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016_0141_b_01L현양성교론 제19권
016_0141_b_01L顯揚聖教論卷第十九


무착(無着) 지음
현장(玄奘) 한역
016_0141_b_02L無著菩薩造
三藏法師 玄奘奉 詔譯


11. 섭승결택품(攝勝決擇品) ③
016_0141_b_04L攝勝決擇品第十一之三

논하건대, 그와 같이 계사(界事)의 결택(決擇)을 이미 설명하였으니 잡염(雜染)의 사실인 수승한 결택 중에서 번뇌 잡염인 수승한 결택을 지금 곧 먼저 말해야겠다.
다음의 게송으로 말하리라.
016_0141_b_05L論曰如是已說界事決擇於雜染事勝決擇中煩惱雜染勝決擇今當先頌曰

뜻[意]과 서로 응하는 4혹(惑)은
어디에나 두루 행하여 함께 일어나고
그는 무기(無記)로서 최후에야 없어지며
태어남을 따라 나는 저의 성품이네.
016_0141_b_08L意相應四惑
遍行而俱起
無記最後滅
隨所生彼性

논하건대, 뜻[意]과 서로 응하는 번뇌는 온갖 자리에 두루 행하여 온갖 샘이 있는 [有漏] 선(善) 따위의 마음과 함께 같은 시간에 현행(現行)하여 서로 어기지 않는다고 알아야 한다.
또, 그 번뇌는 모두가 구생(俱生)이요, 분별기(分別起)가 아니며 그는 바로 유부무기(有覆無記)의 성질이요, 불선(不善)의 성질이 아니니 최후인 금강유정(金剛喩定)으로 단번에 끊을 수 있는 것이 된다.
또, 그 번뇌는 네 종류가 있나니 이른바 무명(無明)과 살가야견(薩迦耶見=身見)과 아만(我慢)과 아애(我愛)이다. 만일 이 세계에 나면 보특가라(補特伽羅)라고 알아야 한다.
그 뜻과 서로 응하는 번뇌는 곧 이 세계의 체성(體性)에 해당된다.
다시 다음의 게송으로 말하리라.
016_0141_b_10L論曰當知意相應煩惱遍行一切位與一切有漏善等心俱時現行不相違故又此煩惱皆是俱生非分別起是有覆無記性非不善性最後金剛喩定之所頓斷又此煩惱有四種謂無明薩迦耶見我慢我愛若生此界中補特伽羅當知此意相應煩惱卽是此界體性所攝復次頌曰

온갖 번뇌가 생기고 계속하는데
현행(現行)하여 일어남과 연(緣)과
수면(隨眠)과 소연경(所緣境)과 추중(麤重)이
모두가 제마다 차별이 20이네.
016_0141_b_18L一切生相續
現起及與緣
隨眠境麤重
各差別二十
016_0141_c_01L
논하건대, 만일 이 세계와 이 경지에 나면 곧 이 세계와 이 경지의 온갖 번뇌가 생기고 계속하게 된다.
또, 그 번뇌ㆍ잡염(雜染)에는 현행(現行)과 연(緣)과 수면(隨眠)과 소연경(所緣境)과 추중(麤重)이 있는데 모두가 제마다에게 20가지 모양이 있다고 알아야 한다.
번뇌의 현행(現行)에 20가지가 있다 함은 첫째는 애욕에게 묶임을 당하는 현행(現行)이니 집에 있는 이들을 말함이요, 둘째는 애욕에게 묶임을 당하지 않는 현행(現行)이니 집을 떠난 이들을 말함이요, 셋째는 잘 분별함이 없음이니 악에 처해서 설법하는 이를 말함이요, 넷째는 잘 분별함이 있음이니 선(善)에 처해서 설법하는 이를 말함이요, 다섯째는 서로 증가됨이니 탐냄 따위가 행하고 있는 이를 말함이다.
여섯째는 모두 평등함이니 등분(等分)이 행하고 있는 이를 말함이요, 일곱째는 희박함이니 진로(塵勞)가 희박해진 이를 말함이요, 여덟째는 바깥 문[外門]의 속박인 현행(現行)이니 애욕을 떠나지 못한 이를 말함이요, 아홉째는 안 문의 속박인 현행이니 세간도(世間道)로 말미암아 애욕을 떠난 이를 말함이요, 열째는 증가되고 있는 속박의 현행이니 온갖 중생들을 말한다.
열 한째는 기억 못하고 속박함인 현행(現行)이니 온갖 배움에 있는 이들을 말함이요, 열 둘째는 분별의 속박인 현행이니 굳게 집착하는 이를 말함이요, 열 셋째는 구생(俱生)의 속박인 현행이니 굳게 집착하지 않는 이를 말함이요, 열 넷째는 관찰함인 현행이니 관찰하기를 좋아하는 이를 말함이요, 열 다섯째는 자재롭지 않은 현행이니 수면하는 이를 말한다.
열 여섯째는 자재로운 현행(現行)이니 깨달은 이를 말함이요, 열 일곱째는 구출할 수 없는 현행이니 열반법이 없다고 하는 이를 말함이요, 열 여덟째는 구출할만한 현행이니 열반 법이 있다고 하는 이를 말함이요, 열 아홉째는 모양을 취하는 현행이니 저를 찾아 생각하고서 법을 따르고 모양을 취하는 이를 말함이요, 스무째는 모양을 취하지 않는 현행이니 저를 찾아 생각하지 않고 법만 따르며 모양을 취하지 않는 이를 말한다.
016_0141_b_20L論曰若生此界此地卽此界地一切煩惱令生相續又此煩惱雜染若現若緣若隨眠若所緣境若麤重知各有二十種相煩惱現行有二十種者一隨所欲纏現行謂在家者不隨所欲纏現行謂出家者三無所了別謂處惡說法者四有所了別處善說法者五互增上謂貪等行者六皆平等謂等分行者七微薄謂薄塵行者八外門纏現行謂未離欲者九內門纏現行謂由世閒道離欲者十增上纏現行謂諸異生十一失念纏現行謂諸有學十二分別纏現行謂堅執著者十三俱生纏現行謂不堅執著者十四觀察現行謂憙觀察十五不自在現行謂睡眠者十六自在現行謂覺悟者十七不可救現謂無涅槃法者十八可救現行有涅槃法者十九取相現行謂尋思彼隨法而取相貌者二十不取相貌現行謂不尋思彼隨法不取相貌者
016_0142_a_01L번뇌의 연(緣)에 20가지가 있다함은 첫째는 즐거움이요, 둘째는 괴로움이요, 셋째는 괴로움도 즐거움도 아니요, 둘째는 괴로움이요, 셋째는 괴로움도 증거움도 아님이요, 넷째는 하고자 함이요, 다섯째는 찾음[尋]이요, 여섯째는 닿임[觸]이요, 일곱째는 먼저 익혔던 관습이요, 여덟째는 수면(隨眠)이요, 아홉째는 착한 벗을 친근하지 않음이요, 열째는 바른 법을 듣지 않음이다.
열 한째는 이치대로 작의(作意)하지 아니함이요, 열 두재는 믿지 않음이요, 열 셋째는 게으름이요, 열 넷째는 기억을 상실함이요, 열 다섯째는 산란히요, 열 여섯째는 바르지 않은 알음이요, 열 일곱째는 방일하는 번뇌요, 열 여덟째는 이생성(異生性)이요, 열 아홉째는 욕심 떠남을 향함이요, 스무째는 태어남을 향함이다.
016_0141_c_19L煩惱緣有二十種者一樂二苦三不苦不樂四欲五尋六觸七先所串習八隨眠九不親近善友十不聽聞正十一不如理作意十二不信十三懈怠十四失念十五散亂十六不正十七放逸煩惱十八異生性十九由離欲二十由受生
번뇌의 수면(隨眠)에 20가지가 있다 함은 첫째는 부정지(不定地)의 수면(隨眠)이요, 둘째는 정지(定地)의 수면이요, 셋째는 자기의 경지를 따르는 수면이요, 넷째는 다른 이의 경지를 따르는 수면이요, 다섯째는 손실을 당하는 수면이요, 여섯째는 손실을 당하지 않은 수면이요, 일곱째는 따라 순응하는 수면이요, 여덟째는 따라 순응함이 아닌 수면이요, 아홉째는 갖추어 만족한 수면이요, 열째는 부족되어 감하는 수면이다.
열 한째는 해칠만한 수면(隨眠)이요, 열 둘째는 해치지 않을 만한 수면이요, 열 셋째는 증가되는 수면이요, 열 넷째는 평등한 수면이요, 열 다섯째는 적고 얇은 수면이요, 열 여섯째는 깨달음 있는 수면이요, 열 일곱째는 깨달음 없는 수면이요, 열 여덟째는 많은 괴로움이 생긴 수면이요, 열 아홉째는 적은 괴로움이 생긴 수면이요, 스무째는 괴로움이 생기지 않는 수면이다.
016_0142_a_03L煩惱隨眠有二十種者一不定地隨二定地隨眠三隨自境隨眠四隨他境隨眠五被損隨眠六未被損隨七隨順隨眠八不隨順隨眠九具滿隨眠十缺減隨眠十一可害隨眠十二不可害隨眠十三增上隨眠四平等隨眠十五微薄隨眠十六有覺隨眠十七無覺隨眠十八生多苦隨眠十九生少苦隨眠二十不生苦隨眠
번뇌의 소연경(所緣境)에 20가지가 있다 함은 첫째는 일 있음에 반연하는 경계[境界]요, 둘째는 일없음에 반연하는 경계요, 셋째는 제 모양에 반연하는 경계요, 넷째는 공통된 모양에 반연하는 경계요, 다섯째는 현재 보는 데에 반연하는 경계요, 여섯째는 현재 보지 않는 데에 반연하는 경계요, 일곱째는 바깥문에 반연하는 경계요, 여덟째는 안문에 반연하는 경계요, 아홉째는 제 종류의 번뇌에 반연하는 경계요, 열째는 단 종류의 번뇌에 반연하는 경계이다.
열 한째는 자기의 것에 반연하는 경계[境]요, 열두째는 남의 것에 반연하는 경계요, 열 셋째는 없음에 반연하는 경계요, 열 넷째는 유루(有漏)에 반연하는 경계요, 열 다섯째는 무루(無漏)에 반연하는 경계요, 열 여섯째는 유위(有爲)에 반연하는 경계요, 열 일곱째는 무위(無爲)에 반연하는 경계요, 열 여덟째는 제 마음의 분별에 반연하는 경계요, 열 아홉째는 기억과 분별에 반연하는 경계요, 스무째는 일 모양[事相]에 반연하는 경계이다.
016_0142_a_13L煩惱所緣境有二十種者一緣有事二緣無事境三緣自相境四緣共相境五緣現見境六緣不現見境緣外門境八緣內門境九緣自類煩惱境十緣他類煩惱境十一緣自境十二緣他境十三緣無境十四緣有漏境十五緣無漏境十六緣有爲境十七緣無爲境十八緣自心分別境十九緣憶念分別境二十緣事相境
016_0142_b_01L추중(麤重)에 20가지가 있다 함은 첫째는 성집(性執)의 추중(麤重)이요, 둘째는 성번뇌(性煩惱)의 추중이요, 셋째는 성업(性業)의 추중이요, 넷째는 번뇌장(煩惱障)의 추중이요, 다섯째는 소지장(所知障)의 추중이요 여섯째는 정장(定鄣)의 추종이요, 일곱째는 업장(業障)의 추중이요, 여덟째는 보장(報障)의 추중이요, 아홉째는 개장(蓋障)의 추중이요, 열째는 바르지 않은 심사(尋思)의 추중이다.
열 한째는 근심ㆍ괴로움의 추중이요, 열 둘째는 두려움의 추중이요, 열 셋째는 피로와 게으름의 추중이요, 열 넷째는 음식의 추중이요, 열 다섯째는 음욕의 추중이요, 열 일곱째는 네 요소가 어김의 추중이요, 열 여덟째는 시간이 변하여 달라짐의 추중이요, 열 아홉째는 죽음의 추중이요, 스무째는 변행(遍行)의 추중이다. 또, 만일에 분별하여 아는 번뇌를 간추려 말한다면 다섯가지 모양으로 말미암나니 말하자면 자체 모양과 원인 모양, 품류(品類) 모양, 대상에 마음이 산란하는 모양, 결과의 모양이다.
또 다음, 어느 한도에서 번뇌의 수면(隨眠)과 불선(不善)을 설명할 것인가를 다음 게송으로 말하리라.
016_0142_a_22L麤重有二十種者一性執麤重二性煩惱麤重三性業麤重四煩惱障麤五所知障麤重六定障麤重七業障麤重八報障麤重九蓋障麤重不正尋思麤重十一愁惱麤重十二怖畏麤重十三勞倦麤重十四食麤十五眠夢麤重十六婬欲麤重七大種乖違麤重十八時分變異麤十九死麤重二十遍行麤重又若略說了知煩惱由五種相謂自體相因相品類相於境心亂相及果相次齊何當說煩惱隨眠及不善?頌曰

자기를 따라 순응하여 나기 때문이며
종자와 그의 일 때문이며
네 가지 과실이 나기 때문이며
깨끗지 못한 세 가지 원인 때문이네.
016_0142_b_11L隨順自生故
種子故事故
生四過失故
不淨三因故

논하건대, 네 가지 원인으로 말미암아 수면(隨眠)이라고 말하나니 첫째는 자기를 따라 순응하여 나기 때문이니 만일 번뇌의 일이면 그 번뇌를 따라 순응함이라고 말한다. 둘째는 종자에 따라 속박하기 때문이요, 셋째는 그 증가되는 일 때문이요, 넷째는 네 가지 과실이 생기기 때문이다.
네 가지 과실(過失)이란, 첫째는 고요하지 못한 과실이요, 둘째는 차별인 과실이요, 셋째는 행위가 일어나는 과실이요, 넷째는 원인을 포섭하는 과실이다. 그 중에 앞의 하나는 둘이 나타남으로 말미암아서요, 세 가지는 넷이 나타남으로 말미암아서이다.
【문】 어느 한도에서 불선(不善) 번뇌의 모양을 알아야 하는가.
【답】 세 가지 원인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니 맹렬하여 성하기 때문이며, 중생들을 괴롭히고 어지럽게 하기 때문이며, 선(善)을 장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업(業)ㆍ잡염(雜染)인 수승한 결택[勝決擇]을 지금 설명해야겠다. 다음의 게송으로 말하리라.
016_0142_b_13L論曰由四種因故說名隨眠一隨順自生故謂若煩惱事隨順此煩惱種子隨縛故三彼增上事故四生四過失故四過失者一不寂靜過失差別過失三發行過失四攝因過失此中前一由二所顯三種由四所顯齊何當知不善煩惱相?答由三因謂猛盛故惱亂有情故能障㝵善復次業雜染勝決擇今當說頌曰

업에는 사업(思業)과 사이업(思已業)으로서
그의 차별이 열 세 가지 있으며
그것에 6과(果)와 3위(位)이고
또는 업의 결정이 다섯 가지이네.
016_0142_b_22L業思及思已
差別有十三
彼果六三位
業決定五種
016_0142_c_01L
논하건대, 만약 간추려 말한다면 업(業)에 두 가지가 있나니 사업과 사이업을 말한다.
그 업의 차별에 다시 열 세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몸의 업이요, 둘재는 말의 업이요, 셋째는 뜻의 업이요, 넷째는 율의(律儀)에 해당하는 업이요, 다섯째는 불율의(不律儀)에 해당하는 업이요, 여섯째는 그 모두에 해당함이 아닌 업이요, 일곱째는 복의 업이요, 여덟째는 복 아닌[非福] 업이요, 아홉째는 부동업(不動業)이요, 열째는 검고 검은 이숙업(異熟業)이요, 열 한째는 희고 흰 이숙업이요, 열 둘째는 검고 희며 검고 흰 이숙업이요, 열 셋째는 검고 흰 것이 아니고 이숙(異熟)이 없는 업이니 그것으로 온갖 업을 총 망라할 수 있다.
그와 같은 따위의 업에는 여섯 가지 과[六果]와 세 가지 위[三位]가 있다고 알아야 한다.
여섯 가지 과[六果]란, 가애과(可愛果)와 불가애과(不可愛果), 청정과(淸淨果), 이숙과(異熟果), 등류과(等流果), 증상과(增上果)를 말한다.
세 가지 위[三位]란, 작용위(作用位)와 습기위(習氣位), 여과위(與果位)를 말한다.
또, 그와 같은 업에는 다섯 가지 결정이 있나니 첫째는 지금의 법(現法)에서 받는 결정이요, 둘째는 다음 생(生)에서 받는 결정이요, 셋째는 그 후의 차별로 받는 결정이요, 넷째는 과보를 받는 결정이요, 다섯째는 업을 짓는 결정이다.
다시 다음의 게송으로 말하리라.
016_0142_c_01L論曰若略說業有二種謂思及思已此業差別復有十三種一身業二語三意業四律儀所攝業五不律儀所攝業六俱非所攝業七福業八非福業九不動業十黑黑異熟業十一白白異熟業十二黑白黑白異熟業十三非黑白無異熟業能盡諸業是等業當知有六種果三種位六種果者謂可愛果不可愛果淸淨果熟果等流果增上果三位者謂作用習氣位與果位又如是業有五種決定一現法受決定二生受決定後差別受決定四受報決定五作業決定復次頌曰

제 업 따위도 네 가지이고
선후의 과보가 성숙함도 넷이며
다시 또 아홉 가지가 있는데
곧 두 가지 차별이라고 알아야 한다.
016_0142_c_15L自業等四種
此先熟亦四
復九種當知
卽二種差別
016_0143_a_01L
논하건대, 바가범(婆伽梵)께서, 「마납바(摩納婆)여, 알아야 하나니 온갖 중생들은 제 업으로 짓는 바라, 업이 다투는 근본이 된다. 업으로부터 생긴 것이며 업이 의지하거나 나아가는 것이 된다 」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그와 같은 업은 제가 지은 업인데, 네 가지라고 알아야 하나니 즉, 자기가 계속하는 것에서 여과(與果)할 수 있기 때문이며, 능동적인 다스림과 수동적인 다스림이 앞에 나타나 있기 때문이며, 과거세(過去世)로부터 현세가 생기기 때문이며, 미래의 존재[有]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업이 다하기 때문에, 「업이 의지하거나 나아가는 것이 된다 」고 말씀하신 것이다.
또, 그 업의 과보에는 선후(先後)의 과보가 성숙함이 네 가지라고 알아야 하나니 이른바 가장 먼저는 중한 업보가 성숙되고, 다음에는 가장 가까운 것이 성숙되고, 그 다음에는 관습된 것이 성숙되고 맨 뒤에는 먼저 지은 것이 성숙되는 것이 그것이다.
또, 끊을 수가 없는 업은 이숙(異熟)이 결정된 것이거나 부정보(不定報=결정되지 않은 과보)인 업이라고 알아야 하나니 그것만은 애욕을 떠나 끊음에 있어서도 장애가 되지 않는다.
또, 모든 외도는 이와 같은 소견을 일으키고 이와 같은 말을 하나니 즉, 「모든 중생들이 온갖 업 짓는 것을 따라 혹은 즐거움과 함께 행하기도 하고, 혹은 괴로움과 함께 행하기도 하며, 받은바 이숙(異熟)도 역시 그와 같다 」고 하는데 저들의 외도는 모두가 허망한 고집을 한 것이다. 왜냐하면 두 가지로 받는 것을 구비하였기 때문이니 말하자면 모든 선업(善業)도 괴로움의 과보를 받기도 하고 또한 즐거움의 과보를 받기도 하며, 불선(不善)한 업도 역시 그와 같다.
016_0142_c_17L論曰如薄伽梵說摩納婆當知一切有情自業所作業爲諍本從業所生業爲依趣如是此業自所作業四種應知於自相續能與果故能治所治現在前故從過去世生現世故爲未來有故爲業盡故名業依趣又此業報當知四種先後報熟所謂最先重業報熟次最近者次串習者後先作又不可斷業當知異熟決定若不定報業於離欲斷不能爲㝵又諸外道起如是見說如是論隨諸衆生作諸業或樂俱行或苦俱行所受異亦復如是彼諸外道皆是妄執以故?具二受故謂諸善業亦受苦報亦受樂報不善之業亦復如是
또 업은 두 뿌리에 의하기 때문에 선성(善性)과 불선성(不善性)을 이루나니 말하자면 착한 뿌리에 의하기 때문에 온갖 선업(善業)을 일으키며, 착하지 않는 뿌리에 의하기 때문에 불선업(不善業)을 이루나니 말하자면 착한 뿌리에 의하기 때문에 온갖 선업(善業)을 일으키며, 착하지 않는 뿌리에 의하기 때문에 불선업(不善業)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또, 선업과 불선업의 차별된 모양에는 아홉 가지 원인으로 말미암는다고 알아야 한다. 첫째는 원인과 밭[田=福田ㆍ敬田따위]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니, 말하자면 착한 뿌리와 착함 아닌 부리와 공경해야할 밭[敬田] 따위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일로 말미암기 때문이니 원만한 일과 원만하지 않은 일로 말미암을 말한다. 셋째는 방편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니 간단없는 방편과 은근하게 존중하는 방편으로 말미암음을 말한다. 넷째는 의지로 말미암기 때문이니 의지가 혹 깨끗하기도 하고, 혹 부정하기도 함을 말한다. 다섯째는 작의(作意)로 말미암기 때문이니 맹렬한 정신(淨信)과 증가되는 속박으로 말미암을 말한다.
여섯째는 원하는 견해로 말미암기 때문이니 저열한 과보를 회양하고 수승한 과보를 원하여 하는 것으로 말미암음을 말한다. 일곱째는 돕는 벗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니 그 밖의 착한 법과 불선(不善)의 법에 섭수됨으로 말미암음을 말한다. 여덟째는 많이 익힘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니 자기가 수행하며, 또한 남들로 하여금 찬탄하고 따라 기뻐하게 하며, 같은 법을 닦는 이를 보면 마음에 기뻐함을 말한다. 아홉째는 많은 사람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니 많은 사람과 함께 그러한 업을 행하는 것을 말한다.
다시 태어남의 잡염(雜染)인 수승한 결택[勝決擇]을 지금 곧 말해야겠다.
다음의 게송으로 말하리라.
016_0143_a_09L又當知業依二根故成善不善性謂依善根故起諸善業依不善根故起不善又善不善業差別之相當知由九種因一由因及田故謂由善不善根及尊重等田有差別二由事故謂由圓滿不圓滿事三由方便故謂由無閒殷重方便四由依止故謂由依止或淨不淨五由作意故謂由猛利淨信及增上纏六由欲解故謂由迴向願求勝劣果報七由助伴故謂由所餘善不善法之所攝受八由多修習謂自修行亦教他作讚歎隨喜同法者心生喜悅九由多人故謂與多人共行此業復次生雜染勝決擇今當說頌曰
016_0143_b_01L
목숨 마치는 것의 결정과 결정 아님이 있고
중간에 요사함이 여섯의 원인이며
분명한 위치에는 세 가지 마음이 있고
중음(中陰)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네.
016_0143_b_01L命終定不定
中夭由六因
明了位三心
中有或有無

논하건대, 목숨을 마침에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결정(決定)이니 북승상주(北勝上洲)를 말함이요, 둘째는 결정아님[不決定]이니 딴 곳을 말한다.
또 중간에 요사함에는 여섯 가지 원인으로 말미암 나니 첫째는 불평등을 피하지 않기 때문이요, 둘째는 기억을 상실하기 때문이요, 셋째는 뜻이 분포하기 때문이요, 넷째는 수명이 다하기 때문이요, 다섯째는 업이 다했기 때문이요, 여섯째는 복이 다했기 때문이다.
또, 목숨이 마칠 적에 세 가지 마음이 있나니, 즉 선심(善心)과 불선심(不善心)과 무기심(無記心)을 말함인데, 그것은 분명한 마음의 위치에 있을 적을 의미한 것이요, 만일 분명하지 않는 위치에 있을 적에는 결코 무기(無記) 뿐이다.
또, 목숨이 마친 후에 중음[中陰]이 있기도 하나니 장차 형상 세계[色界]에 태어나게 될 이를 말한다. 혹 중음이 없기도 하나니 장차 무형 세계[無色界]에 태어나게 될 이를 말한다.
다시 다음의 게송으로 말하리라.
016_0143_b_03L論曰有二種命終一決定謂北勝上二不決定謂餘處又復中夭由六種因一不避不平等故二念忘失故三意瞋忿故四壽盡故五業盡故福盡故又命終時有三種心謂善心不善心無記心此在分明心位若至不分明位定唯無記又命終後或有中有謂將生有色界者或無中有將生無色界者復次頌曰

그 밖에 중음이 반연하는 것에 의하여
물들어 더럽힌 마음이 생기며
네 가지로 태어나는 그 가운데서
3계(界)와 5취(趣)를 따라 생사(生死)하네.
016_0143_b_12L依餘有所緣
染污心生起
於四種生中
及三界五趣

논하건대, 그 밖에 중음이 태어난 곳에 반연함으로 대상을 삼는 것에 의지하여 물들어 더럽힌 마음이 생기게 되어 생유(生有)로 하여금 계속하게 한다.
또, 네 가지로 태어나는[四生] 그 가운데서 온갖 나고 죽음을 받나니 알로 나는 것[卵生]ㆍ태로 나는 것[胎生]ㆍ습기로 나는 것[濕生]ㆍ변화하여 나는 것[化生]을 말한다.
또, 욕심 세계ㆍ형상 세계ㆍ무형 세계의 3계(界)와 지옥 따위의 5취(趣)에서 온갖 나고 죽음을 받나니 그와 같은 죽음과 태어남과 처소를 설명한 것이다.
이미 태어남의 잡염(雜染)인 수승한 결택을 밝히었으니 진리[諦]에 대한 결택(決擇)을 지금 곧 설명해야겠다.
다음의 게송으로 말하리라.
016_0143_b_14L論曰依止餘中有緣生處爲境染污心生起令生有相續又於四種生中受諸生死謂卵生胎生濕生化生於欲無色三界中及於地獄等五趣中受諸生死如是若死若生處所已顯生雜染勝決擇諦事決擇今當說頌曰

뜻으로 이해한 내용과 언설은
모두 세속의 진리라고 알아야 하며
청정함이 반연함과 그 청정한 성품과
저 방편은 모두 승의(勝義)의 진리이네.
016_0143_b_21L當知世俗諦
意解義及說
淨所緣彼性
方便名勝義
016_0143_c_01L
논하건대, 온갖 언설(言說)과 그 뜻으로 인하여 알아 얻은 내용은 모두 세속의 진리[世俗諦]라고 말하며, 만일 청정(淸淨)함이 반연한 바와, 만일 청정한 성품과, 만일 저 방편(方便)이라면 모두를 승의의 진리(勝義諦)라고 말한다. 청정함이 반연한 바란, 네 가지 거룩한 진리[四聖諦]와 진여(眞如)를 말하며, 청정한 성품이란, 사라진 의리[滅諦]를 말한다.
다시 다음의 게송으로 말하리라.
016_0143_b_23L論曰一切言說及因彼意解所得義皆名世俗諦若淸淨所緣若淸淨性若彼方便皆名勝義諦淸淨所緣者謂四聖諦及眞如淸淨性者謂滅諦淸淨方便者謂道諦復次頌曰

마땅히 알아야 하리, 그 네 가지 진리[四諦]는
더러움과 깨끗함에 해당 되는데
그를 보거나 거치지 못한 것으로서
병과 병이 없어지는 원인과 같네.
016_0143_c_05L當知是四種
染淨之所攝
未見未經受
如病病滅因

논하건대, 네 가지 진리를 바로 염오(染汚)와 청정(淸淨)의 두 법에 해당된다고 알아야 한다. 그리고 염오의 두 가지는 결과[果]와 원인[因] 그것이며, 청정의 두 가지도 그와 마찬가지이다.
그와 같은 네 가지 진리[四諦]에 대해서 온갖 중생들이 끝없이 오면서 사라짐의 진리[滅諦]와 도의 진리[道諦]인 두 진리를 실다히 보지도 못했고 또한 거치어 받아들이지 못했다.
또, 병들고 병이 사라지는 것과 같은 저 두 원인으로 네 가지 진리가 건립되었나니 괴로움의 진리[苦諦]는 병(病)과 같고, 쌓임의 진리[集諦]는 병의 원인과 같고 사라짐의 진리[滅諦]는 병이 사라짐과 같고, 도의 진리[道諦]는 병이 사라지는 원인과 같다.
다시 다음의 게송으로 말하리라.
016_0143_c_07L論曰當知四諦染污淸淨二法所攝染污二種若果若因淸淨亦爾如是四諦從無始來一切有情未如實見滅道二諦亦未經受又如病病滅及彼二因建立四諦苦諦如病集諦如病因滅諦如病滅道諦如病滅因次頌曰

그 네 가지 진리에는
각각 넷의 모양과 넷의 행(行)과
변지(遍知) 따위의 네 가지
인과(因果)의 체성에 차별이 있네.
016_0143_c_14L當知是四諦
各四相四行
遍知等四種
因果性差別
016_0144_a_01L
논하건대, 네 가지 거룩한 진리에는 낱낱이 네 가지 모양이 있다고 알아야 한다. 괴로움의 진리에 네 가지 모양이란, 첫째는 생기는 괴로움이요, 둘째는 내적(內的)인 괴로움이요, 셋째는 외적(外的)인 괴로움이요, 넷째는 거칠고 중한 괴로움이니 첫째의 것은 나는[生] 괴로움을 말하고, 둘째는 늙고 병들고 죽는 괴로움을 말하고, 셋째는 원수와 만나게 되는 괴로움과 사랑과 이별하는 괴로움과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과 사랑과 이별하는 괴로움과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을 말하고, 넷째는 5취온(取蘊), 즉 오음성고(五陰盛苦)의 괴로움을 말한다.
쌓임의 진리에 네 가지 모양이란, 첫째는 총괄적인 애욕이요, 둘째는 뒤에 있을 애욕이요, 셋째는 기쁨과 탐냄과 병행되는 애욕이요, 넷째는 저 곳에서 기쁨인 애욕이다.
사라짐의 진리에 네 가지 모양이란, 첫째는 애착이 없어짐이요, 둘째는 애욕을 떠남이요, 셋째는 사라짐이요, 넷째는 열반이다.
도의 진리에 네 가지 모양이란, 고지통(苦遲通) 따위의 네 가지 행적을 말함이니 앞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또, 낱낱이 진리에 각각 넷의 행(行)이 있다고 알아야 하나니 성현관품(成現觀品)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또, 모든 진리에는 변지(遍知), 영단(永斷), 작증(作證), 수도(修道)인 인과(因果)의 체성이 있다고 알아야 하나니 앞의 세 가지는 바로 결과[果]이고 수도(修道)는 바로 원인[因]이니 말하자면, 괴로움의 원인을 두루 알며[遍知], 쌓임의 원인을 영원히 끊으며[永斷], 사라짐의 원인을 증득[作證]함이다.
016_0143_c_16L論曰當知四聖諦一一有四種相諦有四相者一起苦二內緣苦三外緣苦四麤重苦初謂生苦第二謂老病死苦第三謂怨憎會苦愛別離苦所欲匱苦第四謂五取蘊苦集諦有四相者一摠愛二後有愛三喜貪俱行愛四彼彼處喜愛滅諦有四相者一愛盡二離欲三滅四涅槃道諦有四相者謂苦遲通等四種行迹前已說又一一諦各有四行當知如成現觀品已說又於諸諦有遍知永斷作證修道因果體性應知前三是果修道是因謂遍知苦因永斷集因及證滅因
어찌하여 세속 따위를 진리라고 말하는가를 다음의 게송으로 말하리라.
016_0144_a_07L云何世俗等說名爲諦?頌曰

저 깨달음은 어겨도 다툼이 없으며
으레 그를 증득함도 역시 그러하며
진리에서도 두 가지는 선(善)뿐이고
다시 두 가지라고 알아야 하리.
016_0144_a_08L彼覺無乖諍
法爾證亦然
諦三種唯善
復二種應知

논하건대, 「저 어김없는 도리를 으레 깨닫는다 」함은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들이 법이 으레 그러함으로 말미암아 저 온갖 법에서 어김없는 도리를 깨닫나니 그를 세속의 진리라 말한다.
「으레 그를 증득함도 역시 그러하다 」함은 진리를 이미 본 이들은 그 법의 성품대로 어김 없는 도리를 증득하나니 그들 승의(勝義) 진리라 말한다. 그러한 도리에서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온갖 거룩한 이[聖者]들이 그것으로 진리를 삼기 때문에 거룩한 진리[聖諦]라 말한다 」고 하셨다.
또, 괴로움의 진리 따위인 네 가지 진리에서 처음 두 가지는 선(善)과 불선(不善)과 무기(無記)의 3성(性)에 통하고 그 외는 선(善) 뿐이라고 알아야 한다.
또, 선(善)에도 두 가지가 있나니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을 말한다. 그것에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끊음과 도(道)에 해당되는 것을 말한다.
그와 같이 진리[諦]에 대한 결택을 이미 설명하였으니 의지(依止)의 결택(決擇)을 지금에 곧 설명해야겠다.
다음의 게송으로 말하리라.
016_0144_a_10L論曰彼覺無乖諍法爾者謂世閒愚夫等由法爾故於彼諸法覺無乖諍名世俗諦法爾證亦然者謂諸已見諦者如其法性證無乖諍名勝義諦由此道理薄伽梵說一切聖者以此爲諦故名聖諦又苦等四諦當知二通善不善無記三性餘唯是善善有二種謂世閒出世閒此復二種謂斷及道所攝如是已說諦事決擇依止決擇今當說頌曰

일곱 가지 의지(依止)는
세 가지 소의성(所依性)이라고 알아야 하나니
그것에는 또 두 가지 선교(善巧)와
네 구절 따위의 많은 설명이 있네.
016_0144_a_20L當知七依止
三種所依性
彼善巧二種
四句等廣說
016_0144_b_01L
논하건대, 세 가지 소의성(所依性)으로 말미암아 부처님께서 일곱 가지 의지(依止)를 말씀하셨다고 알아야 한다. 무엇이 세 가지 소의(所依)냐 하면, 첫째는 샘이 다한[漏盡] 소의(所依)요, 둘째는 공덕이 발기되는 소의요, 셋째는 현법락주(現法樂住)의 소의이다.
또, 그 의지에는 두 가지 선교(善巧)가 있다고 알아야 하나니 첫째는 삼마지(三摩地) 선교요, 둘째는 삼마발저(三摩鉢底) 선교다, 그것에는 네 구절 따위의 많은 분별이 있나니 부처님께서 다음의 온타남(嗢柁南=集施)ㆍ가타(伽他)로 말씀하신 것과 같다.
016_0144_a_22L論曰當知由三種所依性故薄伽梵說七種依止何等名爲三種所依?一漏盡所依二功德發起所依三現法樂住所依又此依止有二種善巧應一三摩地善巧二三摩鉢底善巧此有四句等廣分別如薄伽梵說柁南伽他曰

혹 어떤 정려(靜慮) 닦는 이에겐
삼마지(三摩地)의 선교(善巧)와
혹 삼마발저(三摩鉢底)의 선교가
함께 하거나 함께하지 않기도 하네.
016_0144_b_06L或有靜慮者
三摩地善巧
或三摩鉢底
或俱不俱等
016_0144_c_01L
어떤 것을, 삼마지의 선교이고 삼마발저의 선교가 아니라고 하느냐 하면, 공(空)함 따위의 세 가지 삼마지 선교이고 승처(勝處)ㆍ변처(遍處)ㆍ멸진정(滅盡定) 따위의 선교가 아님을 말한다.
어떤 것을, 삼마발저의 선교이고 삼마지의 선교가 아니라고 하느랴 하면, 승저ㆍ변처ㆍ무상정(無想定) 따위에 들어가거나 나가거나 하는 삼마발저 선교이고 셋의 삼마지 선교가 아님을 말한다.
어떤 것을 함께 함인 선교(善巧)라고 하느냐 하면, 말한 바 삼마지와 삼마발저의 차별에 함께 선교(善巧)함이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함께 선교(善巧)함이 아니냐 하면, 말한바 삼마지와 삼마발저의 차별에 함께 선교(善巧)함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다음으로 삼마지 선교이고 삼마발저 선교가 아님이란, 들어갈 바의 삼마지의 명칭[名]과 구절[句]과 문자[文]의 차별을 잘 알기 때문이고, 능히 들어감인 삼마지의 모든 행상(行相)과 상태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삼마발저 선교이고 삼마지 선교가 아님이란, 어떤 이가 들어갈 바의 삼마지의 모든 행상(行相)과 상태를 잘 알아 그 정(定)에 드나, 이 삼마지의 명칭과 구절과 문자의 차별을 잘 알지 못하면서 「내가 지금에 이와 같고 이와 같은 정에 들므로 삼마지라 말한다 」고 한다.
또, 어떤 보살은 백이나 되는 삼마지와 천이나 되는 삼마지 따위에 들어갈 수 있으나, 그러나 그 정(定)의 명칭과 구절과 문자의 차별을 잘 알지 못하면서, 「내가 지금 이와 같고 이와 같은 정(定)에 들므로 삼마지라 말한다 」고 하거나, 나아가서는 「여러 부처님을 따르지 못했고 제일 구경(究竟)인 보살 마하살의 듣는 바를 얻지 못했으며, 혹은 나는 제일 구경을 얻지 못했다 」고 한다.
016_0144_b_08L云何三摩地善巧非三摩鉢底善巧?謂於空等三三摩地善巧故非於勝遍處滅盡定等善巧故云何三摩鉢底善巧非三摩地善巧?謂於勝處遍處無想定等若入若出三摩鉢底善巧故非於三三摩地善巧故云何俱善巧?謂於所說三摩地三摩鉢底差別俱善巧故云何俱非善巧?謂於所說三摩地三摩鉢底差別俱不善巧故復次三摩地善巧非三摩鉢底善巧者謂善了知所入三摩地名文差別故不善了知能入三摩地諸行狀相故三摩鉢底善巧非三摩地善巧者謂如有一能善了知所入三摩地諸行狀相而入彼定不善了知此三摩地名文差別謂我今入如此如此名三摩地又有菩薩能入若百三摩地若千三摩地等然彼不能了知彼定名文身差別謂我今入如此如此名三摩地乃至未從諸佛及得第一究竟菩薩摩訶薩所聞自未得第一究竟
【문】 어떻게 정(定)에 머무르는가.
【답】 어떤 이가 정(定)에 들 수 있는 모든 행상과 상태를 잘 알아 취하므로 인해서이니 그를 잘 알아 취하기 때문에 그 하고 싶은 대로 들어갈 바의 정(定)에 머무르며 또는 그 들어갈 바인 모든 삼마지를 잃어버리는 일이 없다. 그와 같은 머무름에는 두 가지 머무름이 있나니 첫째는 정(定)에 편히 머무르기 때문에 머무름이라 말하며 둘째는 잃어버리지 않기 때문에 머무름이라 말한다.
【문】 어떻게 정(定)에서 일어나는가.
【답】 어떤 이가 정(定)에 들 수 있는 모든 행상과 상태를 잘 알아 취하므로 인해서이니 그를 잘 알아 취하기 때문에 그 하고 싶은 대로 들어갈 바의 정(定)에 머무르며 또는 그 들어갈 바인 모든 삼마지를 잃어 버리는 일이 없다. 그와 같은 머무름에는 두 가지 머무름이 있나니 첫째는 정(定)에 편히 머무르기 때문에 머무름이라 말하며 둘째는 잃어버리지 않기 때문에 머무름이라 말한다.
【문】 어떻게 정(定)에서 일어나는가.
【답】 어떤 이가 능히 정(定)에 든 모든 행상과 상태를 다시 생각하지 않고 다만 부정지(不定地)의 분별 모양에 해당되는 그것과 정지(定地)의 동분(同分)과 작의(作意)로 모든 법을 생각하기 때문에 그 삼마지로부터 일어나나니, 혹은 짓는 바를 따르는 것으로 인하여 일어나며, 혹은 결정적으로 짓는 바로 인하여 일어나며, 혹은 짓는 바를 기약했거나 바라는 것으로 인하여 어긋나게 된다.
짓는 바를 따르는 것이란, 옷과 바리와 온갖 도구와 작업을 말한다. 결정적으로 짓는 바란, 대소변을 보거나 스승과 어른을 받들거나 걸식하는 따위의 행동을 말한다. 짓는 바를 기약했거나 바라는 것이란, 어떤 이가 남을 위하여 짓는 바가 있는 것을 따르기로 약속함을 말한다. 혹은 다른 정(定)에 다시 들기 위하여 그 정(定)에서 일어나기도 한다.
016_0144_c_07L云何住定?答謂如有一於能入定諸行狀相善能了取善了取故隨其所欲住所入定又於所入諸三摩地無有退失如是有二種住一安住於定故名爲住二能不退失故名爲住云何起定?答謂如有一於能入定諸行狀相不復思惟但以不定地分別相所攝定地同分作意思惟諸法從此三摩地起或因隨所作故起或因決定所作故起或因期願所作故起隨所作者謂衣鉢衆具業決定所作者謂大小便利供事師長乞食等行期願所作者謂如有一期許爲他隨有所作或爲更入餘定故從定起
016_0145_a_01L【문】 어떤 것을 행상(行相)이라 말하는가.
【답】 반연하는 바의 대상에 행하여 정(定)에 들기 때문에 행상이라고 말하나니 삼마지에 의하여 일으킨 바 거치른 적정[靜]ㆍ병[病]ㆍ부스럼ㆍ화살ㆍ무상(無常) 따위의 행상을 말한다.
【문】 어떤 것을 상태라고 말하는가.
【답】 만일 장차 정(定)에 들고자 할 그 때에는 반드시 정(定)의 상태가 생기게 되나니 그 상태로 말미암아 수행자는 스스로 알기를, 「나는 곧 오래지 않아 그와 같은 상태의 정(定)에 들게 될 것이라 」고 한다.
또, 혹은 다시 정에 들면 그를 가르치는 스승도 역시 「이 수행자에게 그와 같은 상태가 일어났으니 그는 오래지 않아 그와 같은 정(定)에 곧 들게 될 것이라 」고 안다.
016_0144_c_21L云何爲行?答行所緣境而入於定故名爲行謂依三摩地所起麤無常等行云何名狀?答若有將入定者爾時必有定相生起由此相故行者自知我當不久將入如是如是相定或復已入又教授師亦知此行者有如是如是相起不久當入如是如是定
【문】 어떤 것을 모양[相]이라고 말하는가.
【답】 모양에는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경계의 모양[境相]이요, 둘째는 원인의 모양[因相]이다. 경계의 모양이란, 모양을 분별함이니 그것을 인연하여 정(定)에 들어간다.
원인의 모양이란, 정(定)에 들 수 있는 온갖 자량(資粮)이니 말과 교훈을 따라 순응함과 정(定)에 필요한 것을 싸 모음과 즐기는 낙욕(樂欲)이나 싫어하는 마음을 닦음과 산란한 모양이나 산란 하지 않은 모양을 아주 잘 아는 것이며, 또는 남에게 핍박이나 괴롭힘을 당하지 않음과, 혹은 사람이나 사람 아닌 것과, 혹은 소리의 지장과, 혹은 어떤 작용의 지장을 당하지 않음이다.
016_0145_a_06L云何名相?答相有二種一者境相二者因相境相者謂分別相由緣此而入於定因相者謂能入定所有資糧如隨順言教定具積集修俱樂欲厭離之心極善了知亂不亂相不爲他之所觸惱或人非人或聲所或用所作
【문】 어떤 것을 조복되어 순응함이라고 말하는가.
【답】 만일 삼마지(三摩地)가 모든 행상(行相)에 있어서 구속과 장애를 받는 것이 마치 물을 지님과 같다면 으례히 그 구속을 받아서 고요하지 않고 미묘하지 못하고 편안한 길이 아니므로 마음이 한 갈래로 정해지는 것을 얻지 못하리니 그 때에는 그 삼마지를 조복되어 순응함이라고 말하지 못할 것이며, 뜻과 같이 머무르지 못함이라고 알아야 한다. 만일 그와 정반대의 현상이라면 조복되어 순응함이라고 말한다.
【문】 어떤 것을 행하는 바라고 말하는가.
【답】 삼마지의 경계를 말함이니 만일에 그 경지를 초과한 정(定)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나니 마치 초선(初禪)에 든 사람이 그 위인 제2선(禪) 따위의 일들을 알지 못함과 같다. 그와 같아서 근도(根度)와 보특가라도(補特伽羅度)에 대해서도 역시 알아 보지 못한다.
016_0145_a_13L云何名調順?答若三摩地爲諸行相之所拘執猶如持水法爾被執靜不妙非安隱道不能證得心定一當知爾時此三摩地不名調順隨意住與此相違名爲調順云何名所行?答謂三摩地境界過此境定不能知如入初靜慮不能知見第二靜慮等事如是根度及補特伽羅度亦不知見
016_0145_b_01L【문】 어떤 것을 이끌어 발기시킴이라고 하는가.
【답】 넓은 문구(文句)의 뜻을 잘 간추려 포섭하며, 온갖 수승한 공덕을 잘 발기시킴을 말한다.
【문】 어떠한 삼마지를 좋아할만한 것이라고 말하는가.
【답】 제 부끄럼[慚]과 남 부끄럼[愧]과 사랑함과 공경함과 깨끗하게 믿음 등을 갖추고서 이치 그대로 생각을 하며 기억하고 바르게 알고 모든 감관을 수호하고 계율을 지니고 후회가 없는 따위이며, 나아가서는 최후가 되는 것을 좋아하고, 그 좋아하는 그대로 삼마지에 드는 것이며, 그와 상반되면 좋아할만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016_0145_a_22L云何引發?答謂能略攝廣文句及能發起諸勝功德何等三摩地名爲可愛?答謂具慚愧愛敬淨信如理作意憶念正知護諸根持戒無悔等乃至樂爲最後如其所樂入三摩地當知翻此名非可愛
【문】 어떤 것을 좋아할만한 것이며, 좋아할 만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가.
【답】 말하자면, 제 부끄럼과 남 부끄럼 따위를 조금 성취하거나 조금 성취하지 못함이며, 제 부끄럼ㆍ남 부끄럼 따위를 조금 서취하거나 조금 성취하지 못함이며, 제 부끄럼ㆍ남 부끄럼을 갖춤과 사랑함과 공경함이 아닌 것과 서로 응하는 따위라고 널리 말한다.
【문】 어떤 것을 증가함이라고 하는가.
【답】 삼마지가 이미 증가된 것을 말한다.
【문】 어떤 것을 줄어짐이라고 말하는가.
【답】 삼마지를 얻었다고 잃어 버림을 말한다.
【문】 어떤 것을 방편이라고 하는가.
【답】 둘에 나아가는 도를 말한다.
【문】 어떤 것을 사마타(奢摩他)라고 하는가.
【답】 분별의 영상(影像)과 작의(作意)의 모양이 없는 것을 말한다.
【문】 어떤 것을 집수(執受)라고 하는가.
【답】 어느 청정한 모양이거나 혹 광명의 모양이거나 잡아 취함을 일으키는 모양을 말한다.
【문】 어떤 것을 버림[乘捨]이라고 하는가.
【답】 착한 품류에 대해서 이미 평등하고 뛰어난 버림을 얻게 된 것을 말한다.
또 다음으로, 온갖 정려(靜慮)에 의하는 수승한 결택을 지금 곧 말해야겠다.
다음의 게송으로 말하리라.
016_0145_b_06L云何可愛不可愛?謂慚愧等少分成就少分不成就謂具慚愧非愛敬相應等乃至廣說云何爲增?答謂三摩地已得增長云何爲減?答謂三摩地得已退失云何方便?答謂趣二之道云何奢摩他?答謂無分別影像作意相云何執受?答謂由隨一若淸淨相或光明相起執取相云何棄捨?答謂於善品已得平等增上捨相復次依諸靜慮勝決擇今當說頌曰

정려(靜慮)의 여러 가지 장애와 갈래와
그리고 저 광범한 건립이 있는데
거기엔 괴로움과 요동을 멀리 떠나서
뒤의 것이 차차 더 수승하네.
016_0145_b_19L靜慮數障分
及彼廣建立
遠離於苦動
後後分勝異
016_0145_c_01L
논하건대,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네 가지 정려(靜慮)는 어찌하여 네 가지 뿐이고 많거나 적지 않는가. 괴로움과 즐거움의 일을 벗어나 구경(究竟)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차츰 차츰 제4정려에 이르러서는 근심ㆍ괴로움ㆍ기쁜ㆍ즐거움을 초월하여 벗어났기 때문이다.
016_0145_b_21L論曰如上所說四種靜慮云何唯四不多不少?由出苦樂事究竟故所以者何?漸次乃至第四靜慮得超度故
【문】 처음 정려(靜慮)에서 다스리는 장애는 어떠한가.
【답】 다섯 가지가 있다고 알아야 하나니 첫째는 탐냄, 성냄, 해침, 찾음[尋]이요, 둘째는 괴로움이요, 셋째는 근심이요, 넷째는 계율을 범함이요, 다섯째는 산란이다.
【문】 제2 정려에서 다스리는 장애는 어떠한가.
【답】 또한 다섯 가지가 있다고 알아야 하나니 첫째는 처음 정려(靜慮)의 탐냄이요, 둘째는 심사(尋伺)요, 셋째는 괴로움이요, 넷째는 들뜸이요, 다섯째는 결정적인 열등한 성질이다.
【문】 제3 정려에서 다스리는 장애는 어떠한가.
【답】 네 가지가 있다고 알아야 하나니 첫째는 제2 정려의 탐냄이요, 둘째는 기쁨이요, 셋째는 기뻐 날뜀이요, 넷째는 결정적이 열등한 성질이다.
【문】 제4 정려에서 다스리는 장애는 어떠한가.
【답】 또한 다섯 가지가 있다고 알아야 하나니 첫째는 나고 드는 숨이요, 둘째는 제3 정려의 탐냄이요, 셋째는 즐거움이요, 넷째는 즐거움인 작의(作意)요, 다섯째는 결정적인 열등한 성질이다.
016_0145_c_02L初靜慮所治障云何?答有五種應一貪恚害二苦三憂四犯戒散亂第二靜慮所治障云何?答亦有五種應知一初靜慮貪二尋伺三苦五定下劣性第三靜慮所治障云何?答有四種應知一第二靜慮貪二喜三踊躍定下劣性第四靜慮所治障云何?答亦有五種應知一入出息二第三靜慮貪四樂作意五定下劣性
016_0146_a_01L【문】 모든 정려에는 몇 가지 갈래가 있는가.
【답】 처음의 정려에는 다섯 갈래가 있다. 무엇이 다섯이냐 하면, 심(尋)ㆍ사(伺)ㆍ기쁨ㆍ즐거움ㆍ심일경성(心一境性)이다. 제2 정려에는 네 갈래가 있나니 안으로 평등하고 깨끗함과 기쁨ㆍ즐거움ㆍ심일경성을 말한다.
【문】 안으로 평등하고 깨끗함은 어떤 법으로 그 자체가 되었는가.
【답】 기억과 바르게 아는 것과 놓음으로 그 자체가 되었다. 그리고 제3 정려에는 다섯 갈래가 있나니 기억과 바르게 아는 것과 놓음과 즐거움과 심일경성을 말한다. 제4 정려에는 네 갈래가 있나니 놓음이 청정함과 기억이 청정함과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과 심일경성(心一境性)이다.
【문】 기억과 바르게 아는 것과 놓음은 어느 곳에도 있는데 무슨 까닭으로 처음 정려 따위에서는 말하지 아니했는가.
【답】 처음 정려에서는 심(尋)ㆍ사(伺)의 문에서 이끌어 발기하기 때문에 비록 있으나 말하지 아니했고, 제2 정려에서는 기뻐 날뛰는 자체에서 짓는 업이 있고 마음에 소유하고 있는 약간의 번뇌에 얽히고 덮인 것이 있기 때문에 통틀어 안으로 평등하고 깨끗함이라는 명칭으로써 그를 밝힌 것이다.
제3 정려에서는 저 마음에 소유하고 있는 약간의 번뇌를 모두 멀리 떠났기 때문에 저 자상(自相)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경에서 기쁨에 탐(貪)함을 멀리 떠나는 것을 설명하되, 「처음 정려에서는 비록 심사(尋伺)의 탐을 떠났으나 기쁨의 탐을 떠나지 못했다 」고 하신 것이다.
제4 정려에서는 곧 이 생각의 놓음이 아주 제일의 청정함으로 드러난다. 그러므로 모든 정려 중에 그 적응하는 대로 차별이 있는 것이라고 알아야 한다.
016_0145_c_14L於諸靜慮有幾支耶?答初有五支何等爲五?謂尋心一境性二靜慮有四支謂內等淨心一境性內等淨以何法爲體?答以念正知及捨爲體第三靜慮有五支正知心一境性第四靜慮有四謂捨淸淨念淸淨不苦不樂心一境性正知捨一切處有何故於初靜慮等不說耶?答初靜慮中由尋伺門所引發故雖有不說第二靜慮有踊躍自體之所作業及心所有少分煩惱所纏覆故摠以內等淨顯之第三靜慮中彼心所有少分煩皆遠離故顯彼自相故經中說遠離喜貪初靜慮中雖離欲貪未離喜第二靜慮中雖離尋伺貪未離喜第四靜慮中卽此捨念極善淸淨顯了是故於諸靜慮中如其所應差別應知
016_0146_b_01L【문】 무슨 까닭으로 4정려(靜慮)에서 네 갈래와 다섯 갈래를 세웠는가.
【답】 소의(所依)에 머무르기 때문이며, 순조로운 이익에 머무르기 때문이며, 그 자체에 머무르기 때문이다.
또는 사유(思惟)의 경계(境界)며, 수용의 경계며, 경계에서 산란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는 순조로운 이익이 의지하는 바이며, 증상(增上)의 마음이 의지하는 바이며, 증상의 슬기가 의지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또는, 세 가지 어지럽힘이 머무르고 있는 장애를 다스리기 위함이다. 세 가지 어지럽힘이 머무르고 있음이란, 더럽힘이 머물러 있음과 괴로움이 머물러 있음과 헷갈림이 머물러 있음이다.
또는, 5욕(欲)을 누리는 이는 바로 짓는 일 세 가지가 있어서 저 5욕을 누리는 것을 드러내나니 첫째는 바른 방편(方便)을 가지고 수용할 것을 구함이요, 둘째는 구하여 얻고서는 바로 수용함이요, 셋째는 자재롭게 따라 굴림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정려(靜慮)를 닦는 이도 바로 짓는 일 세 가지에 의하여 그에 알맞게 그 갈래를 세운다고 알아야 한다. 그것에도 다시 세 가지 다스림이 있나니 첫째는 애욕을 떠나는 다스림이요, 둘째는 몸과 마음의 핍박과 괴롭힘을 멈추는 다스림이요, 셋째는 바깥 마음의 산란을 고요함으로 다스림이다.
016_0146_a_10L何故於四靜慮建立四支五支耶?住所依故住順益故住自體故次思惟境界故受用境界故於境不散故復次順益所依故增上心所依增上慧所依故復次爲對治三種惱亂住障故三種惱亂住者謂染污住苦住迷亂住復次如受用五欲有三種正所作事顯彼受用諸欲一以正方便求所受用二求得已受用三自在隨轉如是修靜慮者三種正所作事如其所應建立支分應知復次爲對治自苦行故修靜慮者建立支分應知此復三種對治離欲對治二止息身心逼惱對治外心散亂寂靜對治
【문】 무슨 까닭으로 처음 정려에서 애욕 떠남을 말하고서 다시 악과 착함 아닌 법을 멀리 떠나는 것을 말하는가.
【답】 온갖 애욕의 제 모양을 밝히기 위함이며, 또는 그 허물이 되는 모양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그 허물이 되는 모양이란, 저 온갖 애욕으로 나쁜 행위를 저지르고 보면 아주 낮고 나쁜 곳에 떨어지나니 그러므로 악이라고 말하며, 착한 법이 생기는 것을 어기기 때문에 착함이 아니라고 말한다.
또는, 번뇌ㆍ잡염(雜染)을 잘 끊는 것을 밝히기 위함이며, 전에 싸 모은 업과 잡염을 능히 끊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또는, 집에 있는 이로서 수용하는 여러 가지 일에서 생기는 욕심을 끊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이며, 집을 떠난 이의 심사(尋伺) 부문에서 생기는 법을 끊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또는, 욕심의 심(尋)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또는, 저 외도와 신선이 얻은 모양과 같은 것을 밝히기 위하며 또 그가 물러서고는 나쁜 주문[惡呪]을 일으키는 것을 끊음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016_0146_b_02L何故初靜慮說離欲已復說遠離惡不善法?答爲顯諸欲自相及顯過患相故過患相者謂彼諸欲起惡行已墮極下處故名爲惡違善法生故名不善復次爲顯能斷煩惱雜染故及顯能斷先所積集業雜染故復次爲顯斷在家者受用事門所生欲故及顯斷出家者於尋伺門所生法故復次爲顯斷欲尋故及顯斷恚尋害尋故復次爲顯同彼外仙所得相故及顯斷彼退已起惡呪故
【문】 무슨 까닭으로 괴로움의 뿌리[苦根]를 처음 정려에서 끊지 못했다고 말하는가.
【답】 그 종류는 거칠고 중하기 때문에 그를 멀리 떠나지 못한 것이다. 만일 처음 정려에서 거칠고 중한 괴로움의 뿌리를 이미 끊었다면 제2 정려에 머무를 때와 응당 차별이 없을 것이니 그러므로 처음 정려에서는 거칠고 중한 괴로움을 끊지 못했다고 알아야 한다.
【문】 심사(尋伺) 따위의 법이 처음 정려(靜慮) 따위에서 능히 순조로운 이익이 되고 자기의 경지를 거두어 들이어 청정을 얻도록 하는데, 무슨 까닭으로 여래께서 그를 움직임이라고 말씀하시는가.
【답】 딴 경지에 견주어 보기 때문에 움직임이라고 말씀하신 것이요, 자기 경지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016_0146_b_13L何故苦根初靜慮中說未斷耶?答彼品麤重未遠離故若初靜慮已斷苦根麤重品者與住第二靜慮時無差別是故當知初靜慮中未斷麤重苦品尋伺等法於初靜慮等中能爲順益攝受自地令得淸淨何故如來說彼名動?答望他地故說名爲非望自地
016_0146_c_01L【문】 무슨 까닭으로 욕심 세계와 처음 정려 따위에서 그 다음 다음의 갈래를 세웠는가.
【답】 대략 세 가지 원인이 있나니 능동적이 다스림, 수동적인 다스림 때문이며, 증득함인 이익 때문이며, 증득함인 자체 때문이니 그와 같은 세 가지 원인은 4정려 중의 다섯 갈래(五支)에 해당함이니 그 적응 하는대로라고 알아야 한다.
【문】 제2 정려를 처음 정려에 견주어 보면 어떠한 수승하고 다른 점이 있는가.
【답】 삼마지(三摩地)가 원만하여 수승하고 다르다.
【문】 제3 정려를 제2 정려에 견주어 보면 어떠한 수승하고 다른 점이 있는가.
【답】 순조로운 이익이 원만하여 수승하고 다르다.
【문】 제4 정려를 제3 정려에 견주어 보면 어떠한 수승한 다른 점이 있는가.
【답】 청정함이 원만하여 수승하고 다르다.
다시 다음의 게송으로 말하리라.
016_0146_b_21L何故從欲界及於初靜慮等中立後後支耶?答略有三因謂能治所治故證利益故證自體故如是三因於四靜慮中五支所攝如其所應當知第二靜慮望初靜慮有何勝異?答三摩地圓滿勝異第三靜慮望第二靜慮有何勝異?答順益圓滿勝異第四靜慮望第三靜慮有何勝異?淸淨圓滿勝異復次頌曰

근분(近分)은 기쁨에서 움직임 있고
그 처음만이 샘을 없앨 수 있으며
또한 두 가지로 소리를 반연하며
여덟 등지(等至)에서 여덟 가지 일 버리네.
016_0146_c_07L近分喜有動
唯初能盡漏
亦二種緣聲
八等至捨八

논하건대, 처음 정려의 근분[近分定]에는 기쁨에 움직임이 있어서 근본정려(根本靜慮=根本定)의 기쁨과 같지 아니하다. 또 처음 근분미지(近分未至)에 해당하는 선정은 온갖 샘(漏)을 없애어 남김이 없게 된다. 또 처음 근분정(近分定)에는 두 가지가 있나니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을 말하며, 그 밖의 근분정에는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을 말하며, 그 밖의 근분정에는 세간(世間)뿐이니 이미 처음의 근본무루(根本無漏)인 정려(靜慮)를 얻었기 때문에 위의 경지의 모든 근분정에 무루(無漏)가 앞에 나타남이 아니다.
또는, 정중(正中)에 들어 있어서 외부의 소리를 취할 적에 두 가지 취함으로 말미암는다고 알아야 하나니 첫째는 정(定)에서 반연하는 대상과 가지가지 반연할 바의 대상을 분별하는 의식으로 말미암기 때문이요, 둘째는 이 구생(俱生)인 이식(耳識)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여덟 가지 등지(等至)에서 여덟 가지 일을 버린다 함은 여덟 가지 삼마발저[三摩鉢底]로 능히 여덟 가지 일을 버리는 놓음이다. 무엇이 여덟이냐 하면, 말과 심[尋]ㆍ기쁨ㆍ즐거움을 버리기 때문에 4정려의 삼마발저를 증득하며 형상[色]과 무형[空]ㆍ식(識)ㆍ무소유처(無所有處)의 생각[想]을 버리기 때문에 4무색(無色)의 삼마발저를 증득한다.
다시 다음의 게송으로 말하리라.
016_0146_c_09L論曰初靜慮近分喜有動非如根本靜慮喜又初近分未至所攝定能盡諸漏非餘又初近分有二種謂世閒出世閒餘近分唯世閒由已得初根本無漏靜慮故非於上地諸近分定無漏現前又處定中取外聲時當知由二種取一由了別定所緣境及種種所緣境意識故二由此俱生耳識八等至捨八者謂八種三摩鉢底能捨八事捨何等八?謂捨語證四靜慮三摩鉢底捨色所有處想故證四無色三摩鉢底次頌曰

현법안락주(現法安樂住)이며
현관(現觀)에 들 수 있고
해탈이라 칭찬하고 생각하며
네 가지 원인임을 알아야 하리.
016_0146_c_22L現法安樂住
能入於現觀
讚說想解脫
四種因當知
016_0147_a_01L
논하건대, 모든 정려만이 바로 현법안락주(現法安樂住)인 성질이 되나니 몸과 마음인 두 가지 편안함이 있기 때문이요, 무색정(無色定)에 몸의 편안함이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정려(靜慮)에 의하여 현관(現觀)에 들 수 있고 무색정(無色定)이 아니니 모든 정려에는 비발사나(毘鉢舍那)가 매우 맹렬하기 때문이다.
또는, 정려와 모든 정(定)을 닦는 이는 무색(無色) 해탈에 자주 드나들어서 저의 모양을 칭찬하여 말하나니 그가 매우 고요함이기 때문이다. 또, 모든 외도들은 저 무색정(無色定)에 대해서 해탈이라는 생각을 일으키기 때문에 자주 자주 그를 칭찬하여 말한다.
또는, 유상(有想)의 삼마지 해탈(解脫)에 의해서 온갖 샘[漏]을 없앨 수 있으며, 무소유처(無所有處)의 삼마지에 이르러서는 아주 맹렬하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유독 유상(有想) 삼마발저에 의해서만이 잘 알아 통달하고 그 외의 경지에서는 그러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네 가지 원인(四種因)이라 함은 모든 삼마발저가 능히 현법 안락주 따위 네 가지의 의지하는 원인이 됨을 말함이니 그 차례와 같은 것으로 알아야 한다.
다시 다음의 게송으로 말하리라.
016_0147_a_01L論曰唯諸靜慮是現法安樂住性有身心二種安故非無色定無身安又依靜慮能入現觀非無色定諸靜慮毘鉢舍那極猛利故又修靜慮及諸定者於無色解脫數入數出讚說彼相極寂靜故又諸外道於無色定起解脫想故數數讚說又依有想三摩地解脫能盡諸漏乃至無所有處三摩地極猛利故是故薄伽梵唯依有想三摩鉢底領解通達於餘地四種因者謂諸三摩鉢底爲現法安樂住等四種依因如其次第應知復次頌曰

애미(愛味) 따위에는 열 가지와
여섯 가지와 세 가지라고 알 것이며
물러남의 계속됨과 그를 다스림에는
각각 많은 종류의 차별이 있네.
016_0147_a_14L愛味等當知
十種三種
退相續障治
各多種差別

논하건대, 애미(愛味)와 상응청정(相應淸淨)과 무루(無漏)인 세 가지 정려에는 그 순서대로 열 가지와 여섯 가지와 세 가지가 있다고 알아야 한다. 무엇이 열 가지이냐 하면, 섭사품(攝事品)에서 이미 설명한 것과 같다.
무엇이 여섯 가지이냐 하면 여섯 가지 청정(淸淨)을 말함이니 첫째는 이끌어 내는 청정이요, 둘째는 최상으로 연마하는 청정이묘, 셋째는 후천적으로 얻는 청정이요, 넷째는 더럽게 물듦이 청정함이요, 다섯째는 포섭함이 청정함이요, 여섯째는 감당함이 청정함이다.
무엇이 세 가지이냐 하면, 출세간(出世間) 무루와 이계(離繫) 무루와 후득(後得) 무루를 말한다.
016_0147_a_16L論曰愛味相應淸淨無漏三種靜慮如其次第有十種六種三種應知何十種?謂如攝事品已說云何六種?謂六種淸淨一引發淸淨二上練淸三後得淸淨四垢染淸淨五攝淸六堪任淸淨云何三種?謂出世閒無漏離繫無漏後得無漏
016_0147_b_01L또, 애욕 떠남으로부터 물러남이 계속됨과 다스림에는 각각 많은 종류가 있다고 알아야 하나니 말하자면, 혹은 의지[依止]가 평등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물러나게 된다. 말하자면, 어떤 이가 중한 병이 들면 정(定)을 잃어 물러나게 되나니 존자(尊者) 벌륵가리(伐勒迦梨)가 말하기를, 「나는 지금 이 삼마지(三摩地)에서 증득해 들어갈 수 없으니 장차 이 삼마지에서 무지근함이 많기 때문에 물러나 잃어버리지나 않았을까 」라고 함과 같다.
또는 어떤 이의 성품이 거칠고 중함은 숙습(宿習)에서 말미암음이니 그러한 거칠고 중함이 많기 때문에 삼마지에서 물러나게 된다.
혹은 경계가 수승하고 미묘함으로 말미암아 물러나게 되나니 말하자면, 어떤 이가 수승하고 미묘한 경계가 앞에 나타나기 때문에 정(定)을 잃어버리기도 함이다. 마치 문유(聞有)와 외도(外道)와 선인(仙人)도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을 얻었다가도 사랑스럽고 예쁜 소녀의 몸과 접촉함으로 말미암아 그 정(定)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016_0147_a_23L又從離欲退彼相續彼障治應知各有多種謂或由依止不平等故退如有一遭於重疾退失於定如尊者伐勒迦黎說我今於此三摩地不能證入將無於此三摩地由多麤重故而退失耶?又如有一爲性多麤重宿習故由此多麤重故退三摩地由境界勝妙故退謂如有一得勝妙境界現前故退失定如聞有外道仙乃至得非想非非想處定由觸可妙色少女身故退失彼定
혹은 공경의 공양으로 말미암아 물러나게 되나니 어떤 이가 현재에 수승하고 미묘한 공경의 공양을 얻음으로 말미암아 곧 그 정(定)을 잃어버리게 된다.천여(天與) 따위는 혹 경멸과 헐뜯음으로 말미암아 물러나게 되나니 어떤 이가 남에게 성내어 헐뜯음을 당하거나 꾸짖음을 당하면 곧 그 정을 잃어버리게 된다.
외도들이나 선인(仙人)들은 성내어 물러나고서는 온갖 나쁜 주문을 행하기도 하며, 혹은 교만함으로 말미암아 물러나게 된다. 어떤 이는 자기가 얻은 정(定)으로 인하여 제 자신은 뽐내고 남을 멸시하다가 정(定)을 잃어버리게 된다.
혹은 증상만(增上慢)으로 말미암아 물러나나니 말하자면, 어떤 이가 미득정(未得定)에서 일어나 이미 얻었다는 증상만 때문에 그 얻은바 정을 잃어버리게 된다.
혹은 작의(作意)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물러나게 되나니 말하자면, 어떤 이가 먼저는 그와 같은 모든 행과 모양으로 말미암아 정에 들어가게 되었으나 그 후에는 다시 그러한 행(行)과 모양을 생각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정을 잃어버리게 된다.
016_0147_b_11L或由敬飬故退謂如有一現前獲得勝妙敬便退失定如天與等或由輕毀故退謂如有一被他瞋毀訶責便退失如諸外仙瞋忿退已行諸惡呪由憍慢故退謂如有一因所得定擧陵他退失於定或由增上慢故退謂如有一於所未得定起已得增上慢故退所得定或由不作意故退如有一先由如是諸行狀相得入諸彼於後時更不思惟此行狀相故退失於定
016_0147_c_01L혹은 순숙되지 않기 때문에 물러나나니 말하자면, 어떤 이가 처음에는 닦아 익히어 착한 종류들을 발기하다가도 혹 자기의 번뇌가 많아 그 번뇌가 앞에 나타남으로 말미암아 정(定)을 잃어버리게 된다. 또 어떤 이는 위의 정려를 좋아하거나 나아가서는 위의 정려를 의심하기 때문에 정을 잃어버리게 된다.
혹은 수명이 다하거나, 복이 다하거나 업이 다하기 때문에 물러나나니 말하자면, 어떤 이가 위의 경지에 태어났다가 그 곳에서 목숨을 버린 후, 타락하여 아래의 경지에 나게 됨을 의미한다.
또 다음으로, 만약 하품(下品) 번뇌와 하품 선근(善根)인 보특가라(補特伽羅)이면 많은 찰나(刹那) 동안 공력을 들이다가 비로소 물러나게 되고, 많은 찰나 동안 공력을 들이고야 비로소 정(定)에 들게 되며, 만일 하품 번뇌와 상품(上品)의 선근(善根)인 보특가라이면 많은 찰나 동안 공력을 들이다가 비로소 물러나게 되고, 한 찰나로 말미암아 속히 정에 들게 된다.
만일에 상품(上品)의 번뇌와 하품의 선근인 보특가라이면 많은 찰나 동안 공력을 들이다가 비로소 물러나게 되고, 한 찰나로 말미암아 속히 정을 잃어 버리고, 많은 찰나동안 고역을 들이어야 비로소 정(定)에 들 수 있으며, 만일 상품의 번뇌와 상품의 선근인 보특가라이면 한 찰나로 말미암아 속히 정에서 물러나고 한 찰나로 말미암아 속히 정(定)에 들 수 있다.
다시 다음의 게송으로 말하리라.
016_0147_b_22L或由不純熟故退謂如有修習始業創發善品或由自煩惱多現在前故退失定謂如有一愛上靜慮乃至疑上靜慮故退失定或由壽盡福盡業盡故退謂如有一從上地生處捨命墮下地生復次若下品煩惱下品善根補特伽羅由多剎那用功方退由多剎那用功方得入定若下品煩惱上品善根補特伽羅多剎那用功方退由一剎那速得入若上品煩惱下品善根補特伽羅由一剎那速退失定多念用功方能入定若上品煩惱上品善根補特伽由一剎那速退失定由一剎那能入定復次頌曰

날카로운 근기와 바뀌어 태어난 이에겐
물러나는 일이 없다고 알아야 하나니
아래 경지에 의해 정(定)이 생기며
애욕을 떠난 후에야 나기 때문이네.
016_0147_c_13L利根及生轉
當知無有退
依下地發定
離欲後生故

논하건대, 그와 같이 물러나는 일은 날카로운 근기에는 있지 않으며, 만일 바뀌어 태어난 이라면 비록 둔한 근기라 하더라도 또한 물러나는 일이 없다.
또, 정려 따위의 정(定)은 반드시 먼저 아래 경지에 의해서 발기 되나니 먼저 여기에서 정(定)에 들고난 후에야 저 곳에 날 수 있다. 왜냐하면 반드시 먼저 애욕을 떠난 이라야만 저 곳에 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이미 의지(依止)의 결택(決擇)을 설명하였으니 각분(覺分) 결택(決擇)을 설명하였으니 각분(覺分) 결택을 지금 곧 설명해야겠다.
다음의 게송으로 말하리라.
016_0147_c_15L論曰如是退定利根者無若轉易生雖鈍根者亦無有退又靜慮等定先依下地發起以先於此閒入定後生彼何以故?要先離欲者後時得生彼故如是已說依止決擇覺分決擇今當說頌曰

2승(乘)과 대승(大乘)에 의하며
스물 일곱 가지 모양인
바른 방편으로 말미암아서
각분(覺分)을 세웠다고 알아야 하리.
016_0147_c_21L依二乘大乘
由二十七相
正方便當知
建立於覺分
016_0148_a_01L
논하건대, 성문(聲聞)과 독각(獨覺)인 2승(乘)에 의하며, 또는 대승(大乘)에 의하여 각분(覺分)을 세움이 스물 일곱 가지 모양인 바른 방편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알아야 한다.
무엇을 스물 일곱 가지인 바른 방편이라고 말하느냐 하면, 반연할 바에 매어두어 바르게 관찰하는 방편이며, 염오(染汚)를 떠나고 청정을 껴잡는 방편이며, 안의 마음을 닦아 순조롭게 하는 방편이며, 출세간(出世間)의 바른 법을 이끌어 내는 방편이며, 저 빈틈이 없는 방편이며, 진실하게 곧 깨닫는 방편이며, 딴 적멸(寂滅)을 증득하는 방편이며, 알 바에 드는 방편이며, 끊는 데에 드는 방편이다.
그리고 깨끗함이 아니고 낙이 없고 괴로움이 있음을 통달하는 방편이며, 배움이 원만해지는 방편이며, 경계에 대해서 산란함 없이 관찰하는 방편이며, 성인의 교훈을 무너뜨리지 않는 방편이며, 지혜로 알 바인 저 과(果)를 껴잡는 방편이며, 원(願)인 방편이며, 중생들을 불쌍히 여기는 방편이며, 지혜를 닦아 익히는 방편이며, 법을 현관(現觀)하는 방편이며, 능동적인 다스림과 수동적인 다스림으로 나아가는 방편이다.
그리고 복덕과 돕는 양식[資粮]을 싸 모으는 방편이며, 중생들을 성숙시키는 방편이며, 온갖 보살의 도를 껴잡는 방편이며, 위덕(威德)을 이끌어 내는 방편이며, 말과 교훈을 이끌어 내는 방편이며, 광대하고 매우 깊은 마음을 쌓고 익히는 방편이며, 해로운 법과 업을 멀리 떠나는 방편이며, 유정(有情)과 열반(涅槃)의 양쪽에 편히 머무는 방편이다.
다시 다음의 게송으로 말하리라.
016_0147_c_23L論曰依聲聞獨覺二乘及依大乘建立覺分由二十七種相正方便應知等名爲二十七種正方便?謂繫屬所緣正觀方便捨離染污攝淨方便治內心調順方便引發出世正法方便彼無閒缺方便眞實現覺方便餘寂滅方便入所知方便入斷方便通達不淨無樂有苦方便學圓滿方便於境無散觀察方便聖教不壞方便攝智所知彼果方便願方便悲愍有情方便修治智方便法現觀方便能治所治進趣方便福德資糧積集方便成熟有情方便攝一切菩薩道方便引發威德方便引發言教方便大甚深心積習方便遠離匱法業方便安住有情涅槃二界方便復次頌曰

몸 따위의 세 가지 차별인
저 영상(影像)을 따라 관찰함에는
듣는 따위의 세 지혜로 말미암아
법을 생각함에 미혹함이 없네.
016_0148_a_16L身等三差別
彼影像隨觀
由聞等三智
念法無迷惑
016_0148_b_01L
논하건대, 몸 따위에 각각 세 가지의 차별이 있다고 알아야 하나니 몸의 세 가지란, 혹 몸 부분(身分)의 제 성품이 부정함이니 몸의 내부이며, 혹 몸의 부분이 청정한 것과 흡사함이니 몸의 피부이며, 혹 몸의 부분이 변해서 무너짐의 부정함이니 목숨이 마친 후에 푸르게 되거나 어혈처럼 멍드는 따위의 몸 부분이다.
느낌[受]에 세 가지가 있음이란, 이른바 괴로움과 즐거움과 괴로움도 즐거움도 아님이 그것이다.
마음[心]에 세 가지가 있음이란, 즐거움 따위를 말한다. 느낌[受]과 상응(相應)하는 법에 세 가지가 있음이란, 검은 것과 흰 것과 잡색(雜色)을 말한다.
저 영상(影像)을 따라 관찰[隨觀]함이란, 심사경(尋思經)에서 말씀하시기를, 「저 몸 따위의 영상[影像]을 따라 관찰[隨觀]함이 알아야 할 사실과 같은 종류이기 때문에 영상[影像]이라 말한다 」고 하셨다.
말한 바 따름[隨]이란, 바로 비슷하다는 뜻이다.
또, 그 따라 관찰함이란, 바로 세 지혜[三智]이니 들음에서 생기는 지혜와 생각에서 생기는 지혜와 닦음에서 생기는 지혜이다. 그와 같은 세 지혜는 생각하는 힘으로 말미암아 저 증상연(增上緣)인 수다라(修多羅) 따위의 법에 대해서 헷갈림이 있지 아니하다. 그러므로 념주(念住)라고 말하나니 몸과 느낌과 마음과 법에 대해서 생각[念]의 힘에 의하여 머무르기[住] 때문이다.
다시 다음이 게송으로 말하리라.
016_0148_a_18L論曰當知身等各有三種差別身三種者或有身分自性不淨如身內分或有身分相似淸淨如身皮分或有身分變壞不淨如命終已靑瘀等身受有三種者所謂苦不苦不樂心有三種者謂樂等受相應法有三種者謂黑彼影像隨觀者如尋思經說於彼身等影像隨觀與所知事同分類故名爲影像所言隨者相似義又此隨觀卽是三智謂聞所生智思所生智修所生智如是三智由念力故於彼增上緣修多羅等法無有迷惑是故說名念住於身由念力住故復次頌曰

저 다스릴 바에 아홉 가지이며
작의(作意)에는 둘이라고 알 것이며
닦음의 차별에는 세 가지가 있고
두 가지 잃어버림이 없음이네.
016_0148_b_09L彼所治九種
作意當知二
修差別有三
二種無失壞
016_0148_c_01L
논하건대, 모든 념주(念住)에는 아홉 가지의 다스릴 바 장애가 있다고 아라야 하나니 첫째는 싫어하거나 떠나려고 아니함이요, 둘째는 작의(作意)하지 아니함이요, 셋째는 지관(止觀)에 대한 딸린 번뇌[隨煩惱]요, 넷째는 가라앉음[沈下]이요, 다섯째는 잘 참아내지 못함이요, 여섯째는 열등한 것을 만족하게 앎이요, 여덟째는 계율을 어기고 범함이요, 아홉째는 의욕이 증가되고 맹렬해지는 온갖 미묘하고 착한 멍에[軛]를 버림이다.
또, 념주(念住)를 닦는 데에 두 가지 작의(作意)가 있으니 느리지 않는 작의(作意)와 물들지 않는 작의이다. 경에서 말씀하기를, 「치성한 이는 그것이 바로 첫째라고 할 수 있고, 바른 지혜와 기억하는 생각으로 세상의 탐냄ㆍ근심을 제거하는 이는 바로 둘째라 할 수 있다 」고 하셨다.
또, 그 둘째의 것이 세 가지 잡염(雜染)을 제거할 수 있다. 무엇을 세 가지 잡염이라 하느냐 하면, 첫째는 계율을 범하는 인연으로 마음에 변함과 뉘우침을 내나니 그러한 장애로 말미암아 능히 처음 닦는 마음으로 하여금 정(定)을 얻지 못하게 한다. 둘째는 안 마음이 어두워짐이니 그러한 장애로 말미암아 비록 이미 정의 마음을 얻었더라도 반연하는 것에서 잃어버리고 가라앉게 된다. 셋째는 바깥 마음이 산란함이니 그러한 장애로 말미암아 비록 수승한 법을 증득했더라도 세상의 명예와 이끗에 집착하게 되며, 혹은 수승하게 전진하는 법을 능히 증득하지 못하고서 마음에 근심하고 괴로워 하게 된다.
닦음의 차별에는 세 가지가 있다 함은 온갖 념주(念住)를 닦는 데에 각각 세 가지가 있음이니 안과 밖과 안팎의 모든 몸 따위를 따라 관찰함을 말한다.
또는, 몸에 대해서는 혹 영상만을 관찰하기도 하며, 혹 영상(影像)으로써 몸에 견주어 보기도 하며, 혹 다시 합치어 통틀어 관찰하기도 하나니 몸에 대해서 세 가지로 관찰한 것처럼 나아가서는 법에 대해서 까지도 역시 그와 같이 관찰한다.
또, 모든 념주(念住)에 대해서 잃어 버림이 없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처음 잃어버림이 없음으로서 산란하지 않음을 말함이니 그러한 힘으로 말미암아 잘 발기 할 수 있게 된다. 둘째는 내종 잃어버림이 없음으로서 증상만(增上慢)이 없음을 말함이니 그러한 힘으로 말미암아 잘 닦는 것을 완성할 수 있게 된다.
다시 다음의 게송으로 말하리라.
016_0148_b_11L論曰當知諸念住有九種所治障一不厭離二不作意三止觀隨煩惱四沈五不能堪忍六於少劣知足七忘失教授八違犯戒行九棄捨欲樂上猛利諸妙善軛又於修念住有二種作意謂不緩作意不染作意經言盛者此顯第一正智憶念除世閒貪憂者此顯第二又此第二能除三種雜染何者名爲三種雜染?一犯戒因心生變悔由此障故能令初時心不得定二內心惛略由此障故雖已得定心於所緣忘失沈沒三外心散由此障故雖證勝法而著世閒名聞利飬或未能證勝進之法心生憂修差別有三者修諸念住各有三謂於內俱身等隨觀又復於身或唯觀影像或以影像比類於身復和合摠觀如於身三種如是乃至於法亦爾又有二種於諸念住無有失壞一初無失壞謂不散亂由此力能善發起二後無失壞謂無增上由此力故善修究竟復次頌曰

가라 앉음과 들뜸을 끊기 위하여
상응도(相應道) 두 가지를 닦으며
관찰하여 번뇌를 버리게 되고
세 가지 애착[三愛]을 없애네.
016_0148_c_10L爲斷於沈掉
相應道二種
觀察捨煩惱
及爲盡三愛

논하건대, 념주(念住)를 닦는 위치에서 가라 앉음과 들뜸[沈掉]을 끊기 위하기 때문에 응당 두 가지 상응도(相應道)를 닦을 것이니 비구니경(比丘尼經)과 취자심상경(取自心相經)을 닦을 것이니 비구니경(比丘尼經)과 취자심상경(取自心相經)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어떻게 비구니경에서 말씀하셨느냐 하면, 저 경에서 말씀하시기를, 「가라앉음을 끊기 위하여 응당 약간의 사랑스러울 만한 청정한 모양을 생각해야 하며, 들뜸을 끊기 위하여 응당 다시 대략 껴잡아야 한다 」고 하셨다.
어떻게 취자심상경에서 말씀하셨느냐 하면 저 경에서 말씀하시기를, 「가라앉음을 끊기 위하여 응당 약간의 사랑스러울 만한 청정한 모양을 생각해야 하며, 들뜸을 끊기 위하여 응당 다시 대략 껴잡아야 한다 」고 하셨다.
어떻게 취자심상경에서 말씀하셨느냐 하면 저 경에서 말씀하시기를, 「자심(自心)의 모양을 취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마음으로 하여금 가라 앉게 하며, 약간의 사랑스러울 만한 바깥 모양을 취하므로 말미암아 가라 앉음에 딸린 번뇌[隨煩惱]가 잠시 동안 쉬게 된다. 그러나 마음의 안정을 얻지 못했으면 다시 그 마음을 대략 껴잡아 가라 앉는 허물을 보면 다시 바깥 모양을 취하고 들뜸의 허물을 보면 그 후 다시 자심(自心)의 모양을 취해야 한다. 그 때에는 능히 가라 앉음과 들뜸의 딸린 번뇌를 끊게 되어 마음이 바른 정(定)을 얻게 되리니 대략 그 마음을 껴잡고 자심(自心)의 모양을 취하여 가라 앉음과 들뜸을 떠나기 때문이라 」고 하셨다.
016_0148_c_12L論曰於念住修位中爲斷沈掉故修二種相應道如『比丘尼經』及『取自心相經』說云何『比丘尼經』說?如彼經爲斷沈沒故應當思惟少分可愛淸淨相貌爲斷掉動故復應略攝何『取自心相經』說?如彼經言由不取自心相故令心沈沒由取少分可愛外相故沈隨煩惱蹔時斷息然心未得定復更略攝其心見沈沒過復取外相見掉動過後復更取自心之相爾時能斷沈掉隨煩惱心得正定攝其心取自心相離沈掉故
016_0149_a_01L다시 다음으로 상응도(相應道)를 관찰함으로 말미암아 능히 번뇌를 버리게 된다고 알아야 하나니 안경(鷃經)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그러므로 저 경[鷃經]에서 말씀하시기를, 「말한바 뱁새란, 수행자의 심행(心行)을 비유함이요, 해알 곳이 아니라 함은, 저 수행자가 사랑스러운 경계만 생각함을 비유함이요, 매에게 잡힘을 당한다 함은, 저 수행자가 탐냄의 속박에 집착됨을 비유함이요, 뱁새의 한탄과 하소연이라 함은 저 수행자가 마음에 뉘우침을 비유함이요, 잠시 동안 석방됨이란, 저 수행자가 탐냄의 속박을 잠시 쉬게 됨을 비유함이다.
그리고 또 흙덩어리라 함은, 5취온(取蘊)을 비유함이요, 큰 밭두둑이라 함은, 무상관(無常觀)을 비유함이요, 굴이라 함은 진여관(眞如觀)의 통달함을 비유함이요, 매를 부름이라 함은, 관찰과 작의(作意)를 비유함이요, 매가 빨리 온다 함은, 저 탐냄의 속박이 장차 앞에 나타남을 비유함이요, 굴속에 들어간다 함은, 진연관의 생각함을 비유함이요, 매가 스스로 괴롭히고 해친다 함은, 수면(隨眠)이 끊어짐을 비유함이라 」고 하셨다.
016_0149_a_01L復次由相應道觀察故能捨煩惱應如『鴳經』說故彼經言所言鴳者行者心行非所行處者喩彼行者思惟可愛境界被鷂所執者喩彼行者爲貪纏所執鴳怨訴者喩彼行者心生變悔蹔放捨者喩彼行者貪纏蹔土塊者喩五取蘊大場壟者喩無常觀窟穴者喩通達眞如觀喚鷂子喩觀察作意鷂迅來者喩彼貪纏將現在前入窟穴者喩思惟眞如觀鷂自苦害者喩隨眠斷
다시 그 상응도(相應道)에는 능히 세 가지 애착[三愛]을 없앰이라고 알아야 하나니 돕는 벗의 애착과 이것의 애착과 후생 몸의 애착 그것인데, 그것을 다스리기 위하여 ⧼나⧽와 법이 차별이 없다고 밝힌 것이다.
다시 다음의 게송으로 말하리라.
016_0149_a_12L復次此相應道當知能盡三愛謂助伴愛利飬愛後有愛爲對治此故我與法無有差別復次頌曰

증상만(增上慢)을 끊기 위해서이며
애미(愛味)에 의한 뒤바뀜과
3심(心)에서 나아감을 위하여
념주(念住)를 닦아 익히네.
016_0149_a_15L爲斷增上慢
味所依顚倒
及三心趣入
修習於念住
016_0149_b_01L
논하건대, 증상만(增上慢)을 다스리기 위하여 애미(愛味)에 의한 정[定]을 다스리기 위하며, 또는 네 가지 뒤바뀜[四顚倒]을 다스리기 위하여 념주(念住)를 닦는다.
증상만을 다스리기 위함이란, 경에서 말씀하시기를, 「유독 이 몸과 느낌과 마음과 법에 대해서 만일 기억하여 생각함에 머무르거나 나아가서는 혹 지혜가 있거나, 혹 봄이 있거나, 혹 생각을 매어두는 일이라 」고 하셨다.
그 증상만에는 두 가지가 있나니 몸 따위의 거칠고 중한 장애를 끊지 못해서 일어난 것과 지관(止觀)을 합해서 다스림을 원만하게 하지 못한 데서 생기 것을 말한다.
애미(愛味)에 의한 정(定)을 다스리기 위함이란, 경에서, 「의지할 바가 없기 때문이라 」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뒤바뀜을 다스리기 위함이란, 경에서 말씀하시기를, 「온 세상에 대해서 조금도 고집하거나 취함이 없으면 그 뒤바뀜이 끊어짐으로 말미암아 다시는 조그마한 5취온(取蘊)에 대해서 항상함이며, 즐거움이며, ⧼나⧽이며, 깨끗함이 된다고 고집하지 아니할 것이라 」고 하신 것과 같다.
또는, 3심(心)에서 나아감을 위하여 념주(念住)를 닦아 익힌다 함은, 마을에 노닐 적에는 마음이 출행함에 나아가며, 시끄러운 곳에 있을 적에는 마음이 그를 멀리 떠나려는 곳을 향해 나아가며, 고용한 방안에 있을 적에는 마음이 열반으로 나아감을 말한다.
또는, 나고 죽음을 벗어나는 곳으로 나아가며, 번뇌를 떠나는 곳으로 나아가며, 적멸(寂滅)을 좋아하는 곳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마음이 열반으로 나아가게 된다.
016_0149_a_17L論曰爲欲對治增上慢故爲欲對治愛味所依定故及爲對治四顚倒故修習念住爲對治增上慢者如經說唯應於此身若住憶念乃至或唯有智或唯有見或唯繫念此增上慢有二種謂於未斷身等麤重障及於未圓滿止觀俱品治起爲對治愛味所依定者如經說無所依止故爲對治顚倒故者如經說於諸世閒無少執取由顚倒斷故更不復執少五取蘊爲常爲樂爲我爲淨又爲三心趣入修習念住應知謂遊行聚落心趣於出住憒鬧時心趣遠離於靜室心趣涅槃又趣出生死趣煩惱樂寂滅故心趣涅槃
顯揚聖教論卷第十九
壬寅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