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변행심소와 별경심소의 두 가지 분위(分位)에 관하여 말하였다. 그러면 선위(善位)의 심소의 양상은 어떠한가?1) 게송(『유식삼십송』의 제11)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017_0551_c_04L已說遍行、別境二位,善位心所,其相云何?頌曰:
선심소는 신(信)ㆍ참(慚)ㆍ괴(愧)와 무탐(無貪) 등 세 가지 선근2)과 근(勤)ㆍ안(安)ㆍ불방일(不放逸)과 행사(行捨) 및 불해(不害)이다.
017_0551_c_06L善謂信、慚、愧 無貪等三根 勤、安、不放逸
行捨及不害。
논하여 말한다. 오직 선(善)으로서 심왕과 함께하는 것을 선심소라고 이름한다. 신(信)ㆍ참(慚) 심소 등 반드시 열한 가지가 있다.무엇을 ‘신(信)심소’3)라고 하는가? 참으로 존재함[實]과 덕(德) 및 능력[能]을 깊이 인정하고 좋아하며 원하여 심왕을 청정하게 함을 체성으로 삼고, 불신(不信)을 다스리고 선(善)을 좋아함을 업으로 삼는다.
그런데 신(信)심소를 구별하면 대략 세 종류가 있다. 첫째는 참으로 존재함을 믿는 것이니, 일체법의 참다운 현상[事]과 본질[理]에 대해서 깊이 믿어 인정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덕이 있음을 믿는 것이니, 삼보의 진실되고 청정한 덕을 깊이 믿고 좋아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능력이 있음을 믿는 것이니, 모든 세간과 출세간의 선에 대하여 힘이 있어서 능히 얻고 능히 성취한다4)고 깊이 믿어서 희망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것을 믿지 못하는 마음을 다스리고, 세간과 출세간의 선을 닦고 증득함을 즐기고 좋아한다.
017_0552_a_01L【답】 이것은 자성이 매우 맑아서, 능히 심왕 등을 청정하게 한다. 심왕이 뛰어나기 때문에 심정(心淨)이라는 명칭을 건립한다. 물을 맑히는 구슬[水淸珠]이 능히 탁한 물을 청정하게 하는 것과 같다. 참(慚)심소 등은 선(善)이지만, 청정을 자상으로 하지 않는다. 이것은 청정하게 함을 자상으로 한다.7) 그것에 혼동되는 과실이 없다.
또한 모든 잡염법은 각기 따로 자상이 있다. 오직 불신만이 있어서, 자상이 혼탁하고 또한 능히 다른 심왕과 심소도 혼탁하게 한다. 매우 더러운 물건은 스스로도 더럽고 다른 것도 더럽히는 것과 같다. 신(信) 심소는 바로 그것에 뒤집어 배대한 것이기 때문에 청정함을 자상으로 한다.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8) 신심소는 즐기고 좋아함을 자상으로 한다고 말한다. 마땅히 세 가지 성품에 통해야 하고, 자체[體]가 곧 욕구하는 것이어야 한다. 또한 고제와 집제는 신심소의 인식대상이 아니어야 한다.9)
017_0552_a_05L有說信者愛樂爲相。應通三性,體應卽欲,又應苦、集非信所緣。
다음과 같은 국집된 견해가 있다.10) 신심소는 수순함을 자상으로 한다고 말한다. 마땅히 세 가지 성품에 통해야 하고, 곧 승해ㆍ욕(欲) 심소가 되어야 한다.11) 만약 분명히 지녀서 수순하다면 승해심소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즐겨서 수순하다면, 욕심소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둘의 자체에서 떠나서는 수순의 모습이 없기 때문이다. 이에 의거해서 마땅히 알라. 심왕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 신(信)심소이다.
무엇을 ‘참(慚)심소’12)라고 하는가? 자신과 법의 힘에 의지해서 현인(賢人)13)과 선법(善法)14)을 받들고 존중함을 체성으로 삼고, 무참(無慚)을 다스리고 악행을 멈추게 함을 업으로 삼는다. 자신과 법을 존귀하게 여기는 증상력에 의지해서, 현인과 선법을 받들고 존중하며 잘못을 부끄럽게 여겨서, 무참을 다스리고 여러 악행을 멈추게 한다.
무엇을 ‘괴(愧)심소’15)라고 하는가? 세간의 힘에 의지해서 포악함과 악법을 가볍게 여기고 거부함을 체성으로 삼고, 무괴(無愧)를 다스리고 악행을 멈추게 함을 업으로 삼는다. 세간에서 꾸짖고 싫어하는 증상력에 의지해서 포악함과 악법을 가볍게 여기고 거부하고, 잘못을 부끄럽게 여기며 무괴를 다스리고 여러 악업을 멈추게 한다.
잘못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은 이 둘의 공통된 양상이다. 따라서 여러 성스러운 가르침16)에서 가정적으로 자체[體]로 삼는다.17)만약 부끄럽게 여기는 것을 고집해서 둘을 별개의 양상으로 삼으면,18) 참(慚)ㆍ괴(愧) 심소의 자체가 차별이 없어야 한다. 그러면 곧 이 두 법은 상응하지 않아야 한다.19) 수(受)ㆍ상(想) 심소 등에 이러한 뜻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자신과 타인에 기다림으로써 둘의 개별적인 양상을 건립한다고 말하면, 참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어야 하고, 그러면 문득 성스러운 가르침20)에 위배된다. 만약 참(慚)ㆍ괴(愧) 심소가 참된 것으로서 개별적으로 일어난다고 인정하면, 다시 논서에서 열 가지는 착한 마음에 두루한다고 말한 것21)에 위배된다.
017_0552_b_01L【문】 (현인과 선법을) 존중하며 (악과 잡염법을) 가볍게 여기고 거부하는 것이 만약 둘의 개별적인 양상이라고 말하면, 인식대상이 다르므로22) 함께 생겨나지 않아야 한다. 둘의 과실이 이미 같은데,어째서 치우쳐서 힐책하는가?23)【답】 누가 두 법의 인식대상이 다르다고 말했는가?
【문】 어째서 우리에게도 역시 이러한 뜻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가?【답】 그대는 참ㆍ괴 심소는 자상이 같다고 집착하는데, 어떤 논리로써 능히 앞에서 시설한 비판을 부정할 수 있겠는가?
017_0552_b_05L豈不我說亦有此義?汝執慚、愧相旣同。何理能遮前所設難?
그런데 성스러운 가르침에서 자타(自他)를 돌아본다고 말한 것은 자신과 법을 자기[自]라고 이름하고, 세간을 다른 것[他]이라고 이름한다. 혹은 곧 이 가운데에서 선을 받들고 악을 거부한다고 말한다. 자신을 이익되거나 해롭게 하는 것에 대해서 자기 또는 다른 것이라고 이름하기 때문이다.24)
(『삼십송』의 제11게송에서) ‘무탐(無貪) 등’이라고 한 데서 ‘등(等)’은 무진(無瞋)과 무치(無癡)를 가리킨다. 이 셋을 근(根)이라고 이름한 것은 선을 일으키는 것이 뛰어나기 때문이고, 세 가지 불선근을 가까이 다스리기 때문이다.
017_0552_b_09L無貪等者,等無瞋、癡。此三名根,生善勝故,三不善根近對治故。
무엇이 ‘무탐(無貪)심소’25)인가? 윤회의 삶[有]26)과 그 원인[有具]27)에 대해서 탐착하지 않음을 체성으로 삼고, 탐착을 다스려서 선을 행함을 업으로 삼는다.
017_0552_b_11L云何無貪?於有、有具無著爲性,對治貪著,作善爲業。
무엇이 ‘무진(無瞋)심소’28)인가? 고통과 고통의 원인[苦具]에 대해서 성내지 않음을 체성으로 삼고, 성냄을 다스려서 선을 행함을 업으로 삼는다. 착한 심왕이 일어날 때에는, 따라서 어떤 대상을 반연해도 모두 윤회의 삶[有] 등29)에 대해서 탐착하거나 성내는 일이 없다. 윤회의 삶 등에 상대해서[觀]30) 건립한다. 반드시 그것만을 반연하는 것은 아니다.31) 앞에서 참(慚)ㆍ괴(愧) 심소를 선ㆍ악에 상대해서 건립한 것과 같다. 따라서 이 두 가지(무탐ㆍ무진)는 모두 착한 마음에 두루한다.
무엇이 ‘무치(無癡)심소’32)인가? 모든 본체[理]와 현상[事]에 대해서 명료하게 이해함을 체성으로 삼고, 우치함을 다스려서 선을 행함을 업으로 삼는다.
017_0552_b_16L云何無癡?於諸理事明解爲性,對治愚癡,作善爲業。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33) 무치심소는 혜(慧)를 체성으로 한다. 『집론』에서 말하기를 “이것은 과보[報]ㆍ가르침[敎]ㆍ증득[證]ㆍ지혜[智]를 결택함을 자체로 한다”34)고 한다. 생득의 지혜[生得]ㆍ문혜(聞慧)ㆍ사혜(思慧)ㆍ수혜(修慧)에 순차적으로 같다고 말한다.35) 모두 결택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지혜이지만 선품(善品)에 뛰어난 능력[功能]이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번뇌심소 중의 여러 견해[見]와 같기 때문에36) 다시 별도로 설명한다.
017_0552_c_01L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37) 무치심소가 곧 혜(慧)는 아니고 별도의 자성이 있어야 한다. 바로 무명에 상대하여 무탐ㆍ무진 심소처럼 선근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논서에서 말하기를 “큰 자비는 무진ㆍ무치 심소에 포함되고, 근(根)38)에 포함되는 것은 아니다”39)라고 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 논서에서 무치심소는 혜(慧)를 체성으로 한다고 말하면, 큰 자비[大悲]는 힘[力]40) 등처럼 혜근(慧根) 등의 근(根:22근)에 포함되어야 한다.
또한 만약 무치심소는 별도의 체성이 없다고 말하면, 불해(不害)심소 등과 같이 자체가 있는 것[實物]이 아니어야 한다. 그러면 문득 논서에서 “열한 가지 선의 심소 중에서 셋41)은 세속유(世俗有)이고, 나머지는 모두 참으로 존재하는 것[實]이다”42)라고 말한 것에 위배된다.43)
그런데 『집론』에서 무치가 혜(慧)를 자체로 삼는다고 말한 것은,44) 그것(무치)의 원인과 결과를 들어서 이것(무치)의 자성을 나타낸 것이다.45) 인가함[忍]46)과 좋아함[樂]47)으로써 신(信)심소의 자체를 나타내는 것과 같이 이치가 반드시 그러해야 한다.
017_0552_c_05L然集論說慧爲體者,擧彼因果顯此自性,如以忍樂表信自體,理必應爾。
탐ㆍ진ㆍ치 심소는 6식과 상응하고, 바로 번뇌에 포함되며, 악을 일으키는 것이 뛰어나기 때문에 불선근(不善根)으로 건립한다. 그것을 단멸하려면 반드시 공통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의 다스림에 의한다. 공통적이라는 것은 오직 선(善)의 혜(慧)이다. 개별적인 것이라는 것은 세 가지 근(根)48)이다. 그러므로 무치심소는 반드시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어야 한다.
‘근(勤)심소’49)는 정진을 말한다. 선품을 닦고 악품을 끊는 일에 대해서 용맹스럽고 굳세게 함을 체성으로 삼는다. 게으름을 다스려서 착한 일을 원만하게 이루는 것을 업으로 삼는다. 용맹스럽다는 것은 정진하는 것을 나타내어 모든 잡염법을 가려낸다. 굳세다는 것은 지극히 순수한 것을 나타내어 청정 무구성을 가려낸다. 곧 정진은 오직 착한 성품에만 포함됨을 나타낸다.
이것의 양상의 차이는 대략 다섯 종류가 있으니 곧 맹렬함을 일으키는 것[被甲]50)ㆍ가행51)ㆍ낮추지 않음[無下]52)ㆍ물러나지 않음[無退]53)ㆍ만족하지 않음[無足]54)이다. 경전에서 말씀한, 세력이 있음[有勢]ㆍ정진함[有勤]ㆍ용감함[有勇]ㆍ견고하고 용맹함[堅猛]ㆍ선의 멍에55)를 버리지 않음[不捨善軛]이니, 순차적으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다섯의 차이를 말하면 초발심ㆍ자분(自分)ㆍ승진(勝進)ㆍ자분행(自分行) 중의 세 가지 품류로서 다르기 때문이다.56) 혹은 초발심ㆍ오랜 기간[長時:삼대겁]ㆍ무간(無間:일체시)ㆍ은중함[慇重]ㆍ무여(無餘:6바라밀)의 수행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혹은 자량도 등의 다섯 가지 도[五道]57)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2승의 구경도에서는 대보리를 기뻐하기 때문이고, 부처님의 구경도에서는 남을 이롭고 즐겁게 함을 좋아하기 때문이다.58)
혹은 두 가지59) 가행ㆍ무간ㆍ해탈ㆍ승진으로 다르기 때문이다.‘안(安)심소’60)는 경안(輕安)을 말한다. 추중(麤重)을 멀리 여의고 몸과 마음을 고르고 화창하게 해서 자재함[堪任]을 체성으로 삼는다. 혼침을 다스려서 신체[所依身]를 전환함을 업으로 한다. 이것이 선정을 장애하는 법을 조복시키고 없애서, 의지처(신체)로 하여금 바뀌어 평안하고 적절하게 하기 때문이다.
곧 네 가지 법62)이 단멸하고 닦아야 할 것에 대해서 능히 방지하고 닦는 것을 불방일이라고 이름하고, 별도로 자체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른 체상이 없기 때문이고, 악한 일을 방지하고 착한 일을 닦는 중에서 네 가지 능력에서 떠나서는 별도의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 신(信)ㆍ참(慚) 심소 등도 역시 이러한 능력이 있지만, 그 네 가지에 비해서 세력이 미약하고, 선근에 두루 책려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것(불방일)의 의지처가 아니다.
【문】 방지하고 닦는 것이라고 말하면, 정진 및 세 가지 선근과 무엇이 다른가?64)【답】 그것은 모름지기 이것(불방일)을 기다려서 비로소 작용이 있게 된다고 말한다.65) 이것(불방일)도 다시 다른 것을 기다려야 하고 그러면 문득 끝없이 소급하는 과실이 있게 된다.66)근(勤)심소는 오직 착한 심왕을 두루 책려하고 근(根)67)은 다만 선법의 의지처이다. 어째서 그것68)이 방지하고 닦는 작용이 있다고 말하는가?69)
【문】 그대가 주장하는 방지하고 닦는 작용의 그 체상은 어떠한 것인가?70)만약 널리 (모든 선심을) 의지하는 것이라고 말하면 곧 무탐심소 등이다. 만약 두루 책려하는 것이라고 말하면 근(勤)심소와 다르지 않다. 악을 그치고 선을 증진시키는 것이라고 말하면 곧 전체적으로 네 가지 법이다. 산란되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면 곧 등지(等持)심소이어야 한다. 다 같이 대상을 취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면 촉(觸)심소와 무엇이 다른가? 잊어버리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면, 곧 염(念)심소이어야 한다.
이와 같이 불방일 심소의 작용을 분석해보면, 무탐심소 등에서 떠나서는 마침내 얻을 수 없다. 따라서 불방일심소는 반드시 별도의 자체가 없다.무엇이 ‘행사(行捨)심소’71)인가? 근(勤)ㆍ세 가지 선근이 심왕으로 하여금 평등하고 적정하며 작용[功用]이 없이 머물게 함을 체성으로 삼는다. 도거(掉擧)를 다스려서 고요히 머물게 함을 업으로 삼는다.
네 가지 법이 심왕에서 도거 등의 장애를 멀리 여의어서 고요히 머물게 하는 것을 행사(行捨)라고 이름한다. 평등하고 적정하며 작용이 없이 머물게 한다는 것은, 처음ㆍ중간ㆍ나중의 지위에서 행사심소의 차이를 판별한 것이다. 불방일이 먼저 잡염을 제거함에 의해서, 행사 심소가 다시 심왕을 적정히 머물게 한다.
무엇이 ‘불해(不害)심소’73)인가? 모든 유정에 대해서 손해와 괴로움을 주지 않는 무진(無瞋)심소를 체성으로 삼는다. 해롭게 하는 것을 다스리고 연민히 여겨 고통을 없애주고자 함을 업으로 삼는다. 곧 무진(無瞋)심소가 유정에 대해서 손해나 괴로움을 주지 않는 것을, 가정적으로 불해(不害)심소라고 이름한다.
기뻐함[欣]이라는 것은 욕(欲)심소와 함께하는 무진심소의 일부이다. 기뻐하게 된 대상에 대해서 증오나 성냄이 없기 때문이다. 분노하지 않음, 원한을 품지 않음, 고뇌하지 않음, 질투하지 않음 등도 역시 그러하다.79) 상응한 바에 따라서 바로 진(瞋)심소의 일부에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싫어함[厭]이라는 것은 혜(慧)와 함께하는 무탐(無貪)심소의 일부이다. 싫어하게 된 대상에 대해서 탐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색하지 않음, 교만하지 않음 등도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상응한 바에 따라서 탐심소 일부의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덮어두지 않음, 거짓으로 꾸미지 않음, 아첨하지 않음 등은 무탐ㆍ무치(無癡) 심소의 일부이다. 상응한 바에 따라서 탐ㆍ치(癡) 심소 일부의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 감추지 않음[不覆]80)은 오직 무치심소의 일부이다. 어떤 경론에서도 부(覆)심소가 탐심소의 일부라고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81) 거만하지 않음[不慢]82)은 신(信)심소의 일부에 포함된다. 그것을 믿을 때에는 그것을 얕보지 않기 때문이다.
017_0553_c_01L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83) 거만하지 않음은 행사(行捨)심소의 일부에 포함된다. 마음이 평등한 자는 자신을 높이고 거만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84) 거만하지 않음은 참(慚)심소의 일부이다. 그것을 받들고 존중할 때에는 그것을 거만하게 높이지 않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88) 의심하지 않음은 곧 진정한 혜(慧)심소에 포함된다. 바른 견해는 유예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산란하지 않음[不散亂]89)의 자체는 진정한 정(定)심소에 포함된다. 바른 견해와 바르게 아는 것은 모두 착한 성품의 혜(慧)에 포함된다. 잊어버리지 않음[不忘念]90)은 곧바로 염(念)심소이다. 회(悔)ㆍ면(眠)ㆍ심(尋)ㆍ사(伺) 심소는 잡염법ㆍ청정법에 모두 통한다. 촉(觸)ㆍ욕(欲) 심소 등이 별도로 정반대의 심소가 없는 것과 같다.
또한 모든 잡염법이 6식에 두루하는 것은 뛰어나기 때문에 그것을 뒤집어 정반대로 별도의 선법으로 건립한다. 만(慢) 등과 분(忿)심소 등은 오직 의식과 함께하기 때문이다.92) 해(害)심소도 역시 그러하지만93) 여러 번 일어나서 남을 괴롭히고 손해 입히기 때문이고, 최상의 교법의 뛰어난 원인인 자비를 장애하기 때문이며, 그것94)의 증상(增上)의 과실을 요별하기 때문에 뒤집어서 정반대로 불해(不害)심소로 건립한다.실념(失念)ㆍ산란ㆍ부정지 심소는 뒤집으면 별경심소에 포함되기 때문에 선심소에서는 설명하지 않는다.
또한 이해는 본질이 통하므로 많은 법의 동체(同體)임을 말하고, 미혹한 생각은 현상적인 자체가 국한되므로 양상에 따라 여러 종류로 나뉜다.96) 따라서 잡염ㆍ청정법에 대해서 일제히 책망하지 않아야 한다. 이 열한 가지 선심소 중에서 셋은 가유(假有)이니,97) 곧 불방일과 행사(行捨) 및 불해이다. 뜻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나머지 여덟 가지는 실유(實有)이니, 체상과 작용이 다르기 때문이다.
017_0554_a_01L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 열한 가지 중에서 네 가지는 선한 심왕에 두루 작용하니, 곧 정진과 세 가지 선근은 선품에 두루하기 때문이고, 나머지 일곱 가지는 일정하지 않다. 현상과 그 본질인 진리를 추구하는데, 아직 결정되지 않았을 때에는 신(信)심소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참(慚)ㆍ괴(愧)는 같은 종류이므로, 의지처가 각기 다르더라도 따라서 하나를 일으킬 때에는 다른 하나가 없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세간도로써 번뇌를 끊을 때에 안(安)심소가 있기 때문이다. 불방일ㆍ행사 심소는 무루도의 시기에 비로소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유정을 불쌍히 여길 때에 불해심소가 있기 때문이다.
논서에서 말하기를 “열한 가지 심소는 여섯 가지 지위 중에서 일어난다. 결정된 지위에서는 신(信)심소가 상응한다. 잡염을 그치게 할 때에는 참(慚)ㆍ괴(愧) 심소가 일어난다. 자신과 남을 돌아보기 때문이다. 선품의 지위에서는 정진과 세 가지 선근이 있다. 세간도의 시기에는 안(安)심소가 일어나고, 출세도에서는 사(捨)ㆍ불방일 심소가 있다. 중생을 섭수할 때에는 불해심소가 있기 때문이다”98)라고 한다.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 그가 말하는 것은 아직 이치에 맞지 않다. 현상과 그 본질인 진리를 추구하는데, 아직 결정하지 않은 심왕에 만약 신(信)심소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하면, 선(善)이 아니어야 한다. 잡염심 등처럼 청정한 믿음이 없다고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참(慚)과 괴(愧)는 종류가 다르고, 의지처[依]는 달라도 대상이 같으며, 모두 착한 심왕에 두루한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말했기 때문이다.
만약 출세도에서 안(安)심소가 생겨나지 않는다고 말하면, 이 각지(覺支)는 무루가 아니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세간도는 사(捨)ㆍ불방일 심소가 없다고 말하면, 적정(寂靜)함도 아니고 악을 방지하고 선을 닦음도 아니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도거ㆍ방일을 조복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유루의 착한 심왕에서도 이미 네 가지 법99)을 갖추므로, 출세도처럼 두 가지100)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착한 심왕이 일어날 때에는 모두 유정을 해롭게 하지 않는다. 해롭게 하는 법에 거스르므로 불해심소가 있기 때문이다.
「섭결택분」에서 말하기를 “여러 가지 선심소는 선정의 지위와 선정에 들지 않은 지위에서 모두 선한 심왕에 두루하고 선정 지위의 심왕 중에서는 안심소를 증장한다”104)라고 하기 때문이다.
017_0554_a_21L「決擇分」說‘十善心所,定、不定地,皆遍善心。定地心中,增輕安故。’
017_0554_b_01L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105) 선정의 가행도 역시 선정의 지위라고 이름할 수 있다. 그것도 역시 미약하게나마 조화되고 화창하게 하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의거하여 욕계에서도 역시 안심소가 있다. 그렇지 않다면 문득 (『유가사지론』의) 「본지분(本地分)」에서 신심소 등 열한 가지 심소는 일체지(一切地)106)에 통한다고 말한 것에 위배된다.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107) 안심소는 오직 선정에서만 존재한다. 선정에서 자양되어 조화되고 화창하게 하기 때문이다. 논서에서 말하기를 “욕계의 모든 심왕과 심소는 경안(輕安)이 없기 때문에 선정이 아닌 지위[不定地]라고 이름한다”108)고 한다. 일체 지(地)에 열한 가지가 있다고 말한 것은, 심(尋)ㆍ사(伺) 심소 등이 있는 세 종류의 지위에109) 공통적으로 모두 있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110) 5식에서는 오직 열 가지만 있다. 자성이 산만하게 작용해서, 안심소가 없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111) 5식에서도 역시 안심소가 있다. 선정에 이끌려 생겨나서 착한 것은112) 역시 조화되고 화창함이 있기 때문이다. 성소작지와 함께하는 것에는 반드시 안심소가 있기 때문이다.
이 선심소 열한 가지는 어떤 느낌[受]과 상응하는가?113) 열 가지는 5수(受)와 상응하고,114) 하나115)는 우수(憂受)ㆍ고수(苦受)를 제외한다. 핍박하는 느낌에서는 조화되고 화창함이 없기 때문이다.116) 이것은 별경심소와 모두 상응할 수 있다.117) 신심소 등과 욕심소 등은 서로 거스르지 않기 때문이다. 열한 가지 심소는 오직 선의 성품이다.118) 안심소는 욕계에서는 없고, 나머지는 모두 3계에 통한다.119)
모두 유학(有學) 등 세 가지이다.120)견도에서 단멸되는 것은 아니다.121) 『유가사지론』에서 신(信)심소 등의 여섯 가지는 오직 수도에서 단멸되는 것이고, 단멸해야 할 것이 아닌 것[非所斷]이라고 말하기122) 때문이다.나머지 부문을 판별하는 것은 논리에 맞게 생각해야 한다.
이상과 같이 선위(善位)의 심소를 말했다. 그러면 번뇌심소의 양상은 어떠한가?123) 게송(『삼십송』의 제12)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번뇌심소는 탐(貪)ㆍ진(瞋)ㆍ 치(癡)ㆍ만(慢)ㆍ의(疑)ㆍ악견(惡見)이다.124)
017_0554_b_18L如是已說善位心所。煩惱心所其相云何?頌曰:
논하여 말한다. 이 탐 등 여섯 가지는 체성이 근본번뇌에 포함되기 때문에 번뇌심소라고 이름한다. 무엇을 ‘탐(貪)심소’125)라고 하는가? 윤회하는 삶[有]과 그 원인[有具]에 대해서 탐착함을 체성으로 삼는다. 능히 무탐(無貪)심소를 장애하여 고통을 일으키는 것을 업으로 삼는다. 애착의 세력에 의해 5취온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017_0554_b_19L煩惱謂貪嗔 癡慢疑惡見。
017_0554_c_01L무엇을 ‘진(瞋)심소’126)라고 하는가? 고통[苦]과 그 원인[苦俱]에 대해서 미워하고 성내는 것을 체성으로 삼는다. 능히 무진(無瞋)심소를 장애하여 불안과 악행의 의지처가 됨을 업으로 삼는다. 진(瞋)심소는 반드시 몸과 마음을 매우 괴롭혀서 모든 악업을 일으키게 하는 불선의 성품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치(癡)심소’127)라고 하는가? 모든 본질과 현상에 대해서 미혹하고 어두운 것을 체성으로 삼는다. 능히 무치(無癡)심소를 장애하고 모든 잡염법의 의지처가 됨을 업으로 삼는다. 무명에 의해서 의(疑)ㆍ삿된 정(定)ㆍ탐(貪) 등의 번뇌와 수번뇌 업을 일으켜서 능히 다음 생의 잡염법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만(慢)심소’128)라고 하는가? 자기를 믿어 남에 대해서 높이는 것을 체성으로 삼고, 능히 불만(不慢)을 장애하여 고통을 일으킴을 업으로 삼는다. 만심소가 있는 사람은 덕ㆍ덕이 있는 사람에 대해서 마음이 겸손하지 않다. 그리하여 생사에 윤회하는 일이 끝이 없고 모든 고통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이 만(慢)을 구분하면 일곱 가지129) 또는 아홉 가지130)가 있다. 세 가지 품류와 자아ㆍ덕의 다섯 곳에서 생겨난다.131) 일체가 모두 견도ㆍ수도에서 단멸되는 것에 통한다. 성스러운 지위에서도 아만이 현행할 수 있다. 만(慢)의 종류도 이에 근거해서 일어난다고 말하는 것이 역시 과실이 없다.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133) 이 의심소는 혜(慧)심소를 자체로 한다. 결정을 미루어서 간택하는 것을 의심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접두어 비(毘, vi)가 혜[末底, mati]를 돕는 것이 의심의 뜻이기 때문이다. 혜[末底]와 반야는 뜻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134)
017_0554_c_13L云何爲疑?於諸諦理猶豫爲性,能障不疑善品爲業。謂猶豫者善不生故。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135) 이 의(疑)심소는 별도로 자체가 있다. 혜(慧)심소를 결정하지 않게 하므로 곧 혜(慧)가 아니기 때문이다. 『유가사지론』에서 여섯 가지 번뇌심소를 설명하는 중에서 “악견(惡見)은 세속유(世俗有)이다. 곧 혜(慧)심소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다른 것은 실유이다. 별도로 체성이 있기 때문이다”136)라고 한다. 접두어 비(毘, vi) 혜[末底, mati]를 도우므로 혜(慧)를 고집하여 의(疑)심소라고 말하면, 접두어 비(毘, vi)가 지혜[若南, jna]를 돕기 때문에 지혜를 식(識, vijna)이라고 해야 한다.137) 계(界:性)는 돕는 힘에 의해 뜻이 문득 바뀐다. 따라서 이 의심소는 혜(慧)를 자체로 삼지 않는다.
이 악견의 행상(行相)은 구별하면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살가야견(薩迦耶見)139)이니, 5취온에 대해서 나ㆍ나의 소유로 집착함을 말한다. 모든 견해의 의지처가 되는 것을 업으로 한다. 이 견해를 구분하면 스무 가지 문구[句]140)와 예순다섯 가지 문구 등이 있다. 후천적으로 분별에 의해 생겨나는 것에 포함된다.
이 견해의 종류를 말하면, 여러 견해 중에서 과거의 것[前際]144)을 집착하는 네 가지 두루 상주한다는 견해[遍常論], 일부만 상주한다는 견해[一分常論], 미래의 것[後際]145)을 계탁하는 열여섯 가지의 표상작용이 존재한다는 견해[有想論], 표상작용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견해[無常論]와 표상작용[想]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俱非]에 각각 8론(論)이 있으며, 그리고 일곱 가지 단멸론[七斷論] 등이 있다.146) 이것은 분별에 의해 생겨나는 것에 포함된다.
017_0555_a_05L二邊執見,謂卽於彼隨執斷常。障處中行、出離爲業。
셋째는 사견(邪見)이니, 원인147)ㆍ결과148)ㆍ작용149)ㆍ참다운 존재[實事]150)를 비방하고, 네 가지 견해가 아닌 다른 모든 삿된 집착을 말한다. 증상연과 같이 명칭도 뜻도 두루하기 때문이다.
혹은 자재천152)ㆍ대자재천[世主]153)ㆍ제석천ㆍ범천왕154) 및 다른 사물[物類]155) 등이 상주해서 변화가 없다고 계탁한다. 혹은 자재천 등은 모든 사물의 원인이라고 계탁한다.156) 혹은 어떤 사람들은 제멋대로 여러 삿된 해탈을 계탁한다.157) 혹은 어떤 사람들은 망령되게 도(道)가 아닌 것을 집착해서 도(道)로 삼는다.158) 이와 같은 모든 견해들은 다 삿된 견해이다.
다섯째는 계금취견(戒禁取見)160)이니, 여러 견해에 수순하는 계율과 의지처인 5온에 대하여 집착해서 가장 뛰어난 것으로 삼아서, 능히 청정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로움 없이 수고롭게 애쓰는 고통의 의지처가 되는 것을 업으로 한다.
017_0555_a_18L四見取,謂於諸見及所依薀,執爲最勝,能得淸淨,一切鬪諍所依爲業。
017_0555_b_01L그런데 어떤 곳에서 말하기를,161) 집착해서 가장 뛰어난 것으로 삼는 것만을 견취견으로 이름하고, 능히 청정을 얻는다고 집착하는 것만을 계금취견으로 이름한다고 한 것은 그림자처럼 생략해서[影略] 말한 것이거나,162) 근기에 따라서 말한 방편문[隨轉理門]이다. 그렇지 않다면 『유가사지론』 「섭결택분」에서 어째서 멸제가 아닌 것을 멸제라고 계탁하고, 도제가 아닌 것을 도제라고 계탁하는 것을 삿된 견해라고만 말하고, 두 가지 견취견에 포함된다고는 말하지 않았겠는가?
이상과 같이 총체적인 것163)과 개별적인 것164)의 열 가지 번뇌심소 중에서, 여섯 가지는 선천적으로 일어나는 것과 후천적으로 분별에 의해 생겨나는 것에 통한다.165) 자연히 일어날 때에도, 사려 관찰할 때에도 함께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의(疑)심소와 나머지 세 가지 견해166)는 오직 분별에 의해 생겨난다. 반드시 나쁜 친구나 삿된 가르침의 힘, 스스로 살펴서 사려 관찰함에 의해서 비로소 생겨날 수 있기 때문이다. 변견(邊見) 중에서 선천적으로 일어남에 통하는 것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 오직 단견(斷見)뿐이다. 상견(常見)은 양상이 두드러지므로, 나쁜 친구 등의 힘에 비로소 이끌려 생겨나기 때문이다.
『유가사지론』 등에서 말하기를 “어떤 변견이 선천적으로 일어나는가? 단견에 포함되는 것을 말한다. 현관(現觀)을 배우는 사람이 다음과 같은 공포심을 일으킨다. 지금 나[我]167)의 나168)는 어느 곳에 있는가?”169)라고 한다. 따라서 짐승 등은 거스르는 연[違緣]을 만날 때에는 모두 내가 단멸된다고 두려워해서 공포심을 일으킨다고 말한다.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 그 논서는 두드러진 양상에 의거해서 말한 것이고, 논리와 진실로써 말하면 선천적으로 일어나는 것도 역시 상견(常見)에 통한다.170) 짐승 등은 내가 항상 존재한다고 집착해서, 치열하게 오랜 기간 지낼 수 있는 재료ㆍ도구[資具]171)를 만들고 모은다.172)
이 열 가지 번뇌심소에 있어서 무엇이 몇 가지와 상응하는가?174) 탐(貪)심소는 진(瞋)ㆍ치(癡) 심소와는 반드시 함께 일어나지 않는다. 애착과 증오의 대상이 반드시 같지 않기 때문이다. 대상에 대해서 결정하지 않을 때에는 탐착이 없기 때문이다. 탐심소는 만ㆍ악견 심소와 혹은 상응할 수 있다. 애착되는 것과 멸시되는 대상이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함께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한다.175) 잡염되는 것과 믿어지는 대상은 같을 수 있기 때문에 상응할 수 있다고 말한다.176) 다섯 가지 악견의 대상에 대해서는 모두 애착할 만하기 때문에 탐심소가 다섯 가지 악견과 상응한다는 것에 과실이 없다.
017_0555_b_13L故顯揚等諸論皆說,於五取薀執斷計常,或是俱生或分別起。
017_0555_c_01L진(瞋)심소는 만(慢)ㆍ의(疑) 심소와 혹은 함께 일어날 수 있다. 성내게 된 것과 믿어지는 대상이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상응하지 않는다고 말한다.177) 멸시되는 것과 증오되는 대상이 같을 수 있기 때문에 함께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178) (의심소가) 처음에 결정을 미룰 때에는 (진심소가) 아직 그것을 증오하지 않기 때문에 함께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한다.179) 오랫동안 생각해도 결정되지 않을 때에는 문득 분발심이 일어나기 때문에 상응할 수 있다고 말한다.180) 수순되거나 거슬리는 일을 의심하는 것도 상응함에 따라서 역시 그러하다.181)
이것은 세 가지 악견182)과 혹은 상응할 수 있다. 유신견이나 변견이 즐거움이 있는 5온에 대해서 유신견ㆍ상견(常見)183)을 일으킬 때는, 증오하는 일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상응하지 않는다고 말한다.184) 고통이 있는 5온에 대해서 유신견ㆍ상견185)을 일으킬 때는 증오하는 일을 일으키기 때문에 함께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단견(斷見)은 이것186)에 정반대로 뒤집어서 성냄이 있고 없음을 말한다. 사견(邪見)이 나쁜 일과 좋은 일을 비방하거나 부정할 때에는 순서대로 성냄이 없기도 하고 있기도 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단견(斷見)은 반드시 함께 생겨나지 않는다. 내가 단멸된다고 집착할 때에는, 남을 멸시하고 나를 믿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유신견ㆍ사견의 일부와도 역시 그러하다. 의(疑)심소는 살펴서 결정하지 않는다. 악견과 서로 다르기 때문에, 의심소는 악견과 반드시 함께 일어나지 않는다. 다섯 가지 악견은 전전하여 반드시 상응하지 않는다. 한마음 중에서 많은 혜(慧)가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치(癡)심소는 나머지 아홉 가지와 모두 반드시 상응한다. 모든 번뇌가 일어나는 것은 반드시 어리석음에 의하기 때문이다.
이 열 가지 번뇌심소는 어떤 식(識)과 상응하는가?187) 장식(藏識)에서는 전혀 없다. 말나식에는 네 가지188)가 있으며, 의식에서는 열 가지를 모두 갖춘다. 5식에서는 오직 세 가지이니, 탐ㆍ진ㆍ치 심소이다. 분별이 없기 때문이고,189) 헤아리는 것 등에 의해서 만(慢)심소 등을 일으키기 때문이다.190)
이 열 가지 번뇌심소는 어떤 느낌[受]과 상응하는가?191) 탐ㆍ진ㆍ치의 세 심소는, 선천적으로 일어나는 것에서도 후천적으로 분별에 의해 생겨나는 것에서도, 모두 5수(受)가 상응한다고 인정된다. 탐심소는 거슬리는 연[違緣]을 만날 때에는 우수(憂受)ㆍ고수(苦受)와 함께하기 때문이다. 진(瞋)심소는 수순의 대상을 만날 때에는 희수(喜受)ㆍ낙수(樂受)와 함께하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 선천적으로 일어나는 만(慢)과 후천적으로 분별에 의해 생겨나는 만심소는, 고수(苦受)는 아니고 네 가지 느낌[受]과 상응함이 인정된다. 고수가 있는 열등한 온(蘊)을 믿을 때에는 우수와 상응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017_0555_c_21L有義俱生分別起慢容與非苦四受相應。恃苦劣薀,憂相應故。
017_0556_a_01L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192) 선천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역시 고수와도 함께 일어난다. 극심한 고통의 세계에서 의식에 고수가 있다는 것은 앞193)에서 이미 말했기 때문이다. 분별에 의해 생겨나는 만심소 등은 순전히 고통만 있는 세계에서는 없다. 거기서는 삿된 스승이나 삿된 가르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기서는 악취를 이끄는 업을 짓지 않는다. 반드시 분별에 의해 생겨나는 것으로써 능히 그것을 일으키기 때문이라고 말한다.194)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 선천적으로 일어나는 유신견ㆍ변견(邊見)은 다만 희수ㆍ낙수ㆍ사수(捨受)와 상응한다. 5식과 함께하지는 않으며,196) 오직 무기이기 때문이다.197) 분별에 의해 생겨나는 두 견해는 네 가지 느낌과 함께하는 것이 인정된다. 고수(苦受)와 함께하는 5온을 집착해서 나ㆍ나의 소유이며 상주하는 것으로 삼으면, 단견(斷見)이 이것에 정반대로 뒤집어서 우수(憂受)와 상응하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 두 견해 중에서 선천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역시 고수와도 함께한다. 순전히 고통만 받는 세계에서 극심한 고통의 5온을 반연할 때에는 고수와 상응하기 때문이다.
017_0556_a_09L有義二見,若俱生者亦苦受俱。純受苦處,緣極苦蘊,苦相應故。
논서에서 말하기를 “선천적으로 일어나는 번뇌는 모두 세 가지 느낌에서 현행할 수 있다”198)고 한다. 구체적으로 많이 설명한 것은 앞199)에서와 같다. 나머지200)는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7_0556_a_11L論說俱生一切煩惱,皆於三受現行可得。廣說如前。餘如前說。
이것은 진실된 의미에 의해 말한 것이다. 두드러진 양상에 따라서 말하면,201) 탐ㆍ만ㆍ네 가지 악견202)은 낙수ㆍ희수ㆍ사수와 함께한다.203) 진(瞋)심소는 오직 고수ㆍ우수ㆍ사수와 함께 일어난다.204) 치(癡)심소는 5수(受)와 모두 상응할 수 있다. 사견ㆍ의 심소는 느낌[受]과 함께하며 고수는 제외한다.
탐ㆍ치 심소가 낙수와 함께하는 것은 하계의 4지(地)205)에 통한다. 나머지 일곱 가지가 낙수와 함께하는 것은, 욕계를 제외한 나머지 셋에 통한다.206) 의(疑) 및 홀로 작용하는 치심소는 욕계로서는 오직 우수와 사수뿐이다. 나머지가 느낌과 함께 일어나는 것은 논리에 맞게 알아야 한다.
이것은 별경심소와는 몇 가지가 서로 상응하는가?207) 탐ㆍ진ㆍ치ㆍ만 심소는 다섯 가지 심소208)와 함께 일어난다고 인정된다. 한 대상에 기울여 집중할 때에 정(定)심소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의(疑)와 다섯 악견은 각기 네 가지 심소와 함께하는 것이 인정된다. 의심소에서는 승해(勝解)를 제외하는데, 결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악견은 혜(慧)심소와 함께하지 않으니, 혜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017_0556_b_01L이 열 가지 번뇌심소는 어떤 성품에 포함되는가?209) 진(瞋)심소는 오직 불선이니, 자신과 남을 해롭게 하기 때문이다. 나머지 아홉 가지는 두 가지210)에 공통된다. 아홉 가지 번뇌심소가 두 가지 상계(上界)라면, 오직 무기에만 포함된다. 반드시 조복되기 때문이다. 욕계에 계박된 것이라면, 분별에 의해 생겨나는 것은 오직 불선에만 포함되니, 악행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선천적으로 일어난 것이라면, 악업을 일으키는 것은 역시 불선에 포함되니, 자신과 남을 해롭게 하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무기에 포함되니, 미세하여 선을 장애하지 않고 자신과 타인을 매우 괴롭히거나 해롭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땅히 알라. 선천적으로 일어난 유신견ㆍ변견은 오직 무기에만 포함되므로, 악업을 일으키지 않는다. 여러 번 현행하지만, 선을 장애하지 않기 때문이다.
017_0556_b_04L當知俱生,身邊二見唯無記攝,不發惡業。雖數現起,不障善故。
이 열 가지 번뇌심소는 어떤 세계에 계박되는가?211) 진심소는 오직 욕계에만 있고, 나머지는 3계에 통한다. 하부 지위[下地]에 태어나 살면서 아직 열등한 잡염을 떠나지 않은 때에는 상부 지위[上地]의 번뇌를 현전하지 않는다.212) 반드시 그 지위의 근본정(根本定)을 얻은 자만이 그 지위의 번뇌를 현전한다고 인정되기 때문이다. 모든 유루도는 분별에 의해 생겨나는 미혹ㆍ미세한 선천적인 것을 조복시킬 수는 없지만, 능히 선천적인 두드러진 미혹을 조복하고 제거하여 점차 상계의 근본정을 증득한다. 그것213)은 다만 현상에 미혹하고 감각기관에 의해 전전한다. 산란되고 두드러지게 작용하여 바로 선정을 장애하기 때문이다. 그 선정을 증득한 때에 그 지위의 선천적이거나 분별에 의한 모든 미혹을 다 현전한다고 인정된다.
상부 지위에 태어나 살면서는 하부 지위의 모든 미혹은 선천적이거나 분별에 의한 것이거나 모두 현전할 수 있다. 제4선정의 중유(中有)에 태어나는 자가 해탈을 비방함으로써 지옥에 나기도 한다고 말하기214) 때문이다. 몸이 상부 지위에 있으면서 장차 하부 지위에 태어나려고 할 때에는, 하부 지위의 태어남을 촉진하는 선천적인 애착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부 지위에 태어나서 하부 지위의 것215)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많은 것[多分]에 의해서 말한 것이거나 근기에 따른 방편문이다.216) 하부 지위의 번뇌는 역시 상부 지위도 반연한다. 『유가사지론』 등에서 욕계에 계박된 탐심소가 상부 지위에 태어남을 구하고 상부 지위의 선정을 음미한다고 말하기217) 때문이다. 진(瞋)심소는 멸제ㆍ도제를 싫어하고 질투한다고 말하므로218) 역시 욕망을 떠난 지위도 싫어하고 질투해야 하기 때문이다. 총체적으로 모든 행(行)을 반연해서 나ㆍ나의 소유로 집착하여, 단멸이나 상주라고 여겨서 거만한 자는 상부 지위를 반연할 수 있기 때문이다.
017_0556_c_01L나머지 다섯 가지 번뇌심소219)는 상부 지위를 반연한다고 말하는 것이, 그 논리가 매우 타당하다. 그런데 어떤 곳220)에서 탐ㆍ진ㆍ만 심소 등이 상부 지위를 반연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두드러진 양상에 의해서 말하거나 혹은 별도로 반연한 것221)에 의해 말한 것이다. 세간에서 다른 지위의 법을 집착해서 자아 등으로 삼는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고, 변견은 반드시 유신견에 의해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상부 지위의 번뇌도 역시 하부 지위를 반연한다. 상계에 태어나는 자가 하계의 유정에 대해서, 자신의 뛰어난 덕을 믿어서 그들을 멸시한다고 말하기222) 때문이다. 총체적으로 여러 행을 반연하여 나ㆍ나의 소유(유신견)나 단멸ㆍ상주하는 것(변견)으로 집착해서 애착하는 자는 하부 지위를 반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의(疑)와 나머지 세 악견223)은 논리에 맞게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상계의 미혹은 하계를 반연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많은 것에 의해서이거나 또는 별도로 반연한 데서 말한 것이다.224)
이 열 가지 번뇌는 유학(有學) 등에 대해서는 무엇에 포함되는가?225) 유학과 무학이 아니다. 그것226)은 오직 선의 성품이기 때문이다.
017_0556_c_07L此十煩惱學等何攝?非學、無學,彼唯善故。
이 열 가지 번뇌는 단멸되는 번뇌[所斷] 중에서 어떤 것인가? 단멸해야 할 것이 아닌 것[非所斷]은 아니다. 그것227)은 잡염이 아니기 때문이다. 분별에 의해 생겨나는 번뇌심소는 오직 견도에서 단멸되는 것[見所斷]뿐이다. 두드러져서 단멸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선천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오직 수도에서 단멸되는 것[修所斷]뿐이다. 미세하여 단멸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견도에서 단멸되는 열 가지는 참으로 모두 단박에 단멸된다. 진견도(眞見道)는 4성제(聖諦)를 총체적으로 반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리의 양상에 미혹한 것에 총체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이 있다. 총체적인 것은 열 가지가 모두 4성제에 미혹한 것을 말한다. 고제ㆍ집제는 그것의 원인ㆍ의지처이기 때문이다. 멸제ㆍ도제는 그것이 두려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개별적인 것이란, 4성제의 양상에 따로따로 미혹해서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두 가지는228) 오직 고제에 미혹하고, 여덟 가지는 4성제에 공통적으로 미혹한다. 유신견ㆍ변견은 오직 과보에서만 일어난다. 개별적인 것의 공(空)ㆍ비아(非我)229)는 오직 고제에 속하기 때문이다.
의(疑)와 세 가지 악견심소230)는 직접 고제의 이치에 미혹한다. 두 가지 견취견231)은 세 가지 악견232)과 계금(戒禁) 및 의지처인 5온을 집착해서, 뛰어나고 능히 청정하게 하는 것으로 삼는다. 자신과 타인의 견해 및 그 권속에 대해서 순차적으로 상응한 바에 따라서 탐ㆍ진ㆍ만 심소를 일으킨다. (아홉 가지 번뇌와) 상응하는 무지(無智)는 아홉 가지 번뇌와 함께 모두 미혹한다. 불공무명은 직접 고제의 이치에 미혹한다. 의ㆍ사견은 직접 집제 등에 미혹한다. 두 가지 견취견과 탐심소 등은 고제에 미루어 알아야 한다.
017_0557_a_01L그런데 진심소는 역시 직접 멸제와 도제에 미혹한다. 그것을 두려워함으로써 증오와 질투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4성제에 미혹한, 직접적이고[親] 간접적인[踈] 두드러짐과 미세함이 이와 같다. 자세하게 말하면 탐ㆍ진ㆍ만의 세 심소가 악견ㆍ의 심소와 함께 생겨나는 것은 상응한 바에 따라 그것과 같다.
선천적으로 일어나는 두 가지 견해233)와 그것에 상응하는 탐ㆍ만ㆍ무명은 고제에 미혹하지만, 인식작용이 미세하여 단멸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수도에서 비로소 단멸된다. 진(瞋)과 나머지 탐 등은 별도의 본질[事]234)에 미혹해서 생겨나고, 진리를 관찰하는 것에 거스르지 않기 때문에 수도에서 단멸된다.
모든 번뇌심소가 다 상분이 있지만, 의지되는 것의 본질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235) 본질이 있는 것[有事]을 반연하는 번뇌, 본질이 없는 것[無事]을 반연하는 번뇌라고 이름한다. 그것의 친소연(親所緣)은 모두 유루이지만, 의지되는 본질은 역시 무루에도 통한다. 유루를 반연하는 번뇌, 무루를 반연하는 번뇌라고 이름한다. 자기 지위[自地]를 반연하는 것은 상분이 본질에 비슷하므로, 분별해서 일어난 본질[事]의 대상을 반연한다고 이름한다. 멸제ㆍ도제ㆍ다른 지위[他地]를 반연하는 것은 상분이 본질과 비슷하지 않기 때문에, 분별해서 일어난 명칭의 대상을 반연한다고 이름한다.236)다른 부문을 판별하는 것은 논리에 맞게 생각해야 한다.
논하여 말한다. 이것은 오직 번뇌의 분위의 차이이고, 등류하는 성질이므로 수번뇌라고 이름한다. 이 스무 종류는 구분하면 세 가지가 있다. 분(忿) 등 열 가지239)는 각기 따로 일어나기 때문에 소수번뇌(小隨煩惱라고 이름한다. 무참(無慚) 등 두 가지240)는 불선(不善)에 두루하기 때문에 중수번뇌(中隨煩惱)라고 이름한다. 도거심소 등 여덟 가지241)는 잡염심에 두루하기 때문에 대수번뇌(大隨煩惱)라고 이름한다.
무엇을 ‘분(忿)심소’242)라고 하는가?243) 현전의 이롭지 않은 대상을 대함으로써 분발하는 것을 체성으로 삼는다. 분노하지 않음[不忿]을 능히 장애하고 몽둥이를 잡는 것을 업으로 삼는다.244) 분노를 품는 사람은 대부분 포악한 신표업(身表業)을 많이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냄의 심소의 일부분으로써 자체[體]를 삼는다. 성냄의 심소에서 떠나서는 별도의 분노의 심소의 체상과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
017_0557_b_01L무엇을 ‘한(恨)심소’245)라고 하는가? 이전에 분노가 있었기 때문에 악을 품고 버리지 않아서 원한을 맺음을 체성으로 삼는다. 원한을 품지 않음[不恨]을 능히 장애하고 매우 괴롭게 함을 업으로 삼는다. 원한을 맺는 사람은 참을 수 없어서 항상 매우 괴롭기 때문이다. 이것도 역시 진(瞋)심소의 일부분을 자체로 한다. 진심소에서 떠나서는 별도로 한심소의 체상과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
무엇을 ‘부(覆)심소’246)라고 하는가? 자신의 지은 죄에 대해서 이익과 명예를 잃을까 두려워하여 감추려 드는 것을 체성으로 삼는다. 숨기지 않음[不覆]을 능히 장애하며 후회하면서 괴로워함을 업으로 삼는다. 죄를 숨기는 사람은 나중에 반드시 후회하고 괴로워하여 안온함이 없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 이 부심소는 치(癡)심소의 일부분에 포함된다. 논서에서 오직 이것은 치심소의 일부분이라고 말하기247) 때문이다. 장래의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아서 자신의 죄를 덮어두기 때문이다.
017_0557_b_08L有義此覆癡一分攝。論唯說此癡一分故,不懼當苦覆自罪故。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248) 이 부심소는 탐ㆍ치 심소의 일부분에 포함된다. 역시 이익과 명예를 잃을까 두려워해서 자신의 죄를 덮어두기 때문이다. 논서에서는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에 의거해서 오직 치(癡)심소의 일부분이라고 말한 것이다. 도거(掉擧)심소를 탐심소의 일부분이라고 말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249) 그런데 도거심소는 모든 잡염심에 두루한다고 말하므로, 집착해서 오직 탐심소의 일부분으로만 삼을 수 없다.
무엇을 ‘뇌(惱)심소’250)라고 하는가? 먼저 분ㆍ한(恨) 심소가 있었고 좇아서 사납고 맹렬하게 다투고 어그러지는 것을 체성으로 삼는다. 고뇌하지 않음[不惱]을 능히 장애하여, 타인에게 지네가 쏘는 것처럼 함을 업으로 삼는다. 이전의 악을 좇고 현재의 거슬리는 연[違緣]에 접촉하여, 마음이 문득 다투고 어그러져서 대부분 사납고 흉하고 비루한 구체적인 말을 하여, 타인을 마치 지네가 쏘듯이 하기 때문이다. 이것도 역시 진(瞋)심소의 일부분을 자체로 삼는다. 진심소에서 떠나서 별도로 뇌심소의 체상과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
무엇을 ‘질(嫉)심소’251)라고 하는가? 자신의 명예와 이익을 지나치게 구하여, 남의 영화를 참지 못하고 시기함을 체성으로 삼는다. 질투하지 않음[不嫉]을 능히 장애하여 근심함을 업으로 삼는다. 질투하는 사람은 남의 영화를 보고 듣고서 깊이 근심을 품어 안온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도 역시 진(瞋)심소의 일부분을 자체로 삼는다. 진심소에서 떠나서 별도로 진심소의 체상과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
017_0557_c_01L무엇을 ‘간(慳)심소’252)라고 하는가? 재물과 법에 탐착해서 베풀지 못하고 감추고 아끼는 것을 체성으로 삼는다. 인색하지 않음[不慳]을 능히 장애하여 비루하게 비축함을 업으로 삼는다.인색한 사람은 마음에 많이 비루하게 머뭇거리고, 재물과 법을 축적해서 능히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탐심소의 일부분을 자체로 한다. 탐심소에서 떠나서 별도로 간심소의 체상과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
무엇을 ‘광(誑)심소’253)라고 하는가? 이익과 명예를 얻기 위해서 교묘하게 덕이 있는 것처럼 보여서 속이는 것을 체성으로 삼는다. 속이지 않음[不誑]을 능히 장애하여 삿되게 살아가는 것을 업으로 삼는다. 교묘하게 속이는 사람은 마음에 다른 음모를 품고서, 대부분 진실치 못한 삿된 생계수단의 일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것은 탐ㆍ치 심소의 일부분을 자체로 한다. 그 두 가지에서 떠나서는 별도로 광심소의 체상과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
무엇을 ‘첨(諂)심소’254)라고 하는가? 남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교묘하게 다른 행동을 보여서 진실하지 못하게 굽히는 것을 체성으로 삼는다. 아첨하지 않음[不諂]과 가르침[敎誨]을 능히 장애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다. 아첨해서 굽히는 사람은 남을 끌어들이기 위해 굽혀서 적절한 시기에 따라 교묘하게 방편을 시설해서 남의 마음을 잡거나, 혹은 자기의 과실을 감추기 위해 스승과 친구의 바른 가르침에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도 역시 탐ㆍ진 심소의 일부분을 자체로 삼는다. 그 두 가지에서 떠나서는 별도로 첨심소의 체상과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
무엇을 ‘해(害)심소’255)라고 하는가? 모든 유정에 대해서 마음에 불쌍히 여기지 않고 손해를 끼치고 괴롭히는 것을 체성으로 삼는다. 해롭게 하지 않음[不害]을 능히 장애하여 핍박함을 업으로 삼는다. 해롭게 하는 사람은 남을 핍박하기 때문이다. 이것도 역시 진(瞋)심소의 일부분을 자체로 삼는다. 진심소에서 떠나서는, 별도로 해(害)심소의 체상과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 진ㆍ해(害) 심소의 개별적인 모습은 선심소에 견주어서 말해야 한다.256)
무엇을 ‘교(憍)심소’257)라고 하는가? 자신의 번성한 일에 대해서 깊이 탐착심을 일으켜서 취하여 방자함을 체성으로 삼는다. 방자하지 않음[不憍]을 능히 장애하여 잡염의 의지처가 됨을 업으로 삼는다. 방자하게 취한 사람은 모든 잡염법을 일으키고 증장하기 때문이다. 이것도 역시 탐심소의 일부분을 자체로 삼는다. 탐심소에서 떠나서는 별도로 교심소의 체상과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
무엇을 ‘무참(無慚)심소’258)라고 하는가?259) 자신과 법을 돌아보지 않고 현인을 가볍게 여기고 선법(善法)을 거부함을 체성으로 삼는다. 능히 참(慚)심소를 장애하여 악행을 증장함을 업으로 삼는다. 자신과 법에 대해서 돌아보지 않는 사람은 현인을 가볍게 여기고 선법을 거부하여 자신의 잘못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참심소를 장애하여 모든 악행을 일으키고 증장하기 때문이다.
017_0558_a_01L무엇을 ‘무괴(無愧)심소’260)라고 하는가? 세간을 돌아보지 않고 포악함을 받들어 중히 여기는 것을 체성으로 삼는다. 능히 괴(愧)심소를 장애하여 악행을 일으키고 증장함을 업으로 삼는다. 세간에 대해서 돌아보지 않는 사람은, 포악함을 받들어 중히 여겨서 죄과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괴심소를 장애하여 여러 악행을 일으키고 증장하기 때문이다. 잘못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것은 이 두 가지의 공통된 양상이다. 따라서 모든 성스러운 가르침에서 가정적으로 말해서 자체로 삼는다.261)
만약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것을 집착해서 두 가지 개별적인 양상으로 삼으면, 곧 이 둘은 자체가 차이가 없어야 한다.262) 그러므로 두 법은 함께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수(受)ㆍ상(想) 심소 등에 이러한 뜻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자신과 남을 기다림으로써 둘의 개별적인 양상을 건립한다면 실유(實有)가 아니어야 하고, 그러면 문득 성스러운 가르침에 위배된다.263) 만약 이 둘이 실유로서 따로따로 일어난다고 인정하면, 또한 논서에서 함께 악심에 두루한다고 말한 것264)에 위배된다. 불선심(不善心)의 시기에는 따라서 어떤 대상을 반연해도 모두 선을 가볍게 여기고 거부하고 악을 받드는 뜻이 있기 때문에, 이 두 법은 모두 악심에 두루하고, 인식대상이 다르지 않으므로 따로따로 일어나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과실이 없다.
그런데 모든 성스러운 가르침에서 자타(自他)를 돌아보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자신과 법을 자(自)라고 이름하고, 세간을 타(他)라고 이름한 것이다. 혹은 곧 이 가운데에서 선법을 거부하고 악을 받든다고 말한다. 자기에 대해서 이롭게 하거나 손해를 끼치는 것을 자타로 이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논서에서 탐심소 등의 일부분으로 삼는다고 말한 것은265) 이것이 그것의 등류이기 때문이지, 그것의 체성은 아니다.
무엇이 ‘도거(掉擧)심소’266)인가? 심왕으로 하여금 대상에 대해서 고요하지 않게 함을 체성으로 삼는다. 능히 행사(行捨)와 사마타(奢擧他)267)를 장애함을 업으로 삼는다.
017_0558_a_15L云何掉擧?令心於境不寂靜爲性。能障行捨、奢摩他爲業。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 도거심소는 탐심소의 일부분에 포함된다. 논서에서 오직 이것은 탐심소의 일부분이라고 말하기268) 때문이다. 이것은 과거의 즐거웠던 일을 생각함에 의해서 생겨나기 때문이다.
017_0558_a_17L有義掉擧貪一分攝。論唯說此是貪分故,此由憶昔樂事生故。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 도거심소는 오직 도거심소에만 포함되는 것은 아니다. 논서에서 도거심소는 잡염심에 두루한다고 말하기269) 때문이다. 또한 도거심소의 인식활동[行相]은 적정(寂靜)하지 않음을 말한다. 이것이 번뇌의 공상(共相)에 포함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도거심소는 이것에서 떠나서 별도의 인식활동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번뇌에 의거해서 가립하지만, 탐욕에서 증장하므로 탐심소의 일부분으로 삼는다고 말한다.
017_0558_b_01L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 도거심소는 별도로 체성이 있어야 한다. 모든 잡염심에 두루하기 때문에, 불신 등처럼 다른 것의 일부분이라고 말함으로써 도거심소 자체가 문득 실유가 아닌 것은 아니다. 불신 등도 역시 가유라고 말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논서에서 세속유라고 말한 것270)은 수면(睡眠) 등처럼 다른 것의 인식활동에 따라 말한 것이다. 도거심소의 개별적인 양상이란, 시끄럽게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 함께 일어나는 법271)으로 하여금 적정치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만약 번뇌에서 떠나서 별도의 이 양상이 없다고 말하면, 별도로 사마타[止]를 장애한다고 하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적정하지 않은 것은 이것의 개별적인 인식활동은 아니다.
무엇이 ‘혼침(惛沈)심소’272)인가? 심왕으로 하여금 대상에 대해서 자재하지 못하게[無堪任] 함을 체성으로 삼는다. 능히 경안과 위빠사나[毗鉢舍那]273)를 장애함을 업으로 삼는다.
017_0558_b_06L云何惛沈?令心於境無堪任爲性。能障輕安、毘鉢舍那爲業。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274) 혼침은 치(癡)심소의 일부분에 포함된다. 논서에서 오직 이것은 치심소의 부분이라고 말하기275) 때문이다. 혼미하고 어두워 무겁게 가라앉는 것이 치심소의 인식활동이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276) 혼침은 다만 치심소에만 포함되는 것은 아니다. 자재하지 못한 것이 혼침의 인식활동이고, 모든 번뇌심소는 다 자재하지 못하며, 이것에서 떠나서는 별도로 혼침의 인식활동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번뇌에 의거해서 가립하지만, 치심소의 인식활동이 증성하므로 다만 치심소의 일부분이라고만 말한다.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277) 혼침은 별도로 체성이 있다. 치심소의 부분이라고 이름하지만, 이것은 등류이기 때문에 불신 등처럼 곧 치심소에 포함되는 것은 아니다.
만약 번뇌심소에서 떠나서 별도로 혼침심소의 인식활동이 없다고 말하면, 별도로 혼침이 위빠사나[觀]를 장애한다고 말하지 않아야 한다. 따라서 자재하지 못한 것은, 이것의 개별적인 행상은 아니다. 이것이 치(癡)심소의 인식활동과 차이가 있다고 말하면, 치심소는 대상에 대해서 미혹하고 어두운 것을 인식활동으로 하고, 바로 무치(無癡심소를 장애하지만 답답하게 무거운 것은 아니다. 혼침은 대상에 대해서 답답하게 무거운 것을 인식활동으로 하고, 바로 안(安)심소를 장애하지만 미혹하고 어두운 것은 아니다.
017_0558_c_01L무엇이 ‘불신(不信)심소’279)인가? 참다운 존재[實]ㆍ덕[德]ㆍ능력[能]에 대해서 인정하거나 즐거워하거나 욕구하지 않고, 심왕을 더럽히는 것을 체성으로 삼는다. 능히 청정한 믿음을 장애하여 게으름의 의지처가 되는 것을 업으로 삼는다. 믿지 않는 사람은 게으름이 많기 때문이다. 불신의 세 가지 행상은 신(信)심소를 정반대로 뒤집어서 알아야 한다.
그런데 모든 잡염법은 각각 별도의 인식활동이 있다. 오직 이 불신만이 자성이 혼탁하고, 또한 능히 다른 심왕과 심소를 혼탁하게 한다. 매우 더러운 물건이 자신도 더럽고 다른 것도 더럽히는 것과 같다. 그리하여 이것은 심왕을 더럽히는 것을 체성으로 한다고 말한다. 불신에 의거하기 때문에, 참다운 존재ㆍ덕ㆍ능력을 인정하거나 즐거워하거나 욕구하지 않는다. 별도로 체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 다른 것280)에 대해서 삿되게 인정하고 즐거워하고 욕구한다면, 이것(불신)의 원인281)과 결과282)이지, 이것의 체성은 아니다.283)
무엇이 ‘해태(懈怠)심소’284)인가? 선품(善品)을 닦고 악품을 끊는 일에 대해서 게으른 것을 체성으로 삼는다. 능히 정진을 장애하여 잡염을 증장함을 업으로 삼는다. 게으른 사람은 잡염법을 증장하기 때문이다. 모든 잡염법의 일에 대해서 부지런히 책려하는 것도 역시 해태 심소라고 이름한다. 선법을 퇴전시키기 때문이다. 무기의 일에 대해서 부지런히 책려하는 것은 모든 선품에 대해서 나아가게도 물러나게도 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은 욕(欲)ㆍ승해(勝解) 심소가 되며, 별도로 체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무기에 대해서 인정하고 즐거워하고 욕구하는 것이 청정도 잡염도 아니므로 신(信)심소도 아니고 불신심소도 아닌 것과 같다.
무엇이 ‘방일(放逸)심소’285)인가? 잡염품을 방지할 수 없거나 청정품을 닦을 수 없고 방탕하게 흐르는 것을 체성으로 삼는다. 불방일을 장애하여 악을 증장하고 선법을 훼손하는 것의 의지처가 됨을 업으로 삼는다. 해태ㆍ탐ㆍ진ㆍ치 심소 때문에 잡염품을 방지하거나 청정품의 법을 닦을 수 없는 것을 총체적으로 방일이라고 이름하고, 별도로 자체가 있는 것은 아니다. 만(慢)ㆍ의(疑) 심소 등도 역시 이런 작용이 있지만, 그 네 가지286)에 비해서 세력이 미약하고 세 가지 선근287)과 정진[遍策]의 법을 장애하기 때문이다. 이것의 인식활동을 추정하는 것은 불방일 심소와 같다.
017_0559_a_01L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289) 실념(失念)은 염(念)심소의 일부분에 포함된다. 이것이 번뇌와 상응하는 염(念)심소라고 말하기290) 때문이다.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291) 실념(失念)은 치(癡)심소의 일부분에 포함된다. 『유가사지론』에서 이것이 치심소의 일부분이라고 말하기292) 때문이다.치심소가 기억하는 것을 잃게 하기 때문에 실념이라고 이름한다.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296) 산란은 치심소의 일부분에 포함된다. 『유가사지론』에서 이것이 치심소의 부분이라고 말하기297) 때문이다.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298) 산란은 탐ㆍ진ㆍ치 심소에 포함된다. 『집론』 등에서 이것이 세 가지의 일부분이라고 말하기299) 때문이다. 치심소의 일부분이라고만 말한 것은 잡염심에 두루하기 때문이다.300) 탐ㆍ진ㆍ치 심소가 심왕을 방탕하게 흐르게 하는 것이 다른 법301)보다 뛰어나기 때문에 산란이라고 말한다.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302) 산란은 별도로 자체가 있다. 세 가지의 일부분이라고 말한 것은 이것이 그것의 등류이기 때문이고, 무참(無慚) 등처럼 곧 그것303)에 포함되는 것은 아니다.304) 다른 것의 인식활동에 따라서 세속유라고 이름한다. 산란의 개별적인 인식활동은 조급하고 어지러운 것을 말한다. 함께 일어나는 법으로 하여금 모두 방탕하게 흐르게 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 세 가지에서 떠나서 별도의 자체가 없다고 말하면, 별도로 삼마지(三摩地)305)를 장애한다고 말하지 않아야 한다. 도거와 산란의 둘의 작용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것(도거)은 이해[解]를 바뀌게 하고, 이것(산란)은 연(緣)을 바뀌게 한다. 한 찰나에는 이해와 연(緣)을 바뀌게 하는 일이 없지만, 그러나 상속함에 있어서는 바꾸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 염오심의 시기에는 도거와 산란의 세력에 의해서 항상 생각마다 이해를 바꾸고 연(緣)을 바꾸어야 한다. 혹은 염(念)심소 등의 세력에 의해서 억제되고 조복되는 것이 마치 원숭이를 묶어 놓은 것과 같아서 잠시 안주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도거와 산란 심소는 함께 잡염심에 두루한다.
무엇이 ‘부정지(不正知)심소’306)인가? 관찰되는 대상에 대해서 그릇되게 이해함을 체성으로 삼는다. 능히 바르게 아는 것[正知]을 장애하여 계율 등을 훼범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다. 바르게 알지 못하는 사람은 훼범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017_0559_a_20L云何不正知?於所觀境謬解爲性。能障正知毀犯爲業。謂不正知者多所毀犯故。
017_0559_b_01L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307) 부정지는 혜(慧)심소의 일부분에 포함된다. 이것이 번뇌와 상응하는 혜(慧)라고 말하기 때문이다.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308) 부정지는 치심소의 일부분에 포함된다. 『유가사지론』에서 이것은 치심소의 부분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아는 것을 바르지 않게 하는 것을 부정지(不正知)라고 이름한다.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309) 부정지는 두 가지[俱]310)의 일부분에 포함되다. 앞에서 인용한 두 문장에서 그림자처럼 생략해서 말했기 때문이다. 논서에서 다시 이것이 잡염심에 두루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017_0559_b_02L有義不正知俱一分攝。由前二文影略說故。論復說此遍染心故。
(『삼십송』의 제13ㆍ제14 게송에서) ‘와[與]’, ‘아울러[幷]’, ‘및[及]’이라는 말311)은 수번뇌심소가 오직 스무 가지만은 아니라는 것을 나타낸다. 『잡사경(雜事經)』 등312)에서 탐 등 많은 종류의 수번뇌를 말하기 때문이다. 수번뇌라는 명칭은 역시 번뇌도 포함한다. 이것은 앞의 번뇌심소의 등류의 성질이기 때문이다. (『유가사지론』 제62권에서) 번뇌와 같은 종류인 다른 염오법은 다만 수번뇌라고 이름한다. 번뇌심소에 포함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스무 가지 수번뇌뿐으로 말한 것313)은, 번뇌심소가 아니고, 오직 잡염이며,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이것에서 나머지 잡염법은 이것의 분위기이거나 혹은 이것의 등류이므로, 모두 여기에 포함된다. 그 종류의 차이에 따라서 논리에 맞게 알아야 한다.
이상과 같이 스무 가지 수번뇌 중에서 소수번뇌심소 열 가지와 대수번뇌 중의 세 가지314)는 반드시 가유(假有)이다.315) 무참ㆍ무괴ㆍ불신ㆍ해태 심소는 반드시 실유(實有)이다. 성스러운 가르침과 바른 논리로써 성취되기 때문이다. 도거ㆍ혼침ㆍ산란의 세 종류는 가유라는 견해도 있고, 실유라는 견해도 있다. 인용되는 바른 논리와 성스러운 가르침은 앞에서와 같이 알아야 한다.
스무 가지 수번뇌심소가 모두 선천적으로 일어나는 것과 후천적으로 분별에 의해 생겨나는 것에 통한다.316) 두 가지(구생ㆍ분별) 번뇌심소의 세력에 따라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 스무 가지 수번뇌 중에서 열 가지 소수번뇌심소는 전전(展轉)하여 반드시 함께 일어나지 않는다.317) 서로 위배되기 때문이고, 인식활동이 두드러지고 맹렬해서 각각 주체가 되기 때문이다.
017_0559_c_01L어떤 곳319)에서는 여섯 가지320) 심소만이 잡염심에 두루하다고 말한다. 혼침ㆍ도거 심소가 증성할 때에는 함께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어떤 곳321)에서 다만 다섯 가지322) 심소만이 잡염심에 두루한다고 말한 것은, 혼침ㆍ도거 심소 등이 오직 선법(善法)323)에 거스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직 잡염뿐이기 때문에 제8식과는 함께하지 않는다.324) 제7식 중에는 오직 여덟 가지 대수번뇌심소만이 있다. 취하고 버리는 것의 차이는 앞에서와 같이 알아야 한다.325) 제6식과 함께하는 것에는 모든 수번뇌가 있음이 인정된다. 열 가지 소수번뇌심소는 두드러지고 맹렬해서 5식 중에는 없다. 중수번뇌와 대수번뇌심소와는 행상이 통하므로326) 5식에도 있다고 인정된다. 이상에 의거해서 중수번뇌와 대수번뇌심소는 5수(受)와 상응한다.327)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328) 열 가지 소수번뇌는 세 가지329)를 제외하고, 분(忿)심소 등은 오직 희수(喜受)ㆍ우수(憂受)ㆍ사수(捨受)와 상응한다. 첨ㆍ광ㆍ교(憍) 심소는 네 가지 느낌[受]과 함께하며 고수(苦受)를 제외한다.
017_0559_c_04L有義小十,除三忿等唯喜憂捨三受相應。諂、誑、憍三四俱,除苦。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330) 분 등의 심소는 네 가지 느낌과 함께하며 낙수(樂受)를 제외한다. 첨ㆍ광ㆍ교 심소는 5수(受)와 함께 일어난다. 지옥에서의 의지(意地)에 고수(苦受)가 있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말했기 때문이다. 이 느낌과 함께하는 인식 활동은 번뇌심소에서 말한 바와 같다.
참다운 의미에서 말하는 것은 이와 같다. 두드러진 양상에 따라서 말하면, 분ㆍ한ㆍ뇌ㆍ질ㆍ해(害) 심소는 우수(憂受)와 사수(捨受)만 함께한다. 부(覆)ㆍ간(慳) 심소는 희수ㆍ사수와 함께하고, 나머지 세 가지331)에는 낙수가 증성하다. 대수번뇌와 중수번뇌는 두드러진 양상에 따라서도 역시 참다운 의미에서와 같다.
이와 같은 스무 가지 수번뇌심소는 다섯 가지 별경심소와 모두 함께 일어난다고 인정되니,332) 위배되지 않기 때문이다. 잡염의 염(念)심소와 잡염의 혜(慧)심소는 염ㆍ혜 심소와 함께하지는 않지만, 치(癡)심소의 일부분333)과는 역시 상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334) 염심소는 역시 현재와 예전에 익힌 종류의 대상을 반연하고, 분(忿)심소는 역시 찰나의 과거도 반연할 수 있기 때문에 분심소는 염심소와 역시 상응할 수 있다.335) 잡염의 정(定)심소가 일어날 때에는 심왕도 역시 조급하고 어지러워진다. 따라서 산란은 정심소와 상응한다고 말하는 것이 과실이 없다.336)
두 가지 중수번뇌와 여덟 가지 대수번뇌는 열 가지 번뇌심소와 함께한다.337) 열 가지 소수번뇌는 반드시 악견ㆍ의(疑)심소와는 함께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소수번뇌)은 인식활동이 두드러지게 작용하고, 그것은 살피고 미세하기 때문이다. 분(忿) 등의 다섯 가지 심소법은 만ㆍ치 심소와 함께한다고 인정된다. 분 등이 탐ㆍ진 심소와는 함께하지 않는다. 이것(분 등)은 진심소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간(慳)심소는 치ㆍ만 심소와는 함께하고, 탐ㆍ진 심소와는 함께하지 않으니, 탐심소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교심소는 오직 치심소와 함께하니, 만 심소와는 이해가 다르고, 탐심소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부ㆍ광ㆍ첨 심소는 탐ㆍ치ㆍ만 심소와 함께한다. 인식활동이 거스르지 않으므로 탐ㆍ치 심소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소수번뇌심소 중의 일곱 가지338)와 두 가지 중수번뇌는 오직 불선의 성품에 포함된다.339) 소수번뇌심소 중 세 가지340)와 여덟 가지 대수번뇌심소는 역시 무기에도 통한다. 소수번뇌 중 일곱 가지와 두 가지 중수번뇌는 오직 욕계에만 포함된다.341) 광ㆍ첨 심소는 욕계와 색계에 있으며, 나머지342)는 3계에 통한다.
017_0560_a_01L하부 지위[下地]에 태어나 살면서 상부 지위[上地]의 열한 가지 심소를 일으킨다고 인정된다.343) 선정에 탐착해서 다른 곳에 대해서 교ㆍ광ㆍ첨 심소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상부 지위에 태어나서는 하부 지위의 뒷부분의 열 가지 심소344)를 일으킨다. 사견ㆍ탐 심소와 함께 그것을 일으킨다고 인정되기 때문이다. 열 가지 소수번뇌는 상부 지위에 살면서는 하부 지위를 일으키는 데 의하지 않는다. 진정으로 태어남을 촉진하고 멸함[滅]을 비방하지 않기 때문이다. 두 가지 중수번뇌와 여덟 가지 대수번뇌는 하부 지위에 있으면서 역시 상부 지위도 반연한다.345) 상부 지위를 반연하는 탐심소 등과 상응해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346) 열 가지 소수번뇌는 하부 지위에 있으면서 상부 지위를 반연하지 않는다. 인식활동이 두드러지고 가까워서 멀리 취하지 않기 때문이다.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347) 질(嫉)심소 등348)은 역시 상부 지위도 반연할 수 있다. 뛰어난 지위와 법에 대해서 질투 등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여덟 가지 대수번뇌와 첨ㆍ광 심소는 상부 지위에 있으면서 역시 하부 지위도 반연한다. 하부 지위를 반연하는 만(慢)심소 등과 상응해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범천왕이 석존의 제자에 대해서 첨ㆍ광 심소를 일으키기 때문이다.349) 교심소는 하부 지위를 반연하지 않는다. 믿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스무 가지 수번뇌심소는 모두 유학과 무학에 포함되지 않는다.350) 이것(수번뇌)은 다만 잡염법뿐이고, 저것(유학 등)은 오직 청정법뿐이기 때문이다. 스무 가지 중에서 뒷부분의 열 가지 심소는 오직 견도에서 단멸되는 것과 수도에서 단멸되는 것에 통한다.351) 두 가지 번뇌심소352)와 상응해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스무 가지 중에서 앞부분의 열 가지 수번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354) 오직 수도에서 단멸되는 것뿐이다. 두드러진 현상의 대상을 반연하여 자연히 생겨나기 때문이다.
017_0560_a_16L前十有義唯修所斷。緣麤事境任運生故。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355) 역시 견도에서 단멸되는 것과 수도에서 단멸되는 것에 통한다. 두 가지356) 번뇌심소의 세력에 의해 일어나기 때문이고, 다른 악견 등을 반연하여 분(忿)심소 등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견도에서 단멸되는 것은, 의지처ㆍ인식대상인 총체적인 것ㆍ개별적인 미혹의 세력에 따라서 모두 4성제에 통한다.
이 가운데에서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 분(忿)심소 등은 다만 4성제에 어두운 미혹을 반연하여 생겨나고, 직접 4성제에 미혹한 것은 아니다. 인식활동이 두드러지고 얕아서 깊게 취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017_0560_a_20L此中有義忿等但緣迷諦惑生,非親迷諦。行相麤,不深取故。
017_0560_b_01L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357) 질(嫉)심소 등358)도 역시 직접 4성제에 미혹한 것이니, 멸제ㆍ도제 등에 대해서 질투 등을 일으키기 때문이다.그런데 분 등 열 가지 심소는 다만 본질이 있는 대상[有事]을 반연한다.359) 반드시 본질에 의탁해서 바야흐로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유루 등을 반연하는 것도 이상의 내용에 견주어서 알아야 한다.360)
2)무탐(無貪)ㆍ무진(無瞋)ㆍ무치(無癡)의 심소를 세 가지 선근[三善根]의 심소라고 한다.
3)신(信, śraddhā)심소는 ‘믿음’의 능력이다. 제법의 참다운 도리와 삼보의 덕과 선근의 뛰어난 능력을 믿고 기꺼이 원한다. 염오의 심왕ㆍ심소를 다스려서 청정하게 한다. 마치 탁수(濁水)에 맥반석을 넣으면 정화되듯이 이 믿음심소는 염오심을 정화하는 기능이 있다.
4)무위선(無爲善)을 얻고 유위선(有爲善)을 성취하는 것, 또는 세간의 선(善)을 얻고 출세간의 선을 성취하는 것을 말한다.
5)외인(外人)의 질문이다. 신(信)심소의 인과는 분명히 하고, 아직 그것의 자상을 말하지 않았는데, 그 자상은 어떠한가라고 묻는다.
6)이것은 심왕이지 심소가 아니어야 한다고 비판한다.
7)논주가 신(信)심소와 참(慚) 등의 심소의 차이점을 회통하여 답변한다.
8)상좌부 또는 대승의 다른 학파[異師]의 견해를 논파한다.
9)논주의 논파이다. 즉 그대들의 주장대로라면 마땅히 신심소는 3성(性)에 통해야 한다. 그것은 세 가지 대상을 즐기고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심소의 자체는 곧 욕(欲)심소이어야 하고, 신심소에도 악(惡)과 무기가 있을 수 없지 않겠는가? 또한 4성제를 믿을 때에 즐기고 좋아하는 것이 신심소라고 하면, 고제(苦諦)ㆍ집제(集諦)는 신심소의 인식대상이 아니어야 한다고 비판한다.
10)대승의 이사(異師) 또는 대중부의 견해이다.
11)이하 논주의 논파이다.
12)참(慚, hrī)심소는 ‘제 부끄러움’의 작용을 하는 심소이다. 자신과 법에 의지해서 현선(賢善)을 존경하고, 자신의 잘못에 대해 뉘우치고 부끄러워하는 심리작용이다.
13)범부와 성인을 막론하고 누구나 현덕(賢德)이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14)모든 유루(有漏)와 무루(無漏)의 선법을 가리킨다.
15)괴(愧, apatrapā)심소는 ‘남부끄러움’, 즉 타인의 비방을 두려워하고 왕법(王法)의 형벌을 두려워해서 잘못을 부끄러워하는 심리작용이다.
22)참(慚)심소의 인식대상[所縁]은 현인과 선법[賢善]이고, 괴(愧)심소의 대상은 포악(暴惡)이다. 이처럼 둘의 인식대상이 다르다고 비판한다.
23)외인의 질문이다. 그대는 참(慚)ㆍ괴(愧) 심소가 구생(俱生)하지 않는 것으로써 우리를 비판하지만, 그대의 견해에도 두 심소의 인식대상이 다르다는 과실이 있다. 그렇다면 그대와 우리 둘 모두 과실이 있는데, 어째서 우리만 비판하느냐고 묻는다.
24)자신을 이익되게 하는 것은 자(自), 해롭게 하는 것은 타(他)라고 한다.
25)무탐(無貪, alobha)심소는 애착심을 없애는 심리작용이다. 여기에는 5취온(取)뿐만 아니라 열반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는 것도 포함된다. 왜냐하면 열반에 집착하면, 그 집착이 원인이 되어 3계 윤회의 과보가 따라오기 때문이다.
26)유(有)는 3유(有:三界)의 과보[果], 즉 윤회의 삶을 말한다.
27)유구(有具)는 3유(有), 즉 윤회의 삶의 원인[因]이다.
28)무진(無瞋, adveṣa)심소는 성냄을 없애는 심리작용이다. 3고(苦:苦苦ㆍ壞苦ㆍ行苦)뿐만 아니라 또한 열반[苦具]에 대해서도 성내는 마음이 없어야 한다. 열반을 추구하다가 뜻대로 증득하지 못하면 성내는 마음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29)윤회하는 삶의 원인[有具]ㆍ고통[苦]ㆍ고통의 원인[苦俱]을 가리킨다.
30)여기서 관(觀)은 관대(觀待)로서, 상대하는 것을 말한다.
31)탐(貪)심소를 윤회의 삶[有]과 그 원인[有俱]에 관대(觀待)하고, 진(瞋)심소를 고통[苦]과 그 원인[苦俱]에 관대하여 둘의 별상(別相)을 건립한다. 그러나 반드시 무탐(無貪)심소가 유(有)와 유구(有俱)를 반연하고, 무진(無瞋)심소가 고(苦)와 고구(苦俱)를 반연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32)무치(無癡, amoha)심소는 모든 사리(事理)를 밝게 이해하는 능력의 심리작용이다.
50)피갑(被甲)은 맹렬하고 날카롭게 즐거운 욕구를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경전에는 세력이 있는 것[有勢]이라고 이름한다. 갑옷[甲]을 입고[被] 군대가 진(陣)을 친 곳에 들어갈 때 두려워하지 않고 큰 위세가 있는 것과 같음을 일컫는다.
51)가행(加行)은 견고하고 용감한 방편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경전에는 정진하는 것[有勤]으로 이름한다. 마음을 견고하게 해서 스스로 책려(策勵)하는 것을 일컫는다.
52)낮추지 않음[無下]은 증득해야 할 것에 대해서 스스로를 경멸하지 않고, 역시 법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경전에는 용감한 것[有勇]으로 이름한다.
53)물러나지 않음[無退]이란 추위나 배고픔 등의 고통을 능히 인내로써 받아들이고, 열등한 선(善)에 대해서 혐오(嫌惡)나 만족함을 일으키지 않으며, 다음 단계의 뛰어난 공덕 등을 기쁘게 구하는 것을 말한다. 경전에는 견고하고 용맹한 것[堅猛]으로 이름한다.
54)만족하지 않음[無足]은 이후에 점차 4성제를 관찰함[諦觀] 등 뛰어난 도(道)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경전에는 선(善)의 멍에를 버리지 않는 것[不捨善軛]으로 이름한다.
55)소[牛]에게 멍에를 씌움으로써 소로 하여금 도망가지 않고 능히 나아가게 한다. 선법(善法)도 역시 그러해서 수행자에게 멍에를 지워 선품(善品)에서 벗어나지 않고 열반에 나아가게 하므로 이렇게 표현한다.
56)다섯 가지 중에서 맹렬함을 일으키는 것[被甲ㆍ有勢]은 발심이고, 나머지 넷은 수행인데, 이 수행은 다시 자분(自分)과 승진(勝進)으로 나뉜다. 자분은 가행(加行. 有勤:下品), 낮추지 않음[無下. 有勇:中品], 물러나지 않음[無退. 堅猛:上品]의 3품이고, 만족하지 않음[無足. 不捨善]은 승진에 해당된다.
57)자량도(資糧道)ㆍ가행도(加行道)ㆍ견도ㆍ수도ㆍ무학도이다.
58)3승(乘)의 무학(無學)도 증과(證果)를 원만히 이루었는데, 어째서 만족하지 않는 것[無足]이나 선의 멍에를 버리지 않는 것[不捨善軛]이라고 말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2승(乘)의 구경도(究竟道:無學)는 마음을 대승으로 회향하여 대보리를 기뻐하기 때문이고, 모든 부처님의 구경도에서는 영원히 미래세가 다하도록 유정을 이롭게 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모두 만족하지 않음이나 선의 멍에를 버리지 않는다고 이름할 수 있다고 말한다.
59)가깝고[近] 먼 것[遠]을 말한다.
60)안(安, prasrabdhi)심소는 ‘경안(輕安)’, 즉 번뇌를 멀리하고[輕] 몸과 마음을 편안히 조절하는[安] 능력의 심리작용이다. 이것은 욕계의 산심위(散心位)에서는 일어나지 않고, 색계ㆍ무색계의 정위(定位)에서만 생기(生起)한다.
61)불방일(不放逸, apramāda)심소는 방일함을 없애는 심리작용, 즉 정진ㆍ무탐ㆍ 무진ㆍ무치의 심소력으로 번뇌를 끊고 선행을 닦음에 있어서 선법을 획득하고 보존하게 하는 능력의 심소이다.
62)근(動)심소와 세 가지 선근[三善根]의 심소를 말한다.
63)외인의 질문이다.
64)논주가 반대로 질문한다.
65)외인의 답변이다.
66)논주의 논파이다.
67)무탐(無貪)ㆍ무진(無瞋)ㆍ무치(無癡)의 3근(根)이다.
68)정진과 세 가지 선근의 심소를 가리킨다.
69)외인이 비판하여 묻는다.
70)논주의 반대질문이다.
71)행사(行捨, upekṣā)심소는 마음의 ‘평정’을 이루게 하는 심리작용이다. 여기서 ‘사(捨)’는 혼침이나 들뜸[掉擧]이 아닌 평정상태를 말한다. ‘행사(行捨)’란 5온(蘊) 중에 수온(受蘊)이 아닌 행온(行蘊)에 포함되는 사(捨)라는 뜻이다.
72)근(勤)심소와 세 가지 선근의 심소를 가리킨다.
73)불해(不害, ahiṃsā)심소는 타자(他者)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심리작용이며, 이것은 무진(無瞋)심소에 의해 생기한다.
74)무진(無瞋)ㆍ불해(不害) 심소를 별도로 건립해야 하는 이유를 밝힌다.
75)설일체유부의 견해이다.
76)논주의 논파이다.
77)이 ‘및[及]’이라는 글자에 상위(相違)와 합집(合集)의 뜻이 있다. 상위는 선심소(善心所)의 열한 가지가 각각 모두 그 자체가 다른 것을 나타낸다. 합집은 열한 가지 이외에 다른 심소가 있음을 나타낸다. 여기서는 후자의 개념이다.
78)다음은 선심소에 관한 장행석(長行釋) 중의 제3제문분별(第三諸門分別)의 일단(一段)이다. 그것에 열두 가지가 있는데, 먼저 뜻[義]으로써 다른 것을 포섭하는 것을 나타낸다.
79)분노하지 않음[不忿], 원한을 품지 않음[不恨], 고뇌하지 않음[不惱], 질투하지 않음[不嫉] 등은 분노[忿]ㆍ원한[恨]ㆍ고뇌[惱]ㆍ질투[嫉] 등의 심소를 뒤집어 정반대로 건립된 것인데, 어느 것이나 모두 무진(無瞋)심소의 일부이다.
80)부(覆)심소를 뒤집은 정반대이다.
81)거만하지 않음[不慢]에 관한 제1사(第一師)의 견해이다.
82)만(慢)심소를 뒤집은 정반대이다.
83)제2사(第二師)의 견해이다.
84)호법의 정의이다.
85)의심하지 않음[不疑]에 관한 제1사(第一師)의 견해이다.
86)의심[疑]의 심소를 뒤집은 정반대이다.
87)제2사(第二師)의 견해이다.
88)호법의 정의이다.
89)산란(散亂)심소를 뒤집은 정반대이다.
90)실념(失念)심소를 뒤집은 정반대이다.
91)외인의 질문이다. 근본번뇌의 심소와 수번뇌의 심소 중에서 여기서는 다만 수번뇌의 심소 열한 가지만을 별도로 뒤집어서[飜] 정반대로 선의 심소로 하고, 다른 것은 별도로 뒤집어 배대하지 않는 까닭을 묻는다.
92)근본번뇌심소 열 가지 중에서 탐(貪)ㆍ진(瞋)ㆍ치(癡)를 제외한 나머지 일곱 가지와, 소수번뇌[小隨感] 중에서 해(害)를 제외한 나머지 아홉 가지는 오직 의식에서만 일어난다. 따라서 뒤집어서 별도로 건립하지 않는다.
93)해(害)심소도 역시 의식에만 있고 6식에 두루하지 않지만, 그것을 뒤집어서 불해(不害)심소를 건립하는 이유를 밝힌다.
94)해(害)심소를 가리킨다.
95)외인의 질문이다. 잡염법과 청정법을 뒤집어 배대하는데, 어째서 그 청정법의 숫자가 적은가라고 비판하여 묻는다.
96)청정법은 지해[解]이고, 지해는 본질[理]이 통하고 모습이 원만하므로 열한 가지 법에 많은 법의 동체(同體)를 포함해야 한다. 미혹한 생각[迷情]은 현상적인 자체[事體]가 이미 국한되어 잡염이 증성한 모습에 따르기 때문에 여러 종류로 나눈다.
125)탐(貪, rāga)심소는 ‘탐욕’, 즉 애착을 일으키는 심리작용이다. 좋아하는 대상에 대한 집착, 특히 윤회하는 삶과 그 원인인 5온 나아가 열반에 대해서까지 애착심을 일으킴으로써 고통을 자초한다.
126)진(瞋, dveṣa)심소는 ‘성냄’, 즉 좋아하지 않는 대상에 대한 불쾌감의 심리이다. 고통과 그 원인에 대해 증오심을 일으키는 심리작용이다. 몸과 마음을 열뇌하게 해서 갖가지 악업을 짓게 만든다.
127)치(癡, moha, avidhya)심소는 ‘어리석음’, 즉 특히 현상계[事]와 그 본질[理]의 진리(연기ㆍ무아ㆍ중도 등)를 모르는 무명의 심리작용이다. 여기서 의(疑)ㆍ사견ㆍ탐(貪) 등 여러 번뇌들이 일어난다.
128)만(慢, māna)심소는 ‘거만’, 즉 자신을 높이고 타인을 얕보며 나아가 덕 높은 성자에게도 자신을 낮추려 들지 않는 심리작용이다.
129)일곱 가지 거만[七慢]은, 만(慢)ㆍ과만(過慢)ㆍ만과만(慢過慢)ㆍ아만(我慢)ㆍ증상만(增上慢)ㆍ비열만(卑劣慢)ㆍ사만(邪慢)이다. 만(慢)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 대해서 우월감을 갖고 잘난 척하는 것이다. 과만은 자신과 동등한 자격의 사람에 대하여 자신을 높이는 것이다. 만과만은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을 높이는 것이다. 아만은 5취온을 나ㆍ나의 것으로 집착하여 교만하며, 여기서 자기 능력을 믿고 남을 업신여기게 되는 것이다. 증상만은 자기를 가치 이상으로 보는 것이다. 비열만은 겸손하면서도 자만심을 갖는 것이다. 사만은 덕이 부족한 사람이 자신을 덕 높은 사람으로 착각하고 삼보를 경시하는 것이다.
130)아홉 가지 거만[九慢]은, ①아만(我慢), ②아등(我等), ③아열(我劣), ④유승아(有勝我), ⑤유등아(有等我), ⑥유열아(有劣我), ⑦무승아(無勝我), ⑧무등아(無等我), ⑨무열아(無劣我)이다. 이 9만의 자체[體]에서 7만의 만(慢)ㆍ과만(過慢)ㆍ비만(卑慢)을 낸다. 즉 ③⑤⑦이 만(慢)을, ①⑥⑧이 과만을, ②④⑨가 비만을 낸다.
131)하품(下品)과 중품(中品)의 일분(一分)에서 만(慢)이, 중품과 상품의 일분에서 과만(過慢)이, 상품의 일분에서 만과만(慢過慢)이, 상품의 일분에서 비만(卑慢)이, 아처(我處)에서 아만(我慢)이, 덕처(德處)에서 증상만(增上慢)과 사만(邪慢)이 생겨난다.
132)의(疑, vicikitsā)심소는 ‘의심’하는 작용, 특히 4성제 등의 진리를 의심하여 참으로 그러하다고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심리이다. 불신(不信)이 아니라, 불설(佛說)을 신봉하지만 그 교설의 내용ㆍ중요성을 애써서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얼버무려 둔다. 이런 상태에서는 그 진리를 실천하고자 하는 강한 동기ㆍ선(善)심소가 생기될 수 없다.
133)대승 이사(異師)의 견해이다.
134)mati(末底)는 혜(慧)의 뜻이다. 이에 접두어 vi(毘)를 덧붙여 vimati로 하면 의심[疑]의 뜻이 된다. 그러므로 혜(慧, mati)와 반야(般若, praj)는 뜻이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137)jna(若南)는 지혜[智]의 뜻이다. 여기에 접두어 vi를 붙여서 vijna(毘若南)로 하면 식(識)의 뜻이 된다. 그러나 식의 자체가 곧 지혜는 아닌 것과 같이, 의(疑)심소의 자체가 곧 혜(慧)심소는 아니다.
138)악견(惡見)심소는 그릇된 견해를 일으키는 심리작용이다. 특히 인습에 사로잡혀서, 4성제 등의 진리를 오해하고 인과법을 무시한다. 이것은 별경심소 중의 혜(慧) 심소의 일부분인 염오성이 작용된 것이다. 악견은 작용의 차이에 따라 유신견ㆍ변견ㆍ사견ㆍ견취견ㆍ계금취견의 다섯 종류로 나뉜다.
139)살가야견(薩迦耶見)은 산스끄리뜨 satkāya-dṛṣṭi의 번역어이다. 유신견(有身見)ㆍ신견(身見) 등으로 의역(意譯)된다. 5온이 결합하여 이루어진 임시적 육신을 실아(實我)라고 집착하는 소견이다. 또한 육신에 달려 있는 일체의 소유도 고정된 소유주가 있는 것이 아닌데, 그것을 나의 소유라고 집착하는 소견을 말한다.
140)5온(蘊)의 각각에 네 가지 문구가 있어서 합하면 스무 가지가 된다. 즉 색온(色蘊)에 대해서 말하면, “물질[色]은 나이다”, “나는 물질을 갖는다”, “물질은 나에게 속한다”, “나는 물질 중에 있다”라고 계탁하듯이, 하나의 온(蘊)에 네 가지가 있다. 5온(蘊)에서 말하면 스무 가지 문구[句]가 된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다섯 가지 아견(我見:5온 각각에 대한 나라는 견해)과 열다섯 가지 나의 소유라는 견해[我所見:5온 각각에 我瓔珞ㆍ我童僕ㆍ我器라는 세 가지씩의 我所見]가 되므로 합하면 스무 가지 문구가 된다.
141)극단에 집착하는 견해이며, 변집견(邊執見)이라고도 한다.
142)아견(我見)의 대상을 가리킨다.
143)단멸[斷]과 상주[常]의 극단을 떠난 중용(中容)의 의처(意處)이다.
144)여기서 전제(前際)는 과거에 의해 분별의 견해를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145)여기서 후제(後際)는 미래에 의해 분별의 견해를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146)극단적인 견해[邊見]는 62견(見) 중에서 47견(見)을 포함한다. 마흔일곱 가지 중에서 마흔 가지(四遍常論ㆍ四一分常論ㆍ有想十六論ㆍ無想八論ㆍ俱非八論)는 상견(常見)이고, 일곱 가지는 단견(斷見)이다.
147)보시(布施)나 탐착 등 모든 선악의 원인[因]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부정함을 가리킨다.
148)선악업에 초감(招感)되는 이숙과(異熟果)가 없다고 부정하는 것을 말한다.
149)세간ㆍ부모 등 모든 사회ㆍ국가를 부정하는 것을 말한다.
150)세간의 참다운 아라한(阿羅漢)도 없다고 부정하는 것을 말한다.
151)『성유식론술기(成唯識論述記)』 제6권 말(末)에 각각의 견해에 관하여 상세하게 발명되어 있다.
152)욕계 제6천인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이다.
153)여기서 세주(世主)는 대자재천, 즉 색계의 18천 가운데 최고천인 색구경천(色究竟天)을 말한다.
154)색계 초선천(初禪天)의 주(主)이다.
155)자성(自性) 등을 가리킨다.
156)집제(集諦)에 대한 삿된 견해이다.
157)멸제(滅諦)에 대한 삿된 견해이다.
158)도제(道諦)에 대한 삿된 견해이다.
159)잘못된 견해에 취착하는 견해이다.
160)계금(戒禁)은 계법(戒法)이라는 뜻이다. 계금취견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외도에서 잘못된 계법에 집착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불교인 중에서 계법의 진정한 정신을 이해하고 실천하기보다는 계법의 형식 그 자체에 취착하는 경우이다.
249)『유가사지론』 제55권과 『대승아비달마잡집론』 제1권 등에서는, 부(覆)심소가 무지(無智)와 함께함으로써 명예를 잃을까 두려워 죄를 덮어 두는 것에 의거하여 치(癡)심소의 일부분이라고 말한 것이고, 사실은 탐심소의 일부분에도 있다. 예를 들면 도거(掉擧)심소는 실제는 별도로 자체[體]가 있지만, 탐(貪)의 모습이 증성하므로 탐심소의 일부분이라고 말한 것과 같다.
250)뇌(惱, pradāsa)심소는 ‘열뇌(熱惱)’, 즉 과거에 분하게 여긴 일을 돌이켜 생각하거나, 현재 일이 마음에 맞지 않아 괴로워하는 심리작용이다. 불편한 심기로 조악(粗惡)한 말로 타인을 씹게 된다. 진(瞋)심소의 일부분이다.
251)질(嫉, īrṣyā)심소는 ‘질투’, 즉 자신의 이익과 명예를 앞세워 다른 사람의 영화를 질투하는 심리작용이다. 진(瞋)심소의 일부분이다.
252)간(慳, mātsarya)심소는 ‘인색’, 즉 자신의 재산ㆍ가정ㆍ사회적 지위 나아가 수증과(修證果)를 지나치게 아까워하여, 남에게 베풀지 않고 몰래 감추어 두려는 심리작용이다. 이것은 탐(貪)심소의 일부분이다.
253)광(誑, śaṭya)심소는 ‘속임’, 즉 이익과 명예를 얻기 위해 거짓으로 덕이 있는 것처럼 꾸미는 심리작용이다. 그리하여 정직하지 못한 생활을 하게 되는데, 이것은 탐(貪)심소와 치(癡)심소의 일부분이다.
254)첨(諂, māya)심소는 ‘아첨’, 즉 자기 본심을 숨겨 두고서 남에게 거짓으로 순종하는 것처럼 위장하거나, 남에게 아첨해서 자기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심리작용이다. 탐(貪)심소와 치(癡)심소의 일부분이다.
255)해(害, vihiṃsā)심소는 ‘해침’, 즉 모든 유정에게 연민의 정을 갖지 못하고, 손해를 입히며 괴롭히는 심리작용이다. 진(瞋)심소의 일부분이다.
256)진(瞋)심소는 열한 가지 선심소 중에서 무진(無瞋)심소를 장애하므로, 바로 자(慈)를 장애한다. 해(害)심소는 선의 심소 중에서 불해(不害)심소를 장애하므로, 바로 비(悲)를 장애한다. 또한 진(瞋)심소는 자주 남의 목숨을 괴롭히고 끊어 놓으며, 해(害)심소는 오직 남을 괴롭히는 작용을 한다.
257)교(憍, mada)심소는 ‘방자함’, ‘교만’, 즉 자신이 지닌 우월한 특성(미모ㆍ혈통ㆍ학식 등)에 도취되어 교만해지는 심리작용으로서, 이에 특별 대접을 받으려고 한다. 탐(貪)심소의 일부분이다.
258)무참(無慚, āhrīkya)심소는 참(慚)의 반대 심소로서,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여 부끄러움을 내지 않으며, 현인과 선법을 경시하는 심리작용이다.
259)다음에 두 가지 중수번뇌[中隨惑]의 체성과 업을 해설한다.
260)무괴(無愧, anapatrāpya)심소는 괴(愧)의 반대 심소로서, 남을 고려하지 않고 나쁜 짓을 하면서도 조금도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고, 포악하거나 악덕인(惡德人)을 따르는 심리작용이다.
261)여러 경론에서 무참(無慚)ㆍ무괴(無愧)심소의 자체를, 잘못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것[不恥]으로 설명하므로 여기서 그것을 회통하여 불치(不恥)는 이 두 가지 심소의 공통된 양상임을 밝힌다.
262)종래의 견해를 비판한다.
263)무참(無慚)ㆍ무괴(無愧) 심소가 실유(實有)로서 전후(前後)하여 일어난다고 말하면, 일어나고 일어나지 않음이 있으므로 악(惡)에 두루한다고 말하지 않아야 한다고 비판한다.
305)삼마지(三摩地, samdhi)는 등지(等持)로 번역한다. 선정을 닦아서 마음을 한 대상에 안주하여 움직임이 없는 것을 말한다.
306)부정지(不正知, asamprajñānya)심소는 대상을 잘못 이해하는 심리작용으로서 정지(正知)를 장애한다. 혜(慧)와 치(癡)심소의 일부분이다.
307)제1사(第一師)의 견해를 서술한다.
308)제2사(第二師)의 견해를 서술한다.
309)호법의 정의이다.
310)혜(慧)와 어리석음[癡]의 심소를 말한다.
311)다음에 『유식삼십송』의 제13ㆍ제14 게송에서의 ‘와[與]’, ‘아울러[幷]’, ‘및[及]’의 글자의 의미를 해석한다.
312)『아비달마법온족론(阿毘達磨法蘊足論)』 8권 등이다.
313)다음에 삿된 욕구[邪欲] 등 나머지를 수번뇌심소에 포함시키지 않고 폐지(廢止)한 근거를 밝힌다. 오직 스무 가지를 수번뇌심소로 말한 것은, 이 스무 가지가 번뇌심소[本惑]가 아니고, 오직 잡염이며, 두드러짐의 세 가지 뜻에 의해서 수번뇌심소로 말한다. 이 스무 가지 이외의 삿된 욕구[邪欲] 등은 모두 이 스무 가지의 분위(分位)이고 등류성이므로, 스무 가지 수번뇌에 포함된다.
314)실념(失念)ㆍ방일ㆍ부정지(不正知) 심소를 가리킨다.
315)다음에 수번뇌심소를 열두 가지 부문으로 나누어 판별한다. 먼저 스무 가지 수번뇌심소 중에서 실유(實有)와 가유(假有)를 판별한다[假實分別門].
316)다음에 선천적으로 일어나는 것[俱生起]과 분별에 의해 생겨나는 것[分別起]을 판별한다[俱生分別門].
317)다음에 스무 가지 중에서 어떤 것이 함께 일어나고 그렇지 않은가를 판별한다[自類相應門].
319)위의 책 제55권(『고려대장경』 15, p.938中:『대정장』 30, p.604上)의 내용을 회통한다.
320)혼침ㆍ도거(掉擧) 심소를 제외한다.
321)『대승아비달마잡집론』 제6권(『고려대장경』 16, p.324中:『대정장』 31, p.723上)의 내용을 회통한다.
322)불신ㆍ해태ㆍ혼침ㆍ도거ㆍ방일 심소를 말한다.
323)안(安)ㆍ행사(行捨) 등의 심소를 가리킨다.
324)다음에 수번뇌심소와 8식과의 상응관계를 밝힌다[諸識俱門].
325)제8식의 경우는 본 논서 제3권에서, 제7식의 경우는 제5권에서 언급하였다.
326)불선(不善)과 잡염법에 두루하기 때문이다.
327)다음에 수번뇌심소와 5수(受)와의 상응관계를 밝힌다[受俱門].
328)제1사(第一師)의 견해를 서술한다.
329)첨ㆍ광ㆍ교(憍) 심소를 말한다.
330)제2사(第二師)의 견해를 서술한다.
331)첨ㆍ광ㆍ교 심소이다.
332)다음에 수번뇌심소와 별경심소와의 상응관계를 밝힌다[別境相應門].
333)실념(失念)ㆍ부정지(不正知) 심소이다.
334)망념(妄念)이 어떻게 염(念)심소와 함께하며, 악혜(惡慧)가 어떻게 혜(慧)심소와 함께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335)분(忿)심소는 현재를 반연하고, 염(念)심소는 예전에 익힌 것을 반연한다. 그런데 이 둘이 어떻게 함께 일어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에 대해 답한다.
336)정(定)심소는 하나의 대상에 기울이고, 산란심소는 많은 연(緣)을 취한다. 그런데 어떻게 두 심소가 함께 일어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에 답한다.
337)다음에 수번뇌심소와 번뇌심소와의 상응관계를 밝힌다[根本相應門].
338)열 가지 소수번뇌심소 중에서 첨ㆍ광ㆍ교 심소를 제외한 나머지이다.
339)수번뇌심소의 3성(性) 관계를 판별한다[三性門].
340)첨ㆍ광ㆍ교 심소이다.
341)수번뇌심소가 어떤 세계에 계박되는가를 밝힌다[界繫門].
342)교(憍)심소와 대수번뇌의 심소 여덟 가지를 말한다.
343)상부 지위[上地]와 하부 지위[下地]에서 어떤 수번뇌의 심소를 일으키는가를 밝힌다[下上生起門:第二子門].
344)무탐(無貪)ㆍ무진(無瞋)과 대수번뇌의 심소 여덟 가지이다.
345)수번뇌심소가 상부 지위와 하부지위에서 서로 반연하는 것을 밝힌다[上下相緣門:第三子門].
346)제1사(第一師)의 견해를 서술한다.
347)제2사(第二師)의 견해를 서술한다.
348)질(嫉)ㆍ간(慳)ㆍ교(憍) 심소이다.
349)마등(馬騰) 비구가 4대종(大種)이 멸진한 지위를 알고 선정에 들어 사왕천(四王天)의 대중들에게 물으니, 아무도 알지 못했다. 마침내 범천왕(梵天王)에게 물으니, 그도 역시 모르는데 문득 교묘하게 속여서 말하기를 “나는 이 대중 중에서 대범(大梵)이고, 자재하며 일체를 만들어내고[作者], 변화시키며[化者], 생겨나게 하고[生者], 기르며[養者], 모든 것의 어버이이다. 따라서 나는 안다”고 하였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대중 밖으로 나와서 마등 비구의 손을 잡고 아첨의 말을 하고, 돌아가서 부처님께 여쭈었다고 한다. 이것은 본질에 의거해서 말한 것이고, 만약 영상(影像)이라면 모두 오직 자기 지위[自地]뿐이니, 자기 마음에 속하기 때문이다.
350)수번뇌심소와 유학(有學) 등의 포함관계를 밝힌다[學等門].
351)다음에 수번뇌심소가 어떤 도(道)에서 단멸되는가를 밝힌다[三斷門].
352)선천적으로 일어나는 번뇌심소와 분별에 의해 생겨나는 번뇌심소를 말한다.
353)4성제(聖諦)에 대하여 총체적이거나 개별적으로 미혹한 것을 말한다.
354)제일사(第一師)의 견해를 서술한다.
355)호법의 정의이다.
356)구생(俱生)과 분별(分別)을 말한다.
357)제2사(第二師)의 견해를 서술한다.
358)소수번뇌의 심소 중에서 부(覆)ㆍ광ㆍ첨 심소를 제외한 나머지를 말한다.
359)다음에 수번뇌심소가 본질이 있는 대상을 반연하는가 등을 판별한다[有事等分別門]. 여기서 본질은 나[我]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아견(我見과 함께하지 않는 심왕 등을 유사(有事)를 반연한다고 이름한다. 아견과 함께하는 심왕 등을 무사(無事)를 반연한다고 이름한다. 분(忿) 등 열 가지 소수번뇌의 심소는 아견(我見)과 함께하지 않으므로, 본질이 있는 대상[有事]을 반연한다고 이름한다. 중수번뇌의 심소와 대수번뇌의 심소의 열 가지는 유사(有事)와 무사(無事)에 통하지만, 본문에서는 생략한다.
360)수번뇌심소가 유루와 무루를 반연하는 것[漏無漏門], 명칭에 의한 대상과 본질이 있는 대상을 반연하는 것[名境事境門] 등은 앞의 내용에 견주어서 알아야 함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