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집성문헌

泗溟堂芳啣帖 海南表忠祠院中留傳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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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당방함첩泗溟堂芳啣帖
사명당방함첩泗溟堂芳啣帖
해남海南 표충사表忠祠 원내에 전하는 기록

0001_0001_b_01L泗溟堂芳啣帖

0001_0001_b_02L泗溟堂芳啣帖

0001_0001_b_03L海南表忠祠院中留傳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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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대장僧大將 사명泗溟 송운松雲 대선사 직첩방함職帖芳啣
영의정첩領議政帖 1장張 이조판서첩吏曺判書帖 1장張 양국대장첩兩國大將帖 1장張 금표자金瓢子 등의 물건을 원주原州 치악산雉岳山 보문사普門寺 청민淸旻 상좌上佐 두 사람이 있는 곳에 보관한다.
구환선장금석九環禪杖金錫 1개箇, 오금발우烏金鉢盂 1좌座 등의 물건을 전라도全羅道 곡성谷城 도림사道林寺에 보관한다.
어사御賜 화죽금병畵竹金屛 1좌座, 은표자銀瓢子 1개箇 등의 물건을 평안도平安道 정주定州 심원사深原寺에 보관한다.
일본국日本國 설화목雪花木, 친필親筆 서문序文 현판懸板 1좌를 경상도慶尙道 영천永川 선본사禪本寺에 보관한다.
왜장倭將 평청정平淸正 관영冠纓 1꿰미 100매枚를 경상도慶尙道 청도淸道 운문사雲門寺에 보관한다.
순금 불상 1위位, 비단 가사 1령領, 비단 신발과 여러 물건들을 경상도慶尙道 밀양密陽 표충원表忠院에 보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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僧大將泗溟松雲大禪師職帖芳啣

0001_0002_a_02L領議政帖一張 吏曺判書帖一張 兩國大將帖一張 金瓢子等物 原州
0001_0002_a_03L雉岳山普門寺 淸旻上佐兩人處留置也

0001_0002_a_04L九環禪杖金錫一箇 烏金鉢盂一座等物 全羅道谷城 道林寺 留藏也

0001_0002_a_05L御賜畵竹金屛一座 銀瓢子一箇等物 平安道定州深原寺 留置也

0001_0002_a_06L日本國雪花木 親筆序文懸板一座 慶尙道永川禪本寺 留藏也

0001_0002_a_07L倭將平淸正冠纓一串百枚 慶尙道淸道雲門寺 留藏也

0001_0002_a_08L純金鑄像一位 錦袈裟一領 錦履及種種之物 慶尙道密陽表忠院 留藏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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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지敎旨
유정惟政
절충장군 행호분위상호군折衝將軍行虎賁衛上護軍이 만력萬曆 21년(1593) 4월 15일에 첩帖을 내림.
등계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登階通政大夫僉知中樞府事가 무진년(1628) 봄에 첩帖을 내림.
승수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陞授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가 무진년(1628) 가을에 첩帖을 내림.
임진년 봄에 바다에서 왜적이 침범해 오던 날에 서산西山 대사가 관서關西 묘향산妙香山에 있다가 임금이 파천한다는 소식을 듣고 험난한 길을 가시는 임금의 행차를 애통하게 여겼다. 이에 맨 먼저 대의를 제창하여 여러 제자들을 격동시키고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였다. 제자 유정惟政은 관동關東에서 병사를 일으켰고, 제자 해안海眼은 진천鎭川에서 병사를 일으켰으며, 제자 영규靈奎는 금성錦城(나주)에서 병사를 일으켰다. 서산은 발우 대신 칼을 차고 대의를 위해 문도들을 이끌고 달려가 행군에 참여하여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먼저 평양平壤 모란봉牧丹峯에서 적병을 쳐부수었다. 이 모든 것이 서산 대사의 지휘 방략이었다. 그리고 의승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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敎旨

0001_0002_b_02L惟政
折衝將軍行虎賁衛上護軍者 萬曆二十一年四月十五日下帖

0001_0002_b_03L登階通政大夫僉知中樞府事者 戊辰春下帖

0001_0002_b_04L陞授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者 戊辰秋下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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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辰之春 當海寇滔天之日 西山大師 在關西妙香山 聞鸞輿之播遷 痛天
0001_0002_b_06L步之艱難 於是首倡大義 激動群弟 起兵討賊 弟子惟政 起兵關東 弟子海
0001_0002_b_07L眼 起兵鎭川 弟子靈奎 起兵錦城 西山投鉢帶釼 倡義率徒 馳詣行軍 與明將
0001_0002_b_08L都督李如松 先破賊兵於平壤牧丹峯 此皆西山大師之指畫方略 又率弟子

0001_0003_a_01L이끌고 수원水原의 위급함을 구하였다. 그래서 선조宣廟가 불러 직접 만나서 자헌대부 팔도도총섭資憲大夫八道都摠攝의 직임을 제수하였고, 직접 말(馬)과 모시(紵) 도포의 표리表裡(겉감과 안감)를 하사하여 격려하였다. 이윽고 서울을 회복한 후에 선조가 어가를 돌려서 갈 때에 대사가 호종하였고, 도착한 후 아뢰기를, “신은 늙고 병들었습니다. 원컨대 군대의 일을 제자 유정에게 이관하고 소신은 사직하여 산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그의 뜻을 가상히 여기고 허락하여 묘향산으로 돌아갔다. 송운松雲 대사는 스승을 대신하여 의승병을 통솔하고 충의를 분창하고 주모麈毛를 대신해 1척의 검을 지니고 적의 소굴을 드나들었으며, 위험을 무릅쓰고 적병을 죽인 것이 자못 많았다. 갑진년(1604)에 어명으로 교지를 받들어 일본에 갔는데 칙서사명勅書司命은 다음과 같다.

0001_0003_a_01L兵 以救水原之急 故
0001_0003_a_02L宣廟朝引見內闥 加授資憲大夫八道都摠攝之職任 御賜馬紵 表裡以
0001_0003_a_03L獎之 旣已京城已復
0001_0003_a_04L宣廟朝 將旋扈駕 西山還都 奏曰 老且病矣 願以兵事移付弟子惟政 小臣
0001_0003_a_05L請骸骨歸山
0001_0003_a_06L上嘉其志 許之還入妙香山 松雲大師 代師統衆 奮忠倡義 擲麈毛持尺釼
0001_0003_a_07L出入賊窟 侵徑危險 殺獲頗多 甲辰 以
0001_0003_a_08L御命奉敎 往于日本 勅書司命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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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교 등계 의병대장군大禪敎登階義兵大將軍 이조판서吏曹判書 겸 지의금부사兼知義禁府事 육군문도총령六軍門都摠領 송운松雲 사명四溟 유정惟政 대사 사명기司命旗
전배비장前陪裨將 병조판서兵曹判書 이유진李由眞
후배비장後陪裨將 훈련대장訓鍊大將 안몽규安夢奎
종사집사관從事執事官 어영대장御營大將 유종성柳鍾成
송운松雲은 세 치 혀로 능히 백만의 적을 상대하였으며, 왜적의 우두머리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하여금 마음을 고쳐 심복하게 하여 마침내 화의를 이루었고, 또 포로로 잡혀간 남녀 3천여 명에게 음식을 주고 본국으로 쇄환해 왔다. [1] 지금 우리나라 삼천리가 크게 편안한 것은 모두 송운 대사의 공훈충절 때문이다. 이 당시에 선조가 하교하여 직접 만나서 그의 공로에 대해 특별히 하사하였는데, 연이어 품계의 순서를 뛰어넘어 삼대三代의 관위官位를 포증褒贈하였다.

0001_0003_b_01L大禪敎登階義兵大將軍 吏曹判書 兼 知義禁府事 六軍門都摠領 松雲四溟
0001_0003_b_02L惟政大師 司命旗

0001_0003_b_03L前陪裨將兵曹判書李由眞

0001_0003_b_04L後陪裨將訓鍊大將安夢奎

0001_0003_b_05L從事執事官御營大將柳鍾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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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雲 以三寸之舌 能敵百萬之衆 及宗 [1] [2] 使蠻酋改心服事 遂成和好 且以轂
0001_0003_b_07L [3] [4] 被虜男女三千餘口 刷還本國 至今環東土三千餘里 太平奠安 盡是松雲
0001_0003_b_08L大師之功勳忠節也 當是之時
0001_0003_b_09L宣廟朝下敎引見 以功勞特賜 連加超擢 褒贈三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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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지敎旨. 부父 임황任煌은 22세에 춘당대春塘臺 알성장원謁聖壯元이었고, 관官은 전주 판관全州判官, 순창 군수淳昌郡守, 강계 부사江界府使, 안변 부사安邊府使에 이르렀는데, 품계를 가선대부嘉善大夫 충무위忠武衛 자헌대부資憲大夫 형조판서刑曹判書 의금부사義禁府事로 포증함.
교지敎旨. 조부 임엽任曄을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추증함.
교지敎旨. 증조부 임효곤任孝昆을 통례원좌통례通禮院左通禮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추증함.
교지敎旨. 대장군 유정惟政을 선무일등공신宣武一等功臣 영의정領議政 이조판서吏曹判書 병조판서兵曹判書 겸 승정원도승지兼承政院都承旨로 증직함.만력萬曆 43년 을사년(1605) 10월 15일 첩帖을 내림.
교지敎旨. 모母 서씨徐氏는 정부인貞夫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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敎旨
父任煌 年至二十二 春塘臺 謁聖壯元 官至全州判官 淳昌郡守 江界府使
0001_0004_a_02L安邊府使 行仕
0001_0004_a_03L褒贈 嘉善大夫忠武衛 資憲大夫刑曹判書義禁府事者

0001_0004_a_04L敎旨 祖任曄 通政大夫 承政院左承旨 經筵參贊官 嘉善大夫 同知中樞府事者
0001_0004_a_05L敎旨 曾祖任孝昆 通禮院左通禮 嘉善大夫 同知中樞府事者

0001_0004_a_06L敎旨 大將軍惟政 宣武一等功臣 領議政 吏曹判書 兵曹判書 兼 承政院都承旨
0001_0004_a_07L萬曆四十三年乙巳十月十五日下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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敎旨
母徐氏貞夫人者

0001_0004_b_01L조모 박씨朴氏는 정부인貞夫人, 증조모 김씨金氏는 숙부인淑夫人으로 추증함. 동년 동월 동일에 첩帖을 내림.
송운松雲 대사는 병오년(1606)에 부산釜山과 금정산金井山의 두 산성을 축성하였고, 큰 난리가 평정된 후 또 제자 천여 명을 이끌고 창경궁昌慶宮과 창덕궁昌德宮의 두 궁궐을 수리하는 일에 달려와 도왔다. 그의 공력으로 사직을 보존하고 은택이 백성들에게 흘렀으니, 승려가 있었던 이래로 송운같이 성대한 이가 없었다. 영규靈奎 대사는 금성錦城(나주)에서 의승병을 일으켜 중봉中 [2] 峰 선생 조헌趙憲과 함께 전쟁터에서 순국하였으니, 아! 이 세 분 대사의 공훈이 저와 같이 우뚝하도다. 그래서 국가가 다섯 번이나 충성을 포창하고 대의를 장려하는 성대한 생각으로 밀양密陽 상서면上西面 삼강동三綱洞 백하암白霞庵 옛터에 사원을 지어서 지키는 승도에게는 잡역을 감면하였으니, 특별히 생각하여 임금이 복호復戶의 조치를 내리신 것이다. 또 유림 여러 선생 서원의 예와 같이 본관에서 봄과 가을에 제수祭需로써

0001_0004_b_01L祖母朴氏貞夫人者

0001_0004_b_02L 曾祖母金氏淑夫人者 同年月日下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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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雲大師 丙子 [5] 自築釜金井兩山城 大亂旣平 又率弟子千餘名 赴助昌慶昌德兩宮
0001_0004_b_04L之役 其爲功存
0001_0004_b_05L社稷 澤流生靈 自有山人以來 未有盛於松雲也 靈奎大師 起兵錦城 與中 [6] 峰先生
0001_0004_b_06L趙憲 同殉于戰 噫 三大師之功勳 卓卓能如彼 故
0001_0004_b_07L國家以五褒忠獎大義之盛念 建祠于密陽地上西面三綱洞白霞庵舊址 以守
0001_0004_b_08L僧徒蠲減雜役 特念勅賜復戶 又與儒林諸先生書院一例 自本官封春秋祭需

0001_0005_a_01L지극히 존숭하였고, 헌관獻官은 순찰사巡察使가 특별히 차정하여 보내고 양종총섭도유사수호승통兩宗摠攝都有司守護僧統은 예조禮曹에서 특별히 차정하여 향사를 거행하였다. 삼강동은 송운 대사와 노盧 승지承旨와 손孫 판서判書가 함께 태어난 마을이며, 이들 모두 충훈의 성대함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
봉안할 때의 축문 奉安時祝文
보제 존자普濟尊者 청허당淸虛堂 대선사 각령覺靈께 삼가 아룁니다.
광장설廣長舌의 상호를 갖추시고 줄 없는 거문고를 타셨도다.
난리에 임하여서는 의병을 창도하여 사직을 보전하는 공을 세우셨고
한 짝 신발로 서방으로 돌아갔으나 교화가 동토에 퍼지니 영전의 은택 새롭도다.
삼가 관官의 공양으로써 우러러 충정에 보답하고자 하오니 부디 흠향하소서.전 판서前判書 윤순尹淳이 짓다.
자통慈通 홍제弘濟 존자 사명四溟 송운松雲 대선사 존령께 삼가 아룁니다.
총명하신 식견과 통찰로 선종禪宗의 맥을 전하셨도다.
난리에 임해서는 충의를 떨쳐서 국가에 드러나는 공을 세우셨고
자비의 배로 남쪽 바다 건너 많은 백성 구제하셨으니 무엇으로 흠모하리오.
삼가 관의 공양으로써 우러러 충정에 보답하고자 하오니

0001_0005_a_01L以極尊崇 而獻官段 自巡察使特定差送 兩宗摠攝都有司守護僧統 自禮曹特
0001_0005_a_02L差 亨祀擧行也 三綱洞卽松雲大師 盧承旨 孫判書 共生一洞 皆有忠勳盛烈故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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奉安時祝文

0001_0005_a_04L普濟尊者淸虛堂大禪師 覺靈之下 伏以
具廣長舌相 弄沒絃琴瑟
臨亂倡
0001_0005_a_05L義 功存社稷
隻履西歸 化被東土 令典新澤
謹將官供 仰報忠貞 伏惟尙饗
0001_0005_a_06L慈通弘濟尊者四溟松雲大禪師 尊靈之下 伏以
聰明識通 傳禪宗脉

0001_0005_a_07L臨亂奮忠 功彰國家
慈舡蠻海 普濟群生 欣慕何由
謹將官供 仰報忠貞

0001_0005_b_01L부디 흠향하소서.전 판서前判書 이기진李箕鎭이 짓다.
복국우세福國祐世 기허당騎虛堂 대사 영령께 삼가 아룁니다.
여래가 보낸 사신으로 선문의 목탁이셨도다.
섬나라 오랑캐가 강역을 침범하자 품었던 충의를 떨쳐
지조로써 순국하되 죽음을 아깝게 여기지 않았으며
기꺼이 몸을 던져 사바세계를 버리셨도다.
삼가 관의 공양으로써 우러러 충정에 보답하고자 하오니 부디 흠향하소서.전 참판前參判 오광운吳光運이 짓다.
봄여름 제향할 때 제문 春秋祭享時祭文
모년 모일에 행밀양도호부사行密陽都護府使 아무개는 감히 국일사國一師 자도紫都 대선사 청허당淸虛堂 서산西山 대사와 자통慈通 홍제弘濟 존자 사명泗溟 송운당松雲堂 대사와

0001_0005_b_01L伏惟尙饗
0001_0005_b_02L福國祐世騎虛堂大師 靈几之下 伏以
如來所使 禪門木鐸
島夷犯界 懷
0001_0005_b_03L忠奮義
志切殉國 不惜變易
肯將籧膚 抛棄沙塲
謹將官供 仰報忠貞
0001_0005_b_04L伏惟尙饗
0001_0005_b_05L春秋祭享時祭文

0001_0005_b_06L維歲次某年某月某朔某日 行密陽都護府使某 敢昭告于
0001_0005_b_07L國一師紫都大禪師 淸虛堂 西山大師
0001_0005_b_08L慈通弘濟尊者 泗溟 松雲堂大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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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_0007_a_01L복국우세福國祐世 기허당騎虛堂 대사의 영령께 삼가 아룁니다.
종과 교를 세우고 부처님의 마음 등불을 전하셨습니다.
나라와 세상을 도와 난리 당해 의승군을 창도하시고
자비의 배로 백성을 구제하시고 충절로 순국하시니
국가가 흠모하고 존중하여 특별히 향촉을 내리셨습니다.
삼가 공양 올려 우러러 충정을 표창하고자 하오니 부디 흠향하소서.
송운松雲 대사는 가정嘉靖 23년(1544) 갑진년 10월 17일에 태어났으니 중종中宗 성효대왕誠孝大王 39년이다. 14세에 황악산黃岳山 금산金山 직지사直指寺 신묵信黙 장로長老 강석에서 출가하였고, 선지禪旨를 깨달은 것은 정사년(1557) 가을이었다. 속세 나이 67세, 법랍 53세가 되는 만력 38년(1610) 경술 8월 26일에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에서 입적하였다. 갑진년(1544)으로부터 건륭乾隆 48년(1783) 계묘까지 연수를 계산하면 241년이다.

0001_0007_a_01L福國祐世 騎虛堂大師 一含覺靈之下 伏以
扶宗樹敎 傳佛心燈
福國祐
0001_0007_a_02L世 臨亂倡義
慈舡濟衆 忠節殉國
國家慕重 特下香燭
謹將獻供 仰
0001_0007_a_03L表忠貞
伏惟尙饗

0001_0007_a_04L
松雲大師 嘉靖二十三年甲辰十月十七日始生 卽我
0001_0007_a_05L中宗誠孝大王三十九年也 年甫十四卽投於黃岳山金山直指寺信黙長老講下
0001_0007_a_06L已悟禪旨 乃丁巳之秋也 長往盡報者 六十七禩也 鵬顯鶴歸者 五十三秋
0001_0007_a_07L也 萬曆三十八年 庚戌八月二十六日 入寂于伽倻山海印寺也 自甲辰至
0001_0007_a_08L于乾隆四十八年癸卯 計年數則二百四十一年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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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축년(1829) 예조禮曺에서 베껴 와서 밀양密陽 표충원表忠院 청금안靑衿案에 올린다.
선대 조정의 스승이신 서산西山 대사의 보장록寶藏錄과 승대장僧大將 사명泗溟 송운松雲 대사의 직첩방함록職帖芳啣錄이 모두 표충원에 있어서 예전에 제임祭任으로 제사에 참여하였을 때, 1통을 베껴서 온 적이 있었다. 20여 년이 지나 도광道光 신축년(1841) 춘향제 때에 원임院任으로 제사에 참여하였을 때에 다시 고증해 보고자 하였는데 직첩방함록이 없었다. 원院 중의 담당자에게 문책하였더니 잃어버린 지 여러 해가 지났다고 하였다. 어쩌다가 이와 같이 흠이 되는 일이 생긴 것인가. 우리 불가가 비록 무념을 종으로 삼고 무상을 체로 삼으며 무주를 근본으로 삼아서 이름이 널리 알려져서 세상의 이익에 이르기를 구하지 않지만 우리 선사先師는 도덕으로 보면 선禪의 수풀과 교敎의 바다에 성대하고, 공업으로 보면 국가 사직에 가장 깊다.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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歲己丑 自禮曺謄書下來 于密陽表院靑衿案 留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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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_0007_b_03L
先朝師西山大師 寶藏錄 與僧大將泗溟松雲大禪師 職帖芳啣錄
0001_0007_b_04L俱在於院中 故昔年祭任參祀時 一通謄出而來矣 至二十餘年 道
0001_0007_b_05L光辛丑 春享院任參祀時 更考前錄 則職帖芳啣一錄不在矣
0001_0007_b_06L責問院中管司則曰 見失已過多年 此何等欠事耶 吾家雖以無
0001_0007_b_07L念爲宗 無相爲體 無住爲本 不求名稱普聞 利達於世 然而唯我
0001_0007_b_08L先師道德盛茂於禪林敎海 功業最深於國家社稷 是以唯

0001_0008_a_01L우리 임금께서 누차 추증하셨던 것이다. 여러 가지로 추증한 것은 대개 대사를 지극히 숭상하여서 유가와 석가의 이목들에게 널리 보이게 하여 충의의 성덕을 권장하고자 하였던 일이니, 이 기록들은 하루라도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본에 의거하여 베껴서 1통을 표충원에 두고자 한다. 어떻게 하면 유실을 방지할 수 있는가는 오직 후인들이 어떻게 잘 지키느냐에 달려 있을 따름이다.
판상의 시에 삼가 차운함 謹次板上韻
사방의 산이 위호하는 하나의 두륜산頭輪山
그 가운데 사원을 건립하여 제물을 진설하니
대의가 당당하여 해와 달처럼 빛나고
임금의 은혜로 곡진히 춘추로 제향하네.
화방의 철갑 두른 말은 서리 눈발 같고
적자摘子의 금옥 같은 문구들은 보배가 되니
당시 이름난 충절의 선비 많았건만
백성 구제한 뛰어난 공덕이 특출 나도다.

0001_0008_a_01L我聖朝累加褒贈 諸般追贈者 蓋所以致崇極於大師 博示
0001_0008_a_02L聽於儒釋耳目 勸獎忠義之盛德事也 則此錄不可一日無者 故
0001_0008_a_03L依舊本謄出一通 留鎭于院中 何以則防失 唯在乎後人謹守如何
0001_0008_a_04L耳 時摠攝 藏嗸 盥手謹跋

0001_0008_a_05L
謹次板上韻

0001_0008_a_06L四山衛護一頭輪
中建廟祠俎豆陳
大義堂堂輝日月
聖恩
0001_0008_a_07L惓惓享秋春
火房鐵馬如霜雪
摘子金文作寶珍
當世雖多
0001_0008_a_08L名節士
奇功獨出濟斯民

0001_0008_b_01L임금의 수레 몽진蒙塵하던 날이
선사先師가 의승병을 창도하던 때이니
충의를 다하여 사직을 안위하느라
수도하던 도량의 문을 닫았네.
누가 여래께서 시키셨다 하겠는가.
범인의 무리들은 알기 어려워.
사원을 세우고 위의와 제물을 갖추노니
어찌 공훈 보답을 게을리 한다 하리오.

장춘동長春洞의 빛깔 하늘색으로 물들고
구곡의 시냇물 소리 한강에 이르네.
남북으로 우러러보니 영령한 기운 씩씩하고
위대한 현자 모여드니 날로 유유하도다.
침계루 시에 삼가 차운함 謹次枕溪樓韻
따스한 봄 와서 노닌 날
신선이 되어 날아오르는 때
자색 구름 계곡에 서리니
별세계의 연지 못 바라본 듯.
성은이 이르니 얼마나 다행인가.
용상을 따름에 부끄러울 뿐.
마음 바꾸니 돌아갈 길 멀어
남은 꿈은 남쪽 가지에 걸어두노라.
도광道光 21년(1841) 신축년 2월 기봉 장오奇峯藏嗸가 삼가 쓰다.

0001_0008_b_01L鑾駕蒙塵日
先師倡義時
盡忠安社稷
修道掩裨扉

0001_0008_b_02L信如來使
難知凡類隨
建祠儀物備
豈曰報勳遲

0001_0008_b_03L長春洞色建天碧
九曲溪聲徹漢流
南望北瞻靈氣壯

0001_0008_b_04L賢鍾出日悠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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謹次枕溪樓韻

0001_0008_b_06L來翫長春日
登仙羽化時
紫雲橫谷口
別界對蓮池
何幸
0001_0008_b_07L天恩至
可慙龍象隨
飜懷歸路遠
殘夢掛南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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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光二十一年辛丑春二月日 奇峯藏嗸 謹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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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광道光 21년 신축년 8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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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光二十一年辛丑八月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