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027_0510_c_01L아비달마구사론 제8권
027_0510_c_01L阿毘達磨俱舍論卷第八


존자 세친 지음
삼장법사 현장 한역
권오민 번역
027_0510_c_02L尊者世親造
三藏法師玄奘奉 詔譯


3. 분별세품(分別世品) ①
027_0510_c_04L分別世品第三之一

이미 3계에 의거하여 심(心) 등의 제법에 대해 분별해 보았으니, 이제 다음으로 논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3계란 무엇이며, 거기에는 각기 몇 가지의 처소의 차별이 있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027_0510_c_05L已依三界分別心等今次應說三界是何各於其中處別有幾頌曰

지옥과 방생(傍生)과 아귀와
인간, 그리고 6욕천(欲天)을
욕계의 20처(處)라고 이름하니
지옥과 주(洲)가 다르기 때문이다.
027_0510_c_07L地獄傍生鬼
人及六欲天
名欲界二十
由地獄洲異

이러한 욕계 위의 17처를
색계라 이름하니, 거기에는
세 정려 각각에 세 곳이 있고
제4 정려에는 여덟 곳이 있다.
027_0510_c_09L此上十七處
名色界於中
三靜慮各三
第四靜慮八

무색계에는 방처(方處)가 없지만
생(生)에 따라 네 종류가 있는데
중동분과 아울러 명근에 의해
마음 등을 상속하게 한다.
027_0510_c_10L無色界無處
由生有四種
依同分及命
令心等相續

논하여 말하겠다. 지옥 등의 네 곳과 6욕천(欲天)과, 그리고 기세간(器世間)을 욕계라고 한다.
027_0510_c_11L論曰地獄等四及六欲天幷器世閒是名欲界
여기서 6욕천이란 첫 번째가 사대왕중천(四大王衆天)이며,1) 두 번째가 삼십삼천(三十三天)이며,2) 세 번째가 야마천(夜摩天, Yāmadeva)이며, 네 번째가 도사다천(都史多天, Tuṣitadeva)이며, 다섯 번째가 낙변화천(樂變化天)이며, 여섯 번째가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이다.
027_0510_c_13L六欲天者四大王衆天三十三天夜摩天睹史多天樂變化天他化自在天
이와 같은 욕계에는 몇 가지 처소의 차별이 있는 것인가?
지옥과 주(洲)에 각기 다른 곳이 있기 때문에 스무 곳이 된다.
즉 8대지옥을 지옥의 각기 다른 곳이라 한 것인데, 첫 번째는 등활지옥(等活地獄)이며, 두 번째는 흑승지옥(黑繩地獄)이며, 세 번째는 중합지옥(衆合地獄)이며, 네 번째는 호규지옥(號叫地獄)이며, 다섯 번째는 대규지옥(大叫地獄)이며, 여섯 번째는 염열지옥(炎熱地獄)이며, 일곱 번째는 대열지옥(大熱地獄)이며, 여덟 번째는 무간지옥(無間地獄)이다.
027_0510_c_15L如是欲界處別有幾地獄洲異故成二十八大地獄名地獄異一等活地獄二黑繩地獄三衆合地獄四號叫地獄大叫地獄六炎熱地獄七大熱地獄八無間地獄
027_0511_a_02L주(洲)의 각기 다른 곳이란 4대주(大洲)를 말하는데, 첫 번째가 남섬부주(南贍部洲, Jambudvīpa)이며, 두 번째가 동승신주(東勝身洲, Purvavideha)이며, 세 번째가 서우화주(西牛貨洲, Avaragodnīya)이며, 네 번째가 북구로주(北俱盧洲, Uttarakuru)이다. 즉 이와 같은 열 두 곳과 아울러 6욕천과 방생과 아귀의 처소로써 스무 곳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만약 유정계(有情界)일 경우 타화자재천으로부터 무간지옥에 이르기까지, 기세계(器世界)일 경우 타화자재천으로부터 풍륜(風輪)에 이르기까지 모두 욕계에 포섭된다.3)
027_0510_c_20L言洲異者謂四大洲南贍部洲二東勝身洲三西牛貨洲四北俱盧洲如是十二幷六欲天餓鬼處成二十若有情界從自在天至無閒獄若器世界乃至風輪欲界攝
이러한 욕계 위에는 17처가 있다. 즉 아래 세 정려처에는 각기 세 곳이 있으며, 제4 정려처에만 유독 여덟 곳이 있는데, 그러한 기세간과 그곳에 머무는 유정을 총칭하여 색계라고 이름한다.
027_0511_a_04L此欲界上處有十七謂三靜慮處各有三第四靜慮處獨有八及有情摠名色界
제1정려에 세 곳이 있다고 함은, 첫 번째가 범중천(梵衆天)이며, 두 번째가 범보천(梵輔天)이며, 세 번째가 대범천(大梵天)이다.
027_0511_a_06L第一靜慮處有三一梵衆天二梵輔天三大梵天
제2정려에 세 곳이 있다고 함은, 첫 번째가 소광천(少光天)이며, 두 번째가 무량광천(無量光天)이며, 세 번째가 극광정천(極光淨天)이다.
027_0511_a_07L二靜慮處有三者一少光天二無量光天三極光淨天
제3정려에 세 곳이 있다고 함은, 첫 번째가 소정천(少淨天)이며, 두 번째가 무량정천(無量淨天)이며, 세 번째가 변정천(遍淨天)이다.
027_0511_a_09L第三靜慮處有三一少淨天二無量淨天三遍淨天
제4정려에 여덟 곳이 있다고 함은, 첫 번째가 무운천(無雲天)이며, 두 번째가 복생천(福生天)이며, 세 번째가 광과천(廣果天)인데, 네 번째가 무번천(無繁天)이며, 다섯 번째가 무열천(無熱天)이며, 여섯 번째가 선현천(善現天)이며, 일곱 번째가 선견천(善見天)이며, 여덟 번째가 색구경천(色究竟天)이다.
027_0511_a_10L第四靜慮處有八者一無雲天二福生天三廣果天四無煩天五無熱天六善現天七善見天八色究竟天
그런데 가습미라국(迦濕彌羅國)의 여러 위대한 논사들은 모두 색계의 처소에는 단지 열여섯 곳이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즉 그들은 말하기를, “범보천 처소에 높은 누각이 있어 이를 대범천이라 이름하지만 한 주인이 머무는 곳으로 별도의 장소[地]가 아니니, 마치 세존께서 앉으신 자리를 ‘사중(四衆)에 의해 둘러싸여 있는 곳’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4)
027_0511_a_13L濕彌羅國諸大論師皆言色界處但有十六彼謂卽於梵輔天處有高臺名大梵天一主所居非有別地尊處座四衆圍繞
무색계 중에는 처소가 존재하지 않으니, 색법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방처(方處)가 없는 것이다. 즉 무색의 법인 과거ㆍ미래법이나 무표와 무색의 법이 방소, 즉 구체적인 공간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은 이치상 결정코 그러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숙생의 차별에 따라 네 가지가 있을 뿐으로, 첫 번째가 공무변처(空無邊處)이며, 두 번째가 식무변처(識無邊處)이며, 세 번째가 무소유처(無所有處)이며, 네 번째가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이다. 즉 이와 같은 네 가지를 무색계라고 이름한다. 그리고 이러한 네 가지는 처소 상 위 아래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이숙]생으로 말미암아 뛰어나고 열등함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027_0511_a_17L無色界中都無有以無色法無有方所過去未來無表無色不住方所理決然故但異熟差別有四一空無邊處二識無邊三無所有處四非想非非想處是四種名無色界此四非由處有上但由生故勝劣有殊
027_0511_b_02L다시 그곳에 방처가 없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 것인가?
이를테면 이러한 처소(욕계ㆍ색계)에서 그러한 정려(무색정)를 획득한 자가 명종(命終)하면 바로 이러한 처소에 태어나기 때문이다. 또한 그 곳으로부터 몰하여 욕계ㆍ색계에 태어날 때는 바로 이러한 처소(욕계ㆍ색계)에서 중유(中有)가 일어나기 때문이다.5)
027_0511_a_23L復如何知彼無方處謂於是處得彼定者命終卽於是處生故復從彼歿生欲色時於是處中有起故
이를테면 유색계의 일체의 유정과 같은 이는 요컨대 색신(色身)에 의지하여 심(心) 등이 상속하는데, 무색계에서 생을 받는 유정은 무엇을 근거로 하여 심 등이 상속하는 것인가?6)
대법(對法)의 여러 논사들은 설하기를, “그러한 처소에서의 심 등은 중동분(衆同分)과 아울러 명근(命根)에 의해 상속할 수 있다”고 하였다.7)
027_0511_b_03L如有色界一切有要依色身心等相續於無色界受生有情以何爲依心等相續對法諸師說彼心等依衆同分及與命根而得相續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찌하여 유색계 유정의 심 등도 다만 이러한 두 가지 법에 의지하여 상속하지 않는 것인가?
유색계의 생에서는 이 두 가지가 저열하기 때문이다.8)
027_0511_b_07L若爾有色有情心等何不但依此二相續有色界生此二劣故
무색계에서의 이러한 두 가지 법은 어째서 강성한 것인가?
그러한 무색계에서의 두 가지는 뛰어난 선정[勝定, 곧 무색정]으로부터 생겨났기 때문이니, 그러한 등지(等至)에 의해 능히 색상(色想)을 조복하기 때문이다.9)
027_0511_b_08L色此二因何故强彼界二從勝定生由彼等至能伏色想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러한 무색계에서의 심 등의 상속은 다만 뛰어난 선정에 의지해야 할 것인데, 무엇 때문에 별도의 의지처가 필요할 것인가?
027_0511_b_10L若爾於彼心等相續但依勝定何用別依
여기서 다시 마땅히 논설해 보아야 할 것이니, ‘예컨대 유색계에서 생을 받은 유정의 동분과 명근은 색에 의지하여 일어난다고 한다. 그렇다면 무색계에서의 이 두 가지는 무엇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것인가?’
이 두 가지는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여 일어난다.
027_0511_b_11L又今應如有色界受生有情同分命根依色而轉無色此二以何爲依此二更互相依而轉
그렇다면 유색계의 이 두 가지는 어찌하여 서로 의지하지 않는 것인가?
유색계의 생에서는 이 두 가지가 저열하기 때문이다.
027_0511_b_14L有色此二何不相依色界生此二劣故
무색계에서의 이러한 두 가지는 어째서 강성한 것인가?
무색계에서의 두 가지는 뛰어난 선정으로부터 생겨났기 때문이라고 앞에서 설하지 않았던가? 즉 “그러한 계의 선정(즉 무색정)에 의해 능히 색상을 조복한다”고 하였다.
027_0511_b_15L無色此二因何故彼界此二種從勝定生故前說定能伏色想
그렇다고 한다면 [무색계에서의] 심(心) 상속의 힐난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할 것이며, 혹은 심과 심소도 오로지 서로가 서로에 의지하여 [생겨난다고] 해야 할 것이다.10)
027_0511_b_17L是則還同心相續難心心所唯互相依
따라서 경부사(經部師)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무색계에서 심 등이 상속하는 데에는 별도의 근거가 없다. 즉 어떤 원인이 있어 아직 색의 애탐을 떠나지 않고서 심ㆍ심소 등을 인기한 경우라면 인기된 심ㆍ심소는 색과 구생하는 것으로, 색에 의지하여 일어난다. 그러나 만약 원인이 이미 색의 애탐을 떠났다면 색을 싫어하고 배반하였기 때문에 인기된 심 등은 색과 구생하지 않으며, 색에 의지하지 않고서 일어난다.”11)
027_0511_b_18L故經部師說無色界心等相續無別有依謂若有因未離色愛引起心等所引心等與色俱生依色而轉若因於色已得離愛背色故所引心等非色俱生不依色
027_0511_c_02L
어떠한 까닭에서 욕(欲) 등의 3계라고 이름한 것인가?
능히 자상(自相)을 갖기 때문에 ‘계(界)’라고 이름하였다. 혹은 이미 앞(권제1)에서 해석한 바와 같이 계는 ‘종족(種族)’의 뜻이다. 즉 욕탐[欲]이 소속된 세계를 설하여 욕계라고 이름하였으며, 색(色)이 소속된 세계를 설하여 색계라고 이름하였으니, 이를테면 후추음이라 하고, 금강환(金剛環)이라고 말하듯이 가운데 말을 생략해 버렸기 때문에 이같이 설하게 된 것이다.12)
027_0511_b_23L何故名爲欲等三界能持自相故名爲界或種族義如前已釋欲所屬界說名欲界色所屬界說名色界去中言故作是說如胡椒飮如金剛
그리고 그 세계 중에는 색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무색계라고 이름하였다. 즉 여기서 말한 색이란 바로 변애(變礙)의 뜻, 혹은 시현(示現)의 뜻으로, 그곳의 본질[體]이 색이 아니기에 ‘무색’이라 이름한 것이지만 그것이 단지 ‘색이 없다’는 사실만을 본성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13) 즉 무색[성]이 소속된 세계를 설하여 무색계라고 이름한 것이니, 가운데 말을 생략한 예는 앞에서 설한 바와 같다.
027_0511_c_04L於彼界中色非有故名爲無色言色者是變㝵義或示現義彼體非色立無色名非彼但用色無爲體色所屬界說名無色界略去中言如前說
또한 욕탐의 세계를 이름하여 욕계라고 하니, 이러한 세계는 능히 욕탐을 임지(任持)하기 때문이다. 색계와 무색계의 경우도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027_0511_c_08L又欲之界名爲欲界此界力能任持欲故色無色界應知亦然
여기서 욕탐이라는 말은 어떠한 법을 설한 것인가?
간단히 말하면 그것은 단식(段食)과 음욕에 의해 인기된 탐(貪)이니, 계경의 게송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다.14)
027_0511_c_09L中欲言爲說何法略說段食婬所引如經頌言

세간의 온갖 묘한 경계는 진실로 욕탐이 아니니
진실의 욕탐은 사람들이 분별한 탐(貪)으로
묘한 경계는 본성 그대로 세간에 머무를 뿐
지자(智者)는 그것에 대한 욕탐을 이미 제거하였네.15)
027_0511_c_11L世諸妙境非眞欲
眞欲謂人分別貪
妙境如本住世間
智者於中已除欲

그러자 사명외도(邪命外道)가 바로 존자(尊者) 사리자(舍利子)를 힐난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027_0511_c_13L邪命外道便詰尊者舍利子言

만약 세간의 묘한 경계가 진실로 욕탐이 아니며
욕탐은 바로 사람들이 분별하는 탐이라고 한다면
비구는 마땅히 욕탐을 향수하는 이라고 해야 할 것이니
나쁜 분별의 심사(尋思)을 일으키기 때문이다.16)
027_0511_c_14L若世妙境非眞欲
說欲是人分別貪
比丘應名受欲人
起惡分別尋思故

그 때 사리자가 그에게 다시 반문하여 말하였다.
027_0511_c_16L時舍利子反質彼言

만약 세간의 묘한 경계가 바로 진실로 욕탐이며
욕탐을 사람들이 분별하는 탐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대의 스승도 욕탐을 향수하는 이라고 해야 할 것이니
항시 좋아하는 묘한 색을 관(觀)하기 때문이다.
027_0511_c_17L若世妙境是眞欲
說欲非人分別貪
汝師應名受欲人
恒觀可意妙色故

만약 어떤 법이 그 같은 3계에 현행하게 되면 이러한 법을 바로 3계의 계(繫), 즉 3계에 종속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인가?
그렇지 않다.
027_0511_c_19L若法於彼三界現行此法卽說三界繫不不爾
그렇다면 어떠한가?
[3계에 현행하는 법] 가운데 3계의 탐을 수증(隨增)하는 것이 바로 3계에 종속되는 법 즉 3계계(界繫)이다.17)
027_0511_c_21L云何於中隨增三界貪者是三界繫
그렇다면 그 가운데 어떠한 법을 3계의 탐이라고 이름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3계 중에서 각기 수증된 것이다.
027_0511_c_22L此中何法名三界貪謂三界中各隨增者
027_0512_a_02L지금 여기서 말한 바는 말을 묶는 이[縛]와 말[馬]에 대해 답하는 것과 같으니, 비유컨대 어떤 이가 ‘말을 묶는 이가 누구인가?’ 라고 묻자 ‘말의 주인이다’고 답하여 말하고, 그가 ‘그렇다면 말의 주인은 누구인가?’라고 다시 묻자 ‘말을 묶는 자이다’고 답하여 말하는 것과 같다.18) 즉 이와 같은 두 가지 답은 모두 이해시킬 수 없는 것이다.
027_0511_c_23L今此所言同縛馬荅猶如有問縛馬者誰荅言馬主卽彼復問馬主是誰荅言縛者如是二荅皆不令解
지금 여기서 말한 바는 그러한 답과 같지 않으니, 이를테면 앞에서 설한 욕계의 온갖 처소에서 아직 탐을 떠나지 않은 자의 탐을 ‘욕탐’이라 이름하며, 이러한 탐에 의해 수증되는 법을 일컬어 ‘욕계계’라고 하는 것이다. 앞에서 설한 색계와 무색계의 처소 중에서도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라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027_0512_a_03L今此所言不同彼荅謂於前說欲界諸處未離貪者貪名欲貪此所隨增名欲界繫於前所說色無色中隨其所應當知亦爾
혹은 부정지(不定地, 즉 散地)에서의 탐을 ‘욕탐’이라 이름하며, 이것에 의해 수증되는 법을 일컬어 ‘욕계계’라고 한다. 또한 온갖 정려지(靜慮地, 즉 4정려)에서의 탐을 ‘색탐’이라 이름하며, 이것에 의해 수증되는 법을 일컬어 ‘색계계’라고 한다. 나아가 온갖 무색지(無色地, 즉 4무색정)에서의 탐을 ‘무색탐’이라 이름하며, 이것에 의해 수증되는 법을 일컬어 ‘무색계계’라고 한다.
027_0512_a_06L或不定地貪名欲貪此所隨增名欲界繫諸靜慮地貪名色貪此所隨增名色界繫諸無色地貪名無色貪此所隨增名爲無色界繫
욕계 변화심(變化心) 상에서 어떻게 욕탐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인가?19)
다른 이로부터 들은 바에 대해, 혹은 스스로 퇴실(退失)하여 [변화심에 대해] 애미(愛味)를 낳기 때문이다.20) 혹은 변화하는 자의 자재로운 힘을 보고서 그러한 변화심에 대해 탐애를 낳기 때문이다.21) [혹은] 만약 마음이 능히 향(香)ㆍ미(味)의 두 가지 법을 변화하였다면 이러한 능변화심은 바로 욕계계이니, 색계의 마음은 능히 향ㆍ미를 화작(化作)할 수 없기 때문이다.22)
027_0512_a_10L於欲化心上如何起欲貪從他所聞或自退失生愛味故或觀化者自在勢力於彼化心生貪愛故若心能化香味二法此能化心是欲界繫色界心不能化作香味故

이와 같은 3계는 오로지 하나만 존재하는 것인가?
3계는 가없는 것[無邊]으로, 마치 허공의 양(量)과도 같다. 따라서 비록 처음으로 생겨나는 시기(始起) 유정은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이루 헤아릴 수 없고 가없는 부처님들이 세상에 출현하여 각기 무수한 유정을 교화 제도하여 무여(無餘)의 반열반계(般涅槃界)를 증득하게 하였으니,23) 그러한 유정의 무궁무진함은 마치 허공과도 같은 것이다.
027_0512_a_14L如是三界唯有一耶三界無邊如虛空量故雖無有始起有情無量無邊佛出於世一一化度無數有情令證無餘般涅槃界而不窮盡猶若虛空

세계는 마땅히 어떠한 형태로서 안주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
마땅히 옆으로 병립[傍]하여 머무는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계경에서는, “비유하자면 수레바퀴 만한 하늘 비[天雨]의 방울이 무간(無間)에 끊임없이 허공으로부터 아래로 쏟아 퍼붓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동방으로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세계가 무간에 끊임없이 멸하기도 하고 혹은 이루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동방에서와 마찬가지로 남ㆍ서ㆍ북방도 역시 또한 이와 같다”고만 말하였을 뿐, 상하로 그렇게 된다고는 말하지 않은 것이다.24)
027_0512_a_18L世界當言云何安住當言傍住故契經言譬如天雨滴如車軸無閒無斷從空下澍如是東方無閒無斷無量世界或壞或成如於東方南西北方亦復如是不說上下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역시 상하 두 방향으로도 존재하는 것이니, 다른 부파가 전승한 경에서는 시방(十方)으로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색구경천 위에도 다시 욕계가 있으며, 욕계 아래에도 색구경천이 있으니, 이렇듯 세계는 끝이 없는 것이다”고 하였다.25)
027_0512_a_23L有說亦有上下二方餘部經中說十方故色究竟上復有欲界於欲界下有色究竟
027_0512_b_02L그리고 만약 한 욕계의 탐을 떠날 때면, 온갖 욕계의 탐도 모두 멸하여 떠날 수 있으며, 색계와 무색계의 탐을 떠나는 것도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26) 그러나 초정려에 의해 신통의 지혜[通慧]를 일으킬 때에 생겨난 신통은 다만 그 자신이 생겨난 세계와 범세(梵世)에만 미칠 수 있고, 다른 세계에는 미칠 수 없다. 그 밖의 [다른 정려에 의한] 신통의 지혜도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027_0512_b_02L若有離一欲界貪時諸欲界貪皆得滅離離色無色應知亦爾依初靜慮起通慧時所發神通但能往至自所生界梵世非餘所餘通慧應知亦爾

3계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5취(趣)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027_0512_b_06L已說三界五趣云何頌曰

[3계] 중에 있어서 지옥 등은
자신의 명칭에 따라 5취(趣)로 설해지니
오로지 무부무기로서
유정에 속하지만, 중유(中有)는 아니다.
027_0512_b_07L於中地獄等
自名說五趣
唯無覆無記
有情非中有

논하여 말하겠다. 3계 중에는 지옥 등의 5취(趣)가 있다고 설한다. 즉 지옥 등을 자신의 명칭대로 설한 것으로, 이를테면 앞에서 설한 지옥ㆍ방생(傍生)ㆍ아귀(餓鬼), 그리고 인간과 천(天), 이것을 5취라고 이름한다.27)
그리고 오로지 욕계에만 네 가지 취 전부가 있으며, 3계에는 각기 천취의 일부만이 있다.
027_0512_b_09L論曰於三界中說有五趣卽地獄等如自名說謂前所說地獄傍生鬼及天是名五趣唯於欲界有四趣全三界各有天趣一分
3계(界)에 포섭되면서 ‘취’에는 포섭되지 않는 경우가 있는가? 그럼에도 3계 중에 5취가 있다고 설한 것인가?
있다. 이를테면 선(善)과 염오와 외적인 기세간과 중유(中有)는 비록 계에 포섭되는 존재[界性]일지라도 취에 포섭되는 것은 아니니, 5취의 본질은 오로지 무부무기(無覆無記)일 뿐이기 때문이다.28) 만약 이와 다르다고 한다면 취는 서로 뒤섞여야 할 것이니, 하나의 취 중에는 5취의 업과 번뇌가 모두 존재하기 때문이다.29)
027_0512_b_13L爲有三界非趣所攝而於界中說有五趣謂善染外器中有雖是界性而非趣攝五趣體唯無覆無記若異此者趣應相雜於一趣中具有五趣業煩惱故
그리고 5취는 오로지 유정수(有情數)만을 포섭하며, 중유 자체는 포섭하지 않는다. 곧 『시설족론(施設足論)』에서 이와 같이 설하고 있는 것이다. “4생(生)은 5취를 포섭하여도 5취는 4생을 포섭하지 않는다. 포섭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이른바 중유이다.”30) 또한 『법온족론』에서도 역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안계(眼界)란 무엇인가? 이를테면 4대종과 소조의 정색(淨色)으로, 바로 지옥ㆍ방생ㆍ아귀ㆍ인간ㆍ천의 취(趣)와 수소성(修所成)과 중유의 안(眼), 안근(眼根), 안처(眼處), 안계이다.”31) 나아가 계경에서도 역시 중유를 ‘취’와는 다른 존재로 헤아리고 있다.
027_0512_b_17L五趣唯是有情數攝體非中有『施設足論』作如是說四生攝五趣非五攝四生不攝者何所謂中有『法薀足論』亦作是言眼界云何謂四大種所造淨色是眼眼根眼處眼界地獄傍生天趣修成中有契經亦簡中有異趣
027_0512_c_02L어떤 계경에서 그러한가?
이를테면 『칠유경(七有經)』이니, 거기서는 이를테면 지옥유(有)ㆍ방생유ㆍ아귀유ㆍ천유ㆍ인유ㆍ업유(業有)ㆍ중유의 일곱 가지 존재를 설하고 있다.32)즉 그 경에서는 5취와 아울러 5취의 원인(즉 업유)과 그것으로 나아가는 방편(즉 중유)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33) 그렇기 때문에 ‘취’는 오로지 무부무기라고 하는 사실의 이치는 지극히 잘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으니, 업유라는 원인을 통해 판단하건대, 그것은 [결과인] 온갖 ‘취’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027_0512_b_23L是何契經謂『七有經』彼說七有謂地獄有傍生有餓鬼有天有人有業有中有彼經中說五趣及因幷趣方便故趣唯是無覆無記其理極成簡業有因異諸趣故
그리고 가습미라국(迦濕彌羅國)에서는 이와 같은 계경을 외워 전하고 있다.34) “존자 사리자(舍利子)는 이같이 말하였다. 구수(具壽)여! 만약 어떤 이에게 지옥의 [과보를 받을 만한] 온갖 번뇌[漏]가 현전하는 일이 있다면, 지옥의 이숙을 초래할 업[順地獄受業]을 조작하고 증장할 것이니, 그 때 그의 신ㆍ구ㆍ의 업은 첨곡(諂曲)ㆍ진예(瞋穢)ㆍ탐탁(貪濁)할 것이기 때문에 나락가 중에서 5온의 이숙을 받게 된다. 즉 그 같은 이숙이 이미 일어났으면 그것을 나락가(那落迦, naraka, 즉 지옥)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그러니 오온의 법을 배제하고서 어떻게 그러한 나락가가 획득될 수 있을 것인가?” 따라서 ‘취’는 오로지 무부무기일 뿐인 것이다.
027_0512_c_05L迦濕彌羅國誦如是契經尊者舍利子作是言具壽若有地獄諸漏現前故造作增長順地獄受業彼身語意曲穢濁故於柰落迦中受五薀異熟異熟起已名那落迦除五薀法彼那落迦都不可得故趣唯是無覆無記
만약 이와 같다고 한다면 마땅히 다음의 『품류족론』의 내용을 어떻게 회통할 것인가? 즉 거기서는 “5취는 일체의 수면(隨眠)에 의해 수증(隨增)된 것이다”고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35)
027_0512_c_11L若如是者『品類足論』當云何通彼說五趣一切隨眠所隨
거기에서는 5취로 속생(續生)하는 마음 중에 5부의 일체 번뇌가 있을 수 있음을 설한 것으로, ‘취’와 아울러 그것으로 드는 마음을 모두 ‘취’라고 설하였기 때문에 [5취가 무부무기라는 사실과] 서로 모순되는 과실이 없다. 비유하자면 촌락과 촌락 변두리를 모두 촌락이라고 이름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36)
027_0512_c_13L彼說五趣續生心中容有五部一切煩惱趣及入心摠說爲趣無相違失譬如村落及村落邊摠名村落
그러나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5]취 자체는 선과 염오와도 역시 통한다. 그렇지만 『칠유경』에서 업유(業有)를 헤아리고 있는 것에 대해 ‘별도로 설하고 있기 때문에 결정코 그것(5취)에 포섭되지 않는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니, 마치 5탁(濁) 중에 ‘번뇌’와 ‘견(見)’을 구별하여 ‘탁’이라고 설하고 있다 하여 ‘별도로 설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견은 결정코 번뇌에 포섭되지 않는다’고 해서는 안 되는 것과 같다. 이와 마찬가지로 업유도 역시 비록 ‘취’이기는 하지만, ‘취’의 원인을 나타내기 때문에 별도로 설하게 된 것이다.”37)
027_0512_c_15L有說趣體亦通善染然『七有經』簡業有者非別說故定非彼攝如五濁中煩惱與見別說爲濁非別說故彼見定非煩惱所攝如是業有雖亦是趣爲顯趣因是故別說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칠유경』 중에서 5취와 별도로 설한] 중유도 역시 마땅히 ‘취’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니, ‘취’의 뜻과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취’란 말하자면 그렇게 ‘가게 된 것[所往]’으로, 중유를 설하여 바로 ‘가게 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으니, 이것은 바로 죽는 곳[死處]에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027_0512_c_20L若爾中有亦應是趣不爾趣義不相應故趣謂所往不可說言中有是所往卽死處生故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무색계도 역시 마땅히 ‘취’가 아니어야 할 것이니, 바로 죽는 곳에서 생을 받기 때문이다.38)
027_0512_c_22L若爾無色亦應非趣卽於死處而受生故
027_0513_a_02L이미 그렇다고 한다면 중유는 ‘중유’라고 이름하기 때문에 마땅히 ‘취’라고 이름해서는 안 될 것이니, 바로 두 가지 ‘취’ [즉 사유(死有)와 생유(生有)] 중간에 존재하기 때문에 중간의 존재 즉 ‘중유’라고 이름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것이 ‘취’에 포섭되는 것이라면 중간이 아니기 때문에 마땅히 ‘중유’라고 이름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027_0512_c_24L旣爾中有名中有故不應名趣二趣中故名爲中有此若趣攝非中間故是則不應說名中有
그렇지만 앞에서 존자 사리자가 “이숙이 이미 일어났으면 그것을 나락가라고 이름한다”고 말한 것은 ‘이숙이 일어나야 비로소 지옥이라 이름한다’는 사실을 설한 것이지 ‘지옥은 오로지 이숙일 뿐이다’는 사실을 설한 것은 아니다. 또한 다시 “오온의 법을 배제하고서 어떻게 그러한 나락가가 획득될 수 있을 것인가?”고 말한 것은, 능히 온갖 ‘취’로 나아가는 실유(實有)의 보특가라(補特伽羅)를 부정하기 위해 그같이 설한 것일 뿐 [이숙의 무기온 이외] 그 밖의 다른 온을 부정하기 위해 그같이 말한 것은 아니다.39)
027_0513_a_03L然彼尊者舍利子言異熟起已名地獄說異熟起方名地獄非說地獄唯是異熟然復說言除五薀法彼那落迦不可爲遮實有能往諸趣補特伽羅故作是說非遮餘薀故作是言
비바사사(毘婆沙師)는 설하기를, “[5]취는 오로지 무부무기일 뿐이다”고 하였다. 또한 어떤 이는 설하기를, “한결같이 이숙생(異熟生)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유여사는 말하기를, “역시 소장양(所長養)과도 통한다”고 하였다.40)
027_0513_a_08L毘婆沙師說趣唯是無覆無記有說一向是異熟生有餘師言亦通長養

앞에서 설한 3계와 5취 중에는 그 순서대로 식주(識住)에 일곱 가지가 있다.41)
그것의 일곱 가지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027_0513_a_10L卽於三界及五趣中如其次第識住有七其七者何頌曰

신체가 다르고 아울러 생각도 다른 것과
신체는 다르지만 생각은 동일한 것과
이와 반대되는 것과, 신체와 생각이 동일한 것과
그리고 무색계의 아래 세 가지 처이다.
027_0513_a_12L身異及想異
身異同一想
翻此身想一
幷無色下三

때문에 식주에는 일곱 가지가 있는 것으로
그 밖의 처는 식주가 아니니, 손괴함이 있기 때문이다.
故識住有七
餘非有損壞

논하여 말하겠다. 계경 중에서 설하기를,42) “유색의 유정은 신체가 다르고[身異] 생각도 다른데[想異], 예컨대 인간과 일부의 천(天)과 같은 유정이 바로 제1 식주이다”고 하였다. 여기서 ‘일부의 천’이라고 함은, 이를테면 욕계의 6천과, 겁초(劫初)에 생겨난 자를 제외한 초정려[의 온갖 천]을 말한다.43) ‘신체가 다르다’고 말한 것은 이를테면 그들의 색신은 여러 가지의 색깔ㆍ형태[顯形]와 모양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신체가 다르기 때문에, 혹은 다른 신체를 갖었기 때문에 그러한 유정을 설하여 ‘신체가 다르다’고 일컬은 것이다. ‘생각이 다르다’고 말한 것은 이를테면 그들의 고(苦)ㆍ낙(樂)ㆍ불고불락의 관념[想]이 차별되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혹은 다른 생각을 갖기 때문에 그러한 유정을 설하여 ‘생각이 다르다’고 일컬은 것이다.
027_0513_a_14L論曰契經中說有色有情身異想異如人一分天是第一識住一分天者謂欲界天及初靜慮除劫初起言身異者謂彼色身種種顯形狀貌異故彼由身異或有異身故彼有情說名身異言想異者謂彼苦樂不苦不樂想差別故彼由想異或有異想故彼有情說名想異
또한 유색의 유정으로서 신체는 다르지만[身異] 생각은 동일한[想一] 자도 있으니, 범중천(梵衆天)과 같은 이로서 이를테면 겁초에 일어난 자가 바로 제2 식주이다.
027_0513_a_22L有色有情身異想一如梵衆天謂劫初起是第二識住
027_0513_b_02L그 까닭은 무엇인가?
겁초에 일어났으므로 그들 여러 범중들은 이와 같은 생각을 일으킨다. ‘우리들은 모두 다 대범(大梵)에 의해 생겨난 이들이다.’ 그리고 그 때 대범도 역시 이와 같은 생각을 일으킨다. “이러한 제 범중들은 모두 다 내가 낳은 이들이다.”44) 이같이 [대범이] 단일한 원인이라고 동일하게 생각하였기 때문에 ‘생각이 동일하다’고 일컬은 것이다.
027_0513_a_23L以者何以劫初起彼諸梵衆起如是我等皆是大梵所生大梵爾時亦起此想是諸梵衆皆我所生同想一因故名想一
그러나 대범왕의 신체는 그 크기가 높고 광대하며, 용모나 위덕(威德), 언어, 광명, 의관 등에 있어서 각각이 모두 범중들과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신체가 다르다’고 일컬은 것이다.
027_0513_b_04L大梵王身其量高廣貌威德言語光明衣冠等事一一皆與梵衆不同故名身異
그런데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45) “범중천은 이같이 생각하고 말하였다. 우리는 일찍이 이와 같은 중생(즉 대범)이 장수하며 오래 머무는 것을 보았다. ……(이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그런데 그(대범)가 ‘어떻게 하면 그 밖의 다른 유정(즉 범중천)으로 하여금 우리(대범천)의 동분으로 태어나게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원을 세웠고, 그가 이러한 마음의 원을 일으켰을 때 우리는 바로 그의 동분 안에 태어나게 된 것이다.” [그럴 때] 범중은 일찍이 어떤 처소에서 대범을 보았던 것인가?
027_0513_b_06L經說梵衆作是念言我等曾見如是有情長壽久乃至起願云何當令諸餘有情生我同分於彼正起此心願時我等便生彼同分內梵衆何處曾見梵王
유여사는 말하기를, “극광정천(極光淨天)에 머물 때이다. 즉 그들은 그 하늘로부터 몰(歿)하여 이곳에 태어났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027_0513_b_10L餘師言住極光淨從彼天歿來生此
[그렇다면 그들 범중들은] 어떻게 지금 제2 정려를 획득하지 않았으면서 그곳에서의 옛날 일[宿住事] 능히 기억할 수 있는 것인가? 또한 만약 그가 이미 제2 정려를 획득하였다고 한다면 어떻게 대범을 연(緣)으로 삼아 오히려 계금취견(戒禁取見)을 일으키는 것인가?46)
027_0513_b_12L云何今時不得第二靜慮而能憶念彼地宿住事耶若彼已得第二靜云何緣大梵猶起戒禁取
다시 유여사는 설하기를, “중유 중에서 머물 때 [보았다]”고 하였다.47)
그들이 중유 중에 머물 때에는 장시간 머무는 일이 없으니, [제2 정려로부터 몰하여 초정려의] 생을 받는 데에는 어떠한 장애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떻게 범중천이 ‘우리들은 일찍이 이와 같은 중생(즉 대범)이 장수하며 오래 머무는 것을 보았다’고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범중은 바로 그들 자신의 하늘 즉 범중천에 머물면서 여기에 태어나기 이전의 지난 일들을 기억하는 것이니, 이를테면 일찍이 그들(대범)이 오래 머무는 것을 보고서 그 후 [거기에 태어나] 다시 보았을 때 그와 같은 기억을 불러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027_0513_b_14L有餘師住中有中彼住中有中無長時住以於受生無障㝵故如何梵衆可作念言我等曾見如是有情長壽久是故梵衆卽住自天憶念此生前所更事謂先見彼長壽久住後重見時起如是念
또한 유색의 유정으로서 극광정천(極光淨天)의 경우처럼 신체가 동일하고[身一] 생각이 다른[想異] 자가 있으니, 이것이 바로 제3 식주이다. 그리고 여기서는 다만 뒤의 것(즉 제2 정려의 최후인 극광정천)만을 언급하였지만 아울러 처음의 것(즉 역시 제2 정려천인 小光天과 無量光天)도 포섭해야 하니, 제2 정려가 모두 여기에 포섭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그러한 소광천이나 무량광천은 어떠한 식주에 포섭될 것인가? 즉 그러한 천은 색깔과 형태, 모양이 다르지 않기 때문에 ‘신체가 동일하다’고 일컬은 것이며, 낙(樂)과 비고비락(非苦非樂)이 교차하기 때문에 ‘생각이 다르다’고 일컬은 것이다.48)
027_0513_b_20L有色有情身一想異極光淨天是第三識住此中擧後兼以攝初應知具攝第二靜慮若不爾彼少光天無量光天何識住攝天顯形狀貌不異故名身一樂非苦樂二想交參故名想異
027_0513_c_02L 그리고 전(傳)하여 설(說)하는 바에 따르면, “그들 천(天)은 근본지(根本地)의 희근(喜根)을 싫어하여 근분지(近分地)에 의해 사근(捨根)을 일으켜 현전시키고, 다시 근분지의 사근을 싫어하여 근본지의 희근을 일으켜 현전하게 하니, 마치 부귀한 자가 욕락(欲樂)을 싫어하여 법락(法樂)을 향수하고, 법락을 싫어하여 다시 욕락을 향수하는 것과 같다.”49)
027_0513_c_02L傳說彼天厭根本地喜根已起近分地捨根現前厭近分地捨根已起根本地喜根現如富貴人厭欲樂已便受法樂法樂已復受欲樂
어찌 변정천(遍淨天)의 생각도 역시 마땅히 그러하다고 하지 않겠는가?50)
변정천에서는 일찍이 낙(樂)을 싫어하는 일이 없으니, 낙은 적정(寂靜)이므로 일찍이 싫어한 때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제2 정려의] 희(喜)는 그렇지 않으니, 마음을 요동시키기 때문이다.
027_0513_c_06L豈不遍淨想亦應非遍淨天曾有厭樂以樂寂靜曾無厭時喜則不然擾動心故
그러나 경부사(經部師)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다른 어떤 계경에서는 그러한 천 중에서의 생각이 다른 것에 대해 이와 같이 해석하고 있다. 즉 극광정천 중에 새로이 태어난 천중(天衆)이 있었는데 세간이 이루어지고 허물어지는 것에 대해 아직 잘 알지 못하였다. 그는 [괴겁(壞劫) 시에] 하지(下地)에서 화염이 이글이글 타오른 것을 보고 두려움과 염리(厭離)를 느낀 나머지 ‘저 화염이 범궁(梵宮)을 태워 그것들을 모두 허공으로 만들고 계속 올라와 우리의 처소(즉 극광정천)에까지 들이닥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였다. [그 때] 이미 오래 전에 극광정천에 태어나 세간이 이루어지고 허물어지는 것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어떤 천중이 있었는데, 그 놀라고 두려움에 떠는 천중을 위로하여 말하기를, ‘정선(淨仙)이여! 정선이여! 두려워하지 마라. 두려워하지 마라. 옛날에도 저 화염은 범궁을 모두 태워 그것들을 모두 허공으로 만들고는 거기서 바로 꺼져 버렸다’고 하였다.”
027_0513_c_08L經部師有餘契經釋彼天中有想異義極光淨有天新生未善了知世閒成彼見下地火焰洞然見已便生驚怖厭離勿彼火焰燒盡梵宮令彼皆空上侵我處彼極光淨有舊生天善了知世閒成壞便慰喩彼驚怖天淨仙淨仙勿怖勿怖昔彼火焰燒盡梵宮令其皆空卽於彼滅
이처럼 그들(제2 정려의 천중)은 [하지의] 화염을 보고서 ‘올라온다’ ‘올라오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아울러 ‘두렵다’ ‘두렵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생각이 다르다’고 일컫는 것이지 [유부의 주장처럼] 낙(樂)과 비고비락(非苦非樂)이 서로 교차하기 때문에 ‘생각이 다르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51)
027_0513_c_16L彼於火焰有來不來想及怖不怖想故名想非由有樂非苦樂想有交參故得想異名
또한 유색의 유정으로서 변정천의 경우처럼 신체가 동일하고[身一] 생각이 동일한[想一] 자가 있으니, 이것이 바로 제4 식주이다. 즉 오로지 [적정 미묘한] 즐거움의 생각[樂想]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생각이 동일하다’고 이름한 것이다.
027_0513_c_19L有色有情身一想一如遍淨是第四識住唯有樂想故名想一
[생각이 동일하고 동일하지 않음에 대해 다시 정리하면] 초정려 중에서는 염오한 상으로 말미암아 ‘생각이 동일하다’고 말한 것이며,52) 제2 정려에서는 두 가지의 선한 생각(즉 희근과 사근)에 따라 ‘생각이 다르다’고 말한 것이며,53) 제3 정려에서는 이숙의 생각으로 말미암아 ‘생각이 동일하다’고 말한 것이다.54)
나아가 아래 세 가지 무색정(無色定)의 명칭의 차별은 계경에서 설한 바와 같다. 즉 이것이 바로 세 가지 식주로서,55) 이상의 식주를 일컬어 7식주라고 한다.
027_0513_c_20L初靜慮中由染污想故言想一第二靜慮由二善想故言想異第三靜慮由異熟想故言想一下三無色名別如經卽三識住是名爲七
027_0514_a_02L여기서 어떠한 법을 일컬어 식주(識住)라고 한 것인가?
이를테면 각기 상응하는 바대로 그것에 계속(繫屬)되는 5온과 4온을 바로 ‘식주’라고 이름한다.56)
그 밖의 [처소의 온]은 어째서 식주가 되지 않는 것인가?
그 밖의 처소에서는 모두 식(識)을 손상시키고 파괴[損壞]하는 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그렇기 때문에 ‘식’이 거기에 낙주(樂住)할 수 없는 것이다.]
027_0513_c_24L此中何法名爲識住謂彼所繫五薀四薀如其所應是名識住所餘何故非識住耶於餘處皆有損壞識法故
그 밖의 다른 처소란 무엇을 말한 것인가?
이를테면 온갖 악처(惡處:지옥ㆍ아귀ㆍ방생)와 제4 정려, 그리고 유정천(有頂天:무색계의 비상비비상처)를 말한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그곳에는 ‘식’을 손상시키고 파괴하는 법이 존재하기 때문에 식주가 되지 않는 것이다.
027_0514_a_04L餘處者何謂諸惡處第四靜慮及與有頂所以者何由彼處有損壞識法故非識住
무엇을 일컬어 ‘식’을 손상시키고 파괴하는 법이라고 하는가?
이를테면 온갖 악처에는 무거운 고수(苦受)가 있어 능히 ‘식’을 손상시키며, 제4 정려에는 무상정과 무상사(無想事:즉 무상과)가 있고, 유정천 중에는 멸진정이 있어 능히 ‘식’을 파괴하고 그 상속을 끊어지게 하기 때문에 식주가 되지 않는 것이다.
027_0514_a_06L等名爲損壞識法謂諸惡處有重苦受能損於識第四靜慮有無想定及無想事有頂天中有滅盡定能壞於令相續斷故非識住
또한 다시 [어떤 이는] 설하기를,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악처 등을 제외한] 다른 처소에 처해 있는 유정은 마음으로 즐거이 와서 머물며, 만약 그곳에 이를 경우 다시 나가려고 희구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을 설하여 ‘식주’라고 이름하였다. 그렇지만 온갖 악처에는 이러한 두 가지의 뜻이 모두 없다. 즉 제4 정려의 마음은 항상 나가기만을 희구하니, 예컨대 여러 이생은 무상(無想)에 들기만을 희구하고, 여러 성자는 정거(淨居) 혹은 무색처에 드는 것만을 즐기려 하며, 혹은 정거천(淨居天)의 유정은 적멸을 증득하기만을 즐기려고 하기 때문에,57) 그리고 유정천은 어둡고 저열[昧劣]하기 때문에 ‘식주’라고 이름하지 않는 것이다”고 하였다.
027_0514_a_10L復說若處餘處有情心樂來止若至於此不更求說名識住於諸惡處二義俱無四靜慮心恒求出謂諸異生求入無若諸聖者樂入淨居或無色處淨居天樂證寂滅有頂昧劣故非識

이와 같이 7식주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으니, 이에 따라 다시 9유정거(有情居)에 대해 논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유정거의 아홉 가지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027_0514_a_16L如是分別七識住已因茲復說九有情居其九者何頌曰

[앞의 7식주와] 함께 유정천(有頂天)과
그리고 무상(無想)의 유정이
바로 9유정거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으로
그 밖의 곳은 즐거이 머물지 않기 때문에 유정거가 아니다.
027_0514_a_17L應知兼有頂
及無想有情
是九有情居
餘非不樂住

논하여 말하겠다. 앞의 7식주와 아울러 제일유(第一有:즉 非想非非想處인 有頂天을 말함)와 무상(無想)의 유정, 이것을 일컬어 아홉 가지라고 한다. 즉 온갖 유정류는 오로지 이러한 아홉 곳에서만 즐거이[欣樂] 머물기 때문에 ‘유정거(有情居)’로 설정한 것이다.58) 그러나 그 밖의 다른 처소는 모두 유정거가 아니니, 즐거이 머무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027_0514_a_19L論曰前七識住及第一有無想有情是名爲九諸有情類唯於此九欣樂住故立有情居餘處皆非不樂住故
027_0514_b_02L여기서 그 밖의 다른 처소라고 함은 온갖 악처(惡處)를 말한다. 즉 그곳은 유정류가 스스로 즐거워하며 머무는 곳이 아니니, 악업의 나찰(羅刹, raksana)이 그를 핍박하여 머물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곳은 감옥과 같기 때문에 유정거로 설정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무상천을 제외한 그 밖의 제4정려는 모두 유정거가 아니니, 앞서 식주(識住) 중에서 해석한 바와 같다.59)
027_0514_a_22L言餘處者謂諸惡處非有情類自樂居中惡業羅剎逼之令住故彼如牢獄不立有情居第四靜慮除無想天餘非有情居如識住中釋

앞에서 인용한 경에서는 7식주를 설하고 있지만, 다시 어떤 다른 경 중에서는 4식주를 설하고 있다.60)
그것의 네 가지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027_0514_b_03L前所引經說七識住復有餘經說四識住其四者何頌曰

4식주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4온(蘊)으로서 오로지 자지(自地)의 그것뿐으로
유독 식온(識蘊)만은 식주가 아니라고 설하며
[7식주와 4식주는] 유루로서, 4구(句)로 포섭된다.
027_0514_b_05L四識住當知
四薀唯自地
說獨識非住
有漏四句攝

논하여 말하겠다. [식주의 네 가지란] 계경에서 말한 바와 같다. 즉 경에서 “식(識)은 색(色)에 따라 머물며, 식은 수(受)에 따라 머물며, 식은 상(想)에 따라 머물며, 식은 행(行)에 따라 머문다”고 하였으니,61) 이것을 네 가지 종류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027_0514_b_07L論曰如契經言識隨色住識隨受住識隨想住識隨行住是名四種
이와 같은 네 가지 종류의 본질[體]은 무엇인가?
이를테면 순서에 따른 유루의 4온(蘊)이다. 또한 이것은 오로지 자지(自地)에 존재하는 것만 식주가 되며 다른 지에 존재하는 것은 식주가 아니니, ‘식’의 소의처가 되어 탐착[依著]하게 되는 것을 ‘식주(識住)’라고 이름하기 때문이다. 즉 ‘식’은 다른 지(地)의 색 등의 온에 대해서는 갈애하는 힘[愛力]에 의해 그것을 소의처로 삼아 탐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027_0514_b_09L如是四種其體云何謂隨次第有漏四薀又此唯在自地非餘識所依著名識住故非於異地色等薀中識隨愛力依著於彼
어찌하여 식온은 식주가 된다고 설하지 않는 것인가?
‘능히 머무는 것[能住,즉 식]’을 떠나 ‘머물게 되는 것[所住,즉 대상]’을 설정하였기 때문이다. 즉 능히 머무는 식을 ‘머물게 되는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으니, 비유하자면 [능히 왕좌에 앉는 자인] 왕을 왕좌라고 이름할 수 없는 것과 같다.
027_0514_b_13L如何不說識爲識住由離能住立所住故非能住識可名所住如非卽王可名王座
혹은 마치 사람이 배를 타고 부리는 이치와 마찬가지로 만약 어떤 법을 식이 타고 부린다고 한다면, 이러한 법을 설하여 ‘식주’라고 이름하니, 식은 능히 그 자신을 타고 부리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식온을 설하여 식주라고 하지 않는 것으로, 비바사사(毘婆沙師)의 설은 이와 같다.62)
027_0514_b_15L或若有法識所乘御如人舩理說名識住非識卽能乘御自體是故不說識爲識住毘婆沙師所說如是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그 밖의 다른 계경에서는, “식식(識食) 중에도 희(喜)가 있고, 염(染)이 있으며, 희염(喜染)이 있기 때문에, 식은 거기에 머물며 그것은 식에 의해 제어(乘御)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인가?63) 또한 [식온이 4식주가 아니라고 한다면] 어떻게 앞의 7식주는 5온을 본질로 한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인가?
027_0514_b_18L若爾何故餘契經言於識食中有喜有染有喜染故識住其中識所乘御又如何言前七識住五薀爲體
027_0514_c_02L비록 이러한 설이 있을 수 있을지라도 그것은 생처(生處)에 포섭되는 (5)온을 개별적으로 분석하여 설한 것이 아니다. 즉 [5온] 전체가 희염을 낳았기 때문에 식이 일어날 때에도 역시 ‘식주’라고 이름한 것으로, 오로지 식온에 대해서만 [식주라고] 설한 것이 아니다.64) 그러나 색 등의 (4)온은 각기 능히 여러 종류의 희염을 낳고, 식으로 하여금 그것을 소의로 삼아 탐착하게 하기 [때문에 식주라고 이름할 수 있지만] 유독 식온만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식주가 아니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4식주 중에서 식은 식주가 아닌 것이다. 그렇지만 그 밖의 경우에 있어서는 [식을 포함시켜] 설할 수 있다.65)
027_0514_b_21L雖有是說而於生處所攝薀中不別分析摠生喜染故識轉時亦名識住非獨說識然色等薀一一能生種種喜染令識依著獨識不然故言非住是故於此四識住中識非識住於餘可說
또한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4식주는 마치 좋은 밭과 같고, 취착함이 있는 일체의 온갖 식[有取識]은 종자와도 같다”고 설하셨으니,66) 종자(즉 식)를 좋은 밭(4온)이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세존이 설한 교법의 뜻을 우러러 헤아려 보면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027_0514_c_03L又佛意說此四識住猶如良田摠說一切有取諸識猶如種子不可種子立爲良田仰測世尊教意如是
또한 법(식 이외 4온)은 식온과 구시(俱時)에 생겨나 식의 좋은 밭이 될 수 있어 ‘식주’로 설정할 수 있지만 식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식주가 아닌 것이다.
이상과 같이 논설된 일곱 종류와 네 종류의 식주는 비록 다른 점이 있지만, 그것들은 모두 유루이다.
027_0514_c_06L又法與識可俱時生爲識良田可立識住識薀不爾故非識住如是所說七種四種識住雖殊而皆有漏
7식주가 4식주를 포섭하는 것인가, 4식주가 7식주를 포섭하는 것인가?
서로가 서로를 두루 포섭하지 않으니, 이에 대해서는 마땅히 4구(句)로 분별할 수 있다. 즉 자세히 관찰하면 이러한 두 가지 교문(敎門) 자체에는 서로 범주 상의 넓고 좁음이 있어 혹 어떤 경우 7식주에는 포섭되어도 4식주에는 포섭되지 않는 등의 4구가 있을 수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027_0514_c_09L爲七攝四四攝七耶非遍相攝可爲四句謂審觀察應知二門體互寬陜得成四句或有七攝非四攝等
제1구는 7식주 중의 식이 바로 그것이다. 제2구는 이를테면 온갖 악처와 제4정려, 그리고 유정천 중의 식온을 제외한 그 밖의 온이 바로 그것이다. 제3구는 7식주 중의 [식온을 제외한] 4온이 바로 그것이며, 제4구는 이를테면 앞에서 언급한 행상을 제외한 것이다.67)
027_0514_c_11L第一句者謂七中識第二句者謂諸惡處第四靜慮及有頂中除識餘薀第三句者七中四薀第四句者謂除前相

앞에서 설한 온갖 계(界)와 취(趣)의 생(生)에는 간략히 네 종류가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68)
무엇을 네 가지라 하며, 어떠한 처소에 어떠한 생이 있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027_0514_c_15L於前所說諸界趣中應知其生略有四種何等爲四何處有何頌曰

[3계ㆍ5취] 중에는 4생의 유정이 있으니
이를테면 난생(卵生) 등이 바로 그것이다.
027_0514_c_16L於中有四生
有情謂卵等

인간과 방생은 네 가지를 갖추고 있으며
지옥과 아울러 온갖 천(天)과
중유는 오로지 화생(化生)이며
아귀는 태생(胎生)과 화생 두 가지와 통한다.
027_0514_c_17L人傍生具四
地獄及諸天
中有唯化生
鬼通胎化二

논하여 말하겠다. 유정의 유형에는 난생(卵生)ㆍ태생(胎生)ㆍ습생(濕生)ㆍ화생(化生)이 있는데, 이것을 일컬어 4생(生)이라고 한다. 여기서 ‘생’이란 말하자면 생류의 뜻으로, 온갖 유정 중에는 비록 잡다한 종류로 뒤섞여 있을지라도 생류로서는 동등하기 때문이다.
027_0514_c_18L論曰謂有情類卵生胎生濕生化生是名爲四生謂生類諸有情中雖餘類雜而生類等
무엇을 일컬어 난생이라고 하는가?
이를테면 알껍질[卵殼]로부터 생겨나는 유정류를 난생이라 이름하니, 예컨대 거위나 공작ㆍ앵무새ㆍ기러기 등과 같은 것이다.
027_0514_c_21L云何卵生謂有情類生從卵㲉是名卵生如鵝孔雀鸚鵡鴈等
무엇을 일컬어 태생이라고 하는가?
이를테면 탯집[胎藏]으로부터 생겨나는 유정류를 태생이라 이름하니, 예컨대 코끼리나 말ㆍ소ㆍ돼지ㆍ양ㆍ나귀 등과 같은 것이다.
027_0514_c_23L云何胎生謂有情類生從胎藏是名胎生如象馬牛猪羊驢等
027_0515_a_02L무엇을 일컬어 습생이라고 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습기(濕氣)로부터 생겨나는 유정류를 습생이라 이름하니, 예컨대 벌레나 누에나비ㆍ모기ㆍ노래기ㆍ지네 등과 같은 것이다.
027_0514_c_24L云何濕生謂有情類生從濕氣是名濕生如虫飛蛾蚊蚰蜒等
무엇을 일컬어 화생이라고 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어떤 곳(즉 앞에서 언급한 알ㆍ태ㆍ습기 등)에도 의탁한 바없이 생겨나는 유정류를 화생이라 이름하니, 예컨대 나락가나 천(天), 중유 등과 같은 것이다. 즉 감관을 모두 갖추어 결함이 없으면서 수족이나 마디마디[支分]가 단박에 생겨나니, 없는 듯하다가 홀연히 있기 때문에 화생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027_0515_a_04L云何化生謂有情類生無所託是名化生如那落迦中有等具根無缺支分頓生無而欻有故名爲化
[온갖 취(趣)에는 각기 몇 가지의 생이 있는 것인가?]
인간과 방생의 취에는 각기 네 가지 종류를 모두 갖추고 있다. 즉 인간이면서 난생인 경우는, 이를테면 고니의 알에서 생겨난 세라(世羅)와 오파세라(鄔波世羅)와,69) 녹모(鹿母)의 소생인 서른두 명의 아들과,70) 반차라왕(般遮羅王)의 오백 명의 아들 따위와 같은 자이다.71) 인간이면서 태생인 경우는 이를테면 바로 지금 세상의 인간과 같은 자이다. 인간이면서 습생인 경우는 이를테면 만타라(慢馱羅), 차로(遮盧), 오파차로(鄔波遮盧), 합만(鴿鬘), 암라위(菴羅衛) 등과 같은 자이다.72) 그리고 인간이면서 화생인 경우는 오로지 겁초(劫初:즉 태초)의 인간뿐이다.
027_0515_a_07L人傍生趣各具四種人卵生者謂如世羅鄔波世羅生從鶴卵鹿母所生三十二子般遮羅王五百子等人胎生者如今世人人濕生者如曼馱多遮盧鄔波遮盧鴿鬘菴羅衛等人化生者唯劫初人
방생의 세 가지 종류(즉 난ㆍ태ㆍ습의 3생)는 모두 현재 관찰되고 있는 바이며, 방생이면서 화생인 것은 용(龍)이나 게로다(揭路茶) 등과 같은 것이다.73)
027_0515_a_12L傍生三種共所現見化生如龍揭路荼等
그리고 일체의 지옥과 온갖 천과 중유는 모두 오로지 화생일 뿐이다.
나아가 아귀취는 오로지 태생과 화생 두 종류와 통할 뿐이다. 즉 아귀이면서 태생인 자는 아귀모(餓鬼母)와 같은 이인데, 목련(目連)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던 것이다.
027_0515_a_13L一切地獄諸天中有皆唯化生鬼趣唯通胎化二種鬼胎生者如餓鬼女白目連云

나는 밤마다 새끼를 다섯 낳아
낳는 대로 모두를 먹어 치우며,
낮에도 다섯을 낳아 역시 그러하여
비록 모두를 먹었으되 배부른 일이 없도다.74)
027_0515_a_16L我夜生五子
隨生皆自食
晝生五亦然
雖盡而無飽

일체의 ‘생’ 가운데 어떠한 생이 가장 뛰어난 것인가?
마땅히 말해야 할 것이다. 가장 뛰어난 것은 오로지 바로 화생일 뿐이다고.75)
027_0515_a_18L一切生中何生最勝應言最勝唯是化生
만약 그렇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최후신(最後身)의 보살은 ‘생’을 획득하는데 자재(自在)하면서도 [화생을 받지 않고] 태생을 받은 것인가?76)
027_0515_a_20L若爾何緣後身菩薩得生自在而受胎生
현재세에 태생을 받을 경우 커다란 이익이 있기 때문이니, 이를테면 여러 위대한 석가종족의 친족과 권속을 인도하고 관계[相因]하여 정법에 들게 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그 밖의 다른 종족을 인도하여 ‘보살이 바로 전륜왕(轉輪王)의 종족이다’는 사실을 알고 경애하고 사모하는 마음을 낳게 하여 그것으로 인해 삿된 것을 버리고 정법을 획득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교화될 중생으로 하여금 ‘그(최후신의 보살)는 이미 인간임에도 능히 대의(大義)를 성취하셨다. 우리도 역시 그러하니 어찌 능히 정근(正勤)을 발하여 정법을 전수(專修)하지 않겠는가’라고 하는 것과 같은 증상심을 낳게 하기 위해서였다.
027_0515_a_21L現受胎生有大利故謂爲引導諸大釋種親屬相因令入正法又引餘類令知菩薩是輪王種生敬慕心因得捨邪趣於正法又令所化生增上心彼旣是人能成大義我曹亦爾何爲不能因發正勤專修正法
027_0515_b_02L 또한 만약 그렇게 하지 않다고 한다면 [즉 태생으로 태어나지 않았다고 한다면], 보살의 족성(族姓)을 알기 어려워 천신(天神)인가 귀신인가 하여 허깨비[幻化]로 의심하고 두려워하였을 것이니, 이를테면 외도의 논(論)에서 거짓되게 비방하여 말한 것과 같다. “백 겁을 지난 후 마땅히 위대한 환술사(幻術師)가 세간에 출현하여 세간을 집어삼키는 일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태생을 받아 온갖 의혹과 비방을 종식시키려고 하였던 것이다.
027_0515_b_02L又若不爾族姓難知恐疑幻化爲天爲鬼如外道論矯設謗言過百劫後當有大幻出現於世噉食世閒故受胎生息諸疑謗
그런데 유여사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신계(身界:즉 사리를 말함)를 남기기 위해서 태생을 받은 것이다. 즉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과 온갖 이류(異類)들로 하여금 [그것에 대해] 한번만 공양을 베풀어도 천 번이나 하늘에 태어나고 아울러 해탈을 증득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만약 화생을 받았다고 한다면 외적인 종자[外種, bāhya-bīja]가 없기 때문에 몸이 문득 죽게 되면 더 이상 남아있는 형체가 없으니, 이는 마치 등불이 꺼지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027_0515_b_07L有餘師說爲留身界故受胎生令無量人及諸異類一興供養千返生天及證解脫若受化生無外種故身纔殞逝無復遺形如滅燈光卽無所見
그러나 만약 어떤 사람이 부처님께서 지원통(持願通)를 갖고 있어 능히 오래도록 그 몸을 남겨둘 수 있다고 믿는다면, 이는 [올바른] 해석이라 할 수 없다.77)
027_0515_b_11L若人信佛有持願通能久留身此不成釋因論生論
논의에서 논의가 낳아지는 법, 만약 화생의 몸이 마치 등불이 소멸한 것처럼 죽어서 더 이상 남기는 것이 없다고 한다면 어째서 계경에서 ‘화생의 게로다(揭路茶) 새가 역시 화생인 용을 잡아먹기에 충분하다’고 설하였던 것인가?78)
027_0515_b_12L若化生身如滅燈光死無遺者何故契經化生揭路荼取化生龍爲充所食
[화생의 용인 줄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다만 먹기 위해 용을 잡은 것일 뿐, 허기를 채운다고는 설하지 않았는데 여기에 무슨 허물이 있을 것인가?79) 혹은 용이 아직 죽지 않았을 때는 잠시 허기를 채울 수 있지만, 죽고 나면 다시 배고프게 된다. 즉 [살아 있는 동안에] 잠시 먹었다 하였는데, 무슨 허물이 되겠는가?
027_0515_b_14L以不知故爲食取龍不說充飢斯有何失或龍未死暫得充飢死已還飢暫食何咎
4생 가운데 무엇이 가장 많은 것인가?
오로지 화생이 가장 많다. 왜냐 하면 3취(즉 인간ㆍ방생ㆍ아귀)의 일부와, 2취(즉 천과 지옥) 전부, 그리고 일체의 중유(中有)가 모두 화생이기 때문이다.
027_0515_b_17L於四生內何者最多唯化何以故三趣少分及二趣全一切中有皆化生故

여기서 어떤 법을 설하여 중유라고 일컬은 것인가? 또한 어떠한 이유에서 중유는 ‘생’이라고 이름하지 않는 것인가?80)
게송으로 말하겠다.
027_0515_b_19L此中何法說名中有何緣中有非卽名生頌曰

사(死)와 생(生)의 두 가지 유(有) 중간의
5온을 중유(中有)라고 이름하니
마땅히 이르러야 할 곳에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중유는 ‘생’이 아닌 것이다.
027_0515_b_20L死生二有中
五薀名中有
未至應至處
故中有非生

논하여 말하겠다. [중유란] 사유(死有) 이후, 생유(生有) 이전, 다시 말해 그 중간에 존재하는 [5온] 자체로서, 태어나야 할 곳[生處]에 이르기 위해 이러한 몸을 일으킨 것이니, 2취 중간에 존재하기 때문에 ‘중유’라고 이름하였다.
027_0515_b_22L論曰於死有後在生有前卽彼中間有自體起爲至生處故起此身二趣中閒故名中有
027_0515_c_02L이러한 몸도 이미 일어난 것이라면 어째서 ‘생’이라고 이름하지 않는 것인가?81)
‘생’이란 말하자면 당래(當來) 마땅히 이르러야 하는 곳에 이르는 것으로, ‘이른다’는 뜻에 의해 ‘생’이란 명칭을 건립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중유의 몸은 비록 그 자체로서는 일어났을지라도 아직 그곳(마땅히 이르러야 하는 곳)에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생’이라고 이름하지 않는 것이다.82)
027_0515_b_25L此身已起何不名生生謂當來所應至處依所至義建立生名此中有身其體雖起而未至彼故不名生
무엇을 일컬어 ‘당래 마땅히 이르러야 하는 곳’이라고 한 것인가?
업에 의해 인기된 이숙의 5온이 마침내 분명하게 되는 것,83) 이것을 ‘당래 마땅히 이르러야 하는 곳’이라고 한다.
027_0515_c_05L何謂當來所應至處所引異熟究竟分明是謂當來所應至處

그런데 유여사는 설하기를, “죽음으로부터 생처(生處)에 이르는 사이는 단절되어 있기 때문에 중유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다.84)
이는 마땅히 인정할 수 없는 주장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증(理證)과 교증(敎證)에 의거하였기 때문이다.
어떠한 이증과 교증에 의거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027_0515_c_06L有餘部說從死至生處容閒絕故無中有此不應許所以者何依理教故理教者何頌曰

곡식 등이 상속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곳(즉 生處)에 끊어짐 없이 속생하니
거울의 영상이 실재한다는 것은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동등한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비유가 되지 않는다.
027_0515_c_09L如穀等相續
處無閒續生
像實有不成
不等故非譬

동일한 처소에 두 가지의 실재가 병존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며
상속한 것이 아니며, 두 가지에 의해 생겨난 것이기 때문으로
경에서 건달박(健達縛)과 아울러 5불환과와
7선사(善士)의 존재를 설하고 있기 때문에 [중유는 실유이다].
027_0515_c_11L一處無二竝
非相續二生
說有健達縛
及五七經故

논하여 말하겠다. 바야흐로 정리(正理)에 의할 것 같으면 중유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세간을 현견하건대 상속(相續) 전전(展轉)하는 법은 요컨대 끊어짐이 없이, 즉 무간(無間) 찰나에 속생(續生)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세간의 곡식 따위가 상속하는 것처럼 유정이 상속하는 이치도 역시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으로, 찰나에 속생하여 반드시 끊어짐[間]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027_0515_c_12L論曰且依正理中有非無現見世閒相續轉法要處無閒剎那續生且如世閒穀等相續有情相續理亦應然剎那續生處必無閒
어찌 현견하고 있지 않는가? 즉 마치 거울 등에 의지하여 본체[質, 즉 거울에 비친 상의 본체]로부터 영상[像, 거울에 비친 상]이 생겨나는 것처럼 어떤 법이 속생(續生)하더라도 그 사이에 역시 끊어짐이 있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85) 이와 마찬가지로 유정의 사유와 생유 사이에 비록 끊어짐이 있을지라도 무엇이 속생하는 것을 방해할 것인가?
027_0515_c_16L豈不現見有法續生而於其中處亦有閒如依鏡等從質像生如是有情死有生有處雖有閒何妨續生
실로 [거울에 맺힌] 온갖 영상이 실재한다고 하는 이치는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또한 [본체와 영상은]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그 같은 예증은 비유로서 성립하지 않는다. 즉 [본체와는] 다른 별도의 색이 낳아진 것을 설하여 ‘영상’이라고 이름하지만 그것의 체성이 실유라는 이치는 이루어질 수 없으며, 설사 이루어질 수 있다 할지라도 양자는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비유로서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86)
027_0515_c_19L實有諸像理不成故又非等故爲喩不成謂別色生說名爲像其體實有理所不成設成非等故不成喩
즉 [본송에서] ‘거울의 영상[이 실재한다는 것]은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비유가 되지 않는다’고 한 것은 동일한 처소에 두 가지 [실유의 색]이 병존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즉 동일한 처소에 거울이라는 색법과 영상이 함께 현전하는 것을 보지만, [만약 그것들이 실유라고 한다면] 두 가지의 색은 마땅히 동일한 처소에 함께 존재한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니, 그것들은 각기 다른 대종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87)
027_0515_c_22L言像不成故非喩者以一處所無二竝故謂於一處鏡色及像竝見現前二色不應同處竝有依異大故
027_0516_a_02L 또한 폭이 좁은 강물 위에 비친 양안(兩岸)의 색형(色形)은 동일한 처소에 두 가지 상이 동시에 함께 나타난 것으로, 양안에 있는 자는 서로를 분명히 본다. 그러나 일찍이 동일처에 병존하는 두 가지의 색을 본 일이 없으니, 이러한 두 가지 색은 마땅히 함께 생겨난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다.
027_0515_c_25L又陜水上兩岸色形同處一時俱現二像居兩岸者互見分明曾無一處竝見二色不應謂此二色俱生
또한 그림자[影]와 빛[光]은 일찍이 동일한 처소에 함께 존재한 일이 없지만, 그럼에도 그림자 가운데 매달려 있는 거울을 보게 되면 빛의 영상이 환하게 비쳐 거울의 면에 나타나지만, 마땅히 여기(하나의 거울 면)에 두 가지 상(그림자와 빛)이 함께 생겨났다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다.
027_0516_a_04L又影與光未嘗同處然曾見鏡懸置影中光像顯然現於鏡面不應於此謂二竝生
혹은 [본송에서] ‘동일한 처소에 두 가지 사물이 병존하는 일은 없다’고 하였을 때의 두 가지란 거울의 면과 거기에 비친 달의 영상을 말하는 것으로, [이러한 두 가지는] 가깝게 보이고 멀리 보이는 등의 차별이 있으니, 마치 우물 속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88) 만약 [동일한 처소에] 함께 생겨난 것이라고 한다면, 어째서 다르게 보이겠는가? 그러므로 온갖 영상[像]은 이치상 실로 존재하지 않는 것[無]임을 알아야 한다.
027_0516_a_07L或言一處無二竝者鏡面月像謂之爲二近遠別見如觀井水若有竝生如何別見故知諸像於理實無
그렇지만 이와 같이 보이게 되는 것은 온갖 인연이 화합한 세력 때문으로, 이러한 제 법성의 공능의 차별은 참으로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다. [본송에서 ‘거울의 영상이 실재한다는 것은]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비유가 되지 않는다’고 한 것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027_0516_a_10L然諸因緣和合勢力令如是見以諸法性功能差別難可思議已辯不成所以非喩
[본송에서] ‘동등한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역시 비유가 되지 않는다’고 함은, 본체[質]와 영상[像]은 상속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본체와 영상은 [사유와 생유처럼] 동일한 상속이 아니니, 오로지 거울 등에 의지하여서만 영상이 나타나기 때문이며, 영상과 본체는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유와 생유와 같은 것은 바로 동일한 상속으로 전후에 끊어짐이 없이 다른 곳에서 속생한다. 본체와 영상을 서로 견주어 보더라도 거기에는 이와 같은 상속이 없다. 즉 [양자의 관계는] 서로 유사하지 않기 때문에 [본체와 영상은 중유 무체론(無體論)의] 비유가 되지 않는 것이다.89)
027_0516_a_12L言非等故亦非喩者以質與像非相續故謂質與像非一相續唯依鏡等有像現故像與本質俱時有故如死生有是一相續前後無閒餘處續生質像相望無此相續以不相似故不成喩
또한 [거울에] 나타난 영상은 두 가지 연(緣)에 의해 생겨났기 때문에 [중유 무체론의 비유가 되지 않는다]. 즉 온갖 영상은 두 가지 연으로 말미암아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니, 첫 번째가 본체이며, 두 번째가 거울 따위이다. 즉 영상은 이 두 가지의 인연[因]이 뛰어날 때 그것에 의지하여 생겨나는 것이다.90)
027_0516_a_17L又所現像由二生故謂二緣故諸像得生一者本質二者鏡等二中勝者像依彼生
그러나 생유는 두 가지 인연에 의해 일어나는 일이 없다. 오로지 사유에만 의지할 뿐 별도의 뛰어난 의지처가 없기 때문에 앞서 인용한 [본체와 영상의] 비유는 이러한 법(즉 사유와 생유)과 동등하지 않은 것이다. 역시 또한 [생유는] 외적 무생물[非情, acetanā]인 정혈(精血:아버지의 정액과 모태의 피) 등의 연(緣)을 뛰어난 의지처[勝依性]로 삼는다고 설할 수도 없으며,91) 화생이 공중에서 홀연히 생겨난다고 할 경우, 거기서는 어떠한 법을 뛰어난 의지처로 삼았다고 헤아릴 것인가?
027_0516_a_19L生有無容由二緣起唯有死有無別勝依故所引喩非等於法亦不可說以外非情精血等緣爲勝依性由化生者空中欻生於中計何爲勝依性
정리(正理)에 따라 ‘사유로부터 생유에 이르는 데에는 끊어짐[間節]이 있다’고 주장하는 그들 유여사의 종의(즉 중유무체론)에 대해 이미 논파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중유는 결정코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92)
027_0516_a_23L已依正理對破彼宗從死至生處容閒絕是故中有決定非無
027_0516_b_02L다음으로 성교(聖敎)에 의거하여 중유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논증하리라.
이를테면 계경에서 말하기를, “유(有)에는 일곱 가지가 있으니, 5취(趣)의 유와 업유와 중유가 바로 그것이다”고 하였다.93) 만약 그들 부파(중유의 실재성을 부정하는 대중부 등의 부파)에서는 이러한 계경을 외워 전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어찌 『건달박경(犍達縛經)』은 외워 전하지 않을 것인가? 즉 그 계경에서 말하기를, “모태에 들어가는 것은 요컨대 세 가지의 사실이 함께 현재 나타났기 때문이니, 첫 번째로는 어머니의 몸의 시기가 적당한 것이며, 두 번째로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교애(交愛)가 화합하는 것이며, 세 번째로는 건달박이 바로 나타나는 것이다”고 하였다.94) 그러니 중유의 몸을 배제하고서 그 어떤 건달박이 존재할 것이며, 선행한 온(本有의 온)은 이미 괴멸하였는데 ‘무엇이 바로 나타나는 것’인가?
027_0516_a_25L次依聖教證有中有謂契經言有有七種卽五趣有業有中有若此契經彼部不誦豈亦不誦『健達縛經』如契經言入母胎者要由三事俱現在前一者母身是時調適二者父母交愛和合三健達縛正現在前除中有身何健達縛前薀已壞何現在前
만약 그들이 이 계경도 외워 전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다음의 『장마족경(掌馬足經)』의 내용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즉 그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95) “그대는 지금 아는가, 모르는가? 이러한 건달박(犍達縛)이 바로 앞에 나타났다면 그를 바라문(婆羅門)이라 해야 할 것인가, 찰제리(刹帝利)라고 해야 할 것인가, 바로 폐사(吠舍)라고 해야 할 것인가, 술달라(戌達羅)라고 해야 할 것인가?96) 혹은 동방에서 왔다고 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남ㆍ서ㆍ북 방에서 왔다고 해야 할 것인가?” 즉 선행한 온은 이미 괴멸하였는데, [무엇이] ‘왔다’고 말해야 할 것인가? 여기서 ‘왔다’고 하는 말은 오직 중유가 왔다는 것이다.
027_0516_b_08L若此契經彼亦不誦復云何釋『掌馬族經』如彼經言汝今知不此健達縛正現前者爲婆羅門爲剎帝利爲是吠舍爲戍達羅爲東方來爲南西北前薀已壞不可言來此所言來固唯中有
만약 다시 이와 같은 계경도 외워 전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오불환경(五不還經)』은 마땅히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즉 그 경에서는 설하기를 “다섯가지의 불환이 있으니, 첫 번째는 중반(中般)이며, 두 번째는 생반(生般)이며, 세 번째는 무행반(無行般)이며, 네 번째는 유행반(有行般)이며, 다섯 번째는 상류반(上流般)이다”고 하였는데,97) 만약 중유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일컬어 ‘중반’이라고 할 것인가?
027_0516_b_13L若復不誦如是契經『五不還經』當云何釋如契經說有五不還一者中般二者生般三無行般四有行般五者上流中有若無何名中般
유여사는 주장하기를, “천(天)이 있어 그것을 중간이라고 이름하니, 그곳에 머물면서 반열반하기 때문에 ‘중반’이라 이름하는 것이다”고 하였다.98)
그러나 그럴 경우 마땅히 ‘생(生)’ 등의 하늘도 인정해야 할 것이지만,99) 이미 그 같은 하늘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은 옳은 것이 아니다.
027_0516_b_17L有餘師執有天名中住彼般涅槃是故名中般是則應許有生等天旣不許然故執非善
또한 경에서 “일곱 가지 선사취(善士趣)가 있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100) 그것은 즉 앞의 다섯 가지 불환에서 중반을 세 가지로 나눈 것으로, [중반으로 나아가는] 처소와 시간상에 가깝거나 중간이거나 멀거나 하는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101) 즉 “비유하자면 장작개비의 작은 불꽃이 흩어질 때에는 잠시 일어났다가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바로 가까이서 소멸하는 것처럼 첫 번째 선사도 역시 그러하다. 또한 비유하자면 쇳덩어리의 작은 불꽃이 흩어질 때에는 불꽃이 일어나 중간쯤 지속하다가 소멸하는 것처럼 두 번째 선사도 역시 그러하다. 또한 비유하자면 쇳덩어리의 커다란 불꽃이 흩어질 때에는 멀리까지 이르도록 떨어지지 않고 있다가 소멸하는 것처럼 세 번째 선사도 역시 그러하다”고 하였던 것이다.
027_0516_b_19L又經說七善士趣謂於前五中般分三由處及時近中遠故譬如札火小星逬時纔起近卽滅初善士亦爾譬如鐵火小星逬時起至中乃滅二善士亦爾譬如鐵火大星逬時遠未墮而滅善士亦爾
027_0516_c_02L그러므로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욕계와 색계] 중간에 하늘이 있는 것도 아니며, 이처럼 [중반불환에] 시간과 처소에 세 가지 품류의 차별이 있기 때문에 그들이 주장하는 바(중유무체론)는 결정코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
027_0516_c_02L非彼所執別有中天有此時處三品差別故彼所執定非應理
그러나 유여사는 다시 설하기를, “[정해진] 수량(壽量)[을 다하지 않고 그] 중간에, 혹은 [색계]천에 가까운 중간에 그 밖의 나머지 번뇌를 끊고 아라한과를 성취할 때를 ‘중반’이라 이름하니,102) 계(界) 혹은 상(想) 혹은 심(尋)의 상태[位]에 이르러 반열반하기 때문에 거기에 [가깝고 중간이고 멀다는] 세 가지 품류가 있는 것이다”고 하였다.103)
027_0516_c_03L有餘復說或壽量中閒或近天中閒斷餘煩惱成阿羅漢是名中般由至界位或想或尋而般涅槃故有三品
혹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색계의 중동분을 취하고 나서 바로 반열반에 드는 것을 바로 첫 번째의 경우(즉 近)라고 일컫고, 이로부터 그 후 색계천의 즐거움을 향수하고 나서 비로소 반열반에 드는 것을 바로 두 번째의 경우(즉 中)라고 일컬은 것이며, 다시 이로부터 그 후에 이르러 색계천의 법회(法會)에 들어 바로 반열반하는 것을 일컬어 바로 세 번째 경우(즉 遠)라고 하였다.104) 나아가 법회에 들고 나서 다시 많은 시간을 거쳐 비로소 반열반하는 것을 바로 생반(生般)이라 이름하니, 처음 태어나서가 아니라 많은 수량(壽量)을 감(혹은 滅)하고서 비로소 반열반하기 때문에 ‘생반’이라 이름한 것이다”105)고 하였다.
027_0516_c_06L取色界衆同分已卽般涅槃是名第一從是次後受天樂已方般涅槃是名第二復從此後入天法會乃般涅槃是名第三入法會已復經多時方般涅槃是名生般或減多壽方般涅槃非創生時故名生般
이와 같은 주장은 [앞서 인용한] 불꽃의 비유와 모두 상응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러한 [열반의] 처소로 가는 것에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106) 또한 [중반을 그와 같이 해석할 경우] 무색계에서도 역시 마땅히 중반열반이 있다고 설해야 할 것이니, 그곳에서도 역시 수량(壽量) 중간에 반열반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곳에 중반열반이 있다고는 설하지 않으니, 올타남(嗢拕南, Udāna)의 가타(伽陀, gāthā)에서 설한 바와 같다.107)
027_0516_c_12L如是所說與火星喩皆不相應所以者何以彼處行無差別故又無色界亦應說有中般涅槃由彼亦有壽量中閒般涅槃故然不說彼有中般者如嗢拕南伽他中說

여러 성자와 현자를 총합하면
4정려에 각기 열 가지가 있고,
3무색정에는 각기 일곱 가지가 있으며,
오로지 여섯 가지는 비상처(非想處)이다.108)
027_0516_c_17L摠集衆聖賢
四靜慮各十
三無色各七
唯六謂非想

따라서 그들이 주장하는 바는 모두 다 허망한 분별일 뿐인 것이다.
만약 다시 이와 같은 따위의 계경도 외워 전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어찌할 것인가?] 무상법왕(無上法王, 즉 세존을 말함)께서 멸도(滅度)하신 지 이미 오래되었고, 온갖 대법(大法)의 장군들도 역시 반열반하였으며,109) 성교(聖敎)는 여러 갈래로 나누어져 이미 다수의 부파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그 문의(文義)에 대한 각기 다른 주장들이 이리 저리 난무하고, 정의(情意)에 따라 그것들을 임의로 취하기도 하고 버리기도 하니, 지금이 바야흐로 지극히 그러하다.110)
027_0516_c_19L故彼所執皆是虛妄若復不誦如是等經無上法王久已滅度諸大法將亦般涅槃聖教支離已成多部其於文義異執交馳取捨任情于今轉盛
027_0517_a_02L 아! 슬프도다. 그대들은 어리석고 미혹함을 굳게 지키어 이치도 어기고 교법도 거부하니, 가슴 아프기가 그지없다. 제 유정으로서 앞에서 논설한 이증과 교증에 의거하여 그것을 기준[量]으로 삼은 자라면 거기(욕계ㆍ색계)에 중유가 실재한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것[極成]이다.
027_0516_c_23L哀哉汝等固守愚迷違理拒教可傷之甚諸有馮前理教爲量中有於彼實有極成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찌하여 계경 중에서 “극악한 업을 지은 도사마라(度使魔羅)는 현신으로 무간지옥에 떨어졌다”고 설하고 있는 것인가?111)
이 경의 뜻은 ‘그(도사마라)가 아직 목숨을 버리지 않았을 때 지옥의 맹렬한 불길이 그의 몸을 태웠고 그로 인해 목숨을 마치고서 그 같은 중유를 받아 이에 따라 무간지옥에 떨어졌다’는 내용을 설한 것이다. 즉 그의 악업의 세력이 너무나도 강성하였기 때문에 목숨을 마치기도 전에 괴로움의 상(相)이 이미 이르렀으니, 먼저 현수(現受) 즉 순현수업(順現受業)의 과보를 받고 그 후에 생수(生受) 즉 순생수업(順生受業)의 과보를 받았다는 것이다.112)
027_0517_a_04L若爾云何契經中說造極惡業度使魔羅現身顚墜無閒地獄此經意說彼命未捨地獄猛焰已燒其身因此命終受彼中有乘茲乃墮無閒地獄由彼惡業勢力增强不待命終苦相已至先受現受後受生受
그렇다면 어째서 경에서 “어떤 종류의 유정은 5무간업(無間業)을 짓거나 증장하게 되면 결정코 반드시 무간에 나락가(那落迦, 지옥)에 떨어진다”고 설하고 있는 것인가?
027_0517_a_09L何故經說一類有情於五無閒業作及增長已無閒必定生那落迦
이 경의 뜻은 그가 다른 취(趣)로는 가지 않는다는 것이며, 아울러 그의 업은 결정코 순생수업임을 나타내는 것이다.113) 그리고 만약 [그대처럼] 단지 문구에만 집착한다면 요컨대 다섯 가지 무간업을 모두 갖추어야 비로소 지옥에 태어나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 중의 한 가지라도 빠트리거나 혹은 다른 업에 의해서는 지옥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이니, 그것은 큰 잘못이 될 것이다. 또한 ‘무간에 나락가에 태어난다’고 말씀하였으니, [그대는] 마땅히 그러한 업을 짓는 즉시 몸이 허물어지는 것도 기다릴 것 없이 바로 태어난다고 해야 할 것이다.
027_0517_a_11L此經意遮彼往異趣及顯彼業定順生受但執文應要具五方生地獄非隨闕一或餘業因便成大過又言無閒生那落迦應作卽生不待身壞
혹은 중유가 바로 ‘생겨나는 것[生]’이라고 누가 인정하지 않을 것인가? 나락가라는 명칭도 역시 중유와 통한다. 즉 사유와 무간에 중유가 일어날 때, 역시 ‘생겨난다’고 말할 수 있으니, [중유는] 생유의 방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에서 ‘무간에 나락가에 생겨난다’고만 말하였지 ‘이 때(즉 나락가에 생겨날 때)가 바로 생유이다’고는 말하지 않은 것이다.114)
027_0517_a_15L或誰不許中有是生那落迦名亦通中有有無閒中有起時亦得名生生方便經言無閒生那落迦不言爾時卽是生有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다음과 같은 경의 송문(頌文)을 다시 어떻게 회통할 것인가? 이를테면 경의 게송에서는 이같이 말하고 있다.
若爾經頌復云何通如經頌言

재생(再生)이여! 그대는 지금 성년을 지나
노쇠에 이르고 염마왕(琰魔王)과 가까운데
앞길을 가고자 하여도 자량(資糧)이 없으니
중간에 머무를 곳 더 이상 없구나.115)
027_0517_a_19L再生汝今過盛位
至衰將近琰魔王
欲往前路無資糧
求住中閒無所止

만약 중유가 존재한다면 어째서 세존께서는 ‘그는 중간에 머무를 곳이 없다’고 말씀하셨겠는가?
이 게송의 뜻은 그(악업자)가 인간 세상에서 너무나도 빨리 마멸되어 잠시라도 머무름이 없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혹은 그의 중유가 [당래] 태어나야 할 곳에 이르는 동안 역시 잠시라도 머무를 곳이 없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니, 거기로 가는데 어떠한 장애도 없기 때문이다.
027_0517_a_21L若有中有如何世尊言彼中閒無有所止此頌意顯彼於人中速歸磨滅無暫停義或彼中有爲至所生亦無暫停行無㝵故
이 같은 경의 뜻은 이와 같을 뿐 그 밖의 다른 뜻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아는 것인가?(중유무체론자의 물음)
그렇다면 그대는 다시 이 같은 뜻이 아니라 다른 뜻이라는 것을 어찌 안 것인가?(논주의 반문)
027_0517_a_25L寧知經意如此非餘汝復焉知如餘非此
027_0517_b_02L양쪽의 허물이 이미 같거늘 어찌 한쪽(중유무체론자)으로만 치우쳐 나무라는 것인가?(중유무체론자의 항변)
앞의 두 해석은 경에 대해 모두 어긋남이 없다. [그럼에도 그대는] 어찌하여 그것을 ‘중유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치우쳐 경증(經證)으로 삼는 것인가? 무릇 경증으로 인용하는 말은 이치상 다르게 해석되는 뜻[異趣]이 없어야 하니, 그것에 만약 다르게 해석되는 뜻이 있다고 한다면 경증이 될 수 없는 것이다.(논주의 마무리)
027_0517_b_02L二責旣等何乃偏徵二釋於經竝無違害如何偏證中有是無凡引證言理無異趣此有異趣爲證不成
說一切有部俱舍論卷第八
甲辰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彫造
  1. 1)사대왕중천은 증상(增上)ㆍ광목(廣目)ㆍ지국(持國)ㆍ비사문(毘沙門)의 4천왕이 머무는 하늘이다.
  2. 2)33천(혹은 忉利天, Trayastriṁśa)은 수미산 정상에 있으며, 중앙에 제석천을 중심으로 사방에 각기 8천이 있어 33천이다.
  3. 3)이상의 6욕천과 8대지옥ㆍ4대주 등의 유정과 기세간(器世間)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본론 권제11(p.510 이하)을 참조할 것.
  4. 4)즉 색계 16천설은 바사(婆沙)의 정설로서(『대비바사론』 권제193, 한글대장경125,p.406), 중현(衆賢)에 따르면 ‘하늘[天]의 처소의 명칭은 동분(同分)에 의해 설정되는 것으로, 한명의 범왕(梵王)은 동분을 성취할 수 없기 때문에 범보천과 더불어 1천으로 삼아야 한다.’(『현종론』 권제12, 한글대장경200,p.299) 그래서 그는 본송(本頌)도 “욕계 위의 16처를 색계라고 이름하니, 그 중 초정려에 2처, 제2ㆍ제3 정려에 3처가 있고, 제4정려에 8처가 있다(此上十六處 名色界於中 初二二三三 第四靜慮八)”이라고 개작하고 있다. 참고로 범본에서는 이 가습미라 대논사의 설을 예의 ‘전설(傳說, kila)’로 전하고 있는데, 동분의 실재성을 인정하지 않는 경량부로서는 대범천을 범보천과는 독립된 1처로 설정하지 않을 별도의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5. 5)욕계나 색계에서 무색정을 획득하고서 명종하면 무색계로 가지 않고 그곳에서 무색계에 태어나고, 또한 반대로 무색계에서 몰하면 욕계나 색계로 가 중유(中有)를 일으키는 것은 무색계에 방처가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만약 무색계에 방처가 있다고 한다면 욕계ㆍ색계에서 무색정을 획득하고서 명종한 이는 무색계로 가 그곳에서 태어날 것이고 몰한 경우에도 그곳에서 중유를 일으켜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유(antarabhāva)란 사유(死有)에서 생유(生有)로 이어지는 중간적 존재로, 본권 말(末)과 권제9 초에 걸쳐 상세하게 논증 토론되고 있다.
  6. 6)욕계ㆍ색계의 유정은 소의신에 의지하여 의식이나 목숨 등을 상속하지만 무색계에는 방처가 없기 때문에 소의신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근거로하여 그러한 것을 유지 상속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7. 7)여기서 대법 즉 아비달마의 제 논사란 『대비바사론』에 나타난 정통 유부의 논사를 말한다.
  8. 8)무색계의 중동분과 명근은 무색정에 의해 획득된 것이기 때문에 뛰어나지만, 유색계의 그것은 그 힘이 저열하기 때문에 심ㆍ심소는 다만 색신에 의지하여 상속한다는 것이다.
  9. 9)무색정으로써 색상을 조복할 때 생겨난 중동분과 명근은 그렇지 못한 유색계의 그것보다 강성하다는 뜻.
  10. 10)만약 무색계의 중동분과 명근이 서로가 서로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무색계의 심과 심소도 역시 서로서로를 의지하여 일어나므로 별도로 중동분 등에 의지하여 상속한다고 설할 필요가 없다. 혹은 중동분과 명근이 뛰어난 선정에 의해 생겨났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 의지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심ㆍ심소도 역시 뛰어난 선정에 의해 생겨났기 때문에 서로가 의존하여 생겨난다고 할 수 있다는 논주 세친의 마무리 힐난.
  11. 11)중동분이나 명근의 실재성을 인정하지 않는 경량부논사들은 유색계의 심ㆍ심소의 경우 색의 애탐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근거로하여 전기(轉起) 상속하지만, 색의 애탐을 떠난 무색계의 경우 그 자체로서 상속할 뿐 별도의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12. 12)후추[胡椒]가 들어간 음료를 후추음(飮)이라 하고, 금강석이 박힌 반지를 금강환(環)이라고 하듯이 욕이 소속된 세계[欲所屬界]라는 말에서 중간의 ‘소속된’이라는 말을 생략하고서 욕계라고 하였다는 뜻.
  13. 13)즉 무색계는 다만 색이 없는 세계일 뿐 아니라, 변애(공간적 점유성)와 시현(눈의 대상으로서 나타나는 색처)을 본질로 하지 않는 심법이 소속된 세계라는 뜻.
  14. 14)여기서 계경은 『잡아함경』 권제19(대정장2,p.127중)과 동 권제28(p.199상). 이는 『대비바사론』 권제173(한글대장경124,p.521)에도 인용되고 있다.
  15. 15)즉 욕탐의 본질은 묘한 경계 즉 5경(境)에 있는 것이 아니라(외계는 욕탐과는 관계없이 항상 그 본성대로 머물 뿐이다) 인간의 내심 즉 분별에 따른 탐에 있다는 뜻이다.
  16. 16)비구는 외면적으로는 단식(段食) 즉 음식과 음욕의 욕망을 떠나 청정행을 닦지만, 만약 욕망의 본질이 분별의 탐이라고 한다면 비구 중에도 내심 나쁜 분별을 일으키는 자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 역시 욕망을 향수하는 이[受欲人]이라고 해야 한다는 뜻.
  17. 17)이를테면 무루법과 같은 것은 비록 3계에서 일어날지라도 그것에 속박되지 않듯이 현행하는 것이 모두 그것에 종속되는 것은 아니며, 다만 3계의 탐을 수증(隨增)하는 법을 계(繫) 즉, 종속되는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욕탐에 의해 수증된 법을 욕계계라고 하며, 색탐과 무색탐에 의해 수증된 법을 색계ㆍ무색계 계라고 한다. 무루법은 당연히 어떠한 세계에도 종속되지 않기 때문에 불계(不繫)이다.
  18. 18)즉 3계의 탐을 수증하는 법을 3계계라고 말하고, 다시 3계란 거기에서 각기 수증되는 법이라고 말하는 것은 말과 말을 묶는 자의 비유처럼 순환모순이라는 뜻.
  19. 19)욕계 능변화심을 획득하는 이는 욕탐을 끊고 색계 근본정을 획득하는 자에게 한정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능변화심에 대해 욕탐을 일으킬 리가 없는데 일으키는 까닭은 무엇인가.
  20. 20)아직 근본정을 획득하지 않은 자가 다른 이로부터 욕계 변화심을 일으켰다는 말을 듣고서 미래의 변화심에 대해 욕탐을 일으키며, 혹은 스스로 물러난 자는 자신의 과거 변화심에 대해 욕탐을 일으킨다.
  21. 21)혹은 변화심을 일으킨 이의 뛰어난 힘을 보고 그것에 애탐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상 세 가지 애탐은 모두 간접적인 것으로, 직접적으로 스스로 능변화심에 대해 애탐을 일으키는 일은 없다는 것이 논주의 답이다.
  22. 22)능변화심은 원래 색계정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지만 향ㆍ미를 화작할 때의 그 같은 마음은 바로 욕계계이니, 색계에는 단식성(段食性)의 향ㆍ미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본론 권제2, p.59 참조)
  23. 23)유부에 의하면 유정은 무시(無始)이래 존재하지만, 화지부에서는 새로이 태어나는[始起] 유정의 존재를 인정한다. 곧 그러한 처음 태어나는 유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일찍이 어딘가에서 무시이래 생존 윤회하여 왔을 것인데, 무량(無量)의 부처님이 무수한 중생을 제도하여 열반에 들게 하였을 것이지만 여전히 수많은 중생이 존재하므로 그 전부의 양을 헤아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24. 24)『잡아함경』 권제34 제940경(대정장2,p.241중).
  25. 25)세계가 안주하고 있는 형태에 대해 『대비바사론』 권제193(한글대장경125, p.409)에서는 상하로 포겐 형태[上下重累]와 옆으로 퍼져있는 형태[隣次傍布] 두 가지를 들고 양자 모두의 난점을 설하고 있다. “전자의 경우 그곳의 염오를 두루 떠나는 것을 어떻게 설할 수 있고 어떻게 신통이 거기까지 두루 이를 수 있는가, 만약 후자의 경우라면 ‘상하의 세계가 끝이 없다’고 한 타라달다(陀羅達多)의 설을 어떻게 회통할 수 있을 것인가?” 본론에서의 ‘어떤 이의 설’(보광이나 법보에 의하면 법밀부 즉 법장부)은 양자 절충설로서, 옆으로 퍼져있으면서 또한 상하 무한하다. 즉 풍륜 아래로는 허공을 사이에 두고서 다시 색구경천 내지 풍륜이 있고 그 아래로도 끝없이 그러하며, 또한 색구경천 위로도 허공을 사이에 두고 풍륜 내지 색구경천이 있고 그 위로도 끝없이 그러하다는 것이다.
  26. 26)즉 무수한 세계가 있을지라도 그 성질은 모두 동일하기 때문에 어떤 한 3계에서 해탈하면 동시에 모든 3계를 해탈할 수 있다. 비유하자면 학교가 많이 있을지라도 그 중 하나만을 졸업하면 다른 학교의 교과목도 졸업한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할 수 있다.
  27. 27)여기에 아수라(阿修羅)를 더한 6취설이 일반에 알려져 있지만, 이는 독자부(犢子部)의 주장이고, 유부나 상좌부의 정설은 5취설이다. 그리고 대승경전에서도 대개 5취설을 취하는 경우가 많다.
  28. 28)즉 5취의 본질은 오로지 과거의 업에 의해 초래된 이숙생의 과(果)이기 때문으로, 이에 따라 5취는 오로지 유정에 해당될 뿐, 이숙생이 아닌 무정물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29. 29)예컨대 인취(人趣)는 과거업에 의한 유정의 갈래(따라서 무부무기임)이지 현재의 선악의 업에 의한 갈래는 아니다. 즉 현행의 인취에는 지옥에서 천상에 이르는 번뇌와 업이 모두 존재하기 때문이다.
  30. 30)4생(生)이란 태생(胎生)ㆍ난생(卵生)ㆍ습생(濕生)ㆍ화생(化生)으로, 중유는 화생에 포섭된다.
  31. 31)『법온족론』 권제10(대정장26,p.498중). 이는 즉 5취 이외 따로이 중유를 설한 사실로 볼 때, 중유는 5취와는 별도의 존재임을 알 수 있다는 논거이다.
  32. 32)『장아함경』 권제10 『법보경(法報經)』(대정장1,p.236중)에서 이러한 7유를 설하고 있다. “當知七有. 一爲不可有, 二爲畜生有, 三爲餓鬼有, 四爲人有, 五爲天有, 六爲行有, 七爲中有.” 여기서 첫 번째 불가(不可)는 불가락(不可樂, 혹은 意)의 뜻으로 지옥을 말한다.
  33. 33)5취란 말하자면 그렇게 하여 가게 된 것[所往]이라면 중유는 그곳으로 능히 가는 것[能往]이지 가게 되는 것이나 처소는 아닌 것이다.(후술)
  34. 34)이 계경은 『대비바사론』 권제172(한글대장경124,p.497)에도 인용되고 있다. 경은 미상. 지옥의 과보를 받을 만한 번뇌가 현행함에 따라 그 과보를 받을 업을 조작하게 되고, 그것에 의해 지옥의 이숙과를 초래하게 된다는 뜻. 따라서 지옥을 포함한 5취는 다만 이숙생의 무부무기라는 것이다.
  35. 35)『품류족론』 권제9(대정장26,p.730상;한글대장경117,p.207), “地獄趣十八界十二處五蘊攝--三界一切隨眠隨增. 傍生趣餓鬼趣人趣亦如是.” 즉 이 같은 논의에 따른다면 일체의 수면인 5부(部)의 법이 ‘취’의 자성이 되어야 하는 것으로, 만약 무부무기만이 ‘취’의 자성이라고 한다면, 논에서는 다만 수소단과 변행수면만이 수증하는 것이라고 설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36. 36)즉 『품류족론』의 논의는 5취로 태어날 때의 마음 중에 5부의 번뇌가 모두 일어날 수 있음을 ‘취’ 자체와 더불어 설한 것으로서, 그것은 오로지 ‘취’의 본성 자체에 대한 논의가 아니기 때문에 ‘취’가 무기라는 주장은 그 논의 주장과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는 뜻.
  37. 37)보광에 의하면 이는 대중부의 설이다. 즉 『칠유경』 중에서 5취와 업유를 구별하여 설하였을지라도 양자는 개별적인 존재가 아니다. 마치 5탁(劫濁ㆍ命濁ㆍ有情濁ㆍ煩惱濁ㆍ見濁) 중에 ‘번뇌’와 ‘견’을 별도로 설하였을지라도 결국 ‘견’은 번뇌에 포섭되는 것처럼, 업유도 5취 중에 포섭되지만 취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별도로 설하였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5취가 선 등의 3성(性)과 통한다고 하는 점에서 유부와 대립한다.
  38. 38)이 같은 힐난에 대해 중현은 이같이 답하고 있다. “그렇지 않다. 무색계의 경우 죽는 곳이 바로 태어나는 곳으로, 다른 곳으로 가지 않는다. 그러나 중유는 비록 죽는 곳이 바로 태어나는 곳이라 할지라도 다른 곳으로 가기 때문에 그것은 ‘취’가 아니다.”(『현종론』 권제12, 한글대장경200,p.308)
  39. 39)사리자가 말한 뜻은 실유의 보특가라(pudgala, 人 혹은 我로서 전이 상속을 가능하게 하는 실체)를 부정하기 위한 것이었지, ‘지옥의 오온은 오로지 무부무기이며 그 밖의 선 또는 불선의 오온이 아니다’는 말이 아니다. 따라서 앞의 경문은 5취가 오로지 무부무기라는 사실의 경증이 될 수 없다는 뜻
  40. 40)인(人) 등 5취의 생은 전적으로 전생의 이숙업에 의해 낳아진 이숙과라고 한다면 그 본질은 무부무기일 것이고, 후천적으로 길러진 것이라고 한다면 선ㆍ불선ㆍ무기의 3성이라 할 수 있다.
  41. 41)설일체유부에 있어 의식은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반드시 그 근거[所依]를 갖어야 한다. 이에 따라 완성된 유부의 세계관에서 볼 때 3계 5취의 제 유정의 의식이 안주(安住)하는 형태에는 일곱 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이를 7식주(識住, vijñānasthiti)라고 한다. 즉 전체적으로 언급하자면 욕계의 인간과 천(天), 그리고 색계의 아래 세정려와 무색계의 아래 세 처가 바로 의식의 7생처(生處)로서, 식주(識住)의 체(體)이다.
  42. 42)『중아함경』 권제24 제97경 『대인경(大因經)』(대정장1,p.581중); 『증일아함경』 권제42 제46품 제7경; 『장아함경』 권제8 제9경 『중집경(衆集經)』(동,p.50상) 등을 참조할 것.
  43. 43)여기서 겁초(劫初)란 성겁(成劫) 시를 말하는 것으로, 이 때 유정은 제2 식주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44. 44)이는 브라만교의 세계관을 불교적으로 해석한 설로서, 태초에 단지 대범왕만이 있었는데, 후에 그를 시위(侍衛)해 줄 이를 원하여 발원하였다. 이에 제2 정려의 극광정천이 연민하여 스스로 초정려로 내려와 범중천이 되었는데, 대범왕은 이들을 보고 자신이 낳은 이라고 생각하고, 범중천도 역시 대범천에 의해 생겨나게 되었다고 생각하여, 온갖 천이 동일한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렇지만 대범왕의 위덕은 중대(重大)하여 범중천과는 다르기 때문에 ‘신체가 다르다’고 일컫게 되었다.
  45. 45)『장아함경』 권제14 『범동경(梵動經)』(대정장1,p.90중).
  46. 46)이 논설은 앞의 유여사설에 대한 논주 세친의 비판이다. 즉 대범천에 의해 이미 범중천(즉 초선천)으로 태어난 이상 극광정천(제2 정려)에서의 옛날 일을 기억할 수 없을 것이며, 또한 제2 정려를 이미 획득하였다고 한다면 초선의 대범천을 능생자(能生者)로 생각할 리도 없는 것이다. 계금취견이란 5견의 하나로, 이를테면 대자재천이나 생주(生主) 등 세계의 참된 원인이 아닌 것을 원인으로 간주하고[非因計因], 그리하여 그 하늘에 태어나기 위해 갠지즈 강에 목욕하거나 불로 온몸을 지지는 등 참된 도가 아닌 것을 도로 여기는 것[非道計道]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전자의 뜻이다.
  47. 47)여기서 중유는 제2정려에서 몰하여 초정려에 태어나는 사이.
  48. 48)즉 제2 정려의 아래 위 3천을 비교하면 신체가 다르지만, 동일 천에서는 다른 신체를 초래할 만한 표업의 차별이 없기 때문에 신체가 동일한 것이다. 또한 제2 정려는 희(喜)ㆍ사(捨)의 2수(受)가 존재하기 때문에 생각이 다른 것이다.
  49. 49)이 전설(傳說,kila)은 『대비바사론』 권제137(한글대장경123,p.263)에서 논설된 것으로, 세친이 이를 불신하여 동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의 ‘전설’이라 설한 것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이유는 본론 권제28에서는 다루어지고 있는 유부와 경부 사이에 정려지(支)에 대한 논쟁을 참조하라.
  50. 50)변정천은 제3정려에 포섭되는 천으로, 그것도 근본지의 낙(樂)을 싫어하여 근분지의 사근(捨根)을 일으키기 때문에 ‘생각이 동일하다’고 해야한다는 힐난.
  51. 51)즉 제3 식주의 상이(想異)에 대해, 제2 정려에서는 낙(樂)과 비고비락(非苦非樂)이 교차하기 때문이라고 유부에서는 설명하고 있는데, 그럴 경우 제3정려의 변정천 역시 근본지의 낙(樂)을 싫어하여 근분지의 사(捨)를 현전하기 때문에 ‘상이’가 되어야 한다는 난문이 제기된다. 이에 대해 유부에서는 제3 정려의 낙은 적정한 것이기 때문에 싫어하는 법이 없다고 하는 등 그 해석이 분분하였으나, 경량부에서는 『장아함경』 권제21 『세기경(世紀經)』 「삼재품(三災品)」(대정장1,p.138중)을 인용하여 제2 정려의 ‘상이’에 대해 간단하게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괴겁시의 화재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12를 참조하라.
  52. 52)제2 식주. 대범천이 능생자(能生者)라고 생각하는 것, 즉 그가 궁극의 능생인(因)이 아님에도 그에 대해 계금취를 일으켜 ‘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53. 53)제3 식주. 이는 곧 등지(等至)의 힘에 따라 두 가지 수(受)가 교차하여 현전하기 때문이다.
  54. 54)제4 식주. 즉 제3 정려는 순일 적정하여 이숙의 낙수(樂受)만이 현전하기 때문이다.
  55. 55)무색계의 공무변처(空無邊處)는 제5 식주이고, 식무변처(識無邊處)는 제6 식주이며, 무소유처(無所有處)는 제7 식주이다. 즉 “무색의 유정으로서 공무변처의 경우처럼 일체의 색상(色想)을 초월하고 유대상(有對想)을 멸하고서 무변의 허공에 들어간 자를 제5 식주라고 하며, 무색의 유정으로서 식무변처의 경우처럼 일체의 공무변처를 초월하여 무변의 의식에 들어간 자를 제6 식주라고 하며, 무색의 유정으로서 무소유처의 경우처럼 일체의 식무변처를 초월하여 무소유에 들어간 자를 제7 식주라고 한다.”(『집이문족론』 권제17, 대정장26, p.437하)
  56. 56)즉 의식는 앞에서 설명한 7처(處)에 소속되는 온(욕계ㆍ색계의 경우 5온, 무색계의 경우 4온)에 낙주(樂住)하여 집착하기 때문에 그러한 온을 ‘식주’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57. 57)색계 제4정려 8천 중 무운(無雲)ㆍ복생(福生)ㆍ광과(廣果) 등의 아래 3천은 범부와 성자가 동거하는 곳으로서, 범부는 여기서 무상천으로 나아가려고 하고, 성자는 정거(淨居) 즉 무욕천으로 나아가 성도에 의해 번뇌를 끊어 버리려고 한다. 또한 정거천에 있는 이는 열반에 들기를 염원한다.
  58. 58)유정천(有頂天)과 무상천(無想天)은 이미 식주(識住)가 아니라고 하였는데, 어떻게 ‘유정거’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 하면, 이러한 두 곳에는 ‘식’을 손상시키고 파괴하는 법이 있어 ‘식’이 거기에 즐거이 머물지 않기 때문에 ‘식주’가 아니다. 그렇지만 이 두 곳은 유정신을 성취하고, 유정이 즐거이 머물고 있기 때문에 ‘유정거’ 중에 포섭된다. 즉 다른 처소로부터 와서 머물기를 좋아하고, 옮겨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곳을 ‘유정거’라고 한다.(『현종론』 권제12, 앞의 책,p.315)
  59. 59)주57) 참조.
  60. 60)앞의 7식주가 식(識)이 안주하는 곳이라면, 여기서의 식주는 ‘식’이 머물게 되는 근거 즉 소의(所依)로서의 식주이다. 즉 유부에 있어 마음은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반드시 그 근거를 갖어야 하는데, ‘식’은 능히 색ㆍ수ㆍ상ㆍ행의 4온에 머물기 때문에 그것을 4식주라고 이름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다른 지[異地]에 존재할 경우 ‘식’의 소의가 되지 않기 때문에 오로지 자지(自地)의 4온만이 식주가 된다.
  61. 61)『장아함경』 권제8 『중집경(衆集經)』(대정장1,p.51상); 『대집법문경(大集法門經)』 권상(대정장1,p.229상)
  62. 62)이 설은 『대비바사론』(권제137,대정장17,p.706하)에 나온다.
  63. 63)『잡아함경』 권제15 제378경(대정장2, p.103중하). 즉 식식(識食:心識을 말함. 일체의 유정을 유지시키는 네 가지 에너지 즉 4食의 하나. 본론 권제10, 487에서 상론) 중에 희(喜, nandī)와 염탐(染貪, rāga)이 있다고 한다면, 그러한 식의 희탐과 염탐은 식의 소의처이면서 식에 의해 제어[乘御]되는 것이다. 따라서 식온도 식주가 될 수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은가 하는 난문.
  64. 64)앞의 계경은 5온 전체를 소연으로 하여 희염이 낳아졌고, 식이 그것을 제어한다는 사실을 설한 것이지 오로지 식온만을 소연으로 하였다는 것은 아니다. 즉 의식이 일어날 때, 그 생처인 5온 전체에 대해 낳아진 희염을 소의로 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전체적인 입장에서 ‘식주’라고 이름하였지만, 그러나 엄격히 말하자면 희염을 낳은 것은 앞의 4온이지 식온이 아니다.
  65. 65)여기서 그 밖의 경우, 즉 4식주 이외 경우란 4식(食)이나 7식주의 경우를 말한다. 4식이란 단식(段食)ㆍ촉식(觸食)ㆍ사식(思食)ㆍ식식(識食)이다. 본론 권제10, p.487 참조.
  66. 66)『잡아함경』 권제2 제39경(대정장2,p.9상)에서 이와 유사한 내용을 설하고 있다. ‘종자는 취음(取陰)과 구식(具識)에 비유되고, 지계(地界)는 4식주에 비유되며, 수계(水界)는 탐(貪)ㆍ희(喜)에 비유된다.’
  67. 67)제1구는 7식주이면서 4식주가 아닌 것으로, 7식주 중의 식온이 이에 해당한다. 제2구는 4식주이면서 7식주가 아닌 것. 제3구는 7식주이면서 4식주인 것. 제4구는 7식주도 아니면서 4식주도 아닌 것.
  68. 68)3계ㆍ5취의 모든 유정은 태어나는 형태에 따라 네 가지로 분류되는데, 이를 4생(生)이라고 한다. 여기서 ‘생’이란 생류의 뜻으로, 4생의 온갖 유정은 생류로서는 동일하기 때문이다.
  69. 69)옛날 남섬부주의 어떤 상인이 바다에서 온 아름다운 학 한 마리를 얻게 되었는데, 이 학은 그 후 두 개의 알을 낳았으며, 여기서 두 명의 동자가 태어났다. 그들은 용모단정하고 총명하였으며, 장성한 후 출가하여 함께 아라한과를 얻었는데, 그들 중에 작은 이를 오파세라(Upaśaila)라 이름하고, 큰 이를 세라(Śaila)라고 이름하였다.(『대비바사론』 권제120, 한글대장경122,p.474))
  70. 70)녹모는 비사가(毘舍佉,Vaiśākha) 또는 녹자모(鹿子母)로 불린다. 앙가국 출신으로, 오백 명의 시녀와 함께 부처님을 영접하여 설법을 듣고 초과(初果) 즉 예류과를 얻었다고 한다. 후에 사위성의 장자 녹자와 결혼하여 그를 불법으로 인도함에 따라 마치 그의 어머니와 같다 하여 녹자모로 불림. 그녀가 서른두 개의 알을 낳았다고 하는 것은 『대비바사론』 권제120(앞의 책)에 나온다.
  71. 71)반차라왕(Pañcāla rāja)의 왕비가 오백 개의 알을 낳자 왕이 이를 부끄럽게 여겨 갠지즈강가에 버렸다. 이웃나라 왕이 우연히 그곳을 지나다 이를 수습하게 되었다. 여기서 아이들이 태어나 용맹한 전사가 되어 사방을 정복하고 마침내 반차라왕과 조우하게 되었는데, 왕이 두려움에 떨자 왕비는 ‘그들은 모두 우리의 아들이다. 어미를 보게되면 악심을 멈출 것이다’ 하고 성위로 올라가 그들을 믿게하기 위해 그들에게 동시에 젖을 먹였다고 한다. 이 밖에도 기원정사를 지어 부처님께 바친 급고독장자의 여식 급고독녀(給孤獨女)―『현우경(賢愚經)』 (권제13)에서는 소만녀(蘇鬘女)라는 이름으로 나온다―는 특차시라(特叉尸羅)왕자에게 출가하여 10개의 알을 낳았다고 한다.
  72. 72)만타라(Māṃdhātṛ, 구역은 頂生王)는 포살타(布殺陀, Upoṣadha) 왕의 정수리에 생겨난 수포로부터 태어나, 장성한 후 금륜왕(金輪王)이 되었음. 차로(Cru)와 오파차로(Upacāru)는 앞의 만타라왕의 양 볼기짝에 생겨난 수포에서 태어난 아들로서, 커서 전륜왕이 되었다고 함. 함만(Kapotamālinī)은 범수(梵授, Brahmadatta)라고 이름하는 왕의 겨드랑이 밑의 수포에서 생겨난 아들로서, 그가 태어날 때 마치 비둘기처럼 날아 나왔으며, 왕이 그를 꽃의 장식같이 중히 여겼으므로 합만(鴿鬘)이라 하였음. 암라위(Āmrapāli)는 불제자로서 비구니. 원래는 창부였는데, 암라나무의 습기, 혹은 가지로부터 태어났다고 전한다.
  73. 73)게로다, 즉 가루다(garuda)는 인도신화에서 비쉬누가 타고 다니는 새. 가루다라는 말은 언어의 날개들(wings of speech)이라는 뜻으로, 베다지식의 인격적 표현으로 상징된다. 구역에서는 금시조(金翅鳥), 혹은 식토비고성(食吐悲苦聲)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이는 용을 잡아먹는다는 신비의 새로서, 머리는 새와 바슷하지만 몸은 사람을 닮았으며, 날개는 금빛, 머리에는 여의주가 박혀있고, 입으로 화염을 내뿜는다고 한다.
  74. 74)아귀가 화생이라는 것은 알기 쉽지만, 태생이라는 것이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본송을 논거로 인용한 것이다. 즉 화생이라면 배가 부르거나 부르지 않는 일이 없을 것이지만 태생이기 때문에 배가 부르지 않다는 것이다.
  75. 75)즉 수족이나 손가락[支分] 등과 온갖 근이 원만 구족하고, 그 작용이 날카롭고 예리[孟利]하며, 신체의 형태가 미묘하기 때문에 다른 생보다 뛰어나다.(『현종론』, 앞의 책,p.324)
  76. 76)최후신의 보살이란 깨닫기 전의 마지막 생의 보살을 말한다. 여기서는 3아승기 백 겁의 수행을 닦은 후 마침내 가필라국의 왕자로 태어나 정각을 성취하는 석가불을 말한다.
  77. 77)지원통은 원하기만 하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신통, 즉 신경지증통(神境知證通)을 말함. 곧 부처님의 이러한 신통을 믿는 불교도에게 있어 앞의 유여사의 해석은 성립할 수 없다는 뜻이다.
  78. 78)『장아함경』 권제19 『세기경(世紀經)』「용조품(龍鳥品)」(대정장1,p.127); 『증일아함경』 권제19(대정장2,p.646상) 참조.
  79. 79)가루다가 용을 잡아 먹었다면 화생인 용은 이미 죽어 형체가 없어야 할 것이고, 따라서 배가 부를 수 없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용을 잡은 것인가? 이는 4생의 부질없는 방론으로, 그래서 논의는 논의를 낳는다고 설한 것이다.
  80. 80)중유(中有, antarā-bhava)란, 사유(死有, 죽는 순간의 존재) 이후 생유(生有, 태어나는 순간의 존재) 이전의 5온, 즉 그 중간의 존재로서, 그 자체로서는 일어나고 몰하는 일이 있지만, 당래 태어나야 할 곳[生處] 즉 생유에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생’이라고는 하지 않는 것이다. 참고로 태어나 죽을 때까지의 존재를 본유(本有)라 하고, 이상을 4유(有)라고 한다.
  81. 81)중유 또한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그럴 경우 無因論에 떨어짐)이 아니라 업에 따라 존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계경에서 말한대로 ‘업은 생의 인[生因]’이기 때문에 중유도 ‘생’이라고 해야하지 않는가? 하는 난문
  82. 82)중유 또한 그 본질은 이숙의 5온이지만, 그것은 5온 자체 즉 능취(能趣)이지 소취(所趣, 즉 이르러야 할 곳에 이르게 되는 것)가 아니기 때문에, 다시 말해 그것은 생겨나야 할 것을 능히 생겨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만 ‘일어난다’고 하고 ‘생겨난다’고 하지 않는다.(『현종론』 권제13, 앞의 책,p.326) 그런데 보광에 의하면 중유는 육안에 의해 보이지 않지만 생위(生位)는 분명하여 육안에 의해 보이기 때문에 ‘생’이라고 하였다.
  83. 83)이 말은 견인업(牽引業)에 의해 인기된 중동분이 현현하여 원만업에 의해 구체적으로 생겨난다는 뜻이다. 인업과 만업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17을 참조할 것.
  84. 84)이같이 중유의 실재성을 부정한 이는 『대비바사론』 권제69(한글대장경120, p.430)에 의하면 분별론자이나 『이부종륜론(異部宗輪論)』에 의하면 대중부, 화지부, 일설부, 설출세부, 계윤부이다.
  85. 85)이 같은 반론은 앞의 주에서 언급하였듯이 대중부 계통의 주장이다. 즉 이들은 거울의 영상[像, pratibimba]은 피사체[質, 또는 本質, bimba. 자신의 상을 능히 투사하는 본체를 말함. 이하 中有 假實의 논쟁에서의 본체라는 말은 ‘질’ 혹은 ‘본질’의 역어임]와 서로 떨어져서 맺히는 것처럼, 유정의 사유와 생유가 서로 단절되어 있어도, 다시 말해 중유를 상정하지 않고서도 속생(續生)할 수 있다는 것이다.
  86. 86)본 논설은 앞서 본체는 거울과 떨어져 있어도 영상을 맺듯이 유정의 사유와 생유는 서로 단절되어 있어도 속생(續生)할 수 있다는 대중부설에 대한 반론의 총론에 해당한다. 즉 본체에 근거한 영상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며(세친은 像色無體論者이다), 설혹 실재한다 할지라도 거울과 영상이라는 두 가지 실체가 동시에 동일한 처소에 병존할 수 없으며, 또한 거울과 영상은 각기 개별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사유에서 중유로, 중유에서 생유로 변천하는 유위법의 예증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부의 경우 상색(像色) 즉 영상(광명을 장애하여 중간에 나타나는 다른 색)은 여덟 가지 현색(顯色) 중의 하나로서 그 실재성을 인정한다. 따라서 이 논설은 내용상으로 볼 때 대중부의 대론자인 유부의 주장이라고 보기는 어렵고(논의형식상으로는 유부의 주장임), 다만 논주 세친이 대중부 주장(無中有論)의 비판논거로서 경량부의 상색무체설(像色無體說)을 차용하여 논설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광기』의 평석처럼 유부와 경량부(혹은 세친) 양자 모두 상색(像色)비실재론 혹은 중유실유론을 주장한 것으로 오인할 수 있다. 참고로 경량부에서는 상색과 중유의 실재성을 모두 부정하고 있다. 따라서 중유를 비판하는 대중부의 예증을 상색무체설로써 다시 비판하고 있는 본 항의 게송은 신(新) 살바타(薩婆他)인 중현(衆賢)에 의해 크게 개작되고 있다. 즉 그는 상색의 존재를 부정하는 본송 제3구 이하를 삭제하고 그것을 비판하는 8구의 게송을 더하고 있는 것이다.(『현종론』 권제13, 앞의 책,p.327 참조)
  87. 87)이는 세친의 상색무체론의 논거로서, 이하 네 가지의 예증을 들고 있다. 첫 번째 거울과 거기에 비친 영상, 두 번째 폭이 좁은 강물에 비친 양안(兩岸)의 영상, 세 번째 햇빛의 그림자 속에 있는 거울에 비친 빛의 영상과 그림자 등의 각기 두 가지가 동일한 처소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영상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네 번째 거울의 면과 거기에 비친 상에는 원근이 있으니, 동시 동처에 생겨난 실유의 존재라면 어찌 원근이 있겠는가.
  88. 88)즉 우물의 수면과 거기에 비친 달의 영상(혹은 그것을 들여다 보는 자의 그림자)에는 가깝고 먼 거리상의 차별이 있기 때문에 양자는 동일한 처소에 함께 생겨난 것이라고 할 수 없다는 뜻.
  89. 89)즉 상속하는 모든 것은 반드시 전후 계기(繼起)하지만, 영상과 본체는 동시에 생기하기 때문에 상속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유정의 상속은 전후 끊어짐이 없이 이곳에서 죽어 다른 곳에서 계속 생기한다. 따라서 마땅히 곡식 따위라면 동일한 법의 비유로 인용할 수 있지만, 영상의 경우는 중유의 경우와는 동등하지 않기 때문에 비유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현종론』 권제13, 앞의 책,p.339)
  90. 90)원문에서는 ‘두 가지 가운데[中]’이지만, 앞 뒤 문맥 및 범본과 구역에 따라 ‘두 가지 인연[因]’으로 번역하였다. 여기서 ‘뛰어나다’고 함은 거울과 본체에 결함이 없는 것을 말한다. 그래야 영상이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91. 91)즉 그것들은 비정물(非情物) 무생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의나 앞서 ‘영상이 생겨나는 것은 참으로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라고 하는 논의는 당시 의학이나 광학이 아직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 이루어진 것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92. 92)이상은 이증(理證)에 의거한 중유실유론의 논증. 그러나 이는 사실상 중유실 유에 대한 직접적인 논증이 아니라 대중부 등이 제출한 비판의 논거를 검토하여 다시 비판한 간접적인 논증이었다.
  93. 93)『장아함경』 권제10 『법보경(法報經)』(대정장1,p.236하) 참조.
  94. 94)『중아함경』 권제54 『체체경(嗏諦經)』(대정장1,p.769상); 같은 경 권제37 『아섭지경(阿攝知經)』(동, p.666상). 건달박(健達縛, Gandharva, 食香身)은 중유의 다른 이름. 원래는 리그베다에서 소마(Soma) 주(酒)와 관계하는 잡신의 일종으로, 호색의 신이나 여기서는 남녀의 침실과 관계하는 어떤 신비적 존재로서 중유의 5온을 말한다. 한편 중유는 다음 생처(生處)의 향을 찾아가기 때문에 심향(尋香)이라고도 하며, 혹은 오로지 향만을 먹기 때문에 식향(食香)이라고도 함. 이에 대해 본론 권제9(p.405 이하)에서 자세히 논의되고 있으며, 그 이명에 대해서는 권제10(p.489)에서 논설된다.
  95. 95)앞의 『아섭지경』을 참조할 것. ‘장마족(掌馬足)’은 ‘아섭지(Assalāyana)’의 역어로서, assa(馬)는 바라문의 성이며 lāyana(羅延多那)는 그의 이름이다. 남전(南傳) 『중부경전』 93의 Assalāyana-sutta.
  96. 96)바라문(Brhmana), 찰제리(Kṣatriya), 폐사(Vaiśya), 술달라(Śūdra). 이상은 인도의 4성계급의 음사. 즉 선행한 본유의 온이 이미 괴멸하였다면 어떻게 그것의 종성을 규정할 것인가 하는 힐난.
  97. 97)여기서 『오불환경』은 『잡아함경』 권제27 제736경 제740경(대정장2,p.196-197); 장아함 권제8의 『중집경(衆集經)』). 사문과(沙門果)의 세 번째 계위인 불환이란 말 그대로 몰후(歿後) 다시는 욕계에 환생하지 않는 성자로서, 반열반하는 시간과 장소에 따라 일곱 가지로 분류되는데, 색계에서의 반열반은 다섯 가지이다. 즉, (1)중(中)반열반은 욕계에서 몰하여 색계에 이르는 중유의 상태에서 반열반. (2)생(生)반열반은 색계에 태어난 직후 반열반. (3)유행(有行)반열반은 색계에 태어난 후 오랫동안 가행한 후의 반열반. (4)무행(無行)반열반은 오랜 시간 가행 없이 반열반. (5)상류(上流)반열반은 범중천 범보천 등 다시 상지로 전생하여 획득하는 반열반이다. 자세한 내용은 본론 권제24 참조.
  98. 98)즉 중반이란 중유에서의 반열반이 아니라 욕계ㆍ색계의 중간의 하늘[中天]에 머물면서 반열반하는 것이라는 뜻으로, 이러한 사실은 『대비바사론』 권제69(한글대장경120,p.434)에서 분별론자의 설로 주장되고 있다.
  99. 99)즉 중반열반을 ‘중간’의 하늘에서의 열반이라고 해석할 경우, 생반열반도 ‘생’이라는 하늘에 머물면서 반열반하는 것이라고 해석해야 한다는 뜻.
  100. 100)『중아함경』 권제2 『선인왕경(善人往經)』(대정장1,p.427). 본론 권제24(p.1090) 참조.
  101. 101)아직 욕계를 벗어나지 않고 반열반에 들 경우, 그것은 욕계 몰(歿) 후 중유에서의 반열반인 중반열반과 처소와 시간이 다 같이 가까우며(제1 善士), 욕계ㆍ색계의 중간에 이르거나 혹은 색계에 이르러 반열반에 들 경우, 처소와 시간이 다 같이 중간이거나 혹은 멀다(제2, 제3 선사). 이를 속반(速般, 중유에서의 신속한 반열반), 비속반(非速般, 얼마 동안 머문 후의 반열반), 경구반(經久般, 오랜 시간이 지난 후의 반열반)이라 한다. 이 같은 중반의 3종불환은 9종불환의 한 종류로 해석되고 있다. 본론 권제24(p.1089) 참조.
  102. 102)이는 『대비바사론』 권제69(한글대장경120, p.434)에서 분별론자의 설로 논설되고 있다.
  103. 103)이 논설은 중반열반을 중유에서의 열반으로 인정하지 않는 분별설부의 논설로서, 칭우(稱友)에 의하면 여기서 ‘계’란 번뇌종자의 뜻이다. 즉 ‘계(界)’ㆍ‘상(想)’ㆍ‘심(尋)’의 상태란 순서대로 아직 번뇌가 현행하지 않는 상태에서, 처음 현행하는 상태에서, 이미 일어나 오래된 상태에서 그것을 끊어 반열반에 드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계’의 상태는 이근자(利根者)의 경우로 가까운 중반이고, ‘상’의 상태는 중근자의 경우로 중간에 해당하며, ‘심’의 상태는 둔근자(鈍根者)의 경우로 가장 늦어 먼 중반에 해당한다. 보광(普光)도 ‘계’를 혹종(惑種)으로, ‘상’을 염상(染想)으로, ‘심’을 심구(尋求)로 해석하고 있다.
  104. 104)여기서 법회(dharma-saṁgīti)란 법의 합송(合誦)의 뜻으로, 구역에서는 ‘송법장당(誦法藏堂)’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105. 105)이는 즉 법회에 들어 바로 반열반하는 것이 ‘중반’이라고 한다면 생반(生般)은 무엇이냐는 물음을 가정하여 진술한 논설이다. 즉 생반열반이란 유부의 해석처럼 색계에 태어나서 바로 반열반에 드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래 살아야 하는 수량을 감(減)하고서 반열반에 드는 것을 말한다는 뜻.
  106. 106)즉 분별론자의 세 가지 중반에 관한 설명은 다만 시간상의 차별일 뿐 공간상의 차별이 없다는 뜻. 이를테면 앞서 인용한 불꽃의 비유에서는 시간적 공간적 차별에 의한 세 가지 분별이었다.
  107. 107)『증지부경전』iv. 422.
  108. 108)‘성자’는 견도로부터 무학위의 유정을 말하며, ‘현자’는 견도 이하 5정심위 이상의 유정을 말한다. 예컨대 이들이 욕계 불선을 떠나 초정려를 획득하고서 이러한 선정에 대해 애락심을 낳아 출세(出世)를 구하지 않을 경우, (1) 혹 어떤 이는 상품의 인(因)을 지어 대범처에 태어나는 경우가 있으며, (2) 혹 어떤 이는 중품의 인을 지어 범보처에 태어나는 경우가 있으며, (3) 혹 어떤 이는 하품의 인을 지어 범중처에 태어나는 경우가 있다. 나아가 (4) 혹 어떤 이는 초정려를 획득하고서 이에 대한 염리심(厭離心)을 낳아 열반을 흔락하여 보리를 구하기도 하며, (5) 혹 어떤 이는 나아가 불환과를 증득하고 욕계신에서 능히 번뇌를 끊고 현법열반하는 경우도 있으며, (6) 혹은 초정려를 획득하고서 중반열반하는 경우도 있으며, (7) 혹은 생반열반(生般涅槃)하는 경우도 있으며, (8) 혹은 유행반열반(有行般涅槃)하는 경우도 있으며, (9) 혹은 무행반열반(無行般涅槃)하는 경우도 있으며, (10) 혹은 상류반열반(上流般涅槃)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무색정을 획득하는 자에게는 중유가 없고 또한 거기에는 처소의 상하구별이 없기 때문에, 앞의 3무색정에서는 앞의 열 가지 중 (6)의 중반을 제외하고 앞의 세 가지를 하나로 한 가지로 하여 각기 일곱 가지가, 그리고 유정처(有頂處)에서는 더 이상 상지가 없기 때문에 상류반열반이 제외된 여섯 가지가 있다. 이상 보광에 『구사론기』에 따름.
  109. 109)대법의 장군이란 아비달마의 위대한 논사들 이를테면 사리불이나 목건련 등을 말한다.
  110. 110)여기서 ‘지금’은 세친이 본론을 저술할 무렵으로, 세친의 출세연대에 대해서는 이설이 많지만 대략 기원후 400-480년 혹은 320-400년 무렵으로 추정된다.
  111. 111)『중아함경』 권제30 『항마경(降魔經)』(대정장1,p.622상). 옛날 갈낙가손타불(羯洛迦孫馱佛, 즉 拘留孫佛, 항마경에서는 覺礫拘荀大如來)이 지원(至遠, 『항마경』에서는 ‘音’)이라 이름하는 시자와 함께 걸식할 때 도사마라(Dṣī-mra, 『항마경』에서는 ‘惡魔’)가 소년의 모습으로 변하여 시자에게 돌을 던져 그의 머리에서 피가 나게 하였다. 이에 부처님께서 나무라자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바로 무간지옥(『항마경』에서는 無缺大地獄)에 떨어졌다고 한다. 『대비바사론』 권제125(한글대장경122,p.600)에도 나온다. 이는 곧 중유가 존재한다면 어찌 중유를 거치지도 않고 현신으로 바로 지옥에 떨어졌겠는가 하는 힐문.
  112. 112)순현수업은 현세에 지은 업의 과보가 현세에 이숙하여 나타나는 업이고, 순생수업(또는 순차생수업)은 현생에 지은 업의 과보가 다음 생에 나타나 받게 되는 업. 본론 권제15(p.710) 참조.
  113. 113)즉 이 경문에서의 ‘무간(無間)’은 시간적으로 무간이 아니라 이생과 다음 생 사이에 지옥 이외 다른 어떠한 취도 거치지 않는다는 뜻이다는 의미. 이는 출정심(出定心)은 정전심(定前心)을 등무간으로 삼아 일어난다고 할 때의 ‘무간’의 개념과 동일하다.
  114. 114)이는 세친의 생각이다. 즉 중유는 생유의 방편이 되기 때문에 이것 역시 ‘생’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으며, 그러한 의미에서 나락가에 태어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나락가에 태어나는 것이 중유이고, 이미 태어난 것은 생유이기 때문에, 중유를 이미 태어난 것 즉 생유라고는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115. 115)『별역(別譯)잡아함경』 권제5(대정장2,403하)에 이에 상응하는 게송이 나온다. 여기서 ‘재생’은 재생족(dvija) 즉 바라문을 말하며, ‘앞길……’은 선취로 나아가려 해도 보시와 지계 등의 자량이 없어 나아갈 수 없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