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028_0391_a_01L잡아비담심론(雜阿毘曇心論) 제1권
028_0391_a_01L雜阿毘曇心論卷第一
존자 법구(法救) 지음
송(宋) 천축(天竺) 삼장(三藏) 승가발마(僧伽跋摩) 등 한역
김형준 번역
028_0391_a_02L尊者法救造
宋天竺三藏僧伽跋摩等譯
1. 서품(序品)
028_0391_a_04L序品第一
예전에 큰 스승들은
매우 깊은 여러 법에 대해
들어 아는 바가 많고 성스런 자취1)를 보아
이미 일체의 뜻을 말씀하셨네.
028_0391_a_05L古昔諸大師
於諸甚深法
多聞見聖迹
已說一切義
부지런히 노력하여 방편으로 구하였으나
아직 다른 부분[異分]을 얻지 못했네.
『아비담심론(阿毘曇心論)』을
많이 들어 아는 자[多聞者] 이미 설하였지만
028_0391_a_07L精勤方便求
未曾得異分
阿毘曇心論
多聞者已說
혹은 지나치게 총괄적이거나
혹은 넓기가 한량없으니,
이와 같은 갖가지의 설명은
경(經)을 따른 것이 아니네.
028_0391_a_08L或有極摠略
或復廣無量
如是種種說
不順修多羅
빛나게 드러내면서 경을 잘 따른 것은
오직 이 논(論)이 최고이니,
근거 없이 공허한 논은
지혜 있는 사람조차 요해(了解)하지 못하네.
028_0391_a_09L 光顯善隨順
唯此論爲最
無依虛空論
智者尚不了
지나치게 간략하면 이해하기 어렵고
지나치게 자세하면 오히려 지혜로운 이도 물러나게 한다네.
그러니 나는 이제 그 중간에 처해 설하되
광설(廣說)로써 장엄하리라.
028_0391_a_11L極略難解知
極廣令智退
我今處中說
廣說義莊嚴
광설[廣說]이란 범음(梵音)으로는 비바사(毘婆沙)2)라고 한다. 비바사 가운데 설해진 의미로써 그 중간에 처한 설을 장엄하는 것이다. 여러 스승들이 법승(法勝)의 『아비담심론』의 뜻을 풀이한 것은 자세하거나 간략함[廣略]이 같지 않지만, 법승의 해석을 가장 간략하다고 한다. 우바선다(優婆扇多)가 8천의 게송으로 풀이한 것이 있고, 또 어떤 스승이 만 2천의 게송으로 풀이한 것이 있는데, 이 두 논(論)을 자세한 해석이라 한다. 화수반두(和修槃頭)3)는 6천의 게송으로 법을 풀이하였지만, 크고 심원하며 그윽하고 광활하나 3장(臧)에 의거하지 않기에 ‘근거 없이 공허한 논’이라 한다.
028_0391_a_12L◀廣說梵音云毘婆沙以毘婆沙中義莊嚴處中之說諸師釋法勝阿毘曇心義廣略不同法勝所釋最爲略也優婆扇多有八千偈釋又有一師萬二千偈釋此二論名爲廣也和修槃頭以六千偈釋法宏遠玄曠無所執著於三藏者爲無依虛空論也▶
존귀한 법승(法勝)께 경례하오며
설하신 바를 저는 정대수지 하겠나이다.
나 달마다라(達摩多羅:法救)가
그분께서 일찍이 설하지 않았던 것을 설하리라.
028_0391_a_14L敬禮尊法勝
所說我頂受
我達摩多羅
說彼未曾說
제자들이 모두 권청하는 바이니
아비담비바사(阿毘曇毘婆沙)는
오로지 정진하여 그 뜻을 사유해
현명한 대중들은 마땅히 배워야 하나니.
실로 쉽게 이해하고 요달하여
번뇌를 여의고 군생(群生)을 제도하리라.
028_0391_a_16L弟子咸勸請
毘曇毘婆沙
專精思惟義
賢衆所應學
正要易解了
離惱濟群生
또한 청정함을 드러내어 번뇌를 대치(對治)하려면 『아비담비바사』에 의지해서 상응해야 하기 때문에 대덕(大德) 법승(法勝)과 나 달마다라(達摩多羅)가 함께 『잡아비담심론(雜阿毘曇心論)』을 장엄하려 하는데, 지나치게 자세하거나 간략함을 떠나서 참된 의미를 설하겠다.
028_0391_a_18L 復次爲顯現淸淨煩惱對治依阿毘 曇毘婆沙所應故大德法勝及我達 摩多羅共莊嚴雜阿毘曇心離諸廣 略說眞實義
【문】진실한 뜻은 차치하고 어떤 것이 아비담4)이며 어떤 것이 비바사인가?
028_0391_a_22L且置眞實義云何名 阿毘曇云何名毘婆沙
028_0391_b_02L【답】모니5)께서 말씀하신 등제(等諦)6)와 제일의제(第一義諦)7)의 깊은 의미를 선양해서 드러내고 진실한 성품의 의미를 설하는 것을 아비담이라 부른다. 또한 능히 경의 내용을 현현함이 마치 등불이 밝게 비추듯 하니, 이는 혜근(慧根)의 성품이 된다. 만약에 그 자상(自相)을 취한다면 곧 각법(覺法)8)이 아비담이다. 만약에 여러 가지 부수하는 가르침[衆具]을 취한다면 이는 5음(陰)9)의 본성이다. 모든 논(論) 중에서 뛰어나 해탈을 향해 나아가게 한다면 이것을 아비담이라 한다.
028_0391_b_02L於牟尼所 說等諦第一義諦甚深義味宣暢顯 說眞實性義名阿毘曇又能顯現修 多羅義如燈照明是惠根性若取自 相則覺法是阿毘曇若取衆具是五 陰性名者諸論中勝趣向解脫是名 阿毘曇
다음으로 비바사란 모니께서 말씀하신 성품의 참된 뜻에 대해서 묻고 답하고 분별하여 참된 요의를 궁구하여 펴며[究暢], 계경(契經)에 수순하여 중생의 마음을 열어 즐겁게 하는 것이다. 이른바 성(性)ㆍ상(相)ㆍ명자(名字)ㆍ지(地)ㆍ의(依)ㆍ행(行)ㆍ연(緣)ㆍ염(念)ㆍ지(智)ㆍ근(根)ㆍ정(定)ㆍ세계[世]ㆍ선(善) 및 계(界)ㆍ학(學)ㆍ견제단(見諦斷)ㆍ의연(義緣)ㆍ방편득(方便得)ㆍ역(亦)ㆍ이욕득(離欲得)ㆍ어느 곳이든 처음 일어나는 곳[何處初起]ㆍ섭(攝)ㆍ상응(相應)ㆍ인연(因緣)ㆍ과(果)ㆍ유과(有果) 등 한량없는 제법의 갖가지의 뜻에 대해 다양한 종류의 갖가지 설명을 낳았으니, 이것을 ‘비바사론’이라 부른다.
028_0391_b_08L 復次毘婆沙者於牟尼所說性眞實 問答分別究暢眞要隨順契經開 悅衆心所謂性名字 世善及界見諦斷義緣方 便得亦離欲得何處初起相應因 緣果有果等無量諸法種種義生說 種種類種種說是名毘婆沙論
예를 들면 불 세존께서 간략하게 설하신 두 가지 지혜, 곧 법지(法智)10)와 비지(比智)11)를 비바사가 한량없이 분별하는 것과 같다. 이른바 저 법지(法智)란 무루혜(無漏慧)의 성품으로서 이것은 지혜의 모습[智相]이니, 처음으로 법을 알게 되기에 이것을 법지라고 이름한 것이다.
028_0391_b_15L如佛 世尊略說二智法智比智毘婆沙說 無量分別所謂彼法智者是無漏惠 是智相名者初知法故是名法智
이 지혜는 여섯 경지[六地]12)에 있으며 욕계13)에 의거한다. 열여섯 가지 행[十六行]14)이며 4제(諦)를 경계로 삼는다. 4념처(念處)이며, 혜(慧) 곧 지혜의 모습[智相]이다. 3근(根)15)과 3삼매(三昧)16)와 상응한다. [3근이란 희(喜)ㆍ락(樂)ㆍ사(捨)이며, 3삼매란 이른바 유각유관(有覺有觀)ㆍ무각유관(無覺有觀)ㆍ무각무관(無覺無觀)이다.]
3세(世)에 떨어지고 3세 및 세간을 떠남[離世]을 연한다. 이것은 선(善)한 것이며, 세 종류17)를 연한다. 이것은 불계(不繫)이며, 욕계 및 불계를 연한다. 이것은 유학(有學)ㆍ무학(無學)18)이며, 세 종류19)를 연한다. 이것은 부단(不斷)이며, 세 종류20)를 연한다. 그리고 이름에 연하고[名緣] 뜻에 연하며[義緣], 방편의 얻음이고 이욕의 얻음이다.
028_0391_b_18L 在六地依欲界十六行境界四諦四 念處智卽智相三根三三昧相應◀三根喜樂捨也三三昧謂有覺有觀無覺有觀無覺無觀▶墮三世緣三世及 離世是善緣三種◀謂善不善無記▶是不繫緣欲界 及不繫是學無學緣三種◀謂學無學非學非無學也▶是不斷緣三種◀謂見諦斷修道斷不斷也▶名緣及義 方便得離欲得
028_0391_c_02L욕계에서 일어나 법계(法界)ㆍ법입(法入)21)행음(行陰)22)에 포섭되며 의계(意界)ㆍ법계(法界)ㆍ의식계(意識界)와 상응한다. 세 가지 인[三因]23)의 자성이자 세 가지 인이 일으킨 바이고, 네 가지 연[四緣]24)의 자성이자 네 가지 연이 일으킨 바이다.
028_0391_c_02L欲界起法界法行陰所攝意界法界意識界相應自性三因所生四緣自性四緣所
이것의 최초에 생기는 무루(無漏)의 의과(依果) 및 공용과(功用果)이다. 함께 생겨나는 경우는 오직 공용과 뿐이다. 유과(有果)라 함은 세 가지 과보, 곧 앞에서 말한 두 가지 과보와 해탈의 과보이다. 증상과(增上果)는 설하지 않지만, 이와 같이 일체법을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028_0391_c_05L是初生無漏依果及功用果俱生 者唯功用果有果者三果謂前二及 解脫果不說增上果如是一切法應 當知
【문】이미 영원한 연기(緣起)의 근본은 알게 되었다. 아비담비바사는 그것에 대한 대치(對治)를 설하는 것이거늘, 무슨 의미로 참된 의미를 설한다고 하는가?
028_0391_c_08L已知久遠緣起根本阿毘曇 毘婆沙說彼對治何故說眞實義
【답】진실한 뜻을 알고자 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분별하지 않는다면 여러 가지 논(論)은 가히 요달해 알기 어렵다. 알지 못하기에 참된 지혜가 생겨나지 못하며, 참된 지혜가 생겨나지 않기에 진실을 알지 못한다. 나아가 진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번뇌와 행위의 과환(過患)들을 보지 못하며, 과환을 보지 못하기에 악취(惡趣)25)에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곧 하늘 세계에 태어나거나 해탈을 얻게 되는 것이다.
028_0391_c_09L 爲知眞實義故若不分別諸論難可 了知以不知故實智不生實智不生 故不知眞實不知眞實故不見煩惱 諸行過惡以不見過故墮於惡趣彼相違則生天解脫
【문】이미 설하는 이유를 말하였으니, 마땅히 참된 뜻을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
028_0391_c_14L已說所以說 當說眞實義
【답】이 논은 여러 논(論) 가운데 가장 수승하다. 일체의 경계를 구족해 드러내 보이니, 이 아비담론에서는 지혜를 증장시키게 된다. 5탁(濁)26)이 세상에 불어날 때에는 수명과 지혜와 염(念)이 모두 손감된다.
028_0391_c_15L是論於諸論中最爲 殊勝具足顯示一切境界於阿毘曇 論增廣智惠五濁世增時智慧皆悉損減
이러한 일들을 관찰하고 광대한 논에서 듣고 지니며 또한 두려워해 자타를 이롭게 하고자 간략히 진실을 설하니, 이것은 곧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나중도 좋은 가르침[三時善說]인 것이다. 외도(外道)와 삿된 논을 펴는 여러 스승들을 애처롭고 불쌍히 여기고, 먼 과거에 수승하고도 바른 논을 펴신 법주(法主) 및 여러 성중(聖衆)들을 멀리 우러러 널리 이 가운데에서 크게 공경하고 믿는 마음을 일으키고, 중생의 불ㆍ법ㆍ승에 대한 염(念)을 열어 일으키게 하고자 3보의 참된 공덕을 드러내 보이니, 바야흐로 논(論)의 가닥을 잡기 위해 이 게송을 설하겠다.
028_0391_c_18L觀察是等於廣大論聞 持恐怖爲利自他略說眞實三時善 哀愍外道邪論諸師遠慕前勝正 論法主及諸聖衆普於是中生大敬 開發衆生佛法僧念故顯示三寶 眞實功德方造論端故說是偈
2. 계품(界品)
028_0391_c_23L雜阿毘曇心論界品第一
028_0392_a_02L예전의, 가장 뛰어나시며 번뇌를 여의신
안교(安敎)의 존자님께 머리 조아려 예배합니다.
말씀하신 바 모든 것이 구족되었으니
나한(羅漢)에게서 진리를 보나이다.
028_0391_c_24L頂禮前最勝
離惱安教尊
所說悉具足
羅漢見眞諦
‘머리 조아려 예배한다’는 것은 애과(愛果)를 일으킬 만한 선한 마음으로 예를 올려 공경히 절하는 것을 말한다.
‘예전[前]’이라 함은 앞 시대를 말한 것이다. 누구를 앞에 두어 가장 뛰어나다고 하는 것인가? 이는 곧 공양드릴 곳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렇게 말한 것이다.
‘가장 뛰어나다’ 함은 무슨 뜻인가? 모든 번뇌를 조복하기 때문에 가장 뛰어나다고 하는 것이다. 곧 게송에서 설하는 바와 같다.
028_0392_a_03L頂禮者起善心轉愛果擧體敬禮也 前者先也何者爲先謂最勝也示供 養處故最勝有何義伏諸煩惱故名 最勝如偈所說
우파가[憂波伽]여, 마땅히 알아야 한다.
우리들과 같은 모든 부처들은
이미 모든 번뇌를 여의었으니
이 때문에 가장 뛰어나다고 하느니라.27)
028_0392_a_07L憂波伽當知
如我等 諸佛
悉已離諸漏
是故名最勝
‘번뇌를 여의었다’고 함은 번뇌나 모든 속박이 몸과 마음을 불태워도, 세존께서는 실로 영겁에 걸쳐 모든 중생들을 편안하게 하고자 활활 타오르던 번뇌의 불길을 영원히 다하게 되었으므로 고뇌에서 벗어났다고 표현한 것이다. 안락(安樂)을 말하기에 마땅히 번뇌를 여의었다고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때문에 다음으로 안교(安敎)를 말한 것이다.
028_0392_a_08L離惱 煩惱諸纏燒其身心世尊曠劫悉 安衆生熾然永盡故名離惱安樂說 當知離惱是故次說安教
‘안(安)’이란 안온하다는 뜻이며, ‘교(敎)’란 이른바 언설을 말한다. 가르침에 안온해지는 바가 있는 까닭에 안교라고 말한 것이다. 간략히 설명하면 자신도 안온하고 다른 사람도 안온하게 한다는 것이다. 번뇌를 여의었다고 함은 자신이 안온해진 것이며, 안교란 다른 사람을 안온하게 하는 것이다. 전도(顚倒)되지 않았기에 안교라고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하신 바 모든 것이 구족되었다고 한 것이다.
‘말씀’이란 언설로서 곧 안교이다.
028_0392_a_11L安者謂 安隱也教謂言說教有所安故曰安 略說自安安他離惱者自安也教者安他也不顚倒故故知安教故次說所說悉具足說者言說也是安教
‘구족’이란 깊고 미묘함을 변정(辯正)하고 결단을 드러내며, 전도되지 아니 함을 설해 참된 뜻에 이르러 2제(諦)28)에 어긋나지 않은 까닭에 구족이라 한 것이다. 때문에 그에게 예를 올리는 것을 법을 공양한다고 하는 것이다.
‘아라한’29)이란 구경의 경지에 이르러 법상(法相)이 원만히 충족된 자를 말한다. 때문에 다음으로 아라한이라고 말했으며, 참된 복전(福田)으로서 마땅히 그를 공양해야 하기에 아라한이라 부르는 것이다. 이것은 오로지 무학(無學)이라고만 하는데, 이 무학의 경지를 말한 다음에 유학[學]이 진리를 봄을 설한다.
028_0392_a_16L具足者辯正深妙顯現決斷 說不顚倒到眞實義不違二諦故曰 具足是故禮彼名供養法阿羅漢者 到究竟處法相滿足是故次說阿羅 眞實福田應彼供養 故名阿羅漢此一向說無學說無學 次說學見眞實
‘진리’란 4성제(聖諦)가 전도되지 않는 것이다. 이른바 8인(忍)ㆍ8지(智)를 배워서 그 진리를 보기 때문에 진리를 본다고 한다. 비록 견도(見道)에 머물고 있어 아직 4제에 두루 통달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반드시 4제를 보기 때문에 역시 ‘진리를 본다’고 하는 것이다.
028_0392_a_22L眞實者四聖諦不 顚倒謂已學八忍八智見彼眞諦名見眞實雖住見道未周四諦必當 見故亦名見眞實
【문】무엇 때문에 예경하는가?
何故敬禮
028_0392_b_02L【답】모니(牟尼) 세존께서는
  법취(法聚)의 두 가지 상(相)을 모두 아시고
  또한 다른 사람을 위해 드러내 보이셨으니
내 지금 그 일부분을 설하리라.
028_0392_b_02L 牟尼尊悉知
法聚二種相
亦爲他顯現
我今說少分
‘모니’란 몸ㆍ입ㆍ뜻이 원만한 까닭에 모니라 하는 것이다.
‘모두[悉]’란 무릇 일체지(一切智)30)를 설하는 경[修多羅]ㆍ율[毘尼]ㆍ론[阿毘曇]이 유포되어 지금에 이른 것을 말한 것이다.
‘아시고[知]’란 지견(知見)과 깨달음의 뜻이다.
‘법(法)’이란 지닌다는 뜻으로서 자성(自性)을 지니기에 법이라 부르며, 법에는 적취가 있는 까닭에 법취(法聚)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선한 법이면 선법취[善法聚]가 되니, 불선(不善) 및 무기(無記)31)의 법 역시 이와 같다.
‘둘[二]’이란 수를 이름하며, ‘상(相)’이란 모양[相貌]이다.
028_0392_b_04L 牟尼者身口意滿故曰牟尼悉者一切智所說修多羅毘尼阿毘曇布至今知者知見覺義也法者持也 持自性故名法法有積聚故名法聚 彼善法善法聚不善無記法亦如是 二者數名相者相貌也
【문】무엇이 두 가지 상인가?
云何二相
【답】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이다. 자상이란 공통되지 않으며, ‘오직 이것’으로 다른 것에는 없는 것이다. 마치 장애의 모습이 곧 색(色)인 것과 같다. 공상이란 이것과 다른 것에 함께 하는 것이다. 마치 색의 무상(無常)함과 같은 비유이다.
028_0392_b_10L 自相及共相自相者不共卽此非 如㝵相是色如是比共相者共及餘如色無常如是比
【문】만약 장애의 모습이 색이라면, 자상 또한 공상이기도 한 것이다. 곧 4음(陰)32)을 관찰하기 때문에 이것은 자상이며, 열 종류의 색을 관찰하기 때문에 이것은 공상이기도 한 것이다. 이와 같이 자상은 곧 공상과의 관찰 때문에 자상과 공상의 두 종류는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028_0392_b_13L若㝵相是 色自相者亦是共相觀四陰故是自 觀十種色故是共相如是自相卽 共相觀故二種自相共相則爲不成
【답】하나의 독자성 때문에 장애는 곧 색의 모습이기 때문에 색의 자상이라고 이름하며, 여러 가지 색[衆色]의 차별이 있기 때문에 열 종류를 설하는 것이다. 그대가 말하기를, “관찰하는 까닭에 자상과 공상은 성립되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렇지 않다. 그것은 왜냐하면, 마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처럼, 열매와 씨앗의 관계처럼, 고제(苦諦)와 집제(集諦)의 관계처럼, 또한 허락하고 제약하는 관계처럼 허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에 자상을 관찰한다면 그것은 공상은 아니며, 만약에 공상을 관찰한다면 자상은 아닌 것이다.
028_0392_b_16L一自故㝵者是色相故名色自相色差別故說十種汝言觀故自相共 相不成者不然何以故不壞故如父 如果種如苦集諦如聽制若觀自 相則非共相若觀共相則非自相
마치 한 사람을 두고 아버지라 부르고 또한 아들이라고 부르는데, 아버지로 말미암아 아들이라고 부르고 아들로 말미암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만약에 아버지를 관찰한다면 아들을 보지 못하며, 만약에 아들을 관찰한다면 아버지를 보지 못하게 된다.33) 만약에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렇지가 않다. 그것은 왜냐하면, 이미 성립되어 있기 때문이니, 이것을 부자간의 뜻의 성립으로 삼는 것이다.
028_0392_b_21L一人亦名父亦名子以父故名子子故名父若觀父則不觀子若觀子 則不觀父若言不成者不然何以故 已成故是爲父子義成
028_0392_c_02L 선(善)이건 악(惡)이건 정견(正見)이건 사견(邪見)이건 그 가운데에서 자세히 설명하면 무간업(無間業)이 생겨나게 된다. 만약 아버지라는 뜻이 없다면 아비가 없다는 사견(邪見)과 아버지가 있다는 정견도 없게 된다. 만약 이것이 없다면 청정하고 더러움 또한 없으며, 청정하고 더러움이 없다면 해탈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무간업이 없다면 인과(因果)도 없으며, 인과가 없다면 일체법 역시 존재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해석을) 잘못이라거나 지나치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이란 뜻이 성립되며, 이미 성립되어 다시 성립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만약에 이미 성립되었는데 다시 성립된다면 이 일은 끝이 없을 것이다. 때문에 자상과 공상의 뜻이 성립된다.
028_0392_c_02L若善若惡見邪見於中廣說起無閒業若無父 亦無無父邪見及有父正見此若無 者淨穢亦無淨穢無者解脫亦無無無閒業者亦無因果因果無者一 切法亦無莫言非過是故父子義成 不可已成更成若已成更成此則無 是故自相共相義成
【문】부처님께서 알고 있는 모든 법을 설명할 것인가?
028_0392_c_09L佛所知法 一切當說耶
【답】그렇지 않다.
不也
【문】무엇을 설명하려는가?
何所說
【답】또한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현현(顯現)하셨으니 내가 지금 그 일부분을 설명하리라.
028_0392_c_10L爲他顯現我今說少分
현현(顯現)이란 ‘열어 보여 준다[開示]’는 뜻이다.
다른 사람[他]이란 교화를 받는 사람이다. 가령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뜻이 [자기에게] 요익하여 범행(梵行)을 따르게 되는 것은 『신서림계경(申恕林契經)』34)에서 설하는 바와 같다. 그분께서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법을 설하신 것 가운데 나는 지금 일부분을 설명하려는 것이다. 여래께서 아시는 바는 깊고 광대하고 한량없어 사리불(舍利弗)같은 사람들조차도 다 설할 수 없거늘, 하물며 다른 이들이야 말할 나위 있겠는가?
028_0392_c_11L顯現者開示 義也他者受化人也若義饒益隨順 梵行如『申恕林契經』說於彼爲他說 法中我今說少分如來所知深廣無 如舍利弗等尚不能盡說況復餘
【문】세존께서는 어떤 법을 설하셨는가?
世尊說何法
【답】유루(有漏)ㆍ무루(無漏)의 이 같은 일체법을 설하셨다.
有漏無漏如是一切
일체의 유루행은
아(我)ㆍ낙(樂)ㆍ상(常)ㆍ정(淨)35)을 떠난 것이나
루(漏) 있음을 보지 못한 까닭에
아(我) 등을 헤아려 망령되이 받아들인다.
028_0392_c_16L 一切有漏行
離我樂常淨
不見有漏故
計我等妄受
이 모든 유루36)의 행은 자재롭지 못하기에 아(我)를 벗어나 있고, 3고(苦)37)를 이루기에 즐거움[樂]을 벗어나 있다. 연력(緣力) 때문에 항상함[常]을 벗어나 있고, 번뇌가 있는 곳이기에 청정[淨]을 벗어난 것이다.
028_0392_c_18L 此諸有漏行不自在故離我三苦成 故離樂緣力故離常煩惱處故離淨
【문】어떤 것들이 유루(有漏)의 행인가?
028_0392_c_20L 何等是有漏行
【답】모든 번뇌가 생겨나는 바인 5음(陰)이 그것이다.
028_0392_c_21L諸煩惱所生五
【문】만약 유루행이 아ㆍ낙ㆍ상ㆍ정을 벗어난 것이라면, 무엇을 일러 중생들이 그 가운데서 받아들인다는 것인가?
028_0392_c_22L若有漏行離我樂常淨者云何 衆生而於中受
028_0393_a_02L【답】유루(有漏)를 보지 못하기에 아(我) 등을 헤아려 망령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중생은 유루의 행에 대해 그 모습을 모르고서 아ㆍ낙ㆍ상ㆍ정을 받아들인다. 지은 업으로 덮여 있기에 내가 아님[非我]을 모르며, 위의(威儀)에 덮여 있기에 이것이 곧 괴로움임을 모른다. 유사한 상속이 덮고 있기에 항상하지 않음[非常]을 모르며, 엷은 가죽으로 덮여 있기에 부정(不淨)을 모른다. 이와 같이 모르고 있기에 그것을 아ㆍ낙ㆍ상ㆍ정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028_0392_c_23L不見有漏故計我等 妄受衆生於有漏行不知相已便受 我樂常淨作業所覆故不知非我儀所覆故不知是苦相似相續覆故 不知非常薄皮覆故不知不淨如是 不知故受我樂常淨
【문】어떤 모습이 유루의 행인가?
何相爲有漏行
【답】만약 모든 번뇌를 증가시킨다면
성인은 이를 유루라 말씀하신다.
  그 스며든다[漏]는 표현 때문에
지혜 있는 사람은 번뇌라 말한다.
028_0393_a_06L 若增諸煩惱
是聖說有漏
以彼漏名故
惠者說煩惱
의지처[依]38)나 대상[緣]이 있어서 늘어나는 신견(身見)39) 등의 여러 번뇌는 「사품(使品)」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그러한 모든 행은 누(漏)를 좇아 생기고 누를 생하게 하며, 누의 장소인 까닭에 이것을 유루법(有漏法)이라 설하는 것이다. 무루의 연(緣)은 약한[軟] 번뇌와 중간 번뇌와 센 번뇌를 증장시키지 않는다고 함은 사실이 아니다. 의지처를 늘리기에 [번뇌 역시] 늘어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의지처를 늘리고 연(緣)을 늘리지 않을 뿐이다.
028_0393_a_08L 若依若緣增長身見等諸煩惱如使 品說彼諸行從漏生故生漏故漏處 是說有漏法無漏緣不增長軟中 上者不然增依故非不增增依不增
【문】왜 그런가?
何故
【답】그것이 스며든다는 이름을 지닌 까닭에 지혜 있는 사람은 그것을 번뇌라 말한다. 번뇌라는 것을 설하여 누(漏)라고 이름한 것이다. [이것은] 일체의 입처(入處)40)로 항상 스며들기 때문이며, 또한 마음의 누가 연이어 주입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번뇌를 늘어나게 하는 모든 행(行)이 바로 유루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028_0393_a_13L以彼漏名故惠者說煩 煩惱者說名漏一切入處常漏故漏連注故是故增煩惱諸行當知是 有漏
【문】그것은 달리 이름이 있는가?
彼更有名耶
【답】또한 번뇌라 하기도 하고
  수음(受陰)및 쟁(諍)이라 하기도 한다.
  번민과 수음과 다툼이 생기기 때문이니
  이것은 여러 성현들께서 설하신 바이다.
028_0393_a_16L 亦名爲煩惱
受陰及與諍
煩受諍起故
是諸賢聖說
이 유루의 행을 이름하여 번뇌ㆍ수음ㆍ다툼이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게송에서 이른 대로] 번민과 수음과 다툼이 생기기 때문이니, 이것은 여러 성현들께서 설하신 바이다. 신견(身見) 등 모든 번뇌는 중생을 괴롭히기 때문에 번뇌라고 이름하며, 스스로의 몸으로 받아들이는 까닭에 이것을 수(受)라고 표현하며, 마음을 근심시키고 교란시키기 때문에 다툼이라고 한 것이다.
028_0393_a_18L 卽此有漏行名爲煩惱受陰何以 煩受諍起故是諸聖賢說身見 等諸煩惱惱衆生故名煩惱受自身 故名受擾亂心故名諍
이 다툼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즉 번뇌쟁(煩惱諍)과 음쟁(陰諍)과 투쟁(鬪諍)이 그것이다. 번뇌쟁이란 108번뇌이고, 음쟁이란 죽음이며, 투쟁이란 각각 서로 어긋나는 것을 말한다. 마땅히 알아야 하는데, 여기에서는 번뇌쟁을 말하는 것이다.
028_0393_a_22L諍有三種惱諍陰諍鬪諍煩惱諍者百八煩惱 陰諍者鬪諍者各各相違當知此 中說煩惱諍
028_0393_b_02L신견(身見) 등의 모든 번뇌를 낳는 유루행은 번뇌를 따라 생기기 때문에 번뇌라고 설하고, 취함[受]을 따라 생기기 때문에 ‘수음(受陰)’이라 설하며, 다툼으로부터 생기기 때문에 쟁(諍)이라 설하는 것이다.
이미 수음(受陰)의 모습을 설명하였으니, 지금부터는 음(陰)의 모습을 설명하겠다.
028_0393_b_02L身見等諸煩惱生諸有 漏行從煩惱生故說煩惱從受生說受陰從諍生故說諍已說受陰相 陰相今當說
만약 행이 번뇌를 여의고
또한 모든 루(漏)에서 해탈한다면
이것과 앞의 수음은 곧 음이 되니,
이는 성인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028_0393_b_05L若行離煩惱
亦解脫諸漏
此及前受陰
是陰聖所說
만약 행이 신견(身見) 등의 여러 번뇌와 여러 루(漏)를 벗어난다면, 이것은 무루의 행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무루의 행과 앞에서 말한 수음을 이름하여 음의 모습[陰相]이라 한다. 음과 수음의 차별은, 전(轉)과 부전(不轉)41)을 합한 것이 곧 음이며, 전은 곧 수음이다.42)
028_0393_b_07L 若行離身見等諸煩惱及諸漏故知是無漏行此諸無漏行及前說受 是名爲陰相受陰差別者轉不 轉合是陰轉者是受陰
【문】어떤 것이 그런 것인가?
何者是
【답】이른바 색ㆍ수음(受陰)과
  상(想)ㆍ행(行) 및 식(識)이다.
  이 5음의 차례는
  거칠고 미세함에 따라 설한 것이다.
028_0393_b_11L 所謂色受陰
想行及與識
是五陰次第
麤細隨順說
‘이 5음’43)이란 이른바 색음과 수ㆍ상ㆍ행ㆍ식음을 말한다.
028_0393_b_13L 是五陰謂色陰受想行識陰
무엇을 색음이라 하는가? 일체의 모든 색의 과거ㆍ미래ㆍ현재이니, 이와 같이 광의로써 설한다. 나아가 그것이 일어났다가 소멸했다면 이것을 과거라고 말하며, 아직 일어나지도 않았고 소멸되지도 않은 그것은 미래라고 말하고, 이미 일어났으나 아직 소멸하지 않은 것은 현재라고 말한다. 또 자신에게 있는 것을 이름하여 내(內)라 부르고 다른 사람의 몸이나 중생들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색은 외(外)라 부른다. 또한 이 내외(內外)의 뜻은 입처(入處)의 설명과 같다.
028_0393_b_14L云何色 一切諸色過去未來現在如是廣 彼起已滅是說過去未起未滅是 說未來已起未滅是說現在在自身 名爲內在他身及非衆生數名爲外 復次內外義如入處說
‘거칠다’고 함은 대상이 있는 것[有對]을 말하며, ‘미세하다’고 함은 대상이 없는 것[無對]을 말한다. 만약 [이러한 해석이] 성립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관(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관하기에 [그런 해석이] 성립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 역시 그렇지 않다. 만약에 거친 것을 관한다면 곧 미세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염된 것[染汚]을 악색(惡色)이라 하고 오염되지 않은 것을 호색(好色)이라 부른다. 과거와 미래를 이름하여 원(遠)이라 하고, 현재를 이름하여 근(近)이라 한다.
원의 내용에는 네 가지 구별이 있으니 행품(行品)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거기에서는] 그 일체를 생략하여 단지 색음이라고 설한다. 이 말의 명칭은 간략할지라도 그 실제[事]는 간략하지 않다. 색음과 마찬가지로 수ㆍ상ㆍ행ㆍ식 역시 이와 같다.
028_0393_b_19L麤者名有對 細者名無對若言不成是則不然觀故不成者不然若觀麤則非細 染污名惡色不染污名好色過去未 來名爲遠現在名爲近遠義四種行品說彼一切一向略說色陰此名 非事略如色陰受想行識亦如是
028_0393_c_02L그 가운데 구별을 하게 되어 자신이 취하는 것은 내(內)라 하고 다른 사람의 몸이 취하는 것은 외(外)라 하니, 내연과 외연과 방편력의 일어남과 경계력의 일어남이다.
거칠다고 함은 5식신(識身)44)이며, 미세하다고 함은 뜻의 경지[意地]를 말한다. 오염과 오염되지 않음과 계지(界地) 또한 마찬가지이며, 나아가 식음(識陰)또한 이와 같다.
‘행(行)’은 곧 행음(行陰)이다. 외(外)란 중생ㆍ비중생의 범주임을 알아야 한다.
028_0393_c_02L 於中差別者自身受名爲內他身受 名爲外內緣外緣方便力起境界力 麤者五識身細者意地染污不染 污界地亦如是乃至識陰亦如是是行陰外者衆生非衆生數當知
【문】색 내지 식에는 어떤 모습[相]이 있는가?
028_0393_c_07L 色乃至識有何相
【답】장애가 있는 모습[礙相]이 곧 색음(色陰)의 모습이고, 감각을 따르는 것은 수[受陰]의 모습이며, 지(知)를 따르는 것은 상[想陰]의 모습이고, 조작(造作)하는 것은 행[行陰]의 모습이며, 분별하는 것은 식음[識陰]의 모습이다.
028_0393_c_08L㝵相是色相覺是受相順知是想相造作是行相 分別是識相
이른바 과거의 색이라 하는 것은 비록 [현재는] 장애되지 않을지라도 일찍이 장애된 일이 있기 때문에 [역시 색음에 해당되고] 또 다가올 미래의 색도 비록 [현재는] 장애되지 않을지라도 곧 장애가 될 것이기 때문에 역시 [색음에 해당한다.] 또한 극미(極微)45)의 [색] 하나하나는 비록 [현재는] 장애되지 않을지라도 많은 미세한 것들이 모이게 되면 곧 장애가 된다. 또 작용이 없는 [색]은 비록 장애가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색을 만들게 되면 장애가 되니 이 역시 장애가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나무가 흔들리면 그림자도 흔들리는 것과 같다. 색음의 과거, 미래와 마찬가지로 나머지 네 가지의 음(陰) 역시 이와 같다.
028_0393_c_10L彼過去色雖不㝵曾㝵 當來色雖未㝵當㝵故極微一一 雖不㝵衆微集則㝵無作雖不㝵作色是㝵故彼亦㝵如樹動影亦動 如色陰過去未來餘四陰亦如是
【문】무엇 때문에 먼저 색음을 말하고 나아가 식음에 이르기까지 그렇다고 하는가?
028_0393_c_14L 何故前說色陰乃至識陰
【답】[게송에서 말했듯이] 이 5음의 차제는 거칠고 미세함에 따라 설한 것이다. 그 5음 가운데서 색음이 가장 거친데, 5식(識)의 의지처가 되기 때문이고 또한 6식의 경계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먼저 설한 것이다. 수음(受陰)은 비록 그것은 색이 아닐지라도 행(行)이 거칠기 때문에 색과 같이 설한다. 마치 자신의 머리나 발등에서 아픈 느낌[痛受]이 좇아 일어나는 것과 같다. 나아가 식음은 가장 미세하기 때문에 마지막에 설하는 것이다.
028_0393_c_15L是五陰 次第麤細隨順說彼五陰中色陰最 五識依故六識境界故是故前說 受陰雖非色行麤故如色說如我首 足等痛受隨轉如是乃至識陰最細 是故後說
알 수 없는 우주의 근본적인 시작 이래로 남자는 여색 때문에 여자는 남색 때문에 서로 마음이 물들고 애착하니, 때문에 [색부터] 먼저 설하는 것이다. 즐겁게 느끼고 탐내는 까닭에 색욕을 일으키며, 생각이 전도되는 까닭에 즐겁게 받아들이려는 탐욕을 일으키게 된다. 또한 번뇌 때문에 생각의 전도를 일으키며, 뜻[意]에 의지하게 되기 때문에 번뇌를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028_0393_c_20L復次從不可知本際已來爲女色女爲男色染著處故是故前 樂受貪故起色欲想顚倒故起樂 受貪煩惱故起想顚倒依意故起煩
028_0394_a_02L다음으로 두 종류의 색을 관찰하는 까닭에 불법(佛法) 가운데 들어가 감로문(甘露門)을 삼으니, 이른바 부정관(不淨觀)46)과 안반념(安般念)47)이 그것이다. 부정관이란 만들어진 색[造色]을 관찰하며, 안반념이란 4대(大)48)를 관찰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먼저 색음(色陰)을 관찰하는 것이다. 색을 관찰하고 나서는 수(受)의 허물을 보며, 수의 허물을 보고 나서는 상(想)이 전도되지 않고, 상이 전도되지 않으면 번뇌가 형성되지 않으며, 번뇌가 형성되지 않으면 마음이 곧 참고 견딜 수 있게 되는 것이다.
028_0393_c_24L復次二種色觀故入佛法中爲甘 露門謂不淨觀及安般念彼不淨觀 者觀造色安般念者觀四大是故前 觀色陰觀色已見受過見受過已想 不顚倒想不顚倒已煩惱不行煩惱 不行已心則堪忍
이것은 순차적으로 5음을 설명한 내용인데, 이제 이것을 거꾸로 설명하겠다. 청정하고 더러움이 생기는 것은 마음이 그 근본이 된다. 때문에 먼저 식음(識陰)을 관찰하는 것이다. 식을 관찰하고 나면 번뇌가 엷어지고, 번뇌가 엷어지면 법상(法想)을 일으키며, 법상을 일으키고 나면 곧 탐냄의 수(受)가 생기지 않으며, 탐냄의 수가 생기지 않기에 색을 관찰하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먼저 색음을 설하고 나아가 식음에 이르기까지 설하는 것이다.
028_0394_a_06L此則順說五陰當逆說淨穢之生以心爲本故前觀 識陰觀識已煩惱薄煩惱薄已起法 起法想已則貪受不生貪受不生 故觀察色是故先說色陰乃至識陰
【문】색음은 어떻게 분별해서 설하는가?
028_0394_a_10L 云何分別說色陰
【답】열 종류의 색입(色入)과
  작용 없는 가색(仮色)
  이것이 색음을 분별한 것으로서
  모니께서 설하신 바이다.
028_0394_a_11L 十種謂色入
及無作假色
是分別色陰
牟尼之所說
‘열 종류의 색입’이란 눈과 색,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촉감이다.
‘작용 없는 가색’이란 「업품(業品)」에서 설명한 바와 같으니, 이 모든 색 하나하나를 색음이라 말한다.
028_0394_a_13L 十種謂色入者眼色耳聲鼻香舌味 身觸無作假色者如業品說是諸色 一一說色陰
식음(識陰)이라 하는 것은
이는 곧 의입(意入)이다.
18계(界) 가운데서도
또한 일곱 가지를 말한다.
028_0394_a_16L所名爲識陰
此卽是意入
於十八界中
亦復說七種
이른바 ‘식음’이란 곧 저 의입(意入)이며, 18계 중에서는 7심계(心界)를 말하는 것이다.
028_0394_a_18L 謂識陰卽是意入十八界中說七心界
나머지 세 가지 음이 있고
무작(無作)과 세 가지 무위(無爲)가 있으니
이것을 법입(法入)이라 말하고
또한 법계(法界)라고도 한다.
028_0394_a_19L 餘則有三陰
無作三無爲
是則說法入
亦復說法界
‘나머지 세 가지 음’이란 수음ㆍ상음ㆍ행음을 말한다.
‘무작과 세 가지 무위’란 허공과 수멸(受滅:擇滅)과 비수멸(非受滅:非擇滅)을 말한다.
이 일곱 가지 법은 법입(法入)이라고 하며 또한 법계(法界)라고도 한다.
028_0394_a_21L 餘三陰者受陰想陰行陰無作三無 爲者虛空數滅非數滅此七法說法 入亦說法界
【문】어떤 이유로 수(受)ㆍ상(想)에 대해서는 달리 음(陰)을 세우면서 나머지 마음의 법에 대해서는 하나의 행음(行陰)만을 세우는가?
028_0394_a_24L以何等故受想別立 餘心法立一行陰
028_0394_b_02L【답】생사에 윤전(輪轉)하는 것은
  가지 다툼의 근본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런 까닭에 수ㆍ상을 달리 하여
  두 종류의 음(陰)을 건립한다.
028_0394_b_02L 輪轉於生死
當知二諍根
是故別受想
建立二種陰
두 가지 일[二事] 때문에 중생들은 생사에 윤전하는 것이다. 이른바 즐거운 느낌[樂受]에 대한 탐냄과 전도된 생각이 그것이다. 즐거운 느낌을 탐내는 까닭에 행하고 사랑하며, 뒤바뀐 생각으로 헤아려 집착하기 때문에 행하고 보는[行見] 것이다.
028_0394_b_04L 二事故衆生輪轉生死謂樂受貪及 顚倒想樂受貪故行愛倒想計著故 行見
‘두 가지 다툼의 근본’이란 [탐욕의 결박과 견욕의 결박을 말하는데] 애욕과 갈애에 익숙해진 탐욕의 결박은 수(受)로부터 생기고 편견과 욕망의 결박은 상(想)에서 생긴다. 수에 대해서는 여러 선정(禪定)49)을 닦아야 하고 상에 대해서는 무색정(無色定)50)을 닦아야 한다.51)
다음으로 마음의 법[心法]은 혹은 근(根)이기도 하고 혹은 근이 아니기도 하다. 근의 법은 곧 수이고 근 아닌 법은 곧 상이다. 그런 까닭에 뜻에 따라 설하는 것이다.
028_0394_b_07L二諍根者習欲愛貪欲縛從受 見欲縛從想生受修諸禪想修無 復次心法或根或非根根法是受 非根法是想是故隨義說
【문】5음은 모두가 행이거늘, 왜 하나의 행음(行陰)만을 따로 말하는가?
028_0394_b_10L五陰一 切是行何故說一行陰
【답】5음이 비록 행이라도
  하나만이 행(行)의 이름을 받는다.
  유위법(有爲法)은 많기에
  행음이라 말하고 다른 것은 [행음이] 아니로다.
028_0394_b_11L 五陰雖是行
而一受行名
有爲法多故
說行陰非餘
행음 가운데는 상응(相應)52)과 불상응(不相應)53) 등의 유위행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상응이란 사(思)와 원(願) 등이며, 불상응이란 이른바 득(得) 등이다.
028_0394_b_13L 以行陰中有相應不相應等有爲行 相應者思願等不相應者謂得等
【문】일체가 모두 행음(行陰)이거늘, 계경에서는 왜 사(思) 하나만을 설하여 행음이라 하고 다른 것은 아니라고 하는가?
028_0394_b_15L 一切悉是行陰何故契經說一思 爲行陰非餘
【답】뛰어나기 때문이며, 증상하기 때문이며, 앞서기 때문이다. 상을 짓는 것[作相:造作]이 곧 행(行)54)의 모습인데 그 사(思)는 바로 작용의 성품이다. 만약 다른 음이 있을지라도 모두 5음 가운데 들어가게 된다. 이것을 지금부터 곧 참답게 설명하겠다.
028_0394_b_17L勝故增上故前故相是行相彼思是作性若有餘陰入五陰中今當如實說
모든 법음(法陰)을 자세히 설한다면
그 수는 팔만 가지가 있으니
계율 등과 다른 음은
모두 5음(陰)에 포함된다.
028_0394_b_19L 廣說諸法陰
其數有八萬
戒等及餘陰
悉是五陰攝
8만 가지의 법음은 모두 색음에 속하는데, 부처님의 말씀은 언어를 본성으로 하기 때문이다.
혹은 어떤 이가 설하듯이, 이름[名]의 본성이라면 행음에 속하는 것이다.
그 밖에 계 등의 5음55)에 대해서 보면, 저 계음(戒陰)은 색음에 속하고, 선정ㆍ지혜ㆍ해탈ㆍ해탈지견음은 모두가 행음에 속한다. 만약 이 외에 다른 음의 이름이 있다 해도 모두가 5음 가운데 들어간다.
028_0394_b_21L 八萬法陰皆色陰攝以佛說語性故 有說名性者行陰攝餘戒等五陰戒陰色陰攝解脫解脫知見陰 皆行陰攝若有餘陰名悉入五陰中
028_0394_c_02L【문】어떤 것에 한정하여 그것을 법음이라 하는가?
028_0394_c_02L 齊何當言法陰
【답】법음이란 이른바 경론이다.
  이와 같은 낱낱의 설법 및
  모든 대치(對治)의 행을
  모두 법음의 범주라 부른다.
028_0394_c_03L 法陰謂經論
如是一一說
及諸對治行
悉名法陰數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낱낱의 경론(經論)을 이름하여 법음이라고 하니, 이와 같은 경론의 수는 6천 가지가 있다”고 한다.
또 다른 사람은 말하기를, “낱낱의 음처(陰處)가 곧 법음처(法陰處)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다른 사람은 말하기를, “음처와 계처(界處) 등을 법음(法陰)의 범주로 삼는다”라고 한다.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은 이른바 중생에게는 8만의 행이 있고, 그런 까닭에 세존께서는 그들의 행에 따라 그들을 위해 대치(對治)를 설하신 것이니, 이 모두가 법음의 범주인 것이다.
028_0394_c_05L 有說一一經論名爲法陰如是經論 數有六千復有說一一陰處是法陰 又說陰處界處等爲法陰數如是 說者謂衆生有八萬行是故世尊隨 彼所行爲說對治悉是法陰數
【문】앞에서 설하기를, “열 가지는 이른바 색입(色入)이며, 또한 작용 없는 가색(仮色)이다. 이것을 색음(色陰)이라 이름한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입(入)56)인가?
028_0394_c_10L說十種謂色入亦無作假色是名色 何等爲入
【답】이른바 눈ㆍ귀ㆍ코
  혀ㆍ몸 및 뜻[意[과
  색ㆍ소리ㆍ냄새ㆍ맛ㆍ촉감이며,
  나머지는 모두 법입이라 말한다.
028_0394_c_12L 所謂眼耳鼻
舌身及與意
色聲香味觸
餘則說法入
‘안입(眼入)’이란 안식이 의지하는 바이며, 4대(大)를 취해 만들어진 순수한 색으로서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대상이 있는 것이다. 귀ㆍ코ㆍ혀ㆍ몸의 경우도 역시 이와 같다. 여기서 구별이 있다면 [근거하는] 인식 작용을 따라 구별할 따름이다.
‘의입(意入)’이란 곧 마음[心]ㆍ뜻[意]ㆍ식별[識]이며, [여기에서는] 이름[名]과 뜻[義]과 업(業)과 세간[世]과 시설(施設)에 의한 것이다. 그 이름 등에 의한 소작의 차별은 다음과 같이 알아야 한다.
이름에 의한다면, 곧 이름이 마음이 되고 이름이 뜻이 되고 이름이 식이 된다.
57)에 의한다면, 집기(集起)한 것이 곧 마음이라는 의미이며, 생각하고 헤아린다는 것이 의(意)의 뜻이고 구별하여 안다는 것이 식별[識]이다.
028_0394_c_14L 彼眼入者眼識所依四大所造淨色 不可見有對耳鼻舌身亦如是差別 隨識所依意入者是心 施設彼名等所作差別應當知 名者名爲心名爲意名爲識義者起是心義思量是意義別知是識義
58)에 의한다면, 멀리서 아는 것이 곧 마음이며, 앞에서 아는 것이 곧 뜻이고 계속해서 생겨나는 것이 곧 식별이다.
세간59)에 의한다면, 과거세는 곧 뜻[意]에 해당하며, 다가올 미래세는 곧 마음이고 현재세는 곧 식별인 것이다.
시설60)에 의한다면, 계시설(界施設)은 마음이고 입시설(入施設)은 뜻이며, 음시설(陰施設)은 식이다.
028_0394_c_20L 業者遠知是心前知是意續生是識 世者過去世是意當來世是心現在 世是識施設者界施設心入施設意 陰施設識
028_0395_a_02L다음으로 탐욕ㆍ노여움ㆍ어리석음 등을 달리 분별한다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경계가 있다. 안정된 마음[定心]을 불란(不亂)이라고 하며, 이와 상위(相違)한 오염된 마음을 이름하여 란(亂)이라고 한다.
게으름과 상응하는 마음을 하(下)라고 하며, 정진과 상응하는 마음을 이름하여 거(擧)라고 한다. 습(習)이 적은 청정한 마음 및 오염된 마음을 소(少)라 하며, 습이 많은 청정한 마음을 다(多)라고 한다. 적은 근기를 지닌 자가 얻기 쉬운 소대치(少對治)ㆍ소수전(少隨轉)의 모든 염오심을 이름하여 소(小)라 하며, 이와 상위한 선심(善心)을 대(大)라고 한다.
닦을 수 있는 수행에 대해서 닦지 못한다면 이와 같은 염오심을 불수(不修)라고 하며, 이와 상위한 선심을 이름하여 수(修)라고 한다.
028_0394_c_24L復次貪恚癡等分別則無 量境界定心名不亂此相違染污心 名爲亂懈怠相應心名爲下精進相 應心名爲擧少習淨心及染污心名 爲少多習淨心名爲多少根易得少 對治少隨轉諸染污心名爲小此相 違善心名爲大於彼得修習修不修 如是染污心名不修此相違善心 名爲修
자성해탈(自性解脫)및 그 밖의 해탈(在解脫)에 있어서 그에 대한 염오심을 불해탈(不解脫)이라고 하며, 이와 상위한 선심을 해탈(解脫)이라고 한다.
혹은 마음이 자성해탈이면서 해탈에 있지 않은 경우가 있고, 혹은 마음이 해탈에 있으면서 자성해탈이 아닌 경우도 있다. 또한 마음이 자성해탈이면서 또한 해탈에 있는 경우도 있고, 혹은 마음이 자성해탈도 아니고 해탈에 있지도 않은 경우가 있다.
028_0395_a_09L自性解脫及在解脫於彼染 污心名不解脫此相違善心名解脫 或有心自性解脫非在解脫或有心 在解脫非自性解脫或有心自性解 脫亦在解脫或有心非自性解脫亦 非在解脫
자성해탈이면서 해탈에 있지 않은 경우란 곧 아직 배울 것이 남아 있는 지위에 있는 자[有學]의 무루심이다. 다음으로 해탈에 있으면서 자성해탈이 아닌 경우란 곧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경지에 오른 자[無學]의 유루심이다. 자성해탈이면서 또한 해탈에 있는 경우란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경지에 오른 자의 무루심이며, 자성해탈도 아니고 해탈에 있지도 않은 경우란 아직 배울 것이 남아 있는 자의 유루심 및 범부의 마음이다.
028_0395_a_14L自性解脫非在解脫者學無漏心在解脫非自性解脫者無學有漏心自性解脫亦在解脫者 是無學無漏心非自性解脫亦非在 解脫者是學有漏心及凡夫心
색입(色入)에는 세 가지 구분이 있다. 이른바 색깔과 처소[處]와 [색깔과 처소가] 함께 하는[俱] 경우 등이다.
이 중에 색깔이라는 것은 푸른색ㆍ노란색ㆍ붉은색ㆍ흰색으로, 이처럼 자세히 설할 수 있다.
처소[處]란 몸이 색을 받아들이는 곳을 말하며, 함께 한다[俱]고 함은 예를 들면 그림을 그리고 만드는 일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성입(聲入)에는 세 가지가 있다. 이른바 집수(執受)된 4대(大)를 원인으로 하는 소리61)와 집수되지 않은 4대를 원인으로 하는 소리62), 그리고 그 둘을 함께 원인으로 하는 소리이다.
028_0395_a_18L色入 者三種謂色色者靑黃赤白是廣說處者身作色俱者如造畫等 聲入者三種謂因受四大聲因不受 四大聲因俱聲
028_0395_b_02L집수된 4대를 원인으로 하는 소리란 이른바 목구멍ㆍ입술ㆍ혀를 인연해 나오는 소리이다. 집수되지 않은 4대를 원인으로 하는 소리란 이른바 바람ㆍ요령ㆍ나무 등을 인연해 나오는 소리이다. 두 가지를 함께 원인으로 하는 소리란 이른바 북을 치거나 피리를 불어 소리를 내는 경우이다. [다시] 이들 각각의 소리에는 두 가지 구분이 있으니, 이른바 마음에 드는 소리(可意:manojña)와 마음에 들지 않는 소리(不可意:amanojña)가 그것이다.
028_0395_a_22L因受四大者謂咽喉 脣舌因緣發聲因不受四大者謂風 鈴樹等因緣發聲因俱聲者謂擊鼓 吹貝因緣發聲彼聲一一有二種可意不可意
향입(香入)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좋은 냄새ㆍ나쁜 냄새ㆍ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냄새가 그것이다.
미입(味入)에는 여섯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매운맛ㆍ신맛ㆍ단맛ㆍ쓴맛ㆍ짠맛ㆍ싱거운 맛이 그것이다.
028_0395_b_03L香入者三種謂好香非好惡香味入者六種謂辛
【문】가령 맛을 볼 때 맛을 구별하는 것은 먼저 혀로 인식하는[舌識]것인가? 아니면 몸으로 인식[身識]하는 것인가?
028_0395_b_05L若嘗味時別味者爲舌識 先覺爲身識耶
【답】만약 먼저 [음식의] 차갑고 따뜻한 것을 느낀다면 이 경우는 먼저 몸의 인식작용이 있고 뒤에 혀의 인식이 있는 경우이다. 그러나 만약 먼저 매운맛 등을 구별하였다면 먼저 혀의 인식 작용이 있고 뒤에 몸의 인식이 있는 경우이다.
촉입(觸入)에는 열한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4대(大) 및 일곱 종류의 만들어진 색이 그것이다. 일곱 종류의 만들어진 색이란, 이른바 거칠음ㆍ매끄러움ㆍ가벼움ㆍ무거움ㆍ차갑거나 따뜻함ㆍ배고픔ㆍ목마름을 말한다.
거칠음이란 거칠고 억센 [감각]이다. 매끄러움이란 미세하고 연한 [감각]이고, 가벼움이란 말로 이를 수 없는 [감각]이고, 무거움이란 도탑고 두꺼운 [감각]이며, 차가움이란 따뜻함을 구하는 [감각]이고, 배고픔이란 음식을 원하는 [감각]이며, 목마름이란 마실 것을 구하는 [감각]이다.
028_0395_b_06L若先覺冷暖則先 身識後舌識若先別辛等味者則先 舌識後身識觸入者十一種謂四大 及七種造色七種造色謂澀 冷暖澀者麤强滑者細軟輕者 不可稱重者淳厚冷者求暖飢者欲 渴者欲飮
【문】어떤 요소[大]가 불어나는 까닭에 거칠고 매끄럽고 내지 배고프고 목마른 [감각이] 있게 되는가?
028_0395_b_12L何大增故澀滑乃至 飢渴
【답】혹은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특별하게 한 가지로] 치우쳐 불어난다면, 그 업보는 먼저 거친 4대의 과를 얻고 내지 배고픔과 목마름의 [과를 얻는다]”고 한다.
또 다른 사람은 말하기를, “수(水)와 화(火)가 증대하기 때문에 매끄러우며, 지(地)와 풍(風)이 증대하기 때문에 거칠며, 지와 수가 증대하기 때문에 무거우며, 풍과 화가 증대하기 때문에 가벼우며, 수와 풍이 증대하기 때문에 차가우며, 풍이 증대하기 때문에 배가 고프고, 화가 증대하기 때문에 목이 마르다”고 한다.
028_0395_b_13L或有說無偏增者彼業報先 得澀四大果乃至飢渴復有說水火 增故滑地風增故澀地水增故重火增故輕水風增故冷風增故飢增故渴
【문】몇 가지의 촉감이 몸의 인식 작용[身識]을 일으키는가?
幾觸能起身識
【답】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거친 느낌에서 목마른 느낌에 이르기까지 그 하나하나가 [몸의 인식 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고 하며,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다섯 가지 촉감이 능히 일으키니, 4대(大)와 거친 감각이 그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마침내 배고프고 목마름이 있게 된다”라고 한다. 또한 어떤 사람은 “열한 가지 [촉감]이 몸의 인식 작용을 일으킨다”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몸의 인식 작용에 속하는 경계인 까닭에 잘못된 해석이 아니다.
두 가지의 자상(自相)이 있으니, 일[事]의 자상과 입처(入處)의 자상이 그것이다. 일의 자상이란 평등한 경계이고 입처의 자상은 독자적인 모습의 경계이기 때문이다.
028_0395_b_17L有說從 澀至渴一一能起又說五觸能起四 大與澀如是乃至飢渴復有說者一種起身識等是身識境界故無過 有二種自相事自相及入處自相自相者等境界入處自相者自相境 界故
028_0395_c_02L이 열한 가지 가운데 두 가지 촉감은 욕계와 결박되어 있다. 곧, 배고픔과 목마름이 그것으로 색계63)에는 결박되지 않는다. [나머지] 아홉 가지는 욕계와 색계에 모두 결박되어 있다. 색계의 옷[衣]은 비록 말로 이를 수 없는 촉감이지만, 나머지는 또한 말로 이를 수 있고 또한 모아서 쌓을 수도 있다. [음식이란] 비록 차갑고 따뜻함의 과환은 없다고 하더라도 길이 몸을 길러 주고 적절하게 조절해 주는 기능은 있다. 그런데 배고프고 목마르다는 것은 혹은 의과(依果)64)라고 말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배고프고 목마름은] 먹고 마심으로써 끊을 수 있기 때문이다.
028_0395_b_23L此十一種二種欲界繫飢及渴 非色界繫九種欲界色界繫色界衣 雖不可稱餘亦可稱亦可積聚雖無 冷暖之患而有長養調適飢渴者說依果以飮食能斷故
아비담(阿毘曇) 논사는 “과보로 얻은 색은 끊어지고 난 뒤 다시 이어질 수 없다”고 말하며, 계빈의 논사65)는 “배고프고 목마름은 선ㆍ불선의 과보이자 장애[報障]이기에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먹은 것이 소화되고 나면 도로 [배고프고 목마름을] 알 수 있게 된다. 때문에 부자의 기갈은 좋은 과보이며 가난한 자의 기갈은 좋지 못한 과보가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66)
028_0395_c_04L阿毘曇者說 報色不可斷已更續罽賓者說飢渴 是善不善報障故不可知食消已還 復可知是故富者飢渴是善報貧者 飢渴是不善報
법입(法入)에는 네 가지 구분이 있다. 그 가운데 무작색(無作色)은 업품(業品)에서의 설명과 같다. 심법(心法)은 행품(行品)에서의 설명과 같으며, 또한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 행[心不相應行]은 잡품(雜品)에서의 설명과 같다. 무위(無爲)는 이 품(品)의 뒤편에서 설명하게 될 것이다.
내입(內入) 가운데 안입(眼入)은 그 경계가 거칠기 때문에 먼저 말하며, 외입(外入) 가운데 색입(色入)은 그 자상(自相)이 거칠기 때문에 먼저 말하는 것이다.
괴로움과 즐거움이 들어오는 문인 까닭에 입처라고 말한다. 또한 ‘살(殺)’의 뜻이 입처의 의미이다. 즉 마음과 마음의 법이 이 가운데서 소멸되는 것이다.
028_0395_c_08L法入者四種無作色 如業品說心法如行品說心不相應 如雜品說無爲此品後當說內入 中眼入境界麤故前說外入中色入 自性麤故前說苦樂所入門故說入 又殺義是入處義心心法於此中
【문】입처(入處)와 촉입처(觸入處)에는 어떤 구별이 있는가?
入處觸入處何差別
【답】촉입처는 곧 입처이기도 하지만, 입처는 촉입처가 아니다. 즉 외입처가 곧 여기에 해당한다. 또 가령 내입처 가운데 비분(非分)67)도 이것은 입처이면서 촉입처가 아니다.[인연의 차이로 촉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비분이라고 한다.]
촉감이 머무는 곳인 까닭에 촉입처라 부르며, 촉감이 빈 것[空]이라면 오직 입처만이 있는 것이다.[촉입처라고 함은] 촉감이 들어오는 문지기 때문인데, 이는 마치 창문과도 같은 것이다.[인도에서는 창문을 풍입(風入)이라고 부른다].
028_0395_c_14L觸入處 卽是入處或入處非觸入處外入是 若內入處非分者是入處非觸入 ◀緣差不起觸者名非分也▶觸所住故名觸入處觸空 者唯是入處觸所入門故如窗牖◀天竺爲窗牖爲風入▶
촉감이 머무는 곳이기 때문이라는 것은 마치 성주(聖住)68)의 비유와도 같다.[성주란 말은 중국을 부르는 말이다. 그리고 변방의 지명을 미리차주(彌離車住)69)라 부른다.]
또한 수입처(受入處)라고 할 수도 있다. 촉이 길러내는 마음과 마음의 법은 촉이 지니고 온 바이고 촉이 전개된 바이기에, 또한 촉의 힘으로 인해 눈앞에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촉입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028_0395_c_19L觸所住故如聖住亦應說受入處觸 長養心心法觸所持來觸所轉故力故現在前是故說觸入◀聖住者中國名聖住邊地地名彌離車住也▶
【문】어떻게 한 몸에 12입(入)을 갖추게 되는가?
028_0395_c_22L云何一身具十二入
【답】비록 한몸 안이라고 해도
  짓는 일이 각기 다르고
  의(依)와 연(緣)과 자성 때문에
  열두 가지로 나누어 구별한다.
028_0395_c_23L 雖於一身中
所作事各異
依緣自性故
十二種分別
028_0396_a_02L한몸 안에 12입을 갖추게 되나 다만 일이 각기 다를 뿐이다. 가령 일이 안입(眼入)에 속한다면 이 일은 법입(法入)에 이르기까지 [다른 11입과] 관계된 것이 아니다. 만약에 일이 만약에 법입에 속한다면 이 일은 안입에 이르기까지 [다른 11입과] 관계된 것이 아니다.
028_0396_a_02L 於一身中具十二入但事各異若事 是眼入此事乃至非法入若事是法 此事乃至非眼入
【문】어떤 것이 안입에 속하는 일이며, 나아가 ‘법입’에 속하는 일인가?
028_0396_a_05L何等爲眼入 事乃至法入事
【답】눈은 색을 봄으로 해서 일을 삼으며,70) 또 색은 눈이 행하는 바로써 일을 삼는다. 나아가 법입에 이르기 이와 같다. 비유하면 같은 방 안에 열두 사람이 머물고 있으나 [그들의] 사업이 각자 다른 것과 같이 저 [12입] 역시 이와 같다.
또한 의(依)와 연(緣)의 차별로도 열두 가지 입(入)을 말하게 된다. 이른바 6식신(識身)에는 여섯 가지 의지처[六依: 6근]와 여섯 가지 대상[六緣: 6경]이 있는 것이다. 또한 자성을 분별해서 열두 가지로 설명한다. 가령 눈의 자성은 법의 자성에 이르기까지 [다섯의 자성]이 아니며, 법의 자성은 눈의 자성에 이르기까지 [다섯의 자성]이 아닌 것이다.
028_0396_a_06L眼以見色爲事以眼所行爲事如是乃至法入譬如 一室十二人止事業各異彼亦如是 又依緣差別說十二謂六識身有六 依六緣又自性分別說十二若眼自 性乃至非法自性若法自性乃至非 眼自性
【문】열 가지의 입처(入處)와 법입처(法入處)의 일부분은 색이거늘, 무엇 때문에 홀로 한 입처만을 색입(色入)이라고 하는가?
028_0396_a_12L十入處及法入少分是色 何故獨說一入處爲色入
【답】비록 수많은 색이 있을지라도
  단지 한 색입처를 말함은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한 색입은
  3안(眼)의 경계이기 때문이다.
028_0396_a_13L 雖有衆多色
但說一色入
當知一色入
三眼境界故
그 입처 가운데서 3안의 경계를 이름해 색입이라 하니, 육안(肉眼)71)과 천안(天眼)72)과 성혜안(聖惠眼)73)이 그것이다. 색은 거칠기 때문에 스무 종류로 말한다. 이른바 푸르고 노랗고 붉고 희고, 길고 짧고 바르고 바르지 못하고 모나고 둥글고 높고 낮은 것과 연기, 구름, 먼지, 안개, 빛, 그림자 그리고 밝고 어두움이 그것이다. 그 가운데 길고 [짧음] 등의 여덟 가지는 세 종류74)로 나누어 구별하지만 나머지는 모두 무기(無記)이다.
028_0396_a_15L 於彼入中三眼境界者名爲色入天眼聖惠眼以色麤故說二十種 所謂靑不正 彼長等八事 三種分別餘悉無記
【문】일체의 12입은 모두가 법의 성품[法性]이거늘, 왜 오직 하나의 법입(法入)만을 말하는가?
028_0396_a_20L一切十二入 盡是法性何故但說一法入
【답】그 일체의 모든 법이
  곧 법입이라고 해도
  (한)법 가운데 많은(법이) 있기에
  하나만이 법입이지 나머지는 아닌 것이다.
028_0396_a_21L 彼一切諸法
雖盡是法入
法中衆多故
一法入非餘
028_0396_b_02L그 일체가 모두 법입이긴 하지만 오직 한 입 가운데 수많은 법이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색법과 무색법과 상응ㆍ불상응법, 유위ㆍ무위법이 그것이다. 때문에 오직 한 법입만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세 가지 유위의 모습75)이 있으니, 그것은 법의 모습이지 [법과]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곧, 그 법입 가운데 들어가는 것이다. 이 때문에 오직 한 법입만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일체의 법은 이름으로써 뚜렷이 드러나는데, 그 이름은 법입 가운데 들어가는 것이다.
028_0396_a_23L 彼一切雖盡是法入但一入中衆多 法故謂色法無色法相應不相應法 有爲無爲法是故但說一法入復次 三有爲相彼法相不相違彼入法入 是故但說一法入又一切諸法以 名顯現彼名入法入中
법이란 진실한 모습으로, 이른바 공해탈문(空解脫門)76)이다. 앞의 법으로써 법을 깨닫기 때문이다. 이 공 또한 법입 가운데 들어간다. 신견(身見)으로 능히 깨달을 수 있다고 한다면, 이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전도된 채 굴러가기 때문이다.
법이란 최고의 진리[第一義]이니, 이른바 적멸열반77)이다. 이 법 또한 법입 가운데 들어간다.
028_0396_b_06L法者眞實相 謂空解脫門以前法覺法故是空入 法入中身見能自覺者不然顚倒轉 法者第一義謂寂滅涅槃是法入 法入中
【문】세존께서는 계경(契經)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입(入)을 설하셨는데, 무엇 때문에 오직 12입(入)만을 말하는가?
028_0396_b_10L世尊說契經無量入何故 但說十二入
【답】저 열 가지 일체입(一切入)과
8입(入)과 2입(入)ㆍ4입(入) 및
다섯 가지 해탈입은
모두가 열두 가지에 포함된다.
028_0396_b_11L 彼十一切入
八入二四入
及五解脫入
皆悉十二攝
열 가지 일체입(一切入) 가운데 앞의 8입(入) 및 8승처(勝處)78)는 탐욕없는 선한 뿌리의 본질을 지니며, 모두가 법입 가운데 들어간다. 만약에 권속을 취한다면 그것은 곧 5음의 본질로, 모두가 의입(意入)과 법입(法入) 가운데 들어간다.
열 가지 일체입(一切入) 가운데 마지막 두 가지 입과 4무색입(無色入)은 4음(陰)의 본질로서 모두가 의입과 법입 가운데 들어간다. 2입(入)이란 이른바 무상중생입(無想衆生入)79)과 비상중생입(非想衆生入)80)을 말한다. 무상중생입은 향입(香入)과 미입(味入)을 제외한 열 가지 입의 본질을 지닌다. 네 가지 무색계를 말할 경우 이미 설명했듯이 그것은 비상입(非想入)과 같다.
028_0396_b_13L 十一切入中前八入及八勝處是無 貪善根性悉入法入中若取眷屬五陰性悉入意入法入中十一切入 後二入及四無色入是四陰性悉 入意入法入中二入者謂無相衆生 入及非想衆生入無想衆生入十入 除香味入說四無色則已說非想
다섯 가지 해탈입은 지혜의 본질이다. 그 권속은 곧 5음의 본질이며, 모두가 성입(聲入)ㆍ의입(意入)ㆍ법입(法入)의 3입(入) 가운데 들어간다. [5해탈입(解脫入)이란, 하나는 부처님의 설법으로 곧 해탈을 얻는 것이며, 둘은 법문을 듣고 나서 사유해 얻는 것이며, 셋은 스스로 경을 외움으로 인하여 얻는 것이며, 넷은 다른 사람을 위하여 법을 설함으로써 얻는 것이며, 다섯은 인연에 의해 얻는 것이다].
028_0396_b_21L五解脫入是慧性眷屬是五陰性 悉入三入中聲入意入法入◀五解脫入者一者佛說卽得解脫二者聞已思惟得三者因自誦經得四者因爲他說法得五者因緣得也▶
【문】설하는 바 18계(界)란 종류가 열여덟인가? 아니면 명칭이 열여덟인가?
028_0396_b_23L所說十 八界爲種有十八名有十八
028_0396_c_02L【답】계의 종류는 열일곱이라 말하고
  혹은 열둘이라 말하기도 하나니
  경계와 의지하는 것과 의지처를
  열여덟 가지로 분별한 것이다.
028_0396_b_24L 界種說十七
或說爲十二
境界依者依
分別十八種
18계는 열일곱 종류 혹은 열두 종류가 있다. 만약 의계(意界)를 취한다면 곧 6식(識)을 잃고, 만약 6식을 취한다면 곧 의계를 잃게 된다. 비유하면 나무를 취할 경우 숲을 잃게 되고, 숲을 취할 경우 나무를 잃는 것과 같다. 또한 손가락을 펴고 오므리는 비유 역시 이와 같은 것이다. 만약에 의계를 취한다면 곧 6식을 잃게 되고, 6식을 취한다면 곧 의계를 잃게 되는 것이다.
028_0396_c_03L 十八界或十七種或十二種若取意 界則失六識若取六識則失意界如別取樹則失林若取林則失樹捲等譬亦如是若取意界則失六識 若取六識則失意界
【문】만약 그렇다면 왜 18계라고 말하는가?
028_0396_c_08L若然者云何 說十八界
【답】경계와 의지하는 것과 의지처를
  열여덟 가지로 분별한 것이다.
028_0396_c_09L 境界依者依
分別十八種
3사(事) 때문에 18계를 말하게 되는 것이다. 곧, 의지처와 의지하는 자와 경계 때문이다.
‘의지처’란 이른바 여섯 가지 의지처이니, 안계(眼界)에서 의계(意界)에 이르기까지를 말한다.
‘의지하는 자’란 이른바 6식계이니, 안식계(眼識界)에서 의식계에 이르기까지를 말한다.
‘경계’란 이른바 여섯 가지 외계(外界)이다.
만약에 아라한(阿羅漢)의 최후심은 후식(後識)을 일으키지 않고 의계도 아니라고 한다면 이것은 그렇지 않다. 다른 인연 때문에 후식이 이어지지 않는 것이니, 마치 땅에 씨앗이 없는 것과 같다.81)
028_0396_c_10L 三事故說十八界依故依者故境界 依謂六依眼界乃至意界依者謂 六識界眼識界乃至意識界境界謂 六外界若言阿羅漢最後心不生後 識非意界者此則不然以餘緣故後 識不續如地無種
또한 촉에 인하여 18계를 세우는 것이다. 안촉(眼觸)은 세 가지의 인연으로 생기니, 이른바 눈과 색과 인식이 그것이다. 뜻[意]에 이르기까지 이와 같으며, 비유하면 밥그릇과 밥과 먹는 자의 세 가지 일과 같으니, 즉 밥그릇은 이른바 안계이고 밥은 색계이며 먹는 자는 안식계인 것이다.
028_0396_c_16L復次因觸故立十 八界眼觸三因緣生謂眼如是 乃至意器故食故食者故器謂眼界 食謂色界食者謂眼識界
【문】마땅히 스물한 가지 계(界)라고 말해야 하나니, 즉 두 눈과 두 귀와 두 콧구멍이 여섯이 되고 여기에 설계와 신계와 일곱 심계(心界)와 여섯 외계(外界)가 있기 때문이다.
028_0396_c_19L應說二十 一界二眼二耳二鼻爲六舌界身界七 心界六外界
【답】두 눈은 하나의 계(一界)라고 말한다.
  둘은 하나의 자기이기 때문이다.
  귀ㆍ코 또한 이와 같으니
  둘을 함께 일계(一界)라고 말한다.
  몸을 단정하게 장엄하기 위하여
  그것들은 모두 하나씩이 아닌 것이다.
028_0396_c_21L 二眼說一界
以二一自故
耳鼻亦 如是
二共說一界
爲令身端嚴
彼皆不一一
028_0397_a_02L비록 두 눈이 있지만 하나의 계로 말한다. 하나의 자기이기 때문이며, 함께 같은 4대(大)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며, 하나가 되어 스스로 보는 것[一自見] 때문이다. 하나의 자기[自]에 두 개의 근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인식이 의지하기 때문에 두 눈의 안식의 의지처는 당연히 2근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나의 인식은 한 입처(入處)에 의지하기 때문에, 한 입(入)의 경계이면서 또한 함께 한 입(入)의 경계를 받아들이기 때문에 두 눈이 함께 한 색을 취하는 것이다. 또한 한쪽 눈으로만 보면 밝고 또렷하게 보이지 않지만 두 눈으로 보면 밝고 또렷하게 보이는 것이다.
028_0396_c_24L雖有二眼而說一界以一自故共一 四大造故一自見故非一自有二根 一識所依故二眼眼識依亦不應二 一識依一入處故一入境界亦俱 受一入境界故二眼共取一色以一 眼見色則不明了二眼見色則明了
두 귀와 두 콧구멍이 하나의 계(界)를 이루는 것도 또한 눈과 같이 설명되니, 몸을 단정하게 장엄하기 위하여 두 눈ㆍ두 귀ㆍ두 콧구멍이 있는 것이다. 한쪽 눈만으로는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공경받지 못하기 때문에 눈 등은 두 개가 생겨났고 몸과 혀는 하나가 생겨난 것이다. 이와 같이 불세존께서는 비록 갖가지 계를 말씀하셨으나 모두가 18계 가운데 들어가는 것이다. 이제 차례로 그것을 설명하겠다.
028_0397_a_06L 二耳二鼻成一界亦如眼說爲莊嚴 身故生二眼二耳二鼻以一眼者人 不愛敬故是故眼等生二身舌生一 如佛世尊雖說種種界悉入十八界 今當次第說
만약 여러 다른 계가 있어서
세존께서 계경에서 설하셨다 해도
각기 그 자성(自性)을 따라
모두가 18계에 포함된다.
028_0397_a_11L 若有諸餘界
世尊契經說
各隨其自性
悉入十八界
만약 세존께서 다른 계를 말씀하셨다고 하더라도 모두 18계 안에 포함되나니, 그 이유는 의지처[依]와 의지하는 자[依者]와 대상[緣]의 세 가지 일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세존께서 “교시가(憍尸迦)82)여, 세상에는 갖가지의 계가 있느니라”하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이 말씀은 여러 가지 견해를 계라는 이름으로 말씀하신 것이며, 이러한 계는 모두 법계(法界) 안에 포함되는 것이다.
또 가령 62계(界)83)를 설하는 경우는 다계경(多界經)84)의 말씀 및 다른 계경(契經)과 같아도, 계라는 이름으로 설하는 내용은 각기 그 뜻에 따라 18계 가운데 포함되는 것이다.
028_0397_a_13L 若世尊說餘界悉入十八界中以三 事故依故依者故緣故如世尊說尸迦世有種種界謂諸見以界名說 彼悉入法界中若彼說六十二界『多界經』說及餘契經以界名說者隨其義入十八界中
【문】계(界)와 입(入)과 음(陰)에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028_0397_a_19L 陰何差別
【답】계란 일체법을 말한 것으로
  그것은 곧 12입이다.
  세 가지 무위법(無爲法)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곧 5음이라 말한다.
028_0397_a_20L 界說一切法
彼卽十二入
除三無爲法
餘則說五陰
028_0397_b_02L일체법을 78계라 말하는데, 그 이유는 의지처를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며, 의지하는 것을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며, 대상[緣]을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일체법을 곧 12입(入)이라 말한다.
이 가운데 일곱 가지 마음의 계[七心界]는 의입(意入)에 속하는데, 이것은 곧 내용에 차별이 있음을 말한다. 세 가지 무위(無爲)를 제외한 나머지 법을 5음(陰)이라고 하는데, 쌓이는 기세가 있기 때문이다.
028_0397_a_22L 一切法說十八界以不離依故依者 緣故彼一切法卽說十二入七心 界爲意入此卽義差別除三無爲法說五陰積聚勢故
【문】만약 일체법을 계라고 하며, 계가 곧 입(入)이고 세 가지 무위법을 제외한 것을 음이라고 한다면, 무슨 이유로 세존께서는 세 가지로 설하셨는가?
028_0397_b_03L若一切法說 界卽是入除三無爲說陰何故世 尊三種說
【답】모니께서 중생들을 관찰하심에
  알고 싶어함과 근기가 같지 않음과
  성품ㆍ행동의 어리석음에 차별 있기에
  음(陰)ㆍ계(界)ㆍ입(入)으로 나누어 말씀하셨네.
028_0397_b_05L 牟尼觀衆生
欲解根不同
性行愚差別
故說陰界入
중생들은 세 종류의 알고 싶어하는 것이 있다. 즉 자세하게 [알고 싶어하는 것]과 간략하게 [알고 싶어하는 것]과 중간 정도로 [알고 싶어하는 것]이 그것이다. 자세하게 알고 싶어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계를 말씀하시고, 중간 정도로 알고 싶어하는 사람에게는 입(入)을 말씀하시고, 간략하게 알고 싶어하는 사람에게는 음(陰)을 말씀하신 것이다. 둔하거나 중간 정도이거나 상 등의 근기를 지닌 자들에 대한 설법의 차별도 또한 이와 같다. 성품이 교만하고 안일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계를 설하셨으니, 성품의 내용이 곧 계(界)의 의미와 같기 때문이다. 재산을 믿고 교만하고 안일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입(入)을 설하셨으니, [재물을] 싣고 문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입(入)의 의미와 같기 때문이다. 목숨을 믿고 교만 안일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음(陰)을 설하셨으니, 음(陰)은 죽음의 법이기 때문이다.
또 수행을 시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계를 설하셨다. 수행이 적은 사람을 위해서는 입을 설하시고, 이미 수행이 된 사람을 위해서는 음을 설하셨다. 또 색심(色心)에 어리석은 사람을 위해서는 계를 설하셨으며, 색(色)에 어리석은 사람을 위해서는 입을 설법하시고, 심법(心法)에 어리석은 사람을 위해서는 음을 설하셨다.
028_0397_b_07L 衆生三種欲解廣者爲說界 中者爲說入略者爲說陰軟中上根 亦如是恃性憍逸爲說界性義是界 恃財憍逸爲說入輸門義是入義 恃命憍逸爲說陰以陰死法故始行 者爲說界少行者爲說入已行者爲 說陰愚於色心爲說界愚於色爲說 愚於心法爲說陰
【문】음ㆍ입ㆍ계는 무슨 뜻인가?
028_0397_b_15L界有何
【답】모이고 쌓인다는 것이 곧 음(陰)의 내용이고
  문 안에 싣고 들어온다는 뜻을 입(入)이라 말하며
  종성(種性)의 뜻을 계(界)라 하니
  이것이 세 가지 차별이다.
028_0397_b_16L 聚積是陰義
輸門義說入
種性義說界
是三種差別
열한 가지의 한량없는 색 등85)을 총괄해서 색음(色陰)이라 말한다. 창고와도 같고, 군대의 무리와도 같다. 비유하면 네 종류의 군대86)는 비록 그 종류는 각각 다를지라도 이것을 군의 무리[軍衆]라 부르는 것과 같다. 색의 경우도 또한 이와 같아서 비록 열한 가지가 있다고는 해도 동일한 색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면 이름하여 색음이라 하는 것이다. 아비담(阿毘曇)에서 말한 바와 같으니, 곧 ‘훌륭히 색음을 관찰하는 자는 하나의 극미(極微)를 하나의 계ㆍ하나의 입(入)ㆍ하나의 음(陰)의 일부분으로 포섭하며, 잘 관찰하지 못하는 자는 1극미를 하나의 계ㆍ하나의 입ㆍ하나의 음으로 포섭한다”라고 하는 것이다.
028_0397_b_18L 十一種無量色等摠說色陰如庫藏 如軍衆譬如四種軍其類各別名爲 軍衆色亦如是雖有十一同一色相 名爲色陰如阿毘曇說善觀色陰者 一極微攝一 界一入一陰 少分不善觀 者言一極微攝一界一入一陰
028_0397_c_02L색음과 마찬가지로 수ㆍ상ㆍ행ㆍ식ㆍ음도 역시 이와 같다. 문 안에 싣고 들어온다는 뜻을 입(入)이라고 설한 것은 괴로움과 즐거움으로 통하기 때문이다.
‘종성의 뜻을 계(界)’라고 설한 것은, 마치 한 산중에 많은 성질이 있는 것과 같다. 즉 금의 성질, 은의 성질 등이 있듯이 이처럼 한 몸 속에는 갖가지의 성질이 각기 다르기 때문에 18계라고 말하는 것이다.
028_0397_b_24L如色 受想行識陰亦如是輸門義說入 通苦樂故種性義說界者如一山 中多有諸性金性銀性等如是一身 中種種性各異故說十八界
【문】무슨 이유로 18계ㆍ12입ㆍ5음이 불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는다고 말하는가?
028_0397_c_05L以何 等故說十八界十二入五陰不增不
【답】경계와 의지하는 자87)와 의지처는
  재고 헤아리는 법에 응한다.
  그런 까닭에 계ㆍ입ㆍ음은
  불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는 것이다.
028_0397_c_07L 境界依者依
度量法所應
是故界入陰
不增亦不減
계(界)가 재고 헤아림에 응한다는 것은 여섯 가지 의지처와 여섯 가지 의지하는 자와 여섯 가지 대상 [緣]88)을 말한다. 만약 그 의지처가 증가하게 되면 그것은 의지처가 아니다, 이유는 의지하는 자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에 [의지처가] 줄어든다면 의지하는 자에게 의지할 곳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일체의 입(入) 역시 의지처와 대상으로 헤아리게 된다.
028_0397_c_09L 界度量所應者六依六依者六緣依若增則非依以無依者故若減則 依者無所依故如是一切入亦以依 緣爲量
음(陰)은 왜 색에 염착(染着)하는가? 즐거이 받아들여 집착하기 때문이다. 왜 즐거이 받아들여 집착하는가? 생각이 전도되었기 때문이다. 왜 생각이 전도되었는가? 번뇌와 상응하기 때문이다. 번뇌는 뜻에 의지하고 뜻은 곧 뜻에 의지함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뜻은 법을 연하여 의식(意識)을 낳는데, 이 의지처를 떠나서는 다시 다른 의지처가 없기 때문이다.
이미 계ㆍ입ㆍ음의 자성 및 인연을 설명하였으니, 지금부터는 계에 관해서 자세히 설명하겠다.
028_0397_c_13L陰者何故染著色樂受著故 何故樂受著想顚倒故何故想顚倒 煩惱相應故煩惱依意意卽依意所說意緣法生意識離是依更無餘 依故已說界入陰自性及因緣今當 廣說界
계 가운데 한 가지는 볼 수 있나니
또한 모든 계라고도 말한다.
무기(無記)는 여덟 가지이며
나머지는 선ㆍ불선이로다.
028_0397_c_18L界中一可見
又說一切界
無記謂八種
餘則善不善
028_0398_a_02L‘계 가운데 한 가지는 볼 수 있나니’란, 18계 가운데 색계는 눈으로 볼 수 있으니, 여기에 있고 저기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사람들에게 마음의 작용을 지시하는 까닭에 볼 수 있다는 것이며, 또한 스스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니, 이른바 눈이 작용하는 바인 것이다. 또한 마땅히 알아야 하니, 나머지 17계는 볼 수 없다. 상(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한 모든 계를 다 볼 수 있다고 설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혜안(慧眼)의 경계이기 때문이다. 곧, “지혜 있는 사람은 저 일체법을 무아(無我)로 본다”라고 게송에서 설하듯이 아비담(阿毘曇)에서는 “유학(學)이 자취를 보는 것은 4성제의 자취를 보는 것과 같다”고 설하기 때문에 18계는 모두 다 볼 수 있는 것이다.
028_0397_c_20L 界中一可見者十八界中色界可見 可視在此在彼是故可見復次示人 心行是故可見復次自現故謂眼所 當知十七不可見無行相故又說 一切界皆可見慧眼境界故如所說 彼一切諸法慧者見無我如阿毘 曇說學見迹見四眞諦迹故是故十 八界一切皆可見
‘무기는 여덟 가지’라 한 것은, 여덟 가지의 계는 무기89)임을 말한 것이다. 이른바 5정(情)90)과 냄새ㆍ맛ㆍ촉감이 그것이다. 사랑스러움[愛]과 사랑스럽지 못함[不愛]의 과를 결정할 것이 없기 때문에 무기라 말한다. 나머지 열 가지 계는 결정할 수 있으니, 선함과 악함의 구별이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색ㆍ소리ㆍ법계와 7심계(心界)가 그것이다.
028_0398_a_05L無記謂八種者界無記謂五情無愛不愛果 可記故說無記餘十界可記善及不 善故謂色七心界
선한 몸의 움직임은 곧 선색(善色)이며, 악한 몸의 행동은 불선색(不善色)이다. 나머지 색은 무기(無記)이다. 소리와 입의 움직임 역시 그와 같다. 순수한 마음으로 이루어진 7식계(識界)는 선이며, 뉘우침이 없고 부끄러움 없음과 상응하는 마음은 불선이다. 나머지는 곧 무기이다. 법계의 경우에도 마음과 상응하는 것은 마음과 같이 설하지만, 만약에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다면 잡품(雜品)에서 설명한 내용과 같다.
028_0398_a_08L善身動是善 不善身動是不善色餘色無記是聲口動淨心七識界是善無慚無 愧相應心是不善餘則無記法界心相應如心說若不相應如雜品說
선(善)에 네 가지 종류가 있다. 즉 자성(自性)과 상응(相應)과 공기(共起)와 제일의(第一義)이다. 이 가운데 자성의 선이란 뉘우치고 부끄러워하는 마음 및 세 가지 선한 근기[三善根]가 그것이다. 상응이란 곧 그것이 상응하는 마음 및 마음의 법[心法]이다. 공기란 곧 그것이 일으키는 바의 몸과 입으로 짓는 업 및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 행[心不相應行]이 그것이다. 제일의란 이른바 열반을 말한다. 이것을 네 종류의 선이라 한다.
028_0398_a_12L 善有四種自性相應共起第一義性善者愧及三善根相應者卽彼 相應心心法共起者卽彼所起身口 業及心不相應行第一義者謂涅槃 是爲四種善
[반대로] 자성불선(自性不善)이란 뉘우치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는 것과 세 가지의 좋지 못한 근기[三不善根]91)가 그것이다. 상응이란 곧 그것이 상응하는 마음과 마음의 법이다. 공기란 그것이 일으키는 바의 몸과 입의 업 및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 행이 그것이다. 제일의란 윤회의 위험을 말한다. 이 두 가지와 서로 어긋나는 것은 곧 무기이다.
028_0398_a_17L自性不善者無慚無愧 三不善根相應者卽彼相應心心法 共起者卽彼所起身口業及心不相 應行第一義者輪轉危嶮俱相違者 是無記
【문】일체법은 12입(入)이니, 이는 곧 세존께서 말씀하신 바인데 어째서 무기(無記)라 하는가?
028_0398_a_21L一切法十二入卽是世尊 所記何故說無記
028_0398_b_02L【답】한결같이 말씀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무기라고 하지는 않는다. 선한 것에는 선하다고 기별(記別)하시고 선하지 못한 것을 불선이라고 하셨지만, 선ㆍ불선을 기별하지 않으신 까닭에 무기라 말하는 것이다.
만약 인과가 있을 때는 인과를 기별하지만, 그것과 다르다면 곧 무기인 것이다. 혹은 기론계경(記論契經)92)에서 설하듯이 [특별히] 말씀하시지 않았음을 무기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028_0398_a_22L不以一向不說 故名無記善者記爲善不善者記爲 不善不記善不善故說無記若因果 時則記因果異則無記或有不說名 無記如記論契經說
일체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
이것은 일관된 논리이다.
일체는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다는 것
이것을 분별론이라 부른다.
028_0398_b_03L 一切皆當死
是論一向記
一切死復生
是名分別論
만약 생(生)은 수승한 것이냐고 묻는다면
이것은 힐문론(詰問論)이라 부른다.
중생과 5음이 다르다는 것
이것은 지기론(止記論)이라 부른다.
028_0398_b_05L 若問生殊勝
是名詰問論
衆生五陰異
是名止記論
‘일관된 논리93)’란 만약 어떤 사람이 “모든 중생들은 모두가 죽게 되는가?”라고 묻는다면 마땅히 일관되게 “모든 중생들은 모두가 곧 죽게 된다”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분별론’94)이란 만약 어떤 사람이 “모든 중생들은 모두가 죽어야 하며 죽고 나서 다시 태어나는가?”라고 묻는다면 마땅히 분별해서 “번뇌가 있는 사람은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지만 번뇌가 없는 사람은 죽은 뒤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028_0398_b_06L 一向記論者若有問一切衆生悉當 死耶應一向答一切衆生皆悉當死 分別論者若有問一切皆當死死復 生耶應分別答有煩惱者死而復生 無煩惱者死已不生
‘힐문기론(詰問記論)’95)이란 만약 어떤 사람이 “인간의 삶은 수승한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마땅히 그에게 반문하여야 한다. “그대는 바야흐로 어디를 향해 가고자 그것을 묻는가?”
 만약 그가 “바야흐로 하늘 세계[天趣]로 향해 갑니다”라고 말한다면 “못났도다”라고 대답해 주고, 만약 그가 “바야흐로 악취(惡趣)96)로 향해 갑니다”라고 말한다면 “뛰어나도다”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028_0398_b_11L詰問記論者有問人生殊勝不應反問汝方何趣 故問若言方天趣應答言若言惡趣應答言
‘지기론(止記論)’97)이란, 만약 어떤 사람이 “음(陰)과 중생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마땅히 [대답을] 멈추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질문은] 서로 맞지 않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석녀(石女)98)의 아이가 공경을 잘 합니까?”라고 묻는 것과도 같다. 석녀에게는 아이가 없거늘 어떻게 공경하는지 공경하지 않는지 말할 수 있겠는가? 이와 마찬가지로 음은 있어도 중생은 없으니, 어떻게 같고 다름이 있을 수 있겠는가? 맞지 않는 질문이기에 대답하지 않는 것이다.
028_0398_b_14L止記論者若有問與衆生爲異爲同耶應當止何以故 以不應故譬如有問石女兒善恭敬 石女無兒何得答言恭敬不恭敬是有陰而無衆生何得有同異耶不應故不答
아비담(阿毘曇)논사는 이와 같이 말한다.
‘일관된 논리[一向記論]’란,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는 무소착(無所著)ㆍ등정각(等正覺)99)인가? 교법을 훌륭히 설했는가? 세존의 제자는 제대로 향해 나아가는가? 색은 무상(無常)하며 수ㆍ상ㆍ행ㆍ식은 무상한가? 고ㆍ집ㆍ멸ㆍ도를 훌륭히 분별하였는가?”라고 묻는다면 응당히 일관되게 대답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용이 [중생들에게] 요익하기 때문이다.
028_0398_b_19L阿毘曇者說一向記論 若有問如來無所著等正覺耶說教法耶世尊弟子善向耶色無常 受想行識無常耶善分別苦集滅道 應一向答義饒益故
분별론이란, 만약 어떤 사람이 “저를 위하여 설법해 주십시오”라고 하였을 경우 곧 그에게 “수많은 법이 있으니, 혹은 과거의 것이고 혹은 미래의 것이고 혹은 현재의 것이거늘 어떤 법을 설해주기를 바라는가?”라고 묻는 것이다.
028_0398_b_23L分別論者爲我說法應問言法有衆多若過 去若未來若現在欲說何法
028_0398_c_02L이 때 만약 “저를 위하여 과거의 법을 설해 주십시오”라고 말한다면, “과거의 법 역시 많으니, 혹은 색음(色陰)에 관한 것이고, 혹은 수ㆍ상ㆍ행ㆍ식음에 관한 것인데, 무엇을 설해야 하는가?”물어야 한다. 이 때 만약 “색음입니다”라고 말한다면, 곧 묻기를, “색음 역시 많으니, 선ㆍ불선ㆍ무기의 [색음이 있거늘] 무엇을 설해야 하는가?”라고 한다. 이 때 만약 “선색입니다”라고 한다면 마땅히 또 묻기를, “선색에 일곱 가지100)가 있으니, 불살생 내지 불기어(不綺語)가 있거늘 무엇을 설해야 하는가?”라고 한다.
028_0398_c_02L若言我說過去法應問過去法亦多或色 或受想行識陰爲說何者若言應問色陰亦多或善不善無記說何者若言善色應問善色有七種 不殺生乃至不綺語爲說何者
이 때 그가 “불살생에 관해서입니다”라고 말한다면 마땅히 다시 묻기를, “살생하지 않음에도 세 가지 구별이 있으니, 탐내지 않음과 노여워하지 않음과 어리석지 않음이 그것이다. 무엇을 설해야 하는가?”라고 한다. 이 때 만약 그가 “탐내지 않음에 관해서 입니다”라고 한다면 마땅히 다시 묻기를, “탐내지 않음에도 두 종류가 있으니, 마음먹고 탐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경우와 저절로 탐욕이 없는 경우가 있다. 무엇을 설해야 하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이와 같이 논하는 것을 이름하여 분별기론(分別記論)이라 한다.
028_0398_c_07L若言 不殺應問不殺有三種不貪不恚爲說何者若言不貪應問言不貪 有二種作及無作爲說何者如是等 名爲分別記論
힐문기론(詰問記論)이란, 만약 어떤 사람이 법을 물어 올 경우 마땅히 그에게 반문하기를, “법은 많거늘, 그대는 무엇을 묻고자 하는가?”라고 하는 것이다. 그를 위해 과거, 미래, 현재 내지 작위(作爲), 무작(無作)을 분별하지 않으며, 그가 만일 초심자라면 분별하여 설법해 주고, 만일 알면서도 고의로 묻는 자라면 도리어 반문하여 그가 스스로 대답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을 힐문기론이라 한다.
028_0398_c_11L詰問論者若有問 應反詰法有衆多汝問何者不爲 分別若過去未來現在乃至作無作 若軟心者爲分別說若諂曲者則還 反問令彼自答是名詰問論
지기론(止記論)이란, 만약 어떤 사람이 묻기를, “세계는 끝이 있는가, 끝이 없는가?”라고 묻는다면, 이 같은 질문이란 마치 허공에 핀 꽃술을 가리켜 향기가 난다거나 향기가 나지 않는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과도 같다.101) 이것을 지기론이라 부른다.
이미 기별[別]하는 것과 기별하지 않는 것[無記]에 대하여 설명하였으니, 이제 열두 가지 대상을 지니는 것[有對]102)에 대해 설명하겠다.
028_0398_c_15L止記論 若有問言世有邊耶世無邊耶是等如虛空花鬘不可記言香與不 是名止記論已說記無記十二有 對今當說
열두 가지 계는 대상을 지니고
한 가지 계는 일부분이라고 말한다,
열 가지 계와 일곱 계는 대상을 지니고
한 가지 계의 일부분도 그렇다.
경계의 대상을 지님과
장애 및 연을 말한다.
028_0398_c_19L 十二界有對
一界說少分
十界七有對
一少分亦然
說境界有對
障㝵及與緣
눈ㆍ귀ㆍ코ㆍ혀ㆍ몸의 계 및 일곱 가지 마음의 계, 이 열두 계를, 대상을 지니는 것이라고 한다. 법계 가운데 일부분도 역시 대상을 지니는 것이라고 설한다. 즉 심법이 그것이다. 또한 열 가지 색계를 대상을 지니는 것이라고 한다. 일곱 가지 심계와 법계의 일부분도 역시 대상을 지니는 것이라고 말한다.
028_0398_c_21L 眼耳鼻舌身界及七心界此十二界 說有對法界中少分亦說有對謂心 又十色界說有對七心界及法界 少分亦說有對
【문】이 가운데 어떤 것을 대상을 지니는 것이라고 하는가?
此中說何等有對
028_0399_a_02L【답】경계의 대상을 지니는 것103)과 장애와 연을 말한다. 즉 세 가지 대상을 지니는 것이 있으니, 경계를 대상으로 지니는 것이 있고 장애물을 대상으로 지니는 것이 있으며 연을 대상으로 지니는 것이 있다.
028_0399_a_02L說境界有對障㝵及與緣三種有 境界有對障㝵有對緣有對
경계를 대상으로 지니는 것104)이란『시설경(施設經)』105)에 말하는 바와 같이 눈은 색과 대하고 나아가 뜻은 법과 대한다. 이미 의계(意界)에 대해 설명했으니, 그것은 이미 일곱 가지 심계와 법계의 일부분에 관해서 말한 것이라고 마땅히 알아야 한다. 때문에 열두 가지 계와 한 가지 계의 일부분은 대상을 지님을 알아야 한다. 다섯 가지 외계(外界)106)와 법계의 일부분은 곧 대상을 지니지 않는다. 경에서 설하듯이 “뭍을 보면 곧 물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이처럼 자세히 설명되는 것이다.
028_0399_a_04L境界 有對者如施設經所說眼與色對乃 至意與法對已說意界當知已說七 心界法界少分是故當知十二界一 界少分是有對五外界法界少分是 無對如彼經等說若觀陸則不觀水 如是廣說
장애물의 대상을 지닌다는 것[障礙有對:Alambanapratighāta]은 이른바 각각 상대하여 각각의 처소에서 장애되는 것이다. 만약 그곳에 한 가지가 있게 되면 두 번째가 머물 곳은 없게 된다. 극미(極微)의 쌓임인 까닭이며 장애되는 까닭이며 나뉠 수 있는 까닭이며 어떤 장소에 근거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러니 여덟 가지 대상이 없는 것은 이 가운데서 자세히 설명되어야 한다고 알아야 한다.
028_0399_a_10L障㝵有對者謂各各相對 各各處障㝵若彼有一則無第二住 極微聚故障㝵故可分故據處所故 當知八無對此中應廣說
연의 대상을 지닌다107)고 함은 마음과 마음의 법은 경계에서 전개됨을 말한다. 그러니 마땅히 이와 같이 말해야 한다.
만약 법이 경계의 대상을 지닌다면 그 법에는 장애의 대상이 있는 것인가?
이 경우 마땅히 4구(句)의 논리로 구별해야 한다.
혹은 경계의 대상을 지니면서 장애의 대상을 지니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일곱 가지 심계 및 마음과 상응하는 법계가 그것이다.
028_0399_a_13L緣有對者 心心法於境界轉應如是言若法境 界有對彼法障㝵有對耶應作四句 或境界有對非障㝵有對者七心界 及心相應法界
혹은 장애의 대상을 지니면서 경계의 대상을 지니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다섯 가지 외계가 그것이다.
혹은 경계의 대상을 지니면서 장애의 대상을 지니는 경우가 있으니, 다섯 가지 내계(內界)108)가 그것이다.
혹은 경계의 대상을 지니지도 않고 장애의 대상을 지니지도 않는 경우가 있으니 법입처에 포섭되는 색과 무위(無爲)와 심불상응행이 그것이다.
028_0399_a_17L或障㝵有對非境界 有對者五外界或境界亦障㝵有對 五內界或非境界亦非障㝵有對 法入所攝色無爲心不相應行
[그렇다면] 만약에 법이 경계의 대상을 지닌다면 그것은 연의 대상을 지니는가? 곧 연의 대상을 지닌다는 것은 곧 경계의 대상을 지니는 것이기도 하다.109) 혹은 경계의 대상을 지니면서 연의 대상을 지니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이른바 다섯 가지 내계가 그것이다.
028_0399_a_20L法境界有對彼緣有對耶謂緣有對 是境界有對或境界有對非緣有對 謂五內界
유루(有漏)는 열다섯 가지 있으니,
나머지는 두 가지이고, 세 가지는 삼유(三有)에 있네.
욕계(欲界)에만 네 가지 유가 있고
열한 가지는 두 가지 유(有)에 있네.
028_0399_a_23L 有漏有十五
餘二三三有 欲有中有四 十一在二有
028_0399_b_02L[18계 가운데] 15계(界)는 오로지 유루이다. 즉 다섯 가지 내계와 다섯 가지 외계와 다섯 가지 인식계가 그것이다.
[이 15계는] 번뇌가 생겨난 바이기에, 번뇌를 낳기에, 번뇌가 의지하기에, 번뇌가 그 가운데서 일어나기에 ‘유루’라 말하는 것이다. 마치 길에서 두려움을 지니듯, 번뇌와 함께 하기 때문에 유루라고 하는 것이다. 유루라는 것은 마치 독약을 섞은 밥과 같은 것이다.
028_0399_b_02L 十五界一向有漏五內界五外界識界漏所生故生漏故漏處故漏於 中起故說有漏如前有怖畏與漏俱 故說有漏如雜毒食
‘나머지는 두 가지’란, [18계 가운데] 나머지 세 가지 계 즉 의계(意界)ㆍ법계(法界)ㆍ의식계(意識界)의 이 세 가지 계가 두 가지로 구분되어 혹은 유루이며 혹은 무루인 것이다. 만약 번뇌가 생겨난 바라면 그것은 유루이며, 이와 다르다면 곧 무루(無漏)인 것이다.
‘세 가지는 3유에 있다’란, 의계(意界)와 법계(法界)와 의식계는 3유(有) 즉 욕유(欲有)와 색유(色有)와 무색유(無色有) 가운데서 얻게 됨을 말한 것이다.
무루란 곧 결박되지 않는 것이다. 비록 삼계의 몸 가운데서 [무루를] 얻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자성(自性)으로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028_0399_b_06L餘二者意界意識界此三界二種或有漏或無 若漏所生是有漏相違則無漏三有者意界法界意識界三有中可 欲有色有無色有無漏者是不繫 雖三界身中得非自性得故
‘욕계에만 네 가지 유가 있다’란, 냄새와 맛의 계와 이것들을 경계로 삼는 식(識)은 색계와 무색계에는 있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물질식[揣食]110)의 욕망을 벗어난 세계이기 때문이다. 나머지 세 가지 입(入)111)은 물질식의 성질을 지니고 있다.
그 [색계]에는 마땅히 촉감이 없어야 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촉입(觸入)의 성질에 두 종류가 있다. 혹은 물질식의 성질을 지닌 경우도 있고 혹은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즉 물질식이 아닌 것은 색계에 존재하니 그곳에는 물질식의 성질이 없다. 몸이 미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냄새와 맛은 오로지 물질식의 성질을 지니고 있다. 때문에 그곳에서는 존재하지 않으며, 경계가 없기 때문에 그에 대한 인식[識]도 역시 없는 것이다.
028_0399_b_11L欲界中有 四者香界味界及此境界識非色無 色界離揣食欲故三入是揣食性亦應無觸者此則不然觸入性有二 或是揣食性或非非揣食者在色 界彼無揣食性以身微妙故香味一 向揣食性是故彼無境界無故彼識 亦無
【문】그곳에는 맛과 냄새도 없고 그에 대한 인식도 없다면 코와 혀의 계 역시 마땅히 없어야 할 것이 아닌가?
028_0399_b_18L彼無香味亦無彼識者鼻界 舌界亦應無
【답】모든 기관(根)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며, 또한 모든 근은 전전하면서 서로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열한 가지는 두 가지 유에 있다’란, 욕유와 색유에는 다섯 가지 내계와 색ㆍ소리ㆍ촉감의 계 및 이들을 경계로 하는 인식의 이 열한 가지가 있음을 말한다. 무색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무색계는 색의 성질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028_0399_b_19L具諸根故諸根展轉 相持故十一在二有者欲有色有內界色聲觸界及此境界識此十一 非無色界離色性故
유각(有覺)ㆍ유관(有觀)은 다섯 가지이며
세 가지 행(行)은 세 가지이고 나머지에는 없다.
연(緣)을 지닌 것은 마땅히 일곱 가지임을 알아야 하니
법입은 일부를 말한다.
028_0399_b_22L 有覺有觀五
三行三餘無
有緣當知七
法入說少分
028_0399_c_02L‘유각ㆍ유관112)은 다섯 가지이다’란 5식계(識界)가 유각ㆍ유관인 것을 말한다.113)왜냐하면 [사유가] 거칠기 때문이다. 나아가 범천계114)에 이르기까지이며 그보다 높은 경지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115)
‘세 가지 행은 세 가지이다’라고 한 것은, 의계(意界)와 의식계(意識界)와 마음과 상응하는 법계(法界)의 이 세 가지 경계에서는 세 종류의 상태가 있음을 말한 것이다. 즉 욕계(欲界)및 초선(初禪)의 경지는 유각ㆍ유관이며, 중간선(中間禪)116)의 경지는 무각ㆍ유관이다. 그보다 높은 경지 및 일체의 불상응법에서는 무각ㆍ무관이다.
028_0399_b_24L 有覺有觀五者五識界有覺有觀乃至梵世非上地三行三者三界 三種意界意識界心相應法界欲界 及初禪有覺有觀禪中閒無覺有觀 上地及一切不相應法無覺無觀
【문】유각유관의 경지의 법에는 네 가지 구분이 있다. 즉 유각ㆍ유관, 무각ㆍ유관 ,무각ㆍ무관 ,비유각유관ㆍ비무각무관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유각ㆍ유관인가?
028_0399_c_06L 有覺有觀地法有四種或有覺有觀 無覺有觀無覺無觀非有覺有觀非 無覺有觀非無覺無觀云何有覺有
【답】욕계 및 초선(初禪)의 각관을 제외한 나머지 마음과 마음의 법이 그것이다.
028_0399_c_10L答曰欲界及初禪除覺觀諸餘心 心法
【문】어떤 것이 무각ㆍ유관인가?
云何無覺有觀
【답】각이다.
答曰
【문】어떤 것이 무각ㆍ무관인가?
028_0399_c_11L云何無 覺無觀
【답】색과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 행(行)이 그것이다.
色心不相應行
【문】어떤 것이 비유각유관이며 비무각유관이며 비무각무관인가?
028_0399_c_12L云何非有 覺有觀非無覺有觀非無覺無觀
【답】관이다.117)
‘나머지에는 없다’란, 나머지는 유각도 아니고 유관도 아니라는 것이다. 대상[緣]이 없기 때문이다.
‘대상을 지닌 것118)은 마땅히 일곱 가지임을 알아야 하니, 법입은 일부를 말한다’란, 일곱 가지 마음의 계는 대상을 지님을 말한다. 이것은 대상이 있는 까닭에 대상을 지닌다고 말한 것이다. 이는 마치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있을 경우‘아들을 지닌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표현이다.
028_0399_c_13L觀餘無者謂餘非有覺非有觀緣故有緣當知七法入說少分者心界說有緣有此緣故故曰有緣人有子謂之有子
법계의 일부분이 대상을 지닌다면 심법(心法)이 되며, 일부의 대상을 지니지 않는다면 비심법(非心法)이 된다. 즉 안식(眼識)및 그와 상응하는 법은 색을 연하고 나아가 신식(身識) 및 그와 상응하는 법은 촉을 연하고, 의식(意識) 및 그와 상응하는 법은 일체의 법을 연하는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말하자면 일체법으로써 경계를 삼는다는 것으로 반연(攀緣)의 뜻은 아니다. 눈과 몸의 인식도 역시 이와 동일하다].
028_0399_c_17L法界少分有緣者 心法少分無緣者非心法謂眼識及 相應法緣色乃至身識及相應法緣意識及相應法一切法緣◀謂以一切法爲境界耳攀緣義上眼身識亦同此▶
아홉 가지는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지만 나머지는 두 가지로 구분된다.
유위(有爲)와 무위(無爲)가 함께 하는 것은 하나이고
오로지 유위인 것은
열일곱 계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028_0399_c_21L九不受餘二
爲無爲共一
一向是有爲
當知十七界
028_0400_a_02L‘아홉 가지는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란, 아홉 계가 받아들이지 아니함을 말한 것이다. 가령 색이 현재로서 근(根)에 속하는 것과 근을 떠나지 않는 것이 있으니 이것을 받아들임[受]이라고 한다. 만약 이것이 끊어지고 허물어지고 쪼개지고 갈라져서 핍박될 경우, 마음과 마음의 법을 받아들이게 된다. 여기에서 [마음과 마음의 법이] 멈추고 머물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과 다를 경우 영향을 받지 않게 되는데, 그래서 아홉 계는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일곱 가지 마음의 계와 소리의 계 및 법계 등이니, [이것들은] 끊어지고 허물어지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028_0399_c_23L 九不受者九界不受受名若色現在 根數及不離根若此斷壞破裂逼迫 心心法受於彼止住故異則不受九界不受七心界聲界法界無斷壞
‘나머지는 두 가지’란, 다섯 가지 내계는 현재에서는 곧 외부의 영향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 끊음 등의 앎[斷知]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와 미래의 세계에서는 영향을 받지 않으니, 마음과 마음의 법이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색ㆍ냄새ㆍ맛ㆍ촉감의 경우 현재이거나 근을 떠나지 않았다면 곧 외부의 영향을 받아들인다. 마음과 마음의 법이 근(根) 가운데 멈추고 머물 경우와 같이 그 가운데서도 역시 그러한 것이다. 아직 근(根)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028_0400_a_05L餘二者五內界現在是受起斷等 知故過去未來是不受心心法不住 色香味觸若現在及不離根是受 如心心法根中止住彼中亦爾不離 根故
‘유위와 무위가 함께 하는 것은 하나’라고 한 것은, 한 법계만은 유위와 무위를 지님을 말한 것이다. 이 가운데 세 가지는 항상하기 때문에 무위이다. 나머지 법은 무상하기 때문에 유위이다. 때문에 유위와 무위가 함께 한 법계에 존재하는 것이다.
‘오로지 유위인 것은 열일곱 계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란, [법계를 제외한] 17계는 무상(無常)하기 때문에 오로지 유위임을 말한다. 생멸(生滅)하기 때문이고, 세 가지 유위의 모습이 이루어지는 곳이기 때문이고, 원인이 있기[有因] 때문이고, 음(陰)에 떨어지고 세간에 떨어지기 때문이며, 둔함과 중간과 상 등의 구별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과 서로 다르다면 그것은 무위이다.
028_0400_a_09L爲無爲共一者一法界有爲無 於中三種常故無爲餘法無常故 有爲是故爲無爲共一一向是有爲 當知十七界者十七界無常故一向 有爲生滅故三有爲相所成故有因 墮陰故墮世故軟中上故與上相 違是無爲
죄와 과보가 있거나
오염되고 은몰(隱沒)한 마음
닦고 익히는 데에 열 가지가 있고
한 가지 계 가운데 견해가 있으며
또한 유심법(有心法)이라고 설한다
하나의 계는 곧 견해의 성질이다.
028_0400_a_15L 有罪及有報
染污及隱沒
修習則有十
一界中有見
亦說有心法
一界是見性
일곱 가지 마음의 계와 색ㆍ소리ㆍ법계는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혹은 유죄인 경우도 있고 혹은 무죄인 경우도 있다. 즉 오염된 마음은 유죄이며 오염된 마음이 아닌 경우는 무죄인 것이다. 유죄ㆍ무죄와 같이 염오와 은몰 또한 이와 같다.
5식계(識界)와 색계와 성계(聲界)에서는 선이건 악이건 과보가 있다. 그러나 무기(無記)의 경우는 과보가 없다.
또한 의계(意界)와 의식계(意識界)와 법계의 경우 불선이거나 선한 유루인 것은 과보가 있지만 무기와 무루인 것은 과보가 없다.
028_0400_a_17L 七心界色聲法界二種或有罪或無 穢污是有罪不穢污是無罪如有 罪如無罪如是穢污隱沒亦如是識界色界聲界若善不善是有報無記是無報意界意識界法界若不 善善有漏是有報若無記無漏是無
【문】무엇 때문에 불선이거나 선한 것은 과보가 있고 무기와 무루인 것은 과보가 없는 것인가?
028_0400_a_24L以何等故不善善有漏是有報記無漏是無報
028_0400_b_02L【답】비유하면 씨앗을 뿌릴 경우 세 가지 조건이 화합하여 싹이 돋아나는 것과 같다. 가령 단단하고 알찬 씨앗이 있는데, 여기에 물을 대주고 풀이나 흙으로 덮어 주면 자체의 성질과 여러 가지 도구의 힘 때문에 싹과 잎이 생기게 된다. 하지만 단단하고 알찬 씨앗이 비록 있다고 하더라도 물을 대주지 않고 풀과 흙으로 덮어 주지 않으면 여러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싹과 잎이 생기지 못한다. 또한 씨앗이 알차지 못할 경우 비록 물을 대주고 풀과 흙으로 덮어 준다고 하더라도 자성이 견실하지 못한 까닭에 싹과 잎이 생겨나지 못한다. 외부의 조건과 씨앗에 세 가지 일의 차별이 있듯이 이와 같이 내부의 연이 일어나는 일에도 세 가지 일의 차별이 있는 것이다.
028_0400_b_02L譬如外種三事和 合生有種堅實漑之以水覆以草土 自性衆具力故牙葉得生有種雖堅 不以水漑不草土覆衆緣不具故 牙葉不生有種不實雖漑以水覆以 草土自性不實故牙葉不生如外種 三事差別如是內緣起亦三事差別
가령 첫 번째 씨앗과 같이 불선이거나 선한 유루의 법이 견고하면서 여기에 갈애[愛]라는 물을 주고 남아 있는 번뇌[結]의 흙을 덮어 준다면 자체의 성질과 많은 연의 힘 때문에 유(有)라는 싹이 돋아나게 된다.
또한 두 번째 씨앗과 같이 무루법(無漏法)이 비록 단단할지라도 갈애라는 물을 주거나 번뇌라는 흙을 덮어 주는 일이 없다면 인연이 갖추어지지 않은 까닭에 유(有)라는 싹은 생겨나지 않는다.
또 세 번째의 씨앗과 같이 무기의 법은 비록 여기에 갈애라는 물을 주고 번뇌라는 흙을 덮어 준다고 하더라도 자체의 성질이 부실하다면 유(有)라는 싹은 돋아나지 않는 것이다.
028_0400_b_08L 如初種如是不善善有漏法堅固以愛水覆以餘結以自性衆緣力故 有牙得生如第二種如是無漏法堅 無愛水漑及餘結覆因緣不具故 有牙不生如第三種如是無記法漑以愛水覆以餘結自性不實有牙 不生
‘닦고 익히는 데에 열 가지가 있다’란, 일곱 가지 마음의 계와 색ㆍ소리의 계에서 선은 닦는 것이고 불선이나 무기는 닦지 않음을 말한다. 또한 법계에서 선(善)ㆍ유위(有爲)의 경우에는 닦게 되지만 불선ㆍ무기 및 수멸(數滅)119)의 경우는 닦지 않는다.
028_0400_b_15L修習則有十者七心界色聲界 善者修不善無記者不修法界善有 爲修不善無記及數滅不修
【문】무엇 때문에 불선이거나 무기, 또는 수멸의 경우는 닦지 않는가?
028_0400_b_17L以何 等故不善無記及數滅是不修
【답】사랑할 만한 과보가 있기 때문에 닦는 것인데, 불선이거나 무기의 경우는 사랑할 만한 과보가 없기 때문에 닦지 않는다. 또 수멸의 경우는 본질적으로 과보가 상속하여 생겨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닦지 않는다. 그러니, 여덟 가지 계에는 죄도 없고 과보도 없고 오염된 것도 없고 은몰(隱沒)된 것도 없기에 닦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028_0400_b_18L愛果故修不善無記無愛果故不修滅性是果不相續生故不修當知八 界無罪無報無染污無隱沒不修
‘한 가지 계 가운데 견해가 있다’란, 법계 가운데는 여덟 가지 견해가 있음을 말한 것이다. 곧, 신견(身見) 등의 다섯 가지 견해[五見]120)와 세속의 등견(等見; 正見)과 유학견[學見]과 무학견(無學見)이 그것이다.
028_0400_b_21L界中有見者法界中有八種見身見 等五見世俗等見學見無學見
028_0400_c_02L견(見)이라 함은 자세히 살펴보기 때문이다. 또한 결정적이기 때문이며 견고히 받아들이기 때문이며 대상[緣]이 깊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마치 어두운 밤에 색을 보는 것과 같으니 오염된 지혜로 법을 보는 것도 그와 같다. 또 개인 밤에 색을 보는 것처럼 세속의 등견도 이와 같고, 그늘진 낮에 색을 보는 것처럼 유학의 견해도 그와 같으며, 맑게 개인 낮에 색을 보는 것처럼 무학(無學)의 견해 역시 그와 같은 것이다.121)
028_0400_b_23L見者視故決定故堅受故緣深入故如陰 夜見色穢污慧見法亦如是如晴夜 見色世俗等見亦如是如陰晝見色 學見亦如是如晴晝見色無學見亦 如是
‘또한 유심법(有心法)이라고 설한다’란, 곧 이 법계에는 마음의 법이 있음을 말한 것이다. 이른바 수(受)ㆍ상(想) 등이 그것이니, 이 심법(心法)이 존재하기 때문에 유심법이라고 설한 것이다.
17계와 일계(一界)122)의 일부는 심법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하나의 계는 곧 견해의 성질이다’라고 한 것은, 한 계가 견해의 성질을 지니고 있음을 말한다. 이른바 안계가 능히 [사물을]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16계와 안계의 일부분은 견(見)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028_0400_c_05L亦說有心法者卽此法界有心 謂受相等有此心法故說有心法 當知十七界及一界少分非心法界是見性者一界是見性謂眼界能 視故當知十六界及一界少分非見
【문】어떤 것이 견(見)인가? 눈이 본다고 해야 하는가? 안식(眼識)이 본다고 해야 하는가? 눈의 안식과 상응하는 지혜로 본다고 해야 하는가? 아니면 [이러한 조건들이] 화합해서 본다고 해야 하는가? 이 해석들에 과실이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즉 만약 눈이 본다고 한다면 나머지 다른 인식 작용이 함께 할 때는 왜 보지 못하는가? 왜 모든 경계를 함께 얻지 못하는가? 또 만약 안식이 본다고 할 경우 인식하는 모습은 실제로 보는 모습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눈이 없는 사람 역시 보아야 할 것이다.
028_0400_c_09L 云何見爲眼見爲眼識見爲眼識 相應慧見爲和合見彼何所疑一切 有過若言眼見者餘識俱時何故不 何故不俱得一切境界若言眼識 見者識相非見相無眼者亦應見
또 만약 안식과 상응하는 지혜로 본다고 한다면 또한 이식(耳識)과 상응하는 지혜로 소리를 듣는 것인가? 또 만약 [조건들이] 화합하여 보게 된다고 한다면 이것은 일정하지 않다. 때에 따라서 안식에는 스물 두 가지 법이 있는 경우도 있고, 혹은 스물한 가지 법이 있는 경우도 있으며 혹은 열두 가지가 있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028_0400_c_14L言眼識相應慧見者復以耳識相應 慧聞耶若言和合見者此則不定時眼識二十二法或二十一或十二
【답】자신의 눈이 색을 본다.
  그 안식이 보는 것은 아니며
  지혜도 아니고 화합해서도 아니다
  가로막힌 색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028_0400_c_17L 自分眼見色
非彼眼識見
非慧非和合
不見障色故
  자신의 눈이 보기 때문에 다른 인식 작용이 함께 할 때는 보지 못한다. 다른 인식 작용이 함께 해서 본다고 한다면, 빈 눈이 자기 앞에 나타나 자신의 것이 아닌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인으로 일체의 경계를 함께 얻을 수는 없는 것이며, 독자적인 몫이 있는 여러 근(根)은 함께 다른 인식 작용이 머무는 근이 될 수 없기 때문에 독자적인 몫[自分]이라 표현하는 것이다. 두 가지 인식 작용은 함께 행해지지 못하니, 두 번째 차제연(次第緣)이 없기 때문이다.
028_0400_c_19L自分眼見色是故餘識俱時則不見 以餘識俱空眼現在前非自分故是因故不俱得一切境界自分諸根 不俱識住根故名自分無有二識俱 無第二次第緣故
【문】만약 안식을 떠나서 색을 보지 못한다면 이것은 인식 작용이 보는 것이지 눈이 보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눈은 무슨 작용을 하는가?
028_0400_c_24L若眼離識不 見色者是則識見非眼見眼復何用
028_0401_a_02L【답】인식이 이루어진다면 그 작용 역시 이루어진다. 그것이 자신의 몫이 아니라면(非分) 그것은 곧 인(因)이 몫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수(受)가 상(想)을 떠나지 않고 상이 수를 떠나지 않듯이 그 역시 이와 같다.
028_0401_a_02L識成彼則成彼非分則因非分故 如受不離想想不離受彼亦如是
만약 안식이 [사물을] 본다고 한다면 무엇이 또한 [사물을] 인식하겠는가? 만약 지혜가 사물을 본다고 한다면 무엇이 또한 사물을 인식하겠는가? 만약 이러한 조건들이 화합해서 사물을 본다고 한다면 이러한 여러 가지 법의 사업(事業)은 각기 그 내용이 다를 것이다. 간격이 있으면 화합할 수 없나니, 만약 화합해서 사물을 본다고 한다면 마땅히 두 가지 결정적인 자체의 본성[法]이 있어야 하는데, 이 내용은 그렇지 않다.
만약에 다시 안식으로 사물을 본다고 한다면 마땅히 가로막힌 색도 볼 수 있어야 하나니, [안식은]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지혜 및 화합의 경우도 또한 이와 마찬가지이다.
028_0401_a_04L眼識見者誰復識耶若慧見者誰復 知耶若和合見者此等諸法事業各 異其義有間則無和合若和合見者 則應有二決定自法是義不然若復眼 識見者應見障色以無對故慧及和 合亦復如是
안식은 대상이 없기에 가로막힌 색을 식별하지 못한다고, 곧 볼 수 없다고 한다면 이는 그렇지 않다. 당연히 분별해야 하기 때문이다. 분별의 측면에서 말한다면 “왜 안식은 가로막힌 색을 인식하지 못하는가?”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 경우 아마 눈과 한 경계에서 전개하는 것이기 때문에 안식은 가로막힌 색을 인식할 수 없는 것이다. 눈은 대상이 있으며, 대상이 있기 때문에 가로막힌 색을 보지 못한다. 때문에 안식도 [가로막힌 색을] 인식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에 안식으로 본다면] 인식에는 마땅히 두 가지 자성(自性)이 있어야 하는데, 인식하거나 보는 작용이 그것이다. 나머지도 또한 이와 같다.
또한 안식이 본다고 한다면 왜 인식은 그렇지 않은가? 이미 안식은 가로막힌 색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눈과 한 경계에서 전개하기 때문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028_0401_a_10L以眼識無對不識障色 謂不見者不然應分別故分別者應 何故眼識不識障色應說眼一境界 轉故是故眼識不識障色眼有對對故不見障色是故眼識不識識應 有二自性若識若見餘亦如是又復 眼識見者何故不識已知眼識不識 障色復應知眼一境界轉故
마땅히 다시 설하겠다. [안식은] 장애가 있으며 대상에 의지하는 까닭에 가로막힌 색을 인식하지 못한다고 한다면, 이는 그렇지 않다. [안식에는] 대상없는[無對] 의지처가 있기 때문이다. 안식에는 두 가지의 의지처가 있으니, 눈과 차제멸(次第滅)하는 뜻[意]이다. 만약에 대상 있는 의지처를 지니기 때문에 가로막힌 색을 보지 못한다고 한다면, 대상 없는 의지처를 지니는 경우에는 마땅히 가로막힌 색을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와 다르게 말한다면 그것은 과실이 있는 말이다.
028_0401_a_17L當復說 有對依故不識障色者不然有無對 依故眼識二種依眼及次第滅意有對依故不見障色者無對依故應見 障色異說有過
눈은 곧 고유의 의지처이고 뜻은 공통의 의지처라면, [안식이] 가로막힌 색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 의지처가 색 등의 모습에서 독자적인 몫[分]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 역시 그렇지 않다. 또한 눈은 곧 색인 까닭에 안식도 곧 색이라고 한다면, 이 또한 그렇지 않다. 눈이 연을 지니지 않는 까닭에 [안식도] 연을 지니지 않는다는 것도 그렇지 않으며, 눈이 상응하지 않는 까닭에 [안식도] 상응하지 않는다고 하면 그 역시 그렇지 않다. 이와 같은 설은 모두 허물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028_0401_a_21L眼是不共依意是共 不見障色者不然依者於色等相 非分亦非眼是色故眼識是色亦非眼無緣故無緣亦非眼不相應故不 相應如是等皆有過
028_0401_b_02L또한 뜻[意]도 고유한 의지처이다. 만약 뜻에 의지하여 안식이 생긴다고 한다면 일찍이 그것에 의지하여 다른 인식은 생긴 일이 없을 것이다. 마음은 하나하나가 상속하여 전개되기 때문이니, 그런 까닭에 뜻도 고유한 의지처이다.
견(見)과 인식의 무간식(無間識)이 본다고 한다면, 이 역시 그렇지 않다. 네 가지 허물어지지 않는 일[不壞]이 있기 때문이다. 세존께서는 보고 듣고 느끼고 인식하는 네 가지 일은 허물어지지 않는 네 가지 일이라 말씀하셨다. 만약 인식이 곧 본다고 한다면 오직 듣고 알아채고 인식하는 세 가지 일만이 있어야 할 것이니, 보는 것이 곧 인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지는 않은 것이다. 때문에 마땅히 알아야 하니 눈으로 보는 것이다.
028_0401_b_02L復次意亦是不 共依若依意眼識生未曾依彼餘識 心一一相續轉故是故意亦是不 共依見識無閒識卽見者不然四種 不壞故世尊說見識四種 不壞若識卽見者唯聞識三種卽識故不如是是故當知眼見
인식의 작용을 분별하여 네 가지를 세운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가로막힌 색을 보지 못한다는 것에 관해서는 이미 잘못임을 말한 바이다. 인식과 보는 일에는 간격이 있는 것이고 표현과 내용이 각기 다르다. 눈빛으로 비추어 보는 것을 ‘본다’고 하며, 마음을 따라 분별하는 것을 ‘인식한다’고 하는 것이다.
028_0401_b_08L識用 分別建立四種者不然不見障色已說過識見有閒名義各異眼光照 名爲見心隨分別 名爲識
또한 ‘눈으로 본다’고 한다면, 그리고 ‘그것은 마땅히 눈이 지닌 분량[量]으로 재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는 스스로 과실을 낳는 것이다. 인식에는 한량이 없기 때문이다. 인식에 한량이 없다는 것은 세존께서 말씀하신 바이다.
세존께서‘눈으로 본다’ 라고 말씀하셨던 것과 같다. 따라서 인식으로 본다고 한다면 이는 그렇지 않다. [이것은] 뜻이 법을 인식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또한 다른 법 가운데에서도 인식하는 것이 있는가? 만약 그것이 곧 뜻이 법을 인식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눈의 경우도 역시 이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028_0401_b_12L若復言眼見彼應稱眼量者 彼自生過識無限量故識無限量尊所說如世尊說眼有見而謂識見者 不然如言意識法復有餘法於中識 若言卽意識法者當知眼亦如是
곧, “범지(梵志: brahmaṇa)여, 눈은 곧 문을 뜻하니 [그 문을 통하여] 색을 보는 까닭이다. 이 【문】은 견의 다른 이름이니, 그대는 설해진 것에 대해 잘못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과 마음의 법에는 방향과 일정한 장소가 없거늘 [마음이] 나가고 들어온다고 말한다면, 이는 그렇지 않다” 곧 경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뜻[意]은 곧 문(門)인 것이다. 그것으로 법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법 가운데에서 법을 식별하는 것은 없다. 때문에 눈이 그 가운데서 곧 보는 것이다.[안식(眼識)이 보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여기까지의 7장 모두에서 처음 한 장은 힐문(詰問)하여 아닌 것을 판별하고 나머지 6장은 분석하고 풀이해서 인식 등이 ‘보는 것’이 아님을 판별한 것이다. 다른 사람이 그 집착한 바에 따라 서술하는 것을 제어하고, 마지막에는 진실을 검토하여 틀린 것을 경책함으로써 자기의 뜻을 이룬 것이다].
028_0401_b_16L如所說梵志眼是門爲見色故此見 之異名汝於所說妄解心心法無方 處而言出入者不然卽彼契經說是門爲識法故更無異法於中識法 是故眼中卽見◀從眼識非見至此凡七章初詰問辯非餘六章辯析釋識等非見物異人異敍其所執終則撿實罰違以成己義▶
극미(極微)의 수는 열 가지이고
아홉 계는 4대(大)로 만들어진 것
두 계는 일부만을 말하고
내계는 열둘이라고 한다.
이것은 곧 근(根)의 성질이고
한 가지 계 가운데 근이 있는 것이다.
028_0401_b_22L極微數有十
九界四大造
二界說少分
內界說十二
此卽是根性
一界中有根
028_0401_c_02L‘극미의 수는 열 가지’라고 한 것은, 열 가지 색계는 극미가 모인 것임을 말한다. [거기에는 각기] 한계가 있고[有分] 덮여 가로막힌 것이 있고 큰 걸림돌이 되는 곳이며 각기 근거로 삼는 곳이기 때문이다. 나머지 여덟 가지 계는 극미가 모인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아홉 계는 4대로 만들어진 것’이라 한 것은, [열 가지 색계 가운데서] 촉계(觸界)를 제외한 나머지 아홉 계는 4대(大)로 만들어진 것임을 말한 것이다. 그것은 4대가 낳은 것이며 4대가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4대는 이 여러 계와 더불어 다섯 가지 인이 되어 생하니, 생인(生因)ㆍ의인(依因)ㆍ건립인(建立因)ㆍ양인(養因)ㆍ장인(長因)이 그것이다.123)
028_0401_b_24L 極微數有十者十色界是極微聚分故覆障故大㝵故據處所故當知 八界非極微聚九界四大造者除觸 餘九色界四大造四大所生故大因故四大與此諸界五因生生因建立因養因長因
‘두 계는 일부만을 말한다’고 했는데, 촉계(觸界)와 법계(法界)의 두 계를 마땅히 분별하면 혹은 4대로 만들어졌거나 혹은 4대로 만들어지지 않은 경우도 있음을 말한다. 촉계에서 4대의 성질은 4대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일곱 가지 조색(造色)은 4대로 만들어진 것이며, 법계 가운데 몸과 입의 업(業)도 4대로 만들어진 것이다. 다른 법계는 4대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또 일곱 가지 심계는 4대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나머지] 열한 가지는 4대로 만들어진 것이니, 안입(眼入)이 의지하는 바이고 나아가 법입(法入)이 의지하는 바가 그것이다. 그러나 의입(意入)은 [4대가 만드는 경계가] 아니다. 조색(造色)도 역시 열한 가지이다. 곧, 안입 내지 법입이 그것으로 의입은 아니다.
028_0401_c_07L二界說少分者 二界當分別觸界法界或四大造非四大造觸界中四大性非四大造 七種造色四大造法界中身業口業 四大造餘法界非四大造七心界非 四大造十一種四大眼入所依乃至 法入所依非意入造色亦十一種入乃至法入非意入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즉 “안입이 의지하는 바인 4대가 안입을 낳으니, 나머지도 또한 이와 같다” 또 어떤 사람은, “안입이 의지하는 바 4대가 3입(入) 즉 안입ㆍ신입(身入)ㆍ촉입(觸入)을 낳는다. 마찬가지로 설입(舌入)이 의지하는 곳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와 같다. 이 가운데 차별은 자근(自根)을 설하는 것이다. 신입(身入)이 의지하는 곳에서 2입(入) 즉 신입과 촉입(觸入)을 낳으며, 색ㆍ소리ㆍ냄새ㆍ맛의 입처(入處)가 의지하는 곳도 이와 같으며, 촉입이 의지하는 곳은 오직 촉입만을 낳는다”라고 말한다.
028_0401_c_14L或有說眼入所 依四大生眼入餘亦如是復有說者 眼入所依四大生三入眼入身入如是乃至舌入所依是中差別者 說自根身入所依生二入身入觸入 色聲香味入所依亦如是觸入所依 唯生觸入
028_0402_a_02L그들은 또 이렇게 말하고 있다. 즉 “일체의 4대는 색과 소리를 낳고 일체의 욕계의 색은 냄새와 맛을 떠나지 않으며, 법입(法入)이 의지하는 곳도 역시 이와 같다. 안입(眼入)이 의지하는 곳에서 7입(入)이 생기니 즉 안입과 신입(身入)과 다섯 가지 계가 그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설입(舌入)이 의지하는 곳에 이르기까지도 그러하다. 신입이 의지하는 곳에서 눈 등의 4근(根)을 제외한 6입(入)124)이 생긴다. 법입(法入)이 의지하는 곳에서도 또한 이와 같다. 색입(色入)이 의지하는 곳에서는 5입(入)을 낳으며, 나아가 촉입(觸入)이 의지하는 곳에 이르기까지도 이와 같다.
또 다른 사람은 말하기를, “안입이 의지하는 곳에서 11입(入)이 생기며, 내지 법입이 의지하는 곳에 이르기까지도 이와 같다”라고 하고 있다.
028_0401_c_20L彼又作是說一切四大生 色聲一切欲界色不離香味法入所 依亦如是眼入所依生七入眼入入及五境界如是乃至舌入所依身 入所依生六入除眼等四根法入所 依亦如是色入所依生五入乃至觸 入所依亦如是復有說者眼入所依 生十一入乃至法入所依亦如是
이 4대의 인연에서 다른 모습의 4대가 다른 모습의 조색(造色)을 일으키는 것을 분별하여 마땅히 4구(句)로써 논리를 전개해야 한다. 즉, 같은 모습의 4대가 다른 모습의 조색을 일으키기도 하고, 다른 모습의 4대가 같은 모습의 조색을 일으키기도 한다. 또한 다른 모습의 4대가 다른 모습의 조색을 일으키기도 하고, 같은 모습의 4대가 같은 모습의 조색을 일으키기도 한다.
028_0402_a_04L此四大因緣分別異相四大起異相 造色應作四句有同相四大起異相 造色有異相四大起同相造色有異 相四大起異相造色有同相四大起 同相造色
어떤 것이 같은 모습의 4대가 다른 모습의 조색을 일으키는 경우인가? 즉 촉상(觸相)의 4대가 다른 열한 가지 조색을 일으키는 경우이다.
어떤 것이 다른 모습의 4대가 같은 모습의 조색을 일으키는 경우인가? 즉 단단하고 젖어 있고 따뜻하고 움직이는 모습의 4대가 촉상의 조색을 일으키는 경우이다.
어떤 것이 다른 모습의 4대가 다른 모습의 조색을 일으키는 경우인가? 즉 단단하고 축축하고 따뜻하고 움직이는 모습의 4대가 열한 가지 조색을 일으키는 경우이다.
어떤 것이 같은 모습의 4대가 같은 모습의 조색을 일으키는 경우인가? 즉 촉상을 지닌 4대가 촉상을 지닌 조색을 일으키는 경우이다.
028_0402_a_09L云何同相四大起異相造 謂觸相四大起十一種造色云何 異相四大起同相造色謂堅濕暖動 相四大起觸相造色云何異相四大 起異相造色謂堅濕暖動相四大起 十一種造色云何同相四大起同相 造色謂觸相四大起觸相造色
【문】4대와 조색에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
028_0402_a_15L大造色何差別
【답】4대는 곧 원인[因]이며 조색은 그 결과[果]이다. 단단하고 축축하고 따뜻하고 움직이는 모습이 곧 4대이다. 그러나 만약 색으로서 4대를 원인으로 해서 생했고 게다가 4대의 모습이 없다면 그것은 곧 조색이다.
또한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이 4대이며, 볼 수 있기도 하고 볼 수 없기도 한 것이 조색이다. 이와 같은 것들로써 설명할 수 있다.
‘내계는 열둘이라고 한다’란, 내부의 다섯 가지 색과 일곱 가지 심계이니, 이 열두 가지는 곧 내계임을 말한다. 따라서 [18계 가운데 나머지] 여섯 가지 계는 외계라고 알아야 한다.
028_0402_a_16L四大是因造色是 堅濕暖動相是四大若色因四大 而無四大相彼是造色復次不可見 者四大可見不可見者造色如是等 內界說十二者內五色及七心界 此十二是內界當知六界是外
【문】법 때문에 ‘내계’라고 말하는 것인가? 사람에 속한 일인 까닭에 내계라고 하는 것인가? 만약 법 때문에 내계라고 말한다면 일체법에는 자성이 없게 되며, 만약 사람에 속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고 한다면 법에는 사람이 없게 된다.
028_0402_a_21L故說內人故說內耶若法故說內者 一切法無自若人故說內者法無有
028_0402_b_02L【답】법 때문에 내계라고 말하나, 다만 일체법이 여기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마음과 마음의 법이 의지하는 곳인 까닭에 내계라고 말하는 것이다. 저 의계(意界)는 의지처이면서 역시 의지하는 자이다. 그러나 저 다섯 색계는 의지처이지 의지하는 자는 아니다. 그리고 마음의 법은 비록 의지하는 자이기는 해도 의지처는 아니다. 나머지는 의지처도 아니고 의지하는 자도 아니다.
028_0402_a_24L法故說內但非一切法心心法 所依故說內彼意界亦依亦依者五色界是依非依者心法雖是依者 而非依餘非依亦非依者
‘이것은 곧 근의 성질이다’라고 한 것은, 곧 이 열두 가지를 근(根)이라고 말한 것이다.
‘한 가지 계는 근을 지닌다’라고 한 것은, 법계 가운데 열한 가지 법이 근이며, 나머지는 근이 아님을 말한다. 이 경우에 다섯 가지 계와 한 계의 일부분은 근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028_0402_b_04L此卽是根 性者卽此十二說根一界中有根者 法界中十一法是根餘者非根當知 五界及一界少分非根
유분(有分)과 여분(餘分)은 열일곱이고
한 계는 유분(有分)이라 말한다.
열일곱 계는 세속에 떨어지며
한 계는 소분(少分)이며 셋은 업[三業]이다.
028_0402_b_07L 分餘分十七
一界說有分
十七界墮世
一少分三業
‘유분과 여분125)은 열일곱이다’라 한 것은, 법계를 제외한 나머지 계는 각기 유분 및 여분이라고 말한 것이다. 안계(眼界)가 유분이라고 함은 세 가지 종류가 있기 때문이다. 곧 세간을 분별하여 과거에 이미 색을 보았고, 지금 현재 색을 보고 있고, 미래에 곧 색을 보게 될 것임을 말한 것이다. 유여분은 네 가지가 있다. 즉 과거에 색을 보지 못한 채 이미 소멸했거나, 현재에 색을 보지 못한 채 소멸하고 있거나, 미래세에 있어서의 두 가지 곧 불생법(不生法)과 생법(生法)이 그것이다. 생법이란 색을 보지 못한 채 소멸하게 되는 것이다. 나머지 다른 색계의 경우도 이와 같다.
일곱 가지 심계의 경우는 만약 미래의 불생법이라면 그것은 여유분이며, 나머지는 곧 유분이다.
028_0402_b_09L 分餘分十七者除法界餘界說有分 及餘有分彼眼界有分者三種世分 別故過去已見色現在今見色未來 當見色餘有分者四種過去不見色 已滅現在不見色而滅未來世二種 謂不生法及生法生法者不見色當 餘色界亦如是七心界若未來不 生法彼餘有分餘者是有分
‘한 계는 유분이다’라 한 것은, 법계는 오로지 유분이며, 여유분이 아님을 말한다. 모든 법계는 의식(意識)의 경계이기 때문이다. 만약 다른 계도 역시 남아 있는 몫이 있는 계는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의식 때문에 유분ㆍ여유분이 세워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른바 눈이 보는 색은 유분이며, 보지 못하는 색은 곧 여유분이다. 다시 말해 색이면서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유분이며, 볼 수 없는 것은 여유분인 것이다.
028_0402_b_17L一界說 有分者法界一向是有分非餘有分 以一切法界意識境界故若言餘界 亦應非餘有分者此則不然彼不以 意識故立有分餘有分謂眼見色是 有分不見色是餘有分謂色眼所見 是有分所不見是餘有分
028_0402_c_02L여기에 차별이 있다면 가령 눈이 한 가지에 유분이라면, 나머지 일체에도 각기 유분이 있으며, 만약 한 가지에 여유분이라면 나머지 일체에도 여유분인 것이다. 만약 색을 보았다면 이는 유분이며, 나머지는 아니다. 귀ㆍ코ㆍ혀ㆍ몸ㆍ소리ㆍ냄새ㆍ맛ㆍ촉감 등도 또한 이와 같다. 제일의(第一義)는 눈의 설명과 같으며, 세속적인 범주에 들어가는 것은 색(色)에 관한 설명과 같다.
028_0402_b_23L差別者若眼 是一有分餘一切亦有分若一餘有 餘一切亦餘有分色若見者是有 分非餘耳鼻舌身聲香味觸亦如是 第一義如眼說俗數如色說
【문】무릇 공유법(共有法)126)이 혹은 유분, 혹은 여유분이 되는 경우가 있는가?
028_0402_c_04L頗共 有法或有分或餘有分耶
【답】있다. 열 가지 색입(色入)은 혹은 여유분이면서 그것의 생(生) 등의 모습은 곧 유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법계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가령 불생법의 뜻[意]은 곧 여유분이며, 그것과 상응하고 공유(共有)하는 법은 유분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법계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028_0402_c_05L十色 入或餘有分彼生等相是有分法界 攝故若不生法意是餘有分彼相應 共有法是有分法界攝故
【문】유분과 여유분은 어떤 내용인가?
028_0402_c_08L有分有分有何義
【답】한정된 몫이 있을 때 유분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면 안계에 두 종류가 있으니, 업보(業報)를 지닌 몫과 업보가 없는 몫이 그것이다. 업보를 지닌 몫은 업보가 없는 몫을 위해 구분되기에 유분이라고 말하며, 업보가 없는 몫도 업보가 있는 몫을 위해 구분되기에 역시 유분이라고 말하게 된다. 두 몫은 함께 유분의 모습을 얻는 것이다.
028_0402_c_09L有分時說有分界有二種有業及無業分彼有業分 爲無業分所分故說有分彼無業分 亦爲有業分所分亦說有分二分俱 得有分相
【문】어떤 유분의 범주를 몫이라 표현하는가?
何等分數名分
【답】업보가 없는 몫[無業分]은 업보가 있는 몫[有業分]을 위해 몫이 되기에 여유분이라고 말하게 된다. 그것은 왜냐하면 업보가 있는 몫의 힘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마치 사람에게 아들이 있는 것처럼 그것 또한 이와 같은 이치이다.
028_0402_c_13L無業 分爲有業分所分故說餘有分何以 得有業分力故如人有子彼亦如
‘열일곱 계는 세속에 떨어진다’라고 했는데, 열일곱 가지 계는 3세(世)의 일에 떨어지는 까닭에 3세라고 말하니, 혹은 과거, 혹은 미래, 혹은 현재이다. 가령 일어났던 것이 이미 소멸되었다면 그것은 과거이고, 만약 아직 일어나지 아니한 것이라면 그것은 미래이다. 만약 이미 일어나 멸하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현재이다.
또한 만약 지어지지 않은 것이라면 미래라고 설하며, 만약 지어지고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현재라고 설하고, 만약 지어졌다 이미 소멸되었다면 이것은 과거라고 설한다.
028_0402_c_16L十七界墮世者十七界墮三世事 故說三世或過去或未來或現在起已滅是過去若未起是未來已起 未滅是現在復次若未作是說未來 若作是說現在若作已滅是說過去
028_0403_a_02L‘한 계는 마땅히 분별해야만 한다’라고 한 것은, 법계는 유위(有爲)일 경우에는 3세에 떨어지고, 무위(無爲)일 경우에는 3세에 떨어지지 않음을 말한다.
‘셋은 업(業)이다’라고 한 것은, 삼계는 업을 지닌다는 것이다. 이른바 색계, 성계, 법계가 그것이다. 색계에서 몸으로 짓는 것이 곧 업이다. 나머지 다른 색계는 업이 아니다. 성계에서는 입으로 짓는 것이 곧 업이다. 나머지 소리는 업이 아니다. 법계에서는 몸과 입으로 짓는 업과 생각[思]이 곧 업이다. 나머지 법계는 업이 아니다.
이 업의 모습은 업품(業品)에서 자세히 설명하겠다.
028_0402_c_20L 一界當分別者法界若有爲墮三世無爲則不墮三世業者三界有業色聲法色界身作是業謂餘色界非 聲界口作是業餘聲非業法界身 口業及思是業餘法界非業業相品當廣說
비학비무학(非學非無學)은
열다섯 계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그것은 모두 수도(修道)에서 끊나니
나머지 계는 모두 세 종류이다.
그것은 삼계(三界) 가운데서
지계(持戒)와 범계(犯戒)를 설한다.
028_0403_a_03L 非學非無學
當知十五界
彼悉修道斷
餘界俱三種
於彼三界中
說持戒犯戒
‘비학비무학은 열다섯 계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라고 했는데, 열 가지 색계와 다섯 가지 식계(識界)는 곧 비학비무학이니, 그것은 유루(有漏)이기 때문이다. 즉 이 여러 계는 수도(修道)로써 끊는데 그것은 지혜로 대치(對治)하는 [경계이기] 때문이다.
‘나머지 계는 모두 세 종류이다’라고 했는데, 여기에서 나머지 세 가지 계란 곧 의계(意界)ㆍ법계(法界)ㆍ의식계(意識界)로서 세 종류가 있다. 혹은 유학, 혹은 무학(無學), 혹은 비학비무학이며, 다시 [그 경지에 따라] 혹은 견도(見道)에서 끊기도 하고, 수도(修道)에서 끊기도 하고, 끊는 일이 없는 경우도 있다.
028_0403_a_05L 非學非無學當知十五界者十色界 五識界是非學非無學有漏故卽此 諸界修道斷智對治故餘界俱三種 餘三界意界法界意識界俱三種或無學或非學非無學或見斷修斷或無斷
유학(有學)과 상응하는 의계(意界)는 곧 유학이니, 즉 고법인(苦法忍)에서 금강삼매(金剛三昧)에 이르기까지 서로 상응하는 의(意)는 곧 유학인 것이다.
무학과 상응하는 의(意)는 곧 무학이니, 즉 진지(盡智)ㆍ무생지(無生智) 및 무학(無學)의 등견(等見)에 상응하는 의(意)는 곧 무학인 것이다.
비학비무학에 상응하는 의(意)는 곧 비학비무학이니, 즉 선(善)과 염오와 무기가 그것이다. [여기에서] 선(善)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방편으로 얻은 것과 욕망을 여의어 얻은 것과 태어나면서 얻은 것이 그것이다.
028_0403_a_11L學相應意是學謂苦法 忍乃至金剛三昧相應意是學無學 相應意是無學謂盡智無生智及無 學等見相應意是無學非學非無學 相應意是非學非無學謂善染污無 善有三種方便得離欲得生得
또한 오염[된 마음]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불선(不善)과 은몰된 무기[隱沒無記]가 바로 그것이다.
무기(無記)에는 네 가지가 있으니, 위의(威儀)ㆍ공교(工巧)ㆍ보생(報生)ㆍ변화(變化)127) [무기]가 그것이다.
의계(意界)의 경우와 같이 의식계(意識界)도 또한 이와 같다.
법계(法界)에서는 혹은 유학, 혹은 무학, 혹은 비학비무학일 경우도 있다. 즉 유학인의 몸과 입으로 짓는 업과 수음(受陰)ㆍ상음(想陰)ㆍ행음(行陰)은 곧 유학이다. [무학인의 경우라면] 이러한 것들은 곧 무학이 된다. 법계에 포섭되는 유루(有漏)의 몸과 입으로 짓는 업과 수음 ㆍ상음 ㆍ행음 및 무위(無爲)는 곧 비학비무학(非學非無學)이다.
유학과 무학의 뜻에 관해서는 앞으로 업품(業品)에서 자세히 설명하게 될 것이다.
028_0403_a_16L污有二種不善及隱沒無記無記有 四種威儀工巧報生變化如意界 意識界亦如是法界或學或無學 或非學非無學謂學身口業受想行 陰是學此卽無學法界所攝有漏身 口業受想行陰及無爲是非學非無 學無學義業品當廣說
028_0403_b_02L이 삼계128)에 있어서 인법(忍法)으로 대치(對治)하는 것은 견도(見道)에서 끊는 것이며, 지혜로 대치하는 것은 수도(修道)에서 끊는 것이다. 지혜로써 무루[智無漏]인 것은 끊어야 할 것이 없다.
견도에서 끊는 것과 수도에서 끊는 것에 관해서는 그 의미를 사품(使品)에서 자세히 설명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삼계 가운데서 지계와 범계(犯戒)를 설한다’라고 했는데, 이른바 색계에서의 선한 신작(身作)은 계율을 지키는 일이며, 불선의 신작은 곧 계율을 범하는 일임을 말한 것이다. 성계(聲界)는 곧 입으로 짓는 것이며, 오직 법계에서만이 무작(無作)인 것이다.
계율을 지키는 모습과 범하는 모습에 관해서는 곧 업품(業品)에서 자세히 설명하게 될 것이다.
028_0403_a_23L此三界忍對 治是見斷智對治是修斷智無漏是 無斷見斷修斷義使品當廣說於彼 三界中說持戒犯戒者謂色界善身 作是持戒不善身作是犯戒聲界是 口作法界唯無作持戒犯戒相業品 當廣說
17계에서는 위가 있다고 하고
한 계는 두 가지로 말한다
과보인 것과 또 과보를 지닌 것은 17계이며
한 계는 세 가지라고 함은 깨달은 이가 설한 바이다.
028_0403_b_06L 十七說有上
一界說二種
果有果十七
一三覺所說
‘17계에서는 위가 있다’라고 한 것은, 법계를 제외한 나머지 17계는 제한이 있다129)는 것이다. 왜냐하면 유위이기 때문이다.
‘한 계는 두 가지로 말한다’는 것은, 법계에서는 혹은 위가 있기도 하고 혹은 위가 없기도 한 경우를 말한다. 즉 유위(有爲)의 법계 및 허공과 비수멸(非數滅)은 위가 있는 것이며, 수멸(數滅)은 선하기 때문에 영구 불변하기 때문에 위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과보인 것과 과보를 지닌 것은 17계’라고 한 것은, 법계를 제외한 나머지 17계는 곧 과보이며 과보를 지님을 말한다. 왜냐하면 유위의 법은 성품이 열등하여 전전(展轉)하며 서로를 연하여 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028_0403_b_08L 十七說有上者除法界彼十七界有 有爲故一界說二種者法界或有 上或無上有爲法界及虛空非數滅 是有上數滅善故常故說無上果有 果十七者除法界餘十七界是果有 以有爲法性劣展轉相因生故
‘한 계는 세 가지라고 함은 깨달은 이가 설한 바이다’라고 했는데, 법계에서는 세 가지 종류가 있음을 말하니, 혹은 과보이면서 과보를 지니지 않은 것과 혹은 과보이면서 과보를 지닌 것과 혹은 과보가 아니면서 과보를 지니지 않은 것이 그것이다.
과보이면서 과보를 지니지 않는 것은 수멸이다. 과보이면서 과보를 지니는 것은 유위의 법계이다. 과보도 아니면서 과보를 지니지도 않는 것은 허공과 비수멸이다.
028_0403_b_14L三覺所說者法界有三種或果非有 或果有果或非果非有果果非有 果者數滅果有果者有爲法界非果 非有果者虛空非數滅
세 가지 계는 세 가지를 연하고
하나의 의지처 또한 그렇다.
다섯 가지는 하나이나 혹은 분별하기도 한다.
나머지의 연은 오직 하나라고 말한다.
028_0403_b_18L三界三種緣
一依亦復然
五一或分別
餘緣唯說一
028_0403_c_02L‘세 가지 계는 세 가지를 연한다’는 것은, 눈ㆍ귀ㆍ의식계(意識界)는 선(善)ㆍ불선(不善)ㆍ무기(無記)의 세 가지를 연함을 말한다.
‘하나의 의지처 또한 그렇다’라고 한 것은, 의식계가 의지하는 것도 역시 선ㆍ불선ㆍ무기의 세 종류가 있음을 말한 것이다.
‘다섯 가지는 하나이다’라고 한 것은, 5식(識)의 의지처는 한 종류임을 말한 것이다.
‘혹은 분별하기도 한다’라고 한 것은, 이른바 [5식의 의지처에는] 함께 일어나는 5근(根)과 차례로 멸하는 의(意)가 있어서 만약 함께 일어나는 의지처를 취하면 즉 하나의 무기가 된다. 왜냐하면 5근은 오직 무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약에 차례로 멸하는 의(意)를 취한다면 세 가지로 구별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의계(意界)는 선ㆍ불선ㆍ무기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028_0403_b_20L 三界三種緣者眼耳意識界三種緣 不善無記一依亦復然者意識界 所依亦三種不善無記五一者識依一種或分別者謂俱起五根及 次第滅意若取俱起依則一無記五根唯無記故若取次第滅意則三 以意界善不善無記故
또한 안식(眼識)이 의지처로 삼는 부분과 차례로 연하는 부분은 마땅히 네 구의 논리로 분별하여야 한다. 곧 의지처의 부분이면서 차례로 연하는 부분이 아닌 경우도 있고, 혹은 차례로 연하는 부분이면서 의지처의 부분이 아닌 경우도 있으며, 혹은 의지처의 부분이면서 또한 차례로 연하는 부분인 경우도 있고, 혹은 의지처의 부분도 아니고 차례로 연하는 부분도 아닌 경우가 있는 것이다.
028_0403_c_04L復次眼識 依分次第緣分應作四句或依分非 次第緣分或次第緣分非依分或依 分亦次第緣分或非依分非次第緣
[이 가운데서] 의지처의 부분이면서 차례로 연하는 부분이 아닌 경우란, 안식(眼識)과 함께 일어나는 안근(眼根)을 말한다.
차례로 연하는 부분이면서 의지처의 부분이 아닌 경우란, 차례로 멸하는 심법(心法)을 말한다.
의지처의 부분이면서 곧 차례로 연하는 부분인 경우란, 차례로 멸하는 의(意)를 말한다.
의지처의 부분도 아니고 차례로 연하는 부분도 아닌 경우란, 위에서 말한 그런 일을 제외한 [나머지 경우를 말한다.] 마찬가지로 신식(身識)의 의지처에 이르기까지도 이와 같다.
028_0403_c_08L依分非次第緣分者眼識俱起眼 次第緣分非依分者彼次第滅心 依分亦次第緣分者次第滅意依分非次第緣分者除上爾所事至身識依亦如是
【문】의식(意識)의 의지처는 곧 차제연인가?
028_0403_c_12L意識依是次第 緣耶
【답】그렇다. 의식의 의지처는 곧 차제연이다.
答曰如是意識依是次第緣
【문】무릇 차제연으로서 의식의 의지처가 아닌 경우도 있는가?
028_0403_c_13L次第緣非意識依耶
【답】의식의 의지처와 상응하는 심법(心法)이 그것이다.
028_0403_c_14L意識依相應 心法
【문】만약 안식이 의계(意界)를 의지처로 삼는다면 왜 그것을 안식이라 표현하고 의식이라 표현하지 않는가?
028_0403_c_15L若眼識以意界爲依者何故 名眼識不名意識耶
【답】눈 자체는 공유되는 의지처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씨앗과 싹의 관계와도 같으며, 북과 소리의 관계와도 같다. 눈과 그 안식은 공통되지 않는 의지처이나, 뜻[意]은 공유의 의지처이다. 그 이유는 여섯 가지 인식 작용은 전전하면서 차제연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나머지 연은 오직 하나이다’라고 한 것은, 곧 비식ㆍ설식ㆍ신식이 오직 무기(無記)와 연(緣)함을 말한 것이다. 왜냐하면 냄새와 맛과 촉감은 오로지 무기이기 때문이다.
의계(意界)란 곧 6식신(識身)이니, 이것을 떠난 다른 것은 없기 때문이다.
법계에 관해서는 설하지 않지만, 만약 마음과 상응한다면 마음에 관한 것과 같이 설명된다.
028_0403_c_16L眼是不共依 如種牙如鼓聲眼是眼識不共依 意是共依以六識身展轉次第緣生 餘緣唯說一者鼻識舌識身識唯 緣無記以香觸一向無記故意界 卽六識身離是無餘故不說法界若 心相應如心說
눈을 따라 생하는 것은 견(見)이고
이계(耳界)를 따라 생하는 것은 문(聞)이며
삼계(三界)를 따라 생하는 것은 각(覺)이고
의계(意界)를 따라 생하는 것이 식이다.
028_0403_c_22L 若眼隨生見
耳界隨生聞
三界隨生覺
意界隨生識
028_0404_a_02L 가령 눈을 따라 생하는 것을 이름하여 견(見)이라고 하고, 귀를 따라 생하는 것을 이름하여 문(聞)이라 하고, 3사(事)130)를 따라 생하는 것은 각(覺)이라 하고, 뜻을 따라 생하는 것을 인식[識]이라고 한다. 그 삼계131)는 방편으로 얻거나 애욕을 벗어나 얻음으로써 신통력[神通性]과 4지(支)ㆍ5지(支)132) 및 선정의 과보를 수득(修得)하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그것들이 따라 생함은 각기 달리 세우며 나머지 세 가지가 따라 생함은 그러한 모습이 없기 때문에 함께 하나의 감각[覺]만을 세운 것이다.
028_0403_c_24L 若眼隨生名爲見耳隨生名爲聞事隨生名爲覺意隨生名爲識彼三 界以方便得離欲得修得神通性四 支五支定果是故彼隨生各別建立 餘三隨生無彼相分故共建立一
【문】각에는 어떤 뜻이 있는가?
028_0404_a_05L 覺有何義
【답】그 경계는 오직 무기(無記)이며
각심(覺心) 가운데서 전개된다.
따라 생기는 세 가지 인식
이것을 각(覺)이라 부른다.
028_0404_a_06L 境界唯無記
覺心於中轉
隨生三種識
是則名爲覺
냄새와 맛과 감촉은 오로지 무기이며, 무기인 까닭에 각이라 말한다. 때문에 이를 따라 생긴 세 가지 인식을 각(覺)이라 표현한 것이다.
028_0404_a_08L 觸一向無記無記故說覺是故 隨生三識名爲覺
두 경계는 가까이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니
멀고 가까운 경계는 하나이다.
나머지는 오로지 가까이서 받아들이는 것으로
의지처 및 경계는 동등하다.
028_0404_a_10L 二境不近受
遠近境界一
餘一向近受
依及境界等
‘두 경계는 가까이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 것은, 안식과 이식은 경계를 가까운 곳에서 받아들이지 않음을 말한다. 가령 눈을 핍박하면 색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귀 역시 그러하니 핍박하면 듣지 못한다. 비록 깊숙한 내부에 있다 하더라도 멀리 밖에서 나는 소리를 듣게 된다. 만약 너무 멀어도 역시 보고들을 수 없다고 한다면 이는 당연한 얘기다. 하지만 의식(意識)이라는 것은 멀고 가까운 경계를 모두 받아들일 수 있다. 다만 자신과 상응하여 공유하는 것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법은 모두 받아들이는 것이다.
028_0404_a_12L 二境不近受者眼識耳識不近受境 如逼眼色不見故耳亦如是逼則 不聞雖深在內而遠聞外聲若言遠 亦不見聞者此則不論意識者遠近 境界悉受除自己及相應共有餘一 切法悉受
‘나머지는 오로지 가까이서 받아들이는 것이다’라고 한 것은, 비식ㆍ설식ㆍ신식은 의지처와 대상[緣]에 간격이 없는 까닭에133) 경계를 가까이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의지처 및 경계는 동등하다’라고 한 것은, 이른바 비식과 설식과 신식 및 이 세 가지 식의 의지처는 동등한 경계를 취함을 말한다. 즉 비근(鼻根)과 향미(香味)가 조화를 이루어 인식이 생겨나는 것이다. 설근(舌根)ㆍ신근(身根)과 미약한 [맛과 촉감의 관계] 또한 이와 같다.[소위 근(根)과 대상[塵]이 합쳐지는 곳에 인식이 생겨나는 것이다.]
028_0404_a_18L餘一向近受者身識 近受境界依緣無閒故依及境界等者 謂鼻舌識身識此三識依取等境界 鼻根香微均而生識舌身根微亦如 ◀謂根塵合處乃生著▶
두 계는 일정하지 않다고 말하며
다른 한 계의 경계도 또한 그렇다.
다섯 계의 의지처는 혹은 함께 하지만
한 계의 의지처는 멀다고 말한다.
028_0404_a_22L二界說不定
一界境亦然
五界依或俱
一界依說遠
028_0404_b_02L‘두 계는 일정하지 않다’라고 한 것은, 안식과 이식은 그 의지처나 대상[緣]이 모두 일정하지 아니함을 말한 것이다. 가령 안식계의 경우 혹은 의지처는 크지만 대상은 작으니 털끝을 보는 것과 같다. 혹은 의지처는 작아도 대상은 크니 산을 보는 것과 같으며, 혹은 의지처와 대상이 같은 경우도 있으니 포도나 복숭아 등 과일을 보는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식(耳識)도 이와 같다.
028_0404_a_24L 二界說不定者眼識耳識緣俱不 眼識界或依大而緣小如見毛端 或依小而緣大如見山或依緣等見蒱桃果耳識亦如是
‘한 계의 경계도 또한 그렇다’하고 한 것은, 의식(意識)의 경계도 역시 일정하지 아니하니, 혹은 크기도 하고 혹은 작기도 함을 말한 것이다. 일체법이 경계가 되기 때문이며, 의지처가 형상이 없기 때문에 크고 작은 것을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의계(意界)를 떠나서 6식은 달리 체(體)가 없기 때문에 설하지 않는 것이다. 마음의 법 또한 마음과 같이 설명된다.
‘다섯 계의 의지처는 혹은 함께 한다’라고 한 것은, 5식신(識身)은 혹은 의지처와 함께 할 경우도 있음을 말한 것이다. 여기서 함께 한다는 것은 5근(根)을 말한 것이며, 멀다고 하는 것은 차제멸(次第滅)의 뜻을 말한 것이다.
‘한 계의 의지처는 멀다’라고 함은 의식계(意識界)의 의지처는 멀다는 것을 말한다. 이른바 그것이 차제멸의 뜻[意]을 지니는 것이다.
028_0404_b_05L一界境亦然 意識境界不定境界或大或小切法境界故依無形故大小不可說 離意界六識無別體故不說心法 如心說五界依或俱者五識身或與 依俱俱者謂五根遠者次第滅意界依說遠者意識界依說遠謂彼次 第滅意
열한 계에는 두 종류가 있고
여섯 계에는 세 종류, 한 계에는 네 종류가 있으니
일[事]과 장양(長養)과 과보[報]와
찰나(刹那)와 의지처의 종류라네.
028_0404_b_12L 十一界有二
六三一四種
事及長養報
剎那與依種
‘열한 계에는 두 종류가 있다’라고 한 것은, 5내계(內界)134)와 성계(聲界)와 5식계(識界)에는 두 종류가 있음을 말한 것이다.
‘여섯 계에는 세 종류’라고 한 것은, 색ㆍ냄새ㆍ맛ㆍ촉감의 [다섯]계와 의계(意界)와 의식계(意識界)의 이 여섯 계에는 세 종류가 있음을 말한 것이다.
‘한 계에는 네 종류가 있다’라고 한 것은, 법계에는 네 종류가 있음을 말한 것이다.
028_0404_b_14L 十一界有二者五內界聲界五識界 二種六三者意界意識界 此六界三種一四種者法界四種
【문】어떤 종류를 둘ㆍ셋ㆍ넷이라고 하는가?
028_0404_b_17L 云何種說二三四
【답】일과 장양과 과보와 찰나와 의지처의 종류가 그것이다. 저 안계(眼界)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과보[報]와 장양(長養)이 그것이다. 여기서 보생(報生)135)이란 선ㆍ불선의 업의 과보를 말한다. 즉 3악도(惡道)는 곧 불선업의 과보이며, 인간계와 천상계는 선한 업보로 얻는 과보다. 또 눈과 여러 가지 기능[衆具]과 청정한 행[梵行]과 정수(正受)에서 길이 길러지는 대상이 되는 까닭에 이것이 장양이다. 그러나 별도로 의지하는 성질이 없기 때문에 따로 의지처를 설명하지는 않는다.
찰나(刹那)나 일[事]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 눈과 마찬가지로 귀ㆍ코ㆍ혀ㆍ몸의 계도 또한 이와 같다. 성계(聲界) 역시 두 종류가 있으니, 곧 장양(長養)과 의지처[依]136)가 그것이다.
028_0404_b_18L事及長養報那與依種彼眼界二種報及長養報生者不善業報果三惡道是不 善業果人天是善業果眼及衆具行正受所長養故是長養無別依性 故不說依剎那事亦爾如眼耳鼻舌 身界亦如是聲界亦二種長養及依
【문】왜 소리는 과보로 얻는 것이 아닌가?
028_0404_b_24L 何故聲非報
028_0404_c_02L【답】현재 방편으로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리란 현재 방편으로 생기는 것이지만, 과보란 전생의 업보로 일어나는 것이다. 또한 소리라는 것은 욕망을 따라 생기는 것이지만 과보는 욕망을 따라 생기는 것이 아니다. 또한 소리와 소리에는 간격이 있으나 과보에는 간격이 없다.137) 만약 소리이면서 곧 과보라면 마땅히 색과 같이 일체의 시간에 단절됨이 없어야 한다. 하지만 소리에는 단절이 있다. 때문에 소리는 과보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다섯 가지 인식계[五識界]는 과보 및 의지처이다. 즉 색과 냄새와 맛과 촉감의 계는 세 가지이니 과보와 의지처와 장양이 그것이다. 의계(意界)는 세 가지이니, 과보와 의지처와 찰나138)가 그것이다. 찰나란 고법인(苦法忍)과 함께 생하는 의계이며, 의식계의 경우도 또한 이와 같다.
028_0404_c_02L現在方便生故者現在方便生報者前業所起聲者 隨欲生報非隨欲生復次聲聲有閒 報報無閒若聲是報者應如色一切 時不斷而聲有斷是故非報五識界 報及依色香味觸界三種長養 意界三種剎那剎那者苦法忍 俱生意界意識界亦如是
법계에는 네 가지가 있으니, 과보와 찰나와 의지처와 일[事]이 그것이다. 여기에서 과보란 선ㆍ불선업의 과보이며, 찰나란 고법인(苦法忍)의 권속139)을 말한다. 의지처란 고법인의 권속을 제외한 나머지 선한 유위(有爲)의 법계와 과보를 제외한 불은몰무기(不隱沒無記)의 유위법계 및 염오법계이다.
무위의 법계에는 오직 일(事)140) 만이 있다.
028_0404_c_09L法界四種 剎那彼報者善不善業報果那者苦法忍眷屬依者除苦法忍眷 餘善有爲法界除報餘不隱沒無 記有爲法界染污法界無爲法界唯 有事
몸과 눈과 색계를 일으키고
자신의 경지[自地]와 다른 경지[他地]가 있으며
만약 여기에서 안식(眼識)이 생한다면
자신의 경지이니 다른 경지의 경우도 또한 그렇다.
028_0404_c_14L 生身眼色界
自地及他地
若彼眼識生
自他地亦然
욕계에 태어나, 욕계의 몸과 욕계의 눈과 욕계의 색과 욕계의 안식이 생기게 된다. 마찬가지로 초선(初禪)의 경지에 생겨나면 초선의 경지의 몸과 초선의 경지의 눈과 초선의 경지의 색과 초선의 경지의 안식이 생기게 된다. 이것을 자기 경지[自地]라 부른다.
028_0404_c_16L 生欲界欲界身欲界眼欲界色欲界 眼識生如是生初禪地初禪地身禪地眼初禪地色初禪地眼識生名自地
다른 경지[他地]란, 욕계에 태어나서 초선의 경지의 눈으로 욕계의 색을 본다면 그에게는 욕계의 몸과 초선의 경지의 눈과 욕계의 색과 초선의 경지의 안식이 생겨난다. 또한 초선[의 경지]를 본다면 그에게는 욕계의 몸과 초선의 경지의 눈과 색 및 초선의 경지의 안식(眼識)이 생겨난다.
028_0404_c_20L他地者生欲界初禪地眼見 欲界色彼欲界身初禪地眼欲界色 初禪地眼識生見初禪者彼欲界身 初禪地眼色初禪地眼識生
028_0405_a_02L또 욕계에 태어나서 2선(禪)의 경지의 눈으로 욕계의 색을 본다면 그에게는 욕계의 몸과 2선의 경지의 눈과 욕계의 색 및 초선의 경지의 안식이 생겨난다. 또 초선[의 경지]를 본다면 그에게는 욕계의 몸과 2선의 경지의 눈과 초선의 경지의 색과 초선의 경지의 안식이 생겨난다. 또 2선[의 경지]를 본다면 그에게는 욕계의 몸과 2선의 경지의 눈과 색 및 초선의 경지의 안식이 생겨난다.
028_0404_c_23L生欲界 二禪地眼見欲界色彼欲界身二禪 地眼欲界色初禪地眼識生見初禪 地者彼欲界身二禪地眼初禪地色 初禪地眼識生見二禪者彼欲界身 二禪地眼色初禪地眼識生
또 욕계에 태어나 3선의 경지의 눈으로 욕계의 색을 본다면 그에게는 욕계의 몸과 3선의 경지의 눈과 욕계의 색과 초선의 경지의 안식이 생겨난다. 또 초선[의 경지]를 본다면 그에게는 욕계의 몸과 3선의 경지의 눈과 초선의 경지의 색과 초선의 경지의 안식이 생겨난다. 또 2선[의 경지]를 본다면 그에게는 욕계의 몸과 3선의 경지의 눈과 2선의 경지의 색과 초선의 경지의 안식이 생겨난다. 또 2선[의 경지]를 본다면 그에게는 욕계의 몸과 3선의 경지의 눈과 색 및 초선의 경지의 안식이 생겨난다.
028_0405_a_05L生欲界 三禪地眼見欲界色彼欲界身三禪 地眼見欲界色初禪地眼識生見初 禪者彼欲界身三禪地眼初禪地色 初禪地眼識生見二禪者彼欲界身 三禪地眼二禪地色初禪地眼識生 見三禪者彼欲界身三禪地眼色禪地眼識生
또 욕계에 태어나 4선의 경지의 눈으로 욕계의 색을 본다면 그에게는 욕계의 몸과 4선의 경지의 눈과 욕계의 색과 초선의 경지의 안식이 생겨난다. 초선[의 경지]를 본다면 그에게는 욕계의 몸과 4선의 경지의 눈과 초선의 경지의 색과 초선의 경지의 안식이 생겨난다.
028_0405_a_12L生欲界四禪地眼見欲 界色彼欲界身四禪地眼見欲界色 初禪地眼識生見初禪者彼欲界身 四禪地眼初禪地色初禪地眼識生
또 2선[의 경지]를 본다면 그에게는 욕계의 몸과 4선의 경지의 눈과 2선의 경지의 색과 초선의 경지의 안식이 생겨난다. 또 3선[의 경지]를 본다면 그에게는 욕계의 몸과 4선의 경지의 눈과 3선의 경지의 색과 초선의 경지의 안식이 생겨난다. 또 4선[의 경지]를 본다면 그에게는 욕계의 몸과 4선의 경지의 눈과 색 및 초선의 경지의 안식이 생겨난다.
028_0405_a_15L 見二禪者彼欲界身四禪地眼二禪 地色初禪地眼識生見三禪者彼欲 界身四禪地眼三禪地色初禪地眼 識生見四禪者彼欲界身四禪地眼色禪地眼識生
욕계에서 생함을 설하듯이 내지 4선에 이르기까지의 생함도 또한 이와 같다. 차별이 있다면, 이른바 아래 경지의 눈으로는 위의 경지의 색을 보지 못하며, 위의 경지에 태어난다면 아래 경지의 눈은 눈앞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028_0405_a_20L如說生欲界乃至生第 四禪亦如是有差別者謂下地眼不 見上地色生上地下地眼不現在前
이계(耳界)는 앞에서 말한 것과 같으며
비계(鼻界)와 설계(舌界)는 자신의 경지[自地]뿐이다.
몸과 촉감은 경지에 입각하여 설하고
의식(意識)은 수없이 많다.
028_0405_a_22L 耳界如前說
鼻舌界自地
身觸卽地說
意識則衆多
028_0405_b_02L‘이계(耳界)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라고 한 것은, 앞에서 말한 안식과 같이 이식도 역시 이와 같다는 것이다.
‘비계(鼻界)와 설계(舌界)는 자신의 경지뿐이다’라고 한 것은, 욕계에 태어나면 욕계의 몸과 욕계의 코와 욕계의 냄새와 욕계의 비식(鼻識)이 생기며, 설계(舌界) 또한 이와 같음을 말한 것이다.
‘몸과 촉감은 경지에 입각해 설한다’라고 한 것은, 신식에는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즉 욕계에 태어난다면 욕계의 몸과 욕계와 촉감과 욕계의 신식(身識)이 생겨나며, 초선의 경지도 역시 이와 같다. 2선에 태어난다면 2선의 몸과 2선의 촉감과 초선의 경지의 신식이 생긴다. 자기 경지의 촉감을 느끼기 때문에 다른 경지의 촉감이 생하지 않는 것이다. 제3선ㆍ제4선의 [경지에서도] 또한 이와 같다.
028_0405_a_24L 耳界如前說者如前說眼識耳識亦 如是鼻界說自地者生欲界欲界身 欲界鼻欲界香欲界鼻識生舌界亦 如是身觸卽地說者身識有差別故 生欲界欲界身欲界觸欲界身識生 初禪亦如是生二禪二禪身觸初禪 地身識生以覺自地觸故非他地生 第三第四禪亦如是
‘의식은 수없이 많다’라고 한 것은, 혹은 자기 경지의 뜻[意]과 자기 경지의 법과 자기 경지의 의식이 생기는 경우도 있고 혹은 다른 경지의 경우도 있음을 말한다.
그 가운데 자기 경지의 경우란, 욕계에 태어나 욕계의 뜻과 욕계의 법과 욕계의 의식(意識)이 생하며, 내지 유상무상처(有想無想處)의 경지에 이르기까지도 모두 이와 같다.
여기서 다른 경지[他地]란, 욕계에 태어나 바르게 받아들였을 때, 욕계의 선한 마음이 차례로 초선(初禪)[의 경지]를 바르게 받아들이는 경우 그에게는 욕계의 뜻과 초선의 경지의 의식이 생기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법은 혹은 삼계에 얽매이는 경우도 있고 혹은 얽매이지 않는 경우도 있다.
028_0405_b_09L意識則衆多者 或自地意自地法自地意識生或他 彼自地者生欲界欲界意欲界法 欲界意識生乃至生有想無想處亦 如是他地者生欲界正受時欲界善 心次第初禪正受起彼欲界意初禪 地意識生法或三界繫或不繫
초선의 다음 차례에 욕계의 선한 마음이 앞에 나타나면 그에게는 초선의 뜻과 욕계의 의식이 생겨난다. 그리고 법은 혹은 삼계에 얽매이는 경우도 있고 혹은 얽매이지 않는 경우도 있다.
초선의 다음 차례에서 2선(禪)[의 경지]를 바르게 받아들이게 되면, 그에게는 초선의 뜻과 2선의 의식이 생겨난다. 그리고 법은 혹은 삼계에 얽매이는 경우도 있고 혹은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028_0405_b_15L初禪 次第欲界善心現在前彼初禪意欲 界意識生法或三界繫或不繫初禪 次第二禪正受彼初禪意二禪意識 生法或三界繫或不繫
이와 같이 제2선ㆍ초선, 초선ㆍ제2선, 초선ㆍ제3선, 제3선ㆍ초선 내지는 유상무상처에 이르기까지 순역으로 또한 차례로 초월하는 과정이 상세히 설명되어야만 할 것이다. 여기에서 차별이 있다면, 이쪽의 경지를 바르게 받아들인 것을 의계(意界)로 삼고 저쪽의 경지를 바르게 받아들인 것을 의식계(意識界)로 삼는다는 것이다.
만약 선(禪)[의 경지]가 의식(意識)이 된다면 법은 삼계에 얽매이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또 만약 무색계가 의식이 된다면 그 법은 자기 경지이자 드높은 경지이며 [삼계에] 얽매이지 않는 [경지]가 된다.
028_0405_b_19L如是第二禪 初禪初禪第二禪初禪第三禪第三 禪初禪乃至有想無想處逆順次第 超越應廣說有差別者此正受爲意 彼正受爲意識若禪爲意識者法 或三界繫或不繫若無色爲意識者 彼法自地上地及不繫
028_0405_c_02L또한 바르게 받아들인 정초선(淨初禪)의 다음 차례에 욕계에서의 초선의 과보인 변화심이 현전하게 되면 그에게는 초선의 뜻[意]과 욕계의 의식이 생겨나며, 법은 욕계가 변화한 것이 된다. 곧, 그 욕계 초선의 과보에 이어 정초선의 경지가 앞에 나타난다면, 그에게는 욕계의 뜻과 초선의 의식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 경우도] 법은 혹은 삼계와 연계되기도 하고 혹은 연계되지 않는 경우도 있으며, 내지 제4선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이와 같다.
028_0405_c_02L又復正受淨 初禪次第欲界初禪果變化心現在 彼初禪意欲界意識生法者欲界 卽彼欲界初禪果次第淨初禪現 在前彼欲界意初禪意識生法或三 界繫◀或不繫乃至▶第四禪亦如是
여기에서‘생한다[生]’고 함은, 그가 욕계에서는 사라져 초선의 경지에서 생겨난다면 그에게는 욕계의 뜻과 초선 경지의 의식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이 경우 법은 혹은 색계ㆍ무색계에 연계되는 경우도 있고 혹은 연계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또한 초선의 경지에서 사라져 욕계에서 태어난다면, 그에게는 초선 경지에서의 뜻과 욕계의 의식이 생겨난다. 이 경우도 법은 혹은 삼계에 연계되는 경우도 있고 연계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나아가 유상무상처의 경지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이와 같다. 여기에서141) 사라지는 것은 곧 뜻[意]이며, 받아서 생하는 것은 곧 의식(意識)이다. 다만 그 법은 자기 경지이자 드높은 경지이며 얽매이지 않은 [경지]인 것이다.
028_0405_c_07L生者彼欲 界沒生初禪地彼欲界意初禪地意 識生法或色無色界繫或不繫初禪 地沒生欲界彼初禪地意欲界意識 生法或三界繫或不繫乃至有想無 想處亦如是彼沒者是意受生者是 意識但彼法自地上地及不繫
혹은 그는 안계를 얻거나
혹은 그것을 의지처로 하는 식(識)만이 있으니
둘 모두 얻거나 얻지 못하고
또한 색계에서도 그러하고 더불어 버리는 일도 그러하다.
028_0405_c_13L 若彼得眼界
或彼所依識
二俱得不得
亦色及與捨
‘혹은 그는 안계를 얻는다’라고 한 것은, 가령 안계(眼界)가 성취되지 않다가 [이제] 성취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안식계(眼識界)가 아님을 말한다. 즉 무색계에서 사라져서 제2선ㆍ제3선ㆍ제4선의 경지에 태어나고 마침내 욕계에 태어나게 되면 점차로 안근(眼根)을 얻게 되는 것이다.142)
‘혹은 그것을 의지처로 하는 식만 있다’라고 한 것은, 혹은 안식계(眼識界)가 성취되지 않다가 이제 성취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안계(眼界)가 아님을 말한 것이다. 즉 상3선(上三禪)143)의 경지에서 사라져서 욕계 및 초선[의 경지]에 태어나게 되며, 만약 거기에 머물 경우 안식(眼識)이 앞에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028_0405_c_15L 若彼得眼界者或眼界不成就得成 就非眼識界謂無色界沒生第二第 三第四禪生欲界漸得眼根或彼所 依識者或眼識界不成就得成就非 眼界謂上三禪地沒生欲界及初禪 若卽住彼眼識現在前
028_0406_a_02L‘둘 모두를 얻는다’라고 한 것은, 혹은 안계와 안식계를 함께 얻음을 말한 것이다. 즉 무색계에서 사라져서 욕계나 초선[의 경지]에 태어나는 것이다.
‘함께 얻지 못한다’라고 한 것은, 안계가 성취되지 않다가 이제 성취된 것도 아니며, 또한 안식계가 성취되지 않다가 [이제] 성취된 것이 아님을 말한 것이다. 즉 욕계에 태어나서 안근(眼根)을 잃지 않고 급기야 범천(梵天)에서 목숨이 다하여 다시 범천이나 욕계에 태어날 경우나 제2선ㆍ제3선ㆍ제4선의 세계에서 사라졌다가 다시 제2선ㆍ제3선ㆍ제4선의 [세계]에 태어나거나 무색계에서 사라졌다가 다시 무색계에 태어나는 경우를 말한 것이다.
028_0405_c_21L二俱得者眼及眼識界俱得謂無色界沒生欲 界及初禪俱不可得者非眼界不成 就得成就亦非眼識界不成就得成 謂生欲界不失眼根及梵天上若 命終生梵天及欲界第二第三第四 禪沒生第二第三第四禪無色界沒 生無色界
‘색계에서도 그러하다’라고 한 것은, 가령 [이전에] 색계를 성취하지 못하다가 이제 성취했다면 그것은 곧 안계를 성취하지 못하다가 이제 성취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혹은 안계이면서 색계가 아닌 경우도 있는데, 예를 들면 욕계에 태어나 점차로 안근을 얻는 경우가 그것이다.
가령 색계를 성취하지 못하다가 이제 성취했다면 그것은 안식계에도 속하는 것인가? 이에 대한 해답은 마땅히 4구(句)의 논리로 구별해야 할 것이다.
028_0406_a_05L亦色者若色界不成就得 成就彼卽眼界不成就得成就或眼 界非色界者生欲界漸得眼界若色 界不成就得成就彼眼識界耶應作 四句
첫째, 색계를 전에 성취하지 못하다가 지금 성취하여 얻어도 안식계에 해당되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곧 무색계에서 사라져서 상3선 가운데에 태어나는 경우이다.
둘째, 안식계를 전에는 성취하지 못하다가 지금 성취하여 얻어도 그것이 색계가 아닌 경우가 있다. 즉 3선의 경지에서 사라져 욕계나 초선의 경지에 태어나며, 만약 곧 거기에 머물게 된다면 안식이 앞에 나타나게 되는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셋째, 색계를 전에 성취하지 못하다가 지금 성취하여 얻어도 역시 안식계에 속하는 경우가 있다. 즉 무색계에서 사라져 욕계나 초선의 경지에 태어날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넷째, 색계도 아니고 안식계도 아닌 경우가 있다. 즉 위에서 말한 일을 제외한 다른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028_0406_a_09L色界不成就得成就非眼識界 無色界沒生上三禪中眼識界不 成就得成就非色者卽彼三禪沒生 欲界及初禪若卽住彼眼識現在前 色界不成就得成就亦眼識界者色界沒生欲界及初禪非色界亦非 眼識界者除上爾所事
‘더불어 버리는 일도 그러하다’라고 한 것은, 얻는 경우를 설명한 것과 같이 잃는 경우도 이와 같이 자세히 설명됨을 말한 것이다.
028_0406_a_15L及與捨者說得捨亦如是廣說
색계는 두 가지 식으로 인식한다.
내지 촉감도 그러하다.
나머지 모든 열셋의 계는
오로지 의식(意識)의 대상[緣]이다.
028_0406_a_16L 色界二識識
乃至觸亦然
諸餘十三界
一向意識緣
028_0406_b_02L ‘색계는 두 가지 식으로 인식한다’라고 한 것은, 색계에서는 안식(眼識)과 의식의 두 식으로 인식됨을 말한 것이다. 이 가운데 안식계는 독자적인 모습[自相]만을 갖추고 있으나 의식계는 독자적인 모습과 공통적인 모습[共相]이 공존한다.
‘내지 촉감도 그러하다’라고 한 것은, 성계(聲界)도 이식과 의식의 두 식으로 인식됨을 말한 것이다. 여기서 이식계는 독자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으나 의식계는 독자적인 모습과 공통적인 모습이 공존한다. 이렇게 하여 촉계에 이르기까지도 두 가지 인식으로 인식하게 된다. 즉 신식(身識)과 의식이 그것으로, 신식은 독자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으나 의식은 독자적인 모습과 공통적인 모습이 공존하게 된다. 그 이유는 [의식을 제외한] 5식신(識身)은 독자적인 모습을 경계로 삼기 때문이고, 사유로 얻는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고, 현재 눈앞에 나타나는 경계이고, 일념(一念)으로 [얻어지는 경계이기] 때문이다.
028_0406_a_18L 色界二識識者謂色界二識識眼識 及意識眼識界自相意識界自相及 共相乃至觸亦然者聲界二識識識及意識耳識界自相意識界自相 及共相乃至觸界二識識身識及意 身識自相意識自相及共相以五 識身自相境界故不思惟故現在境 界故一念故
‘나머지 모든 열셋의 계는 오로지 의식의 대상[緣]이다’라고 한 것은, 다섯 가지 색근(色根)144)과 일곱 가지 심계(心界) 및 법계의 이 열세 가지 계는 오로지 의식의 식으로 그것은 독자적인 모습과 공통적인 모습이 공존한다는 것이다.
이 의식에는 허물어지는 연145)과 허물어지지 않는 연146)의 두 종류가 있다. 허물어지지 아니하는 연이란 이 열세 가지 계의 연이 여기에 해당되며, 허물어지는 연이란 이 열세 가지 계와 다른 다섯 가지 경계가 하나하나 합쳐지는 연 내지는 18계의 총체적인 연을 말한다.
028_0406_b_03L諸餘十三界一向意識 緣者五色根七心界及法界此十三 界一向意識識自相及共相此意識 二種壞緣及不壞緣不壞緣者卽此 十三界緣壞緣者十三與五境界一 一合緣乃至十八界摠緣
사유(思惟)의 인식에 세 가지 있으니
그 중 뜻[意]은 욕유(欲有) 안의 일이로다.
색계ㆍ무색계는 분별되며
한 가지는 이른바 나머지 계이다.
028_0406_b_08L 思惟識三種
是意欲有中
色無色分別
一種謂餘界
 ‘사유의 인식에 세 가지 있으니 그 중 뜻은 욕유 안의 일이로다’라고 한 것은, 욕계의 의식에는 세 가지의 사유(思惟)가 있음을 말한 것이다. 즉 자성사유(自性思惟)147)와 수억사유(隨憶思惟)148)와 분별사유(分別思惟)149)가 그것이다.
여기서 자성사유란 깨달음[覺]150)이고 수억사유란 염(念)이며, 분별사유란 일정하지 않은 지혜이다. 이 세 가지 사유는 욕계 의식(意識)의 사유이다.
028_0406_b_10L 思惟識三種是意欲有中者欲界意 識有三種思惟自性思惟隨憶思惟 分別思惟彼自性思惟者謂覺也憶思惟者意地念也分別思惟者地不定慧也此三思惟欲界意識思 惟也
‘색계ㆍ무색계는 분별된다’라고 한 것은, 색계와 무색계에서의 의식은 경우에 따라 세 가지가 있음을 말한 것이다. 즉 초선의 경지에서는 결정되지 않으며, 선정에 든 경우에는 둘이 있으며 선정에 들지 못한 경우에는 셋이 있다.
3선(禪)의 경지에서 의식이 선정에 들지 않은 경우는 두 가지가 있으니, 자성사유를 제외한다. 가령 하나를 정한다면 수억사유뿐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무색계에서는 선정에 들지 않은 자가 없으니, 거기에는 오직 한 가지 수억사유만이 있다. 만약 여기에서 선정에 들지 않은 자가 있다고 할 경우, 선정에 든 것은 한 가지이고 선정에 들지 않은 것은 두 가지가 된다”고 한다.
028_0406_b_16L色無色分別者色無色界意識 或三種謂初禪地不定入定者二定者三三禪意識不定者二除自性 思惟若定者一隨憶思惟有說無色 界無不定者彼惟一種隨憶思惟說有不定者定者一不定者二
‘한 가지는 나머지 계를 말한다’라고 한 것은, 5식신(識身)을 ‘나머지’라고 표현한 것이다. 여기에는 오직 자성사유만이 있으니, 생각이 예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028_0406_b_21L一種 謂餘界者五識身說餘唯有自性思 不利故
【문】이와 같이 법상(法相)을 분별하는 일은 끝났다. 그렇다면 법을 포섭하는 일은 자성(自性)인가, 아니면 타성(他性)인가?
028_0406_b_23L如是分別法相已云何 攝法爲自性爲他性
【답】자성이다. 왜 그런가?
自性何以故
028_0406_c_02L  모든 법은 타성을 여의어
  각자 스스로의 성품에 머문다.
  때문에 일체법은
  자성에 속한다고 말한다.
028_0406_b_24L 諸法離他性
各自住己性
故說一切法
自性之所攝
  ‘모든 법은 타성을 여읜다’라고 한 것은, 안계(眼界)는 다른 열일곱 계를 벗어남을 말한다. 왜냐하면 성품이 다르기 때문이다. 나머지 계의 경우도 역시 이와 같다. 성품을 벗어난 것을 곧 포섭이라고는 말하지 않으니,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자성에 속하는 것이며 타성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028_0406_c_03L 諸法離他性者眼界離十七界異性 餘界亦如是不應說若離性是攝 以異相故故說自性之所攝非他性
‘각자 스스로의 성품에 머문다’라고 한 것은, 일체의 성품이 각기 자성 가운데 머물고 있음을 말한 것이다. 이 성품은 다른 [계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자성에] 머문다면 이것이 포섭하지 다른 것이 포섭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때문에 일체법은 자성에 포섭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포섭[攝]’이라는 의미는 이른바 자성(自性)은 자성으로서 공이 아니며[自性不空], 또한 본질도 아님을 말한다. 마치 색은 색으로서 공이 아닌 것과 같다. 또한‘서로 유지한다는 뜻이 곧 포섭이다’라고 말한다.
028_0406_c_06L 各自住己性者一切性各住自相性非他相故應說若住者是攝非餘 說一切法自性之所攝義謂自性 自性不空非餘自色色不空又復說 相持義是攝
예를 들면 경에서 말하는 내용처럼 만약 어떤 누관(樓觀)의 중심이 되는 곳에는 많은 재목들이 의지하는 곳으로, 누관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또 다른 설명에 따르면, [포섭이란] 마치 실이 옷을 유지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또한 부챗살의 지도리[樞]가 부채를 유지하고 있는 것과 같으며, 도끼가 땔감을 유지시키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혹은 어떤 사람은 방편을 포섭이라 말한다. 그들의 설명에 의하면 이 5근(根)151)은 지혜를 우두머리로 삼는다. 왜냐하면 [지혜로써 나머지를] 포섭하기 때문이다.
028_0406_c_11L如契經說如樓觀中心 衆材所依爲樓觀之最如所說如綖 持衣如戶樞持扇如斧持薪或說方 便攝如所說此五根慧爲首謂攝故
또 어떤 사람은 화합(和合)을 포섭이라고 한다. 즉 네 가지 포섭의 일[四攝事]152)이 능히 중생들을 포섭한다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수순(隨順)을 포섭이라고 한다. 그들의 설명에 따르면 바른 견해153)ㆍ바른 의지154)ㆍ바른 방편이 곧 지혜의 몸[慧身]인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섭취(攝取)하기 때문에 포섭이라고 하였다. 예를 들면 화상155)이 재물과 가르침으로 학인들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세간의 설명은 궁극적인 포섭의 내용은 아니다. ‘자성으로써 자성을 포섭한다’는 것이야말로 구경(究竟)을 이룬 제일의(第一義)인 것이다.
세 가지 단계의 포섭이 있으니, 이 가운데에서는 자성의 포섭[自性攝]을 말한 것이다. 이와 같은 자성의 포섭은 제일의(第一義)를 버리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028_0406_c_14L 或說和合攝謂四攝事能攝衆生或說 隨順攝如所說等見等至等方便是 慧身或攝取故名攝謂和上以財法 此等世俗言說非究竟攝自性自 性攝者是究竟第一義三段攝此中 說者是自性攝如是自性攝不捨第 一義故
이미 자성의 포섭을 설명하였다. 안계는 하나의 계ㆍ하나의 입(入)ㆍ하나의 음(陰)에 포섭되며, 17계(界)와 11입(入)과 5음(陰)에는 포섭되지 않는다.
또한 오른쪽 눈은 오른쪽 눈에 포섭되고 왼쪽 눈은 왼쪽 눈에 포섭되는 것이다. 눈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장양(長養)과 과보가 그것이다. 장양은 장양에 포섭되고 과보는 과보에 포섭된다.
028_0406_c_21L已說自性攝眼界攝一界一 入一陰不攝十七界十一入五陰次右眼攝右眼左眼攝左眼眼二種 長養及報長養攝長養報攝報
028_0407_a_02L그리고 과보에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선업의 과보와 불선업의 과보가 그것이다. 선업의 법은 선업의 법에 포섭되고 불선업의 법은 불선업의 법에 포섭되는 것이다.
불선업의 과보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3악취(惡趣)156)가 그것이다. 축생은 축생으로 포섭되며 아귀와 지옥의 경우도 역시 이와 같다.
선업의 과보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인간세계와 하늘세계가 그것이다. 인간은 인간세계에 포섭되고 하늘 사람은 하늘세계에 포섭된다.
과거는 과거에 포섭된다. 미래와 현재도 그와 같으며, 나아가 찰나는 찰나에 포섭된다.
028_0406_c_24L報復二 善業報不善業報善業攝善業報 不善業報攝不善業報不善業報三 謂三惡趣畜生攝畜生餓鬼地獄 亦如是善業報二種謂人天人攝人 天攝天過去攝過去未來現在乃至 剎那攝剎那
계 가운데 한 계를 설하며
음과 입도 또한 그렇다.
이와 같은 음ㆍ입ㆍ계는
곧 일체법을 포섭한다
028_0407_a_07L 界中說一界
陰入亦復然
如是陰入界
則攝一切法
‘한 가지 계’란 법계를 말한다.
‘한 가지 입’이란 의입(意入)을 말한다.
‘한 가지 음’이란 색음(色陰)을 말한다157)
028_0407_a_09L 一界者法界一入者意入一陰者色 陰也◀界品竟▶
雜阿毘曇心論卷第一
甲辰歲高麗國分司大藏都監奉勅彫造
  1. 1)성스런 자취란 곧 고집멸도(苦集滅道)의 4성제(聖諦:cataḥ satya)를 가리킨다.
  2. 2)비바사(vibhāsa)란, 여기에서는 『아비달마대비바사(阿毘達磨大毘婆沙)』 200권을 가리킨다.
  3. 3)본론에서 언급되는 세친(世親:Vasubandhu)은 『잡아비담론』의 작자인 법구보다도 이전의 사람을 가리킨다. 이 세친이 뒤에 『구사론』의 작자인 세친의 스승[如意: Manoratha]이 된다고도 한다.
  4. 4)범어로는 abhidharma. 부처님 법에 대한 해석이라는 의미에서 대법(對法)이라고 한다. 한편, 뛰어난 가르침이란 의미에서 승법(勝法)이라고 한다.
  5. 5)모니(牟尼, muni)란 인도 일반의 성인이나 성자를 의미. 불교에서는 석존을 가리킨다.
  6. 6)범어로는 saṁvŗti-satya. 이른바 속제(俗諦) 혹은 세속제(世俗諦).
  7. 7)범어로는 paramārtha-satya. 진제(眞諦)라고도 함. 세속제의 상대적인 말.
  8. 8)곧 37각품(覺品)을 의미.
  9. 9)5음이란 혜근(慧根)과 상응해 함께 일어나는 심(心)ㆍ심법(心法)ㆍ심불상응법(心不相應法)ㆍ무작(無作) 등을 말한다.
  10. 10)범어로는 dharma-jñāna. 욕계의 제법을 대상으로 하는 성지(聖智).
  11. 11)범어로는 anvaya-jñāna. 상계(上界)의 번뇌에 대해서 작용하는 지혜. 색계ㆍ무색계의 제행의 4제를 관찰해서 번뇌를 끊는 무루지(無漏智)를 말한다. 비지(比智)는 구역어.
  12. 12)미지정(未至定)ㆍ중간정(中間定)ㆍ4선정(禪定)의 여섯 단계의 선정.
  13. 13)범어로는 kāma-dhātu. 색욕ㆍ성욕ㆍ식욕ㆍ수면욕 등 본능적 욕망이 지배하는 생존계.
  14. 14)범어로는 daṡa-ākāra. 열여섯 가지 행상으로 4제를 관하는 일종의 4제관법. 곧, 먼저 고제(苦諦)에 대해서 비상(非常)ㆍ고(苦)ㆍ공(空)ㆍ비아(非我)로 관하며, 집제(集諦)에 대해서는 인(因)ㆍ집(集)ㆍ생(生)ㆍ연(緣)으로, 멸제(滅諦)에 대해서는 멸(滅)ㆍ정(靜)ㆍ묘(妙)ㆍ리(離)로, 도제(道諦)에 대해서는 도(道)ㆍ여(如)ㆍ행(行)ㆍ출(出)로 관하는 것.
  15. 15)희근(喜根)ㆍ낙근(樂根)ㆍ사근(捨根).
  16. 16)유각유관삼매ㆍ무각유관삼매ㆍ무각무관삼매(有覺有觀三昧ㆍ無覺有觀三昧ㆍ無覺無觀三昧)
  17. 17)이른바 선ㆍ불선ㆍ무기.
  18. 18)유학(ṡaikṣa)이란 배울 것이 더 남아 있는 상태로 아직 아라한과를 얻지 못한 사람을 가리킨다. 반면에 무학(aṡaikṣa)이란 더 이상 닦을 것이 없는 성자의 경지를 가리킨다.
  19. 19)이른바 유학ㆍ무학 및 비학비무학
  20. 20)이른바 견제단(見諦斷)ㆍ수도단(修道斷)ㆍ부단(不斷)
  21. 21)12입처 가운데 법입처를 말한다.
  22. 22)5음 가운데 행음을 말한다.
  23. 23)곧, 자분인(自分因)ㆍ상응인(相應因)ㆍ공유인(共有因)의 세 인(因).
  24. 24)인연(因緣)ㆍ등무간연(等無間緣)ㆍ소연연(所緣緣)ㆍ증상연(增上緣).
  25. 25)범어로는 durgati. 악업의 결과로 받는 생존 상태.
  26. 26)5탁이란 탁한 악세에 드러나는 다섯 가지 탁한 현상을 말한다. 곧, 유정의 과보가 쇠해져 몸과 마음이 약해지고 고통이 증대하는 유정탁(sattvakaṣāya)ㆍ유정의 수명이 짧아지는 명탁(āyuṣ-kaṣāya)ㆍ갖은 번뇌가 치성하는 번뇌탁(kleṡa-kaṣāya)ㆍ삿된 견해가 난무하는 견탁(dṛṣṭi-kaṣāya)ㆍ전쟁이나 기근 ,질병이 번창하는 겁탁(kalpa-kaṣāya)을 말한다.
  27. 27)이 게송은 세존께서 성도하신 후 다섯 비구를 제도하기 위해 베나레스로 가시던 중 길에서 만난 외도수행자 우파카(Upaka)를 상대로 설하신 내용이다.
  28. 28)곧, 속제(俗諦)와 진제(眞諦).
  29. 29)범어로는 arhat. 원시불교에서의 이상적인 출가자상. ‘공양 받을 자격이 있는 자’ 라는 의미에서 응공(應供)이라 번역하기도 한다. 나한(羅漢)은 약칭.
  30. 30)범어로는 sarvajñātā. 일체를 꿰뚫어 아는 자. 곧, 완전지를 획득한 자.
  31. 31)범어로는 avyākṛta. 선(善)ㆍ불선(不善)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32. 32)색음을 제외한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음(識陰).
  33. 33)곧, 한 사람을 두고 단지 그를 아버지나 혹은 아들의 한 측면으로만 본다면, 이는 그가 아들이자 아버지일 수 있는 측면을 간과하게 된다는 뜻.
  34. 34)범어로는 Siṁsapā-Vana-sutta(雜阿含 권15, SN.56.31). 이 경에서 세존은 자신이 지견한 법을 숲 속의 나뭇잎에 비유하고 다시 교화를 위해 설하는 법을 손 안에 든 나뭇잎에 비유한다. 그렇지만 이 교화를 위한 법 역시 열반을 향한 가르침이라고 설한다.
  35. 35)아(我, ātmaka)ㆍ낙(樂, sukha)ㆍ상(常, nitya)ㆍ정(淨, ṡubha).
  36. 36)범어로는 āsrava. 6근을 통해 흘러나오는 것. 곧, 번뇌의 다른 명칭.
  37. 37)고고(苦苦, duḥkhaduḥkha)ㆍ행고(行苦, saṁskāra-duḥkha)ㆍ괴고(壞苦, vipariṇāmaduḥkha)
  38. 38)범어로는 āṡraya.
  39. 39)범어로는 satkāya-dŗṣṭi. 5온이 화합해 이루어진 몸에 대해 ‘나’혹은 ‘내것’이라는 관념을 버리지 못하는 집착. 또는 몸이 있다고 집착하는 견해. 이 Sat를 경량부에서는 무상하고 무너지는 것으로 보며, 설일체유부에서는 실유(實有)의 존재로 본다.
  40. 40)6내입처(內入處)를 가리킨다.
  41. 41)전(轉)이란 번뇌를, 부전(不轉)이란 무루행을 말한다.
  42. 42)곧, 수음이란 번뇌를 의미한다.
  43. 43)5음(pañca-skandhā)이란 이른바 유정을 이루는 다섯 가지 요소로, 색(rūpa)ㆍ수(vedanā)ㆍ상(sam/jñā)ㆍ행(sam/khāra)ㆍ식(vijñāna)을 말한다.
  44. 44)곧, 안ㆍ이ㆍ비ㆍ설ㆍ신 식(識)을 말함.
  45. 45)범어로는 paramāṇu. 물질의 특징을 지니지 않은 순간까지 물질을 세분한 것. 현대적으로는 원자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1극미를 중심으로 상하ㆍ사방에 극미가 모인 것을 미진(微塵)이라고 한다.
  46. 46)범어로는 aṡubhā-bhāvanā. 자기 몸의 더러움을 관조해 번뇌와 욕망을 제거하는 관법. 그 초기의 유형은 백골관으로 시신이 서서히 썩어가서 결국은 백골이 되는 과정을 관조한다.
  47. 47)범어로는 ānāpāna-smŗti. 출입식념(出入息念). 드나드는 숨에 의식을 집중하는 선정수습법.
  48. 48)4대란 일체의 물질을 구성하는 원소로, 견고함을 본질로 하는 지대(地大 , pŗthivi-dhātu)ㆍ습기를 모으는 수대(水大, ab-dhātu)ㆍ열을 본질로 하며 성숙작용을 지니는 화대(火大, tejo-dhātu)ㆍ생장작용을 하는 풍대(風大, vāyu-dhātu).
  49. 49)곧 욕계를 벗어나기 위해 색계의 선정인 4선정(禪定)을 닦아야 한다는 뜻.
  50. 50)곧 색계를 벗어나기 위해 무색계의 선정인 4무색정(無色定)을 닦아야 한다는 뜻.
  51. 51)곧, 고락(苦樂)의 수(受)를 제어하기 위해서는 4선(禪)을 닦아야 하고, 상(想)을 제어하기 위해서는 4무색정(無色定)을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4선은 느낌을 제어하는 수행이고, 4무색정은 생각을 제어하는 수행인 것이다.
  52. 52)범어로는 śamprayukta. 수(受)와 상(想)을 제외한 일체의 심소법을 말한다. 심왕(心王)과 결부되어 동시에 일어나기에 심상응행이라고 하는 것이다.
  53. 53)범어로는 viprayukta. 심과 상응하지 않는 심소법으로, 물질도 아니고 마음도 아닌 것.
  54. 54)범어로는 saṁskāra. 마음작용을 뜻한다. 사(思)의 작용력이 가장 뚜렷하기에 사로써 행을 대표하는 것이다.
  55. 55)계(ṡiila)ㆍ정(samādhi)ㆍ혜(jñāna)ㆍ해탈(vimukti)ㆍ해탈지견(darṡana-jñāna-vimkti)
  56. 56)입(āyatana)이란 이른바 심ㆍ심작용의 의지처이다.
  57. 57)범어로는 artha.
  58. 58)범어로는 karma.
  59. 59)범어로는 adhvam.
  60. 60)범어로는 prajñapti.
  61. 61)감각과 지각을 지니는 유정이 4대를 집수해서 인후나 입술 혀 등을 통해 발생시키는 소리이다.(因受四大聲,有執受大種因聲, upāttamahābhūtahetukaṡabda)
  62. 62)유정이 아닌 바람이나 요령 나무 등이 일으키는 소리이다.(因不受四大聲,無執受大種因聲, anupāttamahābhūtahetukaṡabda)
  63. 63)범어로는 rūpa-dhātu. 색계에서의 본능적 욕망을 여의고, 오직 순수한 물질로만 이루어진 생존계.
  64. 64)범어로는 niṣyanda-phala. 원인과 동류의 과가 있는 것을 의과라고 한다. 예를 들어, 음식을 먹지 않으면 그 의과로서 배고픔과 목마름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수류과(隨流果)는 구역어.
  65. 65)범어로는 Kaśmiri.
  66. 66)곧, 부자는 기갈을 느껴도 먹고 마실 음식이 충분하니 오히려 즐거움을 초래하는 바람직한 과보이지만, 먹을 것이 없는 가난한 자의 기갈은 고통만을 증대시키기에 바람직하지 못한[不善] 장애거리가 될 뿐이다.
  67. 67)곧, 인식에 관계되지 않는 것.
  68. 68)범어로는 āryavāsa.
  69. 69)미리거주(彌離居住)는 Mleccha의 음사어로, 천민, 야만인을 뜻한다. 구탁종(垢濁種)은 의역어.
  70. 70)‘곧, 그것이 눈에 속하는 일이 되며’라는 뜻이다.
  71. 71)범어로는 maṁsa-cakṣana. 범부의 눈.
  72. 72)범어로는 divyaṁ-cakṣana 6신통 가운데 천안통.
  73. 73)범어로는 prajñā-cakṣana 성자의 무루지.
  74. 74)곧, 선ㆍ악ㆍ무기의 셋.
  75. 75)곧, 생ㆍ주ㆍ멸의 3유위상(有爲相).
  76. 76)범어로는 śūnyatā-vimokṣa-mukha. 일체는 인연으로 생기는 것으로 그 본체[실체]가 없다는 공에 통달해 일체에 대해 자재를 얻는 것을 말한다.
  77. 77)범어로는 kŗtanāyatana. 번뇌가 완전히 멸한 해탈의 경지.
  78. 78)범어로는 abibhvāyatanna.
  79. 79)이른바 무상정(無想定)을 말한다.
  80. 80)4무색정 가운데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를 말한다.
  81. 81)곧, 땅에 씨앗이 없다면 싹이 트지 않는 관계와도 같다
  82. 82)범어로는 Kauśika. 제석천이 인간이었을 당시의 이름.
  83. 83)6근ㆍ6경ㆍ6식의 각 6계와 지ㆍ수ㆍ화ㆍ풍ㆍ공ㆍ식의 6계, 욕(欲)ㆍ에(恚)ㆍ해(害)ㆍ무욕(無欲)ㆍ무에(無恚)ㆍ무해(無害)의 6계, 낙(樂)ㆍ고(苦)ㆍ희(喜)ㆍ우(憂)ㆍ사(捨)ㆍ무명(無明)의 6계, 각(覺)ㆍ상(想)ㆍ행(行)ㆍ식(識)의 4계, 욕(欲)ㆍ색(色)ㆍ무색(無色)의 3계,색(色)ㆍ무색(無色)ㆍ멸(滅)의 3계, 3세의 3계,묘(妙)ㆍ불묘(不妙)ㆍ중(中)의 3계,선(善)ㆍ불선(不善)ㆍ무기(無記)의 3계, 유학(有學)ㆍ무학(無學)ㆍ비이(非二)의 3계, 유루ㆍ무루의 2계, 유위ㆍ무위의 2계 등을 합해 총 62계가 된다.
  84. 84)Bahudhātukasutta.
  85. 85)열한 가지란, 5근ㆍ5경ㆍ무작색(無作色).
  86. 86)4종의 군대란, 상병(象兵)ㆍ마병(馬兵)ㆍ거병(車兵)ㆍ보병(步兵).
  87. 87)앞부분은 모두 의지하는 것. 의지하는 자로 고칠 것.
  88. 88)6경(境)을 말한다.
  89. 89)범어로는 avyākŗta. 선(善)의 과인 애(愛, priya)와 불선(不善)의 과인 불애(不愛, Apriya)의 어떤 것도 초래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90. 90)안근ㆍ이근ㆍ비근ㆍ설근ㆍ의근.
  91. 91)곧, 탐ㆍ진ㆍ치의 3독을 말함.
  92. 92)vyākaraṇa.
  93. 93)범어로는 ekāṁṡavyākaraṇa. 범어로는 질문자의 말이 도리에 맞는다고 보았을 때 답자(答者)가 주저 없이 대답하는 것을 말한다. 결정기(決定記)라고도 한다.
  94. 94)범어로는 vibhajyavyākaraṇa.
  95. 95)범어로는 paripŗcchāvyākaraṇa.
  96. 96)6도윤회 중에 지옥ㆍ아귀ㆍ축생의 길.
  97. 97)범어로는 sthāpaṇiiyavyākaraṇa.
  98. 98)범어로는 vandhyā.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자.
  99. 99)범어로는 samyak-saṁbuddhi. 최상의 깨달음을 얻은 자. 곧 붓다를 가리키는 말.
  100. 100)10선업도 가운데 7종의 색법. 불살생(不殺生)ㆍ불투도(不偸盜)ㆍ불사음(不邪淫)ㆍ불망어(不妄語)ㆍ불양설(不兩舌)ㆍ불악구(不惡口)ㆍ불기어(不綺語).
  101. 101)곧, 손이 닿지 않는 곳에 핀 꽃을 두고 그 꽃의 향기를 운운한다는 것은 의미 없는 논의라는 뜻. 그러니 이런 경우에는 논의 자체를 그만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102. 102)대상을 지닌다는 것(sapratigha, 有對)은 곧 제법이 서로 대하는 관계를 말한다. 혹은 장소를 점한 채 물질적으로 장해하는 바가 있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103. 103)경계를 대상으로 하는 것(viṣayapratighāta)이란 곧 일체의 경계를 상대하고 일체의 인식의 주관을 향하는 것을 말한다.
  104. 104)범어로는 viṣayapratighāta.
  105. 105)시설족론[施設足論]을 가리킨다.
  106. 106)곧, 소리ㆍ냄새ㆍ맛 등.
  107. 107)범어로는 ālambanapratighāta.
  108. 108)곧, 안(眼)ㆍ이(耳)ㆍ비(鼻)ㆍ설(舌)ㆍ신(身).
  109. 109)범어로는 ālambanapratighāta. 이 곧 경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110. 110)범어로는 kavadㆍiikārahāra. 이른바 고체ㆍ액체ㆍ기체를 막론한 일체의 물질적인 음식을 말한다.
  111. 111)곧, 향ㆍ미ㆍ촉의 세 가지.
  112. 112)유각(savittaka)은 사유를 일으킨 상태이며, 유관(savicāra)은 일으킨 사유를 바라보는 상태. 유심(有尋)ㆍ유사(有伺)라고 하기도 함.
  113. 113)5식계에서는 각ㆍ관의 작용 있음을 말한다.
  114. 114)범어로는 brahmaloka. 사바세계의 주인인 범천(Brahma sahāpati)이 사는 세계로, 불교에서는 이 세계를 초선(初禪)의 경지에 대비시킨다.
  115. 115)범천계는 이른바 초선천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116. 116)곧, 초선과 제2선의 중간.
  117. 117)곧, 관(觀)은 앞의 세 경지 가운데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118. 118)범어로는 sālambana.
  119. 119)범어로는 pratisaṁkhyā-nirodha.
  120. 120)신견(身見)ㆍ변견(邊見)ㆍ사견(邪見)ㆍ견취견(見取見)ㆍ계금취견(戒禁取見).
  121. 121)오염된 지혜로 법(慧法)을 보는 것은 마치 어두운 밤에 색을 보는 것과 같으며, 세속의 등견은 마치 개인 밤에 색을 보는 것과 같고, 유학의 견해는 그늘진 낮에 색을 보는 것과 같고, 무학의 견해는 맑게 개인 낮에 색을 보는 것과도 같다.
  122. 122)법계 가운데 심법(心法) 이외를 가리킨다.
  123. 123)생인(生因, janma-hetu), 의인(依因, niṡraya-hetu), 건립인(建立因, pratiṣṭhii-hetu),양인(養因, upastambra-hetu), 장인(長因, upabŗṁhaṇa-hetu).
  124. 124)곧, 신입과 다섯 경계를 말함.
  125. 125)유분(sabhāga)이란, 근ㆍ경ㆍ식의 인식작용에서 주ㆍ객관의 어느 것으로도 각자의 작용을 과거ㆍ미래ㆍ현재에서 수행하는 법을 말하며, 작용이 주어지지 않는 것을 유여분(tat-sabhāga)이라 한다. 신역에서는 각각 동분(同分), 피동분(彼同分)이라 함.
  126. 126)공유법(共有法)이란, 심심법(心心法) 및 생주이멸의 유위사상(有爲四相), 득비득(得非得) 등의 법을 말한다.
  127. 127)위의(威儀)란 행주좌와를 말한다. 공교란 기술을 말하고, 보생이란 앞에서 지은 업의 과보를 말하며, 변화란 변화하는 것을 말한다.
  128. 128)색계(色界)ㆍ성계(聲界)ㆍ법계(法界)를 말함.
  129. 129)범어로는 sa-uttara.
  130. 130)비(鼻)ㆍ설(舌)ㆍ신(身)을 말한다.
  131. 131)안계(眼界)ㆍ이계(耳界)ㆍ의계(意界)를 말한다.
  132. 132)4지ㆍ5지란, 초선 내지 제4선에서 얻는 선정을 말한다.
  133. 133)곧, 소의[根]와 소연[境]이 같은 시간 같은 장소를 지니기 때문이다.
  134. 134)안ㆍ이ㆍ비ㆍ설ㆍ신.
  135. 135)범어로는 vipāka-ja.
  136. 136)범어로는 naiṣyandika. 등류(等類)라고도 한다. 원인과 동류의 과가 있는 것을 말한다.
  137. 137)왜냐하면 과보란 끊임없이 상속되어 단절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138. 138)근도(近道)로 들어가는 최초의 찰나를 말한다.
  139. 139)여기에서의 권속이란 곧 상응하는 심법 등을 말한다.
  140. 140)범어로는 dravyavat. 불생불멸하는 상주(常住)의 실체를 말한다.
  141. 141)곧, 초선의 경지에서 사라져 비상비비상처의 경지에 생하는 경우를 말함.
  142. 142)무색계에는 안계가 없으며, 제2선, 제3선, 제4선에 생함에 의해 비로소 안계를 얻는다. 초선이 제외되는 것은 여기에서는 안계 외에도 안식계를 얻기 때문이다.
  143. 143)곧, 제2선ㆍ제3선ㆍ제4선을 말함.
  144. 144)안ㆍ이ㆍ비ㆍ설ㆍ신.
  145. 145)범어로는 saṁbhinnā-laṁbana. 다른 것과 공통되는 대상을 말한다.
  146. 146)범어로는 asaṁbhinnā-laṁbana. 공통되지 않는 그 자신만의 대상을 말한다.
  147. 147)범어로는 svabhāva-vikalpa. 깊은 고찰을 가하지 않은 채 현재만을 대상으로 직접 인식하는 작용.
  148. 148)범어로는 anusmaraṇa-vikalpa. 기억을 좇아 사유하는 것.
  149. 149)범어로는 abhinirūpaṇa-vikalpa.마음속으로 깊이 사유하고 판단 추리하는 작용.
  150. 150)범어로는 vitarka.
  151. 151)5근이란 이른바 해탈에 이르기 위한 다섯 가지 능력을 말한다. 곧, 신(信, ṡraddhā-indriya)ㆍ근(勤, viriya-indriya)ㆍ념(念, smŗti-indriya)ㆍ정(定, samādhi-indriya)ㆍ혜(慧, prajñā-indriya).
  152. 152)범어로는 saṁgrahavastu. 보시(布施)ㆍ애어(愛語)ㆍ이행(利行)ㆍ동사(同事).
  153. 153)원문은 등견(等見). 신역(新譯)으로는 8정도 가운데 정견(正見)에 해당.
  154. 154)원문은 등지(等至). 3본 등 다른 본에서는 등지(登志)로 교정. 곧, 신역(新譯)으로는 8정도 가운데 정사유(正思惟)에 해당.
  155. 155)범어로는 upādhyāya. 이란 본래 계사(戒師)를 가리키지만, 후대에는 고승에 대한 존칭어가 되었다.
  156. 156)범어로는 duragati. 란 6도 윤회 가운데 악업에 의해 태어나는 세계를 말한다.
  157. 157)곧, 색법은 색음에 포섭되고, 마음은 의입(意入)에, 그리고 심소법ㆍ심불상응법ㆍ무위법은 법계에 포섭되어 일체법을 이루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