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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7_0773_a_01L일수로가론
용수보살(龍樹菩薩) 지음
후위(後魏) 구담류지(瞿曇留支)가 낙양(雒陽)에서 한역
김월운 번역
사물의 본체는 무상하나니
이러한 사물에는 본체가 없다.
본체라는 그것의 성품에도 본체가 없으니
그러므로 공과 무상을 설하네.
무슨 까닭으로 이 논서를 짓는가? 어떠한 이치를 설하고 어떤 사람을 파(破)하는가? 대답하노니 경을 읽는 이가 광대한 부피에 싫증을 내기 때문이며 또한 총명하고 예지 있는 사람이 한량없는 논서를 많이 익혔으나 여래의 법의 바다 가운데에서 뜻을 생각하다가 싫증을 내기 때문이다. 또 무상하고 자기 본체가 공하며 다르지 않다는 뜻에 대하여 의심을 내기 때문에 이 의심을 끊기 위하여 이 논서를 지었다. 어떠한 이치를 말했는지를 이제 설명하겠다. 일체의 법은 무상하고 스스로의 본체가 빈 것을 말한다. 스스로의 본체가 공하다는 것은 무상하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일체의 법은 스스로의 성품과 스스로의 본체가 비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함이 없다. 온갖 부처와 연각과 성문은 공한 법 가운데에서 벗어남을 얻었다. 항상한 법 가운데에서 제행을 끊고 해탈을 얻은 것이 아니다.
게송에서 말한다.
공을 멸하고 있음의 본체에 머무르면
상견을 이루게 되고
다음 찰나에 모두 사라진다고 한다면
단견을 이루게 되리라.
이런 까닭에 온갖 법은 스스로의 본체가 비었다 한다. 모든 부처님과 연각과 성문과 아라한은 이 이치 가운데에서 이익을 얻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을 파하는가에 대해서 이제 말하겠다. 만약에 얻은 바가 있는 사람이 제행(諸行)을 떠나서 무상(無常)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바른 견해가 아니다. 만약에 무상이 유위(有爲)를 떠났다면 무상은 항상한 것이 되고 허공과 같게 되리라. 만약 그렇다면 무위와 유위의 본체는 차별이 없게 된다. 만약에 유위와 무위가 합한다면 무위와 합했기 때문에 병(缾)은 깨뜨릴 수 없게 된다. 만약에 무위와 유위가 합했다면 유위와 합했기 때문에 열반(涅槃)도 무너뜨릴 수 있게 된다. 만약에 일체법이 다르지 않는 것이라면 일체법은 파괴할 수 없다. 열반과 같이 항상하고 인연으로 생(生)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제행이 인연에서 생한 것이 아니라면 허공이나 열반과 다르지 않으므로 유위법을 무상하다고 말할 수 없다. 만약에 제행이 인연에서 생한 것이 아닌데 무상한 것이라고 한다면 허공과 열반도 항상하다고 말할 수 없다. 만약 그렇다면 유위(有爲)와 무위(無爲)는 더 나은 법이 없다. 만약에 무상이 유위를 떠났는데도 여전히 무상하다고 말한다면 유위는 항상함을 떠난 것이 되고 이름이 무상하다고 하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만약 그렇다면 어떤 경전 중에 그런 말이 있는가? 어떤 뜻으로 그렇게 말했는가? 그대가 지금 하는 말은 어떤 뜻으로 하는 말인가? 그대가 지금 하는 말은 이치에 맞지 않다. 그대의 삿된 소견으로 헤아릴 바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대가 말하는 바는 바른 견해가 아니다.
만약에 얻은 바가 있는 어떤 사람이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법은 스스로 본체[體]를 가지고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바른 견해가 아닌 줄 알 수 있다. 왜냐 하면 타당한 이유 없이 견해를 내기 때문이다. 만약에 미래의 본체가 인연으로 생한 것이 아니고 스스로의 본체로서 성립한 것이라면 현재의 법 역시 인연으로 생한 것이 아니고 자성(自性)을 본체로 하여 성립할 것이다. 미래와 현재의 자성은 평등하며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에 자성이 평등하다면 현재에 있는 법이 모두 인연을 따라 생겼는데 미래의 법인들 어찌 인연을 따라서 생기지 않으리요. 그대의 지금 주장은 경전에 의거하여 말하는 것인가? 말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으면 이치가 없고 만약 이치가 없으면 믿을 수 없다.
만약에 미래의 법이 인연에서 생기지 않고 자성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미래의 법은 허공과 같아서 인(因)과 연(緣)이 없다. 인과 연이 없기 때문에 인연에서 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실로 미래의 본체는 없다. 미래가 없기 때문에 현재와 과거도 또한 없다. 현재와 과거가 없기 때문에 삼세(三世)는 본체가 없다. 만약에 본체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곧 상견(常見)이다. 원인 없이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불제자로서 얻을 바가 있다는 소견을 가지면 외도인 가비라(迦毘羅) 등과 다를 바가 없다. 이 논서는 가비라나 우루가(憂褸迦) 등의 외도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대들과 같은 소견을 가진 자들을 위해서 지은 것이 이 논서이다. 앞에서 말하기를 어떤 사람들을 파하는가 하였는데 그대들처럼 얻을 바가 있다는 사람들의 사견을 끊어 없애기 위하여 이 논서를 짓는다.
일수로가론의 게송의 뜻을 지금부터 풀이하겠다.
게송에서 말하기를 ‘자체의 성품이 무상하다’라고 하였는데, 자체라는 것은 생겨남이 있는 것을 말하고 법이 있기 때문에 본체라고 이름한다. 얻은 바가 있다고 하는 사람이 이 법 중에서 마음으로 집착해서 본체라 하나니, 이 법은 5음(陰)과 18계(界)와 12입처(入處) 중에서 성문(聲聞)과 연각(緣覺)의 법을 굴린다.
하나, 둘 또는 여럿이라고 말할 때와 같이 또는 한 사람, 두 사람, 여러 사람이라고 말할 때 제각기 스스로의 본체가 있기 때문에 자체라고 말한다. 지ㆍ수ㆍ화ㆍ풍이 제각기 딱딱하고 축축하고 뜨겁고 움직이는 자기 성품을 가지듯이 이와 같이 제각기 스스로의 모습과 스스로의 본체가 있으므로 자체라고 말한다.
얻은 바가 있다는 사람이 생(生)ㆍ주(住)ㆍ멸(滅)이 같은 모습이라고 한다면, 그 말은 옳지 않다. 자체의 성품이 무상하기 때문이다. 그것의 본체와 이름은 얻을 바가 있다는 사람들이 분별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그렇기 때문에 온갖 법을 떠나서 무상의 본체는 따로 없다. 자기의 모습이 바로 무상이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신 바와 같이 일체의 모든 행은 모두가 무상하다. 이 말씀에 따르면, 법을 떠나서 무상함이 스스로의 모습을 가진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만약에 그대가 어찌하여 무상인지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내가 지금 설명하겠다. 게송에서 말하기를 ‘이러한 사물에는 본체가 없다’고 하였는데, ‘사물에 본체가 없다’는 것은 그대가 분별하는 것은 무상하다는 것이다. 그 무상한 것은 본체가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물에는 본체가 없다’고 말한다. 자성으로서 본체가 없기 때문에 본체가 없다고 말한다. 게송에서 말하기를 ‘본체라는 그것의 성품에도 본체가 없다’고 하였는데, 본체가 없음을 떠나서 다른 본체가 없기 때문에 ‘본체라는 그것도 본체가 없다’고 말한다. 만약에 그대가 생각하는 대로 ‘본체가 없음을 떠나서 다른 본체가 있다’고 말한다면 그 말은 옳지 않다. 그대의 이 말은 경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에 ‘본체가 없는 것이 곧 스스로의 본체이다’라고 말한다면, 이것도 또한 옳지 않다. 경전에서 설한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어떤 경전에서 이런 법을 말하셨는가? 부처님의 경전에는 이런 말이 없다. 경전에서 설한 것이 아니므로 옳지 않다. 큰 성인의 경전에서 설한 바가 아니면 믿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말로써만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게송에서 말하기를 ‘그렇기 때문에 공(空)과 무상(無常)을 말한다’고 하는 것은 『조복삼밀제경(調伏三蜜提經)』에서 말한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 삼밀제에게 말씀하시기를 ‘눈은 공하고 무상하며 움직이지 않음이 없다. 무너지지 않음이 없고 변하지 않음도 없다. 왜냐 하면 성품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귀ㆍ코ㆍ혀ㆍ몸ㆍ뜻도 또한 그러하다’고 하셨다. 부처님께서는 이 경전 가운데서 공을 말씀하셨고 무상을 말씀하셨다. 이 말씀에 따라서 온갖 법은 공하고 무상한 줄 알 수 있다. 무상은 본체가 없다. 그러므로 모든 법의 성품은 그대로 본체가 없으므로 본체가 없다는 말은 이치에 합당하다.
만약 이와 같이 경전의 뜻에 들어갈 수 있다면 그 뜻은 합당하다. 만약에 경전에 들어가지 못하면 그 말은 무너진다. 내가 말한 바와 같이 경전을 이해하면 그 이치는 합당하다. 그렇기 때문에 법의 성품이 그대로 본체가 없다는 그 말이 일수로가론 1권에서 성취되었다. 무릇 모든 법은 본체와 성품과 사물들의 있음이 이름은 다르나 그 뜻은 같다. 그러므로 혹은 ‘본체[體]’라고 하고 혹은 ‘성품[性]’이라고 하고 혹은 ‘법(法)’이라 하고 혹은 ‘있음[有]’이라 하고 혹은 ‘사물[物]’이라 하는데, 모두가 있음[有]의 차별일 뿐이다. 정음(正音:범어)으로는 사바바(私婆婆, sa- bhava)인데, 번역하여 ‘자체의 성품[自體體]’이라 하고, 다른 번역으로는 ‘없는 법과 있는 법[無法有法}’이라 하고, 다른 번역으로는 ‘자성이 없는 것[無自性性]’이라고도 한다. - 017_0773_a_01L壹輸盧迦論一卷龍樹菩薩造後魏瞿曇留支雒陽譯‘體自體無常 如是體無體 自體性無體故說空無常。’問曰以何義故造此一偈論說何等義破:何等人答,曰爲讀誦者,於廣大部,生懈倦心?又爲:聰睿先已,廣習無量,諸論於如,來法海義,中思惟而生懈倦於,無常自體空不異義中,生異相疑爲斷此、疑故造,斯論說何:義者今當,說謂一切法,無常自。體空自體?空不離。無常一切,法自性自體。空是故無有常一。切諸佛緣覺聲聞於,空法中而得。出離非於、諸行、斷常,法中而得解脫偈言滅空住有體 則成於常見 若謂後時滅則成於斷見以此義故說一切法自體空諸佛緣覺聲聞羅漢於此義中得利益故破何等人者今當說若有所得人離於諸行說有,無常則,非正見若無,常離有爲,無常則常,猶如虛空。若如是者,則有爲、無爲體無差別若有爲與無爲合,無爲合故,則缾不可破。若無爲與有爲合,有爲合故,則涅槃可壞。若不異者,則一切法不可破壞。如涅槃,常非緣生故。若諸行非因緣生、不異虛空涅槃者,則有爲法不名無常。若諸行非因緣生,是無常者,則虛空。涅槃不名爲常。若如是者,則有爲、無爲無有勝法。若無常離有爲,猶名無常者,則有爲離常,應名爲常。但是事不然。若如是者,何等修多羅中,作如是說,以何義說?汝今所說以何義說?汝今所說,義不相應,非汝邪思之所能量,是故汝說,非爲正見。若人有所得,謂過去未來、現在,法自體成者,當知是人,則非正見。何以故。無因生見故。若言未來體非因緣生,自體成者,則現在法,亦非因緣生,自性體成。以未來、現在自性平等。無差別故。若性平等者,現在有法,皆從緣生,未來法何故非緣生,汝今此義,爲以修多羅說,爲依義說?說不相應,則無理趣。若無理趣,則不可信,若未來法無因緣生,自性成者,未來之法猶如虛空,無有因緣。離因緣故。非因緣生,則無實未來體,無未來故,現在,過去亦無。現在、過去無故,三世無體。若有體者,則是常見。無因生故。若佛弟子,有所得見。則與外道迦毘羅等。無差別。此論非爲迦毘羅、憂樓迦諸外道等,爲汝等輩,同見之人故,造斯論。向說破何等人?爲令汝等有所得人,斷除邪見故作斯論。一輸盧迦偈句義,今當釋。偈言,自體性無常者。自體名有生,有法故,名爲體。有所得人於此法中,心取爲體。此法於陰、界、入中,有聲緣轉如說一體二體、多體。如彼此人,一、二、衆多,各有自體故,名自體。如地、水、火、風,堅、濕熱、動,各有自性。如是各各,自相自體故,言自體。有所得人謂生、住、滅同相者,是義不然。自體性無常故。彼體名有所得人,分別故生。是故離諸法,無無常體,以自相無常故。如佛告比丘,一切諸行,皆悉無常。以此說故,離法有無常自相者,是事不然。若汝不了云何無常?我今當說。偈言如是體無體故。體無體者,汝所分別無常者,彼無常無體。是故體無體。自性無體故,言無體。偈言,自體性無體者,離無體,更無別體故,言自體無體。若汝意謂離無體,而有體者,是義不然。以汝此法非修多羅說故。若謂無體是自體者,是亦不然。以修多羅,所不說故。世尊於何等修多羅中,說如此法?於佛世尊修多羅中,都無此義。以非經說故,不成就。非大聖修多羅所說之義,則不應信。是故非唯言說,而得取證。偈言故說空、無常者,如調伏三蜜提經中說。佛告三蜜提:眼空無常,無不動,無不壞,無不變。何以故?性如是故。耳、鼻、舌、身、意亦復如。是世尊於此修多羅中,說空說無常。以是義故,知諸法空、無常。無常無體。是故諸法性自無體,則無體義成。若能如是入修多羅義,其義則成,若不入修多羅,其義則壞。以我所說,入修多羅,其義則成是故性自無體,其義成就。一輸盧迦論一卷。凡諸法體性、法物、事、有,名異義同。是故或言體,或言性,或言法,或言有,或言物,莫不皆是有之差別。正音云私婆婆,或譯爲自體、體,或譯爲無法,有法,或譯爲無自性、性。壹輸盧迦論一卷甲辰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