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자 법구(法救) 지음 송(宋) 천축(天竺) 삼장(三藏) 승가발마(僧伽跋摩) 등 한역 김형준 번역
028_0391_a_02L尊者法救造
宋天竺三藏僧伽跋摩等譯
1. 서품(序品)
028_0391_a_04L序品第一
예전에 큰 스승들은 매우 깊은 여러 법에 대해 들어 아는 바가 많고 성스런 자취1)를 보아 이미 일체의 뜻을 말씀하셨네.
028_0391_a_05L古昔諸大師, 於諸甚深法, 多聞見聖迹, 已說一切義。
부지런히 노력하여 방편으로 구하였으나 아직 다른 부분[異分]을 얻지 못했네. 『아비담심론(阿毘曇心論)』을 많이 들어 아는 자[多聞者] 이미 설하였지만
028_0391_a_07L精勤方便求, 未曾得異分, 阿毘曇心論, 多聞者已說。
혹은 지나치게 총괄적이거나 혹은 넓기가 한량없으니, 이와 같은 갖가지의 설명은 경(經)을 따른 것이 아니네.
028_0391_a_08L或有極摠略, 或復廣無量, 如是種種說, 不順修多羅。
빛나게 드러내면서 경을 잘 따른 것은 오직 이 논(論)이 최고이니, 근거 없이 공허한 논은 지혜 있는 사람조차 요해(了解)하지 못하네.
028_0391_a_09L 光顯善隨順, 唯此論爲最, 無依虛空論, 智者尚不了。
지나치게 간략하면 이해하기 어렵고 지나치게 자세하면 오히려 지혜로운 이도 물러나게 한다네. 그러니 나는 이제 그 중간에 처해 설하되 광설(廣說)로써 장엄하리라.
028_0391_a_11L極略難解知, 極廣令智退, 我今處中說, 廣說義莊嚴。
광설[廣說]이란 범음(梵音)으로는 비바사(毘婆沙)2)라고 한다. 비바사 가운데 설해진 의미로써 그 중간에 처한 설을 장엄하는 것이다. 여러 스승들이 법승(法勝)의 『아비담심론』의 뜻을 풀이한 것은 자세하거나 간략함[廣略]이 같지 않지만, 법승의 해석을 가장 간략하다고 한다. 우바선다(優婆扇多)가 8천의 게송으로 풀이한 것이 있고, 또 어떤 스승이 만 2천의 게송으로 풀이한 것이 있는데, 이 두 논(論)을 자세한 해석이라 한다. 화수반두(和修槃頭)3)는 6천의 게송으로 법을 풀이하였지만, 크고 심원하며 그윽하고 광활하나 3장(臧)에 의거하지 않기에 ‘근거 없이 공허한 논’이라 한다.
028_0391_b_02L【답】모니5)께서 말씀하신 등제(等諦)6)와 제일의제(第一義諦)7)의 깊은 의미를 선양해서 드러내고 진실한 성품의 의미를 설하는 것을 아비담이라 부른다. 또한 능히 경의 내용을 현현함이 마치 등불이 밝게 비추듯 하니, 이는 혜근(慧根)의 성품이 된다. 만약에 그 자상(自相)을 취한다면 곧 각법(覺法)8)이 아비담이다. 만약에 여러 가지 부수하는 가르침[衆具]을 취한다면 이는 5음(陰)9)의 본성이다. 모든 논(論) 중에서 뛰어나 해탈을 향해 나아가게 한다면 이것을 아비담이라 한다.
다음으로 비바사란 모니께서 말씀하신 성품의 참된 뜻에 대해서 묻고 답하고 분별하여 참된 요의를 궁구하여 펴며[究暢], 계경(契經)에 수순하여 중생의 마음을 열어 즐겁게 하는 것이다. 이른바 성(性)ㆍ상(相)ㆍ명자(名字)ㆍ지(地)ㆍ의(依)ㆍ행(行)ㆍ연(緣)ㆍ염(念)ㆍ지(智)ㆍ근(根)ㆍ정(定)ㆍ세계[世]ㆍ선(善) 및 계(界)ㆍ학(學)ㆍ견제단(見諦斷)ㆍ의연(義緣)ㆍ방편득(方便得)ㆍ역(亦)ㆍ이욕득(離欲得)ㆍ어느 곳이든 처음 일어나는 곳[何處初起]ㆍ섭(攝)ㆍ상응(相應)ㆍ인연(因緣)ㆍ과(果)ㆍ유과(有果) 등 한량없는 제법의 갖가지의 뜻에 대해 다양한 종류의 갖가지 설명을 낳았으니, 이것을 ‘비바사론’이라 부른다.
예를 들면 불 세존께서 간략하게 설하신 두 가지 지혜, 곧 법지(法智)10)와 비지(比智)11)를 비바사가 한량없이 분별하는 것과 같다. 이른바 저 법지(法智)란 무루혜(無漏慧)의 성품으로서 이것은 지혜의 모습[智相]이니, 처음으로 법을 알게 되기에 이것을 법지라고 이름한 것이다.
이 지혜는 여섯 경지[六地]12)에 있으며 욕계13)에 의거한다. 열여섯 가지 행[十六行]14)이며 4제(諦)를 경계로 삼는다. 4념처(念處)이며, 혜(慧) 곧 지혜의 모습[智相]이다. 3근(根)15)과 3삼매(三昧)16)와 상응한다. [3근이란 희(喜)ㆍ락(樂)ㆍ사(捨)이며, 3삼매란 이른바 유각유관(有覺有觀)ㆍ무각유관(無覺有觀)ㆍ무각무관(無覺無觀)이다.] 3세(世)에 떨어지고 3세 및 세간을 떠남[離世]을 연한다. 이것은 선(善)한 것이며, 세 종류17)를 연한다. 이것은 불계(不繫)이며, 욕계 및 불계를 연한다. 이것은 유학(有學)ㆍ무학(無學)18)이며, 세 종류19)를 연한다. 이것은 부단(不斷)이며, 세 종류20)를 연한다. 그리고 이름에 연하고[名緣] 뜻에 연하며[義緣], 방편의 얻음이고 이욕의 얻음이다.
028_0391_c_02L욕계에서 일어나 법계(法界)ㆍ법입(法入)21)ㆍ행음(行陰)22)에 포섭되며 의계(意界)ㆍ법계(法界)ㆍ의식계(意識界)와 상응한다. 세 가지 인[三因]23)의 자성이자 세 가지 인이 일으킨 바이고, 네 가지 연[四緣]24)의 자성이자 네 가지 연이 일으킨 바이다.
이것의 최초에 생기는 무루(無漏)의 의과(依果) 및 공용과(功用果)이다. 함께 생겨나는 경우는 오직 공용과 뿐이다. 유과(有果)라 함은 세 가지 과보, 곧 앞에서 말한 두 가지 과보와 해탈의 과보이다. 증상과(增上果)는 설하지 않지만, 이와 같이 일체법을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문】이미 영원한 연기(緣起)의 근본은 알게 되었다. 아비담비바사는 그것에 대한 대치(對治)를 설하는 것이거늘, 무슨 의미로 참된 의미를 설한다고 하는가?
028_0391_c_08L問:已知久遠緣起根本,阿毘曇 毘婆沙說彼對治,何故說眞實義?
【답】진실한 뜻을 알고자 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분별하지 않는다면 여러 가지 논(論)은 가히 요달해 알기 어렵다. 알지 못하기에 참된 지혜가 생겨나지 못하며, 참된 지혜가 생겨나지 않기에 진실을 알지 못한다. 나아가 진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번뇌와 행위의 과환(過患)들을 보지 못하며, 과환을 보지 못하기에 악취(惡趣)25)에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곧 하늘 세계에 태어나거나 해탈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일들을 관찰하고 광대한 논에서 듣고 지니며 또한 두려워해 자타를 이롭게 하고자 간략히 진실을 설하니, 이것은 곧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나중도 좋은 가르침[三時善說]인 것이다. 외도(外道)와 삿된 논을 펴는 여러 스승들을 애처롭고 불쌍히 여기고, 먼 과거에 수승하고도 바른 논을 펴신 법주(法主) 및 여러 성중(聖衆)들을 멀리 우러러 널리 이 가운데에서 크게 공경하고 믿는 마음을 일으키고, 중생의 불ㆍ법ㆍ승에 대한 염(念)을 열어 일으키게 하고자 3보의 참된 공덕을 드러내 보이니, 바야흐로 논(論)의 가닥을 잡기 위해 이 게송을 설하겠다.
028_0392_a_02L예전의, 가장 뛰어나시며 번뇌를 여의신 안교(安敎)의 존자님께 머리 조아려 예배합니다. 말씀하신 바 모든 것이 구족되었으니
나한(羅漢)에게서 진리를 보나이다.
028_0391_c_24L頂禮前最勝, 離惱安教尊, 所說悉具足, 羅漢見眞諦。
‘머리 조아려 예배한다’는 것은 애과(愛果)를 일으킬 만한 선한 마음으로 예를 올려 공경히 절하는 것을 말한다. ‘예전[前]’이라 함은 앞 시대를 말한 것이다. 누구를 앞에 두어 가장 뛰어나다고 하는 것인가? 이는 곧 공양드릴 곳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렇게 말한 것이다. ‘가장 뛰어나다’ 함은 무슨 뜻인가? 모든 번뇌를 조복하기 때문에 가장 뛰어나다고 하는 것이다. 곧 게송에서 설하는 바와 같다.
우파가[憂波伽]여, 마땅히 알아야 한다. 우리들과 같은 모든 부처들은 이미 모든 번뇌를 여의었으니 이 때문에 가장 뛰어나다고 하느니라.27)
028_0392_a_07L憂波伽當知, 如我等 諸佛, 悉已離諸漏, 是故名最勝。
‘번뇌를 여의었다’고 함은 번뇌나 모든 속박이 몸과 마음을 불태워도, 세존께서는 실로 영겁에 걸쳐 모든 중생들을 편안하게 하고자 활활 타오르던 번뇌의 불길을 영원히 다하게 되었으므로 고뇌에서 벗어났다고 표현한 것이다. 안락(安樂)을 말하기에 마땅히 번뇌를 여의었다고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때문에 다음으로 안교(安敎)를 말한 것이다.
‘안(安)’이란 안온하다는 뜻이며, ‘교(敎)’란 이른바 언설을 말한다. 가르침에 안온해지는 바가 있는 까닭에 안교라고 말한 것이다. 간략히 설명하면 자신도 안온하고 다른 사람도 안온하게 한다는 것이다. 번뇌를 여의었다고 함은 자신이 안온해진 것이며, 안교란 다른 사람을 안온하게 하는 것이다. 전도(顚倒)되지 않았기에 안교라고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하신 바 모든 것이 구족되었다고 한 것이다. ‘말씀’이란 언설로서 곧 안교이다.
‘구족’이란 깊고 미묘함을 변정(辯正)하고 결단을 드러내며, 전도되지 아니 함을 설해 참된 뜻에 이르러 2제(諦)28)에 어긋나지 않은 까닭에 구족이라 한 것이다. 때문에 그에게 예를 올리는 것을 법을 공양한다고 하는 것이다. ‘아라한’29)이란 구경의 경지에 이르러 법상(法相)이 원만히 충족된 자를 말한다. 때문에 다음으로 아라한이라고 말했으며, 참된 복전(福田)으로서 마땅히 그를 공양해야 하기에 아라한이라 부르는 것이다. 이것은 오로지 무학(無學)이라고만 하는데, 이 무학의 경지를 말한 다음에 유학[學]이 진리를 봄을 설한다.
‘진리’란 4성제(聖諦)가 전도되지 않는 것이다. 이른바 8인(忍)ㆍ8지(智)를 배워서 그 진리를 보기 때문에 진리를 본다고 한다. 비록 견도(見道)에 머물고 있어 아직 4제에 두루 통달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반드시 4제를 보기 때문에 역시 ‘진리를 본다’고 하는 것이다.
028_0392_b_02L【답】모니(牟尼) 세존께서는 법취(法聚)의 두 가지 상(相)을 모두 아시고 또한 다른 사람을 위해 드러내 보이셨으니 내 지금 그 일부분을 설하리라.
028_0392_b_02L答: 牟尼尊悉知, 法聚二種相, 亦爲他顯現, 我今說少分。
‘모니’란 몸ㆍ입ㆍ뜻이 원만한 까닭에 모니라 하는 것이다. ‘모두[悉]’란 무릇 일체지(一切智)30)를 설하는 경[修多羅]ㆍ율[毘尼]ㆍ론[阿毘曇]이 유포되어 지금에 이른 것을 말한 것이다. ‘아시고[知]’란 지견(知見)과 깨달음의 뜻이다. ‘법(法)’이란 지닌다는 뜻으로서 자성(自性)을 지니기에 법이라 부르며, 법에는 적취가 있는 까닭에 법취(法聚)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선한 법이면 선법취[善法聚]가 되니, 불선(不善) 및 무기(無記)31)의 법 역시 이와 같다. ‘둘[二]’이란 수를 이름하며, ‘상(相)’이란 모양[相貌]이다.
【문】만약 장애의 모습이 색이라면, 자상 또한 공상이기도 한 것이다. 곧 4음(陰)32)을 관찰하기 때문에 이것은 자상이며, 열 종류의 색을 관찰하기 때문에 이것은 공상이기도 한 것이다. 이와 같이 자상은 곧 공상과의 관찰 때문에 자상과 공상의 두 종류는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답】하나의 독자성 때문에 장애는 곧 색의 모습이기 때문에 색의 자상이라고 이름하며, 여러 가지 색[衆色]의 차별이 있기 때문에 열 종류를 설하는 것이다. 그대가 말하기를, “관찰하는 까닭에 자상과 공상은 성립되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렇지 않다. 그것은 왜냐하면, 마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처럼, 열매와 씨앗의 관계처럼, 고제(苦諦)와 집제(集諦)의 관계처럼, 또한 허락하고 제약하는 관계처럼 허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에 자상을 관찰한다면 그것은 공상은 아니며, 만약에 공상을 관찰한다면 자상은 아닌 것이다.
마치 한 사람을 두고 아버지라 부르고 또한 아들이라고 부르는데, 아버지로 말미암아 아들이라고 부르고 아들로 말미암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만약에 아버지를 관찰한다면 아들을 보지 못하며, 만약에 아들을 관찰한다면 아버지를 보지 못하게 된다.33) 만약에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렇지가 않다. 그것은 왜냐하면, 이미 성립되어 있기 때문이니, 이것을 부자간의 뜻의 성립으로 삼는 것이다.
028_0392_c_02L 선(善)이건 악(惡)이건 정견(正見)이건 사견(邪見)이건 그 가운데에서 자세히 설명하면 무간업(無間業)이 생겨나게 된다. 만약 아버지라는 뜻이 없다면 아비가 없다는 사견(邪見)과 아버지가 있다는 정견도 없게 된다. 만약 이것이 없다면 청정하고 더러움 또한 없으며, 청정하고 더러움이 없다면 해탈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무간업이 없다면 인과(因果)도 없으며, 인과가 없다면 일체법 역시 존재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해석을) 잘못이라거나 지나치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이란 뜻이 성립되며, 이미 성립되어 다시 성립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만약에 이미 성립되었는데 다시 성립된다면 이 일은 끝이 없을 것이다. 때문에 자상과 공상의 뜻이 성립된다.
현현(顯現)이란 ‘열어 보여 준다[開示]’는 뜻이다. 다른 사람[他]이란 교화를 받는 사람이다. 가령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뜻이 [자기에게] 요익하여 범행(梵行)을 따르게 되는 것은 『신서림계경(申恕林契經)』34)에서 설하는 바와 같다. 그분께서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법을 설하신 것 가운데 나는 지금 일부분을 설명하려는 것이다. 여래께서 아시는 바는 깊고 광대하고 한량없어 사리불(舍利弗)같은 사람들조차도 다 설할 수 없거늘, 하물며 다른 이들이야 말할 나위 있겠는가?
일체의 유루행은 아(我)ㆍ낙(樂)ㆍ상(常)ㆍ정(淨)35)을 떠난 것이나 루(漏) 있음을 보지 못한 까닭에 아(我) 등을 헤아려 망령되이 받아들인다.
028_0392_c_16L 一切有漏行, 離我樂常淨, 不見有漏故, 計我等妄受。
이 모든 유루36)의 행은 자재롭지 못하기에 아(我)를 벗어나 있고, 3고(苦)37)를 이루기에 즐거움[樂]을 벗어나 있다. 연력(緣力) 때문에 항상함[常]을 벗어나 있고, 번뇌가 있는 곳이기에 청정[淨]을 벗어난 것이다.
028_0392_c_18L 此諸有漏行,不自在故離我,三苦成 故離樂,緣力故離常,煩惱處故離淨。
【문】어떤 것들이 유루(有漏)의 행인가?
028_0392_c_20L 問:何等是有漏行?
【답】모든 번뇌가 생겨나는 바인 5음(陰)이 그것이다.
028_0392_c_21L答:諸煩惱所生五 陰。
【문】만약 유루행이 아ㆍ낙ㆍ상ㆍ정을 벗어난 것이라면, 무엇을 일러 중생들이 그 가운데서 받아들인다는 것인가?
028_0392_c_22L問:若有漏行離我樂常淨者,云何 衆生而於中受?
028_0393_a_02L【답】유루(有漏)를 보지 못하기에 아(我) 등을 헤아려 망령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중생은 유루의 행에 대해 그 모습을 모르고서 아ㆍ낙ㆍ상ㆍ정을 받아들인다. 지은 업으로 덮여 있기에 내가 아님[非我]을 모르며, 위의(威儀)에 덮여 있기에 이것이 곧 괴로움임을 모른다. 유사한 상속이 덮고 있기에 항상하지 않음[非常]을 모르며, 엷은 가죽으로 덮여 있기에 부정(不淨)을 모른다. 이와 같이 모르고 있기에 그것을 아ㆍ낙ㆍ상ㆍ정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답】만약 모든 번뇌를 증가시킨다면 성인은 이를 유루라 말씀하신다. 그 스며든다[漏]는 표현 때문에 지혜 있는 사람은 번뇌라 말한다.
028_0393_a_06L答: 若增諸煩惱, 是聖說有漏, 以彼漏名故, 惠者說煩惱。
의지처[依]38)나 대상[緣]이 있어서 늘어나는 신견(身見)39) 등의 여러 번뇌는 「사품(使品)」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그러한 모든 행은 누(漏)를 좇아 생기고 누를 생하게 하며, 누의 장소인 까닭에 이것을 유루법(有漏法)이라 설하는 것이다. 무루의 연(緣)은 약한[軟] 번뇌와 중간 번뇌와 센 번뇌를 증장시키지 않는다고 함은 사실이 아니다. 의지처를 늘리기에 [번뇌 역시] 늘어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의지처를 늘리고 연(緣)을 늘리지 않을 뿐이다.
【답】그것이 스며든다는 이름을 지닌 까닭에 지혜 있는 사람은 그것을 번뇌라 말한다. 번뇌라는 것을 설하여 누(漏)라고 이름한 것이다. [이것은] 일체의 입처(入處)40)로 항상 스며들기 때문이며, 또한 마음의 누가 연이어 주입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번뇌를 늘어나게 하는 모든 행(行)이 바로 유루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답】또한 번뇌라 하기도 하고 수음(受陰)및 쟁(諍)이라 하기도 한다. 번민과 수음과 다툼이 생기기 때문이니 이것은 여러 성현들께서 설하신 바이다.
028_0393_a_16L答: 亦名爲煩惱, 受陰及與諍, 煩受諍起故, 是諸賢聖說。
이 유루의 행을 이름하여 번뇌ㆍ수음ㆍ다툼이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게송에서 이른 대로] 번민과 수음과 다툼이 생기기 때문이니, 이것은 여러 성현들께서 설하신 바이다. 신견(身見) 등 모든 번뇌는 중생을 괴롭히기 때문에 번뇌라고 이름하며, 스스로의 몸으로 받아들이는 까닭에 이것을 수(受)라고 표현하며, 마음을 근심시키고 교란시키기 때문에 다툼이라고 한 것이다.
028_0393_b_02L신견(身見) 등의 모든 번뇌를 낳는 유루행은 번뇌를 따라 생기기 때문에 번뇌라고 설하고, 취함[受]을 따라 생기기 때문에 ‘수음(受陰)’이라 설하며, 다툼으로부터 생기기 때문에 쟁(諍)이라 설하는 것이다. 이미 수음(受陰)의 모습을 설명하였으니, 지금부터는 음(陰)의 모습을 설명하겠다.
만약 행이 번뇌를 여의고 또한 모든 루(漏)에서 해탈한다면 이것과 앞의 수음은 곧 음이 되니, 이는 성인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028_0393_b_05L若行離煩惱, 亦解脫諸漏, 此及前受陰, 是陰聖所說。
만약 행이 신견(身見) 등의 여러 번뇌와 여러 루(漏)를 벗어난다면, 이것은 무루의 행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무루의 행과 앞에서 말한 수음을 이름하여 음의 모습[陰相]이라 한다. 음과 수음의 차별은, 전(轉)과 부전(不轉)41)을 합한 것이 곧 음이며, 전은 곧 수음이다.42)
【답】이른바 색ㆍ수음(受陰)과 상(想)ㆍ행(行) 및 식(識)이다. 이 5음의 차례는 거칠고 미세함에 따라 설한 것이다.
028_0393_b_11L答: 所謂色受陰, 想行及與識, 是五陰次第, 麤細隨順說。
‘이 5음’43)이란 이른바 색음과 수ㆍ상ㆍ행ㆍ식음을 말한다.
028_0393_b_13L 是五陰謂色陰、受想行識陰。
무엇을 색음이라 하는가? 일체의 모든 색의 과거ㆍ미래ㆍ현재이니, 이와 같이 광의로써 설한다. 나아가 그것이 일어났다가 소멸했다면 이것을 과거라고 말하며, 아직 일어나지도 않았고 소멸되지도 않은 그것은 미래라고 말하고, 이미 일어났으나 아직 소멸하지 않은 것은 현재라고 말한다. 또 자신에게 있는 것을 이름하여 내(內)라 부르고 다른 사람의 몸이나 중생들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색은 외(外)라 부른다. 또한 이 내외(內外)의 뜻은 입처(入處)의 설명과 같다.
‘거칠다’고 함은 대상이 있는 것[有對]을 말하며, ‘미세하다’고 함은 대상이 없는 것[無對]을 말한다. 만약 [이러한 해석이] 성립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관(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관하기에 [그런 해석이] 성립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 역시 그렇지 않다. 만약에 거친 것을 관한다면 곧 미세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염된 것[染汚]을 악색(惡色)이라 하고 오염되지 않은 것을 호색(好色)이라 부른다. 과거와 미래를 이름하여 원(遠)이라 하고, 현재를 이름하여 근(近)이라 한다. 원의 내용에는 네 가지 구별이 있으니 행품(行品)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거기에서는] 그 일체를 생략하여 단지 색음이라고 설한다. 이 말의 명칭은 간략할지라도 그 실제[事]는 간략하지 않다. 색음과 마찬가지로 수ㆍ상ㆍ행ㆍ식 역시 이와 같다.
028_0393_c_02L그 가운데 구별을 하게 되어 자신이 취하는 것은 내(內)라 하고 다른 사람의 몸이 취하는 것은 외(外)라 하니, 내연과 외연과 방편력의 일어남과 경계력의 일어남이다. 거칠다고 함은 5식신(識身)44)이며, 미세하다고 함은 뜻의 경지[意地]를 말한다. 오염과 오염되지 않음과 계지(界地) 또한 마찬가지이며, 나아가 식음(識陰)또한 이와 같다. ‘행(行)’은 곧 행음(行陰)이다. 외(外)란 중생ㆍ비중생의 범주임을 알아야 한다.
【답】장애가 있는 모습[礙相]이 곧 색음(色陰)의 모습이고, 감각을 따르는 것은 수[受陰]의 모습이며, 지(知)를 따르는 것은 상[想陰]의 모습이고, 조작(造作)하는 것은 행[行陰]의 모습이며, 분별하는 것은 식음[識陰]의 모습이다.
028_0393_c_08L答:㝵相是色相,隨 覺是受相,順知是想相,造作是行相, 分別是識相。
이른바 과거의 색이라 하는 것은 비록 [현재는] 장애되지 않을지라도 일찍이 장애된 일이 있기 때문에 [역시 색음에 해당되고] 또 다가올 미래의 색도 비록 [현재는] 장애되지 않을지라도 곧 장애가 될 것이기 때문에 역시 [색음에 해당한다.] 또한 극미(極微)45)의 [색] 하나하나는 비록 [현재는] 장애되지 않을지라도 많은 미세한 것들이 모이게 되면 곧 장애가 된다. 또 작용이 없는 [색]은 비록 장애가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색을 만들게 되면 장애가 되니 이 역시 장애가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나무가 흔들리면 그림자도 흔들리는 것과 같다. 색음의 과거, 미래와 마찬가지로 나머지 네 가지의 음(陰) 역시 이와 같다.
【답】[게송에서 말했듯이] 이 5음의 차제는 거칠고 미세함에 따라 설한 것이다. 그 5음 가운데서 색음이 가장 거친데, 5식(識)의 의지처가 되기 때문이고 또한 6식의 경계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먼저 설한 것이다. 수음(受陰)은 비록 그것은 색이 아닐지라도 행(行)이 거칠기 때문에 색과 같이 설한다. 마치 자신의 머리나 발등에서 아픈 느낌[痛受]이 좇아 일어나는 것과 같다. 나아가 식음은 가장 미세하기 때문에 마지막에 설하는 것이다.
알 수 없는 우주의 근본적인 시작 이래로 남자는 여색 때문에 여자는 남색 때문에 서로 마음이 물들고 애착하니, 때문에 [색부터] 먼저 설하는 것이다. 즐겁게 느끼고 탐내는 까닭에 색욕을 일으키며, 생각이 전도되는 까닭에 즐겁게 받아들이려는 탐욕을 일으키게 된다. 또한 번뇌 때문에 생각의 전도를 일으키며, 뜻[意]에 의지하게 되기 때문에 번뇌를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028_0394_a_02L다음으로 두 종류의 색을 관찰하는 까닭에 불법(佛法) 가운데 들어가 감로문(甘露門)을 삼으니, 이른바 부정관(不淨觀)46)과 안반념(安般念)47)이 그것이다. 부정관이란 만들어진 색[造色]을 관찰하며, 안반념이란 4대(大)48)를 관찰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먼저 색음(色陰)을 관찰하는 것이다. 색을 관찰하고 나서는 수(受)의 허물을 보며, 수의 허물을 보고 나서는 상(想)이 전도되지 않고, 상이 전도되지 않으면 번뇌가 형성되지 않으며, 번뇌가 형성되지 않으면 마음이 곧 참고 견딜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순차적으로 5음을 설명한 내용인데, 이제 이것을 거꾸로 설명하겠다. 청정하고 더러움이 생기는 것은 마음이 그 근본이 된다. 때문에 먼저 식음(識陰)을 관찰하는 것이다. 식을 관찰하고 나면 번뇌가 엷어지고, 번뇌가 엷어지면 법상(法想)을 일으키며, 법상을 일으키고 나면 곧 탐냄의 수(受)가 생기지 않으며, 탐냄의 수가 생기지 않기에 색을 관찰하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먼저 색음을 설하고 나아가 식음에 이르기까지 설하는 것이다.
‘두 가지 다툼의 근본’이란 [탐욕의 결박과 견욕의 결박을 말하는데] 애욕과 갈애에 익숙해진 탐욕의 결박은 수(受)로부터 생기고 편견과 욕망의 결박은 상(想)에서 생긴다. 수에 대해서는 여러 선정(禪定)49)을 닦아야 하고 상에 대해서는 무색정(無色定)50)을 닦아야 한다.51) 다음으로 마음의 법[心法]은 혹은 근(根)이기도 하고 혹은 근이 아니기도 하다. 근의 법은 곧 수이고 근 아닌 법은 곧 상이다. 그런 까닭에 뜻에 따라 설하는 것이다.
모든 법음(法陰)을 자세히 설한다면 그 수는 팔만 가지가 있으니 계율 등과 다른 음은 모두 5음(陰)에 포함된다.
028_0394_b_19L 廣說諸法陰, 其數有八萬, 戒等及餘陰, 悉是五陰攝。
8만 가지의 법음은 모두 색음에 속하는데, 부처님의 말씀은 언어를 본성으로 하기 때문이다. 혹은 어떤 이가 설하듯이, 이름[名]의 본성이라면 행음에 속하는 것이다. 그 밖에 계 등의 5음55)에 대해서 보면, 저 계음(戒陰)은 색음에 속하고, 선정ㆍ지혜ㆍ해탈ㆍ해탈지견음은 모두가 행음에 속한다. 만약 이 외에 다른 음의 이름이 있다 해도 모두가 5음 가운데 들어간다.
【답】법음이란 이른바 경론이다. 이와 같은 낱낱의 설법 및 모든 대치(對治)의 행을 모두 법음의 범주라 부른다.
028_0394_c_03L答: 法陰謂經論, 如是一一說, 及諸對治行, 悉名法陰數。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낱낱의 경론(經論)을 이름하여 법음이라고 하니, 이와 같은 경론의 수는 6천 가지가 있다”고 한다. 또 다른 사람은 말하기를, “낱낱의 음처(陰處)가 곧 법음처(法陰處)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다른 사람은 말하기를, “음처와 계처(界處) 등을 법음(法陰)의 범주로 삼는다”라고 한다.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은 이른바 중생에게는 8만의 행이 있고, 그런 까닭에 세존께서는 그들의 행에 따라 그들을 위해 대치(對治)를 설하신 것이니, 이 모두가 법음의 범주인 것이다.
【문】앞에서 설하기를, “열 가지는 이른바 색입(色入)이며, 또한 작용 없는 가색(仮色)이다. 이것을 색음(色陰)이라 이름한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입(入)56)인가?
028_0394_c_10L問:前 說十種謂色入,亦無作假色,是名色 陰。何等爲入。
【답】이른바 눈ㆍ귀ㆍ코 혀ㆍ몸 및 뜻[意[과 색ㆍ소리ㆍ냄새ㆍ맛ㆍ촉감이며, 나머지는 모두 법입이라 말한다.
028_0394_c_12L答: 所謂眼耳鼻, 舌身及與意, 色聲香味觸, 餘則說法入。
‘안입(眼入)’이란 안식이 의지하는 바이며, 4대(大)를 취해 만들어진 순수한 색으로서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대상이 있는 것이다. 귀ㆍ코ㆍ혀ㆍ몸의 경우도 역시 이와 같다. 여기서 구별이 있다면 [근거하는] 인식 작용을 따라 구별할 따름이다. ‘의입(意入)’이란 곧 마음[心]ㆍ뜻[意]ㆍ식별[識]이며, [여기에서는] 이름[名]과 뜻[義]과 업(業)과 세간[世]과 시설(施設)에 의한 것이다. 그 이름 등에 의한 소작의 차별은 다음과 같이 알아야 한다. 이름에 의한다면, 곧 이름이 마음이 되고 이름이 뜻이 되고 이름이 식이 된다. 뜻57)에 의한다면, 집기(集起)한 것이 곧 마음이라는 의미이며, 생각하고 헤아린다는 것이 의(意)의 뜻이고 구별하여 안다는 것이 식별[識]이다.
업58)에 의한다면, 멀리서 아는 것이 곧 마음이며, 앞에서 아는 것이 곧 뜻이고 계속해서 생겨나는 것이 곧 식별이다. 세간59)에 의한다면, 과거세는 곧 뜻[意]에 해당하며, 다가올 미래세는 곧 마음이고 현재세는 곧 식별인 것이다. 시설60)에 의한다면, 계시설(界施設)은 마음이고 입시설(入施設)은 뜻이며, 음시설(陰施設)은 식이다.
028_0395_a_02L다음으로 탐욕ㆍ노여움ㆍ어리석음 등을 달리 분별한다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경계가 있다. 안정된 마음[定心]을 불란(不亂)이라고 하며, 이와 상위(相違)한 오염된 마음을 이름하여 란(亂)이라고 한다. 게으름과 상응하는 마음을 하(下)라고 하며, 정진과 상응하는 마음을 이름하여 거(擧)라고 한다. 습(習)이 적은 청정한 마음 및 오염된 마음을 소(少)라 하며, 습이 많은 청정한 마음을 다(多)라고 한다. 적은 근기를 지닌 자가 얻기 쉬운 소대치(少對治)ㆍ소수전(少隨轉)의 모든 염오심을 이름하여 소(小)라 하며, 이와 상위한 선심(善心)을 대(大)라고 한다. 닦을 수 있는 수행에 대해서 닦지 못한다면 이와 같은 염오심을 불수(不修)라고 하며, 이와 상위한 선심을 이름하여 수(修)라고 한다.
자성해탈(自性解脫)및 그 밖의 해탈(在解脫)에 있어서 그에 대한 염오심을 불해탈(不解脫)이라고 하며, 이와 상위한 선심을 해탈(解脫)이라고 한다. 혹은 마음이 자성해탈이면서 해탈에 있지 않은 경우가 있고, 혹은 마음이 해탈에 있으면서 자성해탈이 아닌 경우도 있다. 또한 마음이 자성해탈이면서 또한 해탈에 있는 경우도 있고, 혹은 마음이 자성해탈도 아니고 해탈에 있지도 않은 경우가 있다.
자성해탈이면서 해탈에 있지 않은 경우란 곧 아직 배울 것이 남아 있는 지위에 있는 자[有學]의 무루심이다. 다음으로 해탈에 있으면서 자성해탈이 아닌 경우란 곧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경지에 오른 자[無學]의 유루심이다. 자성해탈이면서 또한 해탈에 있는 경우란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경지에 오른 자의 무루심이며, 자성해탈도 아니고 해탈에 있지도 않은 경우란 아직 배울 것이 남아 있는 자의 유루심 및 범부의 마음이다.
색입(色入)에는 세 가지 구분이 있다. 이른바 색깔과 처소[處]와 [색깔과 처소가] 함께 하는[俱] 경우 등이다. 이 중에 색깔이라는 것은 푸른색ㆍ노란색ㆍ붉은색ㆍ흰색으로, 이처럼 자세히 설할 수 있다. 처소[處]란 몸이 색을 받아들이는 곳을 말하며, 함께 한다[俱]고 함은 예를 들면 그림을 그리고 만드는 일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성입(聲入)에는 세 가지가 있다. 이른바 집수(執受)된 4대(大)를 원인으로 하는 소리61)와 집수되지 않은 4대를 원인으로 하는 소리62), 그리고 그 둘을 함께 원인으로 하는 소리이다.
028_0395_b_02L집수된 4대를 원인으로 하는 소리란 이른바 목구멍ㆍ입술ㆍ혀를 인연해 나오는 소리이다. 집수되지 않은 4대를 원인으로 하는 소리란 이른바 바람ㆍ요령ㆍ나무 등을 인연해 나오는 소리이다. 두 가지를 함께 원인으로 하는 소리란 이른바 북을 치거나 피리를 불어 소리를 내는 경우이다. [다시] 이들 각각의 소리에는 두 가지 구분이 있으니, 이른바 마음에 드는 소리(可意:manojña)와 마음에 들지 않는 소리(不可意:amanojña)가 그것이다.
【문】가령 맛을 볼 때 맛을 구별하는 것은 먼저 혀로 인식하는[舌識]것인가? 아니면 몸으로 인식[身識]하는 것인가?
028_0395_b_05L問:若嘗味時,別味者爲舌識 先覺、爲身識耶?
【답】만약 먼저 [음식의] 차갑고 따뜻한 것을 느낀다면 이 경우는 먼저 몸의 인식작용이 있고 뒤에 혀의 인식이 있는 경우이다. 그러나 만약 먼저 매운맛 등을 구별하였다면 먼저 혀의 인식 작용이 있고 뒤에 몸의 인식이 있는 경우이다. 촉입(觸入)에는 열한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4대(大) 및 일곱 종류의 만들어진 색이 그것이다. 일곱 종류의 만들어진 색이란, 이른바 거칠음ㆍ매끄러움ㆍ가벼움ㆍ무거움ㆍ차갑거나 따뜻함ㆍ배고픔ㆍ목마름을 말한다. 거칠음이란 거칠고 억센 [감각]이다. 매끄러움이란 미세하고 연한 [감각]이고, 가벼움이란 말로 이를 수 없는 [감각]이고, 무거움이란 도탑고 두꺼운 [감각]이며, 차가움이란 따뜻함을 구하는 [감각]이고, 배고픔이란 음식을 원하는 [감각]이며, 목마름이란 마실 것을 구하는 [감각]이다.
【문】어떤 요소[大]가 불어나는 까닭에 거칠고 매끄럽고 내지 배고프고 목마른 [감각이] 있게 되는가?
028_0395_b_12L問:何大增故澀滑乃至 飢渴?
【답】혹은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특별하게 한 가지로] 치우쳐 불어난다면, 그 업보는 먼저 거친 4대의 과를 얻고 내지 배고픔과 목마름의 [과를 얻는다]”고 한다. 또 다른 사람은 말하기를, “수(水)와 화(火)가 증대하기 때문에 매끄러우며, 지(地)와 풍(風)이 증대하기 때문에 거칠며, 지와 수가 증대하기 때문에 무거우며, 풍과 화가 증대하기 때문에 가벼우며, 수와 풍이 증대하기 때문에 차가우며, 풍이 증대하기 때문에 배가 고프고, 화가 증대하기 때문에 목이 마르다”고 한다.
【답】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거친 느낌에서 목마른 느낌에 이르기까지 그 하나하나가 [몸의 인식 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고 하며,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다섯 가지 촉감이 능히 일으키니, 4대(大)와 거친 감각이 그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마침내 배고프고 목마름이 있게 된다”라고 한다. 또한 어떤 사람은 “열한 가지 [촉감]이 몸의 인식 작용을 일으킨다”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몸의 인식 작용에 속하는 경계인 까닭에 잘못된 해석이 아니다. 두 가지의 자상(自相)이 있으니, 일[事]의 자상과 입처(入處)의 자상이 그것이다. 일의 자상이란 평등한 경계이고 입처의 자상은 독자적인 모습의 경계이기 때문이다.
028_0395_c_02L이 열한 가지 가운데 두 가지 촉감은 욕계와 결박되어 있다. 곧, 배고픔과 목마름이 그것으로 색계63)에는 결박되지 않는다. [나머지] 아홉 가지는 욕계와 색계에 모두 결박되어 있다. 색계의 옷[衣]은 비록 말로 이를 수 없는 촉감이지만, 나머지는 또한 말로 이를 수 있고 또한 모아서 쌓을 수도 있다. [음식이란] 비록 차갑고 따뜻함의 과환은 없다고 하더라도 길이 몸을 길러 주고 적절하게 조절해 주는 기능은 있다. 그런데 배고프고 목마르다는 것은 혹은 의과(依果)64)라고 말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배고프고 목마름은] 먹고 마심으로써 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비담(阿毘曇) 논사는 “과보로 얻은 색은 끊어지고 난 뒤 다시 이어질 수 없다”고 말하며, 계빈의 논사65)는 “배고프고 목마름은 선ㆍ불선의 과보이자 장애[報障]이기에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먹은 것이 소화되고 나면 도로 [배고프고 목마름을] 알 수 있게 된다. 때문에 부자의 기갈은 좋은 과보이며 가난한 자의 기갈은 좋지 못한 과보가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66)
법입(法入)에는 네 가지 구분이 있다. 그 가운데 무작색(無作色)은 업품(業品)에서의 설명과 같다. 심법(心法)은 행품(行品)에서의 설명과 같으며, 또한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 행[心不相應行]은 잡품(雜品)에서의 설명과 같다. 무위(無爲)는 이 품(品)의 뒤편에서 설명하게 될 것이다. 내입(內入) 가운데 안입(眼入)은 그 경계가 거칠기 때문에 먼저 말하며, 외입(外入) 가운데 색입(色入)은 그 자상(自相)이 거칠기 때문에 먼저 말하는 것이다. 괴로움과 즐거움이 들어오는 문인 까닭에 입처라고 말한다. 또한 ‘살(殺)’의 뜻이 입처의 의미이다. 즉 마음과 마음의 법이 이 가운데서 소멸되는 것이다.
【답】촉입처는 곧 입처이기도 하지만, 입처는 촉입처가 아니다. 즉 외입처가 곧 여기에 해당한다. 또 가령 내입처 가운데 비분(非分)67)도 이것은 입처이면서 촉입처가 아니다.[인연의 차이로 촉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비분이라고 한다.] 촉감이 머무는 곳인 까닭에 촉입처라 부르며, 촉감이 빈 것[空]이라면 오직 입처만이 있는 것이다.[촉입처라고 함은] 촉감이 들어오는 문지기 때문인데, 이는 마치 창문과도 같은 것이다.[인도에서는 창문을 풍입(風入)이라고 부른다].
촉감이 머무는 곳이기 때문이라는 것은 마치 성주(聖住)68)의 비유와도 같다.[성주란 말은 중국을 부르는 말이다. 그리고 변방의 지명을 미리차주(彌離車住)69)라 부른다.] 또한 수입처(受入處)라고 할 수도 있다. 촉이 길러내는 마음과 마음의 법은 촉이 지니고 온 바이고 촉이 전개된 바이기에, 또한 촉의 힘으로 인해 눈앞에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촉입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답】비록 한몸 안이라고 해도 짓는 일이 각기 다르고 의(依)와 연(緣)과 자성 때문에 열두 가지로 나누어 구별한다.
028_0395_c_23L答: 雖於一身中, 所作事各異, 依緣自性故, 十二種分別。
028_0396_a_02L한몸 안에 12입을 갖추게 되나 다만 일이 각기 다를 뿐이다. 가령 일이 안입(眼入)에 속한다면 이 일은 법입(法入)에 이르기까지 [다른 11입과] 관계된 것이 아니다. 만약에 일이 만약에 법입에 속한다면 이 일은 안입에 이르기까지 [다른 11입과] 관계된 것이 아니다.
【답】눈은 색을 봄으로 해서 일을 삼으며,70) 또 색은 눈이 행하는 바로써 일을 삼는다. 나아가 법입에 이르기 이와 같다. 비유하면 같은 방 안에 열두 사람이 머물고 있으나 [그들의] 사업이 각자 다른 것과 같이 저 [12입] 역시 이와 같다. 또한 의(依)와 연(緣)의 차별로도 열두 가지 입(入)을 말하게 된다. 이른바 6식신(識身)에는 여섯 가지 의지처[六依: 6근]와 여섯 가지 대상[六緣: 6경]이 있는 것이다. 또한 자성을 분별해서 열두 가지로 설명한다. 가령 눈의 자성은 법의 자성에 이르기까지 [다섯의 자성]이 아니며, 법의 자성은 눈의 자성에 이르기까지 [다섯의 자성]이 아닌 것이다.
【문】열 가지의 입처(入處)와 법입처(法入處)의 일부분은 색이거늘, 무엇 때문에 홀로 한 입처만을 색입(色入)이라고 하는가?
028_0396_a_12L問:十入處及法入少分是色, 何故獨說一入處爲色入?
【답】비록 수많은 색이 있을지라도 단지 한 색입처를 말함은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한 색입은 3안(眼)의 경계이기 때문이다.
028_0396_a_13L答: 雖有衆多色, 但說一色入, 當知一色入, 三眼境界故。
그 입처 가운데서 3안의 경계를 이름해 색입이라 하니, 육안(肉眼)71)과 천안(天眼)72)과 성혜안(聖惠眼)73)이 그것이다. 색은 거칠기 때문에 스무 종류로 말한다. 이른바 푸르고 노랗고 붉고 희고, 길고 짧고 바르고 바르지 못하고 모나고 둥글고 높고 낮은 것과 연기, 구름, 먼지, 안개, 빛, 그림자 그리고 밝고 어두움이 그것이다. 그 가운데 길고 [짧음] 등의 여덟 가지는 세 종류74)로 나누어 구별하지만 나머지는 모두 무기(無記)이다.
【문】일체의 12입은 모두가 법의 성품[法性]이거늘, 왜 오직 하나의 법입(法入)만을 말하는가?
028_0396_a_20L問:一切十二入 盡是法性,何故但說一法入?
【답】그 일체의 모든 법이 곧 법입이라고 해도 (한)법 가운데 많은(법이) 있기에 하나만이 법입이지 나머지는 아닌 것이다.
028_0396_a_21L答: 彼一切諸法, 雖盡是法入, 法中衆多故, 一法入非餘。
028_0396_b_02L그 일체가 모두 법입이긴 하지만 오직 한 입 가운데 수많은 법이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색법과 무색법과 상응ㆍ불상응법, 유위ㆍ무위법이 그것이다. 때문에 오직 한 법입만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세 가지 유위의 모습75)이 있으니, 그것은 법의 모습이지 [법과]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곧, 그 법입 가운데 들어가는 것이다. 이 때문에 오직 한 법입만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일체의 법은 이름으로써 뚜렷이 드러나는데, 그 이름은 법입 가운데 들어가는 것이다.
법이란 진실한 모습으로, 이른바 공해탈문(空解脫門)76)이다. 앞의 법으로써 법을 깨닫기 때문이다. 이 공 또한 법입 가운데 들어간다. 신견(身見)으로 능히 깨달을 수 있다고 한다면, 이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전도된 채 굴러가기 때문이다. 법이란 최고의 진리[第一義]이니, 이른바 적멸열반77)이다. 이 법 또한 법입 가운데 들어간다.
【문】세존께서는 계경(契經)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입(入)을 설하셨는데, 무엇 때문에 오직 12입(入)만을 말하는가?
028_0396_b_10L問:世尊說契經無量入,何故 但說十二入?
【답】저 열 가지 일체입(一切入)과 8입(入)과 2입(入)ㆍ4입(入) 및 다섯 가지 해탈입은 모두가 열두 가지에 포함된다.
028_0396_b_11L答: 彼十一切入, 八入二四入, 及五解脫入, 皆悉十二攝。
열 가지 일체입(一切入) 가운데 앞의 8입(入) 및 8승처(勝處)78)는 탐욕없는 선한 뿌리의 본질을 지니며, 모두가 법입 가운데 들어간다. 만약에 권속을 취한다면 그것은 곧 5음의 본질로, 모두가 의입(意入)과 법입(法入) 가운데 들어간다. 열 가지 일체입(一切入) 가운데 마지막 두 가지 입과 4무색입(無色入)은 4음(陰)의 본질로서 모두가 의입과 법입 가운데 들어간다. 2입(入)이란 이른바 무상중생입(無想衆生入)79)과 비상중생입(非想衆生入)80)을 말한다. 무상중생입은 향입(香入)과 미입(味入)을 제외한 열 가지 입의 본질을 지닌다. 네 가지 무색계를 말할 경우 이미 설명했듯이 그것은 비상입(非想入)과 같다.
다섯 가지 해탈입은 지혜의 본질이다. 그 권속은 곧 5음의 본질이며, 모두가 성입(聲入)ㆍ의입(意入)ㆍ법입(法入)의 3입(入) 가운데 들어간다. [5해탈입(解脫入)이란, 하나는 부처님의 설법으로 곧 해탈을 얻는 것이며, 둘은 법문을 듣고 나서 사유해 얻는 것이며, 셋은 스스로 경을 외움으로 인하여 얻는 것이며, 넷은 다른 사람을 위하여 법을 설함으로써 얻는 것이며, 다섯은 인연에 의해 얻는 것이다].
028_0396_c_02L【답】계의 종류는 열일곱이라 말하고 혹은 열둘이라 말하기도 하나니 경계와 의지하는 것과 의지처를 열여덟 가지로 분별한 것이다.
028_0396_b_24L答: 界種說十七, 或說爲十二, 境界依者依, 分別十八種。
18계는 열일곱 종류 혹은 열두 종류가 있다. 만약 의계(意界)를 취한다면 곧 6식(識)을 잃고, 만약 6식을 취한다면 곧 의계를 잃게 된다. 비유하면 나무를 취할 경우 숲을 잃게 되고, 숲을 취할 경우 나무를 잃는 것과 같다. 또한 손가락을 펴고 오므리는 비유 역시 이와 같은 것이다. 만약에 의계를 취한다면 곧 6식을 잃게 되고, 6식을 취한다면 곧 의계를 잃게 되는 것이다.
3사(事) 때문에 18계를 말하게 되는 것이다. 곧, 의지처와 의지하는 자와 경계 때문이다. ‘의지처’란 이른바 여섯 가지 의지처이니, 안계(眼界)에서 의계(意界)에 이르기까지를 말한다. ‘의지하는 자’란 이른바 6식계이니, 안식계(眼識界)에서 의식계에 이르기까지를 말한다. ‘경계’란 이른바 여섯 가지 외계(外界)이다. 만약에 아라한(阿羅漢)의 최후심은 후식(後識)을 일으키지 않고 의계도 아니라고 한다면 이것은 그렇지 않다. 다른 인연 때문에 후식이 이어지지 않는 것이니, 마치 땅에 씨앗이 없는 것과 같다.81)
또한 촉에 인하여 18계를 세우는 것이다. 안촉(眼觸)은 세 가지의 인연으로 생기니, 이른바 눈과 색과 인식이 그것이다. 뜻[意]에 이르기까지 이와 같으며, 비유하면 밥그릇과 밥과 먹는 자의 세 가지 일과 같으니, 즉 밥그릇은 이른바 안계이고 밥은 색계이며 먹는 자는 안식계인 것이다.
028_0397_a_02L비록 두 눈이 있지만 하나의 계로 말한다. 하나의 자기이기 때문이며, 함께 같은 4대(大)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며, 하나가 되어 스스로 보는 것[一自見] 때문이다. 하나의 자기[自]에 두 개의 근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인식이 의지하기 때문에 두 눈의 안식의 의지처는 당연히 2근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나의 인식은 한 입처(入處)에 의지하기 때문에, 한 입(入)의 경계이면서 또한 함께 한 입(入)의 경계를 받아들이기 때문에 두 눈이 함께 한 색을 취하는 것이다. 또한 한쪽 눈으로만 보면 밝고 또렷하게 보이지 않지만 두 눈으로 보면 밝고 또렷하게 보이는 것이다.
두 귀와 두 콧구멍이 하나의 계(界)를 이루는 것도 또한 눈과 같이 설명되니, 몸을 단정하게 장엄하기 위하여 두 눈ㆍ두 귀ㆍ두 콧구멍이 있는 것이다. 한쪽 눈만으로는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공경받지 못하기 때문에 눈 등은 두 개가 생겨났고 몸과 혀는 하나가 생겨난 것이다. 이와 같이 불세존께서는 비록 갖가지 계를 말씀하셨으나 모두가 18계 가운데 들어가는 것이다. 이제 차례로 그것을 설명하겠다.
만약 여러 다른 계가 있어서 세존께서 계경에서 설하셨다 해도 각기 그 자성(自性)을 따라 모두가 18계에 포함된다.
028_0397_a_11L 若有諸餘界, 世尊契經說, 各隨其自性, 悉入十八界。
만약 세존께서 다른 계를 말씀하셨다고 하더라도 모두 18계 안에 포함되나니, 그 이유는 의지처[依]와 의지하는 자[依者]와 대상[緣]의 세 가지 일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세존께서 “교시가(憍尸迦)82)여, 세상에는 갖가지의 계가 있느니라”하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이 말씀은 여러 가지 견해를 계라는 이름으로 말씀하신 것이며, 이러한 계는 모두 법계(法界) 안에 포함되는 것이다. 또 가령 62계(界)83)를 설하는 경우는 다계경(多界經)84)의 말씀 및 다른 계경(契經)과 같아도, 계라는 이름으로 설하는 내용은 각기 그 뜻에 따라 18계 가운데 포함되는 것이다.
【답】계란 일체법을 말한 것으로 그것은 곧 12입이다. 세 가지 무위법(無爲法)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곧 5음이라 말한다.
028_0397_a_20L答: 界說一切法, 彼卽十二入, 除三無爲法, 餘則說五陰。
028_0397_b_02L일체법을 78계라 말하는데, 그 이유는 의지처를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며, 의지하는 것을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며, 대상[緣]을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일체법을 곧 12입(入)이라 말한다. 이 가운데 일곱 가지 마음의 계[七心界]는 의입(意入)에 속하는데, 이것은 곧 내용에 차별이 있음을 말한다. 세 가지 무위(無爲)를 제외한 나머지 법을 5음(陰)이라고 하는데, 쌓이는 기세가 있기 때문이다.
【문】만약 일체법을 계라고 하며, 계가 곧 입(入)이고 세 가지 무위법을 제외한 것을 음이라고 한다면, 무슨 이유로 세존께서는 세 가지로 설하셨는가?
028_0397_b_03L問:若一切法說 界,界卽是入,除三無爲說陰,何故世 尊三種說?
【답】모니께서 중생들을 관찰하심에 알고 싶어함과 근기가 같지 않음과 성품ㆍ행동의 어리석음에 차별 있기에 음(陰)ㆍ계(界)ㆍ입(入)으로 나누어 말씀하셨네.
028_0397_b_05L答: 牟尼觀衆生, 欲解根不同, 性行愚差別, 故說陰界入。
중생들은 세 종류의 알고 싶어하는 것이 있다. 즉 자세하게 [알고 싶어하는 것]과 간략하게 [알고 싶어하는 것]과 중간 정도로 [알고 싶어하는 것]이 그것이다. 자세하게 알고 싶어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계를 말씀하시고, 중간 정도로 알고 싶어하는 사람에게는 입(入)을 말씀하시고, 간략하게 알고 싶어하는 사람에게는 음(陰)을 말씀하신 것이다. 둔하거나 중간 정도이거나 상 등의 근기를 지닌 자들에 대한 설법의 차별도 또한 이와 같다. 성품이 교만하고 안일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계를 설하셨으니, 성품의 내용이 곧 계(界)의 의미와 같기 때문이다. 재산을 믿고 교만하고 안일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입(入)을 설하셨으니, [재물을] 싣고 문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입(入)의 의미와 같기 때문이다. 목숨을 믿고 교만 안일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음(陰)을 설하셨으니, 음(陰)은 죽음의 법이기 때문이다. 또 수행을 시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계를 설하셨다. 수행이 적은 사람을 위해서는 입을 설하시고, 이미 수행이 된 사람을 위해서는 음을 설하셨다. 또 색심(色心)에 어리석은 사람을 위해서는 계를 설하셨으며, 색(色)에 어리석은 사람을 위해서는 입을 설법하시고, 심법(心法)에 어리석은 사람을 위해서는 음을 설하셨다.
【답】모이고 쌓인다는 것이 곧 음(陰)의 내용이고 문 안에 싣고 들어온다는 뜻을 입(入)이라 말하며 종성(種性)의 뜻을 계(界)라 하니 이것이 세 가지 차별이다.
028_0397_b_16L答: 聚積是陰義, 輸門義說入, 種性義說界, 是三種差別。
열한 가지의 한량없는 색 등85)을 총괄해서 색음(色陰)이라 말한다. 창고와도 같고, 군대의 무리와도 같다. 비유하면 네 종류의 군대86)는 비록 그 종류는 각각 다를지라도 이것을 군의 무리[軍衆]라 부르는 것과 같다. 색의 경우도 또한 이와 같아서 비록 열한 가지가 있다고는 해도 동일한 색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면 이름하여 색음이라 하는 것이다. 아비담(阿毘曇)에서 말한 바와 같으니, 곧 ‘훌륭히 색음을 관찰하는 자는 하나의 극미(極微)를 하나의 계ㆍ하나의 입(入)ㆍ하나의 음(陰)의 일부분으로 포섭하며, 잘 관찰하지 못하는 자는 1극미를 하나의 계ㆍ하나의 입ㆍ하나의 음으로 포섭한다”라고 하는 것이다.
028_0397_c_02L색음과 마찬가지로 수ㆍ상ㆍ행ㆍ식ㆍ음도 역시 이와 같다. 문 안에 싣고 들어온다는 뜻을 입(入)이라고 설한 것은 괴로움과 즐거움으로 통하기 때문이다. ‘종성의 뜻을 계(界)’라고 설한 것은, 마치 한 산중에 많은 성질이 있는 것과 같다. 즉 금의 성질, 은의 성질 등이 있듯이 이처럼 한 몸 속에는 갖가지의 성질이 각기 다르기 때문에 18계라고 말하는 것이다.
【답】경계와 의지하는 자87)와 의지처는 재고 헤아리는 법에 응한다. 그런 까닭에 계ㆍ입ㆍ음은 불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는 것이다.
028_0397_c_07L答: 境界依者依, 度量法所應, 是故界入陰, 不增亦不減。
계(界)가 재고 헤아림에 응한다는 것은 여섯 가지 의지처와 여섯 가지 의지하는 자와 여섯 가지 대상 [緣]88)을 말한다. 만약 그 의지처가 증가하게 되면 그것은 의지처가 아니다, 이유는 의지하는 자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에 [의지처가] 줄어든다면 의지하는 자에게 의지할 곳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일체의 입(入) 역시 의지처와 대상으로 헤아리게 된다.
음(陰)은 왜 색에 염착(染着)하는가? 즐거이 받아들여 집착하기 때문이다. 왜 즐거이 받아들여 집착하는가? 생각이 전도되었기 때문이다. 왜 생각이 전도되었는가? 번뇌와 상응하기 때문이다. 번뇌는 뜻에 의지하고 뜻은 곧 뜻에 의지함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뜻은 법을 연하여 의식(意識)을 낳는데, 이 의지처를 떠나서는 다시 다른 의지처가 없기 때문이다. 이미 계ㆍ입ㆍ음의 자성 및 인연을 설명하였으니, 지금부터는 계에 관해서 자세히 설명하겠다.
계 가운데 한 가지는 볼 수 있나니 또한 모든 계라고도 말한다. 무기(無記)는 여덟 가지이며 나머지는 선ㆍ불선이로다.
028_0397_c_18L界中一可見, 又說一切界, 無記謂八種, 餘則善不善。
028_0398_a_02L‘계 가운데 한 가지는 볼 수 있나니’란, 18계 가운데 색계는 눈으로 볼 수 있으니, 여기에 있고 저기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사람들에게 마음의 작용을 지시하는 까닭에 볼 수 있다는 것이며, 또한 스스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니, 이른바 눈이 작용하는 바인 것이다. 또한 마땅히 알아야 하니, 나머지 17계는 볼 수 없다. 상(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한 모든 계를 다 볼 수 있다고 설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혜안(慧眼)의 경계이기 때문이다. 곧, “지혜 있는 사람은 저 일체법을 무아(無我)로 본다”라고 게송에서 설하듯이 아비담(阿毘曇)에서는 “유학(學)이 자취를 보는 것은 4성제의 자취를 보는 것과 같다”고 설하기 때문에 18계는 모두 다 볼 수 있는 것이다.
‘무기는 여덟 가지’라 한 것은, 여덟 가지의 계는 무기89)임을 말한 것이다. 이른바 5정(情)90)과 냄새ㆍ맛ㆍ촉감이 그것이다. 사랑스러움[愛]과 사랑스럽지 못함[不愛]의 과를 결정할 것이 없기 때문에 무기라 말한다. 나머지 열 가지 계는 결정할 수 있으니, 선함과 악함의 구별이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색ㆍ소리ㆍ법계와 7심계(心界)가 그것이다.
선한 몸의 움직임은 곧 선색(善色)이며, 악한 몸의 행동은 불선색(不善色)이다. 나머지 색은 무기(無記)이다. 소리와 입의 움직임 역시 그와 같다. 순수한 마음으로 이루어진 7식계(識界)는 선이며, 뉘우침이 없고 부끄러움 없음과 상응하는 마음은 불선이다. 나머지는 곧 무기이다. 법계의 경우에도 마음과 상응하는 것은 마음과 같이 설하지만, 만약에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다면 잡품(雜品)에서 설명한 내용과 같다.
선(善)에 네 가지 종류가 있다. 즉 자성(自性)과 상응(相應)과 공기(共起)와 제일의(第一義)이다. 이 가운데 자성의 선이란 뉘우치고 부끄러워하는 마음 및 세 가지 선한 근기[三善根]가 그것이다. 상응이란 곧 그것이 상응하는 마음 및 마음의 법[心法]이다. 공기란 곧 그것이 일으키는 바의 몸과 입으로 짓는 업 및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 행[心不相應行]이 그것이다. 제일의란 이른바 열반을 말한다. 이것을 네 종류의 선이라 한다.
[반대로] 자성불선(自性不善)이란 뉘우치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는 것과 세 가지의 좋지 못한 근기[三不善根]91)가 그것이다. 상응이란 곧 그것이 상응하는 마음과 마음의 법이다. 공기란 그것이 일으키는 바의 몸과 입의 업 및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 행이 그것이다. 제일의란 윤회의 위험을 말한다. 이 두 가지와 서로 어긋나는 것은 곧 무기이다.
【문】일체법은 12입(入)이니, 이는 곧 세존께서 말씀하신 바인데 어째서 무기(無記)라 하는가?
028_0398_a_21L問:一切法十二入,卽是世尊 所記,何故說無記?
028_0398_b_02L【답】한결같이 말씀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무기라고 하지는 않는다. 선한 것에는 선하다고 기별(記別)하시고 선하지 못한 것을 불선이라고 하셨지만, 선ㆍ불선을 기별하지 않으신 까닭에 무기라 말하는 것이다. 만약 인과가 있을 때는 인과를 기별하지만, 그것과 다르다면 곧 무기인 것이다. 혹은 기론계경(記論契經)92)에서 설하듯이 [특별히] 말씀하시지 않았음을 무기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일체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 이것은 일관된 논리이다. 일체는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다는 것 이것을 분별론이라 부른다.
028_0398_b_03L 一切皆當死, 是論一向記, 一切死復生, 是名分別論。
만약 생(生)은 수승한 것이냐고 묻는다면 이것은 힐문론(詰問論)이라 부른다. 중생과 5음이 다르다는 것 이것은 지기론(止記論)이라 부른다.
028_0398_b_05L 若問生殊勝, 是名詰問論, 衆生五陰異, 是名止記論。
‘일관된 논리93)’란 만약 어떤 사람이 “모든 중생들은 모두가 죽게 되는가?”라고 묻는다면 마땅히 일관되게 “모든 중생들은 모두가 곧 죽게 된다”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분별론’94)이란 만약 어떤 사람이 “모든 중생들은 모두가 죽어야 하며 죽고 나서 다시 태어나는가?”라고 묻는다면 마땅히 분별해서 “번뇌가 있는 사람은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지만 번뇌가 없는 사람은 죽은 뒤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힐문기론(詰問記論)’95)이란 만약 어떤 사람이 “인간의 삶은 수승한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마땅히 그에게 반문하여야 한다. “그대는 바야흐로 어디를 향해 가고자 그것을 묻는가?” 만약 그가 “바야흐로 하늘 세계[天趣]로 향해 갑니다”라고 말한다면 “못났도다”라고 대답해 주고, 만약 그가 “바야흐로 악취(惡趣)96)로 향해 갑니다”라고 말한다면 “뛰어나도다”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지기론(止記論)’97)이란, 만약 어떤 사람이 “음(陰)과 중생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마땅히 [대답을] 멈추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질문은] 서로 맞지 않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석녀(石女)98)의 아이가 공경을 잘 합니까?”라고 묻는 것과도 같다. 석녀에게는 아이가 없거늘 어떻게 공경하는지 공경하지 않는지 말할 수 있겠는가? 이와 마찬가지로 음은 있어도 중생은 없으니, 어떻게 같고 다름이 있을 수 있겠는가? 맞지 않는 질문이기에 대답하지 않는 것이다.
아비담(阿毘曇)논사는 이와 같이 말한다. ‘일관된 논리[一向記論]’란,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는 무소착(無所著)ㆍ등정각(等正覺)99)인가? 교법을 훌륭히 설했는가? 세존의 제자는 제대로 향해 나아가는가? 색은 무상(無常)하며 수ㆍ상ㆍ행ㆍ식은 무상한가? 고ㆍ집ㆍ멸ㆍ도를 훌륭히 분별하였는가?”라고 묻는다면 응당히 일관되게 대답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용이 [중생들에게] 요익하기 때문이다.
028_0398_c_02L이 때 만약 “저를 위하여 과거의 법을 설해 주십시오”라고 말한다면, “과거의 법 역시 많으니, 혹은 색음(色陰)에 관한 것이고, 혹은 수ㆍ상ㆍ행ㆍ식음에 관한 것인데, 무엇을 설해야 하는가?”물어야 한다. 이 때 만약 “색음입니다”라고 말한다면, 곧 묻기를, “색음 역시 많으니, 선ㆍ불선ㆍ무기의 [색음이 있거늘] 무엇을 설해야 하는가?”라고 한다. 이 때 만약 “선색입니다”라고 한다면 마땅히 또 묻기를, “선색에 일곱 가지100)가 있으니, 불살생 내지 불기어(不綺語)가 있거늘 무엇을 설해야 하는가?”라고 한다.
이 때 그가 “불살생에 관해서입니다”라고 말한다면 마땅히 다시 묻기를, “살생하지 않음에도 세 가지 구별이 있으니, 탐내지 않음과 노여워하지 않음과 어리석지 않음이 그것이다. 무엇을 설해야 하는가?”라고 한다. 이 때 만약 그가 “탐내지 않음에 관해서 입니다”라고 한다면 마땅히 다시 묻기를, “탐내지 않음에도 두 종류가 있으니, 마음먹고 탐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경우와 저절로 탐욕이 없는 경우가 있다. 무엇을 설해야 하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이와 같이 논하는 것을 이름하여 분별기론(分別記論)이라 한다.
힐문기론(詰問記論)이란, 만약 어떤 사람이 법을 물어 올 경우 마땅히 그에게 반문하기를, “법은 많거늘, 그대는 무엇을 묻고자 하는가?”라고 하는 것이다. 그를 위해 과거, 미래, 현재 내지 작위(作爲), 무작(無作)을 분별하지 않으며, 그가 만일 초심자라면 분별하여 설법해 주고, 만일 알면서도 고의로 묻는 자라면 도리어 반문하여 그가 스스로 대답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을 힐문기론이라 한다.
지기론(止記論)이란, 만약 어떤 사람이 묻기를, “세계는 끝이 있는가, 끝이 없는가?”라고 묻는다면, 이 같은 질문이란 마치 허공에 핀 꽃술을 가리켜 향기가 난다거나 향기가 나지 않는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과도 같다.101) 이것을 지기론이라 부른다. 이미 기별[別]하는 것과 기별하지 않는 것[無記]에 대하여 설명하였으니, 이제 열두 가지 대상을 지니는 것[有對]102)에 대해 설명하겠다.
눈ㆍ귀ㆍ코ㆍ혀ㆍ몸의 계 및 일곱 가지 마음의 계, 이 열두 계를, 대상을 지니는 것이라고 한다. 법계 가운데 일부분도 역시 대상을 지니는 것이라고 설한다. 즉 심법이 그것이다. 또한 열 가지 색계를 대상을 지니는 것이라고 한다. 일곱 가지 심계와 법계의 일부분도 역시 대상을 지니는 것이라고 말한다.
028_0399_a_02L【답】경계의 대상을 지니는 것103)과 장애와 연을 말한다. 즉 세 가지 대상을 지니는 것이 있으니, 경계를 대상으로 지니는 것이 있고 장애물을 대상으로 지니는 것이 있으며 연을 대상으로 지니는 것이 있다.
028_0399_a_02L答:說境界有對,障㝵及與緣。三種有 對:境界有對、障㝵有對、緣有對。
경계를 대상으로 지니는 것104)이란『시설경(施設經)』105)에 말하는 바와 같이 눈은 색과 대하고 나아가 뜻은 법과 대한다. 이미 의계(意界)에 대해 설명했으니, 그것은 이미 일곱 가지 심계와 법계의 일부분에 관해서 말한 것이라고 마땅히 알아야 한다. 때문에 열두 가지 계와 한 가지 계의 일부분은 대상을 지님을 알아야 한다. 다섯 가지 외계(外界)106)와 법계의 일부분은 곧 대상을 지니지 않는다. 경에서 설하듯이 “뭍을 보면 곧 물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이처럼 자세히 설명되는 것이다.
장애물의 대상을 지닌다는 것[障礙有對:Alambanapratighāta]은 이른바 각각 상대하여 각각의 처소에서 장애되는 것이다. 만약 그곳에 한 가지가 있게 되면 두 번째가 머물 곳은 없게 된다. 극미(極微)의 쌓임인 까닭이며 장애되는 까닭이며 나뉠 수 있는 까닭이며 어떤 장소에 근거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러니 여덟 가지 대상이 없는 것은 이 가운데서 자세히 설명되어야 한다고 알아야 한다.
연의 대상을 지닌다107)고 함은 마음과 마음의 법은 경계에서 전개됨을 말한다. 그러니 마땅히 이와 같이 말해야 한다. 만약 법이 경계의 대상을 지닌다면 그 법에는 장애의 대상이 있는 것인가? 이 경우 마땅히 4구(句)의 논리로 구별해야 한다. 혹은 경계의 대상을 지니면서 장애의 대상을 지니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일곱 가지 심계 및 마음과 상응하는 법계가 그것이다.
혹은 장애의 대상을 지니면서 경계의 대상을 지니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다섯 가지 외계가 그것이다. 혹은 경계의 대상을 지니면서 장애의 대상을 지니는 경우가 있으니, 다섯 가지 내계(內界)108)가 그것이다. 혹은 경계의 대상을 지니지도 않고 장애의 대상을 지니지도 않는 경우가 있으니 법입처에 포섭되는 색과 무위(無爲)와 심불상응행이 그것이다.
유루(有漏)는 열다섯 가지 있으니, 나머지는 두 가지이고, 세 가지는 삼유(三有)에 있네. 욕계(欲界)에만 네 가지 유가 있고 열한 가지는 두 가지 유(有)에 있네.
028_0399_a_23L 有漏有十五, 餘二三三有 欲有中有四 十一在二有。
028_0399_b_02L[18계 가운데] 15계(界)는 오로지 유루이다. 즉 다섯 가지 내계와 다섯 가지 외계와 다섯 가지 인식계가 그것이다. [이 15계는] 번뇌가 생겨난 바이기에, 번뇌를 낳기에, 번뇌가 의지하기에, 번뇌가 그 가운데서 일어나기에 ‘유루’라 말하는 것이다. 마치 길에서 두려움을 지니듯, 번뇌와 함께 하기 때문에 유루라고 하는 것이다. 유루라는 것은 마치 독약을 섞은 밥과 같은 것이다.
‘나머지는 두 가지’란, [18계 가운데] 나머지 세 가지 계 즉 의계(意界)ㆍ법계(法界)ㆍ의식계(意識界)의 이 세 가지 계가 두 가지로 구분되어 혹은 유루이며 혹은 무루인 것이다. 만약 번뇌가 생겨난 바라면 그것은 유루이며, 이와 다르다면 곧 무루(無漏)인 것이다. ‘세 가지는 3유에 있다’란, 의계(意界)와 법계(法界)와 의식계는 3유(有) 즉 욕유(欲有)와 색유(色有)와 무색유(無色有) 가운데서 얻게 됨을 말한 것이다. 무루란 곧 결박되지 않는 것이다. 비록 삼계의 몸 가운데서 [무루를] 얻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자성(自性)으로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욕계에만 네 가지 유가 있다’란, 냄새와 맛의 계와 이것들을 경계로 삼는 식(識)은 색계와 무색계에는 있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물질식[揣食]110)의 욕망을 벗어난 세계이기 때문이다. 나머지 세 가지 입(入)111)은 물질식의 성질을 지니고 있다. 그 [색계]에는 마땅히 촉감이 없어야 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촉입(觸入)의 성질에 두 종류가 있다. 혹은 물질식의 성질을 지닌 경우도 있고 혹은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즉 물질식이 아닌 것은 색계에 존재하니 그곳에는 물질식의 성질이 없다. 몸이 미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냄새와 맛은 오로지 물질식의 성질을 지니고 있다. 때문에 그곳에서는 존재하지 않으며, 경계가 없기 때문에 그에 대한 인식[識]도 역시 없는 것이다.
【문】그곳에는 맛과 냄새도 없고 그에 대한 인식도 없다면 코와 혀의 계 역시 마땅히 없어야 할 것이 아닌가?
028_0399_b_18L問:彼無香味亦無彼識者,鼻界 舌界亦應無。
【답】모든 기관(根)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며, 또한 모든 근은 전전하면서 서로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열한 가지는 두 가지 유에 있다’란, 욕유와 색유에는 다섯 가지 내계와 색ㆍ소리ㆍ촉감의 계 및 이들을 경계로 하는 인식의 이 열한 가지가 있음을 말한다. 무색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무색계는 색의 성질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유각(有覺)ㆍ유관(有觀)은 다섯 가지이며 세 가지 행(行)은 세 가지이고 나머지에는 없다. 연(緣)을 지닌 것은 마땅히 일곱 가지임을 알아야 하니 법입은 일부를 말한다.
028_0399_b_22L 有覺有觀五, 三行三餘無, 有緣當知七, 法入說少分。
028_0399_c_02L‘유각ㆍ유관112)은 다섯 가지이다’란 5식계(識界)가 유각ㆍ유관인 것을 말한다.113)왜냐하면 [사유가] 거칠기 때문이다. 나아가 범천계114)에 이르기까지이며 그보다 높은 경지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115) ‘세 가지 행은 세 가지이다’라고 한 것은, 의계(意界)와 의식계(意識界)와 마음과 상응하는 법계(法界)의 이 세 가지 경계에서는 세 종류의 상태가 있음을 말한 것이다. 즉 욕계(欲界)및 초선(初禪)의 경지는 유각ㆍ유관이며, 중간선(中間禪)116)의 경지는 무각ㆍ유관이다. 그보다 높은 경지 및 일체의 불상응법에서는 무각ㆍ무관이다.
【답】관이다.117) ‘나머지에는 없다’란, 나머지는 유각도 아니고 유관도 아니라는 것이다. 대상[緣]이 없기 때문이다. ‘대상을 지닌 것118)은 마땅히 일곱 가지임을 알아야 하니, 법입은 일부를 말한다’란, 일곱 가지 마음의 계는 대상을 지님을 말한다. 이것은 대상이 있는 까닭에 대상을 지닌다고 말한 것이다. 이는 마치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있을 경우‘아들을 지닌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표현이다.
법계의 일부분이 대상을 지닌다면 심법(心法)이 되며, 일부의 대상을 지니지 않는다면 비심법(非心法)이 된다. 즉 안식(眼識)및 그와 상응하는 법은 색을 연하고 나아가 신식(身識) 및 그와 상응하는 법은 촉을 연하고, 의식(意識) 및 그와 상응하는 법은 일체의 법을 연하는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말하자면 일체법으로써 경계를 삼는다는 것으로 반연(攀緣)의 뜻은 아니다. 눈과 몸의 인식도 역시 이와 동일하다].
아홉 가지는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지만 나머지는 두 가지로 구분된다. 유위(有爲)와 무위(無爲)가 함께 하는 것은 하나이고 오로지 유위인 것은 열일곱 계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028_0399_c_21L九不受餘二, 爲無爲共一, 一向是有爲, 當知十七界。
028_0400_a_02L‘아홉 가지는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란, 아홉 계가 받아들이지 아니함을 말한 것이다. 가령 색이 현재로서 근(根)에 속하는 것과 근을 떠나지 않는 것이 있으니 이것을 받아들임[受]이라고 한다. 만약 이것이 끊어지고 허물어지고 쪼개지고 갈라져서 핍박될 경우, 마음과 마음의 법을 받아들이게 된다. 여기에서 [마음과 마음의 법이] 멈추고 머물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과 다를 경우 영향을 받지 않게 되는데, 그래서 아홉 계는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일곱 가지 마음의 계와 소리의 계 및 법계 등이니, [이것들은] 끊어지고 허물어지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두 가지’란, 다섯 가지 내계는 현재에서는 곧 외부의 영향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 끊음 등의 앎[斷知]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와 미래의 세계에서는 영향을 받지 않으니, 마음과 마음의 법이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색ㆍ냄새ㆍ맛ㆍ촉감의 경우 현재이거나 근을 떠나지 않았다면 곧 외부의 영향을 받아들인다. 마음과 마음의 법이 근(根) 가운데 멈추고 머물 경우와 같이 그 가운데서도 역시 그러한 것이다. 아직 근(根)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위와 무위가 함께 하는 것은 하나’라고 한 것은, 한 법계만은 유위와 무위를 지님을 말한 것이다. 이 가운데 세 가지는 항상하기 때문에 무위이다. 나머지 법은 무상하기 때문에 유위이다. 때문에 유위와 무위가 함께 한 법계에 존재하는 것이다. ‘오로지 유위인 것은 열일곱 계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란, [법계를 제외한] 17계는 무상(無常)하기 때문에 오로지 유위임을 말한다. 생멸(生滅)하기 때문이고, 세 가지 유위의 모습이 이루어지는 곳이기 때문이고, 원인이 있기[有因] 때문이고, 음(陰)에 떨어지고 세간에 떨어지기 때문이며, 둔함과 중간과 상 등의 구별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과 서로 다르다면 그것은 무위이다.
일곱 가지 마음의 계와 색ㆍ소리ㆍ법계는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혹은 유죄인 경우도 있고 혹은 무죄인 경우도 있다. 즉 오염된 마음은 유죄이며 오염된 마음이 아닌 경우는 무죄인 것이다. 유죄ㆍ무죄와 같이 염오와 은몰 또한 이와 같다. 5식계(識界)와 색계와 성계(聲界)에서는 선이건 악이건 과보가 있다. 그러나 무기(無記)의 경우는 과보가 없다. 또한 의계(意界)와 의식계(意識界)와 법계의 경우 불선이거나 선한 유루인 것은 과보가 있지만 무기와 무루인 것은 과보가 없다.
【문】무엇 때문에 불선이거나 선한 것은 과보가 있고 무기와 무루인 것은 과보가 없는 것인가?
028_0400_a_24L問:以何等故不善善有漏是有報、無 記無漏是無報?
028_0400_b_02L【답】비유하면 씨앗을 뿌릴 경우 세 가지 조건이 화합하여 싹이 돋아나는 것과 같다. 가령 단단하고 알찬 씨앗이 있는데, 여기에 물을 대주고 풀이나 흙으로 덮어 주면 자체의 성질과 여러 가지 도구의 힘 때문에 싹과 잎이 생기게 된다. 하지만 단단하고 알찬 씨앗이 비록 있다고 하더라도 물을 대주지 않고 풀과 흙으로 덮어 주지 않으면 여러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싹과 잎이 생기지 못한다. 또한 씨앗이 알차지 못할 경우 비록 물을 대주고 풀과 흙으로 덮어 준다고 하더라도 자성이 견실하지 못한 까닭에 싹과 잎이 생겨나지 못한다. 외부의 조건과 씨앗에 세 가지 일의 차별이 있듯이 이와 같이 내부의 연이 일어나는 일에도 세 가지 일의 차별이 있는 것이다.
가령 첫 번째 씨앗과 같이 불선이거나 선한 유루의 법이 견고하면서 여기에 갈애[愛]라는 물을 주고 남아 있는 번뇌[結]의 흙을 덮어 준다면 자체의 성질과 많은 연의 힘 때문에 유(有)라는 싹이 돋아나게 된다. 또한 두 번째 씨앗과 같이 무루법(無漏法)이 비록 단단할지라도 갈애라는 물을 주거나 번뇌라는 흙을 덮어 주는 일이 없다면 인연이 갖추어지지 않은 까닭에 유(有)라는 싹은 생겨나지 않는다. 또 세 번째의 씨앗과 같이 무기의 법은 비록 여기에 갈애라는 물을 주고 번뇌라는 흙을 덮어 준다고 하더라도 자체의 성질이 부실하다면 유(有)라는 싹은 돋아나지 않는 것이다.
【답】사랑할 만한 과보가 있기 때문에 닦는 것인데, 불선이거나 무기의 경우는 사랑할 만한 과보가 없기 때문에 닦지 않는다. 또 수멸의 경우는 본질적으로 과보가 상속하여 생겨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닦지 않는다. 그러니, 여덟 가지 계에는 죄도 없고 과보도 없고 오염된 것도 없고 은몰(隱沒)된 것도 없기에 닦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한 가지 계 가운데 견해가 있다’란, 법계 가운데는 여덟 가지 견해가 있음을 말한 것이다. 곧, 신견(身見) 등의 다섯 가지 견해[五見]120)와 세속의 등견(等見; 正見)과 유학견[學見]과 무학견(無學見)이 그것이다.
028_0400_b_21L一 界中有見者,法界中有八種見:身見 等五見、世俗等見、學見、無學見。
028_0400_c_02L견(見)이라 함은 자세히 살펴보기 때문이다. 또한 결정적이기 때문이며 견고히 받아들이기 때문이며 대상[緣]이 깊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마치 어두운 밤에 색을 보는 것과 같으니 오염된 지혜로 법을 보는 것도 그와 같다. 또 개인 밤에 색을 보는 것처럼 세속의 등견도 이와 같고, 그늘진 낮에 색을 보는 것처럼 유학의 견해도 그와 같으며, 맑게 개인 낮에 색을 보는 것처럼 무학(無學)의 견해 역시 그와 같은 것이다.121)
‘또한 유심법(有心法)이라고 설한다’란, 곧 이 법계에는 마음의 법이 있음을 말한 것이다. 이른바 수(受)ㆍ상(想) 등이 그것이니, 이 심법(心法)이 존재하기 때문에 유심법이라고 설한 것이다. 17계와 일계(一界)122)의 일부는 심법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하나의 계는 곧 견해의 성질이다’라고 한 것은, 한 계가 견해의 성질을 지니고 있음을 말한다. 이른바 안계가 능히 [사물을]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16계와 안계의 일부분은 견(見)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문】어떤 것이 견(見)인가? 눈이 본다고 해야 하는가? 안식(眼識)이 본다고 해야 하는가? 눈의 안식과 상응하는 지혜로 본다고 해야 하는가? 아니면 [이러한 조건들이] 화합해서 본다고 해야 하는가? 이 해석들에 과실이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즉 만약 눈이 본다고 한다면 나머지 다른 인식 작용이 함께 할 때는 왜 보지 못하는가? 왜 모든 경계를 함께 얻지 못하는가? 또 만약 안식이 본다고 할 경우 인식하는 모습은 실제로 보는 모습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눈이 없는 사람 역시 보아야 할 것이다.
또 만약 안식과 상응하는 지혜로 본다고 한다면 또한 이식(耳識)과 상응하는 지혜로 소리를 듣는 것인가? 또 만약 [조건들이] 화합하여 보게 된다고 한다면 이것은 일정하지 않다. 때에 따라서 안식에는 스물 두 가지 법이 있는 경우도 있고, 혹은 스물한 가지 법이 있는 경우도 있으며 혹은 열두 가지가 있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답】자신의 눈이 색을 본다. 그 안식이 보는 것은 아니며 지혜도 아니고 화합해서도 아니다 가로막힌 색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028_0400_c_17L答: 自分眼見色, 非彼眼識見, 非慧非和合, 不見障色故。
자신의 눈이 보기 때문에 다른 인식 작용이 함께 할 때는 보지 못한다. 다른 인식 작용이 함께 해서 본다고 한다면, 빈 눈이 자기 앞에 나타나 자신의 것이 아닌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인으로 일체의 경계를 함께 얻을 수는 없는 것이며, 독자적인 몫이 있는 여러 근(根)은 함께 다른 인식 작용이 머무는 근이 될 수 없기 때문에 독자적인 몫[自分]이라 표현하는 것이다. 두 가지 인식 작용은 함께 행해지지 못하니, 두 번째 차제연(次第緣)이 없기 때문이다.
【문】만약 안식을 떠나서 색을 보지 못한다면 이것은 인식 작용이 보는 것이지 눈이 보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눈은 무슨 작용을 하는가?
028_0400_c_24L問:若眼離識不 見色者,是則識見非眼見,眼復何用?
028_0401_a_02L【답】인식이 이루어진다면 그 작용 역시 이루어진다. 그것이 자신의 몫이 아니라면(非分) 그것은 곧 인(因)이 몫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수(受)가 상(想)을 떠나지 않고 상이 수를 떠나지 않듯이 그 역시 이와 같다.
028_0401_a_02L答:識成彼則成彼,非分則因非分故。 如受不離想、想不離受,彼亦如是。
만약 안식이 [사물을] 본다고 한다면 무엇이 또한 [사물을] 인식하겠는가? 만약 지혜가 사물을 본다고 한다면 무엇이 또한 사물을 인식하겠는가? 만약 이러한 조건들이 화합해서 사물을 본다고 한다면 이러한 여러 가지 법의 사업(事業)은 각기 그 내용이 다를 것이다. 간격이 있으면 화합할 수 없나니, 만약 화합해서 사물을 본다고 한다면 마땅히 두 가지 결정적인 자체의 본성[法]이 있어야 하는데, 이 내용은 그렇지 않다. 만약에 다시 안식으로 사물을 본다고 한다면 마땅히 가로막힌 색도 볼 수 있어야 하나니, [안식은]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지혜 및 화합의 경우도 또한 이와 마찬가지이다.
안식은 대상이 없기에 가로막힌 색을 식별하지 못한다고, 곧 볼 수 없다고 한다면 이는 그렇지 않다. 당연히 분별해야 하기 때문이다. 분별의 측면에서 말한다면 “왜 안식은 가로막힌 색을 인식하지 못하는가?”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 경우 아마 눈과 한 경계에서 전개하는 것이기 때문에 안식은 가로막힌 색을 인식할 수 없는 것이다. 눈은 대상이 있으며, 대상이 있기 때문에 가로막힌 색을 보지 못한다. 때문에 안식도 [가로막힌 색을] 인식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에 안식으로 본다면] 인식에는 마땅히 두 가지 자성(自性)이 있어야 하는데, 인식하거나 보는 작용이 그것이다. 나머지도 또한 이와 같다. 또한 안식이 본다고 한다면 왜 인식은 그렇지 않은가? 이미 안식은 가로막힌 색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눈과 한 경계에서 전개하기 때문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마땅히 다시 설하겠다. [안식은] 장애가 있으며 대상에 의지하는 까닭에 가로막힌 색을 인식하지 못한다고 한다면, 이는 그렇지 않다. [안식에는] 대상없는[無對] 의지처가 있기 때문이다. 안식에는 두 가지의 의지처가 있으니, 눈과 차제멸(次第滅)하는 뜻[意]이다. 만약에 대상 있는 의지처를 지니기 때문에 가로막힌 색을 보지 못한다고 한다면, 대상 없는 의지처를 지니는 경우에는 마땅히 가로막힌 색을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와 다르게 말한다면 그것은 과실이 있는 말이다.
눈은 곧 고유의 의지처이고 뜻은 공통의 의지처라면, [안식이] 가로막힌 색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 의지처가 색 등의 모습에서 독자적인 몫[分]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 역시 그렇지 않다. 또한 눈은 곧 색인 까닭에 안식도 곧 색이라고 한다면, 이 또한 그렇지 않다. 눈이 연을 지니지 않는 까닭에 [안식도] 연을 지니지 않는다는 것도 그렇지 않으며, 눈이 상응하지 않는 까닭에 [안식도] 상응하지 않는다고 하면 그 역시 그렇지 않다. 이와 같은 설은 모두 허물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028_0401_b_02L또한 뜻[意]도 고유한 의지처이다. 만약 뜻에 의지하여 안식이 생긴다고 한다면 일찍이 그것에 의지하여 다른 인식은 생긴 일이 없을 것이다. 마음은 하나하나가 상속하여 전개되기 때문이니, 그런 까닭에 뜻도 고유한 의지처이다. 견(見)과 인식의 무간식(無間識)이 본다고 한다면, 이 역시 그렇지 않다. 네 가지 허물어지지 않는 일[不壞]이 있기 때문이다. 세존께서는 보고 듣고 느끼고 인식하는 네 가지 일은 허물어지지 않는 네 가지 일이라 말씀하셨다. 만약 인식이 곧 본다고 한다면 오직 듣고 알아채고 인식하는 세 가지 일만이 있어야 할 것이니, 보는 것이 곧 인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지는 않은 것이다. 때문에 마땅히 알아야 하니 눈으로 보는 것이다.
인식의 작용을 분별하여 네 가지를 세운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가로막힌 색을 보지 못한다는 것에 관해서는 이미 잘못임을 말한 바이다. 인식과 보는 일에는 간격이 있는 것이고 표현과 내용이 각기 다르다. 눈빛으로 비추어 보는 것을 ‘본다’고 하며, 마음을 따라 분별하는 것을 ‘인식한다’고 하는 것이다.
또한 ‘눈으로 본다’고 한다면, 그리고 ‘그것은 마땅히 눈이 지닌 분량[量]으로 재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는 스스로 과실을 낳는 것이다. 인식에는 한량이 없기 때문이다. 인식에 한량이 없다는 것은 세존께서 말씀하신 바이다. 세존께서‘눈으로 본다’ 라고 말씀하셨던 것과 같다. 따라서 인식으로 본다고 한다면 이는 그렇지 않다. [이것은] 뜻이 법을 인식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또한 다른 법 가운데에서도 인식하는 것이 있는가? 만약 그것이 곧 뜻이 법을 인식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눈의 경우도 역시 이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곧, “범지(梵志: brahmaṇa)여, 눈은 곧 문을 뜻하니 [그 문을 통하여] 색을 보는 까닭이다. 이 【문】은 견의 다른 이름이니, 그대는 설해진 것에 대해 잘못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과 마음의 법에는 방향과 일정한 장소가 없거늘 [마음이] 나가고 들어온다고 말한다면, 이는 그렇지 않다” 곧 경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뜻[意]은 곧 문(門)인 것이다. 그것으로 법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법 가운데에서 법을 식별하는 것은 없다. 때문에 눈이 그 가운데서 곧 보는 것이다.[안식(眼識)이 보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여기까지의 7장 모두에서 처음 한 장은 힐문(詰問)하여 아닌 것을 판별하고 나머지 6장은 분석하고 풀이해서 인식 등이 ‘보는 것’이 아님을 판별한 것이다. 다른 사람이 그 집착한 바에 따라 서술하는 것을 제어하고, 마지막에는 진실을 검토하여 틀린 것을 경책함으로써 자기의 뜻을 이룬 것이다].
028_0401_c_02L‘극미의 수는 열 가지’라고 한 것은, 열 가지 색계는 극미가 모인 것임을 말한다. [거기에는 각기] 한계가 있고[有分] 덮여 가로막힌 것이 있고 큰 걸림돌이 되는 곳이며 각기 근거로 삼는 곳이기 때문이다. 나머지 여덟 가지 계는 극미가 모인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아홉 계는 4대로 만들어진 것’이라 한 것은, [열 가지 색계 가운데서] 촉계(觸界)를 제외한 나머지 아홉 계는 4대(大)로 만들어진 것임을 말한 것이다. 그것은 4대가 낳은 것이며 4대가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4대는 이 여러 계와 더불어 다섯 가지 인이 되어 생하니, 생인(生因)ㆍ의인(依因)ㆍ건립인(建立因)ㆍ양인(養因)ㆍ장인(長因)이 그것이다.123)
‘두 계는 일부만을 말한다’고 했는데, 촉계(觸界)와 법계(法界)의 두 계를 마땅히 분별하면 혹은 4대로 만들어졌거나 혹은 4대로 만들어지지 않은 경우도 있음을 말한다. 촉계에서 4대의 성질은 4대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일곱 가지 조색(造色)은 4대로 만들어진 것이며, 법계 가운데 몸과 입의 업(業)도 4대로 만들어진 것이다. 다른 법계는 4대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또 일곱 가지 심계는 4대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나머지] 열한 가지는 4대로 만들어진 것이니, 안입(眼入)이 의지하는 바이고 나아가 법입(法入)이 의지하는 바가 그것이다. 그러나 의입(意入)은 [4대가 만드는 경계가] 아니다. 조색(造色)도 역시 열한 가지이다. 곧, 안입 내지 법입이 그것으로 의입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즉 “안입이 의지하는 바인 4대가 안입을 낳으니, 나머지도 또한 이와 같다” 또 어떤 사람은, “안입이 의지하는 바 4대가 3입(入) 즉 안입ㆍ신입(身入)ㆍ촉입(觸入)을 낳는다. 마찬가지로 설입(舌入)이 의지하는 곳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와 같다. 이 가운데 차별은 자근(自根)을 설하는 것이다. 신입(身入)이 의지하는 곳에서 2입(入) 즉 신입과 촉입(觸入)을 낳으며, 색ㆍ소리ㆍ냄새ㆍ맛의 입처(入處)가 의지하는 곳도 이와 같으며, 촉입이 의지하는 곳은 오직 촉입만을 낳는다”라고 말한다.
028_0402_a_02L그들은 또 이렇게 말하고 있다. 즉 “일체의 4대는 색과 소리를 낳고 일체의 욕계의 색은 냄새와 맛을 떠나지 않으며, 법입(法入)이 의지하는 곳도 역시 이와 같다. 안입(眼入)이 의지하는 곳에서 7입(入)이 생기니 즉 안입과 신입(身入)과 다섯 가지 계가 그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설입(舌入)이 의지하는 곳에 이르기까지도 그러하다. 신입이 의지하는 곳에서 눈 등의 4근(根)을 제외한 6입(入)124)이 생긴다. 법입(法入)이 의지하는 곳에서도 또한 이와 같다. 색입(色入)이 의지하는 곳에서는 5입(入)을 낳으며, 나아가 촉입(觸入)이 의지하는 곳에 이르기까지도 이와 같다. 또 다른 사람은 말하기를, “안입이 의지하는 곳에서 11입(入)이 생기며, 내지 법입이 의지하는 곳에 이르기까지도 이와 같다”라고 하고 있다.
이 4대의 인연에서 다른 모습의 4대가 다른 모습의 조색(造色)을 일으키는 것을 분별하여 마땅히 4구(句)로써 논리를 전개해야 한다. 즉, 같은 모습의 4대가 다른 모습의 조색을 일으키기도 하고, 다른 모습의 4대가 같은 모습의 조색을 일으키기도 한다. 또한 다른 모습의 4대가 다른 모습의 조색을 일으키기도 하고, 같은 모습의 4대가 같은 모습의 조색을 일으키기도 한다.
어떤 것이 같은 모습의 4대가 다른 모습의 조색을 일으키는 경우인가? 즉 촉상(觸相)의 4대가 다른 열한 가지 조색을 일으키는 경우이다. 어떤 것이 다른 모습의 4대가 같은 모습의 조색을 일으키는 경우인가? 즉 단단하고 젖어 있고 따뜻하고 움직이는 모습의 4대가 촉상의 조색을 일으키는 경우이다. 어떤 것이 다른 모습의 4대가 다른 모습의 조색을 일으키는 경우인가? 즉 단단하고 축축하고 따뜻하고 움직이는 모습의 4대가 열한 가지 조색을 일으키는 경우이다. 어떤 것이 같은 모습의 4대가 같은 모습의 조색을 일으키는 경우인가? 즉 촉상을 지닌 4대가 촉상을 지닌 조색을 일으키는 경우이다.
【답】4대는 곧 원인[因]이며 조색은 그 결과[果]이다. 단단하고 축축하고 따뜻하고 움직이는 모습이 곧 4대이다. 그러나 만약 색으로서 4대를 원인으로 해서 생했고 게다가 4대의 모습이 없다면 그것은 곧 조색이다. 또한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이 4대이며, 볼 수 있기도 하고 볼 수 없기도 한 것이 조색이다. 이와 같은 것들로써 설명할 수 있다. ‘내계는 열둘이라고 한다’란, 내부의 다섯 가지 색과 일곱 가지 심계이니, 이 열두 가지는 곧 내계임을 말한다. 따라서 [18계 가운데 나머지] 여섯 가지 계는 외계라고 알아야 한다.
028_0402_b_02L【답】법 때문에 내계라고 말하나, 다만 일체법이 여기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마음과 마음의 법이 의지하는 곳인 까닭에 내계라고 말하는 것이다. 저 의계(意界)는 의지처이면서 역시 의지하는 자이다. 그러나 저 다섯 색계는 의지처이지 의지하는 자는 아니다. 그리고 마음의 법은 비록 의지하는 자이기는 해도 의지처는 아니다. 나머지는 의지처도 아니고 의지하는 자도 아니다.
‘이것은 곧 근의 성질이다’라고 한 것은, 곧 이 열두 가지를 근(根)이라고 말한 것이다. ‘한 가지 계는 근을 지닌다’라고 한 것은, 법계 가운데 열한 가지 법이 근이며, 나머지는 근이 아님을 말한다. 이 경우에 다섯 가지 계와 한 계의 일부분은 근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유분(有分)과 여분(餘分)은 열일곱이고 한 계는 유분(有分)이라 말한다. 열일곱 계는 세속에 떨어지며 한 계는 소분(少分)이며 셋은 업[三業]이다.
028_0402_b_07L 分餘分十七, 一界說有分, 十七界墮世, 一少分三業。
‘유분과 여분125)은 열일곱이다’라 한 것은, 법계를 제외한 나머지 계는 각기 유분 및 여분이라고 말한 것이다. 안계(眼界)가 유분이라고 함은 세 가지 종류가 있기 때문이다. 곧 세간을 분별하여 과거에 이미 색을 보았고, 지금 현재 색을 보고 있고, 미래에 곧 색을 보게 될 것임을 말한 것이다. 유여분은 네 가지가 있다. 즉 과거에 색을 보지 못한 채 이미 소멸했거나, 현재에 색을 보지 못한 채 소멸하고 있거나, 미래세에 있어서의 두 가지 곧 불생법(不生法)과 생법(生法)이 그것이다. 생법이란 색을 보지 못한 채 소멸하게 되는 것이다. 나머지 다른 색계의 경우도 이와 같다. 일곱 가지 심계의 경우는 만약 미래의 불생법이라면 그것은 여유분이며, 나머지는 곧 유분이다.
‘한 계는 유분이다’라 한 것은, 법계는 오로지 유분이며, 여유분이 아님을 말한다. 모든 법계는 의식(意識)의 경계이기 때문이다. 만약 다른 계도 역시 남아 있는 몫이 있는 계는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의식 때문에 유분ㆍ여유분이 세워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른바 눈이 보는 색은 유분이며, 보지 못하는 색은 곧 여유분이다. 다시 말해 색이면서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유분이며, 볼 수 없는 것은 여유분인 것이다.
028_0402_c_02L여기에 차별이 있다면 가령 눈이 한 가지에 유분이라면, 나머지 일체에도 각기 유분이 있으며, 만약 한 가지에 여유분이라면 나머지 일체에도 여유분인 것이다. 만약 색을 보았다면 이는 유분이며, 나머지는 아니다. 귀ㆍ코ㆍ혀ㆍ몸ㆍ소리ㆍ냄새ㆍ맛ㆍ촉감 등도 또한 이와 같다. 제일의(第一義)는 눈의 설명과 같으며, 세속적인 범주에 들어가는 것은 색(色)에 관한 설명과 같다.
【답】있다. 열 가지 색입(色入)은 혹은 여유분이면서 그것의 생(生) 등의 모습은 곧 유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법계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가령 불생법의 뜻[意]은 곧 여유분이며, 그것과 상응하고 공유(共有)하는 법은 유분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법계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답】한정된 몫이 있을 때 유분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면 안계에 두 종류가 있으니, 업보(業報)를 지닌 몫과 업보가 없는 몫이 그것이다. 업보를 지닌 몫은 업보가 없는 몫을 위해 구분되기에 유분이라고 말하며, 업보가 없는 몫도 업보가 있는 몫을 위해 구분되기에 역시 유분이라고 말하게 된다. 두 몫은 함께 유분의 모습을 얻는 것이다.
‘열일곱 계는 세속에 떨어진다’라고 했는데, 열일곱 가지 계는 3세(世)의 일에 떨어지는 까닭에 3세라고 말하니, 혹은 과거, 혹은 미래, 혹은 현재이다. 가령 일어났던 것이 이미 소멸되었다면 그것은 과거이고, 만약 아직 일어나지 아니한 것이라면 그것은 미래이다. 만약 이미 일어나 멸하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현재이다. 또한 만약 지어지지 않은 것이라면 미래라고 설하며, 만약 지어지고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현재라고 설하고, 만약 지어졌다 이미 소멸되었다면 이것은 과거라고 설한다.
028_0403_a_02L‘한 계는 마땅히 분별해야만 한다’라고 한 것은, 법계는 유위(有爲)일 경우에는 3세에 떨어지고, 무위(無爲)일 경우에는 3세에 떨어지지 않음을 말한다. ‘셋은 업(業)이다’라고 한 것은, 삼계는 업을 지닌다는 것이다. 이른바 색계, 성계, 법계가 그것이다. 색계에서 몸으로 짓는 것이 곧 업이다. 나머지 다른 색계는 업이 아니다. 성계에서는 입으로 짓는 것이 곧 업이다. 나머지 소리는 업이 아니다. 법계에서는 몸과 입으로 짓는 업과 생각[思]이 곧 업이다. 나머지 법계는 업이 아니다. 이 업의 모습은 업품(業品)에서 자세히 설명하겠다.
‘비학비무학은 열다섯 계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라고 했는데, 열 가지 색계와 다섯 가지 식계(識界)는 곧 비학비무학이니, 그것은 유루(有漏)이기 때문이다. 즉 이 여러 계는 수도(修道)로써 끊는데 그것은 지혜로 대치(對治)하는 [경계이기] 때문이다. ‘나머지 계는 모두 세 종류이다’라고 했는데, 여기에서 나머지 세 가지 계란 곧 의계(意界)ㆍ법계(法界)ㆍ의식계(意識界)로서 세 종류가 있다. 혹은 유학, 혹은 무학(無學), 혹은 비학비무학이며, 다시 [그 경지에 따라] 혹은 견도(見道)에서 끊기도 하고, 수도(修道)에서 끊기도 하고, 끊는 일이 없는 경우도 있다.
유학(有學)과 상응하는 의계(意界)는 곧 유학이니, 즉 고법인(苦法忍)에서 금강삼매(金剛三昧)에 이르기까지 서로 상응하는 의(意)는 곧 유학인 것이다. 무학과 상응하는 의(意)는 곧 무학이니, 즉 진지(盡智)ㆍ무생지(無生智) 및 무학(無學)의 등견(等見)에 상응하는 의(意)는 곧 무학인 것이다. 비학비무학에 상응하는 의(意)는 곧 비학비무학이니, 즉 선(善)과 염오와 무기가 그것이다. [여기에서] 선(善)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방편으로 얻은 것과 욕망을 여의어 얻은 것과 태어나면서 얻은 것이 그것이다.
또한 오염[된 마음]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불선(不善)과 은몰된 무기[隱沒無記]가 바로 그것이다. 무기(無記)에는 네 가지가 있으니, 위의(威儀)ㆍ공교(工巧)ㆍ보생(報生)ㆍ변화(變化)127) [무기]가 그것이다. 의계(意界)의 경우와 같이 의식계(意識界)도 또한 이와 같다. 법계(法界)에서는 혹은 유학, 혹은 무학, 혹은 비학비무학일 경우도 있다. 즉 유학인의 몸과 입으로 짓는 업과 수음(受陰)ㆍ상음(想陰)ㆍ행음(行陰)은 곧 유학이다. [무학인의 경우라면] 이러한 것들은 곧 무학이 된다. 법계에 포섭되는 유루(有漏)의 몸과 입으로 짓는 업과 수음 ㆍ상음 ㆍ행음 및 무위(無爲)는 곧 비학비무학(非學非無學)이다. 유학과 무학의 뜻에 관해서는 앞으로 업품(業品)에서 자세히 설명하게 될 것이다.
028_0403_b_02L이 삼계128)에 있어서 인법(忍法)으로 대치(對治)하는 것은 견도(見道)에서 끊는 것이며, 지혜로 대치하는 것은 수도(修道)에서 끊는 것이다. 지혜로써 무루[智無漏]인 것은 끊어야 할 것이 없다. 견도에서 끊는 것과 수도에서 끊는 것에 관해서는 그 의미를 사품(使品)에서 자세히 설명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삼계 가운데서 지계와 범계(犯戒)를 설한다’라고 했는데, 이른바 색계에서의 선한 신작(身作)은 계율을 지키는 일이며, 불선의 신작은 곧 계율을 범하는 일임을 말한 것이다. 성계(聲界)는 곧 입으로 짓는 것이며, 오직 법계에서만이 무작(無作)인 것이다. 계율을 지키는 모습과 범하는 모습에 관해서는 곧 업품(業品)에서 자세히 설명하게 될 것이다.
17계에서는 위가 있다고 하고 한 계는 두 가지로 말한다 과보인 것과 또 과보를 지닌 것은 17계이며 한 계는 세 가지라고 함은 깨달은 이가 설한 바이다.
028_0403_b_06L 十七說有上, 一界說二種, 果有果十七, 一三覺所說。
‘17계에서는 위가 있다’라고 한 것은, 법계를 제외한 나머지 17계는 제한이 있다129)는 것이다. 왜냐하면 유위이기 때문이다. ‘한 계는 두 가지로 말한다’는 것은, 법계에서는 혹은 위가 있기도 하고 혹은 위가 없기도 한 경우를 말한다. 즉 유위(有爲)의 법계 및 허공과 비수멸(非數滅)은 위가 있는 것이며, 수멸(數滅)은 선하기 때문에 영구 불변하기 때문에 위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과보인 것과 과보를 지닌 것은 17계’라고 한 것은, 법계를 제외한 나머지 17계는 곧 과보이며 과보를 지님을 말한다. 왜냐하면 유위의 법은 성품이 열등하여 전전(展轉)하며 서로를 연하여 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 계는 세 가지라고 함은 깨달은 이가 설한 바이다’라고 했는데, 법계에서는 세 가지 종류가 있음을 말하니, 혹은 과보이면서 과보를 지니지 않은 것과 혹은 과보이면서 과보를 지닌 것과 혹은 과보가 아니면서 과보를 지니지 않은 것이 그것이다. 과보이면서 과보를 지니지 않는 것은 수멸이다. 과보이면서 과보를 지니는 것은 유위의 법계이다. 과보도 아니면서 과보를 지니지도 않는 것은 허공과 비수멸이다.
세 가지 계는 세 가지를 연하고 하나의 의지처 또한 그렇다. 다섯 가지는 하나이나 혹은 분별하기도 한다. 나머지의 연은 오직 하나라고 말한다.
028_0403_b_18L三界三種緣, 一依亦復然, 五一或分別, 餘緣唯說一。
028_0403_c_02L‘세 가지 계는 세 가지를 연한다’는 것은, 눈ㆍ귀ㆍ의식계(意識界)는 선(善)ㆍ불선(不善)ㆍ무기(無記)의 세 가지를 연함을 말한다. ‘하나의 의지처 또한 그렇다’라고 한 것은, 의식계가 의지하는 것도 역시 선ㆍ불선ㆍ무기의 세 종류가 있음을 말한 것이다. ‘다섯 가지는 하나이다’라고 한 것은, 5식(識)의 의지처는 한 종류임을 말한 것이다. ‘혹은 분별하기도 한다’라고 한 것은, 이른바 [5식의 의지처에는] 함께 일어나는 5근(根)과 차례로 멸하는 의(意)가 있어서 만약 함께 일어나는 의지처를 취하면 즉 하나의 무기가 된다. 왜냐하면 5근은 오직 무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약에 차례로 멸하는 의(意)를 취한다면 세 가지로 구별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의계(意界)는 선ㆍ불선ㆍ무기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안식(眼識)이 의지처로 삼는 부분과 차례로 연하는 부분은 마땅히 네 구의 논리로 분별하여야 한다. 곧 의지처의 부분이면서 차례로 연하는 부분이 아닌 경우도 있고, 혹은 차례로 연하는 부분이면서 의지처의 부분이 아닌 경우도 있으며, 혹은 의지처의 부분이면서 또한 차례로 연하는 부분인 경우도 있고, 혹은 의지처의 부분도 아니고 차례로 연하는 부분도 아닌 경우가 있는 것이다.
[이 가운데서] 의지처의 부분이면서 차례로 연하는 부분이 아닌 경우란, 안식(眼識)과 함께 일어나는 안근(眼根)을 말한다. 차례로 연하는 부분이면서 의지처의 부분이 아닌 경우란, 차례로 멸하는 심법(心法)을 말한다. 의지처의 부분이면서 곧 차례로 연하는 부분인 경우란, 차례로 멸하는 의(意)를 말한다. 의지처의 부분도 아니고 차례로 연하는 부분도 아닌 경우란, 위에서 말한 그런 일을 제외한 [나머지 경우를 말한다.] 마찬가지로 신식(身識)의 의지처에 이르기까지도 이와 같다.
【문】만약 안식이 의계(意界)를 의지처로 삼는다면 왜 그것을 안식이라 표현하고 의식이라 표현하지 않는가?
028_0403_c_15L問:若眼識以意界爲依者,何故 名眼識不名意識耶?
【답】눈 자체는 공유되는 의지처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씨앗과 싹의 관계와도 같으며, 북과 소리의 관계와도 같다. 눈과 그 안식은 공통되지 않는 의지처이나, 뜻[意]은 공유의 의지처이다. 그 이유는 여섯 가지 인식 작용은 전전하면서 차제연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나머지 연은 오직 하나이다’라고 한 것은, 곧 비식ㆍ설식ㆍ신식이 오직 무기(無記)와 연(緣)함을 말한 것이다. 왜냐하면 냄새와 맛과 촉감은 오로지 무기이기 때문이다. 의계(意界)란 곧 6식신(識身)이니, 이것을 떠난 다른 것은 없기 때문이다. 법계에 관해서는 설하지 않지만, 만약 마음과 상응한다면 마음에 관한 것과 같이 설명된다.
눈을 따라 생하는 것은 견(見)이고 이계(耳界)를 따라 생하는 것은 문(聞)이며 삼계(三界)를 따라 생하는 것은 각(覺)이고 의계(意界)를 따라 생하는 것이 식이다.
028_0403_c_22L 若眼隨生見, 耳界隨生聞, 三界隨生覺, 意界隨生識。
028_0404_a_02L 가령 눈을 따라 생하는 것을 이름하여 견(見)이라고 하고, 귀를 따라 생하는 것을 이름하여 문(聞)이라 하고, 3사(事)130)를 따라 생하는 것은 각(覺)이라 하고, 뜻을 따라 생하는 것을 인식[識]이라고 한다. 그 삼계131)는 방편으로 얻거나 애욕을 벗어나 얻음으로써 신통력[神通性]과 4지(支)ㆍ5지(支)132) 및 선정의 과보를 수득(修得)하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그것들이 따라 생함은 각기 달리 세우며 나머지 세 가지가 따라 생함은 그러한 모습이 없기 때문에 함께 하나의 감각[覺]만을 세운 것이다.
【답】그 경계는 오직 무기(無記)이며 각심(覺心) 가운데서 전개된다. 따라 생기는 세 가지 인식 이것을 각(覺)이라 부른다.
028_0404_a_06L 答: 境界唯無記, 覺心於中轉, 隨生三種識, 是則名爲覺。
냄새와 맛과 감촉은 오로지 무기이며, 무기인 까닭에 각이라 말한다. 때문에 이를 따라 생긴 세 가지 인식을 각(覺)이라 표현한 것이다.
028_0404_a_08L 香、味、觸一向無記,無記故說覺,是故 隨生三識名爲覺。
두 경계는 가까이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니 멀고 가까운 경계는 하나이다. 나머지는 오로지 가까이서 받아들이는 것으로 의지처 및 경계는 동등하다.
028_0404_a_10L 二境不近受, 遠近境界一, 餘一向近受, 依及境界等。
‘두 경계는 가까이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 것은, 안식과 이식은 경계를 가까운 곳에서 받아들이지 않음을 말한다. 가령 눈을 핍박하면 색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귀 역시 그러하니 핍박하면 듣지 못한다. 비록 깊숙한 내부에 있다 하더라도 멀리 밖에서 나는 소리를 듣게 된다. 만약 너무 멀어도 역시 보고들을 수 없다고 한다면 이는 당연한 얘기다. 하지만 의식(意識)이라는 것은 멀고 가까운 경계를 모두 받아들일 수 있다. 다만 자신과 상응하여 공유하는 것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법은 모두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머지는 오로지 가까이서 받아들이는 것이다’라고 한 것은, 비식ㆍ설식ㆍ신식은 의지처와 대상[緣]에 간격이 없는 까닭에133) 경계를 가까이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의지처 및 경계는 동등하다’라고 한 것은, 이른바 비식과 설식과 신식 및 이 세 가지 식의 의지처는 동등한 경계를 취함을 말한다. 즉 비근(鼻根)과 향미(香味)가 조화를 이루어 인식이 생겨나는 것이다. 설근(舌根)ㆍ신근(身根)과 미약한 [맛과 촉감의 관계] 또한 이와 같다.[소위 근(根)과 대상[塵]이 합쳐지는 곳에 인식이 생겨나는 것이다.]
두 계는 일정하지 않다고 말하며 다른 한 계의 경계도 또한 그렇다. 다섯 계의 의지처는 혹은 함께 하지만 한 계의 의지처는 멀다고 말한다.
028_0404_a_22L二界說不定, 一界境亦然, 五界依或俱, 一界依說遠。
028_0404_b_02L‘두 계는 일정하지 않다’라고 한 것은, 안식과 이식은 그 의지처나 대상[緣]이 모두 일정하지 아니함을 말한 것이다. 가령 안식계의 경우 혹은 의지처는 크지만 대상은 작으니 털끝을 보는 것과 같다. 혹은 의지처는 작아도 대상은 크니 산을 보는 것과 같으며, 혹은 의지처와 대상이 같은 경우도 있으니 포도나 복숭아 등 과일을 보는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식(耳識)도 이와 같다.
‘한 계의 경계도 또한 그렇다’하고 한 것은, 의식(意識)의 경계도 역시 일정하지 아니하니, 혹은 크기도 하고 혹은 작기도 함을 말한 것이다. 일체법이 경계가 되기 때문이며, 의지처가 형상이 없기 때문에 크고 작은 것을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의계(意界)를 떠나서 6식은 달리 체(體)가 없기 때문에 설하지 않는 것이다. 마음의 법 또한 마음과 같이 설명된다. ‘다섯 계의 의지처는 혹은 함께 한다’라고 한 것은, 5식신(識身)은 혹은 의지처와 함께 할 경우도 있음을 말한 것이다. 여기서 함께 한다는 것은 5근(根)을 말한 것이며, 멀다고 하는 것은 차제멸(次第滅)의 뜻을 말한 것이다. ‘한 계의 의지처는 멀다’라고 함은 의식계(意識界)의 의지처는 멀다는 것을 말한다. 이른바 그것이 차제멸의 뜻[意]을 지니는 것이다.
열한 계에는 두 종류가 있고 여섯 계에는 세 종류, 한 계에는 네 종류가 있으니 일[事]과 장양(長養)과 과보[報]와 찰나(刹那)와 의지처의 종류라네.
028_0404_b_12L 十一界有二, 六三一四種, 事及長養報, 剎那與依種。
‘열한 계에는 두 종류가 있다’라고 한 것은, 5내계(內界)134)와 성계(聲界)와 5식계(識界)에는 두 종류가 있음을 말한 것이다. ‘여섯 계에는 세 종류’라고 한 것은, 색ㆍ냄새ㆍ맛ㆍ촉감의 [다섯]계와 의계(意界)와 의식계(意識界)의 이 여섯 계에는 세 종류가 있음을 말한 것이다. ‘한 계에는 네 종류가 있다’라고 한 것은, 법계에는 네 종류가 있음을 말한 것이다.
【답】일과 장양과 과보와 찰나와 의지처의 종류가 그것이다. 저 안계(眼界)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과보[報]와 장양(長養)이 그것이다. 여기서 보생(報生)135)이란 선ㆍ불선의 업의 과보를 말한다. 즉 3악도(惡道)는 곧 불선업의 과보이며, 인간계와 천상계는 선한 업보로 얻는 과보다. 또 눈과 여러 가지 기능[衆具]과 청정한 행[梵行]과 정수(正受)에서 길이 길러지는 대상이 되는 까닭에 이것이 장양이다. 그러나 별도로 의지하는 성질이 없기 때문에 따로 의지처를 설명하지는 않는다. 찰나(刹那)나 일[事]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 눈과 마찬가지로 귀ㆍ코ㆍ혀ㆍ몸의 계도 또한 이와 같다. 성계(聲界) 역시 두 종류가 있으니, 곧 장양(長養)과 의지처[依]136)가 그것이다.
028_0404_c_02L【답】현재 방편으로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리란 현재 방편으로 생기는 것이지만, 과보란 전생의 업보로 일어나는 것이다. 또한 소리라는 것은 욕망을 따라 생기는 것이지만 과보는 욕망을 따라 생기는 것이 아니다. 또한 소리와 소리에는 간격이 있으나 과보에는 간격이 없다.137) 만약 소리이면서 곧 과보라면 마땅히 색과 같이 일체의 시간에 단절됨이 없어야 한다. 하지만 소리에는 단절이 있다. 때문에 소리는 과보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다섯 가지 인식계[五識界]는 과보 및 의지처이다. 즉 색과 냄새와 맛과 촉감의 계는 세 가지이니 과보와 의지처와 장양이 그것이다. 의계(意界)는 세 가지이니, 과보와 의지처와 찰나138)가 그것이다. 찰나란 고법인(苦法忍)과 함께 생하는 의계이며, 의식계의 경우도 또한 이와 같다.
법계에는 네 가지가 있으니, 과보와 찰나와 의지처와 일[事]이 그것이다. 여기에서 과보란 선ㆍ불선업의 과보이며, 찰나란 고법인(苦法忍)의 권속139)을 말한다. 의지처란 고법인의 권속을 제외한 나머지 선한 유위(有爲)의 법계와 과보를 제외한 불은몰무기(不隱沒無記)의 유위법계 및 염오법계이다. 무위의 법계에는 오직 일(事)140) 만이 있다.
028_0405_a_02L또 욕계에 태어나서 2선(禪)의 경지의 눈으로 욕계의 색을 본다면 그에게는 욕계의 몸과 2선의 경지의 눈과 욕계의 색 및 초선의 경지의 안식이 생겨난다. 또 초선[의 경지]를 본다면 그에게는 욕계의 몸과 2선의 경지의 눈과 초선의 경지의 색과 초선의 경지의 안식이 생겨난다. 또 2선[의 경지]를 본다면 그에게는 욕계의 몸과 2선의 경지의 눈과 색 및 초선의 경지의 안식이 생겨난다.
이계(耳界)는 앞에서 말한 것과 같으며 비계(鼻界)와 설계(舌界)는 자신의 경지[自地]뿐이다. 몸과 촉감은 경지에 입각하여 설하고 의식(意識)은 수없이 많다.
028_0405_a_22L 耳界如前說, 鼻舌界自地, 身觸卽地說, 意識則衆多。
028_0405_b_02L‘이계(耳界)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라고 한 것은, 앞에서 말한 안식과 같이 이식도 역시 이와 같다는 것이다.
‘비계(鼻界)와 설계(舌界)는 자신의 경지뿐이다’라고 한 것은, 욕계에 태어나면 욕계의 몸과 욕계의 코와 욕계의 냄새와 욕계의 비식(鼻識)이 생기며, 설계(舌界) 또한 이와 같음을 말한 것이다. ‘몸과 촉감은 경지에 입각해 설한다’라고 한 것은, 신식에는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즉 욕계에 태어난다면 욕계의 몸과 욕계와 촉감과 욕계의 신식(身識)이 생겨나며, 초선의 경지도 역시 이와 같다. 2선에 태어난다면 2선의 몸과 2선의 촉감과 초선의 경지의 신식이 생긴다. 자기 경지의 촉감을 느끼기 때문에 다른 경지의 촉감이 생하지 않는 것이다. 제3선ㆍ제4선의 [경지에서도] 또한 이와 같다.
‘의식은 수없이 많다’라고 한 것은, 혹은 자기 경지의 뜻[意]과 자기 경지의 법과 자기 경지의 의식이 생기는 경우도 있고 혹은 다른 경지의 경우도 있음을 말한다. 그 가운데 자기 경지의 경우란, 욕계에 태어나 욕계의 뜻과 욕계의 법과 욕계의 의식(意識)이 생하며, 내지 유상무상처(有想無想處)의 경지에 이르기까지도 모두 이와 같다. 여기서 다른 경지[他地]란, 욕계에 태어나 바르게 받아들였을 때, 욕계의 선한 마음이 차례로 초선(初禪)[의 경지]를 바르게 받아들이는 경우 그에게는 욕계의 뜻과 초선의 경지의 의식이 생기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법은 혹은 삼계에 얽매이는 경우도 있고 혹은 얽매이지 않는 경우도 있다.
초선의 다음 차례에 욕계의 선한 마음이 앞에 나타나면 그에게는 초선의 뜻과 욕계의 의식이 생겨난다. 그리고 법은 혹은 삼계에 얽매이는 경우도 있고 혹은 얽매이지 않는 경우도 있다. 초선의 다음 차례에서 2선(禪)[의 경지]를 바르게 받아들이게 되면, 그에게는 초선의 뜻과 2선의 의식이 생겨난다. 그리고 법은 혹은 삼계에 얽매이는 경우도 있고 혹은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이와 같이 제2선ㆍ초선, 초선ㆍ제2선, 초선ㆍ제3선, 제3선ㆍ초선 내지는 유상무상처에 이르기까지 순역으로 또한 차례로 초월하는 과정이 상세히 설명되어야만 할 것이다. 여기에서 차별이 있다면, 이쪽의 경지를 바르게 받아들인 것을 의계(意界)로 삼고 저쪽의 경지를 바르게 받아들인 것을 의식계(意識界)로 삼는다는 것이다. 만약 선(禪)[의 경지]가 의식(意識)이 된다면 법은 삼계에 얽매이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또 만약 무색계가 의식이 된다면 그 법은 자기 경지이자 드높은 경지이며 [삼계에] 얽매이지 않는 [경지]가 된다.
028_0405_c_02L또한 바르게 받아들인 정초선(淨初禪)의 다음 차례에 욕계에서의 초선의 과보인 변화심이 현전하게 되면 그에게는 초선의 뜻[意]과 욕계의 의식이 생겨나며, 법은 욕계가 변화한 것이 된다. 곧, 그 욕계 초선의 과보에 이어 정초선의 경지가 앞에 나타난다면, 그에게는 욕계의 뜻과 초선의 의식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 경우도] 법은 혹은 삼계와 연계되기도 하고 혹은 연계되지 않는 경우도 있으며, 내지 제4선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이와 같다.
여기에서‘생한다[生]’고 함은, 그가 욕계에서는 사라져 초선의 경지에서 생겨난다면 그에게는 욕계의 뜻과 초선 경지의 의식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이 경우 법은 혹은 색계ㆍ무색계에 연계되는 경우도 있고 혹은 연계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또한 초선의 경지에서 사라져 욕계에서 태어난다면, 그에게는 초선 경지에서의 뜻과 욕계의 의식이 생겨난다. 이 경우도 법은 혹은 삼계에 연계되는 경우도 있고 연계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나아가 유상무상처의 경지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이와 같다. 여기에서141) 사라지는 것은 곧 뜻[意]이며, 받아서 생하는 것은 곧 의식(意識)이다. 다만 그 법은 자기 경지이자 드높은 경지이며 얽매이지 않은 [경지]인 것이다.
혹은 그는 안계를 얻거나 혹은 그것을 의지처로 하는 식(識)만이 있으니 둘 모두 얻거나 얻지 못하고 또한 색계에서도 그러하고 더불어 버리는 일도 그러하다.
028_0405_c_13L 若彼得眼界, 或彼所依識, 二俱得不得, 亦色及與捨。
‘혹은 그는 안계를 얻는다’라고 한 것은, 가령 안계(眼界)가 성취되지 않다가 [이제] 성취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안식계(眼識界)가 아님을 말한다. 즉 무색계에서 사라져서 제2선ㆍ제3선ㆍ제4선의 경지에 태어나고 마침내 욕계에 태어나게 되면 점차로 안근(眼根)을 얻게 되는 것이다.142) ‘혹은 그것을 의지처로 하는 식만 있다’라고 한 것은, 혹은 안식계(眼識界)가 성취되지 않다가 이제 성취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안계(眼界)가 아님을 말한 것이다. 즉 상3선(上三禪)143)의 경지에서 사라져서 욕계 및 초선[의 경지]에 태어나게 되며, 만약 거기에 머물 경우 안식(眼識)이 앞에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028_0406_a_02L‘둘 모두를 얻는다’라고 한 것은, 혹은 안계와 안식계를 함께 얻음을 말한 것이다. 즉 무색계에서 사라져서 욕계나 초선[의 경지]에 태어나는 것이다. ‘함께 얻지 못한다’라고 한 것은, 안계가 성취되지 않다가 이제 성취된 것도 아니며, 또한 안식계가 성취되지 않다가 [이제] 성취된 것이 아님을 말한 것이다. 즉 욕계에 태어나서 안근(眼根)을 잃지 않고 급기야 범천(梵天)에서 목숨이 다하여 다시 범천이나 욕계에 태어날 경우나 제2선ㆍ제3선ㆍ제4선의 세계에서 사라졌다가 다시 제2선ㆍ제3선ㆍ제4선의 [세계]에 태어나거나 무색계에서 사라졌다가 다시 무색계에 태어나는 경우를 말한 것이다.
‘색계에서도 그러하다’라고 한 것은, 가령 [이전에] 색계를 성취하지 못하다가 이제 성취했다면 그것은 곧 안계를 성취하지 못하다가 이제 성취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혹은 안계이면서 색계가 아닌 경우도 있는데, 예를 들면 욕계에 태어나 점차로 안근을 얻는 경우가 그것이다. 가령 색계를 성취하지 못하다가 이제 성취했다면 그것은 안식계에도 속하는 것인가? 이에 대한 해답은 마땅히 4구(句)의 논리로 구별해야 할 것이다.
첫째, 색계를 전에 성취하지 못하다가 지금 성취하여 얻어도 안식계에 해당되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곧 무색계에서 사라져서 상3선 가운데에 태어나는 경우이다. 둘째, 안식계를 전에는 성취하지 못하다가 지금 성취하여 얻어도 그것이 색계가 아닌 경우가 있다. 즉 3선의 경지에서 사라져 욕계나 초선의 경지에 태어나며, 만약 곧 거기에 머물게 된다면 안식이 앞에 나타나게 되는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셋째, 색계를 전에 성취하지 못하다가 지금 성취하여 얻어도 역시 안식계에 속하는 경우가 있다. 즉 무색계에서 사라져 욕계나 초선의 경지에 태어날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넷째, 색계도 아니고 안식계도 아닌 경우가 있다. 즉 위에서 말한 일을 제외한 다른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더불어 버리는 일도 그러하다’라고 한 것은, 얻는 경우를 설명한 것과 같이 잃는 경우도 이와 같이 자세히 설명됨을 말한 것이다.
028_0406_a_15L及與捨者,如 說得,捨亦如是廣說。
색계는 두 가지 식으로 인식한다. 내지 촉감도 그러하다. 나머지 모든 열셋의 계는 오로지 의식(意識)의 대상[緣]이다.
028_0406_a_16L 色界二識識, 乃至觸亦然, 諸餘十三界, 一向意識緣。
028_0406_b_02L ‘색계는 두 가지 식으로 인식한다’라고 한 것은, 색계에서는 안식(眼識)과 의식의 두 식으로 인식됨을 말한 것이다. 이 가운데 안식계는 독자적인 모습[自相]만을 갖추고 있으나 의식계는 독자적인 모습과 공통적인 모습[共相]이 공존한다. ‘내지 촉감도 그러하다’라고 한 것은, 성계(聲界)도 이식과 의식의 두 식으로 인식됨을 말한 것이다. 여기서 이식계는 독자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으나 의식계는 독자적인 모습과 공통적인 모습이 공존한다. 이렇게 하여 촉계에 이르기까지도 두 가지 인식으로 인식하게 된다. 즉 신식(身識)과 의식이 그것으로, 신식은 독자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으나 의식은 독자적인 모습과 공통적인 모습이 공존하게 된다. 그 이유는 [의식을 제외한] 5식신(識身)은 독자적인 모습을 경계로 삼기 때문이고, 사유로 얻는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고, 현재 눈앞에 나타나는 경계이고, 일념(一念)으로 [얻어지는 경계이기] 때문이다.
‘나머지 모든 열셋의 계는 오로지 의식의 대상[緣]이다’라고 한 것은, 다섯 가지 색근(色根)144)과 일곱 가지 심계(心界) 및 법계의 이 열세 가지 계는 오로지 의식의 식으로 그것은 독자적인 모습과 공통적인 모습이 공존한다는 것이다. 이 의식에는 허물어지는 연145)과 허물어지지 않는 연146)의 두 종류가 있다. 허물어지지 아니하는 연이란 이 열세 가지 계의 연이 여기에 해당되며, 허물어지는 연이란 이 열세 가지 계와 다른 다섯 가지 경계가 하나하나 합쳐지는 연 내지는 18계의 총체적인 연을 말한다.
사유(思惟)의 인식에 세 가지 있으니 그 중 뜻[意]은 욕유(欲有) 안의 일이로다. 색계ㆍ무색계는 분별되며 한 가지는 이른바 나머지 계이다.
028_0406_b_08L 思惟識三種, 是意欲有中, 色無色分別, 一種謂餘界。
‘사유의 인식에 세 가지 있으니 그 중 뜻은 욕유 안의 일이로다’라고 한 것은, 욕계의 의식에는 세 가지의 사유(思惟)가 있음을 말한 것이다. 즉 자성사유(自性思惟)147)와 수억사유(隨憶思惟)148)와 분별사유(分別思惟)149)가 그것이다. 여기서 자성사유란 깨달음[覺]150)이고 수억사유란 염(念)이며, 분별사유란 일정하지 않은 지혜이다. 이 세 가지 사유는 욕계 의식(意識)의 사유이다.
‘색계ㆍ무색계는 분별된다’라고 한 것은, 색계와 무색계에서의 의식은 경우에 따라 세 가지가 있음을 말한 것이다. 즉 초선의 경지에서는 결정되지 않으며, 선정에 든 경우에는 둘이 있으며 선정에 들지 못한 경우에는 셋이 있다. 3선(禪)의 경지에서 의식이 선정에 들지 않은 경우는 두 가지가 있으니, 자성사유를 제외한다. 가령 하나를 정한다면 수억사유뿐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무색계에서는 선정에 들지 않은 자가 없으니, 거기에는 오직 한 가지 수억사유만이 있다. 만약 여기에서 선정에 들지 않은 자가 있다고 할 경우, 선정에 든 것은 한 가지이고 선정에 들지 않은 것은 두 가지가 된다”고 한다.
‘한 가지는 나머지 계를 말한다’라고 한 것은, 5식신(識身)을 ‘나머지’라고 표현한 것이다. 여기에는 오직 자성사유만이 있으니, 생각이 예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028_0406_b_21L一種 謂餘界者,五識身說餘,唯有自性思 惟,不利故。
【문】이와 같이 법상(法相)을 분별하는 일은 끝났다. 그렇다면 법을 포섭하는 일은 자성(自性)인가, 아니면 타성(他性)인가?
028_0406_b_23L問:如是分別法相已。云何 攝法?爲自性、爲他性?
【답】자성이다. 왜 그런가?
答:自性。何以故?
028_0406_c_02L 모든 법은 타성을 여의어 각자 스스로의 성품에 머문다. 때문에 일체법은 자성에 속한다고 말한다.
028_0406_b_24L 諸法離他性, 各自住己性, 故說一切法, 自性之所攝。
‘모든 법은 타성을 여읜다’라고 한 것은, 안계(眼界)는 다른 열일곱 계를 벗어남을 말한다. 왜냐하면 성품이 다르기 때문이다. 나머지 계의 경우도 역시 이와 같다. 성품을 벗어난 것을 곧 포섭이라고는 말하지 않으니,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자성에 속하는 것이며 타성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각자 스스로의 성품에 머문다’라고 한 것은, 일체의 성품이 각기 자성 가운데 머물고 있음을 말한 것이다. 이 성품은 다른 [계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자성에] 머문다면 이것이 포섭하지 다른 것이 포섭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때문에 일체법은 자성에 포섭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포섭[攝]’이라는 의미는 이른바 자성(自性)은 자성으로서 공이 아니며[自性不空], 또한 본질도 아님을 말한다. 마치 색은 색으로서 공이 아닌 것과 같다. 또한‘서로 유지한다는 뜻이 곧 포섭이다’라고 말한다.
예를 들면 경에서 말하는 내용처럼 만약 어떤 누관(樓觀)의 중심이 되는 곳에는 많은 재목들이 의지하는 곳으로, 누관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또 다른 설명에 따르면, [포섭이란] 마치 실이 옷을 유지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또한 부챗살의 지도리[樞]가 부채를 유지하고 있는 것과 같으며, 도끼가 땔감을 유지시키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혹은 어떤 사람은 방편을 포섭이라 말한다. 그들의 설명에 의하면 이 5근(根)151)은 지혜를 우두머리로 삼는다. 왜냐하면 [지혜로써 나머지를] 포섭하기 때문이다.
또 어떤 사람은 화합(和合)을 포섭이라고 한다. 즉 네 가지 포섭의 일[四攝事]152)이 능히 중생들을 포섭한다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수순(隨順)을 포섭이라고 한다. 그들의 설명에 따르면 바른 견해153)ㆍ바른 의지154)ㆍ바른 방편이 곧 지혜의 몸[慧身]인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섭취(攝取)하기 때문에 포섭이라고 하였다. 예를 들면 화상155)이 재물과 가르침으로 학인들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세간의 설명은 궁극적인 포섭의 내용은 아니다. ‘자성으로써 자성을 포섭한다’는 것이야말로 구경(究竟)을 이룬 제일의(第一義)인 것이다. 세 가지 단계의 포섭이 있으니, 이 가운데에서는 자성의 포섭[自性攝]을 말한 것이다. 이와 같은 자성의 포섭은 제일의(第一義)를 버리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이미 자성의 포섭을 설명하였다. 안계는 하나의 계ㆍ하나의 입(入)ㆍ하나의 음(陰)에 포섭되며, 17계(界)와 11입(入)과 5음(陰)에는 포섭되지 않는다. 또한 오른쪽 눈은 오른쪽 눈에 포섭되고 왼쪽 눈은 왼쪽 눈에 포섭되는 것이다. 눈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장양(長養)과 과보가 그것이다. 장양은 장양에 포섭되고 과보는 과보에 포섭된다.
028_0407_a_02L그리고 과보에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선업의 과보와 불선업의 과보가 그것이다. 선업의 법은 선업의 법에 포섭되고 불선업의 법은 불선업의 법에 포섭되는 것이다. 불선업의 과보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3악취(惡趣)156)가 그것이다. 축생은 축생으로 포섭되며 아귀와 지옥의 경우도 역시 이와 같다. 선업의 과보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인간세계와 하늘세계가 그것이다. 인간은 인간세계에 포섭되고 하늘 사람은 하늘세계에 포섭된다. 과거는 과거에 포섭된다. 미래와 현재도 그와 같으며, 나아가 찰나는 찰나에 포섭된다.
9)5음이란 혜근(慧根)과 상응해 함께 일어나는 심(心)ㆍ심법(心法)ㆍ심불상응법(心不相應法)ㆍ무작(無作) 등을 말한다.
10)범어로는 dharma-jñāna. 욕계의 제법을 대상으로 하는 성지(聖智).
11)범어로는 anvaya-jñāna. 상계(上界)의 번뇌에 대해서 작용하는 지혜. 색계ㆍ무색계의 제행의 4제를 관찰해서 번뇌를 끊는 무루지(無漏智)를 말한다. 비지(比智)는 구역어.
12)미지정(未至定)ㆍ중간정(中間定)ㆍ4선정(禪定)의 여섯 단계의 선정.
13)범어로는 kāma-dhātu. 색욕ㆍ성욕ㆍ식욕ㆍ수면욕 등 본능적 욕망이 지배하는 생존계.
14)범어로는 daṡa-ākāra. 열여섯 가지 행상으로 4제를 관하는 일종의 4제관법. 곧, 먼저 고제(苦諦)에 대해서 비상(非常)ㆍ고(苦)ㆍ공(空)ㆍ비아(非我)로 관하며, 집제(集諦)에 대해서는 인(因)ㆍ집(集)ㆍ생(生)ㆍ연(緣)으로, 멸제(滅諦)에 대해서는 멸(滅)ㆍ정(靜)ㆍ묘(妙)ㆍ리(離)로, 도제(道諦)에 대해서는 도(道)ㆍ여(如)ㆍ행(行)ㆍ출(出)로 관하는 것.
15)희근(喜根)ㆍ낙근(樂根)ㆍ사근(捨根).
16)유각유관삼매ㆍ무각유관삼매ㆍ무각무관삼매(有覺有觀三昧ㆍ無覺有觀三昧ㆍ無覺無觀三昧)
17)이른바 선ㆍ불선ㆍ무기.
18)유학(ṡaikṣa)이란 배울 것이 더 남아 있는 상태로 아직 아라한과를 얻지 못한 사람을 가리킨다. 반면에 무학(aṡaikṣa)이란 더 이상 닦을 것이 없는 성자의 경지를 가리킨다.
19)이른바 유학ㆍ무학 및 비학비무학
20)이른바 견제단(見諦斷)ㆍ수도단(修道斷)ㆍ부단(不斷)
21)12입처 가운데 법입처를 말한다.
22)5음 가운데 행음을 말한다.
23)곧, 자분인(自分因)ㆍ상응인(相應因)ㆍ공유인(共有因)의 세 인(因).
24)인연(因緣)ㆍ등무간연(等無間緣)ㆍ소연연(所緣緣)ㆍ증상연(增上緣).
25)범어로는 durgati. 악업의 결과로 받는 생존 상태.
26)5탁이란 탁한 악세에 드러나는 다섯 가지 탁한 현상을 말한다. 곧, 유정의 과보가 쇠해져 몸과 마음이 약해지고 고통이 증대하는 유정탁(sattvakaṣāya)ㆍ유정의 수명이 짧아지는 명탁(āyuṣ-kaṣāya)ㆍ갖은 번뇌가 치성하는 번뇌탁(kleṡa-kaṣāya)ㆍ삿된 견해가 난무하는 견탁(dṛṣṭi-kaṣāya)ㆍ전쟁이나 기근 ,질병이 번창하는 겁탁(kalpa-kaṣāya)을 말한다.
27)이 게송은 세존께서 성도하신 후 다섯 비구를 제도하기 위해 베나레스로 가시던 중 길에서 만난 외도수행자 우파카(Upaka)를 상대로 설하신 내용이다.
28)곧, 속제(俗諦)와 진제(眞諦).
29)범어로는 arhat. 원시불교에서의 이상적인 출가자상. ‘공양 받을 자격이 있는 자’ 라는 의미에서 응공(應供)이라 번역하기도 한다. 나한(羅漢)은 약칭.
30)범어로는 sarvajñātā. 일체를 꿰뚫어 아는 자. 곧, 완전지를 획득한 자.
31)범어로는 avyākṛta. 선(善)ㆍ불선(不善)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32)색음을 제외한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음(識陰).
33)곧, 한 사람을 두고 단지 그를 아버지나 혹은 아들의 한 측면으로만 본다면, 이는 그가 아들이자 아버지일 수 있는 측면을 간과하게 된다는 뜻.
34)범어로는 Siṁsapā-Vana-sutta(雜阿含 권15, SN.56.31). 이 경에서 세존은 자신이 지견한 법을 숲 속의 나뭇잎에 비유하고 다시 교화를 위해 설하는 법을 손 안에 든 나뭇잎에 비유한다. 그렇지만 이 교화를 위한 법 역시 열반을 향한 가르침이라고 설한다.
39)범어로는 satkāya-dŗṣṭi. 5온이 화합해 이루어진 몸에 대해 ‘나’혹은 ‘내것’이라는 관념을 버리지 못하는 집착. 또는 몸이 있다고 집착하는 견해. 이 Sat를 경량부에서는 무상하고 무너지는 것으로 보며, 설일체유부에서는 실유(實有)의 존재로 본다.
40)6내입처(內入處)를 가리킨다.
41)전(轉)이란 번뇌를, 부전(不轉)이란 무루행을 말한다.
42)곧, 수음이란 번뇌를 의미한다.
43)5음(pañca-skandhā)이란 이른바 유정을 이루는 다섯 가지 요소로, 색(rūpa)ㆍ수(vedanā)ㆍ상(sam/jñā)ㆍ행(sam/khāra)ㆍ식(vijñāna)을 말한다.
44)곧, 안ㆍ이ㆍ비ㆍ설ㆍ신 식(識)을 말함.
45)범어로는 paramāṇu. 물질의 특징을 지니지 않은 순간까지 물질을 세분한 것. 현대적으로는 원자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1극미를 중심으로 상하ㆍ사방에 극미가 모인 것을 미진(微塵)이라고 한다.
46)범어로는 aṡubhā-bhāvanā. 자기 몸의 더러움을 관조해 번뇌와 욕망을 제거하는 관법. 그 초기의 유형은 백골관으로 시신이 서서히 썩어가서 결국은 백골이 되는 과정을 관조한다.
47)범어로는 ānāpāna-smŗti. 출입식념(出入息念). 드나드는 숨에 의식을 집중하는 선정수습법.
48)4대란 일체의 물질을 구성하는 원소로, 견고함을 본질로 하는 지대(地大 , pŗthivi-dhātu)ㆍ습기를 모으는 수대(水大, ab-dhātu)ㆍ열을 본질로 하며 성숙작용을 지니는 화대(火大, tejo-dhātu)ㆍ생장작용을 하는 풍대(風大, vāyu-dhātu).
49)곧 욕계를 벗어나기 위해 색계의 선정인 4선정(禪定)을 닦아야 한다는 뜻.
50)곧 색계를 벗어나기 위해 무색계의 선정인 4무색정(無色定)을 닦아야 한다는 뜻.
51)곧, 고락(苦樂)의 수(受)를 제어하기 위해서는 4선(禪)을 닦아야 하고, 상(想)을 제어하기 위해서는 4무색정(無色定)을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4선은 느낌을 제어하는 수행이고, 4무색정은 생각을 제어하는 수행인 것이다.
52)범어로는 śamprayukta. 수(受)와 상(想)을 제외한 일체의 심소법을 말한다. 심왕(心王)과 결부되어 동시에 일어나기에 심상응행이라고 하는 것이다.
53)범어로는 viprayukta. 심과 상응하지 않는 심소법으로, 물질도 아니고 마음도 아닌 것.
54)범어로는 saṁskāra. 마음작용을 뜻한다. 사(思)의 작용력이 가장 뚜렷하기에 사로써 행을 대표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