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高僧傳卷第四 義解一

ABC_IT_K1074_T_004
032_0798_a_01L고승전 제4권
032_0798_a_01L高僧傳卷第四 義解一

석혜교 지음
추만호 번역
032_0798_a_02L梁會稽嘉祥寺沙門釋慧皎撰

2. 의해(義解) ①
032_0798_a_03L朱士行一
支孝龍二
康僧淵三
竺法雅四
康法朗五
竺法乘六
竺潛深七
支道林八
于法蘭九
于法開十
于道邃十一
竺法崇十二
竺法義十三
竺僧度十四

1) 주사행(朱士行)
주사행은 영천(穎川) 사람이다. 뜻과 행동이 바르고 곧아서 어떤 기쁨이나 어떤 막음으로도 그 지조를 꺾을 수 없었다. 어려서부터 멀리까지 생각을 품고 깨달아, 티끌세상을 벗어나 출가한 후로는 오로지 경전의 연구에 힘썼다.
032_0798_a_17L朱士行穎川人志業方直勸沮不能移其操少懷遠悟脫落塵俗出家已專務經典
032_0798_b_01L예전 한(漢)나라 영제(靈帝) 때에 축불삭(竺佛朔)이 『도행경(道行經)』을 번역했다. 이는 곧 소품(小品)의 옛 판본으로서 문구가 간략하여 내용의 뜻이 두루 미치지 못하였다. 사행은 일찍이 낙양에서 『도행경』을 강의하였다. 그러다가 문장의 뜻이 잘 드러나지 않고 투박하여, 대체로 미진함을 깨닫고는 매양 탄식하였다.
“이 경은 대승의 요체인데 번역의 이치를 다하지 못하였다. 맹세코 뜻을 세워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멀리 가서 대본(大本)을 구하여야 하겠다.”
032_0798_a_20L昔漢靈之時竺佛朔譯出『道行經』卽『小品』之舊本也文句簡意義未周士行嘗於洛陽講『道行經』覺文章隱質諸未盡善每歎曰經大乘之要而譯理不盡誓志捐身遠求大本
마침내 위(魏)나라 감로(甘露) 5년(257)에 옹주(雍州)를 출발하였다. 서쪽 고비 사막을 지나 우전국(于闐國)에 이르렀다. 과연 범서(梵書)로 된 정본(正本) 90장(章)을 얻었다. 제자인 불여단(不如檀)을불여단은 중국어로 법요(法饒)라는 의미이다. 보내 범본의 불경과 함께 낙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제자가 아직 출발하지 않고 있을 즈음에, 우전국의 소승을 배우는 여러 무리들이 마침내 그곳 왕에게 아뢰었다.
“한나라 땅의 사문이 바라문의 책으로 불법을 미혹하여 어지럽힙니다. 왕은 이 땅의 주인이십니다. 만약 이것을 금지하지 않으면 장차 불법이 끊어져, 한나라는 귀머거리와 소경의 땅처럼 될 것입니다. 이럴 경우 임금님의 허물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자 왕은 경전을 갖고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사행은 깊이 원통한 마음을 품었다. 마침내 경을 태우는 일로 증명해 보이고자 하였다. 왕이 곧 이를 허락하였다. 사행이 궁전 앞에 장작을 쌓아 불태우며, 불 곁에 나아가 서원하였다.
“만약 불법이 한나라 땅에 유통할 것이라면, 불경은 곧 불에 타지 않을 것이다. 그와 같은 가호가 없다면, 이는 운명일 터이니 어찌 하겠는가?”
말을 마치고 경을 불 속에 집어던졌다. 불은 이내 꺼졌는데, 한 글자도 손상되지 않았다. 가죽을 덧댄 책표지[皮牒]도 본래 것과 같았다. 이에 대중들이 놀라고 감복하여 모두 그 신비한 감응을 칭송하였다. 마침내 경전을 진류(陳留) 창원(倉垣)의 수남사(水南寺)로 보낼 수 있었다.
032_0798_b_03L遂以魏甘露五年發迹雍西渡流沙旣至于闐果得梵書正凡九十章遣弟子不如檀此言法送經梵本還歸洛陽未發之頃闐諸小乘學衆遂以白王云漢地沙門欲以婆羅門書惑亂正典王爲地主若不禁之將斷大法聾盲漢地王之咎也王卽不聽齎經士行深懷痛心乃求燒經爲證王卽許焉於是積薪殿以火焚之士行臨火誓曰若大法應流漢地經當不然如其無護命也如何言已投經火中火卽爲滅不損一字牒如本大衆駭服咸稱其神感遂得送至陳留倉恒水南寺

∙축숙란(竺叔蘭)
이때 하남 땅에 축숙란이란 거사가 있었다. 본래는 천축국 사람이다. 아버지 대에 피난을 와서 하남 땅에 거주하였다. 숙란은 어렸을 때 사냥을 좋아하였다. 훗날 잠시 죽었다가 깨어나는 일을 겪고 나서, 두루 업과 과보를 보았다. 이로 인해 생각을 바꾸어, 오로지 정성을 다해 힘써서 깊이 불법을 숭상하였다. 그는 여러 나라 언어를 널리 연구하여, 범어와 중국어에 빼어났다.
032_0798_b_16L時河南居士竺叔蘭本天竺人父世避難居于河南蘭少好遊獵後經暫死備見業因改勵專精深崇正法博究衆音於梵漢之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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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차(無羅叉)
또한 무라차란 승려가 있었다. 서역의 도사로서 옛 서적을 참구하고 배운 것이 많았다. 이들이 곧 손에 범본을 잡으면, 축숙란은 한문으로 번역하였다. 이를 『방광반야경(放光般若經)』이라 부른다. 가죽을 덧댄 책 표지[皮牒]로 된, 옛 원본은 지금 예장(豫章)에 남아 있다.
태안(太安) 2년(303)에 이르러 지효룡(支孝龍)이 축숙란을 찾아갔다. 한꺼번에 다섯 부를 베껴 쓰고 교정하여, 이를 정본으로 삼았다. 당시에는 아직 품목으로 정리되지 않았으므로, 열네 필의 비단에 쓰인 옛 원본은 오늘날의 필사권 20권 분량이다.
032_0798_b_20L又有無羅叉比丘西域道稽古多學乃手執梵本叔蘭譯爲晉文稱爲『放光波若』皮牒故本今在豫章至太安二年支孝龍就叔蘭一時寫五部挍爲定本時未有品目本十四疋縑令寫爲二十卷
사행은 마침내 나이 80세에 우전국에서 세상을 마쳤다. 서방의 법에 의하여 그를 다비하였다. 땔감이 다 타서 불이 꺼졌지만 시신은 오히려 온전하였다. 대중들이 모두 놀라고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곧 주문을 외웠다.
“만약 진실로 득도하셨다면, 법으로 보아 마땅히 시신이 썩어 없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 소리에 응하여 시신이 부스러져 흩어졌다. 이에 뼈를 거두어 탑을 세웠다. 그 후 제자인 법익(法益)이 그 나라에서 돌아와 친히 이 일을 전하였다. 그런 까닭에 손작(孫綽)이 『정상론(正像論)』에서 “사행은 우전국에서 형체를 흩뿌렸다”고 이른 것은, 이것을 두고 한 말이다.
032_0798_c_02L士行遂終於于闐春秋八十依西方法闍維薪盡火滅尸猶能全衆咸驚異呪曰若眞得道法當毀敗應聲碎散因斂骨起塔焉後弟子法益從彼國親傳此事故孫綽『正像論』云士行散形於于闐此之謂也

2) 지효룡(支孝龍)
지효룡은 회양(淮陽)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풍모 있는 자태가 있어 무겁게 여겨졌다. 이에 다시 더하여 고상한 풍채가 탁월하고, 높은 이론이 시대에 적합하였다. 항상 소품(小品)을 펴놓고 음미하면서, 이를 마음의 요체로 삼았다.
진류(陳留)의 완첨(阮瞻), 영천(穎川)의 유개(庾凱)와 나란히 지음(知音)1)의 교류를 맺었다. 세상 사람들이 이들을 8달(達)이라 불렀다. 당시에 혹자가 그를 조롱했다.
“우리 진나라에서 용 같은 천자가 일어나시어[龍興] 천하를 한 집안으로 만드셨네[天下爲家]. 가사와 오랑캐 옷을 벗어버려야 하거늘, 사문은 어찌하여 머리카락과 피부를 온전히 하여 비단을 걸치지 않는 것인가?”
효룡이 말하였다.
“하나(도)를 잡는 것으로써[抱一]2) 소요(逍遙)하고, 오직 적멸로써 정성을 이루고자 합니다. 머리카락을 잘라 모습을 허물고 옷을 바꾸어 형상이 변했다고 하여, 저들은 나를 욕되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저들의 영화를 버렸습니다. 그런 까닭에 고귀함에 무심(無心)하면 할수록 더욱더 귀하고, 풍족함에 무심하면 할수록 더욱더 풍족한 법입니다.”
그의 때맞춘 임기응변은 모두 이와 같았다.
032_0798_c_08L支孝龍淮陽人少以風姿見重加復神彩卓犖高論適時常披味『小品』以爲心要陳留阮瞻穎川庾敳竝結知音之交世人呼爲八達時或嘲之曰大晉龍興天下爲家沙門何不全髮膚去袈裟釋胡服被綾羅龍曰抱一以逍遙唯寂以致誠翦髮毀容改服變彼謂我辱我棄彼榮故無心於貴而愈貴無心於足而愈足矣其機辯適皆此類也
당시 축숙란이 처음으로 『방광반야경』을 번역하였다. 효용은 이미 평소 무상(無相)을 즐기던 터였다. 이에 이를 얻자마자 곧 10여 일 동안 펴서 읽어보고는, 문득 나아가 강의를 열었다. 그 후 그가 어디서 세상을 마쳤는지 모른다.
손작(孫綽)이 찬(贊)하였다.
032_0798_c_18L時竺叔蘭初譯『放光經』龍旣素樂無相得卽披閱旬有餘日便就開講後不知所終矣孫綽爲之贊曰

작고 모난 것은 견주어 보기 쉬우나
크나큰 그릇이란 상상하기조차 어려워라.
굳세고 굳센 님이여,
높고 넓은 곳으로 매진하기에
032_0798_c_21L小方易擬
大器難像
桓桓孝龍
剋邁高廣

중생들이 다투어 삼가 귀의하고
사람들은 사모하여 본받아 우러르네.
찰랑이는 샘물 가득 구름을 담고
난초는 풍성한 향기를 바람에 싣는구나.
032_0798_c_22L物競宗歸
人思效仰
雲泉彌漫
蘭風肸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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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강승연(康僧淵)
강승연은 본래 서역 사람으로 장안에서 태어났다. 모습은 비록 인도 사람이지만 실제로는 중국말을 하였다. 얼굴과 행동이 자상하고 바르며, 뜻과 행동이 넓고 깊었다. 『방광(放光)』ㆍ『도행(道行)』 등 두 반야경을 외웠다. 곧 대품과 소품의 두 경전이다.
032_0798_c_23L康僧淵本西域人生于長安貌雖梵人語實中國容止詳正志業弘深誦『放光』『道行』二『波若』卽『大小品』也

∙강법창(康法暢)ㆍ지민도(支敏度)
진(晋)나라 성제(成帝) 때에 강법창ㆍ지민도 등과 더불어 양자강을 건넜다. 법창도 역시 재주와 생각이 넘쳐 나서 서로 자주 오고가고 하였다. 『인물론(人物論)』과 『시의론(始義論)』 등을 지었다. 법창은 늘 주미(麈尾: 拂子, 털이개)를 손에 쥐고 걸어 다녔다. 이름난 손님을 만날 때마다 청담(淸談)으로 하루해를 다 보냈다. 이에 유원규(庾元規)가 법창에게 말하였다.
“이 털이개를 왜 항상 쥐고 다니는가?”
법창이 말하였다.
“(당신 같이) 청렴한 사람은 갖지 않고, (나 같이) 탐욕스런 사람은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항상 가지고 다니게 된다.”
032_0799_a_03L晉成之與康法暢支敏度等俱過江暢亦有才思善爲往復著『人物』『始義論』等暢常執麈尾行每値名賓輒淸談盡庾元規謂暢曰此麈尾何以常在暢曰廉者不取貪者不與故得常在
지민도도 역시 총명하며 명석하다고 이름이 났었다. 『역경록(譯經錄)』을 지었는데, 지금도 세상에 유행한다.
승연은 비록 덕이 법창과 민도보다 더 높았지만 그들과 달리 청렴하고 검약하게 자처하여 항상 구걸로 생활하였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미처 그를 알지 못하였다.
그 후 어느 날 걸식(乞食)을 하다가 진군(陳郡)의 은호(殷浩)를 만났다. 은호가 처음으로 불경의 심원한 이치에 대해 물었다. 즉각 세속 책의 성정(性情) 같은 내용으로 답하면서, 낮부터 해가 질 때까지 계속하였다. 은호는 그를 굴복시킬 수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그를 다시 보았다.
또 낭야(瑯琊)의 왕무홍(王茂弘)이 코가 높고 눈이 깊다 하여 그를 희롱하였다. 승연은 말하였다.
“코가 얼굴의 산이라면, 눈은 얼굴의 못[淵]이랍니다. 산이 높지 않으면 신령스럽지 못하고, 못이 깊지 않으면 맑지가 않다.”
당시 사람들이 명답이라 여겼다.
032_0799_a_09L 敏度亦聰哲有譽著『譯經錄』今行於世淵雖德愈暢而別以淸約自常乞丐自資人未之識後因分衛之次遇陳郡殷浩浩始問佛經深遠之卻辯俗書性情之義自晝之曛不能屈由是改觀琅瑘王茂弘以鼻高眼深戲之淵曰鼻者面之山眼者面之淵山不高則不靈淵不深則不時人以爲名答
그 후 예장산(豫章山)에 절을 세웠다. 읍과의 거리가 수십 리이다. 강물을 두르고 높은 재를 옆에 끼며, 대나무 숲이 울창하고 무성하였다. 이름난 승려와 뛰어난 달인들이 메아리가 답하듯 달려와 무리를 이루었다.
항상 『심범천경(心梵天經)』을 수지하여, 공의 논리에 그윽하고 원대하였다. 유달리 강설을 잘 하기에, 배움을 숭상하는 문도들이 오가며 가득 찼다. 그 후 그 절에서 세상을 마쳤다.
032_0799_a_17L後於豫章山立寺去邑數十里帶江傍嶺林竹鬱茂僧勝達響附成群以常持『心梵經』理幽遠故偏加講說尚學之徒往還塡委後卒於寺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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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축법아(竺法雅)
법아는 하간(河間: 황하 부근) 사람이다. 올곧고 올바르며 법도와 기량이 있었다. 어려서는 외도의 학문을 좋아하였다. 장성해서는 불교의 논리에 통달하였다. 그러자 의관을 갖춘 선비들이 모두 의지하여 가르침을 받고 명을 받들었다.
당시 그에게 의지한 제자들 모두 세간의 학문을 공부했다. 그러나 불교의 논리는 잘 알지 못하였다. 이에 곧 강법랑(康法朗) 등과 더불어 경전 가운데 나오는 일을 헤아렸다. 이것을 외도의 서적과 짝 맞춰 비교함으로써 이해를 돕는 사례로 삼았다. 이것을 격의(格義)라고 말한다.
032_0799_a_21L法雅河閒人凝正有器度少善外學長通佛義衣冠士子咸附諮稟時依門徒竝世典有功未善佛理雅乃與康法朗等以經中事數擬配外書爲生解之例謂之格義

∙비부(毘浮)ㆍ담상(曇相)
아울러 비부ㆍ담상 등도 역시 격의를 말하여 문도들을 가르쳤다. 법아는 풍채가 깨끗하고 시원하였다. 요점의 해설[樞機]에 뛰어나, 외전과 불경을 번갈아가며 강설하였다. 도안(道安)ㆍ법태(法汰) 등과 더불어 늘 불경을 펼쳐 해석하되, 의문 나는 것을 모아서 함께 경의 요점을 연구하였다.
그 후 고읍(高邑)에 절을 세웠다. 대중 승려가 백여 명에 이르렀으나, 가르쳐 이끄는 일에 게으르지 않았다.
032_0799_b_03L乃毘浮相曇亦辯格義以訓門徒雅風采灑落善於樞機外典佛經遞互講說與道法汱每披釋湊疑共盡經要後立寺於高邑僧衆百餘訓誘無懈

∙담습(曇習)
법아의 제자 담습이 스승을 이어받아, 강론하는 말솜씨가 훌륭하였다. 위조(僞趙)의 태자 석선(石宣)의 존경을 받았다.
032_0799_b_07L雅弟子曇習祖述先師善於言論爲僞趙太子右宣所敬云

5) 강법랑(康法朗)
강법랑은 중산(中山) 사람이다. 어릴 때 출가하여 계율을 절도 있게 잘 지켰다. 한 번은 경을 읽다가 쌍수(雙樹)ㆍ녹원(鹿苑: 鹿野苑)의 부분을 보고는 울적하여 탄식했다.
“내가 과거의 성인이야 만나지 못한다 하지만, 어찌하여 성인께서 계셨던 곳을 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에 맹세코 가이(迦夷: 카필라)로 가서 유적을 우러러보기로 하였다. 곧 같이 공부한 네 사람과 함께 장액(張掖)을 떠나, 서쪽으로 고비 사막을 지났다. 걸어서 사흘이 지나자, 길에는 사람의 자취가 끊어졌다.
홀연히 한 옛 절이 길가에 있는 것을 보았다. 초목이 사람을 덮어 가린, 다 쓰러져 가는 집에 두 칸의 방이 있었다. 방 가운데 각기 한 사람씩 앉아 있었다. 한 사람은 경을 외우고, 한 사람은 이질(痢疾)을 앓았다. 두 사람의 방이 나란히 있으나 서로 돌보지 않았다. 사방에 똥오줌뿐이어서 온 방안이 냄새나고 더러웠다. 법랑이 그의 동료들에게 말하였다.
“출가한 사람은 가는 길이 같아서 불법으로써 친척이 됩니다. 보지 않았으면 모르되, 보고서야 어찌 버려두고 가겠습니까?”
032_0799_b_09L康法朗中山人少出家善戒節嘗讀經見雙樹鹿苑之處鬱而歎曰吾已不値聖人寧可不睹聖處於是誓往迦夷仰瞻遺迹乃共同學四人發迹張掖西過流沙行經三日路絕人蹤忽見道傍有一故寺草木沒人中有敗屋兩閒閒中各有一人一人誦經一人患痢兩人比房不相料理屎尿縱撗擧房臭穢朗謂其屬曰出家同道法爲親不見則已豈可見而捨耶
032_0799_c_01L 법랑은 이에 6일 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씻고 세탁하며 공양하였다. 7일째가 되자 이 방안 전체가 향화(香華)로 꾸며졌다. 이를 보고는 이윽고 그가 신인(神人)임을 깨달았다. 그가 법랑에게 말하였다.
“방은 우리 스승님[和上]의 방입니다. 그 분은 이미 더 이상 배울 게 없는 경지를 터득하신 분입니다. 찾아가 문안을 드리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법랑이 찾아가 문안을 드렸다. 그가 법랑에게 말하였다.
“그대들의 정성이 들어맞아 모두가 곧 도에 들어갈 것이오. 멀리 여러 나라로 떠돌아다닐 필요가 없소. 그러한 일은 무익하오.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 도를 수행하여 시기를 놓치지 말아야 하오. 다만 법랑 그대는 공업(功業)이 작고 정순하지 못하여 아직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하나, 중국[眞丹國]으로 돌아가서는 대법사가 될 것이오.”
이에 네 사람은 다시 더 서쪽으로 가지 않았다. 계속 이곳에 머물면서 오로지 정성을 다하여 도를 닦았다. 오직 법랑만은 다시 여러 나라를 떠돌아다니면서, 경론을 찾아 연구하였다. 그 후 중산(中山)으로 돌아왔다. 제자 수백 명이 불법의 강설을 이어나갔다. 후에 돌아가신 곳을 알지 못한다.
032_0799_b_19L乃停六日爲洗浣供養至第七日此房中皆是香花乃悟其神人因語朗云比房是我和上已得無學可往問訊朗往問訊因語朗云君等誠契皆當入道不須遠遊諸國於事無益唯當自力行道勿令失時但朗功業尚小未純未得所願當還眞丹國作大法於是四人不復西行仍留此專精業道唯朗更遊諸國硏尋經論後還中山門徒數百講法相係後不知所
손작(孫綽)이 찬을 지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아름다운 것과 흠집은 숨길 수 없다고 하지만
법랑은 환히 빛났으나
그 빛남을 숨겼다.
032_0799_c_07L孫綽爲之贊曰
人亦有言
瑜瑕弗
朗公冏冏
能韜其光

끝을 공경히 하되 시작은 신중하며
미세함을 추구하되 빛남을 찾아냈다.
무엇으로써 증명을 삼는가.
서리를 밟으면 얼음이 단단하게 얼 것을 아노라.
032_0799_c_08L敬終愼始
微辯章
何以取證
冰堅履霜

∙영소(令韶)
법랑의 제자 영소는 아버지가 안문(雁門) 사람이다. 성은 여(呂)씨다. 어렸을 때에는 사냥을 즐겼으나, 훗날 발심하여 출가하였다. 법랑을 섬겨 스승으로 삼았다.
생각과 배움에 공이 있었다. 특히 선 수행에 뛰어나서, 입정(入定)할 때마다 혹은 며칠씩 일어나지 않았다. 그 후 유천산(柳泉山)으로 거처를 옮겨 동굴을 뚫고 좌선하였다. 법랑이 세상을 마친 후에는, 나무로 법랑의 상을 조각하여 아침저녁으로 예배하며 섬겼다.
손작(孫綽)이 『정상론(正像論)』에서 “여소(呂韶)가 중산에서 정신을 집중했다”고 한 것은, 곧 이 사람을 말한 것이다.
032_0799_c_09L朗弟子令韶其先鴈門人姓呂少遊獵後發心出家事朗爲師思學有功特善禪每入定或數日不起後移柳泉山穴宴坐朗終後刻木爲像朝夕禮事孫綽『正像論』云呂韶凝神於中山其人也

6) 축법승(竺法乘)
축법승은 어디 사람인지 자세하지 않다. 어려서부터 빼어난 슬기로움으로 훌쩍 뛰어났다. 멀리 비추어 보는 능력이 보통 사람을 뛰어넘었다. 축법호(竺法護)에게 의지하여 사미가 되었다. 맑고 진실한 뜻과 기개가 있어, 법호가 매우 아름답게 여겼다.
법호의 도가 관중(關中) 지방을 덮자, 재산까지 성대하게 불어났다. 당시 장안의 으뜸가는 집안 출신으로 불법을 받들고자 하는 누군가가, 법호의 도덕을 시험해 보려고 하였다. 법호를 찾아가 거짓으로 다급한 사정을 알리고, 돈 20만 냥을 요구하였다. 법승이 당시 열세 살의 나이로 스승의 옆에서 모시다가, 법호가 채 대답하기도 전에 곧 말하였다.
“스승님[和尙]께서는 마음에서 이미 허락하셨습니다.”
032_0799_c_15L竺法乘未詳何人幼而神悟超絕鑑過人依竺法護爲沙彌淸眞有志護甚嘉焉護旣道被關中且資財殷富時長安有甲族欲奉大法試護道德僞往告急求錢二十萬護未答乘年十三侍在師側卽語曰和上意已相許矣
032_0800_a_01L손님이 돌아간 후에 법승이 말하였다.
“이 사람의 얼굴색을 보아하니 실지로 돈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스승님의 도덕이 어떠한지를 관찰하려고 온 것입니다.”
법호가 말하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였다.”
다음날 그 손님은 종중 사람 백여 명을 거느리고 법호를 찾아와 계를 받기를 청하였다. 그러면서 돈을 요구한 것을 사과하였다. 이에 스승과 제자의 이름이 멀고 가까운 곳에 두루 퍼졌다.
032_0799_c_22L客退後乘曰觀此人神色非實求錢將以觀和上道德何如耳護曰吾亦以爲然明日此客率其一宗百餘口詣護請受戒具謝求錢之於是師資名布遐邇
후에 법승은 서쪽 돈황(燉煌)에 이르러, 절을 세워 배우는 이들을 맞아들였다. 몸을 잊고 도를 위하여 가르치면서 게으르지 않았다. 무릇 이리ㆍ승냥이 같이 사나운 족속들의 마음을 바꾸어, 오랑캐 무리들로 하여금 예의를 알게 하였다. 큰 교화가 서쪽 땅에 행해지게 된 것은 법승의 힘이다. 그 후 머물던 절에서 세상을 마쳤다.
032_0800_a_03L乘後西到燉立寺延學忘身爲道誨而不倦使夫豺狼革心戎狄知禮大化西行乘之力也後終於所住
손작은 『도현론(道賢論)』에서 법승을 왕준충(王濬沖)에 비유해 논하였다.
“법승과 안풍(安豊)은 어려서부터 슬기로운 예지력으로 거울처럼 비추었다. 그러니 비록 승려와 속인이라는 차이에도 불구하고, 논두렁 밭두렁 같이 서로 비슷하다 하겠다.”
덕이 높은 선비 계옹(季顒)이 그를 위하여 찬과 전기를 지었다.
032_0800_a_06L孫綽『道賢論』以乘比王濬沖論云法乘安豐少有機悟之鑑雖道俗殊操阡陌可以相准士季顒爲之贊傳

∙축법행(竺法行)ㆍ축법존(竺法存)
법승과 같이 공부한 축법행과 축법존이 있다. 그들도 나란히 산중에 깃들어 지조를 지킨 것으로 당세에 이름이 알려졌다.
032_0800_a_09L乘同學竺法行法存竝山拪履操知名當世矣

7) 축법잠(竺法潛)
법잠의 자(字)는 법심(法深)이다. 왕(王)씨로 낭야(瑯琊) 사람이다. 진(晋)나라 승상 무찬군공(武昌郡公) 왕돈(王敦)의 아우이다. 열여덟 살에 출가하여 중주(中州) 유원진(劉元眞)을 섬겨 스승으로 삼았다. 유원진은 일찍부터 재주와 지혜로서 명성이 있기 때문에 손작이 찬탄했다.
032_0800_a_10L竺潛字法深姓王琅瑘人晉丞相武昌郡公敦之弟也年十八出家事中州劉元眞爲師元眞早有才解之譽故孫綽贊曰

삼가하여 마음을 비우고
어슴푸레 한가롭게 머무름을
그 누가 체득했나.
우리 유원진일세,
032_0800_a_14L索索虛衿
翳翳閑沖
其體之
在我劉公

이야기는 아로새길 만하고
비춤은 어리석은 이를 깨우칠 만하며
가슴 속은 탁 트여
매양 밝아라.
032_0800_a_15L談能彫飾
照足開
懷抱之內
豁爾每融

법잠은 유원진에게 배운 뒤로 경박함과 화려함을 자르고 깎아냈다. 근본을 숭상하고 배움에 힘쓰더니, 미묘한 말로 교화를 일으켜 명성이 서쪽 조정을 적셨다. 그는 풍모와 자태, 용모가 당당하였다.
032_0800_a_16L潛伏膺已後翦削浮華崇本務學微言興化譽洽西朝風姿容貌堂堂如也
스물네 살에 이르자 『법화경』과 『대품』을 강의하였다. 이미 깊은 이해를 쌓아 올렸을 뿐 아니라 강설마저도 훌륭하였다. 그런 까닭에 그의 풍모를 살피고 도를 음미하는 사람이 항상 5백 명을 채웠다.
진(晋) 영가(永嘉) 연간(307~313)의 초기에 난을 피하여 양자강을 건넜다. 중종(中宗) 원제(元帝)ㆍ숙조(肅祖) 명제(明帝)ㆍ승상 왕무홍(王茂弘)ㆍ태위(太尉) 유원규(庾元規) 등이 모두 그의 풍모와 덕을 공경하여 벗으로서 공경하였다.
건무(建武) 태녕(太寧, 317~325) 연간 중에 법잠은 항상 궁전 안에 나막신을 신고 들어왔다. 당시 사람들이 모두 세상 밖의 사람이라 일컬었으니, 그의 덕을 무겁게 여겼기 때문이다.
032_0800_a_18L至年二十講『法華』『大品』旣蘊深解復能善說故觀風味道者常數盈五百晉永嘉初避亂過江中宗元皇及肅祖明帝丞相王茂弘大尉庾元規竝欽其風德而敬焉建武太寧中潛恒著屐至殿時人咸謂方外之士以德重故也
032_0800_b_01L중종ㆍ숙조가 세상을 떠나고 왕무홍ㆍ유원규도 죽자, 마침내 자취를 섬산(剡山)에 숨겨 당시의 세상으로부터 피하였다. 그러나 그의 발자취를 뒤쫓아서 도를 묻는 사람들이 이미 다시 산문에 모여들었다.
법잠은 30여 년 동안 강석을 유유자적하였다. 때로는 대승의 법을 펴기도 하고, 때로는 『노자』와 『장자』를 풀기도 하였다. 투신한 제자 모두가 내전ㆍ외전에 두루 뛰어나지 않은 자가 없었다.
032_0800_b_01L中宗肅祖昇遐庾又薨乃隱迹剡以避當世追蹤問道者已復結旅山門潛優遊講席三十餘載或暢方或釋『老莊』投身北面者莫不內外兼
애제(哀帝, 562~563)가 불법을 좋아하고 존중하였다. 자주 두 명의 사신을 파견하여 정성을 다해 모시기를 청하였다. 법잠은 부름의 뜻이 중하다 하여 잠시 궁궐로 나아갔다. 어전에서 『대품경』을 개강하니, 주상과 조정의 선비들 모두가 훌륭하다고 칭송하였다.
032_0800_b_06L至哀帝好重佛法頻遣兩使慇懃徵請潛以詔旨之重蹔遊宮闕卽於御筵開講『大品』上及朝士竝稱善焉
당시 간문제(簡文帝: 司馬煜)가 재상으로 있었다. 조정과 재야에서는 사실상 그를 군주[至德: 至尊을 뜻함]로 여겼다. 법잠은 승려와 속인의 영수로서 선대의 조정에서는 벗으로 공경하고 존중하였다. 그리하여 읍 받는 예와 절 받는 예를 늘상 겸하였다. 간문제가 왕이 되자 경건히 하는 예가 더욱 도타워졌다.
법잠은 어느 날 간문제의 처소에서 패국공(沛國公) 유담(劉惔)을 만났다. 유담이 조롱하였다.
“도사가 무엇 때문에 붉은 문이 있는 궁전에서 노니는가?”
법잠이 답하였다.
“당신은 붉은 문이라 보십니까? 제가 보기에는 그저 오막살이일 뿐입니다.”
사공(司空) 하차도(何次道)는 아름다운 덕을 지녔다. 순수하고 소박하여 경전을 독실하게 믿었다. 매양 공경하고 숭상하는 마음이 더해서 스승과 제자로서의 예를 따랐다. 그러더니 자주 초청하여 여러 번 법사를 일으켰다.
032_0800_b_08L于時簡文作相朝野以爲至德以潛是道俗摽領又先朝友敬尊重挹服頂戴兼常迄乎龍飛虔禮彌篤潛嘗於簡文處遇沛國劉惔惔嘲之曰何以遊朱門潛曰君自睹其朱門貧道見爲蓬戶司空何次道懿德純篤信經典每加祇崇遵以師資之數相招請屢興法祀
법잠은 비록 그들을 따라 다시 동서로 움직였지만, 마음속으로 이것을 즐거워하지 않았다.
마침내 나라에 아뢰고 섬주(剡州)의 앙산(仰山)으로 돌아와, 그가 먼저 가졌던 뜻을 이루었다. 여기에서 숲과 언덕을 소요하다가 남은 여생을 마쳤다. 이때 지둔(支遁)이 심부름꾼을 보내, 앙산 옆에 있는 옥주(沃州)의 작은 산을 사서 고요히 머물 곳으로 삼고자 하였다. 법잠이 대답하였다.
“오려고만 한다면 곧 주겠습니다. 어찌 소유(巢由: 上古時代의 仙人)가 산을 사서 은둔한다는 말을 듣겠습니까?”
032_0800_b_16L潛雖復從運東西而素懷不樂乃啓還剡之仰山遂其先志於是逍遙林阜以畢餘年支遁遣使求買仰山之側沃洲小嶺欲爲幽拪之處潛答云欲來輒給聞巢由買山而隱遁
032_0800_c_01L지둔은 뒤에 어떤 고구려(高句麗) 도인에게 편지를 보냈다.
“상좌(上座) 축법심은 중주(中州) 유원진의 제자입니다. 체득한 덕이 곧고 우뚝하여 도인과 속인을 모두 다스립니다. 지난날 서울에서 불법의 기강을 유지하여, 나라 전체에서 모두 우러르는 도를 넓히신 뛰어난 분입니다.
근자에 도업이 더욱 깨끗해져서 티끌세상의 더러움을 참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방을 산 속 물가에 꾸며 덕을 닦으면서 한가로이 지내자 생각하셨습니다. 지금은 섬현(剡縣)의 앙산에 계십니다. 같이 노니는 이들과 함께 도의를 논설하십니다. 조용히 사는 삶이 하도 깨끗하여, 멀거나 가깝거나 모두들 영탄합니다.”
032_0800_b_21L後與高麗道人書云上座竺法深中州劉公之弟子德貞峙道俗綸綜往在京邑維持法內外具瞻弘道之匠也頃以道業靖濟不耐塵俗考室山澤修德就閑今在剡縣之仰山率合同遊論道說高拪皓然遐邇有詠
진의 영강(寧康) 2년(374)에 앙산의 집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89세이다.
열종(烈宗) 효무제(孝武帝)가 조서를 내렸다.
“법심 법사는 진리를 깨닫고 마음을 멀리 비우며, 거울 같은 풍모로서 맑고 곧았다. 재상의 영화를 버리고 물들인 옷의 검소함을 이어받아, 인간 세상 밖의 산에 살면서 독실하고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않았다. 바야흐로 그가 펼친 도에 힘입어 창생을 구제하려 하였다. 갑자기 돌아가시니 가슴이 아프다. 돈 10만 냥을 부조한다. 급히 말을 달려 보내도록 하라.”
또 손작은 법잠을 유백륜(劉伯倫)에 비유해 논하였다.
“법잠은 도의 소양이 깊고 무거우며 원대한 기량(器量)이 있었다. 유령(劉伶, 유백륜)은 방탕하게 뜻을 멋대로 하여 우주를 작다고 여겼다. 비록 속세를 떠나 조용히 사는 일에서는 유령이 미치지 못하지만, 넓고 큰 바탕의 면에서는 같다고 하겠다.”
032_0800_c_04L以晉寧康二卒於山館春秋八十有九烈宗孝武詔曰深法師理悟虛遠風鑑淸貞棄宰相之榮襲染衣之素山居人外篤勤匪懈方賴宣道以濟蒼生奄然遷化用痛于懷可賻錢十萬星馳驛孫綽以深比劉伯倫論云深公道素淵重有遠大之量劉伶肆意放蕩以宇宙爲小雖高拪之業劉所不及而曠大之體同焉

∙축법우(竺法友)
당시 앙산에는 또한 축법우가 있었다. 의지가 굳세고 행동이 바르며 뭇 경전에 널리 뛰어났다. 어느 날 법잠에게서 아비담(阿毘曇)을 받았다. 하룻밤 만에 곧 이를 외웠다. 이에 법잠이 말하였다.
“한번 눈을 거친 것을 외우다니, 옛날 사람들에게도 칭찬받을 일이다. 만약 부처님께서 다시 이곳에서 불법을 일으키신다면, 반드시 너를 5백 나한의 하나로 삼으리라.”
스물네 살 때 곧 강설을 할 수 있었다. 그 후 섬현성 남쪽에 대사(臺寺)를 세웠다.
032_0800_c_13L時仰山復有竺法志業强正博通衆典嘗從深受『阿毘曇』一宿便誦深曰經目則諷見稱昔人若能仁更興大晉者必取汝爲五百之一也年二十四便能講說後立剡縣城南臺寺焉

∙축법온(竺法蘊)
축법온은 깨달음과 슬기로운 이해력으로 그윽한 경지에 들어간 사람이다. 『방광반야경(放光般若經)』에 더욱 빼어났다.
032_0800_c_18L竺法蘊悟解入玄尤善『放光波若』

∙강법식(康法識)
강법식도 역시 의학(義學)의 공부가 있었다. 또한 초서(草書)와 예서로 이름이 알려졌다. 어느 날 강흔(康昕)을 만났다. 강흔은 스스로 서예에서는 법식을 능가한다고 말하였다. 이에 법식과 강흔은 각기 왕우군(王右軍: 王羲之)의 초서를 썼다. 옆 사람이 훔쳐서 돈벌이를 하려 했다. 그러나 누구의 것인지 구별할 수가 없었다. 또 많은 경을 베껴 썼는데, 매우 중하게 여겨졌다.
032_0800_c_19L康法識亦有義學之而以草隸知名嘗遇康昕昕自謂筆道過識識共昕各作右軍草傍人竊以爲貨莫之能別又寫衆經甚見重之
032_0801_a_01L
∙축법제(竺法濟)
축법제는 어릴 때부터 글 짓는 재주가 있어 『고일사문전(高逸沙門傳)』을 지었다. 무릇 이러한 여러 사람들 모두가 법잠의 제자들이다. 손작은 이들을 위하여 나란히 찬을 지었으나, 다시 갖추어 적지는 않겠다.
032_0800_c_22L竺法濟幼有才藻作『高逸沙門傳』此諸人皆潛之神足孫綽竝爲之贊不復具抄

8) 지둔(支遁)
지둔의 자는 도림(道林)이다. 관(關)씨로 진류(陳留) 사람이다. 혹은 하동(河東)의 임려(林慮) 사람이라고도 한다.
어릴 때부터 신통한 이치가 있고 총명함이 몹시 빼어났다. 처음 서울에 이르자 태원왕(太原王) 사마몽(司馬濛)이 그를 매우 중히 여겨 말하였다.
“미묘한 경지에 이른 공부는 재상감으로도 손색이 없다.”
032_0801_a_02L支遁字道林本姓關氏陳留人或云河東林慮人幼有神理聰明秀徹至京師太原王濛甚重之造微之不減輔嗣
진군(陳郡)의 은융(殷融)이 일찍이 위개(衛玠)와 교류하였다. 그러면서 위개의 정신의 빼어남은 후진으로서 아무도 그를 이을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지둔을 만나자 다시 위개와 같은 사람을 만났다고 탄식하였다.
집안 대대로 부처를 섬겼으며, 어려서부터 비상한 이치를 깨달았다. 여항산(餘杭山)에 은거하여 도행품(道行品)에 대해 깊이 사유하고, 『혜인경(慧印經)』을 자세히 공부하였다. 우뚝하니 홀로 빼어나 스스로 하늘의 뜻을 터득했다.
032_0801_a_06L陳郡殷融嘗與衛玠交謂其神情儁徹後進莫有繼之者及見遁歎息以爲重見若人家世事早悟非常之理隱居餘杭山深思『道行』之品委曲慧印之經卓焉獨拔得自天心
스물다섯 살에 출가하여 강의하는 곳에 이를 때마다 근본적인 가르침을 잘 드러냈다. 그러나 문장 구절을 간혹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었다. 당시 글만을 고수하는 사람들에게 거칠다고 평가받았다. 사안(謝安)이 이 소식을 듣고 훌륭하게 여겨 말하였다.
“이것은 곧 구방인(九方堙)이 말의 관상을 보는 일과 같다. 병들어 피로한 말은 버리되, 그 중에서 뛰어나고 빠른 말을 취하는 것이다.”
왕흡(王洽)ㆍ유회(劉恢)ㆍ은호(殷浩)ㆍ허순(許詢)ㆍ극초(郄超)ㆍ손작(孫綽)ㆍ환언표(桓彦表)ㆍ왕경인(王敬仁)ㆍ하차도(何次道)ㆍ왕문도(王文度)ㆍ사장하(謝長遐)ㆍ원언백(袁彦伯) 등은 당대의 이름난 사람들이다. 모두가 속세를 벗어난 허물없는 사귐을 나눈다고 알려졌다.
032_0801_a_11L年二十五出家每至講肆善標宗會而章句或有所遺時爲守文者所陋謝安聞而善之此乃九方堙之相馬也略其玄黃而取其駿王洽劉恢殷浩許詢郗超孫綽彦表王敬仁何次道王文度謝長遐袁彦伯等竝一代名流皆著塵外之
지둔이 백마사(白馬寺)에 있을 때이다. 유계지(劉系之) 등과 『장자』의 「소요편(逍遙篇)」을 담론하였다. 어느 날 유계지가 말하였다.
“각기 성품에 맞게 하는 것이 소요하고 생각한다.”
지둔이 말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무릇 걸(桀)과 도척(盜跖)은 목숨을 잔혹하게 해치는 성품이었습니다. 만약 성품에 맞게 하는 것이 소요라면, 저들 또한 소요하는 것이 됩니다.”
이에 물러나서 「소요편」에 주석을 달았다. 이때에 오랫동안 공부한 유생들이 탄복하지 않음이 없었다.
032_0801_a_18L遁嘗在白馬寺與劉系之等談『莊子ㆍ逍遙篇』云各適性以爲逍遙遁曰不然夫桀跖以殘害爲性若適性爲得者彼亦逍遙矣於是退而注『逍遙篇』群儒舊學莫不歎服
032_0801_b_01L그 후 오(吳: 江蘇省)로 돌아와 지산사(支山寺)를 세웠다. 만년에 섬현(剡縣)으로 들어가고자 하였다. 사안(謝安)이 오흥(吳興)의 태수(太守)가 되어 지둔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대를 그리워하는 날들이 쌓이고 쌓여, 때를 헤아리고 마음을 기울여서 기다렸습니다. 그렇거늘 섬현으로 돌아가 스스로를 다스리려 하신다니 몹시 원망스럽기만 합니다. 인생이란 잠시 깃드는 것일 뿐인지라, 근자엔 풍류를 마음껏 즐기는 일조차 거의 다한 듯합니다. 종일토록 근심스럽기만 하고, 하는 일마다 실망하여 탄식할 따름입니다.
오직 기다림은 그대가 오시어 툭 터놓고 이야기하여 시름을 푸는 일입니다. 하루가 천년이 흐르는 것 같군요. 이곳은 대부분 산마을인지라, 한가하고 고요하며 병을 치료할 만한 곳입니다. 일이야 어디라고 섬현과 다르겠습니까만은 의약품에서 같지 않습니다. 반드시 이런저런 인연을 생각해서, 쌓이고 쌓인 저의 그리는 정을 이루어주셨으면 합니다.”
032_0801_a_22L後還吳立支山晚欲入剡謝安爲吳興與遁書曰思君日積計辰傾遲知欲還剡自治以悵然人生如寄耳頃風流得意之事殆爲都盡終日慼慼觸事惆悵唯遲君來以晤言消之一日當千載耳多山縣閑靜差可養疾事不異剡醫藥不同必思此緣副其積想也
왕희지는 당시 회계(會稽) 태수로 있었다. 평소 지둔의 명성을 들었다. 그러나 아직 믿지 않아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한 차례 지나가는 기운이니, 무어 말할게 있겠는가?”
그 후 지둔이 섬현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우군(于郡)을 경유하였다. 이때 왕희지는 짐짓 지둔을 찾아가 그의 감화력을 살펴보았다. 지둔에게 이르자 왕희지는 말하였다.
“「소요편」에 대해 들려줄 수 있겠는가?”
지둔은 곧 수천 어구의 글을 지어 새로운 이치를 펴서 드러내었다. 글 짓는 솜씨가 놀랍고 절묘하였다. 왕희지는 마침내 옷깃을 열고 허리띠를 풀었다. 지둔에게 정신이 팔려 돌아가기를 잊었으나, 그만 둘 수 없었다. 이어 영가사(靈嘉寺)에 주석하기를 청하니, 가까이에 두고 싶어서였다.
032_0801_b_06L羲之時在會稽素聞遁名未之信人曰一往之氣何足言後遁旣還剡經由于郡王故詣遁觀其風力旣至謂遁曰『逍遙篇』可得聞乎遁乃作數千言摽揭新理才藻驚絕王遂披衿解帶流連不能已仍請住靈嘉寺存相近
얼마 안 되어 다시 자취를 섬산으로 돌려 옥주(沃州)의 작은 잿마루에 절을 세워 도를 행하였다. 백여 명에 달하는 대중 승려가 늘 따르며 가르침을 받았다. 때로 혹 게으름을 피우는 사람도 있었다. 지둔은 이에 좌우명을 지어 이들에게 힘쓰도록 하였다.
032_0801_b_13L俄又投迹剡山於沃洲小嶺立寺行道僧衆百餘常隨稟學時或有墯者遁乃著『座右銘』以勖之

부지런할지어다, 부지런할지어다.
지극한 도란 채워지는 것이 아니다.
어찌하여 쉬고 머뭇거리어
신기함을 약하게 하여 잃게 하는가.
032_0801_b_15L之勤之
至道非彌
奚爲淹滯
弱喪神

아득한 삼계에
오래도록 길이 시달려서
번뇌의 고달픔은 밖에서 모여들건만
어두운 마음은 안으로만 치달린다.
032_0801_b_17L茫茫三界
眇眇長羈
煩勞外湊
心內馳

죽을 각오로 내달려 목마르게 흠모하면
아무리 아득해도 피로조차 잊는다.
인간의 한 세상은
떨어지는 이슬방울과 같다.
032_0801_b_18L殉赴欽渴
緬邈忘疲
人生一
涓若露垂

나의 몸도 나의 것이 아니니
누가 베푼다는 말인가.
덕을 품은 달인은
편안함이 반드시 위태로운 것임을 안다.
032_0801_b_19L我身非我
云云誰施
人懷德
知安必危

고요하게 맑은 거동으로
번뇌를 참선의 연못에서 씻어내라.
삼가하여 밝은 금계를 지켜서
우아하게 계율을 즐겨야 한다.
032_0801_b_20L寂寥淸擧
濯累禪
謹守明禁
雅翫玄規

신묘한 도리에 마음을 편안히 하며
함이 없는 경지에 뜻을 높이도록 하라.
세 가지 가림을 가라앉혀 맑게 하고
여섯 가지 허물을 무르녹여 단련하라.
032_0801_b_21L綏心神道
志無爲
寮朗三蔽
融冶六疵

다섯 요소를 이룬 우리네 몸은 공한 것으로
우리네 사지도 텅 빈 것이라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킨다고 하여 손가락을 비유한 것은 아니니
끊되 떠나지 말아라.
032_0801_b_22L空同五
豁虛四支
非指喩指
絕而莫離

미묘한 깨달음을 이미 베풀었으니
더욱 더 그 앎을 그윽하게 하라.
변화에 따라 그대로 맡겨
남과 더불어 옮겨가라.
032_0801_b_23L覺旣陳
又玄其知
婉轉平任
與物推
032_0801_c_01L
앞으로는
생각하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아라.
이를 도탑게 한 이가 깨달음의 어버이니
갓난아기처럼 되도록 뜻을 두어라.
032_0801_c_02L過此以往
勿思勿議
敦之覺父
在嬰兒
당시의 여론은 지둔의 재능이 세상을 경영하는 백성을 구제할 만한데도, 자신을 깨끗이 하려 세속에서 벗어나, 자신과 함께 남을 구제하는 일을 겸하는 겸인(兼人)의 도리에 어긋남이 있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지둔이 이에 『석몽론(釋矇論)』을 지었다.
032_0801_c_03L時論以遁才堪經贊而潔己拔俗有違兼濟之道遁乃作『釋矇論』
만년에는 석성산(石城山)으로 거처를 옮겨 다시 서광사(棲光寺)를 세웠다. 산문(山門)에서 좌선[宴坐]하여 마음을 선의 뜻에서 노닐고, 나무열매를 먹고 개울물을 마셨다. 뜻은 더 이상의 태어남이 없는 경지에서 물결쳤다.
이어 안반(安般: 數息)과 4선(禪)에 관한 여러 경전과 『즉색유현론(卽色遊玄論)』ㆍ『성불변지론(聖不辯知論)』ㆍ『도행지귀(道行旨歸)』ㆍ『학도계(學道誡)』 등의 책에 주석을 달았다. 이는 마명(馬鳴)의 발자취를 따른 것이자, 용수(龍樹)의 그림자를 밟아 오른 것이다. 이치가 법의 근본과 호응하여 실상과 어긋나지 않았다.
032_0801_c_04L晚移石城山又立拪光寺宴坐山門遊心禪苑木喰㵎飮浪志無生乃注『安般』『四禪』諸經及『卽色遊玄論』『聖不辯知論』『道行旨歸』『學道誡』等追蹤馬躡影龍樹義應法本不違實相
만년에는 산음(山陰)으로 나와서 『유마경』을 강의하였다. 지둔이 법사가 되고 허순(許詢)이 도강(都講)이 되었다. 지둔이 한 논리를 화통하면, 대중들은 허순이 문제점을 제기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다시 허순이 한 질문을 마련하면, 대중들은 또한 지둔이 회통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강론이 끝날 때까지 두 사람의 논리는 다하지 않았다.
무릇 법문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말하였다.
“소상하게 지둔의 종지를 터득했다.”
그러나 돌아가 스스로 설명하기를 두세 번 하노라면, 도리어 문득 어지러웠다.
032_0801_c_09L出山陰講『維摩經』遁爲法師許詢爲都講遁通一義衆人咸謂詢無以厝詢設一難亦謂遁不復能通如此至竟兩家不竭凡在聽者咸謂審得遁迴令自說得兩三反便亂
진(晋)의 애제(哀帝)가 즉위하였다. 그러자 자주 두 명의 사신을 파견하여 초청하므로 서울로 나갔다. 동안사(東安寺)에 머물면서 『도행반야경(道行般若經)』을 강의하였다. 승려와 속인이 함께 공경하고 숭배하였다. 조정과 재야에서도 기뻐 감복하였다.
태원왕(太原王) 사마몽(司馬濛)은 일찍부터 정밀한 논리를 구축한 사람이다. 그런데 자기의 재주 넘친 글을 가려내어 수백 어구의 글을 만들고는, 스스로 생각하였다.
‘지둔이 겨를 수 없을 것이다.’
지둔을 찾아갔다. 지둔이 그것을 보고 천천히 말하였다.
“제가 당신과 헤어진 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의 말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사마몽이 부끄러워하며 물러나서 곧 감탄하였다.
“참으로 승려의 왕이다. 어찌 내가 겨룰 수 있겠는가?”
032_0801_c_14L至晉哀帝卽位頻遣兩使徵請出都止東安寺講『道行波若』白黑欽崇朝野悅服原王濛宿搆精理撰其才詞往詣遁作數百語自謂遁莫能抗遁乃徐曰道與君別來多年君語了不長進慚而退焉乃歎曰實緇鉢之王何也
032_0802_a_01L극초(郄超)가 사안(謝安)에게 물었다.
“지둔의 말솜씨를 혜중산(嵇中散)과 비교하면 어떠한가?”
사안이 말하였다.
“혜중산은 노력해야 겨우 쫓아갈 수 있을 뿐이지.”
극초가 다시 물었다.
“은호(殷浩)와 비교하면 어떠한가?”
사안이 말하였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논변에서는 아마도 은호가 지둔을 누르겠지. 그렇지만 솟구쳐 뛰어넘어 곧 바로 연원에 이르려는 점에서는, 은호가 참으로 부끄러움이 있을 것이다.”
그 후 극초는 벗에게 편지를 보냈다.
“지둔 법사는 신령한 이치에 뛰어나고 그윽한 경지에 빼어나서 홀로 깨달은 분일세. 참으로 수백 년 이래의 불법을 이어 밝혀, 진리를 끊어지지 않게 한 불법의 제왕이라네.”
032_0801_c_20L郗超問謝安林公談何如嵆中散嵆努力裁得去耳又問何如殷浩亹亹論辯恐殷制支超拔直上淵源浩實有慚德郗超後與親友書云法師神理所通玄拔獨悟實數百年紹明大法令眞理不絕一人而已
지둔이 서울에 오랫동안 머물러 3년을 넘어서려 하자, 이에 동산(東山)으로 돌아갔다. 황제에게 글을 올려 하직 인사를 아뢰었다.
“지둔이 머리를 조아려 아뢰옵니다. 감히 재능 없는 사람이 바깥세상의 스승이 되려는 바람을 품었습니다. 그러나 미처 후진들을 채찍질하지 못하여, 신령한 다스림에 허물만 남겼습니다.
무릇 사문(沙門)의 길[義]에서의 법이란 부처님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순수함을 조각하면 질박함에 어긋나므로, 욕망을 끊어 종문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텅 비어 그윽한 거리에서 노닐며, 안으로는 성인의 법칙을 지켜서 5계(戒)의 곧음을 가슴에 달고, 밖으로는 임금님의 다스림을 돕습니다. 소리 없는 음악으로 조화롭게 하되, 스스로의 깨달음으로 화음을 이루어서, 자애로운 효도를 도탑게 하여, 꿈틀거리는 중생들에게 상해가 없게 합니다.
032_0802_a_03L淹留京師涉將三載乃還東山上書告辭曰遁頓首言敢以不才希風世未能鞭後用愆靈化蓋沙門之義法出佛聖彫純反朴絕欲歸宗遊虛玄之肆守內聖之則佩五戒之貞外王之化諧無聲之樂以自得爲和慈愛之孝蠕動無傷
어루만지며 구휼하는 애절한 마음을 머금고, 길이 어질지 못한 일을 슬퍼합니다. 조짐이 나타나지 않는 순리(順理)를 잡고, 멀리 숙명(宿命)의 재앙을 막습니다. 더 이상의 자리가 없는 경지의 절개를 끌어안고, 항(亢: 極上)의 땅을 밟아도 후회하지 않습니다.3)
이 때문에 어진 임금은 왕의 자리의 무거움에 나아가서 높은 절개를 공경하고, 뛰어난 법도로 편안히 합니다. 순리의 마음을 더듬어서 형식적인 공경을 생략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어받은 시대를 더욱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032_0802_a_10L銜無恤之哀悼不仁秉未兆之順遠防宿命挹無位之節履亢不悔是以哲王御南面之重莫不欽其風尚安其逸軌探其順心略其形敬故令歷代彌新矣
폐하께옵선 하늘이 성스러운 덕을 모아주신 데다, 우아하고 고상하여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도리를 신령한 규범에서 노닐어 해가 기울도록 돌아갈 것을 잊습니다. 이른바 새벽의 종과 북소리가 지극하듯이, 명성이 천하를 떨치어 맑은 교화의 바람이 이미 높으므로, 몹시 다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러러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수명을 하늘땅과 같이 하여 널리 지극한 교화를 떨치십시오. 진부한 믿음의 요망하고 거짓됨을 제거하여, 공자를 위해 기도한 드넓은 논의를 찾으십시오. 좁은 길에서 진흙 묻히는 일을 끊어, 평탄한 길에서 크나큰 말고삐를 떨치소서.
032_0802_a_14L下天鍾聖德雅尚不倦道遊靈摸昃忘御可謂鍾鼓晨極聲振天下風旣邵莫不幸甚上願陛下齊齡二弘敷至化去陳信之妖誣尋丘禱之弘議絕小塗之致泥奮宏轡於夷
032_0802_b_01L그리하시면 태산은 계씨의 산신 제사로 더렵혀지지 않고서도, 하나(도)를 얻어서 신령스러움을 이룹니다. 왕자는 둥근 언덕이 아닌 곳에서 하늘 제사를 지내지 않고서도, 하나(도)를 얻어서 길이 올곧습니다.4) 만약 올곧음과 신령스러움이 각각 하나(도)로써 사람(왕자)과 신(태산)이 서로를 잊는다면, 임금은 임금다워서 아래로 몸소 거동하는 일이 없으려니와, 신은 신다워서 주술로써 신령스러움을 더하지 않습니다. 왕자와 신의 그윽한 덕이 서로를 덮어주어 백성들이 그윽한 돌봄에 힘입고, 넓고 넓은 우주가 상서로운 집을 이룬다면, 크고도 큰 우리나라가 천도를 이루는 공간이 될 것입니다.
늘상 함이 없어야 만물이 근본으로 돌아가고,5) 크나큰 형상을 잡아야 천하가 저절로 찾아듭니다.6) 나라 법에는 형벌과 살육을 담당하는 관리가 있습니다. 만약 살려주되 그것이 베풂 때문이 아니라면, 상 받는 사람은 스스로 얻습니다. 만약 죽이되 그것이 노여움 때문이 아니라면, 벌받는 사람은 스스로 받을 것입니다. 관청을 넓혀서 귀신의 생각을 꺼려하고, 인사권을 공개하여 그윽한 도량을 지극히 하십시오. 그러신다면, 공자의 이른바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던가? 사계절이 흘러가는구나!(天何言哉 四時行焉)’가 될 것입니다.
032_0802_a_20L若然者太山不淫季氏之旅得一以成靈王者非圓丘而不禋得一以永貞若使貞靈各一人神相忘君而下無親擧神神而呪不加靈德交被民荷冥祐恢恢六合成吉祥之宅洋洋大晉爲元亨之宇常無爲而萬物歸宗執大象而天下自往典刑殺則有司存焉若生而非惠則賞者自得戮而非怒則罰者自刑弘公器以厭神意提詮衡以極冥量所謂天何言哉四時行焉
빈도는 동산(東山)의 들에 숨어살며 세상의 영화와 달리하여, 긴 언덕의 푸성귀를 먹고 맑게 흐르는 계곡물로 양치질하며 지냈습니다. 남루한 옷을 입고 세상을 떠나려 하여, 황제의 섬돌 엿보기를 끊었사옵니다. 모르는 사이에 천자의 빛이 곡진하게 비추어, 외람되이 오막살이집까지 미쳐, 자주 밝으신 조서를 받들어 서울로 올라오게 하셨습니다. 나아가거나 물러가거나 어찌 할 수도 없어 몸둘 바를 알지 못했습니다.
궁정에 이른 이래 누차 이끌어주심에 힘입었습니다. 빈객의 예로써 넉넉하게 대하시고, 미묘한 말씀으로 격려해 주셨습니다. 매양 부끄럽게도 재능이 막힌 곳을 뚫지 못하고, 논리는 새로움을 취하지 못하였습니다. 폐하의 그윽한 계획에 대답하여 그 뜻을 널리 백성에게 알리거나, 보고 들은 것을 성실하게 거짓 없이 하기에는 부족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옆에서 모시면서 조심하고 삼갔으나, 흐르는 땀이 자리를 적셨습니다.
그 옛날 상산의 네 늙은이[商山四皓]는 한 고조 유방에게 나아갔고, 단간목(段干木)은 위문후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었습니다. 모두가 물러가고 나아감에 알맞은 때가 있었으니, 묵묵히 말하지 않더라도 임금과 신하 간에 서로 뜻이 어울렸습니다.
032_0802_b_07L貧道野逸東山與世異榮菜蔬長阜漱流淸壑襤縷畢世絕窺皇階不悟乾光曲曜猥被蓬蓽頻奉明詔使詣上京進退惟谷不知所厝自到天道屢蒙引見優以賓禮策以微言每愧才不拔滯理無拘新不足對楊玄摸允塞視聽踧踖侍人流汗位席曩四翁赴漢干木蕃皆出處有時默語適會
이제 덕은 옛 분들과 다르고 동정도 진심에서 어긋나, 궁궐에 온통 정신을 기울여서 황제를 선동합니다. 근거 아닌 것으로 지쳐버리니, 어떻게 할 만한 정치[有爲之治]를 하겠습니까? ‘아, 세월이 빠르게 흘러감이 이와 같구나!’ 하는 탄식이 나옵니다. 하물며 다시 뜻을 같이 한 동지들이 한가롭게 살면서 멀고 넓게 빠짐없이 익히니, 고개를 빼어들어 동쪽을 돌아보며 그리워함에, 누군들 품은 생각이 없겠습니까?
우러러 원하옵건대 이제 폐하께옵서 저를 내쳐 놓아주시는 은택을 내려주십시오. 숲으로 돌아가 새답게 새를 기르게 하여 주신다면, 그 입은 은혜가 두터울 것입니다. 삼가 봉하지 않은 글로써 아뢰어, 어리석고 좁은 소견을 말씀드립니다. 양식을 싸서 꾸려 놓고, 길을 바라보며 엎드려 자애하신 조서(詔書)를 기다립니다.”
조서를 내려 곧 이를 허락하여 노자를 지급하고, 사신을 보내서 일마다 풍성한 후대를 하였다. 당대의 이름난 인사를 모두가 떠나는 길에서 송별연을 베풀어 떠나보냈다.
032_0802_b_15L今德非昔動靜乖哀遊魂禁省鼓言帝側困非據何能有爲且歲月僶俛感若斯之歎況復同志索居綜習遼落首東顧孰能無懷上願陛下時蒙放歸之林薄以鳥養鳥所荷爲優露板以聞申其愚管裹糧望路伏待慈詔詔卽許焉資給發遣事事豐厚一時名流竝餞離於征虜
032_0802_c_01L채자숙(蔡子叔)이 먼저 와서 지둔 가까이에 앉아 있었다. 사안석(謝安石)은 뒤에 이르렀다. 채자숙이 잠깐 일어난 사이에 사안석이 곧 자리를 옮겨 그곳에 앉았다. 채자숙이 돌아와서는 요와 함께 사안석을 들어올려 땅바닥에 팽개쳤다. 그러나 사안석은 개의하지 않았다. 당시 명현들이 그를 사모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032_0802_b_23L蔡子叔前至近遁而坐謝萬石後至値蔡蹔起謝便移就其處蔡還合褥擧謝擲地謝不以介意其爲時賢所慕如此
이윽고 섬산(剡山)에서 자취를 거두어 숲 우거진 물가에서 목숨을 마쳤다.
어떤 사람이 한번은 지둔에게 말을 보내 주었다. 지둔이 이를 거두어 길렀다. 당시 혹 이 일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에 지둔은 말하였다.
“그 뛰어나고 빠름을 사랑하여 잠시 기를 따름이오.”
그 후 어떤 사람이 학을 선물로 보내 왔다. 이때 지둔이 학에게 말하였다.
“너는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생물이다. 그렇거늘 어찌 사람들의 귀와 눈의 노리개가 될 수 있겠느냐?”
그리고는 마침내 이를 놓아주었다. 지둔이 어릴 때의 일이다. 스승과 함께 사물의 종류를 논하다가, 계란은 날로 먹어도 살생이라 할 만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스승도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이어 스승이 죽은 뒤, 홀연히 스승의 형상이 나타나서 달걀을 땅에 집어던졌다. 껍질이 깨지면서 병아리가 걸어 나왔다가 잠깐 사이에 모두 사라졌다. 지둔은 곧 깨닫고, 이로 말미암아 몸을 마치도록 푸성귀만 먹었다.
032_0802_c_03L旣而收迹剡山畢命林澤人嘗有遺遁馬者遁愛而養之或有譏之者遁曰愛其神駿聊復畜耳後有餉鶴者遁謂鶴曰爾沖天之物寧爲耳目之翫乎遂放之幼時嘗與師共論物類謂鷄卵生用未足爲殺師不能屈師尋亡忽見形投卵於地㲉破雛行頃之俱滅遁乃感悟由是蔬食終身
지둔은 전에 여요(餘姚)의 오산(塢山)을 지나다 그곳에 머물렀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오히려 오중(塢中)으로 되돌아갔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어보자 그가 대답하였다.
“사안(謝安)이 예전에 자주 찾아와 만나면 곧 열흘씩 이곳에서 보냈소. 지금 감정에 부딪쳐 눈을 들어 바라보는 것마다 그때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없군요.”
그 후 병이 심해지자 오중으로 돌아갔다. 진(晋)의 태화 원년(366) 윤4월 4일에 머물던 곳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53세이다. 곧 오중(塢中)에 묻었다. 아직 그 무덤이 남아 있다. 혹 어떤 사람은 섬주에서 죽었다고 하지만 아직 자세하지 않다.
032_0802_c_11L遁先經餘姚塢山中住至於名辰猶還塢中或問其答云謝安在昔數來見輒移旬日今觸情擧目莫不興想後病甚移還塢中以晉太和元年閏四月四日于所住春秋五十有三卽窆於塢中厥塚存焉或云終剡未詳
그를 위하여 극초(郄超)는 서전(序傳)을 지었고, 원굉(袁宏)은 명찬(銘贊)을 지었으며, 주담보(周曇寶)는 조문을 지었다. 손작의 『도현론(道賢論)』에는 지둔을 바로 상자기(向子期)에 견주어 표현하였다.
“지둔과 상수(向秀)는 장자와 노자를 숭상했다. 두 사람의 시대는 다르나 현담을 즐긴 기풍은 같다고 하겠다.”
032_0802_c_17L郗超爲之序傳袁宏爲之銘贊周曇寶爲之作孫綽『道賢論』以遁方向子期論云支遁向秀雅尚『莊老』二子異時風好玄同矣
032_0803_a_01L또한 『유도론(喩道論)』에서 전한다.
“지둔은 의식이 맑고 바탕이 순하여 남을 상대하지 않았다. 현묘한 도가 깊고 성하여 정신과 더불어 맡은 바를 다하였다. 이것이 유학에 힘쓴 먼 곳의 무리들이 근본에 돌아가게 된 이유이자, 유유자적한 도가의 사람들이 깨닫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다.”
훗날 덕이 높은 선비인 대규(戴逵)가 길을 가다가 지둔의 묘 앞을 지나가다가 탄식하였다.
“덕스런 소리가 아직 멀어지지 않았거늘 아름드리 나무가 이미 무성하구나. 바라건대 신통한 이치가 면면히 이어져서, 기운과 함께 다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오.”
032_0802_c_21L又『喩道論』云支道林者識淸體順而不對於物玄道沖濟與神情同任此遠流之所以歸宗悠悠者所以未悟也後高士戴逵行經遁墓歎曰德音未遠而拱木已繁冀神理緜緜不與氣運俱盡耳

∙지법건(支法虔)
지둔과 함께 공부한 법건(法虔)은 이론에 정밀하게 뛰어나 입신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지둔보다 먼저 죽었다. 지둔이 탄식하였다.
“예전에 장석(匠石)7)은 자귀질을 영인(郢人)에게서 그만두었고, 아생(牙生: 伯牙)은 종자기가 죽자 거문고 줄을 끊었다. 자기를 미루어서 남에게 미친다는 것은 참으로 허튼 것이 아니다. 보배롭게 사귄 벗이 이미 사라졌구나. 말을 해도 완상해 줄 사람이 없으니, 마음속에 답답한 것이 맺혀 나도 죽을 것이다.”
이에 절오장(切悟章)을 짓다가 죽음에 즈음하여 완성하였다. 붓을 떨어뜨리면서 세상을 마쳤다. 무릇 지둔이 지은 시문은 열 권으로 모아져 세간에 성행된다.
032_0803_a_02L遁有同學法虔精理入神先遁亡遁歎曰昔匠石廢斥於郢人牙生輟弦於鍾子推己求良不虛矣寶契旣潛發言莫賞中心蘊結余其亡矣乃著『切悟章』臨亡成落筆而卒凡遁所著文翰集有十盛行於世

∙축법앙(竺法仰)
당시 동쪽 땅에 또 축법앙이 있었다. 지혜로운 이해력으로 세상에 알려져서 왕탄(王坦)이 소중히 여겼다. 죽은 뒤에 오히려 형상을 드러내어 왕탄을 찾아가 행실을 도왔다.
032_0803_a_08L時土復有竺法仰者慧解致聞爲王坦之所重亡後猶見詣王勖以行業焉

9) 우법란(于法蘭)
우법란은 고양(高陽)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남다른 지조가 있었다. 열다섯 살에 출가하였다. 곧 부지런하게 정진하여 경전을 연구하고 외웠다. 밤낮으로 법을 구하고 도를 물음에 있어서 반드시 대중보다 앞섰다.
스무 살에 이르자 풍채가 빼어나게 뛰어났다. 도를 3하(河)8)에 떨쳐서 이름이 사방 먼 곳까지 유포되었다. 성품이 산천을 좋아하여 대부분 산 동굴에 머물렀다.
어느 겨울철, 산에 있을 때 얼음과 눈보라가 매우 사나웠다. 이때 호랑이 한 마리가 법란의 방에 들어왔으나, 법란은 얼굴빛에 거부감이 없었다. 호랑이도 매우 순종하더니, 이튿날 눈이 그치자 곧 떠났다.
또한 산중의 신(神)들도 항상 찾아와 법을 받았다. 그의 덕이 정령(精靈)들에게까지 미치는 것이 모두 이러하였다.
032_0803_a_10L于法蘭高陽人少有異操十五出家便以精勤爲業硏諷經典以日兼夜求法問道必在衆先迄在冠年風神秀逸道振三河名流四遠性好山泉多處巖壑嘗於冬月在山冰雪甚厲時有一虎來入蘭房蘭神色無忤虎亦甚馴至明旦雪止乃去山中神常來受法其德被精靈皆此類也
032_0803_b_01L그 후 강남의 산수(山水)로는 섬현(剡縣)이 가장 기이하다는 말을 들었다. 곧 천천히 동구(東甌)를 걸어서 멀리 우승산(嶀嵊山)이 바라보이는 석성산(石城山) 발치에 머물렀다. 지금의 원화사(元華寺)가 그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그의 감화력을 유원규(庾元規)에 비유하였다. 손작(孫綽)의 『도현론(道賢論)』에는 그를 완사종(阮嗣宗)9)과 비교하여 논했다.
“법란이 남긴 묘한 자취는 매우 고상하여 거의 지인(至人)10)의 무리이다. 완보병(阮步兵)은 홀로 오만하여 무리 짓지 않았으니, 또한 법란과 짝한다 하겠다.”
섬현에 머문 지 얼마 안 되어 상심하여 탄식했다.
“불법이 비록 일어났지만 불경의 도리에 빠진 것이 많구나. 만약 한 번만이라도 원만한 가르침을 들을 수 있다면 저녁에 죽더라도 좋으리라.”
이에 멀리 서역으로 가서 남다른 가르침을 구하려고 하였다. 교주(交州)에 이르러 병이 들어 상림(象林)에서 세상을 마쳤다.
지둔(支遁)이 뒤쫓아가서 그의 상(像)을 세우고 찬(贊)을 지었다.
032_0803_a_18L後聞江東山水剡縣稱奇乃徐步東遠矚嶀嵊居于石城山足今之元華寺是也時人以其風力比庾元規綽『道賢論』以比阮嗣宗論云蘭公遺高尚妙迹殆至人之流阮步兵傲獨不群亦蘭之儔也居剡少時欻然歎大法雖興經道多闕若一聞圓教夕死可也乃遠適西域欲求異聞至交州遇疾終於象林沙門支遁追立像贊曰

법란은 세속을 초월하여
현묘한 종지[玄旨]를 빠짐없이 체득하고
아름답게 산택에 숨어
호랑이ㆍ외뿔소를 두루 길들였다.
032_0803_b_05L于氏超世
綜體玄旨
嘉遁山澤
馴洽虎兕

별전에 이르기를, “법란도 감응하여 마른 샘에서 물로 양치질하였다. 그 일은 법호(法護)와 같다”라 하였다. 그러나 아직 자세하지 않다.
032_0803_b_06L別傳云蘭亦感枯泉漱水與竺法護同未詳

∙축법흥(竺法興)ㆍ지법연(支法淵)ㆍ우법도(于法道)
이 밖에 또 축법흥ㆍ지법연ㆍ우법도 등이 법란과 같은 시대에 살았으며, 덕이 비슷하였다. 법흥은 견문이 넓은 것으로 이름이 알려지고, 법연은 빛나는 재주로 칭송되며, 법도는 논리의 해석으로 명성을 날렸다.
032_0803_b_07L又有竺法興支法于法道與蘭同時比德興以洽見知名淵以才華著稱道以義解馳聲矣

10) 우법개(于法開)
법개는 어디 사람인지 모른다. 우법란을 섬겨 제자가 되었다. 깊은 생각이 외롭게 일어나 고유한 견해를 말로 드러냈다. 『방광반야경』과 『법화경』에 빼어났다. 또한 기바(耆婆: 醫神)를 이어받아 오묘하게 의술에 뛰어났다.
어느 날 걸식을 하다가 한 집에 투숙하였다. 주인의 부인이 자리에 누워 병이 위급하였다. 온갖 치료로도 효험이 없어 온 집안이 당황하고 어지러웠다. 법개가 이르기를 “이 병은 쉽게 치료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주인은 바로 양(羊)을 죽여서 잡신(雜神)에게 제사를 올리려 하였다.
법개가 주인을 시켜 먼저 양고기를 조금 가지고 국을 끓여서 병자에게 주었다. 그런 다음에 그 기운을 타고서 침을 놓았다. 잠깐 사이에 양의 얇은 꺼풀에 아기가 쌓여서 나왔다.
032_0803_b_10L于法開不知何許人事蘭公爲弟子深思孤發獨見言表善『放光』及『法華』又祖述耆婆妙通醫法嘗乞食投主人家値婦人在草危急衆治不驗家遑擾開曰此易治耳主人正宰羊欲爲淫祀開令先取少肉爲羹進竟因氣鍼之須臾羊膜裹兒而出
승평 5년(361)에는 효종(孝宗)황제가 병에 걸렸다. 법개가 맥을 짚었다. 그는 황제가 일어나지 못할 것을 알고, 다시는 들어가기를 기꺼워하지 않았다. 강헌(康獻) 황후가 명령하였다.
“황제께서 몸이 조금 좋지 않아 법개를 불러 맥을 짚어보게 하였다. 그랬더니 다만 문에 이르러 앞으로 나오지 않으면서 온갖 말로 기피하는구나. 마땅히 정위(廷尉)에게 넘겨 벌을 내리도록 하여라.”
갑자기 황제가 죽어서 죄를 면하였다. 섬현(剡縣)의 석성산으로 돌아왔다. 스승의 뒤를 이어 원화사(元華寺)를 수축하였다.
그 후 백산(白山)의 영취사(靈鷲寺)로 옮겨 늘 지도림(支道林: 支遁)과 색(色)과 공(空)의 의미를 다투었다. 이들의 논쟁에 여강(廬江)의 하묵(何黙)이 법개의 비판을 밝게 펼치고, 고평(高平)의 극초(郄超)가 도림의 해답을 잘 풀었다. 나란히 세간에 전한다.
032_0803_b_17L平五年孝宗有疾開視脈知不起肯復入康獻后令曰帝小不佳昨呼于公視脈旦到門不前種種辭憚收付廷尉俄而帝崩獲免還剡石城續修元華寺後移白山靈鷲寺每與支道林爭卽色空義廬江何默申明開難高平郗超宣述林解竝傳於世
032_0803_c_01L
∙우법위(于法威)
법개의 제자 법위(法威)는 맑고 총명하여 핵심을 찌르는 말솜씨가 있었다. 그런 까닭에 손작이 그를 찬하였다.
032_0803_c_01L開有弟子法威淸悟有樞辯故孫綽爲之贊曰

『주역』에서는 한백(翰白)11)을 찬양하고
『시전(詩傳)』에서는 빈조(蘋藻: 문장)를 찬미하네.
희고 날쌘 얼룩말이 마당에 있듯이
큰 비가 멈춘 때의 향기가 나는 듯하구나.
032_0803_c_03L易曰翰白
詩美蘋藻
班如在場
芬若停潦

법위(法威: 于威)의 밝은 깨우침은
견고하여 멀리서도 검토하니
깨끗한 그 명예를
그리워함에 부끄러움이 없어라.
032_0803_c_04L于威明發
介然遐討
有潔其名
無愧懷抱

법개가 어느 날 법위를 시켜, 서울을 벗어나 지둔이 『소품반야경(小品般若經: 道行經)』을 강론하는 산음(山陰)을 지나가게 하였다. 법개가 법위에게 일러두었다.
“도림의 강의는 네가 그곳에 이를 무렵에 어느 품(品)에 이를 것이다. 내가 가르쳐 준 말로 수십 번에 걸쳐 공박하고 논란하여라. 이 품에 있는 것은 예전에도 통하기 어려웠던 대목이다.”
법위가 그 고을에 이르자 바로 지둔의 강의를 만났다. 과연 법개의 말과 같았다. 여러 번 질의와 응답을 주고받았다. 마침내 지둔이 굴복하였다. 지둔은 이로 인해 성난 목소리로 말하였다.
“그대는 얼마만큼 반복해야 만족하겠는가? 누군가의 부탁을 받아서 온 것인가?”
그러므로 동산(東山)의 속담에 전한다.
“위없는 기량의 법심(法深: 竺法灒), 독창적 생각의 우법개(于法開), 절륜한 말솜씨의 도림(道林: 支遁), 놀라운 기억력의 식스님12).”
032_0803_c_05L開嘗使威出都經過山陰支遁正講『小品』開語威言道林講比汝至當至某品中示語攻難數十番此中舊難通威旣至郡正値遁講果如開言往復多番遁遂因厲聲曰君何足復受人寄載來故東山喭云深量開思林談識記
애제(哀帝) 때에 여러 번 부름을 받았다. 마침내 서울로 나가서 『방광반야경』을 강의하였다. 모든 옛 불경 번역[舊學]에서 품었던 의문들이 그로 인하여 풀어지지 않은 것이 없었다. 강의를 마치고 동산으로 하직하여 돌아왔다. 황제가 그의 덕을 그리워하여, 정중하게 돈과 비단 및 가마와 겨울ㆍ여름 옷들을 선물로 보냈다. 사안(謝安)과 왕문도(王文度) 등도 모두 좋은 친구가 되었다.
어떤 사람이 물었다.
“법사께서는 덕이 높고 밝으며 굳세고 대범하십니다. 그런데도 무엇 때문에 의술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계십니까?”
법개가 대답하였다.
“6육바라밀을 밝혀 네 가지 마구니의 병을 제거하고, 아홉 가지 조짐을 조리하여 풍한(風寒)의 병을 치료합니다. 이것은 자신에게도 이롭고 다른 사람도 이롭게 합니다. 그러니 또한 괜찮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60세에 산사에서 세상을 마쳤다. 손작이 그를 가리켜 말하였다.
“재주 있는 말솜씨로 종횡하고, 몇 가지 술법으로 널리 가르침을 편 것은, 법개공에게 달려 있던 일이어라.”
032_0803_c_11L至哀帝時累被詔徵乃出京講『放光經』凡舊學抱疑莫不因之披釋講竟還東山帝戀德慇懃䞋錢絹及步輿幷冬夏之服謝安王文度悉皆友善或問法師高明剛簡何以醫術經懷答曰明六度以除四魔之病調九候以療風寒之疾自利利人不亦可乎年六十卒於山寺孫綽爲之目曰辯縱撗以數術弘教其在開公乎
032_0804_a_01L
11) 우도수(于道邃)
도수는 돈황(燉煌) 사람이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숙부가 그를 양육하였다. 도수는 효도와 공경으로 정성을 다하여, 마치 친어머니를 받들듯이 하였다. 열여섯 살에 출가하여 법란(法蘭)을 섬기고 제자가 되었다.
학업이 고명하여 내외의 전적을 해박하게 열람하였다. 의방과 약업[方藥]에 훌륭하며 서찰(書札)을 아름답게 썼다. 다른 풍속들을 훤하게 외우고, 더욱이 담론에 솜씨가 있었다. 법호가 항상 칭송하였다.
“도수는 고상하고 간결하며 우아하고 소박하여, 옛 어진 분들[고인]의 기풍이 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바야흐로 불법의 대들보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후 법란과 더불어 양자강을 건너니, 사경서(謝慶緖)가 크게 미루어 중히 여겼다.
성품이 산과 시내를 좋아하여 동쪽에 있을 때, 대부분의 이름난 산을 노닐어 밟았다. 사람됨이 비방과 칭송에 개의하지 않으며, 세속과 가까이 할 뜻을 가슴에 품은 적이 없었다.
그 후 법란을 따라 서역(西域)으로 가다가 교지(交趾)에서 병에 걸려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가 31세이다.
032_0803_c_20L于道邃燉煌人少而失蔭叔親養之邃孝敬竭誠若奉其母至年十六出事蘭公爲弟子學業高明內外該善方藥美書扎洞諳殊俗尤巧談護公常稱邃高簡雅素有古人之若不無方爲大法梁棟矣後與簡公俱過江謝慶緖大相推重性好山在東多遊履名山爲人不屑毀譽未嘗以塵近經抱後隨蘭適西域交阯遇疾而終春秋三十有一矣
극초(郄超)가 그의 형상을 그림으로 그렸고, 지둔이 비명(碑銘)을 지어 찬양하였다.

영명하고 영명한 상인(上人)이시여,
지식은 뛰어나고 이론은 맑아라.
밝은 바탕은 옥같이 아름답고
덕스런 말씀은 난초처럼 향기로워라.
032_0804_a_07L超圖寫其形支遁著銘贊曰
英英上
識通理淸
朗質玉瑩
德音蘭馨

손작은 도수를 완함(阮咸)과 비교하였다. 어떤 사람이 이에 대해 말하였다.
“완함은 여러 번 벼슬을 한 허물이 있고, 도수는 맑고 투명하다는 명성이 있습니다. 그렇거늘 어떻게 짝이 됩니까?”
손작이 말하였다.
“비록 자취에서는 우묵한 구덩이와 높은 땅으로 비교되는 차이가 있다. 그렇지만 고상한 기풍에서는 같다.”
『유도론(喩道論)』에 전한다.
“근간 낙양에 축법행이 있다. 담론자들은 그를 악령(樂令)에 견준다. 강남에 우도수가 있다. 알만한 이들은 그를 뛰어난 부류로 상대한다. 모두가 당시에 함께 보고들은 것으로, 동료들이 사사로이 칭찬한 말이 아니다.”
032_0804_a_09L孫綽以邃比阮咸或曰咸有累騎之譏邃有淸冷之譽何得爲疋孫綽曰雖迹有窪高風一也『喩道論』云近洛中有竺法談者以方樂令江南有于道邃者以對勝流皆當時共所見聞非同志之私譽也

12) 축법숭(竺法崇)
법숭은 어디 사람인지 자세하지 않다. 어려서 도에 들어와 계율로써 절도를 지켜 칭찬을 받았다. 게다가 민첩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여, 뜻을 경전의 기억에 두텁게 두었다. 더욱이 법화 일승의 가르침[法華一敎]에 뛰어났다.
일찍이 상주(湘州)의 녹산(麓山)을 노닐 때에, 산의 정령[山精]이 부인으로 나타났다. 법숭을 찾아와 수계(受戒)를 청하고는, 머물던 산을 희사하여 절로 사용하게 하였다. 법숭이 머물러 조금 지나자, 교화가 상주 땅을 두루 적셨다.
그 후 섬현(剡縣)의 갈현산(葛峴山)으로 돌아왔다. 초가집 암자에서 개울물을 마시며, 선정(禪定)의 지혜로 기쁨을 취하였다. 동구(東甌)의 학자들이 다투어 찾아와 모여들었다.
032_0804_a_15L竺法崇未詳何人少入道以戒節見加又敏而好學篤志經記而尤長『法華』一教嘗遊湘州麓山山精化爲夫人詣崇請戒捨所住山以爲寺居之少時化洽湘土後還剡之葛峴茅庵㵎飮取欣禪慧東甌學者競往湊焉
노국(魯國)의 은둔하는 선비 공순지(孔淳之)와 만나, 해가 다하도록 즐거이 노닐었다. 문득 이틀 밤을 묵으면 다시 돌아갈 것을 잊었다. 마음을 열어 몰록 들어맞으면 스스로 마음에 꼭 맞는 사귐이라 생각하였다. 이에 법숭은 한탄하였다.
032_0804_a_22L與隱士魯國孔淳之相遇每盤遊極日輒信宿忘歸披衿頓契以爲得意之交也崇迺歎曰
032_0804_b_01L
생각을 인간 세상 밖으로 멀리한 지
30여 년이건만
일산을 기울여 머리를 맞댈 벗을 만나다니
늙음이 이르는 것도 알지 못하는구나.
032_0804_b_01L緬想人
三十餘年
傾蓋于茲
不覺老之將

그 후 공순지와 이별하여 떠돌았다. 법숭이 시를 읊었다.

호연지기(浩然之氣)는
아직도 마음과 눈에 남아 있거늘
산림의 선비는
가더니 돌아오지 않누나.
032_0804_b_03L後淳之別遊崇詠曰
皓然之氣
猶在心目
山林之士
往而不反

이 시는 이와 같은 사람(공순지)을 일컬은 것이다.
법숭은 후에 산중에서 세상을 마쳤다. 『법화의소(法華義疏)』 네 권을 지었다고 한다.
032_0804_b_04L其若人之謂崇後卒於山中著『法華義疏』四卷

∙석도보(釋道寶)
당시 섬현의 동쪽 앙산에 석도보가 있었다. 성은 왕(王)씨이며, 낭야 사람이다. 진(晋)의 재상인 왕도(王導)의 아우이다. 어린 나이에 불법을 믿고 깨달아, 세상을 피해서 영화를 마다하였다. 친구들이 충고하며 말렸으나 제지할 수 없었다. 향기로운 탕에서 목욕하고, 곧 나아가 머리카락을 깎으려 하였다. 이때 시를 지어 읊었다.

만 리의 강물이 처음에는 술잔에 넘치는
작은 물에서 시작된 것임을 어찌 알랴?

후에 그는 배움의 행실로 세상에 드러났다.
032_0804_b_06L時剡東仰山復有釋道寶者本姓王琅瑘人晉丞相道之弟弱年信悟世辭榮親舊諫止莫之能制香湯澡將就下髮乃詠曰
安知萬里水
發濫觴時
後以學行顯焉

13) 축법의(竺法義)
법의는 어디 사람인지 자세하지 않다. 열세 살 때 법심(法深)을 만나 문득 물었다.
“어질음과 이로움[仁利]은 군자가 행하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공자님께서는 무슨 까닭에 거의 말씀을 하지 않았습니까?”
법심이 말하였다.
“사람으로서 잘 행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에, 거의 말씀하시지 않은 것이다.”
법심은 그가 어리지만 뛰어나게 총명한 것을 보고 출가하기를 권유하였다. 이에 불문에 뜻을 깃들여 법심으로부터 배움을 받았다. 많은 경전을 섭렵하였다. 특히 『법화경』에 뛰어났다.
그 후 법심을 하직하여 서울을 떠나 다시 크게 강석을 열었다. 왕도(王導)와 공부(孔敷) 등도 모두 가르침을 따라 벗으로서 공경하였다.
032_0804_b_10L竺法義未詳何許人年十三遇深公便問仁利是君子所行孔丘何故罕深曰物尟能行是故罕言深見其幼而穎悟勸令出家於是拪志法從深受學遊刃衆典尤善『法花』辭深出京復大開講席王導孔敷竝承風敬友
진(晋)의 흥녕(興寧) 연간(363~365)에 이르러 다시 강남으로 돌아와, 시영(始寧)의 보산(保山)에서 쉬었다. 수업하는 제자가 항상 백여 명이었다.
함안(咸安) 2년(372)에 이르러 문득 심기(心氣)에 질병을 느끼자, 항상 생각을 관세음보살에 두었다. 어느 날 꿈에 한 사람이 나타났다. 배를 가르고 창자를 꺼내 씻어주었다. 꿈을 깨니 곧 병이 나았다. 부량(傅亮)은 늘 말하였다.
“나의 아버지가 법의와 교류하시던 곳에서는, 매양 관세음보살의 신령한 이적을 설법하는 것을 들었다.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숙연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032_0804_b_17L至晉興寧中更還江左憩于始寧之保山受業弟子常有百至咸安二年忽感心氣疾病常存念觀音乃夢見一人破腹洗腸覺便病愈傅亮每云吾先君與義公遊處每聞說觀音神異莫不大小肅然
032_0804_c_01L진(晋)의 영강(寧康) 3년(375) 효무(孝武)황제가 사신을 보내, 오시기를 청하였다. 서울로 나가 강설하였다.
진의 태원(太元) 5년(380) 서울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74세이다. 이에 10만 냥으로 신정강(新亭崗)을 사서 묘지로 삼고, 3층의 탑을 세웠다. 법의의 제자인 담상(曇爽)이 묘소에 절을 세워 신정정사(新亭精舍)라 이름하였다.
그 후 송(宋: 南北朝 때의 前宋) 효무제(孝武帝, 454~465)가 남쪽으로 내려와 간흉을 토벌하였다. 황제의 깃발을 이곳에 멈추고서 이 절을 임시 궁전으로 삼았다. 효무제가 제왕의 자리를 선양받아 등극하자, 다시 선당(禪堂)에 행차하여 이곳을 개척하였다. 절 이름을 중흥사(中興寺)로 고쳤다. 그런 까닭에 원가(元嘉, 424~453) 말엽의 동요에 이르기를, “전당(錢塘)에서 천자가 나왔다”고 한 것은 곧 이 선당을 가리킨 말이다. 그런 까닭에 중흥사의 선방에는 아직도 용비전(龍飛殿)이 있다. 지금의 천안사(天安寺)가 그곳이다.
032_0804_b_22L寧康三年孝武皇帝遣使徵請出都講說晉太元五年卒於都春秋七十有四矣帝以錢十萬買新亭岡爲墓起塔三級義弟子曇爽於墓所立寺因名新亭精舍後宋孝武南下伐凶鑾旆至止式宮此寺及登禪復幸禪堂因爲開拓改曰中興故元嘉末童謠錢唐出天子乃禪堂之謂故中興禪房猶有龍飛殿焉今之天安是也

14) 축승도(竺僧度)
승도의 성은 왕(王)씨로 이름은 희(晞)이다. 자는 현종(玄宗)이고 동완(東莞) 사람이다. 비록 어릴 때는 매우 보잘것없는 집안에서 자랐으나, 타고난 자태가 빼어났다. 열여섯 살이 되자 정신이 시원하고 빼어나서 남다르게 뛰어났다. 성품과 도량이 온화하여 고을과 이웃 사람들이 부러워하였다.
당시에 홀로 어머니와 살면서 효성으로 섬기고 예를 다하였다. 같은 고을의 양덕신(楊德愼)의 딸에게 구혼하였다. 양덕신의 딸 역시 양반집의 규수로 이름은 소화(苕華)라 하였다. 용모가 단정하고 또한 고전공부도 잘하였다. 승도와 나이가 같았으므로 구혼한 날에 곧 서로의 결혼을 허락하였다. 미처 예식을 치루기 전에 소화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얼마 되지 않아 그녀의 아버지 또한 죽고, 승도의 어머니 역시 돌아가셨다.
이에 승도는 마침내 세상의 무상함을 보고, 문득 느끼어 깨달은 바 있어, 곧 속세를 버리고 출가하였다. 이름을 승도라 바꾸고서, 속세 밖으로 자취를 옮겨 땅을 피해 유학하였다.
032_0804_c_08L竺僧度姓王名晞字玄宗東莞人也雖少出孤微而天姿秀發至年十六神情爽拔卓爾異人性度溫和鄕鄰所羡時獨與母居孝事盡禮求同郡楊德愼女亦乃衣冠家人女字苕華容貌端正又善墳籍與度同年求婚之日卽相許焉未及成禮苕華母亡苕華父又亡庶母亦卒度遂睹世代無常忽然感悟乃捨俗出家改名僧迹抗塵表避地遊學
이에 소화는 부모상을 마치고 스스로 생각하였다.
‘여인이 좇는 세 가지 길[三從之義]에서 홀로 서는 도리란 없다.’
곧 승도에게 편지를 보냈다.
“우리 몸의 터럭이나 피부조차 다치거나 훼손시켜서는 안 되거니와, 종실의 제사를 갑자기 지내지 않아도 안 됩니다. 당신으로 하여금 세간의 가르침을 돌아보게 하고, 먼 뜻을 바꾸어 우뚝이 빛나는 자태를 성대하게 하여, 밝은 세상에 빛나게 하고자 합니다. 멀게는 조상들의 혼령을 편안히 쉬게 하고, 가깝게는 사람과 신들의 소원을 풀어 위로하고자 합니다.”
아울러 다섯 수의 시를 그에게 보냈다. 첫 수의 시는 다음과 같다.
032_0804_c_18L苕華服畢惟三從之義無獨立之道乃與度書髮膚不可傷毀宗祀不可頓廢其顧世教改遠志曜翹爍之姿於盛明之世遠休祖考之靈近慰人情之願幷贈詩五首其一篇曰

크나큰 도리는 스스로 끝없고
하늘땅은 길고도 오래 가며
거대한 바위는 소멸되기 어렵고
겨자씨 또한 헤아리기 어려워요.
032_0804_c_23L大道自無窮
地長且久
巨石故叵消
芥子亦難數
032_0805_a_01L
사람이 한 세간에 태어남은
회오리바람이 창문 사이를 지나는 것과 같아서
부귀영화가 어찌 무성하지 않으리오만
아침저녁 사이에 시들고 썩어가지요.
032_0805_a_01L人生一世閒
飄忽若過牖
榮華豈不
日夕就彫朽

냇가에서 시를 읊조리다
해 저물 녘 술병 두드리는 일 생각만 해도
맑은 소리 귀를 간지럽히고
기름진 맛 입에 달라붙지요.
032_0805_a_03L川上有餘吟
日斜思鼓缶
淸音可娛耳
滋味可適口

비단옷으로 몸을 치장하고
멋진 갓으로 머리를 꾸밀 수 있거늘
어찌 머리를 깎고 수염을 깎아
텅 빈 것에 탐닉하여 있는 것을 해치시나요.
032_0805_a_04L羅紈可飾軀
華冠可曜首
安事自翦削
空以害有

저의 구구한 정 때문이 아니라
그대가 후세를 구휼케 하려구요.
不道妾區區
但令君恤後

이에 승도는 답서를 보냈다.
“무릇 임금을 섬겨서 한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도를 넓혀서 만방을 제도하는 일만 같지 못하오. 어버이를 편안히 모셔 한 집안을 이루는 것은 도를 널리 펴서 삼계를 제도하는 것만 같지 못하오. 신체발부를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세속에서나 가까이 하는 말일 뿐이라오. 다만 나의 덕이 멀리 미치지 못하여 아직 두루 덮을 수 없으니 이것이 부끄러울 따름이오.
그러나 한 삼태기의 흙이 쌓여서 산을 이루는 것처럼, 또한 미약한 것에서부터 드러나기를 바랄 뿐이오. 이에 가사를 걸치고 석장을 잡고서, 맑은 물을 마시고 반야를 읊는 것이오. 비록 제후의 옷을 입고 여덟 가지 맛있는 반찬을 갖추어 먹으며, 황홀한 악기 소리를 듣고 휘황찬란한 빛깔을 드러내며 산다 할지라도, 뜻을 바꾸지는 않겠소.
만약 지난날의 약속에 매달린다면 곧 함께 열반을 기약할 뿐이라오. 또한 사람의 마음이 각기 다른 것은 그 얼굴이 각기 다른 것과 같듯이, 그대가 도를 즐기지 않는 것은 마치 내가 속세를 그리워하지 않는 것과 같소.
032_0805_a_06L度答書曰夫事君以治一國未若弘道以濟萬邦安親以成一家未若弘道以濟三界髮膚不毀俗中之近言但吾德不及遠未能兼被以此爲然積簣成山亦冀從微之著也披袈裟振錫杖飮淸流詠『波若』雖公王之服八珍之膳鏗鏘之聲暐曄之不與易也若能懸契則同期於泥洹矣且人心各異有若其面卿之不樂道猶我之不慕俗矣
양씨여, 길이 이별하여 긴긴 전생의 인연을 이제는 끊소! 이 해도 저물어가고 시간은 나와 함께 하지 않는구려. 도를 배우는 사람은 나날이 덜어내는 것으로 뜻을 삼아야만 하고, 세속에 머무는 사람은 때맞추어 힘써야 하오.
그대는 나이와 덕이 모두 한창 때이니, 마땅히 사모하는 사람을 빨리 찾아야 할 것이오. 도사에게 마음을 뺏겨 좋은 시절을 놓쳐서는 안 되오.”
032_0805_a_16L楊氏長別離萬世因緣於今絕矣歲聿云暮不我與學道者當以日損爲志處世者當以及時爲務卿年德竝茂宜速有所慕莫以道士經心而坐失盛年
다섯 수의 시를 지어 여자의 시에 회답하였다. 그 첫 수의 시는 다음과 같다.

기회건 시운이건 멈추어 주지 않고
눈 깜짝할 사이 세월은 지나가며
큰 바위도 다할 때를 만나니
겨자씨도 어찌 많다 하겠소.
032_0805_a_21L又報詩五篇其一首曰
機運無停
儵忽歲時過
巨石會當竭
芥子豈云多

참으로 가는 것은 쉬지 않으므로
시냇가에서 탄식하였다오.13)
듣지 못했소, 영계기(榮啓期)가
흰머리가 되어서도 맑은 노래 부른 것을.
032_0805_a_23L良由去不息
故令川上嗟
不聞榮啓期
皓首發淸歌
032_0805_b_01L
무명옷으로 따뜻하거늘
누가 비단 치장을 따지겠소.
금세에는 비록 즐겁다 하더라도
다음 생에는 어찌할 것이오.
032_0805_b_01L布衣可暖身
論飾綾羅
今世雖云樂
當奈後生何

죄와 복은 참으로 자신으로 말미암는 것
어찌 남을 구휼한단 말이오.
032_0805_b_02L罪福良由己
寧云己恤他

승도의 품은 뜻이 돌처럼 견고하여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소화도 느끼고, 역시 깊은 믿음이 일어났다. 이에 승도는 오로지 정성을 불법에 쏟아 많은 경전을 펴서 음미하였다. 『비담지귀(毘曇旨歸)』란 책을 지었으며, 이 또한 세상에 유행한다. 그 후 어디에서 세상을 마쳤는지 모른다.
032_0805_b_03L度旣志懷匪石不可迴轉苕華感悟亦起深信度於是專精佛法披味群經著『毘曇旨歸』亦行於世後不知所終

∙축혜초(竺慧超)
당시 하내(河內) 지방에 또 축혜초가 있었다. 역시 행실과 지혜를 겸비하여 드러냈다. 덕 높은 선비인 안문(雁門)의 주속지(周續之)와 좋은 벗으로, 『승만경(勝鬘經)』을 주해하였다.
032_0805_b_06L時河內又有竺慧超者亦行解兼著與高士鴈門周續之友善注『勝鬘經』焉
高僧傳卷第四
乙巳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1. 1)백아(伯牙)가 타는 거문고 소리를 듣고 그 악상(樂想)을 일일이 알아 맞혔다는 종자기(鍾子期)와의 고사에서 나온 말로 자기의 마음을 잘 알아주는 친한 벗을 일컫는 말.
  2. 2)하나를 잡는 것으로써 천하의 기준을 삼는다(抱一爲天下式, 『老子』 22장).
  3. 3)『주역(周易)』 「건괘(乾卦)」, 상구(上九)의 효사(爻辭)에 항룡유회(亢龍有悔)란 말이 있는데, 여기서는 이를 역(逆)으로 이항무회(履亢無悔)라 한 것이다.
  4. 4)예로부터 하나(도)를 얻은 것이 있더라. 하늘은 하나를 얻어서 맑고, 땅은 하나를 얻어서 편안하고, 신은 하나를 얻어서 신령하고, 골짜기는 하나를 얻어서 가득하고, 만물은 하나를 얻어서 낳고, 제후나 왕은 하나를 얻어서 올곧게 하니, 이러한 모든 것이 이르는 곳은 하나이다. (『노자』 39장)
  5. 5)도는 늘 하는 것이어서 함이 없으면서도 하지 않음이 없다. 제후나 왕이 이를 지킬 수 있다면 만물이 절로 변화하리라. (『노자』 37장)
  6. 6)크나큰 형상을 잡으면 천하가 마음껏 오가리니, 천하가 마음껏 오가더라도 해가 안 되어 크게 평안하다. (『노자』 35장)
  7. 7)장석운부(匠石運斧)의 고사를 나은 유명한 장인이다. 그는 자귀로 물건을 쪼는 데 조금도 틀림이 없었다 한다.
  8. 8)하동ㆍ하남ㆍ하북의 세 군(郡)이다. 즉 황하 유역을 일컫는다.
  9. 9)완적(阮籍), 삼국시대(三國時代) 위(魏)나라 죽림칠현(竹林七賢) 중의 한 사람. 벼슬이 보병교위(步兵校尉)였기 때문에 완보병(阮步兵)이라고도 함.
  10. 10)만약 천지 본연의 바름을 타고 대자연의 순리를 부려 무궁한 지경에서 노닌다면, 그런 이가 대체 어디에 기댈 게 있으랴. 그러므로 말하는 것이다. “지인(至人)은 자기를 고집함이 없고, 신인(神人)은 공을 드러냄이 없고, 성인(聖人)은 이름을 떨침이 없다.”(『장자』 「소요유」)
  11. 11)백마한여(白馬翰如). 말이 아주 희고 날쌔다는 것.
  12. 12)『고승전』 전체를 살펴보아도 식으로 끝나는 법명을 가진 승려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
  13. 13)공자(孔子)가 흐르는 물을 보고 ‘수재수재 서자여사(水哉水哉 逝者如斯)’라고 탄식한 것을 말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