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대각국사외집(大覺國師外集) / 大覺國師外集卷第十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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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각국사외집 제12권大覺國師外集卷第十二
영통사 대각 국사 비문1)
김부식 지음

상이 즉위한 지 4년째 되는 을사년(1125, 인종 3) 가을 7월 경오일에 대각 국사의 문인인 도승통都僧統 징엄澄儼 등이 국사의 행적을 갖추어 상에게 아뢰었다.
“선사先師가 세상을 떠난 지 오래되었는데도 비명碑銘을 아직까지 짓지 못했으므로 그 덕업德業이 마멸磨滅되어 기록할 수 없게 될까 항상 두렵습니다. 바라건대 상께서는 이를 불쌍히 여기시어 자료를 모아 비문을 짓게 함으로써 영원히 전해지게 해 주소서.”
상이 일렀다.
“아, 국사는 나에게 종조從祖가 되는 분으로, 후세에 끼친 공렬功烈이 찬란하여 볼 만하니, 어찌 덮어 두고 드러내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그러고는 마침내 신臣 부식富軾에게 행장을 내리며 일렀다.
“그대가 비명을 짓도록 하라.”
신이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였기에 물러나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신이 살펴보건대, 국사는 성인聖人의 도道에 대해서 천성적으로 터득하여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자라고 말할 만하다. 무엇으로 그런 줄을 알겠는가.
국사는 소싯적부터 학문의 길을 알아서 분잡紛雜하고 화려한 것에 이끌리지 않았다. 그리고 출가出家하고 나서는 도道가 쇠퇴하고 학문이 피폐한 때를 당하여 홀로 시속時俗의 행태를 뒤로 하고 옛 성현聖賢의 뒤를 따라 그 뜻을 조술祖述하고자 하였다. 불행히도 단명短命하였으나, 수립한 업적이 이와 같으니, 자사子思가 “성誠으로 말미암아 밝아진다.”2)라고 말한 것이 바로 여기에 해당하지 않을까 한다.
국사의 휘諱는 석후釋煦이다. 속성俗姓은 왕씨王氏이고 자字는 의천義天인데, 뒤에 송宋나라 철종哲宗과 이름이 같다고 하여 자字로 대행代行하였다.
국사는 태조대왕太祖大王의 4세손世孫이요, 문왕文王의 넷째 아들이다. 모친 인예태후仁睿太后 이씨李氏가 밤에 용이 가슴으로 들어오는 것 같은 꿈을 꾸고 잉태하여 을미년 9월 28일에 궁중에서 낳았는데, 이때 향기가 물씬 풍기다가 오래 지나서야 없어졌다.
국사는 어려서부터 초오超悟하였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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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_0590_c_02L大覺國師外集卷第十二

004_0590_c_03L[靈通寺大覺國師碑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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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上嗣位之四年乙巳秋七月庚午大覺
004_0590_c_05L國師門人都僧統澄儼等具師之行事
004_0590_c_06L以聞曰吾先師卽世久矣而碑銘未著
004_0590_c_07L常懼其德業有所磨滅而不記惟上哀
004_0590_c_08L憐之使之裒撰以示久遠上曰於乎
004_0590_c_09L師於余爲從祖而遺功餘烈炳然可觀
004_0590_c_10L其可盖而不章乎遂授臣富軾以行狀
004_0590_c_11L汝其銘之臣讓不獲命退而叙曰
004_0590_c_12L臣觀之師於聖人之道可謂性得而生
004_0590_c_13L知者也何以知其然哉自少知學不爲
004_0590_c_14L紛華盛麗之所移及其出家當道衰學
004_0590_c_15L廢之時獨能背馳於時態追古聖賢而
004_0590_c_16L祖述之不幸卷一二第一張短命而其
004_0590_c_17L所樹立如此子思有言因誠而明者
004_0590_c_18L是類乎師諱釋煦俗姓王氏字義
004_0590_c_19L後以名犯哲宗諱以字行2) [126]
004_0590_c_20L大王四世孫而文王第四子也母仁睿
004_0590_c_21L*大后李氏夜夢若有龍入懷而有身
004_0590_c_22L至乙未秋九月二十八日生於宮中
004_0590_c_23L時有香氣郁然久而後歇師少超悟
004_0590_c_24L金富軾撰靈通寺碑{編}「大」通「太」{編}次同

004_0591_a_01L책을 읽고 글을 짓는 것도 정민精敏하여 오래전부터 익힌 것만 같았다. 형제가 모두 품행이 뛰어났으나, 그중에서도 국사가 걸출하게 두각頭角을 나타내었다. 상이 어느 날 왕자들에게 일렀다.
“누가 승려가 되어 복전福田의 이익을 지을 수 있겠는가?”
국사가 일어나 아뢰었다.
“신이 출세出世의 뜻이 있으니, 상께서는 분부만 해 주십시오.”
상이 일렀다.
“가상하다.”
모후母后가 전일의 귀한 태몽胎夢을 떠올리고는 남몰래 애석하게 여겼으나, 이미 임금의 명을 받았으므로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을사년(1065, 문종 19) 5월 14일에 경덕 국사景德國師를 내전內殿에 불러 머리를 깎게 한 뒤에 상이 재배再拜하고는 국사를 따라 영통사靈通寺에 가서 거하도록 허락하였다. 그해 10월에 불일사佛日寺 계단戒壇에 나아가 구계具戒를 받았다. 이때 춘추春秋 11세였으나, 학문을 멈추지 않아 이미 성인成人의 경지에 이르렀다. 언젠가 꿈에 어떤 사람이 징관澄觀 법사의 글을 전해 주었는데, 이로부터 혜해慧解가 날로 발전하였다.
바야흐로 장년壯年(청춘)의 나이에 접어들어서도 더욱 부지런히 노력하여 밤낮으로 매진하면서 박람강기博覽强記에 힘썼다. 국사는 일정한 스승이 없이 도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가서 배우곤 하였다. 현수賢首의 교관敎觀으로부터 점돈頓漸과 대소승大小乘의 경률론經律論 및 그 장소章疏에 이르기까지 탐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 틈나는 대로 불교 이외의 학술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견문을 넓혔다. 그리하여 중니仲尼(공자)와 노담老聃(노자)의 글을 비롯해서 자사집록子史集錄과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학설에 이르기까지 그 정화菁華를 음미하고 그 근저根柢를 탐색하였다. 그래서 그 의논이 종횡으로 치달리며 끝없이 펼쳐졌으므로, 비록 노사老師나 숙덕宿德이라 할지라도 모두 따라갈 수 없다고 자인하였다. 이처럼 성명聲名이 널리 전해지면서 당시에 법문法門의 종장宗匠이라고 일컬어졌다. 정미년(1067, 문종 21) 7월 을유일에 교서敎書를 내려 우세승통祐世僧統으로 높였다.
국사는 일찍부터 송宋나라에 가서 구도求道할 뜻을 지니고 있었다. 진수晉水의 정원淨源 법사가 혜행慧行으로 학자들의 스승이 되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상인商人의 선박 편에 글을 부쳐 예禮를 닦았는데, 원공源公도 국사가 비범한 인물임을 알고는 곧바로 회답을 하며 초청을 하니, 이로부터 송나라에 건너가고 싶은 마음이 더욱 절실해졌다.
선왕宣王(宣宗)이 재위한 지 2년째 되는 해인 송나라 원풍元豊(神宗의 연호) 7년(1084) 정월에 국사가 내전內殿에 들어가 간곡히 청하니,

004_0591_a_01L讀書屬辭精敏若宿習兄弟皆有賢
004_0591_a_02L而師傑然出鋒頴上一日謂諸子曰
004_0591_a_03L孰能爲僧作福田利益乎師起曰臣有
004_0591_a_04L出世志惟上所使上曰善母后以前
004_0591_a_05L夢貴徵竊惜之而業已受君命叵如之
004_0591_a_06L乙巳五月十四日徵景德國師於內
004_0591_a_07L殿剃䰂上再拜之許隨師出居靈通寺
004_0591_a_08L冬十月就佛日寺戒壇受具時春秋十
004_0591_a_09L一歲而學問不息已能成人甞夢人傳
004_0591_a_10L澄觀法師書自是慧解日進至年甫壯
004_0591_a_11L益自勤苦早夜矻矻務愽覽强卷一
004_0591_a_12L二第二張
而無常師道之所存
004_0591_a_13L從而學之自賢首敎觀及頓漸大小乘
004_0591_a_14L經律論章疏無不探索又餘力外學
004_0591_a_15L見聞淵愽自仲尼老聃之書子史集錄
004_0591_a_16L百家之說亦甞玩其菁華而尋其根柢
004_0591_a_17L故議論縱橫馳騁袞袞無津涯雖老
004_0591_a_18L師宿德皆自以爲不及聲名流聞時謂
004_0591_a_19L法門有宋▣ [87] 丁未七月乙酉敎書裒 [88]
004_0591_a_20L爲祐世僧統師甞有志如宋問道
004_0591_a_21L晋水淨源法師以慧行爲學者師託舶
004_0591_a_22L致書以修禮源公知師非常人
004_0591_a_23L復書相招由是欲往滋甚至宣王在位
004_0591_a_24L第二年是宋元豊七年春正月入內誠

004_0591_b_01L상이 신하들을 모아 의논하였는데 모두 안 된다고 하였다. 이에 국사가 상 앞에서 신하들을 상대로 말하였다.
“옛날 성현聖賢들은 자기 몸을 잊고 도를 사모하였으니, 예컨대 현장玄奘은 서역西域에 갔었고, 의상義湘은 중국에 들어갔었다. 만약 편안함에 안주만 하고 스승을 찾기를 힘쓰지 않는다면, 이는 출가出家한 본래의 뜻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그 말이 간절하고 또 눈물까지 흘렸으므로 상이 감격하여 허락할 뜻을 가졌으나, 신하들의 의논이 워낙 확고해서 결정을 미룬 채 파하였다.
이듬해 4월 경오일 밤에 국사는 왕과 태후에게 올리는 글을 남기고는 제자 수개壽介를 데리고 미복微服 차림으로 정주貞州3)에 가서 상객商客의 배에 몸을 싣고 중국으로 길을 떠났다. 상이 이 소식을 듣고는 깜짝 놀라 관료官僚와 제자 낙진樂眞·혜선慧宣·도린道隣 등을 차견差遣하여 따라가게 하였다.
5월 갑오일에 송나라 판교진板橋鎭에 이르니, 지밀주知密州 조봉랑朝奉郞 범악范鍔이 영접하며 위로하였다. 곧장 표문表文을 붙여 중국에 온 뜻을 갖추 설명하니, 황제가 주객원외랑主客員外郞 소주정蘇注廷에게 명하여 국사를 안내하게 하였다.
7월에 경사京師 계성사啓聖寺에 들어갔다. 그리고 중서사인中書舍人 범백록范百祿의 집에 숙소를 정하였다. 며칠 뒤에 수공전垂拱殿에서 황제를 알현하니, 객례客禮로 대우하며 우악優渥한 은총을 내렸다. 다음 날에 표문表文을 올려 스승에게 수업 받기를 청하니, 황제가 선뜻 들어주었으므로 마침내 화엄종의 유성有誠 법사를 만날 수 있었다.
이에 앞서 황제가 승통僧統이 온다는 말을 듣고는 양가兩街4)에 명하여 고재高才와 석학碩學 중에서 사범師範이 될 만한 자를 미리 뽑아 두도록 하였는데, 양가에서 유성 법사를 추천했었다. 그리하여 이때에 와서 승통이 옷깃을 여미고 발밑에 서서 제자의 예를 행하려고 하자, 유성 법사가 세 번 사양한 뒤에 받아들였다. 국사가 앞으로 나아가 아뢰었다.
“저는 바다 밖의 보잘것없는 사람입니다. 마음을 비우고 도를 구한 지 오래되었습니다만, 아직도 터득한 것이 없습니다. 바라건대 스승께서는 자비를 베풀어 미혹迷惑의 구름을 거두어 주소서.”
유성 법사가 답하였다.
“고불古佛이 심장을 꺼내 공양하며 법을 구하기도 하였고, 일문一文 일구一句를 얻기 위해 전륜轉輪의 왕위王位를 버리기도 하였는데, 지금 스님이 능히 행하고 있으니, 정말 어려운 일이라고 하겠소이다. 바라건대 일승一乘에 함께 뜻을 두고 만행萬行을 함께 닦아 화장세계華藏世界의 바다에서 함께 노닐었으면 하오.

004_0591_b_01L上會群臣議皆以爲不可師於上前
004_0591_b_02L與群臣言聖賢忘軀慕道如玄奘往西
004_0591_b_03L義想入中國苟安安而不務求師
004_0591_b_04L非所以出家本意其言懇切繼之以泣
004_0591_b_05L上感激意許之而群臣議確依違而罷
004_0591_b_06L至明年四月庚卷一二第三張夜留
004_0591_b_07L書上王及大后率弟子壽分 [89] 微服至貞
004_0591_b_08L㝢啇客舩發上聞之驚差遣官僚
004_0591_b_09L與弟子樂眞慧宣道隣從之五月甲午
004_0591_b_10L至大宋板橋鎭知密州朝奉郞范鍔迎
004_0591_b_11L卽附表具陳所以來朝之意皇帝命
004_0591_b_12L主客員外郞蘇注廷導之秋七月入京
004_0591_b_13L師啓聖寺以中書舍人范百祿爲主
004_0591_b_14L日見垂拱殿待以客禮寵數渥縟
004_0591_b_15L日表乞承師受業優詔從之遂見華嚴
004_0591_b_16L有誠法師先此皇帝聞僧統之來
004_0591_b_17L兩街預選高才碩學堪爲師範者兩街
004_0591_b_18L推薦誠師至是僧統摳衣下風欲行弟
004_0591_b_19L子之禮誠師三辭而後受之乃進曰
004_0591_b_20L甲海外之鄙人也虛襟求道之日久
004_0591_b_21L有所得願師慈憫開我迷雲古佛
004_0591_b_22L刳心而爲法至有求一文一句而捨轉
004_0591_b_23L輪王位 [90] 上人能行之可謂難矣
004_0591_b_24L同志一乘同修萬行以游花藏海者

004_0591_c_01L이것이 나의 소원이외다.”
이에 승통이 질의質疑를 하며 …(운운)… 하자 유성 법사가 감탄하며 일렀다.
“말의 뜻이 완곡하고 절실하며 중관重關의 뜻을 잘 파악하고 있으니, 법왕法王의 진자眞子가 아니면 바로 의상義湘의 후신後身일 것이오.”
국사는 다시 조정의 유지有旨를 받고 주객원외랑主客員外郞 양걸楊傑과 함께 경사京師를 나온 뒤에 변수汴水를 따라 회사淮泗 지역까지 와서는 점차 진출하여 여항餘杭(杭州)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대중상부사大中祥符寺에 나아가 원공源公(淨源)을 배알拜謁하면서 유성 법사를 만났을 때의 예禮처럼 하였는데, 원공은 점잖게 앉아 있었다. 승통이 앞에 나아가 아뢰었다.
“저는 도의道誼를 우러러 사모하며 하루를 1년처럼 여기다가 이제 어렵고 험한 길을 두려워하지 않고 백 사舍(3천 리)를 달려와 뵙게 되었으니, 바라건대 금구金口 옥음玉音을 베푸시어 깨달음을 얻게 해 주소서.”
원공이 답하였다.
“옛날 혜사慧思가 지의智顗를 한 번 보고는 영산靈山의 옛일을 바로 알았는데,5) 지금 승통이 여기에 온 것 역시 숙연宿緣이 아닌 줄 어찌 알겠소이까. 무릎 꿇는 예는 행할 것이 없고, 내가 들은 대로 강講을 해 드리겠소이다.”
이에 절실하게 질문하고 도道로써 대답하는 것이 마치 겨자씨를 던져서 바늘을 꿰는 것처럼 이루어졌으니, 물어보고 응답하는 것이 그 용용舂容을 다하였다.6)
원공源公이 지주知州인 포종맹浦宗孟의 요청에 따라 남산南山의 혜인원慧因院에 들어가서 주역周譯의 경經7)을 개강할 적에 승통이 금전을 희사하여 재공齋供을 하며 학도를 매우 많이 모이게 하였다. 원공이 전에 거하던 세 곳에 현수賢首의 교장敎藏과 조사祖師의 상像을 설치하였으므로 이곳에 와서도 마련하려고 하였으나 행하지 못하였다. 양공楊公이 그 뜻을 알고는 지주知州 및 여러 관료와 함께 힘껏 주선하였는데, 승통도 은銀을 희사하고 교장敎藏 7천5백여 권을 안치安置하였다. 그리고 귀국해서도 금으로 쓴 『대경大經』(『화엄경』) 3본을 보내어 성수聖壽를 축원하였다. 혜인원은 본래 선원禪院이었으나 강원講院으로 고치게 하고 특별히 조세租稅를 면제하였는데, 이는 조정에서 승통을 배려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때 마침 국왕이 표문表文을 올려 국사의 귀국을 간청하자, 마침내 조서詔書를 내려 급히 경사京師로 돌아오게 하는 한편, 원공源公에게도 함께 배를 타게 하고 강학講學을 멈추지 않게 하였다. 원우元祐 원년(1086, 선종 3) 후後 2월 13일에 경사에 들어와서 재차 황제를 알현하고 5일 동안 머물다가

004_0591_c_01L卷一二第四張吾之願也於是僧統請
004_0591_c_02L問云云歎口 [91] 辭旨婉切善啓重開 [92]
004_0591_c_03L法王之眞子卽義想之後身復承朝
004_0591_c_04L與主客員外郞楊傑出京師㳂汴達
004_0591_c_05L淮泗侵尋以至餘杭詣大中祥符寺
004_0591_c_06L謁源公如見誠公之禮源公儼然而坐
004_0591_c_07L僧統進曰某甲仰慕道誼以日爲歲
004_0591_c_08L憚險艱百舍來謁願開金口玉音
004_0591_c_09L卒覺悟源公曰昔慧思一見智顗
004_0591_c_10L知靈山之舊今僧統之來焉知非夙緣
004_0591_c_11L不須膝行爲禮請講以所聞於是
004_0591_c_12L誠投道應如芥就鍼有問有答盡其
004_0591_c_13L舂容源公因知州蒲公宗孟之請入南
004_0591_c_14L山慧因院開講周譯經僧統施錢營齋
004_0591_c_15L以延學徒甚衆源公於前所居三處
004_0591_c_16L各置賢首敎藏并祖師像至此又欲辧
004_0591_c_17L焉而未能楊公知其意與知州及諸僚
004_0591_c_18L力營之僧統亦捨銀置敎藏七千五百
004_0591_c_19L餘卷及還國又以金書大經三本
004_0591_c_20L卷一二第五張以祝聖壽慧因本
004_0591_c_21L禪院改爲講院特免租稅朝廷爲僧統
004_0591_c_22L故也會國王上表乞令歸國遂詔趣
004_0591_c_23L赴京請源公同舟講學不輟以元祐
004_0591_c_24L元年後二月十三日入京再見淹五

004_0592_a_01L조정을 하직하였다.
수주秀州 진여사眞如寺에 이르러 능엄소주楞嚴疏主8)의 탑정塔亭이 퇴락한 것을 보고는 개연히 탄식하며 사승寺僧에게 금金을 주어 수선하게 하였다. 이에 대해서 양공楊公은 “선공璿公 오늘 비로소 지음知音을 만났다.”라고 하였고, 오흥吳興의 장형章衡은 이 일을 기록하며 “승통은 독실하고 중후한 호학好學 군자君子라고 이를 만하다.”라고 하였다.
4월에 다시 혜인원慧因院에 들어가니, 원공源公이 국사에게 도를 전하고는 정좌正坐하여 분향焚香하며 일렀다.
“바라건대 승통은 돌아가서 불사佛事를 널리 짓도록 하시오. 그리하여 하나의 법등法燈을 전함으로써 백천百千의 법등이 서로 이어져서 무궁하게 전해지도록 하시오.”
그리고 마침내 경서經書와 향로香爐와 불자拂子를 주어 신표信標를 삼게 하였으니, 승통이 원공을 자뢰資賴하여 도가 발전되었을 뿐 아니라, 원공의 명성이 더욱 높아진 것 역시 승통이 드날려 주었기 때문이다.
원공을 하직하고 천태산天台山에 이르러 정광불롱定光佛隴에 올라가서 지자智者 대사의 친필親筆 원문願文을 보고는, 탑전塔前에 예배하며 동토東土에 천태종天台宗을 전하겠다고 서원誓願하였다. 이 일을 양공楊公이 기록하였고, 사문沙門 중립中立이 비석을 세웠다.
처음에 밀주密州에서 경사京師에 이르고 다시 오월吳越에 이르기까지 왕래한 기간이 모두 14개월이었다. 그동안 명산名山 승경勝境과 여러 성현들의 유적遺迹을 만날 때마다 첨앙瞻仰하며 예배禮拜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고승高僧 50여 인을 만나서도 모두 법요法要를 자문咨問하였다. 원공源公과 같은 경우는 평소에 소망한 바로서 …(결락)….
혜림慧林과 선연善淵이었고, 계율戒律은 택기擇其와 원조元照이었으며, 범학梵學은 천길상天吉祥과 소덕紹德이었다. 이들은 모두 탁월하여 숭상할 만하였기 때문에 국사가 그들의 장점을 취한 것이었다. 귀국하려 할 즈음에 선종禪宗과 강학講學의 종사宗師들이 각각 문도門徒를 거느리고 …(결락)….
배워서 모두 구비하였으니, 이분은 참으로 법을 중히 여기는 대보살大菩薩이었다. 그렇긴 하지만 국사가 처음으로 학습을 한 것이 아니요, 이미 터득한 것을 여러 고승들과 비교해 보려고 온 것일 뿐이었다. 그러므로 국사에게 증정한 시 중에 “그 누가 우리 우세 스님처럼9) …(결락)….
“삼한의 왕자가 법을 구하러 중국에 왔나니, 양자는 착치와 미천처럼 만만치 않은 맞수라오.”10)라고 하였으니, 국사가 당시의 현인賢人들에게 추존推尊을 받은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 5월 20일에 조하朝賀하고 돌아가는 본국本國의 사신을 따라 배를 타고 29일에 …(결락)….


004_0592_a_01L日朝辭至秀州眞如寺見楞嚴疏主塔
004_0592_a_02L亭傾圮慨然歎之以金屬寺僧修葺
004_0592_a_03L楊公曰璿公今日始遇知音吳興章衡
004_0592_a_04L記其事云僧統可謂䔍厚好學君子矣
004_0592_a_05L夏四月復入慧因院源公傳道訖
004_0592_a_06L坐焚香云願僧統歸廣作佛事傳一燈
004_0592_a_07L使百千燈相續而無窮遂授經書爐拂
004_0592_a_08L以爲信非特僧統資源公而道益進
004_0592_a_09L源公名所以益高以僧統揚之也禮辭
004_0592_a_10L源公行至天台登定光佛隴觀智者
004_0592_a_11L親筆願文禮於塔前誓傳敎于東土
004_0592_a_12L公志之沙門中立立石始自密至京
004_0592_a_13L及吳越往來凡十有四月所至名山勝
004_0592_a_14L諸有聖迹無不瞻禮所遇高卷一
004_0592_a_15L二第六張
1)僧五十餘人亦皆咨問法要
004_0592_a_16L若源公雅所望以爲 [93] 慧林善淵戒律則
004_0592_a_17L擇其元照梵學則天吉祥紹德此皆卓
004_0592_a_18L然可尙故資其所長者已及將歸禪講
004_0592_a_19L宗師各率徒 [94] 學之悉備此眞重法大
004_0592_a_20L菩薩者也然非是始學欲以己所得
004_0592_a_21L與諸師相試故來耳故其所贈詩有孰
004_0592_a_22L若祐世師 [95] 三韓王子西求法鑿齒彌天
004_0592_a_23L兩勍敵其爲時賢推尊類皆然也
004_0592_a_24L五月二十日隨本國朝賀回使放洋

004_0592_b_01L
상과 좌우 신하들이 모두 감동하였다. 황제가 선물한 황금과 비단, 그리고 국왕과 태후太后가 부쳐 보낸 재보財寶가 거만巨萬을 헤아렸으나, 모두 여러 도량道場과 불법을 들려준 여러 법사法師들에게 베풀었을 뿐, 조금도 …(결락)….
국사가 태어나던 해에 이미 터를 닦아 세우고서 많은 세월 동안 국가가 주재主宰할 사람을 의논했으나 적임자를 찾기 어려웠는데, 이때에 와서 국사가 교리를 선양하며 신묘한 뜻을 모두 궁구하여 학자들이 바다처럼 모여들었으니, 이는 일찍이 있지 않았던 일이었다. …(결락)….
태만하여 강론講論을 하지 않았으므로 공사公私 간에 경적經籍이 거의 모두 흩어져 없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마침내 거금巨金을 들여 중국과 거란契丹과 일본日本에서 책을 구입하였다. 또 신미년(1091, 선종 8) 봄에는 남쪽 지방에 내려가 수색해서 얻은 책이 무려 4천 권이나 되었는데, 먼지가 끼고 좀이 슬어 책장이 떨어진 것들을 모두 수습하여 상자에 넣어 가지고 돌아왔다. 그리고 위에 청하여 흥왕사興王寺에 교장사敎藏司를 설치한 다음 명류名流를 불러 잘못된 곳을 교정하여 간행하게 한 결과, 몇 년이 지나지 않아서 문적文籍이 크게 갖추어졌으므로 학자들이 기뻐하며 의지하게 되었다.
갑술년(1094, 선종 11) 2월 초에 홍원사洪圓寺에 들어가서 예전처럼 강학講學을 하였다. 이에 앞서 국사가 흥왕사興王寺에 거하던 초기에 순종順宗이 병으로 누워 있으면서 국사를 불러 일렀다.
“과인이 대가람을 지어 그 액호를 홍원洪圓으로 하려고 소원했는데, 지금 병이 위독해져서 뜻을 이루지 못할 듯싶다. 만약 사군嗣君(宣宗)이 이 일을 잊지 않는다면, 스님도 마음을 같이해서 나의 소원이 이루어지도록 하라.”
국사가 눈물을 흘리며 답하였다.
“신이 감히 심력心力을 다하여 죽어도 변하지 않겠습니다.”
이때 절이 낙성落成됨에 이르러 국사를 주지住持로 임명한 것이었다.
5월에 해인사海印寺에 물러나 거하면서 산수山水 사이에 자적自適하며 호연浩然히 여생을 마칠 뜻을 지니고는, 헌종獻宗이 두 번이나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 을해년(1095) 10월 8일에 숙종肅宗이 즉위하고 나서 여러 차례 근신近臣 편에 글을 보내 맞아오게 하였으나 그때마다 고사固辭하였다. 이에 숙종이 또 하교下敎하였다.
“불곡不穀이 스님을 생각하는 마음이 정말 간절하기만 하다. 고산경행高山景行11)이라 자나깨나 더 생각이 날 뿐만이 아니요, 척령재원鶺鴒在原이라 비타匪他의 의리가 중해서 그런 것이다.12)

004_0592_b_01L十九日 [96] 上及左右無不感動皇帝所
004_0592_b_02L贈金繒國王太后寄送財寶以巨萬計
004_0592_b_03L擧施諸道場及所聞法諸師無少 [97] 師誕
004_0592_b_04L年肇基旣成多歷年國家每議其主而
004_0592_b_05L難其人至是宣演敎理盡妙窮神學者
004_0592_b_06L卷一二第七張得未曾有2) [127]
004_0592_b_07L怠不講故官幐私褚亡散幾盡遂重購
004_0592_b_08L求書於中國以及契丹日本又於辛未 [128]
004_0592_b_09L卷一二第八張南遊搜索所得書
004_0592_b_10L慮四千卷皆塵昏▣斷編簡壞舛
004_0592_b_11L収並拾包匭以歸請置敎藏司於興王
004_0592_b_12L召名流刊正謬缺使上之鈆槧
004_0592_b_13L幾稔閒文藉大備學者忻賴甲戌
004_0592_b_14L春二月初入洪圓寺其敎學如故
004_0592_b_15L興王初順王寢痾召師言寡人甞願
004_0592_b_16L作大伽藍額號洪圓今病䔍殆不自濟
004_0592_b_17L若嗣君不相忘師其同心以終吾願
004_0592_b_18L師涕泣曰臣敢盡心力死生不易
004_0592_b_19L於旣成乃命住持焉夏五月退居海
004_0592_b_20L印寺溪山自適浩然有終焉之志獻王
004_0592_b_21L再徵不能致乙亥冬十月八日肅祖卽
004_0592_b_22L數遣近臣齎書迎之固辭又敎曰
004_0592_b_23L不糓之望師可謂切矣非止高山景行
004_0592_b_24L窹寐増想而鶺鴒在原義重匪他雖不

004_0592_c_01L내가 직접 가지는 못했지만, 누차 간곡히 청했는데도 옷깃을 떨치고 멀리 숨은 채 나를 전혀 돌아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옛날의 달자達者는 백이伯夷도 되지 않고 유하혜柳下惠도 되지 않는 가운데13) 때에 맞게 진퇴進退하곤 하였다. 바라건대 한 번 나와서 나의 뜻에 부응하도록 하라.”
국사가 번연翻然히 마음을 바꾸어 말하였다.
“예禮를 갖추어 말씀을 후하게 하니 의리상 거절할 수 없다.”
도성都城에 가서 다시 흥왕사興王寺에 거하며 예전처럼 강학講學하였다.
정축년(1097, 숙종 2) 5월에 국청사國淸寺의 주지住持에 취임하여 처음으로 천태종天台宗의 교리를 강의하였다. 이 천태종은 예전에 이미 동방에 전해졌으나 중간에 폐해졌는데, 국사가 전당錢塘에서 천태의 도를 묻고 불롱佛隴에서 맹서를 하며 떨쳐 일으킬 생각을 한 때로부터 하루도 마음속에서 잊은 적이 없었다. 인예태후仁睿太后가 이 말을 듣고 기뻐하여 국청사를 짓기 시작하였는데, 숙종肅宗이 그 일을 이어받아 마침내 완공하게 된 것이다.
국사가 이때에 문文에 의거하여 이理를 드러내고 이理를 궁구하여 심心을 다하였다. 그리하여 지관止觀이 원명圓明하고 어묵語黙이 자재自在한 가운데 문자만을 전적으로 믿고 고수하는 병통을 제거하고, 단공斷空을 취하여 집착하는 폐습을 타파하였다. 이에 당시의 학자로서 거룩한 경지를 우러러보며 옛것을 버리고 스스로 찾아오는 자들이 거의 1천 인에 이를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세상에서 천태종을 논하는 자들이 국사를 백세토록 바뀌지 않을 종장宗匠이라고 일컫고 있는데, 이 말을 어찌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무인년(1098, 숙종 3) 4월 경인일에 상이 다섯째 아들에게 명하여 국사를 시봉하게 하였다. 이에 국사가 손수 그의 머리를 깎아 주었으니, 지금의 도승통都僧統이 바로 그이다.
신사년(1101, 숙종 5) 2월에 홍원사洪圓寺 구조당九祖堂이 이루어지자 상이 국사를 청하여 훈수熏修(淨心齋戒)하고 낙성落成하게 하였다. 전세前世에 조보祖譜가 일정하지 않았는데, 지금 와서 마명馬鳴·용수龍樹·천친天親·불타佛陀·광통光統·제심帝心·운화雲華·현수賢首·청량淸凉을 화엄華嚴의 아홉 조사祖師로 확정하였다.
8월에 국사가 병에 걸렸다. 그러나 궤안几案에 기대어 앉아 마음을 관觀하기도 하고, 불경을 수지독송受持讀誦하기도 하면서 피곤하다고 하여 그만둔 적이 있지 않았다.

004_0592_c_01L能往屢以誠請拂衣高蹈曾不我顧
004_0592_c_02L古之達者非夷非惠與時卷舒冀或
004_0592_c_03L一來副我意焉師翻然曰備禮厚辭
004_0592_c_04L卷一二第九張義不可拒乃赴都
004_0592_c_05L居興王寺敎學如初丁丑夏五月
004_0592_c_06L持國淸寺初講天台敎是敎舊已東漸
004_0592_c_07L而中廢師自問道於錢塘立盟於佛隴
004_0592_c_08L思有以振起之未曾一日忘於心仁睿
004_0592_c_09L大后聞而悦之經始此寺肅祖繼之
004_0592_c_10L以畢厥功師於此之時依文而顯理
004_0592_c_11L究理而盡心止觀圓明語默自在
004_0592_c_12L盡信書之守破惡取空之執一時學者
004_0592_c_13L瞻望聖涯 [98] 舊而自來幾一千人盛矣
004_0592_c_14L世之議台宗者謂師百世不遷之宗
004_0592_c_15L渠不信哉戊寅夏四月庚寅上命第五
004_0592_c_16L子侍之師手落其髮今都僧統是也
004_0592_c_17L辛巳春二月上以洪圓寺九祖堂成
004_0592_c_18L師熏修以落之前世爲祖譜不一今以
004_0592_c_19L馬鳴龍樹天親佛陁光統帝心雲華賢首
004_0592_c_20L淸凉爲九祖師所定也秋八月
004_0592_c_21L隱几而坐或觀心或持經不以疲
004_0592_c_22L「僧五十…辛未」二百五十五字甲本冠註曰
004_0592_c_23L丁亥十月依金石總覽補缺方山學人柳壽焚香
004_0592_c_24L敬書
「及」字下略一張空白有 {編}

004_0593_a_01L문인門人이 불사佛事를 행하기를 청하니, 국사가 일렀다.
“부처님에게 기도드린 지 오래이다.”
상이 중사中使를 보내 위문하고 명의名醫를 보내 약을 처방하게 하였으며, 보의寶衣와 ▣▣를 제사諸寺에 나눠 주어 복을 기원하게 하였다. 병이 위독해지자 상이 친히 와서 위문하며 일렀다.
“불가휘不可諱의 일14)이 있을지도 모르니, 남기고 싶은 말이 있으면 듣고자 한다.”
국사가 답하였다.
“정도正道를 중흥中興하기를 소원하였으나, 병이 그 뜻을 빼앗아 갑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지성至誠으로 외호外護하여 여래如來의 유교遺敎에 부응해 주십시오. 그러면 죽어도 썩지 않게 될 것입니다.”
10월 5일 임진일에 오른쪽 옆구리를 땅에 대고 열반하니, 향년享年이 47세요, 승랍僧臘이 36세였다. 이에 앞서 보당寶幢이 부러져서 땅에 쓰러지는 꿈을 꾸기도 하였다. 상이 서거 소식을 듣고는 비통해하며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부의賻儀하게 하는 한편, 국사國師에 책봉冊封을 하고, 대각大覺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16일 계묘에 다비茶毗를 행하고 유골遺骨을 거두었으며, 11월 4일 신유에 오관산五冠山 영통사靈通寺의 진방震方(동방)에 안치하였으니, 이는 본교本敎의 의례儀禮에 따른 것이었다.
불법佛法은 양梁나라 대통大通 원년(527, 법흥왕 14) 정미년에 처음으로 신라에 들어왔다. 그 뒤 1백여 년이 지나서 의상義湘과 원효元曉가 출현하였는데, 이 두 스님은 성종성聖種性(십지 보살)으로서 대종사大宗師가 된 분이었다. 그들이 말세末世에 빛을 비추고 은택의 물결을 가한 덕분에 모두 어둠의 세계에서 벗어나 고명高明한 경지로 나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성인이 떠난 지 오래되었으므로, 법이 따라서 해이해지게 되었다. 세상에서 명사名士라고 하는 자들을 보면, 마음은 명성만 추구하고 지혜는 이끗에 끌리기만 하였다. 그리하여 학문은 갈수록 천박해져서 전적典籍을 섭렵涉獵하면서도 문구文句를 찢어발겨 치아齒牙 사이에 끼워 놓고 시끄럽게 재잘거리며 혼자서 좋아하였는데, 후학들도 그 오류誤謬를 답습踏襲하여 그대로 행할 뿐 반성할 줄을 알지 못하였다.
국사가 이에 몽매蒙昧한 습속과 침체沈滯된 도덕을 걱정한 나머지 격앙하고 분발하여 정도正道를 밝히고 폐단을 구제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그리하여 곡학曲學을 축출하고 묘온妙蘊을 제시하였으며, 은폐된 진리를 드러내 보이고 왜곡된 마음을 붙들어 일으키면서 뇌정雷霆처럼 진동시키고 우로雨露처럼

004_0593_a_01L1) [129] 自止門人請修佛事事佛久
004_0593_a_02L一二第一○張
上遣中使問體名醫
004_0593_a_03L處方俵寶衣名昌 [99] 於諸寺爲之請福
004_0593_a_04L親來慰問曰2) [130] 不可諱願聞其
004_0593_a_05L所欲言者所願重興正道而病奪其
004_0593_a_06L伏望至誠外護以副如來3)▣▣ [131]
004_0593_a_07L死且不朽冬十月五日壬辰右脇而化
004_0593_a_08L4) [132] 年四十七僧臘三十六是前或夢
004_0593_a_09L寶幢5)▣▣ [133] 于地上聞之慟命有司賵
004_0593_a_10L有加册爲國師謚曰大覺十六日癸
004_0593_a_11L茶毗6)▣▣ [134] 十一月四日辛酉
004_0593_a_12L安措於五冠山靈通寺之震方從本敎
004_0593_a_13L佛法以梁大通元年丁未肇入新羅
004_0593_a_14L後一百餘年義想元曉作是二師者
004_0593_a_15L以聖種性爲大宗師末光所燭餘波
004_0593_a_16L所加皆得以出其黮闇而造其高明
004_0593_a_17L去聖云遠法隨而弛世所謂名士者
004_0593_a_18L心蕩乎名智昏乎利7)▣▣ [135] [100] 浮淺涉獵
004_0593_a_19L典籍磔裂文句置之齒牙8) [136] ▣▣ [101]
004_0593_a_20L自好後來者承誤襲謬往而不返
004_0593_a_21L卷一二第一一張是疾習俗之蔽蒙也
004_0593_a_22L道德之欝滯也激昻9) [137] 以明道救
004_0593_a_23L蔽爲己任黜其曲學示之妙蘊剖發
004_0593_a_24L幽覆扶起窳情雷霆以震動之雨露

004_0593_b_01L적셔 주었다.
그 사이에 비록 심복心服하며 기꺼이 따르는 자들도 있었으나, 사견邪見을 지닌 자들이 정견正見을 질시疾視하며 훼방毁謗하는 일이 물 끓듯 일어났다. 그러나 국사가 도道로 자처自處하며 동요하지 않고 태연히 대하자 끝내는 안정되면서 점차 바른 길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지난날 편벽된 견해로 망령되이 집착하던 자들이 얼굴을 고치고 생각을 바꿔서 근본의 학문에 힘쓰게 되었다.
국사는 또 일찍이 말하였다.
“선가禪家에서 전제筌蹄15)를 빌리지 않고 마음으로 마음을 전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상상근기上上根機의 지혜를 소유한 자나 가능한 일이다. 간혹 하근기下根機의 사람이 구이지학口耳之學16)으로 하나의 도리를 터득하고서 스스로 족하다고 여기는가 하면, 삼장三藏의 십이분교十二分敎17)를 가리켜 추구篘狗18)요 조박糟粕19)이라고 하면서 또 볼 것이 뭐가 있느냐며 비웃고 있으니, 이 또한 잘못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능가경楞伽經』과 『기신론起信論』 등의 경론經論을 배우도록 권하기도 하였다.
국사는 또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부모를 잘 봉양하며 나태하지 않았고, 돌아가심에 미쳐서는 사모하는 정을 극진히 하여 천도薦度하는 공덕을 지었으며, 자신의 팔뚝을 태워서 기도드리기도 하였다. 뒤에 기일忌日을 당해서도 이와 똑같이 하였다.
국사는 또 감식안鑑識眼이 밝을 뿐더러 선을 좋아하여 게을리하지 않았다.20) 매양 진신搢紳 선생들을 한가로이 접견하며 응대할 적에 그 언론言論이 성인聖人의 도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며, 또 그 문사文辭가 평담平澹하면서도 깊은 맛이 있었으므로 사대부士大夫들이 그 풍도를 받들어 귀의하면서 점차 조탁彫琢하는 것을 싫어하고 아정雅正한 쪽으로 나아가게 되었다.또 문학文學을 자신의 업業으로 삼지 않는 속리俗吏나 호신虎臣(武臣)들, 그리고 다른 종교나 학술에 종사하여 원수처럼 반대하는 자들도, 국사의 모습을 한 번 보고 그 말을 한 번 듣기만 하면 송연悚然히 자복自服하면서 늦게 만난 것을 한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뒤에 예종睿宗이 국사의 화상畫像을 보고 배회하면서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한 나머지 국사를 찬미하는 시 2백 자字를 친히 짓기도 하였다.
국사가 송나라에 갔을 때 사상泗上에서 승가탑僧伽塔21)에 예배할 적에 등화燈火와 같은 광명이 그 위에 나타났고, 천축사天竺寺에서 관음觀音을 예배할 적에는 흰빛이 찬란하게 빛났으며, 또 해인사海印寺에서 강경講經할 적에는 법당이 갑자기 진동하여 놀라서 일어난 적도 있었다. 예종睿宗이 동궁東宮 시절에 병이 들어 국사에게 나아가자, 국사가 그를 위해 『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을 독송讀誦하였는데, 밤 10시쯤에

004_0593_b_01L以溥濩之*閒雖有心服而悅隨者
004_0593_b_02L群邪疾正謗毁沸騰以道自處恬不
004_0593_b_03L動心終而翕然 [102] 變於正異時僻見
004_0593_b_04L妄執者革面遷慮務爲10) [138] 本之學
004_0593_b_05L甞言曰禪家所謂不藉筌蹄以心傳心
004_0593_b_06L則上上根智者也脫或下士以口耳之
004_0593_b_07L認得一法自以爲足指三藏十二
004_0593_b_08L分敎蒭狗也糟粕也又烏足觀者
004_0593_b_09L亦誤乎乃勸學11) [139] 伽起信等經論
004_0593_b_10L天性至孝善父母不怠及其亡則窮思
004_0593_b_11L畢情以營功德至自燒臂後値諱日
004_0593_b_12L亦如之又鑒識洞然樂善不倦每與
004_0593_b_13L搢紳先生燕見應對其言論不出聖
004_0593_b_14L人之道又其文辭平澹而有味故士
004_0593_b_15L大夫承風而披靡稍厭彫琢而趣雅正
004_0593_b_16L至於俗吏虎臣不以卷一二第一二
004_0593_b_17L
文學自業及他道異術相背如仇
004_0593_b_18L讎者一見其貌聞其言則莫不竦然自
004_0593_b_19L恨相値之晚後睿考覩畫像徘徊
004_0593_b_20L感慕親製讃詞二百字師適宋時
004_0593_b_21L上禮僧伽塔上有光明如燈火天竺
004_0593_b_22L寺禮觀音放素光赫赫然又在海印寺
004_0593_b_23L講經堂宇忽動有驚起者睿考在東宮
004_0593_b_24L被疾詣師爲讀金剛般若經至乙夜光

004_0593_c_01L입에서 빛이 나와 문을 환히 비추었다. 고승전高僧傳에서 이야기하는 신이감통神異感通이라는 것이 어쩌면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국사는 복福을 일으키는 일도 잊은 적이 없었다. 혹자가 고하였다.
“영신永新의 앞길은 1백 고을의 출입문 역할을 하는 곳으로, 옛날에는 관원館院이 있었는데 지금은 무너져 없어졌다.”
국사가 즉시 문인門人에게 지시하여 새로 짓도록 하고는, 관館의 이름을 지남指南이라 하고 원院의 이름을 겸제兼濟라 하였는데, 예종睿宗 때에 와서 이곳에 토전土田을 하사하였다.
처음에 국사가 어렸을 적에 태후太后가 일렀다.
“나는 흥왕사興王寺 안에 하나의 별원別院을 개설하여 네가 뒷날 도道를 행하는 곳으로 삼게 하고 싶다.”
그러고는 그곳에 와서 땅을 고르게 하였는데, 국사가 뒤에 별원을 세우고는 그 이름을 천복薦福이라고 하였다. 그 밖에 불상佛像과 경문經文을 조성한 것 또한 모두 기록할 수가 없다.
국사가 이미 일국一國의 존친尊親이었으므로 큰 정사政事가 있을 때면 반드시 친밀하게 자문諮問을 구하여 결정하곤 하였으므로 상과 함께 국사國事를 논한 것이 매우 많았으며, 인민人民에게 음덕陰德을 끼친 것 또한 지대하였는데, 세상에서는 이를 다 알지 못하였다.
국사는 후세에 불후不朽히 전해질 글을 남기고자 하였으나, 그 뜻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였다. 일찍이 군언群言이 한만汗漫하다고 하여 그 정요精要를 뽑고 종류별로 나누어서 그 이름을 『원종문류圓宗文類』라고 하였다. 또 교화에 도움이 될 만한 고금의 문장을 모아 『석원사림釋苑詞林』을 편찬하려고 하였으나, 미처 참정參定하지 못한 채 열반한 뒤에야 이루어졌으므로 취사선택한 것이 마땅함을 잃었다.
문인門人이 국사가 지은 시문詩文 중에 잔편殘篇과 단고斷藁를 모아 보니, 남아 있는 것이 얼마 되지 않았다. 그래도 이것이나마 편집해서 20권으로 만들었는데, 이는 모두 가볍게 낙서한 것으로 장차 후세에 전하려 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국사가 생전에 자기의 글을 써서 새긴 것이 있으면 그 목판木板을 거두어 불살랐던 것이었다.
당시에 북요北遼의 천우제天佑帝가 국사의 명성을 듣고는

004_0593_c_01L自口出燭於戶牗傳所謂神異感通者
004_0593_c_02L豈是歟又不忘興福或告永新前路
004_0593_c_03L是百郡之所出入舊有舘院而壞亡
004_0593_c_04L指授門人作新之名舘曰指南院曰兼
004_0593_c_05L至睿考錫以土田始師之幼大后
004_0593_c_06L謂言吾願於興王內別開一院爲若
004_0593_c_07L異日行道之所伻來卜地至後營構
004_0593_c_08L號之薦福其他所成佛像經文亦不能
004_0593_c_09L盡書師旣爲一國尊親有大政事
004_0593_c_10L款密諮決故所與上論列國家事甚多
004_0593_c_11L而有陰德於人民亦厚世12)▣▣ [140] 卷一二
004_0593_c_12L第一三張
而盡知師欲立言以垂不
004_0593_c_13L而志莫之遂甞以群言汗漫撮其
004_0593_c_14L精要類別部分名曰圓宗文類又欲
004_0593_c_15L會古今文章有補於敎以爲釋苑詞林
004_0593_c_16L而未及叅定至後乃成故去取失當
004_0593_c_17L門人集所著詩文殘篇斷藁存者無幾
004_0593_c_18L紬次爲二十卷此皆卒 [103] 爾落筆非將以
004_0593_c_19L貽後也故於生前有以其文寫而刻之
004_0593_c_20L取其板焚之當時北遼天佑帝
004_0593_c_21L▣疑「憊」{編}▣疑「有」{甲}▣▣疑「遺敎」
004_0593_c_22L{編}
▣疑「享」{甲}▣▣疑「崩摧」{甲}▣▣
004_0593_c_23L▣疑「遺骨以」{編}
▣▣疑「高益」{編}「閒」
004_0593_c_24L通「間」{編}次同
▣疑「奮」{甲}▣疑「根」{甲}
004_0593_c_25L
▣疑「楞」{編}▣▣疑「莫得」{編}

004_0594_a_01L대장大藏과 제종諸宗의 소초疏鈔 6천9백여 권을 보내 주었으며, 그 밖에도 문서文書와 약물藥物과 금백金帛 등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연경燕京의 법사인 운서雲諝와 고창국高昌國의 아사리阿闍梨인 시라부저尸羅嚩底도 모두 국사를 존경하여 책서策書와 법복法服을 보내며 문안하였다. 요遼나라에서 사신이 오면 모두 국사를 뵙기를 청하면서 토산물을 손에 들고 찾아와 절하곤 하였으며, 우리나라 사신이 요나라에 들어가면 반드시 국사의 안부를 묻곤 하였다. 가장 뒤늦게 일본 사람이 우리나라에 문서를 구하러 왔는데, 그 목록目錄 중에 ≺대각국사비지大覺國師碑誌≻가 들어 있었다. 국사의 이름이 사방에 드러나서 외국의 존경을 받은 것이 또한 이와 같았다.
국사가 일찍이 신臣의 선형先兄인 석현담釋玄湛을 불러 함께 노닐면서 매우 즐거워하셨는데, 지기知己로서의 친분이 백아伯牙와 종자기鍾子期 정도일 뿐만이 아니었다. 신이 그 덕분에 국사를 한 번 뵐 수 있었는데, 안색이 청수淸粹한 것이 마치 청천백일靑天白日을 보는 것만 같았다. 그때 외람되게도 함께 앉아 이야기할 기회를 주셔서 낮부터 밤까지 모실 수가 있었는데, 『주역』과 노장老莊의 대의大義 한두 대목을 시험 삼아 물어보시기에 신이 우연히 답변해 올린 적이 있었다. 그 뒤에 몇 번이나 신을 칭찬하면서 “담사湛師의 아우 또한 재사才士이다.”라고 하셨는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국사가 입멸入滅하였다.
아, 장부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쓰임이 되려고 하는 법이다.22) 가령 내가 죽어서 국사를 일으킬 수만 있다면, 머리카락을 땅에 깔아서 발로 밟고 가시게 하더라도 흠모하며 기꺼이 할 것인데, 더구나 문자文字를 가지고 비석碑石 아래에 신의 이름을 걸게 하시니, 어찌 영광이요 행운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학술學術이 고루하고 사어辭語가 거칠어서 그윽한 덕의 숨겨진 빛을 드러내어 후예들에게 보여 줄 수 없으니, 이것이 한스러울 따름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義想西學     의상은 중국에 유학하여
傳佛圓音     부처의 원음을 전하였고
元曉獨見     원효는 홀로 깨달음을 얻어
窮幽極深     깊이 숨겨진 뜻을 궁구하였네.
或出或處     혹은 나아가고 혹은 머물렀으나
脗然同心     입술이 합하듯 마음이 같았나니
香熏霧潤     향기가 풍기고 안개가 퍼지듯
學者林林     배우는 이들이 성황을 이뤘다네.
道與世喪     도가 세상과 함께 쇠퇴한 결과
日薄月渝     날로 엷어지고 달로 변질되어
有狂東走     광처럼 동주하는 일만 벌어질 뿐
無知北遊     지처럼 북유하는 일은 알지 못했네.23)
迷不知復     혼미하여 돌아올 줄 알지 못하고24)
放不知求     달아나도 찾을 줄을 알지 못한 채25)
邪熾正域     사가 치성하여 정이 소멸하였나니

004_0594_a_01L其名送大藏及諸宗疏鈔六千九百餘
004_0594_a_02L其文書藥物金帛至不可勝計
004_0594_a_03L京法師雲諝高昌國阿闍梨尸羅嚩底
004_0594_a_04L亦皆尊嚮以策書法服爲問遼人來
004_0594_a_05L使者皆請見以土物藉手而拜吾使
004_0594_a_06L入遼則必問師之安否最後日本人求
004_0594_a_07L文書於我其目有大覺國師碑誌其名
004_0594_a_08L現四方爲異國所尊又如此師甞召
004_0594_a_09L臣先兄釋玄湛與之遊甚歡相知之分
004_0594_a_10L非啻期牙臣由是得以一謁容色睟
004_0594_a_11L卷一二第一四張若覩靑天白日
004_0594_a_12L賜之坐語自晝窮夜 [104] 問易老莊一
004_0594_a_13L二大義臣偶能言之他日數稱之曰
004_0594_a_14L師弟亦才士也居無何師入滅
004_0594_a_15L爲知己者用假令死而可作雖布髪而
004_0594_a_16L藉足亦所忻慕焉況以文字挂名於
004_0594_a_17L碑石之下豈不論榮幸也哉而學術固
004_0594_a_18L辭語澁吶不能發幽德之潜光
004_0594_a_19L示來裔是所恨焉
其銘曰

004_0594_a_20L
義想西學傳佛圓音元曉獨見

004_0594_a_21L窮幽極深或出或處脗然同心

004_0594_a_22L香熏霧潤學者林林道與世喪

004_0594_a_23L日薄月渝有狂東走無知北遊

004_0594_a_24L迷不知復放不知求邪熾正域 [105]

004_0594_b_01L不塞不流     사를 막지 않으면 정이 흐르지 않으리.26)
否終則傾     비도 결국에는 기울어지나니27)
異人挺生     이인이 우뚝 출현하시어
不留富貴     부귀에 마음을 두지 않고
而趣高明     고명한 경지로 나아갔다네.
誰謂宋遠     누가 송나라가 멀다고 했나.
示道乃行     목도를 통해 건너가시어28)
索焉而獲     찾으면 바로 얻고
爲焉而成     행하면 바로 이루었다네.
理無不盡     이에 극진하지 않음이 없고
事無不融     사에 원융하지 않음이 없이
遊觀自在     무애자재하게 유관하셨나니
浩不可窮     호연한 그 기풍 끝이 없어라.
攝諸刹海     시방세계十方世界를 포섭하여
於一毛中     하나의 터럭 속에 집어넣었고
不動一步     한 걸음을 떼지 않고서도
周行虛空     허공을 두루 다니셨다오.
橫流湯湯     홍수가 제멋대로 넘쳐흐를 때
獨爲之防     홀로 제방 역할을 담당했나니
道其百派     모든 강물의 흐름을 인도하여
東至于洋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게 했네.29)
始則不信     처음에는 믿으려 하지 않으면서
狺狺衆狂     미친 듯 으르렁대던 사람들도
終隨而革     끝내는 마음 바꿔 뒤따르면서
磨淬發光     갈고 닦아 빛을 발했다네.
惟君之哲     우리 임금님 명철하시어
其尊其師     존숭하고 스승으로 모시며
問道之要     도의 요체를 문의도 하고
謀事之疑     의심되는 일을 자문도 했네.
陰毗密賛     국사가 몰래 돕고 보살피면서
幾格淸夷     거의 태평 시대 이루었나니
飄然遠擧     표연히 멀리 떠나시려 하자
則挽留之     옷깃 붙잡고서 매달렸다오.
其道之大     그 도가 얼마나 광대한지
如天如地     하늘과 같고 땅 같았으며
淵源之深     그 연원이 하도 깊어서
固不敢議     감히 논의할 수도 없다오.
其出於時     당시 세상에 내놓은 것은
土苴而已     단지 찌꺼기일 뿐이지만
如膚寸雲     마치 부촌의 구름 같아서
澤彌萬里     은택이 만 리에 가득했다오.30)
厥徒叩閽     그 문도가 대궐 문을 두드려
稽首敷臆     머리 조아리고 심정을 토로하며
冀書之碑     국사의 위대한 덕 드날리도록
以揚宏則     비문 짓기를 간절히 아뢰니
上曰其然     상이 옳다고 윤허하시고
乃命臣軾     신 부식에게 하명하셨네.
臣拜獻辭     신이 절하고 글을 지어 올렸나니
詒厥罔極     아무쪼록 무궁히 전해지기만을.

대각국사외집 제12권大覺國師外集卷第十二


004_0594_b_01L不塞不流否終則傾異人挺生

004_0594_b_02L不留富貴而趣高明誰謂宋遠

004_0594_b_03L1) [141] [106] 道乃行索焉而獲爲焉而成

004_0594_b_04L理無不盡事無不融遊觀自在

004_0594_b_05L卷一二第一五張

004_0594_b_06L浩不可窮攝諸刹海於一毛中

004_0594_b_07L不動一步周行虛空橫流湯湯

004_0594_b_08L獨爲之防道其百派東至于洋

004_0594_b_09L始則不信狺狺衆狂終隨而革

004_0594_b_10L磨淬發光惟君之哲其尊其師

004_0594_b_11L問道之要謀事之疑陰毗密賛

004_0594_b_12L幾格淸夷飄然遠擧則挽留之

004_0594_b_13L其道之大如天如地淵源之深

004_0594_b_14L固不敢議其出於時土苴而已

004_0594_b_15L如膚寸雲澤彌萬里厥徒叩閽

004_0594_b_16L稽首敷臆冀書之碑以揚宏則

004_0594_b_17L上曰其然乃命臣軾臣拜獻辭

004_0594_b_18L詒厥罔極卷一二第一六張

004_0594_b_19L大覺國師外集卷第十二

004_0594_b_20L「示」字形似「木」{編}
  1. 1)영통사 대각 국사 비문 : 대본에는 제목이 없으나 편집자의 주를 참고하여 이렇게 제목을 붙였다.
  2. 2)성誠으로 말미암아 밝아진다 : 자사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중용』에 “성誠으로 말미암아 명明해지는 것을 성性으로 얻은 것이라고 하고, 명明으로 말미암아 성誠해지는 것을 교敎로 이룬 것이라고 한다.(自誠明。謂之性。自明誠。謂之敎。)”라는 말이 나온다.
  3. 3)정주貞州 : 경기도 개풍군開豊郡 풍덕豊德의 고구려 시대 이름이다.
  4. 4)양가兩街 : 당송唐宋 시대에 불교 행정을 담당했던 좌우가승록사左右街僧錄司라는 승직僧職을 말한다. 줄여서 좌우가左右街라고 한다.
  5. 5)옛날 …… 알았는데 : 천태 지자天台智者가 처음 남악 혜사南岳慧思를 만났을 적에, 혜사가 “옛날에 영취산靈鷲山에서 함께 『법화경』의 법문을 들은 그 숙연이 따라다녀서 이제 다시 오게 된 것이다.(昔日靈山。同聽法華。宿緣所追。今復來矣。)”라고 말한 고사가 『불조통기佛祖統紀』 권6 사조四祖 천태 지자天台智者 조에 나온다.
  6. 6)물어보고 …… 다하였다 : 질문하는 자나 응답하는 자 모두 성실하게 있는 힘을 다하였다는 말이다. 용용舂容은 힘껏 친다는 뜻이다. 『예기』 「학기學記」에 “질문에 잘 대답하는 것은 종을 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작게 두드리면 작게 울리고, 크게 두드리면 크게 울리니, 있는 힘껏 친 뒤에야 그 소리를 다 낼 수가 있는 것이다.(善待問者如撞鐘。叩之以小者則小鳴。叩之以大者則大鳴。待其從容。然後盡其聲。)”라는 말이 나오는데, 정현鄭玄의 주注에 “종용從容은 힘껏 친다는 뜻의 용용舂容과 같다.”라고 하였다.
  7. 7)주역周譯의 경經 : 측천무후則天武后의 대주大周 시대에 실차난타에 의해 번역된 80권본 『화엄경』을 말한다. ‘신역화엄경新譯華嚴經’ 혹은 줄여서 ‘신경新經’, 또는 ‘주본周本’이라고도 한다. 참고로 동진東晉 시대에 불타발다라佛馱跋陀羅에 의해 번역된 60권본 『화엄경』과 함께 이 80권본 『화엄경』을 ‘화엄대경華嚴大經’이라고 부르는데, 60권본 『화엄경』, 즉 ‘진본晉本’은 ‘대경大經’ 중에 먼저 번역되었다 하여 ‘구경舊經’이라고도 부른다.
  8. 8)능엄소주楞嚴疏主 : 정원淨源의 스승인 자선子璿을 가리킨다. 장수사長水寺에 거하면서 『화엄華嚴』과 『능엄楞嚴』의 강론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송 진종眞宗이 대중상부大中祥符 6년(1013)에 그에게 자의紫衣와 함께 장수소주능엄대사長水疏主楞嚴大師라는 호를 하사하였다.
  9. 9)그 누가 우리 우세 스님처럼 : 양걸이 의천에게 바친 시에 나오는데, 『대각국사외집』 권11에 실려 있다.
  10. 10)삼한의 …… 맞수라오 : 소식이 양걸을 배웅한 시에 나오는데, 『대각국사외집』 권11에 실려 있다.
  11. 11)고산경행高山景行 : 높은 산이나 큰 길과 같은 숭고한 덕행이라는 뜻으로, 그지없이 존경하며 우러러 사모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시경』 「소아小雅」 ≺차할車舝≻의 “높은 산은 누구나 우러러보게 마련이고, 큰 길은 누구나 함께 걸어가게 마련이다.(高山仰止。景行行之。)”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12. 12)척령재원鶺鴒在原이라 …… 것이다 : 한 번 만나서 형제 간의 회포를 풀어 보고 싶다는 말이다. 척령재원은 할미새가 들판에 있다는 뜻으로, 형제의 우애를 비유하는 말인데, 『시경』 「소아」 ≺상체常棣≻의 “저 할미새 들판에서 호들갑 떨듯, 급한 때는 형제들이 서로 돕는 법이라오. 항상 좋은 벗이 있다고 해도, 그저 길게 탄식만을 늘어놓을 뿐이라오.(鶺鴒在原。兄弟急難。每有良朋。況也永歎。)”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비타匪他 역시 타인이 아니라는 뜻으로, 형제의 대칭代稱이다. 『시경』 「소아」 ≺규변頍弁≻의 “어찌 다른 사람이리오. 형제이지 타인이 아니로다.(豈伊異人。兄弟匪他。)”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13. 13)백이伯夷도 …… 가운데 : 극단적인 행동을 피하고 중도中道를 취하여 융통성 있게 처신하는 것을 말한다. 은殷나라 말기에 백이는 지조를 고수하여 주周나라 조정에 절대로 발을 들여놓지 않았고, 춘추시대 노魯나라 유하혜柳下惠는 세 번이나 파직되었어도 조정을 떠나지 않은 대조적인 면모를 보였다.
  14. 14)불가휘不可諱의 일 : 사람이 피할 수 없는 일이라는 뜻으로, 죽음을 완곡하게 표현한 말이다.
  15. 15)전제筌蹄 : 전은 물고기 잡는 통발이고, 제는 토끼 잡는 그물로서, 보통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의 뜻으로 쓰이는데, 여기서는 궁극적인 깨달음을 위한 경론經論의 언어 문자를 비유하는 말로 쓰였다. 『장자』 「외물外物」에 “물고기를 잡고 나면 통발을 잊기 마련이고, 토끼를 잡고 나면 덫을 잊기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말이라는 것도 가슴속의 뜻을 전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니, 그 속뜻을 알고 나면 말을 잊어버리기 마련이다. 내가 어떻게 말을 잊어버린 사람을 만나 그와 함께 말을 해 볼 수 있을까.(筌者所以在魚。得魚而忘筌。蹄者所以在免。得免而忘蹄。言者所以在意。得意而忘言。吾安得夫忘言之人而與之言哉。)”라는 내용이 나온다.
  16. 16)구이지학口耳之學 : 천박한 공부를 가리킨다. 『순자荀子』 「권학편勸學篇」의 “소인이 배우는 것을 보면, 귀로 들어왔다가 금방 입으로 나가 버리고 만다. 입과 귀의 사이는 네 치밖에 안 되니, 어떻게 7척의 몸뚱이를 아름답게 할 수가 있겠는가.(小人之學也。入乎耳。出乎口。口耳之間則四寸耳。曷足以美七尺之軀哉。)”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17. 17)십이분교十二分敎 : 불경을 형식과 내용에 따라 열두 종류로 분류한 것으로, 계경契經·응송應頌·기별記別·풍송諷頌·자설自說·인연因緣·비유譬喩·본사本事·본생本生·방광方廣·희법希法·논의論議 등을 말한다. 십이부경十二部經 혹은 십이분경十二分經이라고도 한다.
  18. 18)추구篘狗 :풀을 묶어서 개 모양으로 만든 것을 말한다. 보통 추구芻狗라고 한다. 옛날에 제사를 지낼 때 쓰던 것인데, 제사가 끝나고 나면 바로 내버리기 때문에 소용이 있을 때만 이용하고 소용이 없을 때는 버리는 천한 물건의 비유로 쓰인다. 『노자』 제5장에 “천지는 불인하여 만물을 추구로 여긴다.(天地不仁。以萬物爲芻狗。)”라는 말이 나온다.
  19. 19)조박糟粕 : 술 찌꺼기라는 말이다. 조백糟魄이라고도 한다. 제 환공齊桓公이 책을 읽는 것을 보고 윤편輪扁이 “왕께서 읽고 있는 것은 옛사람이 남긴 술 찌꺼기이다.(君之所讀者。古人之糟魄而夫。)”라고 말한 고사가 전한다. 『장자』 「천도」.
  20. 20)선을 …… 않았다 : 천성적으로 선을 좋아하여 끊임없이 도덕의 수양에 힘썼다는 말이다. 『맹자』 「고자告子 상」의 “인의충신과 선을 좋아하여 게을리하지 않는 이것이 바로 하늘의 작위요, 공경대부와 같은 종류는 사람의 벼슬일 뿐이다.(仁義忠信樂善不倦。此天爵也。公卿大夫。此人爵也。)”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21. 21)승가탑僧伽塔 : 안휘성安徽省 사현泗縣의 보광왕사普光王寺에 있는 서역승西域僧 승가僧伽 화상의 탑을 말하는데, 사주탑泗州塔 혹은 영서탑靈瑞塔이라고도 한다. 당 고종高宗 용삭龍朔(661~663) 초년에 중국에 건너온 그에 대한 신앙이 당송唐宋 시대에 성행하였는데, 청량 징관淸涼澄觀도 그 탑을 중건한 고사가 있으며, 송 태종太宗 태평흥국太平興國 7년(982)에는 탑원塔院을 다시 보수하고 태평흥국사太平興國寺라고 개칭改稱하기도 하였다.
  22. 22)장부는 …… 법이다 : 사마천司馬遷의 ≺보임소경서報任少卿書≻에 “장부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쓰임이 되려 하고, 여인은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위하여 예쁘게 단장하려 한다.(士爲知己者用。女爲說己者容。)”라는 말이 나온다. 『문선』 권41.
  23. 23)광처럼 …… 못했네 : 말로는 똑같이 불법을 숭상한다면서도 실제로는 각자 사적인 목적을 이루려 꾀하고 있을 뿐, 진정으로 진리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구도자求道者는 볼 수가 없었다는 말이다. 『한비자韓非子』 「설림說林 상」에 “미친 자가 동쪽으로 달리니, 쫓는 자도 동쪽으로 달린다. 동쪽으로 달리는 행위는 같지만 동쪽으로 달리는 이유는 각자 다르다. 그러므로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라도 자세히 살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狂者東走。逐者亦東走。其東走則同。其所以東走之爲則異。故曰同事之人。不可不審察也。)”라는 동주미東走迷의 고사가 나온다. 또 『장자』 「지북유知北遊」 첫머리에, 지知가 진리를 찾기 위해 북쪽으로 현수玄水 물가에 나아가 유람했다(知北遊於玄水之上)는 말이 나온다.
  24. 24)혼미하여 …… 못하고 : 『주역』 「복괘復卦」 상육上六에 “돌아옴에 혼미하니, 흉하다.(迷復。凶。)”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자기 잘못을 끝내 깨닫지 못하고 헤매기만 할 뿐 개과천선改過遷善하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25. 25)달아나도 …… 못한 채 : 『맹자』 「고자告子 상」에 “닭이나 개가 달아나면 사람들이 찾을 줄을 알면서도 마음이 달아나면 찾을 줄을 모른다. 학문의 길은 다른 것이 아니다. 달아난 그 마음을 찾는 것일 뿐이다.(人有鷄犬放。則知求之。有放心而不知求。學文之道無他。求其放心而已矣。)”라는 말이 나온다.
  26. 26)사를 …… 않으리 : 한유韓愈의 ≺원도原道≻에 “저들을 막지 않으면 우리의 도가 흘러 전하지 못하고, 저들을 저지하지 않으면 우리의 도가 행해지지 않는다.(不塞不流。不止不行。)”라는 말이 나온다.
  27. 27)비도 결국에는 기울어지나니 : 사물의 이치는 극에 이르면 반대 방향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으니, 비운否運도 태운泰運으로 바뀌게 마련이라는 말이다. 『주역』 「비괘否卦」 상구上九 상象에 “비도 결국에는 기울어지나니, 어찌 항상 비색否塞하기만 하겠는가.(否終則傾。何可長也。)”라는 말이 나온다.목도를 통해 건너가시어 : 배를 타고 송나라로 건너간다는 말이다.
  28. 28)목도는 해로海路를 뜻한다. 『주역』 「익괘益卦」 단사彖辭의 “큰물을 건너는 것이 이로운 것은 목의 도가 이에 행해짐이라.(利涉大川。木道乃行。)”라는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29. 29)홍수가 …… 했네 : 의천이 당시에 난립하여 분규를 일삼는 여러 종파를 하나로 회통하여 안정시켰다는 말이다. 홍수가 제멋대로 흘러 온 세상에 범람했을 때(洪水橫流。氾濫於天下。), 요 임금이 홀로 이를 근심하여(堯獨憂之) 순에게 이 일을 맡겼는데, 순이 다시 우에게 치수治水하게 하자, 우가 강물을 모두 동쪽으로 유도하여 바다로 빠져나가게 했다는 이야기가 『맹자』 「등문공滕文公 상」에 나온다. 또 『서경』 「요전堯典」에 “넘실넘실 홍수가 바야흐로 터져서 끝없이 산을 에워싸고 언덕을 넘어 질펀하게 하늘까지 잇닿았으므로 백성들이 탄식하였다.(湯湯洪水方割。蕩蕩懷山襄陵。浩浩滔天。下民其咨。)”라는 말이 나온다.
  30. 30)당시 …… 가득했다오 : 의천이 세상에 혜택을 베푼 것은 그의 도의 경지에서 볼 때에는 쓰고 남은 찌꺼기에 불과했겠지만, 마치 태산에 드리운 구름이 비를 내리듯 온 세상에 크나큰 은택을 끼쳤다는 말이다. 『장자』 「양왕讓王」에 “참된 도로 몸을 다스리고, 그 나머지로 나라와 집을 보살피며, 또 그 찌꺼기로 천하를 다스린다.(道之眞以治身。其緖餘以爲國家。其土苴以治天下。)”라는 말이 나온다. 부촌膚寸은 부촌이합膚寸而合의 준말이다. 촌寸은 손가락 하나의 너비인 1촌을 말하고, 부膚는 손가락 네 개를 합친 너비인 4촌을 말한다. 부촌이합은 부촌의 구름, 즉 작은 조각구름들이 모여서 큰 구름을 이룬 것을 말한다. 『공양전公羊傳』 「희공僖公」 31년에 “구름 기운이 바위틈에서 나와 조금씩 조각으로 합쳐져서 아침이 다하기 전에 천하에 두루 비를 뿌려 주는 것은 오직 태산만이 그러할 뿐이다.(觸石而出。膚寸而合。不崇朝而徧雨乎天下者。唯泰山爾。)”라는 말이 나온다.
  1. 1)金富軾撰。靈通寺碑{編}。
  2. 2)「大」通「太」{編}次同。
  3. 1)「僧五十…辛未」二百五十五字。甲本冠註曰丁亥十月。依金石總覽補缺。方山學人柳壽焚香敬書。
  4. 2)「及」字下略一張空白有 {編}。
  5. 1)▣疑「憊」{編}。
  6. 2)▣疑「有」{甲}。
  7. 3)▣▣疑「遺敎」{編}。
  8. 4)▣疑「享」{甲}。
  9. 5)▣▣疑「崩摧」{甲}。
  10. 6)▣▣▣疑「遺骨。以」{編}。
  11. 7)▣▣疑「高益」{編}。
  12. 8)「閒」通「間」{編}次同。
  13. 9)▣疑「奮」{甲}。
  14. 10)▣疑「根」{甲}。
  15. 11)▣疑「楞」{編}。
  16. 12)▣▣疑「莫得」{編}。
  17. 1)「示」字形似「木」{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