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담(阿毘曇)2)이란 진(秦)나라 말로는 대법(大法)이다.3) 중우(衆祐)4)께서는 [이르시기를] “도과(道果)의 지극히 심오함을 관찰함으로써 그 성품과 형용을 헤아려 참된 모습[眞像]을 파악하는 것을 ‘대(大)’라 하고, 또한 도혜(道慧)의 지극함으로써 관찰하기를 마치 나침반과 같이 하여 하나의 상[一相]을 살피는 것이 ‘법(法)’이다”라고 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대법(大法)이라고 하는 것이다. 『중아함(中阿含)』에서 세존께서 우다야(優陀耶, Udaya)를 질책하여 말씀하시되 “너는 아비담을 힐난하고 있구나. 하지만 부처도 신(身)의 다섯 가지 법[五法]5)을 대아비담이라고 하였느니라”고 하였다.[계ㆍ정ㆍ혜를 일컬어 무루라고 한다.]
부처님께서 반열반하신 뒤에 가전연(迦旃延, Katyāyana)[논리(義)에 있어서 제일이다.]이 10부(部)의 경전은 범위가 너무 넓어 구명(究明)하기 어려웠기에 그 같은 대법을 찬술하여 1부(部) 팔건도(八犍度) 44품(品)으로 삼은 것이니, 그 경의 내용은 이보다 더 풍부함이 없고 심오하기도 이보다 더할 것이 없다. 중요한 도는 그것을 행함에 이에 말미암지 않음이 없으니, 이 어찌 풍요롭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지극한 덕이 오묘하되 여기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으니 어찌 심오하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풍부하고 심오함이 흡족하게 갖추어져 있으니, 능히 미묘함을 드러내 열고 그윽한 이치를 밝히고 있다.
여기에서 지혜를 설함에 있어서는 두루하지 않음이 없고, 근본을 설함에 있어서는 치밀하지 않음이 없으며, 선(禪)을 설함에 있어서는 다하지 않음이 없고 도를 설함에 있어서는 갖추지 않음이 없다. 두루하기 때문에 열여섯 가지의 작용[二八]이 각각 때에 맞추어져 있음이요, 치밀함이란 스무 가지가 번갈아 주빈(主賓)이 됨이며, 다하였기 때문에 미(味:愛)와 정(淨)으로 두루 그 문에서 노닌 것이며, 갖추었기 때문에 예리하고 둔함이 각각 그 연유를 분별한 것이다. 그러므로 높은 곳에 앉은 대덕께서 찬탄하게 되었고, 삼장(三藏)이 고무(鼓舞)하게 된 것이다. 저 신독(身毒:인도)에서 온 여러 사문들이 다 같이 이 경을 조술(祖述)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모두가 비바사(鞞婆沙)6)를 법칙으로 삼아 그밖에 또 다른 묘미를 노래하였다. 그렇지만 이것은 중국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총령(蔥嶺)의 밖에 있었으니 비록 그것을 따르고자 하더라도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024_0695_b_02L그러다가 건원(建元) 19년(383)에 계빈(罽賓, Kaśmīra)의 사문(沙門) 승가제바(僧伽提婆)가 이 경을 읽고는 매우 이롭다고 여겨 장안(長安)에 오니, 비구 석법화(釋法和)가 그로 하여금 인출(印出)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불념(佛念)이 번역하여 전해 주고 혜력(慧力)과 승무(僧茂)가 받아 적었으며, 법화가 그 뜻을 정리하였다. 4월 20일부터 출간하기 시작하여 10월 23일에 마쳤는데, 그날 교감한 이들과 번역한 이들이 이를 살펴보니, 이치와 말이 혼잡하여 마치 용과 뱀이 연못에 함께 있고 금과 구리가 한데 뒤섞여 있는 것과 같았다. 법화가 그러함을 살펴 이를 한탄하니, 다른 일들도 역시 심히 옳지 않다고 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다시 출간하기로 하였다.
새벽부터 밤늦도록 게으르지 않았기에 46일 만에 덜어내야 할 곳을 모두 결정하였으니, [이 때] 덜어낸 것이 4권이나 되었다. 그리고 지극한 이치에는 그 아래에 자세한 해석을 달아 주었다. 그리하여 범본(梵本)으로는 1만 5천 72수로(首盧)[48만 2천 5백 4언(言)]7)이었으나, 진(秦)의 말로는 19만5천2백50언이 되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인연(因緣) 1품을 망실하고는 말하되, ‘그것의 말의 수효는 십문(十門)과 같았다’고 하였다.8)
이 경(經)을 두루 열람함에 있어 대인들이 숭상하는 세 가지의 것이 있으니, 높은 자리에 있는 자는 그 넓음을 숭상하고, 번뇌가 다한 이는 그 요점을 숭상하며, 기틀[機]을 연구하는 자는 그 치밀함을 숭상한다. 여기에서 치밀하다고 함은 용과 코끼리가 코를 쳐들고 울부짖어도 그 소리가 귀에 닫지 못함이니, 사람들 중에 지극히 안정된 이가 아니면 그 누가 능히 이와 함께 말할 수가 있겠는가.
요점이란 8인(忍)과 9단(斷)의 거대함과 세밀함이 여기에 다 수록되어 있음이니, 사람들 중에 지극히 단련된 자가 아니면 그 누가 능히 이러한 경지에 이르겠는가. 넓다고 함은 숱한 미묘함 48가지가 두루 갖추어져 있음이니, 사람들 중에 지극히 아름다운 이가 아니면 그 누가 여기에 합할 수 있겠는가. 그리하니 장래 [불도를] 배우는 자로서 이 경 안에서 노닐 것 같으면, 구하여 얻지 못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여기에서는] 세간제일법(世間第一法)과 지(智)와 인(人)과 애공경(愛恭敬)과 무참(無慙)ㆍ색(色)ㆍ무의(無義)와 마지막으로 사품(思品)에 대해 설명한다.
024_0695_c_06L世間第一法, 智人愛恭敬, 無慚色無義,
最後說思品。
1) 세간제일법 발거(世間第一法跋渠)
024_0695_c_08L世閒第一法跋渠第一
세간제일법(世間第一法)2)이란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세간제일법이라고 부르는가? 세간제일법은 어떠한 세계에 매인[繫] 것인가? 마땅히 욕계에 매인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색계에 매인 것 혹은 무색계에 매인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세간제일법은 유각유관(有覺有觀)이라고 할 것인가, 무각유관(無覺有觀) 혹은 무각무관(無覺無觀)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세간제일법은 낙근(樂根)과 상응한다고 할 것인가, 희근(喜根) 혹은 호근(護根)과 상응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 세간제일법은 한 찰나의 마음[一心]이라고 할 것인가, 여러 찰나에 걸친 마음[衆多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세간제일법은 물러남[退]이 있다고 할 것인가 물러남이 없다고 할 것인가?
정(頂)3)이란 무엇인가? 정타(頂墮)란 무엇인가? 난(暖)이란 무엇인가? 이 스무 가지 신견(身見) 중 어떠한 것이 아견(我見)이며, 아소견(我所見)은 몇 가지의 견(見)인가?
024_0695_c_17L云何頂?云何頂墮?云何暖?此二十身見,幾我見?我所見有幾見?
024_0696_a_02L만약 무상(無常)을 유상(有常)이라고 본다면, 이것은 5견(見) 중 어떠한 견에 속하며, 어떠한 진리[諦]로 이 견을 끊을 수 있는가? 혹은 유상을 무상으로 보고 혹은 괴로움[苦]을 즐거움[樂]으로 보거나 혹은 즐거움을 괴로움으로 보며, 혹은 부정한 것을 청정한 것으로 보고 혹은 청정한 것을 부정한 것으로 보며, 혹은 무아(無我)를 유아(有我)로 보며, 혹은 무인(無因)을 유인(有因)으로 보거나 혹은 유인을 무인으로 보며, 혹은 유(有)를 무(無)로 보거나 무(無)를 유(有)로 보는 것은 5견 중 어떠한 견이며, 어떠한 진리로 이 견을 끊을 수 있는가? 이 장(章)에서의 내용을 모두 연설하겠다.
세간제일법이란 무엇인가?
【답】 모든 심(心)ㆍ심법(心法)이 순서[次第]대로 또는 순서를 뛰어넘어 증득[越次取證]하는 것을 세간제일법이라고 한다. 또 어떤 이4)는 주장하기를 5근(根)5)에 있어서 순서대로 또는 순서를 뛰어넘어 증득하는 것을 세간제일법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종의[義]6)에 따르면 모든 심ㆍ심법이 순서대로 순서를 뛰어넘어 증득하는 것을 세간제일법이라고 한다. 무엇 때문에 세간제일법이라고 부르는가?
【답】 이와 같은 심ㆍ심법은 그 밖의 모든 세간의 심ㆍ심법 중 최상이며, 능히 여기에 미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세간제일법(世間第一法)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또한 이 같은 심ㆍ심법은 범부의 성질[凡夫事]을 버리고 성스러운 법[聖法]을 획득하며, 그릇된 성질[邪事]을 버리고 바른 법을 획득하여 이 같은 바른 법 중에서 순서를 뛰어넘어 증득하므로 세간제일법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세간제일법은 어느 세계에 매인 것인가? 욕계에 매인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색계 혹은 무색계에 매인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인가?
【답】 욕계의 도로써는 개(蓋)7)나 전(纏)8)을 끊을 수 없으며 또한 욕계의 결(結)9)을 제거할 수도 없다. 그러나 색계의 도로써는 개와 전을 끊을 수 있으며, 욕계의 결도 제거할 수 있다. 만약 욕계의 도로써 개와 전을 끊을 수 있고, 또한 욕계의 결을 제거할 수도 있다면 이와 같은 세간제일법은 욕계에 매인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욕계의 도로써는 개와 전을 끊을 수 없고 욕계의 결을 제거할 수도 없으며, 바로 색계의 도로써 개와 전을 끊을 수 있고 욕계의 결을 제거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세간제일법은 욕계에 매인 것이라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세간제일법을 무색계에 매인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인가?
024_0696_b_02L【답】 등법(等法) 중에 순서를 뛰어넘어 증득함에 있어 먼저 욕계의 괴로움을 괴롭다고 생각하고 난 뒤에 색계와 무색계의 괴로움을 괴로움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성도(聖道)를 일으킨다면 먼저 욕계의 본질[事]을 분별하고 난 후에 비로소 색, 무색계의 본질을 분별한다. 만약 등법 중에 순서를 뛰어넘어 증득함에 있어 먼저 무색계의 괴로움을 괴롭다고 생각하고 난 뒤에 욕계와 색계의 괴로움을 괴롭다고 생각하며, 성도를 일으킴에 있어 먼저 무색계의 본질을 분별하고 난 후에 비로소 욕계와 색계의 본질을 분별한다고 할 것 같으면 세간제일법은 무색계에 매인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다만 등법 중에 순서를 뛰어넘어 증득할 때에는 먼저 욕계의 괴로움을 괴롭다고 생각하고 나서 색계와 무색계의 괴로움을 괴롭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만약 성도를 일으킬 때에는 먼저 욕계의 본질을 분별하고 난 후에 색계와 무색계의 본질을 변별하는 것이기 때문에 세간제일법을 무색계에 매인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또한 무색정(無色定)에 들어서는 색상(色想)을 제거하니 색상이 없이는 욕계를 분별하지 못하는 것이다. 마치 그것이 고법인(苦法忍)10)에 소연(所緣)이 되는 것처럼 세간제일법에도 역시 소연이 되기 때문이다. 세간제일법은 유각유관(有覺有觀)이라고 말해야 할 것인가, 무각유관(無覺有觀) 혹은 무각무관(無覺無觀)이라고 말해야 할 것인가?
024_0696_c_02L【답】 무각유관의 삼매에 의거하여 획득한 세간제일법이니, 이것을 무각유관이라고 한다. 무엇을 무각무관이라고 하는가? 【답】 무각무관의 삼매에 의거하여 획득한 세간제일법이니, 이것을 무각무관이라고 한다. 세간제일법은 낙근(樂根)과 상응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 희근(喜根) 혹은 호근(護根)과 상응한다고 말해야 할 것인가? 【답】 세간제일법은 낙근과 상응하고 혹은 희근과 상응하며 혹은 호근과도 상응한다. 무엇을 낙근과 상응한다고 하는 것인가?
【답】 제3선(第三禪)에 의거하여 획득한 세간제일법이니, 이것을 낙근과 상응하는 것이라고 한다. 무엇을 희근과 상응한다고 하는 것인가? 【답】 제일, 제이선에 의거하여 획득한 세간제일법이니, 이것을 희근과 상응하는 것이라고 한다. 무엇을 호근과 상응한다고 하는 것인가? 【답】 미래선(未來禪)11)에 의거하고 선중간(禪中間)12)에 의거하고 제사선에 의거하여 획득한 세간제일법이니, 이것을 호근과 상응하는 것이라고 한다. 세간제일법은 마땅히 한 찰나의 마음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여러 찰나에 걸친 마음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답】 세간제일법은 마땅히 한 찰나의 마음으로 여러 찰나에 걸친 마음이 아니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어째서 세간제일법은 한 찰나의 마음이며 여러 찰나에 걸친 마음이 아닌가?
024_0696_c_10L答曰:世閒第一法當言一心,非衆多心。以何等故世閒第一法一心非衆多心?
【답】 만약 세간제일법이라면 중간에 그 밖의 세간법을 일으키지 않으며, 오로지 무루(無漏)만이 있을 뿐이다. 만약 중간에 [다른 세간법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전 찰나의 세간제일법보다] 열등한 것인가, 동등한 것인가, 뛰어난 것인가? 만약 열등한 것이라면 순서를 뛰어넘어 증득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물러나는 도[退道]로는 등법 중에 순서를 뛰어넘어 증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동등한 것이라 할지라도 역시 순서를 뛰어넘어 증득할 수 없다. 왜냐하면 본래 이 도(道)로써는 순서를 뛰어넘어 증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뛰어난 것이라면 그 본래의 심(心)ㆍ심소념법(心所念法)은 세간제일법이 아닐 것이며, 나중의 심ㆍ심소념법이라면 이것을 바로 세간제일법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세간제일법은 마땅히 물러남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인가, 물러남이 없다고 해야 할 것인가?
024_0697_a_02L【답】 세간제일법은 물러남이 없다. 어떠한 이유에서 세간제일법은 물러남이 없다고 하는가? 【답】 세간제일법은 진리[諦]를 따르고 진리로 충만하고 진리를 분별[辨]하는 것이니, 비거나 결함이 없는 없는 무소유로서 약간의 마음[若干心]을 일으켜 [성도를] 사유하지 못하게 함이 없다. 비유하자면 어떤 사람이 물을 건너고 산이나 계곡 언덕 등의 험난한 곳을 지날 때 몸을 바르게 하고 몸이 아직 이르기 전에 마음을 돌리지 않으면 반드시 목적지에 도작하는 것처럼 세간제일법 역시 그러하다. 즉 그것은 진리를 따르고 진리로 충만하고 진리를 분별하는 것이므로 비거나 결함이 없는 무소유인 것이다. 따라서 약간의 마음을 일으켜 [성도를] 사유하지 못하게 함이 없다.
마치 항가(恒迦)13)ㆍ담부나(擔扶那)14)ㆍ살뇌(薩牢)15)ㆍ이라발제(伊羅跋提)16)ㆍ마혜(摩醯)17) 등의 다섯 개의 빠르게 흐르는 큰물은 모두 대해로 흘러 나가지만, 능히 그 흐름을 끊는 것도 없고 장애가 되는 것도 없어서 대해로 흘러가고, 바다를 충만하게 하며, 바다를 분별하는 것처럼 세간제일법 역시 그렇다. 즉 진리를 따르고 진리로 충만하고 진리를 분별하는 것이므로 비거나 결함이 없는 무소유로서 약간의 마음을 일으켜 [성도를] 사유하지 못함이 없는 것이다. 또한 세간제일법과 고법인 중간에는 마음을 괴롭히는 하나의 법도 없으니, 그때에 능히 제압해서 성도를 사유하지 못하게 하는 일이 없다. 그러므로 세간제일법은 물러남이 없다고 말한다. 정법(頂法)이란 무엇인가? 무엇을 정법의 물러남이라고 하는가?
【답】 비유하자면 물방울이 떨어지는 것과 같은 짧은 순간의 환희로서 불(佛)ㆍ법(法)ㆍ승(僧)을 향하는 것이다. 세존께서 16바라문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대들이여[諸摩那]18), 물방울이 떨어지는 짧은 순간 정도의 환희만으로도 불ㆍ법ㆍ승을 향한다면 이것을 정법이라고 한다.”고 말씀하셨던 것과 같다. 무엇을 정법의 물러남이라고 하는가?
【답】 [이미] 정법을 얻었던 자가 목숨이 다하여 물러나서는 재차 드러내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은 선지식을 만나 그를 따라 법을 듣고 사유하고 내적으로 헤아려 부처[佛]의 도를 믿고 그 가르침[法]을 좋아하고 승가[僧]를 따른다. 그리고 색(色)은 무상하고, 통(痛)19)ㆍ상(想)ㆍ행(行)ㆍ식(識)도 무상하다고 믿으며, 고(苦)ㆍ습(習)ㆍ진(盡)ㆍ도(道)를 믿고 사유한다. 그러나 그는 어떤 때에는 선지식을 만나지 못해 법을 듣지 못하고 사유하고 헤아리지 못해 세속의 믿음에서 물러나니, 이를 정법의 물러남이라고 하는 것이다. 난법(暖法)20)이란 무엇인가?
024_0697_b_02L【답】 바른 법 가운데 자비와 환희를 일으키는 것이다. 마치 이는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마사(馬師)비구와 만숙(滿宿)비구, 이 두 어리석은 이는 나의 법 중에서 털끝만큼의 난법도 갖지 않았다.”라고 하신 것과 같다. 스무 가지 신견(身見)에서는 몇가지가 아견(我見)이며, 아소견(我所見)에는 몇가지 견이 있는가? 【답】 다섯 가지는 아견이고, 열다섯 가지는 아소견이다. 무엇을 다섯 가지 아견이라고 하는가?
【답】 색아견(色我見)과 통ㆍ상ㆍ행ㆍ식의 아견이니, 이것이 다섯 가지 아견이다. 무엇을 열다섯 가지 아소견1)이라고 하는가? 【답】 색을 나의 것이라 보고 나 가운데도 색이 있다고 보며, 색 가운데도 내가 있다고 보고 통ㆍ상ㆍ행ㆍ식도 나의 것이라고 보며, 나 가운데도 [통ㆍ상ㆍ행]ㆍ식이 있다고 보고 [통ㆍ상ㆍ행]ㆍ식 가운데도 내가 있다고 보는 것이니, 이것을 열다섯 가지 아소견이라고 한다. 만약 무상을 유상으로 본다면 이것은 변견(邊見)2)이니, 고제로써 끊어야 한다[苦諦所斷].
유상을 무상으로 본다면3) 이것도 그릇된 생각[邪見]이니, 진제로써 끊어야 한다[盡諦所斷]. 괴로움에 즐거움이 있다고 보는 것은 악법을 최고로 삼는 것으로, 이를 견도(見盜)4)라 말하며, 고제로써 끊어야 한다. 즐거움에 괴로움이 있다고 보면5) 이것은 그릇된 견해로, 진제로써 끊어야 한다. 더러움[不淨]에 깨끗함이 있다고 보면 악법을 최고로 삼는 것으로, 이는 견도(見盜)이니 고제로써 끊어야하며 깨끗함에 더러움이 있다고 보면 그릇된 견해로, 진제(盡諦)에 의해 끊거나 혹은 도제(道諦)에 의해 끊어야 한다. 만약 진(盡)이 더럽다고 관찰하면, 이것은 잘못된 생각으로 진제로서 끊어야 한다. 만약 도(道)가 더럽다고 관찰하면, 이것은 잘못된 생각으로 도제로써 끊어야 한다. 무아임에도 ≺나≻[我]가 있다고 보면, 이것은 신사견(身邪見)으로 고제로써 끊어야 한다.
원인이 있는데도 원인이 없다고 보면, 이것은 그릇된 견해이니, 습제로써 끊어야 한다. 원인이 없는데도 원인이 있다고 보면 무작인(無作因)으로 짓는 것이니, 이것은 계도(戒盜)이며, 고제로써 끊어야 한다. 만약 [4제 등의 진리가] 있는데도 없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그릇된 견해이니, 고제로써 끊어야 하고 혹은 습제로써 끊어야 하며 혹은 진제로써 끊어야하고 혹은 도제로써 끊어야한다. 만약 괴로움[苦]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이것은 그릇된 견해이니, 고제로써 끊어야 한다.
024_0697_c_02L만약 괴로움의 원인[習]과 그 소멸[盡], 소멸에 이르는 방법[道]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잘못된 생각으로 습ㆍ진ㆍ도로써 끊어야 한다. 만약 존재하지 않는데도 존재한다는 견해를 편다면 이것은 견(見)이 아니고 그릇된 지식[邪智]6)이다. 이상 아비담의 첫 번째인 세간제일법의 발거를 마친다. [범본(梵本) 528수로(首盧)]
한 찰나의 지혜[一智]로써 모든 법을 알 수 있는가? 한 찰나의 의식[一識]으로 모든 법을 알 수 있는가? 두 찰나의 마음[二心]이 전전(展轉)하여 서로의 인(因)이 될 수 있는가? 두 찰나의 마음이 전전하여 서로의 연(緣)이 될 수 있는가? 어떠한 이유에서 한 사람의 전후 두 마음은 동시에 일어날[俱生] 수 없는 것인가? 만약 사람이 얻을 수 없는 것이라면 앞서 생겨난 마음[前心]이 뒤에 생겨난 마음[後心]으로 나아감도 없거늘 어떠한 이유에서 이전에 행위하였던 것을 기억할 수 있는 것인가? 또한 어떠한 이유에서 의식이 굳게 기억하며, 또 어떠한 이유에서 기억하고는 잊어버리지 않는 것인가?
어떠한 이유에서 제사를 지내면 아귀는 [그 음식들을] 바로 얻지만 다른 세계에 있는 존재들은 얻지 못하는 것인가? 하나의 눈[一眼]으로 색(色)을 보는가, 두 개의 눈으로 색을 보는 것인가? 귀와 소리, 코와 냄새 역시 그러한 것인가? 모든 과거는 그 전부가 [현재에는] 나타나지 않는 것인가? 만약 나타나지 않는 것이라면 그 모든 것이 과거인가? 모든 과거는 일체가 다해 없어진[盡] 것인가? 만약 다하여 없어진 것이라면 그 전부가 과거인가? 모든 과거는 일체가 끝난[沒] 것인가? 만약 끝난 것이라면 그 모든 것이 과거인가?
만약 괴로움[苦]에 대해 의혹이 생기면 이것은 괴로움인가 괴로움이 아닌가? 그리고 그것은 한 찰나의 마음이라고 말해야 할 것인가, 여러 찰나에 걸친 마음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만약 습(習)ㆍ진(盡)ㆍ도(道)에 대해 의혹이 생기면 그것은 도인가, 도가 아닌가? 그리고 그것은 마땅히 한 찰나의 마음이라고 말해야 할 것인가, 여러 찰나에 걸친 마음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한 찰나의 마음에는 의혹이 있는가, 의혹이 없는가? 무엇을 가리켜 명신(名身)이라고 하는가? 무엇을 구신(句身)이라고 하며, 무엇을 미신(味身)이라고 하는가?
024_0698_a_02L불ㆍ세존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어리석은 이들[癡人]이다”고 말씀하신 일이 있다. 이 뜻은 무엇인가? 어째서 불ㆍ세존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어리석은 이들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인가? 여섯 가지 원인이 있는데, 상응인(相應因)7)ㆍ공유인(共有因)8)ㆍ자연인(自然因)9)ㆍ일체변인(一切遍因)10)ㆍ보인(報因)11)ㆍ소작인(所作因)12)이 그것이다. 무엇을 상응인이라고 하는가? 무엇을 공유인이라고 하는가? 무엇을 자연인이라고 하는가? 무엇을 일체변인이라고 하는가? 무엇을 보인이라고 하는가? 무엇을 소작인이라고 하는가?
만약 마음에 번뇌[使]가 있고 모든 번뇌와 마음이 함께 있다면 그 번뇌는 이 마음에 의해 얽매이는가? 만약 번뇌가 마음에 의해 얽매이고 이 마음이 그 번뇌와 함께 있다면 그 번뇌는 이 마음과 함께하는 번뇌인가? 만약 마음에 번뇌가 함께 있고 모든 번뇌와 마음이 함께 있다면 그 번뇌는 이 마음에서 끊어지는 것인가? 만약 번뇌가 마음에서 끊어지는 것이라면 이 마음은 번뇌와 함께 있으므로 그 번뇌와 이 마음은 함께 끊어지는 것인가? 멸인식(滅因識)이라 하는데, 무엇이 멸인식이며, 멸인식이란 어떠한 번뇌에 의해 얽매이는가? 이 장에서의 내용을 모두 연설하겠다. 한 찰나의 지혜[智]로써 일체법을 아는가?
【답】 알 수 없다. 만약 이 지가 ‘일체법은 무아이다’라고 하는 사실을 생기게 했다면 이 지혜는 무엇을 모르는 것인가? 【답】 자연(自然)을 알지 못하며,13) 공유법(共有法)을 알지 못하며, 상응법(相應法)을 알지 못한 것이다. 한 찰나의 의식[識]으로써 모든 법을 인식하는가?
【답】 인식할 수 없다. 만약 이 의식이 ‘온갖 법들은 무아이다’라고 하는 사실을 생기게 했다면 이 의식은 무엇을 통달하지 못한 것인가? 【답】 자연을 알지 못하며 공유법을 알지 못하며, 상응법을 알지 못한 것이다. 두 찰나의 마음이 전전(展轉)하여 서로의 원인[因]이 될 수 있는가? 【답】 될 수 없다. 어떤 사람에게 이전과 미래 동시에 생겨난 두 찰나의 마음은 존재하지 않으며, 미래의 마음이 이전 마음의 원인이 되지도 않는다. 두 찰나의 마음이 전전하여 서로의 연(緣)이 될 수 있는가?
024_0698_b_02L【답】 될 수 있다. 이를테면 미래[當來]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첫 번째 그릇된] 마음을 일으키고 그것은 다음 순간[當念時] 바로 두 번째 [그릇된] 마음을 일으키는 것과 같다. 또한 미래가 존재한다고 생각하여 [첫번째 바른] 마음을 일으키고, 그것은 다음 순간 바로 [두 번째 바른] 마음을 일으키는 것과 같다. 또한 미래의 도(道)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마음을 일으키고 그것은 다음 순간 바로 두 번째 마음을 일으키는 것과 같다. 또한 미래의 도는 존재한다고 생각하여 마음을 일으키고, 그것은 바로 다음 순간 두 번째 마음을 일으키는 것과 같다.14) 혹은 타인의 마음을 아는 두 사람의 전전하는 마음은 [서로에게] 연이 되는 것이다. 어떠한 이유에서 한 사람이 앞뒤의 두 마음을 동시에 일으킬 수 없는 것인가?
【답】 두 번째 차제연(次第緣)15)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생은 매 찰나 마다 마음이 변하니, 마치 사람이 허공을 잡을 수 없는 것과 같다. 먼저 생겨난 마음은 머물러 있지 않거늘 뒤의 마음은 어떻게 본래 지었던 것을 기억하는가? 【답】 중생은 법 중에 이 같은 지혜16)를 획득하여 이전에 지었던 바를 기억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도장을 파서 글자를 새겨 넣는 것과 같다. 즉 어떤 도장에 새겨있는 것이 아는 글자라면 현재 남이 새겨 넣은 글자도 역시 알며, 자기가 새긴 것 또한 스스로 안다. 그래서 ‘너는 어떤 글자를 새겼는가’라고 그는 따라와 묻지 않고 나 또한 가서 묻지 않으며, 그 역시 ‘나는 이러한 글자를 새겼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도장에 새겨진 글자에 대하여 새겨진 글자임을 스스로 안다면, 자신이 새긴 것도 역시 알고 다른 이가 새긴 것도 역시 아는 것이다.
이처럼 중생은 법에 대하여 행해진 것을 따라서 곧 알며, 행해진 법 역시 아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타인의 마음을 아는 두 사람이 각기 상대방의 마음을 서로의 원인으로 삼는 것과 같다. 그럴 때 그 중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너는 무엇을 가리켜 서로의 원인이라고 하는가’라고 묻지 않으며, 그 역시 ‘나는 이런 인연을 지어 역시 타인의 마음을 안다’고 대답하지 않는다. 즉 법으로서 이 같은 마음[意]을 획득하여 각기 서로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중생도 법으로서 이 같은 지혜를 획득하여 전법(前法)에 따라 바로 아는 것이다. 또한 일체의 심소념법(心所念法)은 그 원인[因]과 조건[緣]을 결정적으로 갖고 있으며 또한 마음을 닦아 행위한[修意所作] 힘이 있어 의식은 항상 잊히지 않는 것이다. 어떠한 이유에서 기억하고서 다시 기억하는가?
024_0698_c_02L【답】 중생의 법에 있어서는 마음이 자연히 되돌아오면 거기에 차제지(次第智)가 생겨나며, 또한 마음을 닦는 힘[修意力]으로 굳고 전일한 마음이 되어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다. 어떠한 이유에서 기억하고 나서 다시 기억하지 못하는가? 【답】 중생의 법에 있어서는 의식이 스스로 되돌아오지 않으면 거기에 차제지가 생겨나지 않으며, 또한 의식이 점차 미약해져 항상 대부분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제사를 지내면 아귀(餓鬼)는 그곳에 이르지만 다른 세계에는 이르지 않는가?
【답】 아귀의 도(道)는 원래 그러하다[自爾]. 즉 태어나 머무는 곳[入處]의 법과 받은 신분(身分)이 그러하기 때문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원앙이나 기러기ㆍ학ㆍ공작ㆍ앵무 등의 새나 천추(千秋)ㆍ공명조(共命鳥)17)가 능숙하게 허공을 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새는 사람보다 영묘하지 못하며 사람보다 위대하지도 못하다. 위신력에 있어서도 인간보다 영묘할 수 없으며, 덕(德) 또한 인간보다 클 수 없다.
그럼에도 그 존재[法]는 스스로 그러해서 새의 몸으로 태어나서 비행하는 것이다. 또한 비유하자면 니리(泥犁, Naraka)와 축생도와 아귀계는 모두 숙명(宿命)을 알고 다른 이의 마음[他意]도 역시 알며, 또한 번개를 치고 구름을 모아 비바람을 내리치게 하는 등의 이런 여러 가지 일을 행할 수 있는 것과 같다. 그렇지만 그것들은 사람보다 뛰어나지 못하며, 정신에 있어 사람보다 클 수 없고 힘에 있어서도 사람을 압도할 수 없다. 그럼에도 그 존재는 스스로 그러한 것으로, [그 같은 곳에] 태어나고 몸을 받게 된 것은 지은 바의 과보이다.
그리고 다시 이같이 말한다. “나는 당연히 아이를 가질 것이며, 그 아이도 나중에 당연히 아이를 가질 것이다. 내가 죽은 후 만약 아귀에 떨어진다 하더라도 나를 생각하고 나에게 췌식(揣食)18)을 시여할 것이다.”그는 기나긴 밤 이와 같이 욕망하고, 이와 같이 염원하고, 이와 같이 탐하고 이와 같이 사유하니, 염원한 바가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하나의 눈으로 색(色)을 보는 것인가, 두 개의 눈으로 색을 보는 것인가? 【답】 두 개의 눈으로 색을 본다. 어떠한 이유에서 두 개의 눈으로 색을 본다고 하는 것인가?
024_0699_a_02L【답】 만약 한 눈을 감고 색을 본다면 명료하지 않아[不淨] 불명확한 인식[不淨識]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두 눈을 뜨고 색을 본다면 명료한 인식[淨識]이 일어난다. 만약 한쪽 눈을 감고 색을 보면 명료한 인식이 일어나고, 두 눈을 열고 색을 보면 불명확한 인식이 일어난다고 할 것 같으면 “두 눈이 색을 본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만 한쪽 눈을 감고 색을 보면 불명확한 인식이 일어나고 두 눈을 뜨고 색을 보면 명료한 인식이 일어나기 때문에 “두 눈이 색을 본다”고 하는 것이다. 한쪽 눈을 감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눈이 파괴되고[壞] 소멸되고[滅] 훼손된[沒] 경우 역시 그러하다. 그리고 귀와 소리, 코와 냄새의 관계 역시 그러하다. 모든 과거의 것은 일체가 드러나지 않는 것[不現]인가?
【답】 모든 과거의 것이 반드시 드러나지 않는 것만은 아니다. ‘과거의 것이라 해도 나타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고 함은 무엇을 말하는가? 【답】 마치 우다야(優陀耶)가 말하기를 “모든 결(結)은 지나가 버린 것이다. 원림(園林)에서 원림을 떠나갔고, 욕망에서 떠나 욕망에 오염되지 않았으니, 마치 정련(精鍊)한 진짜 금과 같다”19)고 한 것과 같다. 이것이 바로 ‘과거의 것이라 해도 나타나지 않는 것도 아님’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타나지는 않지만 과거의 것은 아니다’고 함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답】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신족을 타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나 혹은 주술이나 약초로써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 이것이 ‘나타나지 않지만 과거의 것은 아니다’고 함을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의 것으로서 역시 나타나지 않는 것’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답】 모든 행위의 기(起)와 시기(始起)ㆍ생(生)과 시생(始生)ㆍ성(成)과 시성(始成)이 다해 버리고[盡去], 나타나지 않은 채로 바뀌어 지나가버려 과거세에 포섭되는 과거세의 사실을 ‘과거의 것으로서 역시 나타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과거의 것도 아니고 나타나지 않는 것도 역시 아니다’라고 함은 무엇을 말하는가?
【답】 앞에서 언급한 것을 제외한 것이다. 모든 과거의 것은 전부가 다하여 없어진 것[盡]인가? 【답】 과거의 것이 반드시 다한 것만은 아니다. ‘과거의 것이라 해도 다한 것이 아니다’라고 함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답】 우다야가 “모든 결(結)은 지나가 버린 것이다. 원림에서 원림을 떠나갔다. 욕망에서 떠나 욕망에 오염되지 않았다. 정련한 진짜 금과 같다”고 말한 것과 같으니 이것이 ‘과거의 것이라 해도 다한 것만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하였으나 과거의 것이 아니다’고 함은 무엇을 말하는가?
【답】 마치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성스러운 제자는 지옥ㆍ축생ㆍ아귀ㆍ악취의 도(道)를 다하였다”고 하신 것과 같다. 이것은 말하자면 이미 다하였으되 과거의 것은 아님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과거의 것으로서 역시 다한 것’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답】 모든 행위의 기와 시기, 생과 시생 성과 시성이 다해 버리고, 나타나지 않은 채 변하고 지나가 버려 과거세에 포섭되는 과거세의 사실, 이것을 일컬어 ‘과거의 것으로서 역시 다한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과거의 것도 아니고 다한 것도 아니다’라고 함은 무엇인가?
024_0699_b_02L【답】 앞에서 언급한 것을 제외한 것이다. 또한 나는 여기에서 결(結)에 대해 설명할 것이다. 결은 혹은 과거의 것이면서 다한 것이 아니며, 혹은 다한 것이면서도 과거의 것이 아니다. 혹은 과거의 것이면서 역시 다한 것이며, 혹은 과거의 것도 아니며 역시 다한 것도 아니다. ‘과거의 것이면서 다한 것이 아니다’고 함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답】 모든 과거의 결로서, 다하지 않고 남음이 있어 사라지지도 않고 나타나지도 않은 것을 일컬어 ‘과거의 것이면서 다한 것도 아니다’고 한다. ‘다한 것이면서도 과거의 것이 아니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답】 모든 미래의 결로서, 이미 다하여 남김이 없으며 이미 사라졌고 이미 드러난 것, 이것을 ‘다한 것이면서도 과거의 것이 아니다’고 하는 것이다. ‘과거의 것이면서 역시 다한 것이다’고 함은 무엇을 말하는가?
【답】 과거의 결로서 이미 다하여 남김이 없으며, 이미 사라졌고 이미 다 드러난 것이 ‘과거의 것이면서 이미 다한 것’이라고 한다. ‘과거의 것도 아니면서 역시 다한 것도 아니다’고 함은 무엇을 말하는가? 【답】 미래의 결로서 아직 다하여 없어지지 않아 남음이 있으며 사라지지도 않고 다 드러나지도 않은 것이 현재의 모든 결에 미치는 것이니, 이것을 ‘과거의 것도 아니면서 역시 다한 것도 아닌 것’이라고 한다. 모든 과거의 것은 다하여 끝난[沒] 것인가?
【답】 과거의 것이 반드시 끝난 것만은 아니다. ‘과거의 것이면서 끝나지 않은 것’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답】 우다야가 말하기를 “모든 결은 지나가 버린 것이다. 원림에서 원림을 떠나갔다. 욕망에서 떠나 욕망에 오염되지 않았으니, 정련한 진짜 금과 같다”고 한 바와 같다. 이것이 바로 ‘과거의 것이면서 끝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끝난 것이면서 과거의 것이 아닌 것’이란 무엇을 말함인가?
【답】 나는 지금 작은 예로써 설명하리라. 사람들은 마치 작은 집에 대해서 ‘집이 낡았다[沒]’고 말하며, 조그마한 거리나 마을ㆍ그릇을 보고도 역시 그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작은 눈[小眼]으로 색을 보면 ‘눈이 쇠하였다[沒]’고 말하니, ‘끝난 것이면서 과거의 것이 아닌 것’이란 바로 이것을 말함이다. 그렇다면 ‘과거의 것이면서 역시 끝난 것’이란 무엇을 말함인가?
【답】 모든 행위의 기(起)ㆍ시기(始起)ㆍ생(生)ㆍ시생(始生)ㆍ성(成)ㆍ시성(始成)이 다해 버림을 획득하여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은 채 변하고 지나가 버려 과거세에 포섭되는 과거세의 사실. 이것을 ‘과거의 것이면서 역시 끝난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의 것도 아니면서 또한 끝난 것도 아닌 것’이란 무엇인가? 【답】 앞에서 언급한 것을 제외한 것이다. 또한 나는 여기에서 결(結)에 대해 설할 것이다. 결은 혹은 과거의 것이면서 끝난 것이 아니며, 혹은 끝난 것이면서도 과거의 것이 아니며, 혹은 과거의 것이면서 역시 끝난 것이며, 혹은 과거의 것도 아니면서 역시 끝난 것도 아니다. ‘과거의 것이면서 끝난 것이 아니다’고 함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024_0699_c_02L【답】 모든 과거의 결로서 아직 다하지 않고 남음이 있어 없어지지도 않고 다 드러나지도 않은 것, 이것을 일컬어 ‘과거의 것이면서 끝나지 않은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끝난 것이면서도 과거의 것이 아니다’고 함은 무엇을 말하는가? 【답】 모든 미래의 결로서, 이미 다하여 남김이 없으며, 이미 사라졌고 이미 다 드러난 것을 ‘끝난 것이면서도 과거의 것이 아닌 것’이라고 한다. ‘과거의 것이면서 역시 끝난 것’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답】 모든 과거의 결로서, 이미 다하여 남김이 없으며, 이미 사라졌고 이미 다 드러난 것을 ‘과거의 것이면서 역시 끝난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의 것도 아니면서 역시 끝난 것도 아닌 것’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답】 모든 미래의 결로서 아직 다하지 않아 남음이 있으며, 없어지지도 않고 드러나지도 않은 결이 현재의 결에 이르게 되는 것, 이것을 ‘과거의 것도 아니면서 역시 끝난 것도 아닌 것’이라고 한다. 만약 괴로움[苦]에 대해 의혹을 낳으면 이것은 괴로움인가 괴로움이 아닌가? 그리고 그것을 한 찰나의 마음[一意]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여러 찰나에 걸친 마음[衆多意]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20)
【답】 ‘이것은 괴로움이다’고 하면 한 찰나의 마음이고 ‘괴로움이 아니다’고 마면 제2 찰나의 마음[二意]이다. 만약 습(習)ㆍ진(盡)ㆍ도(道)에 대해 의혹을 낳으면 이것은 도인가 도가 아닌가? 그리고 그것은 마땅히 한 찰나의 마음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여러 찰나에 걸친 마음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답】 ‘이것이 도이다’고 하면 한 찰나의 마음이고, ‘도가 아니다’고 하면 제2 찰나의 마음이다. 한 찰나의 마음에 의흑하면서 의혹하지 않음이 있는가?
【답】 없다. ‘괴로움인가’함에 있어서는 의혹이 있어도 ‘괴로움이다’고 함에 있어서는 의혹이 없다. ‘괴로움이다’고 하는 것은 의혹이 아니지만 ‘괴로움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라고 하면 의혹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습ㆍ진ㆍ도인가’라고 함에 있어서는 의혹이 있어도 ‘[습ㆍ진]ㆍ도이다’고 함에 있어서는 의혹이 없다. ‘도이다’라고 하는 것은 의혹이 아니지만 ‘도라고 해야 할 것인가’ 하면 의혹이 없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무엇을 명신(名身)이라고 하는가? 무엇을 구신(句身)이라고 하는가? 무엇을 미신(味身)이라고 하는가? 명신이란 무엇인가?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여라. 스스로 그 마음을 청정히 하는 것이 모든 부처의 가르침이다.
024_0699_c_21L諸惡莫作, 諸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教。
024_0700_a_02L 여기에서 ‘모든 악을 짓지 말라’고 함은 이 구문의 제1구이다. ‘여러 선을 받들어 행하여라’고 함은 이 구문의 제2구이고, ‘스스로 그 마음을 청청히 하라’고 함은 이 구문의 제3구이며, ‘이것이 모든 부처의 가르침이다’라고 함은 이 구문의 제4구이다. 이같이 구문으로서의 뜻을 만족시켜 이러저러한 작용을 기술하는 것, 이것을 구신이라고 한다. 미신이란 무엇인가?
【답】 자신(字身)을 미신이라고 설명한다. 세존께서 또한 말씀하시기를 “송(頌)은 바로 게(偈)의 모습[相]이고, 자(字)는 바로 미(味)의 모습이며, 명(名)은 바로 게를 짓는 자에 의거하는 게의 본질[體]이다”고 하셨다. 즉 이처럼 글자에 대하여 미(味)의 부분을 설명할 것을 일러 ‘미신을 설명한다’고 한 것이다. 불ㆍ세존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한 ‘어리석은 이[癡人]’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어떤 연유에서 불ㆍ세존께서 어리석은 이라고 말씀하셨는가?
【답】 불ㆍ세존께서 제자들이 법 가운데 계행(戒行)을 따르지 않고 많은 그릇된 일을 범하면서 어떠한 결과도 없이 실행하기 때문에 어리석은 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또한 불ㆍ세존께서 제자들이 교계(敎誡)와 교사(敎使)의 수순한 법에 따르지 않기 때문에 어리석은 이라고 칭하신 것이니 이는 세존의 한결같은 훈계이며 가르침의 말씀이다. 이를테면 오늘날 화상(和上)이나 아사리(阿闍利)가 제자들을 가르치고 훈계하여 칭하기를, ‘어리석은 이나 짓는 것으로 법다운 것이 아니며, 착하지 않은 일을 행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불ㆍ세존 역시 그러하여 여러 제자들에게 ‘어리석은 이’라고 하셨던 것이다. 여섯 가지 원인이 있는데, 상응인(相應因)ㆍ공유인(共有因)ㆍ자연인(自然因)ㆍ일체변인(一切遍因)ㆍ보인(報因)ㆍ소작인(所作因)이 그것이다. 무엇을 상응인이라고 하는가?
【답】 통(痛)은 통과 상응하는 법의 상응인 중에 인(因)이 되며, 통과 상응하는 법은 통의 상응인 중에 인이 된다. 상(想)ㆍ사(思)ㆍ갱락(更樂)ㆍ억(憶)ㆍ욕(欲)ㆍ해탈(解脫)ㆍ염(念)ㆍ삼매(三昧)ㆍ혜(慧)는 혜 등과 상응하는 법의 상응인 중에 인이 되며, 혜 등과 상응하는 법은 혜 등의 상응인 중에 인이 된다. 이것을 상응인이라고 한다. 무엇을 공유인이라고 하는가?
024_0700_b_02L【답】 마음[心]은 심소념법(心所念法)의 공유인 중에 인이 되며 심소념법은 마음의 공유인 중에 인이 된다. 또한 마음은 심소회(心所廻)의 신행(身行)과 구행(口行)의 공유인 중에 인이 된다. 또한 마음은 심소회의 심불상응행(心不相應行)의 공유인 중에 인이 되며, 심소회의 심불상응행은 마음의 공유인 중에 인이 된다. 또한 함께 생겨난[共生] 4대(大)는 전전(展轉)하여 공유인 중의 인이 된다. 이것을 공유인이라고 한다.[인 중의 인이 된다고 함은 전전하여 함께 생겨난다[相生]는 뜻이다.] 무엇을 자연인이라고 하는가?
【답】 이전에 생겨난 선근(善根)은 이후에 생겨나는 선근 및 선근에 상응하는 법으로서 자신의 경계와 자연인 중에 인이 된다. 과거의 선근은 미래 현재의 선근 및 선근에 상응하는 법으로서 자신의 경계와 자연인 중에 인이 된다. 과거ㆍ현재의 선근은 미래의 선근 및 선근에 상응하는 법으로서 자신의 경계와 자연인 중에 인이 된다. 무기근(無記根) 역시 이와 같다.[네 가지 통(痛)이란, 첫째 애(愛), 둘째 다섯 가지 사견, 셋째 교만, 넷째 무명이다.]
이전에 생겨난 불선근(不善根)은 이후에 생겨나는 불선근과 불선근상응법의 자연인 중에 인이 된다. 과거의 불선근은 미래 현재의 불선근과 불선근상응법의 자연인 중에 인이 된다. 과거ㆍ현재의 불선근은 미래의 불선근과 불선근상응법의 자연인 중에 인이 된다. 이것을 자연인이라고 한다. 무엇을 일체변인이라고 하는가?
【답】 이전에 생겨난 것으로서 고제로써 끊으며[苦諦斷] 일체에 두루하는 번뇌[遍使]는 이후에 생겨나는 자신의 세계에 속하는 습(習)ㆍ진(盡)ㆍ도(道)ㆍ사유단(思惟斷)의 번뇌와 번뇌상응법의 일제변인 중에 인이 된다. 과거의 것으로서 고제로써 끊으며 일체에 두루하는 번뇌는 자신의 세계에 속하는 미래ㆍ현재의 습ㆍ진ㆍ도ㆍ사유단의 번뇌와 번뇌상응법의 일체변인 중에 인이 된다. 과거ㆍ현재의 것으로서 고제로써 끊으며 일체에 두루하는 번뇌는 자신의 세계에 속하는 미래의 습ㆍ진ㆍ도ㆍ사유단의 번뇌와 번뇌상응법의 일체변인 중에 인이 된다. 습제로서 끊어야 할[習諦所斷] 것 역시 이와 같다. 이것을 일체변인이라고 한다. 무엇을 보인이라고 하는가?
024_0700_c_02L【답】 모든 심ㆍ심소연법(心心所緣法)으로서 보색(報色)과 심심법(心心法)과 심불상응행을 향수(享受)하는 것이라면, 그 같은 심심법은 이러한 보(報:異熟)의 보인 중에 인이 된다. 또한 신행(身行)과 구행(口行)이 보색과 심심법과 심불상응행을 향수한다면, 그 같은 신행과 구행은 이러한 보에 있어 보인 중에 인이 된다. 또한 모든 심불상응행으로서 보색과 심심법과 심불상응행을 향수한다면, 그 같은 심불상응행은 이러한 보에 있어 보인 중에 인이 된다. 이것을 보인이라고 한다. 그 무엇을 소작인이라고 하는가?
【답】 눈[眼]이 색(色)을 반연[緣]하여 안식(眼識)을 생기게 했을 때 그 안식은 눈을 소작인 중의 인으로 삼는다. 혹은 색과 그 공유법(共有法)과 그 상응법, 귀와 소리와 이식(耳識) 코와 냄새와 비식(鼻識), 혀와 맛과 설식(舌識), 몸과 세활(細滑)21)과 신식(身識), 의(意)와 법과 의식(意識), 그리고 그것의 공유법과 그것의 상응법, 색법과 무색법(無色法) 가견법(可見法)과 불가견법(不可見法), 유대법(有對法)과 무대법(無對法) 유루법과 무루법, 유위법과 무위법 이와 같은 모든 법으로서 소작인을 삼는다. 다만 그 자신[自然]은 제외한다.
나아가 귀ㆍ코ㆍ혀ㆍ몸ㆍ뜻이 법(法)을 반연해서 의식(意識)을 생기게 했을 때, 그 의식은 뜻을 소작인 중의 인으로 삼는다. 혹은 그러한 법과 공유법과 그것의 상응법, 눈과 색과 안식 귀와 소리와 이식, 코와 냄새와 비식 혀와 맛과 설식 몸과 세활과 신식 그리고 그것의 공유법과 그것의 상응법, 색법과 무색법 가견법과 불가견법 유대법과 무대법, 유루법과 무루법, 유위법과 무위법 이와 같은 모든 법을 소작인 중의 인으로 삼으며 그 자신은 제외한다. 이것을 소작인이라고 한다. 만약 마음에 번뇌[使]가 함께하며, 모든 번뇌가 마음과 함께한다면 그 번뇌는 이 마음에서 얽매이는[所使] 것인가?22)
024_0701_a_02L【답】 혹은 얽매이고 혹은 얽매이지 않는다. ‘얽매인다’고 함은 무엇을 말하는가? 【답】 모든 번뇌가 아직 다하지 않은 것, 이것을 ‘얽매인다’고 한다. ‘얽매이지 않는다’고 함은 무엇을 말하는가?
【답】 모든 번뇌가 다한 것, 이것을 ‘얽매이지 않는다’고 한다. 만약 번뇌가 마음에서 얽매이고 이 마음에 번뇌가 함께한다면 그 번뇌는 이 마음과 함께하는 번뇌인가?
【답】 혹은 이것은 그것에 따르고 여타의 것에는 따르지 않으며, 혹은 이것은 그것에 따르고 여타의 것에도 따른다. ‘이것은 그것에 따르고 여타의 것에는 따르지 않는다’고 함은 무엇을 말하는가? 【답】 고지(苦智)가 생겨나고 습지(習智)가 생겨나지 않았을 경우 만약 습제소단(習諦所斷)의 마음이 고제소단(苦諦所斷)을 소연(所緣)으로 삼으면 이것을 ‘이것은 그것에 따르지만 여타의 것에는 따르지 않는다’고 함이다. ‘이것은 그것에도 따르고 여타의 것에도 따른다’고 함은 무엇을 말하는가?
【답】 사람이 물듦에 의해 마음의 전부가 계박되는 것, 이것을 ‘이것은 그것에도 따르고 여타의 것에도 따른다’고 하는 것이다. 만약 마음이 번뇌와 함께하고 모든 번뇌가 마음과 함께한다면 그 번뇌는 이 마음에서 장차 멸하는 것인가? 【답】 혹은 멸하고 혹은 멸하지 않는다. ‘멸한다’고 함은 무엇을 말하는가?
【답】 모든 번뇌가 그 소연에서 없어지는 것, 이것을 ‘멸한다’고 하는 것이다. ‘멸하지 않는다’고 함은 무엇을 말하는가? 【답】 모든 번뇌가 그 소연에서 아직 다하지 않는 것, 이것을 ‘멸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상응하는 모든 번뇌가 있는데, 그렇다면 이 번뇌는 어떻게 멸해지는 것인가? 【답】 모든 번뇌의 소연이 멸함으로써 멸해 지는 것이다. 그와 같다면 그대는 번뇌의 소연이 멸함을 말하는가?
【답】 그러하다. 만약 그런 말을 한다면 모든 번뇌 가운데 진제(盡諦)ㆍ도제(道諦)로써 끊는 무루연(無漏緣)의 이 번뇌는 어떻게 없어지는 것인가? ‘이것의 멸은 그것의 멸에 의한다’고 하지만 이는 그렇지 않다. 앞에서 말했던 바와 같이 모든 번뇌 가운데 진제ㆍ도제로서 끊는 유루연(有漏緣)의 것이 다함에 따라 그것도 다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만약 모든 번뇌가 마음에서 끊어지는 것[斷]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마음과 함께하는 번뇌를 끊는 것이기 때문에 그 번뇌는 이 마음과 함께하는 번뇌인가?
【답】 혹은 이것은 그것에 따르고 여타의 것에는 따르지 않으며, 혹은 이것은 그것에도 따르고 이것은 여타의 것에도 따른다. ‘이것은 그것에 따르고 여타의 것에는 따르지 않는다’고 함은 무엇을 말하는가? 【답】 만약 마음에 어떠한 물듦도 없이 사유로써 끊는다면 이것을 일컬어 ‘이것은 그것에 따르고 여타의 것에는 따르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것에도 따르고 이것은 여타의 것에도 따른다’고 함은 무엇을 말하는가?
024_0701_b_02L【답】 만약 마음에 물듦이 있으면 이것을 ‘이것은 그것에도 따르고 이것은 여타의 것에도 따른다’고 하는 것이다. 무엇을 진연식(塵緣識:신역 因境斷食)이라고 하는가?23) 【답】 고지(苦智)가 생겨나도 습지(習智)가 아직 생겨나지 않았을 경우, 만약 마음이 습제에 의해 끊어야 할 것으로서 고제에 의해 끊어야 할 것의 소연으로 삼는다면 이것을 진연식이라고 한다. 이러한 식(識)에는 몇 가지 번뇌가 있어 얽매이는가?
【답】 열아홉 가지이다.24) 그것은 한 마음[一心]인가? 그렇지 않다. 욕애(欲愛)가 아직 다하지 않았는데 고지(苦智)가 생겨났어도 습지(習智)는 아직 생겨나지 않았을 경우 만약 욕계의 습제소단의 마음이 고제소단을 소연으로 삼으면 이것을 진연식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식에는 몇 가지 번뇌가 있어 얽매이는가?
【답】 욕계의 습제로써 끊어야 할 것으로서 일곱 가지이다. 또한 욕애는 다하였어도 색애(色愛)가 아직 다하지 않았는데 고지는 생겨났지만 습지가 아직 생겨나지 않았을 경우, 만약 색계의 습제로써 끊어야 할 마음이 고제로써 끊어야 할 것을 소연으로 삼으면 이것도 진연식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식에는 몇 가지 번뇌가 있어 얽매이는가?
【답】 색계의 습제로써 끊어야 할 것으로서 여섯 가지이다. 또한 색애는 다하였으나 무색애가 아직 다하지 않았는데 만약 고지는 생겨났지만 습지가 아직 생겨나지 않았을 경우 무색계의 습제소단의 마음이 고제소단을 소연으로 삼으면 이것도 진연식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식에는 몇 가지 번뇌가 있는가? 【답】 무색계의 습제소단인 것으로, 여섯 가지이다. 이상 지품(智品) 제2를 마친다. [범본 230수로, 장(長) 20자(字)]
1)Jñānaprasthāṇa-Aṣtagrantha. 발지경팔건도의 유래에 관하여 『대지도론』(2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부처님께서 입멸하신 뒤 100년 만에 아수가(阿輸迦, Aśoka)라는 왕이 있어 반사우슬대회(般闍于瑟大會)를 열었는데, 여러 대법사의 논의가 달랐기 때문에 다른 부(部)의 이름이 생겼다. 이로부터 차츰차츰 전해져서 가전연(迦旃延)이라는 성을 가진 바라문 도인에 이르렀다. 그는 지혜롭고 근기가 예리해 삼장과 안팎의 경서를 모두 읽고는 부처님의 말씀을 해석하기 위하여 『발지경팔건도(發智經八揵度』를 지으니, 초품(初品)은 세상에서 으뜸가는 법이었다. 그 뒤에 여러 제자들이 『팔건도』를 다 알지 못하는 뒷사람들을 위해 『비바사(鞞婆娑)』를 지었다.
2)abhidharma. 그 어의는 ‘법(dharma)에 관하여(abhi)’라는 의미로 아비달마(阿毘達磨)ㆍ비담(毘曇)이라 음역하거나 대법(對法)ㆍ무비법(無比法)ㆍ승법(勝法) 등으로 의역한다. 이 중 무비법ㆍ승법은 dharma를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보고 이에 대한 불제자들의 해석을 아비담이라고 한다는 입장이다. 한편 이 말은 불제자들의 아비담에 대한 이해를 묶은 책인 논서를 가리키기도 하는데, 부파불교시대부터 만들어진 논서들을 모아 논장(abhidharma-piṭaka)이라 부르며, 여기에 원시불교시대에 성립된 경장과 율장을 더해 3장(tri-piṭaka)이 된다.
3)abhidharma에서 abhi를 ‘뛰어난’의 뜻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말한다.
4)세존을 달리 부르는 말이다.
5)오분법신을 말한다.
6)『대비바사론(大毘婆娑論, Mahāvibhāṣāśāstra)』을 가리킨다.
7)수로(首盧)는 śloka의 음역어. 하나의 ś1oka는 16음절 2행, 곧 32음절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정확히는 48만2천3백4 음절이 된다.
8)즉 번역 도중 본론 제23ㆍ24권의 근(根)건도 중의 ≺연(緣)발거≻ 제7을 망실하였는데, 아마도 그 수량이 본론 제8권의 결사(結使)건도 중의 ≺십문발거≻ 제4와 같았다는 것으로 여겨진다. ≺십문발거≻는 그 말미에 1천6백 수로라고 명기되었지만 ≺연발거≻에는 아무런 표시도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참고로 그 무렵 같은 계빈의 사문 담마비(曇摩卑)가 이를 송지(誦持)하여 왔기 때문에 비로소 8건도 44품을 완비할 수 있었다.
1)범어로는 skandha. 무더기[聚]를 의미한다.
2)범어로는 laukikāgra-dharma. 세제일법(世第一法)ㆍ세간최승법정(世間最勝法頂)ㆍ세간제일가행(世間第一加行)이라고도 한다.
3)정법(頂法)을 말한다.
4)舊아비달마논사를 가리킨다.
5)신ㆍ근ㆍ념ㆍ정ㆍ혜의 다섯을 말한다.
6)곧 유부의 종의(宗義)를 가리킨다.
7)범어로는 nīvaraṇa. 마음을 덮어 청정심을 가로막는 것으로, 통상 탐냄(rāga)ㆍ성냄(pratigha)ㆍ게으름(styāna-middha)ㆍ들뜸(auddhatya)ㆍ의심(vicikitsā)의 다섯을 말한다.
8)범어로는 paryavasthāna. ‘속박’ 혹은 ‘얽어매임’이라는 뜻으로, 존재를 속박하고 구속하는 것을 의미한다.
9)범어로는 saṃyojana. 사(使, anuśaya)와 더불어 번뇌의 이칭으로, ‘내면에 깃든 악한 성향’을 가리킨다.
10)범어로는 duḥkhe`nvaya-jñāna-kṣāntiḥ. 고제를 관찰해 얻는 지혜인 고법지의 직전에 얻는 마음을 말한다. 고류지인(苦類智忍)이라고도 한다.
11)초선에 이르기 직전의 준비과정을 말한다.
12)초선과 제2선의 중간상태를 말한다.
13)범어로는 Gaṅga. 항하가(恒河伽)라고도 한다.
14)범어로는 Yamunā. 람모나(藍牟那)라고도 한다.
15)범어로는 Sarayu. 살라유(薩羅由)라고도 한다.
16)범어로는 Aciravatī. 아지라바제(阿脂羅婆提)라고도 한다.
17)범어로는 Mahī.
18)범어로는 māņava. 바라문청년을 가리킨다.
19)범어로는 vedana. 감수작용으로서의 ‘느낌’을 말한다.
20)범어로는 uṣmagata-dharma.
1)열다섯 가지 아소견은 색아유견(色我有見)ㆍ아중색견(我中色見)ㆍ색중아견(色中我見) 외에 통(痛)ㆍ상(想)ㆍ행(行)ㆍ식(識)에 대한 각각 세 가지씩의 열두 가지 아소견을 합하여 열다섯 가지가 된다.
2)변견이란 세간의 단멸과 영원성을 주장하는 두 가지 치우친 견해를 말한다.
3)곧 적멸의 경지조차도 덧없는 것이라고 보는 것을 말한다.
4)범어로는 ḍṛṣṭi-parāmarśa. 유루법을 가장 청정하다고 보는 견해로, 견취(見取)라고도 한다.
5)곧, 뛰어난 즐거움인 열반 조차도 괴롭다고 보는 것을 말한다.
6)욕계 수소단(修所斷)인 사행상(邪行相)에 대한 지식으로 이른바 불염오무지(不染汚無智)이다.
7)범어로는 saṃprayukta-hetu. 양자가 서로 조력하는 관계에 있어서 원인이 되는 것을 말한다. 한편, 그 결과가 되는 것을 사용과(士用果)라고 한다.
8)범어로는 sahabhū-hetu. 구유인(俱有因)이라고도 한다.
9)범어로는 sabhāga-hetu. 동류인(同類因)이라고도 한다.
10)범어로는 sarvatraga-hetu. 변행인(遍行因)이라고도 한다.
11)범어로는 vipāka-hetu. 이숙인(異熟因)이라고도 한다.
12)범어로는 kāraṇa-hetu. 능작인(能作因)이라고도 한다.
13)자연(自然)이란 불(佛)을 말한다.
14)이와 같이 미래의 사유에 상응하는 마음과 다음 찰나의 마음은 서로 연(緣)이 되는 것이다.
15)범어로는 samanantarana-pratyaya. 등무간연(等無間緣)이라고도 한다. 앞의 찰라심이 뒤의 찰라심의 원인이 된다고 간주되는 연을 말한다.
16)곧 동분지(同分智)를 말한다.
17)범어로는 jīvaṃ-jīvaka. 명명조(命命鳥)ㆍ공명조(共命鳥)라고도 한다.
18)육체를 장양시키는 물리적 음식물로서, 형태가 쪼개어 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단식이라고 한다.
19)『중아함경(中阿含經)』29권, 「용상경(龍象經)」에 의하면 “부처는 모든 번뇌나 욕망들을 지나쳐 버렸으며, 그것은 바로 해탈이고 진짜 금의 현현인 것이다[越度一切結 於林離林去 舍欲樂無欲 如石出眞金]”라고 한다.
20)의혹의 본성에 대하여 논한 부분이다.
21)범어로는 sparśa. 감관에 의한 접촉을 의미한다.
22)마음과 번뇌가 함께 일어남과 얽매이는 것[所使], 나아가 그 단멸에 대하여 논하는 부분이다.
23)여기에서 진단식이란 이미 끊어진 법[已斷法]을 소연으로 삼는 식(識), 혹은 변행인과 소연이 이미 끊어졌으나 자체는 아직 끊어지지 않은 식의 뜻.
24)견취ㆍ사견ㆍ탐ㆍ진ㆍ만ㆍ의ㆍ무명의 욕계견집소단(見集所斷)인 7가지 수면과 진(瞋)을 제외한 색계ㆍ무색계의 각각 6가지 견집소단인 12가지 번뇌를 합하여 19가지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