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039_0969_c_01L법원주림 제65권
039_0969_c_01L法苑珠林卷第六十五


서명사 사문 석도세 지음
송성수 번역
039_0969_c_02L 西明寺沙門釋 道世 撰


75. 방생편(放生篇)[여기에는 2부가 있다.]
039_0969_c_04L放生篇第七十五
救戹篇第七十六
放生篇此有二部
039_0970_a_02L
술의부(述意部) 인증부(引證部)

(1) 술의부(述意部)
평범한 잡된 무리도 모두 삶을 탐하고 미련하여 미혹된 무리도 다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러므로 숲을 잃은 곤궁한 호랑이는 목숨을 여막 안에 맡기고, 깃을 잘린 놀란 새는 몸을 책상 곁에 던진다. 심지어 양생(楊生)이 새를 기를 때 어찌 옥환(玉環)에 뜻이 있었겠으며, 공씨(孔氏)가 거북을 놓을 때 본래는 금인(金印)에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비한 기약이 어그러지지 않아 그런 과보가 이르렀던 것이니, 그러므로 인과의 업행은 화하여 해[日]와 같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또 큰 자비의 교화는 괴로움의 구제를 처음으로 삼고 큰 서원의 마음은 중생 제도를 근본으로 삼는 것이다. 다만 5부(部)의 유명한 종족이 다 솥을 벌여 놓음으로써 서로 사랑하고, 3시(市)의 뛰어난 사람이 모두 칼을 두드림으로써 의무를 다했을 뿐이다. 중생이 무슨 죄가 있기에 억울하게 잔혹한 벌을 당하고, 함식(合識)은 허물이 없으면서 함부로 절이고 삶음을 당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원한의 영혼이 끊이지 않고 고통의 과보가 서로 갚게 하는 것이다.
지금 그대들에게 권하노니, 다 함께 자비의 행을 닦아 두려워하는 것들을 다 살도록 놓아주어 비록 저 날짐승과 물고기라도 마음대로 마시고 쪼게 하고, 자색 비늘과 붉은 꼬리들로 하여금 다 강호(江湖)를 잊게 하며, 비단 가슴과 푸른 깃 등을 하늘에 소요하게 해야 한다. 혹 3귀(歸)를 듣고 도를 깨치면 눈먼 용과 무엇이 다르며, 4제(諦)를 듣고 천상에 나면 다시 앵무새와 같을 것이니, 다 함께 오래 사는 기초를 놓고 모두 항상 사는 과보를 부르게 하라.

(2) 인증부(引證部)
『범망경(梵網經)』에서 말하였다.
“만일 불자가 자비심으로 방생하면, 모든 남자는 다 내 아버지요, 모든 여자는 다 내 어머니이다. 나의 생(生)이란 근본이 없는 생이 없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6도(道)의 중생은 다 내 부모이다. 그런데 그것을 죽여 먹으면 그것은 내 부모를 죽이는 것이요, 또 내 옛 몸을 죽이는 것이다. 일체의 땅과 물은 다 내 전생의 몸이요, 일체의 불과 바람은 다 내 본래의 몸이다. 그러므로 항상 생(生)마다 생을 받는 방생을 행하라.
세상 사람이 축생 죽이는 것을 보거든 부디 방편으로 구제하여 그 고난을 풀어 주고 항상 교화하며 보살계를 강설하여 중생을 구제하라. 부모나 형제가 죽는 날에는 법사를 청해 보살계와 경률을 강설하여 그 명복을 빌어 줌으로써 그로 하여금 모든 부처님을 만나 보고 인간이나 천상에 나게 하라.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경구죄(輕垢罪)를 범하느니라.”
또 『승기율』에서 말하였다.
“일체 도인과 속인의 7중(衆)들은 다 물을 걸러서 마시고 써야 한다. 만일 걸러서 얻은 물이면 손바닥의 가는 무늬를 보듯 자세히 살펴보라. 살펴볼 때는 큰 코끼리가 대를 실은 수레를 돌리는 그 동안에 쓸데없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면 물을 거르게 하고, 믿을 수 없는 사람이면 내가 걸러 벌레를 잡아 본래 물을 가져온 곳에 갖다 두라. 만일 물을 가져온 곳이 멀거나 가깝거나 거기 있는 못이나 우물이 7일 동안 마르지 않는 것이면 그 벌레를 거기에 넣어 주라. 만일 그 물벌레가 있는 줄을 알면 그릇이나 노끈을 남에게 빌려 주지 말고 못이나 강물에 벌레가 있으면 큰 소리로 외쳐라.
‘이 물에는 벌레가 있다.’
만일 누가 그 까닭을 물으면 이렇게 대답하라.
‘장자여, 직접 이 물을 보시오.’
만일 그가 친우이거나 스승 같은 사람이거든 이렇게 말하라.
‘여기는 벌레가 있으니 물을 걸러서 써야 한다.’”
또 『십송률』에서 말하였다.
“어떤 두 비구는 일찍이 부처님을 뵈온 적이 없으므로 먼 북쪽에서 부처님을 뵈오려 왕사성으로 떠났다. 도중에서 목이 말랐으나 벌레가 있는 물을 만났다. 계율을 깨뜨리는 사람은 말하였다.
‘우리 같이 이 물을 먹자.’
계율을 지키는 사람은 말하였다.
‘벌레가 있는데 어떻게 먹겠는가?’
계율을 깨뜨리는 사람은 말하였다.
‘내가 만일 먹지 않으면 반드시 죽을 것이니 그러면 부처님을 뵐 수 없다.’
그는 그 물을 먹고 떠났다. 그러나 계율을 지키는 사람은 계율을 지키기 위해 물을 마시지 않고 드디어는 목이 말라 죽었다. 그러나 그는 죽자 곧 삼십삼천에 나서 원만한 몸으로 먼저 부처님께 가서 그 발에 예배하고 부처님은 그를 위해 설법하셨다. 그는 법눈이 깨끗해져 3귀계를 받은 뒤에 천상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물을 마신 사람은 뒤에 와서 부처님을 뵈었다. 부처님께서는 4중(衆)에게 설법하신 뒤에 옷을 헤쳐 그 금색의 몸을 이 비구에게 보이시면서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너는 내 육신을 보고자 하지만 그것이 어찌 계율을 지니는 것만 하겠는가. 먼저 내 법의 몸과 지혜의 몸을 보아라.’
이어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지금부터 20리 밖을 나가는 비구로서 물을 거르는 주머니를 가지지 않으면 죄를 범하는 것이요, 자기는 없더라도 동행하는 이에게 그것이 있으면 여행을 허락한다.’
또 출정(出征) 나가는 군인과 교화하러 다니는 어떤 비구니가 있었다. 군인들은 다 활을 물 거르는 주머니 안에 두고 그것으로 물을 걸렀다. 어떤 관리가 이 사실을 왕에게 알리자 왕은 크게 화를 내어 그들을 죽이려고 하면서 말하였다.
‘너희들은 조그만 벌레를 보고도 겁을 내어 죽이지 못하거늘 어찌 적을 죽이려 하겠는가?’
군인들은 변명하는 글을 왕에게 올렸다.
‘만일 벌레들이 나라에 해를 끼친다면 우리는 그것을 다 죽이겠습니다. 그러나 아무 원한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걸러 마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까?’
왕은 이 말을 듣고 다 놓아주었다. 이 수행하는 사람의 자비의 선근으로 말미암아 도적은 다 와서 투항하였다.”
또 『정법념처경』에서 말하였다.
“하룻밤을 지낸 물을 자세히 보지 않으면 조그만 벌레들이 생겼을까 염려되므로 거르지 않았거든 마시거나 쓰지 말라. 이것을 세지불살계(細持不殺戒)라 하느니라.”
또 『지도론』에서 말하였다.
“지난 옛날 세상에 백성들이 병이 많아 누렇고 하얗게 여위었다. 보살은 그 때 붉은 고기가 되어 그 살을 병자들에게 보시하여 그 병을 고쳐 주었다.
또 옛날 보살은 새가 되어 숲 속에서 살았다. 어떤 사람이 깊은 물에 들어갔다가 사람이 다니지 않는 거기서 물귀신의 덫에 걸려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보살은 향산(香山)에 가서 약초(藥草)를 캐어 와서 그 덫에 붙여 덫의 노끈이 모두 삭아 사람은 거기서 벗어났다. 보살은 전생에 이런 일이 무량하여 구제를 많이 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본생경(本生經)이라 한다.”
또 『십송률』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옛날 설산(雪山) 밑의 위덕(威德)이라는 사슴 왕은 5백 마리 사슴의 왕이 되었다. 그 때 사냥꾼은 곡식과 덫을 놓았다. 사슴 왕은 앞서 가다가 오른 다리가 덫에 걸렸다. 사슴 왕은 생각하였다.
≺만일 내가 지금 이 모양을 보이면 어느 사슴도 감히 곡식을 먹지 않을 것이니, 이 곡식을 다 먹어 버려야겠다.≻
사슴 왕은 그 다친 다리의 모양을 보였다. 그 때 다른 사슴은 다 가고 오직 암사슴 한 마리만이 있어 다음 게송으로 말하였다.

대왕은 아십시오
저기 사냥꾼이 옵니다.
부지런히 방편을 써서
그 덫에서 벗어나시오.

그리고 암사슴은 사냥꾼을 보고 다음 게송으로 말하였다.

당신은 예리한 칼로
나를 먼저 죽이시오.
그리고 원하노니
저 사슴 왕을 놓아주시오.

사냥꾼은 이 말을 듣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생겨 다음 게송으로 답하였다.

나는 너를 죽이지 않으리.
또 저 사슴 왕도 죽이지 않고
너와 사슴 왕을 놓아주리니
어디로든지 마음대로 가라.

사냥꾼은 곧 사슴 왕을 놓아주었다.’
부처님께서는 이어 말씀하셨다.
‘그 때의 그 사슴 왕은 바로 지금의 이 나요, 그 때의 그 5백 사슴은 바로 지금이 이 5백 비구이니라.’
그리고 그 때 기러기 왕이 있었는데 사냥꾼이 그것을 잡았다. 함께 있던 기러기가 기러기 왕을 대신해 제 목숨을 버리려 하여 게송으로 말하였다. 사냥꾼은 가엾이 여겨 그 두 마리를 다 놓아주었다. 기러기는 그 뒤에 보배를 구해 그 은혜를 갚았으니, 그 대의(大意)는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또 『지도론』에서 말하였다.
“왕은 사슴의 말을 듣고 곧 자리에서 일어나 다음 게송으로 말하였다.

나는 진실로 짐승일 뿐이니
이름은 사람 머리 사슴이다.
너는 비록 사슴의 몸이나
이름은 사슴 머리 사람이구나.

이치로 따져 말한다면
형상만으로 사람이라 할 수 없다.
만일 자비심만 가졌다면
비록 짐승이나 실은 사람이다.

나는 지금부터
고기는 일체 먹지 않으리.
나는 무외(無畏)의 보시로
너의 마음을 편하게 하리.”

또 『선견율』에서 말하였다.
“목건련은 아육왕을 위해 본생경(本生經)을 연설했다.
‘대왕님, 옛날 자고새 한 마리가 조롱(鳥籠)에 갇혀 시름하면서 크게 울 때에 그 동류들이 몰려와 사람에게 잡혀 죽었습니다. 자고새는 도인에게 물었습니다.
≺내게 무슨 죄가 있습니까?≻
도인은 대답하였습니다.
≺네가 울 때에 그들을 죽일 마음이 있었느냐?≻
자고새가 말하였습니다.
≺내가 울 때 친구들이 모여 온 것이요, 나는 죽일 마음이 없었습니다.≻
도인은 말하였습니다.
≺죽일 마음이 없었으면 네게는 죄가 없다.≻
그리고 다음 게송으로 말했습니다.

업이 같다고 해서 부딪치는 것이 아니요
마음이 같다고 해서 일어나는 것 아니다.
선(善)한 사람은 마음을 잘 거두어 머무나니
죄가 함부로 네게 오는 것이 아니니라.’”

또 『승기율』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옛날 향산(香山)에 선인들이 사는 곳이 있었고, 그 산에서 멀지 않은 곳에 못이 있었다. 한번은 자라 한 마리가 그 못에서 나와 먹이를 먹고 햇볕을 받으며 입을 벌리고 자고 있었다. 그 때 향산의 원숭이들이 못의 물을 먹으려고 언덕에 올라왔다가 이 자라가 입을 벌리고 자는 것을 보았다. 그 때 원숭이는 음심(婬心)이 동해 그 신생(身生)을 자라 입 안에 넣었다. 자라는 놀라 깨어나면서 입을 닫아 그것을 육갑(六甲) 속에 감추었다. 그래서 이런 게송이 있다.

어리석은 사람은 상(相)에 집착하나니
그것은 마치 자라한테 물린 것 같다.
지조 잃으면 마라(魔羅)에게 붙들려
도끼를 쓰지 않으면 떨어지지 않는다.

그 때 자라는 급히 원숭이를 붙잡고 물 속으로 들어가려 했다. 원숭이는 황급하여 생각했다.
≺만일 물에 들어가면 나는 반드시 죽는다.≻
그러나 원숭이는 아프고 힘이 빠져 자라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물에 떠서 이리저리 돌고 끌려 어떤 험한 곳에 이르러 자라는 벗듯이 누웠다. 원숭이는 두 손으로 자라를 안고 생각했다.
≺누가 나를 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줄까?≻
원숭이는 일찍부터 저 선인이 사는 곳을 알기 때문에 말하였다.
≺저이가 나를 구해 주리라.≻
원숭이는 자라를 안은 채 그리로 갔다. 선인은 멀리서 이들을 보고 생각했다.
≺아아, 이상하다. 저 원숭이는 무엇 때문에 장난을 하는가?≻
원숭이는 일부러 선인에게 말했다.
≺바라문 선인님, 어떤 보물을 발우에 가득 담아 오십니까? 무엇을 믿고 내게 오십니까?≻
그리고 원숭이는 다음 게송으로 말하였다.

나는 어리석은 원숭이
죄 없는 남을 괴롭혔다.
재액을 구제하실 현사(賢士)님이여,
내 목숨은 오래지 않다.

바라문님, 만일에 오늘
나를 구해 주지 않으신다면
잠깐 동안에 이 신생(身生)이 끊겨
곤액(困厄) 그대로 산으로 돌아가리.

그 때 선인은 게송으로 답하였다.

나는 너로 하여금 그것 벗어
저 산 속으로 돌아가게 하겠지만
염려스럽다, 너희 원숭이 성질
또 그런 짓을 다시 할까를.

그 때 선인은 저들을 위해 그 전생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자라야, 너는 전생에
그 이름을 가섭이라 했고
원숭이야, 너는 전생에
그 이름을 교진여라 했었다.

과거에도 그런 음욕을 행했거니
이제는 그런 버릇 버려야 한다.
그리하여 가섭은 교진여를 놓아
저 산림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자라는 이 말을 듣고 곧 원숭이를 놓아주었느니라.’
게송으로 말하였다.

친한 이 모두 내 권속인데
세대가 달라 서로 속이지만
다만 현재의 즐거움만 구하고
오는 고통의 근본임을 모른다.

나를 끌고 3도(塗)에 들어가
갖가지 고통을 받게 하거늘
스스로의 자비로 놓아주지 않으면
어떻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으리.”

감응연(感應緣)[한 가지 증험만 인용한다.]
당(唐)나라 위군(魏郡)의 마가운(馬嘉運)
당(唐)나라 위군(魏郡)의 마가운(馬嘉運)은 정관(貞觀) 6년(632) 정월에 집에 있다가 날이 저물어 대문을 나갔다. 갑자기 어떤 두 사람이 각각 말 한 마리씩을 붙들고 문 밖 나무 밑에 서 있는 것을 보고 가운은 물었다.
“당신네는 누구십니까?”
그들은 대답했다.
“동해공(東海公)이 우리를 보내어 마생(馬生)을 맞이하러 왔습니다.”
가운은 평소에 학식이 있어 그 이름이 온 고을에 다 퍼졌으므로 항상 대사(臺史)와 사방의 귀인들이 그를 청했다. 그런 줄 알기 때문에 괴이히 여기지 않고, 그 사자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말이 없습니다.”
저들은 말하였다.
“말을 준비해 왔습니다. 이것으로 마생을 모시겠습니다.”
가운은 나무 밑에서 말에 올랐으나 가운의 몸은 나무 밑에 거꾸로 누워 있었다. 조금 있다가 어떤 관리가 가운을 데리고 대문 안으로 들어가는데, 남녀 수십 인이 문 밖에서 무엇을 하소연하는 듯했다. 어떤 부인이 있었다. 그녀는 이전부터 가운과 아는 사이로서, 그 고을의 장공근(張公瑾)의 첩이었다. 그녀의 성은 원(元)씨로서 손에 한 장의 문서를 들고 가운에게 말하였다.
“마생은 아직도 나를 아시겠습니까? 옛날 장총관(張總管)과 노실 때에 늘 자주 뵈었습니다. 총관은 무례하게도 이유 없이 나를 죽였으므로 나는 천조(天曹)에 호소한 지 3년이온데 왕천주(王天主)가 되어 공근을 구호하여 지금 항상 보고 있습니다. 지금에야 원한을 풀었으나 관리가 지금 오래지 않아 쫓아올 것입니다. 나는 혼자 억울하게 당했습니다만 마생은 왜 여기 오셨습니까?”
가운은 전에 원씨가 피살된 줄을 알았으나 지금 보고 비로소 죽은 것을 확실히 알았다. 사자가 데리고 대문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문지기가 말하였다.
“동해공이 지금 주무시므로 뵈올 수 없습니다. 저 곽형사(霍刑司)에게로 가시오.”
가운이 형사를 만났는데, 그는 곧 익주(益州)의 행대랑(行臺郞) 중의 곽장(霍璋)이었다. 그는 가운을 보자 맞이해 자리에 앉히고는 말하였다.
“이 부(府)의 기실관(記室官)이 지금 공석이어서 동해공이 그대의 재학(才學)을 듣고 그 자리에 앉히려는 것입니다.”
가운은 사양하면서 말하였다.
“처자를 거느리고 가난하게 살 뿐이요, 벼슬은 원하지 않습니다. 양해해 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그러나 곽장은 말하였다.
“학문이 없어 할 수 없다면 우리는 아는 사이라 내가 천거하여 되도록 하겠소.”
조금 있다가 어떤 사람이 와서 말하였다.
“동해공이 지금 일어나셨습니다.”
그리고는 가운을 데리고 들어갔다. 한 사람이 청사에 앉았는데 살이 찌고 키가 작으며 얼굴빛은 검었다. 그는 가운을 앞으로 불러 말하였다.
“그대의 재학을 듣고 기실(記室)을 맡기고 싶은데 할 수 있겠소?”
가운은 사양하면서 말하였다.
“큰 영광입니다. 그러나 시골 늙은이로서 경학(經學)을 후생(後生)들에게 가르치는 것으로 업을 삼을 뿐이요, 기실 벼슬에는 적당하지 않습니다.”
동해공은 말하였다.
“곽장을 아시오?”
가운은 대답했다.
“예, 압니다.”
그는 곧 곽장을 오라 하여 가운의 재술(才術)을 물었다. 곽장은 말하였다.
“평생에 그 경학은 알지만 문장 짓는 것은 보지 못했습니다.”
동해공은 물었다.
“문장을 잘하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가운은 대답했다.
“진자량(陳子良)이라는 사람이 문장을 잘합니다.”
동해공은 말하였다.
“이 마생은 놓아 돌려보내라.”
그리고 곧 자량을 데려오라 했다. 가운은 하직하고 나와 곽장과 헤어질 때 곽장은 말하였다.
“자네는 돌아가거든 우리 집 개한테 말해 주시오.
‘나는 임종 때 너에게 말했다. 너는 내가 타던 말을 팔아 그것으로 부도(浮屠)를 세우라고. 그런데 왜 너는 말을 팔아 네 마음대로 써 버렸느냐? 빨리 내 말대로 부도를 세우라.’
내가 말한 우리 집 개란 내 맏아들을 두고 한 말이오.”
가운은 물었다.
“내가 아까 장공근의 첩을 만났는데, 그녀가 말한 천주(天主)란 누구를 말하는 것이오?”
곽장은 말하였다.
“공근의 고향에서 사람의 왕이 5계를 받들면 죽어서 천주가 된다 하오. 그것이 항상 공근을 구호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으나 이제는 면하지 못할 것 같소.”
이렇게 말하고 이별하면서 사람을 시켜 가운을 전송했다. 어떤 험한 오솔길에 이르러 그는 가운에게 말하였다.
“이 길을 따라 돌아가십시오.”
이상은 다 가운이 직접 이야기한 것이다.
그 해 7월에 면주(綿州)의 진자량(陳子良)이 갑자기 죽었다가 하룻밤을 지내고 깨어나 말하였다.
“나는 동해공을 보았는데 그는 나를 기실(記室)로 쓰고자 했으나 나는 문자를 모르기 때문에 못한다고 사양했다.”
오(吳)나라에 진자량(陳子良)이라는 사람이 있어 그가 죽고, 또 공근도 갑자기 죽었다. 이 두 사람이 죽은 뒤에 가운은 어떤 사람과 함께 길을 가다가 갑자기 관부(官府) 사람을 보았다. 가운은 황급히 달아나다가 한참 만에야 진정했다. 동행하던 사람이 그 까닭을 묻자, 가운은 말하였다.
“동해공의 사자를 만났는데 그는 말하기를 ‘사람을 붙들러 익주(益州)로 가려 한다’ 하고는, 다시 ‘진자량이 그대를 걸어 고소했으므로 그대 때문에 곽사형이 큰 꾸지람을 들었다. 그대는 거의 면하지 못할 뻔했으나 그대는 목숨을 살린 복이 있기 때문에 면하게 되었다’고 했다.”
처음에 가운이 촉(蜀)나라에 있을 때, 어떤 사람이 못의 고기를 모두 훑어 잡으려는 것을 보고, 그 때 가운이 남에게 글을 가르치고 받은 비단 수십 필로 그 고기를 사서 살려 주었는데, “목숨을 살렸다”는 것은 이것을 말한 것이다.
정관(貞觀) 때에 왕은 구성궁(九城宮)에 있으면서 이 말을 듣고 중서시랑(中書侍郞) 잠문본(岑文本)을 시켜 이 일을 조사하여 문분이 이 일을 적어 왕에게 아뢰었다 한다.
그 뒤에 가운은 국자박사(國子博士)가 되어 이 벼슬로 죽었다.[이 한 가지 증험은 『명보기』에 있다.]
039_0969_c_07L述意部第一
蓋閒元元雜類莫不貪生蠢蠢迷徒咸知畏死所以失林窮虎乃委命於廬中鎩翮驚禽遂投身於案側至如楊生養雀寧有意於玉環孔氏放龜無情於金印而冥期弗爽雅報斯臻故知因果業行皎然如日且大悲之化救苦爲端弘誓之心濟生爲本五部名族皆以列鼎相誇三市逸莫不鼓刀成務群生何罪枉見刑殘含識無愆橫逢俎醯致使怨魂斷苦報相酬今勸仁者同修慈行所危怖竝存放捨縱彼飛沈隨其啄當使紫鱗頳尾竝相望於江湖錦臆翠毛等逍遙於雲漢或聽三歸而寤道何異瞽龍聞四諦而生天更同鸚鳥共立長壽之基同招常命之果
引證部第二
如梵網經云若佛子以慈心故令放生業一切男子是我父一切女人是我母我生生無不從之受生故六道衆生皆是我父母而殺而食者卽殺我父母亦殺我故身一切地水是我先身一切火風是我本體故常行放生生受生若見世人殺畜生時方便救護解其苦難常教化講說菩薩戒救度衆生若父母兄弟死亡之請法師講菩薩戒經律追福資其亡者得見諸佛生人天上若不爾者犯輕垢罪又僧祇律云一切道俗七衆等竝須漉水飮用若漉得水已使能見掌中細文者審悉看之看時如大象載竹車迴頃知無應用使可信者教漉可信者自漉得蟲還送本取水來處安之若來處遠近有池池井七日不消者以蟲著中若知水有蟲不得持器繩借人若池江水有蟲得唱云此水有蟲若問者荅云長者自看若知友同師者語言此中有蟲當漉水用又十誦律有二比丘未曾見佛從北遠道共往舍衛奉見世尊道中渴乏値有蟲水破戒者言可共飮之持戒者言水中有蟲何可得飮破戒者言我若不飮必當渴死不得見佛便飮而去持戒者愼護戒故不飮遂渴乏卽生三十三天身得具足先到佛頭面禮足佛爲說法得法眼淨三歸畢還歸天上飮水者後到佛佛爲四衆說法卽披衣示金色身癡人欲看我肉身何爲不如持戒者先見我法身智慧之身佛言從今已比丘若行二十里外無漉水囊犯若自無同意伴有者聽去又有征行軍人有比丘尼教化行人人皆弓頭安漉囊持用濾水官人聞奏國王王聞瞋之皆欲殺卻汝小蟲尚畏不殺況見賊肯害之行人向王分疏云小蟲若於國有害臣皆殺卻旣無有怨何故不聽濾飮王聞放之由行人慈善根力及賊皆來投化又正法念經云經宿之水若不細觀恐生細蟲若不漉治不飮不用是名細持不殺戒又智度論云過去世時人民多病黃白痿瘁菩薩爾時身爲赤魚自以爲其肉施諸病人以救其疾又昔菩薩作一飛鳥在林中住見有一人入於深水非人行處爲水神所羂著不可若能至香山取一藥草著其羂上繩卽爛壞人得脫去菩薩宿世作如是等無量本生多有所濟名本生經又十誦律云佛言過去世時近雪山有鹿王名曰威德作五百鹿王有獵師安穀施羂鹿王前行右腳墮毛羂中鹿王心念若我現相則諸鹿不敢食穀須噉穀盡爾乃現腳相諸鹿皆去唯一女鹿住便說偈言大王當知 是羅師來 願勤方便出是羂去爾時鹿王以偈荅言我勤方便 力勢已盡 毛羂轉急不能得出女鹿見獵師到已向說偈言汝以利刀 先殺我身 然後願放鹿王令去獵師聞之生憐愍心以偈荅言我終不殺汝 亦不殺鹿王 放汝及鹿王隨意之所去獵師卽時解放鹿王佛言昔鹿王者今我身是五百鹿者五百比丘是時有鴈王獵者得之有同伴鴈欲代捨命還說偈相報獵師見愍二鴈竝放求寶報恩大意同前又智度論云王聞鹿言卽從坐起說偈言我實是畜獸 名曰人頭鹿 汝雖是鹿身名爲鹿頭人 以理而言之 非以形爲人若能有慈悲 雖獸實是人 我從今日始不食一切肉 我以無畏施 且可安汝意又善見律云目連爲阿育王演本生經云大王往昔有一鷓鴣鳥爲人籠在地愁怖便大鳴喚同類雲集人所殺鷓鴣問道人云我有罪不人荅云汝鳴聲時有殺心不鷓鴣鳥我鳴命伴來無殺心也道人卽荅若無殺心汝無罪也而說偈言不同業而觸不同心而起善人攝心住罪不橫加汝又僧祇律云佛告諸比丘過去世時山中有仙人住處去山不遠有一池水中有一鼈出池水食食已向日張口而眠香山中有諸獼猴池飮水已上岸見此鼈張口而眠獼猴便作婬法卽以身生內鼈口中鼈覺合口藏六甲裹如所說偈言愚癡人執相 猶如鼈所齧 失守摩羅捉非斧則不離鼈急捉獼猴卻行欲入水獼猴急怖便作是念若我入水必死無疑苦痛力弱任鼈迴轉流離牽曳遇値嶮處鼈時仰臥是時獼猴兩手抱鼈作是念言誰當爲我脫此苦難獼猴曾知仙人住處彼當救我便抱此鼈向彼處去仙人遙見便作是念咄哉異事念是獼猴爲作何等欲戲弄猴故言婆羅門是何等寶物滿鉢持得何等信而來向我爾時獼猴卽說偈言我愚癡獼猴 無辜觸惱他 救戹者賢士命急在不夂 今日婆羅門 若不救我者須臾斷身生 困戹還山林爾時仙人以偈荅言我令汝得脫 還於山林中 恐汝獼猴法故態還復生 爾時彼仙人 爲說往昔事鼈汝宿命時 曾號字迦葉 獼猴過去世號字憍陳如 已作婬欲行 今可斷因緣迦葉放憍陳 令還山林去鼈聞是語便放猴去頌曰普親皆眷屬 隔世卽相欺 但求現在樂不知來苦資 牽我入三塗 楚痛受萬危自非慈放捨 何得命延時
感應緣 略引一驗
唐魏郡馬嘉運以貞觀六年正月家日晩出大門忽見兩人各捉馬一先在門外樹下立嘉運問是何人荅云東海公使迎馬生耳嘉運素有學識知名州里每臺使及四方貴客多請見之及見聞名弗復怪也謂使者曰吾無馬使者曰進馬以此迎馬生嘉運卽於樹下上馬而去其身倒臥於樹下也俄至一官曹將入大門男女數十人門外如訟者有一婦人先與運相識是同郡張公瑾妾姓元手執一紙文書迎謂嘉運曰馬生尚相識不張㧾管交游每數相見摠管無狀非理殺我我訴天曹於今三年爲王天主救護公瑾故常見抑今乃得申官已追之不夂將至疑我獨見枉害馬生那亦來耶嘉運先知元氏被殺及見方自知死使者引入門者曰公眠未可謁宜可就霍司刑處坐嘉運見司刑乃益州行臺郞中霍璋也見嘉運延坐曰此府記室官闕東海公聞君才學欲屈爲此官耳嘉運曰貧守妻子不願爲官得免幸甚璋曰若不能作自陳無學吾當有相識可擧令作俄有人來云公眠已起引嘉運入見一人在廳事坐短黑色呼嘉運前謂曰聞君才學屈爲記室耳能爲之乎嘉運拜謝曰幸甚但鄙夫田野頗以經業教授後不足以當記室之任耳公曰識霍璋不荅曰識之因使召璋問以嘉運才術璋曰平生知其經學不見作文公曰誰有文章者嘉運曰有陳子良者解文章公曰放馬生歸卽命追于子良嘉運辭去璋與之別倩君語我家狗吾臨終語汝賣我所乘作浮汝那賣馬自費速如我教造浮圖所云我家狗者謂其長子嘉運因問向見張公瑾妾所言天主者爲誰公瑾鄕人王五戒者死爲天主救公瑾故得至今今似不免矣言畢而別遣使者送嘉運至一小澀道指由此路歸嘉運具言之其年七月緜州人姓陳名子良暴死經宿而蘇自言見東海公欲用爲記室辭不識文字別有吳人陳子良卒公瑾亦亡但二人亡後嘉運嘗與人同行於路忽若見官府者嘉運色憂怖唯趨頃之乃定同侶問之荅曰而見東海公使人云欲往益州追人仍說子良極訴君霍司刑爲君被誚讓幾不免賴君贖生之福故得免也嘉運在蜀之日將抉池取魚嘉運時爲人講書得絹數十匹因買池魚贖謂此也至貞觀中車駕在九城宮聞之使中書侍郞岑文本就問其事文本錄以奏云爾嘉運後爲國子博士卒官右此一驗出冥報記

76. 구액편(救厄篇)[여기에는 5부가 있다.]
039_0972_c_03L救戹篇第七十六此有五部
039_0973_a_02L
술의부(述意部) 보살부(菩薩部) 유수부(流水部)
상주부(商主部) 수왕부(獸王部)

(1) 술의부(述意部)
자비는 큰 힘의 보시요, 복을 비는 것은 걱정을 없애 달라는 청이다. 지극한 정성에 감응하는 것은 여러 성인이 다 그런 것이지만 관세음보살만이 홀로 그 이름이 드러난 것이다. 그러므로 불 속에 들어가면 반드시 몸이 문드러지고 바다에 떠돌면 사는 생명이 없게 된다. 그러나 순식간에 말하고 생각하여 귀향(歸向)하면 큰 바다도 말릴 수 있고, 뜨거운 불에 찬 기운이 돌며 목에 칼을 받아도 그 칼날이 다치게 하지 못하며, 깊은 구덩이에 떨어지더라도 몸에 아무 상처가 없고 감옥에서 형틀을 쓰고 있더라도 몸이 저절로 풀린다. 이런 힘을 얻은 일은 다 이루 말할 수 없다. 만일 지성으로 자신을 제어하면 반드시 영험을 얻을 것이나 만일 들떠 방종하면 액난을 구제하기 어려울 것이다.

(2) 보살부(菩薩部)
『승가라찰경(僧伽羅刹經)』에서 말하였다.
“어느 때 어떤 보살이 산에 살면서 자비심을 가지고 단정히 앉아 선정에 들어 움직이지 않았다. 새가 그 정수리에서 알을 까는 줄 알고는, 알이 땅에 떨어질까 염려하여 몸을 움직이지 않고, 앉을 때도 조심하고 다닐 때도 머리를 흔들지 않았다. 병아리가 날개는 생겼으나 아직 날지 못했으므로 끝내 그것을 버리지 않았다.”
『미륵소문본원경(彌勒所問本願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아난아, 나는 옛날 도를 구할 때 무수히 고생했다. 그 때 보화(寶華)라는 왕태자가 있었다. 그는 얼굴이 단정하고 뛰어나게 아름다웠다. 그는 동산에 놀러 나갔다가 나병 환자를 만나 그에게 물었다.
≺어떤 약을 쓰면 그대 병이 낫겠는가?≻
병자는 답하였다.
≺사람의 골수와 피를 내 몸에 바르면 병이 나을 수 있습니다.≻
태자는 이 말을 듣자 곧 자기 몸을 베어 그 골수와 피를 내어 그에게 지심으로 주었으므로 마음에 회한(悔恨)이 없었다.
아난아, 그 태자는 곧 지금의 이 나이니라. 4대해(大海)의 물은 말[斗]로 헤아릴 수 없나니, 그것은 정각(正覺)을 얻기 위해서이니라.’”
또 『대집경(大集經)』에서 말하였다.
“그 때 광야(曠野)보살은 귀신의 몸으로 나타났고, 산지(散脂)보살은 사슴의 몸으로 나타났으며, 혜거(慧炬)보살은 원숭이의 몸으로 나타났고, 이애(離愛)보살은 암양의 몸으로 나타났으며, 진루(盡漏)보살은 거위 왕의 몸으로 나타났다. 이런 5백 보살 등은 각각 갖가지 몸으로 나타나 그 몸에서 다 큰 광명을 내었다. 이 여러 보살들은 각각 손에 등불을 들고 시방 부처님께 공양하기 위하여 7불 이래 이런 여러 부처님들을 위해 다 함께 그 권속이 되었다. 그리하여 5계를 받고 보리심을 내었다. 그들은 일체 중생을 조복받아 그들로 하여금 보리심을 내게 하려고 그런 몸을 다 받은 것이다.”
또 『잡보장경(雜寶藏經)』에서 말하였다.
“옛날 어떤 아라한 도인은 한 사미를 길렀는데, 이 사미가 7일 뒤에는 반드시 목숨을 마칠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에게 여가를 주어 집에 돌려보내면서 7일 다음 날에는 꼭 돌아오라 했다.
이 사미는 스님에게 하직하고 집에 돌아가다가 도중에서 개미들이 물을 따라 떠내려가면서 곧 죽게 된 것을 보았다. 그는 자비심을 내어 가사를 벗어 거기에 흙을 담아 물을 막고는, 그 개미들을 집어 마른 곳에 갖다 두어 모두 살려 주었다. 그리고 7일 다음 날에 스승에게로 돌아갔다. 스승은 괴상히 여겨 선정에 들어 천안(天眼)으로 관찰했다. 그제서야 그것은 다른 복이 아니요, 개미를 구해 준 인연 때문에 7일 만에 죽지 않고 연명하게 된 것을 알았다.”[또 묵은 탑을 수리해도 연명할 수 있고, 또 가람의 담장에 구멍난 것을 보수해도 연명할 수 있다.]

(3) 유수부(流水部)
또 『금광명경(金光明經)』에서 말하였다.
“그 때 유수(流水) 장자는 천자재광왕국(天自在光王國) 안에서 일체 중생들의 병을 고쳐 다 낫게 했다. 그 때 장자의 아내 수공룡장(水空龍藏)은 두 아들을 낳아 첫째 이름을 수공(水空)이라 했고, 둘째 이름을 용장(龍藏)이라 했다.
어느 때 장자는 이 두 아이를 데리고 차츰 노닐면서 어느 빈 못에 이르러, 여러 새와 짐승이 많은 고기와 피를 먹고 자꾸 달리는 것을 보고 생각했다.
‘이 새와 짐승들은 무엇 때문에 자꾸 달리기만 하는가?’
장자는 곧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가 어떤 못에 물이 말라 있고, 그 못에는 많은 고기들이 있는 것을 보았다. 장자는 그것을 보고 큰 자비심을 내었다. 그 때 어떤 수신(樹神)은 반 몸을 나타내고 말하였다.
‘착하다 장자여, 이 고기들은 참으로 가엾다. 너는 저들에게 물을 주라. 그 때문에 네 이름을 유수(流水)라 한 것이다.’
장자가 물었다.
‘이 고기들은 모두 몇 마리나 되는가?’
수신은 답하였다.
‘모두 만 마리는 될 것이다.’
장자는 그 많은 숫자를 듣고 더욱 큰 자비심이 일어났다. 이 빈 못은 햇볕에 쪼이고 있으므로 만 마리의 고기들은 곧 죽게 되어 있었다. 장자는 사방으로 물을 찾았으나 얻지 못하다가 큰 나무를 보고 그 가지와 잎을 꺾어 가지고 돌아와 못을 덮어 주었다. 그리고 또 빨리 먼 곳에 가서 수생(水生)이라는 큰 강을 발견했다. 여러 악인들이 이 고기를 잡기 위해 그 물을 다른 데로 돌려 흘러 내려오지 못하게 해 놓았다. 그러나 그 돌려 놓은 곳이 험준해서 다시 고치기가 어려웠다. 장자는 빨리 왕에게 가서 이 사정을 이야기하고 말하였다.
‘대왕님, 큰 코끼리 20마리만 빌려 주시면 우리가 물을 싣고 가서 저 고기들을 구제하겠습니다.’
왕은 대신에게 명령하여 빨리 빌려 주라 했고, 자신도 직접 우리로 나와 마음대로 골라 가라고 했다. 그래서 유수 장자와 두 아들은 20마리 코끼리를 몰고 성(城)을 보수하는 사람에게 가서 가죽푸대를 빌렸다. 그리고 물을 돌린 상류로 가서 가죽푸대에 물을 넣어 코끼리에 싣고 빈 못으로 빨리 가서 물을 부어 못물은 드디어 가득 차게 되었다.
그리하여 장자가 못가를 거닐 때 이 고기들도 언덕을 돌면서 그를 따랐다.
장자는 다시 생각했다.
‘이 고기들은 왜 나를 따라올까? 반드시 배가 고파 내게 먹이를 구하는 것일 것이다.’
그리하여 유수 장자는 그 아들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집에 가서 아버지께 여쭙고 집에 먹을 것이 있는 대로 다 코끼리에 싣고 빨리 돌아오느라.’
두 아들은 아버지의 분부대로 집에 가서 위의 사실을 할아버지에게 아뢴 뒤에, 음식을 코끼리에 싣고 아버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장자는 기뻐하면서 그 음식을 받아 못에 던져 주어 고기들을 한껏 먹게 하였다. 그리고 다시 생각했다.
‘경전에, 만일 어떤 중생이 임종 때에 보승(寶勝)여래의 이름을 들으면 곧 천상에 난다 하였다.’
그는 곧 물에 들어가 말하였다.
‘나무 보승여래 십호(十號) 명자(名字).’
그리고 다시 고기들을 위해 이 매우 깊고 미묘한 법과 12인연을 설명했다. 그리고 유수 장자와 그 아들은 집에 돌아왔다.
또 그 뒤에 손님이 술에 취해 누워 있을 때 갑자기 대지가 진동했다. 그 때 만 마리 고기는 같은 날에 목숨을 마치고 곧 도리천에 나서는 가만히 장자의 은혜를 갚을 일을 생각했다. 이 만 명의 천자는 만 개의 진주와 천상의 묘한 영락을 그 장자의 머리맡에 두고, 또 만 개는 발치에 두고, 또 만 개는 오른쪽 옆구리 곁에 두고, 또 만 개는 왼쪽 옆구리 곁에 두었다. 그리고는 만다라꽃과 마하만다라꽃을 내려 무릎까지 묻히도록 쌓고 갖가지 음악을 울려 묘한 소리를 내었다.
염부제에서 자던 사람들이 다 깨어나고 또 유수 장자도 잠에서 깨었다. 이 만 명의 천자들은 다 허공에서 노닐면서 이 나라 안에 하늘 꽃을 내리고 또 못에도 하늘 꽃을 내리고는 곧 사라져 도리천으로 돌아갔다.”

(4) 상주부(商主部)
『대비경(大悲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옛날 큰 상주(商主)가 보배를 캐기 위해 여러 상인들을 데리고 큰 바다로 들어갔다. 그들이 보배를 캐어 배에 가득 싣고 오다가 바다 가운데서 갑자기 배가 부서졌다. 그들은 모두 두려워하고 매우 걱정하면서 어떤 자는 선판(船板)을 붙잡고 있다가 죽었고, 어떤 자는 물에 떠 있다가 죽었다.
나는 그 때에 그 상주가 되어 큰 바다에서 부낭(浮囊)으로 무사히 바다를 건넜다. 그 때 어떤 다섯 사람이 상주를 부르면서 말하였다.
≺보살 상주님, 원컨대 우리에게 무외(無畏)를 보시해 주십시오.≻
이 말이 끝나자 상주는 말하였다.
≺여러분, 걱정 마십시오. 나는 그대들을 이 바다에서 무사히 건너가게 하겠소.≻
아난아, 그 때 상주는 예리한 칼을 차고 생각했다.
≺바다의 법으로는 시체를 그대로 두지 않는다. 만일 내가 내 목숨을 버린다면 이 상인들은 반드시 이 바다의 어려움을 무사히 지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곧 상인들을 불러 자기 몸을 잘 잡으라 했다. 어떤 상인은 그의 등에 업혔고, 어떤 자는 그의 어깨를 안았고, 어떤 자는 그의 넓적다리를 붙잡았다. 그 때 상주는 저들에게 무외를 보시하기 위해 큰 자비와 큰 용맹을 일으켜 곧 예리한 그 칼로 자기 목숨을 끊고 빨리 죽음을 취했다. 그러자 바다는 그의 시체를 떠밀어 언덕 위에까지 올려다 놓았다. 이때 다섯 상인은 무사히 바다를 건너 즐거워하면서 염부제까지 돌아왔느니라.
아난아, 그 때의 그 상주가 어찌 다른 사람이겠느냐? 그는 바로 지금의 이 나요, 그 다섯 상인은 바로 지금의 이 다섯 비구이다. 이 다섯 비구는 옛날에도 큰 바다에서 해탈을 얻었고, 지금 또 이 생에서 생사의 큰 바다에서 해탈을 얻었으니, 나는 이들을 무외열반의 저 언덕에 안치했느니라.”

(5) 수왕부(獸王部)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 말하였다.
“옛날 무량한 아승기겁 이전에 큰 수림에 많은 짐승들이 살고 있었다. 들불이 일어나 삼면은 다 타는데 오직 한 면만은 물 건너 있었다. 여러 짐승들은 몹시 다급했으나 도망갈 길이 없었다.
부처님께서는 이어 말씀하셨다.
‘나는 그 때 몸이 크고 힘이 센 큰 사슴이 되어 앞다리를 이쪽 언덕에 걸치고 뒷다리를 저쪽 언덕에 걸쳐 그 짐승들을 내 등을 밟고 건너가게 했다. 그래서 등의 껍질과 살이 다 문드러졌으나 자비의 힘으로 죽을 때까지 참았다. 최후에 토끼 한 마리가 왔다. 나는 힘이 다 빠졌으나 억지로 힘을 내어 참으면서 그것을 지나가게 했다. 토끼가 지나가자 나는 척골이 부러져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이런 일은 과거에도 있는 일이요 지금만이 아니다. 그 때 건너간 자들은 지금의 이 제자들이요, 최후의 그 한 마리 토끼는 바로 지금의 저 수발타이니라. 이 부처님께서는 세세생생을 즐겨 정진을 행하면서 지금도 쉬지 않느니라.’”
또 『현우경(賢愚經)』에서 말하였다.
“먼 옛날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어느 해에 큰 흉년이 들었다. 여래께서는 인지(因地)에서 자비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큰 고기가 되니 길이가 5백 유순이었다. 그래서 그 나라 사람으로서 고기가 먹고 싶은 자는 사람이고 짐승이고 불문하고 다 와서 그것을 먹었다. 그런데 먹으면 다시 살이 생기고 하여 12년을 지내도록 그 살과 피를 보시하였다.”
또 『수생경(受生經)』에서 말하였다.
“옛날에 보살은 자라 왕이 되어 큰 바다에 살면서 여러 동류(同類)를 교화하여 그 새끼들은 다 어진 덕을 닦았다. 왕이 스스로 자비를 행해 중생을 구호하고 가엾이 여기는 것이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과 같았다. 바다는 깊고 넓어 그 끝을 한정하기 어려웠으나 자라 왕은 두루 다니면서 가지 않는 곳이 없었다.
어느 때 자라 왕은 바다에서 나와 바닷가에 누워 쉬고 있었다. 오랜 세월을 지내는 동안 그 동안 단단하고 말라 마치 육지와 같았다. 멀리서 온 상인들은 그 등 위에서 나무를 쪼개 불을 피워 밥을 지어 먹기도 하고 거기에 소와 말을 매기도 하며 돌을 실은 수레를 그 위에 두기도 하였다. 자라 왕은 바닷물로 달려 들어가고 싶었으나 잔인할까 두려워 억지로 참았지만 아픔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방편을 써서 화독(火毒)을 없애기 위해 물이 얕은 곳으로 들어갔으나 대중을 해칠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상인들은 조수가 넘쳐드는가 생각하고 매우 두려워하여 슬피 울면서 하늘에만 귀명(歸命)하여 구제를 빌었다. 자라 왕은 그들을 더욱 가엾이 여겨 말하였다.
‘부디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 몸이 불에 타기 때문에 고통을 없애려고 물에 들어간 것이지 일부러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지금 마땅히 서로 편안하여, 마침내 위태롭지 않았다. 대중은 이 말을 듣고야 살아날 줄을 알고 모두 큰 소리를 내어 말하였다.
‘나무불(南無佛).’
자라 왕은 자비심을 내어 다시 그 갖가지 보배를 지고 물가에 옮겨 놓았다. 대중은 위기를 벗어나 모두 기뻐하면서 자라 왕의 그 덕을 찬탄하였다.
‘당신은 큰 교량이 되어 많은 사람을 건네 주시고 그 수행은 큰 배가 되어 삼계에 뛰어납니다. 만일 불도를 얻으시거든 부디 다시 생사의 고액에서 구제해 주십시오.’
자라 왕은 말하였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여래의 말씀과 같다.’
그들은 각자 헤어져 갔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 때의 그 자라 왕은 바로 지금의 이 나요, 그 5백 상인들은 바로 지금의 사리불 등 5백 제자이니라.’”
또 『정법념처경』에서 말하였다.
“만일 어떤 중생이 죽음의 고통을 받아야 할 범법자를 보고 재물로써 그 목숨과 바꾸어 그를 해탈시키고도 은혜 갚기를 바라지 않으면, 그는 목숨을 마치고는 환희천(歡喜天)에 날 것이요, 천상에서 사람의 몸을 받으면 왕난(王難)을 만나지 않을 것이다.
만일 계율을 지키는 중생으로서 큰 화재가 일어나 중생을 태워 죽이는 것을 보고 물로 불을 꺼서 중생을 구제하면, 그는 목숨을 마친 뒤에는 행도천(行道天)에 나서 갖가지 즐거움을 받을 것이다.”
또 『도구자경(度拘子經)』에서 말하였다.
“옛날 어떤 나라에 쌀값이 폭등하여 백성들이 굶주렸다.
그 때 어떤 사문은 성내에 들어가 여러 집으로 걸식하러 다녔으나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다음에 어떤 큰 부호의 장자 집에 가서 거칠고 맛없는 밥을 얻어먹고 막 문을 나오려는데 어떤 백정을 만났다. 백정은 개 한 마리를 안고 잡아먹으려고 가다가 이 사문을 보자 기뻐하며 예배했다. 사문은 그를 위해 오래 살기를 축원해 주었다. 그리고 사문은 그가 개를 잡아먹을 것임을 알고 일부러 물었다.
‘그 가진 것이 무엇입니까?’
그는 답하였다.
‘이번에는 빈 걸음이라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사문은 또 말하였다.
‘나는 벌써 보았는데 왜 숨기십니까? 살생하는 죄는 매우 중한 것입니다. 내가 가진 밥과 그 개와 바꾸어 그것을 살려 주면 당신의 목숨은 무량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말하였다.
‘나는 그리할 수 없습니다. 잡아서 우리 식구가 다 함께 먹을 것인데 어찌 당신의 그 적은 밥으로 대신하겠습니까?’
사문이 아무리 회유하고 타일렀으나 그는 끝내 거절하면서 들어줄 것 같지 않았으므로 사문은 다시 말했다.
‘만일 들어주지 않으려면 그 물건이라도 내게 보여 주십시오.’
그는 곧 개를 내어 사문에게 보였다. 사문은 밥을 떠서 개를 먹이고 손으로 어루만지며 축원을 해 주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였다.
‘개야, 너는 내 죄로 개가 되어 자유롭지 못하고 사람에게 잡아먹힌다. 나는 너로 하여금 세세생생에 죄를 멸하고 복이 생겨 개의 몸을 버리고 사람이 되어 어느 세상에서나 3보의 법을 만나게 하리라.’
개는 밥을 얻어먹고 기뻐 날뛰면서 귀의할 줄을 알았다. 백정은 개를 끌고 가서 여럿이 같이 먹었다. 개는 목숨을 마치고 어느 부호인 장자의 집에 태어나게 되어 땅에 떨어지자마자 이내 자비심이 생겼다.
그 때 이 사문은 그 장자의 집에 걸식하러 갔었는데 장자의 아들(개)은 이 사문을 보자, 곧 전생의 인연을 알고는 그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예배했다. 그리고 온갖 맛난 음식을 공양한 뒤에 그 부모에게 청했다.
‘나는 이 스님을 따라가 계를 받고 그의 제자가 되렵니다.’
부모는 사랑하고 소중히 여겨 허락하려 하지 않으면서 말하였다.
‘우리 집에 아들이라고는 너뿐이다. 우리는 너에게 뒤를 잇게 하여 우리 집 주인을 만들려는데 무엇 때문에 이 집을 버리고 떠나려 하느냐?’
그러나 아들은 음식도 먹지 않고 울면서 말하였다.
‘만일 허락해 주시기 않으면 나는 곧 죽고 말겠습니다.’
부모는 이것을 보고 곧 허락하여 따라가게 했다. 아들은 스승을 따라가서 도를 배우게 되었다. 그리하여 수염과 머리를 깎고 세 종류의 법의를 입고 불경을 외워 그 뜻을 잘 알고 곧 삼매를 얻어 퇴전(退轉)하지 않는 자리를 얻고 일체를 교화하였다. 그리고 큰 보리심을 내었다.
‘부처님 세상은 만나기 어렵고 경전의 도는 듣기 어려우므로 만일 만나게 되면 누구나 다 제도를 얻을 것이다. 축생도 도를 얻거늘 하물며 사람으로서 어찌 과(果)를 얻지 못하겠는가? 비록 계를 범함으로써 다시 부끄럼이 생기더라도 희고 깨끗함이 오면 검고 더러운 것은 저절로 없어질 것이다.’”
또 『잡아함경』에서 말하였다.
“그 때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옛날 라바(羅婆)라는 새는 매한테 잡혀 허공으로 오르면서 크게 울부짖었다.
≺나는 지각이 없어 이런 고난을 당한다. 나는 공연히 부모의 경계를 떠나 다른 곳에서 놀았기 때문에 이런 고난을 당하는 것이다. 나는 왜 지금 남에게 붙들려 자유를 얻지 못하는가?≻
매는 라바에게 말하였다.
≺너는 어떤 경계에서 자유를 얻는가?≻
라바는 답하였다.
≺나는 밭두덕에 내 경계가 있는데 거기 있으면 고난도 면할 수 있다. 거기가 부모의 경계다.≻
매는 라바에 대해 교만한 마음이 생겨 말하였다.
≺너를 놓아주어 돌아가게 할 것이니, 그 밭두덕에서 이 고난을 벗어날 수 있겠는가?≻
이리하여 라바는 매의 발톱에서 벗어나 밭두덕의 큰 흙덩이 밑으로 들어가 편히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다시 흙덩이 위에서 매와 한 번 싸우려 하자 매는 크게 성을 내어 말하였다.
≺저 조그만 놈이 나와 감히 싸우려 한다.≻
매는 바로 날아 내려가 마구 덮쳤다. 이때 라바는 흙덩이 밑으로 들어가고 매는 나는 그 힘에 흙덩이에 가슴을 부딪쳐 그 자리에서 죽었다. 라바는 흙덩이 밑에서 위를 쳐다보고 다음 게송으로 말하였다.
매가 힘을 다해 내려올 때에
라바는 흙덩이를 의지하였다.
성내는 그 맹렬한 기세는
재화를 불러 제 몸을 부수었다.

나는 모든 것 잘 통달해
스스로의 내 경계에 의지하여
원수를 갚고 기뻐하면서
나의 이 힘을 기꺼이 관찰한다.

아무리 네게는 흉하고 어리석은
백천 용상(龍象)의 힘이 있어도
나의 이러한 지혜에 비하면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게송으로 말한다.

중생은 모두 죽기를 두려워하고
목숨 있으면 위험을 겁낸다.
고기가 마른 못에 시달리면서
흐르는 물 만나기 어려움과 같다.

친하거나 멀거나 다 부모인데
어찌 서로들 속일 수 있으랴?
자비로 고난을 구제해 주면
복의 과보는 스스로 따라오리.”

감응연(感應緣)[대략 열다섯 가지 증험을 인용한다.]
진(秦)의 사문 석도경(釋道囧)
진(晋)의 거사 여송(呂竦)
진(晋)의 거사 서영(徐榮)
진(晋)의 거사 장숭(張崇)
진(晋)의 장군(將軍) 왕의(王懿)
진(晋)의 엄맹(嚴猛)의 부인
진(晋)의 주자장(周子長)
송(宋)의 사문 축혜경(竺慧慶)
송(宋)의 사문 석담무갈(釋曇無竭)
송(宋)의 사문 석법진(釋法進)
주(周)의 사문 석헤진(釋慧瑱)
주(周)의 사문 석승실(釋僧實)
진(陳)의 사문 석혜포(釋慧布)
당(唐)의 사문 석지총(釋智聰)
당(唐)의 거사 서선재(徐善才)

진(秦)의 사문 석도경(釋道囧)
진(秦)나라 사문 석도경(釋道囧)의 고향과 씨족(氏族)에 관한 것은 앞에서 이미 소개했다.
요진(姚秦) 홍시(弘始) 18년에 그는 도의(道懿)를 스승으로 삼았다. 스승의 심부름으로 하남(河南)의 곽산(霍山)으로 가서 종유(鍾乳)를 캐기 위해 동학(同學)인 도랑(道朗) 등 네 사람과 동행했다. 그들은 횃불을 들고 더듬으면서 3리쯤 들어갔다가 한 깊은 물을 만나 나무를 걸치고 건너가게 되었다. 도경이 제일 먼저 건너고 뒤의 사람들은 나무에서 떨어져 죽었다. 그 때 불이 또 꺼지고 사방은 깜깜한데, 도경은 저들을 생각하고 통곡할 뿐이었다. 그러나 도경은 옛날처럼 일심으로 관세음보살을 부르면서 발원했다.
‘만일 내가 길에까지 나갈 수 있게 해 주시면 백인회(百人會)에 공양하여 그 위신(威神)에 보답하겠습니다.’
하룻밤을 지낸 뒤에 조그만 불빛이 마치 반딧불처럼 깜박거리더니 조금 있다가 굴 안이 다 환히 밝아졌다. 이리하여 그는 길을 발견하고 동굴에서 나올 수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그의 믿음은 더욱 깊어지고 신령스런 일을 자주 보았다.
원가(元嘉) 19년(442)에 임천강왕(臨川康王)은 광릉(廣陵)의 진영을 맡고는 도경을 청해 공양하고 그 해 9월에 서재(西齋)에서 10일 동안 관세음보살의 재를 올렸다. 9일째 되는 날 밤 4경(更)이 끝날 때 다른 스님은 다 자고 도경만 일어나 관음에게 예배하고 돌아와 좌선하려 했다. 갑자기 사방 벽(壁)에 무수한 스님이 반 몸을 드러냈는데, 한 부처님은 나계(螺髻)가 분명한 것을 보았다. 또 어떤 키가 큰 사람은 위가 편편한 두건을 쓰고 베옷을 입고 손에 긴칼을 들었는데 그 상은 매우 장대하고 이상했다. 그는 향을 집어 도경에게 주었다. 그러나 도경이 그것을 받으려 하지 않자 벽 안에 있던 스님이 도경에게 말하였다.
“도경께서는 그것을 받아 주인을 보호하시오.”
그리고 이내 보이지 않았다. 그 때 다른 대중 스님은 전연 보이지 않고 오직 거기 안치된 석가 부처님의 행상(行像)이 있을 뿐이었다.

진(晋)의 거사 여송(呂竦)
진(晋)나라 여송(呂竦)의 자는 무고(茂高)요, 연주(兗州) 사람이니 시풍현(始豊縣)에 우거하고 있었다. 그 고을 남쪽에 있는 시내는 흐르는 물이 급하고 언덕은 높으며 돌아나가는 굽이는 마치 서로 얽힌 것 같았다. 또 큰돌이 많아 낮에도 지나가는 나그네는 두려움을 느꼈다. 여송은 스스로 이렇게 말하였다.
“그 아버지가 배를 타고 시내 복판을 갈 때 한 10리쯤 가서 날이 저물고 갑자기 풍우가 일어나 칠흑처럼 어두워 동서를 분간할 수 없었다. 자기는 물에 빠져 오직 관세음보살만을 부르고 또 생각했다. 잠깐 사이에 불빛이 언덕에 이르러 마치 사람이 횃불을 든 것처럼 온 시내가 환했으며, 멀리 집으로 갈 때에는 불이 항상 앞에서 인도했는데 그것은 배에서 10여 보쯤 떨어져 있었다.”
그 뒤에 여송이 희가빈(希嘉賓)과 사귀어 놀았는데 이것은 희가빈이 전한 말이다.

진(晋)의 거사 서영(徐榮)
진(晋)나라 서영(徐榮)은 낭야(琅邪) 사람이다. 동양(東陽)에 갔다가 경정산(經定山)으로 돌아올 때 뱃사공이 익숙하지 못해 잘못하여 배가 소용돌이 속에 들어가 물결에 휩쓸려 거의 물에 빠지게 되었다. 서영은 오직 지심으로 관세음보살만 불렀다. 잠깐 사이에 수십 명 사람이 힘을 모아 배를 끄는 것 같았다. 배는 소용돌이 속을 빠져 나와 평류(平流)로 돌아와 강을 따라 내려갔다. 날이 저물자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풍우가 매우 거세어 갈 곳을 알지 못하는데 물결은 더욱 몰아쳤다. 서영은 『관음경』을 끊이지 않고 외웠다. 조금 있다가 산머리에서 환한 불빛이 보였다. 키를 그리로 향해 돌려 바로 운포(運浦)에 이르러 배는 무사하였다. 다시 돌아볼 때 그 불은 아주 보이지 않았다. 동행이 이상히 여겨 이것을 사람의 불이 아니라 생각하고 이튿날 아침에 그 갯마을 사람에게 물었다.
“어젯밤에 산 위에 있던 그 불은 무슨 불이었습니까?”
여러 사람들은 깜짝 놀라면서 말하였다.
“어젯밤에는 그처럼 풍우가 쳤는데 불이 있을 이치가 없습니다. 우리는 아무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신광(神光)임을 알았다.
그 뒤에 서영은 계부(稽府)의 도호(都護)가 되었는데, 이것은 사부(謝敷)가 그에게서 직접 들은 이야기다. 또 서영과 배를 같이 탔던 스님 지도온(支道蘊)은 착실한 사람으로서 그도 이것을 직접 보고 뒤에 부량(傅亮)에게 말했는데, 서영의 이야기와 꼭 같았다.

진(晋)의 거사 장숭(張崇)
진(晋)나라 장숭(張崇)은 경조(京兆)의 두릉(杜陵) 사람으로서 젊어서부터 불법을 받들었다. 진나라 태원(太元) 때에 부견(符堅)이 패망하자 장안의 백성 천여 집이 모두 남쪽으로 달아나 진나라로 귀순했다. 그러나 진수(鎭戍)에 붙들려 모두 유구(流寇)라 오인되어 남자들은 다 죽임을 당하고 자녀들은 사로잡혔다. 장숭 등 다섯 사람은 손발에 수갑을 채인 채 깊은 구덩이로 끌려가서 허리까지 묻히어 서로의 거리가 20보쯤 되었었다. 그리고 다음 날이면 저들은 말을 달리면서 이들에게 활을 쏘아 죽임을 오락으로 삼게 되었다. 장숭은 희망이 없다 생각하고는 오직 깨끗한 마음으로 관세음보살만 오로지 생각했다. 밤중에 갑자기 수갑이 저절로 풀려 몸에서 떨어졌다. 이로 인해 곧 달아나 거기서 벗어났다.
장숭은 다리가 아파 동행과 함께 어느 절에서 잘 때도 늘 관세음보살을 부르면서 지심으로 예배한 뒤에 돌 하나를 앞에 놓고 발원했다.
‘지금 강동(江東)을 지나가려고 진제(晋帝)의 난리를 호소하나이다. 무리가 당한 원혼(冤魂)을 다스려 그 처자를 구제해 주소서. 만일 내 소원이 이루어지겠으면 이 돌이 두 조각이 되어지이다.’
이렇게 발원하고 예배를 마치자 돌은 곧 두 조각이 났다. 장숭은 드디어 경사(京師)에 도착하여 백호준(白虎樽)을 열고 원혼들을 벌여 놓았다. 진제는 이들을 다 용서하고 이미 남에게 팔린 자는 모두 호적에 편입시켰다.
이 사실은 지생(智生) 스님이 직접 본 것이다.

진(晋)의 장군(將軍) 왕의(王懿)
진(晋)나라 왕의(王懿)는 자는 중덕(仲德)이니 태원(太原) 사람으로서 차기장군(車騎將軍)으로 있었다. 그 집은 대대로 불법을 신봉했다. 그 아버지 묘(苗)는 부견(符堅) 때에 중산(中山) 태수(太守)로 있다가 정령(丁零)에게 죽었다. 중덕이 그 형인 원덕(元德)과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남방으로 돌아올 때 산은 험준하고 주리고 피곤한데 양식까지 떨어져 어찌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오직 3보(寶)만 생각하였는데 그 때 갑자기 한 소년이 푸른 소를 몰고 오다가 중덕 등을 보고는 각각 밥 한 그릇씩 주고 이내 사라졌다.
그 때는 마침 장마라 큰물이 났다. 중덕은 앞을 바라보았으나 물이 하도 넓어 어디가 얕아서 옷을 걷고 건너갈 수 있을지를 알지 못했다. 갑자기 흰 이리 한 마리가 그 앞을 돌아 물을 건너갔다. 돌아오는 것이 마치 길을 인도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세 번을 되풀이했다. 이에 중덕은 그 이리를 따라 물을 건너는데 물은 겨우 무릎까지 올라왔다. 이윽고 육지에 올라 진(晋)나라로 돌아왔다.
뒤에 그는 왕구상서(王丘尙書)를 거쳐 서주(徐州) 자사(刺史)가 되었다. 한번은 재(齋)를 베풀기 위해 미리 도량을 소제하고 향과 꽃을 준비하고 불경과 불상을 벌여 놓았다. 갑자기 법당에서 독경하고 창패(唱唄)하는 소리가 들리는데 맑고도 유창했다. 중덕은 급히 가 보았다. 다섯 스님이 불전에 앉았는데 그 위용과 거동이 신기하고 뛰어났었다. 중덕은 비범한 스님들이라 생각하고 매우 기뻐하고 공경했다. 그 스님들이 얼굴을 돌려 바라보는데 모두 친우 같았으며, 말을 나누기 전에 갑자기 몸을 솟구쳐 공중으로 날아갔다. 많은 친척과 손님들은 다 이것을 보고 모두 기뻐하면서 불법을 더욱 신봉했다.[이상 네 가지 증험은 『명상기(冥祥記)』에 나온다.]

진(晋)의 엄맹(嚴猛)의 부인
진(晋)나라 때 회계(會稽)에 사는 엄맹(嚴猛)의 부인은 나물캐러 갔다가 호랑이한테 물려 죽었다. 엄맹이 숭중(嵩中)으로 가려는데 갑자기 그 부인이 나타나 말하였다.
“당신이 지금 떠나면 반드시 좋지 못한 일을 만날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도와드리리다.”
둘이서 한참 가는데 갑자기 호랑이 한 마리가 엄맹을 향해 뛰어왔다. 부인이 손을 들어 호랑이를 가리키면서 막는 시늉을 했다. 조금 있다가 두 호인(胡人)이 창을 메고 지나갔다. 부인이 손가락질하자 호랑이는 곧 호인들을 덮쳤고 남편은 화를 면하였다.[한 가지 증험은 『이원록(異苑錄)』에 나온다.]

진(晋)의 주자장(周子長)
진(晋)나라 주자장(周子長)은 무창(武昌)의 오장포(五丈浦) 동쪽 언덕 위에 우거(寓居)하고 있었다. 함강(咸康) 3년(337)에 자장은 새개포(塞開浦) 중수(中愁)의 집으로 갔다. 집에서 오장까지는 몇 리 거리에 있었다. 마침 날이 저물었다. 오장까지 오기 전 1리쯤은 원래 빈 언덕이었는데 네 겹으로 둘러싼 기와집이 갑자기 앞에 나타났다. 문지기가 자장의 머리를 붙잡았다. 자장은 말하였다.
“나는 부처님 제자인데 왜 나를 붙잡느냐?”
문지기는 물었다.
“만일 그렇다면 경을 외울 줄 아는가?”
자장은 답하였다.
“전에 『사천왕경』과 『녹자경(鹿子經)』을 외웠다.”
그는 곧 3, 4번 외웠으나 문지기는 여전히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자장은 이것이 귀신임을 알고 바로 꾸짖었다.
“이 무창의 미련한 귀신아, 나는 네게 내가 부처님 제자라고 말했고, 또 너를 위해 경전을 몇 번 외우지 않았느냐? 그런데 왜 나를 놓지 않느냐?”
그제서야 귀신은 자장을 놓아주고 집은 곧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귀신은 여전히 쫓아왔다. 자장이 집문 앞을 지나려 하자 귀신이 앞을 막아 들어가지 못하였고, 또 소리도 낼 수 없었다. 그래서 다시 귀신을 끌고 한계사(寒溪寺)로 가면서 곧 귀신의 가슴을 움켜잡고 또 꾸짖었다.
“이 무창의 미련한 귀신아, 이제 너를 데리고 저 절의 화상(和尙) 앞에 갈 것이다.”
귀신도 자장의 가슴을 잡고 서로 끌어 오장의 못을 지나 서쪽으로 갔다. 뒤에서 어떤 귀신들이 이 귀신을 보고 말하였다.
“서장(西將)을 놓아주고 우리를 끌고 절에 가라.”
이 귀신은 자장을 놓아주었다. 자장은 일부러 뒤의 귀신에게 말하였다.
“저 절에는 참 도인들이 있다. 그래도 두렵지 않는가?”
뒤의 한 귀신이 낮은 말로 말하였다.
“그대는 조금 전에 성동(城東)에서 도인을 만났는데 왜 놓쳤느냐?”
그러자 모두 함께 웃었다. 자장이 집에 도착했을 때는 3경(更)이 지났었다.[이 한 가지 증험은 『영귀지(靈鬼志)』에 나온다.]

송(宋)의 사문 축혜경(竺慧慶)
송(宋)나라 사문 축혜경(竺慧慶)은 광릉(廣陵) 사람으로서 경전에 밝고 행을 닦았다. 원가(元嘉) 42년(435)에 형양(荊陽)에 큰 홍수가 나서 냇물과 언덕이 편편했다. 혜경은 여산(廬山)으로 들어가려고 배를 탔는데 조금 있다가 갑자기 폭풍이 일어나 다른 배는 이미 포구(浦口)에 정박했으나 오직 혜경이 탄 배만은 아직 대지 못하고 강 복판으로 휘몰렸다. 바람은 빠르고 물결은 몰아치므로 혜경은 고요히 빠져 죽기만을 기다렸다. 그래서 그는 바른 마음과 단정한 생각으로 『관음경』을 외웠다. 물가 사람들이 그 배를 바라볼 때, 바람을 맞이하여 물결을 끊는 것은 마치 수십 명 사람이 끌어당기는 것 같아서, 바로 위의 언덕에 대어 배에 탄 사람이 다 무사히 건넜다.

송(宋)의 사문 석담무갈(釋曇無竭)
송(宋)나라 초년에 황룡사(黃龍寺)의 사문 담무갈(曇無竭)은 『관음경』을 외우면서 부지런히 고행을 닦았다. 25인의 무리들과 함께 부처님의 나라를 찾아갈 때 흉년에 대비하고 곧은 뜻은 더욱 견고했다. 천축(天竺)의 사위국에 이르러 길에서 산에 사는 코끼리 한 떼를 만났다. 담무갈은 『관음경』을 외우고 그 이름을 부르며 귀명(歸命)했다. 그 때 어떤 사자가 숲 속에서 나오자 코끼리들은 다 놀라 달아났다.
그 뒤에 또 들소 한 떼가 소리치며 달려와서 곧 해치려 했다. 무갈은 또 전처럼 귀명했다. 어디서 큰 솔개가 날아와 소들은 놀라 다 흩어졌다. 그래서 화를 면했었다.[위의 두 가지 증험은 『명상기(冥祥記)』에 나온다.]

송(宋)의 사문 석법진(釋法進)
송(宋)나라 고창(高昌)의 석법진(釋法進)[혹은 도진(道進)]은 성은 장(張)씨요 양주(凉州)의 장액(張掖) 사람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부지런히 공부하여 뛰어난 덕이 있었으므로 저거몽손(沮渠蒙遜)의 신임을 받았다. 몽손이 죽고 그 아들 경환(景環)이 오랑캐에게 패하게 되어 법진에게 가서 물었다.
“고창을 치려는데 이길 수 있겠습니까?”
법진은 답하였다.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다만 흉년이 걱정일 뿐입니다.”
그래서 군사를 돌려 곧 평정했다.
3년 뒤에 경환이 죽고 그 아우 안주(安周)가 뒤를 이었다. 이 해에 흉년이 들어 죽는 자가 무수했다. 안주는 전부터 법진을 섬기고 있었으므로 법진은 자주 안주에게 청하여 굶주리는 사람들을 구휼했다. 그러나 나라의 재물이 자꾸 말라가서 다시 청할 수 없었다. 법진은 이에 목욕한 뒤에 칼과 소금을 준비하여 깊은 굴 속의 굶주리는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가서 차례로 3귀계(歸戒)를 주었다. 그리고 옷과 발우를 나뭇가지에 걸어 굶주리는 사람들 앞에 맨몸을 던지면서 말하였다.
“여러분에게 보시합니다. 모두 함께 먹으시오.”
그러나 대중은 비록 주리기는 하나 의리가 있어 차마 먹을 수 없었다. 법진은 자기 손으로 살을 베고 버티어 서서 소금을 찍어 그것을 먹었다. 두 다리의 살이 다하고 마음이 흐리어 더 벨 수 없어지자 인해 대중에게 말했다.
“여러분은 내 껍질과 살을 가지십시오. 며칠은 더 부지할 것입니다. 만일 왕의 사자가 오면 반드시 가져갈 것이니 감추십시오.”
그러나 대중은 아무도 그것을 취하는 사람이 없었다. 조금 있다가 법진의 제자들이 찾아오고 또 왕의 사자도 왔다.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달려와 울음이 끊이지 않았으며 곧 가마에 메고 궁중으로 돌아갔다. 안주는 영을 내려 3백 석의 보리를 내어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주고 따로 창고를 열어 빈민들을 구휼했다. 이튿날 새벽에 그의 숨이 끊어져 성의 북쪽으로 나가 화장할 때는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찔러 7일 만에야 그쳤다. 시체는 다 타고 없었으나 오직 혀만이 타지 않았으므로, 그 자리에 3층탑을 세우고 그 오른편에 비를 세웠다.[이 한 가지 증험은 『양고승전(梁高僧傳)』에 나온다.]

주(周)의 사문 석혜진(釋慧瑱)
주(周)나라 상당원(上黨元)의 개부사(開府寺)의 석혜진(釋慧瑱)은 그 씨족(氏族)은 알 수 없다. 그는 계율을 굳게 받들고 참선과 참회를 업으로 삼았다. 주나라 건덕(健德) 6년에 나라에서 불법을 멸할 때에 혜진은 경상(經像)을 안고 깊은 산에 들어갔는데 도적을 만나면 겁탈 당할 염려가 있었다. 전연 모르는 사이에 어떤 사람이 나타났다. 키는 10자가 넘고 수염과 얼굴은 아름다우며 종과 옷을 갖추었고 갈기가 붉은 흰말을 타고 산꼭대기에서 내려와 혜진의 앞에 이르러서는 말에서 내려 말하였다.
“오늘밤에 도적이 닥칠 것이니 스님은 어디로 피하십시오.”
혜진은 벼랑 밑에 있었으므로 다른 길이 없었다. 혜진은 그것을 산신이라 생각하고 그에게 말하였다.
“지금 불법이 무너지고 빈도(貧道)는 몸둘 곳이 없기 때문에 일부러 여기 와서 단월에게 의지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도적이 온다 하니 여기서 죽을 수밖에 없구나. 또 어디로 도망가겠는가?”
그 산신은 말하였다.
“스님이 이미 멀리서 제자를 찾아오셨으니 제자도 또한 스님을 잘 보호해 드리겠습니다. 그러시다면 여기 계십시오.”
그리고 그만 어디로 사라졌다. 그날 밤에 눈이 내려 10자 남짓 쌓여 길이 막혔으므로 드디어 도적의 화를 면하게 되었다.
그 뒤에 눈이 그치고 길이 트이자 도적은 다시 왔다. 산신은 산 밑에 있는 여러 마을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도적이 혜진 스님을 해치려 한다. 그대들은 급히 가서 그 스님을 구하라.”
마을 사람들이 모두 무기를 들고 도적을 치러 가자 도적들은 다 놀라 달아났다. 이 뒤로 혜진은 늘 산신을 의지하여 산에서 수행했는데, 그 최후는 알 수 없다.

주(周)의 사문 석승실(釋僧實)
주(周)나라 경사(京師)에 있는 대추원사(大追遠寺)의 석승실(釋僧實)은 성은 정(程)씨이니 교양(僑陽) 영무(靈武)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마음이 단아하고 맑았으며 고상하여 여럿과 어울리지 않았다. 위효문(魏孝文) 대화(大和) 말년에 경사에서 낙양(洛陽)으로 가서 늑주(勒主) 삼장을 만나 3학(學)을 배웠다. 3학을 다 통달하고는 주로 구차제정(九次弟定)으로 마음을 다루었으므로 선정(禪定)을 얻고 물은 맑고 깨끗하며 선림(禪林)은 울창하였다. 이리하여 경화(京華)의 교화가 오래일수록 더욱 번성하였다.
하루는 스님들이 낮잠 자는 정오에 갑자기 종각(種閣)에 올라가 종을 급히 쳤다. 스님들이 괴상히 여겨 방에서 나와 그 까닭을 묻자, 승실은 말하였다.
“스님들은 모두 향을 준비하고 법당으로 모이시오.”
스님들이 모이자, 또 승실은 말하였다.
“스님들은 다 마음을 다해 불사를 닦으시오. 모두 『관음경』을 외워 강남(江南)을 구제하시오. 양국(梁國)의 그 절의 강당이 지금 무너지려 하오. 도인과 속인을 불문하고 모두 함께 구제해야 하겠소.”
그 때 양도(楊都)의 강당에는 법을 논의하기 위해 천 명의 도속(道俗)들이 거기 모여 있었다. 이들은 모두 갑자기 서북에서 이상한 향내가 나고, 또 공중에서 독경 소리와 음악 소리가 들리며 구름이 모여 북문으로 들어왔다가 남문으로 바로 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리하여 모두 놀라 강당에서 나와서는 신 신는 것도 잊고 소리나는 곳으로 쫓아갔다. 사람들이 다 나오자 이내 강당은 무너졌다. 이리하여 대중은 다 완전히 그 화를 면하게 되었다.
양(梁)나라 왕은 이 말을 듣고 주(周)나라로 사자를 보내어 이 사실을 알아보고 과연 그러했음을 알았다. 이리하여 양왕은 세 번이나 승실 스님을 청했으나 주왕이 보내 주지 않았으므로, 양왕은 멀리서 예배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다해 보물과 나무껍질의 납의(納衣)와 3의(衣)ㆍ궤(机)ㆍ불자(拂子)ㆍ집물(什物) 등만을 보냈다. 승실은 다른 것을 다 흩어 보시하고 오직 납의와 궤만 간수해 두어 현재도 그 절에 있는데, 스님들이 서로 관리하고 있다.
보정(保正) 3년 7월 18일에 대추원사에서 죽으니 나이는 88세였다. 조야(朝野)가 다 놀라고 한탄했으며, 사람과 하늘이 다 얼굴빛을 변하고 두 나라가 모두 애통해 했다. 그 분묘는 지금 그 동산 안에 있다.

진(陳)의 사문 석혜포(釋慧布)
진(秦)나라 섭산(攝山)에 있는 서하사(栖霞寺)의 사문 혜포(慧布)는 성은 학(郝)씨며 광릉(廣陵) 사람이다. 젊어서부터 지조가 높고 도량이 크며 수행이 뛰어나 왕의 신임을 받았다. 혹 어떤 사람이 극락세계에 가서 나기를 원하면 그는 그에게 말하였다.
“세계의 깨끗한 것이 내 소원이 아니다. 지금 내가 기원하는 것은 중생 교화뿐이다. 무엇 때문에 연꽃 속에서 10겁 동안 쾌락을 누리겠는가? 그보다는 3도(道)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 낫느니라.”
또 나이 70이 되었을 때 대중에게 말하였다.
“나의 목숨은 다시 35년에 있다. 다만 늙고 약했으니 세상에 산들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나는 항상 3보가 없는 변두리에 나서 대중을 위해 불사 짓기를 원할 뿐이다. 잘 계십시오. 부디 노력하십시오.”
이리하여 아무것도 먹지 않고 목숨이 곧 끊어지려 했다. 왕이 의사를 보내 진찰하려 했으나 팔을 오그리고 허락하지 않았고, 심(沈) 황후가 향과 편지를 전했으나 그것도 받지 않았다. 임종 때에는 다음 결사(訣辭)를 남겼다.

오래 사는 것을 기뻐하지 않거니
저녁에 죽은들 무슨 걱정 있으랴?
났지만 아무 난 것 없나니
죽어도 죽는 것 없기 때문이다.

그가 죽기 전에 대지가 잇따라 진동하고 7일 만에 죽었다. 시체를 숲으로 옮기자 산이 또 진동했다. 태사(太史)는 아뢰었다.
“도를 얻은 사람의 별이 바로 지금 사라졌습니다.”
그는 처음 떠나려 할 때 대중에게 말하였다.
“어젯밤 꿈에 두 보살이 나를 맞이하러 왔는데, 하나는 생신(生身)이요 하나는 법신(法身)이었으므로 나는 이내 가기를 승낙했으며, 조금 있다가 모든 하늘이 또 나를 영접하러 왔으나 나는 거기 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허락하지 않았었다.”
흐르는 광명이 간(★) 선사의 방을 환히 비추므로 선사는 괴상히 여겨 나가 보았다. 어떤 두 사람이 혜포의 방으로 들어갔는데, 그들이 바로 보살인 줄 몰랐던 것이다. 다만 전에 이야기한 것과 꼭 맞았을 뿐이었다.
혜포는 단정히 앉아 죽었다. 귀신을 보는 어떤 사람은 번기와 꽃이 절에 가득하고 광명이 불꽃을 살리는 것을 바라보고 그 까닭을 몰랐다가 절에 가서 보고야 비로소 혜포가 죽은 줄을 알았다.
진(陳)나라 정명(禎明) 원년(587) 11월 23일에 본사에서 죽으니 나이는 70여 세였다.

당(唐)의 사문 석지총(釋智聰)
당(唐)나라 윤주(潤州) 섭산(攝山)에 있는 서하사(栖霞寺)의 석지총(釋智聰)은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그는 전에는 양주(楊州)의 백마사(白馬寺)에 있다가 뒤에는 강을 건너 양주 안락사(安樂寺)에 있었다. 왕이 죽은 뒤에 돌아가기를 생각했으나 계책이 없어 강가의 갈대밭 속에 숨어 『법화경』을 외우고 있을 때 7일 동안은 배고프지 않았고, 항상 호랑이가 와서 돌고 있을 뿐이었다.
먹지 않은 지 여러 날을 지나 지총은 호랑이에게 말하였다.
“내 목숨은 잠깐이다. 너나 먹어라.”
호랑이가 갑자기 말하였다.
“천지가 개벽된 뒤로 그런 일은 없습니다.”
갑자기 한 80쯤 되어 보이는 노인이 겨드랑 밑에 배를 끼고 와서 말했다.
“스님은 강을 건너시려는 모양인데, 서하사에 가서 계시려거든 이 배를 타십시오.”
호랑이 네 마리가 한꺼번에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본 지총은 말하였다.
“위난을 구제하려면 바로 지금이다. 이 네 마리 호랑이를 맞이하리라.”
이리하여 남쪽 언덕에 이르자 노인과 배는 간 곳이 없었다. 지총은 네 마리 호랑이를 데리고 서하사로 가서 사리탑 서쪽에 있었다. 지총은 거닐기도 하고 참선도 하면서 맹세코 눕거나 자지 않았으므로 80명 대중이 모두 절 밖에 나가지 않았다. 무슨 나쁜 일이 있을 때는 호랑이 한 마리가 절에 들어와 큰 소리로 대중에게 알렸으므로 이 때문에 모두 놀라 깨달았으니, 항상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의 떳떳한 법이 되었다.
정관(貞觀) 23년(649) 4월 8일에 음식을 조금 먹고 지관사(止觀寺)에 가서 대중에게 하직을 고한 뒤에 본방으로 돌아와 편안히 앉아 죽으니, 이상한 향기가 온 단양(丹陽)에 퍼져 넘쳤다. 나이는 99세였다.[이상 네 가지 증험은 『당고승전(唐高僧傳)』에 나온다.]

당(唐)의 거사 서선재(徐善才)
당(唐)나라 무덕(武德) 초년에 예천현(醴泉縣)의 서선재(徐善才)는 일생 동안 항상 재계를 닦고 『관음경』을 천 번 이상 외웠다. 경사(京師) 연흥사(延興寺)의 현완(玄玩) 율사 곁에서 공덕을 닦기 위해 『일체경』을 삼가 조성했다.
무덕 2년(619) 11월에 일이 있어 집으로 돌아오다가 길에서 오랑캐의 도적을 만나 여주(驪州) 남쪽 경계에 있는 저들의 소굴로 잡혀갔다. 잡혀온 수천 명을 모두 결박하고 큰 벼랑으로 끌고 가서 사람을 시켜 차례로 죽여 그들의 머리는 다 벼랑 밑으로 떨어졌다. 선재는 이 광경을 보자 자신도 면하지 못할 줄을 확실히 알고는 오직 관세음보살만 생각하면서 잠깐도 그치지 않았다.
선재의 차례가 되었다. 처음에 칼로 내리칠 때는 그 칼을 보았으나 그 다음부터는 아무것도 몰랐다. 칼에 치일 때는 신시(申時)쯤이었는데, 저녁에 깨어나자 자신은 깊은 시냇가에 있는 나뭇가지 위에 있고, 언덕과는 3백여 자쯤 떨어져 있었다. 선재는 혼자 생각했다.
‘나는 왜 여기 있는가?’
그는 비로소 오늘 죽게 되었던 일을 깨달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는 무슨 인연으로 죽지 않고 완전한 몸으로 나무 위에 있을까?’
그리고는 손으로 목을 만져 보았을 때 조금 아플 뿐, 조금도 다친 데는 없었다. 그래서 관세음보살의 힘으로 신명이 완전해진 것을 알았다.
그 때는 보름이라, 하늘은 맑고 달은 밝은데 옷이 없고 또 며칠을 굶었기 때문에 몹시 주림과 추위를 느꼈다. 이튿날 아침에 나무에서 내려와 시내를 끼고 동으로 2리쯤 가서 그 시내 안에서 한 벌의 양가죽옷과 한 켤레의 신을 얻어 그것으로 추위를 면했다. 다시 1리쯤 가서는 한 발우에 복숭아와 대추를 얻었는데, 그것은 푸르고 붉고 흰 것이 마치 방금 딴 것과 같았으며, 한 되 남짓한 그것을 먹고서 주림을 면했다. 관세음보살의 신력이 아니고서야 어찌 한 겨울에 싱싱한 복숭아와 대추를 얻을 수 있었겠는가? 이제 주림과 추위를 면하고 또 기력이 회복되어 차츰 남쪽 언덕까지 올라가 뒤를 돌아보았다. 도적의 진영은 몇 리를 뻗어 있었고, 사람과 짐승의 시끄러운 소리는 아직 모두 잠이 들지 않은 것 같았다.
선재는 남쪽 언덕에 오기는 했으나 도적이 쫓아올까 걱정되어 집을 향해 급히 달려갔다. 50리쯤 가서야 도적이 멀어진 것을 알고 심신이 다 안정되어 어떤 나무 밑에서 쉴 때, 가부하고 앉아 관음을 염송(念誦)하다가 며칠 동안 시달린 끝이라 어느 곁에 4경(更)까지 앉아 쉬었다. 갑자기 정신을 차려 눈을 뜨니 커다란 푸른 이리 한 마리가 선재 앞에 쭈그리고 앉아 그 입으로 선재의 코를 떠받치고 있었다. 선재는 이것을 보자 다시 눈을 감고 생각했다.
‘만일 이것이 내 원수이거든 나를 잡아먹고 묵은 원한을 풀음으로써 각각 맺힌 원한을 버리고 인자한 마음을 내어라. 또 만일 관세음보살이시면 이 제자를 구제해 편안하게 하소서.’
이렇게 생각하고 눈을 떴을 때는 그것은 자취도 보이지 않았다.
알아야 한다. 모든 부처님의 자비 선근의 힘은 인연을 따라 감응을 나타내므로 그 이익이 무궁한 것이다. 지금에 경전을 외우고도 그 힘을 얻지 못하면 그것은 실로 경박한 마음 때문이요, 또 과거와 현재에 지은 악이 서로 돕기 때문에 느끼기 어려운 것이니라.
선재가 무사히 집에 돌아가 그 남은 복숭아와 대추를 도속(道俗)들에게 보이니, 그들은 다 거짓 아닌 사실임을 알았다.
039_0972_c_04L述意部 菩薩部 流水部
商主部 獸王部
述意部第一
夫慈悲弘力之施祈福紓患之請至可感列聖同然而觀世大士獨見襃聞是以投火有必糜之軀海漂無或生之命但瞬息之頃言念歸向洪海可竭烈火飛涼或臨刀項上刃不傷或墜墯深坑全身無損或枷禁桎梏散誕形軀如是得力備鑑難若懇誠克己必感靈徵若浮漫惰情艱危叵救也
菩薩部第二
如僧伽羅剎經云有菩薩在山心端坐思惟不動鳥孵頂上覺鳥在懼卵墜落身不移搖檢坐而行彼處不動及鳥生翅但未能飛終不捨又彌勒所問本願經云佛言阿難本求道時勤苦無數過去世時有王太號曰寶華端正姝好從園觀出道見一人身患病癩見問病人以何等藥卿病病者荅曰得王身髓血等以塗我身其病乃愈太子聞已卽自破身骨髓血等以與病者至心施與意無悔恨其王太子者卽我身是四大海水尚可斗量我身骨髓血等不可稱求正覺故又大集經云爾時曠野菩薩現爲鬼散脂菩薩現爲鹿身慧炬菩薩現獼猴身離愛菩薩現羖羊身盡漏菩薩現鵝王身如是五百諸菩薩等各現受種種諸身其身悉出大香光一一菩薩手執燈明爲供養十方諸從七佛已來與如是佛同爲眷屬受持五戒發菩提心爲欲調伏一切衆令發菩提故受此身又雜寶藏經云昔者有一羅漢道人畜一沙彌知此沙彌卻後七日必當命終與假歸家至七日頭勅使還來沙彌辭師卽便歸去於其道中見衆蟻子隨水漂流命將欲絕生慈悲心自脫袈裟盛土堰水而取蟻子置高燥處遂悉得活至七日頭還歸師所師甚怪之尋卽入定以天眼觀知其更無餘福得爾以救蟻子因緣之故七日不死得延命長又治故塔亦得延命又治補伽藍牆壁泥孔亦得延命
流水部第三
如金光明經云爾時流水長者於天自在王國內治一切衆生患令得平復時長者子有妻名曰水空而生二子一名水空二名水藏時長者子將是二子次第游行到一大空澤中見諸禽獸多食血肉一向馳奔長者言是諸禽獸何因緣故一向馳走時長者子遂便隨逐見有一池其水枯涸於其中多有諸魚長者見魚生大悲心時有樹神示現半身作如是言善哉男子此魚可愍汝可與水是故號汝名爲流水長者問神此魚頭數爲有幾所樹神荅言其數具足足滿千爾時流水聞是數已倍生悲心時此空池爲日所曝是十千魚將入死門是時長者四方求水了不能得見有大樹尋取枝葉還到池上與作蔭涼作蔭涼已復更疾走遠至餘處見一大河名曰水生有諸惡人爲捕此魚決棄水不令下過然其決處懸嶮難補時長者子速至王所說其因緣唯願大王借二十大象令得負水濟彼魚命爾時大王卽勅大臣速疾供給自至廏中隨意取是時流水及其二子將二十大從治城人借索皮囊至彼上流決盛水象負疾至空澤池寫置中水遂瀰滿時長者子於池邊仿佯而行是魚亦隨偱岸而行時長子復作是念是魚何緣隨我而行必飢火所惱從我求食爾時流水告至家啓父家中可食之物悉載上急速來還爾時二子如父教勅至啓祖說如上事爾時二子收食象還至父所長者心喜從子取食散池中與魚食已令其飽滿復思經中若有衆生臨命終時得聞寶勝如名號卽生天上卽便入水作如言南無過去寶勝如來十號名字復是魚解說如是甚深妙法十二緣爾時流水及子還家復於後時賓客醉臥爾時其地卒大震動十千魚同日命終卽生忉利天旣生天已念報恩爾時十千天子從忉利天下至長者家長者子在樓上睡是十千天子以十千眞珠天妙瓔珞置其頭復以十千置其足邊復以十千置右脅邊復以十千置左脅邊雨曼陀羅華摩訶曼陀羅華積至于膝種天樂出妙音聲閻浮提中有睡眠皆悉覺寤流水長者亦從睡寤十千天子於空游行於王國內皆雨天華復至澤池復雨天華便從此還忉利宮
商主部第四
如大悲經云佛告阿難過去之世大商主爲採寶故將諸商人入於大彼所乘船衆寶悉滿至海中閒其船卒壞彼商人心懷怖畏極生憂其中或有得船版者或有浮者命終者我於爾時作彼商主在大海用以浮囊安隱而度有五人商主言大士商主唯願惠施我等無畏說是語已爾時商主卽告之言諸丈勿生怖畏我令汝等從此大海隱得度阿難彼時商主身帶利劍作是念大海之法不居死屍如其我今自捨身命此諸商人必能得度大海之難作是念已卽喚商人置己身令善捉持彼諸商人有騎背者抱肩者有捉䏶者爾時商主爲欲施彼無怖畏故興大悲心起大勇猛以利劍斷己命根速取命終于時大海漂其死屍置之岸上五商人便得度海安隱受樂平吉無難還閻浮提阿難彼時商主豈異人乎我身是也五商人者今五比丘是也是五比丘昔於大海而得度脫今復於此生死大海而得度脫安置無畏涅槃彼岸獸王部第五如大智度論云乃往過去無量阿僧祇有大林樹多諸禽獸野火來燒三邊俱起唯有一邊而隔一水衆獸窮逃命無地佛言我於爾時爲大身多力鹿以前腳跨一岸以後腳跨一令衆獸蹈背上而度皮肉盡壞慈悲力忍之至死最後一兔來氣力已竭自强努力忍令得過過已脊折墯水而死如是久有非但今也前得度者今諸弟子是最後一兔須跋陀佛世世樂行精進今猶不息又賢愚經云佛過去夂遠世時時世飢儉如來因地慈救衆生作大魚身長五百由旬國人須其肉者無問人畜皆來取噉取已還生經於十二年施其肉血又受生經云昔者菩薩曾爲鼈王長大海化諸同類子民群衆皆修仁王自奉行慈悲救護愍於衆生如母愛子其海深長邊際難限而悉周至靡不更歷於時鼈王出於海外邊臥息積有日月其背堅燥猶如陸賈人遠來因止其上破薪然火煮飯食繫其牛馬車乘載石皆著其上鼈王欲趣入水畏墯不仁適欲强忍痛不可勝便設權計入淺水處除滅火毒不危衆賈衆賈恐怖潮卒漲悲哀呼嗟歸命諸天唯見救濟鼈王心益愍之因報賈人曰愼莫恐怖吾被火焚故捨入水欲令痛息今當相安終不相危衆賈聞之知有活望俱時發聲言南無佛鼈興大慈還負衆賈移在岸邊衆人得脫靡不歡喜遙稱鼈王而歎其德尊爲橋梁多所過度行爲大舟超越三界設得佛道當復救脫生死之厄鼈王報曰善哉善哉當如來言各自別去佛言時鼈王者我身是也五百賈人者五百弟子舍利弗等是又正法念經云若有衆生見犯法者應受死苦以財贖命令其得脫不求恩報命終生常歡喜天從天退還受人身不遭王難若有衆生持戒見大火起焚燒衆生以水滅火救諸衆生命終生行道天受種種樂又如度狗子經說有一國穀米踊人民飢餓有沙門入城分衛遍門室無所一獲次至長者大豪貴得麤惡飯適欲出城門中逢一射獵屠兒抱一狗子持歸欲殺見沙門歡喜前爲作禮沙門呪願老壽長生沙門知有狗子疑欲殺之故問其人何所齎荅曰空行無所獲持沙門又吾已見之何爲藏匿殺生之罪爲不善願持我食貿此狗子令命得卿福無量其人荅曰不能相與故行求家門共食卿此小飯何所足乎沙門殷勤曉喩請之其人觝突不肯隨言沙門又言設不肯者可以示我其人卽出以示沙門沙門擧飯以飼狗子以手摩抆祝願淚出卿罪所致得是犬身不得自在見殺食噉使汝世世罪滅福生離狗子身得生爲人所在遇法三寶自然狗子得食善心生焉踊躍歡喜知自歸依人將還家屠殺共食狗子命過卽生豪貴大長者家適生墯地便有慈心彼沙門分衛次到長者門裏分衛時長者子見彼沙門憶識本緣便前稽首禮沙門足請前供養百味飮食前白父母今我欲逐此大和尚奉受經戒作弟子父母愛重不肯聽之我今一門有汝一子當以續後家門之主因便欲棄家而去小兒啼泣不肯飮不欲聽我便自就死父母見然便聽令去隨師學道除去鬚髮被三法諷誦佛經深解其義便得三昧不退轉開化一切發大道意佛世難經道難聞能與相値無不蒙度生尚有得道豈況於人寧不獲果復缺犯還生慚愧白淨已來黑垢自又雜阿含經云爾時世尊告諸比丘過去世時有一鳥名曰羅婆爲鷹所捉飛騰虛空於空鳴喚言我不自覺忽遭此難我坐捨離父母境界而游他處故遭此難如何今日爲他所囚不得自在鷹語羅婆汝當何處自有境界而得自在羅婆荅言我於田耕壟中自有境界足免諸難是爲我家父母境界鷹於羅婆起憍慢言汝令去還耕壟中能得脫不於是婆得脫鷹爪還到耕壟大塊之下住止處然復於塊上欲與鷹鬪鷹則大怒彼是小鳥敢與我鬪瞋恚極盛峻飛直搏於是羅婆入於塊下鷹鳥飛勢臆衝堅塊碎身卽死羅婆鳥深伏塊下仰說偈言鷹鳥用力來 羅婆依自塊 乘瞋猛盛力致禍碎其身 我具足通達 依於自境界伏怨心隨喜 自觀欣其力 設汝有兇愚百千龍象力 不如我智慧 十六分之一觀我智勝殊 摧滅於蒼鷹頌曰含識皆畏死 有命懼嶮危 如魚困池涸難逢流水湄 親疏皆父母 何得輒相欺慈悲救厄苦 福報自然隨
感應緣 略引一十五驗
秦沙門釋道冏 晉居士呂竦
晉居士徐榮 晉居士張崇
晉將軍王懿 晉嚴猛婦
晉周子長 宋沙門竺慧慶
宋沙門釋曇無竭 宋沙門釋法進
周沙門釋慧瑱 周沙門釋僧實
陳沙門釋慧布 唐沙門釋智聰
唐居士徐善才
秦沙門釋道冏鄕里氏族已載前記姚秦弘始十八年師道懿遣至河南霍山採鍾乳與同學道朗等四人共持炬探究入且三里遇一深流橫木而過冏最先濟後輩墜木而死又滅冥然昏闇冏生念已盡慟哭而猶故一心呼觀世音誓願若蒙出供百人會表報威神經一宿而見小光炯然狀若熒火儵忽之閒穴中盡明於是見路得出巖下由此信寤彌深屢睹靈異元嘉十九年臨川康王作鎭廣陵請冏供養其年九月西齋中作十日觀世音齋已得九日夜四更盡衆僧皆眠冏起禮拜還欲坐禪忽見四壁有無數沙門悉半身見一佛蠡髻分明了了有一長人著平上幘箋布袴褶毛把長刀貌極雄異捻香授道冏不肯受壁中沙門語云冏公可爲受香以覆護主人俄而霍然無所復見當爾之時都不見衆會諸僧唯睹所置釋迦文行像而已
晉呂竦字茂高兗州人也寓居始豐其縣南溪流急岸峭迴曲如縈又多大石白日行者猶懷危懼竦自說父當行溪中去家十許里日向暮天忽風雨晦冥如漆不復知東西自分覆溺唯歸心觀世音且誦且念須臾有火光來岸如人捉炬者照見溪中了了遙得歸家火常在前導去船十餘步竦後與郗嘉賓周旋郗所傳說晉徐榮者琅邪人當至東陽還經定舟人不慣誤墯洄澓中游儛濤波垂欲沈沒榮無復計唯至心呼觀世斯須閒如有數十人齊力引船者踊出澓中還得平流沿江還下日已向暮天大陰闇風雨甚駛不知所向而濤浪轉盛榮誦經不輟口有頃望見山頭有火光赫然迴柁趣之徑得運浦擧船安隱旣至亦不復見光侶異之疑非人火明旦問浦中人夜山上是何火光衆皆愕然曰昨風雨如此豈如有火理吾等竝不見了其爲神光矣榮後爲稽府督護謝敷聞其自說如此與榮同船者有沙門支道蘊謹篤士也具見其事後爲傅亮言之與榮所說同
晉張崇京兆杜陵人也少奉法晉太元中苻堅旣敗長安百姓有千餘家南走歸晉爲鎭戍所拘謂爲游寇殺其男丁虜其子女崇與同等五人手腳杻械持身出坑埋築至腰各相去二十步明日將馳馬射之以爲娛崇慮望窮盡唯潔心專念觀世音夜中械忽自破上得離身因是便走遂得免脫崇旣腳痛同等路經一寺乃復稱觀世音名至心禮拜以一石置前發誓願言今欲過江東訴亂晉帝理此冤魂救其妻息若心願獲果此石當分爲二崇禮拜已石卽破焉崇遂至京師發白虎樽具列冤氏帝乃悉加宥已爲人所略賣者皆爲編戶生道人目所親見
晉王懿字仲德太原人也守車騎將軍世信奉法父苗苻堅時爲中山太守丁零所害仲德與兄元德攜母南歸登陟峭嶮飢疲絕糧無復餘計唯歸心三寶忽見一童子牽靑牛見懿等飢各乞一飯因忽不見積雨大水懿前望浩然不知何處爲淺可得揭俄有一白狼旋繞其前過水而返似若引導如此者三於是逐狼而渡裁至膝俄得陸路南歸晉朝王丘尚書爲徐州剌史嘗欲設齋宿昔灑埽敷陳香華盛列經像忽聞法堂有經唄聲淸婉流暢懿遽往觀見有五沙門在佛坐前威容偉異神儀秀懿知非凡僧心甚歡敬沙門迴相瞻盻意若依然音旨未交忽而竦身飛空而去親表賓僚見者甚衆咸悉欣踊倍增信寤右此四驗出冥祥記
晉時會稽嚴猛婦出採薪爲虎所害後亡猛行至蒿中忽見云君今日行必遭不善我當相免也旣而俱前逢一虎跳梁向猛婦擧手指麾狀而遮護須臾有二胡人荷戟而過婦因指之虎卽搏胡壻得免也右一驗出異苑錄
晉周子長僑居武昌五丈浦東堈頭咸康三年子長至寒溪浦中愁家去五丈數里合暮還五丈未達減一里先是空堈忽見四帀瓦屋當道卒便捉子長頭子長曰我是佛弟子何故捉我吏問曰若是佛弟子能經唄不子長先能誦四天王及鹿子經便爲誦之三四過捉故不置知是鬼便罵之曰武昌癡鬼語汝我是佛弟爲汝誦經數偈故不放人也捉者便放不復見屋鬼故逐之過家門前鬼遮不得入門亦不得作聲而心將鬼至寒溪寺中過子長便擒鬼胸罵曰武昌癡鬼今當將汝至寺中和尚前了之鬼亦擒子長胸相拖度五丈塘西行諸鬼謂捉者曰放爲西將牽我入寺中捉者已放子長故復語後者曰寺中正有道人輩乃未肯畏之後一鬼小語曰汝近城東看道人面何以得敗便共大笑子長比達家三更盡右一驗出靈鬼志
宋沙門竺慧慶廣陵人也經行修明元嘉十二年荊楊大水川陵如一將入廬山船至小而暴風忽起同旅已得依浦唯慧慶舫未及得泊飄颺中江風疾浪踊靜待淪覆慶正心端念誦觀世音經洲際之人望見其舫迎飆截流如有數十人牽挽之者到上岸一舫全濟
宋元嘉初中有黃龍沙彌曇無竭者誦觀世音經淨修苦行與諸徒屬二十五人往尋佛國備經荒儉貞志彌旣達天竺舍衛路逢山象一群齎經誦念稱名歸命有師子從林中象驚奔走後有野牛一群鳴吼而將欲加害竭又如初歸命有大鷲飛來牛便驚散遂得剋免 右此二驗出冥祥記
宋高昌有釋法進或曰道進姓唐州張掖人幼而精苦習讀有超邁之爲沮渠蒙遜所重遜卒于景環爲胡寇所破問進曰今欲轉掠高昌可剋不進曰必捷但憂災餓耳迴軍卽定後三年景環卒弟安周續立歲荒餓死者無限周旣事進進屢從求乞以賑貧餓國蓄稍竭進不復求乃淨洗浴取刀鹽至深窮窟餓人所聚之處次第授以三歸便挂衣鉢著投身餓者前云施汝共食衆雖飢猶義不忍受進卽自割肉柱鹽以啖之兩股肉盡心悶不能自割因語餓人云汝取我皮肉猶足數日若王使來必當將去但取藏之餓者悲悼無能取者須臾弟子來至王人復到擧國奔赴號噭相屬因輿之還宮勅以三百斛麥以施飢者別發倉廩以賑貧民至明晨乃絕出城北闍維煙焰衝天七日乃歇屍骸都盡舌不爛卽於其處起塔三層樹碑于右此一驗出梁高僧傳
周上黨元開府寺釋慧瑱不知氏族奉律貞礭禪懺爲業會周建德六年國滅三寶瑱抱持經像隱于深山賊欲劫初未覺也忽見一人形長丈美鬚顏具好衣服乘白馬朱騣自山頂來徑至瑱前下馬而謂曰今夜賊至師可急避瑱居懸崖之下絕無餘道疑是山神乃曰今佛法毀滅道容身無地故來依投檀越今有賊正可於此取死更何逃竄神曰師旣遠投弟子弟子亦能護師正爾住此遂失所在當夜忽降大雪可深丈餘雪深道隔遂免賊難後晴路開群賊重來神遂告山下諸村曰賊欲劫瑱師汝等急往共救乃各嚴器仗入山拒擊賊便驚散從此每日瑱常憑神安業山阜不測其終
周京師大追遠寺釋僧實俗姓程陽靈武人也幼懷雅亮淸卓不群孝文大和末年從京至雒因遇勒主三藏授以禪法三學雖通偏以九次調心故得定水淸澄禪林蓊蔚於是陶化京華夂而逾盛忽於一日正午僧寢之時自上樓鳴鍾急衆僧出房怪問所以實告僧曰人各速備香火急赴集堂僧旣集已又告僧曰人各用心修理佛事齊誦觀音以救江南梁國其寺講堂欲崩恐損道俗宜共救厄當爾之時楊都講堂正論法集道俗向千充滿其中忽聞西北異種香煙及空中經聲伎樂雲屯從堂北門而入直出南門合堂驚出靴履忘共逐聽聲人旣出盡堂欻摧倒衆得全免斯危難奏聞梁主勅使問果如實救梁主三度奉請周主不梁主遙禮備盡致敬大送珍寶及樹皮納三衣机拂什物等禪師餘物竝皆散施唯留納机等見在禪林寺僧互掌之以保定三年七月十八日卒於大追遠寺春秋八十有八朝野驚嗟人天變色哀慟二國遺墳現在苑內陳攝山棲霞寺沙門惠布姓郝廣陵人少懷遠操性度虛梗志行罕儔爲君王所重或見諸人樂生西方者告云方土乃淨非吾願也今所祈化度衆生如何在蓮華中十劫受樂未若三塗處苦救濟也年至七十與衆別云布命更至三五年在但老困不能行道住世何益常願生邊地無三寶處爲作佛事去也幸願好願自努力於是絕穀不食命將欲下勅令醫診之縮臂不許沈皇后欲傳香信又亦不許臨終遺訣曰長生不喜夕死無憂以生無所生無所滅故也未終前大地連動七日便移屍就林山地又動太史奏云道之人星滅矣時以當之初將逝時告衆前云昨夜有二菩薩來迎一是生身一是法身吾已許之尋有諸天又來迎接以不願生故不許耳流光照於侃禪師戶侃時怪光盛出戶觀二人向布房中不知是聖人也往述之恰然苻合言已端坐而化見鬼者望見幡華滿寺光明騰焰測其故入山視之乃知布公去世也陳禎明元年十一月二十三日卒于本春秋七十有餘
唐潤州攝山棲霞寺釋智聰未詳何許人住楊州白馬寺後度江住楊州安樂寺大業旣崩思歸無計隱江荻中誦法華經七日不飢常有虎繞之而已不食已經數日聰曰吾命須卿須可食虎忽發言曰造天立地無有此理忽有一翁年可八十腋下挾船翁曰師欲度江至棲霞住者卽上船四虎一時目中淚出聰曰救危扶難正在今日可迎四虎於是利涉往達南岸船及老人不知所在聰領四虎同往棲霞舍利塔西經行坐禪誓不寢臥衆徒八十咸不出院若有凶事一虎入寺大聲告衆由此驚寤每以常式至貞觀二十三年四月八小食訖往止觀寺與衆辭別還歸本房安坐而卒異香充溢丹陽一郭年九十九矣右此四驗出唐高僧傳
唐武德初中有醴泉縣人姓徐名善一生已來常修齋戒誦念觀世音過逾千徧每在京師延興寺玄琬律師所修營功德敬造一切經至武德二年十一月因事還家道逢胡賊被捉將去至豳州南界胡賊凶毒所捉得漢數千人各被反縛將向洪崖差人次第殺之頭落懸崖賢者見前皆殺定知不免唯念觀音剎那不輟次到賢者初下刀時自見下刀及至斫時心不覺惺當殺之時日始在申至於初夜覺身在深㵎樹枝上坐岸三百餘尺賢者便自私念我何故在此良久始知今日被殺何因不死身全在樹便以手摩項覺項微痛無片傷卽知由念觀音得全身命時十五日天時月朗其身無衣兼不得食經由數日極覺飢寒旦漸下樹偱㵎東行二里於其㵎內拾得一領羊裘及得一量鞋靺得著免寒行一里便得一魁桃棗靑翠赤白似新摘來可有升餘得食免飢自非觀音神力豈能仲冬得新桃棗旣免飢得充氣力漸上南坡到南岸上顧北看遙見賊營數里人畜聲鬧猶未眠臥賢者雖到南岸恐賊來趁望家急行可行五十里知賊漸遠身心寧泰在一樹下歇息跏趺誦念身勞日久不覺坐至於四更忽寤開眼一靑狼偉大向賢者前蹲坐將口拄賢者鼻賢者見已還閉目作念云實我讎願食我身以償宿殃各捨怨結共發仁慈若是觀音願救弟子令得安泰作此語已開眼觀視不見遺當知諸佛慈善根力隨緣感現利益無窮今時有誦不得力者良由輕復由過現宿惡相資所以難感者平安到家幷將殘桃棗呈示道俗知實不虛道年幼自見琬師說之耳
法苑珠林卷第六十五
甲辰歲高麗國分司大藏都監奉勅彫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