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속공자(滯俗公子)가 견정(甄正)선생에게 이같이 말했다. “저는 속세에 오랫동안 묻혀 살아 왔기에 생각이 대방(大方)을 알지 못하고, 말세에 태어났기에 마음이 통리(通理)에 어둡습니다. 보고 듣는 것을 게을리 하다가 갈림길에 부딪치면 머뭇거리면서 끝내 말에 체하고 현혹되어 평탄한 길에서도 자빠지는지라, 스스로 현혹된 것을 가슴에 품고 세월만 보냈습니다. 바라건대 손가락으로 남쪽을 알리고 소매로는 북쪽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자 선생이 책상을 치우고서 이같이 대답했다. “내 어려서 『시경(詩經)』과 『예경(禮經)』만을 익히다가, 장성하여서는 옛 전적(典籍)을 즐겼는데, 이에 탐닉하여 해를 거듭하며 살펴보아도 피곤한 줄을 몰랐다. 책에 실린 것이나 글자로 쓰인 것은 제왕(帝王)의 치도(治道)일 뿐이다. 무릇 거룩한 가르침의 문호는 시비를 환히 밝히지 못하면 비류(紕謬)를 상세히 가리지 못하기에, 오래도록 영대(靈臺)에 두고 살피면서도, 나를 벗하는 이 없는 것이 한스러웠는데, 그대가 지금 묻는 것도 말만 헛되게 하지 않겠는가?” 그러자 공자가 무릎을 꿇고서 이같이 말씀드렸다. “모름지기 일을 기록하는 서책이나 조(朝)ㆍ대(代)1)를 편력하는 사(史)는 옛사람의 찌꺼기를 전한 것인데, 참으로 선왕의 거려(蘧廬)2)를 이 같은 말세의 속인과 논한다고 하여 어찌 의논이 되겠습니까? 석가(釋迦)께서 자취를 남긴 법왕(法王)의 교화는 9류(流)를 뛰어넘어 독보하는 것인지라, 만 겁토록 우러러보아도 언사로는 그 경계를 새기지 못하고 어리석은 지혜로는 그 조짐조차 들여다보지 못하며, 휘황하기가 10경(景)이 청천에 빛나듯 하고, 도도하기가 9영(瀛)이 벽해에 파도치듯 합니다. 이는 대체로 세간을 벗어나는 성지(聖旨)인지라, 저의 짧은 혀로는 가늠할 수 없습니다. 대체로 도가(道家)를 가르침으로 베푼 것은 유래가 깊습니다. 그러니 황제(黃帝)의 서(書)에서 백양(伯陽)의 전(典)에 이르도록, 모두 수신(修身)하여 치국(治國)하는 요체이면서도, 연명하여 장수를 누리는 공로가 있고, 가만히 은둔하여 마음을 맑게 비우는 규약이 있고, 부드러우면서 태평스러운 덕망이 있고, 너그러우면서 강하게 하는 작용이 있고, 예봉(銳鋒)을 꺾어 분란을 풀어내는 공능이 있으니, 진실로 범부를 이롭게 하되 시정(時政)에 흐트러짐이 없으니, 우리나라가 세워진 것도 이에 비롯합니다. 근자에 오(吳)나라와 촉(蜀)나라가 강역(疆域)을 나누었고, 송(宋)나라와 제(齊)나라가 대통(大統)을 이었으나, 각기 천존(天尊)을 세워 교화의 주체(主體)로 삼았습니다. 경론의 말씀에 따르면, 천존이란 도법(道法)의 종가(宗家)이고 현문(玄門)의 극위(極位)인지라, 하늘과 사람이 모두 받들기에 천존이라 부릅니다. 조화(造化)가 이루어지는 원천인데다 음양(陰陽)이 시작되는 근본으로 천지를 낳고 건곤(乾坤)을 잉태하기에, 만물이 이를 바탕으로 형태를 세우면 삼광(三光)이 그것을 받아 모양을 이룬다 하는데, 그 말에 따르면 천존은 천지보다 앞선다고 합니다. 선생께서는 학문이 산봉우리처럼 넉넉한 데다 석실(石室)3)마저 겸하셨으며, 도는 유가와 역사를 갖추신 데다 식견과 변재가 세밀하십니다. 맑은 거울이 높이 매달려 오는 물건을 비추듯이, 큰 종을 두드리기를 기다려 바람 타고 흐르듯이, 이 깊은 의심을 터놓아 미혹한 이들을 돌이켜 주십시오.” 마침내 선생이 하늘을 쳐다보며 탄식하면서 이같이 말했다. “이처럼 어리석고 고집 센 중생이 어찌 그대뿐이겠는가? 들어와 앉으라. 내 그대에게 이를 한번 논해보리라. 대체로 도가(道家)를 가르침으로 삼은 것이 황제(皇帝)에서 비롯하여 백양(伯陽)에 이른다는 일이 참으로 그대의 말과 같다고 치더라도, 천존에 이르러서는 얼마나 허망하고 얼마나 그릇됐는지 그대는 잘 귀담아 듣거라. 내가 그대에게 이를 분석하여 논하리라. 대체로 우주의 바깥은 말로써 다다를 바가 아니기에 사람이 이를 알 도리가 없으나, 천지의 안은 귀와 눈이 이르는 곳으로 모두 상세하게 규명할 수 있다. 내가 서(書)ㆍ사(史)를 열람하다가 고인이 남긴 말이 간독(簡牘)에 기록된 것이나 한묵(翰墨)에 전해지는 것을 훑어보았으므로, 마땅히 그대에게 사적(史籍)에 근거하고 전기(典記)에 의지해서 말하겠노라. 『주역(周易)』의 「구명결(鉤命決)」에서는 천지가 갈라지기 전에 태역(太易)이 있었고 태초(太初)가 있었고, 태시(太始)가 있었고 태소(太素)가 있었고 태극(太極)이 있었기에, 이를 5운(運)이라 부른다고 한다. 이를 풀어 보면 기(氣)의 형상이 나뉘지 않은 것을 태역이라 부르고, 원기(元氣)가 바야흐로 싹트는 것을 태초라 부르고, 기가 형태를 바로잡는 것을 태시라 부르고, 형체가 변하여 바탕을 이루는 것을 태소라 부르고, 바탕과 형체가 모두 갖춰진 것을 태극이라 부른다. 5기(氣)가 차츰 변화하는 것을 5운이라 부르니, 이것은 기의 형태와 바탕이 갖춰져 서로 떨어지지 않은 것을 가리켜서, 모두 태역이나 태소 따위로 부르는 것이다. 또 『역위(易緯)』 「통괘(通卦)」에서는 역(易)에 태극이 있고, 이것에서 양의(兩儀)가 생겨나는데, 기(氣)가 맑고 가벼운 것은 위로 올라가 하늘이 되고, 기가 탁하고 무거운 것은 아래에 뭉쳐 땅을 이루기에, 천지가 화합하여 사람이 생겨나면, 사람을 이것에 보태어 삼재(三才)라 부른다고 한다. 또 『주역』「서괘(序卦)」에서는 천지만물이 있고 나서야 군신(君臣)이 세워지고 부자(父子)가 정해져서 장유(長幼)와 부부(夫婦)의 예법과 존비(尊卑)와 상하(上下)의 구별된다고 하는데, 이에 따르면태역(太易) 이전에는 기색(氣色)이 갈라지지 않았고, 형태와 형상이 나타나지도 않아 아득하게 혼돈된 ‘모양 없는 모양’이었으며, 이의(二儀)가 나누어지자 천지의 형태가 갖춰지고, 삼광(三光)이 명랑해져서 기의 형상과 바탕이 보이면, 마침내 음양이 교합하여 사람이 비로소 생겨났다고 한다. 이 이후에야 삼재가 드디어 갖춰졌다고 하는데, 여기에 서(書)와 기(紀)를 겸하여 풀어보면, 마치 손바닥을 가리키듯이 알 수 있다. 천존이 만약 원래부터 형색이 없다면, 태역 따위와 다를 바가 없어서 5운에 우선하여 생겨나지 못한다. 만약 형색이 있다면, 삼재의 안에 태어나야 할 것이며, 이도 태역에 우선하지도 못한다. 또 태극 이전에는 형태도 없고 형상도 없으므로 천존에게 형태가 있다는 것이 맞지 않음이 명확해지리라. 만약 태역과 기가 동일하다면, 태극에 이르른 다음에야 삼재와 함께 형태를 갖추어 생겨나야 하는데, 이것은 음양과 천지에서 생육되는 것인데 어찌 천존이 천지를 낳는다고 하겠는가? 이같은 이치를 잘 연구하면 헛되고 실한 것이 스스로 드러나리니, 따로 경(經)ㆍ사(史)에서 찾지 않아도 되리라.” 이에 공자가 두렵기도 하고 한편으로 놀랍기도 하여 이같이 말했다. “선생의 말씀처럼 참으로 허망하다면, 이는 단지 풍속이 사람을 바꾸었다는 것인데, 진흙탕에 빠져서 우매함만 늘었는데도, 어리석게도 이를 깨닫지 못하고 현혹되었습니다. 다시 의문나는 점을 여쭙고자 하니,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도가(道家)의 『영보경(靈寶經)』 따위에 따르면, 모두 천존의 말씀이라 하며, 부(部)ㆍ질(袟)이 모두 보존되어 있으므로, 근거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닙니다. 만약 천존이 없다면 경전의 가르침은 어디서 비롯하게 되겠습니까? 『영보경』에 실린 사적은 너무도 분명하기에 제가 다시 말해 보겠습니다. 경전에는 천존은 대라천(大羅天) 현도(玄都) 옥경산(玉京山)에 머물면서 허공의 청림(靑林) 가운데로 노닐거나, 채목(寨木)의 아래에 앉기도 하면서 삼청(三淸)의 상청(上淸)에 처하니, 9선(仙)을 총괄하는 우두머리이고, 조회(朝會) 때마다 백령(百靈)이 모이되, 그 품계가 만 가지나 되기에 그 신변(神變)의 기이함이 모두 경문에 열거되어 있습니다. 만약 아무런 영향(影響)도 없었다면, 어떻게 이같이 하였겠습니까? 고견을 듣고 싶사오니, 잠시나마 의심을 풀어주십시오.” 선생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그대가 미신에 빠져 든 것이, 어찌 이다지도 심한가? 그대에게 대략을 논하겠으니, 그대는 잘 듣도록 하거라. 대체로 거짓되게 말하면 안 되므로 말은 반드시 『예경(禮經)』에 의거해야 하고, 붓은 함부로 놀려서는 안 되므로 일마다 전적에 근거해야 한다. 『예경』에 실리지 않았다면 바르지 못한 얘기인 것을 알 수 있는데, 전적에 기록된 바도 없다면 실로 허무맹랑한 말이 된다. 겸상(縑緗:서적)은 징험할 수 있고 치소(緇素:승려와 속인)는 속이기 어렵기에, 마침내 가르침을 달리하여 외방(外方)에 두고 기이한 자취를 이 가운데 붙여서 사책(史策:기록)을 강구하여 명감(明鑑)의 임형(臨形)4)을 같게 하고자 제력(帝歷)을 구하였다.5) 만약 경중을 저울질하여 사물을 가늠해보면 무회씨(無懷氏)6) 이전에는 문자가 조합되지 못하다가 염황(炎皇) 이래로 서(書)와 기(紀)가 늘어났으니, 황제와 소호(少昊)의 대(代)와 전욱(顓頊)과 제곡(帝嚳)의 조(朝)와, 당요(唐堯)와 우순(虞舜)의 군(君)과, 하우(夏禹)와 은탕(殷湯)의 후(后)에 이르기까지, 그리고주무(周武)와 진양(秦襄)이래로 한(漢)ㆍ위(魏)ㆍ진(晉)ㆍ송(宋)의 이전까지 위로는 『상서(尙書)』와 좌전(左傳)이 있고,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와 황보밀(皇甫謐)의 『제왕기(帝王紀)』가 있고, 위요(韋耀)의 『통기(洞紀)』가 있고, 양엽(楊曄)과 배개(裴玠)의 서(書)가 있다. 역대로 서로 계승하여 연기(年紀)를 뚜렷이 하되, 큰 일은 기록하지 않은 것이 없고, 소소한 일마저도 실리지 않은 바가 없다. 선양(禪讓)과 전쟁(戰爭)의 제(帝)와, 순요(純澆)와 보취(步驟)의 황(皇)과, 신기(神祇)와 변현(變現)의 징표와, 재이(災異)와 상서(祥瑞)의 감응과, 용봉(龍鳳)과 구사(龜蛇)의 통감(通感)과, 어별(魚鱉)과 현시(贙兕)의 정령(精靈)에서 심지어 수목의 기괴(奇怪)함과 귀요이매(鬼妖魑魅)까지도 모두 기록하여 빠트린 것이 없는데, 어찌하여 천존만은 그 일이 상세하지 않은가? 천황(天皇)이 운(運)을 열어 제업(帝業)을 권여(權輿:사물의 시초)하는 것은 인황(人皇)의 연대로 아득하게 이어지되, 5성(姓)을 본종[宗本]으로 하였으니, 이에 72성이 파생되어 번창하되, 유소(有巢)와 수인(燧人)에 이르기까지 6기(紀) 96대 1백80만 2천7백60여 년을 거쳤다. 당시는 문자가 생겨나지도 않았고 풍속도 질박하였으며, 태호(太昊)에서 무회씨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16대이니, 합산하면 1만 7천7백83년간의 햇수이다. 3기(紀) 72선(禪)을 거쳐서 염제(炎帝) 신농씨(神農氏)로부터 황제의 자손에 이르기까지, 서로 18세(世)를 이어왔기에, 합산하면 1천5백30년간이다. 문자가 생겨나자 점차로 기록이 상세해지고, 이때부터 사관(史官)이 확립되어 겪은 대로 볼 수 있어서 여러 가지 방책(方策)이 구비되었으나, 천존의 이치는 아무리 열독하여도 들리는 바가 없다. 따라서 이로 미루어 보면 그 허망함을 밝히기 충분하다 하리니 다시 무엇을 의심내겠는가?” 이에 공자가 말했다. “선생께서 현하(懸河:폭포)처럼 변재에 능하시고, 끊이지 않고 말씀을 토하시니, 마음이 정갈하게 씻어지고 이목이 참신해집니다. 스스로 소리를 죽이고 숨을 삼킨 채 이치를 살피고 유현(幽玄)에 형통하더라도, 미신에 막힌 것이 너무 깊어서, 약간의 의혹이 없지 않습니다. 다시금 고견을 청하자니 부끄러운 마음만 앞섭니다. 재차 상세한 말씀을 청하고자 그동안 쌓인 우매함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도가(道家)의 가르침의 자취와 의지(義旨)가 몹시 많은 데다 법문(法門)의 명수(名數)나 사리(事理)가 적지 않습니다. 경전에도 36부의 명자가 있어서 모두 삼통(三洞)에 포함되는 데다, 옥자(玉字)ㆍ금서(金書)ㆍ은함(銀函)ㆍ요격(瑤格)ㆍ자필(紫筆)ㆍ주도(朱韜)마다 모두 나타내어 밝혔으니, 어찌 이 모두가 헛된 것이겠습니까?” 선생이 말했다. “그대가 근본에 현혹되더니, 이제는 또 말단에 현혹되는구나. 그대가 논한 것에서 약간만 보충하면 깨달을 수 있으리라. 도가의 경전은 모두 천존의 말씀이라 하나, 이는 주체가 본래 허망한 것임을 실토하는 것으로 가르침의 자취라는 것이 어찌 있을 수 있겠는가. 가죽은 털을 남기지 않는데, 어찌 이를 다시 붙이려 하는가? 비록 36부가 남아 있어도 모두 위서(僞書)이며, 그 무리가 삼통(三洞)이라 칭하더라도 모두 실다운 기록이 아니다. ‘옥자’와 ‘금서’는 날조된 가운데서 생겨난 허위이고, ‘은함’과 ‘요격’은 허구 속에서 꾸며진 허구이며, ‘자필’이란 명칭도 말을 왜곡시켜 망령되게 세운 것이다. ‘주도’의 설도 억지로 치장하여 헛되이 이름붙인 것으로, 그 같은 일을 말하여 비루한 백성을 현혹시키되 진실을 은폐하니, 이것도 허망하다고 할 수 있으리라. 도가에서 경전과 그 가르침을 천존의 계시라 주장하나 교주가 궁극적으로 있지 않으므로 경에 주체가 없이 설해진 것이 분명하다. 이처럼 경을 설하는 주체가 없다는 것이 허위의 단서임을 스스로 알아야 할 것이다. 반드시 근원을 캐고 원천을 따져야지, 어찌 번잡한 언사에 매여 애를 쓰는가? 그대가 아직도 미처 깨닫지 못하니, 끝내 분석하여 논하여야 하겠구나. 36부라 칭하는 것도 그 이치가 이러하다. 이 같은 이름은 불경에서 나온 것인데, 도사가 이를 근거로 창작하였다. 비루하고 우매한 무리들이 많으면 좋다고 여겨서 불경에는 12부가 있는데, 이에 24부를 더하여 모두 36부를 만들었다. 불법에서 안(眼)ㆍ이(耳)ㆍ비(鼻)ㆍ설(舌)ㆍ신(身)ㆍ의(意) 따위의 6근(根)의 염진(染塵)을 설하고, 이에 기인해서 죄명을 제정한다. 이어 6근의 매 근마다 6종(種) 법문(法門)을 열어서, 6곱하기 6은 36인 까닭에 36이라 표시하는 것을 보고는, 이같이 따라 호칭하더라도 그 이름만이 있을 뿐이지 끝내 그 이치는 없다. 매 부(部)의 내용마다 사리에 어긋나는 것도, 이것은 성인의 풀이가 아니라 망령되게 날조하였으니, 어찌 면밀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36부가 거짓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삼통이란 명칭도 불경의 삼장(三藏)을 모방하였으니, 삼통이란, 첫째를 ‘통진(洞眞)’이라 이르고, 둘째를 통현(洞玄)이라 이르고, 셋째를 통신(洞神)이라 이른다. 이 같은 것을 삼통이라 하는데, 여기서 통(洞)이란 통찰하여 밝게 깨닫는다는 이치이기에, 이 같은 세 부류의 경전을 익히면 도리를 밝게 깨닫게 되는 것을 말하고자 삼통이라 부른 것이다. 통진이란 불법의 대승경전을 배워서 법체(法體)의 실상(實相)을 풀어내는 것이고, 통현이란 이치를 설명하여 진실에 계합하는 것이고, 통신이란 부적ㆍ금방(禁方)ㆍ장표(章標)ㆍ초의(醮儀)의 부류이다. 지금 삼통의 경문을 조사해 보면, 오직 『노자』의 두 권이 통현의 목차에 약간 섭수(攝受)되었는데, 그 통진부(洞眞部)란 바로 영보(靈寶)이다. 경전의 숫자도 근대의 오(吳)ㆍ송(宋)ㆍ제(齊)ㆍ양(梁) 4대조(代朝)의 도사, 갈현(葛玄)이나 송문명(宋文明)ㆍ육수정(陸修靜) 및 고환(顧歡) 따위가 날조한 것으로, 모두가 실다운 근거가 없다. 그 통신의 1부는 후한말 촉나라 사람 장도릉(張道陵)이 스스로 설한 것이라 하는데, 저이가 아미산(峨嵋山)에서 도를 닦아 증과(證果)하자, 노자가 자미궁(紫微宮)에서 하강하여 장도릉에게 천사(天師)의 직임과 부적ㆍ금방(禁方)ㆍ장표(章標)ㆍ초의(醮儀)의 일과 귀신을 부르는 술법을 수여하였다고 이르면서, 도릉이 몸소 도경(道經)이라 날조한 경이 수백 권이나 된다. 장도릉이 천존과 마주보고 설법하였다는 경전도 그 경문은 대부분 천사 장도릉이 설했다고 한다. 진(晉) 무제(武帝)가 오나라를 평정한 이후에 장도릉의 경법(經法)이 처음으로 강좌(江左)에 유포되었다. 송문명 등이 장도릉이 날조한 경전에다 의소(義疏)를 창작하여 이를 풀이하자, 이로 인해 다시 위경(僞經)이 급증하여 그 수가 늘어나게 되었으므로, 삼통이 날조된 경위를 충분히 알 수 있다. ‘옥자’와 ‘금서’는 천존이 옥경(玉京)의 현도(玄都)에서 경전을 설하자, 여러 천상의 진인(眞人)들이 편집하여 ‘옥(玉)’이라 제자(題字)하고 그 경문을 베낀 것이라 하는데, 일설에는 ‘옥자’란 여러 천서(天書)의 이름이라고도 한다. ‘금서’는 금(金)에 새긴 것을 제자한 것이니, 지금의 도사들에게 수여되는 진문(眞文) 및 상청(上淸)의 어휘들은 모두 ‘옥자’로서 글을 삼는데, 그 글자가 소전(小篆)과 비슷하면서도 소전이 아니다. 도가는 진행도(眞行道)를 밝혀서 5방에 단(壇)을 세우고 각자 하나의 진문(眞文)을 펼치는데, 그와 같은 글과 글자를 ‘옥자’로 쓴다. 송문명 등이 예서(隷書)를 지어 이를 번역하였다는데, 송문명에 따랐다는 이 같은 경위를 징험해 보면 글자를 위조한 것임이 더욱 뚜렷해진다. 만약 ‘옥자’가 원래 여러 천상의 진인이 쓰던 것이라면 송문명은 근대의 도사인지라 설법하는 집회에 참여하지도 않았고 또 경을 편집한 진인과 서로 접촉하지도 않았을텐데, 어떻게 송문명이 ‘옥자’를 알아 예서로 바꾸었겠는가? 이는 ‘옥자’는 송문명이 지은 것인데, 전서체로 고치고서 ‘옥자’란 이름을 허위로 내세운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예서로써 그 날조된 글자를 다시 바꿀 수 있었던 것이니, 이같이 증험해 보면 환히 알 수 있다. 또 ‘은함’과 ‘요격’이라는 것도, 함(函)은 경전을 담는 상자이고, 격(格)은 경전을 저장하는 창고이다. 이는 천존이 설한 경전은 하늘과 사람에게 공경 받는 것이라 은함에 담고 옥장에 모신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은과 옥이 귀하기 때문에 경전을 제본하는 데 쓰인다고 하나, 이 같은 것은 헛된 말로 전부가 속이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단지 선궁(仙宮)은 인간보다 존귀하여 매사가 다를 텐데, 만약 인간의 은과 옥으로 천궁의 보물을 삼는다면 인간의 소리와 색도 천궁에서 귀중한 것이 될 수 있겠다. 소리와 색으로 경전의 말씀을 위조하는 것도 망령된 것인데 은과 옥이 어찌 진재(眞材)가 되겠는가. 색의 대경(對境)이 동일한데도, 서로 간에 어떠한 차별이 있기에 진재로 옹립하면서 색을 부정하는지 그 연유를 모르겠다. 또 ‘자필(紫筆)’과 ‘주도(朱韜)’라 하는 것은 한층 더 거짓되며, 단지 붓이 생겨난 것은 여섯 나라[六國]에서 비롯된다고 전하는데, 진나라 사람 몽염(蒙恬)이 최초로 붓을 만들었다. 진나라 이전에는 모두 나무를 깎아 글을 쓰면서 이것을 참(槧)이라 부르거나 또는 찰(札)이라 부르거나 또는 고(觚)라 불렀기에 원래 붓이라는 이름조차도 없었는데 어떻게 천존이 이를 붓이라 불렀겠는가? 하물며 5색(色)도 실답지 못하고 6진(塵)도 모두 헛된 것인데, 미혹된 마음이 집착에 매여 망령되게 색이라 하는 것으로 성현에게는 본래 이 같은 소견이 없다. 이는 송문명 등이 세속에서 귀히 여기는 주자(朱紫)로서 도참(圖讖)을 색칠하는 데 쓰면서 이같이 이름을 붙인 것뿐이다. 또 도(韜)라는 것은 『육토(六韜)』를 본떠서 허망하게 태공(太公)의 병서(兵書) 이름을 표절했으며, 바로 세속의 책을 가지고 이름을 달리하였다 하나, 병지(兵誌)를 따서 목차를 정했기에, 참으로 진로(塵勞)의 경계를 여의지 못하고 바야흐로 생사의 흐름에 묻힌 것이라 하겠다. 말하는 일이 비슷하다고 그 이름을 아름답게 여겼으나 이치를 궁리해 보면 전부가 헛된 자취일 뿐이다.” 공자가 선생의 이 같은 말을 듣고서 정신이 아득해지고 마음이 동요되어 어쩔 줄을 모르다가 마침내 선생에게 이같이 말했다. “듣건대 중구(衆口)는 쇠도 녹인다 하고, 참언(讒言)을 자꾸 하면 뼈도 녹아난다고 했습니다. 선생께서 이같이 논의하셔도 반박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의심나는 것을 아직도 풀지 못하였으니, 다시 풀이해 주시기 바랍니다. 경전에서 채운(彩雲)과 하광(霞光)이 허공에 맺혀 글자를 이루고, 연휘(烟輝)와 무액(霧液)의 뭉쳐진 기(氣)가 글이 되었다 합니다. 빛줄기가 8각형의 글자를 사방 1장으로 드리우자 마침내 『영보』가 모두 시현되었다 하는데 이는 참으로 그럴 듯합니다.” 선생이 말했다. “생각을 고루한 데 집착하는 이는 바꾸기 힘드나, 성품이 밝아서 살피는 이는 쉽게 깨달을 진데, 그대는 깊이 빠져 들어 정신을 잃고서도 되돌리지 못하며, 미혹이라 생각하고도 보는 것에 휘말려 다시 의심을 내는구나. 그대는 자세히 들어보라. 내가 그대에게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이 같은 경전의 뜻을 일러주겠다. 대체로 진문(眞文)이라 서술하는 것은 근원을 속여서 『영보』의 허망한 자취를 현시하려는 것임을 이미 말했다. 천존이 일기(一氣)의 단서를 머금고 양의(兩儀)를 포괄하는 시초부터 물상(物象)과 군형(群形)을 낳아 기른다고 말하는데, 저 경전의 말씀이 헛된 소문에 의하지 않았더라도 글씨의 성립이 어떻게 기(氣)의 맺힘이라고 추리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송문명 등이 진문(眞文)의 인(因)을 위조하여 그 연기(緣起)의 상(狀)을 망령되이 세운 것이다. 그리하여 천존이 운하(雲霞)의 기가 맺히고 뭉친 것에 감응하여 글을 이뤘기에 글자가 바로 사방 l장이나 되었다는 것은 세속의 책과 달리하려는 의도이고, 빛줄기가 8각으로 내렸다는 것은 전예체(篆隷體)를 달리 쓰려는 것이다. 만약 진문을 이 하방(下方)에 드러내어 범속에서 모두 알리려면 반드시 신령한 형상도 시현해야 하나, 진문이 만약 상방(上方)의 천존이 모두 통솔하는 곳에 있다면 글이 번잡해질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괴이한 자취를 나타내어 해조(海棗)의 논을 펴고자 해도 궁리하는 것이 달팽이 뿔처럼 허무한지라 이 또한 거짓이다.” 공자가 말했다. “‘옥자’가 기가 허공에 맺힌 것임을 거짓이라 말씀하시니, 진실로 말씀하신 바와 같더라도 대라천(大羅天)이나 현도(玄都)의 경계 및 옥경(玉京)ㆍ선우(仙宇)ㆍ금궐(金闕)ㆍ천궁(天宮) 또는 허공의 청보림(靑寶林)이나 채목(寨木)의 영수(靈樹)나 삼청상계(三淸上界) 및 구선(九仙)의 영부(靈府)에 도속(道俗)을 함께 말씀하신 것이 어찌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선생이 마침내 팔장을 풀고 이같이 말했다. “마침 그대에게 말하려고 했는데, 그대가 먼저 물었구나. 지금 그대에게 그 허망함을 모두 드러내주겠다. 『영보』의 위경에 따르면 32천이 있는데, 그 천상은 밑에서 위로 중첩되어 놓여 있다고 한다. 밑에서 첫 번째가 태황황증천(太黃皇曾天)이고, 두 번째가 태명옥모천(太明玉貌天)이고, 세 번째가 청명하동천(淸明何童天)이고, 네 번째가 현태평육천(玄胎平育天)이고, 다섯 번째가 원명문거천(元明文擧天), 여섯 번째가 상명칠요천(上明七曜天)이고, 일곱 번째가 허무월형천(虛無越衡天)이고, 여덟 번째가 태극몽예천(太極濛翳天)이고, 아홉 번째가 적명화양천(赤明和陽天)이고, 열 번째가 상진현명천(上眞玄明天)이고, 열한 번째가 휘명종표천(暉明宗飄天)이고, 열두 번째가 축락황가천(竺落皇笳天)이고, 열세 번째가 허명당휘천(虛明堂暉天)이고, 열네 번째가 관명단정천(觀明端靜天)이고, 열다섯 번째가 현명공경천(玄明恭慶天)이고, 열여섯 번째가 태환극요천(太煥極瑤天)이고, 열일곱 번째가 원재공승천(元載孔昇天)이고, 열여덟 번째가 태안황애천(太安皇崖天)이고, 열아홉 번째가 현정극풍천(顯定極風天)이고, 스무 번째가 시황고망전(始黃考芒天)이고, 스물한 번째가 태황옹중천(太黃翁重天)이고, 스물두 번째가 원사강유천(元思江由天)이고, 스물세 번째가 상박원락천(上撲元樂天)이고, 스물네 번째가 무극담서천(無極曇誓天)이고, 스물다섯 번째가 호정소도천(浩庭霄度天)이고, 스물여섯 번째가 연통원통천(淵通元洞天)이고, 스물일곱 번째가 태문한총천(太文翰寵天)이고, 스물여덟 번째가 태소수락천(太素秀樂天)이고, 스물아홉 번째가 태허무상천(太虛無上天)이고, 서른 번째가 태석등승천(太釋騰勝天)이고, 서른한 번째가 용변범도천(龍變梵度天)이고, 서른두 번째가 태극평육천(太極平育天)이다. 대체로 도가의 32천에 근거하면 대라(大羅)라는 이름은 빠져 있으니, 원래 대라천이 없었음이 분명해진다. 이 또한 망령되게 날조한 것으로, 이 같은 32천 조차도 모두 거짓으로 꾸며낸 것이다. 어떻게 이를 아는가 하면, 지금 제24천을 담서천(曇誓天)이라 하고 31천을 범도천(梵度天)이라 이름하는 것에 근거한다. 표절한 담(曇)과 범(梵)의 두 글자는 원래 이 땅에는 없었던 것이다. 『옥편(玉篇)』ㆍ『설문(說文)』ㆍ『자림(字林)』ㆍ『자통(字統)』에도 이 같은 글자가 없다. ‘담’과 ‘범’의 두 글자는 원래가 불경에서 나온 것인데 그 상대되는 말을 찾지 못하자 천축의 음운(音韻)을 새기고자 번역하던 이가 만들어 석가의 성지(聖旨)를 기술한 것이다. 이 땅에는 원래 이 같은 글자가 없었으나, 나중에 갈홍(葛洪)이 불경에서 범이란 글자를 베끼고 정(淨)이라 새겼기에 육법언(陸法言)7)이 이로써 『절운(切韻)』에 편입하였다. 만약 천존이 『영보』 따위의 경전을 설했더라도 이는 불법이 동쪽에 전파되기 이전이므로 이 글자가 아직 만들어지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하늘의 이름에 충당할 수 있겠는가? 만약 불법 이후라면 이는 불경을 표절한 것이며, 근자에 위조하여 그 진퇴에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하더라도 위조한 자취만은 저절로 뚜렷해진다. 저 대라라는 이름이 참으로 이 같은 부류에 해당되니. 이처럼 한 쪽을 징험하면 나머지 세 모서리도 충분히 드러낼 수 있다. 또 현도의 선궁(仙宮)과 옥경(玉京)의 영수(靈岫)란 것도 경의 말씀에 따르면, 현도는 옥경산 위의 궁전 이름이고, 금궐은 현도궁의 대궐을 호칭하는 것이라 하나, 그 종지를 검토해 보면 허망함이 더욱 뚜렷해진다. 도가의 법이 이 땅의 가르침이고 천존이 이 땅의 성인이라면 설명하고 교화하는 것을 외번(外蕃)에 두지 않을 터이니, 그 머무르는 곳도 이 땅 위라야 함당하다. 문자(文字)에서 추정되는 제왕의 경계는 위로는 헌황(軒皇)의 대에서 아래로는 희주(姬周)의 조(朝)에 이르기까지 동쪽으로는 진한(辰韓)을 넘지 못하고, 서쪽으로는 대하(大夏)를 지나지 못하고, 남쪽으로는 겨우 상군(象郡)에 이르렀고, 북쪽으로는 안문(雁門)에 막혔으니, 이 가운데에 넓고 좁음으로 저 하늘의 멀고 가까움을 알 수 있다. 또 『십주기(十州記)』ㆍ『사이전(四夷傳)』ㆍ『지리지(地理誌)』ㆍ『여지지(輿地誌)』ㆍ『괄지지(括地誌)』ㆍ『급몽서(汲冡書)』에 따르더라도, 옥경은 말할 것 없고 현도란 지역조자 찾지 못하는데, 천존이 어떠한 곳에서 교화를 폈다 하겠는가? 만약 여러 천상이었다 하더라도 천상과 인간의 경계는 완전히 달라서 단지 더럽고 깨끗하다는 차별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언어조차도 같지 않은데다 그 글자도 더욱 좋을 것이니, 매사에 모두 현격한 차이가 있으리라. 단지 천지ㆍ일월ㆍ산하ㆍ금옥ㆍ주패(珠貝)ㆍ총림ㆍ산석(山石) 따위조차도 동업(同業)에 함께 감득(感得)하는 망정(妄情)에서 귀천(貴賤)이 있다는 집착을 내는 것이니, 상천(上天)에는 이 같은 일이 없다. 바로 인간이 금과 옥이 진귀하다고 허망하게 집착하는 것에서 선도(仙都)와 산궐(山闕)이라 이름 붙이고, 다시 성인이라 덧붙여 말하더라도 참으로 이와 같지 않을 터이니 이 또한 거짓이 된다. 단지 세간의 말조차 지역에 따라 달라져서 만리 이내라도 말소리로 뜻이 통하지 않는다. 하물며 여러 하늘도 각각 성운(聲韻)이 유별할 터이니, 설사 천존이 실제로 옥경산 위에서 설법하였고 마침내 사람에 의지해서 사방으로 전해져 이 땅까지 왔더라도 반드시 번역하고 나서야 유포된 수 있는데, 증험해 보면 경전을 전한 사람도 없는 데다 번역을 한 장소도 없다. 설사 경전의 말이 이 땅의 음운으로 되어 있더라도 반드시 사람이 전하는 것을 기다려서야 이 땅에 다다를 수 있다. 천존이 경전을 설한 뒤에는 반드시 이를 모아 기록하는 문인(門人)이 있어야 상천(上天)에서 하대(下代)로 전하게 된다. 현도의 승경(勝境)에서 출발하여 적현(赤縣)의 신주(神州)에 이르러서 36부의 영문(靈文)으로 새기고 12품의 과격(科格)을 연출하였다면, 이는 사람의 일 가운데 참으로 장관일텐데 어째서 사적만이 남아 있고 기록된 것이 없는가? 대체로 유정(有情)이라면 그 불가능을 알 수 있으니, 이 또한 거짓이 된다. 또 공청(共靑)의 보림(寶林)이나 채목(寨木)의 영수(靈樹)나 삼아(三雅)의 처소도 기재되어 있지 않은 데다 구구(九丘)의 장소조차도 불확실하다. 비록 이름을 달리 날조해서 속세의 사물과 달리 보이도록 기도하더라도, 오직 『영보경』에서 설하는 것은 근거 삼을 만한 전(典)이나 기(記)가 없다. 매사가 헛된 말에 뿌리박는 것이 마치 그림자를 붙잡는 것과 같은지라 이 또한 거짓이 된다. 또 삼청(三淸)의 천상(天上)과 구선(九仙)의 천부(天府)를 말하는 것도 헛된 자취만을 늘려서 그 헛된 종지를 보태려는 것이다. 『영보경』의 삼청전(三淸天)의 이름에 따르자면 앞서 말했듯이 상하로 겹쳐서 안치하였다. 하천(下天)을 상청(上淸)이라 하고, 중천(中天)을 태청(太淸)이라 하고, 상천(上天)을 옥청(玉淸)이라 하니, 이러한 것이 바로 삼청이다. 이 같은 삼천(三千)은 32천의 바로 위와 대라천의 아래에 두었으니, 옥청은 천존이 머무는 하늘이고, 태청은 대도군(大道君)이 머무는 하늘이고, 상청은 노자가 머무는 하늘이라 풀이하였는데, 그 가르침을 따져보면 바로 허위임이 드러난다. 『영보』에는 32천의 천위(天位)가 미리 정해져 있으므로, 만약 삼천 및 대라를 보충하면 바로 36천이 되는지라, 이미 있던 32위(位)와 맞지 않기에 이 또한 불가하다. 만약 삼청과 대라가 32천 내에 있다면 삼청과 대라는 별명에 불과해서 32천의 명수에 나열하여 함께 표시해야 하는데, 그러한 별명의 이름을 경전에서 따로 호칭하는 바가 없으니, 32천의 명수가 아님이 분명해져서 이 또한 거짓이 된다. 또 이 경전은 천존의 말씀이라 칭하는데, 설법하는 주체가 원래 헛되게 날조한 것이니, 설사 삼청의 이름이 있더라도 원래 옹립할 만한 천존은 없다고 하겠다. 소위 ‘옥청의 경계’라는 것도 망론에 불과하니, 대도군이라 호칭하더라도, 도(道)는 허통(虛通)의 이치이고. 무물(無物)을 이르는 것인데, 태상도군(太上道君)에게 어찌 형상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처럼 태청의 하늘도 세울 수 없으므로 이 또한 거짓이 된다. 노자가 수레를 몰고 서역으로 갔다가 종당에는 승천했다는 근거가 아무데도 없으니, 상청의 위(位)를 헛되이 표시하는 일 따위는 모두가 헛바람 치는 말이다. 두세 번을 거듭하면서 더우 허망해졌으므로 그 거짓된 자취가 바로 뚜렷해진다. 구선(九仙)이라 말하는 것도 경전의 말씀에 따르면, 신선에는 아홉 등급이 있어 등급의 차별에 따라 그 위를 표시한다는데, 천존이 만약 그 우두머리라면 이는 신선의 부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도, 『신선전(神仙傳)』 가운데 어째서 실려 있지 않은가? 설사 이것이 사실이더라도 생사를 면하지 못하고 마침내 겁화(劫火)에 불태워져 성증(聖證)의 위(位)에 들지 못하기에 대체로 그 경위를 날조한 것이 바로 이 같은 유이다.” 공자가 말했다. “선생이 거침없이 말씀하시어 아무리 말솜씨가 혓바닥에 꽃 피듯 하고, 구변이 샘솟듯 끊이지 않고, 문장이 급류가 쓸 듯이 하여 말로 치는 것이 마치 따사로운 봄바람이 얼음을 녹이고, 매서운 가을바람이 낙엽을 쓸 듯하여도 말은 한낱 말일 뿐입니다. 의심나는 것은 여전히 의심스럽습니다. 『영보도인경(靈寶度人經)』에 따르면 천존은 시청천(始靑天) 가운데 벽락(碧落)8)의 공가(空歌)인 대부려토(大浮黎土)에 머문다고 합니다. 이것은 천존이 거주한다는 근거가 되니, 설법하였다는 것도 의심할 바가 없어서 시청천도 분명해지고, 벽락의 궁(宮)도 확실해지는 데다, 그 경계를 표시하여 공가(空歌)라 호칭하고 그 국토를 이름하여 부려(浮黎)라고 새겼으니, 어떠한 고론이라도 이 같은 일마저 거짓이라 배척하지 못할 것입니다.” 선생이 손바닥으로 입을 쓰다듬으면서 공자에게 이같이 말했다.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안다고 안회(顔回)는 공자에게 칭찬 들었고, 아침에 세 개 주고 저녁에 네 개 준다고 저공(狙公)은 장생(莊生)에게 분노를 느꼈는데, 내 예전에는 이를 괴이쩍게 여겼으나 지금은 이를 믿게 되었다. 시청(始淸)의 하늘과 대라가 어떻게 다른지, 벽락이란 이름이 상청과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 앞서 일러줬어도 다시 현혹되는구나. 소위 32천의 설에 따르면 하늘에는 시청이란 이름이 없다. 또 삼청의 위(位)에도, 그 위에 부려(浮黎)의 경지가 없는데, 이를 뒤섞어 놓았으니, 시종(始終)이 어그러졌다. 단지 여러 천상에는 모두 천인뿐이며, 욕계(欲界)의 천상에는 남녀가 섞여 있는 곳으로, 비록 욕사(欲事)의 가볍고 무거움이 같지 않더라도, 열 가지 업을 훌륭히 닦아야 그 경계에 태어나니, 인간이 영토를 나누고 들판에 내 것이라 표시하는 것과 같을 수 없다. 또 색계(色界) 위로는 여자는 없고 남자만 있으니, 이는 사무량인(四無量因)을 닦아야 저 같은 과(果)를 감득(感得)하게 된다. 마침내 토지가 없는 실(實)에 감득하고 나면, 온갖 보배는 함께 이루어지는 것인데, 지금 말하는 대부려토(大浮黎土) 한 가지만 하더라도, 어찌 황당하지 않겠는가? 그 거짓된 경위는 징험해 보면 알 수 있기에, 이는 그대 자신의 생각이 어두운 것이지, 내 말이 틀린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