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017_0769_a_01L백자론(百字論)
017_0769_a_01L百字論一卷
제바보살(提婆菩薩) 지음
후위(後魏) 북인도(北印度)삼장 보리류지(菩提流支) 한역
김월운 번역
017_0769_a_02L提婆菩薩造 後魏北印度三藏菩提流支譯
내 지금 총명과 예지를 갖추신 스승님께 귀의하노라.
스승님의 그 이름 제바이시니 크나큰 지혜를 지니셨도다.
스승님은 백 개의 글자로써 능히 진실한 법을 펼치시니
모든 삿된 견해 물리치고 법의 진실한 모습을 드러내셨도다.
017_0769_a_04L我今歸依聰睿師
厥名提婆有大智
能以百字演實法
除諸邪見向實相
‘무슨 까닭으로 이 논서를 짓는가?’라고 묻는다면, ‘온갖 법들은 제각기 스스로의 모습[自相]을 갖는다’는 아견(我見) 따위의 주장을 부수기 위함이라고 대답하겠다.
017_0769_a_06L說曰何故造論爲破我見等一切諸法各有自相
상가(僧佉:상캬)의 학자는 말한다.
“온갖 법은 하나의 모습[一切法一相]을 갖는다. 이것이 나의 ‘요긴한 맹서의 말[要誓說]’이다. 어떤 까닭으로 ‘온갖 법은 하나의 모습[一切法一相]’이라는 주장을 세우는가?. 모두가 하나[一]를 함께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병이나 옷 따위의 물건이 모두 하나의 본성을 갖추고 있는 것과 같다. 이런 의미에서 온갖 법은 하나의 모습이라고 말하는 것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라는 이치가 성립한다.”
017_0769_a_08L僧佉曰一切法一相是我要誓說何因緣立一切法一相以盡同共有一故喩如甁衣等物體各有一以是義故當知一切法名爲一相是故一義成
불교의 학자는 말한다[內曰].
“하나가 아니다. 왜 그러한가?. 그대가 ‘요긴한 맹서의 말’로써 ‘하나의 모습이라는 주장’을 세운 것은 하나[一:같은 것]인가, 둘[二:다른 것]인가?. 만약에 이것도 하나라면 요긴한 맹서의 말만 있는 것이며, 하나의 모습이라는 주장은 없는 것이 된다. 이런 이치로 그대가 세운 하나라는 주장은 여기서 깨어진다.”
017_0769_a_13L內曰非一何以故汝要誓言一相義爲一爲二若是一者唯有要不應有一以是因緣汝所立一義卽破
비사사(毘舍師:바이셰시카)의 학자는 말한다.
“그대가 ‘하나[一]의 이치’를 깨뜨린다고 하니, 나는 여기서 ‘다름[異]의 이치’를 세우겠다. 하나라는 주장의 허물[過]을 버리기 위함이다.”
불교의 학자는 말한다.
“그대가 다름이라는 주장을 세운다면, 나는 오히려 하나라는 주장을 세우겠다. 무슨 까닭인가? 만약에 그대가 ‘당한 근거[因] 없이 다름의 주장을 세운다면, 나도 또한 타당한 근거 없이 하나라는 주장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017_0769_a_16L毘舍師曰汝言一破我今立捨一過故內曰汝若立異我還立何以故汝若離因立異我亦離因立一
비사사의 학자는 말한다.
“나는 반드시 다름이라는 주장을 세우겠다. 무슨 까닭인가?. 온갖 법은 차별이 있고 제각기 다른 모습[異相]을 갖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코끼리ㆍ낙타ㆍ사슴ㆍ말 따위의 종류가 그 모습이 제각기 다른 것과 같다. 이런 까닭으로 온갖 법의 모습은 모두 다르며, 온갖 법은 모두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다름의 이치가 성립된다.”
017_0769_a_19L毘舍師曰我要立異所以者何諸法差別各異相故喩如象駝鹿馬如是等類其相各異以是故諸法相一切法皆異是故異義成
017_0769_b_01L불교의 학자는 말한다.
“그대가 이것과 저것의 모습이 같지 않으므로, 다름의 이치가 성립된다고 말한다면, 모습의 다름에 있어서는 법은 모두 하나[一:같은 것]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가 세운 다름이라는 요긴한 맹서의 말이 무너졌다. 요긴한 맹서의 말이 무너졌기 때문에 다름이라는 법의 모습은 성립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017_0769_a_22L內曰以此彼相不同故言異義成者以相別故法各是一汝所立異要言則壞要言壞故則知異相不立
외도(外道)1)는 말한다.
“하나[一]와 다름[異]이라는 법의 모습[相]이 성립하지 않는다면, 나는 이제 ‘있음[有]’이라는 법의 모습을 세우겠다. 법은 제각기 ‘있음의 모습’을 나타내므로, 있음의 모습과 이치[義]가 성립하는 줄 당연히 알 수 있다. 그리고 있음의 모습이 성립하기 때문에, 하나와 다름도 또한 성립하는 줄 당연히 알 수 있다. 하나도 있음의 모습이요, 다름도 있음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017_0769_b_03L外曰以一異相不成故我今立有相以法各有相故當知有相義成有相成故當知一異亦成
불교의 학자는 말한다.
“그대가 지금 ‘있음’의 주장을 세우는 것은, 반드시 타당한 근거[因]가 있어야 할 것이다. 만약에 타당한 근거도 없이 있음의 주장을 세운다면, 나도 또한 타당한 근거 없이도 없음[無] 주장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017_0769_b_06L內曰汝今立有必應有因若無因而立有我亦無因而立無
외도는 말한다.
“나는 ‘온갖 법의 있음’이라는 주장은 성립한다’고 간단하게 말하겠다. 무슨 까닭인가?. 드러나 보이는 온갖 법은 제각기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허공의 꽃’은 본체[體]의 모습이 없어서 얻을 수 없지만[不可得], 병이나 옷 따위의 물건은 눈앞에서 본체의 모습의 있음과 쓰임새[用]를 나타내기 때문에 온갖 법은 모두 있음의 모습이라는 것을 마땅히 알 수 있는 것과 같다. 이런 까닭으로 있음의 이치는 성립한다.”
017_0769_b_07L我要言立一切法有何以故現見諸法各有相故喩如虛空中花無有體相故不可得衣等物現有用故當知一切法皆是有相以是因緣故有義得成
불교의 학자는 말한다.
“그대가 있음의 주장을 세우는 것은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있음이라는 그것은 모습이 없으므로, 이 두 가지(모습이 있음과 모습이 없음)가 함께 있다면 허물이 있다. 만약에 ‘모습을 나타내기 때문에 있음의 이치가 성립한다’고 한다면, 모습[相]을 나타내는 것이 있음이니, 있음도 또한 ‘이것(모습을 나타내는 것)’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두 가지 있음의 이치(‘있음’의 모습이 따로 ‘있음’)’는 서로 성립할 수 없다. 그런데 만약에 있음이라는 것에는 모습이 없다고 말한다면, 요긴한 맹서의 말은 무너지게 된다. 있음[有]과 없음[無]이 함께 이루어진다면 ‘타당한 근거’가 되지 않으므로 ‘있음의 이치[義]’는 곧 무너진다.”
017_0769_b_12L內曰汝立有者因有相故因無相故有此二俱有過若以現相故成有義者現相是有有亦是有二有理不相成若言因無要誓則壞有無俱非因故有義則破
외도는 말한다.
“만약에 내가 주장하는 있음을 깨뜨린다면, 그대는 곧 없음을 세우는 것이다. 없음의 이치가 성립된다면, 있음도 따라서 성립될 것이다. 비유하자면 세상 사람이 음식을 먹을 때에 먼저 거친 것을 먹으면 맛난 것도 있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그대가 나의 있음을 깨뜨린다면, 이것은 곧 없음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017_0769_b_16L外曰若破我有汝則立無無義得成有還得立喩如世人飮食先因麤澀故有美好以是故汝破我有當知是無
불교의 학자는 말한다.
“그대가 없음을 세운다면 어떤 타당한 근거가 있는가? 그대가 만약 타당한 근거 없이 없음을 세운다면, 나도 또한 타당한 근거 없이 있음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017_0769_b_19L內曰立無者因何而成汝若無因而成無我亦無因而成有
외도는 말한다.
“어떻게 알겠는가? 본체의 모습이 없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더울 때의 불꽃과 같다. 스스로의 본체의 모습이 없는데 하물며 적은 물이라도 얻을 수 있겠는가? 이런 까닭으로 온갖 법은 한 티끌의 모습조차도 얻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주장하는 없음의 이치는 성립한다.”
017_0769_b_21L外曰云何而知無體相故喩如熱時炎自無體相況而有少水可得以是因緣故一切法無一塵相可得是故我立無義成
017_0769_c_01L불교의 학자는 말한다.
“그대가 세운 없음[無]은 타당한 근거가 있는가, 타당한 근거가 없는가? 만약에 타당한 근거가 없다고 말한다면, 공연히 ‘요긴한 맹서의 말’을 한 것이 된다. 만약에 타당한 근거가 있다고 말한다면, ‘요긴한 맹서의 말’은 곧 무너진다. 그대가 만약에 없음이라고 말한다면, 없음도 또한 성립하지 않는다.”
017_0769_c_01L內曰汝所立無爲有因爲無因若言無因空有要誓若言有因要誓則壞汝若無無亦不成
외도는 말한다.
“온갖 법은 원인[因]이 있는데 그대가 있음과 없음 모두를 깨뜨리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무슨 까닭인가? 진흙, 실, 장포, 갈대 등이 있으므로 온갖 법은 모두 원인이 있는 것을 아는 것과 같다.”
017_0769_c_04L外曰一切法有因汝破有無者此義則不然何以故有埿葦等故知一切法皆有因
불교의 학자는 말한다.
“원인은 없다. 그대는 ‘원인이 있기 때문에 있음이다’라고 말하는데, 원인이 있다는 것은 곧 그것(원인)이 없다는 것이다. 만약에 진흙 속에 먼저 병이 있다고 한다면 진흙ㆍ실ㆍ장포 따위는 모두 그것(병)의 원인이 아니다. 무슨 까닭인가? 원인 속에 먼저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에 원인 속에 먼저 없었다고 한다면, 역시 그것의 원인이 아니다. 비유하자면 모래 속에 기름이 없으면 모래는 기름의 원인이 아닌 것과 같다. 만약에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고 말하더라도 이치는 역시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 하면 두 가지 허물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원인이 있어도 역시 생하지 않고[不生], 원인이 없어도 역시 생하지 않는다. 만약에 원인 없이 생한다면, 원인을 다시 어디에 쓴다 하겠는가? 만약에 원인이 있어서 생한다면 요긴한 맹서의 말은 곧 무너진다. 그대는 앞에서 ‘온갖 법이 모두 원인이 있어서 생한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옳지 않다.”
017_0769_c_06L內曰無因汝言有因故有有因則是若埿中先有甁縷等皆非是何以故因中先有故若因中先無亦非是因喩如沙中無油沙非油因若言亦有亦無義亦不成何以故二過故復次有亦不生無亦不生從無因生因復何用爲若從有因生要誓言則壞汝先言一切法皆有因生者此事則不然
외도는 말한다.
“눈앞에 병과 옷 따위의 쓰임[用]이 있으므로, 곧 온갖 법은 원인이 있어서 생한 것인 줄 안다. 모습이 갖추어져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017_0769_c_15L外曰現有甁衣等用故則知一切法皆從因生不相形故成
불교의 학자는 말한다.
“그대는 ‘결과가 있기 때문에 원인이 있다’고 말하는데, 이러한 이치는 성립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모습의 갖추어짐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결과의 쓰임(用)이 있는 것을 보고서 원인이 있다라고 말한다면, 결과 역시 원인이 된다. 결과가 만약에 원인이라면, 곧 결과는 없는 것이 된다. 결과가 없기 때문에 원인도 없다. 그러므로 인과가 모두 무너진다. 만약에 의지ㆍ자재ㆍ시간ㆍ방위 등의 원인에서 생한다면 이것은 곧 모습이 갖추어진 원인이다. 또한 이것은 유위법이며, 유위이므로 곧 무상하다. 자재와 시간과 방위는 모습이 갖추어져서 있게 되므로, 곧 원인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017_0769_c_17L內曰汝言有果故有因此義不何以故相形有故若以見果有用故言有因者果亦是因果若是因無果無果故則無因是故因果俱壞若言從意自在方如是等因生是相形因便是有爲法有爲則無常自在方相形而有則不因成
017_0770_a_01L외도는 말한다:
“내가 말한 바는 진실하다. 예전의 모든 선인(仙人)들이 이와 같이 말했다. 이 법은 결정된 법이어서 끝내 다름이 없다.”
017_0769_c_23L外曰我所言眞實先舊諸仙作如是說法決定終無有異
불교의 학자는 말한다:
“그대는 ‘법이 그러하다[法爾]’고 하였는데, 이것은 옳지 않다. 내가 말하는 바는 그대의 법과 다르다. 그대의 법에 있는 것이 내 법에는 없다. 내 법에 있는 것이 그대의 법에는 없다. 왜 그런가? 그대가 말하기를 ‘나의 법이 그렇다’고 하므로, 만약에 그대의 법이 그렇다면, 그것은 곧 자기만 인정하는 것이다. 자기만 인정하는 말은 곧 이치에 합당함이 없다. 이치에 합당함이 없다면 곧 아는 바가 없다. 만약에 아는 바가 있다면 곧 수승한 원인을 말할 것이다. 만약에 수승한 원인이 없이 ‘법이 그렇다’고 말한다면, 곧 아무런 이치가 없는 것이다.”
017_0770_a_02L內曰汝言法爾非正說如我所說與汝法異汝法中所有我法中則無我法中所有汝法中則無何以故汝言我法爾故汝法若爾則但自是自是而說則無理趣若無理趣則無所知若有所知更說勝因若無勝因而言法爾則無道理
외도는 말한다:
“이것은 우리들의 법이다.”
017_0770_a_08L外曰此是我家法
불교의 학자는 말한다:
“그대가 말하는 ‘우리들의 법’이라는 그 법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대의 법이 스스로 성립하지 않거늘, 어찌 다른 법을 성립시킬 수 있겠는가? 만약에 타당한 근거[因]가 없다면 끝내 주장을 이룰 수 없다. 자기만 옳다고 하는 그런 법은 바른 이치[正理]가 아니다.”
017_0770_a_09L內曰汝言我家法其法則不成汝法不自成云何能成若當離因者終無有所成自是其法者此則非正理
외도는 말한다:
“원인 없이 생기는 법은 없다. 토끼의 뿔, 거북의 털, 석녀(石女)의 아이, 허공의 꽃 따위와 같이 없는 법은 끝내 얻을 수 없다. 인연이 있어야 생기기 때문이다. 기름을 짜려면 깨를 구하고 병(甁)을 만들려면 진흙을 구하는 것을 보듯이, 하나의 법이 원인이 되어서 여러 법을 생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사물은 제각기 원인이 있다. 진흙으로 병을 이루지만 방석의 원인이 되지는 않고, 실로서 방석을 이루지만 병의 원인이 되지 않는 것과 같다. 이러한 것들로써 다른 법을 구하여도 또한 그러하다.”
017_0770_a_12L外曰無法非因生如兔角龜毛石女兒虛空花等如是無法終不可得以因緣生如見壓油求麻作甁求埿非以一法爲因能生多法而物各有因如埿能成甁不爲疊因縷能成疊不爲甁因以此類求餘法亦爾
불교의 학자는 말한다:
“그대는 ‘원인이 능히 생한다’고 하지만, 원인이 능히 생하지 못한다. 이 원인이 이루는 바가 있는가, 무너뜨리는 바가 있는가? 만약에 원인이 이루는 바가 있다면 그대를 이루고 또한 나를 이룰 것이다. 만약에 인연이 무너뜨리는 바가 있다면 나를 무너뜨리고 또한 그대를 무너뜨릴 것이다. 무엇으로 비유할까? 불이 능히 물건을 태우기 때문에 그대를 태우고 또한 나를 태우며, 만약에 저쪽이 뜨거우면 이쪽도 뜨거운 것과 같다.
017_0770_a_18L內曰汝言因能生者因不能生此因爲有所成爲有所壞若因有所成成汝亦成我若因有所壞我亦壞汝以何爲喩如火能燒物汝亦燒我若於彼處熱在此亦復然
017_0770_b_01L다시 이 이치를 밝히리라. 만약에 원인이 있어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면 그대를 이루고 또한 나를 이룰 것이다. 원인이 비록 생하는 바가 있으나, 원인의 법이 모두 성립하지는 않는다.그대는 ‘소리[聲]의 법이 항상하다’는 주장을 세워서 ‘요긴한 맹서의 말’을 삼는다. 무엇을 근거로 하는가? 몸이 없음[無身]을 근거로 한다. 어떤 비유를 하는가? 허공을 비유로 한다. 허공은 몸이 없이 항상하다. 이런 까닭으로 이름과 소리는 항상한 것이 된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도 이설(異說)을 말할 수 있다. 이름과 소리는 무상한 것이다.
017_0770_a_22L復次更明此義若言有因而成成汝亦成我因雖有所生因法不俱成立聲法是常作要誓說以何爲因身是因以何爲喩虛空爲喩虛空者無身而常以是故名聲作常復有異名聲無常
왜 그러한가? 소리는 지어진 법이기 때문에 무상하다. 어떻게 비유할까? 병이 진흙과 돌림바퀴와 끈과 사람의 힘과 물 따위를 원인으로 병을 이루는데, 지음을 인연으로 생하기 때문에 병이 무상한 것과 같다. 소리가 입술과 이빨, 목구멍, 혀 따위를 연으로 하여 생하기 때문에 소리 역시 무상한 것과 같다. 이 두 가지 원인이 이루는 바가 능히 있지는 않다. 그대가 진실을 말한다면 그 이치가 성립하겠지만, 헛된 근거를 허망하게 말한다면 이론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대가 요긴한 맹서의 말을 하는데, 요긴함이 있을 때는 맹서가 없고 맹서가 있을 때는 요긴함이 없다. 이 두 글자가 함께하지 않는다면, 요긴한 맹서는 곧 무너진다. 원인의 법이 생기기 전에는 원인이 되지 못하고, 멸하여도 원인이 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아이가 나기 전에는 생이라고 할 수 없고, 멸한 이후에도 생이라고 할 수 없다. 이런 까닭에 원인은 없다.”
017_0770_b_05L以何故聲是作法故無以何爲喩如甁因埿等而成甁以作因生故甁無常如聲從脣舌衆緣生故聲亦無常此二因能有所成汝言眞實其義有妄說虛因理則不立汝說要誓要時無誓有誓時無要二字不俱誓則壞如因法未生非爲因以滅亦非因如子未生不名爲生以滅亦非以是故無因
외도는 말한다.:
“그대는 비록 인과를 깨뜨리지만, 나는 ‘나[我]의 법이 있기 때문에, 인과가 성립한다’고 말한다.”
불교의 학자는 말한다:
“그대는 ‘나의 법’이 있다고 말하는데, 무엇을 본체로 하는가? 만약에 지식(知識)을 나로 삼는다면 지식은 무상한 것이다. 병(甁)을 아는 지식이 멸하고서야 방석을 아는 지식이 생겨난다. 만약에 지식이 나[我]가 아니라면 나는 지각이 없다. 나가 지각이 없다면 괴로움도 즐거움도 없다. 이러한 나는 본체도 모습도 없다. 만약에 나와 지각이 합하기 때문에 나에게 지각이 있다고 말한다면, 지각은 나와 합하기 때문에 지각은 지각이 아니다.”
017_0770_b_14L外曰汝雖破因果說有我法故因果則還成內曰汝言有我法以何爲體若以知識爲我識則無常知甁智以滅知疊智始生若知識非我我則無知我若無知無苦樂如是之我則無體相若言我與知合故我有知知與我合故知亦非知
017_0770_c_01L외도는 말한다:
“나는 있다. 왜인가? 병과 옷 등의 물건이 나의 것이기 때문에 내가 있는 것을 안다.”
불교의 학자는 말한다.
“하나의 허물이 있기 때문이다. 병과 있음은 하나이다. 다르지 않기 때문에 하나가 있다. 만약에 병과 병 아닌 것’에 하나가 있다면 이것(병 아닌 것)도 역시 병이다. 그렇다면 곧 여러 병이 있는 것이다. 만약에 병 아닌 것에도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병이 없는 것이다.”
017_0770_b_21L外曰有我所以者何衣等物是我所故當知有我內曰有一過故甁與有一不異故有一若甁非甁有亦應是甁是則多甁若有一非甁是則無甁
외도는 말한다.
“하나의 병이 있다고 하는데 하나이기 때문에 허물이 있다고 한다면, 나는 여기서 ‘다름’의 주장을 세우고자 한다. 하나의 허물을 버리고자 하기 때문이다.”
불교의 학자는 말한다.
“그대가 말하는 다름은 없는 것이다. 병의 존재[有]가 없으면 병도 없다. 비유하자면 다른 비구 바라문이라고 할 때 비구 바라문은 여기에 없는 것과 같다. 만약에 병이 존재[有]와 다르다면 곧 이것은 없는 것이다. 마치 칼과 칼집은 그 존재의 다름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것과 같다. 병에도 하나와 다름이 있다면 응당 볼 수 있어야겠지만 지금 하나와 다름을 볼 수 없기 때문에 다름이라는 이치는 성립하지 않는다.”
017_0770_c_02L外曰有一甁一故有過今立異捨一過故內曰汝說異則無甁有無故無甁喩如異比丘異婆羅當知無比丘婆羅門若甁異有則是無如刀與鞘有異可見甁有一異亦應可見今有一異不可見故異義不成
외도는 말한다.
“하나와 다름이 비록 무너졌지만 현실의 눈앞에는 병이 있음을 본다. 비유하자면 허공의 꽃은 존재가 없기 때문에 볼 수 없지만 병은 눈앞에 볼 수 있기 때문에 병의 존재가 있음을 알 수 있는 것과 같다.”
불교의 학자는 말한다.
“그것은 보는 것이 아니다. 어째서 보는 것이 아닌가? 그대가 지금 본다고 말하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것인가, 식별로 보는 것인가? 만약에 눈으로 보는 것이라면 죽은 사람도 눈이 있으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만약에 식별로 보는 것이라면 맹인에게도 식별이 있으므로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만약에 인식기관과 식별작용이 각각 볼 수 없다면 둘이 화합하더라도 볼 수 없을 것이다. 비유하자면 한 맹인이 볼 수 없다면 무리의 맹인도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017_0770_c_08L外曰一異雖壞現見有甁喩如虛空中花無故不可見甁現見故知有甁內曰不見何故不見汝言現見爲眼見爲識見若眼見者死人有亦應見若識見者盲人有識亦應若根識一一別不見和合亦不見喩如一盲不能見衆盲亦不見
외도는 말한다.
“ 병은 있다. 보이는 실체[色]가 있으므로 병은 있다.”
불교의 학자는 말한다.
“그대는 보이는 실체가 있으므로 병이 있다고 말한다. 보이는 실체와 병은 하나[一]인가 다름인가? 만약에 병과 보이는 실체가 같은 것이라면 다른 보이는 실체를 볼 때도 병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만약에 보이는 실체와 병이 다른 것이라면 병은 볼 수가 없는 것[非可見]이다. 그러므로 병은 없는 것이다. 만약에 볼 수 있는 것을 병이라고 한다면 병이 가려진 곳에 있어서 눈으로 볼 수 없을 때에는 병은 병이 아닐 것이다. 만약에 보이는 실체와 병이 하나라면 병이 부서질 때에 다른 보이는 실체도 무너질 것이다.”
017_0770_c_14L外曰有甁有色故有甁內曰汝言有色故有甁色與甁爲一爲異色若一餘色時亦應見甁若色異甁甁非可則無甁若以見爲甁甁在障處不見時甁應非甁若色與甁一甁壞餘色亦應壞
외도는 말한다:
“나의 법은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다. 보이더라도 무너지지 않고 보이지 않더라도 무너지지 않는다. 왜냐 하면 나의 법은 항상 있기 때문이다. 원인 중에는 결과가 있다. 미세하여 나타나지 않지만 이미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는 커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과가 있는 줄 안다.”
017_0770_c_20L外曰我法不生不滅見亦不壞不見亦不壞何以故我法常有故因中有果微細不現以先有後得成大以是故知有因果
017_0771_a_01L불교의 학자는 말한다.
“이미 있다면 따로 지을 필요가 없다. 진흙 속에 병이 있다면 도공이 필요 없는 것과 같다. 실 속에 비단이 이미 있다면 베 짜는 사람이 필요 없는 것과 같다. 병과 비단은 장인의 공을 기다려서야 이루어지므로 원인 안에 결과가 없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에 원인 안에 결과가 이미 있다면 미래의 법은 없을 것이다. 만약에 미래의 법이 없다면 곧 생멸이 없다. 생멸이 없다면 선악도 없다. 선악이 없다면 업을 짓는 일도 없고 죄와 복의 과보도 없다. 그렇다면 일체의 법은 없는 것이다.
017_0770_c_23L內曰先有不須作如埿有甁不須陶師縷有疊不須織師以甁疊待功匠成故知因中無果若因中已有果者無未來法若無未來法則無生滅生滅亦無善惡無善惡亦無作業罪福果報如是則一切法無
또 만약 원인 중에 미세한 과보가 이미 있고 거친 과보는 아직 없다고 한다면 이 거친 과보는 앞에는 없다가 나중에는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곧 생멸이 되며 그대가 앞에서 말한 바와 다르다. 또 만약 미세한 법이 이미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생기는 법이 아니다. 생기는 법이 아니라면 삼세의 법칙이 무너지는 것이다. 삼세가 만약 없다면 일체의 법이 없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에 원인 가운데 결과가 이미 있다면 우유 속에 이미 낙(酪)이 있다는 것이다. 만약에 앞에는 없다가 나중에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지어진 법인 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온갖 법이 원인 중에 이미 있다면 다시 지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017_0771_a_06L復次若因中先有微細果而無麤者是麤便先無而後有是則生滅違汝先說又若微細先有則非生法非生法故則壞三世三世若無當知一切法亦無因中先有果乳中已有酪若言先無而後有者當知是作法以是故一切法因中先有更不須作
외도는 말한다.
“만약에 ‘원인 가운데 결과가 이미 있다’고 말하는 것이 허물이 있다면, 이제는 ‘원인 가운데는 없다가 나중에 결과가 생긴다’고 말하겠다. 그렇게 되면 생멸이 없는 것을 떠난다. 그러므로 허물이 없다. 생함과 멸함이 있기 때문에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017_0771_a_13L外曰若因中先有果是過者今說因中先無而後果生離無生滅是故無過有生滅亦有亦無
불교의 학자는 말한다.
“생함이 없거나 생함이 있거나 일시(一時)가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에 병이 진흙 가운데 있다면 돌림틀, 끈, 사람의 노력 등이 없이도 병이 이루어질 것이다. 만약에 진흙 가운데에 병이 없다면 거북의 털로써 옷감을 짜서 쓸 수 없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러므로 원인 가운데에 결과가 있어도 생함은 없고 원인 가운데에 결과가 없어도 생함은 없다. 그렇다면 몸을 받는 것[受身]은 스스로 생함[自生]인가, 다른 것에서 생함[他生]인가? 두 가지 다 허물이 있다. 만약에 스스로 생한다면 생한다는 말을 쓸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스스로 생하는 자생의 몸은 없는 것이다. 만약에 스스로 생할 수 없다면 어찌 다른 것에서 생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만약에 자기와 남에게서 생한다고 한다면 이것 또한 허물이 있다. 그러므로 온갖 법은 생함이 없다.”
017_0771_a_16L內曰無生有生非一時若甁埿中已有不須輪人功等若無如龜毛不可紡織令使有用以是故有亦不生無亦不生又受身爲自生從他生二俱有過若自生何用生以是故自生無身若不從自云何而從他生若言自他生是亦俱有過以是故一切法無生
017_0771_b_01L외도는 말한다.
“만약에 몸이 없다면 생함[生]과 머무름[住]과 멸함[滅]이라는 유위의 세 가지 모습이 있을 수 없다. 만약에 유위가 있다면 무위도 있다. 유위와 무위가 성립한다면 온갖 법도 성립한다.”
017_0771_a_23L外曰若無不應有生滅有爲三相若有有則有無爲有爲無爲成故一切法亦成
불교의 학자는 말한다.
“유위의 법은 없다. 그대가 말하는 유위의 세 가지 모습은 차례로 생하는 것인가, 일시에 생하는 것인가? 차례로 생한다고 하여도 허물이 있고 일시에 생한다고 하여도 허물이 있다. 만약에 차례로 생한다고 하면 생할 때에는 머무름과 멸함이 없고 머무를 때에는 생함과 멸함이 없고 멸할 때에는 생함과 머무름이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차례로 생함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만약 생함의 머무름이 있다면 생함 자체도 없는 데 머무름이 어디에 머무르겠는가? 생함의 본체가 스스로 없는 데 머무름이 어찌 있겠는가? 생함도 없고 머무름도 없다면 석녀의 아이와 같다. 이것의 없음의 법이다. 만약에 생함과 머무름이 있었는데 멸에 의해 없어졌다고 한다면 생함과 머무름이 이미 없는 데 멸이 무엇을 없앨 수 있겠는가? 토끼의 뿔을 부순다고 할 때에 부순다는 말은 비어있는 것과 같다.”
017_0771_b_03L內曰無有爲法汝言三相爲次第生爲一時生次第亦有過一時亦有過若次第生生時無住滅住時無生滅滅時無生住以是故不得次第又若生有住生自無體住何所住體自無住云何有無生無住如石女兒是則無法若有生住爲滅所滅生住旣無滅何能滅如壞兔角空有壞名
외도는 말한다.
“그대는 ‘생함과 머무름과 멸함은 차례로 얻을 수 없다’라고 말한다. 유위의 모습은 마치 두 머리와 세 팔을 얻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유위의 세 가지 모습도 얻을 수 없다. 유의의 세 가지 모습이 일시에 있다 하여도 얻을 수 없다. 무슨 까닭인가? 만약에 생함 가운데에 멸함이 있다면 생함은 곧 생함이 아니다. 멸함 가운데에 생함이 있다면 멸함은 곧 멸함이 아니다. 머무름 가운데에 있는 생함과 멸함을 파하는 것도 이와 같다. 생함과 멸함이 서로 다른데 어찌 일시에 있다고 하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유위의 세 가지 모습은 차례로 생할 수도 없고 일시에 생할 수도 없다.
017_0771_b_11L外曰汝言生滅次第不可得有爲相如二頭三手不可得三相亦不可得若三相一時亦不可得何以若生中有滅生則非生若滅中有滅則非滅住中生滅破亦如是滅相違云何一時以是故三相次第生不可得一時生亦不可得
또 그대가 말하는 세 가지 모습이란 유위로써 모습을 짓는 것인가, 무위로써 모습을 짓는 것인가? 만약에 유위로써 모습을 짓는다면 생함도 유위이니 세 가지 모습이 있을 것이다. 머무름과 멸함도 또한 그러하다. 이와 같은 모습은 끝없이 많다. 만약에 모습이 끝없이 많다면 그대는 유위의 법이 다만 세 가지 모습만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요긴한 맹서의 말’이 무너진다. 만약에 모습이 무위를 나타낸다면 어찌 유위의 상으로써 무위의 상을 나타낼 수 있겠는가?”
017_0771_b_17L又汝言三相爲與有爲作相爲與無爲作相若與有爲作相生是有爲應有三相住滅亦爾如是之相則爲無窮相若無窮汝不應說有爲法但有三相誓則壞若相相無爲云何有爲相而能相無爲
017_0771_c_01L외도는 말한다.
“그대가 만약에 유위의 모습을 짓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무위의 모습을 지어야 한다. 무슨 까닭인가? 무위는 온갖 곳에 두루하여 방소(方所)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위에서 모습을 지어야 한다.”
017_0771_b_23L外曰汝若不欲令作有爲應作無爲相何以故無爲遍一切無方所故是故應與無爲作相
불교의 학자는 말한다.
“무위는 방소가 있다. 내가 지금 그대에게 묻는다. 허공은 방소가 있는가, 방소가 없는가? 허공이 만약에 방소가 있다면 허공은 응당 그대의 몸 곁에 있을 것이요, 그대의 몸은 허공의 곁에 있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부분이 있으며 부분이 있다면 끝이 있을 것이다. 만약에 허공에 방소가 없다고 한다면 그대의 몸이 허공에 꽉 찼는가, 허공이 그대의 몸에 꽉 찼는가? 만약에 허공이 그대의 몸에 꽉 차고 그대의 몸에 허공이 꽉 찬다면 허공은 끝이 있는 것이다.
017_0771_c_02L無爲有方所我今問汝虛空爲有方所爲無方所虛空若有方所應在汝身邊亦在彼身邊若爾便是有分有分則有邊若言虛空無方所爲汝身遍虛空虛空遍汝身若虛空遍汝身汝身遍虛空是則有邊際
그렇다면 병이나 옷, 방석 등이 끝이 있기 때문에 무상한 것과 같다. 허공도 끝이 있다면 그것도 무상하다. 그리고 항상한 원인이라야 항상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만약에 원인이 무상하다면 결과가 어찌 항상할 수 있겠는가? 진흙을 원인으로 하여 생겨난 병은 진흙이 무상하기 때문에 병도 또한 무상한 것과 같다. 방소가 있으므로 무상하다고 말한다. 또한 그대가 말하는 바 항상함이란 원인이 있기 때문에 항상하기도 하고 원인이 없기 때문에 항상하기도 하다.
017_0771_c_08L如甁等有邊故無常虛空爾者亦是無常又復常因能生常果因若無常果云何常如因埿生甁埿無常故甁亦無有方所故名爲無常又復汝所言有因故常無因故常
둘 다 허물이 있다. 만약에 원인을 따라서 생하는 것이 항상한 것이라고 한다면 병이나 옷 등의 물건과 같이 원인에서 생겨났기 때문에 모두 무상한 것이다. 그대가 만약에 원인 없이 생겨난 법을 항상하다고 한다면 나는 원인 없이 생겨난 법을 무상하다고 말한다. 만약에 원인 없이 생겨난 법이 반드시 있고 그것을 항상하다고 한다면 이것을 이치에 맞는 말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이치에 어긋난 말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여기서 분명히 그 타당한 이유를 밝혀야 할 것이다.”
017_0771_c_13L二俱有過言從因生是常者如甁衣等物從因生故皆亦無常汝若以離因生法是我亦以離因生法是無常若必有離因生法而常者爲是稱理言爲是偏黨說今應分明更說其因
외도는 말한다.
“원인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작인(作因)과 요인(了因)이다. 작인으로 생겨난 것은 무상하다. 병이나 옷 등의 물건은 작인에서 생겼기 때문에 무상한 것과 같다. 요인에서 생긴 법은 항상하다. 등잔불이 어둠 속의 물건을 비출 때에 어둠이 사라지고 물건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 지어진 법이 아니기 때문에 항상하다. 그러므로 작인에서 생겨난 것은 무상하고 요인에서 생겨난 것은 항상하다.”
017_0771_c_18L外曰有二種作因了因從作因生是無常如甁衣等物作因生故無常從了因生法是常如燈能照闇中衆物闇去物非作法故是常以是故從作因生者是無常從了因生者是常
017_0772_a_01L불교의 학자는 말한다.
“병 따위의 물건은 눈앞에 보기 때문에 있는 것이다. 무위는 눈앞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없는 것이다. 왜냐 하면 무위는 본체와 형상이 없기 때문에 없는 법이다. 있음을 버리고 없음도 버리고 둘을 모두 버림으로써 아견을 능히 끊을 수 있고 아소의 견해를 능히 끊어서 열반을 얻게 된다. 경에서 설한 바와 같다. 여여한 지혜의 경계에서 일체법의 공함을 본다면 식(識)은 취할 바가 없기 때문에 심식(心識)이 멸하고 종자도 멸한다.”
017_0771_c_23L內曰甁等物現見故是有無爲非現見故是何以故無爲無體相故無法捨有捨無二俱捨故能斷我見及我所見便得涅槃如經中說如智境見一切法空識無所取故心識滅種子滅
외도는 말한다.
“만약에 유위의 법이 본체와 형상이 없다면 무엇을 일러서 대상이 있다고 하는가?”
불교의 학자는 말한다.
“꿈과 같은 것이다. 세속의 법은 모두 꿈과 같다. 꿈은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없는 것도 아니다. 또한 원인이 없지도 않다. 마찬가지로 세속의 법은 모습이 있지도 않으며 모습이 없는 것도 아니며 원인이 없는 것도 아니다. 마치 집과 같으니 만약에 본체와 형상이 있다면 집을 짓기 전에 그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만약에 없다고 한다면 집은 아예 볼 수 없을 것이다. 대들보와 서까래와 주춧돌과 벽 등에 의지하여 쓰임새를 나타내고 있음으로 원인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온갖 법은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니며 원인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꿈과 같은 것이다.”
017_0772_a_05L若有爲法無體相云何而有實如夢世諦法皆如夢夢非實有非是無亦非無因如世諦法非有相非無相非無因如似屋宅若有體相未作時應見若言無不應得見假梁壁故而有成用非是無因以是一切法非是有非是無亦非無因是故如夢
외도는 말한다.
“만일 온갖 법이 꿈과 같다면 늙은이나 어린이나 젊은이가 병을 잡을 때에 어째서 방석 등을 잡을 수 없는가? 방석을 잡을 때에 어째서 병 등을 잡을 수 없는가? 현실에서 보건대 병을 잡을 때에 다른 물건을 잡을 수는 없다. 이름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체의 법은 꿈과 같지 않음을 알 수 있다.”
017_0772_a_13L外曰若一切法如夢老少中年取甁時何故不取疊等取疊時何不亦取甁等今見取甁不取餘物以名有定故當知一切法不如夢
불교의 학자는 말한다.
“이름은 본체가 아니다. 만약에 이름이 본체라면 병이라는 이름이 있을 때에 우유나 낙(酪) 등을 담을 수 있는 작용이 있어야 할 것이다. 세상에서 지혜로운 사람이 다만 병이라고 말함으로써 빈 이름만으로 쓰임새가 있는 것이라면 도공이 병을 만들거나 병을 시장에 내다 팔 필요가 없을 것이다. 몸에는 세 가지 이름이 있는 것과 같다. 남자이거나 여자이거나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것이다. 몸이라는 이름을 취하면 세 가지에 통한다. 그러나 이름으로써 이름을 구하면 세 가지가 서로 포섭될 수 없다. 그러므로 이름과 본체는 다른 것이다.
017_0772_a_16L名非是體若名是體如有甁名應便有盛乳酪等用如世智人言甁空名已有用者不應復須陶師造作出價市甁如身有三名若男若女非男非女以身取名則統於三若以名求名則三不相攝是故名體有異
017_0772_b_01L병에 소리가 있다면 들을 수 있고 색이 있다면 볼 수가 있다. 병의 냄새와 촉감도 또한 그러하다. 그렇다면 여러 개의 병이 있게 된다. 또 병에는 주둥이와 목구멍과 바닥, 배가 있다. 그 이름이 하나가 아니다. 그래서 여러 개의 병이 있게 된다. 이와 같이 관찰하건대 이름이란 빈 것이니 실체가 없는 줄 알아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게송을 말씀하셨다.”
017_0772_a_22L復次如甁有聲可聞有色可見甁嗅觸亦得如是則有多甁又甁有口是名非一復應多甁以此觀察名字虛假當知無實如佛所說偈
세간에는 거짓된 이름[假名]이 있나니
모습이란 더울 때의 불꽃과 같고
음성은 메아리와 같나니
세간의 모습은 꿈과 같도다.
017_0772_b_03L世閒有假名
相如熱時炎
音聲猶如響
世閒相如夢
외도는 말한다.
“그대가 비록 여러 가지 방법으로 법이 있다는 것을 파하지만 만약에 법이 있다고 말하면 그대의 말이 무너질 것이다. 만약 없다고 말한다면 없다는 것을 어찌 파할 수 있겠는가? ”
불교의 학자는 말한다.
“그대의 법이 본체와 형상이 있다고 하므로 내가 파하였는데 만약 본체가 없다면 내가 파할 것이 없다. 게송으로 말한다.”
017_0772_b_05L外曰汝雖種種破法是有若言有法則壞汝說若言是無無何所破內曰汝法有體相我則有所破若本無體則我無所破說曰
크신 님의 평등한 모습
마음에는 물든 바가 없고
또한 물들지 않음도 없으니
어디에도 머무는 바가 없구나.
017_0772_b_09L大人平等相
心無有染著
亦無有不染
都無有止住
본체와 형상이 있는 것들은
애욕이 있거나 애욕을 끊어야 하는데
무너지지 않는 믿음을 성취하면
이런 사견(邪見)을 버리게 되리.
017_0772_b_11L諸有體相者
有欲及斷欲
成就不壞信
而捨諸邪見
사견의 얽매임을 풀어버리고
온갖 더러움을 모두 없애어
3독(毒)의 상처를 모두 씻어서
바른 길을 부지런히 닦아야 하리.
017_0772_b_12L蠲除邪見網
衆穢悉滅盡
能棄三毒刺
勤行修正道
이와 같은 법을 잘 관찰하여서
깊은 마음으로 믿음과 공경심을 내어
진심으로 진실한 법을 구하여
세 가지 존재[三有]의 길로 가지 말아야 하리.
017_0772_b_13L善察如是法
深生信敬心
信心求實法
不趣向三有
유와 무를 취하지 않고
적멸의 길 깨달으면
일체의 법은 같음이 없고
그러한 법은 또한 다름이 없다.
017_0772_b_15L不取於無有
得證寂滅道
一切法無一
如是法無異
무엇이 존재의 참모습인가
원인의 법에는 본체가 없나니
모습 없이 이루어져 있게 된다면
이러한 법은 옳지 못하다.
017_0772_b_16L云何是有相
因法則無體
非相形而有
自是法不然
그대의 법이 성립되지 않는 건
이와 같이 타당한 이유가 없는 탓이니
그대가 말하는 본체와 형상
그것이 하나라면 곧 허물이 있다.
017_0772_b_17L汝法則不成
如此不用因
汝當說體相
一則是有過
만약 그렇다면 본체가 없고
다섯 가지 감관은 대상을 취하지 않으리
물질적인 대상은 이름이 있어
볼 수는 있지만 본체는 없다.
017_0772_b_19L若爾則無體
五情不取塵
色法有名字
所見亦無體
있음으로 작용하지 않기 때문에
그 법은 생함이 없나니
유위의 법은 본체가 없고
이와 같이 방소도 없다.
017_0772_b_20L以有不須作
彼法無有生
有爲法無體
如此亦有方
꿈과 같아 다름이 없고
모습도 다름이 없으니
이것이 백자론이라
제바께서 설한 바로다.
017_0772_b_21L等如夢無異
相亦無有異
此是百字論
提婆之所說
百字論一卷
癸卯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017_0772_c_01L
  1. 1)불교와 다른 주장을 하는 종교의 학자. 여기서는 ‘상가와 비사사의 공동적인 반론’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