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佛地經論卷第六

ABC_IT_K0554_T_006
015_0267_a_01L불지경론 제6권
015_0267_a_01L佛地經論卷第六


친광 지음
015_0267_a_02L親光菩薩等造
현장 한역
이미령 번역
015_0267_a_03L大唐三藏法師玄奘奉 詔譯



또 세계가 모든 중생들을 광대하게 수용하는 것처럼 여래의 묘관찰지도 모든 부처님의 대중 모임을 나타내 보여서 커다란 법의 비를 내려 중생들로 하여금 커다란 법의 즐거움을 받게 한다.
015_0267_a_04L經曰又如世界爲諸衆生廣大受用如是如來妙觀察智示現一切諸佛衆會雨大法雨爲令衆生受大法樂

여기에서는 수용인상(受用因相)을 나타내 보인다.
기세간이 유정의 업의 증상력을 따르기 때문에 아뢰야식의 공상종자가 갖가지 공상의 자량(資糧) 도구를 변생(變生)하여 유정으로 하여금 광대하게 수용하게 하듯이, 여래의 묘관찰지도 평등지를 도와 증상연이 되어서 경지(鏡智)가 정식(淨識)에 상응하도록 촉발하여 수용신을 나타냄으로서 갖가지 무리들이 모임의 위덕이 치성하고 커다란 법의 비를 내려서 지상(地上)의 대보살들로 하여금 큰 법의 즐거움을 받게 한다.
015_0267_a_07L論曰此中顯示受用因相如器世閒隨有情業增上力故阿賴耶識共相種子變生種種共相資具爲令有情廣大受用如是如來妙觀察智助平等智爲增上緣擊發鏡智相應淨識現受用身種種衆會威德熾盛雨大法雨爲令地上諸大菩薩受大法樂
또한 여래의 성소작지를 도와 증상연이 되어서 경지가 정식에 상응하도록 촉발하여 변화신을 나타냄으로서 갖가지 무리들이 모임의 위덕이 치성하고 바른 법의 비를 내려서 지전(地前)의 교화되어야 할 유정들로 하여금 법의 즐거움을 수용하게 한다.
015_0267_a_14L亦助如來成所作智爲增上緣擊發鏡智相應淨識現變化身種種衆會德熾盛雨正法雨爲令地前所化有情受用法樂

세계 속에서 다섯 갈래[五趣], 이른바 지옥과 아귀와 방생과 사람의 갈래와 천상의 갈래를 능히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여래의 관찰지 상에서도 가없는 인과로 다섯 갈래의 차별을 모두 갖추어 나타낸다.
015_0267_a_18L經曰如世界中五趣可得所謂地獄餓鬼傍生人趣天趣如是如來觀察智上無邊因果五趣差別具足顯現
015_0267_b_01L
여기에서는 차별인상(差別因相)을 나타내 보인다.
마치 세계 속에서 유정의 업의 증상력을 따르기 때문에 아뢰야식의 불공상(不共相) 종자가 변생하여 갖가지 다섯 갈래의 인과의 차별을 얻을 수 있듯이, 여래의 묘관찰지도 다섯 갈래의 인과를 경계로 삼기 때문에 그 다섯 갈래를 변사(變似)하여 인과의 두 가지 상의 차별을 나타낸다. 그러나 모든 아수라 종류는 일정하지 않아서 다섯 갈래에 태어나지 않으니, 천상이기도 하고 귀신이기도 하고 혹은 또 방생(축생)이기도 하기 때문에 별도로 설하지 않는다.
015_0267_a_21L論曰此中顯示趣差別因相如世界中隨有情業增上力故阿賴耶識不共相種變生種種五趣因果差別可如是如來妙觀察智五趣因果爲境界故似其五趣因果二相差別顯非生五趣諸阿素洛種類不定天或鬼或復傍生故不別說
다섯 갈래의 인(因)이란 이른바 중유신(中有身)이 다섯 갈래를 방편으로 삼기 때문이니, 갈래[趣]란 나아갈 바[所趣]이며, 중유(中有)는 능히 나아감[能趣]이기 때문에 갈래에는 포섭되지 않는다.
015_0267_b_06L五趣因謂中有身以與五趣爲方便故是所趣中有能趣故非趣攝
생류(生類)에 대해서 별도로 네 가지 생[四生]1)을 건립하였으니, 그러므로 중유 또한 생류에 포섭되는 바이다. 어떤 사람은 중유가 방편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갈래 중에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한 인(因)은 업과 번뇌 등이고 과(果)는 다섯 갈래이다.
015_0267_b_08L就生類別建立四生是故中有亦生所攝義中有趣方便故說在趣中此言因業煩惱等果卽五趣

세계 속에서 욕계와 색계와 무색계를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여래의 묘관찰지 상에서도 가없는 인과의 삼계의 차별을 구족하여 현현한다.
015_0267_b_11L經曰如世界中無色諸界可得如是如來觀察智上無邊因果三界差別具足顯現

여기에서는 계차별인상(界差別因相)을 나타내 보였다.
마치 세계 속에서 유정의 업의 증상력에 따라 아뢰야식의 공상과 불공상의 종자가 변생하여 삼계의 인과의 차별을 얻을 수 있는 것과 같다.
여기에서 세계는 정(情)과 비정(非情)을 모두 말하니, 이른바 유정세계와 기세계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 속에는 무색계가 있을 수 없을 것이니, 무색계는 오직 선정으로부터 생겨난 색일 뿐 업으로 생겨난 색이 아니어서 방처(方處)가 없기 때문이다.
015_0267_b_14L論曰此中顯示界差別因相如世界中隨有情業增上力故阿賴耶識共不共相種子變生三界因果差別可此中世界通情非情謂有情世界及器世界若不爾者不應於中有無色界以彼唯有定所生色無業生色無方處故
015_0267_c_01L세계 속에서 그 응하는 바에 따라 삼계를 세우니, 이른바 기세계 중에는 욕계와 색계와 정비정계(情非情界)가 있을 뿐이고 유정계 중에도 세 가지가 모두 있다. 오직 유정계는 기세계와 유정 및 비정계를 통하여 교류되는데, 유정세계는 오로지 유정계만을 임지(任持)하기 때문이다.
015_0267_b_21L於世界中隨其所應建立三界謂器世界中但有欲色情非情有情界中具有三種唯有情界以器世界通持有情及非情界有情世界唯能任持有情界故
이와 같이 여래의 묘관찰지는 삼계의 인과를 경계로 삼기 때문에 그것을 변사하여 삼계 인과의 두 가지 상의 차별이 나타난 것이지 삼계의 인과에 의해 앞에서와 같은 두 가지 분별을 생하는 것은 아니다.
015_0267_c_02L如是如來妙觀察智三界因果爲境界故似其三界因果二相差別顯現非生三界因同前二種分別
여기서의 뜻을 말한다면, 묘관찰지는 능히 모든 경계를 보편적으로 관찰하기 때문에 두루 모든 계(界)의 갈래에 태어나는 번뇌의 업 등에 감응된 모든 행의 성숙이 섭수하는 심ㆍ심법 등의 인과의 상이 나타난다.
015_0267_c_05L此中意說妙觀察智普能觀察一切境故遍似一切諸界趣生煩惱業等所感諸行成熟所攝心心法等因果相現
말하자면 모든 여래의 대원경지가 증상(增上)하여 생겨난 묘관찰지는 비록 소취와 능취의 집착이 없고 모든 번뇌와 소지의 두 가지 장애의 티끌을 멀리 여의었지만 모든 인과 등의 일을 관찰하고 능히 설하기 때문이다. 마치 깨끗하고 원만한 거울에 온갖 그림자가 나타나는 것처럼 모든 경계의 상이 모두 그 속에 나타난다.
015_0267_c_08L謂諸如來大圓鏡智增上所生妙觀察智雖無所取能取執著遠離一切煩惱所知二垢障故觀察一切因果等事及能說如淨圓鏡現衆影像一切境相皆現其中
그렇지만 경지(鏡智)에는 차별의 허물이 없다. 대원경지는 모든 것에 어리석지 않기 때문에 비록 능히 모든 영상을 현현해서 운(運)에 맡겨 구르는 까닭에 분별함이 없다. 이 지혜(묘관찰지)도 능히 일체 경계의 상을 나타내지만 분별함이 있다. 만약 분별함이 없다면 곧 인과 등의 일을 관할 수 없을 것이며, 모인 대중들을 위하여 법을 설하여 의심을 끊게 하는 일도 하지 못할 것이니, 이 문장에서 반드시 증명된다.
무루심 등도 또한 상분(相分)이 있다. 여래지(如來智) 상에서 다섯 갈래와 삼계의 가없는 인과가 낱낱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015_0267_c_13L然無鏡智無差別過大圓鏡智以於一切皆不愚故雖能顯現一切影像任運轉故而無分別此智能現一切境相亦有分別若無分別則不能觀因果等事及爲衆會說法斷此文定證無漏心等亦有相分來智上五趣三界無邊因果具足現
어떤 사람은 “여래지는 맑고 깨끗하기 때문에 모든 경계의 상이 그 속에 나타난다고 하여도 이 경계의 상은 지혜가 변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청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다만 중생심 등이 모든 법의 영상을 변현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015_0267_c_20L有說如來智明淨故一切境相雖現其中而此境相非智所變不淸淨但是衆生心等所變諸法影像
015_0268_a_01L하지만 이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이와 같은 영상이 만약 중생심이 변한 것이라면 어떻게 부처님의 지혜 위에서 현현할 수 있단 말인가? 다른 인(因)이 그와는 다른 마음을 생할 수 없으니 올바른 이치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나머지 마음의 상 또한 반드시 그러하다.
015_0267_c_22L不應理如是影像若是衆生心等所云何在佛智上顯現不可他因生他心相違正理故如餘心相此亦應
그런데 이 경계의 상은 여래의 무루심이 변현한 것이니, 밝은 거울 속에 똥이나 오물의 영상이 비록 부정한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부정하지 않은 것처럼 심(心)과 심법(心法)이 경계의 법[境法]을 반연하는 것도 그러하다.
015_0268_a_03L然此境相如來無漏心所變現明鏡中糞穢影像雖似不淨實非不心及心法緣境法爾
만약 다른 경계를 반연한다면 붙박이 등불이 고정되어 있어서 움직일 수 없는 것과는 같지 않고, 다만 맑은 거울의 성품이 본래 깨끗한 것과 같기 때문에 경계의 상을 변사(變似)하여 능히 그것을 연려(緣慮)2) 한다. 만약 모든 경계의 상이 심상(心上)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비록 그가 힘이 있어서 심과 심소를 일으킬 수 있다고 해도 5근(根) 등과 같이 소연(所緣)이라 불리지 않으니, 다른 곳에서 설한 것과 같다.
015_0268_a_05L若緣他境如鉗燈無動作故但如明鏡性本淨變似境相而能緣慮若諸境相非心上現彼雖有力生心心所如五根等不名所緣如餘處說
무분별지 또한 반드시 그러하니, 반연된 진여[所緣眞如]가 지체(智體)를 여의지 않으면 반드시 그렇다고는 할 수 없다. 후득속지(後得俗智)가 비록 진여를 여의지 않아도 분별함이 있기 때문에 진여의 본체를 증득하지 않는데, 다만 스스로 변하여 진상(眞相)을 만들어 내어서 반연하기 때문이니 논란할 수 없다. 모든 이생(異生)의 마음이 반연하는 무루의 마음 위에 존재하는 모든 무루의 경계상이 비록 무루인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유루이듯이 이 또한 응당 그러하다.
015_0268_a_09L無分別智亦定爾耶所緣眞如不離智體不可定後得俗智雖不離眞有分別故不證眞體但自變作眞相而緣故不可如諸異生心緣無漏心上所有無漏境相雖似無漏實是有漏此亦應
유식의 도리도 당연히 이와 같아서 마음이 변한 상이 비록 있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본체가 없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반드시 색 등이 있는 것이 심과 심법이 유식(唯識)을 이루지 않는 것과 같으니, 만약 그것들이 실제로 있다고 해도 다만 식을 여의지 않는다. 유식이라는 것은 심과 심법이 또한 저 색 등의 온갖 상을 여의지 않는 것인데, 명칭에 응해서 오직 경계뿐이라고 하면 문득 커다란 허물을 이루게 된다.
015_0268_a_15L唯識道理決定如是心所變相雖相似有而實無體若不爾者應有色等如心心法不成唯識若彼實有但不離識名唯識者心及心法亦不離彼色等諸相應名唯境便成大過

세계 속에 소미로(蘇迷盧)3) 등의 대보산왕(大寶山王)이 현현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여래의 관찰지 상에서도 모든 불보살의 위신력이 이끄는 광대하고 깊고 깊은 가르침[敎法]을 얻을 수 있다.
015_0268_a_19L經曰如世界中蘇迷盧等大寶山王顯現可得如是如來觀察智上諸佛菩薩威神所引廣大甚深教法可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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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는 우대법우인상(雨大法雨因相)을 나타내 보였다.
마치 기세간이 모든 중생들의 업의 증상력을 말미암아 모든 보배산을 일으키는 것처럼 여래의 묘관찰지도 모든 유정들이 감응한 정법의 업의 증상력을 말미암아 불보살의 위신력이 이끄는 깊고 큰 가르침을 일으킨다.
015_0268_a_22L論曰此中顯示雨大法雨因相如器世閒由諸衆生業增上力起諸寶山如是如來妙觀察智由諸有情感正法業增上力故起佛菩薩威神所引深大教法
이 가르침은 모든 불보살의 자재한 위신력을 나타내 보이고 또한 능히 그 위신력을 이끌어 일으키는데, 이 때문에 모든 불보살의 위신력이 이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여래의 묘관찰지가 능히 대원경지에 상응하는 식(識) 위에 가르침의 영상을 일으킨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혹은 스스로 능히 가르침의 영상을 나타낼 수 있으니, 이것을 말미암아 선근의 성숙을 반연하게 되어서 교화될 유정의 자심(自心)이 변현한다.
015_0268_b_04L此教開示諸佛菩薩自在威神亦能引發彼威神力是故說名諸佛菩薩威神所引此說如來妙觀察智能發鏡智相應識上教法影像或自能現教法影像由此爲緣善根成熟所化有情自心變現

세계 속에는 광대하고 깊고 깊어서 기울거나 움직일 수 없는 큰 바다를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여래의 관찰지 상에서도 모든 천상이나 악마나 외도의 이론(異論)에 의해서 기울거나 흔들리지 않는 깊고 깊은 법계의 가르침을 얻을 수 있다.
015_0268_b_09L經曰如世界中廣大甚深不可傾動大海可得如是如來觀察智上一切天魔外道異論所不傾動甚深法界教法可得

여기에서는 항복원적인상(降伏怨敵因相)을 나타내 보였다.
마치 기세간이 모든 중생들의 업의 증상력을 말미암아 온갖 큰 바다를 일으키되 기울거나 움직일 수 없는 것처럼 여래의 묘관찰지는 모든 중생들이 정법의 업의 증상력에 감응함을 말미암기 때문에 법계의 가르침을 일으키되 기울어지거나 흔들리지 않는다.
015_0268_b_13L論曰此中顯示降伏怨敵因相如器世閒由諸衆生業增上力起諸大海不可傾動如是如來妙觀察智由諸有情感正法業增上力故起法界教不可傾動
법계는 바로 공(空)과 무상(無相)의 이치이니, 법계의 이치를 설하는 것을 법계의 가르침이라고 이름한다. 모든 외도들은 다 여러 견해에 의지하여 있는데, 법계의 공한 이치는 여러 견해를 대치하고 여러 견해의 갈래를 여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공의 가르침을 능히 헤아릴 수 없고 앞서의 위신력의 가르침을 능히 기울게 하거나 움직일 수도 없다.
015_0268_b_18L法界則是空無相理說法界理名法界教諸外道等皆依諸見法界空理對治諸見離諸見趣是故空教彼不能測不能傾動前威神教
015_0268_c_01L위신력이 높고 넓기 때문에 보배산에 비유되고, 이 법계의 가르침은 법계가 깊고 깊기 때문에 큰 바다에 비유된다.
묘관찰지는 바로 능히 모든 경계의 인(因)을 비추어 나타낼 수 있기 때문에 능히 모든 법의 가르침을 일으켜 설할 수 있다. 간략하게 “뛰어나다”라고 말한 것은 계경에서 “불세존을 이름하여 커다란 지혜의 태양이라고 하니, 두루 능히 일체법을 밝게 비추기 때문이다”라고 설한 것과 같다.
015_0268_b_21L威神高廣故喩寶山此法界教法界甚深故喩大海妙觀察智是能顯照一切境因故能起說一切法教略說勝者是故契經說佛世尊名大智日普能照了一切法故

세계는 대륜산(大輪山)과 소륜산(小輪山)에 둘러싸여 있는 것처럼 여래의 묘관찰지는 어리석지 않은 모든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에 둘러싸여 있다.
015_0268_c_03L經曰又如世界大小輪山之所圍繞如是如來妙觀察智不愚一切自相共相之所圍繞

여기에서는 단일체의인상(斷一切疑因相)을 나타내 보였다.
가령 기세계는 하나의 묘고산과 일곱 개의 큰 금산(金山)과 여덟 개의 큰 바다와 네 개의 큰 섬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것들을 전체적으로 밖에서 소륜산이 둘러 감싸고 있다. 이와 같이 하나하나씩 모여서 천(千)이 된다.
015_0268_c_06L論曰此中顯示斷一切疑因相如器世界一妙高山七大金山八大海水四大洲等摠於其外有小輪山周帀圍繞如是爲一積數至千
다시 그것들을 전체적으로 밖에서 다음의 윤산(輪山)이 둘러 감싸고 있으니, 그것을 소천계(小千界)라고 이름한다. 이와 같이 하나하나씩 모여서 천이 된다. 또다시 그것들을 전체적으로 밖에서 다음의 윤산이 둘러 감싸고 있으니, 그것을 중천계(中千界)라고 이름한다. 이와 같이 하나하나씩 모여서 천이 된다. 전체적으로 그것들을 밖에서 대륜산이 둘러 감싸고 있는데 커다란 풍륜(風輪)이 그 아래를 총지(總持)하고 있으니, 이것을 하나의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라고 이름한다. 이와 같은 것을 “대륜산과 소륜산이 둘러 감싸고 있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015_0268_c_10L復摠於外有次輪山周帀圍繞名小千界如是爲一復數至千更摠於外有次輪山周帀圍繞名中千界如是爲一復數至千摠於其外有大輪山周帀圍繞有大風輪摠持其下名一三千大千世界
이와 같이 여래의 묘관찰지도 모든 자상과 공상을 두루 알아서 세간의 온갖 의혹을 끊는다. 자상과 공상의 어리석음은 바로 의혹의 인(因)인데, 자상과 공상을 알아서 이런 어리석음이 없기 때문에 스스로 의혹이 없고 능히 다른 이의 의심도 끊게 해준다. 대원경지는 영원히 두 가지 장애를 끊어서 모든 자상과 공상에 대해 어리석지 않으니, 능히 이런 지혜를 낳고 이 지혜를 거두고 보호하기 때문에 ‘감싼다’고 이름한다.
015_0268_c_16L如是名爲大小輪山之所圍繞如是如來妙觀察智遍知一切自相共相能斷世閒一切疑惑自共相愚是疑惑因知自共相無此愚故自無疑惑能斷他疑大圓鏡智永離二障不愚一切自相共相能生此智攝護此智故名圍繞
015_0269_a_01L경지(鏡智)가 비록 능히 일체법의 자상과 공상을 안다고 하여도 분별함이 없기 때문에 능히 다른 사람을 위해 법을 설하여 의혹을 끊게 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 지혜(묘관찰지)는 능히 분별함이 있기 때문에 능히 모든 이들을 위해 법을 설하여 의혹을 끊게 해준다.
015_0268_c_22L鏡智雖能知一切法自相共相無分別故不能爲他說法斷疑此智能知有分別故能爲一切說法斷疑
또 이 지체(智體)는 능히 모든 법의 자상과 공상을 알아서 두 종류의 행상(行相)이 감싸는 바가 되는데, 자상의 행상은 소륜산과 같고 공상의 행상은 대륜산과 같다. 대원경지가 능히 총지하는 것은 마치 풍륜이 아래를 총지하는 것과 같다. 여래의 깨끗한 지혜는 현량(現量)에 포섭되는 것인데, 어떻게 능히 모든 법의 공상을 알 수 있는가? 만약 공상의 경계가 현량이 아는 바라면 어떻게 두 양(量)이 두 상(相)에 의지하여 서겠는가?
015_0269_a_02L又此智體能知諸法自相共相二種行相之所圍繞自相行相如小輪山共相行相如大輪山鏡智能持如風持下如來淨智現量所攝云何能知諸法共相若共相境現量所知云何二量依二相立
어떤 사람은 “두 양은 산심위(散心位)에 있으면서 두 상에 의지하여 서니 정심위(定心位)4)를 말하지 않는다. 만약 정심에 있으면서 일체상을 반연한다면 모두가 현량에 포섭된다”고 말한다.
015_0269_a_07L有義二量在散心位依二相立不說定位若在定心緣一切相皆現量攝
어떤 사람은 “정심은 오직 자상을 반연하지만, 그러나 공상의 방편에 이끌리는 바를 말미암아 모든 공상을 반연한다. 드러나는 이치라는 것은 방편의 측면에서 설한다면 공상을 안다고 이름하고, 이와 같지 않은 것은 자상을 안다고 이름한다. 이런 도리를 말미암아 진여란 공하고 무아인 모든 법의 공상이라고 이름하거나 혹은 진여란 2공(空)이 드러난 바이니 이것은 공상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015_0269_a_09L有義定心唯緣自相然由共相方便所引緣諸共相所顯理者就方便說名知共相不如是者名知自相由此道理或說眞如名空無我諸法共相或說眞如二空所顯非是共相
참다운 뜻에서 말한다면, 저 『인명론』에서 세우는 자상과 공상은 이것과 조금 차이가 있다. 거기(인명론)에서는 일체법 상에서 참다운 뜻을 모두 자상이라고 이름한다고 하는데, 모든 법에서 자상과 공상이 각각 자기의 본체에 부합하며 다른 것과 함께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분별심으로 한 종류의 능전(能詮)과 소전(所詮)을 세운다면 모든 법에 통해 있으니, 마치 실이 꽃을 꿰는 것과 같아서 이것을 공상이라고 이름한다.
015_0269_a_14L如實義者彼『因明論』立自共相與此少異彼說一切法上實義皆名自相以諸法上自相共相各附己體不共他故若分別心立一種類能詮所詮通在諸法如縷貫花名爲共相
이것은 요컨대 산심의 분별이 거짓으로 세운 것이니 비량(比量)의 경계이고, 모든 정심은 이런 분별을 여의고 있어서 모두 현량이라고 이름한다. 비록 모든 법을 반연하더라도 또한 무상(無常) 등 하나하나의 법은 각각 개별적으로 있기 때문에 자상이라고 이름한다.
015_0269_a_19L此要散心分別假立是比量境一切定心離此分別皆名現量雖緣諸法苦無常等亦一一法各別有故名爲自相
015_0269_b_01L진여가 비록 공상이 나타내는 바라 하더라도 이는 모든 법 스스로의 참다운 성품이라서 스스로 상이 있기 때문에 또한 공상이 아니다. 그것은 일체법과 더불어 하나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므로 공상이라고 이름할 수 없으니, 자상 또한 모든 공상과 더불어 하나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논에서는 모든 법 위에 있는 참다운 뜻을 모두 자상이라고 이름한다고 설하였고, 이 경에서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서로 어긋나는 것이 아니다.
015_0269_a_22L眞如雖是共相所顯以是諸法自實性故自有相故亦非共相不可以其與一切法不一不異卽名共相自相亦與一切共相不一異故是故彼論說諸法上所有實義皆名自相此經不爾故無相違

또한 묘생이여, 성소작지(成所作智)란 것은。
015_0269_b_04L經曰復次妙生成所作智者

성소작지는 여래의 화신을 이룬다는 걸 마땅히 알아야 한다. 여기에 또 세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신화(身化)요, 둘째는 어화(語化)요, 셋째는 의화(意化)이다.
015_0269_b_05L論曰成所作智應知成立如來化身此復三種一者身化二者語化三者意化
첫 번째 신화에 다시 세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현신통화(現神通化)이고, 둘째는 현수생화(現受生化)이고, 셋째는 현업과화(現業果化)이다.
015_0269_b_08L第一身化復有三種現神通現受生化現業果化
두 번째 어화에도 또한 세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경위어화(慶慰語化)이고, 둘째는 방편어화(方便語化)이고, 셋째는 변양어화(辯揚語化)이다.
015_0269_b_09L第二語化亦有三種慶慰語化二方便語辯揚語化
세 번째 의화에 또한 네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결택의화(決擇意化)이고, 둘째는 조작의화(造作意化)이고, 셋째는 발기의화(發起意化)이고, 넷째는 수령의화(受領意化)이다.
015_0269_b_11L第三意化復有四種決擇意化造作意化發起意受領意化
성소작지는 능히 이와 같은 세 가지 화업(化業)의 작용을 일으키니, 이렇게 세 가지 업을 변화한 것이 바로 화신(化身)이다. 마땅히 알아라. 이것은 용(用)으로써 체를 드러내는 것일 뿐 이 세 가지 업이 바로 지혜의 체는 아니다. 다만 이 지혜 위에 나타난 상분(相分)일 뿐이다. 성소작지의 증상연력(增上緣力)은 대원경지에 상응하는 정식(淨識)을 격발하여 이와 같이 세 가지 업의 변화 작용을 나타내고 스스로도 또한 능히 나타낼 수 있다.
015_0269_b_13L成所作智能起如是三業化用此化三業卽是化身應知此中以用顯體非此三業卽是智體但是智上所現相分成所作智增上緣力擊發鏡智相應淨識令現如是三業化用自亦能現
마땅히 알아라. 네 가지 지혜의 하나하나는 능히 온갖 작용을 일으킨다. 억지로 말한다면, 대개 평등지는 수용신을 일으키고, 성소작지는 변화신을 일으키며, 묘관찰지는 모든 자상과 공상과 다라니문과 삼마지 등을 관찰하며, 대원경지는 능히 모든 법의 영상을 나타낸다. 하나하나의 감관[根]이 모든 경계를 취하지만 강제 작용[强用]이 없지 않듯이 이것 또한 그러하다. 여기에서 경문(經文)으로 반드시 증명된다.
015_0269_b_18L當知四智一一能起一切作用就强多分說平等智起受用身成所作智起變化身妙觀察智觀察一切自相共相陁羅尼門三摩地等大圓鏡智能現一切諸法影像如一一根取一切境非無强用此亦如是此中經文定證
015_0269_c_01L세 가지 업의 심과 심법 등에 모두 변화가 있다. 여래지(如來智) 상에서 이런 거친 상의 심과 심법 등의 모든 공덕을 나타내서 모든 하지(下地)로 하여금 능히 환히 알게 함을 나타내니, 만약 그렇지 않다면 2승(乘)과 이생(異生)이 어떻게 능히 알겠는가? 여래의 모든 심과 심법 등의 공덕에는 차별이 있는데, 어떻게 여래께서 오래 전에 부처를 이루고서 다시 능히 탐욕이나 성냄 등의 갖가지 화신을 나타낼 수 있다는 말인가? 다른 경에서도 또한 무량한 종류로 변화하여 모두 마음이 있게 한다고 설한다.
015_0269_c_01L三業心心法等皆有變化如來智上現此麤相心心法等一切功德令諸下位能現了知若不爾者二乘異生云何能知如來所有心心法等功德差別云何如來久已成佛復能現作具貪瞋等種種化身餘經亦說化無量類皆令有心
또 화신은 또한 유심이라고도 이름하고 무심이라고도 이름한다고 설한다. 다른 것에 의지하는 마음이 있으면 스스로 마음에 의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른바 화심(化心) 등은 참다운 마음에 의지하여 나타나지만, 다만 참다운 마음 위에서 상분은 흡사 연려 등의 작용[用]이 있는 듯하다.
015_0269_c_08L又說化身亦名有心亦名無心有依他心無自依心故謂化心等依實心現但實心上相分似有緣慮等
마치 거울 속에서 불[火]은 별개의 자기 실체가 없지만 온갖 연을 따라 생하는 것처럼, 다른 마음 등이 다른 곳에서 비록 화심(化心) 등이 없어 참다운 작용[實用]이 없다고 말하지만 여실한 마음 등과 변화색 등은 참다운 작용이 있는 것과 같다. 여실한 색 등이기 때문에 치우치게 있다고 말하는 것이며, 화심(化心) 등을 말미암아 거친 상이 현현하는 것도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에 원숭이에 이르기까지 여래의 마음을 안다. 만약 부처님의 참다운 마음[實心]이라면 모든 대보살 또한 능히 요달하지 못한다.
015_0269_c_11L如鏡中火無別自體隨衆緣生如餘心等餘處雖說無化心等以無實用如實心等變化色等有實作用實色等故偏說有由化心等麤相顯現易了知故乃至猿猴知如來心佛實心諸大菩薩亦不能了

모든 중생들이 부지런히 힘쓰는 몸의 업[身業]과 같으니, 이를 말미암아 중생이 갖가지 이익되는 일을 찾아서 농사일을 하거나 왕 등을 섬기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여래의 성소작지도 부지런히 몸을 변화하는 업이다. 이를 말미암아 여래는 갖가지 공교로운 일을 나타내 보여서 재주가 많고 오만한 여러 중생을 꺾고 항복받나니, 이 선교방편의 힘으로 모든 중생들을 이끌어서 성스러운 가르침으로 들게 하여 성숙하고 해탈하게 한다.
015_0269_c_16L經曰如諸衆生勤勵身業由是衆生趣求種種殉利務農勤王等事如是如來成所作智勤身化業由是如來示現種種工巧等處摧伏諸伎傲慢衆生以是善巧方便力故引諸衆生令入聖教成熟解脫
015_0270_a_01L
여기에서는 신통변화를 나투어서 몸을 변화하는 업의 모양을 나타내 보인다. 마음을 참으로 용맹하게 하기 때문에 ‘부지런히’라고 이름한다. 선한 성품 중에서 정진을 겸하여 취하며 나머지는 다만 작의(作意)이다. 이를 말미암아 몸의 업을 발기하여 부지런히 매진함으로써 인(因)으로 나아가 이름을 삼는 것이다.
이 몸의 업을 말미암아 세간의 유정은 세 가지 올바른 일을 짓는다.
‘등’이란 그 나머지 여러 가지 일을 모두 취한다는 의미이다.
015_0269_c_22L論曰此中顯示現神通化化身業相令心勇悍故名勤勵於善性中兼取精進餘但作意由此發起勤勵身業就因爲名由此身業世閒有情作三正事等者等取其餘雜事
성소작지는 정진과 상응하여 몸을 변화하는 업을 일으킨다. 이 변화하는 업을 말미암아 보살이 되었을 때 여러 도예가 등의 온갖 공교로운 일을 나타내 보인다. 이것은 바로 지혜 위에 신업(身業)의 상을 나타냄으로서 기술이나 오만함을 꺾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일의 선교방편을 나타냄이 바로 자비와 지혜[悲慧]가 평등해서 운용하는 길에 먼저 신통력을 나타내는 것이니, 처음에는 믿음을 낳게 하기 때문에 중생을 성스러운 가르침에 들어가도록 이끌어 들인다고 하는 것이다.
015_0270_a_04L成所作智精進相應起化身業由此化業爲菩薩時示現種種陶師等類工巧等處此是智上身業相現爲欲摧伏伎術傲慢故現斯事善巧方便卽是悲慧平等運道先現神通初令生信故名引生令入聖教
마치 신통력을 나투어서 가섭 등을 교화하는 것처럼 차례로 순조롭게 길들여서 감능(堪能)할 수 있게 하기 때문에 성숙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며, 이끌어서 모든 선근을 기르기 때문에 나중에는 삼계의 악한 갈래를 해탈케 하는 것이니, 성품이 있든[有性] 성품이 없든[無性] 그 차례대로라서 해탈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015_0270_a_10L如現神通度迦葉等次令調順有所堪能故名成熟引令長養諸善根故後令解脫三界惡趣有性無性如其次第故名解脫
교화하는 힘을 말미암아 종자의 성품이 있는[有種性] 자는 성도(聖道)에 태어나서 삼계를 해탈하게 하며, 종자의 성품이 없는[無種性] 자는 세간의 선을 닦아서 항상 선한 갈래에 태어나게 한다. 그 선근을 염(念)하여 정법을 설해서 삼계를 벗어나게 하니, 빛을 놓아서 괴로움을 쉬게 하고 선한 갈래[善趣]에 안립하게 한다.
015_0270_a_13L由教化力有種性者令生聖道解脫三界無種性者令修世善常生善趣念彼善根爲說正法令脫三界放光息苦安立善趣
또 그들로 하여금 듣고 사유하고 수행하는 지혜의 차제삼구(次第三句)를 내게 하며, 또 그들로 하여금 순해탈분(順解脫分)과 순결택분(順決擇分)과 성도(聖道)에 태어나게 하는 차제삼구를 내게 하며, 또 그들로 하여금 견도(見道)와 수도(修道)와 무학도(無學道)의 차제삼구에 들게 한다. 이와 같은 것은 성스러운 가르침의 차별상에 따라서 설한 것을 해석한 것이니, 뒤에도 이와 같다.
015_0270_a_17L又令彼生聞思修慧次第三句又令彼生順解脫分順決擇分及生聖道次第三句又令彼入見道修道及無學道次第三句如是等釋應隨相說後亦如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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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마치 중생이 신업(身業)을 수용하고 이를 말미암아 중생이 갖가지 색 등의 경계를 수용하는 것과 같으니, 이처럼 여래의 성소작지도 몸을 화현하는 업을 받고 이를 말미암아 여래도 모든 중생들이 갖가지로 태어나는 곳에 가서 똑같은 생을 받지만 존경받는 지위에 머무심을 나타낸다. 그렇게 같은 부류의 생을 나타내 보임으로써 일체 다른 부류의 중생을 거두고 항복받나니, 이 선교방편의 힘으로 인하여 모든 중생들을 이끌어서 성스러운 가르침에 들게 하여 성숙하고 해탈케 한다.
015_0270_a_21L經曰又如衆生受用身業由是衆生受用種種色等境界如是如來成所作智受身化業由是如來往諸衆生種種生處示同類生而居尊位由其示現同類生故攝伏一切異類衆生以是善巧方便力故引諸衆生令入聖教成熟解脫

여기에서 나타내 보인 것은 생을 받는 화현(化現)과 화신의 업[化身業]의 상이다. 세간 유정이 태어나는 온갖 곳에서 모든 감관[根]이 색 등의 경계를 받아들이기 때문에 수용신(受用身)이라고 이름하며, 운전(運轉)하는 것이 있으므로 신업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015_0270_b_05L論曰此中顯示現受生化化身業相世閒有情於諸生處諸根領納色等境界故名受用身有運轉故名身業
성소작지는 태어나는 모든 곳에서 동시에 생을 나투어 경계를 수용하니, 이른바 천상과 인간 가운데 태어나는 모든 곳에 화신을 나투어서 같은 종류의 중생인 거사나 찰제리(刹帝利)나 바라문을 나타내어 모든 아래의 중생들을 조복시켜 이익과 즐거움을 얻게 한다. 이것 또한 지혜 위에 신업의 상이 나타난 것이라서 경지(鏡智)를 촉발하거나 혹은 스스로 현현한다. 다른 예도 반드시 그러하다.
015_0270_b_08L成所作智一切生處同時現生受用境界謂現化身於天人中一切生處示同類生居剎帝利婆羅門種伏諸下類令得利樂此亦智上身業相現或擊鏡智或自顯現餘例應爾

또 마치 중생이 신업(身業)을 이해해 받아들이고 이를 말미암아 중생은 자신이 지은 선업과 악업의 과보를 받아들이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여래의 성소작지도 몸이 변화하는 업을 받아들이고 이를 말미암아 여래는 본사(本事)와 본생(本生)의 닦기 어려운 모든 행을 받아들임을 나타내 보이나니, 이 선교방편의 힘을 말미암아 모든 중생들을 이끌어 성스러운 가르침에 들어가게 하고 성숙하고 해탈케 한다.
015_0270_b_13L經曰又如衆生領受身業由是衆生領受所作善惡業果如是如來成所作智領身化業由是如來示現領受本事本生難修諸行以是善巧方便力故引諸衆生令入聖教成熟解脫

여기에서 나타내 보인 것은 업의 과보의 화현과 화신의 업의 상이다. 몸이란 바로 업이기 때문에 신업이라고 이름하였으니, 먼저 지은 업의 과보이기 때문에 과(果)에서 인(因)의 명칭을 말하는 것이다. 혹은 몸이 먼저 지은 업의 과보를 받을 때에 운전하는 용(用)이 있기 때문에 몸의 업이라고 이름한다.
015_0270_b_18L論曰此中顯示現業果化化身業相身卽是業故名身業先業果故果說因名或身領受先業果時有運轉用故名身業
이 몸의 업이 먼저 지은 업의 사랑할 만하거나 사랑할 만하지 않은 과보를 받아들임을 말미암아서 성소작지는 화신(化身)을 현사(現似)하여 화업(化業)을 받아들인다.
015_0270_b_22L由此身業領受先業愛非愛果成所作智現似化身領受化業
015_0270_c_01L이 업을 말미암아 일체 본사와 본생의 닦기 어려운 모든 행을 받는 것을 나타내 보이는데, 지난 세상에 상응하는 나머지 모든 일을 본사라고 이름하고, 먼저 세상에서 갖가지로 생을 받은 것을 본생이라고 이름한다.
015_0270_b_23L由此業故示受一切本事本生難修諸行先世相應所有餘事名爲本事先世所受生類差別名爲本生
비습반달라(毘濕飯怛囉) 등 일체 본생의 일은 이 본생에 의거한다. 먼저 닦은 갖가지 고행을 닦기 어려운 행이라고 이름하고, 혹은 금생에 변화신에 의지하여 먼저 고행을 닦은 뒤에 그 행을 버리고 닦은 곳에서 행하다가 바야흐로 보리를 얻는 것을 닦기 어려운 행이라고도 이름한다.
015_0270_c_03L如毘濕飯怛囉等一切本生事依此本生先所修行種種苦行名難修行或於今世依變化身先修苦行後捨彼行修處中行方得菩提名難修行
이른바 모든 중생들은 고행을 닦기를 계교(計較)해서 악을 멈추고 선을 일으키고서야 바야흐로 보리를 얻는데, 그들을 교화하기 위해 먼저 그들과 똑같이 여러 고행을 닦는 것을 보여주다가 나중에는 지계만으로 청정함을 얻는 것이 아님을 나타낸다. 요컨대 선정과 지혜를 말미암아 바야흐로 청정함을 얻기 때문에 고행을 버리고 닦는 곳에서 행하다가 바야흐로 보리를 얻는다.
015_0270_c_07L謂諸衆生計修苦行止惡起善方得菩提爲化彼故先示同彼修諸苦行爲顯非但持戒得淨要由定慧方得淨故現捨苦行修處中行方得菩提
계경에서 말하기를, “여래께서 과거 세상의 가섭불 때에 비난의 말씀을 하시기를 ‘어떤 곳의 사문은 머리와 수염을 깎은 자로서 큰 보리와 위없는 보리는 지극히 얻기 어렵다’고 하셨기 때문에 그는 이 악업을 말미암아 지금 이와 같은 난행의 괴로운 과보를 받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015_0270_c_11L有契經說如來先世迦葉佛時作是罵言何處沙門剃鬚髮者有大菩提無上菩提極難得故由彼惡業今受如是難行苦果
이 말은 또한 악행을 멈추게 하기 위해 화신으로 현현하여 지은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일생 동안 보살이 일찍이 한량없는 여래를 가까이 모시고 여러 선의 근본을 심었는데, 성품이 과거세의 생활을 기억하여 이와 같이 입으로 짓는 무거운 악행을 다시 일으키는데 매이겠는가? 마땅히 알아라. 이것은 중생을 교화하고 제도하고자 하여 말한 것이니, 이렇게 말한 것을 듣고 제도를 얻었다면 부처님의 처소에서 이 말을 여의도록 하기 때문이다.
015_0270_c_15L此言亦是爲止惡行現化所作若不爾者何有繫屬一生菩薩已曾親事無量如來殖諸善本性憶宿命更起如是重語惡行當知此言爲欲化度宜聞此言而得度者令於佛所離此言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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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마치 중생의 경축하고 위로하는 말의 업과 같아서 이를 말미암아 중생이 점차적으로 말하여 서로서로 경축하고 위로하는데, 마찬가지로 여래의 성소작지도 경축하는 말로 교화하는 업이니, 이를 말미암아 여래는 갖가지 즐거워하는 바에 따라 법을 선양한다. 문의(文義)가 교묘해서 지혜가 적은 중생이 처음 듣고도 숭상하며 믿나니, 이는 공교로운 방편의 힘으로써 모든 중생들을 이끌어 그들로 하여금 성스러운 가르침에 들어가 성숙하고 해탈케 한다.
015_0270_c_20L經曰又如衆生慶慰語業由是衆生展轉談論遞相慶慰如是如來成所作智慶語化業由是如來宣暢種種隨所樂法文義巧妙小智衆生初聞尚信以是善巧方便力故引諸衆生令入聖教成熟解脫

여기에서 나타내 보인 것은 경축하고 위로하는 말의 교화와 교화의 어업(語業)의 상(相)이다. 경축하고 위로한다는 것은 바로 희열의 차별적인 말이 능히 저것을 낳기 때문에 경축하고 위로한다고 하는 것이니, 이 말을 듣고서 점점 더 커다란 환희를 내기 때문이다. 이른바 모든 유정들은 말과 마음의 증상력을 발함을 말미암기 때문에 각각 별개의 식 위에서 어업의 상이 나타남을 증상연으로 삼으며, 나머지 식으로 하여금 어업의 상을 변사(變似)하게 하여 각각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기쁘게 한다.
015_0271_a_03L論曰此中顯示慶慰語化化語業相慶慰卽是喜悅差別語能生彼故名慶慰聞此語言展轉發生大歡喜故謂諸有情由發語心增上力故各別識上語業相現爲增上緣令餘識變似語業相各謂聞他語言生喜
성소작지가 어업을 화작하는 것도 이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스스로 미묘한 소리를 내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변하게 하니, 이른바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환희를 내기 때문이다.
‘즐거워하는 바의 법을 따른다.’는 것은 그 인(因)의 힘이 응하는 바에 따라 사람과 천상의 3승의 여러 차별법을 즐겨 듣는 것이다.
015_0271_a_09L成所作智化作語業應知亦爾自現妙音令他心變謂聞佛語生歡喜故隨所樂法者隨彼因力所應樂聞人天三乘諸差別法
‘글과 뜻으로 교묘함’이란 것은 이취(理趣)가 분명하고 이해하기 쉽다는 것이다. ‘지혜가 적은 중생이 처음 듣고도 숭상하며 믿는다’는 것은 이른바 부처님의 말씀과 음성은 60가지 덕을 갖추었으니, 여러 범부들의 어리석은 지혜가 잠깐 동안 듣더라도 오히려 믿고 이해력을 일으키겠거늘 하물며 나머지 총명한 사람의 지혜가 성소작지하는 것에 있어서겠는가.
015_0271_a_13L文巧妙者字句顯美令樂聞故義巧妙者理趣分明易解了小智衆生初聞尚信者謂佛言音具六十德諸凡愚慧暫時得聞尚生信解何況其餘聰愍者慧成所作智
경축하고 위로한다고 하는 것은 능히 말을 나투어서 모든 교묘한 문의(文義)를 널리 설하여 온갖 유정들에게 환희심을 내게 하기 때문이다. 또한 능히 선현(善現) 등의 무리가 가피를 입으니, 부처님의 말씀과 음성이 지극히 깊고 깊어서 헤아리기 어려운 법을 널리 설하시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이 지혜는 능히 다른 일체의 논자(論者)와 색류(色類)와 나아가 허공에 이르기까지 가피할 수 있어서 또한 능히 어업을 화현해 일으켜 설법하시니, 이 일이 불가사의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015_0271_a_17L名慶慰者能現化語宣說一切巧妙文義生諸有情歡喜心故亦能加被善現等輩以佛言音宣說甚深難測量法如是此智能加被他一切論者一切色類乃至虛空亦能發起化語說法當知此事不可思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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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중생의 방편어(方便語)의 업과 같으니, 이를 말미암아 중생이 차례차례 가리킴을 받아 짓는 바에 전일하게 힘써서 악을 나무라고 착함을 칭찬하며 서로 부르거나 명령한다. 마찬가지로 여래의 성소작지가 일으킨 방편도 말이 변화하는 업이니, 이를 말미암아 여래는 바른 학처(學處)를 세우며, 모든 방일함을 나무라며, 방일하지 않음을 칭찬하며, 또 믿음을 따라 행하는 사람과 법을 따라 행함 등을 건립한다. 이 공교로운 방편의 힘이 있기 때문에 모든 중생들을 이끌어 그들로 하여금 성스러운 가르침에 들어가게 하여 성숙하고 해탈케 한다.
015_0271_a_23L經曰又如衆生方便語業由是衆生展轉指授務專所作毀惡讚善更相召命如是如來成所作智所起方便語變化業由是如來立正學處毀諸放逸讚不放逸又復建立隨信行人隨法行等以是善巧方便力故引諸衆生令入聖教成熟解脫

여기에서 나타내 보인 것은 방편어의 교화와 교화하는 어업(語業)의 상이다. 마치 온갖 세간의 방편어의 업이 서로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교시하여 친한 이와 벗을 이익되게 하며 게으른 중생에게 가행(加行)을 일으키게 하기 때문에 방편이라고 이름하는 것과 같다.
015_0271_b_07L論曰此中顯示方便語化化語業相如諸世閒方便語業更相教示諸所應作不應作事利益親友放逸衆生加行起作故名方便
마찬가지로 여래는 대비(大悲)를 말미암아서 모든 유정들을 위해 학처를 안립하고, 모든 악을 항복시키고, 세간의 선을 닦게 하고, 성도(聖道)의 차별적인 지위를 안립하여서 정도에 들어가 삼계를 벗어나게 한다. 성소작지가 능히 교화의 말을 발해서 이런 일을 모두 이루어내니, 이른바 모든 악을 쉬게 하고 모든 선을 일으키게 하므로 이것이 바로 말의 쓰임[語用]이다.
015_0271_b_11L如是如來由大悲故爲諸有情安立學處令伏諸惡修世閒善安立聖道分位差別令入正道出離三界成所作智能發化語成辦斯事謂息諸惡發起諸善是此語用

또 중생이 변론하여 드날리는 말의 업과 같으니, 이를 말미암아 중생이 차례차례 열어 보여서 요의(了義)가 아닌 곳에서 모든 논리를 편다. 마찬가지로 여래의 성소작지도 변론의 말로 교화하는 업이니, 이를 말미암아서 여래는 모든 중생들의 한량없는 의혹을 끊는다. 이 공교로운 방편의 힘으로 모든 중생들을 이끌어서 그들로 하여금 성스러운 가르침에 들어가게 하여 성숙하고 해탈케 한다.
015_0271_b_16L經曰又如衆生辯揚語業由是衆生展轉開示所不了義宣諷諸論如是如來成所作智辯語化業由是如來斷諸衆生無量疑惑以是善巧方便力故引諸衆生令入聖教成熟解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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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나타내 보인 것은 변론하여 드날리는 말의 교화와 교화하는 어업의 상이다. 성소작지는 모든 중생들의 의요(意樂)의 차별에 따라 교화하는 말의 업을 나타내서 갖가지 뜻을 설하여 모든 의혹을 끊어준다. 이른바 한 가지 소리를 내서 모든 뜻을 나타내되 모든 유정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부류에 따라 이익을 얻게 한다.
015_0271_b_21L論曰此中顯示辯揚語化化語業相成所作智隨諸衆生意樂差別現化語業說種種義斷諸疑惑謂發一音表一切義令諸有情隨類獲益
계경에서 “부처님께서는 한 가지 음성으로 모든 법을 연설하시지만 중생은 자기들의 부류에 따라서 각각 해탈을 얻는다. 어떤 이는 두려워하고, 어떤 이는 환희심을 내며, 어떤 이는 싫어해 여의는 마음을 내고, 어떤 이는 거듭 의심을 끊는다”고 한 것과 같다. 이것은 바로 여래의 본원이 이끄는 부사의한 힘에서 발해진 교화의 말이다. 하나의 소리가 능히 온갖 의심을 끊으니, 화신(化身)을 짓는 일 또한 중생으로 하여금 하나의 본질을 다르게 보아서 이롭고 즐거운 일을 이루게 함이다.
015_0271_c_02L如契經言佛以一音演說諸法衆生隨類各得開解或有怖畏或有歡喜或生厭離或復斷疑此是如來本願所引不思議力所發化語一音能斷一切衆疑若作化身亦令衆生一質異見利樂事成

또 마치 중생이 결택하는 뜻의 업[意業]과 같으니, 이를 말미암아 중생이 지을 수 있는 것과 지을 수 없는 것을 결택한다. 마찬가지로 여래의 성소작지도 결택의 뜻이 교화하는 업이니, 이를 말미암아 여래는 중생의 8만 4천 마음의 길[心行]의 차별을 결택한다. 이 공교로운 방편의 힘으로 모든 중생들을 교화함으로서 성스러운 가르침에 들어가게 하여 성숙하고 해탈케 한다.
015_0271_c_08L經曰又如衆生決擇意業由是衆生決擇可作及不可作如是如來成所作智決意化業由是如來決擇衆生八萬四千心行差別以是善巧方便力故引諸衆生令入聖教成熟解脫

여기에서 나타내 보인 것은 결택하는 뜻[決擇意]의 교화와 교화하는 의업(意業)의 상이다. 성소작지가 상응하는 의업은 능히 교화를 일으키기 때문에 화의업(化意業)이라고 이름하는데, 이것은 능히 교화 받는 중생의 8만 4천 가지 심행(心行)의 차별을 결택할 수 있다. 또는 다시 이 지(智)의 상분(相分) 중에 나타낸 변화의 의업이 흡사 능히 중생의 8만 4천 가지 심행을 결택할 수 있듯이 그들로 하여금 승의제를 환히 알아 이익을 얻게 한다.
015_0271_c_13L論曰此中顯示決擇意化化意業相成所作智相應意業能起化故名化意業此能決擇所化衆生八萬四千心行差別或復此智相分中現變化意業似能決擇衆生八萬四千心行令彼了知得勝義利
어떤 것이 8만 4천 가지 심행인가? 이른바 모든 유정들의 8만 4천 가지의 모든 구(垢)와 진(塵)과 노(勞)의 심행의 차별이니, 이것이 8만 4천 바라밀다와 다라니문과 삼마지 등을 장애한다.
015_0271_c_19L云何八萬四千心行謂諸有情八萬四千諸垢塵勞心行差別此能障㝵八萬四千波羅蜜多陁羅尼門三摩地等
015_0272_a_01L『현겁경(賢劫經)』에서 그 모양을 자세하게 설명한 것과 같다. 이른바 최초의 수행법을 닦고 익히는 바라밀에서부터 최후의 부처님 몸을 나누는 바라밀다에 이르기까지 350의 하나하나가 6도피안(到波岸)을 갖추니, 이와 같이 하면 모두 2천100이 된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 및 그와 동등한 유정의 심행인 8천400을 대치하여 4대종(大種)5)과 여섯 가지 무의(無義)가 낳은 허물을 제거하기 위해 열 배를 하면 8만 4천이 된다. 이것을 닦고 익히기 때문에 다시 8만 4천 다라니문과 삼마지 등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간략하게 설명한 것인데, 자세하게 설명하면 헤아릴 길이 없다.
015_0271_c_22L如『賢劫經』廣說其相所謂最初修習行法波羅蜜多乃至最後分布佛體波羅蜜多三百五十一一皆具六到彼岸如是摠有二千一百對治貪瞋癡及等分有情心行八千四百除四大種及六無義所生過失十轉合數八萬四千修習此故復得成就八萬四千陁羅尼門三摩地等此猶略說廣則無量

또 마치 중생의 조작하는 의업(意業)과 같으니, 이를 말미암아 중생이 갖가지 모든 일으키는 업을 조작한다. 마찬가지로 여래의 성소작지는 뜻을 지어 교화하는 업이니, 이를 말미암아 여래는 모든 중생들이 닦는 행이 행인가, 행이 아닌가, 얻음인가, 잃음인가를 관찰하여 그로 하여금 취하고 버림으로서 조작하고 대치(對治)하게 한다. 이는 공교로운 방편으로 모든 중생들을 이끌어서 성스러운 가르침에 들어가게 하여 성숙하고 해탈케 함이니라.
015_0272_a_07L經曰又如衆生造作意業由是衆生造作種種諸所起業如是如來成所作智造意化業由是如來觀諸衆生所行之行行與不行若得若失爲令取捨造作對治以是善巧方便力故引諸衆生令入聖教成熟解脫

여기에서 나타내 보인 것은 조작하는 뜻의 교화와 교화하는 의업의 상이다. 처소를 따라 모든 유정들이 행하는 행을 관찰해서 만약 모든 악행을 행하지 않으면 득(得)이 있고 행하면 실(失)이 있으며, 만약 모든 선행을 행하면 곧 득이 있고 행하지 않으면 실이 있다고 본다. 이와 같이 관찰하여 그들로 하여금 득을 갖고 실을 버리게 하는데, 득에서는 임지(任持)의 대치(對治)를 조작하고 실에서는 원리(遠離)의 대치를 조작한다.
015_0272_a_13L論曰此中顯示造作意化化意業相隨所觀察一切有情所行之行若諸惡行不行有得行卽有失若諸善行行卽有得不行有失如是觀察爲欲令彼取得捨失於德造作任持對治於失造作遠離對治
성소작지가 상응하는 의업은 능히 교화함을 일으키기 때문에 화의업이라고 이름한다. 비록 모든 여래가 온갖 일에 대해 공용이 없다고 할지라도 중생으로 하여금 마음 등을 변현(變現)케 함이 흡사 조작이 있는 듯하기 때문에 조작이라고 이름한다. 혹은 다시 이 지(智)의 상분(相分) 중에 나타낸 변화의 의업이 흡사 능히 모든 유정들의 행의 득실을 관찰하는 듯해서 그들로 하여금 승의의 이익을 얻을 수 있음을 환히 알게 한다.
015_0272_a_19L成所作智相應意業能起化故名化意業雖諸如來於一切事無有功用而令衆生心等變現似有造作故名造作或復此智相分中現變化意業似能觀察一切有情諸行得失令彼了知得勝義利
015_0272_b_01L 또 마치 중생들의 발기한 의업과 같으니, 이를 말미암아 중생이 모든 업을 발기한다. 마찬가지로 여래의 성소작지도 뜻을 발하여 교화하는 업이니, 이를 말미암아 여래는 그들에게 대치를 말씀해 주고자 하기 때문에 그들이 좋아하는 이름과 구절과 글자와 몸을 나타낸다. 이 공교로운 방편의 힘을 쓰는 까닭에 모든 중생들을 이끌어서 그들로 하여금 성스러운 가르침에 들어가게 하여 성숙하고 해탈케 한다.
015_0272_b_01L經曰又如衆生發起意業由是衆生發起諸業如是如來成所作智發意化業由是如來爲欲宣說彼對治故顯彼所樂名句字身以是善巧方便力故引諸衆生令入聖教成熟解脫

여기에서 나타내 보인 것은 발기한 뜻의 교화와 교화하는 의업의 상이다. 성소작지가 상응하는 의업은 능히 몸과 입의 두 가지 업을 발하기 때문에 그 쓰임[用]에 나아가서 의업을 발기한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혹은 이 의 업이 지혜를 말미암아 발기하기 때문에 의업을 발기한다고 이름하는데, 능히 교화함을 일으키기 때문이요, 혹은 지의 상분이 그것과 닮게 나타내기 때문이다.
015_0272_b_06L論曰此中顯示發起意化化意業相成所作智相應意業能發身語二種業故就用說名發起意業或此意業由智發起是故說名發起意業能起化故或智相分現似彼故
‘이 화의업이 그들에게 대치를 말씀해 주고자 하기 위해서’라는 것은 유정의 모든 행의 대치를 설하고자 함이다. 이 설해진 법은 이름과 구절과 글자와 몸을 자성으로 삼으니, 이 때문에 이름과 구절과 글자와 몸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015_0272_b_11L此化意業爲欲宣說彼對治者爲說有情諸行對治此所說法名句字身以爲自性是故顯示名句字身
여래는 저 유정이 즐기는 바에 따라 이름과 몸 등을 설해서 사랑하고 즐기는 마음을 일으켜 대치를 낳게 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바로 여래의 성소작지의 상분 중에 나타낸 변화의 의업이 이름과 몸 등을 발한 것이니, 널리 유정의 모든 행의 대치를 설하였다. 이 힘을 말미암기 때문에 모든 유정들로 하여금 스스로의 마음이 변하여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을 닮게 해서 깊이 사랑하고 즐기는 마음을 낳아 대치를 일으키게 하는 것이니, 그런 까닭에 의업을 발기한다고 이름한 것이다.
015_0272_b_14L如來隨彼有情所樂說名身等令起愛樂發生對治是則如來成所作智相分中現變化意業發名身等宣說有情諸行對治由此力故令諸有情自心變似佛所說法深生愛樂發起對治是故說名發起意業
015_0272_c_01L
또 마치 중생의 받아들이는 의업과 같으니, 이를 말미암아 중생이 괴로움과 즐거움을 받아들인다. 마찬가지로 여래의 성소작지는 받아들이는 뜻으로 교화하는 업이니, 이를 말미암아 여래는 정기(定記)ㆍ부정기(不定記)ㆍ반문기(反問記)ㆍ치기(置記)를 기별하기 때문에 그 마땅함을 따라서 과거ㆍ미래ㆍ현재 등의 뜻을 받아들인다. 이 공교로운 방편의 힘으로 모든 중생들을 이끌어서 그로 하여금 성스러운 가르침에 들어가게 하여 성숙하고 해탈케 한다.
015_0272_b_20L經曰又如衆生受領意業由是衆生受領苦樂如是如來成所作智受意化業由是如來於定不定反問置記爲記別故隨其所應受領去來現在等義以是善巧方便力故引諸衆生令入聖教成熟解脫

여기에서 나타내 보인 것은 받아들이는 뜻의 교화와 교화하는 의업의 상이다. 수(受)가 사(思)와 상응하여 능히 그 마음을 움직여서 괴로움과 즐거움을 느끼게 하니, 이 때문에 받아들이는 의업이라고 하였다. 성소작지의 수는 사와 상응하여 능히 교화를 일으키기 때문에 화의업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상분(相分) 속에서 교화를 나타내는 의업을 화의업이라고 이름한다.
015_0272_c_03L論曰此中顯示受領意化化意業相受相應思能動其心令受苦樂是故說名受領意業成所作智受相應思能起化故名化意業或相分中現化意業名化意業
4기(記)에 대한 질문에서는 기별(記別)이 되기 때문에 그 응하는 바에 따라 모든 질문을 여실하게 환히 알고 나서 3세 등의 무량한 법의(法義)를 받아들여 여실하게 환히 알고, 하나하나의 자체(自體)를 여실하게 알고 나서는 그 응하는 바에 따라 하나하나 기별을 하는데 뒤바뀜이 없다. 4기란 첫째는 일향기(一向記)이고, 둘째는 분별기(分別記)이고, 셋째는 반문기(反問記)이고, 넷째는 묵치기(默置記)이다.
015_0272_c_08L於四記問爲記別故隨其所應如實了知一切問已領三世等無量法義如實了知一一自體如實知已隨其所應一一記別無有顚倒言四記者一向記分別記反問記默置記
일향기란 ‘모든 생한 것은 결정적으로 멸하는가? 불ㆍ법ㆍ승의 3보는 좋은 복전인가?’와 같은 물음을 말하며, 이 뜻은 결정되어 있다. 분별기란 ‘모든 멸하는 것은 결정적으로 다시 생겨나는가? 불ㆍ법ㆍ승 3보는 오직 하나만 있는가?’와 같은 물음을 말하니, 이 뜻은 결정되어 있지 않다.
015_0272_c_13L一向記者如有問言一切生者決定滅耶佛法僧寶良福田耶如是等問應一向記此義決定分別記者如有問言一切滅者定更生耶佛法僧寶唯有一耶如是等問應分別記此義不定
반문기란 ‘보살의 10지(地)는 위인가, 아래인가? 불ㆍ법ㆍ승 3보는 훌륭한가, 천한가?’와 같은 물음을 말하니, 그대는 어떤 질문을 바라는 것인가? 묵치기란 ‘진실로 존재하는 성품인 아(我)는 선인가, 악인가? 석녀(石女)의 아이의 몸 색깔은 검은가, 흰가?’와 같은 물음을 말하니, 기별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며 오랜 희론이기 때문이다.
015_0272_c_18L反問記者如有問言菩薩十地爲上爲下佛法僧寶爲勝爲劣如是等問應反問記汝望何問默置記者如有問言實有性我爲善爲惡石女兒色爲黑爲白如是等問應默置記不應記故長戲論故
015_0273_a_01L마땅히 알아라. 여기에서 몸과 입의 화업(化業)은 자기 몸에 상응하거나 다른 이의 몸에 상응하거나 혹은 상응하지 않기도 하지만, 뜻의 화업은 오직 자신과 타인에게만 상응한다. 이를 말미암아 세 가지 신통변화를 풀이하니, 이른바 신통(神通)이란 교(敎)ㆍ계(誡)ㆍ기(記)의 신통변화이다.
015_0273_a_01L應知此中身語化業或自身相應他身相應或不相應意化業唯自他相應由此卽釋三種神變謂神通記說神變
이 부처님의 화업은 일체 종자[一切種]에 대해 언제나 따라붙는 것이 불가사의하고, 작용이나 수량이나 국토의 차별이 불가사의하고, 유정을 이롭게 하는 쓰임이 쉼 없이 구르는 것이 불가사의하기 때문이다. 모든 여래의 세 가지 화업은 유정을 성숙시키고자 함을 우선으로 삼기 때문에 제일의 방편선교(方便善巧)라고 이름한다. 그러므로 계경에서 “불세존께서는 커다란 지혜의 약이라고 이름하니, 능히 모든 번뇌의 병을 없애주기 때문이다”라고 설한 것과 같다.
015_0273_a_05L此佛化業於一切種恒時隨逐不可思議作用數量國土差別不思議故利有情用無休息轉不思議故一切如來三種化業爲欲成熟有情爲先說名第一方便善巧故契經說佛世尊名大智藥能除一切煩惱病故

이때 묘생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오직 여래만이 정법계(淨法界)에서 화합한 한 가지 맛의 사지(事智)를 수용하고 모든 보살 또한 능히 그러합니까?”
부처님께서 묘생에게 말씀하셨다.
“보살 또한 능히 화합한 한 가지 맛의 사지를 수용하느니라.”
015_0273_a_11L經曰爾時妙生菩薩摩訶薩白佛言世尊爲獨如來於淨法界受用和合一味事智而諸菩薩亦能如是佛告妙生菩薩亦能受用和合一味事智

지금 ‘화합한 한 가지 맛의 사지를 수용함(受用和合一味事智)’에 의거하여 질문을 한 것이다. 앞에서는 부처님의 경지를 말하면서 여래의 청정법계의 본체만이 한 가지 맛이라고 설하였으나, 부처님의 대원경지 등의 속에서는 화합한 한 가지 맛을 수용하되 움직임도 없고 지음도 없었으니, 묘생보살은 이 일을 궁금하게 생각하였으므로 오직 여래만인가 또는 보살에게 통하는가 하는 의문을 가겼던 것이다.
015_0273_a_15L論曰今依受用和合一味事智爲問前辯佛地但說如來淸淨法界體唯一味佛鏡智等於中受用和合一味無動無作妙生菩薩意疑此事爲唯如來亦通菩薩故作此問
015_0273_b_01L또한 앞에서는 다만 다섯 가지 법이 있어서 대각지(大覺地)를 포섭한다고만 말하였지만 청정법계의 본체는 오직 한 가지 맛이다. 대원경지가 이것에 의지하고 이것을 반연해서 무분별을 낳기 때문에 또한 오직 한 가지 상[一相]이고, 평등성지는 진여를 통틀어 반연해서 두 가지 분별을 여의어서 또한 오직 한 가지 상이다. 그 나머지 두 가지 지(智)는 다른 이를 이익되게 하기 때문에 역시 진여에 의지하여 달리 분별함이 없어서 또한 오직 한 가지 상이다. 이와 같이 오직 부처만이 화합한 한 가지 맛의 사지(事智)를 수용하나니, 다른 것에는 당연히 통하지 않는다. 이것을 심사숙고하여 결정내리고자 이런 의문을 일으켰던 것이다.
015_0273_a_20L或前但說有五種法攝大覺地淸淨法界體唯一味鏡智依此緣此而生無分別故亦唯一相平等性智通緣眞如離二分別亦唯一相其餘二智爲饒益他亦依眞如無異分別亦唯一相如是唯佛受用和合一味事智應不通餘爲欲審定故作此問
여기에서 이미 말했듯이, 정법계에서 화합한 한 가지 맛의 사지를 수용함을 증득해 알고, 나머지에서는 화합한 한 가지 맛의 사지를 수용함이 없다. 감응하는 바를 능히 수용하고 화합한 한 가지 맛의 진여 경계를 수용하기 때문에 수용이라고 이름한다. 한 가지 일을 함께하기 때문에 화(和)라고 한다. 비록 함께 한 가지 일을 한다고 하여도 혹은 다시 헤어지고 나뉠 수 있으나, 그 중에서 언제나 헤어지지 않고 나뉘지 않음을 나타내기 위한 까닭에 다시 합(合)을 말한 것이다. 소연과 능연이 평등하고 또 평등하며 끝내 화합해서 헤어지거나 나뉘지 않기 때문이다.
015_0273_b_04L此中旣言於淨法界受用和合一味事智證知於餘無有受用和合一味智能受用所應受用和合一味眞如境界故名受用共同一事故名爲和雖同一事或復離別爲顯於中常不離別故復言合所緣能緣平等平等畢竟和合不離別故
맛이란 것은 견실함이니, 바로 수용되고 반연되는 법계의 진여가 한 가지 맛인 것이다. 사(事)란 것은 이른바 일의 쓰임[事用]이고, 지(智)란 것은 바로 능히 수용하는 지혜[能受用智]이다. 먼저 대원경지와 평등성지를 취하고 나머지 둘을 겸하여 취하였으니, 대개 진여를 반연하기 때문이다.
015_0273_b_11L味者堅實卽所受用所緣法界眞如一味事謂事用智者卽是能受用智正取鏡智平等性智兼取餘二多緣眞故
혹은 한 가지 맛이란 것은 능히 수용하는 지혜가 분별함이 없기 때문이고, 사(事)란 과보이니 정법계를 반연해서 생기하기 때문이다. 혹은 능히 수용함[能受用]이란 바로 버리고 받아들임[捨受]이니,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는 평등한 일류(一類)인 까닭에 한 가지 맛이라고 하는 것이다. 사는 과보이니, 즉 이것이 대원경지 등과 상응해서 그 힘을 말미암아 생겨나기 때문에 그것의 과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015_0273_b_14L或一味者能受用智無分別故事者是果緣淨法界而生起故或能受用卽是捨受無苦無樂平等一類故名一味事者果也卽此相應圓鏡智等由彼力生故名彼果
또 사(捨)를 행하여 공용(功用)의 상(相)이 없어서 일체처에서 한 가지 맛으로 구른다. 능수용지를 사지(事智)라고 이름하는데, 혹은 지(智)가 스스로 능히 자기 본체를 받아들이기 때문에 수용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자신과 남의 두 가지 분별이 없기 때문에 한 가지 맛이라고 말하는 것이며, 사란 과보이니 온갖 인연으로부터 두 가지 생각을 멀리 여의어서 항상 구르기 때문이다.
015_0273_b_18L或是行捨無功用相於一切處一味而轉能受用智說名事智或智自能領受己故名受用自他二種分別無故名一味事者果也從衆因緣遠離二想恒時轉故
015_0273_c_01L‘보살도 또한 등등’이란 것은, 여기서의 뜻은 화합한 한 가지 맛의 사지로 수용하는 것은 오직 여래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만약 모든 보살 또한 능히 이와 같다면 어찌하여 다만 다섯 가지 법이 대각지를 포섭한다고만 말하는 것인가? 여기서의 뜻은 불지(佛地)가 오직 이 다섯 가지 법에 포섭되는 것이지, 다섯 가지 법이 오직 불지만을 포섭한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또한 능히 모든 보살지(菩薩地)를 포섭하기 때문이다.
015_0273_b_23L菩薩亦能等者此中意受用和合一味事智非獨如來諸菩薩亦能如是云何但言有五種法攝大覺地此中意說佛地唯是五法所攝不說五法唯攝佛地亦能攝諸菩薩地故

묘생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어떤 보살이 화합한 한 가지 맛의 사지를 수용합니까?”
부처님께서 묘생에게 이르셨다.
“무생법인을 증득한 보살이다. 그 보살이 무생법 중에서 법인의 견해를 얻었을 때 두 가지 상념[想]을 대치하니, 나와 남[自他]의 두 가지 상념을 버림을 말미암는 까닭에 평등한 마음을 얻느니라. 이로부터 모든 보살이 나와 남이 다르다는 상념을 다시는 현전하지 않아서 화합한 한 가지 맛의 사지를 수용하느니라.”
015_0273_c_05L經曰妙生菩薩復白佛言何等菩薩受用和合一味事智佛告妙生證得無生法忍菩薩由彼菩薩無生法中得忍解時對治二想由遣自他二種想故得平等心從此已上彼諸菩薩自他異想不復現前受用和合一味事智

대승의 무생법인을 얻은 보살을 나타내 보이기 위함이니, 아마도 공용의 가행이 있는 도[功用有加行道]에 머무는 보살이 아직 화합한 한 가지 맛의 사지를 수용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015_0273_c_12L論曰爲顯示得大乘無生法忍菩薩或住功用有加行道菩薩未有受用和合一味事智故
다시 어떤 보살이 화합한 한 가지 맛의 사지를 수용하는가를 묻자 무생법인을 증득한 보살이라고 답하였으니, 이른바 초지(初地) 이상의 보살은 두 가지 공(空)으로 드러난 진여를 증득하여 일체법의 변계소집의 본성은 생겨남도 없고 또한 멸함도 없어서 본래 적정하고 자성이 열반임을 관함으로써 화합한 한 가지 맛의 사지를 수용하므로 2승(乘)과는 같지 않다.
015_0273_c_15L復問言何等菩薩受用和合一味事智證得無生法忍菩薩謂從初地已上菩薩證得二空所顯眞如觀一切法遍計所執本性無生亦無有滅本來寂靜自性涅槃受用和合一味事智
2승의 견도현관(見道現觀)이 다만 생공(生空)으로 드러난 진여만을 증득할 뿐 아직 법공(法空)으로 드러난 진리(眞理)를 증득하지는 못하였으니, 아직 능히 모든 법의 평등으로 화합한 한 가지 맛의 사지를 수용함을 현관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015_0273_c_20L非如二乘見道現觀但證生空所顯眞如未證法空所顯眞理未能現觀諸法平等受用和合一味事智
지전(地前)의 보살 또한 아직 능히 증득하지 못하였고 아직 진여를 보지 못하였으니, 한 가지 맛으로 화합하는 평등성지가 아직 현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015_0273_c_23L地前菩薩亦未能證未見眞如和合一味平等性智未現行故
015_0274_a_01L어떤 사람은 초지 이상의 보살에 다시 세 종류가 있다고 말한다. 첫째는 초발심 보살이니, 이른바 초지에 있으면서 이미 견도(見道)6)의 정성이생(正性離生)7)에 들어 참다운 무루심이 비로소 현행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이미 수행(修行)한 보살이니, 이른바 그 위의 6지(地)이다. 이미 수도(修道)8)를 얻어서 수행을 진전했기 때문이다.
015_0274_a_02L有義初地已上菩薩復有三種初發心謂在初地已入見道正性離生眞無漏心創現行故已修行謂上六地已得修道進修行故
셋째는 불퇴전 보살이니, 이른바 그 위의 3지이다. 수도가 이미 원만해져서 모든 공용을 여읜 가행이 없는 도[無加行道]로 운(運)에 맡겨 현전함으로서 모든 번뇌가 끝내 일어나지 않아 생각마다 훌륭하게 나아가 퇴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오직 8지 이상만을 취해서 일체법이 본래 생겨남도 없고 지금도 일어남이 없음을 관하여 상품(上品)의 인(忍)을 얻는지라 한결같이 청정해서 항상 무루를 일으켜 운(運)에 맡겨 구른다. 이것을 얻기 때문에 무생법인을 증득하였다고 말하는 것이다.
015_0274_a_05L退轉謂上三地修道已滿離諸功用無加行道任運現前一切煩惱畢竟不起念念勝進無退轉故此中唯取八地已上觀一切法本來無生今亦不起得上品忍一向淸淨恒起無漏任運而轉由得此故說名證得無生法忍
계경에서 말했듯이, “8지 이상의 모든 보살의 무리는 법상(法想)을 여읜 까닭에 나와 내 것이라는 생각이 없고, 모든 법이 항상함도 항상하지 않음도 없음을 관해서 생겨남도 일어남도 없고 자타(自他)가 평등하며, 나아가 자세히 설한다”고 한 것과 같다.
015_0274_a_12L如契經言八地已上諸菩薩衆離法想故無我我所觀一切法非常無常無生無起自他平等乃至廣說
운에 맡겨 두 가지 상념[二想]의 대치할 수 있음을 말미암아 일체처에서 평등심을 얻으며, 여기부터 그 이상의 지위는 두 가지 생각을 떠났기 때문이며, 모든 공용이나 가행을 떠나기 때문이며, 오로지 무루이고 지극히 청정하기 때문이며, 무분별지가 이미 자재함을 얻어 운에 맡겨 구르기 때문에 바야흐로 “화합한 한 가지 맛의 사지(事智)를 수용한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015_0274_a_14L由得任運二想對治於一切處得平等心從此已上離二想故離諸功用及加行故一向無漏極淸淨故無分別智已得自在任運轉故方得說名受用和合一味事智
초지 보살은 비록 자타의 평등을 이미 증득하였다고 하여도 공용의 가행과 작의(作意)가 존재하여 아직 청정하지 않기 때문에 건립하지 못하는 것이다.
015_0274_a_19L初地菩薩雖已證得自他平等而有功用加行作意未淸淨故而未建立
015_0274_b_01L
묘생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원하오니 여래시여, 비유로써 자세하게 말씀해 주셔서 모든 보살들로 하여금 깊고 깊은 뜻을 깨닫고 교화할 인연에 따라 널리 퍼뜨려서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들은 뒤에 재빨리 무생법인을 얻게 하여 주소서.”
015_0274_a_21L經曰妙生菩薩復白佛言唯願如來廣說譬喩令諸菩薩悟甚深義隨所化緣廣宣流布令諸衆生聞已疾悟無生法忍

묘생보살이 위의 뜻으로 하여금 비유의 문을 말미암아 명료하고 쉽게 볼 수 있도록 모든 보살들이 이 법을 들은 뒤에 깊고 깊은 뜻을 깨닫고 무생인을 깨닫도록 하기 때문에 다시 거듭 청하여 여쭙는 것이다.
015_0274_b_02L論曰妙生菩薩爲令上義因譬喩門明了易見諸菩薩等聞是法已悟甚深義悟無生忍故復請問

부처님께서 묘생에게 말씀하셨다.
“비유하면 삼십삼천(三十三天)이 아직 잡림(雜林)에 들지 못하면 끝내 일[事]이나 받음[受]에서 나와 내 것이 없다는 것을 화합하여 수용할 수 없지만, 만일 이 잡림에 들면 곧 분별없이 뜻에 따라 수용하느니라. 이 잡림에 이러한 공덕이 있음을 말미암아 능히 모든 천(天)으로 하여금 이 숲에 들게 하는 자는 하늘의 모든 과보를 일에서나 받음에서나 사유하는 바 없이 화합하여 수용하느니라.
015_0274_b_05L經曰佛告妙生譬如三十三天未入雜林終不能於若事若受無我我所和合受用若入雜林卽無分別隨意受用由此雜林有如是德能令諸天入此林者天諸果報若事若受無所思惟和合受用
이처럼 보살이 만일 무생법인을 증득하지 못하면 끝내 평등한 마음과 평등한 버림[捨]을 얻지 못하여 일체 성문이나 독각과 차별이 없으니, 두 가지 상념이 있는 까닭에 능히 화합한 한 가지 맛인 사지(事智)에 머물러 수용하지 못하느니라. 만일 이미 무생법인을 증득하였다면 두 가지 상념을 버린 까닭에 평등한 마음을 얻어서 드디어 성문이나 독각과 차별되며, 평등한 마음을 말미암아 능히 버림에 머물 수 있어서 화합한 한 가지 맛인 사지를 수용하느니라.”
015_0274_b_11L如是菩薩若未證得無生法忍終不能得平等之心平等之捨乃與一切聲聞獨覺無有差別有二想故彼不能住受用和合一味事智若已證得無生法忍遣二想故得平等心遂與聲聞獨覺差別由平等心而能住捨受用和合一味事智

삼십삼천에 있는 하나의 잡림은 여러 천상들의 복의 힘이 화합하여 감응한 바로서 모든 천상의 무리들로 하여금 이 숲에 있지 못하게 하니, 궁전 등의 사업(事業)이나 즐거움 등의 느낌[受]이 뛰어나고 하열함의 차이가 있고 나와 내 것이라는 차별의 수용이 있다.
015_0274_b_17L論曰三十三天有一雜林諸天和合福力所感令諸天衆不在此林宮殿等事業樂等受勝劣有異有我我所差別受用
만약 이 숲에 들면 일에서나 느낌에서나 도무지 뛰어남이나 하열함이 없어서 모두가 똑같이 으뜸가고 미묘하며 나와 내 것이 없이 화합하고 수용하여 능히 평등케 한다. 화합 수용하는 까닭에 잡림이라고 이름하는데, 이것은 모든 천상이 각기 닦은 평등하게 화합한 복업(福業)의 증상력을 말미암기 때문이다.
015_0274_b_21L若在此林若事若受都無勝劣皆同上妙無我我所和合受用能令平等和合受用故名雜林此由諸天各修平等和合福業增上力故
015_0274_c_01L 저 모든 천상의 아뢰야식으로 하여금 이 숲을 한 곳, 한 때에 동일한 모양으로 변현하게 하는데, 이 잡림의 증상력을 말미암기 때문에 저 전식(轉識)으로 하여금 또한 똑같이 변현하게 하니, 비록 각기 수용하지만 차별이 없는 것이다.
015_0274_c_01L令彼諸天阿賴耶識變現此林同處同時同一相狀由此雜林增上力故令彼轉識亦同變現雖各受用而謂無別
이와 같이 지전(地前) 보살과 2승(乘)은 아직 2공(空)이 드러내는 진여의 무생법인을 증득하지 못하였으니, 견도(見道)에서 끊어야 할 차별의 집착이 있기 때문에 자기와 남을 차별하는 두 가지 상념을 아직 여의지 못하였고, 무루의 평등성지가 상응하는 마음의 평등한 수(受)와 사(捨)를 아직 얻지 못하였다. 혹은 다시 사를 행하기 때문에 능히 화합한 한 가지 맛의 사지를 수용함에 머물지 못하는 것이다.
015_0274_c_05L如是地前菩薩二乘未證二空所顯眞如無生法忍有見道斷差別執故未離自他差別二想未得無漏平等性智相應之心平等受捨或復行捨故不能住受用和合一味事智
어떤 사람은 7지 이하의 보살은 여전히 공용이 있고 가행의 도(道)가 있으며 여전히 미세한 번뇌의 현행이 있으니 아직 청정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아직 마음에서나 사에서나 운(運)에 맡겨 무생법인을 얻지 못하였고 묘관찰지가 상응하는 평등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능히 화합한 한 가지 맛의 사지(事智)를 수용함에 머물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015_0274_c_09L有義七地已下菩薩猶有功用有加行道猶有微細煩惱現行未淸淨故未得任運無生法忍妙觀察智相應平等若心若捨故不能住受用和合一味事智

또 묘생이여, 비유컨대 갖가지 크고 작은 온갖 흐름이 큰 바다에 들어가기 전에는 각각 의지하는 바가 다르니, 다른 물과 적은 물로서 물에 늘거나 줄어듦이 있는지라 그 물의 업에 따라 짓는 바가 각각 다르지만 적은 부분이 물에 사는 생명에게 의지처가 되어 준다. 그러다가 큰 바다에 들어가면 개별적으로 의지하는 바가 없어서 물의 차별이 없고, 한량이 없고, 더함과 덜함이 없고, 짓는 업이 한결같은지라 광대하게 물에 사는 생명의 의지처가 되느니라.
015_0274_c_14L經曰復次妙生譬如種種大小衆流未入大海各別所依異水少水水有增減隨其水業所作各異少分依持水族生命若入大海無別所依水無差別水無限量水無增減所作業一廣大依持水族生命
015_0275_a_01L 마찬가지로 보살이 만일 여래의 청정한 법계인 큰 바다에 증득해 들지 못하면 각기 의지하는 바가 다르니, 차별된 지혜와 작은 지혜로서 지혜에 늘거나 줄어듦이 있는지라 그 지혜의 업에 따라 짓는 바가 각각 다르지만, 적은 부분이 중생의 선근이 성숙하는 의지처가 되어 준다. 그러다가 이미 여래의 청정한 법계인 큰 바다에 깨달아 들면, 의지하는 바가 차별이 없고, 지혜가 차별이 없으며, 지혜가 한량없으며, 지혜에 늘거나 줄어듦이 없어서 화합한 한 가지 맛의 사지를 수용하며, 한량없는 중생에게 선근을 성숙시키는 의지처가 되느니라.
015_0274_c_20L如是菩薩若未證入如來淸淨法界大海各別所依異智少智智有增減隨其智業所作各異少分衆生成熟善根之所依止若已證入如來淸淨法界大海無別所依智無差別智無限量智無增減受用和合一味事智無量衆生成熟善根之所依止

‘큰 온갖 흐름’이란 이른바 긍가(殑伽) 등의 네 가지 큰 강이다. ‘작은 온갖 흐름’이란 이른바 나머지 작은 강이다. ‘큰 바다에 들기 전에는 각각 의지하는 바가 다르다’는 것은 여러 지방이 의지처가 되기 때문이다. ‘다른 물’이란 맑거나 탁하거나 활기가 없거나 보기 좋은 물의 차별이다. ‘적은 물’이란 큰 바다를 선망하기 때문이다. ‘물에 늘거나 줄어듦이 있다’는 것은 비가 적게 오거나 많은 비가 올 때의 차별이다. ‘그 물의 업에 따라 짓는 바가 각각 다르다’는 것은 갖가지 기미(氣味)와 세력과 성숙에 차별이 있다는 것이다.
015_0275_a_04L論曰大衆流者謂殑伽等四種大河小衆流者謂餘小河未入大海各別所依者種種地方爲所依故異水者淸濁灰美水差別故少水者望大海水有增減者少雨多雨時差別故隨其水業所作各異者種種氣味勢力成熟有差別故
‘적은 부분이 물에 사는 생명에게 의지처가 되어준다’는 것은 적은 숫자나 적은 양의 물에 사는 유정에게 의지처가 되어 준다는 것이다. ‘만일 큰 바다에 들어가면 각각 의지하는 바가 다르고 등등’은 앞에서 설한 것과는 모든 것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니, 그 모습을 알아야 한다. ‘광대하게 의지가 되어준다’는 것은 숫자로는 넓고 양으로는 큰 것에 의지하여 설하는 것이다.
015_0275_a_11L少分依持水族生命者少數少量水族有情所依持故若入大海無別所依等者與前所說一切相違應知其相廣大依持者依數廣量大而說
‘마찬가지로 보살이 만일 여래의 법계인 큰 바다를 증득해 들어가지 못하면’이란 것은 아직 모든 부처님의 청정한 법계를 증득하지 못한 것이다. ‘의지하는 바가 각기 다르다’는 것은 따로따로 여래의 소의(所依)가 되기 때문이다. ‘다른 지혜’라는 것은 각각 별도의 승해(勝解)에 의해 닦아 이룬다는 것이다. ‘작은 지혜’라는 것은 부처님의 지혜를 선망하기 때문이다. ‘지혜에 늘거나 줄어듦이 있다’는 것은 모든 지위가 서로 바라봄에 뛰어남과 천함이 있다는 것이고, 정(定)이 서로 바라봄에 뛰어남과 천함이 있다는 것이다.
015_0275_a_15L如是菩薩未證如來法界大海者未證諸佛淸淨法界各別所依者別別如來爲所依故智者各別勝解所修成故少智者佛智故智有增減者諸地相望有勝劣故及定相望有勝劣故
015_0275_b_01L‘그 지혜의 업에 따라 짓는 바가 각각 다르며’라는 것은 모든 보살의 정수(定數)의 양이 차별이 있기 때문에 짓는 바가 각각 다르니, 모든 보살의 뛰어난 이해와 세력을 따라서 유정계를 반연하여 능히 짓는 바가 있으나 이것을 지나쳐서 구르지는 않기 때문에 각각 다르다고 한다. ‘적은 부분의 중생’이라는 것은 적은 수와 적은 양의 선근이 성숙하여 의지하는 바이다. 모든 보살들의 증상력을 말미암기 때문에 분수에 따라 남의 선근을 성숙하게 하고, 모든 보살의 정(定)은 여래의 정을 선망하나 수량이 적기 때문에 모든 유정들을 교화하여 이롭게 하고 즐거움을 주는 것 또한 적다.
015_0275_a_20L隨其智業所作各異者諸菩薩定數量別故作各異隨諸菩薩勝解勢力緣有情界能有所作過此不轉是故各異分衆生等者少數少量成熟善根所依止故由諸菩薩增上力故隨分令他善根成熟諸菩薩定望如來定量少故化諸有情利樂亦少
‘만일 이미 여래의 청정한 법계인 큰 바다에 깨달아 들면’이라는 것은 모든 부처님의 청정한 법계를 이미 증득하였다는 것이다. ‘의지하는 바가 차별이 없고’라는 것은 청정 진여가 의지하는 바가 된다는 것이다. 무루계 중에서 모든 부처의 다름이 있음을 세울 수 없거늘 하물며 보살이겠는가? ‘지혜가 차별이 없다’는 것은 대원경지 등이 모두 비슷하기 때문이며, 나와 남의 분별의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015_0275_b_04L若證如來法界大海者已證諸佛淸淨法界無別所依者淸淨眞如爲所依故漏界中不可建立諸佛有異何況菩智無差別者圓鏡智等皆相似故無有自他分別異故
‘지혜가 한량이 없으며’라는 것은 가없는 소지경(所知境)을 환히 깨달은 것이다. ‘지혜에 늘거나 줄어듦이 없으며’라는 것은 동등하게 청정한 것이니, 경계에 작고 많음이 없음을 두루 아는 것이다. ‘화합된 한 가지 맛의 사지(事智)를 수용한다’는 것은 평등성지 등 일체 지어진 바가 모두 비슷하기 때문이다. ‘한량없는 중생에게 등등’은 수적으로 양적으로 모두가 한량없음이며, 복덕과 지혜가 다함없고 자량(資糧)이 모두 평등한 것이니, 법신을 얻음으로써 생사의 경계를 다하였고 모든 유정들의 선근을 무르익게 하는 의지처가 되기 때문이다.
015_0275_b_09L智無限量者達無邊所知境故智無增減者等淸淨故遍知境界無少多故受用和合一味事智者平等智等一切所作皆相似故無量衆生等者若數若量皆無量故福德智慧無盡資糧皆平等由得法身窮生死際一切有情成熟善根所依止故
앞과 뒤의 두 가지 비유에 차별이 있다. 어떤 사람은 “앞의 비유는 모든 보살들이 환희지나 부동지에 아직 들지 못하였거나 이미 들어갔음을 비유한 것이고, 뒤의 큰 바다의 비유는 모든 보살들이 부동지나 여래지에 아직 들지 못하였거나 이미 들어갔음을 비유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두 비유가 똑같이 보살이 무생법인을 아직 얻지 못하였거나 이미 얻었음을 비유한 것이니, 앞에서는 보살의 공덕이 조밀(稠密)한 것이 잡림과 같음을 비유한 것이고, 뒤에서는 보살의 공덕이 가없음을 큰 바다에 비유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015_0275_b_16L前後二喩有差別者有義前喩說諸菩薩未入已入或歡喜地或不動地後大海喩說諸菩薩未入已入或不動地或如來地有義二喩同說菩薩未得已得無生法忍前說菩薩功德稠密喩如雜林後說菩薩功德無盡喩如大海
佛地經論卷第六
壬寅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015_0275_c_01L
  1. 1)미혹의 세계에 있는 모든 살아 있는 것을 통틀어 네 가지로 분류한 것이다. 태생(胎生)ㆍ난생(卵生)ㆍ습생(濕生)ㆍ화생(化生)의 네 종류 가운데 중유(中有)는 화생에 속한다.
  2. 2)마음으로 생각하는 일. 유식설에서는 제6식이 대상을 생각하는 일을 가리킨다.
  3. 3)묘고산(妙高山) 또는 수미산이라고도 하며, 간단히 소미(蘇迷)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4. 4)산심(散心)과 정심(定心)은 명상의 경지에 있는 마음과 일상적인 마음을 가리킨다. 마음이 항상 6진(塵) 경계에 집착하여 잠시도 안주하고 있지 않는 것이 산심이고, 마음이 항상 하나의 대상에 안주하는 선정의 마음이 정심이다.
  5. 5)네 가지 원소, 즉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을 가리킨다.
  6. 6)4성제를 관찰하는 단계. 무루성도(無漏聖道)를 처음으로 보기 시작하여 성자의 무리에 들어간 지위이다. 소승에서는 예류향(預流向)에 해당하고. 대승에서는 초지(初地)를 말한다.
  7. 7)견도(見道)의 다른 이름이다. 정성(正性)이란 무루의 성도(聖道)이고, 이생(離生)이란 분별에 의해서 일어나는 번뇌를 끊는 것이다.
  8. 8)견도의 다음 단계로 더욱 구체적인 사상(事象)에 대처하여 몇 번이라도 반복해서 익히고 닦는 단계이다. 견도에서 본 진리를 다시 반복하여 보는 지위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