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우록(僧祐錄)』에는 안공고(安公古)가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본 경은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을 처음 한역한 이역본임
실역(失譯) 이한정 번역
007_0956_a_02L僧祐錄云安公古典,是般舟三昧經初異譯
이와 같이 들었다.
007_0956_a_03L聞如是:
부처님께서 나열기죽원(羅閱祇竹園)의 다조수(多鳥樹) 아래에 계실 때 5백 명의 비구 대중과 함께 있었다. 그들은 모두 아라한(阿羅漢)이었기에 집착이 다해서 남아 있는 번뇌가 없고, 해야 할 일을 다 하였고, 구하는 것을 이루었기에 모두들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원하는 곳에 이르렀으니, 이미 끊은 까닭이었다. 한 사람의 범비구(凡比丘)1)만을 제외하고서, 최초로 정법에 감화되어 득도(得度)하였기에 모두가 8선(禪)2)을 건넜다.
이때 발피보살이 5백 명의 보살과 함께 있었는데 모두 속가에 있으면서 5계(戒)를 수지하였으며 이들은 전부 여래에게 정법을 받고자 하였다. 발피보살이 곧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 계신 곳으로 나아가 부처님께 예배드리고 한쪽으로 비켜 앉자, 여러 보살과 여러 비구도 모두 부처님께 머리 숙여 예배드리고 한쪽으로 비켜 앉았다.
이때 부처님께서 정의(定意)3)에 드시어 신족통(神足通)을 일으켜 다른 국토에 있는 모든 비구들을 남김없이 이 죽원으로 모이고 모두 부처님께 예배드리게 하셨다. 이때 10여 만 명의 비구 대중이 모두 죽원으로 모였다. 부처님께서 다시 정의에 드시어 신족통을 일으켜 대덕 비구니들과 3만여 명의 비구니들을 모두 죽원으로 모이도록 하시자, 이들도 모두 다 부처님께 와서 예배드리고 한쪽으로 비켜 앉았다.
007_0956_b_02L부처님께서 다시 정의에 드시어 신족통을 일으키시자, 나단가루(羅檀迦簍)보살이 유사대국(惟舍大國)에서, 가휴두(迦休頭)보살이 점파대국(占波大國)에서, 나달두(那達頭)보살이 바라내대국(波羅奈大國)에서, 수심무(須深無)보살이 가유라위대국(迦惟羅衛大國)에서, 대대도중(大大導衆)보살과 급고독(給孤獨) 가라월(迦羅越)4)이 사위대국(舍衛大國)에서, 존달(尊達)보살이 구섬대국(拘暹大國)에서, 만논조(謾論調)보살이 사호대국(沙號大國)에서 각각 2만 8천 명을 이끌고 죽원으로 모여서 부처님의 발에 머리 숙여 예배드리고 모두들 한쪽으로 비켜 앉았다.
이때 아사세왕(阿闍世王)이 10만 명의 대중과 함께 부처님 계신 곳으로 찾아와서 부처님께 예배드리고 한쪽으로 비켜 앉았다.
007_0956_b_07L爾時阿闍世王,與過十萬衆人俱,來到佛所,皆以頭面禮佛,悉坐一面。
그때 첫 번째 사천왕(四天王)ㆍ도리천왕(忉利天王)ㆍ범천왕(梵天王)이 무앙수(無央數)5)의 하늘의 무리들과 함께 부처님이 계신 곳으로 찾아와서 부처님께 예배드리고 모두들 한쪽으로 비켜 앉았다. 또 여러 변정천(遍淨天)의 무앙수 대중이 모두 부처님 계신 곳으로 찾아와서 예배드리고 한쪽에 비켜 서 있었다. 4아수륜왕(阿須倫王)이 무앙수의 아수륜 대중을 거느리고 부처님께서 계신 곳으로 찾아와서 예배드리고 모두들 한쪽에 비켜 서 있었다. 난두화난(難頭和難)용왕ㆍ사가라(沙迦羅)용왕ㆍ마나사(摩奈師)용왕ㆍ아뇩달(阿耨達)용왕ㆍ이라발(伊羅鉢)용왕이 무앙수의 용들과 함께 부처님 계신 곳으로 찾아와서 예배드리고 한쪽에 비켜 서 있었다.
이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발피여, 그대는 마음껏 여래에게 질문하여라. 지금은 그대가 질문한 바를 깨우쳐 주리라. 이는 네 뜻이 생하고 멸하는 모습을 아는 까닭이니라.”
007_0956_b_22L佛因言:拔陂!恣意所問,如來今我悉能解汝所,問知汝意生滅形象。
007_0956_c_02L그러자 발피 보살이 즉시 이같이 여쭈었다. “보살이 ‘정의(定意)’를 어떻게 성취하여야만 그 다문(多聞)함이 바다처럼 갖춰지겠습니까? 그 다문함에 의심하는 바가 없어서 한 번 마음을 내면 이를 잊지도 않고 물러서지도 않고 게으르지도 않아 마침내 위없는 큰 도의 지극한 덕인 바른 깨달음을 이루어 성불하게 되겠습니까? 생을 바꾸더라도 정법이 없는 곳으로 떨어지지 않고, 언제나 그 생을 받는 곳을 잘 헤아려서, 본원(本願)을 여의지 않고 여래를 친견하게 되겠습니까?
잠자거나 꿈꿀 때에도 정법을 벗어나지 않되 언제나 보기 좋고 반듯한 모습을 얻으며 이 모습을 보는 자가 항상 기뻐하고 호사롭고 귀한 가문에 태어나서 언제나 뜻을 굳게 하여 배우는 것을 충실히 하고, 터득한 것을 빨리 잊지도 않고, 도량도 넓고 뜻도 견실해서 수치스러움을 알아서, 묘한 이치를 모두 깨달아 자비를 많이 행하게 되겠습니까? 언제나 조용히 깨침에 머물면서도, 대하는 것마다 위엄을 떨치고 늘 정진하되 도중에 후회하는 마음을 내지 않고, 바른 뜻이 곧게 되겠습니까?
언제나 법에 들어가고, 언제나 지(止)에 들어가고, 언제나 관(觀)에 들어가고, 언제나 선(禪)에 들어가고, 언제나 정(定)에 들어가게 되겠습니까? 또한 공하여 들어간다는 생각을 내지 않고 지법(地法)을 이루지 않으며, 두렵거나 무서워하지 않으면서 늘 설법을 즐기고, 늘 수법(受法)6)을 즐겨서, 그 뜻하는 바가 다시는 본원에 위배되지 않게 되겠습니까? 본래의 덕과 본래의 뜻이 세력이 크고, 본래 인연이 굳세고, 5근(根)이 굳세기에, 짓는 바도 늘 굳세고, 악을 꾸짖고 멀리함도 늘 굳세고, 살펴보는 바도 늘 굳세어서, 해탈의 소원이 항상 굳세게 되겠습니까? 그 한량없음이, 바다처럼 되겠습니까?
비유하자면, 달이 저절로 완전하게 청정해지고 둥글어지는 것과도 같게 되겠습니까? 비유하자면, 해가 어둠을 없애는 것과도 같게 되겠습니까? 비유하자면, 등불이 밝은 물질을 드러내는 것과도 같게 되겠습니까? 비유하자면, 허공에 색칠하지 못하는 것처럼, 마음이 집착 없이 공하게 되겠습니까? 비유하자면, 밝은 구슬처럼 정법을 모두 통달하게 되겠습니까? 비유하자면, 돌처럼 흔들리지 않고 가만히 머물러 있게 되겠습니까?
비유하자면, 뿌리처럼 쉽게 흔들리지 않게 되겠습니까? 비유하자면, 물에 젖은 새끼 너구리처럼 그 마음이 부드러워져 모진 데가 없이 되겠습니까? 비유하자면, 때까치처럼 그 마음을 낮추게 되겠습니까? 비유하자면, 거지처럼 저잣거리를 즐겨 다니지 않고 산중에 사는 것만을 즐기게 되겠습니까? 비유하자면, 사슴이나 원숭이처럼 속인들을 가까이하지 않게 되겠습니까?
007_0957_a_02L배우면서도 늘 대중을 거느리고 대중을 이끌어 가되 교화하기 힘든 사람들 사이에서도 노여워하지 않고, 모든 마군을 점차로 해탈로 이끌게 되겠습니까? 제법(諸法)을 배우지 않고도 스스로 깨치며 법을 깨닫되 그 정(定)이 견고하여 다른 것을 인연하지 않게 되겠습니까? 커다란 자비의 힘이 있어 쉽게 어지럽혀지지 않고, 생각하는 바가 늘 깊어서 바른 행을 여의지 않아서, 그 마음에 얻는 바가 헤아리기 힘들게 되겠습니까?
법을 들을 때마다 눈물 흘리면서 삼가는 바가 매우 크며 부처님께서 행하시고 생각하시고 원하셨던 모든 것을 남김없이 다 갖출 수 있게 되겠습니까? 누구라도 와서 바라는 것이 있으면 그때마다 헤아릴 수 없이 착한 생각을 일으키고 그 원력이 바다같이 청정한 신심을 이루고, 그 원력이 늘어나되 늘 정갈하고, 질투와 노여움을 끊어서 항상 그 원력이 밝게 되겠습니까? 일체지(一切智)가 지극하여 그 환희로운 빛이 속에서 뿜어져 나오며, 행원(行願)으로 불신(不信)을 끊고, 나쁜 소견을 씻어내서 한없는 세상에 가득히 원력을 행하게 되겠습니까?
모든 꾸밈을 세세생생 끊어가되 여전히 단아하고, 청정함을 즐겨 계율을 깨끗이 행하여 속연을 끊고 각지(覺地)를 인연하게 되겠습니까? 마음속으로 간구하는 원력이 견고해서 물러남이 없고, 지은 것이 원만하여 구하는 것을 이루되 항상 무위(無爲)에 머물게 되겠습니까? 천상과 인간세에 선법(善法)을 전도하되 싫증내지 않고, 모두 보살도를 이루어 득도하더라도 근심하거나 좋아하지도 않게 되겠습니까? 모든 외도들에게 에워싸이더라도 삿된 것에 기울지 않으며, 언제나 모든 부처님을 공경하고 즐거워하며, 법의 광채가 휘황하여 이지러지지 않는 것을 낱낱이 친견해서, 모든 부처님을 만나 뵙게 되겠습니까?
비유하자면, 요술로 만들어진 사람처럼 일체법(一切法)에 나[我]라고 할 만한 것이 없음을 알게 되겠습니까? 비유하자면, 신통변화로 만들어진 사람처럼 후법(後法)7)이 다가오지 않게 되겠습니까? 비유하자면, 꿈속에서 만난 사람처럼 과거ㆍ현재ㆍ미래가 없게 되겠습니까? 비유하자면, 빛이 모든 세상을 비춰서 그 몸을 드러나게 하는 것과도 같게 되겠습니까? 비유하자면, 쌍일(雙日)8)에 길 떠나지 않는 것처럼, 중단하는 인연법이 없게 되겠습니까? 비유하자면, 생사를 경치삼아 태중(胎中)에 들지 않고 세간에 머물되, 태중에 든다는 생각조차 끊어 그 같은 법을 취하지 않고, 오직 원리(遠離)만을 행하여 법기(法器)만을 염려케 되겠습니까?
007_0957_b_02L보살의 뜻을 가없게 해서, 모든 세간의 어떤 것에도 그 뜻을 기울이지 않고, 점차 집착없는 바에 가까이해서, 모든 부처님 국토의 부절문(符節門)9)을 지나게 되겠습니까? 일체를 구족하게 깨닫고 선법(善法)을 흩날려서 스스로 최상의 법기를 이루겠습니까? 모두가 부처님께로 돌아와서 모두들 여래를 예배하더라도, 부처님의 위신력은 그 머물러 계심에 옷자락 하나 흔들리지 않으시고, 그 세력의 전능함이 사자가 홀로 부르짖는 것과 같으니 언제나 이 같으신 부처님을 친히 뵙고 공경하되 세상의 중생을 흡족케 함에 어긋남이 없게 되겠습니까?
모든 부처님께서는 일체를 아시어 때에 맞춰 각행(覺行)을 펼치시니, 의심을 버려서 달리 수법(受法)하지 않게 되겠습니까? 일체의 3세(世)를 비춰보지 않는 바가 없어서 일체지로서 설법함이 무궁하고 언제나 자비를 행하여 불쌍히 여기는 까닭에, 경을 연설하여 그 뜻을 밝혀서, 지혜가 아닌 것을 멀리하되 이에 머물지 않게 되겠습니까? 모든 사람을 대하되 차별하지 않고, 몸과 뜻이 언제나 반듯해서, 마음을 세상의 눈으로 삼아 삼계를 밝히게 되겠습니까?
삼계를 낱낱이 살펴보되 이를 업신여기지 않고 무아법을 행하여 세상의 모든 윤회를 멈추게 하면서도 행을 닦아 온갖 즐거움을 구하지 않고 오로지 믿음으로 행하고 믿음으로 생각하고, 법을 취하지도 버리지도 않고 일체지로 교화를 하되 저들을 커다란 배움의 문에 머물도록 권해서 두려움이 없게 하겠습니까? 여래의 정법인 모든 말씀을 잘 연설해서 항상 이를 행하고, 정각을 구하는 이를 따라 기뻐하지 않음이 없고, 모든 중생이 크게 즐거워하는 바를 함께 즐겨 설하면서 부처님의 계율과 정(定)을 따라10) 악법을 끊게 되겠습니까?11)
모든 부처님의 법을 즐기면서 행을 닦되 비난받아도 원망하는 마음을 내지 않고, 중생 속으로 다니면서 중생이 두려워하는 것을 끊어 주고, 힘을 북돋아서 말과 행동이 모두 열반에 이르게 할지니, 언제나 곧아서 그 머무는 바를 취하더라도 흔들림이 없게 되겠습니까? 저 계율이 파리해진12) 모든 이를 돕고자 사자좌에 앉아 법을 연설하고 모든 분별(分別)에 통달케 해서 부처님의 지혜에 따르게 하겠습니까?
언제나 세간에 머물러 있되 세간에 떨어지지 않고 늘 행을 닦는 것을 즐기고, 속가에 있으면서도 늘 존귀한 법을 깨닫고, 모든 부처님을 따라 행을 익혀서 항상 정법을 소원하되 게으르거나 어리석지 않게 되겠습니까? 여래처럼 중생을 잘 이끌되 그 행에 편협됨 없이 시방세계의 모든 곳을 즐거이 다니면서, 중생이 죄를 버리고 복을 이루도록 하되 고요함이 나날이 늘어 법문에 들게 되겠습니까?
007_0957_c_02L비유하자면, 허공처럼 법신(法身)에는 형체가 없으나 언제나 사람들을 감싸안고, 보살이 일체를 끊지 않고서도 모든 부처님의 모든 행을 따르되 머물거나 그치고자 하는 마음을 내지 않게 되겠습니까?
007_0957_c_02L譬如天法身無形故常掔內人,爲菩薩一切不斷諸佛諸行,不住止欲。
비록 보살도를 이루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사람들을 보호하는 갑옷이 되고, 비록 원한이나 질투, 욕심이 많더라도 이 모든 것을 이겨내게 되겠습니까? 부처님 앞에서 한량없는 원력을 세워 여래의 십종역지(十種力地)에 머무르게 되겠습니까? 모든 망상을 제거하여 일체법을 통달하고, 방편을 다스려 세상이 흩어지는 것을 깨닫게 되겠습니까?
모든 행을 닦아 생사 속에 들어가되, 도리어 생사를 버려서 머무는 바가 없이 하고, 또한 이에 현혹되지도 않고 법의 바다를 건너 귀한 보배를 거두게 되겠습니까? 세상 모든 곳으로 널리 다니되 세상을 멀리하고, 큰 변화를 익히고 닦아서 부처님의 힘을 갖추어 비할 데 없는 곳에 이르게 되겠습니까? 마음을 하나로 모아서 모든 부처님 만나보기를 발원하고, 날 적마다 다른 세상에 태어나는, 이 같은 세간을 버리게 되겠습니까?
여래께서 이 세간에 머무시되 정각(正覺)에 집착함이 없으시니, 부처님과 그 국토를 멀리서라도 뵙고, 그 법을 듣고 비구스님들을 친견해서 5달(達)13)을 없애고 6달(達)을 없애게 되겠습니까? 보살이 세간에 따르지 않고 부처님 세계를 듣고 보면서도, 여전히 이 세간에 머물러 있게 되겠습니까?
정각(正覺)14)을 멀리서 바라보며, 밝은 법을 닦아 그 행을 받드는 것이, 비유하자면 지금 부처님 앞에서 그 법을 받들어 행하는 것과 같이 되겠습니까? 정등각(正等覺)을 이루어 저의 의심을 없애고, 또 이처럼 여러 보살의 해태심(懈怠心)을 없애서 언제나 부처님을 직접 뵙고 법을 잘 듣되, 꿈 속에서라도 그 마음이 삿된 것에 기울지 않게 되겠습니까?”
007_0958_a_02L네가 예전부터 공덕이 있었으니, 과거세의 부처님께 보시해서 한량없는 착한 복을 지었고, 많은 부처님을 만나 뵙고, 법의(法義)의 자리에 앉아 법을 소원하되 달리 원하는 바 없이 범행(梵行)을 받들어 지켰느니라. 구하는 바 없이 무식(無食)15)에 자족하고 즐거이 계율을 지켜서 모든 보살행을 지었노라. 언제나 보살이 되기를 권유하였고, 언제나 보살을 존중하기를 원하였고, 언제나 보살의 뜻이 장대하기를 원하였고, 보살이 왕성하기를 원하였고, 보살도를 성취하기를 원하였으니, 그 구하는 바가 늘 자비롭고 장대하였느니라.
모든 것을 평등한 마음에 의지해서, 중생심(衆生心)을 억제해서 무극(無極)에 이르러,16) 부처님을 뵙고 열반의 이치를 새겼으니, 여래의 말씀에 따라 성불을 구했던 마음이, 비유하자면 화이철(和夷鐵)17)처럼 무량하였노라. 중생이 착한 생각을 내는 것을 낱낱이 알고서, 그 행실에 따라 깨닫게 하였으니, 이런 것이 너의 공덕이니라.
발피여, 내가 이미 생각마다 일체지를 갖추었으나, 비록 이렇다 하더라도 언제나 여래정(如來定)에 들어 있으니, 이를 이름하여 세간상주지(世間常住止)라고 하느니라. 이 같은 ‘정(定)’을 ‘정의(定意)’라 하니 견고해서 타락하지도 않고 그 마음을 잃지도 않기에, 저 이근(耳根)이 열악한 중생이 달리 게으름 피워서는 안 되느니라.”
이에 발피보살이 다시 이같이 여쭈었다. “오직 여래만이 저에게 이 같은 정의(定意)를 해설할 수 있으니, 제가 대중을 위하여 배워서 솔선하여 대중들을 안락케 하겠습니다. 원컨대 이 세간을 가엾이 여기시어, 사람과 천상의 세계 및 여러 보살로써 큰 서원을 세운 이들을 위해, 이 같은 광명이 스스로 비춰지는 것을 보게 해 주십시오.”
부처님께서 다시 발피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언제나 하나의 법을 행하고, 언제나 하나의 법을 짓되 싫증을 내지 않고 받들어 행하고 높이면 이익이 많을 것이다. 무엇이 하나의 법인가? 부처가 ‘정의(定意)’에 드는 것을 친견하는 것이니, 이를 이름하여 ‘정(定)’에 ‘지(止)’하여 머문다고 하느니라. 소위 부처님의 마음을 인연하여 마음을 내게 되면, 그 마음이 삿되지도 어지럽지도 않게 되리라. 언제나 묵묵히 정진을 거르지 말고 내 몸이 없는 것처럼 대해서 깊이 잠들어 누웠어도 항상 공(空)을 일으키거라.
마치 악독한 원수를 멀찌감치 피해가는 것처럼 속인들을 멀리해서 몸을 늘 숨기며, 악지식(惡知識)을 피하여 가까이하지 말고 늘 착한 도반을 사귀어 그 도를 따르거라. 6근(根)을 곧게 해서 삿된 마음을 내어 게으름에 빠지지 말거라. 욕심을 줄여 좋은 음식도 바라지 말고 좋은 법의(法衣)도 탐내지 말지니, 오래 살기도 바라지 말고 타고난 수명에 따르되 알음알이로써 그 몸을 애착하지도 말거라.
007_0958_b_03L그 처자식의 정에도 이끌리지 말지니, 자신이 태어난 나라도 버리고 속히 떠나가되, 자애로운 마음을 기르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얻으며 기뻐하는 마음에 머무르고, 담담한 행을 닦아야 한다. 모든 번뇌[蓋]에서 마음을 지키거라. 색상(色想)에서 훈습(薰習)되는 여러 선(禪)을 버려서, 음상(陰想)에서 분별되는 모든 입(入)도 취하지 말고, 모든 대(大)도 받지 말고, 마음을 누그러뜨리지 말며, 느낌[受]이 생겨나도 어지럽혀지지 말고, 부정한 곳에도 머물지 말고, 사향(舍向)18)을 이뤄서 모든 중생을 해탈케 하고, 모든 중생을 자신처럼 여기거라.
일체 중생이 모두 나[我]라는 것이 없으니, 일체 법에도 얻을 것이 없기에 계율로써 달리 구하지 말고 늘 선정을 익히고 많이 배우는 것을 즐기고 계율을 지켜서 번뇌[漏]로 인해 정(定)을 훼손하지 않게 하고, 계율을 지켜서 타락하지 않게 하고, 법에 의심내지 말고, 부처님과 논쟁하려 들지 말고, 법을 저버리지 말고, 스님들을 비방하지 말고, 거친 말을 삼가고, 도를 얻은 이를 잘 모시고, 늘 세간의 음악을 멀리하여 즐기지도 말라. 세간의 즐거움에 쏠리지도 말고, 축생의 소리를 즐겁게 여겨 멀리 외진 곳으로 가서 여섯 가지 견법(堅法)을 행하고, 다섯 가지 해탈을 익히고, 언제나 열 가지 악한 행동을 버리고, 열 가지 선을 넉넉히 행하거라.
9요(嬈)19)를 몸소 익혔으나, 스스로 여덟 가지 무세(無勢)20)에서 벗어나서, 여덟 가지 정진으로 모두 위사(違捨)21)하고, 늘 9상(想)22)으로 행을 익혀서, 여덟 가지 대인(大人)의 마음을 닦되, 여러 선(禪)을 성취하더라도 이에 애착하지 말아야 한다. 스스로 큰 이치를 얻었다 자만하지 말고, 항상 설법하는 바를 잘 듣고, 항상 법을 중히 여겨서, 언제나 법색(法色)이라는 마음을 내고 나[我]라는 생각을 멀리하여 신체에 매이지도 말고, ‘사람’이라는 생각도 모두 버려야 한다.
다시 태어나더라도 5음(陰)을 받겠다는 생각도 내지 말고, 모든 것을 잘 분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고, 열반의 원력을 세워서 생사에 떠돌지 말고, 생사를 두렵게 생각해서, 모든 음(陰)을 원수처럼 여기며, 4대(大)를 독사처럼 여겨서 모든 입(入)을 공하다고 생각하고 삼계는 머물 데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니원(泥洹)을 보고서 홀로 즐기고, 세간의 업(業)을 다시 짓지 말고, 세간을 떠나서 부처님만을 따라야 한다.
007_0958_c_02L 다른 사람과 다투지도 말고, 모든 세속법에 가까이하지도 말고, 모든 부처님을 늘 친견하고, 이 몸은 헛되다 여겨서 해탈을 구하되 언제나 깨끗하게 착한 일만 하고, 언제나 잊지 말고 생각해서 세 가지 견정(堅定)을 잘 헤아리고, 언제나 모든 부처님을 염원하고, 선법(善法)의 근본을 믿고 의지해야 한다.
항상 욕심에 자유로운 부처님의 ‘정(定)’을 흠모하되 부처님의 몸과 같아지기를 바라지 말고, 일체법에 분별내지 않고 세간을 헤아려서 이치를 깨달아 남과 다투지 않고, 보시받을 때에도 순서를 지키고, 여래가 계신 국토에 머물고, 인욕을 닦아 이로움을 얻고, 자신을 낮춰서 법신(法身)의 공함에 들어가고, 사람의 몸이 생멸(生滅) 없는 열반의 몸인 것을 깨달아서 언제나 지혜의 눈으로 관찰하여 청정케 한다.
일체법에 나[我]라는 것이 없기에 성불을 원하는 마음을 어긋나게 하거나 뛰어 넘지도 말고, 모든 것을 부처님께 비춰서 한결같이 행하고, 알음알이를 생각지 말고 도달하는 것만을 바라고, 수없는 망식(妄識)이 거듭하더라도 뜻을 바로 세우고 일불승(一佛乘)에 머물러서 업을 지음에 다른 이에게 휘둘리지 말고 부처님의 지혜만을 따르고, 선지식을 만나면 세존을 뵌 것처럼 하고, 모든 보살은 다른 생각이 없으니 어긋나면 바로 마군의 소행임을 알아야 한다. 세간의 모든 것은 환상이고 모든 부처님은 빛과 같다고 여래를 비춰 보고, 언제나 행을 닦아 무극(無極:바라밀다)에 들어가는 보살의 뜻을 구하고 평등함을 억념(憶念)하여 간곡한 믿음으로 모든 부처님의 선법과 평등하다는 것을 보거라.
007_0959_a_02L발피여, 만약 비구ㆍ비구니ㆍ우바새ㆍ우바이가 항상 계율을 지키면서 언제나 외진 곳에 머물되 중생과 함께 하지 않으면서 곧 이렇게 생각을 한다고 하자. ‘아미타불께서는 어디 계시는 것일까? 늘 머무시며 설법하신다고 들었는데…….’ 그리고 이내 생각한다. ‘서방에 계시며, 그곳은 곧 아미타께서 다스리는 곳이다.’
발피여, 비유하자면 사람이 잠자면서 은이나 금이나 갖가지 보배가 모여 있는 것을 보거나, 친구나 사랑하는 친척들을 만나 매우 즐거워하며 싫증나지 않으면서 그들과 함께 어울려 놀고 서로 정답게 얘기하는 꿈을 꾸다 깨어나면, 꿈에서 보았던 것을 기억하고는 이 같은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말할 때마다 바로 눈물을 흘리면서 그 생각을 염두에 두고 기억하게 되리라.
발피여, 이와 마찬가지이니라. 보살이 백의(白衣)23)이거나 학자(學者)24)이거나 아미타불이 계신 나라를 전해 듣게 되면, 늘 그쪽만을 생각하되 계를 번뇌[漏]로 훼손하지 않고 계음(戒陰)에서 뜻이 어지럽혀지지 않으며 깨끗한 마음으로 하루 낮 하룻밤에서 이레째의 낮과 밤에 이르도록 생각한다. 이처럼 이레 동안 밤낮으로 생각하고 나면 바로 아미타불을 친견케 되리니, 혹 꿈속에서라도 아미타불이 실제로 오시게 되리라. 여래를 직접 친견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허공으로 올라가는 꿈을 꾸는 남자가 스스로 허공 가운데 머물러 있다고 여겨서 낮밤도 생각하지 않기에, 그 안근(眼根)이 담벽에 가려지지도 않고, 그늘에 덮여 어둡지도 않는 것과 같으리라.
007_0959_b_02L 보살이 미처 천안통(天眼通)을 얻지 못하였더라도 아미타불을 친견할 수 있고, 천이통(天耳通)을 얻지 못하였더라도 아미타불이 경을 설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고, 신족통(神足通)을 얻지 못하였더라도 아미타불의 국토에 갈 수 있느니라. 이처럼 보살도 아래 세상에 따르지 않고 저 나라로 왕생할 수 있으나, 단지 스스로 이 세상에 머물고자 하는 까닭에, 아미타불 여래를 친견하고 설법을 듣고서 들은 대로 받들어 행하는 것이니라. 보살이 이렇게 정의(定意)에 들어가서 깊이 잠들더라도 법을 듣고는 다른 사람에게 널리 연설하게 되느니라.
발피여, 비유하자면, 어떤 남자가 앵무새로부터 수문(須聞)이라 이름하는 어진 규수가 있다는 것을 전해 듣고, 또 두 번째 남자가 아범화리(阿凡和利)라 이름하는 어진 규수가 있다는 것을 전해 듣고, 다시 세 번째 남자가 연화색(蓮花色)이라 이름하는 어진 규수가 있다는 것을 전해 듣고서 이같이 이름자만을 전해들은 것에 연연하여 스스로 탐착을 내는 것과도 같으니라.
남자들은 모두 저 어진 규수들을 본 적도 없으면서, 단지 멀리서 전해만 듣고도 마음을 일으켜 염원하여 음욕을 내었기에, 잠자는 때에 꿈에서라도 보게 되면 바로 그 여자들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게 되었느니라. 이런 까닭에 나열기성(羅閱祇城)의 어떤 남자가 마음을 이렇게 일으켜서 이렇게 만나게 되었느니라. 서로 어지러이 쾌락을 즐기다가 새벽녘에 깨어나서 다시 기억해보면 들었던 그대로이고 알았던 그대로였느니라.
발피여, 너에게 일러주고자, 이 같은 인연을 빌어 이같이 설법하는 것이니라. 지금부터 다시는 다른 것을 받아들이지 말고 위없는 도를 깨친다면, 내가 다시 말하나니, 아주 먼 미래세에 그 명호를 선오(善寤) 여래(如來)ㆍ무소착(無所著)ㆍ정각자(正覺者)라 할 것이니라. 중생들이 제멋대로 보고 생각하더라도, 단지 이러한 것만이 정견이고 이러한 것만이 보살이니라.
발피여, 이 세간에 머무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이니라. 저곳에 아미타불이 있는 것을 전해 듣고서 자주 생각하면, 바로 여래를 친견하게 되리라. 아미타불이 나타나면 부처님의 얼굴을 보고 정의(定意)에 머무르게 되느니라. 친견하자마자 여래께 ‘어떠한 법의 모임으로부터 보살이 이와 같은 세상에 태어나게 됩니까?’라고 여쭙게 되리니, 아미타불이 바로 여러 보살에게 ‘항상 염불하는 마음을 잘 익혀서 저버리지 말라. 언제나 행을 닦되 헛것이라고 지어나가면 바로 이 같은 불국토에 태어나게 되리라’고 말씀하시리라.
007_0959_c_02L어떠한 것이 늘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이고 여래법을 생각하여 잊지 않는 것인가? 지금 여래는 집착하는 바 없이 정각을 이루어, 그 금색신(金色身)에 서른두 가지 대인상(大人相)이 있기에, 저 자마금색신(紫磨金色身)이 청정하기가 마치 밝은 달이나 수정 구슬로 만든 몸과 같으니라. 비유하자면 마치, 영락과 같은 여러 보배들을 장식하고 여러 제자들 사이에서 홀로 설법하고 계시는 것과 같으니라. 이와 같이 정성스럽게 설하는데, 어째서 마음에 품지 못하겠는가?
잊지 않는다는 것이란 무엇인가 하면, 지신(地神)ㆍ수신(水神)ㆍ화신(火神)ㆍ풍신(風神)ㆍ범천왕(梵天王) 따위의 모두가 색(色)ㆍ통(痛: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을 여의지 못하였더라도 여래를 염하게 되면, 그 인연이 공해져서 바로 성취하게 되느니라. 이같이 염불하는 마음을 내거라.
발피여, 아주 오랜 과거세에 한 남자가 있었으니, 광야의 연못가를 지나갈 때에 기갈이 몹시 심하였느니라. 그가 연못가에서 바로 잠에 떨어지자 좋은 음식을 마음껏 먹는 꿈을 꾸고는 그 기갈 들린 것만큼 포식하였느니라. 이윽고 깨어나자 실제로 배부르게 먹은 것 같은 생각이 들었느니라. 이처럼 법이라고 제멋대로 헤아리는 것도 비유하자면 꿈에 먹은 음식과도 같기에, 이와 같이 관찰하면 다른 것도 견딜 수 있느니라.
부처님 법 가운데에는 보살도 또한 마찬가지이니라. 속가에 있거나 학자이거나 부처님께서 계신 곳을 전해 듣게 되면, 언제나 지극한 마음으로 그쪽을 생각하되, 부처님을 친견하고자 항상 염원할 것이요, 그러나 생각에 집착하지 말라. 태(胎)에 있어서도 그러하니, 자기 몸이 있다는 생각을 내지 않고 언제나 공한 생각에 머물러라. 부처님을 생각하는 마음뿐이어야 한다. 공한 마음에 머물러서 부처님을 생각해야 하니, 그 청정하기가 유리보배 중에서도 으뜸간다고 생각해야 한다. 이와 같이 염원한다면 바로 여래를 친견하게 되느니라.
007_0960_a_02L발피여, 비유하자면 사람이 태어난 나라에서 다른 곳으로 가더라도 여전히 원래 태어난 나라에서 노닐다가 즐거웠던 일을 생각하는 것과도 같으니라. 잠을 자면 다시 고국에서 노닐었던 꿈을 꾸게 되니, 예전에 다달았던 곳을 생각하고 그 나라에서 마음껏 놀게 되느니라. 잠에서 깨어나면, 가까운 이나 친구 또는 곁에서 시중드는 사람에게, 내가 이러이러한 곳에 가보았고, 이러이러한 것을 보았으니, 내가 예전에 보았던 곳이고 가서 놀았던 그대로였다고 말하게 되느니라.
발피여, 비유하자면 더러운 것을 살펴보던 비구가 반쯤 퇴색된 것을 앞에 놓고는 예전에 진청색을 보았었기 퇴색된 것을 보고도 그 원색을 보았다고 하는 것과도 같으니, 실상 그 공한 것이 마치 연기와도 같으니라. 단지 백골을 앞에 놓고도 ‘이 뼈는 어디서 왔고, 원래 누구의 것이었고,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하는, 이 같은 것들은 모두 마음이 지어낸 것뿐이니라.
발피여, 보살도 역시 마찬가지이니라. 부처님만을 의지하되 다른 것에 귀의하지 않고 머무르는 바가 곧 정의(定意)이리니, 이처럼 방향을 방편삼아 부처님 친견하는 것을 소원하는 것이니라. 그 방향에 부처님께서 계시다면 곧 여래의 몸을 친견케 될지니, 어째서인가 하면 정(定)에 의지하는 까닭에서이니라. 다시 부처님을 의지하는 까닭에 이 같은 정의에 머무르게 되리니,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그 정력(定力)을 돌이키되 전생의 공덕으로 세 번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여래를 친견케 되느니라.
발피여, 네가 이를 일컬어 사람의 형체가 기름이나 물이나 거울이나 수정그릇 속에 들어갔다고 하겠느냐? 그 가운데에 있는 그대로라고 하겠느냐?”
007_0960_a_22L拔陂!汝寧謂是人形入油水鏡水精器不?若已在其中耶?”
007_0960_b_02L이에 발피보살이 부처님께 대답하였다. “여래시여, 나[我]라는 것은 본래 없기에 그릇 속에도 없나이다. 참기름이나 물이나 거울이나 수정 속에서 보여지는 것은, 단지 그림자가 그 앞에 있는 것뿐이니, 이는 빛 속에서 생겨난 것도 아니고 몸에서 생겨난 것도 아니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착하도다. 발피여, 실제로는 이처럼 색의 깨끗함에 기인하는 것임을 헤아려 보아야 하느니라. 여러 보살이 부처님을 친견하고자 하는 것도 간단해서 어려움 없이 보게 되기에 누가 물어보더라도 그 대답할 바를 알고는 능히 대답하게 될지니, 이를 전해 듣고서 마음속으로 기뻐하는 사람에게도 다시 이처럼 ‘이 같은 모든 부처님은 어디서 오시며 나는 어디로 가야 뵐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들게 되느니라.
그러나 이 같은 것은 모두 오는 바도 없고, 그 오는 것처럼 가는 바도 없음을 알아야 하느니라. 이를 가리켜 자기 스스로 이 같은 마음을 내는 것뿐이라고 하나니, 단지 마음이 미치는 바는 삼계일 뿐이니라. 내가 천상을 보고 싶다고 마음을 내면 천상을 보게 되는 것이고, 마음속으로 부처님을 그리면 뜻한 대로 부처님을 친견하는 것이니, 단지 내 마음이 부처가 되는 것뿐이니라. 단지 마음뿐이고 내 몸이란 것도 마음뿐이니라.
마음으로 부처님을 친견하더라도, 마음은 마음을 볼 수 없고 마음은 마음을 알지 못하니, 마음속의 생각은 지혜가 없으며, 생각이 없는 마음이 곧 열반이니라. 이 법이란 것도 견고하지 못해서 모두가 자기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나, 자신이라는 것도 모두 공한 것이기에, 자신을 찾아보아도 존재하지 않느니라. 발피여, 보살도 이와 같이 정(定)에 머물러야 하느니라.
발피여, 네 가지 법이 있어서 보살이 속히 이 같은 정(定)을 성취하느니라. 어떠한 것이 그 네 가지인가 하면, 첫째는 한량없는 신심(信心)이고, 둘째는 정진하여 게으르지 않는 것이고, 셋째는 지혜로써 다른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고, 넷째는 선지식을 가까이하는 것이니라. 발피여, 이것이 네 가지 법이니, 보살이 이로써 속히 정을 성취하게 되느니라.
또 네 가지 법이 있어서 보살이 이 같은 정을 속히 성취하게 되느니라. 언제나 부처님을 친견하고자 하는 것이고, 언제나 법을 듣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고, 머무는 바 없이 헤아리는 것이고, 부처님을 염원하는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할지니, 보살이 이 같은 네 가지 법으로써 정을 속히 성취하게 되느니라.
007_0960_c_02L또 네 가지 법이 있으니, 어떠한 것이 네 가지인가 하면, 속인과의 대화를 즐기지 않는 것이고, 사람들과의 교제를 즐기지 않는 것이고, 세속의 즐거움을 바라지 않는 것이고, 누워서 잠자지 말고 깨어 있되 대소변이나 식사하는 때나 경행하는 때를 제외하고는 사부대중이나 기타의 무리들과 어울리지 말고, 언제나 법을 보시하여 늘려 나가되, 색을 탐하거나 지나친 이익을 즐기지 않는, 이러한 것이 네 가지 법이니라. 이러한 네 가지 법에 의하여 보살이 정(定)을 속히 성취하게 되느니라.
또 네 가지 법이 있어서 정(定)을 속히 성취하게 되느니라. 늘 불상을 조성하거나 탱화를 그려놓고 항상 모시는 것이고 항상 정의(定意)에 들어가는 것이니, 의요(意樂)로써 이 같은 정의에 오랫동안 머무를 수 있으며, 또는 써서 지니더라도 이 같은 정(定)이 일어나리니, 마음에 꾸밈이 없고 법에도 꾸밈이 없이 바로 위없는 존귀한 도에 머무르는 것이고, 항상 여래의 가르침을 지켜서 그 진리를 잊지 않는 것이니라. 이 같은 네 가지 법에 의해서 보살이 정(定)을 속히 성취하게 되느니라.”
자금색(紫金色) 상호(相好)는 백 가지 복을 낳으니 늘 우러러 보며 부처님을 생각한다면 환희에 넘친 광명이 모두를 비춰서 좋은 모습 황금구슬 빛나듯 하리라.
007_0960_c_14L紫磨色相百福, 常作念佛在前,
歡喜光一切照, 形極好如金珠。
과거ㆍ미래 모든 부처님 언제나 손 모아서 염불하면 천인사(天人師)를 뵙게 되리니 정성 다해 선법(善法)을 생각하라.
007_0960_c_16L過去佛及未來, 常當念叉手住,
亦見在人天尊, 悉恭敬善法念。
언제나 덕왕(德王)을 시봉하되 그 자리 꽃과 향으로 꾸며놓고 공양 올릴 때 그 마음도 깨끗해지리니 이러한 정을 구하는데 어떤 어려움 있을까.
007_0960_c_18L常待遇於德王, 以花香散其形,
與飮食常淨心, 求是定當何難。
듣기 좋은 북소리 피리 소리 가득하듯 언제나 무량하다는 생각 즐겨 내고 기뻐하되 한없는 기쁨으로 한결같이 무극정(無極定)을 발원하라.
007_0960_c_20L鼓吹增及琴瑟, 常作樂無量象,
造喜悅無數喜, 常願求無極定。
부처님 모습이야 비길 데가 없으나 상호를 잘 헤아려 보면 저 금색신(金色身) 청정하게 빛나리니 이 같은 정을 원하는데 무엇이 어려울까.
007_0960_c_22L常造作無比形, 好分別相具好,
金色身禮淸淨, 欲願定是何難。
007_0961_a_02L 생각해야 할 법을 항상 생각하고 정결한 계율 듣고자 바라면
헛된 세상사 마침내 사라져서 머지않아 정을 얻으리라.
007_0960_c_24L所念法常念作, 淨潔戒聞欲求,
偕事聚壞散棄, 於是定得不久。
형상 있는 것에 집착하지 말고 자비로운 마음을 행하여 모두 의지해 지키며 또 마땅히 선고(善苦)를 관하면 머지않아 정을 얻으리라.
007_0961_a_04L莫生嬈於有形, 行慈心具依護,
且當觀欲善苦, 求是定得不久。
설법할 적마다 마음 기쁜지라 세존을 가까이 모시고 늘 예배드리되 탐욕도 어여삐 보지 말고 설법도 가벼이 여기지 말거라.
007_0961_a_06L生意喜於說法, 相侍尊常禮尊,
莫綺可棄貪慳, 於法說莫疾弄。
어짐이 한결같아야 얻게 되리니 나고 죽는다는 여래의 말씀 모든 부처님 한결같이 일러주니 선정 이루기 어렵다 하지 말거라.
007_0961_a_08L如是令善可待, 所生滅如來說,
無數佛悉所教, 所求定莫爲難。
부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발피여, 보살은 설법하는 비구를 공경해야 하나니, 언제나 예를 다하여 세존처럼 존중하여야만 이와 같은 ‘정(定)’의 진보가 있게 되느니라.
007_0961_a_10L“拔陂!菩薩當於說法比丘恭敬,常當禮遇具作待如尊,於是定便爲進。
발피여, 보살이 경을 해설하는 비구가 그 마음이 어지럽다고 시기하거나 원망하거나 미워하는 따위의 청정하지 못한 마음을 낸다면 발피여, 온갖 의롭지 않은 것을 받아들이면서도 보살이 이 같은 정의(定意)를 성취하여 덕이 지극히 높아지고 도의(道義)가 원만해지는 일은 끝내 없으리라.
발피여, 비유하자면 여래가 바른 깨달음의 눈으로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보는 것처럼, 보살도 또한 이처럼 부처님을 친견하면 곧 바른 정의에 머무르게 되느니라. 덧없다고 전해 듣는 것에서 행을 갖추게 되고, 정진하여 게으름 피우지 않는 것에서 행을 갖추게 되고 보시에서 행을 갖추게 되고, 계율에서 행을 갖추게 되고, 인욕에서 행을 갖추게 되고, 마음이 선(禪)에 머무는 것에서 행을 갖추게 되고, 지혜의 정(定)에서 행을 갖추게 되고, 해탈의 지혜로 행을 갖추게 되어 해탈의 위없는 지혜로 행을 갖추게 되느니라.”
007_0961_b_02L
눈을 들어 허공을 바라보니 밝은 달이 중천에 떴구나. 수많은 별을 널리 보았기에 별 밝다는 생각은 기억 속에 여전하다네.
007_0961_b_02L有眼觀上視空, 於淨月中夜起,
見無數億千里, 雖曉明意在識。
정의(定意)는 보살이 얻는 바이니 수많은 부처님 세계 친견하였어도 정에서 깨어나면 생각이 기억 속에 여전하기에 남들에게 그 나라 좋다고 찬양하리라.
007_0961_b_05L定意爾菩薩得, 見無數千佛國,
從定寤意故識, 亦於衆說國好。
정의 맑은 눈으로 각(覺)을 통해 살펴보되 막힘없이 시방세계를 둘러보면 그 절묘함이 깨달음의 눈에 들어오리니 이처럼 깨끗한 정으로 세존을 친견하라.
007_0961_b_07L定眼淨次覺視, 無蔽鄣觀十方,
勝可愛爲覺眼, 是定淨用見尊。
세존을 끝없이 염원해서 세상을 살펴보고 시방 3세의 부처님을 친히 뵙고서 3독(毒)을 끊고 태(胎)의 모습 없애리니 높은 덕을 배우고자 원력 세워라.
007_0961_b_09L尊無時想觀世, 觀十方三世尊,
斷毒淨無胎相, 願聽善學上德。
설법을 듣고서 마음 시원하기에 속히 생각을 비워 요처(要處)에 머물되 내가 법을 깨치겠다 원력 세워서 중생을 구하고자 부처되길 바라거라.
007_0961_b_11L亦聽法快甚涼, 可疾念空止要,
我是法願與俱, 安樂衆願爲佛。
저 보살이 한량없는 색신(色身)으로 수많은 부처님 세계 찾아갈지니 이 보살이 정을 얻고 나면 무량수의 부처님을 모두 친견케 되리라.
007_0961_b_13L如無量菩薩色, 見佛國億萬數,
菩薩爾得定後, 見無央諸尊形。
배운다는 생각에서 자비를 닦고 여래의 말씀 남김없이 행하여 끝내 정을 이룰지니 저 보살이 무수한 세월 동안 행하지 못했었노라.
007_0961_b_15L有意學遍慈仁, 從我聞悉持行,
是定爾菩薩得, 無數百法不持。
믿음과 수치심에서 사랑스런 생각내지만 실은 이 세상 모두 버려야만 하거늘 어찌 세상에 법보시를 행하지 않고 홀로 정토에 태어나겠는가.
007_0961_b_17L信羞慚生想愛, 悉遠棄世所可,
何不作世法施, 從是得淨止地。
부처님께서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발피여, 보살이 정의(定意)를 성취하려면 마땅히 정의를 일으키도록 정진해야 하느니라. 비유하자면 배에 온갖 보배를 가득 싣고서 큰 바다를 건너 이 언덕으로 가는 때에, 배가 그만 해안 가까이에서 가라앉게 되면 이로 인하여 염부제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면서 이를 안타깝게 여기고 슬피 울면서 ‘우리같이 가난한 사람들은 이제 다시 이 같은 보배를 얻지 못하게 되었다.’고 하리라.
007_0961_c_02L발피여, 이처럼 정의도 멀어졌다는 소리가 들리게 되면, 다시는 경을 쓰거나 읽거나 외우거나 행하지 않기에, 마침내 진리도 구하지 않게 되느니라. 그 나라에 있는 비구ㆍ비구니와 우바새ㆍ우바이와 여러 천상의 천주까지도 모두 함께 비명을 지르며 안타깝게 여기며 슬피 울면서 ‘우리같이 가난한 사람들은 이제 다시 이 같은 법보시를 만나지 못하게 되었다.’고 하리라.
세상에 이같이 깊고 묘한 정의가 있더라도 이는 부처님께서 친히 가르치시는 바이고, 부처님께서 칭찬하시는 바이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이기에 이를 듣고도 써두지 않거나, 외우지도 않거나, 독송하지도 않거나, 다시 행하지 않거나, 그 정의에 머무르지도 않고, 좋은 것만을 즐겨들어 지혜를 해치게 되면 마침내 자세히 듣지도 않고 많은 지혜를 취하지도 않게 되느니라. 혹 듣게 되더라도 바라지도 않고, 이 같은 정(定)을 기꺼이 취하려고도 하지 않으니라.
발피여, 비유하자면 마치 어리석고 지혜가 모자라는 사람에게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전단향(栴檀香)을 건네주었으나, 이 바보가 도리어 더럽다는 마음을 일으키기에, 지혜로운 이가 ‘이 전단향은 아주 좋은 향인데 어째서 더럽다는 마음을 내는가? 어째서 이를 맡아보지 않는가? 이렇게 색이 좋은데도 어째서 이를 보지 못하는가?’라고 사리를 밝혀 말해주어도 이 어리석은 사람은 좋은 색을 보면서도 스스로 코를 쥐는 것과도 같으니라.
코를 쥐는 것은 향내를 맡고 싶지 않기 때문이고, 눈을 감는 것은 좋은 색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일지니, 이 같은 정(定)을 말해주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이니라. 계율이 없는 자는 좋아하지 않고 멀리 하려 하며, 받들어 익히는 것도 달가워하지 않느니라. 지혜 없으면 그 지(智)가 사라지리니, 선지(禪地)에 다다랐다가 바로 태에 집착해서 태 안으로 돌아가게 되느니라.
이 같은 무리는 이 같은 정의(定意)를 말해주더라도 믿지 않고 써두지도 않고 따르지도 않고 기뻐하는 마음도 없으면서 도리어 대중 가운데에서 어질다는 칭찬만을 듣고자 하니, 이 같은 배움에 무슨 빛이 나겠는가? 단지 금생에만 고명한 비구가 있으니, 비유하자면 아난과도 같으니라.
이 경전은 비유하자면 등잔불을 대중들 사이에서 으슥한 곳으로 가져가버리는 것과 같기에, 곧바로 진리가 아니라고 말들 하게 되리라. 이 경을 듣고도 귀를 어지럽히기에, ‘이것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라고 말들 하리라.
007_0961_c_21L是經譬如虞中大,去衆於屛處更說非諦,是經欲聞巧亂耳,是非佛所說。’
007_0962_a_02L발피여, 비유하자면 한 상인이 어떤 바보에게 다가가 아주 좋은 마니주(摩尼珠)를 보여주자, 이 바보가 상인에게 ‘이 구슬은 값이 얼마나 나가는가?’라고 묻는다고 하자. 상인이 ‘이 같은 구슬은 밤에도 빛이 나기 때문에, 이 보배만 있으면 어두운 곳도 훤히 밝힐 수 있다.’고 대답하였으나, 저 바보가 ‘이같이 귀한 구슬을 어찌 우리들에게 팔려고 하는가?’라고 구슬 주인을 비웃으면서, 다시 마니주를 살펴보고는 구슬 주인에게 ‘이 구슬을 소 한 마리로 쳐보면, 그 값이 소의 한쪽 귀만큼은 되리라.’고 조롱하는 것과도 같으니라.
이와 마찬가지로, 나중에 이와 같은 보살의 정의(定意)를 어떤 비구가 잘 지녀서 굳게 믿고는, 이를 바르게 익혀서 받들어 행하다가 혹 의심이 일어나더라도 이를 부끄러워하며 열반을 구하되, 많이 듣고 지혜를 쌓아 깊은 마음으로 자비를 행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얻었기에, 마침내 이 같은 정(定)에 자유롭게 처하면서, ‘이와 같은 정(定)에 오래 머무를 수 있다.’고 말하게 된다.
어리석은 사람은, 예전에 이같이 행한 적도 없고 복덕조차도 없기에, 자만심만 크고 질투가 많아서 이로운 것은 자기가 갖고자 해서 세간의 명예만을 바라기에, 들은 것도 적고 원래부터 배운 것도 어질지 못한지라, 이와 같은 무리가 이 정(定)을 전해 듣더라도, 지니지도 않고 믿지도 않고 행하지도 않고 즐거이 받아들이지도 않으면서 도리어 큰소리 내어 ‘참 괴상하구나. 이들 비구가 어째서 부끄러움도 모르는가? 이들 비구가 말하는 것을 듣자 하니, 말만 그럴 듯하게 꾸며서 이런 것도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라고 억지를 부리는구나.’라고 욕하는 것과 같으니라.
발피여, 내가 일부러 이처럼 다시 설명한 것은 너뿐만이 아니라 인간과 천상의 천주들까지 모두 이해시키려는 까닭에서이니라. 발피여,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7보를 가득 채워 모든 부처님과 여래 정각에게 보시하더라도 이 같은 정의(定意)를 듣지 못할 것이나 혹 어떤 보살이 이 같은 정의(定意)를 전해 들었다면, 그 들은 것만으로도 복덕이 많다고 이르게 되느니라.”
2)8정(定)을 지칭. 색계(色界)의 초선(初禪)ㆍ2선(禪)ㆍ3선(禪)ㆍ4선(禪)과, 무색계(無色界)의 공무변처(空無邊處)ㆍ식무변처(識無邊處)ㆍ무소유처(無所有處)ㆍ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에서 미지정(未至定)ㆍ중간정(中間定)ㆍ근분정(近分定)을 제외한 여덟 가지 근본정(根本定)을 말한다.
3)선행(禪行)을 닦아 어지러운 마음을 여의는 것으로서 정심(定心)이라고도 한다.
4)범어 kulapati를 음역(音譯)한 것으로, 거사(居士)를 지칭한 것이다.
5)무앙수는 10의 60승(乘)에 해당하는 수이다.
6)4제(諦)를 인견(忍見)하여 견도위(見道位)에 드는 것.
7)후법은 후유법(後有法)의 준말로 내생을 지칭한다.
8)날짜의 순서가 짝수인 날이니, 이 날은 먼 여행을 삼간다고 한다.
9)부절(符節)은 대나무나 금속을 써서 만든 일종의 여행증(旅行證)으로서 두 개를 만들어 하나는 관부(官部)에 두고 서로 맞춰보고서 진위(眞僞)를 확인했다. 여기에 유래해서 문호(門戶)가 두 짝인 솟을대문을 부절문(符節門)이라 한다.
10)원문은 재여래족하(在如來足下)이다. 직역하면 ‘여래의 발밑에서’가 되지만, 원문의 족(足)은 여래의 양족(兩足), 즉 계(戒)와 정(定)을 가리키는 뜻이다. 따라서 본 역에서는 ‘부처님의 계율과 정에 따라’로 번역해 둔다.
11)원문은 단련(斷蓮:연꽃을 끊는다)이나, 구송본(舊宋本)에는 단련(斷連:연달아 끊어 나간다)으로 되어 있다. 단련(斷連)은 4정근(正勤)의 단단(斷斷)과 동의어로 쓰여졌기에 본 역에서는 원문을 수정하여 ‘악법(惡法)을 끊는다’로 번역해 둔다.
12)원문은 일체리피(一切羸彼)이다. 지계(持戒)가 청정하지 못한 까닭에 계율로 인한 공덕이 늘지 않는 것을 가리켜 ‘계율이 살찌지 못하고 파리하다’고 한다.
13)5달(達)은 다섯 가지 사견(邪見)이다. 5달의 달(達)은 범어 dṛṣṭi의 음역(音譯)인 달리슬치(達利瑟致)의 약자(略字)이다. 여기에 어리석음을 추가하여 6달(達)이라고도 한다.
14)정각은 여래 10호(號) 가운데 정변지(正遍知)의 이역(異譯)이다.
15)재가신도가 계율을 지켜 음욕(淫慾)을 여의는 것. 그 같은 신도의 집을 무식가(無食家)라 하여 비구ㆍ비구니의 숙박이 허용된다.
16)범어 nirvāna의 음역. 열반(涅槃)이란 용어는 음역(音譯)이다. 도무극(度無極)은 파라미타, 즉 완성된 것을 말한다.
17)범어 vajra의 음역. 집금강신(執金剛神)이 지니는 금강저(金剛杵)라는 뜻이다.
18)열반(涅槃)의 안택(安宅)을 가리키는 무위사(無爲舍)의 준말. 향(向)은 문(門), 즉 열반에 이르는 문이란 뜻이다.
19)바른 용어는 9결(結). 역시 번뇌를 가리키나 통상은 쓰지 않는다. 중생을 생사에 매어 놓는 애(愛)ㆍ상(喪)ㆍ만(慢)ㆍ무명(無明)ㆍ견(見)ㆍ취(取)ㆍ의(疑)ㆍ결(嫉)ㆍ간(慳) 아홉 가지 결혹(結惑)이다.
20)제행세속(諸行勢速)의 세속(勢速)을 지칭한다. 범어 java의 역어(譯語)로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이 무상(無常)함을 의미한다.
21)해탈을 뜻하는 것으로 배사(背捨)가 바른 용어이다.
22)욕계(欲界)의 탐욕(欲貪)을 여의기 위한 부정관(不淨觀)을 수습(修習)하는 아홉 가지 상법(想法)으로 창(脹)ㆍ청어(靑瘀)ㆍ괴(壞)ㆍ혈도(血途)ㆍ농란(膿爛)ㆍ감(瞰)ㆍ산(散)ㆍ골(骨)ㆍ소(燒)의 아홉 가지이다.
23)속인(俗人)을 지칭한다. 부처님 재세시(在世時)의 인도인이 흰옷을 입은 것에서 유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