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때 박가범은 실라벌(室羅筏) 서다림(逝多林)의 급고독원(給孤獨園)에 계셨다. 그때에 세존께서 필추들에게 말씀하셨다. “4무색(無色)이 있느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어떤 필추가 모든 빛깔에 대한 생각[色想]을 초월하고 상대가 있다는 생각[有對想]을 없애며 갖가지 생각을 사유(思惟)하지 않고 끝없는 허공[無邊空]에 들어가 공무변처(空無邊處)를 완전히 갖추어 머무르나니, 이것을 제1이라 하느니라. 또 어떤 필추가 온갖 종류의 공무변처를 초월하여 끝없는 의식[無邊識]에 들어가 식무변처(識無邊處)를 완전히 갖추어 머무르나니, 이것을 제2라 하느니라. 또 어떤 필추가 온갖 종류의 식무변처를 초월하여 아무 것도 없는[無所有] 데로 들어가 무소유처(無所有處)를 완전히 갖추어 머무르나니, 이것을 제3이라 하느니라. 또 어떤 필추가 온갖 종류의 무소유처를 초월하여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에 들어가 완전히 갖추어 머무르나니, 이것을 제4라고 하느니라.”
‘모든 빛깔에 대한 생각을 초월한다’고 함에 있어서 어떤 것이 모든 ‘빛깔에 대한 생각[色想]’인가? 안식(眼識)과 상응하는 생각[想]과 평등한 생각[等想]과 현전의 평등한 생각[現前等想]과 분명하게 이해함[解了]과 형상을 취함[取像]과 이미 낸 생각[已想]과 앞으로 낼 생각[當想]을 통틀어 ‘빛깔에 대한 생각’이라 한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다섯 가지 식[五識]과 상응하는 생각과 평등한 생각과 나아가 이미 낸 생각과 앞으로 낼 생각을 통틀어 빛깔에 대한 생각이라 한다’고 한다. 지금의 이 뜻 속에는 오직 안식과 상응하는 생각, 평등한 생각, 나아가 이미 낸 생각, 앞으로 낼 생각을 통틀어 ‘빛깔에 대한 생각’이라고 한다.
024_1143_c_02L이와 같은 빛깔에 대한 생각을 그때에 초월하고 평등하게 초월하기 때문에 ‘모든 빛깔에 대한 생각을 초월한다’고 한다.
‘상대가 있다는 생각을 없앤다’고 함에서 어떤 것이 상대가 있다는 생각[有對想]인가? 이식(耳識) 등의 네 가지 식[四識]과 상응하는 생각과 평등한 생각과 나아가 이미 낸 생각과 앞으로 낼 생각을 통틀어 ‘상대가 있다는 생각’이라고 한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진에(瞋恚)와 상응하는 생각과 평등한 생각과 나아가 이미 낸 생각과 앞으로 낼 생각을 통틀어 상대가 있다는 생각이라고 한다’고 한다. 지금의 이 뜻 속에는 이식 등 네 가지 식과 상응하는 생각과 평등한 생각과 나아가 이미 낸 생각과 앞으로 낼 생각을 통틀어 ‘상대가 있다는 생각’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상대가 있다는 생각을 그때에 끊고 두루 알며 멀리 여의고 극히 멀리 여의며 조복하고 극히 조복하며 숨어 없어지고 제거되어 소멸하기 때문에 ‘상대가 있다는 생각을 없앤다’고 한다. ‘갖가지 생각을 사유하지 않는다’고 함에서 어떤 것이 갖가지 생각[種種想]인가? 개(蓋)와 전(纏)이 있는 이의 온갖 염오(染汚)의 빛깔ㆍ소리ㆍ냄새ㆍ맛ㆍ감촉의 생각과 온갖 착하지 않은 생각과 온갖 이치대로 이끄는 것이 아닌[非理所引] 생각과 온갖 선정[定]을 장애하는 생각을 통틀어 ‘갖가지 생각’이라고 한다.
그런 생각을 그때에 다시는 이끌어내지 않고 다시는 기억하지 않으며 다시는 사유하지 않고 다시는 이미 사유하지 않았으며 다시는 앞으로도 사유하지 않을 것이므로 ‘갖가지 생각을 사유하지 않는다’고 한다. ‘끝없는 허공[無邊空]에 들어가 공부변처(空無邊處)를 완전히 갖추어 머무른다’고 함에서 어떤 것이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의 가행(加行)이며 어떠한 가행을 닦아 공무변처정에 들어가는가? 이 선정에 대하여 처음에 업(業)을 닦는 이는 먼저 마땅히 제4 정려(靜慮)를 사유해서 거칠고[麤] 괴롭고[苦] 막힌다[障]고 여겨야 하며, 다음에는 공무변처를 사유해서 고요하고[靜] 미묘하고[妙] 여읜다[離]고 여겨야 한다.
024_1144_a_02L그는 그때에 만일 마음이 산란하여 그 밖의 다른 경계에 내닫고 한군데로 나아가지 못하며 생각을 지킬 수 없는지라 하나의 반연[一緣]에 머무르면서 공무변처정을 닦게 된다면 이 정도로는 아직 공무변처정의 가행이라 하지 못하며 또한 공무변처정에 들었다고 하지 못한다. 그가 만일 그때에 자신의 마음을 가다듬고 다잡아서 산란하여 다른 경계에 내닫게 하지 않고 한 갈래로 나아가 생각을 머물러 하나에 반연하면서 공무변처정을 닦아 익히는 모양을 사유하며 이와 같이 사유해서 근(勤)을 일으켜 정진하되 세차고 날래고 왕성하게 하면서 격려하는 뜻을 멈추지 않으면 이것을 바로 공무변처정의 가행이라 하며 또한 공무변처정에 들었다고 한다.
또 그는 이 도(道)를 낸 뒤에 닦아 익히고 많이 닦아 익히기 때문에 곧 마음으로 하여금 머무르고, 평등하게 머무르고, 가까이 머무르고, 편안히 머무르며, 한 갈래로 나아가고, 평등하게 지니고, 둘이 없고 물러남이 없게 하면 이 만큼으로도 이미 공무변처정에 들었다고 한다. 또 이 선정 속의 모든 심(心)ㆍ의(意)ㆍ식(識)을 공무변처정과 함께 있는 마음[心]이라 하고, 모든 사(思)와 평등한 사[等思]와 나아가 마음에서 짓는 뜻의 업을 공무변처정과 함께 있는 의업(意業)이라 하며, 모든 마음의 뛰어난 견해로서 이미 낸 승해와 앞으로 낼 승해를 공무변처와 함께 있는 승해(勝解)라 하고, 또 이 선정 속의 느낌과 생각과 나아가 지혜 등을 공무변처정과 함께 있는 모든 법[諸法]이라 하는 것이니, 이와 같은 모든 법도 또한 공무변처정이라고 한다.
‘온갖 종류의 공무변처를 초월하고’라 함은 그는 그때에 공무변처라는 생각을 초월하고 평등하게 초월하기 때문에 ‘온갖 종류의 공무변처를 초월한다’고 한다. ‘끝없는 의식[無邊識]에 들어가 식무변처(識無邊處)를 완전히 갖추어 머무른다’고 함은 어떤 것이 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의 가행이며 어떠한 가행을 닦아 식무변처정에 들어가는가? 이 선정에 대하여 처음에 업(業)을 닦는 이는 먼저 마땅히 공무변처를 사유하면서 거칠고 괴롭고 막힌다고 여겨야 하며, 다음에는 마땅히 식무변처를 사유하면서 고요하고 미묘하고 여읜다고 여겨야 한다. 그 밖의 나머지 자세한 설명은 공무변처에서와 같다.
024_1144_b_02L‘온갖 식무변처를 초월한다’고 함은 그는 그때에 식무변처라는 생각을 초월하고 평등하게 초월하기 때문에 ‘온갖 종류의 식무변처를 초월한다’고 한다.
‘아무 것도 없는[無所有] 데로 들어가 무소유처를 완전히 갖추어 머무른다’고 함은 어떤 것이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의 가행이며 어떠한 가행을 닦아 무소유처정에 들어가는가? 이 선정에 대하여 처음에 업(業)을 닦는 이는 먼저 마땅히 식무변처를 사유하되 거칠고 괴롭고 막힌다고 여겨야 하며, 다음에는 마땅히 무소유처를 사유하되 고요하고 미묘하고 여읜다고 여겨야 한다. 그 밖의 나머지 자세한 설명은 공무변처에서와 같다.
‘온갖 종류의 무소유처를 초월한다’고 함은 그는 그때에 무소유처라는 생각을 초월하고 평등하게 초월하기 때문에 ‘온갖 종류의 무소유처를 초월한다’고 한다.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에 들어가 완전히 갖추어 머무른다’고 함은 어떤 것이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의 가행(加行)이며, 어떠한 가행을 닦아 비상비비상처정에 들어가는가? 이 선정에 대하여 처음에 업(業)을 닦는 이는 먼저 마땅히 무소유처를 사유하되 거칠고 괴롭고 막힌다고 여겨야 하며, 다음에는 마땅히 비상비비상처를 사유하되 고요하고 미묘하고 여읜다고 여겨야 한다. 그 밖의 나머지 자세한 설명은 공무변처에서와 같다.
어느 때 박가범께서 실라벌(室羅筏) 서다림(逝多林)의 급고독원(給孤獨園)에 계셨다. 그때에 세존께서 필추들에게 말씀하셨다. “4수정(修定)이 있느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이른바 닦아야 할 선정이 있나니, 만일 익히고 닦고 짓는 것이 많으면 현법락주(現法樂住)를 증득하게 되느니라. 또 닦아야 할 선정이 있나니, 만일 익히고 닦고 짓는 것이 많으면 뛰어난 지견[殊勝智見]을 증득하게 되느니라. 또 닦아야 할 선정이 있나니, 만일 익히고 닦고 짓는 것이 많으면 뛰어나게 분별하는 지혜[勝分別慧]를 증득하게 되느니라.
024_1144_c_02L또 닦아야 할 선정이 있나니, 만일 익히고 닦고 짓는 것이 많으면 모든 번뇌가 영원히 다함[諸漏永盡]을 증득하게 되느니라. 어떤 것을 ‘닦아야 할 선정이 있어서 만일 익히고 닦고 짓는 것이 많으면 현법락주를 증득하게 된다’고 하는가? 어떤 필추가 곧 자기 몸에 대하여 여읨에서 생긴 희락[離生喜樂]으로 인해서 윤택하여지고[滋潤], 두루 윤택하여지며 가득하게 차고[充滿], 두루 가득하게 차며, 고르게 기뻐하고[適悅], 두루 고르게 기뻐하기 때문에 여읨에서 생긴 희락이 자기 몸 속에서 조그마한 부분까지도 가득하게 차지 않음이 없나니, 이것을 바로 ‘닦아야 할 선정이 있어서 만일 익히고 닦고 짓는 것이 많으면 현법락주를 증득하게 된다’고 하느니라.
어떤 것을 ‘닦아야 할 선정이 있어서 만일 익히고 닦고 짓는 것이 많으면 뛰어난 지견을 증득하게 된다’고 하는가? 어떤 필추가 광명상(光明想)에 대하여 잘 섭수(攝受)하고 잘 사유(思惟)하며 잘 닦아 익히고 잘 통달하되 낮에도 밤에도 차별이 없고 앞에도 뒤에도 차별이 없으며 아래도 위에도 차별이 없어서 마음을 열고 개(蓋)를 여의며 비춤[照]과 함께 하는 마음을 닦고 어두운 마음[闇昧心]을 제거해서 한량없는 선정을 닦나니, 이것을 바로 ‘닦는 선정이 있어서 만일 익히고 닦고 짓는 것이 많으면 뛰어난 지견을 증득하게 된다’고 하느니라.
어떤 것을 ‘닦아야 할 선정이 있어서 만일 익히고 닦고 짓는 것이 많으면 뛰어나게 분별하는 지혜를 증득하게 된다’고 하는가? 어떤 필추가 느낌[受]의 생김[生]을 잘 알고 느낌의 머무름[住]을 잘 알고 느낌의 사라짐[滅]과 다함[盡]과 없어짐[沒]을 잘 알아서 이것에 대하여 염에 머무르되[住念] 염에 머무르지 않는 것이 아니며 그리고 생각[想]을 잘 알고 거친 생각[尋]을 잘 알아서 이것에 대하여 염에 머무르되 염에 머무르지 않는 것이 아니니, 이것을 바로 ‘닦아야 할 선정이 있어서 만일 익히고 닦고 짓는 것이 많으면 뛰어나게 분별하는 지혜를 증득하게 된다’고 하느니라.
024_1145_a_02L어떤 것을 ‘닦아야 할 선정이 있어서 만일 익히고 닦고 짓는 것이 많으면 모든 번뇌가 영원히 다함을 증득하게 된다’고 하는가? 어떤 필추가 5취온(取蘊)에 대하여 자주자주 나고 없어짐을 따라 관(觀)하고 머무르되 이를테면 ‘이것은 바로 물질[色]이다. 이것은 바로 물질의 발생[集]이다. 이것은 바로 물질의 소멸[滅]이다. 이것은 바로 느낌[受]ㆍ생각[想]ㆍ지어감[行]ㆍ의식[識]이다. 이것은 바로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의 발생이다. 이것은 바로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의 사라짐이다’라고 하나니, 이것을 바로 ‘닦아야 할 선정이 있어서 익히고 닦고 짓는 것이 많으면 모든 번뇌가 영원히 다함을 증득하게 된다’고 하느니라. 그때에 세존께서는 앞의 뜻을 거두기 위하여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탐욕의 생각[欲想]과 근심하는 번뇌를 끊고 혼침(惛沈)과 악작(惡作)을 여의면 청정한 사(捨)와 염(念)을 얻나니 법(法)에 심(尋)과 사(伺)는 그 앞에 행해진다.
024_1145_a_05L斷欲想憂惱, 離惛沈惡作, 得淸淨捨念,
法尋伺前行。
현법락주(現法樂住)가 처음이 되고 다음에는 뛰어난 지견(智見)과 지혜로 무명(無明) 등의 번뇌를 깨뜨리며 마지막에는 해탈의 과(果)를 증득한다.
024_1145_a_07L現法樂爲初, 次勝知見慧,
破無明等漏, 後證解脫果。
‘곧 자기 몸[身]에 대하여’라 함은 몸[身]도 또한 몸이라 하고 신근(身根)도 또한 몸이라 하며 5색근(色根)도 또한 몸이라 하고 4대종(大種)으로 만들어진 무더기[聚]도 또한 몸이라 한다. 지금 이 뜻에서는 4대종으로 만들어진 무더기를 ‘몸’이라 한다. ‘여읨으로 생긴 희락[離生喜樂]’이라 함은 초정려(初靜慮)에 있는 기쁨[喜]과 즐거움[樂]이며 평등한 느낌[平等受]이어서 느낌에 속한 몸의 가볍고 편안함[輕安]과 마음의 가볍고 편안함이니, 이것을 바로 기쁨과 즐거움이라 한다. 이와 같은 기쁨과 즐거움은 욕(欲)과 나쁜 법[惡不善法]을 여읨에서부터 일어나고 평등하게 일어나며 생기고 평등하게 생기며 쌓여 모이고 출현하기 때문에 ‘여읨으로 생긴 희락’이라 한다.
‘윤택하여지고[滋潤], 두루 윤택하여지며, 가득히 차고[充滿], 두루 가득히 차며, 고르게 기뻐하고[適悅], 두루 고르게 기뻐한다’고 함은 곧 자기의 4대종으로 만들어진 무더기인 몸에서 여읨으로 인하여 생긴 기쁨과 즐거움이 일어나고 평등하게 일어나며 생기고 평등하게 생기며 쌓여 모이고 출현해서 윤택해지고 두루 윤택해지는 것이 그 하나의 뜻[一義]이요, 가득하게 차고 두루 가득하게 차는 것이 그 하나의 뜻이며, 고르게 기뻐지고 두루 고르게 기뻐지는 것이 그 하나의 뜻이어서 하(下)ㆍ중(中)ㆍ상(上)으로 말미암아 자라고 길러지는 것에 차별이 있다.
비유하면 마치 농부가 처음에 적은 물을 밭두둑에다 대면 그때에 밭두둑은 윤택하여지고 두루 윤택하여지며 다음에 중간쯤 되는 물을 밭두둑에다 대면 그때에 밭두둑은 가득하게 차고 두루 가득하게 차며 맨 나중에 많은 물을 밭두둑에다 대면 그때에 밭두둑은 고르게 기뻐지고 두루 고르게 기뻐지는 것과 같다.
024_1145_b_02L필추도 역시 그러하여 처음에 하품(下品)의 여읨으로 생긴 희락[離生喜樂]으로써 4대종으로 만들어진 몸을 양육하는 그때에 자기의 몸은 윤택하여지고 두루 윤택하여지며, 다음에는 중품(中品)의 여읨으로 생긴 희락으로써 4대종으로 만들어진 몸을 양육하는 그때에 자기의 몸은 가득하게 차고 두루 가득하게 차며, 나중에 상품(上品)의 여읨을 생긴 희락으로써 4대종으로 만들어진 몸을 양육하는 그때에 자기의 몸은 고르게 기뻐지고 두루 고르게 기뻐지며 그 여읨으로 생긴 희락은 자기 몸속에 조그마한 부분까지도 가득하게 차지 않음이 없게 되나니, 곧 발에서부터 정수리에 이르기까지 그 여읨으로 생긴 희락은 자라고 기르는[長養] 일을 하면서 가득하게 차지 않음이 없다.
‘이것을 바로 닦는 선정[修定]이 있어서’라 함에서 어떤 것이 선정[定]인가? 곧 자기의 몸에서는 여읨으로 생기는 희락으로 윤택하여지고, 두루 윤택하여지며, 가득하게 차고, 두루 가득하게 차며, 고르게 기뻐하고, 두루 고르게 기뻐하기 때문에 마음이 머무르고, 평등하게 머무르고, 가까이 머무르고, 편안히 머무르며 흩어지지 않고, 어지럽지 않고, 가다듬어 그치고, 평등하게 지니고, 마음이 한 경계로 되는 성품을 통틀어 선정이라 한다.
어떤 것을 ‘닦는다[修]’고 하는가? 이 선정을 닦고 또는 익히며 한결같이 짓고 항상 지으며 더욱더 수행해서 버리지 않는 것을 통틀어 닦는다고 한다. ‘익히고 닦으며 짓는 것이 많다’ 함은 이 선정에 대하여 자유자재하게 됨을 나타내는 것이다. ‘현법락주(現法樂住)를 증득하게 된다’ 함은 이 선정을 익히고 닦으며 짓는 것이 많으면 현재 법[現法] 가운데서 즐거움[樂]을 느끼며 편안히 머무름[住]을 증득하는 것이니, 사랑할 만하고, 좋아할 만하고, 기뻐할 만하고, 뜻에 맞아서 희망할 것도 없고 사모할 것도 없으며 고요하고, 안온하기 때문에 ‘낙주(樂住)’라 하며 이 낙주에 대하여 얻고 성취하며 친근하고 접촉해서 증득[觸證]하기 때문에 ‘증득(證得)한다’고 한다.
024_1145_c_02L또 다음에는 초정려(初靜慮)에 속한 여읨에서 생긴 희락[離生喜樂]과 함께 행하는 심일경성(心一境性)을 말하여 ‘선정’이라 하며 곧 이 선정에 대하여 닦고 익히며 한결같이 짓고 항상 지으며 행(行)을 더해서 버리지 않는 것을 ‘닦는다’고 한다. 그리고 ‘익히고 닦고 짓는 바’는 그의 자재함을 나타낸다는 것과 ‘현법락주를 증득하게 된다’고 하는 데에 대한 뜻을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광명상(光明想)에 대하여 잘 섭수(攝受)한다’는 등에서 어떤 것이 광명정(光明定)의 가행(加行)이며 어떠한 가행을 닦아 광명정에 들어가는가? 이 선정[定]에 대하여 처음에 업(業)을 닦는 이는 먼저 마땅히 깨끗한 달[月輪]의 모양을 잘 취하기도 하고 혹은 깨끗한 해[日輪]의 모양을 잘 취하기도 하며 혹은 약물(藥物)ㆍ말니(末尼), 그리고 모든 천상의 궁전[諸天宮殿] 및 별[星宿]의 광명을 잘 취하기도 하고 혹은 등불이나 촛불의 광명을 잘 취하기도 하며, 혹은 또 성읍(城邑)이나 하천이나 토지가 불타는 광명을 잘 취하기도 하고, 혹은 또 산이나 진펄이나 너른 들판이 불타는 광명을 잘 취하기도 하며, 혹은 또 열 짐[擔], 혹은 스무 짐, 혹은 서른 짐, 혹은 마흔 짐, 혹은 쉰 짐, 혹은 백 짐, 혹은 천 짐, 혹은 백천 짐, 혹은 한량없는 백 짐, 혹은 한량없는 천 짐, 혹은 한량없는 백천 짐의 땔나무가 불에 타는 광명을 잘 취하기도 한다.
이들 불의 광명이 왕성하고, 극히 왕성하고, 환히 밝고, 극히 환히 밝은 어느 한 가지 광명을 취한 뒤에 자세히 살피고 사유(思惟)하며, 분명히 알고[解了], 관찰(觀察)하고, 뛰어나게 이해하고[勝解], 굳게 머물러서[堅住] 그것을 분별한다. 그는 그러할 때에 만일 마음이 산란하여 그 밖의 다른 경계에 내닫게 되고 한 갈래로 나아가지 못하며 생각을 지킬 수 없으므로 하나의 반연[一緣]에 머물러서 취한 모든 광명의 모양을 사유하면, 이 정도로는 아직 광명정의 가행이라 하지 못하며 또한 아직 광명정에 들었다고 하지 못한다.
024_1146_a_02L그가 만일 그때에 자기의 마음으로 가다듬고 다잡아서 산란하여 다른 경계에 내딛지 않게 하고 한 갈래로 나아가 염(念)에 머물러 하나에 반연하게 해서 이러한 모든 광명의 모양을 사유하며 이와 같이 사유해서 근(勤)을 일으켜 정진하되 나아가 격려하는 뜻을 쉬지 않으면, 이것을 바로 광명정의 가행이라 하며 또한 광명정에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이 도(道)를 낸 뒤에 닦아 익히고 많이 닦아 익히기 때문에 곧 마음으로 하여금 머무르고, 평등하게 머무르고, 가까이 머무르고, 편안히 머무르며, 한군데로 나아가고, 평등하게 지니고, 둘이 없고, 물러남이 없게 해서 이와 같은 모든 광명의 모양을 사유하면 이 만큼으로도 이미 광명정에 들었다고 하며 그러나 아직 광명정상(光明定想)이라고는 하지 못한다.
어떤 것을 광명정상이라 하는가? 곧 앞의 광명정(光明定)에 의지하여 앞과 같은 모든 광명의 모양을 사유하는 모든 생각[想]과 평등한 생각과 분명한 이해와 형상을 취함[取像]과 이미 낸 생각과 앞으로 낼 생각을 광명정의 생각[想]이라 하며 이 광명정의 생각을 바로 광명상(光明想)이라 한다. ‘광명상에 대하여 잘 섭수(攝受)한다’ 함은 이 생각에 대하여 공경하면서 섭수하고 은근히 섭수하며 존중히 섭수하면서 그것의 인(因)과 그것의 문(門)과 그것의 이치[理]와 그것의 방편(方便)과 그것의 행상(行相)을 사유하기 때문에 ‘잘 섭수한다’고 한다.
‘잘 사유(思惟)한다’고 함은 자주자주 광명상(光明想)을 일으킨 뒤에 자주자주 광명의 모양에 대한 생각을 사유하는 것이다. ‘잘 닦아 익힌다[修習]’고 함은 이 생각에 대하여 자주자주 익히고 자주자주 닦으며 짓는 것이 많기 때문에 ‘잘 닦아 익힌다’고 한다. ‘잘 통달한다’고 함은 이 생각에 대하여 평등하게 알고[等了] 자세하게 알며[審了] 평등하게 살펴서 관찰하기 때문에 ‘잘 통달한다’고 한다.
‘낮에도 밤에도 차별이 없다’고 함은 마치 낮 동안에 자세히 살펴서 앞에서와 같은 모든 광명의 모양을 사유하고 분명하게 알며 관찰하고 뛰어나게 알며 굳게 머무르고 분별하는 것처럼 밤 동안에도 또한 그러하며 마치 밤 동안에 자세히 살펴서 앞에서와 같은 모든 광명의 모양을 사유하고 분명하게 알며 관찰하고 뛰어나게 알며 굳게 머무르고 분별하는 것처럼 낮 동안에도 또한 그러하니, 그 때문에 ‘낮에도 밤에도 차별이 없다’고 한다.
024_1146_b_02L‘앞에도 뒤에도 차별이 없다’고 함은 마치 마주 보고 대할 때에 자세히 살펴서 앞에서와 같은 모든 광명의 모양을 사유하고 분명하게 알며 관찰하고 뛰어나게 알며 굳게 머무르고 분별하는 것처럼 등뒤에 있을 때에도 또한 그러하며 마치 등뒤에서 그렇게 한 것처럼 마주보고 대할 때에도 또한 그러하다.
또 이전에 자세히 살펴서 앞에서와 같은 모든 광명의 모양을 사유하고 분명하게 알며 관찰하고 뛰어나게 알며 굳게 머무르고 분별하는 것처럼 지금에도 또한 그러하며 마치 지금에 그렇게 한 것처럼 이전에도 또한 그러하였나니, 그 때문에 ‘앞에도 뒤에도 차별이 없다’고 한다.
‘아래도 위에도 차별이 없다’고 함은 마치 하방(下方)에 대하여 자세히 살펴서 앞에서와 같은 모든 광명의 모양을 사유하고 분명하게 알며 관찰하고 뛰어나게 알며 굳게 머무르고 분별하는 것처럼 상방(上方)에 대해서도 또한 그러하며 또한 상방에서 그렇게 하는 것처럼 하방에 대해서도 또한 그러하나니, 그 때문에 ‘아래도 위에도 차별이 없다’고 한다. ‘마음을 연다’고 함은 광명으로 환하게 비추어서 선명(鮮明)하고 청정(淸淨)함과 함께 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다.
‘개(蓋)를 여읜다’고 함은 혼침(惛沈)ㆍ수면(睡眠)의 전개(纏蓋)를 멀리 여의고 마음의 작용이 명료(明了)한 것이다. ‘비춤[照]과 함께 하는 마음을 닦는다’고 함은 광명으로 환히 비추어서 선명하고 청정함과 함께 하는 마음을 닦아 익히는 것이다. ‘어두운 마음[闇昧心]을 제거한다’고 함은 이 마음 가운데서는 어두운 모양을 일으키지 않고 오직 광명의 모양만을 일으키는 것이니, 마치 등불이나 촛불이 환히 비추어서 어두움을 없애는 것과 같이 한다.
‘한량없는 선정을 닦는다’고 함은 한량없는 광명 모양[無量光明相]의 선정을 닦는 것이다. ‘이것을 바로 닦는 선정이 있어서’라고 함에서 어떤 것이 선정[定]인가? 곧 광명에 대하여 자세히 살펴서 사유하고 분명하게 알며 관찰하고 뛰어나게 알며 굳게 머무르고 분별해서 일으킨 마음이 머무르고, 평등하게 머무르며 나아가 마음이 한 경계로 되는 성품을 통틀어 선정이라고 한다. 어떤 것을 ‘닦는다’고 하는가? 이 선정을 닦고 익히며 한결같이 짓고 항상 지으며 행을 더해서 버리지 않는 것을 통틀어 ‘닦는다’고 한다.
024_1146_c_02L‘익히고 또는 닦고 또는 짓는 것이 많다’고 함은 이 선정에 대하여 자재(自在)하게 됨을 나타낸다. ‘뛰어난 지견(智見)을 증득하게 된다’고 함에 어떤 것을 뛰어난 지견이라 하는가? 이 선정에 대하여 익히고 닦으며 짓는 것이 많아서 원만한 지위에 이르면 옛 육안(肉眼) 쪽에서 색계(色界)의 대종(大種)으로 만들어진 청정한 천안(天眼)에 일어나며 이 천안에 의하여 청정한 안식(眼識)이 생기고 이 안식에 의하여 전후와 좌우와 상하의 모든 빛깔을 두루 관찰할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이 색계의 대종으로 만들어진 청정한 천안이 옛 육안 쪽에서 생기되 여여(如如)하여 이와 같고 이와 같이 청정한 안식을 내며 이 안식에 의하여 저 모든 빛깔을 받아들이고 관찰하는 것이니, 이것을 바로 이 가운데 뛰어난 지견이라고 한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뜻이 청정함으로 말미암아 뛰어나게 이해하고 보게 되는데 곧 사람의 육안이 변하여 천안이 되는 것을 뛰어난 지견이라 한다’고 한다. 지금의 이 뜻에서는 곧 앞에서 말한 청정한 안식과 상응하는 뛰어난 지혜를 말하여 지(智)라 하고 또한 견(見)이라고도 하는 것이니, 천안의 안식과 상응하는 뛰어난 지혜가 저마다 모든 빛깔을 받아들이고 관찰하게 되는 것을 바로 이 가운데 뛰어난 지견이라고 한다.
그는 이 선정을 익히고 닦고 짓는 것이 많으면 뛰어난 지견을 증득(證得)하는 것이니, 뛰어난 지견을 얻고 성취하며 친근히 하고 접촉해서 증(證)하기 때문에 ‘증득한다’고 한다. 또 광명상(光明想)과 함께 행하는 심일경성(心一境性)을 선정[定]이라 하며 곧 이 선정에 대하여 닦고 익히며 한결같이 짓고 항상 지으며 행을 더해서 버리지 않는 것을 ‘닦는다’고 한다. 그리고 ‘익히고 닦으며 짓는 것이다’고 함은 그 자재함을 나타낸다는 것과 ‘뛰어난 지견을 증득하게 한다’는 뜻에 대해서는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느낌[受]의 생김[生]을 잘 알고 느낌의 머무름[住]을 잘 알며 느낌의 소멸[滅]과 다함[盡]과 없어짐[沒]을 잘 안다’고 함은 느낌의 생김을 자세히 관(觀)하고 느낌의 머무름을 자세히 관하며 느낌의 소멸과 다함과 없어짐을 자세히 관하는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염에 머무르되[住念] 염에 머무르지 않는 것이 아니다’라고 함은 느낌의 생김을 자세히 관할 때에 염을 갖추고[具念], 바르게 알며[正知], 느낌의 머무름을 자세히 관할 때에 염을 갖추고, 바르게 알며, 느낌의 소멸과 다함과 없어짐을 자세히 관할 때에 염을 갖추고, 바르게 아는 것이다.
024_1147_a_02L‘그리고 생각[想]을 잘 알고 거친 생각[尋]을 잘 안다’고 함은 생각과 거친 생각의 생김을 자세히 관하고 생각과 거친 생각의 머무름을 자세히 관하며 생각과 거친 생각의 소멸과 다함과 없어짐을 자세히 관하는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염에 머무르되 염에 머무르지 않는 것이 아니다’라고 함은 생각과 거친 생각이 생김을 자세히 관할 때에 염을 갖추고[具念] 바르게 알며[正知], 생각과 거친 생각이 머무름을 자세히 관할 때에 염을 갖추고 바르게 알며, 생각과 거친 생각이 사라짐과 다함과 없어짐을 자세히 관할 때에 염을 갖추고 바르게 안다는 것이다.
‘이것을 바로 닦는 선정이 있어서’라고 함에서 어떤 것이 선정[定]인가? 그는 그때에 생각하기를 ‘나는 모든 법에 대하여 바르게 사유해서 착하지 않은 법은 일으키지 않고 모든 착한 법을 일으키며 무기의 법[無記法]을 일으키지 않고 유기의 법[有記法]을 일으키며 착하지 않은 법은 오래 머무르지 않게 하고 모든 착한 법은 오래 머무르게 하며 무기의 법은 오래 머무르지 않게 하고 유기의 법은 오래 머무를 수 있게 해야 한다’고 한다.
그는 그러할 때에 또한 마음을 관찰하고 또한 심소법(心所法)도 관찰하는 것이니, 그는 이와 같이 심ㆍ심소법을 관찰할 때에 일으키는 마음이 머무르고 평등하게 머무르며 나아가 마음이 한 경계로 되는 성품을 통틀어 선정이라고 한다. 어떤 것을 ‘닦는다’고 하는가? 이 선정을 닦고 익히며 한결같이 짓고 항상 지으며 행을 더하여 버리지 않는 것을 통틀어 ‘닦는다’고 한다. ‘익히고 닦으며 짓는 것이 많다’고 함은 이 선정에 대하여 자재할 수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뛰어나게 분별하는 지혜[勝分別慧]를 증득하게 된다’고 함은 이 선정에 대하여 익히고 닦고 짓는 것이 많으면 온갖 착하지 않은 지혜와 이치대로 이끈 것이 아닌 지혜와 온갖 착하지 않아서 선정을 장애하는 지혜로 하여금 모두 다 파괴되고 버려 두어 일어나지 않게 되며, 이것과 서로 반대되는 지혜는 생장하면서 굳건히 머무르게 되나니, 이로 말미암아 ‘뛰어나게 분별하는 지혜를 증득한다’고 한다.
024_1147_b_02L그리고 곧 이 지혜를 얻고 성취하고 친근히 하고 접촉해서 증득하기 때문에 ‘증득한다’고 한다. 또 다음에 느낌과 생각과 거친 생각을 자세히 관하는 것과 함께 행하는 심일경성(心一境性)을 선정[定]이라 하며 곧 이 선정에 대하여 닦고 익히며 한결같이 짓고 항상 지으며 행을 더해서 버리지 않는 것을 ‘닦는다’고 한다.
그리고 ‘익히고 닦으며 짓는 것이 많다’ 함은 그의 자재함을 나타낸다는 것과 ‘뛰어나게 분별하는 지혜를 증득하게 된다’는 데에 대한 뜻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5취온(取蘊)에 대하여 자주자주 나고 없어짐[生滅]을 따라 관해서 머무른다’고 하는 것은 물질[色]이 생기는 것과 변하고 파괴되는 것을 사실대로 알며 느낌[受]ㆍ생각[想]ㆍ지어감[行]ㆍ의식[識]이 생기는 것과 변하고 파괴되는 것을 사실대로 안다. ‘이것을 바로 닦는 선정이 있어서’라고 함에서 어떤 것이 선정[定]인가? 5취온에 대하여 자주자주 나고 없어짐을 따라 관해서 머무를 적에 일어난 마음이 머무르고 평등하게 머무르며 나아가 마음이 한 경계로 된 성품을 통틀어 선정이라 한다.
어떤 것을 ‘닦는다’고 하는가? 이 선정에 대하여 닦고 익히며 한결같이 짓고 항상 지으며 행을 더해서 버리지 않는 것을 통틀어 ‘닦는다’고 한다. ‘익히고 닦으며 짓는 것이 많다’고 함은 이 선정에 대하여 자재함을 나타낸 것이다. ‘모든 번뇌[漏]가 영원히 다함을 증득하게 한다’고 함에서 번뇌라 함은 세 가지 번뇌이니, 곧 욕루(欲漏)와 유루(有漏)와 무명루(無明漏)이다. 그는 이 선정에 대하여 익히고 닦으며 짓는 것이 많으면 이 세 가지 번뇌로 하여금 다하고, 평등하게 다하고, 두루 다하고, 마지막까지 다하게 되기 때문에 ‘모든 번뇌가 영원히 다한다’고 하며 이 영원히 다함을 획득하고 성취하고 친근히 하고 접촉해서 증명하기 때문에 ‘증득한다’고 한다.
또 다음에, 제4 정려(靜慮)에 속한 청정한 사(捨)와 염(念)과 함께 행하는 아라한에 나아가는 무간도(無間道)에 딸린 마음이 한 경계로 되는 성품[心一境性]을 ‘선정’이라고 하며 곧 이 선정에 대하여 닦고 익히며 한결같이 짓고 항상 지으며 더욱 수행해서 버리지 않는 것을 말하여 ‘닦는다’고 한다. 그리고 ‘익히고 닦으며 짓는 것이 많다’ 함에서 그것의 자재함을 나타내는 것과 ‘모든 번뇌가 영원히 다함을 증득하게 한다’고 하는데 대한 뜻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024_1147_c_02L 어느 때 박가범께서 실라벌(室羅筏) 서다림(逝多林)의 급고독원(給孤獨園)에 계셨다. 그때에 어떤 필추가 부처님께 나아가 세존의 두 발에 머리 조아리고 물러나 한 쪽에 서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께서는 일찍이 ‘각지(覺支)’라고 말씀하셨는데 각지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이 각지라는 말은 7각지(覺支)를 나타내는 것이니라. 어떤 것이 일곱 가지인가? 이른바 염각지(念覺支)ㆍ택법각지(擇法覺支)ㆍ정진각지(精進覺支)ㆍ희각지(喜覺支)ㆍ경안각지(輕安覺支)ㆍ정각지(定覺支)ㆍ사각지(捨覺支)이니라. 이와 같은 각지는 차례대로 점점 일어나고 차례대로 점점 얻으며 그를 수행하여 원만하게 하느니라.”
그때에 저 필추는 또 부처님께 아뢰었다. “어찌하여 각지는 차례대로 점점 일어나고 차례대로 점점 얻으며 그것을 닦아서 원만하게 합니까?” 부처님께서 필추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어떤 이가 몸에 대하여 순신관(循身觀)에 머물러 정념(正念)에 편안히 머무르며 어리석음을 멀리 여의면 그때에 곧 염각지(念覺支)가 일어나 염각지를 얻으며 그것을 수행하여 원만하게 하느니라. 그는 이 염(念)으로 말미암아 법에 대하여 간택(簡擇)하고 지극히 간택하며 두루 거칠게 생각하고[遍尋思] 두루 세밀하게 생각하여[遍伺察] 자세히 살피면 그때에 곧 택법각지(擇法覺支)가 일어나 택법각지를 얻으며 그를 수행하여 원만하게 하느니라.
그는 법을 간택함으로 말미암아 근(勤)을 발하여 정진하되 마음이 하열하지 않으면 그때에 곧 정진각지(精進覺支)가 일어나 정진각지를 얻으며 그것을 수행하여 원만하게 하느니라. 그는 정진으로 말미암아 뛰어난 기쁨을 내어 탐애(貪愛)하는 맛을 멀리 여의면 그때에 곧 희각지(喜覺支)가 일어나 희각지를 얻으며 그것을 수행하여 원만하게 하느니라. 그는 이 기쁨으로 말미암아 몸과 마음이 가볍고 편안해져서 거칠고 무거운 것을 멀리 여의면 그때에 곧 경안각지(輕安覺支)가 일어나 경안각지를 얻으며 그것을 수행하여 원만하게 하느니라.
024_1148_a_02L그는 가볍고 편안함[輕安]으로 곧 쾌락을 느끼고 쾌락 때문에 마음이 안정해지면 그때에 곧 정각지(定覺支)가 일어나 정각지를 얻으며 그것을 수행하여 원만하게 되느니라. 그는 마음이 안정해지므로 탐애를 없애고 증상(增上)의 사(捨)에 머무르면 그때에 곧 사각지(捨覺支)가 일어나 사각지를 얻으며 그것을 수행하여 원만하게 되느니라. 느낌[受]과 마음[心]과 법(法)에 대하여 순수관(循受觀)과 순심관(循心觀)과 순법관(循法觀)에 머무르는 것도 자세한 설명은 역시 그러하니, 이와 같아서 각지는 차례대로 점점 일어나고 차례대로 점점 얻으며 그것을 수행하여 원만하게 되느니라.”
어떤 것이 염각지(念覺支)인가? 세존께서 말씀하시되 “성스러운 제자가 이 안의 몸[內身]에 대하여 순신관(循身觀)에 머물러 만일 정근(正勤)ㆍ정지(正知)ㆍ정념(正念)을 갖추면 세간의 탐애[貪]와 근심[憂]을 제거하고 그의 밖의 몸[外身]에 대하여 순신관에 머물러 만일 정근ㆍ정지ㆍ정념을 갖추면 세간의 탐애와 근심을 제거하며 안팎의 몸[內外身]에 대하여 순신관에 머물러 만일 정근ㆍ정지ㆍ정념을 갖추면 세간의 탐애와 근심을 제거하게 되나니, 안과 밖과 안팎의 느낌[受]과 마음[心]과 법(法), 이 세 가지에 대하여도 자세한 설명은 역시 그러하다”고 하셨다.
이와 같은 4념주(念住)를 닦아 익힐 때에 있는 모든 무루(無漏)의 작의(作意)와 상응하는 모든 염(念)과 따라 염하는 것과 오로지 염하는 것과 기억하는 것, 잊지 않는 것, 잃지 않는 것, 빠뜨리지 않는 것, 새지 않는 것, 잃지 않는 법의 성품[不失法性]이요 마음에 분명히 기억하는 성품[心明記性]을 통틀어 염(念)이라 한다. 또한 이를 염근(念根)이라 하고 또한 염력(念力)이라고도 하며 또한 염각지(念覺支)라고도 하며 또한 정념(正念)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곧 성스럽고[聖] 세간을 벗어나며[出世] 번뇌가 없고[無漏] 취가 없으며[無取] 도(道)에 따르는 행[隨行]이요 도와 함께 있으며[俱有] 도에 따라 굴러서[隨轉] 바르게 괴로움을 다하고 괴로움의 맨 끝[邊際]을 짓는다. 모든 배울 것이 있는 이[有學者]는 보는 그대로 모든 행(行)을 사유하고 관찰하여 마지막[究竟]에 이르게 되며 모든 행 가운데서 자세히 그의 허물[過患]을 보고 영원한 열반에 대하여 깊이 그 공덕을 보지만, 만일 아라한이면 해탈한 마음 그대로 사유하고 관찰하여 마지막에 이르게 된다. 이와 같은 모든 무루의 작의와 상응하는 모든 염과 따라 염하는 것 나아가 마음에 분명히 기억하는 성품이니, 이것을 바로 염각지라고 한다.
024_1148_b_02L어떤 것이 택법각지(擇法覺支)인가? 세존께서 말씀하시되 “성스러운 제자는 착한 법[善法], 착하지 않은 법[不善法]과 죄가 있는 법[有罪法], 죄가 없는 법[無罪法]과 닦아야 할 법[應修法], 닦지 않아야 할 법[不應修法]과 하열한 법[下劣法], 승묘한 법[勝妙法]과 검은 법[黑法], 흰 법[白法]과 적대가 있는 법[有敵對法]과 인연으로 생기는 법[緣生法]을 사실대로 아느니라”고 하셨다. ‘착한 법과 착하지 않은 법을 사실대로 안다’고 함에서 어떤 것이 착한 법[善法]인가? 착한 신업(身業)ㆍ어업(語業)과 착한 심(心)ㆍ심소법(心所法)과 착한 심불상응행(心不相應行)과 택멸(擇滅)이니, 이것을 착한 법이라 한다.
어떤 것이 착하지 않은 법[不善法]인가? 착하지 않은 신업ㆍ어업과 착하지 않은 심ㆍ심소법과 착하지 않은 심불상응행이니, 이것을 착하지 않은 법이라 한다. 그는 이와 같이 착하고 착하지 않은 법에 대하여 바른 지혜[正慧]로써 사실대로 간택(簡擇)하고 지극히 간택하며 두루 거칠게 생각하고[遍尋思] 두루 세밀하게 생각하며[遍伺察] 자세히 살피게 되면, 이것을 ‘착한 법과 착하지 않은 법을 사실대로 안다’고 한다.
‘죄가 있는 법과 죄가 없는 법을 사실대로 안다’고 함에서 어떤 것이 죄가 있는 법[有罪法]인가? 3악행(惡行)과 3불선근(不善根)과 10불선업도(不善業道)이니, 이것을 ‘죄가 있는 법’이라 한다. 어떤 것이 죄가 없는 법[無罪法]인가? 3묘행(妙行)과 3선근(善根)과 10선업도(善業道)이니, 이것을 ‘죄가 없는 법’이라 한다. 그는 이와 같이 죄가 있고 죄가 없는 법에 대하여 바른 지혜로써 사실대로 간택하고 지극히 간택하며 두루 거칠게 생각하고 두루 세밀하게 생각하며 자세히 살피게 되면 이것을 ‘죄가 있는 법과 죄가 없는 법을 사실대로 안다’고 한다.
‘닦아야 할 법과 닦지 않아야 할 법을 사실대로 안다’고 함에서 어떤 것이 닦아야 할 법[應修法]인가? 3묘행과 3선근과 10선업도와 훌륭한 사람[善士]에게 친근히 하는 것과 바른 법[正法]을 듣는 것과 이치대로 작의[如理作意]와 법ㆍ수법행(法隨法行)과 공경하면서 듣는 것과 감관 문[根門]을 은밀히 보호하는 것과 음식(飮食)에 분량을 아는 것과 초저녁과 새벽에 일찍 잠을 자지 않는 것과 부지런히 힘써서 모든 선행(善行)을 닦는 것이니, 이것을 ‘닦아야 할 법’이라 한다.
024_1148_c_02L또 4념주(念住)ㆍ4정승(正勝)ㆍ4신족(神足)ㆍ5근(根)ㆍ5력(力)ㆍ7등각지(等覺支)ㆍ8지성도(支聖道)ㆍ4정행(正行)ㆍ4법적(法迹)ㆍ사마타(奢摩他)ㆍ비발사나(毘鉢舍那)도 또한 닦아야 할 법이라고 한다. 어떤 것이 닦지 않아야 할 법[不應修法]인가? 3악행과 3불선근과 10불선업도와 훌륭하지 않은 사람[不善士]을 친근히 하는 것과 바르지 않은 법[不正法]을 듣는 것과 이치대로가 아닌 작의[不如理作意]와 법이 아닌 행[非法行]을 행하는 것과 공경하면서 듣지 않는 것과 공경하면서 묻지 않는 것과 감관 문을 은밀히 보호하지 않는 것과 음식에 분량을 모르는 것과 초저녁과 새벽에 항상 잠을 익히는 것과 부지런히 힘써서 선행을 닦지 않는 것이니, 이것을 닦지 않아야 할 법이라고 한다.
그는 이와 같이 닦아야 하고 닦지 않아야 할 법에 대하여 바른 지혜로써 사실대로 간택하고 지극히 간택하며 두루 거칠게 생각하고 두루 세밀하게 생각하며 자세히 살피게 되면, 이것을 ‘닦아야 할 법과 닦지 않아야 할 법을 사실대로 안다’고 한다. ‘하열한 법과 승묘한 법을 사실대로 안다’고 함에서 어떤 것이 하열한 법[下劣法]인가? 착하지 않은 법[不善法]과 유부무기(有覆無記)이니, 이것을 하열한 법이라 한다. 어떤 것이 승묘한 법[勝妙法]인가? 모든 착한 법[善法]과 무부무기(無覆無記)이니, 이것을 승묘한 법이라 한다.
그는 이와 같이 하열하고 승묘한 법에 대하여 바른 지혜로써 사실대로 간택하고 지극히 간택하며 두루 거칠게 생각하고 두루 세밀하게 생각하며 자세히 살피게 되면 이것을 ‘하열한 법과 승묘한 법을 사실대로 안다’고 한다. ‘검은 법과 흰 법을 사실대로 안다’고 함에서 어떤 것이 검고 흰 법인가? 착하지 않은 법을 검다[黑]하고 착한 법을 희다[白] 하며 죄가 있는 법을 검다 하고 죄가 없는 법을 희다 하며 닦지 않아야 할 법을 검다 하고 닦아야 할 법을 희다 하며 하열한 법을 검다 하고 승묘한 법을 희다 하는 것이니, 이것을 검은 법[黑法]과 흰 법[白法]이라 한다.
024_1149_a_02L그는 이와 같이 검고 흰 법에 대하여 바른 지혜로써 사실대로 간택하고 지극하게 간택하며 두루 거칠게 생각하고 두루 세밀하게 생각하며 자세히 살피게 되면, 이것을 ‘검은 법과 흰 법을 사실대로 안다’고 한다. ‘적대가 있는 법을 사실대로 안다’고 함에서 어떤 것이 적대가 있는 법[有敵對法]인가? 탐내는 것과 탐냄이 없는 것은 서로가 적대(敵對)이고, 성내는 것과 성냄이 없는 것은 서로가 적대이며, 어리석은 것과 어리석음이 없는 것은 서로가 적대인 것이니, 이것을 적대가 있는 법이라 한다.
그는 이와 같은 적대가 있는 법에 대하여 바른 지혜로써 사실대로 간택하고 지극하게 간택하며 두루 크게 생각하고 두루 세밀하게 생각하며 자세히 살피게 되면, 이것을 ‘적대가 있는 법을 사실대로 안다’고 한다. ‘인연으로 생겨나는 법을 사실대로 안다’고 함에서 어떤 것이 인연으로 생겨나는 법[緣生法]인가? 인연으로 생기는 법[緣起法]과 인연으로 이미 생긴 법[緣已生法]을 통틀어서 인연으로 생긴 법이라 한다. 그는 이와 같은 인연으로 생기는 법에 대하여 바른 지혜로써 사실대로 간택하고 지극하게 간택하며 두루 크게 생각하고 두루 세밀하게 생각하며 자세히 살피게 되면, 이것을 ‘인연으로 나는 법을 사실대로 안다’고 한다.
그는 착한 법ㆍ착하지 않은 법과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나아가 인연으로 생기는 법을 사실대로 아는 때에 무루(無漏)의 작의(作意)와 상응하는 법에 대하여 간택하고, 지극하게 간택하고, 가장 지극하게 간택하며 분명하게 알고, 평등하게 알고, 가까이 알며, 기민한 슬기가 있고, 막힘 없이 환히 통하고, 자세히 살피고, 뛰어나게 각(覺)과 명(明)과 혜(慧)의 행이요 비발사나(毘鉢舍那)를 통틀어 혜(慧)라 하고 또한 혜근(慧根)이라 하며 또한 혜력(慧力)이라 하고 또한 택법각지(擇法覺支)라 하며 또한 정견(正見)이라고 한다.
이것은 거룩하고 세간을 벗어나며, 번뇌가 없고, 취함[取]이 없으며, 도(道)를 따르는 행이요 도와 함께 있으며, 도에 따라 굴러서 바르게 괴로움을 다하고 괴로움의 맨 끝[邊際]을 짓는다. 모든 배울 것이 있는 이[有學者]는 보는 대로 모든 행(行)을 사유하고 관찰해서 최후의 경지[究竟]에 이르게 하며 모든 행 가운데서 깊이 그 허물을 보고 영원한 열반에 대하여 깊이 공덕을 보지만 만일 아라한이면 해탈한 마음 그대로를 사유하고 관찰해서 최후의 경지에 이르게 한다. 이와 같은 모든 무루의 작의와 상응하는 법에 대하여 간택하고 나아가 비발사나를 택법각지라 한다.
024_1149_b_02L어떤 것이 정진각지(精進覺支)인가? 세존께서 말씀하시되 “성스러운 제자는 이미 생긴 악한 법[已生惡不善法]을 끊기 위하여 욕(欲)을 일으키고 근(勤)을 발하여 정진해서 마음을 다잡고[策心] 마음을 지니며[持心], 아직 생기지 않은 악한 법[未生惡不善法]을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하여 욕을 일으키고 근을 발하여 정진해서 마음을 다잡고 마음을 지니며, 아직 생기지 않은 착한 법[未生善法]을 생기게 하기 위하여 욕을 일으키고 근을 발하여 정진해서 마음을 다잡고 마음을 지니며, 이미 생긴 착한 법[已生善法]을 굳게 머무르고 잊지 않으며, 수행하고 원만하게 하며, 갑절이나 더하고 광대하게 해서 지혜로 증을 짓게[作證] 하기 위하여 욕을 일으키고 근을 발하여 정진해서 마음을 다잡고 마음을 지니느니라”고 하셨다.
그는 이와 같은 4정승(正勝)을 닦을 때에 생겨나는 모든 무루의 작의와 상응하는 힘쓰고 정진하고 세차고 날래며, 왕성하게 해서 격려하는 뜻을 멈추지 않는 것을 통틀어 정진(精進)이라 하고 또한 정진근(精進根)이라 하며, 또한 정진력(精進力)이라 하고 또한 정진각지(精進覺支)라고 하며, 또한 정근(正勤)이라고 한다. 이것은 거룩하고 세간을 벗어나며, 번뇌가 없고 취함[取]이 없으며, 도(道)를 따르는 행이요 도와 함께 있으며, 도에 따라 굴러서 바르게 괴로움을 다하며 괴로움의 맨 끝[邊際]을 짓는다.
모든 배울 것이 있는 이[有學者]는 보는 대로 모든 행(行)을 사유하고 관찰해서 최후의 경지에 이르게 하며 모든 행 가운데서 깊이 그 허물을 보고 영원한 열반에 대하여 깊이 그 공덕을 보지만, 만일 아라한이면 해탈한 마음 그대로 사유하고 관찰해서 최후의 경지에 이르게 한다. 이와 같이 모든 무루의 작의와 상응하는 힘쓰고 정진하며 나아가 격려하는 뜻을 멈추지 않는 것을 정진각지라 한다.
024_1149_c_02L어떤 것이 희각지(喜覺支)인가? 세존께서 말씀하시되 “대명(大名:摩訶男)아, 알아야 한다. 성스러운 제자는 이와 같은 모양으로써 모든 부처님을 따라 염[隨念]하는 것이니, ‘이 세존은 바로 여래(如來)ㆍ아라한(阿羅漢)ㆍ정등각(正等覺)ㆍ명행원만(明行圓滿)ㆍ선서(善逝)ㆍ세간해(世間解)ㆍ무상장부(無上丈夫)ㆍ조어사(調御士)ㆍ천인사(天人師)ㆍ불(佛)ㆍ박가범(薄伽梵)’이라고 하느니라. 저 성스러운 제자가 이와 같은 모양으로 부처님을 따라 염할 때에는 탐냄[貪]이 마음을 얽지 못하고 성냄[瞋]이 마음을 얽지 못하고 어리석음[癡]이 마음을 얽지 못하며 여래에 대한 그의 마음은 바르고 곧나니, 마음이 바르고 곧기 때문에 뜻[義]을 얻어 위세 있고[威勢] 법(法)을 얻어 위세가 있느니라.
여래에 대하여 반가움[欣]을 일으키게 되나니, 반가워하기 때문에 기쁨[喜]이 생기고, 마음이 기쁘기 때문에 몸이 편안하며, 몸이 편안하기 때문에 즐거움을 느끼고, 즐겁기 때문에 마음이 안정되며, 마음이 안정되기 때문에 평등하지 않은[不平等] 모든 유정들에 대하여 평등하게 머무를 수 있고, 괴롭히고 해침[惱害]이 있는 모든 유정들에 대하여 괴롭히고 해침이 없는 데에 머무르며 예법류(豫法流)를 얻고 모든 부처님을 따라, 염함[隨念]을 닦기 때문에 나아가 마지막 열반을 증(證)하게 되느니라.
또 대명아, 성스러운 제자는 이와 같은 모양으로 바른 법[正法]을 따라 염하는 것이니, ‘부처님의 바른 법은 착한 말씀[善說]이요 현재 보는[現見] 것이며, 뜨거움이 없고[無熱] 때에 응하며[應時], 가르쳐 이끌어주고[引導] 가까운 관[近觀]이어서 지혜로운 이는 안에서 증[內證]한다’라고 하느니라. 저 성스러운 제자가 이와 같은 모양으로 법을 따라 염할 때에는 탐냄이 마음을 얽지 못하고 성냄이 마음을 얽지 못하고 어리석음이 마음을 얽지 못하며 바른 법에 대하여 그 마음은 바르고 곧나니, 마음이 바르고 곧기 때문에 뜻[義]의 위엄 있는 기세를 얻고 법(法)의 위엄 있는 기세를 얻느니라.
바른 법에 대하여 반가움을 끌어 일으키게 되나니, 반가워하기 때문에 기쁨이 생기고 마음이 기쁘기 때문에 몸이 편안하며, 몸이 편안하기 때문에 즐거움을 느끼고 즐겁기 때문에 마음이 안정되며, 마음이 안정되기 때문에 평등하지 못한 모든 유정들에 대하여 평등하게 머무를 수 있고, 괴롭히고 해침이 있는 모든 유정들에 대하여 괴롭히고 해침이 없는 데에 머무르며, 예법류(豫法流)를 얻고 바른 법에 대하여 따라 염함을 닦기 때문에 나아가 마지막 열반을 증하게 되느니라.
024_1150_a_02L또 대명아, 성스러운 제자는 이와 같은 모양으로 승가(僧伽)를 따라 염하는 것이니, ‘부처님의 제자는 묘한 행[妙行]과 질박 정직한 행[質直行]과 이치대로의 행[如理行]과 법ㆍ수법행(法隨法行)과 화경행(和敬行)과 수법행(隨法行)을 완전히 갖추고 있다. 또 부처님의 제자는 예류(豫流)의 향(向)이 있고 예류의 과(果)가 있으며, 일래(一來)의 향이 있고 일래의 과가 있으며, 불환(不還)의 향이 있고 불환의 과가 있으며, 아라한(阿羅漢)의 향이 있고 아라한의 과가 있나니, 이와 같이 하여 통틀어 4쌍(雙) 8척(隻)의 보특가라가 있다.
이와 같은 승가는 계율[戒]이 구족하고 선정[定]이 구족하며 지혜[慧]가 구족하고 해탈(解脫)이 구족하고 해탈지견(解脫智見)이 구족하다. 청(請)에 응하고 굴(屈)에 응하며 공경에 응하는 위없는 복전[無上福田]이어서 세간의 공양에 응하는 것이다’라고 하느니라. 저 성스러운 제자가 이와 같은 모양으로 승가를 따라 염할 때에는 탐냄이 마음을 얽지 못하고 성냄이 마음을 얽지 못하며 어리석음이 마음을 얽지 못하고 승가에 대하여 그의 마음은 바르고 곧으니, 마음이 바르고 곧기 때문에 뜻[義]의 위엄 있는 기세를 얻고 법(法)의 위엄 있는 기세를 얻느니라.
승가의 처소에서 반가움을 끌어 일으키게 되나니, 반가워하기 때문에 기쁨이 생기고 마음이 기쁘기 때문에 몸이 편안하며, 몸이 편안하기 때문에 즐거움을 느끼고 즐겁기 때문에 마음이 안정되며, 마음이 안정되기 때문에 평등하지 않은 모든 유정들에 대하여 평등한 데에 머무를 수 있고, 괴롭히고 해침이 있는 모든 유정들에 대하여 괴롭히고 해침이 없는 데에 머무르며, 예법류(豫法流)를 얻고 승가의 처소에 따라 염함을 닦기 때문에 나아가 마지막 열반을 증하게 되느니라.
또 대명아, 성스러운 제자는 이와 같은 모양으로 스스로 계율[戒]을 따라 염하는 것이니, ‘나의 청정한 계율은 이지러지지 않고[不缺] 뚫어지지 않으며[不穿], 뒤섞이지 않고[不雜] 더러워지지 않아서[不穢] 공양을 받을 만하며 숨기거나 어두움이 없고 잘 마쳤으며 잘 받아 지니고 있으므로 지혜로운 이가 칭찬하면서 언제나 헐뜯음이 없다’고 하느니라. 저 성스러운 제자가 이와 같은 모양으로 스스로의 계율을 따라 염할 때에는 탐냄이 마음을 얽지 못하고 성냄이 마음을 얽지 못하고 어리석음이 마음을 얽지 못하며 자기 자신의 계율에 대하여 그 마음은 바르고 곧나니, 마음이 바르고 곧기 때문에 뜻[義]의 위엄 있는 기세를 얻고 법(法)의 위엄 있는 기세를 얻느니라.
024_1150_b_02L자기 자신의 계율에 대하여 반가움을 끌어 일으키게 되나니, 반가워하기 때문에 기쁨이 생기고 마음이 기쁘기 때문에 몸이 편안하며, 몸이 편안하기 때문에 즐거움을 느끼고 즐겁기 때문에 마음이 안정되며, 마음이 안정되기 때문에 평등하지 않은 모든 유정들에 대하여 평등한 데에 머무를 수 있고 괴롭히고 해침이 있는 모든 유정들에 대하여 괴롭히고 해침이 없는 데에 머무르며, 예법류(豫法流)를 얻고 자기 자신의 계율에 대하여 따라 염함을 닦기 때문에 나아가 마지막 열반을 증하게 되느니라.
또 대명아, 성스러운 제자는 이와 같은 모양으로 스스로 보시[施]하며 염하는 것이니, ‘나는 지금 뛰어난 이익을 잘 얻은지라 비록 한량없는 간탐의 때[慳垢]에 얽힌 중생들 가운데에 있다 하더라도 마음은 온갖 간탐의 때를 멀리 여의고 보시를 능히 행하며 비록 집에 살고 있다 하더라도 온갖 재보(財寶)에 집착하지 않고 손을 펴서 보시하며 크게 제사를 지내고 복전(福田)에 공양하며 은혜로운 평정[惠捨]을 완전히 갖추고 평등한 분포(分布)를 좋아하고 있다’라고 하느니라.
저 성스러운 제자가 이와 같은 모양으로 자기 자신의 보시를 따라 염할 때에는 탐냄이 마음을 얽지 못하고 성냄이 마음을 얽지 못하며 어리석음이 마음을 얽지 못하고 자기 자신이 보시한 곳에 대하여 그 마음은 바르고 곧나니, 마음이 바르고 곧기 때문에 뜻[義]의 위엄 있는 기세를 얻고 법(法)의 위엄 있는 기세를 얻느니라. 자기 자신이 보시한 곳에 대하여 반가움을 끌어 일으키게 되나니, 반가워하기 때문에 기쁨이 생기고 마음이 기쁘기 때문에 몸이 편안하며 몸이 편안하기 때문에 즐거움을 느끼고 즐겁기 때문에 마음이 안정되며 마음이 안정되기 때문에 평등한 데에 머무를 수 있고, 괴롭히고 해침이 있는 모든 유정들에 대하여 괴롭히고 해침이 없는 데에 머무르며, 예법류(豫法流)를 얻고 자기 자신의 보시에 대하여 따라 염함을 닦기 때문에 나아가 마지막 열반을 증하게 되느니라.
또 대명아, 성스러운 제자는 이와 같은 모양으로 모든 하늘[天]을 따라 염하는 것이니, ‘사대왕중천(四大王衆天)과 삼십삼천(三十三天)과 야마천(夜摩天)과 도사다천(覩史多天)과 낙변화천(樂變化天)과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이 있다. 이와 같은 모든 하늘들은 그들이 성취한 믿음[信]ㆍ계율[戒]ㆍ들음[聞]ㆍ평정[捨]ㆍ지혜[慧] 때문에 이곳에서 죽어서 저 천상에 태어나 모든 쾌락을 받는 것이니, 나도 역시 믿음과 계율과 들음과 평정과 지혜가 있으므로 역시 장차 그곳에 나서 모든 하늘과 함께 동일한 쾌락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느니라.
024_1150_c_02L저 성스러운 제자가 이와 같은 모양으로 하늘을 따라 염할 때에는 탐냄이 마음을 얽지 못하고 성냄이 마음을 얽지 못하고 어리석음이 마음을 얽지 못하며 모든 하늘의 처소에서 그 마음은 바르고 곧나니, 마음이 바르고 곧기 때문에 뜻[義]의 위엄 있는 기세를 얻고 법(法)의 위엄 있는 기세를 얻느니라. 모든 하늘의 처소에서 반가움을 끌어 일으키게 되나니, 반가워하기 때문에 기쁨이 생기고 마음이 기쁘기 때문에 몸이 편안하며, 몸이 편안하기 때문에 즐거움을 느끼고 즐겁기 때문에 마음이 안정되며, 마음이 안정되기 때문에 평등하지 않은 모든 유정들에 대하여 평등한 데에 머무를 수 있고, 괴롭히고 해침이 있는 모든 유정들에 대하여는 괴롭히고 해침이 없는 데에 머무르며, 예법류(豫法流)를 얻고 모든 하늘의 처소에서 따라 염함을 닦기 때문에 나아가 마지막 열반을 증하게 되느니라”고 하셨다.
그는 이와 같은 6수념(隨念)을 닦을 때에 무루(無漏)의 작의(作意)와 상응하는 마음의 반가움과 지극히 반가움과 현전에서 지극히 반가움과 반가워하는 성품과 반가워하는 종류와 뜻에 알맞은 것과 뜻을 즐겁게 하는 것과 기꺼워하는 성품과 기꺼워하는 종류와 화합하기를 좋아하여 떨어지지 않는 것과 즐거워하는 것과 능히 감당해 냄이 있는 성품과 좋아서 뛰는 것과 좋아서 뛰는 성품과 기뻐하는 것과 기뻐하는 성품을 통틀어 기쁨[喜]이라 하며 또한 희각지(喜覺支)라 한다.
이것이야말로 거룩하고 세간을 벗어나며, 번뇌가 없고 취(取)가 없으며, 도(道)에 따르는 행이요, 도와 함께 있으며, 도에 따라 굴러서 바르게 괴로움을 다하고 괴로움의 맨 끝[邊際]을 짓는다. 모든 배울 것이 있는 이[有學者]는 보는 대로 모든 행(行)을 사유하고 관찰해서 최후의 경지에 이르게 하며 모든 행 가운데서 깊이 그 허물을 보고 영원한 열반에 대하여 깊이 그 공덕을 보지만, 만일 아라한이면 해탈한 마음 그대로 사유하고 관찰해서 최후의 경지에 이르게 한다. 이와 같이 모든 무루의 작의와 상응하는 마음의 반가움과 지극히 반가움과 나아가 기뻐함과 기뻐하는 성품을 ‘희각지’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