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033_0720_a_01L비구니전 서문


근원을 살펴보건대, 저 곧은 마음과 굳센 뜻과 뛰어난 절개가 어찌 천진(天眞:불생불멸의 참된 마음) 때문으로만 형성되었겠는가? 아니 어쩌면 스승의 밝은 행위를 우러러 힘쓰는 데서 오는 것이리라. 그러므로 이런 말들을 하곤 한다. “안회(顔回)가 되기를 바라는 이들도 안회와 같은 무리이고, 천리마[驥]가 되기를 바라는 말들도 천리마와 같은 무리이다.”그러므로 사람을 교화하는 훌륭한 계획의 향기가 흘러 끊어지지 않는 것이다. 이 때문에 붓을 잡고 먹을 가는 이들[握筆懷鉛之客]이 미래에 올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계획을 남겨 놓고, 일과 말을 편집하여 적는 이들[比事記言之士]이 후세 사람들에게 권하거나 경계할 것을 쓰고자 했으므로, 말을 잊고자 했으나 이에 그만둘 수가 없었다.
과거 부처님[大覺]께서 인도 가비라위[羅衛]에서 태어나 햇빛과 같은 깨달음[佛日]을 이 세상에 환하게 밝히셨으므로 온 세상의 뭇 중생들이 귀의하여 마음을 기울여서 사모했다. 비구니들이 처음 일어나게 된 것은 불도를 사랑하는 것이 근원이므로 부처의 경지에 올라 깨달음을 얻은 이들이 대대로 끊어지지 않고, 불교의 역사[法藏]에 줄을 이어 늘어선 것이 하늘을 가로지르는 해처럼 분명했다.
부처님께서 구시라성[拘尸]의 사라쌍수(沙羅雙樹) 아래에서 열반에 드신 이래 세월이 흘러가면서 점차 쇠퇴하여 그릇되고 어지러워져 갔는데, 그즈음 간혹 믿음이 경박하고 남들을 헐뜯는 이들이 있어서 그랬던 것인가? 불법의 미묘한 말씀이 일어났다가 다시 스러진 것은 어질지 못한 이들이 어지럽혀서 그런 것이요, 불법의 올바른 가르침이 스러졌다가 다시 융성하게 된 것은 어진 이들이 바로잡아서 그런 것이리라.
불법이 동쪽으로 흘러와서 정검(淨撿)이 첫 비구니가 되자 수백 년을 이어내려오고 뛰어난 이들[碩德]이 줄지어 일어나니, 선묘(善妙)와 정규(淨珪)는 고행의 절개를 다했으며, 법변(法辯)과 승과(僧果)는 좌선하는 관법의 미묘함을 다했고, 심지어는 승단(僧端)과 승기(僧基)처럼 뜻을 세우고 바른 도리를 굳게 지킨다거나 묘상(妙相)과 법전(法全)처럼 아주 먼 곳까지 크게 명성을 떨친 이들이 나오기까지 하였다. 이와 같은 이들이 시대마다 가끔씩 나타나서 못처럼 깊고 산악처럼 높이, 처음을 잘 시작하고 끝을 잘 마무리하여 집대성[金聲玉振]하였으니, 생각건대 참으로 말세를 버텨 주는 중요한 버팀목이자 의지처가 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청정한 규범으로부터 조금씩 멀어지니 이들의 뛰어난 덕화[英風]야말로 천년 세월 속의 모범이 될 터이지만, 이들이 지녔던 뜻이나 벌였던 일들을 책[方冊]에 모으지 못했으므로 매양 슬퍼하고 한탄한 지가 꽤 오래되었다. 비로소 이에 덕을 칭송한 비문과 문집에서 널리 채록하거나 수집하였고, 때로는 많이 아는 이에게 묻기도 하고 때로는 나이 지긋한 분들을 찾아뵙기도 하여, 비구니의 전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엮고 서문을 지었다. 진(晋) 승평(升平, 357~361) 연간으로부터 시작하여 양(梁) 천감(天監, 502~519) 연간에서 끝맺었는데 모두 65명이다.
번잡하고 화려한 것을 숭상하지 않고 중요하고 실질적인 것을 모으는 데 애쓴 것은 해탈을 구하는 이들이 그 분들과 덕을 나란히 할 것을 생각하여 부지런히 힘쓰도록 하고자 해서이다. 하지만 아는 것이 적은데다 어리석고 거칠어서 가끔 빠뜨린 것도 있을 듯하니 학식이 넓고 성품이 우아한 군자[博雅君子]께서는 훈계[箴]를 내리소서.


비구니전(比丘尼傳) 제1권


석보창(釋寶唱) 지음
추만호 번역


1. 진(晋)나라 낙양(洛陽) 죽림사(竹林寺) 정검니전(淨撿尼傳)

정검의 본래 성은 중(仲)씨이고 이름은 영의(令儀)로 팽성(彭城) 사람이다. 아버지 탄(誕)은 무위(武威) 태수를 지냈다. 정검은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하였으나 일찍이 과부가 되어 집안이 가난하였다. 늘 귀속의 자녀들에게 거문고와 글을 가르쳤으며, 불법을 들으면 믿고 즐거워하여 받들어 마지않았다.
그 뒤 사문 법시(法始)를 만나니 불경의 도리에 통달한 분이었다. 진(晋) 건흥(建興, 313~316) 연간에 궁성 서문 쪽에 절을 세우자 정검이 그곳에 나아갔다. 법시가 설법을 하자 정검이 크게 깨달아, 생각이 굳세고 씩씩하게 불법의 이로움을 구하려고 하는 데까지 이르렀고, 법시로부터 불경을 빌려 마침내 불법의 뜻에 통달하였다.
어느 날 법시에게 여쭈었다.
“불경의 가르침 속에 비구와 비구니를 말하고 있사오니, 바라건대 저를 제도해 주셨으면 합니다.”
법시가 대답했다.
“서역에는 남자 비구와 여자 비구니의 두 대중이 있지만 아직 이 나라에는 비구니법이 갖추어져 있지 않구나.”
정검이 다시 여쭈었다.
“이미 비구와 비구니를 말했다면, 어찌 불법에 다름이 있사옵니까?”
법시가 다시 대답했다.
“외국인들이 비구니에게 500계가 있다고 하니 비구 250계와 다를 것이므로 응당 화상(和尙)께 여쭐 일이다.
화상이 말하였다.
“비구니계는 비구계와 큰 점에서는 같으나 세세한 점에서는 달라, 그 바른 법을 얻지 못한다면 반드시 수계를 받지 못하리라. 비구니 10계는 큰스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다. 만일 화상이 없다면 비구니가 의지할 바가 없게 되노라.”
정검이 즉각 머리를 깎고 화상으로부터 10계를 받고는, 뜻을 같이하는 24명과 함께 궁성 서문에 죽림사(竹林寺)를 세웠다. 아직 비구니 스님이 없는 터라서 그들은 모두 정검에게 물었는데, 웬만큼 덕을 이룬 이보다 나았다.
앞서의 화상은 서역(西域) 사문인 지산(智山)이다. 계빈국(罽賓國)에서 머물렀는데, 너그럽고 온화하며 지혜롭고 사려 깊으며 평소 선을 익히고 경전을 염송하였다. 진(晋) 영가(永嘉, 307~313) 말년에 중국에 이르러 탁발[分衞]로써 생활하며 반드시 도를 넓히는 일을 말하곤 했다. 당시에는 믿음이 엷고 약하여 기원하여 사뢸 줄을 알지 못하다가 건무(建武) 원년(317)에 계빈국으로 돌아간 뒤 천축의 불도징(佛圖澄) 스님이 와서 덕스런 업적을 정리하였으니 모두가 한스러워하고 추모하는 것이었다.
정검은 무리를 모아 대중을 이끄는 것이 청아(淸雅)하여 법칙에 잘 맞았고, 설법하여 교화함이 마치 바람이 불어 풀을 쓰러뜨리는 것 같았다. 진 함강(咸康, 335~342) 연간에 사문 승건(僧建)이 월지국(月支國)에서 승기니갈마(僧衹尼羯磨)와 계본(戒本)을 가져왔고, 승평(升平) 원년(357) 2월 8일에 낙양에 외국 사문 담마갈다(曇摩羯多)를 청하여 계단(戒壇)을 세웠다. 진나라 사문인 도량(道場)이 『계인연경(戒因緣經)』에서 말했듯이 그 바른 법을 이루지 못한다면 사수(泗水)에 배를 띄우는 것과 같을 것이다.
정검 등 4인이 함께 그 계단에서 큰스님으로부터 구족계[具戒]를 받으니, 진나라에 비구니가 있게 된 것 또한 정검이 처음이다. 계를 받는 날을 맞이하여 특이한 향기가 가득 퍼졌다. 함께한 무리들이 다 같이 듣고는 기뻐 찬탄하여 공경히 우러름을 더하지 않음이 없었다. 계율에 맞는 행실을 잘 닦고, 배움에 뜻을 두어 쉬지 않았으며, 신자들이 보시한 것이 많을지라도 받는 대로 나누었다. 항상 자기 몸은 뒤로 하고 매양 다른 이보다 먼저 하였다.
승평(升平, 357~361) 말년에 이르러 문득 이전의 향기를 다시 맡고 아울러 붉은 기운을 보았는데, 한 여인이 손에 다섯 빛깔의 꽃을 들고 허공에서 내려왔다. 정검이 보고 기뻐하면서 무리들에게 말하였다.
“뒷일을 잘 부탁한다. 나는 이제 떠나노라.”
여인의 손을 잡고 작별 인사를 하고서 허공으로 올라가는데, 가는 길이 마치 무지개와 같았고 곧바로 하늘에 닿았다. 이때 나이가 70세이다.

2. 위조(僞趙) 건현사(建賢寺) 안령수(安令首)니전

안영수의 본래 성은 서(徐)씨로 동완(東莞) 사람이다. 아버지 충(忡)은 위조(僞趙)에서 벼슬하여 외병랑(外兵郞)이 되었다. 안영수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민첩하여 배우기를 좋아하고, 말하여 논하는 것이 맑고 고우며, 성품이 우아하고 욕심이 없어 담박하였다. 사람 사이의 일들을 즐거워하지 않아 조용히 한가하고 고요하게 지내면서 불법을 스스로 즐기며 시집가려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물었다.
“너는 응당 다른 가문에 귀속되어야 하거늘 어찌하여 이와 같이 하느냐?”
안영수가 대답했다.
“단정한 마음가짐으로 도를 일삼아 생각을 끊고 인간 세상 밖에 있으면서, 남의 기림[譽]이나 헐뜯음에 흔들리지 않고 청렴하고 바른 것으로 스스로 만족하면 될 터인데, 어찌 반드시 시집살이[三從之道]를 한 뒤라야 예에 맞는다고 하겠습니까?”
아버지가 다시 물었다.
“너는 홀로 한 몸만을 착하게 하고자 하는데, 어찌 부모까지 함께 구제할 수 있겠느냐?”
안영수가 다시 대답했다.
“몸을 바로 하고 도리를 행하여 바야흐로 일체의 것에서 벗어나려 하거늘, 하물며 양친에게서이겠습니까?”
서충(徐忡)은 이런 일 때문에 불도징(佛圖澄)을 찾아갔다. 불도징이 말했다.
“그대는 집으로 돌아가서 3일 동안 재계[潔齋]한 뒤 다시 찾아오시오.”
서충이 그대로 하니, 불도징이 사철쑥 씨를 갈아 삼[麻]에서 짠 기름에 섞고 서충의 오른쪽 손바닥에 발랐다. 그러고는 서충에게 바라보게 하였다. 한 사문이 대중 한가운데서 설법을 하는 것이 보였는데 형상이 여자 같았다. 본 대로 말하자 불도징이 말했다.
“이는 그대 딸의 전생 모습입니다. 출가하여 남을 유익하게 함이 지난날에도 이와 같았습니다. 만약 딸의 뜻을 따른다면 바야흐로 영화로움이 육친 가운데 가장 빼어나 그대는 부유하고 귀하게 될 것이며, 나고 죽는 괴로움의 바닷속에서 올바른 길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서충이 돌아와 출가를 허락하자, 안영수는 곧 머리를 깎고 불도징과 비구니 정검(淨撿)을 따라 계를 받고 건현사(建賢寺)를 세웠다. 불도징은 석륵(石勒)이 남긴 ‘꽃을 새긴 납의[剪花納]와 7조 가사[七條衣], 코끼리 코를 새긴 세숫대야[象鼻澡灌]를 안영수에게 주었다. 두루 여러 서적을 읽되 한 번이라도 눈을 거친 것은 반드시 외웠으며, 생각이 연못 깊은 곳에 이르는 것처럼 하고 정신은 먼 곳까지 상세하게 비추었다. 당대의 도를 믿는 무리들이 으뜸으로 삼지 않음이 없었으니, 이 때문에 출가자가 200여 명이나 되었다. 또한 대여섯 개의 정사(精舍)를 지었는데, 수고로움과 괴로움을 꺼리지 않아 다 세울 수가 있었다. 석호(石虎)가 공경하여 아버지 충을 발탁하여 황문시랑(黃門侍郞) 청하태수(淸河太守)로 삼았다.

3. 사주(司州) 서사(西寺) 지현(智賢)니전

지현의 본래 성은 조(趙)씨로 상산(常山) 사람이다. 아버지 진(珍)은 부류현령(扶柳縣令)을 지냈다. 지현은 어려서부터 거동이 우아하며, 뜻이 곧고 기개가 서 있었다. 승려가 되어서도 계율에 맞는 행실을 갖추고 닦아 정신과 성정이 엄정하여 천박하지 않았으며 넓어서 잡스럽지 않았다.
태수 두패(杜覇)가 도교[黃老]를 도탑게 믿어 승려들을 몹시 미워했는데, 날을 정해 모든 절의 승려들을 정리한다고 명하였다. 정한 격식이 높고도 까다로워 평범한 이가 행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나이 어린 승려들은 놀랍고 두려워했는데 멀리서 그의 풍채를 바라보기만 하여도 놀라 달아났다. 오직 지현만이 두려워하지 않고 조용히 태연자약하였다. 성 밖 활 쏘는 곳[射堂]에 모였는데 모두가 나이 먹은 이들이고 심사하는 날에 비구니 무리 중의 젊은이는 지현뿐이었다.
두패가 먼저 지현의 자격을 시험했는데, 자격이 모두 넉넉하였다. 지현은 거동과 외관이 맑고 우아하였으며 말도 솜씨 있게 하였다. 두패가 몰래 사악한 마음을 품고서 지현만 남게 하였다. 지현은 그의 뜻을 눈치 채고 계율을 허물어뜨리지 않겠노라 맹세하였으므로, 구차하게 목숨을 보존하려 하지 않고 항거하였다. 두패가 노하여 칼로 20여 곳을 베었다. 기절하고 쓰러졌으나, 그가 떠나자 곧 소생하였다.
정진에 더욱 힘써 나물 먹고 재계하여 절개가 굳으니 제자 백여 명이 항상 물과 우유처럼 화합하였다. 부견(符堅)이 왕위에 오를 때에는 명망을 듣고서 공경을 다해 수놓은 가사를 지었는데, 3년간 이루어진 것으로 백만금의 가치가 있었다.
그 뒤에 사주(司州) 서사(西寺)에 머물며 널리 바른 법을 드러내어 믿음과 실천을 활짝 열었다. 진(晋) 태화(太和, 366~371) 연간에 70여 세가 되었는데도, 『법화경』을 똑바로 외워 밤낮으로 한 번씩 했다. 머무는 곳에 온갖 새가 날아와 깃들고 경을 염송할 때마다 따라서 지저귀었다고 한다.

4. 홍농(弘農) 북악(北岳) 묘상(妙相)니전

묘상의 본래 성은 장(張)씨며 이름은 패화(珮華)로 홍농(弘農) 사람이다. 아버지 무(武)는 집안이 본디 부유하고 번성하였다. 묘상은 일찍부터 경의 가르침을 익혔는데, 15세에 태자사인(太子舍人)으로 있는 북쪽 땅의 황보달(皇甫達)에게 시집갔으나 달(達)이 상(喪)을 치를 때 예를 잃었으므로, 묘상이 이를 싫어해 이혼하여 인연을 끊고 출가하기를 청하니 아버지도 함께 좇았다.
부지런히 닦고 푸성귀만 먹으며 마음이 삼장[慧藏] 가운데 노닐고 법상(法相)에 밝게 통달하였다. 홍농 북악 음림(蔭林)의 서쪽 들에 머물렀는데, 따르는 무리들이 몹시 많았으니 기쁜 뜻으로 조용하고 침착하였다. 그곳에 머무른 20여 년 동안 힘껏 고행에 정진하면 할수록 더욱 도타워졌다. 매양 설법으로 사람을 제도할 때 듣는 이들이 뜻을 오로지할 수 없을까 항상 두려워했는데, 때로는 울면서 가르칠 정도였다. 이 때문에 가르친 바가 모두에게 널리 이익이 될 수 있었다.
진(晋) 영화(永和, 345~356) 연간에 홍농 태수가 7일간 재(齋) 올리기를 청하였다. 재를 올리는 자리에서 상석에 자리한 어떤 신도가 자문하여 불법을 듣기를 청했는데 말 속에 불손한 기운이 깔려 있었다. 묘상이 얼굴색을 바로 하여 말했다.
“그대는 오만할 뿐만 아니라 나라의 책임자에게도 너무나 경솔하군요. 어찌 무례함으로써 인간 세상을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곧 병을 핑계 삼아 물러나오니 당시의 승려와 속인들이 모두 다 탄복하였다.
그 뒤에 병으로 여러 날 누워 있다가 편안하게 임종을 맞이했는데 제자들을 둘러보며 말을 남겼다.
“궁핍한 자와 영달한 자를 불문하고 누구든지 나면 반드시 죽는 법이다. 오늘 작별을 하노라.”
말을 끝내자마자 임종하셨다.

5. 건복사(建福寺) 강명감(康明感)니전

명감의 본래 성은 주(朱)씨로 고평(高平) 사람이다. 대대로 불교 경전을 받들었으나 오랑캐가 그를 빼앗아 부인으로 삼으려 하였다. 어려움과 괴로움이 더욱 더 가해졌으나 맹세코 욕을 당하지 않으려 하였다. 양 치는 곳으로 내쳐진 뒤 10여 년 동안 돌아갈 생각은 갈수록 절실했지만 어디를 거쳐 가야 하는지 돌아가는 길을 알지 못하여 늘 삼보(三寶)를 생각하고 더불어 출가하기를 바랐다.
문득 어떤 비구를 만나 5계를 받기를 청하자, 이에 『관세음경』을 주었다. 이것을 얻어 익히고 암송하기를 밤낮으로 쉬지 않으면서, 집으로 돌아가 5층탑을 세울 것을 서원하였다. 근심스런 생각을 이기지 못하고 달아나 동쪽으로 갔다. 초행이라 길을 알 수 없었으나 밤낮으로 계속 갔다.
비탈길로 어떤 산에 들어갔다가 얼룩 호랑이를 만났다. 몇 발짝 거리인지라 처음에는 몹시 놀라고 두려웠지만 잠시 후 의식이 진정되자 마음속으로 이르고자 하는 곳까지 갈 수 있기를 빌었다. 마침내 호랑이를 따라 걸으니 하루 지나고 열흘 지나서 청주(靑州)에 이르게 되었는데, 촌락에 들어설 무렵 호랑이는 문득 사라졌다.
주에 이르러 다시 명백련(明伯連)에게 붙잡혔지만, 소식을 들은 남편이 배상금을 내고 맞아들였다. 집안사람들이 그의 뜻을 구속하고 억제하여 화합하지 못하고 괴로워했다. 부지런히 정진한 지 3년이 되자 마침내 좌선의 행법에 애오라지 도타워졌고 계율을 지킴에 허물이 없게 되었다. 이탈하여 조금이라도 계율을 범하면 즉각 몇 날이고 참회하여 상서로운 모습을 본 뒤라야 쉬었다. 때로는 꽃비가 내리는 것을 보고 때로는 허공에서 소리를 듣고, 때로는 부처님의 모습을 보고 때로는 한밤중에 상서로운 꿈을 꾸었다.
늙어갈수록 품행이 더욱 더 우뚝하여 강북의 자녀들이 스승으로 받들기를 부처님께 귀의하는 것같이 하였다. 진(晋) 태화(太和) 4년(369) 봄에 혜잠(慧湛) 등 10명과 더불어 강을 건너 사공(司空)으로 있는 하충(何充)공에게 나아가자 하충이 한 번 보고 몹시 공경하였다. 당시 서울에는 비구니 절이 없었으므로 자신의 별장[別宅]에다 그들을 위해 절을 세우고는 강명감에게 물었다.
“이름을 무어라 할까요?”
강명감이 대답했다.
“우리 진나라에서 불교의 사부대중이 오늘에야 비로소 갖추어졌습니다. 시주께서 세운 것 모두가 복된 업을 지은 것이므로 건복사(建福寺)로 부르면 괜찮겠습니다.”
하충이 그 말을 좇았다. 뒤에 병을 얻어서 얼마 되지 않아 바로 죽었다.

6. 북영안사(北永安寺) 담비(曇備)니전

담비의 본래 성은 도(陶)씨로 단양(丹陽) 건강(建康)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불교를 믿고 불법을 닦고자 했으나 형제가 없어 홀로 어머니를 모셨다. 어머니 모시기를 공손하고 효성스럽게 하여 친척들이 칭송하였다. 시집갈 나이가 되었는데도 예물을 받으려 하지 않으니, 어머니가 어길 수 없어 세속 떠날 뜻을 받아들였다. 부지런히 계행 닦기를 힘써 밤낮으로 게을리하지 않았다.
진(晋) 목황제(穆皇帝, 345~361년)가 예로써 맞아들여 공경하기를 도탑게 하였다. 그러고는 항상 칭송하여 말하였다.
“보면 볼수록 더욱 아릅답구려.”
장황후(章皇后) 하씨(何氏)에게도 말했다.
“서울의 비구니 가운데서 담비만큼 아름다운 이는 없구려.”
영화(永和) 10년(354)에 이르러 장황후가 그를 위해 정음리(定陰里)에 절을 세우고 영안사(永安寺)라 하였다.[오늘날의 하후사(何后寺)가 그것이다.]
담비는 겸허하게 남을 이끌면서 일찍이 자랑하거나 거만한 적이 없었다. 명예가 날이 갈수록 넓혀져서 멀고 가까운 데서 모여든 무리가 3백여 명이나 되었다. 나이 73세로, 테원(泰元) 21년(396)에 마쳤다. 제자 담라(曇羅)는 널리 경과 율을 읽고 재기가 넉넉하고 치밀하여 스승의 임무를 잇도록 명받았다. 더하여 4층탑ㆍ강당ㆍ방우(房宇)를 세우고, 또한 와불상과 부처님 일곱 분을 모신 불단[七佛龕堂]을 지었다고 한다.

7. 건복사 혜잠(慧湛)니전

혜잠의 본래 성은 팽(彭)씨로, 임성(任城) 사람이다. 신령스런 자태는 초원(超遠)해 보였고 정성스런 품행은 남달랐다. 연못같이 깊은 성정은 멀리까지 미쳐서 남을 구제하는 것에 힘썼다. 거친 옷을 입고 푸성귀를 먹으면서도 그 속에서 즐거워했다.
일찍이 옷을 어깨에 메고 산길을 걷다가 노략질하는 무리들을 만났다. 칼을 들고 혜잠에게 들이대려 했으나 손이 떨려 그럴 수 없었다. 그러고는 혜잠에게 어깨에 멘 옷을 내놓으라고 하니, 혜잠이 깔깔 웃고는 옷을 주면서 말했다.
“그대들이 나에게 바라는 것은 매우 중한 것인데 얻는 것은 너무 가볍구려.”裙
다시 옷 속에 입고 있던 속옷 새것을 끌러 그들에게 주었다. 노략질하는 무리들이 용서를 빌며 모두 다 혜잠에게 돌려주었으나 혜잠은 희사하고 떠나왔다.
건원(建元) 2년(344) 강을 건넜다. 사공(司空)으로 있는 하충(何充)이 크게 높이 공경함을 더하여 건복사(建福寺)에 머물기를 청하였다고 한다.

8. 연흥사(延興寺) 승기(僧基)니전

승기의 본래 성은 명(明)씨로, 제남(濟南) 사람이다. 머리를 매만지던 시절부터 도에 뜻을 두어 출가하기를 원했으나, 어머니는 듣지 않고 몰래 혼인을 약속하고 빙례(娉禮:혼인) 치르는 것을 비밀로 했다. 남편을 맞아들일 날이 가까워져서야 눈치를 채고는 바로 곡기를 끊고 물이나 국물조차 목에 넘기지 않으니, 친척들 모두가 말렸으나 그 뜻을 바꿀 수 없었다.
7일 째에 어머니는 사위를 부르니 사위는 불법을 공경히 믿는 사람인데다 부인이 거의 숨이 다해 가는 것을 보았으므로 장모에게 말했다.
“사람마다 각기 뜻한 바가 있사오니 그 뜻을 빼앗아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어머니가 그 뜻을 좇아 마침내 출가하니 그때 나이가 21세였다. 안팎의 친척들이 모두 와서 경하하고 위로하면서 다투듯 진귀한 꽃과 이름난 자리를 베풀었으며, 고을의 목사가 광대를 보내고 군수는 몸소 왔다. 승려와 속인들이 모두 감탄하였으니, 일찍이 없었던 일이었다.
승기는 맑게 계율의 규범을 지키고 정진하여 경을 익혔다. 여러 번 비구니 담비(曇備)와 같은 이름난 이들과 함께 거의 어깨를 나란히 하였는데, 중요한 일일수록 가장 치밀하게 했으며 일을 잘하고 논의를 주도했다. 황제가 평소 높은 예로써 맞이했고, 건원(建元) 2년(344) 황후 저(褚)씨가 그를 위해 도정리(都亭里) 통공항(通恭巷) 안에 절을 세우고, 연흥사(延興寺)라 했으며 승기를 사주로 머물게 하였다.
제자가 100여 명이었는데 일에 닥쳐서는 맑게 처리하여 승려와 속인들이 더욱 공경하였다. 나이 68세인 융안(隆安) 원년(397)에 죽었다.

9. 낙양성(洛陽城) 동사(東寺) 도향(道響)니전

축도향의 본래 성은 양(羊)씨로, 태산(太山) 사람이다. 뜻과 성품이 삼감을 애오라지 하여 남과 더불어 거스름이 없었다. 사미 때에 늘 대중을 위하여 일을 하면서도 입으로 항시 경을 염송하고, 20세에 이르러서는 『법화경』, 『유마경』 등의 경전을 염송하였다. 구족계를 받은 뒤에는 진리의 참맛을 연찬하여 궁구하고, 푸성귀를 먹으며 괴로운 지경에서도 굳은 절개를 지키니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더 지극하였다.
낙양 동사(東寺)에서 머물렀는데 평소 청담(淸談)에 능하고 『반야경』([小品]에 더욱 뛰어났다. 이치에 통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고 어지러운 변론에 힘쓰지 않았고, 온 고을에서 도를 배우는 이들이 다 같이 으뜸가는 스승[師宗]으로 받들었으니, 비구니로서 경전을 강의한 이는 도형이 처음이었다.
진(晋) 태화(泰和, 366~370) 연간에 양영변(楊令辯)이란 여인이 있었는데, 도교를 도타이 믿어서 기운[氣] 먹기를 애오라지 행하였다. 앞 시대의 인물들도 공경히 섬긴 일이 많았는데, 도형에 이르러 왕에게 그 술법은 차츰 사망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양영변이 같은 성씨라고 하면서 거짓 인연을 맺고 여러 차례 오가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질투하고 해독을 끼칠 틈을 엿보았다. 그 뒤에 남몰래 독약을 도형의 음식 속에 집어넣었는데, 어떤 치료로도 낫지 않았다. 제자가 물었다.
“누구의 집에 가겼다가 병을 얻으셨는지요?”
도형이 대답했다.
“나야 그 사람을 잘 알지만 이 모두가 인연의 업에 의한 소치이니 너는 더 이상 묻지를 말아라. 설사 말하여 유익함이 있다 할지라도 오히려 말하지 않거늘, 하물며 무익한데 있어서랴.”
끝내 말하지 않고 돌아갔다.

10. 신림사(新林寺) 도용(道容)니전

도용은 본래 역양(歷陽) 사람으로, 오강사(烏江寺)에 머물렀다. 계율의 행실이 맑고 우뚝하며 길흉을 잘 점쳐서 화복을 미리 알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성인(聖人)이라고 알려졌다.
진(晋) 명제(明帝, 323~325)가 당시에 몹시 공경하고 받들어서 꽃을 자리 아래 깔고는 그가 범인인가 성인인가를 시험했는데 과연 꽃이 시들지 않았다.
간문제(簡文帝, 371~372) 때에 이르러서는 먼저 청수도사(淸水道師)를 섬겼는데, 도사는 서울에서 왕복양(王濮陽)으로 불렸다. 궁궐 안에 도교의 전각[道舍]을 세우니, 도용이 자주 불법의 길을 열고 이끌었으나 아직 따르지 않았다. 그 뒤에 간문제가 매양 도교의 사당을 들어설 때마다 문득 신(神)과 같은 이를 보았는데 사문(沙門)의 모습을 하였고 사당 안에 가득했다. 황제가 도용이 한 짓이 아닐까 의심했으나 잘 알 수 없었다.
황제의 자리에 오른 뒤에 까마귀가 태극전(太極殿)에다 집을 지었으므로 곡안원(曲安遠)으로 하여금 점대[莝]를 뽑게 하니 점괘가 나왔다.
“서남쪽에 있는 여자 스님이 이 괴이한 현상을 사라지게 할 수 있다는군요.”
간문제가 심부름꾼을 보내 오강사(烏江寺)로 가서 도용을 맞이하게 했다. 이 괴이한 일로써 알현하여 도용이 말했다.
“7일간 목욕재계하고 팔계를 받는다면 절로 그칠 것입니다.”
간문제가 즉각 좇아 한결같은 마음으로 정숙하니 7일도 되지 않았는데 까마귀가 다투듯 모여들어 둥지를 옮겨 갔다.
간문제가 깊이 믿어 그를 위해 절을 세우고 소용되는 비용을 공급했으며 수풀이 있었기 때문에 절 이름을 신림사(新林寺)라 하였다. 즉시 스승의 예로써 섬기고 마침내 불법을 받들었으니, 동진[後晋]에서 불도를 드러내어 숭상한 것은 도용의 힘이다. 효무제(孝武帝, 373~395) 때에는 더욱 높이 공경했다. 태원(太元, 376~396) 연간에 갑자기 자취가 끊어져 찾았으나 있는 곳을 알지 못하니, 효무제가 그의 옷과 그릇[衣鉢]으로 대신해 장례를 치르도록 명했으므로 절 주변에 무덤이 있다고 한다.

11. 사주(司州) 서사(西寺) 영종(令宗)니전

영종의 본래 성은 만(滿)씨로, 고평 금향(高平金鄕)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불법을 믿어 마을 사람들이 칭찬했다. 집안이 상사와 화란[喪亂]을 당해 오랑캐에게 잡혀갔다. 간절하고 지극한 정성으로 귀의하여 불ㆍ법ㆍ승 삼보를 부르고 『보문품(普門品)』을 염송하며, 눈썹을 뽑아 없애 몹쓸 병이라 핑계를 대고 하소연함으로써 풀려나게 되었다.
길을 따라 남쪽으로 돌아가면서 기주(冀州)를 떠날 때 다시 적들에게 쫓기게 되었다. 나무 꼭대기에 올라 애오라지 지성으로 염송하니, 붙잡으려는 자들이 앞을 바라볼 뿐 끝내 위를 쳐다보지 못했으며, 찾다가 잡지 못하자 얼마 안 되어 흩어졌다. 영종이 나무에서 내려와 다시 떠나면서 감히 먹을거리를 빌지 않았으나 애초부터 배고픔을 느끼지 못했다.
저물녘 맹진(孟津) 나루에 다다랐지만 건널 만한 배가 없었다. 허둥지둥하면서 근심과 두려움으로 다시 삼보를 부르자, 문득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모르는 어떤 흰 사슴이 물속으로 내려가 건너가고 있었다. 모래와 먼지가 따라 일어날 뿐 물결조차 일지 않았다. 영종이 사슴을 따라 건너는데 조금도 물에 젖지 않고 평안하게 걷는 것이 마치 육지와 같았다. 이런 인연으로 집에 다다랐으므로 곧바로 도에 들고 성심으로 그윽하게 나아가 학행이 정밀하고 간절했으며, 경전의 가르침을 열어보아 뜻 깊숙이 들어가 입신의 경지에 이르렀다.
진(晋) 효무제가 소문을 듣고 편지를 보내 두루 법을 물었다. 뒷날 백성들이 돌림병을 만나 빈곤한 이들이 무리를 이루자 영종은 자산을 기울여 구걸하는 사람들에게 의식을 대 주고 먹여 살렸다. 험하고 먼 곳을 마다하지 않고 마땅함을 따라 구휼하였으므로 그에 힘입은 이들이 매우 많았는데, 영종은 굶주림을 참느라 은근히 괴로웠으므로 몸은 마르고 얼굴은 파리했다.
나이 75세에 갑자기 아침 일찍 제자들을 불러 지난밤의 꿈 이야기를 하였다.
“어떤 큰 산을 보았는데 수미산(須彌山)으로 부르더구나. 높은 봉우리가 몹시 빼어나 위로 하늘에 이어졌으며, 보배 장식으로 장엄하게 꾸며져 있어 휘황찬란하고, 북[法鼓]이 둥둥거리고 향 연기는 향기롭게 퍼지는데, 나보고 앞서라는 말소리가 나더라. 경악하여 놀라 깨니 몸속이 문득 보통 때와 달라서 비록 고통이나 괴로움은 없지만 상태가 마치 흠뻑 취한 듯 정신을 차릴 수가 없구나.”
같이 공부한 도진(道津)이 말했다.
“이치로 보아 극락일거야.”
말을 서로 나누다가 마치지도 않았는데 갑작스레 돌아갔다.

12. 간정사(簡靜寺) 지묘음(支妙音)니전

묘음은 어디 사람인지 자세하지 않다. 어려서 도에 뜻을 두었는데 서울에서 살았다. 불경과 그 외의 것을 널리 배우고 문장을 잘 지었다. 진 효무제, 태부(太傅)인 회계왕(會稽王) 도(道), 맹의(孟顗) 등이 모두 공경하여 받들었다. 매양 효무제, 태부, 중조학사(中朝學士)와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거나 글을 짓곤 했고, 본디 재치까지 있던 터라서 명성이 자자했다.
태부가 태원(太元) 10년(385) 간정사(簡靜寺)를 세우고 묘음을 주지로 삼았는데 제자가 백여 명이나 되었다. 안팎의 재주와 의리가 있는 이들이 이 때문에 스스로 와서 끝없이 공양을 올리니 그 부유함이 도읍을 기울일 정도였다. 귀한 이나 천한 이나 으뜸으로 섬겼으므로 문에 말과 수레가 날마다 백여 량이나 있었다.
형주자사(荊州刺史) 왕침(王忱)이 죽자 열종(列宗)이 왕공(王恭)으로 교대하게 하려는 뜻이 있었다. 그때 환현(桓玄)이 강릉에 있었는데, 왕침 때문에 좌절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왕공이 응당 형주 자사로 갈 것이라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러나 평소에 또한 왕공이 꺼리고 있었다. 당시의 황문시랑(黃門侍郞) 은중감(殷仲堪)이 재주가 별로 없는데다가 제어하기 쉬웠으므로, 그가 형주 자사가 되었으면 싶었다. 이에 사신을 보내 묘음에게 의탁하여 은중감에게 형주 자사를 맡기도록 공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열종이 묘음에게 물었다.
“형주의 자사 자리가 비어 있는데 누가 맡았으면 좋겠소?”
묘음이 대답했다.
“빈도는 출가인으로 어찌 세속 사람들의 논의 가운데 끼어들 수 있겠습니까만, 안팎으로 들려오는 이야기에 의한다면 모두들 은중감만큼 뜻과 생각이 깊고 먼 데까지 이르는 이가 없다고 하니, 형초(荊楚)를 감당할 수 있을 성싶군요.”
황제가 그렇다고 여겨 마침내 왕침 대신 은중감을 자리를 맡기니, 권세가 조정을 움직이고 위엄이 전국에 떨쳤다고 한다.

13. 하후사(何后寺) 도의(道儀)니전

도의의 본래 성은 가(賈)씨로 안문루번(雁門婁煩) 사람인 혜원(慧遠)의 고모다. 같은 고을의 해직(解直)에게 시집갔는데, 해직이 심양(尋陽)의 수령으로 있다가 죽었다. 22세 때에 속세의 허물을 벗어 던지고 법의를 입었다.
총명하고 민첩하며 사리에 밝았으며, 널리 듣고 기억을 잘하였다. 『법화경』을 염송하고 『유마경』과 『반야경』을 연구했다. 정밀한 뜻과 묘한 이치를 마음으로 인하여 홀로 깨달았다. 계율의 행실이 높고 우뚝하며 신령스런 기운은 맑고 아득했다.
서울에서 경과 율이 차츰 갖추어져 연구하는 모임이 계속 이어진다는 소문을 듣고는, 진(晋) 태원(泰元, 376~396) 말 서울에 이르러 하후사(何后寺)에 머물렀다. 단정한 마음가짐으로 율장을 미묘한 곳까지 정미하게 궁구하며, 몸을 공손하게 낮추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의상(衣裳)은 거칠고 해졌으며 스스로 지팡이와 그릇을 잡으니, 맑은 기운을 흩뿌리면서도 교만함이 없었으므로 도인이나 속인이나 높이 여겼다.
78세에 질병을 만나 몹시 위독했지만 마음을 다잡고 더욱 힘써 염송함에 게으름이 없었다. 제자가 청하였다.
“바라건대 조금이라도 쉬셔서 기력이 나아졌으면 합니다.”
대답하였다.
“네가 마땅한 바를 말했구나.”
말을 마치자마자 돌아갔다.
033_0720_a_01L比丘尼傳卷第一 幷序大莊嚴寺釋寶唱 撰晉洛陽竹林寺淨撿尼傳一僞趙建賢寺安令首尼傳二司州西寺智賢尼傳三弘農北嶽妙相尼傳四建福寺康明感尼傳五北永安寺曇備尼傳六建福寺慧湛尼傳七延興寺僧基尼傳八雒陽城東寺道馨尼傳九新林寺道容尼傳十司州西寺令宗尼傳十一簡靜寺支妙音尼傳十二何后寺道儀尼傳十三原夫貞心亢志奇操異節豈惟體率由於天眞抑亦勵景行於仰止故曰希顏之士亦顏之儔慕驥之馬亦驥之乘斯則風烈徽猷流芳不絕者也以握筆懷鈆之客將以貽厥方來事記言之士庶其勸誡後世故雖欲忘言斯不可已也大覺應乎羅衛佛日顯於閻浮三界歸依四生向慕比丘尼之興發源於愛道登地證果仍世不絕列之法藏如日經天自拘尸滅影雙樹匿迹歲曆蟬聯陵夷訛於是時澆信謗人或存亡微言興而復廢者不肖亂之也正法替而復隆者賢達維之也像法東流淨撿爲緜載數百碩德係興善妙淨珪苦行之節法辯僧果盡禪觀之妙若僧端僧基之立志貞固妙相法全之弘震曠遠若此之流往往閒出淵深嶽跱金聲玉振實惟叔葉之貞季緖之四依也而年代推移淸規稍遠英風將範於千載志業未集乎方冊每懷慨歎其歲久矣始乃博採碑頌廣搜記集或訊之博聞或訪之故老詮序始終爲之立傳起晉升平訖梁天監凡六十五人不尚繁華存要實庶乎求解脫者勉思齊之而寡見庸疏或有遺漏博雅君子箴其闕焉晉竹林寺淨撿尼傳一淨撿本姓仲名令儀彭城人也父誕武威太守撿少好學早寡家貧常爲貴遊子女教授琴書聞法信樂莫由諮後遇沙門法始經道通達晉建興中於宮城西門立寺撿乃造之始爲說撿因大悟念及强壯以求法利始借經遂達旨趣他日謂始曰經中云比丘比丘尼願見濟度始曰西域有男女二衆此土其法未具撿曰云比丘比丘尼寧有異法始曰外國人云尼有五百戒便應是異當爲問和和尚云尼戒大同細異不得其法不得授尼有十戒得從大僧受但無和上尼無所依止耳撿卽剃落從和上受十戒同其志者二十四人於宮城西門共立竹林寺未有尼師共諮淨撿過於成德和上者西域沙門智山也住罽賓國寬和有智思雅習禪晉永嘉末來達中夏分衛自資必弘道時信淺薄莫知祈稟建武元還反罽賓後竺佛圖澄還述其德皆追恨焉撿蓄徒養衆淸雅有則說法教化如風靡草晉咸康中沙門僧建於月支國得僧祇尼羯磨及戒升平元年二月八日洛陽請外國沙門曇摩羯多爲立戒壇晉沙門釋道場以戒因緣經爲難云其法不成浮舟于泗撿等四人同壇上從大僧以受具戒晉土有比丘尼亦撿爲始也當其羯磨之日殊香芬馥闔衆同聞莫不欣歎加其敬仰善修戒行志學不休信施雖多隨得隨散常自後己每先於人到升平未忽復聞前香見赤氣有一女人手把五色花自空而下撿見欣然因語衆曰好持後事我今行矣執手辭別騰空而上所行之路有似虹蜺直屬于天時年七十矣僞趙建賢寺安令首尼傳二安令首本姓徐東莞人也父忡仕僞趙爲外兵郞令首幼聰敏好學言論淸綺雅性虛淡不樂人閒從容閑靜以佛法自娛不願求娉父曰汝應外屬得如此首曰端心業道絕想人外譽不動廉正自足何必三從然後爲父曰汝欲獨善一身何能兼濟父首曰立身行道方欲度脫一切何況二親耶忡以問佛圖澄澄曰君歸家齋三日竟可來忡從之澄以茵支子磨麻油傅忡右掌令忡視之見一沙門在大衆中說法形狀似女具以白澄澄曰是君女先身出家益物往事如若從其志方當榮拔六親令君富生死大苦海向得其邊忡還許之便翦落從澄及淨撿尼受戒立建賢澄以石勒所遺翦花納七條衣象鼻澡灌與之博覽群籍經目必誦思致淵深神照詳遠一時道學莫不宗焉因其出家者二百餘人又造五六精舍匪憚勤苦皆得修立石虎敬擢父忡爲黃門侍郞淸河太守司州西寺智賢尼傳三智賢本姓趙常山人也父珍扶柳縣賢幼有雅操志槪貞立及在緇衣戒行修備神情凝遠曠然不雜太守杜霸篤信黃老憎嫉釋種符下諸寺剋日簡汰制格高峻非凡所行年少怖懼皆望風奔駭唯賢獨無懼容興居自若集城外射堂皆是耆德簡試之尼衆盛壯唯賢而已霸先試賢以格皆有餘賢儀觀淸雅辭吐辯麗霸密挾邪心逼賢獨住賢識其意不毀戒法不茍存身命抗言拒之霸怒以刀斫賢二十餘瘡悶絕躄地霸去乃甦倍加精進菜齋苦節門徒百餘常如水乳及符堅僞立聞風敬重爲製織繡袈裟三歲方成價直百萬後住司州西寺弘顯正法開長信行晉太和中年七十餘誦正法華經日夜一遍其所住處衆鳥依棲經行之時鳴呼隨逐云弘農北嶽妙相尼傳四妙相本姓張名珮華弘農人也父茂家素富盛相早習經訓十五適太子舍人北地皇甫達達居喪失禮相惡之告求離絕因請出家父竝從之勤蔬食遊心慧藏明達法相住弘農北嶽蔭林面野徒屬甚多悅志閑曠遁影其中二十餘載勵精苦行久而彌篤每說法度人常懼聽者不能專或涕泣以示之是故其所啓訓能弘益晉永和中弘農太守請七日齋座上白衣諮請佛法言不遜相正色曰君非直見慢亦大輕邦宰用無禮茍出人閒耶於是稱疾而退當時道俗咸歎服焉後枕疾累日終怡悅顧語弟子曰不問窮達生必有死今日別矣言絕而終建福寺康明感尼傳五明感本姓朱高平人也世奉大法經爲虜賊所獲欲以爲妻備加苦楚不受辱謫使牧羊經歷十載懷歸轉篤反途莫由常念三寶兼願出家遇一比丘就請五戒仍以觀世音經授之因得習誦晝夜不休願得還家立五層塔不勝憂念逃走東行初不識路晝夜兼涉徑入一山見有班虎去之數步初甚恐懅小卻意定心願逾至遂隨虎而行積日彌旬得達靑將入村落虎便不見至州復爲明伯連所虜音問至家夫兒迎贖家人拘制其志未諧苦身懃精三年乃遂專篤禪行戒品無愆脫有小犯輒累晨懺悔要見瑞相然後乃休或見雨或聞空聲或睹佛像或夜善夢及桑榆操行彌峻江北子女師奉如晉永和四年春與慧湛等十人江詣司空公何充充一見甚敬重于時京師未有尼寺充以別宅爲之立寺感曰當何名之答曰大晉四部今日始檀越所建皆造福業可名曰建福公從之矣後遇疾少時便卒北永安寺曇備尼傳六曇備本姓陶丹陽建康人也少有淸願修正法而無有昆弟獨與母居事母恭孝宗黨稱之年及笄嫁徵幣弗許母不能違聽其離俗精懃戒行日夜無怠晉穆皇帝禮接敬厚常稱夂看更佳謂章皇后何氏曰京邑比丘尼尟有曇備之儔也到永和十年后爲立寺于定陰里名永安今之何后寺是虛導物未嘗有矜慢之容名譽日廣遠近投集衆三百人年七十三泰元二十一年卒弟子曇羅博覽經律才贍密勅續師任更立四層塔講堂房宇又造臥像及七佛龕堂云建福寺慧湛尼傳七慧湛本姓彭任城人也神貌超遠操殊特淵情曠達濟物爲務惡衣蔬樂在其中嘗荷衣山行逢群劫欲擧刃向湛手不能勝因求湛所負衣湛歡笑而與曰君意望甚重所獲殊復解其衣內新裙與之劫卽辭謝倂以還湛湛捨之而去建元二年渡司空何充大加崇敬請居建福寺住云延興寺僧基尼傳八僧基本姓明濟南人也綰髮志道願出家母氏不聽密以許嫁秘其娉禮迎接日近女乃覺知卽便絕糧水漿不下親屬共請意不可移至於七日母呼女壻壻敬信見婦殆盡婦母曰人各有志不可奪也母卽從因遂出家時年二十一內外親戚皆來慶慰競施珍華爭設名供州牧給伎郡守親臨道俗咨嗟歎未曾有基淨持戒範精進習經數與曇備尼輩略齊樞機最密善言事議康皇帝雅相崇禮建元二年皇后褚氏爲立寺於都亭里通恭巷內名曰延興居寺住徒衆百餘人當事淸明道俗加敬年六十八隆安元年卒矣洛陽城東寺道馨尼傳九竺道馨本姓羊太山人也志性專謹物無忤沙彌時常爲衆使口恒誦經及年二十誦法華維摩等經具戒後硏求理味蔬食苦節彌老彌至住洛陽東寺雅能淸談尤善小品貴在理不事辭辯一州道學所共師宗丘尼講經馨其始也晉泰和中有女人楊令辯篤信黃老專行服氣先時人物亦多敬事及馨道王其術寢亡令辯假結同姓數相去來內懷姤嫉伺行毒害後竊以毒藥內馨食中治不愈弟子問往誰家得病答曰其知主皆籍業緣汝無問也設道有我尚不說況無益耶不言而終新林寺道容尼傳十道容本歷陽人住烏江寺戒行精峻占吉凶逆知禍福世傳爲聖晉明帝甚見敬事以花布席下驗其凡聖果不萎焉及簡文帝先事淸水道師師京都所謂王濮陽也第內爲立道容亟開導未之從也後宮人每入道屋輒見神人爲沙門形滿於室內帝疑容所爲也而莫能決踐祚之後烏巢太極殿帝使曲安遠筮之西南有女人師能滅此怪帝遣使往烏迎道容以事訪之容曰唯有淸齋七日受持八戒自當消弭帝卽從之整肅一心七日未滿群烏競集運巢而去帝深信重卽爲立寺資給所須因林爲名名曰新林卽以師禮事之遂奉正法後晉顯尚佛道容之力也逮孝武時彌相崇敬太元中忽而絕不知所在帝勅葬其衣鉢故寺邊有塚云司州令宗尼傳十一令宗本姓滿高乎金鄕人也幼有淸信鄕黨稱之家遇喪亂爲虜所驅歸誠懇至稱佛法僧誦普門品拔除其眉託云惡疾求訴得放隨路南歸行出冀州復爲賊所逐登上林樹專誠至捕者前望終不仰視尋索不得爾而散宗下復去不敢乞食初不覺晩達孟津無舩可濟慞惶憂懼稱三寶忽見一白鹿不知所從來下涉河流沙塵隨起無有波瀾宗隨鹿而曾不沾濡平行如陸因得達家卽入道誠心冥詣學行精懇開覽經深義入神晉孝武聞之遣書通問後百姓遇疾貧困者衆宗傾資賑給告乞人閒不避阻遠隨宜贍恤蒙賴甚多忍飢懃苦形容枯悴年七十五忽早召弟子說其夜夢見一大山云是須彌高峯秀絕上與天連寶飾莊嚴輝曜爛日法鼓鏗鏘香煙芳靡吾令前愕然驚覺卽體中忽忽有異於雖無痛惱狀如昏醉同學道津曰正當是極樂耳交言未竟奄忽遷神簡靜寺支妙音尼傳十二妙音未詳何許人也幼而志道居處京華博學內外善爲文章晉孝武皇帝太傅會稽王道孟顗等竝相敬信與帝及太傅中朝學士談論屬文雅有才致籍甚有聲太傅以太元十年爲立簡靜寺以音爲寺主徒衆百餘人內外才義者因之以自達供䞋無窮富傾都邑貴賤宗事門有車馬日百餘兩荊州刺史王忱死烈宗意欲以王恭代之桓玄在江陵爲忱所折挫恭應往素又憚恭殷仲堪時爲恭門生玄知殷仲堪弱才亦易制御意欲得乃遣使憑妙音尼爲堪圖州旣而烈宗問妙音荊州缺外問云誰應作者答曰貧道道士豈容及俗中論議聞外內談者竝云無過殷仲堪以其意慮深遠荊楚所須帝然之遂以代㩲傾一朝威行內外云何后寺道儀尼傳十三道儀本姓賈鴈門婁煩人慧遠之姑出𡣪同郡解直直爲尋陽令亡儀年二十二棄捨俗累披著法衣聰明敏博聞强記誦法華經講維摩小品義妙理因心獨悟戒行高峻神氣淸聞中畿經律漸備講集相續晉泰元末乃至京師住何后寺端心律藏妙究精微身執卑恭在幽不惰衣裳麤弊自執杖鉢淸散無矯道俗高之年七十八遇疾已篤執心彌勵誦念無殆弟子請曰願加消息冀蒙勝損答曰非所宜言言絕而卒比丘尼傳卷第一丙午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