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 ‘공(空)’의 품을 성립하는 가운데 사람의 ‘공’한 것은 이미 성립했으나 법의 ‘공’한 것을 성립하지 못했는지라 법의 ‘공’함을 나타내기 위해 이 때문에 모든 법의 제 성품 없는 품을 해 둔다.
017_0684_b_03L論曰:立空品中人空已成、未立法空,爲顯法空,故說諸法無自性品。
≪해석≫ 앞서 ‘공’의 품을 설하고 뒤에 제 성품 없는 품을 설함은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017_0684_b_05L釋曰:前說空品,後說無性品,欲何所爲?
【답】앞서 ‘공’의 품을 설한 것은 사람의 ‘공’함을 나타내기 위해 다만 번뇌장(煩惱障)을 제거할 뿐이니, 이는 별개의 도이기 때문이다. 뒤에 제 성품 없는 품을 설하는 것은 법의 ‘공’함을 나타내기 위해 일체 지장(智障)과 번뇌장을 통틀어 제거하는 것이니, 이는 공통된 도이기 때문이다.
다시 별개의 용(用)이 있으니, 이는 세간의 세 가지 허망한 논(論)을 제거하기 위해서이다. 첫째 싸우는 것으로써 수승한 논을 삼음이니, 노가야제가(露伽耶鞮迦)와 승가(僧佉)들의 논이 그러한 것이다. 둘째 들음이 많은 것으로서 수승한 논을 삼음이다. 사위타(四韋陀)와 이제하바(伊鞮訶婆)의 논이 그러한 것이다. 셋째 바른 행으로써 수승한 논을 삼음이니, 이승(二乘)들의 교법이 그러한 것이다.
이제 두 ‘공’을 설하여 이 세 가지 논을 제거함에 있어서 먼저 사람의 ‘공’함을 설한 것은 앞서 외도들의 두 가지 논을 제거하기 위해서이다. 그 다음 법의 ‘공’함을 설하는 것은 뒤의 이승(二乘)들 치우친 고집과 내지 외도들 삿된 고집의 논을 제거하기 위해 진실한 바른 행을 나타내서 이 행으로 인하여 구경(究竟)의 견줄 데 없는 이치를 얻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사람의 ‘공’함을 설한 것은 삿된 법을 깨뜨리기 위해서이다. 법의 ‘공’함을 설하는 것은 바로 법을 성립하기 위해서이니, 이것을 널리 밝혀 용(用)을 논한 것은 저 18부(部)와 같음이다. 이 용을 나타내기 위해 이 논을 설하는 것이니, 바로 제1의 용을 밝히는 부분이다.
017_0684_c_01L【답】일체 법은 세 가지 성품에 벗어나지 않으니, 첫째는 분별하는 성품이고, 둘째는 남을 의지하는 성품이고, 셋째는 진실한 성품이다. 분별하는 성품이란, 이른바 이름과 말로써 모든 법의 제 성품을 나타내는 것이니, 곧 대경[塵]이나 의식[識]과 같은 부분이다. 남을 의지하는 성품란, 이른바 인(因)을 의지하고 연(緣)을 의지하며 법의 제 성품을 나타내는 것이니, 곧 산란한 의식의 분야가 인의 속 감관과 연의 바깥 대경을 의지해 일어나기 때문이다. 진실한 성품이란, 이른바 법이 바로 그대로의 진리이다.
법이란, 곧 분명하고 남을 의지하는 두 가지 성품인가 하면, 그대로의 진리는 곧 두 가지 성품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니, 분별하는 성품은 그 체상(體相)이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없고, 남을 의지하는 성품은 그 생명이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없다. 이 두 성품은 그 생명이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없다. 이 두 성품의 아무것도 없음은 다변하거나 달라짐이 없기 때문에 그대로의 진리이고 말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그대로의 진리를 일컬어 진실한 성품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것이 곧 제2의 상응되는 부분이니 그것으로 이름을 세운 것이다.
다음, 이 세 가지 성품을 들어서 세 가지 성품 없는 것을 설하겠으니, 세 가지가 다 성품이 없으므로 말미암아 한 가지 성품도 없는 이치를 알아야 할 것이다. 분별하는 성품을 말하지만, 그 모양의 성품이 없으므로 말미암아 성품 없는 것이라고 말함이니, 왜냐하면 나타나는바 그대로 이 모양이 사실 없는지라, 이 때문에 분별하는 성품이란, 모양이 없는 것으로써 성품을 삼음이며, 남을 의지하는 성품을 말하자면, 그 생겨나는 성품이 없으므로 말미암아 성품 없는 것이라고 말함이다. 왜냐하면 이 나는 것은 인연의 힘으로 말미암아 성품 없는 것이라고 말함이다. 왜냐하면 이 나는 것은 인연의 힘으로 말미암아 이룩되고 자기 힘으로 말미암아 이룩되고 자기 힘으로 말미암아 이룩되는 것이 아닌지라, 인연의 힘이 곧 분별하는 성품인가 하면, 분별 하는 성품 그 자체가 이미 없는 것이어서 인연의 힘이 없기 때문에 나는 것이 성립될 수 없으니, 이 때문에 남을 의지하는 성품이란, 나는 것이 없는 그것으로써 성품을 삼음이다. 진실한 성품을 말하자면, 진실의 성품이 없으므로 말미암아 성품 없는 것이라고 말함이니, 왜냐하면 이 이치가 바로 진실이기 때문에 일체 법이다. 이 이치로 말미암아 똑같이 성품이 없는지라, 이 때문에 진실한 성품이란, 성품이 없는 그것으로써 성품을 삼는 것이다.
017_0685_a_01L≪해석≫ 진실한 성품을 말하자면, 진실로 성품이 없기 때문에 성품이 없는 것이란, 이 진실한 성품은 다시 별다른 법이 없고 바로 앞의 두 성품 없는 것에 되돌아가는 이치이다. 말하자면, 이 진실한 성품의 진실은 모양도 없고 나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일체 함이 있는[有爲] 법이 분별하고 이 남을 의지하는 두 가지 성품에 벗어나지 않는가 하면, 이 두 가지 성품이 이미 진실한 모양도 없고 나는 것도 없으니, 이 이치로 말미암아 일체 법도 다 동일하게 그 성품이 없기 마련이다.
이 동일하게 성품이 없는 것도 진실히 없고 진실한 성품의 있는 것도 진실이 없으니, 이 분별하고 남을 의지하는 두 가지가 있는 그것은 진실이 있지만, 이 분별하고 남을 의지하는 두 가지는 없기 때문에 있다고 말할 수도 없고 없다고 말할 수도 없는지라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다섯 가지 대경[五塵]과 같고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토끼 뿔과 같으니, 이 성품은 곧 있는 성품도 아니고 없는 성품도 아니기 때문에 이 성품을 이름하여 성품 없는 성품이라고 한다.
또 성품 없는 것을 성품으로 삼아서 이것을 성품 없는 성품이라고 하는 것은, 곧 제대로 성립되는 진리가 아닌지라, 만약에 이 세 가지 성품이 모두 제대로 성립된다면, 앞의 두 가지 성품은 제대로 성립되는 세간의 진리인 것이니, 그 체(體)는 사실 없지만 제대로 성립하여 있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진실한 성품은 곧 제대로 성립되는 진여의 진리인 것이니 두 가지 있는 것을 대치하여 두 가지 없는 것에 제대로 성립하기 때문에 진여의 진리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이 성품을 도로 찾건대 있는 것도 여의고 없는 것도 여의었기 때문에 제대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고, 세 가지 성품 없는 것이 다 제대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곧 제3의 상응되는 분야로서 세 가지 체상(體相)을 밝힌 것이다.
≪논≫ 이 세 가지 성품의 이와 같이 성품 없는 것에 대해 이미 그 모양을 설했으니, 이제부터는 그 도리를 성립시킴을 말하겠다. 분별하는 성품이란 체상(體相)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성품은 다섯 가지 갈무리[五藏]에 섭수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에 법이 있다면, 이 다섯 가지 갈무리를 벗어나지 아니하나니, 다섯 가지 갈무리란, 첫째 모양이고, 둘째 이름이고, 셋째 분별이고, 넷째 그대로의 진리이고, 다섯째 분별없는 지혜이다.
017_0685_b_01L첫째의 모양이란, 이른바 모든 법의 품류(品類)가 명구(名句)의 맛에 의지함이 되는 것이고, 둘째의 이름이란, 곧 이 모든 법의 품류 가운데 명구의 맛이 그것이다. 셋째의 분별이란, 이른바 세 세계[三世]의 마음과 또는 마음의 법인 것이고, 넷째의 그대로의 진리란, 이른바 법의 ‘공’함에서 나타나는 성인의 지혜 경계이다. 다섯째의 분별없는 지혜란, 곧 이 지혜로 말미암아 일체 성인이 그대로의 진리를 통할 수 있는 것이니, 이 다섯 가지 법 가운데 앞의 세 가지는 세간의 진리이고, 뒤의 두 가지는 그대로의 진여이다. 일체 법이 이 다섯 가지를 벗어나지 아니하나니, 만약에 분별하는 성품이 그 체(體)가 법이 있는 것이라면, 응당 이 다섯 가지에 섭수되어야 하겠는데, 섭수되지 않기 때문에 그 체가 없는 줄을 아는 것이다.
【답】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고 이치는 없으니, 왜냐하면 세간이 이치 가운데에 이름을 내세우는 것과 같음이다. 범부들은 이름을 잡고서 이치의 성품을 분별하나니 이름을 곧 이치의 성품이라고 하는 그것이 뒤바뀜이다. 이 때문에 다만 분별이 있을 뿐이고 실다운 체는 없는 것이다.
【답】세 가지 뜻으로 말미암아 이 이치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첫째 앞에서 말한 이름에 지혜가 나지 아니하나니 세간이 이름을 내세우는 것과 같다. 만약에 이 이름이 바로 이치의 체성이라면, 이름을 듣지 못했을 때엔 이치를 얻을 수 없어야 하겠는데, 이름을 얻지 못했을 때에도 먼저 이치 얻은 것을 이미 보았다. 또 만약에 이름이 바로 이치라면, 이치를 얻을 때엔 곧 이름도 얻어야 하겠는데, 이러한 이치가 없으니, 이 때문에 이것이 객인 줄을 아는 것이다.
017_0685_c_01L둘째 하나의 이치가 많은 이름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이름이 바로 이치의 성품이라면, 혹은 한 가지 물체에 많은 종류의 이름이 있어서 그 많은 이름을 따르기 때문에 응당 많은 체가 있어야 하겠다. 만약에 많은 이름을 따라 곧 많은 체가 있다면, 법이 한 가지 곳에 성립되는 것과 서로 어긋날뿐더러, 이 이치는 현량(現量)에 어긋나는 것이니, 이러한 이치가 없기 때문에 이것이 객인 줄을 아는 것이다.
셋째 이름은 일정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에 이름이 바로 이치의 성품이라면, 이름이이미 일정하지 않음으로써 이치의 체도 일정하지 않아야 하리니, 왜냐하면 혹시 이 물체의 이름으로 저 물체를 지목하기 때문이다. 이름인즉 일정하지 않지만, 물체는 그러한 것이 아닌 줄을 알기 때문에 다만 이 객일 뿐임을 아는 것이다.
다시 그대의 말과 같이, 이 이름이 이치 가운데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존재하는 이치가 어떻게 존재를 위해 이치가 있다거나, 존재를 위해 이치가 없다고 하겠는가. 만약에 존재하는 그것이 이치가 있다면, 앞의 세 가지는 도로 성립되기가 어려울 것이다. 만약에 존재하는 그것이 이치가 없다면, 이름과 이치가 함께 객임이 반드시 성립되는 것이다.
【답】이 이치가 그렇지 않으니, 왜냐하면 비추는 그것이 평등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대의 말과 같이 이치의 실지 있는 것을 이름으로써 그 이치를 나타낸다면, 등불의 비추는 빛과 같은 것은 이 이치가 성립되지 않나니, 왜냐하면 요컨대 먼저 이치부터 잡고 나서 그 뒤에 비로소 이름을 내세워야 하기 때문에 이치를 얻지 못했을 때엔 이름을 내세울 수 없는 것이다. 이미 이치를 먼저 잡으므로 말미암아 그 뒤에 비로소 이름을 내세운다면, 잡고서도 오히려 이치를 분명히 알 수 없거늘, 어찌 하물며 그 이름만으로 분명히 알 수 있겠는가. 등불로써 물체를 비추는 것은 이치가 그렇지 않으니, 요컨대 등불로 인하여 그 때문에 물체를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고, 먼저 물체부터 분명히 안 연후에 등불을 필요로 함이 없느니라. 이 때문에 비추는 이치가 평등하지 않는 것이다.
017_0686_a_01L≪해석≫ 말로써 취하여도 오히려 이치를 분명히 알 수 없는 것이란, 마치 알음알이[識]가 먼저 이치를 얻고 나서 그 다음에 푸르고 누르거나, 혹은 옳고 그른 것을 잡아 이 잡음을 따른 뒤에야 바야흐로 이름을 내세우는 것과 같음이다. 만약에 잡는 그것만으로 이치를 다 분명히 알 수 있다면, 잡지 못했을 때 알음일이가 이미 이치를 얻을 수 없어야 하리니, 이 때문에 잡음으로 인하지 않고서도 이치를 분명히 알 수 있다면, 이름이 그 잡음의 뒤에 있거늘 어떻게 분명히 알 수 있겠는가. 또 만약에 이름이 이치를 다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이 이름을 알지 못할 때엔 이름을 듣지 못해야 하고 그 이치를 얻지도 못하리니, 마치 등불이 빛을 비춤으로 말미암아 이 사람은 등불로 인하여 환히 빛을 알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은 그것으로 인하여 그 빛을 볼 수 없는 것과 같음이다. 이런 이치가 없는 것은 반드시 비춤을 인하여 빛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름으로 말미암아 이치를 나타내는 것인즉 이와 같지 않으니, 이 때문에 비추는 이치가 평등하지 않는 것이다.
≪논≫ ≪외도의 말≫ 만약에 그대가 이른바 이름으로 말미암아 이치를 분별한다면, 실상 분별할 이치가 없으리니, 이 때문에 이름 가운데 이치가 없고 이치 가운데 이름이 없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함께 객(客)이라는 이치가 그렇지 않으니, 왜냐하면 만약에 어떤 사람이 이름을 이치와 다르고, 이치는 이름과 다르다고 고집하더라도, 이 사람으로서 이미 뒤바뀜이 없다면, 곧 이치 가운데에 치우친 집착이 없겠고,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말을 듣더라도 근심하고 기뻐하는 마음을 내지 않아야 할지니라. 이름과 이치가 서로 관계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좋고 싫은 이름을 들으면, 곧 근심하거나 기뻐하는 마음을 내기 때문에 이름과 이치가 상응되어 이 객이 될 수 없음을 아는 것이니, 마땅히 객이라는 이치는 그대의 뒤바뀐 생각인 줄을 알아야 할 것이오.
【답】이 이치가 바로 그렇지 않으니, 왜냐하면 오랜 시일에 걸쳐 자주자주 뒤바뀜에 훈습(熏習)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치우친 집착이 있는 것이다. 또 이름과 이치의 상응됨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이미 이름은 이치와 다르다고 잡되, 그 다른 것이 이름으로 말미암아 그러하다고 한다면, 이치에 있어서도 역시 치우친 집착을 면하지 못하리라.
왜냐하면 오랜 시일에 걸쳐 자주자주 명자(名字)에 훈습되었기 때문에 반드시 이 법문으로 말미암아 분별하는 마음을 내고 허망한 치우친 집착을 일으키는 것이다. 범부로서도 바른 소견을 지닌 사람이라면 역시 이 몸이 물질 등 지어감의 덩어리인 줄을 알거늘, 그 자주자주 훈습됨으로 말미암아 ≺아집(我執)≻이 굳어버렸기 때문에 자타(自他)의 상속하는 가운데 남고 나의 치우친 집착을 면치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름과 이치의 분별이 법의 치우친 집착인가 하면, 곧 이 뒤바뀜으로 없는 물건을 증익(增益)하기 때문이다.
017_0686_b_01L 남과 나의 치우친 집착과 같기 때문에 이름과 이치의 치우친 집착도 이 법이 뒤바뀐 것인 줄을 알지니 이미 뒤바뀐 것이거늘, 어떻게 뒤바뀜을 내고서도 얽매임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이 때문에 치우친 집착이 본래의 의식[識]을 훈습함으로 말미암아 종자를 이룩하여 그 종자가 능히 남을 의지하는 성품을 일으킴으로써 미래의 결과가 되나니, 이 치우친 집착이 바로 분별하는 성품이어서 능히 미래에 남을 의지하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또 이 미래의 남을 의지하는 성품으로 인하여 그 결과가 다시 미래의 법에 집착하는 뒤바뀜을 내나니, 곧 이 남을 의지하는 성품이 원인이 됨으로 말미암아 능히 미래의 분별하는 성품이 결과가 되는 것을 내는지라 이러한 것이 서로서로가 원인이 되기 때문에 생사가 항상 일어나서 계속 끊어지지 아니하나니, 곧 제4의 세 가지 성품을 성립하는 분야로서 분별하는 성품을 설하여 그 이치를 성립시켜 마친 것이다.
그리고 별도로 여섯 가지 차별이 있어 다음부터 이 성품의 품류 차별을 설하겠다. 그러나 분별하는 성품의 차별이 여섯 가지가 있다. 첫째 제 성품의 분별이니, 이를테면 물질[色] 등 모든 쌓임[陰]의 체성을 분별하되, 다만 현량의 취하는 바 다섯 가지 식(識)으로써 바로 다섯 가지 대경[塵]을 취하거나, 또한 의식이 바로 법을 취할 수 있을 뿐이고 한 가지 가운데 갖가지를 분별하는 것이 아닌지라, 그러므로 제 성품의 분별이라고 하나니, 바로 그 체성을 취하기 때문이다.
017_0686_c_01L넷째는 수면(隨眠)의 분별이니 이를테면, 앞의 물건을 보고도 그 명자를 알지 못함으로써 펼쳐 설할 수 없는지라 이 때문에 수면의 분별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017_0686_b_23L四者隨眠分別,謂見前物不識名字,不能宣說,故稱隨眠分別。
다섯째는 가행(加行)하는 분별이 또 다섯 가지가 있으니, 사랑함에 따르는 분별이 그 하나이고, 미워함에 따르는 분별이 그 둘이고, 화합하는 분별이 그 셋이고, 멀리 여의는 분별이 그 넷이고, 버림에 따르는 분별이 그 다섯이다. 이 다섯 가지 분별로 말미암아 탐욕ㆍ진심ㆍ우치의 번뇌를 내기 때문에 가행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다섯 가지를 합하여 앞의 네 가지를 성취하는 것이 모두다 그 이치를 요약한 분별이다.
여섯째는 명자의 분별이 또 두 가지가 있으니, 명자 있는 것이 그 하나이고, 명자 없는 것이 그 둘이다. 명자가 있는 것이란, 이를테면 이 물건은 사실 이러한 것으로서 혹은 빛으로부터 의식에 이르기까지의 어떠한 것이라든가, 혹은 함이 있고 함이 없는 것이라든가, 항상이 있고 항상함이 없는 것이라든가, 선하고 악하고 선함도 악함도 없는 것이라든가, 이러한 등등의 잡음은 다 명자가 있는 분별이다.
명자가 없는 것이란, 이를테면 이것이 무슨 물건인가, 어떻게 된 것인가, 무엇 때문에 된 것인가, 어떻게 이와 같은가, 하는 이 네 구절의 분별이다. 첫째의 것은 그 체성을 찾음이고, 둘째의 것은 그 원인을 구함에 있어서 무슨 인연 때문에 이러한 것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셋째의 것은 그 체성의 차별을 찾음이고, 넷째의 것은 그 원인의 차별을 구함이니, 이 네 가지는 다 명자가 없는 분별이다. 이것이 곧 명자에 의지하여 이치의 제 성품을 분별하는 다섯 가지이다.
또 다섯 가지 제 성품을 분별할 것이 있으니, 명자에 의지하여 이치의 제 성품을 분별하는 것이 그 첫째이고, 이 이치에 의지하여 명자의 제 성품을 분별하는 것이 그 둘째이고, 명자에 의지하여 명자의 제 성품을 분별하는 것이 그 셋째이고, 이치에 의지하여 이치의 제 성품을 분별하는 것이 그 넷째이고, 명자와 이치에 의지하여 명자와 이치의 제 성품을 분별하는 것이 그 다섯째이다. 첫째의 명자에 의지하여 이 이치의 제 성품을 분별하는 것이란, 이를테면 이 종류는 물질에 속하는 것으로서 물질의 체성으로 말미암아 성취되었고, 그리고 이 종류는 느낌과 생각과 지어감과 의식에 속하는 것으로서 의식의 체성으로 말미암아 성취된 것이라고 분별하는 것이다.
017_0687_a_01L≪해석≫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먼저 이치를 얻지 못한채 그 이전에 물질의 이름을 얻어 그 물질의 모양에 대한 말을 들었을 경우, 이와 같이 형체가 있는 것은 잡아 가질 수도 있고 무너져 없어질 수도 있는지라, 이러한 모양 있는 것들을 일컬어 물질이라고 하는데, 이 사람이 뒷날 그 물질의 본체와 품류와 상모를 본다면, 옛날의 들은바 그대로 그것이 물질인 줄을 알게 되나니, 곧 이것이 명자로 말미암아 물질의 체성을 분별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의식의 쌓임도 그러한 것이니, 먼저 그 명자만을 얻고 그 본체를 보지 못했더라도 뒤에 본체를 얻으면 옛날의 들은 바 그대로 곧 이것은 느낌이고, 또한 이것은 의식인 줄을 알기 마련이다.
≪논≫ 둘째의 이치에 의지하여 명자에 제 성품을 분별하는 것이란, 이를테면 이 품류는 물질이라 할 수 있고, 저 품류는 물질이라 할 수 없다든가. 또한 이 품류는 의식이라 할 수 있고, 저 품류는 의식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이니, 먼저 이치부터 얻은 연후에야 그 품류를 분별하여 명자를 내세우는 것이다.
셋째의 명자에 의지하여 명자의 제 성품을 분별하는 것이란, 이를테면 이 물질의 명자에 대해 어떤 사람이 비록 그 명자를 얻기는 했지만, 이 명자의 품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다시 생각하고 헤아려서 그 명자의 품류에 대한 해석을 배우는 것과 같음이다. 이것을 가리켜 명자에 의지하여 명자의 제 성품을 분별하는 것이라 하나니, 또한 명자를 알고서도 그 해석을 구하는 품류가 또한 그러한 것이다.
넷째의 이치에 의지하여 이치의 제 성품을 분별하는 것이란, 이를테면 물질의 명자를 알지 못함으로 인하여 그 명자를 결정해 물질의 품류를 분별하지 못하는 것이니, 마치 어떤 사람이 물질의 명자를 알지 못한채 다만 그 물체를 보고서 이 물체가 저 물체보다 다른 것을 분별할 뿐, 결코 무슨 물건인 줄을 알지 못해 그 결정된 명자를 얻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 때문에 다만 이치에 의지하여 이치를 분별할 뿐이라 하는 것이다. 또는 어린 아이들의 소견처럼, 명자를 알지 못함과 동시에 분별하는 의식의 지위가 없음으로써 그 얻는바 경계가 다섯 가지 식(識)이 모두 이치에만 반연하고 명자에 반연하지 않음과 같은 것이다.
017_0687_b_01L다섯째의 명자와 이치에 의지하여 명자와 이치를 분별하는 것이란, 이를테면 이 품류는 빛으로써 물체를 삼고 이 빛은 바로 이 물체의 명자라고 하는 것이니, 마치 어떤 사람이 먼저 이미 명자도 알고 이치도 알고 있지만, 뒤에 다시 앞서 알고 있는 그 명자와 이치를 거듭 분별하여서 이것은 곧 물질의 체이고, 이것은 곧 물질의 명자라고 하든가, 그리고 이 품류는 의식으로써 체를 삼고 이 의식은 곧 이 품류의 명자라고 하는 것과 같음이라, 이러한 것들을 다 이르되 명자와 이치에 의지하여 명자와 이치를 분별하는 것이라 한다.
이 다섯 가지 분별이 곧 앞서 널리 설한 여섯 가지 가운데 최초의 제 성품 분별이다. 앞서는 대략 밝히기 때문에 다만 제 성품 분별이라고 말했을 뿐이다. 뒤에서는 널리 밝히기 때문에 다섯 가지 성품을 분별한 것이다. 이러한 앞의 여서 가지와 뒤의 다섯 가지를 다 분별하는 성품의 품류 차별이라고 하나니, 이미 분별하는 성품의 품류 차별을 널리 했으므로, 다음엔 분별하는 성품의 공용(功用)을 설하겠다.
이 분별하는 성품이 능히 앞의 여섯 가지와 뒤의 다섯 가지를 분별하는지라, 이제 이 여섯 가지와 다섯 가지 분별하는 성품의 그 공용 차별을 나타내기 위해 여덟 가지 분별이 능히 세 가지 일 종류를 짓는 것이 있으니, 세 가지 일 종류란, 첫째 희론(戱論)의 종류이고, 둘째 아만(我慢)의 종류이고, 셋째 탐욕 등 미혹의 종류이다.
여덟 가지 분별이란, 첫째 제 성품의 분별이니, 이를테면, 물질 등의 물질은 바로 물질인 것이다. 쌓임 등류의 네 가지 쌓임은 바로 앞서 명자에 의지해 이치를 분별한 것 등 다섯 가지 분별한 체 성품과 또는 앞서 여섯 가운데 최초의 제 성품인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다 제 성품의 분별이라고 한다.
017_0687_c_01L셋째는 무더기[聚] 가운데 어떤 하나를 잡는 분별이니 이를테면, 물질의 쌓임 가운데 ≺나≻라든가, 중생이라든가, 수명이라든가를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모두가 그 성립을 기대하여 이것을 잡아 분별을 일으킴이고, 또는 많은 무더기 가운데 그 무더기는 잡는 것이 원인이 되나니, 이를테면 가옥ㆍ군졸ㆍ거마ㆍ의복ㆍ음식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것도 모두가 그 성립됨을 기대하여 이것을 잡아 분별을 일으킴이니, 이러한 것들이 바로 어떤 무더기 가운데, 하나를 잡는 분별이다. 이 두 가지가 곧 안팎의 분별이니, 앞의 것은 사람이 있다는 잡음이고, 뒤의 것은 법이 있다는 잡음이다.
≪해석≫ 이른바 모두 기대하는 것이란, 세간이 유포하는 그 성립한바 명자를 다 모두 하는 일에 계합되기를 기대하여 다 같이 하나의 풀이를 만들게 하려는 것이다.
017_0687_c_02L釋曰:共期者,世流布所立名字,皆共期契所作,欲令同作一解也。
≪논≫ 넷째는 ≺나≻의 분별이니, 이를테면 이 등류는 흐름[流]이 있고 잡음[取]있는 것이란, 오랜 시일의 ≺아집(我執)≻이 자주자주 관습(慣習)을 의지해 이 치우친 집착의 관습으로부터 ≺신견(身見)≻의 의지하는 등류를 반연하여 허망한 분별을 일으키나니, 이것을 이르되 ≺나≻의 분별이라고 한다.
≪해석≫ 이른바 이 등류는 흐름이 있고 잡음이 있는 것이란, 등류는 곧 아리야식(阿梨耶識)이 모든 미혹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흐름이 있음이란, 곧 탐애(貪愛)가 그것이다. 과거의 번뇌인 십사(十使)가 소멸하여도 분별할 수 없는 것이 모든 미혹의 명칭인데, 이것을 다만 무명이라고 통틀어 일컫는 것은 이 무명이 능히 지혜의 밝음을 막기 때문에, 이 무명이 능히 모든 미혹의 원인이 되어서 생사에 유전하기 때문에 흐름이 있다고 일컫는 것이다. 또는 법수를 논하는 사람[數人]들의 말과 같이 생사에 흘러 스며들기 때문에 마음의 번뇌가 연달아 스며들기 때문에 사람으로서 가질 것이 아니기 때문에 흐름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잡음이란, 곧 흐름이 있는 그것의 결과이라, 이를테면 그 원인이 과거를 거쳐 왔기 때문에 흐름이 있는 결과라 하고 미래ㆍ현재 상속하는 중이기 때문에 잡음이라 하는 것이니, 이것이 곧 현재 상속하는 가운데 수면(隨眠)과 탐욕의 종자이다. 모든 번뇌가 다 현재 상속하는 가운데 존재하고 있는 것을 흐름이라고 말하고 참음이라고 말하는 데, 이 흐름은 곧 네 가지 흐름[四流]이고, 이 잡음은 곧 네 가지 잡음[四取]이다. 이와 같이 구별하여 말하지만, 이 흐름과 잡음들은 다 본래의 식(識)을 떠나지 않기 때문에 이 등류를 흐름이 있고 잡음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오랜 시일의 ≺아집≻이 자주자주 관습에 의지하는 것이란, 처음이 없는 때로부터 이 흐름과 잡음들의 미혹이 있었음을 통틀어 말하기 때문에 오랜 시일이라고 하는 것이다.
017_0687_c_22L長時我執數依串習者,通說無始來有此流取等惑,故說長時也。
017_0688_a_01L≺아집≻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 수면(隨眠)과 둘째 훌륭한 체하는 마음과 셋째 습기(習氣)가 그것이다. 자주자주란 말은, 곧 수면을 밝힘이라, 이른바 ≺아집≻이 자주자주 본래의 식에 의지하는 것이다. 관(慣)이란 말은 곧 훌륭한 체하는 마음이니, 이른바 ≺아집≻이 자주자주 관습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다. 습(習)이란, 말은 곧 습기를 밝힘이니, 이른바 ≺아집≻이 자주자주 습기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다. 이 수면과 훌륭한 체하는 마음은 안의 번뇌이니 진리의 도를 얻어 봄으로써 이 미혹은 곧 사라지는 것이다. 습기는 오랫동안의 버릇으로 이뤄진 것이어서 바른 번뇌가 아니기 때문에 아라한(阿羅漢)이 되었을 땡도 이 번뇌는 오히려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진리의 법을 얻어야만 바야흐로 점점 제거할 수 있나니, 이 세 가지 ≺아집≻은 다 본래의 식에 의지하는 것이다.
≺신견≻의 의지하는 등류를 반연하여 허망한 분별을 일으키는 것이란, 본래의 식에 두 가지 뜻이 있는 것을 밝힘이니, 이것이 곧 세 가지 ≺신견≻의 의지하는 곳이다. 두 가지 뜻이란, 첫째 종자를 지어내어 ≺신견≻을 낳을 수 있는 것이고, 둘째 ≺신견≻의 반연할 그 경계를 지어내는 것이다. 이 본래의 식을 반연하여 지어낸 경계가 일어나기 때문에 ≺나≻의 분별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논≫ 다섯째는 ≺내 것[我所]≻의 분별이니 이를테면 이 등류도 흐름이 있고 잡음이 있는 것이다. 오랜 시일의 ≺내 것≻이라는 집착이 자주자주 관습을 의지해 이 치우친 집착의 관습으로부터 ≺내 것≻이라는 견해의 의지하는 등류를 반연하여 허망한 분별을 일으키나니, 이것을 ≺내 것≻의분별이라고 한다. 집착하는 경계의 뜻이 넷째의 것과 다르지 않는데 다만 ≺나≻라는 집착과 ≺내 것≻이라는 집착이 있어서 이것이 다를 뿐이다.
그리고 여섯째는 사랑하는 분별이니, 이를테면 깨끗한 등류를 사랑함으로써 그것을 반연하여 허망한 분별을 일으키는 것을 사랑하는 분별이라 한다. 일곱째는 미워하는 분별이니, 이를테면 깨끗하지 못한 등류를 미워함으로써 그것을 반연하여 허망한 분별을 일으키는 것을 미워하는 분별이라 한다. 여덟째는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미워하는 것도 아닌 분별이니, 이를테면 사랑할만하거나 미워할만한 등류가 아님으로써 그것을 반연하여 앞의 두 가지 분별을 뒤엎어버리는 것을 가리켜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미워하는 것도 아닌 분별이라 한다.
017_0688_b_01L이 여러 분별을 따라 설하자면, 오직 두 가지 분별이 있을 뿐이니, 첫째는 분별의 의지이고, 둘째는 분별의 경계이다. 여덟 가지 분별 가운데 제 성품과 차별과 또는 무더기 중에 하나를 골라잡는 이 세 가지 분별이 능히 희론(戱論)을 지어내는 분별의 의지이기도 하고 한편으론 희론을 지어내는 분별의 경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 등류에 의지함으로써 명자와 생각과 말이 분별을 일으키는 것이고, 명자와 생각과 말이 분별을 훈습(熏習)하는 분별이니, 희론 분별이라고 한다. 세 가지 등류 가운데에 세 가지 명자를 반연함으로 말미암아 이 때문에 자주자주 지어가는 갖가지 상모(相貌)를 일으키나니, 이러한 분별을 희론이라고 한다. 세 가지 등류로써 의지를 삼고, 세 가지 명자로써 경계를 삼고, 희론으로써 분별의 체(體)를 삼으니 만큼, 의지와 경계는 곧 분별하는 성품인 것이고, 희론의 분별은 곧 남을 의지하는 성품인 것이다.
≪해석≫ 여덟 가지 분별 가운데 앞의 세 가지 분별을 희론의 분별이라 한다. 이 세 가지가 각각 곧 의지가 되고, 곧 경계가 되고 곧 희론의 체가 되나니 왜냐하면 세 가지 분별 가운데 각각 분별하는 것과 분별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분별하는 것이란, 바로 희론의 체이고, 분별할 것이란 그 중에 등류와 명자 이 두 가지가 있으니, 곧 이것이 세 가지 이치 등류의 명자이고, 곧 이것이 세 가지 등류의 갖가지 명자이다. 이 때문에 이치로써 의지를 삼고 명자로써 경계를 삼고, 이 명자를 반연하여 법문을 삼음이니, 이치의 등류를 취하기 때문에 바로 그 취할 것으로써 의지를 삼고, 반연할 것으로써 경계를 삼는다. 이 때문에 이 등류에 의지해 명자와 생각과 맘을 반연하여 분별을 일으킨다고 하는 것이다.
017_0688_c_01L생각과 말이란, 이를테면 마음으로 이 명자를 생각하고 말로써 이 명자를 설하기 때문에 생각과 말이라고 이르는 것이다. 이는 분별이 생각과 말의 의지하는 것이 되는지라, 이제 이 가운데 생각과 말을 성립하는 것은 모두가 명자이다. 명자를 나타내려면 거칠고 세밀한 것이 있기 마련이니, 명자인즉 세밀한 것이 되고, 생각인즉 작은 것이 되고, 거친 말은 가장 거친 것이 된다. 이 때문에 이 세 가지 명자로써 세 가지 분별을 지적함이다. 말하자면 맨 처음 제 성품의 분별은 바로 물질 등류 법의 체를 밝힘이니, 이 뜻은 세밀한 것이 되기 때문에 명자의 명자를 성립한 것이다.
다음 차별의 분별은 그 체의 차별을 밝힘이니, 곧 작은 부분이 거친 것이 되기 때문에 생각하는 명자를 성립한 것이다. 저 무더기 가운데 하나를 골라잡는 분별은 이른바 병(甁)ㆍ가옥 등을 말함이니, 이것이 가장 거칠기 때문에 말을 따르는 명자이다. 명자와 생각과 말의 훈습한 분별을 희론의 분별이라고 하는 것이란, 이 세 가지 명자를 반연해 경계가 됨으로 말미암아 분별을 일으킴이니, 분별하는 것이 곧 훈습이 있어서 능히 이치를 분별하고 능히 이치를 분별하는 것이 곧 희론의 분별인 것이다.
세 가지 등류 가운데, 세 가지 명자를 인연하여 자주자주 지어가는 갖가지 상모를 일으키는 것이란, 의지하는 세 가지 등류와 반연하는 세 가지 명자가 법문이 되어서 자주자주 갖가지 상모를 일으키는 것을 밝힘이니, 분별에 있어서의 의지와 경계와 희론이 그 체는 다만 하나이면서 세 가지 뜻의 용(用)이 있을 뿐이다.
≪논≫ 그 다음 ≺나≻의 분별과 ≺내 것≻의 분별인 이 두 가지 분별은 능히 몸이라는 견(見)과 또는 모든 견의 근본을 짓고, 능히 ≺나≻라는 교만과 또는 모든 교만의 근본을 짓는 것이다.
017_0688_c_12L論曰:次我及我所:此二分別能作身見及諸見本:能作我慢及諸慢本。
≪해석≫ 이 두 가지 분별은 앞에서와 같이 역시 밝혀야 하리니, 곧 이것이 의지와 경계와 분별의 체가 되기 때문이다. 앞서 이미 예를 밝힌 바 있어 스스로 알 수 있고, 다시 변론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다만 뒤에 ≺나≻라는 견을 내고 또 모든 견의 근본을 짓는 것을 밝힐 뿐이다. ≺나≻가 있음을 집착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견을 ≺내 것≻이란 집착으로 말미암아 능히 ≺나≻라는 교만과 모든 교만의 근본을 짓는 것이다.
≪논≫ 뒤에 사랑함과 미워함과 사랑하고 미워함에 대함인 이 세 가지 분별이 능히 탐욕과 진심과 무명 따위를 내는 것이다.
017_0688_c_19L論曰:後愛憎對二,此三分別能生欲瞋及無明等。
≪해석≫ 이 세 가지 분별이 바로 세 가지 독[三毒]이니, 이 때문에 능히 일체 세 가지 독을 내는 것이다.
017_0688_c_20L釋曰:此三分別卽是三毒,是故能生一切三毒也。
017_0689_a_01L≪논≫ 이러한 여덟 가지 분별이 능히 세 가지 사용(事用)의 품류를 짓나니, 맨 앞의 세 가지는 곧 희론의 품류를 지어낸다. 다음의 두 가지는 ≺나≻라는 견과 ≺나≻라는 교만의 품류를 지어내고, 뒤의 세 가지는 곧 탐욕 등 미혹의 품류를 지어내는 것이다. 차음의 여섯 가지 분별이 법을 섭수한 이치를 나타내는 것이어서 일체 분별이 이 여섯 가지를 벗어나지 않는다. 무릇 섭수한 것이 세 가지 이치이니, 제 성품의 분별과 차별의 분별인 이 두 가지는 분별의 의지이고, 깨달아 앎과 수면(隨眠)과의 가행인 이 세 가지는 분별의 체이고, 뒤의 하나인 명자는 분별의 경계이다.
이 때문에 여섯 가지 분별이 법을 섭수해 다한 것이다. 깨달아 앎과 수면은 세 가지 성품에 공통되고 가행은 다만 불선한 것이다. 이 훌륭한 체하는 마음의 미혹을 여읠 것이 다섯 가지가 있으니, 사랑함을 따라 탐욕을 내고, 미워함을 따라 진심을 일으키고, 버림을 따라 무명을 내는 이 세 가지는 번뇌의 체(體)이다. 화합하는 것과 멀리 여의는 이 두 가지는 번뇌의 용(用)이므로 탐욕으로 말미암아 화합하고, 진심으로 말미암아 멀리 여의고, 무명으로 말미암아 이 두 가지의 따로 성립되지 않는 기능을 통틀어 성립한다. 말하자면, 탐욕은 대경을 끌어들이기 때문에 화합하고, 진심은 대경을 내버리기 때문에 멀리 여의는데, 무명이 있으므로 말미암아 끌어들임과 내버림이 있어서 이 때문에 두 가지 작용을 통틀어 성립하는 것이다.
다음은 명자에 의지하여 이치를 분별하는 것 등이 다섯 가지 분별이니, 분별의 의지와 경계와 또는 차별의 의지와 경계를 나타내기 위해서다. 다만 분별하는 성품은 뒤의 여덟 가지를 섭수하여 세 가지 장애되는 일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니, 이를테면 제 성품의 분별과 차별의 분별과 무더기 가운데, 하나를 잡는 이 세 가지 분별은 능히 마음의 번뇌를 냄으로써 일체 지혜의 장애가 되는 것이다. ≺나≻의 분별과 ≺내 것≻의 분별이 이 두 가지 분별은 능히 살의 번뇌를 냄으로써 해탈의 장애가 되는 것이고, 사랑할만하지도 미워할만하지도 않은 이 세 가지 분별은 능히 껍질의 번뇌를 냄으로써 선정의 장애가 되는 것이다. 한편 이 세 가지 번뇌가 바로 세 가지 일의 등류이니, 마음의 번뇌는 곧 희론하는 일 등류이고, 살의 번뇌는 곧 난 체하는 교만한 일 등류이다. 껍질의 번뇌는 곧 탐욕 등 미혹하는 일 등류이다. 이 세 가지 일의 등류는 남을 의지하는 성품인 것이다.
017_0689_b_01L만약에 분별을 대략 설하자면, 세 가지를 벗어나지 않으니, 분별의 의지가 그 하나이고, 분별의 체가 그 둘이고, 분별의 경계가 그 셋이다. 만약에 분별의 체를 설하자면, 이른바 세 세계[三界]의 마음과 마음의 법이 그것이고, 의지와 경계는 다시 분별의 체가 없는 거시니, 비슷한 대경[塵]의 이치 등류로써 의지를 삼고, 비슷한 대경의 명자등류로써 경계를 삼을 뿐이다. 그리고 다음 서로 미혹하는 거칠음과 무거운 거칠음을 구분한다면, 분별하는 성품을 일으키는 그것이 능히 두 가지 미혹이 되어서 중생들을 얽어매나니, 첫째는 모양의 미혹이고, 둘째는 거칠고 무거운 미혹이다. 모양의 미혹이란, 곧 분별하는 성품이고, 거칠고 무거운 미혹이란, 곧 남을 의지하는 성품이니, 이 두 가지 미혹이 성립되는 까닭은 남을 의지하는 성품 가운데 집착하여 분별하는 성품을 삼기 때문에 성립되는 것이다.
≪해석≫ 분별하는 성품을 일컬어 모양의 미혹이라고 한 것은, 상모(相貌)를 모양이라고 하였고, 상모를 미혹이라고 말한 것은, 그 상모가 미혹의 반연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미혹이라고 말한 것이다. 다만 남을 의지하는 성품은 바로 미혹하는 것으로서 그 가볍고 무거움을 말하는 것이고, 분별하는 성품은 다만 미혹하는 반연으로서 미혹을 말하기 때문에 가벼움에 속하는 것임을 말할 뿐이다. 남을 의지하는 성품은 바로 미혹의 체이기 때문에 거칠고 무거움에 속하는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모양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미혹이기 때문에 분별없는 지혜를 능히 장애하고 분별없는 경계에 합하지 않으며, 상모를 분별하기 때문에 거칠고 무거운 미혹으로 말미암아 바로 후생(後生)에 모은 괴로움들을 얻는 것이니, 이 두 가지가 반드시 서로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두 미혹이 중생들을 얽어맨다고 말하는 것이다.
017_0689_c_01L≪논≫ 만약에 어떤 사람이 이 두 가지 성품을 얻지도 않고 보지도 않는다면, 이 두 가지 미혹으로부터 곧 해탈하게 될 것이다. 얻지 않는다는 말은 이른바 분별하는 성품을 얻지 않는 것이니, 이 성품은 아주 체가 없기 때문에 얻을 것이 없고, 보지 않는다는 말은 이른바 남을 의지하는 성품을 보지 않는 것이니, 남을 의지하는 성품은 비록 체가 있긴 하지만, 마음이 모양을 반연하지 않기 때문에 이 성품도 역시 있지 않는지라. 이 때문에 보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며, 이 성품을 얻지도 않고 보지도 않는 것은 두 가지 도를 말미암기 때문이니, 하나는 보는 도이고, 다른 하나는 제거하는 도이라 보는 도로 말미암아 분별이 곧 없어지기 때문에 얻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제거하는 도로 말미암아 남을 의지하는 성품이 곧 사라지기 때문에 보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해석≫ 옛날에 이치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삿된 분별을 일으켜서 있지 않음을 있다고 하므로 삿된 소견이라고 하나니, 이 삿된 소견으로 말미암아 능히 대치하는 도를 장애함으로 이제 이미 이치를 보고서 곧 옛날의 보는 바가 있지 않음을 알기 때문에 분별하는 성품이 곧 없다고 말한다. 곧 이 바른 도로 말미암아 옛날의 삿된 소견을 제거하기 때문에 남을 의지하는 성품이 곧 없어졌다고 말한다. 옛날의 분별과 남을 의지함이 다시 두 가지 체가 없고 이제 두 가지 도(道)를 보고 제거하여 역시 하나이고 두 가지가 없는 것이다.
≪논≫ 이것을 이름하여 분별하는 성품의 공용(功用)성립이라 하나니, 분별하는 성품의 네 가지 이치 있는 것을 다 끝내 없으므로, 이다음엔 남을 의지하는 성품 성립되는 것을 밝히기로 한다. 이 성품의 체상(體相)은 이미 앞서 설한 것과 같고, 이제는 이 성품을 성취하기 위해 성립되는 도리를 설하였다. 이 성품은 다만 말로써 체를 삼는 것이 아니니, 왜냐하면 말이란 반드시 의지할 데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난식(亂識)의 품류를 의지하지 않고서도 명자와 언어가 성립된다면 그럴 이치가 없겠다.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의지할 품류가 이미 없으니만큼, 그 설하는 명자와 언어가 곧 성립될 수 없는 것이며, 만약에 그렇다면 두 가지 성품이 없을 것이다. 두 가지 성품이 없기 때문에 곧 미혹하는 품류가 없는가 하면, 미혹하는 품류가 없기 때문에 곧 두 가지 과실이 있으리니, 첫째는 공용을 말미암지 않고서 자연히 해탈하는 것이고, 둘째는 생사와 열반을 나타낼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과실이 없으니, 이 때문에 틀림없이 남을 의지하는 성품이 있는 줄을 아는 것이다.
017_0690_a_01L≪해석≫ 이 가운데 이른바 명자와 언어가 반드시 의지하는 데가 있는 것이란, 남을 의지하는 성품으로써 그 의지한 것을 삼음이다. 남을 의지하는 성품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이 때문에 명자와 언어를 성립하게 되는 것이고, 만약에 이 성품이 없다면 성립할 수가 없을지라. 이 때문에 이 가운데 의지할 품류가 앞서의 것과 다름을 밝힘이니, 앞서인즉 분별하는 성품의 품류로써 명자와 언어의 그 의지할 것을 삼았던 것이다.
【답】서로가 인연이 되어 함께 성립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상모를 반연함으로 말미암아 거칠고 무거운 것이 성립되고, 거칠고 무거운 것을 반연하여 상모의 품류가 성립되기 때문에 이 두 가지 품류를 설하여 남을 의지하는 성품이라 하나니, 왜냐하면 다른 체가 없기 때문에 모두 남을 의지하는 성품이라 하는 것이고, 그 이치를 따진다면 끝내 같지 않는 것이다.
【답】분별하는바 그대로이니, 이 있는 것과 같지 않기 때문에 있다고 말할 수 없고, 한결같이 없지도 않기 때문에 없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있는 것과 같지 않기 때문에 잇는 것이 아니고, 한결같이 없지도 않기 때문에 없는 것이 아니라는 이 말의 뜻을 풀이한다면, 일체 종류의 명자는 모두 다 말할 수 있다.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반면, 없다고 말할 수도 있으며, 또 있다거나 없다고 말할 수 있는 반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으니, 이 모두가 다 어긋나지 않는 것이다.
【문】이미 있다고 말한다면, 이 있는 것은 세속의 있는 것이라 합니다. 진여의 있는 것이라 합니까?
017_0690_a_22L問曰:旣說爲有,爲是俗有、爲是眞有?
【답】모두가 세속의 있는 것이니, 왜냐하면 분별하는 경계가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017_0690_a_23L答曰:皆是俗有。何以故?非無分別境界故。
017_0690_b_01L【문】세속의 진리란 어떤 모양인 것입니까?
017_0690_b_01L問曰:俗諦何相?
【답】세속의 진리가 세 가지 모양이 있으니, 이를테면 ≺나≻로서의 말과 법으로서의 말과 일로서의 말이다. ≺나≻로서의 말이란, 이른바 ≺나≻ㆍ중생ㆍ중생ㆍ행(行)이라든가, 사람ㆍ하늘ㆍ남자ㆍ여인 등이 그것이다. 법으로서의 말이란, 이른바 물질과 느낌과 생각과 지어감과 의식 등이 그것이다. 일로서의 말이란, 이른바 보고 듣고 나고 사라지는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것을 이르되, 세속의 진리라 하나니 세속의 진리가 성립되는 이것이 바로 남을 의지하는 성품의 품류이기 때문이다. 앞서의 분별하는 성품도 역시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 있는 것으로 성립하고, 둘째 체상을 성립하고, 셋째 사용(事用)을 성립하고, 넷째 차별을 성립함이 그것이다. 널리 체상을 밝힘을 이미 앞서의 설한 것과 같고, 사용을 갖춰 밝힐 것은 뒤에 따로 다시 설하기로 하고, 지금은 이 가운데 있는 것으로서 먼저 남을 의지하는 성품이 있는 것을 밝히겠다. 이 성품이 있는 것을 나타내려고 하기 때문에 미혹 등 품류의 사용을 드는 것이고, 이 때문에 사용을 드는 것이고, 이 때문에 사용이 있는 체상을 앞에 대략 든 것이다.
【답】여기부터가 이 성품의 차별을 밝힌 것이다. 일곱 가지 그대로의 진리[如如]에서 매우 많은 뜻이 생겨나니, 그대로의 진리 가운데, 분별하는 성품과 남을 의지하는 성품의 사용을 밝히건대 인과의 생멸은 앞뒤의 뜻이 없는 것이다. 진여의 진리란, 이를테면 일곱 가지의 그대로인 것이니, 나는 것이 그 첫째이고, 모양이 그 둘째이고, 알음알이가 그 셋째이고, 의지하는 것이 그 넷째이고, 삿된 행이 그 다섯째이고, 청정한 것이 그 여섯째이고, 바른 행이 그 일곱째이다.
017_0690_c_01L첫째의 이른바 나는 것이 그대로인 진리란, 함이 있는 법은 앞도 없고 뒤도 없음을 말하는 것이니, 함이 있는 법은 다만 두 성품을 섭수한 그 분별하는 성품과 남을 의지하는 성품이다. 이 법의 앞도 없고 뒤도 없는 그것이 무릇 세 종류가 있으니, 첫째 두 성품을 요약하여 앞뒤 없는 것을 분별하건대, 만약에 남을 의지하는 성품이 앞에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분별하는 성품이 없으니만큼, 남을 의지하는 것이 성립되지 않겠다. 만약에 분별하는 성품이 앞에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남을 의지하는 성품이 없으니만큼 분별하는 성품이 성립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두 성품은 서로가 번갈아 기다려 앞뒤가 없음으로써 서로 나는 것이고, 이 때문에 분별하는 성품이 이미 없는 데다가 남을 의지하는 성품도 있지 않아서 한결같이 함께 없기 때문에 곧 그대로의 진리인 것이다.
둘째 인과를 요약하여 앞뒤 없는 것을 분별하건대, 만약에 원인이 반드시 앞에 있는 것이라면, 다시는 원인할 것이 없으므로 해서 곧 원인이 성립되지 않는다. 또 만약에 아무런 인연도 없이 자연 원인이 있는 것이라면, 그 원인은 곧 한량이 없을 것이다. 만약에 결과가 반드시 앞에 있는 것이라면, 이미 원인이 없으니 만큼, 곧 결과가 성립되지 않겠다. 만약에 아무런 인연도 없이 자연 결과가 있다면 그 결과는 곧 다함이 없을 것이다. 이 때문에 인과는 결정이 없고 앞뒤로 이리저리 서로가 바라는 것이어서, 앞을 바라보면 결과가 되고 뒤를 바라보면 원인이 되나니, 이 때문에 생사가 처음이 없는지라, 이러한 인과의 체는 곧 분별하는 것인가 하면, 남을 의지하는 것이기도 하니, 분별이 이미 없고 남을 의지하는 것도 있지 않는 이것이 바로 그대로의 진리인 것이다.
셋째 생멸을 요약하여 앞뒤 없는 것을 분별하건대, 만약에 나는 것이 앞에 있거나 사라지는 것이 뒤에 있다면, 이는 두 가지 과실이 있기 마련이니, 첫째는 늙고 죽음이 있지도 않기 전에 이미 나는 것이 있게 되고, 둘째는 이 생을 버리지도 않기 전에 문득 저 생을 얻게 되는 것이다.
만약에 그렇다면, 또 두 가지 과실이 있기 마련이니, 첫째는 나는 것이 곧 소용이 없으므로 이 생으로 이미 태어났거늘 무슨 저 생을 필요로 하겠는가. 과보를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나는 것이 곧 다함이 없을지라, 이미 나고 또 나니, 이리저리 찾아본들 어찌 다함이 있을 수 있겠는가. 만약에 그렇다면, 다시 두 가지 과실이 있기 마련이니, 첫째는 나기만 하고 사라지지 않음으로써 곧 항상한 것이어야 하겠고, 둘째는 만약에 많이 나는 것이 있으면 곧 이 많은 중생이어야 할지라, 만약에 그렇다면 원인과 결과가 서로 발생하는 이치가 없을 것이고, 또 만약에 항상 나는 것이 되면 열반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에 사라지는 것이 앞에 있거나 나는 것이 뒤에 있다면, 이미 생멸이 있지 않거늘, 무엇으로 사라지겠는가.
017_0691_a_01L다음 둘째의 이른바 모양의 그대로인 진리란, 사람과 법의 두 가지 ‘공’함을 말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공’한 모양을 그대로의 진리라고 하는 까닭이 세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는 희론(戱論)을 여읜 것이니, 희론이란 이른바 진리의 이치와 세속의 이치를 고집하여, 혹은 하나라든가, 혹은 다르다고 하는 등 네 가지 비방하는 것을 통틀어 희론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만약에 진여와 세속을 반드시 하나라고 고집한다면, 구태여 도를 닦지 않고서도 모두가 해탈하리니, 죄다 진여를 보기 때문에 누구나 다 성인일 것이라, 또 만약에 진여와 세속이 결정코 하나인 것이라면, 진리가 세속을 버릴 수 없는지라, 진여의 이치가 이미 세속을 버릴 수 없으니 만큼, 세속의 미혹을 제거하지 못해 해탈의 이치도 없으리니, 이는 다만 범부일 뿐이어서 성인은 엇어야 할 것이고, 만약에 진여가 반드시 세속과 다르다고 고집한다면, 세속을 의지해선 진여를 통할 수 없으리니, 진여는 곧 만날 수도 없고 방편도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두 가지 ‘공’한 이 희론을 여의나니, 그러므로 그대로의 진리라고 하는 것이다. 둘째는 분별이 없는 지혜의 경계이니, 이 지혜는 뒤바뀜이 없고 세속의 이치가 없는 것으로써 경계를 삼는다. 이 때문에 이 지혜의 뭉친 것이 바로 그대로의 진리인 것이다. 셋째는 진실한 성품이니, 만약에 이 성품을 어긴다면 생사를 이룩하고 이 성품을 따른다면 열반을 얻는지라, 이 성품은 일체 법의 진실한 성품이 되기 때문에 그대로의 진리라고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모양의 그대로란 것은 모양의 ‘공’함을 말하는 것이다. 곧 모양의 ‘공’한 그것으로써 모양을 삼는 것이다.
다음 셋째의 이른바 알음알이의 그대로인 진리란, 일체의 지어감은 다만 이 알음알이 뿐인가 하면, 이 알음알이가 두 가지 뜻이 있기 때문에 그대로라고 일컫는 것이니, 첫째는 뒤바뀜이 없음을 섭수하고, 둘째는 변하여 달라짐이 없는 것이다. 뒤바뀜이 없음을 섭수한 것이란, 이를테면 열두 가지 느낌[十二入] 등 일체 법은 다만 이 알음알이 뿐이어서 난식(亂識)을 떠난 이외에는 별다른 법이 없기 때문에 일체 법은 다 알음알이에 섭수되나니, 이 이치가 결정코 그렇기 때문에 뒤바뀜이 없음을 섭수한 것이라 하고, 뒤바뀜이 없기 때문에 그대로인 것이다.
017_0691_b_01L뒤바뀜이 없는 그대로는 이 모양이 없는 그대로가 아닌 것이다. 변하여 달라짐이 없는 것이란, 이른바 이 난식(亂識)은 곧 분별과 남을 의지함이어서 대경[塵]과 의식이 나타나는 것과 같지만, 이와는 달리 분별하는 성품이 아주 없기 때문에 남을 의지하는 성품도 있지 않아서 이 두 가지의 아무것도 없는 그것이 바로 아마라식(阿摩羅識)인 것임을 밝힘이니, 이 아마라식만은 변하여 달라짐이 없기 때문에 그대로라고 일컫는 것이다.
앞서 그대로의 진리를 일컫는데, 다만 열두 가지 느낌만을 제외한 것은 소승(小乘)에서 일체 법을 분별함에는 열두 가지 느낌을 뒤바뀐 것이 아니라 하지만, 이젠 대승의 이치로서 모든 느낌을 죄다 없는 것으로 타파하는지라, 다만 이 난식의 소작이기 때문에 열두 가지 느낌인즉 뒤바뀜이 되고, 유일한 난식인즉 뒤바뀜이 아니어서 이 때문에 그대로라고 일컬었을 뿐이다. 이 식의 자체는 오히려 변해 달라지는 것이므로 다음 분별하는 것과 남을 의지하는 것으로써 이 난식을 제거하고, 오직 아마라식만은 뒤바뀜이 없기 때문에 이 변하는 달라짐이 없는 것을 참된 그대로라고 하였다. 앞서 유식(唯識)의 이치 가운데에도 역시 이 식에 대한 설명을 하였지만, 먼저 유일한 난식으로써 바깥 대경을 제거하고, 그 다음에 아마라식으로써 난식을 제거했으니, 이 때문에 아마라식이야말로 마지막 단 하나의 청정한 식인 것이다.
다음 넷째의 이른바 의지하는 것의 그대로인 진리란, 괴롬의 진리[苦諦]가 그것이다. 괴롬의 진리가 세 가지 있으니, 괴롬의 종류가 그 하나이고, 괴롬의 진리가 그 둘이고, 괴롬의 성스러운 진리가 그 셋이다. 괴롬의 종류란, 다섯 가지 잡음의 쌓임[五取陰]을 말하는 것이니, 이 다섯 가지에 의지하는 것을 중생이라 하고, 괴롬의 의지하는 것이 이 다섯 가지를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괴롬의 종류라고 일컫는 것이다.
017_0691_c_01L괴롬의 진리란, 뒤바뀌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니, 괴롬의 종류가 결코 성인의 뜻을 어기는 것을 밝힘이다. 이 이치가 진실한 것이기 때문에 괴롬의 진리라 하고, 성인에 이것을 인연하여 결정코 버릴 것을 버리기 때문에 염착(染着)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괴롬의 성스러운 진리란, 이른바 그 괴롬은 모두가 한 가지 맛일 뿐이니, 이 괴롬의 진리가 체생(體生)이 없기 때문에 ‘공’한 것임을 밝힘이다. ‘공’하기 때문에 모양이 없고, 모양이 없기 때문에 원이 없고, 한 가지 법도 원하여 구할 것이 없는 것은 이 공통된 모양을 가지고 세 가지 해탈의 자체가 다만 하나임을 분별함이니, 일체법이 여기를 떠나지 않기 때문에 한 가지 맛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성스러움이란, 곧 바른 이치이어서 이 한 가지 맛이 뒤바뀜도 없고 변함도 없기 때문에 성스러운 진리라고 일컫는 것이다.
맨 처음의 괴롬의 종류는 곧 세속의 진리이고, 다음 괴롬의 진리는 곧 진여의 진리이니, 뒤바뀜이 없음으로써 진여의 진리를 편히 성립하는 것이다. 맨 뒤의 하나는 제1의 이치 진리이니, 뒤바뀜도 없고 변하여 달라짐도 없는 이 제1의 이치 진리는 편히 성립하는 진리가 아닌지라, 이 뒤에 나오는 세 가지 진리도 역시 그러한 것이다.
다음 다섯째의 이른바 삿된 행의 그대로인 진리란, 쌓임의 진리[集諦]를 말하는 것이니, 괴롬의 예(例)와 같이 역시 세 가지이다. 첫째 쌓임의 종류이니 이를테면, 여섯 가지 탐애(貪愛)가 여섯 대경[六塵]을 의지해 일어나서 능히 생사로 하여금 상속하여 이 종류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둘째는 쌓임의 진리이니, 이를테면 뒤바뀌지 않아서 이 여섯 가지 탐애가 결정코 모든 존재[有]로 하여금 상속하게 하는 줄을 아는지라, 진실하여 뒤바뀜이 없으므로 쌓임의 진리라 하는 것이고, 셋째가 쌓임의 성스러운 진리이니 이를테면, 쌓임도 한 가지 맛이어서 앞의 것과 다르지 않는지라, 네 가지 진리가 똑같이 세 가지 해탈문으로써 한 가지 맛을 삼기 때문이다.
다음 여섯째의 이른바 청정한 것의 그대로인 진리란, 사라짐의 진리[滅諦]가 역시 세 가지 있음을 말하는 것이니, 첫째 사라짐의 종류란, 이를테면 네 가지 사문의과[四沙門果]가 그것이라. 곧 이 견혹(見惑)ㆍ사혹(四惑)의 두 가지 미혹이 아주 다 사라져 다시 나지 않는 것이 그 종류이다. 둘째 사라짐의 진리란, 이를테면 뒤바뀌지 않아서 이 사라짐의 종류가 반드시 적정(寂靜)한 것이 그 진리의 이치이다. 셋째 사라짐의 성스러운 진리란, 이를테면 사라짐의 한 가지 맛도 역시 앞의 것과 다르지 않는 것이다.
다음 일곱째의 이른바 바른 행의 그대로인 진리란, 도의 진리[道諦]가 역시 세 가지 있음을 말하는 것이니, 첫째 도의 종류란, 이를테면 여덟 가지 성스러운 도의 갈래[八聖道分]가 바로 그 종류인 것이다. 둘째 도의 진리란, 이를테면 뒤바뀌지 않은 이 여덟 가지가 반드시 쌓임을 벗어날 수 있으니, 이것이 그 진리의 이치이다. 셋째 도의 성스러운 진리란, 이를테면 도의 한 가지 맛도 역시 앞의 것과 다르지 않는 것이다.
017_0692_a_01L그리고, 다시 의지하는 것의 그대로인 진리란, 이른바 괴롬의 진리이고, 괴롬의 진리란, 이른바 지어감의 괴로움이 무상(無常)하기 때문이다. 무상한 것에 세 가지 이치가 있으니, 첫째 아무것도 없는 무상이니 이를테면, 괴롬은 분별하는 성품으로써 이 성품이 아주 아무것도 없는가 하면, 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 무상의 이치이고, 진실히 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 있는 그것을 진여의 그대로라고 하는지라, 만약에 앞에 없거나 뒤에 없는 것으로써 무상이라고 한다면, 이는 곧 세속의 진리로서의 뒤바뀌지 않은 것을 그대로라고 하는 것이고, 참으로 그대로는 아닌 것이다.
둘째는 생멸의 무상이니, 이를테면 괴롬은 남을 의지하는 성품이기도 한지라, 이 남을 의지하는 성품은 이미 진실로 있는 것이 아니고 진실로 없는 것도 아니니, 진실한 성품과 다르기 때문에 진실로 있는 것이 아니고 분별하는 성품과 다르기 때문에 진실로 없는 것도 아니다. 진실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라지는 것이고 진실로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것인가 하면, 이러한 나고 사라지는 것이 바로 무상한 이치이어서 나는 그것이 진실로 나는 것이 아니고 사라지는 그것이 진실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진여의 그대로이다.
셋째는 여의고 여의지 않는 무상이니, 이를테면 괴롬은 진실한 성품이기도 하여 이 성품이 도전(道前)에는 번뇌를 여의지 못하고, 도후(道後)에라야 번뇌를 여의는지라. 지위를 잡음이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무상이라고 말하는 것이고, 그 체가 변하여 달라지지 않기 때문에 그대로의 진리라고 이르는 것이다.
다시 삿된 행의 그대로인 진리란, 이른바 쌓임의 진리가 그것이고, 쌓임의 진리란, 이른바 참되고 비슷한 두 가지 쌓임이 그것이니, 참된 쌓임이란, 모든 번뇌가 다섯 가지 쌓임으로 하여금 상속하게 하는 이 존재인 것이고, 비슷한 쌓임이란, 모든 업이 능히 여러 갈래를 얻는 차별인 것이다. 또 쌓임이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 훈습(熏習)하는 쌓임이니, 이를테면 분별하는 성품 종류의 미혹이 능히 쌓임을 훈습하여 일으킴이다. 왜냐하면 분별하는 종류로 말미암아 그 미혹이 쌓임 분야의 원인을 짓기 때문이며, 둘째는 일으키는 쌓임이니, 이른바 번뇌와 업이 그것이다. 왜냐하면 이 번뇌와 업으로 말미암아 쌓임을 일으켜 성립하기 때문이다.
≪해석≫ 이 일으키는 쌓임은 곧 남을 의지하는 성품이고 남을 의지하는 성품의 체는 곧 번뇌와 업이니, 이 성품으로 말미암아 능히 미래 다섯 가지 쌓임의 자체를 내는 것이며, 또 분별하는 성품으로서 내는 것은 곧 스스로가 나서 남을 내는 것이니, 이 때문에 일으키는 쌓임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017_0692_b_01L≪논≫ 셋째는 서로가 여의지 않는 쌓임이니, 이를테면 쌓임의 그대로인 것이다. 이 그대로의 체가 장애를 여의지 못한 그것을 쌓임이라고 하나니, 왜냐하면 이 그대로가 바로 쌓임 편의 성품이기 때문이고, 쌓임이 그대로에 장애되는 것이기 때문에 쌓임의 그대로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가 바로 세 가지 성품이 없음이기 때문에 그대로라고 말하는 것이다.
다시 청정한 것의 그대로인 진리란, 이른바 사라짐의 진리에 역시 세 가지 뜻이 있는지라, 첫째 체상(體相)이 생멸이 없는 것이니, 이를테면 분별하는 종류의 미혹은 본래 체상이 없기 때문에 멸(滅)이라 하는 것이다. 둘째 잡는 것이 생멸이 없음이니, 이를테면 다만 난식(亂識) 종류의 미혹이 인(因)을 말미암거나 연(緣)을 말미암을 뿐, 본래 나는 것이 없기 때문에 멸이라 하는 것이다. 셋째 더러움과 깨끗함의 두 가지가 다 멸한 것이니, 이를테면 본래가 청정함으로써 더러움이 없는 청정한 것이다. 분별하는 성품을 잡아서 본래 더러움이 없음을 말하고 남을 의지하는 성품을 잡아서 더러움이 없는 청정함을 말할 뿐이니, 왜냐하면 이 성품이 체가 있다면 더럽힐 수 있는 것이어서, 도를 말미암아 더러움을 제거하기 때문에 청정함을 얻을 것이다.
본래가 청정함이란, 곧 도전(道前)이거나 도중(道中)이고, 더러움이 없는 청정함이란 곧 도후(道後)이니, 이 두 가지 청정한 것을 두 가지 열반이라고도 한다. 도전은 곧 택멸이 아니고, 제 성품의 본래 있는 그대로이므로 지혜로서의 얻는 것이 아니며, 도후는 곧 택멸이 도를 닦아 얻은 것이다. 도전을 잡아서 본래 있다고 말하고, 도후를 잡아서 처음 있다고 말다는 것이니, 처음 나타나는 것이 곧 처음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청정한 그대로의 진리라고 말하는 것이다.
다시 바른 행의 그대로인 진리란, 이른 바 도의 진리가 역시 세 가지 뜻이 있어서 첫째 아는 도이니 분별하는 성품이 그것이다. 이 성품은 체가 없고 다만 아는 것을 필요로 할 뿐, 면할 것이 없기 때문에 아는 도라고 말하는 것이다. 둘째는 제거하는 도이니 남을 의지하는 성품이 그것이다. 이 성품은 체가 있으니, 만큼 번뇌의 종류를 알아서 그 번뇌를 멸해야 하기 때문에 제거하는 도라고 말하는 것이다 셋째는 증득하는 도이니, 진실한 성품이 그것이라. 이 성품은 두 가지가 다 ‘공’하기 때문에 또는 제거할 것을 알아서 얻기 때문에 증득하는 도라고 말하는 것이니, 이러한 것을 이르되 바른 행의 그대로의 진리라고 한다.
017_0692_c_01L이 일곱 가지 진리의 체가 바로 세 가지 성품 없는 것이기 때문에 통틀어 그대로인 진리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일곱 가지 가운데, 앞의 세 가지는 편히 성립한 진리가 아니니, 왜냐하면 이 세 가지는 다만 따로의 이름만이 있고 따로 체는 없기 때문이다. 나는 것의 그대로인 진리가 맨 먼저 있는 까닭은 제멸(除滅)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양의 그대로인 진리가 그 다음에 있는 까닭은, 나는 편 쪽의 제멸할 수 있는 것과 같기 때문이고, 알음알이의 그대로인 진리가 맨 뒤에 있는 까닭은, 제멸하는 편의 방편이기 때문이다. 뒤의 네 가지 그대로인 진리는 제대로 성립한 진리이니, 왜냐하면 이 네 가지는 용(用)을 잡아서 이름을 성립한 그 용이 네 가지가 있기 때문이고, 체(體)를 잡아 이름을 성립한 것이 아니어서 그 체는 다만 동일한 맛이기 때문이다.
의지하는 것이 맨 먼저 있는 까닭은 알아보아야 하기 때문이니, 이 두 가지 이치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첫째는 알바의 대경이 많은 것이고, 둘째는 다만 알 것을 필요로 할 뿐, 다시 다른 뜻은 없는 것이다. 알 바의 대경이 많은 것이란, 괴롬의 진리 가운데, 무상함과 괴로움과 ‘공’함과 ≺나≻없는 이 네 가지 뜻이 있기 때문에 그 나머지 쌓임 등 세 가지 진리는 다만 이 네 가지 이름이 있을 뿐이고, 네 가지 뜻의 다름은 없으니, 왜냐하면 쌓임의 진리는 다만 인(因)의 뜻으로써 진실을 삼고, 사라짐의 진리는 다만 고요한 것으로써 진실을 삼고, 도의 진리는 다만 벗어나는 것으로써 진실을 삼고, 그 나머지 연(緣)이 있는 따위의 아홉 가지 뜻은 다 가칭한 이름인 것이다.
둘째의 이른바 다만 알 것을 필요로 할뿐, 다시 다른 뜻이 없는 것이란, 괴로움은 업의 과보이지 번뇌가 아니기 때문에 제거할 수 없고, 수승한 덕이 아니기 때문에 증득을 필요로 하지도 않고, 바른 행이 아니기 때문에 수행을 필요로 하지도 않고, 다만 싫어 여의기를 위해 알 것을 필요로 할 뿐이니, 이 때문에 다시 끊거나 증득하거나 수입하는 등 그러한 뜻이 없는 것이다.
017_0693_a_01L만약에 이것을 안다면, 곧 모든 미혹을 제거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삿된 행이 둘째에 있는 것은 미혹을 제거함으로 말미암아 청정함을 증득하기 때문이고, 청정한 것이 셋째에 있는 것은 청정함을 증득하여 구속하기 때문에 바른 행이 원만하나니, 왜냐하면 그 도의 용(用)이 있기 때문임으로 진실한 이치를 보는 것이 그 하나이고, 나쁜 법을 제거하는 것이 그 둘이고, 고요함에 이르는 것이 그 셋이니, 이 세 가지를 만약 구족한다면, 그 도의 용이 원만하겠고, 도의 용이 원만하기 때문에 바른 행이 넷째에 있는 것이다. 이 일곱 가지의 그대로인 진리가 바로 진실한 성품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