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037_0954_a_01L대종지현문본론(大宗地玄文本論) 제1권
037_0954_a_01L大宗地玄文本論卷第一


마명(馬鳴) 지음
진제(眞諦) 한역
이병욱 번역
037_0954_a_02L馬鳴菩薩造 眞諦三藏 譯


1. 귀의덕처무변대결택분(歸依德處無邊大決擇分)
037_0954_a_03L歸依德處無邊大決擇分第一

일체의 여지(餘地) 없는 밝음에 정례(頂禮)드리니
하나도 아니고 하나가 아닌 모든 궤칙의 경지로서
헤아릴 수 없고 생각할 수 없고 무량(無量)한 하나이자
아울러 여러 가지 세계의 중생들 종류이네.
037_0954_a_04L頂禮一切無餘明
非一非一諸則地
不數不思無量一
幷諸種種趣生類
본래 헤아릴 수 없는 목숨을 끊은 품[斷命品]이니
더불어 평등해서 티끌 티끌마다 법(法)이 있지 않고
겸하여 불가설(不可說)의 무소유(無所有)이니
이러한 것들의 온갖 법이 아님을 통틀어 갖추었다.
037_0954_a_06L本無量數斷命品
與等塵塵無有法
兼不可說無所有
通俱非是等諸法
【論】 이 두 행의 게송에 여덟 가지 문(門)이 있으니, 어떤 것이 여덟 가지 문인가? 첫째, 중중(中中)의 주인을 드러내 보이는 문이다. 둘째, 도로(道路)의 궤칙(軌則)을 드러내 보이는 문이다. 셋째, 잡됨을 여의고 하나로 합치됨을 드러내 보이는 문이다. 넷째, 끝없이 중생[毛生]을 드러내 보이는 문이다. 다섯째, 여러 가지 식(識)을 여의는 것을 드러내 보이는 문이다. 여섯째, 가유(假有)로서 실질이 없음을 드러내 보이는 문이다. 일곱째, 일이 있는 바가 없음[無所有]을 드러내 보이는 문이다. 여덟째, 구족하여 장애 없음을 드러내 보이는 문이다. 이것이 여덟 가지 문이다.
037_0954_a_08L論曰就此二行偈中則有八門云何爲八一者顯示中中主者門二者顯示道路軌則門三者顯示離雜合一四者顯示無邊毛生門五者顯示種種離識門六者顯示假有無實門七者顯示無所有事門八者顯示具足無礙門是名爲八
첫 번째인 중중의 주인을 드러내 보이는 문에 다섯 종류가 있다. 어떤 것이 다섯 가지인가? 첫째는 순서에 따르고 전변을 따르는 응신(應身)의 주인이고, 둘째는 유와 무에 걸림 없는 변화신의 주인이며, 셋째는 본체이자 본성인 법신의 주인이고, 넷째는 근본과 지말이 모두 끊어져서 도(道)가 가득한 주인이며, 다섯째는 감응에 따라 걸림 없는 자연(自然)의 주인이다. 이것이 다섯 가지이다.
037_0954_a_15L就顯示中中主者門中則有五種云何爲五一者隨順隨轉應身主者二者有無無礙變身主者三者本體本性法身主者者本末俱絕滿道主者五者隨應無礙自然主者是名爲五
037_0954_b_01L수집행인대다라니수다라(修集行因大陀羅尼修多羅) 중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 때 화륜보광명천자(花輪寶光明天子)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가장 뛰어난 인도자이시여, 생각하고 의론할 수 있는 것과 생각하고 의론할 수 없는 것을 얼마만큼 가지고 계십니까? 오직 원하건대 세존께서는 저희들을 위해 열어 보이셔서 분명히 말씀해 주옵소서. 저희들 대중은 그 이름[名字]을 듣고 항상 외우고 항상 생각하여 무명의 장(藏)을 벗어나 열반의 성에 이르고자 합니다.’
037_0954_a_20L『修集行因大陁羅尼修多羅』中作如是說爾時花輪寶光明天子則白佛言世尊第一導師有幾數量可思議不可思議願世尊爲我等衆開示顯說我等大衆聞其名字常誦常念出無明藏到涅槃城
이에 세존께서 화륜보광명천자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만약 신통력으로 한량 없고 가없는 아승기 겁 동안 그 이름을 말한다 해도 끝내 다하지 못할 것이지만 지금 간략히 말하겠다. 너희들을 위해서 그 요점을 말하겠다. 선남자야, 깨달은 사람의 수효는 넓고 크며 원만하기가 항하의 모래 수보다 많으나, 간략히 말하면 다섯 종류가 있다. 어떤 것이 다섯 종류인가? 첫째는 수체(隨體)의 부처님이고, 둘째는 변체(變體)의 부처님이며, 셋째는 법체(法體)의 부처님이고, 넷째는 헤아릴 수 없는[莫測] 부처님이고, 다섯째는 감응해 구르는[應轉] 부처님이다.’”
그리고 여러 가지를 말하였다.
037_0954_b_03L於是世尊告天子言我若以神通力無量無邊阿僧祇劫中說其名終不能盡今當略言爲汝等衆宣說其要善男子其覺者數廣大圓滿過於恒沙略說五種云何爲五一者隨體佛二者變體佛三者法體佛者莫測佛五者應轉佛乃至廣說故
게송에서 “일체의 여지(餘地) 없는 밝음에 정례 드린다”고 말한 것과 같다.
037_0954_b_09L如偈頂禮一切無餘明
무슨 의미로 이끌어 주시는 스승을 모두 주인이라 이름하는가? 세 가지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자재(自在)한 의미이니 모든 법의 왕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정상의 의미이니 삼계에서 첫 번째이기 때문이며, 셋째는 두루하는 의미[周遍義]이니 이르지 못하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세 가지이다. 이와 같이 중중의 주인을 드러내 보이는 문을 말했다.
037_0954_b_10L以何義故一切導師皆名主者以三義故云何爲三一者自在義諸法王故二者頂上義三界一故三者周遍義無所不至故是名爲三如是已說顯示中中主者門
다음은 도로(道路)의 궤칙을 드러내 보이는 문을 말하겠다. 이 문에 여섯 종류가 있다. 어떤 것이 여섯 종류인가? 첫째는 소리의 높낮이와 말의 인도가 무애자재(無礙自在)한 궤칙이고, 둘째는 근본 경지에 의지함이 평등한 하나의 종자라서 온갖 허망함을 여읜 궤칙이며, 셋째는 생장하고 장엄함이 하나하나 힘이 있는 궤칙이며, 넷째는 궁극적으로 원만해서 여지없이 다 거두는 궤칙이고, 다섯째는 이름도 아니고 모습도 아니며 체(體)도 아니고 용(用)도 아니고 조작도 없는 궤칙이며, 여섯째는 자연히 현전하여 상주불변(常住不變)하고 소전(所詮)이 없어서 궁극적으로 청정함이 충만한 궤칙이다. 이것이 여섯 가지이다.
037_0954_b_15L次當說顯示道路軌則門此門中則有六種云何爲六一者音臍言導無礙自在軌則二者所依本地平等一種離諸虛妄軌則三者生長莊嚴一一有力軌則四者究竟圓滿無餘盡攝軌則五者非名非相非體非用無造無作軌則六者自然現前常住不變無所詮了究竟淨滿軌是名爲六
037_0954_c_01L금강삼매의 장애 없는 해탈의 근본 지혜의 실제 성품의 수다라[金剛三昧無礙解脫本智實性修多羅] 중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다시 문수사리야, 만약 내가 자세히 말하면 모두 10억7만 3천50법문이 수행자가 지나가야 할 도로(道路)의 칙칙(則則)이고, 내가 간략히 말하면 모두 여섯 종류의 수행자가 지나가야 할 칙칙이 있다. 이와 같은 여섯 가지가 헤아릴 수 없고 가없는 궤칙의 장해(藏海)를 거두어들인다. 어떤 것이 여섯 가지인가? 첫째는 말하는 칙(則)이고, 둘째는 등(等)의 칙이며, 셋째는 종(種)의 칙이고, 넷째는 상(上)의 칙이며, 다섯째는 비(非)의 칙이고, 여섯째는 상(常)의 칙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037_0954_b_23L『金剛三昧無礙解脫本智實性修多羅』中作如是說復次文殊師利若我廣說摠有十億七萬三千五十法門行者履遊道路則則我略說摠有六種行者履遊則則是六則通攝一切無量無邊軌則藏云何爲六一者說則二者等則者種則四者上則五者非則六者常乃至廣說故
마치 게송에서 하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닌 모든 궤칙의 경지이기 때문인 것과 같다.
037_0954_c_08L如偈非一非一諸則
이것은 무슨 의미 때문인가? 모든 법장(法藏)을 이름하여 궤칙이라 한다. 이것은 세 가지 뜻이 있기 때문인데, 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금구(金區)의 의미이다. 때마다 사람은 쉽게 바뀌지만 법문의 인(印)은 항상하여 변하지 않으니, 저 구(區)와 같기 때문이다. 둘째는 인도하는 의미이다. 장차 수행하려는 사람을 거두어 다스리는 길로 나아가게 하니, 저 인도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셋째는 간직하는 의미이다. 자기의 모습을 잘 간직하여 잃어버리지 않으니, 마치 저 간직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것이 세 가지이다. 이와 같이 도로의 궤칙을 드러내 보이는 문을 설명하였다.
037_0954_c_09L以何義故一切法藏皆名軌則以三義故云何爲三一者金區義人易轉法門之印常恒不變如彼區二者引導義攝將行者令趣治路如彼導故三者能持義善持自相而不壞失如彼持故是名爲三如是已說顯示道路軌則門
037_0955_a_01L다음은 잡됨을 여의고 합일함을 드러내 보이는 문을 설명하겠다. 이 문에 세 종류가 있다. 어떤 것이 세 종류인가? 첫째는 결박하여 합일하는 것이다. 헤아릴 수 없고 가없는 무명의 번뇌를 가진 온갖 무리가 다시 생겨나는데, 비록 안에서는 합일하지 못하지만 바깥에서는 합일한다. 왜냐하면 수(數)와 양(量) 등이 성립하여 하나라는 의미에 계합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해탈하여 합일하는 것이다. 헤아릴 수 없고 가없는 삼승의 모든 성인(聖人) 등이 있는데, 이들이 안으로는 도리(道理)의 합일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바깥으로는 티끌과 함께 합일하는 의미가 있다. 셋째는 모두 아닌 것[俱非]을 구족해서 합일하는 것이다. 헤아릴 수 없고 가없는 금강의 중간인 대성인의 무리 등이 계합하는 주체와 계합되는 대상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이것을 세 가지라 한다.
037_0954_c_15L次當說顯示離雜合一門就此門中則有三種云何爲三一者結縛合一一切無量無邊無明煩惱之衆類再生雖無內合一而有外合一以數量等成立契一義二者解脫合一一切無量無邊三乘諸聖人等內有道理之合一義有同塵之合一義故三者具足俱非合一一切無量無邊金剛中間大聖衆等具足能契所契之二義故是名爲三
문수사리가 제일(第一)의 무극무진(無極無盡)을 논의하는 수다라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비록 승가의 무리는 바다 같아서 헤아릴 길이 없지만, 그 본체에는 단지 세 종류가 있다. 어떤 것이 세 종류인가? 첫째는 근(根)이 없고 싸움이 없는 경지이고, 둘째는 근과 함께 하면서 싸움 없는 경지이며, 셋째는 근을 두고서 싸움이 없는 경지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그러므로 게송에서 “헤아릴 수 없고 생각할 수 없는 무량(無量)한 하나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037_0955_a_02L『文殊師利論義第一無極無盡修多羅』中作如是說僧衆之海雖無有量而其本體但有三種云何爲三一者無根無諍地二者俱根無諍地三者有根無諍地乃至廣說故如偈不數不思無量一故
무슨 의미 때문에 모든 스님을 합일(合一)이라고 이름하는가? 두 가지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모으는 의미[集積義]이다. 헤아릴 수 없고 가없이 흩어진 티끌을 모으기 때문이다. 둘째는 한 가지라는 의미이다. 헤아릴 수 없고 가없이 파도치는 의식을 편안히 잠재우기 때문이다. 이것이 두 가지이다. 이와 같이 잡됨을 여의고 합일함을 드러내 보이는 문을 설명하였다.
037_0955_a_07L以何義故一切諸僧皆名合一有二義故云何爲二一者積集義集會無量無邊一切散亂塵故二者一種義安止無量無邊一切波浪識故是名爲二如是已說顯示離雜合一門
다음은 끝없이 중생을 드러내 보이는 문을 말하겠다. 이 문에 세 가지 문이 있다. 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 첫 번째는 유(有)인 종류의 중생의 가없는 문이고, 둘째는 공(空)인 종류의 중생의 가없는 문이며, 셋째는 사(似)인 종류의 중생의 가없는 문이다. 이것이 세 가지이다. 처음 문에 네 종류가 있다. 어떤 것이 네 종류인가? 첫째는 알에서 태어나는 것이고, 둘째는 태(胎)에서 태어나는 것이며, 셋째는 축축한 것에서 생겨나는 것이고, 넷째는 변화해서 생겨나는 것이다. 이것이 네 가지이다. 이와 같은 네 가지 생(生)으로 헤아릴 수 없는 유(有)인 종류의 근본 명수(根本名數)를 포섭할 수 있다.
037_0955_a_12L次當說顯示無邊毛生門就此門中則有三門云何爲一者有類毛生無邊門二者空類毛生無邊門三者似類毛生無邊門是名爲三就初門中則有四種云何爲四一者卵生二者胎生三者濕生四者化生是名爲四如是四生能攝一切無量有類根本名數
두 번째 문에 대해 살펴보면 세 종류가 있다. 어떤 것이 세 종류인가? 첫째는 광명 속에 갈무리된 공(空)의 종류이고, 둘째는 어두운 색 가운데 갈무리된 공(空)의 종류이며, 셋째는 바람과 구름 가운데 갈무리된 공(空)의 종류이다. 이것을 세 종류라 이름한다. 이와 같은 세 종류는 공(空) 때문에 공인 것이 아니고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공인 것이다. 그래서 마땅히 공(空)인 종류의 권속을 잘 관찰해야 한다. 그 권속의 숫자는 많지만 이 헤아림을 벗어나지 않는다.
037_0955_a_19L就中門中則有三種云何爲三一者光明中藏空類二者闇色中藏空類三者風雲中藏空類是名爲三如是三類空故非空以隱故空應審觀察空類眷屬其數衆多不出此量
037_0955_b_01L세 번째 문을 살펴보아도 세 종류가 있다. 어떤 것이 세 종류인가? 첫째는 허깨비같이 변화하는 주술로서 모습마다 이치가 없는 사(似)인 종류이고, 둘째는 변화하는 약과 방술과 금기로서 모습마다 이치가 없는 사(似)인 종류이며, 셋째는 근본을 따라 영상(影像)을 현전하는 사(似)인 종류이다. 이것을 세 종류라 이름한다. 이와 같은 세 종류가 모든 헤아릴 수 없고 가없는 갖가지 사(似)인 종류의 근본 명수(名數)를 포섭할 수 있다.
037_0955_b_01L就後門中亦有三種云何爲三一者幻化呪術相相無理似類二者變藥方禁相相無理似類三者隨本現前影像似類是名爲三如是三類能攝一切無量無邊種種似類根本名數
종류를 모으는 법문(法門)의 수다라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식(識)의 종류에는 자세히 말하면 열 가지가 있지만 간략히 말하면 세 가지가 있다. 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심식(心識)이 친하고 가깝게 존재하는 중생이고, 둘째는 장소에 감추어져 있어서 심식이 드러나지 않는 중생이며, 셋째는 심식이 멀어서 움직이고 구르는 듯한 중생이다. 이것을 세 가지라 이름한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
게송에서 “아울러 여러 가지 세계의 중생들 종류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037_0955_b_06L『集類法門修多羅』中作如是說有識種類廣說有十略說有三云何爲三一者心識親近在有衆生二者處所隱藏不見衆生三者識遠似有動轉衆生是名爲三乃至廣說故如偈幷諸種種趣生類
무슨 의미로 모든 중생을 털이 난 것[毛生]이라 이름하는가? 두 가지 뜻이 있기 때문이다. 두 가지는 어떤 것인가? 첫째는 움직여 구르는데[動轉] 결정된 뜻이 없는 것이니, 육취에 따라 생을 받는 것에는 결정된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는 매우 많아서 헤아릴 수 없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방(方)과 각(角)에는 숫자와 양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두 가지라 이름한다. 지금 이 문에서는 성인은 각(角)과 같이 드물고,범부는 털과 같이 많은 것을 나타내 보이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끝없이 중생의 문을 드러내 보이는 것을 설명하였다.
037_0955_b_12L以何義故一切衆生皆名毛生二義故云何爲二一者動轉不定義隨趣受生無有定法故二者衆多無數義方角無有數量故是名爲二此門中爲欲現示聖如角尟凡如毛多故如是已說顯示無邊毛生門
037_0955_c_01L다음은 여러 가지 식(識)을 여읨을 드러내 보이는 문을 설명하겠다. 이 문에 두 종류가 있다.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공업(共業:공통된 업)으로 이루어진 목숨을 끊은 품(品)이고, 둘째는 별업(別業)으로 이루어진 목숨을 끊은 품이다. 이것을 두 가지라 한다. 첫 번째 문에 네 종류가 있다. 첫째는 풍륜(風輪)의 대지(大地)로 목숨을 끊은 품이고, 둘째는 수륜(水輪)의 대지로 목숨을 끊은 품이며, 셋째는 금륜(金輪)의 대지로 목숨을 끊은 품이고, 넷째는 화륜(火輪)의 대지로 목숨을 끊은 품이다. 이것을 네 가지라고 한다. 이와 같은 네 가지 윤(輪)이 일체의 헤아릴 수 없고 가없는 공업으로 이루어진 목숨을 끊은 품의 근본명수(根本名數)를 다 거두어들인다.
037_0955_b_17L當說現示種種離識門就此門中則有二種云何爲二一者共業建立斷命品二者別業建立斷命品是名爲就第一門中則有四種云何爲四一者風輪大地斷命品二者水輪大地斷命品三者金輪大地斷命品者火輪大地斷命品是名爲四如是四輪能攝一切無量無邊共業建立斷命品類根本名數
별업으로 이루어진 목숨을 끊는 품이라고 하는 것은 중생의 몸에서 비집수(非執受)에 포함되는 머리털과 털 등의 종류이다. 업행본인(業行本因) 수다라 중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다시 문수사리여, 중생이 세간에 거주한다고 하는 것에는 두 종류가 있다. 어떤 것이 두 종류인가? 첫째는 총륜(摠輪:네 가지 윤을 총괄)세간이고, 둘째 별지(別持:따로 그 개성을 지킴)세간이다. 이것을 두 가지 세간이라 이름한다. 이 두 가지 세간은 헤아릴 수 없고 가없는 일체의 거주하고 의지하는 세간을 능히 잘 거두어들인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마치 게송에서 “헤아릴 수 없는 숫자의 목숨을 끊은 품이다”고 말하고 있는 것과 같다.
037_0955_c_03L言別業建立斷命品者謂衆生身非執受攝髮毛等『業行本因修多羅』中作如是說次文殊師利言衆生居住世閒者有二種云何爲二一者摠輪世間者別持世間是名爲二此二世間能攝持無量無邊一切居住依止世乃至廣說故如偈及無量數斷命
이것은 어떤 의미인가? 일체의 식(識)을 여읨을 목숨을 끊음이라 이름하나니, 소위 요별(了別)하는 지혜의 성품이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갖가지 식을 여읜 것을 나타내 보이는 문을 설명하였다.
037_0955_c_11L以何義故一切離識皆名斷命所謂無有了別智品故如是已說現示種種離識門
다음은 가유(假有)로서 실질이 없음을 드러내 보이는 문을 설명하겠다. 이 문에 다섯 종류가 있다. 어떤 것이 다섯 종류인가? 첫째는 물 속에 비친 달과 같은 가유(假有)이고, 둘째는 건달바성과 같은 가유이며, 셋째는 신기루의 물과 같은 가유이고, 넷째는 허깨비같이 변화하여 지어낸 가유이며, 다섯째는 계곡의 메아리 소리와 같은 가유이다. 이것을 다섯 종류라고 이름한다.
037_0955_c_13L次當說現示假有無實門就此門中則有五種云何爲五一者如水中月假有二者如闥婆城假有三者如陽炎水假有四者如幻化作假有五者如谷響音假有是名爲五
대보무진련화지지(大寶無盡蓮花地地) 수다라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물속에 비친 달과 같다는 다섯 종류 허설(虛說)의 비유는 5만 5천5백50의 언전(言詮)인 허설의 비유와 근본 이름을 모두 포함한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그러므로 게송에서 “더불어 평등해서 티끌 티끌마다 법(法)이 있지 않고”라고 말한 것과 같다.
037_0955_c_18L『大寶無盡蓮花地地修多羅』中作如是說如水中月等五種虛說譬摠攝五萬五千五百五十詮虛說譬喩根本名字乃至廣說故如偈等塵塵無有法
037_0956_a_01L이것은 무슨 의미 때문인가? 일체의 헤아릴 수 없는 허설의 비유는 다 있지 않다고 이름하기 때문이다. 소위 실제의 자성이 없기 때문에 없다고 이름하고, 실제가 없지만 도무지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있다고 이름한다. 이와 같이 가유(假有)로서 실제가 없음을 나타내 보이는 문을 설명하였다.
037_0955_c_22L以何義故一切無量虛說譬喩皆名無有所謂無有實自性故名曰爲無無有其實非都無名曰爲有如是已說現示假有無實門
다음은 일이 있는 바가 없음[無所有]을 드러내 보이는 문을 말하겠다. 이 문에 네 종류가 있다. 어떤 것이 네 종류인가? 첫째는 석녀(石女)와 같이 일이 있는 바가 없는 것이고, 둘째는 토끼와 말의 뿔처럼 일이 있는 바가 없는 것이며, 셋째는 거북이 털과 같이 일이 있는 바가 없는 것이고, 넷째는 아라한의 번뇌와 같이 일이 있는 바가 없는 것이다. 이것을 네 종류라 이름한다.
037_0956_a_03L次當說現示無所有事門就此門中則有四種云何爲四一者如石女兒無所有事二者如兔馬角無所有事三者如龜䠓毛無所有事四者如羅漢染無所有事是名爲四
본지(本地)의 수다라 중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다시 불자여, 그대가 앞에서 어떤 법이 존재하지 않는 품인가 물었는데, 석녀의 자식과 같은 네 종류 근본의 가르침이 있지만, 내가 자세히 말한다면, 그 숫자는 헤아릴 수 없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마치 게송에서 “겸하여 말할 수 없는 무소유(無所有)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037_0956_a_07L『本地修多羅』中作如是說復次佛子汝前所問何等法名爲無所有品者石女兒等四種本說我若廣說其數無量乃至廣說故如偈兼不可說無所有
이것은 어떤 의미 때문인가? 모든 공(空)의 법은 다 명자(名字)라서 있는 바의 일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두 종류가 있는데,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저 공한 법의 체성(體性)은 공(空)하고 공하니 이 네 가지 근본 교설과 같기 때문이다. 둘째, 이 공이 저것을 다 언전(言詮)하지 못한다면, 이것도 공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두 종류라고 이름한다. 이와 같이 있는 바의 일이 없음을 나타내 보이는 문을 설명하였다.
037_0956_a_12L以何義故一切空法皆悉名爲無所有事有二種故云何爲二一者彼空法體性空空如此四本說故二者此空若不詮彼則是空故是名爲二如是已說現示無所有事門
다음은 구족하여 장애 없음을 드러내 보이는 문을 설명하겠다. 이 문에 열 종류가 있다. 첫째는 심주법(心主法)이고, 둘째는 심념법(心念法)이며, 셋째는 색주법(色主法)이고, 넷째는 색자법(色子法)이며, 다섯째는 비계응법(非契應法)이고, 여섯째는 무위법(無爲法)이며, 일곱째는 유위도 아니고 무위도 아닌 법이고, 여덟째는 유위이기도 하고 무위이기도 한 법이며, 아홉째는 구구법(俱俱法)이고, 열째는 모두 아닌 법이다. 이것을 열 종류라 이름한다.
037_0956_a_16L次當說現示具足無礙門就此門中則有十云何爲十一者心主法二者心念三者色主法四者色子法五者非契應法六者無爲法七者非有爲非無爲法八者亦有爲亦無爲法九者俱俱法十者俱非法是名爲十
037_0956_b_01L심주법은 팔식 등의 모든 심식을 하나로 만들 수 있는 근본적인 법이기 때문이다. 심념법은 이것과 상응하는 모든 수의 법이다. 색주법은 하나로 능히 창조할 수 있는 대종법(大種法) 등이다. 색자법은 하나로 창조될 수 있는 갖가지 색법이다. 비계응법은 하나가 색도 아니고 마음도 아닌 여러 종류의 법일 수 있는 것이다. 무위법은 허공 등의 네 종류의 무위법이고, 유위도 아니고 무위도 아닌 법은 일심 등 모든 본성의 법이고, 유위이기도 하고 무위이기도 한 법은 일심 등 모든 본성의 법이 지은 업의 용상(用相)이며, 구구법은 큰 근본의 법에서 그 첫 번째 부분이고, 모두 아닌 법이란 큰 근본의 법에서 최후의 부분이다.
037_0956_a_22L言心主法者可一八識等諸心識本法故言心念法者與此相應一切數法色主法者可一能造大種法等言色子法者可一所造種種色法言非契應法者可一非色非心種種諸法無爲法者虛空等四種無爲法言非有爲非無爲法者一心等諸本性法言亦有爲亦無爲法者一心等諸本性之法作業用相言俱俱法者大本之法其第一分言俱非法者大本之法其最後分
이와 같은 열 가지 법이 지금 이 문에서 한 쪽은 있고 다른 한 쪽은 없으며, 한 쪽은 생기고 다른 한 쪽은 없어지며, 한 쪽은 역(逆)이고 다른 한 쪽은 순(順)이며, 한 쪽은 품(品)이고 다른 한 쪽은 유(類)이어서 서로 버려서 여의지 않는다. 그러므로 구족하여 장애가 없음을 드러내 보이는 문을 말한 것이다.
037_0956_b_10L如是十法今此門中有一無一生一滅一逆一順一品一類不相捨離是故說言現示具足無礙門焉
최후덕왕광대허공(最後德王廣大虛空) 수다라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불가설(不可說), 불가설, 불가설인 시방세계 미진(微塵)의 수효는 헤아릴 수 없고 가없는 법문의 큰 바다이다. 한 번 거처하기도 하고 한 번 일어서기도 하며, 한 번 머물기도 하고 한 번 그치기도 하는데, 끝내 나눌 수 없고 또한 버릴 수도 없다. 이러한 의미 때문에 건립하여 말하기를 ‘광대하고 원만함이 허공과 같아서 지지(地地)가 다함이 없고 끝없는 법계의 큰 바다의 문’이라고 하였다.(나머지는 생략한다)”
마치 게송에서 “이런 것들이 아닌 모든 법을 통틀어 갖추었다”고 말한 것과 같다.
037_0956_b_13L『最勝德王廣大虛空修多羅』中作如是說不可說不可說不可說十方世界微塵之數無量無邊法門大海一居一起一住一止終不分剖亦不捨離以此義故建立稱曰廣大圓滿虛空地地無盡無極法界大海乃至廣說故如偈通俱非是等諸法故

2. 귀의덕처인연(歸依德處因緣) 대결택분
歸依德處因緣大決擇分第二

이와 같이 덕처(德處)에 귀의함이 가없는 대결택분을 설명하였다. 다음은 덕처에 귀의하는 인연의 대결택분을 설명하겠다. 그 내용은 어떠한가? 게송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037_0956_b_20L如是已說歸依德處無邊大決擇分次當說歸依德處因緣大決擇分相云何偈曰
037_0956_c_01L열 가지 큰 인연이 있으니
귀의하는 덕처의 바다를 만들어 내는구나.
이른바 예경과 은혜와 가하는 힘[加力],
광대함과 수승함과 무아,
결정과 큰 바다와, 교화를 돕는 것,
겸하여 자기의 본래 몸을 통틀어 나타내 보이는 것,
037_0956_c_01L以有十種大因緣
造作歸依德處海
所謂禮恩及加力
廣大殊勝與無我
決定大海幷贊化
兼通現示自本身
이와 같은 열 가지의 큰 인연은
원만한 대사(大士)라야 갖출 수 있다.
범부의 경계가 아니며 성인이라도 헤아릴 수 없으며
수분(隨分:隨分覺)의 보살도 할 수 없느니라.
037_0956_c_04L如是十種大因緣
圓滿大士乃能具
凡非境聖亦非量
隨分菩薩亦不能
【論】 무슨 인연 때문에 덕처에 귀의하는가? 열 종류의 큰 인연이 있기 때문에 귀의한다. 예컨대 게송에서 “열 가지 큰 인연으로 귀의하는 덕처의 바다를 만들어낸다”고 말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열 종류의 인연이라고 하는가?
037_0956_c_06L論曰何因緣故歸依德處以有十種大因緣故而作歸依如偈以有十種大因緣造作歸依德處海云何名爲十種因緣
첫째는 예경하고 존중하는 것의 깊고 깊은 인연이다. 덕처에 예경하고 귀의할 수 있으며, 교만한 마음을 눌러 선근을 늘리는 것이다. 예컨대 게송에서 “예(禮)”라고 말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
037_0956_c_10L一者禮敬尊重甚深因能作禮敬歸依德處摧伏憍慢長善根故如偈
둘째는 은혜와 혜택을 생각해서 그 과보를 널리 전하고자 하는 인연이다. 가장 묘한 논과 가르침을 만들어서 모든 미쳐 날뛰는 중생을 일깨워 준다. 일체의 덕처가 모두 다 환희이기 때문이고, 게송에서 “은혜”라고 말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
037_0956_c_12L二者憶念恩澤報推因緣而能造作勝妙論教開曉一切狂亂衆生一切德處皆悉歡喜如偈
셋째는 가하는 힘을 우러러 청해서 인연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만약 큰 논의 법문을 짓는다면 저 모든 덕처에서 힘을 가하지 않으니, 법문의 바다를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게송에서 “가하는 힘”이라고 말한 것과 같다.
037_0956_c_15L三者仰請加力成爲因若爲造作大論法門彼諸德處不其加力不能分別法門海故如偈加力
넷째는 가르침을 전하는 것이 널리 퍼져서 중생들을 깨닫게 하는 인연이다. 묘한 말로 총명한 가르침을 보임으로서 저 모든 수다라의 비밀스럽고 미묘하며 깊은 글의 뜻의 큰 바다를 그 자리에서 깨닫게 하니, 가르침을 넓고 크게 하기 위한 것이다. 게송에서 “넓고 크다”고 말한 것과 같다.
037_0956_c_18L四者開布廣散令了因緣妙言辭示聰明詮現了彼諸修多羅中秘密微妙深遠文義大海爲令廣大故如偈廣大
다섯째는 중생에게 권하여 뛰어나다는 생각을 내게 하는 인연이다. 논과 가르침을 지어서 글의 뜻을 열어 보이는 것이다. 만약 저 모든 중생들을 귀의시키지 못하면, 끝내 믿고 받아들이고 받들어 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송에서 “뛰어나다”고 말한 것과 같다.
037_0956_c_21L五者勸物令生殊勝因緣造作論教開示文義若不歸依彼諸衆生不能究竟信受奉行故如偈殊勝
037_0957_a_01L여섯째는 인욕과 무아(無我)를 닦아 익히는 인연이다. 마음을 일으켜 기뻐하고 존중하며 귀의하고 향하는 넓고 큰 마음 때문이다. 게송에서 “무아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037_0957_a_01L六者修習忍辱無我因發起歡喜尊重歸向廣大心故與無我
일곱째는 공덕을 낳는 것이 결정된 인연이다. 귀의하는 덕처에서 논의 가르침을 지으니, 보거나, 듣거나, 보는 자를 보거나, 듣는 자를 듣거나, 같은 나라에 머물거나 간에 일체가 시간에 따라 이동하지 않으며, 헤아릴 수 없고 끝없는 모든 공덕의 선근의 성품을 낳아서 기른다. 결정하는 데에 어긋나지 않기 때문이며, 게송에서 “결정”이라고 말한 것과 같다.
037_0957_a_03L七者出生功德決定因歸依德處造作論教若見若聞見見者若聞聞者若同國住一切皆悉隨時不移出生增長無量無邊一切功德善根之品決定決定不謬違如偈決定
여덟째는 큰 바다의 다함없는 보배 창고의 인연이다. 헤아릴 수 없고 가없는 일체의 갖가지 힘을 쌓아두어서 뛰어나고 원만한 큰 바다의 여의보륜금강덕장(如意寶輪金剛德藏)을 짓는 것은 헤아릴 수 없고 가없이 가난하고 고통스러우며 괴로운 중생의 부류를 구제하여 해탈시키고자 함이다. 게송에 “큰 바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037_0957_a_08L八者大海無盡寶藏因緣積集無量無邊一切諸種種力造作殊勝圓滿大海如意寶輪金剛德藏爲欲救度無量無邊貧窮苦惱衆生類故如偈大海
아홉째는 방편의 선교(善巧)로 교화하는 인연이다. 구족한 사람에겐 비록 따로 귀의함이 없지만, 교화를 도와서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한 까닭이다. 게송에서 “교화를 돕는다”고 말한 것과 같다.
037_0957_a_12L九者方便善巧教化因緣具足者中雖無別歸贊教化爲利生故如偈幷贊化
열 번째는 과거의 본래 몸을 나타내 보이는 인연이다. 귀의하는 덕처에서는 모든 것이 자신이 거두어 지니지 않음이 없기 때문이다. 게송에서 “자신의 본래의 몸을 통틀어 나타내 보인다”고 말한 것과 같다. 이것을 열 가지의 큰 인연의 모습이라고 이름한다.
037_0957_a_14L者現示過去本身因緣所歸德處一切皆悉無非自身之攝持故如偈兼通現示自本身是名十種大因緣
이와 같이 넓고 크고 뛰어난 인연을 어떤 사람이 만들 수 있겠는가? 불보살(佛菩薩)이 짓는 것이니, 보살의 보살들도 지을 수 없는 것인데 하물며 범부와 이승이 지을 수 있겠는가? 게송에서 “이와 같은 열 가지의 큰 인연은 원만한 대사(大士)라야 구족할 수 있으니 범부의 경계도 아니고, 성인도 헤아릴 수 없으며, 수분보살도 할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다.
037_0957_a_18L如是廣大殊勝因緣何人所作菩薩作菩薩菩薩當不能作況凡二如偈如是十種大因緣圓滿大士乃能具凡非境聖亦非量隨分菩薩亦不能
大宗池玄文本論卷第一
自秋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