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C_IT_K1080_T_002
- 033_0156_a_01L홍명집 제2권
- 033_0156_a_01L弘明集卷第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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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명불론明佛論 -
033_0156_a_02L梁楊都建初寺釋僧祐撰
明佛論
- [진晉나라 종병宗炳1)]
- 晉宗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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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오묘한 도는 진실로 그 교화를 존중해야만 하는데도 세상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허탄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아, 모두 내 몸도 돌아보지 못하는데 한가로이 먼 장래의 일을 근심하겠느냐고 한다. 또한 만 리 밖 일이나 사후의 일은 모두 염려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물며 수미산須彌山이 거대하고 불국토가 장엄하며, 정신[神]이 멸하지 않고 사람이 부처가 될 수 있으며, 마음이 모든 것을 짓고, 일체의 현상은 모두 공空한 것이며, 숙연宿緣은 끊임없이 이어져 아득히 억 겁이 지나도 반드시 보응이 있다는 불교의 가르침에 대해서랴.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뛰어나고 기이하며 현실 세상을 넘어서 본질을 꿰뚫은 것으로, 그 이치는 믿을 만하며, 그 사실은 진실한 것이다. 천박한 귀로 어찌 운문곡雲門曲2)을 들을 수 있겠는가? - 033_0156_a_04L夫道之至妙,固風化宜尊;而世多誕佛,咸以我躬不閱,遑恤于後。萬里之事,百年以外,皆不以爲然。況復須彌之大,佛國之偉,精神不滅,人可成佛,心作萬有,諸法皆空,宿緣緜邈,億劫乃報乎!此皆英奇超洞,理信事實。黃華之聽,豈納雲門之調哉?
- 세상 사람들은 또한 주공과 공자의 글을 귀하게 여겨 요임금부터 한漢나라까지 중국은 일찍이 다른 나라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런데 무엇이 한나라 명제明帝를 감화시켜 무슨 덕으로 홀로 영묘한 빛을 발하게 하였는가? 그러나 이와 같은 상황은 억지로 이끌려진 것이고, 이전의 습관이 현묘한 관점으로 넓혀지지는 못하였다. 따라서 지극한 이치는 멀리 있지 않지만 의심하여 스스로 몰락하니, 슬프다.
- 033_0156_a_11L世人又貴周、孔書典,自堯至漢,九州華夏,曾所不曁,殊域何感?漢明何德,而獨昭靈彩?凡若此情,又皆牽附先習,不能曠以玄覽,故至理匪遐,而疑以自沒。悲夫!
- 중국의 군자는 예의에 밝으나 사람 마음을 아는 데에는 어두우니,3) 어찌 부처님의 마음을 알겠는가? 세상의 일은 가까운 일이라도 깊이 도모하지 않으면 오히려 성공과 실패가 뒤집히는데, 하물며 정미한 정신인 나의 일임에랴. 정미한 정신을 얻으면 밝은 데로 끝없이 올라가고, 잃으면 한없이 영원히 떨어지니, 깊은 물가에 있듯 얇은 얼음을 밟는 듯 염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033_0156_a_16L中國君子,明於禮義而闇於知人之心,寧知佛之心乎?今世業近事,謀之不臧,猶興喪反之。況精神我也,得焉則淸升無窮,失矣則永墜無極。可不臨深而求,履薄而慮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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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_0156_b_01L한 판의 바둑같이 형세 판단을 얕게 하는 것에서조차 혁추奕秋4)의 마음을 읽을 수 없었다. 그런데 우물 안 개구리의 소견을 가지고 망령되이 큰 도리를 억측하여 정신을 함정에 빠뜨리는 데까지 이르니, 지나치지 않은가? 이제 몽매한 식견으로 근원적 진리를 밝히고자 하나, 스스로도 비추지 못하여 잘못한 점을 알지 못하는데 어찌 깨달음을 밝힐 수 있겠는가? 오직 정신을 밝혀 깊은 진리를 향해 나아가 착한 길에 머물러야 하는 것이니, 그러기 위해서 불경을 지침으로 삼아 수행해야만 한다. 저 불경은 5경經의 덕을 포함하고 원대한 실상을 깊이 더하였으며, 노자와 장자의 허虛를 포함하고 공空의 궁극을 거듭 더하고 있으니, 높이 실상의 이치를 말하고 고요히 정신에 감응한 것이다. 해와 같이 밝고 바람과 같이 청량하니, 성인이 아니면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삼가 세상의 소견을 미루어 부처님의 이치를 모아 밝히고자 한다. - 033_0156_a_20L夫一局之弈,形筭之淺,而弈秋之心,何嘗有得?而乃欲率井蛙之見,妄抑大猷,至獨陷神於天穽之下,不以甚乎!今以茫昧之識,燭幽冥之故,旣不能自覽監於所失,何能獨明於所得?唯當明精闇向,推夫善道,居然宜脩,以佛經爲指南耳。彼佛經也,包『五典』之德,深加遠大之實;含老、莊之虛,而重增皆空之盡。高言實理,肅焉感神,其映如日,其淸如風,非聖誰說乎?謹推世之所見,而會佛之理,爲明。
- [論] 지금 발뒤꿈치에서 정수리에 이르고 나아가 허공에 올라가도, 마음은 가도 가도 끝이 없어 사방과 상하 어디로 가도 무궁하다. 생명은 홀로 생긴 것이 아니고 반드시 그 근원에서 전해지는 것이니, 그 전해 온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시작이 없고, 여러 세대가 서로 끊이지 않고 생겨나니 다함이 없다. 이 몸은 이미 무한한 실상을 날마다 쓰고 있으니, 시작이 없는 무한에서 직접 왔고, 또한 끝없는 곳으로 전해져 갈 것이다. 그러므로 헤아릴 수 없이 넓고 시작도 끝도 없이 장구한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서로 이러한 사실을 망각하고 자기라는 생각을 만들어 내었다. 그리하여 자신들이 온 세상[八極]의 중심[赤縣]에 산다고 생각하고, 이를 한 번도 의심해 본 일이 없다. 지금 3천의 해와 달이 펼쳐져 있고, 1만 2천 천하가 늘어서 있으며, 갠지스 강의 모래알과 같이 많은 나라가 있고, 흩날리는 티끌과 같이 장구한 억 겁의 세월이 쌓였으나 모두 불교의 교화가 포용하는 것이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끝이 없이 무한한 것인데, 어찌 유독 내 입장의 유교만 인정하고 남의 입장의 불교를 의심하는가?
- 033_0156_b_09L論曰:今自撫踵至頂,以去凌虛,心往而勿已,則四方上下皆無窮也。生不獨造,必傳所資。仰追所傳,則無始也。弈世相生而不已,則亦無竟也。是身也,旣日用無限之實,親由無始而來,又將傳於無竟而去矣。然則無量無邊之曠,無始無終之久,人固相與凌之以自敷者也。是以居赤縣於八極曾不疑焉。今布三千日月,羅萬二千天下,恒沙閱國界,飛塵紀積劫。普冥化之所容,俱眇末其未央,何獨安我而疑彼哉?
- 033_0156_c_01L저 짐승의 털처럼 가느다란 것을 망망대해와 비교하면 그 차이는 크지만, 그래도 헤아림의 끝이 있다. 이제 유교의 윤리를 태허太虛5)와 비교해 보면 그 차이를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세상에서 크게 여기는 것이 도에서는 작은 것이고, 사람이 멀리 여기는 것이 하늘에서는 가까이 여기는 것이 된다. “헌원軒轅 이전은 아득하다”6)라고 하는 것도 천도를 체득하여 높은 데서 바라보면 대개 어제의 일일 뿐이다. 『서경』에서 “멀리 안다”고 한 것은 당唐ㆍ우虞를 벗어나지 않고, 『춘추』에서 말하는 “글을 짓는다”는 것도 왕의 작업에 국한된 것이다. 또 『예기』에서는 경敬을, 『악기樂記』에서는 양良을, 『시경』에서는 온溫을, 『역경』에서는 결潔을 말하지만, 이제 불교에서는 무궁한 가운데에서 3천의 해와 달을 비추어 아름답게 빛나게 하고, 1만 2천 천하를 나열하여 바르게 본다. 따라서 주공과 공자가 말한 것은 만蠻과 촉觸의 오랑캐 땅7)에서 그 나라의 상황에 따라 다스리려고 한 현실적인 가르침일 뿐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정녕 일생의 일로 국한될 뿐으로, 생을 뛰어넘는 일은 그대로 두고 논하지 않았던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찌 시초인 형상에 대해서는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도 종극인 정신에 대해서는 소략하게 말했던 것일까? “몽산蒙山에 오르면 노나라가 작게 보이고, 태산太山에 오르면 천하가 작게 보인다”8)고 한 말이야말로 이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다.
- 033_0156_b_21L夫秋毫處滄海,其懸猶有極也。今綴彝倫於太虛,爲%(卄/狠)胡可言哉?故世之所大,道之所小。人之所遐,天之所邇。所謂軒轅之前,遐哉邈矣者,體天道以高覽,蓋昨日之事耳。『書』稱知遠,不出唐虞;『春秋』屬辭,盡於王業;『禮』、『樂』之良敬,『詩』、『易』之溫潔。今於無窮之中,煥三千日月以照,麗列萬二千天下以貞觀,乃知周、孔所述,蓋於蠻觸之域,應求治之麤感,且寧乏於一生之內耳。逸乎生表者,存而未論也。若不然也,何其篤於爲始形,而略於爲終神哉?登蒙山而小魯,登太山而小天下,是其際矣。
- 또 『삼분오전三墳五典』9)은 이미 일실되었고, 세속의 유생이 편찬한 책은 오로지 현세의 치적에 대한 것이고, 세상을 벗어난 말이면 혹은 역사 서적들 속에 여기저기 묻혀 있거나 분서갱유焚書坑儒로 완전히 사라졌다. 노자ㆍ장자의 도와 적송자赤松子ㆍ왕자교王子喬 등 여러 진인眞人들의 방술은 진실로 마음을 닦고 몸을 기르는 것이지만, 모두 6경經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학문하는 자들은 오로지 현세적 이익만 구하고 다 남아 있지도 않은 글만을 고집하여 『서경』과 『예기』로 학문을 제한한다. 또한 정신을 궁극적으로 밝히는 영원하고 심오한 교화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다만 목전의 일에만 빠져 영영 잊어버리니, 참으로 슬프지 아니한가? 아, 첩첩한 구름 아래를 거닐면서 해와 달이 있음을 믿지 않는 자와 같구나.
- 033_0156_c_11L且又『墳』、『典』已逸,俗儒所編,專在治迹。言有出於世表,或散沒於史策,或絕滅於坑焚。若老子、莊周之道,松、喬列眞之術,信可以洗心養身,而亦皆無取於六經。而學者唯守救麤之闕文,以『書』、『禮』爲限斷,聞窮神積劫之遠化,炫目前而永忽,不亦悲夫?嗚呼!有似行乎增雲之下,而不信日月者也。
- 033_0157_a_01L이제 일음일양一陰一陽을 칭하면서 “음양으로 측정할 수 없는 것을 신령이라고 한다”10)고 말하는 것은, 지극한 무無를 도道라고 하고 음양 두 가지가 섞이므로 ‘일음일양’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도에서 내려가서 정신精神으로 들어가면 항상 음양의 밖으로 벗어나 있고, 두 음양으로 탐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음양으로 측정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일 뿐이다. 엄군평嚴君平이 “하나가 둘을 낳는 것을 신명神明이라고 한다”고 한 것이 바로 이러한 의미이다. 만약 이 두 구절이 모두 무無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을 가지고 정신을 밝히겠는가?
- 033_0156_c_19L今稱“一陰一陽謂,陰陽不測之謂神”者。蓋謂至無爲道,陰陽兩渾,故曰“一陰一陽”也。自道而降,便入精神,常有於陰陽之表,非二儀所究,故曰“陰陽不測”耳。君平之說“一生二”,謂“神明”是也。若此二句,皆以無明,則以何明精神乎?
- 그러나 중생들의 정신[神]은 그 궁극은 비록 같지만 인연에 따라 변하고 흘러서 거칠거나 미묘한 식識을 이룬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소멸하지는 않는다. 지금 순임금은 비록 아버지인 고수瞽瞍가 낳았지만 순임금의 정신이 반드시 고수가 낳은 것은 아니고, 순임금의 아들인 상균商均의 정신 또한 순임금이 기른 것이 아니다. 낳고 기르기 전에 본디 거칠고 미묘함이 있는 것이다. 근본은 낳기 전에 있는 것이므로 죽은 이후에도 소멸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또 소멸되지 않는다면 같지 않을 것이니, 어리석은 자와 성인의 차이가 있어서 어리석은 자와 성인은 나고 죽음으로 바뀌거나 소멸되지 않는 분수[分:천성]임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정신이 형체를 받으면 5도道를 두루 편력하니, 천지가 생기고 무너지며 지나온 세월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11)고 하는 것이다.
- 033_0157_a_02L然群生之神,其極雖齊,而隨緣遷流,成麤妙之識,而與本不滅矣。今雖舜生於瞽,舜之神也,必非瞽之所生。則商均之神,又非舜之所育。生育之前,素有麤妙矣。旣本立於未生之先,則知不滅於旣死之後矣。又不滅則不同,愚聖則異,知愚聖生死不革不滅之分矣。故云:精神受形,周遍五道,成壞天地,不可稱數也。
- 겹눈동자인 순임금은 완고한 고수에게서 태어났고, 어리석은 상균은 그 몸을 성인인 순임금에게서 받았다. 어리석은 자와 성인은 전적으로 다른데, 어떤 수로 합하여졌을까? 중화重華 순임금의 정신이 처음에는 거칠었지만, 오랜 세월 동안 인因을 지어 수많은 변화를 겪은 뒤 연綠을 만난 것이 어찌 아니겠는가? 지금은 순임금의 정신이 유독 누구보다 뛰어나지만, 옛날에 거칠었던 허물이 있었으나 이를 수양하여 다 없앤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신은 소멸되지 않는다는 것, 인을 만나면 연을 만나게 된다는 이치, 오래 습관을 쌓으면 성인이 된다는 것, 이 세 가지를 다 여기에서 볼 수 있다.
- 033_0157_a_10L夫以累瞳之質,誕于頑瞽;嚚均之身,受體黃中。愚聖人絕,何數以合乎?豈非重華之靈,始麤於在昔。結因往劫之先,緣會萬化之後哉?今則獨絕其神,昔有接麤之累,則練之所盡矣。神之不滅,及緣會之理、積習而聖,三者鑑於此矣。
- 만약 형체가 생기면 정신이 생기고 형체가 사라지면 정신도 사라지는 것이라면, 마땅히 형체가 손상되면 정신이 훼손되고 형체가 아프면 정신이 곤고해질 것이다. 그러니 어찌 몸이 썩는다거나 죽음에 임하여 정신과 의지가 평온하고 온전하겠는가? 그런데 염백우는 “들창 바깥에서 그 손을 잡는12) 정도로 병이 지극히 심했는데도 덕행의 주체는 변화가 없었으니, 이것이야말로 정신 불멸의 증험일 것이다. 만일 정신이 형체에서 생겨난다면 본래 인연으로 화합한 것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그 증거를 멀리 여러 사물들에서 취한 뒤에 가까이 자신에게서 구해 보기로 하자.13)
- 033_0157_a_17L若使形生則神生,形死則神死,則宜形殘神毀,形病神困。懅有腐敗其身,或屬纊臨盡,而神意平全者;及自牖執手,病之極矣,而無變德行之主,斯殆不滅之驗也。若必神生於形,本非緣合。今請遠取諸物,然後近求諸身。
- 033_0157_b_01L저 5악岳ㆍ4독瀆14)에는 영혼이 없다고 하지만 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다. 만약 정신[神]을 인정한다면, 산은 다만 흙이 많이 쌓인 것일 뿐이고, 큰 물은 물이 많은 것일 뿐이니, 하나를 얻은 영혼이 어찌 물이나 흙과 같은 거친 것에서 나왔겠는가? 그리고 영혼이 바위와 물에 감응하고 의탁하여 고요히 일체를 이루고 있으니, 설사 산이 무너지고 강이 말라도 반드시 물ㆍ흙과 함께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정신은 형체와 합쳐져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소멸하지 않는다. 사람 또한 그러하다. 정신이라는 것은 만물 가운데 신묘한 것을 하는 것이다.15) 만약 형체에 의해 이루어지고 형체를 따라 소멸한다면 형체를 근본으로 하는 것인데, 어떻게 신묘하다고 하겠는가? 저 정신은 사방에 통달하고, 또한 끝없이[無極] 흐른다. 위로는 하늘에 이르고, 아래로는 땅에 두루 한다.16) 성인은 기미를 궁구하고 현자는 조짐을 연구하니, 재아宰我ㆍ자공子貢ㆍ장자莊子ㆍ혜강嵆康ㆍ계찰季札ㆍ장량張良 등은, 정신의 작용은 꾸미거나 행하지 않으면서도 앉아서 우주를 꿰뚫는다. 그러나 형체를 가지고 썩는 냄새를 맡고 맛있는 것을 즐기는 것은 성인과 하급의 어리석은 자가 같으니, 어찌 정신이 몸을 받아서 생겨나고 몸을 따라 소멸될 수 있겠는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 033_0157_a_23L夫五嶽四瀆謂無靈也,則未可斷矣。若許其神,則嶽唯積土之多,瀆唯積水而已矣。得一之靈,何生水土之麤哉?而感託巖流,肅成一體,設使山崩川竭,必不與水土俱亡矣。神非形作,合而不滅,人亦然矣。神也者,妙萬物而爲言矣。若資形以造,隨形以滅,則以形爲本,何妙以言乎?夫精神四達,竝流無極,上際於天,下盤於地。聖之窮機,賢之硏微。逮于宰、賜、莊、嵆、吳札、子房之倫,精用所之,皆不莊不行,坐徹宇宙。而形之臭腐,甘嗜所資,皆與下愚同矣,寧當復稟之以生,隨之以滅耶?又宜思矣。
- 주공이 교외에서 후직后稷을 제사하고 종묘에서 문왕文王을 제사하는 것을 두고 세상 사람들은 혹 헛되이 효를 행한다고 말하지만, 그런 의문을 갖는 사람들은 어찌 그것이 반드시 헛되다고 생각하는가? 그렇게 생각할 근거가 없다. 만약 그렇게 생각할 근거가 없다면, 문왕과 후직의 영혼은 소멸한다고 말할 수 없다. “삼일재를 지내면 반드시 재를 받는 대상이 나타난다”17)고 했는데, 보통 사람이 보지 못한다고 하여 주공도 반드시 보지 못한다고 단정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영박嬴博 땅에서 아들을 제사지낼 때 계찰이 “뼈와 살은 땅으로 돌아가지만, 혼기魂氣는 가지 않는 곳이 없다”18)고 말한 것은, 영혼이 소멸하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 033_0157_b_13L周公郊祀后稷,宗祀文王,世或謂空以孝。卽問談者,何以了其必空?則必無以了矣。茍無以了,則文,稷之靈,不可謂之滅矣。齋三日,必見所爲齋者。寧可以常人之不見,而斷周公之必不見哉?嬴博之葬,日:“骨肉歸于土,魂氣則無不之。”非滅之謂矣!
- 033_0157_c_01L“지극한 다스림은 하늘을 본받는 것이고, 큰 혼란은 하늘을 거스르는 것이다”라고 했으니, 이 말의 핵심은 이것들이 모두 정신의 작용이라는 것이다. 요임금은 모든 이치를 밝혔고 모든 욕망을 제거하였으니 그 정신이 밝고, 걸왕은 악이라는 악은 행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그 정신이 부패하였다. 걸왕이 요임금의 선을 모르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악도 모르는 것이 아니었지만, 악으로 멸망한 것이다. 신체의 욕망을 따라 그 정신을 부패하게 하였으나, 요임금이 선하다는 것과 악을 행하면 망한다는 것을 아는 인식이 걸왕의 정신에 항상 포함되어 있었다. 만약 걸왕을 임금 자리에 있지 못하게 하고 천 년 동안 죽지 않게 하여 악을 행하면 고초가 연이어 이르고, 선을 조금이라도 행하면 조금씩 용서를 받게 한다면, 어찌 그가 점차 악을 없애고 선을 닦지 않겠는가? 따라서 이전에 말한 것처럼 그의 정신에 요임금을 아는 인식이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반드시 조금이라도 작용이 있는 것이다. 또한 천 년을 쉬지 않고 닦아 욕심을 모두 정화하면, 마침내 그 정신을 요임금같이 밝게 할 수 있을 것이다.
- 033_0157_b_20L夫至治則天,大亂滔天,其要心神之爲也。堯無理不照,無欲不盡,其神精也。桀無惡不肆,其神悖也。桀非不知堯之善,知己之惡,惡已亡也。體之所欲,悖其神也。而知堯、惡亡之識,常含於神矣。若使不居君位,千歲勿死,行惡則楚毒交至,微善則少有所寬。寧當復不稍滅其惡,漸脩其善乎?則向者神之所含知堯之識,必當少有所用矣。又加千歲而勿已,亦可以其欲都澄,遂精其神如堯者也。
- 저 별과 달이 변화하면 천지의 가락이 바뀌고 달이 기울고 차면 조개가 이에 상응하며, 사계절이 바뀌면 제비와 기러기와 용과 뱀이 그에 따라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은, 모두 먼저 미묘한 조화가 있고 나서 그 후에 사물의 유형으로 발현된 것이다. 모든 무리들은 똑같이 그윽한 조화를 입는 법이니, 어찌 몇몇 가지만 그러하겠는가? 수많은 조화가 모두 그렇지 않겠는가? 이제 살인한 자는 죽고 사람을 다치게 한 자는 형벌을 받으며, 또 죄를 지으면 포승줄에 묶인다. 지금 죄가 없는데도 죄가 있는 것과 동일하게 여겨지는 자는 모두 드러나지 않은 연을 이전에 지어 인간의 이치로 후에 나타난 것이다. 저 숨겨진 것과 드러난 것은 하나이다. 숨겨진 데서 피를 흘리는 일을 행하면 드러난 데서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다. 드러난 데서 흉악한 일을 행하면 숨겨진 데서 재앙을 받게 되는 일 또한 어찌 괴이한 것이겠는가? 이제 불멸하는 정신이 요임금을 아는 인식을 내포하고 있어서 만 대 중에 숨겨지기도 하고 드러나기도 하므로, 악을 행하면 괴롭고 선을 유도하면 즐거운 것이다. 더욱이 일월과 같이 밝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빛을 드리워 밝게 비추심에 있어서이겠는가. 어떤 인연이 있어 자기를 비우고 성인의 가르침을 따라 한 번 변하여 도에 이르지19) 못하겠는가? 생각건대 아마도 옛날의 걸ㆍ주 같은 인물도 모두 장래에 서서히 탕왕ㆍ무왕 같은 인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물며 이제 수는 적지만, 맑은 흐름에 마음을 맡기고 불법을 따르는 고아한 무리들에 있어서랴. 이로써 보면 사람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 033_0157_c_07L夫辰月變則律呂動,晦望交而蚌蛤應;分至啓閉,而燕、鷹、龍、蛇颯焉出沒者。皆先之以冥化,而後發於物類也。凡厥群有,同見陶於冥化矣,何數事之獨然,而萬化之不盡然哉?今所以殺人而死,傷人而刑,及爲縲紲之罪者;及今則無罪,與今有罪而同然者。皆由冥緣前遘,而人理後發矣。夫幽顯一也,舋遘於幽,而醜發於顯,旣無怪矣;行凶於顯,而受毒於幽,又何怪乎?今以不滅之神,含知堯之識,幽顯於萬世之中,苦以創惡,樂以誘善,加有日月之宗,垂光明照,何緣不虛已鑽仰,一變至道乎?自恐往劫之桀、紂,皆可徐成將來之湯、武。況今風情之倫,少而汎心於淸流者乎?由此觀之,人可作佛,其亦明矣。
- 033_0158_a_01L무릇 생명이 일어나는 것은 모두 정情의 조짐에 말미암는 것이다. 지금 남녀가 정精을 합쳐서 만물을 생성하는데,20) 정精이란 모두 정情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다. 정情이 자기 자신에서 만나면 수많은 정신이 신체를 받게 된다. 이로써 정情이 생명의 근본임을 크게 알 듯하다. 5제帝ㆍ2후后와 같은 사람의 경우에는 비록 정情을 뛰어넘어 신神에 도달하였지만, 사람이 살아가는 도리를 따르지 않는 경우가 없었다. 이는 진실로 예전에 지은 인연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므로, 정을 초월한 자기를 굽혀 정에 동화되어 사람들과 맞추어 살면서 수많은 종족을 퍼뜨렸던 것이다. 하물며 지금 보통 사람들은 정情으로 신神을 관통하여 한 몸을 받아 살다가 다시 정으로 죽으니, 어찌 다시 한 몸을 받아 끝없이 생사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식識은 불멸의 근본을 맑게 할 수 있으니, 날마다 덜어내는 학문을 배워서 “덜어내고 또 덜어내면 반드시 무위와 무욕에 이른다”21) 고 하였다. 욕정이 오직 정신만의 반영이 되게 되면, 더 이상 생명을 받지 않을 것이다. 생명이 없으면 신체가 없는데, 신체가 없으면서도 정신이 있는 것을 법신法身이라고 한다.
- 033_0158_a_01L夫生之起也,皆由情兆。今男女搆精,萬物化生者,皆精由情搆矣。情搆於己,而則百衆神受身大似,知情爲生本矣。至若五帝三后,雖超情窮神,然無理不順,茍昔緣所會,亦必俯入精化,相與順生,而敷萬族矣。況今以情貫神,一身死情,安得不復受一身,生死無量乎?識能澄不滅之本,稟日損之學,損之又損,必至無爲,無欲欲情,唯神獨映,則無當於生矣。無生則無身,無身而有神,法身之謂也。
- 지금 황제ㆍ우임금ㆍ순임금ㆍ주공ㆍ공자는 세상 사람들이 우러르고 믿는 사람들이다. 황제가 용을 타고 하늘로 날아오른 일,22) 우임금이 용처럼 물에 잠기고 순임금이 새처럼 날아오른 일, 주공이 바람의 방향을 바꾸어 쓰러진 벼를 일으킨 일,23) 공자가 음식도 먹을 수 없는 상태에서 피리를 불고 노래를 한 일 등을 보면, 모두 정신을 근본으로 체화했으므로 신통이 응하여 막힘없이 두루 작용한 것이다. 이제 현상과 이치는 비록 다르지만 그것들은 모두 감응에 따라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니, 반드시 사람의 힘으로 이루어진 일이 아니다.
- 033_0158_a_12L今黃帝、虞舜、姬公、孔父。世之所仰而信者也。觀其縱轡升天,龍潛鳥颺,反風起禾,絕粒絃歌,亦皆由窮神爲體,故神功所應,倜儻無方也。今形理雖外,當其隨感起滅,亦必有非人力所致而至者。
- 황하에서 그림이 나오고, 낙수에서 글이 나오며,24) 명래蓂萊는 심지도 않았는데 요임금의 궁정에서 자라났다. 우임금의 시대에는 쪼아서 만들지도 않았는데 현규玄珪가 나타났고,25) 은나라 무정 시대에 뜰의 상곡桑穀이 갑자기 한 아름으로 커졌다가 불타 버렸으며,26)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 주왕을 토벌하려 할 때 불구슬이 왕의 어전에 흘러 들어와서 까마귀가 되었고,27) 큰 불이 가벼워지고 작은 솥이 무거워진 것28)과 같은 변화는 모두 영에 감응하여 일어난 것이다. 이것은 실로 불가사의한 종류의 일들이다.
- 033_0158_a_17L河之出圖,洛之出書;蓂莢無裁而敷,玄珪不琢而成;桑穀在庭,倏然大拱,忽爾以亡;火流王屋而爲烏;鼎之輕重大小,皆翕欻變化,感靈而作;斯實不思議之明類也。
- 033_0158_b_01L이것은 저 법신이 지극히 신령하여 만물에 감응하여 변화를 나타내고, 신통한 공력을 나투어 만상을 밝힌 것이다. 또 어떤 기이한 일이 일어나지 않겠으며, 어떤 변화가 제한되겠는가? 어찌 단지 구천을 우러러 오르고 용처럼 깊은 물속에 잠기며, 바람을 마시고 음식을 먹지 않는 것뿐이겠는가?
- 033_0158_a_22L夫以法身之極靈,感妙衆而化見,照神功以朗物,復何奇不肆,何變可限。豈直仰陵九天,龍行九泉,吸風絕粒而已哉?
- 무릇 법신의 빛나는 위용은 위대한 상서로움을 나타내니, 분신分身을 나투어 일으키고 세계를 옮기고 큰 바다를 털오라기에 집어넣는 종류의 일29)은 황제ㆍ우임금ㆍ주공ㆍ공자가 한 일에 견주면 신묘한 변화가 무한한 것이다. 이렇듯 나타나고 사라지는 수많은 상서들은 이미 형체를 벗어나 정신에 들어간 것이니, 모두 황홀하고 현묘한 변화이다. 어찌 유독 유교의 신통만 믿고 저 법신의 위용은 내리누르는가? 깊이 깨달으신 법왕法王은 한없이 맑고 밝으셔서 믿으면 징표가 있어서 틀림없이 지척에서 대할 수 있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는 이를 알지 못하니, 슬프구나.
- 033_0158_b_02L凡厥光儀符瑞之偉,分身踊出,移轉世界,巨海入毛之類。方之黃、虞、姬、孔,神化無方。向者衆瑞之晻曖顯沒,旣出形而入神,同惚怳而玄化。何獨信此而抑彼哉?冥覺法王,淸明卓朗,信而有徵。不違顏咫尺,而昧者不知,哀矣哉!
- 저 홍범구주洪範九疇에서 말하는 서징庶徵30)의 좋고 나쁨은 모두 마음에서 오는 것이다. 흰 무지개가 해를 관통하고 태백성이 묘좌에 침입하며, 추운 계곡에 기장이 자라고 성벽이 무너지고 여름에 서리가 내리는 등의 일은 모두 사람의 정情에서 일어나서 멀리는 하늘의 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는 참으로 서로 형체와 그림자의 관계이다.
- 033_0158_b_08L夫『洪範』庶徵休咎之應,皆由心來。逮白虹貫日,太白入昴,寒谷生黍,崩城隕霜之類,皆發自人情。而遠形天事,固相爲形影矣。
- 저 형체란 원래 그림자가 없을 수 없고 소리는 원래 울림이 없을 수 없으며, 또한 정情은 원래 응보가 없을 수 없다. 어찌 단지 해를 관통하고 서리를 내리게 하는 종류의 일뿐이겠는가? 인정을 따라 빠짐없이 사물에 응하지 않는 경우가 없으니, 형체를 숨기는 일이 없다. 다만 어떤 경우에는 보응이 자기 몸에 나타나고 어떤 경우에는 자연 현상으로 나타나는데, 직접 나타나기도 하고 간접적으로 나타나기도 하며, 드러나게 나타나기도 하고 은근히 나타나기도 하여 한이 없으니 누가 그 끝을 알 수 있겠는가? 온갖 변화가 세상에 가득 차고 여러 형상이 눈에 가득하나, 모두 옛날부터 정情이 감응하여 모인 결과이다. 따라서 불경에서는 “일체 제법은 마음에서 형체를 만든다”고 하였고, 또 “마음이 법의 근본이니, 마음이 천당을 만들고 마음이 지옥을 만든다”고 하였다. 그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를 말한 것이다. 따라서 마음을 맑게 하고 정을 깨끗하게 하면 반드시 훌륭하고 좋은 곳에 태어나고, 마음과 행실을 탁하게 하면 3악도惡道에 떨어져 영원히 고통 당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깊은 진리를 드러내고 있으며 밝고 참된 이치를 담고 있어서, 곧 영혼을 정화시키고 생각이 함부로 되는 것을 씻어내며 진실로 뜻을 여미도록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 033_0158_b_11L夫形元無影,聲元無響,則亦情元無報矣,豈直貫日隕霜之類哉?皆莫不隨情曲應,物無遁形。但或結於身,或播於事,交賖紛綸,顯昧眇漫,孰睹其際哉。衆變盈世,群象滿目,皆萬世以來,精感之所集矣。故佛經云:“一切諸法,從意生形。”又云:“心爲法本,心作天堂,心作地獄。”義由此也。是以淸心潔情,必妙生英麗之境。濁情滓行,永悖於三塗之域。何斯唱之迢遰,微明有實理,而直疏魂沐想,飛誠悚志者哉?
- 033_0158_c_01L그러나 수많은 정情은 모두 서로 연綠이 되어 식識을 이루고, 그 식이 감응하여 형체를 이루나, 그 본성은 실제로는 없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이래 홀로 활연히 깨달아 마음의 근심을 없애어 여기에 이른 이는 아무도 없다. 이를 다시 논하여 밝혀 보고자 한다.
- 033_0158_b_22L雖然,夫億等之情,皆相緣成識,識感成形,其性實無也。自有津悟以來,孤聲豁然,滅除心患,未有斯之至也。請又述而明之:
- 저 성스러운 정신이 현묘하게 비추지만 생각으로 헤아리는 식이 없는 것은 마음과 사물이 절대적으로 오직 정신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텅 비어 밝은 근본은 언제나 상주하여 사라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마음이 사물과 접하면 정신 하나만이 아니게 된다.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비록 안회의 경지가 미미한 것이지만 항상 열심히 노력하여 공자의 가르침을 우러러 닦아 인仁을 좋아하고 산을 즐겼으니, 공자께서는 “안회는 도에 가깝다. 자주 쌀통이 비어 있었다”31)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들은 모두 마음이 작용하여 인식하는 것이니, 반드시 그 작용과 작용이 계속하여 묘하게 접하고, 그 식과 식이 계속하여 묘하게 이어지는 것이다. 이는 마치 불꽃이 서로 이어져서 불길을 이루는 것과 같다. 이제 공空을 깨달아 마음을 쉬면 마음의 작용이 그치고, 정식情識 또한 다하게 되니, 정신의 밝음이 온전해진다. 그러므로 정식의 생성은 새로운 것과 옛것이 신묘하게 이어지는 것이므로 모두 근원의 하나가 아니니, 어찌 항상 존재하겠는가?
- 033_0158_c_03L夫聖神玄照,而無思營之識者,由心與物絕,唯神而已。故虛明之本,終始常住,不可凋矣。今心與物交,不一於神。雖以顏子之微微,而必乾乾鑽仰,好仁樂山,庶乎屢空。皆心用乃識,必用用妙接,識識妙續,如火之炎炎,相卽而成爓耳。今以悟空息心,心用止而情識歇,則神明全矣。則情識之搆,旣新故妙續,則悉是不一之際,豈常有哉?
- 가령 “요리사가 소를 볼 때 반드시 소 전체를 보는 것은 아니다”32)라고 하였고, 불경에서는 변화하여 흩어지는 법을 말하며 “법과 식의 본성은 공하여 꿈과 같고, 환영과 같고, 그림자와 같고, 메아리와 같고, 물거품과 같고, 물속의 달그림자와 같다”고 하였다. 이 말들이 어찌 옳지 않겠는가? 안회는 이와 같은 것을 알았으므로 있음에 처하기를 없음과 같이 했고, 가득 찬 것을 텅 빈 것처럼 대하였다. 현상으로 인해 괴로움을 당하지도 않고, 이를 바꾸려고도 하지 않았다. 안회의 쌀통이 자주 비어 있었던 것을 보면 그는 유有가 실제로는 무無임을 알았던 것을 알 수 있다. 하물며 그보다 못한 사람들은 진리를 잃어 갈수록 더욱 멀어지니, 비록 다시 큰 길을 따라간다 하더라도 마치 동쪽으로 달려가는 미친 자를 쫓아가면 똑같이 미친 자가 되는 것과 같이33) 모두 이치에 어긋나고 그릇되이 감응하며, 천도를 저버리고 망령되이 행동하여 갈수록 더 진리가 존재하지 않게 된다. 하물며 질과 맛과 소리와 모양은 또한 정情이 거짓으로 만든 그림자인 데 있어서이겠는가.
- 033_0158_c_12L使庖丁觀之,必不見全牛者矣。佛經所謂變易離散之法,法識之性空,夢幻、影響、泡沫、水月,豈不然哉?顏子知其如此,故處有若無,撫實若虛,不見有犯而不挍也。今觀顏子之屢空,則知其有之實無矣。況自茲以降,喪眞彌遠。雖復進趍大道,而與東走之疾,同名狂者。皆違理謬感,遁天忘行,彌非眞有矣。況又質味聲色,復是情僞之所影化乎?
- 033_0159_a_01L또한 골짜기에 둔 배도 모르는 사이에 없어진다고 하였으니,34) 현상의 변화는 번개와 같이 빠르다. 미래는 아직 이르지 않았고, 과거는 이미 소멸하였으며, 이미 존재하는 것(현재)도 머물지 않으니, 순식간에 한 터럭도 의지할 것이 없다. 그런데 무엇을 고수하여 있다고 생각하려 하는가? 거짓으로 있는 것이 참으로 심하게 정신을 가리고 있구나. 이제 여기에 밝은 거울이 있는데, 먼지가 끼여 있지 않으면 밝게 비추고, 먼지가 쌓여 있으면 희미하게 비춘다. 먼지가 두텁게 쌓여 있으면 비추어 보기에 흐리지만, 거울의 본질은 본래 밝은 것이므로 먼지가 더하여도 여전히 비추는 것이다. 비록 밝은 것이 어두워지더라도 요컨대 거울이 소멸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단지 거울에 먼지가 가득 차 있으므로 사물이 잘 보이지 않게 되어 잘못 보는 과오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의 정신의 이치도 이와 유사하다. 거짓 존재하는 것이 정신을 덮어 거칠거나 정미한 식을 이루게 된다. 식이 정신에 붙어 있으므로, 죽어서도 소멸하지 않고 오직 공으로만 이를 없앨 수 있다. 반드시 없애는 일이 습관이 되어서 식이 다 없어지면 본래의 정신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를 열반[泥洹]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훌륭한 말들이 구름처럼 많아도, 공으로 관통한다. 저 바위와 숲이 매우 아름답고 바람과 물이 시원하면 회한이 가득 차 걸어도 가슴에 시원한 느낌이 드는데, 하물며 성인의 아름다움에 있어서이겠는가. 공은 허하게 사람을 비우니, 마음이 맑아지고 지극히 기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옛사람들은 허虛를 타고 도道에 들어갔으니, 모래알 하나하나가 모두 부처라고 해도 많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 033_0158_c_21L且舟壑潛謝,變速奔電,將來未至,過去已滅,已在不住。眒息之頃,無一毫可據,將欲何守而以爲有乎?甚矣!僞有之蔽神也。今有明鏡於斯,紛穢集之,微則其照藹然,積則其照昢然,彌厚則照而昧矣。質其本明,故加穢猶照,雖從藹至昧,要隨鏡不滅。以辯之物,必隨穢彌失,而過謬成焉。人之神理,有類於此。僞有累神,成精麤之識。識附於神,故雖死不滅。漸之以空,必將習漸至盡,而窮本神矣,泥洹之謂也。是以至言雲富,從而壑以空焉。夫巖林希微,風水爲虛。盈懷而往,猶有曠然。況聖穆乎空,以虛授人,而不情心樂盡哉!是以古之乘虛入道,一沙一佛,未詎多也。
- [문] 정신은 본래 텅 빈 것인데 어떻게 만유를 받아들여 그와 함께 연緣을 지을 수 있는가? 또 본래 텅 비었다면 이미 균등한데 어떻게 어리석은 사람과 성인으로 나뉠 수 있는가? 또 마음이 만유를 짓는다고 하지만, 만유가 아직 없었을 때에는 또 어떻게 마음을 번거롭게 하여 감응하여 만유를 낳게 할 수 있었는가?
- 033_0159_a_13L或問曰:“神本至虛,何故治受萬有,而與之爲緣?又本虛旣均,何故分爲愚聖乎?又旣云‘心作萬有’,未有萬有之時,復何以累心,使感而生萬有乎?”
- [답] 정신은 신묘하고 형체는 거친 것이지만, 서로 더불어 작용을 한다. 신묘한 것이 거친 것에 연緣하므로, 텅 빈 것이 만유에 연함을 알 수 있다. 지금 어리석은 자가 비록 미천하더라도 현재에 살면서 옛날을 기억할 수 있고, 이곳에 있으면서 저곳을 기억할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정신의 공력이 있어서 수련을 하면 그 근본이 평등하게 허虛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마음이 만유를 지음은 이미 앞에서 말하였다. 그러한 견해에 의해 실상을 살펴보면, 세 가지가 이미 분명하다. 그러나 그렇게 된 까닭은 시작이 없는 데서 온 것이다. 시작이 없는 시작인데, 어찌 시작이 있겠는가? 현묘하고 또 현묘하다.
- 033_0159_a_17L答曰:“今神妙形麤,而相與爲用。以妙緣麤,則知以虛緣有矣。今愚者雖鄙,要能處今識昔,在此憶彼。皆有神功,則練而可盡,知其本均虛矣。心作萬有,備於前論。據見觀實,三者固已信然矣。但所以然者,其來無始。無始之始,豈有始乎?亦玄之又玄矣。
- 033_0159_b_01L장자는 염구苒求라는 인물에게 “아직 천지가 있기 전을 알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공자는 “옛날은 지금과 같다”35)고 하였다. 사람들은 비록 무시無始 이전이 있다고 말하지만,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시초는 막막하기만 하니, 여기에서 말하는 염구의 경우와 같다. 지금 신명의 시초와 중생의 최초의 조상은 모두 아득하기만 하니, 추측하고 생각하여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찌 학자가 이렇다 저렇다 하고 예측할 수 있겠는가?
- 033_0159_b_01L莊周稱冉求問曰:‘未有天地可知乎?’仲尼曰:‘古猶今也。’蓋謂雖在無始之前,仰尋先際,初自茫眇,猶今之冉求耳。今神明始創,及群生最先之祖,都自杳漠,非追想所及,豈復學者通塞所豫乎?
- 저 성인은 진실로 신명이 굳게 엉긴 분들이어서 상황에 감응할 뿐이지 생각으로 미칠 수 없으니, 세상을 벗어나 있다. 무無를 감응으로 여기고 그대로 두고 논하지 않는데, 성인도 논하지 않는 것을 보통 사람이 어찌 깨달을 수 있겠는가? 지금 보통 사람들은 성인과 함께 땅을 밟고 하늘을 이고 있지만, 단지 땅을 밟고 하늘을 이고 있다는 것 외에 어찌 종극을 알 수 있겠는가? 우임금이 5복服36)을 다스렸어도 다스린 땅이 9주州37)에 지나지 않으니, 이는 세상일이 미치는 범위를 말하는 것일 뿐이다. 대황大荒의 바깥, 즉 양곡暘谷과 몽사濛汜38)의 경계에 이르면 사람의 이치로는 헤아릴 수 없으니, 신묘한 성인도 분명하게 드러내지 못한 것이다. 하물며 여기에서 더욱 나아가면 혼돈하고 아득할 뿐이니, 어찌 그 경계를 논할 수 있겠는가?
- 033_0159_b_06L夫聖固凝廢,感而後應耳。非想所及,卽六合之外矣,無以爲感,故存而不論。聖而不論,民何由悟?今相與踐地戴天而存,踐戴之外,豈有紀極乎?禹之弼成五服,敷土不過九州者,蓋道世路所及者耳。至於大荒之表,晹谷濛氾之際,非復人理所豫,則神聖已所不明矣。況過此彌往,渾沌冥茫,豈復議其邊陲哉?
- 033_0159_c_01L이제 하늘을 이고 땅을 밟고 있는 현실을 미루어서 마침내 논의할 수 없는 곳에 이르므로 일체일 뿐이다. 현재의 정신 작용을 미루어서 옛날의 시초를 구하면 마침내 성인이 “그대로 두어 둘 뿐 논하지 않는다”고 한 데 이르게 된다. 이 또한 하나의 이치가 서로 꿰뚫은 것일 뿐이니, 어찌 따로 논의할 수 있겠는가? 모두 그윽한 연은 우주를 따라서 무궁하고 사물의 정情이 감응하는 대상은 유한하기 때문이다. 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은 성인을 본받아 인식을 이루니, 그것은 많은 사람들의 눈이 해로 인하여 볼 수 있게 되는 경우와 같다. 이주離朱가 백 보 밖의 가는 털을 본 것39)은 그 신묘한 눈이 해의 힘을 빌어서 볼 수 있었던 것일 뿐이다. 이제 천 보 밖에 가는 털을 두면 시력이 다해 해의 힘을 빌어도 볼 수 없지만, 미세한 것을 보고 위험을 피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어찌 천 보 밖의 것을 볼 수 없다고 하여, 백 보 밖의 가는 털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하는가? 이제 연의 근본을 통달하지 못하고 정에 감응하는 것이 다 없어져서 성인이 될 방법이 없지만, 가르침을 받아 도에 도달하는 나루에 이르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안다. 어떻게 연의 시작을 모른다고 하여 이미 밝은 교화를 도리어 의심하겠는가?
- 033_0159_b_15L今推所踐戴,終至所不議,故一體耳。推今之神用,求昔之所始終,至於聖人之所存而不論者,亦一理相貫耳,豈獨可議哉?皆由冥緣隨宇宙而無窮,物惰所感者有限故也。夫衆心稟聖以成識,其猶衆目會日以爲見。離朱察秋毫於百尋,資其妙目,假日而睹耳。今布毫於千步之外,目力所匱,無假以見,於而察微避危,無所少矣。何爲以千丈所昧,還疑百尋之毫乎?今不達緣本,情感所匱,無會以聖,而知取至於致道之津,無所少矣。何爲以緣始之昧,還疑旣明之化矣哉?”
- [문] 요즘 사람들이 말하기를, “연緣의 시원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부처님을 믿을 수 없다”고 한다. 이는 올바른 앎[感]이 아닌가? 성인은 왜 이를 밝히지 않는가?
- 033_0159_c_05L或問曰:“今人云‘不解緣始,故不得信佛’,此非感耶?聖人何以不爲明之?”
- [답] 이른바 앎이란 것은 단순하게 사물에 접하여 움직이는 작용이고 이치에 도달한 것은 아니니, 요컨대 성인에게서 배워 통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치가 진실한 앎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사람들이 몸의 즐거움에 빠져 현상을 벗어나지 못하면 고苦와 공空의 이치를 밝혀 주셨고, 겸애兼愛가 널리 전파되지 않으면 자신의 몸을 던지는 자비를 보여 주셨다. 누구나 실상에 이르지는 못하므로 3승乘을 나누어 설법하셨다. 또한 사람들의 업과 수행이 다르므로 6바라밀을 밝히시어 열반으로 건너가는 다리가 되는 보응을 하나도 빠짐없이 말씀하셨다. 이것들은 상황에 따라 대응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영취산靈鷲山에서 도를 들은 하늘과 사람은 모두 통달하여 깨달음을 이룬 자가 무수히 많았던 것이다.
- 033_0159_c_07L答曰:“所謂感者,抱升之分,而理有未至,要當資聖以通,此理之實感者也。是以樂身滯有,則朗以苦空之義;兼愛不弘,則示以投身之慈;體非俱至,而三乘設;分業異脩,而六度明。津梁之應,無一不足,可謂感而後應者也。是以聞道靈鷲,天人咸暢,造極者蔚如也。
- 033_0160_a_01L어찌 멀리 연緣의 시원을 의심하여 이치에 이르겠는가? 밝은 가르침이 충분하니 말씀하신 바와 같이 수행하면, 무엇이 부족하겠는가? 그런데도 반드시 믿지 않고 결국 생각으로 미칠 수 없는 것에 지나치게 의심을 품는 것은, 곧 죽을 병에 걸린 사람에게 약을 주어도 먹지 않고 날아오는 화살을 맞고도 고통을 견디면서 그 화살을 뽑지 않는 것과 같다. 요컨대 화살과 약이 만들어진 시원을 추구하느라고 죽음에 이르는 것과 도대체 무엇이 다른가? 모두 옛날부터 도를 쌓고도 아직 원래의 길한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고 오늘날 망령된 의심을 하기에 이르렀으니, 어찌 진실한 이치를 알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치에 맞지 않는 망령된 의심으로는 진실로 성인을 따라 지극한 밝음에 이를 수 없다. “내가 몽매함을 없애지 않으면 몽매함이 나를 사로잡는다”40)고 하였듯이, 진실로 자기를 비우고 몸이 현묘한 조화를 따라 순응하여 참된 믿음으로 나아가면 그 후에 깨달음이 따라오게 된다. 한 번 깨달음이 흔들고 지나가면, 마침내 그윽한 궁극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망령된 의심을 고집하면서 순일함으로 돌아가 옷깃을 여미지 못하는 자는 마침내 미혹이 굳어지는 재앙에 오랫동안 빠지게 될 것이니, 어찌 벗어날 때를 기약할 수 있겠는가? 조금이라도 이치에서 벗어나게 되면 천지 차이로 그 결과가 달라지게 되니,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 033_0159_c_15L豈復遠疑緣始,然至理哉?明訓足,如說脩行,何所不備?而猶必不信,終懷過疑於相所不及者。與將隕之疾,饋藥不服;流矢通中,忍痛不拔;要求矢、藥造搆之始,以致命絕,夫何異哉?皆由積道自昔,故未會元吉,致使今日在信妄疑,豈可以爲實理之感哉?非理妄疑之惑,固無以感聖而剋明矣。夫非我求蒙,蒙而求我。固宜虛己及身,隨順玄化,誠以信往,然後悟隨應來。一悟所振,終可遂至冥極。守是妄疑,而不歸純斂衽者,方將長淪惑固之災,豈有旦期?背向一差,昇墜天絕,可不愼乎!”
- [문] 공자의 가르침에 “생명을 구하여 인仁을 해치지 않고, 자신을 죽여서 인을 완성한다”41)는 말이 있는데, 이는 인의 지극함이다. 또 불경에서도 보살의 행을 말하였다. 노자는 무위의 지극함을 밝혔으니, 이는 열반의 극치에 나아간 것인데도 일찍이 그를 신통하여 부처님이 된 자라고 칭한 일이 없다. 어찌 공자와 노자가 미진한 점이 있고 도를 밝히는 데 궁극에 이르지 못한 것이 있다고 하면서 그들이 도에 이르렀다는 실질을 은폐하고자 하는가? 그러니 불교의 주장은 실질이 없다는 의심이 어찌 생기지 않겠는가?
- 033_0160_a_05L或問曰:“孔氏之訓:‘無求生以害仁,又殺身以成仁。’仁之至也,亦佛經說菩薩之行矣。老子明無爲之至也,卽泥洹之極矣。而曾不稱其神通成佛,豈孔、老有所不盡與?明道欲以扇物,而掩其致道之實乎?無實之疑,安得不生?”
- 033_0160_b_01L[답] 교화를 펴는 데는 각각 상응하는 상황이 있다. 공자는 세상의 어지러움을 다스리고자 수洙ㆍ사泗 지역에서 도를 펼쳐 치도治道에 응한 것이다. 노자는 순수한 풍조가 점점 시들자 『도덕경』 상ㆍ하 두 편을 짓고 세상에서 숨어 버렸다. 가령 안연顔淵ㆍ염백우冉伯牛ㆍ재아宰我ㆍ자공子貢ㆍ윤희尹喜ㆍ장주莊周가 밖으로는 유교와 도교의 가르침을 추앙하여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지극한 데로 이끌고, 안으로는 무생無生의 학문을 받들어 정신의 이치를 밝히고자 했더라도, 세상에서 누가 그것을 알겠는가? 염구冉求ㆍ계로季路ㆍ자유子游ㆍ자사子思ㆍ맹가孟軻ㆍ곽림종郭林宗ㆍ정강성鄭康成ㆍ개공蓋公ㆍ엄군평嚴君平ㆍ반사班嗣ㆍ양왕손楊王孫과 같은 사람들에 이르면, 어떤 사람들은 예교禮敎에 통달하였고, 어떤 사람은 스스로 무위에 맡기는 도교에 통달하였으나, 불법은 기뻐하지 않았다. 이들은 모두 나름대로 인연을 다한 것이고, 결국 불법을 무시한 일이 없다. 그러므로 공자와 노자가 가르침을 세워 이끌었으며, 이러한 사람들은 스스로 감명받은 바가 있어 방자한 행위나 지나친 반응을 하지 않았다. 유교에서는 인을 넓혔고, 도교에서는 인위적인 행위를 삼가게 하였으니, 이들 모두는 가르침을 터득하여 경지에 이른 것이므로 지극하지 않은 바가 없다. 비록 자애와 무위의 학설이 부처님 말씀과 통하기는 하지만 법신과 열반에 대하여 충분히 말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밝지 못한 것일 뿐이다. 또 “무위하지만 행하지 못하는 일이 없다”42)고 한 말과 “저 법신은 형체가 없고 일체에 두루 들어간다”고 한 말이 어찌 같은 곳에 이르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공자, 노자와 여래의 가르침은 비록 세 가지로 서로 길이 다르지만, 선을 익힌다는 점에서는 길을 함께했던 것이다.
- 033_0160_a_11L答曰:“教化之發,各指所應。世蘄乎亂,洙泗所弘,應治道也。純風彌凋,二篇乃作,以息動也。若使顏、冉、宰、賜、尹喜、莊周,外讚儒玄之迹,以導世情所極,內稟無生之學,以精神理之求,世孰識哉?至若冉季、子游、子夏、子思、孟軻、林宗、康成、蓋公、嚴平、班嗣、楊王之流,或分盡於禮教,或自畢於任逸,而無欣於佛法,皆其寡緣所窮,終無僭濫。故孔、老發音指導,自斯之倫,感向所曁,故不復越叩過應。儒以弘仁,道在抑動,皆已撫教得崖,莫匪爾極矣。雖慈良、無爲,與佛說通流,而法身、泥洹無與盡言,故不明耳。且凡稱‘無爲而無不爲’者,與夫‘法身無形,普入一切’者,豈不同致哉!是以孔、老、如來,雖三訓殊路,而習善共轍也。
- [문] 삼황ㆍ오제부터 공자와 노자에 이르기까지 불법으로 마음을 닦은 사람은 있겠지만, 불법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눈 행적은 이제껏 들어보지 못하였다. 무슨 까닭인가?
- 033_0160_b_05L或問曰:“自三五以來,曁于孔、老。洗心佛法,要將有人。而獻酬之迹,曾不乍聞者,何哉?”
- [답] 내가 앞에서 논한 내용은 이미 분명하다. 세속적인 유교에서는 오직 다스림에 관한 사적에 기울여서 편찬하였고, 세속적인 것을 뛰어넘는 것이 있었다고 해도 역사 기록에서 흩어져 사라지거나 분서갱유焚書坑儒로 없어져 버렸다.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저 삼황三皇의 책은 3분墳이라고 하고, 대도大道를 말하고 있다”43)고 하였는데, 그때는 효와 자애가 자연히 충분한데 어찌 다시 인의를 가르쳤겠는가? 순일함과 질박함에서 벗어나지 않았는데, 노자와 장자가 또 무엇을 가르칠 필요가 있었겠는가? 또 정신의 근본은 태어남이 없는 것임을 밝히고 일체의 본성을 공하다고 함으로써 궁극을 비추지 않는다면, 또 어찌 위대한 도라고 하겠는가? 이러한 글이 없어졌으니, 세상 사람들 중 누가 알겠는가? 사마천[史遷]은 오제五帝에 대한 글을 쓰면서 각각에 대해 말하기를, “태어나면서부터 신령스러웠다,” “어려서부터 말을 잘 하였다,” “스스로 자기 이름을 말했다,” “깊이 생각하여 모든 것이 통하였다,” “그 지혜가 신과 같았다”고 하였으니,44) 이미 저 대승 보살이 화생한 것과 같은 종류의 일이다.
- 033_0160_b_07L答曰:“余前論之指已明,俗儒而編專在治迹。言有出於世表,或散沒於史策,或絕滅於坑焚。今又重敷所懷。夫三皇之書,謂之『三墳』,言大道也。爾時也,孝慈天足,豈復訓以仁義?純朴不離,若老、莊者復何所扇?若不明神本於無生,空衆性以照極者,復以何爲大道乎?斯文沒矣,世孰識哉!史遷之述五帝也,皆云生而神靈,或弱而能言,或自言其名。懿淵疏通,其智如神。旣以類夫大乘菩薩,化見而生者矣。
- 033_0160_c_01L황제가 헌원의 언덕에서 살고 공동산崆峒山에 오르며 환산丸山과 대산岱山에 오른 것과, 고양제가 유릉幽陵과 반목蟠木을 유행하여 그 발자취가 먼 바다 저편까지 이른 것이 여래如來의 도에 말미암은 것이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오제五帝의 치세는 대를 이어 오래 계속되었고, 요임금은 100년, 순임금은 70년이었다. 더욱이 광성廣成ㆍ대외大隗ㆍ홍애鴻崖ㆍ소보巢父ㆍ허유許由ㆍ지보支父ㆍ북인北人ㆍ고야姑射의 네 신선들의 부류45)는 현묘한 기풍을 닦고 쌓아서 한 시대를 풍미하였지만, 5경에 남아 있는 것은 오직 「요전」ㆍ「순전」 두 편뿐이며, 그나마 줄어들고 빠진 기록이다.
- 033_0160_b_18L居軒轅之丘,登崆峒,陟几岱,幽陵蟠木之遊,逸迹超浪,何以知其不由從如來之道哉?以五帝之長世,堯治百年,舜則七十。廣成、大隗、鴻崖、巢許、支父、化人、姑射四子之流,玄風畜積,洋溢于時。而『五典』餘類,唯唐、虞二篇,而至寡闕。
- 또 사마천이 “백가百家가 황제에 대해 서술하고 있지만 그 글은 단아하지 못하며, 훌륭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46)고 기록하고 있듯이, 오직 살벌한 내용만을 수록하였다. 치적이 매우 많은데도 한 가지도 제대로 기록하지 않았으니, 어찌 남아 있는 글들에서 지극한 도가 융성하였음을 볼 수 없다고 이들 모두가 허망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제 신령하고 명철한 임금이 넓은 세상을 다니고 구자具茨에 일곱 성인을 데리고 가며,47) 묘고야산[姑射]에서 신선을 보았으니,48) 그러한 조화의 삶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은미한 말이 분명히 드러나게 되면, 어찌 이러한 사람들이 정신을 궁극에 닿게 하여 억 겁을 벗어난 것이 아닌지 알겠는가? 광성廣成의 말에 “지극한 도의 요체는 그윽하여 말로 표현할 수 없다”49)는 것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수릉엄삼매首楞嚴三昧이다.
- 033_0160_c_03L子長之記,又謂:‘百家之言黃帝,文不雅訓,搢紳難言。唯採殺伏治迹,猶萬不記一。’豈至道之盛,不見于殘缺之篇,便當皆虛妄哉?今以神明之君,遊浩然之世,攜七聖於具茨,見神人於姑射,一化之生,復何足多談。微言所精,安知非窮神億劫之表哉?”“廣成之言曰:‘至道之精,窈窈冥冥。’卽首楞嚴三昧矣。
- “나의 도를 얻은 자는 위로는 황제가 되고, 아래로는 왕이 된다”50)고 하였으니, 이는 조화를 따라 오르내리고 어디든 날아갈 수 있는 황제인 전륜성왕과 같은 무리가 된다는 것이다. 또 “나의 도를 잃은 자는 위로는 빛을 보고, 아래로는 땅이 된다”51)고 하였으니, 이는 천인天人의 세계에서 나고 죽는 것을 말한 것이다. 또 황제가 대외의 풍모에 감격하여, “천사天師라 경칭하고 물러갔다”52)고 하였으니, 이는 부처님에 대한 10호號의 칭호와 같다.
- 033_0160_c_11L‘得吾道者,上爲皇,下爲王。’卽亦隨化升降,爲飛行皇帝、轉輪聖王之類也。‘失吾道者,上見光,下爲土。’亦生死於天人之界者矣。‘感大隗之風,稱天師而退’者,亦十號之稱矣。
- 이들은 아마도 스스로 무생無生의 교화를 체득하였을 것이다. 모두가 젊어서부터 도가 깊어 그 업이 그윽한 진리에 통하였으나, 오래전에 사적이 없어져서 그들이 펼친 이치가 글 속에서 가려졌던 것이다. 그러므로 백가가 성인들에 대해 쓴 것은 분명한 듯하지만 우매하고, 벼슬하는 유학자들은 훌륭한 가르침이라고 하지 않고 있다. 이제 세상에 가득한, 도에 깊지 못한 사람들은 역사 기록에 기대어 지극한 이치를 억누르고, 사사로운 이해에 따라 원대한 교화를 외면하여 영겁토록 정신을 곤고하게 하니, 어찌 애통하지 않은가? 백익伯益은 『산해경山海經』에 “천독(天毒:인도)이라는 나라는 사람을 두려워하고 사람을 사랑한다”고 기록하였고, 곽박郭璞은 그 주석에서 “옛날 천독이라는 나라는 천축이고, 부처가 출현한 곳이다. 두려워하고 사랑한다는 뜻은 여래如來의 큰 자비를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 033_0160_c_16L自恐無生之化,皆道深於若時,業流於玄勝。而事沒振古,理隨文翳,故百家所摭,若曉而昧,又搢紳之儒,不謂雅訓。遂令殉世而不深于道者,仗史籍而抑至理,從近情而忽遠化,困精神於永劫,豈不痛哉!伯益述『山海』:‘天毒之國,偎人而愛人。’郭璞傳:‘古謂天毒,卽天竺,浮屠所興。偎愛之義,亦如來大慈之訓矣。’
- 033_0161_a_01L이와 같이 삼황ㆍ오제 때 불교에 대하여 이미 들었다고 하였으니, 국전國典에 전하지 않는다고 해서 의심하기에 충분하지 못하다. 3대代 이래로 공자와 노자의 시대까지 역사 기록 외에 있었던 일들 모두를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예기禮記』의 기록에 의하면, 공자가 예禮에 대해 묻자 노자가 대답하였고, 관령關令인 윤희尹喜가 노자에게 도를 구하자 다시 도를 밝혔다고 한다. 가령 이 『도덕경』 상ㆍ하 두 편이 없어지고 『예기』만 남아 있다면, 후세에 어찌 노자를 예나 아는 늙은 유학자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노자는 심오한 기풍을 체득한 사람이 아닌가? 이제 오랜 세대를 거치는 동안 수많은 서책들이 없어진 뒤에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을 리가 없는데, 어찌 보이는 것으로만 단정하여 공자와 노자 사이에 교류가 없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 033_0161_a_01L固亦旣聞於三、五之世也。國典不傳,不足疑矣。凡三代之下,及孔、老之際,史策之外竟何可量?孔之問禮,老爲言之;關尹之求,復爲明道。設使二篇或沒,其言獨存於『禮記』,後世何得不謂柱下翁,直是知禮老儒?豈不體於玄風乎?今百代衆書,飄蕩於存亡之後,理無備在。豈可斷以所見,絕獻酬於孔、老哉!
- 동방삭이 한무제에게 겁소劫燒53)에 대해 말한 것과 유향劉向이 『열선전列仙傳』에서 74인이 불경을 지니고 있다고 한 것은 학자의 좁은 식견일 뿐, 불교가 후한 명제 때 들어왔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정신을 치달리게 하여 세상에서 뛰어나게 된 자는 많으며 눈에 띠지만, 정성을 기울여 그윽한 데 이른 자는 적고 드러나지 않는다. 따라서 깊이 깨달은 진실이 세상의 사물에서 드러나지 않고 있는 것일 뿐이다.
- 033_0161_a_09L東方朔對漢武劫燒之說,劉向『列仙』敍‘七十四人在佛經’,學者之管窺於斯,又非漢明而始也。但馳神越世者衆而顯,結誠幽微者寡而隱,故潛感之實,不揚於物耳。
- 도인 불도징佛圖澄은 어질고 성스러웠는데, 석륵石勒ㆍ석호石虎 시대에 석호에게 말하기를, “임치성臨菑城에 옛날 아육왕사지[阿余王寺處]가 있는데, 거기에는 아직 불상과 승로반承露盤이 있다. 깊은 숲 속 큰 나무 아래에 땅 속으로 20길 되는 곳에 있다”고 하였다. 석호의 사자가 불도징의 말에 따라 땅을 파서 찾아보니 모두 불도징의 말과 같았다.
- 033_0161_a_14L道人澄公,仁聖於石勒、虎之世,謂虎曰:‘臨菑城中,有古阿余王寺處,猶有形像、承露盤,在深林巨樹之下,入地二十丈。’虎使者依圖陷求,皆如言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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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_0161_b_01L근래에 요흥의 숙부가 진晉나라 왕이 되었을 때, 하동 포판의 늙은이가 말한 아육왕사지에서 빛이 나오는 것을 보고 땅을 파서 부처님의 유골을 얻었다. 석함 속에 있는 은으로 된 상자에서 발하는 빛이 매우 특이하였다. 진왕이 마중나가 패수 가에서 함을 맞이하였는데, 비구들은 이제 새로 지은 절에서 그 석함을 볼 수 있다.
이로써 보면, 불교가 제나라와 진나라 땅에 있은 지 오래되었다. 그러나 3전傳54)에서 말하고 있지 않은 것은 간보干寶와 손성孫盛의 역사책55)에 불교에 대한 이야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묘한 교화는 실로 드높았으며, 진나라 때에는 강남에서 융성하였다. - 033_0161_a_18L近姚略叔父爲晉王,於河東蒲坂,古老所謂阿育王寺處,見有光明。鑿求得佛遺骨,於石函銀匣之中,光曜殊常,隨略迎都於霸上比丘,今見在新寺。由此觀之,有佛事於齊、晉之地久矣哉!所以不說於三傳者,亦猶于寶、孫盛之史,無語稱佛,而妙化實彰有晉,而盛於江左也。”
- [문] 만약 여러 부처님들이 나타나 일체를 깨닫고 위엄 있고 신묘한 능력이 일체 현상에 자재하다면, 어찌하여 지금 빛나는 위의를 발하여 근기가 높고 낮은 자들이 모두 함께 깨닫게 하지 않는가? 어찌하여 궁박한 상황에 신묘한 공적을 떨쳐서 인간들의 불행한 상태를 제거하지 않으며, 군자의 무리들에게 부처의 모습을 보이지 않아 모두 믿지 않게 하여 일천제一闡提56)의 고통에 빠지게 하는가? 백기白起와 항우[項籍]는 하루 동안 진秦나라와 조趙나라 사람들 60만 명을 생매장하였는데, 옛날이나 지금이나 올바르면서도 생매장당한 사람들은 진실로 모두 큰 선을 쌓은 숙연宿緣이 없었던 것인가? 좋은 인연이 하나도 없고 모두 큰 악만 지었다고 볼 수는 없을 터인데, 부처님의 자비를 입지 못하고 하루 아침에 모두 생매장 당하는 고통을 당하였다. 그런데도 부처님은 억지로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같다고 하며 참혹한 고통을 앉아서 바라보고 대응하지 않았으니, 어찌 자비롭다고 하겠는가? 인연으로도 운명[天]을 바꾸지 못하고 덕으로도 세상일을 벗어나게 하지 못하여 구할 수 없다면, 어찌 신통자재하고 불가사의하다고 하겠는가?
- 033_0161_b_02L或問曰:“若諸佛見在,一切洞徹,而威神之力,諸法自在。何爲不曜光儀於當今,使精麤同其信悟;灑神功於窮迫,以拔冤抂之命?而令君子之流,於佛無睹,故同其不信,俱陷闡提之苦?秦、趙之衆,一日中,白起、項藉坑六十萬。夫古今彝倫,及諸受坑者,誠不悉有宿緣大善;盡不睹無一緣,而悉積大惡。而不睹佛之悲一日俱坑之痛,憖然畢同,坐視窮酷而不應,何以爲慈乎?緣不傾天,德不邈世,則不能濟,何以爲神力自在、不可思議乎?
- 노나라 양후가 일몰을 지연시킨 것,57) 후한의 경공耿恭이 우물에서 물이 솟아 나오게 한 것,58) 후한의 송균이 구강九江에서 호랑이가 강을 떠나게 하고 메뚜기를 국경에서 멈추게 한 것59) 등은 모두 마음이 두루 통하여 자연의 법칙이 아닌 것을 현묘하게 통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물며 부처님의 신통력으로 백기의 기운을 누그러뜨리고 항우의 마음을 다스려 수많은 생명을 살리는 것이 저 수미산을 겨자씨에 넣는 것60)보다 훨씬 쉽고, 호랑이와 비둘기에게 자신의 몸을 던지는 것61)보다 더욱 어진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지금 부처님의 신통력은 생각해도 보지 못하고 말을 해도 듣지 못하며 청하여도 얻지 못하니, 적막하기만 하고 허공과 다름이 없다. 그런 가운데에도 사문이 되어 소신공양하거나 인간의 도리를 끊고 여섯 가지 정을 끊어 버리거나 힘써 노력하고 재보를 기울여 절을 짓고 불상을 짓거나 하여 한순간에 현세의 일을 버리고도 얻는 바가 없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닌가.
- 033_0161_b_14L魯陽迴日,耿恭飛泉,宋九江虎違江而蟥避境,猶皆心撗徹,能使非道玄通。況佛神力,融起之氣,治籍之心,以活百萬之命殊易。夫納須彌於芥子,甚仁於毀身乎一虎一鴿矣!而今想焉而不見,告焉而不聞,請之而無救,寂寥然與大空無別。而於其中,有作沙門而燒身者,有絕人理而翦六情者,有苦力役、傾資寶而事廟像者,頓奪其當年,而不見其所得。吁!可惜矣。
- 033_0161_c_01L만약 보응이 장래에 있다고 한다면, 앞에서 나온 60만 명의 생명은 선악이 같지 않은데도 죽어 없어진 것은 같다. 지금 선악이 이미 다른데 어찌 현세의 보응은 같고 죽은 뒤 받게 되는 것만 다를 수 있는가? 선업ㆍ악업이 다른데도 현세에서는 하나도 구별되지 않고 장래는 막막하니, 무엇을 바라고자 하는 것인가? 하물며 내세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야 또 어떻겠는가?
- 033_0161_c_01L若謂應在將來者,則向六十萬,命善惡不同,而抂滅同矣。今善惡雖異,身後所當,獨何得異?見世殊品,旣一不蒙甄,將來浩蕩,爲欲何望?況復恐實無將來乎?經云:“足指按地,三千佛土皆見,及盲聾瘖瘂、牢獄毒痛,皆得安寧。”
- 불경에서는 “부처님께서 발가락을 땅에 대자 삼천대천세계의 불국토가 모두 나타나고, 맹인ㆍ귀머거리ㆍ벙어리ㆍ뇌옥牢獄ㆍ독으로 인한 고통[毒痛]들이 모두 평안을 얻었다”고 한다. 무릇 부처님은 먼 자에게나 가까운 자에게나 산 자에게나 죽은 자에게나 계율이 있는 자에게나 없는 자에게나 똑같이 자비롭게 대하신다. 이러한 마음이 있으므로 중생의 고통을 살펴 저들을 한결같이 평안하게 할 수 있다고 한다. 불경에는 이러한 말들이 매우 많지만, 실제로는 조금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혹시 다른 나라 인도에 세상을 풍미한 뛰어난 사람이 있어 이 공법空法을 협박과 회유로 이끌어 말로는 미묘하고 심원한 내용을 설하고 행적에는 밝고 고요한 아름다움이 있어, 쉽게 믿은 자들이 스스로 불교에 몸을 던지고 서로 이어서 마침내 예상할 수 없던 결과에 이르게 되는 형세를 막을 수 없는 것이 아닌지 어찌 알겠는가?
- 033_0161_c_07L夫佛,遠近存亡、有戒無戒,等以慈焉。此之有心宜見,苦痛宜寧,與彼一矣。而經則快多是語,實則竟無蹔應。安私非異國有命世逸群者,搆此空法,以脅暴,善交言,有微遠之情事,有澄肅之美純,而易信者一己輸身,遂相承於不測,而勢無止薄乎?”
- [답] 이제 바른 길을 보지 못하여 쉬운 것을 험하다고 하지만, 진실로 길을 잘 보면 어려운 것이 없다. 항상 없는 것이 도이다. 부처님만이 정신으로 도를 본받으셨으니, 덕과 도는 하나이고 정신과 도는 둘이 된다. 둘이므로 비춤으로써 변화와 통하고, 하나이므로 항상 원인이 되면서도 인위적인 지음이 없다.
- 033_0161_c_14L答曰:“今不睹其路,故於夷謂險。誠瞰其塗,則不見所難矣。夫常無者,道也,唯佛則以神法道。故德與道爲一,神與道爲二。二故有照以通化,一故常因而無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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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_0162_a_01L저 만 가지 변화라는 것은 진실로 각각의 인연을 따르는 것이니, 이는 대도大道 가운데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이제 부처님께서 제법자재諸法自在하고 불가사의하다고 하는 것은 부처님께서 인연에 의하지 않고 숙명을 초월하여 마음대로 구제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대개 중생이 무량한데도 신묘한 공력으로 이끈다는 것은 모두 각각의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어서 그 비춤을 헤아릴 수 없다고 하는 것일 뿐이다. 비유하자면 요임금 때의 대홍수와 4흉凶, 순임금 때의 고瞽의 완고함과 상象의 오만함 등과 같은 경우이다. 이들은 모두 교화하기에 너무 굳어 버려서 요임금ㆍ순임금이라고 하더라도 변화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반드시 각각의 경우에 따라 홍수를 다스리고 4흉을 유배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진실로 그 덕에 합치한 일이니, 어찌 위대하지 않는가? 저 부처란 다른 것이 아니다. 생각건대 성인의 도는 세속의 중생을 구제할 뿐 아니라 중생 이외의 세상도 교화하는 것일 뿐이다. 인연이 이르러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공적이 저절로 이루어져 만물을 완성한 것이 바로 요임금이 남달리 감응한 것이다. - 033_0161_c_19L夫萬化者,固各隨因緣,自於大道之中矣。今所以稱佛,云‘諸法自在,不可思議’者,非曰爲可不由緣數,越宿命而撗濟也。蓋衆生無量,神功所導,皆依崖曲暢,其照不可思量耳。譬之洪水四凶、瞽頑象傲,皆化之固然,堯、舜不能易矣。而必各依其崖,降水流凶,允若克諧,其德豈不大哉!夫佛也者,非他也,蓋聖人之道不盡於濟主之俗,敷化於外生之世者耳。至於因而不爲,功自物成,直堯之殊應者。
- 저 종種의 음률에 의해 다른 부류를 감화시킨 것62)은 마음이 그윽히 합치했기 때문인데, 하물며 저 신령한 성인이 신묘한 이치로 다른 부류를 감화시키는 데 있어서이겠는가? 그 모습이 저 불국토에서 그윽하게 만나는 이들은 모두 간절한 뜻과 밝은 정신이 여러 겁 동안 쌓여 점점 밝아졌으므로 진리를 꿰뚫어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석가모니께서 빛을 발하여 시방세계를 남김없이 비추고 다보탑을 솟아나게 하시며,63) 수미등왕불의 세계가 순식간에 유마힐의 방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게 했다고 해도,64) 그것이 어찌 부처님 혼자만 나타낸 것이겠는가? 사람들도 이를 볼 수 있다.
- 033_0162_a_07L夫鍾律感類,由心玄會,況夫靈聖以神理爲類乎?凡厥相與冥遘於佛國者,皆其烈志淸神,積劫增明,故能感詣洞徹。致使釋迦發暉,十方交映,多寶踊見,鐙王入室。豈佛之獨顯乎哉?能見矣。
- 그런데 지금의 군자들이 부처님[應供]의 세상에 태어나지 못하고 우적(禹績:중국)에 있게 된 것은 모두 옛날에 정성이 미치지 못하여 현재에 어긋나게 된 것이다. 비록 백이ㆍ숙제와 같이 청빈하고, 유하혜ㆍ계찰과 같이 바를지라도 뜻한 바가 진실로 다르다면, 또 어떤 감화를 받아서 부처님을 뵐 수 있겠는가? 하물며 그보다 못한 사람들이 비록 예의를 몸에 익히고 세상에 명성을 떨쳐도, 세상에 대한 집착이 깊고 뜻이 도에 합치하지 않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다른 사람들의 군자이지만 실로 하늘이 보면 소인이다. 지극한 영이 또 어떻게 감응할 수 있겠는가? 어찌 부처님께서 이들에게만 자신을 숨기신 것이겠는가? 자신이 보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 033_0162_a_12L至若今之君子,不生應供之運,而域乎禹績之內。皆其誠背于昔,故會乖于今。雖復淸若夷、齊,貞如柳、季,所志茍殊,復何由感而見佛乎?況今之所謂,或自斯以還。雖復禮義熏身,高名馥世,而情深于人,志不附道。雖人之君子,而實天之小人。靈極之容,復何由感應?豈不之偏隱哉?我不見矣。
- 만약 부처님께서 인연을 따라 나타나시고 6바라밀의 정성이 숙업宿業에서부터 일어난다면, 홀로 부처님의 광명을 알 수 있는 자 또한 많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도와 세속이 나란히 있어도 무엇으로 서로를 구별하겠는가? 그러므로 거칠고 신묘하다는 것은 나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부처님을 보고 못 보는 것은 감응이 다르기 때문인데, 어찌 자신이 부처님의 빛나는 위용을 보지 못한다고 하여 부처님께서 현존하시지 않는다고 의심할 수 있는가?
- 033_0162_a_20L若佛或有隨緣來生,而六度之誠發自宿業,感見獨朗,亦當屢有其人。然雖道俗比肩,復何由相知乎?然則麤妙在我,故見否殊應。豈可以己之不曜於光儀,而疑佛不見存哉?
- 033_0162_b_01L천지에 신령이 있고, 정신이 불멸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지금 진나라와 조나라에서 생매장 당한 사람들도 그 정신은 우주와 함께 계속되니, 천지가 이루어지고 무너져도 그것은 소멸하지 않는다. 백기白起ㆍ항우[項籍] 두 장군이 어찌 60만 명의 정신을 순식간에 소멸시킬 수 있겠는가? 정신은 소멸할 수 없으며 소멸하는 것은 육체뿐이니, 어찌 부처님의 말씀과 같지 않은가? 항상 소멸하는 것이 중생들의 육체이므로 그 육체가 소멸하게 될 때 마침 백기와 항적을 만난 것이다. 어떻게 이를 밝힐 것인가?
- 033_0162_b_01L夫天地有靈,精神不滅,明矣。今秦、趙之衆,其神與宇宙俱來,成敗天地而不滅。起、籍二將,豈得頓滅六十萬神哉?神不可滅也,則所滅者身也。豈不皆如佛言:“常滅群生之身,故其身受滅。”而數會於起、籍乎?何以明之?
- “건도乾道가 변화하여 각각 성명性命을 바르게 한다”65)고 하였으니, 닭ㆍ돼지ㆍ개ㆍ양의 생명에 이르기까지 모두 건乾ㆍ곤坤 6자(子:爻)로 동일한 것이다. 사람들이 다른 생명을 죽여 자신의 육체를 유지하는 것은 거미가 거미줄을 치는 것과 똑같이 포악하다. 매와 호랑이는 다른 생명을 잡아먹지 않으면 살 수 없으나 사람은 채소를 먹어도 살 수 있으니, 다른 생명을 죽이는 것은 더욱 포악한 일이다. 천도는 지극히 공정하고 뭇 생명이 살기를 바라니, 생명을 학대하고 어찌 응보를 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제 60만 명은 선악이 비록 다르지만, 그들 모두의 생명을 해쳤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아름답고 악한 것이 다르므로 그들이 삶에서 누리는 바는 진실로 다를 수 있지만, 생명을 해친 것은 동일하므로 같은 날 죽임을 당하였던 것이다.
- 033_0162_b_07L夫乾道變化,各正性命,至于鷄、彘、犬、羊之命,皆乾坤六子之所一也。民之咀命充身,暴同蛛蟱爲網矣。鷹、虎非搏噬不生;人可飯蔬而存,則虛己甚矣。天道至公,所希者命,寧當許其虐命,而抑其冥應哉!今六十萬人,雖當美惡殊品,至於忍咀群生,恐不異也。美惡殊矣,故其生之所享,固可實殊。害生同矣,故受害之日,固亦可同。
- 지금 도가의 말을 세상에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고 평가한다. 우공于公66)ㆍ병길邴吉67)과 같은 사람들은 다른 이들을 편안하게 해 주어서 후에 응보를 받았고, 엄연년嚴延年68)ㆍ전분田蚡69)과 진晉의 선제宣帝70) 등은 각각 살인에 대한 응보를 받았다. 이것들은 모두 한漢ㆍ위魏의 사서에 기록되어 있어 세상 사람들이 믿는다.
- 033_0162_b_16L今道家之言,世之所迂,無以云焉。至若于公、邴吉、虞怡,德應于後;嚴延年、田鼢、晉宣,殺報交驗。皆書于漢、魏、世所信睹。
- 033_0162_c_01L사람을 살리면 복이 자손에까지 미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하물며 정신은 생명을 죽이고 살리는 주체이니, 훗날의 자신에게 화복이 없을 수 있겠는가? 남의 몸을 죽이고 살리는 데 따라 반드시 자기 몸에 응보를 받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의 정신을 통하게 하고 막히게 하면 자기의 정신에 그에 따른 안락과 근심이 어찌 없겠는가? 엄연년이 죽인 사람들은 모두 소인들이었고, 전분이 죽인 두영竇嬰과 진의 선제가 죽인 왕릉王陵은 뛰어난 재목이었다. 그들의 어질고 어질지 않음과 귀천은 다르지만 죽인 자들이 받는 응보는 하나이다. 응보를 받는 것은 부호를 죽였는가, 천한 사람을 죽였는가에 따라 다르지 않고, 죽인 자의 신분이 장상將相인가 진왕晋王인가에 따라 다르지도 않다. 그러니 어찌 천도가 공평하지 않다고 하겠는가.
- 033_0162_b_19L夫活人而慶流子孫,況精神爲殺活之主,無殃慶於後身乎?殺活彼身,必受報己身,況通塞彼神,而不榮悴於己神乎?延年所殺,皆凡等小人;竇嬰、王陵、宰牧之豪。賢否殊,貴賤異,其致報一也。報之所加,不論豪賤,將相、晉王不二矣。豈非天道至平,
- 재주 있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도 각각 그 자식이고, 하늘의 이치는 성명性命에 있는 것이지 귀천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돼지와 물고기가 비록 천하지만 모두 건도乾道를 본받아 각기 성과 명이 바른 것이다. 허공을 나는 큰 새와 나무에서 먹이를 쪼아먹는 작은 새, 갈로葛廬가 소리를 들었다는 소[牛],71) 진晉의 서파西巴가 감동시켰다는 사슴72)도 자기 무리에서는 각각 애정이 깊은 것이다.
- 033_0162_c_03L才與不才,亦各其子。理存性命,不在貴賤故耶?則肫魚雖賤,性命各正於乾道矣。觀大鳥之迴翔,小鳥之啁嚼,葛廬所聽之牛,西巴所感之鹿,情愛各深於其類矣。
- 여기에 임산부와 어린아이가 있다고 하자. 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를 꺼내고 어린아이를 불태운다면, 그는 남을 원통하게 한 재앙을 받는다고 한다. 이는 하늘이 응보하는 것이다. 이제 봄에 새끼 밴 짐승을 잡아 새끼를 태우거나 절인다면, 천도天道의 응보도 동일할 것이다. 어찌 이 일에만 유독 응보가 없을 수 있겠는가? 다만 짐승의 피를 마시던 때부터 지금의 모습과 이치가 이어져 내려와 짐승과 물고기 잡는 일은 갑자기 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성왕은 푸줏간과 부엌을 멀리하여 백성을 교화하였으니, 백성이 살생하는 풍습에 순응하면서 그 해를 줄이고자 한 것이다. 성인은 푸줏간에 가서 짐승이 죽는 소리를 들으면 차마 그 고기를 먹지 못하였고,73) 가을에 승냥이로 제사지내고 봄에 수달 류로 제사지내서 수렵 기간을 삼는 것74)은 수렵할 때가 아닌 때 새끼 밴 짐승을 해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며, 봄에 사냥할 새와 물고기를 잡는 그물을 치지 못하게 한 것75)은 생명이 소중함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제나라 선왕이 종에 피를 칠하는 흔종의 예를 행하기 위해 소를 죽이는 일을 차마 못했다고 한 것을 맹자가 칭찬한 것76)은 왕에게 살생을 싫어하는 덕이 있음을 안 것이다.
- 033_0162_c_08L今有孕婦稚子於斯,而有刳而剔之,燔而炙之者,則謂冤痛之殃,上天所感矣。今春獵胎孕,燔葅羔雛,亦天道之所一也,豈得獨無報哉?但今相與理,緣於飮血之世,畋漁非可頓絕。是以聖王庖廚其化,蓋順民之殺以減其害,踐庖聞聲,則所不忍。因豺獺以爲節,疾非時之傷孕。解罝而不網,明含氣之命重矣。孟軻擊掌於舋鍾,知王德之去殺矣。
- 중국의 선왕은 백성을 교화하여 위급에서 구하였으니 비록 그 인仁이 깊지만, 백성이 살생하는 것을 갑자기 금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여래는 정신을 궁구하고 궁극을 밝혔으므로, 5도道의 생명을 고르게 중히 여겨 살생을 금하는 것을 여러 계율의 으뜸으로 삼았다. 평사(蓱沙:빈비사라왕)는 흰 토끼를 죽이고 그 응보를 받았고, 석씨는 황어黃魚를 죽여 멸망하였다.77) 이것들은 응보의 형세를 보여 준 것이다. 인과응보는 심오하고 정미하며, 멀지만 어둡지 않다.
- 033_0162_c_17L先王撫麤救急,故雖深其仁,不得頓苦其禁。如來窮神明極,故均重五道之命,去殺爲衆戒之首。蓱沙見報於白兔,釋氏受滅於黃魚,以示報應之勢。皆其窈窕精深,迂而不昧矣。
- 033_0163_a_01L만약 전생에 도道를 들을 수 있어서 불법을 공경하고 계율을 닦았다면, 반드시 마복(馬福:趟括)의 군사들처럼 장평長平에서 땅 속에 묻히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또 그러한 위험에 처하게 되었어도 불법을 철저히 믿었다면 반드시 당시의 환난을 극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흔종을 중하게 여겨 짐승을 죽였다면 전생의 선한 응보를 받기 어려웠을 것이고, 불살생의 계율을 지킨 공덕이 있으면 내생에 결코 땅 속에 묻히는 응보를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위급한 상황에 처한 사람에게 신통력을 발휘하여 원한과 죄에 빠져 있는 생명을 구한다고 하는 이와 같은 도는 실로 지극한 자비인 것이다. 이제 세상에서 칭찬을 받아도 도심道心이 없어 여러 생명을 해치면 그 응보가 곧 닥치게 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다. 부처님은 이치에 따라 정당한 일을 행하여 법에 의해 만물을 구제하시는 것이니, 법에 의하지 않고는 구제할 도리가 없다. 어찌 부처님에게 진실함이 없겠는가? 비유하자면 편작이 병을 치료하기 위해 약을 준다 해도 믿지 않고 따르지 않으면 병이 치료되지 않는 것과 같다. 이것이 어찌 편작의 의술이 훌륭하지 않아서이겠는가?
- 033_0162_c_22L若在往生能聞于道,敬脩法戒,則必不墜長平而受坑馬服矣。及在旣墜,信法能徹,必超今難。若緣舋先重,難有前報。及戒德後臻,必不復見坑來身矣。所謂灑神功於窮迫,以拔冤抂之命者,其道如斯,慈之至矣。今雖有世美,而無道心,犯害衆命。以報就迫,理之當也。佛乘理居當,而救物以法,不蹈法則理無撗濟,豈佛無實乎?譬之扁鵲,救疾以藥,而不信不服,疾之不瘳,豈鵲不妙乎?
- 노나라 양후와 후한의 경공耿恭, 원조遠祖인 송구강宋九江이 일몰을 지연시키고, 샘물을 솟아오르게 하고, 메뚜기와 호랑이의 어려움을 피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정성으로 감동시켰기 때문이 아닌가? 천도를 감동시킨 것이 곧 부처님을 감동시킨 것이다. 이 사람들은 진나라와 조나라에 있었더라도 반드시 어려움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저 위험에 빠진 자들은 모두 정성이 없어서이니, 어떻게 부처님을 감동시켜 백기와 항적을 감화시키는 데 이르겠는가?
- 033_0163_a_09L魯陽、耿恭、遠祖九江,所以能迴日、飛泉、虫虎避德者,皆以列誠動乎神道。之感,卽佛之感也。若在秦、趙,必不陷於難矣。則夫陷者,皆已無誠,何由致感於佛,而融冶起、籍哉!
- 저 정신에 통달한 무리들은 지극한 조화의 자리에 함께하므로, 겨자씨 안에서도 수미산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또 설화에 나오는 매와 호랑이는 지금은 비록 호랑이와 매이지만 옛날에는 사람이었을 수 있다. 이들이 일찍이 인연이 있어 부처님의 좋은 운을 만나 부처님께서 몸을 던져 이들을 구제하시고 허벅지 살을 베이신 것이다. 이와 같이 진실로 부처님께서 감동하시어 목숨을 던져 구해 줄 만한 인연이었다면, 감화하는 기적이 어찌 아무렇게나 일어날 수 있겠는가? 수많은 죽음의 바람을 부르는 것은 모두 자기에 의한 것인데, 어찌 부처님을 의심할 수 있는가? 뜻이 간절하다면, 생각하면 볼 수 있고 알려 주면 들을 수 있다. 주공과 공자가 꿈에서 만났고,78) 또 은나라 고종이 부열傅說을 꿈에서 초청하니 실제로 나타났다고 했다.79) 주공과 공자는 세월이 현격하고, 부암傅巖은 멀리 떨어진 험준한 곳인데도 현묘히 대면하는 데 장애가 없었다. 이로 미루어 보면 마음을 깨끗이 하여 생각하고 느끼면 무량수불無量壽佛을 만나보고, 백억 개의 수많은 세계를 뛰어넘어 공적이 없음에 이를 수 있다. 이런데도 그대는 어찌 부처님의 신통이 허공과 다름이 없다고 하는가?
- 033_0163_a_14L夫以通神之衆,萃窮化之堂,故須彌可見於芥子之內耳。又雖今則虎、鴿、昔或爲人,嘗有緣會。故値佛嘉運,投身濟之,割股代之。茍無感可動,以命償殺。融冶之寄,安得妄作?吹萬之死,咸其自己,而疑佛哉?夫志之篤也,則想之而見,告之斯聞矣。推周孔交夢,傳說形求實至,古今攸隔,傅巖遐阻,而玄對無礙。則可以信夫潔想思感,睹無量壽佛,越境百億,超至無功。何云大空無別哉!
- 033_0163_b_01L저 도道는 정신을 단련하는 것과 관련되고, 형체를 보존하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문은 머리를 깎고 소신공양을 하며, 정신을 갈고 닦아 마음의 작용을 끊는다. 정신은 소멸할 수 없으니, 세속을 떠난다고 어찌 도에 위배되겠는가? 인간의 이치를 따라 살고 6정情을 자극하는 세속의 생활이 어찌 나를 사로잡아 정신을 번거롭게 하기를 구할 수 있겠는가? 참으로 자기 스스로 마음의 작용을 끊어서 날마다 덜어내면, 정신이 맑아져 실제로 도에 점차 나아갈 수 있다. 화려한 건축물을 짓는 데 힘쓰고 재물을 기울여 화려한 집을 짓다가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죽으면, 이름으로나 실제로나 도둑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집을 지어 놓고 귀신과 코끼리나 사는 한없이 적막한 곳이 되게 하는 일인 것이다. 형체가 미미해지면 정신도 따라서 심원해지니, 미미하면 곧 청정해지고, 심원하면 신묘한 복을 받게 된다. 도둑질과 도 중에서 어느 것을 택할 것인가? 한순간에 현세를 버리면 높아지고 깊어져서 신명神明과 합하여 복덕이 후생에 빛나게 되는데, 그 복덕을 어찌 이루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 033_0163_b_01L夫道在練神,不由存形。是以沙門祝形燒身,厲神絕往。神不可滅,而能奔其往,豈有負哉?契闊人理,崎嶇六情,何獲于我,而求累于神?誠自翦絕,則日損所淸,實漸于道。苦力榮觀,傾資夐居,未幾有之。俄然身滅,名實所收,不出盜跨。搆館拪神象,淵然幽穆,形從其微,神隨之遠。微則應淸,遠則福妙。盜跨與道,孰爲優乎?頓奪其當年,所以超升。潛行恊于神明,福德彰於後身,豈能見其所得哉?
- 사람의 활동은 반드시 정신의 도에 통해 있고, 사물 또한 공연히 그러한 것이 아니라 마땅한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있는 것이다. 만약 보이지 않는 응보가 앞에서 논한 내용과 같지 않다면, 60만 생명이 무슨 이유로 매장 당했겠는가? 매장 당할 응보가 이미 있었기 때문이고, 좋은 응보가 있었다면 반드시 매장 당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제까지 전국 시대 사람으로 묘연히 세상을 등지고 장수한 안기생安期生80)과 은밀히 상산에 은거한 사호四皓,81) 또는 용안을 지녀 임금이 되고 땅을 나누어 주어 군주가 된 한 고조 등 명성을 날리고 뛰어난 업적을 남긴 자들은 이루 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들은 모두 활의 명인인 예羿의 사정거리 안에 똑같이 있었는데,82) 어찌 그들만 그럴 수 있었는가? 이런 일들이 어찌 전생의 응보가 각각 다른 때문이 아니겠는가? 현세의 복이 과거의 행동으로 이루어짐을 이미 보았다면, 지금의 행위가 내생에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하다. 현세의 삶이 다름을 보면 이는 숙명이 나타난 것인데, 사후에 당하는 일만 어찌 업보에 무관하겠는가?
- 033_0163_b_12L夫人事之動,必貫神道。物無妄然,要當有故而然矣。若使幽冥之報不如向論,則六十萬命,何理以坑乎?旣以報坑,必以報不坑矣。今戰國之人,眇若安期,幽若四皓,龍顏而帝,列地而君,英聲茂實,不可稱數,同在羿之彀中,獨何然乎?豈不各是前報之所應乎?旣見福成於往行,則今行無負於後身,明矣。見世殊品,旣宿命所甄。則身後所當,獨何容濫?
- 033_0163_c_01L불경에 의하면, “부처님께서 교화하는 때를 만난 것은 모두 본디 좋은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처님을 만나면 전생에 만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지금 그대는 현세에서는 조금도 응보가 없고 어떤 허물도 관계가 없다고 하면서 지극한 법을 오히려 헛된 주장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아, 정신의 거울은 한없이 밝은데, 성인을 모욕하는 죄가 두렵지 않은가.
- 033_0163_b_21L經之所寄,自謂當佛化見之時,皆由素有嘉會,故其遇若彼。今曾無蹔應,皆咎在無緣,而反誣至法空搆。嗚呼!神鑑孔昭,侮聖人之殃,亦可畏也。
- 감히 묻노니, 헛된 주장을 하는 자는 성인인가, 현인인가, 아니면 소인인가? 저 성인은 항상된 마음이 없이83) 사물의 본성에 나아가 변화를 일으킬 뿐이다. 만약 육체가 죽을 때 정신도 소멸한다면 한결같이 유교의 가르침으로 삶을 다하면 되는 것이지, 또 무슨 일이 필요하겠는가? 그런데 불멸한다고 속이고 성불한다고 속여서 소신공양하고 머리깎게 하며 결혼하지 못하게 하여 자손을 끊은 일들이 수를 셀 수 없이 많다. 또한 뛰어난 성인은 가르칠 때 일정한 방식이 없으니, 어떤 경우에는 드러나지 않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천하가 다 알게 할 수도 있다. 헛된 주장을 하는 것이 어떤 이로움이 있겠는가? 그 독은 매우 쓰니, 성현의 행위가 아님을 알 것이다. 어떤 사람인가? 소인인 번수樊須 같은 무리도 주공ㆍ공자 앞에서는 옷깃을 여미고 이단이 될까 두려워하였는데, 감히 망령된 주장을 하겠는가? 만약 그 이하의 사람이라면 불초不肖한 무리들이다. 어찌 9류流84) 밖에 일가를 세워 노자ㆍ장자보다 더욱 빛나고, 천 년 뒤에까지 빛을 발할 수 있겠는가?
- 033_0163_c_02L敢問空搆者將聖人與?賢人與?小人與?夫聖無常心,蓋就物之性,化使遂耳。若身死神滅,但當一以儒訓,盡其生極。復何事哉,而誑以不滅,欺以成佛?使燒祝髮膚,絕其胖合,所遏苗裔,數不可量。且夫彦聖,育無常所,或潛有塞矣,空搆何利,而其毒大苦,知非聖賢之爲矣。若人哉,樊須之流也,則亦斂身周、孔、畏懼異端,敢忘作哉?若自茲以降,則不肖之倫也,又安能立家九流之外,增徽老、莊之表,而昭列於千載之後?
- 용수龍樹ㆍ제바提婆ㆍ마명馬鳴ㆍ가전연迦旃延ㆍ법승法勝ㆍ산현山賢ㆍ달마다라達摩多羅 등의 사람들은 널리 5백 년 동안 부처님의 가르침을 숭앙하여 『대지도론大智度論』ㆍ『중론中論』ㆍ『백론百論』ㆍ『아비담론』 등의 논서들을 썼으니, 이들 모두는 신통한 재사들이다. 근래에는 손작孫綽85)이 칭송한 기역耆域ㆍ건타륵健陀勒 등 여덟 명의 현승과 지도림支道林이 초상을 그리고 찬을 붙인 축법호竺法護ㆍ우법란于法蘭ㆍ도수道邃ㆍ궐공칙闕公則 등은 모두 정신이 중화中華를 비춘 사람들이다. 서진 시대의 축법행竺法行은 상서령 악광樂廣86)에 비유되었고, 동진의 시리밀尸梨蜜은 여러 사람들에게 탁월한 경지를 높이 평가 받았으며, 곽문거郭文擧87)는 확연히 깊고 진실하였는데, 그들은 오직 불교를 받들었다. 용수 이래로 위에 말한 모든 사람들이 어찌 불초한 사람의 속임에 빠진 것이라고 하겠는가? 그러니 부처님[黃面夫子]의 일이 어찌 밝고도 밝은 것이 아니겠는가?
- 033_0163_c_14L龍樹、提婆、馬鳴、迦旃延、法勝、山賢、達摩多羅之倫,曠載五百,仰述道訓,『大智』、『中』、『百論』、『阿毘曇』之類,皆神通之才也。近孫綽所頌耆域、健陁勒等八賢,支道林像而讚者竺法護、于法蘭、道邃、闕公則,皆神映中華。中朝竺法行,時人比之樂令。江左尸梨蜜,群公高其卓朗。郭文擧廓然邃允,而所奉唯佛。凡自龍樹以還,寧皆失身於所向謂不肖者之詫乎?然則黃面夫子之事,豈不明明也哉!
- 033_0164_a_01L이제 부처님의 뼈ㆍ이빨ㆍ머리털 등 남아 있는 유품과 발자취는 여전히 본국에서 빛을 발하고 있으니, 이 또한 불도를 증험하는 것이다. 저 인도 사람들은 대부분 성질이 자세히 관찰하고 머리가 좋으면서도 애착과 욕망이 유달리 깊지만, 그 조상들이 모두 부처님 앞에 나아가 누업을 친히 전하여 대대로 그 실질에 접하였으므로 부처님의 그림자와 발자취로 밝게 교화함이 두드러졌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 후대의 왕들이 국력을 기울여 계율을 받들었으며, 4중衆은 고행에 투철하여 죽어도 후회가 없었다. 만약 부처님의 이치가 거짓되고 애매하며 행적이 실제로 특이하지 않다면, 어찌 이를 받아들여 자신의 욕망을 타파하고 형체도 없는 이를 존경하였겠는가? 만약 부처님의 그림자와 유물이 사실이 아니고 근거 없는 헛소문이 나도는 것이라면, 예나 지금이나 불도를 배우러 오는 사람들이 어찌 몸을 괴롭게 하면서 욕망을 떠나려고 하겠는가? 또 수행에 진퇴가 있고 마땅히 장애와 어려움을 겪는데도, 어찌 모두 다시 불법을 독실하게 믿는가? 대략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 033_0164_a_01L今影骨、齒、髮、遺器、餘武,猶光于本國,此亦道之以證也。夫殊域之性,多有精察黠才,而嗜欲類深。皆以厥祖身立佛前,累業親傳世抵,其實影迹遺事,昭化融顯。故其裔王,則傾國奉戒,四衆苦徹,死而無悔。若理之詭曖,事不實奇,亦豈肯傾已破欲,以尊無形者乎?若影物無實,聲出來往,則古今來者,何爲苦身離欲,善是之至?往而反,宜見沮懈,而類皆更篤乎?粗可察矣。”
- [論] 예부터 가르침의 도가 드러나지 않는 이유는 그 삶을 보존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괴로움[苦]은 삶에서 오는 것인데 어리석은 자는 이를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여러 부처님들은 이를 깨달아 생을 괴로움이라고 함으로써 무생無生으로 이끄셨으나, 무생은 한 순간에 체득할 수 없으므로 생의 선악이 같다는 가르침으로 이끄신 것이다. 선한 응보가 가득 차면 곧 생이 완전히 다하는 단계에 오를 수 있다. 그러므로 그 도는 푸른 바다와 같이 넓어서 작아도 나루가 되지 않는 경우가 없고 커도 통하지 않는 경우가 없다. 비록 삶을 보존하기를 힘써 닦는 가르침과 멀게 보이지만 오히려 5경經을 닦고 예교를 익히도록 권고하는 것이다.
- 033_0164_a_11L論曰:夫自古所以平顯治道者,將以存其生也。而苦由生來,昧者不知矣。故諸佛悟之以苦,導以無生。無生不可頓體,而引以生之善惡同。善報而彌升,則朗然之盡可階焉。是以其道浩若滄海,小無不津,大無不通。雖邈與務治存生者反,而亦固陶漸『五典』,勸佐禮教焉。
- 033_0164_b_01L이제 세상 사람들이 천도에서 오는 화와 복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사마천이 백이에게 감동하여 천도를 개탄한 것과 같다. 그러나 성인인 공자가 어찌 망령된 말씀을 하였겠는가? 공자는 “선을 쌓으면 경사가 있고, 악을 쌓으면 재앙이 있다”88)고 하였다. 그러나 안회는 요절하였고, 염백우는 병이 들어 후손들의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다. 상신(商臣:초나라 목왕)은 아버지를 죽였는데도 편하게 죽었고, 그 아들인 장왕莊王은 현명한 패왕이 되었다.89) 이러한 일들은 모두 이치에 맞지 않으며 통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치가 어찌 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 사람들은 경사스러운 일이 있고 나서 죽은 후에 3악도의 재앙을 받는다고 하는 설을 믿지 않을 수 없다. 형체는 존망이 있지만 정신은 반드시 응보가 있으니, 현세에서 응보를 받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다만 인연에 앞뒤가 있으므로 응보가 늦거나 빠르게 나타나는 것이니, 이는 일생에 화복이 일찍 나타나고 늦게 나타나는 것과 같다. 따라서 공자의 가르침은 부처님과 통하는 것이니, 변치 않는 현묘한 극치의 도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033_0164_a_18L今世之所以慢禍福於天道者,類若史遷感伯夷而慨者也。夫孔聖豈妄說也哉?稱“積善餘慶,積惡餘殃”,而顏、冉夭疾,厥胤蔑聞;商臣考終,而莊周賢霸。凡若此類,皆理不可通。然理豈有無通者乎?則納慶後身,受殃三塗之說,不得不信矣。雖形有存亡,而精神必應,與見世而報,夫何異哉?但因緣有先後,故對至有遲速,猶一生禍福之早晩者耳。然則孔氏之訓,資釋氏而通,可不曰玄極不易之道哉!
- 저 인생의 이치는 덧없는 것이어서 있고 없음이 환상과 같다. 백 년이라는 세월에 갇혀 어려서 죽을 수도 있고 늙어서 죽을 수도 있지만, 끝나지 않는 경우가 없다. 비록 흰머리의 등 굽은 노인이라도 지난 일을 생각하면 순식간인데, 하물며 오래 살지 못한 자는 어떠하겠는가?
- 033_0164_b_06L夫人理飄紛,存沒若幻,籠以百年令之,孩老無不盡矣。雖復黃髮鮐背,猶自覺所經俄頃,況其短者乎?
- 또 시간은 그침이 없고 운은 다함이 없으니, 이미 지나온 무수한 억 겁의 세월은 모두 한순간들이 모여 지금에 이른 것일 뿐이다. 이제 순간이 쌓여 백 년이 되는 것이 어찌 어렵겠는가만, 그 절반을 사는 자도 드물다. 아침 이슬과 같은 몸에 애착하는 부류의 사람들은 대개 맑고 그윽한 진실을 지니지 못한다. 어찌 순식간에 썩을 몸을 달콤하게 여기면서 영원히 존재하는 정신을 왜곡하고 스스로 유구한 진리에 통하지 않으려고 하는가? 아무리 명가名家나 법가法家처럼 세상을 돕는 학문이라도 어찌 위대한 도에서 나온 것이 아니겠는가? 다만 인간 세상을 유전하면서 세상일만 왈가왈부하다 보니 오직 사람의 도만 대단하고 정신에 대한 생각은 쓸데없다고 멸시하게 된 것뿐이다. 만약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높은 산에 올라 멀리 아름다운 경관을 보면, 하늘은 맑고 맑아 드넓고 해와 달은 밝게 비추어 특이하다. 어찌 성인들의 위업과 신령함이 그 가운데에서 존엄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사람들만 소란스럽게 세상일에 매여 바쁜 것일 뿐이다. 그러니 진실로 심원하게 생각하여 도에 대한 정신의 생각을 트이게 하고, 고요한 실상을 느껴 밝은 영령의 감응을 밝혀야 할 것이다.
- 033_0164_b_09L且時則無止,運則無窮,旣往積劫無數無邊,皆一眒一閱以及今耳。今積眒以至百年,曾何難及,而又鮮剋半焉!夫物之媚於朝露之身者,類無淸遐之實矣。何爲甘臭腐於漏刻,以抂長在之神,而不自疏於遐遠之風哉!雖復名法佐世之家,亦何獨無分於大道?但宛轉人域,囂于世路,故唯覺人道爲盛,而神想蔑如耳。若使迴身中荒,升嶽遐覽,妙觀天宇淸澄之曠,日月照洞之奇,寧無列聖威靈尊嚴乎其中,而唯離離人群悤悤世務而已哉?固將懷遠以開神道之想,感寂以昭明靈之應矣。
- 033_0164_c_01L옛날에 공자는 노나라에서 5경을 저술하여 천하를 교화하였는데, 높은 태산과 몽산의 꼭대기에 오르면 천하와 노나라가 모두 작아 보였다고 한다. 어찌 정신이 우주와 합치하여 한 세상을 초월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5경을 지은 것은 대개 한순간의 짧은 인생에서 작은 일에 응한 것일 뿐이다. 세상은 어찌 부처님의 법을 막고 믿지 않는가? 묻건대, 지금 사람들이 부처님의 법을 믿지 않는 것은 백성들 외에는 모두 신명神明이 없다고 하는 것인가, 아니면 신명은 있지만 오직 부처만 없다는 것인가? 만약 모두 신명이 없고 오직 사람만 있을 뿐이라면, 누가 제비를 보내어 은나라 시조인 설契을 낳게 하였으며, 누가 거인의 발자국을 남겨 후직의 어머니가 이에 감응하여 후직을 낳게 하였겠는가? 한漢ㆍ위魏ㆍ진晉ㆍ송宋 나라에는 모두 상서로운 명이 있었으므로, 보고 듣는 것을 넘어 정신의 진리가 빛남을 알았다. 정신의 진리가 있으면 반드시 신묘한 극치가 있는 법이니, “하나를 얻어 신령해진다”90)는 것이 부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저 정신이라는 것은 경우에 따라 현묘하게 응하나, 그 응함이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진실을 따라 교화하면 무슨 근심인들 다하지 못하겠는가? 어찌 백성들을 속인 후에 가르칠 것인가? 그러므로 불법이 진실하고 그 가르침이 믿을 만한 것임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 033_0164_b_22L昔仲尼脩『五經』於魯,以化天下,及其眇邈太蒙之顚,而天下與魯俱小。豈非神合於八遐,故超於一世哉?然則『五經』之作,蓋於俄頃之閒,應其所小者耳。世又何得以格佛法而不信哉?請問今之不信,爲謂黔首之外,都無神明耶?爲之亦謂有之,而直無佛乎?若都無神明,唯人而已,則誰命玄鳥,降而生商?孰遺巨迹,感而生棄哉?漢、魏、晉、宋,咸有瑞命故。知視聽之表,神道炳焉。有神理,必有妙極,得一以靈,非佛而何?夫神也者,依方玄應,應不豫存,從實致化,何患不盡,豈須詭物而後訓乎?然則其法之實,其教之信,不容疑矣。
- [論] 모든 생명은 정미한 정신을 주인으로 삼으니, 현묘하고 지극한 영은 모두 이치가 있다. 요임금에 감응하여 멀리 짐승들까지도 그 덕에 춤을 추었으니,91) 이것이 어찌 감응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부처님은 만 가지 감응의 마루[宗]인 것이다. 해와 달과 바다와 산도 오히려 아침저녁의 예가 있으니, 기울고 차는 것이 그것이다. 하물며 불도를 닦는 무리들은, 뛰어난 자는 삶을 초월하여 정신을 궁극까지 도달하게 하고, 중간의 무리는 좋은 몸을 받아 태어나며, 하층의 무리라도 저 3악도惡道는 면하지 않는가? 지금 세상의 가르침은 일생의 테두리 안에서만 가르침을 펴고 있으니, 저 현묘한 진리에 이른 자는 적고 세속을 그대로 따르는 자는 많다. 그러니 어찌 서로 세속의 사정만 익혀서 죽으면 정신이 소멸한다고 말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뜻을 원대히 하여 밝고 심원하게 되는 데 힘쓰지 않고 하잘것없는 세속의 사정만 익히므로, 군자의 도는 드문 것이다.
- 033_0164_c_13L論曰:群生皆以精神爲主,故於玄極之靈,咸有理以感。堯則遠矣,而百獸儛德,豈非感哉?則佛爲萬感之宗焉。日月海嶽,猶有朝夕之禮,祑望之義。況佛之道衆,高者窮神於生表,中者受身於妙生,下則免夫三趣乎?今世教所弘,致治於一生之內,夫玄至者寡,順世者衆,何嘗不相與准習世情,而謂死則神滅乎?是以不務邈志淸遐,而多脩情寸陰,故君子之道鮮焉。
- 033_0165_a_01L부처님의 법으로 비추어 본다면, 그 육체는 내가 아니고 잠깐 쉬는 거처일 뿐이다. 정신이 바로 내 몸으로서, 영원히 존속하여 끝이 없는 것이다. 덕이 높은 자는 그 덕이 자기에게서 끝없이 펼쳐지고, 중간급의 사람은 미덕을 행하여 서서히 밝아져 완성에 이르며, 하급의 악한 자는 자신을 새롭게 하여 돌이키는 길이 있으니, 과오를 고치면 향상될 수 있다. 그러므로 옛날부터 그 업이 맑고 탁한 자들 중에 자기를 맑게 하고 심원한 것을 생각하며 행동을 삼가하여 지금에는 내세의 업을 헤아려 지극한 덕에 이른 자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이것이 불법의 효과이다. 이 모든 것은 세상이 북돋는 바이고 부처님께서 여신 바이니, 수많은 도 가운데 어찌 널리 융화하여 밝고 신묘하게 통하는 길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어찌 소홀히 하여 받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 033_0164_c_23L若鑑以佛法,則厥身非我,蓋一憩逆旅耳。精神乃我身也,廓長存而無已。上德者,其德之暢於己也無窮;中之爲羙,徐將淸升以至盡;下而惡者,方有自新之迥路,可補過而上遷。是以自古精麤之中,絜己懷遠,祗行於今,以擬來葉,而邁至德者,不可勝數,是佛法之效矣。此皆世之所壅,佛之所開,其於類豈不曠然融朗,妙有通塗哉!若之何忽而不奉乎?
- 저 바람은 불길을 지나가면 뜨거워지지만 숲 속을 지나가면 반드시 시원해지고, 물이 격랑하면 탁해지나 맑은 바위를 지나가면 반드시 맑아지는 법이다. 정신의 작용이 맑아지고 탁해지는 것 또한 무엇을 의탁하느냐에 달려 있다. 지금 불법을 믿지 않는 것은 필연적으로 타고난 분수가 아니고 마음이 그렇게 처하기 때문이다. 한번 마음을 세상사에서 벗어나게 하여 밝고 미묘하게 해 보면, 부처님의 진리는 분명해지고 모든 일을 믿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니 그 마음을 신묘한 데 두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에 의거하여 나아가면 믿음이 마침내 정신의 도를 완성하여 백 세 이전 조상들의 업까지 모두 현묘하게 밝힐 수 있을 것이니, 효의 큰 뜻을 영원히 성취할 수 있다.
- 033_0165_a_10L夫風經炎則宣,次林必淸。水激則濁,澄石必明。神用得喪,亦存所託。今不信佛法,非分之必然,蓋處意則然。試避心世物,移映淸微,則佛理可明,事皆信矣,可不妙處其意乎?資此則信以往,終將剋王神道。百世先業,皆可幽明永濟,孝之大矣。
- 중생이 인仁의 혜택을 입는 것이 지극한 자비이고, 홀로 정신을 맑게 모으는 것이 지극한 도이며, 확연히 밝아 거리낌 없는 것이 밝음의 극치이다. 보통 사람의 마음에서 시작하여 길머리가 제 궤도에 오르면, 비록 억 겁의 많은 세월이 걸릴지라도 마침내 현묘한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특이하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들이 제 궤도를 벗어나 길을 잃고 잘못된 길을 오래도록 가면 영원히 9지地92)에 빠지게 되니, 슬프지 않은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세상에 어떻게 훌륭한 성인들이 나타나 어리석은 자들을 가르치겠는가? 위로는 여러 부처님께서 계시고 아래로는 벌레와 같은 하찮은 미물이 움직이지 않는가? 이것들은 모두 정신을 얻고 잃음에 따른 형세이다.
- 033_0165_a_17L衆生沾仁,慈之至矣。凝神獨妙,道之極矣。洞朗無礙,明之盡矣。發軫常人之心,首路得轍,縱可多歷劫數,終必遙集玄極,若是之奇也。等是人也,背轍失路,蹭蹬長往,而永沒九地,可不悲乎?若不然也,世何故忽生懿聖,復育愚鄙,上則諸佛,下則蜎飛蠕動乎?皆精神失得之勢也。
- 033_0165_b_01L지금 사람들은 일곱 자의 육신을 가지고 몇 십 년 안에 늙어 죽기까지 그 반을 밤에 잠자느라 보내고, 또 나머지 반의 좋은 세월을 많은 슬픔과 질병으로 괴로워하며 보내니, 영화를 누리고 즐거워하며 자신의 뜻대로 사는 날이 얼마나 되는가? 젊은 날은 머무르지 않고 영화로우면 마음으로 굴욕을 두려워하게 되며 즐거움은 실제로 근심으로 이어지니, 완전한 평안은 없다. 그런데도 모두 다투어 세속의 험난한 길로 들어가 휩쓸리고 불법의 넓은 길로 가는 것을 꺼려 하니, 어찌 지혜롭다 하겠는가?
- 033_0165_b_01L今人以血身七尺,死老數紀之內,旣夜消其半矣。喪疾衆故,又苦其半。生之美盛,榮樂得志,蓋亦幾何?而壯齒不居,榮心懼辱,樂實連憂,亦無全泰。而皆競入流俗之險路,諱陟佛法之曠塗,何如其智也!
- 세상에는 인연의 근본을 알지 못하여 불교의 이치에 대해 번민하는 자가 참으로 많다. 저 인연으로 일어나는 것[緣起]은 넓고도 커서 생각이나 추측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깨닫고 못 깨닫는 것은 이치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세상 밖의 일이기 때문이니, 부처님께서도 그대로 놓아둘 뿐 논의하지 않으셨다. 이에 대해서는 앞에서 모두 설명하였다.
- 033_0165_b_07L世之以不達緣本,而悶於佛理者,誠衆矣!夫緣起浩汗,非復追想所及,失得所關,無理以感,卽六合之外,故佛存而不論,已具前論。
- 이제 다시 바꾸어 말해 보고자 한다. 성인이 『역易』을 지은 것은 하늘이 형상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니, 길함과 흉함, 잘 다스려짐과 어지러움은 점을 치면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는 현상의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성인도 밝히지 않으셨으므로 알 수 없다. 그러나 알 수 없는 것이 있다고 하여 알 수 있는 것조차 무시하고 점을 거스르고 천도를 어기며 움직인다면, 어찌 망하지 않는 자가 있겠는가? 연緣의 시초가 명확하지 않다고 하여 불법을 저버리는 것도 이와 같다.
- 033_0165_b_10L請復循環而申之:夫聖人之作『易』,天之垂象,吉凶治亂,其占可知。然源其所以然之狀,聖所不明,則莫之能知。今以所莫知,廢其可知,逆占違天而動,豈有不止者乎?不可以緣始不明,而背佛法,亦猶此也。
- 033_0165_c_01L또 태어나기 이전의 생각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정신이 본래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사람이 태내에 있을 때부터 어린아이 때까지 정신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한 생의 일만도 지금 생각해 보면 오히려 막막해서 기억할 수 없는데, 하물며 생사를 지나 다른 몸을 거쳤는데 옛날 기억이 어찌 사라지지 않겠는가? 기억한 것은 사라지지만 그렇다고 정신이 항상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못하니, 인연의 시초를 알지 못한다고 하여 어찌 진리가 항상 밝다고 보는 데 방해가 되겠는가? 자로가 죽음에 대해 묻자, 공자는 “삶을 다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93)라고 답하였고, 또 귀신을 섬기는 일에 대해 묻자 “사람 섬기는 일을 다 알지 못하는데 어찌 귀신 섬기는 일을 알겠는가?”라고 하였다. 이것이 어찌 자로가 용맹스러움을 지극히 좋아하고 임금을 섬기는 데 충성을 다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한 생의 일에 대해서는 참으로 느낀 바가 있었지만, 생사와 귀신의 근본에 대한 문제는 비록 질문이 있었어도 그 참된 이치를 느낀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본성과 천도에 대해서는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 033_0165_b_16L又以不憶前身之意,謂神不素存。夫人在胎孕,至于孩齔,不得謂無精神矣。同一生之內耳,以今思之,猶冥然莫憶,況經生死、歷異身,昔憶安得不止乎?所憶亡矣,而無害神之常存。則不達緣始,何妨其理常明乎?子路問死,子曰:“未知生,安知死。”問事鬼神,則曰:“未知事人,焉知事鬼。”豈不以由也盡於好勇,篤於事君,固宜應以一生之內。至於生死、鬼神之本,雖曰有問,非其實理之感。故性與天道,不可得聞。
- 불교 학설에서 중생이 유한한가, 무한한가 하는 종류의 열네 가지 질문에 대하여 일체지를 증득하신 부처님은 모두 그대로 놓아두고 대답하지 않았다. 이를 대답해 봐야 아무 이로움이 없고 사악함에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인으로 품부 받고 부처님을 봉양하는 도는 대답을 거절하신 것에 대해 감사하고 응답한 것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이는 목마른 자가 강물을 마실 때 큰 물을 끌어당겨 자기의 갈증을 채우는 것과 같다. 어찌 반드시 곤륜산에서 근원을 찾아야만 그 물을 마시겠는가? 저 불법이 하늘의 이치에 어긋나고 이치를 얻을 수 없을 것 같다면, 의심해도 좋다. 그러나 이제 얻을 수 없는 장애가 없고 하늘의 뜻에 맞고 정신을 맑게 하는 실질이 있으니, 어찌 그러하겠는가?
- 033_0165_c_04L佛家之說衆生有邊無邊之類十四問,一切智者皆置而不答。誠以答之無利益,則墮惡邪。然則稟聖奉佛之道,固宜謝其所絕,飡其所應,如渴者飮河,挹洪流以盈己,豈須窮源於崑山哉?凡在佛法,若違天礙理,不可得然,則疑之可也。今無不可得然之礙,而有順天淸神之實,豈不誠然哉!
- 사람의 삶은 근심과 함께 사는 것이다. 근심과 불행은 수시로 일어나고, 재앙과 질병은 몽매함에서 일어난다. 비록 신분이 높고 고귀하여 백만의 무리를 거느리는 사람이라도 처음부터 혼자였던 형체와 정신으로 무상한 죽음을 앉아서 기다릴 수밖에 없고, 가족들이 피리를 불고 처자가 즐거워해도 순식간에 죽음에 떨어져 정신을 잃게 된다. 어디에 의지하기에 충분할 인생의 이치가 있는가?
- 033_0165_c_12L夫人之生也,與憂俱生。患禍發於時事,災厲奮於冥昧。雖復雅貴連雲,擁徒百萬,初自獨以形神坐待無常。家人熇熇,婦子嬉嬉,俄復淪爲惚怳。人理曾何足恃?
- 이렇듯 모든 것은 빠르게 지나가며 다투어 덧없이 사라지는데, 진실한 가르침을 마음대로 비방하니 그 폐해가 크다. 정신은 소멸하지 않는다. 소멸하게 하려 해도 불가능할 뿐 아니라 죄에 의해 육체를 받으니, 지금의 패역한 사람들과 갖가지 미물들은 모두 거울삼아 경계해야 할 것이다. 장래를 도모하려면 오직 정성스럽게 부처님을 믿고 마음을 다해 계율을 따름으로써 정신을 구원해야 한다. 그러면 살아서는 영의 도움을 받고 죽어서는 맑아져서 올라가게 된다. 쉬지 않고 맑아져서 올라가면, 머지않아 부처가 될 것이다. 부처님께서 본래 이렇게 말씀하셨으나 사람들이 이를 무시하였는데, 어찌 사람이 부처님보다 뛰어나다고 단언하겠는가? 뛰어나지 못하다면 저 악도惡道에 떨어져 영원히 고통받지 않겠는가?
- 033_0165_c_16L自以過隙宜競,賖謗冥化,縱欲侈害,神旣無滅,求滅不得,復當乘罪受身。今之無賴群生,虫豸萬等,皆殷鑑也。爲之謀者,唯有委誠信佛,託心履戒,以援精神。生蒙靈援,死則淸昇。淸昇無已,逕將作佛。佛固言爾,而人侮之。何以斷人之勝佛乎?其不勝也,當不下墜彼惡,永受其劇乎?
- 033_0166_a_01L아, 6극極94)의 고통 속에서 사는 자가 세상에 그치지 않는구나.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보고 정진하다가 죽는 사람은 임종시에 대부분 정신과 뜻이 안정되어 있다. 위험과 어려움에 처한 이는 한 마음으로 관세음을 부르면 대개 구제받는다. 이것들은 모두 앞에서 말한 대로 살아서는 영의 도움을 입고 죽어서는 맑아져 올라간다는 증거이다.
- 033_0166_a_01L嗚呼!六極苦毒,而生者所以世無已也。所聞所見,精進而死者,臨盡類多神意安定。有危迫者,一心稱觀世音,略無不蒙濟。皆向所謂生蒙靈援、死則淸昇之符也。
- 저 황제와 왕이 해가 기울도록 밥먹을 틈도 없이 바빠 보이게 일해도 백성들은 현실 생활에서만 도움을 받을 뿐이니, 어떻게 그 정신을 자라게 하여 온갖 교화의 주인이 될 수 있겠는가? 이제 주공과 공자에 의지하여 백성을 기르고 불법을 맛보아 정신을 기르면, 살아서는 밝은 임금이 되고 죽어서는 밝은 정신이 되어 항상 주인이 될 것이다. 여래께서 어찌 속이겠는가? 나는 탑을 숭앙하고 불상을 꾸미며 자격 없는 승려들이 있다 하여 재산을 축내고 백성들에게 해를 입히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심원한 진실을 보지 않고 가까이 있는 폐단만 보아 함부로 불법을 비난하려 한다. 그 도를 존경하고 그 가르침을 믿으며 무상하고 색色이 공空임을 깨달아 자비로운 마음을 바르게 닦는다. 신분이 높고 부유하더라도 다른 존재의 생명을 가벼이 끊지 않고 불초자로 하여금 행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함부로 행하지 못하게 하면, 덕으로 이끌고 예로 나란하게 하여 천하가 성대히 인仁으로 돌아갈 것이 아니겠는가?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부터 신분이 낮은 사람까지 무엇이 아까워 스스로 자기 정신을 구제하지 않는 것인가?
- 033_0166_a_05L夫萬乘之主,千乘之君,日昃不遑食,兆民賴之於一化內耳。何以增茂其神,而王萬化乎?今依周、孔以養民,味佛法以養神,則生爲明后,歿爲明神,而常王矣。如來豈欺哉?我非崇塔侈像,容養濫吹之僧,以傷財害民之謂也。物之不窺遠實而觀近弊,將撗以詬法矣。蓋尊其道,信其教,悟無常,空色有,慈心整化,不以尊豪輕絕物命,不使不肖竊假非服。豈非導之以德,齊之以禮,天下歸仁之盛乎!其在容與之位,及野澤之身,何所足惜而不自濟其精神哉!
- 옛날에 혜원慧遠 화상이 여산廬山에서 수행하였고, 내가 여산에 온 지도 50년이 되었다. 고결하게 정진하고 이치와 학문이 분명한 것이 진실로 혜원의 종풍이다. 그 스승인 도안道安 법사는 영묘한 덕이 뛰어났고 만나기 어려운 비구였으며, 아울러 맑은 진실을 품은 이였다. 이들은 모두 그 모습이 평소 도에 두루 통달하였고 후에는 산에서 홀로 살았다. 그러므로 신명神明의 교화가 멀리 바위와 숲에까지 미쳤다. 혜원 화상은 바위 위나 나무 아래, 냇가나 골짜기에서 나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말이 뛰어나서 사람을 숙연하게 하였다.
- 033_0166_a_18L昔遠和上澄業廬山,余往憩五旬,高絜貞厲,理學精妙,固遠流也。其師安法師,靈德自奇。微遇比丘,竝含淸眞。皆其相與素洽乎道,而後孤立於山。是以神明之化,邃于巖林。驟與余言於崖樹㵎壑之閒,曖然乎有自言表而肅人者。
- 033_0166_b_01L이와 같은 논의도 혜원 화상이 경전의 뜻에 의거하여 말한 것일 뿐이다. 저 깊이 통달한 이가 새의 발자국을 보고 문자를 만든 것은 여인輿人의 노래에 의해 정신을 궁구하였기 때문95)이다. 제영提縈의 한마디 말에 한 문제文帝가 마침내 신체의 형벌을 영원히 폐지했던 일도 갑자기 일어난 미묘한 느낌으로 시작되지만, 마침내 하늘까지 닿게 되었다. 이제 거칠고 초라한 말로 느낀 바를 밝히니, 갑자기 죽더라도 이 때문에 현실을 뛰어넘어 올라가게 될지 어찌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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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_0166_b_01L凡若斯論,亦和上據經之指云爾。夫善卽者,因鳥迹以書契,窮神輿人之頌。提縈一言,而霸業用遂,肉刑永除。事固有俄爾微感,而終至沖天者。今蕪陋鄙言,以驚其所感,奄然身沒,安知不以之超登哉!
弘明集卷第二
丙午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 1)종병(375~443)은 남조 유송劉宋 시대의 은둔 선비로서, 호북성 열양涅陽 사람이며, 돈독한 불교 신봉자로 잘 알려져 있다. 동진東晉의 은중감殷仲堪ㆍ환현桓玄 등의 초빙에 응하지 않고 산수를 유람하였고, 여산廬山 혜원慧遠에게 사사하여 「명불론」을 비롯하여 불교에 관한 많은 논저가 있다.
- 2)황제黃帝의 고상한 음악. 『주례』 「춘궁대사락春宮大司樂」 참조.
- 3)『장자』 「전자방田子坊」. 온백설자溫伯雪子가 말한 내용이다.
- 4)『맹자』 「고자告子」 상에 나오는 인물로 바둑 잘 두기로 유명한 사람이다.
- 5)크나큰 허공, 즉 하늘을 가리키는 도가道家의 용어이다.
- 6)『사기』 117 「사마상여전司馬相如傳」, 헌원은 황제黃帝의 이름이다.
- 7)『장자』 「칙양則陽」에 나오는 우화로, 달팽이의 좌우 촉수를 촉과 만이라는 나라로 상정하여 보잘것없음을 나타내었다.
- 8)『맹자』 「진심盡心」 상.
- 9)삼황ㆍ오제의 책을 말하며, 전하여 고대의 전적이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 10)『주역』 「계사」 상.
- 11)『태자서응본기경』 상.
- 12)『논어』 「옹야」.
- 13)『주역』 「계사」 하.
- 14)5악은 태산ㆍ화산ㆍ곽산ㆍ항산ㆍ숭산이고, 4독은 양자강ㆍ황하ㆍ회수ㆍ제수를 말한다.
- 15)『주역』 「설괘說卦」.
- 16)『장자』 「각의刻意」.
- 17)『예기』 「교특생郊特牲」.
- 18)『예기』 「단궁壇弓」.
- 19)『논어』 「옹야」.
- 20)『주역』 「계사」.
- 21)『노자』 48장.
- 22)『사기』 「효무제기孝武帝紀」.
- 23)『상서』 「금등金滕」.
- 24)『주역』 「계사」 상. 이를 바탕으로 『주역』이 만들어졌.
- 25)『상서』 「우공禹貢」.
- 26)『사기』 「은본기」.
- 27)『사기』 「주본기周本紀」.
- 28)『좌전』 「선공宣公」 3년.
- 29)『유마경』 「부사의품不思議品」.
- 30)군주의 5사事가 천도의 5행行에 잘 합치하고 있는가의 여부에 의해 하늘이 내리는 좋은 징조와 나쁜 징조를 말한다.
- 31)『논어』 「선진」.
- 32)『장자』 「양생주」.
- 33)『회남자』 「설산훈」.
- 34)『장자』 「대종사大宗師」.
- 35)『장자』 「지북유知北遊」.
- 36)왕도王都가 있는 사방 천 리 이내의 땅을 왕기王畿라 하고, 여기서 점차 멀어지는 지역을 다섯으로 나눈 것으로, 가까운 곳부터 전복甸服ㆍ후복侯服ㆍ수복綏服ㆍ요복要服ㆍ황복荒服이라 부른다.
- 37)왕성을 중심으로 천자가 다스리는 전 지역을 아홉으로 나눈 것으로 기冀ㆍ연兗ㆍ청靑ㆍ서徐ㆍ형荊ㆍ양揚ㆍ예豫ㆍ양梁ㆍ옹雍 지방을 가리킨다.(『상서』 「우공禹貢」).
- 38)『초사礎辭』 「천문天問」에 나오는 말로, 각각 해 뜨는 동방과 해 지는 서방을 말한다.
- 39)『맹자』 「이루離樓」.
- 40)『주역』 「몽괘蒙卦」.
- 41)『논어』 「위령공衛靈公」.
- 42)『노자』 37장, 48장 등.
- 43)공안국孔安國의 『상서』 서문.
- 44)『사기』 「오제본기五帝本紀」.
- 45)광성과 대외는 황제의 스승, 홍애는 황제의 명신이다. 지보와 북인 무택無擇은 『장자』 「양왕襄王」에 나오는 숨은 현인이다. 묘고야산의 네 신선에 대한 고사는 『장자』 「소요유逍遙遊」에 실려 있다.
- 46)『사기』 「오제본기」 말미의 사마천의 말이다.
- 47)『장자』 「서무귀徐無鬼」.
- 48)『장자』 「소요유」.
- 49)『장자』 「재유在宥」.
- 50)주 49와 상동.
- 51)주 49와 상동.
- 52)『장자』 「서무귀徐無鬼」에 나오는 이야기로, 황제가 현인 대외를 만나러 구자산具茨山에 가는 길에 목동을 만나 천하를 다스리는 간단한 이치를 듣고는 거듭 머리를 숙이고 ‘천사’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 53)『양고승전』 「축법란전」. 한무제가 연못 바닥에서 검은 재를 얻어 이것이 무엇이냐고 동방삭에게 물으니, 그는 서역 사람에게 물어봐야 할 것이라고 답하였는데, 나중에 축법란이 와서 이 말을 듣고 “세계가 파괴될 때 큰 겁화가 세계를 다 태우는데, 이것은 그때의 재이다”라고 답하였다는 고사를 말한다.
- 54)『춘추좌전』ㆍ『공양전』ㆍ『곡량전』.
- 55)간보는 『진기晉紀』 20권, 손성은 『진양추晉陽秋』를 지었다.
- 56)성불할 성품이 없는 이, 혹은 보살이 일체 중생을 모두 제도시키기 위하여 성불할 틈이 없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 57)『회남자』 「남명훈覽冥訓」. 전국 시대 노나라의 양후陽侯가 한韓나라와 한참 교전할 때 태양이 지는 것을 보고 재주를 써서 태양을 서게 하였다는 고사이다.
- 58)『후한서』 49 「경엄전耿弇傳」. 경엄이 흉노를 공격할 때 물의 부족을 근심하여 우물을 파서 15길 깊이에 이르렀지만 물을 얻을 수가 없자 의복을 정제하고 우물을 향해 거듭 절을 하자 물이 나왔다는 고사이다.
- 59)『후한서』 71. 호랑이의 피해에 사람들이 고심하자 구강九江 태수인 송균宋均이 성심으로 정치를 행하고 간악한 관리를 물러나게 하고 훌륭한 사람들을 추천하니 그 공적 때문에 호랑이가 강을 건너 동쪽으로 갔으며, 또한 중원中元 원년(56)에 산양山陽의 초와 패에 메뚜기가 많아서 구강 지역까지 왔지만 오면서 동서로 나뉘어 이 지역을 피해 사라졌다는 고사이다.
- 60)『유마경』 「부사의품」.
- 61)『육도집경六度集經』 「보시도무극장布施度無極章」. 호랑이가 새끼에게 젖을 먹인 후 피곤하고 배가 고파 그 새끼를 잡아먹고자 한 것을 본 보살이 어미 호랑이의 입에 자신의 머리를 밀어넣으며 보시하였다는 고사와, 매에 쫓긴 비둘기를 구조하기 위해 살바달왕이 자신의 허벅지살을 베어서 매에게 주었다는 부처님 전생담 등이다.
- 62)『논형論衡』 「정현定賢」. 추연의 뛰어난 연주에 추운 겨울에 기장이 자라났다는 이야기이다.
- 63)『법화경』 「견보탑품」.
- 64)『유마경』 「부사의품」.
- 65)『주역』 「건괘乾卦」.
- 66)『한서』 71 「우정국전于定國傳」. 정국의 아버지인 우공은 옥리로서 일을 공명하게 처리하기로 유명하였는데, 그 음덕에 의해 아들이 승상이 되었다고 한다.
- 67)『한서』 74 「병길전邴吉傳」. 한무제 말년에 무고巫蠱의 일에 연좌되어 옥에 갇혀 있던 선제를 정위감廷尉監으로서 옥사를 보고 있던 병길이 구하였다. 이것을 계기로 선제가 그를 박양후博陽侯로 봉하였다는 고사이다.
- 68)『한서』 90 「혹리전酷吏傳」. 선제 때 시어사侍御史 겸 하남 태수였던 엄연년은 항시 호협豪俠을 개최하여 궁핍을 초래하였고, 범간犯姦한 이를 주살함이 극에 달해 도백屠伯이라고 불렸다. 나중에 참소에 의해 그의 죄명 10조가 상주되었으며, 이에 연년은 약을 마시고 자살하였고, 그의 시체는 저잣거리에 효수되었다.
- 69)『한서』 52 「전분전田蚡傳」.
- 70)『진서晉書』 「선제기宣帝紀」.
- 71)『좌전』 「희공僖公」 29년.
- 72)『한비자』 「설림說林」.
- 73)『맹자』 「양혜왕梁惠王」.
- 74)『예기』 「왕제王制」.
- 75)『예기』 「월령月令」.
- 76)『맹자』 「양혜왕」 상.
- 77)『증일아함경』 「육등견품六等見品」.
- 78)『논어』 「술이述而」.
- 79)『사기』 「은본기」.
- 80)진秦 낭야부현 사람으로, 하상대인河上大人에게 학문을 배우고 장수를 얻었다 하여 ‘천세옹千歲翁’으로 불렸다고 한다. 진시황을 만나 수십 년 후에 자신을 봉래산에서 찾으라 하여 진시황이 사람을 보내 찾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 81)섬서陝西의 상산商山에 은거하고 있는 동원공東園公ㆍ각리선생角里先生ㆍ기리계綺里季ㆍ하황공夏黃公 등 네 사람은 나이 80여 세로서 모두 머리와 눈썹이 하얗다 하여 ‘상산사호商山四皓’로 불렸다.
- 82)『장자』 「덕충부德充符」. 예는 하나라 때의 제후로 궁술의 명인이니, 그의 사정거리 안에 있다는 것은 곧 그의 활을 피할 수 없다는 뜻이다.
- 83)『노자』 49장.
- 84)84)84) 한대漢代의 아홉 학파를 이름한다. 곧 유가儒家ㆍ도가道家ㆍ음양가陰陽家ㆍ법가法家ㆍ명가名家ㆍ묵가墨家ㆍ종횡가縱橫家ㆍ잡가雜家ㆍ농가農家 등이다.
- 85)동진東晉 중기의 사상가로, 『홍명집』 「유도론喩道論」과 『문선文選』 11에 수록된 유천태산부遊天台山賦 등이 전해지고 있다. 또한 그가 『도현론道賢論』을 지어 인도의 일곱 승려를 죽림칠현竹林七賢과 비교한 것이 『양고승전』에 전하고 있다.
- 86)본명은 악광(樂光, ?~304), 자는 언보彦輔로 남양 청양淸陽 사람이다. 벼슬이 상서령에 이르렀기 때문에 ‘악령樂令’이라고도 불린다. 서진西晋 시대의 청담가淸談家로 왕연王衍과 어깨를 나란히 하였다.
- 87)본명은 곽문郭文, 자가 문거이다. 낙양이 만족의 수중에 들어가자 강남으로 도망하여 저항하였고, 오흥五興의 여항대벽산餘杭大辟山에 은거하였다. 이후 왕도에게 초청받아 그 서원西園에 머문 7년 동안 일체의 출입을 삼갔다고 한다.
- 88)『주역』 「곤괘坤卦」 문언文言.
- 89)『사기』 「초세가楚世家」.
- 90)『노자』 39장.
- 91)『상서』 「순전舜典」.
- 92)범부가 생사왕래하는 세계를 삼계라 하고, 이것을 또 나누어 9지라고 한다. 욕계오취지(욕계)ㆍ이생희락지ㆍ이희묘락지ㆍ사념청정지(이상은 색계)ㆍ공무변처지ㆍ식무변처지ㆍ무소유처지ㆍ비상비비상처지(이상은 무색계)를 말한다.
- 93)『논어』 「선진先進」.
- 94)『상서』 「홍범洪範」에 나오는 것으로, 일찍 죽는 것[凶短折]ㆍ병환[疾]ㆍ근심[憂]ㆍ가난[貧]ㆍ추악함[惡]ㆍ쇠약함[弱]을 말한다.
- 95)『좌전』 「희공僖公」 28년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