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제(聖諦)에 네 가지가 있다”는 이런 말씀을 한 이 경3)은 불세존께서 어떤 인연으로 이와 같은 경을 설하신 것인가? 성제에는 왜 더하거나 덜하지도 않고 네 가지만 있는가? 성(聖)과 제(諦)의 뜻은 무엇인가? 만약 성스러움[聖] 때문에 진리[諦]라고 한다면 앞의 두 가지는 진리라고 할 수 없다. 만약 성스러운 사람들[聖家]의 진리이기 때문에 진리라고 한다면 그 뜻은 확실하지 않게 된다. 또한 경에 “진리는 오로지 하나이지 두 번째 것이 있을 수 없다”는 말씀이 있는데 왜 네 가지라 하는 것이며, 어떻게 서로 모순 없이 성립되는가?
029_0521_c_01L또한 경에 ‘모든 행법(行法)을 고(苦)라 한다’는 말씀이 있다. 따라서 두 가지 진리[二諦]라고 해야지, 4제의 뜻은 성립되지 않는다” 또한 하나씩 증가하는 법[增一]에서는 모든 법은 하나에서 시작하여 둘이 되고, 그것이 많은 수로 안립되는 것이라고 했는데, 왜 제(諦)의 뜻에만 증가하는 법이 없는가? 또한 네 가지 진리의 모습이 각기 다른데 어떻게 동시에 관찰할 수 있는가? 또한 진리의 네 가지 모습은 바라문제(波羅門諦)와 성제(聖諦)에 있어서 어떤 차별이 있는가? 지산게(持散偈)4)로써 말한다.
왜 아라한은 4제에 대하여 모자람이 없는 원만한 지혜를 갖추고 있더라도 모든 부처님께서 얻으신 일체지(一切智)와 같지 않은가? 만약 이것이 같지 않다면 4제 중에 무명(無明)이 있는 것이 된다. 만약 일체법이 4제 가운데 포함된다면 승사파(勝奢波) 잎에 비유되는 경5)도 마땅히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만일 이해하지 못한다면 5제(諦)가 존재하는 것이 되고, 만약 5제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다른 법은 진리[諦]가 아닌 것이 된다.
만약 고(苦) 등 네 가지를 성제(聖諦)라 하고, 또 고제 하나에 성제가 구족되어 있다고 한다면 이와 같은 경들은 설할 필요가 없게 된다. 만약 4제의 지(智)를 고제라고 한다면 이 뜻은 옳지 않다. 만약 한 가지 제(諦)를 알 경우 나머지 다른 제도 알게 된다면, 뒤의 세 가지 제는 설할 필요도 없게 된다. 무엇 때문에 고제를 먼저 설하는가? 만일 인(因)을 설하기도 전에 과(果)를 먼저 말한다면, 어찌 12연생(緣生)에 어긋나지 않겠는가? 왜 멸제(滅諦)를 먼저 설하고, 도제(道諦)를 나중에 설하는가?
왜 4제에 대하여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최상의 교설이라 하며, 증득하는 과(果)가 다른가? 왜 일체지와 같지 않고, 승사파 잎에 비유되는 경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하는가? 4제의 지와 고제는 어긋나며, 하나의 제에 구족하다면 나머지는 설할 필요가 없게 되는가? 왜 먼저 고를 설하는가, 12인연과 어긋나지 않는가, 왜 멸을 먼저 설하는가?
029_0521_c_22L持 散偈曰: 一意上果異, 一切智葉譬, 四違一無用, 先苦因緣滅。
【문】성제(聖諦)에 네 가지가 있다고 하셨는데, 무엇 때문에 불세존께서는 이 경을 설하셨는가? 【답】어떤 제자들은 성도(聖道)를 얻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전에 외도로 있으면서 삿된 법을 품수(稟受)한 이들이 있었다. 그들 가운데 혹자는 항상 유행하는 외도를 섬겼고, 혹자는 한곳에 머물지 않는 도[不住一處道]ㆍ호명도(護命道)ㆍ상위도(相違道)ㆍ노성문도(老聲聞道)ㆍ사구담도(思瞿曇道)ㆍ조시의도(鳥翅衣道)ㆍ사수도(事水道)ㆍ편발도(編髮道)ㆍ사화도(事火道)ㆍ나형도(躶形道) 등을 믿고 행한 자들이었다.
이와 같은 여러 외도에서는 각기 자기들의 법을 찬탄하며 “오직 우리의 법만이 진실을 여지없이 밝혀 진리와 어긋나지 않으며 죽음이 없는 과(果)를 성취한다. 다른 법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이런 말을 듣고서 이와 같은 법 가운데 어떤 것이 진실이고 어떤 것이 진실이 아닌지 결정할 지혜가 없었던 이 제자들은 진리와 진리가 아닌 것에 대하여 무명(無明)의 혹(惑)을 일으켜 진실한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여겼다. 이런 까닭에 대선(大仙)6)께서 이와 같은 경을 설하신 것이니, 비유하면 어떤 이가 가짜 영락(瓔珞)에 속아 넘어가려 할 때 그에게 진짜 영락을 보여주는 것과 같다.
또한 여러 가지 다른 법에서도 이러한 뜻을 설하고 있다. 만약 속세의 복식[飾]을 버리고 사문의 모습을 갖추고서 아란야(阿蘭若) 처소7)에 머무르며 두타법을 행하고, 백법(白法)8)을 만나면 기꺼이 재물을 베풀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지키며 계(戒)의 수레에 올라 말처럼 치달리는 감각기관[根]을 제어하고, 다문(多聞)이라는 무기를 연마하며 선정(禪定)의 갑옷을 입고는 이러한 행을 바탕으로 ‘우리야말로 진정한 사문이다’라고 스스로 말한다면, 이런 사람들은 사문이라는 증상만(增上慢)을 일으킨 것이다.
029_0522_b_01L그런 자들로 하여금 진정한 사문을 볼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하여 불세존께서 이와 같은 경을 설해 그 뜻을 드러내 보이신 것이다. 4제를 통달해야 성스러운 법 가운데의 진정한 사문이 되는 것이지 다른 행으로 되는 것은 아니니, 『사문경(沙門經)』에서 “만약 이와 같은 것이 있다면 ……”이라고 설한 것과 같다. 경의 말씀을 온전히 설명하자면, 진정한 사문이란 4제를 정관(正觀)함으로써 성립될 수 있는 것이지 구경(究竟)에는 모두 유류(有流)를 얻게 되는 세간의 수행에 기인해 사문이라 하는 것은 아니니, 나형게(裸形偈)에서 설한 바와 같다.
또한 이미 아홉 가지 재난[九難]을 면했기 때문이다. 전생에 부처님께서는 정각의 원인이 될 싫어하고 멀리하는 법[遠離法]을 일으켜 선근(善根)의 향기로 그 마음을 훈습하고, 성스러운 도의 자량(資糧)을 길러 생각과 행[意行]을 모두 깨끗이 하셨기에 성스러운 진리를 통달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근행심(勤行心)으로 성스러운 진리라는 지혜의 약(藥)을 복용하게 하려고 불세존께서 이 경을 설하신 것이니, 이는 치료할 수 있는 병이면 의사가 곧 약을 주는 것과 같다.
또한 악도의 고통은 너무도 극심해 참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그것을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일으킨다. 이러한 사람을 위하여 악도에 떨어지지 않는 인연을 제시하고자 이 경을 설하신 것이다. 무엇 때문인가? 8지옥9)에 태어나는 중생은 상하 전후좌우 여섯 방향으로 불길에 휩싸여 온 몸이 마치 녹은 금처럼 벌겋고, 들이마시고 내쉬는 호흡이 모두 화염이기에 태워지는 뜨거운 고통을 받는다. 또 어떤 이들은 배가 고파 철환(鐵丸)을 먹고 목이 말라 구리즙을 마시기도 하며, 꺾이거나 패이거나 부서지거나 뽑히는 갖가지 고통을 겪기도 하며, 여러 색깔의 개나 쇠 부리를 가진 새들에게 먹히는 자들도 있다.
어떤 이들은 아귀로 태어나 굶주림과 목마름의 고통에 항상 시달리며, 목구멍이 바늘 구멍만하여 항상 먹고 싶고 마시고 싶어 하지만 끝내 배불리 먹고 마실 수 없다. 목이 말라 물을 구하러 가면 숙업(宿業)의 결과로 시냇가에 가까이 갔을 때 시냇물이 말라보이거나 피고름 똥오줌 등 냄새나고 더러운 것들이 그득한 것으로 보이고, 꽃과 과일이 풍성한 나무를 만나도 황량한 숲으로 변해버린다. 게송에서 말한 바와 같다.
달마저 여름날 태양처럼 이글거리고 바람은 불꽃이 닿는 듯 세찬 파도처럼 퍼붓는 빗발 땅은 뜨거운 숯불 위를 걷는 듯.
029_0522_c_01L 그러므로 아귀의 몸을 받아 태어나면 받는 그 고통이 아주 극심하다. 혹 축생도에 태어나면 항상 우리에 갇히고 묶이며 얻어맞아 몸이 부서지거나 채찍질 당하며, 서로 먹고 먹히면서 서로를 의심하고 두려워하며 항상 마음이 불안한 이런 고통을 받는다. 수라(修羅)에 태어나면 원수 맺고 인색하며 교만을 떨고 공격하는 이런 고통을 받는다. 불제자들은 모든 악도에 이러한 고통이 있다는 것을 들으면 자신이 그곳에 떨어질까 두려워하게 된다. 4제를 알고 보는 것은 이러한 곳에 떨어지는 인연이 아님을 드러내기 위하여 이 경을 설하니, 이는 마치 사람이 바다 밑으로 떨어졌을 때 배나 뗏목을 동원하여 그를 구제해주는 것과 같다. 경에서도 말하기를 “만약 중생이 이러한 고통에 대하여 여실하게 안다면 네 가지 악도와 생로병사의 모든 고통에서 해탈할 수 있다”고 하였다.
또한 중생으로 하여금 다섯 가지 삿되고 속이는 말들을 모두 버리게 하기 위해서이니, 첫째는 많은 악을 발생시키는 말이고, 둘째는 악한 사람을 본받아 하는 말이고, 셋째는 현인(賢人)을 멀리하는 말이고, 넷째는 번뇌를 일으키는 말이고, 다섯째는 속이는 것을 근본[體]으로 삼는 말이다. 다른 사람에게 중생을 이롭게 하는 다섯 가지 바른 말[正語]를 해주도록 하기 위해서이니, 첫째는 자기 자신의 덕과 상응하는 말이고, 둘째는 훌륭한 사람을 본받아 하는 말이고, 셋째는 선근을 생기게 하고 자라나게 하는 말이고, 넷째는 빽빽한 가시덤불과 같은 생사를 벗어나게 하는 말이고, 다섯째는 실다운 즐거움[實樂]에 이르는 말이다.
다섯 가지 삿된 말을 멀리하고 다섯 가지 바른 말을 행하게 하기 위하여 이 경을 설하니, 비유하면 가짜 보석을 버리고 진짜 보석을 취하도록 하는 것과 같다. 경에서도 “옳지 못하고 악한 말을 진실로 하지 말라. 만약 수행승이 모였다면 두 가지 일을 해야 한다. 첫째는 성스러운 침묵이고, 둘째는 성스러운 정법의 말이다”고 설하고 있다. 또한 어떤 범부들은 각자 다른 진리에 집착하여 자신의 주장은 진실이고 다른 사람의 주장은 거짓이라 하며, 이런 집착으로 말미암아 장님이 코끼리 보듯 서로 다툰다. 그러므로 죽음도 투쟁도 없고, 다시 태어남도 없고, 전도됨도 없는 가장 뛰어난 길이 바로 성제(聖諦)의 지혜라는 것을 나타내 보이고자 이 경을 설한 것이다.
029_0523_a_01L단견과 상견에 집착해 나[我]를 주장하는 사람이나 서로 투쟁하며 4제(諦)를 관찰하는 사람은 진실로 공함[眞空]을 깨닫는 것만 못하다는 이런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니, 이는 『거다가경(佉多柯經)』에서 설한 내용과 같다. 또한 올바른 스승을 의지하여 한적한 처소에 오래 머물면서 두타행을 받아들여 생활에 필요한 도구를 줄이고, 육근(六根)을 잘 지키며 음식의 양을 조절하고, 초야初夜와 후야後夜10)에는 깨어 즐거이 일심으로 청문하고, 이치에 맞게 사량하여 바르게 말하고 외우며, 단정하게 앉아 적정(寂定)에 들어 수식관문(數息觀門)을 행하면, 이런 인연이 성숙하고 상속(相續)함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고요해지고 세밀해진다.
그러나 무리와 어울리면 그런 마음이 동요하고 약해지는 자들이 있으니, 그와 같은 사람들이 통달할 수 있게 해주기 위하여 이 경을 설한 것이다. 이미 마치 기름을 다루는 사람이 그 이로운 약을 나누어 주는 것과 같다. 진정한 뜻으로는 오직 지혜의 근본만을 통달이라 하니, 이 근본은 4성제를 연유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통달경(通達經)』에 관해서는 이 논에서 다시 설명할 것이다. 또한 네 가지 의혹[四惑]11)을 무너뜨리고 두 가지 방편을 드러내기 위해 이 경을 설하셨으니, 게송으로 말하겠다.
또 범천 등 모든 천(天)과 신선[仙] 등 모든 인간과 바리(婆利)12) 등 수라도(修羅道)의 무리들과 용들과 모든 야차 등의 신들과 염마(閻魔) 등은 4성제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삼계의 뇌옥(牢獄)에서 벗어날 수 없음이 마치 누에가 고치 속에 들어 있는 것과 같다. 또한 육도를 윤회함이 마치 수레바퀴가 구르는 것과 같아 무명의 어둠 속으로 질주하다 깊고 험한 구렁텅이로 떨어져 아주 뜨겁게 타오르는 지옥의 고통을 받는다. 그러나 만약 4성제를 제대로 볼 수 있다면 무명의 어둠을 제거하고 지혜의 광명을 얻어 네 가지 악도로부터 벗어나고 어떤 세계도 우러러보지 않게 된다. 이 4성제는 진실하여 무이(無二)이고 전도됨이 없으며 무쟁(無諍)이어서 여래가 갖춘 출세간의 뛰어난 공용(功用)을 이룰 수 있기에 이러한 뜻을 나타내 보이기 위하여 이 경을 설한 것이다. 논주(論主)는 4제의 뜻에 비견될 만한 어떤 것도 없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수로가(首盧迦)13)로 말한다.
제자와 사문들로 하여금 9난과 두려운 악도를 면하게 하려고 과실과 옳지 못한 집착을 스승께서 없애고 범행(梵行)을 드러내셨네.
029_0523_b_07L持散偈曰: 弟子及沙門, 免難畏惡道, 過失與邪執, 師尊破顯梵。
【문】성제(聖諦)에는 왜 덜하거나 더하지도 않고 네 가지만 있는가? 【답】이 질문은 질문답지 못하다. 왜냐 하면 모든 곳에서 이와 같은 무한 오류가 있기 때문이다. 또 신견(身見)ㆍ단견(斷見)ㆍ상견(常見)ㆍ무사견(無事見)의 네 가지를 대치하기 위하여 성제에는 네 가지가 있는 것이다. 또 네 가지 전도(顚倒)를 대치하기 위하여 4제를 설한 것이니, 비유하자면 4념처(念處)와 같다. 또 네 가지 삿된 집착의 일을 없애기 위해서이니, 모든 중생에게 네 가지 삿된 집착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그 네 가지인가? 과(果)ㆍ인(因)ㆍ해탈ㆍ방편에 대한 삿된 집착[邪執]이다.
첫째 과사집(果邪執)이란 아견(我見)으로 기억하고 애착한 업에 의해 조성된 5음ㆍ18계ㆍ12입 등은 더럽고 악취가 풍기는 것이 마치 죽은 개와 같고, 세 가지 고통의 불길을 따라 타버리며, 무상(無常)이라는 금강법인에 의해 파괴되는 것들이다. 나와 나의 것과 만드는 자와 받아들이는 자과 받아들이게 하는 자 등은 멀리 여의하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것들에 대해 청정하다[淨], 즐겁다[樂], 영원하다[常], 나이다[我]라고 집착하는 것이 과사집이다. 이런 집착을 벗어나게 하려고 고성제를 설한 것이다.
029_0523_c_01L둘째 인사집(因邪執)이란 소위 세주(世主)나 범왕(梵王)이나 자재인(自在人)이나 쌍시(雙時)나 정해진 자성[自性定]이나 자연(自然) 등은 인(因)도 숙업(宿業)도 아니니, 세존께서는 숙업과 지ㆍ수ㆍ화ㆍ풍과 극미[隣虛]ㆍ허공 등을 말씀하셨다. 이런 잘못된 인이나 평등하지 못한 인을 발생의 원인이라 집착하는 것을 인사집(因邪執)이라고 한다. 이런 집착을 벗어나게 하려고 집제를 설한 것이다. 셋째 해탈사집(解脫邪執)이란 5도를 귀결시켜 비뉴(毘紐:비쉬누)의 본체로 들어간다거나 궁극에 공(空)으로 들어간다거나 세속에 이른다거나 고통이 없는 최상의 독존에 머문다거나 나[我]의 속성을 벗어난다거나 세 가지 선정(禪定)의 과(果)라거나 잠시 버린다거나 영원히 버린다거나 하는 것들이다. 이와 같은 해탈에 대한 집착은 그 해탈이 결정적이지도 않고 영원하지도 않으므로 해탈집(解脫執)이라 한다. 이러한 집착을 깨뜨려 주려고 멸제를 설한 것이다.
넷째 방편사집이란 5진(塵)과 음식, 의복, 와구, 주처(住處)를 멀리 여의고 비바람ㆍ꽃ㆍ과일ㆍ뿌리ㆍ싹ㆍ가지ㆍ잎사귀ㆍ쌀겨ㆍ밀기울ㆍ기름 찌꺼기ㆍ쇠똥 등 이러한 것들을 음식으로 삼고 나무껍질ㆍ띠ㆍ덩굴ㆍ널빤지ㆍ엮은 풀ㆍ푸른 사슴의 가죽 등 이러한 것들을 이용하여 의복으로 삼거나, 혹은 멀쩡한 땅을 내버려두고 방망이, 널빤지, 가시, 재 따위를 모아 그 위에 눕거나, 물구나무서거나, 태양을 향해 몸을 그을리거나, 항상 젖은 옷을 입거나, 항상 물속에 있거나, 멀리 떠돌거나, 바위를 향해 몸을 던지거나, 불을 향해 달려들거나, 오랫동안 물속에 잠수하거나, 업이 사라지는 덴 특별한 인연이 없다며 세월에 의지하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를 통해 열반을 얻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을 방편사집이라고 한다. 이런 집착을 벗어나게 하려고 도제(道諦)를 설한 것이다. 이러한 네 가지 일 때문에 4제를 설한 것이니, 마치 성도(聖道)와 같다.
029_0524_a_01L또한 희유한 법을 분별하기 위한 까닭에 성제(聖諦)에 네 가지가 있는 것이다. 왜냐 하면 5취음(取陰)이 바로 중생이 의지하고 집착하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苦)라고 설한 것이니, 의지하고 집착할 만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탐애(貪愛)로 인하여 적정(寂靜)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니, 탐애가 사라지면 곧 적멸이 있게 된다. 고(苦)가 멸하면 아만(我慢)이 적멸하게 되니, 마음의 괴로움을 대치하기 때문이다. 도(道)를 닦음으로써 무명이 적멸하니, 이는 도가 무명을 대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해탈을 구하는 모든 사람이 고를 멸하고 낙(樂)을 얻게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의 뛰어난 공용(功用)이 있기 때문이다. 고를 어떻게 멸하는가? 집(集)을 멸했기 때문이다. 낙을 얻는 것은 도(道)를 닦기 때문이고, 또 성제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경론사(經論師)가 말하기를 “만약 어떤 사람이든 생사의 과실을 바로 관찰하고 열반의 공덕을 바로 관찰한다면 정정취(正定聚)에 들어가게 된다”고 하였다. 생사의 과실이란 무엇인가? 몸을 받아 태어나 식(識)을 일으키는 과실을 말한다. 이러한 식이 일어나는 원인은 탐애(貪愛)이다. 열반의 공덕이란 무엇인가? 식이 일어나지 않는 낙을 말하며, 이러한 식을 일으키지 않는 방편이 바로 성도(聖道)이다. 따라서 4제를 설한 것이다. 또한 세간과 출세간의 인과를 분별하기 위하여 4제를 설한다. 또한 네 가지에 통달했기 때문이며, 그리고 이 네 가지에 의지하여 머물기 때문에 4제를 설한 것이다. 또한 별상(別相)이 네 가지이기 때문에 4제를 설한 것이다.
【문】성(聖)은 무슨 뜻이고, 제(諦)는 무슨 뜻인가? 【답】성에는 여덟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자재(自在)이다. 만약 다른 것에 매이고 속해 있다면 자재하다고 할 수 없고 예속되어 있다고 할 수 있으니, 성(聖)이라고 할 수 없다. 모든 부처님과 불제자는 심(心)과 법(法) 두 가지로부터 자재하므로 성(聖)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는 탐애를 벗어났다는 뜻이다. 마치 자유자재로 집을 벗어나는 것과 같다. 셋째는 성스러운 종성(種姓)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성인(聖人)이라고 한다. 마치 바라문의 종족으로 태어나는 것과 같다.
넷째는 성지(聖地)에서 태어났다는 뜻이 있다. 여기서 지(地)란 진실로 태어남이 없는 땅을 말한다. 비유하면 중국(中國)15) 땅에 태어나는 것과 같다. 다섯째는 생사를 벗어나는 수행을 하는 것이니, 마치 바라문과 같다. 여섯째는 생사의 수레를 타지 않음이니, 버리고 집착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일곱째는 다시는 윤회전생(輪廻轉生)의 몸을 받지 않기 때문이니, 마치 오래된 종자와 같다. 여덟째는 공경과 공양을 받을 만한 복덕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황제와 같다. 이상의 내용을 지산게로써 말한다.
자재로움, 탐애를 벗어남 성스러운 종성으로 태어남, 성스러운 땅에서 태어남 생사를 벗어나는 행, 생사의 수레를 타지 않음 다시는 전생(轉生)의 몸을 받지 않음, 공경을 받을 만함.
029_0524_a_21L自在離貪奴, 聖種聖地生, 行離不乘車, 不生恭敬往。
029_0524_b_01L 제(諦)에는 일곱 가지 뜻이 있다. 첫째 전도되지 않음이 제의 뜻이다. 비유하면 불의 모양과 같다. 둘째 실제로 존재함[實有]이 제의 뜻이니, 경에서 설한 것과 같다. 셋째 변하거나 달라지지 않음이 제의 뜻이다. 넷째 변함없는 행[無二行]이 제의 뜻이니 수제가(樹提伽)의 사야달다행(蛇耶達多行)과 같다. 다섯째 다시는 무명혹을 일으키지 않음이 제의 뜻이니 이것은 지혜로 인해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 것으로, 화륜(火輪)의 지혜와는 다르다. 여섯째 어긋나지 않음이 제의 뜻이니 비유하자면 업(業)과 성스러운 계(戒)에서와 같다. 일곱째 문구와 뜻이 서로 걸맞음이 제의 의미이니, 그 이유는 고(苦)라는 말은 반드시 고통을 그 뜻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곱 가지 뜻이 있기 때문에 진리[諦]라고 한다.
【문】그대는 “만약 성스러움 때문에 진리라고 한다면 앞의 두 가지는 진리라고 할 수 없게 된다. 또는 성스러운 사람들의 진리이기 때문에 진리라고 한다면 그 뜻은 확실하지 않게 된다”고 물었다. 【답】진리는 성스러움의 근원[因]이다. 이는 그것이 성스러움을 생기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범(梵)이 머물기 때문에 성제(聖諦)라 하는 것과 같고, 경에서 “4여의족(如意足)은 성(聖)과 그 뜻이 상응한다”고 한 것과 같다. 또한 성인(聖人)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성제라 하니, ‘길잡이의 길’이라 하는 것과 같고, 경에서 “모든 여래가 과거ㆍ현재ㆍ미래에 있어 모두 4제를 설하셨다”고 한 것과 같다.
【문】그대는 “성인이 말씀하셨기에 성제라고 한다면 범부가 똑 같은 내용을 말해도 범제(凡諦)라 해야 하리라”고 물었다. 【답】부처님의 위신력을 이어받아 설하였기 때문에,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완성하고 수립했기 때문에 범제가 아니다. 이는 마치 사리불이 행한 인연과 같다.16) 또한 성인께서 예전에 먼저 잘 요달(了達)한 것이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신선의 약과 같다. 또한 성인은 진실한 견해에 의거하기 때문에 성제라 하니, 비유하면 세제(世諦)와 같다. 【문】범부는 진실하지 못한 견해에 의지하니, 성(聖)도 아니고 제(諦)도 아니라 해야 하는가?
029_0524_c_01L【답】청정한 눈이 없으면 볼 수 없으니, 비유하면 장님이 진짜와 가짜 보석을 가려내는 것과 같고, 눈병 난 사람의 눈에 달이 여러 개로 잘못 보이는 것과 같으며, 술에 만취한 사람은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는 마치 풀무더기를 코끼리 떼로 여기는 것과 같다. 또한 『지습론(智習論)』에서는 “체(體)가 성(聖)이기 때문에 성제를 설한다”고 하였다. 비유하면 ‘검은 뱀’ ‘붉은 쌀’이라 하는 것과 같다. 또한 경에서 말하기를 “위없는 성스러운 지혜로 비춘 것이기 때문에 성제를 설한다”고 하였다. 【문】그대는 “또한 경에 ‘제(諦)는 오로지 하나이지 두 번째 것이란 없다’는 말씀이 있다. 왜 네 가지 뜻이 있다고 하며, 서로의 뜻을 파괴하지 않는다고 하는가?”라고 물었다.
【답】전도됨이 없다는 뜻을 연유했기 때문에 하나이고, 품류가 다르기 때문에 네 가지이니, 비유하면 ‘네 가지 전도’라 하는 경우와 같다. 또한 진리[諦]의 뜻으로 인해 하나라 한 것이니 비유하면 ‘성도(聖道)’라 하는 경우와 같고, 일과 공용(功用)이 다르기 때문에 네 가지라 한 것이니 비유하면 그 성도(聖道)에 여러 항목이 있는 것과 같다. 또한 법상(法相)이 통하기 때문에 하나라 한 것이니 비유하면 ‘색(色)’이라 하는 경우와 같고, 법상(法相)이 구별되기 때문에 네 가지라 한 것이니 비유하면 색(色)에 4대(大)가 있는 것과 같다. 또한 나라는 것이 없이[無我] 평등하기 때문에 하나이니, 무아란 모든 것이 평등하다는 것이다. 비유하면 같거나 다른 것[同異]과 같다. 또한 변이성[變異]이 없기 때문이니 심해탈(心解脫)에 의거하여 “제(諦)는 오로지 하나지 두 번째 것이란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왜냐 하면 고(苦) 등 성제는 모두 변이성이 있기 때문이니, 경에서 “모든 유위법은 공허하니 이는 파괴되는 법이다. 이것이 유일한 진실이며 파괴됨이 없는 심해탈이니, (이 심해탈로) 변이하는 상(相)들과 상응하면 어떤 경우에도 진실로 허망하지 않으리라”고 한 것과 같다. 네 가지 뜻 역시 그러하다. 따라서 성제에 네 가지가 존재한다.
【문】그대는 “또한 경에 ‘모든 행법(行法)을 고(苦)라 한다’는 말씀이 있다. 따라서 두 가지 진리[二諦]라고 해야지, 4제의 뜻은 성립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답】분별부(分別部)에서 주장하는 뜻은 “일체의 유위법은 무상하기 때문에 고이지, 제일제(第一諦)의 뜻으로 인해 고(苦)인 것은 아니다. 이 고를 벗어나기 위해 세존이 계신 곳17)에서 청정한 범행(梵行)을 닦는 것이니, 이를 고제(苦諦)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나중에 자세히 설명하겠다. 그러므로 네 가지 뜻은 무너지지 않는다. 또한 3고(苦)18)에 대해서는 갖가지 설이 있어 여러 경에서 설한다. 일체의 유위법은 여러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유위의 고는 분류하여 말할 수 있으니, 고고(苦苦)에 의거해 설명하면 고의 종자[苦種]ㆍ고의 뿌리[苦根]ㆍ고의 세계[苦界]ㆍ고의 감수[苦受] 등으로 설명한다. 괴고(壞苦)와 행고(行苦)에 의거해 고를 설명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029_0525_a_01L 일체의 감수[受]에 의거해 고를 설명하면 “무상(無常)이 고다”라고 한다. 따라서 “일체의 유위법은 ……”라고 한 것이다. 혹은 행고(行苦)에 의거해 “생기(生起)가 바로 고(苦)다. 유(有)가 생기는 것이 바로 고이니, 색(色)이 생기는 것은 곧 고가 생기는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혹은 “이것이 고제이다”라고 하면서 갖가지 의미로 고를 설명하기도 한다. 따라서 이 모두가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또한 변이함이 없기 때문이다. 열반에 의거해 말하면 일체의 유위는 고이자 고의 터전이기 때문이며, 고의 양상과 상응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에서도 4제의 뜻은 잘못이 없다.
【문】그대는 “또한 하나씩 증가하는 법에서는 모든 법은 하나에서 시작하여 둘이 되고, 나아가 그것이 많은 수로 안립되는 것이라고 했는데, 왜 제(諦)의 뜻에만 증가하는 법이 없는가?”라고 물었다. 【답】그 뜻이 진실하고 전도됨이 없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모든 것을 제(諦)라고 하셨다. 비록 하나, 둘, 셋 등은 하나로부터 증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제에는 그러한 증가함이 없다. 다만 제를 분별하여 관찰[觀]하기 위해 네 가지가 있다고 말한 것이다. 지혜의 양상을 안립하기 위함이었으니, 이는 4념처(念處)에서와 같다. 마치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인연으로 4제(諦)가 성립한다면 이 뜻은 성제를 잘 이해하기 위하여 네 가지를 설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고에 원인[因]이 있다는 것을 알면 곧 법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되니, 이는 경에서 “만약 누군가 12연생(緣生)을 본다면 이를 법을 본 것이라 한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출세간의 16상(相)을 통달하는 것은 모두 견제(見諦)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인연에 계속(繫屬)되는 것이 바로 무상(無常)의 뜻이니, 비유하면 북소리와 같다. 『난타경(難陀經)』으로 이를 증명하자면 “무상이면 고이고, 고이면 무아이며, 무아이면 공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든 이것을 알면 법을 볼 수 있고, 16상을 통달하여 미혹을 소멸하여 고를 벗어날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뜻이 있기 때문에 성제에는 네 가지가 있는 것이다. 또한 최고의 상품(上品)이기 때문이고, 범부나 외도가 함께 할 수 없는 지혜[不共智]의 경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로부터 늘어남이 없는 것이다.
029_0525_b_01L【문】그대는 “또한 진리의 네 가지 모습이 각기 다른데 어떻게 동시에 관찰할 수 있는가?”라고 물었다. 【답】생각[想]에 의하기 때문이다. 이는 경에서 “일체의 유위법이 무상(無常)하다는 생각을 닦아 모든 탐애를 뽑아 없애라”고 한 것과 같다. 이러한 생각의 경계가 바로 고제이고, 모든 탐애는 곧 집제이고, 뽑아 제거하는 것은 멸제이며, 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곧 도제이다. 이러한 뜻에 의하기 때문에 네 가지 모습이 동일하지 않다 하더라도 일시에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사택(思擇)에 의하기 때문이니, 경에서 “무상이나 그 밖의 생각으로 인해 5음(陰)에 대해 잘 생각하면[思擇] 아직 생기지 않은 탐애는 생겨날 수 없게 되고 이미 생겨난 탐애는 곧 사라진다”고 한 것과 같다.
여기에서 5음은 고제이고, 탐애는 집제이며, 생겨나지 않고 소멸하는 것은 멸제이며, 무상 등을 잘 생각하는 것은 도제이다. 이러한 뜻에 의하기 때문에 4제를 동시에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과실을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니, 경에서 “결박된 상태의 과실을 관찰하면 탐애가 없어진다”고 한 것과 같다. 여기에서 결박된 상태[結處]는 고제이고, 탐애는 집제이며, 없어지는 것은 멸제이며, 과실을 관찰하는 것은 도제이다. 이러한 뜻에 의하기 때문에 동시에 제(諦)를 관찰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동시에 제를 관찰한다는 것은 비유하면 불과 같다. 불이란 모든 물질들을 태울 수 있으니, 동시에 태우면서 열과 빛을 발생한다. 관찰하는 것도 역시 그러하여 해로운 것이 생겼을 때 고요함[靜]이 드러나면 각각의 자상(自相)이 없어지게 되니, 증득과 닦음은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다.
또 비유하면 태양과 같다. 태양은 모든 물질을 건조시킬 수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물속의 종자와 피지 않은 꽃 봉우리 등으로 각기 다양한 모습일지라도 그것들을 건조시키고 성숙시키고 꽃 봉우리를 터트리고 꽃을 피우는 작용은 동시에 일어난다. 제를 관찰하는 것도 역시 이와 같다. 다시 비유하자면 등불과 같다. 등불은 모든 물질을 태울 수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심지ㆍ기름ㆍ어둠 속 물건 등으로 각기 다양한 모습일지라도 그것들을 태우고 건조시키고 파괴하고 비추는 작용은 모두 동시에 일어난다. 제를 관찰함도 역시 이와 같다. 또는 배와 같다. 배는 서로 다른 모습의 물건을 모두 실어 나르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쪽과 저쪽 강 언덕에 있는 물건을 실어오고 실어가고 싣고 내리고 하는 것을 동시에 한다. 제를 관찰함도 역시 이와 같다.
029_0525_c_01L분별부에서는 “만약 고의 모습[苦相]을 모아 생멸심을 관찰하고 통달하여 유위법을 싫어하면 무원해탈문(無願解脫門)을 닦는 것이다. 만약 유위법에는 오로지 생멸만이 있다고 관찰하고 그 밖의 다른 법들을 보지 않으면 공해탈문(空解脫門)을 닦는 것이다. 만약 적정(寂靜)을 관찰하고 유위와 생멸상을 보지 않으면 무상해탈문(無相解脫門)을 닦는 것이다.”고 말한다. 이 가운데 고의 모습은 고제이고, 그 모습이 생기는 것은 번뇌이며, 업은 곧 집제이고, 그 양상이 멸하는 것이 멸제이며, 이런 법이 마음으로 하여금 능히 모습[相]을 떠나 무상(無相)을 보게 하는 것이 곧 도제이다. 만약 무위법이 적정하여 생멸을 떠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네 가지 4제의 뜻이 일시에 성립한다. 이 무위적정과 다른 것을 고제라 하고, 이를 제거함으로써 무위법이 적정하게 된 것을 집제라 하며, 무위법은 곧 멸제이고, 이러한 적정을 관찰하고 또 무위를 보는 것이 도제이다.
【문】그대는 “바라문제(婆羅門諦)와 성제(聖諦)에 어떤 차별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답】세존은 진정한 성인이자 바라문이시다. 이 제(諦)는 따라서 차별이 없다. 비유하면 석(釋)과 천제(天帝)19)가 같은 것과 같다. 또한 바라문제는 도제(道諦)에 포섭되고, 성제(聖諦)는 도과(道果)로서 대치도(大治道)의 경계에 포섭된다. 또한 한결같이 선(善)이기만한 것은 바라문제이고, 성제에는 선ㆍ악ㆍ무기(無記)가 있다. 또한 도(道)는 바라문제이고, 도과(道果)를 성제라 한다.
029_0526_a_01L【문】그대는 “모든 부처님은 왜 성제에 있어서 똑같이 한 가지 혜(慧)를 갖는가?”라고 물었다. 【답】법을 남김없이 통달한 모습은 평등하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정안(淨眼)으로 색을 관찰하는 것과 같다. 또한 법을 증득하고 보았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불이 뜨겁고[熱] 밝은[明] 것과 같으니, 이런 사실은 세간 사람들이 똑같은 혜(慧)로 함께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법이라는 거울[法鏡]을 잘 닦았기 때문이니, 모든 부처님께서는 법계를 통달하시어 삼세(三世)의 모든 일을 현재의 일처럼 다 아시는 것과 같다. 비유하면 물이 아무리 많더라도 비치는 달그림자는 단 하나인 것과 같다.
【답】중생을 건져 삶과 죽음의 바다를 건널 수 있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출세간의 법과 같다. 또한 진리[諦] 가운데 가장 뛰어나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제(諦)의 뛰어남과 같다. 또한 모든 법의 진실함을 포섭할 수 있기 때문이니, 승사파 잎의 비유20)와 같다. 또한 범천과 제석 등 어떤 천신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며, 돌아다니기를 좋아하고 강건한 힘을 가진 비수뉴천(毘搜紐天)21) 등도 그런 지혜를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며, 지혜를 부지런히 닦고 멀리 유행한 어떤 외도의 선인(仙人)도 증득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22) 또한 무분별지(無分別智)의 경계이기 때문이니, 만약 이를 안다면 사리불이나 세존처럼 모든 공덕으로 장엄된다. 또한 뜻[義]이 구족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경지에 이르지 못한 이들은 도저히 알 수 없기 때문에 이를 설하는 공덕이 가장 뛰어나다. 그러므로 4제를 상품(上品)의 정설(正說)이라 한 것이다.
【문】그대는 “똑같이 4제를 경계로 삼아 관찰했다면 그 지혜도 평등해야 하는데, 왜 과(果)에 차이가 있는가?”라고 물었다. 【답】경계가 같다고 해서 지혜가 같은 것은 아니니, 비유하면 정(定)과 탐욕 등에 단계적인 차이가 있는 것과 같다. 또한 지혜의 차이로 인해 과(果)에도 차이가 있는 것이니, 비유하면 업의 차이로 말미암아 과에 차이가 있는 것과 같다. 또한 도를 수행함이 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 증득하는 과가 동일하지 않으니, 비유하면 종자가 다르면 그 열매에 차이가 있는 것과 같다. 또한 관하는 과실에 하품ㆍ중품ㆍ상품이 있기 때문에 증득하는 과가 동일하지 않은 것이다.
029_0526_b_01L【문】그대는 “만약 아라한이 4제에 대하여 그 지혜가 원만하고 여지가 없다면 일체지(一切智)와 차이가 없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4제 중에 무명이 있는 것이 된다”고 하였다. 【답】아라한이 4제 이외의 모든 부처님의 경계를 알지 못한다고 해서 무명이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왜냐 하면 단지 언설만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아라한이 4제 이외의 언설을 알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무명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는 승사파 잎에 비유한 경23)에서 말한 것과 같다. 또한 불세존께서 이미 결정하고 판단하셨기 때문이니, 고제 등 4제를 알지 못하는 것을 무명이라고 한다. 4제 외에 베다[皮陀]24)와 베다분[皮陀分] 등에 대해 알지 못한다고 무명이라 하지는 않는다.
또한 바름[正]에 상대되고, 진실한 지혜[諦智]가 상대하여 다스리는 번뇌를 무명이라 하지, 일체지(一切智)를 모르는 상태에서 4제만 따로 설하는 것을 무명이라 하지는 않는다. 왜냐 하면 자신의 고(苦)의 일부분인 식(識)의 상속은 각각 다르니, 무시(無始)의 생사에 의거하면 아라한도 역시 이러한 마음은 볼 수가 없다. 이와 같이 이미 생한 것은 이와 같은 증상연연(增上緣緣) 등과 사유 등과 선ㆍ악ㆍ무기 등에 의한 것이다. 이와 같이 인(因)에서 생긴 연(緣)에 포함되는 것들이 이러한 상태에 있다가 적위(跡位)의 순간에 다음에는 제2심(心), 그 다음에는 중간의 마음과 뒤의 마음, 이와 같은 방법으로 시간의 단위인 찰나로부터 시작하여 라바(羅婆)ㆍ모휴다(牟休多)ㆍ하루ㆍ보름ㆍ한 달ㆍ한 절기ㆍ해[年數]에 걸쳐 생성ㆍ변화ㆍ소멸하니, 이런 자신의 상속 중에서는 아라한조차도 자신의 고(苦)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데, 하물며 다른 종류 일체 중생들이 온갖 종류의 자신의 고를 볼 수 있겠는가?
029_0526_c_01L자신의 고에 대해서도 알 수 없는데, 다른 사람의 고를 어찌 알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아라한이 일체지의 경계를 알 수 없다는 것이지, 4제 중의 총상과 별상이 무명이라는 것은 아니다. 또한 4제로 무명을 대치하는 지혜의 경계 외에도 또 다른 법이 있는데, 성문의 경계에 있는 아라한 역시 이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사리불이 “내가 초선[初定]에 들어가 관찰한 것들을 알고 또 나의 경지를 헤아리거나 나를 선정에서 물러나고 깨어나게 할 수 있는 인간이나 천신을 나는 보지 못했다. 오직 세존만이 이 적정(寂定)의 이름을 간별하셨다”고 한 경우와 같다. 나아가 목련존자 역시 이 사리불이 들고나는 선정을 이해할 수 없었으며, 그가 교화하고 제도한 타난사야(陀難蛇耶) 바라문 및 외종질인 우파저사(優波低舍)25)조차도 선정ㆍ지혜ㆍ변설(辯說)ㆍ수습(修習) 등에 있어서는 그들이 미칠 수 없었다. 사리불과 마찬가지로 가섭존자 역시 그러하였다. 그러므로 4제를 떠나서도 무명 등을 대치하는 법이 있기에 이것이 일체지가 아니라는 것이지 이것이 무명이라는 것은 아니다.
【문】그대는 “만약 일체법이 4제 가운데 포함된다면 승사파 잎에 비유되는 경26)도 마땅히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만일 이해하지 못한다면 오제(五諦)가 존재하는 것이 되고, 만약 오제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다른 법은 진리[諦]가 아닌 것이 되다.”라고 하였다. 【답】자연적인 소멸 등은 4제 이외의 식의 경계[識境界]를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며, 관찰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왜 관찰의 대상이 아닌가? 이 법을 안다고 하더라도 생사의 흐름이 다하지 않고 고(苦)도 다하지 않기 때문에, 외도를 향하여 우러러보는 일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제석의 깃발처럼 어떤 견해에도 동요하지 않게 된 것은 아니다. 이를 통달한다 해도 미세한 부분까지 통달했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 비유하면 화살이 털끝을 맞히는 것과 같은 일을 두루 행할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수학(修學)할 필요는 없다.
029_0527_a_01L또한 다른 여러 논사(論師)들은 일체법이 상(相)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진리[諦]에 포함된다고 말한다. 비록 베다[皮陀]와 베다분[皮陀分]이 오랜 세월 세상에 전해지면서 그 근본이 나뉜 것에 승거(僧佉)27)와 유가(瑜伽)28) 실광론(實廣論)ㆍ욕진론(欲塵論)ㆍ비세사론(鞞世師論)29)ㆍ의방론(醫方論)ㆍ상론(相論)ㆍ산수론(算數論)ㆍ시지론(時智論)ㆍ수론(獸論)ㆍ아역론(鴉域論)ㆍ명론(明論)ㆍ가무장엄론(歌舞莊嚴論)ㆍ인무론(人舞論)ㆍ천무론(天舞論)ㆍ천선왕전(天仙王傳) 등의 논서와 외도론(外道論)과 상행외도(常行外道) 등 내지 96종이 있고, 또한 풀ㆍ약초ㆍ덩굴ㆍ나무 등의 껍질과 뿌리ㆍ줄기ㆍ꽃ㆍ열매ㆍ잎 등의 힘이나 익혀 맛을 내는 따위의 일에 관한 내용이 있다.
또한 세간의 불가사의하고 희유한 네 가지 큰 변이(變異)와 업과 과보 등에 관한 논(論)이 있어 이를 분별하고 있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논들을 두고 승사파 잎에 비유하시며 “이와 같은 등등의 뜻에 대해서는 그대들에게 설하지 않았다. 왜냐 하면 공덕이 생기지 않기 때문이고, 온갖 미혹을 일으키기 때문이며, 유위(有爲)를 증장시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설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다. 비유하면 독과 약이 서로 맞지 않으면 약이 반대의 성질로 변화하고, 주술(呪術)이나 환화(幻化), 피다라론(皮多羅論) 등은 다른 사람을 손상시키고 번민하게 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설하지 않으신 것이지, 4제에서 벗어난 것이기 때문에 설하지 않으신 것은 아니다.
【문】“만약 고제(苦諦) 등 네 가지를 성제라고 하고, 이 고제가 성제를 구족한다고 한다면 이와 같은 등의 경들은 설할 필요가 없는 것이 된다. 또 만약 고제에 대해서 이것이 고라고 한다면 이 뜻은 틀리지 않은가”라고 하였다. 【답】이 경에서는 지혜[智]를 고제라 하였다. 경계에 대해서 분별함이 없기 때문이니, 이는 4량(量)을 설하는 경우에서와 같다. 또한 경계를 안립하기 때문에 지혜가 성립하게 된다. 비유하면 육식(六識)에서와 같다. 또한 공능(功能)이 있기 때문이다. 지혜의 체(體)는 오로지 하나지만 공능에 의거하면 가지가 된다. 4정근(正勤)에서와 같이 지혜 역시 마찬가지이다. 또한 4성제가 지혜의 총상(總相)이기 때문이니, 지혜가 4제를 관찰하는 것에 있어서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뜻이 있기 때문에 경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지혜를 설하는 것이다.
029_0527_b_01L또한 결정적으로 고를 벗어나게 하는 것이 4제의 공덕이기 때문에 고제 하나에 성제가 구족되어 있다는 말은 이치에 맞게 된다. 만약 요의(了義)를 말한다면 고제 등은 요의제(了義諦)가 된다. 왜냐 하면 부처님께서 “고제 등에는 생성ㆍ변화ㆍ소멸 등의 양상이 있기 때문에 네 가지를 안립하여 관찰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수습(修習)이라 할 수 있는 것에 오직 한 가지 관찰만 있게 된다. 이 경에 따라 모든 제(諦)를 분별하면 소위 도제(道諦)라는 하나의 진리만 있게 되니, 무위제(無爲諦)를 설했기 때문이다. 이 경에서는 이것의 이유에 대해 증명하고 있지는 않다. 아비달마와 『장론(藏論)』에 의거하면 성립된다. 【문】그대는 “만약 한 가지 제(諦)를 알게 될 경우에 다른 제에 대해서도 알게 된다면, 뒤의 세 가지 제에 대해서는 설명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라고 하였다.
【답】나는 “고제를 보면 곧 나머지 제도 본다”고 말하지 않았다. 나는 “4제를 동시에 보아 동시에 벗어나고, 동시에 제거하고, 동시에 얻고, 동시에 닦는다”고 말하였다. 따라서 다른 나머지 제에 대한 설명은 쓸모없는 것이 아니다. 비유하면 고제를 설하는 경우에서와 같다. 또 유위경계의 수량(數量) 때문에 도(道)의 수량을 설하는 것과 같다. 또한 네 가지 가운데 한 가지 제(諦)를 완전히 알고 나면 나머지 제도 곧 통달하게 되니, 마치 (곡식 더미에서) 한 톨을 알면 나머지 다른 톨도 파악할 수 있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4제는 다 쓸모가 있는 것이다.
또한 관문(觀門)에 들어가기 때문이니, 5취음을 관찰하여 애념(愛念)을 버리고 떠남이 마치 원수의 집에 대해 파악하는 것과 같다. (여기에서) 5취음은 고제이고, 애념은 집제이며, 버리고 떠남은 멸제이며, 파악하는 것은 도제이다. 고제를 관찰하는 방법에 의거하면 그 뜻이 이와 같다. 탐애인 줄 알고 나서 이를 곧 버리면 이로 인해 고가 생기지 않는다. (여기에서) 탐애하는 것은 곧 집제이고, 탐애하는 대상은 고제이며, 고가 생기지 않음이 멸제이고, 아는 것이 도제이다. 집제를 관찰하는 방법에 의거하면 이와 같다. 유위가 이미 적멸한 것을 알고 이를 증득한 사람에게는 무명이 없어지게 되고 유위의 탐욕과 갈애가 고요해진다. (여기에서) 유위가 고요해진 것이 멸제이고, 벗어난 대상인 유의법이 고제이며, 무명과 탐애가 집제이고, 이를 아는 것이 도제이다.
029_0527_c_01L멸제를 관찰하는 방법에 의거하면 이와 같다. 조도법(助道法)을 알면 몸에 익히고 닦아 그것과 어긋나는 번뇌장을 버린다. 이를 버림으로써 유(有)가 다시는 생기지 않는다.30) (여기에서) 조도(助道)는 도제이고, 유(有)는 곧 고제이며, 번뇌업은 집제이고, 이를 버려 유가 다시 생기지 않는 것이 멸제이다. 도제를 관찰하는 방법에 의거하면 이와 같다. 이렇게 모든 제(諦)를 관찰하는 방법에 의거하기 때문에 비록 관찰은 하나이지만 나머지를 제를 설명하는 것이 쓸모없는 것은 아니다.
【문】그대는 “무엇 때문에 고제를 먼저 설하는가?”라고 물었다. 【답】고(苦)를 그치고 멈춰 사제관(四諦觀)을 닦고, 또 출가하여 범행(梵行)에 머물게 하려고 고를 먼저 설한다. 또한 태어나 늙고 죽는 등의 고(苦)가 끝이 없고 찰나찰나 항상 핍박하니, 수행인은 마치 사자가 먹이를 사냥하듯 이를 잘 관찰하여 고의 근본 원인을 찾아야 한다. 또한 외부의 인연으로는 시작을 알 수 없는 이 근본적인 병을 치료할 수가 없으니, 수행인은 마치 의사가 병을 치료하듯 이를 잘 관찰하여 그 병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 또한 삼계에는 재난과 횡액과 질병과 번뇌가 가득하니, 수행인은 마치 독 있는 나무를 골라내듯 이를 관찰하여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 또한 이러한 것은 거칠고, 허물이 있고, 혐오스러운 의지처이고, 두렵고 무서운 처소이기 때문에 고를 먼저 설하는 것이다.
【문】그대는 “인(因)을 설하기 전에 과(果)를 먼저 설한다면 12연생에 어긋나지 않는가?”라고 물었다. 【답】발생하는 순서이기 때문에 12연생에서는 앞의 것이 인(因)이고, 뒤의 것은 과(果)이다. 올바르게 생각하는 순서이기 때문에 4제에서는 앞의 것이 과이고, 뒤의 것이 인이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설명은 모두 어긋나지 않는다. 또한 과 가운데 미혹이 있고 인을 반연하여 과를 헤아리는 것은 경에서 “이것이 있으면 저것도 있게 되고, 이것이 생기면 저것도 생긴다”라고 설한 것과 같다. 인 가운데 미혹이 있고 과를 반연하여 인을 헤아리는 경우는 경에서 “늙음과 죽음 따위의 존재는 어떤 법이 이들을 존재하게 한 것일까?”라고 한 것과 같다. 이러한 뜻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각각의 유(有)에 대해 논파하는 것이 모두 어긋나지 않게 된다. 순서에 역행하여 설하거나 차제에 따라 순서에 맞게 설할 수 있는데 이 두 가지는 그 설명이 서로 다르다. 연생(緣生)을 역으로 설한 것을 4제라고 한다. 그러므로 4제는 12연생과 어긋나지 않는다.
029_0528_a_01L【문】그대는 “왜 멸제를 먼저 설하고 도제를 나중에 설하는가?”라고 물었다. 【답】두 가지의 뜻이 있으니, 첫째는 순행(順行)이고, 둘째는 역행(逆行)이다. 경에서 “계가 청정하면 마음이 청정해지고, 마음이 청정해지면 지혜가 청정해지며, 내지 해탈지견(解脫知見)과 명해탈(明解脫)에 이른다”고 한 것은 순행적인 설명이다. 그리고 역행적인 설명이란 “해탈은 탐욕을 떠나는 것을 조건으로 하며, 탐욕을 떠나는 것은 악을 싫어하는 것을 조건으로 하며, 악을 싫어함은 실상을 제대로 보는 것을 조건으로 하며, 내지 근심과 후회가 없음은 계의 청정을 조건으로 한다”고 말한 것과 같다. 『사제론』 『사택품』을 마친다.
아주 거친 경계를 나타내기 위하여 고제를 설하고, 고의 양상[相]을 얻은 다음 이 법이 어떤 원인으로 생겨났는가를 보여주기 위해 집제를 설하며, 이 법이 어느 곳에서 다하는가를 나타내기 위해 다음으로 멸제를 설하고, 이 법은 무엇을 바탕으로 얻을 수 있는가를 나타내기 위해 다음으로 도제를 설한다. 또한 무시이래의 횡액의 그물을 고라 하고, 횡액의 뿌리를 집이라 하며, 횡액의 뿌리를 영원히 벗어나는 것을 멸이라 하고, 뽑아 없애는 것을 도라고 한다. 또한 너무도 무거운 것[極重]을 고라 하고, 무거운 것을 들고 있는 것을 집이라 하며, 이를 버리는 것을 멸이라 하고, 그 집착을 소멸시키는 것을 도라 한다.
또한 결박된 곳[結處]을 고라 하고, 결박을 집이라 하며, 결박이 없어진 것을 멸이라 하고, 허물을 관찰하는 것을 도라 한다. 또한 취함[取] 역시 마찬가지다. 또한 의지하는 곳[依處]을 고라 한다. 세간의 범부들은 5취음의 피해를 보면서도 오히려 그것을 의지하고 집착하니, 비유하면 원수를 친구로 오인하여 의지하는 것과 같다. 의지하는 대상을 편안히 여기고 애착하는 것을 집이라 하니, 이러한 편안함과 애착으로 인해 3유(有)33)의 감옥에 머물면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 것이 마치 미치광이 죄수와 같다. 의지함과 애착이 없는 것을 멸이라 한다. 의지할 곳이 없기 때문이니, 이는 『구제경(懼提經)』에서 설한 것과 같다. 의지함과 애착을 없애는 것을 도라고 한다. 의지함의 허물을 관찰하기 때문이니, 이는 마치 불타는 집을 관찰하는 것과 같다.
029_0528_b_01L또한 육도(六道)를 고라 한다. 즐거움이 없기 때문이니, 이는 마치 더러운 화장실과 같다. 업과 번뇌를 집이라 하니, 육도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육도를 벗어나는 것을 멸이라 하니, 가명(假名)으로 설립한 사물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불이 꺼진 것과 같으니, 『녹두경(鹿頭經)』에서 설한 것과 같다. 모든 윤회의 세계로부터 벗어나도록 이끌기 때문에 도라 하니 『바라하마왕경(婆羅呵馬王經)』에서 설한 것과 같다. 또한 두려움을 고라 하고, 아애(我愛)를 집이라 한다. 두려움이 없는 곳을 멸이라 하니, 최상의 실다운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운행하여 두려움이 없는 곳에 이르게 하는 것을 도라고 한다.
또한 일거리[作事]를 고라 하고, 일의 원인을 집이라 하며, 일의 원인을 뽑아 없앤 것을 멸이라 하고, 뽑아 없애는 것을 도라 한다. 또한 비유하자면 열매를 고라 하고, 종자를 집이라 하고, 종자가 파괴된 것을 멸이라 하고, 종자가 파괴되도록 하는 원인을 도라 한다. 또한 고는 질병과 같고, 집은 질병의 원인과 같고, 멸은 질병이 없어진 것과 같고, 도는 질병을 치료하는 약과 같다. 또한 고는 불과 같고, 집은 땔감과 같으며, 멸은 불이 다 사그라진 것과 같고, 도는 불이 사그라지게 한 원인과 같다.
또한 마치 원한과 같은 것을 고라 하고, 원한을 맺는 것을 집이라 하며, 맺힌 원한을 제거한 것을 멸이라 하고, 원한을 제거한 원인을 도라고 한다. 또한 옷과 같은 것을 고라 하고, 때[塵]와 같은 것을 집이라 하며, 때가 깨끗이 빠진 것을 멸이라 하고, 깨끗하게 한 원인을 도라고 한다. 또한 고는 빚과 같고, 집은 가난과 같으며, 멸은 가난을 벗어난 것과 같고, 도는 재물과 같다. 또한 고는 불타는 열기와 같고, 집은 불타는 열기의 원인과 같고, 멸은 시원함과 같고, 도는 시원하게 하는 도구와 같다. 또한 고는 중독된 상태와 같고, 집은 독과 같고, 멸은 해독된 상태와 같고, 도는 아가다(阿伽陀)34)와 같다.
또한 고는 번민에 시달림과 같고, 집은 번민하게 하는 것과 같으며, 멸은 번민을 벗어난 것과 같고, 도는 번민을 벗어나게 하는 원인과 같다. 또한 고는 살해당함과 같고, 집은 살해하는 자와 같으며, 멸은 살해자를 벗어나는 것과 같고, 도는 살해자를 벗어날 방법과 같다. 또한 고는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이고, 집은 반드시 제거해야 할 것이며, 멸은 반드시 획득해야 할 것이다. 이 세 가지를 위하여 성도(聖道)를 닦는 것이니, 그 순서가 이와 같다. 4제의 본체와 모습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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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함[似]과 진실함[眞], 이족론사(理足論師), 품(品) 유위상(有爲相)은 식(識)의 그림자 허망한 일체, 세 가지 핍박이 있고 세 가지의 4제이니, 열두 가지이다.
진제(眞諦)와 사제(似諦) 두 가지 진리[二諦]를 설하는 여러 법사들이 있다. 생(生)은 탐애의 결과이기 때문에 진정한 고[眞苦]라 하고, 육도는 업의 과보이기 때문에 유사한 고[似苦]라 한다. 생의 원인인 탐애를 진정한 집[眞集]이라 하고, 육도를 견인한 업을 유사한 집[似集]이라 한다.
생의 원인인 탐애를 모두 없앤 것을 진정한 멸[眞滅]이라 하고, 육도를 견인한 원인을 모두 없앤 것을 유사한 멸[似滅]이라 한다. 생의 원인을 멸하는 바른 지혜를 진정한 도[眞道]라 하고, 계(戒) 등의 방편으로 육도를 이끌어내는 원인을 벗어나는 것을 유사한 도[似道]라고 한다. 또한 이족론사(理足論師)는 말하기를 “식(識)은 진정한 고이며, 이와 상응하는 색(色) 등도 역시 고라고 한다. 자신에게 애착하는 것을 진정한 집이라 하고, 이와 상응하는 업(業) 등도 역시 집이라 한다. 자신에 대한 애착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진정한 멸이라고 하고, 이러한 소멸로 말미암아 나머지 것들도 완전히 사라지는 것 역시 멸이라고 한다. 올바른 견해[正見]를 진정한 도라 한다. 만약 이런 올바른 견해가 생기지 않는다면 나머지 다른 방법들로는 소멸에 이를 수가 없다. 이런 올바른 견해가 생김으로 인해 다른 방법들도 도라고 부를 수 있게 된다”고 하였다.
또한 가명부(假名部)에서는 말하기를 “제(諦)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고품(苦品)이고, 둘째는 품제(品諦)이며, 셋째는 성제(聖諦)이다. 고품이란 5취음(取陰)를 말하고, 고품제란 고뇌에 시달림을 그 양상[相]으로 하며, 고성제란 이러한 고의 일미(一味)를 말한다. 집품(集品)이란 탐애를 말하고, 집품제란 태어나게 하는 것을 그 양상으로 하며, 집성제는 이러한 집의 일미이다. 멸품이란 사문과(沙門果)를 말하고, 멸품제란 적정(寂靜)을 그 양상으로 하며, 멸성제는 일미를 그 양상으로 한다. 도품이란 여덟 가지 성도[八分聖道]를 말하고, 도제란 곧바로 벗어남을 그 양상으로 하며, 도성제는 일미를 그 양상으로 한다”고 하였다.
029_0529_a_01L또한 분별부에서 말하기를 “일체의 유위는 모두 다 고이니, 무상(無常)하기 때문이다. 최초의 제(諦)이기 때문에 고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이를 벗어나기 위하여 세존이 계신 곳에서 청정한 범행(梵行)을 닦는 것이니, 이것이 고성제이다. 일체의 원인을 모두 집이라 하니 능히 태어나게 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제이기 때문에 집이라 하는 것은 아니다. 이를 끊기 위하여 세존이 계신 곳에서 청정한 범행을 닦는 것이니, 이것이 집성제이다. 일체의 유위가 고요히 떠난 것을 멸이라 하니, 적정(寂靜)함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세 번째 제이기 때문에 멸이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이 멸을 증득하기 위해 세존이 계신 곳에서 청정한 범행을 닦는 것이니, 이것이 멸성제이다. 일체의 선법(善法)이 모두 도이니, 능히 벗어나게 하기 때문이다. 네 번째 제이기 때문에 도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이 도를 익히기 위하여 세존이 계신 곳에서 청정한 범행을 닦는 것이니, 이것을 도성제라 한다”고 하였다.
또한 “유위의 상(相)에 집착하는 것이 번뇌이며, 번뇌와 번뇌가 일으키는 업을 집이라 한다. 만약 이로부터 3유(有)가 존재하게 되었다면 이를 집성제라 하고, 3유가 생긴 것을 고성제라고 한다. 이와 같이 두 번째 제로부터 첫 번째 제가 생겨난다. 만약 마음이 유위의 상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이로부터 벗어나 상이 없는 세계를 통달한다면, 이러한 인으로 말미암아 번뇌와 번뇌가 일으키는 업이 끊어지게 되며, 이러한 끊어짐으로 말미암아 다시는 인연을 짓지 않으며 다시는 윤회의 몸을 받아 태어나지 않게 된다. 이렇게 다시는 태어나지 않게 된 것을 멸성제라고 한다. 이 법은 마음으로 하여금 유위의 상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이로부터 벗어나 상이 없는 세계를 증득하게 하니, 이런 올바른 견해[正見] 등을 멸도성제(滅道聖諦)라 한다. 가령 유위의 상을 집착하여 다른 유사한 영상을 허망하게 분별하는 등의 일도 역시 이와 같다”고 하였다.
029_0529_b_01L또한 『분별론』에서 말하기를 “세존께서는 일체의 고(苦)에 의지하지 않고 고제를 가립[假]하여 설하셨다. 만약 그렇다면 왜 그렇게 하셨는가? 무기과(無記果)와 집착하는 5취음의 성(性)ㆍ체體)ㆍ상(相)을 드러내기 위하여 고제를 가립하여 설하고, 고의 원인이 되는 법을 가립하여 설하신 것이다. 이러한 것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세존이 계신 곳에서 청정한 범행을 닦는 것이니, 이것이 진정한 고제이다. 일체의 원인에 의지하지 않고 집제를 가립하여 설하셨으니, 능히 다음 생의 존재[後有]를 발생시키는 원인의 성ㆍ체ㆍ상을 드러내기 위하여 집제를 가립하여 설하고 집의 원인이 되는 법을 가립하여 설하신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끊기 위해 세존이 계신 곳에서 청정한 범행을 닦는 것이니, 이것이 진정한 집제이다.
일체의 멸에 의지하지 않고 멸제를 가립하여 설하셨으니, 능히 윤회전생의 길이 끊어진 상태의 성ㆍ체ㆍ상을 드러내기 위하여 멸제를 가립하여 설하고 멸의 원인이 되는 법을 가립하여 설하신 것이다. 이를 증득하여 여기에 다다르기 위하여 세존이 계신 곳에서 청정한 범행을 닦는 것이니, 이것이 진정한 멸제이다. 일체의 도에 의지하지 않고 도제를 가립하여 설하셨으니, 능히 미혹을 없애는 도의 성ㆍ체ㆍ상을 드러내기 위하여 도제를 가립하여 설하고 도제의 원인이 되는 법을 가립하여 설하신 것이다. 이를 닦기 위해 세존이 계신 곳에서 청정한 범행을 닦는 것이니, 이것이 진정한 도제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장론(藏論)』에서 말하기를 “고에 관하여 간략히 밝히자면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미운 사람과 만나는 것이요, 둘째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두 곳에서 일어나는데, 첫째는 몸이고, 둘째는 마음이다. 애착[愛]에 세 가지가 있기 때문에 3고(苦)가 성립한다. 집제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탐애[愛]와 허망분별의 견해[見]와 업(業)이다. 탐애와 허망분별의 견해라는 두 가지 미혹을 후집(後集)이라고 한다. 이로 말미암아 업이 존재하게 되면 추묘집(麁妙集)이 된다.
멸제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허망한 견해[見]라는 일처(一處)의 미혹이 소멸한 것이요, 둘째는 탐욕[欲]이라는 일처의 미혹이 소멸한 것이며, 셋째는 존재[有]라는 일처의 미혹이 소멸한 것이다. 도제에도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견도(見道)이고, 둘째는 수도(修道)이며, 셋째는 성수도(成守道)이다. 이들 셋이 세 가지 근본이다”라고 하였다. 또 “고란 핍박을 당하는 상(相)이고, 집이란 그러한 것들이 생기는 상이며, 멸이란 적정(寂靜)한 상이고, 그러한 능히 벗어나게 하는 상이다”라고 하였다. 또 “고란 상(相)이 존재하는 것이고, 집이란 상이 존재하게 하는 것이며, 멸이란 상을 벗어난 것이고, 도란 상을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고제란 어떤 것인지 이미 이와 같이 간략히 설명했는데 무엇 때문에 자세히 분별하는가? 고취(苦趣) 가운데 왜 태어남[生]에 대하여 가장 먼저 설명하는가? 태어남[生]이란 무엇인가? 태어남은 어떤 양상[相]이며, 태어남이 하는 일[事]은 무엇이며, 태어남의 인연은 무엇인가? 태어남이 왜 고(苦)인가? 만약 태어남이 고라면 세 가지 안락한 태어남은 그 뜻이 성립되지 않는다. 생(生)과 기(起)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아라한이라 해도 아직 5음(陰)이 멸하지 않은 상태인데 왜 “태어남이 이미 다하였다”고 말하는가?
029_0529_c_01L늙음[老]이란 무엇인가? 늙음은 어떤 양상이며, 늙음이 하는 일은 무엇이며, 늙음의 인연은 무엇인가? 왜 늙음을 고라 하는가? 치아가 떨어져 나간 모습 등은 모든 이에게 보편적인 것은 아니므로 그 고도 모두에게 보편적인 것이 아닌데, 왜 늙음을 고성제라 주장하는가? 유위법은 찰나찰나[念念] 소멸하기 때문에 머무르지 않는데 어떻게 늙음[老]이 있을 수 있는가? 이상의 내용을 지산게로써 말한다.
자세히 분별하는 까닭, 가장 먼저 설명하는 까닭, 생(生)ㆍ생상(生相)ㆍ생사(生事)ㆍ생연(生緣)이란? 태어남이 고(苦)인 까닭, 세 가지 안락한 태어남은 어찌하며, 기(起)와 어떻게 다른가? 아라한은 왜 태어남이 다했고, 또 노(老)ㆍ노생老生)ㆍ노사(老事)ㆍ노연(老緣)이란, 늙음이 고인 까닭은? 치아가 떨어져 나간 모습 등과 찰나찰나 소멸함에 관련된 질문.
만약 천상세계[天道]에 병이 없다고 한다면, 일체 중생은 병을 법으로 삼는다는 이 말은 어떻게 해명하겠는가? 『정도론(正道論)』에서 “병(病)은 업의 과보이니, 이런 업의 과보는 고이지 고성제는 아니다”라고 하였다. 부처님께서는 “고를 병이라 한다”고 하셨고, 또 게송에서 “배고픔[飢]이 제일가는 병이다”라고 했는데, 이와 같은 두 가지 말씀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죽음[死]이란 무엇인가? 죽음은 어떤 양상이며, 죽음이 하는 일은 무엇이며, 죽음의 인연은 무엇인가? 왜 죽음을 고라 하는가? 방일사(放逸死)ㆍ파계사(破戒死)ㆍ생연사(生緣死) 이 세 가지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또한 유각무각사(有覺無覺死)ㆍ유회무회사(有悔無悔死)ㆍ유방일무방일사(有放逸無放逸死)ㆍ유착무차사(有著無著死)ㆍ유조복무조복사(有調伏無調伏死)ㆍ소분조복사(小分調伏死)의 뜻은 무엇인가? 5음은 찰나찰나에 스스로 멸하는데 타살에 의한 죽음 등이 어떻게 성립할 수 있는가?
029_0530_a_01L원망하고 미워하는 대상과의 만남[怨憎會]이란 무엇인가? 원망하고 미워하는 대상과의 만남은 어떤 양상이며, 원망하고 미워하는 대상과의 만남이 하는 일은 무엇이며, 원망하고 미워하는 대상과 만나는 인연은 무엇인가? 왜 원망하고 미워하는 대상과의 만남을 고(苦)라 하는가? 만약 원망하고 미워하는 부류가 만난다면 영원히 서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뜻은 마땅히 이치에 맞는 것이다. 친애하는 대상과의 헤어짐[親愛離]이란 무엇인가? 친애하는 대상과의 헤어짐은 어떤 양상이며, 친애하는 대상과의 헤어짐이 하는 일은 무엇이며, 친애하는 대상과 헤어지는 인연은 무엇인가? 왜 친애하는 대상과의 헤어짐을 고(苦)라 하는가?
늙음 등과 만나는 것은 곧 원망하고 미워하는 대상과 만나는 것이고, 젊음 등과 헤어지는 것은 곧 친애하는 대상과 이별하는 것이다. 원망하는 대상과의 만남과 사랑하는 대상과의 헤어짐을 따로 말한다면 어찌 중복된 설명이 아니겠는가? 구하되 얻지 못함[求不得]이란 무엇인가? 구하되 얻지 못함은 어떤 양상이며, 구하되 얻지 못함이 하는 일은 무엇이며, 구하되 얻지 못함의 인연은 무엇인가? 왜 구하되 얻지 못하는 것을 고라 하는가? 욕망의 대상[欲塵]은 곧 고이고, 그것이 다다르거나 그것을 얻는 것 역시 고이다. 그런 것을 구하여 얻지 못했다고 어찌 고라 하겠는가? 어떤 인연 때문에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가?
어떻게 5음(陰)이 고라고 간략하게 말할 수 있는가? 간략하다[略]는 무슨 뜻인가? 여러 음(陰)은 어떤 양상이며, 음(陰)은 무슨 뜻인가? 색(色)이나 식(識) 등이 똑같은 유위상(有爲相)인데 왜 5음과 5취음을 말하며, 이것들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왜 취음을 고라 하면서 음을 고라고 하지는 않는가? 음이란 무슨 뜻인가? 하나의 고(苦)만 정견(正見)하면 고제(苦諦)를 통달할 수 있는데, 왜 온갖 고의 양상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는가? 경에 “색은 즐거움이고 또한 즐거움의 처소에 있다”라는 말도 있는데, 만약 취음(取陰)이 고라면 경의 이치가 서로 어긋난 것이 된다. 왜 이 경에서만 오직 이렇게 간략하게 설하고 나머지 다른 경에서는 “색(色)은 고이다. …… 식(識)은 고이다”라고 설하였는가? 취음은 또 어떤 인연으로 고라 하는가? 총괄하여 간략히 설명한다면 그건 무슨 뜻인가?
029_0530_b_01L【문】그대는 “어떤 것이 고제인지 이미 이와 같이 간략히 설명했는데 무엇 때문에 구체적으로 자세히 분별하는가?”라고 물었다. 【답】어떤 제자들은 간락하고 바른 가르침은 좋아하니, 예를 들면 사리불 등은 열린 지혜로 교화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간략히 설명해 주셨다. 어떤 제자들은 자세히 설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예를 들면 난타(難陀)와 불가바(弗迦婆) 등은 자세히 분별하는 지혜가 있었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자세히 설명해 주셨다. 또한 어떤 제자들은 수행의 인력(因力)이 아주 강했으니, 예를 들면 대가섭(大迦葉)은 이미 선근(善根)을 증장시킨 자였기 때문에 간략히 설명해 주셨다. 연력(緣力)이 약한 경우가 있는데 예를 들면 사제(莎提) 등은 아직 선근을 증장하지 못한 자였기 때문에 자세히 설명해 주셨다.
또한 앙굴마라(鴦崛摩羅) 등은 근기가 예리했기 때문에 간략히 설명해 주고, 사노(蛇奴) 등은 교화를 받아들이는 근기가 둔했기 때문에 자세히 설명해 주셨다. 또한 다문(多聞) 제자인 아난(阿難) 등과 같은 이들은 들은 것을 암기해 간직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간략히 설명해 주셨다. 소문(少聞) 제자인 주라반타(周羅般陀) 등과 같은 이들은 지혜가 둔하고 약했기 때문에 자세히 분별하여 설명해 주셨다. 또한 성인의 말씀과 뛰어난 덕을 풍부히 갖춘 리바다(離婆多) 등과 같은 이들은 자신의 심식을 관찰하는 것을 자주 닦았기 때문에 간략히 설명해 주셨다. 아직 성인의 말씀과 뛰어난 덕을 갖추지 못한 천나(闡那) 등과 같은 이들은 자신의 심식을 관찰하는 것을 자주 닦지 못했기 때문에 자세하게 분별하여 설명해 주셨다.
【문】그대는 “고취(苦聚:고의 집합) 가운데 왜 태어남[生]을 맨 처음 설하는가가?”라고 물었다. 【답】고(苦)의 시초이기 때문이니, 늙고 병들고 죽는 것 등 모든 고는 태어남에서 시작한다. 비유하면 무회(無悔) 등의 세간ㆍ출세간법은 계(戒)를 최초로 삼는 것과 같다. 이와 마찬가지로 늙고 병들고 죽는 것 등은 태어남이 그것들을 충족시킨다. 따라서 태어남을 맨 처음 설하니, 그것들이 서로 떼려야 뗄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태어남의 능력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니, 만약 태어남이 있고 나면 늙음ㆍ병ㆍ죽음이 능히 신체의 기관과 마음 등을 해치게 된다. 비유하면 불과 같으니, 만약 불이 일어나면 태우고 익히고 비추는 등의 작용이 있게 되어 불의 작용이 없을 수 없게 된다. 태어남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먼저 설한 것이다.
029_0530_c_01L또한 그것들이 서로 떼려야 뗄 수 없기 때문이다. 가령 중생이 늙음과 질병을 벗어났다면 이는 끝내 태어남과 무관하지 않으니, 그것들이 행고(行苦)이기 때문이며, 탐애의 과보이기 때문이며, 도(道)에 의해 다스려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태어남을 먼저 설한다. 또한 모두에게 평등한 허물이기 때문이니, 일체의 중생은 똑같이 태어남이라는 해로움을 받는다. 비유하면 무상(無常)이라는 살귀(殺鬼)의 피해를 똑같이 받는 것과 같다. 또한 모든 과정의 단계[有分]를 따라가기 때문이니, 태어남은 무명 등 12유분(有分)에 편재한다. 비유하면 독이 든 우유와 같다. 또한 삼계(三界)에 변재하기 때문이니, 태어남이 삼계에 변재한 것은 마치 소[牛]가 같거나 다른 것과 같다. 따라서 태어남을 먼저 설한다. 또한 고(苦)의 뿌리이기 때문이니, 태어남은 고의 뿌리이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 등은 고의 가지나 잎사귀이다.
게송을 풀어 해석해 보자. 경과 아비달마 그리고 『장론(藏論)』과 『십이연생론(十二緣生論)』 등에서와 같이, 『심사택론(心思擇論)』에서 태어남에 관하여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한 업이 증장(增長)하여 수면(隨眠)을 품별하여 동반함으로써 태어남의 인연이 되는 법들을 접촉하여 이끌어내고 취합[聚集]함에 따라 갖가지 중생의 처소를 얻게 되고 음ㆍ입ㆍ계 등을 얻게 되는데, 이것을 태어남이라고 한다. 또한 상속하여 태어날 때 가장 먼저 식(識)이 생(生)을 받게 되니, 이것을 태어남이라고 한다. 경에서 “식이 들어감으로 인해 명색(名色)이 화합한다”고 설한 것과 같다. 만약 태어남의 차제(次第)를 말하자면 식이 처음 일어나는 것을 태어남이라 한다.
또한 다른 논사들이 말하기를 “생의 단계에 맨 먼저 식이 온갖 것과 함께 일어나는 것을 태어남이라 한다”고 하였다. 또한 태어남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니 소위 가라라(歌羅羅) 등 태위(胎位)의 차별35)과 나아가 출태(出胎)로서 이는 『수생경(受生經)』에서 설한 것과 같다. 또한 태어남에 다섯 종류가 있으니 다음 게송에서 말하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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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스러운 법을 얻는 것을 태어남이라 하고 태위(胎位)에 머물고 성가(姓家)를 이루며 취집한 같거나 다른 부류 및 존재를 태어남이라 하고 오로지 존재만을 태어남이라 하기도 하네.
게송을 해석해 보자. 성스러운 법을 얻는 것을 태어남이라 하니, 경에서 “이미 노예의 지위[奴位]에서 벗어나 나의 입으로부터 태어났다”고 설한 것과 같다. 또한 성스러운 법과 계율 중에 태어나는 것이니, 『앙굴마라경』에서 설한 것과 같다. 또한 태위(胎位)에 머무는[住] 것을 태어남이라 하니, 소위 가라라(柯羅囉)ㆍ알부타(頞浮陀)ㆍ가하나(伽訶那) 등이다. 비유하면 종자ㆍ싹ㆍ줄기ㆍ가지 등과 같다.
029_0531_a_01L 得聖法名生, 胎位姓家成, 聚同異及有, 唯有名爲生。
또한 어떤 가문의 성(姓)이 성립된 것을 태어남이라 한다. 가령 금보(金寶) 등이나 찰제리 등의 가문에서 태어나는 것과 같다. 또한 취집(聚集)한 같거나 다른 부류를 태어남이라 하는데 형상에는 차이가 있으니 소위 사람, 코끼리, 말 등이다. 비유하면 바라다라(婆羅多羅) 등의 나무와 같다. 또한 존재하는 것[有]을 태어남이라 하니, 음ㆍ계ㆍ입이 존재하는 것을 태어남이라 한다. 가령 꽃이 존재한다거나 아들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경우와 같다. 이 논(論)에서 오로지 유(有)만을 태어남이라고 설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의 바탕[本]이기 때문이며, 탐애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로지 유(有)만을 태어남이라 한다.
【문】그대는 “태어남은 어떤 양상이며, 태어남이 하는 일은 무엇이며, 태어남의 인연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답】나타나 드러남이 태어남의 양상이고, 갖가지 고(苦)가 태어남이 하는 일이며, 업이 존재하는 것이 태어남의 인연이다. 【문】그대는 “태어남이 왜 고(苦)인가” 하고 물었다. 【답】세 가지 고[三苦]의 불길에 태워지기 때문이다. 몸을 받아 태어난 곳[受生處]이 애락(愛樂)할만한 곳이 아니고 복행(福行)의 과보가 아닐 경우, 취집(聚集)한 같거나 다른 부류는 고고(苦苦)에 의해 불태워진다.
몸을 받아 태어난 곳이 애락 할 만한 곳이고 복행의 과보일 경우, 취집한 같거나 다른 부류는 괴보(壞菩)에 의해 불태워진다. 몸을 받아 태어난 곳이 부동행(不動行)의 과보일 경우, 취집한 같거나 다른 부류는 행고(行苦)에 의해 불태워진다. 비유하면 들불이 큰 나무를 휘감으며 태우는 것과 같다. 따라서 태어남을 고라고 설한다. 또한 온갖 고통이 의지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만약 태어남[生]이 있다면 몸과 마음의 온갖 고가 의지하고 모이게 되며 생기지 않을 때가 없게 된다. 비유하면 녹야원에 많은 선인(仙人)들이 의지하여 사는 것과 같다.
029_0531_b_01L또한 음ㆍ입ㆍ계 등이 드러난 곳을 태어남의 처소라고 하는데 그 처소에서 일단 태어나면 부서지고 파괴되고 찌르는 공격을 받고, 분해되고 잘리고 분리되고 떨어져 유실되는 등의 고가 골고루 따라 생기게 되니, 무상(無常)이라는 원수는 막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왕자에게 굽지 않은 질그릇에 음식을 담아 올리는 것과 같다. 따라서 태어남을 고라고 설한다. 또한 태어남은 온갖 고의 저장소이고, 근심과 슬픔과 번민을 낳는 것이며, 길하지 못한 일들의 근본이고,36) 늙음과 죽음의 인연이며, 모든 병을 불러일으키는 것이고, 고통이 사무쳐 그 받은 몸을 잃게 하는 것이며, 모든 악이 의지하는 곳이고, 장애나 파괴에 의해 손상되는 것이며, 너무도 고단한 성(城)의 문이고, 원망스런 도구들의 창고이며, 번뇌가 끝없이 흐르는 강이다.
이러한 태어남은 등불로 밝힐 수 없는 어둠이고, 벗어나기 어려운 깊은 구렁텅이며, 불꽃이 보이지 않는 큰 불이고, 알아차리기 힘든 원수며, 의심스럽지 않은 사기꾼이고, 약이 없는 고통이며, 노끈 없는 결박이며, 길잡이도 없고 불빛도 없는 가시나무 숲이다. 철없는 어린아이는 이를 찬탄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비난한다. 애착의 대상이 되는 맘에 드는 존재는 모든 불보살에겐 대비의 마음을 내게 하는 원인이며, 유학(有學)의 성인들에겐 벗어나야 할 대상이며, 무학(無學)의 성인들에겐 완전히 제거해야할 대상이다. 모든 부처님께서 이를 스스로 깨달아 이름을 세우기를 고(苦)라 하셨으니, 따라서 태어남을 고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태위(胎位)가 고이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몸을 받을 때 붉은 피와 하얀 정자가 화합하면 식(識)이 찾아와 의탁하여 잡스럽고 더러운 고를 받는다. 그 다음으로 가라라(柯羅囉)ㆍ알부타(頞浮陀)ㆍ가나(伽那)ㆍ비시(萆尸) 등의 태위(胎位)에서도 점차 자라면서 고를 받으니 마치 종기가 성숙하는 과정과 같다. 이미 견실해져서 몸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을 때에는 압박받는 큰 고통을 받으니, 마치 대가(大家)의 고통과 같다. 어머니의 자궁 속에 누워 있을 때는 양쪽의 내장기관이 겹겹이 짓누르니, 비유하면 죄인이 밑에서는 삶고 위에서는 짓눌러 큰 곤욕을 치루는 것과 같다. 어머니가 음식이나 몸가짐에 절도를 잃어 뛰거나 활보하거나 헤엄치거나 몸을 늘이거나 굽히거나 힘을 쓰거나 하면, 어머니의 뱃속에서 두들겨 맞는 고통을 받아 고뇌하게 되고 어머니의 뱃속에서 맞지 않는 음식을 받게 된다.
029_0531_c_01L이런 몸가짐과 음식 때문에 태아는 사지가 찢어지는 것 같은 갖가지 고통을 받게 되니, 비유하면 왕법(王法)을 범해 온갖 고초를 당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태어남은 고이다. 어머니의 자궁 밖으로 나올 때에는 그 몸은 파초의 속잎처럼 부드럽고 약하며 산문(産門)은 기름 짜는 기계처럼 짓눌러서 압착당하는 고통을 받는다. 또 처음 자궁 밖으로 나왔을 때에는 그 몸이 새로 난 상처와 같아 손이나 물이나 옷이 닿으면 마치 뜨거운 재를 쏟아 붓거나 칼이나 검으로 베는 것과 같은 참기 어려운 고통을 받게 된다. 따라서 태어남을 고라고 설한다.
【문】그대는 “만약 태어남이 고라면 세 가지 안락한 태어남은 그 뜻이 성립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답】업보의 차이를 분별하기 위함 때문이고, 삼계의 차별을 안립하기 위함 때문이며, 세 가지 감수작용[三受]이 있음을 나타내기 위함 때문이고, 이로 말미암아 세 가지 안락한 태어남이 행고(行苦)에 포함됨을 마땅히 알아야 하기 때문이며, 이것이 고제이기 때문이고, 고에 의해 핍박되기 때문이며, 고가 아주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태어남은 곧 고이다. 또한 복행(福行)의 과보가 존재하기 때문에 세 가지 안락한 태어남이 있는 것이니, 이는 게송에서 말하는 것과 같다.
복덕의 과보로 말미암아 안락을 뜻대로 성취할 수 있고 최상의 적정(寂靜)을 신속히 성취하며 소원대로 반열반을 성취하네.
029_0531_c_10L 福德果報樂, 隨意得成就, 速得最寂靜, 如願般涅槃。
무상(無常)이라는 악독(惡毒)이 뒤섞여 있기 때문에 고는 마치 독이 든 음식과 같으니, 비록 온갖 맛이 골고루 갖춰져 있고 색깔과 향기와 촉감이 좋더라도 그것을 먹으면 반드시 죽음이라는 결과를 낳는다. 일체의 생사(生死) 역시 이와 같아서 무상이라는 독이 섞여있다. 따라서 고라고 말한다. 또한 태어날 때의 즐거움, 세상에 머무를 때의 즐거움으로 말미암아 안락한 태어남이라고 말하나, 이런 안락한 태어남도 무너질 때에는 고이기 때문이다. 성인은 이 무너지는 고를 싫어함이 마치 분뇨를 싫어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태어남을 고라고 설한다.
【문】그대는 “생(生)과 기(起)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라고 물었다. 【답】네 가지 태어남 가운데 화생(化生) 하나를 기(起)라 하고, 나머지 세 가지를 생(生)이라고 한다. 또한 자궁에 수태되는 것을 생이라 하고, 어머니의 자궁 밖으로 나오는 것을 기라 한다. 또한 단계의 과정마다 순서에 따라 생기는 것을 생이라고 하고, 한꺼번에 완전히 갖춰져 생기는 것을 기라고 한다. 『장론(藏論)』에서는 “생이란 식(識)에 속하니 태에 의탁하는 종자이기 때문이요, 기란 업에 속하니 식(識)을 여러 윤회의 도(道) 가운데로 분산하여 안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설한다.
029_0532_a_01L【문】그대는 “아라한은 아직 5음을 다 멸하지 않은 상태인데 왜 태어남이 이미 다하였다고 말하는가?”라고 물었다. 【답】이미 멸하였기 때문에 “태어남이 다하였다”고 말한 것이다. 또한 인연이 멸하였기 때문이니, 다음에 태어날 법이 이번 생에 없기 때문에 “태어남이 다하였다”고 말한 것이니, 비유하자면 탐애가 소멸했기 때문에 “고제가 소멸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또한 태어남의 근본을 뽑아 없앴기 때문에 “태어남이 다하였다”고 말한 것이니, 비유하자면 어떤 나무의 뿌리가 이미 잘렸기 때문에 설령 꽃과 잎 등이 무성하더라도 역시 “이미 죽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태어남이 다하였다”고 말한 것도 마찬가지다. 또한 미래에 소멸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태어남이 다하였다”고 말한 것이니, 비유하자면 산꼭대기에서 굽지 않은 질그릇을 던졌다면 그것이 땅에 닿기도 전에 미리 “그건 깨졌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태어남이 다하였다”고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아라한은 태어남이 다하였다”고 말한다.
【문】그대는 “늙음(老)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답】젊고 장성함이 멸하여 없어지고 차례차례 단계를 거치면서 4대(大)가 쇠락해 손상되고 온갖 현상이 변하여 달라지니 몸은 느려지고 몸의 마디는 성글어져 색과 모양이 거칠고 추해지며, 모든 감각기관이 허약해지고 생각이나 식(識)의 인식작용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면서 죽음의 문을 향하는 것을 늙음[老]이라 한다. 또한 미세한 그것이 기관을 지나 몸의 각 부분 속으로 두루 들어가면 나중에는 결국 몸의 각 부분이 손상되고 변하여 달라지니, 이러한 법을 늙음이라고 한다.
무슨 까닭에 늙는가? 그것이 만일 치아에 들어가면 이가 떨어져 나가는 모습을 나타내고, 혹 피부 속에 들어가면 점차 주름살이 생기고 온갖 기미, 검버섯 등이 생겨난다. 혹은 모발에 들어가면 탈색하여 백발이 된다. 혹은 4대(大)에 들어가면 4대가 성글어지고 약해진다. 혹은 감각기관에 들어가면 그 기관의 힘이 없어진다. 혹은 몸의 형체[身形] 속에 들어가면 형체가 떨려 흔들리고 거동이 불안해진다. 혹은 마음속에 들어가면 마음이 곧 들떠 방탕해지며, 기억과 판단력을 잃는다. 혹은 등의 척추에 들어가면 등이 굽는다. 혹은 몸의 관절에 들어가면 관절이 어긋나 흉물스럽게 된다. 젊고 장성한 사람의 유연하고 매끄러움을 모두 다 잃어버리기 때문에 무너지는 양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029_0532_b_01L또한 늙음에는 두 가지 있으니 첫째는 의감실(依減失)이요, 둘째는 능의감실(能依減失)이다. 첫째 의감실이란 온갖 물질과 피ㆍ살덩이ㆍ지방질ㆍ뼈ㆍ골수 등이 조금씩 감소해 사라지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감실(減失)로 말미암아 유사한 결과[相似果]를 얻게 되니 달리거나 도약하거나 활보하거나 말을 타거나 몸을 펴거나 굽히거나 가거나 오거나 힘을 쓰거나 짐을 지는 등의 행동에서 다 손실됨이 있다. 두 번째 능의감실이란 눈이나 귀 등의 보고 듣는 등의 작용이 다 분명하지 못함을 말한다. 분명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유사한 결과를 얻게 되니, 기억력과 지혜와 의지가 감소하고 심지(心地)의 정진력[勤力]과 감당하는 능력 등이 모두 다 손실된다. 경이나 『장론(藏論)』 그리고 『십이연생론(十二緣生論)』 가운데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으니, 이것을 늙음이라 한다.
【문】그대는 “늙음[老]은 어떤 양상이며, 늙음이 하는 일은 무엇이며, 늙음의 인연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답】감소하고 변하여 점차 무너지는 등의 현상을 늙음의 양상이라 한다. 젊음이 손실되고, 유연함과 매끄러움이 없어지면서 혐오할 만한 일이 다가오는 것을 늙음이 하는 일이라고 한다. 음(陰)ㆍ계(界)ㆍ입(入)이 생기는 것을 늙음의 인연이라고 한다. 이 늙음은 또한 근심이나 슬픔 등의 바탕[處]이 된다. 【문】그대는 “왜 늙음을 고(苦)라 하는가?”라고라고 물었다. 【답】이 늙음은 중생이 혐오하는 모습을 생기게 하고 나서는 사랑스러운 형색과 정진력ㆍ 기억력ㆍ판단력을 빼앗고 죽음의 왕에게 이끈다.
비유하면 왕법(王法)을 범하면 의금부의 관리가 코를 베고 발을 자르고는 죽이는 곳으로 넘기는 것과 같다. 늙음도 이와 같기 때문에 늙음을 고라고 설한다. 또한 중생들이 유창하게 말하던 신체의 힘과 감각기관이 취하고 기억하고 사량했던 것들을 던져버리게 되며, 식과 지혜의 힘을 눈 깜짝할 만큼의 틈도 없이 늙음의 태양이 앗아가 버리는 것이 마치 몹시 뜨거울 때 태양이 다섯 가지 가림으로부터 벗어나 치성한 광명으로 널리 비추면 조그만 구덩이나 얕은 물마저 모조리 고갈되는 것과 같다. 늙음도 이와 같기 때문에 늙음을 고라 설한다.
029_0532_c_01L또한 늙음은 형색(形色)을 누추하게 만들고, 사랑스러운 요소들을 빼앗으며, 젊음과 병이 없는 즐거움을 제거해 멸하며, 정진력ㆍ감당하는 능력ㆍ기억력ㆍ판단력ㆍ인내력ㆍ사량(思量) 및 인식[識] 등을 모조리 훼손하고 침탈하며, 모든 감각기관이 허약해져 다시는 세력을 떨치지 못하는 것이 마치 나찰녀가 남자의 정기를 빨아먹고 죽음의 처소로 데려가는 것과 같다. 따라서 늙음을 고라 설한다. 또한 연꽃 같은 어린아이의 몸은 친지들의 마음 속 사랑을 받고, 단정한 형색은 다른 사람의 마음과 눈을 즐겁게 해주지만 늙어 번개처럼 빠르게 변하면 오그라들고 파고되어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이 싫어하고 꺼리게 된다. 따라서 늙음을 고라고 설한다.
또한 신체ㆍ감각기관ㆍ기억력ㆍ판단력을 파괴할 수 있기 때문에 늙음을 고라고 설한다. 신체가 파괴됨으로써 길을 가거나 서거나 앉거나 눕거나 몸을 굽히거나 펴거나 몸을 돌리거나 뒤척이거나 하는 일 등이 다 자재(自在)하지 않게 된다. 감각기관이 파괴됨으로써 보고 듣고 냄새를 맡고 맛보고 감촉하는 것 등이 다 불분명하게 된다. 또 어떤 이는 “나는 듣는 것이 불분명하여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간 것 같다”고 말한다. 기억력이 파괴됨으로써 지나간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며 봤던 것을 알아보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늙음을 행상(行相)과 같다고 말한다. 또 발사불부(跋私弗部)에서는 “유위의 모든 법은 실유(實有)하며 잠시 머무르는데, 이 머무름에는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이런 유위의 모습을 늙음이라 한다. 마치 경에서 “이 몸은 백년을 머무를 수 있다”고 하거나 혹은 “4식(識)이 머문다”고 한 것과 같다. 이러한 뜻이 있기 때문에 늙음이라고 한다.
만약 유위법이 실제로 찰나마다 멸한다면 젊음도 성립되지 않고 명근(命根)도 없게 된다. 【문】그대는 “병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답】신체의 조직 계통[身界]이 원만하게 생장(生長)하지 못한 것을 말한다. 어그러지고 어긋나 원만하게 생장하지 못했을 때 이를 신체의 병이라고 한다. 만약 원만 평등하게 생장했을 때는 무병(無病)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불세존께서는 기바(耆婆)37)로 인하여 말씀하시기를 “여래의 신체조직[身界]은 지금 원만 평등함에 이르렀다”고 하셨다. 또한 자신의 성품이 다시 서로 어긋나 길러주신 은혜를 알지 못하여 신체의 부위를 독사를 만지듯 하여 거슬리면, 이를 병이라고 한다.
029_0533_a_01L또한 병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몸의 병이고, 둘째는 마음의 병이다. 몸의 병에 다시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신체의 내부 계통[界]이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해 생긴 병이니, 이를 내부를 인연으로 하여 일어난 병이라 한다. 둘째는 다른 사람이나 다른 것들이 핍박하고 공격해 생긴 병이니, 이를 외부를 인연으로 하여 일어난 병이라 한다. 이 몸의 병은 명칭ㆍ원인ㆍ처소에 따라 차이가 있기 때문에 품류가 다양하다. 명칭의 차이란 몸에서 진액이 흘러내리는 병이나 나병ㆍ종기ㆍ악성종기ㆍ기침ㆍ종양ㆍ중독ㆍ중풍ㆍ정신이상 등을 말한다. 원인의 차이란 가래, 풍, 담 등이 병으로 확산되어 한 가지나 두 가지ㆍ세 가지ㆍ네 가지 등의 병이 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식으로 가래 등 예순두 가지가 질병의 원인이 된다. 처소의 차이란 머리ㆍ눈ㆍ귀ㆍ목구멍ㆍ심장ㆍ배 등에 병이 있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몸의 병이라고 한다. 만약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404병이 있다.
마음의 병은 삿된 망념을 원인으로 하여 일어난 것이니, 근심이나 번뇌 등을 말한다. 이 마음의 병에도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내부의 대상을 반연한 것으로 내문혹(內門惑)이라 하고, 둘째는 외부의 대상을 반연한 것으로 외문혹(外門惑)이라 한다. 이것 또한 명칭ㆍ원인ㆍ처소의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에 품류가 다양하다. 명칭의 차이란 탐욕ㆍ성냄ㆍ교만ㆍ어리석음ㆍ잘못된 견해ㆍ의심ㆍ아첨ㆍ속임 따위이다. 원인의 차이란 깨끗한 모습ㆍ잘못된 모습ㆍ존재하는 모습ㆍ존재하지 않는 모습 등이 마음의 병의 원인이 된다. 처소의 차이란 색(色) 등의 육진(六塵)이다. 경에서 “색에 대한 탐애 내지 법에 대한 탐애”라고 말한 것과 같다. 여기에서 밝힌 것은 신체의 병에 대해서만 논하고 있지, 마음의 병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다.
【문】그대는 “병은 어떤 양상이고, 병이 하는 일은 무엇이며, 병의 인연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답】병은 몸을 핍박하고 고뇌하게 하는 것을 양상으로 하며, 고통과 근심이 병이 하는 일이며, 본인의 신체가 원만하게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등이 그 원인[緣]이다. 【문】그대는 “왜 병을 고라 하는가?”라고 물었다. 【답】세간의 총명한 이에게는 자신의 능력 따라 스스로 이루고 싶은 것들이 있지만 질병으로 말미암아 다 성취할 수 없으며 원하는 것과 어긋나기 때문에 고(苦)가 된다. 따라서 질병이 능히 고의 원인이 되니, 비유하면 불은 사물을 태우는 원인이고 태양은 빛의 원인인 것처럼 늙음과 죽음 등도 그러해 고통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고이다.
029_0533_b_01L또한 근본을 해치기 때문에 병(病)을 고(苦)라고 한다. 비유하면 속이 빈 파초ㆍ대나무ㆍ갈대ㆍ띠와 같다. 또한 통증을 일으키기 때문에, 목숨을 해쳐 수명이 끝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잠복한 불씨나 독과 같기 때문에 병을 고라 설한다. 또한 고고(苦苦)에 포섭되기 때문이니, 태어나거나 상속(相續)하는 가운데 중생이 감당해낼 수가 없는 것이 마치 어린 코끼리가 들불 속에 고립된 것과 같다. 따라서 병을 고라 설한다. 또한 자재함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 만약 사람이 병을 만나면 네 가지 몸가짐이나 생각[想]이 다 자재하지 못하고 그 몸이 축 늘어져 펴거나 굽히거나 가거나 움직이는 등의 행동을 할 수 없는 것이 마치 마디를 연결한 끈이 끊어진 목각인형과 같게 된다.
또한 수명을 버리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니, 가령 사람이 병을 만나 그 고통을 참지 못하고 불을 지르거나 독약을 먹어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것과 같다. 비유하면 타니가(陀尼柯) 아라한의 경우와 같다. 또한 어떤 방법으로도 치료할 수 없게 되면 목숨이 반드시 끝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병을 고라 설한다. 비유하면 알저(頞底) 선인이 이질에 걸렸을 때 탕약을 끊은 것과 같다. 또한 혐오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며, 핍박하고 해를 끼치는 성품이 일어나면 무명(無明)을 길러내기 때문이고, 지혜를 두려워하는 종류가 되기 때문이며, 괴로운 고통을 체(體)로 하기 때문이고, 불안한 마음이 의거하는 처소가 되기 때문에 무학(無學)의 지위에 있던 이도 분별력을 잃게 된다. 지혜가 파괴됨으로써 취사선택할 바를 멀리 벗어나 어리석은 사람처럼 옳은 일과 그른 일을 분별할 줄 모르게 된다. 이러한 뜻이 있기 때문에 늙음을 고라고 말한다.
대덕 불타밀(佛陀蜜)께서는 “제불세존께서는 무량수의 겁 동안 선근을 생장(生長)시켜 십력(十力)을 구족하시고 열 가지 자재함이 있으시다. 네 가지 마(摩)를 물리쳐서 이겨내시고 사무외와 일체를 원만 평등하게 관찰하는 방편은 얻으셨다. 하지만 가을날 맑은 하늘에 뜬 둥근 달처럼 사랑스럽고 나라연(那羅延)처럼 견고하던 신체 각 부위의 힘과 형색 피부 등의 모습도 늙음으로 인해 손상되었다. 따라서 늙음을 고라고 말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뜻은 부처님께서 아라비국(阿羅毘國)에 계실 때 우다이(優陀夷) 비구가 부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게송으로 말하였으니 다음과 같다.
1)진제(眞諦, 499~569)는 서인도 출신 스님으로 파라말타(波羅末陀, Paramārtha) 또는 구나라타(拘那羅陀, Gunarata)로 음역하기도 한다. 양나라 무제의 초청으로 546년(대동 12) 부남(扶南)에서 중국 해남에 이르렀다. 『섭대승론(攝大乘論)』 3권과 『석론(釋論)』 15권을 번역하여 후대에 중국 섭론종(攝論宗)의 개조(開祖)로 추앙되었고, 마명(馬鳴)의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1권을 번역해 중국 불교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2)『대승기신론』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에 나온다. 4신(信)은 만유의 근본이자 실재인 진여眞如를 믿는 신근본(信根本), 진여의 현현(賢現)인 불타를 믿는 신불(信佛), 부처님이 설하신 교법을 믿는 신법(信法), 교법을 실현시켜 자리이타(自利利他)의 행을 실천하는 승려들을 믿는 신승(信僧)이다.
3)이 경은 『사제경四諦經』으로 추측된다. 후한(後漢)시대에 안세고(安世高)가 148년에서 170년 사이에 번역하였다. 4성제(聖諦)에 대해 설한 경전이다. 부처님께서 사위국의 기수급고독원에서 여러 비구들에게 과거ㆍ현재ㆍ미래 모든 여래의 바르고 참된 법을 4제라 한다고 말씀하시고, 사리불이 이에 부연하여 고(苦)ㆍ집(集)ㆍ멸(滅)ㆍ도(道)를 상세히 설명하였다. 이역본으로 『중아함경』 제31 「분별성제경(分別聖諦經)」이 있다.
4)산문의 내용을 암기하기 쉽도록 그 핵심이 되는 문구나 단어를 운문의 형태로 요약한 게송을 말한다.
5)Saṃyutta-nikāya 제437경, 『잡아함』 「제404경」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부처님이 코삼비의 싱사파 숲에서 나뭇잎을 손에 조금 쥐고서 비구들에게 “비구들아,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한 줌의 싱사파 잎이 많은가, 저 숲에 있는 잎이 더 많은가?” 하고 물으셨다. 그리고 이에 빗대어 당신이 알고 있는 것이라도 유용하지 않고, 청정한 삶에 필수적인 것이 아니며, 싫어함, 냉정, 소멸, 적정, 완전한 이해, 깨달음, 열반으로 인도하지 않는 것들은 대중에게 설하지 않고, 유용하고 청정한 삶에 필수적인 고집멸도(苦集滅道) 4성제만 설하셨음을 대중에게 밝혔다. 여기에서 “승사파(勝奢波) 잎에 비유되는 경”은 숲 속의 싱사파 잎, 즉 4성제를 근간으로 한 정법(正法) 이외의 다양한 외도의 가르침을 의미한다.
6)부처님을 일컫는 칭호다. 세간을 떠나 산중에서 수행하여 장생(長生)을 구하는 사람을 신선이라 한다. 부처님은 신선 가운데서 가장 높다는 뜻으로 대선이라 한다.
7)출가 비구가 수행하고 거주하는 장소로서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한적한 곳을 말한다.
8)청정한 선법(善法)을 뜻하며 흑법(黑法:악법)과 반대 개념이다.
9)8열지옥(熱地獄) 또는 8대지옥(大地獄)이라고도 한다. 뜨거운 불길로 인하여 고통을 받는 여덟 가지 큰 지옥으로 등활지옥(等活地獄)ㆍ흑승지옥(黑繩地獄)ㆍ중합지옥(衆合地獄)ㆍ규환지옥(叫喚地獄)ㆍ대규환지옥(大叫喚地獄)ㆍ초열지옥(焦熱地獄)ㆍ대초열지옥(大焦熱地獄)ㆍ무간지옥(無間地獄)을 말한다.
10)고대 인도에서는 1일을 6시로 구분하고, 이를 다시 신조(晨朝)ㆍ일중(日中)ㆍ황혼(黃昏)의 주3시(晝三時)와 초야(初夜)ㆍ중야(中夜)ㆍ후야(後夜)의 야3시(夜三時)로 구분하였다. 수행자들은 중야에만 숙면을 취하였다.
11)혹(惑)은 번뇌의 다른 이름이다. 곧 아치(我癡)ㆍ아견(我見)ㆍ아만(我慢)ㆍ아애(我愛)를 말한다.
12)바리아수라(婆利阿修羅, Vadiśasura)는 아수라왕(阿修羅王)의 하나이다.
13)범어로 Śloka이며 경론의 길이를 계산하는 단위이다. 약칭하여 수로(首盧)라고 한다. 경론에서 장행(長行)이든 게송이든 32자(字)를 한 게송으로 하여 1수로가(首盧迦)라고 칭한다.
14)네 가지 평등한 마음[四等心]은 곧 자慈ㆍ비悲ㆍ희喜ㆍ사捨이다. 4무량심(無量心)이라고도 한다.
15)중국은 불교의 사상과 문화가 번성하는 중심 지역을 말한다. 상대적인 개념은 변국(邊國)이다.
16)『사제경四諦經』과 『중아함경』 제31 「분별성제경(分別聖諦經)」에서 부처님이 먼저 비구들에게 “과거ㆍ현재ㆍ미래 모든 여래의 바르고 참된 법을 4제라 한다”고 선언하고, 사리불이 법좌를 이어 대중들에게 고(苦)ㆍ집(集)ㆍ멸(滅)ㆍ도(道)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17)세존이 계신 곳은 곧 불교교단을 의미한다.
18)괴로움을 그 성질에 따라 고고(苦苦)ㆍ괴고(壞苦)ㆍ행고(行苦)의 세 가지로 분류한다.
19)불교의 호법신 중 하나인 도리천(忉利天)의 천주 Śakkra Devānāmindra는 석가제환인다라(釋迦提桓因陀羅)ㆍ석제환인(釋提桓因)ㆍ제석천(帝釋天)ㆍ천제석(天帝釋)으로 번역한다. 또한 석(釋)ㆍ천제(天帝)로 약칭하기도 한다.
20)부처님이 당신의 가르침을 손아귀에 쥔 싱사파 잎에 비유한 경, 즉 Saṃyutta-nikāya 제437경, 잡아함 제404경을 의미한다.
21)비수뉴(毘搜紐)는 Viṣṇu의 음역이다. 힌두교의 3주신(主神) 중 하나로 세계를 관장하며 유지 발전시키는 신이다. 베다에서는 태양신으로 묘사되어 있다. 줄여서 비뉴(毘紐)라고도 한다.
22)“지혜를 부지런히 닦고 멀리 유행한 어떤 외도의 선인(仙人)도 증득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의 원문은.“智勤遠行諸外仙人所得故”이다. 문맥으로 보아 ‘所’와 ‘得’ 사이에 ‘不’ 자가 누락된 것으로 추정되어 ‘不’ 자를 삽입해 “智勤遠行諸外仙人所不得故”로 보고 번역하였다.
23)Saṃyutta-nikāya 제437경, 잡아함 제404경을 의미한다.
24)피다(皮陀)는 범어 Veda의 음역(音譯)이다. 베다는 인도 바라문교의 근본적인 성전을 총칭하는 말이다.
25)범어 Upatiṣya, 팔리어 Uptissa의 음역이다. 사리불의 동생이라 한 곳도 있고, 조카라 한 곳도 있다.
26)숲 속의 싱사파 잎, 즉 사성제를 근간으로 한 정법(正法) 이외의 다양한 외도의 가르침을 의미한다.
27)인도 6파 철학의 하나인 Sāṃkhya학파를 말한다. 수론학파數論學派라고도 한다.
28)인도 6파 철학의 하나인 Yoga학파를 말한다.
29)비세사(鞞世師)는 인도 6파 철학의 하나인 Vaiśeṣika학파를 말한다. 승론학파勝論學派라고도 한다.
30)“유(有)가 다시는 생기지 않는다”의 원문은.“有更生”이다. 문맥으로 보아 ‘更’과 ‘生’ 사이에 ‘不’ 자가 누락된 것으로 추정되어 ‘不’ 자를 삽입해 “有更不生”으로 보고 번역하였다.
31)원문은 ‘所’이나 아래에서 ‘취함[取]’으로 설명하였다. 송(宋)ㆍ원(元)ㆍ명(明) 3본에도 ’取’로 되어있다. 오자로 보고 ‘取’로 수정하여 번역하였다.
32)원문은 ‘依’이나 아래에서 ‘옷[衣]’으로 설명하였다. 오자로 보고 ‘衣’로 수정하여 번역하였다.
33)3유는 욕유(欲有)ㆍ색유(色有)ㆍ무색유(無色有)이며, 말하자면 욕계ㆍ색계ㆍ무색계 삼계와 같은 의미이다.
34)범어로 agada이며, 건강무병 장생불사의 뜻이다.
35)불교에서는 전통적으로 어머니의 몸속에 수태된 시점으로부터 출생할 때까지의 266일간의 차례를 다섯 단계로 나누니 이를 태내오위(胎內五位)라 한다. 즉 수정 후 제1주를 가라라(歌羅羅, kalala), 제2주를 알부타(頞浮陀, arbuda), 제3주를 비시(萆尸, peśī), 제4주를 가나(伽那, ghana), 제5주부터 출산 전까지를 발라사거(鉢羅奢佉, praśākhā)라 한다.
36)“길하지 못한 일들의 근본이고”에 해당하는 원문은 “비고근본(非苦根本)”이다. 문맥으로 보아 ‘고(苦)’는 ‘길(吉)’의 오자로 추정되어 ‘길’로 수정해 번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