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C_IT_K1507_T_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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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_0093_b_01L십구장원통기 하권
균여 지음
장순용 번역
3. 교의이대유오중(敎義二大有五重)
【章】‘첫째, 교의(敎義)의 2대(大)에는 다섯 겹[五重]이 있다’1)는 것은, 첫째는 형상을 잊은 해인[忘像海印]은 뜻[義]이고, 형상을 나타낸 해인[現像海印]은 가르침[敎]이 된다. 둘째는 형상을 나타낸 해인은 뜻이고, 부처님이 밖으로 향함은 가르침이 된다. 셋째는 부처님이 밖으로 향함은 뜻이고, 보현이 정관(定觀)에 들어가는 것은 가르침이 된다. 넷째는 보현이 정(定)에 들어가는 것은 뜻이고, 관(觀)에서 나와 마음에 존재하는 것은 가르침이 된다. 다섯째는 정(定)에서 나와 마음에 존재하는 것은 뜻이고, 언어로써 나타내는 것은 가르침이 된다는 것이다.
초문(初門)에서 비유한 것처럼 평평한 물이 갖가지 상(像)이 나타나도 물은 그 나타남을 분별하지 않는다는 것은 부처님이 정에 들어가 마음을 증득함에 있어 삼세간의 법을 나타내면서도 증득한 마음은 이를 분별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움직이지 않는 물속에 일체 형상이 남김없이 나타나고, 그 형상의 나타남 또한 움직이지 않는다는 비유처럼 부처님의 증득한 마음속에 삼세간법이 현현하면서도 스스로의 지위를 움직이지 않고 성품이 중도에 있다는 이것이 가르침[敎]이다.
“초교(初敎)가 의미하는 것은, 부처님의 대원경지(大圓鏡智) 속에 나타난 상(像)이다”라는 것은 본질이다. 그러나 제8식(識)의 지종자(持種子)를 무구정식(無垢淨識)이라 바꿔서 이름붙이기 때문에 이 본질은 능의(能依)와 소의(所依)의 일신(一身)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숙교(熟敎) 중에서의 성정본각(性淨本覺)이란 훈습된 거울[鏡] 속에 나타난 형상이 청정한 성품을 쫓아 마음이 생긴 것이지 새롭고 새로워지는 마음을 따라 갖가지 경계가 생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본질도 능의와 소의의 일신이다.
원성실(圓成實)이란 1승 속의 체가 원융[體融]하기 때문에 갖가지 상을 나타내는 것이니 이것은 곧 수신(水身)이다. 이 초중문(初重門)은 오직 부처님이 안으로 깨달은[佛內證] 마음에 분별이 없다는 의미와 차별을 나타낸다는 의미 두 항목을 구분하여 논한 가운데 형상을 나타낸 해인에서 기연을 등지는 것은 뜻[義]이 되고, 부처님이 기연을 향하는 것은 가르침[敎]이 된다. 이는 9회에서 덧붙인 것이다.
세 항목 중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보현이 안으로 향하면 부처가 되고, 부처님이 밖으로 향하면 9회의 모든 보살이 된다”고 말하는 것인데 만약 이 의미를 따르면 보현이 정(定)에 들어감과 아울러 상을 잊은 해인을 증득한다는 이 뜻은 부처님과 보현에 입각해 말한 것이지 기연에 입각해 구분 지은 것이 아니다. 하나는 “보현이 정에 들어가는 분수로 부처님이 밖으로 향한 문이 궁극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부처님이 밖으로 향함은 뜻이 되고, 보현이 정관(定觀)에 들어가는 것은 가르침이 된다”고 말한다. 나머지 두 항목도 이에 준하면 알 수 있다.
이 「지품(地品)」에서는 문구(文句)로써 논의하여 2대(大)가 오직 제5 항목일 뿐이라 말한다. 비유하자면 절을 본고 온 사람이 본래의 살던 곳으로 돌아와 탑을 설명할 때는 오직 자기 마음을 설명할 뿐인 것과 같으니, 비록 자기 마음이 관찰한 것이라도 탑이지 나머지 다른 물건이 아니다. 보현 역시 이와 마찬가지로 자기 마음이 관찰한 것이 부처님이 증득한 법이여서 그 의미를 따라 설명할 뿐이다. 나머지 국토해와 세계해의 근본 실제의 차별 연(緣)도 이와 같다.
【記】제3구(句)에 입각하면 교의의 2대(大)에 5중(重)이 있다고 했는데, 이 구절은 지엄 대사가 스스로 지은 것은 아니다. 「십지품」2)에서 말하기를 “의대(義大)는 설할 수 없으나 설대(說大)는 설할 수 있다”고 설명한 뜻은 논주(論主)가 설대를 해석한 글에서 “소리를 따라 뜻을 취하는 데 다섯 가지 잘못이 있기 때문에 이 글을 인용한 것이다. 온 뜻은 앞서 변별한 것과 같다. 10지의 뜻은 이처럼 설하거나 들을 수 없는 것이다” 한 것은 의대(義大)이고, “나는 단지 한 부분(一分)만을 설할 뿐이다” 하는 교대(敎大)이다.
이 2대의 문장에 의거해 5중(重)을 논하는 것은 10지의 뜻은 설할 수 없다고 보는 글이다. 형상을 잊은 해인과 형상을 나타낸 해인을 서로 대대하면, 형상을 잊은 해인은 설할 수 없고, 형상을 나타낸 해인은 설할 수 있다. 만약 형상을 나타낸 해인과 부처님이 밖으로 향함을 서로 대대하면 형상을 나타낸 해인은 설할 수 없는 것이요, 부처님이 밖으로 향함은 설할 수 있는 것이 된다. 부처님이 밖으로 향함은 덧붙여서 경문이 된 것이다.
나아가서 보현이 정에 들어갔을 때 마음속에 존재하는 것과 언어로 나타내는 것을 서로 대대하면, 마음에 존재하는 것은 곧 설할 수 없는 것이고, 언어로 나타내는 것은 설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이 언어 속에서 드러난다 해도, 『화엄경』의 법은 여전히 바람이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이 듣는 대로 뜻을 취할 수 없기 때문에 경문에 따라 뜻을 취하는 데 다섯 가지 잘못이 있는 것이다.
‘평평한 물을 비유함과 같다’에서부터 ‘분별하지 못한다’에 이르기까지는 부처님이 증득한 마음에 비록 세 가지 세간법이 나타나더라도 부처님이 증득한 마음은 분별하지 않기 때문에 의대(義大)라고 말하는 것이다. ‘부처님이 증득한 마음’에서부터 ‘성품이 중도에 있다’에 이르기까지에서,
【문】어째서 앞서의 형상을 잊은 해인에서는 성품이 중도에 있다고 말하지 않고, 형상을 나타낸 해인에 와서야 비로소 성품이 중도에 있다고 말하는 것인가?
【답】형상을 잊은 해인 중에서도 삼세간의 법을 나타내지만 그러나 여기서는 오직 부처님의 깨달은 마음의 분별없는 뜻만 볼 뿐 나타낸 형상은 보지 못한다. 형상을 나타낸 해인에 이르러서야 나타난 형상이 자기 지위에서 움직이지 않고 성품이 중도에 있는 뜻을 보기 때문에 여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성품이 중도에 있다”고 말한다. ‘초교(初敎)에 뜻이 있다’는 것은 아래의 가르침에 대해서 형상을 나타낸 해인을 나타낸 것이다.
‘부처님의 대원경지 중에 형상을 나타내는 것이 바로 본질’이란 것은 친광(親光)보살이 상(相)을 거두어 마음을 따른다는 의미이므로 능연심(能緣心)을 본질로 삼고, 이 마음 가운데 소연상(所緣相)이 현현하는 뜻을 영상(影像)으로 삼기 때문에 본질과 영상이 다 함께 같은 종(種)에서 생기는 것이다. 호법보살에게는 색(色) 등의 종자로부터 생기는 형상이 바로 본질이다. 이 형상이 능연심 속에 나타나는 뜻을 기준으로 해서 영상으로 삼기 때문에 본질과 영상이 같은 종(種)에서 생기는 것이지만, 견분(見分)과 상분(相分)은 다른 종에서 생긴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바로 상과 견이 함께 존재한다는 뜻이 된다. 초교에서는 다분히 호법의 뜻을 바르다고 보기 때문에 여기서도 호법의 뜻을 인용한다.
‘그러나 제8식’에서부터 ‘의지하는 일신(一身)’에 이르기까지 초교(初敎) 에서는 진여(眞如)는 응연(凝然)하여 모든 법을 짓지 않고 오직 뇌야식(賴耶識)만이 종자를 지니어서 모든 법을 낳는다. 이 뇌야식이 종자를 갖는 뜻이 전환하여 무구정식(無垢淨識)이 되는데, 이 식 역시도 생멸의 뜻이라 불과(佛果)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덕용 생멸의 뜻은 남아 있다. 그러므로 부처의 대원경지 속에 종자로부터 생긴 상을 나타내기 때문에 본질이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반연하는 주체인 마음[能緣之心]과 반연의 대상인 형상[所緣之相]이 다르고, 또 의거의 주체인 종자[能依之種]와 의거의 대상인 식[所依之識]이 구별되기 때문에 “의거의 주체와 의거의 대상인 일신이라고는 일컫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숙교 가운데서……’부터 ‘원성실(圓成實)’에 이르기까지는 숙교에서는 성정본각(性淨本覺)이 인(因)이 훈습한 거울 속에 상(像)을 나타내는 것은 성품이 청정한 각심(覺心)이 온전히 활동하여 모든 상(相)을 이룬 것이지, 새롭게 새로워지는 마음을 따라 갖가지 경계를 낳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본질인 것이다. 또 성품이 청정한 각심이 모든 상(相)을 완전하게 이루기 때문에 역시 의거의 주체와 의거의 대상인 일신인 것이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초교(初敎)에서는 형상과 인식을 논하지 않기 때문에 인식 외에 중음(中陰)이 있어 전전(展轉)한다 하였고, 숙교(熟敎)에서는 형상과 인식을 밝힐 수 있기 때문에 인식 이외에 따로 중음이 없다 하였다.
【문】어째서 초교에서는 형상과 인식을 논하지 않고, 숙교에서는 형상과 인식을 밝히는 것인가?
【답】초교에서는 비록 종자가 무기(無記)의 성품과 동일하다고 말하지만, 식이 전변하여 온갖 형상을 이룬다고 말하질 못하고 오직 종자로부터 모든 형상이 생겨남을 밝히기 때문에 형상과 인식을 밝히지 않는 것이니, 그런 까닭에 인식 이외에 따로 중음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숙교에서는 만약 내 몸을 기준으로 하면 여래장(如來藏)이 내 몸을 완전하게 하고, 또 육도를 기준으로 하면 여래장이 아귀를 완전하게 하고 인천(人天)을 완전하게 한다. 이처럼 여래장이 진실로 모든 법을 완전하게 이루기 때문에 형상과 인식을 논하는 것이라 식 이외에 중음은 없는 것이다.
‘인(因)이 훈습하는 거울’이라 함은 『기신론(起信論)』에서는 성정본각(性淨本覺)에 네 가지가 있다 하니, 첫째는 여실히 공한 거울[如實空鏡]이고, 둘째는 인(因)이 훈습하는 거울[因薰習鏡]이며, 셋째는 법을 여의는 거울[法出離鏡]이고, 넷째는 연(緣)이 훈습하는 거울[緣薰習鏡]이다. 이 상(像)을 나타내는 것은 인(因)이 훈습하는 거울이기 때문에 그 경문을 인용한 것이다.
【문】가르침의 본체에서는 “초교는 본질과 그림자를 갖추고, 종교(終敎)는 오직 그림자일 뿐 본질이 없다”고 했는데, 어째서 여기선 “종교 중에 본질이 있다”고 하는가?
【답】종교에서는 여래장이 진실로 육도의 생멸하는 모든 상(相)을 완전하게 이루지만 이 가르침의 뜻은 육도생사의 모든 형상을 소멸시키는 것을 종지로 삼고 있기 때문에 육도의 형상을 소멸시켜 평등한 참으로 돌아갈 때는 오직 진여만이 있을 뿐이다. 마치 온전한 물이 물결을 이루다가 물결이 가라앉는 날이면 오직 물만 있고 물결은 없는 것처럼 무명이 소진할 때는 오직 참[眞]이기 때문에 불과 중엔 오직 여여(如如)함과 여여한 지혜만이 홀로 존재한다. 이러한 까닭에 몸을 나타내어 법을 설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가르침의 체에는 본질이 없다고 말하고, 중생이 보고 듣는 것은 스스로의 식이 전변한 물질과 소리이기 때문에 영상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선 인위(因位)를 입각하여 여래장이 모든 형상을 온전히 이룬다고 논하기 때문에 본질이라 말하는 것이다.
「명난품(明難品)」3)에서는 마치 밝고 청정한 거울이 그 거울의 면을 따라 상(相)이 드러나는 것과 같다고 했는데, 「관석(觀釋)」에서 해석하기를 “밝고 청정한 거울이란 가령 거울 속에 나타난 상(像)을 안다면 그 즉시 육도의 과(果)는 생기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른바 거울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4) 여래장 거울[如來藏鏡]과 정광유리거울[錠光玻璃鏡]과 해인거울[海印鏡]이다.
여래장 거울 속의 상(像)이란 형상과 거울이 나뉘지 않는 일신(一身)이다. 만약 형상을 취한다면 거울은 곧 깨지고, 만약 거울이 깨진다면 형상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내 몸은 여래장과 함께하여 나뉘지 않는다. 만약 여래장의 업과(業果)를 안다면, 육도의 과(果)가 어찌 생길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거울을 얻었을 때 나타난 5, 6척의 상(相)은 마치 얼음처럼 녹아 없어질 것이다. 그런 까닭에 숙교에서는 여래장이 온갖 형상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여래장의 태양을 얻어 육도생사가 마치 얼음 녹듯 없어지는 것과 같기 때문에 가르침의 본체에는 본질이 없다고 말할 뿐이다.
그러므로 여실히 공한 거울과 인(因)이 훈습하는 거울은 인 안에서 보는 것이고, 연으로 훈습하는 거울과 법을 여의는 거울은 과 속에서 보는 것이다. 이 때문에 여기서는 인위에 입각하여 여래장이 진실로 육도생사의 모든 상(相)을 온전히 이룬다는 의미를 기준하여 본질이라 말하는 것이다.
‘1승은 체가 융용[體融]하다’ 등은 「관석」에서는 ‘해인의 거울 속에 나타난 상(像)이란 나의 5, 6척 몸에 삼세간을 갖추기 때문에 따로 머무는 곳이 있지 않으므로 무주(無住)라 말하고, 이 같은 무주를 곧 부동(不動)이라 말한다’ 하였다. 무측(無側)의 내 몸이라면 어느 곳에서 어느 곳으로 전변하겠는가? 그렇다면 이 상(像)은 없어지지 않는 것이다. 어떻게 무측임을 아는가? 인문(印文)대로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인문에서는 “세 가지 세간이 해인삼매로부터 무성히 출현해 나타나니 ‘무성히 나타난다’는 것은 첫째는 종이 위에 법(法)자를 써두는 것이고, 둘째는 법자 위에 붉은 획을 그어 두는 것이다. 이 중에서 하얀 종이는 기세간(器世間)이고, 붉은 획은 지정각세간(智正覺世間)이며, 검은 글자는 중생세간(衆生世間)이다. 이 셋 가운데서 그 하나를 취함에 따라 온전히 전체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따로 취할 수 없다” 하였다. 이런 뜻 때문에 1승 가운데 나타난 갖가지 형상이 바로 거울의 체(體)이고, 거울 외에 갖가지 형상이 없기 때문에 나타난 형상이 바로 수신(水身)인 것이다. ‘이 초중(初重)의 항목은 오직 부처이다’ 등은 부처님의 안으로 깨달은[內證] 마음에서 형상을 잊은 해인과 형상을 나타내는 해인을 구분해서 논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항목에서는 부처님께서 근기를 향하심을 가르침으로 삼으니 이것은 9회에서 가피로 그리 된 것이다’라는 것은 9회에서 가피로 그리 된 것이니 바로 부처님께서 보현에게 가피하시어 그리한 의향이시다.
‘세 번째 항목엔 두 가지 뜻이 있으니, 하나는 보현이 안을 향하면 부처님이 되고, 부처님께서 밖을 향하시면 9회의 모든 보살이 된다’는 것은 부처님과 보현이 다른 체가 아님을 준하기 때문에 이처럼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외화(外化)에도 10불(佛)이 있지만 내증(內證)은 10불 자체의 경계이고 외화는 보현의 경계라 말하는 것은 대대(大對)의 의미를 쫓아서 말한 것이다.
만약 이 뜻을 따른다면, 보현이 정(定)에 들어가는 것과 형상을 잊은 해인을 증득하는 것은 보현이 안을 향하면 부처님이 되고, 부처님께서 밖을 향하면 9회의 모든 보살이 되는 뜻 중에 보현이 정에 들어가 마음을 증득할 때 형상을 잊은 해인과 상을 나타낸 해인을 갖추기 때문에 정에 들어가는 것과 형상을 잊은 해인을 증득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뜻은 부처님과 보현을 준하여 말한 것이지 근기에 입각해 구별 지은 것이 아니다’라는 것은 앞서 제2중(重) 가운데 형상을 나타낸 해인에 있어 부처님이 근기를 등지는 것을 뜻으로 삼고, 근기로 향하는 것을 가르침으로 삼는 것이다. 이른바 “보현이 안을 향하면 부처가 된다” 등은 비록 제3중(重)에서 논하였더라도, 제2중의 형상을 나타낸 해인에서 ‘부처님이 근기를 등지는 것을 뜻으로 삼고, 근기를 향하는 것을 가르침으로 삼는다’ 등이 하나의 양(量)이기 때문에 저 제2중을 기준으로 해서 나중의 뜻과 구별시킨 것이다. 어떤 이는 “보현이 정(定)에 들어가 부처님께서 밖으로 향하는 문이 궁극이 아님을 분명히 안다 등등이라고 말한 이 구절이 바로 제3중의 뜻이다” 했다.
【문】보현이 정(定)에 들어간 부분과 부처님이 밖으로 향한 부분은 어떻게 다른가?
【답】혹자는 “중(重)이 있다”고 말하고, 혹자는 “중이 없다”고 말하며, 혹자는 “지위에 의탁함을 기준으로 하면 중이 있고, 만약 실(實)을 기준으로 하면 중이 없다”고 말한다. 처음의 뜻은 이 장(章)에서 이미 “보현이 정(定)에 들어가 부처님께서 밖으로 향하는 문이 궁극이 아님을 분명히 안다”라고 했고, 또 “화주(化主)의 체(體)ㆍ상(相)ㆍ용(用)과 조화(助化)의 체ㆍ상ㆍ용은 다르다”라고 말하였다. 화주의 용이란 부처님께서 밖으로 향하는 부분이고, 조화의 체는 바로 보현이 정(定)에 들어가는 부분이기 때문에 이같이 차별된다.
다음 뜻은 「사나품소(舍那品疏)」5)에서 “부처의 근원을 남김없이 궁구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고, 또 정위중(正爲中)에서 “보기(普機)보살은 노사나불의 교화하는[能化] 분제(分齊)를 다하였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중(重)이 없는 것이다. 뒤의 뜻은 앞서의 두 뜻을 합한 것이다. 말하자면 화주의 체ㆍ상ㆍ용과 조화(助化)의 체ㆍ상ㆍ용이 차별된다는 것은 지위에 의탁한 뜻을 기준으로 한 것이고, 노사나불의 교화하는 분제와 근원 등을 다했다는 것은 1승의 뜻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그러므로 지위에 의탁함을 기준으로 하면 중(重)이 있고, 1승을 기준으로 하면 중이 없다. 비록 그렇더라도, 이 중에 부처님이 가피로 그리한 것을 기준하여 뜻으로 삼고, 보현이 정관(定觀)에 들어가는 것을 가르침으로 삼기 때문에 중이 있다.
옛말에 “보현이 안을 향한 것이 부처님께서 밖으로 향하는 마음을 증득한 것인가, 아니면 증득하지 못한 것인가?”라고 하였는데, 이러한 뜻은 다만 증득만을 언급할 뿐 원만한 증득[圓證]은 인정하지 않았다. 어째서 증득만을 언급하고 원만한 증득은 인정하지 않았는가?
말하자면 부처님이 밖으로 향하는 문은 하나의 지혜에서 단박에 9회의 법을 증여해 주었기 때문이니, 마치 벼루 안에서 간 먹과 같다. 보현보살이 8회의 개별적인 정(定)의 능력을 이어받아 바야흐로 부처님이 밖으로 향하는 문을 알기 때문이니, 마치 붓 끝에 먹을 적시는 것과 같다. 마치 붓으로 다만 벼루 속의 먹을 적시는 것과 같기 때문에 오직 증득만을 언급했을 뿐, 벼루 속의 먹이 붓 끝에 다 적셔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원만한 증득은 말하지 않은 것이다.
‘나머지 둘도 알 수 있다’는 것은 처음 세 항목의 해석을 마친 것이다. 보현이 정(定)에 들어간 것은 뜻이고, 보현이 정에서 나와 마음속에 있는 것은 가르침이며, 정에서 나와 마음속에 있는 것은 뜻이고, 언어로 나타내는 것은 가르침이다. 이 2부분을 비록 해석하지 않았지만 뜻이 드러나기 때문에 나머지 둘을 알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문】이 5중(重)을 옛사람의 세 가지 근본 정[三本定]에 준거하면 어떤 것인가?
【답】형상을 잊은 해인은 해인정(海印定)이고, 형상을 나타낸 해인은 불화엄정(佛華嚴定)이며, 부처님이 밖으로 향함[佛外向]은 사자분신정(師子奮迅定)이다. 말하자면 부처님이 분별을 여의어서 삼세간의 법을 증득하는 뜻을 해인정이라 하고, 이렇게 증득한 삼세간의 법이 스스로의 지위를 움직이지 않고 성품이 중도에 있는 뜻은 마치 만행(萬行)이 서로 장식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불화엄정이라 한다. 이 중에서 1보(步)를 내딛는 것은 부처님께서 “이 같은 법을 어찌 나만이 홀로 증득할 수 있겠는가? 중생으로 하여금 나처럼 증득시키고자 하기 때문에 대비심을 일으킨다”고 하셨으니, 마치 사자왕이 굴에서 나와 분발하여 빨리 행동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사자분신정이라 한다.
【문】해인정은 가장 근본이 되기 때문에 근본 정이라 말할 수 있지만, 나머지 둘은 어째서 근본 정이라 말하는가?
【답】해인정은 근본을 증득하고, 불화엄정은 근본을 설하고, 사자분신정은 가르침의 근본이기 때문에 세 가지 근본 정(定)이라 말하는 것이다.
【문】해인정에서는 어떤 법을 증득하기에 근본을 증득하는 것이 되고, 불화엄정에서 어떤 법을 설하기에 근본을 설하는 것이 되며, 사자분신정에서는 어떤 가르침을 설하기에 가르침의 근본이 되는 것인가?
【답】해인정에서는 국토해의 법을 증득하고, 불화엄정에서는 이 국토해의 법을 설하고, 사자분신정에서는 세계해의 법을 설한다.
【문】세계해의 법이란 보현보살이 정에서 일어나 설분(說分) 중에서 설한 것이거늘, 어째서 분신정 중에서 세계해의 법을 설한다 하는가?
【답】설분 가운데서 보현보살이 설한 것은 오직 화장세계뿐이고, 분신정 중에서 설한 세계해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이기 때문에 다르다. 이 때문에 표훈(表訓) 대덕은 “사바는 화장(華藏)을 근본으로 삼고, 화장은 세계해를 근본으로 삼으며, 세계해는 국토해를 근본으로 삼고, 국토해는 불가설(不可說)을 근본으로 삼으며, 불가설은 불가설불가설을 근본으로 삼는다”고 하였다. 이렇게 말하기 때문에 사바는 화장을 근본으로 삼는 화장이라서 보현의 설분 가운데서 설해지고, 화장은 세계해를 근본으로 삼는 세계해라서 부처님께서 사자분신정 가운데 설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밖으로 향하시는 항목에서 내주신 것이 바로 세계해의 법이다.
【문】내증(內證)에는 법을 설함이 없는데, 어째서 불화엄정에서 국토해의 법을 설한다 하는가?
【답】다만 연기분(緣起分)에서 법을 설하는 것만 못함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내증에는 법을 설함이 없다고 말할 뿐이다. 그러나 내증 가운데는 과덕(果德)의 무리들을 위해 과덕의 법을 설하기 때문에 불화엄정에서 국토해의 법을 설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말에 신림(神琳) 대덕이 법을 설할 때 대운 법사군(大雲法師君)이 물었다.
“연기분에서 법을 설하는 것이 곧 증분(證分)에서 법을 설한 것과 같다는 것은 무엇을 말함입니까?”
신림 대덕이 묵묵히 한참 있다가 말하였다.
“이미 대답을 했다. 뜻을 이해하였는가?”
대운 법사군이 말하였다.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신림 대덕이 말하였다.
“그대가 이 질문을 했을 때 앉아 있는 자리와 법계의 법이 동시에 질문하였다 한 것은 옳고, 오직 그대만이 질문하였고 나머지 일체 법은 질문하지 않았다 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다.”
법사군이 물었다.
“법계의 인후(咽候)와 다함없는 혀끝이 동시에 질문한 것을 연기분의 질문이라 할 수 있습니까?”
신림 대덕이 말했다.
“삼세간의 법이 동시에 질문하는 것은 증분의 물음이고, 교화를 하시는[能化] 부처님께서 이 물음에 대해 ‘묵묵히 부동(不動)하다’고 말씀하신 것은 증분의 설법이며, 삼세간의 법이 자기 지위에서 부동인 것은 증분의 들음[聞]이다.”
옛말에서 이처럼 “삼세간의 법이 스스로의 지위에서 부동인 의미는 증분의 설법이다”고 말했기 때문에 불화엄정에서 삼세간이 스스로의 지위에서 부동인 뜻은 국토해의 법을 설하는 것이 된다.
【문】이 세 가지 근본의 정을 경문에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답】옛말에 표훈 대덕이 황복사(皇福寺)에 있을 때, 대정 각우(大正角于)가 표훈 대덕의 방에 들어가 세 가지 근본의 정을 배우길 청하였다. 그러자 표훈 대덕은 대중들로 하여금 모두 방 밖으로 나가라고 했다. 나머지 사람이 모두 방을 나갔지만, 균륜(縜綸) 스님은 문을 나서 창가에 서서 귀를 기울였다. 그 때 표훈 대덕이 “‘한때 부처님께선’라는 것은 불화엄정의 경문이고, ‘처음으로 정각을 이루셨다’ 하는 것은 해인정의 경문이고, ‘사자좌에 앉으셨다’ 하는 것은 사자분신정의 경문이다”라고 말하였는데 이렇게 해서 전해지게 된 것이다.
【문】해인정은 내증(內證)인데, 어째서 상(相) 대덕께선 “석가여래의 가르침의 그물이 섭수하는 세 가지 세간이 해인삼매로부터 무성이 나와 현현한 것을 표현하고자 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는가? 또 「공목법수장(孔目法數章)」6)에서는 “모든 다함없는 법수(法數)와 나머지 승수(乘數)는 모두 1승의 소목(所目)”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1승이 똑같이 해인정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동등한 것인가?
【답】넓은 항목의 해인이 있고, 대략적인 항목의 해인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말하자면 만약 넓은 항목의 해인을 기준으로 하면, 『화엄경』의 법은 모두 해인정에 의거해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해인삼매로부터 무성히 나와서 현현한다’고 말하고, 또 ‘똑같이 해인정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동등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만약 간략한 항목의 해인을 기준으로 하면, 오직 내증뿐이기 때문에 세 가지 근본 정인 해인정은 내증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융질 대덕은 “해인의 분상문(分相門)이 있고, 해인의 통상문(通相門)이 있다”고 하였다. 만약 해인의 분상문을 기준으로 하면, 『화엄경』의 법은 해인정에 의거해 일어나니 하교(下敎)의 법이 부처님의 후득지(後得智)에 의거해 일어난다. 이 때문에 의거된 이문(異門) 에는 해인의 분상문을 따라 말한 것이 된다.
만약 해인의 통상문을 기준으로 하면, 일화(一化)의 법은 모두 해인정으로부터 일어나기 때문에 상 대덕의 뜻은 해인의 통상문을 따라 말한 것이다. 그러나 상 대덕이 “석가여래의 가르침의 그물이 거둔 바 세 가지 세간의 해인삼매로부터 무성히 나와서 현현했다”7)고 말한 것 또한 오직 『화엄경』의 법만이 해인정에 의거해 일어난 것이다.
【문】만약 그렇다면, 하교의 법에는 해인정에 의거해 일어나는 뜻이 없는가?
【답】옛말에 윤형(綸逈) 화상이 당나라를 다녀와서 다음과 같은 얘기를 전해 주었다.
지적국통(智積國統)8)이 지엄 화상에게 물었다.
“『대집경(大集經)』등의 경전에도 해인이 있는데, 이것은 『화엄경』의 해인과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지엄 화상이 대답했다.
“해인에는 5중(重)이 있다. 첫째는 3아승기겁 동안을 거치면서 수행한 제석(帝釋)이 법공(法空)의 수미산 마루에 올라서 「소지장(所知障)」의 아수라와 싸울 때, 삼과백법(三科百法)의 영상(影像)이 대원경지 바다 속에 나타난 해인이다. 둘째는 헤아릴 수 없는 겁[不可計數劫] 동안을 거치면서 수행한 제석이 본각(本覺)의 수미산 마루에 올라서 근본무명(根本無明)의 아수라와 싸울 때, 항하사의 오만가지 덕[萬德]의 영상이 일심진여(一心眞如) 바다 속에 나타난 해인이다. 셋째는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一念不生] 제석이 일행삼매(一行三昧)의 수미산 마루에 올라 망념(妄念)의 아수라와 싸울 때 형상도 없고 분별상도 없는 불이실상(不二實相) 바다 속에 나타난 해인이다. 넷째는 두 부처님 세계의 미진수겁[二佛世界微塵數劫] 동안을 거치면서 수행한 제석이 총상중도(總相中道)의 수미산 마루에 올라서 분별변계(分別遍計)의 아수라와 싸울 때, 열 가지 보편적인 법의 영상이 세계해 속에 나타난 해인이다. 다섯째, 10불(佛)의 제석이 법성(法性)의 수미산 마루에 올라서 무주실상(無住實相)의 아수라와 싸울 때, 세 가지 세간의 법이 국토해 속에 나타난 해인이다.”9)
만약 이 뜻을 기준으로 하면, 하교의 법 또한 분수대로 해인정에 의거하여 일어난 것이다. 말하자면 처음의 3해인은 3승이고, 나중의 2해인은 1승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러므로 이 장(章)에서 논한 5중(重)의 가르침의 의미[敎義]라 함은 이 가르침의 뜻이 비록 5대(對)가 된다 하더라도 실제의 해인은 여섯 가지이기 때문에 이 6해인을 3승의 3해인과 합치면 곧 9중이 되는 것이다. 소승에는 식(識)의 전변 없기 때문에 해인을 논하지 않지만, 교화의 주체인 부처님[能化佛]마음 안에 소지법(所知法)을 나타낸 뜻을 기준 한다면 해인을 논할 수 있다. 이는 소승의 해인이니, 그렇게 합치면 열 가지 해인이 된다. 또 설사 소승의 해인 뜻[海印義]을 제외한다 해도 표훈 대덕이 불가설이 불가설 불가설을 근본으로 삼는다고 말하였다” 했다. 형상을 잊은 해인(海印) 이상부터 불가설 불가설을 세워서 근본으로 삼기 때문에 이를 합하면 10해인이 된다.
이 지품에서 문구(文句)의 논의로써 2대(大)를 설한 것이 오직 제5항목뿐이다 하는 것은 말하자면 경문 가운데 10지의 뜻이니 이처럼 설할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는 것 이전을 의대(義大)로 삼고, ‘나는 다만 1분(分)을 설할 뿐이다’ 이하를 설대(說大)로 삼는 것은 세운 것이 제5중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문】법장 대사는 2대(大)를 해석한 글10)에서 말하기를 “이 부분 해석에는 2중(重)이 있으니, 하나는 실(實)에 입각하여 형상을 따르는 과분(果分)과 인분(因分)이고, 두 번째는 묘한 지혜로 올바르게 증득하는 방편이 법에 의탁하는 과분과 인분이다”라고 하였다. 만약 실에 입각하여 형상을 따르는 뜻을 준한다면 이 또한 형상을 잊은 해인을 갖췄거늘, 어째서 오직 제5항목에만 해당하는 것인가?
【답】초중(初重)에서의 인분과 과분이란 단지 뜻을 취해서 논한 것이고, 후중(後重)의 인분과 과분이란 바로 경문에 해당하기 때문에 1대(大)의 경문은 제5항목에 해당하는 것이다.
【문】초중의 인분과 과분을 기준해서는 뜻[義]이 경문의 일부 대의(大義)에 통했다 하고, 후중의 인분과 과분을 기준해서는 이 「지품」을 국한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제5항목에서 보현이 마음 안에 있는 것을 뜻이라 하고, 언어 속에 나타난 것을 가르침이라 한 것은 오직 「지품」에만 국한된 것인가?
【답】보현이 마음 안에 있는 것을 뜻으로 삼고, 언어로 나타난 것을 가르침으로 삼는 것은 일부(一部)에 통하기는 하지만 묘한 지혜로 올곧이 증득한 것은 과분이고, 방편이 법에 의탁한 것은 인분의 뜻이다. 오직 지품 가운데서만 경문의 형상이 나타나기 때문에 이 품에 국한된다고 말한다.
【문】2중의 인과가 둘로 나뉨을 기준으로 해서 원융(圓融)과 항포(行布)의 두 뜻으로 분별한다면, 초중의 인분과 과분은 □□□ 11)에 입각하여 논한 것이고, 후중의 인분과 과분은 항포의 동교(同敎)에 입각하여 논한 것이 된다. 그렇다면 제5중의 교의는 오직 항포뿐인가?
【답】후증의 인과 또한 원융과 항포의 별교에 통한다. 설사 항포의 동교에 입각하여 논한다 하더라도, 보현이 마음속에 있는 것을 뜻이라 하고 언어로 나타난 것을 가르침이라 하는 것은 일부에 통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후증의 인과가 항포가 되는 것은 인(因)의 일분을 설한 설분(說分) 가운데서 다분히 3승 차별행의 덕을 설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과분 역시 항포이니, 이 같은 뜻을 기준으로 해서 항포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현이 마음속에 있는 것을 뜻이라 하고, 언설에 있는 것을 가르침이라 하는 것은 일부에 통하지만 각 회상마다 그 회상의 문상(文相)에 따라 다른 것이다. 이 때문에 후증을 항포라 말한 것은 우선 「지품」의 경문이 드러낸 상을 기준하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그러나 제5중의 가르침과 뜻이 일부를 통틀은 것이고 하더라도 「지품」의 경문은 나머지 회상에 통하지 않기 때문에 오직 「지품」에 국한될 뿐이라고 말한 것이다.
【문】「증교이대장(證敎二大章)」12)에서 말하기를 “1승의 원교를 만약 보고 들음에 기준하면 가르침과 뜻 2대(大)로 나눌 수 없고, 만약 보현의 해행증의(解行證義)를 기준하면 가르침과 뜻의 2대(大)가 있다고 설한다. 만약 보고 들음으로 보현의 증득에 대대한다 해도 역시 보고 들음은 교대(敎大)요, 보현이 증득한 뜻은 의대(義大)라고 말할 수 있다” 했으니, 만약 보고 들음을 기준으로 한다면 가르침과 뜻 2대로 나눌 수 없다는 것은 어떠한 보고 들음인가? 또 이 두 해석은 어떻게 다른가?
【답】‘만약 보고 들음을 기준으로 한다면’이란 종자를 심는 보고 들음이다. 두 해석 중에서, 처음의 해석은 이해하고 실천하는[解行] 것이 교대이고, 보현이 증득한 뜻이 의대이다. 뒤의 해석은 보고 들음이 이해하고 실천하는 데 속하는 것이 교대의 교대이다. 이 때문에 실(實)을 기준해서 갖추어 말하면 “만약 보고 들음으로 보현의 증득에 대대하면, 보고 듣고 이해하고 실천함을 설한 것이 교대이고, 보현이 뜻을 증득함이 의대이다”이다. 그러나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이 교대의 뜻이 되는 것은 처음의 해석 속에서 이미 드러냈기 때문에 여기선 생략한 것이다.
이 두 가지 해석의 뜻을 담고 있는 것은 『오교장(五敎章)』13)인데 ‘세계 밖의 기틀을 거둠[攝界外機]’ 중에 이르기를 “만약 먼저 1승 가운데서 이미 이해와 실천을 성취했다면, 나중에 세간을 벗어난 몸에 저 법을 증득하기 때문에 첫 해석이 있는 것이다” 했다. 또 ‘안팎의 두 기틀을 거둠[攝內外二機]’에서 말하기를 “만약 계(界) 안에서 보고 들음이라면 세간을 벗어나 법을 얻는 것과 출세간을 벗어나 증득해 이루는 것이다. 또는 계 안은 보고 듣고 이해하고 실천함에 통하는 것이고, 출세간은 오직 이해와 실천뿐이며, 출세간을 벗어남은 오직 증득해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나중의 해석이 있다”고 말했다.
말하자면 앞에서 말한 세 가지는 문 앞에 있는 세 수레로 방편의 가르침을 여는 것이고, 계 밖에서 큰 흰 수레를 주는 것은 진실한 뜻을 보이는 것이니, 이는 동교(同敎)의 1승에 해당한다. 『법화경』에서 설한 동교는 이익을 얻은 뒤의 두 항목이기 때문에 계 밖의 기틀을 거둔 가운데서 계 안의 기틀을 거둔 것이니 세 수레의 가르침을 준 것은 가르침이고, 이미 세 수레를 얻은 뒤의 큰 흰 소 수레를 준 것은 뜻이 된다. 안팎의 두 기틀을 거둠에 있어 깊고 은밀한 세 수레로 계 안의 기틀을 이끄는 것도 역시 법화의 계책이다. 이처럼 계 안의 기틀을 이끌어서 세 수레를 얻게 하는 것을 가르침으로 삼고, 세 수레를 얻은 후에 큰 흰 소 수레를 주는 뜻을 뜻으로 삼는다.
이렇게 말하기 때문에 1승의 뜻을 기준함에 있어서도 “먼저 1승에서 이해와 실천을 성취하고, 나중에 세간을 벗어난 몸에서 그 법을 증득한다”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미 이해와 실천을 성취한 사람으로 하여금 과법(果法)을 증득케 하는 것이 바로 이 경의 종지(宗旨)이니, 이런 뜻을 따르기 때문에 「증교이대장(證敎二大章)」에 처음의 해석이 있는 것이다. “만약 계 안에서 보고 들음이라면 세간을 벗어남은 이해와 실천이고, 출세간을 벗어남은 증득을 이루는 것이다” 등은 이 경이 삼계에 구애받지 않아서 어린아이도 보고 들을 수 있다는 뜻이니, 이 뜻을 따르기 때문에 나중 해석이 있는 것이다.
【문】「증교이대장」에 있는 이 두 해석의 뜻과 여기서 논한 5중교의(重敎義)의 뜻과 어떻게 다른가?
【답】「증교이대장」에서는 수행의 차례를 기준으로 해서 해석한 것이요, 여기서는 일어남을 기준으로 해서 차제를 설한 것이기 때문에 다르다.
【문】어째서 같은 종류의 2대(大)를 해석한 글에 이 같은 차이가 있는가?
【답】경문 가운데 두 가지 뜻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징관 대사가 2대(大)를 해석한 글14) 『화엄경수소연의초(華嚴經髓疏演義抄)』 제52권, 대정장 36, p.407 상.
에서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닦아서 증득하는 상대(相對)이고, 하나는 언어로 표현되는 상대이다”라고 하였다. 닦아서 증득하는 상대란 것은 수행의 차례를 기준으로 한 것이며, 언어로 표현되는 상대란 것은 일으킴을 기준으로 해서 차례를 설한 것이다. 이 두 가지 상대가 있는 까닭은 경문에 두 가지 뜻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절을 보는 것과 같다’에서부터 ‘부처님의 증득한 법이다’에 이르기까지는 보현이 오직 자기 마음으로 관(觀)한 것을 설한 것이기 때문에 부처의 증득한 마음을 다할 수는 없다. 비록 자기 마음으로 관한 것을 설했다 하더라도, 여타의 다른 법을 설한 것이 아니라 오직 부처님이 증득한 법만을 설했기 때문에 만약 법체(法體)를 기준으로 한다면 계급의 깊고 얕음이 없다. 그러므로 만약 제2중에서 상을 나타낸 해인이 뜻이고, 부처가 밖으로 향함이 가르침임을 기준으로 한다면, 가르침과 뜻에는 계급이 있지만 하나의 상을 나타낸 해인이 명칭을 바꿔서 가르침이 됨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법체를 기준으로 하면 계급이 없는 것이다.
또 부처님이 밖으로 향하는 것은 뜻이고, 보현이 정관(定觀)에 들어가는 것은 가르침이기 때문에 가르침과 뜻에서는 계급이 있지만 비록 자기 마음이 관한 것을 설하더라도 나머지 법을 설하지 않고 오직 부처님이 증득한 법만을 설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체(體)를 기준으로 하면 이 역시 계급이 없는 것이다.
【문】예전에 상 대덕께서 20권 소(疏)를 익히게 할 때, 절을 보는 비유 글을 두고 말하기를 “지엄 화상이 본래 두 가지 비유를 썼는데, 법장 대사의 소(疏)에서는 단지 하나의 비유만 기록하면서 다른 비유 하나는 싣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는데, 다른 하나의 비유는 무엇인가?
【답】얼음에 들어가는 비유이다. 가령 어떤 사람이 얼음 속에 들어가자, 곁에 있던 사람이 “찹니까?” 하고 물었다. 얼음에 선 사람이 “에이는 듯이 차다”고 대답하자, 언덕 위에서 털옷을 입고 불을 쬐던 자가 이 말을 듣고 나서 의관을 정제[勝振]하였다.
【문】이 비유는 어떤 법에 해당하는가?
【답】‘어떤 사람이 얼음에 들어간다’는 것은 보현보살이 여래정장정(如來淨藏定)에 들어간 것이고, 곁에 있던 사람이 ‘찹니까?’ 하고 물은 것은 동생(同生)과 이생(異生)의 대중들이 모두를 청한 것이다. 얼음에 선 사람이 ‘에이는 듯이 차다’고 말한 것은 보현보살이 5해(海)를 관하고 10지(智)를 설한 말이다. ‘언덕 위에서 털옷을 입고 불을 쬐던 사람’에서 ‘털옷을 입었다’는 말은 교화 받을 근기가 무명 번뇌를 끊지 않았다는 뜻이다. ‘불을 쬔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도의 불을 향한다고 말하니 소위 반야의 불을 향하기 때문이며, 또 한편으로는 번뇌의 불을 향하는 것이라 하니 번뇌의 불에 태워짐을 여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의관을 정제하다’는 것은 근기가 이익을 얻은 것이다.
【문】‘의관을 정제하였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어떤 이는 “보현보살이 10지(智)에 대해 설하는 것을 듣고 국토해의 법을 증득하기 때문이다”라고 하는데, 말하자면 이해와 실천의 입장에 서서 보현보살이 본분(本分) 가운데 10지(智)의 법을 설함을 잠깐 듣고 바로 국토해를 증득하기 때문에 ‘의관을 정제하였다’라 말한다. 또 어떤 이는 “비록 보현이 얻은 법을 다 같이 증득한다 할지라도 ‘의관을 정제하였다’라고 말한다”고 하니, 말하자면 교화 받는 근기가 이해와 실천의 입장에 서서 보현보살이 본분 가운데 10지(智)를 설함을 다 듣고 나면 바로 이해와 실천의 이익을 얻으니 이 또한 ‘의관을 정제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문】두 비유가 어떻게 다른가?
【답】어떤 이는 “얼음에 들어가는 비유는 보현이 정(定)에 들어가는 뜻을 비유한 것이기 때문에 깊고, 절[寺]을 보는 비유는 얕다”고 하는데,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절을 보는 비유 중에 어떤 사람이 절에 이르러서 탑을 본 것은 보현보살이 여래정장정(如來淨藏定)에 들어가 5해(海)를 관한 것이고, 집에 들어간 것은 대비(大悲)의 집에 돌아간 것이며, 오직 자기 마음만을 설한 것은 오직 자기 마음의 10지(智)를 설한 것이다. 이 때문에 두 비유는 다르지 않다.
‘뜻대로 설함’ 등은 비록 부처님이 근기를 등지는 것을 뜻으로 삼고 근기를 향하는 것을 가르침으로 삼더라도, 상을 나타낸 해인이 명칭을 바꾼 것을 가르침으로 삼음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법체는 다르지 않다. 부처님이 밖으로 향함을 뜻으로 삼고, 보현이 정관(定觀)에 들어감을 가르침으로 삼지만, 보현이 나머지 법을 설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부처님이 증득한 법만을 설하기 때문에 법체는 다르지 않은 것이다. 이처럼 국토해와 세계해가 비록 다르더라도, 국토해가 이름을 바꾸면 세계해임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법체는 다르지 않다. 비록 본질과 차별연(差別緣)이 다르더라도, 본질이 이름을 바꿔서 차별연이 됨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법체는 다르지 않다. 그래서 그러한 것이다.
4. 인과상형현의무진(因果相形現義無盡)
【章】‘넷째, 인과의 형상(形相)이 뜻의 다함없음을 나타낸다’는 것은, 비유하자면 마치 1척의 나무와 10보의 나무가 그 형상이 바야흐로 길고 짧은 위상[位]을 얻는 것과 같으니, 만약 형상이 없다면 길고 짧은 위상을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1척은 긴 위상이고 10보는 짧은 위상임을 아는 것이니, 만약 1척이 긴 위상이 없이 같은 곳에 놓여져 있으면서 형상을 얻지 못한다면, 10보가 긴 위상이 될 것이다.
따라서 1척의 사람을 청함에 있어 10보의 당기[幢]를 들어 수여하고, 10보의 사람을 청함에 있어 1척을 수여하는 것이니, 이 같은 것이 형상이니 법계에 일체의 상대적인 법은 모두 이에 준거한다. 그러므로 모든 법은 드는 한 법에 따라 일체를 다 거두는 것이라서 형상할 것도 없고 우수하거나 열등한 품(品)도 없는 것이니, 이 같은 법 중에 비로소 1승의 법상(法相)을 논한다. 이러한 뜻의 검정을 통해 앞서 5중의 교의가 하나하나가 서로 5중을 다 갖추어서 우수하거나 열등한 상대(相對)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로 형상을 뺏는 것은 위에 준거해서 이해하라.
【記】제4구(句) 중에 나아가면, 온 뜻은 앞서 변별해 말한 것과 같다. 인과란 두 가지 뜻으로 볼 수 있는데, 말하자면 첫 번째 뜻은 상을 잊은 해인과 상을 나타낸 해인을 대대해서 상을 잊음을 과분(果分)이라 하고, 상을 나타냄을 인분(因分)이라 한다. 또 상을 나타낸 해인과 부처님이 밖으로 향함을 대대해서 상을 나타냄이 과분이요, 부처님이 밖으로 향함이 인분이다. 나아가 보현이 정(定)에서 나와 마음 안에 있는 것과 언어에 있는 것을 대대하여 보현이 마음 안에 있는 것은 과분이요, 언어로 나타난 것은 인분이 되니, 이처럼 다중(多重)의 인과를 논한 것이다.
또 하나의 뜻은 상을 잊음과 상을 나타냄과 밖으로 향함 등 셋은 과(果)가 되고, 보현이 정(定)에 들어감 이하는 인(因)이 된다. 이와 같은 것은 모두 인과의 형상을 말한 것이다.
이 위의 두 가지 뜻을 모두 다 맞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1척의 나무와 같다’에서 ‘1척을 수여한다’에 이르기까지, 만약 1척의 나무가 10보의 긴 위상을 대대하지 않는다면 누구를 대대하여 짧은 위상을 얻을 것이며, 만약 10보의 나무가 1척을 짧은 위상을 대대하지 않는다면 누구를 대대하여 긴 위상을 얻겠는가? 그러므로 1척의 나무는 10보의 나무를 대대해야 비로소 10보의 짧다는 위상이 이루어지고, 10보의 나무는 1척의 나무를 대대해야 비로소 1척의 긴 위상이 이루어지는 까닭에 그러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 길고 짧은 위상을 논하는 데는 세 가지 항목이 있다. 첫째, 다만 변계(遍計)만을 기준으로 해서 논한다면 1척은 짧은 위상이요, 10보는 긴 위상이다. 둘째, 변계를 밟고서 연기를 논한다면 1척은 긴 위상이요, 10보는 짧은 위상이다. 셋째, 다만 연기만을 논한다면, 1척을 들 때 온전한 1척이기 때문에 곁에 10보의 나무가 없고, 10보를 들 때 온전한 10보이기 때문에 곁에 1척의 나무가 없다.
어째서 “변계를 밟고서 연기를 논한다면 1척의 긴 위상이요, 10보는 짧은 위상이다”라고 하는가? 이른바 만약 변계로 말하면, 비록 1척이 짧은 위상이지만 1척이 자라게 되면 10보의 긴 위상과 차이가 없기 때문에 1척을 무너뜨리지 않고서도 바로 10보의 긴 위상을 갖추게 된다. 그러므로 1척이 긴 위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변계로 말하면, 10보가 비록 긴 위상이라도 10보가 짧아지게 되면 1척의 짧은 위상과 차이가 없기 때문에 10보를 무너뜨리지 않고서 바로 1척의 짧은 위상을 갖추게 되는 것이므로 10보가 짧은 위상이라 말하는 것이다.
‘만약 다만 연기만을 논한다면’이란 ‘마치 꿈에서 본 산하대지 등과 같다’는 것이 나의 내가 없는 과보심[無我報心]으로 하여 어느 일부분을 산이라 하는 것도 아니고, 어느 일부분을 티끌이라 하는 것도 아니어서 완전한 명칭으로 티끌이 되고 완전한 명칭으로 산이 되는 것 등이니, 이처럼 머무름이 없는 큰 허공[無住大空]이 완전한 명칭으로 1척이 되고, 완전한 명칭으로 10보가 된다. 이 때문에 1척을 들 때는 머무름이 없는 큰 허공이 1척을 온전히 하여 곁에 10보의 긴 위상이 없는 것이고, 10보를 들 때는 머무름이 없는 큰 허공이 10보를 온전히 해서 곁에 대대할 만한 것이 1척의 짧은 위상이 없는 것이다.
『도신장(道申章)』에서 말했다.
“지엄 화상이 천화(遷化)하기 10일 전에 배우는 무리들이 들어가 안부를 묻자, 지엄 화상이 대중들에게 물었다.
‘경전에 한 티끌 속에 시방세계를 머금는다는 것과 한량없는 겁이 일념이등이라는 글이 있는데, 그대들은 어떻게 보는가?’
대중들이 말했다.
‘연기법은 자성이 없는 것이라서 작은 것은 작은 것에 머물지 않고 큰 것은 큰 것에 머물지 않으며, 짧은 것은 짧은 것에 머물지 않고 긴 것은 긴 것에 머물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떠다니는 것일 뿐입니다.’
지엄 대사가 말했다.
‘그러한 것이 그러하다.’
하지만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자가 무슨 말씀이냐고 묻자, 지엄 대사가 말했다.
‘많이 말하지 마라. 오직 한마디이기 때문이다.’ ”
이렇게 말했기 때문에 1척을 들 때는 머무름이 없는 큰 허공이 1척을 온전히 하기 때문에 곁에 아무것도 없고, 10보를 들 때는 머무름이 없는 큰 허공이 10보를 온전히 하기 때문에 곁에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니, 이 같은 것이 바로 연기의 뜻이다.
‘이 같은 형상이란’ 등은 1척과 10보의 상대를 기준으로 해서 논한 것이니, 나머지 대승과 소승, 오염과 청정 등의 일체 상대법을 준거해 논한 것도 이 와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모든 법’에서부터 ‘우수하거나 열등함이 없는 품(品)’에 이르기까지는 한 티끌을 들 때 법계의 모든 법을 구족하여 곁이 없는 것[無側]이니, 나머지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우수하거나 열등함이 없는 품이라고 말한 것이다.
‘상대가 없다는 등’은 만약 가장 아래의 ‘언어로 나타내는 것이 가르침이다’ 하는 것을 기준으로 한다 해도 여기에 5중의 무측(無側)을 갖추고, 또 가장 위의 ‘상을 잊은 해인’을 기준으로 한다 해도 이 안에 5중의 무측을 갖추기 때문에 상대가 없다고 말한 것이다.
5. 회문별속이현의융(廻文別屬以現義融)
【章】 ‘다섯째, 경문을 돌이켜 별도로 귀속시킴으로써 뜻의 융섭을 나타낸다’는 것은, 위의 형상을 빼앗음을 말미암아야 비로소 경문을 돌이키는 것이니 만약 형상을 빼앗지 않는다면 돌이킬 수 없다. 뒤의 모든 문자는 별도로 하나의 여(如)자에 귀속하여 다함없는 뜻을 내는 것이니, 그러므로 한 문자가 7처(處) 8회(會)를 구족해서 모든 문자가 걸림 없기 때문에 뜻의 융화를 나타낸다고 말한 것이다.
이러한 뜻으로 검정하면, 가장 아래 보현이 하나의 세계해를 말로 나타낸다는 이 부분에 위의 5중의 뜻과 가르침이 두루 갖추고 있어서 가장 위 부처님이 상을 잊은 해인(海印)에 5중이 두루 구족되어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런 뜻으로 인해 경문 내의 모든 글자 가운데 한 글자 한 글자마다 앞뒤의 모든 글자를 섭회(攝廻)하여 별도로 한 글자에 귀속시켜 뜻을 나타냄에 걸림이 없으니, 하나하나의 티끌이 삼세간의 법을 섭회하여 별도로 한 티끌에 귀속시켜 뜻을 나타냄에 걸림이 없는 것이다. 이 뜻과 위의 뜻은 다함도 없고 차이도 없으나, 경문을 돌이켜 뜻의 융화를 드러내지 못하는 것은 다함없는 상(相)이 아직도 숨어 있는 것이니, 이 때문에 경문을 돌이켜 앞서의 뜻이 다함없음을 드러낸 것이다.
【記】제5구의 글에 나아가 “경문을 돌이켜 별도로 귀속시킴으로써 뜻의 융화를 나타낸다”고 한 것은 오직 5중이 서로 거두는 것만이 아니라, 이 경문의 법을 만약 문자를 기준으로 하면, 최초의 여(如) 한 글자에 많은 글자를 갖추고 있으나, 곁이 없고, 나머지 글자를 기준으로 해도 마찬가지이니, 이런 것으로 뜻의 융화를 나타냈기 때문이다.
‘하나하나의 티끌이 거둔다’ 등은 문자를 기준으로 하여 그러한 것처럼 티끌을 기준으로 하면, 한 티끌 속에 삼세간 법을 거두어 곁이 없고 나머지 티끌도 마찬가지여서 이와 같이 뜻의 융화를 나타냈기 때문이다.
‘뜻과 위의 뜻이라는 것’ 등은 인과의 형상과 ‘뜻을 나타냄이 다함없다’는 뜻이 다르지 않지만, 앞서의 구절 중에서는 오직 하나하나의 중(重)이 5중을 갖출 뿐 하나하나의 글자가 많은 글자를 거둠을 밝히지 않기 때문에 다함없는 상(相)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구절에 이르러선 한 글자 속에 많은 글자를 거둠을 밝혔기 때문에 바야흐로 다함없는 상을 나타낸 것이다.
6. 기인다라창의변제(寄因陀羅彰義邊際)
【章】 ‘여섯째, 인다라에 의탁해서 뜻의 변제(邊際)를 드러낸다’는 것은, 위의 뜻을 융화한 것이 안으로는 중심이 없고 밖으로는 변제가 없어서 인다라에 의탁하고 있음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임(琳) 대덕이 “비유하자면 세계가 선회하는 것처럼 처음과 끝도 없고 안팎의 구별도 없다”라고 말한 것은, 마치 손가락으로 물을 돌려 물결을 이루는 것처럼 인다라도 마찬가지이니 한 손가락의 물결 속에 법계의 일체 세계가 나타나 안립한다. 이 모든 세계의 한 티끌 한 티끌이 한 손가락의 물결을 거두어들이고, 또한 이 한 손가락의 물결 속에 법계도 마찬가지로 거두어지면서 중중무진(重重無盡)한 것이다. 만약 한 티끌 속에 1척, 10보, 천 보 등이 나타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안을 향해서 마음을 찾는다면 들어가고 들어가도 여전히 밖이고, 밖을 향해 변두리를 찾으면 나가고 나가도 여전히 안이니, 어째서 그러한가? 흰 옥에 들어가는데, 검은 옥이 흰 옥의 그림자를 두르고 흰 옥으로 들어간다면, 어떻게 검은 옥은 오직 안이요 밖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검은 옥이 밖이고 흰 옥이 안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문】미세문(微世門)과 어떻게 다른가?
융(融) 대덕이 답하기를, “인다라는 법의 다함없는 분제(分齊)를 드러내고, 미세문은 법의 지극하고 뛰어난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말하자면 인다라문은 한 티끌 속에 시방세계를 나타내는 것이고, 미세문은 한 티끌 속에 시방세계를 나타내어 멀고 가까운 것과 크고 작은 것을 움직이지 않고 안립하는 모습이다” 하였다.
【문】미세함이 서로 융용(融鎔)하는 것과 하나와 많음이 서로 융용하는 것이 어떻게 다른가?
임 대덕이 답하기를, “서로 융용하는 건 다 동일하다”고 하였다.
【문】다 동일한데 어째서 두 항목을 구별하는가?
【답】무엇으로 인하여 서로 융용하는가? 그런 까닭에 하나와 많음이 서로 융용하는 것이 있는 것이요, 서로 융용하는 모습은 어떠한가? 그런 까닭에 미세함이 서로 융용하는 것이 있는 것이다. 서로 힘이 있고 힘이 없는 것을 말미암아서 인과의 도리를 남김없이 거두기 때문에 하나와 많음이 서로 융용하는 것이고, 하나와 많음이 서로 융용하는 것은 거친 뜻으로써 알 수 없기 때문에 미세함을 말한 것이다.
【문】열의 하나를 거두어 이룰 때 비로소 열의 둘을 거두어 이루고, 나아가 열의 열[十十]을 거두어 이루는 것은 하나를 부르면 다하는 것인데, 어째서 다하지 못함이라고 하는가? 만약 오직 하나만이 열을 갖추고 나머지 아홉은 열을 갖추지 못한다면, 원만치 못한 아홉의 차별을 거두는 것이니 동상(同相)을 밝히지 못한 것인가?
【답】거두어진 열이 모두 열을 갖춘다면 중중(重重)에 들어가기 때문에 모두 원만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오직 처음의 첫 항목에 있을 뿐 두 번째 거두어들이는 항목[攝門]의 다함없음으로 다하지 못함이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의 항목에 다함없음이 없으면 나머지 항목의 다함없음도 없다. 스스로의 항목이 같음[同]과 다름[異] 두 항목의 다함없음을 거둔다는 것은 스스로의 항목이 거두는 것이 아니다.
【문】나[自]도 없고 남[他]도 없는 도리는 형상을 뺏는 거둠이기 때문에 하나의 항목에 다함없는 뜻이 거둬지는 것인데, 어째서 스스로의 거둠이 되지 못하는가?
【답】마치 허공이 곁이 없어 서로 알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스스로 구족함에 대대함이 없어서 덕도 더 이상 거둠이 없기 때문이다. 이문(異門)이란 동체의 열 개 항목이니 바로 제2 항목 등이다. 감응되는 것은 이체(異體)이고, 감응하는 것은 동체이기 때문에 앞서 이체라 말한 것과는 다르다.
【記】제6구가 있게 된 뜻[來意]은, 앞서 변별한 것과 같다.
【문】5중의 교증(敎證)에서 상을 잊은 해인과 상을 나타낸 해인이 바로 내증(內證)이다. 만약 5중을 기준으로 해서 인다라를 논한다면 「의리장(義理章)」 중의 내증은 인다라의 미세함을 논하지 않는 글인데 어떻게 회통하는가?
【답】내증 가운데서는 인다라를 논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하나와 많음을 나누어 논할 수 없기 때문에 논하지 않는다고 했을 뿐이다. 그러나 5중이 서로 갖추고 있는 뜻을 기준으로 하면 인다라를 설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문】옛말에 “해인 중의 성법(成法) 가운데서 인다라를 논한다”고 말했으니, 그렇다면 내증에서도 인다라를 논할 수 있는 것인가?
【답】두 가지 의미로 살필 수 있다. 말하자면 첫째 의미는 해인 중의 성법 가운데서 인다라를 논한다는 것은 넓은 범위의 해인을 기준으로 했기 때문에 『화엄경』의 법을 기준으로 해서 바야흐로 인다라의 뜻을 논한 것이라 말하는 것이고, 좁은 범위의 해인에서는 논하지 않는다. 둘째 의미는, 내증 중에서 인다라를 논하지 않은 것은 하나와 많음을 나누어 논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옛사람이 해인 중의 성법 가운데서 인다라를 논한 다 한다고 한 것은 인다라의 법이 내증 안에서 바야흐로 만족함을 얻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만약 내증 안에 인다라를 갖추고 있지 않다면 어떤 연기분(緣起分)에서 이를 논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내증에 갖추어진 법은 연기분 속에서 논할 수 있다. 이는 위의 두 가지 뜻을 다 인정하는 것이다.
위의 ‘뜻을 융화함을 드러내고자 한다’는 것은 앞서의 “경문을 돌이켜 따로 귀속시킴으로써 뜻의 융화를 나타낸다”는 것을 가리키는 구절이다. ‘비유하자면 세계가 선회하는 것과 같아서 시작도 끝도 없고, 안팎의 구별도 없다’는 것은 마치 인다라의 세계에 대열이 선회하는 것과 같음을 일컬은 것이다.
‘마치 손마디로써’에서부터 ‘또한 마찬가지이다’에 이르기까지는 마치 한 손가락으로 물을 돌려 물결을 이루는 것과 같아서 한 손가락의 물결 속에 법계의 일체 세계가 그 안 들어가 안정되게 세워짐을 나타내고, 또 그 세계 하나하나의 티끌 속에서 저마다 한 손가락의 물결을 거두고, 또 거두어진 한 손가락의 물결 속에 법계의 일체 세계가 안정되게 세워짐을 나타내면서 들어감 속에 또 들어가고, 들어감 속에 또 들어가는 것이 인다라의 뜻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문】중중무진이란 것에서 중중(重重)과 무진(無盡)은 어떻게 다른가?
【답】일설에는 다르다고 하니, 이른바 『대료간(大料簡)』15) 제망중중문(帝網重重門)에서 이르기를, “앞의 1구(句) 중에 일체를 갖추니, 이것이 하나 속의 일체요, 다시 하나가 그대로 일체인 것이다. 이처럼 중중하고 중중해서 다 궁구할 수 없다. 총체적으로 이 1구가 두 가지 종류를 나타낸다는 것은 이 같은 1구와 나머지 일체 구가 하나하나 다 마찬가지이니, 이는 곧 무진이요, 다함이 없고 다함이 없음이다”라고 하였다.
하나 속에 일체를 거두고, 그 거둔 일체 속에 또 각기 일체의 법을 거둔다는 것은 중중이다. ‘만약 하나의 항목이 그러하다면 나머지 항목도 역시 그러하다’는 것은 다함이 없고 다함이 없기 때문에 다른 것이다. 그러나 중중과 무진은 차별이 없다. 말하자면 「의리장」16)에 이르기를 “그러나 이 무진과 중중은 모두 다 첫 번째 항목에서 거둔다” 하였다. “다만 자체 한 개의 항목 중의 무진과 중중만을 거두는 것인가, 아니면 나머지 이문(異門) 중의 무진과 중중도 거두는 것인가?” 등을 묻기 때문에 다르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가령 한 티끌 속에 1척이 나타나니 10보, 천 보 등도 그렇다’는 것은 한 손가락의 물결 속에 법계의 법이 나타나는 것과 같으니, 1척과 10보와 천 보에서도 그러하다.
“만약 안을 향해 마음을 찾는다면 들어가고 들어가도 여전히 밖이고, 밖을 향해 변두리를 찾는다면 나가고 나가도 여전히 안이다”라는 등은 제석전(帝釋殿)의 구슬 그물에서는 검은 옥의 그림자가 흰 옥 속에 들어가기 때문에 검은 옥이 안이요 흰 옥이 밖이다. 그러나 검은 옥의 그림자가 흰 옥의 그림자를 두른 채 흰 옥 속에 들어가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검은 옥이 안이고 흰 옥이 밖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흰 옥이 안이고 검은 옥이 밖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 그 흰 옥이 검은 옥의 그림자를 두른 채 검은 옥 속에 들어가기 때문에 검은 옥이 안이고 흰 옥이 밖이라 말할 수 있으니 그런 까닭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마치 하나의 궁문(宮門)에 여러 겹이 있어서, 밖에서 안으로 들어갈 때 이 문으로 들어가면 바로 안이다 말하지만, 그 문 안에 다시 다른 문이 있기 때문에 앞서 들어온 문은 도리어 밖이 되는 것과 같다. 또 이 문을 들어가면 바로 안이 된다 말하지만, 그 문 안에 다시 다른 문이 있어서 앞서 들어온 문은 도리어 밖이 되기 때문에 들어가고 들어가도 여전히 밖을 말한 것이다.
안에서 밖으로 나갈 때, 이 문을 나가면 그대로 밖이 된다고 말하지만, 그 문 밖에 다시 다른 문이 있기 때문에 앞서 나간 문은 도리어 안이다. 이 문을 나가면 그대로 밖이 된다고 말하는데, 그 문 밖에 다시 다른 문이 있어서 앞서 나간 문은 도리어 안이 되니, 이런 식으로 중중하기 때문에 나가고 나가도 여전히 안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인다라가 드러난다’에서 ‘안립하는 모습’에 이르기까지는 하나의 티끌 속에 법계의 일체 법을 거두니, 그 거둔 일체 법 가운데 저마다 법계의 일체법 등을 거두어서 그 안에 들어가면서 또 들어가고, 들어가면서 또 들어가기 때문에 법의 다함없는 분제(分際)를 드러낸다고 말한 것이다. 미세문에서는 한 티끌 속에 법계의 일체 법을 나타내고, 그 일체법이 움직이지 않으면서 멀든 가깝든 크든 작든 스스로의 지위에서 환하게 일제히 나타나기 때문에 법의 지극하고 뛰어난 모습을 드러낸다 말하는 것이다.
【문】「의리장」17)의 미세상용안립문(微細相容安立門)에서 이 뜻을 물은 것과 인다라는 어떻게 다른가?
【답】“중중으로 숨었다 비쳤다 서로 나타나면서 인다라에 섭수(攝收)되어 일제히 환하게 나타나는 것은 미세의 섭수이다”에서 다중(多重)의 법에 나아가 하나의 법 속에 일체 법을 거두면서도 스스로의 지위에서 움직임 없이 일제히 환하게 나타남이 미세(微細)이다. 또 나타난 일체 법 가운데서 하나하나가 저마다 법계를 나타내면서도 일체법이 스스로의 지위에서 움직임 없이 일제히 환하게 나타난다는 뜻도 역시 미세문이 된다.
【문】이처럼 하나의 인다라 가운데 여러 개의 미세문을 논하는 것인가? 또는 오직 한 법만을 기준으로 하여 이 가운데 이 같은 중중의 법이 일제히 환하게 나타난다는 뜻이 미세가 되므로 하나의 인다라 가운데 하나의 미세를 세우는 것인가?
【답】두 가지 뜻 모두 옳다. 말하자면 『요간(料簡)』18)에 “또 이문(異門)으로 동체(同體)를 섭수(攝收)하여 서로 들어가는 뜻이기 때문에 미세문을 나타낸 것이요, 이체(異體)가 서로 들어가는 것이 동체가 서로 들어가는 것을 대동(帶同)하기 때문에 중중무진의 제망문(帝網門)이 있는 것이다”고 했으니, 이문(異門)으로 동체를 섭수하여 서로 들어가는[相入] 뜻이기 때문에 미세문을 나타냈다는 것은 이체가 스스로의 하나를 지키는 것이 저마다 다르고, 열 개 항목에 하나하나마다 모두 동체가 스스로 갖춘 덕의 10법을 대동함으로써 일제히 환하게 나타나는 뜻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이체가 서로 들어가는 것[相入]이 동체가 서로 들어가는 것을 대동하기 때문에 중중문(重重門)이 있다는 것은 이체의 저마다 다른 열 개 항목 하나하나가 서로 저마다 열을 갖추기 때문에 그 거둔 어진 열의 하나하나가 다 동체의 열이 서로 들어감을 대동하는 뜻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이 같은 중중의 법에 입각하여 이체의 하나 속에 이체의 각기 다른 10법이 일제히 환하게 나타나는 뜻이 미세가 되는 것이다. 그 나타난 열의 하나하나가 다 동체의 열을 대동해서 일제히 환하게 나타나는 뜻이 다시 또 미세가 된다면, 하나의 인다라 가운데 여러 개의 미세의 뜻을 논하는 것도 인정할 수 있다. 또 이 같은 중중의 법이 하나 속에서 일제히 한하게 나타나는 뜻이 미세가 되는 것도 역시 인정할 수 있다.
【문】중중의 법이 하나 속에 나타나는 뜻을 기준으로 해서 미세를 세운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답】마치 다섯 면의 거울을 걸어놓는 것과 같으니, 제1의 거울 속에 법계의 일체 법이 나타난다면, 그 나타난 것 속에서 4만 2천 유순 이상의 일륜(日輪)이 나타나고, 백천장산(百千丈山) 또한 현현하다. 이처럼 멀고 가까움, 많고 적음, 오염과 청정이 스스로의 지위를 움직이지 않고 일제히 환하게 나타난다. 나머지 네 거울도 마찬가지다. 다시 또 제1의 거울 속에서 나머지 네 거울의 그림자를 거두고, 그 거둔 네 거울 속에서 하나하나가 저마다 법계 모든 법의 멀고 가까움, 많고 적음을 나타내면서도 스스로의 지위를 움직이지 않고 일제히 환하게 드러난다. 그렇기 때문에 중중의 인다라법을 기준으로 하면 하나의 법 가운데 일제히 환하게 나타나는 뜻이 다시 미세가 되는 것도 없지 않다.
【문】만약 하나의 법 가운데 중중의 법이 일제히 환하게 나타나는 것이라면, 많음[多]도 함께하는 것인가?
【답】「의리장」에서 말하기를 “든 것에 따라 첫머리가 되고, 나머지는 짝[伴]이 된다”고 하기 때문에 많음은 함께하지 않는다.
‘어째서 서로 용납하는가?’에서부터 ‘미세가 서로 용납하는 것’에 이르기까지에서, 어째서 서로 용납하는 것인가? 하나가 힘이 있을 때는 많음은 힘이 없기 때문에 서로 용납하게 되는 것이고, 이 때문에 ‘하나와 많음이 서로 용납하는 항목[一多相容門]’이 있는 것이다. 서로 용납하는 법의 모습은 무엇을 말함인가? 하나의 법속에 법계의 모든 법이 스스로의 지위를 움직이지 않고 일제히 환하게 나타남이 그것이다. 그런 까닭에 미세상용문(微細相容門)이 있는 것이다.
【문】오직 일제히 나타나는 모습을 기준으로 하는 것만으로도 미세라고 할 수 있는데, 어째서 서로 용납함을 아울러 취하는가?
【답】비록 미세를 말하더라도 서로 용납함을 버리지 않는 것이 바로 서로 용납하는 법의 미세한 모습이기 때문에 미세가 서로 용납한다고 말한다.
【문】미세라는 것은 포함하는 미세인가, 아니면 포함되는 미세인가?
【답】혹자는 포함하는 미세라 말하고, 혹자는 포함되는 미세라 말하며, 혹자는 알기 어렵다는 뜻이 미세라고 말한다.
처음의 뜻은, 「제10지소(地疏)」19)에 말하기를 “미세에 들어가는 지혜란 미세상용안립문이니, 항상 깨달음을 이루는 8상(相)을 드러내 보이는 가운데서 하나가 일체를 나타내기 때문에 미세에 의거함에 칭합한다” 하였다. 미세한 한 티끌 속에 일체의 뜻이 드러나는 것을 미세라 말하기 때문에 그러하다.
다음의 뜻은 「의리장」 미세문 가운데 경문을 인용하여 이르기를 “한 티끌 안의 미세국토와 일체 티끌 등이 다 그 속에 머물고 있다”고 했다. 한 티끌 안의 미세국토라 말했기 때문에 미세가 포함된 것이다.
마지막 뜻은, 「지소」에 이르기를 “저 응화(應化) 등은 앞서 3지(智)에 붙어서 미세의 일화(一化)를 의거해 나타난다”고 하였다. 미세의 화의(化義)를 나타냄을 기준으로 해서 미세라 말하기 때문에 알기 어렵다는 뜻으로써 미세를 삼은 것이다.
처음의 뜻은 미세 속에서 서로 용융하는 것이고, 다음의 뜻은 미세의 법을 서로 용융할 수 있음이며, 마지막 뜻은 서로 용융하는 뜻이 미세해서 알기 어렵다는 것이다. 징관(澄觀) 대사가 『연의(演義)』20)에서 이 세 가지 뜻으로 미세문을 해석했기 때문에 이 세 가지 뜻을 갖추어야 비로소 미세문이 된다.
【문】알기 어렵다는 뜻이 미세의 뜻에 있어 ‘한 티끌 속의 미세국토’라는 글이 되는데 이를 어떻게 회통한다는 말인가?
【답】이 역시 알기 어렵다는 뜻을 기준으로 해서 미세라고 말했을 뿐이지, 국토를 기준으로 해서 미세라 말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틀리지 않다.
【문】세 가지 뜻을 갖춤에 입각하여 글을 깨뜨렸다[破文]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답】세 번 미세의 말을 되풀이하면 뜻이 저절로 나타날 뿐이다. 말하자면 미세 가운데 미세한 법이 미세하게 서로 용융하는 것이고, 미세한 법이 미세 가운데 미세하게 서로 용납하는 것이며, 미세하고 미세한 법이 미세 가운데 서로 용융하는 것이니, 이처럼 세 번 반복하면 세 가지 뜻이 저절로 나타난다.
하나와 많음이 서로 용융하는 것은 거친 뜻으로는 알지 못하기 때문에 미세를 말했다는 것은, 우선 알기 어렵다는 뜻을 기준으로 해서 미세라 말한 것이다.
【문】거친 뜻으로는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면 마땅히 지혜의 미세를 말한 것인데, 어째서 알기 어렵다는 뜻을 기준으로 해서 미세라고 말했다 하는가?
【답】이미 아는 법이 미세이기 때문에 이 지혜도 미세임을 아는 것이니, 이 때문에 알기 어렵다는 뜻을 기준으로 해서 미세라 한 것이다.
【문】하나와 많음이 서로 용융하는 것은 이미 하나와 많음이 서로를 용융했기 때문에 서로 용융하다고 말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미세가 서로 용융하는 것은 오직 하나가 많음을 용융하는 것일 뿐, 서로 용융하는 것이 아닌데, 어째서 미세가 서로 용융한다고 말하는가?
【답】두 가지 뜻으로 살펴 볼 수 있다. 첫 번째 뜻은 하나가 많음을 용융한다고 하는 것은 결코 어떤 하나가 편벽되게 어떤 많음을 용융하는 것이 아니니, 내가 집착하는 것을 따라 하나가 나머지 많음을 용융하게 되고, 나머지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서로 용융한다고 말한 것이다. 두 번째 뜻은 하나가 많음을 용융할 때 많음도 하나에 들기 때문에 서로 용융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문】나중의 뜻에서 하나가 많음을 용융하는 것은 용융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많음이 하나 속에 들어감은 들어갈 뿐이지 용융하는 것이 아니거늘, 어째서 서로 용융한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인가?
【답】만약 그렇다면 어려운 것은, 서로 들어가는 항목이란 많음이 하나에 들어가는 것을 들어간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고, 하나가 많음을 용융하는 것은 용융이지 들어감이 아니니 어떻게 서로 들어간다고 말하겠는가? 그러므로 들어가는 하나는 용융이지 들어감이 아니다. 그러나 합해져서 들어가는 것을 서로 들어간다고 말할 수 있으니, 비록 용융되는 많음은 들어감이지 용융함이 아니라 하더라도 합쳐지면 서로 용융함이라 말하여도 무리가 없다.
‘열을 거두어 하나를 이룬다’에서부터 ‘다하지 못함인가’에 이르기까지에서, 자체의 항목이 다함없을 때 비로소 나머지 항목도 다함이 없다‘는 것에 대해 ‘첫 항목에서 열을 거둘 때 곧 다함이 되는데 어째서 나중의 아홉 항목은 다하지 못하는 것인가?’ 하고 질문하였다. ‘만약 오직 하나만이 열을 갖출 뿐이다’에서부터 ‘동상(同相)을 밝히지 못한다’에 이르기까지에서, 동상이란 개별적인 연(緣)의 만족을 본다는 뜻이기 때문에 ‘만약 하나의 항목 가운데 열을 거두어도 저 거두어진 아홉 가운데 열을 갖추지 못한다면 만족치 못한 아홉을 거두는 것과 다르기 때문에 동상을 밝히지 못하는 것인가?’ 하고 질문하였다.
이에 답인 ‘거두어진 열’에서부터 ‘다하지 못함이라 말한다’에 이르기까지는, 「의리장」21)에서 묻기를, “이 동체 가운데 하나가 곧 열이라는 등은 단지 이 열만을 거둔 것인가, 아니면 다함없음을 거둔 것인가?” 하니 답하기를, “열이어야 하는 것은 곧 열이고, 다함없는 것이어야 하는 것은 곧 다함없음이니, 이렇게 늘리고 줄이는 것을 지혜에 따라 취한다. 즉 열이 앞서 다함없음을 해석한 말과 같다는 것은 하나의 항목 중에 이미 열을 갖추었으나, 이 열이 다시 자체적으로 번갈아 상즉(相卽)하면서 중중에 들어가 다함없음을 이룬다”고 하였으니, 이 뜻을 쫒아서 답했을 뿐이다.
‘자체의 항목이 없다’에서부터 ‘자체의 항목에서 거두어진 것이 아니다’에 이르기까지는 자체의 항목에 다함없음 없을 때는 나머지 항목의 다함없음도 세우질 못하니, 그러므로 다만 이러한 뜻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거둔다고 말했을 뿐, 자체 항목의 다함없음을 거두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머지 항목은 다하지 못함’이라고 말한 것이다.
‘무릇 자체가 없음’에서부터 ‘다함없는 뜻이 거둠’에 이르기까지는, 융질 대덕이 이 말을 인용해 증거로 삼으면서 “총상(摠相)의 다함 중에 갖추어진 아홉 항목이 별상(別相)의 다하지 못함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 뜻에서도 이 글을 증거로 삼았으니, 말하자면 자체의 한 항목에서 다함없음을 거둘 때 나머지 아홉 항목도 다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 한 항목의 다하지 못하는 뜻 중에서 거두는 것일 뿐, 자체 항목의 다함없음이 되는 것을 거두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앞서서 “이 해석은 처음을 밝혀 드러내고 ‘나머지 항목은 허공 같다’는 해석은 별다른 뜻이 없다”라고 말한 것은, 처음의 해석 중에서 나머지 항목이 허공과 같다는 것은 첫 항목의 다함없음을 볼 때 나머지 항목이 서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허공 같다고 말한 것이요, 나중의 해석에서 다시 나머지 하나하나 항목 속에 다함없는 일체를 거둔다고 말한 것도 처음 한 항목의 다함을 세울 때 나머지 항목은 다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한 항목의 다함을 세울 때 남기는 것 없이 거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머지 하나하나의 항목 속에서 다함없음을 거둘 뿐이다”라고 말한 것이니, 이 역시 처음 해석한 허공과 같다는 뜻이지 별개의 다른 뜻을 나타낸 것이 아니다.
【문】「의리장」22)에서 “묻는다. 이 동체 가운데 거둔 일체라는 것은 마땅히 자체 항목의 일체를 거둔 것인데, 어찌 나머지 항목 속의 일체를 거둔 것일 수 있겠는가?” 한 것은 앞의 어떤 경문을 들어서 이 질문을 한 것인가?
【답】앞의 동체즉문(同體卽門) 말미에 이르기를 “혹은 자체의 동체와 이체 두 항목을 함께 거둠에 있어 다함없고 다함없음이다”라고 말했기 때문에 이 뜻을 가지고 질문한 것이다.
상대함이 없다는 것은 자체 항목의 다함없음을 세울 때 나머지 항목은 서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곁에 나머지 항목의 다함없음이 없거늘, 어떤 나머지 항목의 다함없음을 거두어서 자체 항목의 다함없음으로 삼는 것인가? 이 때문에 상대함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응하는 것[所應]은 이체이고, 응함[能應]은 동체라 함은 응하는 것을 합쳐서 동체로 삼은 뜻 가운데 응하는 것이 이체라는 것이니, 바로 동체 안의 이체일 뿐이지, 모든 연(緣)이 각기 다른 이체가 아니기 때문에 응하는 것을 합쳐야 비로소 동체가 된다. 오직 응함이 동체가 되는 뜻을 기준으로 함에 있어서 이미 응하는 것은 이체이고, 응함은 동체라고 말했기 때문에 오직 응함만이 동체이다.
‘앞의 이체를 일컬음이 아니라는 것’은 어떤 이는 “응한 것이 이체라는 뜻을 준하여 말한 것이지 앞의 이체를 일컬은 것은 아니다”고 말하는데 앞의 「의리장」의 경문을 해석했을 뿐이니, 말하자면 앞에서 “혹은 자체의 동체와 이체 두 항목 중의 다함없음을 함께 거둔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문(異門)이란 단지 ‘동체문 중의 두 번째’ 등일 뿐, 앞에서 말한 ‘응한 것이 바로 이체다’라고 한 것을 일컬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7. 총삼삼전현제무궁(摠三三轉現際無窮)
【章】 ‘일곱째, 삼삼(三三)의 전변을 총괄해서 제(際)의 무궁함을 나타낸다’는 것은, 앞의 인다라 항목은 오직 가로의 위치[橫位]에 의거해서 법계를 논했지만, 이 항목은 세로의 위치[竪位]에 의거해서 법계를 논했다. 3승에서는 삼세로써 먼저와 나중을 정했지만 이제 1승에서는 과거 일념 가운데 3제(際)를 갖추어 때때마다 모든 법을 격리시기 때문에 셋을 총괄했다고 말하니, 나머지 둘도 마찬가지다.
이 세 항목은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3전(轉)이라 말하는 것이니, 앞의 인다라의 항목에서는 한 티끌 속에 삼세 모든 법의 다함없음을 나타내었는데 어떤 뜻을 인해서 그러한 것인가? 그런 까닭에 지금 이 항목에서는 과거의 일념이 3제(際)를 갖추기 때문에 나머지 둘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한 티끌 속에 삼세법이 현현하는 것을 나타낼 수 있다.
【記】제7구에서 “앞의 인다라 항목은 가로 위치에 의거해서 법계를 논하고, 이 항목은 세로 위치에 의거해서 법계를 논한다” 하는 것은 한 티끌 속에서 법계의 일체 법을 거둠을 기준으로 한 것이니, 그 거두어진 일체법 안에서 다시 저마다 일체 법을 거두기 때문에 오직 가로위치에 의거해서 법계를 논한다고 말한 것이다. 지금 이 항목에서는 3제(際)를 기준하여 서로 거둠을 논하기 때문에 세로위치에 의거해서 법계를 논한다고 말한 것이다.
따라서 제목에서 “삼삼(三三)의 전변을 총괄해서 제(際)의 무궁함을 나타낸다”고 말한 것이니, 말하자면 과거 중에 3제를 갖추고 현재 중에 3제를 갖추고 미래 중에 3제를 갖추기 때문에 셋을 총괄했다고 말한 것이며, 세 항목이 별개이기 때문에 세 번 전변한다고 말한 것이다. 과거세(過去世)가 이르기 때문에 세 번 전변한다고 말한 것은, 바로 십현문(十玄門) 중에 십세격법이성문(十世隔法異成門)이다. 고덕(古德)은 “3승에서는 때[時]로써 법을 격리시키기[隔] 때문에 무상(無常)의 때를 세운 것이고, 1승에서도 때로서 법을 격리시키기 때문에 상(常)의 때를 세운 것이다”라고 하였다.
【문】어째서 같은 때[時]로써 모든 법을 격리시키는 것이 이처럼 같지 않은가?
【답】3승에서는 법을 세우는 것이 단선적[單]이기 때문에 때로써 법을 격리시키는 데 있어 무상의 때를 세운 것이고, 1승에서는 법을 세움이 원만하기 때문에 때로써 법을 격리시키되 항상[常]의 때를 세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하다. 『영락경』에 이르기를 “범마달왕(梵摩達王)에게 말하기를 ‘그대 앞에 누워 있는 개가 그대의 과거 몸이요, 장차 내가 그대의 미래불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바로 삼세가 일시(一時) 속에 현현한다는 경문이다. 만약 3승의 뜻으로 이 경문을 살핀다면, 과거는 오직 개의 위치에 있을 뿐 사람이나 부처는 없고, 현재는 오직 사람의 위치에 있을 뿐 개나 부처는 없으며, 미래는 오직 부처의 위치에 있을 뿐 개나 사람은 없기 때문에 법을 세운 것이 단선적이다. 그러나 1승에서는 과거 개의 위치 안에 사람과 부처를 갖추고, 현재 사람의 위치 안에 개와 부처를 갖추며, 미래 부처의 위치 안에 개와 사람을 갖추기 때문에 법을 세움이 원만한 것이다.
【문】법체(法體)는 하나라도 서로 조망해서 9세(世)를 갖추는 것인가?
【답】1승에서는 만약 9세가 구별되면 법 역시 구별된다. 이는 3승에서 일왕(一往)의 삼세를 세우기 때문에 과거의 개가 변천해서 현재의 사람이 되고, 현재의 사람이 천류해서 미래의 부처가 되니, 이 때문에 무상(無常)의 때를 세운 것이다. 1승에서는 과거 속에 3제(際)를 갖추기 때문에 변천 없이 과거의 개가 현재의 사람이 되고, 현재 속에 삼세를 갖추기 때문에 전변 없이 현재의 사람이 미래의 부처가 되니 그러므로 항상[常]의 때를 세운 것이다.
만약 법체가 하나인데 서로 조망하여 9세를 세운 것이라면 어떻게 때로써 법을 격리시킬 수 있는가? 우선 내 몸을 기준으로 하면 한 달에 30일이기 때문에 날을 기준으로 하면 30신(身)이 구별되고, 하루는 12시(時)이기 때문에 때를 기준으로 하면 12신이 구별되고, 1시각은 8각(刻)이기 때문에 각(刻)을 기준으로 하면 8신이 구별된다. 또 사시(巳時)의 몸은 오직 사시의 위치에 있을 뿐이어서 이 몸을 옮겨서 오시(午時)로 가는 이치가 없는 등이기 때문에 가령 9세의 지위가 구별되는 법이라면 역시 별체의 법을 세우는 것이다.
【문】그저께, 어제, 오늘, 내일, 모레의 이 5위(位)를 기준으로 하면, 그저께는 과거의 과거이기 때문에 오직 하나의 지위일 뿐이고, 어제로 나아가 어제의 당체(當體)를 기준으로 하면 과거의 현재이고, 오늘로 조망해 보면 현재의 과거이기 때문에 두 지위를 갖춘 것이다. 오늘로 나아가 오늘의 당체를 기준으로 하면 현재의 현재이고, 어제로써 조망해 보면 과거의 미래이며, 내일로 조망해 보면 미래의 과거이기 때문에 세 지위를 갖춘 것이다. 내일로 나아가 내일의 당체를 기준으로 하면 미래의 현재이고, 오늘로써 조망해 보면 현재의 미래이기 때문에 두 지위를 갖춘 것이다. 모레는 미래의 미래이기 때문에 오직 하나의 지위뿐이다. 이와 같기 때문에 이틀은 오직 하나의 지위이고, 이 틀은 두 지위를 갖추고 있으며, 하루는 세 지위를 갖추고 있으니, 5일을 기준으로 해서 9세를 논하는 것은 하나의 법체 위에서 서로 조망하여 9세를 논하는 것이 되는가?
【답】「의리장」23)에서는 “이 위의 모든 잡의(雜義)가 10세에 두루 미치는 가운데 동시에 별이(別異)가 구족하여 현현하니, 때[時]와 법이 서로 여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1승에서 이미 때와 법이 서로 여의지 않기 때문에 9세가 별개임을 칭한 것이니, 법체도 역시 별개이다.
그러므로 3승에서는 물질[色]과 마음[心] 등의 법이 종자를 따라 생기하고, 이 법 위에서 삼세를 건립하는 것이 상응하지 않는 법이기 때문에 법은 실다움[實]이고, 때는 거짓[假]이다. 1승 가운데 9세라는 것은 동상(同相)을 기준해 관찰하면, 하나하나의 세(世)마다 총상의 법을 띠기 때문에 비록 법이 실다움이고 때가 거짓이라는 뜻이 3승과 동일하지만 1승 중의 거짓과 실다움은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법체이기 때문에 법체 역시 별개인 것이다.
【문】「십세장(十世章)」24)에 이르기를 “우선 함께함에 입각해 보면 과거의 과거가 없기 때문에 과거의 현재 법을 있는 것이니, 어째서인가? 저것이 대사(代謝)하지 않으면 이것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 과거의 현재가 있기 때문에 과거의 과거가 없다. 만약 이것이 있지 않으면 저것도 대사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과거의 현재가 있기 때문에 과거의 미래가 없다. 저것이 대사하지 않기 때문에 이것도 있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또 과거의 미래가 없기 때문에 저 과거의 현재가 있는 것이니 만약 이것이 있다면 저것은 이미 대사하기 때문이요, 그러므로 이것이 있지 않음으로 인해 저것도 아직 대사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과거의 과거가 없기 때문에 과거의 미래가 없다. 말하자면, 만약 저것이 없지 않으면 이것의 나타남도 있음이 되지 못하고, 이것의 나타남이 있음이 되지 못한다면, 이것의 미래도 없음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이것의 없음이 전전(展轉)하는 것은 저것의 없음을 말미암는 것이다.
또 과거의 미래가 없기 때문에 과거의 과거도 없게 하는 것이니, 앞서 말한 것을 돌이켜 생각해 보라. 과거의 삼세가 이 여섯 가지 뜻의 상유(相由)가 있음으로 하여 현재와 미래에 제각기 여섯 가지가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과거의 과거가 없기 때문에 과거의 현재로 하여금 있게 하고, 과거의 현재가 있기 때문에 과거의 미래로 하여금 없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1승에서도 삼세의 변천을 논할 수 있는데, 어째서 없다는 건가?
【답】이것이 바로 교윤(巧潤) 화상이 힐난한 것이다. 이 뜻은 3승 가운데 삼세의 변천을 세우는 사람을 인도하고자 하기 때문에 우선 그렇게 말했을 뿐, 1승의 종지는 삼세의 변천이 아니기 때문에 상(常)의 때를 세운 것이다.
【문】1승은 삼세의 변천이 아니라는 걸 어떻게 아는가?
【답】1승에서는 모든 법에 체성이 없기 때문에 과거는 현재와 미래의 연(緣)으로 이루어지고, 현재도 역시 과거와 미래의 연으로 이루어지고, 미래도 역시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삼세는 변천이 아니다.
【문】설사 과거세가 현재와 미래의 연으로 이루어지고, 현재도 과거와 미래의 연으로 이루어진다 해도, 그 지위가 섞이지 않기 때문에 과거는 멸위(滅位)이고, 현재는 생위(生位)이니, 그러므로 삼세가 변천의 뜻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답】과거가 비록 멸위라도 현재의 생연(生緣)으로 말미암아 멸(滅)을 성취하는 것이지 자연적인 멸이 아니다. 또 현재가 비록 생위라도 과거의 멸연(滅緣)을 말미암아 생(生)을 성취하는 것이지 자연적인 생이 아니다. 이 때문에 삼세는 변천하는 것이 아니다.
【문】어째서 이 구절에서는 일념(一念)을 논하지 않는가?
【답】9세의 개별을 포함한 것이 그대로 총체적인 일념이기 때문에 별(別)을 논한 것이고, 9세의 때[時]가 총체적인 일념을 나타내기 때문에 논하지 않은 것이다.
【문】10세의가 격리된 법이란 총체적인 세(世)와 개별적인 세를 함께 기준하여 격리시킨 것인가? 아니면 오직 개별적인 9세만을 기준해 격리시킨 것인가? 만약 총체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을 통틀어서 격리시킨 것이라면 9세의 개별을 포함한 것이 그대로 총체적인 일념인데, 어째서 총체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으로써 격리시키는 것인가? 또 만약 오직 개별적인 아홉으로써 격리시킨 것이라면 마땅히 9세의 격리된 법이라고 해야 하거늘, 어째서 10세의 격리된 법이라고 하는가?
【답】이미 10세의 격리된 법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어떤 경우엔 개별적인 9세로써 격리시키고, 어떤 경우엔 총체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으로써 격리시킨 다.
【문】총체적인 일념이란 개별적인 9세에 대해 비록 편벽됨이 없다 해도, 경문에서 “현재에 나아가 삼세를 설하는 것이 그대로 일념”이라 했다면 이 또한 현재의 일념 속에 해당하기 때문에 개별적인 9세 이외엔 총체적인 일념이 없는 것인데, 어째서 총체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으로써 격리시킨다 하는가?
【답】현재의 일념에 두 가지 뜻이 있다. 나머지 8세를 간별하여 현재 일념의 뜻으로 삼기도 하고, 9세를 통틀어 포함해서 총체적인 일념의 뜻으로 삼기도 하기 때문에 총체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으로써 격리시킨다 한 것이다.
【문】어떻게 그런 줄을 아는가?
【답】옛 말에 지엄 화상이 상(想) 화상으로 하여금 9세법을 분명히 깨닫게 할 때 이와 같이 말하기를 “마치 어떤 사람이 꿈속에서 자기 몸이 사다리 위에서 기와를 건네는 것을 보고, 또 자신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지붕을 타고서 기와를 받아 지붕을 덮는 것을 보고, 또 자신의 자식과 손자가 땅 위에 있으면서 기와를 나르는 것을 보는 것과 같다” 했다. 가령 법과 맞추어 보면, 아버지를 낳은 아버지는 과거의 과거이기 때문에 오직 하나뿐인 자리이고, 아버지는 과거의 현재이자 현재의 과거이기 때문에 두 자리를 갖춘 것이며, 그 자신은 현재의 현재이자 또한 과거의 미래요, 또한 미래의 과거이기 때문에 세 자리를 갖춘 것이고, 자식은 현재의 미래이자 미래의 현재이기 때문에 두 자리를 갖춘 것이며, 손자는 미래의 미래이기 때문에 한 자리이다.
그러나 전체 꿈을 꾼 사람은 총체적인 일념이기 때문에 이 사다리 위에 있는 사람을 기준으로 하면 두 가지 뜻이 있는 것이다. 만약 사다리 위에서 기와를 건네는 뜻을 기준으로 해서 살핀다면 나머지 8위를 간별해서 현재의 일념으로 삼을 뿐이고, 만약 전체 꿈꾼 9위의 뜻을 기준으로 해서 살피면 총체적인 일념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일념을 개별적인 뜻으로 삼든, 총체적인 뜻으로 삼든 걸림이 없다.
【문】만약 개별적인 9세 이외에 총체적인 일념을 세운다면, 이 또한 수전(數錢)의 항목에서 10전을 이루는 것 외에 이루어진 1전을 덧붙여서 11전을 논해야 하거늘, 어째서 오직 10전만을 논하는 것인가?
【답】어떤 이는 “수전의 항목에서 처음 하나는 이루어진 것[所成]이고, 나머지 아홉은 이루는 것[能成]이 된다”고 말하기 때문에 모순되지 않는다. 그러나 설사 처음 하나가 이루어진 것이고 나머지 아홉이 이루는 것이라 이를 기준으로 한다 하더라도 수전(數錢)의 항목과 격세(隔世)의 항목은 다른 것이다. 말하자면 10전의 자리를 나열함에 처음의 하나는 이루어진 것이고 나머지 아홉은 이루는 것이므로 이 예에 비추어 9세만을 기준으로 총체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을 나누어 논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이미 개별적인 9세 이외에 이 9세를 균등히 딛고서 총체적인 일념을 세운 것이기 때문에 수전의 항목과 크게 다르다.
【문】만약 그렇다면 앞의 힐난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답】행원(行遠) 대덕은 “총별문(摠別門:총체적인 항목과 개별적인 항목)과 능성소성문(能成所成門:이룸의 항목과 이루어짐의 항목)은 다르니, 격세의 항목은 총별문이고, 수전의 항목은 능성소성문이기 때문에 다르다”고 말했다.
【문】어째서 능성소성문과 총별문이 다른가?
【답】행원 대덕은 다만 “총별문과 능성소성문은 다르다”고 했을 뿐 어떻게 다른지는 밝히지 않았다. 여기서 이 뜻을 해석함에 두 가지 구별되는 뜻이 나온다. 말하자면 총별문은 즉(卽)하지도 않고 동일하지도 않은 뜻을 기준하기 때문에 개별적인 9세 이외에 총체적인 일념을 덧붙여 세우고 있지만, 능성소성문에서는 우선 상즉문(相卽門)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이루는 10전 이외에 이루어진 하나를 덧붙이진 않는다.
【문】법장 대사가 총별을 기준하여 상즉(相卽)을 논하기 때문에 총별문 가운데도 상즉이 있다 할 수 있거늘, 어째서 능성소성문은 상즉이기 때문에 총별문과 다르다 하는가?
【답】비록 총별을 기준하여 상즉을 논하더라도 능성소성문의 상즉의 뜻과는 다르다. 말하자면 능성소성문에서는 먼저 하나의 체(體)가 있고 나머지는 체가 없다는 뜻을 기준으로 해서 상즉을 논한다. 만약 총별을 기준으로 해서 상즉을 논할 때 체가 있고 없고의 뜻을 논하지 않고, 곧바로 총체적인 것이 그대로 개별적인 것이고, 개별적인 것이 그대로 총체적인 것이라 말한다.
따라서 법장 대사가 총별을 기준해서 상즉을 논한 것은 상(想) 대덕의 여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은 뜻에 입각하여 논했기 때문에 총별문이 즉(卽)하지도 않고 동일하지도 않은 뜻이요, 능성소성문은 상즉의 뜻이므로 이와 모순되지 않는다. 비록 이같이 이해하더라도, 이 또한 곤란하기 때문에 반드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앞서 ‘인다라의 항목’에서 ‘현현(現顯)’에 이르기까지는, 앞에서 “어째서 총별이 법을 격리시키는가?”라고 물은 뜻을 이 경문을 해석할 때 비로소 회통되었다.
「부사의품(不思義品)」25)에 이르기를 “모든 부처님이 한 티끌 속에서 삼세의 일체 불찰(佛刹)을 널리 나타내신다” 하였고, 「도신장(道身章)」에서 말하기를, “묻는다. 만약 그렇다면 시방세계가 한 티끌에 들어갈 때도 시방세계의 한 티끌일 뿐이니, 들어가는 주체인 세계와 들어가는 대상인 티끌이 다르지 않는 것인가? 답한다. 그렇다. 이는 9세의 일념이기 때문에 하나가 아닌 하나이고, 일념의 9세이기 때문에 차별이 아닌 차별일 뿐이다. 티끌과 세계도 이와 마찬가지이다”라고 하였다. ‘티끌과 세계도 이와 마찬가지다’라는 말 속에 이미 시방이 한 티끌임을 나타냈기 때문에 하나가 아닌 하나이고, 한 티끌의 시방이기 때문에 차별이 아닌 차별을 의미한다. 한 티끌 속에 삼세의 일체 불찰을 나타낸다는 것은 동시에 나타나는 것인가, 아니면 앞뒤전후로 나타나는 것인가? 마땅히 동시에 나타난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한 티끌 속에 나타난다고 말할 때 동시에 현현한다는 뜻을 충분히 나타내기 때문에 단지 한 티끌 속에 나타남을 말한 것일 뿐 다시 동시에 현현한다는 말을 하지 않은 것이다. 동시는 총체적인 것이고, 삼세는 개별적인 것이며, 한 티끌은 총체적인 것이고, 일체의 불찰은 개별적이기 때문에 그 총체적인 동시로써 격리시킨 것이요, 총체적인 한 티끌은 그 개별적인 삼세로 개별적인 일체 불찰을 격리시키기 때문에 총별 두 항목으로 법을 격리시킨 뜻이 이 글에 이르러 회통된다.
8. 무생불법기위승침(無生佛法寄位升沈)
【章】 ‘여덟째, 태어남이 없는 불법은 지위에 의탁해서 오르고 내려간다’는 것은, 부처님께서 내증(內證)한 해인을 이름하여 태어남이 없는 불법이라고 한다. 가령 하루살이가 아침에 태어나고 저녁에 죽더라도 그 목숨은 3제(際)를 마친 것이다. 생멸도 또한 이와 같으니, 어느 때 태어나고 어느 때 소멸한다고 하겠는가? 그러므로 태어남이 없는 불법이라고 하는 것이니, 나머지 일체법도 이와 마찬가지다. 이 때문에 모든 부처는 스스로 모든 법의 이름을 명명하지 않고 모습이나 형상도 설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연(機緣)을 위해 보현보살이 태어남도 없고 명칭도 없는 곳에서 정(定)에서 나와 갖가지 이름으로 제목을 붙인 것이다. 그러므로 제목을 붙임[所目]이라 말한 것이니, 이 소목(所目) 속에는 기연(機緣)의 마음을 따라 우수하고 열등함, 존귀하고 비천함의 차별이 있기 때문에 지위에 의탁해서 오르고 내린다고 말한 것이다. 중생은 실제로 소목에 집착하기 때문에 명칭에 집착하는 무리라 말하는 것이고, 부처님은 명칭을 따라 증명하지 않고 명칭도 상주(常住)하는 뜻이 없기 때문에 무명(無名)의 참다운 근원이 바로 법성원융(法性圓融)의 증분(證分)이라 말하는 것이다.
소목이란 방편의 처음과 끝을 관통하는 것이고, 흐르는 것[所流]이란 방편의 중간이다. 방편 1승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소목(所目)이고, 둘째는 소류(所流)이고 셋째는 방편이다. 처음의 둘이 연기의 도리에 입각하는 것은 기연 중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며, 방편이 지혜를 기준하는 것은 기인(機人)의 지혜에 나아가는 것이고, 또 성자의 뜻에 나아가는 것은 기인(機人)이 성스러운 뜻을 얻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부처님의 훌륭하고 교묘한 방편[善巧方便]이고, 소목은 『화엄경』의 3승이다.
첫 믿음의 시기에서는 태어남이 없는 불법에 대해 갖가지 이름으로 소목하니, 그런 까닭에 방편의 처음을 통해서 소목 중에 있는 법을 실제로 증득할 때 오직 머무름이 없는 뜻이어서 실제의 명칭과 다름이 없다. 그러므로 이름하여 소목이라 하는 것이니, 소목은 실다움이 없으므로 방편의 끝까지 관통하는 것이다.
소류라는 것은 나머지 네 가지 종지로 별이(別異)의 3승을 조망하면 3승은 실로 법체가 없으니, 이를 없애고 1승법을 3승의 사람에게 주어서 근기가 점차 익어가게 한다면 이 사람이 회향하는 데 두 가지가 있게 된다. 하나는 수승한 1승 동교(同敎)로 형상을 빼앗아 인도하는 것이고, 하나는 이 중에 분별이 없지만 법화에서 소목으로 회전한 사람은 곧바로 그 법을 얻어 진실로 형상의 빼앗음이나 진퇴가 없기 때문에 별교(別敎)의 1승이다.
방편이란 얻은 법에 실다움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아서 1승의 마음에로 향하기 때문이다. 초교(初敎)와 숙교(熟敎)는 안정하게 설립된 진리[諦] 속에서 가르침을 세운 것이고, 돈교(頓敎)와 화엄은 안정하게 설립된 진리 속에서 가르침을 세운 것이 아니므로 듣는 것도 없고 설한 것도 없다. 돈교는 침묵의 가르침이되 침묵으로 나타낸 것이니, 이 뜻은 1승의 증득한 마음에 법계의 일체 법이 단박에 나타나는 것을 이름하여 가르침이니 설함이니 하는 것이다.
무릇 일체 법 가운데 실제로 소목에 집착하는 마음으로 보는 것이 상응하는 연기법이고, 소목을 잊은 지혜로 보면 ‘태어남이 없는 불법’ 아님이 없는 것이다. 초교 등에 있어 명심견주(名心見柱)를 거느림이 거짓이고, 명심견주를 거느리지 않음이 실(實)이라 하는 것이 1승에 이르러 만족케 되서 원대한 방편을 익히게 하는 것이다.
태어남이 없는 불법은 의대(義大)이고, 지위에 의탁해서 오르고 내림은 설대(說大)이니, 이 중에서 부처님이 증득하신 태어남 없는 불법은 의지하는 대상[所依]인 과해(果海)이다. 이는 지(地)의 법이 부처가 기틀을 향해 10지장(地藏)을 나누는 것도 의대(義大)의 거둠이고, 의지한 것을 따르기 때문에 또한 설대(說大)의 거둠이기도 하다는 것을 표명하는 것이다. 언설을 따르고 가행(加行)의 지혜를 따르기 때문에 부처님이 중생을 거두고자 10지장을 나누어 5승법을 갈무리하는 것이니, 이는 부처님의 인위(因位)와 가르침이 상응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엄 대사가 말하기를 “10지라는 것은 5승이 보현이 증득한 지위에 나아가는 것이고, 불과를 섭수하여 사용하는 것[攝用]”26)이라고 하였다. 이 10지장이 5승의 본원이기 때문에 가난을 없애고 복을 원하는 사람에게 초지(初地)를 주고, 법을 베풀어 하늘에 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제2지를 주고, 10계(戒)와 5계와 8계로 인천과(人天果)를 얻게 하며, 나아가 1승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8지 이상의 1승법을 주니, 이 때문에 지위에 의탁해서 오르고 내린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지위에 따라 나누는 법이 부처의 견지에서 보면 모두가 태어남이 없는 불법이다. 그러므로 불과로부터 10지를 생기하는 것이다. 이 10지가 원(願)ㆍ행(行)ㆍ해(解)ㆍ신(信)을 갖추고 있어 지위에 따라 열거해 보이면 지(地) 이전의 40심(心)이 있다. 이 때문에 각 지위마다 오직 10지일 뿐이다.
【記】제8구(句)가 있게 된 의미는, 의심하여 이르기를, “우선 내 몸을 기준으로 하면 이 5척 중에 법계의 일체 모든 법을 갖추면서도 곁이 없음[無側]이요, 만약 하루살이를 기준으로 하면 아침에 태어나 저녁에 죽는 목숨이 3제(際)를 다 마치기 때문에 태어남도 없고 소멸함도 없는 것이다. 두 가지 사물이 이미 그렇다면 나머지도 마찬가지라서 명칭도 없고 모습도 없을 테인데, 어째서 갖가지 차별이 현유(現有)하는가?” 하니, 이런 의심을 해결하기 위해 “부처를 기준으로 하면, 비록 태어남이 없는 불법을 증득했다 하더라도 기연(機緣)에 따라 설하기 때문에 갖가지 오르고 내리는 차별이 있을 뿐”이라고 했으므로 이 구절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기연이 되는 것’에서부터 ‘소목을 말함’에 이르기까지, 어떤 이는 내증(內證)의 정(定)이라 말하고, 또 어떤 이는 8회상의 개별적인 정이라 말한다. 처음의 뜻은, 앞의 글에서 말하기를 “부처님의 내증인 해인을 이름하여 태어남이 없는 불법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런 까닭에 보현보살이 정(定)에서 나왔다고 말하기 때문에 내증의 정이라 말한다.
【문】보현보살은 내증의 정에 들어가지 않는데, 어떻게 내증의 정에서 나옵니까?
【답】제3중(重)의 교의 중에서 한편으로는 “보현보살이 안을 향하면 부처님이 되고, 부처님이 밖을 향하면 9회의 모든 보살이 된다”고 말했기 때문에 보현이 정(定)에서 나오는 것은 내증의 정이다. 외화(外化)에 10불(佛)의 명칭과 뜻이 없지 않지만, 내증은 10불 스스로의 경계이므로 외화(外化)가 보현의 경계란 것은 대대(大對)의 뜻을 따라 우선적으로 그리 말한 것이다. 뒤의 뜻 이은 보현보살이 오직 8회의 개별적인 정(定)에만 들어갈 뿐, 내증의 정에 들어감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문】초회(初會)에서 보현보살이 여래정장정(如來淨藏定)에 들어가 5해(海)를 관찰하고 10지(智)를 설하기 때문에 정(定)에도 소목(所目)이 있거늘, 어째서 경문에서는, “태어남도 없고 명칭도 없는데서 정에서 나와 갖가지 이름으로 제목을 붙였다”고 말하는가?
【답】비록 정에 소목이 있다 할지라도, 이는 대략적인 설명이기 때문에 우선 다양한 각도를 따라서 “정에서 나와 갖가지 이름으로 제목을 붙였다”고 말한 것이다.
【문】모든 경문에서 말하는 1승의 소류와 1승의 소목과 1승의 방편이란 무엇을 말한 것인가?
【답】세 가지 뜻이 있다. 혹자는 소류와 소목과 방편 모두가 다 이 경이라 하고, 혹자는 소목은 이 경이요, 소류와 방편은 아래의 가르침[下敎]이라 한다. 또 융질 대덕은 말하기를 “만약 통상문(通相門)을 기준하면, 일대에 설한 교법(敎法)이 소목이기 때문에 소목이라 말한다” 했다. 따라서 이 뜻 속에는 인천승(人天乘)에서부터 나아가 제10 과해(果海)의 근기에 이르기까지 다 소목 중에서 이익을 얻으니, 이 때문에 통틀어서 소목의 근기라 한다는 의미가 있다.
만약 대위분(大位分)을 기준으로 하면 오직 『화엄경』의 명칭만이 소목이 되고, 아래의 가르침의 명칭은 소류와 방편이 된다. 그러나 이 뜻에서는 오직 제9와 제10의 근기만이 소목의 법 속에서 이익을 얻기 때문에 이 둘이 소목의 근기가 된다.
만약 미세의 도리에 의거하면, 아래의 4교[下四敎] 중에 소류와 소목을 갖춘다. 말하자면 하교(下敎)의 사람 중에서, 혹은 소류의 견해를 지어 1승에 들어가는 자가 있다면 이 사람이 받아들인 가르침을 기준으로 해서 소류라 말하는 것이고, 혹 소목의 견해를 내어 1승에 들어가는 이가 있다면 이 사람이 받아들인 법을 기준으로 해서 소목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 가지 뜻 중에서 통상문의 일대교설을 기준으로 해서 모두 제목을 명명[名目]한 것이기 때문에 소목이라 말하고, 대위문을 기준으로 하면 오직 『화엄경』의 명칭만이 소목이 되고, 아래 가르침의 명칭은 소류와 방편이 되니, 저 제3의 미세의 도리에 의거하는 항목은 마땅히 폐기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보법장(普法章)」27)에서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고 말한 것은 아래 경문에 있는 소목의 뜻을 첫머리에다 간별해 놓은 것이고, 이 장(章) 가운데서 “보현이 명칭도 없고 태어남도 없는 곳에서 출정(出定)하여 갖가지 이름으로 제목을 붙인다”고 하였기 때문에 소목이 다시금 비었다고 말한 것이다. 「삼매장(三昧章)」28)에서 “1승의 제목이 그대로 1승에 속한 것이요, 3승의 제목은 그대로 3승에 속한 것이다” 등이라 말했기 때문에 통상문을 기준으로 하면 하나로 교화하는 법이 모두 소목이고, 대위문을 기준으로 하면 오직 『화엄경』의 법만이 해인정(海印定)의 소목 법의 된다. 이 해인 중의 소목 법이 밖을 향해 흐르면서 아래 4교법(敎法)을 성취하기 때문에 오직 화엄만이 소목이 되고, 아래의 4교(敎)는 소류 등이 된다.
【문】모든 경문 가운데 “방편일승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1승의 소류이고, 둘째는 1승의 소목이며, 셋째는 1승의 방편이다”라 했으니, 1승의 소목이라 말하는 것은 통상문의 뜻을 따라서 하나의 교화 법을 총체적으로 취한 것 모두가 소목에 해당하는 것인가, 아니면 오직 『화엄경』의 법만이 소목인가?
【답】오직 『화엄경』의 법29)만이 소목이 된다.
【문】방편일승이란 화엄의 1승인가?
【답】아래의 4교[下四敎]이다.
【문】만약 그렇다면 방편일승에서 소목을 논한 것인데, 소목이 아래의 4교일 수 있는가?
【답】아니다. 방편일승에서 소목의 뜻을 아울러 논한 것은 동일하게 되는[所同] 별교를 함께 논하기 때문에 방편일승인 것이니, 비록 아래의 가르침이라 하더라도 1승의 소목은 바로 『화엄경』이다. 그러므로 방편일승 중에 소목의 뜻을 함께 논한 것은 설사 방편의 법을 듣는 것이 있어도 그대로 1승이라 하고, “어째서 방편승이 바로 1승인가?” 하고 의심하기 때문에 이 의심을 해결하기 위해 1승의 흐름을 따르기 때문에 그대로 1승이고, 1승의 소목이기 때문에 그대로 1승이고, 1승의 방편이 되기 때문에 그대로 1승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방편일승 중에 소목을 함께 논했을 뿐 소목이 방편승은 아니다.
【문】「보법장」에서는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하는 첫머리가 아래 경문에 있는 소목의 뜻을 간추려 뽑은 것이라 하고, 이 장(章)에서는 “보현이 태어남도 없고 명칭도 없는 곳에서 출정하여 갖가지 이름으로 제목을 붙였다”고 말하기 때문에 소목이라 이름붙인 것이라 한다면 1승의 소목과 어떻게 다른가?
【답】「보법장」에 있는 소목의 뜻과 또 갖가지 이름으로 제목을 붙인 소목의 뜻 등은 모두 『화엄경』을 기준으로 했기 때문에 넓은 의미이고, 모든 경문에서의 1승 소목은 3승의 법수(法數)가 바로 1승 중에서 제목을 명명한 것이기 때문에 1승의 소목이라 말한다. 그러므로 좁은 의미이다. 그러나 1승 소목의 뜻이라 말하는 것도 아래 경문에 있는 소목의 뜻과 명칭도 없고 태어남도 없는 곳에서 갖가지 이름으로 제목을 붙인 뜻을 조망한 것이기 때문에 얕고 깊음이 없다.
융질 대덕은 이 경문에 의거해 “태어남도 없고 명칭도 없는 곳에서 갖가지 이름으로 제목을 붙인 것”을 증거로 삼아 통상문을 세우면서 “하나로 교화하는 법이 모두 소목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오직 『화엄경』의 법만을 이름하여 소목이라 할 뿐이다.
소목 중에 ‘기연(機緣)의 마음을 따라 우수함과 열등함, 존귀함, 비천함이 차별되기 때문이다’ 하는 것은 『화엄경』에 5승의 법을 갖추었음을 나타낸 것이다. 아래 경문에서 말하기를 “이 10지장(地藏)이 5승의 본원이기 때문에 가난을 없애고 복을 원하는 사람에겐 초지(初地)를 주고, 법을 베풀어 하늘에 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제2지를 주고, 10계와 5계와 8계는 인천과를 얻도록 하고, 나아가 1승을 원하는 사람에겐 8지 이상의 1승법을 주니, 이 때문에 지위에 의탁해서 오르고 내린다고 말한다”고 하였다.
【문】만약 그렇다면 경문에서 말하는 “기연의 마음을 따르는 우수하고 열등한 기틀”이란 1승의 기틀인가?
【답】1승의 뜻을 기준으로 해서 보면, 기연의 마음을 따라 우수하고 열등함, 존귀함과 비천함이 있다는 것 모두 『화엄경』에 갖추어진 것이기 때문에 1승의 기틀이다. 그러나 기연의 잘못된 집착을 따르는 뜻을 기준해서 본다면 아래 3승의 기틀이다. 만약 5승의 항목을 10지에 배당하면, 인천(人天)은 실로 초지ㆍ2지ㆍ3지에 있고, 이승은 실로 4지ㆍ5지ㆍ6지에 있고, 보살은 실로 제7지에 있으며, 1승은 실로 8지 이상에 있으니, 이 같은 뜻에 의거해 관찰하면, 5승은 모두 10지 가운데 갖추어진 것이다. 만약 잘못된 집착을 따른 뜻으로 관찰하면, 앞의 4승이 바로 아래의 3승의 기틀이기 때문에 여기서도 그러하다.
【문】「공목십지장」30)에서 말한 “10지란 5승이 관찰한 것이다” 하는 것은 하교(下敎)의 5승이 화엄 10지를 관찰하는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관찰하는 주체인 5승이 그대로 하교이거늘, 어째서 5승의 기인(機人)이 이 경문의 10지 가운데 갖추어져 있다고 하는가?
【답】5승이 관찰한 경문의 뜻을 기준으로 하면 그럴 수 있겠지만, 보현이 증득한 지위의 뜻을 기준으로 해서 관찰하면 5승의 기틀이 그대로 부동인 것이 바로 내가 증득한 지위이므로 그러하다.
【문】경문에서 말하는 “중생이 소목을 실제로써 집착하기 때문에 명칭을 집착하는 무리라 한다”는 것은 『화엄경』의 기틀인가?
【답】아래 3승[下三乘]의 기틀이다.
【문】그렇다면 명칭도 없고 태어남도 없는 처의 소목을 실제로 집착하는 무리가 『화엄경』의 기틀인가?
【답】비록 명칭도 없는 곳에 있는 소목의 법을 실제로서 집착한다 하더라도, 실제로 집착할 때의 잘못된 이해는 3승의 법이 되기 때문에 마찬가지이다.
【문】어떻게 그런 줄을 아는가?
【답】「지통문답(智通問答)」31)에 이르기를, “묻는다. 또 소(疏) 중의 해석하는 글에서, 앞은 8교(敎)를 기준으로 해서 서로 이루어짐을 밝히고, 3교를 기준으로 해서 차제(次弟)의 뜻을 변별하였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답한다. 큰 의미[大意]는 이 경문 안에서 모든 가르침의 뜻을 거두지 못함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고자 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처음 27일 동안 보리수 아래서 대인(大人)에게 대법을 설하실 때, 일체의 허공법계와 일체의 미진(微塵)과 일체의 미진 처소와 일체의 10세와 9세와 앞뒤의 시중(時中)과 일체의 5승ㆍ3승ㆍ1승ㆍ무량승(無量乘)의 기틀에 단박에 응하시어 일체 법문을 설하니, 기연에 임한 중생은 저마다 듣고 이해하고 행함에 따라 증득하였다. 이와 같이 모든 가르침 등의 십십(十十) 법문이 순간 동시에 몰록 나타나니 큰 기틀의 사람은 이러한 법을 보고 듣고 이해하고 행하여 증득하였다. 그리하여 하나의 처소가 일체의 처소이고 한 때가 일체의 때이고 한 근기가 일체의 근기이고 하나의 행이 일체의 행임을 순간마다 몰록[頓頓] 닦고 행한다” 하였다.
‘대인에게 임하여 대법을 설한다’는 것은 『화엄경』의 법을 설한 것이다. ‘기연에 임한 중생은 저마다 듣고 이해하고 행하는 것에 따라 증득한다’는 것은 이처럼 『화엄경』을 설할 때 소승인의 이해는 소승법이 되고, 3승인의 이해는 3승법이 되니, 각각의 잘못된 이해를 일컬은 것이다. ‘큰 기틀의 사람이 이 같은 법문을 보고 듣고 이해하고 행하고 증득하는 등’에서 큰 기틀의 인간이란 기연의 사람이 소승과 3승의 법에 집착하는 것과 다르고, 또한 이해가 다함없는 순간 몰록한 법이 되기 때문에 타인이 보는 것이 그대로 자기가 보는 것이 되고 타인이 듣는 것이 그대로 자기가 듣는 것이 되니, 비단 보고 듣는 것만이 아니다.
만약 근기를 기준하여 논하면, 저들이 이해하는 저들의 근기가 바로 내 몸이기 때문에 하나의 근기가 일체의 근기가 되는 것과 하나의 행이 일체의 행이 되는 것을 단박에 수행한다. 이렇게 말하기 때문에 설사 명칭이 없는 것의 소목 법이라 하더라도 실제로써 집착할 때 잘못 이해한 것이어서 아래의 3승법이 되는 것이다.
‘바로 법성원융의 증분(證分)이다’ 하는 것은 어떤 이는 모두 『화엄경』을 기준해서 말한 것이라고 하는데 이는 내증(內證)이다. “소목은 방편의 처음과 끝에 통한다”는 것에 대해 융질 대덕이 이르기를, “법을 기준으로 하면 하나로 교화하는 법이 모두 소목이기 때문에 방편의 처음과 끝에 통한다고 말하는 것이고, 근기를 기준으로 하면 소위 처음에 잘못 집착한 소목이 마지막 시기에 이르기까지도 소목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처음과 끝에 통하는 것이다. 비록 그렇다 하나 이 부분에서 ‘처음 믿음을 낼 때 태어남이 없는 불법에 갖가지 이름으로 소목한다’고 말했기 때문에 방편에 통하는 것이다. 또 최초의 소목에서 모든 법을 실제로 증득할 때는 오직 머무름이 없는 뜻이니, 실다움이 없는 명칭을 이름하여 소목이라 한다. 이처럼 소목이란 것은 실다움이 없기 때문에 방편의 끝에 통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말하기 때문에 처음 집착할 때에는 ‘명칭도 없고 태어남도 없는 곳’의 소목 법을 잘못 집착하여서 아래 3승법이 되지만 마지막 증득할 때는 도리어 명칭이 없는 곳의 소목 뜻을 이해해서 머무름이 없음에 들어가기 때문에 방편의 처음과 끝에 통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방편의 1승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소목이고, 둘째는 소류이고, 셋째는 방편이다”함에 있어 방편승 중에서 소목을 아울러 논한 까닭을 의심하여 “방편승은 바로 하교(下敎)이거늘 어째서 방편승을 1승이라 하는가?”라고 할까봐 염려하여 이런 의심을 해결하기 위해 “방편승의 법이 비록 하교이나, 그 법이 본래 1승 소목의 법이기 때문에 방편승일 때 바로 1승이다”라 고 말한다. 이런 뜻 때문에 소목을 아울러 논한 것이다.
맨 처음의 두 번째 ‘연기의 도리에 나아가서’와 ‘기연 중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등의 기연이란 어떤 기연인가?
【답】하교의 기연이다.
【문】만약 그렇다면 소목도 하교라 할 수 있거늘, 어째서 이 경이라 하는가?
【답】『화엄경』의 소목 법은 밖을 향해 흘러서 하교의 기연을 따라 그 안에서 일어난다. 연(緣)에서 일어난 법은 본래 『화엄경』의 소목이기 때문에 소목을 아울러 논한 것이지, 일어난 법에서 소목을 아울러 보는 것이 아님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만약 방편일승 중에서 소목을 아울러 논하지 않으면”이라 하는 것은 기연에서 일어난 법이 본래 『화엄경』의 소목임을 드러낼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만약 이 소목이 일어난 것에서 보는 것이라면, 소류와 소목 두 뜻 모두 구별하기 어려운 결점이 있게 되는데 말하자면 소류의 법이 명명한 제목의 법인가, 명명한 제목의 법이 아닌가? 만약 명명한 제목의 법이라면 소목이라 말할 수 있거늘, 어째서 오직 소류라고만 말하는가? 만약 명명한 제목의 법이 아니라면, 소류의 법은 이름이 없는 법인가?
또 소목의 법이 일어날 때는 흐르면서 일어나는 것인가, 아니면 흐르지 않고 일어나는 것인가? 만약 흐르면서 일어나는 것이라면 소류라고 말할 수 있거늘, 어째서 오직 소목이라고만 하는가? 만약 흐르지 않고 일어나는 것이라면, 어떻게 흐르지 않고서 일어나는가?
또 하교의 법이 1승에 의거해 일어나는 것을 기준하여 소류의 명목이 되는 것이라면, 이 일어나는 법이 소목이 되기 때문에 소류와 소목은 마땅히 계급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소류의 뜻을 이해하는 것은 제7의 근기이고, 소목의 뜻을 이해하는 것은 제8의 근기이기 때문에 소류와 소목은 계급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소목의 법을 흐르면서 일어난다고 말하지 않고, 소류의 법을 명목이라 말하지 않는 것은 진실로 소목은 오직 해인정 중의 소목 법이기 때문이다. 이 소목의 법이 밖을 향해 흐르면서 하교의 법을 성취하는 것을 이름하여 소류라 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일어난 하교의 법 가운데 소류와 소목의 두 뜻을 아울러 세운 것은 아니다.
【문】「일승삼승의장(一乘三乘義章)」32)에 이르기를 “구경(究竟)에 의거함으로 말미암아 1승의 가르침을 성취한다. 어째서인가? 1승의 흐름을 따르기 때문이요, 또한 일승교의 소목이 되기 때문이다” 하였다. 소목은 ‘의거해 일어남’ 속에서 볼 수 있는 것인가?
【답】방편승의 법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본래 『화엄경』 중에 있는 소목의 법이나, 밖을 향해 흐르면서 하교를 성취하기 때문에 소목을 아울러 논한 것이지, ‘의거해 일어남’ 중에서 소목을 아울러 보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만약 소목이 ‘의거해 일어남’ 중에서도 본다 하면, 저 제8의 근기도 소류의 법을 이해하는 것이 당연하여서 오히려 스스로 얻은 3승의 법이 1승의 다함없는 가르침을 따라 일어나는 것을 바로 본다고 말할 수 있거늘, 어째서 제8 근기의 경문33)에서는 “저 3승 등의 법이 본래 별교의 1승과 다르지 않다”고 하는가?
또 제7의 근기에서는 위에서 인용한 것처럼 3승과 1승을 동시에 설한다 등이라 말하였고, 여기서 인용한 동시이처(同時異處)의 3승이란 앞의 글에서 동시이처를 해석하여 말하기를 “바로 동교이기 때문이요, 말단이 근본을 여의지 않기 때문이며 근본에 의거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라고 한 그것이다. 근본에 의거해 말단을 성취하는 뜻 중에서 바야흐로 동시이처의 3승을 증득해 이룸을 인용한 것이라면, 가령 제8의 근기도 일어난 법을 이해하는 것이거늘, 어째서 동시이처의 3승을 인용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소목은 오직 이 경(經)뿐임을 아는 것이다.
방편이 지혜에 준거하는 것과 기인(機人)의 지혜에 나아가는 것에 대해
【문】소류와 소목 이외에 다른 방편의 기틀이 있는가?
【답】혹자는 있다고 한다. 그러나 상(想) 대덕은 “방편이란 지혜의 말을 기준으로 한 것이요, 또한 성자의 뜻에도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등등이라고 말했으니, 기연 근기[機根]의 지혜와 성자의 뜻을 통틀어 기준하여 방편이라 말했을 뿐이지 별다른 방편의 근기는 없다. 따라서 모든 경전에서의 1승 방편이란 근기의 지혜와 성자의 뜻을 기준으로 해서 설한 것이다.
【문】소류와 소목 두 근기의 지혜를 통틀어 기준해 방편의 근기라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오직 소류의 지혜만을 기준으로 하는 것인가?
【답】후자이다.
【문】먼저 말한 소류와 소목이란 연기의 도리에 나아간 것이고, 다음에 말한 방편이란 지혜의 말씀을 기준한 것이라면, 역시 소목의 지혜를 아울러 취해서 방편을 삼았다고 할 수 있는가?
【답】소목의 지혜는 당연히 올바른 승(乘) 속에서 본 것이기 때문에 방편으로 지혜를 기준하는 것은 오직 소류의 지혜뿐이다.
【문】‘또 성자의 지극한 선교방편(善巧方便)에 나아간다’는 것은 “기인(機人)이 성자의 뜻을 얻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성자의 뜻에 나아가는 것도 기인의 지혜를 기준으로 해서 방편이라 할 뿐이거늘, 어째서 다시 성자의 뜻을 기준으로 방편을 삼아 따로 해석하는 것인가?
【답】‘또 성자의 뜻에 나아갈 수 있다’고 설한 것은 능화불(能化佛)이 하교의 법을 설하는 지혜를 기준으로 해서 방편이라 말한 것이다. 그러나 기인이 성자의 뜻을 얻는다고 말한 것은 앞에서 “기인의 지혜에 나아간다는 것은 어떤 지혜인가?”라고 의심함을 염려했기 때문에 이 의심을 풀기 위해 성자의 뜻을 들어서 기인이 성자의 뜻을 얻는 지혜를 방편으로 삼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중의 정석(正釋)에서 이르기를 ‘성자의 뜻에 나아감’은 경문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부처님의 선교방편이다” 하였다.
소목은 화엄의 3승이니, 3승의 법수(法數)가 1승의 소목이기 때문이다.
‘최초의 믿는 때’로부터 ‘방편의 끝이다’에 이르기까지에서, 명칭도 없고 태어남도 없는 곳에서 소목의 법에 집착하여 잘못 이해하기 때문에 처음에 통한다고 말하는 것이고, 증득할 때는 이 태어남도 없고 명칭도 없음에 있는 소목의 법을 이해해서 들어가기 때문에 끝에 통한다고 말한 것이다. 최초로 믿는 때란 최초로 잘못 집착함을 일컬은 것이다.
‘모든 법을 실제로 증득할 때는 오직 머무름이 없는 뜻일 뿐이다’라는 것에 대해,
【문】이것이 앞서 말한 “부처님께서 명칭을 따르지 않는 것은 명칭의 머무름이 없는 뜻을 증명한 것이다” 하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
【답】앞의 것은 부처님께서 머무름이 없는 뜻을 증득함을 밝힌 것이요, 여기에서는 기인(機人)의 증득함을 밝힌 것이다. 『화엄경』의 소목 법은 실답기 때문에 다르다. 소목이 실답지 않다는 것에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태어남도 없고 명칭도 없는 곳을 잘못 집착해서 갖가지 이름으로 소목하여 실다운 명칭이라 일컫다가 끝내 명칭도 없고 태어남도 없는 곳의 소목을 이해하는 것을 실다운 명칭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므로 변계(偏計)의 실다움이 없음을 기준으로 해서 실다움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또 하나는 태어남도 없고 명칭도 없는 실다운 법 가운데서 갖가지 이름으로 제목이 붙이기 때문에 소목 안에서도 명칭이 없는 참다운 근원의 실다움이 없으니, 그러므로 실다움이 없다고 말한다. 두 가지 뜻을 다 옳다.
‘명심견주(名心見柱)를 거느리지 않음이 실다움’이라는 것은 ‘1승에 이르러 만족되어 원대한 방편을 익히게 한다’ 등의 글 뜻으로 관찰하여, 명칭도 없는 참다운 근원에 대해 ‘소목은 실다움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사람의 회향’에서 ‘법화의 회향’에 이르기까지는, 처음 소류의 이해를 일으키는 것이 그대로 노지(露地)에 의거한 동교이니, 이러한 이해로써 화엄의 동교를 지극히 하기 때문에 처음 소류의 이해를 일으켜서 노지에 의거한 동교의 사람을 화엄의 동교로 형상을 빼앗아 이끌어 준다. 소류의 이해를 일으키지 못하는 사람은 법화로 회향한다.
【문】「도신장」에 이르기를 “법화 동교의 기틀이 생긴 까닭에 일체 승이 1승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을 보고, 화엄 동교의 기틀이 익어가기 때문에 일체 승이 그대로 1승이지 더 이상 다른 승(乘)이 없음을 본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소류의 이해를 일으켜서 법화에 들어가고, 소목의 이해를 일으켜서 화엄에 들어가는 것인가?
【답】이미 존재하는 두 가지 동교일 때 기틀이 이해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밝히고자 한 것일 뿐, 소류의 이해가 법화의 동교에 들어가고, 소목의 이해가 화엄의 동교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소류의 이해로써 화엄의 동교를 지극히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소목의 사람이 곧바로 얻은 법은 진실해서 형상을 빼앗거나 진퇴함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융질 대덕은 제9와 제10의 근기라고 말했다. 말하자면 제9와 제10의 근기는 명칭도 없고 태어남도 없는 곳에서 갖가지 이름으로 제목을 붙일 때 오직 법의 진실만을 이해할 뿐 잘못된 집착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러나 이 대덕께선 미세 도리의 소목을 세워 근거로 하기 때문에 그러하다. 하지만 여기서는 앞서 소류의 해석을 마치고, 지금부터 소목을 해석한다고 말한다.
【문】제8의 근기는 3승에서 1승에로 들어간 사람인데, 어째서 경문에서는 “곧바로 얻은 법이 진실해서 형상을 빼앗거나 진퇴함이 없다”고 하는가?
【답】제8의 근기가 소목의 이해를 일으키면 바로 태어남도 없고 명칭도 없는 곳의 소목 법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곧바로 얻은 법이 진실해서 형상을 빼앗거나 진퇴함 등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제7의 근기는 스스로 얻은 법이 다함없는 1승의 가르침에 의거해 일어나는 것을 보기 때문에 여기로부터 저기에 이르기까지의 본말과 형상에 대한 견해를 낸다. 그런 까닭에 형상을 빼앗아 이끈다고 말하는 것이다.
‘방편’에서부터 ‘1승의 마음’에 이르기까지는, 앞에서 방편이라 말한 것은 지혜를 기준으로 했기 때문인데, “말한 지혜란 어떤 지혜인가?” 하고 의심할까 두려워 이 해석에서 “스스로 얻은 법의 실답지 않음을 아는 것이 1승의 마음으로 향함이다”라고 한 것이다.
‘무릇 일체 법’ 등에서부터 ‘태어남이 없는 불법’에 이르기까지는, 실제로 소목을 집착한 마음이 기연 속에서 일어나는 법임을 보는 것이니, 부처로 말한다면 태어남이 없는 불법을 보는 것이다.
‘처음의 가르침’ 등에서부터 ‘원대한 방편’에 이르기까지는, 명칭을 가진 마음으로 연기의 도리를 보는 것이고, 명칭을 가지지 않는 마음으로 명칭이 없는 참 근원의 원대한 방편을 보고 귀의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 부처의 증득함’에서 ‘지(地)의 법을 나타낸다’에 이르기까지는,
【문】의지가 되는 과해(果海)란 내증인가?
【답】혹자는 내증이라 하고, 혹자는 외화(外化)라고 한다. 나중의 뜻을 기준으로 해서 이 경문을 회통할 때 비록 의지되는 과(果)가 바깥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심화되면 바로 내증인 것이다. 그러므로 과체(果體)에 두 가지 뜻이 없음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지(地)의 법을 나타낸다’ 는 것은 의지의 대상이 되는 과해와 증득의 되는 10여(如)에 다 통지만 여기서는 우선 의지의 대상이 되는 과해에 통하는 뜻을 인용하였다.
“부처가 밖으로 향한 기틀을 10지장(地藏)으로 나눈 것도 역시 의대(義大)의 거둠이니, 의지하는 것을 따르기 때문이다”라는 것에 대해, 징관 대사는 2대(大)를 해석한 글에서 “둘째, 구경(究竟)의 불과를 기준하여 보현의 인(因)에 대대하면 설의(說義)가 1부(部)에 통한다”34)고 했다. 말하자면 이 증득의 지혜가 구경의 과해와 그윽하게 같아지는 것이 과분(果分)이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증득하신 태어남이 없는 불법이 의지가 되는 과해라는 것은 1부(部) 구경과분(究竟果分)의 뜻에 통하는 것이다.
앞에서 비록 1부에 통하는 과분을 세웠더라도, 증득의 지혜를 아울러 세우지 않았다. 이 때문에 증득의 지혜가 구경의 과해에 그윽하게 합쳐지는 것으로 과분을 삼는다는 것은 증득의 주체[能證]와 증득의 대상[所證]이 구경의 과해에 그윽하게 합치는 것으로 과분을 삼는다. 이렇게 말하기 때문에 ‘부처가 기틀을 향해 10지장을 나눈 것도 역시 의대(義大)의 거둠이다’라 함이 바로 증득의 지혜가 구경의 과해에 그윽하게 합치하는 것을 과분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또한 ‘설대(說大)의 거둠이 언설을 따르고 가행(加行)의 지혜를 따르기 때문’이라 함에는 자취가 있는 곳[迹處]의 비어 있음이 비어 있는 곳의 자취를 따라서 지(地)의 지혜를 설한다는 뜻[說義]도 있고, 언설에 의탁하여 표현해 난다는 뜻도 있다.
‘부처님께서 중생을 거두고자 10지장을 나누셨다’ 등에서는 의대와 설대를 나누지 않고 총체적으로 10지에서 5승을 갖춘 뜻을 나타내었다.
‘지엄 대사가 이르기를’35)에서부터 ‘섭용(攝用)에 이른다’까지는, 원융과 항포를 모두 10지중에 세웠으나 5승이 보현이 증득한 지위에 나아가서 불과를 거두어서 쓴다[攝用]고 말하기 때문에 이는 곧 근본 실제의 뜻에 차별의 뜻을 갖춘 것이 된다.
‘가난을 버리고 복을 원하는 사람 등에게’라 함은 5승이 관찰한 뜻을 해석한 것이다.
‘이처럼 지위에 따라서’부터 ‘10지를 낳는다’까지는, 5승이 관찰한 뜻을 해석한 것이다. ‘이처럼 지위에 따라서’부터 ‘10지를 낳는다’에 이르기까지는, 불과로부터 10지를 낳는 것이니, 불과를 거두어 쓰는 것을 해석한 것이다.
‘이 10지가 원(願)ㆍ행(行)ㆍ해(解)ㆍ신(信)을 갖추어서 지위를 열거해 보인다’ 등은 앞서 40심(心)을 갖춘 뜻을 해석한 것이다.
9. 미세상용이명극승(微細相容以明極勝)
【章】 ‘아홉째, 미세가 서로 용융함으로써 지극히 수승함[極勝]을 밝힌다’는 것은, 인다라의 항목처럼 3승의 사람을 변별할 뿐, 티끌 속 법계의 법이 멀고 가깝고 크고 작음은 변별하지 않으니, 스스로의 지위를 움직이지 않고 지극히 수승한 모습을 나타내기 때문에 극승이라 말한 것이다. 상(相)에 나아가는 것은 이처럼 지극히 깊은 상(相)에 나아가는 것이다.
【記】‘아홉째, 미세가 서로 용융함으로써 지극히 수승함을 밝힌다는 것’에 대해,
【문】이 구절은 의당 앞에서 인다라에 의탁해 뜻의 변제(邊際)를 드러내는 구절 다음에 있어야 하거나, 혹은 삼삼(三三)으로 전변(轉變)함을 총괄해서 제(際)의 무궁함을 나타내는 구절 다음에 두어야 하는데, 어째서 반드시 태어남이 없는 불법이 지위에 의탁해 오르내리는 구절 다음에 두는가?
【답】뜻이 있다. 말하자면 앞 구절에서 해석해 말하기를 “태어남이 없는 불법이라 말한 것은 부처님의 내증인 해인을 이름하여 태어남이 없는 불법이라 한 것이다. 그러나 기연(機緣)을 위해 보현보살이 태어남도 없고 명칭도 없는 곳에서 출정(出定)하여 갖가지 이름으로 제목을 붙이기 때문에 소목을 말한 것이고, 소목에 기연을 따르는 마음에 우수함 열등함, 존귀함과 비천함의 차별이 있기 때문에 지위에 의탁해서 오르고 내린다고 이름붙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의심하는 자가 말하기를 “기연을 따르는 마음에 우수함과 열등함, 존귀함과 비천함의 차별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3승과 동일한 것인가? 그리고 『화엄경』의 법은 하나 속에 많음을 거두어서 인다라를 성취하는 것인가?” 하니, 이런 의심을 해결하기 위해, “설사 기연을 따른 마음에 우수함과 열등함, 존귀함과 비천함의 차별이 있더라도, 1승 속에서는 한 티끌을 잡으면 온 법계가 온전히 한 티끌이기 때문에 이 한 티끌 가운데 멀고 가까움, 크고 작음이 스스로의 지위를 움직이지 않고 확연히 드러나 무측(無側)이다. 나머지도 마찬가지이므로 3승과는 크게 다르다”고 하였으니, 이런 뜻을 말미암아서 이 구절이 생긴 것이다. ‘가령 인다라 항목에서 변별하면’이라는 것은 앞에서 인다라에 의탁한 구절 중에 미세문(微細門)을 인용해 변별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문】미세문은 포함함[能含]과 포함됨[所含]과 알기 어려움[難知] 등의 미세를 갖추는데 이 세 가지 뜻에 깊고 얕음이 있는가?
【답】만약 상(相)을 따라 구별해 논한다면 포함하는 것의 미세와 포함되는 것의 미세이니, 이는 변계(遍計)를 딛고서 연기의 뜻을 논한 것이다. 미세를 알기 어렵다는 것은 곧바로 연기의 뜻을 논한 것이다.
말하자면 포함되는 미세란, 가령 한 티끌이 작다 해도 이 티끌이 거대함에 이르면 시방과 더불어 차이가 없기 때문에 한 티끌이 시방 속에 들어가도 똑같이 변제(邊際)가 없는 것이다. 또 시방이 지극히 크다 해도 시방이 작음에 이르면 한 티끌과 차이가 없기 때문에 시방이 한 티끌 속에 들어가도 남길 것이 없기 때문에 포함되는 미세라 말한다. 포함하는 미세란 한 티끌이 시방을 거두는 것에 해당된다. 이상 두 가지 뜻이 바로 변계를 딛고서 연기를 논한 뜻이다.
‘미세를 알기 어렵다’는 것은 하나가 많음 속에 들어가도, 들어가는 것은 들어감이 아니기 때문에 한 티끌을 들 때 곁에 남는 것이 없으므로 다시 하나 속의 많음에 들어가는 것이 없는 것이다. 많음의 법을 들 때도 남는 것이 없으므로 다시 많음의 하나에 들어가는 것이 없다. 이처럼 하나와 많음이 한 몸이라 알기 어려운 뜻으로 미세를 세우기 때문에 곧장 연기의 뜻을 논했을 뿐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래서 지엄 대사는 “많은 길을 구하지 않고 단지 하나만을 말했기 때문이다”36)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포함하는 미세와 포함되는 미세란 원효 대사가 말한 “작음의 큰 뜻이 큼을 용융할 수 있고, 큼의 작은 뜻이 바야흐로 작음 속에 들어간다”의 뜻에 해당한다. ‘미세의 뜻은 알기 어렵다’는 것은 법장 대사가 말한 “작음의 큰 모습[大相]과 큼의 작은 뜻이 필요치 않아야 비로소 용융하게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니, 바로 작음의 작은 모습이 큼의 큰 모습을 용융하여 들어간다는 뜻일 뿐이다”에 해당된다.
10. 격월과문성의자재(隔越科文成義自在)
【章】 ‘열 번째, 과문(科文)을 뛰어넘어서 뜻의 자재로움을 성취한다’37)는 것은, 이는 초회(初會)의 뜻을 성취하고자 한 것이다. 만약 나머지 모든 회상의 법과 문구(文句) 등이 여기 이 처음에서 자재(自在)한다면 초회의 뜻처럼 성취한다. 나머지도 마찬가지이니 이에 준거하라. 그 상(相)은 어떠한가? 만약 “초회의 명칭이 무엇인가?” 하고 묻는다면 “도리천의 회상”이라고 답하며, 만약 “어떤 법을 설했는가?” 하고 묻는다면 10주법(住法)이라고 답한다. 이 같은 언설이 성취하는 뜻에 어긋나지 않으니, 어째서인가? 초회에서 논할 때가 바로 모든 회상의 근본이 되기 때문에 모든 회상을 초회처럼 거두니, 나머지 회상도 마찬가지라서 근본이 앞과 뒤를 거두는 것을 기준하여 따른다.
그러므로 동이상(同異相)에서 연(緣)의 동위(動位)는 집을 이루지 못하지만, 성괴상(成壞相)에서는 가령 주본석(柱本石)이 기둥 위에 있고 또한 기와 위에 있다면 집을 이룰 수 있다. 어째서인가? 기와 등은 바로 기둥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공(想公)께서는 “가장 위에 있는 1척의 기와는 1척의 분제(分齊)에 칭합하여 20보(步)를 밟는다”고 하였으니, 어째서 기와가 없으면 집을 이룰 수 없는 것인가? 기와가 없으면 집을 이루지 못하는 까닭에 모든 연(緣)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1척은 다만 10보이고, 나아가 1촌(寸)도 1척에서 늘거나 줄지 않는 것이다.
【문】주본(柱本)의 1척 돌이 20보인가?
【답】그렇다.
【문】본연(本緣)을 무너뜨리는 것인가?
【답】다만 1척이 바로 20보이니, 1척의 지위가 어찌 움직이리요? 동이상(同異相) 속에서 온전한 힘을 성취하고자 한다면 1척의 돌이 기둥의 근본에 있어 온전한 힘을 무너뜨리고 작위하지 않을 즈음에 이르면 그것이 기둥머리에 있고 기와 위에 있어서 집을 이룰 수 있다.
【記】‘열 번째, 과문을 뛰어넘어서 뜻의 자재로움을 성취한다’는 구절이 있는 뜻은 이전과 같으니, 이 구절을 변별하는 것이 6상(相)의 뜻이다. 그러므로 아래에서 “초회에서 때를 논할 때 모든 회상의 근본이 된다”는 등은 총체적인 뜻과 개별적인 뜻이다.
‘동이상(同異相) 가운데 모든 연(緣)의 동위(動位)는 집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은, 옛 말에 이르기를 “동상 중에는 분동(分同)이 있고 만동(滿同)이 있다”38) 하였으니, 말하자면 1척의 머리[留頭] 1척의 힘을 내서 20보의 당(堂)과 동일한 것은 분동이요, 1척의 머리가 20보의 힘을 내어서 20보의 당과 같은 것은 만동이라 이같이 말하였다.
【문】만동 가운데 1척의 머리가 20보의 힘을 내서 20보의 당과 동일할 때 1척의 지위를 움직이기 때문에 집을 이루지 못하는 것인가?
【답】이상(異相)이란 모든 연(緣)의 형상이 길고 짧은 것이 저마다 다름을 일컬은 것이다. 동상(同相)이란 모든 연이 집을 이루는 데 그 힘과 뜻이 가지런히 동일한 것을 일컬은 것이다. 그러므로 1척의 지위를 움직이지 않고서도 20보의 힘을 내어 20보의 당과 동일하기 때문에 집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1척의 지위를 움직여 20보의 힘을 내서 20보의 당과 동일한 것이라면 집을 이룰 수 없기 때문에 이같이 말했을 뿐이다.
‘성괴상(成壞相) 중에서는’부터 ‘집을 이룰 수 있다’까지, 이 글은 모든 경문에서 언급하는 괴상과 모순되니, 말하자면 지엄 대사는 “6괴상의 모든 뜻이 저마다 스스로의 법에 머물러서 본성을 옮기지 않기 때문이다”39)라고 하였고, 상(想) 대덕은 “논주(論主)가 종(宗)을 세운 도리에 준거하기 때문에 아는 것이니, 비록 인과를 믿고 이해하고 행하고 회향하는 지(地)라도 부처님은 스스로의 지위를 움직이지 않아서 먼저와 나중 등이 없다”고 하였다.
【문】이 글이 이와 같다면 어째서 이 중에 가령 주본석(柱本石)이 기둥 위에 있고 또 기와 위에 있으면 집을 이룰 수 있다고 하는가.
【답】상 대덕의 경문40)에서는 이미 스스로 회통하고 있으니, 이른바 “비록 인과를 믿고 이해하고 행하고 회향하는 지(地)라도 부처님은 스스로의 지위를 움직이지 않아서 먼저와 나중이 없다”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스스로의 지위를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모든 글 가운데 스스로의 지위를 움직이지 않는 것에 해당하고, ‘먼저와 나중이 없다’는 것은 이 중의 “가령 주본석(柱本石)이 기둥 위에 있고 또 기와 위에 있다면 집을 이룬다”는 글에 해당한다.
【문】앞서 동상을 대대한 이상에서는 ‘먼저와 나중이 없다’는 뜻이 없고, 여기 성상(成相)을 대대하는 괴상(壞相)에서야 비로소 ‘먼저와 나중의 뜻이 없다’는 것이 있는 것인가?
【답】동상의 모든 연(緣)이 총체적인 것을 대동함에 따라 성상의 집을 세운 것이다. 말하자면 이 각(角)이 인(印)이고, 저 각이 인이라는 것은 동상의 뜻이다. 이 1각을 들어서 인이라 부를 때 이 1각이 바로 온전한 인이요, 나머지 각에서 인을 짓는 뜻이 더는 없는 것이 성상이다. 지금 말한 ‘이 1각을 들어서 인이라 부른다’ 하는 것은 어떤 각(角)인가? 바로 괴상의 각이다.
그러나 도문(圖文)에서 이 괴상을 해석해 말하기를 “모든 연은 저마다 달라서 스스로의 여여함에 머물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으니, 스스로의 여여[自如]함에 머문다고 하는 것은 이 각이 곧 여여함이고, 저 각도 곧 여여함이기 때문에 스스로의 여여함에 머문다고 말하는 것이지, 이 각과 저 각 이외에 따로 여여함을 가리켜 스스로의 여여함에 머문다고 말한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각을 들어 인이라 부를 때 이 각의 여여함이 온전한 만족되는 여여함이라서 만족된 인을 성취하는 것이지 더는 들 만한 나머지 각이 없다.
어째서 성상 중에서는 이 각을 들어 인이라 부를 때 이 각이 온전히 만족한 인을 성취하여 더는 들 나머지 각이 없는 것인가? 만약 제1각을 들어서 인이라 부를 때에는 이 각은 가지런히 54각에 이르러 만족한 인을 성취한다. 54각에 이를 때 이 1각의 지위가 움직이겠는가? 그러나 이 1각은 지위를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가지런히 54각에 이르러 만족의 인을 성취한다.
집도 마찬가지이니, 1척의 주본석을 집이 부를 때 이 주본석이 모든 연 가운데 가지런히 이르러 만족한 집을 성취한다. 주본석이 모든 연에 두루 이를 때 1척의 지위를 움직이는가? 그러나 1척의 주본석은 지위를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일제히 모든 연 속에 이르게 되니, 혹은 기둥 위에 이르거나 나아가 기와 위에 이르러 만족한 집을 이루기 때문에 성상 중에서는 ‘먼저와 나중의 뜻이 없다’고 설하고, 동상 중에서는 ‘먼저와 나중의 뜻이 없다’고 설하지 않았을 뿐이다. 상공(想公)이 ‘가장 위에 있는 1척의 기와 등을 집이라 부를 때’라고 말한 것은 곧 이 기와가 일제히 모든 연 가운데 이르러 만족한 집을 이루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동이상(同異相) 중에서 온전한 힘을 성취하고자 한다면’ 등은 동이상에서는 단지 온전한 힘을 말미암아 바야흐로 집을 이루기 때문에 ‘먼저와 나중의 뜻이 없다’고 설하지 않은 것이고, 성괴상(成壞相)에 이르러서는 단지 비어 있는 힘[空力]을 말미암아 바야흐로 집을 이루기 때문에 ‘먼저와 나중의 뜻이 없다’고 설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온 힘을 무너뜨려 하지 않음[不作]의 즈음에 이를 때’ 등이란 앞에서 동이(同異)의 두 상(相)이 있음[有]을 다할 즈음에 온 힘을 무너뜨리지 않기 때문에 경문에서는 1척의 돌이 기둥의 근본에 있다고 말한 것이다. 또 성괴(成壞)의 두 상이 비어 있음[空]을 다할 즈음에 온 힘을 무너뜨려 하지 않음 즈음에 이르기 때문에 글에서 “온 힘을 무너뜨려 하지 않음의 즈음에 이를 때, 주본석이 기둥 위에 있고 기와 위에 있어서 집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지상(至相) 존자는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지혜로운 사람이다. 두순(杜順)을 스승으로 섬기면서 화엄을 배웠는데, 꿈에 신승(神僧)이 나타나 은밀히 아뢰기를 “6상(相)을 깨달으면 1승을 통철(洞徹)한다” 했다.
그래서 3관(觀)의 오묘함을 기준으로 『지론(地論)』의 종지를 총괄해서 이 10구(句)를 편찬하여 『약소(略疏)』의 첫머리에 적어 놓으니, 법계의 선복(漩澓)이라고 할 만하다. 신라의 승려 법융(法融)이 부석(浮石)의 적손(嫡孫)인 신림(神琳) 화상에게 수학하고 해석을 지었으나, 그 이치가 깊고 언사가 질박하여 그 항목(門)을 이해하는 자가 드물었다.
우리 조정의 제4대째인 광종(光宗)의 시대에 원통(圓通) 수좌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균여(均如)다. 그는 모든 불심(佛心)을 깨우쳐 1승의 인(印)을 차고, 성주(聖主)의 보살핌을 받아서 원종(圓宗)을 크게 천양하였다. 가령 『탐현기』나 『수현기』 등 여러 조사의 글 중에서 예전엔 완전히 해석되지 않은 부분들을 다 해석하였으니, 어떤 경우엔 수좌께서 직접 붓을 대고 어떤 경우는 문인(門人)이 그에게 들은 바를 기록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백 개의 성(城)을 거치지 않고 착한 벗의 가르침을 직접 받게 하니, 참으로 성품 바다[性海]의 나침반이라 하겠다.
그러나 그 문장이 모두 방언(方言)의 고훈(古訓)인 가초(歌草)로 씌어졌으므로 후세에 이르러 가초의 글은 전해지지 않았다. 비록 최상의 지혜를 갖춘 대근기라도 책[卷]을 대하매 스스로를 망실하고 아득하여 귀착되는 곳을 알 수 없으니, 마침내 미묘한 말이 황폐해지고 오묘한 종지가 쇠락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
본강(本講) 화상은 이름이 천기(天基)인데, 병술년 봄 처음으로 계룡산 갑사(岬寺)에 주석하면서 옛 장서를 뒤져 이 기(記)를 얻었다. 뒤이어 수좌 문인인 담림(曇林)이 계승하여 이를 직접 기록하였다. 본강 화상은 대도를 행하기 어려움에 탄식하고 반쪽 구슬이나마 잃지 않은 걸 기뻐하면서 직접 방언을 삭제하고 어긋난 곳을 교열하였으며, 융공(融公)이 본문을 참사(參寫)하여 두 부분으로 나누어 후학에게 베풀었다.
고려국 수도 강화(江華)에서 19년 경술월일(庚戌月日) 제자들이 기록[誌]하다. - 047_0093_b_01L十句章圓通記卷下章曰:三教義二大有五重者:一忘像海印,是義現像海印是教;二現像海印,是義佛外向是教;三佛外向,是義普賢入定觀是教;四普賢入定,是義出觀在心中是教;五出定在心中,是義言語中現爲教也。初門中喩如平水中現種種像,而水不分別,其現佛入定證心中,現三世間法,而證心不分別。此爲義喩,如不動水中,無遺現一切像,其現像亦不動佛,證心中三世間法現顯,不動自位性,在中道,此爲教也。初教有義,佛大圓鏡智中現像,是本質。然第八識持種子義,轉名無垢淨識故,是本質,非謂能依、所依一身熟教中,性淨本覺因熏習,鏡中現像從性淨心生,非從新新心生,種種境故,是本質亦能依、所依一身也。是圓成實也。一乘中體融故,顯現種種像,則直是水身。此初重門唯是佛內證,心中分論無分別義,現差別義二門中,此現像海印中,背機爲義佛向機爲教,是九會加所爲也。三門中有二義;一云普賢向內爲佛,佛向外爲九會諸菩薩,若從此義,普賢入定及證忘像海印,此義就佛,普賢爲語非就機作區也。一云普賢入定分知佛外向門,未究竟故,佛外向爲義,普賢入定觀爲教也。餘二可知此地品中,以文句論義,說二大唯是。第五門也。喩如見寺人至本處說塔,唯說自心,雖自心所觀是塔,非餘別物。普賢亦爾,自心所觀是佛證法,如義說爾,餘國土海、世界海本實差別緣,亦如是也。 記曰:就第三句中,教義二大,有五重者,此句非是儼師自所作也。十地品中說義大不可說,說大可說之義論主釋說大文云隨聲取義,有五種過故,引此文也。來意如前辨也十地義如是不可得說聞已上爲義大我但說一分已下爲教大依此二大之文論五重者見十地義不可說之文,以忘像海印與現像海印相對,則忘像海印,是不可說現像海印,是可說。若現像海印與佛外向相對,則現像海印,卽不可說。佛外向是可說,佛外向者,加所爲經文也。乃至普賢入定在心中,與現言語相對,則在心卽不可說,現語言,是可說也。雖此語言中所現,而華嚴經法,尚如風畫不得,如聞取義故,隨文取義,有五種過也。喩如平水至不分別者,佛證心中雖現三種世間法,而佛證心不分別故,云義大也。 佛證心至性在中道者。問:何故前忘像海印中,不云性在中道,於現像海印中,方云性在中道耶?荅:忘像海印中,亦現三世間法,而此中唯見佛證心之無分別義不見所現之像,至於現像海印,見所現之像,不動自位性在中道之義故,此中方云性在中道也。初教有義者,對下教現現像海印也。 佛大圓鏡智中,現像是本質者,親光菩薩得攝相從心義故,能緣心爲本質。此心中所緣相之顯現之義,爲影像故,本質影相,竝是一種所生也。護法菩薩從色等,種所生相,是本質也。約此相之現於能緣心中之義,爲影像故,本質影像,是一種所生而見分、相分,是別種所生故,此是相、見俱存義也。初教之中,多以護法之義,爲正故,於此中,亦引護法義也。然第八識至所依一身者,初教中,眞如凝然不作諸法,唯賴耶識持種而生諸法也。轉此賴耶識,持種之義爲無垢淨識,此識亦是生滅之義,至佛果中,猶存德生滅義。是以佛圓鏡智中,現從種所生相故,云本質也。然能緣心與所緣相異,又能依種子,與所依識別故,云非謂能依、所依一身也。 熟教中至圓成實者,熟教中,性淨本覺,因熏習鏡中,所現像者,性淨覺心全動成諸相,爾非從新新心,生種種境故,是本質也。又性淨覺心全成諸相故,亦能依、所依一身也古言初教中不論相識故云識外有中陰轉也熟教中,得明相識故,識以外無有中陰也。問:何故初教中不論相識熟教中得明相識耶?荅:初教中,雖云種子同無記性,而不得云識變,而成諸相,唯明從種而生諸相。是故不明相識故有識外之中陰也。而熟教中,若約吾身則如來藏全吾身,又約六道如來藏、全餓鬼、全人天,如是如來藏眞全成諸法故,論相識也。是故無識外之中陰也。因熏習鏡者,起信論中,性淨本覺有四:一如實空鏡,二因熏習鏡,三法出離鏡,四緣熏習鏡也。此現像者,是因熏習鏡故,引彼文也。問:教體中,云初教中,具本影終教中,唯影無本也。何故此云終教中,有本質耶?荅:終教中,如來藏眞全成六道生滅諸相,而此教意令泯六道生死諸相爲宗。是故泯六道相歸平等眞時,唯有眞如,猶如全水成波,波息之日唯水無波,無明盡時,唯是眞故,是以佛果中,唯如如,及如如智獨存也。由是無有現身說法故,教體中云無本也。而衆生見聞自識所變色聲故,云有影像也。此中立在因位論如來藏全成諸相故,云本質也。明難品中,猶如明淨鏡隨其面相顯觀。釋中釋云明淨鏡者,若知鏡中,所現之像,卽六道之果不得生也。謂鏡有三:如來藏鏡、錠光玻璃鏡、海印鏡也。如來藏鏡中之像者,像與鏡不分之一身也。若取像者鏡則破焉,若破鏡者,不得像也。是故吾身共如來藏不分也。若知如來藏之業果,則六道之果,豈得生耶?然得鏡之時,所現五六尺之相,如冰泯也。是故熟教中,如來藏全成諸相,得如來藏,日六道生死,如冰泯也。故教體中,云無本質耳。是以如實空鏡,因熏習鏡於因中,見緣熏習鏡法出離鏡於果中見。是故此中立在因位,約如來藏眞全成六道生死諸相之義,云本質也。一乘中,體融等者,觀釋中,云海印鏡中,所現像者,吾五、六尺身,具三世間故,非別有住處故,云無住。如此無住,卽云不動也。旣無側之吾身從何處轉,何處也?是則此像不泯之也。何知無側如印文故謂印文云,三種世間從海印三昧繁出現現也。繁出者一紙上書置法字也。二法字上畫置朱畫也。此中白紙者器世間也。朱畫者智正覺世間也。黑文字者衆生世間也於此三中隨取其一全全起故別取不得也已上爲此義故,一乘中所現種種之像,卽是鏡體無有,鏡外種種之像故,所現像,卽直是水身也。此初重門,唯是佛等者,於佛內證心中,分論忘像海印,現像海印故也。 二門中,佛向機爲教,是九會加所爲者,九會加所爲,是佛加普賢之意趣也。 三門中,有二義。一云普賢向內爲佛,佛向外爲九會諸菩薩者,約佛普賢,無二體故,如是云也。是以外化中,亦有十佛,而云內證十佛自境界,外化普賢境界者,從大對之義云也。 若從此義普賢入定,及證忘像海印者,於普賢向內爲佛,佛向外爲九會諸菩薩義中,普賢入定證心之中,具忘像海印,現像海印故,云入定及證忘像海印也。 此義約佛普賢爲語,非就機,作區也者,對前第二重現像海印中,佛背機爲義,向機爲教也。謂普賢向內爲佛等者,雖在第三重論,而與第二重之現像海印中,佛之背機爲義,向機爲教等,爲一量故,約彼第二重,令別後義耳。一云普賢入定分,知佛外向門,未究竟等者,此句正是第三重義也。問:普賢入定門與佛向外門何別?荅:一云有重,一云無重。一云約寄位,則有重。若約實則無重也。初義者,此章旣云普賢入定分,知佛向外門,未究竟也。又化主體相用與助化之體相用別也。化主之用者,是佛之向外門也。助化之體,乃普賢入定門故,如是別耳。次義者,旣舍那品疏云盡佛源底故。又正爲中云普機菩薩盡盧舍那佛能化分齊故,無重也。後義者,合前二義也。謂化主之體相用與助化之體相用別者,約寄位義盡舍那佛能化分齊及源底等者,約一乘義故,約寄位,則有重而約一乘,則無重也。雖然此中,旣約佛之加所爲,爲義普賢入定觀爲教故,有重也。古言普賢向內,及證佛之向外心耶,不及證耶?如是義中,但言及證不許圓證也。何故但言,及證不許圓證耶?謂佛向外門於一智中,頓餉九會之法故,如硯中所磨之墨也。普賢菩薩承八會別定之力,方知佛向外門故,如筆端所染之墨也。如以筆但及染硯中之墨故,但言及證而硯中之墨非筆端之所盡染故,不得言圓證也。餘二可知者,釋初三門竟,普賢入定,是義普賢出定在心中,是教出定在心中,是義現語言爲教。此二門雖不釋而義現故,云餘二可知也。問:以此五重准於古人三本定者,何耶?荅:忘像海印,是海印定現像海印,是佛華嚴定,佛向外,是師子奮迅定也。謂佛離分別證三世間法之義爲海印定如此所證三世間法不動自位性在中道之義,如萬行交飾故,爲佛華嚴定也。此中下一步,佛云如此之法,豈可唯我獨證而已?欲令衆生,亦如我證故,起大悲,如師子王出窟奮迅故,爲師子奮迅定也。問:海印定者,最爲本故,可言本定,餘二云何爲本定耶?荅:海印定,是證本佛華嚴定,是說本師子奮迅,是教本故,云三本定也。問:海印定中證何法故,爲證本佛華嚴定中,說何法故,爲說本師子奮迅定中,說何教故,爲教本耶?荅:海印定中,證國土海法,佛華嚴定中,說此土海法,師子奮迅定中,說世界海法也。問:世界海法者,普賢菩薩起定於說分中所說,何故奮迅定中說世界海法耶?荅:說分中,普賢菩薩所說者,唯是華藏世界也。奮迅定中,所說世界海者,是佛所說故別也。故表訓德言娑婆以華藏爲本,華藏以世界海爲本,世界海以國土海爲本,國土海以不可說爲本,不可說以不可說,不可說爲本。如是云故,娑婆以華藏爲本之華藏,乃普賢說分中所說也。華藏以世界海爲本之世界海,是佛之師子奮迅定中所說也。是以佛外向門中,所餉者,乃是世界海法也。問:內證中無有說法,何故佛華嚴定中說國土海法耶?荅:但約不如緣起分中,說法故,云內證無有說法耳。然於內證中,爲果德,衆說果德法故,於佛華嚴定中,說土海法也。是故古言,神琳德說法之時,大雲法師君問曰:‘緣起分說法,如是證分說法,云何?’琳德嘿然良久云:‘荅之已竟,意得耶否?’雲法師君白云:‘意未得也。’琳德云:‘君之起此問時,所坐之牀及法界之法同時起問者是也。但君起問而餘一切法不起問者不也。’法師君白云:‘法界咽喉無盡舌端,同時起問者,可緣起分之問乎?’琳德言:‘三世間法同時起問者,證分之問也。’能化之佛稱於此問,嘿然不動者,證分之說法也。三世間法之自位不動者,證分之聞也。古言如是旣云:三世間法自位不動之義,爲證分說法故,知佛華嚴定中,三世間自位不動之義,爲說國土海法也。問:此三本定經文云何?荅:古言表訓大德在皇福寺時,大正角于進於訓德房中,白言請學三本定焉。於是訓德教令大衆竝出房外,餘人竝出去,而縜綸師出戶,立窗邊而傾耳。時訓德言一時佛者,佛華嚴定經文也。始成正覺者,海印定經文也坐師子座者師子奮迅定經文也已上如是傳來也。問海印定,是內證也。何故相德云欲表釋迦如來教網所攝三種世間,從海印三昧,繁出現顯故也?又孔目法數章云所有無盡法數及餘乘數,皆一乘所目,卽是一乘由同在海印定中,成故等耶?荅:有廣門海印有略門海印故爾,謂若約廣門海印,則華嚴經法,竝依海印定起故,云從海印三昧繁出現顯也。又云:由同在海印定中成故等也。若約略門海印者,唯內證故,三本定之海印定者,約內證也。融質大德云有海印分相門,有海印通相門。若約海印分相門,則華嚴經法依海印定,起下教之法,依佛後得智起故,所依異門中,從海印分相門云也。若約海印通相門一化之法俱從海印定起故,想大德之義從海印通相門云也。然想大德云,釋迦如來教網所攝三種世間,從海印三昧繁出現顯者,亦唯華嚴經法依海印定起也。問:若爾下教之法無有依海印定起義耶?荅:古言綸迥和尚往大唐,傅來云,智積國統問於儼和尚曰:‘大集等經,亦有海印焉,與華嚴經海印何別耶?’儼和尚荅曰:‘海印有五重也。一者三阿僧祇劫,歷修之帝釋乘法空須彌山頂,與所知障阿脩羅鬪諍之時,三科百法影像現於大圓鏡智海中之海印也。二者不可計數劫,歷修之帝釋乘本覺須彌山頂,與根本無明阿脩羅鬪諍之時,恒沙萬德影像現於一心眞如海中之海印也。三者一念不生之帝釋乘一行三昧須彌山頂,與妄念阿脩羅鬪諍之時,無相無分別相現於不二實相海中之海印也。四者二佛世界微塵數劫,歷修之帝釋乘摠相中道須彌山頂,與分別遍計阿脩羅鬪諍之時,十種普法像影現於世界海中之海印也。五者十佛之帝釋乘法性須彌山頂,與無住實相阿脩羅鬪諍之時,三種世間之法現於國土海中之海印也。若約此義下教之法,亦分依海印定中起也。謂初三海印,是三乘後二海印,是一乘故爾也。是以此章中,所論五重教義者,教義互望,雖成五對,而實海印有六種故,此六海印幷三乘三海印故,卽有九重小乘中,雖無識變故,不論海印,而約能化佛心中,現所知法之義可論海印。此爲小乘海印,是則合爲十重海印也。’又設除小乘之海印義旣表訓大德言不可說以不可說不可說爲本已上於忘像海印以上立不可說不可說以爲本故,則可幷,此爲十海印也。 此地品中,以文句論義說二大唯,是第五門者,謂經文中十地義,如是不可得說聞已,前爲義大。我但說一分下爲說大者,立當第五重故也。問:藏師釋二大文,云今釋有二重一,就實隨相果分、因分二妙智正證方便寄法果分、因分也。若約就實隨相義,則亦具忘像海印,何故唯當第五門耶?荅:初重因分、果分者,但取義論後重因分果分者,正當文中故,一大文當於第五門也。問:約初重因分、果分云義通一部經中大義,約後重因分、果分,云局斯地品也。是則第五門中,普賢在心中爲義,現語言中爲教者,唯局地品中耶?荅:普賢在心中爲義。現言語爲教者,通一部中,而妙智正證爲果分方便寄法爲因分義唯地品中文相現故,故云局此品也。問:約二重因果二分,以圓融行布二義分別,則初重因分、果分者,立在 論也。後重因分、果分者,立在行布同教中論也。是則第五重教義,唯行布耶?荅:後重因果,亦是通於圓融行布之別教也。設云立在行布同教中論,而普賢在心中,爲義現言語爲教者,通於一部中也。謂後重因果爲行布者,於說因一分之說分中,多說三乘差別行德故,對此之果分,亦是行布約如是義,爲行布也。是故普賢在心中爲義,在語言爲教者,通於一部,而隨會會文相有別。是故後重云行布者,且約地品文之現相故爾也。然故第五重教義通 一部中,而地品之文不通餘會故,云唯局地品也。問:證教二大章云一乘圓教,若約見聞,則不得分教義二大,若約普賢解行證義,卽說有其教義二大。若將見聞對普賢證,亦得可言見聞,是教大普賢證義是義大已上若約見聞則不得分教義二大者,是何見聞耶?又此二釋何別耶?荅:若約見聞者,植種見聞也。二釋中初則解行,是教大普賢證義,是義大也。後則以見聞屬於解行,是教大之教大中,故約實具云,若將見聞對普賢證說見聞解行,是教大普賢證義,是義大也。然解行爲教大之義,初釋中已現故,此中略也。存此二釋之義者,五教章中,攝界外機中云。若先於一乘中,已成解行,後於出世身上證彼法故,有初釋也。又攝內外二機中,云若界內見聞,出世得法,出出世證成,或界內通見聞、解行,出世唯解行,出出世,唯證入故,有後釋也。謂前云三以臨門三車爲開方便教界外授大白牛車爲示眞實義,此當同教一乘,如法華經說之同教者,當攝益之後二門故,攝界外機中,攝界內機,授三車教者,爲教旣得三車已後,授大白牛車者,爲義也。攝內外二機中,以深密三車,引界內機者,亦是法華之謀也。如是引界內機,令得三車爲教得三車已後,授大白牛車之義爲義如是云故,約一乘義中,亦先於一乘已成解行後,於出世身上,證彼法者,謂令已,成解行之人證果法者,是此經宗也。從此義故,證教二大章中存初釋也。若界內見聞,出世解行,出出世證成等者,且此經不㝵三界童蒙,亦得見聞之義,從此義故,存後釋也。問:證教二大章中,存此二釋之義,與此中論五重教義之意,何別耶?荅:證教二大章中,約修行次第釋也。此中約起說次第故別也。問:何故釋一種二大之文,有此不同耶?荅:以經文中具含二義故爾也。是以澄觀師釋二大文,云有二一修證相對二詮表相對也。修證相對者,約修行次第也。詮表相對者,約起說次第也。所以有此二相對者,由經文中,具二義故也。 喩如見寺至是佛證法者。普賢唯說自心所觀故,不能盡佛證心也。雖說自心所觀,然非說餘法,只說佛之所證法故,若約法體,則無階級淺深也。是以若約第二重現像海印,是義佛向外,是教則於教義,有階級而約一現像海印轉,名爲教故,約法體,則無階級也。又佛向外是義普賢入定觀,是教故,於教義有階級,而雖說自心所觀不說餘法唯說佛所證法是故約體此亦無階級也。問:古云想大德令習二十卷疏時,至見寺喩文言。儼和尚本用二喩,而藏師疏中只載一喩,不載一喩焉。其一喩何耶?荅:入冰喩也。如有人入於冰中,傍有人問云冷耶?立冰人荅言冷。如切岸上,有被毛衣向火者,聞此辭已,勝振也。問:以此喩,合法者云何?荅:有人入冰者,普賢菩薩入如來淨藏定也。傍人起冷哉之問者,同異生、大衆之同請也。立冰人云冷。如切者,普賢菩薩觀五海說十智之辭也。岸上有被毛衣,向火人者,謂被毛衣者,所化機不斷無明煩惱之義也。向火者,一云向道火也。謂向般若火故。一云向煩惱火故,不離煩惱熱所炙故,勝振者,機人得益也。問:勝振者何耶?荅:一云聞普賢菩薩說十智已,證土海法故也。謂纔聞立在解行際中,普賢菩薩本分中說十智之法,卽證國土海故,云勝振也。一云雖齊證普賢所得之法,而云勝振也。謂纔爲所化機,得聞立解行際普賢菩薩本分十智說已,卽得解行益,亦云勝振也。問:二喩何別耶?荅:一云入冰之喩及喩普賢入定義故深也。見寺之喩淺也。雖然見寺喩中,有人至寺觀塔者,普賢菩薩入如來淨藏定觀五海也。歸家者,歸大悲家也。唯說自心者,唯說自心之十智也。是故二喩不別也。 如義說等者,雖佛背機爲義,向機爲教,然約現像海印轉名爲教故,法體不異也。佛外向爲義,普賢入定觀爲教。然普賢非說餘法,唯說佛所證法故,法體不異也。如是國土海世界海雖別然約國土海轉,名世界海故,法體不異也。雖本實與差別緣別然約本實轉,名爲差別緣故,法體不異故爾也。章曰:四因果相形現義無盡者,喩如一尺木、十步木相形,方得長短位。若不形,不得長短位是故知一尺,是長位,十步,是短位。若一尺無長位,竝在一處相形,不得十步長位。是以請一尺人中,擧十步幢受與請十步人中,受與一尺。如是相形,法界一切相對諸法准例之,是故諸法隨擧一法,皆盡攝一切無所相形,無勝劣品。如是法中,始論一乘法相也。以此義驗定,知前五重教義一、一互具五重無勝劣相對也互形奪准上解之記曰就第四句中來意如前辨所言因果者以二義可見謂一義忘像海印與現像海印相對,則忘像爲果分,現像爲因分。現像海印與佛外向相對,則現像爲果分,佛外向爲因分,乃至普賢出定在心中與在語言相對,則普賢在心中,爲果分現語言,爲因分。如是論多重因果也。一義忘像現像,外向等,三爲果普賢入定,以下爲因,如是云因果相形也。此上二義竝得也。 喩如一尺木至受與一尺者。若一尺木不對十步長位,則對誰得短位?若十步木不對一尺短位,則對誰得長位?是則一尺之木對十步木,方成短位,十步之木對一尺木,方成長位故爾也。汎論此長短位,有三門:第一直約遍計論,則一尺是短位,十步是長位。第二踏遍計論緣起,則一尺是長位,十步是短位,第三直論緣起,則擧一尺時,全一尺故側中無十步,木擧十步時,全十步故,側中無一尺木也。何故踏遍計論緣起,則一尺是長位,十步是短位者?謂若以遍計云,則雖一尺,是短位而一尺之至長與十步之長位無異故,不壞一尺,卽具十步之長位。故云一尺,是長位也。以遍計云,則十步雖是長位,而十步之至短與一尺之短位無異故,不壞十步,卽具一尺之短位。故云十步是短位也。若直論緣起者,猶如夢所見山河大地等者。吾無我報心非片分爲山非片分爲塵也。全名爲塵,全名爲山等,如是無住大空,全名爲一尺,全名爲十步也。是故擧一尺時,無住大空全一尺也。而側中無十步之長位,擧十步時,無住大空全十步,而側中無一尺短位之可對也。道申章云:‘儼師遷神十个日前,學徒進所問訊,師問大衆曰:經中一微塵中,含十方世界與無量劫,是一念等文。汝等作何物看?衆人白:云緣起法無自性小不住小大不住大短不住短長不住長故爾耶?浮矣見耳。師曰:然之然矣。而猶生白:云何謂?師曰:莫須多道,只言一故已上云故擧一尺時無住大空全一尺故無側擧十步時,無住大空,全十步故,無側如是者,是緣起義耳。如是相形等者,如約一尺十步相對而論約餘大小染淨等一切相對之法論,亦爾也。 是故諸法至無勝劣品者,擧一塵時,具足法界一切諸法無側餘餘,亦爾故云無勝劣品也。無相對等者,若約最下現語言爲教,則此中具五重無側,又約最上忘像海印,則此中具五重無側故,云無相對也。章曰:五迴文別屬以現義融者,由上形奪,方得迴文。若不形奪不得迴後諸文字別屬一如字現無盡義是故一字具是七處、八會諸字無㝵故,言以現義融也。以此義驗之定知最下普賢言現一世界海,此一邊中,具是上五重義,教最上佛忘像海印中具五重也。因此義,經內諸字中,一、一字字攝迴前後諸字別屬一字現義無㝵一、一塵攝迴三世間法,別屬一塵,以現義無㝵得也。義與上義無盡無異。然不迴文彰義融者,無盡相猶隱。是故以迴文彰前義無盡也。記曰:就第五句中文,云迴文別屬,以現義融者,非唯五重互攝,而此經法若約文字最初如之一字具多字無側,約餘字,亦爾以現義融故也。 一、一塵攝等者,如約文字旣爾約塵,則一塵中,攝三世間法無側餘塵,亦爾如是以現義融故也。 義與上義等者,與因果相形現義,無盡之義無異也。而前,句中唯一、一重具五重耳。不明一、一字攝多字故無盡。相隱至此句中,明一字中,攝多字故,方現無盡相也。章曰:六寄因陁羅彰義邊際者,欲彰上融義內無中心外,無邊際,寄因陁羅也。琳德云:喩如世界旋無始終,無內外別,如用手寸,迴水成波因陁羅,亦爾一指波中,法界一切世界現然安立。此諸世界一、一塵攝入一指波,亦此一指波中法界,亦復如是重重無盡也。如一塵中現一尺十步千步等,亦爾若向內尋心入入,猶外向外尋邊,出出猶內。何以故?入於白玉、黑玉帶白玉影,入於白玉,何云黑玉?唯是內非外反,可云黑玉,是外白玉,是內也。問:與微細門,何別耶?融德荅:因陁羅彰法無盡,分齊微細門,現法極勝貌也。謂因陁羅門一塵中,現十方世界微細門,一塵中現十方世界不動遠近大小,安立貌也。問:微細相容與一、多相容何別?琳德荅:相容劑同,問何因,齊同二門別耶?荅:何因相容耶故,有一、多相容,相容之貌如何耶故,有微細相容也。由互有力、無力無遺攝因果道理故,有一、多相容,一、多相容麤意不知故,言微細也。問:攝十一成時,方攝十二成,乃至攝十十成者,呼一則盡何爲不盡耶?若唯一具十餘九,不具十者,攝不滿九別,不明同相耶?荅:所攝十,皆具十,則入重重故,皆滿然。 此唯在初一門,不以二攝門無盡,云不盡也。無自門、無盡無餘門、無盡自門攝同異二門。無盡者,不爲自門,攝凡無自無他道理,形奪攝故,是一門不盡義攝。何故不爲自攝?荅:如虛空無側不相知無對,自具是德無更攝故也。異門者,同體十門,是第二等也。所應是異體能應是同體故,非謂前異體也。記曰:就第六句中,來意如前辨。問:五重教證中,忘像海印、現像海印,卽是內證也。若約五重論因陁羅者,義理章中內證中,不論因陁羅微細之文。云何會耶?荅:言內證中,不論因陁羅者,不得分論一、多故,云不論耳。然約五重互具之義,得說因陁羅故爾也。問:古言海印中之成法中,論因陁羅已上則內證中亦可論因陁羅耶荅以二義可見謂一義海印中,成法中,論因陁羅者,約廣門海印故,云約華嚴經法,方論因陁羅義,略門海印中,不論也。一義內證中,不論因陁羅者,非是分論一、多故云爾也。而古人所謂海印中,成法中,論因陁羅者,因陁羅法於內證中,方得滿足故也。謂若內證中,不具因陁羅者,何緣起分中得論耶?然則內證所具之法得於緣起分中論也。此上二義竝得也。欲彰上融義者,指前迴文別屬,以現義融句也。喩如世界旋無始終,無內外別者,如因陁羅之世界行列迴旋之謂也。 如用手寸至,亦復如是者,猶如用一指迴水成波,於一指波中,法界一切世界入於其中,現然安立。又其世界一、一塵中,各攝一指之波,又其所攝一指波中,法界一切世界現然安立入中。又入入中,又入其因陁羅義,亦爾也。重重無盡者,重重與無盡何別?荅:一云別謂大料簡帝網重重門,云前一句中,卽具一切、此一中一切,復一卽一切。如是重重重重不可窮盡,㧾是。一句、二類現者,如此一句、餘一切句一一皆爾是則無盡無盡無盡已上於一中攝一切,其所攝一切中,又各攝一切法者,重重也。如一門旣爾,餘門亦爾者,無盡無盡故別也。然重重與無盡無別也。謂義理章中,然此無盡重重,皆悉攝在初門中也。問:但攝自一門中,無盡重重耶,爲亦攝餘異門中,無盡重重耶等,云故不別也。 如一塵中,現一尺,十步、千步等亦爾者,如一指波中、現法界法,一尺、十步、千步等中,亦爾也。 若向內尋心入入,猶外向外尋邊出出,猶內等者,帝釋殿之珠網,其黑玉影入白玉中故,黑玉是內。白玉是外也。然其黑玉影帶白玉,影入白玉中故,不得一向云黑玉是內,白玉是外也。反可云白玉,是內,黑玉是外也。又其白玉帶黑玉,影入黑玉中故,則可云黑玉是內也,白玉是外也。故云爾也。如一宮門而有多重,從外入內之時,謂入此門,卽爲內也。卽其門內,復有異門故,前所入門還是外也。又謂入此門,卽爲內也。卽其門內,復有異門故,前所入門,還爲外也。故云入入猶外也。從內出外之時,謂出此門,卽爲外也。卽其門外,復有異門故,前所出門,還是內也。又謂出此門,卽爲外也。卽其門外,復有異門故,前所出門,還爲內也。如是重重故,云出出猶內 也。因陁羅彰至安立貌者,於一塵中,攝法界一切法,其所攝一切法中,各攝法界一切法等,入中,又入入中,又入故,云彰法無盡分際也。微細門中,於一塵中,現法界一切法,其一切法不動遠近大小白位炳然齊現故,云彰法極勝貌也。問:義理章微細相容安立門中,問此義與因陁羅,云何別耶?荅:重重隱映互現因陁羅攝齊頭炳然現者微細攝已上 就多重法中於一法中攝一切法,自位不動,炳然齊現爲微細也。又約所現一切法中,一、一,各現法界、一切法,自位不動,炳然齊現之義,亦爲微細門也。如是一因陁羅中,論多箇微細門耶。又唯約一法中,如是重重法之炳,然齊現之義,爲微細故,於一因陁羅中,立一微細耶?荅:二義竝得也。謂料簡中,又由以異門,攝同體、相入義故,現微細門也。由異體、相入帶同體相入故有重重無盡帝網門也已上以異門攝同體相入義故現微細門者,異體之守自一,各異十門一、一皆帶同體之自具德十法,炳然齊現之義故爾也。異體相入帶,同體相入故,有重重門者,異體之各異十門一、一相,由各具十時,其所攝十一一,皆帶同體之十相,入義故爾也。立在如此重重法中,於異體一中,異體之各異十法,炳然齊現之義爲微細也。其所現之十一一,皆帶同體之十炳然齊現之義,復爲微細,則一因陁羅中,論多箇微細之義,可許也。又如此重重之法一中,炳然齊現之義,則爲微細,亦可許也。問:何知約重重之法,現於一中之義,立爲微細耶?荅:猶如懸五面鏡於第一鏡中,現法界一切法,其所現中,四萬二千由旬上之日輪現焉,百千丈山,亦現顯焉。如是遠近多少染淨自位不動,炳然齊現也。餘四鏡亦爾復於第一鏡中攝餘四鏡影其所攝四鏡中一一各現法界諸法遠近多少,不動自位,炳然齊現故,約重重因陁羅之法,於一法中,炳然齊現之義,復爲微細,亦不無也。問:若於一法中,重重之法,炳然齊現者,則多有竝耶?荅:義理章云隨擧爲首餘,則爲伴故,多有不竝也。 何因相容,至微細相容者,何因相容耶?由一有力時,多則無力故,得相容故,有一、多相容門也。相容法之貌云何耶?於一法中,法界諸法,不動自位,炳然齊現者是也。故有微細相容門也。問:唯約齊現之貌可云微細,何故幷取相容耶?荅:雖云微細而非捨相容,乃是相容法之微細貌故,云微細相容也。問:微細者,能含之微細耶,所含之微細耶?荅:一云能含微細也,一云所含微細也,一云難知之義爲微細也。初義者第十地疏云入微細智者,此是微細相容安立門常於示成佛八相之中,一現一切故稱微細依已上微細一塵中現一切義云微細故爾也。次義者義理章微細門中,引經云於一塵內,微細國土一切塵等悉於中住已上旣云一微塵內微細國土故所含微細也後義者第十地 疏云彼應化等貼前三智依現微細一化已上 約現微細化義云微細故以難知義爲微細也。初義於微細中,相容也。次義能相容微細法也。後義相容之義微細難知也。澄觀師演義中,用此三義,釋微細門故,具此三義方成微細門也。問:難知之義爲微細義中,於一塵中,微細國土之文,云何會耶?荅:此亦約難知之義,云微細耳。非約國土,云微細故不違也。問:立在具三義中,破文者,云何耶?荅:三復微細之言意自現耳。謂於微細中微細之法,微細而相容也。微細之法於微細中,微細而相容也。微細而微細之法,於微細中,相容也。如是三復,則三義自現也。一、多相容,麤意不知故,言微細者,且約難知義,云微細也。問:旣云麤意,不知應云智之微細,何故云約難知之義,云微細耶?荅:旣所知之法微細故,知此之智,亦微細故,約難知義,爲微細也。問:一、多相容者,旣一與多互相容故,宜云相容,而微細相容者,唯是一容多耳。非是相容,何故乃云微細相容耶?荅:用二義可見,謂一義言一容多者,非定某一偏容某多,隨吾所執,爲一容多餘餘,亦爾故,云相容也。一義一容多時,多便入一故,云相容也。問:後義中,一能容多,可云容耳,多入一中,入耳非容,何得云相容耶?荅:若爾難者,相入門者,多能入一,可言入耳。一能容多,是容非入,何云相入耶?而所入之一,是容非入然合能、所入得,云相入,雖所容之多,是入非容,而合云相容,亦無難也。攝十成一,至、不盡耶者,有自門無盡時,方有餘門無盡者,則初門中,攝十之時,卽盡。何故不盡後,九門耶?如是問也。 若唯一具十至不明同相 者,同相者見別緣之滿是義故,若一門中,攝十而其所攝九中,不具十,則攝不滿之九別故,不明同相耶?如是問也。 荅:所攝十,至云不盡也者,義理章中,云問此同體中一,卽十等者,爲只攝此十耶,爲攝無盡耶?荅:須十卽十,須無盡,卽無盡。如是增減,隨智取矣,卽十如前釋,言無盡者,一門中旣有十。然此十復自迭相卽入重重成無盡已上從此義荅耳無自門至不爲自門攝者,無自門無盡之時,餘門無盡,不得立故,但約此義故,云攝耳。不是攝爲自門之無盡故,是故云餘門不盡也。 凡無自至不盡義攝者,融質大德引此言爲證,云摠相盡中,所具九門,是別相不盡也。然此義中,亦此文爲證也。謂自一門中,攝無盡時,餘九門不盡故,是一門之不盡義中攝耳,不是攝爲自門無盡也。是以前云此釋明現初餘門,如虛空釋無別義意者,初釋中,餘門如虛空者,見初門無盡時,餘門不相知故,云如虛空也。後釋中言復攝餘一、一門中,無盡一切者,亦立初一門盡時,餘門是不盡故,立一門盡時,無所遺攝故。是故云攝餘一一門中,無盡而已。此亦是初釋之如虛空之義非別現異意也。問:義理章云問此同體中,所攝一切者,但應攝自門一切,豈可攝餘門中,一切耶者,牒前何文,起此問耶?荅:前同體卽門末,云或俱攝自同異二門中,無盡,無盡故,將此義問也。 無對者,立自門無盡時,餘門不相知故,側無餘門無盡攝何餘門無盡,爲自門無盡乎故,云無對也。 所應是異體,能應是同體者,合所應爲同體義中,所應是異體者,是乃同體內之異體耳,非諸緣各異之異體故,合所應方爲同體也。唯約能應爲同體義中,旣云所應,是異體能應,是同體故唯能應,是同體也。 非謂前異體者,一云約所應,是異體之義,云非謂前異體也。然釋前義理章文耳謂前云或俱攝自同異二門中無盡 已上故異門者但云同體門中第二等耳,非謂前所應,是異體 故也。章曰:七摠三、三轉現,際無窮者,前因陁羅門,唯依橫位論法界此門,依豎位論法界三乘中,三世定前後,然今一乘中,過去一念中,具三際時,時隔諸法故,云摠三餘二亦爾。此三門不一故,云三轉前因陁羅門中,一塵中現三世諸法無盡。因何義如是故,今此門中,過去一念具三際故,餘二亦爾故,能表於一塵中,三世法現顯也?記曰:就第七句前因陁羅門,依橫位論法界,此門依豎位論法界者,約一塵中,攝法界一切法,其所攝一切法內。復各攝一切法故,云唯依橫位論法界也,今此門中,約三際論相攝故,云依豎位論法界也。是以題云摠三、三轉現際,無窮也。謂過去中,具三際現在中,具三際未來中,具三際故,云摠三也。三門別故,云三轉也。 過去世至故,云三轉者,此乃十玄門中,十世隔法異成門也。古德云三乘中,以時隔法故立無常時一乘中以時隔法故立常時也 已上問何故以一種時,令隔諸法,有不同耶?荅:三乘中,立法孤單故,以時隔法立無常時,一乘中,立法圓滿故,以時隔法,而立常時,所以爾者,纓珞經云:‘佛告梵摩達王:汝前臥狗,是汝過去身將我是汝未來佛 已上此乃三世於一時中現顯之文。若以三乘義看,此文過去唯狗位無人,佛現在唯人位,無狗佛未來唯佛位,無狗人故,立法孤單也。一乘宗中,過去狗位中,具人佛現在人位中,具狗佛未來佛位中,具狗人故,立法圓滿也。問:法體是一,而互望,具九世耶?荅:一乘中如九世之別法,亦別也。是以三乘中,立一往三世故,過去之狗遷至現在人中,現在之人流至未來佛中。由如是故,立無常時也。一乘中,過去中,具三際故,無遷過去,狗至現在人中、現在中,具三世故,非轉現在人,至未來佛中故,立常時也。若法體,是一,互望立九世者,何得以時隔法耶?且約吾身者,一月中,三十日故,約日取,則三十身別也。一日中,十二時故,約時取,則十二身別也。一時中八刻故,約刻取,則八身別也。且巳時之身。唯巳時位耳。無遷此身去午時之理,午時身,唯午時位耳。無遷此身去未時之理等故,如九世位別法中,亦立別體法也。問:昨昨日、昨日、今日、明日、明明日,約此五位,昨昨日,是過去之過去故,唯一位也。就昨日中,約昨日,當體則過去之現在也。以今日望之,則現在之過去故,具二位,就今日中,約今日當體,則現在之現在也。以昨日望之,則過去之未來,以明日望之,則未來之過去故,具三位也。就明日中,約明日,當體則是未來之現在,以今日望之,是現在之未來故,具二位也。明明日者,是未來之未來故,唯一位也。由如是故,二日唯一位,二日具二位,一日具三位,約五日而論九世,則可是 一法體上互望,論九世耶?荅:義理章中,云此上諸雜義,遍十世中,同時別異具足現顯以時與法不相離故 已上一乘中旣時與法不相離故,稱九世之別法體,亦別也。是以三乘中,色心等法從種而生,於此法上,建立三世,是不相應法故,法則是實時,則是假也。一乘中,九世者,約同相觀,則每一、一世帶摠相法故,雖法是實時,是假義,同於三乘,而一乘中,其假實不動,卽法體故,法體亦別耳。問:十世章中,且就俱中由過去,過去無故,令過去,現在法,得有也。何以故?若彼不謝,此不有故。又過去、現在有故,令過去,過去無也。以若不此有,彼無謝故。又由過去、現在有故,令過去,未來無也。以由彼未謝,令此未有故。又由過去、未來無故,令彼過去、現在成有。以若此有,彼已謝故,是故由此未有,彼得未謝故也。又由過去過去無故,令過去、未來無也。謂若彼不無,此現不成有,此現不成有,此未來不成無。是故此無展轉,由彼無也。又由過去、未來無故,令過去,過去無也。反上思之如過去三世有此六義相由現在未來各有六可知 已上 旣由過去,過去無故,令過去,現在有,由過去,現在有故,令過去、未來無也。是故一乘中,亦可論三世遷流,何故無耶?荅:此是巧潤和尚之難也。此義欲引三乘中,建立三世遷流之人故,且云爾耳。而一乘宗,三世不遷流故,立常時也。問:何知一乘三世不遷流耶?荅:一乘中,諸法無自性故,過去以現未之緣成也。現在亦以過未之緣成也。未來亦爾故,三世不遷流也。問:設過去世,以現未緣成現在,以過未緣成,而位不雜故,過去是滅位,現在是生位故,可有三世遷流之義耶?荅:過去雖是滅位,而由現在之生緣成滅,非自然滅也。現在雖是生位,而由過去之滅,緣成生非自然生。是故三世不遷流也。問:此句中,何故不論一念耶?荅:含九世之別,卽摠一念故,論別九世時,現摠一念故,不論也。問:十世隔法者竝約摠別世令隔耶唯約別九世令隔耶?若通以摠別,令隔者,含九世之別,卽摠一念,何用摠別,令隔耶?若唯以別九,令隔者,應云九世隔法,何云十世隔法耶?荅:旣云十世隔法故,或以別九世令隔,或以摠別令隔也。問:摠一念者,於別九世,雖無偏當,旣經文中,就現在,說三世,卽一念,則且當於現在一念中故,別九世,以外無摠一念。云何以摠別令隔耶?荅:且現在一念,有二義。有簡餘八世,爲現在一念之義有通,含九世爲摠一念之義故,得以摠別令隔。問:何知爾乎?荅:古言儼和尚對想和尚,令曉悟九世法時,云猶如有人夢中,自見其身,在於梯上,傳瓦亦見其父及王父乘在屋上受瓦,而蓋覆之,亦見子及孫子在于地上,而輸瓦也。若合法者,產父之父過去,過去故唯一位父者過去之現在也。亦現在之過去故,具二位其自身者,是現在之現在,亦過去之未來,亦是未來之過去。故具三位也。子者是現在之未來,亦未來之現在。故具二位也。孫者是未來,未來故,是一位也。通夢之人,是摠一念故,約此在於挮上之人,有二義也。若約梯上,傳瓦之義,看之簡餘八位,爲現在之一念耳。若約通夢九位之義,看之是摠一念也。故見現在之一念,有爲別爲,摠之義無㝵也。問:若別九世以外,立摠一念者,亦於錢門中,能成十錢以外,加所成一錢,應論十一錢。何故唯論十錢耶?荅:一云於錢門中,初一爲所成,餘九爲能成故,不違也。然設約初一爲所成,餘九爲能成者,錢門與世門別也。謂列位十錢,以初一爲所成,餘九爲能成。故例此卽應唯約九世分,論摠別而旣別九世,以外立均蹯。此九世之摠一念也。是則與錢門大別也。問:若爾者,前難云何通耶?荅:行遠大德云,摠別門與能成所成門別也。而世門,是摠別門,錢門是能成、所成門故別也。問:何故能成、所成門與摠、別門別耶?荅:行遠大德,但言摠別門與能成所成別也。不明所以別之之意故也。今釋於此義中,出二門別異之義也。謂摠別之門約不卽不一義故,別九世以外,加立摠一念也。而能、所成門中,且約相卽門故,能成十錢以外,不加所成一也。問:藏公約摠別論相卽故,摠別門中,亦有相,卽何故能成、所成門,是相卽故,與摠別門別耶?荅:雖約摠別論相,卽而與能成、所成門之相,卽義別也。謂能成、所成門中,且約一有體,餘無體之義,論相卽也。若約摠別論相,卽時不論有體、無體之義,直云摠卽別,別卽摠耳。是以藏師約摠別論相卽之義,立在想德不離不異義中論故,摠別之門,是不卽不一之義,能成、所成之門,是相卽之義,故不違也。雖如此會此,亦難故,應可思也。 前因陁羅門至現顯也者,前之何以摠別,令隔法之問義?釋此文時,方會也。不思議品云一切諸佛,一微塵中,普現三世一切佛剎。道身章云問若爾十方世界入一塵時,亦是十方世界之一塵耳。無能入世界與所入塵別耶?荅:爾是九世之一念故,非一之一,是一念之九世故非差別之差別耳微塵與世界亦然耳 已上微塵與世界,亦然之言中,已現是十方之一塵故,非一之一,是一塵之十方故,非差別之差別義也。一微塵中,現三世一切佛剎者,同時現耶,前後現耶?應可云同時現耳。然而但言一塵中,現時足現同時現顯之義故,但言一塵中,現更不云同時,現顯之言也。同時是摠三世,是別一塵,是摠一切佛剎,是別故,以其是摠之同時,令隔是摠之一塵,以其是別之三世,令隔是別之一切佛剎故,以摠別二門,令隔法之意,至此文會也。章曰:八無生佛法,寄位升沈者,佛內證海印,名無生佛法。若蜉蝣朝生夕死,命三際竟生滅,亦如是何時生何時滅?是故云無生佛法,餘一切法,亦如是。是故諸佛不自稱諸法名字,不說相狀也。然爲機緣,普賢菩薩出定於無生、無名處,以種種名題目。是故云所目於此所目中,隨機緣心,勝劣尊卑差別故,云寄位升沈也。衆生實執所目故,云執名之徒佛不隨名,證名無住義故,云無名眞源,則是法性圓融證分也。所目者,通方便,始終所流者,方便是中間也。方便一乘中,有三:一所目,二所流,三方便。初二就緣起道理者,於機緣中起故,方便約智者,就機人智。又就聖者意者,機人得聖意也。覺者佛善巧方便也。所目是華嚴經三乘也。始信時中,於無生佛法,以種種名所目。是故通方便始所目中,所有法實得證時,唯是無住義,無異實名,名爲所目,所目者,無實也。是故通方便終也。所流者,餘四宗望別異三乘,三乘實無法體,將去一乘法授三乘人根機漸熟此人迴有二:一勝以一乘同教形奪引,二此中無分,以法華迴所目人直得其法。是眞實無形奪進退故,是別教一乘也。方便者,知自得法無實,向一乘心故也。初教熟教於安立諦中,立教頓教,華嚴於非安立諦中立教,是故不聞無說也。頓教默,是教以默所現,是義一乘中,證心中,頓現法界一切法,名爲教爲說也。凡一切法中,實執所目心見,相應緣起法,忘所目智見無不無生佛法,初教等中,將名心見柱,是假不將,名心見柱,是實者,是至此一乘爲足,令習遠方便也。無生佛法者,義大寄位升沈者,是說大。此中佛證無生佛法,是所依果海,是表地法,佛向機分十地藏,亦義大攝隨所依故,亦說大攝隨言說,隨加行智故,佛欲攝生分十地藏,藏五乘法,是佛因位,與教相應故。是故儼師云十地者,五乘趣向普賢證位,佛果攝用也。此十地藏五乘本源故,捨貧願福人,授初地施法,願天、人、人授第二地十戒、五戒、八戒令得人、天果,乃至願一乘人,授八地以上一乘法。是故云寄位升沈也。然如是隨位分法,以佛見,皆是無生佛法也。是故從佛果,生十地,此十地具願行,解信隨位列示有地前四十心也。是故位位,唯十地也。記曰:就第八句來意者,疑云且約吾身此五尺中,具法界一切諸法,而無側焉。若約蜉蝣朝生夕死之命,竟三際故,無生無滅焉。二物旣爾,餘餘亦爾,無名無相,何故現有種種差別耶?爲決此疑,云約佛雖證無生佛法然,但隨機緣說故,有種種升沈,差別耳故,此句來也。然爲機緣至云所目者,一云內證定,一云八會別定。初義者,前文云佛內證海印,名無生佛法因。此卽云普賢菩薩出定故,云內證定也。問:普賢菩薩無由入內證定,何故出內證定耶?荅:第三重教義中,一云普賢向內爲佛,佛向外爲九會諸菩薩已上旣云佛向外爲九會諸菩薩故普賢所出定者,內證定也。外化中,非無十佛名義,而內證,是十佛目境界外化,是普賢境界者,從大對之義,且云爾也。後義者,普賢菩薩唯入八會別定,無入內證定故,云爾也。問:初會中,普賢菩薩入如來淨藏定,觀五海說十智故,定內亦有所目。何故文云出定於無生、無名處,以種種名題目耶?荅:雖定內有所目,是略說故,且從多分,云出定以種種名題目也。問:諸處文中,云一乘所流,一乘所目,一乘方便者,云何耶?荅:有三義。一云所流所目方便者,竝此經也。一云所目,是此經所流方便者,下教也。又融質大德云:若約通相門一代所說教法,是所目故,云所目也。是以此義中,從人、天乘,乃至第十果海根,竝於所目中,得益。是故通云所目根也。若約大位分,卽唯華嚴經,名爲所目下教,名爲所流方便也。此義中唯第九第十根於所目法中,得益故,竝爲所目根也。若據細道理,於下四教中,具所流所目也。謂下教人中,或有作所流之解入一乘者,約此人所領之教,云所流也。或有作所目之解入一乘者,約此人所領之法,爲所目也。然此三義中,約通相門,一代所說,竝所名目故,云所目約大位門,唯華嚴經,名爲所目下教,名爲所流方便,卽彼第三據細道理門,宜可廢也。謂普法章中,云如是我聞。首料簡下文所目之義,此章中,云普賢出定,於無名、無生之處,以種種名題目故。云所目重空三昧章中,一乘目,卽屬一乘、三乘目,卽屬三乘等。如是云故,約通相門,則一化法,竝所目也。若約大位,則唯華嚴經法,爲海印定,所目之法。此海印中,所目之法向外流成下,四教法故,唯華嚴爲所目下,四教爲所流等也。問:諸處文中,方便一乘中有三:一一乘所流,二一乘所目三一乘方便已上言一乘所目者從通相門義摠取一化法,竝在所目耶,唯華嚴經法爲所目耶?荅:唯華嚴經法爲所目也。問:方便一乘者,華嚴一乘耶?荅:下四教也。問:若爾者,方便一乘中,開論所目,所目可是下四教耶?荅非也。於方便一乘中,幷論所目之義者,幷論所同之別教故,方便一乘。雖是下教,而一乘所目者,乃是華嚴經也。所以方便一乘中,幷論所目之義者,或有聞方便法,卽是一乘。疑云:何故方便乘,卽是一乘耶?爲決此疑,云從一乘流故,卽一乘也。一乘所目故,卽一乘也。爲一乘方便故,卽一乘也。故方便一乘中,幷論所目耳,所目非是方便乘也。問:普法章如是我聞首料簡下文,所目之義,此章云普賢出定於無生、無名處,種種名題目故,名所目,與一乘所目何別?荅:普法章所目之義,又種種名題目所目之義等,摠約華嚴經中,所名目故寬也。諸處中,一乘所目者,三乘法數,是一乘中,所名目。故云一乘所目故狹也。然云一乘所目之義者,亦望下文,所目之義,及於無名、無生處,種種名題目之義故,無淺深也。融質大德依此文中,無生、無名處,以種種名題目,爲證立通相門,云一化法竝所目也。然唯華嚴經法,名爲所目耳。 所目中,隨機緣心,勝劣尊卑差別故者,現華嚴經中,具五乘法也。下文云此十地藏五乘本源故捨貧願福人授初地施法,願天人、人授第二地十戒、五戒、八戒,令得人天果,乃至願一乘人授八地已上一乘法。是故云寄位升沈也。問:若爾者,文云隨機緣心勝劣之機者,是一乘機耶?荅:約一乘義見,則隨機緣心勝劣、尊卑,竝是華嚴經中所具故,一乘機也。約隨機緣謬執義見,則下三乘機也。若約五乘配門十地,則人、天實在初二、三地,二乘實在四、五、六地菩薩實在第七地,一乘實在八地上。依如是義觀,之則五乘竝具十地之中。若隨謬執之義觀之,則前四乘,乃是下三乘機,故此處亦爾也。問:孔目十地章云十地者、五乘所觀者,下教五乘,以華嚴十地,爲所觀故,能觀五乘,卽是下教。何故五乘機人具在此經十地中耶?荅:約五乘所觀文義,則雖爾而約普賢證位之義觀之,則五乘機,卽不動,是我證位故爾也。問:文云衆生實執所目故,云執名之徒者,華嚴經機耶?荅:下三乘機也。問:此乃實執無名、無生處所目之徒,應是華嚴機耶?荅:雖實執無名處中,所目之法,而實執之時,謬解爲三乘法故爾也。問:何知爾耶?荅:智通問荅云。又疏中釋文前,約八教明互相成約三教,辨次第義何耶?荅:大意者,爲現此經內一切教義等,無不攝故。謂佛始第二七日道樹中,臨大人說大法時,一切虛空法界、一切微塵、一切微塵處、一切十世、九世前後時中,一切五乘、三乘、一乘、無量乘機中,頓應說一切法門,所臨機衆生,各各隨應聞解行證。如是一切教義等,十十法門頓同時,頓現大機人。如是法見聞解行證一處一切處、一時、一切時、一根、一切根、一行、一切行、頓頓修行、已上臨大人說大法者說華嚴經法也所臨機衆生各各隨應聞解行證者,如此說華嚴經時,小乘人者,解爲小乘法,三乘人解爲三乘法,各各謬解之謂也。大機人如是法門見聞解行證等者、大機人者別機人之執爲小乘、三乘之法,竝解爲無盡頓頓法故,他所見,卽爲自所見,他所聞,卽爲自所聞,非唯見聞爾耳。若約根論解,彼彼根正,卽吾身故,一根、一切根、一行、一切行頓頓修行。如是云故,設實執無名處中,所目之法而實執時,謬解爲下三乘法也。卽是法性圓融證分也者,一云都約華嚴經也,然內證也。所目者、通方便始終者,融質大德云,約法則一化之法,竝所目故,云通方便始終約根,則謂於始時,謬執所目,及至終時。又解所目故,通始終也。雖然此中,旣云始信時中,於無生佛法,以種種名所目。是故通方便始所目中,所有法實得證時,唯是無住義、無實名,名爲所目。所目者,無實也。是故通方便終也已上如是云故始執之時謬執無名無生處所目之法,以爲下三乘法,終得證日,還解無名處中,所目之義入無住中故,云通方便始終也。方便一乘有三:一所目,二所流,三方便者。所以方便乘中,幷論所目者,恐有疑云方便乘者,乃是下教。何故方便乘爲一乘耶?爲決此疑云方便乘法,雖是下教,其法本是一乘所目法故,方便乘時,卽是一乘,由此義故,幷論所目也。初二就緣起道理者,於機緣中,起故等者,何機緣耶?荅:下教機緣也。問:若爾所目可是下教,何云此經耶?荅:華嚴經中,所目之法向外而流,隨於下教機緣中起也。爲現緣中所起之法本,是華嚴經中所目,所以幷論所目耳,非是所起法中,幷見所目也。若於方便一乘中,不幷論所目者,無由現機緣中所起之法本,是華嚴經中,所目故爾也。若此所目,亦於所起中見者,則流目二義中,竝有難分之失,謂所流之法所名目法耶,非所名目法耶?若所名目法者,可云所目,何故唯云所流耶?若非所名目法者,所流之法無名字之法耶,又所目之法起時,流而起耶,不流而起耶?若流而起者?可云所流,何故唯云所目耶,若不流而起者,何以不流而起耶,又約下教之法依一乘起爲所流名目,此所起之法爲所目故,所流所目應無階級耶,然解所流之義爲第七根解所目之義,爲第八根故,所流所目不無階級也。所以所目法不云流起所流法,不云名目者,良由所目者,唯是海印定中所目之法也。此所目之法向外,流成下教之法,名所流故爾,非於所起下教法中,竝立流目二義也。問:一乘、三乘義章中,云由依究竟一乘教成。何以故?從一乘流故。又爲一乘教所目故已上所目可於依起中見耶荅欲現方便乘法本,是華嚴經中,所目之法外向流成下教故,幷論所目耳,非依起中,幷見所目也。是以若此所目,亦於依起中見者,彼第八根,亦應解所流之法還可云卽見自所得三乘之法從一乘無盡教起。何故第八根文,云彼三乘等法,本來不異別教一乘已上耶又第七根中如上所引三乘與一乘同時說等云云此中引同時異處三乘者前文中釋同時異處三乘云是同教故末不離本故依本而成故已上依本成末義中,方引同時異處,三乘證成,則若第八根,亦解所起法者,何故不引同時異處三乘耶?故知所目唯此經耳。方便約智者、就機人智者、問流目,以外有別方便機耶?荅一云有也然想德云方便者約智語又亦可就聖者意已上等者,通約機根之智及聖者之意而云方便無別,方便之根也。是以諸處中,一乘方便者,約根智及聖者意說也問:通約所流所目二根之智,云方便根耶,唯約所流之智耶?荅:如後問先言所流所目者,就緣起道理,次言方便者,約智語則,亦可幷取所目智爲方便耶?荅:所目之智當正乘中見故,方便約智者,唯所流智也。 又就聖者至善巧方便者,旣云機人得聖者意,則又就聖者意者,約機人智云方便耳。何故復云約聖者意爲方便,而別釋耶?荅:又可就聖者意說者,約能化佛說下教法之智,云方便而云機人得聖者意者,恐有疑云前,云就機人智者,是何智耶?爲釋此疑便擧聖者意,而云機人得聖意之智爲方便,然後正釋就聖者意文,云覺者佛善巧方便也。 所目是華嚴三乘者,以三乘法數,是一乘中所目故也。 始信時中、至方便終者,執於無名、無生處所目之法謬解故,云通始也。得證之時,解此無生、無名中所目之法,而入故云通終也。始信時者,始謬執之謂也。所有法實得證時,唯是無住義者,問此與前云佛不隨名,證名無住義,何別耶?荅:前明佛之證無住義,此明機人之證,華嚴經中所目法實故別也。所目者無實者有二義:一云謬執無生、無名處所目種種名:謂爲實名終解無名、無生處所目之曰無實名故,約無遍計之實云無實也。一云於無生、無名實法中,用種種名題目故,於所目中,無無名眞源之實故,云所目者無實也。二義竝得也。以不將名心見柱,是實者,是至一乘爲足,令習遠方便等文義觀之,則對無名眞源,云所目者,無實也。此人迴有至法華迴者,始起所流之解、卽依露地同教仍以此解極於華嚴同教故,始起流解依於露地,同教之人以。華嚴同教形奪引也。不起流解之人以法華迴也。問:道身章云法華同教機生故,卽見一切乘,從一乘起華嚴同教機熟故卽見一切乘卽是一乘更無別乘已上是則起所流之解,入法華中,起所目解入華嚴耶?荅:欲明已在二同教時,機解別耳,非是以流解入法華同教,以目解入華嚴同教故,云以流解極於華嚴同教也。所目人直得法,是眞實無形,奪進退故,者,融質大德云是第九、第十根也。謂第九、第十根於無名、無生處,種種名題目時,唯解法之眞實耳,無謬執故爾也。然此大德由立據細道理之所目故,爾也。 然今云前釋所流竟,今釋所目也。問:第八根,是從三乘入一乘人,何故文云直得法,是眞實無形奪進退耶?荅:第八根起所目解,卽能解無生、無名處所目之法故,云直得法,是眞實無形奪進退等也。第七根見自所得法,依無盡一乘教起故,作從此至彼本末相形之解故,云形奪引也。 方便者,至一乘心者,前云方便者約智故,恐有疑云所言智者,如何智耶故,此釋云知自所得法之,不實向一乘心也。 凡一切法中,至無生佛法者,實執所目之心見機緣中,所起之法也。以佛而言見無生佛法也。 初教等中,至遠方便也者,將名之心,是見緣起道理也。不將名心,是見歸無名眞源之遠方便也。 此中佛證至是表地法者。問:所依果海者,是內證耶?荅:一云是內證也,一云外化也。約後義會,此文時雖所依果,是外而深之,卽內證也。故約果體無二義故,云爾也。表地法者,通於所依果海及所證十如,此中且引通於所依果海之義也。 佛外向機分,十地藏,亦義大攝隨所依故者,澄觀師釋二大文云二約究竟佛果,對普賢因說義通一部,謂卽此證智冥同究竟果海,爲果分故,佛證無生佛法,是所依果海者,此通一部究竟果分之義也。前雖已立通一部之果分,而訂智不幷立故,證智冥同究竟果海爲果分者,以能證、所證冥同,於究竟果海中,爲果分。如是云故,佛向機分十地藏,亦義大攝者,此是證智冥同,究竟果海爲果分之義也。 亦說大攝隨言說,隨加行智故者,此是迹處之空隨,於空處之迹,亦有說義地智,亦可寄言標擧之義也。佛欲攝生分十地藏等者,此中不分義,說二大摠現十地,具五乘之義也。 儼師云至攝用也者,立於圓融行布,都十地中,而云五乘趣向,普賢證位佛果攝用故,正則本實之義,兼具差別義耳。 於捨貧願福人等者,釋五乘所觀之義也。 如是隨位至生十地者,此中以從佛果,生十地,釋佛果攝用也。此十地具願行解信,隨位列示等者,此釋具前四十心之義也。章曰:九微細相容,以明極勝者,如因陁羅門,辨三乘人。不辨一塵中,法界法遠近大小,不動自位,現極勝相故,云極勝就相者,就此極深相也。記曰:第九微細相容,以明極勝者問:此之一句宜在前寄因陁羅彰義邊際之次,或㧾三三轉現際無窮之次,何須要在無生佛法,寄位升沈之後耶?荅:意有在也。謂釋前句云無生佛法者,佛內證海印,名爲無生佛法。然爲機緣普賢菩薩出定於無生、無名處,以種種名題目故,云所目所目中隨機緣心勝劣尊卑差別故名寄位升沈也已上疑者云:旣言隨機緣心勝劣尊卑差別,則與三乘同耶,然華嚴經法,一中攝多,成因陁羅耶?爲決此疑云:設隨機緣心,勝劣尊卑差別於一乘中。若執一塵,盡法界全一塵故,此一塵中,遠近大小,不動自位,炳現無側餘餘亦爾故,與三乘大別。由如是義故來也。 如因陁羅門辨者,前寄因陁羅句中,引微細門對辨故,云爾也。問:微細門具能含所含,及難知等微細也。此三義中,有淺深耶?荅:若隨相別論,能含微細與所含微細,此且蹯遍計論緣起義耳,難知微細者,此直論緣起義耳。謂所含微細者,若一塵爲小,而此塵之至大,與十方無異故,一塵入十方中,而同無邊際也。若十方爲大、而十方之至小,與一塵無異故,十方入一塵中,而無所遺故,云所含微細也。能含微細者,一塵攝十方是也。此上二義,是蹯遍計論緣起之義也。難知微細者,一入多中,多入一中,而入者不入故,擧一塵時,側無餘故,更無入一中之多,擧多法時,側無餘故。更無入多之一,一之與多,是一身而難知之義,立爲微細故,云直論緣起義耳。然故儼師云莫須多道只言一故是以能含所含微細者當於曉師小之大義,能容大大之小義,方入小中之義,難知微細義者,此當藏師不必小之大相,大之小義,方能容入直小之小相,能容大之大相,能入之義耳。章曰:十隔越科文成義自在者,欲成初會義,若餘諸會處法文句等,在於此初自在,能成如初會義餘,亦爾准之其相云何?若問初會名何耶?荅是忉利天會,若問說何法?荅:是十住法如是言說,不違能成義。何以故?初會論時,爲諸會本故,能攝諸會。如初會餘會,亦爾隨約,是本能攝前後也。是故同異相中,諸緣動位不成,舍而成壞相中,若柱本石在柱以上,亦在瓦上,則能成舍也。何以故?瓦等直是柱本故。想公云最上一尺,瓦稱一尺分齊,踐二十步。何以故?無瓦不成舍,無瓦不成舍故,諸緣亦不成。是故一尺直是二十步,乃至是一寸,非增減一尺也。問:柱本一尺石,是二十步耶?荅:是也。問:壞本緣耶?荅:只一尺,則二十步,何一尺位動哉?同異相中,欲成全力一尺石在柱本,破全力,至不作際時,在柱頭,在瓦上,能成舍也。記曰:第十隔越科文成義自在者,來意如前辨此句、是六相義也。故下云初會論時,爲諸會本等者,摠別義也。同異相中,諸緣動位不成舍者,古云:同相中有分,同有滿同也。謂一尺留頭,出一尺力,同於二十步堂者分同也。一尺留頭,出二十步力,同於二十步堂者滿同也。如是云也。問:滿同中一尺留頭,出二十步力,同於二十步堂時,動一尺位故,不成舍耶?荅:異相者,諸緣形曲長短,各異之謂也。同相者,諸緣成舍力義。齊同之謂也。故不動一尺位,而出二十步力,同於二十步堂故,能成舍也。是以若動一尺位,方出二十步力,同於二十步堂者,則不成舍故,如是云耳。成壞相中,乃至能成舍等者,此文違於諸處,壞相之言,謂儼師云六壞相諸義,各住自法,不移本性故。想德云准是論主立宗道理故,知。雖因果信解行迴地佛自位不動,而無前後等已上其文如是何故此中若柱本石在柱以上亦在瓦以上,卽能成舍耶?荅:想德文中,已自會爾,謂旣云雖因果信解行迴地佛自位不動,而無前後故,自位不動者,當諸文中自位不動也,而無前後者,當此中若柱本石在柱以上,亦在瓦以上卽,能成舍之文也。問:前對同相之異相中卽無,無前後義,今對成相之壞相中,方有無前後義耶?荅:隨同相諸緣之帶㧾立成相舍也。謂此角是印,彼角是印者,同相之義也。擧此一角呼作印時,卽此一角卽正全,印更無餘角作印之義,是成相也。所言擧此一角呼作印者,是何角耶?是壞相之角也。然啚文中,釋此壞相云諸緣各異住自如故已上言住自如者此角卽如也彼角卽如也故,云住自如也。非謂此角、彼角以外別指異、如,云住自如也。然故擧此角呼作印時,此角之如全滿足如成滿足印更無餘角之可擧也。何故成相中擧此角呼作印時,此角全成滿足印,更無擧餘角耶?若擧第一角呼作印時,此角齊至五十四角中,成滿足印也。至五十四角中時,此一角位動耶?然由不動,此一角位方得齊至五十四角中,成滿足印耳。舍亦如是擧一尺柱,本石呼作舍時,此柱本石齊至諸緣中,成滿足舍也。柱本石遍至諸緣時,動一尺位耶?然由不動一尺柱,本石位方得齊,至諸緣中。或至柱以上,乃至瓦以上成滿足堂故,成相中說無前後義同相中,不說無前後義耳。想公云最上一尺瓦等,呼作舍時,卽此瓦齊至諸緣中,成滿足堂故爾也。 同異相中,欲成全力等者,同異相中,只由全力,方得成舍,故不說無前後義,至成壞相中,只由空力,方得成舍故,得說無前後義也。是以破全力,至不作際時等者,前同異二相盡有之際,不壞全力故,文云一尺石在柱本也。成壞二相盡空之際故,破全力,至不作際故,文云破全力,至不作際時,柱本石在拄以上,亦在瓦上,能成舍也。十句章圓通記卷下至相尊者以生知之智,事杜順師,學華嚴。夢神僧冥告悟六相洞一乘。於是約三觀之妙、摠地論之旨撰茲十句標,於略疏之初,則可謂法界漩澓矣。新羅僧法融受業於浮石,嫡孫神琳和尚造釋,然理深辭質,罕有得其門者。至本朝,第四葉光宗時,有圓通首座,名均如得諸佛心,佩一乘印,承聖主眷顧,大闡圓宗如搜玄、探玄等諸祖之書。古未消釋者皆釋之,或首座親自下筆,或門人記其所聞,令人人不待百城之遊,面承善友之誨,則眞性海指南也。然其文皆方言古訓歌,草而寫及乎後世歌草之書不傳。雖上智大根,皆臨卷自失溟涬,然昧其所歸,遂使微言,蕪沒妙旨,淪湑時已久矣本講和尚名天其以丙戌春始住雞龍岬寺搜古藏得此記乃首座門人曇林親承所錄也。本講和尚嘆大道之難行,慶半珠之不失,親削方言,校其差舛,以融公本文參寫,離爲二通,以施後學也。高麗國江華京十九年庚戌月日弟子等誌。
- 1)『총수록』 상권 1, 대정장 45, p.716 중.
- 2)『십지론』 제2권, 대정장 26, pp.132 중~133 하.
- 3)『화엄경』 제5권, 대정장 9, p.427 중.
- 4)『총수록』 상권 1, 대정장 45, p.728 중.
- 5)『화엄경탐현기』 제3권, 대정장 35, p.117 상.
- 6)『화엄공목장』 제2권, 대정장 45, p.5556 하.
- 7)『화엄일승법계도』, 대정장 45, p.711 상.
- 8)『일승화엄교분기원통초』 제3권, p.13좌, 『총수록』 하권, 대정장 45, p.705 하.
- 9)『일승화엄교분기원통초』 제1권과 『총수록』 상권 1, 대정장 45, pp.716 중~702 하.
- 10)『화엄경탐현기』 제10권, 대정장 35, p.299 상.
- 11)이 부분은 누락되어 있다. 문맥상으로 보아 ‘초중의 인분과 과분은 원융의 별교에 입각하여 논한 것이고’일 것이라 예상된다.
- 12)『화엄공목장』 제3권, 대정장 45, p.562 중.
- 13)『화엄오교장』 제1권, 대정장 45, p.480 중.
- 14)『화엄경소』 제33권, 대정장 35, p.755하.
- 15)『화엄경탐현기』 제1권, 대정장 35, p.119 하.
- 16)『화엄오교장』 제4권, 대정장 45, p.504 하.
- 17)『화엄오교장』 제4권, 대정장 45, p.506 중
- 18)『화엄경탐현기』 제1권, 대정장 35, p.125 상.
- 19)『화엄경탐현기』 제1권, 대정장 35, p.125 상.
- 20)『화엄경수소연의초』 제11권, 대정장 36, p.79 중.
- 21)『화엄오교장』 제4권, 대정장 45, p.504 하.
- 22)『화엄오교장』 제4권, 대정장 45, p.505 중.
- 23)『화엄오교장』 제4권, 대정장 45, p.506 하.
- 24)『삼보장(三寶章)』 하권, 대정장 45, p.622 상중.
- 25)『화엄경』 제1권, 대정장 9, p.601 상.
- 26)『화엄공목장』 제3권, 대정장 45, p.560 중.
- 27)『화엄공목장』 제1권, 대정장 45, p.536 하.
- 28)『화엄공목장』 제3권, 대정장 45, p.568 중.
- 29)『총수록』 하권, 대정장 45, p.752 상
- 30)『화엄공목장』 제3권, 대정장 45, p.560 중.
- 31)『수현기(搜玄記)』 제1권, 대정장 35, p.15 중≺8교-15 중ㆍ3교-15 하≻.
- 32)『화엄오교장』 제1권, 대정장 45, p.483 중.
- 33)『화엄오교장』 제1권, 대정장 45, p.483 중.
- 34)『화엄수소연의초』 제52, 대정장 35, p.407 상.
- 35)『화엄공목장』 제3권, 대정장 45, p.560 중 참조.
- 36)『총수록』 상권 1, 대정장 45, p.726 상.
- 37)『총수록』 상권 1, 대정장 45, p.721 중에서 인용한 글.
- 38)『총수록』 상권 2, 대정장 45, p.735 상.
- 39)『화엄오십요문답(華嚴五十要問答)』 하권, 대정장 45, p.531 하.
- 40)『화엄일승법계도』, 대정장 45, p.712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