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 삼계(三界)에 다만 가명(假名)이 있을 뿐이고 실지 그 밖의 대경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허망한 집착으로 말미암아 그런 것이다. 이제 저 진리를 증득하지 못한 자를 위해 모든 법 제 성품의 문(門)을 결정 선택하여 그로 하여금 뒤바뀜 견해가 없게 하려고 이 때문에 이 논을 짓는 것이니, 게송으로 말한다.
노끈을 보고 뱀이라고 아는 것은 그 노끈을 보고 아는 대경[뱀]은 없나니 만약에 저 부분을 깨달을 적엔 뱀처럼 보았던 것의 그릇됨을 알 것이네
≪논≫ 먼 데가 아니고 분명하지 않는 그러한 곳에 다만 노끈과 뱀의 비슷한 모양만을 보고서 저 차별된 제 성품을 알지 못하는 것은 미혹과 착란에 덮이었기 때문이다. 반드시 뱀이라고 집착했다가도 뒤에 가서 저 차별된 법을 깨닫고 나면 그것이 허망한 집착으로 말미암아 광란(誑亂)이 생긴 때문인 줄을 알게 된다. 다만 이것이 그릇 알았을 뿐이고 실다운 일은 없는 것이다. 다시 노끈의 그 갈래갈래를 잘 관찰할 적엔 노끈의 자체도 없을 수 없나니, 이와 같이 알고 나면 모든 노끈의 풀이가 마치 뱀 깨닫는 것과 같음은 다만 허망한 식이 있어서 저 노끈과 같은 것에 미혹되고 착란된 식을 일으켰을 뿐이며, 또 저 지극히 미세한 것에까지도 서로가 가자(假藉)되어 사실 얻을 것이 없는 줄을 알지니, 이 때문에 노끈에 반연함과 그 부분 등의 마음이나 모든 형상이 다만 허망한 식일 뿐이다. 게송을 말했다.
모든 존재는 가설(假設)된 일이니 제 성품을 자세히 관찰할 때 남을 따른 것은 다 가명(假名)이고 내지 세속의 경계도 그러한 것이네
≪논≫ 노끈과 같은 그러한 곳에 따로따로 분석하여 자세히 관찰할 때, 그것이 다 실체(實體)가 없고 다만 허망한 마음인 것임을 알게 되나니, 이와 같이 알라. 일체법은 다만 가명일 뿐이다. 병(甁)이나 옷[衣] 같은 물건도 진흙을 바르고 실로 꿰매어서 이뤄지는 것이고, 내지 언설(言說)도 식(識)의 행하는 경계다. 아직 파괴에 이르지 않은 것을 병 또는 옷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남을 따르는 것이란, 세속의 언설을 따라 있을 뿐 수승한 이치가 아님을 말하는 것이다. 게송을 말했다.
분석할 수 없음은 볼 수 없기 때문에 지극히 미세하여 없는 것과 같거늘 다만 혹란(惑亂)된 마음으로 말미암아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슬기로운 자는 집착하지 아니하네.
≪논≫ 만약에 또 고집하여 말하기를, ‘모든 존재는 가설(假設)된 일이어서 지극히 미세한 정도는 분석할 수 없고 방위와 분한[方分]도 없지만, 이 실체(實體)는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곧 공중의 꽃이나 토끼의 뿔과 같음이다. 볼 수가 없기 때문이고, 그것을 반연할 식(識)을 낼만한 힘이 없기 때문이다. 고집하는 그 지극히 미세한 것은 결정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니, 그러므로 모름지기 볼 수 없는 원인이라 설하는 것이고, 저 지극히 미세한 것을 내세워서 실체의 있음을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방위와 분한이 있고 일의 분별이 있기 때문이니, 마치 현전에 병이나 옷 따위의 물건이 있고 동방ㆍ서방ㆍ북방 따위의 방위와 분한이 있는 것을 보는 것과 같기 때문에 이것이 다 현전에 있고 그 분한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에, ‘지극히 미세한 것이 현전에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반드시 방위와 분한이 있고 별다른 성품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동방ㆍ서방ㆍ북방 같은 것도 그 방위와 분한이 별다르기 때문임을 인정해야 하리니, 이는 사실 지극히 미세한 것이라는 이치가 성취되지 않고, 또 하나의 실체가 아니라 많은 부분으로 이룩되고 보는 일이 다르기 때문에 지극히 미세한 것도 하나의 실체란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이니, 이와 같이 지극히 미세한 것에의 논란을 버려야 한다. 이 때문에 슬기로운 자는 삼계(三界)가 모두 다 허망한 정[妄情]인 것임을 분명히 아는지라, 미묘한 이치를 구하려고 하면 그 실체를 고집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허망하게 있는 것은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보는 것을 더불어 같지 않나니 경계와 형상이 바로 허망하기 때문에 반연하는 것도 역시 있는 것이 아니네.
≪논≫ 만약에 말하기를, ‘나도 저 병이나 옷 따위의 일에 대해 제 성품을 얻을 수 없는 것임을 인정하니 만큼, 이것이 다 허망한 식(識)의 분별하는 바이긴 하다. 그러나 저 형상을 반연하는 난식(亂識)은 그 실체가 있으니, 건달바의 성[建闥婆城]이나 허수아비 사람을 보더라도 그 식은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설령 이 식이 있다 하더라도 역시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는 보는 바 일을 더불어 서로 맞지 않기 때문에 이 미혹되고 착란된 식이 반연하는 경계에 대해 제 성품이 있다는 견해를 일으키는 것이다. 저 일의 제 성품이 이미 없는 것으로 밝혀졌고 경계도 이미 없고 반연하는 허망한 식도 역시 실체의 있는 것이 아니거늘 어떻게 저 허망한 식으로 하여금 있는 것이라 하겠는가. 그러므로 이 세간에는 일찍이 아무것도 없는 데에 종자를 내거나 움이 생겨나는 것을 볼 수 없느니라. 이것으로 말미암아 그대가 설한 바 건달바의성이라든가 허수아비의 비유는 그 도리가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게송을 말했다.
이것이 다 가설(假設)인 줄을 잘 깨닫는 이들은 알 수 있나니 슬기로운 사람이 번뇌 끊는 것은 뱀에 대한 겁을 제거하듯 쉬운 일이네.
≪논≫ 삼계(三界)엔 다만 가명(假名)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 것처럼, 병 따위의 머트러운 깨달음을 이미 제거하고 나면, 이름과 말을 따라 그 일이 있는 줄을 알 것이다. 그러므로 잘 관찰하는 이들은 이것을 분명히 알고 나서 곧 노끈의 곳에 뱀의 겁을 제거하고 다시 자세히 생각해 저 차별을 깨달음으로써 노끈 같은 곳에의 허망한 집착도 없어지느니라. 이와 같이 관찰할 때, 일체 더러운 법을 여읠 수 있고 번뇌의 그물을 빨리 제거할 수 있으며, 또 모든 업과(業果)를 스스로가 끊을 것이다. 다음 게송을 말했다.
슬기로운 사람이 세속의 일을 관찰하고서 세속을 따라 행하는 것처럼 번뇌 끊을 것을 구하려고 하면 참된 수승한 이치를 밝혀야 하네.
마치 세간 사람들이 모든 세속의 일인 병이나 옷 따위의 곳에 대해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여 병 또는 옷이라고 이름하는 것처럼 슬기로운 이도 그와 같아서 세간에 수순하여 언설(言說)을 일으키긴 하되, 그 실체의 있는 것이 아닌 줄을 아는지라, 만약에 번뇌의 과실을 즐거이 관찰하여 해탈을 구하는 자라면 마땅히 이러한 참되고 수승한 이치 가운데에 두루 파고들어서 그 이치대로 뜻을 지어야 하리니, 이렇게 함으로써 모든 경계에서나 또는 허망함을 반연하는 식(識)에 있어서 번뇌의 속박이 다시 자라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