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삼천세계[三千]가 처음 세워지자 이에 만물을 융성하게 할 기틀이 갖춰졌고, 백억 세계[百億]도 이미 형성되었으나 아직 사람과 만물의 질서는 생성되지 않았다. 세계(世界)는 텅 비어있었고, 해와 달도 아직 운행하지 않았으며, 음양의 순환[慘舒]1)도 실로 고요히 머물러 있어 음양(陰陽)을 분별할 수도 없었다. 이에 정천(淨天)2)이 세상에 내려오게 되자 신광(身光)3)이 저절로 좇아 이 세상을 비추게 되어, 땅[飡地]이 비옥하게 되었고 중생[生貪]이 생겨나게 되었으며, 임등(林藤)4)과 향도(香稻)5)가 잇달아 생겨나 이것을 먹게 되었다.
그리고 신광(身光)이 점차 사라지고 해와 달이 나타나게 되면서, 가정[夫婦]이 생기고 농사짓는 일도 하게 되었으며 군신부자(君臣父子)의 도리[道]가 세상에 서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 위로 하늘[靑象]을 바라보니 신묘하고 아득한 색들이 찬란히 빛을 발하고, 아래로 대지[黃輿]를 살피니 바람이 광대한 물 위로 불며 세상이 온전히 이루어졌도다. 그러나 사람들은 ‘음양[二儀]이 나뉘어 구분되고, 사람들이 그 사이에 태어나서, 맑고 탁한 기운을 느껴 스스로 그렇게 존재한다’고 생각하여서, 음양(陰陽)이 이 세상을 만들었다고 여겨 이것을 거대한 화로[鴻爐]에 비유하거나 음양이 만물[品物]을 만들었다고 생각해 이것을 흙 개는 일[埏埴]에 비유하였으니, 이것은 아마도 견문이 부족한 사람들이 사실을 왜곡해서 이야기한 것이로다.
이에 산과 언덕과 별들이 각각 나뉘어 제자리를 찾고 중생[含靈]이 온 세상에 널리 퍼지게 되니, 드디어 도(道)가 96종(種)으로 갈라지고 진리[諦]도 25문(門)으로 나뉘게 되었다. 상캬학파[僧佉]6)는 이에 한 가지 이치를 따라서 만물이 비로소 생겨나게 되었다고 주장하고, 바이셰시카학파[薜世]7)는 6조(條)로 인해 5도[五道]8)가 마침내 생겨났다고 말하였다. 어떤 이는 팔뚝을 드러내고 머리털을 뽑는 것으로 장차 번뇌에서 벗어날 것으로 여기고, 또 다른 이는 몸을 불태우고 상투를 치는 것9)이 극락에 오르는 방법이라 생각하였다.
혹은 태어남도 곧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라 하고, 죽으면 식(識)10)이 소멸된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었다. 더러는 ‘도는 그윽하고 깊고 깊어[幽幽冥冥] 그 세밀한 이치를 알 수 없으며[莫識其精], 아득하고 홀연하여[眇眇忽忽] 그 시작도 알 수 없다[罔知所出]’고 말하였다. 또는 ‘사람은 항상 인도(人道)를 얻어야 한다’고 말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혹은 ‘죽으면 곧 귀신[鬼靈]이 된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또한 ‘나비[蝶]가 자기 자신[我己]임을 알지 못하고, 자신[我]이 나비[蝶形]임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033_0673_a_01L이렇게 사람들이 이미 나나니벌[蜾蠡]로 어지러워지고 다시 뽕잎벌레[螟蛉]로도 미혹되니11), ‘달걀[雞子]의 설’에 혼돈을 일으키고12) 어린아이[孩嬰]의 말에도 시비를 분별해내지 못하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욕망[愛]으로 말미암아 생겨나고 업(業)이 쌓여 된 것이며, 고뇌의 바다[苦海]를 윤회하고 미혹의 나루터[迷津]를 오고갔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직접 넓고 평탄한 진리의 길을 가리키고, 몸소 참되고 바른 오묘한 이치를 전파하며, 12연기(緣起)를 설법하고 36독법(獨法)을 얻어서, 천인사(天人師)라고 불리고, 일체지(一切智)라고 일컬어지며, 번뇌로 가득 찬 윤회의 세상에서 사생(四生)13)을 이끌고, 어리석은 자들이 머무는 세계에서 삼계의 중생[三有]14)을 빼내어, 번뇌에서 벗어나 열반의 세계에 오르게 한 자는, 우리의 위대한 스승 석가세존뿐이시다.
용하(龍河)15)에서 석가세존이 처음 바른 깨달음[正覺]을 이루시니, 구유(九有)16)의 중생이 번뇌에서 벗어나 해탈하려는 소망을 일으키고, 그 후 녹야원[鹿苑]17)에서 순례하시며 불법의 빛을 전하시니, 육도(六道)18)의 중생들까지 불법에 귀의(歸依)하려는 마음이 왕성해지게 되었다. 처음 불법의 수레바퀴[法輪]를 굴리시니 다섯 제자가 불법의 교화를 받았고, 다음으로 계율의 여러 조목[戒躅]를 말씀하시자 일천의 중생이 머리를 조아리며 경배하였다. 이에 왕사성[王舍]에서 부처님의 설법[梵響]이 울려퍼져 깨달음을 얻는 자가 끊임없이 나왔고, 부성(父城)19)에서는 은혜를 갚으시니 불심을 일으키는 자가 셀 수도 없었다.
요교(了教)20)로부터 시작한 것은 첫 발원[初願]으로 정성을 다했음을 아셨기 때문이고, 묘현(妙賢)을 끝으로 한 것은 결사의 염원[結念]에 후일을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팔기(八紀)에 머무르며 불법을 보호하고 지켜서, 구거(九居)의 중생을 널리 구제하며, 가르침이 구석진 곳이라도 전해지지 않은 곳이 없고, 근기가 미약한 자라도 불법을 받아들이지 않음이 없었다.
널리 속세의 신도들을 위해서는 단지 간략하게 5계[禁]를 말씀하셨고. 출가 승려에 국한에서는 상세하게 7편(篇)21)을 전하셨다. 그리하여 소유에 집착하는 큰 잘못도 계율이 왕성하게 전해져서 그 잘못이 없어지게 되었고, 생명을 보존하려는 작은 허물도 계율이 뚜렷이 드러나자 그 허물이 사라지게 되었다. 예를 들어 가벼운 가지[輕枝]조차 분노하여 제거한 자는 현세에 용궁[龍戶]에 태어나고, 하찮은 목숨[微命]에게도 자비를 베풀고 구제하는 자는 교대로 제궁[帝居]에 오르는 것과 같이, 선(善)을 행하는 것과 악(惡)을 행하는 것의 보응을 진실로 분명하게 하였다.
이에 부처님의 말씀과 그 해석을 함께 베풀고, 선정[定]과 지혜[慧]를 같이 도모하니, 생명을 지키고 기르는 것의 핵심은 오직 이 삼장(三藏)에 있었도다. 이에 부처님[大師]을 직접 가까이 대하니, 그 가르침은 오직 한마디 말씀[一說]일 뿐이나, 그 말씀이 근기에 따라 만물을 구원하였고, 그 말씀의 이치에 다른 의론은 필요 없었다.
033_0673_b_01L 폐사(薜舍)에서 처음 말씀하실 때에는 마왕(魔王)이 아난다[歡喜]의 뜻을 미혹케 한다고 하셨고, 희련(熙連)22)강변에서 후에 말씀하실 때는 아나율[無滅]에게 의심을 없애는 이치를 다 드러내셨으니, 중생을 교화하는 인연을 다하신 것이고 맡은 직분을 잘 감당하여 공덕을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드디어 부처님께서 두 강[兩河]23)에서 열반하시니 사람[人]과 하늘[天]의 소망이 꺾어졌고, 쌍수(雙樹)24)에서 입적하시니 용(龍)과 귀신[鬼]도 모두 마음이 무너지게 되었다. 그래서 사라림(娑羅林) 주변이 눈물바다가 되어 진창이 되었고, 통곡하는 자의 몸에서 피가 적화수[花樹]처럼 붉게 흘러 나왔다.
부처님[大師]께서 열반에 드시자 세계가 공허하게 되었는데, 그 후 불법이 널리 퍼지면서 아라한들[應人]이 결집(結集)25)하게 되어, 500인 결집과 700인 결집이 나누어 이루어졌고, 계율을 굳건히 지키면서 불법의 큰 법장들[大將]이 분파를 나누게 되어, 18분파의 구별이 있게 되었다. 보고 들은 것에 따라 삼장(三藏)마다 각각 차이가 생기게 되어서, 아래치마[下裙]를 입으면 치마단[裾]에도 치우침과 바름의 차이가 생겼고, 웃옷을 걸치면 넓이에도 좁고 넓음의 차이가 존재하였다.
같이 잠을 잘 때에는 방을 달리하거나 침상 주위에 끈으로 둘러 쳐야 양쪽 모두 허물이 없었으며, 음식 공양을 받을 때는 자기 손으로 요청하거나 땅에 획을 그어 표시해야 둘 모두 허물이 없었다. 각자 스승에게 배워 이어받은 것들을 고수하여서, 일마다 타협하여 함께하는 것이 없었다.[치우침과 바름이 생겼다는 것은 유부(有部)26)에서는 바른 것이고 나머지 세 부는 모두 치우쳤다는 것이며, 잠을 잘 때에도 유부는 반드시 따로 별실(別室)을 요구하지만, 정량부[正量]에서는 침상 둘레를 끈으로 둘러칠 뿐이라는 것이다. 음식공양을 받을 때도 유부는 자기 손으로 요청하고, 승가부[僧祇]는 다만 땅에 획을 그어 표시한다.]
모든 부(部)의 유파(流派)27)가 일어난 유래는 같지 않으나, 인도[西國]에서는 대대로 가르침과 전통을 이어 받아, 큰 줄기로 구분하면 오직 네 유파로만 나눌 수 있다.
033_0673_b_13L諸部流沠生起不同,西國相承大綱唯四
【첫째, 아리야막가승기니가야(阿離耶莫訶僧祇尼迦耶)28) 유파이다. 당(唐)29)나라에서는 성대중부(聖大衆部)라고 불렀다. 이 유파에서는 7부(部)가 갈라져 나왔고, 삼장(三藏)은 각각 십만(十萬) 게송[頌]이 있어, 중국에서 번역한 것이 천권(千卷) 정도에 달한다. 둘째, 아리야실타폐라니가야(阿離耶悉他陛攞尼迦耶) 유파이다. 중국에서는 성상좌부(聖上座部)라고 불렀고, 이 유파에서는 3부(部)가 갈라져 나왔으며, 삼장(三藏)은 앞의 유파와 어느 정도 비슷하다. 셋째, 아리야모라살바실저바타니가야(阿離耶慕攞薩婆悉底婆拖尼迦耶) 유파이다. 중국에서는 성근본설일체유부(聖根本說一切有部)라고 불렀다. 이 유파에서는 4부(部)가 갈라져 나왔고, 삼장(三藏)은 앞의 유파와 다소 비슷하다. 넷째, 아리야삼밀율저니가야(阿離耶三蜜栗底尼迦耶) 유파이다. 중국에서는 성정량부(聖正量部)라고 불렀다. 이 유파에서는 4부(部)가 갈라져 나왔고. 삼장(三藏)은 삼십만(三十萬) 게송[頌]이다. 그러나 각 부(部)에서 맡아서 전한 것들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또 현재 드러난 사실에 근거하여 18개의 갈래를 말하고, 이것을 분류하여 오부(五部)로 여기기도 하는데, 인도[西國]에서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 사이에 쪼개지고 생겼다가 사라져서, 부(部)의 명칭도 달라지고, 전해지는 일화도 일치하지 않는다. 그 나머지 논의된 것들은 여기에서 번거롭게 언급하지 않겠다. 그러므로 오천축국[五天]의 땅과 남해(南海)의 모든 주(洲)에서는 모두 네 종류의 유파[尼迦耶]만을 언급한다. 그러나 그 각각의 유파가 떠받드는 부분은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
033_0673_c_01L마가다국[摩揭陁]30)은 네 부파가 두루 분포하였는데, 유부(有部 : 성근본설일체유부)가 가장 번성하였다. 나다산도(羅荼信度)국【서인도(西印度)의 나라 이름이다.】은 소수가 3부(部)를 포용하고 있으나, 정량부[正量 : 성정량부]가 가장 많이 분포하고 있다. 북방(北方)은 거의 모두 유부(有部)이고, 어쩌다 대중부[大衆 : 성대중부]를 만날 수 있다. 남쪽 지역은 모두 상좌부[上座 : 성상좌부]를 따르나, 나머지 부도 적지만 존재한다. 동예(東裔)의 여러 나라는 4부가 뒤섞여 있다.
【나란타(那爛陁)31)로부터 동쪽으로 500역[驛]32)에 걸쳐 있는 지역을 모두 동예(東裔)라고 불렀다. 그리고 계속 동쪽으로 가면 대흑산(大黑山)이 있다. 대략 토번(土蕃 : 티베트)의 남쪽경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전(傳)에 이르기를 “이곳은 촉땅[蜀川]의 서남쪽에 있어, 한 달여를 가면 곧 이 산림에 도달한다”고 하였다. 다음으로 이곳에서 남쪽경계 가까이 해안 쪽으로 실리찰달라국(室利察呾羅國)이 있고, 그 다음으로 동남쪽으로 낭가수국(郞迦戍國)이 있으며, 그 다음에는 동쪽에 사화발저국(社和鉢底國)이 있고, 그 다음으로 동쪽으로 끝까지 가면 임읍국(臨邑國)33)에 도달한다. 이들 나라들은 모두 삼보(三寶)를 극진히 따랐고, 계율을 잘 지키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음식을 공양 받는 결사[乞食社]34)가 많았는데, 이것이 국법(國法)으로 정해져 있었다. 서쪽지역에서 본다면, 실제 평범하지 않은 모습이다.】
사자주(師子洲 : 스리랑카)는 모두 상좌부[上座]를 따르고, 대중부[大衆]는 여기에서 배척을 받는다.35) 그러나 남해(南海) 여러 주[諸洲]에 10여 국이 있는데, 순전히 오직 유부(有部)를 근본으로 하고, 정량부[正量]도 가끔 공경을 받는다. 요즘에는 소수가 나머지 두 부도 포용하고 있는데,【서쪽에서부터 이들 지역을 헤아리면, 유바로사주(有婆魯師洲)와 말라유주(末羅遊洲)는 곧 지금의 시리발서국(尸利佛逝國)36)이다. 그리고 막가신주(莫訶信洲)⋅가릉주(訶陵洲)⋅달달주(呾呾洲)⋅분분주(盆盆洲)⋅바리주(婆里洲)⋅굴륜주(掘倫洲)⋅불서보라주(佛逝補羅洲)⋅아선주(阿善洲)⋅말가만주(末迦漫洲)가 있다. 그리고 작은 나라들이 있는데, 너무 많아서 모두 기록할 수 없다.37)】 이들 모두 불법(佛法)을 따르고 있으며, 대부분은 소승(小乘)이다. 오직 말라유주[末羅遊]만이 적지만 대승(大乘)이 있을 뿐이다.
각각 여러 나라들의 사방 둘레는 혹은 백리 정도 되고, 혹은 수백 리가 되고, 더러는 백역(百驛)이나 되는 곳도 있으며, 큰 바다[大海]는 비록 몇 리나 되는 지 헤아리기 어렵고 무역선들이 다니는 길에 의거해서 헤아릴 수 있을 뿐이다. 원래 굴륜(掘倫)38)이라는 곳은, 처음 교광 지역[交廣]39)에 도착했을 때 모든 사람들이 곤륜국(崑崙國)이라고 부른 곳이다. 오직 이 곤륜(崑崙) 사람들만 머리카락이 말려있고 몸은 검은 색인데, 나머지 여러 나라는 중국[神州]과 다르지 않다. 굴륜 사람은 맨발로 다니고 허리 아래에는 감만(敢曼)40)을 했는데, 모두 이런 방식으로 지낸다. 자세한 것은 『남해록(南海錄)』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
033_0674_a_01L환주(驩州 : 베트남 북부)에서 정남(正南)으로 보름 정도를 걸어가거나, 배를 탈 것 같으면 조수가 다섯 번이나 여섯 번 바뀔 때[五六朝]41)쯤 곧 비경(匕景)42)에 도착한다. 다시 남쪽으로 가면 점파(占波)에 이르는데, 이곳이 바로 임읍(臨邑)이다. 이 나라는 대부분이 정량부[正量]이고, 적은 수가 유부(有部)를 포용하고 있다. 이곳에서 서남쪽으로 한 달을 가면 발남국(跋南國)에 다다르는데, 옛날에 이곳을 부남(扶南)이라고 했으며, 이보다 앞서서는 나국(裸國)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원래는 대부분 하늘을 섬겼는데, 후에는 곧 불법(佛法)이 융성하였다. 그러나 사악한 왕들이 지금 잇따라 불법을 없애서, 승려들이 전혀 없고 외도가 뒤섞여 있을 뿐이다. 이곳이 바로 섬부(贍部)의 남쪽 모퉁이이니, 섬나라[海洲]는 아니다.
그러나 중국[東夏]의 대부분 지역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행하고 있고, 관중 지방의 여러 곳에서는 승가부[僧祇 : 대중부]가 옛날부터 널리 퍼져 있었다. 양쯔강 이남지역[江南]의 영표(嶺表)43)에서는 유부(有部)가 먼저 성행하였으니, 『십송(十誦)』이나 『사분(四分)』이라고 부르는 것은 대부분 경문을 새겨 보관하는 경협(經夾)44)을 가지고 제목(題目)으로 삼은 것이다. 사부(四部)의 차이나 율의(律儀)의 다름을 상세히 살피면, 중히 여기는 것과 가볍게 여기는 것의 차이가 크고, 허용하는 것과 금하는 것도 차이가 크니, 출가한 승려들은 각각 자신의 부(部)가 고집하는 것에 의존할 뿐이다.
다른 유파가 가볍게 여기는 사항을 자기 유파는 중요하게 다루는 조항으로 바꾸고, 스스로 허용한 계율 문항으로 나머지 금지계율을 혐오하게 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다. 이와 같이 하면 곧 네 개의 유파가 갈라져 존재하는 의미가 없게 되는 것이요, 허용하고 금지하는 이치도 분명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어찌 혼자서 네 유파를 두루 섭렵할 수 있겠는가. 치마가 찢어지고 금 지팡이[金杖]가 쪼개진 비유는, 번뇌의 소멸을 증득하는 길[證滅]이 다르지 않음을 나타낸 것이니. 불법을 행하는 수행자들[行法之徒]은 각자 자기 유파의 가르침을 따라야 할 것이다.
【빈비사라왕(頻毘娑羅王)이 꿈에 치마[一疊]가 찢어져 18조각이 되고, 금장(金杖)이 쪼개져 18마디가 되니, 왕이 두려워 부처님에게 물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내가 멸도(滅度) 후에 100여 년이 지나서 아수가왕(阿輸迦王)이란 자가 있을 것인데, 섬부(贍部)에 위엄을 떨칠 것이다. 그때 모든 비구의 가르침은 18교파로 나뉘게 될 것이지만, 해탈(解脫)의 문(門)으로 나아가는 것에는 일치하는 것이다. 이것은 곧 앞으로 일어날 일을 나타낸 징조일 뿐이니, 왕은 꿈의 내용을 보고 두려워말라”라고 하였다.】
네 유파[四部] 가운데 대승과 소승을 구분하는 것은 확정할 수 없다. 북천축국[北天]에서 남해에 이르는 군(郡)은 순전히 소승이다. 그리고 중국의 수도 부근에서는 대체로 대승[大教]에 뜻을 두었는데, 나머지 여러 곳에서는 대승의 가르침과 소승의 가르침이 섞여서 전해졌다. 대승과 소승이 진리에 도달하는 과정을 고찰해 보면, 계율[律撿]은 서로 다르지 않아서, 5편(篇)45)으로 수행자들을 제제(齊制)하고, 사성제[四諦]를 널리 닦게 한다. 다만, 보살을 예배하고 대승경(大乘經)을 읽으면 이것을 대승이라 부르고, 이런 일을 행하지 않으면 이것을 소승이라 부른다.
대승은 진리에 이르는 두 가지 가르침 모두 잘못이 없다고 여기는데, 첫째는 중관(中觀)이요, 둘째는 유가(瑜伽)이다. 중관은 현상세계가 존재한다는 것도 진실로 공[眞空]이고, 본체[體]도 텅 비어서 껍데기 같다고 하는 것이요, 유가는 외물[外]은 없고 마음[內]만 있으며, 현상[事]은 모두 마음의 인식작용[唯識]일 뿐이라는 것이다.
033_0674_b_01L이들의 가르침 모두가 나란히 성교(聖教)를 따르니, 누가 옳고 누가 그른 것인가. 같이 열반(涅槃)을 기약하니 어떤 것이 진실이고 어떤 것이 거짓인가. 번뇌를 제거하고 미혹을 끊어서 중생을 구제하는 데 뜻이 있으니, 어찌 널리 떠들썩하게 혼란만을 일으키고 거듭 불법이 전해지는 것을 가라앉히고 방해하겠는가. 불법을 의지하여 행하면 모두 피안(彼岸)에 이르고, 불법을 버리고 배신하면 나란히 삶과 죽음의 나루터[生津]에 빠져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인도[西國]는 대승과 소승의 가르침이 나란히 전해져도, 그 이치가 서로 어그러지고 다투는 것이 없으니, 지혜의 눈[慧目]이 없이 누가 옳고 그름을 판별하겠는가. 오래도록 익힌 것을 맡아서 닦으면, 다행히 스스로를 분열시키는 데 헛된 노력을 들이는 일은 없을 것이다.
또한 중국[神州]은 계율을 지키면서 여러 부[諸部]가 서로 이끌어 주었는데, 계율을 강설하고 기록하는 사람들이 계율의 내용을 번거롭고 복잡하게 만들었으니, 5편(篇)이나 7취(聚)46)처럼 적용이 쉬운 계율도 다시 어렵게 되고, 방편(方便)에 따라 계율을 어기게 되어 너무나 분명한 의미도 도리어 감춰지게 되었다. 이것은 산을 쌓다가 한 삼태기의 흙을 엎고서 그 뜻을 포기하는 것이요, 불경을 강설하는 자리에 한 번 듣고는 물러나려는 마음을 먹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근기가 아주 좋은 무리라도 노년에 이르러서야 깨달음을 이루니, 근기가 중류나 하류의 사람들은 머리가 하얗게 되어도 어찌 깨달음을 이루겠는가.
계율은 본래 그 자체로 근거나 조리가 막막하여, 해석을 읽는 것도 죽을 때까지 해야 하는 것이고, 스승과 제자가 서로 그 공부를 이어서 해야 분명한 규칙이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니 문장과 문단을 의논할 때도 물이 웅덩이에 서서히 고인 후 다시 다른 웅덩이에 고이듯 한 문장 한 단락을 천착한 후에 다음으로 넘어가야 하고, 계율을 범한 죄를 서술할 때도 한 구절을 쓰고 다시 돌아와 그 구절을 검토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공로를 생각하면 실로 산을 만드는 노고에 비교할 수 있는 것이요, 그 유익함을 밝히자면 바다 속 진주가 영원히 그 영롱함을 간직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무릇 계율을 만드는 전문가들은 그 의도가 사람들에게 계율을 쉽게 이해시키는 것에 있는데, 어찌 일부러 사람들이 알 수 없는 밀어(密語)를 만들고 더구나 비판을 피하기 위해 변명을 늘어놓는가? 비유하자면, 물이 하천에서 범람하여 사람들이 깊이 판 우물에까지 흘러들어가서, 사람들이 마시고 생활하는 데 필요한 물과 뒤섞여, 사람의 목숨을 살리는 데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계율의 내용을 바로 잡고 검증하려면 이와 같이 해서는 안 되고, 중요한 계율과 가벼운 계율을 따져서 처벌하는 것을 반드시 여러 차례 수행하여, 죄를 설명하는 방편을 반나절이라도 번거롭게 해서는 안 되니, 이렇게 하면 서방(西方) 남해(南海)지역의 불도들[法徒]이 크게 부처님께 귀의할 것이다. 또한 중국 땅과 같은 곳에서도 예의를 알려주는 가르침이 크게 번성하게 되고, 임금과 어버이를 공경하고 섬기게 되며, 나이든 사람과 윗사람에게 존경을 표하고 양보하며, 청렴하고 소박하며 겸손하고 공순하게 되어서, 이로운 것을 보아도 의로움을 생각한 후에 취하고, 효자와 충신이 계속 생겨나며, 자신을 절제하고 쓰임을 절약하게 될 것이다.
황상(皇上)께서는 모든 백성을 은혜로 다스려, 새벽에 백성들이 해자에 들어가는 것을 몹시 염려하였고47), 여러 신하들도 임금께 공손히 공수(拱手)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밤새도록 살얼음을 밟듯이 자신의 충심을 임금께 바쳤다.
033_0674_b_22L皇上則恩育兆庶,納隍軫慮於明發;群臣則莫不拱手,履薄呈志於通宵。
033_0674_c_01L어떤 때는 크게 부처님의 가르침[三乘]을 베풀고 여러 강설의 자리들[百座]도 널리 마련하니, 팔방[八澤]에는 탑들[制底]이 세워져 배움이 있는 사람들도 모두 부처님께 귀의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으며, 구주[九宇]에도 사찰[伽藍]이 세워져서 길을 잃고 헤매는 자들이 모두 부처님께 돌아오게 되었다. 아름답구나! 농부들은 밭에서도 임금의 덕을 노래하고, 장엄하도다! 상인들은 배나 수레 위에서 임금의 덕을 읊조리도다. 그리하여 고려[雞貴]와 인도[象尊] 등의 나라에서도 황상의 궁전[丹墀]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게 되었고, 금린(金鄰)과 옥문관[玉嶺] 지역에서도 황상의 궁궐[碧砌]을 향해 정성을 다하게 되었으니, 무위(無爲)를 행하고 무사(無事)로 다스리는 것이 진실로 이보다 더할 것이 없게 되었다.
【계귀(雞貴)는 서방(西方)의 고려국(高麗國)을 말하는 것으로, 구구타예설라(俱俱咤𧫦說羅)라고 하니, 구구타(俱俱咤)는 닭[雞]이고 예설라(𧫦說羅)는 귀하다[貴]는 의미이다. 서방(西方)에서 전하는 것에 의하면 그 나라는 닭을 공경하여, 닭을 신령하고 존귀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닭의 깃털을 머리에 꽂아 장식으로 삼는다. 상존(象尊)이라는 것은 인도[西國] 군왕(君王)이 코끼리를 최고로 떠받드는데, 오천축국[五天]은 모두 이와 같다.】
출가(出家)한 법사들[法侶]은 계율의 의례[軌儀]를 강설(講說)하고, 수행 제자들[徒衆]은 지극한 이치[極旨]를 엄숙히 공경하니, 자연히 깊은 골짜기에 거처하며 짚신을 벗고 은거하는 이들이 있게 되어서, 바위에 흐르는 물로 몸을 씻으며 멀리 생각하고, 수풀 속에 앉아서 뜻을 세우게 되었다. 이에 아침부터 해질 때까지[六時]48) 불도를 행하여 청정한 믿음의 은혜를 갚을 수 있게 되었고, 초저녁에서 한밤중까지 고요히 불법과 합일하여 사람과 하늘에게 소중히 여김을 받게 되었다.
이와 같이 하여 부처님의 말씀과 계율[經律]을 잘 따르니, 어찌 허물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불법을 전하고 받는 과정에 오류가 생기고, 계율에도 차이가 발생하며, 고질적인 습관이 항상 생겨나서, 불법의 계율[綱致]에 어긋나는 자들이 있게 되었다. 그래서 삼가 부처님의 가르침[聖教]과 현재 시행되는 중요한 계율[要法]에 의거하여, 총 40장(章) 4권(卷)으로 된 불전을 만들고, 이름을 ‘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歸內法傳)’이라 하였다. 또 『대당서역고승전(大唐西域高僧傳)』 한 권(卷)을 『잡경론(雜經論)』 등과 나란히 기록하여 덧붙였다.
033_0675_a_01L원컨대 여러 대덕(大德)들은 불법의 마음[法心]을 널리 일으키고, 남과 나를 구별하는 마음을 갖지 말며, 잘 헤아려 부처님의 가르침과 수행을 따르고, 사람들을 가볍게 여기거나 불법을 천하게 여기지 말길 바란다. 그러나 옛날부터 지금까지 전해진 부처님의 말씀[經]과 그 해석[論]의 이치(理致)는 선문(禪門)에 잘 통해 있는데, 선정의 깊은 이치는 감추어져 있어 이것을 드러내 전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우선 수행의 방법[行法]을 대략 진술하고 계율의 법상[律相]을 맞춰서 먼저 바치고, 여러 항목의 계율을 모두 갖추고 실제 기록에서 스승이 전한 가르침의 핵심[師宗]을 고찰하였다. 비록 목숨이 해가 저물 적에 이를지라도 삼태기 하나의 공(功)을 이루길 희망하며, 불꽃이 아침빛에 꺼져도 불법의 등불[百燈]은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이런 것을 보면, 한 자[尺]의 걸음도 헛되이 하지 않으면 짧은 걸음으로도 오천축국[五天]에 이를 수 있는 것이요, 일촌의 시간도 헛되이 보내지 않으면 실로 천년동안 길을 잃어 헤매던 발자취도 실로 밝히게 되는 것이다. 바라건대 삼장(三藏)을 살피고 탐구하여서 불법의 바다를 두드려 4바라밀[四波]49)을 드날리며, 오편(五篇)50)을 밝게 비추어서 지혜의 배를 띄워 6상[六象]51)을 끌고 가길 소망한다. 비록 다시 불법의 가르침[匠旨]를 친히 잇고 현묘한 진리[玄宗]를 갖추어 얻었을지라도, 교만한 마음에 깊게 깨달음을 일으키지 못하여, 끝내 지혜의 안목을 얻은 자들에게 비웃음 받을 것이 두려울 뿐이다.
033_0675_b_01L 1) 하안거를 중도에 어기는 것은 작은 허물이 아님. 2) 불존을 대하는 의례. 3) 밥은 작은 상에 앉아서 먹음. 4) 음식을 먹을 때는 맑고 탁함을 구분해야 함. 5) 음식을 먹은 후에 더러움 씻기. 6) 물은 청탁을 구별하여 두 단지에 채워야 함. 7) 새벽과 아침에 물에 벌레가 있는가를 살핌. 8) 아침에 치목(齒木)52) 씹기. 9) 재계하고서 초청한 곳으로 가 공양 받기. 10) 옷 입고 먹는 데 필요한 것. 11) 옷을 착용하는 법식. 12) 비구니의 옷 착용과 상례의 법도. 13) 청정한 땅[淨地]을 정하는 법. 14) 출가한 사람[五衆]의 안거(安居). 15) 수의(隨意)53)할 때의 규율. 16) 숟가락과 젓가락 사용의 가부. 17) 때에 맞게 행동하는 예절. 18) 대소변[便利]에 대한 일. 19) 계(戒)를 받는 것에 대한 규례. 20) 때에 따라 몸을 씻기. 21) 방석[坐具]을 사용하는 법. 22) 누워 쉬는 방법. 23) 병을 적게 하는 경행(經行)54). 24) 사례(四禮)55)를 행할 때는 서로 도와주지 않음. 25)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 대한 법도. 26) 나그네 비구를 맞이하는 예. 27) 먼저 병의 근원을 살핌. 28) 약을 처방하는 법. 29) 잘못된 약 처방을 제거. 3) 오른편으로 돌며[旋右]56) 시간을 보는 법. 31) 존의(尊儀)57)를 씻기 법. 32) 부처님을 기리고 찬양하는 예.
33) 부처님을 공경하는 어긋난 예법. 34) 서방(西方) 불학의 체계. 35) 머리를 기르는 것은 법도에 없음. 36) 죽은 승려의 재물을 나누는 법. 37) 승복을 받는 법. 38) 몸을 사르는 것[燒身]은 합당하지 않음. 39) 옆 사람에게 죄를 짓게 하는 것. 40) 옛 대덕이 하지 않았던 행동.
유부(有部)에서 나누는 것에는 3부의 구별이 있다. 첫 번째는 법호부(法護部)3)이며, 두 번째는 화지부(化地部)4)이고, 세 번째는 가섭비부(迦攝卑部)5)이다. 이는 모두 오천축국에서는 행해지지 아니하고 오직 오장나국(烏長那國)6)과 구자국(龜玆國)7) 그리고 우전국(于闐國)8)에서만 행하는 사람이 더러 있다. 그러나 『십송률』도 근본유부(根本有部)와는 다르다.
하안거를 어기는 모든 필추(苾芻 : 비구)는 다만 거기에서 얻는 열 가지 이익을 얻지 못하게 될 뿐이다. 그러나 그들의 본래의 위치가 이것으로 인해 낮게 평가될 수는 없는 것이다. 어찌 예전에 공경받던 사람이 지금 도리어 아래 사람에게 절하는 것이 용납되겠는가? 습관으로 풍속을 이루었지만 본래는 증빙할 근거가 없는 일이다.
하안거에 들어가 밖으로 나갈 청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도둑질한 허물을 용납한다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소상하게 살피고 이치에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 비구 위치의 높고 낮음은 마땅히 계를 받는 날짜로 논해야 한다. 그러면 비록 하안거를 못하게 된다 하더라도 그의 위치가 아래로 떨어지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성인의 가르침을 찾아 검토해 보아도 이런 문장은 없으니 누가 옛날에 이런 일을 하게 내버려 두었겠는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부처님의 형상을 대하거나 또는 존경하는 스승 가까이 있을 때는 병에 걸린 경우가 아니면 맨발로 있는 것이 예의이며 신발을 신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다. 오른편 어깨만 드러내고 왼쪽 어깨는 옷으로 덮고 머리에는 두건이나 수건을 쓰지 않는다. 이런 변함없는 법칙도 다른 곳에 갈 때는 허용되어 잘못이 아닐 경우도 있다.
033_0675_c_01L만약 추운 나라에 산다면 단화(短靴)를 신는 것이 허용되며 각각의 지역에 맞는 여러 종류의 신발을 신을 수 있다. 사는 곳이 추운 나라일 경우에는 단화를 신는 것이 허락된다. 이미 나라와 지역이 다른 곳에서 춥고 더운 것이 같지 않으니 성인의 가르침에 따라서 그대로 하면 어긋나는 곳이 많게 된다. 이치로 보아서 몹시 추운 겨울에는 그때에 맞게 옷을 입어 몸을 보호해야 하고 봄이나 여름에는 반드시 계율을 따라야 한다. 신발을 신은 채 불탑을 돌지 말아야 한다는 가르침은 이미 오래 전에 명시한 것이고, 부라(富羅)9)를 신은 채 향대(香臺)10)에 나아가지 말라고 한 규정도 이미 오래 전부터였다. 그러나 고의로 이를 어기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억지로 부처님의 귀중한 말씀을 무시하는 것이다.
서방의 승려들은 음식을 먹으려 할 때 사람마다 반드시 손발을 깨끗이 씻고 각자 다른 작은 의자에 앉아야 한다. 의자의 높이는 7촌(寸) 가량 되고 사방은 겨우 1척(尺)이 될까 말까 하다. 그것은 등나무 줄기로 짰는데 다리가 둥글고 가볍다. 지위가 낮고 어린 대중들은 작은 나무 조각을 자리로 사용한다. 두 발은 땅 위에 대고 앞에는 쟁반과 밥그릇을 놓는다. 땅은 소똥으로 깨끗이 바르고 신선한 나뭇잎을 그 위에 깐다. 자리는 팔꿈치 길이만큼 떨어져 있어 서로 부딪치지 않는다.
커다란 의자 위에서 가부좌(跏趺坐)를 하고 밥을 먹는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성인의 규칙에 따르면 의자의 길이는 부처의 손가락 여덟 개 정도이며 보통 사람들보다 세 배로 길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의 손가락 24개의 길이이다. 홀척(笏尺)으로는 1척 반이다. 동하(東夏)의 여러 절의 의자의 높이는 2척 이상이어서 앉는 데 적합하지 않다. 높은 의자에 앉는 것은 잘못인데 당시 불교계의 사람들이 모두 이처럼 하고자 했다면 어찌하였겠는가?
죄를 지은 무리들은 반드시 그 척양(尺樣)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영암사(靈巖寺)11)와 사선사(四禪寺)의 의자의 높이는 1척(尺)이니, 과거에 덕이 높은 선사들이 이러한 규칙을 만든 것은 참으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곧 연좌(連坐)하여 가부좌를 틀고 무릎을 밀쳐내며 식사를 하는 것과 같은 일은 본래의 법이 아니니 다행히 이를 알아야 할 것이다.
033_0676_a_01L듣건대, 불법이 처음 중국에 왔을 때 스님들은 모두가 다 웅크리고 앉아서 식사를 하였는데, 진(晋)나라(265~419) 때에 이르러 이 일이 비로소 잘못 전해졌음을 알고 이때부터 가부좌를 하고 식사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성인의 가르침이 동방에 들어온 지 거의 7백 년이 되어가며 이 기간 동안에 10개의 왕조가 교체되었고 각각의 왕조에서는 그 시대의 걸출한 인물이 배출되었다. 인도 스님들이 계속해서 찾아오게 되자 중국 스님들이 어깨를 밀치며 앞다투어 가르침을 받았고, 또한 친히 서쪽 인도로 가서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목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비록 중국으로 돌아와서 보고 들은 것을 말한다 하더라도 누가 그것을 이용하는 것을 볼 수 있겠는가?
또한 경에 이르기를, “식사를 마치고 발을 씻었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으로 보아 의자 위에 앉아서 식사한 것이 아님이 분명하고 남은 밥을 발 옆에 버렸기 때문에 다리를 펴고 앉아서 먹은 것을 알 수 있다. 불제자라면 마땅히 부처님에 대해 배워야 할 것이며, 설사 따를 수 없는 경우에라도 그것을 경멸하거나 비웃어서는 안 된다.
수건을 깔고 똑바로 앉는다면 깨끗함을 지키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남은 음식과 더러워진 음식으로 더러움을 면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다시 대중이 남긴 밥을 모은다는 것은 이는 깊은 위의(威儀)가 아니며, 수거한다는 것도 도리어 스님들의 밥그릇을 더럽히는 것이다. 가인(家人)들이 오히려 깨끗한 그릇을 잡으니 이는 공연히 깨끗함을 지킨다는 것만 전해왔을 뿐 그 공은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자세히 이를 살펴서 모름지기 그 득실을 관찰하기를 바란다.
모든 서방의 스님과 속인들의 음식 먹는 법은 깨끗한 것[淨]과 더러운 것[觸]으로 구별을 둔다. 일단 한 입이라도 먹은 것은 모두 더러운 것이 된다. 음식을 담았던 그릇도 반드시 다시 사용해서는 안 되고 옆 가장자리에 놓아두었다가 다른 사람의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려서 함께 버린다. 남은 음식은 그것을 잘 먹을 수 있는 자에게 준다. 만약 다시 거두어 받는 일은 결코 해서는 안 된다. 지위의 높고 낮음을 논할 것 없이 이 법은 모두에게 동일하다. 이는 곧 하늘의 의식이며 단지 사람들만의 일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여러 논(論)에서는 “양지(楊枝)12)를 씹지 아니하거나 대소변을 보고 씻지 아니하며, 식사할 때 깨끗한 것과 더러운 음식을 구별함이 없다면 장차 이것 때문에 비천한 사람으로 간주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이미 더럽혀진 그릇을 어찌 다시 사용할 수 있겠는가? 남아있는 음식은 도리어 다시 거두어서 부엌으로 들여보내고, 남은 떡은 항아리 안에 쏟아서 덮어두고, 남아있는 고깃국은 다시 냄비 속에 넣는다. 국과 나물은 다음 날 아침에 다시 먹으며 떡과 과일은 다른 날 곧 먹는다. 계율을 지키는 사람들은 제법 분수와 한계선을 알고 있지만 법을 지키지 않고 소홀히 하는 사람들은 부화뇌동하여 대략 똑같이 행동한다.
033_0676_b_01L또한 재(齋)를 지내고 공양을 받을 때나 다른 음식을 먹을 때 음식이 이미 입으로 들어가게 되면 곧 더러운 것[觸]이 되니 반드시 깨끗한 물로 입을 헹군 뒤에야 비로소 다른 사람과 다른 깨끗한 음식을 건드리고 손을 댈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깨끗한 물로 양치질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것들을 만졌다면 이것은 모두 깨끗하지 않은 것[不淨]이 된다. 깨끗하지 않은 사람과 접촉한 사람도 반드시 깨끗이 씻거나 양치질해야 한다. 만약 개를 만졌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로 반드시 씻어야 한다.
음식을 맛보는 사람은 마땅히 한쪽 옆에 있어야 하며, 맛보기를 마치면 손을 씻고 입을 헹구고 아울러 맛본 그릇을 씻고 나서야 비로소 냄비나 솥을 만질 수 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가 하는 기도나 청원 및 금술(禁術)은 모두 효험이 없게 된다. 비록 신에게 바치는 제사 음식을 차려 놓는다고 하더라도 신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이로써 말한다면 삼보(三寶)와 영기(靈祇)에게 음식을 만들어 공양하거나 평상시 음식을 먹을 때에도 반드시 청결해야 한다. 만약 몸을 깨끗이 씻지 않고 입을 헹구지 않거나 대소변을 보고 씻지 않는 모든 사람은 음식을 하는데 적합하지 않다. 세속에서도 이르기를, “청결하게 재계한 후에야 비로소 석전(釋奠)13)을 올렸다. 손톱을 깎을 때는 살갗 안으로 바짝 들어가게 깎아 때를 없애야 한다. 공자(孔子)ㆍ안자(顔子) 등과 같은 분들에 대한 제사 때에도 역시 모든 일에 있어 반드시 청결하여야 하며 남은 음식으로 제물을 받게[歆饗]하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모든 재(齋)의 공양을 진설하거나 또는 스님들의 평상시 식사도 반드시 다른 사람들의 검사를 받아야 한다. 만약 재가 끝나기를 기다리는데 혹 식사 시간을 넘기게 될까 두려운 사람은 스님이나 일반인을 막론하고 비록 아직 음식을 올리기 전이라도 부분을 취해서 먼저 먹는다. 이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허락된 일이기 때문에 죄와 허물은 없다.
최근 들어 비구나 비구니로서 검교(檢校)를 돕는 사람들이 흔히 정오를 넘겨 식사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복을 받는 대신에 죄를 얻게 되는 것으로 일이 옳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오천축국에서 다른 여러 나라와 다른 것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이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을 구별하는 것[淨觸]으로 첫 번째 기초를 삼기 때문이다.
예전에 북방 오랑캐 땅의 사신이 서쪽 나라에 들어갈 때에는 흔히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게 되었다. 이들은 대소변을 보고도 손을 씻지 않고 남은 음식을 그릇에 담아놓으며 식사할 때 무리를 지어 모여 앉아 서로 몸을 흔들고 부딪치며 돼지나 개를 피하지 않고, 식사 후에 치목(齒木)14)을 씹지 않아 마침내 비난을 받게 되었다. 그러므로 법을 수행하는 사람은 마침내 여기에 마음을 두어야 하며 하찮은 일에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
033_0676_c_01L그러나 중국[東夏]에서는 깨끗하고 더러운 음식의 구별이 없어진 지 오래되었다. 비록 이런 말을 듣는다고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은 아직 그 규율을 체험하지 못하였으므로 각각 얼굴을 마주 대하고 말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알고 깨달을 수 있겠는가?
033_0676_c_01L然東夏食無淨觸其來久矣,雖聞此說多未體儀,自非面言方能解悟。
5. 식파거예(食罷去穢)
033_0676_c_02L五食罷去穢
식사가 끝났을 때는 그릇에 물을 받거나, 혹 가려진 곳에 있거나, 도랑이나 구멍난 곳을 향하거나, 혹 계단에 임해 있어야 한다. 혹은 스스로 물병을 갖고 있거나 사람들로부터 물을 받아 손은 반드시 깨끗이 씻고 입으로는 치목(齒木)을 씹어 치아를 후비고 혓바닥을 닦아내어 힘써 청결하게 하여야 한다. 만약 입 안에 진액이 남아 있다면 재(齋)가 이룩되지 못한다. 그런 후에 콩가루나 또는 때에 따라서는 흙과 물을 섞어 밟아서 진흙을 만들어 그것으로 입술을 닦아 기름기를 없애야 한다. 다음에 깨끗한 병의 물을 취해서 소라 모양의 술잔에 담거나 신선한 나뭇잎을 쓰거나 손을 사용한다. 그때 그 그릇과 손은 반드시 삼설(三屑)15)로 깨끗하게 문지르고 씻어서 기름기가 제거되도록 하여야 한다.
혹 가려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깨끗한 병을 입에 쏟아 붓더라도 환하게 드러난 곳에서는 계율에 따라 그렇게 하지 못한다. 대략 두세 번 입을 헹구게 되면 비로소 깨끗하게 된다. 이렇게 되기 전에 입 안의 진액을 문득 삼키는 것은 옳지 않다. 그것은 위의(威儀)를 어기는 것이므로 삼킬 때마다 죄를 얻게 된다. 또는 아직 깨끗한 물로 거듭 입을 헹구기 전에 침은 반드시 밖으로 뱉어야 한다. 만약 시간이 정오를 넘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는 시간을 어긴 사람으로 생각될 것이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고, 설사 안다고 하더라도 이것을 지키기는 쉽지 않다. 이런 점에서 말한다면 콩국수ㆍ잿물 등은 참으로 허물을 면하기 어렵다. 정말로 치아 속에 음식이 남아있고 혓바닥 위에 기름기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지혜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이치를 잘 살펴서 마땅히 주의하여야 한다. 정식(正食)을 끝낸 뒤에도 이야기 하면서 시간을 보내거나 깨끗한 병에 물을 담아두지 않거나 치목을 씹지 않고 아침 내내 더러운 채 있다가 마침내 밤이 되어서는 허물을 초래하는 것이 어찌 용납되겠는가? 이런 식으로 일생을 보내 죽게 된다면 진실로 재난을 불러들이게 될 것이다. 문인(門人)에게 깨끗한 병의 물을 갖게 한다면 역시 이것도 하나의 의법(儀法)이다.
033_0677_a_01L 모든 물에는 순수한 물[淨]과 탁한 물[觸]의 구분이 있다. 병도 두 개가 있어 순수한 물은 모두 오지그릇이나 도자기를 사용하고, 탁한 물은 구리ㆍ무쇠 등의 병을 임의대로 사용한다. 순수한 물은 비시(非時)16)에 음료수로 사용하고, 탁한 물은 대소변 후에 필요한 것이다. 순수한 물은 깨끗한 손으로만 만질 수 있고 반드시 깨끗한 곳에 두어야 한다. 그러나 탁한 물은 더러운 손으로도 언제나 필요할 때 만질 수 있으니 더러운 곳에 놓아둘 수 있다.
그 물병을 만드는 방법은 뚜껑은 아가리와 잘 맞춰져야 하며, 정수리에는 뾰족한 대(臺)가 나오게 하고, 그 높이는 손가락 두 개 가량 되게 한다. 그 위에 작은 구멍을 뚫고 구리 젓가락과 같이 거칠게 한다. 물을 마실 때는 이 구멍을 이용해야 한다. 가장자리에는 따로 둥근 구멍을 뚫어 놓아 병의 아가리를 에워싸도록 하고, 위로 솟아오르게 하는 것은 손가락 두 개의 높이로 하며, 구멍은 동전 크기만 하게 하여 물을 부을 때는 이곳으로 붓는 것이 좋다. 용량은 2, 3승(升) 가량을 담을 수 있어야 하며 작게 만들면 쓸모가 없다. 만약 이 두 구멍에 벌레나 먼지가 들어갈까 염려되면 뚜껑을 덮어두어도 괜찮다. 또는 대나무나 나무 혹은 베나 나뭇잎 등으로 싸서 막아두어도 된다.
인도의 승려들은 이 제조 방법으로 물병을 만든다. 만약 물을 담을 때에는 반드시 물병의 내부를 씻어 먼지와 때를 다 없앤 뒤에야 비로소 새 물을 받는다. 어찌 순수한 물과 탁한 물을 구분하지 않는 것을 용납하겠는가? 단지 작은 동병(銅甁) 하나에 물을 넣어두고 뚜껑을 덮어 아가리에 꽂아 기울이면 물이 흘러 내려가 버린다. 물을 담아 사용할 만한 것이 못 되고 순수한 물과 탁한 물을 분간하기 어렵다. 또한 그 안에 더러운 것이 있거나 냄새가 나면 물을 보관할 만한 것이 못 된다. 용량도 1승(升) 2합(合) 정도밖에 되지 않으니 어떤 일을 하든지 모두 모자람이 있다.
033_0677_b_01L그 물병을 담는 주머니[布袋]의 법식은 길이가 2척(尺), 넓이가 1척(尺) 가량 되는 천을 구하여 모서리의 양쪽 머리를 주름잡아 마주보게 하여 꿰매고 두 모서리 끝에 길이 1책(磔)이 될까말까한 끈 하나를 붙여두고 병을 그 안에 넣어 어깨에 메고 길을 떠난다. 걸식할 때의 발우 주머니 양식도 이와 같다. 위로 발우의 아가리를 덮어 먼지와 흙이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그 바닥을 뾰족하게 함으로써 발우가 흔들리거나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 발우를 저장하는 주머니는 이와 다르다. 그 내용은 다른 곳에서 서술한 바와 같다. 갖고 있는 물병, 발우, 몸에 맞는 옷과 기타 소지품은 각각 한쪽 어깨에 얹어놓고 가사로 완전히 덮은 채 우산을 바쳐 들고 길을 떠난다. 이러한 모든 것은 불교의 출가승의 의식이다.
손에 여유가 있을 때는 보통 물병과 가죽 신발 주머니를 들고 석장(錫杖)은 비스듬히 겨드랑이에 낀 채 침착하고 여유있게 가거나 멈춘다. 오유월경(烏喩月經)은 바로 그 상황에 해당하는 경이다. 가령 왕사성(王舍城)17)이나 보리수(菩提樹)18)ㆍ영취산(靈鷲山)19)ㆍ녹야원(鹿野苑)20)ㆍ사라학발(沙羅鶴髮)의 장소21)나 소조작봉(簫條鵲封)22) 등에서 예제(禮制)가 있을 때에는 사방에서 모두 모여들어 하루에 수천 명을 헤아리는 스님을 보게 되는데 모두가 이 법식과 같았다.
나란타사(那爛陀寺)23)의 덕이 높은 스님들은 대체로 모두 가마를 타고 다니며 안장을 단 말을 탄 사람은 없다고 알려졌다. 대왕사(大王寺)의 여러 스님들도 모두 그와 같았으며, 지니고 있는 자구(資具)는 모두 사람을 시켜 등에 지고 가거나 혹 동자를 시켜 받들어 지니게 하였다. 이것이 서방 인도 스님들의 법식이다.
새벽마다 반드시 물을 살펴보아야 한다. 물에는 병에 든 물과 우물의 물, 연못물, 하천의 물 등의 구별이 있다. 또 이를 관찰하는 데에도 하나의 기준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날이 밝으면 먼저 병에 든 물을 관찰한다. 병에 든 물을 살피는 데는 희고 깨끗한 구리잔이나 동첩(銅疊)이나 혹은 조개 껍질로 된 술잔이나 칠기(漆器)에서 한 줌 가량의 물을 벽돌 위에 붓는다. 안치하거나 혹 별도로 물을 관찰하는 나무를 만들어도 좋다. 손으로 병의 입을 가리고 한참 동안 이를 살피며 혹 동이나 단지 속에서 이를 관찰하여도 된다.
033_0677_c_01L벌레가 털끝처럼 작아도 반드시 잘 살펴야 한다. 만약 벌레가 보이면 병 속의 물을 거꾸로 쏟아내고 다시 다른 물로 두세 번 그릇을 씻어내서 벌레가 없어지면 비로소 씻는 일을 그만둔다. 연못이나 하천에 병을 갖고 가서 벌레를 물에서 걸러내고 청정한 새 물로 걸러서 취한다. 만약 우물 속의 물일 경우에는 법에 준해서 이를 걸러내면 된다. 우물물에서 물을 떠서 그것을 관찰할 때는 두레박 속에서 구리잔으로 한줌 가량 퍼담아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방법으로 관찰하고, 만약 벌레가 없을 경우에는 밤새도록 필요에 따라 사용하고, 벌레가 있을 경우에는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은 방법으로 걸러낸다. 연못이나 하천의 물을 관찰하는 방법의 자세한 내용은 계율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물을 걸러내는 방법으로 서방에서는 아주 좋은 하얀 무명천을 사용하지만 중국에서는 촘촘한 명주를 이용한다. 혹 경우에 따라서는 미유(米柔)나 혹 미자(微煮)24) 등의 누인 견을 사용하여도 된다. 만약 생견(生絹)을 사용할 경우, 작은 벌레는 곧바로 그것을 빠져나간다. 숙견(熟絹)을 홀척(笏尺)으로 4척(尺) 가량 취한다. 가장자리를 잡고 길게 잡아당겨 양쪽 머리에 주름을 잡아 바느질해서 서로 붙이면 곧 체 모양이 된다. 이 체의 두 모서리에 띠를 두르고 양쪽 면에 매듭을 마련한다. 가운데 나뭇가지를 가로로 놓아두고 1척 6촌이 되게 벌려 열어두고 두 가장자리를 기둥 아래 붙잡아매고 아래에는 쟁반을 바쳐둔다. 물을 기울일 때는 두레박 바닥이 반드시 그물 속에 들어가게 하여야 한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벌레가 물을 따라 땅에 떨어지거나 쟁반에 떨어지게 되므로 순간 살생을 면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물을 처음 체에 부을 때에는 그것을 받아 관찰하고 벌레가 있으면 곧 바꾸어 버려야 하며, 만약 깨끗하면 평상시와 같이 이를 사용한다. 물이 충분하다면 곧 체를 뒤집을 수 있다. 두 사람이 각각 한쪽 머리를 잡고 그물을 뒤집어 방생(放生)하는 그릇 안으로 들어가게 한 채 그 위를 물로 세 차례 두루 씻어주고, 외부의 가장자리는 다시 물을 뿌리고 그 안에는 또 물을 담아서 이를 관찰한다. 만약 벌레가 없을 경우에는 마음대로 그물을 제거한다. 이 걸러진 물은 하룻밤이 지나면 다시 살펴야 한다. 하룻밤이 지난 물을 아침에 살피지 않는 사람은 벌레가 있거나 없거나 계율에서는 이를 적용하여 모두 죄를 초래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생명을 보호하면서 물을 취하는 방법은 많은 종류가 있어 서로 같지 않다. 우물이 있는 곳에서 시행할 때에는 이 체를 쓰는 방법이 가장 긴요하고 하천이나 연못이 있는 곳에서 시행할 때에는 혹 나무 그릇[棬]을 놓거나 음양병(陰陽甁)을 사용하여 임시방편으로 일을 끝마친다. 또한 6월과 7월은 벌레들이 더 작아져서 다른 시기와 같지 않으므로 생견(生絹) 열 겹을 겹치더라도 벌레는 역시 곧바로 빠져나간다. 기쁜 마음으로 생명을 보호하는 사람이라면 이치로 보아 마땅히 주의 깊게 신경 써서 방편으로 살생을 면하도록 하여야 한다. 이 경우 혹 와분자(瓦盆子 : 진흙으로 만든 동이)를 만들기도 하나 체가 역시 가장 중요하다. 서방 인도의 사찰에서는 구리로 만들어 사용하는데 이는 모두가 성인이 제정한 제도이니 일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
사찰에서 걸러내는 데 사용하는 비단은 큰 스님들이 원래 건드려서는 안 된다. 승방 안에서 때에 맞춰 먹는 물[時水]의 경우에도 역시 또한 그와 같이 한다. 아직 구족계를 받지 않은 사람이 취한 물이라야 비로소 마실 수 있다. 때가 아닌데 마시는 사람은 반드시 깨끗한 체와 깨끗한 병과 깨끗한 그릇을 사용해야만 마실 수 있다. 생명을 보존한다는 것은 성계(性戒)25)이니 지켜야 할 계율 가운데 비중이 무겁고 10악(十惡)26) 가운데 첫머리를 차지하는 것이니 이치로 보아 경솔하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수라(水羅:물을 걸러내는 비단)는 스님들이 지녀야 하는 여섯 가지 물건 중의 하나이니 지니지 않을 수 없다. 만약 3, 5리를 갈 경우에도 수라가 없으면 길을 떠나지 않는다. 만약 절에서 물을 걸러내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 그곳에서 음식을 먹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먼길에서 목말라 죽는 한이 있더라도 스님들의 귀감(龜鑑)이 될 만한 사람이다. 어찌 항상 물을 사용하면서 한 번도 관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비록 걸러내는 비단이 있다고 하더라도 벌레가 도리어 그 속에서 죽을 수도 있다. 가령 생명을 보존하고자 하나 그 의식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우물 입구 위에서 수라를 뒤집고 방생하는 그릇을 사용할 줄 모르니 일단 벌레들이 물에 이르면 죽게 될 것은 뻔한 일이다.
때로는 작고 둥근 체를 만드는데 용량이 겨우 1승(升) 2합(合)이다. 성기고 얇은 생견으로는 원래부터 벌레를 관찰하지 않는데 발우 옆에 매달아 놓고 다른 사람들이 그것이 거기에 있는지를 보고 알게 한다. 생명을 보호할 마음이 없으면서 이런 사람은 날마다 허물을 부르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런 일을 스승과 제자가 서로 이어가며 법을 전한다고 생각하니 참으로 탄식할 만한 일이다. 모든 사람들은 제각기 물을 살피는 그릇을 갖고 있어야 하며 방생하는 두레박도 곳곳에 반드시 두어야 한다.
033_0678_b_01L치목(齒木)이라 하는 것은 범어로는 탄다가슬타(憚哆家瑟詫)라고 하는데 탄다라는 말은 번역하면 치아라는 뜻이고, 가슬타라는 말은 나무라는 뜻이다. 이 치목의 길이는 12지(指)이며 짧아도 8지 이하여서는 안 된다. 크기는 새끼손가락과 같으며 한 쪽 끝을 천천히 곱씹고서 그것으로 한참동안 이 사이를 깨끗하게 닦는다. 만약 존귀한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 설 때는 왼손으로 입을 가려야 하며, 사용이 끝나면 쪼개어 구부려서 혀를 문지른다. 또한 별도로 구리나 쇠로 만든 혀를 문지르는 비녀를 사용해도 되며 혹 대나무로 새끼손가락 표면만한 얇은 조각을 만들어 가느다란 한 쪽 끝으로 부러진 이를 쑤신다. 구부려서 혀를 문지르되 손상되지 않게 해야 한다.
치목은 큰 나무토막을 쪼개거나 혹은 작은 나뭇가지를 잘라서 사용해도 된다. 산장에 가까이 사는 사람은 자작나무의 가지나 칡덩쿨을 먼저 사용하면 되고, 평탄한 들판에 거처하는 사람은 곧 닥나무ㆍ복숭아나무ㆍ느티나무ㆍ버드나무 등을 뜻에 따라 미리 비축하여 사용에 대비하고 없어지거나 모자라는 일이 없도록 한다. 젖은 나무는 곧 다른 사람에게 주어야 하고 마른 것은 자신이 가질 수 있다. 젊고 건장한 사람은 마음대로 취하여 씹으면 되지만 늙고 나이 많은 사람은 끝을 방망이질하여 부드럽게 하여야 한다.
그 나뭇가지가 쓰고 떫고 매운 것도 좋으나 끝을 씹으면 솜처럼 부드러운 것이 가장 좋다. 굵은 호엽나무[胡葉木]27) 뿌리는 극히 정교한 치목이다이는 곧 창이(蒼耳 : 도꼬마리) 뿌리와 절이(截耳) 뿌리며 땅 속 두 촌(寸) 가량 들어간 곳에 있는 뿌리이다. 이것은 치아를 단단하게 하고 입에 향기가 나게 하며 음식을 소화시키고 마음의 병을 없애준다. 이것을 반 달 동안 사용하면 입 안의 나쁜 기가 완전히 제거되며, 치아의 아픔과 통증은 30일이면 낫는다. 중요한 것은 모름지기 오래 씹어서 깨끗하게 문지르고 입에서 침이 흘러나오게 하여 많은 양의 물로 깨끗이 양치질해야 하니 이것이 그 방법이다.
033_0678_c_01L그리고 치아의 뿌리에 묵은 더러운 찌꺼기는 오랜 시간이 지나면 단단하게 되므로 이를 제거하여 모두 없어지도록 해야 한다. 만약 끓인 물로 깨끗하게 양치질한다면 죽을 때까지 다시 썩는 일은 없을 것이다. 어금니의 통증은 서쪽 인도 나라에서는 거의 없으니 이는 그들이 치목을 씹기 때문이다. 어찌 치목을 알지 못하고 버드나무가지[楊枝]라 부르는 일이 용납되겠는가? 서쪽 나라에서는 버드나무는 아주 희귀한 나무인데 번역한 사람이 문득 이렇게 이름을 전한 것이다. 부처님의 치목에 사용한 나무는 버드나무가 아닌 것을 나란타사(那爛陀寺)에서 내 눈으로 직접 보았다. 그러나 이미 이것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믿음을 얻으려는 것은 아니니 역시 수고롭게 의혹을 일으킬 필요는 없는 것이다.
『열반경』29)의 범본(梵本)을 조사해 보니 ‘치목을 씹을 때’라고 하였다. 또한 가느다란 버드나무 가지를 사용할 때도 있으며, 혹 다섯 개 혹 여섯 개를 전부 입 안에서 씹으면서 양치질하여 찌꺼기를 제거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기도 한다. 혹 그 즙을 삼켜 장차 그것으로 병을 없애려 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는 청결하기를 바라지만 도리어 더러워지고, 병이 없기를 바라지만 오히려 병을 부르고 있는 사람들이다. 또 혹 이런 일 조차도 알지 못하는 사람도 있으니, 이들에 대해서는 논할 필요조차 없다.
그러나 오천축국의 법에는 속인들도 치목을 씹는 것이 항상 있는 일로써 세 살짜리 어린 아이들에게도 모두 그렇게 하기를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성인의 가르침과 속류(俗流)에 모두 공통적으로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033_0678_c_10L然五天法,俗嚼齒木自是恒事,三歲童子咸卽敎爲,聖敎俗流俱通利益。
이미 좋고 나쁜 것을 말하였으니 이를 행하고 버리는 것은 당사자의 마음에 달려 있다.
033_0678_c_12L旣申臧否,行捨隨心。
9. 수재궤칙(受齋軌則)
033_0678_c_13L九受齋軌則
서방 인도와 남해의 여러 나라에서 행해지는 부청(赴請)30)의 의식을 간략하게 밝힌다면, 인도에서는 시주가 기일에 앞서 미리 예배드리고 스님에게 오실 것을 청한다. 재일(齋日)이 되면 “때가 되었다”라고 가서 아뢴다. 승도의 기물과 자리는 그때에 맞춰 적합하게 준비한다. 이때 혹 정인(淨人)31)을 시켜 스스로 지니게 하여도 되고, 또는 다른 사람의 깨끗한 물건을 받아 써도 되지만, 그릇은 오직 구리와 같은 색을 사용하고 이것을 잿가루[灰末]로 깨끗하게 문질러야 한다. 좌석은 각기 작은 걸상에 나누어 앉아야 하며, 자리가 이어져 서로 부딪치게 해서는 안 된다. 그 걸상의 법식은 제3장에서 이미 말한 것과 같다.
033_0679_a_01L만약 한 번도 쓰지 않은 와기(瓦器)를 사용할 경우 이는 허물이 아니다. 일단 한 번 사용한 것은 쓰기가 끝나면 이를 구덩이 속에 버린다. 왜냐하면 이미 더럽혀진 그릇은 다시 거두어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서방의 길가에 의식(義食:齋)을 베푸는 곳에서는 버려진 그릇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도 다시 사용하는 일은 없다. 그런데도 곧 양양(襄陽)의 와기와 같은 그릇은 식사가 끝나면 이를 다시 거두어들인다. 앞에서 말한 대로 이를 버리는 것은 곧 정법(淨法)을 적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오천축국에서는 원래 도자기와 칠기가 없다. 도자기에 만약 기름이 칠해진 것이라면 이는 틀림없이 청정한 그릇이다. 그곳의 칠기(漆器)는 혹 때로 상인들이 가지고 서방에 이르거나 남해에 온 것으로 모두 식사용으로는 쓰지 않는다. 이는 기름기가 묻은 그릇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그 그릇이 반드시 새 것이라면 깨끗한 잿물로 씻어내서 기름기를 없애면 써도 무방하다. 나무로 만든 그릇은 원래 식사용이 아니며, 새로 만든 것이면 한 번 쓰는 것은 허물이 없으나 거듭 사용하면 허물이 되니 이에 관한 내용은 율법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과 같다.
그때 시주하는 집에서 음식을 베푸는 곳은 반드시 쇠똥으로 깨끗하게 땅을 바르고 각기 따로 작은 걸상과 자리를 안배하며 또한 깨끗한 항아리에 미리 물을 많이 저장한다. 승도들이 오게 되면 옷끈을 풀어놓고 깨끗한 병[淨甁]을 안치하여 곧 물을 살펴본 뒤에 만약 벌레가 없는 물이라면 이를 사용하여 발을 씻는다. 그러고 나서 각기 작은 걸상에 자리잡고 잠깐 동안 머물러 쉬면서 때가 이르고 늦음을 살핀 다음 해가 오시(午時)에 이르게 되면 시주자가 때가 되었다고 말한다.
이때 법중(法衆)은 곧 웃옷을 뒤집어 주름잡고 양쪽 모서리를 앞으로 맨다. 밑면의 오른편 모서리가 허리띠의 왼쪽에 눌러 있게 한다. 혹 가루나 또는 흙으로 손을 씻어 깨끗하게 한다. 혹 시주자가 물을 주기도 하고 혹은 스스로 군지(君持:물병)32)의 물을 사용하기도 한다. 때에 따라서 일을 마치고 다시 와서 걸상에 걸터앉아 그 그릇들을 받게 되는데, 이때 간단하게 물로 씻어서 넘쳐나지 않게 하여야 한다.
033_0679_b_01L또한 식사하는 끝자리에 한 쟁반의 음식을 내어놓아 아리저모(阿利底母)에게 공양드린다. 그 아리저모란 여자는 전생에 어떤 일로 인하여 왕사성(王舍城)에 있던 아이들을 잡아먹게 해 달라고 기원하였는데, 그의 잘못된 서원으로 인하여 죽은 뒤에 마침내 야차(夜叉)34)의 무리 속에 태어나 5백 명의 아이를 낳아서 날마다 왕사성의 남녀들을 잡아먹으니, 여러 사람이 이를 부처님께 아뢰었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마침내 그의 애아(愛兒)라는 이름의 어린아이를 숨겨두셨다. 그는 가는 곳마다 그 아기를 찾아다니다가 마침내 부처님께서 계시는 근처에서 찾게 되었다.
이때 부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애아(愛兒)를 가엾게 여기느냐? 너는 아이가 5백 명이나 있으면서도 한 아이에 대해서조차 가엾게 여기는데, 아이가 한두 명만 있을 뿐인 다른 사람의 경우이겠느냐?” 부처님께서는 이 일로 인해 그를 교화하시어 오계(五戒)를 받게 하여 오파사가(鄔波斯迦:優婆塞)35)가 되게 하였다.
그런 까닭에 서방의 모든 절에서는 늘 문이나 집이 있는 곳 또는 식당ㆍ주방 근처에 아리저모의 형상을 새겨놓거나 그림으로 그려서 한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을 나타내고, 그 무릎 아래에 혹 다섯 혹 세 아이가 있게 하여 그 상(像)을 표시한다. 그리하여 날마다 그 앞에 공양하는 음식을 크게 차려 놓는다. 그 아리저모는 곧 사천왕36)의 대중이며 매우 번성한 세력을 지니고 있다. 혹 질병이 있거나 아이를 낳을 소식이 없는 사람은 향응하는 음식을 차려 놓고 그에게 올리면 모두가 소원을 이루게 된다. 자세한 내용은 율법에서 설명한 것과 같으며 여기서 말한 것은 그 대의(大意)만을 진술하였을 따름이다. 중국에서는 예전부터 이런 것이 있어서 이를 귀자모(鬼子母)라 이름하였다.
또한 인도의 큰 절이 있는 곳에는 모두가 식당의 기둥 옆이나 혹은 큰 창고의 문 앞 나무에 조각하여 형상을 표시하였는데, 혹 1척(尺)이나 3척의 크기로 신왕(神王)의 형상을 만들어 놓았다. 이 신왕은 금주머니를 가지고 작은 걸상에 걸터앉아 한쪽 다리는 땅에 늘어뜨리고 늘 기름으로 닦아서 검은 빛깔의 형상이 되게 하여 이를 마하가라(莫訶哥羅)라 부르니, 곧 이는 대흑신(大黑神)이란 뜻이다.
고대에서 이어가며 이르기를, 이는 대천신(大天神)의 부하이며 성품이 삼보를 사랑하고 오부대중(五部大衆)을 호지하여 손실이 없게 한다. 그에게 기도드리는 사람은 원하는 바를 얻게 된다. 다만 식사 때가 되면 주방에서는 늘 향화(香火)를 바치고, 갖고 있는 음식을 그 앞에 진열한다.
033_0679_c_01L나는 일찍이 『대열반경』을 설법하던 곳인 반탄나사(般彈那寺)에서 식사 때마다 항상 백여 명의 스님들이 모여드는 것을 보았다. 봄ㆍ가을 두 시기에 예배드릴 때가 되면 기약없이 찾아오는 스님이 있어 승도 5백 명이 그 절 안에 갑자기 찾아 왔는데, 바로 중식(中食) 때가 되었으나 다시 밥을 지을 방법이 마땅하지 않자, 일을 맡아보는 사람이 주방사람에게 말하였다. “이런 갑작스런 일이 생겼으니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
이때 어떤 정인(淨人)의 늙은 어머니가 말하였다. “이는 늘상 있는 일이니 근심하지 마십시오.”
033_0679_c_04L于時有一淨人老母而告之曰:“此乃常事,無勞見憂。”
그러자 마침내 향화를 많이 불사르고 제삿밥을 크게 차려놓고 흑신(黑神)에게 고하였다. “큰 성인께서는 열반에 드셨지만 그 문도는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사방에서 스님들이 이곳으로 찾아와 성인의 발자국에 예배드리려 하니 음식을 공양하는 데 있어서 부족됨이 없도록 하십시오. 이것은 당신의 힘으로 되는 일이니 때를 알 수 있다면 다행이겠습니다.”
이어 곧 모든 대중들을 자리에 앉게 하고 절의 평소 때 음식을 차례로 나누어 주니 대중이 모두 만족하였고, 그 음식이 남는 것도 평상일과 같았다. 이에 모두 거룩하다고 소리치며 천신의 힘을 찬양하고 친히 천신의 상[容]에 예근(禮覲)을 행하였다. 그런 뒤 천신의 얼굴을 눈으로 보게 되었고 음식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그 이유를 물어 보았더니 그 유래를 알려 주었다.
중국에도 회하(淮河)의 북쪽[淮北] 땅에는 비록 전에 이런 천신이 없었으나, 강남에는 천신을 안치한 곳이 많이 있으며 그에게 기도하는 사람은 효험을 얻게 되니 신도(神道)란 허망한 것이 아니다. 대각사(大覺寺)의 목진린타용(目眞鱗陀龍)37)도 이와 같은 것으로 신의 이름이 다른 것이다.
그 음식을 내어오는 법은 먼저 생강과 소금을 놓는다. 생강은 곧 한 조각이나 두 조각으로 크기가 손가락만하며 소금은 한 숟가락이나 반 숟가락으로 이것을 나뭇잎에 얹어 놓는다. 소금을 나누어 주는 사람은 합장하고 상좌(上座) 앞에 길게 꿇어 엎드려 입으로 “삼발라거다(三鉢羅佉哆)”라고 소리친다. ‘삼발라거다’라는 말은 번역하면 선지(善至) 즉 “잘 오셨습니다”라는 뜻인데, 예전에 이것을 승발(僧跋)이라 번역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때 상좌는 알리기를, “공평하게 드십시오”라고 하는데, 이 뜻은 공양이 두루 잘 이루어졌고 식사 때가 다시 왔다는 뜻으로 생각된다. 그 글자의 뜻에 기준하면 이와 같은 말이 합당하다.
033_0680_a_01L그런데도 부처님께서는 대중들과 더불어 다른 사람으로부터 독이 든 음식을 받으시고도 부처님께서는 “삼발라거다”를 제창하도록 시키신 다음에 비로소 음식을 드시니, 거기에 있던 독약이 모두 맛있는 음식으로 변하였다. 이것으로 말한다면 이 “삼발라거다”란 말은 비밀의 말이며 반드시 “잘 오셨습니다”라는 뜻으로 지목할 필요는 없다. 동서의 두 음은 때에 따라서 말하는 사람에게 달려있지만, 병주(幷州)와 분주(汾州) 지방에서 “때가 되었다”라고 외치는 것은 자못 그 이유와 진실이 있다.
음식을 주는 사람은 반드시 앞으로 다가서서 발을 나란히 하여 공경스럽게 몸을 굽히고 두 손으로 그릇과 떡 과일을 들고 손과의 거리가 1책(磔)이 되면 내려놓아야 한다. 그 밖에 그릇의 음식도 혹 1촌(寸), 2촌의 거리를 두어야 하며, 만약 이 방도와 다를 경우 이치상으로 보아 받는 것이 이루어지지 못한다. 음식은 받는 대로 따라 먹고 모든 사람에게 다 나누어주기를 기다릴 필요는 없다. 이것을 “등공식변(等供食遍:똑같이 나누어 갖고 모두 함께 먹는다)”이라고 한 것은 바른 번역이 아니다. 식사가 끝나면 뜻에 따라 마음대로 행동한다는 것도 성인의 말씀이 아니다.
다음으로는 멥쌀밥과 콩을 넣어 진하게 끓인 국을 내려준다. 여기에 소락(酥酪)을 끼얹어서 손으로 휘저어 섞이게 하고 여러 가지 조미료를 넣는다. 식사할 때는 오른손을 사용하고 배가 절반쯤 부르게 되면 비로소 떡과 과일을 주고 마지막에 유락(乳酪)과 사탕을 나누어준다. 목이 말라서 냉수를 마시는 것은 겨울과 여름을 막론하고 같다. 이것이 곧 대중스님들의 평상시 식사며 아울러 재(齋) 올릴 공양물을 마련할 때도 대체적으로 모두 그렇다.
그러나 재의 법은 그 뜻이 풍부하고 후하게 하는 데 있기 때문에 남는 떡과 밥이 쟁반과 밥그릇에 가득히 넘치고 소락이 종횡으로 널려 있어 그곳에 온 사람은 모두 받아먹게 된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 승광왕(勝光王)38)이 친히 불중(佛衆)들께 공양드리고 많은 음식과 소락 등이 준비되어 땅에까지 모두 넘쳐 흘렀다고 율장(律藏)에 기록되어 있음은 곧 그 일을 말한 것이다.
나 의정(義淨)이 처음 동인도의 탐마입저국(耽摩立底國)에 이르렀을 때 청렴하고 검소하게 공양을 마련하여 승단에서 재를 올리고자 하니, 이때 사람들이 이를 제지시키면서 말했다. “만약 적당히 잘하려고 할 따름이라면 무슨 일을 한들 그것을 하지 못하겠느냐? 그리고 예전부터 이어온 전통이 모름지기 공양은 풍성하고 넉넉하게 마련하도록 되어 있으니, 만약 다만 배만 채우게 한다면 아마도 당신은 다른 사람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듣건대 스님은 대국에서 오셨다니 처소가 풍부하고 넉넉할 것인데도 만약 충분하게 남는 것이 없다면 공양을 마련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
이런 이유로 그는 오히려 그곳의 법에 의하여 공양을 마련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곧 보시하는 마음이 크고 넓으면 얻는 과보도 도리어 더 풍요롭고 많다는 이치에서 온 것으로 이치에 어긋나는 것은 없다. 틀림없이 그가 가난하고 궁색한 사람이라면 음식을 먹고 난 이후에 친(䞋 : 財施)을 행하는데 이때는 그가 할 수 있는 능력에 따라 행한다.
033_0680_b_01L음식을 먹고 나면 약간의 물로 입을 헹구어 그것을 삼키고 버리지 않는다. 그리고 적은 양의 물을 가지고 와 그릇에 부어 간략하게 오른손을 깨끗이 씻은 후에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선다. 일어서고자 할 때에는 모름지기 오른손 안에 가득 한 줌의 음식을 지니고 밖으로 나가야 하며, 승불(僧佛)의 물건을 성인의 가르침에 따라 중생들에게 두루 보시한다. 음식을 먹기 이전에 보시를 바치는 일은 율장에 기록된 바가 없다. 또한 다시 한 쟁반의 음식으로 먼저 죽은 사람들과 귀신들 가운데 식사에 응할 무리들에게 올린다. 이 인연은 영취산(靈鷲山)에서 있었던 것으로 경에서 자세히 설명한 내용과 같다.
승도들이 이곳을 떠나 헤어질 때는 “닦으신 복업으로 모두가 그에 따라 기뻐합니다”라고 말하고, 그런 다음에 흩어져 떠난다. 이때 대중스님들은 각각 나름대로 게송을 외울 뿐 또 다른 법식(法式)은 없다. 먹기를 마치고 남은 음식은 모두 대중스님들에게 맡겨 어린아이들이 가지고 가게 하거나 혹은 가난한 아랫사람들에게 보시하고 먹기에 응하는 사람은 이를 먹게 한다. 혹 시절이 흉년에 속하거나 혹 시주가 인색한 사람이 아닐까 의심이 날 때에는 물어본 다음에 가지고 간다. 그 남겨진 음식을 재주(齋主)가 다시 거두어 먹는 법은 결코 없다. 이것이 서방 인도에서 공양을 받는 하나의 방식이다.
033_0680_c_01L혹 시주가 초청할 경우에도 앞에서 말한 방식과 같이 하면 된다. 즉 그 집안에 부처님의 형상을 미리 설치하고 오시(午時)가 되면 두루 존의(尊儀)에 나아가 쭈그리고 앉아 각자가 마음 속으로 염원하고 예경을 마치면 식사하는 것은 앞에서 말한 법식과 같다. 혹 경우에 따라서는 한 사람을 따로 시켜 불상 앞에서 길게 꿇어 엎드려[長跪] 합장한 채 큰 소리로 찬불하게 하는 경우도 있다길게 꿇어 엎드린다는 것은 두 무릎으로 땅에 버티고 두 발로 몸을 지탱하는 것을 말한다. 예전에 이것을 호궤(胡跪)라고 해석한 것은 잘못이다. 오천축국에서는 모두 그렇게 하는데 어찌 홀로 호궤라 말하는가.
이때는 오직 부처님의 덕만을 찬양하고 다른 말은 섞지 아니하며, 시주는 곧 등을 밝히고 꽃을 뿌리면서 한마음으로 경건하게 공경하며 곱게 빻은 향니(香泥)를 사용하여 스님의 발에 바른다. 향을 태워 향기가 두루 자욱하더라도 또 다른 일은 행하지 않으며 사정에 따라 북을 쳐서 연주하거나 현악기에 맞춰 노래하며 공양드린다. 그후 비로소 재가 시작되는 것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으며 순서에 따라 음식을 먹는다. 식사가 끝나면 그 병의 물을 가지고 두루 대중 앞에 뿌리면 상좌스님은 비로소 시주를 위하여 간략하게 타나가타(陀那伽陀)39)를 외운다. 이것이 또 다른 서방의 식사법이다. 그러나 인도에서 음식을 먹고 씹는 것은 중국과는 많이 다르나 다만 간략히 율과(律科)에 의거하여 그 대강의 내용만을 말할 수 있을 따름이다.
율에 이르기를, 반자포선니(半者蒲膳尼) 혹은 반자가단니(半者珂但尼)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여기서 포선니(蒲膳尼)라 하는 것은 입 안에 넣어 씹는다[含噉]는 뜻이고, 가단니(珂但尼)라 하는 것은 곧 이로 씹는 것[齧嚼]을 말한다. 또 반자(半者)라 하는 것은 오(五)를 말한 것이다. 반자포선니라는 것은 마땅히 오감식(五噉食)이라 번역되어야 하는데, 예전에 오정식(五正食)이라 한 것은 내용에 기준한 번역이다. 다섯 가지 음식이란 첫째는 쌀밥, 둘째는 보리와 콩밥, 셋째는 보릿가루, 넷째는 고기, 다섯째는 떡이다. 또 반자가단니라 하는 것은 마땅히 오작식(五嚼食)이라 번역되어야 한다. 첫째는 뿌리, 둘째는 줄기, 셋째는 잎, 넷째는 꽃, 다섯째는 열매다.
033_0681_a_01L그 인연이 없는 사람은 만약 앞의 다섯 가지를 먹더라도 뒤의 다섯 가지는 반드시 먹어서는 안 된다. 만약 먼저 뒤의 다섯 가지를 먹었을 경우 앞의 다섯 가지는 곧 뜻에 따른다. 이에 기준하여 알아 둘 것은 유락 등은 이 두 개의 다섯 가지 음식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며 율문에는 따로 다른 이름이 없다. 그러므로 명백히 이는 정식의 음식이 아니다. 만약 여러 가지 면이나 밥에서 숟가락을 세워도 넘어지지 않는 음식은 모두가 떡과 밥 종류에 들어가는 음식이며, 마른 보릿가루를 물에 섞어 손가락으로 저어서 자국이 나타나는 음식도 다섯 가지 음식에 속한다.
또한 오천축의 땅의 경우 경계의 분계선이 아득히 멀어 대략 이것을 말할 경우 동서남북이 각각 4백 역(驛)이며, 그 변두리 오랑캐 지방은 여기서 제외된다. 이는 비록 내가 모두를 목격한 것은 아니지만 짐짓 상세하게 물어서 알 수 있었다. 여기서 먹고 씹을 수 있는 음식은 기교(奇巧)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북방에서는 면이 풍족하고, 서쪽 변방에서는 보릿가루가 풍요하며, 마갈타국(摩竭陀國)40)에서는 쌀이 많고 국수는 적고, 남쪽 오랑캐 지방과 동쪽 구석진 지방은 마갈타국과 같은 종류다.
소유(酥油)와 유락은 가는 곳마다 모두 있었으며, 떡과 과일 종류는 모두 헤아릴 수 없었다. 속인들의 무리 가운데 비린내와 노린내 나는 음식을 먹는 사람은 오히려 적었다. 여러 나라에서는 모두 멥쌀이 많았으며 조[粟]는 적고 기장은 없었다. 참외는 있었으며 감자ㆍ고구마도 풍족하였으나 해바라기와 채소는 모자랐으며 만청(蔓菁 : 순무)은 풍족하였다. 그러나 씨에는 검은 것과 흰 것이 있었는데 요즘 이것을 번역하여 겨자[芥子]라 하여 눌러 기름을 짜서 식량에 충당하고 있으며, 여러 나라에서 모두 그렇게 하고 있다.
그 채소를 먹어보면 맛이 중국의 만청과 다를 것이 없고, 그 뿌리는 야무지고 딱딱한 것이 또한 만청과는 같지 않으며 결실한 입자(粒子)가 굵은 것이 또한 중국의 겨자는 아니다. 그것은 마치 탱자나 귤이 지방에 따라 형태가 바뀌는 것과 같다. 나란타(那爛陀)에 있을 때 이같은 의문을 무행선사(無行禪師)41)와 함께 논의하였으나 명확하게 결론을 낼 수 없었다.
또한 오천축국의 사람들은 여러 가지 양념과 생야채 등을 먹지 않는데 이로 말미암아 사람들에게는 복통(腹痛)의 근심이 없고 장과 위는 부드럽고 화평하여 꼬이고 굳어지게 되는 근심이 없었다.
033_0681_a_16L又五天之人不食諸齏及生菜之屬,由此人無腹痛之患,腸胃和耎亡堅强之憂矣。
그러나 남해의 10주(洲)의 재(齋) 공양은 보다 풍성하고 풍요롭게 마련되었다. 첫날은 빈랑(檳榔)42)나무 열매와 편자향유(片子香油)와 쌀가루 약간을 함께 나뭇잎으로 만든 그릇에 담아 큰 쟁반 가운데 놓고 흰 주단으로 이를 덮고 금병에 물을 담아 앞에 해당하는 땅에 뿌림으로써 대중스님들을 청하고, 다음날 정오가 되기 전에 몸에 바르고 목욕하게 한다.
033_0681_b_01L이튿날 오시가 지나면 북을 치고 음악을 연주하며 향화를 마련하고 붕거(棚車)와 가마[輦輿]로 존의(尊儀)를 청해 맞이하는데, 번(幡)과 깃발들이 햇볕에 비치며 스님과 속인들이 구름처럼 몰려든다. 이들을 인도하여 집 뜰에 이르게 되면 천막과 차일이 쳐지고 금동(金銅)의 불상은 아름답게 장식되어 빛난다. 여기에 향니(香泥)를 몸에 바르고 깨끗한 대야 안에 안치하여 모두 향수를 가지고 경건하고 정성스럽게 목욕시킨 후 향기나는 주단으로 닦아 마루 안에 받들고 들어간다. 마루에는 향등(香燈)을 성대하게 마련한 후 비로소 칭찬을 하게 된다. 그런 다음에 상좌 스님은 그 시주를 위하여 타나가타(陀那迦他)를 설하고 그 공덕을 말해 주고 비로소 처음으로 스님들에게 청하여 밖에 나가서 씻고 양치질하고 사탕물을 마시고 빈랑(檳榔)을 많이 씹게 한 다음 모임을 해산시킨다.
사흘째가 되면 우중(禺中:巳時)에 절에 들어가 때가 이르렀음을 공경스럽게 아뢴다. 스님들이 목욕을 마치면 인솔하여 재가(齋家)로 향하여 다시 존의(尊儀)를 안치하고 간단하게 씻는다. 향화와 북 연주는 전날 아침보다 갑절로 더하고 갖고 있던 공양을 불상 앞에 두루 진열한다. 불상의 양 옆에는 각기 동녀(童女)를 엄숙하게 세우고 혹 다섯 사람 또 혹 열 사람을 안배하기도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동자(童子)를 안배하여도 되지만 시간이 있고 없음을 헤아려 한다.
이들은 혹 향로를 받들기도 하고 금빛 조관(澡罐)43)을 잡기도 하며 혹 향등과 색깔이 선명하고 고운 꽃과 백불(白拂)44)를 받들기도 하고 갖고 있는 장대(粧臺)와 경렴(鏡奩)45) 등을 모두 가지고 와서 불상 앞에 봉헌한다. 그것이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았더니, 이는 복의 인연이라 대답하면서 “지금 봉헌하지 않으면 뒤에 어떻게 과보를 바라겠느냐?”라고 하였다. 이치로 말한다면 이것도 좋은 일이다.
다음으로 한 스님을 청하여 불좌 앞에 길게 꿇어엎드려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게 하고 다음에는 다시 따로 두 분의 스님을 청해서 각기 부처님 옆의 한 자리에 올라가 간략하게 종이 반 장 또는 한 장으로 된 짧은 경을 외우게 하고 혹은 불상에 경하드리며 함께 불상에 점정(點睛:點眼)하여 거룩한 복덕이 오게 한다. 그런 다음에 편의에 따라 각기 한쪽에 자리 잡고 가사를 뒤집어 주름을 잡는다가사(袈裟)는 곧 범어로서, 건타(乾陀)46)의 빛깔이다. 원래 동쪽 나라 말이 아니다. 무엇 때문에 수고롭게 밑바닥에 옷을 놓는가? 만약 율법 문전(文典)의 말에 근거한다면 3의(衣)47)는 모두가 지벌라(支伐羅)48)이다. 가사의 두 모서리를 앞에 매달고 손을 씻고 식사자리에 나아간다. 식사의 위의와 법식은 쇠똥을 땅에 바르고 물을 관찰하여 발을 씻고 또한 식사하는 장소와 식사하는 법의 방식은 인도와 모두 대동소이하다.
033_0681_c_01L그러나 그 가운데 다른 점은 삼정(三淨)을 아울러 갖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흔히 나뭇잎을 꿰매서 쟁반을 만드는데 그 넓이가 자리의 절반과 같다. 거기에 맵쌀밥 1두나 2두를 담을 수 있다. 또한 이것을 그릇으로 이용하여 1승(升)이나 2승의 밥을 받아 스님들이 있는 곳으로 향하여 받들어 올려 들고 스님들의 앞에 이르면 이를 드린다.
다음으로 여러 음식을 나누어 주는데 그 음식의 종류가 20, 30종류 밖에 없는 것은 이는 곧 가난하고 궁색한 사람들이다. 만약 왕가나 부잣집의 경우에는 아울러 구리로 된 쟁반과 구리 밥그릇과 또한 나뭇잎으로 된 그릇을 내려주는데 그 크기가 자리의 크기와 같고 음식과 반찬의 수효가 백 가지 맛을 가득 채우게 된다. 나라의 임금도 그 존귀한 자리를 버리고 노복(奴僕)이라 자칭하면서 스님들에게 음식을 내려주며 철저하게 경건하고 공손하게 대한다. 스님들은 나누어 주는 대로 모두 받아야지 이에 대해 거절해서는 안 된다. 단지 충분하다고 거절하게 될 경우 시주의 마음은 곧 불쾌해진다. 그것이 차고 넘치는 것을 보게 되면 비로소 뜻한 바 만족을 이루게 된다.
멥쌀밥은 4두 혹은 5두, 떡과 과일 등은 세 쟁반이나 두 쟁반을 담고 그의 친척과 이웃집에서도 모두 음식을 가지고 와서 공양을 도우며, 혹 밥을 가져오기도 하고 혹 떡이나 국과 채소 등을 가져오는데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리하여 한 사람이 먹고 남긴 음식으로 서너 사람에게 제공할 수 있게 되며, 만약 성대하게 차렸을 경우에는 열 사람이 먹더라도 다 먹지 못한다. 그 남은 음식은 모두 대중 스님들에게 맡겨 정인(淨人)들에게 가지고 가게 한다.
그런데 중국에서의 재법은 서쪽 나라와 같지 않다. 먹고 남은 음식은 주인이 도로 거두어들이며, 스님들이 갖고 가는 것은 이치로 보아 옳지 못하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출가한 사람은 때를 맞춰서 움직이고 족한 것을 알아 욕되게 행동하지 않으니 시주의 마음에 어그러짐이 없게 된다. 만약 시주가 마음을 정하여 다시 자신이 거두지 않고 스님들에게 청하여 갖고 가게 한다면 그때는 사정을 헤아려 짐작에 맡긴다.
대중 스님들도 역시 식사를 마치고 세수와 양치질을 끝내면 곧 남은 음식을 소제하여 자리를 청정하게 하고 꽃과 등을 깔고 향을 태워 향기를 뿌리며 시주한 물건들을 지니고 대중 앞에 줄지어 선다. 다음에는 향니(香泥)를 나누어주는데 크기가 오동나무 열매만 하다. 스님들은 각기 그것으로 손을 문질러 손이 향기롭고 청결하게 한다.
033_0682_a_01L다음에는 빈랑(檳榔)과 두구(荳蔲)49)를 나누어 주고 여기에 정향(丁香)50)과 용뇌(龍腦)51)를 섞어서 씹으면 능히 입에서 향기가 나고 또한 음식을 소화시켜 마음의 병을 제거하게 할 수 있다. 그 향과 약 등은 모두 깨끗한 병에 담은 물로 씻고 신선한 나뭇잎으로 싸서 여러 스님들에게 드려야 한다. 시주는 상좌 스님의 앞에 이르거나 혹은 능한 사람에게 나아가 주둥이가 붙어있는 병의 물을 마치 구리젓가락처럼 계속해서 쏟아 부어 아래에서 쟁반으로 이를 받게 한다.
이때 스님은 곧 손으로 꽃을 잡고 그 쏟아 붓는 물을 받으면서 입으로는 타나가타(陀那迦他)를 외운다. 이때 처음에는 반드시 부처님께서 설하신 게송을 외어야 하고, 그 뒤에는 사람들이 지은 게송으로 통하게 한다. 많고 적은 것은 사정에 맡기고 시간을 헤아려 이를 마치는데 반드시 시주의 이름을 언급한다. 그가 부유하고 즐거워지라고 기원하고, 다시 현재의 복을 지니고 먼저 죽은 사람들을 위하여 회향하며, 마지막에 황제와 왕을 위하여 기원하고, 다음으로 용과 귀신에까지 미쳐 국토가 다 풍성해지고 인물들도 평안하기를 기원하며, 석가의 성교(聖敎)가 머무르고 멸하지 말기를 기원한다.
그 게송을 번역하면 별기(別記)와 같다. 이는 곧 세존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 친히 서원하던 주(呪)이다. 다만 식사가 끝날 때가 되면 반드시 시주를 위하여 특의나가타(特欹拏伽他)52)를 설하여야 한다. 이는 시주한 물건으로 공양을 받드는 의식을 지키는 일이다. 특의니사(特欹尼師)는 곧 마땅히 공양을 받는 데 합당한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 까닭에 성인이 제정하시기를 다만 식사가 끝날 때마다 반드시 한두 개의 타나가타를 외어서 시주의 은혜에 보답하게 하신 것이다범어로 다나발저(陀那鉢底)라는 말을 번역하면 시주가 된다. 다나는 베푼다는 뜻이고 발저는 주인이라는 뜻인데, 이를 단월(檀越)이라 말하는 것은 본래 바른 번역이 아니다. 이는 다나라는 말에서 나(那)라는 글자를 없애고 위의 타(陀)자의 음을 취하여 이를 바꾸어 단(檀)이라 표현하고 여기에 다시 월(越)자를 더한 것인데, 그 뜻은 단사(檀捨)를 행함으로 말미암아 나름대로 빈궁한 사람들을 고해에서 월도(越渡)시킬 수 있음을 말한 묘한 해석이다. 비록 그렇다고 하더라도 결국 이것은 정본(正本)과는 크게 어긋난다. 또 예전에 이것을 달친(達䞋)이라 번역한 것도 잘못된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미 이것은 성인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일이며, 먹은 음식을 소화시키지 못한다. 남은 음식을 달라고 비는 법도 때때로 행해지는 곳이 있다. 그런 다음에 그 보시한 물건들을 나누어준다. 이때는 여의수(如意樹)를 만들어 이것으로 스님들에게 시주하기도 하고, 혹 금련화(金蓮華)를 만들어 부처님께 올리기도 하는데, 신선한 꽃을 무릎 높이와 같게 하고 흰 주단으로 걸상을 가득히 메운다. 오시(午時)가 지나면 혹 짧은 경문을 강의하기도 하며, 혹 때에 따라서는 밤을 새우며 강의한 후에 비로소 흩어지기도 한다.
033_0682_b_01L그곳을 떠나 헤어질 때는 입으로 “사도(娑度)”라 말하고, 아울러 “아노모타(阿奴謨扡)”라 외친다. 이 사도라는 말은 일의 품목을 거룩하게 받들었다는 뜻이고, 아노모타라는 말은 수희(隨喜) 즉 따라 기뻐한다는 뜻이다. 모든 사람에게 베푸는 것을 보았거나, 또 혹 자기에게 베풀어지는 것을 보았을 때는 모두 함께 이 말을 한다. 그 뜻을 생각해 보면 앞사람이 이미 바친 것을 뒤따라 경하하고 찬양하면 복덕과 이익이 더불어 온다는 것이다. 이것이 남해 10주에서 공양을 받는 하나의 법식(法式)이다.
혹 경우에 따라서는 첫날에는 빈랑나무로 스님들을 초청하고, 이튿날에는 사시(巳時)에 불상을 목욕시키고, 오시에 식사를 마치고 삼가하며 저물어서는 경을 강의하는 경우도 있으니 이는 중심에 처한 사람의 임무이다. 또는 첫날에 치목(齒木)을 받들어서 스님들을 초청하고 이튿날에는 재만을 마련하기도 한다. 혹은 스님들에게 나아가 예배드리고 청하고 바라는 말씀을 하여도 되지만 이것은 곧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이 행하는 재법이다.
그러나 북방의 여러 오랑캐 예를 들면 도화라(覩貨羅)와 속리국(速利國) 등의 나라에서는 그 법이 이와는 다르다. 그곳에서는 시주가 먼저 꽃가마를 바쳐서 법제(法制)의 바닥에 공양드리고 대중은 이 꽃가마의 주위를 에워싸고 돌면서 도사(導師)가 널리 주원(呪願)을 베풀게 하고 그런 다음에 비로소 식사를 한다. 그 꽃가마의 법식은 서방기(西方記)에서 진술한 내용과 같다.
이러한 일들은 바로 일에 간단하고 번잡한 차이가 있고 음식에 광범위하고 간략한 차이는 있으나, 승도들의 궤식(軌式)과 청정을 지키며 손으로 밥을 먹는 등 대체적인 법칙은 모두 비슷하게 닮았다.
033_0682_b_12L斯等雖復事有疏繁、食兼廣略,然而僧徒軌式護淨手飡,大徒法則竝悉相似。
대중 스님 가운데는 혹 두다행(杜多行:頭陀行)53)을 하며 걸식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이들은 오직 3의(衣)만을 입고 있었으며 다른 곳에서 공양을 마련하여 찾아와 청하면서 금은보화를 받들어 올려도 콧물이나 침을 뱉어 버리듯이 하찮게 여기고 궁림(窮林)에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는 곧 동쪽 중국의 재법에서 상소(上疏)하는 글을 보내서 스님들을 청하였으나, 이튿날 아침이 되도록 아뢰지 않는 경우와 같다. 성인의 가르침에 준한다면 이는 정중하지 못한 행위인 듯하다. 그러므로 문도들에게는 모름지기 법식을 가르쳐야 한다.
만약 공양에 응하여 그 집으로 갈 경우에는 마땅히 물을 걸러내는 수라(水羅:漉水囊)를 가지고 가야 하며, 스님들이 쓰는 물은 모두 살펴보아야 한다. 그 음식을 먹고 나면 반드시 치목을 씹고 만약 입 안에 기름끼가 남아있다면 재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밤새도록 주린 배로 지낸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때가 아닌 허물을 면할 수 있겠는가? 인도의 식사법을 보고 중국의 식사법과 견주어 살펴서 적합하지 않은 점이 자연스럽게 명백해진다면 다행이겠다. 상세하게 서술할 여가가 없나니, 지혜 있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생각해야 할 것이다.
033_0682_c_01L일찍이 나는 이것에 대해 한 번 논한 적이 있다. “무상(無上)이신 세존께서는 대자대비하신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중생들이 빠져 허우적대는 것을 가엾게 여기시어 삼대(三大)54)의 과정을 겪어 오시면서 부지런히 발돋움하고 귀의하여 행해지기를 바라셨고 7기(紀)에 현신하시면서 불법을 부양하시고 교화하시었다. 생각하면 주지(住持)의 근본은 입고 먹는 것인데 번뇌의 고달픔이 조장될 것을 두려워하시어 계검(戒檢)을 엄격하게 시행하셨으니, 그 제도에는 성인의 뜻이 담겨 있다. 이 진리에 따라 실행하여야 하는데 도리어 경솔한 마음으로 그것에 죄가 없다고 말하면서 음식을 먹어도 계법의 저촉을 받게 되는 것을 모른다.
다만 음계(婬戒) 한 조목만을 지키면서 곧 나는 죄가 없는 사람인데 무엇 때문에 다시 율법을 배우는 수고를 하겠느냐고 말하면서 목구멍으로 삼키고 입으로 먹고 옷을 입고 벗는 일에는 원래 마음을 쓰지 아니한다. 단지 공문(空門)55)을 가리키며 곧 그것을 부처님의 뜻으로 삼고 있으니, 이런 사람이 어찌 모든 계율이 부처님의 뜻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겠는가?
한 편은 귀중히 여기고 다른 한 편은 가볍게 보는 것은 억측으로 판단하여 나온 것이다. 문도들은 마침내 서로 뒤를 이어 이를 익히면서 계경은 들여다보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하고 두 권의 공문(空門)만을 베껴 얻게 되면 곧 그 가운데의 이치는 삼장(三藏)을 포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 입 한 입 삼킬 때마다 지옥에서 녹인 구리를 마시는 고통이 있게 될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걸음마다 현재 도적이 머무는 재앙을 부르고 있음을 누가 알겠는가?
부낭(浮囊:물위에 뜨게 하는 공기 주머니)에 물이 스며들지 않게 하는 것이 보살의 본심이다. 작은 허물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으면 도리어 최후의 제창을 이루게 된다. 진리는 대승ㆍ소승을 아울러 닦아야만 비로소 자존(慈尊)의 교훈에 순응하게 되며, 작은 죄를 방지하고 대공(大空)을 비추어 보며 중생들을 거두어들여 마음을 투명하고 맑게 한다면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혹 스스로도 헷갈리고 대중을 오도할까 두려워 가르침에 준하여 오로지 그 한 구석만을 말하였다.
공법(空法)의 믿음도 헛된 것은 아니지만 율전이라 하여 어찌 가볍게 여겨서야 되겠는가? 마땅히 보름마다 계율을 설하여 마음을 씻고 참회하고 항상 문도들에게 삼가할 것을 권하여 하루에 세 번 절하고 아뢰도록 하라. 불법이 세상에 머무는 것도 나날이 쇠약해지고 있으니 자기가 어린 시절에 본 것을 살펴보면 곧 늙었을 때와는 전연 다른 것이 있을 것이다. 눈으로 증험한 것이 여기에 남아있으니 다행히 이에 마음을 두었으면 좋겠다.
무릇 음식으로 인해 번거로운 괴로움은 곧 항상 필요로 하는 것이니, 다행히 불법을 공경하게 받드는 무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볍게 보지 말기를 바란다.”
033_0682_c_20L夫飮食之累,乃是常須,幸願敬奉之倫無輕聖敎耳。
033_0683_a_01L거듭 말하노라. “성인의 가르침은 8만 가지이나 그 요체는 오직 한두 가지이다. 밖으로 속세의 길을 따르면서 안으로 진정한 지혜가 생기도록 하여야 한다. 무엇을 속세의 길이라 하는가? 금계(禁戒)를 받들어 허물을 없애는 것을 말한다. 무엇을 진정한 지혜라 하는가? 편견과 경계의 집착을 모두 버리고 뛰어난 진리를 따라 집착이 없는 것을 말한다. 인연으로 생기는 번거로움을 멸하고 부지런히 많은 수행을 쌓아 원만하게 이루어진 묘의(妙義)를 증득하여야 한다.
삼장(三藏)을 닦지 않아 가르침과 진리에 모두 헷갈리게 되는 것이 어찌 용납되겠는가? 죄가 항하의 모래알처럼 거대한 양에 이르렀는데도 함부로 보리(菩提)를 증득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보리란 각(覺)과 혹(惑)과 누(累)가 모두 없어져 불생불멸한 경지를 진상(眞常)이라 부른다.
어떻게 고해(苦海)에 함께 살면서 나는 서방정토에 머물고 있다고 부질없이 말할 수 있겠는가? 영구불변한 진리를 희구하고자 한다면 계(戒)의 청정함이 기본이 된다. 주머니를 뚫는 작은 틈이라도 잘 막고 지켜 침혈(針穴)의 큰 잘못을 삼가하여야 한다. 큰 잘못의 첫째는 의식에 허물이 많은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면 해탈이 먼 것이 아니겠지만 세존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면 스스로 오래도록 물 속에 가라앉게 될 것이다.”
1)참서(慘舒) : 음양의 이치가 양에서 퍼지고[陽舒]. 음에서 수축하는 것[陰慘]을 말한다. 계절로 말하면 양서는 봄과 여름, 음참은 가을과 겨울을 상징한다.
2)정천(淨天) : 사종천(四種天)의 하나로, 번뇌를 소멸시켜 청정한 경지에 이른 수다원(須陀洹)·사다함(斯陀含)·아나함(阿那含)·아라한(阿羅漢)·벽지불(辟支佛) 등의 성자(聖者)를 말한다.
3)신광(身光) : 부처와 보살의 몸에서 나오는 밝은 빛을 가리킨다.
4)임등(林藤) : 세상의 초기에 사람들이 먹었던 식물이다. 구사론(俱舍論) 12에 이르기를 “땅이 곡물을 감추었으나 이때 임등(林藤)이 나타나서 다투어 이것을 먹었다.”고 하였다.
5)향도(香稻) : 향기 나는 벼를 말한다. 세상의 초기에 자연적으로 땅에서 자라난 것이다.
6)승거(僧佉) : 바라문 계통의 여섯 학파 중 하나인 상캬(sāṃkhya) 학파를 말한다. 산스크리트어 sāṃkhya를 승거(僧佉)라고 음사한 것이다.
7)벽세(薜世) : 바라문 계통의 여섯 학파 중 하나인 바이셰시카(vaiśeṣika) 학파를 말한다. 모든 현상은 실(實)·덕(德)·업(業)·동(同)·이(異)·화합(和合)의 육구의(六句義)에 의해 생성되며, 해탈에 이르기 위해서는 이 여섯 가지 원리를 이해하고 요가 수행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8)오도(五道) : 천도(天道)⋅인도(人道)⋅지옥도(地獄道)⋅아귀도(餓鬼道)⋅축생도(畜生道)를 말한다.
9)원문에는 추(推)로 되있으나 추(椎)로 해석하였다.
10)식(識) : 외부의 사물을 대할 때 생겨나는 인식 작용을 말한다.
11)과려(蜾蠡)는 과라(蜾蠃) 즉 나나니벌이다. 명령(螟蛉)은 뽕잎벌레이다. 나나니벌은 항상 뽕잎벌레를 붙잡아 데려가서 자신의 새끼를 길렀는데, 옛 사람들이 나나니벌이 뽕잎벌레를 길러 자신의 새끼로 삼는다고 오해하였다. 그래서 후에 양자(養子)를 명령(螟蛉)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12)외도(外道)에서 말하기를 “본래 해와 달과 별과 허공과 땅이 없었고, 오직 큰물만 있었다. 그때 대안다(大安荼)가 태어났는데 그 모양이 달걀과 같았고 겉은 금색으로 덮여있었다. 그리고 이 달걀이 익어서 두 쪽으로 쪼개졌는데, 한쪽은 위로 올라가 하늘이 되고 다른 쪽은 아래에 있어 땅이 되었으며 그 사이에는 범천(梵天)이 생겨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달걀을 ‘일체중생의 조공(祖公)’이라 불렀다”고 한다.
13)사생(四生) : 네 종류의 출생형태를 말하는 것으로, 난생(卵生)⋅태생(胎生)⋅습생(濕生)⋅화생(化生)이 있다.
14)삼유(三有) :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를 말하며, 이 삼계(三界)의 중생을 가리키기도 한다.
15)용하(龍河) : 이련선하(尼連禪河)의 다른 이름이다. 이 강에 용이 살고 있어서 용하(龍河)라고 이름이 붙여졌다. 이 강에서 석가세존께서 깨달음을 얻은 곳과 거리가 멀리 않다.
16)구유(九有) : 삼계(三界)의 중생이 즐겁게 머무르는 9개의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다른 말로 구거(九居)라고도 한다.
17)녹원(鹿苑) : 석가세존이 부처가 되는 깨달음을 얻은 후 최초로 설법한 성지이다. 인도 베나레스시의 북쪽 사르나트에 있다. 중부 인도 파라나국(派羅奈國) 북쪽 성 밖에 있던 동산으로, 이 때 교진여 등 5비구를 최초로 제도했다고 한다.
18)육도(六道) : 육취(六趣)와 같은 말로, 지옥(地獄)⋅아귀(餓鬼)⋅축생(畜生)⋅아수라(阿修羅)⋅인간(人間)⋅천상(天上)을 가리킨다. 이 여섯은 중생이 윤회하는 경로이므로 육도(六道)라고 한 것이다.
19)부성(父城) : 가비라성(迦毘羅城)을 말한다. 이곳은 석가세존의 부왕(父王)의 성이다. 그래서 부성(父城)이라고 부른 것이다.
20)요교(了敎) : 아야교진여(阿若憍陳如)를 가리킨다. 다섯 비구(比丘)의 한 사람으로. 우루벨라(uruvelā)에서 싯다르타와 함께 고행했으나, 그가 네란자라(nerañjarā) 강에서 목욕하고 또 우유죽을 얻어 마시는 것을 보고 타락했다고 하여, 그곳을 떠나 녹야원(鹿野苑)에서 고행하고 있었는데, 깨달음을 성취한 붓다가 그곳을 찾아가 설법한 사제(四諦)의 가르침을 듣고 최초의 제자가 되었다.
21)7편(篇) : 비구와 비구니가 지켜야 할 구족계(具足戒)의 하나로, 승려가 저지르면 안 될 죄과와 지켜야 할 중요한 사항을 모아서 일곱 편으로 만들었다.
22)희련(熙連) : 강 이름이다. 번역하여 금하(金河)라고도 한다. 석가모니께서 이 강변에서 열반하셨다.
24)쌍수(雙樹) : 사라쌍수(娑羅雙樹)를 줄여서 말한 것이다, 석가모니께서 이 나무 사이에서 입적했다고 한다.
25)결집(結集) : 석가모니불이 열반한 후 그 교법이 흩어지지 않게 하려고, 제자들이 모여서 저마다 들은 것을 외우고 그 바르고 거짓됨을 논의하여, 불전(佛典)을 올바로 평가하고 편찬하는 일을 의미한다. 제1회 결집은 석가 입멸(入滅) 직후 500명의 유능한 비구(比丘)들이 라쟈그리하(Rājagriha: 王舍城) 교외 칠엽굴(七葉窟)에 모여 마하카샤파(Mahākāśyapa: 大迦葉)의 주재로 열렸다. 우팔리(Upāli: 優波離)가 율(律)을, 아난다(Ananda: 阿難陀)가 경(經)을 그들이 듣고 기억하는 대로 외고, 다른 사람들의 승인을 받아 확정했다고 한다. 그 후 석가 입멸 후 100년경에 계율에 대해 이론이 생겼으므로, 바이샬리(Vaiśāli: 毘舍離)에서 야샤스(Yaśas)가 주재하는 제2차 결집이 있었다고 하는데, 여기에는 700명의 고승이 모였다 한다.
26)유부(有部) :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준말이다. 소승의 일파로, 부파(部派) 가운데 가장 세력이 강했다.
27)원문에 ‘조(沠)’로 돼있는 것을 ‘파(派)’로 바꾸어 번역하였다.
28)아리야막가승기니가야(阿離耶莫訶僧祇尼迦耶) : Ārya-mahāsaṃghika-nikāya의 음역이다. 소승 계열의 분파이다.
29)당(唐) : 원래는 당(唐)이 아니라 주(周)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당(唐)의 측천무후가 국호를 당에서 주(周)로 바뀐 시기에 삼장(三藏)이 저술되었기 때문이다. 그 후 다시 주(周)가 당(唐)으로 바뀌어서 편찬되었다.
30)마가다(摩揭陁) : 인도 고대 16개 왕국 중의 하나이다. 기원전 6세기 무렵부터 강성하기 시작한 마가다 왕국(摩揭它 · 摩揭陀 · 摩伽陀 )은 건국자 빔비사라(Bimbisāra, 기원전 544~493)를 비롯해 모두 8명의 군주를 배출하였다. 초대 왕인 빔비사라가 통치할 때 영내에 8만 개의 마을이 있었고, 도읍은 왕사성(王舍城)이었다.
31)나란타(那爛陁) : 고대 인도의 지명이다. 고대 인도 마가다국 왕사성 부근에 있었다. 이 지역에 원래 불교사원이 있어서 지역이름을 나란타사(那爛陀寺)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지역은 고대 동인도 지역의 최고 학술 중심지역이라고 평가받는다.
32)오백역(五百驛) : 중국[東夏]에서는 일역(一驛)을 30여 리(里)정도로 여긴다.
33)임읍국(臨邑國) : 베트남 남부 지역에 있던 고대 국가이다.
34)원문에는 ‘두(杜)’로 되어 있는데 ‘사(社)’로 고쳐 번역하였다.
35)원문에는 ‘편(片)’으로 되어 있으나 ‘척(斥)’으로 고쳐 번역하였다.
36)시리발서국(尸利佛逝國) : 7세기에서 11세기에 수마트라 섬에 있던 나라이다.
37)원문에는 ‘록(彔)’으로 되어 있으나 ‘록(錄)’으로 고쳐 번역하였다.
38)굴륜(掘倫) : 베트남 동남쪽 바다에 있는 작은 섬이다. 다른 말로 곤륜도(崑崙島)라고 한다.
39)교광(交廣) : 지금의 베트남 북부와 광동성 지역을 가리킨다.
40)감만(敢曼) : 허리 아래를 옆으로 감아서 입는 옷이다.
41)오륙조(五六朝) : ‘조(朝)’는 ‘조(潮)’를 의미한다. 조수가 다섯 번에서 여섯 번 바뀔 시간을 말한다.
42)비경(匕景) : 원문에는 ‘칠경(七景)’으로 되어 있는데 ‘비(匕)’자를 ‘칠(七)’자로 잘못 쓴 것 같다. 비경은 베트남 중부에 있는 지명이다.
43)영표(嶺表) : 오령(五嶺) 바깥 지방을 말한다. 지금 광동성(廣東省) 일대를 가리킨다.
44)경협(經夾) : 다른 말로 범협(梵夾)이라고도 한다. 패다라(貝多羅)에 경문(經文)을 새긴 후에 두꺼운 나무판사이에 나뭇잎을 낀 후 실로 그것을 묶었다. 그 모양이 상자와 비슷해서 범협(梵筴)이라고 불렀다. 협(夾)은 아마도 협(筴)일 것이다.
45)오편(五篇) : 구족계(具足戒)를 어긴 죄를 무겁고 가벼움에 따라 다섯 종류로 나눈 것을 말한다.
46)칠취(七聚) : 구족계(具足戒)를 어긴 죄를 무겁고 가벼움에 따라 일곱 종류로 나눈 것을 말한다.
47)납황(納隍) : 한(漢)의 장형(張衡)이 지은 《동경부(東京赋)》에, “사람들이 혹 지낼만한 처소를 얻지 못하는 것을, 자신이 그들을 해자로 밀어 넣은 것처럼 여긴다.[人或不得其所,若己纳之於隍]”라는 구절에서 유래한 말로, 재난에 빠진 백성을 구제하려는 절박한 심정을 나타낸 것이다.
48)육시(六時) : 낮 삼시(三時)와 밤 삼시(三時)를 합쳐서 육시(六時)라고 한다. 낮 삼시는 날이 밝을 때[晨朝], 한낮[日中], 해질 때[日沒]를 말하며 밤 삼시는 초야(初夜), 중야(中夜), 후야(後夜)를 말한다.
49)4바라밀 : 열반에 갖추어져 있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상(常)바라밀, 괴로움이 없고 평온한 낙(樂)바라밀, 집착을 떠나 자유 자재하여 걸림이 없는 아(我)바라밀, 번뇌의 더러움이 없는 정(淨)바라밀 네 가지를 말한다.
50)오편(五篇) : 구족계(具足戒)를 어긴 죄를 무겁고 가벼움에 따라 다섯 종류로 나눈 것을 말한다.
51)육상(六象) : 육상(六相)으로, 만유의 모든 법이 여섯 가지 모양을 갖추고 있음을 뜻하는 말이다. 화엄종에 나오는 말이다. 총상(總相)⋅별상(別相)⋅동상(同相)⋅이상(異相)⋅성상(成相)⋅괴상(壞相)이다.
52)치목(齒木) : 이를 닦을 때 쓰는 작은 나무이다.
53)수의(隨意) : 프라바라나(pravarana)를 번역한 말로) 자자(自恣)라고 한다. 하안거(夏安居)가 끝나는 마지막 날에 안거하고 있던 수행승들이 본 것⋅들은 것⋅의심한 것의 세 가지 일에 자기반성을 하고) 자기의 죄과(罪過)를 임의로 진술하며) 스스로의 과오를 고백하여) 다른 사람에 대한 무례를 사과하고 심신을 모두 결백하게 하는 행사를 말한다.
54)경행(經行) : 불교에서 참선을 하는 수행자가 좌선하다가 졸음을 방지하거나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가볍게 걷는 수행법이다.
55)사례(四禮) : 오체투지하여 사방의 여래께 절하는 것을 말한다.
56)선우(旋右) : 부처나 탑 등에 경의를 표할 때 자신의 오른쪽을 그 대상으로 향하게 하여 도는 예법을 말한다.
57)존의(尊儀) : 부처나 보살의 형체) 또는 귀인(貴人)의 초상(肖像)ㆍ위패(位牌) 등을 높여 이르는 말이다.
1)앞의 서문 주 34) 참고.
2)앞의 서문 주 44) 참고.
3)불멸 300년 경에 상좌화지부(上座化地部)로부터 갈려 나온 법장부를 말한다.
4)범어로 Mahīśāsaka이고 마혜사사가(磨醯奢娑迦)ㆍ미희사사가(彌喜捨娑迦)라고 음역한다. 정지(正地)ㆍ교지(敎地)ㆍ대불가기(大不可棄)라 번역한다. 이 파의 초조를 불가기(不可棄)라 한다. 불가기는 본래 국왕이었으나, 왕의 자리를 버리고 출가하여 유부종(有部宗)에 들어가서 불법을 넓히다가 뒤에 다른 일파를 세웠다. 이 부의 이름은 파조(派祖)가 국왕이었던 데서 나왔으니, 국왕은 국토, 곧 지(地)를 화(化)하는 사람이란 뜻으로 이름하였다.
5)소승 음광부(飮光部)의 시조이다. 불멸 제3백년의 말기(B.C 345~246)에 출생하였고 성은 가섭, 이름은 선세(善歲)이다. 아버지는 가류타이(迦留陀夷), 어머니는 급다(及多)이다. 어릴 적부터 어질고 총명하여 7세 때에 아라한과를 얻고, 불법을 받아 사람의 귀의를 받았다. 또 상좌부의 교의(敎義)가 독자부(犢子部)ㆍ법장부(法藏部) 등으로 발전함에 따라 점점 대중부화(大衆部化)하여 그 근본 뜻을 잃게 됨을 개탄하고, 상좌부의 교의를 유지하기에 힘썼다.
6)범어로 Udyāna이고 오장나(烏仗那) 또는 오장(烏萇)이라고도 쓴다. 지금의 인더스 강 상류의 스와트(Swat) 강 부근이다. 간다라 지방과는 산맥을 사이에 두고 산고개로만 다닐 뿐 이웃 국가와의 예속 관계가 거의 없는 폐쇄적인 국가였다.
7)7)범어로 Kucīna이고 구자(丘玆)ㆍ굴지(屈支)ㆍ굴자(屈茨)ㆍ구이(拘夷)라고도 한다. 지금의 신강(新疆) 위그르 자치구 고거현(庫車縣) 일대에 있던 고대 서역 국가이다. 옛날부터 불교가 성행했던 나라로 구마라습은 이 나라의 왕족 출신이었다.
8)범어로는 gostāna이고 지금의 타림 분지 코탄(Khtan) 오아시스에 있던 고대 서역 국가이다. 기원전 2세기경부터 세력을 떨친 국가로 천산남로와 서역남로의 요충지에 위치하여 불교가 동쪽으로 전파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9)범어 pula의 음역으로 단화(短靴)란 뜻이다.
10)불전(佛殿)의 별칭으로 부처님과 보살의 상을 안치하는 건물을 말한다.
11)지금의 산동 장청현(長淸縣) 지역에 있던 절이다. 전진(前秦) 때 처음으로 규모를 갖추었고 수(隋)ㆍ당(唐) 때 4대 명찰 가운데 하나였다.
12)비구가 지니는 열여덟 가지 물건 중 하나로 치목(齒木)이라고도 한다. 인도에서는 승려뿐 아니라 일반인들도 버드나무 가지의 끝을 씹어서 그 액으로 이를 닦고 입을 씻는다.
13)선성 선사(先聖先師)의 제사이나 한(漢)나라 이후에는 공자(孔子)의 제사만을 일컫게 되었다.
14)범어 탄다가슬타(憚哆家瑟託)의 번역이다. 앞에서 나온 양지(楊枝)와 같은 것이다. 긴 것은 12지(指), 짧아도 8지 이상이고 굵기는 새끼손가락 정도이다. 한 끝을 부드럽게 씹어서 치아를 닦는다. 이것은 우리 나라에서도 치목이라고 했다.
15)콩가루와 마른 흙 그리고 쇠똥을 말한다.
16)불교 용어로 비시식(非時食)의 준말이다. 부처님이 밥 먹도록 제정한 이외의 시각으로 정오가 넘어서 식사하는 것을 말한다.
17)범어로 Rāja-grha이고, 라열기(羅閱祇)ㆍ라열계리혜(羅閱揭梨醯)ㆍ라열기가라(羅閱祇伽羅) 등으로 음역된다. 중인도 마갈타국 고대의 수도이다. 지금의 벵갈주 파트나(Patna)시의 남방이다.
18)범어로 Bodhidruma, Bodhivrksa이고 도수(道樹)ㆍ각수(覺樹)라 번역한다. 도량수(道場樹)라고도 한다. 부처님께서 정각(正覺)을 이루시던 곳을 덮었던 나무이다. 이 나무는 부처님에 따라서 일정치 않다. 석가모니불의 보리수는 필발라나무였다고 하고, 비바시불ㆍ시기불ㆍ비사부불ㆍ구류손불ㆍ구나함불ㆍ가섭불은 차례로 무수ㆍ분타리수ㆍ사라수ㆍ시리사수ㆍ우담발라수ㆍ니구루수 아래서 각기 성도하였다고 한다. 다음 세상에 성불할 미륵불의 보리수는 나가수[龍華樹]라 한다.
19)중인도에 있는 산 이름으로 석가여래가 설법하던 곳이다. 산 모양이 독수리 같다는 데서, 또 일설에는 독수리가 많이 산다는 데서 지은 이름이라 한다.
20)중인도, 베나레스 교외의 사르나드에 있으며 석존이 처음으로 설법한 지역으로 유명하다.
21)구시성(拘尸城)의 열반에 드신 곳을 말한다.
22)가란타죽원(迦蘭陀竹園)을 말한다. 가란타죽원이란 중인도 마갈타국 왕사성 북쪽에 있다. 가란타 장자가 부처님께 바쳐서 절이 지어지고, 부처님은 자주 이곳에서 설법을 하였다. 이것을 죽림정사(竹林精舍)라 한다.
23)범어로 Nālanda이고 시무염사(施無厭寺)라 번역한다. 중인도 마갈타국 왕사성의 북쪽에 있던 절이다. 405년 이후에 지은 것으로 7세기 초 현장(玄獎)이 인도에 유학할 무렵에는 인도 불교의 중심지였다. 이 절에서 많은 큰 스님이 배출되었는데 밀교를 중국에 전한 금강지(金剛智)ㆍ선무외(善無畏)는 모두 이 절에서 수학하고, 또 북송(北宋) 초(980) 중국에 온 법현(法賢)ㆍ보타흘다(補陀吃多) 등도 이 절의 스님들이었다.
24)미유(米柔)와 미자(微煮)는 명주를 삶는 방법이다.
25)구계(舊戒)ㆍ주계(主戒)ㆍ실계(實戒)ㆍ성중계(性重戒)라고도 한다. 살(殺)ㆍ도(盜)ㆍ음(婬)ㆍ망(妄)이 4종계와 같은 계율이다. 부처님이 제정한 계율을 기다리지 않고도 그 일의 성질이 도리에 위반되어 저절로 죄악이 될 것을 금한 것이다.
26)살생(殺生)ㆍ투도(偸盜)ㆍ사음(邪婬)ㆍ망어(妄語)ㆍ기어(綺語)ㆍ악구(惡口)ㆍ양설(兩舌)ㆍ탐욕(貪慾)ㆍ진에(瞋恚)ㆍ사견(邪見)의 열 가지의 악업을 말한다. 이중 처음 세 가지는 몸의 악, 중간의 네 가지는 입의 악, 마지막 세 가지는 마음의 악. 그래서 신삼구사의삼(身三口四意三)이라고도 한다.
27)송(宋)ㆍ원(元)ㆍ명(明) 삼본(三本)에는 호태목(胡苔木)으로 되어 있다.
28)범어로 Nāgārjuna이고 나가알랄수나(那伽閼刺樹那)라고 음역하고 용맹(龍猛)ㆍ용승(龍勝)이라 번역한다. 인도의 대승불교를 크게 드날린 사람으로 불멸 후 6~7백 년경(B.C. 2~3세기)의 남인도(혹은 서인도)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4베다ㆍ천문ㆍ지리 등 모든 학문에 능통하였다. 처음에 인생의 향락은 정욕을 만족하는 데 있다 하고, 두 벗과 함께 주색에 몸을 맡겼다. 왕궁에 출입하면서 궁녀들과 통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두 사람은 사형되고 그는 위험을 간신히 면하였다. 그후로 욕락은 괴로움의 근본이 되는 것임을 깨닫고 절에 가서 가비마라에게서 소승 3장(藏)을 배우다가 만족하지 못하여 설산 지방으로 갔다가 늙은 비구를 만나 대승경전을 공부하고, 후에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대승 경전을 구하여 심오한 뜻을 잘 통달하였다. 그는 또 용궁에 들어가 『화엄경』을 가져왔고, 남천축의 철탑(鐵塔)을 열고, 『금강정경』을 얻었다고 한다. 마명(馬鳴)의 뒤에 출세하여 대승 법문을 성대히 선양하니, 대승불교가 이로부터 발흥하였으므로 후세에 그를 제2의 서가, 8종의 조사라 일컫는다. 저서로는 『대지도론』 100권, 『십주비바사론』 17권, 『중론』 4권, 『십이문론』 1권 등이 있다.
29)이 경의 원명은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으로 소승의 『대반열반경』과 이름을 같이 하기 때문에 이를 『소승열반경』이라 이름 부르는 데에 반하여 대승불교권에서 흔히 『열반경』이라고 줄여서 부를 때에는 이 『대승열반경』을 말한다. 『소승열반경』에 비해서 이 『대승열반경』이 가지는 특색은 『소승열반경』이 부처님께서 돌아가신 것을 사건 중심으로 서술한 것에 비해 이 경은 그러한 사건의 철학적ㆍ종교적 의미가 강조되고 있다는 데에 있다. 그리하여 이 경은 부처님께서 돌아가시기 직전의 마지막 설교의 형식을 통해서 첫째 불신(佛身)의 상주, 둘째 열반의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상주, 셋째 일체 중생의 실유불성(悉有佛性)이라는 세 가지의 사상을 밝히고 있다.
30)부청(訃請)ㆍ수청(受請)이라고도 한다. 비구들이 재가(在家)한 이의 초청에 응하여 가서 공양을 받는 것을 말한다.
31)절에 있으면서 아직 출가하지 않고 중승(衆僧)들에게 급사하는 사람을 말한다. 특히 식사시에 급사하는 승려들을 말한다.
32)범어로 Kundī ; Kundikā이다. 군지(軍持)ㆍ군치가(君稚迦)라고도 하며 번역하면 병(甁)이다. 승려가 가지고 다니는 물병을 말한다. 천수관음도 40수(手) 가운데 오른쪽 한 손에 이것을 들었고 그 손을 군지수(軍持手)라고 한다.
33)선종에서 식당과 승당의 중앙에 안치한 비구 모양의 등상을 말한다. 보통 빈두로존자나 문수보살상을 쓰고 교진여ㆍ대가섭ㆍ포대화상의 형상을 쓰기도 한다.
34)범어로 Yaksa라고 하고 약차(藥叉)ㆍ열차(閱叉)라고 음역한다. 위덕(威德)ㆍ포악(暴惡)ㆍ용건(勇健)ㆍ귀인(貴人)ㆍ첩질귀(捷疾鬼)ㆍ사제귀(祠祭鬼)라고 번역한다. 라찰과 함께 비사문천왕의 권속으로 북방을 수호하며 천야차(天夜叉)ㆍ지야차(地夜叉)ㆍ허공야차(虛空夜叉)의 세 종류가 있다. 천야차ㆍ허공야차는 날아다니지만 지야차는 날아다니지 못한다.
35)범어로 Upāsika라고 한다. 우바이(優婆夷)ㆍ우바사(優婆斯)ㆍ오파사가(鄔波斯迦)라고 음역하며 근사녀(近事女)ㆍ근선녀(近善女)ㆍ청신녀(淸信女)라고 번역한다. 착한 일을 행하고 비구니에 친근승사(親近承事)하고 삼귀계(三歸戒)를 받고, 오계를 갖는 여자를 말한다.
36)제석천을 모시고 불법의 수호를 염원하며, 불법에 귀의하는 사람들을 수호하는 호법신(護法神)을 말한다. 동방의 지국천(持國天), 남방의 증장천(增長天), 서방의 광목천(廣目天), 북방의 다문천(多聞天)이다.
37)목진린타 등으로 마가다국 붓다가야의 금강좌 옆의 연못 속 및 무치린다의 동굴에 산다고 하는 용왕. 석존이 성도했을 때 최초로 공양을 올렸다고 한다
39)범어로 dāna-gāthā의 음역. 시주에게 보답하는 설법으로서의 계승을 말한다. 달친(達嚫)이라고도 한다.
40)중인도에 있던 옛 왕국의 이름. 이 나라의 성(城)의 둘레는 8백 마일에 달한다. 북쪽은 항하에 이르고, 서쪽은 Benares, 동쪽은 Hirana Parvata, 남쪽은 Kirana Savarna에 이른다. 불교와 가장 관계가 깊은 나라로, 석존 생존시에는 비나사라왕이 왕사성에서 서울을 정하고 이 나라를 다스려 문화가 크게 발달하였다. 석존은 이 나라의 니련선하 가에서 성도하였는데, 임금은 석존을 위하여 죽림정사를 짓고, 그의 아들 아사세왕도 불교의 외호자가 되어 제1회의 불전을 결집하였다. 그때부터 2백년 뒤 전나라급다왕 때에 서울을 항하 가에 옮겨 화자성(華子城)이라 하였다. 뒤에 아육왕이 나와 이 화자성에 서울을 정하여 전 인도에 세력을 떨치고, 불교를 크게 일으켜 성의 동남쪽에 계원사(鷄園寺)를 짓고 여러 곳에 보탑을 세웠다. 이밖에도 이 나라에는 마하가섭이 선정에 든 계족산(鷄足山)과 역대 여러 임금의 외호에 의하여 불교 교학의 중심지가 된 나란타사 등 불교에 관계된 유적이 많다.
41)중국 당(唐)나라 시대의 인도 승려. 반야제바(般若提婆)라 음역하여 부른다. 일체유부율 가운데 여래의 열반에 대한 것을 지어 2권을 한역(漢譯)하여 당나라에 보냈다.
42)종려과에 속하며, 열대 지방에 사는 상록 교목으로 가지 없이 곧게 자란다. 빈랑나무의 열매는 심복통(心腹痛), 구충(驅蟲) 등의 한약재로 쓰인다.
43)절에서 스님이 손 씻는 물을 담아 두는 그릇으로 주전차처럼 생겼다.
44)흰 털의 총채로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 지니는 것이다. 먼지를 털어내는 도구이나 번뇌무명(煩惱無明)의 때를 털어내어 정보리심(淨菩提心)을 나타내게 한다는 뜻이다.
45)경갑(鏡匣)이라고도 하는데 거울을 넣어 두는 작은 상자를 말한다.
46)범어로 Kanthā ; kantaka라고 한다. 적색ㆍ황색으로 번역하며 가사의 색을 말한다.
47)인도의 승단에서 개인의 소유를 허락하는 세 종류의 옷으로 대의(大衣)와 두 종류의 상의(上衣)를 말한다. ①승가리(僧伽梨)는 대의(大衣)ㆍ중의(重衣)라고 불리는데 정장하는 옷으로 마을에 탁발을 나가거나 왕궁에 초대받았을 때 입는 옷으로 9개 내지 25개의 천을 기워 합쳐서 한 장의 천으로 만든 것으로 구조의(九條衣)라고 한다. ②울다라승(鬱多羅僧)은 상의(上衣), 상착의(上着衣), 입중의(入衆衣) 등으로 불리우며 예배ㆍ청강(聽講)ㆍ포살(布薩) 등에 사용되고, 칠조(七條)의 천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칠조의(七條衣)라고도 한다. ③안타회(安陀會)는 중의(中衣), 중착숙의(中着宿衣)는 일상의 작업이나 취침 때에 착용하는 옷을 말한다.
48)범어로 Cīvara이다. 부처님이 제정한 법규에 따라 만든 비구의 세 가지 법의(法衣)의 총칭이다.
49)육두구(肉荳蔲)라고도 한다. 열대 식물의 한 가지로, 씨는 약재로 쓰인다.
50)향나무의 한 가지로 꽃봉오리는 약재로 쓰고 정향유(丁香油)를 짠다.
51)용뇌향과의 상록 교목. 보르네오, 수마트라가 원산지이다. 무색 투명하며. 향료의 원료가 된다. 용뇌향, 용뇌수라고도 한다.
52)dakṣiṇāgāthā라고 하며 시송(施頌)이란 번역한다. 보시한 물건에 대해 시주자의 복을 비는 가타(伽陀:頌)를 말한다.
53)번뇌의 때를 벗고 의ㆍ식ㆍ주에 탐욕을 갖지 않고 오로지 불도를 수행하는 것으로 여기에는 열두 종류가 있다.
54)체대(體大)ㆍ상대(相大)ㆍ용대(用大). 한 물건의 본체와 속성과 작용이 절대(絶大)임을 뜻한다.
55)영원한 실체가 있다는 견해를 부정하기 위한 공상(空相)의 법문을 말하는 것으로 만물은 공이라고 깨닫는 법문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