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030_0138_c_01L
좌선삼매경 하권
030_0138_c_01L坐禪三昧經卷下


요진 구마라집 한역
차차석 번역
030_0138_c_02L姚秦三藏鳩摩羅什譯


그때 수행자가 비록 한마음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아직 선정의 힘을 완성하지 못했으면 오히려 욕계의 번뇌 때문에 혼란하게 되니, 마땅히 방편을 만들어 나아가 초선(初禪)을 배우고 애욕을 꾸짖어서 버려야 한다.
어떻게 꾸짖어서 버리는가?
욕계의 허물을 관하여, 욕계는 깨끗하지 않으며 갖가지로 착하지 않으므로 마땅히 초선의 안온함과 쾌락을 생각해야 한다.
030_0138_c_03L爾時行者雖得一心定力未成猶爲欲界煩惱所亂當作方便進學初禪呵棄愛欲云何呵棄觀欲界過欲爲不淨種種不善當念初禪安隱快樂
욕계를 관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욕망은 무상하며, 공덕의 원가(怨家)이고, 허깨비나 요술과 같으며, 공하여 얻을 것이 없음을 아는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여 아직 얻지 못했으면 어리석은 마음은 이미 어지러우니, 어찌 하물며 이미 음욕으로 묶이고 덮였음에랴? 하늘 위의 극락세계도 오히려 항상 편안한 것은 아닌데, 어찌 하물며 사람 가운데서랴?
사람의 마음이 욕망에 집착하여 싫증내거나 만족함이 없으면 불이 장작을 얻은 것과 같고, 바다가 물결을 삼키는 것과 같으며, 정생왕(頂生王)이 비록 일곱 가지 보물을 왕의 사천하에 비처럼 내리더라도 제석이 자리를 나누고도 오히려 만족할 줄 모르는 것과 같으며, 나후사(那睺沙)라는 성을 가진 전금륜왕(轉金輪王)이 욕망의 핍박을 받아서 이무기 가운데 떨어지는 것과 같다.
030_0138_c_07L觀欲云何知欲無常功德怨家如幻如化空無所得念之未得癡心已亂何況已得婬欲纏覆天上樂處猶不常安何況人中人心著欲無有厭足火得薪如海呑流如頂生王雖雨七王四天下帝釋分座猶不知足那睺沙姓也轉金輪王爲欲所逼蟒蛇中
또한 선인(仙人)이 열매를 먹고 풀을 입으며 깊은 산속에 숨어 살면서 머리카락을 뒤집어 쓴 채 도를 찾는 것과 같아서, 오히려 욕망의 도적이 파괴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욕망의 즐거움은 매우 적고 원망의 독은 매우 많으니, 욕망에 집착하는 사람은 나쁜 친구와 서로 가까이하고 착한 사람과 멀리하며, 욕망으로 독한 술을 삼아 어리석고 미혹되어 취하여 죽는다.
욕망은 속이는 것이어서 어리석은 사람들을 내달리게 하고, 피로와 고뇌가 만 가지인데도 자재할 수 없으니, 오직 욕망을 여의는 것만이 몸과 마음을 안온하고 지극히 쾌락하게 할 수 있다.
030_0138_c_15L又如仙人食果衣草隱居深被髮求道猶復不免欲賊所壞樂甚少怨毒甚多著欲之人惡友相善人疏遠欲爲毒酒愚惑醉死爲欺誑走使愚人疲苦萬端不得自唯有離欲身心安隱快樂無極
030_0139_a_01L욕망이 얻을 바가 없는 것은 개가 마른 뼈를 씹는 것과 같으며, 욕망으로 구하는 것은 삼가 애쓰고 지극히 고생해야 비로소 얻을 수 있으니, 그것을 얻기는 매우 어렵지만 그것을 잃기는 매우 쉬워서, 마치 잠깐 동안 세력을 빌렸지만 오래가지 않는 것과 같다.
꿈속에서 본 것이 황홀하더라도 곧 없어지는 것과 같아서그것을 바라면 근심이 되며, 그것을 구하고자 하면 이미 괴로움이요, 그것을 얻어도 또한 괴롭다.
많이 얻으면 많은 괴로움이 있으니, 불이 장작을 얻되 많으면 많을수록 많이 타오르는 것과 같다.
욕망은 살을 저미는 것과 같아서 온갖 새들이 다투어 따르니, 요약해서 말하자면 나방이 불에 달려드는 것과 같고, 고기가 낚시바늘을 삼키는 것과 같으며, 사슴이 소리를 뒤따르는 것과 같고, 목마를 적에 짠 물을 마시는 것과 같다.
030_0138_c_20L無所得如狗齩枯骨求欲勤勞極苦乃得得之甚難失之甚易如假借須勢不得久如夢所見恍惚卽滅之爲患求之旣苦得之亦苦多得多如火得薪多益多熾欲如搏肉鳥競逐以要言之如蛾赴火如魚呑如鹿逐聲如渴飮鹹水
일체의 중생은 욕망 때문에 근심을 만들며 괴로움에 이르지 않음이 없으니, 그러므로 욕망은 독해(毒害)이므로 마땅히 초선을 구하여 욕망의 불을 끊어 없애야 함을 알아야만 한다.
수행자는 한마음으로 정밀하고 정성스럽게 믿고 즐거워하여 생각을 증진시켜서 뜻이 흩어지지 않게 해야 하며, 욕망을 관하여 마음으로 싫어하고 번뇌를 다 없애면 초선정(初禪定)을 얻는다. 욕망의 치성한 불길을 여의고 시원한 선정을 얻는 것은 마치 더운데 그늘을 얻는 것과 같고 가난한데 부귀를 얻는 것과 같다. 이때 문득 초선의 희각(喜覺)을 얻으니, 선(禪) 가운데 갖가지 공덕을 사유하고, 좋고 추함의 분별을 관하여 문득 한마음을 얻는다.
030_0139_a_05L一切衆生爲欲致患無苦不至是故當知欲爲毒害當求初禪滅斷欲火行者一心精懃信樂令心增進意不散亂觀欲心厭除結惱盡得初禪定離欲盛火得淸涼定如熱得蔭如貧得富是時便得初禪喜覺思惟禪中種種功德觀分別好醜便得一心
󰃅 선(禪)을 수행하는 사람은 한마음의 모습[相]을 얻으니,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가?
030_0139_a_12L問曰修行禪人得一心相云何可知
󰂼 얼굴빛이 화열(和悅)하고 윤기가 나며, 천천히 다니고 조용하고 단정하여 한마음을 잃어버리지 않으며, 눈은 색에 집착하지 않는다.
신령한 덕과 선정의 힘으로 명예와 이익을 탐내지 않고 교만함을 격파하며, 그 바탕은 유연하여 독해를 품지 않으며, 또한 인색하거나 질투하지 않는다.
곧게 믿어 마음이 청정하고 논의하여 다투지 않으며, 몸에 속임이 없어서 함께 말하기 쉽다. 부드럽고 부끄러워하여[慙愧] 마음이 항상 법에 있으며, 정성스럽게 수행하고 정진하며 지계를 완전하게 갖추었다.
030_0139_a_13L面色悅澤徐行靖正不失一心不著色神德定力不貪名利擊破憍其性柔軟不懷毒害無復慳嫉信心淨論議不諍身無欺誑易可與柔軟慚愧心常在法懃修精進戒完具
030_0139_b_01L경전을 암송하여 바르게 기억하고 생각이 법행(法行)을 따르며, 마음은 항상 기쁨에 넘쳐 성낼 곳에서도 화를 내지 않고, 네 가지 공양 중에서 청정하지 않은 것은 받지 않으니, 청정한 보시면 받고 양을 알아서 만족할 줄 안다.
잠깨어 일어나면서부터 이익을 가벼이 여기며 능히 법시(法施)와 재시(財施)를 행하고 인욕으로 삿됨을 제거한다. 논의해서 스스로 만족하지 않더라도 말수는 매우 적으며, 겸손하고 삼가해서 상ㆍ중ㆍ하의 자리를 공경하고, 훌륭한 스승과 선지식을 항상 가까이하고 따른다.
음식은 절제할 줄 알고 좋은 맛에 집착하지 않으며, 혼자 있는 고요한 곳을 즐기며,괴롭거나 즐겁더라도 마음으로 참아 동요하지 않으며, 원망이나 다툼도 없고 다투는 소송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한마음의 모습을 알 수 있다.
030_0139_a_19L誦經正憶念隨法行意常喜瞋處不瞋四供養中不淨不受施則受知量止足寤起輕利能行二忍辱除邪論議不自滿言語尟少謙恪恭敬上中下座善師善知識常親近隨順飮食知節不著欲味樂獨靜若苦若樂心忍不動無怨無競喜鬪訟如是等種種相得知一心相
이 각(覺)과 관(觀)1)의 두 가지 일이 선정의 마음을 어지럽히니, 마차 물이 맑고 고요한데 파도가 일렁이면 흐려지는 것과 같다. 수행자가 이미 안으로 한마음인데도 각과 관으로 번민하게 되니, 마치 목적지에 이르면 휴식을 얻고 졸리면 편안함을 얻는 것과 같이 이때 차례대로 각도 없고 관도 없어서 청정한 선정을 일으키고, 내(內)ㆍ정(淨)ㆍ희(喜)ㆍ낙(樂)2)해서 2선(禪)에 들어갈 수 있다.
030_0139_b_03L觀二事亂禪定心如水澄靜波蕩則行者如是內已一心覺觀所惱如極得息如睡得安是時次第無覺無觀生淸淨定內淨喜樂得入二禪
마음은 고요하고 묵연(黙然)해서 본래 얻을 것이 아닌데, 이제 이 기쁨[喜]을 얻으니, 이때 마음의 관(觀)은 기쁨으로 근심을 삼음이 앞에서 말한 각과 관과 같다.
기쁨이 없는 법[無喜法]을 행하여 마침내 기쁨의 경지를 여의고 성현들이 말씀하신 바의 즐거움[樂]을 얻으며, 한마음으로 자세히 알아 생각하고 보호해서 3선에 들어갈 수 있다.
030_0139_b_07L心靜默然本所不得今得此喜是時心觀以喜爲患如上覺觀行無喜法乃離喜得賢聖所說樂一心諦知念護得入三禪
이미 기쁨을 버렸기 때문에 자세히 알아서 기억하고 즐겨 보호[護:捨]한다. 성인은 즐겨 보호할 것을 말하였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버리기[捨]가 어려우며, 즐거움 가운데 최고이니 이것보다 더한 다른 즐거움은 없다. 그러므로 모든 성인들은 일체의 청정한 경지 중에서 인자함[慈]이 최고의 즐거움이 됨을 설하였다.
즐거움은 곧 근심이니, 이유가 무엇인가?
제일의 선(禪) 중에서는 마음이 움직이거나 변하지 않느니, 일이 없기 때문이다. 움직임이 있으면 곧 변화가 있으며, 변화가 있으면 곧 괴로움이 생기니, 그러므로 3선에서는 즐거움으로 근심을 삼는다.
또한 선묘(善妙)로써 이 괴로움과 즐거움을 버리니, 먼저 근심과 기쁨을 버리고 괴로움과 즐거움의 마음을 제거하며, 청정함을 호념하여 제4선3)의 불고불락호청정념(不苦不樂護淸淨念)의 한마음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최고의 청정함을 보호하는 것을 제4선이라고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030_0139_b_11L已棄喜故諦知憶念樂護聖人言樂護餘人難捨樂中第一過此以往無復樂也是故一切聖人於一切淨地中說慈爲第一樂樂則是患所以者第一禪中心不動轉以無事故有動則有轉有轉則有苦是故三禪以樂爲復以善妙捨此苦樂先棄憂喜除苦樂意護念淸淨得入第四禪不苦不樂護淸淨念一心是故佛言護最淸淨第一名第四禪
제3선에서는 즐거움이 움직이기 때문에 그것을 이름하여 괴로움[苦]이라 하니, 그러므로 4선에서는 괴로움과 즐거움을 제거하여 없애서 그것을 이름하여 동요하지 않는 곳[不動處]이라고 한다.
점차 공처(空處)4)를 관조하여 안팎의 색상(色想)을 깨뜨리고, 유대상(有對想)5)을 없애며, 여러 가지 색상을 생각하지 않고, 무량공처(無量空處)6)를 관한다.
항상 색(色)의 허물을 관하고, 공처정(空處定)의 최상의 미묘한 공덕을 생각하며, 이 법을 익히고 생각하여 공처정에 도달할 수 있다.
030_0139_b_20L以第三禪樂動故之爲苦是故四禪除滅苦樂名不動處漸觀空處破內外色想滅有對想念種種色想觀無量空處常觀色過念空處定上妙功德習念是法逮得空處
030_0139_c_01L무량한 식처(識處)를 생각하고 공처의 허물을 관하며, 무량한 식처의 공덕을 생각하고 이 법을 익히고 생각하여 식처정(識處定)에 도달할 수 있다.
무소유처(無所有處)를 생각하고 식처의 허물을 관하며,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의 공덕을 생각하고 이 법을 익히고 생각하여 문득 무소유처정을 얻는다.
비유상비무상처정(非有想非無想處定)을 생각하되, 만일 일체의 생각에 그 근심이 매우 많다면 병이든 종기든 무상(無想)이든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곳[愚癡處]이니, 그러므로 비유상비무상정은 제일 안온한 좋은 곳이므로 무소유처정의 허물을 관조하고, 비유상비무상의 공덕을 생각하며, 이 법을 익히고 생각하여 문득 비유상비무상처정을 얻는다.
030_0139_c_02L念無量識處觀空處過念無量識處功德習念是法逮得識處無所有處觀識處過念無所有處功習念是法便得無所有處念非有想非無想處若一切想其患甚多病若瘡若無想是愚癡處是故非有想非無想是第一安隱善處觀無所有處念非有想非無想功德習念是法便得非有想非無想處
혹 어떤 수행자가 먼저 초지(初地)에서부터 상지(上地)에까지 이르고, 다시 상지에서 자심(慈心:자무량심)을 익혀 행한다면, 먼저 스스로 즐거움을 얻어서 성냄의 독을 파괴하고, 다음으로 시방의 무량한 중생들에게 미치면 이때 문득 자심삼매(慈心三昧)를 얻는다.
비심(悲心:비무량심)으로 중생의 괴로움을 가엾게 여기고, 능히 고뇌를 파괴하여 널리 무량한 중생들에게 미치면, 이때 문득 비심삼매(悲心三昧)를 얻는다.
능히 기쁘지 아니한 것을 깨뜨리고 무량한 중생들로 하여금 모두 희열을 얻게 하면, 이때 문득 희심(喜心:희무량심)삼매를 얻는다.
030_0139_c_10L或有行者先從初地乃至上地復於上地習行慈心先自得樂破瞋恚毒次及十方無量衆生是時便得慈心三昧悲心憐愍衆生之苦能破衆惱廣及無量衆生是時便得悲心三昧能破不悅令無量衆生皆得喜悅是時便得喜心三昧
030_0140_a_01L능히 괴로움과 즐거움을 깨뜨리고 곧바로 시방의 무량한 중생들을 관하면, 이때 문득 호심(護心:사무량심)삼매를 얻는다.
2선(禪) 역시 이와 같으며, 3선과 4선에서는 기쁨[喜]을 제거한다.
다음으로 5통(通)을 배우니, 몸이 능히 날아다닐 수 있고 변화가 자유자재하다.
수행자는 한마음으로 욕정(欲定)ㆍ정진정(精進定)ㆍ일심정(一心定)ㆍ혜정(慧定)에서 한결같은 마음으로 몸을 관찰하고, 항상 가볍다는 생각을 지어서 날아다님[飛行]을 완성하고자 한다.
크든 작든욕정이 지나치면 큰 것이 되고, 욕정이 덜하면 작은 것이 된다. 이 두 가지는 모두 근심이니, 정진하고 지극히 정성스러우면 항상 한마음으로 사유하여 가볍다고 관할 수 있다.
마치 떠 있을 수 있는 사람은 마음의 힘이 강하기 때문에 가라앉지 않는 것과 같으며, 또한 원숭이가 높은 곳에서 떨어지더라도마음의 힘이 강하기 때문에 몸에 고통과 걱정이 없는 것과 같이, 이것도 마찬가지여서 욕력(欲力)ㆍ정진력(精進力)ㆍ일심력(一心力)ㆍ혜력(慧力)으로 그것을 넓고 크게 하면 몸이 더욱 작아져 문득 몸을 움직일 수 있다.
030_0139_c_16L破苦樂直觀十方無量衆生是時便得護心三昧二禪亦復如是三禪四禪除喜次學五通身能飛行變化自行者一心欲定精進定一心定一心觀身常作輕想欲成飛行大若小以欲定過爲大以欲定減爲小此二俱患精進翹常能一心思惟輕觀如能浮人力强故而不沈沒亦如猿猴從高上心力强故身無痛患此亦如是精進力一心力慧力令其廣大身更小便能運身
또한 몸의 공계(空界)를 관하고 항상 이 관을 익히면 욕력ㆍ정진력ㆍ일심력ㆍ혜력이 지극히 넓고 커져서 곧 몸을 들어올릴 수 있으니, 커다란 바람의 힘이 무거운 것을 보내어 먼 곳에 도달하게 하는 것과 같이 이것도 또한 그러하다.
처음에는 마땅히 스스로 시험하여 땅에서 떨어져 한 자, 두 자 그리고 점차 한 길[丈]에 이르고 다시 본래의 곳으로 돌아오니, 마치 새 새끼가 나는 것을 배우고 어린아이가 걸음마를 배우는 것과 같다.
사유하여 스스로 살펴서, 마음의 힘이 크면 반드시 먼 곳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030_0140_a_04L復次觀身空界習此觀欲力精進力一心力慧力極爲廣大便能擧身如大風力致重達此亦如是初當自試離地一尺二漸至一丈還來本處如鳥子學飛小兒學行思惟自審知心力大必能至遠
4대(大)를 배우고 관하되, 지대(地大)를 제거하고 다만 나머지 3대를 관하여 심념(心念)이 흩어지지 않으면 문득 자재할 수 있으니, 몸이 걸림이 없어서 새가 날아가는 것과 같다. 마땅히 다시 배우고 익혀서 멀더라도 가깝다는 생각을 하면, 가까운 것이 먼 것을 없애버리게 된다.
또한 여러 사물을 변화시킬 수 있다. 만약 나무를 땅의 일종이라고 관하고 나머지 종류는 없애버리면 이 나무는 문득 변하여 땅이 되니, 왜냐하면 나무는 땅의 요소의 성분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물ㆍ불ㆍ바람ㆍ허공ㆍ금ㆍ은ㆍ보물도 모두 다 이와 같으니, 왜냐하면 나무에는 여러 가지 요소의 성분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초신통(初神通)의 근본이다.
030_0140_a_10L學觀四大除卻地大但觀三大心念不散便得自在身無罣㝵如鳥飛行當復學習遠作近想是故近滅遠出復能變化諸物如觀木地種除卻餘種此木便變爲地所以者何木有地種分故金銀寶物悉皆如何以故木有諸種分故是初神通根本
4선에는 14가지 변화하는 마음이 있다.
초선(初禪)은 2과(果)이니, 첫째는 초선이고 둘째는 욕계(欲界)이다.
2선은 3과이니, 첫째는 2선, 둘째는 초선, 셋째는 욕계이다.
3선은 4과이니, 첫째는 3선, 둘째는 2선, 셋째는 초선, 넷째는 욕계이다.
4선은 5과이니, 첫째는 4선, 둘째는 3선, 셋째는 2선, 넷째는 초선, 다섯째는 욕계이다.
나머지 신통은 『마하연론(摩訶衍論)』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030_0140_a_17L四禪有十四變化心初禪二果一者初禪二者欲界二禪三果一者二禪二者初禪三者欲界三禪四果一者三禪二者二禪三者初禪四者欲界四禪五果一者四禪二者三禪二禪四者初禪五者欲界餘通如『摩訶衍論』中說
030_0140_b_01L세존의 제자들은 다섯 가지 법문을 익히고 배워서 뜻을 세워 열반을 추구하니,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선정이 많음을 좋아하는 사람은 즐겁기[快樂] 때문이요, 지혜가 많음을 좋아하는 사람은 근심과 괴로움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선정이 많은 사람은 먼저 선법(禪法)을 배우고뒤에 열반을 배우며, 지혜가 많은 사람은 곧바로 열반으로 나아가니, 곧바로 열반으로 나아가는 사람은 아직 번뇌를 끊지 못하였고, 또 아직 선(禪)도 얻지 못한 것이다.
온 마음을 다 기울여 흩어지지 않고 곧바로 열반을 구하여 애착 등 모든 번뇌를 초월하는 것을 열반이라고 한다.
030_0140_a_23L世尊弟子習學五法門志求涅槃有二種人或好定多以快樂故或好智多畏苦患故定多者先學禪法後學涅槃智多者直趣涅槃直趣涅槃者未斷煩惱亦未得禪專心不散直求涅槃越愛等諸煩惱是名涅槃
몸은 진실로 무상(無常)ㆍ고(苦)ㆍ부정(不淨)ㆍ무아(無我)이나, 몸을 뒤바꿔[顚倒] 생각하기 때문에 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이라 여기니, 이것 때문에 일마다 그 몸을 애착하므로, 이것이 바로 최하의 중생이다.
수행자는 뒤바뀐 것을 타파하고자 하기 때문에 마땅히 4념지관(念止觀)7)을 익혀서 몸에는 갖가지 모든 괴로움과 근심이 많다는 것을 관해야만 한다.
인연 따라 생기기 때문에 무상(無常)이며, 갖가지로 괴롭기 때문에 고(苦)이며, 몸에는 36가지 물건이 있기 때문에 부정(不淨)하며, 자재하지 않기 때문에 무아(無我)이니, 이와 같이 관함을 익혀서 내신(內身)을 관하고 외신(外身)을 관하며, 나아가 내외신(內外身)을 관한다.
이와 같은 관법을 익히면, 이것을 일러 신념지(身念止)라고 한다.
030_0140_b_04L實無常不淨無我以心顚倒故常以是故事事愛著其身是則底下衆生行者欲破顚倒故當習四念止觀身種種多諸苦患從因緣生故無種種惱故苦身有三十六物故不以不得自在故無我習如是觀內身觀外身觀內外身習如是觀謂身念止
몸의 실상(實相)이 이와 같은데, 무슨 까닭에 여기에서 뒤바뀐 견해를 일으켜 이 몸을 애착하는가?
몸 주변의 즐거움과 고통을 자세히 사유하고 생각하라. 즐거움과 고통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 몸에 집착하는 것이니, 마땅히 즐거움과 고통은 진실로 얻을 수 없는 것임을 관해야만 한다.
어째서 얻을 수 없는가?
옷과 음식 때문에 즐거움에 이르나 즐거움이 지나치면 괴로움이 생기니, 진실한 즐거움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종기의 고통을 근심하면 약을 발라서 치료하고, 통증이 멈추면 즐거운 것과 같이, 커다란 괴로움 때문에 작은 괴로움을 즐거움이라고 말하는 것이니, 진실한 즐거움이 아니다.
또한 옛날의 괴로움을 괴로움[苦]으로 삼고, 새로운 괴로움으로 즐거움[樂]을 삼으니, 마치 무거운 것을 메고 있다가 어깨를 바꾸면 새로운 무거움으로 즐거움을 삼는 것과 같아서, 진실하고 늘 있는 즐거움이 아니다.
마치 불의 성질은 뜨겁기 때문에 잠시도 차가운 때가 없는 것과 같이, 만일 이것이 참다운 즐거움이라면 마땅히 즐겁지 않은 것은 있을 수가 없다.
030_0140_b_12L身實相如是何故於此起顚倒愛著此身諦思惟念身邊樂以愛樂痛故著此身當觀樂痛實不可得云何不得因衣食故致樂過則苦生非實樂故如患瘡苦以藥塗治痛止爲樂以大苦故謂小苦爲非實樂也復次以故苦爲苦新苦爲樂如檐重易肩而以新重爲樂實常樂也如火性熱無暫冷時若是實樂不應有不樂
030_0140_c_01L혹자가 말하기를, 바깥의 일은 즐거움의 인연이지만 반드시 즐겁지만은 않으니, 어느 때는 즐거움의 원인이고 어느 때는 괴로움의 원인이다. 만일 심법(心法)과 애착을 서로 응하게 한다면 그때는 즐거움이며, 성냄과 서로 응한다면 그때는 괴로움이며, 어리석음과 서로 응한다면 괴로움도 즐거움도 아니다.이것으로 미루어 보건대 즐거움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030_0140_b_21L或曰外事是樂因緣不必是樂或時樂因或時苦因若使心法與愛相應爾時是樂與恚相應爾時是苦與癡相應不苦不樂此推之可知有樂無樂
대답하기를 “없다”라고 하였다.
음욕은 마땅히 즐거움이 아니니, 왜냐하면 만일 음욕이 안에 있다면 바깥에서 여색을 찾는 것은 마땅하지가 않기 때문이다. 바깥에서 여색을 찾음이 마땅히 음욕의 괴로움임을 알아야만 한다.
만일 음욕이 즐거움이라면 마땅히 때때로 버려서는 안 되며, 만일 버린다면 마땅히 이것은 즐거움이 아니다.
커다란 괴로움 속에서는 작은 괴로움으로 즐거움을 삼으니, 마치 사람이 죽어 마땅한데 생명을 보전하기 위해 채찍을 받고 이것으로 즐거움을 삼는 것과 같다.
030_0140_c_02L答曰無也婬欲不應是樂何以故若婬欲在內不應外求女色外求女色當知婬苦若婬是不應時時棄若棄不應是樂於大苦以小苦爲樂也如人應死全命受鞭以是爲樂
욕심이 불타오르면 욕망으로 즐거움을 삼지만, 노년에는 욕망을 싫어하고 욕망이 즐거움이 아니란 것을 아니, 만일 진실로 즐거움의 모습[樂相]이라면 마땅히 싫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와 같이 갖가지 인연으로 즐거워하고자 하는 모습이지만 실재로는 얻을 수 없다. 즐거움이 사라지면 바로 괴로움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즐거움의 고통은 마땅히 괴로움이라고 관해야 하고, 괴로움의 고통은 마땅히 즐거움이라고 관해야 한다. 마치 화살이 몸에 있는 것과 같이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아서, 마땅히 생기고 없어져 무상(無常)하다고 관해야만 한다”고 하셨으니, 이것을 일러 통념지(通念止)라 한다.
030_0140_c_07L欲心熾盛以欲爲樂老時厭欲知欲非樂若實樂相不應生厭是種種因緣欲樂相實不可得樂失則佛言樂痛應觀苦苦痛應觀樂箭在體不苦不樂應觀生滅無常謂痛念止
마음은 괴로움과 즐거움을 받고,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것을 받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무엇이 마음인가?
이 마음은 무상(無常)하여 인연을 좇아 생기기 때문에 생기고 없어져 머물지 않는다. 인식이 대상에 일치하고 대응하여 일어나기[相似生] 때문에, 다만 뒤바뀌었기 때문에, 이것을 하나라고 말할 뿐이니, 본래는 현재의 존재[今有]도 없고 과거의 존재[已有]도 또한 없다. 그러므로 무상이다.
마음의 본성을 관찰해 보면 공(空)임을 알게 되니, 무엇을 공이라 하는가?
인연 따라 생기는 것이다.
눈이 있어서 물질이 있음을 볼 수 있고 기억해서 보고자 하니, 이와 같은 것들이 화합하여 안식(眼識)이 생긴다. 마치 해가 구슬을 사랑하여 해가 있고 구슬이 있으며, 마른 풀과 쇠똥이 있어서 뭇 인연이 화합하여 여기서 불이 생기는 것과 같으니, 하나하나를 미루어 찾으면 불을 얻을 수 없지만 연(緣)이 합하여 불이 있다.
030_0140_c_12L當知心受苦樂受不苦不云何心是心無常從因緣生故滅不住相似生故但顚倒故謂是爲本無今有已有還無是故無常知心空云何爲空從因緣生有眼有可見憶念欲見如是等和合眼識生如日愛珠有日有珠有乾草牛衆緣和合於是火生一一推求不可得緣合有火
030_0141_a_01L안식도 또한 그러해서, 눈에도 머물지 않고 물질에도 머물지 않으며, 두 가지 중간에도 머물지 않고, 머무는 곳이 있지 않으며, 또한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허깨비와 같고 요술과 같으니, 현재의 마음으로 과거의 마음을 관하면 혹은 괴로움이고, 혹은 즐거움이며, 혹은 괴로움도 아니고 즐거움도 아니다. 마음은 각각 다르고, 각각 없어진다. 욕심이 있든 욕심이 없든 역시이와 같아서, 각각 다르고 각각 없어진다. 안의 마음을 관하든 밖의 마음을 관하든, 아니면 안팎의 마음을 관하든 역시 이와 같다”고 하셨으니, 이것을 심념지(心念止)라고 이름한다.
030_0140_c_20L眼識亦爾不住眼亦非色中住不兩中閒住無有住亦復不無是故佛言如幻如化在心觀過去心或苦或樂或不苦不心各各異各各滅有欲心無欲心亦如是各各異各各滅觀內心觀外心觀內外心亦如是是名心念止
또한 마음은 누구에 속한다고 관하는가?
상(想)ㆍ사유(思惟)ㆍ염(念)ㆍ욕(慾) 등의 여러 가지 마음이 서로 응하는 법[心相應法]과 서로 응하지 않는 법[不相應法]을 관하고, 그 주인을 자세히 관하여도 주인은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인연 따라 생기기 때문에 무상(無常)이며, 무상하기 때문에 괴로움이고, 괴로움이기 때문에 자재하지 못하며, 자재하지 못하기 때문에 주인이 없고, 주인이 없기 때문에 공하다.
앞에서는 몸과 느낌과 마음의 법이 얻을 수 없는 것임을 특별히 관하였으니, 이제 다시 4념지(念止) 중에서도 주인을 얻을 수 없으며 이곳을 여의고 구하여도 얻을 수 없음을 총체적으로 관한다.
030_0141_a_03L復次觀心爲屬誰觀想思惟念欲等諸心相應法不相應法諦觀其主主不可得何以故從因緣生故無常無常故苦苦故不自在不自在故無主無主故前別觀身心法不可得今更摠觀四念止中主不可得離此處求亦不可得
만일 항상함[常]을 얻을 수 없다면, 무상(無常)도 역시 얻을 수 없다. 만일 항상하다면 마땅히 항상 괴롭고 항상 즐거워서 역시 마땅히 잊어서는 안 된다.
만일 항상 정신이 존재하는 것이라면 살뇌죄(殺惱罪)가 없고 역시 열반도 없으며, 만일 육신이 바로 정신이라면 무상한 몸이 없어지면 정신도 역시 없어져야만 하며, 또한 후세도 없고 죄와 복도 없다.
이와 같이 두루 주인이 없음을 관하면, 일체의 존재는 모두가 공이며 자재하지 못해서, 인연이 화합하기 때문에 생기고 인연이 무너지기 때문에 없어진다.
이와 같이 인연이 화합하여 법이 되니, 이것을 법념지(法念止)라고 한다.
030_0141_a_10L若常不可得無常亦不可得若常應當常苦常樂亦不應忘若常有神者無殺惱罪亦無涅槃若身是無常身滅神亦應滅亦無後世無罪福如是遍觀無主諸法皆空不自在因緣合故生因緣壞故滅如是緣合法是名法念止
만일 수행자가 법념지를 얻는다면 세간의 공(空)ㆍ늙음ㆍ병듦ㆍ죽음의 법을 싫어하여 도무지 조금도 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이 공한 법에서 다시 무엇을 구하는가?
마땅히 열반의 최선의 법 가운데 들어가서 머물러야 하며, 정진의 힘을 세워서 깊은 사마타(舍摩陀)를 얻는다.깊은 사마타라는 것은 마음이 한 곳에 머무는 것을 말한다. 이곳에서는 적절히 표현할 이름이 없다. 이때 깊은 사마타를 얻어서 제4의 법념지 가운데 머문다.
모든 존재[諸法]의 모습을 관하건대 모든 것이 괴로움이어서 즐거움이 없으며, 즐거움이 없는 것이 진실이요 나머지는 거짓말이니, 괴로움은 애착 등의 여러 가지 번뇌와 업에서 연유한다. 이것은 하늘이 아니며, 시간이 아니고 티끌이 아니라는 등의 갖가지 거짓말 속에서 생기니, 이 번뇌와 업이 이 괴로움을 발생시킨다.
030_0141_a_16L若行者得法念厭世閒空老病死法都無少許常樂我淨我於此空法復何所求應當入涅槃最善法中住建精進力得深舍摩陁故深舍摩陁者住心一處名也此土無是名是時得深舍摩住第四法念止中觀諸法相皆苦無樂無樂是實餘者妄語苦因愛等諸煩惱及業是非天非時非塵等種種妄語中生是煩惱及業出生此苦是
030_0141_b_01L이 괴로움은 열반에 들어갔을 때 일체가 남김없이 사라진다.
색계도 무색계도 세계시(世界始)도 아니니, 세계시외도는 일체 유위법의 처음을 세계시라 하며, 열반이라 말한다. 이 처음이 있다는 것이 만물을 만들어내므로 곧 조화(造化)라고 말한다.라는 등의 갖가지 거짓말은 능히 이러한 괴로움을 없앨 수 없으며, 정견(正見) 등의 8정도가 바로 열반의 길이요, 나머지 외도의 고행(苦行)이나 갖가지 공지계(空持戒)ㆍ공선정(空禪定)ㆍ공지혜(空智慧)는 열반의 길이 아니다.
왜냐하면 불법 가운데 계(戒)ㆍ정(定)ㆍ혜(慧)의 세 가지 법이 합하여 행해져야 열반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비유컨대 사람이 평지에 서서 좋은 활과 화살을 가져야 원수인 적을 쏘아 죽일 수 있는 것과 같이, 세 가지 법을 합하여 행하는 것도 역시 이와 같아서 계율을 평지로 삼고, 선정을 훌륭한 활[快弓]로 삼으며, 지혜를 예리한 화살로 삼아 세 가지 일이 구비되어야 능히 번뇌의 적을 죽일 수 있다. 그러므로 외도의 무리는 열반을 얻을 수 없다.
030_0141_b_02L入涅槃時一切滅盡非色無色界及世界始世界始外道謂一切有法之初色爲世界始外道謂涅槃也以此有始能化作萬物卽名造化也等種種妄語能滅此苦正見等八直是涅槃道非餘外道苦行種種空持戒空禪定空智慧何以故佛法中戒慧三法合行能入涅槃譬如人立平地持好弓箭能射殺怨賊法合行亦如是戒爲平地禪定爲快智慧爲利箭三事備足能殺煩惱以是故外道輩不得涅槃
수행자는 이때 네 가지 법연(法緣)을 만들어 연(緣)을 관하는 것이 활쏘기 놀이와 같다.
괴로움[苦]을 관8)하는 데 네 가지가 있으니, 인연으로 생기기 때문에 무상(無常)이요, 몸과 마음을 괴롭히기 때문에 고(苦)이며, 얻을 것이 하나도 없으므로 공(空)이요, 짓지도 않고 받지도 않으므로 무아(無我)인 것이다.
습(習)을 관9)하는 데 네 가지가 있으니, 번뇌와 유루업(有漏業)이 화합하기 때문에 집(集)이며, 상사과(相似果)가 생기기 때문에 인(因)이며, 이 가운데서 일체의 행(行)을 얻기 때문에 생(生)이고, 상사과가 아닌 것이 서로 이어지기 때문에 연(緣)인 것이다.
030_0141_b_11L行者是時作四法緣觀緣如射博觀苦四種緣生故無常身心惱故苦無一可得故空無作無受故無我觀習四種惱有漏業和合故集相似果生故因是中得一切行故生非相似果相續故緣
진(盡)을 관10)하는 데 네 가지가 있으니, 일체의 번뇌를 덮고 있기 때문에 폐(閉)이며, 번뇌의 불길을 제거하기 때문에 멸(滅)이고, 일체의 법 가운데서 최고이기 때문에 묘(妙)이며, 세간을 지나가기 때문에 출(出)인 것이다.
도(道)를 관11)하는 데 네 가지가 있으니, 능히 열반에 도달하기 때문에 도(道)이며, 뒤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정(正)이고, 일체의 성인께서 간 곳이기 때문에 적(跡)이며, 세간의 근심과 고뇌를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이(離)이다.
030_0141_b_17L觀盡四種一切煩惱覆故閉煩惱火故滅一切法中第一故妙閒過去故出觀道四種能到涅槃故不顚倒故正一切聖人去處故迹得脫世愁惱故離
030_0141_c_01L이와 같이 관하면 무루(無漏)의 상사법(相似法)을 얻으리니, 이름하여 따뜻한 법[煖法]12)이라 한다.
무엇을 따뜻하다 하는가?
항상 부지런히 정진하기 때문에 따뜻한 법이라 이름하며, 모든 번뇌의 장작을 무루지(無漏智)의 불로써 태우니, 불이 나오려고 하는 처음의 모습을 이름하여 따뜻한 법이라 한다.
비유컨대 불을 모으는데 처음 모을 때연기가 나면 이것을 따뜻하다고 이름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이 열반도(涅槃道)의 첫 모습이다.
030_0141_b_21L如是觀者得無漏相似法名爲煖法云何名煖常懃精進故名煖法諸煩惱薪無漏智火燒欲出初相名爲煖法譬如鑽火初鑽煙出是名煖是爲涅槃道初相
부처님의 제자들 가운데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첫 번째는 한마음으로 선정을 구하기를 매우 좋아하니 이 사람들은 유루도(有漏道)이며, 두 번째는 대부분 애착을 제거하고 참다운 지혜를 좋아하니, 이 사람들은 곧 바로 열반으로 향하여 따뜻한 법 가운데 들어가며, 따뜻한 모습[煖相]을 지닌 사람은 깊이 한마음을 얻는다.
참다운 법의 거울이 무루계(無漏界)의 가장자리에 도달하면거울 가운데 모습은 표면의 세계와 비슷하며, 가장자리는 가운데가 아니므로 이렇게 비유했다., 수행자는 이때 크게 안온함을 얻어서 스스로 ‘나는 선정으로 마땅히 열반을 얻으리니, 이 도(道)를 보았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하니, 마치 사람이 우물을 파다가 축축한 진흙에 도달하면 틀림없이 오래지 않아 물을 얻게 되리라는 것을 아는 것과 같으며, 사람이 적을 격파하여 적이 이미 물러나 흩어지면 스스로 승리했음을 알고 마음속이 안온해지는 것과 같으며, 사람이 죽은 사람을 두려워하여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기 위해서 마땅히 먼저 막대기로 몸을 두드려 시험해 보되 만일 은은하게 진맥이 일어나면 이 사람은 따뜻함이 있으므로 반드시 살 수 있다고 아는 것과 같다.
030_0141_c_02L佛弟子中有二種人一者多好一心求禪定人有漏道二者多除愛著好實智慧人直趣涅槃入煖法中有煖相者深得一心實法鏡到無漏界邊鏡中像似面界邊非中故以爲喩行者是時大得安隱自念我定當得涅槃見此道故如人穿井得至濕知當得水不久如人擊賊賊已退自知得勝意中安隱如人怖死欲知活不當先試之以杖打身若隱胗脈起者知是有煖必可得活
또한 법을 듣는 사람이 사유하되 기뻐서 마음으로 집착하면 이때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과 같이, 수행자는 이와 같이 따뜻한 법을 지니기 때문에 ‘따뜻함이 있다’고 이름하는 것이며, 또한 열반분(涅槃分)의 선근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 선근법에는 열여섯 가지가 있어서 4제(諦)의 인연을 행하며, 6지(地)13) 중 하나인 지혜는 일체 무루법의 기반이다.
야인(野人)이 능히 안온함을 행하니무루에서 소원(疎遠)하기 때문에 야인이라고 한다. 범본(梵本)에 살펴보면 범부인(凡夫人)이라고 하였는데 잘못이다., 이것을 따뜻한 법이 있다고 말한다.
030_0141_c_12L亦如聽法人思惟喜悅心著是時心熱者如是有煖法故名爲有煖亦名能得涅槃分善根是善根法有十六行四諦緣六地中一智慧一切無漏法基野人能行安隱於無漏疏故名爲野人梵本爾先言凡夫人是名有煖法
증진하여 더 올라가면 다시 정법(頂法)14)이라고 하니, 마치 젖이 변하여 낙(酪)이 되는 것과 같다.
이 사람은 법의 실상을 관하여 내가 마땅히 괴로움을 벗어나 해탈을 얻을 것이라고 하여 마음으로 이 법을 좋아하니, 이것은 참다운 법[眞法]이어서 능히 갖가지 괴로움과 근심 그리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을 제거할 수 있다.
030_0141_c_18L增進轉更名頂法如乳變爲酪是人觀法實相我當得苦脫心愛是法是爲眞能除種種苦患及老病死
030_0142_a_01L이때 생각하기를, ‘이 법은 누가 설했는가? 바로 부처님 세존이시니, 이것을 좇아 불보(佛寶) 속에서 신심이 청정하여 커다란 환희심을 얻는다. 만일 이 법이 없다면 일체의 번뇌를 누가 능히 막을 수 있겠는가? 이로부터 법보(法寶) 속에서 신심이 청정하여 커다란 환희심을 얻는다. 나는 마땅히 어찌해야 진실한 지혜를 조금이라도 밝혀 이로부터 법보 속에서 신심이 청정하여큰 환희심을 얻을 수 있을까? 만일 내가 불제자의 무리들과 좋은 짝이 될 수 없다면 어떻게 마땅히 참다운 지혜의 약간의 밝음이나마 얻을 것인가?’라고 하면, 이를 좇아 승보(僧寶) 속에서 신심이 청정하여 크게 환희심을 얻으며, 이 세 가지 보배 속에서 한마음의 청정함을 얻어 참다운 지혜에 계합한다.
이것이 정상(頂上)의 선근이니, 또한 정법(頂法)이라 이름하고, 또한 열반분(涅槃分)의 선근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파라연경(波羅延經)』에서 설한 것과 같다.
030_0141_c_21L是時惟此法誰說是佛世尊從是得佛寶中信心淸淨大歡喜悅若無此法切煩惱誰當能遮我當云何得實智慧少許明從是得法寶中信心淸淨大歡喜悅若我不得佛弟子輩好伴云何當得實智慧少許明從是得僧寶中信心淸淨大歡喜悅是三寶中得一心淸淨合實智慧是頂善根亦名頂法名能得涅槃分善根如『波羅延經』中說

불보ㆍ법보ㆍ승보에 대하여
누구라도 조금만 믿음의 청정함이 있다면
이를 정상의 선근이라 이름하리니
그대들은 한결같은 마음으로 지니라.
030_0142_a_07L佛寶法僧寶
誰有少信淨
是名頂善根
汝曹一心持

어째서 약간의 믿음[少信]이라 하는가?
부처님ㆍ보살ㆍ벽지불ㆍ아라한 등의 주변에는 적은데[少] 야인의 주변에는 많기[多] 때문이며, 또한 이것은 파괴할 수 있고 잃어버릴 수 있으니, 그러므로 ‘적다’고 한 것이다.
『법구경』에서 설한 것과 같다.
030_0142_a_09L云何爲少信於佛菩薩辟支佛阿羅漢邊爲少於野人邊爲多復次此可破可失是故名少如『法句』說

파초는 열매를 생산하면 죽고
대나무도 열매를 생산하면 역시 그러하며
노새는 새끼가 있으면 곧 죽고
소인(小人)은 봉양을 받으면 죽는다.
030_0142_a_12L芭蕉生實死
竹生實亦然
騾有子則死
小人得養死

잘못을 타파해도 이롭지 않으므로
소인은 명예를 얻으려 하니
청정의 원인[白淨分]을 모두 잃어버리고
마침내 정법(頂法)에서 떨어진다.
030_0142_a_14L破失非利故
小人得名譽
白淨分失盡
乃至頂法墮

또한 아직 여러 결사(結使:번뇌)를 끊지 못했다면 아직 무루의 무량한 지혜를 얻지 못한 것이니, 그렇기 때문에 ‘적다’고 말한다.
030_0142_a_15L復次未斷諸結使未得無漏無量慧以是故名少
또한 부지런히 정진해서 한마음으로 열반의 길로 들어가 다시 5음(陰)ㆍ4제(諦)ㆍ16행(行)을 분명하게 관하면, 이때 마음이 위축되지도 않고, 후회하지도 않으며, 물러서지도 않으며, 사랑하고 즐거워하여 인(忍)에 들어가는데 이것을 인선근(忍善根)이라고 한다.
인(忍)은 무엇인가?
4제를 따라 행하면 이것을 인이라고 한다.
이 선근에는 세 가지 상ㆍ중ㆍ하의 3시(時)가 있으니, 어째서 인이라고 이름했는가?
5음의 무상(無常)ㆍ고(苦)ㆍ공(空)ㆍ무아(無我)를 관하고, 마음으로 견디어 물러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을 인(忍)이라고 한다.
030_0142_a_17L復次懃精進一心入涅槃道中更了了觀五陰四諦十六是時心不縮不悔不退愛樂入忍是名忍善根忍何等隨四諦觀行名爲忍是善根三種下三時何名忍觀五陰無常無我心忍不退是名忍
030_0142_b_01L또한 일체의 세간은 모두 고ㆍ공이요 즐거움이 없으니, 이 괴로움의 원인은 습(習)과 애착 등 여러 가지 번뇌이며, 이 습은 지혜의 연(緣)을 없애버린다.이것을 상법(上法)이라 하니, 다시 위[上]가 있지 않으며, 8정도(正道)는 능히 수행자로 하여금 열반에 이르게 하니, 다시 그 이상은 있지 않다. 이와 같은 신심(信心)으로 후회하지 않고 의심하지 않으며 참는 것을 인(忍)이라고 이름한다.
이 가운데 다시 참음이 있어서 갖가지 결사(結使)와 갖가지 번뇌와 의심과 후회가 마음속에 들어오더라도 능히 파괴할 수 없게 하니, 비유컨대 돌산은 갖가지 바람과 물에도 떠다니거나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인(忍)이라고 하니, 이 일로써 진실하고 훌륭한 야인(野人)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부처님께서 법의 구절 가운데서 설하신 것과 같다.
030_0142_a_23L復次觀諸世閒盡苦空無有樂是苦因習愛等諸煩惱是習智緣是名上法更無有上八直道能令行人得至涅槃更無有上如是信心不悔不疑忍是名忍是中更有忍種結使種種煩惱疑悔來入心中不能令破譬如石山種種風水不能漂動是故名忍是事得名眞好野人如佛說『法句』中

세계의 정견(正見) 위에서
누군가 많은 것을 얻는 자가 있다면
마침내 천만 년에 이르더라도
끝내 악도(惡道)에 떨어지지 않으리.
030_0142_b_08L世界正見上
誰有得多者
乃至千萬歲
終不墮惡道

이 세간의 정견을 이름하여 인선근(忍善根)이라 하니, 이 사람은 많이 증진하여 한마음으로 지극히 세계행(世界行)을 싫어하고, 4제(諦)의 모습을 분명하게 하여 깨달음을 이루어 열반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이와 같이 한마음의 가운데를 세간제일법(世間第一法)이라고 한다.
일시에 4행(行) 즉, 무상ㆍ고ㆍ공ㆍ무아에 머물러 첫 번째 진리[諦]인 고법인(苦法忍)15)을 관하니, 고제(苦諦)를 반연하기 때문이다.
왜 욕계 5수음(受陰)의 무상ㆍ고ㆍ공ㆍ무아를 관하는가?
이 가운데서 심인(心忍)으로 지혜에 들어가기 때문이며, 또한 이것은 심(心)과 심수법(心數法)에 상응하니, 이것을 고법인(苦法忍)이라고 한다.
신업(身業)과 구업(口業)과 마음에 상응하지 않은 여러 가지 행(行)과 현재ㆍ미래세의 일체 무루법의 초문(初門), 이것을 바로 고법인이라 한다.법은 무루법이며, 인은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030_0142_b_10L是世閒正見是名爲忍善根是人多增進一心極厭世界行欲了了四諦作證趣涅槃如是一心中是名世閒第一法一時住四行無常觀一諦苦法忍共緣故何以故欲界五受陰無常無我是中心忍入慧亦是相應心心數法是名苦法忍身業口業及心不相應諸行在未來世一切無漏法初門是名苦法忍法無漏法忍信受也
030_0142_c_01L차례대로 고법지(苦法智)16)를 내니, 고법인은 결사(結使)를 끊고, 고법지는 깨달음을 이룬다.
비유컨대 한 사람은 베고 한 사람은 묶는 것과 같으며, 또한 예리한 칼로 대나무를 쳐서 베어내되 바람을 맞으면 곧 쓰러지는 것과 같다.
인(忍)과 지(智)로 공부하기 때문에 이 일은 욕계의 번뇌[欲界繫]17)를 구별할 수 있고, 괴로움을 보고 열 가지 결사(結使)를 끊으니, 그때에는 등지(等智)와 달리 무루지(無漏智)를 얻어서 아직 얻지 못한 무루혜(無漏慧)를 얻는다.이때 하나의 지(智)를 성취한다.등지는 미래에 성취한다.
030_0142_b_20L次第生苦法智苦法忍斷結使苦法智作證譬如一人刈一人亦如利刀斫竹得風卽偃忍智功夫是事得辦欲界繫見苦斷十結得爾時異等智得無漏智未得無漏慧得是時成就一智等智未來成就
두 번째 마음속에서 법지(法智)와 고지(苦智), 등지(等智)를 성취한다.
세 번째 마음과 네 번째 마음을 지나서 네 가지 지혜18) 즉 고지(苦智)ㆍ법지(法智)ㆍ비지(比智)ㆍ등지(等智)를 성취한다.
습(習)ㆍ진(盡)ㆍ도(道)의 법지(法智) 가운데서 하나하나 지혜가 늘어나서, 욕망을 여읜 사람은 지타심지(知他心智)19)를 성취하여 늘어난다.
고비인(苦比忍)과 고비지(苦比智)는 18가지 번뇌를 끊는다.
이 네 가지 마음으로 고제(苦諦)를 증득할 수 있다.
030_0142_c_02L第二心中成就法智苦智等智過第三心第四心成就四智苦智法智比智等智道法智中一一智增離欲人知他心智成就增苦比忍苦比智斷十八結是四心苦諦能得
습법인(習法忍)과 습법지(習法智)로 욕계의 번뇌인 일곱 가지 번뇌를 끊으며, 습비인(習比忍)과 습비지(習比智)로 색계와 색계의 번뇌인 열세 가지 번뇌를 끊는다.
진법인(盡法忍)과 진법지(盡法智)는 욕계의 번뇌인 일곱 가지 번뇌를 끊으며, 진비인(盡比忍)과 진비지(盡比智)는 색계와 무색계의 번뇌인 열두 가지 번뇌를 끊는다.
도법인(道法忍)과 도법지(道法智)는 욕계의 번뇌인 여덟 가지 번뇌를 끊으며, 도비인(道比忍)과 도비지(道比智)는 색계와 무색계의 번뇌인 열네 가지 번뇌를 끊는다.
도비지를 수타반나(須陀般那)하자상자(下子上子)20)라고 한다.
진실로 모든 법의 모습을 아는 것이 바로 이 열여섯 가지의 마음의 능함[能]이다.
열다섯 가지 마음속의 날카로운 근기를 수법행(隨法行)이라고 하며, 아둔한 근기를 수신행(隨信行)이라고 하니, 이러한 두 사람은 아직 욕망을 여의지 못하였으므로 초과향(初果向)21)이라고 한다.
030_0142_c_07L習法忍習法智斷欲界繫七結習比忍習比智斷色色界繫十三結盡法忍盡法智斷欲界繫七結盡比忍盡比智斷色無色界繫十二結道法忍道法智斷欲界繫八結道比忍道比智斷色無色界繫十四結道比智是名須陁般那下子上子實知諸法相是十六心能十五心中利根名隨法行鈍根名隨信行是二人未離欲名初果向
먼저 아직 번뇌[結]를 끊지 못하고 열여섯 가지 마음을 얻는 것을 수타반나라고 한다.
만일 먼저 6품(品)의 번뇌를 끊고 열여섯 가지 마음을 얻었다면 식기타가미(息忌陀迦迷)진(秦)나라 말로는 일래(一來)이다.22)라고 한다.
만일 먼저 9품의 번뇌를 끊고서 열여섯 가지 마음을 얻는다면 아나가미(阿那迦迷)진나라 말로는 불래(不來)이다.23)라고 한다.
030_0142_c_16L先未斷結得十六心名須陁般那若先斷六品結十六心名息忌陁伽迷秦言一來若先斷九品結得十六心名阿那迦迷秦言不來
먼저 아직 욕망을 여의지 못하고 88가지 번뇌를 끊었기 때문에 수타반나라고 하며, 또한 무루과(無漏果)의 선근을 얻었으므로 수타반나(須陀般那)라고 한다.
예리한 근기를 견득(見得)24)이라 하고, 둔한 근기를 신애(信愛)25)라고 한다.
사유의 번뇌가 아직 끊어지지 않았으면 나머지 일곱 번 세상에 태어나며,26) 만일 사유의 번뇌 세 가지를 끊으면 초과(初果)와 2과(果)의 중간에 있는 성자[家家]로 세 번 세상에 태어난다.27)
030_0142_c_19L先未離欲斷八十八結故名須陁般那次無漏果善根得得故名須陁般那利根名見得鈍根名信愛思惟結未餘殘七世生若思惟結三種斷家家三世生
030_0143_a_01L성스러운 길 8분(分)과 37품(品)을 흐름[流]이라고 하니,열반을 향해 흐른다는 뜻이며, 이것을 따라 흘러가기 때문에 수타반나라고 한다. 이것이 부처님 첫 공덕의 씨앗이 되며, 악도를 벗어날 수 있다.
세 가지 번뇌를 끊어 세 가지 독을 엷게 하는 것을 식기타가미(息忌陀迦迷)라고 한다.
또한 욕계의 번뇌는 아홉 가지[상상(上上)ㆍ상중(上中)ㆍ상하(上下)ㆍ중상ㆍ중중ㆍ중하ㆍ하상ㆍ하중ㆍ하하]로 견제(見諦)로 끊고 사유(思惟)로 끊는다.
030_0143_a_01L聖道八分三十七品名流向涅槃隨是流行故名須陁般那是爲佛初功德子惡道得脫三結斷毒薄名息忌陁伽迷復次欲界結九上上上中上下中上中中中下下上下中下下見諦斷思惟斷
만일 범부인 사람이 먼저 유루도(有漏道)로써 욕계의 번뇌인 여섯 가지 번뇌를 끊고 견제도(見諦道)에 들어가 열여섯 가지 마음을 얻으면 식기타가미라고 한다.
만일 여덟 가지를 끊어 견제도에 들어간다면 열여섯 가지 마음 가운데 한 가지인 식기타가미 과(果)에서 아나가미(呵那伽迷)로 향한다28).
030_0143_a_05L若凡夫人先以有漏道斷欲界繫六種結入見諦道十六心中得名息忌陁伽迷若八種斷入見諦道第十六心中一種名息忌陁伽迷果向呵那伽迷
만일 부처님의 제자가 수타반나를 얻으면 단순하게 세 가지 번뇌를 끊고 식기타가미를 얻고자 한다. 이것은 사유하여 끊는 것으로, 욕계의 번뇌인 아홉 가지 번뇌를 여섯 가지로 끊으면 이것을 식기타가미의 여덟 가지 끊음이라고 하며, 한 가지 식기타가미의 과(果)가 아나가미로 향한다고 한다.
030_0143_a_10L若佛弟子得須陁般那單斷三結欲得息忌陁伽迷是思惟斷欲界繫九種結六種斷是名息忌陁伽迷八種斷是名一種息忌陁伽迷果向阿那伽迷
만일 범부인 사람이 먼저 욕계의 번뇌인 아홉 가지 번뇌를 끊고 견제도에 들어간다면 열여섯 가지 마음 가운데 아나가미라고 한다.
만일 식기타가미를 얻고 나아가 세 가지 사유의 번뇌를 끊는다면 아홉 번째의 해탈도29)인 아나가미라고 한다.
030_0143_a_14L若凡夫人先斷欲界繫九種入見諦道第十六心中名阿那伽迷若得息忌陁伽迷進斷三種思惟結第九解脫道名阿那伽迷
아나가미에는 아홉 가지가 있으니, 지금 세상에서 반드시 열반에 들어가는 아나가미, 중음(中陰)에서 열반에 들어가는 아나가미, 태어난 뒤에 열반에 들어가는 아나가미, 간절하게 찾아서 열반에 들어가는 아나가미, 간절하게 찾지 않고 열반에 들어가는 아나가미, 최상의 행(行)으로 열반에 들어가는 아나가미, 아가니타에 이르러 열반에 들어가는 아나가미, 무색정(無色定)에 도달하여 열반에 들어가는 아나가미, 몸으로 깨닫는 아나가미, 아라한을 향해 가는 아나가미이다.
030_0143_a_17L阿那伽迷有九種今世必入涅槃阿那伽迷陰入涅槃阿那伽迷生已入涅槃阿那伽迷懃求入涅槃阿那伽迷不懃求入涅槃阿那伽迷上行入涅槃阿那伽迷至阿迦尼咤入涅槃阿那伽到無色定入涅槃阿那伽迷身證阿那伽迷行向阿羅漢阿那伽迷
030_0143_b_01L색계와 무색계의 아홉 가지 번뇌가 있으니, 아홉 번째의 무애도금강삼매(無礙道金剛三昧)로써 일체의 번뇌를 타파한다.
아홉 번째 해탈도(解脫道)에서 지혜를 다하여 일체의 선근을 닦으면 이를 아라한과라고 하는데, 이 아라한에는 아홉 가지가 있으니, 퇴법(退法)ㆍ불퇴법(不退法)ㆍ사법(死法)ㆍ수법(守法)ㆍ주법(住法)ㆍ필지법(必知法)ㆍ불괴법(不壞法)ㆍ혜탈(慧脫)ㆍ공탈(共脫)이다.
유지(濡智)30)로써 부드럽게 나아가 다섯 가지 법을 행하되 물러나면 이것을 퇴법(退法)이라고 하며, 영리한 지혜[利智]로 영리하게 나아가 다섯 가지 법을 행하되 물러남이 없으면, 이것을 불퇴법(不退法)이라고 한다.
030_0143_b_01L無色界九種結以第九無㝵道金剛三昧破一切結第九解脫道盡智修一切善根是名阿羅漢果是阿羅漢有九退法不退法死法守法住法必知不壞法慧脫共脫濡智濡進行五種法退是名退法利智利進行五種法不退是名不退法
유지(濡智)로 부드럽게 나아가되 영리하게 사유하는 것을 싫어하여 스스로 몸을 죽이는 것을 사법(死法)이라고 하며, 유지(濡智)로 크게 나아가 스스로 몸을 지키는 것을 수법(守法)이라고 한다.
중지(中智)로 적당하게 나아가 더함도 덜함도 없이 가운데를 차지하여 머무는 것을 주법(住法)이라고 하며, 조금 영리한 지혜로 부지런히 정진하여 허물어지지 않는 마음의 해탈을 얻을 수 있는 것을 필지법(必知法)이라 하며, 영리한 지혜로 크게 나아가 처음으로 무너지지 않는 마음의 해탈을 얻는 것을 불괴법(不壞法)이라고 한다.
여러 가지 선정에 들어가지 않고 아직 경지에 이르지 않았는데도 여러 가지 번뇌가 없어지는 것을 혜해탈(慧解脫)이라고 하며, 여러 가지 선정을 얻고 또한 멸선(滅禪)과 여러 가지 누진(漏盡)을 얻는 것을 공해탈(共解脫)이라고 한다.
030_0143_b_08L濡智濡進利思惟自殺身是名死法濡智大進自護身是名守法中智中進不增不減處中而住是名住法少利智懃精進得不壞心解脫是名必知法利智大初得不壞心解脫是名不壞法能入諸禪未到地中諸漏盡是名慧解脫得諸禪亦得滅禪諸漏盡是名共解脫
어떤 아라한은 일체의 유위법을 언제나 충분히 만족하여 다시 공덕을 추구하지 않고 때를 기다려 열반에 들어가고, 어떤 아라한은 4선(禪)ㆍ4무색정(無色定)ㆍ4등심(等心)ㆍ8해탈(解脫)ㆍ8승처(勝處)ㆍ10일체입(一切入)ㆍ9차제(次第)ㆍ6신통(神通)ㆍ원지(願智)ㆍ아란야나삼매진(秦)나라 말로는 무쟁(無諍)이라고 한다. 아란야(阿蘭若)란 무사(無事), 혹은 공적(空寂)이라고도 한다. 옛적에 말하기를 “수보리가 늘 공적행(空寂行)을 행한다”고 했는데, 그것은 잘못된 말이다. 이로부터 무쟁행을 실천할 뿐이니, 무쟁이란 장차 중생들을 보호하여 그들로 하여금 나에 대하여 다툼이 일어나지 않게 할 뿐이다. 다툼이 일어나는 것은 마치 사리불과 목련이 밤에 도공(陶公)의 집에 들어가 자는데 구가리(拘迦離)가 와서 다툼을 일으킨 것과 같은 것이 바로 이것이다.ㆍ초월삼매(超越三昧)ㆍ훈선(熏禪)ㆍ3해탈문(解脫門)ㆍ방사(放捨)방사라는 것은 3해탈문의 공(空)ㆍ무원(無願)ㆍ무상(無相)이다. 공ㆍ무원ㆍ무상은 12문을 생각하되 도리어 집착하는 것이다.를 구하여 다시 이지(利智)를 지어 부지런히 정진한다.
이와 같이 여러 선정의 공덕에 들어가면, 이것을 불퇴법(不退法)과 불괴법(不壞法)을 얻었다고 한다.
030_0143_b_16L有阿羅漢一切有爲法常厭滿足更不求功德待時入涅槃有阿羅漢求四禪四無色定四等心八解八勝處十一切入九次第六神通願智阿蘭若那三昧秦言無諍阿蘭若言無事或言空寂舊言須菩提常行空寂行非也自是無諍行耳無諍者將護衆生不令起諍於我耳起諍如舍利弗目連夜入陶屋中宿致拘迦離起諍者是也超越三昧熏禪三解脫門及放捨放捨者三脫門無願無相空無願無相卽十二門念反著者也更作利智懃精進入如是諸禪功德名得不退法不壞法
030_0143_c_01L만일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지 않아서 불법(佛法)이 없으며제자가 없는 때라면, 이때는 욕망을 여읜 사람인 벽지불(辟支佛)이 출현한다.
벽지불은 세 가지가 있으니, 상ㆍ중ㆍ하이다.
하(下)란 본래 수타반나를 얻었으나 식기타가미와 같다.
이 수타반나는 일곱 번째 세상에서 사람 가운데 태어났지만 이때는 불법이 없어서 제자가 될 수 없었으나 다시 여덟 번째 세상에는 태어나지 않으니, 이때 벽지불이 된다.
만일 식기타가미가 두 번째 세상에 태어난다면, 이때는 불법이 없어서 제자가 될 수 없으나 다시 세 번째 세상에는 태어나지 않으니, 이때 벽지불이 된다.
030_0143_c_01L若佛不出世無佛法無弟子時是時離欲人辟支佛出辟支佛有三種下者本得須陁般那若息忌陁伽迷是須陁般那於第七世生人中是時無佛法不得作弟子復不應八世生是時作辟支佛若息忌陁伽迷二世生是時無佛法不得作弟子復不應三世生是時作辟支佛
어떤 사람이 벽지불이 되기를 원하여 벽지불의 선근을 심을 때는 불법이 없어도 선근이 익으니, 이때 세상을 싫어하여 집을 나와 도를 얻으면 벽지불이라고 하며, 이것을 중벽지불(中辟支佛)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이 부처님의 길을 찾아서 지력(智力)으로 나아감에 힘이 모자라 인연으로 물러나니예컨대 사리불과 같은 경우이다., 이때는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시지도 않았고 불법도 없으며 제자도 없으나 선근의 행이 익어서 벽지불이 된다. 특징이 적기도 하고 많기도 하니, 세상을 싫어하여 집을 나와 도를 얻었기에 이것을 상벽지불(上辟支佛)이라고 한다.
030_0143_c_09L有人願作辟支佛種辟支佛善根時無佛法善根熟爾時厭世出家得道名辟支佛是名中辟支佛人求佛道智力進力少以因緣退如舍利弗是也是時佛不出世無佛法亦無弟子善根行熟作辟支佛有相好若少若厭世出家得道是名上辟支佛
모든 법 가운데 지혜가 얕아 들어가는 것을 아라한이라고 하며, 중간 정도로 들어가는 것을 벽지불이라고 하며, 깊게 들어가는 것을 부처님이라고 하니, 마치 멀리서 나무를 보면 가지를 분별할 수 없지만 조금 가까워지면 가지를 분별할 수는 있으나 꽃과 잎사귀는 분별할 수 없으며, 나무 아래에 도달해서는 모두를 분별할 수 있어서 나무의 가지와 잎사귀와 꽃과 열매를 아는 것과 같다.
성문(聲聞)은 일체의 제행(諸行)이 무상(無常)이며, 일체의 모든 법은 주인이 없어서, 오직 열반만이 가장 안온한 것임을 안다.
성문이 능히 이와 같이 관할 수 있다 해도, 분별하여 깊숙하게 들어가고 깊게 알 수는 없다.
벽지불은 약간은 분별할 수 있더라도 깊숙하게 들어가고 깊게 알 수는 없다.
부처님께선 모든 법을 알고 분별하여 통하고 깊이 들어가 깊게 아신다.
030_0143_c_15L諸法中智慧淺入名阿羅漢中入名辟支佛深入名佛如遙見樹不能分別枝小近能分別枝不能分別華到樹下盡能分別知樹枝聲聞能知一切諸行無常一切諸法無主涅槃善安隱聲聞能如是觀不能分別深入深知辟支佛少能分別亦不能深入深知佛知諸法分別究暢深入深知
030_0144_a_01L바라내(波羅奈)의 국왕이 뜨거운 여름에 높은 누각 위에 살며7보로 꾸민 평상에 앉아 청의(靑衣)로 하여금 우두전단향(牛頭栴檀香)을 갈아 몸에 바르게 하였는데, 청의가 팔뚝에 많은 팔찌를 차고 있어서 왕의 몸을 문지를 때마다 팔찌 소리가 귀에 가득하였다. 왕이 그것을 매우 근심하여 차례대로 벗게 하였더니 팔찌가 적어지자 소리도 희미해졌고, 오직 팔찌가 하나일 때 고요하여 소리가 없었다. 왕이 그때 깨닫고 말하기를, “국가의 신하ㆍ백성ㆍ궁인(宮人)ㆍ채녀(婇女)가 일이 많으면 번뇌가 많은 것이 또한 이와 같으니, 즉시 욕망을 버리고 외로운 곳에서 사유하여 벽지불을 얻으리라”고 하고는, 수염과 머리를 스스로 깎고 자연의 옷을 입고 누각에서 떠나, 자신의 신족력(神足力)으로 집을 나와 산으로 들어갔으니, 이와 같은 인연은 중품(中品) 벽지불이다.
030_0144_a_01L如波羅奈國王夏暑熱時處高樓上坐七寶牀令靑衣磨牛頭栴檀香塗身靑衣臂多著釧摩王身時釧聲滿耳甚患之教次第令脫釧少聲微唯獨一釧寂然無聲王時悟曰國家臣民婇女多事多惱亦復如是卽時離欲獨處思惟得辟支佛鬚髮自落自然衣從樓閣去以己神足力出家入山如是因緣中品辟支佛也
만일 수행자가 부처의 길을 찾아 선정에 들어가면, 먼저 마땅히 마음을 묶어 시방 삼세의 여러 부처님의 생신(生身)을 오로지 생각해야만 하지, 땅ㆍ물ㆍ불ㆍ바람ㆍ산ㆍ나무ㆍ초목을 생각해선 안 되니, 하늘과 땅 사이에 형체가 있는 무리나 그 밖에 나머지 존재를 다 생각하지 말고, 다만 여러 부처님의 생신이 허공에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비유컨대 큰 바다의 맑은 물 중앙에 금산왕수미(金山王須彌)와 같고, 밤의 어둠 속에서 큰 불을 태우는 것과 같으며, 커다란 사당 가운데의 7보 깃발과 같이, 부처님의 몸도 이와 같아서 32상(相)과 80종호(種好)를 지니며, 항상 무량하고 청정한 광명이 허공의 푸른 색깔 속에서 나온다.
항상 부처님의 몸과 모습을 생각하는 것이 이와 같으면 수행자는 곧 ‘시방삼세의 모든 부처님께서 마음의 눈앞에 있다’는 일체실견삼매(一切悉見三昧)를 얻는다.
030_0144_a_09L若行者求佛道入禪先當繫心專念十方三世諸佛生身莫念地水火風山樹草木天地之中有形之類及諸餘法一切莫念但念諸佛生身處在虛空譬如大海淸水中央金山王須如夜闇中然大火如大施祠中七寶幢佛身如是有三十二相八十種常出無量淸淨光明於虛空相靑色中常念佛身相如是行者便得十方三世諸佛悉在心目前一切悉見三昧
030_0144_b_01L만일 마음이 한가하여 대상에 머물면 다시 거두어서 머물게 하고 생각을 부처님의 몸[佛身]에 두니, 이때 문득 동쪽 3백천만억 가지의 무량한 일체의 부처님을 보며, 이와 같이 남쪽ㆍ서쪽ㆍ북쪽 4유(維)와 위아래로 생각하는 바의 방향에 따라 일체의 부처님을 본다.
마치 사람이 밤에 별자리를 보되 백천 가지의 무량한 별을 모두 보는 것과 같다.보살은 이 삼매를 얻어 무량 겁의 두터운 죄를 제거하고 엷어지게 하며, 엷어진 것은 없어지게 한다.
이 삼매를 얻고 나서 마땅히 부처님의 갖가지 무량한 공덕과 일체의 지혜와 일체의 이해(理解)와 일체의 견해와 일체의 덕을 생각해야만 대자대비의 자재함을 얻는다.
처음 무명의 알에서 나와서는 4무외(無畏)ㆍ5안(眼)ㆍ10력(力)ㆍ18불공법(不共法)으로 능히 무량한 괴로움을 제거하여 늙고 죽음의 두려움에서 구제되어 늘 즐거운[常樂] 열반과 함께한다.
030_0144_a_20L若心餘處緣還攝令住念在佛是時便見東方三百千萬千萬億種無量諸佛如是南方西方北方上下隨所念方見一切佛如人夜觀星宿百千無量種星宿悉見菩薩得是三昧除無量劫厚罪令薄薄者令滅得是三昧已當念佛種種無量功德一切智一切解一切見一切德大慈大悲自在自初出無明㲉四無五眼十力十八不共法能除無量救老死畏與常樂涅槃
부처님께서는 이와 같은 갖가지 무량한 공덕을 지니신다.
이러한 생각을 하고 나서 스스로 발원하여 말하기를, “나는 마땅히 언제 부처님의 몸과 부처님의 공덕을 얻어서 높고 높음이 이와 같을 것인가?”라고 하고, 다시 큰 서원을 세우기를, ‘과거 일체의 복과 현재 일체의 복을 모두 지니고 부처님의 길을 추구하되 나머지 과보를 사용하지 않는다’라고 한다.
030_0144_b_07L佛有如是等種種無量功德作是念已自發願我何時當得佛身佛功德巍巍如復作大誓過去一切福現在一切盡持求佛道不用餘報
다시 생각하기를, ‘일체의 중생들은 매우 가엾고 불쌍하다. 여러 부처님의 몸과 공덕은 높고 높아서 이와 같은데, 중생들은 어찌하여 다시 나머지 업을 구하고 부처님을 찾지 않는가?’라고 하니, 비유컨대 고귀한 집의 눈먼 아들이 크고 깊은 구덩이에 떨어져 배고프고 고단하고 괴로워하며 똥과 진흙을 먹으니, 아버지가 그것을 매우 가엾게 여기고 방편을 찾아서 깊은 구덩이에서 그를 건져내고 훌륭한 음식을 먹이는 것과 같다.
030_0144_b_11L復作是念一切衆生甚可憐愍諸佛身功德巍巍如是衆生云何更求餘業而不求譬如貴家盲子墮大深坑飢窮困苦食糞食泥父甚愍之爲求方便之於深坑食之以上饌
030_0144_c_01L수행자가 생각하여 말하기를, “부처님의 두 가지 몸과 공덕의 단이슬[甘露]은 이와 같지만 여러 중생들은 생사의 깊은 구덩이에 떨어져 여러 가지 더러운 것을 먹는구나. 크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으로 내 마땅히 일체 중생들을 제도하여 부처님의 길을 얻고 생사의 언덕을 건너게 하며, 부처님의 갖가지 공덕과 법의 맛[法味]으로 모두 배부르게 하리라”라고 한다.
일체의 불법(佛法)은 원하면 모두 얻을 수 있으니, 듣고 외워 지니며 질문하고 관하며 행하여 과(果)를 얻는 것으로 사다리를 삼고, 크고 요긴한 서원을 세워 세 가지 서원의 갑옷을 입으며, 바깥으로는 마군의 무리를 격파하고 안으로는 번뇌의 도적을 깨뜨려서, 곧바로 윤회하지 않는 경지[不迴]에 들어간다.
이와 같은 세 가지 서원을 무량한 여러 가지 서원과 비교하여 서원을 모두 머무르게 하니,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부처님의 길을 얻기 때문이다.이와 같이 생각하고 이와 같이 서원하면 이것이 바로 보살의 염불삼매(念佛三昧)이다.
030_0144_b_16L行者念言二種身功德甘露如是而諸衆生墮生死深坑食諸不淨以大悲心我當拯濟一切衆生令得佛道度生死岸以佛種種功德法味悉令飽滿一切佛法願悉得之聞誦持問觀行得果爲作階梯立大要誓被三願鎧外破魔衆內擊結賊直入不迴如是三願比無量諸願願皆住之爲度衆生得佛道故如是念如是願是爲菩薩念佛三昧
보살도를 행하는 사람은 3독 가운데서 만일 음욕이 치우치게 많으면 먼저 스스로 몸을 관한다.
뼈와 살 피부ㆍ근맥(筋脈)ㆍ흐르는 피ㆍ간ㆍ폐ㆍ장ㆍ위ㆍ오줌ㆍ똥ㆍ눈물ㆍ침 등 서른여섯 가지 물건과 9상(想)31)의 더러움에 마음을 기울여 안으로 관하고 생각이 벗어나지 않게 하되, 바깥으로 여러 연(緣)을 생각하면 추슬러서 되돌아오게 한다.
마치 사람이 촛불을 들고 잡곡 창고에 들어가서 갖가지로 분별하되 콩ㆍ보리ㆍ조 등을 모르는 것이 없는 것과 같다.
030_0144_c_03L行菩薩道者於三毒中若婬欲偏多先自觀身骨肉皮膚筋脈流血肝肺腸胃屎尿涕唾三十六物九想不淨專心內觀不令外念外念諸緣攝之令還如人執燭入雜穀倉種種分別粟無不識知
또한 몸을 여섯 부분으로 나누어 관하니, 단단한 것은 땅의 성분이고, 축축한 것은 물의 성분이며, 뜨거운 것은 불의 성분이고, 움직이는 것은 바람의 성분이며, 구멍은 허공의 성분이고, 아는 것은 식(識)의 성분이다.
또한 도살한 소를 여섯 부분으로 나누어서 몸과 머리, 사지가 각각 다른 것과 같다.
몸에는 아홉 개의 구멍이 있어서 항상 더러운 것이 흘러나오며, 가죽주머니에는 똥이 담겨 있으니, 항상 이와 같이 관하여 생각을 벗어나지 않게 하되, 바깥으로 여러 가지 연(緣)을 생각하면 추슬러서 되돌아오게 한다.
030_0144_c_09L復次觀身六分堅爲地分濕爲水分熱爲火分動爲風分孔爲空分知爲識分亦如屠牛分爲六分身首四支各自異處身有九孔常流不淨革囊盛屎常作是觀不令外念外念諸緣攝之令還
만일 한마음을 얻어서 마음에 싫어함이 생겨 이 몸 여의기를 구하고, 재빨리 사라져 일찍 열반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이때는 마땅히 대자대비심을 일으켜서 커다란 공덕으로 중생들을 구제해야만 하니, 앞의 세 가지 서원을 일으키길, ‘모든 중생들이 부정(不淨)함을 알지 못하므로 여러 가지 잘못과 허물을 일으키니 내가 마땅히 그들을 단이슬의 땅에 올려 놓으리라. 또한 욕계의 중생들이 청정하지 못한 것에 즐겨 집착하는 것이 마치 개가 똥을 먹는 것과 같으니, 내 마땅히 제도하여 청정한 도에 이르게 하리라’고 한다.
030_0144_c_14L若得一心意生厭患求離此身欲令速滅早入涅槃是時當發大慈大悲以大功德拔濟衆生興前三願以諸衆生不知不淨起諸罪垢我當拔置於甘露地復次欲界衆生樂著不淨如狗食糞我當度脫至淸淨道
030_0145_a_01L또한, ‘나는 마땅히 일체 존재의 참다운 모습[諸法實相]은 항상하지도 않고 무상하지도 않으며, 깨끗하지도 않고 더럽지도 않다는 것을 배워서 찾으리라. 나는 왜 이 부정한 것에 집착하는가? 부정함을 관하는 지혜는 인연을 좇아 생기니, 나의 법과 같은 이는 마땅히 참다운 모습을 구해야만 하리라. 어떻게 몸속의 부정함을 싫어하고 열반을 취하는가?마땅히 마치 큰 코끼리가 빠르게 흐르는 물을 건너기 위해 시내의 밑바닥 끝까지 다하듯이 참다운 존재의 모습을 얻어서 열반에 들어가야 한다. 어찌 원숭이나 토끼처럼 빨리 흐르는 것을 두려워하여 서둘러 스스로 몸을 제도할 것인가? 내 이제 마땅히 배우되 보살법과 같이 하리라. 부정관(不淨觀)을 실행하여 음욕을 제거하고, 널리 중생들을 교화하여 욕망과 근심을 여의게 하되, 부정관에 매몰되지는 않으리라.
030_0144_c_20L復次我當學求諸法實相不有常不無常非淨非不淨我當云何著此不淨觀不淨智從因緣生如我法者當求實相何厭患身中不淨而取涅槃當如大象度駛流水窮盡源底得實法相滅入涅槃豈可如獼猴諸兔畏怖駛流趣自度身我今當學如菩薩法行不淨觀除卻婬欲廣化衆生令離欲患不爲不淨觀所厭沒
또한 이미 깨끗하지 않음을 관하였으면 곧 생사를 싫어하여, 마땅히 정문(淨門)을 관하되 마음을 세 곳 즉 코끝ㆍ미간ㆍ이마 위에 묶어놓아야 하니, 마땅히 이 속에서 한 마디의 가죽을 열어 피와 살을 청정하게 제거하고, 마음을 백골에 묶어서 생각을 벗어나지 않게 하며, 바깥으로 여러 연(緣)을 생각하면 추슬러서 되돌아오게 한다. 세 가지 연(緣)에 집착해서 항상 마음과 더불어 싸우나니, 마치 두 사람이 서로 씨름하는 것과 같다. 수행자가 만일 마음을 이기자면 곧 그것을 제압하여 머물게 하는 것 만함이 없으니, 이것을 한마음이라고 한다.
030_0145_a_06L復次旣觀不淨則厭生死當觀淨門繫心三處鼻端眉閒額上當於是中開一寸皮淨除血肉繫心白骨不令外念外念諸緣攝之令還著三緣中恒與心鬪如二人相撲行者若勝心則不如制之令是名一心
만일 싫어하는 것으로 크게 대비심을 일으켜 중생을 가엾게 여긴다면, 이 빈 뼈다귀 때문에 열반을 멀리 여의고 3악도에 들어가는 것이다. 내 마땅히 부지런히 힘쓰고 여러 가지 공덕을 지어 중생들을 교화해서 신상(身相)의 공함을 이해하게 하리라. 뼈는 가죽으로 덮여 있으나 사실은 부정(不淨)한 것을 모은 것이다. 중생을 위하기 때문에 내가 마땅히 이 모든 법의 모습을 분별해야 하리라’라고 한다.
조금이라도 청정하다는 생각이 있으면 마음에 애착을 일으키고, 부정하다는 생각이 많으면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키니, 존재의 모습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참다운 존재를 낳는다.
모든 존재의 참다운 모습 속에는 깨끗한 것도 없고 더러운 것도 없으며, 또한 닫힘도 없고 나옴도 없어서, 모든 존재를 평등하게 관하여 무너뜨릴 수도 없고 움직일 수도 없다.
이것을 모든 존재의 참다운 모습이라고 한다.나한법에서 벗어난 것이다.
030_0145_a_12L若以厭患起大悲心念衆生爲此空骨遠離涅槃入三惡我當懃力作諸功德教化衆生解身相空骨以皮覆實聚不淨爲衆生故徐當分別此諸法相有少淨想心生愛著不淨想多心生厭患有出法相故生實法諸法實相中無淨無不亦無閉亦無出觀諸法等不可壞不可動是名諸法實相出過羅漢法也
030_0145_b_01L보살도를 행하는 사람은 만일 성냄이 치우치게 많으면 마땅히 인자한 마음을 행하고, 동쪽의 중생을 생각해야 한다. 인자한 마음으로 청정하여 원망함도 없고 성냄도 없으며 넓고 커서 헤아릴 수 없으면, 모든 중생들이 눈앞에 있음을 보리니, 남쪽ㆍ서쪽ㆍ북쪽의 4유(維)와 위아래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마음을 통제하고 인자함을 행하며생각을 벗어나지 않게 하되, 바깥으로 다른 연(緣)을 생각하면 추슬러서 되돌아오게 하니, 마음의 눈으로 일체의 중생들을 관하면 모두가 분명하게 눈앞에 있음을 본다.
030_0145_a_20L行菩薩道者若瞋恚偏多當行慈心念東方衆生慈心淸淨無怨無恚大無量見諸衆生悉在目前南西北四維上下亦復如是制心行慈令外念外念異緣攝之令還持心目一切衆生悉見了了皆在目前
만일 한마음을 얻으면 마땅히 발원하여 말하기를, “나는 열반의 진실하고 청정한 법으로 중생들을 제도하여 참다운 즐거움을 얻게 하리라”고 해야 한다.
자삼매(慈三昧)를 행하는 마음이 이와 같다면 이것이 바로 보살도이다.
자삼매에 머물러서 일체 존재의 참다운 모습을 관하면 맑고 깨끗해서 무너지지도 않고 움직이지도 않으니, 발원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이 법의 이익[法利]을 얻게 한다.
이러한 삼매로 동쪽의 일체 중생들을 인자하게 생각하여 부처님의 즐거움을 얻게 하며, 시방도 또한 그러해서 마음이 구르고 어지럽지 않으면, 이것을 보살의 자삼매문(慈三昧門)이라고 한다.
030_0145_b_03L得一心當發願言我以涅槃實淸淨度脫衆生使得實樂行慈三昧如此者是菩薩道住慈三昧以觀諸實相淸淨不壞不動願令衆生此法利以此三昧慈念東方一切衆使得佛樂十方亦爾心不轉亂謂菩薩慈三昧門
󰃅 왜 일시에 총체적으로 시방의 중생들을 생각하지 않는가?
030_0145_b_10L問曰何不一時摠念十方衆生
󰂼 우선 한쪽을 생각하면 한마음을 얻기가 쉬우니, 그런 뒤에 점차 여러 방향으로 두루 미친다.
030_0145_b_11L答曰先念一方一心易得然後次第周遍諸方
󰃅 사람은 원수[怨家]가 있으면 항상 서로 해치고자 하니, 어떻게 인자함을 행하여 그들을 즐겁게 하고자 하는가?
030_0145_b_13L問曰人有怨家恒欲相害云何行慈欲令彼樂
󰂼 인자함은 마음의 법이니 마음에서 나온다. 먼저 친한 바를 따르고, 친함이 점차 증가하여 마침내 원수에게까지 미치니, 마치 불이 장작을 태우되 활활 타오르면 습기를 태울 수 있는 것과 같다.
030_0145_b_14L答曰慈是心法出生於心先從所親所親轉增乃及怨家如火燒薪盛能然濕
󰃅 혹 중생들이 갖가지 괴로움을 만나거나, 혹은 사람 가운데 있거나, 아니면 지옥 속에 있다면, 보살이 비록 인자하더라도 그들이 어찌 즐거움을 얻을 수 있겠는가?
030_0145_b_16L問曰或時衆生遭種種苦或在人中或地獄中菩薩雖慈彼那得樂
󰂼 먼저 즐거워하는 사람을 따라서 그의 즐거워하는 모습을 취하여, 저 괴로워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와 같은 즐거움을 얻게 하니, 마치 패군(敗軍)의 장수가 두려워서 쳐다보지 못하면 그를 바라보던 적군의 사람들이 모두 용사(勇士)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030_0145_b_18L答曰先從樂人取其樂相令彼苦人得如彼樂如敗軍將怖懼失膽視彼敵人皆謂勇士
󰃅 자삼매를 행하면 어떠한 훌륭한 이익이 있는가?
030_0145_b_20L問曰行慈三昧有何善利
030_0145_c_01L󰂼 수행자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집을 나오고 세속을 떠나 마땅히 인자한 마음을 행해야 한다’고 하고, 또한 사유하여 말하기를, “다른 사람이 믿음으로 보시하는 것을 먹음은 마땅히 이익을 행하는 것이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잠깐 동안이라도 인자함을 행하면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라, 곧 도에 들어가서 헛되이 보시를 받지 않는 것이다. 또한몸에는 물들인 옷을 걸치지만 마음은 응당 물들지 않아서 자삼매의 힘이 능히 오염되지 않게 한다. 또한 나의 마음으로 인자함을 행하여 법을 파괴하는 세상에서 나는 법이 있는 사람이며, 비법(非法)의 무리들 가운데 나는 법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므로 법다워서[如法] 고뇌가 없으니, 인자함의 선정32)이 지니는 힘 때문이다”라고 한다.
030_0145_b_21L答曰行者自念出家離俗應行慈心又思惟言食人信施宜行利益如佛所言須臾行慈是隨佛教則爲入道不空受施復次身著染服心應不染慈三昧力能令不染復次我心行慈於破法世我有法人非法衆中我有法人如法無惱慈定力故
보살은 도를 행하여 감로문(甘露門)으로 향하고, 갖가지 뜨거운 번뇌를 인자함으로 시원하게 하여 즐겁게 하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사람이 지독히 뜨거울 때는 맑고 시원한 연못에 들어가면 즐겁다.
또한 위대한 자비의 갑옷을 입으면 번뇌의 화살을 막아주며, 자비로 법의 약을 삼으면 원망과 번뇌의 독을 해소한다. 번뇌는 마음을 태우니, 인자함으로 능히 없앨 수 있다.
자비로 법의 사다리를 삼아 해탈의 집에 올라가며, 자비로 법의 배를 삼아 생사의 바다를 건너며, 훌륭한 법의 재물을 구할 때는 자비를 으뜸가는 보배로 삼고, 열반을 향해 가는 데는 자비를 도의 양식으로 삼는다.
자비로 준마(駿馬)를 삼아 열반으로 건너가고, 자비를 용감한 장수로 삼아서 3악도를 뛰어넘는다.
자비를 행할 수 있는 사람은 뭇 악을 녹일 수 있으며, 모든 하늘의 착한 신들이 항상 따라다니며 옹호한다.
030_0145_c_05L菩薩行道趣甘露門種種熱惱慈涼冷樂如佛所言人熱極時入淸涼池樂復次被大慈鎧遮煩惱慈爲法藥消怨結毒煩惱燒心能除滅慈爲法梯登解脫臺慈爲法渡生死海貧善法財慈爲上寶趣涅槃慈爲道糧慈爲駿足度入涅慈爲猛將越三惡道能行慈者伏衆惡諸天善神常隨擁護
󰃅 만일 수행하는 사람이 자삼매(慈三昧)를 얻는다면, 어떻게 해야 잃어버리지 않고 다시 더욱 늘리겠는가?
030_0145_c_13L問曰當行人得慈三昧云何不失而復增
󰂼 계(戒)를 배워서 맑고 깨끗하며, 잘 믿고 즐거움을 의지한다.
여러 가지 선정의 한마음의 지혜를 배우고, 조용한 곳에 살기를 즐거워하며, 항상 게을리하지 않는다. 욕심을 적게 하여 만족함을 알며, 행동은 인자한 가르침을 따른다. 몸을 절제하고 음식을 적게 먹으며, 잠자는 것을 줄이고, 초야(初夜)와 후야(後夜)에 사유를 멈추지 않는다. 번거로운 언어를 줄여 묵묵히 고요함을 지킨다. 앉고 눕고 가고 머묾에 때를 알아서 쉰다. 법도를 잃어 피로와 괴로움이 극도에 이르지 않도록 한다. 차고 따뜻함을 조화시켜 괴롭고 어지럽지 않게 한다. 이것을 일러 ‘인자함을 더한다’고 한다.
030_0145_c_15L答曰學戒淸淨善信倚樂學諸禪一心智慧樂處閑靜常不放逸欲知足行順慈教節身少食減損睡眠初夜後夜思惟不廢省煩言語默然守靜坐臥行住知時消息不令失度致疲苦極調和寒溫不令惱亂是謂益慈
030_0146_a_01L또한 불도(佛道)의 즐거움과 열반의 즐거움을 일체의 사람들에게 주는 것을 크게 자비롭다고 한다.
수행자는 사유하기를, ‘현재와 미래의 위대한 사람은 인자함을 행하여 일체를 이롭게 하므로 나도 역시 은혜를 입었으니, 이것이 나의 어진 도우미[祐]이다. 나도 마땅히 인자함을 행하여 마침내 베풀어 준 은혜에 보답해야 하리라’라고 한다.
또 다시 생각하여 말하기를,“대덕(大德)은 인자한 마음으로 일체의 중생을 가엾게 생각하고 이것으로 즐거움을 삼으니, 나도 마땅히 그렇게 하리라. 저 중생들을 생각하여 부처님의 즐거움과 열반의 즐거움을 얻게 하리니, 이것이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다. 또한 인자함의 힘은 일체 중생들로 하여금 마음으로 쾌락을 얻게 하며, 몸은 뜨거운 고뇌를 여의고 맑고 시원한 즐거움을 얻게 하니, 인자함을 행하는 복덕을 가지고 일체를 편안하게 할 것을 생각하여 그 은혜에 보답한다.
030_0145_c_21L復次以佛道樂涅槃之樂與一切人是名大慈行者思惟現在未來大人行慈利益一切我亦被蒙是我良祐我當行慈畢報施恩復更念言大德慈心愍念一切以此爲樂我亦當爾念彼衆生令得佛樂涅槃之樂是爲報恩復次慈力能令一切心得快身離熱惱得淸涼樂持行慈福安一切以報其恩
또한 인자함에는 훌륭한 이익이 있으니, 성냄의 법을 끊고 명칭의 문을 열며, 보시하는 이의 좋은 밭이어서 범천에 태어나는 원인이다”라고 한다.
욕심을 여읜 곳에 머물러 원망과 대립 그리고 투쟁의 뿌리를 없애버리므로 모든 부처님께서 칭찬하고 지혜로운 사람들이 사랑하고 공경하며, 능히 청정한 계율을 지녀 지혜의 밝음을 일으키고, 능히 법의 이로움을 들으며, 공덕의 제호(醍醐)로 좋은 사람을 결정한다.
출가의 용감한 힘으로 모든 악을 녹여 없애고, 욕설로 욕보이는 착하지 않음도 인자함으로 갚으면 항복시킬 수 있다.
열락(悅樂)을 묶어 모아서 정진법을 일으킨다.
부귀의 근본 원인은 지혜의 창고를 갖추는 것이니, 성실과 믿음의 창고는 여러 가지 훌륭한 법문이다.
칭찬하고 기리는 법[稱譽法]을 성취하여 근본적인 부처님의 바르고 참다운 길을 공경하고 두려워한다.
030_0146_a_06L復次慈有善利瞋恚法開名稱門施主良田生梵天住離欲處除卻怨對及鬪諍根佛稱揚智人愛敬能持淨戒生智慧能聞法利功德醍醐決定好人家猛力消滅諸惡罵辱不善慈報能結集悅樂生精進法富貴根因智慧府誠信庫藏諸善法門致稱譽敬畏根本佛正眞道
만일 사람이 악을 지니고 그것을 지향하면 도리어 스스로 그 재앙을 받는다.
다섯 가지 나쁜 말이 있으니, 때에 맞지 않는 말, 진실하지 않은 말, 이롭지 않은 말, 인자하지 않은 말, 부드럽지 않은 말이다. 이 다섯 가지 나쁜 말은 사람을 감동시킬 수 없고, 일체의 독해(毒害)도 역시 막을 수 없으니, 비유컨대 작은 불로 커다란 바다를 뜨겁게 할 수 없는 것과 같다.이 아래는 우전왕(優塡王)이 5백 대의 화살을 쏘았다는 것에서 나왔다.
030_0146_a_14L若人持惡向還自受其殃五種惡語非時語非實非利語非慈語非軟語是五惡語不能傾動一切毒害亦不能傷譬如小火不能熱大海此下應出優塡王持五百發箭
030_0146_b_01L『비라경(毘羅經)』에 나오는 우전왕의 아파타나(阿婆陀那:비유)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두 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첫째는 무비(無比)였고, 둘째는 사미파제(舍迷婆帝)였다.
무비가 사미파제를 비방하니, 사미파제에게는 5백 명의 시종들이 있었는데 왕이 5백 대의 화살로 한 명 한 명 쏘아 죽이고자 했다.
사미파제가 여러 시종들에게 말했다.
‘내 뒤에 서라.’
이때 사미파제는 자삼매(慈三昧)에 들어갔다.
왕이 활을 당겨 쏘았으나 화살은 발아래 떨어졌으며,두 번째 화살은 도리어 왕의 다리 아래로 향했다.
왕이 크게 놀랐으나 다시 화살을 쏘려고 했다.
사미파제가 왕에게 아뢰었다.
‘그만두십시오, 그만두십시오. 부부의 도리는 서로 얘기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 화살을 쏜다면 곧바로 당신의 심장을 부술 것입니다.’
왕이 그때 두려워하며 활과 화살을 버리고 물었다.
‘그대는 어떠한 술법을 지니고 있는가?’
대답하였다.
‘저는 다른 술법이 없습니다. 저는 부처님의 제자로서 자삼매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030_0146_a_18L如『毘羅經』中優塡王阿婆陁那說有二夫人一名無比二名舍迷婆帝無比誹謗舍迷婆帝舍迷婆帝有五百直人以五百箭欲一一射殺之舍迷婆帝語諸直人在我後立是時舍迷婆帝入慈三昧王挽弓射之箭墮足下二箭還向王腳下王大驚怖復欲放舍迷婆帝語王言止止夫婦之義是故相語若放此箭當直破汝心時恐畏投弓捨射問言汝有何術我無異術我是佛弟子入慈三昧故也
이 자삼매를 간략하게 설명하면 세 가지 연(緣)이 있으니, 생연(生緣)과 법연(法緣)과 무연(無緣)이다.
아직 도를 얻지 못한 모두를 생연이라 하며, 아라한과 벽지불은 법연이라 하고, 모든 부처님과 세존은 무연이라 하니, 그러므로 간략하게 자삼매문이라고 설명한다.
보살도를 행하는 사람은 3독 가운데에서 만일 어리석음이 치우치게 많다면 마땅히 12분(分)을 관하여 두 가지 어리석음을 타파해야만 하니, 안으로는 몸의 어리석음을 타파하고 밖으로는 중생의 어리석음을 타파한다.
사유하고 생각해 말하기를, “나와 중생은 함께 재액의 어려움 속에 있으니, 항상 태어나고, 항상 늙으며, 항상 병들고, 항상 죽으며, 항상 없어지고, 항상 나온다. 중생은 가엾어서 길에서 나올 줄 모르니, 무엇을 쫓아서 벗어날 것인가?”라고 한다.
030_0146_b_07L是慈三昧略說有三種緣生緣法緣無緣諸未得道是名生緣阿羅漢辟支佛是名法緣諸佛世尊是名無緣是故略說慈三昧門行菩薩道者於三毒中若愚癡偏當觀十二分破二種癡內破身癡外破衆生癡思惟念言我及衆生俱在厄難常生常老常病常死常滅衆生可憐不知出道從何得脫
한마음으로 사유하되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인연을 따라서 태어난다’라고 하고, 마땅히 다시 ‘어떤 인연으로 생기는가?’라고 사유하라.
한마음으로 ‘생의 인연은 유(有)이고, 유의 인연은 취(取)이며, 취의 인연은 애(愛)이고, 애의 인연은 수(受)이다. 수의 인연은 촉(觸)이고, 촉의 인연은 6입(入)이며, 6입의 인연은 명색(名色)이다. 명색의 인연은 식(識)이고, 식의 인연은 행(行)이며, 행의 인연은 무명(無明)이다’라고 사유하라.
이와 같이 다시 ‘마땅히 어떠한 인연으로 태어나며 늙고 죽음을 없애는가?’라고 사유하라.
030_0146_b_15L心思惟生老病死從因緣生當復思惟何因緣生一心思惟生因緣有因緣取取因緣愛愛因緣受受因緣觸因緣六入六入因緣名色名色因緣識識因緣行行因緣無明如是復思惟當何因緣滅生老死
030_0146_c_01L한마음으로 사유하되 ‘태어남이 없어지기 때문에 늙고 죽는 것이 없어지며, 유가 없어지기 때문에 태어남이 없어지며, 취가 없어지기 때문에 유가 없어진다. 애가 없어지기 때문에 취가 없어지며, 수가 없어지기 때문에 애가 없어진다. 촉이 없어지기 때문에 수가 없어지며, 6입이 없어지기 때문에 촉이 없어진다. 명색이 없어지기 때문에 6입이 없어지며,식이 없어지기 때문에 명색이 없어진다. 행이 없어지기 때문에 식이 없어지고, 어리석음이 없어지기 때문에 행이 없어진다’라고 하라.
030_0146_b_21L一心思惟滅故老死滅有滅故生滅取滅故有愛滅故取滅受滅故愛滅觸滅故受滅六入滅故觸滅名色滅故六入識滅故名色滅行滅故識滅癡滅故行滅
이 가운데서 12분(分)은 무엇인가?
무명분(無明分)은 앞도 모르고 뒤도 모르고 앞뒤도 모른다. 안도 모르고 바깥도 모르며 안팎도 모른다. 부처님도 모르고 법도 모르며 승가도 모른다. 괴로움[苦]도 모르고 습(習)도 모르며 진(盡)도 모르고 도(道)도 모른다. 업도 모르고 과보도 모르며 업과(業果)도 모른다. 인(因)도 모르고 연(緣)도 모르며 인연(因緣)도 모른다. 죄도 모르고 복도 모르며 죄복(罪福)도 모른다. 선도 모르고 악도 모르며 선악도 모른다. 유죄법(有罪法)도 모르고 무죄법(無罪法)도 모르며 마땅히 가까이해야 할 법도 모르고 마땅히 멀리해야 할 법도 모른다. 유루법(有漏法)도 모르고 무루법(無漏法)도 모르며 세간법(世間法)도 모르고 출세간법(出世間法)도 모른다. 과거의 법도 모르고 미래의 법도 모르며 현재의 법도 모른다. 흑법(黑法)도 모르고 백법(白法)도 모른다. 인연을 분별하는 법도 모르고 6촉법(觸法)도 모르고 참답게 깨닫는 법도 모른다.
이와 같이 갖가지로 알지 못하고 지혜롭지 못하여 어둡고 검어 밝음이 없음을 보지 못하니, 이것을 무명(無明)이라고 한다.
030_0146_c_03L此中十二分云何無明分知前不知後不知前後不知內不知不知內外不知佛不知法不知僧不知苦不知習不知盡不知道不知不知果不知業果不知因不知緣不知因緣不知罪不知福不知罪福不知善不知不善不知善不善不知有罪法不知無罪法不知應近法知應遠法不知有漏法不知無漏法不知世閒法不知出世閒法不知過去法不知未來法不知現在法不知黑法不知白法不知分別因緣法知六觸法不知實證法如是種種不知不慧不見闇黑無明是名無明
무명을 인연하여 행이 있으니, 무엇을 행이라 하는가?
행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신행(身行)ㆍ구행(口行)ㆍ의행(意行)이다.
무엇이 신행인가?
들숨과 날숨이 바로 신행법(身行法)이니, 왜냐하면 이 법은 몸에 속하기 때문에 신행이라고 한다.
030_0146_c_16L明緣行云何名行行有三種身行意行云何身行入息出息是身行所以者何是法屬身故名身行
030_0147_a_01L무엇이 구행인가?
유각(有覺)과 유관(有觀)33)이니, 이것은 각(覺)과 관(觀)을 만들고 나서 이후에 입으로 말하는 것이다. 만일 각과 관이 없으면 말[言說]도 없으니, 이것을 구행이라고 한다.
무엇이 의행인가?통(痛)은 세계의 사람들이 집착하는 세 종류의 통을 말한다. 통은 응당 수(受)가 되니, 수(受)는 곧 경계에 따라 고락(苦樂)을 받는다. 상계(上界)엔 없으므로 마땅히 수상(受想)을 말하는 것이니, 출가한 이가 근심하는 바이다.
통상(痛想)34)이 바로 의법(意法)이니, 마음[意]에 속하기 때문에 이것을 의행이라고 한다.
또한 욕계의 계행(繫行)ㆍ색계의 계행ㆍ무색계의 계행이 있으며,또한 선행(善行)ㆍ불선행(不善行)ㆍ부동행(不動行)이 있다.
무엇이 선행인가?
욕계의 일체 선행과, 또한 색계의 3지(地)이다.
무엇이 불선행인가?
여러 가지 착하지 않은 법이다.
무엇이 부동행인가?
제4선의 유루(有漏)의 선행과 무색정(無色定)의 착한 유루행(有漏行)이다.
이것을 행이라고 하니, 행을 인연하여 식(識)이 있다.
무엇을 식이라고 하는가?
030_0146_c_19L何口行有覺有觀是作覺觀已然後口語若無覺觀則無言說是謂口行云何意行痛名世界人所著三種痛痛應爲受受則隨界受苦樂上界所無故宜言受想出家所患也痛想是意法繫屬意故是名意復次欲界繫行色界繫行無色界繫行復次善行不善行不動行云何善行欲界一切善行亦色界三地何不善行諸不善法云何不動行四禪有漏善行及無色定善有漏行是名行
여섯 가지 식의 세계가 있으니, 안식(眼識)에서 의식(意識)까지 이것을 여섯 가지 식이라고 한다.
식을 인연하여 명색(名色)이 있다.
무엇을 명(名)이라고 하는가?
무색(無色:물질이 아닌 정신적인 것)의 4분(分)인 통(痛)ㆍ상(想)ㆍ행(行)ㆍ식(識) 이것을 명(名)이라고 말한다.
무엇을 색(色)이라고 하는가?
일체의 색은 4대(大)와 조색(造色:물질을 만드는 것)이니, 이것을 색이라고 말한다.
무엇이 4대인가? 땅ㆍ물ㆍ불ㆍ바람이다.
무엇이 땅인가? 단단하고 무거운 모양이 땅이다.
부드럽게 적시는 모양은 물이요, 뜨거운 모양은 불이요, 가볍게 움직이는 모양은 바람이다.
나머지 물질은 볼 수 있으니, 대(對)가 있거나 대가 없거나 간에 이것을 조색(造色)이라고 한다.
정신작용과 물질이 화합하면 이것을 명색(名色)이라고 한다.
030_0147_a_06L行因緣識云何名識六種識眼識乃至意識是名六識識因緣名色云何爲名無色四分是謂名云何爲色一切色四大及造是謂色云何四大云何堅重相者地濡濕相者水熱相者輕動相者風餘色可見有對無對是名造色名色和合是謂名色
명색을 인연하여 6입(入)이 있으니, 무엇이 6입인가?
안의 6입[內六入]은 눈의 내입[眼內入]에서부터 의식의 내입까지이니, 이것을 6입이라고 한다.
6입을 인연하여 촉(觸)이 있으니, 무엇이 촉인가?
여섯 가지 촉의 세계가 있으니, 안촉(眼觸)에서부터 의촉(意觸)까지이다.
무엇이 안촉인가?
눈은 빛깔을 연하여 안식(眼識)을 내니, 세 가지 법이 화합하면 이것을 안촉이라고 한다.
나아가 의촉도 마찬가지이다.
030_0147_a_13L名色因緣六入云何六入內六入眼內入乃至意內入是名六入六入因緣觸云何觸六種觸界眼觸乃至意觸何眼觸眼緣色生眼識三法和合名眼觸乃至意觸亦如是
촉을 인연하여 수(受)가 있으니, 무엇이 수인가?
세 가지 수가 있으니, 낙수(樂受)ㆍ고수(苦受)ㆍ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이다.
무엇이 낙수인가? 애착하는 번뇌[愛使]35)이다.
무엇이 고수인가? 성냄의 번뇌[恚使]이다.
무엇이 불고불락수인가? 어리석음의 번뇌[癡使]이다.
또한 낙수는 즐거움을 일으켜서 즐거움에 머물러 괴로움을 없애며, 고수는 괴로움을 일으켜서 괴로움에 머물러 즐거움을 없애며, 불고불락수는 괴로움도 모르고 즐거움도 모르는 것이다.
030_0147_a_18L觸因緣受云何受三種受樂受苦受不苦不樂云何樂受愛使云何苦受恚使何不苦不樂受癡使復次樂受生樂住樂滅苦苦受生苦住苦滅樂不苦不樂受不知苦不知樂
수(受)를 인연하여 애(愛)가 있으니, 무엇이 애인가?
눈이 빛깔을 감촉해서 애를 낳으며, 나아가 의식이 존재[法]를 감촉해서 애를 낳는다.
030_0147_a_23L受因緣愛何愛眼觸色生愛乃至意觸法生愛
030_0147_b_01L애를 인연하여 취(取)가 있으니, 무엇이 취인가?
욕취(欲取)ㆍ견취(見取)ㆍ계취(戒取)ㆍ아어취(我語取)이다.
030_0147_b_01L愛因緣取云何取欲取見取戒取語取
취를 인연하여 유(有)가 있으니, 무엇이 유인가?
세 가지 유가 있으니, 욕유(欲有)ㆍ색유(色有)ㆍ무색유(無色有)이다.
아래는 아비(阿鼻)의 커다란 지옥으로부터 위로는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에 이르기까지 이것을 욕유라고 하며, 그리고 그것은 업을 발생시킬 수 있다.
무엇이 색유인가? 아래는 범(梵)의 세계로부터 위로는 아가니타천에 이르기까지 이것을 색유라고 한다.
무엇이 무색유인가? 허공으로부터 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에 이르기까지 이것을 무색유라고 한다.
030_0147_b_03L取因緣有云何有三種有欲有色有無色有下從阿鼻大泥梨上至他化自在天是名欲有及其能生業云何色有從下梵世上至阿迦尼咤是名色有云何無色有從虛空乃至非有想非無想處是名無色有
유(有)를 인연하여 태어남[生]이 있으니, 무엇이 태어남인가?
가지가지 중생들이 곳곳에서 태어나 음(陰)을 받아서 지(持)를 얻고 입(入)을 얻고36) 생명을 얻으니, 이것을 태어남이라고 한다.
030_0147_b_08L因緣生云何生種種衆生處處生出有受陰得持得入得命是名生
생을 인연하여 늙고 죽음이 있으니, 무엇이 늙는 것인가?
이가 빠지고 머리카락이 희어지며 주름이 많아지고, 근(根)이 익어지고 근이 파괴되며 기운이 막힌다. 등이 굽어 지팡이를 짚고서 걸음을 옮기니, 5음의 몸이 낡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늙음이라 한다.
030_0147_b_10L生因緣老死云何老齒落髮白多皺根熟根破氣噎身僂拄杖行步陰身朽故是名老
무엇이 죽음인가?
일체의 중생들은 곳곳에서 퇴락하여 사라지니, 끊어져 사멸하고 목숨을 잃는 것을 죽음이라고 한다. 먼저 늙고 뒤에 죽기 때문에 늙어 죽는다[老死]고 한다.
030_0147_b_13L云何死一切衆生處處退失壽命盡是名死先老後死故名老死
030_0147_c_01L이것은 12인연에 일치하니, 일체의 세간은 인연의 테두리가 아닌 것이 없다. 하늘의 테두리도 아니며, 사람의 테두리도 아니고, 여러 가지 삿된 인연의 테두리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니, 보살은 12인연을 관하되 마음을 묶어서 움직이지 않으며 생각을 벗어나지 않게 하고, 바깥으로 여러 연(緣)을 생각하면 추슬러서 되돌아오게 한다.
12분이 삼세, 즉 전생ㆍ금생ㆍ후생에서 발생하는 것임을 관하여 만약 보살이 마음으로 머무를 수 있다면, 마땅히 12분은 공이요 주인이 있지 않다고 관해야 한다.
어리석음은 내가 행(行)을 만드는 것을 모르며, 행은 내가 어리석음을 따라 존재하는 것을 모르니, 다만 무명을 연하기 때문에 행이 생긴다.
마치 초목의 씨앗처럼 종자에서 싹이 나오지만, 종자 역시 내가 싹을 내는 것을 모르며, 싹도 역시 종자에서 나온 것을 모른다.
나아가 늙고 죽음까지도 또한 이와 같으니, 이 12분 가운데하나하나가 주인도 없고 나도 없음을 관하여 안다.
마치 바깥의 초목은 주인이 없는 것과 같으니, 다만 뒤바뀐 견해에 따라 내가 있다고 헤아리는 것이다.
030_0147_b_15L是中十二因緣一切世閒非無因緣邊非天邊非人邊非種種等邪緣邊出菩薩觀十二因緣心不動不令外念外念諸緣攝之令觀十二分生三世中前生今生菩薩若得心住當觀十二分空無有主癡不知我作行行不知我從癡但無明緣故行生如草木種從子芽出子亦不知我生芽芽亦不知從子出乃至老死亦復如是是十二分一一觀知無主無我如外草木無但從倒見計有吾我
󰃅 만일 내가 없고[無我] 주인도 없으며[無主] 지음도 없다[無作]면, 어떻게 오고 가며 여기서 죽어 저기에 태어난다고 말하는가?
030_0147_c_03L問曰若無吾無主無作云何去來言說死此生
󰂼 비록 내가 없지만 6정(情)이 씨앗[因]을 만들고 6진(塵)이 주변 조건[緣]을 만드는 가운데 6식(識)이 생기니, 세 가지 일이 화합하기 때문에 감촉과 인식의 대상[法]이 생기며 모든 업을 생각하여 안다. 이 오고 감으로 말미암아 이로부터 생사가 있다고 말한다.
비유컨대 해가 구슬을 사랑하여 해와 마른 쇠똥이 화합하는 방편 때문에 불이 생기니, 5음(陰)도 역시 그렇다.
이 5음이 생겼기 때문에 후세의 5음이 나왔다 하더라도 이 5음이 후세에 이른 것은 아니며 또한 이 5음을 여의고서 후세의 5음을 얻은 것도 아니니, 5음은 다만 인연을 따라서 나온다.
030_0147_c_05L答曰雖無吾我六情作因六塵作中生六識三事和合故觸法生知諸業由是去來言說從是有生死譬如日愛珠因日乾牛屎和合方便故火出五陰亦爾因此五陰生後世五陰出非此五陰至後世亦不離此五陰得後世五陰五陰但從因緣出
비유컨대 곡식의 씨앗 속에서 싹이 나오는 것과 같아서 이 씨앗이 싹은 아니며, 또한 나머지 싹의 테두리에서 생긴 것도 아니며, 다른 것도 아니고 같은 것도 아니다. 후세에 몸을 얻는 것도 역시 그러하다.
비유컨대 나무에 아직 줄기ㆍ마디ㆍ가지ㆍ잎ㆍ꽃ㆍ열매가 없지만 시절 인연을 얻어서 꽃과 잎을 구족하는 것처럼 선행과 악행의 과보도 또한 이와 같다.
씨앗이 허물어지기 때문에 항상하는 것도 아니고 동일한 것도 아니며, 싹ㆍ줄기ㆍ잎 등이 생기기 때문에 끊어지는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니, 죽고 태어나 서로 이어지는 것도 역시 그렇다.
030_0147_c_11L如穀子中芽出是子非芽亦非餘芽邊生非異非一得後世身亦爾譬如樹未有莖節枝葉華實得時節因緣華葉具足善惡行報亦復如是種子壞故非常非一葉等生故不斷不異死生相續亦復如是
수행자는 모든 존재가 무상ㆍ고ㆍ공ㆍ무아이며 스스로 태어나고 스스로 없어진다는 것을 알고, 애(愛) 등 때문에 존재함을 알며, 소멸로 인하여 이것이 다함[盡]을 알고, 다함이 바로 도(道)임을 안다.
이 네 가지 지혜로써 12분을 알면 이것이 바로 정견의 길이다.
중생은 사로잡히고 집착하기 때문에 미쳐버리니, 사람이 값을 헤아릴 수 없는 보주(寶珠)를 지니고 있으나 그것의 진가를 구별하지 못하고 다른 것에 속임을 당하는 것과 같다.
이때 보살은 ‘내 마땅히 부처가 되어 바르고 진실한 법으로 저 중생들을 교화하여 올바른 길을 보게 하리라’고 크게 인자한 마음을 일으킨다.
030_0147_c_17L行者謂法無常無我自生自滅知因愛等有知因滅是盡知盡是道以四種智知十二分是正見道衆生爲縛著所誑如人有無價寶珠不別其眞爲他欺誑是時菩薩發大悲心我當作佛以正眞法化彼衆生令見正道
030_0148_a_01L󰃅 대승의 반야바라밀 가운데서 말하는 것과 같이일체의 존재는 생기는 것도 아니요[不生], 없어지는 것도 아니며[不滅], 공(空)이요 무소유(無所有)이며, 일상(一相)이요 무상(無相)이니, 이것을 정견(正見)이라고 하는데, 왜 무상(無常) 등을 관하는 것을 일컬어 정견이라고 하는가?
030_0147_c_23L問曰如『摩訶衍般若波羅蜜』中言法不生不滅空無所有一相無相名正見云何言無常等觀名爲正見
󰂼 만일 대승 가운데서 일체 존재의 공(空)과 무상(無相)을 설하였다면, 왜 무상ㆍ고ㆍ공 등이 진실하지 않다고 말하는가?
만일 불생ㆍ불멸ㆍ공이 참다운 모습(實相)이라면 마땅히 무상(無相)이라고 말해서는 않되니, 그대의 말은 앞뒤가 서로 맞지 않는다.
또한 부처님께서 네 가지 뒤바뀜[顚倒]을 말씀하셨으니, 무상(無常) 가운데 상(常)은 뒤바뀌었으나 또한 도리가 있다.
일체의 유위(有爲)는 무상(無常)하니, 왜냐하면 인연으로 생기기 때문이다. 무상한 인(因)과 무상한 연(緣)이 발생시키는 결과를 어떻게 항상하다고 하겠는가?
먼저는 없었는데 지금은 있으며, 이미 있던 것이 문득 없어지니, 일체의 중생들은 모두 무상함을 보며, 안으로는 늙고 병들고 죽음이 있으며, 밖으로는 만물이 시들어 떨어지는 것을 보니, 어찌하여 무상(無常)이 진실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하는가?
030_0148_a_03L答曰若『摩訶衍』中說諸法空無相何言無常空等不實若言不生不滅空是實相者不應言無相汝言前後不相應復次佛說四顚倒無常中常顚倒亦有道理一切有爲無常以故因緣生故無常因無常緣所生果云何常先無而今有已有便無切衆生皆見無常內有老外見萬物凋落云何言無常不實
󰃅 나는 항상하는 것[常]이 진실이고 항상하지 않는 것[無常]이 진실하지 않다고는 말하지 않았으며, 항상하는 것과 항상하지 않는 것이 모두 진실이 아니라고 말하였다.
왜 그런가 하면, 부처님께서 ‘공(空) 가운데서 항상함과 항상하지 않음의 두 가지 일을 얻을 수 없다. 만일 이 두 가지 일에 집착한다면 이것은 둘 다 뒤바뀐 것이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030_0148_a_12L問曰不言有常爲實無常爲不實我言有無常俱是不實何以故佛言空中有常無常二事不可得若著此二事俱顚倒
󰂼 그대의 말은 법과 서로 맞지 않는다.
왜 그런가 하면, 법이 없다고 말한다면 어째서 다시 둘 다 모두 뒤바뀌었다고 말하는가? 일체가 공하고, 무소유(無所有)라는 이것은 진실한 것이요 뒤바뀐 것이 아니다.
만일 내가 항상함을 부숴버리고 항상하지 않음에 집착한다면 나의 존재는 마땅히 파괴되어야 하며 진실한 나[我]는 아니다.
유상(有常)하다고 뒤바뀐 것을 깨뜨리기 때문에 무상(無常)을 관하니, 왜냐하면 무상의 힘은 능히 유상을 깨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독이 능히 그 밖의 독을 깨뜨릴 수 있는 것과 같고, 약으로 병을 제거하면 약도 함께 버리는 것과 같으니, 약이란 것이 병을 미묘하게 제거할 수 있지만 만일 약을 버리지 않으면 뒤에는 약이 병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이것도 역시 그러해서, 만일 무상법에 집착한다면 마땅히 깨뜨려야만 하니, 실답지 않기 때문이다.
030_0148_a_16L答曰汝言不與法相應何以言無法云何復言二俱顚倒一切空無所有是爲實不顚倒若我破有常著無常我法應破而不實我有常顚倒破故觀無常何以故無常力能破有常如毒能破餘毒如藥除病亦俱去當知藥妙能除病故若藥不後藥爲病此亦如是若無常法著應當破不實故
030_0148_b_01L내가 무상법(無常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깨뜨릴 것인가?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고(苦)는 네 가지 참다운 진리 가운데서 진실로 괴로운 것이라고 말하니, 누가 능히 즐겁게 할 수 있는가?”라고 하셨다.
고(苦)의 인(因)은 참다운 인인데, 누가 능히 인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고의 다함[盡]은 참으로 다하는 것인데, 누가 능히 다하지 않게 하겠는가? 다함의 길[道]은 참다운 길인데, 누가 능히 길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해는 혹 차갑게 할 수 있고, 달은 혹 뜨겁게 할 수 있으며, 바람은 혹 움직이지 않게 할 수 있다 하더라도 이 네 가지 참다운 진리는 끝내 움직이거나 변화시킬 수 없다.
030_0148_b_01L我不受無常法云何佛言苦是四眞諦中言實苦誰能使苦因是實因誰能令非因苦盡是實誰能令不盡盡道是實道誰能令非道如日或可令冷月或可令熱可令不動是四眞諦終不可動轉
그대는 대승 가운데서 요달(了達)하지 못하고 단지 말소리에만 집착할 뿐이니, 대승 가운데 일체 존재의 참다운 모습[諸法實相]에서 참다운 모습[實相]은 깨뜨릴 수도 없고 만들 수도 없다. 만일 깨뜨릴 수 있고 만들 수 있다면 이것은 대승이 아니다.
마치 달이 처음 생겨서 하루나 이틀이 되면, 그것이 생길 때는 매우 미세하여 밝은 눈을 지니고 있는 사람만 볼 수 있어서,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가리켜 보여 주지만 이 보이지 않는 사람은 단지 그 손가락을 볼 뿐이요 달을 못보고 헤매니, 눈 밝은 사람이 말하기를, “어리석은 사람은 왜 단지 나의 손가락만 보는가? 손가락으로 달의 연(緣)을 삼은 것이지 손가락이 저 달은 아니다”라고 하는 것과 같이, 그대도 역시 이와 같다.
말소리는 참다운 모습이 아니니, 다만 말을 빌려서 참다운 이치를 표현할 뿐이다. 그대가 다시 말소리에 집착하면 참다운 모습에 어두울 것이다.
030_0148_b_06L於『摩訶衍』中不能了但著言聲『摩訶衍』中諸法實相實相不可破無有作若可破可作此非摩訶衍如月初一日二日其生時甚微細有明眼人能見指示不見者此不見人但視其指而迷於月明者語言癡人何以但視我指指爲月緣指非彼月汝亦如是言音非實相但假言表實理更著言聲闇於實相
수행자가 만일 이와 같이 바른 지견(知見)을 얻는다면, 12분(分)이 화합하여 원인과 결과의 두 가지 분이 됨을 관할 것이다.
과(果)일 때의 12분은 고제(苦諦)이고, 인(因)일 때의 12분은 습제(習諦:集諦)이며, 인이 소멸할 때는 이것이 진제(盡諦)이며, 인과 과가 없어지는 것을 보는 것이 도제(道諦)이니, 네 가지로 과를 관하면 무상ㆍ고ㆍ공ㆍ무아이며, 네 가지로 인을 관하면 집(集)ㆍ인(因)ㆍ연(緣)ㆍ생(生)이다.
030_0148_b_15L行若得如是正知見觀十二分和合爲因果二分時十二分爲苦諦因時十二分爲習因滅是盡諦見因果盡是道諦種觀果無常無我四種觀因
󰃅 과(果)에 네 가지가 있는데 단지 고제(苦諦)라 이름할 뿐이니, 그렇다면 그 밖의 것은 진리의 이름이 없는가?
030_0148_b_20L問曰果有四種但名苦諦者無諦名也
030_0148_c_01L󰂼 만일 무상의 진리[無常諦]라고 말해도 의심스럽고, 고의 진리[苦諦]라고 해도 역시 의심스러우며, 무아의 진리[無我諦]라 해도 역시 의심스러워서 똑같이 난처하다.
또한 무상의 진리가 때[咎]가 없다고 말한다면, 공과 무아의 진리도 역시 때가 없으며, 만약 무상ㆍ고ㆍ공ㆍ무아의 진리를 설명하자면 중복되기 때문에그러므로 네 가지 중에서 하나만 설한 것이다.
030_0148_b_21L答曰若言無常諦復疑苦諦亦疑無我諦亦疑一種難處若言無常諦無咎空非我諦亦無若無常苦空無我諦於說爲重故是故於四說一
󰃅 괴로움에는 어떤 다른 모습이 있길래 세 가지 가운데서 홀로 이름을 얻었는가?
030_0148_c_02L問曰苦有何異相三中獨得名
󰂼 괴로움은 일체의 중생들이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바이지만 무상(無常)은 그렇지 않으니, 혹 어떤 사람이 괴로움의 핍박을 받는다면 무상을 얻으려고 생각하지, 괴로움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있지 않다.
030_0148_c_03L答曰苦是一切衆生所厭患衆生所怖畏無常不爾或有人爲苦所逼思得無常無有欲得苦者
󰃅 어떤 사람이 칼을 잡고 자살하거나 바늘로 찌르거나 쓴 약을 도적에게 준다면, 이와 같은 여러 가지는 괴로움을 찾는 것이 아닌가?
030_0148_c_05L問曰有人欲得捉刀自殺鍼炙苦藥入賊如是種種非求苦也
󰂼 괴로움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커다란 즐거움을 얻고자 하는 것이니, 괴로움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죽음을 취하는 것이다. 괴로움은 제일의 근심이며, 즐거움은 제일의 이로움이니, 이 때문에 참다운 괴로움을 여의고 쾌락을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과분(果分)으로 오직 괴로움의 진리를 이름하셨을 뿐이요, 무상이나 공이나 무아로 하지 않으셨다.
030_0148_c_07L答曰非爲欲得苦欲存大樂畏苦故取死苦爲第一患樂爲第一利以是故離實苦得快樂是故佛以果分獨名苦諦無常無我諦
이 네 가지 진리 가운데서 참다운 지혜를 분명하게 깨닫고 의심하지 않으며 후회하지 않는 이것을 바른 소견[正見]이라고 하며, 이 일을 사유하여 갖가지로 불어나기 때문에 이것을 바른 깨달음[正覺]이라고 하니, 삿된 생활을 제거하고 네 가지 삿된 말을 거두며, 그 밖의 네 가지 삿된 말을 여의고 네 가지 바른 말을 섭수한다.
삿된 생활을 제거하여 몸의 세 가지 업을 섭수하고, 그 밖의 세 가지 삿된 업을 제거하면 바른 업[正業]이라고 하며, 그 밖의 가지가지 삿된 생활을 여의면 이것을 바른 생활[正命]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때를 관하여 정진하면 이것이 올바른 방편[正方便]이며, 이 일을 생각하여 흩어지지 않는 것을 올바른 관찰[正念]이라고 하며, 이 일을 사유하여 동요하지 않는 것을 올바른 선정[正定]이라고 한다.
올바른 깨달음[正覺]은 왕과 같아서 일곱 가지 일이 따르니, 이것을 도제(道諦)라고 한다.
030_0148_c_11L是於四諦中了了實智慧不疑不悔是名正見思惟是事種種增益故是名正覺除邪命攝四種邪語離餘四種邪語攝四種正語除邪命攝身三種業除餘三種邪業名正業離餘種種邪命是名正命是觀時精進是正方便是事念不散是名正念是事思惟不動是名正定正覺如王七事隨從是名道諦
이 일을 한마음으로 진실하게 믿어서 움직이지 않으면 이것을 신근(信根)이라 하며, 한마음으로 정밀하고 정성스럽게 도를 찾으면 이것을 정진근(精進根)이라고 하며, 한마음으로 생각하여 잊어버리지 않으면 이것을 염근(念根)이라고 하고, 마음이 한곳에 머물러 또한 내달려 흩어지지 않으면 이것을 정근(定根)이라고 하며, 사유하고 분별하여 무상(無常) 등을 깨달으면 이것을 혜근(慧根)이라고 하니, 이 근(根)이 늘어나고 자라서 힘을 얻으면 이것을 다섯 가지 힘[五力]이라고 한다.
030_0148_c_19L是事一心實信不動是名信根一心精懃求道是名精進根一心念不忘失名念根心住一處亦不馳散是名定思惟分別無常等覺是名慧根名增長得力是名五力
030_0149_a_01L󰃅 8정도에서혜(慧)ㆍ염(念)ㆍ정(定) 등을 모두 설하였는데, 근력(根力)에서 무슨 이유로 거듭 설명하는가?
030_0149_a_01L問曰八正道中皆說慧念定等根力中何以重說
󰂼 따라 들어가 행할 때, 처음에는 작은 이익을 얻으니, 이때를 ‘근(根)’이라 하며, 이 다섯 가지 일이 늘어나고 자라서 힘을 얻으면 이때 ‘힘[力]’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030_0149_a_02L答曰隨入行時初得小利是時名爲是五事增長得力是時得名爲力
처음으로 무루(無漏)의 견제도(見諦道)에 들어가면 이 공덕을 8정도(正道)라고 하며, 사유도(思惟道)에 들어갈 때는 7각의(覺意)라고 하며, 처음 도에 들어가서 몸과 느낌과 마음과 법을 관하여 항상 한마음으로 생각하면 이것을 4념지(念止)라고 하며, 이와 같이 선법(善法)의 맛을 얻어서 네 가지로 정근(精懃)하면 이것을 4정근(精懃)이라고 하며, 이와 같이 욕(欲)ㆍ정진(精進)ㆍ정(定)ㆍ혜(慧)의 초문(初門)에서 부지런히 정진하여 마음대로 자재함을 추구하면 이것을 4신족(神足)이라고 하니, 비록 4념지ㆍ4정근ㆍ4신족ㆍ5근 등으로 부르더라도 모두 거두어 수행할 때에는 처음과 끝, 적고 많음, 수행하는 경지[地]의 연(緣) 등에 따라서 각각 이름을 얻는다.
030_0149_a_04L初入無漏見諦道中是功德名八正入思惟道時名七覺意初入道中觀念身痛心法常一心念是名四念如是得善法味四種精懃是名四正懃如是欲精進定慧初門懃精進求如意自在是名四神足雖名四念四正懃四神足五根等皆攝隨行時初後少多行地緣各各得名
비유컨대 4대(大)에 각각 4대가 있어서 다만 많다는 것으로 이름을 얻는 것과 같으니, 만일 땅의 종류가 많고 물ㆍ불ㆍ바람이 적은 곳이라면 이름을 지대(地大)라 할 것이며, 물ㆍ불ㆍ바람도 역시 이와 같을 것이다.
이와 같이 37품(品) 가운데 각각 여러 품이 있으니, 마치 4념지 가운데 4정근ㆍ4신족ㆍ5근ㆍ5력ㆍ7각지ㆍ8정도 등이 있는 것과 같다.
030_0149_a_12L譬如四大各各有四大但多得名若地種水火風少處名爲地大水火風亦如是如是三十七品中各各有諸品如四念止中有四正懃四神足五根五力七覺八道等
이와 같이 12분ㆍ4제를 관하여 4념지ㆍ4정근ㆍ4신족ㆍ5근ㆍ5력ㆍ7각지ㆍ8정도를 행하면 그 마음이 안락하다.
또한 이 법으로 중생을 제도하고, 한마음으로 서원하고 정진하여 부처님을 찾을 때 마음속으로 사유하고 관하여 생각하기를 ‘나는 분명하게 이 도를 관하여 알더라도 마땅히 깨달음을 취하지 않으리라.
030_0149_a_17L如是觀十二分諦行四念止四正懃四神足五根七覺意八正道其心安樂復以此法度脫衆生一心誓願精進求佛時心中思惟觀念我了了觀知此道不應取證
030_0149_b_01L두 가지 일의 힘이 있기 때문에 아직 열반에 들어가지 않으리니, 첫째는 커다란 슬픔[大悲]으로 중생을 버리지 않는 것이며, 둘째는 일체 존재의 참다운 모습을 깊이 아는 것이다. 모든 마음[心法]과 대상[心數法]은 인연 따라 생기는데, 나는 지금 어찌하여이 진실하지 않은 것에 따르는가? 마땅히 스스로 사유해서 12인연을 깊이 관하여 들어가 인연이 어떠한 법인가를 알고자 한다’라고 한다.
또 다시 사유하기를 ‘이 네 가지 연, 즉 인연(因緣)ㆍ차제연(次第緣)ㆍ연연(緣緣)ㆍ증상연(增上緣)은 다섯 가지 인(因)37)으로 인연을 삼는다. 과거와 현재의 아라한의 최후의 마음을 제거한 나머지 과거와 현재의 마음[心法]과 대상[心數法]이 바로 차제연이다. 연연과 증상연은 일체의 존재에서 연유한다’라고 한다.
030_0149_a_22L有二事力故未入涅槃大悲不捨衆生二者深知諸法實諸心心數法從因緣生我今云何隨此不實當自思惟欲入深觀十二因緣知因緣是何法復更思惟是四種緣因緣次第緣緣緣增上緣五因爲因緣除過去現在阿羅漢最後心餘過去現在心心數法是次第緣增上緣緣一切法
다시 스스로 사유하여 말하기를, “만일 존재가 먼저 인연 가운데 있다면 마땅히 이 존재는 인연으로 생긴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만일 없다면 또한 마땅히 인연 가운데서 생긴다고 말해서도 안 된다. 반은 있고 반은 없더라도 또한 마땅히 인연으로 생긴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무엇을 인연이 있다고 하는가? 만일 존재가 아직 생기지 않았는데 과거의 마음과 대상이 없어지면 어떻게 차제연을 만들 수 있는가? 만일 불법(佛法) 가운데 미묘한 법에 연(緣)이 없다면 열반은 어떻게 연연을 만들 것인가?
030_0149_b_07L復自思惟言若法先因緣中有則不應言是法因緣若無亦不應言因緣中生生有半無亦不應因緣生云何有因緣若法未生若過去心心數法失云何能作次第緣若佛法中妙法無緣涅槃何爲緣緣
만일 모든 존재가 진실로 자성이 없다면 어떠한 존재도 얻을 수 없다. 만일 인연으로 결과가 생겨서 이것 때문에 저것이 있다고 설한다면 이 말은 곧 틀린 것이다. 만약 인연 속에 각각 차별이 있거나 혹은 한곳에 화합하더라도 이 과(果)는 얻을 수 없다. 어떻게 인연의 테두리에서 결과가 나오는가? 인연 가운데 과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인연 가운데 먼저 과가 없는데도 나온다면 무슨 까닭에 인연의 테두리에서 과를 낳는가? 둘 다 모두 없기 때문이다.
030_0149_b_13L若諸法實無性有法不可若因緣果生因此有彼是說則不若因緣中各各別若和合一處果不可得云何因緣邊出果因緣中無果故若因緣中先無果而出者以不非因緣邊出果二俱無故
과는 인연에 속하며, 인연의 테두리에서 나오지만 이 인연은 자재하지 않아서 나머지 인연에 속한다. 이 과가 나머지 인연에 속한다면 어찌하여 자재하지 않는가? 인연은 능히 과를 생기게 하니, 그러므로 과는 인연을 좇아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인연 아닌 것을 따라 있는 것도 아니다. 즉, 과가 아니니, 과가 없기 때문에 연(緣)과 연이 아닌 것[非緣]도 역시 없다”라고 한다.
030_0149_b_18L果屬因緣因緣邊出是因緣不自在屬餘因緣是果屬餘因緣云何不自在緣能生果是故果不從因緣有亦不從非因緣有則爲非果果無故緣與非緣亦無也
030_0149_c_01L󰃅 부처님께서 12인연은 무명을 연하여 모든 행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그대는어찌하여 인(因)과 과(果)가 없다고 하는가?
030_0149_b_23L問曰佛言十二因緣無明緣諸行云何言無因果
󰂼 먼저 이미 대답했으니 마땅히 다시 논란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만일 논란하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다시 대답하리라.
부처님께서 “눈이라는 인(因)과 빛깔이라는 대상[緣]에 의해 어리석음의 테두리에서 삿된 억념(憶念)이 생긴다”고 말씀하셨으니, 어리석음이 바로 무명이다.
이 가운데 무명은 무엇에 의지하여 머무는가? 눈[眼]에 의지하는가, 혹은 빛깔[色] 가운데 의지하는가, 혹은 식(識)에 의지하는가?
마땅히 눈에 의지하여 머물러서는 안 되니, 만일 눈에 의지하여 머문다면 마땅히 빛깔에 의지하지 않으므로, 항상 어리석어야 마땅하다.
만일 빛깔에 의지하여 머문다면 마땅히 눈에 기대서는 안 된다. 이것은 곧 바깥의 어리석음인데 어떻게 나의 일을 미리 예측할 수 있는가?
만일 식에 의지하여 머문다면 식은 무색이고, 상대도 없으며, 감촉도 없고, 분별이 없으며, 처소가 없으니, 무명도 역시 그러한데 어떻게 머물 수 있단 말인가?
030_0149_c_02L答曰先以被答不應更難若難者更當答佛言眼因色緣癡邊生邪憶念癡是無明是中無明何所依住若依眼邪若色中若識邪不應依眼住若依眼住不應待色應癡若依色住不應待眼是則外癡何豫我事若依識住識無色無對無分無處無明亦爾云何可住
그러므로 무명은 안도 아니며, 바깥도 아니고, 양쪽의 중간도 아니다. 전생에서 온 것이 아니며, 또한 내생으로도 가지 않는다. 동서남북의 4유(維)와 상하에서 온 것이 아니므로 참다운 존재가 있지 않다.
무명의 본성이 그러하니, 무명의 본성을 요달하면 변하여 밝음이 되며, 하나하나를 추궁하면 어리석음을 얻을 수 없다.
030_0149_c_09L故無明非內非外非兩中閒不從前世來亦不住後世非東西南北四維上下來無有實法無明性爾了無明則變爲明一一推之癡不可得
어떻게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는가?
허공이 불생(不生)ㆍ불멸(不滅)ㆍ불유(不有)ㆍ부진(不盡)하고 본성이 청정하듯이 무명도 역시 이와 같아서 불생ㆍ불멸ㆍ불유ㆍ부진하고 본성이 청정하며, 나아가 태어남을 연하여 늙고 죽음이 있는 것도 역시 그렇다.
030_0149_c_13L何無明緣行如虛空不生不滅不有不盡本性淸淨無明亦如是不生不不有不盡本性淸淨乃至生緣老死亦爾
보살은 이와 같이 12인연을 관하여 중생들이 헛되고 미쳐서 괴로움과 근심에 묶여 있으므로 중생은 제도하기 쉬울 뿐이지만 모든 존재가 만일 참다운 모습을 지니고 있다면 제도하기 어려운 것임을 아니, 이와 같이 사유하면 어리석음을 깨뜨린다.
030_0149_c_17L菩薩如是觀十二因緣知衆生虛誑繫在苦患易度耳諸法若有實相難可得度思惟如是則破愚癡
만일 보살이 정신작용[思覺]이 많으면 항상 아나파나(阿那波那)를 생각하여 들어갈 때와 나올 때,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헤아려서 하나하나의 마음이 흩어지지 않게 한다. 보살은 이러한 방법으로 한마음을 얻어서 5개(蓋)의 욕행(欲行)을 제거한다.
030_0149_c_19L若菩薩心多思覺常念阿那波那時出時數一乃至十一一心不令馳菩薩從此門得一心除五蓋欲行
030_0150_a_01L보살은 도를 보면 마땅히 세 가지 인(忍)을 행해야 하니, 즉 법생인(法生忍)ㆍ유순법인(柔順法忍)ㆍ무생인(無生忍)이다.
무엇이 생인(生忍)인가?
일체의 중생들이 혹욕하고, 혹 때리고, 혹 죽이는 등 갖가지 나쁜 일을 해도 마음이 움직이거나 변하지 않고, 성내지 않으며, 그것을 참을 뿐만 아니라 더욱 자비스럽다면, 이 모든 중생들이 여러 가지 좋은 일을 추구하고 일체를 얻고자 원하리니, 마음을 풀어놓지 않으면 이때 점차 일체 존재의 참다운 모습을 이해할 수 있어서 마치 기운이 배어들어서 달라붙는 것과 같다.
030_0149_c_22L菩薩見道應行三種忍法生忍柔順法忍無生忍云何生忍一切衆生或罵或打或殺種種惡事心不動轉不恚不唯忍之而更慈悲此諸衆生求諸好事願一切得心不捨放是時漸得解諸法實相如氣熏著
비유컨대 인자한 어머니가 자기의 아이를 사랑하여 젖을 먹여 양육하되 갖가지 더러움을 더럽게 여기지 않고 가엾은 생각을 두 배로 더하여 즐거움을 얻게 하고자 하는 것과 같이, 수행자도 이와 같아서 일체의 중생들이 갖가지 나쁜 일과 깨끗하거나 깨끗하지 않은 일을 하더라도 마음에 악을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으며, 물러나거나 피하지도 않는다.
또한 시방의 무량한 중생들을 나 한 사람이 마땅히 모두 제도하여 부처님의 길을 얻게 하리라고 마음으로 참아서 물러서지 않으며, 후회하지도 않고 물러나지도 않는다. 게으르지도 않고 싫어하지도 않으며, 두려워하지도 않고 어려워하지도 않는다.
이 생인 가운데 한마음으로 생각을 묶어서 세 가지 사유가 생각을 벗어나지 않게 하며, 바깥으로 여러 연(緣)을 생각하면 추슬러서 되돌아오게 하니, 이것을 생인이라고 한다.
030_0150_a_05L譬如慈母愛其赤子乳哺養育種種不淨不以爲惡倍加憐念欲令得樂行者如是一切衆生作種種惡淨不淨行心不增惡不退不轉復次十方無量衆生我一人應當悉度使得佛道心忍不退不悔不卻不懈不厭不畏不難是生忍中一心繫念三種思惟不令外念外念諸緣攝之令還是名生忍
무엇을 유순법인(柔順法忍)이라고 하는가?
보살이 이미 생인의 공덕이 무량함을 얻었으면 이 공덕의 복덕과 과보가 무상(無常)함을 안다.
이때 무상함을 싫어하여 스스로 변함없는 복덕을 찾으며, 또한 중생을 위하여 항상 머무는 법을 찾는다.
일체의 모든 존재에서 즉, 물질과 비물질의 존재,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존재, 대립하는 것과 대립하지 않는 존재, 유루(有漏)와 무루(無漏), 유위(有爲)와 무위(無爲) 상ㆍ중ㆍ하의 존재에서 그 참다운 모습을 찾는다.
030_0150_a_13L云何柔順法忍菩薩旣得生忍功德無量知是功德福報無常是時厭無常自求常福亦爲衆生求常住法一切諸色無色法可見不可見法有對無對法有漏無漏有爲無爲上中下法求其實相
030_0150_b_01L참다운 모습이란 무엇인가?
항상하는 것도 아니고 항상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즐거운 것도 아니고 즐겁지 않는 것도 아니며, 공도 아니고 공이 아닌 것도 아니며, 정신이 있는 것도 아니며 정신이 없는 것도 아니다.
무슨 까닭에 항상하는 것이 아닌가?
인연으로 생기기 때문이다. 먼저 없다가 이제 있으며, 그러므로 이미 있다가 도로 없어지기 때문에 항상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이 항상하지 않음[無常]이 아닌가?
업보를 잃어버리지 않기 때문이고, 바깥의 번뇌를 받아들이기 때문이며, 인연이 증가하기 때문에 항상하지 않음이 아니다.
어찌하여 즐거움이 아닌가?
새로운 괴로움 속에서즐거운 생각을 하기 때문이고, 일체의 무상한 성질 때문이며, 욕망에 연유하여 생기기 때문에 즐거움이 아니다.
030_0150_a_19L實相云何非有常非無常非樂非不樂非空非不空非有神非無神何以故非有常因緣生故先無今有故已有還無故是故非有常何非無常業報不失故受外塵故緣增長故非無常云何非樂新苦中生樂想故一切無常性故緣欲生故是故非樂
어찌하여 즐겁지 않음[不樂]이 아닌가?
즐거움은 감수작용을 지니기 때문이고, 욕망에 물들어서 생기기 때문이며, 즐거움을 찾아서 몸을 아끼지 않기 때문에 이것은 즐겁지 않은 것이 아니다.
어찌하여 공(空)이 아닌가?
안팎의 입(入:12處)은 각각의 받아들임이 분명하기 때문이고, 죄와 복의 과보가 있기 때문이며, 일체의 중생이 믿기 때문에, 그러므로 공이 아니다.
어찌하여 공 아닌 것[不空]이 아닌가?
화합 등으로 생기기 때문이고, 분별하여 찾아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며, 마음의 힘으로 변하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공 아닌 것이 아니다.
어찌하여 정신이 있는 것이 아닌가?
자유자재하지 않기 때문이고, 제7식의 경계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며, 정신의 모습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정신이 있는 것이 아니다.
030_0150_b_03L云何非不樂樂有受故染生故求樂不惜身故是非不樂何非空內外入各各受了了故有罪福報故一切衆生信故是故非空何非不空和合等實故分別求不可得故心力轉故是故非不空云何非有神不自在故第七識界不可得故神相不可得故是故非有神
무엇이 정신이 없는 것이 아닌가?
후세가 있기 때문이고, 해탈을 얻기 때문이며, 각각 나의 마음이 생겨서 그 밖의 것을 계산하지 않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정신이 없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태어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불생불멸(不生不滅)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받아들이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으니, 언설(言說)이 모두 사라지고 마음이 갈 곳도 끊어진다. 마치 열반의 본성과 같으니, 이것이 존재의 참다운 모습이다.
이러한 법 가운데서 믿는 마음이 청정하여 정체되지도 않고 걸림도 없으며, 유연하게 알고, 유연하게 믿으며, 유연하게 정진하니, 이것을 유순법인(柔順法忍)이라고 한다.
030_0150_b_10L云何非無神有後世故得解脫故各各我心生不計餘處故是故非無神如是不生不滅不不生不不滅非有非無受不著言說悉滅心行處斷如涅槃是法實相於此法中信心淸淨滯無礙軟知軟信軟進是謂柔順法
030_0150_c_01L무엇이 무생법인(無生法忍)인가?
위와 같이 존재의 참다운 모습 속에서 지혜ㆍ믿음ㆍ정진이 늘어나 자라고, 근(根)이 날카로우면 이것을 무생법인이라고 한다.
비유컨대 성문법(聲聞法) 가운데 난법(煖法)ㆍ정법(頂法)ㆍ지혜ㆍ믿음ㆍ정진이 늘어나 자라서 인법(忍法)을 얻는 것과 같다.
인(忍)이란 열반을 참아내고 무루법을 참아내기 때문에 이름하여 인이라 하고, 새롭게 얻고 새롭게 인식하기 때문에 이름하여 인이라고 하니, 법인(法忍)도 역시 이와 같다.
시해탈(時解脫)38)한 아라한은 무생지(無生智)를 얻을 수 없으며, 더욱 정진하여 널리 이롭게 해서 불시해탈(不時解脫)을 성취하면 무생지를 얻으니, 무생법인도 역시 이와 같다.
아직 보살의 과(果)를 얻지 못하고서 무생법인을 얻으면보살의 참다운 행의 과를 얻으니, 이것을 보살도의 과라고 한다.
030_0150_b_17L云何無生法忍如上實相法中進增長根利是名無生法忍如聲聞法中煖法頂法智慧精進增長得忍法忍者忍涅槃忍無漏法故名爲忍新得新見故名爲忍法忍亦如是時解脫阿羅漢不得無生智增進廣利轉成不時解脫得無生智無生法忍亦如是未得菩薩果得無生法忍得菩薩眞行果是名菩薩道
이때 반주삼매(般舟三昧)를 얻고, 중생 가운데서 대비를 얻으며, 반야바라밀의 문에 들어간다.
그때 여러 부처님께서 문득 그 칭호를 주면 따라서 부처님의 세계 가운데 태어나, 여러 부처님께서 생각하는 바가 되어 일체의 무거운 죄가 엷어지고, 엷은 사람은 없어지며, 3악도가 끊어진다.
항상 천상의 사람 가운데 태어나며, 물러나지 않는다[不退轉]고 이름하며, 움직이지 않는 곳에 도달하고, 마지막 육신은 모두 법신(法身) 속에 들어가 능히 가지가지 변화를 만들어서 일체의 중생들을 제도하여 벗어나게 한다.
6바라밀을 구족하여 일체의 부처님을 공양하고, 부처님의 국토를 청정하게 하며 중생을 교화하고, 10지(地) 가운데 서서 공덕이 원만하게 이루어지니 차례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니, 보살의 선법(禪法) 가운데 초문(初門)이 된다.
030_0150_c_03L是時得般舟三昧於衆生中得大悲入般若波羅蜜門爾時諸佛便受其號墮生佛界中爲諸佛所念切重罪薄薄者滅三惡道斷常生天上人中名不退轉到不動處末後肉身盡入法身中能作種種變化度脫一切衆生具足六度供養諸佛淨佛國土教化衆生立十地中功德成滿次第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爲菩薩禪法中初門

수행자가 마음을 안정하여 도를 찾을 때
언제나 마땅히 시절의 방편을 관찰해야 한다.
만일 때를 얻지 못하고 방편이 없으면
이것은 마땅히 잘못이요, 이롭지 않으리라.
030_0150_c_12L行者定心求道時
常當觀察時方便
若不得時無方便
是應爲失不爲利

송아지가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소젖을 짜는 것과 같아서
젖을 얻을 수 없나니 때가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송아지가 태어났는데 소의 뿔을 짠다면
젖을 얻을 수 없나니 지혜가 없기 때문이다.
030_0150_c_14L如犢未生%(殸/牛)牛乳
乳不可得非時故
若犢生已%(殸/牛)牛角
乳不可得無智故

축축한 나무를 비벼서 불이 나오기를 찾는 것과 같아서
불은 얻을 수 없나니 때가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마른 나무를 잘라서 불을 찾으면
불은 얻을 수 없나니 지혜가 없기 때문이다.
030_0150_c_16L如鑽濕木求出火
火不可得非時故
若折乾木以求火
火不可得無智故

처소를 얻고 때를 알며 자신의 행을 헤아리며
마음의 방편과 힘의 많고 적음과
마땅히 정진해야 하는가와 하지 않아야 하는가와
도의 모습[道相]이 시기에 적절한가 적절하지 않은가를 관하라.
030_0150_c_18L得處知時量己行
觀心方便力多少
宜應精進及不宜
道相宜時及不宜

마음이 살펴 움직이더라도 마땅히 날쌔어서는 안 되니
이와 같이 날쌤이 지나치면 선정을 얻을 수 없다.
예컨대 많은 장작이 타오르는 큰 불은
큰 바람이 와서 불어도 꺼지지 않는 것과 같다.
030_0150_c_20L若心調動不應勇
如是勇過不得定
譬如多薪熾大火
大風來吹不肯滅

만일 선정으로 스스로 마음을 조절한다면
이와 같은 움직임이 그치고 마음에 안정을 얻으리라.
예컨대 큰 불에 큰 바람이 불고
큰 물을 뿌리면 꺼지지 않음이 없는 것과 같다.
030_0150_c_22L若能以定自調心
如是動息心得定
譬如大火大風吹
大水來澆無不滅
030_0151_a_01L
만일 사람의 마음이 부드럽고 또한 게으르면
이와 같이 싫증냄에 빠져서 마땅히 수행하지 않으리니
예컨대 적은 장작에 불꽃이 없어서
바람이 불지 않아도 문득 저절로 사그라지는 것과 같다.
030_0151_a_01L若人心軟復懈怠
如是厭沒不應行
譬如少薪無焰火
不得風吹便自滅

만일 정진력과 용맹한 마음이 있으면
이와 같이 건강함을 돌려서 도를 얻는 것이 빠르니
예컨대 작은 불에 장작을 많이 더하고
바람이 불어서 더욱 타올라 꺼지지 않는 것과 같다.
030_0151_a_03L若有精進勇猛心
如是轉健得道疾
譬如小火多益薪
風吹轉熾無滅時

만일 수행을 놓아버리거나 멈춰서 줄어들면
설령 안정[捨]을 얻더라도 호법(護法:捨法)을 상실하니
예컨대 병든 사람을 마땅히 이끌어서 부양하더라도
만일 다시 풀어놓으면 살 수 없는 것과 같다.
030_0151_a_05L若行放捨止調縮
設復發捨失護法
譬如病人宜將養
若復放捨無得活

만일 생각을 버리고 바르고 평등한 마음을 지닌다면
때에 맞게 부지런히 수행하여 도를 얻는 것이 빠르니
예컨대 어떤 사람이 길들여진 코끼리를 타고
마음대로 물가에 이르지만 넘어지거나 걸림이 없는 것과 같다.
030_0151_a_07L若有捨想正等心
宜時懃行得道疾
譬如有人乘調象
如意至湊無躓㝵

만일 음욕이나 애착, 산란한 마음이 많으면
이때는 마땅히 인자함 등을 행해서는 안 된다.
음욕이 많은 사람이 인자함을 행하면 더욱 어리석고 어두워지니
사람이 냉병에 차가운 약을 먹는 것과 같다.
030_0151_a_09L若多婬欲愛亂心
是時不應行慈等
婬人行慈益癡悶
如人冷病服冷藥

음욕이 많은 사람은 마음이 어지러우면 더러움을 관하라.
더러움을 자세히 관하면 마음이 안정을 얻는다.
법을 행하는 것이 이와 같이 상응하기 때문에
사람이 냉병에 뜨거운 약을 복용하는 것과 같다.
030_0151_a_11L婬人心亂觀不淨
諦觀不淨心得定
行法如是相應故
如人冷病服熱藥

만일 성냄과 어지러운 마음이 많으면
이때는 마땅히 더러움을 관해선 안 된다.
성난 사람이 악(惡)을 관하면 성내는 마음이 늘어나
마치 사람이 열병에 뜨거운 약을 먹는 것과 같다.
030_0151_a_13L若多瞋恚忿亂心
是時不應觀不淨
瞋人觀惡增恚心
如人熱病服熱藥

만일 사람이 분노하면 인자한 마음을 행하라.
인자함을 행하면 성난 마음을 버리지 않아도 없어진다.
법을 행하는 것이 이와 같이 상응하기 때문이니
사람이 열병에 차가운 약을 먹는 것과 같다.
030_0151_a_15L若人瞋怒行慈心
行慈不捨瞋心滅
行法如是相應故
如人熱病服冷藥

만일 매우 어리석어서 마음이 어둡고 얕으면
부정행법(不淨行法)과 자비행법(慈悲行法)을 하지 마라.
두 가지 행법은 어리석음을 증가할 뿐 이익이 없기 때문이니
마치 사람이 풍병에 보릿가루 약을 먹는 것과 같다.
030_0151_a_17L若多愚癡心闇淺
不淨行慈悲行法
二行增癡無益故
如人風病服麨藥

사람의 마음이 어리석고 어두우면 인연을 관하라.
분별하여 자세히 관하면 어리석은 마음이 없어진다.
법과 행이 이와 같이 상응하기 때문이니
사람이 풍병에 기름 약을 먹는 것과 같다.
030_0151_a_19L人心癡闇觀因緣
分別諦觀癡心滅
法行如是相應故
如人病風服膩藥

예컨대 대장장이[金師]가 부채와 탄(炭)을 물리치면
공(功)을 씀이때에 맞지 않아 풀무질 하는 법을 잃는 것과 같으니
허둥지둥 풀무질하며 때를 알지 못해서
어느 때는 물을 뿌리고 어느 때는 놓아버린다.
030_0151_a_21L譬如金師排扇炭
用功非時失韛法
悤悤急韛不知時
或時水澆或放捨
030_0151_b_01L
쇠가 녹는데 급하게 풀무질하면 녹는 것이 지나치고
아직 녹지 않았는데 문득 그만두면 녹지 않는다.
때가 아닌데 물을 뿌리면 쇠가 곧 생기며
때가 아닌데 방치하면 익지 않는다.
030_0151_a_23L金融急韛則消過
未融便止則不消
非時水澆金則生
非時放置則不熟

정진하여 마음을 거두고 놓아버리는 것은
마땅히 행도법(行道法)을 관찰해야 한다.
때가 아닌 방편은 법의 이로움을 잃어버리니
만일 법의 이로움이 아니라면 이로움이 아니다.
030_0151_b_02L精進攝心及放捨
應當觀察行道法
非時方便失法利
若非法利爲非利

예컨대 약사(藥師)가 세 가지 병인
냉병ㆍ열병ㆍ풍병을 없애기 위해서
병에 따라서 약을 주는 것과 같이 부처님께서도 이와 같아서
음욕ㆍ성냄ㆍ어리석음의 병이 약을 따라 없어진다.
030_0151_b_04L譬如藥師三種病
冷熱風病除滅故
應病與藥佛如是
婬怒癡病隨藥滅
坐禪三昧經卷下
乙巳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1. 1)여기서 말하는 각(覺, Vitarka)은 신역(新譯)에선 심(尋)으로 번역하고, 관(觀,Vicara)은 신역에선 사(伺)로 번역한다. 합하여 심사(尋伺)라고 하는데, 각은 거칠고, 관은 세밀한 분별작용으로서 모두 초선에 상응하는 마음의 작용이다.
  2. 2)제2선에서는 내(內)ㆍ정(淨)ㆍ희(喜)ㆍ낙(樂)의 선정 작용을 수반한다.
  3. 3)제4선에서는 행사청정(行捨淸淨)ㆍ염청정(念淸淨)ㆍ비고비락수(非苦非樂受)의 선정 작용을 수반한다.
  4. 4)차례로 무색계에 상응하는 4무색정(無色定)을 설한다.
  5. 5)물질적으로 서로 대립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6. 6)신역에서는 무량공처정으로 번역되어 있으며, 여기서도 동일한 의미이다.
  7. 7)4념처관(念處觀)이라고도 한다.
  8. 8)고제(苦諦)의 네 가지 관법은 무상ㆍ고(苦)ㆍ공ㆍ무아이다.
  9. 9)집제(集諦)를 말하며, 이것은 집(集)ㆍ인(因)ㆍ생(生)ㆍ연(緣)의 네 가지가 있다.
  10. 10)멸제(滅諦)를 말하며, 폐(閉)ㆍ멸(滅)ㆍ묘(妙)ㆍ출(出)의 네 가지가 있다.
  11. 11)도제(道諦)에는 도(道)ㆍ정(正)ㆍ적(跡)ㆍ이(離)의 네 가지가 있다.
  12. 12)난(煖:따뜻하다, Usmagata)은 견도(見道) 무루지(無漏智)의 불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따뜻함을 느낀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13. 13)4선의 근본정(根本定)과 미지정(未至定)과 중간정(中間定) 등 여섯 가지이다.
  14. 14)난위(煖位)의 수행이 하나의 정점에 도달한 것을 의미한다.
  15. 15)고법인이란 정확하게는 고법지인(苦法智忍)으로서 앞의 4선근의 인법(忍法)과 구별하기 위해서 다음의 제이의 고법지(苦法智)를 일으키는 인(忍)이란 의미에서 고법지인(苦法智忍)이라 부른다.
  16. 16)고법지는 바로 욕계에서 고제(苦諦)의 진리를 깨닫는 지혜로서 이것이 제이의 마음이다.
  17. 17)욕계계란 욕계에 묶여있는 번뇌란 의미로서, 열 가지 번뇌란 탐(貪)ㆍ진(瞋)ㆍ치(癡)ㆍ만(慢)ㆍ의(疑)ㆍ신견(身見)ㆍ변견(邊見)ㆍ사견(邪見)ㆍ견취견(見取見)ㆍ계금취견(戒禁取見)이다.
  18. 18)4지란 고지ㆍ법지ㆍ비지ㆍ등지이다. 고지(苦智)란 심계의 고제에 대한 미혹에서 일어나는 번뇌를 끊는 무루지혜이며, 법지(法智)란 욕계에서 일어나게 되는 유위법의 4제를 관찰하는 오염되지 않은 성스러운 지혜이고, 비지(比智)란 신역으로서는 유지(類智)라 한다. 유지란 상계(上界)의 번뇌에 대해서 작용하는 지혜이며, 색계와 무색계의 제행의 4제를 관찰하고 번뇌를 끊는 무루지를 말한다. 등지(等智)란 세속의 일을 아는 지혜이다.
  19. 19)타심통을 아는 것이다.
  20. 20)진나라 말로는 ‘열반으로 흘러 들어감’이라고 한다. 원(元)ㆍ명(明) 본에 의하면 열반에 흘러 들어간다는 의미이다.
  21. 21)4향4과 중의 예류향을 말한다.
  22. 22)일래과(一來果)라 번역하며, 사다함과라고도 한다.
  23. 23)불래(不來)라 번역하며, 아나함을 말한다.
  24. 24)수법행자(隨法行者)가 예류과에 들어간 것을 말한다.
  25. 25)수법행자가 예류과를 얻은 것을 말한다.
  26. 26)여잔칠세생(餘殘七世生)이란 욕계 9품의 수혹(修惑)을 적어도 끊지 않고 초과(初果)를 얻는다는 것은 최대한도로 일곱 번 욕계에 태어나게 된다는 의미이다.
  27. 27)삼종단명가가삼세생(三種斷名家家三世生)이란 욕계 수혹의 앞의 3품을 끊을 때는 일곱 번 세상에 태어나는 가운데 네 번 세상에 태어나는 것을 면하고, 나머지 세 번 태어난다. 가가(家家)란 초과(初果)와 2과(果)의 중간에 위치하는 성자를 가리킨다.
  28. 28)이것은 일래과(一來果)의 성자가 불환과(不還果)로 나아가고 있는 과정에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일종(一種)이란 일간(一間)을 잘못 보고 번역한 것으로 판단되며, 일간이란 아직 일품의 번뇌가 남아서 불환과에 도달하기는 하였으나 아직 간격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29. 29)하나의 번뇌를 끊고 끝내 이것을 해탈하여 진지(眞智)가 나타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제9의 해탈도란 욕계 9품의 미혹 가운데 제9를 끊은 결과를 말하는 것이다.
  30. 30)유(濡)는 부드럽다는 의미로서 부드러운 지혜를 유지라 할 수 있다.
  31. 31)탐욕을 다스리기 위하여 사람의 시신에 대해 부정관을 닦고, 청정함이 뒤바뀌는 생각을 없애는 것으로, 창상(脹想)ㆍ괴상(壞想)ㆍ혈도상(血途想)ㆍ농란상(膿爛想)ㆍ청치어상(靑癡瘀想)ㆍ담상(噉想)ㆍ산상(散想)ㆍ골상(骨想)ㆍ소상(燒想)을 말한다.
  32. 32)원문에는 ‘자정(慈定)’이라 되어 있어서 풀어서 해석했다. 이것은 자삼매를 지칭하는 것이다.
  33. 33)이것은 신역의 유심(有尋)과 유사(有伺)와 서로 통한다. 분별 추구하는 마음의 작용이 조잡한 것을 각이라 하고, 세밀한 것을 관이라 한다.
  34. 34)통(痛, vedana)은 신역의 수(受)에 해당한다.
  35. 35)사(使)란 신역에서는 수면(隨眠)이라 하며, 대체로 번뇌의 다른 이름이다.
  36. 36)이상에서 음은 5음(陰)을 가리키며, 음은 구성요소의 집적을 의미한다. 또한 지는 계(界)라는 의미로 18계를 의미하며, 입은 12처를 의미한다.
  37. 37)생인(生因)ㆍ의인(依因)ㆍ입인(立因)ㆍ지인(持因)ㆍ양인(養因)이다.
  38. 38)아라한의 둔근기인 자가 열반에 들어갈 때 시절인연의 조건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불시해탈(不時解脫)은 이근(利根)으로서 시기를 선별하지 않고 수시로 하는 것을 얻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