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意]과 서로 응하는 4혹(惑)은 어디에나 두루 행하여 함께 일어나고 그는 무기(無記)로서 최후에야 없어지며 태어남을 따라 나는 저의 성품이네.
016_0141_b_08L“意相應四惑, 遍行而俱起, 無記最後滅,
隨所生彼性。”
논하건대, 뜻[意]과 서로 응하는 번뇌는 온갖 자리에 두루 행하여 온갖 샘이 있는 [有漏] 선(善) 따위의 마음과 함께 같은 시간에 현행(現行)하여 서로 어기지 않는다고 알아야 한다. 또, 그 번뇌는 모두가 구생(俱生)이요, 분별기(分別起)가 아니며 그는 바로 유부무기(有覆無記)의 성질이요, 불선(不善)의 성질이 아니니 최후인 금강유정(金剛喩定)으로 단번에 끊을 수 있는 것이 된다. 또, 그 번뇌는 네 종류가 있나니 이른바 무명(無明)과 살가야견(薩迦耶見=身見)과 아만(我慢)과 아애(我愛)이다. 만일 이 세계에 나면 보특가라(補特伽羅)라고 알아야 한다. 그 뜻과 서로 응하는 번뇌는 곧 이 세계의 체성(體性)에 해당된다. 다시 다음의 게송으로 말하리라.
온갖 번뇌가 생기고 계속하는데 현행(現行)하여 일어남과 연(緣)과 수면(隨眠)과 소연경(所緣境)과 추중(麤重)이 모두가 제마다 차별이 20이네.
016_0141_b_18L“一切生相續, 現起及與緣, 隨眠、境麤重,
各差別二十。”
016_0141_c_01L 논하건대, 만일 이 세계와 이 경지에 나면 곧 이 세계와 이 경지의 온갖 번뇌가 생기고 계속하게 된다. 또, 그 번뇌ㆍ잡염(雜染)에는 현행(現行)과 연(緣)과 수면(隨眠)과 소연경(所緣境)과 추중(麤重)이 있는데 모두가 제마다에게 20가지 모양이 있다고 알아야 한다. 번뇌의 현행(現行)에 20가지가 있다 함은 첫째는 애욕에게 묶임을 당하는 현행(現行)이니 집에 있는 이들을 말함이요, 둘째는 애욕에게 묶임을 당하지 않는 현행(現行)이니 집을 떠난 이들을 말함이요, 셋째는 잘 분별함이 없음이니 악에 처해서 설법하는 이를 말함이요, 넷째는 잘 분별함이 있음이니 선(善)에 처해서 설법하는 이를 말함이요, 다섯째는 서로 증가됨이니 탐냄 따위가 행하고 있는 이를 말함이다. 여섯째는 모두 평등함이니 등분(等分)이 행하고 있는 이를 말함이요, 일곱째는 희박함이니 진로(塵勞)가 희박해진 이를 말함이요, 여덟째는 바깥 문[外門]의 속박인 현행(現行)이니 애욕을 떠나지 못한 이를 말함이요, 아홉째는 안 문의 속박인 현행이니 세간도(世間道)로 말미암아 애욕을 떠난 이를 말함이요, 열째는 증가되고 있는 속박의 현행이니 온갖 중생들을 말한다. 열 한째는 기억 못하고 속박함인 현행(現行)이니 온갖 배움에 있는 이들을 말함이요, 열 둘째는 분별의 속박인 현행이니 굳게 집착하는 이를 말함이요, 열 셋째는 구생(俱生)의 속박인 현행이니 굳게 집착하지 않는 이를 말함이요, 열 넷째는 관찰함인 현행이니 관찰하기를 좋아하는 이를 말함이요, 열 다섯째는 자재롭지 않은 현행이니 수면하는 이를 말한다. 열 여섯째는 자재로운 현행(現行)이니 깨달은 이를 말함이요, 열 일곱째는 구출할 수 없는 현행이니 열반법이 없다고 하는 이를 말함이요, 열 여덟째는 구출할만한 현행이니 열반 법이 있다고 하는 이를 말함이요, 열 아홉째는 모양을 취하는 현행이니 저를 찾아 생각하고서 법을 따르고 모양을 취하는 이를 말함이요, 스무째는 모양을 취하지 않는 현행이니 저를 찾아 생각하지 않고 법만 따르며 모양을 취하지 않는 이를 말한다.
016_0142_a_01L번뇌의 연(緣)에 20가지가 있다함은 첫째는 즐거움이요, 둘째는 괴로움이요, 셋째는 괴로움도 즐거움도 아니요, 둘째는 괴로움이요, 셋째는 괴로움도 증거움도 아님이요, 넷째는 하고자 함이요, 다섯째는 찾음[尋]이요, 여섯째는 닿임[觸]이요, 일곱째는 먼저 익혔던 관습이요, 여덟째는 수면(隨眠)이요, 아홉째는 착한 벗을 친근하지 않음이요, 열째는 바른 법을 듣지 않음이다. 열 한째는 이치대로 작의(作意)하지 아니함이요, 열 두재는 믿지 않음이요, 열 셋째는 게으름이요, 열 넷째는 기억을 상실함이요, 열 다섯째는 산란히요, 열 여섯째는 바르지 않은 알음이요, 열 일곱째는 방일하는 번뇌요, 열 여덟째는 이생성(異生性)이요, 열 아홉째는 욕심 떠남을 향함이요, 스무째는 태어남을 향함이다.
번뇌의 수면(隨眠)에 20가지가 있다 함은 첫째는 부정지(不定地)의 수면(隨眠)이요, 둘째는 정지(定地)의 수면이요, 셋째는 자기의 경지를 따르는 수면이요, 넷째는 다른 이의 경지를 따르는 수면이요, 다섯째는 손실을 당하는 수면이요, 여섯째는 손실을 당하지 않은 수면이요, 일곱째는 따라 순응하는 수면이요, 여덟째는 따라 순응함이 아닌 수면이요, 아홉째는 갖추어 만족한 수면이요, 열째는 부족되어 감하는 수면이다. 열 한째는 해칠만한 수면(隨眠)이요, 열 둘째는 해치지 않을 만한 수면이요, 열 셋째는 증가되는 수면이요, 열 넷째는 평등한 수면이요, 열 다섯째는 적고 얇은 수면이요, 열 여섯째는 깨달음 있는 수면이요, 열 일곱째는 깨달음 없는 수면이요, 열 여덟째는 많은 괴로움이 생긴 수면이요, 열 아홉째는 적은 괴로움이 생긴 수면이요, 스무째는 괴로움이 생기지 않는 수면이다.
번뇌의 소연경(所緣境)에 20가지가 있다 함은 첫째는 일 있음에 반연하는 경계[境界]요, 둘째는 일없음에 반연하는 경계요, 셋째는 제 모양에 반연하는 경계요, 넷째는 공통된 모양에 반연하는 경계요, 다섯째는 현재 보는 데에 반연하는 경계요, 여섯째는 현재 보지 않는 데에 반연하는 경계요, 일곱째는 바깥문에 반연하는 경계요, 여덟째는 안문에 반연하는 경계요, 아홉째는 제 종류의 번뇌에 반연하는 경계요, 열째는 단 종류의 번뇌에 반연하는 경계이다. 열 한째는 자기의 것에 반연하는 경계[境]요, 열두째는 남의 것에 반연하는 경계요, 열 셋째는 없음에 반연하는 경계요, 열 넷째는 유루(有漏)에 반연하는 경계요, 열 다섯째는 무루(無漏)에 반연하는 경계요, 열 여섯째는 유위(有爲)에 반연하는 경계요, 열 일곱째는 무위(無爲)에 반연하는 경계요, 열 여덟째는 제 마음의 분별에 반연하는 경계요, 열 아홉째는 기억과 분별에 반연하는 경계요, 스무째는 일 모양[事相]에 반연하는 경계이다.
016_0142_b_01L추중(麤重)에 20가지가 있다 함은 첫째는 성집(性執)의 추중(麤重)이요, 둘째는 성번뇌(性煩惱)의 추중이요, 셋째는 성업(性業)의 추중이요, 넷째는 번뇌장(煩惱障)의 추중이요, 다섯째는 소지장(所知障)의 추중이요 여섯째는 정장(定鄣)의 추종이요, 일곱째는 업장(業障)의 추중이요, 여덟째는 보장(報障)의 추중이요, 아홉째는 개장(蓋障)의 추중이요, 열째는 바르지 않은 심사(尋思)의 추중이다. 열 한째는 근심ㆍ괴로움의 추중이요, 열 둘째는 두려움의 추중이요, 열 셋째는 피로와 게으름의 추중이요, 열 넷째는 음식의 추중이요, 열 다섯째는 음욕의 추중이요, 열 일곱째는 네 요소가 어김의 추중이요, 열 여덟째는 시간이 변하여 달라짐의 추중이요, 열 아홉째는 죽음의 추중이요, 스무째는 변행(遍行)의 추중이다. 또, 만일에 분별하여 아는 번뇌를 간추려 말한다면 다섯가지 모양으로 말미암나니 말하자면 자체 모양과 원인 모양, 품류(品類) 모양, 대상에 마음이 산란하는 모양, 결과의 모양이다. 또 다음, 어느 한도에서 번뇌의 수면(隨眠)과 불선(不善)을 설명할 것인가를 다음 게송으로 말하리라.
자기를 따라 순응하여 나기 때문이며 종자와 그의 일 때문이며 네 가지 과실이 나기 때문이며 깨끗지 못한 세 가지 원인 때문이네.
016_0142_b_11L“隨順自生故, 種子故事故, 生四過失故,
不淨三因故。”
논하건대, 네 가지 원인으로 말미암아 수면(隨眠)이라고 말하나니 첫째는 자기를 따라 순응하여 나기 때문이니 만일 번뇌의 일이면 그 번뇌를 따라 순응함이라고 말한다. 둘째는 종자에 따라 속박하기 때문이요, 셋째는 그 증가되는 일 때문이요, 넷째는 네 가지 과실이 생기기 때문이다. 네 가지 과실(過失)이란, 첫째는 고요하지 못한 과실이요, 둘째는 차별인 과실이요, 셋째는 행위가 일어나는 과실이요, 넷째는 원인을 포섭하는 과실이다. 그 중에 앞의 하나는 둘이 나타남으로 말미암아서요, 세 가지는 넷이 나타남으로 말미암아서이다. 【문】 어느 한도에서 불선(不善) 번뇌의 모양을 알아야 하는가. 【답】 세 가지 원인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니 맹렬하여 성하기 때문이며, 중생들을 괴롭히고 어지럽게 하기 때문이며, 선(善)을 장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업(業)ㆍ잡염(雜染)인 수승한 결택[勝決擇]을 지금 설명해야겠다. 다음의 게송으로 말하리라.
업에는 사업(思業)과 사이업(思已業)으로서 그의 차별이 열 세 가지 있으며 그것에 6과(果)와 3위(位)이고 또는 업의 결정이 다섯 가지이네.
016_0142_b_22L“業思及思已, 差別有十三, 彼果六、三位,
業決定五種。”
016_0142_c_01L
논하건대, 만약 간추려 말한다면 업(業)에 두 가지가 있나니 사업과 사이업을 말한다. 그 업의 차별에 다시 열 세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몸의 업이요, 둘재는 말의 업이요, 셋째는 뜻의 업이요, 넷째는 율의(律儀)에 해당하는 업이요, 다섯째는 불율의(不律儀)에 해당하는 업이요, 여섯째는 그 모두에 해당함이 아닌 업이요, 일곱째는 복의 업이요, 여덟째는 복 아닌[非福] 업이요, 아홉째는 부동업(不動業)이요, 열째는 검고 검은 이숙업(異熟業)이요, 열 한째는 희고 흰 이숙업이요, 열 둘째는 검고 희며 검고 흰 이숙업이요, 열 셋째는 검고 흰 것이 아니고 이숙(異熟)이 없는 업이니 그것으로 온갖 업을 총 망라할 수 있다. 그와 같은 따위의 업에는 여섯 가지 과[六果]와 세 가지 위[三位]가 있다고 알아야 한다. 여섯 가지 과[六果]란, 가애과(可愛果)와 불가애과(不可愛果), 청정과(淸淨果), 이숙과(異熟果), 등류과(等流果), 증상과(增上果)를 말한다. 세 가지 위[三位]란, 작용위(作用位)와 습기위(習氣位), 여과위(與果位)를 말한다. 또, 그와 같은 업에는 다섯 가지 결정이 있나니 첫째는 지금의 법(現法)에서 받는 결정이요, 둘째는 다음 생(生)에서 받는 결정이요, 셋째는 그 후의 차별로 받는 결정이요, 넷째는 과보를 받는 결정이요, 다섯째는 업을 짓는 결정이다. 다시 다음의 게송으로 말하리라.
제 업 따위도 네 가지이고 선후의 과보가 성숙함도 넷이며 다시 또 아홉 가지가 있는데 곧 두 가지 차별이라고 알아야 한다.
016_0142_c_15L“自業等四種, 此先熟亦四, 復九種當知,
卽二種差別。”
016_0143_a_01L 논하건대, 바가범(婆伽梵)께서, 「마납바(摩納婆)여, 알아야 하나니 온갖 중생들은 제 업으로 짓는 바라, 업이 다투는 근본이 된다. 업으로부터 생긴 것이며 업이 의지하거나 나아가는 것이 된다 」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그와 같은 업은 제가 지은 업인데, 네 가지라고 알아야 하나니 즉, 자기가 계속하는 것에서 여과(與果)할 수 있기 때문이며, 능동적인 다스림과 수동적인 다스림이 앞에 나타나 있기 때문이며, 과거세(過去世)로부터 현세가 생기기 때문이며, 미래의 존재[有]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업이 다하기 때문에, 「업이 의지하거나 나아가는 것이 된다 」고 말씀하신 것이다. 또, 그 업의 과보에는 선후(先後)의 과보가 성숙함이 네 가지라고 알아야 하나니 이른바 가장 먼저는 중한 업보가 성숙되고, 다음에는 가장 가까운 것이 성숙되고, 그 다음에는 관습된 것이 성숙되고 맨 뒤에는 먼저 지은 것이 성숙되는 것이 그것이다. 또, 끊을 수가 없는 업은 이숙(異熟)이 결정된 것이거나 부정보(不定報=결정되지 않은 과보)인 업이라고 알아야 하나니 그것만은 애욕을 떠나 끊음에 있어서도 장애가 되지 않는다. 또, 모든 외도는 이와 같은 소견을 일으키고 이와 같은 말을 하나니 즉, 「모든 중생들이 온갖 업 짓는 것을 따라 혹은 즐거움과 함께 행하기도 하고, 혹은 괴로움과 함께 행하기도 하며, 받은바 이숙(異熟)도 역시 그와 같다 」고 하는데 저들의 외도는 모두가 허망한 고집을 한 것이다. 왜냐하면 두 가지로 받는 것을 구비하였기 때문이니 말하자면 모든 선업(善業)도 괴로움의 과보를 받기도 하고 또한 즐거움의 과보를 받기도 하며, 불선(不善)한 업도 역시 그와 같다.
또 업은 두 뿌리에 의하기 때문에 선성(善性)과 불선성(不善性)을 이루나니 말하자면 착한 뿌리에 의하기 때문에 온갖 선업(善業)을 일으키며, 착하지 않는 뿌리에 의하기 때문에 불선업(不善業)을 이루나니 말하자면 착한 뿌리에 의하기 때문에 온갖 선업(善業)을 일으키며, 착하지 않는 뿌리에 의하기 때문에 불선업(不善業)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또, 선업과 불선업의 차별된 모양에는 아홉 가지 원인으로 말미암는다고 알아야 한다. 첫째는 원인과 밭[田=福田ㆍ敬田따위]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니, 말하자면 착한 뿌리와 착함 아닌 부리와 공경해야할 밭[敬田] 따위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일로 말미암기 때문이니 원만한 일과 원만하지 않은 일로 말미암을 말한다. 셋째는 방편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니 간단없는 방편과 은근하게 존중하는 방편으로 말미암음을 말한다. 넷째는 의지로 말미암기 때문이니 의지가 혹 깨끗하기도 하고, 혹 부정하기도 함을 말한다. 다섯째는 작의(作意)로 말미암기 때문이니 맹렬한 정신(淨信)과 증가되는 속박으로 말미암을 말한다. 여섯째는 원하는 견해로 말미암기 때문이니 저열한 과보를 회양하고 수승한 과보를 원하여 하는 것으로 말미암음을 말한다. 일곱째는 돕는 벗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니 그 밖의 착한 법과 불선(不善)의 법에 섭수됨으로 말미암음을 말한다. 여덟째는 많이 익힘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니 자기가 수행하며, 또한 남들로 하여금 찬탄하고 따라 기뻐하게 하며, 같은 법을 닦는 이를 보면 마음에 기뻐함을 말한다. 아홉째는 많은 사람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니 많은 사람과 함께 그러한 업을 행하는 것을 말한다. 다시 태어남의 잡염(雜染)인 수승한 결택[勝決擇]을 지금 곧 말해야겠다. 다음의 게송으로 말하리라.
016_0143_b_01L
목숨 마치는 것의 결정과 결정 아님이 있고 중간에 요사함이 여섯의 원인이며 분명한 위치에는 세 가지 마음이 있고 중음(中陰)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네.
016_0143_b_01L“命終定不定, 中夭由六因, 明了位三心,
中有或有無。”
논하건대, 목숨을 마침에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결정(決定)이니 북승상주(北勝上洲)를 말함이요, 둘째는 결정아님[不決定]이니 딴 곳을 말한다. 또 중간에 요사함에는 여섯 가지 원인으로 말미암 나니 첫째는 불평등을 피하지 않기 때문이요, 둘째는 기억을 상실하기 때문이요, 셋째는 뜻이 분포하기 때문이요, 넷째는 수명이 다하기 때문이요, 다섯째는 업이 다했기 때문이요, 여섯째는 복이 다했기 때문이다. 또, 목숨이 마칠 적에 세 가지 마음이 있나니, 즉 선심(善心)과 불선심(不善心)과 무기심(無記心)을 말함인데, 그것은 분명한 마음의 위치에 있을 적을 의미한 것이요, 만일 분명하지 않는 위치에 있을 적에는 결코 무기(無記) 뿐이다. 또, 목숨이 마친 후에 중음[中陰]이 있기도 하나니 장차 형상 세계[色界]에 태어나게 될 이를 말한다. 혹 중음이 없기도 하나니 장차 무형 세계[無色界]에 태어나게 될 이를 말한다. 다시 다음의 게송으로 말하리라.
그 밖에 중음이 반연하는 것에 의하여 물들어 더럽힌 마음이 생기며 네 가지로 태어나는 그 가운데서 3계(界)와 5취(趣)를 따라 생사(生死)하네.
016_0143_b_12L“依餘有所緣, 染污心生起, 於四種生中,
及三界五趣。”
논하건대, 그 밖에 중음이 태어난 곳에 반연함으로 대상을 삼는 것에 의지하여 물들어 더럽힌 마음이 생기게 되어 생유(生有)로 하여금 계속하게 한다. 또, 네 가지로 태어나는[四生] 그 가운데서 온갖 나고 죽음을 받나니 알로 나는 것[卵生]ㆍ태로 나는 것[胎生]ㆍ습기로 나는 것[濕生]ㆍ변화하여 나는 것[化生]을 말한다. 또, 욕심 세계ㆍ형상 세계ㆍ무형 세계의 3계(界)와 지옥 따위의 5취(趣)에서 온갖 나고 죽음을 받나니 그와 같은 죽음과 태어남과 처소를 설명한 것이다. 이미 태어남의 잡염(雜染)인 수승한 결택을 밝히었으니 진리[諦]에 대한 결택(決擇)을 지금 곧 설명해야겠다. 다음의 게송으로 말하리라.
뜻으로 이해한 내용과 언설은 모두 세속의 진리라고 알아야 하며 청정함이 반연함과 그 청정한 성품과 저 방편은 모두 승의(勝義)의 진리이네.
016_0143_b_21L“當知世俗諦, 意解義及說, 淨所緣彼性,
方便名勝義。”
016_0143_c_01L 논하건대, 온갖 언설(言說)과 그 뜻으로 인하여 알아 얻은 내용은 모두 세속의 진리[世俗諦]라고 말하며, 만일 청정(淸淨)함이 반연한 바와, 만일 청정한 성품과, 만일 저 방편(方便)이라면 모두를 승의의 진리(勝義諦)라고 말한다. 청정함이 반연한 바란, 네 가지 거룩한 진리[四聖諦]와 진여(眞如)를 말하며, 청정한 성품이란, 사라진 의리[滅諦]를 말한다. 다시 다음의 게송으로 말하리라.
마땅히 알아야 하리, 그 네 가지 진리[四諦]는 더러움과 깨끗함에 해당 되는데 그를 보거나 거치지 못한 것으로서 병과 병이 없어지는 원인과 같네.
016_0143_c_05L“當知是四種, 染淨之所攝, 未見、未經受,
如病、病滅因。”
논하건대, 네 가지 진리를 바로 염오(染汚)와 청정(淸淨)의 두 법에 해당된다고 알아야 한다. 그리고 염오의 두 가지는 결과[果]와 원인[因] 그것이며, 청정의 두 가지도 그와 마찬가지이다. 그와 같은 네 가지 진리[四諦]에 대해서 온갖 중생들이 끝없이 오면서 사라짐의 진리[滅諦]와 도의 진리[道諦]인 두 진리를 실다히 보지도 못했고 또한 거치어 받아들이지 못했다. 또, 병들고 병이 사라지는 것과 같은 저 두 원인으로 네 가지 진리가 건립되었나니 괴로움의 진리[苦諦]는 병(病)과 같고, 쌓임의 진리[集諦]는 병의 원인과 같고 사라짐의 진리[滅諦]는 병이 사라짐과 같고, 도의 진리[道諦]는 병이 사라지는 원인과 같다. 다시 다음의 게송으로 말하리라.
그 네 가지 진리에는 각각 넷의 모양과 넷의 행(行)과 변지(遍知) 따위의 네 가지 인과(因果)의 체성에 차별이 있네.
016_0143_c_14L“當知是四諦, 各四相四行, 遍知等四種,
因果性差別。”
016_0144_a_01L 논하건대, 네 가지 거룩한 진리에는 낱낱이 네 가지 모양이 있다고 알아야 한다. 괴로움의 진리에 네 가지 모양이란, 첫째는 생기는 괴로움이요, 둘째는 내적(內的)인 괴로움이요, 셋째는 외적(外的)인 괴로움이요, 넷째는 거칠고 중한 괴로움이니 첫째의 것은 나는[生] 괴로움을 말하고, 둘째는 늙고 병들고 죽는 괴로움을 말하고, 셋째는 원수와 만나게 되는 괴로움과 사랑과 이별하는 괴로움과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과 사랑과 이별하는 괴로움과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을 말하고, 넷째는 5취온(取蘊), 즉 오음성고(五陰盛苦)의 괴로움을 말한다. 쌓임의 진리에 네 가지 모양이란, 첫째는 총괄적인 애욕이요, 둘째는 뒤에 있을 애욕이요, 셋째는 기쁨과 탐냄과 병행되는 애욕이요, 넷째는 저 곳에서 기쁨인 애욕이다. 사라짐의 진리에 네 가지 모양이란, 첫째는 애착이 없어짐이요, 둘째는 애욕을 떠남이요, 셋째는 사라짐이요, 넷째는 열반이다. 도의 진리에 네 가지 모양이란, 고지통(苦遲通) 따위의 네 가지 행적을 말함이니 앞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또, 낱낱이 진리에 각각 넷의 행(行)이 있다고 알아야 하나니 성현관품(成現觀品)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또, 모든 진리에는 변지(遍知), 영단(永斷), 작증(作證), 수도(修道)인 인과(因果)의 체성이 있다고 알아야 하나니 앞의 세 가지는 바로 결과[果]이고 수도(修道)는 바로 원인[因]이니 말하자면, 괴로움의 원인을 두루 알며[遍知], 쌓임의 원인을 영원히 끊으며[永斷], 사라짐의 원인을 증득[作證]함이다.
저 깨달음은 어겨도 다툼이 없으며 으레 그를 증득함도 역시 그러하며 진리에서도 두 가지는 선(善)뿐이고 다시 두 가지라고 알아야 하리.
016_0144_a_08L“彼覺無乖諍, 法爾、證亦然, 諦三種唯善,
復二種應知。”
논하건대, 「저 어김없는 도리를 으레 깨닫는다 」함은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들이 법이 으레 그러함으로 말미암아 저 온갖 법에서 어김없는 도리를 깨닫나니 그를 세속의 진리라 말한다. 「으레 그를 증득함도 역시 그러하다 」함은 진리를 이미 본 이들은 그 법의 성품대로 어김 없는 도리를 증득하나니 그들 승의(勝義) 진리라 말한다. 그러한 도리에서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온갖 거룩한 이[聖者]들이 그것으로 진리를 삼기 때문에 거룩한 진리[聖諦]라 말한다 」고 하셨다. 또, 괴로움의 진리 따위인 네 가지 진리에서 처음 두 가지는 선(善)과 불선(不善)과 무기(無記)의 3성(性)에 통하고 그 외는 선(善) 뿐이라고 알아야 한다. 또, 선(善)에도 두 가지가 있나니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을 말한다. 그것에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끊음과 도(道)에 해당되는 것을 말한다. 그와 같이 진리[諦]에 대한 결택을 이미 설명하였으니 의지(依止)의 결택(決擇)을 지금에 곧 설명해야겠다. 다음의 게송으로 말하리라.
일곱 가지 의지(依止)는 세 가지 소의성(所依性)이라고 알아야 하나니 그것에는 또 두 가지 선교(善巧)와 네 구절 따위의 많은 설명이 있네.
016_0144_a_20L“當知七依止, 三種所依性, 彼善巧二種,
四句等廣說。”
016_0144_b_01L 논하건대, 세 가지 소의성(所依性)으로 말미암아 부처님께서 일곱 가지 의지(依止)를 말씀하셨다고 알아야 한다. 무엇이 세 가지 소의(所依)냐 하면, 첫째는 샘이 다한[漏盡] 소의(所依)요, 둘째는 공덕이 발기되는 소의요, 셋째는 현법락주(現法樂住)의 소의이다. 또, 그 의지에는 두 가지 선교(善巧)가 있다고 알아야 하나니 첫째는 삼마지(三摩地) 선교요, 둘째는 삼마발저(三摩鉢底) 선교다, 그것에는 네 구절 따위의 많은 분별이 있나니 부처님께서 다음의 온타남(嗢柁南=集施)ㆍ가타(伽他)로 말씀하신 것과 같다.
혹 어떤 정려(靜慮) 닦는 이에겐 삼마지(三摩地)의 선교(善巧)와 혹 삼마발저(三摩鉢底)의 선교가 함께 하거나 함께하지 않기도 하네.
016_0144_b_06L“或有靜慮者, 三摩地善巧, 或三摩鉢底,
或俱不俱等。”
016_0144_c_01L 어떤 것을, 삼마지의 선교이고 삼마발저의 선교가 아니라고 하느냐 하면, 공(空)함 따위의 세 가지 삼마지 선교이고 승처(勝處)ㆍ변처(遍處)ㆍ멸진정(滅盡定) 따위의 선교가 아님을 말한다. 어떤 것을, 삼마발저의 선교이고 삼마지의 선교가 아니라고 하느랴 하면, 승저ㆍ변처ㆍ무상정(無想定) 따위에 들어가거나 나가거나 하는 삼마발저 선교이고 셋의 삼마지 선교가 아님을 말한다. 어떤 것을 함께 함인 선교(善巧)라고 하느냐 하면, 말한 바 삼마지와 삼마발저의 차별에 함께 선교(善巧)함이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함께 선교(善巧)함이 아니냐 하면, 말한바 삼마지와 삼마발저의 차별에 함께 선교(善巧)함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다음으로 삼마지 선교이고 삼마발저 선교가 아님이란, 들어갈 바의 삼마지의 명칭[名]과 구절[句]과 문자[文]의 차별을 잘 알기 때문이고, 능히 들어감인 삼마지의 모든 행상(行相)과 상태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삼마발저 선교이고 삼마지 선교가 아님이란, 어떤 이가 들어갈 바의 삼마지의 모든 행상(行相)과 상태를 잘 알아 그 정(定)에 드나, 이 삼마지의 명칭과 구절과 문자의 차별을 잘 알지 못하면서 「내가 지금에 이와 같고 이와 같은 정에 들므로 삼마지라 말한다 」고 한다. 또, 어떤 보살은 백이나 되는 삼마지와 천이나 되는 삼마지 따위에 들어갈 수 있으나, 그러나 그 정(定)의 명칭과 구절과 문자의 차별을 잘 알지 못하면서, 「내가 지금 이와 같고 이와 같은 정(定)에 들므로 삼마지라 말한다 」고 하거나, 나아가서는 「여러 부처님을 따르지 못했고 제일 구경(究竟)인 보살 마하살의 듣는 바를 얻지 못했으며, 혹은 나는 제일 구경을 얻지 못했다 」고 한다.
【문】 어떻게 정(定)에 머무르는가. 【답】 어떤 이가 정(定)에 들 수 있는 모든 행상과 상태를 잘 알아 취하므로 인해서이니 그를 잘 알아 취하기 때문에 그 하고 싶은 대로 들어갈 바의 정(定)에 머무르며 또는 그 들어갈 바인 모든 삼마지를 잃어버리는 일이 없다. 그와 같은 머무름에는 두 가지 머무름이 있나니 첫째는 정(定)에 편히 머무르기 때문에 머무름이라 말하며 둘째는 잃어버리지 않기 때문에 머무름이라 말한다. 【문】 어떻게 정(定)에서 일어나는가. 【답】 어떤 이가 정(定)에 들 수 있는 모든 행상과 상태를 잘 알아 취하므로 인해서이니 그를 잘 알아 취하기 때문에 그 하고 싶은 대로 들어갈 바의 정(定)에 머무르며 또는 그 들어갈 바인 모든 삼마지를 잃어 버리는 일이 없다. 그와 같은 머무름에는 두 가지 머무름이 있나니 첫째는 정(定)에 편히 머무르기 때문에 머무름이라 말하며 둘째는 잃어버리지 않기 때문에 머무름이라 말한다. 【문】 어떻게 정(定)에서 일어나는가. 【답】 어떤 이가 능히 정(定)에 든 모든 행상과 상태를 다시 생각하지 않고 다만 부정지(不定地)의 분별 모양에 해당되는 그것과 정지(定地)의 동분(同分)과 작의(作意)로 모든 법을 생각하기 때문에 그 삼마지로부터 일어나나니, 혹은 짓는 바를 따르는 것으로 인하여 일어나며, 혹은 결정적으로 짓는 바로 인하여 일어나며, 혹은 짓는 바를 기약했거나 바라는 것으로 인하여 어긋나게 된다. 짓는 바를 따르는 것이란, 옷과 바리와 온갖 도구와 작업을 말한다. 결정적으로 짓는 바란, 대소변을 보거나 스승과 어른을 받들거나 걸식하는 따위의 행동을 말한다. 짓는 바를 기약했거나 바라는 것이란, 어떤 이가 남을 위하여 짓는 바가 있는 것을 따르기로 약속함을 말한다. 혹은 다른 정(定)에 다시 들기 위하여 그 정(定)에서 일어나기도 한다.
016_0145_a_01L【문】 어떤 것을 행상(行相)이라 말하는가. 【답】 반연하는 바의 대상에 행하여 정(定)에 들기 때문에 행상이라고 말하나니 삼마지에 의하여 일으킨 바 거치른 적정[靜]ㆍ병[病]ㆍ부스럼ㆍ화살ㆍ무상(無常) 따위의 행상을 말한다. 【문】 어떤 것을 상태라고 말하는가. 【답】 만일 장차 정(定)에 들고자 할 그 때에는 반드시 정(定)의 상태가 생기게 되나니 그 상태로 말미암아 수행자는 스스로 알기를, 「나는 곧 오래지 않아 그와 같은 상태의 정(定)에 들게 될 것이라 」고 한다. 또, 혹은 다시 정에 들면 그를 가르치는 스승도 역시 「이 수행자에게 그와 같은 상태가 일어났으니 그는 오래지 않아 그와 같은 정(定)에 곧 들게 될 것이라 」고 안다.
【문】 어떤 것을 모양[相]이라고 말하는가. 【답】 모양에는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경계의 모양[境相]이요, 둘째는 원인의 모양[因相]이다. 경계의 모양이란, 모양을 분별함이니 그것을 인연하여 정(定)에 들어간다. 원인의 모양이란, 정(定)에 들 수 있는 온갖 자량(資粮)이니 말과 교훈을 따라 순응함과 정(定)에 필요한 것을 싸 모음과 즐기는 낙욕(樂欲)이나 싫어하는 마음을 닦음과 산란한 모양이나 산란 하지 않은 모양을 아주 잘 아는 것이며, 또는 남에게 핍박이나 괴롭힘을 당하지 않음과, 혹은 사람이나 사람 아닌 것과, 혹은 소리의 지장과, 혹은 어떤 작용의 지장을 당하지 않음이다.
【문】 어떤 것을 조복되어 순응함이라고 말하는가. 【답】 만일 삼마지(三摩地)가 모든 행상(行相)에 있어서 구속과 장애를 받는 것이 마치 물을 지님과 같다면 으례히 그 구속을 받아서 고요하지 않고 미묘하지 못하고 편안한 길이 아니므로 마음이 한 갈래로 정해지는 것을 얻지 못하리니 그 때에는 그 삼마지를 조복되어 순응함이라고 말하지 못할 것이며, 뜻과 같이 머무르지 못함이라고 알아야 한다. 만일 그와 정반대의 현상이라면 조복되어 순응함이라고 말한다. 【문】 어떤 것을 행하는 바라고 말하는가. 【답】 삼마지의 경계를 말함이니 만일에 그 경지를 초과한 정(定)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나니 마치 초선(初禪)에 든 사람이 그 위인 제2선(禪) 따위의 일들을 알지 못함과 같다. 그와 같아서 근도(根度)와 보특가라도(補特伽羅度)에 대해서도 역시 알아 보지 못한다.
016_0145_b_01L【문】 어떤 것을 이끌어 발기시킴이라고 하는가. 【답】 넓은 문구(文句)의 뜻을 잘 간추려 포섭하며, 온갖 수승한 공덕을 잘 발기시킴을 말한다.
【문】 어떠한 삼마지를 좋아할만한 것이라고 말하는가. 【답】 제 부끄럼[慚]과 남 부끄럼[愧]과 사랑함과 공경함과 깨끗하게 믿음 등을 갖추고서 이치 그대로 생각을 하며 기억하고 바르게 알고 모든 감관을 수호하고 계율을 지니고 후회가 없는 따위이며, 나아가서는 최후가 되는 것을 좋아하고, 그 좋아하는 그대로 삼마지에 드는 것이며, 그와 상반되면 좋아할만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문】 어떤 것을 좋아할만한 것이며, 좋아할 만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가. 【답】 말하자면, 제 부끄럼과 남 부끄럼 따위를 조금 성취하거나 조금 성취하지 못함이며, 제 부끄럼ㆍ남 부끄럼 따위를 조금 서취하거나 조금 성취하지 못함이며, 제 부끄럼ㆍ남 부끄럼을 갖춤과 사랑함과 공경함이 아닌 것과 서로 응하는 따위라고 널리 말한다. 【문】 어떤 것을 증가함이라고 하는가. 【답】 삼마지가 이미 증가된 것을 말한다. 【문】 어떤 것을 줄어짐이라고 말하는가. 【답】 삼마지를 얻었다고 잃어 버림을 말한다. 【문】 어떤 것을 방편이라고 하는가. 【답】 둘에 나아가는 도를 말한다. 【문】 어떤 것을 사마타(奢摩他)라고 하는가. 【답】 분별의 영상(影像)과 작의(作意)의 모양이 없는 것을 말한다. 【문】 어떤 것을 집수(執受)라고 하는가. 【답】 어느 청정한 모양이거나 혹 광명의 모양이거나 잡아 취함을 일으키는 모양을 말한다. 【문】 어떤 것을 버림[乘捨]이라고 하는가. 【답】 착한 품류에 대해서 이미 평등하고 뛰어난 버림을 얻게 된 것을 말한다. 또 다음으로, 온갖 정려(靜慮)에 의하는 수승한 결택을 지금 곧 말해야겠다. 다음의 게송으로 말하리라.
정려(靜慮)의 여러 가지 장애와 갈래와 그리고 저 광범한 건립이 있는데 거기엔 괴로움과 요동을 멀리 떠나서 뒤의 것이 차차 더 수승하네.
016_0145_b_19L“靜慮數障分, 及彼廣建立, 遠離於苦動,
後後分勝異。”
016_0145_c_01L 논하건대,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네 가지 정려(靜慮)는 어찌하여 네 가지 뿐이고 많거나 적지 않는가. 괴로움과 즐거움의 일을 벗어나 구경(究竟)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차츰 차츰 제4정려에 이르러서는 근심ㆍ괴로움ㆍ기쁜ㆍ즐거움을 초월하여 벗어났기 때문이다.
【문】 처음 정려(靜慮)에서 다스리는 장애는 어떠한가. 【답】 다섯 가지가 있다고 알아야 하나니 첫째는 탐냄, 성냄, 해침, 찾음[尋]이요, 둘째는 괴로움이요, 셋째는 근심이요, 넷째는 계율을 범함이요, 다섯째는 산란이다. 【문】 제2 정려에서 다스리는 장애는 어떠한가. 【답】 또한 다섯 가지가 있다고 알아야 하나니 첫째는 처음 정려(靜慮)의 탐냄이요, 둘째는 심사(尋伺)요, 셋째는 괴로움이요, 넷째는 들뜸이요, 다섯째는 결정적인 열등한 성질이다. 【문】 제3 정려에서 다스리는 장애는 어떠한가. 【답】 네 가지가 있다고 알아야 하나니 첫째는 제2 정려의 탐냄이요, 둘째는 기쁨이요, 셋째는 기뻐 날뜀이요, 넷째는 결정적이 열등한 성질이다. 【문】 제4 정려에서 다스리는 장애는 어떠한가. 【답】 또한 다섯 가지가 있다고 알아야 하나니 첫째는 나고 드는 숨이요, 둘째는 제3 정려의 탐냄이요, 셋째는 즐거움이요, 넷째는 즐거움인 작의(作意)요, 다섯째는 결정적인 열등한 성질이다.
016_0146_a_01L【문】 모든 정려에는 몇 가지 갈래가 있는가. 【답】 처음의 정려에는 다섯 갈래가 있다. 무엇이 다섯이냐 하면, 심(尋)ㆍ사(伺)ㆍ기쁨ㆍ즐거움ㆍ심일경성(心一境性)이다. 제2 정려에는 네 갈래가 있나니 안으로 평등하고 깨끗함과 기쁨ㆍ즐거움ㆍ심일경성을 말한다. 【문】 안으로 평등하고 깨끗함은 어떤 법으로 그 자체가 되었는가. 【답】 기억과 바르게 아는 것과 놓음으로 그 자체가 되었다. 그리고 제3 정려에는 다섯 갈래가 있나니 기억과 바르게 아는 것과 놓음과 즐거움과 심일경성을 말한다. 제4 정려에는 네 갈래가 있나니 놓음이 청정함과 기억이 청정함과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과 심일경성(心一境性)이다. 【문】 기억과 바르게 아는 것과 놓음은 어느 곳에도 있는데 무슨 까닭으로 처음 정려 따위에서는 말하지 아니했는가. 【답】 처음 정려에서는 심(尋)ㆍ사(伺)의 문에서 이끌어 발기하기 때문에 비록 있으나 말하지 아니했고, 제2 정려에서는 기뻐 날뛰는 자체에서 짓는 업이 있고 마음에 소유하고 있는 약간의 번뇌에 얽히고 덮인 것이 있기 때문에 통틀어 안으로 평등하고 깨끗함이라는 명칭으로써 그를 밝힌 것이다. 제3 정려에서는 저 마음에 소유하고 있는 약간의 번뇌를 모두 멀리 떠났기 때문에 저 자상(自相)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경에서 기쁨에 탐(貪)함을 멀리 떠나는 것을 설명하되, 「처음 정려에서는 비록 심사(尋伺)의 탐을 떠났으나 기쁨의 탐을 떠나지 못했다 」고 하신 것이다. 제4 정려에서는 곧 이 생각의 놓음이 아주 제일의 청정함으로 드러난다. 그러므로 모든 정려 중에 그 적응하는 대로 차별이 있는 것이라고 알아야 한다.
016_0146_b_01L【문】 무슨 까닭으로 4정려(靜慮)에서 네 갈래와 다섯 갈래를 세웠는가. 【답】 소의(所依)에 머무르기 때문이며, 순조로운 이익에 머무르기 때문이며, 그 자체에 머무르기 때문이다. 또는 사유(思惟)의 경계(境界)며, 수용의 경계며, 경계에서 산란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는 순조로운 이익이 의지하는 바이며, 증상(增上)의 마음이 의지하는 바이며, 증상의 슬기가 의지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또는, 세 가지 어지럽힘이 머무르고 있는 장애를 다스리기 위함이다. 세 가지 어지럽힘이 머무르고 있음이란, 더럽힘이 머물러 있음과 괴로움이 머물러 있음과 헷갈림이 머물러 있음이다. 또는, 5욕(欲)을 누리는 이는 바로 짓는 일 세 가지가 있어서 저 5욕을 누리는 것을 드러내나니 첫째는 바른 방편(方便)을 가지고 수용할 것을 구함이요, 둘째는 구하여 얻고서는 바로 수용함이요, 셋째는 자재롭게 따라 굴림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정려(靜慮)를 닦는 이도 바로 짓는 일 세 가지에 의하여 그에 알맞게 그 갈래를 세운다고 알아야 한다. 그것에도 다시 세 가지 다스림이 있나니 첫째는 애욕을 떠나는 다스림이요, 둘째는 몸과 마음의 핍박과 괴롭힘을 멈추는 다스림이요, 셋째는 바깥 마음의 산란을 고요함으로 다스림이다.
【문】 무슨 까닭으로 처음 정려에서 애욕 떠남을 말하고서 다시 악과 착함 아닌 법을 멀리 떠나는 것을 말하는가. 【답】 온갖 애욕의 제 모양을 밝히기 위함이며, 또는 그 허물이 되는 모양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그 허물이 되는 모양이란, 저 온갖 애욕으로 나쁜 행위를 저지르고 보면 아주 낮고 나쁜 곳에 떨어지나니 그러므로 악이라고 말하며, 착한 법이 생기는 것을 어기기 때문에 착함이 아니라고 말한다. 또는, 번뇌ㆍ잡염(雜染)을 잘 끊는 것을 밝히기 위함이며, 전에 싸 모은 업과 잡염을 능히 끊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또는, 집에 있는 이로서 수용하는 여러 가지 일에서 생기는 욕심을 끊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이며, 집을 떠난 이의 심사(尋伺) 부문에서 생기는 법을 끊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또는, 욕심의 심(尋)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또는, 저 외도와 신선이 얻은 모양과 같은 것을 밝히기 위하며 또 그가 물러서고는 나쁜 주문[惡呪]을 일으키는 것을 끊음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문】 무슨 까닭으로 괴로움의 뿌리[苦根]를 처음 정려에서 끊지 못했다고 말하는가. 【답】 그 종류는 거칠고 중하기 때문에 그를 멀리 떠나지 못한 것이다. 만일 처음 정려에서 거칠고 중한 괴로움의 뿌리를 이미 끊었다면 제2 정려에 머무를 때와 응당 차별이 없을 것이니 그러므로 처음 정려에서는 거칠고 중한 괴로움을 끊지 못했다고 알아야 한다. 【문】 심사(尋伺) 따위의 법이 처음 정려(靜慮) 따위에서 능히 순조로운 이익이 되고 자기의 경지를 거두어 들이어 청정을 얻도록 하는데, 무슨 까닭으로 여래께서 그를 움직임이라고 말씀하시는가. 【답】 딴 경지에 견주어 보기 때문에 움직임이라고 말씀하신 것이요, 자기 경지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016_0146_c_01L【문】 무슨 까닭으로 욕심 세계와 처음 정려 따위에서 그 다음 다음의 갈래를 세웠는가. 【답】 대략 세 가지 원인이 있나니 능동적이 다스림, 수동적인 다스림 때문이며, 증득함인 이익 때문이며, 증득함인 자체 때문이니 그와 같은 세 가지 원인은 4정려 중의 다섯 갈래(五支)에 해당함이니 그 적응 하는대로라고 알아야 한다. 【문】 제2 정려를 처음 정려에 견주어 보면 어떠한 수승하고 다른 점이 있는가. 【답】 삼마지(三摩地)가 원만하여 수승하고 다르다. 【문】 제3 정려를 제2 정려에 견주어 보면 어떠한 수승하고 다른 점이 있는가. 【답】 순조로운 이익이 원만하여 수승하고 다르다. 【문】 제4 정려를 제3 정려에 견주어 보면 어떠한 수승한 다른 점이 있는가. 【답】 청정함이 원만하여 수승하고 다르다. 다시 다음의 게송으로 말하리라.
근분(近分)은 기쁨에서 움직임 있고 그 처음만이 샘을 없앨 수 있으며 또한 두 가지로 소리를 반연하며 여덟 등지(等至)에서 여덟 가지 일 버리네.
016_0146_c_07L“近分喜有動, 唯初能盡漏, 亦二種緣聲,
八等至捨八。”
논하건대, 처음 정려의 근분[近分定]에는 기쁨에 움직임이 있어서 근본정려(根本靜慮=根本定)의 기쁨과 같지 아니하다. 또 처음 근분미지(近分未至)에 해당하는 선정은 온갖 샘(漏)을 없애어 남김이 없게 된다. 또 처음 근분정(近分定)에는 두 가지가 있나니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을 말하며, 그 밖의 근분정에는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을 말하며, 그 밖의 근분정에는 세간(世間)뿐이니 이미 처음의 근본무루(根本無漏)인 정려(靜慮)를 얻었기 때문에 위의 경지의 모든 근분정에 무루(無漏)가 앞에 나타남이 아니다. 또는, 정중(正中)에 들어 있어서 외부의 소리를 취할 적에 두 가지 취함으로 말미암는다고 알아야 하나니 첫째는 정(定)에서 반연하는 대상과 가지가지 반연할 바의 대상을 분별하는 의식으로 말미암기 때문이요, 둘째는 이 구생(俱生)인 이식(耳識)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여덟 가지 등지(等至)에서 여덟 가지 일을 버린다 함은 여덟 가지 삼마발저[三摩鉢底]로 능히 여덟 가지 일을 버리는 놓음이다. 무엇이 여덟이냐 하면, 말과 심[尋]ㆍ기쁨ㆍ즐거움을 버리기 때문에 4정려의 삼마발저를 증득하며 형상[色]과 무형[空]ㆍ식(識)ㆍ무소유처(無所有處)의 생각[想]을 버리기 때문에 4무색(無色)의 삼마발저를 증득한다. 다시 다음의 게송으로 말하리라.
현법안락주(現法安樂住)이며 현관(現觀)에 들 수 있고 해탈이라 칭찬하고 생각하며 네 가지 원인임을 알아야 하리.
016_0146_c_22L“現法安樂住, 能入於現觀, 讚說想解脫,
四種因當知。”
016_0147_a_01L
논하건대, 모든 정려만이 바로 현법안락주(現法安樂住)인 성질이 되나니 몸과 마음인 두 가지 편안함이 있기 때문이요, 무색정(無色定)에 몸의 편안함이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정려(靜慮)에 의하여 현관(現觀)에 들 수 있고 무색정(無色定)이 아니니 모든 정려에는 비발사나(毘鉢舍那)가 매우 맹렬하기 때문이다. 또는, 정려와 모든 정(定)을 닦는 이는 무색(無色) 해탈에 자주 드나들어서 저의 모양을 칭찬하여 말하나니 그가 매우 고요함이기 때문이다. 또, 모든 외도들은 저 무색정(無色定)에 대해서 해탈이라는 생각을 일으키기 때문에 자주 자주 그를 칭찬하여 말한다. 또는, 유상(有想)의 삼마지 해탈(解脫)에 의해서 온갖 샘[漏]을 없앨 수 있으며, 무소유처(無所有處)의 삼마지에 이르러서는 아주 맹렬하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유독 유상(有想) 삼마발저에 의해서만이 잘 알아 통달하고 그 외의 경지에서는 그러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네 가지 원인(四種因)이라 함은 모든 삼마발저가 능히 현법 안락주 따위 네 가지의 의지하는 원인이 됨을 말함이니 그 차례와 같은 것으로 알아야 한다. 다시 다음의 게송으로 말하리라.
애미(愛味) 따위에는 열 가지와 여섯 가지와 세 가지라고 알 것이며 물러남의 계속됨과 그를 다스림에는 각각 많은 종류의 차별이 있네.
016_0147_a_14L“愛味等當知, 十種、六、三種, 退相續障治,
各多種差別。”
논하건대, 애미(愛味)와 상응청정(相應淸淨)과 무루(無漏)인 세 가지 정려에는 그 순서대로 열 가지와 여섯 가지와 세 가지가 있다고 알아야 한다. 무엇이 열 가지이냐 하면, 섭사품(攝事品)에서 이미 설명한 것과 같다. 무엇이 여섯 가지이냐 하면 여섯 가지 청정(淸淨)을 말함이니 첫째는 이끌어 내는 청정이요, 둘째는 최상으로 연마하는 청정이묘, 셋째는 후천적으로 얻는 청정이요, 넷째는 더럽게 물듦이 청정함이요, 다섯째는 포섭함이 청정함이요, 여섯째는 감당함이 청정함이다. 무엇이 세 가지이냐 하면, 출세간(出世間) 무루와 이계(離繫) 무루와 후득(後得) 무루를 말한다.
016_0147_b_01L또, 애욕 떠남으로부터 물러남이 계속됨과 다스림에는 각각 많은 종류가 있다고 알아야 하나니 말하자면, 혹은 의지[依止]가 평등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물러나게 된다. 말하자면, 어떤 이가 중한 병이 들면 정(定)을 잃어 물러나게 되나니 존자(尊者) 벌륵가리(伐勒迦梨)가 말하기를, 「나는 지금 이 삼마지(三摩地)에서 증득해 들어갈 수 없으니 장차 이 삼마지에서 무지근함이 많기 때문에 물러나 잃어버리지나 않았을까 」라고 함과 같다. 또는 어떤 이의 성품이 거칠고 중함은 숙습(宿習)에서 말미암음이니 그러한 거칠고 중함이 많기 때문에 삼마지에서 물러나게 된다. 혹은 경계가 수승하고 미묘함으로 말미암아 물러나게 되나니 말하자면, 어떤 이가 수승하고 미묘한 경계가 앞에 나타나기 때문에 정(定)을 잃어버리기도 함이다. 마치 문유(聞有)와 외도(外道)와 선인(仙人)도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을 얻었다가도 사랑스럽고 예쁜 소녀의 몸과 접촉함으로 말미암아 그 정(定)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혹은 공경의 공양으로 말미암아 물러나게 되나니 어떤 이가 현재에 수승하고 미묘한 공경의 공양을 얻음으로 말미암아 곧 그 정(定)을 잃어버리게 된다.천여(天與) 따위는 혹 경멸과 헐뜯음으로 말미암아 물러나게 되나니 어떤 이가 남에게 성내어 헐뜯음을 당하거나 꾸짖음을 당하면 곧 그 정을 잃어버리게 된다. 외도들이나 선인(仙人)들은 성내어 물러나고서는 온갖 나쁜 주문을 행하기도 하며, 혹은 교만함으로 말미암아 물러나게 된다. 어떤 이는 자기가 얻은 정(定)으로 인하여 제 자신은 뽐내고 남을 멸시하다가 정(定)을 잃어버리게 된다. 혹은 증상만(增上慢)으로 말미암아 물러나나니 말하자면, 어떤 이가 미득정(未得定)에서 일어나 이미 얻었다는 증상만 때문에 그 얻은바 정을 잃어버리게 된다. 혹은 작의(作意)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물러나게 되나니 말하자면, 어떤 이가 먼저는 그와 같은 모든 행과 모양으로 말미암아 정에 들어가게 되었으나 그 후에는 다시 그러한 행(行)과 모양을 생각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정을 잃어버리게 된다.
016_0147_c_01L혹은 순숙되지 않기 때문에 물러나나니 말하자면, 어떤 이가 처음에는 닦아 익히어 착한 종류들을 발기하다가도 혹 자기의 번뇌가 많아 그 번뇌가 앞에 나타남으로 말미암아 정(定)을 잃어버리게 된다. 또 어떤 이는 위의 정려를 좋아하거나 나아가서는 위의 정려를 의심하기 때문에 정을 잃어버리게 된다. 혹은 수명이 다하거나, 복이 다하거나 업이 다하기 때문에 물러나나니 말하자면, 어떤 이가 위의 경지에 태어났다가 그 곳에서 목숨을 버린 후, 타락하여 아래의 경지에 나게 됨을 의미한다. 또 다음으로, 만약 하품(下品) 번뇌와 하품 선근(善根)인 보특가라(補特伽羅)이면 많은 찰나(刹那) 동안 공력을 들이다가 비로소 물러나게 되고, 많은 찰나 동안 공력을 들이고야 비로소 정(定)에 들게 되며, 만일 하품 번뇌와 상품(上品)의 선근(善根)인 보특가라이면 많은 찰나 동안 공력을 들이다가 비로소 물러나게 되고, 한 찰나로 말미암아 속히 정에 들게 된다. 만일에 상품(上品)의 번뇌와 하품의 선근인 보특가라이면 많은 찰나 동안 공력을 들이다가 비로소 물러나게 되고, 한 찰나로 말미암아 속히 정을 잃어 버리고, 많은 찰나동안 고역을 들이어야 비로소 정(定)에 들 수 있으며, 만일 상품의 번뇌와 상품의 선근인 보특가라이면 한 찰나로 말미암아 속히 정에서 물러나고 한 찰나로 말미암아 속히 정(定)에 들 수 있다. 다시 다음의 게송으로 말하리라.
날카로운 근기와 바뀌어 태어난 이에겐 물러나는 일이 없다고 알아야 하나니 아래 경지에 의해 정(定)이 생기며 애욕을 떠난 후에야 나기 때문이네.
016_0147_c_13L“利根及生轉, 當知無有退, 依下地發定,
離欲後生故。”
논하건대, 그와 같이 물러나는 일은 날카로운 근기에는 있지 않으며, 만일 바뀌어 태어난 이라면 비록 둔한 근기라 하더라도 또한 물러나는 일이 없다. 또, 정려 따위의 정(定)은 반드시 먼저 아래 경지에 의해서 발기 되나니 먼저 여기에서 정(定)에 들고난 후에야 저 곳에 날 수 있다. 왜냐하면 반드시 먼저 애욕을 떠난 이라야만 저 곳에 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이미 의지(依止)의 결택(決擇)을 설명하였으니 각분(覺分) 결택(決擇)을 설명하였으니 각분(覺分) 결택을 지금 곧 설명해야겠다. 다음의 게송으로 말하리라.
2승(乘)과 대승(大乘)에 의하며 스물 일곱 가지 모양인 바른 방편으로 말미암아서 각분(覺分)을 세웠다고 알아야 하리.
016_0147_c_21L“依二乘大乘, 由二十七相, 正方便當知,
建立於覺分。”
016_0148_a_01L 논하건대, 성문(聲聞)과 독각(獨覺)인 2승(乘)에 의하며, 또는 대승(大乘)에 의하여 각분(覺分)을 세움이 스물 일곱 가지 모양인 바른 방편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알아야 한다. 무엇을 스물 일곱 가지인 바른 방편이라고 말하느냐 하면, 반연할 바에 매어두어 바르게 관찰하는 방편이며, 염오(染汚)를 떠나고 청정을 껴잡는 방편이며, 안의 마음을 닦아 순조롭게 하는 방편이며, 출세간(出世間)의 바른 법을 이끌어 내는 방편이며, 저 빈틈이 없는 방편이며, 진실하게 곧 깨닫는 방편이며, 딴 적멸(寂滅)을 증득하는 방편이며, 알 바에 드는 방편이며, 끊는 데에 드는 방편이다. 그리고 깨끗함이 아니고 낙이 없고 괴로움이 있음을 통달하는 방편이며, 배움이 원만해지는 방편이며, 경계에 대해서 산란함 없이 관찰하는 방편이며, 성인의 교훈을 무너뜨리지 않는 방편이며, 지혜로 알 바인 저 과(果)를 껴잡는 방편이며, 원(願)인 방편이며, 중생들을 불쌍히 여기는 방편이며, 지혜를 닦아 익히는 방편이며, 법을 현관(現觀)하는 방편이며, 능동적인 다스림과 수동적인 다스림으로 나아가는 방편이다. 그리고 복덕과 돕는 양식[資粮]을 싸 모으는 방편이며, 중생들을 성숙시키는 방편이며, 온갖 보살의 도를 껴잡는 방편이며, 위덕(威德)을 이끌어 내는 방편이며, 말과 교훈을 이끌어 내는 방편이며, 광대하고 매우 깊은 마음을 쌓고 익히는 방편이며, 해로운 법과 업을 멀리 떠나는 방편이며, 유정(有情)과 열반(涅槃)의 양쪽에 편히 머무는 방편이다. 다시 다음의 게송으로 말하리라.
몸 따위의 세 가지 차별인 저 영상(影像)을 따라 관찰함에는 듣는 따위의 세 지혜로 말미암아 법을 생각함에 미혹함이 없네.
016_0148_a_16L“身等三差別, 彼影像隨觀, 由聞等三智,
念法無迷惑。”
016_0148_b_01L 논하건대, 몸 따위에 각각 세 가지의 차별이 있다고 알아야 하나니 몸의 세 가지란, 혹 몸 부분(身分)의 제 성품이 부정함이니 몸의 내부이며, 혹 몸의 부분이 청정한 것과 흡사함이니 몸의 피부이며, 혹 몸의 부분이 변해서 무너짐의 부정함이니 목숨이 마친 후에 푸르게 되거나 어혈처럼 멍드는 따위의 몸 부분이다. 느낌[受]에 세 가지가 있음이란, 이른바 괴로움과 즐거움과 괴로움도 즐거움도 아님이 그것이다. 마음[心]에 세 가지가 있음이란, 즐거움 따위를 말한다. 느낌[受]과 상응(相應)하는 법에 세 가지가 있음이란, 검은 것과 흰 것과 잡색(雜色)을 말한다. 저 영상(影像)을 따라 관찰[隨觀]함이란, 심사경(尋思經)에서 말씀하시기를, 「저 몸 따위의 영상[影像]을 따라 관찰[隨觀]함이 알아야 할 사실과 같은 종류이기 때문에 영상[影像]이라 말한다 」고 하셨다. 말한 바 따름[隨]이란, 바로 비슷하다는 뜻이다. 또, 그 따라 관찰함이란, 바로 세 지혜[三智]이니 들음에서 생기는 지혜와 생각에서 생기는 지혜와 닦음에서 생기는 지혜이다. 그와 같은 세 지혜는 생각하는 힘으로 말미암아 저 증상연(增上緣)인 수다라(修多羅) 따위의 법에 대해서 헷갈림이 있지 아니하다. 그러므로 념주(念住)라고 말하나니 몸과 느낌과 마음과 법에 대해서 생각[念]의 힘에 의하여 머무르기[住] 때문이다. 다시 다음이 게송으로 말하리라.
저 다스릴 바에 아홉 가지이며 작의(作意)에는 둘이라고 알 것이며 닦음의 차별에는 세 가지가 있고 두 가지 잃어버림이 없음이네.
016_0148_b_09L“彼所治九種, 作意當知二, 修差別有三,
二種無失壞。”
016_0148_c_01L 논하건대, 모든 념주(念住)에는 아홉 가지의 다스릴 바 장애가 있다고 아라야 하나니 첫째는 싫어하거나 떠나려고 아니함이요, 둘째는 작의(作意)하지 아니함이요, 셋째는 지관(止觀)에 대한 딸린 번뇌[隨煩惱]요, 넷째는 가라앉음[沈下]이요, 다섯째는 잘 참아내지 못함이요, 여섯째는 열등한 것을 만족하게 앎이요, 여덟째는 계율을 어기고 범함이요, 아홉째는 의욕이 증가되고 맹렬해지는 온갖 미묘하고 착한 멍에[軛]를 버림이다. 또, 념주(念住)를 닦는 데에 두 가지 작의(作意)가 있으니 느리지 않는 작의(作意)와 물들지 않는 작의이다. 경에서 말씀하기를, 「치성한 이는 그것이 바로 첫째라고 할 수 있고, 바른 지혜와 기억하는 생각으로 세상의 탐냄ㆍ근심을 제거하는 이는 바로 둘째라 할 수 있다 」고 하셨다. 또, 그 둘째의 것이 세 가지 잡염(雜染)을 제거할 수 있다. 무엇을 세 가지 잡염이라 하느냐 하면, 첫째는 계율을 범하는 인연으로 마음에 변함과 뉘우침을 내나니 그러한 장애로 말미암아 능히 처음 닦는 마음으로 하여금 정(定)을 얻지 못하게 한다. 둘째는 안 마음이 어두워짐이니 그러한 장애로 말미암아 비록 이미 정의 마음을 얻었더라도 반연하는 것에서 잃어버리고 가라앉게 된다. 셋째는 바깥 마음이 산란함이니 그러한 장애로 말미암아 비록 수승한 법을 증득했더라도 세상의 명예와 이끗에 집착하게 되며, 혹은 수승하게 전진하는 법을 능히 증득하지 못하고서 마음에 근심하고 괴로워 하게 된다. 닦음의 차별에는 세 가지가 있다 함은 온갖 념주(念住)를 닦는 데에 각각 세 가지가 있음이니 안과 밖과 안팎의 모든 몸 따위를 따라 관찰함을 말한다. 또는, 몸에 대해서는 혹 영상만을 관찰하기도 하며, 혹 영상(影像)으로써 몸에 견주어 보기도 하며, 혹 다시 합치어 통틀어 관찰하기도 하나니 몸에 대해서 세 가지로 관찰한 것처럼 나아가서는 법에 대해서 까지도 역시 그와 같이 관찰한다. 또, 모든 념주(念住)에 대해서 잃어 버림이 없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처음 잃어버림이 없음으로서 산란하지 않음을 말함이니 그러한 힘으로 말미암아 잘 발기 할 수 있게 된다. 둘째는 내종 잃어버림이 없음으로서 증상만(增上慢)이 없음을 말함이니 그러한 힘으로 말미암아 잘 닦는 것을 완성할 수 있게 된다. 다시 다음의 게송으로 말하리라.
가라 앉음과 들뜸을 끊기 위하여 상응도(相應道) 두 가지를 닦으며 관찰하여 번뇌를 버리게 되고 세 가지 애착[三愛]을 없애네.
016_0148_c_10L“爲斷於沈掉, 相應道二種, 觀察捨煩惱,
及爲盡三愛。”
논하건대, 념주(念住)를 닦는 위치에서 가라 앉음과 들뜸[沈掉]을 끊기 위하기 때문에 응당 두 가지 상응도(相應道)를 닦을 것이니 비구니경(比丘尼經)과 취자심상경(取自心相經)을 닦을 것이니 비구니경(比丘尼經)과 취자심상경(取自心相經)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어떻게 비구니경에서 말씀하셨느냐 하면, 저 경에서 말씀하시기를, 「가라앉음을 끊기 위하여 응당 약간의 사랑스러울 만한 청정한 모양을 생각해야 하며, 들뜸을 끊기 위하여 응당 다시 대략 껴잡아야 한다 」고 하셨다. 어떻게 취자심상경에서 말씀하셨느냐 하면 저 경에서 말씀하시기를, 「가라앉음을 끊기 위하여 응당 약간의 사랑스러울 만한 청정한 모양을 생각해야 하며, 들뜸을 끊기 위하여 응당 다시 대략 껴잡아야 한다 」고 하셨다. 어떻게 취자심상경에서 말씀하셨느냐 하면 저 경에서 말씀하시기를, 「자심(自心)의 모양을 취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마음으로 하여금 가라 앉게 하며, 약간의 사랑스러울 만한 바깥 모양을 취하므로 말미암아 가라 앉음에 딸린 번뇌[隨煩惱]가 잠시 동안 쉬게 된다. 그러나 마음의 안정을 얻지 못했으면 다시 그 마음을 대략 껴잡아 가라 앉는 허물을 보면 다시 바깥 모양을 취하고 들뜸의 허물을 보면 그 후 다시 자심(自心)의 모양을 취해야 한다. 그 때에는 능히 가라 앉음과 들뜸의 딸린 번뇌를 끊게 되어 마음이 바른 정(定)을 얻게 되리니 대략 그 마음을 껴잡고 자심(自心)의 모양을 취하여 가라 앉음과 들뜸을 떠나기 때문이라 」고 하셨다.
016_0149_a_01L다시 다음으로 상응도(相應道)를 관찰함으로 말미암아 능히 번뇌를 버리게 된다고 알아야 하나니 안경(鷃經)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그러므로 저 경[鷃經]에서 말씀하시기를, 「말한바 뱁새란, 수행자의 심행(心行)을 비유함이요, 해알 곳이 아니라 함은, 저 수행자가 사랑스러운 경계만 생각함을 비유함이요, 매에게 잡힘을 당한다 함은, 저 수행자가 탐냄의 속박에 집착됨을 비유함이요, 뱁새의 한탄과 하소연이라 함은 저 수행자가 마음에 뉘우침을 비유함이요, 잠시 동안 석방됨이란, 저 수행자가 탐냄의 속박을 잠시 쉬게 됨을 비유함이다. 그리고 또 흙덩어리라 함은, 5취온(取蘊)을 비유함이요, 큰 밭두둑이라 함은, 무상관(無常觀)을 비유함이요, 굴이라 함은 진여관(眞如觀)의 통달함을 비유함이요, 매를 부름이라 함은, 관찰과 작의(作意)를 비유함이요, 매가 빨리 온다 함은, 저 탐냄의 속박이 장차 앞에 나타남을 비유함이요, 굴속에 들어간다 함은, 진연관의 생각함을 비유함이요, 매가 스스로 괴롭히고 해친다 함은, 수면(隨眠)이 끊어짐을 비유함이라 」고 하셨다.
증상만(增上慢)을 끊기 위해서이며 애미(愛味)에 의한 뒤바뀜과 3심(心)에서 나아감을 위하여 념주(念住)를 닦아 익히네.
016_0149_a_15L“爲斷增上慢, 味所依顚倒, 及三心趣入,
修習於念住。”
016_0149_b_01L 논하건대, 증상만(增上慢)을 다스리기 위하여 애미(愛味)에 의한 정[定]을 다스리기 위하며, 또는 네 가지 뒤바뀜[四顚倒]을 다스리기 위하여 념주(念住)를 닦는다. 증상만을 다스리기 위함이란, 경에서 말씀하시기를, 「유독 이 몸과 느낌과 마음과 법에 대해서 만일 기억하여 생각함에 머무르거나 나아가서는 혹 지혜가 있거나, 혹 봄이 있거나, 혹 생각을 매어두는 일이라 」고 하셨다. 그 증상만에는 두 가지가 있나니 몸 따위의 거칠고 중한 장애를 끊지 못해서 일어난 것과 지관(止觀)을 합해서 다스림을 원만하게 하지 못한 데서 생기 것을 말한다. 애미(愛味)에 의한 정(定)을 다스리기 위함이란, 경에서, 「의지할 바가 없기 때문이라 」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뒤바뀜을 다스리기 위함이란, 경에서 말씀하시기를, 「온 세상에 대해서 조금도 고집하거나 취함이 없으면 그 뒤바뀜이 끊어짐으로 말미암아 다시는 조그마한 5취온(取蘊)에 대해서 항상함이며, 즐거움이며, ⧼나⧽이며, 깨끗함이 된다고 고집하지 아니할 것이라 」고 하신 것과 같다. 또는, 3심(心)에서 나아감을 위하여 념주(念住)를 닦아 익힌다 함은, 마을에 노닐 적에는 마음이 출행함에 나아가며, 시끄러운 곳에 있을 적에는 마음이 그를 멀리 떠나려는 곳을 향해 나아가며, 고용한 방안에 있을 적에는 마음이 열반으로 나아감을 말한다. 또는, 나고 죽음을 벗어나는 곳으로 나아가며, 번뇌를 떠나는 곳으로 나아가며, 적멸(寂滅)을 좋아하는 곳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마음이 열반으로 나아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