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나라의 언어 중에서 중천축[中天]1)의 소리가 정확하다. 그 곳에서 말하는 나가이리순나(那伽夷離淳那)2)는 용승(龍勝)을 말하는데, 이름과 의미를 모두 구족하여 상세(上世)의 덕인(德人)이다. 용수(龍樹)3)라고 말하는 것은 조각들을 합하여 하나의 상자[箱]4)를 만드는 식이므로 온전히 타당한 것은 아니다.
용승보살은 법을 통달한 스승으로, 대반야(大般若)5)에 의거하여 『중론(中論)』을 지어서 여러 경전들의 의미를 포용하기는 하였으나, 끝까지 궁구하지는 못하였다. 그 후 아승거(阿僧佉)6)라 이름하는 대승 논사가 중론에서 해설하지 못한 부분을 해석하여, 따로 이 논부(論部)를 이루었다.
위(魏)의 상서령(尙書令) 의(儀)는 고공연국(高公延國)7)의 상빈(上賓)인 구담류지(瞿曇流支)8)와 함께 차례로 공양하였는데 불법(佛法)에 정통하였으며, 석담림(釋曇林)9)과 대론하여 이러한 의미를 지닌 논서를 역출하게 되었다. 무정(武定) 원년10) 세차(歲次) 계해(癸亥) 8월 10일 병인(丙寅)에 휘사(揮辭)하노니, 글자는 무릇 일만 삼천칠백이십칠 자이다.
소멸하지도 않고 생겨나지도 않으며 단절되지도 않고 상주하지도 않으며 한 가지 의미도 아니고 다른 의미도 아니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다.
016_1081_a_16L不滅亦不生, 不斷亦不常, 不一不異義,
不來亦不去。
부처님께서 이미 인연을 말씀하시어 모든 희론(戱論)하는 법을 단절시켰다. 그러므로 나는 설법하는 스승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머리 숙여 예배드린다.
016_1081_a_18L佛已說因緣, 斷諸戲論法,
故我稽首禮, 說法師中勝。
이와 같은 『중론(中論)』의 게송이 이 논서의 근본이다. 나는 그 논의 의미를 모두 섭수하기 위하여 이제 다시금 해석하는 것이다. 그 게송에는 또한 의미가 있으니 이와 같고 이와 같으며, 그 의미의 설명은 이와 같고 이와 같으며, 중생들의 즐거움과 탐착을 단절하는 것도 이와 같고 이와 같다. 의미에 따라 논서를 지은 것에는 차례가 있지 않다.
【답】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에서이다. 세존께서 이미 대경(大經)에서 말씀하셨다. “‘교시가(憍尸迦)2)야, 미래 세상에 만약 선남자나 선여인이 자신의 뜻과 이해에 따라 다른 이를 위하여 이 반야바라밀을 말한다면, 그들은 오직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과 유사한 것을 말한 것이고, 진실된 반야바라밀을 말한 것이 아니다.’
제석왕(帝釋王)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진실한 반야바라밀이기에 유사한 것은 진실한 반야바라밀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나이까?’
016_1081_b_09L帝釋王言:“世尊!何者是實般若波羅蜜,而言相似非實般若波羅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교시가야, 그 사람은 응당 색(色)이 무상(無常)하다고 말하고, 식(識)에 이르기까지 무상하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고(苦)ㆍ무아(無我)ㆍ부적정(不寂靜)ㆍ공(空)ㆍ무상(無常)ㆍ무원(無願)을 말하며, 이와 같이 일체지(一切密)에 이르기까지를 말한다. 저 그와 같은 사람은 방편을 알지 못하는 것이니, 얻는바가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마땅히 이렇게 알아야 하느니라.’
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교시가야, 만약 선남자나 선여인이 이와 같이 다른 이로 하여금 반야바라밀을 수행하고 반야바라밀을 말하게 하려면 이렇게 말해야 한다. ‘선남자야, 와서 반야바라밀을 수행하는 선남자야, 그대는 나아가 조그마한 법에도 집착할 것3)이 없으니, 그대의 마음을 작은 법 중에도 머무르지 않도록 하라.
016_1081_c_02L 왜냐 하면 이와 같은 반야바라밀 중에는 정법(正法)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과거라 하는 것은 곧 법이 없는 것이니, 어디에 머무르겠느냐? 왜냐하면 교시가야, 모든 법은 자체의 성품이 공(空)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 법의 자체가 공하다면, 그 법은 자체가 없는 것이고 그 자체가 없다면, 이것을 반야바라밀이라고 이름한다.
【문】 만약 색이 공(空)하고 무상(無相)하며 무원(無願)이라고 말한다면, 어찌하여 이 법이 오직 상사한 것이고 진실한 반야바라밀이 아니란 말인가? 이 세 가지 해탈(解脫)4)은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으로, 유위(有爲)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 공도 또한 유사한 것이겠는가?
016_1082_a_02L【답】 색(色)에 취착하고 공(空)에 취착하고 혹은 유(有)에 취착한다면, 어떻게 반야바라밀을 얻겠는가? 이 취착이 어찌 이러한 견해뿐이겠는가? 일체의 견해들이 모두 여래(如來)에 의하여 공이라고 설해졌으므로 단절해야 한다. 또 다시 어떤 사람이 곧 저 공을 보는데, 그 사람은 또 어떠한 법으로써 대치[對活]하는가? 오직 이제(二際)6)가 없다는 것만이 곧 그런 견해를 제거할 수 있다. 이제가 없기 때문에 제(際)가 아니라고 이름한다. 그러므로 여래는 이미 가섭(迦葉)을 위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일체의 모든 견해들은 공을 봄으로써 벗어날 수 있으나, 만약 사람이 공을 취하고 공에 대하여 견해를 일으킨다면, 나는 그런 사람을 구제할 수 없느니라.” 이러한 의미에서 스승7)은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016_1082_b_02L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말하는 바 공이란 것은 공 자체가 공하고, 말하는 바 색이란 색 자체가 공하다. 만약 법이 조금이라도 공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것에는 곧 공이 있는 것이다. 일체의 모든 법은 모두 자체가 없으니, 어디에 마땅히 공과 공하지 않음이 있겠느냐?” 이러한 의미에 의하여 다음과 같이 게송에서 말하였다.
【답】 만약 사람이 어리석으면 지혜롭지 못하여, 그 사람은 마음을 일으켜 이와 같이 분별하며 모든 경전을 훼방할 것이다. 곧 “경(經)은 성숙하지 못하고 오직 논(論)만이 참다우며, 그 밖의 법은 논할 바가 못 된다”라고. 그러한 사람을 위하여 여기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답】 여래에게 공양하는 방법은 수없이 많다. 여래는 무량한 공덕을 지니기 때문이다. 이제 일단 대략 세 가지의 공양을 설명하겠다. 첫째는 법에 따라 수행하는 공양이고, 둘째는 자산과 재물을 바치는 공양이며, 셋째는 자신의 몸으로 예배하는 공양이다. 이 중에서 첫 번째 법에 따라 수행하는 것이 공양 가운데 수승하다. 이 게송 가운데 법으로써 여래를 공양하는 것이 공양 중에서 수승하며, 물질적 공양은 수승하지 못하다.
【답】 그대는 들으라. 나는 이제 그대를 위하여 설명할 것이니 잘 생각할지어다. 회론이라고 말하는 것은 소위 얻음이 있다는 것[有得]과 사물이 있다는 것[有物]의 두 가지에 취착하고, 또 참되지 않은 모든 모습들을 취하는 것이다. 이는 희롱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희론이라 이름한다. 그것을 이제 대략 설명하겠다. 소위 자체(自體)10)를 취착하거나, 혹은 자체 아닌 것을 취착하거나, 혹은 자체이기도 하고 자체 아니기도 한 것을 취착하거나, 혹은 자체도 아니고 자체 아님도 아닌 것을 취착하는 것 등을, 이 게송은 여기에서 일체 모두를 단절한다.
016_1083_a_02L【문】 어떻게 대치하였는가? 【답】 외도는 삿된 견해를 갖고 있다. 그들은 자체(自體)가 있다는 견해나, 단견(斷見)11)과 상견(常見)12)을 갖고 있다. 이렇게 집착을 즐겨 일체의 세계는 마혜수라(摩醯首羅)13)ㆍ시절(時節)14)ㆍ미진(微塵)15)ㆍ승(勝)16) 등으로 인하여 자성(自性)17)과 단멸(斷滅)18) 등이 생한다고 분별한다. 저 외도들이 이렇게 분별하면, 곧 인연의 뜻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들이 이와 같이 희론을 즐기기 때문에 삿된 견해라고 이름한다. 이러한 희론은 모든 외도들이 취착하는 법이다. 이것을 단절하기 위하여 세존께서는 이미 이렇게 말씀하셨다. “무명을 인연으로 하여 행(行)이 생하고, 무명이 멸하기 때문에 모든 행이 소멸한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가 생겨나기도 하고 그렇기 때문에 세계가 소멸하기도 하는 것이지, 다른 법 때문에 이와 같이 세계가 생겨나고 소멸하는 것이 아니다.
【답】 취착하기 때문에 차례로 취착하여, 나아가 열반에 취착하게 된다. 그렇기에 여래도 또한 그러한 것을 금지하였으니, 하물며 인연에 취착하는 것을 금지하지 않았겠는가. 외도 사람들은 자체에 취착하기 때문에, 선도(善道)를 잃어버리고 악도(惡道)를 행하며 희론하고 참되지 못하다.
【답】 마혜수라가 만약에 세계를 만든다면 그것은 항상하는 것인가, 무상한 것인가, 다른 이를 위하여 만드는 것인가, 다른 이를 위하여 만드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이미 생겨나서 만드는 것인가, 아직 생겨나지 않고 만드는 것인가, 존재하는데 만드는 것인가, 존재하지 않는데 만드는 것인가? 그것은 이와 같은 모든 경우에 모두 옳지 않다. 만약 세계를 만든다면 항상하는데 만드는 것인가, 무상한데 만드는 것인가, 다른 이를 위하여 만드는 것인가, 다른 이를 위하여 만드는 것이 아닌가, 생겨난 것인가 생겨난 것이 아닌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이와 같은 모든 것은 상응하지 않는다. 도리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답】 만약 항상하는 법이라면, 어떻게 세계를 조작할 수 있겠는가. 만약 항상하는 법이 세계를 만든다면, 허공도 또한 마땅히 세계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만약 무상한 법이 세계를 만든다면, 병(甁) 등도 또한 응당 세계를 만들 것이다. 만약 항상하며 무상한 법이 세계를 만든다면, 허공과 병이 모두 응당 세계를 만들 것이다. 이런 얼은 있을 수 없다.
016_1083_b_02L 만약 그대가 생각하기를, 항상하고 무상한 것은 과오이며 항상한 것과 무상한 것을 여의고 다시 다른 작업이 있어서 세계를 만든다고 한다면, 이것은 곧 무궁한 작업이 세계를 만드는 것이 되고, 또 다시 작업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있게 된다. 여기에도 또한 과오가 있으니, 병도 또한 응당 작업이 있어 세계를 만들 것이다.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만약 그대가 생각하기를, 그것은 허물이니 곧 만드는 자가 없이 세계를 만드는 것이 있다라고 한다면, 이 뜻도 성립하지 않는다.
【답】 중생(衆生)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작자가 없다면, 오히려 만드는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데, 하물며 다시 만드는 것이 있겠는가. 그 만드는 것이 없는데도 만들어진 것이 있다면, 이것은 곧 사물이 없는데도 또한 응당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그런 것을 만들 수 있다면, 토끼뿔[兎角]19)도 만들 것이고, 또한 응당 석녀(石女)의 자식20)도 만들 것이며, 또한 응당 허공의 화만(花鬘)21)도 만들 것이다.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또한 병을 만들 수는 있으나, 모두 만들지 않는 것이다.
만약 이미 생겼다면 마땅히 세계를 만들 수 없음을 알 것이니, 병을 만들지 않음과 같다. 만약 아직 생기지 않았다면 또한 만들 수 없으니, 석녀의 아이와 같다. 만약 이미 있다면 세계를 만들지 않으니, 마치 그 사람(자신)과 같다. 만약 아직 없다면 세계를 만들지 않으니, 마치 토끼뿔과 같다. 이렇게 세계에서 항상함과 무상함 등은 비슷하지 않은 과오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마혜수라와 항상함과 무상함 등이 만약 이 세계를 만드는 인연이라면, 세간의 죄(罪)와 복(福)도 또한 이들이 만든 것이 된다.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만약 그와 같다면, 일체의 죄와 복은 곧 과보가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세간을 보게 되면 죄와 복에는 모두 과보가 있다.
016_1083_c_02L또 다시 수승[勝] 등은 사물 자체가 없기 때문에 세계를 만들지 않는다. 이 의미가 성취된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자세히 말하였다. 인연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 없는 것이다. 또한 장부(丈夫)22)가 장부를 만드는 것은 성립되지 않는다. 스스로 성립하지 않으므로 법을 성립시킬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장부가 존재한다면 유전(流轉)하는 행위가 있을 것이다. 수승함 같은 것은 항상하는 것으로서 인연이 없기 때문에, 수승함에는 유전하는 행위가 없다. 이것은 항상하기 때문이다. 장부가 깨닫고 장부가 깨닫지 못하는 것처럼, 곧 항상함은 수승한 것과 같다.
만약 이와 같다면, 일체의 모든 법은 모두 다 항상하는 것이다. 만약 사물이 없다면 어떤 법이 항상하고, 만약 법이 항상하지 않다면 어떻게 유전(流轉)이 행해지는 것 등을 분별하겠는가? 가비라사(迦卑羅師),23) 그대는 제자이니 어찌 수승함이 있겠으며, 장부가 존재한다면 그대는 마땅히 설명하여 그 의미가 성립하게 하라. 그러한 후에야 항상함 등의 법이 성립될 것이다.
【문】 아함(阿含)24) 때문이다. 【답】 나도 지금 또한 아함 때문에 없다고 한 것이다.
016_1083_c_10L問曰:以阿含故。答曰:我今亦以阿含故無。
【문】 도리(道理)에 의하여 수승함의 존재함이 성취된다. 교대로 서로 포섭하기 때문이다. 【답】 무엇이 도리인가?
016_1083_c_11L問曰:以道理故,有勝成就,迭相攝故。答曰:何者道理?
【문】 수승함이 있으니, 차례로 허물어지는 모습을 보기 때문이다. 마치 나무의 껍질을 보고 나무에 마을이 있음을 아는 것과 같다.
016_1083_c_13L問曰:有勝以見次第有壞相故,如見樹皮,知有樹心。
【답】 만약 이와 같다면, 그것은 그대 학파 중에서 개인적으로 헤아려 도리가 성취된 것일 뿐이다. 실제로 이 수승함은 없으니, 허물어지는 모습을 보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토끼뿔과 같으니, 토끼뿔에서 허물어지는 모습을 보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나무의 껍질 등도 그와 같다.
만약 그대가 생각하기를, ‘비록 겉모습[面] 등이 없어도 이것이 있다’고 한다면, 서로 유사한 종류가 아니므로 곧 수승함이 없음을 알 것이다. 생함이 없기 때문에 석녀의 아이와 같다. 만약 허공과 같다면 곧 성취되지 않을 것이고, 만약 열반과 같다면 이것은 곧 사물도 없고 실체도 없는 것이다. 어떻게 있고 있지 않음을 이루겠는가.
지금 나의 이러한 설명에 의하면, 그대가 비록 말을 한다고 해도 도무지 도리에 맞지 않는다. 그대가 지난 번처럼 종(宗)ㆍ인(因)ㆍ유(喩)25)로써 설명하여도 모두 상응하지 않는다. 이것을 나는 이제 설명하겠다. 그대가 주장한 수승한 법을 파괴하는 데는 무량한 종류가 있어 자세히 말할 수 없으나, 대략 조금만 설명하겠다.
016_1084_a_02L그대가 말한 법 중에서 장부(丈夫)라고 말하는 것은, 중생이 없고 인연이 없기 때문에 마치 토끼뿔과 같다. 그대가 지난 번에 장부는 세계의 인연이라고 말하였는데, 이미 인용한 비유인 세계의 인연을 이제 함께 헤아려 보자. 만약 설명할 수 없다면, 인연의 구비됨이 곧 감소[減]한다. 인연의 구비됨이 감소하기 때문에, 이에 곧 과오가 있게 되어 비유가 감소한다. 그대는 곧 패퇴하여 일체의 논쟁에 대하여 성취하지 못할 것이다. 비유가 없기 때문이다. 응당 먼저 스스로 자신의 주장26)을 관찰하라.
이미 자인상(自因相)을 설명하였다. 만약 그것이 항상하다면 곧 작자(作者)가 아니고, 만약 무상하다면 또한 작자가 아니며, 만약 타인이 만들었다면 또한 작자가 아니고, 타인이 만들지 않았다면 또한 작자가 아니다. 만약 그 자체가 이미 생하였다면 또한 작자가 아니고, 만약 아직 생하지 않았다면 또한 작자가 아니며, 만약 그것이 있다면 또한 작자가 아니고, 만약 그것이 없다면 또한 작자가 아니다. 모두 비유가 있어서 자세히 설명할 수가 없으니, 마땅히 세심하게 생각하여 헤아려 보라. 자붕(自朋)27)은 비유가 있으나 타붕(他朋)28)은 비유가 없다.
이와 같이 마혜수라와 시절, 미진 등이 세계의 인연이 된다는 것은 성립되지 않는다. 만약 그런 일이 성립된다면, 만드는 것과 만들어지는 것이 교대로 서로 상대를 만들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만약 그런 일이 존재한다면 마혜수라는 곧 수승함을 만들 수 있을 것이고, 수승함도 또한 마혜수라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하기 때문에 저 외도들이 말하는 만드는 것과 만들어지는 것은 교대로 서로 어긋나서 모두 상응하지 않는다.
【문】 그대가 말한 바와 같이, 인연을 구비함이 성립되지 않으면, 이것은 곧 과오이며 비유도 즉시 소멸된다. 또 패퇴라고 하였는데 이것을 나는 이제 설명하겠다. 어떤 것이 인연을 구비함이고, 어떤 것이 감소하는 모습이며, 어떠한 사람들이 그러한가? 종(宗)ㆍ인(因)ㆍ유(喩) 등의 셋이 인연을 구족함인데, 그와 같은 사람은 곧 세 가지가 감소되어 오직 인(因)29)과 비유[喩]만 있게 된다. 이 두 가지로는 과오가 있다.
016_1084_b_02L 인연을 구비하기 때문에 종(宗)은 곧 감소될 수 없다. 이것이 언설의 근본이기 때문이며, 또 의미가 성립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랫동안 이미 세 가지의 감소와 인과 비유의 두 가지 감소가 있음을 말한 것이다. 만약 사람이 이것의 세 부분을 분별한다면, 구족하여 화합하므로 인연을 구족한다고 이름한다. 그와 같은 사람에게는 응당 세 가지의 감소가 있다.
만약 또 어떤 사람이 인(因)의 세 가지 모습[因三相]30)을 말한다면, 즉시 인연을 구족하는 것인데, 그 사람에게 세 가지 중 어떠한 감소가 있겠는가? 인연이 구족되는 것이 잘못인가, 비유가 감소되는가, 어떻게 그 사람에게 응당 감소가 있겠는가? 만약 인연이 구족되는 것이 잘못이라면, 그대가 아직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비유가 감소되었기에 인연을 구족하는 잘못이 있다거나 또는 패퇴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답】 어찌하여 이렇게 허공을 쳐대는가, 만약 능히 마혜수라에 관한 주장을 떨쳐 버린다면, 그 즉시 마음을 일으켜 스스로 지혜롭다고 할 만하여, 이내 약야수마(若耶須摩)31)의 주장을 거두어들일 것이다. 그대가 이렇게 하는 말은, 출세간법(出世間法)과 세간법(世間法)을 설명할 수도 없고 또한 상응하지도 않는다. 그 허망한 것이 지극히 범속하고 비루하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곧 대답할 필요조차 없다. 약야수마 논사가 말한 그 언어법(言語法)32) 같은 것이 어떻게 또 세제(世諦)33)의 법을 여의겠는가. 이렇게 내가 지금 하는 말은, 어떤 것이 그 인(因)의 세 가지 모습인가? 만약 어떤 법의 말이 인연을 구족한다면, 다시 어떤 것이 인의 세 가지 모습인가?
【문】 주장 중의 법은34) 상대하는 주장이 없고,35) 또 자신의 주장이 성립한다.36) 마치 소리[聲]가 무상한 것과 같다.37) 조작되기 때문이고, 인연이 허물어지기 때문이며, 조작된 후생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으므로 만약 법이 조작되면 모두 무상하다. 비유하면 병(甁) 등과 같다. 소리도 또한 이와 같이 조작되므로 무상하다. 이와 같이 일체의 법은 조작된 것이므로 무상하다.
016_1084_c_02L【답】 어떤 것을 조작된 법이라고 말하는가? 곧 조작된 것을 조작이라 말하는가, 조작을 여의고 조작이라 말하는가? 이것을 이제 해석하겠다. 만약 조작되었기 때문에 조작이라 말한다면, 소리는 조작된 법이며 소리는 모두 조작된 것이므로 조작된 것이라 말한다. 만약 이와 같다면, 주장하는 법은 포섭할 수 없어 곧 소리는 주장하는 법이라고 말할 수 없다.
만약 그대가 생각하기를, ‘이러한 과오가 있기는 하지만 소리와 조작이 달라서 소리는 곧 조작이 아니다’라고 한다면, 만약 법이 조작을 여읜다면 조작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기 때문에 소리는 조작이 아님을 안다. 만약 소리가 조작이 아니라면, 이것은 곧 법이 아닌 것이다. 만약 법이 아니라면, 어떻게 항상하다고 말하거나 혹은 무상하다고 말하겠는가. 만약 사물을 분별한다면, 사물을 분별하는 병이 어떻게 소리를 조작하겠는가.
있기 때문에 조작이고 없기 때문에 조작이라는 것을 이제 해석하겠다. 있는 법은 조작되지 않고, 없는 법도 또한 조작되지 않으며, 만약 법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여도 역시 조작되지 않는다. 만약 그대가 말하기를, ‘소리는 조작된 법이다, 그러므로 무상한 것이다’라고 한다면, 이 일은 옳지 않다. 또 그대가 세 가지 모습을 말하였기 때문에 이것을 조작된 법이라 이름하고, 인(因)과 인의 말[因語]이 모두 인연을 구족한다고 하면, 곧 상응하지 않는다.
【답】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일체의 조작된 법에는 세 가지 모습이 없다. 주장의 상대가 없기 때문이다. 조작된 주장의 상대인 그 주장은 조작되지 않으므로 서로 파괴한다. 만약 조작되지 않는다면, 이것은 곧 법이 없는 것이다. 만약법이 없다면, 어떻게 파괴되겠는가. 이와 같이 양쪽의 주장은 동등하지도 않고, 수승하지도 않으며, 조작된 법도 아니다. 만약 법의 파괴가 없다면, 또한 토끼뿔도 파괴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자체가 없기 때문에 의미가 상응하지 않는다.
016_1085_a_02L만약 그대가 생각하기를, ‘무상하다는 주장과 항상하다는 주장이 상대하여 이렇게 따라 일어난다’고 한다면, 이것을 내가 이제 설명하겠다. 그대는 대단히 어리석어 성립되지 않는 법을 가지고 성립시키려고 한다. 이 무상한 것을 이름하여 사물이 없다고 한다. 만약 사물이 없다면 곧 자신의 주장이 없고, 자신의 주장이 성립되지 않으면 따라 일어날 수도 없고 전변할 수도 없다. 만약 이와 같다면 허공 등과 같다. 사물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가 타붕(他朋)은 항상하다고 말한다면, 이 일은 옳지 않다.
【답】 항상함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항상함이란 것은 있는 사물인가, 없는 사물인가? 만약 있는 사물이라면, 병(甁)은 곧 항상할 것이다. 있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만약 항상함이 없는 사물이라면, 토끼뿔은 응당 항상할 것이다. 없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항상하다거나 무상하다고 말할 수 없다. 만약 그대가 말하기를, “조작된 법은 자신의 주장[自朋]을 따라 벗어나지 않는다”라고 한다면, 이 일은 옳지 않다. 그 자신의 주장이 성취되지 않기 때문이다.
【답】 성취되어야 할 법이 무상하기 때문이다. 무상한 것은 사물이 없는 것이다. 그 없는 사물이 어디에 비슷한 것이 있겠으며, 무엇이 비슷하단 말인가. 소위 병(甁)은 무상하지만 또한 비슷하게 생한 것이다. 만약 이와 같이 말한다면, 성취되는 법은 비슷함과 다름이 있어도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고, 비슷하기 때문에 자붕과 타붕이 있다. 이것이 성립되어야 할 법이다.
만약 두 가지가 있으면,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다. 병과 무상은 두 가지 법이 있으므로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다. 두 가지 법이 없으므로 비슷하지 않다. 저 성취되어야 할 법이 만약 생기지 않는다면, 무엇을 무상이라고 말하며, 어떻게 성취되어야 할 것이 성취된다고 말하며, 어떻게 무상함이 성취되어야 할 것을 성취하겠는가?
016_1085_b_02L【답】 그런데 이 성취되어야 할 것이 때로는 소리[聲]이고, 때로는 무상(無常)이며, 때로는 소리와 무상이 합하거나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일체는 모두 성취될 수 없다. 만약 성취되지 않는다면, 어디에 성취되는 법이 있겠는가. 만약 사물을 분별한다면, 분별하는 사물의 법에는 비슷함이 있게 된다.
만약 그대가 생각하기를, ‘소리와 무상의 두 가지 법을 여의고 그 밖에 다시 다른 사물을 포섭하는 것이 성취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이 일은 옮지 않다. 사물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어떤 사물이 소리와 무상 등의 두 가지를 여의고 어디에 포섭되기에 사물이라 이름할 수 있겠는가? 그것이 만약 소리라면, 그것은 곧 성취되는 것이라 말할 수 없다. 만약 무상이라면, 그것은 없는 법이므로 성취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소리는 파괴할 수 없다. 만약 합하는 것이라면, 이것도 또한 옳지 않다. 있는 사물과 없는 사물은 합할 수 없기 때문에 합해지지 않는다. 조화하는 것도 또한 그러하여 얻을 수 없다.
만약 그대가 다시 생각하기를, ‘소리는 다른 것으로 성취된다’고 한다면, 이 일은 옳지 않다. 무상과 소리는 별다르지 않기 때문이며, 다르게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가 말하기를, “주장이 있으면 법을 만든다”라고 한다면, 이일은 옳지 않다. 주장을 여의고 법이 있다는 것은 성취되지 않기 때문이다. 불교(佛敎)의 가르침에 의하면, 사물을 여의고 그 밖에 다시 사물이 있는 법이 없다.
【문】 인연을 구비함과 성취되는 것, 이 둘은 상대되는 것으로, 사물과 사물의법[物物法]이라 이름한다
016_1085_b_16L問曰:緣具所成,此二相對,名物物法。
【답】 인연을 구비함과 성취되는 것의 둘은 모두 성립되지 않는다. 만드는 사물을 여의고 그 밖에 다시 만드는 법이 없다. 이와 같이 만드는 법과 주장은 서로를 여의지 않는다. 만약 만드는 것이 주장을 여읜다면, 주장은 곧 만드는 것이 아니다. 오직 만드는 것이 법이며, 만드는 것을 여의고 법이 없다. 소리를 여의고 만드는 법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게송에서 말하였다.
생함을 만드는 것은 오직 형상일 뿐이며 만드는 자도 또한 이와 같다. 일체의 생함은 진실하지 않으며 생하는 법은 토끼뿔과 같다.
016_1085_b_21L生作唯相貌, 作者亦如是。 一切生不實,
生法如兔角。
016_1085_c_02L이와 같이 만드는 법이 있기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고, 없기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며, 또 다시 있고 없기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만드는 법의 세 가지 양태는 도리에 상응하지 않는다. 만드는 법은 사물이 없으니 말[語]이 어디에서 인연을 구비하겠는가, 세 가지 양태가 감소하는 데에서인가, 인연이 구비되는 잘못에서인가?
또 다시 말[語言]은 세 가지 양태에서 상응하지 않는다. 말로 설명된 법은 모두 공(空)하여 없기 때문이고, 자체의 모습[自相]이 없기 때문이다. 구(句)와 말[言]은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 글자[字]를 여의고 구(句)가 없다. 그 둘은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 글자는 미진(微塵)으로 구성되며, 미진으로 인하여 있게 된다. 그러나 그 미진은 분량을 얻을 수 없다. 분량이 없기 때문이다. 미진은 자체가 없어서 생성되거나 소멸하는 일이 성립될 수 없다.
【문】 그대는 말한 바와 같이 법이 공하다고 말하는데, 법이 공하기 때문에 말[語]의 세 가지 양태가 모두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은 옳지 않다. 말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고, 그 말이 말하는 바는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연의 파괴 등을 어떻게 말하겠는가. 법이 공하다고 말하는 것은 세 가지 양태를 부정하는 것이다.
【답】 인연의 파괴라는 것은 도리에 상응하지 않는다.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소리의 인연이 파괴된다면, 어떻게 상응하겠는가? 시시각각으로 생멸하기 때문에, 머물지 않기 때문에, 이미 없는 물건인데 어디에서 얻을 수 있겠는가? 인연의 파괴는 생함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토끼뿔과 같다. 또한 무상(無常)이라는 이 말의 세 가지 양태는, 항상하거나 무상하거나 그 둘은 모두 상응하지 않는다.
016_1086_a_02L【문】 만약 이와 같다면, 어떻게 인연을 희론(戱論)이라 할 수 있는가? 여래(如來) 세존(世尊)께서는 모든 인연이 진실하기 때문에 설하였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무명(無明) 등은 큰 괴로움의 무리로서 화합하여 생긴다. 만약 무명이 멸하면 큰 괴로움의 무리도 멸한다.” 여래 세존은 이렇게 고성제(苦聖諦)38)를 말씀하거나, 혹은 괴로움의 소멸을 말씀하셨다. 만약 이것이 진실이라면 어떻게 희론이라 하겠는가?
【답】 현명하게 마땅히 잘 들어라, 이제 이것을 대략 설명하겠다. 무엇을 무명이라 이름하는가? 네 가지 전도(四顚倒)39)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무명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니, 어떻게 진실하다고 말하겠는가. 또 괴로움은 고성제라고 말하였는데, 여래 세존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다.
『승사유범천소문경(勝思惟梵天所問經)』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범천(梵天)이여, 만약 저 괴로움[苦]이 진실로 성스런 진리라면, 일체의 소나 돼지 등의 모든 축생들도 응당 진실한 진리를 갖고 있을 것이다. 왜냐 하면 그들은 모두 갖가지 괴로움을 받기 때문이다.’
또 말씀하셨다. ‘범천이여, 만약 저 도(道)42)가 진실로 성스런 진리라면, 일체의 유위도(有爲道)를 반연하는 것에 응당 진실한 진리가 있을 것이다. 왜냐 하면 그들은 유위법(有爲法)43)에 의지하여 유위법으로부터 벗어나기를 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괴로움은 진실한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 다시 말씀하셨다. “괴로움이 생겨남이 없음을 아는 것을 괴로움에 대한 진실로 성스런 진리라고 이름한다.” 그러므로 여래께서는 경전에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016_1086_a_19L又復說言:“知苦無生,是名苦實聖諦。”是故如來經說偈言:
한 가지 진리가 있어 생하지 않음[不生]이라 이름하는데 사람들은 네 가지 진리[四諦]를 설한다고 한다. 도량에서는 한 가지도 보지 않거니와 하물며 어찌 다시 네 가지가 있으랴.
016_1086_a_21L一諦名不生, 有人說四諦, 道場不見一,
何況復有四。
이와 같이 미래 세상에는 항상 여러 비구들이 있어 잘못된 마음을 가지고 출가한 후 이렇게 나의 법을 파괴할 것이다.
016_1086_a_23L如是未來世, 當有諸比丘,
惡意出家已, 如是壞我法。
016_1086_b_02L그러므로 일체의 모든 법은 전부 다 생하지 않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통달하여 안다면, 이것이 진실로 성스런 진리이다. 그러므로 여래께서는 다시 말씀하셨다. “수보리(須菩提)야, 나아가 미진 등의 법조차도 없기 때문에 생하지 않는다고 이름한다. 그대가 어떠한 법을 알았기에 생하지 않는 법을 안다고 말하는가 하면, 무생인(無生忍)44)을 아는 것을 무생법인(無生法忍)45)이라고 이름한다.” 그러므로 괴로움 등의 네 가지 법은 사성제(四聖諦)가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다. 만약 저 사람들처럼 분별한다면, 곧 지혜가 될 수 없다. 만약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음을 안다면, 이에 진리를 얻었다고 할 수 있고, 지혜를 얻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를 성자 수보리는 여래께 이렇게 질문하였다.
괴로움[苦]이 열반입니까, 괴로움을 아는 지혜[苦智]가 열반입니까? 괴로움의 발생[集]이 열반입니까, 괴로움의 발생을 아는 지혜[集智]가 열반입니까?
016_1086_b_10L爲苦是涅槃? 苦智是涅槃? 爲集是涅槃?
集智是涅槃?
괴로움의 소멸[滅]이 열반입니까, 괴로움의 소멸을 아는 지혜[滅智]가 열반입니까? 괴로움을 없애는 길[道]이 열반입니까, 괴로움을 없애는 길을 아는 지혜[道智]가 열반입니까?
016_1086_b_12L爲滅是涅槃? 滅智是涅槃?
爲道是涅槃? 道智是涅槃?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佛言:須菩提!
괴로움은 열반이 아니고 괴로움을 아는 지혜도 열반이 아니다. 괴로움의 발생은 열반이 아니고 괴로움의 발생을 아는 지혜도 열반이 아니다.
016_1086_b_13L苦非是涅槃, 苦智非涅槃; 苦集非涅槃,
集智非涅槃;
괴로움의 소멸은 열반이 아니고 괴로움의 소멸을 아는 지혜도 열반이 아니다. 괴로움을 없애는 길은 열반이 아니고 괴로움을 없애는 길을 아는 지혜도 열반이 아니다.
016_1086_b_15L苦滅非涅槃, 滅智非涅槃;
道非是涅槃, 道智非涅槃。
또 다시 수보리야, 사성제(四聖諦)는 평등하니 나는 이것을 열반이라 말한다. 이와 같이 열반이란 것은
016_1086_b_16L又復須菩提!
四聖諦平等, 我說是涅槃。 如是涅槃者,
괴로움도 아니고 괴로움을 아는 지혜도 아니며 , 이와 같이 차례로 내지 괴로움을 없애는 길도 아니고 괴로움을 없애는 길을 아는 지혜도 아니다.
016_1086_b_17L非苦非苦智, 如是次第至, 非道非道智。
그때 성자 수보리는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또 어떤 것이 사성제가 평등하다는 말입니까?”
016_1086_b_18L時聖須菩提白佛言:世尊!復以何者是,四聖諦平等?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佛言:須菩提!
평등이라 말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 임하게 되어도 괴로움도 아니고 괴로움을 아는 지혜도 아니며, 이와 같이 차례로 내지 괴로움을 없애는 길도 아니고 괴로움을 없애는 길을 아는 것도 아니다.
016_1086_b_20L所言平等者,
隨在於何處? 非苦非苦智, 如是次第至,
非道非道智。
저 일체의 법은 일체법이 진여(眞如)로서 허망하지 않은 진여이니 이렇게 법은 평등하다.
016_1086_b_22L若彼一切法, 一切法眞如,
不虛妄眞如, 如是法住等,
나는 저 열반이 괴로움 등이 아니라고 말한다. 일체의 법은 생하지 않으니 자체(自體)가 없기 때문이다.
016_1086_b_23L我說彼涅槃,
而非是苦等。 一切法不生, 以無自體故。
이렇게 말할 때 능히 일체의 법이 생하지 않음을 아는 것을 진실로 성스런 진리라고 이름한다.
016_1086_b_24L如是說能知, 一切法不生, 是名實聖諦。
016_1086_c_02L【문】 만약 이와 같다면, 어떠한 뜻으로 여래께서는 경전 중에서 사성제를 말씀하셨는가?
016_1086_c_02L問曰:若如是者,以何義故,如來經中說四聖諦?
【답】 그것은 차례로 순서를 따라 진리에 들어가게 하려고 부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으로, 제일의(第一義)46)가 아니며, 혹은 진실하고 혹은 허망한 말이다. 그러므로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범천이여, 진실로 성스런 진리, 진실로 성스런 진리라고 말하는데, 어디에 진실하지 않고 허망하지 않은 말이 있단 말인가.” 이러한 일 때문에 네 가지 전도가 발생하니, 그러한 지혜는 진실하지 않다. 이와 같이 괴로움이 진리라는 것은 진실로 성취되지 못하고, 나의 주장이 성취된다.
【문】 나는 지혜가 아닌 것을 진실하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나는 지혜가 아닌 것을 깨닫기 때문에 진실이라 이름한다고 말한다. 어떻게 말하는가 하면, 무상(無常)한 법을 항상하다[常]고 말하기 때문에 지혜가 아니라고 말하며, 괴로움[苦]을 즐거움[樂]이라 말하기 때문에 지혜가 아니라고 말하며, 무아(無我)를 자아[我]라 말하기 때문에 지혜가 아니라고 말하며, 청정하지 못한 것을 청정[淸]하다고 말하기 때문에 지혜가 아니라 이름한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지혜가 아니다. 만일 무상한 것을 무상한 줄 알고, 괴로움을 괴로움으로 알고, 무아의 법에서 능히 무아를 알며, 부정한 법에서 능히 부정을 안다면, 이와 같이 아는 자를, 그는 지혜를 얻고 그는 진실을 얻었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내가 말한 지혜를 진실하다고 이름하는 것이며, 여기에는 지혜와 진실이 없는 것이 아니다.
【답】 이는 불쾌한 냄새가 바람에 실려와서 내게 풍기는 것과 같다. 이것은 희론이기 때문이며, 이 불쾌함은 최대로 집착을 즐기는 지혜이기 때문이다.
016_1086_c_18L答曰:此癡臭氣風來薰我以戲論故,此癡最大,樂著智故。
【문】 어찌하여 그러한가?
問曰:云何?
【답】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答曰:偈言:
만약 무상함이 있다면 항상함이 있다고 말할 수 있으리. 이미 조금도 무상함이 없는데 어디에 마땅히 항상함이 있으리.
016_1086_c_20L若其有無常, 可得言有常; 旣無少無常,
何處當有常?
만약 괴로움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즐거움이 있다고 말할 수 있으리. 이미 조금도 괴로움이 없는데 어디에 마땅히 즐거움이 있으리,
016_1086_c_22L若其少有苦, 可得言有樂;
旣無微少苦, 何處當有樂?
만약 조금이라도 무아가 있다면 자아가 있다고 말할 수 있으리. 이미 무아가 있지 않은데 어디에 마땅히 자아가 있으리.
016_1086_c_23L若少有無我,
可得言有我; 旣無有無我, 何處當有我?
016_1087_a_02L만약 적정(寂靜)하지 않음이 있다면 적정이 있다고 말할 수 있으리. 이미 적정하지 않음이 없는데
어디에 적정이 있으리.
016_1086_c_24L若有不寂靜, 可得有寂靜; 旣無不寂靜,
何處有寂靜?
그럼에도 불구하고 색(色) 자체에 탐욕하여 집착한 후, 혹은 항상하다고 분별하거나 무상하다고 분별한다. 그러나 색 자체는 공(空)하여 필경 아무런 물체도 없다. 어디에 항상함이 있고 또 무상함이 있겠는가. 이러한 종류들은 색이 그러하듯 모든 법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 인연으로 말미암아 희론을 성립한다. 그러나 이 인연도 또한 희론이다. 다만 인연만이 이러한 희론일 뿐 아니라, 부처님에 대한 견해를 취하는 것까지도 또한 희론이다.
【답】 선남자여, 그대는 이 말을 듣고서 교만하지 말라. 부처님의 지혜는 이해하기가 어렵다. 세존(世尊)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016_1087_a_10L答曰:善男子!聽!汝勿憍慢,佛智難解。世尊偈言:
마음을 금강(金剛)같이 지니고 부처님의 지혜를 깊이 믿으라. 심지(心地)47)가 본래 무아임을 안다면 능히 미세한 지혜를 얻어 들을 것이다.
016_1087_a_11L持心如金剛, 深信佛智惠。 知心地無我,
能聞微細智。
이제 그대는 착한 뜻으로 금강같이 선한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그대를 대면하여 이제 희론과 희론하지 않는 모습에 대하여 설명하겠다.
016_1087_a_13L今汝善意生,金剛心善面,汝今聽說戲論不戲論相。
【문】 어떠한 것인가?
016_1087_a_15L問曰:云何?
【답】 그것은 이와 같은 의미이다. 부처님께서 대경(大經)48)에서 깨달은 보살을 위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자체 아닌 것은 자체 아님을 깨닫지 못한다.’ 수보리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자체는 능히 자체가 아님을 깨달을 수 있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지 않다, 수보리야.’
수보리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자체 아닌 것이 능히 자체를 깨달을 수 있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지 않다, 수보리야.’
016_1087_a_19L須菩提言:“世尊!云何非體能覺體耶?”佛言:“不爾,須菩提!”
수보리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자체가 능히 자체를 깨달을 수 있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지 않다, 수보리야.’
016_1087_a_20L須菩提言:“世尊!云何體能覺體耶?”佛言:“不爾,須菩提!”
수보리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자체 아닌 것이 자체 아닌 것을 깨달을 수 있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지 않다, 수보리야.’
016_1087_a_22L須菩提言:“世尊!云何非體能覺非體耶?”佛言:“不爾,須菩提!”
016_1087_b_02L수보리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어찌하여 일체의 법을 얻을 수 없으며, 깨달을 수도 없고, 증득할 수도 없습니까? 자체는 자체 아닌 것을 깨달을 수 없고, 자체 아닌 것은 자체를 깨달을 수 없으며, 자체는 자체를 깨달을 수 없고, 자체 아닌 것은 자체 아닌 것을 깨달을 수 없다면, 이것은 마땅히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깨달음이 있고 얻음이 있는 이 네 가지 유형의 법은 옳지 못하다.’
016_1087_b_04L佛言:“有覺有得,非此四句法。”
수보리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그렇다면 어떻게 깨달아야 하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자체도 아니고 자체 아님도 아니라고 그는 이렇게 깨닫는다. 어디에도 희론이 없다고 그는 이렇게 깨닫는다. 희론도 아니고 희론하는 법도 아니라고 그는 이렇게 깨닫는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에게 색(色)이 항상하다거나 무상하다는 것이 희론이며,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이 항상하다거나 무상하다는 것이 보살마하살에게 희론이다. 혹은 색을 안다거나 모른다는 것이 보살마하살에게 희론이며, 이와 같이 수ㆍ상ㆍ행ㆍ식을 안다거나 수ㆍ상ㆍ행ㆍ식을 모른다는 것이 보살마하살에게 희론이다. 일체가 괴로움이라는 성스런 진리를 안다는 것이 희론이고, 괴로움의 발생을 단절한다는 것이 희론이며, 괴로움의 소멸을 증득한다는 것이 희론이고, 괴로움을 없애는 도를 닦는다는 것이 희론이다.
네 가지 선정[四禪]49)을 수행하는 것이 희론이고, 네 가지 무량[四無量]50)ㆍ네 가지 무색정[四無色]51) 삼마발제(三摩跋提)52)를 수행하는 것이 희론이다. 사념처(四念處)ㆍ사정근(四正勤)ㆍ사여의족(四如意足)ㆍ오근(五根)ㆍ오력(五力)ㆍ칠각분(七覺分)ㆍ팔성도(八聖道)53)를 수행하는 것이 희론이며, 공해탈문(空解脫門)ㆍ무상해탈문(無相解脫門)ㆍ무원해탈문(無願解脫門)54)을 수행하는 것이 희론이다. 팔해탈(八解脫)55)ㆍ구차제정(九次第定)56)ㆍ수순행(隨順行) 삼마발제(三摩跋提)를 수행하는 것이 희론이며, 수다원과(須陀洹果)ㆍ사다함과(斯陀含果)ㆍ벽지불도(辟支佛道)를 얻는 것이 회론이다.
016_1087_c_02L나는 인연을 만나 보리(菩提)를 이루었다고 하는 것이 희론이고, 나는 보살의 십지[十菩薩地]57)를 구족하였다고 하는 것이 희론이다. 나는 또한 보살행(菩薩行)을 얻었다고 하는 것이 희론이고, 나는 중생을 교화하여 성취시켰다고 하는 것이 회론이다.
나는 여래의 열 가지 힘[十力]58)을 얻었다고 하는 것이 희론이고, 나는 네 가지 두려움 없음[四無所畏)59)과 네 가지 걸림없는 지혜[四無礙智]60)와 열여덟 가지 함께 할 수 없는 법[十八不共法]61)을 얻어 만족하였다고 하는 것이 희론이다. 또한 일체를 얻어 구족하였다는 것이 희론이고, 나는 일체의 결습(結習)62)을 끊었다고 하는 것이 희론이다.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수행하여 이미 색이 항상하다거나 무상하다고 하는 것은 희론임을 알고, 응당 이와 같이 희론하지 말아야 한다. 이와 같이 보살은 회론하지 말아야 하며, 나는 일체지(一切智)63)를 얻었다고 하는 희론까지 응당 이와 같이 희론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왜냐 하면, 자체를 자체라고 희론하지 않고, 자체 아닌 것을 자체 아닌 것이라고 희론하지 않으며, 자체를 자체 아닌 것이라고 희론하지 않고, 자체 아닌 것을 자체라고 희론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어떠한 희론할 수 있는 법이 없으니, 어디에 희론이 있으며, 누가 희론을 하며, 어떤 것이 희론이며, 어떻게 희론하겠는가?
수보리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색에 대하여 희론하지 않고 식에 이르기까지 희론하지 않으며, 보리에 이르기까지 희론하지 않는 것입니까?’
016_1087_c_18L須菩提言:“世尊!云何色不戲論乃至識不戲論,略說乃至菩提不戲論?”
016_1088_a_02L부처님께서 혜명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색은 자체가 없고, 식에 이르기까지 자체가 없으며, 일체지에 이르기까지 자체가 없어서 그것에 대하여 희론하지 않는다. 수보리야, 이와 같은 인연으로 색에 대하여 희론하지 않고, 식에 이르기까지 희론하지 않으며, 일체지에 이르기까지도 희론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수행한다면, 보살법을 성취할 것이니라.’” 그대는 이제 잘 생각하여 그 희론과 희론하지 않는 양상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게송에서 말하였다.
1)부처님이 탄생하여 불교를 창시하고 전파한 인도를 옛날 중국과 한국에서는 신성시하여 천축(天竺)이라 칭하였다. 그 천축은 매우 광대하여 중심부와 동ㆍ서ㆍ남ㆍ북의 다섯 지역으로 구분하여 다섯 천축이라고도 하였다. 그 대표적 사용례는 신라의 혜초(慧超)스님이 지은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에 잘 나타난다. 중천(中天)은 중천축(中天竺)을 가리킨다.
2)범어 Nāgārjuna(龍樹)를 소리나는 대로 이렇게 표시한 것이다.
3)이 순중론(順中論)의 서문격인 번역기(飜譯記)를 지은 위나라 상서령(尙書令) 의(儀)는 중관파(中觀派)의 조사인 Nāgārjuna를 용승(龍勝)이라 해야 하고, 용수(龍樹)라고 하면 완전히 타당하지 않다는 독특한 주장을 하였다. 그러나 예로부터 보통 용수라고 번역하였으며, 오늘날에도 역시 이 명칭으로 통용되고 있다.
4)번역 대본에서는 상(廂)이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다른 판본에 나오는 상(箱)과 같다.
5)경전의 부피가 큰 『대품반야바라밀경(大品般若波羅蜜經)』 계통의 경전을 말한다. 구체적으로 어떠한 반야경인지는 차후 자세한 연구가 요구된다.
6)인도 유가행파(瑜伽行派)의 논사인 Asaṅga를 소리나는 대로 적은 것이며, 무착(無着)이라 번역한다. 무착보살은 그 유명한 세친보살(世親菩薩)의 형이며, 중관파(中觀派)와 더불어 인도불교의 2대학파의 하나인 유가행파(瑜伽行派)의 실질적인 조사이다.
7)서역(西城)에 존재했던 많은 나라들 중의 하나인 고창(高昌:Turfan)을 고연국(高延國)이라 표기하였던 듯하다.
8)반야류지(般若流支:Prajñāruci)를 말한다. 남인도 사람인 반야류지는 그 성이 구담씨(瞿曇氏)이기에 구담류지, 또는 구담반야류지라고도 한다. 바라문 출신으로서 어려서부터 불교를 배워 경전의 뜻에 깊이 통하였다. 북위(北黎) 효명제(孝明帝) 희평(熙平) 원년(元年:516)에 비목지선(毘目智仙)과 함께 낙양(洛陽)에 오고, 그 뒤에 업도(鄴都)로 천도하자 역시 따라가서 원상(元象) 원년(538)부터 무정(武定) 원년(543) 사이에 금화사(金華寺)와 창정사(昌定寺) 등에서 경론을 번역하였다. 그가 번역한 경전은 여러 기록마다 차이가 나지만, 인정할 만한 것으로 『정법염처경(正法含處經)』, 『순중론(順中論)』, 『회쟁론(廻諍論)』, 『업성취론(業成就論)』 등이 있다[반야류지가 번역한 경론은 보리류지의 번역과 혼동되기 쉬우므로 주의가 요청된다].
9)태어나고 사망한 연대가 자세하지 않은 담림은 중국 선종의 개조인 보리달마의 제자이며, 선종의 2조(祖)인 혜가(慧可)의 친한 도반이었던 듯하다. 담림의 전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북위(北魏)의 원상(元象) 원년부터 무정(無定) 원년까지 구담반야류지와 비목지선(毘目智仙), 보리류지(菩提流支) 등의 번역을 도우며 필수(筆受)하고 또는 서문을 짓기도 하였다. 가상 길장(嘉祥吉藏)의 『승만경보굴(勝鬘經寶窟)』에 담림의 『승만경소(勝鬘經疏)』가 인용되어 있어, 그가 승만경의 연구자로 알려져 있다.
10)무정(武定)은 동위(東魏) 효정제(孝靜帝)의 연호이며, 그 원년은 서기 543년에 해당한다.
1)이 『순중론의입대반야바라밀경초품법문(順中論義入大般若波羅蜜經初品法門)』을 간략하게 줄여서 이렇게 부른 것이다.
2)범어 Kauśika를 소리나는 대로적은 것임. 교시가는 제석천(帝釋天)의 속명인데, 제석은 모든 신들의 왕으로 도리천(忉利天)의 천주(天主)이기도 하다.
3)다른 판본에 의거해 사(捨)로 해석하지 않고 취(取)로 해석한다.
4)삼해탈문(三解脫門)의 약칭으로 깨달음에 이르는 세 가지의 해탈문이다. 즉 공해탈문(空解脫門)ㆍ무상해탈문(無相解說門)ㆍ무원해탈문(無顧解脫門)이 그것이다.
5)마음 밖에 어떤 대상이 실재한다고 보고, 그 실재한다는 것에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6)대립하는 두 가지의 극단을 말한다. 예를 들면 유(有)와 무(無), 열반(涅槃)과 생사(生死)같은 것이다.
7)여기서 말하는 스승은 부처님이 아니라 『중론(中論)』의 저자인 용수(龍樹)를 뜻한다.
8)범명은 Rāhulabhadra이다. 티베트에서 전하는 바로는 용수의 스승이라는 설도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용수의 제자인 제바(提婆)의 제사라고 간주해 왔다. 따라서 그의 생존연대는 대략 서기 200~300년 정도로 추정된다. 그의 저서로는 『찬반야바라밀게(讚般若波羅蜜偈)』 등이 있었고, 그 외에도 저서가 있었으나 모두 현존하지 않는다.
9)한역자의 번역대로라면 수보리가 용수보살에게 예배하였다는 것처럼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나 수보리는 부처님 생존시의 인물이므로 용수와 만난 일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이 구절은 수보리가 게송으로 부처님께 공양하고, 용수논사도 게송으로 여래에게 공양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0)사물 그 자체, 본체를 말한다.
11)세계는 한 번 단절되면 없어진다는 견해로서, 사람도 한 번 죽으면 단멸되어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고 간주하는 잘못된 주장.
12)단견에 반대되는 견해로서, 세계는 상주불멸하며 사람은 육신이 사멸한 후에도 자아가 영구불멸한다고 집착하는 잘못된 견해.
13)인도 종교에서 말하는 우주를 주재하는 신인 마헤스와라(Maheśvara)를 소리나는 대로 표기한 것으로, 쉬바(Śiva)신의 별명이기도 하다. 인도 종교에서는 이 마혜수라신이 세계를 창조하는 원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14)시간을 말함. 시절이 곧 존재를 성립시키는 근본이라 보는 것이다.
15)일상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극히 미세한 최소의 물질을 말하며, 오늘날 물리학에서 말하는 원자의 개념에 해당한다.
16)프라크리터(prakrti)를 번역한 말이다. 인도 철학 중에 상캬(Sāṁkhya) 학파에서는 이프라크리터가 근원적인 물질의 본질로서, 이것으로부터 모든 사물이 생성되어 현상계가 존재하게 된다고 한다.
17)사물 자체의 본성. 존재의 고유한 성실.
18)절단되어 없어지는 것.
19)토끼의 뿔.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20)돌로 만든 여인이 낳은 자식. 역시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비유할 때 쓰는 말이다.
21)허공에는 꽃으로 만든 꽃다발이 존재하지 않지만. 환상에 빠져 있는 줄 착각할 때 쓰는 비유.
22)일반적으로 나이 든 남자를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세계를 전개시키는 원인인 푸루샤(Puruṣa)를 의미한다. 이 말은 오래 전에 베다(Vēda) 성전에서 세계의 창조자로서 설명되었으나, 이 『순중론』에서 지적하는 것은 그 보다 후대에 전개된 상캬학파에서 제시한 정신적 원리인 푸루샤를 말한다.
23)카필라(kapila)를 말한다. 카필라는 상캬철학의 개조라고 전해지며, 그 생존연대는 대략 BC 350~250년경으로 추정된다.
24)인도말인 Āgama를 그대고 옮긴 것. 이 아함이란 말을 인도철학 일반에서는 예전부터 전승되던 가르침이란 의미로 사용하며, 바라문 종교에서는 주로 베다 성전을 뜻한다. 불교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말씀을 의미하며, 대승불교가 흥기한 뒤로는 원시불교의 경전을 『아함경(阿含經)』이라 불렀다.
25)불교에서는 논리학(論理學)을 인명(因明:hetu-vidyā)이라 불렀다. 인명학은 처음 인도철학 중의 하나인 니야야(Nyāya)학파의 가우타마(Gautama:서기 50~150년경)에 의하여 창시되었다는 전승이 있으며, 나중에 불교학자인 진나(陳郡:Dignāga, AD 480~540)에 의해 개혁되어 대성되었다. 니야야학파에서는 종(宗)ㆍ인(因)ㆍ유(喩)ㆍ합(合)ㆍ결(結)이라는 다섯 가지에 의거한 오지작법(五支作法)을 제시했으나, 진나의 손을 거치며 종(宗)ㆍ인(因)ㆍ유(喩)만으로 가능한 삼지작법(三支作法)으로 간략히 정착되었다. 종(宗:pritiñā)은 주장하는 명제로서 논증되어야 할 것이며, 인(因:hetu)은 논증이 성립되는 근거이며, 유(喩:dṛṣṭānta)는 종과 인의 관계를 명확히 밝히는 비유이다.
26)붕(朋)은 일반적으로 친구ㆍ벗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나, 인명학에서는 논쟁에 있어서 어느 한 쪽이나 그 한 쪽의 주장을 말한다. Pakṣa를 번역한 말이다.
27)동품정유성(同品定有性)에 해당한다. 다음의 주 30)을 참조.
28)이품편무성(異品遍無性)에 해당한다. 다음의 주 30)을 참조.
29)삼지작법 중의 가운데 조건. 종(宗)ㆍ인(因)ㆍ유(喩)에 대해서는 앞의 주 25)를 참조.
30)불교논리학과 인도철학에서 이유로 제시되는 개념인 인(因)이 갖추어야 할 세 가지 조건. 본래 이 인삼상(因三相)이라는 논리는 『순중론(順中論)』의 기록에 의거하면, 아마도 정리과(正理派:Nyāya) 계통에 속하는 약야수마(若耶須摩)에 의하여 설해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나중에 불교학자인 진나(塵那:Dignāga)에 수용되어 확고하게 확립되었다. 인(因)의 세 가지 조건이란 편시종법성(遍是宗法性)ㆍ동품정유성(同品定有性)ㆍ이품편무성(異品遍無性)이다. 예를 들면 ‘저 산에 불[火]이 있다. 연기[煙]가 있기 때문에’라는 논리가 있을 때, 이유개념인 인(因)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 편시종법성(pakṣadharmatva):이유개념이 증명되어야 할 명제의 주어의 종법(宗法)이라는 것이다. 곧 연기라는 인(因)이 종(宗)인 저 산에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동품정유성(sapakṣesattvaṃ):이유개념이 증명되어야 할 명제의 술어(述語:불)와 같은 종류 중에 반드시 존재하는 것이다. 곧 부엌의 아궁이에서 불과 연기의 양쪽이 보이기 때문에 아궁이는 저 산과 같은 종류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인(因:연기)과 종(宗:산)의 양쪽 사이에 서로 떨어질 수 없는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 이품편무성(vipakṣésattvameva):이유개념이 증명되어야 할 명제의 술어와 모순되는 것, 다른 종류 중에는 반드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곧 바다나 강은 산과 다른 종류인데 이 경우에는 불이 없는 곳에 연기가 나지 않듯이, 이품(異品) 전체에 인(因)이 없어야 한다는 조건을 말한다.
31)누구인지 명확한 자료가 없으나, 논리학파인 니야야학파에 속하는 논리가로 추측되고 있다.
32)인명학(因明學)에서 말하는 논리방식.
33)세속적 입장에서 바라보는 상식적인 진리. 속제(俗諦)라고도 한다.
34)인(因)의 삼상(三相) 중에서 편시중법성에 해당한다. 이에 대해서는 앞의 주 30)을 참조.
35)인(因)의 삼상(三相) 증에서 이품편무성에 해당한다. 앞의 주 30) 참조.
36)인의 삼상 중에서 동품정유성에 해당한다. 앞의 주 30) 참조.
37)소리, 말, 언어를 의미하는 śabda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므로 항상하지 않고 무상하다는 것. 이에 대하여 미맘사(Mīmāṁsā) 학파에서는 소리는 그 말에 해당하는 실재하는 것이 나타난 것이라 하여 성상주론(聲常住論)을 취하였다.
38)세간의 모든 것은 괴로운 것이며, 이것은 성스런 진리라는 뜻임. 이것은 원시경전에서 말한 사성제의 첫 번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사성제를 대승경전에서 대승적으로 말하고 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39)진리에 어긋나는 네 가지 뒤바뀐 범부들의 견해. 첫째, 상전도(常顚倒):무상한 것을 항상하다고 보는 것. 둘째, 낙전도(樂顚倒):괴로운 것을 즐겁다고 보는 것. 셋째, 아전도(我顚倒):자아는 없는데도 영원히 있다고 보는 것. 넷째, 정전도(淨顚倒):부정한 것을 깨끗하다고 보는 것이다.
40)사성제(四聖諦)의 두 번째 진리인 집제(集諦)를 말한다.
41)사성제의 세 번째 진리인 멸제(滅諦)를 말한다.
42)사상제의 네 번째 진리인 도제(道諦)를 말한다.
43)여러 가지 인연에 의하여 생겨나고 소멸하는 현상계의 모든 사물을 유위법이라 부른다.
44)절대불변의 진리를 깨달아 다시는 미혹한 세계로 타락하지 않고 안심하게 되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
45)제법이 불생불멸(不生不滅)하다는 진리를 증득하는 것. 줄여서 무생인(無生忍)이라고도 한다.
46)가장 뛰어난 진실한 진리로, 진제(眞諦)라고도 한다.
47)사람마다 본래 갖추고 있는 참된 마음을 대지(大地)에 비유하여 부르는 말임. 대지가 일체의 존재를 생장시키는 것처럼, 마음이 모든 선과 악을 일으키기 때문에 이렇게 비유한 것이다.
48)『대품반야경』 계통의 경전.
49)네 가지 단계의 선정으로 사선(四禪)이라고도 한다. 초선(初禪)ㆍ이선(二禪)ㆍ삼선(三禪)ㆍ사선으로, 욕계(欲界)의 미혹을 벗어나 색계(色界)에 출생하는 네 단계의 선정임.
50)네 가지 광대한 마음으로 사무량심(四無量心)이라고도 한다. 그 네 가지는 자무량(慈無量)ㆍ비무량(悲無量)ㆍ희무량(喜無量)ㆍ사무량(捨無量)이다.
51)무색계에서 닦는 네 단계의 선정으로 사무색정(四無色定)이라고도 한다. 공무변처(空無邊處)ㆍ식무변처(識無邊處)ㆍ무소유처(無所有處)ㆍ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네 선정.
52)범어 samāpatti를 소리나는 대로 적은 것이며, 등지(等至)라 번역하기도 한다. 정신통일에 의하여 마음이 안온하게 평등해진 상태를 말함.
53)소위 삼십칠보리분법(三十七菩提分法)을 말한다. 깨달음을 성취하게 하는 수행법이므로 보리분법이라 한다.
54)소위 삼해탈문(三解脫門)을 말한다. 앞의 주 4) 참조.
55)삼계(三界)의 번뇌를 벗어나 그 계박에서 해탈하는 여덟 가지 선정. 사선정(四禪定)과 사무색정(四無色定) 그리고 멸진정(滅盡定)을 말한다. 이 선정들을 수행하면 미혹을 떠나 깨달음을 얻기 때문에 해탈이라 한다.
56)사선정(四禪定)ㆍ사무색정(四無色定)ㆍ멸수상정(滅受想定)의 아홉 가지 선정을 말한다.
57)보살이 수행해야 할 십지(十地)를 말한다. 이 보살 십지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공지(共地)이고 또 하나는 단보살지(但菩薩地)이다. 전자는 반야경에 설해진 것이고 후자는 화엄경에 설해진 것인데, 여기서 의미하는 보살지는 『대반야경』에 설해진 반야경의 십지이다.
58)부처님에게 구족되어 있는 처비처지력(處悲處智力)에서부터 누진지력(漏盡智力)에 이르기까지의 열 가지 힘으로, 부처님이 전지자임을 나타내는 지혜의 힘.
59)사무소외(四無所畏)라고도 한다. 부처님과 구도자가 가르침을 설할 때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 자신 있게 설법할 수 있는 네 가지 지혜. 그 네 가지는 정등각무외(正等覺無畏)ㆍ누영진무외(漏永盡無畏)ㆍ설장법무외(說障法無畏)ㆍ설출도무외(說出道無畏)이다.
60)부처님과 보살이 설법할 때 아무런 장애 없이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는 지혜의 능력으로 사무애변(四無礙辯)이라고도 한다. 그 네 가지는 법무애(法無礙)ㆍ의무애(義無礙)ㆍ사무애(辭無礙)ㆍ요설무애(樂說無礙)이다.
61)오직 부처님에게만 갖추어져 있는 열여덟 가지 뛰어난 특징을 말한다. 그것은 여래의 십력(十力)과 사무소외(四無所畏)와 삼념주(三念住), 그리고 대비(大悲)이다. 삼념주(三念住)는 부처님께서 정지정념(正智正念)에 머물러 세 가지로 평정한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다. 첫 번째는 중생이 부처님을 믿어도 기뻐하는 마음을 내지 않는 것. 두 번째는 중생이 부처님을 믿지 않아도 근심하지 않는 것, 세 번째는 어떤 사람은 믿고 어떤 사람은 믿지 않아도 기쁨과 근심을 생하지 않는 것이다. 대비(大悲)는 많은 사람들의 괴로움을 구제하고자 하는 부처님과 보살의 큰 자비심ㆍ자애심을 말한다.
62)번뇌(煩惱)와 습기(習氣)를 말한다.
63)모든 것을 알며, 완전한 지혜를 갖고 있는 전지자(全知者). 곧 부처님을 말한다.
64)범어나 팔리어(pāli)의 bodhi를 소리나는 대로 적은 말. 이 보리, 즉 보디는 미혹과 번뇌에서 자각하여 깨달은 바른 지혜, 정각(正覺)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