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존재[諸有]에 두루하는 일체법 가운데 가장 알기 어려운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에 대해 홀로 능히 깨달아 아신, 그릇되고 뒤섞임이 없는 이러한 일체지(一切智)께 지금 공경 예배드리옵니다.
나 중현(衆賢)은 이치에 부합하는 광박(廣博)한 언사로써 다른 종의를 비판하고, 본 종(宗)의 뜻을 드러내고자 함에 만약 경주(經主, 즉 世親)의 말이 이치에 부합하는 가르침이라면 바로 그것에 따라 술(述)하여 그릇된 것을 구하지 않겠지만 조금이라도 대법(對法)의 취지나 경(經)에 어긋남이 있다면 반드시 찾아 밝혀 삭제하고 물리치기를 서원하옵니다.
이미 『순정리(順正理)』라고 이름한 논을 설한 바 있어 사택(思擇)을 즐기는 자라면 마땅히 배워야 하겠지만 문구가 번잡하고 끊겨있어 헤아리기 어려우며 적은 노력으로 능히 이해할 바가 되지 못하기에 광문(廣文)의 요점을 간추려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 보다 간략한 논을 지어 『현종(顯宗)』이라 일렀습니다. 일단 거기서의 게송을 늘어놓고 귀의처로 삼지만 『순정리』 중에서의 번잡한 결택(決擇)은 지워버리고 그것의 잘못된 말에 대해서는 올바로 해석하여 종의가 되는 참된 묘의(妙義)를 드러내려 하옵니다.
논하여 말하겠다. [그대는] 진리를 두루 아는 변지(遍智)도 아니면서 어떻게 능히 알아 이렇듯 불세존께서는 바로 일체지(一切智)로서, 제법(諸法) 중의 가장 알기 어려운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에 대해 능히 깨달아 그릇되고 뒤섞임이 없다고 하는 것인가?1) 비록 진리를 두루 아는 변지가 아닐지라도 역시 능히 알 수 있으니,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행하면 반드시 과보를 획득하기 때문에 지혜를 가진 자는 곧잘 뛰어난 의사에 비유되는 것과도 같다. 이를테면 세간의 의사는 먼저 병자의 풍열(風熱)과 가래 등에 의해 일어나는 질병의 근원을 살피고, 다시 타고난 본성과 후천적으로 익힌 습성[性習]의 두 가지가 나이ㆍ시기ㆍ처소 등 온갖 형편에 따라 동일하지 않음을 참답게 관찰하고, 병고를 없애 주고자 [관찰한 바에 따라] 약을 처방하여 준다. 그리고 모든 환자들은 처방에 따라 약을 복용함으로써 고질병도 점차 없어져 날이 갈수록 몸은 편안하게 되니, 실로 뛰어난 의사는 온갖 약을 처방하는데 청정한 변지를 갖추었음을 지자(智者)라면 능히 살펴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존께서도 교화되어야 할 자에게 있어 탐ㆍ진ㆍ치 등의 번뇌가 병의 근원임을 아시고, 다시 본성(本性) 수집(修集)이라는 두 가지 선의 종자(種子)와 승해(勝解)와 수면(隨眠), 그리고 그가 능히 스스로 원만하게 되는 것을 감내하는 능력 등을 참답게 관찰하시고서, 그들로 하여금 번뇌를 점차적으로 영원히 소멸시켜 주고자 번뇌를 굴복시켜 제거할 두 가지 도(道)라는 약을 처방하여 주셨다.2) 그리고 교화되어야 할 모든 이들은 이러한 처방에 따라 개별적이거나 혹은 일반적인 대치도(對治道)라는 약을 복용함으로써 무시(無始) 이래 자주 익혀 점점 더 견고해지는 감옥과도 같은 온갖 번뇌의 병이 점차 제거되어 탐 등의 멸(滅)을 자신이 얻게 되며, 나아가 도의 얕고 깊음에 따라 더욱더 수승하게 되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에 따라 우리의 위대한 스승께서는 일체의 모든 어둠을 멸하시고, 일체지(一切智)를 갖추었음을 우러러 헤아려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노래로 찬탄하는 이[讚頌者]들은 부처님을 게송으로 찬탄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누가 능히 세존처럼 수면(隨眠) 경계의 이루 헤아릴 수 없고 가없는 자상과 공상의 온갖 품류(品類)를 훌륭히 분별하였을 것이며, 감응하는 대로 널리 설하여 유정을 이롭게 하였을 것인가?
누가 능히 점차로 수행하였으면서도 승리의 약을 성취하지 못하였던 것인가? 지혜가 없어 성교(聖敎)를 능히 따르지 못하였으면서 어찌 영험이 없다는 허물이 여래에게 있다 할 것인가?
그런데 사택(思擇, 생각)에 증상만(增上慢)이 있는 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불세존께서는 일체지(一切智)가 아니니, 청하여 물은 것과는 다르게 대답하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에 대해 마땅히 말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기도 하였는데, [이 같이 물은 것과는] 다르게 대답한 것은 무지하기 때문이다. 또한 ‘전제(前際)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고 말하였는데, 이는 바로 스스로의 무지함을 나타낸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일찍이 손타리(孫陀利)와의 인연을 깨닫지 못하였으며, 아울러 그녀의 친구들이 온갖 악을 짓는 것도 그대로 내버려두었기 때문이다.3) 또한 바라문의 여인인 전차(戰遮)가 일으킨 비방과 훼손을 능히 막지 못하였기 때문이다.4) 또한 일찍이 제바달다(提婆達多)가 불법 중에 출가하고자 한 것을 허락하였기 때문이다.5) 또한 일찍이 외도 올달낙가(嗢達洛迦)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를 스스로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6) 또한 파타리성(波吒釐城)에서 장차 그와 같이 어려운 일이 일어날 것인지에 대해 예측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7) 또한 불법 중에 장차 열여덟 가지 부파의 다른 주장들이 생겨나게 될 것이라고 예견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8) 또한 ‘온갖 업으로서 결정되지 않은 것(즉 不定業)이 존재한다’고 설하셨기 때문이다.” 외도들이 비방하는 언사를 간략히 언급하면 이상과 같다. 그들 외도들은 이렇듯 완고하게 주장하고 있는데, 일체지(一切智)이신 세존께서 비록 갖가지 뛰어난 방편의 화도(化導)를 시설하셨을지라도 그들로 하여금 능히 정등각(正等覺)에 대한 청정한 신해(信解)를 낳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니, 뛰어난 복덕과 지혜를 갖추고서 진리를 구하는 자라야 비로소 능히 일체지의 바다를 측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 [중현(衆賢)]는 여기서 과감히 정근(正勤)의 마음을 일으켜 참다운 이치에 따라 바야흐로 조그마한 깨달음을 열어 보이고자 한다. “청하여 물은 것과는 다르게 대답하였기 때문이니, 이를테면 ‘이에 대해 마땅히 말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이 같이 물은 것과는] 다르게 대답한 것은 무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은 이치에 맞지 않으니, 거기서 주장된 논거가 확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자세히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불세존께서는 청하여 물은 바에 대해 무지하였기 때문에 “마땅히 말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던 것인가? 물은 자[의 의도]를 관찰하여 그가 만약 총명예지의 오만함을 품었다면 그로 하여금 바로 즉시 참답게 믿고 이해하도록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비록 알고 있었음에도 “말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니, 이를테면 어떤 속임수 물음[矯問]에서의 경우와도 같다. 즉 ‘모든 석녀(石女,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의 자식은 검다고 해야 할 것인가, 희다고 해야 할 것인가?’라고 물으면, 끝내 말할 수 없는 것인데, 어찌 별도의 처방이 있어 그들의 고질병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인가? 이와 마찬가지로 외도들은 자아[我]를 주장하여 진실이라 하면서, ‘여래는 사후에 존재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인가?’하는 등의 사실에 대해 속임수의 물음을 묻고 있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에 대해서는 마땅히 말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던 것이다. 여기서 부처님의 의도는, 자아는 실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마땅히 기별(記別)해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이는 만약 어떤 법이 실유(實有)의 존재가 아니라면 마땅히 그것에 대한 차별을 물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혹은 불세존께서는 뛰어난 권도의 방편으로써 그들을 조복(調伏)시키기 위해 “말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같이 ‘말해서는 안 된다’고 함은 바로 그들을 조복시키기 위한 까닭에서이지 무지하기 때문에 (물은 것과는) 다르게 대답하신 것이 아니다. 또한 마땅히 부처님께 뛰어난 말재간[辯才]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해서도 안 되니, 그와 같은 물음은 논도(論道)에 포섭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그와 같은 물음이 논도에 포섭되는 것임에도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다면 가히 말재간이 없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물음 중에는 이치에 맞는 난문(難問)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데, 어찌 부처님께 말재간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법을 청해 물은 자의 마음이 간절하지 않기 때문에, 아견(我見)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에, 근기가 아직 성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존께서는 바야흐로 그들로 하여금 믿고 이해하게끔 할 수 없었으니, 그래서 질문 받은 바를 사치(捨置)하고서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질문 받은 바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선(大仙)이신 세존께서는 일체지가 아니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또한 [외도들은] “‘초제(初際, 혹은 前際, 태초를 말함)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고 말하였는데, 이는 바로 스스로의 무지함을 나타낸 것이다”라고 하였지만, 이 역시 이치에 맞지 않으니, 존재하지 않는 법(비존재)은 마땅히 지식의 대상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존재하는 어떤 법을 대상으로 삼아서도 지혜가 생겨나지 않았다면, 여래는 가히 일체지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초제가 본래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지혜는 무엇을 알아야 할 것인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알지 못하는 것인데, 어찌 지혜가 없다는 말이 성립할 수 있을 것인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초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하지 않은 것인가? 그와 같이 설할 경우 다시 (초제가 존재하지 않는) 이유를 설정하기가 용이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마땅히 ‘알 수 없기 때문에’라는 이유를 제시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이 역시 옳지 않으니, 그것은 결정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혹 어떤 법이 비록 존재하는 것일지라도 인식의 조건[緣]이 결여되면 [그것 역시]알 수 없기 때문에 ‘알 수 없다’는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의 [결정적인] 이유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의 이유로 설정할 경우, 필경무(畢竟無, 절대무)가 동일한 예[同喩]가 될 수 있어 [결정적인] 이유로 허용될 수 있기 때문에 “[초제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고 설하셨던 것이다.9) 만약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는 불확정의 오류[不成失]를 범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이치에 맞지 않으니, 불확정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생사의 초제가 만약 결정코 비존재가 아니라고 한다면, 초제의 몸은 마땅히 원인 없이 생겨나야 할 것이며,10) 초제의 몸에 원인이 없다면 그 후로도 역시 마땅히 원인이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니, 앞뒤의 몸은 원인을 달리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그렇다고 인정한다면(다시 말해 원인 없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인정한다면), 이미 행해진 청정하거나 부정한 온갖 업도 모두 다 어떠한 과보도 갖지 않아야 하겠지만, 그러한 사실은 이미 허락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앞서 (“초제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는 사실의 이유로) 제시된 ‘초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라고 하는 것은 불확정적인 이유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만약 ‘생사에는 초제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마땅히 허공처럼 후제(後際, 종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 역시 이치에 맞지 않으니, 외적인 존재와 그 종류가 동일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외적 존재인 보리의 경우 이후의 것은 이전의 것을 원인으로 하여 생겨나듯이 비록 초제는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불이나 물 등 태우고 썩게 하는 온갖 인연을 만나면 영원히 괴멸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생사는 번뇌와 업을 원인으로 하여 전전(展轉)하며 상생(相生)하니, 비록 초제는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탐ㆍ진ㆍ치 등을 대치하는 힘을 자주 익힘에 따라 생사의 제온(諸蘊)이 마침내 생겨나지 않으면, 바로 후제가 된다. 곧 [생사의 제온이] 공(空)하여 생겨나는 일이 없기 때문에 후제에는 가히 생사가 없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생이 있는 한 어찌 후제가 없을 것인가? 지금 바로 보더라도 생겨난 법은 반드시 끝나는 때가 있으니, 생사가 이미 생겨났다면 이치상 반드시 귀멸(歸滅)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초제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고 설하셨던 것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라는 것이 그 이유였으니, 그 뜻은 이미 잘 제시되었다. 따라서 마땅히 “초제에 대해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불세존께서는 일체지가 아니다”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또한 “일찍이 손타리와의 인연을 깨닫지 못하였으며, 그녀의 친구들이 온갖 악을 짓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두었다”고 말하는 것 역시 이치에 맞지 않다. 비록 일찍이 깨달아 알았을지라도 많은 허물을 피하기 위하여 스스로 밝히지 않았던 것이다. 만약 부처님께서 먼저 “우리는 그러한 짓을 한 적이 없다. 그와 같은 짓을 한 이들은 스스로 올바르다고 하는 다른 사람들이다”라고 말하였다면, 그녀의 친구들은 악한 마음을 마구 퍼뜨림으로써 그 일에 무관심하였던 모든 이들도 다 같이 회의를 품게 되었을 것이다. 그럴 경우 이와 같은 허물은 부처님께 있을 것인가, 그들에게 있을 것인가? 또한 대인(大人)은 남의 비리를 드러내지 않는 법이다. 부처님께서는 바로 대인이니, 어찌 남의 과오를 드러내 보이겠는가? 또한 그들의 악행을 드러내게 될 경우,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세존을 미워하고 등 돌리게 함으로써 정법에 드는 것을 막게 될 것이다. 또한 부처님께서는 자신과 그들의 몸에 비방과 단명(短命)을 초래하는 결정적인 업[定業]이 존재함을 관찰하셨던 것이다. 또한 말세의 필추(苾芻, 비구의 신역)들에게 위안을 열어주기 위해서였다. 즉 부처님께서는 당래 정법이 쇠하여 사라지게 되었을 때, 다문(多聞)과 지계(持戒)의 무리들이 필추로서 조금이라도 비방을 당하지 않고서 죽게 되기를 희망하는 것을 관찰하시고서 그들로 하여금 “우리의 대선(大仙)이신 세존께서는 일체의 번뇌의 과실과 습기(習氣)를 영원히 뿌리째 뽑아버렸고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으며, 색구경천(色究竟天)에까지 이르셨음에도 오히려 뭇사람들로부터 성가시게 비방을 받았는데, 하물며 우리는 어떠하겠는가?’라고 스스로 위안삼아 말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즉 이렇게 마음을 편안히 할 때 온갖 선업을 닦게 되는 것으로, 이상과 같은 득과 실의 결정적 사실을 관찰하였기 때문에 세존께서는 먼저 그것을 스스로 밝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7일이 지나 그 일의 전모가 저절로 밝혀져 부처님께서는 거룩함을 드러내게 되었고, 허물은 외도들에게 돌아갔으니, 그러므로 마땅히 (손타리와의) 인연을 스스로 밝히지 않았다고 해서 ‘불세존께서는 일체지가 아니다’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실에 따라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전차녀(戰遮女)가 비방하게 된 인연을 스스로 파헤쳐 밝히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이미 해석한 셈이다. 제바달다가 불법 중에 출가하고자 한 것을 허락한 까닭에는 깊은 뜻이 있다. 부처님께서 그를 관찰하여 보니, 출가하지 않으면 마땅히 전륜왕과 일을 도모하여 무수한 사람을 해치고, 불법을 괴멸케 하여 악취에 거꾸로 떨어져 언제 벗어날지 기약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제도되어 출가함으로써 심오한 선의 근본을 심게 되었으니, 출가하지 않았다면 능히 심지 못하였을 것이다. 또한 많은 사람들을 보호하고 손해를 없애주며, 아울러 온갖 악을 막게 하기 위한 까닭에서 출가를 허락하였던 것이다. 또한 “일찍이 외도 올달낙가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스스로 알지 못하였다”고 말하는 것 역시 이치에 맞지 않으니, 생각만 하였다면 바로 알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대상에 대해 어떤 의식이 생겨날 때에는 여타의 다른 의식의 대상은 능히 알지 못한다. 부처님께서는 먼저 설법하는 일에 마음을 두었으므로 그 사람이 살았는지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관찰하지 못하였을 뿐이다. 그렇지만 그 후 그것을 알고자 하여 잠시 마음을 챙겼을 때, 그의 목숨이 이미 끊어졌음을 여실히 알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만약 그것을 알고자 하여도 능히 알 수 없었다면 여래는 가히 일체지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다른 대상에 속해 있어 이와 같은 대상(즉 올달낙가의 존망)을 아직 인식의 조건[所緣]으로 삼지 않은 것을 ‘무지하다’고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다. “파타리성에서 장차 그와 같이 어려운 일이 일어날 것인지에 대해 예측하지 못하였다”고 말하는 것 역시 이치에 맞지 않으니, 은밀하게 예측하였기 때문이다. 즉 일찍이 밀의(密意)로써 설하기를, “만약 어떤 것으로부터 면제되어 벗어나게 되면 다른 어떤 것이 다시 또 다른 어떤 손해를 끼치게 된다. 이를테면 부처님께서도 일찍이 깨달은 바가 있어 혹 어떤 것을 수호하였다면, 필시 다른 어떤 것이 또 다른 어떤 손해를 끼치게 되었을 것이지만, 세 가지 어려운 일에 대해 각기 스스로 지키게끔 함으로써 다른 어떤 것이 능히 손해를 끼치지 못하였다. 그래서 밀의로써 설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어려운 일의 필연성을 예측한 것이니, 어찌 세존을 일체지가 아니라고 할 것인가? 또한 “스스로 불법 중에 장차 열여덟 가지 부파의 다른 주장들이 생겨나게 될 것이라고 예견하지 못하였다”고 말하는 것 역시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이미 예견하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미래의 어떤 비구의 무리들은 내 말뜻을 잘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서로 다른] 부파의 주장들이 다투어 생겨나 서로 비방하게 될 것이다”라고 설하신 바와 같다. 세존께서는 이에 대해 내외의 두 가지 방호(防護)를 간략히 설하셨다. 내적인 방호란 말하자면 이설(異說)ㆍ대설(大說)과 같은 것으로, 계경에 나타난 바를 관찰하는 방호이다. 외적인 방호란 말하자면 6가애법(可愛法)과 같은 것으로, 계경에서 설해진 바를 구하여 받아들이는 방호이다. 또한 『견집법계경(見集法契經)』 중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의 법 중에는 장차 이설이 생겨나게 될 것이니, 말하자면 어떤 이는 ‘오로지 금강유정(金剛喩定)만이 번뇌를 능히 단박에 끊을 수 있다’고 설할 것이다. 혹은 ‘택멸열반(擇滅涅槃)은 두 가지의 법을 본질[體]로 한다’고 설할 것이다.11) 혹은 ‘불상응행법(不相應行法)은 개별적인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할 것이다. 혹은 ‘표업(表業)도 존재하지 않는데, 하물며 무표업이 존재하겠는가?’라고 설할 것이다. 혹은 ‘일체의 색법(色法)은 대종(大種)을 본질로 한다’고 설할 것이다. 혹은 ‘전후의 서로 유사한 법을 동류인(同類因)이라 한다’고 설할 것이다. 혹은 ‘색처(色處)는 오로지 현색(顯色)만을 본질로 한다’고 설할 것이다. 혹은 ‘촉처(觸處)는 오로지 대종을 본질로 한다’고 설할 것이다. 혹은 ‘오로지 촉처만이 대애(對礙, 공간적 점유성)를 갖는다’고 설할 것이다. 혹은 ‘안식(眼識)이 능히 본다’고 설할 것이다. 혹은 ‘[근(根)과 식(識)의] 화합이 능히 본다’고 설할 것이다. 혹은 ‘의계(意界)와 법계(法界)는 다 같이 영원하고 무상하다’고 설할 것이다. 혹은 ‘일체의 색법은 찰나멸(刹那滅)이 아니다’라고 설할 것이다. 혹은 ‘불상응행법은 다(多)찰나에 걸쳐 지속하는 경우가 있다’고 설할 것이다. 혹은 ‘무상정(無想定)과 멸진정(滅盡定)은 모두 [완전히 무심(無心)의 상태가 아니라] 유심(有心)의 상태이다’라고 설할 것이다. 혹은 ‘등무간연(等無間緣)도 역시 색법과 통한다’고 설할 것이다. 혹은 ‘일체의 색법에는 동류인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할 것이다. 혹은 ‘이숙생(異熟生)의 색은 끊어졌다가 다시 상속한다’고 설할 것이다. 혹은 ‘방생ㆍ아귀ㆍ천취(天趣)도 역시 별해탈계(別解脫戒)를 획득한다’고 설할 것이다. 혹은 ‘마음에 염오함이 없더라도 역시 생을 계속[續生]할 수 있다’고 설할 것이다. 혹은 ‘생을 계속하게 되는 것은 모두 애에(愛恚)때문이다’고 설할 것이다. 혹은 ‘율의와 불율의는 나누어 받을 수도 있고[分受], 또한 역시 전부 받을 수도 있다[全受]’고 설할 것이다. 혹은 ‘방생과 아귀에게는 무간업(無間業)이 있다’고 설할 것이다. 혹은 ‘무간(無間)과 해탈(解脫)의 두 가지 도는 다 같이 능히 온갖 번뇌를 끊는다’고 설할 것이다. 혹은 ‘의식상응의 선(善)인 유루혜는 모두 다 견(見)이 아니다’라고 설할 것이다. 혹은 ‘유신(有身)과 변집(邊執)의 두 가지 견은 모두 다 불선이며, 또한 역시 타계연(他界緣)이 된다’고 설할 것이다. 혹은 ‘일체의 번뇌는 모두 다 불선이다’라고 설할 것이다. 혹은 ‘낙수(樂受)와 사수(捨受)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할 것이다. 혹은 ‘오로지 낙수만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할 것이다. 혹은 ‘무색계 중에도 역시 온갖 색이 존재한다’고 설할 것이다. 혹은 ‘무상천(無想天)에서 죽으면 모두 악취에 떨어진다’고 설할 것이다. 혹은 ‘일체의 유정은 [정해진] 때가 아닌 때 죽는 일이 없다’고 설할 것이다. 혹은 ‘온갖 무루혜는 모두 지견(智見)을 자성으로 한다’고 설할 것이다. 혹은 ‘과거와 미래는 존재하지 않으며, 일체의 법은 현재찰나에 각기 개별적으로 존재한다’고 설할 것이다. 혹은 ‘색심(色心)은 상호 구유인(俱有因)이 되지 않는다’고 설할 것이다. 혹은 ‘갈랄람(羯剌藍)의 상태에서 이미 일체의 색근(色根)을 모두 갖추게 된다’고 설할 것이다.12) 혹은 ‘정법(頂法)을 획득한 모든 이는 다 악취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설할 것이다. 혹은 ‘모든 선악의 업은 다 전멸(轉滅)될 수 있다’고 설할 것이다. 혹은 ‘모든 무위법은 다 실유의 존재가 아니다’라고 설할 것이다. 혹은 ‘온갖 세간도(世間道)로써는 번뇌를 끊지 못한다’고 설할 것이다.13) 혹은 ‘오로지 섬부주(贍部洲)에서만 능히 원지(願智)ㆍ무쟁(無諍)ㆍ무애해(無礙解)ㆍ중삼마지(重三摩地)를 일으킬 수 있다’고 설할 것이다.14) 혹은 ‘심(心)ㆍ심소법(心所法)은 존재하지 않는 대상[無境]도 역시 소연(所緣)으로 삼는다’고 설할 것이다. 이상과 같은 등등의 온갖 차별의 쟁론이 각기 주장하는 바를 설하면 그 수는 수천을 넘을 것이며, 스승과 제자 사이의 상승(相承)도 백 천의 무리가 넘을 것인데, 여러 도속(道俗)을 위해 해설되고 칭양(稱揚)될 것이다. 나의 불법 중에는 미래세 마땅히 이와 같은 쟁론이 생겨나 한결같지 않게 될 것으로, 그들은 이익을 위하고 이름을 위하여 그릇되게 설하고 그릇되게 수지하여 정법을 증득하지 않을 것이니, 실로 전도되어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부파들의 과거ㆍ현재ㆍ미래에도 역시 또한 이와 같은 쟁론의 차별이 있게 될 것이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분명하게 예견하셨다. 그럼에도 여러 제자들은 성언(聖言)을 돌아보지 않고 각기 종의(宗義)로 삼는 바에 집착하여 서로 비방하고 헐뜯을 것이나 그 허물은 제자들에게 속하는 것이지 어찌 세존께 있다고 하겠는가? 그러므로 일체지(一切智)를 비방하는 것은 옳지 못한 것이다. 또한 “‘온갖 업으로서 결정되지 않은 것[不定業]이 존재한다’고 설하셨기 때문에 [일체지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 역시 이치에 맞지 않으니, 이와 같은 업은 실재하기 때문이다.15) 즉 당래 능히 이숙의 부정(不定)을 초래하는 업이 존재한다고 반드시 인정해야 한다. 만약 이러한 업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도를 닦아 번뇌[結]를 끊는다’고 함은 쓸데없는 중설(重說)이 되고 말 것이니, 일체의 업은 반드시 그 과보를 획득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설한 온갖 이유에서, 혹은 다시 그 밖의 또 다른 이유에 의해 마땅히 일체지(一切智)를 비방해서는 안 된다. 세존께서는 불가사의하고 희유한 공덕과 높고도 광대한 명칭을 성취하셨으니, 이치가 아닌 것으로써 헐뜯고 비방하면 가없는 죄를 얻게 될 것이다. 온갖 유정으로서 지혜 있는 자라면 모두 마땅히 부처님을 믿어야 할 것이니, 일체지를 갖추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먼저 공경하고 예배해야 하는 것이다.
1.변본사품(辯本事品)①
서설
1.서분(序分)-귀경게(歸敬偈)
일체종(一切種)의 온갖 어둠을 멸하시고 중생을 건져 올려 생사의 늪에서 나오게 하신 모든 이 이와 같은 참다운 스승[如理師]께 공경 예배하고서 나는 이제 마땅히 대법장론(對法藏論)을 설하리라.1) 諸一切種諸冥滅 拔衆生出生死泥 敬禮如是如理師 對法藏論我當說
논하여 말하겠다. [본송에서] ‘모든 이[諸]’라는 말은 비록 [부처님] 전체[總]를 나타내는 말일지라도 개별적으로 관찰해야 할 바가 있다. 개별적으로 무엇을 관찰해야 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라는] 이익의 공덕이 모두 원만함을 말한다. 즉 지덕(智德)과 단덕(斷德)을 갖추었기 때문에 자리의 공덕이 원만하며,2) 은덕(恩德)을 갖추었기 때문에 이타의 공덕이 원만하니, 이는 곧 일체지(一切智)로써 능히 유정을 구제하였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일체종(一切種)의 어둠’을 모두 영원히 멸하셨기 때문에 지덕이 원만하였으며, ‘온갖 경계의 어둠’도 역시 영원히 멸하셨기 때문에 단덕이 원만하였다.3) 또한 정법(正法)의 손길을 뻗쳐 중생을 생사의 늪에서 건져 올려 빠져 나오게 하셨기 때문에 은덕이 원만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성문(聲聞)과 독각(獨覺)의 경우, 비록 온갖 어둠은 깨트렸을지라도 필경 염오무지(染汚無知)만을 끊었기 때문에 일체종지(一切種智)가 결여되어 불염오무지(不染汚無知)를 능히 영원히 멸한 것은 아니다. 즉 [일체종지는] 수승한 지혜이기 때문으로, 그래서 일체지를 갖추지 못하였으며, 능히 유정을 건져 올릴 수도 없는 것이다. 여기서 ‘어둠’이라 함은, 이를테면 백태의 막이 청정한 눈을 가리듯이 무지는 참된 견해[眞見]을 장애하기 때문에, 어둠이나 캄캄한 밤은 색상(色像)을 차단하듯이 무지는 진실의 뜻[實義]을 은폐하기 때문에 [무지를 ‘어둠’이라 하였다]. 그렇지만 그것은 모든 유정에게 뛰어난 대치도(對治道)가 생겨날 때 영원히 생겨나지 않게 된다. 그래서 ‘멸하였다’고 일컬은 것으로, 이를테면 일체의 품류 (즉 種)와 온갖 경계의 어둠을 소멸하였기 때문이다. [본송에서] ‘일체종(一切種)의 어둠과 온갖 어둠을 멸하시고, 중생을 건져 올려 생사의 늪에서 나오게 하였다’고 함에 있어, 그와 같은 생사는 바로 모든 유정이 무시(無始)이래 빠져 있는 곳으로, 헤어나기가 대단히 어렵기 때문에 늪에 비유하였다. 즉 중생이 그러한 늪 속에 빠져있어도 구하는 자 없었으나 교묘한 지혜와 대비(大悲)를 성취하신 분이 있어 진리에 부합하는 말씀을 설하여 거기서 건져 올려 빠져 나오게 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참다운 스승에게 공경 예배한다’고 함이란, 앞에서 설한 자리이타의 공덕을 모두 갖추시고, 능히 참다운 성교(聖敎)를 설하신 위대한 스승께 머리를 조아린다는 말이다. 즉 성문과 독각은 의요(意樂) 수면(隨眠)의 지혜(智) 등이 결여되었기 때문에 참다운 스승이 아니며,4) 오로지 불세존만이 이와 같은 공덕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바로 앞서 언급한 [부처님] 전체를 나타내는 ‘모든 이[諸]’라는 말에 의해 관찰되는 바로서, 그가 제시한 가르침을 올바로 유통시키기 위해 먼저 참다운 가르침의 스승을 찬탄 예배해야 하는 것이다. 곧 ‘찬탄 예배한다’는 말은 온갖 나쁜 장애를 소멸하고 뛰어난 상서로움을 나타내고서 논의를 시작한다는 뜻이기 때문에, ‘나는 이제 마땅히 대법장(對法藏)을 설하리라’고 말하게 된 것이다.5)
2.대법(對法) 즉 아비달마의 본질
대법(對法)이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정혜(淨慧)와 이에 수반되는 행(行)을 대법이라 이름하며 아울러 능히 이를 획득하게 하는 온갖 ‘혜’와 ‘논’을 말한다. 淨慧隨行名對法 及能得此諸慧論
논하여 말하겠다. ‘정(淨)’이란 무루(無漏)의 뜻이며, ‘혜(慧)’란 택법(擇法)의 뜻으로,6) 이는 바로 무루 혜근(慧根)에 모두 포섭된다. ‘오로지 무루의 지혜를 일컬어 대법이라고 한다’는 사실은 어떠한 근거에서 알 수 있는 것인가? 불세존께서 천제석(天帝釋) 등에게 마음대로 청하여 묻게 하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계경에서 “나에게는 매우 심오한 아비달마(阿毘達磨,abhidharma, 論)와 비나야(毘那耶,vinaya, 律)가 있으니, 그대 마음대로 청하여 물어라”라고 설한 바와 같다.7) 이는 즉 성도(聖道)라든지 이러한 성도에 의해 증득되는 과보에 관해 천제석이 묻고 싶은 대로 청하여 묻는 것을 허락하는 말이다. 벌차(伐蹉,Vatsa) 종족들에 대해 마음대로 [청하여 묻게 하였던] 계경도 역시 그러하다. 그렇다면 다시 어떠한 이유에서 오로지 무루의 지혜만을 일컬어 ‘대법’이라고 하는 것인가? 이것에 의해 제법(諸法, 모든 존재)의 실상을 현관(現觀)하는 경우 다시는 미혹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찌 [제법실상에 대한] 현관이 오직 ‘혜’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하겠는가? 그러한즉 대법은 오로지 ‘혜’만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다. 진리의 이치를 올바로 깨닫는 것을 설하여 ‘현관’이라 부른다. 따라서 현관의 작용은 오로지 ‘혜’이지 그 밖의 다른 것이 아니다. 또한 현관 중의 ‘혜’가 가장 뛰어나 세 가지 공능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유독 그것만을 대법이라 일컫게 되었던 것이다.8) 그렇지만 이러한 대법(즉 혜)은 그 밖의 다른 법과 관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혜’에 수반되는 행(行) 즉 수행(隨行) 역시 대법이라 이르니, ‘혜’의 권속을 일컬어 ‘수행’이라 한다. [‘혜’의] 권속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혜’와 함께 일어나는 색[隨轉色]과 수(受)ㆍ상(想) 등의 온갖 심소법(心所法)과 생(生) 등과 심(心)을 말한다.9) 곧 이와 같은 무루의 5온(蘊)을 모두 설하여 대법이라 데, 이는 바로 승의(勝義)의 아비달마이다. 그리고 만약 세속(世俗)의 아비달마를 설할 것 같으면, 능히 이것을 획득하게 하는 온갖 혜(慧)와 온갖 논(論)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이것’이란 앞서 언급한 무루의 혜근을 말하며, ‘온갖 혜’란 (무루혜근을) 능히 획득하게 하는 세간의 세 가지 ‘혜’, 즉 세간의 뛰어난 지혜인 수혜(修慧)ㆍ사혜(思慧)ㆍ문혜(聞慧)와 이에 수반되는 수행(隨行)의 법을 말하는데,10) [무루혜근을] 획득하는데 가깝고 먼 것에 따라 세 가지 혜를 이 같은 순서로 설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세간]‘혜’와 이에 수반되는 수행의 법을 떠나서는 무루혜근을 능히 증득할 수 없다. 이는 바로 무루혜근을 획득하는 뛰어난 방편이 되기 때문에 무루혜와 마찬가지로 대법(對法)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으로, 자비의 방편도 역시 자비라고 말할 수 있는 것과 같다. 또한 ‘온갖 논’이란 능히 이러한 무루혜근을 획득하게 하는 『발지론(發智論)』 등의 온갖 논을 말한다.11) 이는 바로 무루혜의 뛰어난 자량(資糧, 자재와 식량)이 되기 때문에 역시 대법(對法)이라 부르니, 이를테면 업의 이숙(異熟)과 같은 번뇌[漏]의 자량도 역시 업이라고 것과 같다.12) 그리고 앞서 언급한 ‘온갖 혜’라는 말에는 역시 태어나면서부터 타고난 지혜[生得慧]도 포함된다. 즉 오로지 태어나면서부터 타고난 지혜가 있어야 대법론(對法論)을 능히 올바로 외워 전할 수 있기 때문에 이것 역시 대법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3.대법장(對法藏,아비달마코샤)의 의미
그렇다면 이 논(즉 『구사론』)도 바로 무루혜의 뛰어난 자량이 되는 것인데, 어찌 역시 대법이라고 이르지 않는 것인가? 어떻게 대법이라고 별도로 말할 수 있을 것인가?13) 『구사론』의 게송으로 말하겠다.
그것(대법)의 승의를 포섭하고 그것에 근거하였기 때문에 이에 대법구사(對法俱舍)라고 하는 명칭을 설정하게 된 것이다. 攝彼勝義依彼故 此立對法俱舍名
논하여 말하겠다. [본송에서] ‘장(藏,kośa, 즉 俱舍)’이란 핵심[堅實]을 말하니, 마치 수장(樹藏) 즉 ‘나무의 속 줄기’라고 하는 것과 같다. 즉 대법론 중의 온갖 핵심적인 뜻이 모두 여기에 포섭되어 들어있어 바야흐로 이 논(즉 『구사론』)은 그러한 대법의 장(藏)으로, 이는 바로 ‘대법의 핵심’이라는 뜻이다. 혹은 ‘장’이란 근거[所依]의 뜻이니, 마치 도장(刀藏) 즉 ‘칼의 집’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말하자면 그러한 대법이 이 논의 근거가 되었던 것으로, 거기서의 내용과 말을 인용하여 이 논을 지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논은 그 같은 대법을 장(藏)으로 삼았기 때문에 ‘대법장’이라 이르는 것으로, 이는 바로 ‘대법을 근거로 삼았다’는 뜻이다.14)
4.아비달마의 목적과 설자(說者)
그렇다면 그 같은 대법은 어떠한 이유에서 설하게 된 것이며, 또한 누가 가장 먼저 설한 것인가? 마땅히 대법을 설한 이에 대해서는 묻지 말아야 할 것이니, 부처님께서는 법에 의지하지 사람에 의지하지 말라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그러할지라도 이미 물었기 때문에 대법을 설한 이유와 그것을 설한 이에 대해 마땅히 밝혀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온갖 번뇌를 능히 소멸할 만한 뛰어난 방편으로 택법을 떠나서는 그 무엇도 결정코 존재하지 않으니 번뇌로 말미암아 세간은 존재의 바다를 떠도는 것 그래서 적대사(寂大師)께서는 대법을 설하셨던 것이다.15) 若離擇法定無餘 能滅諸惑勝方便 由惑世間漂有海 爲寂大師說對法
논하여 말하겠다. 택법(擇法, 법의 간택 분별)을 떠나서는 세간의 괴로움을 초래하는 온갖 번뇌[諸惑]를 능히 소멸할 만한 그 어떤 뛰어난 방편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세존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만약 아직 통달하지 못하였거나 알지 못하는 법이 하나라도 있었다면 ‘나는 괴로움을 능히 바로 멸진(滅盡)하였다’고 끝내 설할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세간의 사람들은 아직 온갖 번뇌를 멸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 가지 존재(有,욕유ㆍ색유ㆍ무색유)의 바다에서 태어나고 죽으며 윤회한다. 곧 (아비달마를 설한 것은) 세간의 사람들로 하여금 택법을 닦고 익혀 세 가지 존재를 낳는 원인인 번뇌를 영원히 적멸(寂滅)하게 하기 위함이니, 그렇기 때문에 위대한 스승께서는 일찍이 스스로 아비달마를 설하셨던 것이다. 부처님께서 만약 (아비달마를) 설하지 않으셨더라면 사리자(舍利子) 등의 여러 위대한 성문(聲聞)들 역시 제법의 실상에 대해 참답게 사택(思擇)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곧 불(佛)ㆍ대사(大師)께서는 교화될 자들의 본성의 차별에 따라 곳곳에서 산설(散說)하였고, 이를 존자(尊者) 가다연니자(迦多衍尼子) 등의 위대한 여러 성문들이, 마치 위대한 존자 가섭파(迦葉波) 등이 함께 모여 율(律)과 계경(契經)을 결집하였듯이 미묘한 원지(願智)로써 과거불께서 설하신 [대]법의 가르침을 관찰하여 그에 감응한 바대로 안치 결집하였던 것이다.16) 그런데 율장과 경장 두 가지는 말[文]에 따라 결집한 것이지만, 오로지 대법장만은 뜻[義]에 따라 결집한 것으로, 모든 이들이 결집의 의의에 대해 말하기를 경과 율에 비해 그것(즉 대법)이 수승하다고 설하고 있듯이, 대법은 부처님의 성교(聖敎)에 따라 결집되었기 때문에 이는 바로 부처님께서 인정하신 바로서 불설(佛說)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Ⅰ.제법의 분별①-유루와 무루, 유위와 무위
1.총설
그렇다면 무엇을 일컬어 사택(思擇)해 보아야 할 법 (즉 擇法)이라 한 것이며, 세존께서는 그것에 의지하여 대법을 설하셨다고 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유루(有漏)와 무루(無漏)의 법이 있으니 도제(道諦)를 제외한 그 밖의 유위에는 누(漏)라는 번뇌가 따라 생겨나므로 그래서 유루라고 이르는 것이다. 有漏無漏法 除道餘有爲 於彼漏隨增 故說名有漏
무루는 말하자면 도제와 아울러 세 가지의 무위 이를테면 허공과 두 가지 멸(滅)이니 이 중의 허공은 장애를 갖지 않는 것이다. 無漏謂道諦 及三種無爲 謂虛空二滅 此中空無碍
택멸(擇滅)은 말하자면 이계(離繫)로서 계박(繫縛)하는 것에 따라 각기 다르며 마땅히 생겨나야 할 법이 끝내 장애 되면 [택멸과는] 다른 비택멸을 획득한다. 擇滅謂離繫 隨繫事各別 畢竟碍當生 別得非擇滅
논하여 말하겠다. 일체의 법을 설함에 있어 간략하게 말하면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유루(有漏)이고, 둘째는 무루(無漏)이다. 이는 전체적으로 설한 것이다. 다음으로 마땅히 개별적으로 해석해 보면, 도성제(道聖諦)를 제외한 그 밖의 유위법(有爲法), 이것을 유루라고 이름한다.17)
2.유루법과 유루의 의미 이(유루)는 다시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5취온(取蘊)을 말하니, 색(色) 내지 식(識)이 바로 그것이다.18) 즉 “무엇을 일컬어 색취온이라고 한 것인가? 이를테면 온갖 번뇌[取]에 따라 일어나는 유루의 색을 말하며, 나아가 식취온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고 (계경에서) 설하고 있는 바와 같다. 어떠한 이유에서 취온을 일컬어 유루라고 하는 것인가? 그것을 근거로 하여 ‘누(漏, 즉 번뇌)’가 따라 생겨나기[隨增] 때문이다.19) 즉 유신견(有身見) 등의 온갖 번뇌를 ‘누’라는 명칭으로 설정한 것으로, 그것으로부터 항상 염오(染汚)한 마음이 누설(漏泄) 즉 새어나오기 때문이다.20) 다시 말해 ‘누’와 상응하고, ‘누’의 경계가 되며, ‘누’에 따라 생겨나기 때문에 [본송에서] ‘누라는 번뇌가 따라 생겨난다’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따라 생겨나는 번뇌[隨眠]’의 뜻에 대해서는 마땅히 뒤(본론「변수면품(辯隨眠品)」 제25권 이하)에서 널리 분별하게 될 것이다. 이에 따라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동일한 세계[界] 동일한 단계[地]에 속하지 않았거나 무루를 근거로 하는 번뇌의 경계(대상)와 수면이 유루라는 사실은 이미 부정된 셈으로, 피차간에는 서로 관계하면서 따라 생겨나지 않기 때문에 이와 같은 두 가지의 명칭(번뇌의 경계와 수면)을 서로 대립시켜 [유루로] 설정하지 않는 것이다.21) 유루와 무루는 다시 어떠한 특징을 갖는가? 이를테면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유루법이란 존재하는 모든 색(色)으로서 집착이라는 온갖 번뇌[取]에 수반되는 것을 말하니, 이는 바로 온갖 존재에 대한 집착을 낳는다는 뜻이다. 나아가 식(識)의 경우도 역시 이와 같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와 서로 반대되는 것이 무루법이다. 유루와 무루의 간략한 특징은 이와 같다. 혹은 유루를 타세간(墮世間)이라고도 하니, 출세간을 일컬어 ‘무루’라고 하듯이 세간에 포섭되기 때문에 타세간이라고 일렀다. 이는 말하자면 세간에 처하여 거기서 헤어나지 못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세간’이라는 말은 고제(苦諦)에 근거하여 설정되었다.22) 그래서 계경에서도 말하기를, “나는 마땅히 너희들을 위하여 세간과 세간의 집(集, 즉 인연)에 대해 널리 설하리라”고 하였던 것이다. 또한 5취온을 일컬어 괴로움의 유루라고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유루를 타세간이라 함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타세간이 모두 유루법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된 것인가? 세존께서 말씀한 바와 같다. “나는 마땅히 너희들을 위해 유루법과 무루법에 대해 설하리라. 유루법이란 말하자면 존재하는 모든 안(眼), 존재하는 모든 색(色), 존재하는 모든 안식(眼識), 존재하는 모든 안촉(眼觸), 존재하는 모든 안촉을 조건[緣]으로 하여 내적으로 생겨난 낙수(樂受), 혹은 고수(苦受), 혹은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이다. 나아가 타세간의 의(意)와 타세간의 법(法)과 타세간의 의식(意識), 타세간의 의촉(意觸) (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등을 유루법이라고 이름한다. 그리고 무루법이란 말하자면 출세간의 ‘의’와 출세간의 ‘법’과 출세간의 의식 (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등을 무루법이라고 이름한다.” 곧 이러한 성교(聖敎)에 근거하여, 아울러 올바른 이치에 의해 타세간은 모두 유루법임을 알게 된 것이다.
3.무루법과 무루의 의미
1)무루의 종류
유루와 유루의 근거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그렇다면 무엇을 일컬어 무루(無漏)라고 하는가? 이를테면 도성제(道聖諦)와 세 가지 무위(無爲)를 일컬어 무루라고 한다. 여기서 도성제란 유루가 아닌 (즉 무루의) 색 등 5온을 말하며, 세 가지 무위란 허공(虛空)과 택멸(擇滅)과 비택멸(非擇滅)을 말한다. 곧 이러한 허공 등과 도성제를 무루라고 이름한 것이다. 도성제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잠시 설한바 있지만 뒤(제29권 이하「辯賢聖品」)에서 마땅히 널리 분별하게 될 것이다.
2) 세 가지 무위
앞에서 간략히 설한 세 가지 무위 중에서 허공(虛空)은 다만 무애(無礙, 공간적 점유성을 갖지 않은 것)를 본질로 하는 것으로, 거기에는 어떠한 장애함도 없어 온갖 존재[諸法]가 가장 잘 나타나기 때문에 ‘허공’이라 일렀다.23) 이를테면 모든 대종[大種, 地ㆍ水ㆍ火ㆍ風이라는 근원적 물질]과 대종으로 이루어진 색취(色聚) 등 일체의 물질적 존재를 능히 두루 가리거나 장애하지 않기 때문이다. 혹은 [다른 어떤 존재에 의해] 장애되는 것도 아니고, 또한 역시 능히 장애하는 것도 아니니,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장애함도 없다’고 설한 것이다. 허공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택멸(擇滅)은 이계(離繫)를 본질로 한다. 여기서 ‘택’이란 참다운 노력에 의해 성취되는 ‘혜’를 말하니, 4성제의 각기 다른 행상(行相)을 참답게 사택(思擇)하기 때문에 ‘택’이라고 일렀다.24) 즉 이러한 간택력(簡擇力, 이해 분별력)에 의해 모든 유루법의 영원한 이계가 획득되는 것으로, 이는 결정코 온갖 [번뇌의] 계박이 생겨나는 것을 장애하기 때문에 ‘택멸’이라고 일렀다.25) 혹은 이는 바로 [번뇌의] 소멸로서 이계는 아닐지라도 그것을 간별(簡別)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계’라는 말로 설하였다. 그런데 어떤 이는 말하기를, “단멸(斷滅)되는 모든 법은 다 같이 동일한 택멸이다”라고 하였다.26) 그러나 아비달마의 위대한 논사들은 모두 “[택멸은] 계박하는 것(즉 번뇌)에 따라 각기 다르다”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택멸이 만약 동일하다면, [그것을 획득하는 한 가지 대치도(對治道) 이외] 그 밖의 다른 대치도를 닦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 되고 마는 허물이 야기된다. 만약 단멸되는 모든 법이 동일한 택멸이라면, 고법지인(苦法智忍)에 의해 끊어지는 번뇌의 멸을 증득(證得)할 때 그 밖의 나머지 번뇌의 멸도 증득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27) 그렇지 않다고 해야 할 것인가? 만약 증득한다고 하면, 그 밖의 다른 대치도를 닦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 되고 만다. 만약 증득하지 않는다고 하면, 이는 즉 단일한 택멸을 놓고서 일부만을 증득하고 나머지는 증득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다. 왜냐하면 [단일한 것에 다수의] 부분이 있다는 것은 모순이기 때문이다.28) 이에 따라 이계(즉 택멸)은 계박하는 것(즉 번뇌)의 수량에 따른다는 사실을 반드시 인정해야 하니, 그래야 올바른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택멸에] 동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하자면 그 자체 동류인(同類因)이 되는 일이 없으며, 또한 역시 다른 것의 원인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29) 미래에 생겨날 것을 영원히 장애하면 비택멸(非擇滅)을 획득한다. 즉 ‘택’이란 앞서 설하였듯이 참다운 노력에 의해 성취되는 ‘혜’인데, 이러한 ‘혜’에 의하지 않고 미래법의 생기를 영원히 막는 어떤 법을 비택멸이라고 한다. 예컨대 안근(眼根)과 의근(意根)이 어떤 하나의 색(色)에 대해 전념할 때, 그 밖의 다른 색과 모든 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 등은 찰나찰나 걸쳐 [현현하지 않고] 그대로 소멸해 버려 그것에 대한 일부의 의처(意處)와 법처(法處)는 비택멸을 획득하게 된다. 즉 5식신(識身)과 일부의 의식신(意識身) 등은 이미 소멸해 버린 경계대상에 대해 끝내 생겨날 수 없으니, 그것들은 동시 존재하는 대상[俱境]을 조건으로 삼아서만 생겨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것들은 동시에 존재하는 소의(所依, 감관)와 소연(所, 대상)과 관계[繫屬]할 때 비로소 그 작용을 낳기 때문이다.30) 그런데 만약 어떤 법이 있어 능히 그 같은 법이 작용을 낳는 것을 장애한다면, 이 법은 혜와는 관계없이 그 같은 법을 장애하여 미래세에 머물게 하고, 영원히 생겨나지 않게 하기 때문에 비택멸이라 이르는 것이다. 그러나 (생기의) 조건이 결여되었을지라도 영원히 생겨나지 않는 것은 아니니, 그 후 동류의 조건을 만나게 되면 그것은 다시 생겨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만약 일찍이 (생기의) 조건이 결여되었다면 그 법은 생겨나지 않을 수 있지만, 그 후 동류의 조건을 만나게 되면 무엇이 장애하여 그것을 생겨나지 않게 할 것인가?
4.유위법과 그 이명(異名)
앞에서 ‘도성제를 제외한 그 밖의 유위법, 이것을 유루라고 한다’고 설하였는데, 무엇을 일컬어 유위라고 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또한 온갖 유위의 법은 말하자면 색 등의 5온(蘊)으로 역시 또한 세로(世路)ㆍ언의(言依) 유리(有離)ㆍ유사(有事) 등이라고도 한다. 又諸有爲法 謂色等五蘊 亦世路言依 有離有事等
논하여 말하겠다. [유위의 법은]늙고 병들고 죽는 등의 온갖 재횡(災橫)을 감추어 쌓아두었거나[隱積] 손상시켜 제압하는 것[損伏]이기 때문에 ‘온’이라고 한 것이며, 계(戒) 따위와는 다르기 때문에 ‘색 등’이라고 말한 것이다.31) 즉 계 등의 5온은 일체의 유위법을 능히 다 포섭하지 못하지만, 색 등의 5온은 유위법을 모두 포섭한다. 그래서 유위법을 색 등의 5온으로만 설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유위’라고 말한 것은 여러 조건[緣]이 집합[聚集]하여 그것들 공동에 의해 행해진 것이기 때문이다.32) 그렇다면 미래는 아직 생겨나지 않았는데, 어찌 유위라고 하겠는가? 마치 [언젠가는] 태워질 땔감처럼 이것도 바로 그러한 종류이기 때문이다.33) 즉 온갖 불생법(즉 미래법)도 그러한 종류(즉 현재법)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비록 영원히 생겨나지 않을지라도 ‘유위’라고 이르는 것이다. [이러한 유위법을] 세존께서는 이러저러한 경 가운데에서 그것이 뜻하는 바에 따라 세로(世路) 등이라고도 일렀다. 그는 다시 어떻게 말하였던 것인가? 이를테면 온갖 유위법을 역시 ‘세로(adhvan)’라고도 일렀으니, 색 등의 5온은 생성 소멸하는 법이기 때문이며, 미래ㆍ현재ㆍ과거 (즉 世)라는 길[路] 가운데 있으면서 유전하기 때문이며, 혹은 무상(無常)에 의해 집어 삼켜지는 것이기 때문에 ‘세로’라고 일렀다. 나아가 모든 불생법은 여러 조건[緣]을 결여한 것이기 때문에 비록 생겨나지 않은 것일지라도 바로 그러한 [현재법의] 종류이기 때문에 ‘세로’라고 불러도 아무런 과실이 없는 것이다.34) (세존께서는) 온갖 유위법을 또한 역시 ‘언의(言依, kathāvastu)’라고도 일렀다. 여기서 ‘언’이란 말소리[言音], 혹은 능히 설하는 것[能說]을 말하며, 이러한 말이 간접적[遠]으로나 직접적[近]으로 의탁하는 바를 ‘의’라고 하니, (계경에서) 의미[義]와 명사적 단어[名]를 모두 (말의) 근거[依]라고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명사적 단어는 의미에 근거하고, 말은 다시 명사적 단어에 근거하니,35) 그렇기 때문에 언의는 명사적 단어와 의미를 모두 포섭하며, 이와 마찬가지로 명사적 단어와 의미는 5온(즉 일체의 유위제법)을 모두 포섭한다. 그래서 계경에서도 “언의에는 세 가지만이 있을 뿐 네 가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다섯 가지가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36) 이에 따라 『품류족론(品類足論)』의 문구를 잘 해석해야 할 것이니, 거기서는 ‘언의는 5온에 포섭된다’고 설하고 있다.37) 즉 ‘의(依)’란 바로 원인 근거의 뜻으로, 무위는 결과를 갖지 않기 때문에 [다시 말해 원인이 되지 않기 때문에] 언의가 아니다. 또한 만약 어떤 취집(聚集) 중에 세 가지, 이를테면 말[語]과 의미[義]와 근거[依]만 획득될 수 있으면, 그것을 ‘언의’라고 설할 수 있다. 그렇지만 무위의 취집 중에는 오로지 ‘의미’만이 존재할 뿐 ‘말’의 ‘근거가 되는 일’은 없기 때문에 ‘언의’라고 이르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무위는 근거[依]도 되고 의미도 갖지만 다만 말이 부재하기 때문에 (다시 말해 말로 나타낼 수 없기 때문에) ‘언의’라고 이르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모든 유위는 말과 더불어 이와 함께 일어나는 의미를 갖지만, 무위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언의가 아니다]. [세존께서는] 온갖 유위법을 또한 역시 ‘유리(有離, saniḥsāra)’라고도 일렀다. 여기서 ‘리’란 영원히 떠나는 것으로, 바로 열반을 말한다. 즉 열반을 획득하고 나면 다시는 생사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즉 (유위법은) 이러한 ‘떠남’을 갖기 때문에 ‘유리’라고 일렀으니, 마치 재산을 가진 이를 ‘유산자’라고 하는 것과 같다. 그렇지만 이는 비록 유위일지라도 일체의 유위가 그러한 것은 아니니, 무루도에는 택멸(즉 離)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한 열반할 때에도 역시 성도(聖道)를 버리기 때문에 ‘유리’라고도 이르니, 마치 뗏목이 그러하듯이 성도 역시 마땅히 끊어야 할 것이라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계경에서 “법조차 마땅히 끊어야 할 것인데, 하물며 어찌 비법(非法)을 끊지 않을 것인가?”라고 말하고 있는 바와 같다. [세존께서는] 온갖 유위법을 또한 역시 ‘유사(有事, savastuka)’라고도 일렀다. 여기서 ‘사’란 이를테면 근거가 되는 것[所依], 혹은 머물게 되는 것[所住]을 말하니, 이는 바로 원인의 뜻이다. 즉 결과는 원인에 근거하고 원인으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으로, 마치 자식이 어머니를 근거로 하는 것과 같다. 혹은 결과는 원인에 머무르며 능히 원인을 가리기 때문으로, 마치 사람이 침상에 머무는 것과 같다. 이는 곧 원인이 결과에 의해 은폐된다는 뜻이니, 원인과 결과는 시간적인 전후의 관계이기 때문이며, 아울러 세밀하고 거친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곧 유위는 바로 이러한 ‘사(즉 원인)’를 갖기 때문에 ‘유사’라고 이름한 것으로, 비유하자면 앞에서 설한 바와 같다. 이상과 같은 따위의 종류가 바로 유위법을 차별 짓는 여러 명칭들이다.
5.유루의 이명(異名)
여기서 설하고 있는 유위법 중에서 (유루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유루를 취온(取蘊)이라고도 이르며 역시 또한 유쟁(有諍)이라고도 설하며 아울러 고(苦)ㆍ집(集)ㆍ세간(世間)ㆍ 견처(見處)ㆍ3유(有) 등이라고도 한다. 有漏名取蘊 亦說爲有諍 及苦集世間 見處三有等
논하여 말하겠다. 앞에서 ‘도성제를 제외한 그 밖의 유위법을 유루라고 한다’고 하여 이미 그 본질에 대해 분별하였지만, 지금 여기서는 그것의 개념[名想]이 동일하지 않음과 차별적인 뜻을 나타내기 위해 다시 거듭하여 설하려는 것이다. 앞에서 ‘일체의 유위를 온(蘊)이라 이름한다’고 설하였는데,38) 지금 여기서는 ‘유루를 일컬어 취온(取蘊)이라 한다’고 설하였다. 이러한 뜻에 준하여 볼 때, 무루는 다만 ‘온’이라고 이를 따름이다. 즉 오로지 온갖 번뇌[漏]에 대해서만 ‘취(取, upādāna)’라는 개념을 설정한 것으로, 그것은 능히 [3유(有), 욕(欲)ㆍ색(色)ㆍ무색유(無色有)]의 생에 집착하여 취[執取]하기 때문에, 혹은 능히 후유(後有)를 초래하는 업에 집착하여 지니기[執持] 때문에 ‘취’라고 일렀다. 그리고 색 등의 5온은 이러한 ‘취’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에, 혹은 능히 ‘취’를 낳기 때문에 ‘취온’이라고 일렀으니, 이는 마치 [풀이나 겨로부터 생겨난 불을] 초강화(草糠火)라고 하는 것과 같고, [꽃과 과실을 낳는 나무를] 화과수(花果樹)라고 하는 것과 같다. 유루법을 역시 유쟁(有諍, saraṇā)이라고도 부른다. 말하자면 번뇌에 대해 ‘쟁(諍)’이라고 하는 개념을 설정한 것으로, 번뇌는 선한 품성을 동요시키기 때문이며, 자신과 타인을 해치고 손상시키기 때문이다. 또한 온은 ‘쟁’과 함께 하기 때문에, 혹은 ‘쟁’은 온과 더불어 생겨나기 때문에 (유루법을) ‘유쟁’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이러한 의미는 곧 온과 ‘쟁’ 중의 어느 하나라도 결여될 경우, 또 다른 생을 획득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본송에서) ‘아울러’라고 하는 말은 그 밖의 다른 유루의 개념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를테면 혹 어떤 경우 (유루를) ‘고(苦, duḥkha)’라고 이르기도 한다. 왜냐하면 5취온은 바로 온갖 핍박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며, 그 본성이 거칠고 무거워 안온(安穩)하지 않기 때문이다. 혹은 어떤 경우 [유루를] ‘집(集, samudaya)’이라고 이르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종류(즉 5취온)는 능히 괴로움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며, 능히 집합하여 이루어지기[集成] 때문으로, 이를테면 취온으로부터 취온이 집합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혹은 [유루를] ‘세간(loka)’이라고 이르기도 한다. 왜냐하면 허물어질 수 있기 때문으로, “존재[性]는 허물어질 수 있기 때문에 ‘세간’이라 이름한다”고 세존께서 설한 바와 같다. 그런데 온갖 성도는 그 본질상 허물어지는 것이 아니지만 역시 ‘세간’이라 이르니, 이를 따르게 되면 무대치(無對治)가 허물어지기 때문이다.39) 혹은 [유루를] ‘견처(見處, dṛṣṭisthāna)’라고 이르기도 한다. 왜냐하면 살가야(薩迦耶) 등의 5견(見)이 여기에 머물면서 수면을 수증(隨增)하기 때문이다.40) 즉 그러한 온갖 ‘견’은 유루법에 대해 일체의 모든 종류, 모든 때, 모든 특성에 관계없이 무차별적으로 견고히 집착하여 동요 없이 수면을 수증하기 때문에 그 자체의 작용이 더욱 왕성하게 증가한다. 그래서 [5견 등을] 다시 별도로 설하게 된 것이지만, 탐(貪) 등과 치(癡)와 의(疑)는 이와 같지 않다. 즉 ‘탐’ 등은 일체의 모든 종류의 유루법에 대해 집착할지라도 모든 때에 집착하지는 않으며, ‘치’는 모든 때에 집착할지라도 무차별적인 것은 아니다. 또한 ‘의’는 무차별적으로 집착할지라도 견고하게 집착하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유루를 그러한 번뇌의 토대라고는 설하지 않은 것이다. 혹은 [유루를] ‘3유(有)’라고 이름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유루는] 존재[有]의 원인, 존재의 근거로서, 세 가지의 존재(欲ㆍ色ㆍ無色有)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본송에서] ‘등’이라고 말한 것은 ‘유염(有染)이라고 이름하기도 한다’는 등의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이상과 같은 등등의 종류가 바로 뜻에 따른 유루법의 또 다른 명칭들이다.
1)변지(遍知,parijñā, 구역은 永斷)란 4제(諦)의 진리성에 대해 두루 아는 것, 혹은 이에 따라 번뇌가 영원히 끊어지기 때문에 번뇌의 단멸을 ‘변지’라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다만 불세존의 일체지(一切智)의 덕성을 논변하기 위한 논주(論主)인 중현 자신의 겸양의 말로 생각된다.
2)여기서 두 가지 도라고 함은 견도(見道)와 수도(修道)로서, 전자에 의해 후천적인 이지적 번뇌를, 후자에 의해 선천적인 정의적 번뇌를 끊게 된다.
3)부처님의 명성이 높아지자 사위성(舍衛城)의 외도들은 이를 질투하여 외도 미녀 손타리(Sundarī)를 불교에 귀의시키고 나서, 그녀를 죽여 기원정사 근처 도랑에 묻어서 불교교단의 소행으로 위장하였다. 그러나 이 일은 7일 후 저절로 밝혀졌고, 외도들은 처형당하였다.
4)전차(Ciñcā) 역시 사위성의 외도 미녀로서, 발우를 배에 감추고서 부처님과 관계하여 임신한 것처럼 흉내 내어 부처님의 덕망을 훼손시키고자 하였으나 제석천에 의해 그 음모가 발각되어 무간지옥에 떨어졌다고 한다.
5)제바달다(Devadatta)는 부처님의 사촌(아난다의 형)으로, 당시 마가다국의 왕자 아자세와 공모하여 부처님을 시해하고서 새로운 불교교단을 세우고자 하였다.
6)올달낙가(Udaraka Rāmaputra, Uddaka Rāmapputta). 부처님께서 출가하여 처음으로 찾아간 스승으로, 성도 후 그에게 설법하고자 하셨으나 그는 이미 일 주일 전에 죽었다고 전한다. 즉 그에게 설법하고자 한 것은 그가 죽은 줄을 몰랐기 때문으로, 그렇기 때문에 불세존께서는 일체지(一切智)가 아니라는 뜻이다.
7)파타리성(Pāṭaliputra, Pāṭaliputta)은 마가다국의 수도로, 아자세왕이 이웃나라인 밧지의 공격에 대비하여 축성하였던 일을 말한다.
8)불타 입멸 후 100년 무렵에 일어난 상좌부와 대중부의 근본분열과 그에 따른 지말분열을 말한다.
9)즉 “생사의 초제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宗). 왜냐하면 존재하지 않기 때문으로(因), 마치 토끼 뿔(절대적 비존재)이 그러한 것과 같다(喩).”고 할 경우, ‘알 수 없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 사이의 필연적 관계는 일체의 모든 절대적 비존재를 통해 확인되기 때문에, ‘(생사의 초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알 수 없다’고 해야 한다는 뜻. 그러나 앞서 논설하였듯이 ‘알 수 없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경우, 진위부정의 오류[不定失]를 범하게 된다.
10)초제(初際) 즉 일체의 세계가 생기하기 이전에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태초가 있었다면, 최초의 생기는 어떠한 원인 없이 무(無)에서 생겨나야 한다는 뜻. 본문은 ‘無無因起’로 되어 있지만, 문맥에 따라 ‘應無因起’로 고쳐 번역하였다.
11)여기서 두 가지란 견소단법(見所斷法)으로서의 택멸과 수소단법(修所斷法)으로서의 택멸.(『대비바사론』 제31권. 한글대장경119, p.144참조)
12)갈랄람(kalalam, 凝滑로 의역)이란 탁태(托胎) 후 첫 번째 7일간의 상태. 본론 제13권을 참조하라.
13)이는 첫 번째의 이설 즉 ‘오로지 금강유정(金剛喩定)만이 번뇌를 능히 단박에 끊을 수 있다’와 통하는 것으로, 이는 『대비바사론』 (제51권. 한글대장경123, p.439)에 의하면 경량부의 선구인 비유자(譬喩者)의 주장이다.
14)여기서 중 삼마지란 공공(空空)ㆍ무상무상(無相無相)ㆍ무원무원(無願無願) 삼마지를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39권 참조.
15)업에는 과보를 낳는 시기와 내용이 결정된 정업(定業)과 그렇지 않은 부정업(不定業)이 있으며, 전자에는 다시 현생에 나타나는 순현법수업(順現法受業), 다음 생에 나타나는 순차생수업(順次生受業), 다음 생 이후에 나타나는 순후차수업(順後次受業)이 있다.(본론 제21권 참조)
1)본송은 본론의 서분(序分)에 해당하는 것으로, 제1구는 세존의 자리덕(自利德)의 원만함을 나타내고, 제2구는 이타덕(利他德)의 원만함을, 제3구는 이와 같은 세존께 공경 예배함을, 제4구는 지금부터 대법장(對法藏) 즉 아비달마의 요지를 설하려는 의지를 나타낸 것으로, 고래로 앞의 3구를 귀경서(歸敬序), 마지막 1구를 발기서(發起序)라 한다.
2)지덕이란 일체법의 자상과 공상을 관조하는 지혜의 공덕을 말하며, 단덕이란 그에 따라 일체의 번뇌를 끊은 공덕을 말한다. 이는 다음의 중생구제의 은덕(恩德)과 더불어 여래의 3덕(德)으로 일컬어진다.
3)‘일체종의 어둠’은 불염오무지(不染汚無知)를, ‘온갖 경계에 대한 어둠’은 염오무지(染汚無知)를 말한다. 여기서 염오무지(kliṣṭa-ajñāna)란 법의 실상을 능히 알지 못하여 망견(妄見)을 일으켜 생사 윤회하게 하는 번뇌성의 무지[즉 (煩惱障)]를 말하는 것이라면, 불염오무지는 비번뇌성의 무지[즉 (解脫障)]를 말한다. 곧 성문 독각은, 염오무지는 끊었지만 불염오무지는 끊지 못하였기 때문에 단덕만을 갖추었을 뿐 일체종지(一切種智)의 지덕은 갖추지 못하였다.(후술) 따라서 지덕과 단덕, 나아가 은덕을 갖춘 이는 오로지 불세존뿐이다.
4)의요(āśaya,보통은 阿世耶로 한역)란 뭔가를 하고자 하는 목적의식. 수면(anuśaya)은 번뇌의 이명(異名). 즉 의요수면의 지혜란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유위의 지혜를 말한다.
5)『대법장』은 『아비달마구사(Abhidharmakośa)』의 의역어(意譯語)로서, 아비달마의 정요(精要) 핵심이라는 뜻.(후술) 곧 본론은 사실상 세친의 『구사론』을 비판한 『순정리론(順正理論)』에 근거하여 유부의 종의(宗義)를 드러내고자 하는 논이기 때문에 논의의 체제는 『구사론』에 따르고 있다.
6)택법(dharmavicaya)이란 법(존재)을 간택(簡擇,분별 판단)하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이해 판단력이 필요한데, 이것이 혜(jñāna)이다. 이러한 판단력에는 다시 번뇌[漏]를 수반하는 유루혜와 더 이상 어떠한 번뇌도 수반하지 않는 무루혜가 있는데, 무루혜는 번뇌를 수반하지 않기 때문에 정혜(淨慧) 즉 청정한 지혜이다. 이는 다름 아닌 불지(佛智)로서, 이것이 바로 대법 즉 아비달마의 본질이다.
7)『장아함경』 제10권 『석제환인문경(釋帝桓因問經)』.
8)현관(abhīsamaya)이란 진리 대상(즉 4諦)에 대한 즉각적인 관찰 판단을 말하는 것으로, 이러한 현관의 본질은 ‘혜’이지만, 이는 지각[受]이나 표상[想] 등 여타의 의식작용[心所] 내지 생성[生] 등의 마음과 관계하지 않는 힘[不相應行法] 따위(이를 隨行이라 함)와 동시에 생겨난다. 즉 오로지 무루혜만으로써 4성제를 관찰하는 것을 견현관(見現觀, darśanābhīsamaya)이라 하고, 무루혜와 그 상응법인 심ㆍ심소가 동일한 성제를 소연의 경계로 삼아 관찰하는 것을 연현관(緣現觀, ālamvanābhīsamaya)이라 하며, 무루혜를 중심으로 하여 심ㆍ심소와 도생율의(道生律儀)와 생(生)등의 4상(相) 등이 동일한 성제를 대상으로 하여 그 작용[事業]을 행하는 것을 사현관(事現觀, kṛyābhīsamaya)이라 한다. 따라서 무루혜는 세 현관 모두에 대해 공능을 갖기 때문에 대법 즉 아비달마의 본질이라 한 것이다. 참고로 혜에 수반되는 상응ㆍ불상응행법은 부수적 본질이 된다.(후술)
9)‘혜와 함께 일어나는 색’은 무표색으로, 여기서는 무루의 무표색인 도생율의(道生律儀, 혹은 無漏律儀, 혹은 道共戒,무루성도를 획득할 때 생겨나는 힘)를 말함. 행(samskṛta)이란 유위세간을 조작하게 하는 힘으로, 여기에는 마음[心]과 관계하는 상응행법(즉 심소법)과 관계하지 않는 불상응행법(‘생’등 14가지)이 있다.
10)아비달마는 무루혜를 본질로 하지만 이는 사실상 불타 진지(眞智)이기 때문에 이생 범부로서는 이를 획득하기 위해 세간의 지혜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다. 이러한 세간의 지혜에는 스승이나 친구의 말을 듣고서 획득하는 지혜[문혜(聞慧), 즉 문소성혜(聞所成慧)], 그것을 주체적으로 사유함으로써 획득하는 지혜[사혜(思慧), 즉 사소성혜(思所成慧)], 다시 선정을 통해 반복적으로 익힘으로써 체득하는 지혜[수혜(修慧), 즉 수소성혜(修所成慧)]가 있으며, 이러한 세 가지 지혜를 낳을 수 있게 하는 타고난 지혜[生得慧] 등 네 가지가 있다. 그러나 이는 모두 선천적 혹은 후천적 실천에 의한 것이므로 여기에는 그 근거가 되는 또 다른 방편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세속(世俗)의 아비달마’로 일컬어지는 협의의 아비달마, 즉 우리가 일반적으로 접하는 아비달마 온갖 논서[諸論]이다.(후술)
11)『발지론(發智論)』(20권, 구역은 『팔건도론(八犍度論)』)은 불멸(佛滅) 300년 무렵 서북인도에서 출세한 가다연니자(迦多衍尼子, Kātyāyanīputra)가 지은 논으로, 그는 이 논을 저술하여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비조가 되었다.
12)‘업의 이숙’이란 선업 또는 악업에 의해 낳아진 결과를 말하는 것으로, 이는 또 다른 번뇌의 근거(자량)가 되지만, 역시 ‘업’으로 불리듯이, 혹은 “음식이나 의복은 그 자체 즐거움[樂受]은 아니지만 즐거움의 조건이 되기 때문에 ‘즐거운 것’이라고 하듯이, 혹은 여인은 그 자체 더러움(즉 탐ㆍ진 등의 번뇌)은 아니지만 더러움의 조건이 되기 때문에 ‘더러운 것’이라고 하듯이 아비달마 제론(諸論) 역시 무루혜(즉 승의의 아비달마)의 조건 혹은 방편이 되는 혜(慧)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역시 ‘아비달마’라고 한다.”(『대비바사론』 제1권, 한글대장경118, p.29-31)
13)세간의 세 가지 지혜와 생득혜(生得慧), 그리고 온갖 논(論)이 승의 아비달마의 자량이 되기 때문에 역시 아비달마[對法]라고 이를 수 있다면, 세친(世親)의 『구사론』 역시 아비달마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반문에 대해 중현은 세친의 게송을 빌려 『구사론』은 아비달마가 아니라 아비달마를 간추린 것(정요), 아비달마에 근거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14)‘아비달마[對法] 코샤(藏)’라는 말을, 두 개의 명사로 구성된 복합어의 경우 뒤의 명사는 반드시 앞의 명사를 한정한다는 격한정복합어[依主釋]로 해석할 때, 그것은 ‘대법을 포섭한 핵심(藏)’의 뜻이므로 『구사론』은 아비달마의 정요[堅實]를 간추린 것일 뿐이다. 혹은 앞의 명사는 형용사적인 수식어라는 소유복합어[有財釋]로 해석할 때, 그것은 ‘대법을 근거로 한 것’이라는 뜻이므로 『구사론』은 아비달마에 근거한 이차적인 논일 뿐이다. 즉 『구사론』은 『발지론』 등의 근본 아비달마의 요점을 정리한 것, 혹은 그것을 근거로 하여 저술된 것이기 때문에 진정한 아비달마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 중현의 생각이었다.
15)『구사론』에서 제4구는 “그로 인해 부처님께서는 대법을 설하셨다고 전(傳)한다.(因此傳佛說對法)로 되어 있다. 여기서 ‘전한다’는 말은 경주(經主) 세친의 불신을 나타내는 말이기 때문에, 중현은 제4구를 이와 같이 개작하고 있는 것이다. 본론은 유부의 종의를 드러내는 것이 논의 목적이기 때문에 『구사론』상에서의 세친이나 경부(經部), 혹은 비유자(譬喩者)나 상좌(上座) 스리라타(Śrīlāta)의 주장에 대해 자세하게 비판하지 않고 대개 삭제하고 있을 뿐이지만, 『순정리론』에서는 1언 1구에 대해 비판 광설(廣說)하고 있다.
16)가섭파(迦葉波, 혹은 迦葉,Kāśyapa,Kassapa). 부처님의 10대제자 중의 한 명으로, 두타(頭陀)제일. 불멸 직후 교단의 상수(上首)로서 왕사성(王舍城)에서 제1결집을 주도하였는데, 아난다로 하여금 경을, 우파리로 하여금 율을 송출(誦出)하게 하였다고 전한다. 가다연니자에 대해서는 주 25)를 참조할 것.
17)온갖 존재[諸法]가 인연 화합하여 드러난 무상의 세계를 유위(有爲)라고 하며, 이 때 온갖 존재를 유위법이라고 한다. 유위(samskṛta)란 다수의 요소가 함께 작용된 것, 조작된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에 반해 조작되지 않은 세계, 혹은 존재 본성에 대한 통찰을 통해 무상하고 괴로운 유위세간의 원동력이 되는 무지와 탐욕 등의 번뇌가 소멸된 세계를 무위라 하고, 그러한 존재를 무위법이라고 한다.(후술) 유위법은 다시 번뇌가 수반되는 유루법(有漏法)과 수반되지 않는 무루법(無漏法)으로 나누어진다. 이상의 유위ㆍ무위, 유루ㆍ무루를 아비달마교학의 기본구도인 4성제에 대입시켜 보면, 미혹한 현실과 그 원인인 고(苦)와 집(集)은 유위이고 유루이며, 깨달음의 이상인 멸(滅)은 무위이고 무루이며,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도정인 도(道)는 유위이고 무루이다. 즉 깨달음에 이르는 도정은 온갖 존재가 인연 화합하여 드러난 현실에서의 경험이기에 유위이지만, 더 이상 번뇌를 수반하지 않기 때문에 무루이다.
18)5취온이란 색(色)ㆍ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 등 번뇌에 따라 생겨난 유루의 5온으로, ‘취(upādāna)’는 번뇌 취착(取著)의 뜻. 또한 반대로 이 같은 5온을 근거로 하여 번뇌가 따라 생겨나기도 한다. 그래서 유루이다.(후설) 5온에 대해서는 본론 제2권에서 상론한다.
19)‘누(漏,āsrava)’란 누설의 뜻으로, 여섯 감관(6根)으로부터 누설된 것 즉 번뇌를 말함. 즉 번뇌(누)가 따라 생겨나고, 또한 번뇌에 따라 생겨나는 법을 일컬어 ‘유루’라고 한다. 그러나 청정한 법(滅諦와 道諦)을 대상[緣]으로 하여 번뇌가 생겨나는 일은 있어도 그것에 따라 생겨나지는 않기 때문에 청정한 법은 유루가 아니라 무루이다. 여기서 ‘따라 생겨난다’는 말을 전통적으로 ‘수증[隨增,隨順增益의 준말]’이라고 하는데, 유부 번뇌론 상에 중요한 술어이다.
20)설일체유부에 의하는 한 번뇌(kleśa)란 그 자체 개별적으로 실재하면서 마음을 오염시키는 의식작용을 총칭한 말로서, 결(結)ㆍ박(縛)ㆍ수면(隨眠)ㆍ전(纏)ㆍ누(漏)ㆍ폭류(瀑流)ㆍ액(軛)ㆍ취(取)ㆍ신계(身繫)ㆍ개(蓋)ㆍ수번뇌(隨煩惱)등의 각각의 명칭으로 분류되고 있다. 유부에서는 이 가운데 ‘수면’을 중심으로 하여 그들의 번뇌론을 전개시키는데, ‘5취온은 나[我]도 나의 것[我所]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그것이 실재한다는 그릇된 지식작용’인 유신견[satkāyadṛṣṭi,또는 薩迦耶見]은 10가지 수면 중의 첫 번째이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25권에서 상론함.
21)이를테면 욕계에서는 색계의 5취온이나 혹은 무루법을 대상으로 하여 번뇌를 일으키는 일은 있어도, 그 같은 법에 따라 번뇌가 생겨나는 일이 없다. 즉 세계를 달리하는 법이나 무루법에 따라서는 번뇌가 수증(隨增)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것을 유루라고도 하지 않는다.
22)고제(苦諦)란 비상(非常)ㆍ고(苦)ㆍ공(空)ㆍ비아(非我)의 4상(相)을 말하는 것으로, 이러한 4상이야말로 현실세간의 참다운 실상이기 때문에 ‘고제’이다. 참고로 ‘세간’도, ‘고’도 모두 유루의 이명(異名)이다.(후술)
23)허공(ākāśa)이란 말하자면 절대공간으로 일체의 물질적 변화를 제거할 때 남는 존재이다. 즉 유부에 의하면 시간(kāla 혹은 adhvan,世路)은 유위제법의 변화상태를 이름한 것이기 때문에 단순한 개념에 지나지 않지만, 공간은 그 자신 공간적 점유성 혹은 장애성을 지니지 않아[無礙] 공간적 점유성을 지닌 물질로 하여금 나타나게 하는 근거로서, 그 자체 불생불멸이기 때문에 무위라고 한 것이다.
24)4성제의 각기 다른 행상이란, 고제의 비상(非常)ㆍ고(苦)ㆍ공(空)ㆍ비아(非我), 집제의 인(因)ㆍ집(集)ㆍ생(生)ㆍ연(緣), 멸제의 멸(滅)ㆍ정(靜)ㆍ묘(妙)ㆍ리(離), 도제의 도(道)ㆍ여(如)ㆍ행(行)ㆍ출(出)을 말하는 것으로, 이에 대한 즉각적 관찰을 통해 이계의 택멸을 획득한다.(본론 제30권 참조)
25)『구사론』 제1권(앞의 책, p.8)에 의하면, 소에 멍에를 멘 수레[牛所駕車]를 줄여 ‘우차(牛車)’라고 하듯이, 간택력(지혜의 힘 즉 판단력)에 의해 획득된 번뇌소멸[擇力所得滅](즉 열반)을 줄여 ‘택멸’이라 이름하였다.
26)상식적으로 수많은 세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종류의 번뇌는 각기 개별적으로 끊어지기 때문에 택멸(즉 열반)에도 그만큼의 수가 있어야 하지만(그래서 일체의 번뇌가 모두 끊어진 것을 완전한 열반 즉 般涅槃이라 함), 택멸에는 동류(同類)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이는 ‘단멸되는 모든 법은 단일한 하나의 택멸이다’라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27)고법지인이란 견도(見道) 16찰나 중 첫 번째 찰나로, 4제 중 고제(苦諦)의 진리성(非常ㆍ苦ㆍ空ㆍ非我)을 인가하는 단계의 수행도. 이것에 의해 고제의 진리성을 확증하는 고법지(苦法智)가 획득되며, 이에 따라 욕계 고제에 미혹하여 생겨난 번뇌가 끊어진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62권에서 상론한다.
28)만약 무위택멸의 열반이 단일하다면, 그것은 무루혜의 첫 번째 단계인 고법지인(苦法智忍)에 의해 증득될 것이므로 그 후 또 다른 실천도를 닦을 필요가 없게 된다. 나아가 고법지인에 의해 그 일부만을 증득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바로 단일한 무위택멸에 다수의 부분이 있다는 말이기 때문에 이치에 맞지 않다는 뜻.
29)이는, 번뇌의 수만큼 택멸의 수가 존재한다고 하면 번뇌가 그러하듯이 택멸무위 역시 전후 동류상사(同類相似)하는 동류인의 관계가 아닌가? 하는 의문에 대한 답이다. 그러나 유부종의에 따르면 무위택멸은 원인에 의해 생겨나는 것도 아니며, 다른 것의 원인도 되지 않는다.(본론 제9권 ‘5과’참조)
30)이를테면 꽃을 보고 있을 때 작용하는 것은 눈과 의근(意根)이며, 그 순간 그 밖의 색이나 소리 등의 대상을 조건으로 하는 전5식(識)과 꽃에 대한 의식을 제외한 그 밖의 의식과 이에 따른 의식작용[心所, 이는 법처(法處)에 포섭됨]은 현현(顯現)하지 않고 그대로 소멸한다. 즉 택멸무위가 무루혜의 간택력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라면, 비택멸무위는 간택력에 의하지 않고 저절로 그렇게 되는 무위를 말한다. 유부의 이론에 따르면, 일체의 존재는 과거ㆍ현재ㆍ미래 3세에 걸쳐 실재하며, 미래법은 일정한 때 일정한 조건 하에서 생기 현현(현재)하지만, 그 같은 조건을 결여한 그것은 잠세태(潛勢態)로서 영원히 미래에 머물게 된다. 이를 연결불생법(緣缺不生法), 혹은 필경불생법(畢竟不生法)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생겨나지 않았기 때문에 소멸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불생불멸인 이것도 일종의 무위법으로 일컬어지는 것이다.
32)유위(samskṛta)란 함께 조작된 것[共所作,본론에서는 ‘共所爲’, 『순정리론』에서는 ‘共所生’]이란 뜻으로, 다수의 존재[諸法]가 원인과 조건[因緣]으로써 화합하여 생겨난 것을 말하며, 이 때의 각각의 존재를 유위법이라고 한다. 예컨대 싹이 생겨나기 위해서는 씨앗과 온도 수분 광선 등이 동시에 함께 작용해야 한다.
33)땔감은 불에 타지 않는 한 땔감이 아니지만, 태워질 가능성이 있고, 언젠가는 탈 것이기 때문에 땔감이라고 하듯이 아직 생겨나지 않은 미래법 역시 언젠가는 여러 인연에 의해 조작되어 생기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유위라고 할 수 있다는 뜻.
34)세로(adhvan)란 과정(過程)의 뜻이다. 즉 모든 유위법은 3세의 과정 중에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일컬은 것으로, 이미 생겨나 소멸한 것을 과거법, 지금 생겨나 있는 것을 현재법, 아직 생겨나지 않은 것을 미래법이라고 한다. 유부교학상에 있어 시간(kāla)이란 객관적으로 독립된 실체, 이른바 ‘법’이 아니라 다만 생멸변천하는 유위제법을 근거로 설정된 개념일 뿐이다. 따라서 유부 아비달마에서는 실재적 시간을 의미하는 kāla(時)라는 말을 피하고 변천 변이의 뜻인 adhvan[世,혹은 世路]라는 말을 사용한다. 즉 유위법은 무상 변천하여 시간[世]의 근거[路]가 되기 때문에 ‘세로’라고 한 것으로, 시간은 바로 유위의 이명(異名)일 뿐이다.
35)명(名,nāma)은 책상ㆍ하늘과 같은 명사적 단어를 말하는 것으로, 말의 근거는 이같은 단어 그 자체(전통술어로 能詮의 名)가 아니라 그것에 의해 드러나는 의미(所詮의 法)이다. 즉 일체의 유위법은 언어적인 의미로 나타낼 수 있기 때문에 언의(kathāvastu)이다. 말소리와 단어[名]ㆍ문장[句]ㆍ음소[文]와 의미의 관계에 대해서는 본론 제8권에서 상론함.
36)여기서 세 가지란 말의 근거가 되는 단어[名]와 문장[句]과 단어를 구성하는 음소[文]를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8권을 참조 바람.
37)『품류족론(品類足論)』 제9권(대정장26,p.728상), ‘言依事十八界ㆍ十二處ㆍ五蘊攝.’ 즉 ‘언의(言依)가 유루의 이명으로, 5온을 포섭한다’고 할 경우, ‘언의는 18계ㆍ12처에도 포섭된다’고 설한 『품류족론』에 위배된다. 이에 따르면, 5온은 오로지 유위이지만, 18계 등은 무위도 포함하므로 ‘언의’는 유위법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택멸(열반) 역시 말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유부에 의하면 말의 대상(조건)으로서 드러난 택멸은 다만 유위일 뿐이며, 무위의 택멸은 불가설이다. 곧 언의는 오로지 유위만을 의미하기 때문에 ‘『품류족론』을 잘 해석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38)바로 앞의 본송에서 ‘온갖 유위의 법은 말하자면 색 등의 5온(蘊)이다[又諸有爲法 謂色等五蘊]’라고 규정하였다.
39)『순정리론』 제1권에 의하면, 도제(道諦)는 두 번째의 허물어짐이 없기 때문에, 결정적이지 않기 때문에 ‘세간’이 아니다. 즉 피안에 이르면 뗏목도 버려야 하듯이 열반에 이르면 무루의 성도도 버려야 하지만, 일단 버리고 나면 다시는 버려야 할 것이 없지만, 유루의 법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40)5견이란 살가야견(薩迦耶見 혹은 有身見,satkāya-dṛṣṭi)ㆍ변집견(邊執見)ㆍ사견(邪見)ㆍ계금취(戒禁取)ㆍ견취(見取)로, 유루법은 이러한 번뇌가 생기하는 주처(住處) 즉 토대가 되기 때문에 견처이다. 5견에 대해서는 본론 제25권에서 상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