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028_0338_a_01L아비담심론경 제5권
028_0338_a_01L阿毘曇心論經卷第五


법승 지음
우바선다 해석
나련제야사 한역
028_0338_a_02L法勝論 大德優波扇多釋
高齊天竺三藏那連提耶舍譯 六卷成部


7. 정품 ②
028_0338_a_04L定品之二別譯

이미 공덕의 자성(自性)을 설명하였으며, 또 유루와 무루의 구별도 설명하였다. 지금부터 그 공덕을 성취하는 과정을 설명하겠다.
028_0338_a_05L已說功德自性亦說有漏無漏成就今當說

알지어다. 아직 욕계 벗어나지 못한 사람은
미선(味禪)과 상응하는 공덕 성취하고
낮은 경지 벗어나 아직 높은 경지에 이르지 못하였어도
청정한 여러 선정 성취하게 되느니라.
028_0338_a_07L當知未離欲
成就味相應
離下未至上
成就淨諸定

‘알아야 한다. 아직 욕계 벗어나지 못한 사람은 미선과 상응하는 공덕 성취한다’고 한 것은 만약 어떤 사람이 그의 경지가 아직 욕계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을 경우 그 경지의 맛과 상응하는 선정을 성취하게 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낮은 경지 벗어나 높은 경지 이르지 못하였어도 청정한 여러 선정 성취하게 된다’라고 한 것은 욕계의 욕애에서 벗어나 제2선 등의 경지에서 생기는 범천(梵天)의 세계가 아직 생겨나지 아니하였을 경우 욕애를 벗어났건 아직 욕애를 벗어나지 아니하였건 청정한 초선(初禪)의 경지와 그밖의 거룩한 공덕이 성취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028_0338_a_09L當知未離欲成就味相應者若人若此地未離欲成就此地味相應離下未至上成就淨諸定者離欲界欲未生第二禪等中梵世若離欲若不離成就淨初禪及彼地餘善功德

알아야 한다. 높은 경지에 머물러도
낮은 경지의 무루 성취하느니라.
방편으로 생긴 공덕은
욕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028_0338_a_14L住上應當知
成就下無漏
方便生功德
當知非離欲

‘높은 경지에 머물러도 낮은 경지의 무루 성취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한 것은 성인이 범천 세계보다 위에 태어나서도 무루(無漏) 초선의 경지와 그밖의 무루의 삼매(三昧)ㆍ신통력 및 지혜 등 모든 공덕을 성취하시게 됨을 말한 것이다. 그 경지가 유루의 공덕을 낳는 곳이라면 그곳은 얽매인 땅이며 무루의 공덕은 이 얽매인 속박을 끊는다. 그런 까닭에 공덕이 생긴 곳을 떠나서 유루를 버렸다고 하여 그것이 곧 무루는 아니다. 이와 같이 모든 경지는 그 내용을 따라 설명하게 되는 것이다.
028_0338_a_16L住上應當知成就下無漏者聖人生梵世上成就無漏初禪及餘無漏三昧神通及智等諸功德彼地有漏功德生處縛無漏斷縛是故離生處捨有漏非無漏如是一切地隨其義說
028_0338_b_02L‘방편으로 생긴 공덕은 욕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고 한 것은 이미 설명한 대로 낮은 경지의 욕애에서 벗어나서 성취되는 모든 공덕은 그 성취가 눈앞에 나타나지 아니하는 공덕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방편이 현재 눈앞에 있는 공덕은 욕계를 벗어난 공덕이 아니다. 방편으로 얻는 것은 천안(天眼)과 같은 경지일 따름이다. 그것은 무기(無記)인 까닭에 무루선ㆍ정선(淨禪)ㆍ미선(味禪)에 상응하는 선정에는 포함되지 아니한다. 그런 까닭에 그 세 가지 선정을 얻었을 때는 멸진정(滅盡定)이라 할 수는 없다. 이 멸진정은 방편의 멸진정이기 때문이다. 그 경지에서는 스물세 가지의 정수(正受:三昧)가 눈앞에 나타나고 그 가운데 여덟 가지는 미선과 서로 호응하고 또 다른 여덟 가지는 정선과 서로 호응하며 나머지 일곱 가지는 무루선(無漏禪)과 서로 호응한다.
【문】그 가운데 있는 하나하나의 선정마다 몇 종류의 인연이 있습니까?
028_0338_a_21L方便生功德當知非離欲者已說離下地欲成就諸功德當知說得成就不現在前方便現在前者彼非離欲方便得者如天眼耳彼無記故無漏味相應不攝是故得彼三種禪時不得滅盡是滅盡定者方便故彼得現前二十三種正受八味相應八淨七無漏問曰彼中一一幾種因

【답】
이른바 무루의 선정에는
선정마다 일곱 가지 인(因)이 있고
미선ㆍ정선과 상응하는 선정에는
한 가지 인연만 있음을 알아야 한다.
028_0338_b_08L答曰
所謂無漏定
一一七種因
味淨相應禪
當知因有一

‘이른바 무루의 선정에는 하나하나마다 일곱 가지의 인(因)이 있다’고 한 것은 하나하나의 무루의 선정마다 모두가 일곱 종류의 무루심에서 생기는 것이며 자기 몫의 인연 가운데서 자기 경지에 인연한 것이나 또한 공생인(共生因), 즉 공통적으로 생기는 인과도 서로 호응하게 된다.
‘미선ㆍ정선과 상응하는 선정에는 한 가지 인연만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한 것은 미선(味禪)과 상응하는 초선은 미선과 상응하는 초선에 인한 것이며 다른 것에 인한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초선의 인은 서로 닮지 아니한 것이기 때문이며 또한 다른 경지의 더럽게 오염된 인의 행과는 틀리기 때문이다. 이것은 더럽게 오염된 행이 아닌 것과도 서로 어긋나는 특유의 경지이며, 또한 자기 몫의 선정도 아니다.
028_0338_b_10L所謂無漏定一一七種因者一一無漏七種無漏中自分因中因自地者亦相應共生因味淨相應禪當知因有一者味相應初禪味相應初禪因非餘初禪因不相似故非餘地穢污行相違故非穢污行相違亦非自
이와 같이 정선(淨禪)과 상응하는 초선(初禪)도 정선과 상응하는 초선의 경지에만 인(因)하며 그것은 더럽게 오염된 것도 아니고 무루선(無漏禪)도 아니다. 왜 그런가? 다른 선정과 서로 비슷하지 않기 때문이며, 다른 경지의 청정한 인연도 아니고 자기 경지의 과보도 아니기 때문이며, 또한 자기 경지에 얽매인 선정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모든 경지의 선정이 모두 그 자체의 경지에만 인연되는 것이다.
【문】하나하나의 선정은 차례로 몇 종류나 생겨납니까?
028_0338_b_17L如是淨初禪淨初禪因非穢污無漏何以故不相似故非餘地淨因自地果報故及自地係縛故如是一問曰一一次第生幾種

【답】
무루선은 무색계까지
역으로 순차로 차례를 뛰어넘어
차례로 여섯 종류의 선정이 생기고
마침내는 열 가지 선정이 생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028_0338_b_20L答曰
無漏禪無色
逆順超次第
次第生六種
當知乃至十
028_0338_c_02L
무루의 초선에서 차례로 여섯 종류의 선정이 생겨난다. 즉 자기경지의 정선(淨禪)과 무루선이다. 이와 같은 제2, 제3의 선정도 이와 같이 정수(正受)의 단계를 뛰어넘어 무루(無漏)인 무소유처(無所有處)의 선정에 이르기까지 차례로 일곱 가지 선정이 생겨난다. 즉 자기경지에서 두 가지의 무루선과 아랫경지에서 네 가지, 윗경지에서 한 가지 선정이 생겨난다. 무루의 제2선에서는 차례차례로 여덟 가지 선정이 생겨난다. 자기경지에서 두 가지, 초선의 경지에서 두 가지, 윗경지에서 네 가지의 선정이 생긴다. 무루의 무변식처정(無邊識處定)에서는 차례로 아홉 가지 선정이 생겨난다. 자기 경지에 속하는 것이 두 가지, 아랫경지에 속하는 것이 네 가지, 윗경지에 속하는 것이 세 가지이다. 나머지 다른 무루선에서는 차례로 열 가지 선정이 생긴다. 즉 자기 경지에 속하는 것이 두 가지며, 아랫경지에 속하는 것이 네 가지, 윗경지에 속하는 것이 네 가지이다.
028_0338_b_22L無漏初禪次第生六種自地淨及無如是第二第三禪如是超越正受無漏無所有處次第生七自地二地四上地一無漏第二禪次第生八自地二初禪地二上地四無漏無邊識處次第生九自地二下地四上地餘無漏次第生十自地二下地四上地四

혹 여섯 가지에서 열한 가지에 이르니
차례로 생기는 정선을 말한다.
두 가지에서부터 열 가지까지는
미선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028_0338_c_07L或六至十一
謂淨次第生
從二乃至十
當知說有味

‘혹 여섯 가지에서 열한 가지에 이르니, 차례로 생기는 정선을 말한다’고 한 것은 정선(淨禪)의 경우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에서 차례로 여섯 가지 선정이 생긴다. 즉 자기경지의 선정과 미선(味禪)과 상응하는 선정, 그리고 아랫경지의 네 가지 정선이 그것이다. 정선과 무루선은 미선과 상응하는 선정이 아니다. 그 이유는 욕계를 벗어났기 때문이다.
정선의 초선(初禪)에서는 차례로 일곱 가지 선정이 생긴다. 즉 자기경지에 속하는 것이 세 가지며 윗경지에 속하는 것이 네 가지다.
정선과 무루선은 불용처(不用處)에서는 차례로 여덟 가지 선정이 생긴다. 즉 자기 경지에 속하는 것이 세 가지며 윗경지에 속하는 것이 한 가지고, 아랫경지에 속하는 것이 네 가지다.
028_0338_c_09L或六至十一謂淨次第生者淨非想非非想處次第生六自地味相應淨下地四淨及無漏非味相應離欲淨初禪次第生七自地三上地四淨及無漏淨不用處次第生八自地上地一下地四
제2선에서의 정선의 경우 차례로 아홉 가지 선정이 생기고 무변식처(無邊識處)에서는 차례로 열 가지 선정이 생긴다.
나머지 다른 경지에서는 모두 열한 가지 선정이 생긴다. 이와 같은 모든 선정은 마땅히 정수(正受)의 시기에 해당되는 것이며, 죽는 시기를 말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런 까닭에 그 가운데 높고 낮은 경지의 미선과 상응하는 선정에는 포함되지 아니하고 생기는 선정이다. 그러나 정선을 얻고도 차례로 상하(上下)의 미선과 상응하는 선정이 생길 수도 있다.
‘두 가지로부터 열 가지에 이르기까지 미선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한 것은 미선과 상응하는 초선의 경우 차례로 두 가지 선정이 생긴다. 즉 자기 경지에 속하는 미선과 상응하는 선정 및 정선이 그것이다. 이 두 가지는 그 경지가 서로 어긋나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028_0338_c_15L淨第二禪次第生無邊識處次第生十餘十一如是一切當知正受時如是說非死時故彼中上下地味相應不攝生得淨次第上下味相應生從二乃至十當知說有味者味相應初禪次第生二自地味相應及淨彼此不相違故
유정천(有頂天)에서의 미선과 상응하는 선정에서는 차례로 열 가지 선정이 생긴다. 즉 정수(正受)의 단계에서 미선과 상응하는 선정이 세 가지가 생기며 자기 경지에서 두 가지가 생기고 아랫경지의 정선(淨禪)도 그 자체 경지의 번뇌가 괴롭히기 때문에 생겨나며, 스스로를 구호하기 때문에 불용처(不用處)의 경지에 근거한 정선도 생기며 이와 같이 모든 경지의 아랫경지에 속하는 선정이 세 가지가 생기며 또한 죽었을 때의 윗경지와 물러섰을 때의 아랫경지에 속하는 선정 등 열 가지 선정은 모두가 미선과 서로 호응하는 선정이다.
028_0338_c_21L頂味相應次第生十正受味三自地及下地淨自地煩惱所惱故依不用處地淨以自救護如是一切地下地淨三及死時上地退下地一切味相應
028_0339_a_02L【문】앞에서는 정수의 시기에 생기는 선정을 말씀하셨으니, 여기서는 마땅히 번뇌를 설명하셔야 하겠습니다.
【답】정선이 차례로 생기는 것은 정수(正受)의 시기에 해당하고 번뇌는 미선과 상응하는 번뇌 및 수음(受陰)으로 생기는 번뇌를 말하게 된다. 왜 그런가? 번뇌의 힘으로 생기는 선정은 선정의 힘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이 가운데서 말하는 선정은 모두 번뇌에 속한다. 그러나 정선(淨禪)의 경우 그것은 반드시 결정적으로 선정의 힘에 의하여 생기는 선정이다. 그런 까닭에 정수와 번뇌를 함께 말하는 것이다.
【문】그 가운데 하나하나의 연(緣)은 몇 가지나 됩니까?
028_0339_a_03L問曰前說正受煩惱今當說淨次第正受煩惱說味相應及受生煩惱何以故煩惱力生非定力故此中說一切煩惱淨必定定力故說共正受煩惱問曰彼中一一緣幾種

【답】
정선과 무루선은
모든 경지에서 전변(轉變)하며
자기경지의 유루(有漏)의 법은
미선(味禪)과 상응하는 소연(所緣)이 된다.
028_0339_a_08L答曰
淨及無漏禪
一切地中轉
自地有漏法
味相應所緣

‘정선과 무루선은 모든 경지에서 전변한다’고 한 것은 정선과 무루선은 모든 경지와 모든 일에 연(緣)함을 말한 것이다.
‘자기경지의 유루법은 미선과 상응하는 소연이 된다’고 한 것은 미선과 상응하는 선정은 자기경지의 맛과 상응하는 선정과 연하는 동시에 정선과도 연하지만 무루와는 연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무루의 연이 아니며 애착이 있으면서도 다른 경지에 애착을 느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028_0339_a_10L淨及無漏禪一切地中轉者淨及無漏禪緣一切地一切事自地有漏法味相應所緣者味相應禪緣自地味相應及淨非無漏何以故非無漏緣有愛亦非愛他地

무색정(無色定)은 아랫경지인
유루의 일을 수행하지 아니한다.
만약 그것이 근본적으로 선할 경우
더럽게 오염된 것은 미선(味禪)과 같다.
028_0339_a_15L無色則不行
於下有漏事
若根本彼善
穢污如味禪

‘무색정은 아랫경지인 유루의 일을 행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무색계의 정수(正受)는 아랫경지인 유루의 법을 반연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아랫경지는 적멸하지 못한 곳이기 때문이요, 또한 아랫경지는 아랫경지의 무루와 연하여 마치 비지(比智:類智, 上界의 無漏智)의 일부분과 같기 때문이다.
028_0339_a_17L無色則不行於下有漏事者無色正受不緣下地有漏法何以故下地不寂滅故亦緣下地無漏如比智分
028_0339_b_02L【문】모든 유루는 아랫경지를 연하지 아니합니까?
【답】그렇지 않다. 만약 그것이 근본적으로 선(善)할 경우 근본적으로 무색계의 정선과 무루선이 되면 그것은 자기의 경지와 윗경지를 연(緣)하고 아랫경지를 연하지 아니하며, 미래선에서 만약 아랫경지와 연할 경우 그것은 아랫경지인 거칠고 추악한 생각에서 싫어하고 여의려는 생각을 연하게 된다.
‘더럽게 오염된 것은 미선과 같다’고 한 것은 미선과 상응하는 선을 말한 것으로 무색계의 선정이 더럽게 오염되는 경우도 역시 이와 같음을 말한 것이다.
028_0339_a_20L一切有漏不緣下地耶答曰不爾若根本彼善若根本無色淨及無漏彼緣自地及上地不緣下地未來禪若緣下地彼於下地麤想緣厭離污如味禪者如味相應禪說無色穢污亦如是

색계에서 만약 무량심 등
공덕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욕계의 경계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028_0339_b_03L色界若有餘
無量等功德
彼欲界境界
世尊之所說

색계의 공덕을 말하는 데 있어 사무량심(四無量心)이나 일체처(一切處) 등은 저 욕계를 연한 공덕이다. 왜 그런가? 신통력을 제외하고 무량심을 말하는 것 등은 저 다섯 가지 신통력은 욕계와 색계를 연하는 공덕이기 때문이다.
【문】앞에서 말씀하신 선정이 몸에 배게 하는 일 가운데서 지혜를 닦는다고 하셨는데, 그 경우 어떻게 선정이 몸에 배게 됩니까?
028_0339_b_05L若色界功德謂四無量一切處等緣欲界何以故除神通說無量等五神通緣欲色界問曰如前說熏禪中修智彼云何熏

【답】
만약 모든 선정을 몸에 배게 할 수 있다면
이는 제4선에 의한 것이니
세 경지의 애착이 다한 까닭에
정거(淨居)의 광과(廣果) 경지에 태어나리라.
028_0339_b_09L答曰
若能熏諸禪
是依第四禪
三地愛盡故
淨居唯廣果

‘만약 모든 선정을 몸에 배게 할 수 있다면 이는 제4선에 의한 것이다’라고 한 것은 색계 제4선의 경지를 얻게 되면, 모든 선정이 몸에 배게 되며 번뇌가 남아 있는 경지가 아니다. 그 사람은 자주 무루 사선(無漏四禪)의 선정에 들어가 무루의 지혜가 일어나고, 또 자주 유루(有漏)의 선정에 들어갔다가 다시 무루선으로 되돌아간다. 거기서 또다시 유루선에 들어가면서 유루선에 들어가는 횟수가 점차로 줄어들어 마침내는 두 찰나에 머물게 된다. 이와 같은 방편으로 만약 한 찰나는 무루심이었다가 또 다음 한 찰나는 유루심이 될 경우 이때 한 생각은 유루이고 또 다른 한 생각은 무루가 되어 두 가지 생각, 즉 한 유루의 생각과 한 무루의 생각을 지니게 된다. 이것을 성취라고 말하는 것이다.
028_0339_b_11L若能熏諸禪是依第四禪者得第四禪能熏禪非餘彼人數數入無漏四起無漏數數入有漏禪復還入無還入有漏漸略乃至住二剎那是方便若一無漏心若一有漏心時一念有漏一念無漏二念一有漏一無漏是說成就
028_0339_c_02L【문】그것은 어디서 얻은 과보입니까?
【답】정거천(淨居天)에서 얻은 과보이다. 왜 그런가? 세 경지의 애착이 다했기 때문에 정거천 중에 광과의 경지에 태어난다.
만약 제4선의 경지를 얻는다면 앞의 세 경지의 애착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이 제4선의 경지를 얻은 사람은 정거천(淨居天) 중에 광과천에서 범부들과 함께 선(禪)을 닦아 몸에 배게 한다. 이 경우 범부들과 함께 하지 아니하는 다섯 가지 선정은 하(下)ㆍ중(中)ㆍ상(上)ㆍ상중(上中)ㆍ상상(上上)의 선이다. 이와 같은 다섯 가지 경지를 불광천(不廣天)ㆍ무열천(無熱天)ㆍ선견천(善見天)ㆍ선현천(善現天)ㆍ색구경천(色究竟天)이라 한다. 그런 까닭에 그 가운데서 과보를 얻게 되는 것이다.
【문】앞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일곱 종류의 원과 지혜[願智]는 어떻게 됩니까?
028_0339_b_18L問曰此何處得果答曰淨居天中何以故三地愛盡故淨居唯廣果若得第四禪離三地愛是故此得第四禪人淨居廣果中凡夫共修熏禪不與凡夫共五種者上中上上彼如是五種不廣天無熱天善見天善現天及色究竟天是故彼中得果問曰如前說七種願是云何

【답】
집착없는 부동(不動)의 법문에서
모든 정수(正受) 얻는다.
그 삼매의 지혜의 힘은
능히 최상의 사선(四禪)을 일으킬 수 있다.
028_0339_c_03L答曰
無著不動法
得一切正受
彼三昧智力
能起頂四禪

이 경지에 이른 사람은 핍박하고 괴롭히는 마음이 계속 이어지지 않기 때문에 모든 정수의 힘이 끊임없이 이어져서 지혜가 생겨난다. 그런 까닭에 세 가지 공덕, 즉 원지(願智)와 무쟁(無諍:마음에 모순이나 갈등이 없는 것)ㆍ무애(無礙:마음에 장애물 없는 것)의 공덕이 생긴다.
저 원지라는 것은 가령 과거ㆍ미래ㆍ현재와 무위(無爲)의 일을 알고자 하면 그때 그 원하는 지혜의 가장자리 끝이 제4선의 정수(正受)의 위치에 머물게 되므로 능히 이것을 알 수 있게 된다.
무쟁(無諍)이란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계속 이어지는 가운데 번뇌로 인한 갈등이 일어나려 하지 아니한다. 이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계속 이어지는 동안 번뇌로 인한 마음의 갈등도 일어나지 아니하는 것이다.
무애란 앞에서 설명한 내용과 같다.
【문】원지(願智)는 어느 경지에 속하는 공덕입니까?
028_0339_c_05L彼人煩惱不能逼惱心相續故一切正受力心相續生故得三功德謂願無諍及無㝵彼願智者若欲知過去未來現在及無爲彼時願智邊際住第四禪正受能知無諍名於他相續中煩惱諍不欲起此人他相續中不起煩惱諍無㝵名如前說問曰智何地攝

【답】
세 가지 경지에 원지가 있고
무쟁은 다섯 경지 속에 포함된다.
두 경지에는 법무애변(法無礙辯)ㆍ사무애변(辭無礙辯)의 공덕이 있고
나머지 두 무애변(無礙辯)은 아홉 경지에 의지한다.
028_0339_c_13L答曰
三地有願智
無諍五地中
二地法辭辯
二辯依九地

‘세 가지 경지에 원지가 있다’고 한 것은 제4선과 초선(初禪)과 욕계를 말한 것이나 결정적인 것은 제4선에서 얻게 된다. 욕계에서는 오직 사람들 가운데 혹 욕계에 있으면서 범천(梵天)의 세계와 서로 호응하는 마음이 일어날 경우 설법을 일으켜 말로 마음을 설명하게 되면 그곳에 원지(願智)가 존재하게 된다. 그런 까닭에 세 경지에 존재한다고 말한 것이다.
‘무쟁은 다섯 경지에 포함된다’고 한 것에서 다섯 경지라고 한 것은 근본 사선과 욕계를 말한다. 이것도 결정적인 것은 제4선에서 얻게 되지만 사람들 가운데 혹 능히 이 공덕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도 있지만 그 일어나는 곳은 결코 다른 경지가 아니다.
028_0339_c_15L三地有願智者第四禪初禪及欲界決定第四禪中得欲界唯人中能起欲界梵世相應心記起言說心彼處有是故說三地無諍五地中者根本四禪及欲界此決定於四禪中得人中能起非餘處
028_0340_a_02L‘두 경지에는 법무애변과 사무애변이 있다’고 한 것 중에 법문에 막힘없는 말재주는 욕계와 범세(梵世)에서 얻는 공덕이다. 여기서 다섯 경지[五地]라 한 것은 근본 사선의 경지와 욕계를 말한 것이다. 이것은 다만 인연을 표현하여 말한 것이며 이름에 따라 바꾸어 표현할 수도 있다. 그런 까닭에 말하는 도리가 여기서 일어나는 것이며, 그 가운데 거칠고 미세한 마음의 작용이 있는 곳[覺觀]에서는 이것을 표현하는 문구에 막힘없는 말재주[辭無礙辯]라고 말하게 되며 이 사무애변은 욕계와 범세(梵世)에서 얻게 되는 공덕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말과의 인연이기 때문이다.
‘두 가지 무애변은 구지에 의지한다’고 한 것에서 ‘두 가지 무애변’이라고 한 것은 내용에 막힘없는 말재주[義無礙辯]와 쉽게 풀이해서 술술 말하는 데 막힘없는 말재주[樂說無礙辯] 등 두 가지 말재주를 말하나니, 욕계와 근본 사선(根本四禪)과 네 가지 무색계의 선정[無色定]에서 얻어지는 공덕이니, 이는 미래선ㆍ중간선ㆍ근본 초선에 속한다.
【문】어떻게 이 정수(正受)를 얻게 됩니까?
028_0339_c_21L二地法辭辯者法辯梵世此五地根本四禪及欲界但名緣言從名轉是故起語言道覺觀處說辭辯欲界及梵世何以故言語緣故二辯依九地者義辯樂說欲界四禪中及四無色定未來閒禪根本初禪攝問曰云何得此正

【답】욕계를 벗어나 새로운 생명을 받고도
정선(淨禪)에서 얻으며
더럽게 오염된 경우와 물러나 다른 경지에 태어나서도
무루선(無漏禪)만이 오직 욕계를 벗어나게 된다.
028_0340_a_05L答曰
離欲及受生
而得於淨禪
穢污退及生
無漏唯離欲

‘욕계를 떠나 다른 생을 받아도 정선에서 얻으며’라고 한 것은 정선(淨禪)ㆍ초선(初禪)의 두 때에 얻는 공덕을 말한 것이다. 욕계를 벗어났을 때 얻는 경우와 높은 경지에 올라가 욕계에서는 사라지고 범천의 세계에 태어났을 때는 그 경지의 허물을 버리게 된다. 이와 같이 모든 경지에서 높은 경지에 올라갈 때마다 그 앞의 경지의 허물은 버리게 된다.
‘더럽게 오염된 경우와 물러나 다른 경지에 태어나서도’라고 한 것은 미선(味禪)과 서로 호응하는 선정을 말한 것이며, 높은 경지에서 물러나서 아랫경지를 얻게 되는 경우를 말한 것이다. 예를 든다면 혹 제2선에서 만약 욕계의 번뇌가 마음을 얽매고 있거나 또는 범세(梵世:初禪)의 번뇌가 마음을 얽어맨다면 이 사람은 이선(二禪)에서 물러나게 되고 그때에는 미선과 상응하는 초선이 생겨서 얻는 것은 높은 경지에서 사라져 욕계나 범세에 태어나는 사람과 같아진다. 그때에는 미선에 상응하는 경지의 초선을 얻게 되는데 모든 경우가 다 이와같다.
028_0340_a_07L離欲及受生而得於淨禪者淨初禪二時得離欲時得及上地沒生梵世彼地過捨如是一切穢污退及生者味相應禪退上得下或第二禪中若欲界纏若梵世纏退爾時得味相應初禪生得者如上地沒生欲界及梵爾時得味相應初禪如是一切
‘무루선만이 오직 욕계를 벗어난다’고 한 것은 무루선은 욕망을 벗어나야 얻나니, 성인이 욕계의 욕망에서 벗어났을 때 무루의 초선을 얻게 되는 것을 말한 것이다. 이 경지는 예전에는 미처 얻지 못한 경지를 얻은 것이기 때문에 얻었다고 하는 것이며 모든 경지를 얻게 되는 경우도 모두 이와 같다.
【문】이 공덕이 어떻게 번뇌를 제거할 수 있다고 하십니까?
028_0340_a_14L漏唯離欲者無漏禪離欲得謂聖人離欲界欲彼得無漏初禪昔所未得故得如是一切問曰此功德何者能除煩惱

【답】
무루선이 번뇌를 제거함은
정수(正受)로 들어가는 중간이며
모든 선정의 중간에서
사근과 서로 호응한다.
028_0340_a_18L答曰
無漏除煩惱
正受中閒者
一切定中間
相應於捨根

‘무루선이 번뇌를 제거한다’고 한 것은 무루의 선정에서는 무루지(無漏智)로 번뇌를 제거하는 것이지, 세속의 지혜로 제거하는 것이 아님을 말한 것이다.
【문】왜 세속의 지혜로는 번뇌를 끊지 못합니까?
【답】세속에서는 번뇌나 지혜가 다 같이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세속에 공통되는 번뇌는 똑같은 하나의 속박이다. 그런 까닭에 그 자체의 경지에 있는 번뇌를 끊을 수 없다. 마치 사람이 반대로 다른 사람에게 묶여 있으면 자기 힘으로 풀 수 없는 것과 같다. 상대방이 와서 줄을 풀어 주어야 그 가운데서 살아나게 되는 것이다.
028_0340_a_20L無漏除煩惱者無漏禪無色除煩惱非世俗問曰何故世俗不斷煩惱同一係縛故世俗共煩惱一縛故自地煩惱不能斷如人被反縛不能自解若彼對治及斷中生
028_0340_b_02L【문】모든 세속의 지혜로는 번뇌를 끊을 수 없습니까?
【답】세속의 지혜로 번뇌를 끊을 수 있는 경우도 있다.
【문】어떤 것이 그러한 경우입니까?
【답】정수(正受)의 중간에 있는 경우이다. 말하자면 미래선(未來禪)의 단계에서 아직 근본선을 얻지 못한 상태에서 만약 방편을 만들어 아랫경지의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그것은 초선(初禪)으로 가는 미래선이며 이 경우는 유루와 무루가 반반이고, 그밖의 미래선은 오로지 유루에 속한다. 근본 사선(根本四禪은 무색(無色)에서 정수(正受)에 들어 있을 때에 해당된다. 그런 까닭에 세속의 지혜로는 번뇌를 끊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028_0340_b_02L問曰切世俗不能斷煩惱耶答曰有世俗能斷煩惱問曰何者是答曰正受中閒者謂未來禪猶未得根本禪若作方便得離下地欲彼初禪未來有漏無漏餘未來一向有漏爲根本禪無色正受是故說世俗不斷煩惱
【문】이에 가까운 선정(禪定)은 어떤 곳입니까?
【답】모든 정수로 가는 중간 지점의 선정은 사근(捨根)과 서로 호응한다. 자기가 구하는 경지를 아직 얻지 못한 까닭에 희근(喜根)은 생기지 않았다.
【문】신족통(神足洞)의 경계에서 얻은 지혜로 신통을 증득[證]하는 것에 관해서는 비록 설명하셨다고 하지만 아직 몇 가지로 변화하는 마음이 있는지는 말씀하시지 아니하였습니다. 그것을 지금 곧 설명하여 주십시오.
【답】열네 가지의 변화하는 마음이 있다. 즉 욕계에서 초선의 과보를 얻는 마음, 초선의 경지에서 얻는 초선의 과보의 마음, 욕계에서 얻는 이선(二禪)의 과보의 마음, 초선의 경지에서 얻는 이선의 과보의 마음, 이선의 경지에서 얻는 이선의 과보의 마음과 이렇게 제4선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이와 같아서 모두 열네 가지로 변화한다.
【문】그것은 누가 성취합니까?
028_0340_b_08L問曰此近禪何處答曰一切定中閒相應於捨根一切正受中捨根相應未得所求故不生喜問曰雖說神足境界智證神通未說幾種變化心今當說答曰十四欲界初禪果初禪地初禪欲界二禪果初禪地二禪果二禪地二禪果乃至第四禪亦如是問曰彼誰成就

【답】
아래의 경지에서 변화하는 마음이며
저 종자(種子)의 과보를 성취한다.
그 인식 따라 상응하면
그는 높은 경지를 성취하리라.
028_0340_b_16L答曰
下地變化心
成就彼種果
隨彼識相應
彼上地成就

‘아래의 경지에서 변화하는 마음이며 저 종류의 과보를 성취한다’고 한 것은 만약 어떤 사람이 선정을 성취했다면 이 사람이 성취한 것은 그 과보가 아랫경지의 변화된 마음이란 뜻이다. 가령 초선의 경지를 얻었다면 이 초선의 경지는 욕계에서 얻은 초선의 과보이다. 이와 같이 모든 경지를 성취하였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문】그대는 먼저 말씀하기를 제2선 등 높은 경지에서는 오식(五識)을 지닌 몸은 없어진다고 하셨는데 만약 높은 경지에 태어난 사람이 사물을 보고 소리를 듣고자 할 때는 어떻게 보고 듣습니까?
【답】범천(梵天) 세계의 인식작용이 앞에 나타난다.
028_0340_b_18L下地變化心成就彼種果者若人成就禪是人成就彼果下地變化心得初禪是初禪地欲界中初禪果成如是一切應當知問曰汝先說第二禪等無五識身若生於上若欲見彼云何見聞答曰梵世識現前
028_0340_c_02L【문】왜 높은 경지에는 이 인식작용이 없습니까?
【답】각지(覺支)ㆍ관지(觀支)가 없기 때문이다.
【문】그는 어느 때 그것을 성취합니까?
【답】그때 그때의 인식작용에 따라 거기에 상응하는 높은 경지가 성취되는 것이며, 마침내는 그의 인식작용에 상응하는 경지가 그때에 성취되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 혹 눈의 인식작용이나 혹은 귀의 인식작용이나 혹은 몸의 인식작용이나 그때 앞에 나타나는 인식작용에 따라 그때 그 경지가 성취되는 것이며, 이 인식작용이 사라질 때는 버린다[捨]라고 표현한다. 왜 그런가? 그것은 육근에 매여있기 때문이다.
028_0340_b_24L何故上地無此識答曰無覺觀故問曰彼幾時成就答曰隨彼識相應彼上地成就乃至彼識相應爾時成或眼識或耳識或身識隨爾時現在前爾時成就此識滅時名捨何以係屬根故

8. 수다라품(修多羅品)①
028_0340_c_07L修多羅品第八

모든 지혜 지니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가장 미세한 내용, 그가 남긴 일부분을 나는 지금 곧 설명하겠다.
028_0340_c_08L一切智口所說最深微細義此餘我今當說

모든 지혜 지니신 분께서 말씀하신
매우 깊고 미세한 내용
내 지금 그 일부분의
수다라를 말하노니 자세히 들어라.
028_0340_c_10L一切智口說
甚深微細義
我今說少分
修多羅諦聽

【문】부처님께서 설법하신 삼계(三界)는 어떤 것입니까?
028_0340_c_12L問曰如佛說三界彼何者是

【답】
욕계에 열 곳의 거처가 있고
색계에는 열일곱 곳이 있으며
무색계에는 네 곳이 있으니
이들은 결정코 오직 삼유[有]의 경지라네.
028_0340_c_13L答曰
欲界十居處
色界說十七
無色界有四
決定唯彼有

‘욕계에 열 곳이 있다’고 한 것은 지옥계ㆍ축생계ㆍ아귀ㆍ인간 세계 및 여섯 욕계천의 종류를 열 곳의 거처라고 하였다. 알지어다. 이것은 욕계를 말한 것이며 이곳 중생들은 욕망의 생각이 있어 돌고 돈다. 만약 이곳에서 모든 조건이 구족되면 저 모든 애증(愛憎)과 욕망에 상응하게 된다. 그런 까닭에 이곳을 욕계라고 말하는 것이다.
028_0340_c_15L欲界十居處者謂地獄畜生餓鬼六欲界天種類此十居處當知說欲此衆生有欲想轉若此處具足彼一切愛欲相應是故說欲界
‘색계에 열일곱 곳이 있다’고 한 것은 범신천(梵身天), 범부루천(梵富樓天)ㆍ소광천(少光天)ㆍ무량광천(無量光天)ㆍ광요천(光曜天)ㆍ소정천(少淨天)ㆍ무량정천(無量淨天)ㆍ변정천(遍淨天)ㆍ무음천(無蔭天)ㆍ복생천(福生天)ㆍ대과천(大果天)ㆍ무상중생천(無想衆生天)ㆍ불광천(不廣天)ㆍ불열천(不熱天)ㆍ선견천(善見天)ㆍ선현천(善現天)ㆍ색구경천(色究竟天) 등 이 열일곱 곳의 거처(居處)를 색계라 말한다. 이곳에서는 욕망의 생각이 돌고 돌지 아니한다. 그곳은 지극히 큰 색이며 남자ㆍ여자의 모습이 없다. 그런 까닭에 색계, 즉 색의 세계라고 말하는 것이다.
028_0340_c_19L色界說十七者梵身梵富樓少光無量光光曜少淨無量淨遍淨無蔭福生大果無想衆生不廣不熱善見善現色究竟此十七居處說色界此居處欲想不轉彼極大色非男女想是故說色界
028_0341_a_02L‘무색계에 네 곳이 있다’고 한 것은 무색계에도 네 곳의 거처가 있으니, 즉 무변허공처(無邊虛空處:空處)ㆍ무변식처(無邊識處)ㆍ무소유처(無★有處)ㆍ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네 곳을 말한다. 이 거처 가운데서는 색은 생기지 아니한다. 왜 그런가? 색계와 욕계를 벗어났기 때문이며 또한 차례로 욕망과 색이 소멸하기 때문이다. 만약 무색계에서도 색욕이 생긴다면 곧 차례로 소멸하는 현상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차례로 소멸하는 현상이 있다. 만약 그것이 없다고 하면 마땅히 색계에서도 욕망의 허물이 생겨야 할 것이다. 그런 까닭에 무색계에서는 색이 생기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이곳을 무색계라고 한다.
028_0341_a_02L無色界有四者無色界有四居處無邊虛空處無邊識處無所有非想非非想處此居處中色不生何以故離色欲故又次第滅故若無色中生色者便無次第滅然有次第滅;若無者應色中生欲過是故無色中不生色是故說無色
【문】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삼유(三有)란 욕유(欲有)ㆍ색유(色有)ㆍ무색유(無色有)를 말씀하신 것인데 이것은 어떤 것입니까?
【답】결정코 오직 저 삼유이다. 앞에서 설명한 계(界)가 곧 유(有)이다.
【문】세존의 말씀과 같이 칠식(七識)이 머문다고 하셨는데 그것은 어떤 것입니까?
028_0341_a_08L問曰如佛說三有欲有色有無色有此云何答曰決定唯彼有前所說界此卽是有如世尊說七識住彼何者是

【답】
좋은 세계[善趣]는
욕계와 색계에 세 곳이 있고
무색계에도 세 곳이 있다.
이곳이 인식작용이 머무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028_0341_a_11L答曰
善趣是欲界
及色界三地
無色亦三地
當知爲識住

욕계에서 좋은 세계의 수효에 들어가는 곳은 인간 세계와 하늘 세계이다. 색계에서 앞 쪽의 세 경지[第一禪天ㆍ第二禪天ㆍ第三禪天]와 무색계의 앞 쪽 세 경지[無邊虛空處ㆍ無邊識處ㆍ無所有處], 이 일곱 곳이 인식 작용이 머무는 곳이다.
【문】어찌하여 삼악도(三惡道:지옥ㆍ축생ㆍ아귀)와 사선천(四禪天)ㆍ유정천(有頂天)은 인식작용이 머무는 곳이라 말하지 아니합니까?
【답】가령 어떤 경지[地]를 말할 때 실상을 보고 번뇌망상을 끊는[見斷] 경우가 있고, 도를 닦아서 번뇌망상을 끊는[修斷] 경우가 있다. 여기서 끊지 못하면 인식작용이 생기며 그것을 인식이 머무는 경지라고 말하는 것이다. 삼악취(三惡趣)의 경우 그 가운데서는 끊어지지 아니하는 일은 없다. 또 제4선 가운데 무상중생천(無想衆生天)과 정거천(淨居天)의 경우는 보고 끊는[見斷] 일이 없다. 그런 까닭에 제4선은 식주(識住)에 포함되지 아니한다.
028_0341_a_13L欲界善趣數謂人天;色界前三地色界前三地此七地說識住處問曰何故三惡道第四禪有頂不說識住答曰若地爲見斷修斷若不斷生彼說識住三惡趣中無不斷事四禪中無想衆生及淨居天無見斷是故第四禪不攝
또 유정천(有頂天)은 오로지 유루(有漏)의 세계이다. 만약 여기서 인식작용이 머물기를 즐긴다면 그곳도 인식작용이 머무는 곳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삼악도에서는 인식작용이 머물기를 즐기지 아니한다. 왜 그런가? 고통에 핍박당하기 때문이다. 정거천(淨居天)은 열반으로 향하는 길목인 까닭에 인식작용이 머물기를 즐기지 아니하며 무상중생천(無想衆生天)은 오로지 무심(無心)의 세계이다. 그런 까닭에 제4선천은 인식이 머무는 곳에 속하지 아니한다. 또 유정천(有頂天)은 행(行)이 민첩하고 날카롭지 못하다. 그런 까닭에 그곳도 역시 인식이 머무는 곳에는 포함되지 아니한다.
028_0341_a_20L有頂一向有漏若識樂住說識住三惡道中識不樂何以故苦逼迫故淨居天向涅槃識不樂住無想衆生亦一向無心是故第四禪不攝有頂行不捷利故彼亦不攝
028_0341_b_02L세 종류의 중생이 있다. 즉 경계를 즐기는 중생들이 있고, 즐거움을 즐기는 중생들이 있으며, 상상을 즐기는 중생들이 있다. 이 가운데 경계를 즐기는 중생들은 인간 세계와 욕계의 하늘 세계에 사는 중생들이며 즐거움을 즐기는 중생들이란 초선(初禪)에서 삼선(三禪)까지 세 곳 선정의 경계에 사는 중생들이며, 상상을 즐기는 중생들이란 세 곳의 무색계에 사는 중생들이다. 그런 까닭에 이들은 인식작용이 머무는 곳이라 말한다.
【문】아홉 곳의 중생의 거처라 하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028_0341_b_02L三種衆生或樂境界樂樂樂想彼中樂境界衆生人及欲界天樂樂三禪地樂想三無色是故彼說識住問曰九衆生居云何

【답】
유정천(有頂天)과 무상천(無想天)
이곳도 중생의 거처라 한다.
네 종류의 유루의 음이
인식이 머무는 곳임을 알아야 한다.
028_0341_b_05L答曰
有頂及無想
是說衆生居
四種有漏陰
當知識住處

‘유정천과 무상천 이곳도 중생의 거처라 한다’고 한 것은 앞에서 설명한 일곱 곳의 인식작용이 머무는 곳 이외에도 무상천과 유정천은 이를 중생이 사는 곳이라 말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아홉 곳의 중생들이 사는 곳이라고 한다.
【문】왜 악도와 무상중생천(無想衆生天) 외에 제4선천은 중생들이 사는 곳[衆生居]이라 말하지 아니합니까?
【답】어느 곳에 즐겨 머물면서 떠나려 하지 아니하는가에 따라 그곳을 중생들이 사는 곳이라 부른다. 악도에는 이 두 가지 조건에 해당되는 곳이 없다. 또 광과천(廣果天)에는 비록 즐겨 머물고자 하지만, 또한 즐겨 떠나고 싶어하기도 한다.
028_0341_b_07L有頂及無想是說衆生居者前說七識住及無想天有頂此說九衆生居問曰何故惡道無想衆生外第四禪不說衆生居耶答曰隨何處樂住不欲去彼處名衆生居惡道中無此二廣果中雖欲樂住亦欲樂去
【문】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네 가지 인식이 머무는 곳[四識住]이라고 한 저곳은 어떤 곳입니까?
【답】네 가지의 유루의 음이 마땅히 인식이 머무는 곳임을 알아야 한다. 유루(有漏)의 세계에서 색(色)ㆍ수(受)ㆍ상(想)ㆍ행(行)의 음을 인식작용이 머무는 곳이라고 말한다. 생겨서 머무는 인식작용을 모두 취하여 그것을 집착하여 길러내기 때문에 식주(識住)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무루(無漏)의 세계는 식(識)이 머무는 곳이 아니다. 그곳에서는 유(有)를 허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곳도 역시 취한 것이 아닌 뒤섞여 합쳐진 인식이 머무는 곳이다.
【문】무슨 까닭으로 인식이 머무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까?
【답】그곳에서는 원인과 이유가 성립되지 아니한다. 마치 왕도(王道)라 할 때 왕(王)은 도(道)가 아닌 것과 같다. 머무는 것이 없는 부분에서 함께 생겨난 인식작용을 머무는 곳[住處]이라고 표현한다. 세 가지가 섞여 합쳐진 것을 주처(住處)라 부르는데 이 인식작용은 그런 것이 아니다.
028_0341_b_13L問曰佛說四識住彼云何答曰四種有漏陰當知識住處有漏色是名說識住取俱識生住執著長養名識住是故無漏非識住彼壞有故彼亦非取和合識住處問曰何故識非識住處答曰彼因由不成如王道王非是道無住分俱生識名住處和合名住處此識非如是
028_0341_c_02L【문】다른 인식작용이 눈앞에 나타나는 인연은 없습니까?
【답】스스로 화합하여 생기지 않기 때문에 저것도 저것을 성취할 수 없다. 이 경우는 중생의 수효에 들어가기도 하고 또한 중생의 수효에 들어가지 않기도 한다.
【문】어찌하여 외부의 인식작용이 머무는 곳에서 일이 지어집니까?
【답】뒤섞여 함께 생겨나 인연에 의지하여 머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허물이 없다. 그도 역시 인연으로 그곳에 머물지만 자기 몫의 경지의 한계 안에 있는 것이지, 다른 사람 몫의 경지의 한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문】세존의 말씀과 같이 열두 가지 인연의 연기(緣起)에는 어떤 모습이 있습니까?
028_0341_b_21L問曰無有他識現前緣耶答曰自和合不生故彼亦不成就彼亦衆生數非衆生數問曰云何外識住處事作答曰和合俱生依緣住多故無過彼亦緣住彼自分地界非他分地界問曰如世尊說十二緣起彼有何相

【답】
모든 번뇌와 업보와
존재하는 일들이 차례로 생기니
알지어다. 여기에는 가지[支] 있으며
모든 중생들에게 이 인연 생긴다.
028_0341_c_04L答曰
諸煩惱及業
有事次第生
當知是有支
衆生一切生

무명(無明)ㆍ애착ㆍ취하려는 마음, 이 세 가지 인연은 번뇌에 속한다. 행(行)과 유(有)는 곧 업(業)에 속하고, 나머지 일곱 가지는 일[事]에 속하는 인연이다. 이와 같은 열두 가지 인연을 번뇌(煩惱)ㆍ업(業)ㆍ사(事)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 인연과 그 인연이 생기는 과정은 차례로 일어나기 때문에 이것을 연기(緣起)의 가지[支]라고 설명한다. 그 가운데 번뇌의 인연은 일에 근거를 두게 되고 번뇌는 업을 짓게 되며 업은 일을 만들게 된다. 이와 같은 관계를 연기(緣起)라 한다.
028_0341_c_06L無明取是煩惱行及有是業餘支是事如是此煩惱業事彼彼生中次第起故說緣起支彼中煩惱依事惱作業業作事如是

저 모든 부분이 건립되면
중생들이 생(生)을 받았다고 한다.
과거와 미래의 중간 인연은
여덟 가지 인연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028_0341_c_10L彼諸分建立
謂衆生受生
過去及未來
中閒當知八

‘저 모든 부분이 건립되면 중생들이 생을 받았다고 한다’는 것은 여러 부분의 차별로 십이지(十二支)의 인연을 설명한 것이다.
【문】그 내용은 어떤 것입니까?
【답】과거와 미래, 그리고 그 중간에 여덟 가지가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그 가운데 무명(無明)이란 과거의 번뇌에 속하고 행(行)은 과거의 업(業)에 속한다. 식(識)은 상속되는 마음과 거기에 수반하는 마음이다. 명색(名色)이라 하는 것은 생명을 부여받은 다음 이어 가며 굴러 소멸하지는 않았고 아직 생겨나지 아니한 네 가지의 색근(色根)에 육입(六入)이 갖추어지지 아니한 상태를 명색이라고 부른다.
028_0341_c_12L彼諸分建立謂衆生受生者此分差別說十二支問曰此云何答曰過去及未來中閒當知八於中無明者去煩惱行者過去業識者相續心及眷屬名色者已受生相續連縛不滅未生四種色根六入未具是名名色
육입이라 하는 것은 이미 네 가지의 색근이 생긴 뒤에도 아직 감촉작용이 의지하지 못한 상태를 육입이라 부른다.
촉(觸)이라 하는 것은 이 모든 근기(根器)가 이미 능히 감촉작용을 위한 근거가 될 수 있으나, 아직도 사물을 분별해서 괴로움과 즐거움을 구별하지 못하고, 날카롭고 쇠잔한 상태를 분별할 수 없는 시기를 촉이라고 부른다.
수(受)라는 것은 괴롭고 즐거운 것을 분별할 수 있고 날카롭고 무딘 원인을 분별할 수 있어서 그 차별을 알고 음식을 분별할 수 있으며 사랑하지만 음욕을 일으키지 아니하는 것을 수라고 한다.
028_0341_c_18L六入者已生四種色根未能爲觸作所依是時名六入觸者此諸根已能爲觸作所依未能分別苦樂不能分別利衰是時名觸受者能分別苦樂利衰因能知差別食分別愛不起婬是時名受
028_0342_a_02L애(愛)라는 것은 욕망이 갖추어진 가운데 사랑하고 구하여 욕구하지만 구할 수는 없고 분별하는 능력은 있는 때를 애라고 한다.
취(取)라고 하는 것은 능동적으로 취하되 분별이 있는 것을 말한다.
유(有)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상대방의 경계에 대하여 나아갈 곳을 구하되 속하고 빨라서 널리 모든 중생의 세계에 생겨나 다음 세상을 맞이하게 될 때를 유라고 한다.
생(生)이라 하는 것은 그가 죽어 차례로 마디가 이어지는 속박을 받게 될 때를 생이라고 한다.
노사(老死)라는 것은 그 다음 마지막으로 받는 명색(名色)ㆍ수(受) 등을 노사(老死)라고 부른다.
【문】부처님께서는 육계(六界)를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어떤 것입니까?
028_0341_c_24L愛者於欲具中愛求欲不能求有分別是時名愛取者能取有分別有者此於彼境界求趣向速廣生諸有趣當來生是時名有彼死次第相續連節縛是時名生老死者次後名色受等是名老死世尊說六界此云何

【답】
이른바 네 가지 대종[四大種]과
모든 유루(有漏)의 식(識)과
또한 색계의 중간에 나타나는 것
이 세계를 생명의 근본이라 말한다.
028_0342_a_07L答曰
所謂四大種
及諸有漏識
亦色中閒見
是界說生本

‘이른바 네 가지 대종과 모든 유루의 식과 색계 중간에 나타나는 것’이라고 한 것은 사대(四大)와 오식(五識)을 지닌 몸에 번뇌의 침입이 있는[有漏] 의식(意識)을 말한다. 또한 가령 색계로 통하는 구멍은 눈으로 취하는 허공의 작용에 속하는 것이다. 이것을 육계(六界)라고 말한다.
【문】왜 십팔계(十八界) 가운데서 따로 육계를 말씀하신 것입니까?
【답】이 여섯 경계가 생(生)의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그 법이 생의 근본이 되나니, 이 가운데서 장부상(丈夫想:世界創造를 생각하는 일)은 지대(地大)가 있는 곳에서 성립된다. 수대(水大)는 사물에 섞여 만물을 윤택하게 적셔 주고, 화대(火大)는 뜨거운 열로 썩어 냄새 나는 것을 제거하며, 풍대(風大)는 사물을 밀고 가서 허공의 중간에 구멍을 뚫어 그 구멍으로 음식이 들어가고 나오게 한다. 이 사대와 서로 호응하는 인식작용의 힘으로 건립된 몸을 장부상(丈夫想)이라고 표현한다.
028_0342_a_09L所謂四大種及諸有漏識亦色中閒見者四大及五識身有漏意識若色孔眼所取虛空數此說六界問曰故十八界中別說六界耶答曰是界說生本彼法生本此中丈夫想地所成立水和合潤漬火熟除臭爛風界空中閒孔飮食入出相應識力建得名丈夫想
그런 까닭에 이것을 세계를 생각하는 일[界想]이라고 부른다. 왜 그런가? 이것은 생명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말씀과 같이 여섯 세계의 인연으로 인하여 어머니의 탯속에 들어간다. 경에 표현된 문구가 이와 같다. 저 사대도 또한 하나의 생명이다. 그런 까닭에 이것을 대생(大生)이라고 표현한다. 마치 대중이 생겨나는 것과 같이 그 요소들도 생겨나는 것이다. 이 가운데서 지대(地大)는 단단한 모습을 지니고 있고 수대(水大)는 축축한 모습을 지니고 있으며, 화대(火大)는 뜨거운 모습을 지니고 있고 풍대(風大)는 가볍게 올라가는 모습을 지니고 있다. 색의 가장자리에서 받는 색의 모습을 허공계(虛空界)라 부른다. 색이란 것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일이다. 식(識)이라 하는 것은 모습을 환하게 아는 것이다.
【문】성제(聖諦)에는 어떤 모습이 있습니까?
028_0342_a_17L是故此名界想何以是生性故如世尊說因六界因緣入母腹胎修多羅句如是彼大亦生是故名大生如大衆生如大生於此中地堅相水濕相火熱相風輕擧相色邊受色相名虛空界色者是與思異事也識者了知相也問曰聖諦有何相
028_0342_b_02L
【답】
결과가 비슷한 모든 행에
번뇌가 있으면 그것이 고제(苦諦)이다.
원인이 비슷한 것이 집제(集諦)이며
멸제(滅諦)는 모든 고통이 다한 것이다.
028_0342_a_24L答曰
果相似諸行
有漏是說苦
因相似是集
滅諦衆苦盡

‘결과가 비슷한 모든 행에 번뇌가 있으면 이는 고제라 한다’는 것은 모든 유루(有漏)의 행동은 원인을 따라 생겨나서 핍박받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지닌다. 그런 까닭에 그것을 고제라고 말한다.
또한 모든 유루의 행동은 그 원인이 비슷하다. 그런 까닭에 이것을 집제(集諦)라 말한다. 마치 같은 벼[稻]의 씨앗이 앞뒤로 싹이 돋아 서로 바라보는 것과 같기 때문에 과(果)다, 인(因)이다라고 설명한다. 이와 같은 유루(有漏)의 행은 과거에 이미 생긴 것과 미래에 곧 생겨날 것을 비추어 보게 되기 때문에 또한 고제라고도 하고 집제라고도 한다.
‘멸제는 모든 고통이 다한 것이다’라고 한 것은 모든 유루의 행은 마지막에 가서는 결국 모두 소멸된다. 그런 까닭에 이것을 멸제라고 말하는 것이다.
028_0342_b_03L果相似諸行有漏是說苦者一切有漏行從因生逼惱相是故說苦因相似是集者一切有漏行他因相似故彼說苦集如一稻種子前後相望亦說果亦說因如是有漏行觀已生當生故亦說苦說集滅諦衆苦盡一切有漏行究竟盡滅是說滅諦

무루(無漏)의 모든 행을
도제(道諦)라고 말한다.
거기에 두 가지 이름 있으니
거칠고 큰 진리부터 차례로 순서 따라 나타냈다.
028_0342_b_10L若無漏諸行
是說爲道諦
彼二種名故
從麤次第見

‘무루의 모든 행을 도제라고 말한다’고 한 것은 모든 무루의 행을 도제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고통이 소멸되었기 때문에 도제라고 말하는 것이다.
【문】왜 그것을 진리[諦]라고 표현합니까?
【답】거기에는 두 종류의 이름이 있기 때문이요, 또 거기에는 두 종류의 일이 있기 때문에 진리라고 표현한 것이다. 즉 스스로의 모습이 허망하지 아니하고 또한 대상 물질을 보고도 전도망상(顚倒妄想)이 생기지 아니하여 마음으로 깨닫게 되기 때문에 진리라고 한다.
【문】왜 허공과 비수멸(非數滅:非擇滅)은 진리에 속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답】원인과 결과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고통이 다한 것을 살피고 비추어 보는 일이기 때문에 진리가 아니다. 성제(聖諦)를 관찰하여 아는 것은 그것이 고통도 고통의 원인도 고통을 벗어나는 방편도 아니다. 다만 고통이 다하게 하고자 하는 까닭에 사제를 관찰하는 것이다. 비유하면 병의 원인에 따라 병자에게 약을 주면 병이 낫는 것과 같다. 사제를 관찰한다는 것은 병을 관찰하는 일과 같다.
028_0342_b_12L若無漏諸行是說爲道諦者一切無漏行說道諦彼一切苦滅故說道何故說名諦彼二種名故二種事故名諦謂自相不虛及見彼生不顚倒心覺何故虛空非數滅非諦答曰非因果故此觀察苦盡故察聖諦;彼非苦苦因非離苦方便欲盡苦故觀察譬如病因病藥病差如觀察病
028_0342_c_02L【문】성제(聖諦)에 어떤 내용이 있습니까?
【답】성(聖)이란 실상을 그대로 깨닫고 나서 다른 사람을 위하여 뚜렷하게 밝혀서 보여 주기 때문에 성인의 진리[聖諦]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가운데 핍박당하는 모습은 고제(苦諦)이며, 고통이 생겨나는 모습은 집제이며 마침내 적멸하고 고요한 모습은 멸제이다. 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모습이 도제에 해당한다.
【문】가령 어떤 일이든 원인이 있고 나서 결과가 있게 마련인데 왜 부처님께서는 사제를 설법하실 때에 결과부터 말씀하신 후에 그 원인을 설명하셨습니까?
【답】크고 굵은 것부터 차례로 나타내신 것이다. 이와 같이 한 것은 다만 끊임없는 고통 등만 보이게 되는 까닭에 부처님께서 먼저 결과를 말씀하신 것이다. 수행하는 사람이 먼저 끊임없는 고통 등을 알고 난 다음 그 고통의 원인을 추구하여야 한다. 그러기에 먼저 멸제(滅諦)부터 말씀하시고 그 후에 도제를 말씀하신 것이다.
028_0342_b_21L問曰聖諦有何義答曰者如實覺已爲他顯示故名聖諦中逼迫相是苦生相是集寂靜相是出離相是道問曰如見因有果故佛先說果後說因耶答曰從麤次第見如是但見無閒等故世尊前說行者先得苦無閒等後苦因先滅後道
왜 그런가? 먼저 결과를 알고 난 뒤에 그 원인을 끊는 도를 닦는 지혜[修智]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때 수행하는 사람은 고통의 자성이 끊임없다고 하는 데서 이를 인식하게 되면 그때는 그 고통의 원인을 끊기 위하여 결정적인 지혜가 생긴다. 이 원인이란 모든 허물과 근심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여 저 수행하는 사람은 먼저 그 고통이 소멸되는 모습을 보게 되고 그 때에는 그 소멸을 증명하기 위하여 방편을 닦아 결정적인 지혜가 생겨나게 된다. 그런 까닭에 먼저 결과를 말씀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먼저 크고 굵직한 현상부터 본 다음에 미세한 원인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고제(苦諦)는 크고 굵직한 현상에 속하고 집제는 미세한 현상에 속한다. 시설(施設)해 보인 현실을 추구하고 그것을 믿는 까닭에 이것이 진리인 것이다. 또한 멸제(滅諦)는 크고 굵직한 현상에 속하고 도제(道諦)는 미세한 진리에 속한다. 그런 까닭에 먼저 멸제를 말씀하시고 뒤에 도제를 말씀하신 것이다.
028_0342_c_05L何以故先知果已後斷因修智生故彼行者於苦自性無閒已彼時爲斷苦因故決定智生是過患因故如是彼行者先見滅相彼時爲欲證故修方便生決定智是故先說果如是先見麤後見細故苦麤集細設推求故信故滅麤道細是故先說滅後說道
경[修多羅]의 설명에 의하면, 비구가 마땅히 멸제를 설법하여야 하는 것은 멸제로 나아가기 위해서 도제를 설법함이 이와 같다. 그런 까닭에 먼저 멸제를 구하고 나중에 도제를 닦는 것이다. 이것을 비유하면 마치 성(城)으로 가려고 할 때 먼저 성으로 가는 길을 찾은 다음에 성 안에 들어갈 수 있는 것과 같다. 모든 사람이 모두 멸제는 믿지만 도제는 믿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쉽게 알게 하려고 크고 굵직한 일부터 차례로 미세한 진리를 설법하신 것이다.
【문】부처님이 말씀하신 네 가지 사문과(沙門果)에는 몇 가지 일이 있습니까?
028_0342_c_12L如修多羅說比丘當爲說爲趣滅故說道如是等是故先求滅後修道如向城道先覓道已然後得入一切皆信滅而不信道是故欲易知故從麤次第說問曰世尊說四沙門果彼幾事

【답】
성과(聖果)의 일 여섯 가지 있으나
가장 뛰어난 과보는 아홉 경지에 있네.
세 번째 과는 여섯 경지에 존재하고
두 가지는 미래선(未來禪)에 근거한다.
028_0342_c_17L答曰
聖果事有六
最勝在九地
第三在六地
二種依未來

‘성과의 일이 여섯 가지 있다’고 한 것은 여섯 가지 일로서 사문과(沙門果)를 말하는 것이다. 즉 다섯 가지 무루(無漏)의 음(陰)과 수연멸(數緣滅:擇滅)이다.
【문】사문과란 무슨 뜻입니까?
【답】성인의 도를 사문이라고 말한다. 그것에 정진하여 그것을 성취하는 까닭에 사문과라고 부른다.
【문】세속의 도에도 정진하는 대장부가 있습니다. 그도 역시 사문과를 얻게 됩니까?
【답】그것은 성인의 도와는 차별이 있다.
028_0342_c_19L聖果事有六者六事說沙門果五無漏陰及數緣滅問曰沙門果何義聖道說沙門彼精進成就故名沙門果問曰世俗道亦精進丈夫得亦得沙門果答曰彼見聖道果差別
028_0343_a_02L【문】이는 무슨 과(果)이며 어떤 경지에 속합니까?
【답】가장 뛰어난 아홉 경지가 거기에 해당된다. 즉 아라한과(阿羅漢果)는 아홉 경지를 거두어들이는 과이다. 즉 미래선과 중간선ㆍ근본 사선ㆍ무색계의 세 가지 선정의 경지 등 아홉 곳의 경지가 여기에 해당한다.
‘세 번째 과는 여섯 경지에 있다’고 한 것은 아나함과(阿那含果)는 여섯 경지를 거두어들이는 과임을 말한 것인데, 무색계를 제외한 나머지 여섯 경지가 그것이다.
‘두 가지는 미래선에 의지한다’고 한 것은 수다원과와 사다함과는 미래선에 속하는 것임을 말한 것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아직도 욕계를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문】그 과보의 자취에는 어떤 모습이 있습니까?
028_0342_c_24L問曰此何果何地攝答曰最勝在九阿羅漢果九地攝未來中閒四禪三無色第三在六地阿那含果六地除無色二種依未來須陁洹斯陁含果未來攝何以故未離欲故問曰迹有何相

【답】
믿음 따라 수행하는 모든 법문은
번뇌는 없지만 근기는 둔하고
법 따라 수행하는 모든 법문은
번뇌도 없고 빠른 모습 이룬다.
028_0343_a_07L答曰
隨信行諸法
無煩惱鈍根
隨法行諸法
無煩惱速相

‘믿음 따라 수행하는 모든 법문은 번뇌는 없으나 근기는 둔하다’고 한 것은 믿음 따라 수행하는 사람은 자신의 무루법의 연한 부분에 속하는 사람으로 둔한 믿음의 수행인에 속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믿음으로 해탈하여도 역시 해탈에 속한다. 그러나 그 근기는 굳세지 못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법 따라 수행하는 모든 법문은 번뇌도 없고 빠른 모습이다’고 한 것은 법 따라 수행하는 사람은 자신이 지닌 법이 근기가 영리한 부류에 속하는 까닭에 빠른 모습이 그에게 속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견도(見到)의 경지에 이르게 되며 때를 기다리지 아니하고, 해탈의 법도 역시 거기에 속하게 됨을 알아야 한다. 왜 그런가? 그 근기가 영리하기 때문이다.
028_0343_a_09L隨信行諸法無煩惱鈍根者隨信行人自身無漏法軟分攝者當知鈍信行攝故信解脫時解脫亦攝當知軟根故隨法行諸法無煩惱速相者法行自身法利根所攝故當知速相彼攝故見到不時解脫法亦攝當知何以故利根故

저 근본 사선 중에서는
이것은 즐겁게 통과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얻은 것이 작고 어렵기 때문에
나머지는 고라고 말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028_0343_a_16L彼禪根本中
當知是樂通
小及難得故
當知餘說苦

‘저 근본 사선 가운데서는 이것을 즐겁게 통과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한 것은 근본 사선의 경우 근기가 연약하건 근기가 영리하건 즐겁게 통과한 자취임을 알아야 한다. 지관(止觀) 등으로 득도하였기 때문이며, 또한 즐겁게 수행한 것이기 때문이다.
‘얻은 것이 작고 얻기도 어렵기 때문에 나머지는 고통이라고 설명했음을 알아야 한다’고 한 것에서 나머지[餘]라고 한 것은 무루의 경지에 포함되는 도(道)를 말한 것이며 고통[苦]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 도가 적기 때문이다. 이른바 미래선(未來禪)이나 중간선(中間禪)의경우지(止)의도가적고무색정(無色定)에서는 관(觀)이 적다. 무루를 미래선에서는 얻기 어렵다. 왜 그런가? 세간선(世間禪)도 미래선으로부터 얻기 때문이며 그것을 얻는 까닭에 닦기 쉬운 선정이다.
028_0343_a_18L彼禪根本中當知是樂通者根本四禪若軟根法及利根法當知樂迹觀等得道故及樂行故小及難得故當知餘說苦者餘者無漏地攝道名以少故彼未來中閒禪止道少色中觀少無漏未來禪難得何以故世閒從未來得故得彼故易修禪
028_0343_b_02L중간선의 경우는 한 경지와 다른 한 경지의 중간에서 일어나는 마음과 마음의 작용이 제거되고 끊어진 현상이 눈앞에 나타난다. 즉 각지(覺支)의 작용이 끊어진 상태가 눈앞에 나타나면 마치 나무로 나무를 자르는 것과도 같은 모습이 된다.
무색계의 선정은 미세하여 성취하기 어렵고 오음을 전환시켜 번뇌를 끊고 사음(四陰)이 바뀌어진 것이 눈앞에 나타난다. 그 경지의 어려움이 이와 같이 얻기 어렵기 때문에 난(難)이라고 말한 것이다. 성인의 도가 아닌 고통은 그 자체의 본질은 고통이 아니며 외부에서 받는 영향과 서로 호응하는 고통이다. 이 가운데서 뛰어난 도(道)가 건립되며 열반이라는 이름의 성(城)으로 들어가는 길이 되기 때문에 적(跡)이라는 뜻으로 표현한 것이다.
【문】허물어지지 아니하는 청정[不壞淨]이란 어떤 것입니까?
028_0343_b_02L閒禪一地中閒心心數斷除現前覺斷觀現前成就如木斷木無色界微細難成就五陰轉斷四陰轉現前彼難如是難得故說難非聖道苦性非苦受相應此中建立勝道故涅槃城義故名迹義問曰不壞淨云

【답】
부처님과 성문승(聲聞乘)의 법에서는
해탈도 역시 남아 있는 인연과의
청정무구한 믿음이니
성인의 지계(持戒)를 결정법(決定法)이라 한다.
028_0343_b_09L答曰
佛及聲聞法
解脫亦餘因
淸淨無垢信
聖戒謂決定

‘부처님과 성문법에서는 해탈도 남은 인연과의 청정 무구한 믿음이다’라고 한 것은 일체종지(一切種智)로 이룬 정각(正覺)은 보리를 얻은 부처님의 지혜다. 그것은 아라한(阿羅漢)이 거둔 공덕의 불법이다. 알지어다. 그 가운데서 만약 번뇌 없는 믿음을 얻는다면 그것을 이름하여 부처님의 허물어지지 아니하는 청정함이라고 한다.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전수 받아 바른 길을 얻었다면 그것은 결정코 성문승(聲聞乘)에 속한다. 알지어다. 그 가운데서는 배울 것이 남아 있는 사람이건 더 배울 것이 없는 사람이건 그들이 얻은 것은 성문(聲聞)의 법이다. 만약 그들에게 번뇌 없는 믿음이 이루어졌다면 그것은 스님의 허물어지지 아니하는 믿음[僧不壞信]에 속한다.
028_0343_b_11L佛及聲聞法解脫亦餘因淸淨無垢信者一切種正覺智菩提佛彼阿羅漢攝功德佛法當知於彼中若無漏彼名佛不壞淨他教授得正決定聲聞當知彼中學無學得聲聞法彼無漏信彼是僧不壞信
만약 열반의 길에서 번뇌 없는 믿음을 이루어 다른 유위(有爲)의 법문 가운데서 이 법륜(法輪)을 굴릴 경우 만일 고제(苦諦)나 집제(集諦) 등에서 믿음이 이와 같이 번뇌의 침입이 없다고 한다면, 이것은 보살이 이루는 공덕에 속한다.
배울 것이 남아 있건 더 배울 것이 없는 사람이건 벽지불(淪支佛:緣覺)의 법문에서는 모든 법 가운데서 허물어지지 아니하는 믿음을 이룬다. 그들은 고제(苦諦)ㆍ집제 가운데서는 바른 믿음의 청정을 이루고, 멸제(滅諦)ㆍ도제(道諦) 가운데서는 희구(希求)하는 믿음을 이루어 번뇌의 침입 없는 지계(持戒)와 성인의 도(道)가 함께 생겨나서 네 번째의 허물어지지 아니하는 청정[不壞淨]을 이룬다.
어찌하여 허물어지지 아니한다 표현하는가? 결정적인 진리를 알고 나서 청정한 믿음을 이룬 까닭에 허물어지지 아니하는 믿음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028_0343_b_17L若於涅槃若無漏信轉餘有爲法中如苦諦集諦等信如是無漏菩薩功德學無學辟支佛法一切法中不壞信彼苦集中正信淸淨滅道中希求信無漏戒聖道俱生第四不壞淨云何名不壞知已決定淸淨信名不壞信
028_0343_c_02L【문】어디에서 허물어지지 아니하는 것을 알게 됩니까?
【답】사성제(四聖諦) 가운데서 알게 된다.
【문】어찌하여 번뇌의 침입 없는 것을 허물어지지 아니하는 믿음이라 합니까?
【답】결정적인 지혜인 까닭에 그것은 실상의 지혜이며, 이 지혜와 함께 번뇌의 침입 없는 믿음이 생긴다. 또한 결정적인 지계(持戒)도 생기는 것이다. 번뇌의 침입이 있는 믿음[有漏]이란 능히 도를 가로막고 부처님을 속이고 나무라며 믿지 아니한다. 이 경우 계율을 지키건 파계(破戒)를 하건 결과적으로 부처님을 속이고 나무라고 불법을 가로막는다. 무루(無漏)에서는 능히 불도를 가로막고 속이고 꾸짖는 일은 생기지 아니한다. 그런 까닭에 결정적으로 무루인 허물어지지 아니하는 믿음과는 차별이 있다.
【문】선정(禪定)을 닦는 데는 어떤 모습이 있습니까?
028_0343_b_23L問曰所知不壞答曰四聖諦中問曰何故無漏不壞信答曰決定故彼實智俱生無漏信及戒決定有漏信者能障欺呵不信持戒破戒呵欺障無漏不生能障欺呵是故決定無漏不壞信差別者問曰修定有何相

【답】
초선에서 만약 선(善)함이 있다면
법의 즐거움에 머무는 선정임을 알아야 한다.
생사의 지혜 얻는 것을 말하며
이것을 지견(知見)이라 부른다.
028_0343_c_06L答曰
初禪若有善
當知現法樂
謂得生死智
是說名知見

‘초선에 만일 선함이 있다면 법의 즐거움에 머무는 선정임을 알아야 한다’고 한 것은 정선(淨禪)과 무루 초선(無漏初禪)의 경지에서는 현재의 법의 즐거움에 머무는 선정을 말한 것이며, 이것을 선정을 닦아 현재의 법의 즐거움을 얻은 사람이라고 부른다.
‘생사의 지혜 얻는 것을 말하며 이것을 지견이라고 한다’고 한 것은 생사의 지혜에 달통하게 되면 이것을 선정을 닦아서 얻은 지견(知見)이라고 말한다.
028_0343_c_08L初禪若有善當知現法樂者淨及無漏初禪現法樂住是名修定得現法謂得生死智是說名知見者生死智通是說修定得知見

지혜로 분별함은
방편으로 생긴 공덕임을 알아야 한다.
금강유정의 사선(四禪)을
누진지(漏盡智)라 부른다.
028_0343_c_12L慧分別當知
方便生功德
金剛喩四禪
是名爲漏盡

‘지혜로 분별함은 방편으로 생긴 공덕임을 알아야 한다’고 한 것은 수행하는 사람이 지닌 방편으로 생긴 공덕에서부터 욕계에 존재하는 가르침ㆍ계율ㆍ듣고 생각하고 닦아서 얻은 공덕과 삼계(三界)에서 그 존재하는 곳에 따라 유위든 무루든 그 모든 공덕을 선정을 닦아 얻은 분별하는 지혜라 표현한다.
‘금강유정의 사선을 이름하여 누진지라 한다’고 한 것에서 금강유정(金剛喩定)이라 하는 것은 최후의 배울 것이 남아 있는 사람의 마음이며 그것이 그의 권속(眷屬:수반하는 작용)들과 서로 호응하여 제4선의 선정에 이르게 되면 번뇌의 침입이 다하게 되는 까닭에 이것을 선정을 닦았다[修定]라고 말한다.
028_0343_c_14L慧分別當知方便生功德者所有方便生功德乃至欲界有教戒聞思修功德三界中隨所有若有爲無漏一切說名修定得分別慧金剛喩四禪是名爲漏盡者金剛喩定者最後學心彼共眷屬相應第四禪地漏盡是說修定
028_0344_a_02L이것은 부처님이 스스로 자기의 공덕을 설하시면서 염부제주(閻浮提洲)의 나무 그림자 속에서 초선(初禪)에서 정수(正受)에 들어가서 거기에서 법의 즐거움에 머무는 경지를 보시고 열한 번 일어났던 번뇌를 청정한 천안(天眼)의 지혜로 보게 되었다고 하셨으며, 자세한 내용은 ‘부기라경(趺祈羅經)’의 설명과 같다. 그 경에서 설명하기를 “생명을 부여받아 태어나는 것이 이와 같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 말씀 등이 지혜의 분별[慧分別]을 말씀하신 것이다.
제4선의 위없이 바르고 진실한 도에 근거하여 번뇌의 침입이 다한 경지를 증험하게 된다.
【문】여의족(如意足)이란 어떠한 자성(自性)을 지니고 있습니까?
028_0343_c_21L此世尊自說已功德薩閻浮提樹影中初禪正受彼見法樂十一起煩惱淸淨天眼智見如『趺祇羅經』說彼經說知受生如是等慧差別依第四禪無上正眞道證漏盡問曰如意足何自性

【답】
선한 유위(有爲)의 모든 법은
방편으로 일으킨 법이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여의족이며
이 또한 정소(正燒)라 한다.
028_0344_a_03L答曰
善有爲諸法
方便之所起
佛說如意足
是亦說正燒

‘선한 유위의 모든 법은 방편으로 일으킨 것이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여의족’이라고 한 것은 만약 그것이 방편으로 일으킨 법문일 경우 이미 말했듯이 그것은 모두 뜻대로 되는 그릇이기 때문에 이것을 여의족(如意足)이라 부른다. 자기 마음이 자유자재로 온갖 공덕을 일으켜 생각한 대로 충족된 공덕을 성취하는 것을 여의족이라 이름한 것이다. 이 만족[足]을 구성하는 여러 가지 요소의 인연은 동일한 내용을 지니고 있다. 왜 그런가? 그것은 삼매를 뜻하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불어난 네 가지의 차별이 있으니, 가령 욕구가 불어나 생긴 삼매는 욕삼매(欲三昧)라 부르고 이와 같이 정진하는 마음이 불어나 생긴 삼매는 간택삼매(簡擇三昧)라 부른다.
028_0344_a_05L善有爲諸法方便之所起佛說如意足者若彼方便所起法已說彼一切如意器故說如意足自心自在起種種功德成就如意足名如意足一義也何者是謂三昧彼四種增上差別如欲增上生三昧名欲三如是精進心增上生名簡擇三昧
처음 욕망이 일어났기 때문에 그 욕망이 불어나게 되고 욕망이 생긴 뒤 욕망으로 구하던 것을 얻게 되었기 때문에 정진하게 되며 정진으로 선정이 불어나 정진을 일으키고 나서 그 정진을 버리지 아니하고 거기에 순응하여 취향하는 마음을 심정(心定)이라 부른다. 이것은 정진하고자 하는 마음의 도리가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여의족이 갖추어진 몸 가운데 최후의 삼매인 까닭에 이것을 의삼매(義三昧)라 부른다. 여기서 만약 남은 이 한마음이 모든 것을 성취하는 선정을 가려 선택하지 아니한다면 모든 마음 가운데서 선정이 생기기 때문에 방편의 차별이 생기고 그것이 불어나고 자라나기 때문에 다른 공덕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
028_0344_a_12L初起欲故欲增上欲生已欲所求爲故精進定增上起精進已不捨精進隨順趣向心名心定此欲精進心道理現前如意足具身中究竟故名慧三昧若不簡擇餘此一心一切成一切心中生故方便差別彼增長說餘功德
028_0344_b_02L‘이 또한 정소라고 말한다’는 것은 여기서 이와 같이 설명한 공덕을 또한 올바른 불태움[正燒]이라고도 말한다는 것이다. 도리에 의지하여 능히 번뇌를 불사를 수 있기 때문에 올바른 불태움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혹 경우에 따라서는 능히 번뇌를 끊을 수 있기 때문에 정단(正斷)이라 표현하기도 하고, 결정적으로 바른 길에 들어가기 때문에 정승(正勝)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것이 허물과 악을 버리고 공덕이 생겨 그 공덕을 지키고 보호하여 불어나고 자라나게 하여 업(業)을 채찍질하고 독려하게 되면 이것을 정진정승(精進正勝)이라 표현한다.
거기에는 네 가지 업의 차별이 있기 때문에, 한마음에서 세워진 정진이 능히 네 가지 업을 짓게 된다. 즉 현재의 번뇌는 끊을 수 있게 되고 미래의 번뇌는 생기지 아니하며 선(善)한 법에 수용되어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게 되며, 그런 까닭에 태어난 뒤에도 전생의 업을 이어 방편의 힘을 잃지 아니하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도 역시 네 가지 차별이 있다.
028_0344_a_19L彼亦說正燒此如是所說功德亦說爲正燒依道理能燒煩惱草故名正燒或以能斷煩惱故說正斷入正決定故名正勝彼捨過惡功德生守護增長策勤業名精進正彼四種業差別故一心建立精進能作四業現在煩惱得斷未來不生於善法容受生故生已相續不失方便力彼亦四種差別

거기서도 또한 염처(念處)라 말하며
또한 네 가지 성종(聖種)이라고 말한다.
그 세력이 생기는 곳을 따라
그것으로 이것의 이름을 짓는다.
028_0344_b_04L彼亦說念處
亦說四聖種
隨其勢力生
以彼名說彼

‘저것도 염처라 말하며 또한 네 가지 성종이라고 말한다’는 것은 전에 말한 공덕에서 염처(念處)를 설명한 내용은 경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즉 신념처(身念處)ㆍ수념처(受念處)ㆍ심념처(心念處)ㆍ법념처(法念處) 등 안팎이 함께하는 독자적인 모습이나 공통된 모습을 염처라고 부른다. 거기에는 네 가지 인연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며, 또한 모든 인연의 분수와 한계에 차별이 있기 때문에 신염처(心念處)는 몸에만 인연하며 다른 법은 아니다. 이와 같이 수념처(受念處)로는 수념처만을 말하며 다른 마음의 염처는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또한 심념처로는 심념처만을 말하며 다른 것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028_0344_b_06L彼亦說念處亦說四聖種彼前所說功德說念處如修多羅法內外俱自相共相是名念處彼四種緣差別故彼一切緣分齊差別故身念處身緣非餘法如是受念處說受念非餘心念處說心念處非餘法念
법념처의 경우는 두 가지 다른 법의 인연이 있다. 상음(想陰)과 행음(行陰)으로 얻는 유위(有爲)의 인연과 허물어지는 인연이 있으며 몸으로 받아들이고 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이와 같은 따위로부터 마침내 모든 법의 인연에 이르기까지가 법념처에 해당된다.
【문】성종(聖種)이란 무엇입니까?
【답】성종도 역시 이와 같다. 거기에서 말하는 공덕을 또한 성종이라 말한다. 성인은 이것을 씨앗으로 삼기 때문에 성종이라 이름한 것이다. 이 법문은 그 자체의 본질이 성인이 될 씨앗이 되므로 성종이라고 말하는 것이며, 이 씨앗 가운데서 성인이 태어나는 까닭에 성종이라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네 가지 애욕이 생기는 것을 상대적으로 치유하는 까닭에 네 가지로 구별해서 설명하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의복(衣服)으로 인해서 애착하는 마음이 생기는 등이 그것이며 더 자세한 설명은 경에서 설명한 내용과 같다.
028_0344_b_13L二種餘法緣以想陰行陰有爲緣壞緣以身受身心受如是等乃至一切法緣問曰云何聖種答曰聖種亦如是彼所說功德亦說聖種聖以此爲種故名聖種此法自性是聖種說聖種於此種中生故名聖種四種愛生對治故說四差別因衣服故愛廣說四種如修多羅
028_0344_c_02L【문】어찌하여 이 공덕을 여의족 내지는 네 가지의 정단(正斷) 등이라 합니까?
【답】그 세력을 따라 생기므로 저것으로써 저것을 설명하느니라. 즉 이 법은 선정의 힘으로 생기는 까닭에 여의족이라 표현하였고, 정진하는 힘으로 생기는 까닭에 정단(正斷)이라 말하였으며 염원이 불어나는 까닭에 염처라고 말하고, 만족을 아는 마음이 불어나고 생기기 때문에 성종이라 말한다.
이상으로 이미 보리(菩提)를 돕는 부분을 설명하여 마쳤으니, 지금부터는 이 스스로 지닌 모습이 공통되는 것을 설명하겠다.
028_0344_b_20L問曰云何以此功德爲如意足乃至四正斷等耶答曰隨彼勢力生以彼名說彼此法以定力生故名如意足精進力生說正斷念增上生故說念處知足增上生故說聖種已說助菩提分共自相今當說

청정한 믿음과 정진과 염(念)과
지혜와 희지(喜支)ㆍ낙지(樂支)
각지(覺支)ㆍ사지(捨支)와
사(思)와 계(戒)도 삼마제(三摩提)이다.
028_0344_c_03L淨信精進念
智慧及憙猗
覺分及與捨
思戒三摩提

부처님의 말씀에 따르면 삼십칠도품(三十七道品)은 보리(菩提)를 돕는 부분적인 법문이다. 그 명칭에 서른일곱 가지가 있는데 그 가운데는 일과 관련되는 것이 열 가지이며 그 가운데 믿음 등의 내용은 게송에서 결집시킨 내용과 같다. 그 가운데 믿음의 뿌리[信根]와 믿음의 힘[信力]을 여기서는 믿음이라 표현하였다. 또한 바른 단절[正斷]ㆍ정진하는 근기ㆍ정진하는 힘ㆍ정진하는 각지(覺支)ㆍ바른 정진 등을 여기서는 정진이라고 표현하였다. 또 염원하는 근기[念根]ㆍ염원하는 힘[念力]ㆍ염원하는 각지[念覺支]ㆍ바른 염원[正念] 등을 사념처(四念處)라고 부른다.
028_0344_c_05L如佛所說三十七助菩提分法彼名有三十七事有十於中信等如偈中結集彼中信根信力名信正斷精進根精進力精進覺支正精進此是精念根念力念覺支正念是名念四念處
지혜의 뿌리ㆍ지혜의 힘ㆍ법을 선택하는 각지(覺支)ㆍ바른 견해, 이러한 것들을 여기서는 혜(慧)라고 표현하였다.
또 희지(喜支)ㆍ낙지(樂支)ㆍ사지(捨支)ㆍ각지(覺支)ㆍ바른 생각ㆍ지계(持戒), 이것은 팔정도(八正道) 가운데 정어(正語)ㆍ정업(正業)ㆍ정명(正命)에 해당된다. 또한 여의족(如意足)ㆍ정근(定根)ㆍ정력(定力)ㆍ정각지(定覺支)ㆍ정정(正定) 등 팔지(八支)는 정지(定支)에 속한다.
【문】왜 이와 같이 많이 종류로 설명해야 합니까?
028_0344_c_11L慧根慧力擇法覺支正見是等名慧喜猗捨覺支正思惟戒是正語正業正命如意足定根定力定覺支正定八支是定支問曰何故如是多種說

【답】
처한 장소 방편은 한마음이며
무디고 날카로운 것도 또한 그렇다.
견도(見道)가 또한 수도(修道)라
그런 까닭에 삼십칠도품을 말하노라.
028_0344_c_15L答曰
處方便一心
軟及利亦然
見道亦修道
故說三十七

‘처한 장소[處]’라고 한 것은 직접 인연이 있는 곳이기 때문에 사념처(四念處)를 말한것이다.
‘방편(方便)’이라 한 것은 바른 방편, 즉 정단(正斷)을 말한 것이다.
‘한마음’이라 한 것은 한마음 가운데 머무는 곳을 말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것은 여의족을 말한 것이다.
연약한 근기가 이어져 나타나는 것을 근(根)이라고 부른다. 이로운 일도 역시 근기가 영리한 것이며 그 근기가 이어져 나타나기 때문에 이것을 힘[力]이라고 부른다. 그 가운데 불어나는 것이 근(根)이 지니고 있는 내용이다. 다른 것이 능멸할 수 없는 능력을 힘이라고 표현한다.
견도(見道)의 위치는 견해를 얻게 되기 때문에 도의 일부분이라고 표현하고 수도(修道)의 위치에서는 도를 보는 까닭에 각지(覺支)라고 표현한다.
028_0344_c_17L處者正緣處故說念處方便者正方便說正斷一心者一心中住處是故說如意足軟根相續見名根利事亦是根利根相續見故名力彼中增上義是根義餘不能陵名力見道得故名道分修道見故名覺支
028_0345_a_02L‘서른일곱 가지를 설명한다’고 한 것은 이 열 가지 법문에 각각 업의 차별이 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삼십칠도품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가운데 각지에 속하는 것은 오로지 무루(無漏)며 나머지는 유루의 경우도 있고 무루의 경우도 있다.
【문】도품에는 어찌하여 유루가 있고 보리(菩提)는 무루라 합니까?
【답】그것은 보리를 얻을 그릇이며, 보리에 따라가는 권속이다. 그런 까닭에 이것을 보리분(菩提分)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이와 같이 이 가운데서 보리와 인연이 먼 것은 유루에 해당되며 보리를 따라가는 까닭에 보리분이라 표현하며 그런 까닭에 그것은 무루이다.
028_0344_c_23L說三十七此十法如是各各業差別故說三十七此中覺支一向無漏餘有漏無漏問曰道品云何有漏菩提是無漏彼菩提器菩提眷屬是故名菩提分如是此中與菩提遠有漏隨順菩提故名菩提分是故無過

이선(二禪)은 삼십륙도품(三十六道品)이요
미래선도 또한 그렇다.
삼선ㆍ사선 및 중간선은
모두 삼십오도품이니라.
028_0345_a_06L二禪三十六
未來禪亦然
三四及中閒
是悉三十五

‘이선은 삽십륙도품’이라 한 것은 정사유(正思惟)를 제외한 서른여섯 가지 도품을 말한 것이다. 왜 그런가? 이 경지에서는 각관(覺觀)이 없기 때문이다.
‘미래선도 또한 그렇다’고 한 것은 미래선도 역시 희각지(喜覺支)를 제외한 삼십육도품만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아직 성취하지 못한 까닭에 기쁨이 없다는 것은 내가 이미 앞에서 설명한 일이다.
‘삼선ㆍ사선과 중간선도 모두 삼십오도품이다’라고 한 것은 제4선과 제3선 및 중간선에서는, 칠각지 가운데서 희각지(喜覺支)와 팔정도(八正道) 가운데서 정사유(正思惟)가 제외되는 것을 말한 것이다.
028_0345_a_08L二禪三十六者除思何以故此地無覺觀故未來禪亦然者亦三十六喜覺支何以故未成就是故無喜已先說三四及中閒是悉三十五者第四第三中閒三十五除喜除正思惟

초선에서는 모든 도품을 말하고
삼공(三空)1)에서는 삼십이도품 말하며
유정천에서는 이십이도품 말하나니
욕계도 또한 그렇다.
028_0345_a_13L初禪說一切
三空三十二
有頂二十二
欲界亦如是

‘초선에서는 모든 도품을 말한다’고 한 것은 초선 가운데서는 삼십칠도품이 모두 해당됨을 말한 것이다.
‘삼공에서는 삼십이도품이다’라고 한 것은 칠각지(七覺支) 가운데서는 희각지(喜覺支)가 제외되고, 팔정도(八正道) 가운데서 정사유(正思惟)ㆍ정어(正語)ㆍ정업(正業)ㆍ정명(正命)이 제외된 것을 말한다.
‘유정천에서는 이십이도품’이라고 한 것은 이 하늘에서는 각지(覺支)와 도지(道支)가 없기 때문에 이십이가 되는 것이다. 유정천에서는 어느 곳을 따라 각지나 정도(正道)를 말하겠는가? 그러나 그 가운데도 유루ㆍ무루의 구별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욕계도 이와 같다’고 한 것은 욕계에도 역시 스물두 가지 도품이 해당됨을 말한 것이며 오로지 유루(有漏)의 경지만 있으니, 욕계의 두 곳이 오로지 유루이기 때문이다.
【문】사식(四食)이라 하는 것은 어느 경지, 어떤 성질의 음식입니까?
028_0345_a_15L初禪說一切者初禪中一切三十七三空三十二除喜正思正語正業有頂二十二者一切無覺支道支是故二十二隨何處覺支次說道分彼中當知有漏無漏欲界亦如是者欲界亦二十二一向是有漏二處一向有漏故問曰四食何地何性

【답】
여러 음식 가운데 단식(摶食)은
욕계의 음식이며 삼입(三入)을 말한다.
식식(識食)ㆍ사식(思食)ㆍ촉식(觸食)
이 음식은 유루(有漏)를 말한다.
028_0345_a_22L答曰
諸食中摶食
欲界說三入
識食及思觸
是食說有漏
028_0345_b_02L
‘모든 음식 중에 단식은 욕계의 음식이며 삼입을 말한다’고 한 것은 단식은 욕계의 향기ㆍ맛ㆍ감촉이 있는 음식을 뜻한다. 이에 관련되는 일이 열세 가지가 있으며, 그 가운데 열한 가지는 감촉[觸]과 관련된 일이다. 즉 사대(四大)와, 일곱 가지 조색(造色:사대의 화합물)이니, 이른바 껄끄럽고 매끄럽고 무겁고 가볍고 차고 목마르고 배고픈 것, 그리고 냄새와 맛이 있으니, 이것이 모두 열세 가지이다.
028_0345_a_24L諸食中摶食欲界說三入者摶食是欲界三入事有十三十一事是觸四大七種造色所謂澀渴及香
【문】무슨 까닭으로 색과 소리는 음식이 아닙니까?
【답】보고 듣는 것은 불어나고 자라나는 것이 아니다. 육근(六根)을 만족시켜 주고 크게 도움을 주는 것이 음식이 지닌 뜻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혹 보고 들음으로써 함부로 분별하는 힘이 생기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즐겁게 받는 감촉에서는 기쁨이 생긴다. 그 기쁨은 육근과 사대(四大)를 윤택하게 하고 이익되게 할 수는 없다. 그런 까닭에 감촉이 음식으로써 능히 이익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색ㆍ소리ㆍ향기ㆍ맛 등의 분별하는 것이 아니면서 또한 능히 몸을 도와 이익되게 할 수 있는 작용인 것이다.
028_0345_b_05L問曰何故色聲非食答曰見聞非增長滿足根大資益義是食義或見或聞妄分別力故生樂受觸生喜彼喜不能潤益根大是故觸爲食能利益非色聲香味離分別亦能資益身
‘식식과 사식 이 음식은 유루이다’라고 한 것은 인식작용과 생각하는 일과 감촉 이것은 유루의 세계에 있는 일이다. 그것이 지속적으로 생겨 이어지면 사람을 속박하고 능히 번뇌를 끌고 올 수 있는 까닭에 이것을 음식[食]이라 표현한 것이다.
무루(無漏)의 세계에서는 감촉작용이 비록 육근(六根)과 사대(四大)를 이익되게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번뇌를 끌고 올 수는 없기 때문에 이 번뇌를 제거하고 단멸하게 되니, 이는 음식이 아니다.
028_0345_b_10L識食及思觸是食說有漏者觸是有漏彼持生相續縛能牽有是故名食無漏觸等雖利益諸根大彼不能牽有故斷除有是故非食
음식이라는 것은 세 가지 일이 있기 때문에 음식이라고 한 것이다. 즉 능히 다음 세상에 태어날 몸을 끌고 올 수 있고, 끌고 온 뒤에는 다시 또 끌어와 자기 몸에 거두어들여 간직하게 되기 때문에 음식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 내용은 생각과 인식작용은 미래의 존재, 번뇌를 끌고 오고 단식(摶食)과 촉식(觸食)은 생긴 뒤에는 모든 번뇌를 거두어 간직하게 된다. 또 경우에 따라서는 혹 모든 음식[四食]이 모두 번뇌를 끌어올 수도 있고 모두가 육근에 거두어들여 간직할 수도 있다.
【문】앞에서 말씀하신 여러가지 삼매(三昧)는 어떤 것이 삼매며 몇가지 속박이 있습니까?
028_0345_b_14L有三種事故名食能牽後有已復牽攝持自身是故名食彼意思識牽未來有摶食觸食生已諸有攝或復一切諸食皆能牽有皆能攝持諸根問曰先所說諸三昧何者三幾種轉

【답】
무원(無願)의 열 가지 행상(行相)과
공삼매(空三昧)의 두 가지 행상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네 가지 행상에서는 무상(無相)을 말하나니
이것을 성행(聖行)이라 하느니라.
028_0345_b_19L答曰
無願有十行
空二行當知
四行說無相
是說爲聖行

‘무원의 열 가지 행상’이라는 것은 무원삼매는 모두 열 가지 행상으로 설명된다. 이것은 삼제(三諦)를 연(緣)하기 때문에 열 가지 행상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즉 고제(苦諦) 가운데서 무상(無常)과 고(苦)의 두 행상이 있고, 집제(集諦) 가운데 네 가지 행상2)이 있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한 내용과 같으며, 도제(道諦) 가운데의 네 가지 행상3)도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028_0345_b_21L無願有十行者無願三昧摠說十行緣三諦故十行轉苦中無常苦二行集中四行如前說道中四行亦如前
028_0345_c_02L【문】왜 멸제(滅諦)와는 연하지 아니합니까?
【답】멸제에서는 원하고 구하지 아니하는 까닭에 무원(無願)이라 부른다. 이는 구하는 것을 즐기지 아니한다는 뜻이다. 원하지 아니하는데 무엇이 고통이라 하겠는가? 그 원인이 다하였으니, 그것이 무(無)이다. 그런 까닭에 그 원인도 역시 버리게 되고 그것으로 인하여 도를 닦는 일도 다하게 되기 때문에 이것이 도제(道諦)와 인연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 선정은 고제(苦諦)로 연유하여 도제(道諦)와 인연하게 되고 멸제와는 인연하지 아니한다. 혹 또는 이것을 유위(有爲)의 세계에서 원하지 아니하는 까닭에 삼제(三諦)와 인연한다고 설명할 수도 있다. 이 경우 도제를 닦는다는 것은 쓴 약을 복용하는 일과 같은 것이다.
028_0345_c_02L問曰何故不緣滅答曰不願求故名無願是不樂求義也不願何等彼因盡則無是故彼因亦捨彼因修道盡是故緣道是故此定緣苦因不緣滅或復說於有爲不願是故緣三諦是中修道如服苦藥
이와 같이 풀이하면 공삼매(空三昧)의 두 가지 행상도 곧 알 수 있을 것이다. 신견(身見:몸에 대한 집착)을 가까이서 상대적으로 치유하는 까닭에 공삼매에 두 가지 행상이 있는 것이다. 무엇무엇이 두 가지 행상인가? 공ㆍ무아(無我)의 두 가지 행상이 그것이다.
신견(身見)으로 아집(我執)을 취하게 되고 그리하여 아집으로 행하게 되는 편견이 생긴다. 이 아집을 상대적으로 치유하는 까닭에 무아의 행상을 말하게 되고 아소(我所), 즉 나의 소유물이라는 집착을 상대적으로 치유하는 까닭에 공(空)의 행상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 그 법문에 아집이 없다면 그런 까닭에 나에게도 아집이 없어지는 것이다.
028_0345_c_07L如是如空二行當知身見近對治故空三昧有二行何等爲二無我身見取我我所行見我對治故說無我行;我所對治故說空行如彼法無我是故無
‘네 가지 행상에서 무상을 설한다’고 한 것은 무상삼매(無相三昧)는 멸제(滅諦)의 네 가지 행상으로 전환되는 삼매다. 여기서는 유위(有爲)의 행이 제외되고 오직 법의 행상에만 인연하게 되는 것을 무상이라 말한다.
여기에서는 해탈의 문을 뚜렷하게 지시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이것은 오로지 무루(無漏)의 삼매이다.
【문】전도(顚倒)는 어떤 것이며 어떤 자체의 본질을 끊어야 합니까?
028_0345_c_12L四行說無相者無相三昧滅四行除有爲行但緣於法行說無相中顯示解脫門故一向無漏三昧顚倒云何斷何自性

【답】
그것은 사전도(四顚倒)를 말하며
고제(苦諦)를 봄으로써 끊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거기에서 불어나는 편견
실상을 본 사람 이를 없애고 새로운 견해 세운다.
028_0345_c_15L答曰
謂彼四顚倒
當知見苦斷
於彼增上見
見實者廢立

‘저것은 사전도를 말하며 고제를 봄으로써 끊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고 한 것은 모든 네 가지 거꾸로 된 견해는 고제(苦諦)에 근거하여 변화해 간다. 그런 까닭에 고제의 실상을 보고 이를 완전히 끊게 되며 이것은 세 가지 견해 가운데서 설명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거기에서 불어나는 편견’이라고 한 것은 이 네 가지 거꾸로 된 견해에서 세 가지 견해의 극히 일부분은 자성(自性)을 보는 견해이다. 경에서는 생각하는 마음이 탁한 까닭에 상상하는 마음의 전도[想心倒]를 말하고 있다. 이것은 곧 진실을 본 사람은 그 거꾸로 된 견해를 버리고 바른 견해를 세우게 된다. 왜 그런가? 불어난 편견[增上見] 가운데 만약 더욱 불어나게 되면 이와 같은 편견의 힘으로 거꾸로 된 견해가 건립된다. 가령 사덕(四德) 가운데 아덕(我德)에 대한 거꾸로 된 견해는 아(我) 즉 구속되지 아니한 나의 본성으로 본 견해가 아니다. 이와 같이 변견(邊見:한 쪽 가장자리에 집착한 견해)은 상덕(常德)에 대한 거꾸로 된 견해이며, 결코 그것은 단견(斷見)이 아니다.
또한 견취견(見取見:잘못된 견해를 정당하다고 집착하는 일)은 정덕(淨德)ㆍ낙덕(樂德)에 대한 거꾸로 된 견해이다.
028_0345_c_17L謂彼四顚倒當知見苦斷者一切四顚倒依苦轉是故見苦斷已說三見於彼增上見者此四顚倒三見中少分是見自性經中想心濁故說想心倒見實者廢立何以故增上見中若得增上如是力顚倒建立如我見顚倒非我所見如是邊見常見顚倒非斷見見取淨樂見顚倒
028_0346_a_02L【문】누가 증상견을 지닌 사람입니까?
【답】추측으로 건립되는 것은 오로지 전도된 견해이다. 그런 까닭에 전도된 망상으로 그는 이와 같이 상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모든 견해가 거꾸로 된 견해는 아니다. 사견(邪見)ㆍ단견(斷見)은 비록 충분히 검토가 미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오로지 거꾸로 된 견해다. 계율을 허무는 일에서 전환하여 계취견(戒取見)이 건립된다. 그러므로 미루어서 건립된 견해라 해서 오로지 전도된 견해만은 아니다. 부분적인 청정[少淨]을 취하는 것은 승견(勝見)이 아니다. 승견이란 부분적으로 뛰어난 것을 취하는 것이 승견이다. 아견(我見)의 힘으로 아소(我所:나의 소유라 집착하는 일)가 건립된다. 그런 까닭에 아소의 견해에서는 전도는 건립되지 않는다.
【문】부처님께서는 육십이견(六十二見)과 같은 많은 견해를 설법하셨습니다. 그러한 견해는 무슨 견(見)에 속합니까?
【답】다섯 견해에 포함된다.
【문】그것은 어떤 것입니까?
028_0346_a_02L問曰誰增答曰推建立一向顚倒是故顚倒彼如是想是故非一切見是顚倒見斷見雖推及一向倒壞事轉建立戒取推建立非一向顚倒取少淨非勝見勝取少勝我見力建立我所故我所見不立顚倒問曰世尊說多如六十二見彼見何見攝答曰見攝問曰此云何

【답】
진실을 비방하는 것
이 견은 사견이라고 말한다.
실상이 아닌 곳에서 건립되는
두 가지 견해와 이 지혜로다.
028_0346_a_10L答曰
誹謗於眞實
此見說邪見
非實而建立
二見及是智

‘진실을 비방하는 것 이 견은 사견이라 말한다’고 한 것은 만약 편견에 사로잡혀 진실을 비방하고 내용이 있는 것을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며, 베푸는 것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등의 견해를 지닌다면 이것이 사견(邪見)에 해당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실상이 아닌 곳에서 건립되는 두 가지 견해와 이 지혜이다’라고 한 것은 음(陰) 가운데서 진실이 아닌 것을 나의 소유물[我所]이라고 집착하여 건립된 신견(身見)이나, 또한 진실이 아닌데도 낙덕(樂德)ㆍ정덕(淨德)이다라고 거꾸로 생각하여 건립된 견취견(見取見)이나 나머지 진실이 아닌 것에 건립된 견해의 경우 그것은 마치 말뚝이 세워진 것을 보고 사람이 서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일이며, 이는 사지(邪智) 즉 잘못된 지혜며 결코 사견(邪見)이 아님을 말한 것이다.
028_0346_a_12L誹謗於眞實此見說邪見者若見謗眞實有義言無所有如無施等是爲邪見非實而建立二見及是智者陰中非實我所建立身見非眞實樂淨建立見取若餘非實建立如見杌建立人想邪智非邪見

또한 지계(持戒)의 위의(威儀) 취하고
인(因)이 아닌데도 인이라 보거나
변견(邊見)을 거두어 받아들임은
상견(常見)ㆍ단견(斷見)에 근거함일세.
028_0346_a_18L又戒威儀取
非因而見因
若攝受邊見
依常見斷見

‘또한 지계의 위의 취하고 인이 아닌데도 인이라 한다’고 한 것은 예를 들면 자재천의 인연이나 우계(牛戒:外道에서 소의 행동을 본뜬 계율) 등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또한 아무 인연 없이 하늘 세계에 태어나고 윤회하던 끝에 해탈하게 된다라고 설하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변견을 거두어 받아들임은 상견과 단견에 근거함이다’라고 한 것은 만약 모든 행이 영구불변이라고 본다면 이것을 상견(常見)이라 부른다.
028_0346_a_20L又戒威儀取非因而見因者如自在天因牛戒見等生天世閒流轉解脫若攝受邊見依常見斷見者若見諸行常是名常見
028_0346_b_02L또 상(常)이란 측면에서 말할 경우 인과의 연속성을 모르는 사람이 그런 까닭에 어떤 일 가운데서 그 일은 단멸된다는 견해를 세우게 된다. 이것을 단견(斷見)이라고 부른다. 이 두 가지 견해를 가장자리의 견해를 받아들인 사람이라 표현한다. 이 두 가지 편견을 제외하면 다른 편견은 없다. 그런 까닭에 모든 편견에 들어오는 것은 이 편견 가운데 있음을 곧 알게 되는 것이다.
【문】이 견해는 어떻게 끊으며 어찌하여 끊지 못합니까?
028_0346_a_24L如說常者彼不知因果連續是故於事中立斷是名斷見是二見名受邊見除此更無餘見故一切見入此見中當知問曰此見何斷何不斷

【답】
진실을 비방하면서 세워졌고
편견으로 인하여 두 가장자리에 근거하니
이 일을 따라 굴러가는데
만약 그 사실을 깨달으면 이 편견 끊을 수 있다.
028_0346_b_05L答曰
誹謗而建立
因見依二邊
隨於此事轉
若見彼則斷

진실을 비방하는 것이 사견임은 이미 설명하였다. 만약 고제(苦諦)를 비방하다가 그가 고통받는 모습을 보게 되면 사견(邪見)이 단절된다고 말한 것이다. 이와 같이 집제(集諦)에서 건립되는 진실이 아닌 견해가 두 가지 있다. 그의 몸이 고통 속에 있음을 보게 된다면 여기서 고제를 보고 사견을 끊는 일이 건립된다.
견취견(見取見)의 경우는 가령 고제를 보고 사견이 끊어졌을 경우 낙(樂) 등의 전도망상이 세워진다. 그런 까닭에 고제를 보고 고통이 끊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집제를 보고 사견을 끊는 일 등이 계취견이다.
028_0346_b_07L誹謗邪見已說彼若謗苦彼說見苦如是集等建立不實說二見彼身見於苦建立見苦斷見取若見苦斷樂等建立是故見苦斷當知如是見集斷等戒取
만약 유루(有漏)의 세계에 근거하여 굴러갈 때 거기서는 고제를 봄으로써 사견을 끊어야 하고 또 만약 무루의 세계에 근거하여 굴러갈 때 거기서는 도제(道諦)를 봄으로써 사견이 끊어진다. 알지어다. 단견ㆍ상견은 고제에 근거하여 전환된다. 그런 까닭에 고제를 보고 끊는 편견에 속하는 것이다.
028_0346_b_12L若依於有漏轉彼見苦若依無漏轉彼見道斷當知斷見常見依苦轉是故見苦所斷
阿毘曇心論經卷第五
甲辰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彫造
  1. 1)공(空)ㆍ무상(無相)ㆍ무원(無願)의 삼해탈문(三解脫門)을 말함.
  2. 2)인(因)ㆍ집(集)ㆍ연(緣)ㆍ생(生)을 말한다.
  3. 3)도(道)ㆍ여(如)ㆍ행(行)ㆍ출(出)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