가 문득 내려와 청원한 일이 모두 화상의 말씀대로 되니 정성과 예의가 펼쳐지게 되었다. 이
에 한마음으로 관행(觀行)45)하며 오른쪽 겨드랑이를 바닥에 대고 발을 포개어 누워서 고요히 세상을 떠났다.
제자들이 발을 굴리며 통곡하고, 중사(中使)가 황제에게 아뢰니, 성상께서는 조정의 정무를 3일 동안 철수하고 매우 깊이 슬퍼하셨다. 이에 중사를 내려 보내 승람(僧藍)46)을 찾아가 대중문도들에게 위문을 베풀게 하였다. 이어 명주 300필ㆍ포목 300단(端)ㆍ백미(白米)와 경미(粳米) 각각 5수레ㆍ백면(白麵)도 5수레ㆍ땔감나무 10수레ㆍ기름 7섬ㆍ숯 3수레를 부조하였다. 또한 창고에 찾아보게 하여 준비가 없거나 없다고 아뢰는 물건이 있으면 곧 별도로 지급해 보내게 하였다. 그달 28일에 이르러 내시(內侍) 위수종(韋守宗)에게 명령하여, 명주 752필을 보내서 선사의 영탑(靈塔)을 조성하는 비용에 충당하게 하였다. 10월 5일이 되자 사공(司空)의 벼슬을 추증하였으니, 천자의 돌봄이 특별히 깊었었다. 또한 시호(諡號)를 내리고, 칙서를 내려 말하였다.
“적멸이 즐거움이 된다. 그런 까닭에 진여로 돌아가는 것이다. 부촉함에는 인연이 있다. 그런 까닭에 그 호칭을 높이는 것이다. 그 고사(故事)를 따라야 하나 그 가운데는 혹 억지로 지은 이름도 있다. 돌아가신 개부의동 삼사시 홍로경 숙국공 대흥선사 삼장 대광지 불공스님은, 덕이 성하고 도가 높아 내가 스승으로 우러러본 사람이다. 마음에 은밀하게 법인(法印)을 갈무리하고, 행은 제도와 불문[度門]을 초월하였다. 정미한 설법을 할 때에는 광대하고 무상(無相)하였다. 한 번의 비로 적셔 주신 것이 뭇 중생들에게 두루 미쳤고, 전해 주신 밝은 부처님의 말씀[百燈]은 두루 정각을 밝혔다. 뜻과 취지[義趣]에 두루 통달하였고, 유교ㆍ도교에도 널리 통하여 성인의 뜻과 딱 들어맞아 합치하였다. 나는 여러 해 동안 앞자리에서 그의 도풍에 순응하였다. 자비의 배는 머물지 못하고, 대들보 나무는 허물어졌다. 아름다운 음성이 영원히 멀어졌으니, 큰 슬픔은 매우 깊다. 도를 논하는 관리들은 스님의 장례를 예에 따라 엄수하라.”
이어 시호를 더하였는데, 드러난 이름과 실제[名實]에 부응하게 하기 위하여 사공(司空)의 벼슬을 추증하고, 이에 시호를 대변정광지불공삼장화상(大辯正廣智不空三藏和上)이라 내렸다. 6일 계묘일(癸卯日)에 장의를 진설(陳設)하고, 성 남쪽에 신주를 옮겨[遷神] 다비공양을 하게 되었다. 황제는 내급사(內給事) 유선학(劉仙鶴)을 파견하여 향다(香茶)의 전(奠)47)을 올리고, 고(故) 대변정광지삼장화상의 영가에 공손히 제사를 올렸다. 그 제문은 다음과 같다.
“생각하오면 영가께서는, 지식이 훤히 밝고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슬기로웠으며, 일찍 범행을 심어 나면서부터 좋은 인연을 쌓았다. 또한 오천축국에서 우뚝 빼어나서 만 리를 두루 다녔다. 마음에 쌓은 것은 바다에 갈무리한 것과 같았고, 중국과 오랑캐의 말에 능통하였다. 경전을 새겨 경(經)을 전하고, 유가(瑜伽)의 가르침을 베풀어, 억조 중생들을 널리 이롭게 하였고, 삼조(三朝)에 출입하였다. 도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며, 진리는 평등하여 자취가 없다. 열반은 항상 고요하여 성인들이 함께 귀의하는 곳이다. 범향(梵香)으로 목욕하고 화(化)하여 돌아가셨다. 나는 얼마 전에 요의경(了義經)을 받들어 모시고 예를 갖추어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맺었다. 영결하는 날 아침 슬픔이 깊어 향과 차[茶]를 갖추어 제사를 올리오니 영이 있다면 이를 비추어 보소서.”
이날 재신(宰臣)ㆍ중귀(中貴:官中貴族)ㆍ신책육군어사(神策六軍御史)ㆍ대부(大夫)ㆍ경조대윤(京兆大尹)ㆍ상서(尙書)ㆍ복야(僕射)ㆍ시랑(侍郎)ㆍ열경(列卿)ㆍ제위장군(諸衛將軍)들은 각기 재물을 갖추어 제사[奠祭]를 올렸고 그 나머지 승려와 속인들의 조문은 다 말할 수가 없다. 7일 새벽에는 다시 표를 올려 사례의 말씀을 진술하였다.
“초토(草土)48) 사문 혜랑 등은 말씀드리옵나이다. 어제 6일 선사를 다비하던 저녁, 자비의 성자[聖慈]이신 황제폐하께서 애도하시어 사공(司空)의 벼슬을 추증하시고, 이어 시호를 ‘대변정광지불공삼장화상’이라 내리셨습니다. 이에 의거하여 나라의 예로써 장례를 베푸시어, 그 은총은 장지로 가는 길[神道]을 빛나게 하셨으며, 삼공(三公)이 보내신 조의도 옛 법장(法章)을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화상이라는 칭호는 선대의 경전에는 실려 있지 아니한 호칭입니다. 이로써 높은 하늘의 은택이 강과 바다에 물을 대주어 윤택하게 함이 끝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승길의 혼령은 해와 달의 은택을 입어 아래세계를 비추어볼 것입니다. 그날 모인 모든 제자 수천 명은 슬픔과 감격 속에 성은을 받들고 이를 갚을 길이 없어, 삼가 중사(中使) 이헌성(李憲誠)에게 부쳐 표를 받들어 감사의 말씀을 진술하옵고 아뢰옵나이다. 사문 혜랑 등은 참으로 황공하옵고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삼가 말씀드렸습니다. 대력 9년 7월 7일 대흥선사 초토사문 혜랑 등이 표를 올립니다.”
이에 대하여 보응원성 문무황제는 비답(批答)을 내려 말하였다.
“화상께서는, 오천축국에서 자취를 일으켜 만 리를 두루 돌아다니시면서, 정법을 널리 베푸시어 중생들을 구제하고 깨닫게 하시다가, 열반에 드시어 영구불변의 나라로 돌아가셨다. 그 행적을 살펴 시호를 내려 높이는 일은 예경(禮經)에 있는 일인데, 번거롭게 사은하였도다.”
같은 날 다시 칙령을 내려, 승 혜랑 등을 오로지 사원의 일을 검교(檢校)하는 직책을 맡아보게 하고, 아울러 후학들을 교수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품계를 높일 만한 사람이나, 뜻이 계합하는 사람 가운데 차례가 된 사람은 주청하였다. 그날 다시 칙서를 내려 승 혜승(慧勝)에게 말하였다.
“화상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 그대는 특히 화상의 생각과 뜻을 얻은 사람이었다. 지금 들으니 그대는 탑소(塔所)에서 향화를 사르며 탑소를 지키고 있다고 하는구나. 예전에 화상의 옆에서 보현염송법(普賢念誦法)을 받아 나와 함께 그것을 존중하며 힘써 닦기를 3년 동안 하였다. 3년이 지난 후에 곧 찾아와 나와 마주앉아 보현염송법[本尊法]을 함께 상량(商量)하였다. 그대가 요청한 일은 그대로 시행하도록 맡기겠다.”
이날 다비의 불이 꺼진 뒤 유골을 거두었는데, 몸체와 정수리 가운데에 모두 사리가 있었다. 그 광명이 아름답고 청정하여 유리와 같이 밝게 빛났다. 이 사실을 모두 위로 아뢰니, 성정(聖情 : 皇帝)은 이를 애도하여 내궁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도량에 안치하게 하였다. 15일이 되자 또 담당자에게 칙명을 내려서 서울의 모든 사찰과 도관에서 공덕을 닦게 하고, 개부의동삼사 우용무군대장군(右龍武軍大將軍) 지군사(知軍事) 상주국(上柱國) 양국공(涼國公) 이원종(李元琮)을 시켜, 고(故) 대변정광지불공삼장화상의 탑소를 다듬어 조성[修造]하는 일을 잠시 정지시키고, 따로 좋은 땅을 골라서 탑을 다듬어 조성하게 하였다. 8월 28일에 이르자 다시 이원종에게 칙명을 내려 말하였다. “고 대변정삼장화상의 다비에서 얻은 사리는, 해당 사원에 사리탑 셋을 조성하여 안치하고, 탑이 세워지면 큰 비(碑)를 건립하라”고 하였다. 이 비는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어사대부(御史大夫) 상주국(上柱國) 풍익현(馮翊縣) 개국공(開國公) 엄영(嚴郢)이 비문을 지었고, 은청광녹대부(銀靑光祿大夫) 팽왕부(彭王傅) 상주국(上柱國) 회계군(會稽郡) 개국공(開國公) 서호(徐浩)가 글씨를 썼다.
이상의 사적을 논평한다면, 예전부터 고승석덕(高僧碩德)에 대한 은총과 특수한 은전은, 살아있을 때는 영화로웠지만 죽으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지금 대변정삼장화상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살아서는 받은 은총이 두텁고, 삼조(三朝)에 걸쳐 황제를 섬겨서 공경[卿]의 열에 서는 벼슬이 내려졌고, 품계는 특진을 더하였다. 그 후 병석에 눕게 되자 위문이 이어졌고, 중사(中使)와 명의(名醫)가 아침ㆍ저녁으로 서로 이어 찾아갔으며, 특별히 개부의동삼사(開府義同三司)의 벼슬을 더하여 숙국공(肅國公)에 봉해졌다. 마침내 세상을 떠나게 되자 황제는 더욱 크게 슬퍼하여 3일 동안 조정의 일을 그만두었다. 하사한 부조도 매우 넉넉하였으며, 사공(司空)의 벼슬을 추증하고, 대변정(大辯正)이란 시호를 내리고, 이어 화상(和上)이라 불렀다. 이러한 일은 선고(先古)에 아직 들어보지 못한 일이었다. 성 밖에서 다비하고, 절 안에 탑을 세우는 일도 몇 일 몇 달이 되지 아니하여 모두 이루어졌다. 아울러 큰 비를 세워 그 덕행을 기념하였다. 이러한 일은 고금에 다시없는 영광이며, 승려의 무리 가운데 첫 번째로 뛰어난 영광이었다. 아상(亞相:宰相의 다음가는 자리)이 비문을 짓고, 왕부(王傅:왕의 스승)가 글씨를 썼으니, 이는 곧 만대에 영원히 전할 일이다. 여기에서 기술한 것은 그 대강만을 들어 간략하게 하였다. 만약 구체적으로 알고자 한다면 『증사공대변정광지삼장표제집(贈司空大辯正廣智三藏表制集)』 가운데 갖추어 자세하게 설한 내용과 같다.
금상폐하인 성신문무황제(聖神文武皇帝)의 조정에서 번역한 경은 다음과 같다.
대승이취육바라밀다경(大乘理趣六波羅蜜多經) 10권 160장
대화엄장자문불나라연력경(大花嚴長者問佛那羅延力經) 1권 2장
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波羅蜜多心經)』 1권 2장
이상 3부 경 모두 12권은 함께 1질이다.
이는 반야삼장(般若三藏)이 계속해서 번역하였다. 『역경도기(譯經圖紀)』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예전 진(秦)나라의 임금 요씨(姚氏)때에 연리수(連理樹)49)가 조정의 뜰에 돋아난 일이 있었는데, 그때 구자국(龜玆國)50)에서 구마라집(鳩摩羅什)이 서량(西涼)땅을 밟고 입공(入貢)하였다.” 지금 우리의 황제께서는 슬기롭고 명철하시며, 합만과(合蔓苽)51)가 황제의 정원[御苑]에 돋아나자, 계빈국(罽賓國)에서 용상대덕(龍象大德)52)들이 남해로 배를 타고 우리 조정을 찾아왔다. 이들은 손에 범어로 된 경전과 『대승이취육바라밀다경(大乘理趣六波羅蜜多經)』을 지니고 있었다. 대신이 이 소식을 듣고 아뢰니, 황제가 그 말을 믿고 분부를 내려 유사(有司)들에게 맡겨서, 석덕들을 뽑아서 서명사(西明寺)에 머물면서 번역하게 하였다. 번역이 끝나고 나서 황제에게 아뢴 이는, 곧 반야삼장법사(般若三藏法師)가 바로 그 사람이다.
법사의 범어 이름은 반자야(般刺若)이며,[당나라 말은 지혜(智慧)라고 한다.] 북천축의 경계에 있는 가필시국(迦畢試國) 사람이다.[계빈국(罽賓國)사람이라고 한 것은 와전된 말이다.] 성씨는 교답마(喬答摩)이다.[구담(瞿曇)이라고 말한 것은 와전된 옳지 못한 말이다.]
그는 총명하고 이해가 빨랐는데, 이는 하늘이 빌려 준 재주다. 7살 때 발심하여 양친을 모시는 일을 어기고 삼보에 귀의하였다. 당시 그는 조복군(調伏軍)이라는 대덕에게 의지하여 네 『아함경』의 10만 게송을 외우고, 『아비달마(阿毗達磨)』 2만 게송도 외웠다. 여가(餘暇)에는 또 스승을 따라 가습밀(迦濕蜜 : 罽賓國)에 갔다.
20세가 되자 구족계를 받고 살바다(薩婆多)53)의 4만에 가까운 게송을 외웠고, 아울러 『구사론(俱舍論)』의 2만 8천 게송도 외웠다. 아울러 그는 『아비달마대비바사론(阿毘達磨大毗婆沙論)』의 뜻을 7년 동안 전수받았다.
이 나라에서는 소승을 배우고 익히고, 그의 나이 23세가 되자 중천축(中天竺)의 나란타사(那爛陁寺)를 찾아가 대승의 경전을 받아 배웠다. 그리하여 『유식(唯識)』ㆍ『유가(瑜伽)』ㆍ『중변(中邊)』 등의 논과 또한 『성명론(聲明論)』과 『금강경』ㆍ『인명론(因明論)』ㆍ『의명론(醫明論)』ㆍ『공율론(公律論)』 등 모두를 지호(智護)ㆍ진우(進友)ㆍ지우(智友) 등 3대 논사에 의지하여 배웠다. 그때 곧 석존이 입멸하신 곳[雙林]에서부터 8탑 사이를 유행하면서 우러러보고 예배드리기를 18년 동안 계속하였다.
당시 남천축국에는 아직까지도 명장(明藏)을 지니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마침내 곧 그곳으로 가서 아직 듣지 못한 경전을 물어서 받았다. 그때 관정사(灌頂師)가 있었는데 이름이 법칭(法稱)이다. 그로부터 유가(瑜伽)의 가르침이 들어 있는 만다라(曼茶羅) 삼밀호신(三密護身)의 5부의 계인(契印)54)을 전수받았다. 이와 같이 이어 받들어 숭상하기를 1년이 경과하자, 3천 5백여 게송을 외우게 되었다.
그는 일찍이 지나(支那:中國)는 큰 나라며, 문수보살이 그 가운데 계시다는 말을 듣고, 동쪽 대당국(大唐國)을 찾아가 맹세코 불교를 전하기로 마음먹었다. 바다에 배를 띄워 동쪽으로 가면서 험한 파도를 만났다. 거의 광주(廣州)에 이르렀을 때, 배가 바람에 나부끼어 도로 물러나 집사자국(執師子國:스리랑카)의 동쪽 기슭에 이르렀다. 다시 비용과 식량[資糧]을 모으고, 배를 견고하게 수리하여 남해를 거쳐 중국으로 향하였다. 도중에 여러 나라를 거치기를 22년 동안 하였다. 거의 광주부(廣州府)에 이르게 되었을 무렵, 바람에 배가 파손되어, 떴다 가라앉기를 몇 번 거듭하였다. 처음 5경 때부터 시작한 바람은 해 뜰 무렵이 되자 조용하였다. 배는 혹 표류하기도 하고, 혹 가라앉기도 하였는데 순풍을 만난 것에 힘입어 육지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지니고 온 자재(資財)와 범협(梵夾) 경ㆍ논 등은 이 액난을 만나 그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바닷가에 이르러 보니, 그것들은 이미 해안 가 흰 모래사장 안 큰 대나무 통속에 그대로 남아 있어, 완연히 신이 있는 것과 같았다. 그는 이런 일은 일찍이 없었던 일이라고 감탄하였다. 이로써 『대승이취육바라밀경(大乘理趣六波羅蜜經)』은 대당국(大唐國)에 본래 인연이 깊은 경전임을 알 수 있다.
동쪽으로 길을 가기를 반 달만에 비로소 광주에 도달하였다. 건중(建中) 3년(782)에 이르러 상국(上國)에 이르렀다. 그는 정원(貞元) 2년(786)에 고향 친구들을 방문하여 만나보았는데, 신책십장(神策十將) 나호심(羅好心)은 곧 반야삼장의 외삼촌의 아들이다. 슬픔과 기쁨으로 서로를 위로하였으며, 곧 집안에 이르러 친족 간의 정을 나누었다. 마침내 그 집에 머물러 공양받게 되었다. 그는 이미 삼보를 믿고 존중하였기에 불경을 번역해 주기를 요청하였다. 이에 대진사(大秦寺)의 파사(波斯)55) 출신의 스님인 경정(景淨)과 더불어 호본(胡本)56)에 의거하여 『대승이취육바라밀다경(大乘理趣六波羅蜜多經)』 7권 번역을 완성하였다. 당시 반야삼장은 호어(胡語)에 숙달하지 못하였고, 또한 당나라말도 미처 이해하지 못하였으며, 경정(景淨)스님은 범어를 알지 못하였고, 또한 아직 불교에 밝지 못하였다. 비록 불경을 전역(傳譯)하였다고는 하였으나 절반의 성과도 얻지 못하였다. 헛된 이름만 훔치기를 도모하거나, 복리(福利)가 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표(表)를 올려 아뢴 것은 그것이 세상에 유행되기를 바라는 생각에서였다.
성상께서는 지혜가 총명하시고 문장에 밝으셨으며, 불교경전을 진실로 공경하였다. 그런데 그들이 번역한 책을 살펴보니 이치에 어둡고 문장은 엉성했다. 또한 무릇 석씨(釋氏)의 가람과 대진(大秦)의 승사(僧寺)는 거주하는 장소가 이미 다르고, 수행하는 법도 전혀 다르다. 경정(景淨)은 마땅히 미시하(彌尸訶)57)의 가르침을 전하고, 사문인 불자들은 불경을 널리 밝힌다. 교법을 구분하고자 한다면 사람들이 함부로 교섭해서는 안된다. 정(正)과 사(邪)는 그 류가 다르며, 경수[涇]와 위수[渭]는 물이 흘러가는 방향이 다르다. 만약 강령에 있는 것을 망라하려면 조리가 있고 어지럽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만 천인(天人)이 우러러보고 사부대중이 귀의할 곳을 알게 된다. 황제는 유사(有司 : 관리)에게 분부하여 곧 제령(制令)으로 말하였다.
“중서문하(中書門下) 왕희천(王希遷)에게 칙첩(勅牒)58)을 내려 칙명을 받들게 하라. 불교는 깊고 미묘하여 도인과 속인들이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공경하였다. 불법은 모두 범본에 인연하여 중화(中華)에 가피를 입게 되었다. 마땅히 왕희천은 유사들과 더불어 번역할 수 있는 모든 스님을 선발하여 서명사(西明寺)에서 다시 번역하게 하고 번역이 끝나면 아뢰게 하라.”
칙첩(勅牒)이 이르니 칙명에 준하여 시행하였다. 정원(貞元) 4년 4월 19일에 칙명을 내렸으며, 다시 칙첩(勅牒)을 사부(祠部)에 내려 칙명에 준하게 함이 또한 그와 같았다. 이 칙첩(勅牒)을 경성의 여러 사찰의 대덕들에게 돌리고, 계빈국(罽賓國)의 삼장(三藏) 사문 반야스님에게 범어본을 번역하게 하였다. 이에 한림원(翰林院)의 대소관(待詔官)과 광택사(光宅寺)의 사문 이언(利言)이 범어를 번역하고, 서명사의 사문 원조(圓照)가 붓으로 받아썼으며, 자성사(資聖寺)의 사문 도액(道液)과 서명사의 사문 양수(良秀)와 장엄사의 사문 원조(圓照)가 나란히 윤문을 하였고, 자은사(慈恩寺)의 사문 응진(應眞)과 예천사(醴泉寺)의 사문 초오(超悟)와 광택사의 사문 도안(道岸)과 서명사의 사문 변공(䛒空)이 나란히 함께 증의(證義)하였다.
6월 8일부터 경의 제목을 짓고자해서, 가서(街西)의 공덕사(功德使) 겸 구당(句當:담당자) 우신책군사(右神策軍使) 영막사(營幕使) 원종흥(元從興)ㆍ원원종(元元從)과 진군대장군(鎭軍大將軍) 행우감문위장군(行右監門衛將軍) 지내시성사(知內侍省事) 상주국(上柱國) 대원현(大原縣) 개국백(開國伯) 왕희천(王希遷)에게 칙명을 내려, 친히 윤지(綸旨)를 받들고, 봉천정난공신(奉天定難功臣)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 행우신책군대장군(行右神策軍大將軍) 지군사검교(知軍事檢校) 공부상서(工部尙書) 겸 어사대부(御史大夫) 상주국(上柱國) 무도군왕(武都郡王) 맹섭(孟涉)과 보응공신(寶應功臣) 원종(元從)과 표기대장군 행우신책군대장군(行右神策軍大將軍) 지군사(知軍事) 겸 어사중승(御史中丞) 상주국(上柱國) 정융군왕(靜戎郡王) 식(食) 실봉(實封) 오천호(五千戶) 마유린(馬有麟) 등과 더불어 범본 경을 봉송하게 하였다.
이때 육률(六律)59) 오성(五聲)60)과 팔음(八音)61)
이 합운(合韻)하였고, 사부대중이 운집하여 노래와 범패소리가 뒤섞이어 요란하였으며, 퉁소와 풍악소리가 하늘에 울려 퍼졌고, 북과 종소리가 땅을 진동시켰다. 저 금원(禁苑)의 문턱을 출발하여 방림문(芳林門)을 나서니, 수레와 말이 수도(首都)의 거리에 가득하였고, 선비와 여인들로 주변 거리에 가득차고 넘쳤다. 서명사에 들어가 진경을 번역하게 되니, 같은 날 돈 1천문(文)ㆍ차(茶) 30천(釧)ㆍ향(香) 일대합(一大合)이 은사(恩賜)되어 이것으로 역경원의 공양에 충당하게 하였다.
경의 제목을 『대승이취육바라밀다경(大乘理趣六波羅蜜多經)』이라 이름 하였다. 그 후 날과 달이 지나도록 위의 두 스님이 경을 번역하여, 10월 중순에 글을 번역하는 것이 두루 끝났다. 11월 15일에 이르자 베껴 쓰는 일도 다시 끝났다. 28일에는 위의를 크게 갖추고 비단수레와 음악을 마련하여, 광범보(光範甫) 광순문(光順門)에 들어가 표를 엮어 위에 아뢰고 새 경전을 진상하였다. 그 글은 10권이며, 품(品)도 역시 10품으로 나누었다.
그 후 두 번, 세 번 칙지가 내려 오가며 노고를 위문하였다. 이어 금원(禁苑)62)에서 재식(齋食 : 음식)을 베풀고, 반야법사에게 명주 100필과 겨울옷 1벌을 더불어 하사하였다. 나머지 열 사람 각각에게는 명주 50필과 옷 1벌을 하사하였으며, 검교(檢校)를 담당한 두 사람 각각에게는 명주 30필과 옷 1벌을 하사하였다. 이렇게 충분하게 베풀었다. 삼장법사 반야는 이 하사품을 공경하여 높이 받들고 부끄럽고 황송해하며, 곧 이때에 표를 올려 감사의 뜻을 전하였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사문 반야는 말씀드립니다. 엎드려 생각하오니 저는 계빈국에서 태어나, 14세에 고향을 떠나 남쪽 천축국을 돌아다니면서, 깨우치지 못한 것을 듣기를 20여 년 간하였습니다. 또한 성지의 자취를 순례하여 쌍림과 8탑을 왕래하였고, 대승ㆍ소승을 배워 사은(四恩)63)에 보답코자 맹세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멀리 중국 땅을 사모하여, 이에 이곳을 찾아와 우러러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제가 가지고 온 범협(梵夾) 경전은, 중국에는 아직 전해지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늘 받들어 올리려고 생각은 하였으나 진헌(進獻)할 길이 없었습니다.
지난번 외사촌 형인 우신책십장(右神策十將) 신평군왕(新平郡王) 나호심(羅好心)이 몸소 융위군(戎衛軍)에 참여한 인연으로 인하여, 마침내 더불어 폐하께 아뢸[奏聞]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스러운 폐하께 들리게 하였으니, 실로 이는 다행한 일이었습니다. 폐하께옵서는 불교를 숭상하시고 대승을 믿고 받아들이시어, 승도들에게 명하여 번역하도록 하셨습니다. 보잘것없는 승려인 저의 간절한 소원은 이것을 번역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끝내 맹세코 이 명령을 받들어 정밀하게 번역하여서, 위로 폐하의 은혜[皇祚]에 보답하기로 하였습니다. 이에 삼가 광순문(光順聞)을 찾아가 표를 받들어 감사의 말씀을 진술하면서 아뢰옵나이다. 사문 승 반야는 참으로 황송하옵고 참으로 두렵습니다. 삼가 말씀드렸습니다. 정원(貞元) 4년 11월 28일 계빈국 사문 반야는 표를 올리나이다.”
이에 대하여 성신문무황제(聖神文武皇帝:唐 德宗皇帝)는 비답을 내려 말하였다.
“스님은 일찍 증원(證源)을 찾아가 일찍이 비장(秘藏)을 자세히 보고, 서역 땅을 주유하면서 대승을 차례로 찾아보고, 심지(心地)에 잠긴 말씀을 얻었으니, 이는 부처님의 묘행이다. 이를 널리 알리기를 기약하고, 현문을 널리 열고자 멀리서 진문(眞文)을 등에 지고 이를 중국에 와서 전하였다. 지나온 길은 만 리나 먼 곳인데, 고난을 견디어 수도[京師]에 도달할 수 있었고, 이에 구마라집(鳩摩羅什)의 유풍을 드높였으며, 다시 마등(摩騰)의 발자취를 이었다. 정성스럽고 간절한 말씀을 돌아보니, 나는 매우 가상하게 생각한다. 이에 도류(道流)들에게 명하여 번역을 더하게 하여 이 상법(上法)이 이로써 길이 유행되게 하리라. 표의 문장을 살펴보니 번거롭게 사은을 진술하였구나.”
같은 날 역경의 시주인 반야삼장의 외사촌형 우신책마군십장(右神策馬軍十將) 봉천정난공신(奉天定難功臣)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검교(檢校) 태자첨사(太子詹事) 상주국(上柱國) 신평군왕(新平郡王) 신(臣) 나호심(羅好心)이 표를 올려 감사드리며 말하였다.
“나호심은 말씀드립니다. 아우인 계빈국 사문 승 반야가 먼저 진상한 대승이취(大乘理趣)의 범협(梵夾) 『육바라밀다경(六波羅蜜多經)』은 금년 4월 19일자 칙지를 엎드려 받들고 왕희천(王希遷)에게 도행이 있는 스님을 정선하여 서명사에서 번역하여 지금 경질(經秩)이 이미 끝난 것에 대해 신은 매우 반갑고 기쁩니다. 머리를 조아리고 또 조아리옵니다. 신이 듣건대 주나라 때 별빛을 숨겨 한나라 황제의 꿈에 광명을 나타냄으로써 비로소 신령한 서상(瑞相)이 인간세계에 감응한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반드시 밝은 임금에게 맡겨서 인도하고 교화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두 번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불법을 펼쳐 베푸시었고, 거듭 진종(眞宗)을 천명하신 것입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황제폐하께옵서는 은택이 나라 안팎에 미치시고, 은혜가 생령들을 덮으시며, 성교(聲敎 : 황제의 가르침)가 먼 곳까지 통하여, 행함이 없어도 다스려지고 있습니다. 보잘것없는 신의 외사촌동생은 14세에 고향을 떠나 뜻이 치류(緇流:僧流)를 사모하여 승려가 되었습니다. 먼저 진상한 경본을 상고해 보니, 범협의 대승이취(大乘理趣)를 육바라밀(六波羅蜜)이라고 합니다. 폐하께서는 불교를 믿고 숭상하시어 특별히 이를 번역하게 하셨습니다. 부지런히 번역의 일을 그치지 않아 지금 경질이 마무리되었음을 고하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번(幡 : 標旗)과 꽃을 하사하시고, 또 다시 번역하게 하시니 미천한 승려로서는 다행한 일이고, 그 총애에 놀라 깊이 엎드립니다.
신의 집안은 서쪽 오랑캐로서 중국에 살 수 있게 되었고, 명예롭게도 대궐을 경비하고 임금을 호위[戎禁]하는데 참여하여, 그 영광이 저의 집에 미치게 되었습니다. 부자가 서로 기뻐하였으나 실로 천지에 부끄럽습니다. 승려가 된 사람이 무슨 공덕이 있었기에 다시 위곡(委曲)한 큰 은혜를 입었겠습니까? 원컨대 신은 그 뜻을 받들어 닦고 간직하여 복덕이 폐하의 은혜[皇祚]에 보답하게 된다면 다행이옵나이다. 맹세코 죽음으로써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그저 기쁘고 기뻐서, 손뼉을 치고 발을 굴리는 지극함을 이루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삼가 광순문(光順門)를 찾아가 표를 받들어 진사(陳謝)함으로써 아뢰옵나이다. 신 나호심은 참으로 황송하고 참으로 두려워 머리를 조아리고 또 조아리면서 삼가 말씀드렸습니다.”
이에 대하여 성신문무황제는 비답을 내려 이르렀다.
“경의 외사촌 동생은 일찍 대승을 깨달아, 멀리 서방에서 상국(上國)으로 내유(來遊)하여 육근(六根)의 깊은 뜻을 선포하고, 쌍수(雙樹)의 부처님 말씀을 베풀었다. 지금은 그의 정성으로 그가 베푼 것이 흠모하고 존중되고 있다. 이에 이를 번역하게 하여 유행(流行)할 수 있게 하였다. 경은 일찍부터 충성심과 정성스런 마음이 가득하여 금위(禁衛)의 직책을 맡게 되었다. 표소(表䟽)를 살펴보니 그 품고 있는 마음이 모두 나타나 있으며 감사하는 바를 알겠다.”
12월 2일에 이르자 장군 왕희천(王希遷)에게 선포하여 예천사(醴泉寺)의 승려 사유(思惟)에게 칙명을 받들게 하고, 사원에 선포하여 계빈국에서 진상한 범어 본 『육바라밀다경』과 승려 반야를 편안하게 모시게 하였다. 그 후 또 23일에 이르러 우신책군판관(右神策軍判官) 내알자감(內謁者監) 풍국청(馮國淸)에게 칙명을 내려, 하사품을 계빈국 승려 반야가 있는 사원에 보내게 하였다. 팔척상(八尺床) 3장(張), 각종 협첩(夾帖) 및 석갈(席褐), 관절욕(官絶褥)ㆍ백서단(白樨氈), 흰 천의 수건[白副手巾] 2장, 구리 물병[銅水甁] 1개, 무쇠냄비[鐵鍋] 2개, 서말들이 솥[三斗釜] 1개, 백자공기[白瓷椀] 10개, 다병[𣗪甁] 1개, 이불[蒲團] 1채, 새차[新𣗪] 20통 및 차를 가는 맷돌[𣗪碾子] 1벌이다.다 (𣗪=木*茶)
또한 경을 진상한 날, 은지를 받들어 다시 번역한 『육바라밀경』 가운데 진언과 계인(契印) 법문은, 당음과 범어를 서로 대조해서 진상해 오라고 하였다. 정원(貞元) 5년 2월 4일에 이르러 베껴 쓰는 일이 끝나게 되어, 사문 양수(良秀) 등과 더불어 진상하게 되었다. 이에 은총의 칙명이 내려 다(𣗪 30천(釧)이 하사되었다. 또한 『육바라밀경』의 번역을 끝낸 날 다시 『대화엄장자문불나라연력경(大華嚴長者問佛那羅延力經)』 1권 나머지 1장 정도를 번역하였다. 그해 12월 15일에 교정ㆍ필사가 끝났으나 아직 진상하지 못하였다. 이제 목록에 따라 진봉(進奉)하게 되었다.
5월 4일에 이르러 어제(御製) 『육바라밀경』의 서문이 완성되어 이를 경의 첫머리에 실어 올리고, 천복사(千福寺)와 장경사(章敬寺)에 칙지를 내려 각 경 1본을 하사하여 돌려가며 읽고 유행시키게 하였다. 이때 장경사와 천복사의 유아(惟雅)와 지유(智柔) 두 스님이 표를 엮어 감사의 뜻을 아뢰니 황제는 이에 비답을 내려 말하였다.
“이 경이 나온 이래로 아직 중국 땅에 전해지지 아니하였다. 모름지기 범본은 서방에서 온 것이어야, 종지의 근원을 상고하여 깨달음의 뜻에 지극히 부합할 수 있다. 그래서 마침내 이를 번역하여 유행하도록 하였다. 스님들은 법문을 경건하게 받들고 세상에 안주(安住)하게 하여 불법(佛法)을 보호하고 지키는 일을 한 지 오래되었다. 경을 모으고 더 보태어 베껴서 절에 두게 하였다. 이 진문(眞文)은 영구히 널리 유포시키기 바란다. 표의 문장을 살펴보니 번거롭게 감사하였구나.”
6년(780) 6월 23일에 이르러 사문 반야는 그가 있는 사원의 암라과(菴羅菓)64) 250개를 진상하니 칙명을 받들어 명주 10필이 하사되었다. 7월 15일에 이르러 다시 명주 50필과 겨울옷 5벌이 하사되었고, 이어 반야에게 칙지를 내려 반야를 북천축국의 가습밀국(迦濕蜜國)의 사신으로 가게 하였다. 17일에 이르자 다시 봄옷 1벌이 하사되었고, 아울러 제자 두 사람 각각에게는 명주 30필과 겨울옷 4벌이 하사되었다. 22일 우은대문(右銀臺門)에서 반야를 인도하여 삼전(三殿)에 들어오게 하여 황제와 대면하고 중서문하(中書門下)의 칙첩을 받게 하였다. 24일 장안을 떠나 장락역(長樂驛)에서 잤다. 25일에 다시 칙지가 내려 계빈국에서 범협 『육바라밀경』을 진상한 사문 반야에게 ‘반야삼장’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시고, 이어 자색(紫色) 옷을 하사하였다. 27일 뒤이어 온 사신에게 이 고별의 칙서[告牒]와 아울러 온갖 약물 10근을 보내왔다. 마땅히 명령서[領取]가 도착하니, “스님들 잘 가시오”라고 하였다. 다음 날 아침 다시 출발하여 길을 회골(廻鶻)의 북쪽 정진(庭鎭)의 서쪽 대식국(大食國)으로 취해서 천축으로 향하였다. 당시 반야삼장법사의 나이는 57세였다.
또한 반야삼장이 제령(制令)을 받들기 전에 천복사(千福寺)의 대덕 지유(智柔)는 다시 거듭 『반야심경』을 번역하기를 요청하였으나, 서번(西蕃)에 사신의 사명을 받들게 되자 미처 진봉할 여가가 없었다. 이에 8월 11일에 이르러 표를 수반하여 아뢰니, 이 경의 「서분(序分)」과 「유통분(流通分)」이 구족하게 되었다. 그 표의 글은 다음과 같다.
“사문 지유(智柔)는 말씀드립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성인의 지혜는 넓고 깊어서 널리 베풀어 줌으로써 더욱 넓어지고, 진리의 근원은 극히 묘하여 말과 모양을 빌려야 비로소 전달됩니다. 이 경은 곧 뭇 성사(聖師)의 대종(大宗)이옵고, 뭇 경전의 근본 모체입니다. 지난날 사문 현장(玄奘)이 이미 번역하여 유행시켰는데, 비록 뜻이 원만하여 남김이 없었으나, 문장이 처음부터 이지러진 곳이 있었습니다. 얼마 전에 계빈국의 승 반야를 만나서 친히 범어의 문장을 보고 그로 인하여 그것을 전하여 통하게[傳通] 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다시 불법을 돕는 일을 경축하게 되었습니다. 비로소 취암정사(鷲巖精舍)에서 진실로 부처님 말씀[金言]을 알게 되었고, 염송하는 사람은 의문이 제거되어 진정한 도풍이 다시 멀리 퍼지게 되었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폐하께옵서는, 친히 부처님의 부촉을 받으시어 선(善)한 일이면 따르지 아니하시는 것이 없고, 도가 생령(生靈)들에게 두루 미쳐 교화되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지유(智柔)는 법도가 없고 용렬하며 비천하오나, 문득 어리석은 정성을 바쳐 천자의 덕[皇風]을 보좌하기를 바라고, 성수(聖壽 : 임금의 수명)를 돕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엎드려 비옵건대 굽어 천감(天鑑 : 하늘 거울)을 드리우셔서 이 금문(金文)을 열람하시어 만약 혹 따를 만하다고 생각하신다면, 이를 조정의 안팎에 반포하도록 선포하여 주시옵기를 청하나이다. 그렇게 되면 모든 미혹된 중생과 사문들에게 매우 다행한 일이 될 것입니다. 진심에서 우러나는 정성[丹誠]을 끝까지 다하고 지극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가 표에 부쳐 진술하여 진상하면서 아뢰옵나이다. 사문 지유는 참으로 황송하옵고 참으로 두려워 죽을죄를 무릅쓰고 삼가 말씀드리옵나이다.”
이에 대하여 성신문무황제는 비답을 내려 말하였다.
“『반야심경』은 대승의 비지(秘旨)이다. 얼마 전에 현장스님이 번역한 것은 문자와 뜻이 이미 두루 갖추어졌으나, 그 첫머리와 뒤따른 부분에서 혹 아직 소상하게 갖추어지지 못한 곳이 있었다. 근자에 계빈국의 스님 반야가 중국을 찾아옴으로 인하여 유문(遺文)을 전하게 되니, 도움 되기에 충분하였다. 스님이 진술하여 청[陳請]한 일은 깊이 나의 마음과 일치한다. 지금 보내 온 상주문대로 진경을 널리 보급하겠다.”
이때 반야삼장은 왕명을 받고 북천축국에 사신으로 나가 있었다. 태원(太原) 쪽으로 길을 취하여 가다가, 진무(振武)땅을 경유하여 회골(廻鶻)국에 들어가 유행(遊行)하게 되었다. 그 동안 모래사막의 이역 땅에서 두루 산천을 밟고 지나갔으며, 더위와 추위가 오고 갔으나, 임금에 대한 충성과 불법을 잘 받들었다. 약 2주년이 되어갈 무렵에 태원으로 돌아왔다. 이때가 곧 정원 8년(792) 3월이었다. 그 달 8일에 공첩(公牒 : 公文)이 내려와서 4월 상순에 상도(上都 : 서울)로 돌아왔다. 이에 칙사(勅使)를 보내 위문하고, 자색(紫色)의 가사를 하사하였으며, 예천사(醴泉寺)의 옛 사원에 돌아가 편안하게 쉬게 하였다.
여기서 내가 서술한 것은, 대략 그 사유만을 들어 말한 것이니,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자세한 내용은 『반야삼장속역도기(般若三藏續譯圖紀)』에 실려 있는 내용과 같다.
이상의 내용을 논평해 본다면, 불법이 동방으로 흘러 들어오면서부터, 고승들이 뒤를 이어 이 땅을 찾아와 함께 번역하여 전한 것이 첫 번째 업적이며 최고의 업적이고, 뜻을 풀이하고 현오한 이치를 참구[參]하여, 소(䟽)ㆍ기(記)를 전해하고 천양한 일이 그 다음 업적인데, 지금 여기서 말한 반야삼장이 바로 그 사람이다. 이른바 그는 스승을 찾아서 인도로 갔으며, 배움은 오명(五明)65)을 궁구하였고, 멀리 끝없이 넓은 바다[滄波]를 건너서 삼장을 유통시켰다. 동ㆍ서ㆍ남ㆍ북을 돌아다닌 발자취는 표주박과 오이[瓠瓜]에 비교할 바가 아니다. 그는 어찌 오직 석씨(釋氏)의 진정한 승려일 뿐이었겠는가? 또한 응당 초빙해야할 상사(上士 : 菩薩)이기도 하다. - 038_0001_a_01L大唐貞元續開元釋教錄卷上甲戌歲西明寺翻經臨壇沙門 圓照 集上四朝應制所翻經論及念誦法,幷修疏記碑表錄集等,摠三百四十三卷,幷目錄三百四十五卷。一百九十三卷經論及念誦法,六十四卷經論疏義,八十六卷貞元新集古今制令碑表記 幷目八十九卷一百六十二卷經論及念誦法。玄宗朝金剛智三藏,贈開府儀同三司,謚大弘教三藏和上,所翻譯經已入目者摠一部四卷。所謂金剛頂瑜伽中略出念誦法四卷亦云經。 八十一紙。右已編入開元釋教錄,不入今計中,玄宗朝所翻經遺漏未入古今錄者,摠五部六卷。大威力烏樞瑟摩明王經三卷 三十五紙穢迹金剛說神通大滿陁羅尼法術靈要門一卷 五紙。穢迹金剛法禁百變法一卷 三紙。右件三部共五卷,竝北天竺國三藏沙門阿質達霰,唐言無能勝將譯。普遍智藏般若波羅蜜多心經一卷二紙。右開元二十六年,東天竺國三藏沙門法月譯,沙門利言譯梵語筆受。今見在光宅寺,翰林待詔。其經本或有寄入般若經部,龍字號帙中。金剛頂經瑜伽脩習毘盧遮那三摩地法一卷一十五紙。千手千眼觀世音菩薩大身呪本一卷二紙。千手千眼觀自在菩薩廣大圓滿無㝵大悲心陁羅尼呪本一卷 三紙。不動使者陁羅尼秘蜜法一卷一十一紙。右四部共四卷,南天竺國三藏 沙門跋日囉菩提唐言金剛智譯沙門智藏筆受,智藏後從號改 名阿目佉跋折羅唐言不空金剛或單名不空,其有智藏筆受者,竝編入大曆目中,金剛智三藏開元二十九年八月十五日,卒於東都廣福寺,廣如行記及塔銘中明矣。右已上八部共同爲一帙十卷。代宗朝大曆中,特進試鴻臚卿大廣智不空三藏奏玄宗、 肅宗、 今上以來三朝所翻經,摠七十七部,共一百一卷,幷都目一卷。金剛頂瑜伽眞實大教王經三卷 四十三紙。金剛頂瑜伽般若理趣經一卷 八紙。觀自在菩薩授記經一卷 十三紙。瑜伽念珠經一卷 二紙。奇特佛頂經三卷 六十八紙。觀自在菩薩最勝明王心經一卷 二十二紙右六部共十一卷,同第一帙。金剛頂瑜伽文殊師利菩薩經一卷 二紙。阿唎多羅阿魯力經一卷 二十一紙。普賢行願讚一卷 五紙。地藏菩薩問法身讚一卷 五紙。出生無邊門經一卷 十紙。大吉祥天女經一卷 七紙。底哩三昧耶經一卷 十四紙。十一面觀自在菩薩經三卷 二十四紙。右八部共十卷,同第二帙。吉祥天女十二名號經一卷 二紙。金剛頂瑜伽十八會指歸一卷 九紙。金剛頂瑜伽三十七尊分別聖位法門一卷 幷序 十三紙菩提場所說一字頂輪王經五卷七十八紙。寶篋經一卷 六紙。金剛壽命陁羅尼經一卷 二紙。右六部共十卷,同第三帙。大孔雀明王經三卷 五十紙。大雲請雨經二卷 十四紙。雨寶陁羅尼經一卷 五紙。蘘麌利童女經一卷 四紙。稻𦼮喩經一卷 八紙。大寶廣博樓閣經三卷 四十五紙。右六部共十一卷,同第四帙。菩提場莊嚴經一卷 二十二紙。除一切疾病陁羅尼經一卷 一紙。能淨一切眼陁羅尼經一卷 二紙。施焰口餓鬼陁羅尼經一卷 四紙。三十五佛名經一卷 二紙。八大菩薩曼茶羅經一卷 三紙。葉衣觀自在菩薩陁羅尼經一卷 八紙。訶利帝母經一卷 三紙。毘沙門天王經一卷 四紙。觀自在菩薩說普賢陁羅尼經一卷七紙。右十部共十卷,同第五帙。文殊問字母品經一卷題云文殊問字母品第十四三紙。金剛頂蓮花部心念誦法一卷 三十三紙。金剛頂瑜伽千手千眼觀自在念誦法一卷二十八紙。無量壽如來念誦儀軌一卷 十二紙。阿閦如來念誦法一卷 十紙。佛頂尊勝念誦法一卷 八紙。金剛頂勝初瑜伽普賢菩薩念誦法一卷十三紙。金剛王菩薩念誦法一卷 十二紙。普賢金剛薩埵念誦法一卷 十二紙。金剛頂瑜伽五秘密修行儀軌一卷十二紙。右十部共十卷,同第六帙。金剛壽命念誦法一卷 三紙。一字頂輪王瑜伽經一卷 六紙。一字佛頂輪王念誦儀軌一卷 十二紙。仁王般若念誦法一卷 十五紙。如意輪念誦法一卷 八紙。大虛空藏菩薩念誦法一卷 五紙。瑜伽蓮花部念誦法一卷 七紙。聖觀自在菩薩心眞言觀行儀軌一卷六紙。觀自在多羅瑜伽念誦法一卷 十三紙。甘露軍咤利瑜伽念誦法一卷 十八紙。右十部共十卷,同第七帙。花嚴入法界品四十二字觀門一卷 六紙。文殊讚法身禮一卷 三紙。受菩提心戒儀一卷 三紙。金剛頂瑜伽三十七尊禮一卷 四紙。般若理趣經釋二卷 三十二紙。大曼茶羅十七尊釋一卷 三紙。金剛頂瑜伽護摩儀一卷 八紙。都部陁羅尼目一卷 四紙。大乘緣生論一卷 十紙。七俱胝佛母陁羅尼經一卷 十九紙。右十部共十一卷,同第八帙。大虛空藏菩薩所問經八卷 一百七紙。右一部共八卷,同第九帙。仁王經二卷 幷序御製 三十五紙。密嚴經三卷 幷序御製 五十一紙。仁王念誦儀軌一卷 十九紙。仁王經疏三卷 此疏迴入在下疏記帙中計右特進試鴻臚卿三藏沙門大廣智不空奏:‘爰自幼年,承事先師大弘教三藏和上,二十有四載,稟受瑜伽法門。後遊五天,尋求所未受者,幷諸經論,更重學習。凡得梵本瑜伽眞言經論五百餘部,奉爲國家,詳譯聖言,廣崇福祐。天寶五載卻至上都奉玄宗皇帝恩命,於內建立灌頂道場,所齎梵經盡許翻譯。及肅宗皇帝配天繼聖,特奉綸旨,於內道場,建立護摩及灌頂法。又爲國譯經助宣皇化,累奉二聖恩勅,先代三藏所有梵文,竝使搜訪。其中有縚索脫落,便令修補,其有未經翻者續譯奏聞:伏惟陛下,纘承 皇運,大庇含靈,廣闢福田。重明日月,恩波遠被,法雨分流,四海宅心,萬方興載。是知佛之付囑,允在聖君,不空叨承渥澤,榮幸實深,切自思之。知何報國?先奉先皇聖制命闡微言,又承陛下恩命,恭遵遺旨,再遣翻譯,利濟群生,雖復四時精懇,未酬萬一。是以區區於日夕,詳譯眞言及大乘經典,冀效涓微,上資皇道。其所譯金剛頂瑜伽法門,是成佛速疾之路。其修行者,必能頓超凡境,達于彼岸,餘部眞言諸佛方便,其徒不一,所譯諸大乘經典,皆是上資邦國,息滅災危,星辰不愆,風雨順敍,仰恃佛力,輔成國家。纂集前後所翻譯訖者,自開元至今大曆六年。凡一百一卷,七十七部,幷目一卷及題,筆受僧俗名字,繕寫已訖,謹因降誕之辰,謹具進奉,庶得眞言福祐,長護聖躬,大乘威力,永康國界。未翻梵本經中,但有護持於國,福潤生靈者,續譯奏聞,不勝虔誠之至。’勅旨依奏,仍宣付中外,竝編入一切經目錄,大曆七年正月十六日。司徒兼中書令臣子儀宣,中書侍郞平章事臣元載奉,中書舍人奉勅旨,如右牒到奉行,大曆七年正月十日。侍中門下侍郞平章事王縉,給事中,祠部 牒大廣智不空三藏,牒奉 勅,如右牒至准 勅故牒。大曆七年二月九日,今史皇甫全,牒 主事劉意,判官員外郞王遂。昔去大曆六年十月十二日,特進試鴻臚卿三藏沙門大廣智不空上表,至其月二十二日,中使李憲誠奉宣勅旨,賜不空三藏錦綵絹等,共八百疋,同翻經十大德,各賜綵三十匹。時,大德明日謝聞:‘沙門潛眞等言。伏奉今月二十二日,中使李憲誠至奉宣聖旨,翻經十大德,各賜綵三十疋者。潛眞聞,垂教者法王,王三界而示迹;行教者人主,主四海而流傳,非法王,無以開四句之文;非人主,無以闡一乘之理。伏惟寶應元聖文武皇帝陛下,道合天地,恩加草木,轉輪馭極,灌頂稱尊。運慈悲方便之門,當付囑弘宣之位。然所譯仁王、虛空藏、密嚴等八十部經者,竝圓音至教,寶界眞詮,無去無來,卽身爲常住之身;不滅不生,諸佛是自心之佛。指虛空爲庫藏,現色相而莊嚴;演瑜伽之無窮,知眞言而不竭。自非才行兼美定慧俱融,安能發揚幽微,弘宣秘奧?大廣智不空三藏和上,言善兩方,行通三密。得淨滿如來加持之力,奉寶應明主弘護之緣。由是理義昭彰,文句炳煥。潛眞等靈山細塵,祇樹小葉,識知荒鄙,學藝庸淺,幸蒙天睠,濫在翻經。承聖力而俯被,得讚潤而修畢。雖曰愚瞽,猶知慶慰,況上契天慈?許宣中外,仍錫縑綵,以光愚拙,凡在法門,不勝慶幸,無任戴荷,殊常之至,謹附中使李憲誠,奉表陳謝以聞,謹言。大曆六年十月二十三日,翻譯經大德大興善寺上座沙門潛眞等上表。’寶應元聖文武皇帝批曰:‘師等,道行精深,智識弘遠,三乘奧旨,千葉遺編,翻譯流行,利濟家國,薄申錫命,煩至謝恩。’時,大曆六年十月十二日,上表陳請入目。時,寶應元聖文武皇帝,省表具悉,宣付如前。爲重 師資,而荅表曰:‘ 和尚夙事 先朝,弘闡妙教,演茲貝葉,廣示迷津。朕嗣纘丕圖,恭承睿旨,和尚再加詳譯,今卷軸續畢,永濟生靈,深可嘉歎!其所譯經,宜宣付中外,入一切經目錄。’時,大廣智不空三藏,旣荷墨制,又宣付流行,踊躍屛營,陳表奉謝。文曰:‘沙門不空言。中使李憲誠,奉宣 聖旨,送新翻經目錄。勅一道。荅進經表,勅一道。特令中外施行,仍入一切經目錄。捧戴忻躍,喜荷無任,誠懼誠悚,再歎再愧。伏惟:陛下承法王之付囑,滿人心之志願,持普賢之密印,行天子之正教。浹辰之際,朗慧日於八方;在於頃刻,注 洪澤于萬物。斯乃普 天幸甚,而況在不空者焉?然不空所翻聖典,四十餘年。三朝已來贊修功德,志在宣傳。上資王室,下潤生靈,豈意夙心一朝願滿?聖恩廣大,累劫難酬,況更特許翻譯所是未翻梵本?倍增悲喜,敢罄竭心力,承奉聖旨,續譯進奉。不勝歡悚懷恩之至,謹因中使李憲誠,奉表以聞,沙門不空誠喜誠愧。謹言。大曆七年正月二十七日,特進試鴻臚卿三藏沙門大廣智不空上表。’寶應元聖文武皇帝批曰:‘和尚夂證菩提,入佛知見。所翻經論,皆洞精微。爰命施行,式傳慧照,頒示寰宇,廣濟含靈,未光慈航,煩至陳謝也,’旣表謝訖,又奉綸言,翻譯大聖文殊佛剎,精勤不息,卷軸又成,陳表進上。大聖文殊師利菩薩佛剎功德莊嚴經一部三卷 五十一紙。‘右不空先奉 綸旨,令譯此經。天恩曲臨,竝已成辦,參挍唐梵,詳定言音,年月處所,筆受證義,僧俗之名。咸題卷中,文殊事迹,緣起根由,始于發心,至成正覺,莊嚴淨土,此經具載。諸佛理體,菩薩行門,法界有情,無生實相,分明表示,功德廣大,餘經罕儔,願此勝因,上資聖祚,伏乞宣示寰宇,以福生靈,特望天恩,所是新置文殊院。大寺七僧,小寺三僧,於文殊院中,長時爲國講宣誦習,有闕續塡,是使法燈繼明不絕,靈神庶類孰不歡心?幸因輪王降誕之辰,天人喜賀同歡之日,冀茲景福上益壽山。願以法流添於聖海,謹隨狀陳進以聞。如天恩允許,請降。’ 墨勅依。大曆八年十月十三日,特進試鴻臚卿三藏沙門大廣智不空上表,其月日也。三藏和尚在內道場,勅賜三藏和尚錦綵絹等,共七百匹,同翻譯經大德潛眞等十人,各賜錦綵三十疋。充䞋成就妙法蓮花經王瑜伽觀智儀軌一卷二十五紙右通前仁王密嚴等經,摠五部共十卷,同第十帙。新翻譯仁王護國經者,昔永泰元年狀請也。仁王經望依梵夾,再譯舊文。‘右興善寺三藏沙門不空奏:伏以,如來妙旨慧洽生靈,仁王寶經義崇護國,前代所譯理未融通,潤色微言事歸明聖。伏惟,寶應元聖文武皇帝陛下,睿文啓運,濬哲乘時,弘闡眞言,宣揚像教。皇風遠振,佛日再明,每爲黎元,俾開講誦。其仁王經望依梵夾,再譯舊文。貝葉之言永無漏略,金口所說更益詳明。仍請僧懷感、飛錫、子鄰、建宗、歸性、義崇、道液、良賁、潛眞、 應眞、慧靈、法崇、超悟、 慧靜、 圓寂、 道休等,於內道場,共翻譯。福資聖代澤及含靈,寇盜永淸,寰區允穆,傳之曠劫。救護實深。’中書門下 牒祠部,牒奉 勅宜依牒至准 勅故牒,永泰元年四月二日牒中書侍郞同平章事杜鴻漸,中書侍郞同平章事元載,黃門侍郞同平章事王縉,檢校侍中李使,檢校右僕射平章事使,檢挍左僕射平章事使,中書令郭子儀使。尚書祠部仁王經望依梵夾,再譯舊文。興善寺沙門不空牒奉中書門下 勅牒,如右牒至唯勅故牒, 永泰元年四月四日,令史張濟, 牒 主事楊獻, 郞中崔漪恩旨頒下。爰命京城義學大德良賁等,翰林學士常衮等,於大明宮南桃園,詳譯仁王,幷校定密嚴等經,至四月十五日譯畢進上。聖慈製序題在經初,披閱內宮,未宣中外。時,京城大德翹想甘露,如渴思漿。錄表上陳。乃爲詞曰:‘沙門乘如等言。乘如聞,日月行於六合,求照者昆蟲;雨露垂於九霄,希潤者草木。所謂覆載不閒,亭育無私,則蚊蚋可逸於長風,蛙蠅可游於滄海者也。伏惟,寶應元聖文武皇帝陛下,慶承塵劫,信植河沙,威懾魔界,聲流佛剎。以寶位之重,崇寶偈之微;以 金輪之尊,騰金口之教。百王千帝,曷可同年而語哉?乘如等幸逢昌運,叨寓玄門,常思諷誦,以荅 皇澤。伏承,頃有恩旨,請不空三藏及義學沙門等,再譯仁王般若波羅蜜多經。教理兼著,性相周圓,緘在龍宮,末頒鹿苑。僧等昧死,敢以請聞。伏願:天慈示之法寶,兼欲依經,請百法師,置百高座,同宣句味,共殄妖氛。愚誠則然,裁惟聖旨,無任慊款翹渴之至。謹詣右銀臺門,奉表陳請以聞。輕冒 天威,伏深戰越。謹言。永泰元年八月八日,大安國寺上座臨壇大德沙門乘如等上表。’寶應元聖文武皇帝批荅曰:‘仁王眞經理精義邃,化流賢劫福利蒼生。師等咸願敷陳助寧國土。所請開講者,依時有恩旨,取二十三日,於資聖、西明兩寺,共置百座,請百法師,講仁王經,及百大德,轉密嚴等,香花飮食鼓樂絃歌。竝出有司不得闕乏。’時屬秋雨霖霪不休,所司奏聞請更延日。奉進止兩寺百座,先令二十三日迎經,爲霖雨宜改,至二十六日迎經開講。其諸司供料著人計會,准改日造。 永泰元年八月二十二日,左監門衛將軍知省事劉淸潭宣改期,甫至天雨未晴。 恩旨又延九月一日。是日也。兩街大德,嚴潔幡花幢蓋寶車,太常音樂,梨園仗內,及兩教坊,詣銀臺門,百戲繁奏。時觀軍容使兼處置神策軍兵馬事,開府儀同三司兼左監門衛大將軍,知內侍省事,內飛龍廏弓箭等使,上柱國馮翊郡開國公魚朝恩,與六軍使陳天,龍衆八部鬼神,護送新經,出於大內。其經適出,彩雲浮空,郁郁紛紛,昭彰異瑞。洎乎己午,兩寺開經,萬姓歡心,祥雲方隱,緇素瞻仰,獲慶非常。三藏不空上表謝曰:‘沙門不空言。不空道乏前修,學虧曩哲,猥承綸詔,翻譯眞經,若履春冰,猶臨泉谷。伏惟, 陛下撥開慧日,布蔭慈雲。 睿思風飛,龍章玉潤。躬爲序述昭煥大千,流法雨於九天,樹勝幢於百座。威儀容止,宛釋迦之下鷲夆;士庶騈闐,猶波斯之詣王舍。慶雲呈瑞,喜氣浮空。足表大階之平,自叶無疆之祐。不勝戴荷之至,謹奉表陳。賀以聞。沙門不空誠歡誠喜。謹言。永泰元年九月二日大興善寺三藏沙門不空上表。’寶應元聖文武皇帝荅曰:‘和尚遠自蓮宮,親緘貝葉,敷演玄教利濟蒼生。翻譯旣成,天人合會。朗三秋之霽景,開五色之祥雲。闡揚眞乘,符契妙理。頃因指喩早結師資,睹此感通彌深頂敬。’時左右六軍使,睹此慶雲,亦陳表奉賀。詞曰:‘臣仙智等言。昨日迎新譯仁王護國般若波羅蜜多經。伏有慶雲應現,瑞呈五色彩散一天。抱慧日而逾鮮,順祥風而表聖。伏惟,陛下以大道賴物,以至德臨邦。精誠感神靈應斯降臣等職忝侍衛久沐淳風,親睹禎祥,無任慶幸。謹詣右銀臺門,奉表陳賀以聞。臣仙智等誠惶誠恐,頓首頓首。謹言。永泰元年九月二日特進右龍武軍大將軍知軍事上柱國徐國公臣劉仙智等上表。’寶應元聖文武皇帝荅曰:‘不二之門早傳秘藏,重宣其義庶廣其言。將敷貝棄之文,用啓蓮宮之會。天浮瑞色,日麗慶雲。現以神通,彰其瑞應和平之兆。慶慰同懷,所賀知爾。’從是初日至白月終,兩上講經,二時行道。飮食茶藥竝出有司,六律五聲晝夜不絕,至十六日,西明散齋,鼓樂絃歌 百戲彌日。西明講終,陳表奉賀。詞曰:‘西明寺上座沙門懷感等言。特奉恩命,令開百座,講仁王護國般若經。以今日經周設齋慶畢,凡是生靈不勝抃躍。伏惟,陛下再造天地,明齊日月。垂衣之睱重譯眞經,聖心佛心同歸一理。唐言、梵語不隔殊方。貫花之偈備聞,傳燈之僧可睹。金繩之界彌勒下生,玉京之中輪王出現。秋天麗景,稼穡將成,彩雲浮空,祅氣必盡。吾君至聖,佛力至慈。法潤恒沙,天下幸甚。懷感等忝棲祇樹,喜躍無涯,稽首焚香,何階上荅?其功德數別狀封進。謹奉表陳謝以聞。誠歡誠喜。謹言。永泰元年九月十五日西明寺上座沙門懷感等表進。’寶應元聖文武皇帝荅曰:‘師等演暢眞經弘宣妙旨,用滋仁壽拯護生靈,法會旣終當同慶也。’時僕固懷恩,背逆天恩,遠自靈武合聚蕃醜,馮淩涇陽。西明百座大德法師,同赴資聖奉勅,應先西明寺百座法師大德竝赴資聖寺佛殿,爲國傳經行道,其資聖寺百座法師良賁等五十座,依前講說仁王般若護國、密嚴等經,普及蒼生。其京城諸寺觀僧道等,竝二時於當處轉經行道,仍令三綱差了事僧專知檢校。務在精修,不在疏怠。李元琮、賈明觀等,專知句當。永泰元年九月十七日,高品李希逸宣。爾時,兩街大德,百座法師,准勅咸皆萃資聖寺,二時講唱兩上轉經行道。午時及與日暮,供設音樂,無易於初。夜後悉集大講堂內,擧衆齊聲稱念摩訶般若波羅蜜多。爲國爲家,願無憂懼。京城寺觀轉念亦然。時制使關內河中副元帥司徒兼中書令上柱國汾陽郡王郭子儀杖莭出師,親摠戎律發于帝里。洎彼涇陽,馮恃天威,顂茲經力,兩軍交對列陣相望。鉦鼓發聲,劍戟如雪。時汾陽王單騎直出,挺立軍前,感激一言。懷恩屛退,西戎北狄各自相攻,浹旬之閒王國大定。是知仁王護國般若眞經,聖心佛心,子育萬姓,其義一也。然後收軍整律,振旅還京,親對天顏,特蒙賜賚。勅資聖寺百座道場,取閏十月二十二日,設無遮齋,以成慶散。是日也,寺南門外,陳布道場,盡正一坊東西街內,弈幕雲布,幡花麗天,尊容煥然光照人里。飯僧旣畢,六樂爭陳,百戲充盈,歌吹盡日。京城大德各䞋三十,不空三藏賜九百疋,絹帛錦綵,以充數焉。侍者小僧各五十疋,又特降恩旨,賜資聖講堂名,爲永泰善法之堂。此卽萬古千秋法門故事也。自蕃戎入境,夜集僧徒,共念摩訶般若波羅蜜,多於此堂內。未盈累月,果得淸平。此乃聖力經威,感斯福應。翻經百座,賜賚珍財,自佛法東流,莫上於茲日也。至十一月一日,恩旨荐臻,勅不空三藏和上,故金剛三藏,天資秀異,氣稟沖和。識洞四生,心依六度。爰自西域杖錫東來,以梵行周身,慈心濟物,覺花外照,智炬內明,汲引群迷,證通圓寂,密傳法印,示隱涅槃,衣鉢空存,音徽長往,教能垂後,禮有飾終,宜旌美名,俾叶榮贈,可贈開府儀同三司,仍賜號大弘教三藏。同日又降鴻恩再及,勅不空三藏,蓮宮釋種,香界導師。性表眞如,學精秘藏,承紺園之妙旨,開示四依:譯金口之微言,津梁六趣。身持梵夾,遠涉流沙,傳燈益明,甘露溥潤。散慈雲於火宅,揚慧日於幽塗。頃者躬問勝因,弘旨方便,永決疑網,滋予智芽。雖出塵之心,齊謝於名位;而襃崇之典,式旌於賢哲。俾應嘉命,用叶朝章,可特進試鴻臚卿,仍賜號大廣智不空三藏。伏以母以子貴俗禮恒規,師因弟榮釋門罕有。恭受榮命,喜懼感懷,捧戴屛營,陳表謝曰:‘三藏沙門不空言。奉今月一日制錫,故大和上金剛三藏,可賜開府儀同三司,仍贈號大弘教三藏。不空特進試鴻臚卿,仍贈號大廣智不空三藏。一雨自天潤流根葉,圓毫發豔,照及幽明,捧戴傍偟,悲喜交集。不空誠歡誠喜,以悽以懼。不空聞,十號者表德之殊稱,九卿者象河之重位。故大和上道洽傳燈,誠以彰其遺烈,不空門慚紹搆,虛竝荷於鴻私,猶燕石之混光,同齊竽之濫吹。榮兼存歿,寵及師資。祗奉兢驚,瞻言靦恧,況出家落彩,本忘榮辱!潔誠報國,僧者通規。陛下,廣運金輪,曲收瓦礫,引安樿於中禁,旌襃崇之殊禮。雖負山無力,而踐迹近賓,虧高謝之法流,點少欲之淸躅。是以面奏三讓,言煩九重。冀殷鑑於懇誠,豈礭然之不拔?羊車稚子,慚廣智而茫然,鹿苑卑材,愧鴻臚而甚矣。無任感戴之至,謹奉表陳謝以聞。沙門不空誠歡誠恐。謹言。永泰元年十一月五日,特進試鴻臚卿大廣智不空三藏,大興善寺沙門不空表進。’寶應元聖文武皇帝荅曰:‘和上道秘雙林,功超正覺,遠從天竺來布眞言,頃得歸依親承付囑。襃崇之典禮秩攸先,俾增印綬之榮,式重師資之敬。兼申寵贈,庶表追榮也。’自譯仁王眞經,洎請編入目錄。爰進文殊佛剎功德莊嚴經,逮于薨年。翻經如後。金剛頂勝初瑜伽經中略出大樂金剛薩埵念誦儀軌一卷十一紙。大樂金剛薩埵修行成就儀軌一卷十五紙。大藥叉女歡喜母幷愛子成就法一卷十二紙。普遍光明大隨求陁羅尼經二卷三十二紙。金剛頂超勝三界經說文殊五字眞言勝相一卷 三紙。五字陁羅尼頌一卷 八紙。聖閻曼德迦威怒王立成,大神驗念誦法一卷 八紙。文殊師利菩薩根本大教王金翅鳥王品一卷 一紙不空羂索毘盧遮那佛大灌頂光眞言一卷 二紙。右九部、共十卷經法同第十一帙。聖迦抳忿怒金剛童子菩薩成就儀軌經三卷 四十八紙。大威怒烏芻澀摩成就儀軌一卷十紙。佛說摩利支天經一卷四紙。金剛頂經一字頂輪王成佛儀軌一卷八紙。佛爲優塡王說王法政論經一卷九紙。大方廣如來藏經一卷十八紙。佛說一髻尊陁羅尼經一卷十四紙。速疾立驗摩醯首羅天說迦婁羅阿尾奢法一卷 六紙。右八部經法共十卷同第十二帙。大日經略攝念誦隨行法一卷 亦名五支略念誦要行法 二紙大毘盧遮那成佛神變加持經略示七支念誦隨行法一卷 三紙。木槵經一卷 一紙。文殊五字念誦法一卷題 云 金 剛 頂 經 瑜 伽 文 殊 師利 菩 薩 儀 軌 供 養 法 一 品七紙。幷有梵字。 十四紙。曼殊室利童子菩薩五字瑜伽法一卷幷梵字。 二紙。金剛頂降三世大儀軌一卷 亦名觀自在心眞言一切如來蓮花大曼茶羅品四紙。文殊師利菩薩及諸仙所說吉凶時日善惡宿曜經二卷 上卷前譯下卷後譯有序共四十紙金剛頂經觀自在王如來修行法一卷六紙。金剛頂瑜伽中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論一卷亦名瑜伽摠持教門說菩提心觀行修持義。七紙。右九部經論法共十卷同第十三帙。瑜伽金剛頂經釋字母品一卷二紙。修習般若波羅蜜菩薩觀行念誦儀一卷七紙。仁王般若陁羅尼釋一卷。七紙。成就大悲觀自在蓮花部瑜伽念誦法門一卷亦名觀自在大悲成就瑜伽。 十二紙。大孔雀明王畫像壇場儀軌一卷四紙餘。金剛手光明灌頂經最勝立印聖無動尊大威怒王念誦儀軌法品一卷十一紙。末利支提婆花鬘經一卷十一紙。大聖天歡喜雙身毘那夜迦法一卷三紙。觀自在菩薩如意輪瑜伽一卷九紙。金輪王佛頂略念誦法一卷三紙。金剛頂瑜伽降三世成就極深密門一卷三紙。右十一部經法共十一卷,同第十四帙。大廣智不空三藏和上,本諱智藏,號不空金剛。梵云阿目佉跋折羅,本西域人也。昔事大弘教金剛智三藏和上,稟受眞言。二十四年樞衣請益。大師歿後還詣五天。梵本瑜伽備皆披閱。周遊徧覽旋赴帝京。或化河西,或居嶺表,或居閞內,或處王宮。翻譯眞經不遑寢食。屬天寶末載,胡馬入閞,至德二年剋復京洛。和上親承聖旨,爲灌頂師。 妃主降階,六宮羅拜,三朝寵遇,恒建道場,詳考幽微,卷不釋手。內宮譯者隨竟上聞。或已宣行,或留中禁。其已得者,具錄如前。其未獲者,一心求訪耳。和上精勤不怠,多歷歲時,洎大曆九年,示有微疾。制使勞問,天降名醫,鍼藥相仍,曉夕繼至,疾將未損,宸極不安。天慈曲臨,錫以官封。勅:‘大道之行,同合於異相。王者至理,摠歸於正法。方化城之齊致,何儒釋之殊途?故前代帝王罔不崇奉,法教弘闡與時偕行。特進試鴻臚卿大興善寺三藏沙門大廣智不空,我之宗師,人之舟楫。超悟三學,坐離於見取,修持萬行;常示於化滅,執律捨縛。護戒爲儀。繼明善教之志,來受人王之請。朕往在先朝,早聞道要。及當付囑,常所歸依。每執經內殿,開法前席。馮几同膠序之禮,順風比崆峒之問。而妙音圓演,密行內持。待扣如說,自涯皆晤。滌除昏妄,調伏魔冤。天人洗心於度門,龍鬼受職於神印。固以氣消災厲,福致吉祥。實惟弘我之多,寧止利吾之美?嘗有命祑,用申優禮,而得師爲盛,味道滋深,思復强名,載明前志。夫妙界有莊嚴之土,內品有果地之殊。本乎尚德,敬順時典,可開府儀同三司,仍封肅國公,食邑三千戶,餘如故。大曆九年六月十一日。’三藏和上再蒙 恩寵,官封增新。然氣力轉微無由謁見,至十五日修表上辭。其文曰:‘沙門不空言。不空幼事先師,已過二紀。早承天澤三十餘年,演瑜伽之法門,奉累聖之恩眄。自從陛下臨御殊私轉深,賜黃閤以宴居,降紫微而問道。積恩重疊日月相繼,雖復精懇,豈酬萬一?而露電難駐,蒲柳易衰。一從伏枕自春徂夏,陛下深睠,存問再三。中使名醫相望道路。但以膏肓之病,雖鍼藥而難生。生滅之資,寧戀惜而能固?忽從昨夜已來,頓覺氣力彌惙,身非己有,瞬息奄奄,心神浸微。違謝聖朝不任戀慕。不空今者年過中壽,未爲夭逝。但以往時越度南海周遊五天,尋其未聞,習其未解。所待金剛頂瑜伽十萬頌,諸部眞言及經論等,五十餘萬頌,冀摠翻譯少荅國恩。何夙願之未終,忽生涯之已盡?此不空所以爲恨也。伏惟陛下,降諸佛之慈慧,下從人之所願。不空先進大聖文殊佛剎經,聖情尋許頒示中外。伏願哀愍念臨終之言,冀福皇家滋吉祥之萬劫。實爲僧人生死榮幸。五鈷金剛鈴杵先師所傳,幷銀盤子、菩提子、水精念珠,幷合子,竝謹隨表進奉。臨紙涕泣,悲淚交流,永辭聖代,不勝戀慕之至。謹附監使李憲誠奉表陳辭以聞。沙門不空誠悲誠戀。謹言。大曆九年六月十五日開府儀同三司肅國公三藏沙門大廣智不空上表。’寶應元聖文武皇帝荅曰:‘和上行登十地,來自五天,敷演瑜伽宣流梵夾,周遊萬里,踐歷三朝,光譯聖言,親承師受。當下武之興運,繼前薪之火傳,而弘菩薩心,爲衆生病彌留有問,震悼增深,宜依所請也。’爾時,開府儀同三司試鴻臚卿肅國公大廣智不空三藏和上表陳情。聖恩垂涕,墨制旋降,所請皆依。和上情禮獲申,一心觀行,右脅累足,怗然而薨。弟子號踊,中使奏聞。聖上震悼,殊深輟朝三日,爰降中使,詣于僧藍,宣慰衆徒,乃錫賻贈絹三百疋,布三百端,白米粳米各五車,白麪亦爾。柴十車,油七石,炭三車,竝如京宣索,如無准,無奏,來當別支送。至其月二十八日,勅內侍韋守宗,送絹七百五十二疋,充先師造靈塔直。洎十月五日追贈司空, 聖睠殊深,又錫謚號。勅:‘寂滅爲樂,所以歸於眞;付囑有緣。所以尊其稱。循其故事,其或强名。故開府儀同三司試鴻臚卿肅國公大興善寺三藏大廣智不空,德盛道高,朕所師仰,心密法印,行超度門,精微有說,廣大無相。一雨之潤,溥洽於群生;百燈所傳,遍明於正覺。傍達義趣,博通儒玄。聖人之情合若符契,朕順風前席,積有歲年?慈航不留,梁木其壞,徽音永隔,震悼殊深,論道之官,追嚴師禮,仍加謚號,用副名實,可贈司空,仍謚大辯正廣智不空三藏和上。’洎六日癸卯,陳設葬儀,遷神城南,茶毘供養。皇帝遣內給事劉仙鶴,以香茶之奠。敬祭故大辯正廣智三藏和上之靈。‘惟靈,智識明晤,天資聰達,夙殖梵行,生知勝因,挺秀五天,周遊萬里,心蘊海藏,音通華戎,貝葉傳經,瑜伽演教,弘利兆庶,出入三朝,道在不言,理均無迹,涅槃常寂,至聖同歸,焚香澡身,與化而盡,朕頃承了義,禮具師資,永訣之辰,攸深震慟,香茶之奠,有靈照之。’是日也,宰臣中貴神策六軍御史大夫京兆大尹,尚書僕射侍郞列卿,諸衛將軍,各申奠祭,其餘緇素不可具陳。七日平晨又陳表謝。‘草土沙門惠朗等言。昨六日先師茶毘之夕,聖慈哀悼追贈司空,仍謚號大辯正廣智不空三藏和上。照宣國禮,寵光神道,三公之贈有越舊章,和上之稱先經未載。是知高天之澤,浸江海而無涯;幽途之靈,蒙日月而下照。凡日弟子數千衆人,悲感聖恩,無任戴荷,謹附中使李憲誠,奉表陳謝以聞。沙門慧朗等誠惶誠愧。謹言。大曆九年七月七日,大興善寺草土沙門慧朗等表上。’寶應元聖文武皇帝批曰:‘和上發迹五天,周遊萬里,宣演正法,拯悟生靈,涅槃歸常,考行崇謚,禮經斯在,煩以謝恩。’同日又奉勅語僧慧朗等:‘專知檢校院事,兼及教授後學,一尊一契有次第者聞奏。’其日又奉勅語僧慧勝:‘和上在日阿師子偏得意旨,今聞於塔所,焚香火守護。先於和上邊受得普賢念誦法,與朕同尊,努力進修三年滿後,卽來對朕與商量本尊法。所請任依。’是時也火滅已後,收得遺身,髏頂等中,皆有舍利,光明瑩淨,皎若琉璃,具以上聞。聖情哀悼,內宮稽首置在道場。至十五日,又勅句當京城諸寺觀修功德使開府儀同三司右龍武軍大將軍知軍事上柱國涼國公李元琮,故大辯正廣智不空三藏和上,塔所修造,宜令且停,別擇好地起修,洎八月二十八日。又勅語元琮,故大辯正三藏茶毘得舍利,令於當寺院,造舍利塔三,造塔畢,建立豐碑。銀靑光祿大夫御史大夫上柱國馮翊縣開國公嚴郢撰文,銀靑光祿大夫彭王傳上柱國會稽郡開國公徐浩書字。論曰:自古高僧碩德寵遇殊恩,生時則榮,歿則已矣。今大辯正三藏和上,則不如是。生承恩渥歷事三朝,授以列卿,品加特進。及臥疾也,勞問相仍,中使名醫晨夕相繼,特加開府封肅國公。洎乎薨焉,上彌震悼,輟朝三日,錫贈增優,授以司空,謚大辯正,仍號和上,先古未聞。城外茶毘,寺中起塔,不日不月悉成就焉。兼樹豐碑紀其德行,冠絕今古,首出僧倫。亞相作文,王傅書字,斯乃萬代不朽也。此之所述略擧大綱,若欲具知,備如贈司空大辯正廣智三藏表制集中廣說。今上聖神文武皇帝朝所翻經。大乘理趣六波羅蜜多經十卷一百六十紙。大花嚴長者問佛那羅延力經一卷二紙。般若波羅蜜多心經一卷 二紙。右三部經,共十二卷同一帙。般若三藏續翻譯經圖紀曰:‘昔秦主姚氏,有連理樹生於廟庭。龜茲羅什踐西涼而入貢,今我皇睿哲,合蔓苽生於御苑。罽賓龍象汎南海以來朝,手持梵經六波羅蜜,大臣聞奏,帝兪其言。 制委有司精選碩德,就西明寺譯訖,奏聞者,卽般若三藏法師其人矣法師梵名般剌若唐言智慧北天竺境迦畢試國人也言罽賓者訛略姓喬荅摩氏言瞿曇者訛略不正穎悟天假七歲發心,違侍二親,歸依三寶。時依大德,名調伏軍;誦四阿含滿十萬頌,阿毘達摩二萬頌。餘又乃隨師,詣迦濕蜜。至年二十具足律儀,誦薩婆多,近四萬頌,及俱舍論誦二萬八千,幷大婆沙兼受其義七年。此國學習小乘。至二十三,詣中天竺,那爛陁寺,受學大乘唯識、瑜伽、中邊等論。及聲明論,與金剛經、因明、醫明、工律論等,竝依智護、進友、智友,三大論師,時乃遊從雙林八塔往來,瞻禮一十八年。時聞南天尚持明藏,遂便往詣諮稟未聞。有灌頂師厥名法稱,授瑜伽教入曼茶羅三密護身五部契印,如是承奉,住經一年,誦滿三千五百餘頌。嘗聞支那大國文殊在中。東赴大唐,誓傳佛教,汎海東邁,駕險乘航,垂至廣州,風飄卻至,執師子國之東隅。又集資糧,堅修航舶,備歷南海,路次國中,二十二年。垂至廣府,風吹舶破,平沒數舩。始從五更洎平日出,或漂或溺,賴遇順風,所持資財,梵夾經論,遭此厄難不知所之。及至海壖已在岸上,於白沙內,大竹筒中,宛若有神,歎未曾有。是知大乘理趣六波羅蜜經,與大唐國中根緣熟矣。東行半月,方達廣州,洎建中三年屆于上國矣。至貞元二祀,訪見鄕親。神策十將羅好心,卽般若三藏舅氏之子也。悲喜相慰,將至家中,用展親親,遂留供養。旣信重三寶,請譯佛經,乃與大秦寺,波斯僧景淨,依胡本六波羅蜜,譯成七卷。時爲般若不閑胡語,復未解唐言。景淨不識梵文,復未明釋教。雖稱傳譯,未獲半珠,啚竊虛名。匪爲福利錄表聞奏,意望流行。聖上睿哲文明,允恭釋典,察其所譯,理昧詞疏。且夫釋氏伽藍大秦僧寺,居止旣別,行法全乖。景淨應傳彌尸訶教,沙門釋子弘闡佛經。欲使教法區分,人無濫涉,正邪異類,涇渭殊流。若網在綱,有條不紊,天人攸仰,四衆知歸,分命有司,乃下 制曰:‘中書門下 牒,王希遷牒奉勅:釋教深微,道俗虔敬,皆因梵本,法被中華。宜令王希遷,與所司,精選有道行僧,就西明寺重更翻譯訖聞奏。’牒至准勅故牒。貞元四年四月十九日牒。次牒祠部准勅亦然。轉牒京城諸寺大德,罽賓三藏沙門般若宣譯梵本,翰林待詔光宅寺沙門利言譯梵語,西明寺沙門圓照筆受,資聖寺沙門道液、西明寺沙門良秀、莊嚴寺沙門圓照竝潤文。慈恩寺沙門應眞、醴泉寺沙門超悟、光宅寺沙門道岸、西明寺沙門辯空,竝同證義。自六月八日欲創經題。勅街西功德使兼句當右神策軍使營幕使元從興元元從鎭軍大將軍行右監門衛將軍知內侍省事上柱國大原縣開國伯王希遷,親奉綸旨,與奉天定難功臣驃騎大將軍行右神策軍大將軍知軍事檢校工部尚書兼御史大夫上柱國武都郡王孟涉,寶應功臣元從驃騎大將軍行右神策軍大將軍知軍事兼御史中丞上柱國靜戎郡王食實封五十戶馬有麟等,送梵本經六律、五聲、八音、合韻四部。雲集歌唄,交諠簫韶,沸天鼓鍾,震地發彼禁闥出芳林門。車騎滿於天衢,士女溢於閭里。入西明寺翻譯眞經。同日恩賜錢一百千文,茶三十釧,香一大合,以充譯經院供養。開題名曰大乘理趣六波羅蜜多經也。自後日來月往,兩上翻經,十月中旬譯文周畢。至十一月十五日繕寫復終。二十八日大設威儀,綵車音樂,入於光範甫光順門,修表上聞,奏進新經,入其文十卷品十亦然。勅旨再三往來勞問,仍於禁以設齋飡,賜般若法師絹一百疋,一副冬衣。餘之十人,各五十疋衣一副,檢校二人各三十疋,衣一副,以充䞋焉。三藏法師般若捧戴慚惶,乃於此時陳表謝曰:‘沙門般若言。伏以,生自罽賓,十四離鄕,南遊天竺,聞所未悟。二十餘年巡禮聖蹤,雙林八塔,大小乘學,誓報四恩。遠慕支那聿來瞻禮,自持梵夾經典,中國未傳,每思上達無由進獻。昨因表兄右神策十將新平郡王羅好心,身參戎衛,遂與奏聞,得徹聖聽,實爲多幸。陛下崇教信受大乘,命以緇徒,許令翻譯。微僧至願斯以爲終。誓奉精修,上資皇祚,謹詣光順門,奉表陳謝以聞。沙門僧般若誠惶誠恐。謹言。貞元四年十一月二十八日罽賓國沙門般若上表。’聖神文武皇帝批曰:‘師夙詣證源,早觀秘藏,周遊西土,歷訪大乘。得心地之潰言,是如來之妙行,期於宣布以廣玄門,遠負眞文來傳中夏。經途萬里克達京師,載揚羅什之風,重繼摩騰之迹。眷言精愨,朕甚嘉焉。’爰命道流,俾加翻譯,庶茲上法永以流行。省視表章,煩有陳謝,同日請譯經,施主三藏表兄,右神策馬軍十將奉天定難功臣開府儀同三司檢校太子詹事上柱國新平郡王臣羅好心,上表謝曰:‘臣好心言。表弟罽賓國沙門僧般若,先進大乘理趣梵夾六波羅蜜經,伏奉今年四月十九日。勅宜令王希遷,精選有道行僧,於西明寺翻譯。今經帙已終者,臣好心誠歡誠喜,頓首頓首。臣聞周星隱曜,漢夢馳光,始知靈瑞感人,必委明王而導化。是以再敷龍樹,重闡眞宗。伏惟,皇帝陛下 澤覃中外,恩被生靈,聲教遠通,無爲而理。微臣表弟十四離鄕,志慕緇流迹現僧侶。昨所進經本,稽梵夾大乘理趣曰:六波羅。陛下信崇特令翻譯,功勤靡輟,今帙告終。特賜幡花,又令重進,微僧爲幸,驚寵伏深。臣家西蕃得居中國,名參戎禁,榮及私門,父子相歡,實慚天地。僧人何德更蒙委曲?洪私願奉修持,福資皇祚,臣之多幸,誓死荅恩。載喜載歡無任抃躍之至。謹詣光順門,奉表陳謝以聞。臣好心誠惶誠恐,頓首頓首。謹言。’聖神文武皇帝批曰:‘卿之表弟,早悟大乘,遠自西方來遊上國。宜六根之奧義,演雙樹之微言。今以精誠所宜欽重,是令翻譯俾可流行。卿夙茂忠懃職司禁衛,省覽表疏,具見乃懷所謝知。’洎十二月二日,將軍王希遷宣奉 勅醴泉寺僧思惟院宜與罽賓國進梵本六波羅蜜經僧般若安置。又至二十三日勅右神策軍判官內謁者監馮國淸,宣送賜罽賓國僧般若,院八尺牀三張,各夾帖,及席褐官絁褥、白䙙氈、白副手巾二枚,銅水甁一,鐵鍋二枚,三斗釜一口,白瓷椀十枚,茶甁一枚,蒲團一枚,新茶二十釧,幷茶碾子一副。又於進經日奉恩旨,令再譯六波羅蜜經中眞言契印法門,唐梵相對進來者。至五年二月四日繕寫畢功,與沙門良秀等進上。恩勅賜茶三十釧,又譯六波羅蜜經了日又譯大花嚴長者問佛那羅延力經一卷,强一紙許。其年十二月十五日,挍寫終畢,未獲進上,今隨目錄進奉。至五月四日,御製六波羅蜜經序成,題之經首。勅下千福及章敬寺,各賜經一本,轉讀流行。是時,章敬、千福,惟雅、智柔修表謝聞。皇帝批曰:‘ 此經出代以來,未傳中夏。須因梵本至自西方,詳考宗源,克符覺義,遂令翻譯,俾可流行。師等虔奉法門住持斯久,令加繕寫,錫在伽藍,庶此眞文攄之不朽,省覽章表,煩有謝 恩。’洎六年六月二十三日,沙門般若進當院菴羅菓二百五十顆。奉 勅賜絹十疋。至七月十五日,又賜絹五十疋,冬衣五副。仍勅般若充往北天竺迦濕蜜國使。至十七日,又賜春衣一副,幷弟子二人各絹三十疋,冬衣四副。二十二日於右銀臺門,引般若入於三殿對見,受中書門下 勅牒。二十四日進發宿長樂譯。二十五日,又勅罽賓國進梵夾六波羅蜜沙門般若,宜賜名般若三藏,仍賜紫衣。二十七日,續使送此告牒,幷雜藥物十斤,至宜領取。師等好去明辰。又發路取迴鶻、北庭、鎭西、大食、天竺。時般若三藏法師行年五十七矣。又三藏法師奉制前千福寺大德智柔,請更重譯般若心經,及奉使西蕃,不遑進奉。至八月十一日,隨表上聞,序分、流通,此經具足。文曰:‘沙門智柔言。伏以,聖智宏深,籍弘演而彌廣;眞源妙極,假言象而方傳。斯經乃衆聖師宗,群經本母。曩者沙門玄奘已譯流行。雖義滿無遺,然文虧首從。昨遇罽賓國僧般若,親睹梵文,因請傳通,重賀贊翼。始知鷲巖精舍實啓金言,誦者除疑,眞風更遠。伏惟,陛下親承 佛囑,善無不從,道洽生靈,人無不化。智柔不揆庸淺,輒獻愚誠,冀補皇風,願資聖壽,伏乞俯垂天鑑覽此金文。如或可從,請頒宣中外則一切迷生沙門幸甚。不任罄竭丹誠之至。謹附表陳,進以聞。沙門智柔誠惶誠恐,死罪。謹言。’聖神文武皇帝荅曰:‘般若心經大乘秘旨。頃者玄奘所翻字義已周,其於首從或未詳備。近因罽賓僧般若來至中華,傳此遺文。足相翼贊,師所陳請,深爲允愜。’今依來奏用廣眞經。時,般若三藏奉承王命,出使北天,路取大原,途經振武,入遊迴鶻也。沙場異域,踐歷山川,暑往寒來,奉忠奉法,向二周載,旋于太原,卽貞元八年三月也。自月八日公牒而行,四月上旬還上都也。勅使勞問,賜紫袈裟,宜歸醴泉舊院安置此之。所述略擧,其由委細而知,廣如般若三藏續譯圖紀。論曰:自佛法東流,高僧繼踵,共推翻譯。初業最高,其次義解,參玄傳揚疏記。今般若三藏卽其人焉。所謂尋師印度,學究五明,遠涉滄波,流通三藏。東西南北非類於瓠瓜,豈唯釋氏之眞僧?抑亦應聘之上士也。大唐貞元續開元釋教錄卷上丙午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 1)죽은 뒤에 관직과 품계를 추증(追贈)한 일을 말한다.
- 2)책을 편집할 때 붙인 이름을 말하는데, 용(龍)의 책이라는 말이다.
- 3)외국 손님을 접빈하는 관청을 말한다.
- 4)상주(上奏)하여 임금의 재가(裁可)를 청하는 것을 말한다.
- 5)가리제(訶利帝)는 Hāriti의 음사어로 귀자모신(鬼子母神)을 말한다.
- 6)관정 의식을 행하는 장소. 관정이란 물을 정수리에 붓는다는 뜻으로, 본래 인도에서 왕이 즉위할 때나 태자를 세울 때, 바닷물을 정수리에 붓는 의식, 밀교(密敎)의 의식의 하나이다.
- 7)부처님의 말씀과 법 즉, 성인의 제도를 말한다.
- 8)아침ㆍ낮ㆍ저녁ㆍ밤, 즉 하루 종일을 말한다.
- 9)8방(方)의 멀고 너른 범위, 곧 온 세상을 말하는 것으로 팔굉(八紘) 또는 팔황(八荒)이라고도 한다.
- 10)불문(佛門)에 들어가는 수계자(受戒者)나 일정한 지위에 오르는 수도자(修道者)의 정수리에 향수를 끼얹는 의식을 말한다.
- 11)신밀(身密)ㆍ어밀(語密)ㆍ의밀(意密). 곧, 신(身)ㆍ어(語)ㆍ의(意)의 삼업(三業)을 말한다.
- 12)가(加)는 가피(加被), 지(持)는 섭지(攝持)의 뜻으로, 부처님의 큰 자비가 중생에게 베풀어지고, 중생의 신심(信心)이 부처님의 마음에 감명되어 서로 어울림을 말한다.
- 13)기다수급고독원(祇多樹給孤獨園), 줄여서 기수원(祇樹園)ㆍ기원(祇園)ㆍ급고독원(給孤獨園)으로, 기원정사(祇園精舍)가 있는 곳으로 부처님이 설법한 유적지이다.
- 14)자(子)에서 해(亥)까지의 12간지(干支)를 말한다.
- 15)물건을 싸서 임금에게 바친다는 뜻이다.
- 16)까닭을 밝히며 사과의 말을 하는 것을 말한다.
- 17)감사와 왕명으로 지방에 파견된 벼슬아치가 글로 써서 올리던 보고를 말한다.
- 18)삼륜(三輪)의 하나. 수륜(水輪)의 위에서, 세계의 대지를 받들고 있다는 지층을 말한다. 즉 이 세계를 말한다.
- 19)빼어나게 뛰어나고 아름다움 문장을 말한다.
- 20)몸가짐과 행동거지가 규칙에 맞고 위덕(威德)이 있는 모습을 말한다.
- 21)가을 석 달. 곧, 초추(初秋)ㆍ중추(仲秋)ㆍ만추(晩秋)을 말한다. 또한 3개월인 가을이 셋이란 뜻에서 아홉 달. 또는, 세 번의 가을이란 뜻에서 3년을 이르기도 한다.
- 22)불보살(佛菩薩)의 지혜를 해에 견주어 이르는 말이다.
- 23)12율(律) 중 양성(陽聲)에 속하는 여섯 음인데, 황종(黃鐘)ㆍ대주(大簇)ㆍ고선(姑洗)ㆍ유빈(蕤賓)ㆍ이칙(夷則)ㆍ무역(無射) 등을 말한다.
- 24)궁(宮)ㆍ상(商)ㆍ각(角)ㆍ치(徵)ㆍ우(羽)의 다섯 음률(音律)을 말한다.
- 25)육바라밀을 말하는 것으로, 여기에도 도(度)는 범어 pāramitā의 한역어이다.
- 26)원리악(遠離惡)ㆍ수용선(受用善)ㆍ이삼독(離三毒)ㆍ불태정진(不怠精進)의 네 가지 근본도리(根本道理)를 말한다.
- 27)삼공(三公) 다음 가는 9명의 장관버슬을 말한다.
- 28)말 그대로는 기와조각ㆍ잔 돌멩이를 말하며, 쓸모없는 사람을 빗대는 말이다.
- 29)칭찬하여 상을 주고 높이 숭상함을 말한다.
- 30)부처님께서 입멸하신 사라쌍수의 숲을 말한다.
- 31)옛날에 벼슬아치로 임명될 때 임금으로부터 받던 표장을 말한다.
- 32)오추삽마(烏蒭澁摩)란 오추사마명왕(蒭澁摩明王)의 줄임말이다. 더러운 것을 없애주는 명왕이다.
- 33)마리지천(摩利支天)이란 천신의 하나로 장애물을 제거해 주고 이익을 주는 신이다.
- 34)가루라(迦婁羅)는 범어 Garuda의 음사어로서 금빛날개를 지녔다고 하여 금시조(金翅鳥)라 번역하기도 한다. 밀교에서는 문수보살의 화신(化身)이라고 한다.
- 35)아미사(阿尾奢)란 범어 aveśa의 음사어로 진언종 비밀법의 하나이다. 편입(遍入)이라 한역하며, 동남ㆍ동녀에게 부탁하여 길흉화복 등을 물어 재앙을 없애는 법이다.
- 36)범어로 Amoghavajra라고 한다.
- 37)관가에서 도장을 찍어 봉하는 것을 말한다.
- 38)원어는 공동지간(崆峒之間)으로 공동산(崆峒山)에 살았던 신선 광성자(廣成子)에게 황제(黃帝)가 찾아가 도(道)를 물었다는 전설에서 비롯된 것이다.
- 39)나라를 다스리는 삼정승들이 집무하는 다락문을 황합(黃閤) 또는 황각(潢閣)이라 한데서 비롯된 정승들의 존칭이다.
- 40)골수에 맺힌 병 또는 고칠 수 없는 병을 말한다.
- 41)나이 80세 또는 100세를 이르는 말이다.
- 42)금강저(金剛杵)의 손잡이 양쪽 끝이 다섯 개로 된 금강저(金剛杵)이다.
- 43)보살이 수행하는 계위(階位)인 52위(位) 중, 제41위로부터 제50위까지를 말한다.
- 44)주관ㆍ객관의 모든 사물이 서로 응하여 융합하는 일을 말한다.
- 45)마음으로 진리를 비추어 보고 그 진리에 따라 실천함을 말한다.
- 46)승가람마(僧伽藍摩, saghārāma)ㆍ승가람(僧伽藍)의 준말이다. 여러 승려들이 한데 모여 불도를 수행하는 곳으로, 절의 통칭이다.
- 47)장사지내기 전에 영좌(靈座) 앞에 간단히 음식을 차려 놓는 일이다.
- 48)거상(居喪) 중임을 나타내는 말이다.
- 49)근간이 다른 두 나무가 합쳐져 한 나무로 변한 나무로서 전(轉)하여 부부수(夫婦樹)라 한다.
- 50)원어는 kucha로 중국 신강성 북쪽에 있던 나라다.
- 51)넝쿨이 하나로 합쳐지는 오이를 말한다.
- 52)큰 불보살, 대각도인과 무상행의 대봉공인, 또는 고승 석덕을 용상이라 한다.
- 53)범어 sarvāsti의 음사어로 곧 소승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를 말한다.
- 54)수행자가 두 손의 열손가락을 구부리거나 펴서 법덕(法德)의 표시인 인(印)을 맺는 것을 말하는데, 인계(印契)를 맺는 것을 반드시 스승에게 친히 배우고 다른 이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 55)페르샤를 말한다.
- 56)서역의 율특어(栗特語), 화전어(和闐語), 토화라어(吐火羅語)로 된 불경을 말한다.
- 57)페르샤의 고대 종교인 Mithra 숭배 사상을 말하는데, 미시하(彌尸訶)는 이 Mithra의 음사어이다.
- 58)천자의 분부를 기록한 문서. 조서(詔書). 칙선(勅宣). 칙서(勅書)를 말한다.
- 59)음률의 옥타브를 12반음으로 나누었으며, 이를 12율이라고 한다. 그런데 12율을 양(陽)과 음(陰)으로 나누어 6률(六律)ㆍ6려(六呂)라고도 한다.
- 60)예로부터 쓰이는 음계로는 5음 음계이다. 즉 궁(宮), 상(商), 각(角), 치(徵), 우(羽)가 기본음계이다.
- 61)아악에 쓰는 여덟 가지 악기를 말하며, 그 재료는 금(金)ㆍ석(石)ㆍ사(絲)ㆍ죽(竹)ㆍ포(匏:바가지)ㆍ토(土)ㆍ혁(革)ㆍ목(木) 등이다.
- 62)대궐 안에 있는 동산. 임금의 원유(園囿). 금원(禁園). 비원(祕苑)이라고도 한다.
- 63)부모(父母)ㆍ중생(衆生)ㆍ국왕(國王)ㆍ삼보(三寶)의 은혜를 말한다.
- 64)범어 Āmra의 음사어로 암마라과(菴摩羅果)ㆍ아마륵과(阿摩勒果)라고도 하며 인도산(印度産) 과실이다. 형태는 호도와 비슷하고 맛은 약간 쓰고 신 맛이 있으나 즙액(汁液)은 미미(美味)라 한다.
- 65)인도에서 학문의 다섯 가지 구분을 말하는 것으로, 즉 성명(聲明)ㆍ공교명(工巧明)ㆍ의방명(醫方明)ㆍ인명(因明)ㆍ내명(內明)의 다섯 가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