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공덕의 자성(自性)을 설명하였으며, 또 유루와 무루의 구별도 설명하였다. 지금부터 그 공덕을 성취하는 과정을 설명하겠다.
028_0338_a_05L已說功德自性,亦說有漏無漏,成就今當說。
알지어다. 아직 욕계 벗어나지 못한 사람은 미선(味禪)과 상응하는 공덕 성취하고 낮은 경지 벗어나 아직 높은 경지에 이르지 못하였어도 청정한 여러 선정 성취하게 되느니라.
028_0338_a_07L當知未離欲, 成就味相應, 離下未至上,
成就淨諸定。
‘알아야 한다. 아직 욕계 벗어나지 못한 사람은 미선과 상응하는 공덕 성취한다’고 한 것은 만약 어떤 사람이 그의 경지가 아직 욕계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을 경우 그 경지의 맛과 상응하는 선정을 성취하게 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낮은 경지 벗어나 높은 경지 이르지 못하였어도 청정한 여러 선정 성취하게 된다’라고 한 것은 욕계의 욕애에서 벗어나 제2선 등의 경지에서 생기는 범천(梵天)의 세계가 아직 생겨나지 아니하였을 경우 욕애를 벗어났건 아직 욕애를 벗어나지 아니하였건 청정한 초선(初禪)의 경지와 그밖의 거룩한 공덕이 성취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알아야 한다. 높은 경지에 머물러도 낮은 경지의 무루 성취하느니라. 방편으로 생긴 공덕은 욕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028_0338_a_14L住上應當知, 成就下無漏, 方便生功德,
當知非離欲。
‘높은 경지에 머물러도 낮은 경지의 무루 성취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한 것은 성인이 범천 세계보다 위에 태어나서도 무루(無漏) 초선의 경지와 그밖의 무루의 삼매(三昧)ㆍ신통력 및 지혜 등 모든 공덕을 성취하시게 됨을 말한 것이다. 그 경지가 유루의 공덕을 낳는 곳이라면 그곳은 얽매인 땅이며 무루의 공덕은 이 얽매인 속박을 끊는다. 그런 까닭에 공덕이 생긴 곳을 떠나서 유루를 버렸다고 하여 그것이 곧 무루는 아니다. 이와 같이 모든 경지는 그 내용을 따라 설명하게 되는 것이다.
028_0338_b_02L‘방편으로 생긴 공덕은 욕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고 한 것은 이미 설명한 대로 낮은 경지의 욕애에서 벗어나서 성취되는 모든 공덕은 그 성취가 눈앞에 나타나지 아니하는 공덕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방편이 현재 눈앞에 있는 공덕은 욕계를 벗어난 공덕이 아니다. 방편으로 얻는 것은 천안(天眼)과 같은 경지일 따름이다. 그것은 무기(無記)인 까닭에 무루선ㆍ정선(淨禪)ㆍ미선(味禪)에 상응하는 선정에는 포함되지 아니한다. 그런 까닭에 그 세 가지 선정을 얻었을 때는 멸진정(滅盡定)이라 할 수는 없다. 이 멸진정은 방편의 멸진정이기 때문이다. 그 경지에서는 스물세 가지의 정수(正受:三昧)가 눈앞에 나타나고 그 가운데 여덟 가지는 미선과 서로 호응하고 또 다른 여덟 가지는 정선과 서로 호응하며 나머지 일곱 가지는 무루선(無漏禪)과 서로 호응한다. 【문】그 가운데 있는 하나하나의 선정마다 몇 종류의 인연이 있습니까?
【답】 이른바 무루의 선정에는 선정마다 일곱 가지 인(因)이 있고 미선ㆍ정선과 상응하는 선정에는 한 가지 인연만 있음을 알아야 한다.
028_0338_b_08L答曰:
所謂無漏定, 一一七種因, 味淨相應禪,
當知因有一。
‘이른바 무루의 선정에는 하나하나마다 일곱 가지의 인(因)이 있다’고 한 것은 하나하나의 무루의 선정마다 모두가 일곱 종류의 무루심에서 생기는 것이며 자기 몫의 인연 가운데서 자기 경지에 인연한 것이나 또한 공생인(共生因), 즉 공통적으로 생기는 인과도 서로 호응하게 된다. ‘미선ㆍ정선과 상응하는 선정에는 한 가지 인연만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한 것은 미선(味禪)과 상응하는 초선은 미선과 상응하는 초선에 인한 것이며 다른 것에 인한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초선의 인은 서로 닮지 아니한 것이기 때문이며 또한 다른 경지의 더럽게 오염된 인의 행과는 틀리기 때문이다. 이것은 더럽게 오염된 행이 아닌 것과도 서로 어긋나는 특유의 경지이며, 또한 자기 몫의 선정도 아니다.
이와 같이 정선(淨禪)과 상응하는 초선(初禪)도 정선과 상응하는 초선의 경지에만 인(因)하며 그것은 더럽게 오염된 것도 아니고 무루선(無漏禪)도 아니다. 왜 그런가? 다른 선정과 서로 비슷하지 않기 때문이며, 다른 경지의 청정한 인연도 아니고 자기 경지의 과보도 아니기 때문이며, 또한 자기 경지에 얽매인 선정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모든 경지의 선정이 모두 그 자체의 경지에만 인연되는 것이다. 【문】하나하나의 선정은 차례로 몇 종류나 생겨납니까?
【답】 무루선은 무색계까지 역으로 순차로 차례를 뛰어넘어 차례로 여섯 종류의 선정이 생기고 마침내는 열 가지 선정이 생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028_0338_b_20L答曰:
無漏禪無色, 逆順超次第, 次第生六種,
當知乃至十。
028_0338_c_02L 무루의 초선에서 차례로 여섯 종류의 선정이 생겨난다. 즉 자기경지의 정선(淨禪)과 무루선이다. 이와 같은 제2, 제3의 선정도 이와 같이 정수(正受)의 단계를 뛰어넘어 무루(無漏)인 무소유처(無所有處)의 선정에 이르기까지 차례로 일곱 가지 선정이 생겨난다. 즉 자기경지에서 두 가지의 무루선과 아랫경지에서 네 가지, 윗경지에서 한 가지 선정이 생겨난다. 무루의 제2선에서는 차례차례로 여덟 가지 선정이 생겨난다. 자기경지에서 두 가지, 초선의 경지에서 두 가지, 윗경지에서 네 가지의 선정이 생긴다. 무루의 무변식처정(無邊識處定)에서는 차례로 아홉 가지 선정이 생겨난다. 자기 경지에 속하는 것이 두 가지, 아랫경지에 속하는 것이 네 가지, 윗경지에 속하는 것이 세 가지이다. 나머지 다른 무루선에서는 차례로 열 가지 선정이 생긴다. 즉 자기 경지에 속하는 것이 두 가지며, 아랫경지에 속하는 것이 네 가지, 윗경지에 속하는 것이 네 가지이다.
혹 여섯 가지에서 열한 가지에 이르니 차례로 생기는 정선을 말한다. 두 가지에서부터 열 가지까지는 미선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028_0338_c_07L或六至十一, 謂淨次第生, 從二乃至十,
當知說有味。
‘혹 여섯 가지에서 열한 가지에 이르니, 차례로 생기는 정선을 말한다’고 한 것은 정선(淨禪)의 경우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에서 차례로 여섯 가지 선정이 생긴다. 즉 자기경지의 선정과 미선(味禪)과 상응하는 선정, 그리고 아랫경지의 네 가지 정선이 그것이다. 정선과 무루선은 미선과 상응하는 선정이 아니다. 그 이유는 욕계를 벗어났기 때문이다. 정선의 초선(初禪)에서는 차례로 일곱 가지 선정이 생긴다. 즉 자기경지에 속하는 것이 세 가지며 윗경지에 속하는 것이 네 가지다. 정선과 무루선은 불용처(不用處)에서는 차례로 여덟 가지 선정이 생긴다. 즉 자기 경지에 속하는 것이 세 가지며 윗경지에 속하는 것이 한 가지고, 아랫경지에 속하는 것이 네 가지다.
제2선에서의 정선의 경우 차례로 아홉 가지 선정이 생기고 무변식처(無邊識處)에서는 차례로 열 가지 선정이 생긴다. 나머지 다른 경지에서는 모두 열한 가지 선정이 생긴다. 이와 같은 모든 선정은 마땅히 정수(正受)의 시기에 해당되는 것이며, 죽는 시기를 말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런 까닭에 그 가운데 높고 낮은 경지의 미선과 상응하는 선정에는 포함되지 아니하고 생기는 선정이다. 그러나 정선을 얻고도 차례로 상하(上下)의 미선과 상응하는 선정이 생길 수도 있다. ‘두 가지로부터 열 가지에 이르기까지 미선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한 것은 미선과 상응하는 초선의 경우 차례로 두 가지 선정이 생긴다. 즉 자기 경지에 속하는 미선과 상응하는 선정 및 정선이 그것이다. 이 두 가지는 그 경지가 서로 어긋나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유정천(有頂天)에서의 미선과 상응하는 선정에서는 차례로 열 가지 선정이 생긴다. 즉 정수(正受)의 단계에서 미선과 상응하는 선정이 세 가지가 생기며 자기 경지에서 두 가지가 생기고 아랫경지의 정선(淨禪)도 그 자체 경지의 번뇌가 괴롭히기 때문에 생겨나며, 스스로를 구호하기 때문에 불용처(不用處)의 경지에 근거한 정선도 생기며 이와 같이 모든 경지의 아랫경지에 속하는 선정이 세 가지가 생기며 또한 죽었을 때의 윗경지와 물러섰을 때의 아랫경지에 속하는 선정 등 열 가지 선정은 모두가 미선과 서로 호응하는 선정이다.
028_0339_a_02L【문】앞에서는 정수의 시기에 생기는 선정을 말씀하셨으니, 여기서는 마땅히 번뇌를 설명하셔야 하겠습니다. 【답】정선이 차례로 생기는 것은 정수(正受)의 시기에 해당하고 번뇌는 미선과 상응하는 번뇌 및 수음(受陰)으로 생기는 번뇌를 말하게 된다. 왜 그런가? 번뇌의 힘으로 생기는 선정은 선정의 힘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이 가운데서 말하는 선정은 모두 번뇌에 속한다. 그러나 정선(淨禪)의 경우 그것은 반드시 결정적으로 선정의 힘에 의하여 생기는 선정이다. 그런 까닭에 정수와 번뇌를 함께 말하는 것이다. 【문】그 가운데 하나하나의 연(緣)은 몇 가지나 됩니까?
【답】 정선과 무루선은 모든 경지에서 전변(轉變)하며 자기경지의 유루(有漏)의 법은 미선(味禪)과 상응하는 소연(所緣)이 된다.
028_0339_a_08L答曰:
淨及無漏禪, 一切地中轉, 自地有漏法,
味相應所緣。
‘정선과 무루선은 모든 경지에서 전변한다’고 한 것은 정선과 무루선은 모든 경지와 모든 일에 연(緣)함을 말한 것이다. ‘자기경지의 유루법은 미선과 상응하는 소연이 된다’고 한 것은 미선과 상응하는 선정은 자기경지의 맛과 상응하는 선정과 연하는 동시에 정선과도 연하지만 무루와는 연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무루의 연이 아니며 애착이 있으면서도 다른 경지에 애착을 느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색정(無色定)은 아랫경지인 유루의 일을 수행하지 아니한다. 만약 그것이 근본적으로 선할 경우 더럽게 오염된 것은 미선(味禪)과 같다.
028_0339_a_15L無色則不行, 於下有漏事, 若根本彼善, 穢污如味禪。
‘무색정은 아랫경지인 유루의 일을 행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무색계의 정수(正受)는 아랫경지인 유루의 법을 반연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아랫경지는 적멸하지 못한 곳이기 때문이요, 또한 아랫경지는 아랫경지의 무루와 연하여 마치 비지(比智:類智, 上界의 無漏智)의 일부분과 같기 때문이다.
028_0339_b_02L【문】모든 유루는 아랫경지를 연하지 아니합니까? 【답】그렇지 않다. 만약 그것이 근본적으로 선(善)할 경우 근본적으로 무색계의 정선과 무루선이 되면 그것은 자기의 경지와 윗경지를 연(緣)하고 아랫경지를 연하지 아니하며, 미래선에서 만약 아랫경지와 연할 경우 그것은 아랫경지인 거칠고 추악한 생각에서 싫어하고 여의려는 생각을 연하게 된다. ‘더럽게 오염된 것은 미선과 같다’고 한 것은 미선과 상응하는 선을 말한 것으로 무색계의 선정이 더럽게 오염되는 경우도 역시 이와 같음을 말한 것이다.
색계에서 만약 무량심 등 공덕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욕계의 경계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028_0339_b_03L色界若有餘, 無量等功德, 彼欲界境界,
世尊之所說。
색계의 공덕을 말하는 데 있어 사무량심(四無量心)이나 일체처(一切處) 등은 저 욕계를 연한 공덕이다. 왜 그런가? 신통력을 제외하고 무량심을 말하는 것 등은 저 다섯 가지 신통력은 욕계와 색계를 연하는 공덕이기 때문이다. 【문】앞에서 말씀하신 선정이 몸에 배게 하는 일 가운데서 지혜를 닦는다고 하셨는데, 그 경우 어떻게 선정이 몸에 배게 됩니까?
【답】 만약 모든 선정을 몸에 배게 할 수 있다면 이는 제4선에 의한 것이니 세 경지의 애착이 다한 까닭에 정거(淨居)의 광과(廣果) 경지에 태어나리라.
028_0339_b_09L答曰:
若能熏諸禪, 是依第四禪, 三地愛盡故,
淨居唯廣果。
‘만약 모든 선정을 몸에 배게 할 수 있다면 이는 제4선에 의한 것이다’라고 한 것은 색계 제4선의 경지를 얻게 되면, 모든 선정이 몸에 배게 되며 번뇌가 남아 있는 경지가 아니다. 그 사람은 자주 무루 사선(無漏四禪)의 선정에 들어가 무루의 지혜가 일어나고, 또 자주 유루(有漏)의 선정에 들어갔다가 다시 무루선으로 되돌아간다. 거기서 또다시 유루선에 들어가면서 유루선에 들어가는 횟수가 점차로 줄어들어 마침내는 두 찰나에 머물게 된다. 이와 같은 방편으로 만약 한 찰나는 무루심이었다가 또 다음 한 찰나는 유루심이 될 경우 이때 한 생각은 유루이고 또 다른 한 생각은 무루가 되어 두 가지 생각, 즉 한 유루의 생각과 한 무루의 생각을 지니게 된다. 이것을 성취라고 말하는 것이다.
028_0339_c_02L【문】그것은 어디서 얻은 과보입니까? 【답】정거천(淨居天)에서 얻은 과보이다. 왜 그런가? 세 경지의 애착이 다했기 때문에 정거천 중에 광과의 경지에 태어난다. 만약 제4선의 경지를 얻는다면 앞의 세 경지의 애착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이 제4선의 경지를 얻은 사람은 정거천(淨居天) 중에 광과천에서 범부들과 함께 선(禪)을 닦아 몸에 배게 한다. 이 경우 범부들과 함께 하지 아니하는 다섯 가지 선정은 하(下)ㆍ중(中)ㆍ상(上)ㆍ상중(上中)ㆍ상상(上上)의 선이다. 이와 같은 다섯 가지 경지를 불광천(不廣天)ㆍ무열천(無熱天)ㆍ선견천(善見天)ㆍ선현천(善現天)ㆍ색구경천(色究竟天)이라 한다. 그런 까닭에 그 가운데서 과보를 얻게 되는 것이다. 【문】앞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일곱 종류의 원과 지혜[願智]는 어떻게 됩니까?
【답】 집착없는 부동(不動)의 법문에서 모든 정수(正受) 얻는다. 그 삼매의 지혜의 힘은 능히 최상의 사선(四禪)을 일으킬 수 있다.
028_0339_c_03L答曰:
無著不動法, 得一切正受, 彼三昧智力,
能起頂四禪。
이 경지에 이른 사람은 핍박하고 괴롭히는 마음이 계속 이어지지 않기 때문에 모든 정수의 힘이 끊임없이 이어져서 지혜가 생겨난다. 그런 까닭에 세 가지 공덕, 즉 원지(願智)와 무쟁(無諍:마음에 모순이나 갈등이 없는 것)ㆍ무애(無礙:마음에 장애물 없는 것)의 공덕이 생긴다. 저 원지라는 것은 가령 과거ㆍ미래ㆍ현재와 무위(無爲)의 일을 알고자 하면 그때 그 원하는 지혜의 가장자리 끝이 제4선의 정수(正受)의 위치에 머물게 되므로 능히 이것을 알 수 있게 된다. 무쟁(無諍)이란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계속 이어지는 가운데 번뇌로 인한 갈등이 일어나려 하지 아니한다. 이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계속 이어지는 동안 번뇌로 인한 마음의 갈등도 일어나지 아니하는 것이다. 무애란 앞에서 설명한 내용과 같다. 【문】원지(願智)는 어느 경지에 속하는 공덕입니까?
【답】 세 가지 경지에 원지가 있고 무쟁은 다섯 경지 속에 포함된다. 두 경지에는 법무애변(法無礙辯)ㆍ사무애변(辭無礙辯)의 공덕이 있고 나머지 두 무애변(無礙辯)은 아홉 경지에 의지한다.
028_0339_c_13L答曰:
三地有願智, 無諍五地中, 二地法辭辯,
二辯依九地。
‘세 가지 경지에 원지가 있다’고 한 것은 제4선과 초선(初禪)과 욕계를 말한 것이나 결정적인 것은 제4선에서 얻게 된다. 욕계에서는 오직 사람들 가운데 혹 욕계에 있으면서 범천(梵天)의 세계와 서로 호응하는 마음이 일어날 경우 설법을 일으켜 말로 마음을 설명하게 되면 그곳에 원지(願智)가 존재하게 된다. 그런 까닭에 세 경지에 존재한다고 말한 것이다. ‘무쟁은 다섯 경지에 포함된다’고 한 것에서 다섯 경지라고 한 것은 근본 사선과 욕계를 말한다. 이것도 결정적인 것은 제4선에서 얻게 되지만 사람들 가운데 혹 능히 이 공덕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도 있지만 그 일어나는 곳은 결코 다른 경지가 아니다.
028_0340_a_02L‘두 경지에는 법무애변과 사무애변이 있다’고 한 것 중에 법문에 막힘없는 말재주는 욕계와 범세(梵世)에서 얻는 공덕이다. 여기서 다섯 경지[五地]라 한 것은 근본 사선의 경지와 욕계를 말한 것이다. 이것은 다만 인연을 표현하여 말한 것이며 이름에 따라 바꾸어 표현할 수도 있다. 그런 까닭에 말하는 도리가 여기서 일어나는 것이며, 그 가운데 거칠고 미세한 마음의 작용이 있는 곳[覺觀]에서는 이것을 표현하는 문구에 막힘없는 말재주[辭無礙辯]라고 말하게 되며 이 사무애변은 욕계와 범세(梵世)에서 얻게 되는 공덕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말과의 인연이기 때문이다. ‘두 가지 무애변은 구지에 의지한다’고 한 것에서 ‘두 가지 무애변’이라고 한 것은 내용에 막힘없는 말재주[義無礙辯]와 쉽게 풀이해서 술술 말하는 데 막힘없는 말재주[樂說無礙辯] 등 두 가지 말재주를 말하나니, 욕계와 근본 사선(根本四禪)과 네 가지 무색계의 선정[無色定]에서 얻어지는 공덕이니, 이는 미래선ㆍ중간선ㆍ근본 초선에 속한다. 【문】어떻게 이 정수(正受)를 얻게 됩니까?
【답】욕계를 벗어나 새로운 생명을 받고도 정선(淨禪)에서 얻으며 더럽게 오염된 경우와 물러나 다른 경지에 태어나서도 무루선(無漏禪)만이 오직 욕계를 벗어나게 된다.
028_0340_a_05L答曰:
離欲及受生, 而得於淨禪, 穢污退及生,
無漏唯離欲。
‘욕계를 떠나 다른 생을 받아도 정선에서 얻으며’라고 한 것은 정선(淨禪)ㆍ초선(初禪)의 두 때에 얻는 공덕을 말한 것이다. 욕계를 벗어났을 때 얻는 경우와 높은 경지에 올라가 욕계에서는 사라지고 범천의 세계에 태어났을 때는 그 경지의 허물을 버리게 된다. 이와 같이 모든 경지에서 높은 경지에 올라갈 때마다 그 앞의 경지의 허물은 버리게 된다. ‘더럽게 오염된 경우와 물러나 다른 경지에 태어나서도’라고 한 것은 미선(味禪)과 서로 호응하는 선정을 말한 것이며, 높은 경지에서 물러나서 아랫경지를 얻게 되는 경우를 말한 것이다. 예를 든다면 혹 제2선에서 만약 욕계의 번뇌가 마음을 얽매고 있거나 또는 범세(梵世:初禪)의 번뇌가 마음을 얽어맨다면 이 사람은 이선(二禪)에서 물러나게 되고 그때에는 미선과 상응하는 초선이 생겨서 얻는 것은 높은 경지에서 사라져 욕계나 범세에 태어나는 사람과 같아진다. 그때에는 미선에 상응하는 경지의 초선을 얻게 되는데 모든 경우가 다 이와같다.
‘무루선만이 오직 욕계를 벗어난다’고 한 것은 무루선은 욕망을 벗어나야 얻나니, 성인이 욕계의 욕망에서 벗어났을 때 무루의 초선을 얻게 되는 것을 말한 것이다. 이 경지는 예전에는 미처 얻지 못한 경지를 얻은 것이기 때문에 얻었다고 하는 것이며 모든 경지를 얻게 되는 경우도 모두 이와 같다. 【문】이 공덕이 어떻게 번뇌를 제거할 수 있다고 하십니까?
【답】 무루선이 번뇌를 제거함은 정수(正受)로 들어가는 중간이며 모든 선정의 중간에서 사근과 서로 호응한다.
028_0340_a_18L答曰:
無漏除煩惱, 正受中閒者, 一切定中間,
相應於捨根。
‘무루선이 번뇌를 제거한다’고 한 것은 무루의 선정에서는 무루지(無漏智)로 번뇌를 제거하는 것이지, 세속의 지혜로 제거하는 것이 아님을 말한 것이다. 【문】왜 세속의 지혜로는 번뇌를 끊지 못합니까? 【답】세속에서는 번뇌나 지혜가 다 같이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세속에 공통되는 번뇌는 똑같은 하나의 속박이다. 그런 까닭에 그 자체의 경지에 있는 번뇌를 끊을 수 없다. 마치 사람이 반대로 다른 사람에게 묶여 있으면 자기 힘으로 풀 수 없는 것과 같다. 상대방이 와서 줄을 풀어 주어야 그 가운데서 살아나게 되는 것이다.
028_0340_b_02L【문】모든 세속의 지혜로는 번뇌를 끊을 수 없습니까? 【답】세속의 지혜로 번뇌를 끊을 수 있는 경우도 있다. 【문】어떤 것이 그러한 경우입니까? 【답】정수(正受)의 중간에 있는 경우이다. 말하자면 미래선(未來禪)의 단계에서 아직 근본선을 얻지 못한 상태에서 만약 방편을 만들어 아랫경지의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그것은 초선(初禪)으로 가는 미래선이며 이 경우는 유루와 무루가 반반이고, 그밖의 미래선은 오로지 유루에 속한다. 근본 사선(根本四禪은 무색(無色)에서 정수(正受)에 들어 있을 때에 해당된다. 그런 까닭에 세속의 지혜로는 번뇌를 끊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문】이에 가까운 선정(禪定)은 어떤 곳입니까? 【답】모든 정수로 가는 중간 지점의 선정은 사근(捨根)과 서로 호응한다. 자기가 구하는 경지를 아직 얻지 못한 까닭에 희근(喜根)은 생기지 않았다. 【문】신족통(神足洞)의 경계에서 얻은 지혜로 신통을 증득[證]하는 것에 관해서는 비록 설명하셨다고 하지만 아직 몇 가지로 변화하는 마음이 있는지는 말씀하시지 아니하였습니다. 그것을 지금 곧 설명하여 주십시오. 【답】열네 가지의 변화하는 마음이 있다. 즉 욕계에서 초선의 과보를 얻는 마음, 초선의 경지에서 얻는 초선의 과보의 마음, 욕계에서 얻는 이선(二禪)의 과보의 마음, 초선의 경지에서 얻는 이선의 과보의 마음, 이선의 경지에서 얻는 이선의 과보의 마음과 이렇게 제4선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이와 같아서 모두 열네 가지로 변화한다. 【문】그것은 누가 성취합니까?
【답】 아래의 경지에서 변화하는 마음이며 저 종자(種子)의 과보를 성취한다. 그 인식 따라 상응하면 그는 높은 경지를 성취하리라.
028_0340_b_16L答曰:
下地變化心, 成就彼種果, 隨彼識相應,
彼上地成就。
‘아래의 경지에서 변화하는 마음이며 저 종류의 과보를 성취한다’고 한 것은 만약 어떤 사람이 선정을 성취했다면 이 사람이 성취한 것은 그 과보가 아랫경지의 변화된 마음이란 뜻이다. 가령 초선의 경지를 얻었다면 이 초선의 경지는 욕계에서 얻은 초선의 과보이다. 이와 같이 모든 경지를 성취하였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문】그대는 먼저 말씀하기를 제2선 등 높은 경지에서는 오식(五識)을 지닌 몸은 없어진다고 하셨는데 만약 높은 경지에 태어난 사람이 사물을 보고 소리를 듣고자 할 때는 어떻게 보고 듣습니까? 【답】범천(梵天) 세계의 인식작용이 앞에 나타난다.
028_0340_c_02L【문】왜 높은 경지에는 이 인식작용이 없습니까? 【답】각지(覺支)ㆍ관지(觀支)가 없기 때문이다.
【문】그는 어느 때 그것을 성취합니까? 【답】그때 그때의 인식작용에 따라 거기에 상응하는 높은 경지가 성취되는 것이며, 마침내는 그의 인식작용에 상응하는 경지가 그때에 성취되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 혹 눈의 인식작용이나 혹은 귀의 인식작용이나 혹은 몸의 인식작용이나 그때 앞에 나타나는 인식작용에 따라 그때 그 경지가 성취되는 것이며, 이 인식작용이 사라질 때는 버린다[捨]라고 표현한다. 왜 그런가? 그것은 육근에 매여있기 때문이다.
모든 지혜 지니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가장 미세한 내용, 그가 남긴 일부분을 나는 지금 곧 설명하겠다.
028_0340_c_08L一切智口所說最深微細義,此餘我今當說。
모든 지혜 지니신 분께서 말씀하신 매우 깊고 미세한 내용 내 지금 그 일부분의 수다라를 말하노니 자세히 들어라.
028_0340_c_10L一切智口說, 甚深微細義, 我今說少分,
修多羅諦聽。
【문】부처님께서 설법하신 삼계(三界)는 어떤 것입니까?
028_0340_c_12L問曰:如佛說三界,彼何者是?
【답】 욕계에 열 곳의 거처가 있고 색계에는 열일곱 곳이 있으며 무색계에는 네 곳이 있으니 이들은 결정코 오직 삼유[有]의 경지라네.
028_0340_c_13L答曰:
欲界十居處, 色界說十七, 無色界有四,
決定唯彼有。
‘욕계에 열 곳이 있다’고 한 것은 지옥계ㆍ축생계ㆍ아귀ㆍ인간 세계 및 여섯 욕계천의 종류를 열 곳의 거처라고 하였다. 알지어다. 이것은 욕계를 말한 것이며 이곳 중생들은 욕망의 생각이 있어 돌고 돈다. 만약 이곳에서 모든 조건이 구족되면 저 모든 애증(愛憎)과 욕망에 상응하게 된다. 그런 까닭에 이곳을 욕계라고 말하는 것이다.
‘색계에 열일곱 곳이 있다’고 한 것은 범신천(梵身天), 범부루천(梵富樓天)ㆍ소광천(少光天)ㆍ무량광천(無量光天)ㆍ광요천(光曜天)ㆍ소정천(少淨天)ㆍ무량정천(無量淨天)ㆍ변정천(遍淨天)ㆍ무음천(無蔭天)ㆍ복생천(福生天)ㆍ대과천(大果天)ㆍ무상중생천(無想衆生天)ㆍ불광천(不廣天)ㆍ불열천(不熱天)ㆍ선견천(善見天)ㆍ선현천(善現天)ㆍ색구경천(色究竟天) 등 이 열일곱 곳의 거처(居處)를 색계라 말한다. 이곳에서는 욕망의 생각이 돌고 돌지 아니한다. 그곳은 지극히 큰 색이며 남자ㆍ여자의 모습이 없다. 그런 까닭에 색계, 즉 색의 세계라고 말하는 것이다.
028_0341_a_02L‘무색계에 네 곳이 있다’고 한 것은 무색계에도 네 곳의 거처가 있으니, 즉 무변허공처(無邊虛空處:空處)ㆍ무변식처(無邊識處)ㆍ무소유처(無★有處)ㆍ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네 곳을 말한다. 이 거처 가운데서는 색은 생기지 아니한다. 왜 그런가? 색계와 욕계를 벗어났기 때문이며 또한 차례로 욕망과 색이 소멸하기 때문이다. 만약 무색계에서도 색욕이 생긴다면 곧 차례로 소멸하는 현상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차례로 소멸하는 현상이 있다. 만약 그것이 없다고 하면 마땅히 색계에서도 욕망의 허물이 생겨야 할 것이다. 그런 까닭에 무색계에서는 색이 생기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이곳을 무색계라고 한다.
【문】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삼유(三有)란 욕유(欲有)ㆍ색유(色有)ㆍ무색유(無色有)를 말씀하신 것인데 이것은 어떤 것입니까? 【답】결정코 오직 저 삼유이다. 앞에서 설명한 계(界)가 곧 유(有)이다. 【문】세존의 말씀과 같이 칠식(七識)이 머문다고 하셨는데 그것은 어떤 것입니까?
【답】 좋은 세계[善趣]는 욕계와 색계에 세 곳이 있고 무색계에도 세 곳이 있다. 이곳이 인식작용이 머무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028_0341_a_11L答曰:
善趣是欲界, 及色界三地, 無色亦三地,
當知爲識住。
욕계에서 좋은 세계의 수효에 들어가는 곳은 인간 세계와 하늘 세계이다. 색계에서 앞 쪽의 세 경지[第一禪天ㆍ第二禪天ㆍ第三禪天]와 무색계의 앞 쪽 세 경지[無邊虛空處ㆍ無邊識處ㆍ無所有處], 이 일곱 곳이 인식 작용이 머무는 곳이다. 【문】어찌하여 삼악도(三惡道:지옥ㆍ축생ㆍ아귀)와 사선천(四禪天)ㆍ유정천(有頂天)은 인식작용이 머무는 곳이라 말하지 아니합니까? 【답】가령 어떤 경지[地]를 말할 때 실상을 보고 번뇌망상을 끊는[見斷] 경우가 있고, 도를 닦아서 번뇌망상을 끊는[修斷] 경우가 있다. 여기서 끊지 못하면 인식작용이 생기며 그것을 인식이 머무는 경지라고 말하는 것이다. 삼악취(三惡趣)의 경우 그 가운데서는 끊어지지 아니하는 일은 없다. 또 제4선 가운데 무상중생천(無想衆生天)과 정거천(淨居天)의 경우는 보고 끊는[見斷] 일이 없다. 그런 까닭에 제4선은 식주(識住)에 포함되지 아니한다.
또 유정천(有頂天)은 오로지 유루(有漏)의 세계이다. 만약 여기서 인식작용이 머물기를 즐긴다면 그곳도 인식작용이 머무는 곳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삼악도에서는 인식작용이 머물기를 즐기지 아니한다. 왜 그런가? 고통에 핍박당하기 때문이다. 정거천(淨居天)은 열반으로 향하는 길목인 까닭에 인식작용이 머물기를 즐기지 아니하며 무상중생천(無想衆生天)은 오로지 무심(無心)의 세계이다. 그런 까닭에 제4선천은 인식이 머무는 곳에 속하지 아니한다. 또 유정천(有頂天)은 행(行)이 민첩하고 날카롭지 못하다. 그런 까닭에 그곳도 역시 인식이 머무는 곳에는 포함되지 아니한다.
028_0341_b_02L세 종류의 중생이 있다. 즉 경계를 즐기는 중생들이 있고, 즐거움을 즐기는 중생들이 있으며, 상상을 즐기는 중생들이 있다. 이 가운데 경계를 즐기는 중생들은 인간 세계와 욕계의 하늘 세계에 사는 중생들이며 즐거움을 즐기는 중생들이란 초선(初禪)에서 삼선(三禪)까지 세 곳 선정의 경계에 사는 중생들이며, 상상을 즐기는 중생들이란 세 곳의 무색계에 사는 중생들이다. 그런 까닭에 이들은 인식작용이 머무는 곳이라 말한다. 【문】아홉 곳의 중생의 거처라 하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답】 유정천(有頂天)과 무상천(無想天) 이곳도 중생의 거처라 한다. 네 종류의 유루의 음이 인식이 머무는 곳임을 알아야 한다.
028_0341_b_05L答曰:
有頂及無想, 是說衆生居, 四種有漏陰,
當知識住處。
‘유정천과 무상천 이곳도 중생의 거처라 한다’고 한 것은 앞에서 설명한 일곱 곳의 인식작용이 머무는 곳 이외에도 무상천과 유정천은 이를 중생이 사는 곳이라 말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아홉 곳의 중생들이 사는 곳이라고 한다. 【문】왜 악도와 무상중생천(無想衆生天) 외에 제4선천은 중생들이 사는 곳[衆生居]이라 말하지 아니합니까? 【답】어느 곳에 즐겨 머물면서 떠나려 하지 아니하는가에 따라 그곳을 중생들이 사는 곳이라 부른다. 악도에는 이 두 가지 조건에 해당되는 곳이 없다. 또 광과천(廣果天)에는 비록 즐겨 머물고자 하지만, 또한 즐겨 떠나고 싶어하기도 한다.
【문】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네 가지 인식이 머무는 곳[四識住]이라고 한 저곳은 어떤 곳입니까? 【답】네 가지의 유루의 음이 마땅히 인식이 머무는 곳임을 알아야 한다. 유루(有漏)의 세계에서 색(色)ㆍ수(受)ㆍ상(想)ㆍ행(行)의 음을 인식작용이 머무는 곳이라고 말한다. 생겨서 머무는 인식작용을 모두 취하여 그것을 집착하여 길러내기 때문에 식주(識住)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무루(無漏)의 세계는 식(識)이 머무는 곳이 아니다. 그곳에서는 유(有)를 허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곳도 역시 취한 것이 아닌 뒤섞여 합쳐진 인식이 머무는 곳이다. 【문】무슨 까닭으로 인식이 머무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까? 【답】그곳에서는 원인과 이유가 성립되지 아니한다. 마치 왕도(王道)라 할 때 왕(王)은 도(道)가 아닌 것과 같다. 머무는 것이 없는 부분에서 함께 생겨난 인식작용을 머무는 곳[住處]이라고 표현한다. 세 가지가 섞여 합쳐진 것을 주처(住處)라 부르는데 이 인식작용은 그런 것이 아니다.
028_0341_c_02L【문】다른 인식작용이 눈앞에 나타나는 인연은 없습니까? 【답】스스로 화합하여 생기지 않기 때문에 저것도 저것을 성취할 수 없다. 이 경우는 중생의 수효에 들어가기도 하고 또한 중생의 수효에 들어가지 않기도 한다. 【문】어찌하여 외부의 인식작용이 머무는 곳에서 일이 지어집니까? 【답】뒤섞여 함께 생겨나 인연에 의지하여 머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허물이 없다. 그도 역시 인연으로 그곳에 머물지만 자기 몫의 경지의 한계 안에 있는 것이지, 다른 사람 몫의 경지의 한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문】세존의 말씀과 같이 열두 가지 인연의 연기(緣起)에는 어떤 모습이 있습니까?
【답】 모든 번뇌와 업보와 존재하는 일들이 차례로 생기니 알지어다. 여기에는 가지[支] 있으며 모든 중생들에게 이 인연 생긴다.
028_0341_c_04L答曰:
諸煩惱及業, 有事次第生, 當知是有支,
衆生一切生。
무명(無明)ㆍ애착ㆍ취하려는 마음, 이 세 가지 인연은 번뇌에 속한다. 행(行)과 유(有)는 곧 업(業)에 속하고, 나머지 일곱 가지는 일[事]에 속하는 인연이다. 이와 같은 열두 가지 인연을 번뇌(煩惱)ㆍ업(業)ㆍ사(事)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 인연과 그 인연이 생기는 과정은 차례로 일어나기 때문에 이것을 연기(緣起)의 가지[支]라고 설명한다. 그 가운데 번뇌의 인연은 일에 근거를 두게 되고 번뇌는 업을 짓게 되며 업은 일을 만들게 된다. 이와 같은 관계를 연기(緣起)라 한다.
저 모든 부분이 건립되면 중생들이 생(生)을 받았다고 한다. 과거와 미래의 중간 인연은 여덟 가지 인연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028_0341_c_10L彼諸分建立, 謂衆生受生, 過去及未來,
中閒當知八。
‘저 모든 부분이 건립되면 중생들이 생을 받았다고 한다’는 것은 여러 부분의 차별로 십이지(十二支)의 인연을 설명한 것이다. 【문】그 내용은 어떤 것입니까? 【답】과거와 미래, 그리고 그 중간에 여덟 가지가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그 가운데 무명(無明)이란 과거의 번뇌에 속하고 행(行)은 과거의 업(業)에 속한다. 식(識)은 상속되는 마음과 거기에 수반하는 마음이다. 명색(名色)이라 하는 것은 생명을 부여받은 다음 이어 가며 굴러 소멸하지는 않았고 아직 생겨나지 아니한 네 가지의 색근(色根)에 육입(六入)이 갖추어지지 아니한 상태를 명색이라고 부른다.
육입이라 하는 것은 이미 네 가지의 색근이 생긴 뒤에도 아직 감촉작용이 의지하지 못한 상태를 육입이라 부른다. 촉(觸)이라 하는 것은 이 모든 근기(根器)가 이미 능히 감촉작용을 위한 근거가 될 수 있으나, 아직도 사물을 분별해서 괴로움과 즐거움을 구별하지 못하고, 날카롭고 쇠잔한 상태를 분별할 수 없는 시기를 촉이라고 부른다. 수(受)라는 것은 괴롭고 즐거운 것을 분별할 수 있고 날카롭고 무딘 원인을 분별할 수 있어서 그 차별을 알고 음식을 분별할 수 있으며 사랑하지만 음욕을 일으키지 아니하는 것을 수라고 한다.
028_0342_a_02L애(愛)라는 것은 욕망이 갖추어진 가운데 사랑하고 구하여 욕구하지만 구할 수는 없고 분별하는 능력은 있는 때를 애라고 한다. 취(取)라고 하는 것은 능동적으로 취하되 분별이 있는 것을 말한다. 유(有)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상대방의 경계에 대하여 나아갈 곳을 구하되 속하고 빨라서 널리 모든 중생의 세계에 생겨나 다음 세상을 맞이하게 될 때를 유라고 한다. 생(生)이라 하는 것은 그가 죽어 차례로 마디가 이어지는 속박을 받게 될 때를 생이라고 한다. 노사(老死)라는 것은 그 다음 마지막으로 받는 명색(名色)ㆍ수(受) 등을 노사(老死)라고 부른다. 【문】부처님께서는 육계(六界)를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어떤 것입니까?
【답】 이른바 네 가지 대종[四大種]과 모든 유루(有漏)의 식(識)과 또한 색계의 중간에 나타나는 것 이 세계를 생명의 근본이라 말한다.
028_0342_a_07L答曰:
所謂四大種, 及諸有漏識, 亦色中閒見,
是界說生本。
‘이른바 네 가지 대종과 모든 유루의 식과 색계 중간에 나타나는 것’이라고 한 것은 사대(四大)와 오식(五識)을 지닌 몸에 번뇌의 침입이 있는[有漏] 의식(意識)을 말한다. 또한 가령 색계로 통하는 구멍은 눈으로 취하는 허공의 작용에 속하는 것이다. 이것을 육계(六界)라고 말한다. 【문】왜 십팔계(十八界) 가운데서 따로 육계를 말씀하신 것입니까? 【답】이 여섯 경계가 생(生)의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그 법이 생의 근본이 되나니, 이 가운데서 장부상(丈夫想:世界創造를 생각하는 일)은 지대(地大)가 있는 곳에서 성립된다. 수대(水大)는 사물에 섞여 만물을 윤택하게 적셔 주고, 화대(火大)는 뜨거운 열로 썩어 냄새 나는 것을 제거하며, 풍대(風大)는 사물을 밀고 가서 허공의 중간에 구멍을 뚫어 그 구멍으로 음식이 들어가고 나오게 한다. 이 사대와 서로 호응하는 인식작용의 힘으로 건립된 몸을 장부상(丈夫想)이라고 표현한다.
그런 까닭에 이것을 세계를 생각하는 일[界想]이라고 부른다. 왜 그런가? 이것은 생명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말씀과 같이 여섯 세계의 인연으로 인하여 어머니의 탯속에 들어간다. 경에 표현된 문구가 이와 같다. 저 사대도 또한 하나의 생명이다. 그런 까닭에 이것을 대생(大生)이라고 표현한다. 마치 대중이 생겨나는 것과 같이 그 요소들도 생겨나는 것이다. 이 가운데서 지대(地大)는 단단한 모습을 지니고 있고 수대(水大)는 축축한 모습을 지니고 있으며, 화대(火大)는 뜨거운 모습을 지니고 있고 풍대(風大)는 가볍게 올라가는 모습을 지니고 있다. 색의 가장자리에서 받는 색의 모습을 허공계(虛空界)라 부른다. 색이란 것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일이다. 식(識)이라 하는 것은 모습을 환하게 아는 것이다. 【문】성제(聖諦)에는 어떤 모습이 있습니까?
028_0342_b_02L 【답】 결과가 비슷한 모든 행에 번뇌가 있으면 그것이 고제(苦諦)이다. 원인이 비슷한 것이 집제(集諦)이며
멸제(滅諦)는 모든 고통이 다한 것이다.
028_0342_a_24L答曰:
果相似諸行, 有漏是說苦, 因相似是集,
滅諦衆苦盡。
‘결과가 비슷한 모든 행에 번뇌가 있으면 이는 고제라 한다’는 것은 모든 유루(有漏)의 행동은 원인을 따라 생겨나서 핍박받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지닌다. 그런 까닭에 그것을 고제라고 말한다. 또한 모든 유루의 행동은 그 원인이 비슷하다. 그런 까닭에 이것을 집제(集諦)라 말한다. 마치 같은 벼[稻]의 씨앗이 앞뒤로 싹이 돋아 서로 바라보는 것과 같기 때문에 과(果)다, 인(因)이다라고 설명한다. 이와 같은 유루(有漏)의 행은 과거에 이미 생긴 것과 미래에 곧 생겨날 것을 비추어 보게 되기 때문에 또한 고제라고도 하고 집제라고도 한다. ‘멸제는 모든 고통이 다한 것이다’라고 한 것은 모든 유루의 행은 마지막에 가서는 결국 모두 소멸된다. 그런 까닭에 이것을 멸제라고 말하는 것이다.
무루(無漏)의 모든 행을 도제(道諦)라고 말한다. 거기에 두 가지 이름 있으니 거칠고 큰 진리부터 차례로 순서 따라 나타냈다.
028_0342_b_10L若無漏諸行, 是說爲道諦, 彼二種名故,
從麤次第見。
‘무루의 모든 행을 도제라고 말한다’고 한 것은 모든 무루의 행을 도제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고통이 소멸되었기 때문에 도제라고 말하는 것이다. 【문】왜 그것을 진리[諦]라고 표현합니까? 【답】거기에는 두 종류의 이름이 있기 때문이요, 또 거기에는 두 종류의 일이 있기 때문에 진리라고 표현한 것이다. 즉 스스로의 모습이 허망하지 아니하고 또한 대상 물질을 보고도 전도망상(顚倒妄想)이 생기지 아니하여 마음으로 깨닫게 되기 때문에 진리라고 한다. 【문】왜 허공과 비수멸(非數滅:非擇滅)은 진리에 속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답】원인과 결과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고통이 다한 것을 살피고 비추어 보는 일이기 때문에 진리가 아니다. 성제(聖諦)를 관찰하여 아는 것은 그것이 고통도 고통의 원인도 고통을 벗어나는 방편도 아니다. 다만 고통이 다하게 하고자 하는 까닭에 사제를 관찰하는 것이다. 비유하면 병의 원인에 따라 병자에게 약을 주면 병이 낫는 것과 같다. 사제를 관찰한다는 것은 병을 관찰하는 일과 같다.
028_0342_c_02L【문】성제(聖諦)에 어떤 내용이 있습니까? 【답】성(聖)이란 실상을 그대로 깨닫고 나서 다른 사람을 위하여 뚜렷하게 밝혀서 보여 주기 때문에 성인의 진리[聖諦]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가운데 핍박당하는 모습은 고제(苦諦)이며, 고통이 생겨나는 모습은 집제이며 마침내 적멸하고 고요한 모습은 멸제이다. 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모습이 도제에 해당한다. 【문】가령 어떤 일이든 원인이 있고 나서 결과가 있게 마련인데 왜 부처님께서는 사제를 설법하실 때에 결과부터 말씀하신 후에 그 원인을 설명하셨습니까?
【답】크고 굵은 것부터 차례로 나타내신 것이다. 이와 같이 한 것은 다만 끊임없는 고통 등만 보이게 되는 까닭에 부처님께서 먼저 결과를 말씀하신 것이다. 수행하는 사람이 먼저 끊임없는 고통 등을 알고 난 다음 그 고통의 원인을 추구하여야 한다. 그러기에 먼저 멸제(滅諦)부터 말씀하시고 그 후에 도제를 말씀하신 것이다.
왜 그런가? 먼저 결과를 알고 난 뒤에 그 원인을 끊는 도를 닦는 지혜[修智]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때 수행하는 사람은 고통의 자성이 끊임없다고 하는 데서 이를 인식하게 되면 그때는 그 고통의 원인을 끊기 위하여 결정적인 지혜가 생긴다. 이 원인이란 모든 허물과 근심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여 저 수행하는 사람은 먼저 그 고통이 소멸되는 모습을 보게 되고 그 때에는 그 소멸을 증명하기 위하여 방편을 닦아 결정적인 지혜가 생겨나게 된다. 그런 까닭에 먼저 결과를 말씀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먼저 크고 굵직한 현상부터 본 다음에 미세한 원인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고제(苦諦)는 크고 굵직한 현상에 속하고 집제는 미세한 현상에 속한다. 시설(施設)해 보인 현실을 추구하고 그것을 믿는 까닭에 이것이 진리인 것이다. 또한 멸제(滅諦)는 크고 굵직한 현상에 속하고 도제(道諦)는 미세한 진리에 속한다. 그런 까닭에 먼저 멸제를 말씀하시고 뒤에 도제를 말씀하신 것이다.
경[修多羅]의 설명에 의하면, 비구가 마땅히 멸제를 설법하여야 하는 것은 멸제로 나아가기 위해서 도제를 설법함이 이와 같다. 그런 까닭에 먼저 멸제를 구하고 나중에 도제를 닦는 것이다. 이것을 비유하면 마치 성(城)으로 가려고 할 때 먼저 성으로 가는 길을 찾은 다음에 성 안에 들어갈 수 있는 것과 같다. 모든 사람이 모두 멸제는 믿지만 도제는 믿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쉽게 알게 하려고 크고 굵직한 일부터 차례로 미세한 진리를 설법하신 것이다. 【문】부처님이 말씀하신 네 가지 사문과(沙門果)에는 몇 가지 일이 있습니까?
【답】 성과(聖果)의 일 여섯 가지 있으나 가장 뛰어난 과보는 아홉 경지에 있네. 세 번째 과는 여섯 경지에 존재하고 두 가지는 미래선(未來禪)에 근거한다.
028_0342_c_17L答曰:
聖果事有六, 最勝在九地, 第三在六地,
二種依未來。
‘성과의 일이 여섯 가지 있다’고 한 것은 여섯 가지 일로서 사문과(沙門果)를 말하는 것이다. 즉 다섯 가지 무루(無漏)의 음(陰)과 수연멸(數緣滅:擇滅)이다. 【문】사문과란 무슨 뜻입니까? 【답】성인의 도를 사문이라고 말한다. 그것에 정진하여 그것을 성취하는 까닭에 사문과라고 부른다. 【문】세속의 도에도 정진하는 대장부가 있습니다. 그도 역시 사문과를 얻게 됩니까? 【답】그것은 성인의 도와는 차별이 있다.
028_0343_a_02L【문】이는 무슨 과(果)이며 어떤 경지에 속합니까? 【답】가장 뛰어난 아홉 경지가 거기에 해당된다. 즉 아라한과(阿羅漢果)는 아홉 경지를 거두어들이는 과이다. 즉 미래선과 중간선ㆍ근본 사선ㆍ무색계의 세 가지 선정의 경지 등 아홉 곳의 경지가 여기에 해당한다. ‘세 번째 과는 여섯 경지에 있다’고 한 것은 아나함과(阿那含果)는 여섯 경지를 거두어들이는 과임을 말한 것인데, 무색계를 제외한 나머지 여섯 경지가 그것이다. ‘두 가지는 미래선에 의지한다’고 한 것은 수다원과와 사다함과는 미래선에 속하는 것임을 말한 것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아직도 욕계를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문】그 과보의 자취에는 어떤 모습이 있습니까?
【답】 믿음 따라 수행하는 모든 법문은 번뇌는 없지만 근기는 둔하고 법 따라 수행하는 모든 법문은 번뇌도 없고 빠른 모습 이룬다.
028_0343_a_07L答曰:
隨信行諸法, 無煩惱鈍根, 隨法行諸法,
無煩惱速相。
‘믿음 따라 수행하는 모든 법문은 번뇌는 없으나 근기는 둔하다’고 한 것은 믿음 따라 수행하는 사람은 자신의 무루법의 연한 부분에 속하는 사람으로 둔한 믿음의 수행인에 속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믿음으로 해탈하여도 역시 해탈에 속한다. 그러나 그 근기는 굳세지 못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법 따라 수행하는 모든 법문은 번뇌도 없고 빠른 모습이다’고 한 것은 법 따라 수행하는 사람은 자신이 지닌 법이 근기가 영리한 부류에 속하는 까닭에 빠른 모습이 그에게 속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견도(見到)의 경지에 이르게 되며 때를 기다리지 아니하고, 해탈의 법도 역시 거기에 속하게 됨을 알아야 한다. 왜 그런가? 그 근기가 영리하기 때문이다.
저 근본 사선 중에서는 이것은 즐겁게 통과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얻은 것이 작고 어렵기 때문에 나머지는 고라고 말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028_0343_a_16L彼禪根本中, 當知是樂通, 小及難得故,
當知餘說苦。
‘저 근본 사선 가운데서는 이것을 즐겁게 통과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한 것은 근본 사선의 경우 근기가 연약하건 근기가 영리하건 즐겁게 통과한 자취임을 알아야 한다. 지관(止觀) 등으로 득도하였기 때문이며, 또한 즐겁게 수행한 것이기 때문이다. ‘얻은 것이 작고 얻기도 어렵기 때문에 나머지는 고통이라고 설명했음을 알아야 한다’고 한 것에서 나머지[餘]라고 한 것은 무루의 경지에 포함되는 도(道)를 말한 것이며 고통[苦]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 도가 적기 때문이다. 이른바 미래선(未來禪)이나 중간선(中間禪)의경우지(止)의도가적고무색정(無色定)에서는 관(觀)이 적다. 무루를 미래선에서는 얻기 어렵다. 왜 그런가? 세간선(世間禪)도 미래선으로부터 얻기 때문이며 그것을 얻는 까닭에 닦기 쉬운 선정이다.
028_0343_b_02L중간선의 경우는 한 경지와 다른 한 경지의 중간에서 일어나는 마음과 마음의 작용이 제거되고 끊어진 현상이 눈앞에 나타난다. 즉 각지(覺支)의 작용이 끊어진 상태가 눈앞에 나타나면 마치 나무로 나무를 자르는 것과도 같은 모습이 된다. 무색계의 선정은 미세하여 성취하기 어렵고 오음을 전환시켜 번뇌를 끊고 사음(四陰)이 바뀌어진 것이 눈앞에 나타난다. 그 경지의 어려움이 이와 같이 얻기 어렵기 때문에 난(難)이라고 말한 것이다. 성인의 도가 아닌 고통은 그 자체의 본질은 고통이 아니며 외부에서 받는 영향과 서로 호응하는 고통이다. 이 가운데서 뛰어난 도(道)가 건립되며 열반이라는 이름의 성(城)으로 들어가는 길이 되기 때문에 적(跡)이라는 뜻으로 표현한 것이다. 【문】허물어지지 아니하는 청정[不壞淨]이란 어떤 것입니까?
【답】 부처님과 성문승(聲聞乘)의 법에서는 해탈도 역시 남아 있는 인연과의 청정무구한 믿음이니 성인의 지계(持戒)를 결정법(決定法)이라 한다.
028_0343_b_09L答曰:
佛及聲聞法, 解脫亦餘因, 淸淨無垢信,
聖戒謂決定。
‘부처님과 성문법에서는 해탈도 남은 인연과의 청정 무구한 믿음이다’라고 한 것은 일체종지(一切種智)로 이룬 정각(正覺)은 보리를 얻은 부처님의 지혜다. 그것은 아라한(阿羅漢)이 거둔 공덕의 불법이다. 알지어다. 그 가운데서 만약 번뇌 없는 믿음을 얻는다면 그것을 이름하여 부처님의 허물어지지 아니하는 청정함이라고 한다.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전수 받아 바른 길을 얻었다면 그것은 결정코 성문승(聲聞乘)에 속한다. 알지어다. 그 가운데서는 배울 것이 남아 있는 사람이건 더 배울 것이 없는 사람이건 그들이 얻은 것은 성문(聲聞)의 법이다. 만약 그들에게 번뇌 없는 믿음이 이루어졌다면 그것은 스님의 허물어지지 아니하는 믿음[僧不壞信]에 속한다.
만약 열반의 길에서 번뇌 없는 믿음을 이루어 다른 유위(有爲)의 법문 가운데서 이 법륜(法輪)을 굴릴 경우 만일 고제(苦諦)나 집제(集諦) 등에서 믿음이 이와 같이 번뇌의 침입이 없다고 한다면, 이것은 보살이 이루는 공덕에 속한다. 배울 것이 남아 있건 더 배울 것이 없는 사람이건 벽지불(淪支佛:緣覺)의 법문에서는 모든 법 가운데서 허물어지지 아니하는 믿음을 이룬다. 그들은 고제(苦諦)ㆍ집제 가운데서는 바른 믿음의 청정을 이루고, 멸제(滅諦)ㆍ도제(道諦) 가운데서는 희구(希求)하는 믿음을 이루어 번뇌의 침입 없는 지계(持戒)와 성인의 도(道)가 함께 생겨나서 네 번째의 허물어지지 아니하는 청정[不壞淨]을 이룬다. 어찌하여 허물어지지 아니한다 표현하는가? 결정적인 진리를 알고 나서 청정한 믿음을 이룬 까닭에 허물어지지 아니하는 믿음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028_0343_c_02L【문】어디에서 허물어지지 아니하는 것을 알게 됩니까? 【답】사성제(四聖諦) 가운데서 알게 된다. 【문】어찌하여 번뇌의 침입 없는 것을 허물어지지 아니하는 믿음이라 합니까? 【답】결정적인 지혜인 까닭에 그것은 실상의 지혜이며, 이 지혜와 함께 번뇌의 침입 없는 믿음이 생긴다. 또한 결정적인 지계(持戒)도 생기는 것이다. 번뇌의 침입이 있는 믿음[有漏]이란 능히 도를 가로막고 부처님을 속이고 나무라며 믿지 아니한다. 이 경우 계율을 지키건 파계(破戒)를 하건 결과적으로 부처님을 속이고 나무라고 불법을 가로막는다. 무루(無漏)에서는 능히 불도를 가로막고 속이고 꾸짖는 일은 생기지 아니한다. 그런 까닭에 결정적으로 무루인 허물어지지 아니하는 믿음과는 차별이 있다. 【문】선정(禪定)을 닦는 데는 어떤 모습이 있습니까?
【답】 초선에서 만약 선(善)함이 있다면 법의 즐거움에 머무는 선정임을 알아야 한다. 생사의 지혜 얻는 것을 말하며 이것을 지견(知見)이라 부른다.
028_0343_c_06L答曰:
初禪若有善, 當知現法樂, 謂得生死智,
是說名知見。
‘초선에 만일 선함이 있다면 법의 즐거움에 머무는 선정임을 알아야 한다’고 한 것은 정선(淨禪)과 무루 초선(無漏初禪)의 경지에서는 현재의 법의 즐거움에 머무는 선정을 말한 것이며, 이것을 선정을 닦아 현재의 법의 즐거움을 얻은 사람이라고 부른다. ‘생사의 지혜 얻는 것을 말하며 이것을 지견이라고 한다’고 한 것은 생사의 지혜에 달통하게 되면 이것을 선정을 닦아서 얻은 지견(知見)이라고 말한다.
지혜로 분별함은 방편으로 생긴 공덕임을 알아야 한다. 금강유정의 사선(四禪)을 누진지(漏盡智)라 부른다.
028_0343_c_12L慧分別當知, 方便生功德, 金剛喩四禪,
是名爲漏盡。
‘지혜로 분별함은 방편으로 생긴 공덕임을 알아야 한다’고 한 것은 수행하는 사람이 지닌 방편으로 생긴 공덕에서부터 욕계에 존재하는 가르침ㆍ계율ㆍ듣고 생각하고 닦아서 얻은 공덕과 삼계(三界)에서 그 존재하는 곳에 따라 유위든 무루든 그 모든 공덕을 선정을 닦아 얻은 분별하는 지혜라 표현한다. ‘금강유정의 사선을 이름하여 누진지라 한다’고 한 것에서 금강유정(金剛喩定)이라 하는 것은 최후의 배울 것이 남아 있는 사람의 마음이며 그것이 그의 권속(眷屬:수반하는 작용)들과 서로 호응하여 제4선의 선정에 이르게 되면 번뇌의 침입이 다하게 되는 까닭에 이것을 선정을 닦았다[修定]라고 말한다.
028_0344_a_02L이것은 부처님이 스스로 자기의 공덕을 설하시면서 염부제주(閻浮提洲)의 나무 그림자 속에서 초선(初禪)에서 정수(正受)에 들어가서 거기에서 법의 즐거움에 머무는 경지를 보시고 열한 번 일어났던 번뇌를 청정한 천안(天眼)의 지혜로 보게 되었다고 하셨으며, 자세한 내용은 ‘부기라경(趺祈羅經)’의 설명과 같다. 그 경에서 설명하기를 “생명을 부여받아 태어나는 것이 이와 같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 말씀 등이 지혜의 분별[慧分別]을 말씀하신 것이다. 제4선의 위없이 바르고 진실한 도에 근거하여 번뇌의 침입이 다한 경지를 증험하게 된다.
【문】여의족(如意足)이란 어떠한 자성(自性)을 지니고 있습니까?
【답】 선한 유위(有爲)의 모든 법은 방편으로 일으킨 법이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여의족이며 이 또한 정소(正燒)라 한다.
028_0344_a_03L答曰:
善有爲諸法, 方便之所起, 佛說如意足,
是亦說正燒。
‘선한 유위의 모든 법은 방편으로 일으킨 것이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여의족’이라고 한 것은 만약 그것이 방편으로 일으킨 법문일 경우 이미 말했듯이 그것은 모두 뜻대로 되는 그릇이기 때문에 이것을 여의족(如意足)이라 부른다. 자기 마음이 자유자재로 온갖 공덕을 일으켜 생각한 대로 충족된 공덕을 성취하는 것을 여의족이라 이름한 것이다. 이 만족[足]을 구성하는 여러 가지 요소의 인연은 동일한 내용을 지니고 있다. 왜 그런가? 그것은 삼매를 뜻하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불어난 네 가지의 차별이 있으니, 가령 욕구가 불어나 생긴 삼매는 욕삼매(欲三昧)라 부르고 이와 같이 정진하는 마음이 불어나 생긴 삼매는 간택삼매(簡擇三昧)라 부른다.
처음 욕망이 일어났기 때문에 그 욕망이 불어나게 되고 욕망이 생긴 뒤 욕망으로 구하던 것을 얻게 되었기 때문에 정진하게 되며 정진으로 선정이 불어나 정진을 일으키고 나서 그 정진을 버리지 아니하고 거기에 순응하여 취향하는 마음을 심정(心定)이라 부른다. 이것은 정진하고자 하는 마음의 도리가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여의족이 갖추어진 몸 가운데 최후의 삼매인 까닭에 이것을 의삼매(義三昧)라 부른다. 여기서 만약 남은 이 한마음이 모든 것을 성취하는 선정을 가려 선택하지 아니한다면 모든 마음 가운데서 선정이 생기기 때문에 방편의 차별이 생기고 그것이 불어나고 자라나기 때문에 다른 공덕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
028_0344_b_02L‘이 또한 정소라고 말한다’는 것은 여기서 이와 같이 설명한 공덕을 또한 올바른 불태움[正燒]이라고도 말한다는 것이다. 도리에 의지하여 능히 번뇌를 불사를 수 있기 때문에 올바른 불태움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혹 경우에 따라서는 능히 번뇌를 끊을 수 있기 때문에 정단(正斷)이라 표현하기도 하고, 결정적으로 바른 길에 들어가기 때문에 정승(正勝)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것이 허물과 악을 버리고 공덕이 생겨 그 공덕을 지키고 보호하여 불어나고 자라나게 하여 업(業)을 채찍질하고 독려하게 되면 이것을 정진정승(精進正勝)이라 표현한다. 거기에는 네 가지 업의 차별이 있기 때문에, 한마음에서 세워진 정진이 능히 네 가지 업을 짓게 된다. 즉 현재의 번뇌는 끊을 수 있게 되고 미래의 번뇌는 생기지 아니하며 선(善)한 법에 수용되어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게 되며, 그런 까닭에 태어난 뒤에도 전생의 업을 이어 방편의 힘을 잃지 아니하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도 역시 네 가지 차별이 있다.
거기서도 또한 염처(念處)라 말하며 또한 네 가지 성종(聖種)이라고 말한다. 그 세력이 생기는 곳을 따라 그것으로 이것의 이름을 짓는다.
028_0344_b_04L彼亦說念處, 亦說四聖種, 隨其勢力生,
以彼名說彼。
‘저것도 염처라 말하며 또한 네 가지 성종이라고 말한다’는 것은 전에 말한 공덕에서 염처(念處)를 설명한 내용은 경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즉 신념처(身念處)ㆍ수념처(受念處)ㆍ심념처(心念處)ㆍ법념처(法念處) 등 안팎이 함께하는 독자적인 모습이나 공통된 모습을 염처라고 부른다. 거기에는 네 가지 인연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며, 또한 모든 인연의 분수와 한계에 차별이 있기 때문에 신염처(心念處)는 몸에만 인연하며 다른 법은 아니다. 이와 같이 수념처(受念處)로는 수념처만을 말하며 다른 마음의 염처는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또한 심념처로는 심념처만을 말하며 다른 것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법념처의 경우는 두 가지 다른 법의 인연이 있다. 상음(想陰)과 행음(行陰)으로 얻는 유위(有爲)의 인연과 허물어지는 인연이 있으며 몸으로 받아들이고 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이와 같은 따위로부터 마침내 모든 법의 인연에 이르기까지가 법념처에 해당된다. 【문】성종(聖種)이란 무엇입니까? 【답】성종도 역시 이와 같다. 거기에서 말하는 공덕을 또한 성종이라 말한다. 성인은 이것을 씨앗으로 삼기 때문에 성종이라 이름한 것이다. 이 법문은 그 자체의 본질이 성인이 될 씨앗이 되므로 성종이라고 말하는 것이며, 이 씨앗 가운데서 성인이 태어나는 까닭에 성종이라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네 가지 애욕이 생기는 것을 상대적으로 치유하는 까닭에 네 가지로 구별해서 설명하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의복(衣服)으로 인해서 애착하는 마음이 생기는 등이 그것이며 더 자세한 설명은 경에서 설명한 내용과 같다.
028_0344_c_02L【문】어찌하여 이 공덕을 여의족 내지는 네 가지의 정단(正斷) 등이라 합니까? 【답】그 세력을 따라 생기므로 저것으로써 저것을 설명하느니라. 즉 이 법은 선정의 힘으로 생기는 까닭에 여의족이라 표현하였고, 정진하는 힘으로 생기는 까닭에 정단(正斷)이라 말하였으며 염원이 불어나는 까닭에 염처라고 말하고, 만족을 아는 마음이 불어나고 생기기 때문에 성종이라 말한다. 이상으로 이미 보리(菩提)를 돕는 부분을 설명하여 마쳤으니, 지금부터는 이 스스로 지닌 모습이 공통되는 것을 설명하겠다.
부처님의 말씀에 따르면 삼십칠도품(三十七道品)은 보리(菩提)를 돕는 부분적인 법문이다. 그 명칭에 서른일곱 가지가 있는데 그 가운데는 일과 관련되는 것이 열 가지이며 그 가운데 믿음 등의 내용은 게송에서 결집시킨 내용과 같다. 그 가운데 믿음의 뿌리[信根]와 믿음의 힘[信力]을 여기서는 믿음이라 표현하였다. 또한 바른 단절[正斷]ㆍ정진하는 근기ㆍ정진하는 힘ㆍ정진하는 각지(覺支)ㆍ바른 정진 등을 여기서는 정진이라고 표현하였다. 또 염원하는 근기[念根]ㆍ염원하는 힘[念力]ㆍ염원하는 각지[念覺支]ㆍ바른 염원[正念] 등을 사념처(四念處)라고 부른다.
지혜의 뿌리ㆍ지혜의 힘ㆍ법을 선택하는 각지(覺支)ㆍ바른 견해, 이러한 것들을 여기서는 혜(慧)라고 표현하였다. 또 희지(喜支)ㆍ낙지(樂支)ㆍ사지(捨支)ㆍ각지(覺支)ㆍ바른 생각ㆍ지계(持戒), 이것은 팔정도(八正道) 가운데 정어(正語)ㆍ정업(正業)ㆍ정명(正命)에 해당된다. 또한 여의족(如意足)ㆍ정근(定根)ㆍ정력(定力)ㆍ정각지(定覺支)ㆍ정정(正定) 등 팔지(八支)는 정지(定支)에 속한다. 【문】왜 이와 같이 많이 종류로 설명해야 합니까?
【답】 처한 장소 방편은 한마음이며 무디고 날카로운 것도 또한 그렇다. 견도(見道)가 또한 수도(修道)라 그런 까닭에 삼십칠도품을 말하노라.
028_0344_c_15L答曰:
處方便一心, 軟及利亦然, 見道亦修道,
故說三十七。
‘처한 장소[處]’라고 한 것은 직접 인연이 있는 곳이기 때문에 사념처(四念處)를 말한것이다. ‘방편(方便)’이라 한 것은 바른 방편, 즉 정단(正斷)을 말한 것이다. ‘한마음’이라 한 것은 한마음 가운데 머무는 곳을 말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것은 여의족을 말한 것이다. 연약한 근기가 이어져 나타나는 것을 근(根)이라고 부른다. 이로운 일도 역시 근기가 영리한 것이며 그 근기가 이어져 나타나기 때문에 이것을 힘[力]이라고 부른다. 그 가운데 불어나는 것이 근(根)이 지니고 있는 내용이다. 다른 것이 능멸할 수 없는 능력을 힘이라고 표현한다. 견도(見道)의 위치는 견해를 얻게 되기 때문에 도의 일부분이라고 표현하고 수도(修道)의 위치에서는 도를 보는 까닭에 각지(覺支)라고 표현한다.
028_0345_a_02L‘서른일곱 가지를 설명한다’고 한 것은 이 열 가지 법문에 각각 업의 차별이 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삼십칠도품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가운데 각지에 속하는 것은 오로지 무루(無漏)며 나머지는 유루의 경우도 있고 무루의 경우도 있다. 【문】도품에는 어찌하여 유루가 있고 보리(菩提)는 무루라 합니까? 【답】그것은 보리를 얻을 그릇이며, 보리에 따라가는 권속이다. 그런 까닭에 이것을 보리분(菩提分)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이와 같이 이 가운데서 보리와 인연이 먼 것은 유루에 해당되며 보리를 따라가는 까닭에 보리분이라 표현하며 그런 까닭에 그것은 무루이다.
이선(二禪)은 삼십륙도품(三十六道品)이요 미래선도 또한 그렇다. 삼선ㆍ사선 및 중간선은 모두 삼십오도품이니라.
028_0345_a_06L二禪三十六, 未來禪亦然, 三四及中閒,
是悉三十五。
‘이선은 삽십륙도품’이라 한 것은 정사유(正思惟)를 제외한 서른여섯 가지 도품을 말한 것이다. 왜 그런가? 이 경지에서는 각관(覺觀)이 없기 때문이다. ‘미래선도 또한 그렇다’고 한 것은 미래선도 역시 희각지(喜覺支)를 제외한 삼십육도품만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아직 성취하지 못한 까닭에 기쁨이 없다는 것은 내가 이미 앞에서 설명한 일이다. ‘삼선ㆍ사선과 중간선도 모두 삼십오도품이다’라고 한 것은 제4선과 제3선 및 중간선에서는, 칠각지 가운데서 희각지(喜覺支)와 팔정도(八正道) 가운데서 정사유(正思惟)가 제외되는 것을 말한 것이다.
초선에서는 모든 도품을 말하고 삼공(三空)1)에서는 삼십이도품 말하며 유정천에서는 이십이도품 말하나니 욕계도 또한 그렇다.
028_0345_a_13L初禪說一切, 三空三十二, 有頂二十二,
欲界亦如是。
‘초선에서는 모든 도품을 말한다’고 한 것은 초선 가운데서는 삼십칠도품이 모두 해당됨을 말한 것이다. ‘삼공에서는 삼십이도품이다’라고 한 것은 칠각지(七覺支) 가운데서는 희각지(喜覺支)가 제외되고, 팔정도(八正道) 가운데서 정사유(正思惟)ㆍ정어(正語)ㆍ정업(正業)ㆍ정명(正命)이 제외된 것을 말한다. ‘유정천에서는 이십이도품’이라고 한 것은 이 하늘에서는 각지(覺支)와 도지(道支)가 없기 때문에 이십이가 되는 것이다. 유정천에서는 어느 곳을 따라 각지나 정도(正道)를 말하겠는가? 그러나 그 가운데도 유루ㆍ무루의 구별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욕계도 이와 같다’고 한 것은 욕계에도 역시 스물두 가지 도품이 해당됨을 말한 것이며 오로지 유루(有漏)의 경지만 있으니, 욕계의 두 곳이 오로지 유루이기 때문이다. 【문】사식(四食)이라 하는 것은 어느 경지, 어떤 성질의 음식입니까?
【답】 여러 음식 가운데 단식(摶食)은 욕계의 음식이며 삼입(三入)을 말한다. 식식(識食)ㆍ사식(思食)ㆍ촉식(觸食) 이 음식은 유루(有漏)를 말한다.
028_0345_a_22L答曰:
諸食中摶食, 欲界說三入, 識食及思觸,
是食說有漏。
028_0345_b_02L ‘모든 음식 중에 단식은 욕계의 음식이며 삼입을 말한다’고 한 것은 단식은 욕계의 향기ㆍ맛ㆍ감촉이 있는 음식을 뜻한다. 이에 관련되는 일이 열세 가지가 있으며, 그 가운데 열한 가지는 감촉[觸]과 관련된 일이다. 즉 사대(四大)와, 일곱 가지 조색(造色:사대의 화합물)이니, 이른바 껄끄럽고 매끄럽고 무겁고 가볍고 차고 목마르고 배고픈 것, 그리고 냄새와 맛이 있으니, 이것이 모두 열세 가지이다.
【문】무슨 까닭으로 색과 소리는 음식이 아닙니까? 【답】보고 듣는 것은 불어나고 자라나는 것이 아니다. 육근(六根)을 만족시켜 주고 크게 도움을 주는 것이 음식이 지닌 뜻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혹 보고 들음으로써 함부로 분별하는 힘이 생기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즐겁게 받는 감촉에서는 기쁨이 생긴다. 그 기쁨은 육근과 사대(四大)를 윤택하게 하고 이익되게 할 수는 없다. 그런 까닭에 감촉이 음식으로써 능히 이익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색ㆍ소리ㆍ향기ㆍ맛 등의 분별하는 것이 아니면서 또한 능히 몸을 도와 이익되게 할 수 있는 작용인 것이다.
‘식식과 사식 이 음식은 유루이다’라고 한 것은 인식작용과 생각하는 일과 감촉 이것은 유루의 세계에 있는 일이다. 그것이 지속적으로 생겨 이어지면 사람을 속박하고 능히 번뇌를 끌고 올 수 있는 까닭에 이것을 음식[食]이라 표현한 것이다. 무루(無漏)의 세계에서는 감촉작용이 비록 육근(六根)과 사대(四大)를 이익되게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번뇌를 끌고 올 수는 없기 때문에 이 번뇌를 제거하고 단멸하게 되니, 이는 음식이 아니다.
음식이라는 것은 세 가지 일이 있기 때문에 음식이라고 한 것이다. 즉 능히 다음 세상에 태어날 몸을 끌고 올 수 있고, 끌고 온 뒤에는 다시 또 끌어와 자기 몸에 거두어들여 간직하게 되기 때문에 음식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 내용은 생각과 인식작용은 미래의 존재, 번뇌를 끌고 오고 단식(摶食)과 촉식(觸食)은 생긴 뒤에는 모든 번뇌를 거두어 간직하게 된다. 또 경우에 따라서는 혹 모든 음식[四食]이 모두 번뇌를 끌어올 수도 있고 모두가 육근에 거두어들여 간직할 수도 있다. 【문】앞에서 말씀하신 여러가지 삼매(三昧)는 어떤 것이 삼매며 몇가지 속박이 있습니까?
【답】 무원(無願)의 열 가지 행상(行相)과 공삼매(空三昧)의 두 가지 행상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네 가지 행상에서는 무상(無相)을 말하나니 이것을 성행(聖行)이라 하느니라.
028_0345_b_19L答曰:
無願有十行, 空二行當知, 四行說無相,
是說爲聖行。
‘무원의 열 가지 행상’이라는 것은 무원삼매는 모두 열 가지 행상으로 설명된다. 이것은 삼제(三諦)를 연(緣)하기 때문에 열 가지 행상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즉 고제(苦諦) 가운데서 무상(無常)과 고(苦)의 두 행상이 있고, 집제(集諦) 가운데 네 가지 행상2)이 있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한 내용과 같으며, 도제(道諦) 가운데의 네 가지 행상3)도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028_0345_c_02L【문】왜 멸제(滅諦)와는 연하지 아니합니까? 【답】멸제에서는 원하고 구하지 아니하는 까닭에 무원(無願)이라 부른다. 이는 구하는 것을 즐기지 아니한다는 뜻이다. 원하지 아니하는데 무엇이 고통이라 하겠는가? 그 원인이 다하였으니, 그것이 무(無)이다. 그런 까닭에 그 원인도 역시 버리게 되고 그것으로 인하여 도를 닦는 일도 다하게 되기 때문에 이것이 도제(道諦)와 인연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 선정은 고제(苦諦)로 연유하여 도제(道諦)와 인연하게 되고 멸제와는 인연하지 아니한다. 혹 또는 이것을 유위(有爲)의 세계에서 원하지 아니하는 까닭에 삼제(三諦)와 인연한다고 설명할 수도 있다. 이 경우 도제를 닦는다는 것은 쓴 약을 복용하는 일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이 풀이하면 공삼매(空三昧)의 두 가지 행상도 곧 알 수 있을 것이다. 신견(身見:몸에 대한 집착)을 가까이서 상대적으로 치유하는 까닭에 공삼매에 두 가지 행상이 있는 것이다. 무엇무엇이 두 가지 행상인가? 공ㆍ무아(無我)의 두 가지 행상이 그것이다. 신견(身見)으로 아집(我執)을 취하게 되고 그리하여 아집으로 행하게 되는 편견이 생긴다. 이 아집을 상대적으로 치유하는 까닭에 무아의 행상을 말하게 되고 아소(我所), 즉 나의 소유물이라는 집착을 상대적으로 치유하는 까닭에 공(空)의 행상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 그 법문에 아집이 없다면 그런 까닭에 나에게도 아집이 없어지는 것이다.
‘네 가지 행상에서 무상을 설한다’고 한 것은 무상삼매(無相三昧)는 멸제(滅諦)의 네 가지 행상으로 전환되는 삼매다. 여기서는 유위(有爲)의 행이 제외되고 오직 법의 행상에만 인연하게 되는 것을 무상이라 말한다. 여기에서는 해탈의 문을 뚜렷하게 지시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이것은 오로지 무루(無漏)의 삼매이다. 【문】전도(顚倒)는 어떤 것이며 어떤 자체의 본질을 끊어야 합니까?
【답】 그것은 사전도(四顚倒)를 말하며 고제(苦諦)를 봄으로써 끊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거기에서 불어나는 편견 실상을 본 사람 이를 없애고 새로운 견해 세운다.
028_0345_c_15L答曰:
謂彼四顚倒, 當知見苦斷, 於彼增上見,
見實者廢立。
‘저것은 사전도를 말하며 고제를 봄으로써 끊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고 한 것은 모든 네 가지 거꾸로 된 견해는 고제(苦諦)에 근거하여 변화해 간다. 그런 까닭에 고제의 실상을 보고 이를 완전히 끊게 되며 이것은 세 가지 견해 가운데서 설명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거기에서 불어나는 편견’이라고 한 것은 이 네 가지 거꾸로 된 견해에서 세 가지 견해의 극히 일부분은 자성(自性)을 보는 견해이다. 경에서는 생각하는 마음이 탁한 까닭에 상상하는 마음의 전도[想心倒]를 말하고 있다. 이것은 곧 진실을 본 사람은 그 거꾸로 된 견해를 버리고 바른 견해를 세우게 된다. 왜 그런가? 불어난 편견[增上見] 가운데 만약 더욱 불어나게 되면 이와 같은 편견의 힘으로 거꾸로 된 견해가 건립된다. 가령 사덕(四德) 가운데 아덕(我德)에 대한 거꾸로 된 견해는 아(我) 즉 구속되지 아니한 나의 본성으로 본 견해가 아니다. 이와 같이 변견(邊見:한 쪽 가장자리에 집착한 견해)은 상덕(常德)에 대한 거꾸로 된 견해이며, 결코 그것은 단견(斷見)이 아니다. 또한 견취견(見取見:잘못된 견해를 정당하다고 집착하는 일)은 정덕(淨德)ㆍ낙덕(樂德)에 대한 거꾸로 된 견해이다.
028_0346_a_02L【문】누가 증상견을 지닌 사람입니까?
【답】추측으로 건립되는 것은 오로지 전도된 견해이다. 그런 까닭에 전도된 망상으로 그는 이와 같이 상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모든 견해가 거꾸로 된 견해는 아니다. 사견(邪見)ㆍ단견(斷見)은 비록 충분히 검토가 미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오로지 거꾸로 된 견해다. 계율을 허무는 일에서 전환하여 계취견(戒取見)이 건립된다. 그러므로 미루어서 건립된 견해라 해서 오로지 전도된 견해만은 아니다. 부분적인 청정[少淨]을 취하는 것은 승견(勝見)이 아니다. 승견이란 부분적으로 뛰어난 것을 취하는 것이 승견이다. 아견(我見)의 힘으로 아소(我所:나의 소유라 집착하는 일)가 건립된다. 그런 까닭에 아소의 견해에서는 전도는 건립되지 않는다. 【문】부처님께서는 육십이견(六十二見)과 같은 많은 견해를 설법하셨습니다. 그러한 견해는 무슨 견(見)에 속합니까? 【답】다섯 견해에 포함된다. 【문】그것은 어떤 것입니까?
【답】 진실을 비방하는 것 이 견은 사견이라고 말한다. 실상이 아닌 곳에서 건립되는 두 가지 견해와 이 지혜로다.
028_0346_a_10L答曰:
誹謗於眞實, 此見說邪見, 非實而建立,
二見及是智。
‘진실을 비방하는 것 이 견은 사견이라 말한다’고 한 것은 만약 편견에 사로잡혀 진실을 비방하고 내용이 있는 것을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며, 베푸는 것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등의 견해를 지닌다면 이것이 사견(邪見)에 해당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실상이 아닌 곳에서 건립되는 두 가지 견해와 이 지혜이다’라고 한 것은 음(陰) 가운데서 진실이 아닌 것을 나의 소유물[我所]이라고 집착하여 건립된 신견(身見)이나, 또한 진실이 아닌데도 낙덕(樂德)ㆍ정덕(淨德)이다라고 거꾸로 생각하여 건립된 견취견(見取見)이나 나머지 진실이 아닌 것에 건립된 견해의 경우 그것은 마치 말뚝이 세워진 것을 보고 사람이 서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일이며, 이는 사지(邪智) 즉 잘못된 지혜며 결코 사견(邪見)이 아님을 말한 것이다.
또한 지계(持戒)의 위의(威儀) 취하고 인(因)이 아닌데도 인이라 보거나 변견(邊見)을 거두어 받아들임은 상견(常見)ㆍ단견(斷見)에 근거함일세.
028_0346_a_18L又戒威儀取, 非因而見因, 若攝受邊見,
依常見斷見。
‘또한 지계의 위의 취하고 인이 아닌데도 인이라 한다’고 한 것은 예를 들면 자재천의 인연이나 우계(牛戒:外道에서 소의 행동을 본뜬 계율) 등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또한 아무 인연 없이 하늘 세계에 태어나고 윤회하던 끝에 해탈하게 된다라고 설하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변견을 거두어 받아들임은 상견과 단견에 근거함이다’라고 한 것은 만약 모든 행이 영구불변이라고 본다면 이것을 상견(常見)이라 부른다.
028_0346_b_02L또 상(常)이란 측면에서 말할 경우 인과의 연속성을 모르는 사람이 그런 까닭에 어떤 일 가운데서 그 일은 단멸된다는 견해를 세우게 된다. 이것을 단견(斷見)이라고 부른다. 이 두 가지 견해를 가장자리의 견해를 받아들인 사람이라 표현한다. 이 두 가지 편견을 제외하면 다른 편견은 없다. 그런 까닭에 모든 편견에 들어오는 것은 이 편견 가운데 있음을 곧 알게 되는 것이다. 【문】이 견해는 어떻게 끊으며 어찌하여 끊지 못합니까?
【답】 진실을 비방하면서 세워졌고 편견으로 인하여 두 가장자리에 근거하니 이 일을 따라 굴러가는데 만약 그 사실을 깨달으면 이 편견 끊을 수 있다.
028_0346_b_05L答曰:
誹謗而建立, 因見依二邊, 隨於此事轉, 若見彼則斷
진실을 비방하는 것이 사견임은 이미 설명하였다. 만약 고제(苦諦)를 비방하다가 그가 고통받는 모습을 보게 되면 사견(邪見)이 단절된다고 말한 것이다. 이와 같이 집제(集諦)에서 건립되는 진실이 아닌 견해가 두 가지 있다. 그의 몸이 고통 속에 있음을 보게 된다면 여기서 고제를 보고 사견을 끊는 일이 건립된다. 견취견(見取見)의 경우는 가령 고제를 보고 사견이 끊어졌을 경우 낙(樂) 등의 전도망상이 세워진다. 그런 까닭에 고제를 보고 고통이 끊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집제를 보고 사견을 끊는 일 등이 계취견이다.
만약 유루(有漏)의 세계에 근거하여 굴러갈 때 거기서는 고제를 봄으로써 사견을 끊어야 하고 또 만약 무루의 세계에 근거하여 굴러갈 때 거기서는 도제(道諦)를 봄으로써 사견이 끊어진다. 알지어다. 단견ㆍ상견은 고제에 근거하여 전환된다. 그런 까닭에 고제를 보고 끊는 편견에 속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