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개 내가 듣건대, 하늘과 땅[二儀]은 형상[像]이 있어, 만물을 덮고 실음으로 모든 생명을 품고 있음이 드러나고, 네 계절[四時]은 형태[形]가 없어, 추위와 더위가 번갈아 가며 만물을 기르는 것이 감춰져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하늘과 땅을 자세히 살펴봄으로, 평범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모두 하늘과 땅이 운행하는 이치의 실마리를 알게 되지만, 하늘과 땅의 이치인 음(陰)과 양(陽)을 명확히 꿰뚫어 보는 데에는,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그 변화의 모든 수를 다 아는 것은 매우 드물다. 그러나 하늘과 땅이 음양의 원리를 담고 있음에도, 음양의 이치를 쉽게 아는 것은 하늘과 땅이 형상이 있기 때문이요, 음양의 이치가 하늘과 땅에 담겨있을지라도 그 이치를 온전히 다 알기 어려운 것은, 음양의 변화는 형태가 없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의 형상이 겉으로 드러나 그것을 파악할 수 있으면, 비록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미혹되어 이해하지 못할 것이 없고, 음양이 변화하는 모습이 감춰져 그것을 엿볼 수 없으면,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오히려 미혹되어 도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하물며 불도(佛道)는 형상이 없이 텅 빈 가르침을 숭상하고, 깊고 현묘한 진리에 오르고 완전한 고요 속의 깨달음을 이끌어서, 모든 중생을 널리 구제하고 온 세상을 맡아 다스리며, 신령한 위엄을 일으키면 위로 그 한계가 없고, 그 신묘한 힘을 억누르면 아래로 그 끝이 없으며, 그 가르침을 거시의 세계로 확장하면 우주에까지 미치고 미시의 세계로 축소하면 터럭까지도 주관하니, 소멸하는 것도 없고 생겨나는 것도 없어서 천겁(千劫)이 흘렀어도 낡지 않고, 감춰진 듯 드러난 듯 온갖 복[百福]을 주관하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졌도다. 현묘한 도는 그윽하고도 그윽하여서 그것을 아무리 좇아가더라도 그 끝을 알 수가 없고, 부처님의 법이 흘러 그 적멸의 경지에 깊이 잠기니 그 법을 아무리 퍼내어도 그 근원을 헤아리기 어렵다. 그러므로 어리석고 평범한 사람들과 초라하며 못난 사람들이, 불법의 뜻에 자신을 던지면 이 세상의 어떤 의혹도 없앨 수 있음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불교가 일어난 것은 서토(西土)를 기반으로 하였으나, 이제는 우리 당나라[漢庭]에 전해져 우리에게 희망의 환한 꿈을 꾸게 하는 것이요, 우리 중국에 부처님의 빛을 비추어 부처님의 자비가 흐르도록 한 것이다. 옛날 온 세상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에는 가르침이 아직 전해지지 않아도 교화가 이루어졌으나, 현 시대에는 백성이 부처님의 덕행을 우러러보고서야 따를 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어둠 속에 있던 사람들이 진리의 빛으로 돌아서서 법도가 바뀌고 시대가 변화함에 이르러, 이전에는 부처님 얼굴[金容]의 찬란한 빛이 가려져서 삼천대천세계[三千]를 비추지 못하다가, 지금은 부처님의 아름다운 형상이 펼쳐지게 되어 단정하신 부처님의 32상[四八之相]을 보게 되었다. 이에 부처님의 정미한 말씀이 널리 전해져서 중생을 삼도(三途)2)에서 구제하였고, 선각자들이 남긴 가르침이 널리 전파되어 중생을 십지(十地)3)로 인도하였다. 그러나 참된 가르침은 사람들이 받들어 따르기 어렵고 그 가르침의 뜻을 하나로 모을 수도 없으나, 세상에 아첨하는 가르침은 사람들이 따르기가 쉬워서 이에 참과 거짓이 얽히고설키게 되었다. 이 때문에 만물의 실체가 없다는 공론[空]과 모든 현상의 본체가 있다는 유론[有]이 더러는 옛 습속을 따라 시비(是非)를 일으킨 것이고, 대승과 소승이 때때로 세월의 흐름에 따라 번갈아 흥하고 망하게 된 것이다. 현장(玄奘) 법사라는 분이 있는데, 법문(法門)의 제일가는 스승이다. 그는 어려서 마음이 바르고 배우는 데 민첩하여 일찍 삼공(三空)4)의 마음을 깨달았고, 커서는 그 정신과 뜻이 불교의 가르침에 부합하여 먼저 사인(四忍)5)의 수행을 감당하였다. 소나무 숲에 부는 맑은 바람[松風]과 호수에 비친 아름다운 달[水月]도 그의 맑고 아름다움 성품에는 견줄 수 없었으니, 신선이 먹는 이슬[仙露]과 찬란한 구슬[明珠]을 어찌 그의 환하고 넉넉한 모습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의 지혜는 모든 것을 통달하여 얽매임이 없고, 그의 정신도 모든 것을 헤아리며 막힘이 없어서, 이미 육진(六塵)6)을 초월하고 멀리 벗어나니, 아득한7) 옛날부터 지금까지 그와 상대할 자가 없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내면을 닦는 데 모든 마음을 쏟으며, 불교의 정법(正法)이 업신여겨지고 쇠퇴함을 슬퍼하였고, 불문[玄門]을 깊이 고찰하여 불법의 심오한 경문이 잘못 전해짐을 안타깝게 여겨서, 불교 경문을 조리에 따라 이치에 맞게 분석하여 전에 들은 것들을 확장하고, 잘못된 것들은 끊어내고 참된 것들을 잇게 하여, 후학들에게 올바른 길을 열어주고자 하였다. 이 때문에 그의 마음은 부처님이 계신 곳[淨土]으로 향하게 되어 멀리 서역(西域)으로 떠나게 되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멀리 떠나 지팡이 하나에 의지하여 홀로 여행을 하니, 쌓인 눈이 새벽에 이리저리 날리는데 길에서 갈 곳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모래 바람이 저녁에 갑자기 일어남에 텅 빈 밖에서 갈 방향을 잃기도 하였다. 만리(萬里)를 가며 만난 산과 강을 지날 때에도 자욱한 안개와 노을을 헤치고 자신의 그림자만 보고 용감히 나아갔고, 온갖 추위와 더위 속에서도 서리를 밟고 비를 맞으며 묵묵히 앞으로 발을 디뎠다. 부처님에 대한 간절한 마음을 중히 여기고 자신의 수고는 가볍게 여기며, 자신의 깊은 바람이 이루어지기를 간곡히 구하여, 서역을 17년 동안 두루 다녔다. 그동안 불도가 전해진 지역을 모두 다니며, 정교(正教)을 묻고 구하였다. 그는 쌍림(雙林)을 지나고 팔수(八水)에 이르러, 부처님의 도를 맛보고 불도의 유풍[風]을 느낄 수 있었으며, 녹야원[鹿苑]에 가고 영취봉[鷲峯]에 올라 부처님의 신비하고 기이한 유적들을 우러러볼 수 있었다. 그가 앞선 성인들의 지극한 가르침을 받들고 현인들의 참된 가르침을 이어받으며, 오묘한 법문을 깊이 탐구하고 심오한 가르침을 정밀하게 궁구하니, 일승(一乘)과 오율(五律)의 도(道)가 마음 밭에서 치달리며 뛰놀게 되었고, 팔장(八藏)과 삼협(三篋)의 문장[文]이 그의 입안에서 파도의 물결처럼 끊임없이 나오게 되었다. 이에 그는 자신이 지났던 나라들로부터 삼장(三藏)의 핵심 경문을 모두 모아 가지고 왔으니, 모두 657부(部)이다. 그리고 번역된 경문은 중국에 널리 배포되어, 그의 빼어난 공덕이 온 세상에 널리 전해지게 되었다. 그가 서역에서 부처님의 자비로운 구름을 이끌고 와서 중국에 불법의 비를 내리게 하니, 결함이 있었던 불교가 다시 온전해지고, 죄 가운데 고통 받던 중생이 다시 복(福)을 받게 되었다. 이것은 불난 집[火宅]의 활활 타는 불꽃에 물을 뿌려서 다시는 미혹된 길로 가지 않게 한 것이고, 애욕의 캄캄한 파도에 빛을 비춰 피안(彼岸)의 세계로 인도한 것이다. 이것으로 사람들은 악(惡)을 행하면 그것으로 인해 업(業)이 생겨 지옥으로 떨어지고, 선(善)을 행하면 그것으로 인해 극락에 오르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극락에 오르고 지옥에 떨어지는 실마리는 오직 사람이 행한 것에 근거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비유컨대 계수나무는 높은 산봉우리에서 자라므로 구름이 내리는 깨끗한 이슬만이 그 꽃을 적실 수 있고, 연꽃은 맑은 물결 속에서 꽃을 피우므로 날리는 티끌이 그 잎을 더럽힐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연꽃의 본성이 본래 깨끗하거나 계수나무의 바탕이 본래 바르기 때문이 아니라, 계수나무가 자라는 곳이 높기 때문에 탁한 것이 더럽힐 수 없는 것이요, 연꽃이 의지한 곳이 맑은 물속이기 때문에 지저분한 것이 더럽힐 수 없는 것이다. 무릇 풀과 나무가 지각이 없을지라도 오히려 좋은 조건에 의지하여 선(善)을 이루는데, 하물며 사람은 지각이 있어 복된 조건을 가지고 복을 이룰 수 없겠는가. 지금 이 경(經)이 널리 전해져서 해와 달처럼 다함없이 이어지고, 이 복(福)이 멀리 펼쳐져서 하늘과 땅과 함께 영원하고 광대하기를 바라노라.
무릇 부처님의 올바른 가르침을 세상에 드러내어 널리 전함에,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면 그 가르침[文]을 널리 퍼뜨리지 못하는 것이요, 불법의 심오한 가르침을 받들어 분명히 밝히는 것도, 현명한 사람이 아니면 그 뜻[旨]을 정확히 확정할 수 없는 것이다. 대개 진여(眞如)의 성스러운 가르침은 모든 불법의 궁극적 근원이요, 모든 불경이 따라야 할 본보기이다. 그 담긴 내용은 너무나 넓고 크며 그 오묘한 뜻은 너무나 아득하고 깊어서, 공(空)과 유(有)의 정밀하고 미묘한 이치도 완전히 꿰뚫게 하고, 삶과 죽음의 가장 핵심적인 진리도 체득하게 한다. 그러나 그 말씀은 너무 많고 복잡하며 그 도리는 너무 다양하고 넓어서, 불법을 찾는 자가 그 근원을 다 탐구하기 어렵고, 그 경문은 세상에 드러났어도 그 의미는 깊이 감추어져 있어, 불법을 실행하려는 자가 불법의 극의를 분명히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성스런 자비가 덧입혀져야 모든 중생의 업(業)이 선(善)으로 나아가고, 부처님의 신묘한 교화가 펼쳐져야 모든 세상의 인연[緣]에서 악(惡)이 끊어짐을 알게 되어, 불법의 그물[法網]이 넓게 펼쳐지고 육바라밀[六度]의 올바른 가르침이 널리 베풀어져, 모든 중생이 도탄(塗炭)에서 구원받고, 삼장(三藏)의 비밀스런 빗장[秘扃]이 열리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부처님의 이름은 날개가 없어도 오래도록 세상에 전해졌고, 부처님의 도(道)는 뿌리가 없어도 영원히 견고하게 박혔으며, 부처님의 도와 이름으로 세상에 전해진 축복은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변함이 없고, 세상에 내려와 중생을 감동시킨 부처님의 모습은 헤아릴 수 없는 겁이 흘러도 손상되지 않은 것이다. 새벽의 종소리[鍾]와 저녁의 게송 소리[梵], 이 두 가지 소리가 영취봉[鷲峯]에서 어우러지고, 부처님의 지혜의 빛[慧日]과 불법의 맑은 물[法流]이 두 개의 수레바퀴처럼 끊임없이 돌아가 녹야원[鹿苑]에서 전해졌으니, 공중으로 치솟은 보개(寶蓋)9)는 떠도는 구름[翔雲]과 함께 나는 듯하였고, 들판의 무성한 봄 숲[春林]은 천화(天花)10)와 더불어 아름다운 광채를 발하였다. 엎드려 생각건대, 황제폐하께서는 불교의 깊은 이치를 숭상함으로 복(福)을 받아, 옷을 늘어뜨리고 손을 꽂은 채로 있어도 온 세상이 다스려졌고, 그 덕(德)이 온 백성에게 입혀져, 공손히 옷깃을 여미고만 있어도 모든 나라가 고개를 숙이고 조공을 바쳤으며, 그 은혜가 죽은 자에까지 이르러 무덤에도 불교경전이 들어가게 되었고, 그 은택이 곤충에까지 미치어 금궤에도 불교의 게송이 담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드디어 아뇩달수(阿耨達水)11)가 중국의 중심12)에 흐르는 팔천(八川)13)과 통하게 되었고, 기사굴산(耆闍崛山:영취산)이 숭산과 화산[嵩華]의 푸른 봉우리와 맞닿게 되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불법의 본성은 움직이지 않고 고요하여, 온전히 불법에 귀의하는 마음이 없으면 불법을 깨닫지 못하고, 지혜의 대지는 깊고 그윽하여 간절하고 지극한 정성에만 감응하여 그 모습을 드러내니, 어찌 칠흑 같은 혼돈의 밤을 비추는 지혜의 등불이요, 화마가 휩쓰는 아침에 내리는 불법의 은택이라 하지 않겠는가. 이에 모든 하천은 다르게 흘러도 모두 함께 바다로 모이고, 모든 만물의 이치는 나누어졌어도 결국 모두 만물의 실재를 이루니, 어찌 탕왕[湯]과 무왕[武]의 우열을 비교하며, 요임금[堯]과 순임금[舜]의 성덕을 서로 견주겠는가. 현장(玄奘) 법사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였고 담백하고 소박한 삶에 뜻을 두었으며, 정신은 어린 나이에도 한없이 맑았고, 신체도 세상 사람들보다 빼어났다. 선방[定室]에서 모든 정신을 집중하고, 깊은 바위산[幽巖]에 자취를 숨겼으며, 삼선(三禪)14)의 세계에 오르고, 십지(十地)의 수행을 차례로 수행하였으며, 육진(六塵)15)의 경계를 초월하여 홀로 부처님의 땅[迦維:인도)을 밟고, 일승(一乘)의 뜻[旨]을 깨달아 그 근기에 따라 중생을 교화하였다. 현장은 중국에는 의거할 진경[眞文]이 없어 인도의 불경을 찾아서, 멀리 항하(恒河:갠지스 강)를 건너 불경을 가져오길 늘 바랐고, 이에 여러 차례 설산[雪嶺]을 넘어가 불경을 가져왔다. 도(道)를 물으며 인도에서 돌아오기까지 17년 세월 동안 불교 경전을 다 깨달아서, 만물을 이롭게 하는 데에만 마음을 두게 되었다. 때문에 정관(貞觀) 19년 2월 6일 홍복사(弘福寺)에서 조칙[勅]을 받들어, 성교(聖教)의 중요한 문장을 번역하니, 모두 657부(部)이다. 이는 대해(大海)의 법류(法流)를 끌어다가 세속의 노고를 씻어서 마르지 않게 한 것이요, 지혜의 등불[智燈]을 전하여 세속의 어둠을 비춰 항상 밝게 한 것이니, 스스로 오랜 동안 좋은 인연을 심은 것이 아니라면, 어찌 불법의 뜻을 이렇게 드날릴 수 있었겠는가. 이것은 법상(法相)16)이 항상 존재하는 것이 해ㆍ달ㆍ별[三光]의 광명처럼 분명하고, 우리 황제폐하의 복덕이 이 세상에 오는 것이 하늘ㆍ땅[二儀]의 견고함처럼 확실함을 말한 것이다. 엎드려 황제폐하께서 지으신 여러 경론의 서문을 보니, 옛일을 비추어 현재를 뛰어넘게 한 것으로, 그 이치는 금석(金石)과 같이 웅장한 소리를 담고 있고, 그 문장은 풍운(風雲)이 뿌리는 은택을 간직하고 있다. 나(治:고종의 이름)는 이에 가벼운 티끌을 거대한 산악에 덧붙이듯, 이슬을 떨어뜨려 강물에 첨가하듯 내 글을 폐하의 서문에 덧붙임으로, 간략하게 그 대강(大綱)을 들어서 이 기문을 짓는다.
016_0574_c_02L 묘한 지혜 햇빛 같아 어둠을 깨뜨리고 맑은 눈 열어 주신 이에게 머리 조아리며 일백 성인이 따라 행할 미묘한 말씀인 『광백론』을 널리 펴기 위하여 내가 해석하리라.
논하건대 삿된 집착인 ‘나’와 ‘내 것[我所]’의 일은 성품이나 형상이 모두 공함을 나타내고, 방편으로 세 가지 해탈문[三解脫門]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 이 논을 짓는다. 집착에 의해 현실[事]의 성품으로 방편이라 여기기 때문에 형상의 분별을 일으키고, 따라서 현실의 형상을 취하여 의지할 바로 여기기 때문에 삿된 소원과 좋아함을 낸다. (그러나) 이미 현실의 공함을 나타냈으므로 두 가지는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나’와 ‘내 것’이란 것이 대략 두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항상함과 무상함이다. 항상 머무는 일은 수승하여 고요하고 안락하므로 중생들은 즐겁고 맑고 넓고 함이 없다고 듣고 대체로 기뻐하는 마음을 내고, 무상한 일은 열등하여 온갖 고통을 일으키므로 중생들은 괴로움의 불길에 훨훨 타는 것을 보면 대체로 싫어하는 생각을 낸다. 그러므로 논의 첫머리에서 항상함을 부정하여 무찔렀으니, 그러기에 이런 게송을 말했다. 온갖 것은 결과로서 나타났으니 그 까닭에 무상한 성품이다 그러므로 부처를 제외하고는 분명 여래라 불릴 이가 없다
논하건대 모든 세간 사람들은 다른 이가 말한바 갖가지 상주(常主)한다는 구절이 대체로 현량(現量:눈에 보이는 것)의 경계를 초월했다 함에 구차하게도 집착하나니, 능동적으로 생긴 결과로써 비량(比量:추측한다)하여 벌려 세우기 때문이다. 이미 결과를 내었다면 인연을 따라 생겼음도 추측해서 알아야 되리니, 마치 거친 빛 따위와 같다. 만일 인연에서 생기지 않았다면 수승한 본체와 작용이 없으므로 나지 못해야 하리니, 마치 허공의 꽃 따위와 같다. 만일 그 이치가 인연에서 생겼음을 허락한다면 결정코 무너지리니 마치 생겨진 결과와 같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모든 법칙은 무상하여 인연을 따라 생멸하니, 마치 괴로움과 즐거움 따위와 같다” 하셨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만이 뒤바뀜 없이 말씀하시어서 여래라 할 수 있나니, 온갖 경계를 보는 데에 걸림없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다면 그 밖의 결과를 내는 작용이 없는 것은 항상한 것이리니, 이미 결과를 내지 못한다면 인연에서 났다고 추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이미 결가를 내는 작용이 없다면 영원히 사라져 없어진 것 같으니, 있지 않는 것이라고 추측해야 되리라. 이 말을 드러내어 그 이치를 확정시키기 위해 다시 게송을 말했다.
어떤 시간도 방위도 물건도 성품이 있어서 인연에서 생기지 아니함이 없으니 그러므로 시간과 방위와 물건은 성품이 있어 항상 머무름이 없다
논하건대 온갖 성품 있는 법은 반드시 인연에서 생겼으니, 마치 괴로움과 즐거움 따위와 같다. 만일 인연에서 생기지 않았다면 결정코 성품이 없으니, 마치 허공의 꽃들과 같다. 이것이 만일 성품이 있다면 의당 인연에서 생겼어야 된다. 만일 인연에서 생겼다면 사라짐이 반드시 뒤따라서 항상 머무를 수 없다. 이렇게 말한다.
원인은 없으나 성품만 있지 않고
논하건대 그가 아무리 애써서 방편을 벌려 항상하다는 주장을 세우나 끝내 어떤 도리로도 이런 구절의 이치는 말하지 못하나니, 세워진 바와 세우는 이에서 한 부분의 의지한 바가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 있음을 허락지 않으면 나머지는 같은 뜻이니, 동유(同喩:성격이 같은 것을 든 비유)가 빠졌기 때문에 비량(比量)으론 이뤄지지 않는다. 설사 억지로 말한다 하여도 끝내 틀린 이치를 이루나니, 무슨 까닭이겠는가. 게송에 말하기를
원인이 있다면 항상함이 아니니
논하건대 설사 그가 억지로 주장하여 항상한 성품의 원인이 있다고 하지만 이미 원인이 있다고 수긍했기 때문에 항상한 성품이 아니다. 마치 괴로움의 성한 불길에 마주 쳐서 생긴 바와 같다. 이 원인은 능히 근본을 어기나니, 생인(生因:곡식이 싹을 내는 것과 같은 경우)은 없으나 요인(了因:등불이 물건을 비치는 것과 같은 경우)이 있기 때문이다. 원인이 있다면 총괄이 되기 때문에 완전히 성립된다. 또 다시 어떤 이는 집착하기를 온갖 성품은 항상하다. 만일 온갖 것이 모두가 무상한 성품이란 주장을 세우면 모두에 동유(同喩:주장한 원인과 성격이 같은 비유이니, 사람은 무상하다. 물질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마치 질그릇으로 된 병과 같다는 예)가 빠지기 때문에 비량이 이뤄지지 않는다 한다면 이것도 옳지 못하니, 앞의 허물과 같기 때문이다. 또 그가 숨은 성품은 항상하다 하고 드러난 형상만이 생멸이 있다 하지만 이 까닭에 무상의 성품을 드러내고 항상 한 성품을 부정하기에 족하니, 그의 주장이 드러난 형상의 항상함과 있지 않음을 막아서 부정했기 때문이다. 만일 드러난 형상도 생멸이 없다고 한다면 앞 지위에 줄어듦이 없고, 뒷 지위에 늘어남이 없으리니, 온갖 논을 지은 이들은 무엇을 하였으며, 무엇을 짓는단 말인가. 만일 모든 법이 비록 숨음과 드러남이 있으나 생멸은 없다 하면 이것 역시 옳지 못하니, 앞ㆍ뒤, 두 지위에 차별이 없다면 늘고 줄음이 없거늘 어찌 숨음과 드러남이 있으랴. 또 본체를 떠나서 따로 딴 지위가 있지 않나니, 그러므로 지위에 숨음과 드러남이 있다면 본체도 그러하리라. 그대가 비록 본체에 생멸이 있다는 말을 수긍치 않으려 하나 이론에 막히기 때문에 반드시 굴복하리라. 이와 같이 세운 바 앞뒤의 두 지위는 숨음과 드러남이 항상치 않음으로써 동법유(同法喩:동유)를 삼는다. 이 까닭에 나의 주장은 그대의 주장과 같지 않으니, 항상함을 세우면 동유는 결정코 없기 때문이다. 또 세운 바 정의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어야 한다. 마음을 일으킬 뿐으로써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다음의 게송에 말했다.
그러므로 원인이 없이도 이뤄지길 바라는 것 참 소견을 가진 이는 그런 일 없다 하네.
논하건대 모든 비량은 남이 허락지 않는 정의를 성립시키기 때문에 능립(能立:능동적으로 성립시킨다)이라 한다. 만일 바른 이유를 떠나서 말뿐이고 헛되이 자기의 뜻을 펴면 정의는 끝내 성립되지 않는다. 말 만 있고, 이유는 없이 정의가 이뤄진다면 온갖 주장은 모두가 이뤄지겠지만 설사 모두가 이뤄진다 한들 그대는 지금 무엇을 아까와 하는가. 나도 아까움이 없다. 그 스스로가 이루지 못할 뿐이다. (원인 없이) 온갖 것이 모두 이뤄진다 함은 그대 자신도 허락하지 않았다. 또 다시 이 밖에 어떤 이는 치우쳐 인명론(因明論:베타)에서 소리는 항상하다 함을 치우쳐 집착하여 말하기를 “처음에 인연을 기다리지 않고 나중에 무너짐도 없다. 성품 그대로가 훤히 드러나서 모든 감관을 초월하는 이치는 결정적인 법칙이어서 일찍이 어긋난 적이 없다. 현량(現量)과 비량(比量) 따위는 사부(士夫:사람)의 견해인데 사부는 실수가 있고, 견해는 의심의 원인이 된다. 그러므로 능동적으로 의지하는 요량[能依量]은 모두 믿기 어렵다” 하나니, 이것도 옳지 못하다. 앞서 말한 사량 안는다는 것의 허물과 별로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의지할 바인 사부와 소견이 모두 허물이 있으므로 능동적으로 의지하면 모든 요량에도 실수가 있다고 한다면 그대와 그대의 스승의 견해와 언론도 이미 허물이 있었거늘 어떻게 믿는가. 그대가 하는 말은 도리어 스스로를 해친다. 만일 그대가 생각하기를 ‘그대와 그대의 스승이 한 말도 결정적인 요량이요, 다른 이의 말은 틀리다’한다면 비량이 없고, 또 자기 종지(宗旨)만을 사랑하는 것이며, 나아가서는 자기의 세운바 종지에 어기는 것이다. 또 비량으로서 ‘인명론’에서 주장한 바인 소리는 사부가 지은 바가 아니어서 본체가 항상하다고 세운다면 원인과 동유가 이루어져야 되리라. 설사 이뤄진다 하여도 역시 스스로 해칠 것이다. 또 인명론에서의 소리가 그 밖의 소리와 같이 소리의 성품이라면 어째서 이 소리만이 항상하고, 나머지 소리는 무상이라고 하는가. 또 다른 사람들은 소리가 무상하다고 허락하나니, 사부가 지은 바이기 때문에 항상치 않거니와 지금은 허락지 않으므로 항상 머문다고도 말하지 말라. 법성은 결정된 것인데 어찌 말하는 이가 허락하고 허락지 않음에 따라 항상함이나 무상함이 되랴. 온갖 법성은 견해의 차별이 따라서 그 본체도 따라 변한다 하지도 말라. 한 물건이 동시에 여러 가지 형체가 있어 서로 서로 어기는 것이 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법이 인정의 계교에 따라 변한다면 의당 자기의 종지를 버리고 남의 견해를 취해야 될 것이다. 또 항상함을 주장하는 이가 말하는 바는 오직 다른 법에만 의존하고 같은 법은 없기 때문에 주장하는 바가 성립되지 않는다. 아니면 자기의 뜨승ㄹ 버려야 되리라. 그러므로 그의 종지는 미루어 따질 필요조차 없고, 오직 거짓말뿐이어서 도무지 진실함이 없다. 또 다시 어떤 이는 집착하여 말하기를 “이법유(異法喩:동법유와 반대이니, 주장한 원인과 반대되는 비유)만으로도 세움이라 할 수 있으니, 다른 법이 두루했기 때문이다. 비량은 본래 다른 이의 뜻을 막기 위한 때문이며, 눈앞에 보이는 서로 섞인바 인연을 막아서 정의를 드러내기 위한 때문이라”한다. 이 이치를 결정되게 하기 위하여 다시 말하기를 “온갖 지은 바가 무상이라면 짓지 않은 것은 항상 머무르리라” 이 말은 다른 법이 결정적이라 함을 드러내기 위함이라 하는데 이것도 옳지 않다. 자기의 말을 따라 여실히 바른 이치를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다른 뜻으로 막은 바 일가 경계만을 동유라 하기 때문이다. 이법유(異法喩)라 함은 두 부분이 같이 시행되어야 두루한다 하는데 만일 동유가 없다면 무엇이 두루했으랴. 자기 스스로가 두루했다고도 말하지 말라. 또 다른 비량이 딴 정의를 막으려 한다면 반드시 동법유(同法喩)가 있은 뒤에야 성립된다. 동법이 없다면 이법도 있지 않으리니, 그 동법과 이법의 두 무더기를 떠난 이외에 딴 구절도 정의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까닭에 눈앞에 서로 섞인 바 인연을 막아서 정의를 드러낸다 함을 부정하여 무찌른다. 또 지은 바를 원인으로 한 것이 보이지 않음으로써 항상 있는 것이라 하려면 끝내 까닭이 없나니, 어디에도 있는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게송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어진 바가 무상한 것을 보고 짓지 않은 것은 항상하리라 하나 이미 무상함이 있다고 보았으면 항상한 성품은 없다고 해야 하리
논하건대 지은 바는 모두가 무상하다고 보고, 짓지 않은 것은 모두가 항상하다고 여기면 이미 지은 바에 무상한 성품이 있다고 보았으므로 짓지 않은 것의 항상한 성품은 없다고 해야 되리라. 온갖 지어진 바가 본체가 있음을 허락한다면 지어진 바 아닌 것은 본체가 없다고 해야 하리라. 짓지 않은 원인은 즐거움 따위가 있음의 경지에서는 일찍이 보지 못하든 바이지만 거북의 털 따위 없음의 경지에서는 모두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짓지 않음은 능립(能立:주장함)의 의지할 바 제 모습을 해치므로 바른 능립이 되지 못한다. 그렇지 않은가. 모든 상위인(相違因:짓지 않은바)은 자기나 남이나 다 인증하는 바임을 막지 않는다면 스스로의 경지에서 능립은 자상차별(自相差別)과 어길 것이나 이제 이 의지하는 바는 모두가 있다고 허락한다. 만일 함께 허락하지 않는다면 항상함과 무상함을 다툴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짓지 않음의 원인은 의지할 바의 제 모습을 어기지 못한다. 어떤 이가 이 말을 해석하기를 나는 이제 모이는 극미(極微) 이외에 흩어지는 극미가 있음을 허락지 않노니, 그러므로 이 어기는 원인은 스스로를 해치는 실수가 없다 하는데 이 해석은 옳지 못하다. 그는 전체의 형상에 의하여 건립하기 때문에 온갖 항상한 법이 있다고 여기지만 어찌 헛되이 모이고 흩어지는 유와 무를 분별할 필요가 있으랴. 이렇게 해석한다면 허공 따위의 무위는 도무지 있는 것이 아니라 하여도 잘못이라 하지 못하리라. 빛 따위의 극미는 세속에 의하여 있다고 허락한다 하여도 그는 지은 바이기 때문에 짓지 않는 바로서의 원인은 성립되지 않는다. 만일 이렇게 이뤄지지 않는 원인 위에서 서로 어긴다는 허물을 지으려 해도 이뤄지지 않으리라. 게송에서 말하기를 “항상한 성품은 없다고 해야 하리라”한 것은 바야흐로 의지한바 ‘공’ 따위의 성품이 있다함을 무찌르고 겸하여 의지하는 것의 항상하다는 성품까지도 없다고 변명한 것이다. 만일 허공 따위는 실제로 존재하는 성품이 없고, 의지하는 바도 없기 때문에 원인이 될 정의도 성립되지 않거늘 어찌 있는 법의 제 모습을 해치랴 한다면 이것도 옳지 못하니, 오직 온갖 존재하는 물건들을 막아 버림으로써 이의 원인을 삼기 때문이다. 원인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본체가 있는 법이니, 지은 바 따위와 같고, 둘째는 본체가 없는 법이니, 짓지 않은바 따위와 같고, 셋째는 두 가지 법이 통하니 아는 바 따위와 같다. 지금 세우고 있는 원인은 오직 지은 바를 막을 뿐 짓지 않은 것의 제 성품을 따로 말하지 않았다. 이 원인은 같은 종류인 빛 따위의 위에는 없고, 다른 종류인 거북의 털 따위에는 있으니, 그러므로 있는 법의 제 모습을 해치지 않는다. 또 게송에서 말하기를
어리석은 범부는 허망하게 분별하여 허공 따위를 항상하다 하거니와
논하건대 갖고 있는 소견마다 하나도 실함이 없고, 지혜가 밝지 못하므로 어리석은 범부라 한다. 항상 따지고 생각하는 경지에 편안히 들어 앉아 모든 법의 성품과 형상을 분별하고 추구하는데 그 중에도 지혜와 견해가 특이한 이는 허망하게 계교하고 헤아리는 길을 뛰어 넘어 행하고, 제각기 아는 바를 자세히 하여 고만하게 굴고, 서로서로 딴 주장을 세워 멋대로 스승과 제자의 차서를 이루나 모두가 분별과 소견의 그물을 없애지 못하고, 무명(無明:어리석음)의 졸음이 마음을 뒤덮었다. 마치 꿈속에서 반연하는 바는 모두가 허망한 것 같았고, 꿈속의 지혜로 계교하는바 허공 따위가 항상 머물거나 실제 존재한다고 믿는 것 같지는 않았다. 또 다시 어떤 석자(釋子:문사)들은 허공 따위가 실제로 있어 항상 머문다고 집착한다. 그러므로 계경(契經:경)에 말씀하시기를 “허공은 빛도 없고, 볼 수도 없고, 대할 수도 없거늘 어디에 의지했으랴. 그러나 광명에 의해서 허공이 드러난다” 하였다. 이 경의 뜻은 실제로 허공이 있어 항상 머무는데 빛도 볼 수도 대할 수도 없으며, 더욱이 의지할 곳도 없다. 오직 광명에 의해 나타날 뿐이다 하는 것이다. 혹 어떤 이는 의심하기를 부처님께서 따로 의지하는 바가 있어 마치 풍륜(風輪:세계를 지탱하고 있는 바람 계층) 따위와 같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으니, 이런 허공은 의당 본체도 형상도 없으리라 하는데 이런 의혹을 풀기 위해 허공은 대할 수 있는 광명 따위의 빛을 용납한다 함으로써 결과를 들어 원인이 실제 본체와 형상이 있음을 드러낸다. 또 말하기를 “허공은 바람의 의지가 되나니, 본체와 형상이 없지 아니하여 남의 의지가 되는 것이라” 하는데 이것도 옳지 못하니, 경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허공이 결과가 있는 법칙이라 한다면 반드시 생멸이 있어야 되리니, 생멸이 따르기 때문에 본체가 무상함이 마치 물질이나 마음 따위와 같으리라. 만일 생멸이 없다면 의당 본체와 형상이 없음이 마치 거북의 털 따위와 같으리라. 풍륜이 같은 종류의 무더기를 떠나서는 별로 의지한 이가 없는 것이 마치 지륜(指輪:지구의 표면) 따위와 같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경에서 말하기를 “풍륜이 허공에 의해 있다 하여 풍륜을 막지 않았다. 앞생각과 현재가 같은 무리이며, 같은 무더기가 되어 의지할 바를 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다. 또 허공에는 같고 다름이 일어날 의지가 없음이 마치 과거 따위와 같아서 따로 상주하는 본체의 형상이 없음을 드러내기 위하여 경에서 다시 말씀하시기를 “허공은 빛도 볼 수도 대할 수도 없거늘 어디에 의지하리오” 하였다. 실제로 존재하는 빛 따위 물건을 보지 못하면 같고 다름이 일어날 의지는 없다. 또 허공을 드러내는데 광명 따위에 의존함은 세속 진리에 의해서 거짓으로 있다고 시설한 것이다. 마치 빛 따위에 의하여 병 따위를 거짓으로 세우는 예와 같다. 그러므로 다시 말하기를 “그러나 광명의 힘을 빌려 허공이 드러난다” 하였다. 이 말에 따라서 말하기를 “허공은 광명 따위를 떠나서 실제로 본체와 형상이 있다”고 말하지 말라. 어둠의 그림자를 보고도 허공을 세우나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는 눈에 장애가 있다. 혹 이것을 제하고는 아무 것도 보이는 바 없어서 딴 물건이 있고 없음을 분별하지 못하나니, 그 까닭에 그러나 어두운 그림자로 인하여 허공이 드러난다 하지 않는다. 광명 속에서는 눈에 아무런 장애도 없나니 만일 허공에 아무런 장애가 없다고 보면 곧 이에 의하여 허공을 건립한다. 또 허공의 거짓도 있는 것이 아니라고 비방하지는 말라. 그러기에 허공이 없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또 허공이 실제로 본체와 형상이 있으므로 온갖 광명을 빌려서 드러나는 것이라면 의당 푸른 빛깔 따위 같이 빛도 볼 수도 의지할 수도 있어야 할 것이며, 경에서는 빛도 볼 수도 대할 수도 의지할 수도 없다고 하지 않았어야 된다. 세속의 거짓 있는 것이라면 허물이 없다. 걸림 없는 빛 따위에 의하여 거짓으로 허공이란 것이 성립되나니, 막히는 물질 따위의 성품이 상응(相應)치 않기 때문이다. 또 이 허공은 4제(諦)에 속하지 않는다. 비록 실제로 있다고 집착하더라도 끝내는 반드시 유분별지(有分別智)에게 알려지고야 만다. 오신식(五識身:전5식)에 의해 일으켜진 의식(意識)을 제하고는 그 밖의 유루(有漏)의 일정치 않은 겉 부분의 분별의식(分別意識)은 실제로 있는 경지를 결정코 반연할 수 없다. 그러므로 게송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혜로운 이는 세간에 의지하면서도 그런 이치를 보지 않는다.
논하건대 지혜로운 이는 세간에 의지해서 분별식(分別識)을 따라 허공 따위를 정밀히 연구하여 그 실제의 정의를 찾으나 조금도 얻지 못하고 오직 이름에 의해서 일어난 분별에 의하여 허공 비슷한 갖가지 형상을 볼 뿐이다. 또 다시 앞에서 집착하기를 허공 따위가 두루 꽉 찬 것이므로 본체가 실제로 있어 항상하다는 주장을 깨뜨리기 위하여 다음 게송을 말한다.
한 유분(有分:허공)이 온갖 부분에 두루함이 아니니 그러므로 낱낱 부분에는 제각기 따로 유분이 있다
논하건대 때와 방위와 물건과의 종류는 제각기 차별된 것이다. 그러기에 부분[分]이라 한다. 허공 따위는 그런 여러 부분과 상응하기 때문에 유분이라 한다. 하나의 유분만이 진실히 상주하여 온갖 부분에 두루 상응하는 것은 아니다. 또 이제 이 상응한바 부분으로 하나하나에 두루하여 온갖 것에 상응하게 하지도 말라. 그러므로 이 유분은 상응하는바 모든 부분의 차별에 따라 무량한 부분이 된다. 즉 이 여러 부분은 딴 의지를 기다리지 않고 허공 혹은 딴 어떤 물건으로 불린다. 그러므로 그대가 말한바 진실로 있고, 항상 머문다는 허공 따위, 두루한 원인의 정의는 성립되지 않는다. 만일 말하기를 “허공 따위도 분별에 의하여 방위와 부분을 거짓 세웠으므로 허물이 없다”고 한다면 이것 또한 옳지 못하다. 실제로 방위와 부분이 없으나 앞에 말한 허물을 여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병 따위들도 역시 거짓으로 방위와 부분을 세운 것이나 제1의제에 의하건대 방위와 부분은 실제로 없다. 이 원인은 오직 이법(異法)에만 있고, 동법(同法)에는 없으니, 정의와는 퍽 어긋난다. 또 허공 따위 차별된 이름과 말들이 오직 온갖 부분의 화합에 의해 세워졌으니, 분별해서 거짓 세움으로써 방위와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마치 저 여러 가지 빛 따위의 화합에 의해 궁전 따위 갖가지 이름과 말이 성립되었다. 이 뜻은 허공이란 단어 등이 오직 세속의 경계에 의하여 세워졌음을 드러낸다. 또 방위의 부분이 있다고 한다면 의당 푸른빛 따위가 항상하고 두루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진실로 허공 따위의 성품이 있다면 이는 세우는 쪽이나 세워진 편의 한 부분과 의지할 바가 성립되지 못한다. 또 다시 어떤 이는 집착하기를 시간은 진실하고 항상하나니, 종자들이 뭇 인연이 화합하면 때로는 결과를 내고, 때로는 결과를 내지 않고, 때로는 작용을 한다. 혹은 펴지고, 혹은 오므려서 가지나 회초리가 피었다 졌다 하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한 원인에는 여읨과 합함이 갖추어 있으니, 이 까닭에 시간은 실제로 있는 것임을 결정적으로 알겠다. 시간이 기다리는 원인은 전혀 볼 수 없나니, 원인을 볼 수 없기 때문에 남[生]이 없고, 남이 없으므로 멸함도 없고 남과 멸함이 없으므로 다시 항상하다 하나니 그러한 집착을 깨뜨리기 위하여 다음의 게송을 말했다.
만일 법의 본체가 실제로 있다면 폈다 오므렸다 하는 작용을 보리라 이는 결정코 상대에서 생긴 것이니 그러므로 생겨진 결과가 된다
논하건대 시간의 작용은 펴고 오므림에 상대방에 의해서만이 성립된다. 그러므로 이 시간의 작용은 인연을 따라 변화한다. 본체와 형상이 있으되 취하고 버리는 차별이 없다면 온갖 작용과 흥폐(興廢)가 어찌 이루어지랴. 또 시간의 작용은 상대방에 의하여 변화하여서 마치 땅ㆍ빛 따위와 같이 결정코 무상하다. 만일 이것으로서 동법유를 삼는다면 작용이 의지하는 바인 시간이 어떻게 항상 머무를 수 있으랴. 그러므로 시간의 원리에 능숙한 사람은 말하기를 “업의 바람 따라 일어난 4대의 종자의 차별됨이 끼리끼리 원인이 되어 차례차례 계속하여 빙빙 돌아 번갈아 바꾸면서 마쳤다간 다시 시작한다. 인연을 따라 차고 더운 촉감이 달라지는 부분들의 차별을 시간이라” 한다. 시간에는 비록 인연과 생멸이 갖추었으나 비슷하게 상속함이 드러나지 않아 알기 어렵다. 그러나 어찌 알지 못한다 하여 원인 따위가 없다고 하겠는가.
또 다시 어떤 이가 집착하기를 시간의 본체는 항상하기도 두루하기도 하여 한량없는 차별진 공능을 포섭해 가졌다가 바깥 인연이 맞으면 온갖 작용을 일으키어 싹과 줄기 따위의 결과가 저절로 생긴다 하는데 이것도 옳지 못하다. 의지하고 있는 바 시간의 본체에 변천이 없다면 의지한 공능에 어찌 맞음이 있으랴. 의지하고 있는 바 종자 따위에 변함이 없는데 싹 따위가 자라나는 공능이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 이 출현하는 공능과 인연에 싹과 줄기가 생기어 이뤄지는 작용이 채워져 있거늘 어찌 허망하게도 작용 없는 시간을 논의하려 하는가. 또 게송에 말하기를
생겨진 결과를 떠나서는 생기게 할 원인이 없으니 그러므로 생기게 할 원인은 모두가 생겨진 결과를 이룬다.
논하건대 모든 법은 반드시, 스스로가 낸 결과에 수승한 본체와 작용이 있기를 기다려서야 바야흐로 원인이라 불린다. 내어진 바가 없으면 내는 이가 어찌 있으랴. 이 까닭에 집착하고 있는바 내는 원인[能生因]은 반드시 땅 법을 기다려서야 다른 원인을 이루나니, 그러므로 괴로움과 즐거움 따위는 결정코 무상하다. 어찌 원인의 법에 먼저부터 체용(體用)이 있다가 나중에 결과가 생길 때에야 원인의 이름이 바야흐로 드러남이 마치 밖의 뭇 인연에 먼저부터 체용이 있다가 결과의 법이 생긴 뒤에야 인연이란 이름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니랴. 시간도 그러하여서 그 본체가 항상하고 두루하여 갖가지 내고 자라게 하는 공능을 포함하고 있다가 모든 결과가 생길 때에야 작용이 바야흐로 드러났다 한다. 또 결과가 아직 나기 전에라도 원인이란 이름을 얻을 수 있으니, 장차 결과를 기다리기 때문이니, 마치 벼나 보리의 종자와 같다. 그대가 주장하기를 “시간은 그 본체가 항상하고 두루하여 갖가지 자라게 하는 공능을 갖추고 있다” 하니, 모든 공능과 본체가 다르지 않다면 공능은 본체와 같아서 하나하나가 두루하고 항상하리라. 그렇다면 작용을 일으켜서 한 결과를 낼 때에 한 결과의 곳에서 온갖 결과를 내게 하리라. 그렇다면 원인과 결과가 혼란함을 이루리라. 내가 주장하는 공능은 생겨진 결과를 바라보건대 결정적인 것이므로 이런 실수가 없거니와 그대가 주장한 공능은 하나하나가 항상하고 두루하므로 시간과 장소가 결정된 것이라고 얼른 허락할 수 없다. 만일 그대가 말하기를 “논주가 세운 공능도 이 허물과 같다”고 한다면 이것 또한 옳지 못하니, 내가 세운 공능은 인연에 의하여 갖가지 차별이 있거니와 두루함도 아니고 항상함도 아니건만 스스로의 인연을 따라 갖가지로 차별되어 생겨진 결과의 시간과 장소가 결정된다. 그러므로 작용을 일으켜 한 결과를 낼 때에 한 결과의 장소에서 온갖 결과를 두루 내는 잘못이 없다. 그러므로 인과가 혼란되지 않는다. 그대가 주장한 시간과 공능이 모두 두루하고 항상하며 앞과 뒤가 다르지 않다는 것과는 다르다. 그러므로 그대에게만 혼란의 실수가 있다.
모든 법은 반드시 변한 뒤에야 다른 것이 생길 원인이 되나니 이렇듯 변하는 원인을 어떻게 항상 머무는 법이라 하랴
논하건대 세간은 모두가 공능의 의지가 되는 종자 따위의 법이 반드시 앞의 지위를 버리고 뒤의 지위를 취한다. 본체와 형상이 뒤바뀌면서야 비로소 싹 따위 생겨진 결과의 원인이 된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이러한 원인의 성품은 이치에 있어서 잘못이 없다. (그대가) 세운 항상한 원인도 이와 같으니, 본체와 형상이 뒤바뀌어야 바야흐로 원인이 되리라. 이미 뒤바뀐다는 사실을 허락한다면 항상 머무를 수가 없으리라. 어찌 세간에서도 종자 따위에서 결과가 나기 전의 지위와 본체나 형상이 뒤바뀌기 전에 아무런 작용은 없으나 원인이라 부를 수는 있다고 허락하지 않던가 하거니와 그렇지 않다. 세간이 비록 거짓 이름으로 말했지만 실제 종자 따위는 사라질 지위에 이르러서 결과를 낸 뒤에야 비로소 원인이란 이름을 얻게 된다. 종자 따위는 그럴 때엔 반드시 뒤바뀜이 있다. 감관과 티끌이 멸하지도 않고 변함도 없는데 작용이 있어서 온갖 의식을 내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도 역시 본체와 형상이 멸하여 뒤바뀜으로써 모든 의식을 내는 것이기 때문에 어긋남이 없다. 또 어떤 스승은 말하기를 “감관과 티끌로써 의식을 바라보건대 싹과 종자 따위의 생멸하는 도리와 같다. 온갖 인과의 법은 때가 동일치 않다” 하니, 이 힐난은 저것에 견주면 퍽이나 성근 것이 된다. 또 다시 어떤 외도는 집착하기를 “자연인 원인의 본체는 항상하여 생멸과 변화가 없다. 자연으로써 원인을 삼아 온갖 결과를 낸다” 하나니, 이런 집착을 깨뜨리기 위하여 게송에서 이렇게 말했다.
본래는 없다가 이제 있어서 자연과 항상함이 원인이라면 자연이 있다고 이미 수긍했기에 원인이란 허망하게 세워졌으니
논하건대 만일 온갖 법이 본래는 없다가 이제 있는데 자연과 항상함으로써 원인을 삼는다 하면 법이 으레 자연스러워서 본래 없다가 이제 있을 것인데 어찌 허망하게 자연함과 항상함이라는 원인을 세울 필요가 있으랴. 왜냐하면 이미 자연이라고 허락했기에 인연을 기다리지 않기 때문이다. 또 본체가 자연하고 항상하여 변함이 없다면 결과가 나기 전의 지위에서는 이미 능동적으로 내는 것이 아니었고, 결과가 난 지위에서도 그러할 것이니, 앞뒤의 지위가 하나이기 때문에 원인의 이치가 성립되지 않는가. 자연과 항상함을 계교하면 두 가지 실수가 있으니, 이른바 결정된 인연이 능히 끼리끼리의 제 결과를 낸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생겨진바 거친 결과가 있는 것을 보고 스스로가 허락한 미미한 항상함의 원인이 있음을 증득하지 못한다. 만일 말하기를 “자연(自然)은 반드시 뭇 인연이 화합해서 도와야 바야흐로 결과를 낸다. 뭇 인연이란 비록 차별된 것이나 화합할 때엔 자연을 도와서 총체적인 작용을 일어나게 한다. 이 하나의 총체적인 작용은 본래는 없다가 이제야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의 본체는 비록 항상 있으나 먼저는 결과를 내지 않다가도 나중에야 비로소 낸다”고 한다면 이것 또한 옳지 못하다. 자연이 항상 있다면 어찌 뭇 인연은 항상 화합하게 하지 못하랴. 뭇 인연이 화합할 때에 그 성품이 비록 다르나 서로가 도와서 하나의 결과를 낸다. 이 밖에 따로 총체적인 작용을 얻을 수 없다. 또 자연의 성품은 비록 뭇 인연이 함께 화합한 지위에 있더라도 나지 못하나니, 본체가 다르지 않기 때문에 아직 나지 않은 지위와도 같다. 항상 머무는 법의 체상은 응연(凝然)해서 바뀌지 않거늘 무엇을 반연하여 남을 도우랴. 만일 자연이 인연을 따라 뒤바뀐다면 생겨진 결과와 같아서 무상이어야 되리라. 그러므로 무상의 여러 인연만이 서로서로 도와서 수승한 체용을 일으키니, 앞 지위와는 달라서 능히 그 결과를 내며, 그가 세운 바 항상함이 앞의 허물을 여의는 것도 아니다. 또 다시 어떤 외도들은 항상함의 원인을 세우기를 시간은 바뀜 없이 능히 결과를 낸다 하는데 이것 또한 어긋나는 원인으로써 비유를 삼았다 하여 막아야 되겠다. 또 게송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째서 항상함의 성품에 의하여 무상의 결과를 일으키겠는가 인과의 형상이 같지 않은 것 세상에선 아무도 본 적이 없다
논하건대 모든 현실의 일어남은 반드시 스스로의 원인과 비슷하다. 그러므로 딴 종류의 결과를 낸다고 말하지 못한다. 어찌 보지 못했는가. 월애주(月愛珠)에서 맑은 물이 흘러내리니, 인과가 다른 종류로 나타난다고는 나도 말하지 않는다. 원인에서 생긴 결과의 모든 체상은 모두가 동일하다. 다만 인과가 서로 내는 이치 가운데서 서로 여읠 수 없는 형상이 결정적으로 비슷함을 말할 뿐이니, 세간에서는 일찍이 이와 같이 인과의 같지 않은 행상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세간에서는 거칠고 무상한 결과가 모두가 저 무상의 원인에서 나지 않는 것이 없음을 보고, 미세한 결과도 무상이기 때문에 마치 거친 결과와 같이 결정코 무상함을 원인으로 삼는 줄 미루어 안다. 그러므로 빛 따위 인과의 성품의 법은 무상의 형상과 절대로 여읠 수 없나니, 이 이치를 결정짓기 위하여 다시 말하기를 “온갖 미세한 결과가 인하고 있는바 빛 따위는 결정코 무상하다. 결과가 무상하기 때문이니, 마치 거친 결과가 인하고 있는 빛 따위와 같다. 또 다시 어떤 이는 이런 소견을 낸다. 허공 따위는 두루하고 항상하다. 만일 한 부분에서 뭇 인연이 화합할 때엔 이 부분에 의하여 소리 따위가 발생하고, 의지한 바에 두루하여 소리를 낸다면 아주 먼 곳에서도 감관은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이런 소견을 깨뜨리기 위하여 다음 게송을 말했다.
한 부분만이 원인이요 딴 부분은 원인이 아니라면 ㅣ당 갖가지를 이룰 것이니 갖가지이기에 항상치 않다
논하건대 만일 허공 따위가 뭇 인연과 화합할 때에 한 부분만 작용이 있어서 제 결과를 내고, 다른 부분은 작용이 없어서 제 결과를 내지 못한다면 허공 따위는 부분 부분이 차별될 것이다. 부분 부분의 체용이 차별이 있으므로 소리 따위와 같이 결정코 무상할 것이다. 또 이 허공 따위는 본체가 항상하고 두루하여 능히 갖가지 제 결과의 의지할 바가 되나니, 이 갖가지 형상이 의지하는 바이기 때문에 비단이나 수(繡) 따위와 같아서 무상한 것임을 증명할 수 있다. 또 앞에서 말하기를 “항상한 법은 응연(凝然)하여 바꿔칠 수 없다” 하였으니, 인연이 어찌 도울 수 있으랴. 계교하고 있는바 허공 따위도 이러할하리라. 본체가 이미 상주하는 것이라면 뭇 인연이 합한다 하여도 어떻게 소리 따위 제 결과를 내리오. 또 다시 어떤 이는 이런 소견을 내기를 한 부분이 일어날 때에 한 물건에만 의지하여 4대 따위 여러 결과가 차츰차츰 변해 나는 것을 차별의 늘어남이라 하는데 4대 따위 여러 결과는 변하기 때문에 무상하지만 한 물건의 제 성품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항상하다 한다. 그러나 이것도 옳지 않다. 이치가 어긋나기 때문이다. 4대 따위는 모두가 제 성품으로써 본체를 삼는데 4대 따위가 변할 때엔 제 성품도 변할 것이다. 이 까닭에 제 성품은 무상하리니, 본체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4대 따위와 같다. 또 이 제 성품은 그 본체가 두루했으므로 한 부분이 변할 때에 나머지 한량없는 부분도 본체는 다름이 없으므로 따라서 변해야 하리라. 그렇지만 한 부분과 한 법이 일어날 때에 나머지 부분과 나머지 법도 모두가 동시에 일어날 것이다. 이와 같이 전체에 모두 작용이 있기 때문에 4대 따위의 결과와 같이 모두 무상할 것이다. 또 앞의 게송으로써 이 집착을 겹쳐서 깨뜨린다. 그들의 계교에 의하건대 제 성품은 가장 수승한 세 부분이 합쳐서 이뤄진 것이니, 이른바 살타(薩埵)와 자사(刺闍)와 답마(答摩)이다. 첫째 살타는 그 성품이 명백하고, 둘째 자사는 그 성품이 들뜨고, 셋째 답마는 그 성품이 어둡다. 이 세 가지는 하나하나의 형상과 작용이 여러 가지이다. 모두가 신아(神我)가 수용하는 일이다. 신아는 생각함으로써 성품을 삼는데 생각함이 수용할 때엔 자사의 성품인 들뜸이 살타 등을 자극해서 갖가지 여럿 바뀌는 공능을 일으키게 하나니, 세 가지 법이 화합해서 한 부분에서 4대 따위를 변해 이루고, 다시 가장 수승하다고 불린다. 비유하건대 바다의 물은 조용한데 한 부분의 바람 따위의 충격을 받아 갖가지 솟구치는 파도가 되나니, 이와 같이 집착하는 제 성품의 가장 수승함에 한 부분에 작용이 있어 4대 따위를 변해 내고, 나머지 부분은 공능이 없고 변함도 없다. 이는 자체가 갖가지로 이뤄진다는 것이요, 갖가지로 이뤄지기 때문에 결정코 무상하다. 마치 4대 따위의 결과가 항상 머물지 않는 것 같다. 또 세 가지 제 성품이 하나하나에 모두 명백ㆍ들뜸ㆍ어두움 따위 여러 작용이 있는데 제 성품과 작용이 이미 본체가 같다고 한다면 성품이 작용을 따르기 때문에 여러 가지 본체를 이루어야 하리라. 제 성품의 가장 수승함에는 차별이 없기 때문이니, 그렇다면 가장 수승함의 본체도 많아져야 하리라. 제 성품의 가장 수승함이 여럿이기 때문에 응당 4대 따위와 같아서 결정코 무상하리라. 또 다시 어떤 이는 집착하기를 극미(極微)는 항상하고 진실하여서 화합하고 서로 도움으로써 이루어지는 바가 있는데 자체는 이지러짐이 없이 온갖 결과를 낸다 하나 이것도 옳지 못하다. 이치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화합했다고 한다면 반드시 방위와 부분이 있을 것이요, 방위와 부분이 있다면 결정코 무상하리라. 만일 극미가 전체가 화합하지만 방위와 부분이 없다고 한다면 이것 또한 옳지 않다. 무슨 까닭이겠는가. 게송에 이렇게 말했다.
원인 속에 있는 극미의 원상은 결과에는 있지 않으니 그러므로 모든 극미는 온 전체에 화합한 것 아니다
논하건대 모든 극미가 온 전체에 두루 화합하여 방위도 부분도 없기 때문에 조그만 부분이 합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는 모든 극미가 동일한 처소에 있다는 것이다. 실제의 결과가 스스로의 원인과 두루 화합하여 별 다른 곳이 없기 때문에 그것 역시 극미의 원상이리라. 만일 그렇다면 온갖 구절과 정의는 모두가 모든 감관으로 알 경계를 초월한다고 수긍해야 한다. 의지한 바를 보기 때문에 나머지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니, 이는 세간을 거슬리는 제 고집이다. 만일 말하기를 “실제의 결과가 비록 스스로의 원인과 온 전체에 화합하여 별 다른 곳이 없지만 헤아릴 수 있는 공덕이 싸이고 모인 힘에 의하기 때문에 그의 실제 결과도 볼 수 있다. 다시 말하건대 모든 실제 결과는 비록 머무는 곳이나 바위나 부분의 차별이 없지만 헤어릴 수 있는 공덕이 싸이고 모인 힘의 수승함에 의하여 그 의지한 바가 실제에는 크지 않건만 큰 것 같이 되고, 방위와 부분의 차별은 분명히 볼 수 있게 한다면 이는 말 뿐이요, 도무지 진실한 뜻이 없다. 내가 먼저 그대에게 따지기를 생겨진 실제 결과가 모든 극미와 다른 곳이 없다면 응당 극미와 같이 모든 감관과 경계를 초월했으리라 했는데 그대는 변명을 하지 못하고 왜 딴 말을 하는가. 만일 의지한 바가 진실하여 이와 같은 형상이 나타난다면 응당 진실의 본체를 버리고 저 의지하는 것[能依]과 같아야 되리라. 이미 딴 형상을 이룬다면 제 형상은 버려야 될 터인데 마치 파지가(頗脂迦) 구슬이 앞의 형상을 버리지 않고 다른 형상을 나타내는 것과 같다고도 말하지 말아야 한다. 그 본체는 무상하여서 앞뒤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것이 저것과 같다면 응당 진실의 본체를 버려야 될 것이다. 공덕은 진실에 의존하는데 진실의 본체가 없다면 공덕도 있지 않으리라. 진실이 없고, 공덕이 없다면 누가 어떤 현상을 나타내리오. 그러므로 생겨진 진실의 결과가 제 형상을 버리지 않고 딴 형상을 나타낸다 하지 말아야 된다. 그렇다면 공덕만이 볼 수 있으리니, 모든 진실의 성품은 모두가 감관의 경계를 초월했다는 것도 그대 스스로가 세운 종지에 어긋난다. 또 다시 어떤 이는 말하기를 “극미는 형체가 있고, 또 서로 장애하기 때문에 있는 곳이 동일하지 않다” 하나니, 이는 극미의 머무름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나 장소가 제각기 다르므로 화합하지는 못하리라. 만일 화합한다고 허락한다면 장소가 같건 같지 않건 스스로의 집착에 어기고 또 부분이 있는 허물이 된다.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극미가 생기는 곳이 제각기 다르니, 비록 끊임이 없으면서도 서로 걸리지 않는다. 제각기 한 방위에 의지해서 서로 피하면서 머무는데 싸이고 모이는 차별에 방위와 부분이 있는 듯 하며, 짬 없는 곳에서 생기어 헤맴이 있는 듯 하며, 찰나의 전후가 잇달아 상속하여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으되 없음도 항상함도 아니다” 하나니, 이런 집착을 겸하여 무찌르기 위해 이런 게송을 말했다.
하나의 극미가 있는 곳에 딴 극미가 있다고 하지 않노니 그러기에 잇따라서 인과 따위의 요량도 허락지 못라리.
논하건대 이렇게 말한 모든 극미의 형상은 끝내 부분과 방위가 있다는 허물을 막지 못한다. 무슨 까닭이겠는가. 게송에 이렇게 말했다.
극미에 동쪽이 있다면 반드시 동쪽의 부분이 있다 극미에 부분이 있다면 어떤 것을 극미라 하랴.
논하건대 이 모든 극미가 걸리는 바탕이 있다면 해가 솟아 빛을 뿜을 때에 동쪽과 서쪽 두 곳으로 빛과 그림자가 나타나서 빛을 따라 그림자가 움직인다. 빛을 받아 그림자를 내는 것이 자리가 같지 않으며 극미는 결정코 방위와 부분이 있는 것임을 안다. 이미 방위와 부분이 있다면 극미로서의 위치를 잃는다. 이와 같이 극미를 분석할 수 있다면 거친 물건과 같아서 진실치도 않고 항상치도 않으니, 그대의 주장인 극미는 방위와 부분도 없고, 항상 머물러 실제 있는 것으로서 세간의 만물을 만든다 한 것과 어긴다. 또 다시 그가 집착하는 바 극미는 결정코 방위와 부분이 있으니, 행(行:움직이는 현실)의 의지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마치 다니는 이와 같다. 무릇 돌아다니는 곳에는 반드시 방위와 부분이 있다. 만일 방위와 부분이 없다면 다니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이겠는가. 게송에서 이렇게 말했다.
반드시 앞을 취하고 뒤를 버려야 바야흐로 수행이라 할 수 있으니
논하건대 기뻐하는 곳에 나아가는 것을 앞을 취한다 하고, 싫어하는 곳에서 물러서는 것을 뒤를 버린다 하나니, 반드시 앞뒤의 방위와 부분의 차별에 의하여 취하고 버리는 작용을 일으켜야 비로소 수행이라 한다. 방위와 부분을 떠난 행을 아직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극미는 이미 행의 작용의 의지가 되기 때문에 극미는 결정코 방위와 부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일 행한 바와 행하는 작용이 차별이 없다면 이는 행하는 이를 무시해서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게송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두 가지가 없다면 행하는 사람도 없으리라
논하건대 앞뒤의 방위에 의하여 취하고 버리는 작용을 일으키는데 방위가 있지 않다면 작용도 없다 하리라. 만일 그렇다면 행하여도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다. 만일 그대가 행하는 곳과 행하는 작용이 없다고 무시한다면 의지하고 있는 행도 없으리라. 이런 극미를 집착하면 삿된 소견에 집착된다. 또 모든 극미에 행하는 작용이 없다면 방위와 부분이 있는 결과를 짓지 못할 것이요, 방위와 부분이 있는 결과를 짓지 못한다면 모든 천안(天眼)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리라. 그렇다면 세운 바 온갖 구절과 정의는 모든 감관의 경계를 초월하여 이름과 말이 몽땅 끊었으니, 어떻게 스스로가 구절과 정의의 차별을 세우리오. 또 다시 극미에 집착한다면 처음도 중간도 나중도 없다. 그리하여 맑은 눈으로도 아무 것도 보지 못하나니, 마치 허공의 꽃과 같아서 아무 것도 없으리라. 이런 이치를 드러내기 위하여 이런 게송을 말했다.
극미는 첫 부분도 없고 중간과 뒤 부분도 없으니 이는 어떤 눈으로도 모두 보지 못하는 바일세
논하건대 만일 극미가 항상하고 하나라고 집착한다면 나고, 머물고, 멸하는 세 가지 시간의 부분도 없고, 앞과 중간과 나중의 세 가지 방위 부분도 없어 마치 허공의 꽃과 같아서 전혀 아무 물건도 없으리라. 그렇다면 극미는 모든 감관의 경계를 초월하여 온갖 눈으로 볼 수 없으리라. 나와 남에게서 두루 찾으나 도무지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실제로 있다고 계교하지 말라. 여기서는 외도의 주장인 극미는 항상 하여서 방위와 부분이 없고, 모든 감관의 경계를 초월하여 눈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을 똑바로 무찌르고, 겸하여 극미는 무상한 것으로서 부분이 있고, 감관의 경계를 초월한 것이 아니어서 맑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라 함을 드러냈다. 또 다시 극미의 인과과 같은 자리라는 것을 무찌르고, 원인의 본체가 결정코 무상하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하여 다음의 게송을 말했다.
만일 원인의 결과 때문에 무너지면 이 원인은 항상함이 아닐 것이요 혹은 결과와 원인 두 본체는 같은 위치가 아니라고 허락하리
논하건대 모든 걸리는 바탕 있는 물건은 다른 바탕 있는 물건이 닥쳐왔을 때에 제 자리를 옮기지 않으면 반드시 망가진다. 이와 같이 극미의 결과가 핍박을 받았을 때에 혹은 서로 받아들여 딴 물체끼리 같이 사는 것이 마치 적은 물을 많은 모래 더미에 붓는 것 같고, 혹은 그 속에 들어가자 그의 성질을 바꾸는 것이 마치 묘한 약물을 구리 즙에 붓는 것 같다. 만일 앞의 경우와 같다고 한다면 모든 부분이 있으리니, 이미 서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모든 부분이 어지러우리라. 마치 서로 떨어져 있는 물건이 공동으로 결과를 낼 수 없는 것 같으리니, 그렇다면 온갖 거친 물건은 없어야 하리라. 또 만일 저 여러 미세한 부분만이 있는 것 같다면 의당 저와 같아서 본체는 분명 무상하리라. 만일 나중의 것과 같다고 한다면 스스로 극미의 본체에 변하여 망가짐이 있다고 하는 것이니, 어찌 따져 묻기를 기다리랴. 만일 모두를 허락지 않는다면 의당 극미는 서로서로 막혀서 인과가 딴 자리에 있다고 허락해야 되리라. 그러나 걸리는 바탕이 있는 물건의 장소는 반드시 같지 않다. 그러므로 인과 관계가 아닌 모든 걸림있는 물건과 같다. 또 이런 게송을 말했다.
모든 법이 항상하고도 상대할 것 있음을 보지 못하니 그러기에 극미가 항상타는 말을 부처님들은 하신 적 없다
논하건대 눈앞에 보기에 돌 따위는 스스로의 머무는 곳에서 다른 물건을 상대하여 장애하는데 이것이 이미 무상하다면 극미도 그러할 것인데 어떻게 항상 머무를 수 있으랴. 상대하여 장애함과 항상함은 서로 어기는 것이므로 두 법이 같은 본체라 함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또 다른 해석이 있는데 딴 물건과 합쳐서 변하고 무너져서 생기는 원인을 상대함이 있는 것이라 하는데 그렇지 않다. 극미는 모두 상대함과 장애함이 있으니 장애함이 무상하다는 것을 증명함이 똑똑하다. 만일 극미가 딴 물건을 장애한다는 것을 다른 이가 전혀 허락지 않으므로 따로 딴 물건과 함께 합쳐서 변하고 무너져서 생기는 원인을 설정하여 극미가 무상한 것이라고 추측해 따진다면 이는 다만 내는 뜻만으로 극미의 성품이 결정코 무상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거늘 어째서 게송에서 말하기를 “상대함이 있다”고 했으랴. 그러므로 이 말은 걸림이 있는 뜻임을 알 수 있다. 비록 전부를 허락지는 않는다 하여도 원인의 이치가 성립되니, 그가 극미는 딴 물건을 장애한다고 허락하기 때문이다. 이미 극미가 깨어지면 방위도 무너지니, 극미라는 결과에 의하여 실제로 방위가 있음을 증명하지만 극미가 없다면 결과도 없거니, 무엇을 인하여 방위가 진실하고 항상하다는 주장을 세우랴. 또 방위는 일정치 않아 인연을 기다려서 성립된다. 거짓으로 시설하여 있다고 하나 진실치 않고 항상치 않다. 위에서 말한 여러 가지 사유에 의하여 극미가 항상하다는 말은 부처님께서는 일찍이 말씀하신 적이 없다. 오직 모든 현실은 모두가 무상하다고 하셨다. 오직 우리 대사(大師)만이 깨달으신 분이라는 칭호를 받으시니, 온갖 경계에 대하여 지혜롭게 보시어 걸림이 없고, 말씀하신 바가 뒤바뀜이 없으시니, 참으로 여래라 불린다.
저 삿된 무리들이 모든 현실이 무상하다는 말씀에 믿음을 내지 못함이 안타깝다. 장하여라. 부처님의 말씀은 무위(無爲)와 행 아닌 것뿐이니, 어찌 항상함인들 폐지하랴. 그러나 이미 세운 바 항상함은 두 가지에 지나지 않다. 하나는 지은 바 있음이요, 둘은 지은 바 없음이다. 만일 지은 바가 있다면 무위라 할 수 없고, 만일 지은 바가 없다면 이름이나 생각만이 있으리라. 그러므로 경에서말씀하시기를 “감ㆍ옴ㆍ‘나’ㆍ허공ㆍ열반의 다섯 가지 법은 다만 이름과 생각뿐이요, 도무지 진실한 이치가 없다”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