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어떻게 보살마하살이 한 지위로부터 다시 다른 지위에 이르게 되는지요?”
014_0989_a_08L須菩提白佛言:“世尊!云何菩薩摩訶薩從一地至一地?”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은 온갖 법의 오고 가는 모양도 없고, 또한 어떠한 법도 오거나 가거나 이르거나 이르지 않거나 하는 것도 없는 줄 아나니, 모든 법의 모양은 소멸하지 않기 때문이니라. 보살마하살은 모든 지(地)에 대하여 기억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지의 업[地業]을 닦고 다스리며, 또한 그 지를 보지도 않느니라.
무엇을 보살마하살이 지의 업을 다스린다 하느냐 하면, 보살마하살은 초지(初地)에 머물러 있을 때에 열 가지의 일을 행하느니라. 첫째는 깊은 마음이 견고하나니, 그것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요, 둘째는 온갖 중생들에 대하여 동등한 마음을 지니나니 중생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며, 셋째는 보시를 하나니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요, 넷째는 선지식(善知識)을 가까이하면서도 또한 교만해지지 않으며, 다섯째는 법을 구하나니 온갖 법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014_0989_b_01L여섯째는 항상 출가(出家)하나니 집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요, 일곱째는 부처님의 몸을 좋아하나니 상호(相好)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며, 여덟째는 법의 가르침을 널리 펴내나니 모든 법의 분별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요, 아홉째는 교만의 법을 깨뜨리나니 법(法)과 생함[生]과 지혜[慧]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며, 열째는 진실한 말을 하나니 모든 말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초지 가운데에 머물러서 열 가지 일을 닦으며 지업(地業)을 다스리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제2지(地) 안에 머무를 때에 항상 여덟 가지의 법을 염(念)하느니라. 무엇이 여덟 가지의 법이냐 하면, 첫째는 계율[戒]이 청정한 것이요, 둘째는 은혜를 알고 은혜를 갚는 것이며, 셋째는 인욕(忍辱)에 머무르는 것이요, 넷째는 기쁨을 느끼는 것이며, 다섯째는 온갖 중생들을 버리지 않는 것이요, 여섯째는 대비(大悲)의 마음에 들어가는 것이며, 일곱째는 스승을 믿고 공경하면서 물어 가르침을 받는 것이요, 여덟째는 모든 바라밀을 힘써 구하는 것이니, 수보리야, 이것을 보살마하살이 제2지 안에 머무르면서 온전히 갖추어야 할 여덟 가지 법이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제3지(地) 안에 머무르면서 다섯 가지 법을 행하느니라. 무엇이 다섯 가지 법이냐 하면, 첫째는 많이 배우고 물으면서 만족해하지 않고, 둘째는 청정하게 법을 보시하면서 또한 교만해지지 않으며, 셋째는 부처님의 국토를 장엄하면서 또한 교만해지지 않으며, 넷째는 세간의 한량없는 고통을 받으면서도 싫증을 내지 않으며, 다섯째는 나와 남에게 부끄러워할 줄 아는 것이니, 수보리야, 이것을 보살마하살이 제3지 안에 머무르면서 온전히 갖추어야 할 다섯 가지의 법이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제4지(地) 안에 머무르면서 열 가지의 법을 받아 행하고 버리지 않아야 하느니라. 무엇이 열 가지 법이냐 하면, 첫째는 아련야(阿練若)의 처소1)를 버리지 않고, 둘째는 욕망이 적으며, 셋째는 만족할 줄을 알며, 넷째는 두타(頭陀)의 공덕을 버리지 않으며, 다섯째는 계율[戒]을 버리지 않으며, 여섯째는 모든 욕망을 더럽게 여기며, 일곱째는 세간을 싫어하는 마음을 지니며, 여덟째는 온갖 가진 것을 버리며, 아홉째는 마음이 침몰하지 않으며, 열째는 온갖 물건을 아까워하지 않는 것이니, 수보리야, 이것을 보살마하살이 제4지 안에 머무르면서 버리지 않는 열 가지의 법이라 하느니라.
014_0989_c_01L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제5지(地) 안에 머무르면서 열두 가지의 법을 멀리 여의느니라. 무엇이 열두 가지의 법이냐 하면, 첫째는 속인과 가까이하는 일을 멀리 여의고, 둘째는 비구니(比丘尼)를 멀리 여의며, 셋째는 다른 이의 집에 대한 간탐을 멀리 여의며, 넷째는 무익한 담론(談論)을 멀리 여의며, 다섯째는 성내는 일을 멀리 여의느니라.
여섯째는 자기 자신이 위대한 척하는 일을 멀리 여의며, 일곱째는 남을 멸시하는 일을 멀리 여의고, 여덟째는 10불선도(不善道)를 멀리 여의며, 아홉째는 크게 잘난 체하는 일을 멀리 여의고, 열째는 스스로 쓰는 일을 멀리 여의며, 열한째는 뒤바뀐 일을 멀리 여의고, 열두째는 음욕[婬]ㆍ성냄[怒]ㆍ어리석음[癡]을 멀리 여의느니라. 수보리야 이것을 보살마하살이 제5지 안에 머무르면서 멀리 여의는 열두 가지의 일이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제6지(地) 안에 머무르면서 여섯 가지의 법을 구족해야 하느니라. 무엇이 여섯 가지의 법이냐 하면, 이른바 6바라밀이니라. 다시, 하지 않아야 할 여섯 가지의 법이 있느니라. 무엇이 여섯 가지의 법이냐 하면, 첫째는 성문이나 벽지불의 뜻을 짓지 않고, 둘째는 보시하면서 근심하는 마음을 내지 않아야 하며, 셋째는 구한 바가 있는 것을 보고 마음이 위축되지 않고, 넷째는 가지고 있는 물건을 다 보시하며, 다섯째는 보시한 뒤에는 마음에 뉘우치지 않고, 여섯째는 깊은 법을 의심하지 않느니라. 수보리야,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제6지 안에 머무르면서 갖추어야 할 여섯 가지의 법이요 멀리 여의어야 할 여섯 가지의 법이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제7지(地) 안에 머무르면서 스무 가지의 법에 집착하지 않아야 하느니라. 무엇이 스무 가지의 법이냐 하면, 첫째는 나에 집착하지 않아야 하고, 둘째는 중생(衆生)에 집착하지 않아야 하며, 셋째는 수명(壽命)에 집착하지 않아야 하며, 넷째는 무리의 수[衆數] 내지 아는 자[知者]와 보는 자[見者]에 집착하지 않아야 하며, 다섯째는 단견(斷見)에 집착하지 않아야 하느니라.
다시 스무 가지의 법이 있나니, 두루 갖추고 원만하게 하여야 하느니라. 무엇이 스무 가지의 법이냐 하면, 첫째는 공(空)을 구족해야 하고, 둘째는 무상(無相)을 증득하여야 하며, 셋째는 무작(無作)을 알아야 하고, 넷째는 3분(分)이 청정하여야 하며,2) 다섯째는 온갖 중생 가운데에서 자비(慈悲)와 지혜를 구족해야 하느니라.
여섯째는 온갖 중생들을 염(念)하지 않아야 하고, 일곱째는 온갖 법의 동등함을 관하되 이에 대해서도 집착하지도 않아야 하며, 여덟째는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알되 이 일도 또한 염(念)하지 않아야 하며, 아홉째는 무생법인(無生法忍)을 갖추어야 하며, 열째는 무생지(無生智)를 갖추어야 하느니라.
열여섯째는 정혜(定慧)가 동등한 자리이어야 하며, 열일곱째는 뜻이 조복되어야 하며, 열여덟째는 마음이 고요히 사라져야 하며, 열아홉째는 막힘없는 지혜[無礙智]를 얻어야 하며, 스무째는 애욕에 물들지 않아야 하나니, 수보리야, 이것을 보살마하살이 제7지 가운데 머무르면서 구족해야 할 스무 가지 법이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제8지(地) 안에 머물러서 다시 다섯 가지의 법을 구족해야 하느니라. 무엇이 다섯 가지 법이냐 하면, 중생의 마음에 따라 들어가고, 모든 신통에 유희하며, 모든 부처님의 나라를 관찰하고, 보게 된 부처님의 국토와 같이 자신의 국토를 장엄하며, 여실히 부처님의 몸을 관하면서 스스로 부처님 몸을 장엄하는 것이니, 이것을 두루 갖추고 원만하게 하는 다섯 가지의 법이라 하느니라.
014_0990_b_01L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제8지(地) 안에 머물러서 다시 다섯 가지의 법을 두루 갖추느니라. 무엇이 다섯 가지냐 하면, 위아래의 모든 근기를 알고, 부처님의 세계를 청정하게 하며, 여환삼매(如幻三昧)3)에 들어가고, 항상 삼매(三昧)에 들어가며, 중생에게 알맞은 선근(善根)에 따라 몸을 받나니, 수보리야, 이것을 보살마하살이 제8이지 안에 머무르면서 두루 갖출 다섯 가지의 법이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제9지(地) 안에 머무르면서 열두 가지의 법을 구족해야 하느니라. 무엇이 열두 가지냐 하면, 끝이 없는 세계에서 제도할 바의 몫을 받고, 보살로서 원한 바를 그대로 얻으며, 모든 하늘ㆍ용ㆍ야차ㆍ건달바의 말을 알아듣고는 그들을 위하여 설법하며, 태(胎) 안에 드는 일을 성취하며, 집안에 대한 일을 성취하며, 태어날 바의 일을 성취하며, 성바지의 일을 성취하며, 권속에 대한 일을 성취하며, 태어나는 일을 성취하며, 출가하는 일을 성취하며, 불수(佛樹)를 장엄하는 일을 성취하며, 온갖 모든 착한 공덕을 원만하게 이루면서 두루 갖추는 것이니, 수보리야, 이것을 보살마하살이 제9지 안에 머무르면서 구족해야 할 열두 가지의 법이라 하느니라.
“어떻게 보살은 보시(布施)를 닦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은 온갖 중생에게 베풀어 주되 분별함이 없나니, 이것을 보시를 닦는다고 하느니라.”
014_0990_b_21L“云何菩薩修布施?”佛言:“菩薩施與一切衆生無所分別,是名修布施。”
014_0990_c_01L“어떻게 보살은 선지식(善知識)을 가까이하는 것인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살바야 안에 들어가 머무르게 해주는 이러한 선지식을 친하게 가까이하면서 물어 그 가르침을 받고 공경하며 공양한다면, 이것을 선지식을 가까이한다 하느니라.”
“어떻게 보살은 부처님 몸을 좋아하면서 지의 업을 다스리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일 보살이 부처님의 몸의 모양[身相]을 뵙고서 이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이르기까지 끝내 부처님에 대한 염(念)을 여의지 않는다면, 이것을 부처님 몸을 좋아하면서 지의 업을 다스린다 하느니라.”
“어떻게 보살은 교법을 널리 펴면서 지의 업을 다스리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은 부처님이 현재 계시거나 부처님이 멸도(滅度)하신 뒤이거나 간에 중생을 위하여 설법하되 처음도 중간도 나중도 좋으며 묘한 이치와 좋은 말로써 정결하고도 순수하고 완전히 갖추나니, 이른바 수투로(修妬路)에서 우바제사(優婆提舍)까지이니라. 이것을 교법을 널리 펴면서 지의 업을 다스린다 하느니라.”
“어떻게 보살은 진실한 말로써 지의 업을 다스리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은 말씀한 바대로 그 말씀을 따라 행하나니, 이것을 진실한 말로써 지의 업을 다스린다 하느니라. 이것이 보살마하살이 초지(初地) 안에 머물러 열 가지의 일을 수행하면서 지의 업을 다스리는 것이니라.”
014_0991_a_01L보살마하살은 이 승(乘)에 올라 모든 법은 본래부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으며 움직임도 없고 일으킴도 없어서 법의 성품[法性]이 항상 머무른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또한 크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과 정진바라밀과 방편의 힘 때문에 도리어 모든 착한 법을 닦고 다시금 수승한 지위[勝地]를 구하면서도 그 지위의 모양을 취하지도 않고 또한 그 지위를 보거나 하지도 않는다.
【문】당연히 대승으로 나아감을 대답해야 되시거늘 어찌하여 지(地)로 나아가는 일을 말씀하시는가?
014_0991_a_04L問曰:應答“發趣大乘”,何以說“發趣地”?
【답】대승(大乘)이 곧 지(地)이다. 지에는 열 가지가 있으니, 초지(初地)로부터 2지(地)에 이르는 이것을 나아간다[發趣]고 한다. 비유컨대 마치 말을 타고 코끼리가 있는 곳으로 나아가서는 말을 버리고는 코끼리를 타며, 다시 코끼리를 타고 용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서는 코끼리를 버리고는 용을 타는 것과 같다.
【답】지에는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단지 보살만의 지[菩薩地]요 둘째는 공통되는 지[共地]이다.
014_0991_a_09L答曰:地有二種:一者、但菩薩地,二者、共地。
공통되는 지라 함은, 이른바 간혜지(乾慧地)에서 불지(佛地)까지이다. 단지 보살만의 지란, 환희지(歡喜地)ㆍ이구지(離垢地)ㆍ유광지(有光地)ㆍ증요지(增曜地)ㆍ난승지(難勝地)ㆍ현재지(現在地)ㆍ심입지(深入地)ㆍ부동지(不動地)ㆍ선근지(善根地)ㆍ법운지(法雲地)이니, 이 지에 대한 모양은 『십지경(十地經)』 가운데에서 자세히 설명한 것과 같다.
초지에 든 보살은 열 가지의 법인 깊은 마음[深心]에서 진실한 말[實語]에 이르기까지를 수행해야 된다. 수보리는 비록 알고 있지만, 중생들의 의심을 끊어 주기 위하여 짐짓 세존께 묻기를 “무엇이 깊은 마음인지요?”라고 하니, 부처님은 대답하시되 “살바야에 상응한 마음으로 모든 선근을 쌓는 것이니라.”고 하신다.
014_0991_b_01L깊은 마음[深心]이라 함은, 깊이 부처님의 도를 좋아하면서 세상마다 세간에 대한 마음이 엷어지는 것이니, 이것을 살바야에 상응한 마음이라 한다. 짓는 바의 온갖 공덕으로 보시하며, 계율을 지니고 선정을 닦는 등의 것으로써 이 세상과 뒷세상의 복락과 수명과 안온을 구하지 않고 단지 살바야만을 위할 뿐이다.
【문】이 보살은 아직 살바야를 모르고 그 맛[味]도 얻지 못했거늘 어떻게 깊은 마음을 얻겠는가?
014_0991_b_07L問曰:是菩薩未知薩婆若,不得其味,云何能得深心?
【답】나는 앞에서 이미 설명했다. 이 사람이 만일 근기가 영리하고 모든 번뇌가 희박하며 복덕이 순수하고 두터우며 세간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비록 아직 대승을 찬탄함을 듣지 못했다 하더라도 오히려 세간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니 하물며 이미 들은 뒤이겠는가. 마치 마하가섭(摩訶伽葉)은 금빛 여인[金色女]을 아내로 맞아들였으면서도 마음으로 좋아하지 않은 채 버리고 출가한 것과 같다.
이러한 등의 모든 귀인(貴人)과 국왕으로 5욕(欲)을 버린 이가 수 없거늘 하물며 보살이 부처님 도의 갖가지 공덕과 인연을 들으면서도 즉시 발심하여 깊숙이 들어가지 않겠는가. 마치 뒤의 「살타파륜품(薩陀波崙品)」 가운데에서 장자의 딸이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는 말을 듣고는 즉시 집을 버리고 담무갈(曇無竭)에게로 나아간 것과 같다.
014_0991_c_01L또한 신근(信根) 등의 5근(根)이 성취되고 순숙(純熟)해지는 까닭에 이 깊은 마음을 얻게 된다. 비유컨대 마치 어린아이가 눈 등의 다섯 감관이 아직 성취되지 못한 까닭에 5진(塵)을 구별하지 못하고 곱거나 추한 것도 모르는 것처럼, 신근 등의 5근이 아직 성숙되지 못한 이도 그와 같아서 선악(善惡)을 식별하지 못하고 속박과 해탈을 알지 못하며 5욕을 좋아하면서 삿된 견해에 빠지게 된다. 곧 신근 등의 5근이 성취된 이라야 비로소 선과 악을 식별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보살은 비로소 반야바라밀의 기미(氣味)를 얻기 때문에 깊은 마음을 내게 된다. 마치 사람이 캄캄한 데에 갇혀 있을 적에 조그마한 틈으로부터 빛을 보게 되면 뛸 듯이 흥분하며 생각하기를 ‘여러 사람들 가운데 나만이 이러한 광명을 보았구나.’하며 기뻐하고 좋아하면서 이내 깊은 마음을 일으키며, 이 광명을 생각하면서 방편을 써서 벗어나기를 구하는 것과 같다.
보살도 또한 그와 같아서 전생 업의 인연 때문에 12입(入)이란 무명(無明)의 캄캄한 감옥 속에 갇혀 있으면서 온갖 알거나 보는 것이 모두 허망하다가 반야바라밀을 듣고서야 조그마한 기미를 얻고는 깊이 살바야를 생각하기를 ‘나는 어찌 하면 이 6정(情)의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모든 부처님이나 성인과 같이 될까?’라고 한다.
또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켜서 원에 따라 행하게 되나니, 이 때문에 깊은 마음을 낸다. 깊은 마음이란, 온갖 법들 가운데에서 사랑할 것은 살바야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고, 온갖 중생 가운데에서 사랑할 것은 부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한 것은 없으며, 또한 깊이 비심(悲心)에 들어가서 중생을 이익되게 하니, 이러한 것 등을 깊은 마음의 모양이라 한다. 초지(初地)의 보살은 항상 이런 마음을 행해야 한다.
일체 중생에 대한 동등한 마음이란, 보살이 이런 깊은 마음을 얻어서 일체 중생을 동등한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다. 중생은 항상 정(情)으로써 그 친한 것을 사랑하고 그가 미워하는 것을 싫어한다. 보살은 깊은 마음을 얻었기 때문에 원수이거나 친한 이거나 동등하여 둘로 보지 않으니, 이 가운데서 부처님은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동등한 마음이란 바로 4무량심(無量心)이니라.”고 하셨다. 이 보살은 중생이 즐거워하는 것을 보면 곧 사랑하고[慈] 기뻐하는[喜] 마음을 내며 원을 세우기를 “나는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다 부처님의 즐거움을 얻게 하리라.”고 한다.
014_0992_a_01L만일 중생이 괴로움을 받는 것을 보면 곧 가엾이 여기는 마음[悲心]을 내어 그들을 불쌍히 여기며 원을 세우기를 “나는 일체 중생의 괴로움을 없애리라.”고 하며, 만일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不苦不樂] 중생을 보면 버리는 마음[捨心]을 내어 원을 세우기를 “나는 중생으로 하여금 사랑하는 마음과 미워하는 마음을 버리게 해야 하리라.”고 한다. 4무량심의 그 밖의 이치는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버리는 마음이라고 함은, 버림[捨]에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재물을 버려 보시를 행하는 것이요, 둘째는 번뇌[結]를 버려 도(道)를 얻는 것이다. 이 간탐을 없앰으로써 버림으로 삼는 것은 두 번째의 번뇌를 버리게 하는 인연이 되어 주니, 제7지(地) 안에 이르러야 비로소 번뇌를 버릴 수 있다.
【답】보시에는 비록 갖가지 모양이 있다 하더라도 단지 큰 것만을 말씀하시고 모양을 취하지 않을 뿐이다. 또한 부처님은 온갖 법에 집착하지 않으시며, 또한 이로써 보살에게 보시를 가르치면서 부처님 법에서와 같이 집착하지 않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그러니, 이 가운데에서는 분별이 없는 보시를 자세히 설명하셔야 한다. 그 밖의 보시하는 모양은 곳곳에서 갖가지로 이미 말씀하셨다.
선지식을 가까이하는 이치에 대해서는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법을 구한다[求法]”고 함은, 법에서는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모든 법 가운데에서 맨 위가 되는 이른바 열반이고, 둘째는 열반을 얻은 방편으로서의 8성도(聖道)이다. 셋째는 온갖 착한 말씀[善語]과 진실한 말씀[實語]이니, 8성도를 돕는 이른바 8만 4천의 법들과 12부경(部經)과 아함(阿含)ㆍ아비담(阿毘曇)ㆍ비니(毘尼)ㆍ잡장(雜藏)의 4장(藏)과 마하반야바라밀(摩訶般若波羅密) 등의 모든 마하연경(摩訶衍經)을 모두 법이라 부른다.
낙법은 즉시 생각하기를 “나는 세상마다 몸을 잃은 것이 헤아릴 수 없지만, 이런 이익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었다.”고 하고는 이내 스스로 살갗을 벗겨 햇볕에 쪼여 말린 뒤에 받아쓰려고 하자 악마는 그만 몸을 숨겨 버렸다. 이때 부처님은 그의 지극한 마음을 아시고는 곧 아래로부터 솟아오르시더니 그를 위하여 깊은 법을 말씀하시니, 곧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었다.
또한 살타파륜(薩陀波崙)은 고행(苦行)을 하면서 법을 구했고, 석가모니[釋迦文] 보살은 5백 개의 못을 몸에 박았으니, 그것은 법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금견왕(金堅王)은 5백 군데에 몸을 파서 심지를 넣고는 등불을 켰으며, 몸을 바위에 던지기도 하고 불에 뛰어 들기도 했다. 이와 같은 등의 갖가지의 고행난행으로 중생을 위하여 법을 구했었다.
또한 부처님은 스스로 법을 구하는 모습을 말씀하시되 “살바야를 위하여 성문이나 벽지불의 경지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셨다.
014_0992_b_14L復次,佛自說求法相:“爲薩婆若,不墮聲聞、辟支佛地。”
“항상 출가한다[常出家]”고 함은, 보살은 집에 있으면 갖가지의 죄의 인연이 있다는 것을 알므로 “내가 만일 집에 있으면 나 자신도 청정한 행을 행할 수 없거늘 어찌 사람들로 하여금 모든 청정한 행을 얻게 하겠는가. 만일 재가의 법을 따른다면 채찍이나 매 따위로 중생을 괴롭히는 일이 있을 것이요, 만일 착한 법을 따라 행한다면 재가의 법을 깨뜨리게 된다. 이 두 가지 일을 헤아려 보건대 나는 지금 출가하지 않는다 해도 죽을 때에는 모두 함께 버려야 하니, 이제 스스로 멀리 여읜다면 복덕이 크리라.”고 한다.
또한 보살은 생각하기를 ‘온갖 국왕과 모든 귀인은 세력이 마치 하늘[天] 같아서 쾌락을 구하는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죽음은 강제로 그것을 빼앗아 간다. 나는 이제 중생들을 위하여 집을 버리고 청정한 계율을 지니며, 부처님 도를 구하면서 시라(尸羅)바라밀의 인연을 두루 갖추리라.’고 한다.
014_0992_c_01L이 가운데에서 부처님은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보살은 세상마다 뒤섞인 마음이 되지 않는다.”고 하신다. “출가하되 뒤섞인 마음이 되지 않는다[出家不雜心]”고 함은 96종의 외도(外道) 가운데에서 출가하지 않고 단지 불도 가운데에서 출가하는 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부처님의 도 가운데에는 바른 견해[正見]의 세간과 바른 견해의 출세간이라는 두 가지가 있으니, 바른 견해인 까닭이다.
“부처님의 몸을 좋아한다[受樂佛身]”고 함은, 갖가지로 부처님을 찬탄하는 공덕과 10력(力)ㆍ4무소외(無所畏)ㆍ대자대비(大慈大悲)와 온갖 지혜를 듣고 또한 부처님 몸의 32상(相)과 80수형호(隨形好)와 큰 광명을 놓는 것과 하늘과 사람들이 공양하면서 만족할 줄을 모르는 것을 보고 스스로 “나도 장차 오는 세상에서는 역시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가령 부처가 될 인연이 없더라도 좋아하겠거늘 하물며 장차 될 터인데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러한 깊은 마음을 얻어서 부처님을 좋아하기 때문에 세상마다 항상 부처님을 만나게 된다. “법의 가르침을 널리 편다[演出法敎]”고 함은, 보살이 위에서와 같이 법을 구하고 그 뒤에 중생을 위하여 연설하는 것이다.
재가(在家)의 보살은 많은 재물을 보시함으로써 행하지만, 출가한 이는 부처님을 사랑하는 정(情)이 무겁고 항상 법시(法施)로써 행하며, 부처님이 세간에 계시거나 계시지 않거나 간에 계율을 잘 지니고 명예와 이득을 구하지 않으며, 일체 중생들에게 마음을 평등하게 지녀 그들을 위하여 법을 설해주어야만 한다.
014_0993_a_01L성문승(聲聞乘)을 해설하는 것을 처음이 좋다 하고, 벽지불승(辟支佛乘)을 해설하는 것을 중간이 좋다 하며, 대승을 선양하는 것을 나중이 좋다고 한다.
묘한 이치[妙義]와 좋은 말[好言]이라 함은, 세 종류의 말이 비록 언사는 묘하다 하더라도 의미(義味)가 천박하고, 비록 이치[義理]는 깊고 묘할지라도 그 언사가 완전하지 못하나니, 이 때문에 묘한 이치와 좋은 말로써 설명한다.
“교만을 깨뜨린다[破憍慢]”고 함은, 이 보살은 출가하여 계율을 지니고 설법하여 대중의 의심을 끊어 줌으로 간혹 스스로 뽐내면서 교만이 생기기도 한다. 이때에는 생각하기를 “나는 머리를 깎고 물든 옷을 입고 발우를 가지고 걸식을 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교만을 깨뜨리는 법이거늘 내가 어떻게 그 가운데에서 교만한 마음을 내겠는가”라고 해야 한다.
이 교만에 이러한 한량없는 허물과 죄가 있는 것을 알면 이 교만을 깨뜨리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게 된다. 마치 사람이 재물을 구하려 하는 데도 오히려 겸손하면서 뜻을 낮추거늘 하물며 위없는 도를 구하는 것이랴. 교만을 깨뜨리기 때문에 언제나 존귀(尊貴)한 데에 태어나고 끝내 하천한 집에 태어나지 않는다.
“진실한 말씀[實語]”이라 함은, 이것은 모든 선(善)의 근본이요 하늘에 가 나는 인연이며 사람들이 믿고 받게 된다. 이 진실한 말씀을 행하는 이는 보시(布施)와 지계(持戒)와 학문(學問)을 빌리지 않고 단지 진실한 말씀만을 닦아도 한량없는 복을 얻는다. 진실한 말씀이란 그 말씀한대로 따라서 행하는 것이다.
014_0993_b_01L【답】부처님 법 중에서는 진실을 귀히 여기기 때문에 진실한 말씀을 말하는 것이다. 그 밖의 것은 모두 네 가지의 진리[四諦]에 포섭되니, 진실하기 때문에 열반을 얻는다. 또한 보살은 중생들과 함께 있으면서 거친말[惡口]과 꾸밈말[綺語]과 두 가지 말[兩舌]에 휩싸이고 때로는 중한 망어죄(妄語罪)가 있기도 하기 때문에 초지(初地)에서 버려야 한다. 이 보살의 행은 초지에서는 아직 두루 갖추지 못하고 이 네 가지 업(業)을 행하는 까닭에 단지 진실한 말만을 설명하지만, 제2지(地) 가운데에서는 두루 갖추게 된다.
【답】부처님은 법왕(法王)이 되시어 모든 법 가운데에서 자유자재하시다. 이 열 가지 법을 알면 초지를 이루게 되나니, 비유컨대 마치 용한 의사는 약초의 종류와 수를 잘 알므로 다섯 가지나 열 가지로도 충분히 병을 물리칠 수 있는 것과 같다. 이 가운데에서는 그 많고 적은 것을 따지지 말아야 한다.초지(初地)를 마친다.
어떻게 보살은 크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에 드느냐[入大悲心] 하면, 만일 보살이 생각하기를 “나는 낱낱 중생들을 위하여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겁 동안 지옥 가운데에서 갖은 고통을 받겠으며, 나아가 이 사람들이 부처님 도를 얻어 열반에 들기까지 대신 받을 것이다.”고 하면 이와 같은 것을 온갖 시방의 중생들을 위하여 고통을 참는다고 하며 이것을 크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에 든다고 하느니라.
어떻게 보살은 부처님 세계를 청정하게 하느냐[淨佛世界] 하면, 모든 선근(善根)을 회향(廻向)하면서 부처님 세계를 청정하게 하나니, 이것을 부처님세계를 청정하게 한다 하느니라.
014_0993_c_11L“云何菩薩淨佛世界?”“以諸善根迴向淨佛世界,是名淨佛世界。”
어떻게 보살은 세간의 한량없는 갖은 고통을 받으면서도 싫증을 내지 않느냐[受世間無量勤苦不以爲厭] 하면, 모든 선근을 구비했기 때문에 중생을 성취시키고 또한 부처님 세계도 잘 장엄하며, 살바야(薩婆若)를 완전히 갖추기까지 끝내 고달파하거나 싫증내지 않나니, 이것을 한량없는 갖은 고통을 받으면서도 싫증을 내지 않는다 하느니라.
어떻게 보살은 다른 이의 집에 대한 간탐을 멀리 여의느냐[遠離慳惜他家] 하면, 보살은 생각하기를 “나는 중생을 편안하고 즐겁게 해 주어야 한다. 다른 이가 이제 나의 안락을 돕고 있거늘 어떻게 간탐을 부리겠는가”라고 하나니, 이것을 다른 이의 집에 대한 간탐을 멀리 여읜다 하느니라.
“은혜를 알고 은혜를 갚는다.”고 함은,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나는 전생에 지은 복덕의 인연으로 당연히 얻어야 한다.”고 하기도 하며, 혹 어떤 이는 말하기를 “나는 저절로 존귀하게 된 것이거늘 그대에게 무슨 은혜가 있다는 말인가”라고 하기도 하면서 이런 삿된 견해에 떨어지나니, 이 때문에 부처님은 말씀하시기를 “보살은 은혜를 알아야 하느니라.”고 하신다.
중생에게 비록 전생에 지은 즐거움의 원인이 있다고 해도 금생에 와서 그 일과 화합하지 않으면 즐거움을 얻을 까닭이 없다. 비유컨대 마치 곡식의 씨가 땅에 있다 해도 비가 없으면 나지 않는 것과 같나니, 땅이 곡식을 낸다 하여 비에 은혜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비록 이 받게 되는 물건이 전생에 심은 종자라 하더라도 공양하고 받드는 사람의 존경과 사랑과 좋은 마음이 어찌 은분(恩分)이 아니겠는가.
014_0995_a_01L마치 부처님께서 『본생경(本生經)』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어떤 사람이 산으로 들어가서 나무를 베어 오다가 잘못하여 길을 잃게 되었다. 때마침 폭우가 쏟아지고 날은 저물었으며 배고프고 추운데다 나쁜 벌레와 독한 짐승들이 와서 침해하려 하므로 이 사람은 하나의 석굴(石窟)을 찾아 들었다. 마침 그 석굴 안에는 한 마리의 큰 곰이 있었으므로 그를 보고 질겁하며 되돌아 나오자 그 곰이 사람에게 말하기를 “당신은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이 집은 따뜻하니 이리로 들어와 머무십시오.”라고 했다.
그때 비는 7일 동안 계속하여 내렸으며, 곰은 늘 단 과일과 맛있는 물을 그에게 대접했다. 7일 만에 비가 그치자 곰은 이 사람을 데리고 나가 그가 갈 길을 가리켜 주면서 말하기를 “나는 죄가 있는 몸이라 원수들이 많이 있습니다. 만일 어떤 이가 물어도 나를 보았다고 말씀하지 마십시오.”라고 했다.
이 사람은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한 뒤에 앞으로 얼마를 가다가 사냥꾼들을 만났다. 그 사냥꾼은 묻기를 “당신은 어디에서 오는 것이오? 짐승들을 보지는 못했소?”라고 했으므로 “나는 큰 곰을 한 마리 보았습니다만, 나는 그 곰에게 은혜를 입었기에 당신들에게 가리켜 줄 수는 없습니다.”라고 했다.
사냥꾼은 말하기를 “당신은 사람이오. 그러니 당연히 사람들과 서로 친해야 되거늘 무엇 때문에 곰을 아끼시는 것이오? 이제 한번 길을 잃게 되면 언제 다시 오겠소. 당신이 우리에게 가리켜 주면 당신에게 많은 몫을 드리겠소이다.”라고 했으므로 이 사람은 그만 마음이 변하여 곧 사냥꾼을 데리고 가서는 곰이 있는 곳을 알려주었다.
사냥꾼은 그 곰을 죽여서 바로 많은 몫을 그에게 주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손을 펴서 그 고기를 가지려 하자 두 팔이 한꺼번에 떨어져버렸다. 사냥꾼은 말하길 “당신에게 무슨 죄가 있는 것이오?”라고 하자, 대답하기를 “이 곰은 나를 대하기를 마치 아버지가 아들을 대하듯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그 은혜를 저버렸으므로 이런 죄를 받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그 사냥꾼은 이 말을 듣고 두려워하면서 감히 그 고기를 먹지 않고 가져다 스님네에게 보시했다.
014_0995_b_01L왕은 이런 일을 듣고는 온 나라 안에 칙명을 내리기를 “은혜를 모르는 사람은 이 나라에 머무르지 못하게 하라.”고 하면서, 또한 갖가지 인연으로써 은혜 아는 이를 찬탄했으므로 은혜의 이치를 아는 이들이 염부제(閻浮提)에 두루 했고 사람들은 모두가 믿고 행했다.
“기쁨을 받는다.”고 함은, 보살은 바로 계율을 지니기 때문에 몸과 입이 청정하고 은혜를 알면서 욕됨을 참기 때문에 마음이 청정해지나니, 3업(業)이 청정한 까닭에 저절로 기쁨이 생기는 것이다. 비유컨대 마치 사람이 향탕(香湯)에 목욕하고 좋은 새옷을 입고 영락으로 장엄하고는 거울 앞에 서서 자기 자신을 비처 보면 마음에 기쁨이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과 같다.
중생이 즐기면서 집착하는 것을 관할 때에는 마치 어른이 어린아이들이 함께 노는 것을 보고서 또한 그들과 같이 놀아 주면서 다시 조그마한 다른 물건을 그들에게 주고 먼저 좋아했던 것을 버리게 하는 것과 같다. 보살도 또한 그와 같아서 중생들을 교화하여 인간과 천상의 복락을 얻게 하고 점차로 권유하여 나아가면서 3승(乘)을 얻게 하나니, 이 때문에 기쁨과 즐거움을 받는다 한다.
014_0995_c_01L“온갖 중생을 버리지 않는다.”고 함은, 대비(大悲)의 마음을 잘 닦고 쌓으면서 중생을 맹세코 제도하고자 발심이 견고하며, 모든 부처님과 성현에게서 경멸과 조소를 받지 않고 온갖 중생을 저버리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버리지 않는 것이다. 비유컨대 마치 먼저 남에게 물건을 주겠다고 허락 했다가 뒤에 만일 주지 않으면 그는 거짓말을 한 죄인인 것과 같나니, 이런 인연 때문에 중생을 버리지 않는 것이다.
“대비(大悲)의 마음에 든다.”고 함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아서 여기에 대하여 부처님은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본래 서원한 큰 마음은 중생을 위해서이다. 이른바 낱낱의 사람들을 위하여 한량없는 겁 동안 대신 지옥의 고통을 받으며, 나아가 이 사람들이 공덕을 쌓고 행하여 부처님이 되어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어가게 한다.”고 하신다.
【답】이 보살의 넓고 큰 마음은 중생을 깊이 사랑하는 것이므로 만일 대리할 것이 있다면 틀림없이 대리하게 될 것이다.
014_0995_c_09L答曰:是菩薩弘大之心,深愛衆生,若有代理,必代不疑。
또한 보살은 인간들이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에 사람의 고기와 피와 오장으로써 나찰귀(羅刹鬼)에게 제사지내는 것을 보게 되는데, 희생을 대신해주어야 할 이가 있다면 이내 허락하면서 보살은 생각하기를 “지옥 가운데에서도 만일 이와 같이 대신할 일이 있다면 나는 반드시 대신해야 한다.”고 한다. 사람들은 보살의 큰 마음이 이와 같음을 듣고는 그를 귀히 여기고 공경하고 존중하게 된다. 그것은 왜냐하면, 이 보살이 중생을 깊이 생각하는 것이 인자한 어머니보다 더하기 때문이다.
“스승을 믿고 공경하면서 물어 받는다.”라고 함은, 보살은 스승으로 인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되거늘 어떻게 스승을 공경하고 공양하지 않겠는가. 비록 지혜와 덕이 높고 밝다 하더라도 만일 공경하거나 공양하지 않으면 큰 이익을 얻을 수 없게 된다. 비유하면 깊은 우물의 물이 맛은 있으나 두레박이 없으면 길을 수 없는 것과 같다.
만일 교만과 뽐내는 마음을 깨뜨리고서 존중하고 공경하며 신복하면 공덕과 큰 이익이 그에게 돌아온다. 또한 내리는 비[雨]가 산꼭대기에 머물러 있지 않고 반드시 낮은 곳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이 만일 사람이 교만한 마음으로 스스로 뽐내면 법의 물[法水]이 들어가지 않는다. 만일 착한 스승을 공경하면 그 공덕은 그에게로 돌아온다.
014_0996_a_01L또한 부처님은 말씀하시기를 “착한 스승에게 의지하면 지계(持戒)와 선정(禪定)과 지혜(智慧)와 해탈(解脫)이 모두 더욱더 자라게 된다.”고 하셨다. 마치 뭇 나무들이 설산(雪山)에 의지하면 뿌리와 줄기와 가지와 잎과 꽃과 열매가 모두 무성해지는 것과 같다. 이 때문에 부처님은 모든 스승을 숭상하고 공경하기를 부처님과 같이 하라.”고 하신다.
【답】보살은 세간의 법을 따르지 않아야 한다. 세간의 법을 따른다면, 착한 이면 마음에 집착하고 나쁜 이면 멀리한다. 하지만 보살은 그렇지 않아서 만일 깊은 이치를 해석 할 수 있고 의심의 맺힘[疑結]을 풀어 주는 이면 나에게 이익되는 이이므로 마음을 다하여 공경하면서 그 밖의 나쁜 일은 염두에 두지 않는다.
마치 헤진 주머니에 보배가 담겨 있을 적에 주머니가 나쁘다 하여 그 보배를 취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과 같으며 또한 밤에 험한 길을 가면서 못된 사람이 횃불을 잡고 갈 적에 그 사람이 나쁘다 하여 그 빛을 따라가지 않을 수는 없는 것과 같다. 보살도 또한 그와 같아서 스승에게서 지혜의 광명을 얻을 적에는 그의 나쁨을 헤아리지 않는다.
또한 제자라면 생각하기를 ‘스승은 반야바라밀의 방편의 힘을 행하시니, 나로서는 무슨 인연으로 이런 나쁜 일이 있는지 알 수가 없다.’라고 해야 하나니, 마치 살타파륜(薩陀坡崙)이 공중에서 시방의 부처님께서 “그대는 가르침의 스승[法師]에 대하여 그 단점을 생각하지 말고 항상 공경하면서 두려워하는 마음을 내라.”고 하는 말씀을 들은 것과 같다.
또한 보살은 생각하기를 ‘가르침의 스승께서 나쁜 일을 좋아하는 것은 바로 나의 일이 아니다. 내가 구하는 것은 오직 법을 듣고서 스스로 이익이 되려고 할 뿐이다. 마치 진흙으로 만든 불상이나 나무로 만든 불상에는 실로 공덕이 없건만 부처님이라는 생각을 냄으로 인하여 한량없는 복덕을 얻게 됨과 같거늘 하물며 이 사람이 지혜와 방편으로 남을 위해 해석함이겠는가. 이 때문에 가르침의 스승에게 허물이 있을지언정 나에게는 허물이 없다.’고 한다.
014_0996_b_01L“마치 세존과 같다는 생각을 한다.”고 함은, 내가 앞에서 설명했듯이 보살은 세간 사람들과는 다르다. 곧 세간 사람들은 아름답고 추함을 분별하면서 아름다운 이에게는 애착하되 오히려 부처님 같게는 하지 못하며, 미운 이는 깔보는 일이 끝내 비교하여 셀 수조차 없다. 하지만 보살은 그렇지 않나니, 모든 법은 마침내 공이요 본래부터 모두가 무여열반(無餘涅槃)의 모양과 같다고 관하고 온갖 중생을 관하면서 그들을 마치 부처님과 같다고 보거늘 하물며 가르침의 스승이겠는가. 지혜와 이익이 있으면서 불사(佛事)를 지을 수 있기 때문에 그를 마치 부처님과 같이 보는 것이다.
“부지런히 모든 바라밀을 구한다.”고 함은, 보살은 생각하기를 “이 6바라밀이 바로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無上正眞道]의 인연이니, 나는 일심으로 이 인연을 행해야만 한다.”고 하나니, 비유컨대 마치 장사하는 이나 농부가 적절한 나라에서 구한 물건을 바꾸거나, 땅에 적당한 씨를 뿌려서 애써 가꾸고 구하게 되면 일마다 이루지 못함이 없는 것과 같다.
부지런히 도를 구하는 이는 항상 일심으로 6바라밀을 부지런히 구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만일 부드러운 마음으로 점차 나아가다가 번뇌에 덮이거나 마라[魔人]에게 무너지게도 되니, 이 때문에 부처님은 “제2지(地) 가운데에서 부지런히 구하면서 게으르지 말라.”고 말씀하신다.제2지(地)를 마친다.
“많이 배우고 물으면서 만족해함이 없다.”고 함은, 보살은 많이 배우고 묻고 하는 것이 바로 지혜의 인연임을 알며 지혜를 얻으면 잘 분별하면서 도를 수행하게 된다. 마치 사람이 눈이 있으면 도달하는 데에 장애가 없는 것과 같다. 이 때문에 보살은 이처럼 서원을 세우되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을 나는 남김없이 다 받아지니리라.”고 하나니, 문지다라니(聞持陀羅尼)의 힘 때문이고, 청정한 천이(天耳)의 힘을 얻기 때문이며, 불망(不忘)다라니의 힘을 얻기 때문이다.
비유컨대 마치 큰 바다가 온 시방의 모든 물을 받아 지니는 것처럼 보살도 또한 그와 같아서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을 잘 받아 지닌다.
014_0996_b_22L譬如大海,能受持一切十方諸水;菩薩亦如是,能受持十方諸佛所說之法。
014_0996_c_01L“청정하게 법을 보시한다.”고 함은, 마치 모판 안에 풀이 났을 적에 그 김을 매어 주면 그 모가 무성해지는 것처럼, 보살도 또한 그와 같아서 법을 보시할 때에 명리나 뒷세상의 과보를 구하지 않으며, 이에 중생을 위하여 스승의 열반까지도 구하지 않는다.
단지 대비(大悲)로써 중생에 대하여 부처님께서 법륜(法輪)을 굴리시고 법을 보시하는 모양과 부처님의 나라를 장엄하는 모양을 따르면서 세간의 한량없는 갖은 고통을 받으며, 나와 남에게 부끄러워할 줄 아는 데에 머무르고 아련야(阿練若)의 처소를 버리지 않을 뿐이다. “탐욕을 적게 하고 만족할 줄 안다.”고 함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문】갖가지의 인연으로 생사(生死) 안에 있으면서 싫어하지 않게 되거늘 무엇 때문에 단지 두 가지의 인연만을 싫어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가?
014_0996_c_07L問曰:種種因緣,在生死中不厭;何以故但二因緣說不厭?
【답】이 선근(善根)이 두루 갖추어진 까닭에 생사 안에 있으면서도 고뇌(苦惱)가 희박하고 적나니, 비유컨대 마치 사람이 상처가 난 데에 좋은 약을 바르면 상처가 나으면서 그 고통이 적어지는 것과 같다. 보살은 선근을 얻고 청정한 까닭에 이 세상에서 근심 걱정이나 질투나 악한 마음 등이 모두 다 그치면서 쉬게 된다.
만일 다시 몸을 받으면 선근의 과보를 얻는지라 저절로 복락(福樂)을 받으며 또한 갖가지의 인연으로 중생들을 이익되게 한다. 그 원한 바대로 스스로 세계를 청정하게 하며, 세계가 장엄하고 청정하여 천궁(天宮)보다 뛰어남으로 그를 보면서 싫어하지 않나니, 큰 보살의 마음까지도 위로될 수 있거늘 하물며 범부이겠는가. 이 때문에 비록 많은 인연이 있다고 해도 단지 두 가지 일만의 싫어함이 없음[無厭]을 말할 뿐이다.
나와 남에게 부끄러워함[慚愧]에는 비록 갖가지가 있다고 해도 이 가운데에서도 큰 것은 성문이나 벽지불의 마음이다. 보살이 발심한 것은 온갖 중생들을 널리 제도하려 함이거늘 조그마한 고뇌가 있다 하여 곧 혼자만이 열반을 취하려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나와 남에게 부끄러워할 만하다. 마치 어떤 사람이 크게 진수성찬을 마련해 놓고 여러 사람을 청하고서는 인색한 마음이 일어난지라 곧 자기 혼자서 먹어 치우면 참으로 나와 남에게 부끄러워할 만한 일인 것과 같다.제3지(地)를 마친다.
014_0997_a_01L“아련야의 처소를 버리지 않는다.”고 함은, 대중을 여의고 혼자 머무르면서 만일 성문이나 벽지불의 마음을 초월하게 되면 이것을 바로 대중을 여읜다[離衆]고 한다. 온갖 법은 얻을 바 없는 공[無所得空]이기 때문에 모양을 취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으며, 이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까지도 또한 취하지 않나니, 집착하는 마음이 없게 되기 때문이다.
“두타(頭陀)의 공덕을 버리지 않는다.”고 함은, 뒤의 각마품(覺魔品) 가운데에서 무생법인(無生法忍)을 말하는 것과 같다. 이 가운데에서는 무생법인을 두타로 삼나니, 보살은 순인(順忍)에 머무르면서 무생법인을 관한다. 이 12두타5)는 계율을 청정하게 지니기 위한 까닭이요 계율을 청정하게 지니는 것은 선정을 위한 까닭이며, 선정은 지혜를 위한 까닭이다. 무생법인은 곧 진실한 지혜이자 무생법인은 바로 두타의 과보(果報)이니, 결과 가운데에서 원인을 말하기 때문이다.
“계율을 버리지 않고 계율 모양[戒相]을 취하지 않는다.”고 함은, 이 보살은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알기 때문에 오히려 계율을 지니는 것조차도 보지 않거늘 하물며 계율을 깨뜨리는 것이겠는가. 비록 갖가지의 인연이라 하더라도 계율을 깨뜨리지 않는 이것이 가장 큰 것이 되나니, 공해탈문(空解脫門)에 들기 때문이다.
014_0997_b_01L“마음이 위축되지 않는다.”라는 것은 앞에서 이미 갖가지의 인연으로 설명했나니, 보살은 이 위축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 모양[不沒不畏相]을 듣는다. “두 가지 식처[二識處]를 내지 않는다.”고 함은, 두 가지 식처는 이른바 눈[眼]과 물질[色] 가운데에서 안식(眼識)을 내지 않고 나아가 뜻[意]과 법(法) 가운데에서 의식(意識)을 내지 않는 것이다. 보살은 이 둘이 아닌 문[不二門] 안에 머물러서 6식(識)으로 아는 바는 모두가 거짓이요 진실이 없음을 관하면서 큰 서원을 세우기를 “온갖 중생으로 하여금 둘이 아닌 법 안에 머물러서 이 6식을 여의게 하겠노라.”고 한다.
“온갖 물건을 아까워하지 않는다.”고 함은, 온갖 물건을 아까워하지 않는 것 안에는 비록 갖가지의 인연이 있다 하더라도 이 인연이 가장 크다. 이른바 보살은 온갖 법은 필경공(畢竟空)임을 알고 온갖 취하는 모양이 소멸한다 함을 기억하지 않나니, 이 때문에 받는 이에 대하여 은혜를 구하지 않고 베푸는 동안에도 잘난 체하는 마음이 없다. 이와 같이 청정한 단(壇)바라밀을 갖추게 된다.제4지(地)를 마친다.
“속인과 친하는 일을 멀리 여읜다.”고 함은, 수행하는 이는 도(道)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출가하거늘 만일 속인과 가까이한다면 아무 다를 것이 없다. 이 때문에 수행하는 이는 먼저 스스로를 제도한 연후에야 다른 사람을 제도하는 것이다. 만일 아직 자신이 제도되지 못했으면서 남을 제도하고자 하다면, 마치 물 위에 뜰 줄도 모르는 사람이 물속에 빠진 이를 구하려다가 함께 빠져 죽는 것과 같다.
이 보살이 속인과 친하는 일을 멀리 여의면 모든 청정한 공덕을 쌓을 수 있고 깊이 부처님을 염(念)하기 때문에 몸을 변화하여 모든 부처님의 나라에 이르러서 출가하여 머리를 깎고 물든 옷을 입게 되나니, 그것은 왜냐하면, 항상 출가하는 법을 좋아하면서 속인과 가까이하기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014_0997_c_01L“남의 집에 대한 간탐을 멀리 여읜다.”고 함은, 보살은 생각하기를 “나 자신조차도 집을 버리고 오히려 탐내지도 않고 아까워하지도 않거늘 어떻게 남의 집을 탐내고 아까워하겠는가. 보살의 법은 온갖 중생으로 하여금 즐거움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그 사람은 나와 중생으로 하여금 즐거움을 얻게 하려고 하며, 또한 그 사람은 나와 중생의 즐거움을 돕고 있거늘 어떻게 간탐을 부리겠는가. 중생은 전세의 복덕의 인연과 금세에 적은 노력[功夫]으로도 공양을 얻게 되거늘 내가 어찌 간탐하고 질투하겠는가?”라고 한다.
“무익한 담설(談說)을 멀리 여읜다.”고 함은, 이것은 바로 이것은 곧 교묘하게 꾸며대는 말[綺語]인데, 자기의 마음과 다른 이의 마음에 근심되는 일을 풀기 위하여 국법에 대한 일과 도적에 대한 일과 큰 바다와 산과 숲과 약초와 보물이며 모든 지방과 국토 등의 이러한 일에 대해 말하는 것은 복도 얻지 못하고 도(道)의 이익도 없다.
보살은 온갖 중생이 무상함과 괴로움의 불속에 빠져 있음을 가엾이 여기면서 “내가 구제해 주어야 한다.”고 해야 하거늘 어떻게 편안히 앉아서 부질없이 무익한 것들을 말한단 말인가. 마치 사람이 잘못하여 불을 내어 사방에서 한꺼번에 타오르고 있는 것과 같으니, 어떻게 그 속에 편안히 있으면서 다른 일이나 말하고 있겠는가. 여기에 대하여 부처님은 “성문이나 벽지불의 일을 말하는 것조차 오히려 무익한 말이 되거늘 하물며 그 밖의 일이겠느냐.”고 하신다.
“성냄을 멀리 여읜다.”고 함은, 마음속에서 처음에 생긴 것을 성내는 마음[瞋心]이라 하나니, 아직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내는 마음이 더욱 자라고 일이 확정되면서 마음속으로 때리고 찢고 살해하게 되면 이것을 괴롭히는 마음[惱心]이라고 하고, 나쁜 말로 헐뜯으면 이것을 송사하는 마음[訟心]이라 하며, 만일 몸으로 살해하고 때리고 묶고 한다면 바로 싸우는 마음[鬪心]이라고 한다. 보살은 중생을 크게 사랑하고 가엾이 여기는 까닭에 이러한 마음을 내지 않는다. 항상 이런 악한 마음을 막아 들어올 수 없게 한다.
“자신은 위대하다 하면서 남을 멸시하는 일을 멀리 여읜다.”라는 것은 안팎의 법을 보지 않는 것이다. 이른바 5중(衆)을 받아들이는 것과 5중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10불선도(不善道)를 멀리 여읜다.”고 함은, 보살은 10불선도 안에 있는 허물의 갖가지 인연을 관찰하나니, 이는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여기에서 부처님은 말씀하시기를 “10불선도는 소승(小乘)조차도 파괴하거늘 하물며 대승(大乘)이겠는가”라고 하신다.
014_0998_a_01L“크게 잘난 체함[大慢]을 멀리 여읜다.”고 함은, 보살은 18공(空)을 수행하면서 모든 법은 일정하여 크고 작은 모양이 있다고 보지 않는다. “자기의 작용[自用]을 멀리 여읜다.”고 함은, 일곱 가지 교만[七慢]의 근본을 뽑아 없애기 때문이며 또한 착한 법을 몹시 좋아하기 때문이다. “뒤바뀜[顚倒]을 멀리 여읜다.”고 함은, 온갖 법안에서는 항상하다[常]ㆍ즐겁다[樂]ㆍ깨끗하다[淨]ㆍ나[我]이다 함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3독(毒)을 멀리 여읜다.”고 함은, 3독에 대한 이치는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으며, 또한 이 3독이 반연할 바[所緣]는 일정한 모양이 없다.제5지(地)를 마친다.
“6바라밀”이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여기에 대하여 부처님은 “3승(乘)의 사람은 모두가 이 6바라밀로써 저 언덕[彼岸]에 이르게 된다.”고 하신다.
014_0998_a_03L“六波羅蜜”者,如先說。此中佛說:”三乘之人皆以此六波羅蜜得到彼岸。”
【문】이것은 바로 보살마하살의 지위이거늘 무엇 때문에 성문이나 벽지불도 저 언덕에 이르게 된다고 하시는가?
014_0998_a_05L問曰:此是菩薩地,何以故說聲聞、辟支佛得到彼岸?
【답】부처님은 이제 6바라밀은 능(能)한 바가 많이 있음을 말씀하신다. 대승의 법 안에서는 소승을 능히 포함하고 포용[含容]하여 받아들이지만, 소승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014_0998_a_06L答曰:佛今說六波羅蜜多有所能,大乘法中則能含受小乘,小乘則不能。
이 보살은 제6지(地) 가운데 머무르면서 6바라밀을 두루 갖추고 온갖 법들이 공한 줄 관찰하나 아직 방편의 힘[方便力]을 얻지 못한지라 성문이나 벽지불의 경지에 떨어질까 두려워함으로 부처님은 그를 보호하기 위하여 “성문이나 벽지불의 마음을 내지 않아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복과 덕이 크기 때문에 믿음의 힘도 또한 크며, 깊고 청정하게 모든 부처님을 믿고 공경한다. 또한 여섯 가지바라밀을 완전히 갖추었으므로 비록 아직 방편을 얻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무생법인(無生法忍)과 반주삼매(般舟三昧)의 깊은 법 가운데에서도 역시 의심하는 바가 없이 생각하기를 “온갖 논의(論議)는 모두가 허물이 있지만 오직 부처님의 지혜만은 모든 희론(戱論)이 사라졌으니, 모자람이나 허물이 없기 때문이다.”고 하면서 방편으로써 모든 착한 법을 닦나니, 이 때문에 의심하지 않는다.제6지(地)를 마친다.
1)아련야(阿練若)는 범어 araṇya의 음역어로서 아란야의 처소란 고요한 숲속에 있는 수행처를 말한다.
2)곧 베푸는 이와 받는 이와 베푸는 물건의 셋이 청정한 것을 말한다.
3)범어로는 māyā-upama-samādhi이다. 일체가 환(幻)과 같아서 실체가 없다고 관하는 것이다.
4)범어 sūtra의 음역어이다.
5)두타(dhūta)란, 의식주에 대한 탐착을 여의고 최소한의 생활수단으로 수행에 전념하는 것을 말한다. 열두 가지란, ①인적 없는 한적한 곳에서 머문다[在阿蘭若處], ②항상 걸식한다[常乞食], ③빈부를 가리지 않고 걸식한다[次第乞食], ④하루에 한 끼만 먹는다[受一食法], ⑤발우 안의 음식으로 만족한다[節量食], ⑥정오가 지나면 꿀조차 먹지 않는다[中後不得飮漿], ⑦낡은 옷만을 입는다[糞掃衣], ⑧세 벌의 옷만을 지닌다[但三衣], ⑨무덤에 머문다[塚間坐], ⑩나무 밑에 앉는다[樹下坐], ⑪지붕 없는 곳에 머문다[露地坐], ⑫앉기만 할 뿐 눕지 않는다[常坐不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