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C_IT_K0557_T_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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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5_0306_a_01L
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론석 중권 - 015_0306_a_01L能斷金剛般若波羅蜜多經論釋卷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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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착보살 게송
세친보살 해석 - 015_0306_a_02L 聲無著菩薩造頌 世親菩薩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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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 한역
김두재 번역 - 015_0306_a_03L三藏法師義淨奉 詔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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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것을 능히 성립하게 된 원인의 모습[因相]이라고 말하는가? - 015_0306_a_04L何謂能立因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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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1)의 성립이 존중받는 까닭에
동등한 흐름이 수승(殊勝)해지며
번뇌의 원인이 되는 성품 때문에
하열한 것도 훌륭하게 되네. -
015_0306_a_05L兩成尊重故,
由等流殊勝,
煩惱因性故,
由劣亦勝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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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성립이 존중받는다는 말은 몸이 의탁하고 있는 땅에 탑을 만들어 세웠기 때문이니, 이것은 설법할 땅을 말한 것이다.
여기에 의지하고 있는 몸이 대사(大師)와 같이 존중 받을 만한 성품을 성취하였기 때문에, 이는 곧 경을 지닌 사람이 보배를 보시 받는 땅이지만 보시를 하는 사람은 이와 같은 일이 없기 때문이다.
다음 아래 경문에서 이 법문(法門)을 밝혔으니, 그것은 곧 모든 부처님께서 친히 증득하여 깨달은 바와 같은 등류의 성품에 대한 것이다.
“일찍이 있어온 법은 곧 여래께서 설하신 것인가, 아닌가?”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무엇을 밝히려고 한 말인가?
어느 한 법도 여래(如來) 혼자서 말씀하신 것은 없었으니, 이 모두는 여러 부처님께서 다 함께 선양(宣揚)하셨음을 말한 것이다. - 015_0306_a_07L言“兩成尊重”者,由所託處成制底塔故。謂是說法之地,其所依身成如大師尊重性故,卽是持經之人施寶之地,及能施者無如是事故。次下經文,顯此法門乃是諸佛親所證會等流之性。“頗曾有法是如來說不”者,此明何意?言無有法是如來獨說,皆是諸佛共宣揚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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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5_0306_b_01L또 보배구슬[珍寶]의 보시로 얻은 복은 곧 고통과 번뇌[苦惱]의 일이 생겨나는 원인이 되며, 법문으로 얻은 공덕만이 비로소 번뇌와 의혹을 끊어 없애는 데에 요긴하므로 우열(優劣)관계에 있어서 현격(縣隔)한 차이가 난다.
그러므로 아래 글에서 대지의 티끌로 비유를 들어 여래께서 말씀하시기를 “티끌이 아닌 것을 가지고 티끌이라 말한다”고 하셨고, 또 말씀하시기를 “세계가 실제 세계가 아닌데 이것을 실제 세계라고 말한다”고 하셨다.
여기엔 어떤 뜻이 담겨 있는가?
이 대지의 티끌은 더러움에 물드는 따위의 성품이 있는 티끌이 아니니, 그러므로 대지의 티끌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또 저 세계는 곧 번뇌의 인자(因子)가 없는 계(界)를 이름한 것이니 이것을 세계라고 말하였다. 계(界)란 인(因)의 의미가 있으며, 이것은 곧 세(世)의 인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말들은 저 복(福)은 곧 번뇌와 의혹, 그리고 진분(塵坌)의 원인이 되니, 저것은 밖의 티끌[外塵]2)로 말미암는 것임을 밝힌 것이다.
비록 이것이 미진(微塵) 무기(無記)여서 복을 심고 선을 행하는 곳으로는 가장 비근(卑近)한 것이긴 하지만 어찌 모든 것이 부처를 이룩하는 복의 원인으로서 다시금 미열(微劣)하지 않음에 비교될 수 있겠는가? 또 저것은 능히 대장부의 모습을 성취하여 지니게 된 복덕이며, 이것은 보리를 성취하는 원인이 된다. 그러므로 4구게(句偈) 등을 지녀서 다른 이에게 법문을 설하는 복도 이보다는 하열하다.
저 여러 가지 모습은 정각(正覺)의 체성(體性)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을 이름하여 대장부상(大丈夫相)이라고 말한다. 저것은 표상(標相)3)이기 때문에 4구게 등을 지녀서 다른 이에게 설법함으로써 그 복덕이 비로소 대각(大覺)의 성품을 증득할 수 있기 때문에 이것보다 하열하다고 말한 것이다.
또 저 복덕은 진귀한 보배를 보시한 복덕보다 훨씬 우세하거늘 하물며 법신(法身)을 근본 원인으로 하는 이 복덕을 초월하지 못하겠느냐? 그러므로 하열하면서도 우세하다고 말한 것이다. 곧 이 복덕은 지극히 비근(卑近)하여 능히 대각(大覺)을 성립하는 원인이 되지만, 이는 이미 보배를 보시하여 성취한 복덕과 4구게를 지녀 다른 이에게 설법한 복덕의 원인과는 차별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다음 아래의 모든 글에서 다시 성립된 내용들은 무엇을 밝히려고 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 015_0306_a_15L又此施珍寶福是苦惱事生起之因,法門功德乃是煩惑斷除之要,優劣懸隔,是故下文將地塵爲喩,如來說作非塵,由此說爲地塵;所言世界,如來說爲非界,由此說爲世界者,此有何意?言此地塵不是染等性塵,是故名作地塵。又彼世界非是煩惱之因名界,爲此說爲世界。界是因義,卽是世之因也。斯言意顯彼福乃是煩惑塵坌之因,由其外塵雖是無記,彼福縱善方之極卑,況竝成佛福因而不更爲微劣?又彼能成大丈夫相所有福業,媲此成菩提因持說法門之福亦爲是劣。由彼衆相非是正覺之體性故,爲此名爲大丈夫相,是彼摽相故。由持說福能得大覺性,爲此名劣,亦勝過施寶之福,況法身因而不超越,是故劣亦勝也,卽是寶福極卑爲能成立因。此旣成立施寶之福與此福因有差別已,次下諸文更復成立。欲何所明?頌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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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과보[果]가 수승하지만 괴로운 까닭은
훌륭한 일이라서 만나기 어렵기 때문이며
열반의 경계를 알지 못하는 까닭은
다른 법이 함께 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
015_0306_b_14L彼果勝苦故,
難逢勝事故,
境岸非知故,
於餘不共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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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매우 심오한 성품인 까닭은
그 밖의 약전[略詮]4)보다 우세하기 때문이며
으뜸가는 족성(族姓)으로 높고 뛰어나기 때문에
어느 복덕보다도 가장 우세한 것이다. -
015_0306_b_16L是甚深性故,
勝餘略詮故,
胄族高勝故,
望福福殊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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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무슨 뜻을 말한 것인가?
답하기를, 보배를 보시한 복으로 획득한 자신의 수용과(受用果)인 그 몸도 훌륭하긴 하지만 저 한량없이 많은 몸을 희생하고 버려 얻은 이 복이 앞에 것보다 훨씬 우세하니, 제 자신의 몸은 곧 괴로움의 성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구나 법을 위하여 보시를 행한 것이겠는가? - 015_0306_b_17L此述何義?答:施寶之福獲得自身所受用果,彼身是勝。以能捨彼無邊之身,此福勝前,由彼自身是苦性故,何況爲彼而行其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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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5_0306_c_01L그때 구수(具壽) 묘생(妙生)은 제 자신의 몸은 곧 괴로운 것임을 알고 법의 세력을 존중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눈물을 흘린 것이다. 이러한 법문은 다시 만나기 어렵다고 생각한 것이다. 묘생에게 스스로의 지혜가 생겨난 후로 지금까지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것이었고, 또한 그것은 수승한 일이었기 때문이니, 이것은 반야(般若)의 이름을 밝히려고 한 말이다.
이 아래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수승하고 절묘한 일을 성립시키고자 한 것이다. 곧 경전에 이르기를 “여래께서 반야바라밀다라고 설명한 것은 곧 반야바라밀다가 아니다”라고 했는데 무슨 뜻으로 이와 같은 말을 하였는가?
답하기를, 열반의 경계는 알기 어려운 것인데 그는 열반의 경계를 알고 있었으니, 부처님을 제외한 다른 사람은 알 수 없는 것이며, 또한 이것은 다른 이들이 함께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법문을 듣고 나면 실상(實想)이 나타나게 되는데, 그 실상은 곧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외한 다른 곳에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상이라고 말한 것은 오직 이곳에만 있기 때문이며, 실상이 아니라고 말한 것은 다른 곳에서는 생겨나지 않는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런 까닭에 경문에 이르기를 “만약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들으면 능히 이와 같은 생각을 낼 텐데, 이 사람은 마땅히 제일 희유(希有)한 공덕을 성취한 사람이다”라고 한 것이다.
또 이 법문은 또한 매우 심오한 뜻이 있으니, 왜냐하면 이 경전을 혹시 조금이라도 받았거나 두루 지니게 되었다면 나라고 집착하는 등의 생각이 다시는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나라고 집착하는 등의 생각이 생기지 않는다’고 한 것은 취한 바의 경계가 뒤바뀜이 없음을 밝힌 것이며, ‘나라고 집착하는 등의 생각은 곧 실제 생각이 아니라’고 한 것은 취한 이도 뒤바뀜이 없음을 밝힌 것이니, 이 두 가지는 그 차례와 같이 나[我]와 법(法) 두 가지에 자성(自性)이 없다는 지혜를 밝힌 것이다.
부처님께서 이 뜻에 대하여 묘생이 말한 일을 따라 인가하셨으니, ‘놀라지도 않고 무서워하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는다’고 말한 것은 이 세 가지 모두에 두렵다[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는 말이니, 그것은 곧 경구(驚懼)ㆍ포구(怖懼)ㆍ외구(畏懼)라는 뜻이 된다. 그러나 일에 따라 다르므로 세 가지로 구별한 것이다.
경(驚)이라고 말한 것은 자신이 있을 곳이 아니라 하여 생겨나는 두려움이니만약 옳게 번역하자면 범음(梵音)으로는 마땅히 월포(越怖)라고 해야 하는데 이제 경(驚)이라고만 말한 것은 옛 뜻을 옮기기엔 충분치 못한 것 같다. 만약 논석(論釋)에 준해 보면 경(驚)이라는 뜻은 매우 걸맞지 않다. 아래 두 가지도 이에 준하여 생각해 보기 바란다, 바른 이치를 어기고 바른 도리에서 벗어나 싫어하기 때문이며, ‘포(怖)’라고 말한 것은마땅히 속포(續怖)라 해야 할 것이다 계속해서 무서운 마음이 생기는 것이니, 이런 마음이 이미 생겨난 뒤에는 끊어 없애지 못하기 때문이다. 외(畏)라고 말한 것은마땅히 정포(定怖)라고 해야 할 것이다 결정된 마음을 내어 한결같이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문득 성립되지 않아 마음속에 두려운 의혹이 생겨 멀리 떠나는 것이다.만약 글에서 본음(本音)과 본의(本意)를 보지 않고는 뜻을 해석하기에 충분치 못할 것이다. 여기의 주석은 본음에서 나온 것이니, 의혹을 내지 말았으면 한다. 다른 역자들은 해석을 달리하고 있는데, 그 논(論)은 잘못된 것이다.
또 이 법문은 다른 경전[略詮]보다 수승한 것이니, 경에 말하기를 “이것은 가장 수승한 바라밀다라고 여래께서 말씀하셨다”라고 했기 때문이다.경전을 여기서는 약전(略詮)이라고 말했다.
또 이 법문은 가장 으뜸가는 족성으로 높고 수승하다고 하였으니 ‘수승한 족성이다’라는 말은 모든 부처님께서 똑같이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 진귀한 보배의 보시에는 이와 같이 많은 덕을 원만하게 갖추지 못하였기 때문에, 즉 이것은 이 성립된 복이 앞의 복덩어리보다는 더 뛰어나니, 더구나 이치가 서로 다른 것이겠는가?
그래서 이른바 “몸은 괴로운 성품이니, 그것을 보시하는 것은 곧 고통스러운 과보의 성품이기 때문에 그 복은 비열(卑劣)하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 법문에 근거하여 경을 가지고 설법할 때에 저 보살들이 모든 고행(苦行)을 행하는 것도 어찌 고통의 과보를 부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어찌하여 이것만은 고통스런 과보를 얻지 않는단 말인가?
이런 의문을 제거하기 위한 까닭에 아래의 글이 생겨났다.
무슨 뜻을 밝히기 위함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 015_0306_b_21L爾時具壽妙生,了彼自身是苦事故,由法勢力遂便墮淚。此之法門復是難逢。妙生自從生智已來,亦未曾聞,復是勝事,此言欲顯般若之名。此下意欲成立是勝妙事,卽經云“如來說爲般若波羅蜜多者,彼卽非波羅蜜多”。爲何意趣作如是說?答:境岸非知故。由其所知境岸,除佛於餘無能知者,復是於餘不共故。此之法門所有實想卽實想者,除佛教已餘處無故。言實想者唯此處有,言非實者是於餘不生義,是故文云“若能生如是想者,彼當成就第一希有”。又此法門亦是甚深,由於此經或少受或遍持,於我等想不復生起。“於我等想不生故”者,明於所取義無有顚倒。“於我等想卽是非想”者,明於能取無有顚倒。此二如其次第,明我、法二無性智,佛於此義隨印妙生所說之事。言“不驚、不怖、不畏”者,此三皆名爲懼,卽是驚懼、怖懼、畏懼,然隨事不同故有三別。言驚者謂,於非處生懼若正譯梵音應云越怖,今言驚等者,此爲不能移舊;若准論釋,驚義未甚相當,下二准此應可思之也 ,違越正理如越正道,可厭惡故。言怖者應云續怖,相續生懼怖,旣生已不能除斷故。言畏者應云定怖,生決定心一向畏懼。此等若無,便成心離惶惑 若不見本音本意,於文卽未閑釋義,爲此註出本音,斯乃可亡疑惑,餘家釋別,義非此論又此法門勝餘略詮故者,由經說此是最勝波羅蜜多如來所說經是略詮,又此法門族胄高勝故。言勝族者,謂由諸佛所共說故。然彼寶施無有如斯衆德圓備,卽是成立此福望前福聚昇,況理別也。所云“於身是其苦性,彼施卽是苦果性故,其福卑劣”者,然此法門若有持說,彼之大士行諸苦行,此亦豈非是招苦報?如何不是得苦果耶?爲除此難,故有下文。欲顯何義?頌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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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인욕행[堪忍]을 행할 때에
비록 괴롭지만 잘 수행하기 때문에
그 공덕은 헤아리기 어려우니
그러므로 이것을 뛰어난 일이라고 이름한다. -
015_0307_a_13L彼行堪忍時,
雖苦行善故,
彼德難量故,
由斯名勝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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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내거나 분노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괴로운 성품이라 부르지 않으니
안락(安樂)하고 큰 자비심이 있기에
행할 때에 괴로움의 과보를 가져오지 않는다. -
015_0307_a_15L 由無恚怒情,
不名爲苦性,
有安樂大悲,
行時非苦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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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5_0307_b_01L
이것은 무슨 뜻을 서술한 것인가?
답하기를, 가령 저 사람이 고행(苦行)을 행할 때에 고뇌(苦惱)의 결과가 있다 할지라도 그때 감인(堪忍)의 성품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훌륭한 일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거기엔 두 가지 원인이 있다. 그 첫째는 착한 성품인 까닭에 모든 바라밀다가 다 착함으로써 체성(體性)을 삼는 것이며, 둘째는 거기에서 얻어지는 덕은 헤아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마치 경에 이르기를 “이것은 곧 바라밀다가 아니다”라고 한 것과 같다.
저 공덕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피안[岸]은 일찍이 아는 이가 없으므로 그 언덕을 알지 못한다고 말한 것이다.
수승한 법과 더불어 서로 호응하기 때문에 곧 이 행하기 어려운 괴로움을 앞의 고뇌와 비교하면 저절로 다름이 있거늘 더구나 나라는 생각과 성냄이라는 생각이 모두 없는 것이겠는가?
결정코 그 고통이 없다고 한다면 고통이 없을 뿐만 아니라 다시금 자비와 즐거움이 생겨날 것이다.
경에 이르기를 “나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지만 또한 생각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생각이 있는 것과 자비의 마음이 서로 호응하는 것임을 밝힌 것이니, 이 말의 이치에 준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모든 유정(有情)이 나라고 집착하는 생각 등을 제거해 버리지 못한다면 고행을 할 때에 고뇌가 있음을 보고서 문득 보리(菩提)의 마음을 버리려고 할 것이니, 이런 까닭에 마땅히 모든 생각을 여의어야 한다고 권유한 것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이는 무엇을 밝히고자 한 것인가?
만약 어떤 사람이 수승한 보리심을 내지 않는다면 문득 이와 같은 과실이 있어서 성내고 한탄하는 마음을 내게 된다.
게송으로 말하리라. - 015_0307_a_16L此述何義?答:縱令彼人行苦行時有苦惱果,然於彼時由有堪忍性故,此名勝事。有其二因:一是善性故,由諸波羅蜜多皆以善爲體性故;二是彼德難量故,如經云“此卽是其非波羅蜜多”。由彼德岸曾無知者,爲此名爲不知其岸。由與勝法相應故,卽此難行之苦,望前苦惱自有殊別,何況我想瞋想悉皆無故必無其苦;非但無苦更生悲樂,如經云“我無是想亦非無想”。言非無想者,此顯有想與悲心相應。准斯語理,若諸有情於我想等不除遣者,苦行之時見有苦惱,卽便欲捨菩提之心,是故應離諸想,乃至廣說。此何所顯?若人不發勝菩提心,便有如斯過失,生瞋恨心。頌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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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생겨나는 원인을 버리지 못하니
이런 까닭에 마땅히 굳세게 노력해야 하네. -
015_0307_b_09L生心因不捨,
是故應堅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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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기를, 어떤 마음이 곧 이 마음이 생겨나는 원인이기에 버려야 하며, 굳세게 부지런히 노력해야 하는 것인가? 또는 어느 곳에서 이 보리심의 원인을 버리지 않고 정진을 구하게 해야 하는가?
게송으로 말하였다. - 015_0307_b_10L問:於何處心是此心生因而遣堅固勤求?復於何處是不捨菩提心因令進求也?頌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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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일러 인변제(忍邊際)를 증득했다 하고
이것을 마음의 방편이라고 말하네. -
015_0307_b_13L謂是得忍邊,
及此心方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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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5_0307_c_01L
이것은 초지(初地) 승의(勝義)의 마음에 들어가서 인변제행(忍邊際行)5)을 증득한 것을 말한 것이니, 머무름 없는 마음이 곧 이것이다.
경문에 이르기를 “마땅히 모든 생각을 여의고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의 마음을 발하여 일으켜야 한다”고 말했으니, 무슨 까닭인가?
이것은 머무르거나 집착함이 없는 마음이 생겨나는 원인을 밝힌 것이다.
만약 물질 등의 처소에서 머물거나 집착하는 마음이 있으면, 이런 사람은 틀림없이 불과(佛果)를 구하고자 매진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보살은 마땅히 머무는 곳 없이 보시를 행하여야 한다’고 한 글의 뜻은 보시가 여섯 가지 바라밀을 포섭한다는 것을 밝히려고 한 것이다. 이것은 곧 머물러 집착함이 없는 마음을 일으켜 방편을 행하는 것이니, 이렇게 하여 인욕바라밀을 증득하고 나면 비록 다시 괴로움을 만난다 해도 큰 보리의 마음을 버리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묻노니 어떻게 마음을 내고 수행하여야 유정(有情)들을 이익 되게 할 수 있으며, 또한 유정을 이익 되게 하는 일에 머물지 않을 수 있는가?
이것은 취하고 버리는 것에 대한 설법에서와 같다.
묻노니 의심을 떨쳐버릴 수는 없는가?
답하기를 보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보시를 행하여 모든 중생들을 유익하게 해야 한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말인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 015_0307_b_14L此謂入初地勝義之心,得忍邊際行無住心卽是。文云“應離諸想發起無上正等覺心。何以故”者,此謂顯其無住著心生起之因。若於色等處有住著心者,此必不能進求佛果故。“諸菩薩應無所住而行布施”者,文意欲明施攝六到彼岸,卽是生起無住著心方便,謂得忍已雖復遭苦,而不棄捨大菩提心。問:如何起行爲利有情,復遣不住利有情事。此則取捨同問,疑情遂發。答曰:菩薩如是應行布施,爲利諸衆生等。此顯何意?頌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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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땅히 알아야 할 것은 바른 수행이
곧 중생을 이익 되게 하는 원인이 되지만
유정(有情)의 일과 모습에 대하여
모두 제거해야 한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하네. -
015_0307_c_03L應知正行者,
是利生因故,
於有情事相,
應知遍除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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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무슨 뜻을 서술한 것인가?
여기에서 ‘바른 수행’이라고 말한 것은 곧 중생을 이익 되게 하는 원인을 말한 것이니, 곧 중생을 이익 되게 하면서도 유정이 간직하고 있는 모습엔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어떤 것을 유정의 사물과 모습이라고 말하는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 015_0307_c_05L此述何義?言此正行者是利益衆生因,應知卽是利益有情而不取有情所有相貌。何謂有情相貌事耶?頌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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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일을 취(聚)라고 말한다. - 015_0307_c_08L彼事謂名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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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중생이라는 것은 곧 명자(名字)로 시설(施設)된 것인데, 이것을 가지고 중생이 의지하는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무엇을 바른 수행이라고 하는가?
중생이라는 사물의 모습은 다 제거해야 하는데 저 명자로 말미암아 생각하는 것은 곧 생각이 아니니, 그것은 곧 그 자체(自體)는 본래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곧 저 중생이란 실제로 중생이 아닌데 5온(蘊)을 가지고 중생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저 중생은 자체가 없기 때문이니, 이것은 나와 법에 성품이 없음을 밝힌 것이다.
무슨 까닭에 불세존께서 모두 갖가지 생각을 여의었는가?
이것은 나와 법, 이 두 가지 관념이 다 본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어떻게 가장 수승하고 미묘한 일을 성취할 수 있는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 015_0307_c_09L彼衆生者卽是名字施設,喚爲衆生及所依事。何者是其正行?謂於衆生事相皆除遣故。由彼名字想者卽是非想,以彼自體本非有故。卽彼衆生不是衆生,謂於五薀名爲衆生。由彼衆生自體無故,此我法無性。何以故?由佛世尊竝除諸想,此明我法二想皆無。如何能成最勝妙事?頌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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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수승한 일은 그 생각을 제거하는 것이며
모든 세존은 비교할 대상이 없는 것은
참다운 견해와 서로 호응하기 때문이다. -
015_0307_c_17L最勝除其想,
諸世尊無此,
由眞見相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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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무슨 뜻을 서술한 것인가?
저 두 가지6)는 실제로 성품이 있는 것이 아닌데 모든 대사(大師)들은 억지로 그 생각을 제거하려고 한다. 그러나 모든 여래(如來)는 진실한 견해로 더불어 서로 호응하고 있음을 말한 것이다.
과(果)와 인(因)의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면 어떻게 저 과의 인을 알 수 있는가? 이미 이런 의심들이 생겼을 것이 아닌가?
경에서는 답하기를 “묘생(妙生)아, 여래는 진실한 말을 하시는 분이니라”라고 하셨는데, 여기에 네 구가 있다.
게송으로 말하리라. - 015_0307_c_18L此述何義?由非彼二是實有性,而諸大師强除彼想。然諸如來與眞見相應故,果不住因位,如何得見彼果之因?旣有此疑,答:如經云“妙生如來是實語”者,有其四句。頌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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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5_0308_a_01L
과(果)는 인(因)의 자리에 머물지 않지만
이것이 곧 저 과보의 원인이 되니
세존께선 진실한 말씀만 하시기 때문에
마땅히 네 가지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
015_0307_c_23L果不住因位,
是得彼果因;
世尊實語故,
應知有四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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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진실한 말의 성품에 네 가지가 있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 015_0308_a_02L此實語性有其四種。何謂爲四?頌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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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점을 세워주고 하승(下乘)7)을 설해주며
또한 대승(大乘)의 이치도 설해 주는
여러 가지 수기(授記)한 일들
어느 것 하나 어긋남이 없어야 하네. -
015_0308_a_03L立要說下乘,
及說大乘義,
由諸授記事,
皆無有差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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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께서는 요기(要期)8)를 세웠기 때문에 원래 불과(佛果)를 구함에 있어 허망하거나 거짓이 없다.
하열승(下劣乘)9)과 대승(大乘)에 대한 모든 수기(授記)에 조금도 거짓이 없기 때문에 여기에서 그 차례를 따라 “진실한 말, 여여(如如)한 말, 거짓이 없는 말, 달라지지 않는 말”이라고 하여 서로 배속(配屬)시켰다.
여래께서 성문승에 대하여 괴로움 등의 네 가지 진리를 말씀하신 것은 모두 진실하여 헛되지 않으며, 그 대승에 대하여 법에는 성품이 없음을 설하니 설명한 진여는 곧 실지(實知)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여래가 곧 이 이치를 알고 계시므로 일체시(一切時), 즉 과거ㆍ미래ㆍ현재에 대하여 수기한 바가 그 말한 것과 같아서 모두 거짓되거나 속임이 없기 때문에 여래라고 말한 것이다.
경에 이르기를 “여래께서 증득하신 법과 말씀하신 법은 곧 진실한 것도 아니요 거짓도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무슨 뜻인가?
게송으로 답하겠다. - 015_0308_a_05L由佛自立要期,元求佛果無有妄謬,於下劣乘及以大乘幷諸授記竝無謬故,於此隨其次第,實語、如語不、誑語、不異語而相配屬。言如來者,由於聲聞乘說苦等四諦是實不虛;於其大乘說法無性所顯眞如稱實知故。如來是知義,於一切時過去未來現在所有授記如其事故皆無妄謬,故曰如來。經云“如來所證法及所說法,此卽非實非妄”者,此有何意?答曰:
-
법[彼]을 증득하지 못한 채 따르기만 한다면
이는 진실도 아니고 거짓도 아니니
법문을 듣고 증득할 과보(果報)에만 집착하는 이에게
그를 다스리기 위하여 선설(宣說)하셨네. -
015_0308_a_15L不得彼順故,
是非實非妄;
如言而執者,
對彼故宣說。
-
015_0308_b_01L
모든 여래께서 설하신 법에 대하여 이 설법에서 저것을 증득하지 않기 때문에 곧 저것을 수순한다. 저 설법으로 말미암아서 친히 안으로 법을 증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말 속에는 실체가 없기 때문에 이것은 진실이 아니요, 그것을 따르기 때문에 또한 이것은 거짓말도 아니다.
‘나는 현재 최상의 깨달음을 증득했다’고 한 것은 곧 문구(文句)의 도리에 의거해서 이런 말을 한 것이다.
묻노니 무엇 때문에 세존께서는 스스로 중생들의 요구에 부합하는 말을 세워서 나의 이 말은 진실한 말이라고 해놓고 또다시 내가 설한 법은 진실도 아니요 거짓도 아니라고 하였는가? 한 마디 말에 두 가지를 겸한다는 것은 이치로 보아 믿기 어렵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런 의혹 때문에 이렇게 답하였다.
“말한 것대로 집착하는 이가 있기 때문에 그에게 말하기를 ‘모든 성인은 곧 무위(無爲)로부터 나타나신 것이다. 그러나 그 진여의 성품은 어느 곳이나 두루 있다’고 하였다.”
어째서 불과(佛果)는 머무름이 없는 마음이라야만 능히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가? 머무르지 않는 마음은 또 어느 때나 항상 존재하는 것으로서 곧 진실한 바탕의 진여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어떤 이는 이것을 얻는데 어떤 이는 이것을 얻지 못하는가?
이런 의심을 제거하기 위하여 어둠 속에 들어가는 비유를 들어 말한 것이다.
이것은 무슨 뜻을 밝히려 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 015_0308_a_17L言諸如來所有說法,此說不得彼故,而是隨順於彼,由彼說法不能親獲內證法故,於其言下無有體故,故非是實;由順彼故,故非是妄言。我現證無上覺者,此據文句道理而有此說。問:何故世尊自立要言我是眞實語者,而所說法非實非虛,一說兩兼,理成難信。由此答云“如言而執者,對彼故宣說”,言諸聖人是無爲所顯者,然眞如性常時遍有,如何佛果以無住心方能證得非有住心?又復如何常時遍有實體眞如,或有得者或不得者?爲除此疑,說入闇喩。此明何義?頌曰:
-
진여는 어느 때 어느 곳에나 항상 있건만
그 참다운 성품을 얻지 못하고
무지(無知) 때문에 머무름이 있으니
지혜가 있으면 머무름 없이 진실을 얻는다. -
015_0308_b_07L常時諸處有,
於眞性不獲,
由無知有住,
智無住得眞。
-
여기에서의 뜻은 진여의 성품을 말한 것이다. 비록 이것이 어느 때나 항상 하여 두루 있으나, 지혜가 없어 머무르는 마음이 있는 까닭에 곧 진여를 증득할 수 없으면 이것은 마음이 청정하지 못하다는 뜻이고, 지혜가 있어 머무르는 마음이 없는 까닭에 곧 진여를 증득할 수 있으면 이것은 청정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불세존은 곧 진여(眞如)에서 나타나셨으니, 이런 이치 때문에 머무르는 마음이 있으면 진여를 증득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이러한 까닭을 게송으로 말하리라. - 015_0308_b_09L此中意道眞如之性雖是常時遍有,由其無智有住心故卽不能得,是不淸淨義;由其有智無住心故卽便得見,是淸淨義。然佛世尊是眞如所顯,由斯理故,以有住心不能證得。由此頌曰:
-
지혜가 없으면 꽉 막힌 문과 같으니
지혜는 어둠을 밝히는 광명과 같아서
능대(能對)와 소치(所治)가 되어
득(得)과 실(失)이 눈앞에 나타난다. -
015_0308_b_15L無智由如闇,
當闇智若明,
能對及所治,
得失現前故。
-
‘어둠과 같다’고 한 것은 곧 어둠과 서로 비슷하다는 뜻이다. 이 어둠을 가지고 저 무식(無識)함에 비유하였고, 저 햇빛을 가지고 지혜가 있고 안목이 있는 것에 비유한 이치도 이와 똑같으니, 경문에 잘 갖추어 서술하고 있다.
그러므로 능대(能對)와 소치(所治)가 되어 득과 실이 눈앞에 나타난다고 말한 것이니, 그 호응하는 바를 따라서 안목이 있는 이는 밝음으로 능히 대할 수 있는 것이다.
밤이 다 지나고 새벽이 되면 밝은 빛이 나타나 다스려야 할 바[所治]를 깨뜨림으로써 깜깜한 것을 없앤다. 밝은 해가 떠올라 그 광명이 이미 앞에 나타나면 그 햇빛이 이미 중생의 색상(色像)을 비추므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뒤의 경문에서는 어떤 것을 말하려고 하였는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 015_0308_b_17L“猶如闇”者,是與闇相似義,由斯以闇比其無識。以其日光譬同有智有眼,如文具述,故云“能對及所治,得失現前故”。隨其所應,由其有眼者,顯得能對。夜分曉已,顯破所治冥闇謝故。日明旣出者,顯能對現前。日光旣照,見衆色像。次後之文欲說何事?頌曰:
-
015_0308_c_01L
이와 같은 바른 수행으로 인하여
이렇게 한량없는 복을 획득하니
법을 바르게 수행 하는 이에게
이제 마땅히 업(業)의 작용을 설하리라. -
015_0308_c_01L由如是正行,
獲如是福量;
於法正行者,
業用今當說。
-
‘이와 같이 바른 수행을 하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은 곧 글에서의 바른 수행을 밝힌 것이다.
게송으로 설하리라. - 015_0308_c_03L“由如是正行”者,此明文正行。頌曰:
-
글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받아 지니고 독송(讀誦)하고 연설하는 것이다. -
015_0308_c_04L於文有三種,
受持讀演說。
-
‘글에 세 가지가 있다’는 것은, 첫째는 받아 지니는 것이며, 둘째는 읽고 외우는 것이며, 셋째는 연설하는 것이다.
‘받아 지닌다’는 것은 법을 지니고 있는 사람을 말한 것이며, ‘읽고 외운다’는 것은 많이 듣고 말함에 의지하는 것이니, 비록 완전히 지니진 못했어도 능히 독송하기 때문에 역시 많이 들어 섭수할 수 있다.
‘뜻에 있어서 바른 수행’이라는 것은 곧 두루두루 그 뜻을 증득하는 것을 말한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리라. - 015_0308_c_05L文有三者:一、受持;二、讀誦;三、演說。言“受持”者,謂持法人。“讀誦”者,依多聞說。雖不能持,由能讀故亦多聞攝。義正行者,謂是周遍得其義故。頌曰:
-
뜻으로 증득하거나 다른 이로부터 듣거나
스스로 듣고 생각하는 것이다. -
015_0308_c_09L義得由從他,
及己聞思故。
-
“뜻으로 증득하는 것은 다른 이로부터 자기에게 미치게 하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무엇이 ‘다른 이로부터’이며, 어떤 것이 ‘자기에게 미치는 것’인가?
법문을 듣고 나서 생각하기 때문에 이러한 차례대로 다른 이로부터 자신에게 미친 것을 증득한다고 말한 것이다. 두루 뜻을 증득함에 의거한 것이니, 이것은 문자와 뜻에 있어서 바른 수행을 말한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리라. - 015_0308_c_10L義之得因,從他及己。何謂從他?云何由己?爲聞思故。如其次第從他及己而得者,據遍得義。此謂文、義正行。頌曰:
-
이것은 안으로 자신을 성숙시킨다는 말이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유정도 성숙시키는 것이
일과 시간의 큰 성품을 따라서
그 복덕은 어느 복덕보다 훨씬 우세하게 된다. -
015_0308_c_14L此謂熟內己,
餘成他有情;
由事時大性,
望福福殊勝。
-
여기에서 ‘받아 지닌다’고 한 것 등은 다만 안으로 자기 자신을 성숙하게 하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유정(有情)도 성숙하게 한다. 곧 이것은 다른 이를 위하여 바른 법을 널리 설하여 이와 같은 복(福)의 양을 획득하였다고 하였으니, 그 복의 양(量)에 대한 차별을 밝힌 것이다.
“일과 시간의 큰 성품으로 말미암아 희망하는 복은 어느 복보다 수승하다”고 하였으니, 여기에서 몸을 버린 복덕은 이에 앞서 몸을 버린 복덕보다 더 우세하다.
일이 크기 때문에 이러한 차별이 있고, 시간이 크기 때문에 하루 내내 오히려 매우 많은 자신의 몸을 가지고 보시를 행한다.
또 경에서 “많은 시간을 법에 대하여 바르게 수행하는 자에 대하여 업(業)의 작용을 이제 마땅히 설하겠다”고 했는데 어떤 것이 저 행에 대한 업의 작용인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 015_0308_c_16L此受持等,但爲成熟內己。“餘成他有情”,卽是於他廣爲正說。獲如是福量者,顯其福量差別。“由事時大性,望福福殊勝”,此捨身福望前捨身福,由事大故有其差別。及由時大,由一日中尚以極多自身而行布施,復經多時於法正行者。業用今當說。何謂彼行業用耶?頌曰:
-
015_0309_a_01L
다른 경계에서의 성품이 아닌 유독 이 성품만이
능히 큰 사람이 의지할 수 있는 성품이며
얻어 듣기 어려운 것이니
최상 경지의 원인을 증장(增長)시키기 때문이라네. -
015_0309_a_01L非境性獨性,
能依是大人,
及難可得聞,
無上因增長。
-
다만 이 바른 법만을 지니고
여기에 의지하여 수행하면 큰 그릇을 성취하리니
모든 업장을 끊어 없애면
곧 지혜를 달통한 성품을 획득하리라. -
015_0309_a_03L 若但持正法,
所依處成器,
蠲除諸業障,
速獲智通性。
-
세간의 미묘한 일들이 원만하고
이숙(異熟)에서는 매우 존귀하게 되리니
이 법을 잘 닦아 행하면
틀림없이 이러한 업(業)을 획득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네. -
015_0309_a_04L 世妙事圓滿,
異熟極尊貴,
於此法修行,
應知獲斯業。
-
015_0309_b_01L
경에서 말한 “이루 다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은 곧 범부의 마음으로는 행할 바 경계를 비교하여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루 다 재고 헤아릴[稱量] 수 없다’고 한 것은 유독 이 성품에서만 획득할 수 있는 복이며, 성문(聲聞) 등은 함께 할 수 없는 성품임을 밝힌 것이다.
‘가장 높고 가장 수승한 대승의 유정들을 유익하게 하기 위하여 설한 것이다’라고 한 것은 곧 이 법문은 대승(大乘)만이 의지하는 대승의 가르침이므로 극상승(極上乘)과 대승만이 행할 수행이라 말하고, 또한 최승승(最勝乘)이라고 말한 것이다.
하열(下劣)의 승을 즐기는 이는 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듣기 어려운 성품을 가진 이는 들어도 증득하기 어렵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사량(思量)하기 어려운 등등의 복덕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은 최상의 원인을 증장시키면 복의 종자도 증장한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이 가운데 경문에 이르기를 ‘생각할 수도 없고 칭량할 수도 없다’고 한 것은 한량하지도 못하고 헤아릴 수도 없는 것을 말함이니, 순서대로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사람은 어깨에 짐을 짊어질 수 있다’는 등의 말을 한 것은 법을 지닐 수 있는 사람을 드러낸 것이다. 법을 지닐 만한 사람이라는 것은 보리(菩提)를 지닐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이 경이 있는 곳에는 향과 꽃을 공양할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경전이 의지하고 있는 곳은 뛰어나고 미묘한 그릇을 성취할 수 있음을 밝힌 것이다.
‘멸시당하고 욕(辱)을 당하기 때문에 마땅히 생겨나게 되는 악한 세계의 업은 장차 모두 소멸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업장(業障)을 제거하여 맑힘을 밝힌 것이다.
‘이것이 가장 훌륭한 일이다’라고 말한 것은 이 경을 받아 지녀 독송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경멸당하거나 욕을 당할 때에 이렇게 욕을 당하는 사람에게 복덕의 성품이 있다는 것을 밝힌 것이며, ‘이것이 가장 훌륭한 일’이라고 말한 것은자고이래(自古以來)로 번역하는 모든 이들이 다 이 말을 하지 않았으니 그것은 범본(梵本) 중에 그 내용의 글자가 은밀하게 숨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 연등불(燃燈佛)의 처소에서 먼저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고 섬겼으므로 그때 얻은 복덕이 말법(末法)시대에 이 법문을 받아 지닌 이가 획득한 복보다 훨씬 많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혜로 통달한 성품을 밝힌 것으로서 많은 복덕의 자량(資糧)이 다 원만하게 갖추어졌기 때문임을 말한 것이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경은 불가사의(不可思議)하다”는 데까지는 그 과보(果報)가 불가사의함을 밝힌 것이다. 곧 이것은 위의 게송에서 말한 “세간의 미묘한 일 원만하여 과보(果報)가 지극히 존귀하리라”고 한 것으로서 세상을 보호하는 제석(帝釋)과 바라문(婆羅門) 등은 그가 증득한 원만한 공덕 때문에 모두 마땅히 섭수할 것임을 말한 것이다.
‘광란(狂亂)’이라고 말한 것은 이것이 마음을 광란하게 하는 요인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생각할 수 없는 과보다’라고 말한 것은 여기에 많다[多]는 성품과 수승하다[勝]는 성품의 두 가지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범부의 마음으로는 모두 헤아려 알 만한 것이 아니니, 이것은 바른 법을 바르게 수행하면 문득 이와 같은 많은 덕에 편안히 머물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바른 행업(行業)으로 인한 과보의 공용(功用)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또 앞에 세 가지의 문답이 있었는데도 여기에서 거듭 물었으니, 그 뜻이 어떻게 다른가?
게송으로 대답하겠다. - 015_0309_a_05L經云“不可思”者,此顯不是凡情比度所行境界。言“不可稱”者,此顯獨性所獲之福,於聲聞等是不共性故。言“爲益發趣極上最勝乘有情故說”者,顯此法門是大人所依大乘教,名極上乘大乘行,名最勝乘。樂下劣者不欲聞故,此顯難聞性,聽者難得故。由能成就不可思量等福聚故,此顯增長無上之因,福種增長故。此中文云“不可思不可稱”者,謂以非量非度,如次應知。“當知是人則爲以肩荷負”等者,此卽顯其能持法者,由彼持法卽是持菩提也。“所在之處香花供養”者,此顯所依之處成勝妙器。由被輕辱故,所有應生惡趣之業皆當消盡故,此顯淨除業障。言此爲善事者,謂遭輕辱時,顯被辱之人有福德性故,言此爲善事自古翻譯皆無此語,由梵本中字隱密故。於然燈佛先供事諸佛所得之福,比於末代於此法門能受持等獲多福故,此顯得成智通性,多福資糧悉圓滿故。乃至當知是經不可思議,此顯果報不可思也。卽是世妙事圓滿、果報極尊貴,謂於護世帝釋婆羅門等所有圓滿皆當攝取。言“狂亂”者,應知此是狂心因。言不可思果報者,此之多性勝性二種,皆非凡情所測。斯謂於法正行便能安住如是衆德,是故名此爲正行業果報功用。又復如前三種問答,此中重問,義有何殊?答曰:
-
각자 스스로 수행할 때에
장차 나는 보살이 되리라는 생각을 한다면
마음에 장애가 된다고 말할 수 있으리니
머무름이 없는 마음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
015_0309_b_12L由自身行時,
將己爲菩薩,
說名爲心障,
違於無住心。
-
“묘생(妙生)아, 실제로 아무런 법도 없는 것을 보살행이라고 말한다”고 했는데, 만약 보살이라는 생각이 없어야 한다면 왜 여래께서는 연등부처님의 처소에서 보살행을 행하셨는가?
이런 의혹을 끊어주기 위하여 수보리가 “실제로는 아무런 법이 없습니다. 여래께서 연등부처님의 처소에 계실 때에”라는 이와 같은 등으로 대답을 한 것이다.
여기에서는 무슨 뜻을 밝히려고 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 015_0309_b_14L“妙生!實無有法可名菩薩”者,若無菩薩,云何如來於然燈佛所行菩薩行耶?答此疑曰“實無有法如來於然燈佛所”如是等,此顯何義?頌曰:
-
뒤에 깨달음을 얻으리라 수기(授記)하셨으니
연등불의 처소에서 행한 것은 뛰어난 것이 아니며
그러므로 보살의 그와 같은 수행이
실제로 원인을 지은 것은 아니다. -
015_0309_b_18L授後時記故,
然燈行非勝,
菩提彼行同,
非實由因造。
-
015_0309_c_01L
이 게송에 담긴 뜻은 “나는 옛날 연등부처님의 처소에서 수승하고 가장 으뜸가는 행인 보살행을 하지 않았다”라고 말하고, 또 “내가 옛날 수행할 때에 실제로 아무 법도 없었다. 만약 어떤 법이라도 있었다면 그 부처님의 처소에서 정각(正覺)을 증득하였을 것이며, 만일 정각을 증득하였다면 연등부처님께서는 나에게 뒷날 부처가 되리라는 수기를 주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여기에서 또 어떤 이는 ‘그는 수행할 때에 스스로 나는 앞으로 부처가 될 것이라고 말하였으리라’고 생각하면서 ‘만약 보리(菩提)가 없다면 부처도 없을 터이니 그렇다면 곧 다 없다고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의심을 하는 까닭에 부처님께서 이런 의심을 없애주기 위하여 경문에서 “묘생아, 여래라고 말하는 것은 곧 실제의 성품인 진여의 다른 이름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뒤바뀜이 없는 이치를 실제 성품이라 하고 변하지 않는 뜻을 진여라고 말한다.
“묘생아,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는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을 증득하였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거짓말이 되느니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을 나타낸 것인가?
답하기를 “보리는 그의 수행과 같아서 실제로 원인을 지은 것이 아니다”라고 게송에서 말했으니, 이 말은 옛날 보살이 수행할 때에 실제로 행한 것이 없는 것처럼 모든 부처님도 다 그와 같다는 말이다.
‘법이 없었다면 정등보리도 증득하지 못했을 터이니 이는 도리어 무상정등보리는 실제로 없다고 말해야 되지 않는가?’라고 의심하는 이가 있을 것이므로 이 의심에 답하기 위해 “묘생아, 여래께서 증득한 정각의 법은 곧 실제도 아니요 거짓도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 뜻은 무엇인가?
이 부처님께서 증득하신 것은 진여(眞如)의 진리이니, 그것은 곧 실제로 어떤 원인으로부터 생겨난 것이 아니다. 모든 유위(有爲)의 모습은 곧 모여서 이루어진 모습이지만, 저것은 물질 등의 모습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게송으로 말하리라. - 015_0309_b_20L此中意言,我昔於然燈佛所,非是勝上行菩薩行。而我昔行時,實無有法可於彼邊證得正覺,若證覺者卽不記我後時成佛。此中意者,言彼行時自云我當成佛。若言菩提非有者,佛亦是無,卽摠撥無。佛爲除此難,文云“妙生!言如來者,卽是實性眞如異名”,謂無顚倒義名爲實性,無改變義是曰眞如。“妙生!若有說云如來證得無上正等覺者,是爲妄語”者,此顯何義?答曰“菩提彼行同,非實由因造”,由昔菩薩修行之時實無可行,諸佛亦爾。無法可證正等菩提,此還摠撥實無無上正等菩提?答斯難曰“妙生!如來所有正覺之法,此卽非實非妄”者,此有何意?然眞如理是佛所證,彼卽非實由從因生,諸有爲相是聚相義,彼卽無其色等相故。頌曰:
-
저 모습이 없는 것을 모습이라고 말한 것은
이것은 거짓이 아님을 나타낸 것이고
이 법이 곧 부처님의 법이기 때문에
모두가 유위(有爲)의 모습이 아니라고 한 것이다. -
015_0309_c_15L無彼相爲相,
故顯非是妄;
由法是佛法,
皆非有爲相。
-
015_0310_a_01L
이것은 물질과 소리 등의 모습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물질 등의 모습은 본래 스스로의 모습이 아니니, 이로 말미암아 “저 모습 없는 것을 모습이라고 하는 까닭은 이것이 거짓이 아님을 나타낸 것이다”라고 게송에서 말했다.
“이런 까닭에 여래께서 설하신 일체법(一切法)은 모두가 부처님의 법이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무슨 뜻을 나타낸 것인가?
여래께서는 이 법을 증득하셨기 때문이다.
게송에서 “이 법은 모두 부처님의 법이기 때문에 다 유위의 모습이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무위(無爲)의 실체를 밝힌 것이다.
여기에서 무슨 뜻을 진술하려 한 것인가?
모든 법은 진여로써 자성을 삼고 있는 것이며, 이는 다만 부처님만이 깨달은 것이므로 모든 법은 곧 부처님의 법이라고 하였다.
이 물질 등은 그 자체의 모습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존재하고 있는 저 모든 물질과 소리 등의 법은 다 이 법이 아니다. 이 법이 아닌 것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그 법을 성취하였으니, 이것은 곧 필경에는 존재하지 않는 모습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장부의 비유는 무엇을 나타낸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 015_0309_c_17L謂此無彼色聲等相,色等相無是其自相,由此故云“無彼相爲相,故顯非是妄”。“是故如來說,一切法卽是佛法”,此顯何義?由如來證此法故。“由法是佛法,皆非有爲相”者,此顯以無爲體。此何所陳?由一切法以眞如爲自性,此乃但是佛所覺悟,是故一切法名爲佛法。由此色等不能持其自體相故,所有彼諸色聲等法皆不是法。由不是法,是故此成其法卽是畢竟能持非有之相。丈夫之喩何所顯耶?頌曰:
-
법신의 부처님을 가지고
장부(丈夫)에 비유한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하니
장애(障碍)10) 없이 원만하게 갖추신 몸이며
모든 장소에 두루 가득하게 계시는 성품이기 때문이라네. -
015_0310_a_05L謂以法身佛,
應知喩丈夫,
無障圓具身,
是遍滿性故。
-
증득하신 몸[德體] 광대(廣大)하신 까닭에
또한 큰 몸이라 이름하지만
존재하는 실체의 몸이 아니므로
그는 몸을 지니지 않았다고 말한다네. -
015_0310_a_07L及得體大故,
亦名爲大身,
非有身是有,
說彼作非身。
-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 이 두 가지 장애가 없기 때문에 원만하게 갖추신 몸이라고 말했다.
‘두루 가득하다’고 말한 것은 두루 다닌다는 뜻이다. 모든 곳에 두루 하기 때문에 원만하게 갖추신 몸이라고 말했으며, 증득한 몸이 크기 때문에 또한 큰 몸이라고 말했다.
여기에서 두루 다닌다는 것은 곧 진여의 성품으로서 모든 법 가운데 있으면서도 그 성품이 다르지 않기 때문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몸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은 곧 “그는 몸이 아닌 것을 성취하였기 때문에 여래께서 몸이 아니라고 설하셨느니라”고 말한 것과 같다.
‘이것을 이름하여 원만히 갖춘 몸, 큰 몸이라고 말했다’는 것은 무슨 뜻을 진술하기 위함인가?
“존재하는 실체의 몸이 아니기 때문에 저것은 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는 곧 진여(眞如)의 성품이니, 실체의 몸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이름하여 원만히 갖춘 몸, 큰 몸이라고 말한 것이다.
‘만약 보살이 없다고 말한다면 정각(正覺)도 또한 없을 것이며, 깨달을 대상[所覺]도 역시 없을 것이며, 중생들로 하여금 열반(涅槃)에 들게 할 수도 없을 것이며, 또한 모든 부처님의 국토도 엄숙하고 청정하게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모든 보살 등이 일을 행하여 여러 중생들로 하여금 원적(圓寂)에 들게 하고, 또한 다시 마음을 내어 부처님의 국토를 청정하게 하려는 것일까?’ 하고 의심하는 까닭에 이 의문에 대답하기 위하여 아래의 글이 있게 되었다.
이것은 무슨 뜻을 나타내기 위함인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 015_0310_a_08L煩惱、所知二障無故,名圓具身。言“遍滿”者,是遍行義,遍諸處故名爲“具身”。“及得體大故,亦名爲大身”,此遍行者應知卽是眞如之性。在諸法中無有異性故,云“非有身是有”。“說彼作非身”,如來說爲非身。由此名爲具身。大身者,斯何所陳?以非有爲身故,名彼爲非身。卽眞如性故,由其無身故,是故名此爲具身大身。若言無有菩薩者,正覺亦無、所覺亦無,亦無衆生令入涅槃,亦不嚴淨諸佛國土。有何所爲,諸菩薩等令諸衆生入於圓寂,又復作意淨佛土耶?爲答斯難,故有下文。此顯何義?頌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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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계(法界)에 대하여 알지도 못하면서
유정(有情)을 제도하겠다는 마음을 내거나
부처님의 국토를 청정하게 하겠다는 생각을 한다면
이것을 이름하여 속임이며 거짓이라 한다네. -
015_0310_a_22L不了於法界,
作度有情心,
及淸淨土田,
此名爲誑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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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5_0310_b_01L
“만약 이러한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곧 속이는 것이며 거짓이니, 이것을 보살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고 말했다.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보살이라는 이름을 얻을 수 있을까?’라는 의혹이 일어날 것이므로 “묘생이 만약 일체법은 성품이 없다는 것을 믿고 이해한다면”이라고 대답한 것이다.
여기에서 “일체법이 성품이 없다”는 이와 같은 등의 글은 무슨 뜻을 나타내기 위한 것인가?
게송으로 대답하리라. - 015_0310_b_01L若言此心是其誑妄,爲此不名菩薩者,若爾由何得名?答“妙生!若有信解一切法無性”。“一切法無性者”如是等,此文欲顯何義?答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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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과 중생이
모든 법엔 자성이 없음을
만약 그것을 알면 비록 성인이 아닐지라도
성인 또는 지혜로운 이라고 불리게 됨을 마땅히 알라. -
015_0310_b_05L於菩薩衆生,
諸法無自性,
若解雖非聖,
名聖慧應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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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무슨 뜻을 밝힌 것인가?
이는 모든 법엔 아무런 성품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법에 성품이 없다’는 것은 곧 중생과 보살이 소유한 법에 의거한 것이니, 저들이 만약 능히 믿고 이해한다면 세간지(世間智)이거나 출세간지(出世間智)이거나 간에, 즉 이생(異生)이거나 성인이거나 간에 모두 보살이라고 불릴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문득 결정을 이루어 부속보살(覆俗菩薩:世諦菩薩)과 승의(勝義:出世諦)보살, 이 두 종류의 보살을 허락한 것이다. 이는 곧 저들에게 순종하기를 밝힌 것이므로 보살, 보살이라고 두 번 말한 것이다.
앞의 경문에서 말하기를 “여래는 나타난 바를 증득한 적이 없다”고 말했는데 그 이치가 명백하여 ‘만약 이와 같다면 어찌 저 성인이 전혀 본 것이 없겠는가?’라는 의심이 일어날 것이므로 이 의문에 대답하기 위하여 다섯 가지 눈을 허락하여 그 뜻을 나타낸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리라. - 015_0310_b_07L此明何義?言法無性。法無性者,此據衆生及菩薩所有之法。於彼若能信解,或世出世,謂是異生及聖皆名菩薩。由此便成決定許有覆俗、勝義二種菩薩,此卽顯其順彼。再說菩薩菩薩,經文前云“如來是無得所顯”者,義成明白。若如是者,豈彼聖人全無所見?爲答斯難,許有五眼,爲顯其義,頌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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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모든 법을 보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렇다고 눈이 없는 것은 아니니
부처님께선 다섯 가지 눈을 갖추셨기에
경계가 허망한 것임을 알고 계신다네. -
015_0310_b_15L雖不見諸法,
此非無有眼;
佛能具五種,
由境虛妄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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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왜 허망한 것이 아닐까?’라는 의심을 낼 것이므로 이 의문에 대답하기 위하여 먼저 비유를 들었을 뿐이다.
“저 모든 중생들의 갖가지 성품에서 그 마음이 유전(流轉)했다는 것을 나는 다 알고 있다”고 이와 같이 자세하게 말했으니, 이는 무슨 뜻을 나타내려고 한 말인가?
저의 허망한 견해 때문이 아니요 경계가 허망한 것이기 때문이니, 어떤 것이 곧 허망한 경계인가 하면 가지가지 허망한 인식을 말하는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리라. - 015_0310_b_17L此乃如何不是妄耶?爲答此難,先爲喩已。“彼諸衆生種種性,其心流轉我悉知之”,如是廣說。此顯何義?言彼非是妄見,由境虛妄故。何者是虛妄境?謂種種妄識。頌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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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가지 마음이 유전(流轉)하여
실상의 염처(念處)를 여의었기 때문에
지니고 있지 않고 항상 변천하므로
허망하다고 말한 것이다. -
015_0310_b_22L種種心流轉,
離於念處故,
彼無持常轉,
故說爲虛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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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5_0310_c_01L
곧 갖가지 인식작용이 있어서 여섯 가지 인식작용이 각기 다른데 그런 까닭에 다시금 이런 허망함이 있는 것이다.
어떤 것을 인식작용이라고 이름하기에 마음이 유전(流轉)하는가?
경에 이르기를 “여래께서 다라(陀羅)가 없다고 말씀하셨다”고 하셨으니 이것은 실상의 염처를 여읜 성품을 밝힌 것이다. 저 염처로 말미암아 이와 같은 염처를 지니는 법인데 그가 만일 이 염처가 없다면 곧 다라(陀羅) 남아라(喃阿羅) 아타라(痾陀羅)를 지닐 수 없을 것이다.
이 세 가지 이름에는 모두 각각 두 가지 뜻이 있으니, 다 지닌다는 이름을 가지고 있고 또한 유주(流注)한다는 뜻이 있다.
이 세 가지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마음이 곧 흘러 흩어지는 것이니, ‘가지고 있지 않다’는 말은 항상 유전하는 인연을 밝힌 것이다.
이미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항상 유전하여 허망한 성품이 있음을 밝힌 것이다.물었다. 무슨 까닭에 본경(本經)에서는 애초부터 범어(梵語)로 된 다라(陀羅)를 보류한 채 한자로 번역하지 않았는가? 거기에는 무슨 의취(意趣)가 있는가? 대답했다. 범본의 세 곳에는 모두 이 다라니가 있지만 그 뜻은 약간의 차이가 있다. 지금 이 경을 번역하는 사람이 만약 전적으로 범자(梵字)만을 따른다면 소리가 중국東土에 막히게 될 것이고, 만일 모두를 중국음唐音으로 번역한다면 그 뜻이 서역(西域)과 어긋나게 될 것이다. 그런 까닭에 처음에 썼던 범자의 의미가 그대로 잘 보전되어 전해지게 되었다고 이유를 말할 수 있겠다. 이 안에서 지(持)자를 말한 것은 아마도 집지(執持)의 일을 기술한 것 같은데 이 경을 번역한 사람이 송(頌)을 지은 무착(無着)보살의 뜻을 맞추고, 이를 주석한 세친(世親)보살의 마음을 맞춘 것이며, 이것을 잘못 기술하여 결코 손을 상하게 하게끔 하는 근심이 없게 하려고 한 것 같다. 만약 이것을 모두 유(流)자로만 번역했다면 지(持)자의 이치는 전혀 나타나지 못했을 것이고, 모두 지(持)자로만 번역했다면 유(流)자의 뜻은 진실로 끝내 나타지지 못한 채 아주 없어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뜻을 모두 겸할 수 있게 번역해야 비로소 생각했던 것과 같이 되어 시원스러워질 것이다. 만약 유자로 번역하면 이치에는 꼭 맞아떨어질 것이나, 그러나 많은 뜻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다라니의 뜻에 미치지 못하게 될 것이다. 한 곳이 이미 그러하다면 다른 곳이야 이를 유추해보면 모두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다라니가 남아 있는 모든 범본이 각기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으니, 이 『반야경』은 이미 네다섯 번의 번역을 거쳤으므로 이를 찾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잘 관찰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의미가 기이한 것을 선호한 것이 아니라 거듭 번역되면서 그 의미가 길러진 것이라고 할 수 있으니, 서쪽 나라의 성명(聲明)은 하나의 이름에 많은 일을 지목하고 있고 하나의 일에 많은 이름을 지니고 있다. 이 다라(多羅)라는 한 마디의 말도 많은 뜻을 포함하고 있어 유(流)라는 뜻이 있고 지(持)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이치가 지방 풍속의 다름을 근거로 했기 때문인 듯하므로 옛것만을 굳게 믿어 융통성을 갖지 않거나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만약 옛 번역만 고집한다면 그 뜻이 소원하거나 지루하게 될 것이며 그 잘잘못에 대해서는 말해볼 겨를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과거 등의 마음은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른바 ‘과거와 미래의 마음’이라고 말한 것은 과거와 미래의 성품이기 때문에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이란 곧 변계소집(遍計所執)이라서 자성이 있지 않기 때문에 얻을 수 없는 것이니, 이는 흘러 변천하는 마음은 곧 허망한 인식작용의 성품이 인연한 바라서 3세의 성품이 없음을 밝힌 것이다.
또 무슨 뜻으로 복의 덩어리에 비유하여 설하였는가?
게송으로 대답하리라. - 015_0310_c_01L卽是種種識有六識殊故,復是其妄。何因名識爲心流轉?經云“如來說爲無陁羅”者,此顯離於念處性故。由彼念處是此持處,彼若無者卽是無持。陁羅喃、阿羅痾、陁羅此之三名,共目二義,皆得名持,亦有流注義,由無持故心卽流散。言“無持”者,爲顯常轉之緣。旣無持故,顯其常轉,是虛妄性問:何故本經初留梵語陁羅,不譯爲漢字者,有何意趣?答:梵本三處皆是陁羅,而義有差別。今時譯者若也全爲梵字,卽響滯於東土;如其摠作唐音,頓理乖於西域。是故初題梵字,可謂義詮流轉所由,於內道持,便是正述執持之事。作斯譯者,方稱頌本無著菩薩之意、符釋者世親菩薩之情。如其不作斯傳,定貽傷手之患。若摠譯爲流,持理便成不現;咸爲持字,流義固乃全無。作此雙兼,方爲愜當。若譯爲流,於理亦得;然含多義,不及陁羅。一處旣爾,餘皆類知,諸存梵本者咸有異意。此『波若』已經四譯五譯,尋者當須善觀,不是好異,重譯意存鞠理。西國聲明,自有一名目多事、一事有多名。爲此陁羅一言,遂含衆義,有流、有持,理應體方俗之殊致,不得恃昔而膠柱。若勘舊譯,全成疏漏,無暇言其藏否。“何以故”者,由有過去等心不可得言故。所云過去未來心者,由是過去未來性故,是不可得。其現在者,卽是遍計所執,自性非有故。此顯流轉之心是妄識性所緣,無有三世性故。復有何意說福聚喩耶?答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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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5_0311_a_01L
마땅히 알아야 하리니 이 지혜 지녔기에
그 복은 곧 허망한 것이 아님을
이 복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
거듭 이 비유로써 설명하신 것이라네. -
015_0310_c_23L應知是智持,
福乃非虛妄;
顯此福因故,
重陳其喩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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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무슨 뜻을 서술한 것인가?
“마음이 이미 흘러 변천한다면 이것은 속이고 거짓된 성품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으니, ‘복의 덩어리가 있다는 것도 또한 모두 허망한 것일 텐데 이것이 이미 허망한 것이라면 어떻게 착한 법을 이룩하겠는가?’라는 깊은 의혹이 이미 있으리라는 것은 너무도 명백한 일일 것이기에 이를 결단하여 밝히기 위해 ‘흘러 변천하는 마음은 정말로 허망한 것’이라는 말에 대한 대답으로서 “복 덩어리의 실체는 곧 허망한 것이 아니니, 이것은 정각의 지혜를 지녔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어떻게 이것이 곧 그것(佛智慧)을 지닌 성품임을 밝혔는가?
경에 이르기를 “묘생아, 만약 이것이 복의 덩어리라면 여래께서는 곧 복의 덩어리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이 말엔 무슨 의미가 담겨 있는가? 다섯 가지 취온(取蘊)으로 말미암았으므로 그 바탕이 곧 허망한 것이다. 만약 이 복의 덩어리가 이 취온에서 생긴 것이라면 여래는 곧 이 복의 덩어리가 복의 덩어리의 성품이 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이니, 그것은 이치상으로 지혜를 지닌 곳에서 생겨난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여래는 곧 색신 등이 모여 조작됨으로 인하여 나타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어째서 여래께서는 여러 가지 좋은 상호가 많이 있다고 말씀하셨을까?’라고 하는 의혹이 생길 것이므로 이 의혹을 제거하기 위하여 “마땅히 색신(色身)이 원만하고 상호가 구족(具足)한 것을 가지고 여래를 관찰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색신이라고 말한 것은 좋은 뜻을 따른 것이다. -
015_0311_a_02L此述何義?心旣流轉,是誑妄性故,所有福聚亦竝成虛。此旣是妄,何成於善?旣有深疑,理須明決。答:流轉之心可是其妄,所言福聚體不是虛,由是正覺智之持故。如何顯此是其持性?如云“妙生!若此福聚者,如來卽不說爲福聚”。此何意趣?由五取薀體是虛妄,若此福聚是取薀者,如來卽不說此福聚爲福聚性,是不說爲智之持處義。若言如來是非集造所顯,如何如來說有諸好及衆相耶?爲除此難,故云“不應色身圓滿及相具足觀於如來”。言“色身”者,是隨好義故。
能斷金剛般若波羅蜜多經論釋 卷中
癸卯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 1)설법이 행해지는 땅과 설법하는 사람을 말한다.
- 2)즉 객진번뇌를 말한다.
- 3)궁극이 아닌 방편의 모습을 뜻한다.
- 4)경전(經典)을 말한다.
- 5)인욕바라밀행(忍辱波羅蜜行)을 말한다.
- 6)가명(假名)과 음사(陰事)를 가리킨다.
- 7)소승(小乘)을 가리킨다.
- 8)중생들이 구하고 바라는 것을 말한다.
- 9)소승(小乘)을 뜻한다.
- 10)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