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동국승니록(東國僧尼錄) / 東國僧尼錄

ABC_BJ_H0323_T_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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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승니록東國僧尼錄
동국승니록東國僧尼錄
작자 미상
김두재 (역)
총목차總目次
Ⅰ. 명승名僧
 본여선사本如禪師    혜철선사慧徹禪師  홍척선사洪陟禪師
 무염선사無染禪師    현욱선사玄昱禪師  각체선사覺體禪師
 도균선사道均禪師    품일선사品日禪師  가지선사迦智禪師
 충언선사忠彥禪師    대모선사大茅禪師1) 증선사證禪師
 척선사陟禪師      순지선사順支禪師  지리산화상智異山和尙
 흠충선사欽忠禪師    행적선사行寂禪師  청허선사淸虛禪師
 금장화상金藏和尙    청원화상淸院和尙  와룡화상臥龍和尙
 서암화상瑞岩和尙    박암화상泊岩和尙  대령화상大嶺和尙
 대무위선사大無爲禪師  운주화상雲住和尙  경유선사慶猷禪師
 혜선사慧禪師      구산화상龜山和尙  혜운선사慧雲禪師
이상은 신라인이다.

 설악영광선사雪嶽令光禪師 도봉산혜거국사道峯山慧炬國師
이상은 고려인이다.

 만항萬恒 혼구混丘 혜근惠勤 관선冠宣 법언法言
이상도 역시 고려인이다.

 순응順應・이정理貞 희랑希朗 보조대사普照大師 이거인李居仁
이상도 역시 신라인이다.

 보덕普德
고구려인이다.

 휴정休靜 유정惟政
이상은 조선(本朝)의 사람이다.

 묵행자嘿行者

Ⅱ. 니고尼枯
 김씨金氏
신라인이다.

Ⅲ. 시승詩僧
 대각국사大覺國師     무애지국사無碍智國師 대감국사大鑑國師
 구산담수선사龜山曇秀禪師 무기無己       탁연사卓然師   치악노승雉岳老僧

012_0857_c_01L[東國僧尼錄]

012_0857_c_02L1)東國僧尼錄

012_0857_c_03L

012_0857_c_04L總目次

012_0857_c_05L
名僧

012_0857_c_06L
本如禪師慧徹禪師洪陟禪師無染
012_0857_c_07L禪師玄昱禪師覺體禪師道均禪師
012_0857_c_08L品日禪師迦智禪師忠彥禪師大茅
012_0857_c_09L禪師證禪師陟禪師順支禪師了悟
012_0857_c_10L大師智異山和尙欽忠禪師行寂禪
012_0857_c_11L淸虛禪師金藏和尙淸院和尙
012_0857_c_12L龍和尙瑞岩和尙泊岩和尙大嶺和
012_0857_c_13L大無爲禪師雲住和尙慶猷禪師
012_0857_c_14L慧禪師龜山和尙慧雲禪師巳上新
羅人

012_0857_c_15L嶽令光禪師道峯山慧炬國師巳上高
麗人

012_0857_c_16L萬恒混丘惠勤冠宣法言巳上亦
高麗人

012_0857_c_17L應理貞希朗普照大師祖師李居仁

012_0857_c_18L亦新
羅人>
普德高句
麗人
休靜惟政已上
本朝
嘿行者

012_0857_c_19L
尼枯

012_0857_c_20L
金氏新羅

012_0857_c_21L
詩僧

012_0857_c_22L
大覺國師無碍智國師大鑑國師
012_0857_c_23L山曇秀禪師無己卓然師雉岳老僧
012_0857_c_24L{底}卐續藏經第二篇乙第二十三套第三册

012_0858_a_01L 삼중공공三重空空     인각선사麟角禪師   정명선사靜明禪師
 성능聖能         무외無畏       탄연坦然     충활冲奯 혜문惠文
 원경圓鏡         수진守眞       의침義砧     정사正思

Ⅳ. 역승逆僧
 신돈辛旽고려조 사람이다.

Ⅴ. 간승奸僧
 보우普雨본조 사람이다.
Ⅰ. 명승名僧
본여선사本如禪師2)남악회양南嶽懷讓3)선사의 법제자[法嗣]4)이다.
혜철선사慧徹禪師5)
홍척선사洪陟禪師6)서당지장西堂智藏선사의 법제자이다.
무염선사無染禪師7)마곡보철麻谷寶徹선사의 법제자이다.
현욱선사玄昱禪師8)
각체선사覺體禪師장경회휘章敬懷暉9)선사의 법제자이다.
도균선사道均禪師남전보원南泉普願10)선사의 법제자이다.
품일선사品日禪師11)염관제안鹽官齊安선사의 법제자이다.
가지선사迦智禪師대매법상大梅法常12)선사의 법제자이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말하였다. “네가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곧 너에게 말해주겠노라.”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대매산大梅山13)의 종지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낙酪과 우유[本]를 동시에 던져 버리라”『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충언선사忠彥禪師대매법상大梅法常 선사의 법제자이다.

012_0858_a_01L三重空空麟角禪師靜明禪師聖能
012_0858_a_02L無畏坦然冲奯惠文圓鏡守眞
012_0858_a_03L正思

012_0858_a_04L
逆僧

012_0858_a_05L
辛旽麗朝

012_0858_a_06L
奸僧

012_0858_a_07L
普雨本朝

012_0858_a_08L

012_0858_a_09L名僧

012_0858_a_10L本如禪師南嶽讓禪師法嗣

012_0858_a_11L慧徹禪師

012_0858_a_12L洪陟禪師西堂藏禪師法嗣

012_0858_a_13L無染禪師麻谷徹禪師法嗣

012_0858_a_14L玄昱禪師

012_0858_a_15L覺體禪師章敬惲禪師法嗣

012_0858_a_16L道均禪師南泉願禪師法嗣

012_0858_a_17L品日禪師鹽官安禪師法嗣

012_0858_a_18L

012_0858_a_19L迦智禪師大梅常禪師法嗣

012_0858_a_20L
僧問如何是西來意師云待汝裏頭來
012_0858_a_21L卽與汝道僧問如何是大梅的1)二日 [1]
012_0858_a_22L師云酪本一時 [2] 并景德傳燈錄

012_0858_a_23L

012_0858_a_24L忠彥禪師大梅常禪師法嗣

012_0858_a_25L

012_0858_b_01L
대모화상大茅和尙귀종지상歸宗智常 선사의 법제자이다.
상당上堂14)하여 대중들에게 말하였다. “모든 부처님의 스승을 알고자 하면 무명심無明心에서 알아 취해야 하고, 항상 머물러 있어서 마르지 않는 성품을 알고자 하면 모든 물질이 변천하는 곳에서 알아 취해야 하느니라.”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대모大茅의 경계입니까?” 화상이 대답하였다. “칼날을 드러내지 않는다.” 스님이 물었다. “어찌하여 칼날을 드러내지 않습니까?” 화상이 대답하였다. “감당할 사람이 없느니라.”『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증선사證禪師
척선사陟禪師
순지선사順支禪師15)앙산혜적仰山慧寂16) 선사의 법제자이다. 본국 호는 요오대사本國號了悟大師이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대사가 불자拂子를 세우셨다. 스님이 말하였다. “그것은 곧 옳지 않은 게 아닙니까?” 대사가 불자를 내려놓았다. 스님이 물었다. “이以자도 성립되지 않는다 하고 팔八자도 옳지 않다 하면, 그것은 무슨 글자입니까?” 대사께서 원상圓相을 그려 보이셨다. 어떤 스님이 선사 앞에서 다섯 개의 고리 모양의 원상을 만들어 보이니, 대사가 찢어 버리고 따로 원상 하나만을 그렸다.
지리산화상智異山和尙임제의현臨濟義玄17) 선사의 법제자이다.
어느 날 대중들에게 설법하셨다[示衆]. “겨울인데도 춥지 않으니, 섣달이 지나거든 보자.” 곧 법상法床에서 내려 오셨다.『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흠충선사欽忠禪師석상경제石霜慶諸18) 선사의 법제자이다.
행적선사行寂禪師19)석상경제 선사의 법제자이다.
청허선사淸虛禪師석상경제 선사의 법제자이다.
금장화상金藏和尙동산양개洞山良价20) 선사의 법제자이다.

012_0858_b_01L大茅和尙歸宗常禪師法嗣

012_0858_b_02L
上堂云欲識諸佛師向無明心內識取
012_0858_b_03L欲識常住不彫性向萬物遷變處識取
012_0858_b_04L僧問如何大茅境師云不露鋒僧云爲
012_0858_b_05L什麽不露鋒師云無當者并景德傳燈錄

012_0858_b_06L

012_0858_b_07L證禪師

012_0858_b_08L陟禪師

012_0858_b_09L順支禪師2)▣山寂禪師法嗣

012_0858_b_10L

012_0858_b_11L本國號了悟大師

012_0858_b_12L
僧問如何是西來意師竪拂子僧曰莫
012_0858_b_13L遮箇便是師放下拂子以字不成
012_0858_b_14L八字不是是什麽字師作圓相示之
012_0858_b_15L有僧於師前作五花圓相師畫破別作
012_0858_b_16L一圓相

012_0858_b_17L

012_0858_b_18L智異山和尙臨濟玄禪師法嗣

012_0858_b_19L
一日示衆曰冬不寒臈後看便下座
012_0858_b_20L景德傳燈錄

012_0858_b_21L

012_0858_b_22L欽忠禪師石霜諸禪師法嗣

012_0858_b_23L行寂禪師石霜諸禪師法嗣

012_0858_b_24L淸虛禪師石霜諸禪師法嗣

012_0858_b_25L金藏和尙洞山价禪師法嗣

012_0858_c_01L
청원화상淸院和尙구봉도건九峯道虔 선사의 법제자이다.
어떤 스님이 물었다. “말을 타고 달리면서 공을 다투면 누가 얻습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그 누구도 그 공을 얻지 못할 것이다.” 어떤 스님이 말했다. “그렇다면 다투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선사가 말하셨다. “비록 다투지 않는다고 해도 허물은 있느니라.” 스님이 말하였다. “어떻게 하면 그 허물을 면할 수 있습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애당초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니라.” 스님이 말하였다. “잃지 않는 이치를 어떻게 단련해야 합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두 손으로 떠받쳐도 일으키지 못하느니라.”
와룡화상臥龍和尙운개지원雲盖志元 선사의 법제자이다.
물었다. “어떤 것이 대인大人의 모습입니까?” 화상이 대답하였다. “자줏빛 비단 휘장 속에서는 손을 드리우지 않는 것이니라.” 물었다. “어째서 손을 드리우지 않습니까?” 화상이 대답하였다. “존귀尊貴하지 않기 때문이니라.” 또 물었다. “온종일 어떻게 마음을 써야 합니까?” 화상이 대답하였다. “원숭이가 모충毛蟲을 잡아먹듯이 하라.”『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서암화상瑞岩和尙곡산장谷山藏 선사의 법제자이다.
물었다. “희고 검은 눈동자를 다 없애버리고 불안佛眼만 뜨고 있으면 어떻겠습니까?” 화상이 대답하였다. “그대가 속으로 집착할까 걱정스럽구나.” 또 물었다. “어떤 것이 왕자의 탄생입니까?” 화상이 대답하였다. “깊은 궁궐 속에서 끌어내도 나오지 않는다.”
박암화상泊岩和尙
물었다. “어떤 것이 선禪입니까?” 화상이 대답하였다. “오래된 무덤은 집으로 삼지 못한다.” 또 물었다. “어떤 것이 도道입니까?” 화상이 대답하였다. “공연히 거마車馬 자국만 남겼구나.” 또 물었다. “어떤 것이 교敎입니까?” 화상이 대답하였다. “패엽貝葉에는 다 쓰지 못한다.”

012_0858_c_01L淸院和尙九峯虔禪師法嗣

012_0858_c_02L
僧問奔馬爭毬誰是得者師曰誰是不
012_0858_c_03L得者曰恁麽則不在爭也師曰直得不
012_0858_c_04L亦有過在曰如何免得此過師曰
012_0858_c_05L要且不曾失曰不失處如何鍜鍊師曰
012_0858_c_06L兩手捧不起

012_0858_c_07L

012_0858_c_08L臥龍和尙雲盖元禪師法嗣

012_0858_c_09L
問如何是大人相師曰紫羅帳裡不垂
012_0858_c_10L曰爲什麽不垂手師曰不尊貴
012_0858_c_11L十二時中間如何用心師曰猢猴喫毛
012_0858_c_12L景德傳燈錄

012_0858_c_13L

012_0858_c_14L瑞岩和尙谷山藏禪師法嗣

012_0858_c_15L
問黑白兩亡開佛眼時如何師曰恐你
012_0858_c_16L守內問如何是誕生王子師曰深宮引
012_0858_c_17L不出

012_0858_c_18L

012_0858_c_19L泊岩和尙

012_0858_c_20L
問如何是禪師曰古塚不爲家問如何
012_0858_c_21L是道師曰徒勞車馬迹問如何是敎
012_0858_c_22L師曰貝葉取不盡

012_0858_c_23L底本冠註曰「二日疑旨」{編}▣疑「仰」{編}

012_0859_a_01L
대령화상大嶺和尙모두 곡산장谷山藏 선사의 법제자이다.
어떤 스님이 물었다. “동관潼關21)에 이르러서 쉴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화상이 대답하였다. “길 가운데에서22) 살아갈 궁리를 할 뿐이니라.” 또 물었다. “길 가운데에서 살아갈 궁리는 어떤 것입니까?” 화상이 대답하였다. “체득하면 옳겠지만 당면해서는 옳지 않느니라.” 또 물었다. “체득하면 옳은데 어째서 당면해서는 옳지 않습니까?” 화상이 말하였다. “체득하는 것은 어떤 사람의 분한 위에서의 일이니라.” 말하였다. “그 속에서의 일은 어떤 것입니까?” 화상이 말하였다. 존귀尊貴한 척 하지 않는 것이니라. 『전등록傳燈錄』
대무위선사大無爲禪師설봉의존雪峯義存23) 선사의 법제자이다.
운주화상雲住和尙 운거도응雲居道膺24) 선사의 법제자이다.
물었다. “모든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시지 못한 것을 어떤 사람이 말할 수 있습니까?” 화상이 대답하였다. “노승老僧이 말할 수 있다.” 또 물었다. “모든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시지 못한 것을 화상께서 어떻게 말할 수 있습니까?” 화상이 대답하였다. “모든 부처님은 곧 내 제자이니라.” 스님이 말했다. “그렇다면 화상께서 말씀해 주십시오.” 화상이 대답하였다. “군왕君王을 상대하지 않았더라면 스무 방망이는 때렸어야 했었느니라.”『전등록傳燈錄』
경유선사慶猷禪師25)
혜선사慧禪師운거도응雲居道膺 선사의 법제자이다.
구산화상龜山和尙장경혜릉長慶慧稜 선사의 법제자이다.
당나라 때에 상국相國(정승) 배휴裴休26)공이 법회를 열고 경을 읽는 스님에게 묻기를 “무슨 경을 보십니까?”라고 하자, 스님이 대답하기를 “무언동자경無言童子經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공이 다시 묻기를 “몇 권입니까?”라고 하자, 스님이 대답하기를 “두 권입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다시 묻기를 “이미 말이 없다고 했거늘 어찌하여 두 권이라 합니까?”라고 하자, 스님이 대답하지 못했다. 화상께서 그 스님을 대신하여 답하기를 “무언無言을 논한다면 두 권만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전등록傳燈錄』

012_0859_a_01L大嶺和尙并谷山藏禪師法嗣

012_0859_a_02L
僧問只到潼關便却休時如何師曰只
012_0859_a_03L是途中活計曰其中活計如何師曰體
012_0859_a_04L卽得當卽不得曰體得爲什麽當不得
012_0859_a_05L師曰體是什麽人分上事曰其中事如
012_0859_a_06L師曰不作尊貴并傳燈錄

012_0859_a_07L

012_0859_a_08L大無爲禪師雪峯存禪師法嗣

012_0859_a_09L

012_0859_a_10L雲住和尙雲居膺禪師法嗣

012_0859_a_11L
問諸佛道不得什麽人道得師曰老僧
012_0859_a_12L道得曰諸佛道不得和尙作麽生道
012_0859_a_13L師曰諸佛是我弟子曰請和尙道師曰
012_0859_a_14L不是對君王好與二十棒傳燈錄

012_0859_a_15L

012_0859_a_16L慶猷禪師

012_0859_a_17L慧禪師并雲居膺禪師法嗣

012_0859_a_18L

012_0859_a_19L龜山和尙長慶稜禪師法嗣

012_0859_a_20L
有擧相國裴公休啓法▣會問看經僧
012_0859_a_21L是什麽經僧曰無言童子經公曰有幾
012_0859_a_22L僧曰兩卷公曰旣是無言爲什麽
012_0859_a_23L却有兩卷僧無對師代曰若論無言
012_0859_a_24L非唯兩卷傳燈錄

012_0859_b_01L
혜운선사慧雲禪師백조원白兆圓 선사의 법제자이다.
설악영광선사雪嶽令光禪師천룡중기天龍重機 대사의 법제자이다.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화상和尙의 가풍家風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분명히 기억해 두어라.” 또 물었다. “어떤 것이 온갖 법의 근원根源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가르쳐 주어서 고맙다.”『전등록傳燈錄』
도봉산道峯山 혜거국사慧炬國師27)청량문익淸凉文益28)선사의 법제자이다.
국사는 처음에 정혜淨慧선사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었는데, 본국本國(고려)의 왕이 그를 사모하여 사신을 보내 돌아오라고 간청하므로 마침내 본국에 돌아왔다. 본국의 왕이 마음의 요결[心訣]을 듣고는 더욱 극진하게 예우했다. 어느 날 국왕의 초청을 받고 왕궁에 들어가 법좌法座에 올라 위봉루威鳳樓를 가리키면서 대중들에게 설법하였다. “위봉루는 여러 상좌들을 위하여 이미 거양擧揚을 마쳤다. 상좌들이여, 알겠느냐? 만일 알았다면 무엇이 알았으며, 만약 모른다면 그 무엇이 위봉루를 모르는가? 진중하라.” 대사의 설교는 중국에는 알려지지 않았고, 그의 임종도 알 수 없다.
만항萬恒고담古潭 혜감국사慧鑑國師이다.
속성은 박씨요, 진사進士 경승景升의 아들이다. 웅진군熊津郡 사람으로서 기유己酉(1259)년에 태어났다. 국사는 구산선九山選29)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충렬왕忠烈王이 삼장사三藏社30)에 머물기를 명하였으며, 제자는 700명이나 되었다. 연우延祐(元 仁宗의 연호) 기미己未(忠肅王 6, 1319)년에 병이 들었는데, 전날 저녁에 남쪽 산봉우리에서 큰 나무가 저절로 쓰러지고 붉은 요기[赤祲]가 산골짜기에까지 뻗쳤다. 나이는 71세였고 법랍法臘은 58년이었다. 왕이 시호[慧鑑國師]를 내리고 그 탑을 광조廣照라 하였다.
스님은 유가儒家의 자제로서 스님이 되었는데 어릴 때부터 영리하였으며, 스스로 학문에 힘썼고 장성해서는 더욱 게을리하지 않았다. 구산선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나,

012_0859_b_01L慧雲禪師白兆圓禪師法嗣

012_0859_b_02L

012_0859_b_03L雪嶽令光禪師天龍機大師法嗣

012_0859_b_04L
僧問如何是和尙家風師曰分明記取
012_0859_b_05L問如何是諸法之根源師曰謝指示
012_0859_b_06L燈錄

012_0859_b_07L

012_0859_b_08L道峯山慧炬國師淸凉益禪師法嗣

012_0859_b_09L
師始發機於淨慧之室本國主思慕
012_0859_b_10L使來請遂迴故地國主受心訣禮待
012_0859_b_11L彌厚一日請入王府上堂師指威鳳
012_0859_b_12L樓示衆曰威鳳樓爲諸上座擧揚了
012_0859_b_13L上座還會麽儻若會且作麽生會
012_0859_b_14L道不會威鳳樓作麽生不會珍重
012_0859_b_15L之言敎未被中華亦莫知所終

012_0859_b_16L

012_0859_b_17L萬恒古潭慧鑑國師

012_0859_b_18L
俗姓朴氏進士景升之子熊津郡人
012_0859_b_19L己酉生師赴九山選中魁科忠烈王
012_0859_b_20L住三藏社弟子至七百延祐己未
012_0859_b_21L遘疾前一夕南峰大木自仆赤祲亘
012_0859_b_22L山谷年七十一臘五十八王賜謚塔
012_0859_b_23L曰廣照師以儒家子爲僧幼穎悟
012_0859_b_24L自强於學長益不怠赴九山選中魁

012_0859_c_01L만류하는 것을 뿌리치고 풍악楓嶽(금강산)으로 갔다가 여름이 지나간 뒤에 지리산智理山으로 옮겨가서 지냈다. 배가 고파도 맛있는 음식을 거듭 먹지 않았고 아무리 추워도 갖옷을 껴입지 않았으며, 여러 해 동안 자리에 편히 눕지 않았고, 자취를 감추려 하였으나 그의 명성은 더욱 드러났다. 충렬왕이 삼장사三藏社에 머무를 것을 명하였고, 그의 스승인 조계曹溪 원오圓悟화상도 또한 그렇게 하라고 타일렀으므로 마침내는 삼장사에 갔다. 그 뒤 낭월사朗月社・운흥사雲興社31)・선원사禪源社32) 등의 절에서 주지를 역임하였다.
경전을 가르칠 적에는 마치 귀머거리는 분명하게 듣는 듯하였고, 술에 취한 사람은 금방 깨어나듯 하였다. 제자가 7백 명에 이르렀는데, 사대부로서 제자가 되어 입사入社한 사람만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중오中吳33)의 몽산덕이(蒙山德異, 1231∼1308)가 그의 글과 게偈를 보고 칭찬을 마지않았으며, 십수 편의 시로 화답하고 이어 편지를 보내 고담古潭이라는 호까지 지어 주었다. 황경皇慶(元 仁宗의 年號) 계축癸丑(1313)년에 대위왕大尉王이 영안궁永安宮에 계실 때에, 편안한 수레를 보내고 겸손한 말로 맞이하므로 스님이 경성京城으로 갔다. 그때 마침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의 이름난 스님들[名流]을 모아서 날마다 차례로 불법을 강론하고 있었는데, 국사가 그곳에 이르러 방할棒喝34)의 풍습을 일으키고 변론이 물을 내리쏟는 듯하니, 임금이 매우 기뻐하면서 같은 수레를 타고 가서 손수 음식을 대접하였다. 그리고는 별전종주중속조등묘명존자別傳宗主重續祖燈妙明尊者라는 법호를 내려주고, 가사・웃옷・하의[裙]・모자・버선과 은폐銀弊 50일鎰을 노자로 주었다. 스님은 산문으로 돌아가서 그곳에 살고 있는 스님들에게 모두 나누어주고 사사로이 간직하지 않았다.
(8월 18일에)35)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에 유서遺書를 써서 스스로 장사 지낼 자리를 잡아놓았다. 밤이 깊어지자 시자侍者를 불러 북을 치게 하고, 가사袈裟를 걸치고 선상禪牀에 의지하여 소리 내어 게를 읊어 작별을 고하니, 그 게송은 대략 다음과 같다.

廓淸五蘊       오온五蘊으로 이루어진 이 몸뚱이 확 트이고 맑아지니
眞照無窮       참되게 비추는 것이 그지없구나.
死生出沒       태어나고 죽고 나타나고 사라짐이
月轉空中       달이 허공을 맴도는 것 같다네.
吾今下脚       내 지금 다리를 내려디디려 하노니
誰辨玄蹝       어느 누가 그 현묘한 자취를 분별하리.
告爾弟子       너희 제자들에게 이르노니
莫謾捫空       부질없이 허공을 더듬지 말라.

선자禪者 경호景瑚가 가고 머무는 이치[去住之意]를 물으니, “사람이 어느 곳인들 만나지 않겠는가? 큰 강을 건너고 나면 뗏목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라는 말만 남기시고는 무릎을 치고 합장한 채 웃으면서 세상을 떠났다.

012_0859_c_01L拂衣往楓岳夏滿移棲智理山
012_0859_c_02L不重味寒不襲裘脇不至席者累稔
012_0859_c_03L跡晦而名彰忠烈王命住三藏社其師
012_0859_c_04L曹溪圓悟和尙亦諭之乃往後歷主朗
012_0859_c_05L月雲興禪源等社凡經指授若聵而聆
012_0859_c_06L若酗而醒弟子至七百士大夫摳衣入
012_0859_c_07L社者不可勝計中吳異蒙山見其文
012_0859_c_08L歎賞不已賡和十數仍貽書致古
012_0859_c_09L潭之號皇慶癸丑大尉王讌居永安
012_0859_c_10L安車卑辭邀至京城時方聚禪敎
012_0859_c_11L名流日以次講論1)主棒喝風生
012_0859_c_12L若懸河王喜甚行同輿手捧饌加法
012_0859_c_13L號別傳宗主重續祖燈妙明尊者袈裟
012_0859_c_14L衣裙帽襪先銀幣五十鎰以贐師還山
012_0859_c_15L悉以付常住不歸于私

012_0859_c_16L
浴更衣修遺書自占葬地夜艾喚侍
012_0859_c_17L者撾皷披袈裟據禪床聲喝吿別
012_0859_c_18L略曰廓淸五蘊眞照無窮死生出沒
012_0859_c_19L月轉空中吾今下脚誰辨玄蹤吿爾
012_0859_c_20L弟子莫謾捫空禪者景瑚問以吿住
012_0859_c_21L之意則有何處不相逢渡河不用筏等
012_0859_c_22L拍膝2)久手含笑而化

012_0859_c_23L底本冠註曰「主疑至」{編}底本冠註曰「久
012_0859_c_24L疑叉」{編}

012_0860_a_01L
처음에 어머니 정씨鄭氏의 꿈에 하늘에서 파란 장막이 내려왔는데, 그 안에 피부와 살결이 빙옥氷玉 같은 사내아이가 있었다. 다가가서 자세히 살펴보니, 애기가 합장하고 정씨의 품에 뛰어들었다. 잠을 깨니 한 말[斗] 크기의 큰 돌이 뱃속에 들어있는 것 같았다. 침을 맞고 약을 먹었으나 아무 효험이 없었다. 기유己酉(1259)년 8월 6일에 스님을 낳았는데, 그 이름을 막아幕兒라고 지었다. 스님이 입적할 무렵에는 대방군帶方郡에 사는 백성 백태白太라고 하는 사람의 꿈에 스님이 푸른 휘장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 다음날 절에 달려가 보니 스님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이제현이 지은 비문의 서문
혼구混丘무극노인無極老人 보감국사寶鑑國師이다.
자는 구을丘乙이고 옛 이름은 청분淸玢이며 속성俗姓은 김씨이다. 첨의평리僉議評理에 추증된 홍부弘富의 아들이요, 청풍군淸風郡 사람이다. 충헌왕忠憲王 신해辛亥(1251)년에 태어났다.36) 구산선九山選의 상상과上上科에 수석으로 급제하였으나 버리고 보각국사普覺國師37)를 따라가서 학문에 몰두하였다. 충렬왕은 비답의 글을 내려[下批] 대선사大禪師의 지위에 오르게 하였고, 덕릉德陵(충선왕, 1272~1325)이 즉위하여서는 특별히 양가도승통兩街都僧統38)을 제수하였으며, 대사자왕법보장해국일大師子王法寶藏海國一이라는 호를 더하고, 책명冊命하여 감지왕사鑑智王師를 삼았다. 두 대의 임금이 함께 제자가 되어 배우기를 청하였으므로 이로 인하여 영원사塋源寺39)에 머물다가 지리至理(至治. 元 英宗의 年號) 2년(1322)에 송림사松林寺40)로 옮겨서 거주하였다. 향년享年은 73세이고 승하僧夏는 63년이다. 충선왕은 시호를 내리고 탑호塔號를 묘응妙應이라 하였다. 저술로는 『어록語錄』 2권, 『가송잡저歌頌雜著』 2권, 『신편수륙의문新編水陸儀文』 2권, 『중편지송사원重編指頌事苑』 30권이 있다.
스님과 가까운 시기에 큰 비구比丘가 있어 부처님과 조사의 도를 밝혀 후학後學들을 깨우쳐 인도하였으니 그 이름은 보각국존普覺國尊이다. 그의 제자들이 대략 수백 수천 명이었지만, 능히 견고한 법을 꿰뚫어 보고 심오한 이치를 파악하여 미묘하게 계합하고 줄탁啐啄41)한 사람은 오직 보감국사寶鑑國師가 그런 사람이었다.
스님은 어려서 여러 아이들과 어울려 놀 적에 기와 조각과 돌을 모아 탑[塔廟]을 만들었고, 쉴 때는 벽을 향하고 앉아 무엇인가 생각하는 것 같았으며, 용모가 단정 엄숙하였고 성격이 또한 자애롭고 다정하였기 때문에 그의 친척들이 작은 아미타阿彌陀라고 불렀다. 열 살 때 무위사無爲寺42)

012_0860_a_01L
初母鄭氏夢天降翠幕有童子肌肉
012_0860_a_02L如氷玉就視之遂合掌躍入鄭氏懷
012_0860_a_03L1)反寤如納斗大石胞中砭藥之不効
012_0860_a_04L以己酉八月六日誕師因名幕兒淮示
012_0860_a_05L帶方郡民名白太者夢師登翠幕
012_0860_a_06L天去恠而明日奔至寺師已逝并李
012_0860_a_07L齊賢撰碑序

012_0860_a_08L混丘無極老人寶鑑國師

012_0860_a_09L
字丘乙舊名淸玢俗姓金氏贈僉議
012_0860_a_10L評理弘富之子淸風郡人忠憲王辛亥
012_0860_a_11L以九山選首登上七科棄去2)徒普
012_0860_a_12L覺學忠烈王下批至大禪師德陵3)
012_0860_a_13L特授兩街都僧統加大師册命師
012_0860_a_14L爲鑑智王師兩王同樞衣請益因命住
012_0860_a_15L塋源寺至理二年移錫于松林寺
012_0860_a_16L七十三僧夏六十三贈謚塔曰妙應
012_0860_a_17L有語錄兩卷歌頌雜著二卷新編水
012_0860_a_18L陸儀文二卷重編指頌事苑三十卷

012_0860_a_19L
近世有大比丘推明佛祖之道以開學
012_0860_a_20L曰普覺國尊其徒盖數百千人而能鑚
012_0860_a_21L堅挹深妙契啐啄者惟寶鑑國師爲然
012_0860_a_22L幼與群兒戱聚瓦石爲塔廟休則面壁
012_0860_a_23L若有思念形貌端嚴性又慈祥故親
012_0860_a_24L戚目爲小彌陀十歲投無爲寺禪師天

012_0860_b_01L천경선사天鏡禪師에게 나아가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으며, 구산선九山選의 상상과上上科를 수석으로 급제하였으나 버리고 보각국존에게 가서 학문에 전념하며 스스로 다짐하기를 심오한 이치를 깨닫기 전에는 그만두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 전에 보각국존이 꿈을 꾸었는데, 어떤 스님이 와서 스스로 오조五祖 법연法演43)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른 아침에 스님이 찾아왔다. 보각국존은 마음속으로 이상하게 여겨오다가 그의 민첩하고도 부지런함에 감탄하고서 여러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나의 꿈이 증험이 있다”고 하였다. 보각국존의 자리를 이어받아 개당開堂하니, 대중들을 통솔함에 법도가 있었고 강론도 하나로 그어 놓은 듯이 논리적이었으며, 온화한 모습에 한아閑雅함은 사람들보다 월등하였다.
덕릉德陵(충선왕)이 왕위를 물려주고 영안궁永安宮에 거처할 때에는, 여러 차례 중사中使(왕명을 출납하는 내시)와 수레를 보내어 맞아다가 조용히 도를 담론하곤 하였는데 더러는 해가 저물 때도 있었다. 이에 국왕이 대신들과 의논하여 조종祖宗의 전례대로 국사를 ‘오불심종해행원만悟佛心宗解行圓滿 감지왕사鑑知王師’로 책명冊命하고, 두 대의 임금이 함께 제자가 되어 배우기를 청하였으니 일찍이 없었던 일이었다. 두어 해 지나자 매우 간절하게 물러가기를 청하므로 왕께서 윤허允許하여 영원사塋源寺에 머무르게 하였다. 이 절은 본래 선원禪院이었던 것이, 원정元貞(원 나라 成宗의 연호) 무렵에 지자종智者宗(天台宗의 별칭)의 소유가 되었다가 국사 때문에 비로소 예전대로 복구되었다.
목욕을 한 후 설법說法을 하고는 여러 제자들과 이별을 고하였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荊棘林中下脚     가시 숲에 태어나서
干戈叢裡藏身     전란 속에 살아왔네.
今日路頭       오늘날 가는 길이
果在何處       과연 어디인지?
白雲斷處是靑山    흰 구름 끊긴 곳이 청산靑山인데
行人更在靑山外    떠나는 사람은 그 청산 밖에 있네.

그리고는 곧 방장실方丈室로 돌아와 걸상에 기댄 채 세상을 떠났다. 국사는 침착하고 중후重厚하여 말이 적었으며, 온갖 학문을 섭렵하여 깨닫지 못한 것이 없었다. 시문詩文을 지은 것이 총림叢林에 많이 퍼져 있었는데, 중오中吳의 몽산덕이蒙山德異 선사가 일찍이 「무극설無極說」을 지어 선편船便에 부쳐왔었다. 국사가 묵묵히 그 의미를 알아차리고 스스로 호를 ‘무극노인無極老人’이라고 하였다.
신은 듣건대, 부처님께서는 “복福과 지智로 자기 자신을 닦으므로 사람들이 호응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즐겨 말씀하셨다. 그 두 가지 중의 하나만 없어도 저 자신조차 세울 수 없는 법인데, 어찌 남에게 신임을 받겠는가? 국사는 무릇 일곱 차례나 품계品階가 올랐고, 여섯 차례 호號를 받았으며, 아홉 차례 이름난 절을 순례하였고, 두 차례나 내원內院에서 지냈으며, 온 나라 석림釋林의 우두머리가 되어 두 임금에게 스승의 예우를 받았다.

012_0860_b_01L鏡祝髮以九山選首登上七科棄去
012_0860_b_02L從普覺學自詭非睹閫奧不止始普覺
012_0860_b_03L夢一僧來自謂五祖演詰朝師往謁
012_0860_b_04L心獨恠之及是歎其敏而勤語衆曰
012_0860_b_05L吾夢有徵矣洎嗣席開堂其師衆規繩
012_0860_b_06L講若畫一而雍容閑雅過之

012_0860_b_07L
德陵謝位處永安宮屢遣中使輿而
012_0860_b_08L致之從容談道或至日暮於是諗國
012_0860_b_09L以祖宗舊例册命師爲悟佛心宗解
012_0860_b_10L行圓滿鑑智王師兩王摳衣前古未
012_0860_b_11L數年乞退許之命住塋源寺寺本
012_0860_b_12L禪院元貞中爲智者宗所有以師故始
012_0860_b_13L復其舊焉

012_0860_b_14L
盥浴說法別衆其略曰荊棘林中下脚
012_0860_b_15L干戈叢裡藏身今日路頭果在何處
012_0860_b_16L白雲斷處是靑山行人更在靑山外
012_0860_b_17L乃還方丈據床而逝4)况厚寡言
012_0860_b_18L無不窺爲詩文富贍行叢林門中
012_0860_b_19L蒙山異禪師甞作無極說附海舶以寄
012_0860_b_20L師默領其意自號無極老人

012_0860_b_21L
臣聞佛氏喜言福智修己而物應者也
012_0860_b_22L缺一於二不足以自立寧能信於人乎
012_0860_b_23L師凡七增秩六錫號九歷名藍再住
012_0860_b_24L內院爲一國釋林之首受兩王凾丈之

012_0860_c_01L그런데도 누구 하나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으며 모두 당연하게 여겼으니, 이른바 ‘복과 지혜, 이 두 가지가 다 존엄한 이’가 아니면 어찌 이와 같을 수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글을 지어 돌에 새겨 후세에 전하더라도 전혀 부끄러움이 없으리라고 신은 생각하나이다. 이제현이 지은 비문에서
혜근惠勤나옹懶翁의 시호는 선각禪覺이며 도호道號는 보제존자普濟尊者이다.
처음의 이름은 원혜元惠요, 영해부寧海府44) 사람이며, 속성俗姓은 아牙씨이다. 선관膳官 영令45) 구서具瑞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정鄭씨로서 영산군靈山郡 사람이다. 정씨의 꿈에 황금빛 새매가 날아와서 그의 머리를 쪼다가 갑자기 오색찬란한 알이 떨어져서 그 품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아기를 배어 연우延祐(元 英宗의 年號) 경신庚申(1320)년에 낳았다.
계묘癸卯(1363)년에 구월산九月山에 들어갔는데, 내시 김중손金仲孫을 보내 돌아오기를 청하였다. 을사乙巳(1365)년 3월에 궁궐에 나아가 물러가기를 청하여 비로소 숙원을 이루고 용문산龍門山과 원적산元寂山 등 여러 산을 다니다가 병오丙午(1366)년에 금강산에 들어갔고, 정미丁未(1367)년 가을에 청평사淸平寺46)에 머물렀다. 그해 겨울에는 예보암猊寶岩이 지공指空47)의 가사와 편지를 선사에게 주면서 지공화상의 치명治命48)이라고 하였다. 기유己酉(1369년)에 다시 오대산五臺山에 들어갔으며, 경술庚戌(1370)년 봄에 사도司徒 달예達叡가 지공의 영골靈骨을 받들고 와서 회암사會巖寺에 안치하자 선사께서 그 영골에 예를 올렸다. 그러고 나서 임금의 부름을 받고 궁궐에 이르러 광명사廣明寺49)에서 여름을 지냈으며, 초가을에 회암사로 돌아왔는데 9월에 공부선功夫選50)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사께서 거처하는 방을 강월헌江月軒이라 하였으며, 병진丙辰(1376)년 5월에 고요히 세상을 떠나셨으니, 세수世壽는 57세이고 법랍法臘은 38년이었다.
현릉玄陵(공민왕恭愍王) 재위 20년(1370) 庚戌 9월 10일에 왕은 선사를 서울로 불러들여 16일에 선사께서 머물고 있는 광명사로 나아가

012_0860_c_01L人無異論咸謂之宜非所謂福智
012_0860_c_02L二嚴者疇克如是哉其撰詞刻石
012_0860_c_03L示後世臣可以無愧矣并李齊賢撰碑文

012_0860_c_04L

012_0860_c_05L惠勤懶翁謚禪覺道號普濟尊者

012_0860_c_06L
初名元惠寧海府人俗姓牙氏具膳
012_0860_c_07L官令瑞之子母鄭氏靈山郡人鄭夢
012_0860_c_08L見金色隼飛來啄其頭忽墜卵五彩
012_0860_c_09L爛然入懷中因而有娠以延祐庚申生
012_0860_c_10L癸卯入九月山遣內侍金仲孫請還
012_0860_c_11L巳三月詣闕乞退始得宿願游龍門
012_0860_c_12L元寂諸山丙午入金剛山丁未秋住淸
012_0860_c_13L平寺其冬猊寶岩以指空袈裟手書授
012_0860_c_14L師曰治命也己酉再入臺山庚戌春
012_0860_c_15L司徒達叡奉指空靈骨來厝于檜岩
012_0860_c_16L師禮師骨因赴召結夏廣明寺5)秩初
012_0860_c_17L還檜岩九月卽功夫選也師所居室曰
012_0860_c_18L江月軒丙辰五月寂然而6)年五十
012_0860_c_19L法臘三十八

012_0860_c_20L
玄陵在位之二十年庚戌秋九月十日
012_0860_c_21L召師入京十六日就師所寓廣明寺
012_0860_c_22L底本冠註曰「反疑及」{編}底本冠註曰「徒
012_0860_c_23L疑從」{編}
底本冠註曰「卽政疑卽位」{編}
012_0860_c_24L本冠註曰「況疑沈」{編}
「秩」疑「秋」{編}
012_0860_c_25L本冠註曰「遊疑逝」{編}

012_0861_a_01L양종兩宗 오교五敎의 모든 승려들을 크게 모아 제각기 터득한 공부를 시험을 치르게 하시니, 그것을 공부선이라 하였으며, 임금이 직접 그곳에 나아가 시험을 주관하였다. 선사께서 향을 사른 후에 법좌에 올라 설법하였다. “고금의 함정[窠臼]을 모두 부숴버리고 범성凡聖의 자취를 다 쓸어 버려라. 납자衲子의 목숨[命根]을 끊어버리고 중생들의 의심 그물을 털어 버려라. 잡고 놓는 것은 손아귀에 달려 있고, 변화와 신통은 기미에 달렸으니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역대 조사들의 규범은 하나뿐이다. 이 모임에 있는 모든 스님들께서는 부디 사실대로 말씀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차례로 들어와 대답하게 하였는데 모두 몸을 굽히고 땀을 흘리면서 알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어떤 이는 이치[理]는 통달하였으나 현상[事]에는 걸리기도 하였으며, 어떤 이는 광란狂亂이 심해서 말에 실수가 있어 한마디만 하고 물러나기도 하였다. 이에 왕은 불편한 기색인 것 같았다. 그러나 환암 혼수幻庵混修 선사가 뒤에 이르자 선사는 그에게 삼구三句51)와 삼관三關52)에 대하여 차례로 물었다. 법회를 마친 다음 회암사로 돌아갔다.
우연히 지공指空 화상이 삼산양수三山兩水에 머물라고 말한 것을 기억하여 회암사로 옮기고자 하였는데, 마침 임금의 부름을 받아 그 절의 법회에 나아갔다가 임금의 청으로 그곳에 머물게 되었던 것이다. 선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선사先師 지공스님이 일찍이 이 절을 중수하려고 계획하였었는데 병란에 불타버렸으니, 감히 그 뜻을 계승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 하고는 곧 대중들과 전우殿宇를 더욱 넓힐 것을 의논하고 두 개의 전각을 짓고 나서 병진丙辰(1376)년 4월에 낙성 법회를 크게 열었다.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에서 말하기를 “회암사는 서울과 매우 가까워서 남녀 신도들의 왕래가 밤낮으로 끊이지 않기 때문에 혹 수행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하니 왕래를 금하도록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교지를 내려 형원사瑩源寺로 옮기도록 하고 빨리 출발하라고 재촉하였다. 선사께서 마침 병중인지라 남여藍輿53)를 타고 삼문三門 밖에 나아가 못 가에 이르렀는데 몸소 남녀들을 인도하여 열반문을 따라 나가도록 하니, 대중들이 모두 의아하게 여겨 실성할 정도로 부르짖어 곡哭을 하니 선사가 대중들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부디 힘써 노력하시오. 나 때문에 중도에서 공부를 멈추지 마시오. 내 걸음은 여주驪州에 가서 그칠 것이오.”
한강에 이르러 호송관 탁첨卓詹에게 말하였다. “내 병이 좀 심하니 배를 빌어 타고 갑시다.” 배를 타고 강물을 따라간지 7일 만에 비로소 여주에 이르렀다. 다시

012_0861_a_01L兩宗五敎諸山衲子試其所自得
012_0861_a_02L號曰功夫選上親幸視爲師拈香畢
012_0861_a_03L昇法座迺言曰破却古今之窠臼
012_0861_a_04L盡凡聖之蹤由割斷衲子命根抖擻
012_0861_a_05L衆生疑網操縱在握變通在機三世
012_0861_a_06L諸佛歷代祖師其揆一也在會諸德
012_0861_a_07L請以實答於是以次入對曲躬流汗
012_0861_a_08L皆曰未會或理通而礙於事或狂甚而
012_0861_a_09L1)夫於言一句便退上若不豫色然幻
012_0861_a_10L庵修禪師後至師歷問三句三關會罷
012_0861_a_11L還檜岩

012_0861_a_12L
偶念指空三山兩水之記欲移錫檜岩
012_0861_a_13L會以召赴是寺法會得請居焉師曰
012_0861_a_14L先師指空盖甞指畫重營而燬于兵
012_0861_a_15L敢不繼其志迺謀於衆增廣殿宇
012_0861_a_16L旣吿畢丙辰四月大設落成之會
012_0861_a_17L2)許以爲檜岩密邇京邑士女往還
012_0861_a_18L夜絡繹或至廢業禁之便於是有旨
012_0861_a_19L移住瑩營源寺逼迫上道師適疾
012_0861_a_20L輿出三門至池邊自導輿者從湼槃
012_0861_a_21L門出大衆咸疑失聲號哭師顧曰3)
012_0861_a_22L力努力無以余故中輟也吾行當止於
012_0861_a_23L驪興耳至漢江謂護送官卓詹曰
012_0861_a_24L疾劇乞舟行泝流七日方至驪興

012_0861_b_01L탁첨에게 말하였다. “조금 쉬고 싶소. 병이 조금 덜하면 갑시다.” 탁첨은 하는 수 없이 그 말을 따랐다. 신륵사에 머무르던 5월 15일에 탁첨이 또 빨리 가자고 독촉하자 선사가 말하였다. “그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내 지금 당장 떠나겠소.”
이날 진시辰時에 고요히 세상을 떠나시니, 그 고을 사람들은 오색의 찬란한 구름이 산꼭대기를 뒤덮는 것을 보았다. 화장을 마치고 세골洗骨 의식을 거행할 때 사방 수백 보 앞에 구름도 없이 비가 내렸다. 사리舍利 150과를 얻었는데 그 사리에 기도를 하였더니 558개로 나뉘어졌다. 사부대중이 타고 남은 재속에서 사리를 찾아 감추어 둔 것만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신령한 광명이 3일 만에 그쳤다. 달여達如 스님이 꿈에서 소대燒臺 밑에 용이 서려 있는 모습을 보았는데 그 형상이 마치 말처럼 생겼다고 하였고, 선사의 사리를 실은 배[喪舟]가 회암사에 돌아올 때는 비도 오지 않았는데 강물이 불어나자 모두 여주의 용[驪龍]의 도움이라고 말하였다. 8월 15일에 회암사 북쪽 언덕에 탑을 세웠고 정골사리頂骨舍利는 신륵사에 안치하여 선사가 입적한 곳을 드러내었으니, 석종石鐘으로 그 위를 덮은 것은 와전됨이 없기를 경계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일이 조정에 보고되었다.
선사의 나이 겨우 20에 이웃에 살던 친구가 죽자 여러 어른들께 물었다.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갑니까?” 모두들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속마음이 아프고 슬퍼 공덕산功德山으로 들어가서 요연了然54) 화상에게 귀의하여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용연화상께서 물었다. “너는 무엇 때문에 중이 되었느냐?” 선사가 대답하였다. “삼계를 초월하여 중생들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부디 그 방법을 열어보여 주십시오.” 화상이 다시 물었다. “지금 여기에 온 물건은 그 무슨 물건인고?” 선사가 대답하였다. “말할 수도 있고 들을 수도 있는 이놈이 여기에 오긴 했지만, 다만 수행해 나아갈 방법을 아직 알지 못합니다.” 화상이 말하였다. “나도 너처럼 아직 모르니 다른 스승을 찾아가는 것이 좋겠다.” 지정至正(元 順帝의 年號) 갑신甲申(1344)년에 회암사로 가서 밤낮으로 홀로 앉아 수행하다가 홀연히 깨닫고는 스승을 찾아 중국으로 가리라 결심하였다.
무자戊子(1348)년 3월에 연경燕京(지금의 북경)에 들어가서 지공 화상을 뵙고 문답을 나눈 뒤 서로 계합하는 것이 있음을 느꼈다. 지정 10년 경인庚寅(1350)년 정월에 지공은 대중들을 모아 하어下語55)하였으나 아무도 대답하는 이가 없었다. 선사가 대중 앞에 나아가 몇 마디 말하고서 세 번 절하고 나갔다. 지공은 서천西天 108대

012_0861_b_01L謂卓曰欲少留竢病間卽行卓勉從
012_0861_b_02L寓神勒寺五月十五日卓又督行
012_0861_b_03L師曰是不難吾當逝矣是日辰時
012_0861_b_04L寂然而逝郡人望見五色雲盖山頂
012_0861_b_05L火之洗骨無雲而雨者方數百步
012_0861_b_06L舍利一百五十五粒禱之分爲五百五
012_0861_b_07L十八四衆得之灰中以自秘者莫知
012_0861_b_08L其數神光照耀三日乃已釋達如夢
012_0861_b_09L見龍盤繞臺下其狀如馬及以喪舟還
012_0861_b_10L檜岩無雨水漲皆驪龍之助云八月
012_0861_b_11L十五日樹浮屠於寺之北崖頂骨舍利
012_0861_b_12L厝于神勒寺示其所終也覆以石鍾
012_0861_b_13L戒其無敢訛也4)開于朝

012_0861_b_14L
年甫冠隣友亡問諸父老曰死何之
012_0861_b_15L皆曰所不知也中心痛悼走入功德山
012_0861_b_16L投了然師祝髮師曰汝爲何事出家
012_0861_b_17L以超三界利羣生且請開示曰汝之來
012_0861_b_18L此是何物耶曰此能言能聽者能來爾
012_0861_b_19L但未知修進之術曰吾亦汝猶未之知
012_0861_b_20L可往求之有餘師至正甲申至檜岩
012_0861_b_21L夜獨坐忽得開悟尋師中國之志決矣
012_0861_b_22L戊子三月至燕都參指空畣問契合
012_0861_b_23L十年庚寅正月空集衆下語無能對者
012_0861_b_24L師出衆吐數語三拜而出空西天百八

012_0861_c_01L조사이다.
그해 봄에 남쪽으로 강소성江蘇省과 절강성浙江省을 유람하였고, 8월에는 평산平山 화상을 찾아뵈었는데 평산이 물었다. “전에는 어떤 사람을 뵈었는가?” 선사가 대답하였다. “서천西天의 지공화상을 뵈었는데 그는 날마다 천 개의 칼을 쓰더이다.” 평산이 말하였다. “지공의 일천 개 칼은 놔두고 너의 칼 하나만 가져오너라.” 선사가 평산 화상의 좌구坐具를 끌어 당겼다. 평산은 선상禪床에 쓰러지며 크게 외쳤다. “이 도적놈이 나를 죽이려 하는구나.” 선사가 말하였다. “제 칼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지만 살릴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고는 그를 부축하여 일으켰다. 평산은 설암雪岩이 급암及庵에게 주고, 급암이 다시 평산에게 주었던 옷과 불자를 선사에게 주어 믿음을 표하였다.
신묘辛卯(1351)년 봄에 보타낙가산寶陀洛迦山56)에 이르러서 관세음보살에게 예배하고, 임진壬辰(1352)년에 복룡산伏龍山57)으로 가서 천암千岩58) 화상을 뵈었다. 천암은 마침 강호江湖에서 천여 명의 사람을 모아 입실入室할 사람을 뽑고 있었다. 천암이 선사에게 물었다. “어디서 왔는가?” 선사가 대답하자 천암이 또 물었다. “부모가 낳기 전에는 어디서 왔는가?” 선사가 대답하였다.
“오늘은 4월 초이틀입니다.” 천암이 입실을 허락하였다.
그해에 북방으로 돌아와 다시 지공을 뵈었다. 지공은 법의法衣와 불자拂子와 범서梵書를 주었다. 선사는 연대燕代의 산천을 두루 돌아다니며 유람하고 한가로운 도인이 되었다. 그의 이름이 궁중에 소문이 나자 을미乙未(1355)년 가을에 성지聖旨를 받들어 대도大都 광제사廣濟寺에 머물렀다.
병신丙申(1356)년 10월 15일에 황제는 원사院使 야선첩목아也先帖木兒를 보내 금강가사金剛袈裟와 폐백을 하사하였고, 황태자는 금란가사와 상아로 만든 불자를 보내왔다. 선사께서는 가사를 받고 대중들에게 물었다. “담연湛然하여 텅 비어서 본래 한 물건도 없거늘 찬란한 이 물건은 어디서 나왔는가?” 대중들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선사는 천천히 말하였다. “구중궁궐 부처님의 말씀[金口]에서 나왔다.” 그리고는 곧 가사를 입고 향을 사르고 성상을 축원한 뒤에 법좌法座에 올라 주장자를 가로 잡고 두어 마디 말하고는 곧 법좌에서 내려왔다.
무술戊戌(1358)년 봄에 지공 화상과 이별하고서 수기를 받고 귀국하였다. 오는 길에 때로는 가고 때로는 머물면서 근기에 따라 설법해 주었다. 경자庚子(1369)년에

012_0861_c_01L代祖也是春南游江淛秋八月參平山
012_0861_c_02L山問曾見何人曰西天指空日用千釰
012_0861_c_03L山云且置指空千釰將汝一釰來
012_0861_c_04L以坐具提山山倒在禪5)▣▣▣賊煞我
012_0861_c_05L師曰吾釰也能殺人能活人乃扶起
012_0861_c_06L以雪岩所傳及庵衣拂子表信辛卯春
012_0861_c_07L抵寶陀洛迦山拜觀音壬辰至伏龍山
012_0861_c_08L參千岩適集江湖千餘人選入室岩問
012_0861_c_09L所自師旣答岩云父母未生前從甚
012_0861_c_10L處來師曰今朝四月初二日岩許之
012_0861_c_11L是歲北還再參指空空授以法衣拂子
012_0861_c_12L梵書於是游涉燕代山川蕭然一閑道
012_0861_c_13L人也名聞于內乙未秋奉聖旨住大
012_0861_c_14L都廣濟寺丙申十月望設開堂法會
012_0861_c_15L帝遣院使也先帖木兒賜金爛袈裟幣
012_0861_c_16L皇太子以金爛袈裟象牙拂子來錫
012_0861_c_17L師受袈裟問衆曰湛然空寂本無一物
012_0861_c_18L粲兮爛兮從何而出衆無對徐曰
012_0861_c_19L重宮金口中乃披拈香祝聖陞座橫按
012_0861_c_20L拄杖下數語便下戊戌春辭指空
012_0861_c_21L授記東還且行且止隨機說法庚子
012_0861_c_22L底本冠註曰「夫疑失」{編}底本冠註曰「許
012_0861_c_23L疑諫」{編}
底本冠註曰「賢疑努」{編}底本
012_0861_c_24L冠註曰「開疑聞」{編}
底本冠註曰「▣▣▣疑
012_0861_c_25L床叫曰」{編}

012_0862_a_01L오대산에 들어가 살았다.
신축辛丑(1370)년 겨울에 임금은 내첨사內詹事59) 방절方節을 보내 서울로 맞아들여 심요心要를 설법해 주기를 요청하면서, 수를 가득 놓은 가사袈裟와 수정으로 만든 불자를 하사하셨고 공주는 마노瑪瑙로 만든 불자를 드리고, 태후는 친히 보시를 하며 신광사神光寺에 머물기를 간청하였으나 끝내 사양하였다. 임금이 말하였다. “나도 불법에서 물러가겠소.” 그러자 부득이 신광사로 갔다.
11월에 홍건적이 경기 일대 지금의 개성일대를 유린하므로 서울을 남쪽으로 옮겨갔다. 승려들도 두려워서 피난하기를 청하자 선사가 말하였다. “명이 있으면 살아남을 것이거늘 도적인들 어찌하랴.” 며칠 동안 더욱 급하게 피난할 것을 청하였다. 그날 밤 꿈에 얼굴에 검은 글씨가 쓰인 어떤 신인神人이 의관을 갖추고 예를 올리며 말하였다. “대중들이 흩어지면 도적들은 틀림없이 이 절을 없앨 것이오니, 선사께서는 뜻을 굳게 가지십시오.” 다음날 토지신土地神에게 나아가 그 용모를 살펴보았더니, 꿈에서 보았던 바로 그 얼굴이었다. 도적은 결국 오지 않았다.
평생토록 세속의 문자를 익히지 않았는데도 시문詩文을 청하는 이가 있으면 붓을 들어 곧바로 써주곤 하였다. 경전의 글이 아니어도 이치와 의미가 매우 깊고 원대하였다. 만년에는 산수화 그리기를 좋아하여 도권道權(수령방백)들의 시달림을 받았으니, 아! 아! 도를 통하면 재능도 많아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이색이 지은 「선각탑비」

懶翁母夢       나옹 어머님의 꿈에
見金色隼       금빛 새매를 보았음이여
飛來啄頭忽墜卵    날아와 머리를 쪼다가 홀연히 알을 떨어뜨렸네.
五彩爛然入懷中    오색찬란함이 품속으로 들어왔는데
因有娠        그로 인해 아기를 가졌다네. 생선生選
관선冠宣
산중에 사는 스님이었다. 김부식金富軾60)이 평양[西京]을 근거지로 한 묘청妙淸61)을 토벌하기 위하여 군사를 모집할 때 산중에 살고 있던 관선이 이에 응하여 큰 도끼를 메고 앞장서서 나가며 적을 공격하여 수십 명을 죽이니 관군이 기세가 올라서 적을 크게 격파하였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62)
법언法言
지채문智蔡文63)이 자혜사慈惠寺64)에 나아가 주둔하였다. 거란 임금이 다시

012_0862_a_01L入臺山居焉辛丑冬上遣內詹事方節
012_0862_a_02L迎入京請說心要賜滿繡袈裟水精
012_0862_a_03L拂子公主獻瑪1)瑠拂子太后親施布
012_0862_a_04L請住神光寺固辭上曰於法吾亦
012_0862_a_05L退矣不得已卽行十一月紅賊蹂躙京
012_0862_a_06L擧國南徙僧徒震惧請避賊師曰
012_0862_a_07L唯命是保賊何能爲數日請益急
012_0862_a_08L夕夢一神人面有黑誌俱衣冠作禮曰
012_0862_a_09L衆散賊必滅寺願固師志明日至土地
012_0862_a_10L座視其貌則夢所見也賊果不至

012_0862_a_11L
平生未嘗習世俗文字有請題詠操筆
012_0862_a_12L立書若不經意理趣深遠晩好2)黑戱
012_0862_a_13L山水逼道權嗚呼道旣通多能也宜
012_0862_a_14L并李穡撰禪覺塔銘

012_0862_a_15L
懶翁母夢見金色隼飛來啄頭忽墜
012_0862_a_16L五彩爛然入懷中因有娠生選

012_0862_a_17L

012_0862_a_18L冠宣

012_0862_a_19L
山人也金富軾討西京賊妙淸有山
012_0862_a_20L人冠宣應3) [1] 荷大斧先出擊賊殺數
012_0862_a_21L十人官軍乘勝大破之勝覽

012_0862_a_22L

012_0862_a_23L法言

012_0862_a_24L
4)葵文出屯慈惠寺契丹主復遣乙

012_0862_b_01L을름乙凛을 보내 공격했다. 채문이 사정思政65)과 그리고 승려 법언과 함께 병사 9천 명을 거느리고 임원역林源驛66) 남쪽에서 적을 맞아 싸워서 3천여 명을 죽였으나 법언은 이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회강會綱67)
순응順應・이정理貞
두 대사는 중국에 들어가 법을 구하고 귀국하였다. 마침 신라 애장왕哀莊王(800~809)의 왕후가 등창을 앓고 있는 때라 중사中使(궁중 사신)를 두 대사에게 보내 그 사실을 고하니, 대사께서 오색실을 중사에게 주고 돌아가 왕에게 보고하도록 하였다. 왕이 스님의 말대로 해보았더니 등창이 나았다. 이에 임금이 감격하여 해인사海印寺를 창건하도록 하였다.
옛날 양梁나라 때에 보지공寶誌公68) 스님이 임종할 무렵 답산기踏山記를 문도들에게 주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죽은 뒤에 고려高麗69)에서 두 스님이 와서 법을 구할 터이니, 이 답산기를 그분들에게 주어라.” 그 뒤에 과연 순응・이정 두 대사가 중국에 들어가 법을 구하니, 보지공의 제자가 그들을 보고 답산기를 내주면서 임종 시에 있었던 말씀을 아울러 전하였다. 순응이 그 말을 듣고 법사의 장지를 물어 그곳을 찾아가서 말하였다. “사람에게는 고금古今의 차이가 있으나 법이야 어찌 고금의 차이가 있겠습니까?” 이렇게 말하고 밤낮 7일 동안 선정에 들어 법을 청하자, 묘의 문이 저절로 열리면서 지공이 나와 그들을 위하여 법을 설하고, 의발衣鉢을 전해 주었으며 또 용의 무늬가 그려진 가죽신을 주면서 당부하여 말하였다. “너의 나라 우두산牛頭山(지금의 가야산) 서쪽에 불법이 크게 일어날 곳이 있으니, 너희들은 본국에 돌아가 별비보대가람別裨補大伽藍 해인사를 지어라.” 말을 마치고는 묘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두 스님은 본국으로 돌아와 우두산으로 가서 동북쪽 고개를 넘어 다시 서쪽으로 내려가다가 사냥꾼을 만나 물었다. “그대들은 사냥하느라 이 산을 두루 돌아다녀 잘 알 것이다. 이 산에 절을 지을 만한 곳이 어디인가?” 사냥꾼이 대답하였다. “여기서 조금 더 내려가면 물이 고여 있는 곳(지금의 비로전毘盧殿 즉 대적광전大寂光殿 자리)이 있는데, 그곳에는 쇠로 된 기와(지금 비로전 지붕에 남아 있음)가 많이 있으니 그곳에 가서 살펴보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두 대사가 물이 고인 곳에 이르러 살펴보니 과연 마음에 흡족했다.

012_0862_b_01L凛擊之蔡文與思政僧法言率兵九千
012_0862_b_02L迎擊于林原驛南斬三千餘級法言戰
012_0862_b_03L會綱

012_0862_b_04L

012_0862_b_05L順應ㆍ理貞

012_0862_b_06L
兩大士入中國求法還國時新羅哀莊
012_0862_b_07L王后患發背遣中使吿之師授以
012_0862_b_08L5)王色線6)便還報於王王依言試
012_0862_b_09L患差王感之剏立海印寺

012_0862_b_10L
昔梁朝寶誌公臨終以踏山記囑門徒
012_0862_b_11L吾沒後有高麗二僧求法而來
012_0862_b_12L此記付之後果有順應理貞兩大士
012_0862_b_13L中國求法誌公門徒見之以踏山記付
012_0862_b_14L并說臨終時語順應聞而問法師葬
012_0862_b_15L而往尋之云人有古今法無前後
012_0862_b_16L七日七夜入定請法墓門自開誌公
012_0862_b_17L出爲之說法以衣鉢傳7)賻蟒皮鞋
012_0862_b_18L仍囑曰汝國牛頭山西8)法佛大興
012_0862_b_19L汝等還國可剏立別裨補大伽藍海
012_0862_b_20L印寺言訖還入二師還國至牛頭山
012_0862_b_21L自東北踰嶺而西遇獵人問曰汝等因
012_0862_b_22L遍閱此山有可以剏寺地否獵人答
012_0862_b_23L此去小下有一水泊處多有鐵瓦
012_0862_b_24L往觀之二師到水泊處見之甚叶其意

012_0862_c_01L풀을 깔고 앉아 선정에 들었더니 정수리에서 광명이 나와 붉은 그 기운이 하늘까지 뻗쳤다.
그때는 마침 신라 제39대(40대라야 옳다) 애장대왕의 왕후가 등창이 났는데, 아무리 좋은 약을 써도 효력이 없었으므로 임금이 근심하며 신하들을 여러 곳으로 나누어 보내 큰 덕을 지닌 이승異僧을 찾아 왕후의 병을 고쳐 주기를 바라고 있던 터였다. 사신이 길을 가다가 하늘에 뻗친 붉은 기운을 바라보고 신이神異한 사람이 있는가 싶어 산 아래 이르러 숲을 헤치고 골짜기를 향하여 수십 리쯤 들어갔으나, 시내는 깊고 골짜기는 좁아 빨리 갈 수가 없었다. 배회하며 한참이나 머물고 있었는데 홀연히 여우 한 마리가 바위를 타고 지나가는 것을 보고 중사의 마음에 이상한 생각이 들어 그 뒤를 따라갔다. 얼마쯤 더 가서야 두 분 스님이 선정에 들어 정수리에서 방광하는 것을 보았다. 공경히 예배하고 왕궁으로 함께 가기를 간청하였으나 두 스님은 허락하지 않았다. 중사가 왕후의 등창에 대하여 말하자, 스님은 오색실을 주면서 말하였다. “궁궐 앞에 무슨 나무가 있느냐?” 중사가 대답하였다. “배나무가 있습니다.” 대사가 말하였다. “그러면 이 실 한쪽 끝을 궁전 앞에 있는 배나무에 매고 또 한 끝은 종창이 난 곳에 대면 곧 나을 것이다.” 그 중사가 돌아가 임금에게 보고하고 스님이 일러준 대로 시행하자, 배나무는 말라 죽고 병은 나았다. 왕이 감격하여 공경하고 나라 사람들을 시켜 이 절을 짓게 하였다. 때는 애장왕 3년 임오壬午(802)년이었다. 해인사 고적

순응찬順應讃
東護大師       동쪽을 보호하신 대사요
南行童子       남쪽을 순행하신 동자70)시네.
身一片雲       몸은 한 조각 구름이요
志千里水       뜻은 천 리 물이로세.
浮囊永思       부낭71)을 길이 생각하다가
捨筏歸止       뗏목 버리고 돌아와 멈추셨네.
彼岸此岸       저 언덕이 곧 이 언덕이니
喩指非指       손가락이 손가락 아닌 것을 깨우쳐 주셨네.
天業受禪       천생의 업으로 선을 배웠으나
猶如覺賢       오히려 각현72)을 닮았네.
牛頭垂袷       우두산 자락에 자리를 잡고
象罔撢玄       무념73)으로 깊은 이치 탐구했네.
岩扄選勝       천연의 바위 문을 들어가 절터를 찾아

012_0862_c_01L藉草而坐入定頂門放光紫氣衝天
012_0862_c_02L時新羅第三十九王哀莊大王王后患
012_0862_c_03L發背良醫無效王患之遣使臣分往
012_0862_c_04L諸方冀得碩德異僧倘蒙扶救也
012_0862_c_05L使於路上望見紫氣疑其有異人
012_0862_c_06L山下披榛入洞至數十里許溪深峽束
012_0862_c_07L行不能前徘徊久之忽見一狐緣岩而
012_0862_c_08L中使心異之隨之而後及見二師
012_0862_c_09L入定光從頂門出敬信禮拜因請邀
012_0862_c_10L還王宮二師不許中使乃以王后發背
012_0862_c_11L之患吿之師授以五色線曰宮前有何
012_0862_c_12L答曰有梨樹師曰持此線一頭繫
012_0862_c_13L於梨樹一頭接於瘡口卽無患其使
012_0862_c_14L還報於王王依言試之梨枯患差
012_0862_c_15L感之敬之使國人剏立玆寺焉時哀莊
012_0862_c_16L王三年壬午并海印寺古籍

012_0862_c_17L
順應讃曰東護大師南行童子身一
012_0862_c_18L片雲志千里水浮囊永思捨筏歸止
012_0862_c_19L彼岸此岸喩指非指天業受禪猶如
012_0862_c_20L覺賢牛頭垂袷象罔撢玄岩扄選勝
012_0862_c_21L底本冠註曰「瑠疑瑙」{編}底本冠註曰「黑
012_0862_c_22L疑墨」{編}
底本冠註曰「幕疑募」{編}「葵」
012_0862_c_23L疑「蔡」{編}
底本冠註曰「王疑五」{編}底本
012_0862_c_24L冠註曰「便疑使」{編}
「賻」疑「贈」{編}底本
012_0862_c_25L冠註曰「法佛疑倒」{編}

012_0863_a_01L海岸提圖       해안에 절 짓기를 생각했네.
地崇洲渚       땅이 숭배하는 주서洲
天授林泉       하늘이 내린 임천이라.
化城口談       화성에서 입으로 설법하셨고
學藪心傳       학수에서 마음으로 전하였네.
影侔秋月       진영은 가을 달에 비길만하고
感隔春烟       감상은 춘연을 막은 듯하네.
綻火中蓮       탄화 속에 핀 연꽃 같구나.

이정찬利貞讃
孤雲獨鶴       외로운 구름과 학
儷影岩壑       그림자와 바위 골짜기를 짝하네.
草創蓮刹       연찰을 처음으로 지으시니
混沌逢鑿       혼돈 속에 거울을 만난 듯하네.
願霈無礙       바라건대 순조로워 걸림이 없어
人天有托       인천이 의탁하게 하소서.
二傑如生       두 분 스님 살아 계신 듯
九原可作       황천에서도
法正別座       정법의 특별한 자리 지으리이다.최치원崔致遠이 지음
희랑 승통希朗僧統신라 말의 해인사 주지이다.
신라 말엽에 승통僧統 희랑希朗이 이 절의 주지로 부임하여 화엄신중삼매華嚴神衆三昧를 얻었다. 그 당시에 우리 태조가 백제百濟 왕자 월광月光과 싸웠는데, 월광은 미숭산美崇山에서 몸을 보전하고 있었다. 식량이 풍족하고 병사들이 강하였으며, 또 적과의 싸움이 귀신과 같았으므로 태조의 힘으로는 제압할 수가 없었다. 이에 태조가 해인사에 들어가서 낭공朗公을 스승으로 섬기자 대사께서 용적대군勇敵大軍(夜叉王)을 보내 그를 돕게 하였다. 월광은 금으로 만든 갑옷을 입은 군사가 공중에 가득함을 보고 그것이 신병神兵임을 알고는 두려워하여 곧 항복하였다. 태조는 이를 인하여 희랑 스님을 공경하여 받들면서 토지[田] 5백 결結을 헌납하고, 옛 사찰을 중수하게 하였다. 해인사 고적
보조대사普照大師
송광사松廣寺 종루鐘樓 앞에 수각水閣이 있고, 그 앞에 나무 한 그루가 있다. 옛날 보조대사 지눌이 임종하려 할 때 이렇게 말하였다. “이 나무는 내가 죽은 뒤에 틀림없이 말라 죽을 것이니, 만일 나뭇가지와 잎사귀가 다시 살아나면 내가 다시 살아난 줄로 알라.” 그런데 지금까지 천 년이나 지났건만 나뭇가지와 잎사귀가 살아나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칼로 껍질을 벗겨보았더니 속에는 나무 진액이 나오고 그 진액은 생기가 있었다. 만일 정말로 말라 죽었다면 틀림없이 썩어서 꺾어졌을 텐데 지금까지도 평상시처럼 우뚝 솟아 있다.

012_0863_a_01L海岸提圖地崇洲渚天授林泉化城
012_0863_a_02L口談學藪心傳影侔秋月感隔春烟
012_0863_a_03L綻火中蓮

012_0863_a_04L
利貞讃曰孤雲獨鶴儷影岩壑草創
012_0863_a_05L蓮刹混沌逢鑿願霈無礙人天有托
012_0863_a_06L二傑如生九原可作法正別座并崔致
012_0863_a_07L

012_0863_a_08L

012_0863_a_09L希朗僧統

012_0863_a_10L
新羅末海印寺住持新羅末僧統希朗
012_0863_a_11L任持此寺得華1)巖神衆三昧時我太
012_0863_a_12L與百濟王子2)目光戰月光保美崇
012_0863_a_13L食足兵强且敵如神太祖力不能
012_0863_a_14L入於海印寺師事朗公師遣勇敵
012_0863_a_15L大軍助之月光見金甲滿空知其神兵
012_0863_a_16L惧而乃降太祖由是敬重奉事納田加
012_0863_a_17L五百結重新其舊海印寺古籍

012_0863_a_18L

012_0863_a_19L普照大師

012_0863_a_20L
松廣寺鐘樓前有水閣前有一樹昔普
012_0863_a_21L照大師臨化時曰此樹我去後必枯
012_0863_a_22L更生枝葉則知我再生今年千而不生
012_0863_a_23L枝葉人以刀括皮則內津津有生氣
012_0863_a_24L若眞枯則必朽倒而至今挺直如常

012_0863_b_01L택리지擇里志74)
조사祖師
금산사金山寺는 본래 그 깊이를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용추龍湫가 있던 곳으로 모악산母岳山 남쪽에 있다. 신라 시대에 조사祖師가 소금 여러 만 섬으로 이 용추를 메웠더니 용이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그로 인하여 거기다가 터를 다지고 큰 전각을 지었는데 전각의 네 모퉁이 계단 아래로 작은 냇물이 빙 둘러 흘렀다. 지금은 누각이 높이 솟아 있는데 그 위에서 물의 깊이를 밝게 통해 볼 수 있다. 호남의 유명한 가람이다.택리지擇里志
이거인李居仁합천夾川 사람이며, 이서里胥였다.
이거인李居仁은 합천 사람인데 겉보기에는 비록 경박하고 쌀쌀맞은 듯하지만, 성품만은 온순하고 어질었다. 항상 이서의 직책이 자기의 임무라고 생각하였으며, 향인鄕人들은 그를 지목하여 어진 관리라고 말했다.
당나라 대중大中 무술戊戌75)년 가을에 여러 마을로 다니면서 국세[王租]를 재촉하며 거두다가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강아지 한 마리를 얻었는데 그 강아지는 눈이 세 개나 달려 있었다. 집으로 데려다가 애지중지 길렀는데 그 강아지의 됨됨이가 보통 강아지의 품격과는 달라서 그 모습은 마치 사자와 같았으나 성질은 어진 사람 같았다. 하루에 오직 한 끼니만 먹었으며, 매우 성실하게 주인을 섬겨서 이거인 부부가 길을 떠날 때는 5리 밖까지 나와 배송拜送하고, 돌아올 때는 5리 밖까지 나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반갑게 맞아 모시고 돌아오곤 하였다. 그 때문에 주인은 더욱더 사랑하고 끔찍하게 생각해 주었으며, 쓰다듬어 주고 불쌍하게 여겼다.
3년째 되는 갑자甲子(1024)년 가을에 강아지가 아무 병도 걸리지 않았는데 앉은 채로 해를 쳐다보다가 죽었다. 관을 잘 만들어서 땅에 묻고 제물도 갖추어 제사까지 지내주었으며, 마치 자식을 잃은 듯이 애통해하였다. 다시 2년 후인 병인丙寅(1026)년 겨울 10월에 거인도 죽었는데 처음에 어떤 전각의 문 앞에 이르러 살펴보니 어떤 왕이 앉아 있었다. 얼굴에는 세 개의 눈이 달려 있었으며, 머리에는 오봉관五峯冠을 썼고, 손에는 보홀寶笏을 들고 있었으며, 몸에는 붉은 비단 옷을 입었고, 입술은 아주 선명한 붉은 색이었으며, 이는 가지런한 것이 마치 조개껍질 같았다. 상아象牙로 만든 의자에 높이 걸터앉아 있었는데 좌우에 종관從官들은 모두

012_0863_b_01L里志

012_0863_b_02L

012_0863_b_03L祖師

012_0863_b_04L
金山則本龍湫深不測在母岳山南
012_0863_b_05L新羅時祖師以鹽累萬塡實之龍徙
012_0863_b_06L仍築基建大殿殿四角階細澗環圍
012_0863_b_07L至今樓閣㟴煥洞省深邃亦湖南大名
012_0863_b_08L擇里

012_0863_b_09L

012_0863_b_10L李居仁

012_0863_b_11L夾川人里胥也
李居仁夾川人也
012_0863_b_12L雖薄寒性度溫良恒以里胥爲己任者
012_0863_b_13L鄕人目爲仁胥焉有唐大中戊戌年秋
012_0863_b_14L催王3) [2] 於聚落暮歸還家乃於路上
012_0863_b_15L得一狗兒盖三目也率豢家中其爲
012_0863_b_16L狗也逈出庸格形如獅子性若賢人
012_0863_b_17L日惟一食事主甚勤出從五里拜送
012_0863_b_18L入迎五里隨侍以歸由是愛而念之
012_0863_b_19L撫而恤之及至三年甲子秋狗子無疾
012_0863_b_20L而坐視日而死居仁庀棺以4)具奠
012_0863_b_21L以祭如喪家豚也越丙寅冬十月居仁
012_0863_b_22L亦死初到門觀有一王面開三眼
012_0863_b_23L冠五峯手擎寶笏身著緋衣唇如激
012_0863_b_24L齒如齊貝高踞牙床左右從官

012_0863_c_01L까만 모자에 붉은 옷을 입고 있었다. 소머리 모양의 험악하게 생긴 나졸과 말 형상의 나찰들이 삼엄하게 주위에 나열해 있는 모습이 마치 국왕이 공사公事를 판결하는 형상 같았다.
그 세 눈 달린 왕이 거인을 보더니만 즉시 마루에서 내려와 손을 잡고 말하였다. “아! 슬프옵니다. 주인이여, 어찌 여기에 왔습니까? 제가 지난번에 명부冥府에서 논죄를 당하여 털옷을 입고 꼬리를 달고 인간 세상으로 3년 동안 귀양을 갔을 때 주인의 극진한 대우를 입어 무사히 다시 이곳에 와서 복직되었으니 감사한 마음 억제하지 못하겠습니다. 지금 갑자기 서로 뵙게 되니 어찌 감히 그 은덕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서 부축하여 계단 위로 안내하였다. 거인은 그제야 그 연유를 깨닫고 눈물을 닦으며 말하였다. “미천한 사람이 본디 배우지 못하여 무식한 자라 장차 명부의 문초에 대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지 못하겠사오니, 바라옵건대 대왕께서 가르쳐 주시어 이롭고 기쁘게 하여 주십시오.” 왕이 말하였다. “훌륭합니다. 어진 분이시여, 제 말씀을 자세히 듣고 명부의 성인에게 진술하십시오.”
거인이 머리를 숙이고 명을 듣고 난 뒤에 사자를 따라 명부에 들어가니 염라대왕이 물었다. “너는 인간 세계에 사는 동안 어떤 인연을 지었느냐?” 거인이 대답하였다. “저는 젊었을 때부터 관사官使가 되어 선근善根을 심을 겨를이 없었습니다. 앞으로 큰 인연을 짓고자 마음먹었었는데, 명을 받들어 여기에 오게 되어 영원히 마음에 슬픔이겠습니다.” 염라왕이 말하였다. “앞으로 바짝 다가오시오.” 거인이 염라왕의 자리 밑까지 다가가니 왕이 말하였다. “너는 무슨 일을 하려다가 미처 이루지 못하였는지 바른대로 말해 보라.” 거인이 대답하였다. “미천한 제가 삼가 듣건대 법보法寶가 가장 귀한 것이라고 하더이다. 장차 대장경을 간행하여 선포하려고 하였었는데 미처 이루지 못했습니다. 부질없이 마음으로 서원만 했을 뿐 결국은 매듭을 짓지 못하여 그 때문에 민망하게 생각하고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대왕이 뜰에 내려와 읍揖하며 말하였다. “전상으로 오르십시오. 잠시나마 함께 머물고 싶습니다.” 거인이 굳게 사양하자, 대왕이 즉시 판관에게 명하여 귀록鬼籙에서 이름을 지우게 하고 신하와 함께 문밖까지 나와 위로하며 전송하였다.
거인이 물러나

012_0863_c_01L烏冠朱服者牛頭惡卒馬面羅刹
012_0863_c_02L衛嚴列如世國王行公之狀也得見居
012_0863_c_03L王卽下堂而執手曰嗟嗟主人
012_0863_c_04L至於此也吾頃適被㝠論衣毛帶尻居
012_0863_c_05L謫三霜賴主人之遇善善來復職
012_0863_c_06L不自抑矣今忽相省敢忘其德耶
012_0863_c_07L引上階居仁始悟其由乃拭淚曰賤子
012_0863_c_08L素是不學無知者將何以控辭奉招於
012_0863_c_09L㝠府乎伏願大王示敎利喜王曰
012_0863_c_10L仁者諦聽吾說以供㝠聖居仁俯
012_0863_c_11L首聽命而後隨使入㝠府則閻王問曰
012_0863_c_12L汝在人間作何因緣答曰居仁自少爲
012_0863_c_13L官使無暇5)拫善矣將欲作大事因緣
012_0863_c_14L承命天歸永慨6)于懷也王曰使來
012_0863_c_15L7)腋前居仁趍進座下王曰汝欲何事
012_0863_c_16L而未遂以直言之居仁曰賤子伏聞
012_0863_c_17L法寶之至貴將欲刊板宣布而未能焉
012_0863_c_18L徒有志願終無事實以此悶懼大王
012_0863_c_19L卽庭揖曰願須登殿小歇一時居仁
012_0863_c_20L固辭大王卽命判8)名除鬼籙與僚
012_0863_c_21L佐步至門外慰而拜送焉居仁退至三
012_0863_c_22L底本冠註曰「巖疑嚴」{編}底本冠註曰「目
012_0863_c_23L疑日」編
底本冠註曰「祖疑租」{編}「理」疑
012_0863_c_24L「埋」{編}
底本冠註曰「拫疑植」{編}「于」疑
012_0863_c_25L「子」{編}
「腋」疑「眼」{編}「宦」疑「官」{編}

012_0864_a_01L삼목왕三目王의 처소에 이르니 왕이 미리 자리를 마련해 놓고 기다리고 있다가 그를 자리에 오르게 하고는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단단히 부탁하며 말하였다. “주인께서는 일이 크다고 해서 절대로 염려하지 마십시오. 집에 돌아가거든 종이를 사다가 문방文房에 나아가 권선문勸善文을 쓰십시오. 그리고 그 권선문의 제목은 ‘팔만대장경판 권공덕설八萬大藏經板勸功德說’이라 하고, 관가에 보내 관인官印을 찍어 집에 가져다 놓고 제가 갈 때까지 기다리시면 제가 장차 인간세계에 순무巡撫 차 내려갈 것입니다.” 그리하여 거인이 공손한 모습으로 물러나 하품하고 기지개를 켜고 깨어나니 한바탕 꿈이었다.
권선문을 지어 관가의 도장을 받아놓고 기다렸는데 정묘丁卯(1027)년 봄 3월 16일에 신라국 공주 자매가 한꺼번에 돌림병에 걸려서 병상에 누워 이렇게 말하였다. “부왕이시여, 빨리 조칙을 내려 대장경 화주를 불러오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소녀들은 죽고 말 것입니다.” 왕이 즉시 온 나라에 교지를 선포하였다. 합천 태수가 그 사실을 알고서 거인을 불러 말을 번갈아 갈아타며 속히 서울로 올라가라 하였다. 거인이 궐문에 당도하니 관리[謁者]가 궁궐로 안내하자 공주가 말하였다. “화주化主님 잘 오셨습니다. 근래 남은 근심은 없으셨습니까. 저는 바로 삼목귀왕입니다. 당신과 약속한 것이 있어서 여기에 왔습니다.” 공주는 다시 국왕에게 말하였다. “이 사람은 지난날 명부에 들어갔다가 명부가 양계陽界76)로 보내어 경전을 간행하여 유포하도록 권한 사람입니다. 바라옵건대 국왕께서는 큰 시주자가 되어 큰일을 성취하도록 도움 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만일 그렇게만 된다면 공주의 질환이 나을 뿐만 아니라, 나라의 운도 영원히 견고해질 것이요, 또한 수명도 오래 누릴 것입니다.” 왕이 예를 드리고 말하였다. “그렇게 실행하겠노라.” 대답을 듣고 삼목왕은 거인과 석별의 정을 나누고 몸을 나타내어 가버렸다. 공주는 본심을 다시 회복하고 곧 자리에서 일어나 절하고 부왕父王과 모후母后에게 아뢰었다. “명부의 세계에서도 그렇게 착한 일을 하는데 하물며 양계의 어진 나라이겠습니까? 부모님께서는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왕이 말했다. “네 말대로 하겠다.”
이리하여 매우 좋은 화주를 기다려 사사롭게 저축했던 재물을 다 내놓아 보시하고, 내외內外에 명을 내려 솜씨 좋은 공인工人을 불러 모으고,

012_0864_a_01L目王所王預令設席以待使之登坐
012_0864_a_02L雍容叙話載叮載囑曰主人萬萬莫以
012_0864_a_03L事大爲慮還家貿紙就於文房寫成
012_0864_a_04L勸疏題曰八萬大藏經板勸功德說云
012_0864_a_05L納官踏印置之君家佇待我歸則我
012_0864_a_06L將以巡撫於人1)門也於是居仁唯唯
012_0864_a_07L而退欠伸而覺乃一夢也依述勸文打
012_0864_a_08L2)侍之及丁卯之春三月旣望新羅
012_0864_a_09L國公主姉妹同時行疫臥病在床
012_0864_a_10L父王急詔大藏經化主來若不爾者
012_0864_a_11L等從此永訣王卽宣旨國中夾州太守
012_0864_a_12L已知其事召居仁傳乘上京都直赴
012_0864_a_13L3)謁者入通公主曰善來化士
012_0864_a_14L4)迎無餘患否我是三目鬼王也與君
012_0864_a_15L有約故來此也又語國王曰此人頃
012_0864_a_16L入㝠府㝠府勸送陽界刻經流傳者
012_0864_a_17L願國王作大檀越助成大事爲何如
012_0864_a_18L若爾則非徒公主無患國祚永固王亦
012_0864_a_19L享壽矣王拜命曰而後又與居仁
012_0864_a_20L有惜別之態現身而去焉公主等
012_0864_a_21L得本心卽起而拜白於父王母后曰
012_0864_a_22L5)宜界6)倘做善事况陽界仁國乎父母
012_0864_a_23L其毋忽哉王曰諾於是待化主甚善
012_0864_a_24L盡傾私儲以施之申命內外集諸良工

012_0864_b_01L거제도巨濟島에서 재나무에 경전을 새겨서 금으로 장식하고 옷칠하여 가야산 해인사에 운반해 안치하고 열두 번이나 찬양하는 법회를 열었다. 이것은 모두 명부에서 그렇게 되도록 한 것이요, 진실로 귀왕鬼王의 사사로운 생각이 아니었다. 거인 부부도 오랫동안 함께 건강하게 살다가 극락세계로 갔다고 전해진다.
아! 불법佛法은 어느 곳에서나 실로 보배롭지 않음이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명부의 왕이 그것을 보배로 여기면 음계陰界를 잘 다스릴 것이요, 인간 세계의 군주가 그것을 보배로 여기면 백성들의 마음을 다 얻을 것이며, 천왕天王이 그것을 보배로 여기면 오래도록 행복을 누릴 것이요, 각황覺皇께서 그것을 보배로 여기면 모든 품류品類에 어짊을 끼치게 될 것이라고 한 설명들이 대장경 발문跋文에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흠차모국기欽差茅國器
보덕普德77)
보덕은 일찍이 반룡산盤龍山에서 살았었다. 하루는 제자에게 말하길 “고구려高句麗에는 오직 도교道敎만 있을 뿐 불법은 숭상하지 않으니, 몸을 편안히 하고 난리를 피할 곳이 어디인가?” 제자가 “전주 고달산高達山이 바로 그런 곳입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건봉乾封(唐 高宗의 年號) 2년 정묘丁卯(667)년 3월 어느 날 제자가 문을 열고 보니 집이 어느새 고달산에 옮겨져 있었으며 당호는 비래당飛來堂으로 반룡산으로부터 1천여 리쯤에 있었다. 최치원이 전기를 지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휴정서산대선사休靜西山大禪師
자字는 현응玄應이요, 또 호는 청허당淸虛堂이다. 속성俗姓은 최씨崔氏로 완산完山 사람이다. 이름은 여신汝信이요, 부친은 기자전箕子殿 참봉參奉 세창世昌이다. 모친은 김씨金氏가 기이한 꿈을 꾸고 경진庚辰(1520)년에 선사를 낳았다. 나이 21세 되던 해에 숭인崇仁 장로長老를 찾아가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으며, 일선一禪78) 화상에게서 계를 받았다. 31세 때에 선과선禪科選에 응시하여 급제한 다음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에까지 올랐다.
기축己丑(1589)년 역옥逆獄 사건이 일어났을 때

012_0864_b_01L巨濟島繡經於梓莊金而塗漆運鎭
012_0864_b_02L于伽倻山之海印寺設十二7)度讃之會
012_0864_b_03L此皆㝠府之使然實非鬼王之私意
012_0864_b_04L者也居仁之夫婦考壽康寧俱登樂
012_0864_b_05L邦云8)陽法之爲寶也無處不9)
012_0864_b_06L也明矣何則㝠王寶之而善治陰界
012_0864_b_07L人主寶之而擧得民情天王寶之而長
012_0864_b_08L年快樂覺皇寶之而垂仁萬品云云說
012_0864_b_09L載於大藏後跋欽差茅國器

012_0864_b_10L

012_0864_b_11L普德

012_0864_b_12L
甞居盤龍山一日謂弟子曰句麗惟存
012_0864_b_13L道敎不崇佛法安身避亂有何處所
012_0864_b_14L答曰全州高達山是也乾封二年丁卯
012_0864_b_15L三月日弟子開戶視之則堂已移於高
012_0864_b_16L達山號曰飛來堂去盤龍一千餘里
012_0864_b_17L崔致遠作傳勝覽

012_0864_b_18L

012_0864_b_19L休靜西山大禪師

012_0864_b_20L
字玄應又號淸虛堂俗姓崔氏完山
012_0864_b_21L名汝信父箕子殿參奉世昌母金
012_0864_b_22L有異夢生師於庚辰年廿一投崇
012_0864_b_23L仁長老落髮從一禪和尙受戒卅一中
012_0864_b_24L禪科選至禪敎兩宗判事己丑之獄

012_0864_c_01L요승妖僧이 무고하는 바람에 감옥에 갇혔었으나 선묘宣廟(宣祖)가 즉시 석방하도록 명하고, 임금이 그린 그림(御畵)와 임금이 지은 시(御詩)를 하사하였으며, 산문으로 돌아가도록 허락하였다. 임진壬辰(1592)년 왜란이 일어나자 선사가 칼을 들고 행재소行在所79)에 다다르니, 선묘께서 명하여 팔도도총섭八道都總攝을 제수하였다. 선사는 문도들을 거느리고 승병僧兵을 나누어 명나라 군사[天兵]와 서로 도와가며 나아가 싸워 왜적의 머리를 벤 것이 매우 많았다. 그리고는 어가御駕를 호종하여 도성都城(서울)으로 돌아와서는 예전에 살던 곳으로 돌아가기를 청하니 선묘께서 허락하고 호를 내려 ‘국일도 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 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總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라 하였다. 갑진甲辰(1604)년에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서 앉은 채로 승화昇化하시니 세수는 85세이고 선랍禪臘은 65였다. 저술로는 『선가귀감禪家龜鑑』・『선교석禪敎釋』・『운수단가사雲水壇謌詞』・『삼가일지三家一指』 각 1권과 『청허당집淸虛堂集』 8권이 간행되었다. 그의 필적은 소략疏略하고 굳세면서도 치밀하다고 말들 하며, 묘향산 수충사酬忠祠와 표충사表忠祠에 배향配享되어 있다.
쌍흘雙仡이 앞으로 나아가 말하였다. “세간법世間法과 출세간법出世間法은 안팎이 상반相反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로부터 공문空門(佛家)의 학덕이 높은 스님[耆宿]들로서 국가의 일[王事]에 힘을 쏟은 분들이 적었건만, 우리 스님께서는 궁벽한 납자衲子의 신분으로 한마디 말로써 임금의 인정을 받아 정성스러운 친필을 받았으며, 왜구의 난이 일어나자 마침내 의義를 위해 떨쳐 일어나 무리를 모아 명나라 군대와 협조하여 나라를 회복시키는 공을 세움으로써 중화中華와 이적夷狄 모두에게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대사의 마음에 어찌 일찍이 계획한 것이 있었겠습니까? 인연을 따라 행동하다 보니 그렇게 공적이 탁월하게 나타난 것일 뿐, 마음은 공유空有에 두었는데도 행적[事]이 충의忠義에 빛났으니 감히 이런 점들 때문에 굳이 청하게 된 것입니다.”
어머니 김씨金氏가 대사를 임신했을 때 기이한 꿈을 꾸었는데, 태어난 지 세 살이 되었을 때 홀연히 어떤 노인이

012_0864_c_01L被誣逮獄宣廟卽命釋之曰賜御畵御
012_0864_c_02L仍許還山壬辰之亂師杖釰赴行
012_0864_c_03L宣朝命授八道都總攝師率門徒
012_0864_c_04L分僧與天兵助援進戰斬馘甚夥乃扈
012_0864_c_05L駕還都請還舊棲宣廟許之賜號曰
012_0864_c_06L國一都大禪師禪敎都總攝扶宗10)拊敎
012_0864_c_07L普濟登階尊者甲辰於妙香圓寂庵坐
012_0864_c_08L八十五禪臘六十五所著禪家龜
012_0864_c_09L禪敎釋雲水壇三家一指各一卷
012_0864_c_10L淸虛堂集八卷刊行筆蹟踈勁有致云
012_0864_c_11L享于妙香酬忠祠密陽表忠祠

012_0864_c_12L
雙仡進曰世出世法外內不相反
012_0864_c_13L昔空門耆宿鮮有寘力王事者吾師以
012_0864_c_14L窮衲子一言而受知聖祖蒙宸翰之窮
012_0864_c_15L及倭難之作卒有奮義聚衆協助
012_0864_c_16L討克賛恢複之烈名聞華夷夫吾師
012_0864_c_17L之心何嘗有所作也隨緣應迹功用
012_0864_c_18L卓然心寘乎空有而事光乎忠義
012_0864_c_19L藉是以固請

012_0864_c_20L
母金氏娠師有異夢生三歲忽有老
012_0864_c_21L「門」疑「間」{編}底本冠註曰「侍疑待」{編}
012_0864_c_22L「丁」疑「下」{編}「迎」疑「近」{編}底本冠註
012_0864_c_23L曰「宜疑㝠」{編}
「倘」疑「尙」{編}「度」疑
012_0864_c_24L「慶」{編}
「陽」疑「佛」{編}「實」疑「寶」{編}
012_0864_c_25L「拊」疑「樹」{編}

012_0865_a_01L찾아와서 말하였다. “어린 사문沙門이 보고 싶어서 왔다.” 그렇게 말하고는 마침내 아이의 손을 잡고 몇 마디 주문呪文을 외우더니 정수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하였다. “이름을 운학雲鶴이라고 짓는 것이 좋겠다.” 말을 마치자마자 문을 나갔는데, 간 곳을 알 수가 없었다. 어렸을 적에 여러 아이들과 놀 때는 반드시 부처님 놀이를 하였다. 조금 자라나면서부터는 용모와 인품[風神]이 빼어났으며, 말하는 것이 사람을 놀라게 하였으므로 고을 수령[州牧 : 李思曾]이 사랑하여 뛰어난 동자라고 칭송하였다. 10세에 양친을 모두 여의고 의지할 곳 없는 신세가 되자 고을 수령이 데리고 서울에 가서 성균관[泮齊]에서 학업을 닦게 하였다. 그 후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번번이 실패를 맛보자, 뜻을 얻지 못한 답답한 심경에 마침내 남쪽으로 유력游歷하다가 두류산頭流山(지리산의 다른 이름)에 들어갔다가 암동巖洞의 경치에 발걸음을 멈추고 내전內典(佛經)을 두루 열람하다가 홀연히 세속을 떠나야겠다는 마음이 생겨 동료들과 작별하며 시를 지었으니 그 시는 다음과 같다.

汲水歸來忽回首    물 긷고 돌아가다 언뜻 머리 돌려 보니
靑山無數白雲中    흰 구름 사이로 무수한 청산이 솟아 있네.

마침내 숭인崇仁 장로를 찾아가 머리를 깎고 일선一禪 화상에게서 계를 받으니, 이때가 가정嘉靖(明 世宗의 年號) 경자(중종 35, 1540)년이요, 대사의 나이 21세 되던 해였다. 뒤이어 영관靈觀80)대사를 찾아뵙고 인가印可를 받았다. 그러다가 뒤에 시골 마을을 유행游行하던 중 한낮에 닭 우는 소리를 듣는 순간 홀연히 깨달음을 얻고 탄식하며 말하였다. “차라리 한평생 어리석은 놈[癡獃漢]이 될지언정 글을 다투는 법사는 되지 않으리라.” 그러고는 붓을 들어 낙엽에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髮白心未白      머리털은 희어져도 마음은 새지 않는 것을
古人曾漏洩      옛사람이 일찍이 밝혀 놓았지.
今聽一聲鷄      이제 닭 울음소리 한 번 듣고는
丈夫能事畢      대장부 해야 할 일 모두 끝냈네.

이때부터 관동關東 지방의 명산名山을 뜬구름처럼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서울[京師]에 들어와 선과선禪科選에 응시하여 합격하였으며, 선選에서부터 계속 승진하여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의 지위에 이르렀는데, 얼마 있다가 모든 것을 버리고 풍악산楓嶽山(금강산)으로 들어가서 삼몽음三夢吟81)을 지었다. 일선一禪 화상이 입적入寂할 즈음에 참언讖言을 남겼으니, 그 내용은 이러하다.

單衣有債       홑옷 입은 사람에게 빚이 있으니
木人爭靑       휴정이네.

이 말은 다리 없는 사람이 남쪽 바다에서 온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때마침 선사가 모처某處에서 이곳에 이르러 화상의 사리舍利에 기도를 하자 신령스럽게 반응하여 환하게 빛이 났다. 대사가 비록 자취를 감추고 광채를 감췄으나 도인道人으로서의 명성이 갈수록 높아진 결과 괜히 뻐기면서 아만我慢에 사로잡힌 무리들까지 소문만 듣고도 마음속으로 존경하여 서로 다투어 스승으로 모시려 하였다.
기축己丑(1589)년 역모의 옥사[逆獄]82)가 일어났을 때 요승妖僧이 무고하는 바람에 체포되는 몸이 되었으나 신문을 받는 과정에서 그 대답이 명쾌하였을 뿐만 아니라

012_0865_a_01L叟來曰委訪少沙門耳遂提兒呪數
012_0865_a_02L摩其頂曰宜名以雲鶴言訖出門
012_0865_a_03L不知所之兒時嬉戱必以佛事稍長
012_0865_a_04L風神穎秀出語驚人爲州牧所愛稱以
012_0865_a_05L奇童十歲1)表怙恃伶仃無所依州牧
012_0865_a_06L擕至京就學于泮齊屢試輙屈鬱鬱
012_0865_a_07L不得意遂南游入頭流窮巖洞之勝
012_0865_a_08L徧閱內典忽有出世之志辭訣同伴
012_0865_a_09L有詩云汲水歸來忽回首靑山無數白
012_0865_a_10L雲中遂投崇仁長老落髮從一禪和尙
012_0865_a_11L受戒時嘉靖庚子師年二十一歲矣
012_0865_a_12L尋參靈觀大師得印可後因遊行村落
012_0865_a_13L聞午鷄忽然有省嘆曰寧作一生癡
012_0865_a_14L獃漢不欲做鉛槧阿師拈筆題落葉曰
012_0865_a_15L髮白心未白古人曾漏洩今聽一聲鷄
012_0865_a_16L丈夫能事畢自是雲游關東諸名山
012_0865_a_17L入京師赴禪科中選陞至禪敎兩宗判
012_0865_a_18L無何拂衣入楓岳作三夢吟一禪
012_0865_a_19L師臨滅有讖云單衣有債木人爭靑
012_0865_a_20L不是無脛來自南溟會師自某至
012_0865_a_21L禱舍利靈應赫然師雖藏蹤晦彩
012_0865_a_22L道譽益隆虛驕我慢之徒望風心醉
012_0865_a_23L爭就北面

012_0865_a_24L
己丑逆獄起爲妖僧所誣被逮對獄明

012_0865_b_01L선묘宣廟 역시 평소 그 명성을 듣고 있었으므로 즉시 석방하도록 명하였다. 그러고는 선사를 인견引見하여 임금이 직접 지은 절구絶句 1수와 임금이 직접 그린 묵죽墨竹 병풍을 하사하였는데, 선사가 그 자리에서 즉시 시를 지어 바치며 은혜에 감사드리자 임금이 더욱 칭찬을 하며 상을 후하게 내린 뒤 산사山寺로 돌아가게 하였다.
임진壬辰(1592)년 왜란에 선묘가 서쪽으로 피난을 하자 선사가 산에서 내려와 행재소行在所에 나아가 임금을 알현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나라에 큰 난리가 났는데 산인山人이라고 해서 어찌 저 혼자만 편안히 있을 수가 있겠는가?” 선사가 눈물을 훔치며 목숨을 바쳐 나라에 보답하고 싶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임금이 더욱 가상하게 여겨 선사에게 팔도선교도총섭八道禪敎都摠攝의 직책을 제수하였다. 이에 선사가 여러 상족上足들에게 개별적으로 명하여 승병僧兵을 규합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유정惟政은 관동關東에서 일어났고, 처영處英83)은 호남湖南에서 일어나 권율權慄의 병력과 합친 뒤 행주幸州에서 왜적을 섬멸하는 전과를 올렸다. 한편 선사는 몸소 문도門徒 1천 5백 명을 이끌고 명나라 군대를 따라 진격해서 평양平壤을 수복하였다. 이때 명明나라의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과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 및 삼협三協 총병摠兵84) 이하 여러 보좌하는 장수들이 대사의 이름을 듣고 다투어 첩帖을 보내 경의를 표하기도 하였고, 어떤 이는 시詩를 지어 증정하여 아름다운 마음을 칭송하기도 하였는데, 그 말과 예우하는 뜻이 지극히 경건하였다. 경성을 이미 수복하고 나서 임금이 장차 대가大駕를 경성으로 돌리려 하자 대사가 승병 수백 명을 이끌고 어가를 호종하여 도성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상에게 청하여 아뢰었다. “신은 늙어서 장차 죽을 몸이니 제자 유정惟政 등에게 승병의 일을 맡겼으면 합니다.” 그러고는 사직하여 돌아가게 해 줄 것을 간청하자, 임금이 그 뜻을 가상하게 여겨 허락하고, 인하여 호를 내리셨다.
선사는 원적암圓寂庵에서 입적入寂하고자 하였다. 기일이 되자 가마를 타고서 폭설暴雪이 내리는 가운데 가까운 산의 암자들을 두루 찾아가 부처님에게 절하고 대중들에게 설법한 뒤, 방장실方丈室로 돌아와 세수하고 목욕을 한 다음 위의威儀를 갖추고 나서 불전佛前에 분향焚香을 하였다. 그리고는 붓을 잡고 자신의 화상畫像에 직접 시 한 수를 적어 내려갔다.

八十年前渠是我    80년 전에는 저것이 나이더니
八十年後我是渠    80년 후에는 내가 곧 저것이로구나.

또 유정과 처영處英 등 두 문인에게 부칠 편지를 써서 남기고는 가부좌跏趺坐한 상태로 입적하니, 세수世壽는 85세요, 선랍禪臘은 65년이었다. 기이한 향기가 방 안에 가득 차더니 며칠이 지나서야 사라졌다.
사유闍維(茶毘, 즉 火葬를 거행하여 얻은 영골靈骨) 1편과 사리舍利 3립粒을 얻어서 보현사普賢寺와 안심사安心寺에다 탑塔을 세워 봉안하였다. 그리고 유정惟政과 자휴自休 등이

012_0865_b_01L宣廟素聞其名卽命釋之引見賜
012_0865_b_02L御製一色及御畫墨竹障子師立進詩
012_0865_b_03L謝恩上益稱賞厚賷還山

012_0865_b_04L
壬辰之亂宣廟西幸師出山詣行在
012_0865_b_05L謁上曰國有大難山人其能自安
012_0865_b_06L師揮涕對願効死上嘉之命授2)
012_0865_b_07L道禪敎都總攝師分命諸上足紏衆
012_0865_b_08L義徒於是惟政起關東處英起湖南
012_0865_b_09L與權公慄合兵鏖戰于幸州師自率門
012_0865_b_10L一千五百人隨天兵進克平壤
012_0865_b_11L朝經略宋應昌提督李如松及三協總
012_0865_b_12L兵以下諸將佐聞師名爭送帖致敬
012_0865_b_13L贈詩稱美辭禮甚䖍京城旣復上將
012_0865_b_14L旋軫師率徒數百扈駕還都請於上
012_0865_b_15L臣老且死願以兵事屬弟子惟政等
012_0865_b_16L乞骸骨歸上嘉其志許之因賜號

012_0865_b_17L
將示寂于圓寂庵是日肩輿衝雪遍訪
012_0865_b_18L諸山近庵拜佛說法還方丈頮盥
012_0865_b_19L威儀焚香佛前或筆自題畵像曰八十
012_0865_b_20L年前渠是我八十年後我是渠又寄書
012_0865_b_21L訣惟政處英二門人訖趺坐就化世壽
012_0865_b_22L八十五禪臘六十五異香滿室累日
012_0865_b_23L乃歇闍維得靈骨一片舍利三粒
012_0865_b_24L普賢安心寺建窣堵波惟政自休等

012_0865_c_01L또 정골頂骨 1편을 받들고 풍악산에 왔고, 사리 여러 개를 얻어서 유점사楡岾寺 북쪽 언덕에 모셨다. 대사는 젊었을 적에 영관靈觀에게서 법을 얻었는데, 이렇게 종풍宗風을 떨친 일은 근래에 없었던 일이었다. 제자들은 1천여 명이나 되었는데 그중에 이름이 알려진 스님들만도 70여 명에 달하였으며, 특히 두각을 나타내 후학을 영도한 일방一方의 종주宗主가 된 자도 4, 5명을 밑돌지 않았으니, 정말 성대했다고 할 만하다. 만년晚年에 이르러서는 소소한 일에 걸림이 없이 자재自在하였는데, 내정은 모르고 외모만 중시하는 부류[皮相之流]들이 혹은 그가 계율을 어기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으나 식견 있는 사람들은 조금도 그 일을 병통으로 여기지 않았다.
선사의 게송은 상쾌하면서도 명랑하고 대부분 경책하는 말들이었으며, 그의 필적筆跡은 소략한듯하면서도 굳세어 보이며 운치가 있다고 그의 행장에 이같이 갖추어 서술되어 있다. 아! 선사의 허깨비 같은 몸뚱이[幻身]는 이미 한 줌의 재로 변하였으나 허깨비가 아닌 것은 일찍이 따라 변화하여 없어진 적이 없었으니, 한 조각의 돌 위에 몇 줄의 글을 새긴다 한들 어찌 선사를 영원히 잊지 않도록 하는 계책이 되겠는가. 비록 그렇긴 하나 그의 도를 존경하는 입장에서는 차마 그 자취를 사라지게 할 수는 없어서 그의 업적을 내세에 영원히 전하고자 하니, 이는 실로 그 문도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바이며 속세의 법도에서도 또한 수긍하고 있는 바이다. 장주莊周가 말하기를 “꼭 해야 할 가치가 있는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또 하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다”85)라고 하였는데, 어쩌면 이런 경우가 거기에 해당될 것이다. 장유병비張維拼碑
휴정休靜은 글씨도 잘 썼고 시도 잘 지었다. 총림의 종주[宗]로서 금강산을 유람하며 지은 시는 이러하다.

舞月癯仙千丈檜    달빛에 춤추는 구선癯仙86)은 천 길 회나무요
隔林淸瑟一聲灘    숲에 막힌 맑은 비파 소리는 여울 물소리 같네. 지봉유설芝峯游說

지금 세상의 승려들 가운데 휴정87)이라는 스님이 있었는데, 선가의 학문에 해박하여 승려들 중에 명성이 자자했다. 그는 또 시를 잘 지었으며, 스스로 호를 청허자淸虛子라고 했다. 일찍이 묘향산妙香山에 있으면서 시 한 편을 지으니 그 시는 이러하다.

萬國都城如蟻垤    온갖 도성이라 하는 것이 마치 개미집 같고
千家豪士若醢雞    천하에 호걸이라 하는 이들 하루살이 같구나.
一窓明月淸虛枕    창틈에 스며드는 달빛 베고 누웠으니

012_0865_c_01L又捧頂骨一片來楓岳得舍利數顆
012_0865_c_02L窆于榆岾寺之北岡師少從靈觀得法
012_0865_c_03L而宗風之振近代3)弟子千餘人
012_0865_c_04L名者七十餘其能領袖後學爲一方宗
012_0865_c_05L主者不下四五人可謂盛矣晩節通
012_0865_c_06L脫自在皮相之流或疑其越戒識者
012_0865_c_07L不以爲病焉

012_0865_c_08L
偈爽朗多警語筆迹踈勁有致云狀之
012_0865_c_09L所述如是亦備矣師之幻身旣而
012_0865_c_10L化爲灰塵矣其未幻者未嘗隨而變滅
012_0865_c_11L一片之石數紙之文何足爲師不朽計
012_0865_c_12L雖然尊其道則不忍泯其跡而欲永其
012_0865_c_13L傳于來世此固其徒用心之勤亦世敎
012_0865_c_14L之所宜許也莊周有言曰莫足爲也
012_0865_c_15L而不可不爲其是之謂歟並張維拼碑

012_0865_c_16L
休靜善書與詩爲叢林所宗其游金
012_0865_c_17L剛山詩曰舞月躍仙千丈檜隔林淸瑟
012_0865_c_18L一聲灘芝峯4)游說

012_0865_c_19L
今世僧人中有惟政頗解禪家學
012_0865_c_20L聲於緇流且善詩自號淸虛子嘗在
012_0865_c_21L香山有一絕云萬國都城如蟻垤
012_0865_c_22L家豪士若醢雞一窓明月淸虛枕無限
012_0865_c_23L「表」疑「喪」{編}「入」疑「人」{編}底本冠
012_0865_c_24L註曰「無下疑脫比」{編}
「游」疑「類」{編}

012_0866_a_01L無限松風韵不齊    무한한 솔바람소리 비할 데 없어라.

이 시는 사물 밖의 높은 경지에서 속세를 내려 보는 뜻이 있으니, 역시 한순간의 깨달음을 노래한 시이다. 서애집西厓集
유정송운홍제 대사 惟政松雲洪濟大師
임진壬辰(1592)년 변란 후에 의승장義僧將이 되어 영남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왜장倭將 가등청정加藤淸正88)이 한번 만나자고 요청하므로 송운松雲 대사가 왜적의 진영에 들어가니 적들이 몇 리를 나열해 선 것이 마치 창검을 묶어 세워놓은 것 같았다. 송운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가등청정을 만나 조용히 담소談笑를 나누었다. 가등청정이 대사에게 말하였다. “당신네 나라에 보배가 있는가?” 대사가 대답하였다. “우리나라엔 다른 보배는 없고 오직 당신의 머리를 보배로 여기고 있다.” 가등청정이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인가?” 대사가 대답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네 머리에 보상금으로 황금 일천 근과 고을 일만 호가 걸려 있으니, 보배가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가등청정이 크게 웃었다.
왜적이 임진년 이후론 감히 화친을 청하지 못하다가 계묘癸卯(1603)년에 이르러서야 통신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해 왔다. 사람마다 모두 분개하였으나, 조정에서는 트집을 잡을까 염려하여 대사를 보내어 적의 정세를 살펴보게 하니, 대사가 두루 돌아다니며 선비들에게 이별을 고하는 시문을 구하므로 내(이수광李睟光)가 시 한 수를 지어주었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盛世多名將      왕성한 세대라 명장도 많았건만
奇功獨老師      기이한 공적은 유독 노스님이 세우셨네.
舟行魯連海      배 띄워 노중련魯仲連처럼 바다로 들어가고89)舌聘陸生辭      혀 놀림은 육생陸生90)의 변설과 맞먹었네.
變詐夷無厭      변덕스럽고 간사한 오랑캐야 싫어할 것 없겠지만
覊縻事恐危      붙잡아 놓고 보내주지 않을까 염려되네.
腰間一長釰      허리에 찬 긴 칼이
今日愧男兒      오늘날 남아를 부끄럽게 하네. 지봉유설芝峯類說

만력萬曆(明 神宗의 연호) 임진壬辰(1592)년에 금강산 유점사榆店寺에 거처하다가 왜병이 크게 밀려옴으로 같은 집에 살던 승려들과 함께 깊은 산골짜기로 피신하였다. 어떤 승려가 엿보고 돌아와서, 유점사에 들어온 왜병들이 스님 수십 명을 묶어놓고 금과 은 등 온갖 보물을 찾다가 아무것도 나오지 않으므로 죽이려고 한다고 하였다. 유정이 그 말을 듣고 가서 구하려고 하니 스님들이 모두 만류하며 말하였다. “우리 스님께서 한집에 살고 있던 다른 스님들을 위하여 죽음에서 구하려 하시니 그 자비심은 더할 나위 없사오나, 범의 주둥이를 더듬고 범의 수염을 뽑는다면 유익함이 없을 뿐 아니라 다만

012_0866_a_01L松風韵不齊有高蹈物外俯視塵寰之
012_0866_a_02L亦一時意會作也西厓集

012_0866_a_03L

012_0866_a_04L惟政松雲洪濟大師

012_0866_a_05L
壬辰變後爲義僧將陣于嶺南倭將
012_0866_a_06L淸正要與相見松雲入倭營賊衆列
012_0866_a_07L立數里槍釰如束松雲無怖色見淸
012_0866_a_08L正從容談笑淸謂松雲曰貴國有寶乎
012_0866_a_09L松雲答曰我國無他寶唯以汝頭爲寶
012_0866_a_10L淸曰何謂也答曰我國購汝頭金千
012_0866_a_11L斤邑萬家非寶1)淸正大笑

012_0866_a_12L
倭奴自壬辰後不敢通和至癸卯
012_0866_a_13L請信使人皆憤惋而朝廷恐其生2)
012_0866_a_14L遣山人往試賊情山人遍▣別章于搢
012_0866_a_15L紳間余贈之曰盛世多名將奇功獨
012_0866_a_16L老師舟行魯連海舌聘陸生辭變詐
012_0866_a_17L夷無厭覊縻事恐危腰間一長釰
012_0866_a_18L日愧男兒芝峯類說

012_0866_a_19L
萬曆壬辰居金剛山榆店寺倭兵大至
012_0866_a_20L與同舍僧3)冠深谷間有僧往覘
012_0866_a_21L入榆店寺縛居僧數十人索金銀諸寶
012_0866_a_22L不出將殺之惟政聞之欲往救之
012_0866_a_23L皆挽之曰吾師欲爲同舍僧救其死
012_0866_a_24L慈悲莫大然探虎口4)將虎鬚無益

012_0866_b_01L화만 부를 뿐입니다.” 그러나 유정은 그 말을 듣지 않고 적병 속에 들어가기를 방약무인傍若無人91)하니, 왜병이 이상하게 여겼다. 절 문에 이르니 왜병들이 혹은 앉아있고 혹은 누워있으면서 칼과 창을 번갈아 가며 손질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정은 절도 하지 않고 돌아보지도 않으며, 걸음을 멈추지도 않고 지팡이를 끌면서 손을 휘젓고 들어가니 왜병이 물끄러미 보고만 있을 뿐 막지 않았다. 산영루山影樓를 지나 법당 아래 이르니 승려들이 모두 묶인 채로 양편 행랑 아래 있다가 유정을 보고 통곡하였으나 유정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어떤 왜병이 선당禪堂 밖에서 군목軍目 같은 문서를 만들고 있었다. 유정이 서서 살펴보았으나 왜병은 막거나 나무라지 않았다. 그 문자를 보아도 알 수 없었으므로 곧장 법당으로 올라갔다. 모든 왜장들이 다 의자에 나열해 앉아있었는데 유정이 손을 드리운 채 예를 올리지도 않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관찰하여도 도무지 알 수 없었다.92) 어떤 장수가 글자를 써서 물었다. “그대는 글자를 아는가?” 유정이 대답하였다. “대충 조금은 안다.” 또 물었다. “너희 나라에서도 7조를 높이느냐?” 유정이 대답하였다. “6조가 있을 뿐인데 어찌 7조를 거론하느냐?” 왜장이 말했다. “듣고 싶다.” 유정이 곧 6조를 차례로 써서 보이니 왜장이 대단히 기이하게 여기며 말하였다. “이 절에도 금이나 은 등의 여러 가지 보배가 있을 터이니 그대는 다 내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죽일 것이다.” 유정이 말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금이나 은 따위는 보배로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쌀과 삼베만 사용할 뿐, 금이나 은은 온 나라를 통틀어도 매우 드물다. 하물며 산속에 사는 중이야 다만 불공을 드리고 나물을 먹고 풀로 옷을 만들어 입으며, 간혹 양식이 떨어지면 솔잎을 먹기도 하고 때로는 마을에서 음식을 빌려 오기도 하여 겨우 목숨이나 부지하며 살고 있거늘 어찌 금은 같은 보배를 쌓아두었겠느냐? 그리고 또 장군을 보니 부처의 일에 6조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 같은데 부처님 법에는 자비와 살생하지 않는 것을 으뜸으로 여기는데, 지금 보니 죄가 없는 어리석은 승려들을 행랑 아래 묶어두고 보물을 내라고 다그치고 있구나. 저들은 지팡이 하나로 1천 산을 돌아다니며, 민가에서 밥을 빌어먹고 조석을 지내는 자들인데 비록 몸을 쪼개고 뼈를 가루로 만든다 한들 어찌 한 치의 보배인들 있겠는가. 바라건대 장군은 모두 풀어주시오.” 그러자 여러 왜인들이 그 글을 돌려가며 보고는 얼굴색이 변하여 졸개들에게 명하니, 졸개들이 마루 아래로 달려 내려가서

012_0866_b_01L取禍耳惟政不從入亂兵中傍若無人
012_0866_b_02L倭兵恠之至沙門諸倭或坐或臥
012_0866_b_03L戟交鍜故不拜揖不顧眄不留行
012_0866_b_04L笻揮手而入倭熟視而不之禁歷山影
012_0866_b_05L至法堂下僧皆縛在兩廡下見惟
012_0866_b_06L政而泣惟政不之顧有倭在禪堂外治
012_0866_b_07L文書如軍目者政立觀倭兵亦不禁呵
012_0866_b_08L觀其文字不可曉直上法堂諸倭將皆
012_0866_b_09L列椅而坐惟政乘手不爲禮彷徨縱觀
012_0866_b_10L之如癡人有一將以文字問曰爾解字
012_0866_b_11L惟政曰粗解文字又問之曰爾國
012_0866_b_12L尊七祖乎惟政曰有六祖焉有七祖
012_0866_b_13L曰願聞之卽列書六祖視之倭將大異
012_0866_b_14L之曰此寺有金銀諸寶爾可盡出之
012_0866_b_15L然當殺之惟政曰我國不寶金銀
012_0866_b_16L用米布金銀諸寶擧一國所罕有
012_0866_b_17L山之僧只事供佛菜食草衣或絕粒
012_0866_b_18L飡松或乞食村閭以爲生豈有蓄金銀
012_0866_b_19L之寶5)旦觀將軍能知佛事有六祖
012_0866_b_20L法全以慈悲不殺爲上今觀無罪愚僧
012_0866_b_21L縛在廡下責以珍貨彼一笻千山
012_0866_b_22L食民間以度朝夕者雖刲身粉骨
012_0866_b_23L有一寸寶願將軍活之諸倭傳示其書
012_0866_b_24L動色顧下卒云云下卒趍下堂盡解

012_0866_c_01L양쪽 행랑채에 묶여있던 20여 명의 승려들을 모두 풀어주었다. 유정은 또 소매를 휘두르며 지팡이를 짚고 나오니 왜장이 커다란 널빤지에 큰 글자로 다음과 같이 써서 걸었다. “이 절에는 도를 아는 고승이 계시니 모든 병사들은 다시는 들어오지 말라.” 그러고는 곧 군사를 거두어 돌아가니 이로부터 왜병이 다시는 유점사에 들어가지 않았다. 조정에서 유정에게 승장僧將을 제수하고 8도의 승군을 통솔하게 하였다. 유정은 왜병의 진중에 드나들며 유세遊說하는 일로 임무를 삼았는데 일찍이 적진에 들어가 왜장 가등청정을 만났더니 묻기를 “너희 나라에는 어떤 보배가 제일 귀한 것인가?” 유정이 대답하였다. “우리나라에는 보배로 여기는 것이 없다. 보배로 여긴다면 그것은 오직 장군의 머리이다.” 그러자 가등청정이 억지로 웃음을 지었으나 마음속으로는 진실로 그를 두려워하였다. 난리가 이미 평정되자 조정의 명을 받들고 일본에 건너가니 덕천가강德川家康이 설면자雪綿子 2만 근을 주었으나 사양하다가 마지못하여 받아서 그 모두를 대마도주對馬島主 귤지정橘智正에게 주고 돌아왔다. 조정에서 궁궐을 중수할 때 유정은 온 나라의 승군을 모아 부역을 도왔다. 어우야담於于野譚

임진년 난리에 의승병을 일으켜 왜병을 물리친 공적이 매우 많았으므로 임금이 특별히 승대장僧大將에 임명하니 명성이 두 나라에 크게 떨쳤다. 난리가 평정된 뒤에 덕천가강德川家康이 일본의 관백關白이 되어 우리나라에 통신사 보내주기를 간청하였다. 사람들이 모두들 분개하였지만 조정에서는 변방에 틈이 생길까 염려하여 유정을 일본에 보내 적장을 살피게 하였다. 왜인이 평소에 그의 이름을 중히 여겨왔으므로, 그의 절개를 시험하고자 위협하여 항복시키려 하였다. 유정이 말하였다. “내 우리 국왕의 명을 받들어 이웃 나라에 통신사로 왔으니, 너희들은 마땅히 핍박하거나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 내 무릎은 너희를 위하여 굽힐 수 없다.” 왜인이 또 숯불을 크게 태워 벌겋게 달아오른 화로처럼 만들어 유정에게 불 속으로 뛰어들게 하였다. 유정은 안색을 바꾸지도 않고 불가마를 향하여 뛰어들려고 하였는데 하늘에서 갑자기 비가 쏟아져 순식간에 불이 다 꺼져버리고 말았다. 왜인들은 유정을 보고

012_0866_c_01L兩廡二十餘僧惟政又揮袖曳笻而出
012_0866_c_02L倭將以大字書大板掛沙門曰此寺有
012_0866_c_03L知道高僧諸兵勿更入卽罷兵而去
012_0866_c_04L自此倭兵更不入榆店寺朝廷除政僧
012_0866_c_05L統營6)入道僧軍出入倭陣以遊說
012_0866_c_06L爲任嘗入賊陣見倭將淸正淸正曰
012_0866_c_07L爾國何寶最貴惟政曰吾國無所寶
012_0866_c_08L所寶惟將軍之首也淸正强笑而中實
012_0866_c_09L憚之亂旣定奉朝命入日本國家康
012_0866_c_10L以雲綿子二萬斤與之辭不得盡與對
012_0866_c_11L馬島主橘智正而歸及朝廷重修廟闕
012_0866_c_12L政鳩一國僧軍以助役於于野譚

012_0866_c_13L
壬辰之亂倡義擊倭虜獲甚多上特
012_0866_c_14L拜僧大將名滿兩國亂定後源家康
012_0866_c_15L爲日本關白請信使于我朝人皆憤
012_0866_c_16L而朝廷恐生邊釁送惟政于日本
012_0866_c_17L以試賊情倭素重其名欲試其節
012_0866_c_18L之使降政曰吾奉命於吾王通使于
012_0866_c_19L隣國爾等不宜侵凌吾膝不可爲汝屈
012_0866_c_20L倭又大熾炭火烈若紅爐使政投入火
012_0866_c_21L政不動顏色立向火邊若將躍入
012_0866_c_22L天忽下雨如注火卽自滅倭見之
012_0866_c_23L底本冠註曰「何上疑脫而」{編}底本冠註曰
012_0866_c_24L「▣疑靈」{編}
「冠」疑「寇」{編}「將」疑「捋」
012_0866_c_25L{編}
「旦」疑「且」{編}「入」疑「八」{編}

012_0867_a_01L신神이라고 생각하며 줄을 서서 예를 올리고 공경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하늘의 도움이 이와 같으니, 대사는 진정한 생불生佛이십니다.” 그러고는 곧 금교金轎로 모셨다. 이로부터는 비록 변소에 가더라도 그때마다 금교에 태워 모셨다. 유정이 조선으로 돌아가려 할 때 관백이 물었다. “대사께서는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제가 반드시 공경히 받들 것이니 말씀해 주십시오.” 유정이 말하였다. “산에 사는 사람인지라 별로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나라에서 가지고 온 불화佛畵 한 장만 돌려주십시오.” 그러자 관백이 말하였다. “우리나라가 비록 작으나 그래도 귀중한 보배가 많은데 어찌하여 이런 것은 다 놓아두고 그것만을 가져가려고 하십니까?” 유정이 대답하였다. “이 부처님은 매우 영험하여 바람과 비를 내릴 수 있고 재앙을 물리치고 상서로운 일을 불러들일 수 있으므로 되돌려 가기를 원합니다.” 관백 이하가 모두 말하였다. “대사께서도 바람과 비를 부르는 일을 할 수 있는데, 어찌 반드시 부처를 그린 탱화를 되돌려 가져가려고 하십니까?” 유정은 더 이상 강요하지 않고 돌아왔다. 이로부터 왜놈이 감히 다시는 위협하지 못했고 지금도 유정 스님의 필적을 사려면 반드시 많은 돈을 주고야 살 수 있으며, 이렇게 사고 나면 다시 잃어버릴지 걱정한다고 한다.
대구 팔공산八公山에 옛날 한 도승道僧이 있었다. 그 도승은 큰 명주[大絹] 여덟 필을 시장에서 사들여 잇대어 한 폭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거기에 열여섯 자나 되는 부처님[金身]을 그려 탱화를 만들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팔도를 두루 돌아다니며 그림 잘 그리는 사람들을 널리 모집하였으나 몇 년이 지나도록 만나지 못하다가, 마침 풍악산 스님이 크게 수륙재水陸齋를 지내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 수륙재에는 승속僧俗이 무려 수천 명이나 모였다고 한다. 화주승化主僧이 모든 대중에게 말하기를 “불화를 잘 그리는 사람을 구하고 있다”라고 하였으나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더니, 좌석 말미에 바짝 마른 한 늙은 사람이 자진해서 나와 응모에 따르므로 함께 돌아왔다. 화사가 목욕재계하고 나서 화주승에게 청하며 말하였다. “이 일은 만 30일이 되어야 완성할 수 있습니다. 나는 불전佛殿에 기거하며 몸을 숨긴 채 그림을 그릴 것이니, 절대로 엿보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그러고는 사방 벽을 발라 구멍이나 틈이 없게 해놓고 다만 밥을 넣어줄 구멍 하나만 남겨두고 3일에 한 번씩 밥을 넣어주되 그때에도 절대로 엿보면 안 된다고 당부하였다. 화주승이 그 말을 따라 감히 엿보지 못하다가 29일째 되던 날 스스로 생각하기를 ‘비록 하루가 덜 찼기는 했지만 그림은 틀림없이 완성되었으리라’ 하고는 잠깐 눈길을 흘려 엿보았더니 화사畵師가 놀라서 붓을 던지고 일어나며 말하였다. “그림을 완성할 수 없겠구나.” 그러고는 곧

012_0867_a_01L以爲神遂羅拜曰天佑如此大師眞
012_0867_a_02L生佛也卽以金轎舁之自是雖如厠時
012_0867_a_03L輒舁牽之將送關白問以大師所欲
012_0867_a_04L必敬承試言之政曰山人本無欲
012_0867_a_05L願還我國佛畫一幀關白曰敝國雖小
012_0867_a_06L尙多重寶何捨此而取彼政曰此佛甚
012_0867_a_07L可以祈禱雨可以禳災致祥故願
012_0867_a_08L還也關白以下齊聲言曰大師亦能呼
012_0867_a_09L風喚雨何必求還佛幀政不復强迫而
012_0867_a_10L自是倭奴不敢復喝至今購得松雲
012_0867_a_11L筆蹟必以重價貿之惟恐失之云

012_0867_a_12L
大丘八公山古有一道買大絹八疋
012_0867_a_13L于燕市聯作一幅欲畫丈六金身爲幀
012_0867_a_14L周行八道廣募能畵者數年不得
012_0867_a_15L値楓岳僧大張水陸僧俗咸聚無慮數
012_0867_a_16L千人化主僧遍吿大衆願得畵佛手
012_0867_a_17L莫有應者坐末疲癃一僧應募自出
012_0867_a_18L與之偕歸齋沐而請僧曰此事滿三
012_0867_a_19L十日乃成吾處於佛殿隱身而爲之
012_0867_a_20L勿覘視塗其四壁使無孔隙只存納飯
012_0867_a_21L一竅三日一納而納時亦勿邪睇1)
012_0867_a_22L主僧依其言不敢窺至二十九日自料
012_0867_a_23L雖未滿一日畵必已就暫流眄而視之
012_0867_a_24L畵師大驚擲筆起立曰畵不就矣

012_0867_b_01L누런 참새로 변화하여 밥을 넣어주던 구멍으로 나와 날아가 버리니 그림자와 메아리조차 적연寂然하였다. 화주승이 이상하게 여겨 들어가 보니 부처님의 모습은 그렸는데 아직 다리 하나를 그리지 못한 채 새의 발자국만 남기고 가버렸다. 곧 그 탱화를 동화사桐華寺에 걸어두고 수재水災나 한재旱災, 질병 따위가 있을 적마다 이 부처님께 빌면 틀림없이 신비한 효험이 메아리처럼 어김없이 나타났다. 임진년 난리에 왜놈이 훔쳐간 것을 송운이 되돌려 달라고 청하였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순오지旬五志93)
대사께서 왜변倭變을 겪은 뒤로 가야산 해인사에 은둔하였다. 갑진甲辰(1604)년 정월 23일에 스승 서산대사가 열반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상喪에 달려가던 중 경기도 양근楊根 오빈娛嬪역에 이르렀을 즈음에 임금의 부름을 받아서 상喪에 가지 못하고 역마를 갈아타고 서울로 갔다. 임금이 하교하여 말씀하셨다. “아! 그대 유정이여, 저 미친 왜구는 진실로 우리의 원수라, 여섯 해 동안의 전쟁에 온 백성들이 근심하고 괴로워하였으니, 내 마음이 편치 못하다. 그대가 가서 왜놈의 우두머리를 만나보고 적의 정세를 자세히 살펴보고 기회를 엿보아 화친을 맺고 돌아오라.” 그러자 대사께서 명을 받고 물러나 행장[行李]을 챙겨 그해 봄 3월 초4일에 길을 떠나니, 위의威儀를 갖추되 기복器服・자장資裝・예우[禮待]의 절차 모두를 사신의 예와 똑같이 하였다. 20일에 동래東萊에 이르러 순풍을 기다려 배에 올라 항해하였다. 도중에 대마도에 들렀다가 다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수개월 만에 왜적의 수도에 도착하니 왜인이 성대한 의식으로 영접하였다. 수도에 이르는 30리 길에 비단을 깔고 좌우에 금과 은색의 병풍을 둘러쳤다. 그리고 병풍 사이에 모두 왜국 사람들이 지은 시사詩辭를 써 놓았다. 대사는 길을 지나면서 언뜻언뜻 본 그 시들을 모조리 기억하였다가 객사에 이르러 왜국의 접반사와 함께 그 나라의 시품詩品을 논하면서 매번 병풍 사이에 써놓았던 시문을 모두 외는데 한 글자도 착오가 없었다. 접반사接伴使가 놀라고 기이하게 여겨 왕에게 사실을 고하였다. 왕이 그의 도술道術을 시험해 보려고 10여 장丈 깊이의 구덩이를 파놓고

012_0867_b_01L有黃雀出自飯孔而飛去影響寂然
012_0867_b_02L化主僧恠而入視之畵佛已就而一足
012_0867_b_03L未就仍畵著鳥跡而去卽以其幀
012_0867_b_04L于桐華寺凡有水旱疾疫必禱此佛
012_0867_b_05L神驗如響2)壬亂時倭奴竊偸而去
012_0867_b_06L雲以此請還而竟不得并旬五志

012_0867_b_07L
大師自經倭變之後隱遯於伽倻山海
012_0867_b_08L印寺甲辰正月二十三日遭法師西山
012_0867_b_09L湼盤奔喪至京郡揚根娛嬪驛被上命
012_0867_b_10L未由奔3)乘馹至京師上下敎曰
012_0867_b_11L咨爾惟政狂彼倭寇宷我仇讎而六
012_0867_b_12L載兵塵萬民憂苦予心不安爾其往
012_0867_b_13L見倭酋詳探賊情因通和好而還也
012_0867_b_14L太師拜命而退卽治行李是年春三月
012_0867_b_15L初四日啓程具威儀器服資裝禮待之
012_0867_b_16L一依使臣前例二十日至東萊
012_0867_b_17L風登舟渡海自對馬島復開洋前進
012_0867_b_18L數月而達倭都倭人盛儀以待去都三
012_0867_b_19L十里設錦繡步幛左右列立金銀屛
012_0867_b_20L屛間盡寫倭國人所製詩辭大師於道
012_0867_b_21L瞥然看過悉記其詩及至舘與倭
012_0867_b_22L接伴使論其國中詩品輙能盡誦屛間
012_0867_b_23L無一差錯使者驚異之吿于其王
012_0867_b_24L其王欲4)誠其道術掘坑十餘丈以要

012_0867_c_01L수많은 독사를 잡아 구덩이 속에 가득 채워놓은 다음 그 위에 유리를 덮어 모든 형상이 다 드러나게 하여 마치 흐르는 물 위에 일렁이는 것처럼 해두어 사람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하였다. 그리고 대사를 맞이하여 들어가 앉도록 하였다. 대사는 그게 물인가 의심하였으나 염주를 던져보고는 그것이 유리인 줄 알고 나서 들어가 앉으니 왜인은 그의 지략에 더욱 감복하였다. 이튿날 아침 왜왕을 만나려고 할 적에 왜왕이 쇠로 만든 말을 통로에 세워두고 그 아래에 사방으로 빙 둘러 숯불을 피웠다. 그리고 대사로 하여금 쇠로 만든 말을 말미암아 들어오도록 하였다. 대사께서 서쪽을 향하여 묵묵히 기도하자 청천백일靑天白日에 한 조각 구름이 조선으로부터 오더니 갑자기 큰 비가 쏟아져 숯불이 다 꺼져버렸다. 왜왕과 그 신하들이 그것을 보고 놀라고 두려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 분은 신승神僧이요 생불生佛이다.” 돌연 태도를 바꾸어 최상품 금연金輦에 태워 내정內庭으로 모시고 들어가 크게 잔치를 베풀고 스승으로 섬기며 대사가 말씀하시는 것이면 모두 복종하여 따랐다. 대사께서 군국郡國을 두루 유람하여 산천을 감상한다는 핑계를 대고 왜국 경계를 골고루 다니면서 그 나라의 물정과 인심을 모조리 정탐하였다. 을사乙巳(1605)년 4월에 이르러 돌아오려고 하니 왜왕과 여러 신하들이 각기 돈과 보물을 바치며 노자로 쓰라고 하였으나 대사께서는 모두 물리치고 받지 않았다. 대사의 첫 번째 요구는 서로 화친하여 국가를 편안하게 할 것과 가등청정의 머리를 달라는 것이었다. 그다음 요구는 우리나라 사람으로 포로가 된 백성들을 돌려보내 달라는 것이었다. 왜왕이 두려워하며 임진・계사[壬癸]년 이래로 포로로 잡은 남녀 3천여 명을 즉시 돌려보낼 것을 명령하고 배와 양식을 갖추어 보내라고 하였다. 7월 13일에 서울로 돌아와 임금께 숙배肅拜하니, 큰 상을 내리시고 특별히 벼슬의 품계를 한 급 높여주었다. 대사께서는 마지못해 임금의 은총을 받은 후 3일 동안 궁중에 머물다가 물러나기를 청하여 가야산으로 들어갔다. 승려 취혜就惠의 기록


012_0867_c_01L象毒蛇 [3] 充入坑中布琉璃其上使5)
012_0867_c_02L形畢露有若縱橫於流水之面者令人
012_0867_c_03L邀大師入坐大師亦疑其爲水
012_0867_c_04L擲念珠知其琉璃而後入坐倭益服其
012_0867_c_05L翌朝將見於倭王倭王立鐵馬以通
012_0867_c_06L其下熾炭火四圍使大師緣鐵馬而
012_0867_c_07L大師西向默禱靑天白日有片雲
012_0867_c_08L來自朝鮮大雨旋下炭火皆滅倭君
012_0867_c_09L臣見者莫不驚怖曰此神僧也生佛
012_0867_c_10L輙以上品金輦舁入內庭設大宴
012_0867_c_11L師事之言所皆從大師托以盤遊郡國
012_0867_c_12L賞翫山川周遊倭境盡採其國物情人
012_0867_c_13L至乙巳四月將還倭王及群臣上下
012_0867_c_14L各奉貨寶以爲贐大師悉却不受首言
012_0867_c_15L交和寧國之事以求淸正之頭次及刷
012_0867_c_16L還我國被虜人民倭君悚然卽令刷出
012_0867_c_17L壬癸以來被虜者男女并三千餘口
012_0867_c_18L舟粮以送使與俱還七月十三日還京
012_0867_c_19L祗肅上大加褒賞特賜一品6)大師
012_0867_c_20L不得已入謝恩命留三日乞退還入伽
012_0867_c_21L倻山云僧就惠
所記

012_0867_c_22L底本冠註曰「犯疑化」{編}底本冠註曰「壬
012_0867_c_23L下疑脫辰字」{編}
底本冠註曰「表疑喪」{編}
012_0867_c_24L底本冠註曰「誠疑試」{編}「郡」疑「群」{編}
012_0867_c_25L底本冠註曰「秧疑秩」{編}

012_0868_a_01L
갑진甲辰(1604)년 봄에 왜인 귤지정橘智正이 와서 통신사를 보내달라고 간절하게 청하므로 총섭승總攝僧 유정惟政에게 명하여 일본에 가서 적의 정세를 상세하게 살피도록 하니, 유정이 바다를 건너 일본에 갔다. 대사는 일본에 도착하여 군국을 두루 유람하며 산천을 감상하기를 요청하였다. 그러자 왜인이 더욱 기이하게 여겨 가마[肩輿]로 맞이하고 청하였다. 대사는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돌아다니다가 오사카大阪에 이르러서는 맨 먼저 서로 화친하여 나라를 편안하게 할 것을 말하였고, 다음으로 우리나라 사람으로 포로가 된 백성들을 모두 돌려보낼 것을 주장하여 말하니, 덕천가강德川家康이 말하였다. “임진년 전쟁에 대해서는 진실로 나는 잘 알지 못하나 두 나라가 서로 평안하고 태평해진다면 좋지 않겠는가?” 그러고는 곧 포로로 잡혀 온 백성들을 모두 풀어주어 함께 돌아가게 하였으나 다만 요시라要時羅94)의 일로 허물을 잡았다. 유정이 말하였다. “우리나라는 일본과 비록 만세에 잊지 못할 원수이긴 하지만, 서로 이웃한 나라로서 약속을 하였기에 본디 그대들을 저버린 적이 없거늘 한 사람의 왜인이 승패에 무슨 상관이 있다고 병란이 끝난 뒤에 왕래하던 사신을 죽이려고 계획했겠느냐. 아무 해 아무 달에 요시라[要酋]가 중원으로부터 돌아왔기에 우리나라에서는 전과 같이 접대하여 같은 해 아무 달에 부산으로 호송한 지가 이미 여러 해가 되었다. 일본이 이러한 일로써 잘못을 돌리려 하니 이것은 필시 요시라를 숨겨두고 트집을 잡으려는 속셈이요, 그게 아니라면 작은 배(扁舟)라서 푸른 바다에 표류되었거나 침몰하는 환란을 당했을 뿐이리라.” 그러자 왜놈의 수괴 등이 오히려 옳다고 여기며 다시는 언급하지 않고 유정에게 다시 한번 와 달라고 간청하였다. 을사乙巳(1605)년 4월에 유정이 귀국길에 먼저 조정에 편지를 보내 차례로 정탐한 왜국의 실정을 낱낱이 보고하고 아울러 요청하기를, “배가 닿는 날에 마땅히 해군[舟師]의 여러 장수들이 부산에 모여 진을 치고 군용軍容을 장엄하게 하고 호송을 엄숙하게 거행하여 왜인의 시선에 위엄 있게 보여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였으나 이날 통제사 이경준李慶濬이 해군을 거느리고 부산으로 오는데 역풍逆風을 만나 미처 도착하지 못하여 마침내 군사의 약속을 그릇치고 말았다. 유정은 일본에서 쇄환刷還해 온 3천여 명을 이경준에게 부탁하여 형편에 따라 나누어 돌려보내게 하였더니, 이경준이 여러 해군 장수에게 부탁하여 그들이 원하는 대로 가도록 하였으나 장수들이 그 남녀들을 서로 차지하기 위하여 앞다투어 얽어매기를

012_0868_a_01L
甲辰春倭人橘智正來懇乞通信
012_0868_a_02L僧總攝惟政往日本詳探賊情政渡海
012_0868_a_03L托以盤遊諸國玩賞山川倭人益奇之
012_0868_a_04L肩輿邀請殆無虛日及至大坂首言
012_0868_a_05L交和寧國之事次及刷還我人之言
012_0868_a_06L康以爲壬辰之役吾實未見兩國無事
012_0868_a_07L相安太平不亦可乎卽令刷出被虜人
012_0868_a_08L使與俱還但以要時羅事歸曲
012_0868_a_09L政曰我國與日本雖是萬世不忘之讎
012_0868_a_10L而交隣之約素不負汝一倭有何關勝
012_0868_a_11L而兵退之後謀殺往來之使乎
012_0868_a_12L年某月要酋回自中原我國如前接待
012_0868_a_13L同年某月日護送予釜山今已累年
012_0868_a_14L日本以此歸咎是必諱隱要開釁隙
012_0868_a_15L扁舟滄海應有漂溺之患耳倭首
012_0868_a_16L猶以爲然更不言及要政再來
012_0868_a_17L巳四月惟政將還先以歷探倭情
012_0868_a_18L報朝廷兼請回泊之日宜令舟師諸將
012_0868_a_19L聚屯釜山以壯軍容俾嚴護行諸倭之
012_0868_a_20L贍視云云是日統制使李慶濬領舟師
012_0868_a_21L赴釜山風送未及竟誤師期惟政以
012_0868_a_22L刷還人三千餘口付李慶濬使之從便
012_0868_a_23L分送慶濬分付諸船將听其所願
012_0868_a_24L將等利其男女爭先恐後縶之維之

012_0868_b_01L포로를 포박하는 것보다 더 심하게 하며, 혹은 소속된 곳을 물어 빨리 대답하지 못하면95) 서로가 자기의 노비라고 우기며, 아름다운 여자를 보면 그의 남편을 묶어 바다에 던지고 마음대로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한 것이 한둘이 아니었으므로 원성이 하늘을 찌를듯하였으나 아무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결국 이경준을 파직하고 이운룡李雲龍96)으로 대신하여 각도의 수사水使에 명하여 변방의 장수로서 방자하게 행동하는 자를 적발하라 하였으나 수사들은 무시해 버리고 끝내 적발하여 고하지 않았다. 진사進士 조경남趙慶男의 『경란록經亂錄』97)

瓶錫空山索然     물병과 석장뿐인 공산空山의 텅 빔은
若枯死木灰何其靜也  마른 장작 타버린 재98) 같이 어찌 그리도 고요한가.
一日杖釰而起     어느 날 큰 칼을 들고 일어나
斫賊如麻何其勇也   도적 소탕하기를 삼대 베듯 하니 어찌 그리도 용감한가
吾不信        나는 믿지 못하겠네
佛氏之有體而無用也  불교에는 본체[體]만 있고 현상[用]이 없다고 하는 것을. 조현명趙顯命99)이 지은 진찬眞賛

승장 유정이 용기산성龍起山城을 보수하려 하였으나 개인의 힘으로는 부족하여 본도 순찰사로 하여금 형편에 따라 도와줄 것을 요청했고, 또 곡식의 종자도 찾아 거두어서 나누어주도록 하였다. 유정의 그 군인 100여 명을 거느리고 산 아래에서 둔전병屯田兵100)을 두어 식량을 비축하려는 전략을 세웠다. 징비록懲毖錄101)
을사년(1605, 선조38) 5월에 승장僧將 송운松雲이 일본에서 잡혀간 우리 포로 1천여 명을 거두어 40・50척의 배에 나누어 싣고 왜인 귤지정橘智正과 함께 돌아왔다. 송운은 다른 이름으로 유정惟政이라 하는데, 성은 임任씨로 밀양 사람이다. 선대는 사족士族이었는데 송운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시에 매우 능하였고 해서楷書와 초서草書를 잘 써서 총림叢林에서 이름이 났다. 임진년에 금강산에 머물러 있었는데, 하루는 왜병이 절에 난입하자, 중들이 뿔뿔이 흩어져 숨었으나 송운만은 꼼짝 않고 앉아 있으니, 왜병이 기이하게 생각하고 빙 둘러서서 합장하여 경의를 표한 후에 물러갔다. 그해 가을에 내가 안주安州에 있으면서 각도에 통문을 보내어 승려와 속인을 막론하고 의병을 일으켜 임금을 위해 충성하라고 하였다. 통문이 이르자 송운이 그 통문을 책상[佛搨] 위에 펼쳐 놓은 후 승려들을 이끌고 흐느껴 울었다. 드디어 승병 천여 명을 모아

012_0868_b_01L甚於搶擄或問所係而不能答則並
012_0868_b_02L稱己奴美女則縛其夫投海而任作己
012_0868_b_03L如此者非一怨聲傳播天高听卑
012_0868_b_04L卽罷李慶濬以李雲龍代之因令各道
012_0868_b_05L水使摘發邊將之恣行者水使等視以
012_0868_b_06L文具竟不發吿云進士趙慶男經亂錄

012_0868_b_07L
瓶錫空山索然若枯1)死木灰何其靜
012_0868_b_08L一日杖釰而起斫賊如麻何其勇
012_0868_b_09L吾不信佛氏之有體而無用也趙顯
012_0868_b_10L命撰眞賛

012_0868_b_11L
僧將惟政方欲修葺龍起山城而患其
012_0868_b_12L私力不足令本道巡察使隨便助力
012_0868_b_13L且覔給種子使惟政率其軍百餘屯田
012_0868_b_14L山下以爲積粟之計事懲毖錄

012_0868_b_15L
已五月僧將松雲還自日本刷還被
012_0868_b_16L擄人口一千餘名分載四五十船與倭
012_0868_b_17L人橘智正同還松雲一名惟政任姓
012_0868_b_18L密陽人先世士族至松雲出家爲僧
012_0868_b_19L頗能詩善眞草有名叢林中壬辰住
012_0868_b_20L金剛山一日倭兵亂入寺僧奔竄
012_0868_b_21L雲獨凝坐不動倭異之環立合掌致敬
012_0868_b_22L而去其秋余在安州通文各道無論
012_0868_b_23L僧俗令起兵勤王文到松雲展文佛
012_0868_b_24L榻上率其類涕泣遂收僧兵千餘入平

012_0868_c_01L평양으로 가서 임원평林原坪에 진을 치고 왜병과 연일 싸웠으며 이로부터 오래도록 군중에 있었다. 또한 일찍이 가등청정加藤淸正의 군영에 두 번 들어가 논설한 일이 있었는데 의기가 격렬하여 조금도 두려워하는 빛이 없었다. 지난해 조정에서 일본으로 가서 산천 유람을 핑계로 적중의 소식을 탐지해 오라는 명이 내려졌을 때 사람들이 모두 위험스럽게 여겼으나, 송운은 편안한 기색으로 조금도 난색을 표하지 않고 맡은 일을 잘 수행하고 돌아왔다. 서애집西厓集
화암월수좌華岩月首座묵행자嘿行者102)에 대한 남은 이야기
묵행자는 본업이 아닌 문장에도 조예가 깊었다. 사림士林들 사이에 그의 초고草稿가 전해지고 있으며, 일찍이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을 지었다.103)
어느 날 동관東觀 이윤보李允甫104)가 말하였다. 「묵언 수행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이름은 알 수 없으나 나이는 쉰 살쯤 되었다. 어떤 때는 머리를 빡빡 깎기도 하고 어떤 때는 두타행頭陀行105)을 하기도 하였다. 경을 독송하지도 않고 부처님께 예배하지도 않으며, 종일토록 편안하게 좌선坐禪만 하면서 명상에 잠겨 있곤 하였다. 안부를 묻는 이가 있어도 귀한 사람이거나 천한 사람 할 것 없이 눈을 들어 쳐다보지도 않고 이름을 물어도 응답하지 않으며 어디서 왔느냐고 물어도 역시 아무 응답도 하지 않기 때문에 묵행자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는 귀정사歸正寺의 별도 구역에 살고 있었다. 내가 그때 마침 구성龜城에 있었는데, 도인道人 존순存純이 나에게 말하였다. “묵행자는 한겨울에도 방석 하나만 깔고 있고 장삼 한 벌만 입고 다녔으나, 옷에는 이나 서캐가 없고 싸늘한 구름 위에 앉았어도 조금도 추워하는 기색이 없습니다. 후배들이 도를 배우겠다고 책을 안고 와서 의심나는 곳에 대하여 질문하면 자세하게 설명해 주곤 합니다. 매우 추운 날 얼어 죽을까 염려가 되어 그가 나가기를 기다렸다가 방자房子를 보내 얼른 방에 불을 지펴서 방바닥을 덥혔는데, 묵행자가 돌아와서 이 사실을 알고는 기뻐하거나 화를 내는 기색이 없이 슬그머니 밖으로 나가 돌을 가져다가 아궁이를 메우고, 회灰를 이겨서 틈새를 막아버리고 방에 들어가 처음처럼 좌선하였습니다. 이런 일이 있고부터

012_0868_c_01L結陣於林原坪連與倭戰自是長
012_0868_c_02L在軍中又嘗再入淸正營中論說意氣
012_0868_c_03L激烈無畏懾前年朝廷命往日本託以
012_0868_c_04L遊山2)賤中消息人皆危之松雲恬
012_0868_c_05L然無難色3)主是乃還西厓集

012_0868_c_06L

012_0868_c_07L華岩月首座餘事嘿行者

012_0868_c_08L
餘事亦深於文章有草集傳士林
012_0868_c_09L撰海東高僧傳

012_0868_c_10L
時李東觀允甫言有嘿行者不知族氏
012_0868_c_11L年可五十或爲髠或爲頭陀不念經
012_0868_c_12L不禮佛終日宴坐瞑如也有候之者
012_0868_c_13L無貴賤不擧目改觀問其名不應
012_0868_c_14L從甚處來亦不應故以嘿行者名焉
012_0868_c_15L居歸正寺別區時予適在龜城道人存
012_0868_c_16L純謂予言行者嘗冬月數一座具著一
012_0868_c_17L衲衣衲中無蟣虱坐氷堗上寒色不
012_0868_c_18L學道後進抱册往從質疑者無不
012_0868_c_19L委細開說方大寒恐其凍也候出時
012_0868_c_20L遣房子急爇柴頭溫其堗而去行者來
012_0868_c_21L觀之無喜慍色徐出戶拾石礫塡堗
012_0868_c_22L泥其灰塗隙而上宴坐如初自是
012_0868_c_23L底本冠註曰「死木疑倒」{編}底本冠註曰「賤
012_0868_c_24L疑賊」{編}
底本冠註曰「主疑至」{編}

012_0869_a_01L다시는 구들을 따뜻하게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재를 올릴 때면 장을 쓰지 않은 나물을 먹었으며, 또 오후에 먹는 것을 금하지는 않았으나 요행히 음식을 만날 때는 먹고 그렇지 않으면 7・8일이 지나도록 먹지 않습니다. 그는 스스로 말하기를, ‘무릇 이름난 산으로 성인의 자취가 있는 곳이라면 가보지 않은 데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나도 가서 그를 만나 보았지만, 한마디 말도 나누지 못했다. 을축乙丑(1205)년 겨울 10월에 굴암사窟岩寺106)를 유람하였는데 그 절 스님이 말하였다. “근래 묵행자가 와서 전암鸇嵓에 올라 보고서 좋아하여 석굴에다 작은 암자 한 채를 지었습니다. 몸소 돌을 져다가 뜨락을 쌓았고, 새로 돌계단을 만들어 산 밑에서 토굴까지 300여 층계가 되었으나 어느 돌 하나 흔들리는 것이 없었습니다. 가끔 재를 올리는 북소리를 듣고 내려와서 밥을 먹곤 했는데 혹 10여 일씩 내려오지 않아 가서 안부를 묻기도 합니다. 편석片石(한 덩이의 바위) 위에다가 칠언송七言頌을 써 놓았는데 이는 묵행자가 지은 것으로서 그 내용은 마치 신선神仙의 일과 관련된 것 같습니다.”
경오庚午(1210)년에 나는 정융에서 길을 나누어 역마를 타고 다시 구성龜城에 들려 성안 사람들에게 물었다. “묵행자는 어디에 있습니까?” 성에 사는 사람들이 대답하였다. “지난번에 봉주奉州 삼각산 문암門岩에 계셨고, 작년 여름에는 굴암사에 머물고 계셨는데, 그 절 스님에게 말하기를 ‘귀신이 북방으로부터 와서 이 성에 모인다’라고 하고는 산에서 내려와 성으로 들어갔으며, 성벽 위를 타고 순행巡幸하다가 성 밖으로 나가는 것을 성안 사람들이 모두 보았습니다. 그 후에 귀신불이 낮에는 안 보이다가 어두우면 나타나곤 하는데, 그 불빛은 푸르고 크기가 똑같지 않았습니다. 혹은 인가人家에 들어오기도 하고 때로는 동산의 나무 위에 모이기도 하며, 혹은 공중에 날아다니기도 하였습니다. 성에 사는 사람들이 그릇을 두드리며 떠들썩하게 밤새워 지키며 잠을 자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하기를 여러 날이 지나서야 비로소 그쳤습니다.” 그때 내 아내와 자식이 이 성에 떨어져 살고 있었는데 물어보았더니 과연 그렇다는 것이었다. 그 후에 승려 익분益芬이 와서 나에게 말했다. “근래에 삼각산에서 묵행자를 보았는데 아무 탈 없이 잘 지내고 있었고, 이웃 마을 사람들이 묵행자가 떠나버릴까 염려하여 서로 집을 수리해 주고 묵행자가 머물고 있는 초옥草屋에 밤낮으로 공양을 올리면서 수호하였다.” 그 후 이별하려 할 때 묵행자가 분芬에게 말하였다. “모든 수행하는 사람은 춥다고 해서 그 의지를 바꾸어서는 안 된다. 지금 수행하는 자는 반드시

012_0869_a_01L不復遣溫也嘗齋時食菜不用醬
012_0869_a_02L不禁午後食値幸則食之或至七八日
012_0869_a_03L不食自言凡名山有聖蹟無不遊觀
012_0869_a_04L予往見不交一言後乙丑歲冬十月
012_0869_a_05L窟岩寺寺僧曰近嘿行者來陟鸇嵓
012_0869_a_06L樂之就石窟搆一小庵躬負石等階
012_0869_a_07L新開磴道自山下至窟置三百餘層
012_0869_a_08L無一石動搖者時聞齋鼓下來飯食
012_0869_a_09L至十餘日不下因往候焉片石上有七
012_0869_a_10L言頌是行者所作其言頗涉神仙事
012_0869_a_11L庚午歲以定戎分道乘傳復至龜城
012_0869_a_12L行者今在何所城人云頃往奉州三角
012_0869_a_13L山門岩居焉去歲夏月住窒岩寺時謂
012_0869_a_14L寺僧曰有思自北方來萃此城因下山
012_0869_a_15L入城乘城上巡行而出城人皆見之
012_0869_a_16L後有鬼火晝伏昏起其色靑小大不
012_0869_a_17L或入人家或聚園樹或飛空中
012_0869_a_18L人擊鳴器以噪之守夜不眠如是過數
012_0869_a_19L日方止時余之妻息下在是城問之
012_0869_a_20L果然後有僧益芬來吿余近往三角
012_0869_a_21L見行者無小恙好在近旁村民
012_0869_a_22L行者之去相與修宅所住草屋日夕
012_0869_a_23L供護焉將吿別行者謂芬曰大都修
012_0869_a_24L行者不以寒若易其志今之修行

012_0869_b_01L높은 누각과 우뚝 솟은 전각으로 그 무리를 보호하고 맛있는 음식과 좋은 의복을 공양받고자 하여, 공경公卿이나 사대부의 집을 출입하며 절을 짓고 스님을 이익되게 함으로써 복을 얻게 된다고 말해서 평민들을 해롭게 하니 어찌 그것이 수행하는 사람이 할 일인가? 너는 힘써 노력하고 소홀히 하지 말라”라고 하므로 분이 감복하였다.」
동관의 말이 이와 같으므로 전기[傳]를 지어서 승사僧史에 빠진 것을 보충한다. 보한집補閑集107)
Ⅱ. 니고尼姑
김씨金氏태대각간太大角干108) 김유신金庾信109)의 아내이다.
성덕왕聖德王 10년(711)에 영을 내려 말하였다. “지금 국내외가 모두 평안하여 베개를 높이하고 아무 근심이 없는 것은 태대각간太大角干의 덕택이다. 부인도 경계하여 서로 이루니 숨은 공덕이 또한 많도다. 과인寡人이 일찍이 마음에 잊지 못하여 그 은혜를 갚고자 하여 해마다 남성南城에서 거둔 세금 1천 석을 하사하도록 명하였다. 그런데 그때 김씨가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었으니 부인을 위해 봉토를 주겠노라.”
Ⅲ. 시승詩僧
대각국사大覺國師
일찍이 문열공文烈公110)의 문집을 읽다가 대각국사의 비문을 보았다. 그 비문에 “국사는 왕자로서 출가하여 송宋나라에 가서 도를 듣고 현수賢首・달마達摩・천태天台・자은慈恩・남산南山 등 다섯 종파의 법문을 다 배웠다. 사상泗上에 가서 승가탑僧伽塔에 예를 올리고 천축사天竺寺에 가서 관음상에 예배하였는데 모두 광명을 발하였다. 북요北遼의 천우天祐 황제가 그의 명성을 듣고 대장경과 여러 종파의 소초疏鈔 6천 9백여 권을 보냈고, 연경燕京의 법사 운서雲諝와 고창국高昌國의 사리闍梨인 시라박저尸羅縛底도 책서策書111)와 법복을 가지고 와서 문안을 드렸다.

012_0869_b_01L欲高樓屹殿庇其徒美食細服供其
012_0869_b_02L出入公卿士大夫之門諭以造寺息
012_0869_b_03L爲得福多屠割平民烏在其爲修
012_0869_b_04L行者歟汝勉之無忽也芬佩服焉
012_0869_b_05L觀言如此因撰傳以補僧史之闕焉
012_0869_b_06L閑集

012_0869_b_07L

012_0869_b_08L尼姑

012_0869_b_09L金氏1)夫角干金庾信妻

012_0869_b_10L
聖德王十年令曰今中外平安高枕
012_0869_b_11L無憂太大角干之賜也夫人儆戒相成
012_0869_b_12L陰功亦多寡人未嘗忘于心思欲報之
012_0869_b_13L命歲賜南城租一千石時金落髮爲尼
012_0869_b_14L命封爲夫人

012_0869_b_15L

012_0869_b_16L詩僧

012_0869_b_17L大覺國師

012_0869_b_18L
嘗讀文烈公集見大覺國師碑師以王
012_0869_b_19L子求出家如宋聞道得賢首達摩天台
012_0869_b_20L慈恩南山等五宗法門至泗上禮僧伽
012_0869_b_21L天竺寺禮觀音像皆放光明北遼
012_0869_b_22L天祐帝聞其名送大藏經諸宗疏鈔六
012_0869_b_23L千九百餘卷燕京法師雲諝高昌國闍
012_0869_b_24L梨尸羅縛底亦皆以策書法服爲問

012_0869_c_01L요나라 사신으로 온 자들도 모두 뵙기를 청했고, 우리 사신이 요나라에 들어가면 반드시 국사의 안부를 묻곤 하였다. 일본 사람도 국사에게 비문과 지문誌文을 지어달라고 청하였으니 저 이국異國에서조차 국사를 존경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국사는 여력이 있을 적에는 외학인 경사經史와 백자서百子書들을 공부하여 그 심오한 이치를 다 터득하였고 준비 없이 붓을 잡아도 문사文辭는 평이平易하면서도 담담하였지만 의미가 깊었다.”라고 하였다. 지금 그의 시 여러 편을 얻어 음미해 보니 문열공의 평이하면서도 담박하다는 평은 믿을 만하다.

비래방장飛來方丈112)에 이르러 보덕성사普德聖師에게 예를 올리고 시를 지으니 다음과 같다.

湼盤方等敎      열반경과 방등경의 교리를
傳授自吾師      우리 성사께서 전수하셨네.
兩聖橫經日      두 스님이 경문을 펴던 날이요원효와 의상이 『열반경涅槃經』과 『유마경維摩經』을 보덕성사에게서 배웠다.
高僧獨步時      고승高僧이 홀로 가던 때였네.
隨緣任南北      인연 따라 남쪽과 북쪽으로 어디든지
在道勿迎隨      도에는 영수113)가 없다네
可借飛房後      애석하여라. 비래방장으로 간 뒤에
東明古國危      동명성왕의 옛 나라가 위태해졌네. 성사는 본래 고구려 반룡사盤龍寺 승려로서 방房을 날려 백제의 고대산孤大山으로 갔다. 그 뒤에 신인神人이 고구려 마령馬嶺에 나타나서 사람에게 알리기를 ‘너의 나라가 패망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였다.

금석암錦石庵이라는 제목으로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老苔班似錦      아롱진 묵은 이끼 비단결 같고
瑞石列如屛      상서로운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쳤네.
時有高僧倚      때때로 고승이 기대어서
長眠養性靈      오래 자면서 성령을 기르네.

용암원龍岩院이라는 제목으로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踏盡殘花上翠微    시들어진 꽃잎 밟으며 취미산에 올라
徘徊瞻景欲忘歸    경치를 두루 구경하다가 돌아가는 것도 잊었네.
他年若也酬前志    다른 해에 전날의 뜻을 보답하려면
高卧烟霞與世違    속세를 떠나 노을 속에 높이 누워야 하리. 보한집補閑集
무애지국사無礙智國師
무애지국사 계응戒膺114)은 불교교리를 강론하는 것 외에 문장에도 달통하여 자유자재하였다. 예왕睿王(1105~1122)이 궁중에 맞아들여 머물기를 간청하자 국사가 시를 지어 말하였다.

聖勑嚴明辭未得    국왕의 명 엄명하여 사양하기 어려워
岩猿松鶴別江東    바위 위의 원숭이와 솔 위의 학과 강동에서 이별했네.
多年幸免魚呑餌    여러 해 동안 고기가 미끼 무는 것을 면했었는데
一旦翻爲鳥在籠    하루아침에 뒤집혀서 새장 속의 새가 되었네.
無限旅愁宮裏月    무한한 나그네의 시름 궁궐에서 달을 바라보며
有明歸夢洞中風    되돌아갈 꿈을 실어 골짜기 바람에 부쳤다네.
不知何日君恩報    모르겠네. 언제나 임금의 은혜를 보답하고
瓶錫重回對碧峰    발우와 지팡이 짚고 다시 돌아가 푸른 산을 마주할까?

곧 태백산太白山으로 가서 살 곳을 자리 잡고 그곳에서 명을 마치려고 하였다. 임금이 다시 사신을 보내 부르고 여러 번 조서를 내렸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012_0869_c_01L人來聘者皆請見吾使入遼則必問師
012_0869_c_02L安否日本人求師碑誌其爲異國所尊
012_0869_c_03L如此師餘力外學經史百子皆尋其根
012_0869_c_04L率爾落筆文辭平淡而有味2)令得
012_0869_c_05L數詩嘗味之文烈公平淡之言信哉
012_0869_c_06L到飛來方丈禮普德聖師云湼盤方等
012_0869_c_07L傳授自吾師兩聖橫經日元曉義相
受涅槃維
012_0869_c_08L摩經
於師
高僧獨步時隨緣任南北在道勿
012_0869_c_09L迎隨可借飛房後東明古國危師本高句
麗盤龍寺
012_0869_c_10L沙門 飛房至百濟孤大山 後神人見
於高句麗馬嶺 吿人曰 汝國敗無日
題錦石庵
012_0869_c_11L老苔班似錦瑞石列如屛時有高
012_0869_c_12L僧倚長眠養性靈題龍岩院云踏盡
012_0869_c_13L殘花上翠微徘徊瞻景欲忘歸他年若
012_0869_c_14L也酬前志高卧烟霞與世違補閑集

012_0869_c_15L

012_0869_c_16L無礙智國師

012_0869_c_17L
無礙智國師戒膺講道外游刃於文章
012_0869_c_18L睿王邀入大內苦請留師作詩云
012_0869_c_19L勑嚴明辭未得岩猿私鶴別江東多年
012_0869_c_20L幸免魚呑餌一旦翻爲鳥在籠無限旅
012_0869_c_21L愁宮裏月有明歸夢洞中風不知何日
012_0869_c_22L君恩報瓶錫重回對碧峰卽往太白山
012_0869_c_23L卜居將終焉上復遣使徵之屢詔不受
012_0869_c_24L「夫」疑「大」{編}底本冠註曰「令疑今」{編}

012_0870_a_01L보한집補閑集
대감국사大鑑國師
대감국사 탄연坦然115)은 필적筆跡이 정묘精妙하고 시의 격식이 고상하면서도 담담하였다. 지나는 곳마다 시를 지어 읊은 것이 많았다.

삼각산 문수사文殊寺를 시제로 지은 시는 이러하다.

一室何寥廓      온 집안 어이 이리 고요한가.
萬緣俱寂寞      온갖 반연이 다 함께 적막하네.
路穿石罅通      길은 돌 틈으로 뚫려서 통해 있고
泉透雲根落      샘물은 구름 아래에서 떨어지네.
皓月掛簷楹      밝은 달은 추녀 끝에 걸려 있고
涼風動林壑      시원한 바람은 숲 골짜기를 뒤흔드네.
誰從彼上人      누가 저 상인을 따라
淸坐學眞樂      맑게 앉아서 참 즐거움을 배우려나.

또 사위의송四威儀頌을 지어 송나라 개심介諶선사에게 부치니 선사가 그 시를 보고 기이하게 여겨 먼 곳에서 의발을 부쳐왔다. 안신安信거사가 비슬산毗瑟山 백운암白雲庵에 머물고 있었는데, 국사가 일찍이 그곳을 찾아가서 현판에 시를 적어 놓았었다. 그 후에 어떤 사람이 이 시가 적힌 현판을 훔치려고 산 밑에 이르렀는데, 현풍玄風 고을 관리官吏가 미리 알고 현판을 거두어 관부官府에 간직해 두었다. 그의 진적眞蹟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보한집補閑集
구산담수 선사龜山曇秀禪師
구산 담수선사는 곽여郭璵 처사와 김金・홍洪 두 학사김부식金富轍, 홍관洪灌 등과 함께 글로 서로 사귀는 사이였다. 그때 예왕睿王(1105~1122)이 평양(西都)에 행차하였는데, 곽・김・홍 세 사람은 모두 임금의 수레(大駕)를 호종하였고, 담수선사는 부득이한 일로 행재소에 나아가지 못해서 시를 지어 부쳤는데 그 시는 다음과 같다.

靑雲二學士      청운의 두 학사와
白日一仙翁      백일의 한 선옹이
並筆巡遊下      붓을 나란히 하여 순유를 따라
連裾扈從中      소매를 맞대고 임금을 호종하네.
大同楊柳雨      대동강 버들에 비 내리고
長樂牧丹風      장락궁 모란꽃 바람이 나부끼니,
應製多佳句      응제116)엔 좋은 시구 많겠지만
聯篇寄驛筒      연달은 시편 역통에 부쳐 보낸다오.보한집補閑集
무기無己

012_0870_a_01L補閑集

012_0870_a_02L

012_0870_a_03L大鑑國師

012_0870_a_04L
大鑑國師坦然筆蹟精妙詩格高淡
012_0870_a_05L所過多題詠1)三角山文殊寺詩曰
012_0870_a_06L2)宣何寥廓3)爲緣俱寂寞路穿石罅通
012_0870_a_07L泉透雲根落晧月掛簷楹凉風動林壑
012_0870_a_08L誰從彼上人淸坐學眞樂作四威儀頌
012_0870_a_09L寄宋朝介諶禪師師見而奇之卽以
012_0870_a_10L衣鉢遙傳之安信居士4)位毗琴山白
012_0870_a_11L雲庵師嘗訪之題詩于板後有人竊此
012_0870_a_12L詩板欲去已到山下玄風官吏逆知之
012_0870_a_13L收在官府不知其眞蹟5)令在否補閑集

012_0870_a_14L

012_0870_a_15L龜山曇秀禪師

012_0870_a_16L
龜山曇秀禪師與郭璵處士金洪兩學
012_0870_a_17L金富轍
洪灌
爲文會之交時睿王幸西
012_0870_a_18L郭金洪皆扈駕唯曇秀不得詣行在
012_0870_a_19L有詩寄云靑雲二學士白日一仙翁
012_0870_a_20L並筆巡遊下連裾扈從中大同楊柳雨
012_0870_a_21L長樂牧丹風應製多佳句聯篇寄驛筒
012_0870_a_22L補閑集

012_0870_a_23L

012_0870_a_24L無己

012_0870_b_01L
승려 무기無己는 스스로 호를 대혼자大昏子라 하였다. 지리산에 은거隱居하여 살면서 30년이 넘도록 한 납의衲衣를 벗은 적이 없었다. 매년 겨울과 여름에는 산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고 뱃가죽을 띠로 칭칭 동여매었고, 봄과 가을에는 배를 두드리며 산을 유람하면서 하루에 서너 말의 밥을 먹는 때도 있었다. 한 번 앉으면 반드시 열흘을 넘기고, 일어나 다닐 때면 산게山偈를 낭랑하게 읊곤 하였다. 산 사방에 70여 개의 암자가 있는데 한 암자에 유숙할 때마다 게송 하나씩을 남겼다. 무주암無住庵이라는 시제로 쓴 시는 이러하다.

此境本無住      이 경계 본래 머뭄이 없거니
何人起此堂      누가 여기다 절을 지었는가?
唯餘無己者      오직 무기라는 사람만이 남아서
去住兩無妨      가고 머무름에 걸림이 없구나.

이러하여 말은 소략하고 쉬운 듯하나, 그 속에 담긴 뜻은 고상하고도 깊어서 거의 한산寒山117)과 습득拾得118)의 풍류와 비슷하였다. 보한집補閑集
수선사修禪社 탁연卓然119) 스님
스님은 재상의 아들로서 필법筆法이 아주 뛰어났다. 갑진甲辰년(1184) 봄에 서울에서 강남으로 돌아가다가 계룡산 아래 어떤 마을을 지나가게 되었다. 나무 위에 까치가 깃든 것을 보았는데 몸은 희고 가슴은 붉으며 꼬리는 검었다. 그곳에 살고 있는 백성 장복長福이 말했다. “이 까치가 여기에 와서 둥지를 튼 지가 벌써 7년째인데 해마다 그 새끼를 올빼미가 잡아먹어 슬프게 호소하기를 그치지 않습니다. 그 슬픈 감정이 쌓여서 첫해에는 머리가 희어지기 시작하더니, 두 해째에는 그 머리가 완전히 희어졌고 세 해째에는 몸 전체가 완전히 희어졌다가 금년에는 다행히 그 액厄을 면하더니 꼬리가 다시 검어졌습니다.” 탁연선사는 기이하게 여겨 같은 절에 있던 천영天英120) 스님에게 모든 걸 이야기했다. 천영스님이 말하였다. “아! 아! 이것이 소위 금두인禽頭人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곧 시를 지었다.

怨氣積頭成雪嶺    원한의 기운 머리에 쌓여 설령雪嶺을 이루었고
血痕治臆化丹田    피 흔적이 가슴 적셔 붉은 밭이 되었구나.
渠如不惱他家子    그대 만약 남의 자식 괴롭히지 않는다면
四海霜毛一日玄    사해의 서리 같은 하얀 털이 하루 만에 검어지리라.

천영스님은 진양공晋陽公의 청을 못 이겨 단속사斷俗寺에 머물러 있었으며 벼슬은 선사禪師의 지위에 올랐는데, 그때의 나이는 서른 남짓하였다. 보한집補閑集
치악노승雉岳老僧

012_0870_b_01L
僧無己自號大昏子隱居智異山
012_0870_b_02L三十年不釋一衲每冬夏入山不出
012_0870_b_03L卷肚皮在帶索中春秋鼓肚遊山日食
012_0870_b_04L三四斗一坐必浹旬起行則朗吟山偈
012_0870_b_05L山四面七十餘庵一庵每宿軌留一偈
012_0870_b_06L無住庵詩曰此境本無住何人起此堂
012_0870_b_07L唯餘無己者去住兩無妨語若疎易
012_0870_b_08L而寄意高深殆寒拾之流歟補閑集

012_0870_b_09L

012_0870_b_10L修禪社卓然師

012_0870_b_11L
師寄相之子筆法絕倫甲辰之春
012_0870_b_12L京師還江南道過鷄龍山下一村見有
012_0870_b_13L鵲栖于樹體皓臆丹尾黔居民長福云
012_0870_b_14L此鵲來巢已七年矣其雛每歲爲土梟
012_0870_b_15L所食呼訴不已哀惑所鍾一年頭始
012_0870_b_16L二年頭盡白三年體渾白及今年
012_0870_b_17L幸免其厄尾漸還黑然師異之語同
012_0870_b_18L社天英師師曰此所謂禽頭人也
012_0870_b_19L迺作詩曰怨氣積頭成雪嶺血痕治臆
012_0870_b_20L化丹田渠如不惱他家子四海霜毛一
012_0870_b_21L日玄英師爲晋陽公所縻住斷俗爵禪
012_0870_b_22L時年三十餘補閑集

012_0870_b_23L

012_0870_b_24L雉岳老僧

012_0870_c_01L
진보궐陳補闕이 왕의 일로써 길을 가다가 치악산雉岳山 서쪽을 지나게 되었는데 소나무와 삼나무가 빽빽하게 우거졌고 수석水石이 그윽하고 기이하였다. 마음으로 그것을 좋아해서 골짜기 안으로 들어가니 초가 두세 채가 있는데 숲에 가려 보일 듯 말 듯 하였다. 한 노승이 어린아이를 업고 냇가 돌 위에 앉아 있으므로 진보궐이 말에서 내려 말을 건네 보니 운치가 범상치 않았다. 마침내 마주 앉았는데 부채에 반송蟠松을 그린 것을 보고 부채 등에다 시를 지어 썼다. 그 시는 이러했다.

老僧長伴蒼髯叟    노승은 오래도록 푸른 수염의 늙은이를 벗하면서
何更移眞入扇團    어찌 다시 참모습을 부채 속에 옮겼는가?

그 노승이 이에 곧바로 화답하는 시를 지었다.

春風不到峩嵋嶺    봄바람이 아미산 고개에 불어오질 않아서
樸地蛟龍翠作團    땅 가득히 교룡처럼 서리어 푸른 덩어리 이루었네.

진보궐이 깜짝 놀라 탄복하였다. 또 십운의 시를 써 주었는데 그 말과 뜻이 깨끗하고 뛰어났다. 어느 곳에 사는 사람인지는 모르겠다. 보한집補閑集

삼중공공三重空空
성품은 검소하지 않고 시와 술을 좋아하였으며, 거주하는 곳은 서울을 떠나지 않았다. 비록 나이는 많았으나 소년들과 놀기 좋아하였고 몹시 취해서는 시나 읊으면서 꽃과 풀을 희롱하며 스스로 방종하였다. 일찍이 포천을 지나다가 시를 지어 돌미륵을 찬탄하였다.

金色巍巍丈六身    금빛으로 우뚝 솟은 한 길 여섯 자 되는 몸이
靑山獨立幾經春    푸른 산에 홀로 서서 몇 봄이나 지냈는가?
我來稽首無何語    내가 와서 머리를 조아려도 아무 말이 없지만
曩劫同修是故人    전생에 함께 수행하던 오래된 벗일러라.

그 후에 장원壯元 유석庾碩이 중도中道 안렴사按廉使121)로서 이곳을 지나다가 이를 보고는, 미륵을 대신하여 희롱삼아 시를 지었는데 그 시는 이러했다.

腰上僧形下俗身    허리 위는 중 모양이요 아래는 속인의 몸
長安桃李眼迷春    장안의 복사꽃과 오얏꽃이 눈부신 봄일세.
莫言曩劫同修善    전생에 함께 수선했다고 말하지 말라.
吾黨曾無破戒人    우리 무리에는 일찍이 파계한 사람이 없다네.

공공空空이 듣고서 조롱당한 것을 해명하는 시를 지어서 상국相國 최공에게 올리니, 그 시는 이러하다.


012_0870_c_01L
陳補闕因王事行過雉岳西松杉蔭密
012_0870_c_02L水石幽奇心愛之入洞中有草屋兩
012_0870_c_03L隱映林間一老僧帶兒于坐溪石
012_0870_c_04L陳下馬與語氣韵不凡遂偶坐見一
012_0870_c_05L紙扇畫蟠松陳取扇書其背云老僧長
012_0870_c_06L伴蒼髯叟何更移眞入扇團僧卽和云
012_0870_c_07L春風不到峩嵋嶺樸地蛟龍翠作團
012_0870_c_08L驚愕歎服又贈十韵語意俱淸絕
012_0870_c_09L知何許人補閑集

012_0870_c_10L

012_0870_c_11L三重空空

012_0870_c_12L
性不檢好詩酒居不離京師雖晩歲
012_0870_c_13L喜與少年輩遊酷酊吟哦嘲花弄草
012_0870_c_14L以自放也

012_0870_c_15L
常過布川留詩讃石彌勒云金色巍巍
012_0870_c_16L丈六身靑山獨立幾經春我來稽首無
012_0870_c_17L何語曩劫同修是故人後廋壯元碩
012_0870_c_18L以中道按廉過此見之代彌勒戱書云
012_0870_c_19L腰上僧形不俗身長安桃李眼迷春
012_0870_c_20L言曩劫同修善吾黨曾無破戒人空空
012_0870_c_21L聞之作解嘲詩上相國崔公云昔過
012_0870_c_22L此詩旣載於「東文選所載麗代僧侶詩文釋坦
012_0870_c_23L然」條(韓國佛敎全書第六册八八一頁中段){編}

012_0870_c_24L「宣」疑「室」{編}「爲」疑「萬」{編}底本冠
012_0870_c_25L註曰「位疑住」{編}
底本冠註曰「令疑今」{編}

012_0871_a_01L
昔過布川院      옛적에 포천원을 지나다가
閑留一首詩      한가하게 시 한 수를 남겼노라.
多談彌勒在      여기저기 미륵이 있다고 떠들썩하더니
戱答使人疑      공연한 희롱의 시로 사람들을 의아하게 하는구나.

그러자 공이 허리가 끊어지도록 웃었다. 보한집補閑集
인각선사麟角禪師
적천사磧川寺라는 제명의 시는 이러하다.

隔林遙聽出山鍾    수풀에 가린 먼 사찰에서 울리는 종소리 듣고
知有蓮坊在翠峰    푸른 산 아래 절이 있는 줄 알았네.
樹密影遮當戶月    우거진 숲 그림자에 가려진 문 달빛 비추고
谷虛聲答打門笻    문 두드리는 지팡이 소리 빈 골짜기에 메아리치네.
水舖白練流今石    물은 흰 비단 펼쳐놓은 듯 돌 위를 흐르고
虹曳靑羅掛古松    무지개는 푸른 비단을 끄는 듯 고송에 걸렸구나.
莫怪老人留數日    노인이 며칠 머문다고 이상히 여기지 말라.
當年普照示遺蹤    당년에 보조가 자취를 남긴 곳일세. 시선詩選
정명선사靜明禪師122)
지리산智異山
問君直入千峯裡    묻노니 그대는 곧바로 천봉 속으로 들어왔으니
知在烟霞第幾重    몇 겹의 노을 속에 있는 줄을 알겠구려.
流水落花迷去路    흐르는 물에 떨어진 꽃 가는 길을 알 수 없으니
他年何處訪高蹤    다른 날 어느 곳에서 높은 자취 찾을까나.
11. 성능聖能123)
백운봉白雲峰
矗矗奇形幾萬重    우뚝 솟은 기이한 형상 몇만 겹인가?
雲中秀出碧芙蓉    구름 속에 솟아 나온 푸른 연꽃일레라.
神光永照黃金界    신령한 빛은 황금세계 영원히 비추고
淑氣長留白玉峯    맑은 기운은 백옥봉에 길이 머무네.
突兀岡巒含月色    우뚝한 산봉우리 달빛 머금고
幽深洞壑秘仙踪    깊은 골짜기 신선 자취 감추었네.
淸遊更欲登高頂    한가히 노닐다가 다시 정상에 올라
俯瞰蒼溟一快胷    푸른 바다 굽어보니 가슴이 후련하네. 북한지北漢志

원효대元曉𡋛
玉樹瓊林密不開    아름다운 나무숲 빽빽하여 열리지 않고
琉璃淨界絕塵埃    유리처럼 맑은 경계 진애를 초월했네.
峩峩雪色峰千疊    높디높은 눈빛처럼 하얀 봉우리 천 겹이나 되고
激激雷聲水萬回    콸콸대며 소리 내어 흐르는 물 만 번이나 굽이치네.
觀靜高僧枯更寂    선정에 든 고승은 마른나무처럼 고요하고
學飛雛鶴去還來    파닥이는 새끼 학이 날개짓 배우다가 내려앉네.

012_0871_a_01L布川院閑留一首詩多談彌勒在
012_0871_a_02L答使人疑公絕倒補閑集

012_0871_a_03L

012_0871_a_04L麟角禪師

012_0871_a_05L
磧川寺詩曰隔林遙聽出山鍾知有蓮
012_0871_a_06L坊在翠峰樹密影遮當戶月谷虛聲答
012_0871_a_07L打門笻水舖白練流今石虹曳靑羅掛
012_0871_a_08L古松莫怪老人留數日當年普照示遺
012_0871_a_09L詩選

012_0871_a_10L

012_0871_a_11L靜明禪師

012_0871_a_12L
智異山詩問君直入千峯裡知在烟霞
012_0871_a_13L第幾重流水落花迷去路他年何處訪
012_0871_a_14L高蹤

012_0871_a_15L

012_0871_a_16L聖能

012_0871_a_17L
白雲峰詩矗矗奇形幾萬重雲中秀出
012_0871_a_18L碧芙蓉神光永照黃金界淑氣長留白
012_0871_a_19L玉峯突兀岡巒含月色幽深洞壑秘仙
012_0871_a_20L淸遊更欲登高頂俯瞰蒼溟一快胷
012_0871_a_21L北漢志

012_0871_a_22L
元曉𡋛詩玉樹瓊林密不開琉璃淨界
012_0871_a_23L絕塵埃峩峩雪色峰千疊激激雷聲水
012_0871_a_24L萬回觀靜高僧枯更寂學飛雛鶴去還

012_0871_b_01L超然是處尋眞客    초연한 이곳에서 진객을 찾아
薄暮登臨元曉𡋛    초저녁에 원효대에 오른다. 북한지北漢志
무외無畏초은산인招隱山人이다.
자구字句를 해석하는 데에 능했으며 피리를 잘 불었다. 익재益齋와 늘 교유를 하였는데, 일찍이 정자를 짓고 그 정자의 이름을 초은招隱이라 하였다.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移得花叢粧後砌    꽃을 옮겨 심어 뒤뜰을 꾸미고
折來松梢補西簷    소나무 가지 꺾어다가 서쪽 지붕 고치었네.
手中只慣山中事    손수 익힌 것은 다만 산중의 일이니
古下那知世味甛    어떻게 세상의 단맛을 알 수 있으리.시선詩選
탄연坦然
문수사文殊寺
一室何寥廓      온 집안이 어이 이리 고요한가.
萬緣俱寂寞      온갖 반연이 다 함께 적막하네.
路穿石罅通      길은 돌 틈으로 뚫려서 통해 있고
泉透雲根落      샘물은 구름 아래에서 떨어지네.
皓月掛簷楹      밝은 달은 추녀 끝에 걸려 있고
涼風動林壑      시원한 바람은 숲 골짜기를 뒤흔드네.
誰從彼上人      누가 저 상인을 따라
淸坐學眞樂      맑게 앉아서 참 즐거움 배울까나.북한지北漢志
충활沖奯고려 송광사松廣社 승려이다.
충활이 처음에 남성시南省試 부장원(亞元)으로 뽑혔는데, 이를 버리고 송광사에 가서 도를 닦았다. 최이崔怡124)가 지신사知申事가 되어 정치를 전단專斷할 때에, 편지를 써서 차와 향을 보내고는 답장을 써 달라고 하자, 대사가 말하였다. “내가 이미 세속과 인연을 끊었는데 무엇 때문에 편지를 주고받아 즐거움으로 삼는단 말인가?” 또 시를 지어 보내자 즉시 그 시운을 따서 시를 지었다.

瘦鶴靜翹松頂月    깡마른 두루미 소나무 꼭대기에 걸린 달에 앉아 있고
寒雲輕逐嶺頭風    싸늘한 구름 가벼워 고갯마루 바람에 쫓기네.
箇中面目同千里    저 속의 면목은 천 리가 같으리니
何更新煩語一通    어찌 다시 새로이 말을 만들어 통하리.

끝내 답장을 쓰지 않았다.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012_0871_b_01L超然是處尋眞客薄暮登臨元曉𡋛
012_0871_b_02L北漢志

012_0871_b_03L

012_0871_b_04L無畏招隱山人

012_0871_b_05L
能訓善吹笛與益齋常從遊嘗築亭
012_0871_b_06L名以招隱有詩云移得花叢粧後砌
012_0871_b_07L折來松梢補西簷手中只慣山中事
012_0871_b_08L下那知世味甛詩選

012_0871_b_09L

012_0871_b_10L坦然

012_0871_b_11L
文殊寺詩一室何寥廓萬緣俱寂寞
012_0871_b_12L路穿石罅通泉透雲根落皓月掛詹楹
012_0871_b_13L凉風1)勤林壑誰從彼上人淸坐學眞
012_0871_b_14L北漢志

012_0871_b_15L

012_0871_b_16L沖奯高麗松廣社僧

012_0871_b_17L
沖奯初以南省正元脫身往松廣社修
012_0871_b_18L崔怡爲知申事專政以書遺茶香
012_0871_b_19L使請書報師曰子已絕俗何須書往
012_0871_b_20L復爲怡且以詩贈之卽次云瘦鶴靜
012_0871_b_21L翹松頂月寒雲輕逐嶺頭風箇中面目
012_0871_b_22L同千里何更新煩語一通卒不以書答
012_0871_b_23L勝覽

012_0871_c_01L
혜문惠文125)자는 빈연彬然이다.
각월재覺月齋와 더불어 시에 이름이 나 있었다. 산에 사는 사람으로서 시문을 깊이 체득하였으므로 당시 이름있는 선비들이 많이 따라서 놀기 좋아하였다. 이규보李奎報126)와도 교유하였는데, 혜문이 죽자 규보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글을 지어 보냈다. 본집本集

천수사天壽寺
路長門外人南北    문밖 먼 길에 사람들 남북으로 오가지만
松老嵓邊月古今    바위 위 노송에 비치는 달 고금에 변함없네.

천룡사天龍寺
地泮花新意      땅이 풀리니 꽃이 새로운 뜻 품고
氷消水舊聲      얼음이 녹으니 물소리 예전과 같구나.

미투리(繩鞋)
中靑藍畝錯      가운데가 푸르니 쪽 심은 이랑 뒤섞인 듯하고
邊白雪城環      가장자리 하야니 눈이 성을 둘러 있는 듯하네. 보한집補閑集
원경圓鏡고려의 왕자로서 스님이 되었다.
원경의 글씨가 회암사檜岩寺 벽에 남아 있다. 대정大定(금金 제량帝亮의 연호) 연간(1161~1189)에 금나라 사신들이 들어왔다가 그의 글씨를 보고,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하였다. “귀한 분의 글씨로구나.” 다른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하였다. “산에 사는 사람의 글씨라서 자못 나물과 죽순을 먹은 기운이 있구나.” 그러자 그 곁에 어떤 스님이 있다가 사실대로 말해 주었더니, 두 사람 다 자기 말이 맞았다고 기뻐하면서 시를 지으니 다음과 같다.

玉子膏染氣半存    왕자의 고량의 기운 반쯤 남아있고
山僧蔬笋尙餘痕    산승의 채소와 죽순의 기운 아직도 남아있네.
顚張醉素無全骨    미친 장지127)와 취한 회소128) 온전한 골격 없으니
却恨當年許作髠    당년에 스님된 것이 한스럽구나.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勝覽
수진守眞129)개태사開泰寺130) 승통僧統이다.
수진은 학문이 넓고 식견이 정밀하여 칙명을 받들어 대장경의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는 일을 하였는데 평소에는 몸소 번역했던 것 같다. 직강直講 하천조河千朝131)가 시를 지어 겨자 한 전대를 함께 부쳐왔다. 법사가 곧 그 시의 운을 따서 화답하는 시를 지었다.

芥子吾宗所極論    겨자는 우리 종파에서 극단을 논하는 것으로
須彌巨海總能呑    수미산과 넓은 바다도 다 삼킨다고 한다.
惠來經榻知何意    은혜로 보내주신 경탑이 무슨 뜻인지 알만 하니
卽事談玄報佛恩    깊은 이치 담론에 임하여 불은에 보답하라는 것이리라.

수진 노숙老宿이 도에 대해 담론한 것이다. 지금은 오교도승통五敎道僧統이 되었다.보한집補閑集

012_0871_c_01L惠文字彬然

012_0871_c_02L
與覺月齋名工於詩深得山人體
012_0871_c_03L時名士多從之遊與李奎報交遊
012_0871_c_04L奎報作哀詞本集
012_0871_c_05L天壽寺時云路長門外人南北松老嵓
012_0871_c_06L邊月古今天龍寺云地泮花新意
012_0871_c_07L消水舊聲繩鞋云中靑藍畝錯邊白
012_0871_c_08L雪城環補閑集

012_0871_c_09L

012_0871_c_10L圓鏡高麗玉子 [4]

012_0871_c_11L
圓鏡手跡在檜岩壁上大定間金使
012_0871_c_12L入觀書迹一人曰貴人筆一人曰
012_0871_c_13L人書蔬笋之氣頗存傍有一僧以實
012_0871_c_14L二人皆喜其言中乃題詩曰玉子
012_0871_c_15L膏染氣卒存山僧蔬笋尙餘痕顚張醉
012_0871_c_16L素無全骨却恨當年許作髠勝覽

012_0871_c_17L

012_0871_c_18L守眞開泰僧統

012_0871_c_19L
守眞學博識精奉勑勘大藏經正錯
012_0871_c_20L如素所親譯河直講千朝作詩并以芥
012_0871_c_21L子一帒見寄師卽次韵答之曰芥子吾
012_0871_c_22L宗所極論須彌巨海總能呑惠來經榻
012_0871_c_23L知何意卽事談玄報佛恩眞老宿道該
012_0871_c_24L爲吾敎都僧統補閑集

012_0871_c_25L底本冠註曰「勤疑動」{編}

012_0872_a_01L
의침義砧국초國初의 시승詩僧이다.
의침은 두보杜甫의 시에 정통하였다. 유태재柳泰齋132)가 일찍이 의침과 교류하면서 두보의 시를 배웠다. 우리 성묘聖廟(成宗)께서 그에게 두시를 언문諺文으로 주해할 것을 명하였는데 간혹 잘못된 것이 있기는 하였으나 모두 의침이 전한 것이다.쇄록瑣錄133)
유태재가 의침에게 시 한 수를 부쳤는데 그 시는 이러하다.

十年南北苦相思    10년 동안 남북으로 떨어져 몹시 그리워했는데
有底浮生久別離    유한한 덧없는 인생에서 오래도록 만나지 못했네.
何日更參方丈去    어느 날에 다시 방장을 뵈옵고
焚香細讀杜陵詩    향 사르고 두릉의 시 읽게 될까나.본집本集
정사正思
정국검鄭國儉134)이 남원 지부사知府事가 되어 하루는 속읍屬邑에 행춘行春135)할 때 원천동源川洞을 지나다가 좌우 벽 위에 송림사松林寺136) 스님 정사正思가 절구絶句 시 한 편을 크게 써놓은 것을 보았는데 그 시는 이러했다.

古佛岩前水      고불이 있는 바위 앞의 물이
哀鳴復嗚咽      슬피 울고 또다시 오열하네.
應恨到人間      아마도 인간 세상에 내려와서
永與雲山別      운산과 영영 이별하는 것을 슬퍼함일레라.

다음 날 정국검은 늙은 선비 양적중梁積中과 같이 말을 나란히 타고 정사스님을 찾아가서 산수山水를 즐기는 벗이 되었다. 후에 매번 인물을 논할 때마다 정사스님을 언급하면서 승려 중에 용龍같은 이라고 하였다.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勝覽
Ⅳ. 역승逆僧
신돈辛旽처음 이름은 편조遍照이다. 본래 옥천사玉泉寺137) 노비의 아들로 그 어미가 천인이라 하여 그 무리에 끼어들지 못했다.
공민왕恭愍王이 일찍이 어떤 사람이 칼로 자기를 찌르려고 하는 것을 어느 스님이 구해주는 꿈을 꾸었다. 왕이 마음속에 이 꿈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김원명金元命138)이 편조를 데리고 왔다. 왕이 그 모습을 보니 꿈에 본 스님과 흡사하였다. 왕이 매우 기이하게 여겨 그와 함께 이야기를 나눠보니 말을 잘할 뿐만 아니라 여유가 넘쳐흘렀다. 스스로 도를 얻었다고 하기에 왕이 너무 기뻐서 여러 차례 궁중으로 불러들였다.
이승경李承慶139)이 그를 보고 말하였다. “국가를 어지럽힐 놈은 틀림없이 이 중일 것이다.” 정세운鄭世雲140)도 요사스런 사람이라 생각하고 죽이려고 하였는데 왕이 밀령을 내려 그를 피신시켰다. 이윽고 두 사람이 죽은 다음에 곧

012_0872_a_01L義砧國初詩僧

012_0872_a_02L
義砧精於杜詩柳泰齋嘗從遊受學
012_0872_a_03L杜詩我成廟命以諺文註解杜詩
012_0872_a_04L有迂曲處皆砧所傳瑣錄
012_0872_a_05L泰齋寄詩云十年南北苦相思有底浮
012_0872_a_06L生久別離何日更參方丈去焚香細讀
012_0872_a_07L杜陵詩本集

012_0872_a_08L

012_0872_a_09L正思

012_0872_a_10L
鄭國儉爲南原知府一日行春屬邑
012_0872_a_11L源川洞左石壁上有松林寺僧正思
012_0872_a_12L大書一絕曰古佛岩前水哀鳴復嗚咽
012_0872_a_13L應恨到人間永與雲山別翌日與老儒
012_0872_a_14L梁積中連鏸尋訪結爲山水友後每
012_0872_a_15L論人物必稱正思爲僧中龍勝覽

012_0872_a_16L

012_0872_a_17L逆僧

012_0872_a_18L辛旽初名遍照 本玉川寺婢之
子 以母賤 不齒於其徒

012_0872_a_19L
恭愍王嘗夢人拔劍剌己有僧救得免
012_0872_a_20L王志之會金元命以遍照見其貌
012_0872_a_21L王大異之與語頗辯給自謂得道
012_0872_a_22L王大悅屢召入內李承慶見之曰
012_0872_a_23L國家者必此髠也鄭之雲亦以爲妖人
012_0872_a_24L欲殺之王密令避之二人旣死乃長

012_0872_b_01L머리를 기르고 두타頭陀행을 한다면서 이름을 신돈이라 하고, 다시 와서 왕을 배알하였다. 이때부터 궁중에 들어가 국사를 관장하기 시작하였으며, 왕도 그를 스승이라고 부르면서 국정에 대하여 자문받았는데 왕은 그의 말이면 따르지 않는 것이 없었으므로 많은 사람이 그에게 아부하였다. 사대부의 처첩들도 신승神僧으로 생각하고 법문을 듣고 법을 구하고자 그에게 이르면 신돈은 서슴없이 사통하였다.『여사제강麗史提綱』
우정언右正言 이존오李存吾141)가 말하였다. “요물이 나라를 그르치려 하니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그리고는 마침내 상소上疏하여 아뢰었다. “신돈이 항상 말을 타고 홍문紅門을 출입하며 전하와 함께 호상胡床에 나란히 앉아 있으며, 그의 집에서는 재상들이 뜰 아래서 절을 하고, 신돈은 늘 앉아서 대하고 있습니다. 비록 최항崔沆142)・김인준金仁俊143) 같은 사람도 아직 이와 같은 적이 없었습니다.…운운…” 그랬더니 왕은 크게 노하여 그 상소문을 불태우게 하고, 이존오를 불러 면전에서 꾸짖었다. 그때에도 신돈은 왕과 마주 앉아 있었다. 이존오가 눈을 부릅뜨고 신돈을 질책하였다. “늙은 중놈이 어찌 그렇게도 무례한가?” 그러자 신돈이 놀라 저도 모르게 황급히 의자에서 내려왔다. 왕이 더욱 노하여 이존오를 순군옥巡軍獄에 가두고 국문하였다. 그리고 장사감무長沙監務로 강등시켰다. 왕이 왕씨와 안씨를 맞아 후비로 삼고 하루는 궁중에서 연회를 베풀었는데, 두 비妃가 왕 옆에 서 있었다. 그러자 신돈이 왕에게 말하였다. “두 비가 저렇게도 나이 어리니 성체가 너무 피로하지 않겠습니까?” 이렇듯이 무례하게 구는 등 오만방자하기가 그지없었다.
현풍玄風 사람 곽의郭儀가 매번 시속의 명절을 만나면 술과 음식을 갖추어서 영산靈山에 가서 신돈의 아버지 묘소에 제사를 드렸다. 본래 신돈과는 서로 알지 못하는 사이였는데 신돈이 그 일을 알고는 놀라고 기뻐하면서 그를 불러 정언正言에 제수하였다.위의 것과 아울러 『고려사』에 수록됨
편조를 ‘수정리순론도섭리보세공신守正履順論道燮理保世功臣 벽상삼한삼중대광영도첨의사사사壁上三韓三重大匡領都僉議使司事 판감찰사사判監察司事 취성부원군제조鷲城府院君提調 승록사사僧錄司事 겸판서운관사兼判書雲觀事’로 삼았는데, 이때부터 성을 신辛으로 이름을 돈旽으로 고쳐 불렀다.
왕이 재위한 지 오래되었으나 재상들이 대부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일찍이 생각하기를, 대대로 벼슬을 해온 대족大族으로서 당파를 맺고 뿌리를 이어 서로의 잘못을 엄폐하는 자들과, 초야의

012_0872_b_01L髮爲頭陀名辛旽復來謁始入內用
012_0872_b_02L稱爲師傅咨訪國政言無不從
012_0872_b_03L多附之士大夫之妻妾以爲神僧
012_0872_b_04L法求法而至旽輒私焉麗史提綱

012_0872_b_05L
右正言李存吾曰妖物誤國不可不去
012_0872_b_06L遂上疏曰辛旽常騎馬出入紅門
012_0872_b_07L殿下並據胡床其在家寄相拜庭下
012_0872_b_08L旽皆坐待之雖崔元金仁俊亦未有如
012_0872_b_09L此云云主大怒命焚其疏召存吾面
012_0872_b_10L責之時辛旽與王對床存吾目旽叱
012_0872_b_11L之曰老僧何得無禮旽惶駭不覺下床
012_0872_b_12L王愈怒下巡軍獄鞠之貶爲長沙監務
012_0872_b_13L王納王氏安氏爲妃一日內宴二妃侍
012_0872_b_14L辛旽謂王曰二妃年少聖體不已
012_0872_b_15L勞乎其褒慢無禮類此

012_0872_b_16L
玄風人郭儀1)過俗節備酒饌往靈
012_0872_b_17L奠旽父墳旽不相識聞之驚喜
012_0872_b_18L拜正言並麗史

012_0872_b_19L
以遍照爲守正履順論道燮理保世功
012_0872_b_20L臣壁上三韓三重大匡領都僉議使司事
012_0872_b_21L判監察司事鷲城府院君提調僧錄司事
012_0872_b_22L兼判書雲觀事始稱姓辛改名旽

012_0872_b_23L
初王在位日久宰相多不稱意嘗以爲
012_0872_b_24L世臣大族親黨根連互爲掩蔽草野

012_0872_c_01L신진으로서 감정을 억누르고 행동을 가식하여 명망을 얻어서 그 신분이 귀하게 되면 스스로 자기 가문이 비천하고 한미한 것을 부끄럽게 여겨 대족들과 혼인하여 그 처음의 유생을 다 버리는 자들과, 유생으로서 기백이 적고 게다가 문생門生이다 좌주座主다 동년同年이다 하여 서로 파당을 이루어 사정을 따르는 자들, 이상 세 가지 부류는 모두 등용할 수 없다고 여겼다. 생각이 이에 미치자, 세상을 초월하여 독립할 수 있는 사람을 얻어 우물쭈물하는 폐단을 혁신해 보려는 생각이 오래되었다. 그러던 차에 신돈을 보게 되었다. 그는 득도得道하여 욕심이 없으며 또한 미천한 사람으로서 가까운 친척조차 없으니, 큰일을 맡기면 틀림없이 이 일을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을 것이고 자기 몸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승려인 그를 발탁하여 국정을 위임하고 의심하지 않았다. 왕이 신돈에게 행차를 굽혀[屈行] 세상일을 구원해달라고 청하니, 신돈은 겉으로는 왕의 뜻에 수긍하지 않는 체했다. 이에 왕이 더욱 강하게 권유하였고, 그제야 신돈은 이렇게 말하였다. “일찍이 듣건대 국왕과 대신들이 참소하고 이간질하는 말을 대부분 믿는다고 하는데, 절대로 그런 일이 없어야 세간에 복리를 안겨줄 수 있습니다.” 이에 왕이 직접 맹서하는 글을 썼는데 그 내용은 이러했다. “스승은 나를 구원하고 나는 스승을 구원하되 죽음으로써 맹세하며 남의 말을 듣고 의혹을 품지 않겠노라. 이것은 부처님과 하늘이 증명할 것이다.” 그러자 신돈이 국정에 참여하여 의논하였다.
국사를 운영한지 30일 만에 나라에 공이 있고 명망 있는 대신들은 모두 축출하고, 총재冢宰와 대간臺諫들도 모두 그의 말을 따라 결정되었다. 영도첨의領都僉議144) 자리를 오래도록 비워두었다가 이때에 이르러서 자신이 그 자리를 겸직하였는데, 그제야 비로소 궁중으로부터 나가 기현奇顯145)의 집에 기숙하였다. 백관들은 그 집으로 가서 국사를 의논하였다. 신돈은 ‘진사의 해에 성인이 나온다[辰巳聖人出]’는 『정감록鄭鑑錄』146)의 비결을 인용하여 거리낌 없이 말하기를 “성인이란 아마도 나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겠는가?”라고 공공연하게 말하곤 하였다. 이전에 기현의 후처가 과부로 있을 적에 신돈이 중의 신분으로 사통한 적이 있었다. 그 후에 기현에게 시집을 갔으나 신돈이 귀하게 여겨 기현의 집에 기숙하고 있으면서 또 간통하고, 기현의 후처에게 규중에서 음식 장만하는 일을 주관하게 하였다. 신돈의 탐음貪淫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서 뇌물이 폭주하고 집에 있을 땐 술을 마시고 고기를 씹으며 마음대로 성색聲色을 향락하다가도 왕을 뵐 때는 깨끗한 말만 하고 음식도 채소・과일・차만 들었다.

012_0872_c_01L新進矯情飾行以取名望及其貴顯
012_0872_c_02L自恥門地卑寒連姻大族盡棄其初儒
012_0872_c_03L儒而少剛又有門生座主同年之
012_0872_c_04L黨比徇情三者不足用也思情離
012_0872_c_05L獨立之人以革因循之弊者久矣
012_0872_c_06L及見旽以爲得道寡慾且出於賤微
012_0872_c_07L無親比任之大事則必徑行而無所
012_0872_c_08L顧籍故拔於髠緇授以國政而不疑也
012_0872_c_09L王請旽屈行以救世事旽陽不肯以堅
012_0872_c_10L王意王强之旽曰嘗聞國王大臣
012_0872_c_11L信讒間愼無如此乃可福利世間也
012_0872_c_12L王乃手寫盟辭曰師救我我救師死f874
012_0872_c_13L生以之2)感人言佛天證明於是旽
012_0872_c_14L與議國政用事三旬罷逐親勳名望家
012_0872_c_15L宰臺諫皆出其口領都僉議久虛其
012_0872_c_16L至是自領之始出禁中寓奇顯家
012_0872_c_17L百官詣門議事旽以辰巳聖人出之讖
012_0872_c_18L昌言曰所謂聖人豈非我歟初顯後妻
012_0872_c_19L寡居旽爲僧得通後乃歸顯及旽貴
012_0872_c_20L3)主顯家又通以顯妻主中饋旽貪淫
012_0872_c_21L日甚貨賂輻湊居家飮酒㗖肉恣意
012_0872_c_22L聲色謁王則淸談齕菜果茗飮

012_0872_c_23L底本冠註曰「過疑遇」底本冠註曰「感疑
012_0872_c_24L惑」
底本冠註曰「主疑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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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연복사에 행차하시어 크게 문수법회文殊法會를 열었다. 이때 불전에 여러 비단을 묶어 수미산須彌山을 만들고 산을 빙 둘러 촛불을 켰는데 초의 크기는 기둥만 했고 높이는 한 길이 넘었으며 밤이 대낮처럼 밝았다. 실로 만든 꽃과 채색 찬란한 봉황은 사람의 눈을 부시게 하였다. 폐백으로 오색 비단 열여섯 묶음을 썼으며, 선발된 승려 300명이 수미산을 안고 돌면서 불공을 올리니 범패 소리는 하늘을 진동하였다. 일을 집전한 사람도 무려 8천여 명에 이르렀다. 왕과 신돈은 수미산 동편에 앉아서 양부兩府를 거느리고 부처님께 예배하였다. 신돈이 왕에게 말하기를, “선남선녀가 임금을 따라 문수보살과 훌륭한 인연을 맺고자 발원하고 있사오니, 바라옵건대 모든 부녀자에게 불전으로 올라와서 불법을 듣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부녀자들이 불전으로 몰려 올라갔으며, 심지어는 신돈을 위하여 화장까지 하는 과부가 있었다. 반승飯僧할 때는 왕이 손수 금으로 만든 향로를 받쳐 들고 각각의 승려들에게 향을 봉행하되 조금도 피곤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신돈이 떡과 과일을 부녀자들에게 나누어 주니 모두 기뻐하며 말하기를, “첨의僉議는 문수보살의 후신이다”라고 하였다. 사대부의 여인들이 진수성찬을 배불리 먹고 어떤 여자는 남은 음식을 땅에 버리기까지 하였다. 한 번 법회를 치른 비용이 거만鉅萬에 이르렀다. 왕이 홀치忽赤147)와 충용위忠勇衛148) 250명에게 명하여 밤낮으로 신돈을 호위하게 했다. 이날은 종일토록 폭풍이 일었으며 황사[黃塵]가 하늘에 자욱했는데, 법회를 하는 7일 동안 3일간은 폭풍이 불었고 3일간은 된서리가 내렸다.
궐문 동쪽에 누각을 짓도록 명하고 격구와 갖가지 오락을 크게 베풀고 구경하였는데, 신돈이 말을 타고 도평의사都評議司의 천막 앞에 이르니 재상들이 모두 기립하여 공수拱手하여 예를 올렸으나 신돈은 말을 탄 채 이야기를 하였고, 신돈의 복식도 왕과 같았다. 사람들이 그가 왕인지 아닌지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였고 사람들은 그의 무례함에 분통을 터뜨렸다.
승려 천희千熙149)로 국사를 삼고 선현禪顯으로 왕사를 삼으니, 두 스님은 모두 신돈이 좋게 여기는 사람들이었다. 왕이 아홉 번 절을 할 때 선현은 서서 절을 받았고, 백관들은 조복을 입고 반열에 나아갔는데 신돈만은 유독 군복을 입고 전상殿上에 서서 왕이 한 번 절할 때마다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면서 내시에게 귓속말하기를, “주상의 예용禮容은 천하에 드믄 일이다”라고 하였다. 그가 은근히 아첨하여 왕에게 총애받음이 이와 같았다. 사관史官 윤소종尹紹宗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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幸演福守大設文殊會中佛殿結綵帛
012_0873_a_02L爲須彌山環山燃燭大如程高丈餘
012_0873_a_03L夜明如晝絲花彩鳳炫耀人目幣用
012_0873_a_04L綵帛十六束選僧三百遶須彌山作法
012_0873_a_05L梵唄震天執事者無慮八千人王與辛
012_0873_a_06L旽坐須彌山東率兩府禮佛旽白王曰
012_0873_a_07L善男女願從上結文殊勝因請許諸婦
012_0873_a_08L上殿聽法於是士女雜1)寡婦至
012_0873_a_09L有爲旽冶容者及至飯僧王手擎金爐
012_0873_a_10L2)遂僧行香略無倦容旽以餅果散於
012_0873_a_11L婦女咸喜曰僉議乃文殊後身也士女
012_0873_a_12L飫珍羞或棄地一會所費至鉅萬王命
012_0873_a_13L忽赤忠勇衛二百五十人晝夜衛旽
012_0873_a_14L是日暴風終日黃塵漲天會凡七日而
012_0873_a_15L暴風三日大霜三日

012_0873_a_16L
命起樓於宮門東大陳百戱擊毬以觀
012_0873_a_17L辛旽騎馬至都評議司幕前宰相
012_0873_a_18L皆起立拱手旽馬而與語旽服飾一如
012_0873_a_19L見者不能辨憤其無禮

012_0873_a_20L
以僧千禧爲國師禪顯爲王師二僧皆
012_0873_a_21L旽所善者也王九拜禪顯立受百官
012_0873_a_22L朝服就班旽獨戎服立殿上每王一拜
012_0873_a_23L輒嘖嘖稱嘆私語䆠者曰主上禮容
012_0873_a_24L天下稀有其陰媚取寵如此史官尹紹

012_0873_b_01L곁에 있었는데, 신돈이 돌아보며 이르기를, “함부로 국사國史를 쓰지 마라. 내가 장차 가져다 보겠노라”라고 하였다. 이보다 앞서 선현이 왕사가 되기 전에, 소종의 일가가 되는 승려 부목夫目이 소종에게 말하기를, “신돈의 탐욕과 사나움이 개돼지만도 못하니 틀림없이 나라를 그르칠 것이며, 게다가 선현이 그에게 붙었으니 나는 차마 볼 수 없다”라고 하고 마침내 도망하여 산으로 들어갔다. 원元나라 사신 걸철지乞徹至가 묻기를 “소문에 따르면 너희 나라에는 권왕權王이 있다던데 지금 어디 있는가?”라고 하였으니, 당시 중국에서는 신돈을 권왕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왕이 걸어서 신돈의 집으로 가서 술을 놓고 낙성연회를 베풀었다. 이보다 앞서 신돈이 기현의 집에 기숙하면서 봉선사奉先寺 솔밭 언덕을 통해서 왕궁에 출입했는데, 그 솔밭 서남쪽에 빈터가 있었다. 신돈이 왕에게 아뢰기를, “그곳에 작은 집을 지으면 늙은 이놈이 오가기에 편안하겠습니다”라고 하자 왕이 허락하였다. 신돈은 그의 도당에게 공역工役을 재촉하여 채 며칠이 지나지 않아 집을 지었다. 또 북원北園에 별실別室을 짓고 겹겹이 문을 만들어 깊숙하고 그윽하게 만들어 놓고 밝은 창문과 깨끗한 책상을 놓아두고 향을 사르며 혼자 앉아서, 쓸쓸히 아무 욕심이 없는 것 같이 보였다. 그 방에는 오직 기현의 아내와 두 명의 계집종만 드나들게 하였다. 무릇 죄에 걸린 자나 벼슬을 구하는 이는 반드시 아내나 첩을 보내 먼저 기현의 처에게 뇌물을 바치고 뵙기를 청하면, 기현의 아내가 나와서 그 사람에게 말하기를 “밀실이 매우 좁아서 겉옷을 입을 수 없고 또 시종들도 데리고 들어갈 수 없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죄에 걸린 자나 벼슬을 구하는 자들의 아내와 첩들은 겉옷을 벗어놓고 짧은 적삼만 입은 채 뇌물을 가지고 홀로 들어가서 바라는 바를 빠짐없이 진술하곤 했다. 그러면 신돈은 혼자서 상대했으므로 추잡한 소문이 흘러 퍼졌다. 기현과 그의 아내는 신돈을 섬기면서 조석으로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아 마치 늙은 노비와 같았다.
지도첨의知都僉議 오인택吳仁澤151)이 전 시중侍中 경천흥慶千興152)과 전 평리評理 목인길睦仁吉153)과 삼사우사三司右使 안우경安遇慶154), 삼사우사 김원명金元命, 전 밀직부사密直副使 조희고趙希古155), 판개성判開城 이순李珣156), 평리評理 한휘韓輝157), 응양군鷹揚軍 상호군上護軍 조린趙璘158), 상호군 윤승순尹承順159)과 함께 밀의하여 말하기를 “신돈은 삿되고 간사하며 음흉하고 교활해서

012_0873_b_01L宗在傍旽顧謂曰無忘國書事吾將
012_0873_b_02L取觀之初禪顯之未封也紹宗族僧夫
012_0873_b_03L目謂紹宗曰旽之貪暴犬豕不若
012_0873_b_04L誤國家禪顯附之吾不忍見遂逃入
012_0873_b_05L元使乞徹至問曰聞爾國有權王何
012_0873_b_06L時中國謂旽爲權王故云

012_0873_b_07L
王步行辛旽家置酒落成初旽在奇顯
012_0873_b_08L由奉先寺松岡出入王宮岡西南
012_0873_b_09L隙地旽白王曰幸此就構小房則庶
012_0873_b_10L便老僕進退王許之旽分其黨督役
012_0873_b_11L不日而成又於止園作別室重門深幽
012_0873_b_12L明窓淨几焚香獨坐蕭然若無欲者
012_0873_b_13L惟許奇顯妻及二婢出入凡陷罪者
012_0873_b_14L官者必遣妻妾先賂顯妻內謁顯妻
012_0873_b_15L出謂曰別室甚狹不可著表衣又不
012_0873_b_16L可率從者以入其妻妾去表衣以短衫
012_0873_b_17L賚賄貨獨入具陳所欲旽獨與相對
012_0873_b_18L醜聲流聞顯與妻事旽朝夕不離側
012_0873_b_19L若老奴婢然

012_0873_b_20L
知都僉議吳仁澤與前侍中慶千興
012_0873_b_21L評理睦仁吉三司右使安遇慶三司右
012_0873_b_22L使金元命前密直副使趙希古判開城
012_0873_b_23L李珣評理韓輝鷹揚軍上護軍趙璘
012_0873_b_24L上護軍尹承順密議曰辛旽邪侫陰狡

012_0873_c_01L남을 참소하고 모략하며 헐뜯기를 좋아한다. 또한 훈구대신들을 배척하고 내쫓았으며, 무고한 사람을 살육하여 그 도당들이 날로 왕성해진다. 도선道詵160)의 비기에 ‘중도 아니고 속인도 아닌 것이 정치를 혼란케 하고 나라를 망치리라’ 하였더니 필시 이 사람일 것이다. 장차 국가에 큰 우환이 될 것이니 마땅히 왕에게 아뢰고 속히 제거해야 하겠다”라고 하였다. 판서 신귀辛貴가 듣고 신돈에게 고하니 신돈은 왕에게 애써 변명하여 아뢰기를 “저는 산수 간의 일개 중이온데 상감께서 삼가 명하시어 이에 이르렀습니다. 감히 명을 어길 수가 없어서, 간사한 무리들을 제거하고 어질고 진실한 사람을 등용하여 백성들이 조금이나마 평안하게 되면 한 벌 옷과 발우를 가지고 다시 산으로 들어갈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온 나라 사람들이 장차 신돈을 죽이려 하니, 원하옵건대 상감께서는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이 놀라서 곡절을 물으니, 신돈이 신귀의 말을 그대로 아뢰었다. 이에 즉시 명하여 오인택 등을 잡아다가 순군부에서 국문한 후 오인택・조희고・경천흥・김원명・안우경・목인길을 곤장을 쳐서 남쪽 끝으로 귀양을 보내고 그 가족들을 잡아다가 관노로 삼고 가산을 몰수하였다. 또 이순・윤승순・조린은 섬으로 귀양 보냈다. 이 일이 있고 난 후 오인택은 신돈이 틀림없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말을 듣고 곧 도망하였다. 신돈은 오인택의 처자를 순군부에 가두고 또 판사복시判司僕寺 사事 옥천계玉天桂가 일찍이 오인택의 작은 아들을 기른 일을 가지고서 오인택과 함께 모략했다고 의심했다. 옥천계는 몹시 혹독한 고문을 받고 옥중에서 괴롭게 죽었고 오인택도 잡혀서 매를 맞고 죽었다.
신돈은 처음에 승려다운 행동으로 왕에게 신임을 받았지만 김란金蘭의 딸을 받아들인 후 또 첩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두었고, 경대부의 아내 중에 얼굴이 예쁜 이는 반드시 은밀하게 불러다가 간통하였다. 조정에서 벼슬하는 사람들이 모두 은혜를 바라거나 혹은 위엄이 두려워서 다투어 노비와 보물을 바쳤다. 그런데도 왕은 오히려 신돈이 봉록을 받지 않고,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으며, 전원田園을 두지 않는다고 하여 믿음이 더욱 두터웠다. 신돈은 위복威福(위력으로 위협하거나 은혜를 입혀 남을 억누름)을 행하여 은혜와 원수를 반드시 갚았으며, 세가世家 대족大族들을 거의 다 주살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호랑이나 이리처럼 보았다. 심지어는

012_0873_c_01L好纔毀人斥逐勳舊殺戮無辜黨與
012_0873_c_02L日盛道詵記有非僧非俗亂政亡國之
012_0873_c_03L必是此人將爲國家大患宜白王
012_0873_c_04L早除之判書辛貴聞以吿旽旽入吿
012_0873_c_05L于王曰旽山水間一袖者也上勤令至
012_0873_c_06L不敢違命思欲去3)汗惡用賢良使
012_0873_c_07L三韓百姓粗得平安然後將一衣鉢
012_0873_c_08L還向山林今國人將殺旽願上哀矜
012_0873_c_09L上驚問之旽俱以貴語對乃命繫仁澤
012_0873_c_10L巡軍鞠之杖流仁澤希古千興元命
012_0873_c_11L遇慶仁吉于南裔沒爲官奴籍其家
012_0873_c_12L又流珣承順璘于外後仁澤聞旽必欲
012_0873_c_13L殺己乃逃旽繫仁澤妻子于巡軍
012_0873_c_14L以判司僕寺事玉天桂嘗養仁澤小子
012_0873_c_15L疑與仁澤同謀痛行栲椋辛死獄中
012_0873_c_16L獲仁澤杖烽卒

012_0873_c_17L
旽初以僧行見信於王旣納金蘭女
012_0873_c_18L又蓄妾無算卿大夫妻貌美者必密招
012_0873_c_19L私之凡在朝者皆希恩畏威爭獻臧
012_0873_c_20L獲寶器王猶以不受祿不近色不置
012_0873_c_21L田園信重之旽恣行威福恩讐必復
012_0873_c_22L世家大族誅殺殆盡人視若虎狼至使
012_0873_c_23L底本冠註曰「還疑遝」{編}底本冠註曰「遂
012_0873_c_24L疑逐」{編}
底本冠註曰「汗疑奸」{編}

012_0874_a_01L벼슬하는 자들로 하여금 밤에 자기집에서 숙직을 서게 하고 자질을 논하여 벼슬을 주었다. 신돈이 외출할 때는 시중侍中 이하가 앞뒤로 그를 둘러쌌으므로 그 때문에 도로가 막혀 시장에서는 가게를 열지 못했다.
기현奇顯과 최사원崔思遠이 심복이 되었고, 이춘부李春富161)와 김란金蘭은 그의 날개가 되어 그 무리가 조정에 가득하였으므로 임금도 불안을 느끼고 신돈을 영상領相(신하를 총괄하는 사람)이라 부르고 함부로 관직명을 부르지 못하였다. 신돈은 스스로 자신의 형세가 굳세고 거침없음을 알고 왕이 자신을 꺼릴까 두려워하더니 마침내 반란[不軌]을 도모하였다. 왕이 헌릉憲陵과 경릉景陵 두 능을 배알할 때 그 무리를 나누어 파견하여 길가에 매복시키고 대사를 거행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왕이 무사히 환궁하자 신돈은 그 무리에게 말하기를, “어째서 약속대로 되지 않았는가?”라고 하니, 그 도당들이 대답하기를 “상감의 거둥이 너무나 성대해서 차마 범할 수 없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신돈이 성을 내며 꾸짖어 말하기를 “너희처럼 실로 겁 많은 놈들은 쓸모가 없다”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밤낮으로 모여서 다시 기일을 정해서 거사하기로 하였다. 신돈의 문객이던 선부 의랑選部議郞 이인李韌162)이 흉악한 음모를 자세히 알고 몰래 기록해 두었다가 거사일이 임박하여 곧 성명을 숨기고 한림거사寒林居士라는 이름으로 글을 써서 밤에 재상 김속명金續命163)의 집에 던져 놓고 즉시 미복微服으로 변장하여 도망쳤다. 김속명이 그 글을 왕에게 바치니 왕은 순위부巡衛府에 명하여 신돈의 무리 기현奇顯・최사원崔思遠・정구한鄭龜漢・진윤검陳允儉・기중수奇仲脩・한을송韓乙松・고인기高仁器 등을 잡아들여 국문하였다. 왕이 처음엔 이인李韌이 모함한 것으로 의심하고 믿지 않더니 급기야 그 일당을 심문하여 모두 자백을 받게 되자, 신돈을 유배지로 보내고 마침내 그 도당들을 모두 죽였다. 왕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익재益齋가 일찍이 말하기를 ‘신돈은 단정한 사람이 아니므로 후환을 끼치리라’고 하였으니 그의 선견지명先見之明에 아무도 미치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신臣 등이 자세히 살펴보건대,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데 있어서 참소를 물리치고 간신을 멀리하는 것보다 더 먼저 해야 할 일은 없습니다. 신돈이 종사宗社에 이롭지 못하리라는 것은, 눈이 있고 귀가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공감하는 바였습니다. 정세운과 이승경이 일찍이 죽이고자 하였으나 왕이 사신을 보내서 몰래 피신시켰고, 이제현李齊賢・이인복李仁復・한수韓脩 등도 단정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말했건만, 왕만 홀로 미혹해서 깨닫지 못했습니다. 왕은 듣기만 하고 살피지 않았으며, 그를 등용하여 의심하지 않았고, 그에게 모든 일을

012_0874_a_01L仕者夜直其第論資授官出則侍中以
012_0874_a_02L下擁前後道路爲之塡塞市不開貨
012_0874_a_03L奇顯崔思遠爲腹心李春富金蘭爲羽
012_0874_a_04L黨與滿朝王亦有不自安之意
012_0874_a_05L領相而不敢官旽自知鴟張大甚恐王
012_0874_a_06L忌之遂謀不軌及王謁憲景二陵分遣
012_0874_a_07L其黨設伏道傍約行大事及王還宮
012_0874_a_08L旽謂其黨曰何不如約其黨曰見上
012_0874_a_09L儀衛甚盛不忍犯也旽怒且罵曰
012_0874_a_10L輩誠怯懦不用者也自是日夜聚謀
012_0874_a_11L刻日擧事旽門客選部議郞李韌備知
012_0874_a_12L凶謀陰籍記之事迫乃匿姓名稱爲
012_0874_a_13L寒林居士爲書夜投宰相金續命第
012_0874_a_14L微服亡去續命以其書聞王命巡衛府
012_0874_a_15L收捕旽黨顯思遠鄭龜漢陳允儉奇仲
012_0874_a_16L脩韓乙松高仁器鞠之王始疑靱誣搆
012_0874_a_17L不之信及訊其黨皆服流旽遂誅黨與
012_0874_a_18L王歎曰益齊嘗言旽非端人必貽後
012_0874_a_19L先見之明不可及已臣等按人君
012_0874_a_20L之爲國莫先於聖讒遠侫而已旽之將
012_0874_a_21L不利於宗社有耳目者所共見知
012_0874_a_22L世雲李承慶1)殺欲之王勸使潛避
012_0874_a_23L李齊賢李仁復韓脩亦言非端人王獨
012_0874_a_24L迷而不悟聽之不察用之勿疑任之

012_0874_b_01L전횡하게 하였으며, 아첨하는 도적을 믿고 도적을 길렀으니, 나중에 후회하였지만 될 수 있겠습니까. 허다히 그 왕을 미혹케하였습니다.
양부의 대간과 이부理部에서 상서하기를 “대역大逆은 천하 만대에 용납지 못할 죄인데, 신돈은 본래 일개 미천한 중으로 외람되게도 임금의 신임을 얻어 지위가 신하로서는 최고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백관의 임용과 면직을 마음대로 하였으며, 사람을 부릴 때에도 턱으로 지시하고 기분으로 부려 자기에게 아부하는 여부에 따라 벼슬을 주고 빼앗았으며, 흉도들을 멀리 심어두고 분수에 맞지 않는 자리를 엿보다가, 다행히도 조종의 신령과 전하의 선견지명으로 음모가 발각되었거늘, 이에 관대한 은전으로 귀양만 보내는 처벌에 그치니 온 나라가 모두 실망하고 있습니다. 또 신돈의 무리가 어찌 오직 최사원・기현 등 7명뿐이겠습니까.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대의大意로 결단하시어 신돈을 극형에 처하시고 가산을 몰수하옵소서. 그리고 그 일당 등도 모두 죽여서 여러 사람의 마음을 통쾌하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상소하니, 왕이 그 말을 따라 대사성大司成164) 임박林撲165)과 판사判事 김두金斗를 보내어 수원에서 신돈을 죽였다.
이보다 앞서 왕이 신돈・이춘부 등과 함께 동맹을 맺었는데 이때에 이르러서 임박에게 그 맹서의 글을 주어 신돈에게 보이게 하고 수죄數罪하여 말하기를 “네가 일찍이 ‘부녀자들을 가까이 하는 것은 도인道人(導引)166)하여 기운을 기르는 것이요 감히 사통私通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였는데, 지금 듣건대 자식까지 낳았다고 하니 이런 일이 맹서의 글에 들어 있느냐? 도성 안에 큰 저택이 7개에 이른다고 하는데 이런 일이 맹서의 글에 들어 있느냐? 이렇게 몇 가지의 일로써 낱낱이 죄를 논한 후에 글을 불에 태워버려라”라고 하였다. 임박이 수원으로 가서 사람을 시켜 신돈을 소환하러 온다고 속였더니 신돈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오늘 나를 소환하는 것은 아마도 아지阿只를 위하여 나를 생각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아지’란 방언方言인데 어린아이를 지칭하는 말이다. 신돈이 형을 당할 때 두 손을 마주 잡고 임박에게 애절하게 말하기를, “바라건대 그대는 아지를 보아서라도 나를 살려 주시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임박은 즉시 목을 베어 죽이고 사지를 각각 잘라서 각 도에 조리돌리고 그 머리는 서울에 매달아 놓았다. 신돈의 성품은 사냥개를 두려워하였고 사냥을 싫어하였으며, 또 방종 음탕하여 항상 까만 닭과 흰 말을 죽여서 양기를 보충했으므로 그 당시 사람들이 신돈을 두고 늙은 여우의 정기라고 말하였다.

012_0874_b_01L益專信讒賊而養寇盜後雖噬臍得乎
012_0874_b_02L多見其王之惑也

012_0874_b_03L
兩府臺諫理部上書曰大逆天下萬世
012_0874_b_04L之所不容辛旽本一微僧濫遇上知
012_0874_b_05L位極人臣而進退百官頤指氣使
012_0874_b_06L其附己與否而予奪之廣植兇徒
012_0874_b_07L覦非分幸賴祖宗之靈殿下先見之明
012_0874_b_08L陰謀發覺乃用寬典止於流放三韓
012_0874_b_09L缺望且旽之黨與豈惟思遠奇顯等七
012_0874_b_10L人而已伏望殿下斷以大義寘旽極
012_0874_b_11L籍沒家產并夷其黨以快衆心
012_0874_b_12L從之遣大司成林撲判事金斗誅旽于
012_0874_b_13L水原初王與旽春富等同盟至是授撲
012_0874_b_14L盟書使示旽數曰邇嘗謂近婦女
012_0874_b_15L以道引養氣非敢私之今聞至生兒息
012_0874_b_16L是在盟書者歟城中甲第至七是在盟
012_0874_b_17L書者歟如是者數事數罪訖可焚此
012_0874_b_18L樸至水原使人詐報宣召旽喜曰
012_0874_b_19L今日召還2)益爲阿只思我也阿只方
012_0874_b_20L言小兒之稱旽當刑束手乞哀於樸曰
012_0874_b_21L願公見阿只活我乃誅之支解以徇梟
012_0874_b_22L首京城旽性畏獸犬惡射獵且縱淫
012_0874_b_23L常殺烏鷄白馬以助陽道時人謂旽爲
012_0874_b_24L老狐精

012_0874_c_01L
고려가 건국한지 5백 년쯤 지나 하늘의 돌보심이 태만해졌다. 그리하여 용렬하고 암둔暗鈍하며 패려悖戾한 공민왕恭愍王이 태어나고, 또 간사하고 흉악한 역도인 신돈이 태어났다. 공민왕이 본래 불도를 숭상하였으므로 신돈은 왕에게 ‘공空 사상’에 대한 이야기로 아첨하였다. 그래서 왕이 혼몽해져서 현혹되자 신돈은 겉만 그럴듯하게 꾸며 아름답게 하였다. 신돈은 뜻을 얻고 나서 임금의 총애를 믿고 권력을 휘둘렀으며 상하의 구분을 무시하였고 군신의 기강을 훼손하였다. 임금이 입는 복식을 입고 임금처럼 행동하였으며 공경대부도 모두 그의 문에서 나왔다. 도당들이 많아지자 몰래 반역을 꾀하였으니, 천하고금의 대악大惡이며 하늘과 땅이 용납하지 못할 바였다. 신돈은 어떤 사람인가? 그의 역죄逆罪가 이와 같이 극도에 이르렀는데도 하늘이 속히 벌하여 죽이지 않고 오늘날에 이르렀으니 이는 또한 무슨 이치란 말인가? 하늘이 만일 고려를 도와 부지하여 안전하게 하려 했다면 비록 이 신돈같이 간특한 역도가 있다고 하더라도 정세운이 죽일 수 있었을 것이고, 이존오가 쫓아낼 수 있었을 것이며, 이제현이 물리칠 수 있었을 것이니, 어떻게 그러한 간악함을 저지를 수 있겠는가. 아마도 이러한 신돈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공민왕이 있었던 것이리라. 그러므로 신돈의 자손이 공민왕의 종사宗社를 도적질하였으니, 공민왕은 결국 나라를 망치게 한 주인이로다. 아! 아! 인군을 인애仁愛하는 것은 천심天心이지만 항상하지 못하여 믿기 어려운 것도 천명天命이다. 하늘이 고려에 대하여 힘써 돌보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공민왕이 일찍이 하늘이 노하고 태도를 달리했는데도 공경히 받들지 않아 스스로 하늘과 단절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천명이 항상하지 못하여 때로 믿지 못할 점이 있는 까닭이니, 어찌 하늘에게만 모든 운수를 탓하겠는가. 뒷날 군왕이 된 자가 하늘의 큰 명[駿命]이 쉽지 않은 줄 몰라서야 되겠는가. 공민왕을 거울로 삼아야 하리라. 이상 『통감通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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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有國將五百年天之眷顧已怠
012_0874_c_02L旣生庸暗悖戾之恭愍又生姦軌兇逆
012_0874_c_03L之辛旽王本信佛則旽爲之談空以諛
012_0874_c_04L王夢旣惑則旽爲之矯飾以媚之
012_0874_c_05L旽旣得志固寵弄權蔑上下之分
012_0874_c_06L君臣之體服御儀衛一如其君公卿
012_0874_c_07L大夫皆出其門黨與旣衆潛圖不軌
012_0874_c_08L天下古今之大3)覆載所不容也
012_0874_c_09L何人哉其罪逆如是其極而天不速罰
012_0874_c_10L殛之以至今日亦何理哉天若眷佑
012_0874_c_11L高麗扶持而全安之則雖有此旽之姦
012_0874_c_12L而鄭世雲得以殺之李存吾得以黜
012_0874_c_13L李齊賢得以斥之將何以售其奸哉
012_0874_c_14L惟其有是旽而有是恭愍也故旽之子
012_0874_c_15L竊恭愍之宗社恭愍卒爲亡國之主
012_0874_c_16L嗚呼仁愛人君者天心也而靡常難諶
012_0874_c_17L亦天命也天之於高麗非不眷眷
012_0874_c_18L而恭愍曾不敬天怒天渝自絕于
012_0874_c_19L此天命之所以靡常而有時乎難諶
012_0874_c_20L何獨諉諸數乎後之爲人君者
012_0874_c_21L不知駿命之不易而恭愍爲殷鑑也哉
012_0874_c_22L并通鑑

012_0874_c_23L底本冠註曰「殺欲疑倒」{編}底本冠註曰「益
012_0874_c_24L疑蓋」{編}
底本冠註曰「要疑惡」{編}

012_0875_a_01L
신돈이 국정을 잡았을 때 기현의 집에 기거하면서 그 아내와 사통하고 사대부의 아내나 첩 중에 아리따운 미모가 있음을 듣기만 하면, 그 남편을 작은 죄로 감옥에 가두고 그 소식을 그의 집에 전하여 만일 주부가 그 억울함을 호소하면 면해주겠다고 하고, 그 부인이 곧 신돈의 집으로 가서 중문中門으로 들어가면 노비는 데리고 들어가지 못하게 하여 신돈이 서당에 홀로 앉아 마음대로 간음하고는 그 남편을 놓아주곤 하였다.용재총화慵齋叢話
Ⅴ. 간승奸僧
보우普雨167)
문정왕후文定王后는 자못 불사를 숭상하였다. 마침 보우라는 승려가 있었는데 글을 잘 짓고 불경에 통달했다. 궁중과 인연이 있어서 널리 사찰 도량을 건설하였는데 그 비용이 만금萬金이 넘었다. 문정왕후가 승하하자 대간臺諫들과 성균관成均館 유생들이 연일 보우를 죽여야 한다고 상소上疏하였다. 그래서 제주濟州로 유배하였는데 제주부사 변협邊協168)이 그 틈을 타서 보우를 장살杖殺하였다. 이에 유림에서는 통쾌하게 여겼다. 이보다 앞서 보우를 등용했을 때 양종兩宗 선과禪科를 시설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모두 없애버렸다.지봉유설芝峯類說
명종明宗조에 요승 보우는 보은사報恩寺169) 주지로 오래 있었는데 중종의 능침(中廟)을 절 부근으로 옮겨서 절의 위세를 견고하게 하고자 하였다. 이에 문정왕후를 속여 현혹하여 말하기를, “선릉宣陵 근처에 길한 조짐이 있으니, 바라옵건대 중묘의 산릉을 그곳에 옮기십시오”라고 하자, 문정왕후는 그 말을 믿었고 윤원형尹元衡170)이 문정왕후의 뜻을 받들어 모든 대신들을 위협하니 안현安玹 등이 비위를 맞추며 그 뜻을 따를 뿐 감히 어기지 못했다. 마침내 능묘를 이장할 계획을 마치고 장차 문정왕후가 돌아가시면 같이 장사하려고 하였는데, 땅의 형세가 매우 낮아서 해마다 비만 오면 강물이 넘쳤다. 문정왕후가 죽은 후엔 부득이 다른 곳에 장사하였다. 여러 사람의 평론에 따라 모두 중묘의 능을 다른 데로 옮기고자 하였으나 다시 옮기는 일이 너무도 어려워서 그만 두었다.석담일기石潭日記
중묘中廟를 처음에 고양高陽에 장례를 치러 희릉禧陵과 같은 곳에 능을 만들었었는데, 임술壬戌(1562)년에 윤원형이

012_0875_a_01L
辛旽秉國政寓奇顯家通其妻聞士大
012_0875_a_02L夫妻妾有姿色者以微譴囚其夫令傳
012_0875_a_03L報其家若主婦訴其寃則可免其婦
012_0875_a_04L卽就旽家入中門去其婢僕旽獨坐書
012_0875_a_05L隨意縱淫因放其夫叢話

012_0875_a_06L

012_0875_a_07L奸僧

012_0875_a_08L普雨

012_0875_a_09L
文定王后頗尙佛事有僧普雨者
012_0875_a_10L解佛經夤緣宮禁廣設道場其費
012_0875_a_11L萬計及文定昇遐臺諫與太學生
012_0875_a_12L章請誅命流于濟州府使邊協因事杖
012_0875_a_13L殺之林快之先是用普雨設兩宗禪
012_0875_a_14L至是并罷之芝峯類說

012_0875_a_15L
明宗朝妖僧普雨久作報恩寺住持
012_0875_a_16L移中廟陵寢于寺側以固其寺之勢
012_0875_a_17L誑惑文定王后謂宣陵近處有吉兆
012_0875_a_18L遷中廟山陵于其地文定信之元衡逢
012_0875_a_19L迎慈旨脅持諸大臣安玹等依何不敢
012_0875_a_20L遂成遷陵之計將於文定百歲後
012_0875_a_21L使得同兆而地勢卑下每年江水漲入
012_0875_a_22L故文定之喪不得已更卜他處物議皆
012_0875_a_23L欲遷陵而以再遷爲難而止石潭日記

012_0875_a_24L
中廟初葬高陽與禧陵同塋壬戌元衡

012_0875_b_01L힘을 다하여 문정왕후를 도와 한강가 낮은 늪지대로 옮겼으나 아무도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세상에 전하는 말에 따르면, 능을 옮길 때에 무덤 속에서 곡성哭聲이 흘러나왔는데 산역山役하는 이들이 듣지 못한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이듬해 순회順懷 세자가 죽고 2년 더 지나서 문정왕후가 승하하였으며, 또 2년 후엔 명종께서 승하하였으니 사람들은 능을 잘못 옮긴 탓이라고 말했다. 임진壬辰(1592)년에 정릉靖陵이 왜구에 의하여 도굴을 당하자 신하와 백성들이 너무도 애통해 하였으니, 차마 무슨 말을 하리오.지봉유설芝峯類說

012_0875_b_01L力賛文定遷于漢濵卑湫之地人莫敢
012_0875_b_02L世傳遷陵時哭聲自壙中出役者
012_0875_b_03L無不聞翌年順懷世子卒越二年
012_0875_b_04L定昇遐又二年明廟昇遐人謂遷陵之
012_0875_b_05L至壬辰靖陵被倭發掘臣民之至
012_0875_b_06L尙忍道哉芝峯類說

012_0875_b_07L
東國僧尼錄終

012_0875_c_01L
  1. 1)목차에서는 ‘대모선사大茅禪師’라고 하였고, 본문에서는 ‘대모화상大茅和尙’이라 하였다.
  2. 2)본여선사本如禪師 : 송나라 고승이다. 사명四明 사람이며 호는 신조법사神照法師이다. 백련사白蓮社를 창건하고, 황우皇祐(仁宗의 연호, 1049~1053) 연간에 입적하였다. 저술로는 『仁王懺儀』・『普賢行法經疏』가 있고, 자세한 내용은 『宋高僧傳』3권에 수록되어 있다.
  3. 3)남악회양南嶽懷讓(677~744) : 중국 당나라 승려이다. 속성은 두杜, 금주金州 안강安康 사람이다. 15세에 형주荊州 옥천사의 홍경弘景에게 출가하여 율을 배웠으며, 뒤에 탄연坦然의 권고로 숭산적안嵩山覿安을 뵈었고 육조 혜능을 15년간 모셨다. 713년 남악 반야사에 들어가 30년간 있으면서 남악의 선풍을 선양하고 당 천보 3년에 68세로 입적하였다. 시호는 대혜大慧이다.
  4. 4)법제자[法嗣] : 법맥法脈을 이어받은 사람 곧 불법상佛法上의 제자弟子이다.
  5. 5)혜철선사慧徹禪師(785~861) : 자는 체공體空, 속성은 박씨이고 경주 태생이다. 15세에 출가하여 부석사에서 『華嚴經』을 배우고 22세에 구족계를 받았다. 814년에 당에 가서 방공산 서당지장西堂智藏에게 심인心印을 받았다. 시호는 인적忍寂이다.
  6. 6)홍척선사洪陟禪師 : 남한조사南韓祖師라고도 하며, 헌덕왕 때 당에 가서 서당지장의 법을 전해 받고 흥덕왕 원년(826년)에 귀국하였다. 흥덕왕과 선광태자의 귀의를 받았으며 지리산에 실상사를 짓고 서당西堂의 선풍을 드날렸다.
  7. 7)무염선사無染禪師(801~888) : 신라시대 승려이다. 호는 무주無住, 속성은 김씨로 무열왕의 8대손이다. 13세에 설악산 오색석사五色石寺(지금의 양양 오색동)에서 출가하였다. 법성法性을 수년 동안 섬기고 부석사 석징釋澄에게 『華嚴經』을 배웠다. 822년경 당에 들어가 불광사佛光寺 여만如滿에게 법을 묻고, 마곡보철麻谷寶徹에게 법인을 받았다. 성주산문聖住山門의 개조이다.
  8. 8)현욱선사玄昱禪師(787~868) : 신라시대 승려이다. 속성은 김씨이며 23세에 출가하여 808년 구족계를 받았다. 824년에 당에 들어가 대원부大原府라는 절에 있으면서 뜻을 이루었다. 837년 본국의 왕자 김의종金義宗을 따라 환국하여, 840년 혜목산에 암자를 짓고 있다가 경문왕의 청으로 고달사에 머물다가 향년 82세로 입적하였다.
  9. 9)장경회휘章敬懷暉 : 당나라 고승으로 혹 회운懷惲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천주泉州 사謝씨의 아들로 호는 박암泊岩, 시호는 대선교선사大宣敎禪師이다. 원화元和(唐 憲宗의 연호, 806~820) 연간에 장경사章敬寺에 거주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宋高僧傳』제10권에 기록되어 있다.
  10. 10)남전보원南泉普願(748~834) : 마조도일馬祖道一의 법제자이다. 속성은 왕王, 중국 정주鄭州 신정新鄭 사람이다. 757년 대외산大隗山의 대혜大慧에게 공부하고 30세에 숭악嵩嶽에게 가서 계를 받았다. 뒤에 마조에게 다시 입문하여 교학을 버리고 도를 깨달았다.
  11. 11)품일선사品日禪師(810~889) : 신라시대 스님으로 혹 범일梵日이라 한다. 속성은 김씨이며 왕족이다. 15세에 출가하여 20세에 비구계를 받았으며 흥덕왕 때 김의종을 따라 당에 가서 제안선사를 뵙고 6년 동안 섬겼으며 뒤에 약산藥山에 가서 도를 묻고, 847년 백달산에서 정진하였다. 명주溟洲 도독 김공金公의 청으로 40여 년간 굴산사에서 지냈다. 그 사이 본국의 경문왕・헌강왕・정강왕이 국사로 모시려고 경주에 올 것을 명하였으나 끝내 거절하였다. 세납 80, 법랍 60으로 입적하였다. 시호는 통효通曉, 탑호는 연휘延徽이다. 선종 9산문 가운데 사굴산문闍崛山門의 개조이다.
  12. 12)대매법상大梅法常 : 당나라 승려이다. 백수장씨白水張氏의 아들로 담연曇延스님에게 출가하였으며 정관貞觀(당 太宗의 연호, 627~649) 연간에 보광사普光寺에 거주하였다. 저서로는 『攝論義疏玄章』・『涅槃經』・『維摩經』・『勝鬘經』 등의 소기疏記가 있다. 자세한 내용은 『宋高僧傳』 제11권에 기록되어 있다.
  13. 13)대매산大梅山 : 중국 은현鄞縣 동쪽 70리에 있는 산 이름이다.
  14. 14)상당上堂 : 설법하기 위하여 법사가 자리에 오르는 것을 말한다.
  15. 15)순지선사順支禪師 : 어떤 책에는 순지順之로 기록하였다. 신라시대 스님으로 속성은 박씨이며 패강 사람이다. 20세쯤 오관산에 가서 출가하였고, 속리산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공악公岳에 다녔고 859년 당에 가서 앙산혜적仰山慧寂에게 법을 받았다. 헌강왕 초년에 송악의 여단월女檀越인 원창왕후와 그의 아들 위무왕고려 태조의 父이 오관산 용엄사를 보시하여 기거하도록 하였다. 서운사瑞雲寺에서 65세에 입적하였다. 시호는 요오선사了悟禪師, 탑호는 진원眞原이다.
  16. 16)앙산혜적仰山慧寂(815~891) : 중국 당대의 승려이다. 위앙종潙仰宗의 개조開祖이다. 소주韶州 회화懷化에서 태어났으며 속성은 섭葉씨이다. 17세 때 왼손의 약손가락과 새끼손가락을 끊어 결심을 보이고 출가하였다. 탐원耽源에게서 선禪의 현묘한 뜻을 깨닫고, 다시 위산潙山의 영우靈祐를 뵙고 깊은 경지에 도달하였다. 15년 동안 위산에 있다가, 뒤에 앙산으로 옮겨서 선풍을 선양, 위앙종을 크게 이룩하였다. 대순 1년 소주 동평산에서 77세로 입적하였다. 시호는 지통 대사智通大師이다.
  17. 17)임제의현臨濟義玄(?~867) : 중국 당대의 스님으로 임제종臨濟宗의 개조이다. 조주 남화 사람으로 속성은 형邢씨이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였고 불교를 좋아하였으며, 출가한 후 여러 곳을 다니면서 경론을 탐구하였다. 계율에 정통했으며 황벽희운黃蘗希運의 법을 이었다. 시호는 혜조선사慧照禪師, 저서는 『임제혜조선사어록』 1권이 있다.
  18. 18)석상경제石霜慶諸 : 당나라 승려이다. 신감新淦 진씨陳氏의 아들이다. 담주潭州 석상산石霜山에 거주하다가 뒤에 장사長沙에 자취를 감추었다. 광계光啓(당 僖宗의 연호, 885~888) 연간에 앉은 채로 입적하였다. 자세한 내용은『송고승전』 제12권에 수록되어 있다.
  19. 19)행적선사行寂禪師(832~916) : 신라시대 스님으로 속성은 최씨이다. 해인사에서 경・논을 연구하고 847년 복천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굴산 통효通曉의 제자가 되었다. 870년 당에 가서 오대산・화엄사에서 문수보살에게 예참하였다. 875년 성도成都의 정중정에 가서 본주스님 무상無相의 영당에 예배, 석상경제를 뵙고 심법을 전해 받았다. 885년 귀국하여 통효를 모셨고 효공・신덕왕 때에 국사가 되었다. 신덕왕 5년 석남사에서 입적하였다. 세수는 85, 시호는 낭공대사郎空大師, 탑호는 백월서운白月栖雲이다.
  20. 20)동산양개洞山良价(807~869) : 조동종의 개조이다. 중국 회계사람으로 속성은 유兪이다. 운암담성의 법제자이다. 오설산五洩山 진묵에게 출가하였고, 21세에 숭산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남전보원과 위산영우를 뵙고 위산의 지시로 운암담성을 찾아가 무정이 설법한다는 말을 듣고 선지를 깨달았다. 시호는 오본대사悟本大師, 저서는 어록 1권이 있다.
  21. 21)동관潼關 : 중국 협서성陜西省에 있는 고을 이름이다.
  22. 22)도중途中 : 일심一心의 본가本家에는 가리사家裏事와 도중사途中事가 있는데, 여기서는 도중사에 대한 이야기이다.
  23. 23)설봉의존雪峯義存(821~908) : 당나라 승려이다. 천주 남안 사람으로 속성은 증曾이다. 12세에 아버지를 따라 포전 옥윤사에 가서 경현慶玄의 시동侍童이 되었다. 17세에 출가하여 부용산 항조恒照를 스승으로 섬겼다.
  24. 24)운거도응雲居道膺(835~902) : 당나라 고승이다. 유주幽州 왕王씨의 아들이다. 홍주洪州 운거산雲居山에 살았다. 『송고승전』 제12권에 기록이 전한다.
  25. 25)경유선사慶猷禪師(871~921) : 신라 말 고려 초기의 스님으로 속성은 장張씨이다. 15세 때 훈종訓宗에게 출가하였다. 888년 당에 들어가 운거도응의 법을 전해 받고, 908년에 귀국하였다. 고려 태조가 싸우던 길에 나주에 이르러 그의 높은 소문을 듣고 진중으로 맞아들여 귀의하였으며 즉위한 뒤에는 왕사로 섬겼다. 일월사日月寺에서 51세로 입적하였다. 법랍 33년, 시호는 법경法鏡, 탑호는 보조혜광普照慧光이다.
  26. 26)배휴裴休 : 당나라 사람이다. 숙肅의 아들로 자는 공미公美이다. 진사로 대중大中(당 선종宣宗의 연호) 연간에 병부시랑을 거쳐 동중서문하장사同中書門下章事에 이르렀다.
  27. 27)혜거국사慧炬國師 : 고려시대 승려이다. 968년 국사가 되었고 974년에 입적하였다.
  28. 28)청량문익淸凉文益(885~958) : 법안종의 시조이다. 중국 여항餘杭 사람으로 7세에 전위全偉에게 출가하였다. 뒤에 장경혜릉에게 참배하고 다시 나한계침羅漢桂琛에게 법을 받았다. 그때 남당주南唐主 서경徐璟의 청으로 금릉金陵의 보은선원報恩禪院에 들어갔으며, 또다시 옮기어 청량사淸凉寺에 있으면서 교화에 힘썼다.
  29. 29)구산선九山選 : 구산은 달마의 선법을 받아서 그 문풍門風을 지켜 온 아홉 개의 산문으로 가지산・실상산・동리산・봉림산・성주산・사자산・회양산・수미산・도굴산을 말한다. 구산에서 실시하는 국가고시인 승려의 과거시험을 구산선이라 한다.
  30. 30)삼장사三藏社 : 개성에 있던 절이다.
  31. 31)운흥사雲興社 : 전라북도 임실군 가지산에 있던 절이다. 신라 진감국사가 창건하였다.
  32. 32)선원사禪源社 : 전라북도 남원군 남원읍 도통리 만행산에 있는 절이다. 875년 도선국사가 창건하였다. 원源자는 원院자가 아닌지 의심스럽다.
  33. 33)중오中吳 : 윤주潤州의 다른 이름이다.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진강현鎭江縣이다.
  34. 34)방할棒喝 : 선가의 종장宗匠이 후학을 깨우치는 방편으로 어떤 이에게는 방棒을, 어떤 이에게는 할喝을 쓰는 것이다. 방은 덕산에게서, 할은 임제에게서부터 시작되었다.
  35. 35)『동문선』 118권에 실린 이제현의 비명에 따라 날짜를 삽입하였다.
  36. 36)충헌왕忠憲王(1213~1259) : 충헌왕忠憲王은 몽골 간섭기에 고종高宗의 시호를 격하하여 불렀던 호칭이다.
  37. 37)보각국사普覺國師(1320~1392) : 고려 후기의 승려이다. 속성은 조趙씨로 광주廣州 풍양豊壤 사람이다. 법명은 혼수混修, 자는 무작無作, 호는 환암幻庵이다. 12세에 출가하여 대선사 계송繼松에게 득도하고 1341년 선선禪選 상상과에 올라 1383년 국사가 되었다. 공양왕 말년에 입적하였다.
  38. 38)양가도승통兩街都僧統 : 고려・조선 초의 승정僧政 제도이다. 양가도승통아래 좌가左街・우가右街 도승록都僧錄, 부승록副僧錄, 승정僧正 등의 승관직이 있었고, 도승통은 조선 초기까지 유지되었다.
  39. 39)영원사塋源寺 : 경상남도 밀양군 자씨산慈氏山에 있던 절로 지금은 없어졌다.
  40. 40)송림사松林寺 :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구덕동에 있는 절이다.
  41. 41)줄탁啐啄 : 사제 간에 서로 부합되는 것을 말한다. ‘줄啐’은 병아리가 태어날 때 안에서 껍질을 쪼는 것이고 ‘탁啄’은 암탉이 밖에서 쪼아주는 것이다.
  42. 42)무위사無爲寺 : 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 월출산에 있는 절로 617년 원효스님이 창건하였다. 처음 이름은 관음사였으며 1556년 무위사라 개칭하였다.
  43. 43)오조五祖 법연法演(?~1104) : 임제종 양기파의 승려이다. 중국 금주 사람으로 속성俗姓은 등鄧이며, 35세에 출가하였다. 성도成都에 가서 중관과 유식의 여러 논서들을 배워 깊고 묘한 이치를 연구하였다. 하루는 교문敎門에 의문을 품고 선禪으로 전향하여 큰 깨달음을 얻었다. 사연산에 거주하다가 오조산五祖山에 들어가서 숭녕 3년에 입적하였다.
  44. 44)영해부寧海府 :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일대를 말한다.
  45. 45)선관膳官 영令 : 선관은 고려시대의 관청으로 제사와 연회에 쓰는 음식을 맡아보았으며, 영令은 종7품관이다.
  46. 46)청평사淸平寺 : 강원도 춘성군 북산면 청평리에 있는 절이다. 973년에 창건하여 백암선원白岩禪院이라고 하였다가 1068년 이의李顗가 중건하여 보현암이라고 고쳤다. 1089년 이자현이 다시 중건하여 청평사로 고쳤다.
  47. 47)지공指空(?~1363) : 인도 승려이다. 인도 마갈타국 만왕滿王의 제3왕자로 8세에 나란타사 율현律賢에게 출가하였으며, 19세에 남인도 길상산 보명普明에게 참배하여 의발을 전수받고 중국에 이르렀다. 1328년 고려에 와서 금강산 법기도량法起道場에 참배하고 7월에 연복정延複亭에서 계를 설하고 즉시 연경으로 돌아가 법원사를 짓고 지정 2년 귀화방장貴化方丈에서 입적하였다.
  48. 48)치명治命 : 죽을 무렵에 맑은 정신으로 하는 유언을 말한다.
  49. 49)광명사廣明寺 : 개성 만월동에 있던 절이다. 고려 태조가 옛집을 절로 만들었다 한다. 조선 세종 때 교종에 속하였다.
  50. 50)공부선功夫選 : 고려 공민왕 때 개경 광명사에서 승려에게 치르게 했던 시험이다.
  51. 51)삼구三句 : 선종의 제가諸家에서 제자를 가르칠 때 선의 종지를 삼구로 나타낸 것이다. 예를 들면, 덕산삼구德山三句, 분양삼구汾陽三句, 임제삼구臨濟三句 등이 있다.
  52. 52)삼관三關 : 송나라 때 황룡산 보각선사가 제자들에게 깨달음의 관문으로서 물었던 세 가지 질문을 말한다. 첫째 질문은 ‘사람마다 모두 태어나는 인연이 있는데, 어떤 것이 네가 태어난 인연인가?’이고, 둘째 질문은 ‘내 손이 어찌 부처의 손과 같으냐?’이고, 셋째 질문은 ‘내 다리가 어째서 나귀의 다리와 같으냐?’이다.
  53. 53)남여藍輿 : 의자와 비슷하고 뚜껑이 없는 작은 가마이다.
  54. 54)요연了然 : 고려시대 승려이다. 이규보의 「東國諸賢書訣評論」에는 오생의 다음에 요연을 명필로 적었다.
  55. 55)하어下語 : 선종에서 스승이 제자에게 내리는 가르침을 말한다.
  56. 56)보타낙가산寶陀洛迦山 : 중국 절강성 주산열도에 있는 섬으로 예부터 관세음보살의 영령한 도량이라 하여 임금이나 백성들에게 높이 숭배되었다. 지금은 보제사・법우사・혜제사 등 200여 사원이 있다.
  57. 57)복룡산伏龍山 : 절강성 진해현鎭海縣 서북에 있는 산이다.
  58. 58)천암千岩 : 법명은 원장元長이다. 임제종臨濟宗의 선사이며, 월越나라 사람이다.
  59. 59)내첨사內詹事 : 내시부內侍府를 말하는 것으로 고려시대에 환관을 맡아 보던 관청이다.
  60. 60)김부식金富軾(1075~1151) : 자는 입지立之이고 호는 뇌천雷川이며 본관은 경주이다. 1134년 묘청妙淸이 도참설로 수도를 서경으로 옮기고자 왕을 설득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반란을 일으켰는데 원수로서 중장군이 되어 이를 평정한 일이 있다.
  61. 61)묘청妙淸(?~1135) : 고려 평양 출신의 술승術僧이다. 백수한白壽翰을 통해 근신近臣들과 접촉하고 도참설로써 중앙정계에 진출하였다. 1127년 왕실의 고문에 추대되자 왕의 서경 행차를 제안하였다. 이 일이 실현되자 당시 내외 정세의 혼란함을 이용하여 서경 천도를 획책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서경을 기반으로 국호를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라 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김부식에 의해 토벌되었다.
  62. 62)관선의 일화는 『高麗史節要』제10권과 『東史綱目』제8하에도 실려있다.
  63. 63)지채문智蔡文(?~1026) : 고려 현종 때의 무신으로 봉주鳳州 지씨의 시조이다. 1010년(현종 1) 중랑장中郞將이 되어 거란군契丹軍의 침입 때 화주和州(함경남도 영흥으로 추정)를 지키다가, 강조康兆의 패전으로 동북방면의 수비가 절망상태에 빠지자 왕명으로 서경西京 수비의 원군으로 보충되었다. 여러 차례 적의 포위작전을 분쇄하여 전과를 올렸으나 마침내 서경이 적에게 포위되자, 다른 장수 휘하의 일부 수비군이 포위망을 뚫고 탈출함으로써 서경의 운명이 경각에 놓였다. 이때 재빨리 서울로 달려가 이 사실을 왕께 알렸으며, 또 왕이 남으로 피란할 때 끝까지 호종, 위기에 처한 왕의 신변을 여러 번 막아냈다. 이듬해 거란군이 철수한 뒤 전공으로 전토 30결結을 하사받고, 1026년(현종 17)에는 상장군上將軍·우복야右僕射가 되었다. 1031년(덕종 즉위) 1등 공신에 추록되었다. 원문에는 ‘채蔡’가 ‘규葵’로 되어 있는데 저본 관주에 의거하여 번역해 둔다.
  64. 64)자혜사慈惠寺 : 황해도 신천군 남부면 청양리 천봉산에 있는 절이다.
  65. 65)사정思政 : 고려시대 무신으로 성은 탁卓이고 중랑장을 역임하였다. 1010년 거란군이 침입하자 동북계 도순검사가 되어 적을 물리쳤다. 1010년 어사중승과 우간의대부를 역임했으나 이 해 강조의 일파로 몰려 섬으로 귀양을 갔다.
  66. 66)임원역林源驛 : 현재의 평안남도 대동군大同郡이다.
  67. 67)회강會綱 : 임상덕林象德(1683~1719)이 저술한 역사서 『東史會綱』인 것 같다. 이는 삼국의 건국에서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강목체로 저술한 것이다. 또 法言의 일화는 『高麗史節要』제10권과 『東史綱目』제8하에도 실려있다.
  68. 68)보지공寶誌公(418? 425?~514) : 보지는 寶誌 또는 保誌, 지공은 志公 또는 誌公라고 한다. 중국 금성 사람으로 속성은 朱氏이다. 승검僧儉을 스승으로 도림사에서 선업을 닦아 익혔다. 신이력과 예언 능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69. 69)‘고려’라고 한 것은 ‘신라’를 잘못 말한 것이 아닌가 한다.
  70. 70)남행동자南行童子 : 혹 南巡童子라고 한다. 『華嚴經』「入法界品」에 나오는 구도 보살 선재동자를 가리킨다. 남으로 남으로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법을 구했다.
  71. 71)부낭浮囊 : 부낭은 물을 건널 때 사용하는 공기주머니이다. 여기서는 배를 타고 중국에 건너가는 것에 비유하였다.
  72. 72)각현覺賢 : 북인도 출신의 승려이다. 동진 때 중국에 건너와 『화엄경』 등을 역경하였다.
  73. 73)상망象罔 : 상망은 무심을 뜻하는 말이다. 『莊子』「天地」에 황제가 적수에서 노닐고 돌아오는 길에 현주를 잃어버렸는데 그것을 무심한 상망이 찾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74. 74)택리지擇里志 : 『택리지』는 이중환에 의해 1751년에 저술된 우리나라 최초의 인문지리서이다. 총 1권으로 四民總論, 八道總論, 卜居總論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전국 각 지역의 풍수지리적 특성과 함께 자연과 인간 생활과의 관계를 서술하고 있다.
  75. 75)대중연간에는 무술戊戌년이 들어있지 않으니, 이는 잘못 기록된 것임이 분명하고, 『山史畧抄』에서는 이 내용과 관련하여 진종 대중 임술년(1022)이라고 하였다. 우리나라에서 대장경을 처음 판각하기 시작한 것이 1011년이므로 『산사약초』의 기록이 가장 적확한 것으로 보인다.
  76. 76)양계陽界 : 귀신 세상이 음계이므로 양계는 사람 세상을 말한다.
  77. 77)보덕普德 : 고구려 시대 승려이다. 자는 지법智法으로 용강 사람이다. 평양 서쪽의 대보산에 영탑사를 지었다. 반룡산 연복사에 있을 때 보장왕이 중국에서 도교를 구하여 오므로 나라가 장차 망할 줄 알고 백제 완산주 고대산으로 그의 방장方丈을 옮기니 지금 고달산 경복사의 비래방장이 그것이다.
  78. 78)일선一禪(1488~1568) : 조선시대 승려이다. 호는 휴옹休翁이며 당호는 경성敬聖 또는 선화자禪和子이다. 속성은 장씨로 울산 사람이다. 13세에 단석산 해산海山을 3년 동안 섬기고 24세에 묘향산에서 고행하고 지리산 벽송지엄에게 법을 얻었다. 1564년 묘향산 보현사 관음전에 있을 때 고사석덕이 팔방에서 운집하였다. 선조 1년에 세수 81세, 법랍 65세로 입적하였다.
  79. 79)행재소行在所 : 임금이 순행巡幸이나 몽진蒙塵 중에 임시로 머물면서 정무를 보는 곳을 말한다.
  80. 80)영관靈觀(1485~1571) : 조선시대 스님으로 호는 부용芙蓉(또는 은암隱庵)이다. 삼천포 사람이다. 13세에 덕이산德異山에 가서 고행苦行 선사에게 의지하여 3년 동안 공부하다가 출가하였다. 17세에 신총信聰에게서 교학을 배우고 위봉威鳳에게서 선의 이치를 얻음. 선조 4년에 입적하니 세수는 87세, 법랍은 72세였다.
  81. 81)삼몽음三夢吟 :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주인의 꿈 이야기 길손에게 말을 하고, 길손의 꿈 이야기 주인에게 말을 하네. 지금 꿈 이야기하는 두 사람 역시, 사실은 꿈속의 사람이라오.(主人夢說客 客夢說主人 今說二夢客 亦是夢中人)”
  82. 82)역옥逆獄 : 선조 때 정여립鄭汝立은 그의 문벌이 장애가 되어 조정에서 높은 벼슬에 오르지 못함을 불평하다가, 고향에 돌아가 자제들의 교육에 종사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실제로는 그의 고향이나 다른 지방의 건달·유자儒者·무뢰무사無賴武士·승려, 그 밖의 잡배들을 모아 대동계大同契라는 조직체를 만들고 때로 무술을 단련하는 한편, 비기참어秘記讖語(鄭鑑錄)의 “이씨는 망하고 정씨가 일어난다(木子亡奠邑興)’는 설을 이용하여 이씨왕조는 망하고 자기가 임금이 된다는 등의 말을 퍼뜨려 인심을 현혹하여 큰 난을 일으킴으로써 자기의 천하를 만들려 하였다. 1589년 10월에 황해도 관찰사 한준韓準 등의 밀계密啓로 정여립의 음모가 탄로 나자, 여립은 아들 옥남玉男과 함께 진안鎭安 죽도竹島로 도망하였다가, 여립은 자살하고 옥남은 잡혀 왔다. 이 사건을 기축옥사라고 한다.
  83. 83)처영處英 : 조선시대 스님으로 호는 뇌묵雷墨이다. 1592년 임진왜란 때에 전라도에서 승병을 일으켜 왜병과 싸워 전공이 많았다.
  84. 84)삼협총병三協摠兵 : 명나라 군직으로 제독 아래 세 장군을 말한다. 즉 左協, 右一, 中一의 총병이다.
  85. 85)꼭 …… 일이다 : 『莊子』「在宥」에 나오는 말이다.
  86. 86)구선癯仙 : 원문은 ‘구선癯仙’이 ‘약선躍仙’으로 되어 있는데, 『청허당집』권1 「次金剛山山映樓板上韻」 원문에는 ‘구선癯仙’으로 되어 있으므로 역자는 이를 따랐다. 한漢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가 「대인부大人賦」를 지어 신선되기를 바라는 무제武帝에게 바치면서 “신선도 산골짜기에 사는 파리하게 여윈 신선(癯仙)이 있고, 천상에서 봉황이나 용을 타고 호화롭게 노는 신선도 있다”고 한 데서 유래된 말이다.
  87. 87)원문의 ‘유정惟政’은 휴정休靜의 오기誤記인 듯하다.
  88. 88)가등청정加藤淸正 : 풍신수길豊臣秀吉의 측근으로, 다수의 전투에서 공을 세웠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제2군의 장수로 조선을 침략했다. 한성에 입성한 후 함경도로 전진하여 조선의 왕자를 인질로 사로잡았다. 강화교섭기에는 울산에 주둔하면서 조선의 사명대사 유정惟政과 교섭하였다. 가등청정과 유정의 회담은 1594년 4월에서 12월까지 세 차례, 그리고 1597년 3월에 한 차례, 총 네 차례 행해졌지만 결렬되었다. 강화교섭 결렬 후 조선을 다시 침략했다. 1598년 11월 말에 일본으로 돌아갔다.
  89. 89)『史記』「魯仲連傳」에 전국시대 위魏의 신원연新垣衍이 진秦을 받들어 진왕을 천자로 칭하려 하자, 여기에 분개한 노중연이 동해에 몸을 던져 죽으려 하였다는 고사가 나온다. 고결한 지조를 일컫는 말이다.
  90. 90)육생陸生 : 중국 전한前漢의 유학자 육가陸價이다. 변설辯說이 능한 학자로서 고조高祖의 중국통일에 크게 공헌하였다. 시서詩書를 좋아하고 문무병용文武倂用 정치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91. 91)방약무인傍若無人 : 여러 사람 앞에서도 거리낌 없이 제멋대로 행동함이다.
  92. 92)여치인如癡人 : 『冷齋夜話』에 “승가가 장강과 회하 사이의 지방을 유람하면서 아주 기이한 행적을 남겼는데, 그때 어떤 이가 그에게 묻기를 ‘네 성이 무엇이냐?(汝姓何)’ 하자, ‘성이 무엇이다.(姓何)’라고 대답하므로, 또 묻기를 ‘어느 나라 사람이냐?(何國人)’ 하자, 또 대답하기를 ‘어느 나라 사람이다.(何國人)’라고 하였다. 당나라 이옹이 비문을 지으면서 그들이 주고받은 말을 이해하지 못하여 전기에 쓰기를 ‘대사의 성은 何이고 何國 사람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어리석은 사람에게 꿈을 이야기한 격(癡人說夢)이라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93. 93)순오지旬五志 : 조선 후기 문신 홍만종이 1678년에 저술한 것으로 열흘 만에 지어서 『십오지』라고도 한다. 고사일문, 시화, 양생술, 삼교합론, 속언 등을 수록하였다. 自序에 옛날에 들은 여러 가지 말과 민가에 떠도는 속담 등을 기록하였다고 밝혔다.
  94. 94)요시라要時羅 : 대마도 출신으로 임진왜란 당시 小西行長과 宗義智의 부하로서 조선의 진영에 와서 여러 정보를 전하며 강화교섭을 진전시키려 한 인물이다. 조선어에 능통하여 조선인들과 자유롭게 대화하며 교섭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강화교섭 기간 중 김응서의 진영을 자주 방문하여 여러 정보와 요구조건을 전달하였으며, 1596년 통신사가 일본으로 갈 때 이를 수행하였다. 정유재란 중에는 순천왜성에 주둔하면서 명군 장수 유정과의 교섭에 참여했다. 그러나 교섭을 촉진하기 위해 스스로 명군 진영에 들어갔다가 북경까지 끌려간 후 처형되었다.
  95. 95)‘소속을 물음에 답하지 못한다’라는 것은 어릴 때 포로가 된 자는 오직 조선이 제 나라라는 것만 알고 있을 뿐 계보나 부모의 이름도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96. 96)이운룡李雲龍(1592~1610) : 조선시대 무신으로 본관은 재령載寧이며 청도 출신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1592년 임진왜란 때 옥포만호로서 패전하여 도망하려는 원균元均을 저지하였다. 1596년 경상좌도 수군절도사가 되었다.
  97. 97)경란록經亂錄 : 남원의병장 조경남이 임진 · 정유 양란 당시의 상황과 국내 외 정세 등을 기록한 야사집으로 『亂中雜錄』이라고도 한다. 1582년(선조 15) 12월부터 쓰기 시작하여 1610년(광해군 2)까지 의병장으로 활동한 사실과 당시 나라 전체의 역사적 상황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98. 98)『莊子』「齊物論」에 “몸은 고목 같고, 마음은 꺼진 재 같다身如枯木 心如死灰”라는 말에 비유하였다.
  99. 99)조현명趙顯命(1690~1752) : 조선 후기에 경상도관찰사, 좌의정, 영의정 등을 지냈다.
  100. 100)둔전병屯田兵 : 평시에는 토지를 경작하여 식량을 자급하고 전시에는 전투원으로 동원되던 병사를 말한다.
  101. 101)징비록懲毖錄 : 조선시대 문신 유성룡이 임진왜란 동안에 경험한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선조 31)까지 7년간의 기사로, 임진왜란 이후 벼슬에서 물러나 있을 때 저술한 것이다.
  102. 102)묵행자嘿行者 : 말없이 도를 수행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화암월수좌를 지칭한다.
  103. 103)“일찍이 『海東高僧傳』을 지었다.”라는 이 기록으로 화암월수좌는 고려시대의 覺訓으로 추정된다. 각훈은 覺月로도 불렸다.
  104. 104)이윤보李允甫 : 고려 의종 때의 문장가이다. 시詩를 잘하고 문장이 뛰어나 이인로李仁老, 이규보李奎報와 함께 당대의 명문장가로 이름을 떨쳤다. 시부詩賦와 잡기 50여 편을 모아 엮은 문집이 있었으나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105. 105)두타행頭陀行:범어 dhūta의 음역이다. 번뇌와 의식주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청정하게 심신을 수련하는 것을 이른다. 민간에서는 행각行脚하면서 걸식하는 승려를 말하거나 행자行者라고도 한다. 두타행에는 모두 12조항이 있어서 이를 12두타행이라고 부른다. 12두타행은 다음과 같다. ① 인가와 떨어진 조용한 숲에 머문다. ② 항상 걸식한다. ③ 걸식할 때는 빈부를 가리지 않는다. ④ 하루에 한 번만 먹는다. ⑤ 과식하지 않는다. ⑥ 점심 이후에는 과실즙이나 꿀 등도 먹지 않는다. ⑦ 누더기로 만든 옷을 입는다. ⑧ 삼의三衣 이외에는 소유하지 않는다. ⑨ 무상관에 도움이 되도록 무덤 곁에 머문다. ⑩ 나무 밑에 거주한다. ⑪ 지붕이 없는 곳에 앉는다. ⑫ 단정하게 앉고 눕지 않는다. 두타행을 할 때 비구는 18가지 물건을 반드시 지녀야 하는데, 이를 두타 18물이라고 한다. 또 삼의를 더럽히지 않기 위해 두타대頭陀垈라는 자루를 목에 걸고 다닌다. 불교 초기에는 12두타행이나 두타 18지물이 지켜졌으나 나중에는 산이나 들, 세상을 편력하며 고행하고 수행하는 개념으로 바뀌었다. 부처의 십대제자 중 가섭이 두타 제일로 칭송받았다.
  106. 106)굴암사窟岩寺 : 평안북도 구성군龜城郡 굴암산窟岩山에 있던 절이다.
  107. 107)보한집補閑集 : 고려 후기 문신 최자崔滋가 이인로의 『파한집』을 보충하여 1254년에 간행한 시화집이다. 자서에서 최이의 요청으로 이인로의 『파한집』을 보충하려는 입장에서 산일된 글을 모아 책을 만들었다고 밝혔다.
  108. 108)태대각간太大角干 : 이벌찬伊伐飡·이벌간伊伐干·우벌찬于伐飡·각찬角粲 등 다른 이름이 많으며, 처음에는 주다酒多라 하였다. 진골眞骨만이 하는 벼슬로, 신라 17관등제官等制와는 별도로 제정되었다. 중대中代에 이르러 이 위에 대각간·태대각간 등의 상위 관등을 두어 김유신처럼 국가에 특별한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 이 관등을 주었다.
  109. 109)김유신金庾信(595~673) : 김유신은 화랑 출신의 명장으로 무예와 지략이 뛰어나 당나라와 함께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키고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룬 명장이다. 그 공으로 태대각간이 되었으며 835년(흥덕왕10)에 흥무대왕興武大王에 추존되었다.
  110. 110)문열文烈 : 문열은 김부식金富軾(1075~1151)의 시호이며, 대각국사 의천의 비문을 썼다. 고려전기 직한림, 추밀원부사, 중서시랑평장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인종의 명에 따라 50권의 『삼국사기』를 편찬하여 바쳤다.
  111. 111)책서策書 : 임금이 벼슬아치를 임명하던 사령장을 말한다.
  112. 112)비래방장飛來方丈 : 전라북도 완주군 고대산 경복사에 있던 건물이다. 원래는 고구려 반룡산 연복사延福寺에 있던 것을, 고구려 승려 보덕普德이 고구려 제28대 보장왕 9년(650)에 신통력으로 이곳에 날려 보낸 것이라고 한다.
  113. 113)영수迎隨 : 수미首尾 상하 전후를 비유하는 말이다. 『노자』14장의 “도라는 것은 앞으로 맞이하려 해도 머리가 보이지 않고, 뒤를 따라가려 해도 꽁무니가 보이지 않는다.(迎之不見其首 隨之不見其後)”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114. 114)계응戒膺 : 고려시대 스님으로 호는 태백산인이다. 대각국사의 맏상좌로 고려사에는 계응繼應이라 되어 있으며 대각국사의 뒤를 이어 교법을 넓히니 법해法海의 용문龍門이라 불렸다.
  115. 115)탄연坦然(1070~1159) : 고려시대 승려이다. 호는 묵암黙庵, 속성은 손씨, 밀양 사람이다. 8세부터 글과 시와 글씨에 능했고 15세 명경생明經生이 되었고, 숙종이 번저藩邸에 있을 적에 불러 세자를 모시게 하였다. 19세 때 몰래 궁중을 나와 경북산京北山 안적사에서 출가하였다. 광명산 혜소국사慧炤國師에게 심요心要를 받았다. 고려 의종 13년에 입적하니 세수는 90이었다. 국사로 추봉하고 대감이란 시호를 내렸다.
  116. 116)응제應製 : 임금의 명에 의하여 시가詩歌를 짓던 일이다.
  117. 117)한산寒山 : 중국 당나라 때 사람이다. 성명은 알 수 없고 항상 천태 시풍현始豊縣의 서쪽 70리에 있는 한암寒巖의 깊은 굴속에 있었으므로 한산이라 한다. 문수보살이 화현한 인물이라고 전해진다.
  118. 118)습득拾得 : 중국 당나라 때 천태산 국청사에 있던 사람이다. 풍간豊干이 산에 갔다가 적성도赤城道 절에서 주운 작은 아이이므로 습득이라 이름한다. 한산과 친히 사귀었고 풍간이 산에서 나온 뒤에 한산과 함께 떠난 후로는 소식을 모른다.
  119. 119)탁연卓然 : 고려시대 승려이다. 호는 법운法雲 또는 운유자雲遊子이다. 고려 고종 때 조계산에서 출가했다. 필법이 아주 뛰어나 명필로 유명하다. 상주 목사 최자崔滋가 백련사를 중창하자 그 현판을 썼다.
  120. 120)천영天英(1215~1283) : 고려시대 승려이다. 속성은 양梁이고, 1225년 조계의 각진覺眞 선사에게 출가하였다. 1236년 선선禪選의 상상과上上科에 급제하고 청진淸眞・진명眞明 국사에게 참학하였다. 1246년 삼중대사, 1248년 선사禪師가 되어 단속사斷續寺에 거주했다. 1256년 대선사가 되었으며 충렬왕 9년에 세수는 72세로 입적하였다.
  121. 121)안렴사按廉使 : 고려 때의 지방관직이다. 초기에는 절도사節度使가 있었는데 1012(현종 3)년에 이를 없애고 1064(문종 18)년에 도서부都署部로 고쳤다가 1113(예종 8)년에 다시 안찰사로 환원했으며, 1298(충렬왕 2)년 안렴사로 개칭하였다.
  122. 122)정명선사靜明禪師(1205~1248) : 고려시대 승려이다. 법명은 천인天因이고, 속성은 박씨이다. 17세에 과거에 낙제하고 허적許迪・신극정申克定과 함께 만덕산 원묘圓妙 국사에게로 가서 출가하였다. 1247년 몽고의 난리를 피하여 상왕산 법화사에 들어갔다가 고려 고종 35년 용혈암에서 세수 44세, 법랍 24세로 입적하였다. 시호는 정명국사이다.
  123. 123)성능聖能 : 조선시대 승려이다. 화엄사 스님으로 숙종 때 8도 도총섭이 되어 북한산성을 쌓았다. 1745년 새 총섭 서봉瑞鳳에게 인계할 때 북한지를 만들어 산성에서 행할 일 14조를 기록하여 판각하였다.
  124. 124)최이崔怡(?~1249) : 고려시대 권신이다. 본래 이름은 최우崔瑀였으나 뒤에 최이로 개명하였다. 1219년 추밀원부사로 아버지 최충헌의 뒤를 이어 집권하였다. 1225년 정방을 설치하여 인사권을 장악했고 도방을 확장했다. 몽골이 침입해 오자 강화천도江華遷都를 단행하여 성을 쌓아 대비했다. 1243년 국자감을 수축했으며 대장경판의 재조를 완성케 했다.
  125. 125)혜문惠文 : 고려시대 승려이다. 속성은 남南씨이고 자는 빈빈彬彬이다. 고성사람으로 가지산에서 출가했고, 30여 세에 불도佛道에 급제하여 대선사에 올랐다. 보제사에서 교화를 펴다가 1232년 몽고의 난리로 서울을 강화로 옮길 때 운문사로 피하여 3년 동안 있다가 입적하였다.
  126. 126)이규보李奎報(1168~1241) : 고려시대 문신이다. 자는 춘경春卿, 호는 백운거사白雲居士이다. 본관은 여흥이다. 1189년 사마시 그 이듬해 문과에 급제하였다. 1199년 전주목사록겸장서기를 지내고 1207년 최충헌에 의해 권보직한림權補直翰林으로 발탁되고 1237년 금자광록대부에 이르렀으며 호탕한 시풍은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127. 127)장지張芝 : 후한 때의 주천酒泉 사람이다. 자는 백영伯英이고 호는 장유도張有道이다. 글씨를 잘 썼다.
  128. 128)회소懷素 : 당나라 승려이다. 현장玄奘의 제자로 글씨를 잘 썼다. 특히 초서에 조예가 깊었다.
  129. 129)수진守眞 : 고려시대 승려이다. 수기守其, 천기天其로도 알려져 있다.
  130. 130)개태사開泰寺 : 충남 논산군 천호산에 있는 절이다.
  131. 131)하천조河千朝 : 하천단河千旦의 이명이다. 고려 때 문장가로 성질이 곧고 문장에 뛰어나 이유李濡・이백순李白順・이함李咸・임경숙任景肅 등과 함께 문명文名을 떨쳤으며 당시의 표전문表箋文은 거의 그가 지었다. 만년엔 불전佛典을 좋아했다.
  132. 132)유태재柳泰齋(1388~1443) : 태재는 유방선柳方善의 호이다. 자는 자계子繼이고 본관은 서산이다. 권근・변계량 등에게 배워 문명文名을 떨쳤다. 1405년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시문에 뛰어났고 만년에는 역학에 정진했으며 문하에서 서거정・이보흠 등의 학자가 배출되었다.
  133. 133)쇄록瑣錄 : 소문쇄록謏聞鎖錄은 조선전기 문인 조신이 고려말에서 조선전기에 활동한 문인 지식층의 동향과 시화詩話를 중심으로 저술한 잡록이다. 자잘한 이야기나 사건을 듣고 기록하였다는 뜻으로 책명을 붙인 것 같다.
  134. 134)정국검鄭國儉(?~1203) : 고려시대 문신이다. 명종 때 내시・대부소경大府少卿이 되었으나 팔관회 때 직무태만으로 참정 송유인宋有仁의 탄핵을 받아 삭직削職되었다가 송유인에게 아부하여 다시 내시가 되었다.
  135. 135)행춘行春 : 태수太守가 봄에 속읍에 다니면서 농상農桑을 권장하던 행사이다.
  136. 136)송림사松林寺 : 전북 남원군 지리산에 있던 절이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137. 137)옥천사玉泉寺 : 경상남도 영산군靈山郡에 있던 절이다.
  138. 138)김원명金元命(?~1370) : 고려시대 무신이다. 본관은 화평和平=光州, 광산군 인연仁沇의 아들이다. 1355년 감찰집의監察執義를 거쳐 이듬해 상장군이 되어 역신 기철奇徹을 포살한 공과 1359년 홍건적의 난리에 남행南幸을 호송한 공으로 2등 공신이 되었다. 말년에는 영덕으로 유배되어 신돈의 부하 손연孫演에게 살해되었다.
  139. 139)이승경李承慶(?~1360) : 고려시대 문신이다. 정당문학政堂文學 조년兆年의 조카이다. 원나라에서 어사御史・용양성 참정을 지내고 1357년 모친상으로 귀국, 이듬해 요양성사遼陽省事를 보내어 불렀으나 가지 않았다. 1359년 홍건적의 침입에 도원수로 활약함.
  140. 140)정세운鄭世雲(?~1363) : 고려시대 무신이다. 본관은 광주. 공민왕을 따라 원나라를 다녀와서 대호군에 승진, 1352년 1등 공신이 되었고 군부 판서를 거쳐 1356년 기철을 주살한 공으로 1358년 지문하성사를 거쳐 1360년 서북면 도순찰사가 되고 1362년 총병관이 되었다.
  141. 141)이존오(1341~1371) : 고려시대 문신이다. 자는 순경順卿 호는 석탄石灘․고산孤山, 본관은 경주. 1360년 문과에 급제 수원서기水原書記를 거쳐 1366년 우정언右正言이 되어 신돈을 탄핵하다가 장사감무로 좌천되었다.
  142. 142)최항(?~1024) : 고려시대 명신이다. 자는 내융內融, 본관은 경주, 평장사 언위彦潙의 손자이다. 991년 문과에 급제하여 우습유지제고右拾遺知制誥를 거쳐 내사사인內史舍人이 되었고, 1009년 목종의 와병 중 김치양金致陽이 자기의 사생아를 즉위시키려는 음모를 미리 막아 현종을 세우는 공을 세웠다. 청렴결백하고 불교를 깊이 믿어 황룡사탑을 수리하였다.
  143. 143)김인준(?~1268) : 고려시대 무신이다. 초명은 인준이었으나 후에 김준金俊으로 개명함. 최충헌의 가노家奴 출신이었으나 최우의 신임을 받아 발탁되었다. 그 후 최우의 후계자였던 최항이 자신을 멀리하자 최항을 죽이고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국왕과 대립하다가 주살되었다.
  144. 144)영도첨의領都僉議 : 고려 때 수상급의 관직. 영도첨의부사의 약칭.
  145. 145)기현奇顯(? ~ 1371) : 고려 후기 신돈辛旽의 심복이 되어 신돈을 자기의 집에 거처시키고 봉선사를 거쳐 왕궁에 출입하게 하면서 횡포와 권세를 누리다가 신돈의 일당인 최사원·정구한·진윤검·기중수 등과 함께 주살되었다.
  146. 146)정감록鄭鑑錄 : 우리나라의 대표적 예언서로 조선시대 민간에 널리 유포되었다. 여러 가지 감결류와 비결서를 집성한 것으로 이본이 많다. 저자나 성립 시기는 분명치 않으나, 성립 시기에 대해서는 대체로 외적의 침입으로 사회 혼란이 극심하고 개인적인 자기 보전에 급급하였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로 보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반왕조적이며 현실 부정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서 조선시대 이래 금서에 속하여 민간에서 은밀히 전승되었다.
  147. 147)홀치忽赤 : 고려 때 활을 메고 궁중을 지키던 호위병이다.
  148. 148)충용위忠勇衛 : 공민왕 5(1356)년 설치된 고려 말기의 군사조직이다.
  149. 149)천희千熙(1307~1382) : 고려말기 승려이다. 호는 설산雪山이고 경주 흥해 사람이다. 13세에 반룡사의 일비一非에게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19세에 상품上品에 올라 중국 강남으로 유학하였다. 몽산蒙山화상의 의발을 받고 만봉의 성안사에 있다가 귀국하여 치악산에 살았다. 공민왕이 사신을 보내어 국사로 봉하고 대화엄종사 선교도총섭을 삼았다. 76세로 입적하였고, 시호는 진각국사眞覺國師, 탑호는 대각원조大覺圓照이다.
  150. 150)윤소종尹紹宗(1345~1393) : 고려시대 문신이다. 자는 헌숙憲淑, 호는 동정桐亭, 본관은 무송茂松이다. 이색의 제자로 1365년 문과에 급제하여 춘추관사를 거쳐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까지 올랐다.
  151. 151)오인택吳仁澤 : 고려시대 공신이다. 1362년 안우安遇를 따라 홍건적을 격퇴하고 이듬해 개경을 수복하였고, 그 뒤 상장군이 되어 이방실李芳實 등을 주살하였다. 1363년 김용金鏞 등이 흥왕사 행궁行宮을 침범하자 최영과 함께 격퇴하였으며 그 공으로 흥왕토적공신興王討賊功臣 1등에 봉해졌다. 1364년 판밀직사사가 되어 뇌물을 좋아하다가 국가 기강을 문란하게 한 죄로 유배되었다가 신돈의 집권 후 지도첨의知都僉議가 되었으나 신돈을 죽이려고 모함하다가 발각되어 상주로 유배되었다.
  152. 152)경천흥慶千興(?~1380) : 고려시대 재상이다. 뒤에 복흥復興으로 이름을 고쳤다. 공민왕 초년에 군부 판서로 등용되었고, 판추밀원사・참지문하정사를 역임했고 기철을 주살한 공으로 1등 공신에 봉해져 벼슬이 좌시중에까지 이르렀다.
  153. 153)목인길睦仁吉(?~1380) : 고려시대 무신이다. 본관은 사천泗川이다. 공민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중랑장으로 시종侍從한 공으로 1등 공신이 되었다. 후에 병부상서에 올라 홍건적을 토벌하고 1365년 첨리 평의가 되었으며 이듬해 신돈의 무고로 전주에 유배되었다. 1367년 오인택과 함께 신돈을 제거하려다가 누설되어 청주에 유배, 다시 기용되어 문하찬성사가 되었다.
  154. 154)안우경安遇慶(?~1372) : 고려시대 장군이다. 1359년 홍건적을 안우安祐 등과 함께 격퇴, 1361년 재침입 때에 개경 탈환에 참여 1등 공신이 되었다. 벼슬이 평리評理에까지 이르렀다.
  155. 155)조희고趙希古 : 고려시대 무신이다. 1361년 광주廣州 목사가 되고 판서를 거쳐, 1362년 홍건적을 격퇴 1등 공신이 되었다. 1362년 밀직부사가 되고 1367년 오인택과 신돈을 제거하려다가 발각되어 장류杖流되었다. 1388년 팔도 도통사 조전원수로 요동 정벌에 나갔다가 위화도 회군에 가담하여 1390년 회군 공신호를 받았다.
  156. 156)이순李珣 : 고려시대 무신이다. 일찍이 예부상서를 지내고 1362년 밀직사사로서 서북면 도병마사가 되어 최영과 홍건적을 방어 이듬해 판밀직사사로서 양광도 도순문사가 되었다. 벼슬이 삼사좌사三司左使에 이르렀다. 고려사에는 이희필李希泌로 되어 있다.
  157. 157)한휘韓輝 : 고려시대 무신이다. 1363년 밀직부사로 최영과 함께 흥왕사 변란을 토벌하여 1등 공신이 되고 이어 추성익대공신推誠翊戴功臣의 호를 받았다. 1367년 신돈의 세력을 제거하려다가 실패하여 유배되었다.
  158. 158)조린趙璘 : 고려시대 문신이다. 1360년 안우와 홍건적을 토벌하여 1등 공신이 되었고 응양군상호군으로 교동 왜구 토벌에도 공을 세웠다. 권신 신돈을 제거하려다가 1367년에 유배되었고 가족은 관노가 되었다.
  159. 159)윤승순尹承順(?~1392) : 고려시대 무신이다. 신돈을 제거하려다가 1367년 유배되었다. 1371년 신돈이 주살된 후 옹양군 상호군이 되어 왜구 토벌에 공을 세웠고 벼슬이 판개성부사에 이르렀다.
  160. 160)도선道詵(827~889) : 신라 말기 승려이다. 호는 옥룡자玉龍子이고 속성은 김씨, 영암사람이다. 15세에 출가하여 화엄사에서 대경大經을 읽었다. 72세에 입적하였다.
  161. 161)이춘부李春富(?~1371) : 고려시대 문신이다. 충정왕 때 우대언右代言・밀직부사를 역임하였다. 1358년 서강병마사로 왜구를 격퇴했고 1360년 동강도병마사로 다시 왜구를 격퇴하였으나 1371년 신돈의 일파로 몰려 주살되었다.
  162. 162)이인李韌(?~1381) : 고려시대 문신이다. 공민왕 때 사관 편수관을 지내고 전교 부령을 거쳐 선부 의랑이 되고 1371년 신돈의 역모 사건을 익명으로 밀고하였다. 벼슬이 지문하부사상의知門下府事商議에 이르렀다.
  163. 163)김속명金續命(?~1386) : 고려시대 문신이다. 공민왕 때 감찰집의를 거쳐 좌부대언이 되었다. 우왕 때 삼사 우사까지 지냈다.
  164. 164)대사성大司成 : 성균관의 최고 높은 직위로 정3품관이다.
  165. 165)임박林撲 : 고려시대 문신이다. 1360년 문과에 급제해서 개성 참군사가 되고 대사성 판전교시사에 이르렀다.
  166. 166)도인導引 : 도가道家에서 선인仙人이 되기 위한 양생법의 하나이다. 정좌・마찰・호흡으로 온몸의 근육과 관절을 조절하여 모든 병을 물리친다고 한다.
  167. 167)보우普雨(1515~1565) : 조선시대 승려이다. 호는 허응虛應 또는 나암懶庵이고 강원도 백담사 스님이다. 명종의 모후 문정왕후가 섭정할 때 강원 감사의 천거로 봉은사에 있으면서 승과를 회복시키고 승려에게 도첩을 주고 불교를 부흥시켰으나 문정왕후가 죽은 뒤 유신의 참소로 1565년 제주도에 유배당하여 목사 변협에게 피살되었다.
  168. 168)변협邊協(1528~1590) : 조선시대 무장으로 자는 화중和中, 호는 남호南湖, 본관은 원주이다. 무과에 3등으로 급제하고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1555년 을묘왜변 때 해남 현감으로 왜구를 격파한 공으로 장흥 부사가 되었다. 1587년 우방어사로 녹도 가리포의 왜구를 격파하였다. 뒤에 제주 목사가 되어 조정의 명에 따라 제주에 유배 중인 보우를 참형했다. 벼슬은 포도대장에까지 이르렀다.
  169. 169)보은사報恩寺 : 이는 봉은사奉恩寺의 잘못 기록인 듯하다.
  170. 170)윤원형尹元衡(?~1565) : 조선시대 문신이다. 중종의 제2 계비 문정왕후의 아우이다. 1533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사관이 되었다. 1537년 김안로에 의해 파직되었다가 1539년 교리로 시독관을 겸직하였고,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면서 예조참의가 되었으며 후에 우의정에 이르렀다.
  1. 1){底}卐續藏經第二篇乙第二十三套第三册。
  2. 1)底本冠註曰「二日疑旨」{編}。
  3. 2)▣疑「仰」{編}。
  4. 1)底本冠註曰「主疑至」{編}。
  5. 2)底本冠註曰「久疑叉」{編}。
  6. 1)底本冠註曰「反疑及」{編}。
  7. 2)底本冠註曰「徒疑從」{編}。
  8. 3)底本冠註曰「卽政疑卽位」{編}。
  9. 4)底本冠註曰「況疑沈」{編}。
  10. 5)「秩」疑「秋」{編}。
  11. 6)底本冠註曰「遊疑逝」{編}。
  12. 1)底本冠註曰「夫疑失」{編}。
  13. 2)底本冠註曰「許疑諫」{編}。
  14. 3)底本冠註曰「賢疑努」{編}。
  15. 4)底本冠註曰「開疑聞」{編}。
  16. 5)底本冠註曰「▣▣▣疑床叫曰」{編}。
  17. 1)底本冠註曰「瑠疑瑙」{編}。
  18. 2)底本冠註曰「黑疑墨」{編}。
  19. 3)底本冠註曰「幕疑募」{編}。
  20. 4)「葵」疑「蔡」{編}。
  21. 5)底本冠註曰「王疑五」{編}。
  22. 6)底本冠註曰「便疑使」{編}。
  23. 7)「賻」疑「贈」{編}。
  24. 8)底本冠註曰「法佛疑倒」{編}。
  25. 1)底本冠註曰「巖疑嚴」{編}。
  26. 2)底本冠註曰「目疑日」編。
  27. 3)底本冠註曰「祖疑租」{編}。
  28. 4)「理」疑「埋」{編}。
  29. 5)底本冠註曰「拫疑植」{編}。
  30. 6)「于」疑「子」{編}。
  31. 7)「腋」疑「眼」{編}。
  32. 8)「宦」疑「官」{編}。
  33. 1)「門」疑「間」{編}。
  34. 2)底本冠註曰「侍疑待」{編}。
  35. 3)「丁」疑「下」{編}。
  36. 4)「迎」疑「近」{編}。
  37. 5)底本冠註曰「宜疑㝠」{編}。
  38. 6)「倘」疑「尙」{編}。
  39. 7)「度」疑「慶」{編}。
  40. 8)「陽」疑「佛」{編}。
  41. 9)「實」疑「寶」{編}。
  42. 10)「拊」疑「樹」{編}。
  43. 1)「表」疑「喪」{編}。
  44. 2)「入」疑「人」{編}。
  45. 3)底本冠註曰「無下疑脫比」{編}。
  46. 4)「游」疑「類」{編}。
  47. 1)底本冠註曰「何上疑脫而」{編}。
  48. 2)底本冠註曰「▣疑靈」{編}。
  49. 3)「冠」疑「寇」{編}。
  50. 4)「將」疑「捋」{編}。
  51. 5)「旦」疑「且」{編}。
  52. 6)「入」疑「八」{編}。
  53. 1)底本冠註曰「犯疑化」{編}。
  54. 2)底本冠註曰「壬下疑脫辰字」{編}。
  55. 3)底本冠註曰「表疑喪」{編}。
  56. 4)底本冠註曰「誠疑試」{編}。
  57. 5)「郡」疑「群」{編}。
  58. 6)底本冠註曰「秧疑秩」{編}。
  59. 1)底本冠註曰「死木疑倒」{編}。
  60. 2)底本冠註曰「賤疑賊」{編}。
  61. 3)底本冠註曰「主疑至」{編}。
  62. 1)「夫」疑「大」{編}。
  63. 2)底本冠註曰「令疑今」{編}。
  64. 1)此詩旣載於「東文選所載麗代僧侶詩文。釋坦然」條(韓國佛敎全書第六册八八一頁中段){編}。
  65. 2)「宣」疑「室」{編}。
  66. 3)「爲」疑「萬」{編}。
  67. 4)底本冠註曰「位疑住」{編}。
  68. 5)底本冠註曰「令疑今」{編}。
  69. 1)底本冠註曰「勤疑動」{編}。
  70. 1)底本冠註曰「過疑遇」。
  71. 2)底本冠註曰「感疑惑」。
  72. 3)底本冠註曰「主疑至」。
  73. 1)底本冠註曰「還疑遝」{編}。
  74. 2)底本冠註曰「遂疑逐」{編}。
  75. 3)底本冠註曰「汗疑奸」{編}。
  76. 1)底本冠註曰「殺欲疑倒」{編}。
  77. 2)底本冠註曰「益疑蓋」{編}。
  78. 3)底本冠註曰「要疑惡」{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