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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_0148_a_01L화엄경삼보장원통기 하권
균여 지음
장순용 번역
3) 법계연기장 ②
‘다섯째, 동체의 능응(能應)과 소응(所應)’이란 것에 대해 혹자는 “소응을 아울러 취한 것이 동체가 된다”고 하는데, 여기서는 오직 능응만을 취한다고 해석한다. 모든 처소의 동체 중에서 “본래의 하나와 많음의 하나는 하나하나가 또한 많음이기 때문에 많음의 하나라고 말한다”고 하였으니, 그러므로 오직 능응만이 동체가 되는 것이다. 함께 존재하면서 걸림 없이 두루 응한다는 말 중에서 만약 두루함[遍]이란 글자를 생략한다면, 오직 능응뿐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동체 안에 이체를 갖추어 서로 조망한다’는 것은, 동체가 본래 스스로 열 가지 덕을 갖추고 있어 소응의 열 가지를 조망한 것이 아니지만 덕을 갖추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이체란 이 처음의 하나가 스스로의 하나를 지키는 것이니, 덕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소대(所待)를 조망해야 비로소 열을 갖추기에 그런 것이다.
연(緣)을 기다리는 것과 연을 기다리지 않는다는 것은 3승 중에 정인(正因) 외에 따로 증상(增上) 등 셋을 세우는 것이다. 만약 정인의 하나라면 스스로 유력(有力)이기 때문에 3연(緣)의 과(果)를 생기하는 뜻을 기다리지 않아서 연을 기다리지 않는 것이다. 정인의 무력(無力)은 반드시 3연을 기다려야 바야흐로 과를 생기하는 뜻이라서 연을 기다리는 것이다. 이 네 가지 인(因)에 의거해서 과를 변별하는 뜻을 1승을 기준으로 해서 설한다면, 10보법(普法)에서는 사람을 드는 것이 정인이 되고 나머지는 증상연이다. 사람의 1법이 스스로 열 가지 덕을 갖춰서 증상(增上) 등 3연의 다른 것을 기다리지 않으면, 연을 기다리지 않는 동체이다. 이 한 사람이 스스로의 하나의 지위를 지키어 반드시 증상 등 3연을 기다려야 비로소 열 가지 덕을 갖춘다면, 연을 기다리는 이체이다. 그러므로 소응의 아홉을 기다리지 않기 때문에 이름 하여 ‘기다리지 않는다’고 하니, 이처럼 연(緣)을 기다리지 않기 때문에 오직 능응만이 동체가 된다. 그러므로 『십구장(十句章)』에서는 “소응은 이체이고, 능응은 동체이다”라고 하였다.
【문】『십구장』에서는 “소응은 이체이고 능응은 동체라 한 것은 앞의 이체를 말한 것이 아니다”고 하였으니, 사람들이 소응을 이체의 이체라 헤아려 각기 다른 모든 연(緣)의 이체로 삼을까 걱정해서이다. 그러므로 변별해서 말하기를 “이것은 다만 동체 안의 이체일 뿐이지, 앞의 각기 다른 모든 연(緣)의 이체를 말한 것이 아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소응도 동체 속에 함께 있는 것인가?
【답】‘앞의 이체를 말한 것이 아니다’고 하는 것은 위에서 조망한 소응의 이체를 말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직 능응의 동체일 뿐이다.
【문】만약 그렇다면 무엇을 조망해서 ‘말한 것이 아니다’라고 했는가?
【답】위에서 말한 이문(異門)이란 동체 10문의 제2 등이라, 이를 조망해서 말한 것이지 앞의 이체를 말한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이문의 말이 각기 다른모든 연의 이체라고 헤아릴까봐 걱정하여 이 때문에 변별해서 말하기를 “소응은 이체이고 능응은 동체이며, 이문은 동체문의 제2 등이니 각기 다른 모든 연의 이체를 말한 것이 아니다”고 한 것이다.
【문】만약 그렇다면 『십구장』에선 어느 대목에서 각기 다른 모든 연의 의미를 설해서 앞의 이체를 말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가?
【답】『십구장』엔 경문이 없지만, 『의리장』은 앞에서 이체를 설하면서 동체문까지 내려간다.
【문】다만 자문(自門)의 중중무진을 섭수한다고 말한 것인가, 나머지 다른 문의 무진(無盡)도 섭수한다고 말한 것인가?
【답】혹은 둘 다 섭수했다 하고, 혹은 단지 스스로의 무진만을 섭수했다고 할 뿐이니, 사람들이 이 나머지 다른 문의 말을 헤아려 앞의 이체로 삼을까 걱정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이 중에서 어떤 사람이 논란하기를 “나머지 다른 문의 무진을 섭수했기 때문에 동체문 중에 소응을 아울러 취한 것이 동체가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하나 속의 열에 10문이 있음은 초문(初門)이 열을 갖춘 것과는 동일하지 않은 것은 자문(自門)의 무진이고, 제2ㆍ제3이 열을 갖춘 것은 나머지 다른 문의 무진이니, 이 때문에 이 논란은 아주 옳지 않다.
【문】그렇다면 고사(古辭)에서는 무엇에 의거해서 능응이 동체라고 말하는가?
【답】동체문에서는 “소응의 다연(多緣)이 서로 즉입(卽入)해서 이 많음과 하나로 하여금 또한 즉입케 하였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이체수문(異體須門) 중의 즉입을 들어서 동체의 즉입을 나타낸 것이라 소응은 이체이고 능응은 동체이다.
【문】그러나 ‘서로 즉입했다’는 것은 동체의 본법 가운데 있는 즉입의 뜻이니, 그러므로 소응을 아울러 취한 것이 되는가?
【답】본법 중에는 단지 두루 응하는 뜻만 있고 즉입의 뜻은 없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
【문】‘이 하나는 곧 많은 개수[箇]를 갖춘 하나이다’라고 하였으니, 하나가 능구(能具)이면서 소구(所具)의 많음을 갖춘다면 이것이 바로 즉입이 되는가?
【답】능구와 소구는 법이 그러한 도리이기 때문에 본법 중에서도 논하였다. 상즉상입은 요컨대 공(空)과 유(有), 역(力)과 무력을 말미암은 뒤에 논한 것이고, 본법 중에선 공과 유, 역과 무력의 뜻을 논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또한 즉입을 설하지 않은 것이다. 징관[觀公]의 소(疏)1)에 이르기를 “‘또한 이 1연(緣)으로 말미암아’ 이하는 즉입의 두 가지 뜻을 쌍으로 해석한 것이다. 그러므로 동체의 즉입은 이체를 말미암아서 이루어진다고 하였으니, 이체가 상입하기 때문에 동체로 하여금 상입케 하고, 이체가 상즉하기 때문에 동체로 하여금 상즉케 한다”고 하였다.
‘소응의 다연(多緣)이 서로 즉입하였다’는 것은 이체수문의 즉입이다.
【문】본법에서 말한 “‘또한 1연과 같다’와 ‘다연에 두루 응한다’는 것은 각기 저 많음과 더불어 전적으로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라고 함도 소응의 많음과 더불어 동체가 됨을 아는 것인가?
【답】여(與)라는 글자는 위(爲)이지, 공여(共與)의 여(與)가 아니다. 그러므로 능응의 하나가 둘이 되고, 전체적인 하나가 셋이 되니, 전체적인 하나 등이 많음의 하나를 갖추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소응을 함께한 것이 아니다.
【문】‘이 하나가 곧 많은 개수의 하나를 갖추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함인가?
【답】개(箇)라는 것은 어조사이다. 이는 곧 많음의 하나를 갖추었을 뿐, 따로 둘, 셋의 많음을 갖추었다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니다.
【문】『의리장』에 이르기를 “이 1전(錢) 자체를 말미암는 것이 하나이고, 둘과 더불어 하나를 짓기 때문에 곧 둘의 하나이고, 나아가 열과 더불어 하나를 짓기 때문에 곧 열의 하나이다” 하였는데 ‘둘과 더불어, 셋과 더불어’ 등이란 소응을 합쳐서 취한 것인가?
【답】이것 역시 앞서 해석한 것과 같다. 여(與)라는 글자는 위(爲)이다. 말하자면 소응에 대망(對望)하는 것이 하나를 지음이 되기 때문에 둘, 셋 등과 함께 하는 것은 동체가 아니고 둘의 하나, 셋의 하나 등이 동체이다.
【문】‘그러므로 이 하나 가운데 곧 열 개의 하나를 갖추었을 뿐, 열이 하나는 아니니 즉문(卽門)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는데, 이 뜻인즉 중문(中門)에선 둘과 함께하고 셋과 함께하는 등이기 때문이다. 만약 즉문에서라면 하나가 곧 둘이고 하나가 곧 셋 등이 되니, 그러면 즉문의 하나가 곧 둘이고 하나가 곧 셋인 등이 동체라면, 중문의 둘과 함께하고 셋과 함께하는 등의 둘, 셋 역시 동체인가?
【답】다만 이 중문의 둘의 하나와 셋의 하나를 기준으로 해서 즉문에서 하나가 곧 둘이고 하나가 곧 셋인 등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둘과 함께하고 셋과 함께하는 둘, 셋은 동체가 아니다.
【문】‘이 1전(錢)을 말미암는다’는 것은 본법의 전(錢)인가, 아니면 내초(來初)의 전(錢)인가?
【답】본법의 전을 들어서 내초의 하나 가운데 10의(義)를 갖추었음을 나타낸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 가운데 많음에는 10문이 있고 하나와는 같지 않은 하나이다. 왜냐 하면 연(緣)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 본수(本數)의 하나 가운데 곧 열을 갖춤은 왜 그런가?’ 하고 따져 물은 뒤 이 물음의 뜻을 해석하고자 했기 때문에 ‘이 1전을 말미암아서 자체가 하나이다’ 등이라 했으니, 본법의 두루 하는 뜻을 들어서 상입(相入)의 초일(初一)이 열을 갖춘 뜻을 나타낸 것이다.
【문】어째서 본법을 들어서 수문(須門)의 초일(初一)이 열을 갖춘 뜻을 나타내는가?
【답】상입문 중에서는 초일이 열을 갖춤을 표식해서 이 초일이 열을 갖춘 뜻을 해석하고자 말하기를 “이 1전을 말미암아서 자체가 하나이고, 둘과 더불어 하나를 짓기 때문에 둘의 하나가 되며, 나아가 열과 더불어 하나를 짓기 때문에 열의 하나가 된다”라고 하였으니, 이와 같이 열의 하나가 있는 것이다.
이미 본래의 하나를 말미암기 때문에 나머지 아홉의 하나가 있는 것이므로 아홉의 하나는 본래의 하나 속에 섭수되어 있다.
【문】어떻게 그런 줄 아는가?
【답】「문기장(文起章)」에 이르기를 “동체의 상즉상입은 제1의 하나가 곧 나머지 아홉의 하나이니 동시에 이것을 조망하면 전부가 이것이고 전부가 저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제1의 하나에 나머지 아홉의 하나가 없기 때문이다. 본래 스스로의 하나가 이렇다면, 나머지 아홉의 하나도 하나하나가 다 마찬가지다. 이 본래의 하나를 나머지 아홉이 조망하면, 각각이 스스로의 하나라 하는 것은 곧 저 아홉의 하나가 본래의 하나를 말미암아서 생기하는 것이지만 이 나머지 아홉의 하나가 본래의 하나 속에 들어가고, 본래의 하나가 나머지 아홉의 하나를 생기하기 때문에 나머지 아홉의 하나를 섭수 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제1의 하나가 곧 나머지 아홉의 하나이니 이를 동시에 조망하면 곧 전부가 이것이고 전부가 저것이기 때문이다’고 함은 여기에 해당된다. 즉 이 1전(錢)을 말미암아서 자체가 하나이고, 둘과 더불어 하나를 짓기 때문에 둘의 하나이고, 나아가 열과 더불어 하나를 짓기 때문에 열의 하나이다. ‘즉 저 아홉의 하나는 본래의 하나를 말미암아서 생기는 것이지만, 이 아홉의 하나는 본래의 하나 속에 들어가서 나머지 아홉의 하나를 생기하기 때문에 나머지 아홉의 하나를 섭수하는 것이다’고 함은 여기에 해당된다. 이 때문에 이 하나 가운데 스스로 열 개의 하나를 갖춘다.
저 장(章) 가운데 이미 본법의 전(錢)을 들어서 용문(用門)의 초일(初一) 가운데 열을 갖춘 뜻을 나타냈기 때문에 지금 여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이 1전을 말미암아서 자체가 하나이고, 다시 둘과 더불어 하나를 짓기 때문에 곧 둘의 하나이다’ 등은 이체문의 ‘하나 가운데 열에 있는 10문의 같지 않은 하나란 하나이니, 어째서인가? 연(緣)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나아가 열은 하나 가운데 열이니, 어째서인가? 하나가 없다면 열도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와 동일한 뜻이다.
【문】만약 그렇다면 이체 중의 하나가 없다면 열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도 본법인가?
【답】이것 역시 본법의 상(相)을 들어서 수문(須門)의 초일(初一)이 열을 갖춤을 말미암아 나타나는 것이다. 말하자면 「문초장(文超章)」에 이르기를 “이체라는 것은 하나를 말미암기 때문에 둘이 있고, 하나를 말미암기 때문에 셋이 있고, 나아가 하나를 말미암기 때문에 열이 있는 것이니, 이처럼 서로 말미암아서 상호 연기가 되는 것은 모두 본래의 하나로부터 나머지 아홉을 낳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머지 아홉은 본래의 하나 속에 들어가 각각 동일치 않기 때문에 이(異)라고 이름붙인 것이다”고 했다.
‘하나를 말미암기 때문에 둘 등이 있다’는 것도 본법을 들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문】반작문(反作門) 중에 “하나는 열이니 어째서인가? 연(緣)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열 가운데 하나이니 어째서인가? 이 하나와 열을 말미암아서 하나를 짓기 때문이다”고 했는데, 이것 역시도 본법을 든 것인가?
【답】그렇다. 실제로 갖추어 말한다면 ‘이 1전을 말미암아서 자체가 하나이고, 둘과 더불어 하나를 짓기 때문에 둘의 하나이고, 셋과 더불어 하나를 짓기 때문에 셋의 하나이고, 나아가 열과 더불어 하나를 짓기 때문에 열의 하나이다’ 이다. 그러나 이를 초월해서 ‘이 하나와 열이 하나를 짓기 때문이다’고 한 것이다.
【문】‘이 하나와 둘이 하나를 짓고, 전부가 둘의 하나가 된다’ 등은 본래의 하나로써 나머지 아홉의 하나를 짓는 것이기 때문에, 따라서 아홉의 하나는 본래의 하나에 들어간다. 그렇다면 내초(來初)의 하나 가운데 열을 갖춘 뜻이 이루어진 것이라 오직 본래의 하나가 나머지 아홉의 하나를 지은 뜻을 나타내었을 뿐, 제10의 초일(初一)을 지은 뜻은 숨겨진 것인데, 어째서 ‘본법의 두루 함을 들어서 제10의 열을 갖춘 뜻을 이룬다’고 하는가?
【답】다르지 않다. 말하자면 본래의 하나가 둘과 더불어 하나를 지으면 전적으로 둘의 하나가 되고, 나아가 열과 더불어 하나를 지으면 전적으로 열의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만약 제10의 하나를 물리치면 처음의 하나도 이루어지지 못하니, 이 때문에 처음의 하나는 제10의 하나에 섭수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초(來初) 중에서 처음의 하나가 많음의 하나를 지은 뜻이 현전했기 때문에 ‘처음의 하나를 여읜 것이 곧 열의 하나도 없는 것이다’고 말하지 않은 것이다. 반작문 중에선 오직 처음의 하나가 열의 하나를 지은 뜻을 나타냈을 뿐, 제10의 하나가 처음의 하나를 지은 뜻은 숨겨져서 나타내지 않았다. 그러므로 ‘저 처음의 하나가 열의 하나 속에 있는 것이니, 열의 하나를 여의고는 처음의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이다.
【문】‘이 1전 말미암아 그 자체가 하나이고, 나아가 이 때문에 이 하나 가운데 스스로 열 개의 하나가 갖추고 있다’는 것과 ‘본법 중에서 이 하나가 많음을 갖춘 것은 동일하지 않다’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답】다르다. ‘1연(緣)과 같음을 인(因)해서’ 등과 ‘이 1전을 말미암아서’ 등은 다르지 않다. ‘이 하나가 곧 많음의 하나 등을 갖춘 것이다’와 ‘그러므로 이 하나 가운데 스스로 열의 하나를 갖추었다’는 것은 다르다. 말하자면 ‘이것이 많음의 하나를 갖추었다’는 것은 본법의 하나 가운데 열을 갖춘 뜻이고, 따라서 ‘이 하나 가운데’ 등은 상입문의 초일(初一) 중에서 열을 갖춘 뜻이기 때문에 동일하지 않다.
【문】‘이 1전(錢)을 말미암아서’ 등과 ‘또한 1연(緣)과 같다’ 등이 동일해서 다르지 않다면, 이 1전의 하나를 말미암는 것도 편당(偏黨)이 없는 총체적인 하나인 것인가?
【답】본법의 하나라는 뜻이라면 동일하다. 그러나 ‘이 1전을 말미암아서’라 함은 초일의 문에 국한된 것이다. 말하자면 저 본법 중에서 소응의 차례를 짓지 않기 때문에 총체적인 하나이다. 지금 여기서 설한 것과 제2와 제3 등은 차례로 두루 응하는 뜻이기 때문에 초문(初門)에 해당한다.
【문】불반작문(不反作門) 에서는 나머지 2, 3, 4 이상의 아홉 문이 제 각기 이와 같음을 예에 준거해서 알 수 있고, 또 반작문 이하의 9, 8에서 나아가 하나에 이르기까지 모두 각기 이와 같음을 예에 준거해서 생각할 수 있다. 만약 여기에서라면 구작(具作)은 무엇을 말하는가?
【답】옴[來]의 제2에 입각하면 마땅히 ‘하나는 둘’이라 말해야 한다. 어째서인가? 연(緣)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둘 가운데 열’은 어째서인가? 처음의 1전은 자체가 하나이고, 둘과 더불어 하나를 짓기 때문에 둘의 하나이고, 나아가 열과 더불어 하나를 짓기 때문에 열의 하나이니, 이 때문에 저 열의 하나는 둘의 하나 가운데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만약 제9문에 입각한다면, 마땅히 ‘하나는 아홉’이라 말해야 한다. 어째서인가? 연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아홉 가운데 열’은 어째서인가? 처음의 1전은 자체가 하나이고, 둘과 더불어 하나를 짓기 때문에 둘의 하나이고, 셋과 더불어 하나를 짓기 때문에 셋의 하나이고, 나아가 열과 더불어 하나를 짓기 때문에 열의 하나이니, 이 때문에 저 열의 하나는 아홉의 하나 가운데 있는 것이다.
만약 제10문의 구작(具作)에 입각한다면, 거초문(去初門)의 설과 같다. 만약 거제이문(去第二門)의 구작에 입각한다면, 마땅히 ‘하나는 아홉’이라고 말해야 한다. 어째서인가? 연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아홉 가운데 하나’는 어째서인가? 이 1전으로 말미암아 자체가 하나이고, 둘과 더불어 하나를 짓기 때문에 둘의 하나이고, 나아가 열과 더불어 하나를 짓기 때문에 열의 하나이니, 이 때문에 처음의 하나는 아홉의 하나 가운데 있다. 만약 제9문의 구작에 입각한다면, 마땅히 ‘하나는 둘’이라 말해야 하니, 어째서인가? 연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둘 가운데 하나’는 어째서인가? 이 1전으로 말미암아 자체가 하나이고, 둘과 더불어 하나를 짓기 때문에 둘의 하나이고, 나아가 열과 더불어 하나를 짓기 때문에 열의 하나이니, 이 때문에 처음의 하나는 둘의 하나 가운데 있는 것이다. 거제10문(去第十門)은 내초문(來初門)의 설과 동일하다.
【문】내문(來門)의 처음과 나중의 두 문 중에서 ‘이 하나를 말미암아 중간의 8문(門)이 있다’고 한다면, 어째서 처음의 1전에서부터 거문(去門)의 10문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 하나’라고 말하는가?
【답】내초(來初)는 능구(能具)가 하나이기 때문에 능구의 하나를 들어서 ‘이 하나’라고 말했고, 제10문은 소구(所具)의 종결이 하나이기 때문에 이를 들어서 ‘이 하나’라고 말했다. 중간의 8문은 능구의 2ㆍ3 등이고 또 소구의 종결이 열이기 때문에 초일(初一)이라 말했고, 초일의 거문(去門)과 앞의 9문에선 소구의 종결이 하나이기 때문에 이를 들어서 ‘이 하나’라 말했으며, 제10문에선 능구가 하나이기 때문에 능구를 들어서 ‘이 하나’라 말했다.
【문】10보법(普法)은 서로 응하면 동체이고, 각기 다르면 이체이다. 서로 응하는 것이 동체라면, 능응과 소응을 갖춘 것이 되므로 소응도 동체인 것인가?
【답】서로 응하는 것이 곧 동체이지, 소응을 동체로 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어려움은 없다.
【문】만약 오직 능응만을 동체로 삼는다면 소응의 법을 남겨두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동체문은 다하지 않는 법계의 법인가?
【답】동체의 다함은 다함이기 때문에 다하지 않는 법계의 잘못이 없다. 그러나 문(門)이 잡란(雜亂)하지 않기 때문에 이체의 다함은 다하지 않음인 것이다.
【문】동체의 초문(初門) 가운데 10무진(無盡)을 갖추었으므로 ‘처음 발심할 때 문득 정각을 성취한다’는 「발심품」의 경문을 인용해서 증명으로 삼았다. 그렇다면 소응도 동체 중에 갖추어진 것인가?
【답】능응의 동체에는 본래 절로 갖가지 덕을 구족했기 때문에 이런 어려움이 없다.
‘여섯째, 소응의 수(數)를 정한다’는 것에서, 혹자는 “소응이 열이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아홉이라고 해석한다. 말하자면 『의리장』에선 “이 1전(錢)을 말미암아서 자체가 하나이고, 둘과 더불어 하나를 짓기 때문에 둘의 하나” 등이라 했으니, 처음엔 제2부터 응해서 제10까지 응하기 때문에 오직 아홉뿐이다. 10보법 중에서 하나는 능응이 되고 나머지는 소응이 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문】‘둘과 더불어 하나를 짓는다’ 등에서 소응은 두 개의 능응이고, 이 또한 소응을 따라서 둘이 되는 것이다. 하나의 소응은 세 개의 능응이 셋의 하나가 되는 등인데, 어째서 ‘차례의 둘, 셋’이라 말하는가?
【답】「문초장」에서 말하였다.
“처음의 동체는 마치 10전(錢)을 셀 때, 제1의 하나는 나머지 아홉을 말미암아서 생기므로 이로부터 제1이고, 하나가 둘을 조망하니 이는 제2의 하나이고, 나아가 열을 조망하는 것은 제10의 하나인 것과 같으니, 곧 이 본래의 하나가 나머지 아홉을 조망하기 때문에 바로 열 개의 하나이다”라고 했다.
그 차례를 지어서 응하도록 하기 때문에 소응은 아홉이다.
【문】만약 제2에서 처음으로 응한다면, 소응의 제2 명칭은 ‘자체가 하나’인 초일(初一)을 조망해서 얻은 것인가?
【답】이체(異體)의 초일을 대대해서 얻은 것이다. 말하자면 3승에선 정인(正因) 이외에 증상(增上) 등의 3연(緣)을 세운다. 정인의 하나인 유력(有力)은 증상 등이 3연이 과(果)를 낳는 뜻을 기다리지 않으니 연(緣)을 기다리지 않는 것이고, 정인의 하나인 무력(無力)은 증상 등의 3연을 기다려서 바야흐로 과를 낳으니 연을 기다리는 것이다.
1승에 이르러서도 10보법에서는 사람의 1법을 기준으로 한 것이 정인이 되고, 나머지 아홉이 증상연이 된다. 사람의 1법에선 스스로 안으로 덕을 갖추고 나머지 아홉을 기다리지 않는다는 뜻이 연을 기다리지 않는 동체가 된다. 이 정인의 하나가 스스로의 1위(位)를 지키면서 증상연을 기다려 바야흐로 열을 갖추는 것은 연을 기다리는 이체이다. 그러므로 소응의 제2의 명칭은 이체의 정인을 대대해서 얻은 것이다.
【문】반작(反作)의 초문(初門) 중에서 이 하나와 열이 하나를 지으면 소응도 열이 되는가?
【답】이는 제10의 열이지, 열 개의 열이 아니다.
【문】만약 제10이라면 반작(反作)이므로 마땅히 ‘이 열과 하나가 열을 짓는다’고 말해야 하는데, 어째서 그렇지 않은가?
【답】제10문의 동체를 해석했기 때문이니, 질문한 뜻과 같을 수도 있다. 그러나 비록 백 문(百門), 천 문(千門), 나아가 다함없음에 이르더라도, 만약 본법을 궁구한다면 1문의 동체이기 때문에 한결같이 처음의 하나[初一]를 든 것이다. 『의리장』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이것과 앞의 이체는 어떻게 다른가? 앞의 이체라는 것은 처음의 하나가 나중의 아홉을 조망해서 이문(異門)이 상입한 것일 뿐이고, 지금 여기선 동체의 하나 속에 스스로 열을 갖춘 것이지 전후의 이문을 조망해서 설한 것이 아니다.”
【문】전(前)이라면 이체의 ‘처음 하나’이고, 후(後)라면 이체의 ‘나중 아홉’이다. 전후를 조망하지 않은 전후가 모두 이체라면, 그렇다면 소응도 열인가?
【답】이체라면 처음의 하나가 나중의 아홉을 조망했기 때문에 전후가 각기 다른 상입이다. 동체라면 하나 속에 스스로 열을 갖춘 상입이기 때문에 전후이문(異門)의 상입이 아니어서 소응을 기준한 전후라고 말한 것이 아니다. 만약 소응의 시(時)를 논한다면, 오직 아홉일 뿐이다.
『연의(演義)』에서 반성(反成)을 해석하여 이르기를 “만일 열의 하나가 없다면, 본래의 하나가 나머지 아홉에 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문】『십구장』2)에 이르기를 “소응은 이체이고, 능응은 동체이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체가 10전을 갖추었기 때문에 소응도 열이 되는 것인가?
【답】소응의 아홉이 동(同)인가 이(異)인가를 묻는다면, 소응은 이체이다. 그러므로 장(章)에서 소응은 이체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정인의 하나 또한 열을 갖추기 때문에 열의 이체이다.
【문】만약 그렇다면 ‘소응의 다연(多緣)이 서로 즉입한다’는 것은 오직 아홉의 즉입인가?
【답】소응이라면 아홉이다. 그러나 서로 즉입할 때는 이체의 ‘처음의 하나’와 ‘나중의 아홉’이 즉입한다. 그러므로 ‘이 많음의 하나로 하여금 즉입케 함도 있다’는 것은 많음의 하나가 곧 아홉으로서 즉입할 때는 스스로의 본래 하나와 더불어 즉입한다. 『연의』에 이르기를 “동체의 즉입은 이체를 말미암아서 이루어지니, 이체가 상입하기 때문에 동체로 하여금 상입케 하고, 이체가 상즉하기 때문에 동체로 하여금 상즉케 한다. 여기에 두 가지 뜻이 있다. 만약 곧바로 설한 것이라면, 이체의 둘이 곧 본래의 하나인 것과 같으니, 그 동체의 둘이 어찌 본래의 하나가 아니겠는가? 이체의 셋이 곧 본래의 하나이니, 동체의 셋도 역시 본래의 하나이다”라고 하였으니, 이체의 둘, 셋 등을 들어서 스스로의 초일(初一)이 즉입하는 뜻과 함께하고, 동체의 둘, 셋 등을 나타냄으로써 자체의 본래 하나가 즉입하는 뜻과 함께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문】만약 그렇다면 크게 들어서 이체의 즉입이기 때문에 동체의 즉입이라고 말한 것인데, 어째서 반드시 소응의 다연(多緣)이 즉입하는 뜻을 들어야 하는가?
【답】위에서 말하길 “이 1연(緣)이 다연(多緣)에 응하기 때문에 이러한 많음의 하나가 있다”고 했으니, 이 말을 인(因)하여 즉입의 소이(所以)를 짓고자 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일곱째, 가지가지 하나하나의 결(決)’이라는 것에 대해, 혹자는 “하나하나[一一]의 동체”라 말하고, 혹자는 ‘가지가지[種種]의 동체’라고 말한다. 처음의 뜻은, 우선 사람의 1법을 기준으로 해서 교(敎)에 응하고 의(義)에 응함으로써 열을 갖추기 때문에 하나하나의 동체이다. 나중의 뜻은, 혹자는 “소응을 아울러 취해서 동체로 삼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고 하고, 혹자는 “오직 능응의 동체에서만 그러한 것이다”라고 했다.
말하자면 『연의』에 이르기를 “가령 한 사람이 아버지를 조망해서 자식이 되고, 자식을 조망해서 아버지가 되고, 형을 조망해서 동생이 되고, 동생을 조망해서 형이 된다는 것과 같이 한 사람의 체(體)에 많은 이름이 있으니, 지금의 본래 하나는 한 사람의 많음과 같고 하나는 많은 이름과 같다”고 했으니, 조망한 아버지와 아들 등은 동체가 아니지만, 한 사람의 몸에 많은 이름을 갖춘 것은 동체이기 때문에 가지가지의 동체인 것이다.
여기서는 하나하나가 동체가 아닌 것과 가지가지 또한 동체인 것과 하나하나 또한 동체인 것과 가지가지가 동체가 아닌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므로 4구(句)가 허물을 보호하고 그릇됨을 제거해서 덕을 나타낸 뒤에야 의리(義理)가 두루 원만해진다.
‘4구가 허물을 보호한다’고 함은 하나하나의 동체인가? 아니다. 명칭은 같으나 체(體)가 다르다면 동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가지가지의 동체인가? 아니다. 명칭도 다르고 체도 다르다면 동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둘 다인가? 아니다. 앞의 두 뜻과 같기 때문이다. 둘 다 아닌가? 아니다. 명칭도 같고 체도 같은 하나하나는 동체가 아님 또한 아니기 때문이다. 일신(一身)에 가지가지 명칭이 있으면, 가지가지 명칭은 동체가 아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덕을 나타내는 4구’라는 것은 하나하나의 동체인가? 그렇다. 명칭도 같고 체도 같은 하나하나가 동체이기 때문이다. 가지가지의 동체인가? 그렇다. 한사람의 가지가지 명칭이 동체이기 때문이다. 둘 다인가? 그렇다. 앞의 두 뜻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둘 다가 아닌가? 그렇다. 명칭도 다르고 체도 다른 가지가지가 동체가 아니기 때문이며, 명칭은 같으나 체가 다른 하나하나가 동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人)ㆍ법(法)ㆍ교(敎)ㆍ의(義) 등 잡문(雜門)을 기준으로 해서 논한다면, 가지가지의 동체이고, 가지가지의 이체이다. 순수하게 사람과 사람, 법과 법을 기준으로 해서 논한다면, 하나하나의 동체이고 하나하나의 이체이다. 만약 비유로 설함을 기준으로 하고, 금과 은 등의 잡전(雜錢)을 기준으로 해서 논한다면 가지가지의 동체와 가지가지의 이체이다. 순수하게 금전을 기준으로 하고 순수하게 은전을 기준으로 해서 논한다면, 하나하나의 동체와 하나하나의 이체이다.
【문】사람은 하나이니, 교(敎) 등에 응해서 사람 사람마다 10덕(德)을 갖추는 것이다. 그렇다면 비록 잡문을 기준으로 해서 설하더라도, 오직 하나하나의 동체가 아닌가?
【답】한 사람으로써 교(敎)에 응하면 이는 교인(敎人)이고, 의(義)에 응하면 이는 의인(義人)인 등이니, 비록 한 개체로서의 사람이라도 교와 의 등의 가지가지 공덕을 갖추기 때문에 가지가지의 동체이다.
【문】한결같이 잡문을 기준해서 설한다면, 오직 가지가지의 동체일 뿐이라서 하나하나의 동체는 없고, 만약 순문(純門)을 기준해서 설한다면 오직 하나하나의 동체일 뿐이라서 가지가지의 동체는 없는 것인가?
【답】크게 대대해서 설한 것이라면 그렇다. 만약 다시 세밀하게 설한다면, 잡문의 동체에도 하나하나의 동체라는 뜻이 있고, 사람 사람마다의 순문을 기준으로 설한다 해도 가지가지의 동체라는 뜻이 있다. 말하자면 한 사람으로써 10법에 응한다면, 교인이 되고 의인 등이 되기 때문에 가지가지의 동체라는 뜻이 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의 이름으로 지목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하나의 동체라는 뜻이 있다. 또 동일한 명칭의 법을 기준하면, 이 사람의 하나가 둘에 응해서 둘의 하나가 되고 셋에 응해서 셋의 하나가 되는 등이니, 이처럼 둘, 셋 등은 명칭이 다르기 때문에 가지가지의 동체이다. 그러나 둘의 하나, 셋의 하나 등은 오직 하나하나이기 때문에 하나하나의 동체라 해도 된다.
그러므로 동체의 증명에서 ‘처음 발심이 곧 정각이다’라고 한 것은 가지가지의 동체라는 뜻을 기준으로 해서 인용했기 때문에 소응을 아울러 취하는 어려움이 없다.
‘여덟째, 동체의 이사(理事)’라는 것에 대해, 혹자는 “이(理)의 성품은 동체이고, 사(事)의 상(相)은 이체이니, 말하자면 「광명각품」에 이르기를 ‘하나 속에서 무량(無量)을 이해하고, 무량 속에서 하나를 이해하니, 전전(展轉)하여 생(生)하는 것이 실답지 않아서 지혜 있는 자는 두려운 것이 없다’고 하였고, 소석(疏釋)3)에서는 ‘전전하여 생하는 것은 이체이고, 실답지 않은 것은 동체이다’고 하였다. 또 전전하여 생하는 것은 연기가 서로 말미암는 것이고, 실답지 않음은 법성의 융통이니, 그러므로 연기가 서로 말미암는 것은 이체에 해당하고 법성의 융통은 동체에 해당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서의 해석은 10대법(對法)을 기준으로 해서 동(同)과 이(異)를 통틀어 논하기 때문에 인문(人門)의 동체와 인문의 이체, 법문(法門)의 동체와 법문의 이체, 이문(理門)의 동체와 이문의 이체 등이 된다. 따라서 이(理)의 동체와 사(事)의 이체를 말한 것이 아니다.
【문】연기가 서로 말미암는 문에서는 사사(事事)의 동체를 논하고, 법성의 융통문에서는 이리(理理)의 동체를 논한 것인가?
【답】‘동체와 이체’라는 것은 체사(體事)의 10법에 해당한다. 동체와 이체의 10법에서 연기가 서로 말미암기 때문에 즉입(卽入)은 연기문이고, 법성이 융통하는 힘 때문에 즉입은 법성의 융통문이니, 두 문 다 동(同)과 이(異)를 갖추어서 논하기 때문에 나눌 수 없다.
【문】「발심품」의 연의(演義) 중의 법성문에서는 동체와 이체를 논하여 말하기를 “이(理)와 다르지 않은 1사(事)가 이(理)의 성품을 갖추어 섭수할 때가 바로 동체의 뜻이고, 저 이(理)와 다르지 않은 다사(多事)로 하여금 의거한 이(理)를 따르게 하여 모두 하나 속에 나타나게 하는 것은 이체가 동(同)을 따르는 것이다”고 하였으니, 법성융통문의 동체와 이체라는 것은 이(理)의 동체이고 사(事)의 이체인데, 어째서 통틀어 논한 것이라 하는가?
【답】이것 또한 이성(理性)의 동체를 기준으로 해서 논하기 때문에 곤란함이 없다.
【문】이문(理門)의 동체 중에서 이(理)가 능응이 되어 교의 등에 응하는 것이 가지가지 덕을 갖춘 것인가?
【답】그렇다.
【문】만약 그렇다면 어째서 ‘이(理)와 다르지 않은 1사(事)가 이(理)의 성품을 갖추어 섭수할 때 곧 동체의 뜻이 되니, 저 이(理)와 다르지 않은 다사(多事)로 하여금 의거한 이(理)를 따르게 하여 모두 하나 속에 나타나게 하는 것은 이체가 동(同)을 따르는 것이다’고 말하면서 오직 이(理)만을 드는가?
【답】이(理)로써 총괄하니 오직 이(理)만을 들었을 뿐이다.
【문】만약 그렇다면 어째서 사(事)를 아울러 드는가?
【답】이(理)는 본래 무상(無相)이라서 언전이 아니면 나타내기 어렵기 때문에 바야흐로 사(事)에 의탁해서 이(理)를 나타내는 것이니, 이 때문에 사(事)를 든 것이다. 그러나 든 사(事)는 이체이다. 그러니 ‘저 이(理)와 다르지 않은 다사(多事)로 하여금 의거한 이(理)를 따르게 하여 모두 하나 속에 나타나게 하는 것은 이체가 동(同)을 따르는 것이다’라고 함은 다사(多事)가 이체의 초일(初一)속에 나타난 것이다. 따라서 사상(事相)은 오히려 이체가 된다.
【문】4구(句)의 상즉 중에서 사사(事事)의 상즉이란 연기가 서로 말미암는 문이고, 이리(理理)의 상즉이란 법성의 융통문인가?
【답】연기문과 법성문은 모두 사사무애(事事無碍)의 소이(所以)이다. 1승 에 만약 사사의 상즉이 있다면, 이리(理理)의 상즉과 이사(理事)의 상즉을 반드시 여의지 않기 때문에 두 문이 각기 4구를 갖추는 것이다. 3승에선 오직 이리(理理)의 상즉을 논할 뿐 사사의 상즉은 논하질 않으니, 1승에 이르러야 바야흐로 사사무애를 설하면서 10문의 소이를 짓는다. 그러므로 오직 사사무애만 바르게 해도 이리상즉 등 또한 여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징관[觀公]은 ‘이사상즉’이란 돈(頓)과 같고 실(實)과 같으니, 이는 동교(同敎)의 설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만약 별(別)로써 동(同)을 총괄한다면 곧 별교의 1승이니, 이사무애가 곧 사사무애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사사무애만을 바르게 하면 이사무애 역시 여의지 않음’을 아는 것이다.
‘이사무애가 곧 사사무애이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1승에서 이(理)와 다르지 않은 사(事)이기 때문에 이사상즉이고, 또 이(理)와 다르지 않은 다사(多事)이기 때문에 사(事) 역시 이(理)처럼 융통하므로 한 티끌이 시방을 포함하고 시방이 한 티끌에 들어가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아홉째, 섞여 있는 단락의 문답’이다.
【문】모든 연(緣)이 서로 다른 모든 연과 모든 연이 서로 응하는 모든 연은 어떻게 다른가?
【답】혹자는 “다르다. 연기법의 법의 이러함이 모종의 인연을 따라서 새로이 일어나기 때문이다”고 하고, 혹자는 “동일하다. 한 종류의 10보법(普法)이 동체문에서 보이고 이체문에서 보이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여기서의 해석은 두 가지 뜻을 다 받아드린다. 말하자면 한 종류의 10보법이기 때문에 동일함이고, 문(門)이 섞이지 않았기 때문에 다름이기도 하다.
【문】6의(義)의 찰나멸(刹那滅)과 결정은 연(緣)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지만 둘 다 스스로의 과(果)를 야기해서 항상 전함[轉]에 따라 온갖 연을 기다리는 것이라 연을 기다림이다. 4구를 사용하는 가운데 찰나멸과 결정이란 타생(他生)이 아니고, 항상 돌고 돔에 따라 온갖 연(緣)을 기다리는 것은 자생(自生)이 아니다. 이체의 중문(中門)에 이르러서는 인(因)의 불생과 연(緣)의 생함을 인용하기 때문에, 연의 불생과 자인(自因)의 생기 때문에 증명으로 삼는다. 또 ‘연의 불생과 인(因)의 생기 때문’은 곧 연을 기다리지 않는 동체인데, 어째서 이체문의 증명에 인용하는가?
【답】한 종류의 6의(義) 가운데 혹은 연(緣)을 기다림과 연을 기다리지 않음을 기준으로 해서 논한 것이고, 혹은 공(空)과 유(有), 역(力)과 무력(無力)을 기준으로 해서 논한 것이다. 그러므로 기다림과 기다리지 않음을 기준으로 해서 논한다면 찰나멸이고, 결정이란 연을 기다리지 않기 때문에 동체이며, 둘 다 자과(自果)를 야기해서 연을 기다리기 때문에 이체이다. 6의(義)의 공(空)과 유(有)는 동체와 이체를 묻지 않으니 곧 즉문(卽門)이고, 6의의 역(力)과 무력은 동이(同異)를 묻지 않으니 곧 중문(中門)이다. 논하는 곳이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문】‘어째서 제4구 무력의 연을 기다리지 않음[不待緣]의 뜻을 세우지 않는가? 저것이 인(因)의 뜻이 아니기 때문에 세우지 않은 것이다’고 하였는데, 만약 1승에서라면, 마땅히 동체 무력의 부대연(不待緣)을 세워야 하는 것인가?
【답】부대연의 무력을 세웠을 뿐, 무력의 부대연을 세운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무력의 부대연이란 정인(正因)의 유력이 대연(待緣)하는 뜻을 이름 하여 유력의 대연이라 하고, 정인의 무력이 대연하는 뜻을 이름 하여 무력의 대연이라 한다면, 정인의 무력 그리고 부대연의 뜻은 이름 하여 무력의 부대연이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로써 연(緣)을 대대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무력의 부대연이라 명칭 한다. 동체는 스스로 ‘열 속의 하나’를 갖추는데, 만약 유력의 유체(有體)라면 나머지는 무력의 무체이고, 또는 이와 반대이기 때문에 단지 부대연의 무력을 세웠을 뿐, 무력의 부대연은 말하지 않는다.
【문】『의리장』에서 대연(待緣)이라고 말한 것은 어떤 연을 기다리는 것인가?
‘인(因)의 사(事)외에 증상연 등의 3연을 기다리는 것이요, 자인(自因)의 6의(義)가 서로 기다리는 것을 취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인(因)의 6의가 서로 기다린다’는 것은 동체(同體) 가운데서 본 것인가, 아니면 이체(異體) 속에서 본 것인가?
【답】혹자는 “동체 속에서 본다”고 말한다. 여기서 해석하자면 ‘6의가 서로 기다린다’는 것은 기다리고 기다리지 않는 상대(相待)의 뜻을 갖추므로 동이원비문(同異圓備門)에 해당한다.
【章】‘첫째,4) 연기가 서로 다른 문’이란 말하자면 다함없는 대연기 중에서 모든 연(緣)이 서로 조망하고 채용이 각기 구별되어서 서로 뒤섞이지 않기 때문에 ‘다르다’고 말한 것이다. 의지(依持)의 뜻은 하나가 다일(多一)의 유력을 유지하는 것이기 때문에 많음을 섭수할 수 있다. 많음이 하나를 의지하여 많음이 무력이 되기 때문에 잠복해서 하나에 들어간다. 이는 곧 많음의 하나를 용납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니, 유지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이다. 가령 많음이 의지하고 하나가 유지하는 것이 그렇다면 하나가 의지하고 많음이 유지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하나의 많음을 섭수하지 않음이 없고, 또한 많음의 하나에 들어가지 못함이 없다. 따라서 하나를 말미암아 많음을 조망함에 유지함도 있고 의지함도 있어서 전체 힘이 무력이기 때문에 섭수할 수도 있고 들어가는 것에도 장애가 없다. 많음이 하나를 조망함에 의지함도 있고 유지함도 있어서 무력의 전체의 힘이기 때문에 섭수할 수도 있고 들어가는 것에도 장애가 없는 것이니, 둘 다 존재하고 둘 다 민절하는 2구(句)도 걸림이 없음은 준거해서 생각하라. 상입의 뜻을 마친다.
‘둘째, 5) 모든 연(緣)이 서로 빼앗는 체(體)와 무체(無體)’라는 것에 대해, 다연(多緣)의 성품 없음이 하나의 성취하는 것이 되므로 ‘많음이 곧 하나’란 하나의 유체(有體)를 말미암아서 많음을 섭수하고 많음의 성품 없음을 말미암아 잠복하여 하나와 동일하기 때문에 ‘많음의 하나’ 아님이 없고, 또 ‘하나의 많음’ 아님이 없다.
하나의 성품 없음은 많음의 성취한 것이 된다. 많음은 유(有)이고 하나는 공(空)이니, 많음에 즉(卽)한 것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하나를 많음에서 조망하면 유체의 무체가 있기 때문에 타자를 섭수해서 자기와 동화하는 것과 자기를 폐기해서 타자와 동화하는 것에 걸림이 없다. 많음을 하나에서 조망하면 무체의 유체가 있어서 또한 자기를 폐기해서 타자에 동화하는 것과 타자를 섭수해서 자기에 동화하는 것 역시 걸림이 없다. 타자에게 자기를 동화하기도 하고 자기에게 타자를 동화하기도 하는 것과 타자에게 자기를 동화하지 않고 자기에게 타자를 동화하지 않는 것의 2구(句)가 걸림 없이 원융자재한 것도 생각하면 알 수 있다. 상즉의 뜻을 마친다.
‘셋째, 6) 체용이 쌍으로 융화하는 유(有)와 무(無)의 문’이란 것에는 6구(句)가 있다. 첫 번째는 체(體)가 용(用) 아님이 없기 때문에 거체(擧體)가 전체적으로 작용인 것이다. 즉 오직 용일 뿐 체가 없으니, 다만 상입만 있을 뿐 상즉이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용이 체 아님이 없기 때문에 전체적인 작용이 체에 돌아가는 것이다. 즉 오직 체일 뿐 용이 없으니, 단지 상즉만 있고 상입은 없다. 세 번째는 체에 돌아가는 용이 그 용을 장애하지 않고, 전체적인 작용의 체가 그 체를 잃지 않는 것이니, 이 때문에 체용이 쌍으로 존재하는 것을 가로막지 않는다. 즉 입(入)하기도 하고 즉(卽)하기도 하는 것에 걸림이 없어서 용융자재한 것이다. 네 번째는 ‘전체적인 작용의 체(體)’의 체(體)가 민절하고, ‘전체적인 체의 용(用)’의 용(用)이 소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체용이 서로 사무치고 형탈(形奪)이 양쪽을 물리치며, 동일한 근원에 즉입하니 원융한 한 맛이다. 다섯 번째는 앞의 4구를 합친 것이니, 동일한 연기가 걸림 없이 함께 존재한다. 여섯 번째는 앞의 5구를 민절해서 기다림을 끊고 말을 여의니, 마땅히 망정을 없애고서 이치대로 생각해야 한다. 연기 이체를 섭수하는 문을 마친다.
【記】열째, 경문에 따라 해석하는 것 가운데서 ‘첫째, 연기가 서로 다른 문’은 먼저는 본법을 해석한 것이고, ‘의지(依持)의 뜻’ 이하는 수문(須門)을 해석한 것이다.
‘첫째, 연기가 서로 다른 문’이란 명칭을 든 것이고, ‘말하자면 다함없는 대연기 속에서’ 이하는 상(相)을 해석한 것이다.
【문】다함없는 대연기 중에서는 10문의 이체를 통틀어 든 것인가? 오직 이 1문뿐인 것인가?
【답】모든 연이 서로 다르고 모든 연이 서로 응하는 등 10문의 연기를 구족했으니, 일어나는 상(相)을 말미암는 것이다. 말하자면 다함없는 대연기 중에서 모든 연이 서로 다른 것은 이체이고, 다함없는 대연기 중에서 모든 연이 서로 응하는 것은 동체이기 때문이다.
【문】연기가 서로 다름의 연기도 역시 1문인가?
【답】연기의 말이라면 10문에 통한다. 말하자면 연기가 서로 다르고 연기가 서로 응하는 등이기 때문에 그렇다.
【문】‘모든 연이 서로 조망하고 체용이 각기 구별된다’고 하였으니, 체(體)라는 것은 즉문(卽門)이고, 용(用)이라는 것은 중문(中門)이다. 그렇다면 본법 중에서도 중즉(中卽)을 논하는가?
【답】한결같이 체(體)는 즉문이고 용(用)은 중문인 것은 아니다. 만약 그러하다면, 어째서 고인(古人)은 “중문이란 인과 도리의 문이고, 즉문이란 덕용(德用)이 자재한 문이다”고 하면서 즉문에서도 용(用)을 들었겠는가? 또 만약 한결같이 체(體)가 즉문이라면, 그렇다면 동체와 이체가 오직 즉문이겠는가? 그러나 그렇지 않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것이다.
수문(須門)을 해석함에 있어서 먼저 ‘의지(依持)’라는 것은 명칭을 든 것이고, 다음의 ‘하나가 많음을 유지한다’ 이하는 상(相)을 해석한 것이며, 나중의 ‘상입문의 뜻을 마친다’는 것은 총체적으로 결론지은 것이다. 이 중에서 혹자는 “하나가 많음을 조망하는 문은 하나가 유력이고 많음이 무력이며, 많음이 하나를 조망하는 문은 많음이 유력이고 하나가 무력이니, 이 뜻에 입각하여 만약 단락을 나눈다면, ‘하나가 많음을 유지하는 것’에서부터 ‘의지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이다’에 이르기까지는 하나가 많음을 조망하는 문이다. ‘가령 많음이 의지하고 하나가 유지하는 것이 그렇다면’ 이하는 많음이 하나를 조망하는 문이다. ‘그러므로 하나가 많음을 조망함을 말미암아서 유지함이 있고 의거함이 있다’ 이하는 해석을 표한 것이다. ‘둘 다 존재하고 둘 다 민절하는 2구’ 이하는 구수(句數)의 『요간(料簡)』이다. 해석함 중에서 ‘하나가 많음을 조망함을 말미암아서 유지함도 있고 의지함도 있다’는 것은 하나가 많음을 조망하는 문을 해석한 것이고, ‘많음을 하나에서 조망하면 의지함도 있고 유지함도 있다’ 이하는 많음이 하나를 조망하는 문을 해석한 것이다”고 하였다.
여기서는 하나가 많음을 조망하는 문은 하나의 역(力)과 무력의 뜻을 갖추고, 많음이 하나를 조망하는 문 또한 많음의 역(力)과 무력의 뜻을 갖춘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 뜻에 의지해서 만약 단락을 분과한다면, ‘하나가 많음을 유지한다’에서부터 ‘역시 많음의 하나에 들어가지 않음이 없다’에 이르기까지는 하나가 많음을 조망하는 문이고, ‘그러므로 하나가 많음을 조망함을 말미암아서’ 이하는 많음이 하나를 조망하는 문이다. ‘둘 다 존재하고 둘 다 민절하는 2구’ 이하는 구수(句數)의 『요간』이다. 먼저는 하나의 유지함과 많음의 의지함을 해석한 것이고, 나중의 ‘가령 많음의 의지함과 하나의 유지함이 그렇다면’ 이하는 많음의 유지함과 하나의 의지함을 나타낸 것이다. 처음 중에 ‘하나가 다일(多一)의 유력을 유지하고’ 등은 하나의 유지를 해석한 것이고, ‘많음이 하나에 의지해서’ 이하는 많음의 의지함을 해석한 것이다. ‘이는 곧’ 이하는 앞의 뜻을 해석한 것이다.
예를 든 것 중에서 먼저는 많음의 의지함과 하나의 유지함을 들어서 능(能)의 예로 삼은 것이고, 나중은 하나의 의지함과 많음의 유지함을 들어서 역시 소(所)의 예로 삼은 것이다. 이것이 만약 구작(具作)이라면, 많음이 일다(一多)의 유력을 유지하니 이 때문에 하나를 섭수할 수 있고, 하나가 다일(多一)의 무력을 의지하기 때문에 잠복해서 많음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이는 곧 ‘하나의 많음을 용납하지 않음이 없으니, 유지하지 못함이 없기 때문이고, 많음의 하나에 들어가지 않음이 없으니, 의지하지 못함이 없기 때문’이라서 이같이 말하는 것이다.
현작(現作) 중에서 ‘하나가 다일(多一)의 유력을 유지한다’고 말하고, 또 ‘많음의 하나를 용납하지 않음이 없다’고 말한 이런 것들을 따르기 때문에 하나가 많음을 조망하는 문에선 혹은 유지한다고 말하고 혹은 전력(全力)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든 것 중에서 ‘하나의 의지함’이라 말하고, 또 ‘많음의 하나에 들어가지 않음이 없다’고 말한 이런 것들을 따르기 때문에 혹은 의지한다고 말하고 혹은 무력이라고 말한다.
【문】만약 그렇다면 현작(現作) 중에 많음이 하나에 의지하기 때문에 많음이 무력이고, 또 하나의 많음에 들어가지 않음이 없다면 예를 든 것 중에 많음의 유지라 말하고 또 하나의 많음을 섭수하지 않음이 없다는 것은 어느 대목에서 본 것인가?
【답】이것은 많음이 하나를 조망하는 문이니, 많음이 유지하고 의지하는 가운데서 보는 것이다. 이른 바 ‘많음이 하나에 의지함이기 때문에’ 등과 또 ‘하나의 많음에 들어가지 않음이 없다’는 것은 많음이 하나를 조망하는 문이니, ‘많음의 무력이 의거하는 뜻이다. 많음이 유지하는 것과 하나의 많음을 섭수하지 않음이 없다’는 것은 많음의 유력이 유지하는 뜻이다.
【문】만약 그렇다면 앞에서 이미 하나가 많음을 조망하는 문과 많음이 하나를 조망하는 문을 갖췄는데, 어째서 다시 많음이 하나를 조망하는 문을 예로 드는가?
【답】하나의 유지함은 많음의 의지함이고, 하나의 의지함은 많음의 유지함이기 때문에 많음의 의지함과 유지함을 들어서 바야흐로 하나의 의지함과 유지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가 많음을 조망하는 문은 비록 많음의 유지함과 의지함이 있더라도, 오직 하나의 유지함과 의거함만을 취할 뿐이다. 말하자면 하나가 능망(能望)이 되고 많음이 소망(所望)이 되어 하나의 의지함과 유지함을 보는 것은 하나가 많음을 조망하는 문이고, 많음이 능망(能望)이 되고 하나가 소망(所望)이 되어서 많음의 유지함과 의지함을 보는 것은 많음이 하나를 조망하는 문이다. 그러므로 다시 예로 든 것이다. 많음이 하나를 조망하는 문에 능례(能例)와 소례(所例)가 있는 것은 앞과 같으니 알 수 있다.
‘하나가 많음을 조망해서 유지함도 있고 의지함도 있는 전력(全力)’ 등이란 처음의 뜻으로 해석하면 유지함이 있는 것은 하나의 유지하는 뜻이고, 의지함이란 많음의 의지를 뜻하고, 전력이란 하나의 유력을 뜻하며, 무력이란 많음의 무력을 뜻한다. 능섭(能攝)이란 하나의 섭수을 뜻하고, 능입(能入)이란 많음의 들어감을 뜻한다.
여기서는, 유지함은 하나가 많음을 유지하는 뜻이고, 의지함은 예를 든 것 중에서 하나가 의지하는 뜻이며, 전력이란 앞의 하나의 유력을 뜻하고, 무력이란 예를 든 것 중에서 하나의 의지함을 뜻한다. 능섭이란 하나가 많음을 섭수하는 뜻이고, 능입이란 예를 든 것 중에서 많음의 하나에 들어가지 않음이 없음을 뜻한다고 해석한다. 많음이 하나를 조망하는 문은 앞에 준거하면 알 수 있다.
만약 구작(具作)이라면 마땅히 ‘많음이 일다(一多)의 유력을 유지할 수 있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를 섭수하여 하나가 많음에 의지하기 때문에 하나의 무력이니 이 때문에 잠복해서 많음에 들어간다. 이는 곧 하나의 많음을 용납하지 않음이 없고 유지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이요, 많음의 하나에 들어가지 않음이 없는 것이니 의거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이다. 가령 하나의 의지함과 많음의 유지함이 그렇다면 하나의 유지함과 많음의 의지함 또한 마찬가지 등임을 말한 것이다.
‘둘째, 모든 연(緣)의 형탈하는 체(體)와 무체(無體)’ 가운데 먼저는 요간의 대의(大意)이고, 나중은 경문에 따라 해석한 것이다.
【문】처음 가운데 모든 처소의 즉문(卽門)에 있어서 ‘하나가 곧 많음이고 많음이 곧 하나’라고 한 것은 하나가 곧 많음일 때는 하나가 유(有)이고 많음이 공(空)이며, 많음이 곧 하나일 때는 많음이 유(有)이고 하나가 공(空)인가?
【답】혹자는 질문한 것과 같다고 말하고, 혹자는 그와는 반대라고 말한다. 또 혹자는 “즉(卽) 이전의 공(空)과 유(有), 그리고 즉 이후의 공과 유라는 뜻이 있기 때문에 하나가 많음일 때는 즉(卽) 이전은 하나가 유이며 많음이 공이고, 즉 이후는 많음이 유이고 하나가 공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선, 하나가 유(有)인 문에 ‘하나가 곧 많음이고 많음이 곧 하나’임을 갖추고 있으며, 많음이 유인 문에도 마찬가지이므로 모든 곳의 경문은 서로 한쪽을 나타낸 것이라고 해석한다. 『의리장』의 이체즉문(異體卽門) 에 이르기를 “하나가 유(有)인 문에선 ‘하나가 곧 많음’인 뜻을 나타내고, 많음이 유인 문에선 ‘많음이 곧 하나’라는 뜻을 나타낸다”고 했고, 또 “스스로가 만약 유(有)일 때라면, 타자는 반드시 공(空)이다” 등이라 하였다.
지엄대사의 「광명각품」 소(疏)7)에서 “‘하나가 곧 많음’이란 하나의 수(數)가 곧 많음이라서 하나 등을 보지 않는다”고 하고, 『지귀장(旨歸章)』8)에서 “자기가 곧 타자라서 자기를 세우지 않고, 타자가 곧 자기라서 타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한 것 등은 하나가 유(有)인 문에선 많음이 곧 하나이고, 많음이 유(有)인 문에선 하나가 곧 많음의 뜻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문】이 뜻을 갖추어 나타낸 곳은 어느 경문이 해당하는가?
【답】『의리장』 동체즉문(同體卽門)의 ‘하나가 유(有)인 문’ 중에 ‘하나가 곧 많음’이라 표식 하였고, ‘열이 곧 하나’라고 결론지었다. 또 ‘많음이 유(有)인 문’ 중에선 ‘많음이 곧 하나’라 표식 하였고, ‘하나가 곧 열’이라 결론지으니, 이것이 바로 분명한 증거이다.
【문】「도신장(道申章)」에서 “차유(此有)가 곧 피유(彼有)일 때, 피유를 보고 차유를 보지 않는다”라고 말한 것은 즉전(卽前)에선 하나가 유이고 많음이 공한 것이고, 즉후(卽後)에선 많음이 유이고 하나가 공이라는 뜻인데, 어째서 그렇지 않다는 것인가?
【답】이 뜻은 먼저 하나를 든 것이다. 이 하나의 유체(有體)가 타자를 섭수하여 자기와 동화할 때, 이 때[時] 가운데 이 하나를 폐기하고 자기를 비운 것이 유와 많음과 같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을 뿐, 즉전과 즉후의 공과 유라는 뜻을 말한 것이 아니다.
【문】하나가 유(有)인 문에서 ‘하나가 곧 많음’이란 뜻은 무엇이고, ‘많음이 곧 하나’란 뜻은 무엇인가?
【답】하나가 유인 문의 섭수함에는 ‘하나가 곧 많음이고 많음이 곧 하나’라는 뜻이 있고, 폐기함에는 ‘많음이 곧 하나’란 뜻이 있다. 많음이 유인 문에선 이와 반대이다. 말하자면 하나가 유(有)인 문에선 하나의 유가 공(空)의 많음을 성취하기 때문에 ‘하나가 곧 많음’이라 말한 것이고, 이 같음을 말미암아서 공의 많음이 유의 하나 속에 섭수되어 있기 때문에 ‘섭수함에는 하나가 곧 많음이고 많음이 곧 하나’라고 말한 것이다. 폐기함에는 한결같이 저 공을 폐기해서 많음이 유의 하나에 즉하기 때문에 ‘많음이 곧 하나’라고 말한 것이다.
경문을 따라 해석하는 가운데 먼저는 문의 명칭을 든 것이고, 다음의 ‘다연(多緣)의 성품 없음’ 이하는 상(相)을 해석한 것이며, 나중의 ‘상즉의 뜻을 마친다’는 결론이다.
상(相)을 해석함에 있어서 먼저는 하나가 많음을 조망함을 해석한 것이고, 다음의 ‘그러므로 하나가 많음을 조망한다’ 이하는 많음이 하나를 조망함을 예로 든 것이며, 나중의 ‘타자에게 자기를 동화하기도 하고 자기에게 타자를 동화하기도 한다’ 이하는 구수(句數)의 『요간』이다.
첫 번째에서 처음부터 ‘하나의 많음이 아님이 없다’에 이르기까지는 하나의 유와 많음의 공을 나타낸 것이다. ‘하나의 성품 없음이 많음의 성취한 바가 된다’ 이하는 많음의 유와 하나의 공을 예로 든 것이다. 처음의 다연(多緣)에서 ‘많음이 곧 하나’에 이르기까지는 많음의 무체(無體)를 나타낸 것이고, ‘하나의 유체(有體)를 말미암아서’부터 ‘잠복하여 하나에 동화하기 때문이다’에 이르기까지는 하나의 유(有)가 섭수하는 것과 많음의 공(空)이 폐기하는 것을 쌍으로 나타낸 것이다.
‘많음의 하나 아닌 것이 없다’는 것은 하나의 유체(有體)가 능히 많음을 섭수하는 뜻을 해석한 것이며, ‘또한 하나의 많음이 아님이 없다’는 것은 많음의 성품 없음이 잠복해서 하나에 동화하는 뜻을 해석한 것이다. 만약 하나가 많음을 조망하는 문에서 하나가 유(有)이고 많음이 공(空)이라면, 또 많음이 하나를 조망하는 문에서 많음이 유이고 하나가 공이라면, 그 뜻은 앞의 중문(中門)에 준거해서 알라. 현작(現作)중, ‘많음의 하나가 아님이 없다’는 것에서, 능구(能具)의 하나가 소구(所具)의 많음을 섭수하지 않음이 없다면 하나가 많음을 조망하는 문의 섭수함을 뜻한다. ‘또한 하나의 많음 아님이 없다’는 것에서, 소구의 많음이 능구의 하나에 즉하지 않음이 없다면 많음이 하나를 조망하는 문이 많음을 폐기하는 구(句)이다.
예를 든 것 중에, 만약 구작(具作)이라면 마땅히 ‘하나의 성품 없음이 많음의 성취한 바가 된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가 곧 많음’은 많음의 유체(有體)를 말미암아서 하나를 섭수하고 하나의 무체(無體)를 말미암아서 잠복하여 많음과 동화하기 때문에 하나의 많음 아님이 없고, 또한 많음의 하나 아님이 없는 것이라 이같이 말하였다. ‘하나의 많음 아님이 없다’는 것에서 능구(能具)의 많음이 소구(所具)의 하나를 섭수하지 않음이 없다면 많음이 하나를 조망하는 문이 많음을 섭수하는 구(句)이다. ‘많음의 하나 아님이 없다’는 것에서 소구의 하나가 능구의 많음에 즉하지 않음이 없다면 하나가 많음을 조망하는 문이 하나를 폐기하는 구(句)이다.
【문】만약 그렇다면 앞의 하나가 많음을 조망하는 문은 이미 많음이 하나를 조망하는 문의 뜻을 갖추었는데, 어째서 다시 많음이 하나를 조망하는 문을 예로 든 것인가?
【답】많음의 폐기하고 섭수하는 뜻을 들어서 바야흐로 하나의 폐기하고 섭수하는 뜻을 나타냈을 뿐이다. 만약 하나의 폐기하고 섭수함을 본다면 하나가 많음을 조망하는 문이고, 많음의 폐기하고 섭수함을 본다면 많음이 하나를 조망하는 문이니, 이 때문에 다시 예를 든 것이다.
많음이 하나를 조망하는 문은 능례(能例)와 소례(所例)로 알 수 있다. 능례에 유체(有體)가 있는 것은 하나의 유체이고, 무체(無體)는 예 중에서 하나의 공(空)을 뜻한다. ‘타자를 섭수하여 자기에 동화한다’는 것은 하나의 유체가 많음을 섭수하는 것과 많음의 하나 아님이 없는 것이다. ‘자기를 폐기하여 타자에 동화한다’는 것은 예 중에서 많음의 하나 아님이 없는 것이다. 소례(所例)에 나아가 만약 많음이 하나를 조망하는 문을 구작(具作)한다면, 마땅히 “하나의 연(緣)이 성품 없는 것은 많음의 성취한 바가 된다”고 말해야 한다. 이 때문에 ‘하나가 곧 많음’은 많음의 유체를 말미암아서 하나를 섭수하고, 하나의 성품 없음을 말미암아서 잠복하여 많음과 동화한다. 그러므로 하나의 많음 아님이 없고, 또 많음의 하나 아님이 없는 것이다. 많음의 성품 없음이 하나의 성취한 바가 되니, 하나에 많음이 있고, 공(空)이 곧 하나인 것도 마찬가지여서 이같이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많음이 하나를 조망하는 문에 비록 하나의 폐기함과 섭수함이 있더라도, 하나의 폐기함과 섭수함을 들어서 많음의 폐기함과 섭수함을 나타내니, 하나의 폐기함과 섭수함도 오히려 하나가 많음을 조망하는 문이 된다. 이 때문에 『연의』9)에 이르기를 “앞의 하나가 많음을 조망한 섭수함과 폐기함은 모두 하나이고, 이 중에서 많음을 하나에서 조망한 섭수함과 폐기함은 모두 많음이다”라고 하였다.
【문】향상(向上)과 향하(向下)는 하나가 많음을 조망하고 많음이 하나를 조망하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
【답】‘향상과 향하’는 하나와 많음의 폐기하고 섭수하는 뜻을 묻지 않는다. 만약 하나로부터 열에 이르기까지 열거하면 향상이고, 열로부터 하나에 이르기까지 열거하면 향하이다. ‘하나가 많음을 조망하고 많음이 하나를 조망하는’ 것은 향상과 향하를 묻지 않는다. 만약 하나가 능망(能望)이 되고 많음이 소망(所望)이 되어서 하나의 폐기함과 섭수함을 논한다면 하나가 많음을 조망하는 문이고, 많음이 능망이 되고 하나가 소망이 되어서 많음의 폐기함과 섭수함을 논한다면 많음이 하나를 조망하는 문이다. 이 때문에 다르다.
【문】『의리장』10)에 이르기를 “자(自)가 만약 유(有)일 때라면 타(他)는 반드시 공(空)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는데, ‘타자가 곧 자기’ 등이란 것은 어느 문에 해당하는가?
【답】두 문에 통한다. 말하자면 자타(自他)의 언사는 하나와 많음의 언사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가 자(自)이고 많음이 타(他)라면, 하나가 많음을 조망하는 문이다. 많음이 자이고 하나가 타라면, 많음이 하나를 조망하는 문이다.
【문】「광명각품」 소의 ‘하나가 곧 많음’은 하나의 수(數)가 곧 많음이라서 하나 등을 보지 않는 것인데, 어느 문에서 보는 것인가?
【답】이것 역시 단지 하나와 많음을 말할 뿐 자타(自他)를 말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가 자이고 많음이 타라면 하나가 많음을 조망하는 문이고, 많음이 자이고 하나가 타라면 많음이 하나를 조망하는 문이다.
【문】『지귀장』에서는 “이 하나의 꽃잎이 자기를 폐기하고 타자와 동화하면, 전체의 저 일체법은 타자를 섭수해서 자기와 동화한다”라고 했는데, ‘저 일체가 곧 자체’ 등은 어느 문에서 본 것인가?
【답】이것은 이미 하나를 능망으로 삼고 나머지 연(緣)을 소망으로 삼기 때문에 하나가 많음을 조망하는 문이다.
구수(句數)의 『요간』 중에서 다시 2구(句)의 뜻을 덧붙인 것은 바야흐로 원만함을 나타낸 것이다. 말하자면 타자에게 자기를 섭수하고, 또한 자기에게 타자를 섭수하며, 타자에게 자기를 섭수하지 않고, 자기에게 타자를 섭수하지 않음이라 이같이 덧붙인 것이다. 어째서인가? 동체즉문의 종결에서 “또한 섭수함과 섭수하지 않음, 또한 즉(卽)함과 즉하지 않음, 섭수함과 섭수하지 않음도 아님, 즉함과 즉하지 않음도 아님”이라 말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즉(卽)이라 말한 것은 여기에서 타자에게 자기를 동화하고 자기에게 타자를 동화하는 것에 해당되며, 그 중에서 즉하지 않음이라 말한 것은 여기에서 타자의 자기에 동화하지 않고 자기의 타자에 동화하지 않는 것에 해당된다. 그 중에서 섭수함과 섭수하지 않음이란 여기에서 덧붙인 언사에 해당되니, 타자에게 자기를 섭수함과 자기에게 타자를 섭수함과 타자에게 자기를 섭수하지 않음과 자기에게 타자를 섭수하지 않음이다. 그러므로 타자에게 자기를 섭수하고 자기에게 타자를 섭수하는 것과 자기에게 타자를 동화하고 타자에게 자기를 동화하는 것은 함께 존재하는 구(句)이고, 타자에게 자기를 섭수하지 않고 자기에게 타자를 섭수하지 않는 것과 타자에게 자기를 동화하지 않고 자기에게 타자를 동화하지 않는 것은 쌍으로 민절하는 구(句)이다.
【章】둘째,11) 모든 연(緣)이 서로 응하는 문이란 말하자면 온갖 연(緣)에 있어서 하나의 연이 다연(多緣)을 응하기 때문에 각각이 저 많음과 함께 전체적으로 그 하나가 되는 것이니, 이 때문에 이 하나가 많은 개수의 하나를 갖춘다. 그렇지만 이 많음의 하나는 비록 본래의 하나로부터 말미암을지라도, 다연(多緣)에 응하기 때문에 이 많음의 하나이다. 그러나 본래의 하나와 함께 체(體)가 차별 없으니, 이 때문에 이름 하여 동체문이라 한다.
‘의지하고 유지해서 들어감을 용납한다’는 것은 말하자면 이 ‘본래의 하나’의 유력이 저 많은 개수[箇]의 하나를 유지하기 때문이고, 본래의 하나 속에 저 많음의 하나를 용납하는 것이 ‘많음의 하나’의 무력이 본래의 하나에 의지하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많음의 하나가 본래의 하나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는 곧 ‘많음의 하나’가 ‘본래 하나’를 용납하지 않음이 없으며, 또한 ‘본래의 하나’가 ‘많음의 하나’에 들어가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가령 ‘본래 하나’의 유력이 유지함이 되고, ‘많음의 하나’의 무력이 의지함이 되어서 용납하여 들어가는 것이 그러하다면, ‘많음의 하나’의 유력이 유지함이 되고, ‘본래 하나’의 무력이 의지함이 되어서 용납하여 들어감도 마찬가지이니, 이는 곧 ‘본래 하나’가 ‘많음의 하나’를 용납하지 않음이 없고, ‘많음의 하나’가 ‘본래의 하나’에 들어가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이는 본래의 하나가 많음의 하나를 조망함을 말미암아서 유지함도 있고 의지함도 있고 유력이고 무력이기 때문에 용납하고 들어감에 걸림이 없다. 많음의 하나가 본래의 하나를 조망함으로써 의지함도 있고 유지함도 있고 유력이고 무력이기 때문에 들어가고 용납함에 또한 걸림이 없다. 그리하여 함께 존재함[俱存]과 쌍으로 민절함[雙泯] 2구(句)가 걸림이 없으니, 역시 준거해서 생각하라. 동체문 가운데 용납하고 들어가는 뜻을 마친다.
둘째,12) 서로 형탈(形奪)함의 체(體)와 무체(無體)라는 것은 말하자면 ‘많음의 하나’의 성품 없음이 본래의 하나가 되어서 많음의 하나를 이루는 것이니, 거체(擧體)가 곧 본래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본래의 하나가 유체(有體)가 되어서 많음의 하나를 섭수하고, 많음의 하나가 무체가 되어서 본래의 하나와 융화하여 같아지기 때문에 ‘많음의 하나’가 ‘본래의 하나’를 섭수하지 않음이 없고 또한 ‘본래의 하나’가 ‘많음의 하나’에 즉하지 않음이 없다.
가령 ‘본래 하나’의 유체와 ‘많음의 하나’의 무체가 섭수하고 즉하는 것이 이미 그러하다면, ‘많음의 하나’의 유체와 ‘본래 하나’의 무체가 섭수하고 즉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 때문에 ‘본래의 하나’가 ‘많음의 하나’를 섭수하지 않음이 없고 또한 ‘많음의 하나’가 ‘본래의 하나’에 즉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이는 곧 본래의 하나가 많음의 하나를 조망함에 유체와 무체가 있기 때문에 타자를 섭수해서 자기에 동화하고 자기를 폐기해서 타자에 동화하는 것에 걸림이 없는 것이다. 많음의 하나가 본래의 하나를 조망함도 유체와 무체가 섭수하고 즉(卽)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섭수하고 섭수하지 않음이고 또한 즉하고 즉하지 않음인 것과 섭수하고 섭수하지 않음도 아니고 즉하고 즉하지 않음도 아닌 2구(句)의 걸림 없음은 생각하면 알 수 있다. 동체문 가운데 상즉의 뜻을 마친다.
셋째, 체(體)와 용(用)이 함께 융화해서 즉하고 들어가는 것에 걸림이 없다는 것은 역시 6구(句)의 걸림 없음이니, 앞의 것을 준거해서 생각하면 알 수 있다. 동체문을 마친다.
【記】‘모든 연(緣)이 서로 응하는 문’에 있어 먼저는 본법을 해석한 것이고, 다음의 ‘의지하고 유지함의 용납하고 들어감’ 이하는 용문(用門)을 해석한 것이며, 나중의 ‘동체문을 마친다’는 것은 결론이다.
첫 번째에서 먼저는 명칭을 든 것이고, 다음의 ‘온갖 연(緣) 속에서’ 이하는 올바른 해석이며, 나중의 ‘그러므로 이 하나가 많은 개수의 하나를 갖추었다’는 결론이다.
【문】‘그렇지만 이 많음의 하나’ 이하는 동체의 명칭을 해석한 것이니, 해석 중에서 ‘온갖 연(緣) 속에서’란 1문인가?
【답】10문에 통하는 것이다.
【문】모든 연(緣)이 서로 응하는 것이 1문이라면, ‘온갖 연 속에서’라는 것도 1문인가?
【답】온갖 연 가운데 1연이 다연(多緣)에 응하기 때문에 각각이 다연과 더불어 전체적으로 하나가 된다. 그러므로 모든 연이 서로 응하면 1문이고, ‘온갖 연 속에서’는 10문에 통한다.
【문】모든 연[諸緣]과 온갖 연[衆緣]은 어떻게 다른가?
【답】말은 같으나 뜻이 다르다. 말하자면 『연의』13)에서는 ‘하나하나가 각기 일체의 말을 갖추었다’를 이렇게 해석했다.
“만약 저 법계차별이 무진법이라면, 각각이 두루 응하기 때문에 하나하나를 따라서 각기 법계차별무진법을 갖춘다.”
두 번째 절(節)의 법계차별무진법은 말은 같으나 뜻은 다르다. 그러므로 법계차별무진법이란 온갖 연에 해당하고, 각기 법계차별무진법을 갖추었다는 것은 모든 연이 서로 응하는 것에 해당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러나 이 많음의 하나’에서 ‘연(然:그러나)’이란 글자는 동체 가운데 본래의 하나와 많음의 하나가 구별되는데 무슨 이유로 동체를 삼았겠는가? 이 때문에 연이란 글자가 있는 것이다. 또 아래에 나오는 연(然)이란 글자는 위에 있는 ‘비록 본래의 하나를 말미암아서’의 수(雖:비록)라는 글자를 조망해서 앞의 것과 연결해 뒤의 것을 일으키고자 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의지하고 유지함의 용납하여 들어감’ 에 있어서 먼저는 명칭을 표(標)한 것이고, 다음의 ‘말하자면 이 본래 하나의 유력’ 이하는 상(相)을 해석한 것이며, 나중의 ‘동체문 속의 용납하고 들어가는 뜻을 마친다’는 것은 결론이다.
상(相)을 해석함에서 먼저는 하나가 많음을 조망함을 해석한 것이고, 다음의 ‘이는 곧 본래의 하나가 많음의 하나를 조망한다’ 이하는 많음이 하나를 조망하는 문을 예로 든 것이며, 나중의 ‘함께 존재함과 쌍으로 민절하는 2구(句)의 걸림 없음’ 이하는 구수(句數)의 『요간』이다.
처음 중에서 먼저는 ‘하나의 유지함과 많음의 의거함’을 해석한 것이고, 나중의 ‘가령 본래 하나의 유력이 유지함이 되고 많음의 하나의 무력이 의지함이 된다’ 이하는 많음의 유지함과 하나의 의지함을 나타낸 것이다. 처음 중에서 먼저는 하나가 많음을 유지함을 나타낸 것이고, 나중의 ‘많음의 하나의 무력이 본래의 하나를 의지한다’는 등은 많음이 하나를 의지함을 나타낸 것이다. ‘이는 곧’ 이하는 언설로 해석한 것이다. ‘본래의 하나’가 ‘많음의 하나’를 용납하지 않음이 없다는 것은 ‘본래 하나’의 유지함을 해석한 것이고, ‘많음의 하나’가 ‘본래의 하나’에 들어가지 않음이 없다는 것은 ‘많음의 하나’의 의지함을 해석한 것이다. 또 ‘많음이 하나를 조망하는 문’ 중에 능례(能例)와 소례(所例)가 있는 것을 알 수 있고, 나머지 뜻은 이체의 중문(中門)에 준거하면 알 수 있다.
‘둘째, 서로 형탈함의 체(體)와 무체(無體)’ 등이라는 것에 있어 먼저는 명칭을 표(標)한 것이고, 다음의 ‘많음의 하나가 성품이 없다’ 이하는 상(相)을 해석한 것이며, 나중의 ‘동체문’ 이하는 결론이다. 상(相)을 해석함에서 먼저는 하나가 많음을 조망함을 해석한 것이고, 다음의 ‘이는 곧 본래의 하나가 많음의 하나를 조망함이다’ 이하는 많음이 하나를 조망하는 문을 예로 든 것이며, 나중의 ‘또한 섭수하고 섭수하지 않는다’ 이하는 구수(句數)의 『요간』이다. 나머지 뜻이란 이체즉문에 준거하면 알 수 있다. ‘또한 섭수하고 섭수하지 않음이다’ 등은 하나가 많음을 조망하고 많음이 하나를 조망함을 통틀은 것이다.
또한 하나가 많음을 조망하는 문을 기준으로 한 것에서 이 하나의 타자를 섭수해서 자기에 동화하는 것은 섭수이고, 이에 즉 할 때 이 하나가 자기를 폐기해서 타자에 동화하기 때문에 섭수하지 않음이다. ‘또한 즉하고 즉하지 않음이다’란 이 하나가 자기를 폐기해서 타자에 동화하기 때문에 즉함이고, 이에 즉 할 때 이 하나가 타자를 섭수해서 자기에 동화하기 때문에 즉하지 않음이다. 섭수하지 않음이란 앞의 섭수를 끊은 것이고, 섭수하지 않음이 없다는 것은 앞의 섭수하지 않음을 끊은 것이다. 즉하지 않음이란 앞의 즉함을 끊은 것이고, 즉하지 않음이 없다는 것은 앞의 즉하지 않음을 끊은 것이다.
‘셋째, 14) 이(異)에 응함이 걸림이 없어서 동체와 이체문을 쌍으로 변별한다’는 것은 이 두 문이 함께 연기하면서 서로 여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이체가 없다면 모든 연(緣)이 잡란(雜亂)하니, 연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동체가 없다면 연이 서로 북돋지 못하니, 이 역시 연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요컨대 잡(雜)하지 않음을 말미암아야 바야흐로 서로 북돋을 수 있다. 그러므로 만약 동체가 아니라면 이체가 없기 때문이고, 만약 이체가 아니라면 동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통틀어 변별한 것에도 4구(句)가 있는데, 첫째는 혹은 거체(擧體)가 전체적으로 달라서 입과 즉(卽)의 함께 함을 갖춘 것이고, 둘째는 혹은 전제가 동일해서 입(入)이기도 하고 즉(卽)이기도 하여 함께 함을 갖춘 것이니, 법의 융통으로 각각이 전체적으로 섭수되기 때문이다. 셋째는 혹은 함께 함이니, 동이(同異)가 걸림이 없어서 쌍으로 현전하기 때문이다. 넷째는 혹은 함께 하지 않음이니, 서로 빼앗아서 함께 소진하기 때문에 쌍으로 부정[非]하는 것이다. 나머지 입(入)과 즉(卽) 등은 준거해 생각하면 알 것이다.
이상으로 제1 연기상유문(緣起相由門)을 마친다.
‘셋째, 이(異)에 응함이 걸림이 없다’ 중에서 먼저는 명칭을 표(標)한 것이고, 다음의 ‘이 두 문이 동일한’ 이하는 동일한 연기를 나타낸 것이다. 다음으로 ‘그러므로 통틀어 변별함’ 이하는 구수(句數)의 『요간』이고, 다음으로 ‘나머지 입(入)과 즉(卽) 등은 준거해서 생각하라’ 이하는 나머지 입과 즉을 예로서 나타낸 것이다.
처음 중에서는 다음과 같다.
【문】동체와 이체에 겹[重]이 있는가?
【답】혹자는 “동체는 깊고 이체는 얕다”고 하지만, 여기서는 깊고 얕음이 없다고 해석한다. “만약 이체가 없다면 곧 모든 연(緣)이 잡란하니 연기가 아니기 때문이며, 만약 동체가 없다면 연이 서로 북돋지 못하니 이 역시 연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요컨대 잡(雜)하지 않음을 말미암아야 비로소 서로 북돋을 수 있다”라고 말했기 때문에 겹이 없음을 안다.
【문】구수(句數)중에서 ‘입(入)과 즉(卽)의 함께 함을 갖춘다’는 것에 있어 무슨 까닭으로 함께 존재함이 걸림 없는 본위(本位) 중에서 즉과 입을 아울러 논하는가?
【답】『요간』15)에서 먼저는 3문의 본법을 논하였고, 나중은 수문(須門)을 설하였다. 이 중에 앞의 것은 이체의 본법과 수문을 설한 것이고, 나중의 것은 동체의 본법과 수문을 설한 것이니, 이 둘을 통틀어 들어서 함께 존재하도록 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문】만약 그렇다면 나머지 입(入)과 즉(卽) 등은 어느 문의 입과 즉인가?
【답】바로 동이(同異)가 원만히 갖춰진 수문(須門)이다. 만약 『요간』에 준거한다면, 하나에 머물면서 두루 응하기 때문에 광협(廣狹)의 자재함이 있다.
【문】본법 중에서 ‘스스로의 하나에 머물면서 두루 응한다’라고 하였고, 수문에서도 그러한데 두 곳은 어떻게 다른가?
【답】본법 중에서 비록 ‘스스로의 하나에 머물면서 두루 응한다’고 했더라도, 그렇더라도 ‘해석함’을 설하지 않았다. 수문에 이르러선 ‘하나에 머물면서 두루 응하기 때문에 광협의 자재함 등이 있다’고 했으니, 이처럼 ‘해석함’의 현문(玄門)을 갖추어 설했기 때문에 크게 다르다.
4) 원음장(圓音章)
【章】원음(圓音)의 뜻은 대략 네 가지로 분별한다. 첫째는 뜻을 든 것이고, 둘째는 결택(決擇)이며, 셋째는 어긋남을 회통한 것이고, 넷째는 변별해서 해석한 것이다.
처음 가운데도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여래가 일음(一音)으로써 일체의 차별된 법을 연설하는 것을 말한다. 말하자면 탐욕이 많은 자는 여래가 부정관(不淨觀)을 설하는 것을 듣는 등, 이런 식으로 일체에 이르기 때문에 이름 하여 원음이라 한다. 그러므로 『화엄경』에서는 “여래는 한 언어로 가없는 계경(契經)의 바다를 연설한다”고 하였다.
또 하나는 여래의 일음이 일체의 차별된 언어와 동일한 것을 말한다. 말하자면 모든 중생이 각기 여래가 자기에게만 말하는 것으로 듣기 때문이다. 『화엄경』에서는 “일체 중생의 언어법은 일언(一言)의 연설이 다하여 남음이 없다”고 하였다.
둘째, 결택(決擇)이란 어떤 교설에서는 “여래가 하나의 어업(語業) 속에서 일체 중생의 언어를 연출하여 저 중생으로 하여금 각기 자기에게만 듣도록 한 것이지, 여래가 오직 일음만을 내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니다. 다만 어업이 동일하기 때문에 이름 하여 일음이라 말하고, 내는 것이 많기 때문에 이름 하여 원음이라 말한다”라고 하고, 어떤 교설에서는 “여래가 오직 일범(一梵)의 언어만 내는 것을 이름 하여 일음이라 말하고, 중생을 위하여 증상연을 지어서 그 지은 것의 감응과 이해가 동일하지 않도록 하기 때문에 이름 하여 원음이라 하는 것이지, 여래에게 몇 가지 음성이 있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고 하였다. 또 어떤 교설에서는 “여래가 오직 하나의 적멸해탈로써 상(相)의 언설을 여의는 것을 이름 하여 일음이라 하고, 모든 중생은 기연의 감응력[機感力]으로 인해 스스로 여래의 갖가지 언설을 듣기 때문에 이름 하여 원음이라 하는 것이지, 여래의 음(音)에 하나가 있고 많음이 있는 것을 말함이 아니다”고 하였다.
【문】위의 세 가지 설은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는가?
【답】만약 따로 편벽되게 취한다면, 셋 모두 잃음이 있다. 어째서인가? 처음의 설은 다만 많음일 뿐 일음이 없기 때문이고, 다음은 오직 일어(一語)일 뿐 다음(多音)이 없기 때문이며, 나중은 오직 무유(無惟)일 뿐 음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령 실다운 뜻이라면, 세 가지 설을 합쳐야 하나의 원음의 뜻이 된다. 왜냐 하면 만약 저 다음(多音)이 일음(一音)에 즉하지 않으면, 이는 다만 다음일 뿐 원만한 뜻이 아니니, 저 다음이 일음에 즉하기 때문에 용융(鎔融)하여 걸림이 없으니 이를 이름 하여 원음이라 한다. 만약 저 일음이 일체에 즉하지 않으면 다만 일음일 뿐 범음(範音)이 아니니, 저 일음이 다음(多音)에 즉하기 때문에 융통하여 걸림이 없으니 이를 이름하여 하나의 범음(範音)이라 한 것이다. 만약 이런 음들이 성품 없는 동진(同眞)의 제(際)에 즉하지 않는다면, 이는 집착한 것이기 때문에 여래의 음이 아니다. 저 음 등이 작(作)을 여의기 때문이며, 성품이 없기 때문이며, 메아리 같기 때문이니, 까닭인즉 법라(法螺)가 항진(恒震)하고 묘음(妙音)이 항상 적멸하기 때문이다.
【記】원음장은 두 가지니, 먼저는 장(章)을 열어서 이름을 열거한 것이고, ‘처음 중에서’ 이하는 장(章)에 의거해 개별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해석 중엔 4단락이 있으니, 처음 가운데 둘이니 처음[初]란 뜻을 편 것이고, 둘째 ‘소위 여래의 일음’ 이하는 뜻을 섭수한 것이다. 관공(觀公)16)은 권즉서문(卷則舒門) 중에서 여래가 계경(契經)의 바다에 이르는 경문을 인용하고, 서즉권문(舒則卷門)중에선 일체 중생이 다하여 남음이 없는데 이른다는 경문을 인용하였다. 그러므로 처음은 뜻을 편 것이고 나중은 뜻을 섭수한 것이다.
처음 가운데 시작부터 ‘차별법’에 이르기까지는 총체적으로 든 것이고, 다음의 ‘소위’ 이하는 넓게 열거한 것이며, 나중의 ‘『화엄경』에서 말하길’ 이하는 인증이다. ‘내지(乃至)’라는 것은 성냄이 많은 자는 여래가 설하는 대비관(大悲觀)을 듣고, 어리석음이 많은 자는 여래가 설하는 연기관 등을 듣는 것이다. ‘인증’이란 「사나품(舍那品)」의 여래가 광명 속에서 설한 게송이다.
둘 가운데 ‘여래’ 이하는 표식이고, 다음의 ‘소위 모든 중생’ 이하는 해석이며, 나중은 인증이다. ‘여래가 오직 자기에게만 말하는 것으로 듣는다’고 함은 천축 사람은 천축 말로 듣고, 한토(漢土) 사람은 한어(漢語)로 듣는 등이다. ‘인증’이란 「십주품」의 초발심주 게송이다.
둘째의 결택(決擇) 가운데 먼저는 고설(古說)을 열거한 것이고, 나중은 문답으로 의심을 없앤 것이다. 처음 중에서 초설(初設)이란 보리류지(菩提留支)의 설이고, 다음은 구마라집의 설이며, 나중은 용군견혜(龍軍堅惠)의 설이다. 이른 바 관공(觀公)의 소(疏)17)와 『간정기(刊定記)』에서 이와 같이 말했다.
“하나는 일음(一音)의 가르침을 세운 것이니, 말하자면 여래의 일대 가르침은 일음을 여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두 대사(大師) 중에서 한 분은 후위(後魏)의 보리류지인데 ‘여래의 일음은 동시에 만 가지를 말하여 크고 작음을 모두 진열한다’고 했고, 또 한 분은 요진(姚秦)의 나집법사로써 ‘부처의 일원음(一圓音)은 평등하여 둘이 없으며, 사념 없이 보편적으로 응하지만 기틀은 스스로 특수하게 듣는다’고 했다. 이는 언설이 본래 크고 작음을 진열한 것을 말함이 아니다. 그러므로 『유마경』에 이르기를 ‘부처는 일음으로 법을 연설하지만, 중생은 각각 처소에 따라 이해한다’고 하였다.
위의 두 대사 가운데 처음은 부처의 언음에 다름[異]을 갖춘 것이고, 나중은 다름[異]이란 스스로 기틀에 있는 것이라 각기 원음의 한 가지 뜻을 얻었다.
보리류지의 일음은 부처의 언설이 다름을 갖추었기 때문에 초설(初說)에 해당하고, 나집의 일음은 다름이 스스로의 기틀에 있기 때문에 차설(次說)에 해당한다.
‘어떤 언설에서는 여래가 오직 하나’ 등이란 요간이다. 능전(能詮)의 교체(敎體) 가운데 셋은 오직 그림자일 뿐 근원이 없으니, 마치 대승의 종교(終敎)가 중생심을 여의어 불과에 색신이 있지 않은 것과 같다. 언성(言聲) 사상(事相)의 공덕은 오직 여여(如如)와 여여지(如如智)의 대비(大悲)와 대원(大願)이 증상연이 되어서 저 교화를 받는 근기 성숙한 중생의 마음속에 부처의 색성(色聲)을 나타나게 하여 법을 설하니, 그러므로 성교(聖敎)는 오직 중생의 마음 속 영상일 뿐이다. 용군과 견혜와 모든 논사(論師)들은 모두 이 뜻을 수립했다.
불과에 색신이 있지 않은 등의 경문에 이르기를 ‘여래는 오직 하나의 적멸해탈로써 상(相)의 언음을 여의었다’고 했고, 대비와 대원 등의 경문에 이르기를 ‘모든 중생 기연의 감응력 때문에 스스로 여래의 갖가지 언음을 듣는다’고 했다. 그러므로 이는 곧 용군과 견혜의 설이다.
초설(初說) 중에서 먼저는 스스로의 설을 들었고, 다음 ‘비위(非謂)’ 이하는 비(非)를 가려낸 것이며, 나중의 ‘어업(語業)이 같다’ 이하는 일음과 원음의 명칭을 해석한 것이다. 차설(次說) 중에서 먼저는 스스로의 설을 들었고, 나중 ‘비위’ 이하는 비(非)를 가려낸 것이다. 처음에 나아가 먼저는 일음을 해석한 것이고, 나중은 원음을 해석한 것이다. 후설(後說) 중에서 먼저는 스스로의 설을 들었고, ‘비위’ 이하는 비를 가려낸 것이다. 처음 중에서 먼저는 일음을 해석한 것이고, 나중은 원음을 해석한 것이다.
【문】후설(後說)이라면 오직 그림자일 뿐 근본이 없지만, 첫째와 둘째의 설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답】근본과 그림자를 갖춘 것이다. 말하자면 부처의 본질인 원음이 있고, 또 듣는 자가 식(識) 위에서 변하는 영상의 원음이 있기 때문이다. 둘째의 문답에는 두 단락이 있으니, 답 중에서 먼저는 편벽되게 취하는 잃음을 나타낸 것이고, 나중은 합쳐서 취하는 얻음을 나타낸 것이다. ‘얻음을 나타냄’에서 는 먼저 총체적으로 표(標)하였고, 다음은 힐문하였으며, 셋째는 개별적으로 해석하였고, 넷째는 결론을 지었다.
‘개별적인 해석’ 중에서 ‘만약 저 다음(多音) 등이라면’이라 함은 반대로 그 잃음을 나타낸 것이고, ‘저 다음 등으로써’란 그 얻음을 순조롭게 나타낸 것이니, 그러므로 이는 두 번째 대사의 뜻이다.
‘만약 저 일음(一音) 등이라면’이란 반대로 그 잃음을 나타낸 것이고, ‘다음(多音) 등에 즉한다’는 것은 그 얻음을 순조롭게 나타낸 것이니, 그러므로 이는 첫 번째 대사의 뜻이다.
‘만약 이런 것들이 동진제(同眞際)에 이른다면’이란 반대로 그 잃음을 나타낸 것이고, ‘저 음(音) 등으로써 작(作)을 여의기 때문에’ 이하는 그 얻음을 순조롭게 나타낸 것이니, 이는 곧 뒤에 있는 대사의 뜻이다.
【문】어째서 차례가 앞과 같지 않은가?
【답】문장의 형세가 그렇기 때문이다. 만약 첫째 대사처럼 다음(多音)을 세운다면, 오직 다음일 뿐 원음을 이루지 못한다. 그러나 두 번째 대사가 일음을 세웠기 때문에 저 다음이 일음에 즉해서 원음을 이루는 것이니, 이는 두 번째 대사의 얻음을 나타낸 것이다.
만약 두 번째 대사처럼 일음을 세웠다면, 오직 일음뿐이라서 원음을 이루지 못한다. 그러나 첫 번째 대사가 다음을 세웠기 때문에 이 일음이 다음에 즉해서 원음을 이루는 것이니, 이는 첫 번째 대사의 얻음을 나타낸 것이다.
‘작(作)을 여의기 때문이고, 성품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함은 오직 상(相)의 언음을 여읜 것을 쫓아 말한 것이고, ‘메아리 같기 때문이다’라고 함은 ‘기연의 감응력 때문에 등’을 쫓아 말한 것이다. 이 뜻인즉, 마치 산골짜기는 본래 음성이 없지만 사람의 소리로 말미암아서 메아리가 울리는 것과 같이 부처는 적멸해서 언설상(言說相)을 여의었지만, 모든 중생의 기연 감응력 때문에 갖가지 음(音)을 내어 법을 설하는 것이다. 결론 중에서 법라(法螺)가 항진(恒震)함은 앞의 두 설을 결론지은 것이고, 묘음이 항상 적멸하다는 것은 나중의 설을 결론지은 것이다.
【문】후설(後說) 중에서 메아리 같다는 것은 법라가 항진하는 중에서 볼 수 있을 것인데, 어째서 그렇지가 않다 하는가?
【답】‘메아리 같기 때문이다’란 듣는 자의 식(識) 위에서 변하는 영상의 언음이고, ‘법라가 항진하는’이란 본질의 언음이기 때문에 다르다.
【문】세 가지 설을 합쳐서 하나의 원음이 될 때가 원교의 뜻인가?
【답】그렇다. 말하자면 5교(敎)를 통틀어 기준으로 해서 본말이 용융(鎔融)하여 오직 일대선교(一大善巧)의 법일 때만 여전히 제5 원교이기 때문에 세 가지 설을 합쳐서 하나의 원음이 될 때에도 제5 원교이다.
【문】만약 그렇다면 『법계도』 중에서 “왜냐 하면 일도(一道)로 여래의 일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라고 한 이것도 오직 원교일 뿐인가?
【답】그렇다.
【문】3승의 기욕(機欲)에 따라서 차별되어 같지 않기 때문에 역시 3승을 갖추었다면 5교를 갖출 수도 있을 텐데, 어째서 오직 원교일 뿐인가?
【답】저 3승도 원교의 3승이기 때문에 그렇다.
셋째, 어긋남을 회통하는 것은 마치 『바사론(婆沙論)』 79권에서 설한 것과 같다. 즉 세존께서 어느 때 사천왕을 위하여 먼저 성어(聖語)로써 4제(諦)를 설하자, 두 왕이 이해하고 두 왕은 이해하지 못했다. 세존께서 이를 불쌍히 여겨서 이익을 주기 위해 남인도 변방국의 속어(俗語)로써 4제를 설하자, 두 천왕 중 하나는 이해했으나 하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세존께서 이를 불쌍히 여기셔서 다시 하나하나 멸려거어(蔑戾車語)로 4성제를 설하자, 사천왕이 모두 이해를 하였다.
【문】만약 일음의 이류(異類)로써 이해한다면, 나중의 두 천왕은 어째서 똑같이 이해하지 못했는가?
【답】저 논석(論釋)에 이르기를 “저 사천왕의 의요(意樂)는 동일치 않으니, 저 뜻을 원만히 하기 위해 부처님께서 달리 설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다음에 다시 세존께서는 모든 언음(言音)을 드러내어 모두가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여 저 의심을 끊게 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다시 다음에 교화를 받는 자는 부처님의 불변 형언(形言)에 의지해서 교화를 받게 된 것이고, 또 교화를 받은 자는 부처님의 전변(轉變) 형언에 의지해서 교화를 받게 된 것이다. 부처님의 불변 형언에 의지해서 교화를 받는 자에게 만약 전변 형언으로써 법을 설하게 되면, 그는 이해할 수 없다. 이는 부처님께서 마갈타국(摩竭陀國)에 계시면서 도지견(度池堅)을 위해 12유순(由旬)을 보행하시니 7만 중생이 모두 제(諦)를 보게 되었다.……고 설한 것과 같다. 부처님의 전변 형언에 의지해서 교화를 받는 자에게 만약 불변 형언으로써 법을 설하게 되면, 그는 이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세존께서는 세 가지 언어로 사천왕을 위해 법을 설하신 것이다. 위의 세 가지 해석에 준거하면 의리(義理)를 통할 수 있으니, 모두 중생을 말미암아서 듣는 것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니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넷째, 변별해서 해석한다는 것에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분제(分齊)를 밝힌 것이고, 두 번째는 이익을 드러낸 것이다. 처음 중에서 부처님의 한 언음(言音)이 일체에 널리 두루 하니, 말하자면 일체처(一切處)와 일체시(一切時)와 일체법(一切法) 등이다. 근기가 성숙한 자는 멀리 있어도 듣지 않음이 없고, 근기가 미숙한 자는 가까이 있어도 듣지 못한다. 일체처에 두루 한다는 것은 가령 『지론(智論)』의 목련이 소리를 찾을 때 지극히 먼 것이 가까운 것과 같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일체시에 두루 함이란 말하자면 이 원음이 미래제가 다하도록 쉰 적이 없는 것이고, 세 번째 일체 법에 두루 함이란 1법도 원음으로 선설(宣說)한 것이 아님이 없는 것이며, 네 번째 일체 중생에 두루 함이란 소위 이 원음이 어떤 근기라도 개각(開覺)하지 못함이 없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어째서 추자(鶖子)는 자리에 있으면서도 귀머거리처럼 듣질 못하는가? 풀이하면, 원음이 들을 수 있음에만 이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이 듣지 못하는 곳에도 이를 수 있기 때문에 ‘두루 이른다’고 이름붙인 것이다.
【문】이것이 만약 보편(普遍)이라면, 어찌하여 어음(語音)과 굴곡(屈曲)과 전표(詮表)가 되는가? 설사 그렇더라도 무엇을 잃는 것인가? 둘 다 허물이 있다. 어째서인가? 이것이 만약 등편(等遍:균등하고 보편적임)이라면 음곡(音曲)을 잃기 때문이고, 가령 굴곡을 간직한다면 등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선, 만약 등편을 말미암는다면 그 음곡을 잃으니, 이 원만함은 음(音)이 아니다. 만약 굴곡을 말미암는다면 그 등편을 어기는 것이니, 이 음은 원만함이 아니라고 해석한다. 여기서는 곡(曲)을 무너뜨리지 않고도 등편이고, 두루 함을 움직이지 않고도 운(韻)의 차이가 있으니, 이를 여래의 원음이라 하지 심식(心識)의 사량 경계라 하지 않는다.
둘째, 이익이란 만약 소승에 의지하면, 여래의 언음이 반드시 일체에게 다 유리한 이익이 있는 것이 아니다. 마치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천우(天雨) 등을 물으신 것이 법륜의 음성으로 섭수한 것이 아닌 것과 같다. 만약 대승 등이라면, 여래가 내는 세속의 언음이 모두 큰 이익이 되지 않음이 없기 때문이다. 가령 부처님께서 성(城)에 들어가셔서 걸식하는 소리를 내는 것은 성에서 똑같이 들은 자들에게 모두 이익을 얻게 하기 때문이다. 경에 이르기를 “모든 부처님의 음성과 어언(語言)과 위의(威儀)와 진지(進止)는 불사(佛事)가 아님이 없다”고 하였다.
‘셋째, 어긋남을 회통함’ 중에서 문답은 두 단락으로 나뉜다. 물음 중에서 먼저는 어긋난 경문을 인용한 것인데, ‘묻기를, 만약에’ 이하는 올바로 물은 것이다. 처음 중에서 멸려거어(蔑戾車語)라는 것은 한역하면 구예어(垢穢語)이다.
답 중에서 먼저는 논석(論釋)을 인용하였는데, ‘위의 세 가지 해석에 준거하면’ 이하는 장주(章主)의 말이다. 처음 중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 다시 다음의 뜻’이란 부처는 일음을 갖추어서 설하지만, 저 사천왕의 의요(意樂)를 원만히 하고자 하기 때문에 세 가지 언어로써 설한다. ‘둘째, 다시 다음의 뜻’이란 부처님은 일음으로 법을 설할 뿐만 아니라 일체의 언음을 잘 이해하기 때문에 법을 설해서 중생을 이해시켜 의심을 끊게 한다. ‘셋째, 다시 다음의 뜻’이란 전변의 형언으로 교화 받는 중생을 위하기 때문에 세 가지 언어로 설한다. ‘가령 부처 등을 설함’이란 『지도론(智度論)』의 경문에 나오는 불변의 형언 중에서 인용한 것이다. ‘위의 세 가지 해석에 준거한다’는 것은 위의 세 가지 ‘다시 다음에’를 가리킨 것이다.
‘넷째, 변별해서 해석함’ 중에서 먼저는 분제(分薺)를 해석한 것이고, 둘째, ‘이익’ 이하는 그 이익을 나타낸 것이다. 처음 중에서 먼저는 올바른 해석이며, 나중은 문답으로 의심을 없앤 것이다. 처음 중에서 ‘부처님의 한 언음’ 이하는 총체적인 표식이고, ‘일체처에 두루 한다’ 이하는 개별적인 해석이다. 처음 중에서 등(等)이란 것은 일체 중생을 균등히 취하는 것이라, 아래에서 ‘일체 중생에 두루 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다.
『지론』은 제12권이다. ‘만약 그렇다면 어째서’ 등은 앞을 인(因)한 것이다. 추자(鶖子)는 사리불이다. 사리불의 어머니가 눈이 추준(鶖蹲)과 같았는데, 이 같은 어머니가 낳은 자식이기 때문에 이름을 추자라고 한 것이다.
나중의 둘 가운데 처음의 물음 중, 먼저는 물은 것이고, 나중의 ‘설사 그렇더라도’ 이하는 허물을 함께하는 것이다. 둘째의 답 가운데 ‘만약 등편(等遍)을 말미암으면’ 등은 여전히 허물을 함께함을 해석한 것이고, ‘지금 곧’ 이하는 바른 답이다. 답 중에서 ‘굴곡을 무너뜨리지 않고서도 등편(等遍)’이라 함은 ‘이것이 만약 등편이라면’의 질문에 대한 답이다. ‘두루 함을 움직이지 않고서도 운(韻)의 차이가 있다’는 것은 ‘가령 굴곡이 존재한다면’이란 질문에 답한 것이다. ‘이것이 소위 여래 등’ 이란 부처의 원음은 정(情)을 초월하고 견(見)을 끊은 것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둘째, 이익’ 중에서 먼저는 해석이고, 나중은 인증이다. 처음 중에서 ‘아난에게 천우(天雨) 등을 물었다’는 것은 세속의 언어이지 법륜의 소리가 아니다. ‘대승 등’이란 여래가 내는 일체의 언음이 이익 되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세속의 언음이 모두 법륜의 소리에 섭수되지 않음이 없다. ‘경에서 말하길’이란 「부사의품」의 경문이다.
5) 법신장(法身章)
【章】법신의 뜻은 4문으로 나눈다. 첫 번째, 명칭을 해석한 것에서 법이 궤칙을 뜻하고 신(身)이 의지(依止)를 뜻한다면, 법이 곧 신(身)이 되는 것이라 이 또한 이름 하여 자성신(自性身)이라 한다.
두 번째, 체성(體性)이란 것에는 간략히 열 가지가 있다. 첫째는 『불지론』에 의거한 것인데, 오직 비추어지는 진여의 청정법계를 성품으로 삼고, 나머지 네 지혜 등은 모두 보(報)와 화(化)에 속한다.
둘째는 혹은 오직 지(智)만을 기준으로 한 것이니, 가령 무성섭론(無性攝論)에서는 더러움도 없고 걸림도 없는 지(智)를 법신으로 삼기 때문에 2장애를 여읜다고 한다. 여러 대덕(大德)이 해석하기를 “이 경계를 섭수해서 마음을 따름에 의거하는 것을 이름 하여 법신이라 하니, 법신이 되지 않으면 이 지(智)는 이(理)가 아니다”고 하였다. 여기서는 일체의 모든 법이 진여에 즉하니, 하물며 이 진지(眞智)가 여(如)하지 않겠는가? 이미 즉(卽)함이 여(如)하니, 어찌 경계를 섭수함을 기다리겠는가? 하고 해석한다.
셋째는 지혜이기도 하고 경계이기도 한 것이다. 예를 들어 양(梁)의 『섭론』에 이르기를 “오직 여여(如如)와 여여지(如如智)만이 홀로 존재하는 것을 이름 하여 법신이라 한다”고 하였다.
넷째는 경계와 지혜가 쌍으로 민절한 것이다. 경에 이르기를 “여래의 법신은 마음도 아니고 경계도 아니다”고 하였다.
다섯째는 이상의 4구(句)를 합쳐서 하나의 걸림 없는 법신이 되니, 설하는 것마다 모두 옳다.
여섯째는 이상의 총체적이고 개별적인 5구가 서로 융화하고 형탈해서 이 5설(說)을 민절하는 것이니, 통연(通然)하여 의탁함이 없는 것을 법신으로 삼는다. 이상은 단적으로 경계와 지혜의 변별에 입각한 것이다.
일곱째는 5분(分)과 비원(悲願) 등의 법행 공덕을 통틀어 수습한 것이니, 이 모두가 법신의 수습 아님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생(修生)의 공덕이 필연코 이(理)를 증명하기 때문에 융섭(融攝)하여 걸림이 없으니, 앞의 지설(智說)과 같다.
여덟째는 보화(報化)의 색상(色相) 공덕을 통틀어 거두는 것이니, 모두가 이 법신의 거둠이 아님이 없기 때문이다. 『섭론』 가운데 32상(相) 등은 모두 법신의 섭수에 들어가는데, 여기에 세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상즉여(相卽如)이기 때문에 이(理)의 법신의 돌아가는 것이고, 둘은 지(智)가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지(智)의 법신에 속하는 것이며, 셋은 당장의 상(相)이 모두 공덕법이기 때문에 이름 하여 법신이라 하는 것이다.
아홉째는 일체의 삼세간을 통틀어 섭수하기 때문이고, 중생과 기(器)가 부처 아님이 없기 때문이며, 일대(一大)의 법신이 10불을 갖추기 때문이니, 3신(身)등이 모두 이 가운데 있는 것은 지정각(智正覺)의 섭수이기 때문이다.
열째는 앞의 아홉을 총괄해서 하나의 총구(摠句)로 삼으니, 이른 바 이것이 여래의 무애자재한 법신의 뜻이다.
세 번째, 출인(出因)에는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요인(了因)이니, 본래 있는 진여 법을 비춰서 나타내기 때문이다. 둘째는 생인(生因)이니, 뛰어난 공덕을 생성하여 수기(修起)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생료무애인(生了無碍因)이니, 생(生)과 요(了)가 상즉해서 두 과(果)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넷째는 이 뛰어난 공덕을 총괄해서 소의(所依)의 인(因)으로 삼고, 기틀의 현용(現用)을 각인하여 소성(所成)의 과(果)로 삼는 것이다.
네 번째, 업용(業用)에도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이 이(理)의 법신이 모든 관지(觀智)와 더불어 각(覺)을 여는 것이 된다. 경에 이르기를 “법신이 법을 설해서 뜻[義]을 수여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둘째는 이것에 의거해 보화(報化)를 일으킴으로써 중생을 이롭게 하는 뛰어난 업용이기 때문이다. 셋째는 혹은 나무 등을 지어서 은밀히 섭화(攝化)하기 때문이다. 넷째는 모든 진도(塵道)와 모단(毛端) 등의 처소에 두루 하면서 중중자재하는 무애의 업용이다.
【記】법신장은 앞에서 원음을 논하면서, 이 원음을 갖춘 부처가 의거하는 몸은 무엇이냐고 했기 때문에 이 단락이 있는 것이다.
첫째는 명칭을 들어서 장(章)을 연 것이다. 처음의 ‘명칭을 해석함’ 이하는 개별적인 해석이다. 개별적인 해석 가운데 ‘궤지(軌持)의 뜻’ 중에서 궤(軌)는 궤칙이고 지(持)는 자성을 유지하는 뜻이다. ‘신(身)이 의지(依止)이다’라는 것은 적취(積聚)의 뜻이 있고, 의지하는 것의 뜻이 있는데, 여기서는 후자를 따른다. ‘법에 즉함이 신(身)이 된다’는 것은 이 궤지의 뜻에 즉함이 신(身)이 되는 것이니, 이는 지업석(持業釋)이다. ‘또한 이름 하여 자성신이라 한다’는 것은 자성을 유지하는 뜻이다. 또 나머지 곳의 법신 역시 이름 하여 자성신이라 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둘째, 체성(體性)’에선 수(數)를 여는 것과 올바르게 해석하는 두 단락이 있다. 해석 중에 ‘네 가지 지혜 등’이란 대원경지 등의 네 가지 지혜이니, 이는 「소전장(所詮章)」 초교(初敎)의 뜻이다. 초교 중에선 유위와 무위가 각기 다르기 때문에 무위의 진여를 법신으로 삼고 유위의 네 가지 지혜를 보신과 화신으로 삼는다. ‘더러움도 없고 걸림도 없는 지혜’에 있어서 무구지(無坵智:더러움이 없는 지혜)는 정체지(正體智)이고, 무애지(無碍智:걸림없는 지혜)는 후득지(後得智)이다. ‘소위 2장애를 여의다’는 것은 번뇌와 소지(所知)의 두 장애이다. 번뇌장은 이(理)를 미혹해서 일어나는 것이고, 소지장은 사(事)를 미혹해서 일어나기 때문에 무구지로써 이(理)에 미혹된 장애를 끊고 무애지로써 사(事)에 미혹된 장애를 끊는다. ‘모든 대덕’이란 『섭론』을 해석한 모든 대덕을 통틀어 가리키는 것이다. ‘여기서의 해석’ 이하는 장주의 말이다. 「소전장」에 이르기를 ‘2구, 3구는 종교(終敎)이고, 4구는 돈교(頓敎)이다’고 하였다. ‘다섯째, 이상의’부터 ‘법신이’ 등에 이르기까지에서 만약 「소전장」의 경문이 없다면 이 5, 6구는 2승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장(章)에서 ‘이 2구는 1승’이라 말했기 때문에 1승이다.
【문】2구가 어떻게 다른가?
【답】혹자는 “다섯째라면 분상(分相)이고, 여섯째라면 해섭(該攝)이다” 하지만, 이는 곤란한 점이 있다. 말하자면 다섯째라면 위의 4구를 합쳤기 때문에 해섭의 뜻은 드러나고 분상의 뜻은 숨는다. 여섯째라면 앞의 다섯을 민절하기 때문에 이 역시 해섭이 아니다.
여기서는 1승에 입각해 합침과 민절함의 두 가지 뜻을 갖추고 있다고 해석한다. 이 두 가지 뜻을 구족했음을 볼 때, 3승 등의 법이 곧 1승임을 보는 것은 해섭의 뜻이고, 이같이 보면 4교(敎) 위에다 원만의 법을 세우기 때문에 분상이다. 만약 두 문을 나누고자 하면 곤란하다.
‘이상은 단적으로 경계와 지혜에 입각해 변별한 것이다’는 아래의 나머지 법을 통틀어 섭수해서 법신의 뜻으로 삼는 것을 대대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아래의 4구중에서 처음의 2구는 3승이고 나중의 2구는 1승이다. ‘일곱째, 5분(分)을 통틀어 섭수한다’ 등이란 앞에서는 오직 경계와 지혜뿐이니 이 5분과 비원(悲願) 등을 통틀었기 때문에 통틀어 섭수한다 한 것이다. ‘앞의 지설(智說)과 같다’는 것은 앞의 ‘일체 법도 오히려 진여에 즉한 것이거늘, 하물며 이 진지(眞智)가 여(如)하지 않겠는가?’를 가리킨 것이라면, 수생(修生)의 공덕도 반드시 이(理)를 증명하기 때문에 법신의 수습 아님이 없다.
【문】‘여덟째, 보신과 화신을 통틀어 수습한다’는 것은 수생(修生)만이 법신인 것이 아니라 보신과 화신의 색상(色相)도 법신이라는 것이다. 섭론이란 인증이다. ‘세 가지 뜻이 있다’ 등이란 「소전장」18)에 이르기를 “이 또한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2승의 방편으로 회향해서 진실한 법신을 점차적으로 설하는 것이다. 그러나 믿지 않을까 걱정해서 이러한 공덕으로써 법신이 됨을 설하는 것이니, 쉽게 믿고 받아들여서 관찰하여 보게 하기 때문이다. 둘은 저 공덕 법으로써 법신을 삼기 때문에 그 속에 섭수되어 있는 것이다. 이상은 모두 시교의 설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또 32상은 낳음도 없고 성품도 없기 때문에 이 역시 진여법신이니, 이는 종교의 설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고 하였으니, 저것에도 세 가지 해석이 있는데, 이것과는 어떻게 다른가?
【답】첫째, 상즉여(相卽如)이기 때문이라 말한 것은 저것 가운데 종교의 설을 기준으로 한 것에 해당한다. 둘째, 지(智)가 나타낸 것 등이란 초교(初敎)의 처음 해석에 해당한다. 셋째, 당상(當相) 등이란 초교의 나중 해석에 해당한다. 그러나 하나의 해석에 배대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지(智)가 나타낸 것 등을 초교의 처음 해석에 배대하는 것은 어렵다. 말하자면 초교 가운데 이(理)의 법신은 있어도 지(智)의 법신은 없기 때문이니, 어떤 지(智)의 법신에 배속시키겠는가?
여기서는 종교 가운데 지(智)의 법신과 이(理)의 법신 두 가지 뜻이 있기 때문에 ‘상즉여이기 때문이다’는 이의 법신이고, ‘지(智)가 나타낸 것이기 때문이다’는 지의 법신이라고 해석한다.
【문】‘아홉째, 통틀어 섭수한다’ 아래의 2구는 별교의 뜻인 2구와 어떻게 다른가?
【답】혹자는 “아홉째 구(句)는 분상(分相)이고, 열째 구(句)는 해섭(該攝)이다”라고 하지만, 이 뜻은 곤란한 점이 있다. 말하자면 아홉째 구(句)에서 ‘3신 등이 모두 이 속에 있다’고 말했다면, 3승의 3신이란 뜻을 섭수한 것이기 때문에 해섭의 뜻이 나타난 것이요, 열째 구(句)는 해섭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1승에 입각하여 두 구(句)의 뜻이 다르다고 해석한다. 이 두 가지 뜻을 갖춘 1승이 3승을 통합해서 거둔다면 해섭이요, 이같이 통합해서 거둔다면 3승위에 수립하는 것이므로 3승과 다르다면 분상이다.
【문】‘넷째, 소성(所成)의 과(果)에 이른다’는 것에 있어서 뛰어난 덕은 곧 과덕인데, 어째서 소의(所依)의 인(因)이라 말하는가?
【답】비록 과덕이라도 다만 물(物)을 기준으로 해서 성도(成道)의 시현(示現)을 말했을 뿐이니, 기연을 폐기하고 자(自)를 기준으로 하는 것은 성취함도 성취하지 않음도 없기 때문이다.
‘법신이 법을 설함은 뜻을 수여하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진여 법신이 모든 관지(觀智)로 비추는 경계가 되어서 지해(智解)를 낳기 때문에 수여(授與)이다.
【문】업용(業用) 4구(句)와 1승, 3승은 무엇을 말하는가?
【답】혹자는 “처음의 2구는 3승이고, 나중의 2구는 1승이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3신을 논한 것이 3승이기 때문에 처음의 2구는 3승이고, ‘셋째 혹은 나무 등을 짓는다’고 함은 삼세간이 모두 불신(佛身)이기 때문에 나무 등이라 말한 것이므로 1승이다. 제4구는 드러냄이다.
여기서는 처음 2구는 3승이고, 제4구는 1승이고, 제3구는 1승과 3승을 통틀은 것이라고 해석한다. ‘소위 나무 등을 지어서 은밀히 섭화(攝化)한다’란 3승에선 자신화(自身化)와 타신화(他身化)와 비신화(非身化)의 세 가지 뜻이 있으니, 자신(自身)이 물(物)로 화하는 것이 자신화이고, 타신(他身)을 물(物)로 화하게 하는 것은 타신화이고, 나무 등으로 변화해서 은밀히 섭화하는 것은 비신화이다. 이 뜻이 3승에 통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6) 십세장(十世章)
【章】10세(世)의 뜻은 두 가지 문으로 나눈다. 첫째는 건립하는 것으로 가령 과거세 중에서 법이 아직 시들지 않았을 때를 이름 하여 과거의 현재라 하고, 다시 과거를 조망해서 저 과거라고 이름붙인 것은 과거의 과거가 되고, 지금의 현재를 조망하면 이것이 아직 있지 않으니 이 때문에 지금을 이름 하여 과거의 미래라 한다. 이 하나가 3세를 갖춰서 함께 과거에 존재한다.
또 저것이 이미 시들고 나서 현재의 법이 일어나니, 아직 시들지 않을 때를 이름 하여 현재의 현재라 하고, 저 과거가 이미 멸해서 없는 것을 조망하기 때문에 저것을 이름 하여 현재의 과거라 하고, 미래가 아직 있지 않음을 조망하기 때문에 이름 하여 현재의 미래라 하니, 이 세 가지가 하나에 갖춰져서 함께 현재에 존재한다.
또 저 법이 시들고 나서 미래의 법이 일어나니, 아직 시들지 않을 때를 이름 하여 미래의 현재라 하고, 저 현재가 이미 시들어 없는 것을 조망하기 때문에 이름 하여 미래의 과거라 하고, 다시 미래도 아직 있지 않음을 조망하기 때문에 이름 하여 미래의 미래라 하니, 이 세 가지가 하나에 갖춰져서 함께 미래에 존재한다.
이 아홉 중에서 각각의 세 가지는 현재로서 유(有)이고, 여섯은 과거와 미래로서 함께 무(無)이다.
【문】만약 과거 미래에서 각기 3세를 세운다면, 이 같은 과거와 미래가 이미 각각 끝이 없고, 이 3세도 끝이 없는데, 어째서 다만 3중(重)으로써 아홉을 설하는가?
【답】과거와 미래를 시설하여 다시 세우고자 하는 것이 앞의 문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오직 아홉이 있을 뿐이다. 또 이 9세(世)가 총체적으로 일념이 되고 9세가 역연(歷然)하니, 이 같은 총(摠)과 별(別)을 합쳐서 논한 것이 10세이다.
【記】「십세장」은 앞의 불보(佛寶) 중에서 원음과 법신의 뜻을 변별한 것이다. 이처럼 삼보가 3세속에 이어져 끊이지 않으니, 이 때문에 세시(世時)에 의거하는 단락이 있는 것이다.
【문】어느 경문에 의거해서 10세의 뜻을 변별하는가?
【답】「이세간품」에 이르기를 “과거세에서 과거를 설하고 과거세에서 현재를 설하고 과거세에서 미래를 설하고, 현재세에서 과거를 설하고 현재세에서 평등을 설하고 현재세에서 미래를 설하고, 미래세에서 과거를 설하고 미래세에서 현재를 설하고 미래세에서 무진(無盡)을 설한다. 현재세에서 3세를 설하는 것이 곧 일념이다”고 하였으니, 이 경문에 의거한 것이다.
【문】만약 미래가 무진이기 때문에 미래세에서 무진을 설하는 것이라면, 과거가 무진이기 때문에 과거세에서도 무진을 설하는가?
【답】소(疏)19)에 이르기를 “미래는 계속 일어나기 때문에 무진이고, 과거는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무진이라 말하지 않는다”고 했다.
【문】현재 속에서 평등을 설한 것은 별이(別異)가 없기 때문에 평등을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와 미래 속에서 과거와 미래를 설했다면, 이 역시 별이가 없기 때문에 과거세에서 평등을 설하고 미래세에서도 그러한가?
【답】소(疏)에 이르기를 “현재는 유(有)이기 때문에 평등을 말하고, 과거와 미래는 무(無)이기 때문에 예로 들지 않았다”고 하였다.
【문】총체적인 일념이란 9세 중에 어디에 해당하는가?
【답】별개의 9세 중에는 달리 치우침이 없기 때문에 뜻에 맞지 않음이 없고, 경에서도 현재의 일념을 들었다.
여기서는 먼저 명칭을 들어서 문(門)을 열었고, 나중의 ‘첫째, 건립’ 이하는 해석이다. 해석 가운데 ‘건립’이란 『도신장』에서 어제의 2일, 오늘의 1일, 내일의 2일 등 5일을 기준으로 해서 논한 것이다. 말하자면 어제의 2일이란 어제 전의 어제이고, 오늘의 1일이란 현재이고, 내일의 2일이란 내일 뒤의 내일이다.
【문】이를 기준으로 해서 9세를 논한 것은 무엇을 말함인가?
【답】어제의 전이라면 오직 과거의 과거 1세뿐이다. 어제 가운데 2세를 갖추고 있으니, 말하자면 어제가 당체(當體)라면 과거의 현재이고, 오늘로써 조망하면 현재의 과거이기 때문이다. 오늘에는 3세를 갖추고 있으니, 이른바 금일이 당체라면 현재의 현재이고, 어제로써 조망하면 과거의 미래이고, 내일로써 조망하면 미래의 과거이기 때문이다. 내일은 2세를 갖추고 있으니, 이른바 내일이 당체라면 미래의 현재이고, 오늘로써 조망하면 현재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내일의 뒤라면 오직 미래의 미래 1세뿐이다. 이것이 5일을 기준으로 해서 9세를 논한 것이다.
‘건립’에서 먼저는 9세를 세운 것이고, 또 ‘9세가 총체적 일념이 된다’ 이하는 10세를 변별한 것이다. 처음 중에서 먼저는 건립을 바르게 밝힌 것이고, 나중은 문답으로 의심을 없앤 것이다. 처음 중에서 먼저는 9세를 바르게 밝힌 것이고, 나중의 ‘이 아홉 중에서 각기 세 가지’ 등은 그 유무(有無)를 변별한 것이다. 처음 중에서 먼저는 과거ㆍ현재ㆍ미래 속에서 각기 3세를 수립한 것이고, 나중은 각기 하나 속에 3세를 갖춤을 나타낸 것이다.
‘하나가 3세를 갖춤’ 등에는 두 가지 해석이 있으니, 혹자는 ‘하나를 갖춘 3세이니 구족의 갖춤이 아니다’고 하고, 혹자는 ‘하나 속에 3세를 갖추었다’고 하니, 아래의 둘은 이에 준거해서 알라.
【문】‘이 아홉 중에서’부터 ‘함께 무(無)이다’에 이르기까지, 이 중에서 만약 유력과 무력, 유체와 무체를 논한다면, 셋은 유력의 체(體)를 나타내고, 여섯의 과거와 미래는 무력의 체(體)가 되는 것인가?
【답】혹자는 “동교(同敎)를 기준으로 한다면 셋은 유(有)를 나타내고 여섯의 과거와 미래는 무(無)이다. 만약 별교를 기준으로 한다면, 내가 근거하는 것에 따라 유력과 무력, 유체와 무체를 논하는데, 무슨 까닭인가? 「보현품소」에 ‘3세가 곧 일념이다’를 해석하여 말하기를 ‘다만 세(世)의 상입이다 함은 하나하나의 세법(世法)이 현세에 들어가 위(位)를 증명하지 않고 대비(對比)를 이루니, 이는 3승의 별행(別行)을 기준으로 해서 이룬 것이다. 또 9세의 자재함을 섭수(攝受)하여 모두 증명하니, 보현의 자재함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이다’고 했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세법이 현세에 들어가서 위(位)를 증명하지 않고 대비를 이룬다’를 기준으로 하면, 셋은 유(有)를 나타낸 것이고, 과거와 미래는 무(無)이다. ‘또한 9세의 자재함을 섭수하여 모두 증명한다’를 기준으로 하면, 마음에 따라 들어서유력과 무력, 유체와 무체를 논한 것이다.
지금 해석하면, 세(世)를 기준해서 유무(有無)와 중즉(中卽)의 뜻을 변별했기 때문에 세(世)를 기준으로 하면 셋은 유(有)이고, 과거와 미래는 무(無)이다. 만약 중증(中卽)을 논한다면, 무엇을 따라서 유력과 무력, 유체와 무체를 논하리오.
【문】어떻게 그런 줄 아는가?
【답】「유전장」20)에 이르기를 “첫째, 이 현재법은 당래(當來)를 말미암아 있고, 그리고 과거를 말미암아서 멸하고 생(生)한다. 그러므로 현재는 2세의 성취한 것이 되어서 현재의 무체로 하여금 과거와 미래에 들어가게 한다. 둘째, 이 현재법은 시드는 것을 과거로 하고, 나중을 이끌어서 당래(當來)를 짓는다. 그러므로 2세는 현재의 성취한 것이 되어 과거와 미래의 무체로 하여금 현재에 들어가게 한다”고 하였으니, 이처럼 서로 유력과 무력, 유체와 무체를 논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문】만약 1승에서도 논하기를 ‘셋은 유(有)를 나타내고 과거와 미래는 무(無)이다’고 한다면, 앞서 「보현품소」를 인용한 것과 여기에서 3승을 기준으로 한 것과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답】저것은 지화(地畵)를 기준해서 3승과 3세를 논했기 때문에 이 ‘셋은 유(有)를 나타내고 과거와 미래는 무(無)이다’와는 다르다. 문답으로 알 수 있다.
【문】‘또 이 9세가 총체적 일념이 된다’ 등은 전문(錢門) 가운데 개별적인 10전(錢) 외에 총체적인 1전을 세우지 않는데, 어째서 세문(世門)에선 개별적인 9세 이외에 다시 총체적인 일념을 세우는가?
【답】혹자는 “화엄이 십십(十十)의 법문이기 때문이니, 전문(錢門)은 개별 속에 이미 열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총체적인 것을 덧붙이지 않았고, 세문의 개별 속에선 오직 아홉뿐이기 때문에 총체적인 일념을 덧붙인 것이다” 하고, 혹자는, “즉(卽)하지도 않고 여의지도 않는 두 가지 뜻을 갖추었기 때문이니, 즉하지 않음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세문에서 다시 총체적인 것을 덧붙이고, 여의지 않음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전문에선 총체적인 것을 덧붙이지 않는다” 한다. 혹자는 “전문도 마땅히 총체적인 것을 덧붙여서 11전이 되지만, 생략하였다”고 한다. 여기서는 첫 번째 뜻으로 해석한다.
【章】둘째, 상섭(相攝)에 두 문이 있으니, 첫째는 상즉이고 둘째는 상입이다. 이 둘의 성립은 두 가지 뜻 때문이니, 하나는 연기가 서로 말미암는 뜻이고, 둘째는 법성이 융통하는 뜻이다. 첫째, 연기가 서로 말미암는 것은 예를 들면 과거의 현재법이 아직 시들지 않을 때는 자체가 현재이고, 현재의 현재로써 조망하면 곧 현재의 과거이다. 그러므로 저 법도 현재이기도 하고 과거이기도 하니, 조망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또 현재의 현재법은 자체가 현재이니 아직 시들지 않았기 때문이고, 과거의 현재로서 조망하면 곧 과거의 미래이고, 또 미래의 현재로서 조망하면 다시 미래의 과거이다. 그러므로 저 법은 현재이기도 하고 과거와 미래이기도 하다. 또 미래의 현재법은 현재이기도 하고 미래이기도 하니, 준거하면 알 수 있다.
또 이 아홉에서는 3세의 현재가 반드시 함께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6세(世)의 과거와 미래도 함께하지 않는다. 하나는 현재이고 둘은 과거와 미래이니, 이 셋은 결정코 함께한다. 그러므로 아홉에서는 그 응하는 것에 따라 숨기도 하고 나타나기도 하니, 함께함과 함께하지 않음[俱不俱] 때문이다.
또한 함께함에 나아가면, 과거의 과거가 없음을 말미암기 때문에 과거의 현재법으로 하여금 존재케 한다. 어째서인가? 만약 저것이 시들지 않으면 이것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 과거의 현재가 있음을 말미암기 때문에 과거의 과거로 하여금 없어지게 하니, 만약 이것이 있지 않으면 저것이 시들지 않기 때문이다. 또 과거의 현재가 있음을 말미암아서 과거의 미래로 하여금 없어지게 하니, 저것이 아직 시들지 않음을 말미암아 이것을 아직 존재하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또 이 과거의 미래가 없음을 말미암아서 이것을 아직 존재하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또 이 과거의 미래가 없음을 말미암기 때문에 저 과거의 현재로 하여금 유(有)를 이루게 하니, 만약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시들기 때문이다. 또 이것이 있지 않음을 말미암아서 저것이 아직 시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과거의 과거가 없음을 말미암기 때문에 과거의 미래로 하여금 없어지게 하는데, 말하자면 만약 저것이 없지 않으면, 이것이 현재 유(有)를 이루지 못하고, 현재 유를 이루지 못하면 이것은 미래에 무(無)를 이루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것의 무가 전전함은 저것의 무를 말미암는 것이다. 또 과거의 미래가 없음을 말미암기 때문에 과거의 과거로 하여금 없어지게 하니, 앞의 것을 돌이켜서 생각하라. 가령 과거의 3세가 이 여섯 가지 뜻에 있어 서로 말미암[相由]으니 현재와 미래도 각기 여섯 가지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함께하지 않음에도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서로 말미암음이 드러나는 것에도 여섯 가지 뜻이 있다. 말하자면 과거의 현재가 있음을 말미암아 바야흐로 현재의 현재로 하여금 유(有)를 이루게 한다. 어째서인가? 만약 저것이 없다면, 법이 시들어서 이 현재의 유(有)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현재의 현재가 있음을 말미암기 때문에 바야흐로 과거의 현재가 유(有)임을 아는 것이니, 만약 이것이 유가 아니라면 저 유는 성립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째서인가? 만약 이 유가 없다면 저 유로 하여금 무(無)로써 시들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니, 시들지 못하는 유는 연기의 유가 아니기 때문에 유를 이루지 못한다. 현재의 현재가 미래의 현재를 조망하는 것에도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앞의 것을 준거해서 생각하라.
과거의 현재가 미래의 현재를 조망하는 것에도 두 가지 뜻이 있다. 말하자면 만약 과거의 현재가 유(有)가 아니라면 미래의 현재가 유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니, 이와 반대의 것도 준거해서 알라.
【記】‘둘째, 상섭문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상즉이고 하나는 상입이다’라는 것은 현문(玄門)을 든 것이다. ‘이 둘이 이루어지는 것’ 이하는 둘의 소이(所以)를 연 것이다. ‘첫째, 연기가 서로 말미암는다’ 이하는 먼저 연기가 서로 말미암음을 해석함에 있어 처음부터 미래의 일체겁에 이르기까지를 과거세 등으로 돌이켜 놓은 것은 9세 법상(法相)의 즉입(卽入)을 나타낸 것이다. ‘무릇 서로 말미암음을 논하자면’ 이하는 즉입의 두 문을 개별적으로 연 것이다. 처음 중에서 먼저는 서로 말미암음을 바르게 든 것이고, 나중의 ‘이 도에 의거해서’ 이하는 서로 말미암기 때문에 즉입함을 나타낸 것이다. 처음 가운데 있어 처음부터 ‘준거해서 알 수 있다’에 이르기까지는 중간의 7세를 기준으로 해서 차례대로 서로 말미암는 뜻을 대략적으로 변별한 것이다. 또 ‘이 9세 가운데 3세’ 이하는 널리 함께함과 함께하지 않음의 뜻을 연 것이다. ‘그러므로 이 9세 총체적으로’ 이하는 차례대로 사이를 뛰어넘는 뜻을 널리 연 것이다.
이 중에서 먼저는 대의(大意)를 기준으로 해서 서로 말미암는[相由] 뜻을 논하였고, 나중은 경문에 따라 올바로 해석하였다. 대의 중에서 혹자는 “서로 말미암는 수(數)가 총체적으로는 아홉이지만, 간략히 하면 함께함과 함께하지 않음을 벗어나지 못한다. 말하자면 첫 째는 함께함이 서로 말미암는 것이고, 둘째는 함께하지 않음이 서로 말미암는 것이며, 셋째는 차례로 서로 말미암는 것이고, 넷째는 사이를 초월하여 서로 말미암는 것이며, 다섯째는 현재의 현재가 서로 말미암는 것이고, 여섯째는 현재가 서로 말미암는 것이며, 일곱째는 은밀함이 서로 말미암는 것이고, 여덟째는 전전(展轉)함이 서로 말미암는 것이며, 아홉째는 무무(無無)가 서로 말미암는 것이다. 무무 중에서 만약 미래의 미래가 서로 말미암음과 과거의 과거가 서로 말미암음을 연다면 열이 된다”고 하였다. ‘함께함과 함께하지 않음[俱不俱]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에서 ‘현재가 서로 말미암는 것이다’라 함은 함께함이 서로 말미암는 것이고, ‘현재의 현재가 서로 말미암는 것’과 ‘은밀함이 서로 말미암는 것’과 ‘전전(展轉)이 서로 말미암는 것’과 ‘무무가 서로 말미암는 것’은 함께하지 않음이 서로 말미암는 것이다. ‘차례로 서로 말미암는다’고 함에는 바로 함께함의 뜻과 겸해서 함께 하지 않음의 뜻도 가지고 있다. ‘사이를 초월하여 서로 말미암는다’고 함은 곧 함께하지 않음의 뜻과 겸하여 함께함의 뜻도 가지고 있다.
【문】현재가 서로 말미암는[相由] 것이라면 함께함이고, 은밀함이 서로 말미암는 것과 현재의 현재가 서로 말미암는 것이라면 함께하지 않음이라고 본문 자체에 나타나 있는데, 어째서 차례로 서로 말미암는 것이 바로 함께함의 뜻과 겸하여 함께하지 않음의 뜻도 가지고 있다고 하는가?
【답】‘차례로 서로 말미암음’이란 과거의 과거가 없음을 말미암기 때문에 과거의 현재가 있음이 성립한다. 혹은 이와는 반대로 과거의 현재가 있기 때문에 과거의 미래가 없음이 성립하고, 혹은 이와 반대라면 함께함이다. 과거의 과거가 없기 때문에 과거의 미래가 없음이 성립하는 것이고, 혹은 이와 반대라면 이 둘은 자체의 현재가 그와 더불어 서로 말미암는 것을 초월하기 때문에 함께하지 않음이 겸하여 있는 것이다.
【문】어째서 사이를 초월하여 서로 말미암는 것이 바로 함께하지 않음과 겸하여 함께함의 뜻이 있다 하는가?
【답】사이를 초월하는 것은 과거의 과거가 없기 때문에 과거의 현재가 성립한다면 이는 차례로 서로 말미암는 것이니, 그러므로 자체의 현재를 초월해서 과거의 과거가 없다고 말하기 때문에 과거의 미래가 없음이 성립하고, 또 과거의 과거가 없기 때문에 현재의 과거가 없음이 성립한다. 따라서 ‘과거의 과거가 없기 때문에 현재의 과거가 없음이 성립한다’는 것은 함께하지 않음의 뜻이고, 과거세 중에서 자체의 현재를 초월해서 그와 더불어 서로 말미암기 때문에 함께함의 뜻이 된다.
그러나 이 뜻은 곤란하다. 먼저 서로 말미암음의 수(數)를 논란한다면, 서로 말미암음의 수(數)가 열[十]에서 그치질 않는다. 만약에 무무(無無)가 서로 말미암음을 짓는다면, 이에 대해서 마땅히 유유(有有)가 서로 말미암는 것을 세워야 하는데, 어째서 열지 않는 것인가? 또 무무 중에 미래의 미래가 서로 말미암음과 과거의 과거가 서로 말미암음이 있어야 한다면, 마땅히 미래의 과거가 서로 말미암음과 과거의 미래가 서로 말미암음도 있어야 하는데, 어째서 열지 않는 것인가? 또 함께함이 서로 말미암는 것 중에서는 마땅히 과거의 현재가 서로 말미암음과 현재의 과거가 서로 말미암음과 현재의 미래가 서로 말미암음[相由]과 미래의 현재가 서로 말미암음이 있어야 하는데, 어째서 열지 않는 것인가?
또 차례로 서로 말미암음을 힐난함에 있어 ‘겸하여 함께하지 않음의 뜻이 있다’는 것은 과거세 중에 3세가 함께하면서 서로 말미암는 것인데, 어째서 자체의 현재ㆍ과거ㆍ미래를 초월해서 서로 말미암는 뜻이 함께하지 않음이 된다고 말하는가?
또 초간의 서로 말미암음을 힐난하는 가운데 ‘바로 함께하지 않으면서 겸하여 함께함의 뜻이 있다’는 것은 과거 3세 중에서 과거와 미래가 자체의 현재를 초월해서 서로 말미암는 것이 함께함의 뜻이라 함은 자체 논지가 모순되는 허물이 있는데, 어째서 ‘차례로 서로 말미암는’의 과거가 3세 중의 과거와 미래가 자체의 현재를 초월해서 서로 말미암는다면 함께하지 않음의 뜻이 되고, 사이를 초월하여 서로 말미암음에 이르면 함께함의 뜻이 되는가?
또 차례로 서로 말미암는 것 중에 이미 함께하지 않음의 뜻을 갖췄는데, 어째서 사이를 초월하여 서로 말미암는 것 중에서도 함께하지 않음의 뜻을 논하는가? 그러므로 이 뜻에는 곤란한 점이 있다.
여기서는 ‘서로 말미암음의 명칭’ 이하는 자현(自現)의 간략함에 해당하고, 먼저는 서로 말미암음의 수(數)를 든 것이고, 나중은 모든 문의 분별을 기준으로 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처음 가운데 모두 일흔 두 가지 서로 말미암음이 있으니, 우선 과거의 과거를 기준으로 해서 설한다면, 첫째 과거의 과거가 없음을 말미암기 때문에 과거 현재의 있음이 성립하고, 둘째 과거의 과거가 없음을 말미암기 때문에 과거 미래의 없음이 성립하고, 셋째 과거의 과거가 없음을 말미암기 때문에 현재 과거의 없음이 성립하고, 넷째 과거의 과거가 없음을 말미암기 때문에 현재 현재의 있음이 성립되고, 다섯째 과거의 과거가 없음을 말미암기 때문에 현재 미래의 없음이 성립된다. 여섯째 과거의 과거가 없음을 말미암기 때문에 미래 과거의 없음이 성립되고, 일곱째 과거의 과거가 없음을 말미암기 때문에 미래 현재의 있음이 성립되고, 여덟째 과거의 과거가 없음을 말미암기 때문에 미래 미래의 없음이 성립되니, 이처럼 과거의 과거 1세를 기준으로 해서 여덟 가지 서로 말미암음이 성립된다. 나머지 8세도 마찬가지라서 각기 여덟 가지 서로 말미암음이 있으니, 9곱하기 8이면 합계 일흔두 가지의 서로 말미암음이다.
【문】서로 말미암음[相由]의 ‘서로[相]’는 무엇을 말하는가?
【답】‘과거의 과거가 없음을 말미암기 때문에 과거 현재의 있음이 성립한다’ 중에서 서로 말미암는 까닭은, ‘함께함’ 의 본문에 이르기를 “만약 저것이 시들지 않으면 이것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고 했으니, 과거의 과거가 없음으로써 시들어졌기 때문에 바야흐로 과거의 현재로 하여금 존재토록 성립시킨 것이다. ‘과거의 과거가 없음을 말미암기 때문에 과거의 미래로 하여금 없게 한다’ 중에서 서로 말미암는 까닭은, ‘함께함’의 본문에 이르기를 “과거의 과거가 없음을 말미암아서 과거의 미래로 하여금 없게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만약 저것이 무(無)가 아니면, 이것이 현재 유(有)를 이루지 못하고, 현재 유를 이루지 못하면 이것이 미래에 무를 이루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 무가 전전함은 저 무로 말미암은 것이다”고 했으니, 알 수 있다.
이후부터는 이 설을 예로 한 것이다. 말하자면 과거의 과거가 없음을 말미암기 때문에 현재의 과거로 하여금 없게 한 것이다. ‘소위 과거의 과거가 만약 무(無)가 아니라면’이란 과거의 3세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고, 과거의 3세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현재의 3세도 성립되지 않고, 현재의 3세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현재 과거의 없음도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나 과거의 과거가 없기 때문에 과거 속의 3세가 이루어질 수 있고, 과거 속의 3세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현재의 3세가 이루어질 수 있고, 현재의 3세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현재의 과거로 하여금 무(無)를 이루게 한다. 그러므로 “과거의 과거가 없기 때문에 현재의 과거로 하여금 무(無)를 이루게 한다”고 말한 것이다. 다음에 나오는 것은 이에 유례하여 생각하라.
‘나중은 모든 문의 분별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에는 세 가지 문이 있다. 첫째는 함께함과 함께 하지 않는 문이고, 둘째는 차례와 초간(超間)의 문이고, 셋째는 유유(有有)와 무무(無無)의 문이다. 각기 일흔두 가지의 서로 말미암음을 다한다.
‘첫째, 함께함과 함께하지 않음[俱不俱]이 일흔두 가지를 다한다’는 것은 함께함의 서로 말미암음이 열여덟 가지이고, 함께하지 않음의 서로 말미암음이 쉰 네 가지로 합계 일흔두 가지이다.
【문】함께함의 열여덟 가지는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가?
【답】과거의 과거가 없음을 말미암기 때문에 과거의 현재로 하여금 있게 하고, 또 이와 반대라면 둘이다. 과거의 현재가 있기 때문에 과거의 미래로 하여금 없게 하고, 또 이와 반대라면 넷이다. 과거의 과거가 없기 때문에 과거의 미래로 하여금 없게 하고, 또 이와 반대라면 여섯이다. 그러므로 과거 3세에는 여섯 가지 서로 말미암음[相由]을 갖추고 있다. 가령 하나의 과거 3세 중에 여섯을 갖추었다면, 현재와 미래의 3세에도 마찬가지로 여섯을 갖춘다. 그리하여 3곱하기 6이 되므로 18의 서로 말미암음이다.
【문】함께하지 않음의 쉰네 가지 서로 말미암음은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가?
【답】함께하지 않음에는 세 가지 문이 있다. 말하자면 첫째는 현재의 현재가 서로 말미암음이고, 둘째는 무무(無無)의 서로 말미암음이고, 셋째는 유무(有無)의 서로 말미암음이다. 현재의 현재에는 여섯 가지가 있고, 무무에는 스물네 가지가 있고, 유무에도 스물네 가지가 있다. 무무와 유무를 합치면 마흔여덟 가지이고, 또 현재의 현재 여섯 가지를 더하기 때문에 쉰네 가지의 서로 말미암음을 이룬다.
【문】현재의 현재가 여섯 가지 서로 말미암음이 있다면 그 상(相)은 어떠한가?
【답】본문 자체에 나타나 있다. 말하자면 과거의 현재가 있기 때문에 현재의 현재로 하여금 있게 하고, 혹은 이와 반대라면 둘이다. 현재의 현재가 있기 때문에 미래의 현재로 하여금 있게 하고, 이와 반대라면 넷이다. 과거의 현재가 있기 때문에 미래의 현재로 하여금 있게 하고, 혹은 이와 반대라면 여섯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문】무무 중의 스물네 가지 서로 말미암음이란 그 상(相)이 어떠한가?
【답】게송에서는 “여섯 가지 무세(無世) 중에서 각기 자가(自家)의 하나를 제외하면 4세(世)에서 서로 말미암는 것이라 각기 네 가지 서로 말미암음이 있다”고 하고, 해석에서는 “우선 과거의 과거가 자체 과거의 미래와 더불어 서로 말미암지 않음을 기준으로 한다면, 이는 함께함의 서로 말미암음 때문이지 함께하지 않음의 서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자가의 1무(無)를 제외한다. 그리하여 현재의 과거와 현재의 미래와 미래의 과거와 미래의 미래 등의 네 가지 없음이 그와 더불어 서로 말미암음[相由]을 조망한다면, 과거의 과거 1무세(無世) 중에 네 가지 서로 말미암음을 갖추게 되니, 이처럼 나머지 다섯의 무세(無世)도 각기 자가의 1무(無)를 제외하면 나머지 네 가지 서로 말미암지 않음과 마찬가지가 된다. 그러므로 여섯 속에 각기 넷이 있어서 합하면 6곱하기 4가 되기 때문에 스물네 가지 서로 말미암음을 이루는 것이다”고 하였다.
【문】유무 중의 스물네 가지 서로 말미암음의 그 상(相)은 어떠한가?
【답】게송에서는 “세 가지 현세 중에 각기 자체의 과거와 미래를 제외하니 나머지 네 가지 무세(無世) 속에서 서로 말미암음은 12를 이룬다. 여섯 가지 무세(無世) 중에서 각기 자가의 현재를 제외하니 나머지 두 가지 현세 속에서 서로 말미암음은 12를 이룬다” 하고, 해석하기를 “유(有)로써 무(無)를 조망함에 있어 우선 과거의 현재와 자체 과거의 과거, 과거의 미래가 서로 말미암음을 기준으로 하면, 이는 함께함의 서로 말미암음이지 함께 하지 않음의 서로 말미암음이 아니라서 제외한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과거와 현재의 미래와 미래의 과거와 미래의 미래 등 네 가지 무가 그와 더불어 서로 말미암음을 조망한다면, 과거의 현재에 네 가지 서로 말미암음을 갖춘다. 이처럼 나머지 현재의 현재와 미래의 현재가 있음도 각기 자가의 과거와 미래를 제외한 것이니, 나머지 네 가지 없음[無]의 서로 말미암음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셋 속에 각기 넷이 있어서 3곱하기 4하여 합이 12의 서로 말미암음을 이루는 것이다.
무로써 유를 조망함에 있어 각기 여섯 가지 무세(無世)가 있는데, 각기 자가의 현재세를 제외하고 나머지 두 가지 현재와 서로 말미암음을 조망하여 우선 과거의 과거와 과거의 현재가 서로 말미암는 것을 기준하면 곧 함께함의 서로 말미암음이기 때문에 제외한다. 그러므로 현재의 현재와 미래의 현재가 그와 더불어 서로 말미암음을 조망하면 둘이 된다. 또 과거의 미래세를 기준으로 해서 스스로의 현재를 제외하고 나머지 둘의 현재와 더불어 서로 말미암으면 넷이 된다. 이처럼 여섯의 무가 각기 두 가지의 서로 말미암음을 갖추니, 2 곱하기 6이므로 합이 12를 이룬다. 유로써 무를 조망한 것과 무로써 유를 조망한 것이 각기 12의 서로 말미암음이 있어서 합계 24이다. 여기에 무무(無無)의 24를 합치면 48을 이루고, 또 현현(現現)의 여섯을 더하면 함께 하지 않음의 54를 이루고, 또 함께 함의 18을 더하면 72의 서로 말미암음이다” 하였다.
‘둘째, 차례와 초간이 72의 서로 말미암음[相由]을 다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문】차례에 있어서 16의 서로 말미암음의 상(相)은 어떠한가?
【답】게송에서는 “전후의 2세에 각기 1문이 있고 중간의 7세에 각기 2문이 있으니, 총체적으로는 9세가 되어 16을 이루니, 이것이 차례로 서로 말미암는 뜻이다”라고 하고, 해석하길 “과거의 과거라면 전(前)에는 남는 세(世)가 없고 오직 후(後)의 서로 말미암음을 조망할 뿐이다. 미래의 미래라면 후에는 남는 세가 없고 오직 전의 서로 말미암음을 조망할 뿐이니, 이 때문에 각기 하나의 서로 말미암음이다. 중간의 7세는 각기 전후를 조망해서 그와 더불어 서로 말미암기 때문에 각기 두 가지 서로 말미암음이다. 그러므로 2곱하기 7과 전후의 두 가지를 합하여 곱하기 8로서 합이 16을 이룬다”고 하였다.
【문】초간 56의 서로 말미암음은 그 상(相)이 어떠한가?
【답】게송에서는 “제1과 제9가 각기 다음의 1세를 넘어서고, 나머지 7세의 서로 말미암음에 각기 일곱의 서로 말미암음이 있고, 중간의 7세 중에서 각기 전후의 둘을 제외하면 나머지 6세의 서로 말미암음에 각기 여섯의 서로 말미암음이 있다”고 하고, 해석하길 “제1이라면 과거의 과거이고, 제9라면 미래의 미래이다. 우선 과거의 과거를 기준으로 하면 과거의 현재를 초월해서 후(後) 7세의 서로 말미암음과 함께 하기 때문에 일곱의 서로 말미암음이다. 미래의 미래는 미래의 현재를 초월해서 전(前) 7세의 서로 말미암음과 함께 하기 때문에 이 역시 일곱의 서로 말미암음이다. 중간의 7세는 각기 전후의 2세를 제외하고, 나머지 6세의 서로 말미암음과 함께 하기 때문에 합계는 7 곱하기 6으로서 42의 서로 말미암음을 이룬다. 여기다 전후의 2세 중에 있는 2곱하기 7을 합치면 56을 이루고, 또 차례의 서로 말미암음인 16을 합쳐서 72의 서로 말미암음을 이룬다”고 하였다.
‘셋째, 유유(有有)와 무무(無無)가 72의 서로 말미암음을 다한다’ 중에는 세 가지 문이 있다. 말하자면 첫 번째는 유유이고, 두 번째는 무무이고, 세 번째는 유무이다. 유유는 곧 현재의 현재로서 여섯의 서로 말미암음이 있고, 무무 중엔 30의 서로 말미암음이 있고, 유무 중엔 36이 있기 때문에 유무와 무무를 합하면 66이 있고, 다시 유유의 여섯을 더하면 합계 72의 서로 말미암음이다.
【문】유유의 서로 말미암음은 곧 현재의 현재가 서로 말미암음이라 여섯인 것은 알겠다. 유무 속의 36과 무무 속의 30은 그 상(相)이 어떠한가?
【답】유무 속의 24와 무무 속의 24는 함께 하지 않음의 서로 말미암음에서 설한 것과 같다. 함께 함의 서로 말미암음 가운데 18이 있는데, 12는 유무이고 6은 무무이다. 함께 함의 서로 말미암음에서 무무의 6과 함께 하지 않음 중의 무무의 서로 말미암음 24를 합치면 30을 이룬다. 함께 함 가운데 있는 유무의 서로 말미암음 12와 함께 하지 않음 중에 있는 유무의 서로 말미암음 24를 합치면 36이 된다.
【문】어째서 함께 함의 서로 말미암음 중에서 12는 유무의 서로 말미암음이고, 6은 무무의 서로 말미암음인가?
【답】과거 속에 과거의 과거가 없기 때문에 과거의 현재가 유(有)가 되고, 혹은 이와 반대라면 하나이다. 과거의 현재가 있기 때문에 과거의 미래로 하여금 없게 하고, 혹은 이와 반대라면 넷이니, 그러므로 이는 유무의 서로 말미암음이다. 과거의 과거가 없기 때문에 과거의 미래로 하여금 없게 하고, 혹은 이와 반대라면 이 둘은 무무이다. 과거세 중에는 유무와 무무를 합치어 여섯이 있고, 현재와 미래도 마찬가지라서 유무와 무무를 합치면 각기 여섯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함께 함의 서로 말미암음 18 중에서 유무의 서로 말미암음은 12이고 무무의 서로 말미암음은 6이다.
그러므로 서로 말미암음은 한 종류이지만, 함께 함과 함께 하지 않음[俱不俱]의 문으로써 72의 서로 말미암음을 다한다면 무간(無間)의 차례이고, 초간과 유유와 무무로써 72의 서로 말미암음은 모두가 함께함과 함께하지 않음의 서로 말미암음이다. 차례와 초간의 문으로써 72의 서로 말미암음을 다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이며, 유유와 무무의 문으로써 다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비록 한 종류의 서로 말미암음일지라도, 문에 따라 각기 다르기 때문에 3문이 있다. 대의(大意)의 요간을 마친다.
둘째, 본문에 따라 해석한다.
【문】처음에 먼저 7세를 기준해서 차례로 서로 말미암는 뜻을 대략 설하였는데, 어째서 과거의 과거와 미래의 미래를 제외하는가?
【답】혹자는 “이미 멸해서 없기 때문이고, 아직 생(生)하지 않아서 없기 때문에 제외한 것이다”고 하였다. 여기서는, 만약 5일을 기준으로 논하면, 중간의 3일은 나머지 지위를 갖추고 전후 2일은 각기 오직 1위(位)가 된다. 이 나머지 지위를 갖춘 중간의 7위를 기준으로 논하면 오직 각기 1위(位)의 처음이고, 나중의 뜻은 저절로 나타나기 때문에 여기서는 간략히 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아래 본문에 이르러선 차례로 서로 말미암는 뜻을 갖추어 설한다.
【문】아래의 본문에 이르러 차례로 서로 말미암음을 널리 변별했다면, 이 중에선 오직 함께함과 함께하지 않는 뜻을 논한 것인데, 어째서 차례로 서로 말미암음을 설하는가?
【답】9세 중에선 지위를 기준으로 해서 논한 것과 혹은 함께함과 함께하지 않음을 기준으로 해서 논한 것 두 가지 뜻이 있다. 만약 지위를 기준으로 해서 논한다면, 어제의 1위(位) 중에 2세를 갖추고, 오늘의 1위에 3세를 갖추며, 내일의 1위에 2세를 갖춘다. 만약 함께 함과 함께 하지 않음을 기준으로 해서 논한다면, 셋의 현재와 여섯의 과거와 미래란 함께 하지 않음이고, 하나의 현재와 둘의 과거와 미래란 함께 함이다. 그러므로 함께 함과 함께 하지 않음은 9세의 문을 기준으로 해서 논한 것이다. 지금 여기서는 지위를 기준으로 해서 나누었기 때문에 나머지 세(世)를 갖춘 중간 3위를 기준으로 해서 7세의 차례가 서로 말미암음을 간략히 변별한 것이다.
이 차례로 서로 말미암음의 16중 가운데 과거의 미래가 없기 때문에 현재의 과거로 하여금 없게 하고, 혹은 이와 반대라면 둘이 된다. 현재의 미래가 없기 때문에 미래의 과거로 하여금 없게 하고 혹은 이와 반대라면 넷이 된 다. 그러므로 차례로 서로 말미암음이면서 함께 하지 않음이며, 또한 무무의 서로 말미암음이다. 나머지 12의 서로 말미암음이라면 함께함의 서로 말미암음이고, 또한 유무의 서로 말미암음이다.
초간 가운데 과거의 과거는 자가의 현재를 초월하는 서로 말미암음이고, 미래와 미래가 또한 자가의 현재를 초월하는 서로 말미암음이니, 이는 함께함의 서로 말미암음이다. 나머지는 모두 함께 하지 않음이다.
‘둘째, 함께함과 함께하지 않음의 뜻’에서 처음은 대략을 표식한 것이고, 둘째 ‘함께 함 속에 나아가서’ 이하는 널리 해석한 것이며, 셋째 ‘【문】함께 함이란 서로 말미암음’ 이하는 문답으로 의심을 없앤 것이다.
처음 중에서 ‘그 응하는 것에 따라 숨겨짐도 있고 나타남도 있다’는 것은 숨겨지면 함께하지 않음의 서로 말미암음이고, 나타나면 함께함의 서로 말미암음이다. ‘숨겨짐도 있고 나타남도 있다’고 말하고 나서 이어 ‘함께 함과 함께 하지 않음으로써’라고 말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함께함에 나아가 ‘과거의 과거가 없기 때문에 과거의 현재로 하여금 있게 한다’는 것은 어제를 기준으로 해서 말한 것이다. ‘만약 저것이 시들지 않으면 이것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란 먼저 어제 시들었기 때문에 어제의 유(有)를 이루고, 또 ‘과거의 현재가 있음을 말미암기 때문에 과거의 과거로 하여금 없게 한다’는 것은 어제의 앞이 되니, 나머지는 모두 본문에 나타나 있다.
또 ‘과거의 과거가 없음을 말미암기 때문에 과거로 하여금 저것의 없음에 이르게 한다’는 것은 만약 과거의 과거가 시들지 않았다면 과거의 현재가 유(有)를 이루지 못하고, 만약 과거의 현재가 유(有)를 이루지 못한다면 과거의 미래가 무(無)를 이루지 못한다. 그러나 과거의 과거가 없기 때문에 과거의 현재로 하여금 유이게 하고, 과거의 현재가 있음을 말미암기 때문에 과거의 미래가 무를 이룬다. 그러므로 이 무는 저 과거의 과거가 없음을 말미암아서 이루어진다.
이처럼 과거 3세 가운데 우선 과거의 과거가 없음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과거의 현재로 하여금 유이게 하는 것이고, 또 이와는 반대로 과거의 현재가 있기 때문에 과거의 미래로 하여금 무이게 하며, 또 이와는 반대로 과거의 과거가 없기 때문에 과거의 미래로 하여금 무이게 하는 것이다. 이 같이 과거의 3세 중에는 여섯의 서로 말미암음을 갖추니, 유무가 서로 말미암음의 넷은 곧 유무의 문 가운데 유무가 서로 말미암는 것이고, 무무의 둘은 무무가 서로 말미암는 것이다.
‘가령 과거의 3세에서’부터 ‘각기 여섯이 있음을 알 수 있다’에 이르기까지는 과거 3세의 여섯을 들어서 현재와 미래에도 각기 여섯이 있음을 예시해 나타낸 것이다. 이 중에는 각기 유무의 넷과 무무의 둘이 있다. 그러므로 함께하지 않음의 무무 24와 함께함의 서로 말미암음 가운데 무무 6을 합치어 30이 되고, 함께 하지 않음의 유무 24와 함께함의 유무 12가 36을 이루니, 합치면 66을 이룬다. 다시 유유의 6을 더하면 72의 서로 말미암음이다. 따라서 유유와 무무와 유무의 문이 72의 서로 말미암음을 다하는 것이다.
둘째, 함께하지 않음에 나아가도 두 가지가 있다. 처음은 현재의 현재가 서로 말미암는 것이니, 역시 여섯 가지 뜻이 있다.
【문】처음의 하나란 현재의 현재가 서로 말미암는 것이라면 나중의 하나는 무엇인가?
【답】무무의 문이다. 이 중에서 유무를 열기 때문에 무무의 24와 유무의 24를 합치면 합계 48이고, 여기에다 현현의 6을 합치기 때문에 54의 서로 말미암음을 이룬다.
【문】함께 함이란 서로 말미암음이라 할 수 있지만 함께 하지 않음을 어떻게 서로 말미암음이라 할 수 있는가?
【답】함께 함이란 드러남의 서로 말미암음이고, 함께 하지 않음이란 은밀함의 서로 말미암음이며, 또한 전전(展轉)의 서로 말미암음이다.
만약 이 함께 하지 않음이 없다면 함께함이 이루어지지 못하기 때문이니, 이 때문에 이 9세는 총체적으로 5위가 되는데 여기에 10문이 있다. 첫째, 과거의 과거가 오직 하나뿐인 것이니 시들어 멸진해서 단지 과거뿐이니, 현재 가(家)의 과거이기 때문이다. 둘째, 과거의 현재에는 두 문이 있는데 말하자면 과거위(過去位) 중에서 스스로 현재이기 때문이고, 현재로써 조망함이 과거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법은 현재이기도 하고 과거이기도 하니, 조망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장애하지 않는다. 셋째, 과거의 미래에 세 문이 있으니 하나는 과거의 현재로써 조망하면, 이것이 아직 있지 않기 때문에 과거 가(家)의 미래이다. 둘째는 현재로써 현기(現起)를 반연함이 아직 시들지 않았기 때문에 이는 현재의 현재이다. 셋은 미래의 현재로써 조망하면, 이것이 이미 시들었기 때문에 미래의 과거이다. 그러므로 이 현재의 현재는 현재이기도 하고 과거의 미래이기도 하다. 넷째, 미래의 현재에도 역시 두 문이 있다. 다섯째, 미래의 미래도 오직 하나의 문뿐이니, 모두 준거해서 알 수 있다.
이상으로 차례가 서로 말미암는 것에 이 아홉 문이 있다. 열째는 초간의 서로 말미암음이다. 말하자면 만약 처음의 하나가 없다면 나중의 하나 등이 없는 것이니, 그러므로 차례와 초간이 서로 말미암음을 장애하지 않기 때문에 이 도리에 의거해서 모든 문을 상즉상입하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경에서 말한 “과거의 일체겁을 미래에 안치(安置)하고, 이제 미래의 일체겁을 과거세에 돌려놓는다”는 것이 이를 말함이다.
일반적으로 서로 말미암음의 뜻을 논한 것에 두 가지 문이 있다. 하나는 역용(力用)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말하자면 만약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니, 이것이 저것이 아니기 때문이고, 역용(力用)으로써 서로 거두기 때문에 입(入)을 설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체(體)가 섞이지 않기 때문에 상시(相是)가 아니다. 하나는 체성(體性)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말하자면 만약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이것이 곧 저것이다. 그러므로 체(體)를 기준으로 해서 상즉이 됨을 설한 것이다. 이 두 가지 문을 해석한 것은 개별적으로 설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본위(本位)를 잃지 않는다면, 즉입이 없지 않으니, 생각하면 알 수 있다. 경에서 말한 “한량없고 헤아릴 수 없는 겁이 능히 일념경(一念頃)을 짓는다” 등이라는 것이 바로 이 뜻이다.
문답으로 의심을 없애는 가운데 답 중 ‘함께함이란 드러남의 서로 말미암음이고, 함께 하지 않음이란 은밀함의 서로 말미암음이다’에서 함께 함의 서로 말미암음이라면 서로 말미암아서 서로 나타내기 때문이고, 함께 하지 않음의 서로 말미암음이라면 서로 말미암아서 서로 나타내지 않기 때문이다.
【문】만약 그렇다면 이 중 은밀함의 서로 말미암음과 앞서 말한 ‘숨겨짐도 있고 나타남도 있다’ 중에서 숨겨짐이 있는 것은 함께 하지 않음의 서로 말미암음이다. 어떻게 구별하는가?
【답】약간 다르다. 말하자면 저 ‘숨겨짐이 있다’고 말한 것은 만약 과거 중의 3세를 본다면 현재와 미래 가운데서 3세는 보지 못하기 때문에 숨겨짐이라 말한 것이다. 여기서 은밀함이라 말한 것은 서로 말미암음이 서로 숨겨져서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은밀함이라 말한 것이다.
【문】‘또한 전전(展轉)의 서로 말미암음’이라 함은 함께함의 서로 말미암음이 전전의 서로 말미암음이 아닌 것인가?
【답】전전이다. 말하자면 함께함의 서로 말미암음 가운데 ‘이것의 전전함이 없다는 것은 저것의 무(無)로 말미암기 때문이다’이다.
【문】‘함께 하지 않음의 서로 말미암음 중에 과거의 미래가 없기 때문에 현재의 미래로 하여금 무이게 하고, 또 이와는 반대로 현재의 미래가 없음을 말미암아서 미래의 과거로 하여금 무이게 하며, 또 이와는 반대로……’ 이 네 가지는 차례의 서로 말미암음인데, 어째서 전전의 서로 말미암음이라고 말하는가?
【답】실제는 차례의 서로 말미암음이다. 그러나 서로 말미암음의 이유를 논한다면, 이는 전전의 성취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말하자면 만약 과거의 미래가 없지 않다면, 과거 속의 3세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과거 속의 3세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현재의 3세도 이루어지지 않으며, 현재의 3세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현재의 과거가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다. 그러므로 과거의 미래가 없기 때문에 과거 속의 3세가 이루어지고, 과거 속의 3세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현재의 3세도 이루어지며, 현재의 3세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현재 속의 과거가 없음도 이루어진다. 이처럼 과거의 미래가 없기 때문에 현재의 과거가 없음도 이루어지니, 전전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셋째, 차례와 초간’의 단락 중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처음은……21) 널리 해석한 것이고, 나중의 ‘그러므로’ 이하는 총체적인 결론이다. 처음 중에서 ‘그러므로’라고 한 것 앞에서 말한 함께함과 함께하지 않음의 72의 서로 말미암음을 다하는 것이요, 함께함의 서로 말미암음 18 중 유무의 서로 말미암음 11과 함께 하지 않음 중 과거의 미래가 없음을 말미암기 때문에 현재의 과거로 하여금 무이게 하는 것이요, 또 이와 반대로 현재의 미래가 없기 때문에 미래의 과거로 하여금 무(無)이게 하는 것이며, 또 이와는 반대로……등의 네 가지 모두 차례의 서로 말미암음이다. 또 함께함의 서로 말미암음 중에 무무의 여섯 가지 서로 말미암음은 함께 하지 않는 문의 유무 중에 자현(自現)이 서로 말미암음을 초월하는 것이다. 현현의 서로 말미암음과 무무의 서로 말미암음 등의 나머지 서로 말미암음은 모두 초간의 서로 말미암음이기 때문에 앞의 것을 인(因)해서 ‘그러므로’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함께함 중의 유무 12, 그리고 함께 하지 않음 중의 무무 4이기 때문에 앞의 9문이 있으며, 나머지 서로 말미암음 때문에 제10문이 있다. 그런 까닭에 본문에 이르기를 “그러므로 이 9세가 총체적으로 5위를 총괄해서 이러한 10문이 있다고 말한 것이고, 차례의 서로 말미암음에는 이러한 9문이 있다”고 하였다.
【문】흡사 9세의 차례를 기준으로 열거한 것처럼 서로 말미암는 뜻이 숨겨져 있는데, 어째서 서로 말미암음이라고 말하는가?
【답】세(世)의 차례를 기준으로 해서 열거 할 때, 자체 서로 말미암는 뜻을 지키면서 현현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제 10의 초간에서 말한 ‘만약 처음의 하나가 없다면 나중의 하나 등도 없다’는 것에서 처음의 하나란 이른바 과거의 과거이고, 나중의 하나란 이른바 미래의 미래이다. 그러므로 ‘과거의 과거가 없음을 들기 때문에 미래의 미래로 하여금 무(無)이게 하는’ 하나의 서로 말미암음 등이 나머지 서로 말미암음을 취하는 것이다.
결론 가운데 ‘차례’라는 것은 앞에 9문의 결론이고, ‘초간’이란 제 10문의 결론이다. ‘서로 말미암음을 장애하지 않기 때문이다’란 통틀어 결론지은 것이다.
‘둘째, 이 도리에 의지해서’ 이하는 서로 말미암음의 힘으로써 9세를 즉입케 하는 것이다. ‘경에서 말하길’이란 「이세간품」이다. “혹자가 말하기를 이 본문……”이란 만약 처음의 하나가 없다면 나중의 하나도 없다는 증거이다. 여기서는 모든 문의 즉입을 통틀어 증명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둘째, 서로 말미암음의 뜻’ 이하는 개별적으로 중즉(中卽)을 연 것이다.
【문】이 중즉을 열 때, 어째서 서로 말미암음의 소이(所以)를 드는가?
【답】서로의 말미암기 때문에 서로 즉입한다. 그러므로 명칭이라면 소이(所以)를 들어서 바로잡고, 나타난 것이라면 즉입의 두 문이 있다. 두 문이 있는 것은 수(數)를 연 것이니, ‘첫째, 역용(力用)을 기준으로 해서’ 이하는 해석이다. 처음 ‘역용’에서부터 ‘체(體)가 섞이지 않기 때문이다’에 이르기까지 가운데 중문(中門)은 지위를 움직이지 않고서 상입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문】중문이 지위의 부동문(不動門)이고, 즉문(卽門)이 지위의 동문(動門)이라면, 능구(能具)의 동부동(動不動)인가, 소구(所具)인가?
【답】혹자는 능구의 동부동이라 말하고, 혹자는 소구라 말하며, 혹자는 능구와 소구를 통틀었다고 말한다.
처음의 뜻에서, 중문의 ‘하나 중의 둘,’ ‘하나 중의 셋’ 등은 능구의 하나를 움직이지 않고서 둘, 셋 등이 와서 갖추어지는 것이다. 즉문의 ‘하나는 곧 둘,’ ‘하나는 곧 셋’ 등은 능구의 하나를 움직여서 열을 갖추기 때문에 능구의 동부동이라 한다.
다음의 뜻은, 중문의 하나가 많음을 섭수할 때 지위를 움직이지 않고서 하나에 들어가고, 즉문의 하나가 많음일 때 많음의 지위를 움직여서 하나에 즉(卽)하기 때문에 소구의 동부동이라 한다.
마지막의 뜻은, 중문의 하나와 많음이 상입할 때 하나와 많음의 지위가 움직이지 않고, 즉문은 하나와 많음의 지위를 움직여서 상즉을 얻기 때문에 능구와 소구의 동부동이라는 것이다.
여기서는 오직 소구의 동부동일 뿐이라고 해석한다. 말하자면 ‘연(緣)의 상(相)이 다해도 연(緣)을 무너뜨리지 않는다’는 것은 소구를 기준으로 해서 말한 것이니 이 때문에 그렇다. ‘이 두 문을 해석한 것은 따로 설한 것과 같아’라는 것은 『법계연기장』과 『대요간』 등이다.
‘본위(本位)를 잃지 않고서 즉입하지 않음이 없다’는 것에 대해, 혹자는 “본위를 잃지 않는 것이 부동(不動)이다 함은 본래의 뜻을 향하기 때문에 연기 자체이다. 또 즉입하지 않음이 없는 것은 가고 옴[去來]의 뜻이기 때문에 연기의 의문(義門)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같은 종류의 연기의문(緣起義門)에서 논(論)을 세운 것이라고 해석한다. 말하자면 아래의 본문에 “모든 겁이 상즉해도 본 겁을 무너뜨리지 않는다”라고 말했으니, 모든 겁이 상즉하는 뜻을 기준으로 해서 즉입하지 않음이 없다고 말하고, 본 겁을 무너뜨리지 않는 뜻을 기준으로 해서 본위를 잃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니, 이 때문에 같은 원리에서 논지를 세운 것이다.
【문】중문은 지위가 부동문이라 본위를 잃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지만, 즉문은 지위가 동문인데 어째서 본위를 잃지 않는다고 말하는가?
【답】다르다. 말하자면 즉문이 동(動)이라서 본위를 잃지 않는 것이다.
【章】둘째, 법성의 융통문(融通門)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그러나 이 9세의 시(時)는 따로 체(體)가 없고 오직 연기법 위에서 임시로 세워졌을 뿐이고, 이 연기법은 또한 자성이 없어서 참에 의거해서 성립한다. 그리하여 연기의 이사(理事)가 융통하여 걸림이 없다. 여기에 4중(重)이 있으니, 첫째는 상(相)을 민절해서 모두 소진하는 것이고, 둘째는 상여(相與)로서 둘 다 존재하는 것이며, 셋째는 상수(相隨)로서 서로 섭수하는 것이고, 넷째는 상시(相是)와 서로 즉하는 것이다.
처음 가운데 근본으로 지말을 쫓는 것은 오직 사(事)일 뿐 이(理)가 없고, 지말로써 근본에 돌아가는 것은 앞과 반대임을 알 수 있다. 경에서 ‘비겁(非劫)이 겁에 들어가고 겁이 비겁에 들어간다’고 한 것이 이런 뜻이다. 둘째 가운데 온전한 사(事)의 이(理)는 사(事)가 아니고, 온전한 이(理)의 사(事)는 이(理)가 아니기 때문에 함께 존재하면서도 섞이지 않는 것이다. 경에서 ‘모든 겁이 상즉하면서도 본 겁을 무너뜨리지 않는다’고 한 것이 이런 뜻이다. 셋째 가운데선 사(事)를 따르면 이(理)를 말미암기 때문에 완전한 하나의 사(事)가 일체를 용납할 수 있고, 이(理)를 따르면 사(事)를 말미암기 때문에 일체의 사(事)가 이(理)를 따라 하나 속에 들어간다. 이와는 반대인 하나가 일체에 들어가는 것도 알 수 있다. 넷째 가운데선 이(理)에 즉한 사(事)를 말미암기 때문에 온전한 하나가 곧 일체이고, 사(事)에 즉한 이(理)를 말미암기 때문에 온전한 일체가 곧 하나이다. 그러므로 오직 이(理)만으론 즉입할 수가 없고 오직 사(事)만으론 즉입할 수 없으니, 요컨대 이사(理事)가 서로 따르면서 상즉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즉(卽)도 있고 입(入)도 있는 것이다. 시겁(時劫)은 이에 의거해서 걸림 없는 법이기 때문에 이 법과 동화해서 자재하게 즉입하는 것이니, 나머지 뜻은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다.
【記】‘둘째, 법성의 융통문’ 중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법이 서로 의지해 성립함을 나타낸 것이다. 다음의 ‘그러므로 연기의 이사(理事)’ 이하는 널리 해석한 것이며, 나중의 ‘시겁이 이에 의지해서’ 이하는 시겁이 법에 따라 융통하여 즉입하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처음 중에서 ‘이 9세의 시(時)가 따로 체(體)가 없으니, 오직 연기법에 의거해서만’이란 마치 만물이 생장해서 봄이 되고 무성해서 여름이 되고 쇠락해서 가을이 되고 거두어 저장해서 겨울이 되는 것처럼 시(時)에 따로 체(體)가 없으니 이 같은 연기법에 의지해서 건립하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러므로 시(時)에 체성이 없어서 연기법에 의지하는 것이니 이 법 또한 참 성품에 의지해서 진성(眞性)의 융통이 되기 때문에 법도 걸림이 없다. 법이 걸림이 없기 때문에 시겁에 의지해서 또한 융통하여 즉입하는 것이다.
【문】『간정기』에선 의거하는 체사(體事) 중에 세시(世時)를 아울러 세우고, 장주(章主)는 현문을 해석하면서 십세문(十世門)을 세웠는데, 어떻게 다른가?
【답】『간정기』의 기주(記主)는 세시(世時)로써 체사의 10법을 세운 것이니, ‘비겁이 겁에 들어가고 겁이 비겁에 들어간다’는 것은 입문(入門)이고, ‘겁이 비겁에 즉하고 비겁이 겁에 즉한다’는 것은 즉문(卽門)이기 때문에 따로 현문을 세운 것이 아니다. 장주의 뜻이라면, 비록 한 종류의 10법이라도 만약 세(世)의 구별을 기준으로 한다면 3세의 법이 다르기 때문에 현문 중에서 세웠다. 그러므로 『연이』22)에서 『간정기』를 인용하여 이르기를 “시겁으로써 의거하는 체사(體事)로 삼는다”고 했다. 그러나 시(時)에 따로 체(體)가 없다면, 어찌 타자의 의지하는 것이 될 수 있겠는가? 만약 시(時)가 의지하는 것이라 하면, 외도(外道)의 시(時)가 상(常)이라고 하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고덕(古德)이 해석함 중에서 세운 것이다.
【문】지금 이 본문에서 9세를 기준으로 해서 즉입을 논했다면, 시(時)는 해석된 것인가?
【답】그렇지 않다. 여기서의 서로 즉입하는 법은 시(時)를 기준으로 해서 구별했기 때문에 그러하다. “시(時)에는 따로 체(體)가 없다”라고 한다면 어찌 의거하는 것의 체사(體事)가 되겠는가?
‘널리 해석함’ 속에 나아가, 처음은 수(數)를 열어서 명칭을 열거한 것이고, 다음의 ‘처음 중에서’ 이하는 해석이며, 나중의 ‘그러므로 오직 이(理)만으론’ 이하는 결론이다.
【문】처음 중의 4구(句)는 무엇을 말하는가?
【답】혹자는 “상(相)이 민절하여 모두 소진한다는 것이 이(理)이고, 상여(相與)로서 둘 다 존재한다는 것은 사(事)이며, 아래의 두 문은 오직 사(事) 속에서만 즉입을 변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혹자는 “처음은 중문이고, 다음은 즉문이고, 또 제3은 중문이고, 제4는 즉문이다”고 하였다.
【문】나중 뜻에서 2중(重)의 중즉(中卽)이 어떻게 다른가?
【답】초중(初重)의 중즉은 이(理)와 사(事)를 통틀어 기준으로 한 것이고, 후중(後重)의 중즉은 오직 사(事)에서만 논한 것이다.
【문】어떻게 초중이 중즉임을 아는가?
【답】초문(初門)의 증거에선 ‘비겁이 겁에 들어간다’를 인용했고, 제2분의 증즉에선 ‘모든 겁이 상즉한다’를 인용했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지금은 초문에서 이(理)와 사(事)가 다르지 않음을 나타내고, 제2문에서 이(理)와 사(事)가 동일치 않음을 나타내고, 아래의 두 문은 오직 사(事) 속의 즉입할 뿐이라고 해석한다.
【문】초문에서 이(理)와 사(事)가 다르지 않고 , 제2문에서 이와 같이 동일하지 않음을 어떻게 아는가?
【답】초문을 해석하면서 ‘근본으로 지말을 쫓는 것은 오직 사(事)일 뿐 이(理)가 아니다’ 등이라 말한 것은 이(理)의 사(事)이기 때문에 다르지 않은 것이고, 사(事)로써 이(理)를 따르기 때문에 이는 곧 온전한 사(事)의 이(理)이기 때문에 다르지 않은 것이다. 제2분을 해석하면서는 “온전한 이(理)의 사(事)가 아니기 때문에 둘 다 존재하면서 섞이지 않는 것이다”고 하였으니, 섞이지 않는다 한다면 이는 이(理)와 사(事)가 동일하지 않은 문(門)이다.
【문】어째서 즉입(卽入)의 초설(初說)은 이(理)와 사(事)가 동일하지도 다르지도 않다는 것인가?
【답】『요간』의 능전교체문[能詮敎體門]과 사융상섭문[事融相攝門] 중에 두 가지 뜻이 있으니, 하나는 상재(相在)이고, 하나는 상시(相是)이다. 나아가 아래 본문에 이르기를 “진실로 온전한 이(理)의 사(事)와 온전한 사(事)의 이(理)는 동일한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니, 동일치 않음을 말미암기 때문에 상재(相在)이고, 다름 아님을 말미암기 때문에 상시(相是)이다”고 하였으니 그 중에서 이(理)와 사(事)가 동일치 않고 다르지도 않는다는 것은 지금 여기서 처음의 두 문이고, 그 중에서 상재와 상시라는 것은 지금 여기서는 나중의 두 문이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선 그것을 예시함으로써 먼저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음을 논하고, 다음으로 즉입을 나타내었다.
【문】만약 그렇다면 ‘상(相)이 민절하여 모두 소진한다’는 것은 중문이 아닌 것인가?
【답】그렇다. 이(理)와 사(事)가 다르지 않기 때문에 즉문이라 말할 수는 있어도 중문은 아니다. 그러므로 처음과 둘째는 중즉의 소이(所以)에 통할 뿐,중즉이 아니다.
【문】만약 그렇다면 어째서 초문의 중즉에선 ‘비겁이 겁에 들어간다’ 등을 인용하는가?
【답】만약 그렇다면 곤란한 점은 『연의』의 동체즉문(同體卽門)에 이르기를 “많음과 하나가 성품이 없어서 본래의 하나에 잠복해 들어간다”고 하였는데, 이 때의 입(入:들어간다)이란 글자도 중문이 되는 것인가? 그러나 입(入)이란 말이 일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여기서의 입(入)자는 입(入)과 즉(卽)이 상대하는 입이 아니다.
【문】이와 사가 동일치 않은 문 가운데 모든 겁이 상즉하는 경문을 인용한 것은 다르지 않은 문에서도 인용할 수 있을 텐데, 어째서 그렇게 하지 않은가?
【답】비록 제2문에서 인용한 것이라도, ‘모든 겁이 상즉한다’는 말은 오히려 초문 중의 뜻이고, ‘본겁을 무너뜨리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제2문의 증거이다.
【문】‘모든 겁이 상즉한다’는 것은 모든 사(事)의 겁이 서로 상즉하는 것인데, 어째서 ‘이와 사가 다르지 않음’의 앞문에서 인용하여 증거로 삼았는가?
【답】‘모든 겁이 상즉한다’는 것은 사법(事法)에 입각하여 저 겁과 이 겁의 상즉을 논한 것이 아니다. 다만 모든 겁의 사(事)와 비겁의 이(理)가 상즉하기 때문에 이와 사가 다르지 않은 것이다.
‘셋째, 서로 통하고 서로 섭수한다’는 것은 말하자면 ‘사(事)의 이(理)를 따르기 때문이고, 이(理)의 사(事)를 따르기 때문이다’고 함이 서로 통하는 것이고, ‘1사(事)가 능히 일체를 용납하고, 일체사가 하나 속에 들어간다’는 것은 서로 섭수함이다. ‘이와는 반대로 하나가 일체에 들어감도 알 수 있다’는 것은 갖추어서 말한다면 마땅히 “사의 이를 따르기 때문에 일체사로 하여금 하나를 용납케 하고, 이의 사를 따르기 때문에 1사(事)가 이(理)를 따라서 일체 속에 들어간다”고 해야 한다.
‘넷째, 상시(相是)와 서로 즉한다’는 것은 말하자면 ‘이의 사에 즉하기 때문이고, 사의 이에 즉하기 때문이다’라 함이 상시이고, ‘하나가 곧 일체이고, 일체가 곧 하나다’라고 함은 서로 즉함이다. ‘그러므로 오직 이(理)만으론 즉입할 만한 것이 없다’ 등은 이(理)와 다른 사(事)와 사와 다른 이를 나타내면 즉입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이와 사가 서로 따른다’는 것은 초문에서 근본으로 지말을 따르는 것과 지말로 근본을 따르는 것을 기준으로 해서 ‘서로 따른다’고 말한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상즉이라고 말한다.
【문】제2의 이와 사가 동일하지 않는 문은 어째서 들지 않았는가?
【답】문은 비록 각기 다르다 하더라도, 이와 다르지 않은 사와 사와 다르지 않은 이를 기준으로 해서 즉입을 논할 때, 이와 사의 동일하지 않은 뜻이 현현하였기 때문에 따로 들지 않은 것이다.
‘나머지 뜻은 준거해서 생각하라’는 것은 우선 즉입의 두 문을 논함으로써 나머지 동시구족인다라(同時具足因陀羅) 등의 문을 예시한 것이다.
7) 현의장(玄義章)
【記】연기의 무애가 제1이고, 염정(染淨)의 연기가 제2이고, 간리이정(揀理異情)이 제3이고, 약병대치(藥病對治)가 제4이고, 이사분무(理事分無)가 제5이고, 인인과과(因因果果)가 제6이고, 이제무애(二諦無碍)가 제7이고, 진망심경(眞妄心境)이 제8이고, 능화소화(能化所化)가 제9이고, 입도방편(入道方便)이 제10이다.
【記】현의장이다. 앞서라면 3세 중에 삼보가 흥륭(興隆)하여 상속이 끊이지 않기 때문에 의거하는 시세(時世)를 밝힌 것이고, 지금 여기선 삼보가 나타낸 현의를 변별하고자 하기 때문에 다음으로 둔 것이다.
【문】현의와 10현(玄)은 어떻게 다른가?
【답】혹자는 “현의란 1승과 3승을 통틀은 것이고, 10현이란 오직 1승에만 국한되기 때문에 다르다”고 말한다.
여기서는 동일하다고 해석한다. 말하자면 여기 이 현의장에서도 3승의 사처(事處)를 논했지만 그 종지는 바로 1승에 있다. 그러므로 현의와 10현은 동일해서 다르지 않다. 아래 본문에서 “중생의 잡염(雜染)에 움직이지 않고, 이 삼보의 청정 등에 즉하여 그 현묘함을 나타내기 때문에 현의라 말한다”고 했기에 그런 것이다.
이 중에서 먼저는 장문(章門)을 열거한 것이고, 나중의 ‘첫째, 연기의 모든법’ 이하는 개별적인 해석이다. 처음 중에서 ‘10분이 상생(相生)하는 차례’란 연기의 모든 법이 이미 걸림이 없기 때문에 내가 드는 것에 따라 상재(相在)와 부재(不在), 상시(相是)와 불시(不是)를 논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제1이 다.
중생의 오염과 삼보의 청청함은 염정(染淨)이 분명히 다른데[玄別], 어떻게 무애를 얻는다는 것인가? 이는 중생의 공(空)과 삼보의 공이 동일한 진공(眞空)이기 때문이니, 이 때문에 연기에 장애가 없으므로 제2가 있다.
단공을 여의고 진공을 증득하고자 할 때, 어떤 약들을 가지고 어떤 병을 치료하는가? 모든 법의 평등을 항상 관(觀)할 때, 모든 병이 다 치료되기 때문에 제4가 있다.
만약 그렇다면 이(理)는 평등이고 사(事)는 차별인데, 어떻게 사상(事相) 역시도 평등하게 될 수 있는가? 이(理)가 평등하므로 사(事)도 이(理)에 따라 평등하기 때문에 제5가 있다.
만약 모든 법이 평등하다면, 어떻게 인과를 설하는가? 이 때문에 제6이 있다.
진제문(眞諦門)이라면 그렇게 평등할 수 있지만, 만약 속제문이라 해도 역시 평등한가? 이 때문에 제7이 있다.
2제(諦)를 알아서 반드시 진망(眞妄)의 심경을 밝히고자 하기 때문에 제8이 있다.
만약 모든 법이 평등하다면, 능화(能化)와 소화(所化)는 어떻게 구별되는가? 이 때문에 제9가 있다.
이 같은 법에 어떤 방편을 지어서 들어가게 되는가? 이 때문에 제10이 있다.
(1) 연기무애문(緣起無碍門)
【章】연기의 모든 법이 회통 융화하여 걸림이 없는데, 어떻게 볼 수 있는가?
【답】여기서는 이 뜻에 2문이 있다고 해석한다. 하나는 뜻을 열어서 융통하는 것이고, 하나는 구수(句數)의 결택(決擇)이다.
처음 뜻을 연 것에는 3중(重) 4구(句)가 있는데 첫째는 공불공문(空不空門)이다. 말하자면 일체가 모두 공하여 털끝만한 상(相)도 없으니, 연기로써 성품이 없기 때문이고, 허상(虛相)이 소진했기 때문이다. 혹은 일체의 불공(不空)은 공(空)으로써 모든 법을 삼기 때문이고, 망정으로 일컫는 무(無)가 아니기 때문이며, 색(色) 등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혹은 두 뜻이 걸림이 없고, 혹은 두 문이 함께 민절하니, 모두 준거해서 생각할 수 있다.
둘째는 상재부재문(相在不在門)이다. 말하자면 혹은 일체가 하나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하나의 성품 없음을 말미암아서 법성을 하나로 삼고, 또 일체법이 이미 그대로 법성이니, 이 때문에 일체가 똑같이 하나 속에 있으면서도 상시(相是)가 아니다.
혹은 부재(不在)의 하나이다. 말하자면 성품 없음을 말미암아서 하나와 많음이 끊어지기 때문이고, 그 유(有)를 무너뜨리지 않고도 서로 섞이지 않기 때문이며, 비록 항상 섭입(涉入)하더라도 스스로의 지위에 머물기 때문이다.
혹은 둘 다이다. 말하자면 미세(薇細)의 상입이 항상 밖에 있기 때문이고, 만리 아득해서 항상 상재(相在)이기 때문이며, 상재와 부재가 한 가지 사(事)이기 때문이고, 장애가 없기 때문이다.
혹은 둘 다 아니다. 말하자면 들어오고 나감이 융화되기 때문이고, 두 상(相)이 끊어지기 때문에 재(在)와 부재(不在)가 없으니, 그러므로 이 법은 명목(名目)을 짓기 어렵다. 이처럼 일체가 하나에 들어가서 이 4구(句)를 갖췄으니, 하나가 일체에 들어가는 것도 역시 준거해서 생각하라.
셋째는 상시불시문(相是不是門)이다. 혹은 일체가 하나이니, 여기에 두 문이 있다. 하나는 성품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경에 이르기를 “만약사람이 성불하고 싶으면 탐욕을 무너뜨리지 말라. 모든 법이 곧 탐욕이니, 이를 아는 것이 곧 성불이다”라고 하였으니, 이 경의 뜻은 탐욕에 성품이 없기 때문에 무너뜨릴 수 없다는 것이다. ‘모든 법이 곧 탐욕’이란 ‘탐욕의 성품 없음’의 이(理)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찌 탐욕이 일체법의 체(體)이겠는가? 그러므로 탐욕의 명칭을 들어서 탐욕의 실(實)을 취한 것임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記】【문】개별적인 해석에 있어 초문(初門) 중의 연기 무애와 법계연기는 동일한 것인가?
【답】동일하다. 말하자면 이 문(門)의 아래 본문에 이르기를 “이상의 3중(重)은 제1제(際)를 융화하여 이루고, 원만히 밝아서 덕을 갖추며, 걸림 없이 자재하다”고 했다. 이는 법계연기문을 기준하여 말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문】만약 그렇다면 앞의 법계연기 중에서 이미 그 뜻을 다하였는데, 어째서 거듭 드는가?
【답】중생의 오염과 삼보의 청정이 서로 연기됨을 나타내고자 한다면, 반드시 법계연기의 뜻을 들어야 비로소 원만히 나타나기 때문에 거듭 들었을 뿐이다.
문답에 2단락이 있으니, 답 가운데 먼저 2문을 열고, 나중의 ‘처음 중에서’이하는 해석이다. 해석 중에서 먼저는 3중(重) 4구(句)를 열었고, 나중의 ‘이상의 3중(重)이 제1제(際)를 융화하여 이룬다’ 이하는 결론이다. 처음 가운데 ‘첫째, 공불공문(空不空門)’이란 공은 진공이고 불공은 유(有)이기 때문에 사(事)이다.
【문】어째서 상재(相在)와 상시(相是) 이전에 먼저 공과 불공을 논하는가?
【답】정관대사가 주변함용관(周遍含容觀)을 해석하여23)23)『화엄법계현경(華嚴法界玄鏡)』 하권, 신수대장경 제45권, p.680 상중.
말하기를 “사(事)는 여(如)하고 이(理)는 융화함으로써 두루 섭수하여 걸림이 없고 교참(交參)이 자재로우니, 대략 10문으로 변별한다. 첫째는 사여리문(事如理門)이고, 둘째는 이여사문(理如事門)이고, 셋째는 사(事)가 이사(理事)를 포함하는 문이며, 넷째는 통(通)과 국(局)에 걸림이 없는 문이고, 다섯째는 넓고 좁음에 걸림이 없는 문이며, 여섯째는 널리 용납함이 걸림이 없는 문이고, 일곱째는 섭수하여 들어감에 걸림이 없는 문이며, 열째는 널리 융화함이 걸림이 없는 문이다”고 하였으니, 처음의 둘은 이사가 상여(相如)하기 때문에 이사무애이고, 나중의 여덟은 사사무애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사사무애의 주변함용관에 먼저 이사무애를 설하는가? 이사무애 때문에 바야흐로 사사무애를 이루니, 이 때문에 그런 것이다. 지금 여기서도 마찬가지이라서 이사무애 때문에 사사무애를 이루고 사사무애 때문에 바야흐로 상재(相在)와 상시(相是)를 얻으니, 그러므로 먼저 공과 불공의 이사무애를 변별한다.
‘일체’로부터 ‘털끝만한 상(相)’에 이르기까지는 연기의 성품이 없기 때문에 털끝만한 상(相)도 없는 것이다. 비록 성품이 없다 하지만 헛된 가짜 상(相)인들 있겠는가? 이 때문에 허상도 다하는 것이다. 또는 ‘ 일체가 불공하니 공으로써 모든 법을 삼기 때문이다’라고 함은 앞에서 ‘털끝만한 상(相)도 없다’고 하고, 또 ‘허상도 다한다’라고 하는 것은 공이 있는 것인데 어째서 공으로써 모든 법을 삼는다고 말하는가?
【답】공이 곧 색(色)이라는 뜻을 기준으로 해서 말한 것이다. 말하자면 비록 공이라 말하더라도, 색(色)과 다르지 않은 공이기 때문에 멸색(滅色)을 말한 것이 아니다. 그런 뒤에 공이란 이름을 붙이니, 이 때문에 공으로써 모든 법을 삼는 것이다. 등(等)이란 수(受)ㆍ상(相)ㆍ행(行)ㆍ식(識)을 균등히 취한 것이다.
‘둘째, 상재와 부재의 문’ 에서는 먼저 일체가 하나에 들어가는 4구(句)이고, 나중의 ‘예를 들어 일체가 하나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이하는 하나가 일체에 들어가는 4구이다. 처음에 있어 상재와 부재라는 것은 섭수하는 것이 있음을 기준하여 상재(相在)라 하고, ‘일체가 하나에 들어간다’에서부터 ‘일체가 똑같이 하나에 존재한다’에 이르기까지는 하나의 법이 성품 없음[無性]이기 때문에 법성의 하나이다. 하나가 성품 없음이라서 법성의 하나이니, 이 때문에 일체도 성품 없음이어서 법성의 일체이다. 그러므로 하나와 일체가 하나의 법성이기 때문에 일체가 하나 속에 있는 것이다.
‘비록 항상 섭입하더라도 스스로의 지위에 머물기 때문에’라 함은 상재의 뜻을 들어서 부재의 뜻을 나타낸 것이다. ‘미세의 상입’이라 함은 상재의 뜻이고, ‘항상 밖에 있기 때문이다’라고 함은 부재의 뜻이다. ‘만리에 아득해서’라고 함은 부재의 뜻이고, ‘항상 상재하기 때문에’라고 함은 상재의 뜻이다. ‘혹은 둘 다 아니라고 일컫는 것이니, 들어오고 나감이 융화하기 때문이다’라고 함은 들어오면 상재이고 나가면 부재이다. ‘예를 들어 일체가’에서부터 ‘일체도 준거해서 생각하라’에 이르기까지는 만약 예시한 것을 갖춘다면, 마땅히 이렇게 말해야 한다.
“혹은 하나가 일체 속에 들어감은 일체의 성품 없음을 말미암아서 법성을 일체로 삼고, 또 하나의 법이 그대로 법성이라 하나가 일체 속에 두루 존재하면서도 상시(相是)하지 않는다. 혹은 일체의 부재는 말하자면 성품 없음을 말미암아서 많음과 하나가 끊어지기 때문에 이 같이 말한 것이다.”
‘셋째, 상시(相是)와 불시(不是)’ 중에서 먼저는 일체가 곧 하나인 4구를 밝힌 것이고, 나중은 하나가 곧 일체인 4구를 예시한 것이다.
처음은 다음과 같다.
【문】상시라는 것은 유(有)가 능시(能是)가 되고 공(空)이 소시(所是)가 되는 것인가?
【답】모든 곳이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가 곧 많음’일 때는 유(有)의 하나가 곧 공(空)의 많음이고 공의 하나가 곧 유의 많음이라는 두 가지 뜻을 갖춘다. 유의 하나가 곧 공의 많음일 때는 유가 능시가 되고 공이 소시가 되며, 공의 하나가 곧 유의 많음일 때는 공이 능시가 되고 유는 소시가 된다.
【문】만약 그렇다면 여기서는 어떻게 말하는가?
【답】비록 말을 단정 짓기 어렵지만, 만약 앞을 준거해서 설한다면 공이 능시가 되고 유가 소시가 된다. 말하자면 중문은 일체가 하나에 들어갈 때 일체의 무력이 하나에 들어가는 것이요, 이에 준거한다면 상시문(相是門)에서도 마찬가지이니, 일체가 하나일 때 일체의 공으로서 하나의 유에 즉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여기에 두 문이 있다’ 이하는, 먼저 장문(章門)을 열고, 다음으로 ‘성품을 기준으로 해서’ 이하는 개별적인 해석이다. 나중의 ‘【문】만약에’ 이하는 문답으로 의심을 없앤 것이다. 해석 중에 ‘첫째, 성품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말하자면 경에 이르기를’이란 『제법무행경(諸法無行經)』이다. ‘혹자는 성품의 문을 기준으로 해서 말했다’는 것은 1승이다.
【문】그렇다면 1승에선 3독(毒)의 당상(當相)이 곧 보리라 하고, 지금 여기에선 “탐욕은 성품이 없기 때문에 무너뜨릴 수 없다”고 말하니, 오직 탐욕의 성품 없는 이(理)만을 취하기 때문에 3승에 해당되는 것인가?
【답】1승에 입각하여 수행의 차례를 기준으로 해서 설한 것이 있고, 이미 증득한 사람의 마음을 기준으로 해서 설한 것이 있다. 만약 이미 증득한 사람의 마음에서라면, 3독의 당상이 곧 보리이다. 만약 수행의 차례에서라면, 요컨대 3독의 성품을 기준으로 해서 상즉하게 한 것이다. 지금 여기선 수행의 차례를 기준으로 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여기서는 인용한 경본(經本)이 3승이기 때문에 3승이고, 만약 1승을 기준으로 한다면 3독의 당상이 곧 보리라고 해석한다. 지금은 저 경(經)에 의거해서 본뜻을 해석했기 때문에 탐욕의 성품이 없음의 뜻을 기준으로 해서 바야흐로 “무너뜨릴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문】1승에서도 이리상즉(理理相卽)과 사사상즉(事事相卽) 등의 4구를 설한다면, 지금의 이것도 1승이 되는데 어째서 3승이라 하는가?
【답】1승이 비록 이(理)를 기준으로 해서 설했다 하나 3독의 상(相)은 이(理)일 뿐이다. 지금 여기서는 요컨대 탐욕의 성품이 없음을 기준으로 해서 상즉케 했기 때문에 3승이다.
【章】둘째, 사(事)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시작이고 하나는 종결이다. 시작이란, 말하자면 법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서 모든 법이 그대로 법계인 것으로써 법계를 삼으며, 1법도 따로 있지 않아서 법계가 그대로 1법인 것으로써 1법을 삼는다. 그러므로 일체법이 곧 1법인 것이다. 두 번째, 종결이란 전체적으로 법계가 그대로 1법인 것으로써 1법을 삼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이 하나가 곧 일체이고, 일체법이 곧 하나이다.
【문】이(理)의 성품에 입각하여 만약 하나의 많음이 모두 끊어진다면, 즉(卽)할만한 것이 없다. 만약 사상(事相)을 기준으로 하면, 사람과 법이 괴리되는 것이므로 무엇을 즉하겠는가? 만약 사(事)를 기준으로 해서 즉(卽)함이 있다면, 그 사(事)를 무너뜨림이 곧 세속에서 괴리되는 것이다. 만약 이(理)를 잡아서 즉함이 있다면 곧 진(眞)에 괴리된다. 만약 사(事)를 들어서 이(理)를 취한다면, 곧 앞의 문과 다르지 않으니 다시 무엇을 변별할 수 있는 것인가?
【답】단지 이 두 가지 뜻을 말미암기 때문에 상즉이다. 어째서인가? 만약 사(事)로서 이(理)가 아니면 즉할 수가 없고, 만약 이(理)로서 사(事)가 아니면 즉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지금은 이사가 둘이 아니면서 둘임을 말미암으니, 이른 바 사에 즉한 이는 바야흐로 참다운 이가 되기 때문에 전체의 사가 상즉하고, 참다운 이가 담연하여 이에 즉한 사가 바야흐로 환사(幻事)가 되기 때문에 항상 상즉하면서 만상이 분연(粉然)한 것이다. 진실로 이사가 상시(相是)이면서 하나 아님을 말미암기 때문에 완전한 하나와 많음이 서로 즉하면서 섞이지 않는 것이니, 망정을 버리고서 생각하라.
혹은 만약 상(像)을 향한다면, 말을 잡아서 이해를 구하더라도 종일토록 보기 어려울 것이다.
혹은 일체가 하나가 아니니, 이른 바 전체가 상시(相是)로서 섞이지 않기 때문이고, 본법을 무너뜨리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색(色)이 곧 공으로서 색(色) 등을 무너뜨리지 않는 것과 같으니, 준거하라. 혹은 둘 다이니, 앞의 두 가지 뜻을 말미암아서 무애가 갖춰지기 때문이다. 혹은 둘 다 아니니, 앞의 두 가지 뜻을 말미암아서 서로 형탈(形奪)하기 때문이다. 두 상(相)을 끊었기 때문에 시(是)도 불시(不是)도 없으니, 그리하여 이 법이 있는 것이다.
가령 ‘일체가 곧 하나’인 것에 이 4구가 있으니, ‘하나가 곧 일체’의 4구도 준거해서 생각하라. 이상의 3중(重)이 1제(際)를 융화하여 이루고, 원만히 밝아서 덕을 갖추고, 걸림 없이 자재로우니, 이를 법계연기문이라 하니 생각하면 알 것이다.
【記】‘둘째, 사(事)를 기준한 것이다. 이 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시작이고 하나는 종결이다’라고 함은 다음과 같다.
【문】이 시작과 종결의 뜻은 무엇을 말하는가?
【답】‘일체가 곧 하나’임을 아는 것이 시작이고, ‘하나가 곧 일체’임을 아는 것은 종결이다.
【문】만약 그렇다면 예를 든 문은 오직 종결일 뿐 시작은 없는 것인가?
【답】예 중에서도 시작과 종결을 갖췄기 때문에 ‘하나가 곧 일체’라는 것은 시작이고, ‘일체가 곧 하나’라는 것은 종결이다.
【문】초문 중에 ‘일체가 곧 하나’가 시작이고 ‘하나가 곧 일체’는 종결인데, 어째서 예를 든 것에서는 시작과 종결이 이와 반대인가?
【답】마음을 관(觀)하는 차례를 기준으로 해서 시작과 종결을 논했기 때문에 그렇다. 말하자면 ‘일체가 곧 하나’라는 언어적 표현에 의거해서 지해(智解)가 발생(發生)한다면, ‘일체가 곧 하나’인 법을 보기 때문에 시작이라 말한 것이다. 이 관(觀)이 이미 무르익으면, 문득 ‘하나가 곧 일체이고 일체가 곧 하나’라는 이해를 일으켜서 법의 그러함을 보므로 종결이라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든 것 중에서 처음에 ‘하나가 곧 일체’라는 언어적 표현에 의거해서 관행(觀行)을 닦기 때문에 시작과 종결이 이와 반대임을 알 수 있다.
문답 가운데 두 가지가 있다. 처음의 물음 중에서 ‘만약 이(理)의 성품에 입각하여 하나와 많음 등’이란 망정으로 헤아린 이사(理事)를 들어서 물은 것이고, ‘만약 사(事)를 들어서 이(理)를 취하면 등’이란 “만약 사(事)를 들어서 이(理)를 취하면, 앞의 성품을 기준으로 한 문과 다르지 않으니 다시 어떻게 변별하겠는가?”라고 물은 것이다. 둘째의 답 중에 먼저는 총체적인 답이고, 나중의 ‘사(事)에 즉한 이(理)’ 이하는 개별적인 답이다.
【문】처음 중에서 이 두 가지 뜻이라 말한 것은 어떤 두 가지 뜻인가?
【답】‘지금은 이사의 둘이 아니면서 둘임을 말미암아서’라고 말했기 때문에 이사의 다르지도 않고 동일하지도 않은 두 문이다. ‘어째서인가’라고 하는 것은 따져 묻은 것이고, ‘만약 사로서 이가 아니라면’ 등은 물음을 거듭 든 것이다.
개별적인 답 가운데 ‘사(事)에 즉한 이(理)가 바야흐로 참다운 이(理)가 된다’ 등은 ‘만약 이(理)를 기준으로 해서 즉함이 있다면’ 등의 질문에 답한 것이고, ‘이에 즉한 사가 바야흐로 환사(幻事)가 된다’ 등은 ‘만약 사(事)를 기준으로 해서 즉함이 있다면’ 등의 질문에 답한 것이다. ‘진실로 이사가 상시(相是)로서 동일치 않음을 말미암기 때문에’ 등은 ‘만약 사를 들어서 이를 취하면’ 등의 질문에 답한 것이다.
‘혹은 만약24) 상(像)을 향한다면, 말에 집착해서 이해를 구하더라도’ 등에서 ‘혹곡(或谷)’을 어떤 판본에서는 ‘혹용(或容)’이라 하였고, 일설에는 ‘혹객(或客)’이라고 하였다. 향(嚮)이란 글자는 어떤 판본에서는 향(響)이라 하고, 어떤 해석에서는 “법은 골짜기의 메아리 같고 거울 속의 영상 같은데도, 이를 미혹한 자는 말에 집착해서 이해를 구한다”고 하였으며, 어떤 해석에서는 “혹은 객(客)이 메아리와 영상 같은 법을 미혹해서 말에 집착하여 이해를 구한다”고 했으며, 어떤 해석에서는 “혹은 영상 같은 실답지 않은 법을 향함을 용납하여 말에 집착해서 이해를 구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전체가 상시(相是)로서 섞이지 않는다’ 등에서 전체가 상시라면 상시문이다. 그러나 섞이지 않음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본법을 무너뜨리지 않는 것이니, 이 때문에 불시(不是)의 말미암음을 이룬다. ‘마치 색(色)이 곧 공인 것과 같다’는 것은 상시문의 뜻이다. 그러나 색을 무너뜨리지 않는 등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불시(不是)의 말미암음을 이룬다. 등(等)이란 것은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 등을 균등히 취하는 것이다. ‘준거해서 생각하라’는 것은 예로 든 4구가 앞과 반대임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상의 3중(重)’ 등은 총체적으로는 3중인데, 열면 6중(重) 4구(句)가 된다. 말하자면 앞의 공불공(共不共) 문 중에서 비록 예를 든 것이 없다 하더라도, 이미 일체가 4구를 지음을 기준으로 해서 ‘일체의 공과 일체의 불공 등’이라 말했으니, 다시 하나의 4구를 기준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하나의 4구를 기준으로 하게 되면, 하나의 공과 혹은 불공, 혹은 둘 다이거나 혹은 둘 다 아닌 등의 4구를 짓기 때문에 2중 4구가 있는 것이다. 또 상재와 상시의 두 문 중에서 각기 4구를 나타내서 예로 든 4구를 변별한다면 합계 6중 4구가 되니, 24구를 이룬다.
【章】둘째, 구수(句數)의 결택(決擇)이란 것에도 3중(重)이 있다. 먼저 하나와 많음의 상즉과 상즉하지 않음을 기준으로 하면 총체적으로 44구가 있다.
첫째, ‘하나가 곧 많음’을 말미암기 때문에 이름 하여 하나라 하고, 둘째 ‘하나가 곧 많음’이기 때문에 하나가 아니며, 셋째 ‘하나가 곧 많음’이기 때문에 하나이기도 하고 하나가 아니기도 하며, 넷째 ‘하나가 곧 많음’이기 때문에 하나이기도 하고 하나 아님도 아니니, ‘많음이 곧 하나’라는 것은 이에 준거하라.
둘째, ‘하나가 많음에 즉하지 않음’을 말미암기 때문에 이름 하여 하나라 하고, 둘은 ‘하나가 많음에 즉하지 않음’이기 때문에 하나가 아니며, 셋은 ‘하나가 많음에 즉하지 않음’이기 때문에 하나이기도 하고 하나가 아니기도 하며, 넷은 ‘하나가 많음에 즉하지 않음’이기 때문에 하나도 아니고 하나 아님도 아니니, ‘많음이 하나에 즉하지 않음’은 이에 준거하라.
셋째, ‘하나가 많음에 즉하지 않음’을 말미암기 때문에 이름 하여 하나라 하고, 둘은 ‘하나가 곧 많음’을 말미암기 때문에 하나가 아니며, 셋은 즉하기도 하고 즉하지 않기도 함을 말미암기 때문에 하나이기도 하고 하나가 아니기도 하며, 넷은 즉함도 아니고 즉하지 않음도 아님을 말미암기 때문에 하나도 아니고 하나 아님도 아니니, ‘많음이 곧 하나’는 이에 준거하라.
넷째, ‘하나는 곧 많음’을 말미암기 때문에 이름 하여 하나라 하고, 둘은 ‘하나가 많음이 아님’을 말미암기 때문에 하나가 아니고, 셋은 둘 다 말미암기 때문에 둘 다 이고, 넷은 둘 다 아님을 말미암기 때문에 둘 다가 아니니, ‘많음과 하나’ 역시 이에 준거하라.
그러므로 이상은 순(順)으로 16구가 있고 역(逆)으로 16구가 있으니, 모두 32구이다.
둘째, 상재와 부재를 기준으로 한 것도 역시 32구이다.
셋째, 공과 불공을 기준으로 한 것도 역시 32구이니, 따라서 합계 96구이다.
또 가령 3중이 서로 융화하면, 3중의 4구가 있다. 첫째, 혹은 오직 공과 불공일 뿐이고, 혹은 즉함과 즉하지 않음일 뿐이며, 혹은 둘 다이며, 혹은 둘 다 아니다. 둘째, 혹은 재(在)와 부재(不在)일 뿐이고, 혹은 오직 공과 불공일 뿐이며, 혹은 오직 둘 다 아닌 등이다. 셋째, 혹은 오직 즉함과 즉하지 않음일 뿐이며, 혹은 재(在)와 부재일뿐이라는 등의 4구이니 준거하라. 그러므로 3 곱하기 4는 12구가 되니, 앞에서 든 96을 더하면 모두 108구의 법문이 된다.
【記】‘둘째, 구수(句數) 중에도 3중이 있다’는 것에서 먼저는 총체적으로 수(數)를 연 것이고, 나중의 ‘먼저’ 이하는 개별적인 해석이다. 해석 중에서 ‘먼저 하나와 많음이 상즉하고 상즉하지 않음을 기준으로 한 것에 총체적으로 44구가 있다’는 것은 구(句)의 숫자를 총체적으로 표시한 것이고, ‘첫째’ 이하는 개별적인 해석이다.
해석 중에서 ‘첫째, 하나는 곧 많음임을 말미암기 때문에 이름 하여 하나’라는 것은 연기의 하나이다. ‘둘은 하나는 곧 많음을 말미암기 때문에 하나가 아니다’라는 것은 망정으로 헤아린 하나를 가려낸 것이다. ‘셋은 하나는 곧 많음이기 때문에 하나이기도 하고 하나가 아니기도 하다’는 것은 연기이기 때문에 하나이고, 망정으로 헤아린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가 아니라는 것이다. ‘넷은 하나는 곧 많음을 말미암기 때문에 하나도 아니고 하나 아님도 아니다’라는 것은 망정으로 헤아린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가 아니고, 연기의 하나 아님이 없기 때문에 하나 아님이 없는 것이다.
‘많음이 곧 하나는 이에 준거하라’를 갖추어 설하면 마땅히 “하나가 많음이 하나를 말미암기 때문에 이름 하여 많음이라 하고, 둘은 많음이 곧 하나를 말미암기 때문에 많음이 아니고, 셋은 많음이 곧 하나를 말미암기 때문에 많음이기도 하고 많음이 아니기도 하며, 넷은 많음이 곧 하나를 말미암기 때문에 많음도 아니고 많음 아님도 아니다”라고 해야 한다.
이 중 망정으로 헤아린 것과 연기의 구별을 기준으로 한 것은 앞을 준거하라는 것이다.
‘둘째, 하나가 많음에 즉하지 않음을 말미암기 때문에 이름 하여 하나’ 등이란, 혹자는 “상시문은 바로 연기 도리의 문이고, 부즉문(不卽門)은 망정으로 헤아려 집착한 법이다”고 하였으니, 그러므로 ‘하나가 많음에 즉하지 않음을 말미암기 때문에 이름 하여 하나’라는 것은 망정으로 헤아린 하나이다. ‘둘은 하나가 많음에 즉하지 않음을 말미암기 때문에 이름 하여 하나가 아니라고 한다’ 함은 연기의 하나이다. ‘셋은 하나가 많음에 즉하지 않음을 말미암기 때문에 하나이기도 하고 하나가 아니기도 하다’는 것은 하나라면 망정으로 헤아린 것을 기준으로 한 것이고, 하나가 아니라면 연기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넷은 하나가 많음에 즉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도 아니고 하나 아님도 아니다’고 하는 것은 하나가 아니라면 연기의 하나가 아니고, 하나 아님도 아니라면 망정으로 헤아린 하나가 아닌 것도 아니다.
‘많음이 하나에 즉하지 않음은 이를 준거하라’를 갖추어 짓는다면 마땅히 “하나는 많음이 하나에 즉하지 않기 때문에 이름 하여 많음이라 하고, 둘은 많음이 하나에 즉하지 않기 때문에 이름 하여 많음이 아니라고 하고, 셋은 많음이 하나에 즉하지 않기 때문에 이름하여 많음이기도 하고 많음이 아니기도 하다고 하며, 넷은 많음이 하나에 즉하지 않기 때문에 이름 하여 많음도 아니고 많음 아님도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고 해야 한다.
이 중에서 망정으로 헤아린 것과 연기의 구별을 기준으로 한 것은 앞의 것을 준거하라.
그러나 여기서는 상시(相是)와 불시(不是)가 모두 연기의 도리 중에서 설한 것이기 때문에 불시(不是)라는 것은 망정으로 헤아린 법을 기준으로 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해석한다. 만약 그렇다면 앞에서 불시의 소이(所以)가 나왔는데도 ‘전체가 상시(相是)이니 섞이지 않기 때문이고 본위를 무너뜨리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것 또한 망정으로 헤아린 것이겠는가? 그리고 ‘색이 곧 공으로서 색을 무너뜨리지 않는다’ 등도 역시 망정으로 헤아린 것이겠는가? 그러나 ‘색 등을 무너뜨리지 않는다’는 것은 환색(幻色)을 무너뜨리지 않고 본래 스스로의 성품이 공하다는 뜻이기 때문에 곤란하다.
그러므로 마땅히 ‘하나가 많음에 즉하지 않기 때문에 이름 하여 하나’라고 말하는 것은 연기의 하나이고, ‘하나가 많음에 즉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가 아니다’라는 것은 망정으로 헤아린 하나가 아니다. ‘하나가 많음에 즉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이기도 하고 하나가 아니기도 하다’는 것은 하나라면 연기이고, 하나가 아니라면 망정으로 헤아린 하나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가 많음에 즉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도 아니고 하나 아님도 아니다’라는 것은 망정으로 헤아리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가 아니고, 연기의 하나가 아님이 없기 때문에 하나 아님도 아니다. ‘이를 준거하라’는 것은 앞을 준거해서 위의 2중(重)이 다음과 같은 4구를 짓고, 아래의 2중이 교직하여 4구를 지었음을 아는 것이다.
셋째 중에서 ‘하나가 많음에 즉하지 않음을 말미암기 때문에 이름 하여 하나라 한다’는 것은 제2중의 초구(初句)이고, ‘둘은 하나가 많음에 즉함을 말미암기 때문에 하나가 아니다’라는 것은 초중(初重)의 제2구이고, 셋은 초중과 2중의 제3구를 통틀은 것이고, 넷이라면 초중과 2중의 제4구이니 뒤집어서 지으면 알 수 있다.
넷째, ‘하나는 곧 많음임을 말미암기 때문에 이름 하여 하나라 한다’는 것은 초중의 초구(初句)이고, ‘둘은 하나가 많음에 즉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가 아니다’라는 것은 제2중의 제2구이고, 셋과 넷이라면 앞과 같으니 뒤집어서 지으면 알 수 있다.
‘이상 순(順)으로 16구가 있고 역(逆)으로도 16구가 있다’는 것은 4중 가운데 4중의 4구를 현작(現作)한 것은 순(順)이고, 4중의 4구를 예작(例作)한 것은 역(逆)이다. ‘둘째, 상재와 부재를 기준으로 한 것도 역시 32구이다’라는 것은 앞의 상시와 불시를 준거해서 지은 것이다. ‘셋째, 공과 불공도 역시 32구임을 기준으로 한다’는 것은 만약 갖추어 설한다면 개별적으로 하나와 일체를 나누어서 각기 4중의 4구를 짓는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는 공(空)이기 때문에 이름 하여 하나라 하고, 둘은 공이기 때문에 하나가 아니고, 셋은 공이기 때문에 하나이면서 하나가 아니고, 넷은 공이기 때문에 하나도 아니고 하나 아님도 아니니, 공 가운데 4구이다. 하나는 불공이기 때문에 이름 하여 하나라 하고, 둘은 불공이기 때문에 이름 하여 하나가 아니라 하고, 셋은 불공이기 때문에 하나이면서 하나가 아니고, 넷은 불공이기 때문에 하나도 아니고 하나 아님도 아니니, 불공의 4구이다. 이것이 2중의 4구이다.
만약 2중의 4구를 교직하여 갖추어 말한다면, 마땅히 ‘하나는 불공이기 때문에 이름 하여 하나라 하고, 둘은 공이기 때문에 이름 하여 하나가 아니라 하고, 셋은 공이기도 하고 불공이기도 하기 때문에 하나이면서 하나가 아니니, 1중의 4구이다. 반대로 지었으니 알 수 있다. 가령 하나의 공과 불공을 기준으로 하면 4중의 4구이고, 이처럼 일체의 공과 불공을 기준으로 해도 역시 4중의 4구이기 때문에 합계 8중의 4구로서 32구를 이룬다.
(2) 염정연기문(染淨緣起門)
【章】【문】중생의 잡염(雜染)과 삼보의 청정은 둘 다 망(妄)이기도 하고 망(妄)이 아니기도 한 것인가?
【답】이 둘에 각기 4구가 있다. 말하자면 중생은 망(妄)이니 멋대로 유(有)를 계교하기 때문이고, 중생은 망이 아니니 법기(法器)를 이루기 때문이다. 이상의 두 가지는 용(用)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중생은 망이니 위의 2구를 말미암기 때문이며, 중생은 망이 아니니 망(妄)으로써 공에 즉하기 때문이고 진여의 성품이 원만하기 때문이다.
삼보는 망(妄)이니 망령된 정으로 유(有)를 취하기 때문이다. 경에 이르기를 “부처님께서 중생을 제도하신다고 중생은 억지로 분별한다”고 하였고, 또 경에 “만약 진실을 이해한 자라면 부처도 없고 보리도 없다” 등이라 하였다. 둘째, 삼보는 망이 아니니 망을 다스리기 때문이다. 경에 이르기를 “부처님의 보리지혜가 끊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셋째, 삼보는 망이니 망을 다스림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성립하니, 망이 없으면 곧 진(眞)도 없기 때문이다. 논(論)에 이르기를 “단지 중생의 견문을 따라서 이익을 얻기 때문에 용(用)이 됨을 설한다”고 하였다. 넷째, 삼보는 망이 아니니, 전체가 진(眞)임을 말미암기 때문이고, 항상 1상(相)이기 때문이다. 경에 이르기를 “삼보가 동일한 맛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記】염정연기문의 문답은 곧 2단락이 된다. 답 중에서 ‘이 둘에 각기 4구가 있다’는 것은 총체적인 표식이고, ‘말하자면 중생은 망(妄)이니’ 이하는 해석이다. 해석 중에서 먼저는 중생의 4구를 해석한 것이고, 나중의 삼보의 4구를 해석한 것이다.
처음 가운데 ‘중생은 망이니’라는 것은 말하자면 변계소집(遍計所執)의 중생이다. ‘중생은 망이 아니다’는 것은 의타사유(依他似有)의 중생이고, 또 진여가 연(緣)에 따르는 뜻을 기준한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용(用)을 기준한 것이다’란 아래의 2구가 체(體)를 기준한 것을 대대하기 때문이다.
【문】‘중생은 망이니 위의 2구를 말미암기 때문이다’라고 함은 어째서 앞에선 중생은 망이 아니라고 말하고 지금 여기선 망이라고 말하는가?
【답】앞에서는 변계(遍計)를 대대하기 때문에 의타(依他)는 망이 아니고, 지금은 원성실(圓成實)의 덕을 대대하기 때문에 의타도 망인 것이다.
‘중생은 망이 아니니’에서부터 ‘성품이 원만하기 때문이다’에 이르기까지는 「사나품소」에서 5해(海)를 기준으로 해서 염정(染淨)의 뜻을 논하는 가운데 ‘중생 그대로 청정함’의 뜻이다.
‘삼보가 망이니’라는 것은 멋대로 계교함이 유(有)가 되기 때문에 비록 삼보라도 역시 망이다. 두 군데의 ‘경에서 말하길’은 모두 『화염경』이고, ‘경에서 말하기를 부처의 보리지혜 등’은 『승만경』이다.
【문】‘삼보는 망이니, 망을 다스림을 말미암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어째서 앞에선 ‘망을 다스리기 때문에 망이 아니다’라고 하고, 지금 여기선 ‘망을 다스리기 때문에 망이다’라고 하는가?
【답】앞에서는 이미 망을 다스렸기 때문에 망이 아니고, 지금은 만약 다스릴 만한 망이 없다면, ‘삼보의 다스림’이 성립하지 못하니, 이제 다스림을 받는 망이 다하여 다스리는 진(眞)을 세웠기 때문에 망이다.
‘이 때문에 세운다’는 것은 순(順)의 해석이고, ‘망이 없으면 없다’는 것은 반대의 해석이다. ‘논에서 말하길’이란 『기신론』이고, ‘경에서 말하길’은 『열반경』이다. 그러므로 중생과 부처가 동일한 진공(眞空)이기 때문에 평등해서 차이가 없으니, 이 때문에 염정연기라고 말하는 것이다.
(3) 간리이정문(揀理異情門)
【章】【문】진공(眞空)과 단공(斷空)은 어떻게 다른가?
【답】대략 네 가지의 구별이 있다. 첫째는 경계를 기준으로 한 것이니, 말하자면 진공은 색(色) 등과 다르지 않아서 이름 하여 법리(法理)의 공이라 한다. 단공은 색 등의 밖에 있어서 색을 멸하여야 비로소 공이 되니, 이름 하여 단멸(斷滅)의 공이라 한다. 둘째, 마음을 기준으로 한 것이니, 말하자면 진공은 성스러운 지혜로 얻은 것이어서 비증(比證) 등과는 같지 않다. 단공은 망정으로 얻은 것이어서 세상 사람이 알고 있는 것이다. 셋째, 덕용(德用)을 기준으로 한 것이니, 말하자면 진공을 달관하면 반드시 번뇌를 복멸(伏滅)해서 왕행(王行)을 이루어 지위에 들게 함으로써 과(果)를 얻게 한다. 만약 염(念)을 반연한 단공이라면 단멸의 견(見)을 이루고 사취(邪趣)를 증장해서 외도의 지위에 들어가고 악취(惡趣)로 전도되어 추락한다. 경에 이르기를 “차라리 수미산 같은 유견(有見)을 일으킬지언정, 겨자씨만큼이라도 공견(空見)을 일으키지 말라”고 했으며, 논(論)에 이르기를 “만약 다시 공을 본다면, 모든 부처도 교화하지 못한다” 등이라 하였다. 또 진공은 곧 색이기 때문에 단공으로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진공은 불가사의하고 단공은 그렇지 않으니, 위를 뒤집으면 알 것이다.
넷째, 대대함을 기준하여 이(理)를 변별한 것은 다음과 같다.
【문】색 등이 이미 그대로 진공이라면 단공은 어째서 홀로 진(眞)이 아닌가?
【답】만약 단공도 공에 즉해서 실로 차별이 없다면, 오직 외람되게 공의 명칭을 취한 것이다. 이 때문에 이를 가려냈을 뿐이니, 대략 4구를 짓는다.
첫째, 색과 단공이 상즉하지 않음이다. 둘 다 집착한 것이기 때문이니, 마치 사람과 가축 등을 보는 것과 같다. 둘째, ‘단공 그대로 공’인 것과 ‘색 그대로 공’인 것의 두 공이 다르지 않으니, 두 상(相)이 없기 때문이다. 셋째, 색의 진공과 단공이 상즉하지 않으니 망정과 이가 다르기 때문이며, 또 단공의 공과 색이 상즉하지 않으니 또한 망정과 이(理)가 구별되기 때문이다. 넷째, 공에 즉한 색과 진(眞)에 즉한 단(斷)이 상(相)을 얻은 것이니, 즉 언어적 표현으로 이(理)를 설하기 때문이고 법에 나아가서 융통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두 문이 이 4구를 갖추고, 나머지 일체법이 서로 조망함도 모두 이와 같으니 준거해서 생각하라. 그러므로 경에 이르기를 “모든 법이 그대로 탐욕이란 것은 공에 즉한 모든 법이 오히려 저것에 즉하고 공에 즉한 탐욕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문】가령 탐욕의 법이 공에 즉한다면, 성냄 등도 역시 공에 즉한다. 성냄 등의 공이 곧 탐욕의 공이 됨을 알지 못한다면, 오히려 탐욕 밖에 있는 것이 되는가?
【답】온전히 안이라서 밖도 완연하고, 온전히 밖이라서 안도 마찬가지이니, 원융하기 때문이고, 한계와 분제가 없기 때문이며, 장애가 없기 때문이다.
【문】가령 당(堂) 안의 공과 방(房) 안의 공이라면, 이 두 공에는 분한이 없기 때문에 한 맛으로 동일하다.
그러므로 당의 곧 방의 공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 당 안의 공은 방 가운데 섭수되지 않으니, 이렇게 되지 않겠는가?
【답】그렇지 않다. 이것은 세법(世法)이라서 저것과 동일할 수 없다. 만약 저 말과 같다면, 방의 공함을 옮기지 않고도 온전히 당 안에 존재하고, 당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는 피차가 서로 통하기 때문에 둘이 아니라고 설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저것의 공이 원래 이것의 공이기 때문에 이름 하여 둘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세법이 아니라서 충분히 설하기 어려우니, 뜻을 회통해서 생각하라. 어떤 객(客)이 알 수 있으리.
【記】간리이정문의 답 가운데 ‘첫째, 경계를 기준으로 한 것이니, 말하자면 진공’ 등이란 색의 체(體)에 성품이 없어서 그대로 진공이기 때문이다. ‘단공은 색의 밖에 있다’ 등은 예를 들어 담의 처소가 공하지 않고 담 밖이 공한다면, 색 밖의 공이다. 가령 우물을 파서 흙을 없앤 뒤에 공이 된다면, 색을 멸한 공이다. ‘비증(比證) 등과 동일하지 않다’는 것은 3승에선 지(地) 이전이 비(比)이니 비지(比智)가 공을 알기 때문이며, 지(地) 위에서는 증(證)이니 증지(證智)가 공을 보기 때문이다. 1승에선 견문이 비(比)이고, 해행(解行)이 증(證)이 된다.
‘반드시 번뇌를 복멸한다’ 등은 3승에선 지(地) 이전이 복멸이고, 지(地) 위에선 단멸이다. 1승에선 견문위(見聞位)가 복멸이고, 해행이 단멸이다. ‘정행(正行)25)을 성취한다’는 것은 번뇌를 소멸하여 얻는 것이다. ‘지위에 들어간다’는 것은 신(信) 등의 5위이고, ‘과(果)를 얻는다’는 것은 보리과를 얻는 것이다. 경이라는 것은 『정명경』이고, 논(論)이란 『금강반야론』이다. 경은 공견(空見)의 일어나지 않음을 증명한 것이고, 논은 공견의 잘못을 증명한 것이다.
‘단공은 그렇지 않으니, 위를 뒤집으면 알 것이다’라고 함은 마땅히 “단공은 색에 즉하질 않으니, 단공을 취할 수 있다. 그러므로 단공은 사의(思議)할 수 있다”고 말해야 한다. ‘넷째, 대대를 기준하여 이(異)를 변별한다’는 것은 단공을 색에 즉한 진공에 대대함으로써 그 차이를 변별한 것이다.
문답의 답 중에서 먼저는 대략적인 답이고, ‘대략 4구를 짓는다’ 이하는 구수(句數)를 열어서 널리 답한 것이다. 널리 답한 것 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는 색과 단공을 기준으로 4구를 분별한 것이고, 처음 가운데 ‘둘 다 집착한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함은 색과 단공이 모두 변계소집이기 때문이다. ‘마치 사람과 가축을 본 것과 같다’ 등은 색과 단공의 현묘한 구별이 마치 사람과 가축의 구별과 같다는 것이다.
‘둘째, 단공이 그대로 공인 것과 색이 그대로 공인 것의 두 공을 구별하지 못한다’는 것은 이것이 모두 진공이기 때문에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다. ‘셋째, 망정과 이(理)가 다르기 때문이다’라고 함에 있어, 진공이란 이(理)이고 단공이란 망정이다. 이하는 준거해서 알라.
‘넷째, 공에 즉한 색과 진(眞)에 즉한 단(斷)’ 등이란 공에 즉한 색과 진에 즉한 단이 사실상 다르지 않지만, 그러나 색과 단의 언어적 표현을 기준으로 해서 이(理)를 나타낸 것이다. ‘그러한 까닭’이란 법에 나아가 융통하기 때문이다.
【문】앞에서는 색과 단공이 즉하지 않았는데, 어째서 지금 여기서는 상즉하는가?
【답】앞에서는 공과 다른 색이고 진에 즉한 단이기 때문에 즉하지 않은 것이고, 지금은 공에 즉한 색과 진에 즉한 단이기 때문에 상즉이다.
‘둘째 중에서 나머지 일체법이 서로 조망해서’ 등이란 가령 색과 단공을 기준으로 해서 논한다면, 이 같은 탐욕과 성냄 등을 기준으로 한 것은 마땅히 “첫째, 탐욕과 성냄이 즉하지 않으니 집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성냄이 그대로 공인 것과 탐욕이 그대로 공인 것의 이 두 공이 다르지 않으니, 두 상(相)이 없기 때문이다. 셋째, 탐욕이 그대로 공인 것과 성냄이 상즉하지 않으니 망정과 이(理)가 다르기 때문이며, 또 성냄이 그대로 공인 것과 탐욕이 상즉하지 않으니 이 역시 망정과 이가 다르기 때문이다. 넷째, 공에 즉한 탐욕과 공에 즉한 성냄은 상즉을 얻는다. 또 나머지 법을 기준으로 해도 역시 마찬가지다”라고 말해야 한다.
‘경에서 말하길’은 『제법무행경』이니, 제4구의 증명에 해당한다. 다음의 두 가지 문답은 알 수 있다. ‘아마도 알 수 있을 것이다’란 소위 행에 나아가는 사람을 권해서 관(觀)과 지(智)를 닦게 한 것일 뿐이다.
(4) 약병대치문(藥病對治門)
【章】【문】병에 대해서 치유를 일으키는 분제(分齊)가 얼마나 있는가? 수행의 요체이기 때문에 제시해 주길 청한다.
【답】병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거친 것이니, 말하자면 기교나 위선으로 수행하는 것이다. 하나는 미세[細]한 것이니, 말하자면 집착의 견해를 타파하지 못하는 것이다.
전자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내실(內實)로는 계율을 깨트렸으면서도 밖으로는 위의(威儀)를 나타내는 등이다. 하나는 완전하여 계를 깨뜨리지 않았음을 가장하는 것이니, 교활하기 때문이고, 사압(伺狎)하기 때문이며, 정지하지 않기 때문이고, 단점을 옹호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의 미세 중에도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비록 직심(直心)을 갖추었더라도 나의 수행에 집착하는 것이고, 둘은 비록 사람이 있다고 집착하지 않더라도 법이 있다고 계교하는 것이니, 실(實)이라는 견해를 타파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치하는 약에도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거친 것이니 여기에도 두 가지가 있다. 말하자면 모든 허물과 잘못에 대해서 덮어두지 않고 깊이 참회하고 뉘우치는 것이다. 둘은 수행하는 것에 기교나 위선이 섞이지 않는 것이니, 모두가 곧고 유연해서 하하(下下)의 뜻을 짓되 자기 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두 번째의 미세 중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모든 수행을 할 때 무아(無我)의 사람을 알아서 괴로움을 계교하지 않는 것이다. 둘은 모든 법이 평등하여 둘이 아님을 관찰해서 일상(一相)과 무상(無相)이 이(理)의 구경(究竟)에 들어가는 것이다. 둘을 통틀어 설한다면, 다만 모든 법의 평등을 깊이 관할 때, 위의 모든 병이 치료되지 않음이 없다. 이것은 대승의 수행법문으로 불장경(佛藏經)의 뜻에 의거해서 설한 것이다.
【記】약병대치문 문답의 답 가운데 먼저는 병을 제시한 것이고, 다음은 약을 제시한 것이며, 나중의 ‘이것은 대승으로서’ 이하는 결론이다. 처음 중에선 숫자를 표식해서 명칭을 열거한 것이고, 나중의 ‘전자 중에서’ 이하는 해석이다.
처음 가운데 ‘첫째, 거침’ 등이라 함에 있어 처음과 둘째는 그릇이 아니라는 것이다. ‘둘째, 미세함’ 등이란 정(正)과 괴(乖)를 실답게 겸해서 협소하고 열등함이 있으나, 그릇이 아니라는 것이다. 해석 중에서 ‘첫째, 내실로는 계율을 깨뜨렸어도’ 등은 진(眞)에 어긋나니 그릇이 아니라는 것이니, 명예와 이익을 구하는 것은 나와 남을 장식하기 때문이다. ‘둘째, 완전하여 계를 깨트리지 않음을 가장하는’ 등은 정(正)을 위배하니 그릇이 아니라는 것이다. ‘둘째, 미세 중에서 하나는 비록 직심을 갖추었더라도’ 등은 기교나 위선을 짓지 않기 때문에 직심이라 말한다. 그러나 스스로 집착한 견해를 따라서 경문을 잘못 취하기 때문에 ‘나의 수행에 집착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實)을 어김에 해당되니 그릇이 아니라는 것이다. ‘둘째, 비록 사람이 있다고 집착하지 않더라도’ 등은 2승의 사람은 인공(人空)을 얻기 때문에 사람이 있다고 계교하지 않는다. 그러나 법공(法空)을 통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법이 있다고 계교해서 실견(實見)을 타파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협소하고 열등함에 해당되니 그릇이 아니라는 것이다.
약 중에서 ‘모든 허물과 잘못을 덮어두지 않고’ 등은 앞서의 ‘내실로는 계율을 깨뜨렸더라도’ 등을 뒤집은 것이다. ‘둘째, 수행하는 것에 기교나 위선을 섞지 않는다’ 등은 앞의 ‘명예와 이익을 구한다’를 뒤집은 것이다. ‘질직(質直)’이란 것은 앞의 ‘정직하지 않음’을 뒤집은 것이다. ‘유연이란 앞의 교활’ 등을 뒤집은 것이다. ‘하하(下下)의 뜻을 짓는다’는 것은 앞의 ‘타인이 알아줌을 위하기 때문이다’를 뒤집은 것이다. ‘자기의 덕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은 앞의 ‘단점을 옹호한다’를 뒤집은 것이다.
미세 중에서 ‘첫째, 모든 행을 닦을 때’ 등은 앞서의 ‘나의 수행에 집착한다’ 등을 뒤집은 것이다. ‘둘째, 모든 법이 평등해서 둘이 아님을 관찰해서’ 등은 앞의 ‘비록 사람이 있다고 집착하지 않더라도’ 등을 뒤집은 것이다. ‘둘은 통틀어 설한다면’이란 것은 앞에서 장문(章門)을 열어서 열거할 때 비록 표식해서 들지 않았더라도, ‘약에도 두 종류가 있다’고 말하였으니 이처럼 두 문을 대비하여 개별적으로 논했기 때문에 통틀어 설한다고 말한 것이다.
【문】‘다만 모든 법의 평등을 깊이 관해서’와 앞의 ‘모든 법이 평등해서 둘이 아님을 관찰한다’는 일상(一相)인데, 어떻게 구별되는가?
【답】법의 평등을 관찰한다면 한 종류로서 차별이 없다. 다만 전자는 개별적으로 실견(實見)을 다스린 것이고, 지금은 모든 병을 통틀어 다스렸기 때문에 다른 것이다.
(5) 이사부무문(理事不無門)
【章】【문】이 같은 이(理)와 사(事에)에서 이(理)는 분한(分限)이 없고 사(事)는 분한이 있는 것인가, 아닌가?
【답】여기에서 이와 사는 각기 4구가 있다. 우선 이(理)는, 첫째 분한이 없으니 일체에 두루 하기 때문이고, 둘째 분한이 없지 않으니 1법 가운데 구족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이다. 셋째, 분한과 분함 없음을 한 맛으로 갖추었으니, 전체가 1법에 존재하면서 일체 처소에 항상 충만하기 때문이다. 마치 하나의 티끌을 관찰하는 가운데 일체처의 법계를 보는 것과 같다. 넷째, 분한과 분함이 없음 둘 다 아니니, 자체가 기다림을 끊었기 때문이고, 원음이기 때문이며, 두 가지 뜻이 일상(一相)으로서 2문(門)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事) 중에서 첫째, 분한이 있으니, 자사(子事)의 상(相)을 따라서 분제가 있기 때문이다. 둘째, 분한이 없으니, 전체가 곧 이(理)이기 때문이다. 『대품(大品)』에 이르기를 “색(色)의 전제(前際)도 얻을 수 없고, 후제(後際)도 얻을 수 없다”고 했으니, 이는 곧 분한이 없는 것이다. 셋째, 둘 다이니 앞의 두 뜻을 걸림 없이 갖추었기 때문이고, 이 두 뜻을 갖춘 것이 바야흐로 1사(事)이기 때문이다. 넷째, 둘 다 아니니 두 뜻을 융화하기 때문이고, 평등하기 때문이며, 두 상(相)이 끊어졌기 때문에 위의 모든 뜻을 말미암는다.
그러므로 이(理)의 성품은 분한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체법의 처소에 존재하는 것이고, 전체의 하나 안에서의 분한이 아니기 때문에 항상 하나 속에 존재하면서도 전체는 하나 밖에 존재한다. 사법(事法)은 분한이 아니기 때문에 항상 이곳에 존재하면서도 항상 타방(他方)의 처소에 존재하는 것이며, 분한이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체에 두루 하면서도 본위를 옮기지 않는 것이다.
또 이(理)는 분한이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1사(事) 밖에 존재하지 않고, 분한이 아니기 때문에 1사(事) 안에 존재하지도 않는다. 사(事)는 분한이 아니기 때문에 항상 이곳에 존재하면서도 존재함이 없는 것이며, 분한이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항상 다른 처소에 존재하면서도 존재함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재(在)와 부재(不在)가 없더라도 이곳에 존재하고 저곳에 존재함에 장애가 없다.
【記】이사분무문 문답의 답 가운데 먼저는 분무(分無)를 기준으로 해서 4구를 논한 것이고, 나중의 ‘위의 모든 뜻을 말미암아서’ 이하는 재(在)와 부재(不在)를 기준으로 해서 4구를 논한 것이다. 나중 중에서 먼저는 재의 뜻을 해석한 것이고, 다음의 ‘또 이(理)는 분한이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하는 부재를 해석한 것이며, 나중의 ‘그러므로 재와 부재가 없더라도’ 등은 결론이다.
처음 중에서 먼저는 이(理)를 기준으로 해서 변별한 것이고, 나중은 사(事)를 기준해서 해석한 것이다. 처음 중에서 ‘이(理)의 성품이 분한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등은 분한이 없는 것을 빼앗아서 분한을 이루는 것이니, 일체에 두루 하면서 하나 속에 존재함을 나타낸 것이다. ‘분한이 아니기 때문에’ 등은 분한을 빼앗아서 분한 없음을 이루는 것이니, 하나에 존재하면서 일체 속에 두루 함을 나타낸 것이다.
나중의 사(事)를 기준으로 한 것 중에서 ‘사법이 분한이 아니기 때문에’ 등은 분한을 빼앗아서 분한 없음을 이루는 것이니, 항상 이 처소에 존재하면서 항상 다른 처소에 존재함을 나타낸 것이다. ‘분한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라는 것은 분한 없음을 빼앗아서 분한을 이루는 것이니, 일체처에 두루 하면서도 본위를 옮기지 않음을 나타낸 것이다. 부재의 뜻에 나아가 먼저는 이(理)를 기준으로 한 것이고, 나중은 사(事)를 기준으로 해서 해석한 것이다. 결론 중에서 ‘재와 부재가 없다’ 등은 부재를 결론지은 것이다. ‘그리고 저곳에 존재하면서 이곳에 존재한다’는 것은 재의 뜻을 결론지은 것이다.
(6) 인인과과문(因因果果門)
【章】「사자후품(師子吼品)」에서 말하기를 “불성에는 인(因)이 있고, 인인(因因)이 있고, 과(果)가 있고, 과과(果果)가 있으니, 인(因)이란 12인연이고, 인인(因因)이란 곧 지혜이고[법을 통달한 이후이다, 과(果)는 아뇩보리이고, 과과(果果)란 무상대반열반(無上大般涅槃)이다”고 하였으니, 나중의 4구에서 인(因)이고 과(果)가 아님은 불성과 같고, 과(果)이고 인(因)이 아님은 대열반과 같고, 인이면서 과인 것은 12인연으로 낳은 법과 같고[이 중에 지혜와 보리의 2구를 갖추고 있다], 인도 아니고 과도 아님은 이름 하여 불성이라 한다[중도의 바른 성품은 소위 법신의 이(理)이다. 제3구를 열면 곧 다섯 가지 불성이 된다].
혹, 어떤 이는 불성은 천제인(闡提人)은 있으나 선근인(善根人)은 없다고 하고[이는 앞의 인성(因性)이다]. 혹 어떤 이는 불성은 선근인은 있고 천제인은 없다고 하며[이를 인성(因性)이라 말한다], 혹은 어떤 이는 불성은 두 사람 다 있다고 하고[인도 아니고 과도 아닌 성품이다], 혹 어떤 이는 불성은 두 사람 다 없다고 한다[과(果)와 과과(果果)의 두 성품이다].
12인연을 이름 하여 불성이라 한 것은 또한 무명이 불성인 것과 같으니,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당체(當體)가 청정하기 때문이니, 이는 법신의 성품이다. 둘째는 명의(名義)를 알아서 반류(反流)를 이루기 때문에 이름 하여 보신의 성품이라 한다. 나머지 지(支)는 이에 준거하라.
또 처음의 4구중에서 첫째는 소위 염정연기문(染淨緣起門)이고, 둘째는 내훈(內熏)의 발심이고, 셋째는 시각(始覺)의 원만함이고, 넷째는 본각(本覺)의 나타남이다.
또 첫째는 염(染)에 따라서 체(體)가 숨는 것이고, 둘째는 청정의 작용이 미묘하게 일어나는 것이며, 셋째는 오염이 다하고 청정이 원만한 것이고, 넷째는 근원으로 돌아가서 실(實)을 드러내는 것이다.
또 첫째와 넷째는 둘 다 이(理)의 성품인데 다만 오염과 청정이 다를 뿐이고, 중간의 둘은 모두 행(行)의 성품인데 다만 인과가 다를 뿐이다.
또 첫째는 오염으로서 청정이 아니고, 둘째는 청정으로서 오염이 아니며, 셋째는 오염이기도 하고 청정이기도 하고, 넷째는 오염도 아니고 청정도 아니다.
또 첫째는 자성이 머무는 것이고, 둘째는 이끌어 내는 것이며, 셋째와 넷째는 과(果)를 얻는 데 이르는 것이다.
또 처음의 둘은 인(因)이고, 나중의 둘은 과(果)이다. 또 첫째를 굴려서 넷째가 되고, 둘째를 굴려서 셋째가 된다.
또 첫째에 의거해서 둘째가 일어나고, 둘째로써 셋째를 이루고, 셋째로서 첫째를 증명하니, 그윽하게 합하여 둘이 아니다. 그러므로 네 가지 뜻이 오직 일심(一心)이 구르는 것이니, 만약 무명을 여읜다면 이 네 가지 상(相)도 모두 멸진한다.
【記】인인과과문이니, 여기엔 네 가지 단락이 있다. 첫째는 「사자후음」의 4구를 인용하여 해석한 것이다. 둘째, ‘혹 어떤 이는 불성은 천제인에게는 있으나’ 이하는 「가섭보살품」의 4구를 인용해서 앞의 4구와 합쳐 해석한 것이다. 셋째, ‘12인연을 이름 하여 불성이라 한다’ 이하는 불성의 평등을 나타낸 것이다. 넷째, ‘또 처음의 4구’ 이하는 7중(重)으로 4구를 해석한 것이다.
처음 가운데 ‘인(因)이란 12인연이다’라고 함은 12인연의 불성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므로 12인연이 지혜의 인(因)을 낳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인인(因因)이란’에서 ‘이거(已去)’에 이르기까지는 발심을 이미 한 사람은 지혜가 있기 때문이다. 『연의』26) 중에선 두 가지 해석이 있는데, 하나는 여기서와 같이 역시지혜로써 12인연을 관(觀)함을 해석했기 때문에 인인(因因)이라 말한 것이다.
과(果)라는 것은 아뇩보리이니, 지혜가 낳은 과(果)이다. ‘과과(果果)라 함 은 무상대열반이다’라는 것은 보리지(普提智)로 나타낸 과(果)이다. ‘나중의 4구’라는 것은「사자후품」과 똑같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인(因)이지 과(果)가 아닌 것이 불성과 같다’는 것은 12인연이다. ‘과(果)이지 인(因)이 아닌 것이 대열반과 같다’는 것은 무상대열반이니, 오직 과(果)일 뿐 인(因)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인이면서 과인 것은 12인연이 낳은 법과 같다’에서 ‘2구’에 이르기까지는 지혜가 12인연을 대대하기 때문에 과(果)이고, 만약 보리를 대한다면 인(因)이다. 또 보리는 지혜가 낳은 과(果)이고, 만약 대열반을 대대한다면 인(因)이다. 그러므로 인기기도 하고 과이기도 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인도 아니고 과도 아니다’라고 함은 법신이다. ‘둘째, 4구를 합쳐서 해석함’ 가운데 ‘초구가 이전의 인성(因性)’이란 것은 12인연이고, ‘제2구가 인인성(因因性)’이란 것은 지혜이다. ‘제3구는 인도 아니고 과도 아닌 성품이다’라고 함은 법신의 성품이기 때문이고, 두 사람에게 모두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제4구가 과(果)와 과과(果果)의 성품인 것이 보리열반의 과(果)이다’라고 함은 두 사람에게 모두 없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문】이 중에서 선근인과 천제인은 무엇을 말하는가?
【답】6바라밀을 익혀서 신만감임위(信滿堪任位)에 이른 자는 선근이다. 이 이전은 천제라 이름 붙인다.
【문】만약 그렇다면 신만감임(信滿堪任)을 이미 지난 3현인(賢人)도 12인연을 갖추었는데, 어째서 오직 천제인만 있다고 말하는가?
【답】12인연 중에 선(善)과 불선(不善)의 둘이 있기 때문이다. ‘천재인은 있으나 선근인은 없다’는 것은 불선의 1분(分)이기 때문에 모순되지 않는다.
【문】효공(曉公:원효대사)의 『열반종요』에 이르기를 “이 4구를 해석하는 데 대략 네 가지 뜻이 있으니, 두 문을 나타내기 때문이고, 인과의 성품을 구별하기 때문이며, 네 가지 뜻을 열기 때문이고, 두 변(邊)을 차단하기 때문이다”고 했는데, 지금 논한 것과 어떻게 다른가?
【답】이것과 저것은 다른 것이다. 말하자면 ‘초구에서 천제인에게 있다’는 것은 12인연이고, ‘제2구에서 선근인에게 있다’는 것은 지혜이다.
【문】이 4구의 불성은 어느 교(敎) 중에서 논(論)을 세운 것인가?
【답】문답의 후권(後卷)27)에 이르기를 “대승열반경에서 말한 4구의 불성이란 것은 소승의 뜻 가운데 처음으로 회심(廻心)한 사람이 4구를 지었다는 뜻이 아니니, 즉 돈교와 종교의 불성이다”고 하였다.
【문】문답의 초권(初卷)28)에 이르기를 “만약 3승 시교에 의거한다면, 반은 부처를 이루고 반은 이루지 못한 것이다. 가령 직진(直進)과 회심의 두 사람이 10천 겁(劫)을 수행해서 감임지(堪任地)에 머문다면 모두 다 부처를 이루고, 가령 이 지위에 이르지 못하고서 일천제(一闡提)의 가위(迦位)와 똑같다면, 이 같은 사람들은 모두 다 성불하지 못하는 것이니, 이는 지위를 기준으로 해서 말한 것이다. 만약 이것에 의거해서 4구를 나누어 분별한다면, 준거하는 것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문】그렇다면 초교 중에서도 4구를 논한 것인가?
【답】혹자는 “『열반경』의 4구를 말한 것이 아니니, 이는 화상 스스로의 뜻으로 4구를 지었을 뿐이다. 말하자면 혹은 오직 성(成)일 뿐이니, 6바라밀의 관습을 닦아서 행의 도달이 신만감임을 이미 지난 자이고, 혹은 오직 불성(不成)일뿐이니, 성품이 없는 중생과 같으며, 혹은 성(成)이면서 불성이니, 6바라밀의 관습을 닦아도 행이 신만감임에 이르지 못한 사람이고, 혹은 성(成)도 아니고 불성도 아니니, 정성(定性)의 2승과 같은 것이다. 이처럼 스스로의 뜻으로 4구를 지은 것이다”고 하였다. 지금의 해석에선 초교에서도 역시 논할 수 있으니, 말하자면 일체의 천제와 선근인을 기준으로 해서 4구를 논한 것은 오직 종교에만 국한된 것이고, 1분(分)의 천제와 선근인을 기준으로 해서 4구를 논한 것은 역시 초교에서 논한 것이다.
【문】1분(分)의 천제라는 것은 무엇인가?
【답】성품이 없는 유정(有情)을 가려낸 것이니, 이는 6바라밀의 관습을 닦아서 행이 신만감임에 이르지 못한 이전의 사람은 1분의 천제가 되고, 신만(信滿)에 이르면 선근인이다.
【문】만약 그렇다면 어째서 『문답』에서는 “『열반경』에서 말한 4구의 불성이란 소승의 뜻 가운데서 처음으로 회심한 사람이 4구를 지었다는 뜻이 아니니, 즉 이는 돈교와 종교이다”라고 말하는가?
【답】『열반경』의 4구라면, 일체의 천제를 기준으로 해서 선근인을 논했기 때문에 종교와 돈교이지, 1분의 천제인을 기준으로 해서 선근인을 대대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르다. 말하자면 초교 가운데 4구는, ‘혹 어떤 이는 불성은 천제인에게는 있고 선근인에게는 없다’는 것은 소위 행을 기준으로 성품을 변별한 것이니, 이 세상에 선(善)을 낳아서 기연을 구할 만한 자이니, 착한 성품을 나타내서 행하기 때문이다. ‘혹 어떤 이는 불성은 선근인에게는 있고 천제인에게는 없다’는 것은 소위 지위를 기준으로 해서 성품을 변별했기 때문에 동등하다.
【문】여기 이 4구와 문답의 4구는 어떻게 다른가?
【답】다르다. 지금 전자 중에서 ‘두 사람에게 모두 있다’는 것은 인(因)도 아니고 과(果)도 아닌 성품이고, 후자는 ‘인(因)을 기준으로 해서 성품을 변별한다’고 말하기 때문에 다르다. 또 후자 중에서 ‘행을 기준으로 해서 성품을 변별하고, 지위를 기준으로 해서 성품을 변별한다’는 것도 같지 않다. 말하자면 전자에서는 ‘초구는 천제인에게 있다’는 것은 12인연이고, 후자에서는 ‘행을 기준으로 해서 성품을 변별한다’고 하였다. 전자 중에서 ‘제2구는 선근인에게 있으니 소위 지혜이다’라고 함은 성취한 지혜이다. 후자 중에서 지위를 기준으로 한 것은 의거하는 지위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다르다. ‘12인연을 이름 하여 불성이라 한다’를 나타냄에서는 무명의 불성을 나타낸 것이고, ‘나머지 지(支)는 이에 준거한다’는 것은 식지(識支) 등을 예시한 것이다.
【문】‘당체(當體)가 청정하기 때문이니, 이는 법신의 성품이다’와 ‘인도 아니고 과도 아닌 성품이란 것은 법신의 이(理)이다’와는 어떻게 다른가?
【답】마치 허공이 하나인 것과 같다. 그러나 병이 빈 것과 항아리가 빈 것은 다르다. 법신이 비록 하나라도 당체가 청정하다는 것은 언어 표현 속에 있기 때문에 조금 다르다.
7중(重)으로 해석한 처음의 4구에서 먼저는 올바른 해석이고, 나중의 ‘그러므로 네 가지 뜻이 오직 일심일 뿐’ 이하는 결론지음이다. 처음 중에서 ‘첫째, 염정연기’라는 것은 진여의 청정이 무명으로 오염되었기 때문에 12인연을 이루는 것이다. ‘둘째, 내훈(內熏)의 발심’이란 진여의 내훈으로 지혜를 발하기 때문이고, 셋째는 무명이 이미 멸진해서 시각이 원만하기 때문이고, 넷째는 구경의 본각이 현현하기 때문이다.
또 처음 가운데 ‘오염에 따라 체(體)가 숨겨진다’는 것은 법신이 숨겨짐이니, 오염에 따라 12인연을 이루기 때문이다. ‘둘째, 청정한 작용을 미묘하게 일으킨다’는 것은 법신이 비록 숨겨졌더라도 청정한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다. ‘셋째, 오염이 다하고 청정이 원만하다’는 것은 무명의 오염이 다해서 시각이 원만한 것이다. ‘넷째, 근원으로 돌아가 실(實)을 드러낸다’는 것은 본각의 근원으로 돌아가서 열반의 실제를 나타내는 것이다.
또 ‘첫째와 넷째는 둘 다 이(理)의 성품인데, 다만 오염과 청정이 다를 뿐이다’라는 것은 첫째는 12인연의 당체가 청정한 뜻이고, 넷째는 무상열반이 모두 이(理)의 섭수인 것이다. 첫째라면 염(染)이고 넷째라면 정(淨)이다. ‘중간의 둘은 모두 행의 성품인데, 다만 인과 다를 뿐이다’라는 것은 지혜와 보리가 모두 행의 성품인 것이니, 지혜는 인(因)이고 보리는 과(果)이다.
또 ‘첫째, 오염이지 청정이 아니다’라는 것은 12인연의 오염이고, ‘둘째, 청정이지 오염이 아니다’라는 것은 보리가 청정한 것이며, ‘셋째, 오염이기도 하고 청정이기도 하다’는 것은 지혜로써 12인연을 조망하면 정(淨)이고 보리를 조망하면 염(染)인 것이며, ‘넷째, 오염도 아니고 청정도 아니다’라는 것은 대열반의 체(體)가 염정(染淨)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첫째, 자성의 머무름이다’라고 함은 12인연에 법신의 성품이 있으니, 자성에 즉해서 불성에 머무는 것이다. ‘둘째, 이끌어낸다’는 것은 있는 법신을 이끌어 내기 때문에 불성을 이끌어 내는 것이다. ‘셋째와 넷째가 모두 과(果)를 얻는 데 이른다’는 것은 이처럼 보리열반에 이르기 때문이다.
또 ‘처음의 둘은 인(因)이다’라고 함에 있어 12인연과 지혜는 인(因)이고, ‘나중의 둘은 과(果)이다’에서 보리와 열반은 과(果)이다. ‘첫째를 굴려서 넷째가 된다’는 것은 12인연의 당체가 청정한 것이 곧 대열반이기 때문이고, ‘둘째를 굴려서 셋째가 된다’는 것은 보리가 지혜로부터 생기기 때문이다.
또 ‘첫째에 의지해서 둘째를 일으킨다’는 것은 12인연에 의지해서 지혜를 일으키기 때문이고, ‘둘째로써 셋째를 이룬다’는 것은 지혜를 말미암아 보리를 이루기 때문이며, ‘셋째로써 첫째를 증명한다’는 것은 보리지혜를 말미암아 열반의 과(果)를 증득하기 때문이다. 마땅히 ‘셋째로써 넷째를 증명한다’고 말해야 하지만 회전하면 12인연의 당체의 청정함이 곧 열반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이하는 결론지음이다. 결론 중에서 ‘만약 무명을 여의면 네 가지 상(相)이 모두 멸진한다’는 것은, 만약 무명을 끊어 다하면 모든 법이 일상(一相)이라 다 평등하다. 따라서 이 4구의 상(相)도 본래 있는 것이 아니지만, 무명을 말미암기 때문에 이 같은 차별이 있다.
(7) 이제무애문(二諦無碍門)
【章】이제무애에는 두 문의 설(說)이 있으니, 하나는 비유를 기준으로 한 것이고, 둘째는 법을 비유함에 입각한 것이다. 우선 환상의 토끼가 수건[巾]에 의거하는 것에도 두 문이 있으니, 하나는 토끼이고 둘은 수건이다. 토끼에도 두 가지 뜻이 있으니, 하나는 상(相)의 차별을 뜻하고, 둘째는 체(體)의 공함을 뜻한다. 수건에도 두 가지 뜻이 있으니, 하나는 스스로의 지위에 머무는 뜻이고, 둘째는 체(體)를 들어서 토끼를 이루는 뜻이다. 이 수건과 토끼는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
우선 ‘다르지 않음[非異]’에 4구가 있으니, 첫째, 수건 위에서 토끼를 이루는 뜻과 토끼 위에서 상(相)을 차별한다는 뜻은 합쳐서 1제(際)가 되기 때문에 ‘다르지 않음’이 된다. 둘째, 수건 위에서 스스로의 지위에 머무는 뜻과 토끼 위에서 체(體)의 공함이란 뜻이 합쳐져 1제가 되기 때문에 ‘다르지 않음’이 된다. 이는 지말로써 근본에 돌아간 것이니, 근본에 입각하여 ‘다르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셋째, 지말은 섭수해서 돌아간 근본과 근본을 섭수해서 쫓아간 지말인데, 이 둘은 쌍으로 걸림 없이 융화하여 함께 존재하기 때문에 ‘다르지 않음’이 되니, 이것은 근본과 지말이 쌍으로 존재하면서도 걸림이 없기에 다르지 않은 것이다. 넷째, 섭수한 것으로써 근본에 돌아가는 지말과 섭수한 것으로써 지말을 따르는 근본인데, 이 하나는 함께 민절하기 때문에 ‘다르지 않음’이 되니, 이것은 근본과 지말이 쌍으로 민절해서 평등하여 다르지 않은 것이다.
둘째, ‘동일하지 않음[非一]’의 뜻에도 4구가 있다. 첫째, 수건 위에서 스스로의 지위에 머무는 뜻과 토끼 위에서 상(相)이 차별되는 이 둘이 서로 어긋나기 때문에 ‘동일하지 않음’이 되니, 이는 서로 등져서 동일하지 않은 것이다. 둘째, 수건 위에서 토끼를 이루는 뜻과 토끼 위에서 체(體)가 공한 뜻이 서로 해치기 때문에 ‘동일하지 않음’이 된다. 셋째, 전자의 서로 등짐과 후자의 서로 해침은 이 둘의 지위가 다르기 때문에 ‘동일하지 않음’이 된다. 말하자면 등짐은 곧 각기 서로가 등지고 버리는 것이라서 서로의 거리가 현격히 멀고, 서로 해침은 함께 적대함으로써 친한 이끼리 서로 해치는 것이니, 이 때문에 가깝고 먼 것이 동일하지가 않다. 넷째, ‘지극히 서로 해침으로써 민절하면서도 민절하지 않고, 극상(極相)의 부정으로 말미암아 간직하면서도 간직하지 않은 것’은 민절하지도 않고 존재하지도 않는 뜻이라서 ‘동일하지 않음’이 되니, 이것이 바로 생성과 파괴의 동일하지 않음이다.
또 이 네 가지 ‘동일하지 않음’과 위에 나온 ‘네 가지 다르지 않음’ 역시 동일하지 않으니, 뜻이 섞이지 않기 때문이다. 또 위에 나온 ‘네 가지 다르지 않음’과 후자의 ‘네 가지 동일하지 않음’ 또한 다르지 않으니, 이(理)가 두루 통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약 ‘다르지 않음’의 문으로써 취한다면 모든 문은 지극히 서로 융화회통하고, 만약 ‘동일하지 않음’의 문을 취한다면 모든 뜻이 지극히 서로 어긋나고 다툰다. 지극히 어긋나고 지극히 융화하는 것이 바로 장애가 없는 법이다.
【記】이제무애 가운데 ‘우선’이라는 것은 진속(眞俗)의 비유인데, 비록 다양한 종류가 있지만 지금은 우선 수건과 토끼를 기준으로 해서 그 뜻을 비유했기 때문에 우선이라고 말한 것이다. ‘토끼에 두 가지 뜻이 있다’ 등이 상(相)의 차별이라면 의타사유(依他似有)의 뜻이고, 체(體)의 공함이라면 의타무성(依他無性)의 뜻이다. ‘수건에도 두 가지 뜻이 있다’는 것이 스스로의 지위에 머무는 것은 불변의 뜻이고, 체(體)를 들어서 토끼를 이루는 것은 수연(隨緣)의 뜻이다. 다르지 않음 중에서 ‘수건 위에서 토끼를 이루는 것과 토끼 위에서 상(相)이 차별되는 뜻이 합쳐져서 1제(際)가 된다’는 것은 연(緣)에 따르는 뜻과 사유(似有)의 뜻이 1제이기 때문이다.
‘근본으로 지말을 따름으로써 지말에 나아가 다르지 않음을 밝힌다’는 것은 근본은 불변이고 지말은 연(緣)에 따르는 것이니, 사유(似有)이다. ‘둘째, 수건 위에서 스스로의 지위에 머무는 뜻’ 등이란 성품 없음의 뜻과 불변의 뜻이 1제이기 때문이다. 이상의 2구는 차례대로 구(句)를 이룬다.
‘셋째, 지말을 섭수함으로써’ 이하의 2구는 교직하여 구(句)를 이룬 것이니, 저 본문으로 알 수 있다.
‘둘째, 동일하지 않은 뜻’에서 불변의 뜻과 사유(似有)의 뜻이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초구가 있고, 연(緣)에 따르는 뜻과 성품 없음의 뜻이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제2구가 있으며, 서로 등지고 서로 해치는 것이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제3구가 있고, 서로 등지고 서로 해침이 모두 민절하기 때문에 제4구가 있다.
본문에서 말한 ‘서로 등지는 것은 곧 서로 등지면서 저버리는’ 등이란 마치 원한이 있는 집안의 두 사람이 상호 저버리면서 서로를 보지 않는 것과 같다. ‘서로 해침이 곧 함께 하는 등’이란 마치 원한 있는 집안의 두 사람이 상호 투쟁하면서 자타(自他)를 해치는 것이다. ‘이는 민절하지도 않고 간직하지도 않은 것이다’라고 함에 있어 민절하지 않음은 서로 해치는 뜻이고, 간직하지 않음은 서로 등지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생성과 파괴의 동일하지 않음’이라는 것에서 생성은 민절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파괴는 간직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章】둘째, 법에 입각해 설하면 수건은 진여여래장(眞如如來藏)을 비유하고, 토끼는 중생의 생사(生死) 등을 비유하는데,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음에도 10문이 있으니 비유를 준거해서 생각하면 알 수 있다.
또 토끼는 생(生)에 즉하고 사(死)에 즉하면서 걸림이 없고, 수건은 은(隱)에 즉하고 현(顯)에 즉하면서 걸림이 없으니, 이 생사와 은현을 역(逆)과 순(順)으로 교직하여 모든 문을 용융(鎔融)하니, 모두 앞의 생각을 준거해서 거두어 드리면 이해할 수 있다.
‘둘째, 뜻을 드러냄’에 네 가지 문이 있으니, 첫째는 열고 합하는 것이고, 둘째는 동일하고 다른 것이며, 셋째는 상시(相是)이고 넷째는 상재(相在)이다.
첫째의 열고 합하는 것에서 먼저는 여는 것이고 나중은 합하는 것이다. ‘여는’ 것은 속제(俗諦)의 연기 중에 네 가지 뜻이 있는데 하나는 모든 연(緣)의 유력(有力)을 뜻하고, 둘은 무력(無力)을 뜻하며, 셋은 자성이 없는 뜻이고, 넷은 사(事)를 이루는 뜻이다. 진제(眞諦)에도 네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공(空)의 뜻이고, 둘은 불공의 뜻이며, 셋은 의지(依持)의 뜻이고, 넷은 사(事)를 다하는 뜻이다.
‘합하는’ 것은 세 가지 문이 있다. 하나는 세속에 칭합하는 것이고, 둘은 진(眞)에 칭합하는 것이고, 셋은 둘 다에 칭합하는 것이다.
처음의 것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용(用)을 기준으로 한 것이니, 말하자면 유력과 무력이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는 체(體)를 기준으로 한 것이니, 말하자면 성품 있음과 성품 없음이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셋째는 걸림 없음이니, 말하자면 체용(體用)이 둘이 아니라서 오직 하나의 속제인 것이다.
진(眞)에 칭합하는 것에도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용(用)을 기준으로 한 것이니, 말하자면 세속을 이룸에 의지하는 것이 곧 세속을 빼앗는 것이니 온전히 다하여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는 체(體)를 기준으로 한 것이니, 공과 불공이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셋째는 걸림 없음이니, 말하자면 체용이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셋은 둘 다에 합한 것이다’에 네 가지 문이 있다. 첫째는 기용문(起用門)을 기준으로 한 것이니, 말하자면 진(眞) 가운데 의지(依持)라는 뜻과 세속 가운데 유력이란 뜻이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는 민상문(泯相門)을 기준으로 한 것이니, 말하자면 진(眞) 가운데 세속을 다하는 것과 세속 가운데 무력이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셋째는 현실문(顯實門)을 기준으로 한 것이니, 말하자면 진(眞) 가운데 불공이란 뜻과 세속 가운데 성품 없음의 뜻이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넷째는 성사문(成事門)이니, 말하자면 진(眞)가운데 공(空)의 뜻과 세속 가운데 사(사)를 간직하는 뜻이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개합문(開合門:열고 합하는 문)을 마친다.
‘이(理)와 사(事)의 즉함과 즉하지 않음의 문’ 중에 이(理)와 사(事)의 상즉과 상즉하지 않음이 걸림 없이 융통하니, 각기 4구가 있다.
처음은 ‘즉하지 않음’의 4구이다. 첫째는 두 사(事)가 상즉하지 않는 것이니, 연상(緣相)의 사(事)가 장애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두 사(事)의 이(理)가 상즉하지 않음이니,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셋째는 이와 사가 상즉하지 않음이니, 이(理)는 고요해서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넷째는 사와 이가 상즉하지 않음이니, 사(事)가 움직이면서 고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두 번째, 상즉의 4구이다. 첫째는 사(事)가 곧 이(理)이니, 연기가 성품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는 이(理)가 곧 사(事)이니, 이(理)가 연(緣)에 따름으로써 사(事)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셋째는 두 사(事)의 이(理)가 상즉함이니, 언어 표현을 기준으로 해서 실(實)을 회통하기 때문이다. 넷째는 두 사(事)의 상즉이니, 이(理)에 즉한 사(事)에 개별적인 사(事)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事)는 이(理)와 같아서 걸림이 없다.
【記】‘둘째, 법에 입각하여 설함’ 중에서 ‘토끼가 생에 즉하고 사에 즉한다’ 등은 토끼 중에서 생(生)의 뜻은 사유(似有)이고 사(死)의 뜻은 성품 없음이다. 수건 중에서 은(隱)의 뜻은 연(緣)에 따르는 것이고 현(現)의 뜻은 불변이다. ‘역(逆)과 순(順)으로 교직한다’ 등은 앞의 비유 중 10문에 준거한 것이니, 이 중에서도 10중(重)이 있다. 갖추어 말한다면 마땅히 “제1중(重)의 토끼가 생(生)하는 것과 수건이 은(隱)하는 것은 다르지 않고, 또 토끼가 사(死)인 것과 수건이 현(現)하는 것이 다르지 않다”라고 말해야 한다. 나중의 2구라면 앞의 비유를 준거한 것이니, 초중(初重)의 다르지 않음 가운데 나중의 2구이다.
제2중의 동일하지 않음 중에서 토끼가 생(生)이고 수건이 현(現)인 것은 동일하지 않음이고, 토끼가 사(死)이고 수건이 은(隱)인 것이 하나가 아니라는 등 역시 앞의 비유를 준거해서 상세하게 4구를 지은 것이다. 다르지 않음이 바로 순(順)이고, 동일하지 않음이 바로 역(逆)이기 때문에 역순 등이다.
둘째, 현(現)의 뜻은 법에 입각해 설하는 문을 대대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 중 속제 가운데 네 가지 뜻이 있으니, 처음의 둘은 용(用)이고 나중의 둘은 체(體)이다. 진(眞)에도 네 가지 뜻이 있으니, 처음의 둘은 체이고 나중의 둘은 용이다. 합(合) 가운데 속제에 칭합함에 있어 ‘용(用)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등은 1승에서 상입하는 뜻과 같고, ‘체(體)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등은 1승에서 상즉의 뜻이다. 진(眞)에 칭합함에 있어 본문에서 ‘세속을 이룸에 의지한다’라고 한 것은 앞의 의지의 뜻이고, ‘세속을 빼앗아서 전부 다하는 것과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는 사(事)를 다하는 뜻이다.
【문】어째서 처음에 열거한 문의 명칭에는 열고 합하고 동일하고 다름 등을 열거하면서, 4문의 해석에선 오직 열고 합하는 것만이 있는가?
【답】열고 합함을 논할 때, 동일하고 다름의 뜻은 저절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본문과 같아서 알 수 있다.
‘이(理)와 사(事)의 즉함과 즉하지 않은 문’이란 상시문(相是門)이기 때문에 즉함과 즉하지 않음을 말한 것이고, 상재(相在)는 앞을 준거하면 알기 때문에 생략했다. 그 중에서 먼저는 ‘즉하지 않음’을 변별한 것이고, ‘둘째, 상즉 중에서’ 이하는 상즉의 뜻을 변별한 것이다. 처음 가운데 ‘혹자는 즉하지 않음이라 말한다’는 것은 망정(情)으로 일컫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그렇지 않다고 해석한다. 여기에서 즉하지 않음과 『법계도』 가운데 각각이 상즉하지 않음은 동일하기 때문에 이는 법의 도리이다.
상즉 4구에서 훈(訓)대덕은 “처음의 2구는 초교이고, 제3구는 종교와 돈교이고, 제4구는 원교이다”라고 했으며, 임(林)대덕은 “4구가 모두 원교이다”라고 했다. 여기서는 이사상즉과 이리상즉은 종교와 돈교에 통하지만, 여기서는 개별로써 동일함을 총괄하는 뜻을 기준으로 했기 때문에 4구가 모두 원교이다.
(8) 진망심경문(眞妄心境門)
【章】진망심경문은 통틀어 4구가 있다.
첫째, 망정에 마음과 경계가 있음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경계는 말하자면 공(空)과 유(有)가 서로 어긋나는 것이니 두 상(相)을 간직하기 때문이고, 마음은 말하자면 두 가지 견해를 무너뜨리지 않는 것이니 망령된 정(情)이기 때문이다. 혹은 경계 위에서 유(有)와 공(空)이 동일한 성품이니 둘 다 집착하는 것이기 때문이고, 마음 위에서도 마찬가지이나 둘 다 망령되게 본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법에도 마음과 경계가 있음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경계는 말하자면 공과 유가 둘이 아닌 것이니 함께 융통하기 때문이고, 마음은 말하자면 둘로 보는 것을 끊은 것이니 둘이 없음을 보기 때문이다. 혹은 경계 위에서 공과 유가 서로 어긋나니 전체적으로 형탈(形奪)하기 때문이고, 마음 위에서도 둘이니 말하자면 1분(分)을 보는 데 따라서 나머지 분(分)의 성품도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 망정으로 법에 나아가 설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경계로는 유와 무 모두 망정으로 존재하는 것이고, 유와 무가 모두 이(理)로는 없는 것이니, 둘이 아닌 것이 하나의 성품이 된다. 혹은 이 또한 서로 어긋나니, 전체적으로 빼앗기 때문이다. 마음은 말하자면 망정(情)에서 유(有)를 망령되게 취하는 것이니, 이것이 집착하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혹은 이 역시 그 이(理)가 없음을 견주어 아는 것이니, 부분적으로는 관심(觀心)이기 때문이다.
넷째, 법으로써 정에 나아가 설하는 것이다. 경계라면 곧 유와 무 모두 이(理)로써는 있고, 유와 무 모두 망정으로는 없는 것이니, 둘이 아닌 것이 하나의 성품이 된다. 혹은 이 또한 서로 어긋나니, 전체적으로 빼앗기 때문이다. 마음은 말하자면 이(理)로는 있음을 지혜로써 보기 때문이고, 망정으로는 없음을 자비로써 보기 때문이며, 혹은 둘이 아닌 마음을 보는 것이 하나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이상의 네 가지 문에서 경계를 기준함에 각기 4구가 있고, 마음에 각기 4구가 있어서 총체적으로 32구가 있으니, 준거해서 생각하라.
【記】진망심경에서 마음과 경계에 각기 4구가 있다. 본문에서 ‘두 가지 견해를 무너뜨리지 않는다’라고 함은 공(空)과 유(有)의 두 가지 견해이다. ‘셋째, 망정으로써 법에 나아간다’는 것은 망령된 정으로써 법에 나아가 설하는 것이다. ‘유와 무 모두 정으로는 존재한다’는 것에서 망정으로 유와 무를 일컫는 것은 망정의 유(有)이기 때문이다. ‘유와 무 모두 이(理)로는 존재한다’는 것에서 법 가운데 유무 모두 도리 가운데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와 무 모두 망정으로는 없다’는 것에서 법 중의 유무는 모두 미혹된 망정 속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9) 능화소화융작십문(能化所化融作十門)
【章】모든 부처와 중생이 연기해서 융통하는 것에는 총체적으로 10문이 있다.
첫째는 분위문(分位門)이다. 부처에 두 가지 뜻이 있으니, 하나는 법신의 평등이고, 둘은 보화(報化)의 차별인데, 이 두 가지는 능화(能化)의 불문(佛門)이다. 중생에도 두 가지 뜻이 있으니, 하나는 소의(所依)의 여래장이고, 둘은 능의(能依)의 망령된 오염인데, 이 두 가지는 소화(所化)의 중생문(衆生門)이다.
둘째는 이사문(理事門)이다. 부처의 법신과 중생의 여래장은 두 성품이 아니기 때문에 이법문(理法門)이 된다. 부처의 보화(報化)와 중생의 망령된 오염은 서로 말미암기 때문에 이는 사법문(事法門)이다.
셋째는 법신이 여래장과 다르지 않고 보화가 염기(染器)에 의지해서 나타나는 것이니, 이 때문에 총체적으로 중생문이다.
넷째는 여래장이 법신과 다르지 않고 망령된 오염은 보화가 뒤집힌 것이니, 이 때문에 총체적으로 불문(佛門)이다.
다섯째는 사(事)가 비어서 체(體)가 없기 때문에, 그리고 이(理)의 성품이고 고쳐지지 않기 때문에 오직 하나의 이문(理門)이다.
여섯째는 이(理)로써 연(緣)에 따르기 때문에, 그리고 사(事)를 간직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오직 하나의 사문(事門)이다.
일곱째는 보화(報化)가 밖으로는 망령된 오염을 섭수하고 안으로는 이(理)의 성품을 섭수하니, 오직 보화문일 뿐이다.
여덟째는 망령된 오염으로써 보화를 나타내고 다시 안으로는 참된 이(理)를 섭수하기 때문에 오직 망염문(妄染門)일 뿐이다.
아홉째는 이상의 모든 뜻이 걸림 없이 현전(現前)하니, 이는 구존문(俱存門)이다.
열째는 이상의 모든 뜻이 용납하고 융화해서 평등하니, 이는 구민문(俱泯門)이다.
이 10문은 마땅히 6상(相)으로 준거해야 한다.
(10) 입도방편문(入道方便門)
【章】도(道)에 들어가는 연기에는 요약하면 세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병을 인식하는 것이고, 둘째는 경계를 가려내는 것이고, 셋째는 정(定)의 지혜이다.
첫째 중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거침이니, 말하자면 명예와 이익 등을 구하는 것이다. 둘은 미세이니, 견취(見趣)의 이(理) 등을 간직하는 것이다.
둘째, ‘경계를 가려냄’ 속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경계를 대대하는 것이니, 말하자면 망정으로 일컫는 경계가 변(邊)에 있는 등이다. 둘은 진경(眞境)에도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3승의 경계이니, 말하자면 공(空)과 유(有)가 둘이 아니라서 융통하는 등이다. 두 번째는 1승의 경계이니, 말하자면 연기를 함께 멸진하고 덕을 갖춤이 원융한 등이다.
셋째, 정(定)의 지혜에도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해(解)이니 말하자면 바른 이해를 낳는 것이라, 해지(解知)와 해행(解行)을 구별하는 것이 이에 해당한다. 둘은 행(行)이니, 말하자면 이해하는 것과 같지 않아서 이해가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무분별한 심행(心行)으로 법의 망정(妄情) 등을 따르는 것이다. 또 이 행이 해(解)를 의지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니, 역시 행이 현전하면 그 해(解)는 반드시 끊어진다. 또 경계를 기준으로 해서 3공(空)의 난의(亂意)로써 가려내고, 행을 기준으로 해서 무분별지(無分別智)로써 서로를 가려내니, 그 뜻을 곧 볼 것이다.
또 도에 들어가는 방편을 대략 네 가지 문으로 짓는다. 첫째는 숙업의 장애를 참회해서 없애는 문이고, 둘째는 보리심을 발하는 문이며, 셋째는 보살계를 받는 문이고, 넷째는 뛰어난 행을 닦는 문이다. 뛰어난 행을 닦는 데 두 가지 길이 있는데, 하나는 시작이고 하나는 종결이다.
처음 시작에 3문이 있으니, 하나는 연(緣)을 버리는 문이고, 둘은 연을 따르는 문이고, 셋은 행을 성취하는 문이다.
첫째 중에 6중(重)이 있다. 하나는 악업 짓기를 버리는 것이고, 둘은 친한 권속을 버리는 것이니, 가령 출가하면 문도와 친족의 권속을 버리는 것이다. 셋은 명예와 이익을 버리는 것이고, 넷은 신명(身命)을 버리는 것이며, 다섯은 심념(心念)을 버리는 것이고, 여섯은 버림[捨]이니, 이 버림은 능소(能所)를 끊게 하여 의탁함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 ‘연(緣)을 따르는 문’에 4중(重)이 있다. 하나는 앞의 여섯 가지 사(事)를 따르면서 마음을 지켜 오염되지 않게 하는 것이고, 둘의 ‘무릇 일체의 감정(堪情)에서’ 이하부터 ‘미소(微小)한 감처(勘處)’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마땅히 지각하여 수용하지 않는 것이니 조금이라도 오염이 있게 하지 말라. 셋은 일체의 어긋난 경계와 나아가 목숨을 끊는 등의 원한에서 모두가 마땅히 마음을 지키면서 기쁘게 참고 받는 것이다. 넷은 무릇 짓는 행이 교위(巧僞)와 허사(虛詐)를 멀리 여의고 나아가 일념(一念)도 있게 하지 않는 것이다.
셋째, ‘행을 성취하는 문’에 있어 하나는 6바라밀의 행을 일으키는 것이고하나하나 운운, 둘은 4무량행(無量行)이고하나하나 운운, 셋은 10대(大) 원행(願行)이다하나하나 운운, 원행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모든 일어나지 않은 행을 채찍질해서 일어나게 하는 것이고, 둘은 이미 일으킨 행을 유지해서 물러나지 않게 하는 것이니, 모두가 원력(願力)을 말미암아서 그대로 법행(法行)에 통하는 것이다.
둘의 종결에도 3문이 있다. 첫째, 사문(捨門)이란 곧 지행(止行)이다. 모든 법의 평등한 일상(一相)을 관하니, 모든 연(緣)이 끊어진다고 운운하는 것이다. 둘째, 연(緣)에 따르는 문이란 곧 관행(觀行)이다. 도리어 사(事)에 나아가서 대비(大悲)와 대원(大願) 등의 행을 일으킨다고 운운하는 것이다. 셋째, 행을 성취하는 문이란 곧 지(止)와 관(觀)을 함께 행하는 것이다. 쌍으로 융통하여 걸림이 없어서 머무름이 없는 행을 이루니, 진(眞)과 속(俗)의 경계가 다르지 않고, 자비와 지혜의 마음이 다르지 않다. 또 이 경계는 다르지 않다.
【記】‘도에 들어가는 방편’ 중에서 먼저는 수(數)를 들어서 문을 여는 것이고, 나중의 ‘처음 중에서’ 이하는 해석이다. 해석 중에 세 가지가 있으니, 먼저는 도에 들어가는 연기를 변별한 것이고, 또 ‘도에 들어간다’ 이하는 도에 들어가는 방편을 변별한 것이다. ‘다시 구수(句數)로써’ 이하는 구수의 요간이다.
처음 가운데 ‘본문에서 말하기를, 첫째는 거침이니 말하자면 명예와 이익을 구하는’ 등이란 것은 첫째와 둘째가 비기(非器)인 것이고, ‘둘째는 미세이니, 견취 등을 간직한다’는 것은 셋째와 넷째가 통틀어 비기인 것이다. ‘둘째, 경계를 가려냄’ 중에서 처음은 가려낸 것이고, 둘째 ‘참다운 경계’ 이하는 취한 경계이다. ‘셋째, 정(定)의 지혜 중에서’ 이하는 해(解)와 행(行)의 두 문이 있는데, 모두 앞의 「유전장」과 같다.
또 ‘경계를 기준으로 하면 3공(空)의 난의(亂意)로써’라 함은 말하자면 색을 멸해서 공을 삼는 것이고, 또 색 밖에서 공을 취하는 것이며, 소위 공을 물(物)로 삼는 것이다. ‘행을 기준으로 하면 무분별지로써 5상(相)을 가려낸 것이다’라고 함은 『섭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5상(相)이란 첫째는 무작(無作)의 뜻을 여의었기 때문이고, 둘째는 허물에 심(尋)이 있고 사(伺)가 있는 지(地)를 여의기 때문이며, 셋째는 상(想)과 수(受)가 적멸한 고요함을 여의기 때문이고, 넷째는 색의 자성을 여의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참다운 뜻에서 달리 계탁함을 여의기 때문이다.”
둘째, 도에 들어가는 방편에는 네 가지 문이 있다.
【문】네 가지 문중에 어째서 처음의 세 문은 해석하지 않는가?
【답】처음의 세 문은 항상 설한 것과 같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넷째 문 중에서 첫째는 연(緣)을 버리는 문이니, 범부의 염착(染着)하는 허물을 여의는 것이고, 둘째는 연(緣)에 따르는 문이니, 2승의 적멸에 걸린 견해를 여의는 것이다.
또 첫째는 번뇌행을 수호하는 것이고, 둘째는 이승행을 수호하는 것이다.
‘둘째, 연(緣)에 따르는 문’에서 ‘첫째는 앞의 여섯 가지 사(事)를 따라서’ 등이란 앞에서는 염착을 여의는 것을 보인 것이고, 여기선 마음을 지켜 오염되지 않음을 보인 것이다. 말하자면 망정에 순응하는 사(事)에서 각지인(覺知忍)이 구경(究竟)의 불수(不受)를 거부하는 것이다. ‘셋째, 일체 모순되는 망정에서’ 등이란 설사 목숨을 끊으려는 원수를 만나더라도 마치 감로를 마시듯이 기쁘게 참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둘째 종결 중에서 ‘첫째, 연(緣)을 버리는’ 등이란 앞의 버리는 행이 지금 여기선 구경이기 때문이다. ‘둘째 연(緣)을 따르는 문’ 등이란 시작에서 연(緣)을 따르는 것이 종결에선 궁극의 구경이기 때문이다. ‘진(眞)과 속(俗)의 경계가 다르지 않다’는 것은 두 경계가 다르지 않은 것이고, ‘자비와 지혜의 마음이 다르지 않다’는 것은 두 마음이 다르지 않은 것이다. ‘또 경계는 다르지 않다’는 것은 마음과 경계가 다르지 않은 것이다.
【章】또 보살의 머무름과 머물지 않음의 행을 밝히는 것을 두 가지 문으로 설명한다. 하나는 여는 것이고, 둘은 합하는 것이다.
여는 것 중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처음은 머물지 않는 것이고, 나중은 머무름을 밝힌 것이다. 머물지 않음에도 둘이 있으니, 첫째는 생사에 머물지 않는 것이고, 둘째는 열반에 머물지 않는 것이다.
처음 중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생사의 허물과 근심을 봄을 말미암기 때문에 머물 수 없는 것이고, 둘은 생사가 본래 공임을 보기 때문에 머물지 않는 것이다. 둘째, 열반에 머물지 않는 것에도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열반이 본래 스스로 있음을 보기 때문에 머무름을 기다리지 않는 것이고, 둘은 생사와 다르지 않음을 말미암기 때문에 머물지 않는 것이다. 또 지(智)와 이(理)가 구별이 없기 때문에, 그리고 끊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머무를 수 없는 것이다.
둘째, 머무름을 밝히는 것에도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생사에 머무는 것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허물과 근심 봄을 말미암아서 대비심을 일으키기 때문이니, 머무름이 속박을 없애게 되기 때문이다. 둘은 공을 보기 때문이니, 머무름이 두렵지 않기 때문이다. 또 둘이 있으니, 하나는 허물을 보아서 싫증을 내기 때문에 머무는 것이고, 둘은 공을 보아 열반에 머무는 것이니, 이는 곧 항상 생사에 있고 항상 열반에 머무는 것이다. 둘째 열반에 머무는 것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항상 이(理)를 증득하기 때문에 머무는 것이고, 둘은 항상 중생을 교화하기 때문에 머무는 것이니, 교화 받는 중생이 곧 열반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합함에도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생사와 열반을 합쳐서 둘이 아니기 때문에 머무름에만 치우치지 않으니, 이 때문에 머무름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고, 또 이 둘이 아닌 처소에 그대로 머물기 때문에 또한 머문다고 말하는 것이다. 둘째, 머무름과 머물지 않음의 두 행을 합치는 것이니, 진실로 머물지 않음을 머무름으로 삼고 머무름을 머물지 않음으로 삼는 것이라 오직 하나의 분별없는 행이기 때문에 둘이 아니다. 셋째, 행과 경계의 두 문을 합치는 것이니, 법계의 법문이 능소(能所)를 끊었기 때문에, 그리고 평등한 법성이 오직 한맛이기 때문에 경계와 행의 다름이 없는 것이다. 넷째 앞에서 연 것과 여기에서 합한 것을 합친 것이니, 둘이 아니고 구별이 없어서 오직 하나의 걸림 없는 법문일 뿐이다. 그러므로 여는 데 구애받지 않고 항상 칭합하고, 칭합함을 무너뜨리지 않고 항상 열어서 두 상(相)이 없기 때문에 우선 이르지 못하는 것을 언설하는 것이다.
만약 다시 구수(句數)로써 분별한다면, 4중(重)의 4구(句)가 있다. 첫째 오직 생사에만 머물지 않는 것이니 그대로 시(是)이고, 둘째 오직 열반에만 머물지 않는 것이니 역시 시(是)이며, 셋째 둘 다에 머물지 않는 것이니 역시 시(是)이고, 넷째 둘 다 아님에 머물지 않는 것이니 역시 시(是)이다.
둘째, ‘오직 머무름뿐’인 것에도 4구가 있으니, 위를 돌이켜서 생각하라. 셋째, 오직 생사에 머무는 것과 오직 생사에 머물지 않는 것이니, 둘 다와 둘 다 아닌 것도 모두 알 수 있다. 넷째, 오직 열반에 머무는 것과 오직 열반에 머물지 않는 것이니, 둘 다와 둘 다 아닌 것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상의 16문(門)은 문마다 모두 전부를 얻으니, 하나를 얻으면 곧 나머지를 가탁하지 않고 나머지 문도 이에 무너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장애도 없고 걸림도 없어서 ‘많음이 곧 많음’이고 ‘하나가 곧 하나’이니, 지혜에 따라서 취하고 버리니 생각하라.
【記】또 보살의 머무름과 머물지 않음의 행을 열고 합하면 둘이 된다. ‘여는 것’ 중에서 먼저는 머물지 않는 뜻을 변별한 것이고, ‘둘째, 머무름을 밝힌다’ 이하는 머무름의 뜻을 변별하는 것이다. 처음 중에서 먼저는 머무는 경계에서 머물지 않는 뜻을 변별한 것이고, 또 ‘지혜와 이(理)에 구별이 없다’ 이하는 능연심(能緣心)의 머물지 않는 뜻을 변별한 것이다.
‘둘째, 머무름’에서는 먼저 생사에 머무름을 변별한 것이고, ‘둘째, 열반에 머무름이다’ 이하는 열반에 머무름을 변별한 것이다. 처음 중에도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처음의 뜻 가운데 초구(初句)는 이타(利他)이고, 두 번째 뜻 가운데 초구는 자리(自利)의 뜻이다. ‘만약 다시’ 이하의 구수(句數) 중에서 먼저는 머물지 않음 속의 4구를 변별한 것이고, ‘둘째, 오직 머무름뿐이다’ 이하는 머무름 속의 4구를 변별한 것이니, 알 수 있다.
균여 성사(聖師)는 광종(光宗) 임금 때 세상에 계셨는데, 그 행화(行化)의 신이(神異)와 감통(感通)은 학사(學士) 혁련정(赫連廷)이 서술한 행장록(行狀錄)과 해동승사(海桐僧史)에 갖춰진 것과 같다. 성사로부터 시대가 멀어지면서 법계종(法界宗)의 광대한 뜻이 땅에 떨어졌으니, 오호라, 대도는 행하기가 어렵구나.
본강(本講) 화상 천기(天其)는 수백여 년 뒤에 태어났지만, 나면서부터 숙세에 심어 놓은 것을 알아서 한결같이 의상(義相) 문하에서 전한 묘지(妙旨)와 성사의 유기(遺記)에 의지하였다. 그리하여 5탁(濁)이 심한 이 말법시대를 만나서 혼자 힘으로 원종(圓宗)의 고의(古義)를 열어 보이니, 그런 뒤에야 해동의 학인들은 화엄의 뜻이 한 길을 유지한다는 것을 알았다.
제자는 본강 화상을 섬기면서 미리 한두 가지 대의(大義)를 들었다. 이제 공(公)의 『삼보장(三寶章)』 고기(古記)에 의거해서 나언(羅言)을 간삭(刊削)하여 두 권으로 추려내서 학인에게 베푸노라. 감히 일을 좋아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다만 앞서간 화상의 본원(本願)을 성취하고자 할 뿐이다. - 047_0148_a_01L華嚴經三寶章圓通記卷下高麗國故法寺主圓通首座 均如 說第五同體能應所應者,一云:幷取所應爲同體,今釋唯取能應也。諸處同體中,云本一、多一,則一、一且多故,云多、一。是故唯能應爲同體也。俱存無㝵,能遍應之言中,若略去遍字,則唯是能應故爾也。同體內,具異體相望者,同體則本來自具十德,非是望於所應之十,而具德故爾也。異體則以是初一,守於自一,不具德故,要望所待,方具十故爾也。待緣、不待緣者,三乘中,正因以外,別立增上等三,若正因之一,自有力故,不待三緣生果之義,則不待緣也。正因無力要待三緣,方能生果之義,則待緣也。據此四因辦果之義,約一乘說,則於十普法,且擧人爲正因,余爲增上緣。人之一法自具十德,不待增上等三緣之他,則不待緣之同體也。卽此一人守自一位,要待增上等三方具十德,則待緣之異體也。是故不待所應之九故,名不待。如是不待緣故,唯能應爲同體故,十句章云所應,是異體能應,是同體也。問:十句章云所應,是異體,能應,是同體,非謂前異體也已上恐人計所應是異體之異體爲諸緣各異之異體是故弁云此但同體內之異體,非謂前諸緣各異之異體也。然則所應幷在同體中耶?荅:非謂前異體者,非是望上所應異體云故唯能應同體也。問:若爾望何云非謂耶?荅:上云異門者,同體十門,是第二等也。望此而云非謂前異體也。恐有人計異門之言,謂是諸緣,各異之異。是故弁云所應,是異體,能應是同體,異門是同體內,第二等非謂諸緣各異之異也。問:若爾十句章中,何處說諸緣各異之義,而云非謂前異體耶?荅:十句章,則無文以義理章前說異體下,至同體門。問:云爲但攝自門無盡重重耶,爲亦攝餘異門無盡耶荅或俱攝或但攝自無盡已上恐有人計此餘異門之言爲前異體故,爾云也。此中有人難云:旣攝余異門無盡故,同體門中,幷取所應爲同體也。然一中十,有十門不同初門,具十則自門無盡。第二第 具十,則余異門無盡,是故此難甚不可也。問:此則古辭依何云能應同體耶?荅:同體門云所應多緣,旣相卽入,令此多、一,亦有卽入,此則擧異體須門中,卽入現同體之卽入。是故所應異體能應同體也。問:然云旣相卽入者,同體本法中,卽入義也。是故幷取所應耶?荅:本法中,但有遍應義無,卽入義故,不爾也問此一卽具多箇一也已上一是能具具所具多此是卽入耶?荅:能具所具則法爾道理故,於本法中亦論也。相卽、相入則要由空有力、無力,然后所論於本法中,旣不論空有力、無力義故,亦不說卽入也。旣觀公疏云;又由此一緣下雙釋卽入二義,所以謂同體卽入,由異體成異體相入故令同體相入異體相卽故令同體相卽已上所應多緣旣相卽入者,是異體須門之卽入也。問:本法中,且如一緣遍應多緣各與彼多全爲一故已上則知幷與所應之多爲同體耶荅與者爲也則音非是共與之與也是故能應之一爲二,而全一爲三,而全一等具於多、一耳。故不幷所應也。問:此一卽具多箇一也者,云何荅箇者語。助:是卽具多一耳,非謂具別二、三之多也。問:義理章云:由此一錢自體,是一與二作一故卽是二一乃至與十作一故卽爲十一已上與二與三等者合取所應耶荅此亦如前釋與者爲也則音謂對望所應爲之作一故,所與二、三等非是同體,而二一、三一等,是同體也。問是故,此一中卽具有十个一耳。仍十非一矣以未是卽門故已上此意者中門中與二與三等故若卽門中一卽二,一卽三等也。是故卽門一卽二,一卽三等,旣是同體,則中門與二與三等之,二、三,亦是同體耶?荅:但約此中門二一、三一至於卽門云一卽二,一卽三等。是故與二與三之二,三非是同體也。問:由此一錢者,本法錢耶,來初錢耶?荅:擧本法錢,以現來初一中,具十義也。謂一中多者,有十門不同一者#一。何以故?緣成故,是本數一中卽具十。何以故已上如是徵已欲釋此徵意故云由此一錢自體是一等擧本法之遍義,以現相入初一具十之義也。問:何故擧本法現,須門初一具十之義耶?荅:相入門中,標初一之具十,欲釋此初一具十之義,云由此一錢自體,是一與二作一故爲二一乃至與十作一故爲十一已上如是有十一也旣由本一故,有余九一。是故九、一攝在本一中也。問:何知爾耶?荅:文起章同體相,卽相入者,然第一、一卽是余九、一。同時望此則全,此全彼故,若不爾者,卻第一、一卽無余九、一故,卻本自一旣如是卻余九、一,一、一皆然旣此本一余九望之則,各是自一者,卽彼九、一由本一生。然此余九之一入本一中本一能生余九一故攝余九一也已上第一一卽余九、一同時望之卽全此全彼故者,當於此中,由此一錢自體是一與二作一故二、一乃至與十作一故十、一也。卽彼九一由本一生,然此九、一入本一中,能生余九、一故,攝余九、一也者,當於此中。是故此一中,卽自具有十个一也。彼章中旣擧本法錢現用門,初一中具十之義故,今此亦爾也。是故云由此一錢自體,是一復與二作一故,卽二、一等者,與異體門一中十。有十門不同一者一。何以故?緣成故,乃至十者一中十何以故若無一卽十不成故已上一義也問若爾異體中,若無一卽十不成者,亦是本法耶?荅:此亦擧本法相,由現須門,初一具十也。謂文之章云:異體者,由一故,有二,由一故有三,乃至由一故有十。如是相由互爲緣起,皆從本一生余九故是故余九入本一中各各不同故名異也已上由一故有二等者,此亦擧本法故爾也。問:反作門中,一者十。何以故緣成故十中一何以故由此一與十作一故已上此亦擧本法耶?荅:爾也。實具云者,由此一錢自體,是一與二,作一故,二。一與三作一故三。一乃至與十作一故十一。然而超擧云此一與十作一故也。問:此一與二作一,全爲二、一等者,以是本一所作,余九、一故。是故九、一入於本一,是則來初一中,具十之義成也。故唯現本一之作余九、一之義耳。第十之作初一義,則隱也。何故云擧本法之遍,以成第十具十之義耶?荅:不別也。謂本一與二作一,則全爲二、一,乃至與十作一,則全爲十、一故。若卻去第十一,則初一亦不成。是故初一攝在第十一也。是故來初中初一之作多、一義已現前故,不云以離初一卽無十一也。反作門中,唯現初一作十一義耳。第十一之作初一義,隱而不現。是故云卽彼初一在十一中,以離十一卽無初一故也。問:由此一錢自體,是一乃至。是故此一中,卽自具有十个一,與本法中,此一卽具多不一也。何別?荅:別也。謂因如一緣等,謂由此一錢等,不別也。此一卽具多个一等。是故此一中,自具有十个一者,別也。謂此卽具多个一者,本法一中具十之義。是故此一之中等者,相入門初一中,具十之義故,不同也。問:由此一錢等,且如一緣等,是同無別,則由此一錢之一,亦是無偏當摠一耶?荅:本法之一義,則同然。由此一錢者,局於初一門也。謂彼本法中,不作所應之次第故,摠一也。今此中說與第二、第三等,次次遍應之義故,當於初門也。問:不反作門中,余二三四已上九門中,皆各如是准例可知。又反作門下九八,乃至於一,皆各如是准例思之。若於此中,具作云何荅立在來第二應云一者二。何以故?緣成故,二中十。何以故?初一錢自體,是一與二作一故,二一,乃至與十作一故十一。是故彼十一,在二一中成也。若立在第九門,應云一者,九。何以故?緣成故,九中十。何以故?初一錢自體,是一與二作一故,二一。與三作一故,三一,乃至與十。作一故十一。是故彼十一在九一中也。若立在第十門具作,則同於去初門說也。若立在去第二門具作,則應云一者九。何以故?緣成故,九中一。何以故?由此一錢自體,是一與二作一故,二一乃至與十作一故十一。是故初一在九一中也。若立在第九門具作者,應云一者二。何以故?緣成故,二中一。何以故?由此一錢自體,是一與二作一故,二一乃至與十作一故十一。是故初一在二一之中也。去第十門,則同來初門說也。問:何故來門初后二門中,云由此一而中間八門,則云初一錢,至去門十門中,竝云此一耶?荅:來初則能具是一故,帖能具之一云此一第十門,則所具之終是一故,帖此云此一中間八門,則能具是二三等。又所具之終,是十故,云初一初一去門前九門中,所具之終,是一故,帖云此一第十門中,能具,是一故,帖能具云此一也。問:十普法之互應,則同體各異則異體也。互應是同體,則具能應、所應故,所應亦是同體耶?荅:互應卽是同體非以所應爲同體故,無此難也。問:若唯以能應爲同體,則遺所應法,然則同體門中,不盡法界之法耶?荅:同體之盡,則盡故無不盡法界之過。然門不雜故,異體之盡,則不盡也。問同體初門中具十無盡是故引發心品初發心時便成正覺之文爲訂也。然則所應亦具同體中耶?荅:能應同體中,本自具足種種之德故,無此難也。第六定所應數者,一云所應是十也。今釋九也。謂義理章云由此一錢自體是一與二作一故二一等始自第二而應,應至第十故,唯九也。十普法中,一爲能應,余爲所應故爾也。問:與二作一等者,所應則二个能應,亦隨所應爲二一所應,則三个能應爲三一等。何故云是次第之二三耶?荅:旣文超章云:初同體者,如數十錢第一一,由余九生,自是第一一望二,是第二一,乃至望十是第十一,卽此本一望余九故卽是十个一也已上作其次第令應故所應是九也。問:若從第二始應,則所應第二之名望於自體,是一之初一得耶?荅:對異體之初一得也。謂三乘中,正因以外,立增上等三緣正因之一,有力不待增上等,三生果之義,爲不待緣正因之一,無力待增上等三緣,方生果,則待緣也。至一乘中,於十普法,約人一法爲正因,余九爲增上緣,於人一中,自內具德不待,余九之義爲不待緣同體也。此正因之一守自一位,待增上緣,方具十者,待緣異體也。是故所應第二之名,對於異體正因得也。問:反作初門中,此一與十作一,則所應,亦是十耶?荅:是第十之十非是十个之十也。問:若是第十,則反作應云此十與一作十何不爾耶?荅:釋第十門同體故,可如所問義也。然雖至百門、千門乃,至無盡,若卻推於本法,則是一門同體故。是故一向卻擧初一也。義理章云:問:此與前異體何別?荅:前異體者,初一望后九異門相入耳。今此同體一中,自具十非望前后異門說也已上前則異體初一后則異體后九旣非望前后之前后,竝是異體。是則所應,亦是十耶?荅:異體則初一望后九故,前后各異之相入也。同體則一中,自具十相入故,非是前后異門相入耳。非約所應云前后也。若論所應之時,唯是九也演義釋反成中若無十一本一不能應余九故已上故爾也。問:十句章云:所應是異體,能應是同體。然則異體具十錢故,所應亦十耶?荅:所應之九,是同耶異耶?則是異體也故章云所應異體也然正因之一亦具十故十、異體也。問:若爾所應多緣,旣相卽入者,唯九卽入耶?荅:所應則九然相卽入時,異體初一與后九卽入也。是故令此多一亦有卽入者多一卽九而卽入之時與自本一卽入也演義云:同體卽入,由異體成異體相入故,令同體相入,異體相卽故,令同體相卽。此有二義。若直說者,如異體二,卽是本一,其同體二。豈非本一異體三,卽本一同體上三,亦本一矣已上擧異體二三等與自初一卽入之義以現同體二三等,與自本一卽入之義故爾也。問:若爾大擧而云異體卽入故,同體卽入,何須要擧所應多緣,卽入義耶?荅:上云由此一緣應多緣故,有此多、一因,於此言,欲作卽入所以。是故爾也。第七種種一一決者,一云一、一同體,一云種種同體也。初義者,且約人之一法,應教應義,以具十故,一一同體也。后義者,一云:幷取所應爲同體故爾也。一云:唯能應同體中,亦爾也。謂演義中,如一人望父爲子,望子爲父,望兄爲弟,望弟爲兄等,於一人體,而有多名,今本一如一人多一如多名也已上所望父子等非是同體一人身中所具多名,是同體故,種種同體也。今釋一、一非同體種種,亦同體一、一,亦同體種種非同體也。是故四句護過去,非現德,然后義理周圓也。四句護過者,一、一同體耶不也。名同體異,則非同體故,種種同體耶?不也。名異體異,則非同體故,俱是耶?不也。如前二義故,俱非耶?不也。名同體同之一、一非非同體故,一身有種種名,則種種之名非非同體故,現德四句者,一、一同體耶?是也。名同體同之一、一,是同體故,種種同體耶?是也。一人種種名,是同體故,俱是耶?是也。具前二義故,俱非耶?是也。名異體異之種種非同體故,名同體異之一、一非同體故。是故約人、法教義等,雜門論,則種種同體、種種異體也。純約人人法,法論則一一同體,一一異體也。若約喩說約金銀等,雜錢論,種種同體,種種異體也。純約金錢,純約銀錢,論則一、一同體,一、一異體也。問:人則是一應於教等,具足人人十德,然則雖約雜門說,唯是一、一同體耶?荅:以一人應教,則是教人應義則是義人等,雖是一箇人具教義等,種種功德故,種種同體也。問:一向約雜門說,則唯種種同體耳。無一、一同體,若約純門說,則唯一、一同體耳,無種種同體耶?荅:大對說者,則爾也。若更細說,則雜門同體中,有一、一同體義,約人、人純門,而說亦有種種同體義也。謂以一人應十法,則爲教人爲義人等故,有種種同體義,然以人一名所目故,有一、一同體義。又約同名之法,則此之人一應二爲二一,應三爲三,一等。如是二、三等名別故,種種同體也。然二一三一等,唯是一、一故,一、一同體,亦得也。故同體訂中,云初發心,卽正覺者,約種種同體義引故,無幷取所應難也。第八同體理事者,一云理性同體,事相異體也。謂光明覺品云:一中解無量,無量中解一展轉生非實智者。無所畏疏釋云:展轉生,是異體非實是同體。又展轉生,是緣起相,由非實是法性融通,然則緣起相由當異體法性融通,當同體故爾也。今釋約十對法,通論同異故,人門同體人門,異體法門,同體法門,異體理門,同體理門、異體等故,非謂理同體,事異體也。問:緣起相,由門中論事事同體,法性融通門中,論理理同體耶?荅:同體、異體者,當於體事十法也。於同異體十法之上,以緣起相由故,卽入者,緣起門也。法性融通力故,卽入者,法性融通門也。二門具論同異故,不可分配也。問:發心品演義中,法性門中,論同異體云:不異理之一事具攝理性時,卽同體義令彼不異理之多事,隨所依理,皆於一中現者,異體隨同也。已上法性融通門同異體者理同體事異體也何故通論耶答:此則且約理性同體論故,無難也。問:理門同體中,理爲能應,應於教義等,具種種德耶?荅:爾也。問:若爾何故云不異理之一事具攝理性時,卽同體義,令彼不異理之多事隨所依理皆於一中現異體隨同也已上 如是唯擧理耶?荅:以理摠該唯擧理耳。問:若爾何故幷擧事耶?荅:理本無相非詮難現故,方託事以現理也。是故擧事然所擧事還是異體也。是則彼不異理之多事,隨所依理,皆於一中現者,異體隨同者,多事現於異體初一中也。是故事相還是異體也。問:四句相卽中,事事相卽者,緣起相,由門理理相卽者,法性融通門耶?荅:緣起門、法性門竝是事事無㝵之所以也。一乘中,若有事事相卽者,則理理相卽,理事相卽,必不離故,二門各具四句也。三乘中,唯論理理相卽,不得論事事相卽也。至於一乘中,方說事事無㝵,仍作十門所以。是故正唯事事無㝵,而理理相卽等,亦不離也。觀公云:理事相卽者,同頓同實,此約同教說,若以別該同卽別教一乘也理事無㝵卽事事無㝵故已上故知正事事無㝵,而理事無㝵,亦不離也。理事無㝵,卽事事無㝵故者,一乘中,不異理之事故,理事相卽。又不異理之多事故,事亦如理融通故,一塵含十方,十方入一塵故,爾云也。第九雜叚問荅問:諸緣互異之諸緣,與諸緣互應之諸緣何別?荅:一云異也。以緣起法法爾,如是隨何因緣,新新起故,一云一也?一種十普法同體門見,異體門見故,今釋二義得也。謂一種十普法故,一亦得門不雜故,異亦得也。問:六義剎那滅決定,是不待緣,俱有引自果恒,隨轉待衆緣,是待緣也。用四句中,剎那滅及決定者,不他生也。恒隨轉待衆緣者,不自生也。至異體中門,引因不生緣生故,緣不生自因生故爲訂。且緣不生因生故者,卽是不待緣同體。何故異體門訂中引耶?荅:於一種六義中,或約待緣、不待緣論,或約空有力、無力論,是故約待、不待論,則剎那滅決定者,不待緣故,同體也。俱有引自果待緣故,異體也。六義之空有,則無問同異體,是卽門也。六義之力、無力,則無問同異,是中門也。論處不定故爾也。問:何故不立第四句?無力不待緣義者以彼非是因義故不立也已上若一乘中應立同體無力不待緣耶,荅:立不待緣無力耳。不立無力不待緣也。謂無力不待緣者,正因之有力待緣之義,名爲有力待緣也。正因之無力待緣之義,名爲無力待緣,則正因無力。又不待緣之義,名無力不待緣也。故知以對緣故,得無力不待緣名也。同體自具十中一。若有力有體余,則無力無體。又反此故,但立不待緣無力耳,不言無力不待緣也。問:義理章云待緣者待何等緣耶?荅:待因事以外,增上等三緣不取自因六義互相待耳已上因六義互相待者同體中見耶異體中見耶?荅:一云:同體中見,今釋六義互相待者,具待不待之相待義故,同異圓備門中當也。第十隨文解釋中,初緣起互異門中,先釋本法依持義已下,釋須門也。初中緣起互異門者,帖名謂於無盡大緣起中下釋相也。問:無盡大緣起中,通擧十門異體耶,唯是一門耶?荅:具足諸緣、互異諸緣互應等,十門之緣起相由也。謂無盡大緣起中,諸緣互異者,異體無盡大緣起中,諸緣互應者,同體故也。問緣起互異之緣起亦一門耶荅緣起之言則通於十門也謂緣起互異,緣起互應等故爾也。問:諸緣相望體用,各別已上體者卽門用者中門然則本法中亦論中卽耶荅非是一向體者,卽門用者中門。若爾何故古人云中門者,因果道理門,卽門者,德用自在門,於卽門中,亦擧用耶?又若一向體者,卽門然則同體、異體唯卽門耶?然不爾故,不爾也。釋須門中,先依持者,怗名次一持多已下,釋相后相入門義竟者,摠結也。此中一云:一望多門,一有力、多無力;多望一門,多有力,一無力也。依於此義,若分科叚,則一能持多至無不能依故者,一望多門也。如多依一持旣爾已下,多望一門也。是故由一望多有持有依已下,重釋俱存雙泯二句已下,句數料簡也。重釋中,由一望多有持有依者,重釋一望多門也。多望於一有依有持已下,重釋多望一門也今釋一望多門具一之力無力義多望一門亦具多之力、無力義,依於此義,若分科叚,則從一能持多至,亦無不入多之一者,一望多門。是故由一望下,例 多望一門也。俱存雙泯二句下句,數料簡也。先釋一持多依后如多依一持旣爾已下,現多持一依也。初中一能持多一有力等者,釋一之持多依一下釋多之依此卽已下,重釋前義也。此中無有不容多之一,以無不能持故,者重釋一之持義無有不入一之多等者,重釋多之依義也。就擧例之中,先擧多依一持,以爲能例后擧一依多持,亦然以爲所例也。此若具作者,多能持一、多有力。是故能攝一、一依多一無力故,潛入多。此卽無有不容一之多,以無不能持故,無有不入多之一,以無不能依故,如是作也。現作中,云一能持多、一有力。又云無有不容多之一,從此等故,於一望多門,或云有持,或云全力也。擧例中,云一依,又云亦無不入多之一從此等故,或云有依,或云無力也。問:若爾現作中,多依一故,多無力,又無有不入一之多,擧例中,云多持。又亦無不攝一之多,則何處見耶?荅:此則多,望一門多之依持中見也。謂多依一故等。又無不入一之多者,是多,望一門多之無力,能依義也。云多持及無不攝一之多者,是多之有力,能持義也。問:若爾前中,已具一望多門,多望一門,何故更例多望一門耶?荅:一持則多,依一依,則多持故,擧多之依持,方現一之依持故,一望多門。蜼有多之持依,唯取一之持依也。謂一爲能望,多爲所望見一之依持者,一望多門也。多爲能望一爲所望見,多之依持者,多望一門。是故更例也多望一,門有能例,所例如前,可知也一望多有,持有依全力等者,以初意釋,則有持者,一之持義有依者,多之依義全力者,一之有力義,無力者,多之無力義,能攝者,一之攝義能入者,多之入義也。今釋有持者,一之持多義,有依者,擧例中,一之依義,全力者,前之一有力義,無力者,擧例中一之依義。能攝者,一之能攝多義,能入者,擧例中,無不入多之一也。多望一門,准前可知。若具作者,應云多能、持一、多有力。是故能攝一、一依於多故,一無力。是故潛入多,此卽無有不容一之多,以無不持故,無有不入多之一,以無不能依故,如一依多持,旣爾一持多依,亦然等云也。二諸緣形奪體,無體中,先料簡大意,后隨文釋也。初中諸處,卽門中云一卽多,多卽一者。一卽多時,一有多空,多卽一時,多有一空耶?荅:一云如問,一云反,此一云有,卽前空有,卽后空有之義故,一卽多時,卽前一有多空,卽后多有一空也。然今釋者,一有門中,具有一,卽多,多卽一,多有門中,亦爾也。是故諸處之文互現一邊也。義理章異體卽門中,一有門中,現一卽多義,多有門中,現多卽一義也。又云自若有時,他必空等,儼師光明覺疏一卽多者,一數卽多而不見一等旨敀已,卽他己,不立他,卽己他不存等者,一有門中,多卽一,多有門中,一卽多義。是故爾也。問:具現此義處,何文是耶?荅:義理章同體卽門,一有門中,標則云一卽多,結則云十卽一也。多有門中,標則云多卽一結,則云一卽十也。此是明訂。問:道申章云此有卽彼有時,見彼有不見此有已上者卽前一有多空卽后多有一空之義何不爾耶荅此義者,且擧此一,此一有體攝他同己時,於此時中,此一廢空己同有多故爾云耳。非謂卽前卽后空有之義也。問:一有門中,一卽多義,是何多卽一義是何?荅:一有門攝中,有一卽多,多卽一義,廢中有多,卽一義也。多有門中,反此也。謂一有門中,一有之所成空多故,云一卽多也。由如是故,空多攝在有一之中故,云攝中一卽多、多卽一也。廢中一向廢彼空多,卽於有一故,云多卽一也。隨文釋中,先擧門,名次多緣無性已下,釋相后相,卽義竟者,結也。釋相中,先釋一望多次。是故一望多已下例,多望一也。后亦同他己,亦同己他下句數料簡也。初中從初至無不一之多者,現一有多空也。一無性爲他所成已下,例 多有一空也。初中多緣至多卽一者,現多無體也。由一有體,至潛同一故者,雙現一有之攝,與多空之廢也。無不多之一者,釋一有體能攝多義,亦無不一之多者,釋多無性,潛同一義也。若一望多門,一有多空多,望一門多有一空意,則准前中門知也。現作中,無不多之一者,能具之一無不攝所具之多,則一望多門之攝義也。亦無不一之多者,所具之多無不卽於能具之一,則多望一門多之廢句也。擧例中,若具作者,應云一無性爲多所成。是故一卽多,由多有體,能攝一由一無體,潛同多故,無不一之多,亦無不多之一也。如是云也。無不一之多者,能具之多無不攝所具之一,則多望一門多之攝句也。無不多之一者,所具之一無不,卽於能具之多,則一望多門一之廢句也。問:若爾前一望多門已具多望一門義。何故更例多望一門耶?荅:擧多之廢攝義,方現一之廢攝義故#耳。若見一之廢攝者,一望多門見多之廢攝者,多望一門。是故更例也。多望一門,能例、所例可知也。就能例中,有有體者,一有體也。無體者,例 中一之空義也。能攝他同己者,一有體能攝多與無不多之一也。廢已同他者,例中無不多之一也。就所例中,若具作多望一門,應云一緣無性爲多所成。是故一卽多,由多有體,能攝一由一無性潛同多故,無不一之多,亦無不多之一、多無性爲一所成一有多空卽一,亦爾如是作也。是故多望一門,雖有一之廢攝,然擧一之廢攝,現多之廢攝,一之廢攝,還是一望多門。是故演義云前一望多攝廢,皆是一,此中多望於一攝廢,皆是多也。問:向上向下,與一望多多望一何別?荅:向上向下者,無問 一之與多廢攝之義,若從一至十而列,則向上也。從十至一而列,則向下也。一望多多望一者,無問向上向下。若一爲能望多爲所望,論一之廢攝,則一望多門也。多爲能望一爲所望,論多之廢攝,則多望一門也。是故別也。問:義理章云:自若有時,他必空故,他卽自等者,當於何門耶?荅:通二門也。謂自他之辭不是一多之辭故爾也。是故一自多他,則一望多門也。多自一他,則多望一門也。問光明覺疏一卽多者,一數卽多,而不見一等,何門中見耶?荅:此亦但言一多,而不言自他故,一自多他,則一望多門也。多自一他,則多望一門也。問:旨敀章此一花葉廢己,同他全體彼一切法攝他同己,彼一切卽自體等,何門見耶?荅:此則旣以一爲能望余緣,爲所望故,一望多門也。句數料蕳中更加二句義,方圓現也。謂攝他己,亦攝己他非攝他己非攝己他。如是加也。何者同體卽門終云亦攝不攝亦卽不卽非攝不攝非卽不卽已上彼中言卽者,當此中,同他己,同己他,彼中云不卽者,當此中,非同他己非同己他。彼中攝不攝者,當此中,加辭攝他己,攝己他,非攝他己,非攝己他也。是故攝他己、攝己他,與同己他,同他己者,俱存句也。非攝他己,非攝己他、與非同他己,非同己他者,雙泯句也。諸緣互應門中,先釋本法,次依持容入下釋用門,后同體門竟者,結也。初中先帖名次衆緣之中,下正釋后。是故此一具多个一也者,結也。然此多、一已下,釋同體名釋中衆緣之中者,一門耶?荅:通於十門也。問:諸緣互應旣是一門,則衆緣之中,亦是一門耶?荅:衆緣一中之一緣,應於多緣故,各與多緣全爲一也。是故諸緣互應,則一門也。衆緣之中者,通於十門也。問:諸緣與衆緣何別?荅:言同意別,謂演義中,釋一、一各具一切之言云若其法界差別無盡之法各各遍應故,隨一、一各具法界差別無盡法也已上二節之法界差別無盡法言同意別也是故法界差別無盡法者,當於衆緣之中也。各具法界差別無盡法者,當於諸緣互應故爾也。然此多、一中然字者,同體之中本一多、一旣別,以何所由爲同體耶故,有然字也。又下然字者,望上雖由本一之,雖字欲連前起后故爾也。依持容入中,先標名,次謂此本一有力下釋相后,同體門中,容入義竟者結也。釋相中,先釋一望多,次是卽本一望多一已下例,多望一門后,俱存雙泯二句,無㝵已下句,數料簡也。初中先釋一持多依后,如本一有力,爲持多無力,爲依已下,現多持一依也。初中先現一持多也。后多一無力依本一等者,現多依一也。是卽下重釋也。無不容多、一之本一者,釋本一之持也。亦無不入本一之多一者,釋多一之依也又多望,一門中有能。例所例可知也。余義准異、體中門可知也。二互相形奪體無體等者,先標名次多、一無性下,釋相后同體門下結也。釋相中先釋一望多,次是卽本一望多一已下例,多望一門后,亦攝不攝已下句數也。余義者,准異體卽門可知也。亦攝不攝等者,通於一望多,多望一也。且約一望多門者,此一之攝他,同己者攝也。卽於此時,此一廢己同他故,不攝也。亦卽不卽者,此一廢己同他故卽也。卽於此時,此一攝他同己故,不卽也。非攝者,絕前攝也;非不攝者,絕前之不攝也。非卽者,絕前卽也;非不卽者,絕前之不卽也。三應異無㝵中,先標名,次以此二門同一已下,現同一緣起也。次是故通弁已下句數料蕳,次余入卽等准思下,例余入卽也。初中問:同異體有重耶?荅:一云同體深,異體淺,然今釋無淺深也。旣云若無異體,卽諸緣雜亂非緣起故,若無同體, 緣不相資,亦非緣起故,要由不雜方有相資已上故知無重也句數中具入卽俱者何故俱存無㝵本位中幷論卽入耶荅料蕳中先論三門本法后,說須門也。此中前說異體本法,與須門后說,同體本法,與須門通擧此二,令俱存故爾也。問:若爾余入卽等,何門之入卽耶?荅:正同異园備之須門也。若准料蕳,則當於住一遍應故,有廣狹自在等也。問:本法中,云住自一能遍應須門中,亦爾二處何別耶?荅:本法中,雖云住自一能遍應然不說能釋至須門中,云旣住一遍應故,有廣狹自在等,如是具說能釋之玄門故,大別也。圓音章 二先開章列名初中已下依章別釋,釋中有四。叚初中二,初則舒義二。謂如來一音下攝義也。觀公卷,則舒門中,引如來至契經海之文舒,則卷門中,引一切衆生至盡無余之文。是故初則舒義,后則攝義也。初中從初至差別之法者,摠擧也。次所謂下廣列也。后華嚴經云已下,引訂也。乃至者,嗔恚多者,聞如來說大悲觀愚癡多者,聞如來說緣起觀等也。引訂者,舍那品如來光明中,所說偈也。二中如來下摽,次謂諸衆生下,釋后引訂也。聞如來唯己語者,天竺人聞天竺語,漢土人聞漢語等也。引訂者,十住品初發心住頌也。第二決擇中,先列古說,后問荅除疑。初中初說者,菩提留攴說,次羅什說,后龍軍、堅惠說也。謂觀公疏及刊定記中,云一立一音教,謂如來一代之教不離一音。然有二師,一后魏菩提留攴,云如來一音,同時報萬大小竝陳。二姚秦羅什法師,云佛一圓音平等無二,無思普應機聞自殊,非謂言音本陳大小故,維摩經云:佛以一音演說法,衆生各各,隨所解上之。二師初則佛音具異,后則異自在機各得园音之一義已上留攴一音則佛音具異故,當於初說。羅什一音,則異自在機故,當次說。或有說言如來唯一等者,料蕳能詮教體中,三唯影無本如大乘終教,離衆生心佛果無有色身,言聲事相功德,唯如如及如如智大、悲大願爲增上緣,令彼所化根熟衆生心中#現佛色聲說法。是故聖教唯是衆生心中,影像也。龍軍、堅惠諸論師等竝立此義已上從佛果無有色身等文云如來唯一寂滅解脫,離相言音也。從大悲大願等文云:諸衆生機感力故,自聞如來種種言音也。是故此卽龍軍、堅惠說也。初說中,先擧自說,次非謂下蕳非后,以語業同下,釋一音圓音名也。次說中先擧自說,后非謂下簡非也。就初中先釋一音,后釋圓音也。后說中先擧自說非謂下蕳非也。初中先釋一音,后釋圓音也。問:后說則唯影無本,初二說則云何?荅:具本影,謂有佛本質圓音,又有聞者,識上所變影像,圓音故也。二中問荅爲二叚,荅中先現偏取之失,后現合取之得現得中。先㧾標,次嘖,三別釋,四結。別釋中若彼多音等者,反示其失,以彼多音等者,順現其得。此則第二師義也。若彼一音等者,反示其失,卽多音等者順現其得,此則初師義也。若此等至同眞傺者,反示其失,以彼音等,離作故,已下順現其得,此卽后師義也。問:何故次第不同前耶?荅:以文勢爾故也。若如初師立多音,則唯是多音不成圓音,然第二師立一音故,而彼多音,卽於一音成,圓音也。是現第二師之得也。若如第二師立一音,則唯是一音不成,圓音然而初師立多音故,而此一音,卽於多音,成圓音也。是現初師之得也。離作故,無性故者,唯從於離相言音云也。如響故者,從於機感力故,等云也。此意者,猶如山谷本無音聲,而由人聲,而出於響。佛則寂滅,離言說相,以諸衆生機感力故,發種種音,而說法也。結中法螺恒振,結前二說也。妙音常寂結后說也。問:后說中如響者,可於法螺恒振中,見何不爾耶?荅:如響故者,聞者識上所變影像言音也。法螺恒振者,本質言音故別也。問:三說合爲一圓音時,是圓教義耶?荅:爾也。謂通約五教本末,鎔融唯一大善巧法時,還是第五圓教故,三說合爲一圓音時,此亦還是第五圓教也。問:若爾法界啚中何故有一道表如來一音故已上此亦唯圓教耶荅爾也問隨三乘機欲差別不同故亦具三乘則可具五教何故唯圓教耶?荅:彼三乘亦是圓教之三乘故爾也。第三會違中問荅,卽爲二叚問中,先引違文,問若已下正問也。初中蔑戾車語者,此云垢穢語也。荅中先引論釋准上三釋下章主之辭也。初中有三,復次初復次意者,佛則一音具說然欲滿。彼四天王意樂故,以三語說也。第二復次意者,佛則非唯一音說法,以能善解一切言音故,能說法,令衆生解令彼斷疑也。第三復次意者,爲以轉變形言所化衆生故,以三語說如說佛等者,智度論文不變形言中引也。准上三釋者,指上三復次也。第四弁釋中,先釋分齊二利益下,現其利益也。初中先正釋,后問荅除疑也。初中佛一言音,下摠標遍一切處,下別釋初,中等者等取。一切衆生以下,云遍一?切衆生,故也智論者,第十二卷也。若爾何故等者,因前也?鶖子者,舍利弗也。以舍利弗母眼,如鶖蹲,如是之母所生之子故,名鶖子也。后中二初問中,先問后設爾下與過也。二荅中,若由等遍等者,反釋與過今,卽已下正荅,荅中不壞曲而等遍者,荅此若等遍之問也。以不動遍,而差韻者,荅如存屈曲之問也。是謂如來等者,現佛圓音超情絕見也。二利益中,先釋后,引訂也。初中問阿難天雨等者,是世俗言非法輪聲也。大乘等者,如來所發一切言音,無不利益故,世俗言音無不皆是法輪聲攝也。經云者,不思議品文也。法身章 前論圓音具此圓音之佛所依身何?是故此叚來也。初帖名開章初釋名已下別釋,別釋中,軌持義者,軌謂軌則持,謂持自性義身,是依止者,有積聚義,所依止義,今從后也。卽法爲身者,卽此軌持義,爲身是持業釋也。亦名自性身者,持自性義也。又余處中法身,亦名自性身故爾也。二體性中,開數正釋二叚也。釋中四智等者,大圓鏡智等,四智也。此則所詮章初教義也。以初教中,有爲、無爲各別故,無爲眞如,爲法身有爲四智,爲報化也。無垢無罣礙智者,無垢智,是正體智也。無礙智,是后得智也。謂離二障者,煩惱所知二障也。煩惱障,則迷理而起所知傽,則迷事而起故,以無垢智斷迷理障無罣礙智斷迷事障也。諸德者,通指釋攝論之諸德也。今釋已下章主之辭也,所詮章云:二句、三句,則終教四句,則頓教也。五此上至法身等者,若無所詮章文,則此五、六 句可。是二乘然,彼章旣云此二句一乘故,一乘也。問:二句何別?荅:一云第五,則分相,第六則該攝也,然難也,謂第五則合上四句故,該攝意現分相意隱,第六則泯絕前五故,亦非該攝也。今釋就一乘中,具合與泯二義,見此具足二義之時,見三乘等法,卽是一乘者,該攝義也。如是見,則立在四教之上,圓滿之法故,分相也。若分配二門難也。此上單就境智弁者,對下通攝余法爲法身義故爾也。下四句中,初二句三乘,后二句一乘也。七通攝五分等者,前唯境智,此通五分及悲願等故,云通攝也。如前智說者,指前一切諸法,尚卽眞如,況此眞智而不如耶?則修生功德必訂理故。是故無不法身收也。八通報化者,非唯修生,是法身收報化色相,亦法身也攝論者,引訂也。有三義等者,所詮章云亦有二義:一爲迴,二乘方便。漸說眞實法身,恐彼難信故,以此等功德,說爲法身,今易信受,以觀見故二彼以功德法,爲法身故,攝在彼中也。此上竝約始教說,又三十二相,卽無生無性故,亦卽是眞如法身此約終教說已上彼亦有三釋與此何別荅一云:相卽如故者,當彼中,約終教,說二智所現等者,當初教初釋也。三當相等者,當初教,后釋然,配一釋,則可也。智所現等當初教初釋者難也。謂初教中,有理法身、無智法身故,屬何智法身耶?今釋終教中,有智法身、理法身二義故,相卽如故者,理法身也。智所現故者,智法身也。九通攝下二句,是別教義二句何別?荅:一云:第九句分相,第十句該攝也。此義難也。謂第九句旣云三身等,竝在此中,則攝三乘三身義故,該攝義現第十句非該攝故,今釋就一乘中,二句義別也。具此二義之一乘統收三乘,則該攝也。如是統收,則立在三乘之上,別於三乘,則分相也。四者至爲所成果者,勝德卽是果德。何故云爲所依因耶?荅:雖是果德,但約爲物成道,示現云耳。廢機約自無成、不成故,法身說法,授與義故者,眞如法身爲諸觀智所照之境,令生智解故,是授與也。業用四句一乘、三乘云何?荅:一云:初二句三乘,后二句一乘也。謂論三身者,是三乘故,初二句三乘,第三或作樹等者,三世間竝佛身故,云樹等故,一乘也。第四句現也。今釋初二句三乘,第四句一乘,第三句通一、三也。謂作樹等密攝化者,三乘中,有自身、化他身化非身化三義,以自身化物者,自身化也。令他身化物者,他身化也。變爲樹等,密攝化者,非身化也。此義通於三乘故爾也。十世章 前佛寶中,弁圓音與法身義,如此三寶於三世中,紹隆不絕。是故所依世時之叚來也。問:依何等文,弁十世義耶?荅:離世間品云:過去世說,過去過去世說,現在過去世說,未來現在世說,過去現在世說平等。現在世說未來未來世說,過去未來世說,現在未來世說無盡。現在世說三世卽一念已上依此經也問若未來無盡故未來世說無盡者,過去無盡故,過去世亦說無盡耶?荅:疏云:未來續起故,無盡,過去不起故,不云無盡也。問:現在中說平等者,無別異故,云平等,則過、未中說過、未則亦無別異故,過去世說平等未來,亦爾耶?荅:疏中云:現在是有故,云平等過未是無故,不例也。問:摠一念者,於九世中,當於何耶?荅:別九世中無別,偏當故,無不當義中,經中且擧現在一念也。此中先帖名開門,后一建立已下釋也。釋中建立者,道申章中,昨二日今一日,明二日約五日論也。謂昨二日者,前昨日、昨日也。今一日者,現也。明二日者,明日后明日也。問:約此論九世云何?荅:前昨日,唯過去,過去一世也。昨日中具二世,謂昨日,當體則過去、現在,以今日望之,則現在、過去故也。今日中,具三世,謂今日當體,則現在現在,以昨日望之,則過去、未來,以明日望之,則未來、過去故也。明日具二世,謂明日當體,則未來、現在,以今日望之#則現在、未來故也。后明日,唯未來,未來一世也。此則約五日,論九世也。就建立中,先立九世,又九世摠爲一念下,弁十世也。初中先正明建立,后問荅除疑。初中先正明九世,后此九中,各三等者,弁其有無也。初中先過、現、未中,各立三世后,各現一中具三也。一具三世等者,有二釋一云一具之三世非具足之具也。一云一中具三世也,下二准此知也。此九中,至俱無者,此中若論有力、無力有體、無體,則三現有力體六過、未,則無力體耶?荅:一云約同教,則三現是有六過未是無也。若約別教隨我所據,論力、無力體、無體也。何者普賢品疏中釋三世,卽一念,云但世相入者,卽一、一世 法入現世,不訂位成比也。此約三乘別行成,又亦九世自在攝受,皆訂也約普賢自在故已上約世法入現世不訂位成比也則三現是有過、未是無也。約又亦九世自在攝受,皆訂則隨心所擧論力、無力體、無體也。今釋約世,弁有無與中卽之義別故,約世則三現,是有過、未是無也。若論中,卽則隨何論力無力體無體也問何知爾耶荅流轉章云一此現在法由當來有及由過去滅生。是故現在爲二世所成,令現在無體入於過、未二,此現在法落謝爲過去引后,作當、來。是故二世爲現所成令過未無體入於現在已上如是互論力無力體、無體故爾也。問:若一乘中,亦論三現,是有過、未是無則,前引普賢品疏。此約三乘,又如何會耶?荅:彼約地畫三乘、三世論故,與此三現,是有過、未,是無別也。問:荅可知,又比九世摠爲一念等者,錢門中,別十錢外,不立摠一錢。何故世門別九世外,更立摠一念耶?荅:一云華嚴是十十法門故,錢門則別中已具十故,不加摠世門別中,唯是九故,加摠一念也。一云不卽不離二義具故,約不卽故,世門更加摠約不離故,錢門不加摠也。一云錢門亦應加,摠爲十一錢,然而略也。今釋存初義也。第二相攝門有二,一相卽,二相入者。擧玄門也。此二得成下開二所以也。初緣起相由已下,釋初緣起相由中,從初至未來一切劫,迴置過去世等者,現九世法相卽入也。凡論相由已下別開,卽、入二門也。初中先正擧相由后依是道下,以相由故,現卽、入也。初中從初至准之可見者,約中間,七世略弁次第相由之義。又此九中,三世下廣開俱、不俱義也。是故此九世摠下廣開次第,超間義也。此中先約大意,論相由義,后正隨文釋也。大意中,一云相由之數摠,則有九要略,不出俱、不俱也。謂一俱相由,二不俱相由#三次第相由#四超間相由,五現現相由,六現相由,七密相由,八展轉相由,九無無相由也,於無無中,若開未未相由,過過相由,則爲十也。不出俱不俱者,現相由者,俱相由也。現現相由,密相由,展轉相由,無無相由者,不俱相由也。次第相由者,正俱義兼有不俱義也。超間相由者,正不俱義兼有俱義也。問:現相由則俱也。密相由現現相由,則不俱文自現也。何故次第相由正俱義,兼有不俱義耶?荅:次第相由者,由過去,過去無故,成過去、現在有,或反此過去、現在有故,成過去未來無,或反此則俱也。過去過去無故,成過去,未來無。或反此則此二超於自現與之相由故,兼有不俱也。問:何故超間相由,正是不俱兼有俱義耶?荅:超間者,過去過去無故,成過去、現在有,則是次第相由。是故超自現在,而云過去,過去無故,成過去、未來無也。又過去過去無故,成現在、過去無也。是故過去過去無故,成現在、過去無者,是不俱義過去世中,超自現在與之相由故,是俱義也。然此義難也。謂先難相由之數,則相由之數不止於十,謂若作無無相由,則對此應立有有相由。何故不開,耶又於無無中,應有未未相由,過過相由,則應有未、過相由,過、未相由,何不開耶?又於俱 相由中,應有過、現相由,現、過相由,現、未相由,未、現相由,何不開耶?又難次第相由中,兼有不俱義者,則過去世中,三世俱而相由。何故云超於自現、過未相由之義,爲不俱耶?又難超間相由中,正不俱而兼有俱義者,則過去三世中,過、未超於自現,而相由,是俱義者,卽自語相違過也。何故次第相由之過三世中,過、未超自現在與之相由,則爲不俱義,至超間相由中,爲俱義耶?又次第相由中,已具不俱義,何故超間相由中,亦論不俱義耶?是故此義難也。今釋相由之名下當 自現且略也。先擧相由之數,后約諸門分別也。初中摠有七十二相由也。謂且約過去,過去說,則一由過去,過去無故,成過去、現在有。二由過去,過去無故,作過去、未來無。三由過去,過去無故,成現在#過去無。四由過去,過去無故,成現在,現在有。五由過去,過去無故,成現在,未來無。六由過去,過去無故,成未來,過去無。七由過去,過去無故,成未來,現在有。八由過去,過去無故,成未來,未來無。如是約過去,過去一世作八相由,余八世,亦爾各八相由也。九八合爲七十二相由也。問:相由之相云何?荅:由過去,過去無故,作過去,現在有中,所以相由者,俱中文云若彼不謝此不有故已上則以過去過去無已落謝故方令過去、現在有得成立也。由過去,過去無故,令過去、未來無中,所以相由者,俱中文云由過去,過去無,令過去、未來無。謂若彼不無此,現不成有,現不成有,此未來不成無。是故此無展轉由彼無也已上則可知也自此以后當例此說也。謂由過去,過去無故,令現在、過去無也。謂過去過去若不無者,過去中,三世卽不成,過去中,三世卽不成故,現在三世,亦不成。現在三世不成故,不成現在,過去無也。然過去過去無故,過去中,三世得成過去中,三世成故,現在三世得成現在,三世得成故,令現在、過去無成故,云過去過去無故令現在過去無成也次后例此思之后約諸門分別者,有三門也。一俱不俱門,二次第超間門,三有有無無門也。各盡七十二相由也。第一俱、不俱盡七十二者,俱相由十八,不俱相由五十四合,有七十二也。問:俱中十八云何成耶?荅:由過去,過去無故,令過去、現在有。又反此則二也。過去、現在有故,令過去、未來無。又反此則四也。過去過去無故,令過去、未來無。又反此則六也。是故過去三世中,具六相由也。如一過去三世中,具六現、未三世中,亦爾具六也。是則三六故,十八相由也。問:不俱中,五十四相由云何成耶?荅:不俱中,有三門#謂一現現相由,二無無相由,三有無相由也。現現有六,無無有二十四,有無二十四也。無無、有無合四十八。又加現現六故,成五十四相由也。問:現現六相由,其相云何?荅:文中自現也。謂過去、現在有故,令現在現在有。或反此則二也。現在現在有故,令未來、現在有。或反此則四也。過去、現在有故,令未來、現在有。或反此則六也。故爾也。問:無無中二十四相由,其相云何?荅:頌曰:六種無世中,各除自家一相由,於四世各有四相由。釋曰:且約過去,過去與自過去、未來無相由,則是俱相由故,非是不俱相由。是故除自家一無也。是故望現在之過去,現在之未來,未來之過去,未來之未來等四無與之相由,則過去過去一無世中,具四相由。如是余五無世,亦各除自家一無與余四無相由,亦爾是則六中,各四合六四故,成二十四相由也。問:有無中,二十四相由,其相云何?荅:頌曰:三種現世中,各除自過、未,余四無世中,相由成十二,六種無世中,各除自家現余二現世中,相由成十二。釋曰:以有望無中,且約過去、現在與自過去過去,過去、未來相由,則是俱相由,非是不俱相由故除也。是故望現在之過去,現在之未來,未來之過去,未來之未來等四無與之相由,則過去現在中,具四相由。如是余現在,現在、未來,現在有,亦各除自家過、未與余四無相由亦爾。是則三中,各四合三、四,成十二相由也。以無望有中,有六無世各除自家。一現在世望余,二現與之相由,且約過去,過去與過去、現在相由,卽是俱相由故除也。是故望現在,現在、未來,現在與之相由則二也。又約過去、未來世,除自現在與余二現相由四也。如是六無,各具二相由,合二、六故,成十二也。以有望無以無望有,各十二相由,合二十四也。合無無二十四,成四十八。又加現現六,則成、不俱五十四。又俱十八,則七十二相由也。第二次第超間,盡七十二相由中,問:次第中十六相由,其相云何?荅:頌曰:前后二世,各一門中間,七世各有二。摠爲九世成十六,是爲次第相由義。釋曰:過去過去,則前無余世,唯有望后相由,未來未來,則后無余世,唯有望前相由故,各一相由也。中間七世,各望前后與之相由故,各二相由故,二七幷前后二故,合二、八,成十六也。問:超間五十六相由,其相云何?荅:頌曰:第一及第九,各越次一世,余七世相由,各有七相由中間,七世中,各除前后二,余六世相由,各有六相由。釋曰:第一則過去過去,第九則未來未來,且約過去,過去超於過去、現在,與后七世相由故,七相由也。未來未來超於未來、現在與前七世相由故,亦七相由也。中間七世,則各除前后二世與余六世相由故,合七、六成四十二相由也。合前后二世中,二七則成五十六。又合次第相由十六,成七十二相由也。第三有有無無,盡七十二相由中,此有三門:謂一有有,二無無,三有無也。有有卽是現現,有六相由也。無無中有,三十相由也。有無中有三,十六故,合有無無無,則有六十六。更加有有六,則合七十二相由也。問有有相由則是現現相由六可知也。有無中,三十六無無中,三十其相云何?荅:有無中,二十四,無無中二十四,則如不俱相由所說也。俱相由中,有十八,則十二是有無六,是無無也。俱相由之無無六,幷不俱中無無相由,二十四成三十也。俱中有無相由之十二,合不俱中,有無相由之二十四,則成三十六也。問:何故俱相由中,十一則有無相由六,是無無相由耶?答:過去中,過去過去無故,成過去、現在有。或反此則一也。過去現在有故,令過去、未來無。或反此則四也。則是有無相由也。過去過去無故,令過去、未來無。或反此,此二則無無也。過去世中,有無無無,合有六也。現在、未來亦爾。合有無無無,各有六也。故俱相由十八中,有無相由十二,無無相由,是六也。是故相由,則一種,然以俱不俱門,盡七十二相由,則無間次第超間及有有無無,而七十二相由,皆是俱、不俱相由也。以次第超間門,盡七十二相由,亦爾以有有無無門,盡之亦爾也。雖是一種相由,然隨門各別故,有三門也。大意料蕳竟第二隨文解,釋初中,且約七世略說次第相由之義,何故除過去過去與未來未來耶?荅:一云已滅無故,未生無故除也。今釋若約五日論,則中間三日具余位,前后二日,各唯一位故,約此具余位之中間七位,論則各唯一位之初后義,自現故,此中且略也。至下文具說次第相由義也。問:至下文廣弁次第相由,則此中唯論俱、不俱義,何故說次第相由耶?荅:於九世中,有約位論,或約俱、不俱論二義也。若約位論,則昨日一位中,具二世也。今日一位具三世也。明日一位,具二世也。若約俱、不俱論,則三現在六過未者,不俱也。一現二過未者俱也。故俱、不俱約九世門論也。今此則約位分故,約具余世之中間,三位略弁七世之次第相由也。此次第相由十六中,過去、未來無故,令現在過去無。或反此二也。現在、未來無故,令未來、過去無。或反此四也。此則次第相由,而是不俱也。亦是無無相由也。余十二相由,則俱相由也。亦有無相由也。超間中,過去過去超自家現之相由,未來未來亦超自家現之相由,是俱相由也。余皆不俱也。二俱、不俱義,初略標二,就俱中已下廣釋三問俱者,可相由已下問荅除疑也。初中隨其所應有隱有現者,隱則不俱相由現,則俱相由也。旣云有隱有現,仍云以俱、不俱故爾也。就俱中,過去過去無故,令過去、現在有者,約昨日云也。若彼不謝,此不有故者,前昨日謝故,成昨日有也。又由過去、現在有故,令過去過去無也者,卽是前昨日也。余皆文現也。又由過去過去無故,令過去,至彼無也者,若過去過去不謝者,不成過去現在有。若過去現在有不成者,不成過去、未來無也。然過去過去無故,令過去、現在有;由過去、現在有故,成過去、未來無也。是故此無由彼過去過去無成也。如是過去三世中,且約過去過去無故,令過去、現在有也。又反此過去、現在有故,令過去、未來無。又反此過去過去無故,令過去、未來無也。又反此如是過去三世中,具六相由,而有無相由之四,卽是有無門中有無相由也。無無之二,是無無相由也。如過去三世、至各有六可知者,擧過去三世之六例,現現未亦各有六也。此中各有有無之四,無無之二也。是故不俱無無二十四,與俱相由中,無無六成三十也。不俱有無二十四與俱中有無十二,成三十六,合成六十六。也。更加有有之六,則七十二相由也。是故有有無無,有無門,盡七十二相由也二就不俱中有二初現現相由亦有六義已上初一則現現相由也。后一是何荅無無門也?此中開有無故,無無二十四,有無二十四,合四十八,此中合現現,六成五十四相由也。問荅除疑中,荅中俱者,現相由不俱者,密相由者,俱相由;則相由相現故,不俱相由,則相由相不現故也。問:若爾此中,密相由與前云有隱有現中,有隱是不俱相由何別?荅:小別也。謂彼云有隱者,若見過去中三世,則不見現未中,三世故,云隱也。今云密者,相由之相隱而不現故,云密也。亦展轉相由者,俱相由不是,展轉相由耶?荅:展轉也謂俱相由中云此無展轉由彼無故已上不俱相由中過去、未來無故,令現在、未來無。又反此由現在、未來無令未來、過去無。又反此此四,則是次第相由。何故云展轉相由耶?荅:實是次第相由,然論相由之由,則是展轉成故爾也。謂若非過去、未來無,則過去中三世不成也。過去中,三世不成故,現在三世亦不成,現在三世不成故,現在、過去無不成也。是故以過去、未來無故,過去中三世得成過去中三世成故,現在三世,亦成現在三世成故,現在中過去,無成如是過去未來無故,現在、過去無成展轉故爾也。三次第超間段中有二初摠問數、、、如過去下廣釋后是故下摠結也。初、、是故者,前則以俱不俱,盡七十二相由,俱相由十八中,有無相由十一及不俱中,由過去、未來無故,令現在、過去無。又反此現在、未來無故,令未來、過去無。又反此等四,竝是次第相由也。又俱相由中,無無六相由,不俱門有無中,超於自現之相由,現現相由,無無相由等,余相由竝是超間相由故,因前云是故也。是則俱中,有無之十二,不俱中無無之四故,有前九門,以余相由故,有第十門。是故文云;是故此九世摠於五位有,此十門云也。次第相由有斯九門已上問似約九世次第列也相由義隱何故云相由耶?荅:約世次第列時,自守相由之義,而現現故,爾云也。第十超間中,若無初一,卽無后一等者,初一謂過去過去后一,謂未來未來。是故擧過去,過去無故,令未來未來無之一相由等,取余相由也。結中次第,者結前九門超間者,結第十門也。無㝵相由故,者通結也。二依是道理下以相由力,令九世卽入也。經云者,離世間品也。一云:此文者,若無初一卽,無后一之訂也。今釋通訂諸門卽入也。二相由之義,下別開中卽也。問:此是開中,卽時何故擧相由之所以耶?荅:以相由故,得相卽入。是故名則擧所以而正所現,則卽入二門也。有二門者,開數一約力用,下釋初中以力用至體不雜故者中門,則位不動,而相入故爾也。問:中門者,位不動門,卽門者位動門,則能具之動、不動耶,所具耶?荅:一云能具之動不動也。一云所具一云:通能所具也。初義者中門云一中二,一中三等,不動能具之一,而將二、三等來具也。卽門中一,卽二,一卽三等,動能具之一具十故,能具之動、不動也。次義者中門一攝多時位不動,入於一也。卽門一卽多時,多位動而卽一故,所具之動、不動也。后義者中門之一多相入時,一、多位不動也。卽門則一多位動而得相卽故,能具、所具之動、不動也。今釋唯所具之動、不動也。謂緣相盡不壞緣者,約所具云也。是故爾也。釋此二門如別說者,法界緣起章及大料蕳等也。不失本位,無不卽入者,一云:不失本位則不動者,向本義故,緣起自體也。無不卽入,則去來義故,緣起義門也。今釋一種緣起義門中立論也謂下文云諸劫相卽而不壞本劫已上約諸劫相卽義云無不卽入也。約不壞本劫義云不失本位也。是故一量中立論也。問:中門是位不動門可云不失本位卽門是位動門何故云不失本位耶?荅:別也。謂卽門是,動而不失本位也。第二法性融通門中,有三初現法之相,依成立也。次是故緣起理事下廣釋后時劫,依此下現時劫,隨法融通卽入也。初中此九世時,無別體,唯依緣起法上者,猶如萬物生長爲春茂盛,爲夏衰,落爲秋,收藏爲冬,則時無別體依於如是緣起之法,而得建立故,爾云也。是則時無自體依緣起法,此法亦依眞性,而成眞性融通故,法亦無㝵以法無㝵故,能依時劫,亦融通卽入也。問:刊定記中,於所依體事中,幷立世時,章主於能釋玄門,立十世門,云何別耶?荅:刊定記主,則以世時,立體事十法,而非劫入劫,劫入非劫者,入門劫,卽非劫非劫,卽劫者,卽門故,非別立玄門也。章主意者,雖是一種十法,若約世別之,則三世之法,各別故,玄門中立也。是故演義中,引刊定記云:有以時劫爲所依體事者,然時無別體,何得爲他之所依耶?若時是所依者,濫於外道時,常之失。是故古德立於能釋中也。問:今此文中,約於九世,以論卽入則時,是所釋耶?荅:不爾此中於相卽、入之法,約時別之。是故爾耳。旣云時,無別體,何得爲所依體事耶?就廣釋中,初開數列名,次初中下釋,后是故唯理已下結也初中四句云何荅一云泯相俱盡者理也。相與兩存者,事也。下之二門,唯事中,弁卽入也。一云:初則中門,次則卽門。又第三亦中門,第四亦是卽門也。問:后義中,二重中,卽云何別耶?荅:初重中,卽通約理事后,重中卽唯事中論也。問:何知初重,是中卽耶?荅:初門訂中,引非劫、入劫,第二門訂引諸劫相卽,是故爾也。然今釋初門現理事不異,第二門現理事非一下二門唯事中卽入也。問:何知初門是理事非異第二門,是理事非一耶?荅:釋初門云以本從末唯事而非理等已上則以理從事故卽是全理之事。是故非異也。以事從理故,卽是全事之理,是故非異也。釋第二門云全理之事非理故俱存而不雜也已上旣云不雜是理事非一門也。問:何故卽入之初說理、事非一、異耶?答:料蕳能詮教體門事融相攝門中,有二義:一相在,二相是,乃至下云良,以全理之事與全事之理,非一、非異,由非一故得相在也由非異故得相是也已上彼中理事非一非異者,今此初二門也。彼中相在相是者,今此后二門也。是故今此例彼先論非一、非異,次現卽、入也。問:若爾泯相俱盡者,不是中門耶?荅:爾也。旣理、事不異故、可云卽門非是中門也。是故初二通中卽之所以耳,非是中卽也。問:若爾何故初門訂中,引非劫、入劫等耶?荅:若爾難者,演義同體卽門中云多一無性潛入於本一已上此之入字亦是中門耶?然入之言不定故,今此入字非是入卽,相對之入也。問:理、事非一門中,引諸劫相卽之文可於非異門引也。何不爾耶?荅:雖是第二門所引,然諸劫相卽之言還是初門中意也。不壞本劫者,正第二門訂也。問諸劫相卽者,是諸事劫互。相卽耳何故,理事非異之前。門中引爲訂耶,荅諸劫相卽者,非謂立在事法,論彼劫,此劫之相卽,但是諸劫之事,與非劫之理相卽故,是理、事非異也。三相通互攝者,謂隨事之理故,隨理之事故者,相通也。一事能容一切也。一切事入一中也者,互攝也。反上卽是一入一切可知者,具作應云由隨事之理故,令一切事能容一也。由隨理之事故,一事隨理入一切中也。四相是互卽者,謂卽理之事故,卽事之理故者,相是也。一卽一切也。一切卽一也者,互卽也。是故唯理無可卽入等者,現異理之事,異事之理,則不成卽入也。要理事相從者,約初門以末從本以本,從末云相從也。如是故云相卽也。問:第二理、事非一門,何不擧耶?荅:門雖各別,然約不異理之事,與不異事之理,以論卽入時,理、事非一之義已現現故,不別擧也。余義准思者,且論卽入二門,例余同時具足因陁羅等門也。玄義章 前則於三世中,三寶興隆相續不絕故,明所依時世今此欲弁三寶所現玄義故,次來也。問:玄義與十玄何別?荅:一云:玄義者,通於一乘、三乘十玄者,唯局一乘故別也。今釋一也。謂今此章中,亦有論三乘事處,然其所宗正在一乘。是故玄義與十玄一,而無別。下文不動衆生之雜染,卽是三寶之淸淨等,現其玄妙故,云玄義故爾也。此中先列章門,后第一緣起諸法下別釋也。初中十門相生次第者,緣起諸法,旣無㝵故,隨我所擧論相在、不在,相是、不是故,有第一。衆生之染,三寶之淨,染、淨玄別,何得無㝵耶?則衆生之空三寶之空,同一眞空故。是故緣起無障㝵也。故有第二。計此眞空不異斷空,欲現眞空,異於斷空,以治情見故,有第三。欲離斷空訂得眞空,以何等藥治#何等病,則常觀諸法平等之時,諸病皆治故,有第四。若爾理則平等事則差別,何得事相,亦平等耶?則理平等故,事亦隨理平等故,有第五。若諸法平等,云何說因果故有第六。眞諦門則平等可爾,若俗諦門,亦平等耶?故有第七。欲知二諦須明眞妄心境故,有第八。若諸法平等,則能化、所化,云何別耶?故有第九。如是之法作何方便,而得入耶?故有第十也。別釋中,初門中,緣起無㝵與法界緣起一耶?荅:一也。謂此門下文云:此上三重融成一際,圓明具德無㝵自在,是約法界緣起門云故爾也。問:若爾前之法界緣起中,義已盡也。何故重擧耶?荅:欲現衆生之染,三寶之淨互爲緣起,則要擧法界緣起之義,方园現故,須重擧耳。問荅卽爲二叚,荅中先開二門,后初中已下釋。釋中先開三重四句后,此上三重融成一際已下結也。初中一空、不空門者,空則眞空,不空則是有故事也。問:何故相在、相是之前,先論空、不空耶?荅:澄觀公釋周遍含容觀云:事如理融遍攝無㝵交參自在,略弁十門一事,如理門二理,如事門三事。含理事門四,通局無㝵門五,廣挾無㝵六,廣容無㝵門七,攝入無㝵門八,交涉無㝵門九,相在無㝵十。普融無㝵門初二則理、事相如故,理、事無㝵也。后八則事、事無㝵也。是則何故事、事無㝵,周遍含容觀中先說理、事無㝵耶?以理、事無㝵故,方成事、事無㝵。是故爾也。今此亦爾理、事無㝵故,成事、事無㝵,事、事無㝵故,方得相在相是。是故先弁空、不空理、事無㝵也。一切法至毫末相者,以緣起無性故,無毫末相也。雖是無性,然有虛假相耶?故虛相亦盡也。或一切不空,以空爲諸法故者,前云無毫末相。又云虛相盡,則旣空所有,何故云以空爲諸法耶?荅:約空卽是色義云也。謂蜼云是空,不異色之空故,非謂滅色,然后名空。是故以空爲諸法也。等者、等取受想行識也。二相在、不在門中,先則一切入一之四句,后如一切入一下一入一切之四句也。初中相在不在者,約能在所攝云相在也。一切入一中,至一切同在一者,一法無性故,是法性之一也。一旣無性,是法性之一故,一切亦無性,是法性之一切。是故一及一切,是一法性故,一切在一中也。雖恒涉入住自位故者,擧相在義現不在義也。微細相入者,相在義,恒在外故者,不在義也。萬里迢然者,不在義也。恒相在故者,相在義也。或俱非謂入出融故者,入則相在,出則不在也。如一切至一切,亦准思之者,若具作所例,則應云或一入一切中,由一切無性以法性爲一切又一法旣卽法性是故一遍在一切中而不相是也。或不在一切,謂由無性多一絕故,如是作也。三相是、不是中,先明一切卽一之四句也。后例一卽一切之四句也。初中問相是者,有爲能是空爲所是耶?荅:諸處不定故,一卽多時,具有一卽空,多空一,卽有多二義也。有一卽空,多時有爲能是空爲所是空。一卽有多時空爲能是有爲所是也。問:若爾今此云何?荅:言雖難定,若准前而說,則空爲能是有爲所是也。謂中門,則一切入一中,時#一切無力,入於一也。以此准之則相是門中,亦爾一切,是一時一切空而卽於一有故爾也。此有二門下,先開章門,次約性已下別釋后問,若就下問荅,除疑也。釋中一約性,謂如經云者,諸法無行經也。一云約性門者,一乘也。問:然則一乘中,三毒當相卽是菩提也。今此云以貪欲,卽無性故,不可壞,則唯取貪欲無性之理。故可當三乘耶?荅:就一乘中,有約修行,次第說有約已訂之人心說也。若於已訂之心中,三毒當相,卽是菩提也。若修行次第中,要約三毒之性,令相卽也。今此約修行,次第故爾也。今釋所引經本,旣是三乘故三乘也。若約一乘,則三毒當相卽菩提也。今依彼經本意釋故,約貪欲之無性義,方云不壞也。問:一乘中,亦說理,理相卽事事相卽等,四句則今此亦是一乘。何云三乘耶?荅:一乘雖約理說,然三毒之相直是理也。今此要約貪欲之無性,令其相卽故三乘也。二約事此中,二一始二終者,問此始終意,云何荅?知一切卽一者始也。知一卽一切者終也。問:若爾所例之門,唯終無始耶?荅:例中亦具始終故,一卽一切者,始一切,卽一者終也。問:何故初門中,一切卽一,始一卽一切終,於所例中,始終反此耶?荅:約觀心次第,論始終故爾。謂依一切卽一之詮發生智解者,則見一切卽一之法故,云始此觀旣熟,則便發一卽一切,一切卽一之解見法。如是是故云終也。所例中,初依一卽一切之詮,修觀行故,始終反此可知也。問荅中有二,初問中,若就理性旣一多等者,擧情計理事而問也。若擧事而取理等者,若擧事取理,則不異前約性門,更何弁耶,如是問也。二荅中,先摠荅后,卽事之理下別荅也。初中云此二義者,何二義耶?荅:旣云今由理事不二而二已上故理事中非異與非一二門也何者嘖若事,而非理等者,卽牒問也。別荅中,卽事之理方爲眞理等荅,若約理有,卽等問也。卽理之事,方爲幻事等,荅約事有卽等問也。良由理事相,是而不一故等者,荅若擧事而取理等問也。或谷嚮像執言求解等者,或谷者,一本云或容一云,或客嚮字,或本云響有。釋云:法如谷中響,鏡中像,而迷之者,執言而求解也。一釋云,又或客有迷於如響像之法,執言求解也。有云:或容向於如像不實之法,執言求解也。全體相是而不雜等者,全體相是,則相是門也。然約不雜故,不壞本法故,以成不是之由也。其猶色卽空者,相是門義,然約不壞色等,以成不是之由也。等者,等取受想行識等也。准思者,所例四句反前可知也。此上三重等者,摠則三重開有六重四句也。謂前空、不空門中,雖無所例然、旣約一切作四句,云一切空、一切不空等,更無約一四句故,若作約一四句,則一空,或不空,或俱,或不俱等。如是作四句故,有二重四句,相在相是二門中,各現:作四句,弁所例四句,則合有六重四句,成二十四句也。二句數中,亦三重者,先摠開數后#先已下別釋,釋中先約一、多相,卽不卽摠有四。四句者,摠摽句數一已下別釋,釋中一由一卽多故,名一者緣起一也。二由一卽多故,非一者簡情計之一也。三一卽多故,亦一亦非一者,緣起故,一非情計一故,非一也。四由一卽多故,非一非非一者,非情計之一故,非一非不是緣起一故,非不一也。多卽一准之中,具說應云一由多卽一故,名多二由,多卽一故,非多三由多,卽一故,亦多亦非多四由多卽一故,非多非不多也。此中約情計與緣起別准前,第二由一不卽多故,名等者,一云相是門,則是緣起道理門也。不卽門者,情計所執之法也。是故由一不卽多故,名一者,情計之一也。二一不卽多故,名非一者,緣起之一也。三由一不卽多故,亦一亦非一者,一則約情計非一則約緣起也。四一不卽多故,非一、非非一者。非一,則非緣起之;一非非一,則非不是情計之一也。多不卽一准之中,具作應云:一多不卽一故,名多;二多不卽一故,名非多;三多不卽一故,名亦多亦非多;四多不卽一故,名非多非非多也。此中約情計與緣起別之准前,然今釋相,是不是竝是緣起道理中,所說故,不是者,非謂約情計之法也。若爾則前出不是之所以,而云全體相,是而不雜故,不壞本位故者,亦情計耶?色卽空,而不壞色等,亦情計耶?然不壞色等者,不壞幻色本自性空之義故難也。是故應云一不卽多故,名一者緣起一也。一不卽多故,非一者,非情計之一也。一不卽多故,亦一亦非一者,一則緣起非一,則非情計之一也。一不卽多故,非一非非一者,非情計故,非一非不,是緣起之一故,非非一也。准之者,准前知上二重,如次作四句也。下二重交絡作四句也三中由一一不卽多故名一者第二重初句也。二由一,卽多故,非一者,初重第二句也。三則初二重第三句通也。四則初二重,第四句也。反作可知也。第四一卽多故,名一者,初重初句也。二一不卽多故,非一者,第二重第二句也。三四則同前也。反作可知也。此上順有,十六句逆,亦十六者,四重中,現作四重四句順也。例作四重四句逆也。二約相在不在,亦三十二句者,准前相是不是作也。三約空不空,亦三十二句者,若具說,則別分一與一切,各作四重四句。謂一空故,名一二空故,非一三空故,亦一非一四空故,非一非不一則,空中四句也。一不空故,名一、二,不空故,名非一、三。不空故,亦一亦非一四,不空故,非一非非一,則不空四句也已上二重四句也若具作交絡二重四句則應云一不空故,名一二空故,名非一三亦空,亦不空故,亦一亦非一四,非空非不空故。非一非非一,則一重四句也。反作可知如約一之空、不空,四重四句,如是約一切之空、不空,亦四重四句故,合八重四句,成三十二句也。染淨緣起門問荅,卽爲二叚荅中,此二各有四句者,摠標謂衆生,是妄下釋釋中,先釋衆生四句后釋三寶四句也。初中衆生,是妄者,謂遍計所執衆生也。衆生非妄者,依他似有衆生也。又約眞如隨緣義也。此二約用者,對下二句之約體故也。衆生是妄,由上二句故者,何故前云衆生非妄,今此云妄耶?荅:前則對遍計故,依他則非妄,今對园成實德故,依他亦妄也。衆生非妄至性滿故者,舍那品疏約五海論染淨之義中,衆生卽淨義也。三寶是妄 者,橫計爲有故,雖是三寶,亦是妄也。二處經云者,竝華嚴經也。經云:佛菩提智等者,勝鬘經也。三寶是妄由治妄故者,何故前則治妄故,非妄今此,則治妄故妄耶?荅:前則旣能治妄故,非妄今,則若無妄可治,卽不立三寶之能治,今對所治之妄,以立能治之眞故,是妄也。故立也者,順釋無妄,則無者反釋也。論云者,起信論也。經云者,涅般經也。是故生之與佛同一眞空故,平等無異故,云染淨緣起也。簡理異情門荅中,一約境謂眞空等者,色體無性,卽眞空故也。斷空在色外等者,如牆處,不空牆外,是空則色外之空也。如穿井除土,方爲空者,滅色之空也。比訂等不同者,三乘地前,是比比智知空故,地上是訂,訂智見空故也。一乘中,見聞是比解行爲訂也。必伏滅煩惱等者,三乘地前伏滅地上,斷滅一乘,見聞位中,伏滅解行斷滅也。成正行者,滅煩惱之所得也。入位者信等五位得果者,得菩提果也。經者,淨名經也。論者,金剛般若論也。經則訂空見之不起論,則訂空見之失也。斷空不爾反上知之者,應云斷空不卽色,可斷空取。是故斷空可思議也。四約對弁異者,以斷空對卽色之眞空,弁其異也。問荅荅中,先略荅略,作四句已下,開句數廣荅也。廣荅中二先約色與斷空分別四句二,如此二門下例擧余法別也。初中俱所執故者,色與斷空,竝是遍計所執故也。如見人畜等者,色與斷空之玄別,如人與畜之別也。二斷空卽空與色卽空二空不別者,此竝眞空故,不別也。三情理異故者,眞空者,理斷空者情也。下准知四,卽空之色與卽眞之斷等者,卽空之色與卽眞之斷實,則不異。然約色與斷之詮,以現理也。所以爾者,以就法融通故也。問:何故前則色與斷空不卽,今此相卽耶?荅:前則異空之色異眞之斷故,不卽今,則卽空之色,卽眞之斷故,相卽也。二中余一切法相望等者,如約色與斷空所論,如是約貪與嗔等,應云一貪與嗔不卽,以所執故,二瞋,卽空與貪卽空。此二空不別以無二相故,三貪卽空與瞋不相卽,以情理異故。又瞋卽空與貪不相卽,亦情理異故,四卽空之貪與卽空之瞋得相卽。又約余法,亦爾等也。經云者,諸法無行經可當第四句之訂也。次二問荅可知,或容可見者,謂勸進行人,令修觀智耳。藥病對治門問荅,荅中先示病,次示藥后。此是大乘下結也。初中標數列,名后前中,已下釋也。初中一麤等者,初二非器也。二細等者,正乖實兼有狹劣非器也。釋中一內實破戒等者,違眞非器,以求名利莊飾我人故也。二假令不破等者,背正非器也。求名利者,通於違眞非器也。二細中一,雖具直心等者,不作巧僞故,云直心。然隨自執見謬取經文故,云執我修行故,當於乖實非器也。二雖不執有人等者,以二乘人得人空故,不計有人,然未達法空故,計爲有法,實見不破故,當於挾劣非器也。藥中於諸過非而不覆藏等者,反前內實破戒等也。二於所修行不雜巧僞等者,反前求名利也。質直者,反前不直也。柔軟者,反前狡猾等也。作下下意者,反前爲他知故也。不現己德者,反前護短也。細中一修諸行時等,反前執我修行等也。二觀察諸法平等不二等者,反前雖不執有人等也。二通說者,於前開列章門時,雖不標擧,然旣云藥有二種,如是別論二門,對此故,云通說也。問:但深觀諸法平等與前觀察諸法平等不二一相何別?荅:觀法平等,則一種無別,但前別治實見,今則通治諸病故別也。理事分無門問荅,荅中先約分無論四句,后由上諸義下約在不在論四句也。后中先釋在義,次又由理不唯下釋不在也。后是故無在不在等結也。初中先約理弁,后約事釋也。初中理性不唯無分等者,奪無分成分,以現遍一切,在一中也。不唯分等者,奪分成無分,以現在一遍一切中也。后約事中,事法不唯分等者,奪分成無分,以現常在此處,恒在他處也。不唯無分者,奪無分成分,以現遍一切處,不移本位也。就不在義中,先約理后,約事釋也。結中無在不在等者,結不在也。而在彼在此者,結在義也。因因果果門,此有四叚一引師子吼品四句釋二,或有佛性闡提人有下引迦葉菩薩品四句合,釋前四句也。三十二因緣,名佛性下現佛性平等也。四又初四句下,以七重釋四句也。初中因者,十二因緣者,現十二因緣之佛性也。是故十二因緣生智惠之因故爾也。因因者,至已去者,以發心已去之人有智惠故也。演義中,有二釋一如此中,又釋以智惠,觀十二因緣故,云因因也。果者,阿耨菩提智惠所生果也。果果者,無上大涅般者,菩提智所現果也。后四句者,同是師子吼品故,爾云也。因非果者,如佛性者,十二因緣也。果非因如大涅般者,無上大涅般、唯是果非因故爾也。是因是果者,如十二因緣,至二句者,智惠對十二因緣故,是果若對菩提,則是因也。又菩提則智惠所生之果,若對大涅般,則是因是故,云亦因亦果也。非因非果者,法身也。二合釋四句中,初句是前因性者,十二因緣也。第二句是因,因性者,智惠也。第三句非因非果性者,法身性故,二人俱有故爾也。第四句果與果果性者,菩提涅般果者,二人俱無故,爾云也。問:此中善根闡提云何?荅:串習六度,至於信滿堪任位者,善根人也。自此已前名闡提也。問:若爾信滿堪任已去三賢人,亦具十二因緣,何故云唯闡提人有耶?荅:十二因緣中,有善不善之二故闡提人有善根人無者不善一分故不違也。問:曉公涅般宗要中,釋此四句,略有四義。現二門故,別因果性故開四意故遮二邊故已上與今所論何別荅此與彼別也。謂初句闡提人有者,十二因緣也。第二句善根人有者,智惠也。問:此四句佛性,何教中立論耶?荅:問荅后卷云:大乘涅般經四句佛性者,非小乘義中,及初迴心人作四句義,卽頓教、終教佛性也。問:問荅初卷云:若依三乘始教,卽半成半不成佛,若直進迴心二人修行,十千劫住,堪任地者,竝皆成佛。若未至此位,卽與一闡提迦位同。如此人等,竝皆不成佛。此約位語,若依此判四句分別准,亦可知已上然則初教中亦論四句耶荅一云非謂涅般經四句也。此則和尚自意作四句耳。謂或唯成如修六度串習行,至信滿堪任已去者也。或唯不成,如無性衆生,或成、不成如修六度串習行,未至信滿堪任人也。或非成、非不成如定性二乘,如是自意作四句也。今釋初教中,亦得論也。謂約一切闡提與善根人,論四句者,唯局終教,約一分闡提與善根人論四句者,亦是初教所論也。問:一分闡提者是何?荅:簡無性有情也。是則修六度串習行未至,信滿堪任已前人爲一分闡提也。至信滿,則善根人也。問:若爾何故問荅云涅般四句佛性者,非小乘義中,及初迴心人作四句義,卽是頓教、終教 耶?荅:涅般經四句,則約一切闡提對善根人論故,終頓教也。非是約一分闡提人對善根人故別也。謂初教中四句,則或有佛性闡提人有善根人無,謂約行弁性也者,此世生,善根可救者,有現行善性故。或有佛性善根人,有闡提人無者,謂約位弁性故等也。問:今此四句與問荅四句何別?荅:別也。今此二人俱有者,非因非果性。彼云約因弁性故別也。又彼中約行弁性,約位弁性者,亦不同也。謂此中初句闡提人有者,十二因緣彼中云約行弁性也。此中第二句善根人有,謂智惠者,所成智惠也。彼中約位者,約所依位故別也。現十二因緣佛性中,現無明,佛性余攴准此者,例識攴等也。問:當體淨故,是法身性與非因非果性者,法身理也。何別?荅:猶如虛空,是一然甁空瓮空,則別法身,雖一然當體淨者,在於詮中故,小別也。七重釋初四句中,先正釋后。是故四義唯一心下結也。初中初染淨緣起者,眞如淸淨,以無明染故,成十二因緣也。二內熏發心者,眞如內熏發智惠故也。三無明旣盡,始覺圓故也。四究竟本覺現現故也。又初隨染體隱者,法身隱也。以隨染成十二因緣故也。二微起淨用者,法身雖隱起淨用也。三染盡淨园者,無明染盡,始覺园也。四還源現實者,還本覺源,現涅般實也。又初與第四俱是理性,但染淨異者,初十二因緣當體淨義,第四無上涅般竝是理攝初,則是染第四則淨也。中間二俱是行性,但因果異者,智惠與菩提竝是行性智惠,則因菩提則果也。又初染而非淨者,十二因緣染也。第三淨而非染者,菩提是淨也。二亦染亦淨者,以智惠,望十二因緣,則淨望菩提,則染也。第四非染非淨者大涅般之體非染淨故也。又初是自性住者十二因緣有法身性卽自性住佛性也。二是引出者,引出所有法身故,引出佛性也。三四竝至得果者,如是至於菩提涅般故也。又初二因者,十二因緣與智惠,則因也。后二果者,菩提與涅般,則果也。轉初爲四者,十二因緣當體之淨,卽是大涅般故,轉二爲三者,菩提從智惠生故。又依初起二者,依十二因緣起,智惠故,以二成三者,由智惠故,成菩提。故以三訂初者,由菩提智,訂涅般果故,應云以三訂四然迴轉,則十二因緣之當體淨,卽是涅般故爾也。是故已下結結中,若離無明四相,皆盡者,若斷無明盡,則諸法一相。皆悉平等。是故此四句相本無所有,然由無明故,有如是差別也。二諦無㝵於中,且如者,眞俗之喩雖有多種今,且約巾兔以喩其義故,云且如也。兔有二義等者,相差別,則依他,似有義也。體空則依他無性義也。巾亦二義者,住自位是不變義,擧體成兔,是隨緣義也。不異中,巾上成兔及兔上相別義,合爲一際者,隨緣義與似有義一際故也。以本就末明不異者,本是不變末,是隨緣似有也。二以巾上住自位義等者,無性義與不變義一際故也。已上二句,如次成句三,以攝末已下二句,交絡成句,如文可知。第二非一義中,不變義與似有義不一故,有初句隨緣義,與無性義不一故,有第二句相背與相害非一故,有第三句,相背相害,俱泯故,有第四句文云:相背卽相背捨等者,猶如冤家二人互相棄去,不相見也。相害卽與等者,猶如冤家二人互相鬪諍,害於自他也。此不泯不存者,不泯是相害義,不存是相背義也。此是成壞非一者,成是不泯義壞,是不存義也。第二就法說中,兔卽生卽死等者,兔中生義,是似有死義,是無性巾中隱義,是隨緣現義,是不變也。逆順交絡等者,准前喩中,十門此中,亦作十重也。具作應云第一重兔生與巾隱非異。又兔死與巾現非異后二句,則准前喩初重非異中,后二句也。第二重非一中兔生巾現,是非一兔死巾隱,是不一等者,亦准前喩,細詳作四句也。非異是順非一是逆故,逆順等也。二現義者,對就法 說門故爾云也。於中俗諦中,有四義,初二用,后二體也。眞中四義,初二是體,后二是用也。合中合俗中,約用等者,如一乘中,相入義約體等者,如一乘中,相卽義也。合眞中文云:依持成俗者,是前依持義,奪俗余盡無二故者,是盡事義也。問:何故初列門名中,列開合一異等,四門釋中,唯有開合耶?荅:論開合時,一異義,則自現故也。如文可知。理、事卽不卽門者,相是門故,云卽不卽也。相在者,准前知故略也。於中先弁不卽二相,卽中下弁相,卽義初中一云不卽者,是情謂故也。今釋不爾此中,不卽與法界啚中,各各不相,卽同故,是法道理也。相卽四句中,訓德云初二句,是初教第三句,是終頓教第四句圓教也。林德云:四句竝是圓教也。今釋理事相,卽理理相,卽通於終頓然。此中約以別該同之意故,四句竝圓教也。眞妄心境,心境各有四句。文云:二見不壞者,是空有二見也。三以情就法者,以妄情就法說也。有無俱情有者,情謂之有無,是情之有。故有無俱理無者,情謂之有無,無於道理。故有無俱理有者,法中有無,竝是道理中,所有。故有無俱情無者,法中有無,竝是於迷情中所無。故入道方便中,先擧數開門,后初中下釋。釋中有三。先弁入道緣起,又入道下弁入道方便也。更以句數下句數料蕳也。初中文云:一麤,謂求名利等者,初二非器,二細存見等者,通三、四非器也。第二簡境中,初是所簡二,眞境下所取之境也。三定智中下有解行二門,竝如前流轉章也。又約境以三空亂意者,謂滅色爲空又色外取空及謂空爲物也。約行以無分別智,五相簡之者,攝論云:五相者:一離無作意故,二離過有尋有伺地故,三離想受滅寂靜故,四離色自性故,五離於眞義異計度故已上第二入道方便有四門問四門中何故不釋初三門耶?荅:以初三門如常所說故爾也。第四門中,一捨緣門,離凡夫染著之過。二隨緣門離二乘滯寂之見,又初是護煩惱行。第二是護二乘行,二隨緣門中,云一還前六事等者,前示離染著此中,示守心不染也。二凡於一切堪情等者,堪情者,順於情也。謂於順情之事,覺知忍拒究竟不受也。三於一切違情等者,設遇斷命之怨,如飮甘露,歡喜忍受也。第二終中,初捨緣等者,前之捨行,今此究竟故。二隨緣門等者,始中隨緣終極究竟故,眞俗境不殊者,二境不殊也。悲智心不別者,二心不別也。又境而不別者,心境不別也。又菩薩住不住行中,開合爲二,開中先弁不住義,二明住下弁住義也。初中先弁所住境中,不住義也。又智理無別,下弁能緣心,不住義也。二住中先弁住生死二住涅般下弁住涅般也。初中亦二義初義中,初句是利他第二義中初句,是自利義也。若更以下句數中,先弁不住中#四句二唯住已下,弁住中,四句可知。華嚴經三寶章圓通記卷下均如聖師在 光宗朝,行化神異感通。具如學士赫連廷所述行狀、錄及海東僧史,自聖師旣遠,法界宗中,廣大之義墜乎地,則嗚呼大道之難行也。本講和尚天其生於相去數百余載之后生,如宿植一依義相門下,所專妙旨聖師遺記。當此季末五濁之深揭,獨力、园宗古義。然后海東學人知有華嚴義,持一路,矣弟子事本講、預聞一二大義。今依如公三寶章古記,刊削羅言,離爲二卷,以施學人,非敢好事,欲成就先和尚之本願耳。
- 1)『화엄경수소연의초(華嚴經隨疏演義鈔)』 제11권, 신수대장경 제36권, p.85 상중.
- 2)『십구장원통기(十句章圓通記)』 하권, 한불전 제4권, p.12 우.
- 3)『탐현기』 제4권, 신수대장경 제35권, p.173 하.
- 4)법계연기를 네 문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가운데 첫 번째 연기상유문에 셋이 있는데 그 첫 번째이다.
- 5)연기상유문의 셋에 각각 세 가지 뜻이 있는데 그 두 번째 뜻이다.
- 6)연기상유문의 셋에 각각 세 가지 뜻이 있는데 그 세 번째 뜻이다.
- 7)『수현기』 제1권 하, 신수대장경 제35권, p.27 상.
- 8)『지귀장』, 신수대장경 제45권, p.594 중.
- 9)『화엄경수소연초』 제11권, 신수대장경 제36권, p.85 상.
- 10)『화엄오교장』 제4권, 신수대장경 제45권, p.503 중.
- 11)연기상유문에 셋이 있는데 그 두 번째이다.
- 12)연기상유문의 셋에 각각 세 가지 뜻이 있는데 그 두 번째이다.
- 13)『화엄경수소연의초』 제11권, 신수대장경 제36권, p.83 중.
- 14)연기상유문의 셋 중에서 세 번째이다.
- 15)『탐현기』 제4권, 신수대장경 제35권, p.124 상.
- 16)『화엄경소』 제3권과 『화엄경수소연의초』 제3권, 신수대장경 제35권, p.123 상.
- 17)『화엄경소』 제1권, 신수대장경 제35권, p.508 상중.
- 18)『화엄오교장』 제1권, 신수대장경 제45권, p.497 하.
- 19)『탐현기』 제17권, 신수대장경 제35권, p.423 하.
- 20)『삼보장』 제1권, 신수대장경 제45권, p.618 하.
- 21)글자가 파괴되어 알아볼 수 없으므로 번역할 수 없다.
- 22)『연의초(演義鈔)』 제10권, 신수대장경 제35권, p.76에서 뜻을 취하였다.
- 24)원문에는 약(若)이 아니라 곡(谷)으로 되어 있다. 뒤에 나오는 ‘향한다’의 글자는 향(嚮)이다.
- 25)본문에선 왕행(王行)으로 되어 있다.
- 26)『화엄경수소연의초』 제24권, 신수대장경 제36권, p.186과 같은 책 제36권, p.281 가운데 뜻을 취하였다.
- 27)『화엄경오십요문답』 하권, 신수대장경 제45권, p.534 중.
- 28)『화엄경오십요문답』 상권, 신수대장경 제45권, p.519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