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030_0748_c_01L석가방지 서문


석도선 지음


오직 이 대당(大唐)이 천하를 다스린 지 40년 동안에 순박한 풍화가 두루 미치면서 경박한 습속이 고쳐졌으며, 문덕(文德)이 닦이고 무공(武功)이 빛나게 되었다. 때문에 청구(靑丘)ㆍ단혈(丹穴)의 제후를 나란히 제봉(堤封)으로 들어오게 하고 용사(龍砂)ㆍ안새(雁塞)의 지방으로 하여금 마침내 성교(聲敎)를 좇게 하여 빼어난 이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조종(朝宗)에서 우의(羽儀)1)를 드러내었고 정성을 다한 폐백을 바치게 되면 어루만지고 달래는 성덕(盛德)을 나타내었다.
그러한지라 팔방(八方)의 변방의 안팎은 앞서의 역사가 자세히 서술되어 있거니와 오축(五竺) 지역[方維]의 내력은 드물게 적혀 있으니 어찌 시기[時]가 아니겠는가?
비록 또 주(周)나라 목왕(穆王)이 서쪽으로 순찰하였지만 곤구(昆丘)에 그쳤고 순(舜)ㆍ우(禹)가 남쪽으로 순행하였지만 창해(滄海)를 넘지 못했으며, 진시황(秦始皇)이 들판을 구획했지만 임조(臨洮) 가까이에 걸쳤고 한(漢)나라 무제(武帝)가 제후(諸候)에게 땅을 봉(封)하였지만 관문(關門)은 철로(鐵路)를 열었을 뿐이요, 이 이후로는 멀리까지 토벌한 일이 상세히 알려진 것이 없다. 그런 까닭에 공동산(崆峒山)에서 도(道)를 물었으나 주천(酒泉)2)의 땅에 국한되었고 곤륜산(崑崙山)에서 임금이 성현[聖]을 참배하였으나 실로 옥문관(玉門關)3)의 곁이었을 뿐이었다.
약수(弱水)와 동정(洞庭)이며 삼위(三危)ㆍ구롱(九隴)에 이르러서는 연기가 임금이 타는 말의 굴레에 피어 올랐고, 사장(沙障)과 여하(黎河)에 관하여는 『하서(夏書)』에 낱낱이 기록되어 있는데 다 함께 오부(雍部)4)를 도모하였다. 박망(博望 : 장건)5)이 황하를 찾았을 적에 비로소 대하(大夏)라는 이름이 들리게 되었고 헌황(軒皇)이 낮잠을 자 꿈에 노닐 적에 맨 처음 화서(華胥)라는 나라를 이야기하였으며 이사(貳師)6) 장군이 대원(大宛)을 정벌하였고 정원(定遠)이 철문(鐵門)을 개척하였다. 그 밖의 나라는 진(秦)으로 들어갔었다.
일제(日磾)7)가 한(漢)나라를 섬길 때는 그 명성과 번영이 총령(葱嶺)8)을 뒤덮었고 제왕의 덕(德)은 기산(耆山)에 뻗쳤으니 천자의 위의가 빛났고 그 무리들도 번성하였다.
그러나 방토(方土)로서 기록한 것과 인물(人物)로서 마땅한 이와 풍속이 변하여 온 내력과 산천(山川)이 뛰어나게 기이한 것을 비록 말하여 밝혔다 하더라도 나가지 못하여 평소에 데면데면 하였고 기록할 만한 것이 없었으니 어찌 지나갈 길이 너무 멀어 나아가 유람한 이가 드물지 않았겠는가?
이런 일로써 토론(討論)하건대 비록 전해 내려온 말[傳說]이 있었으나 조상들의 행인(行人)은 진실로 몸소 본 것이 아니거늘 서로 다투면서 거짓으로 실록(實錄)처럼 꾸며 놓았으니 무엇으로써 그것이 그렇다는 것을 알겠는가? 때문에 황하의 근원이 되는 적석(積石)은 서쪽으로 적현(赤縣)을 쳐다보고, 하늘을 괴고 있는 기둥인 곤륜은 동쪽으로 신주(神州)를 돌아보았으며, 명사(鳴砂)의 바깥은 모두 오랑캐 나라라고 일컬었으며 편안하게 먼 데의 산가지[遠籌]를 이용하고 공연히 당황색 헝겊의 편지[緗簡]만을 전할 뿐이었다. 이로써 신독(身毒)에 관한 설명이 재차 번역[重譯]되어 이르른 것임을 알 수 있고 신이(神異)한 일 등의 전설이 끊어졌음을 알 수 있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도(道)가 동쪽으로 전해져 그 영화스런 빛이 한(漢)나라를 비추면서부터 정치적으로는 10대(代)를 흐르고 햇수로는 장차 6백 년을 지나는 동안 칙사(勅使)가 탄 수레[輶軒]가 잇달아 만나 여러 지방을 모두 갖추어 돌아보았는데, 백여 나라가 다 함께 교화에 귀의하여 험한 산에 사다리를 놓고와서 공물을 바치거나 뭇 왕이 와서 부처님을 우러르지 아니함이 없었다.
그러나 앞뒤의 전해진 기록은 들쭉날쭉하여 서로 같지 않고 일의 자취를 기술한 것이 드물어서 의혹만이 많다고 일컬었으니 다시 이렇게 이른 것을 찾아 보면 그 근본은 번역하는 사람에게로 돌아간다.
옛날 수(隋 : 606)나라 때 동도(東都)의 상림원(上林園)에서 번경관(翻經館) 사문(沙門) 언종(彦琮)이 『서역전(西域傳)』 1부(部) 10편(篇)을 저술하여 널리 풍속으로 폈으면서도 부처님 일[佛事]은 생략했었으므로 넉넉히 들을 수 있음은 좋으나 믿음의 근본[信本]에서 잘못되었다.
나는 생각건대 8상(相)으로는 도(道)를 드러내고 3승(乘)으로는 선도하여 교화하며 4의(儀)가 베푼 것은 근기에 맞추지 않음이 없고 2엄(嚴)의 영향은 모두 혜해(慧解)를 근본으로 한다. 지금은 성스런 자취와 신령한 모습이 화서(華胥)에 한데 모여 섞이었고 신령한 빛과 상서로운 그림자는 세상 안에 어리어 있나니 뜻은 모름지기 형량(形量)을 창성하게 밝히고 심령(心靈)을 움직여 일으켜야 한다.
정관(貞觀) 연간에 역경할 때[645]에 일찍이 자리에 참여하여 곁으로 서기(西記)를 번역해 내어 갖추어진 것이 특별히 상세한 듯하다. 다만 지묵(紙墨)으로써는 번거롭기 쉽고 거울처럼 보기에는 다하기 어려울 뿐이다.
부처님께서 남기신 업적은 석문(釋門)이 함께 돌아갈 곳이기 때문에 강요(綱要)를 추려 모아 대략 한 권을 만들어 모든 후학(後學)에게 물려 주면서 서문을 썼다.
『석가방지(釋迦方志)』는 1부(部)가 8편(篇)으로 되어 있다. 즉 제1 봉강편(封疆篇), 제2 통섭편(統攝篇), 제3 중변편(中邊篇), 제4 유적편(遺跡篇), 제5 유리편(遊履篇), 제6 통국편(通局篇), 제7 시주편(時住篇), 제8 교상편(敎相篇)이다.
우러러 살피건대 모든 부처님의 강령(降靈)은 형상(形相)으로 구할 수 없고 그 근기[機]에 따라 나타나거나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말과 글로써 기술하여 얻을 뿐이다. 그러므로 가르침을 배우는 이는 한데 모아 드는[統擧] 것을 우선으로 해야지 옆으로 지엽(枝葉)적인 것을 궁구하게 되면 끝내 원대한 데에 이르지 못한다. 때문에 편(篇)의 첫머리에서 그 의취를 표방하는 것이다.

석가방지(釋迦方志) 상권


석도선(釋道宣) 지음


1. 봉강편(封疆篇)

부처님께서 법왕(法王)으로 계시는 국토는 이름을 색하(索訶)세계라 하는데 이는 곧 옛 경전에서 번역하여 사바(娑婆)라고 한 것이니 경 가운데 이른바 인토(忍土)라고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 국토에 있는 사람은 억지로라도 기억하고 힘써 생각하면서 괴로움과 즐거움을 능히 참아내며 도를 담아낼 그릇이 될 만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법왕으로 계신다.
이 국토의 경계를 상고하건대 둘레는 쇠로 된 산[鐵山]으로 되어 있고, 산 바깥은 허공이며, 그 허공은 측량할 수가 없다. 산 아래는 땅이요, 땅 아래는 금(金)이며, 금 아래는 물[水]이요, 물 아래는 바람[風]이며, 그 바람의 단단하고 충실함은 금강(金剛)보다 뛰어나다.
중생의 마음과 힘은 동일한 업(業)으로 느끼게 되므로 이 세계를 능히 유지하면서 기울거나 떨어지지 않게 한다. 바람으로부터 바깥은 바로 허공이며 이 둘레를 말하여 보면 아래로부터 위로 무색계(無色界)에 이르는데, 맨 끝은 유정(有頂)이라고 한다. 그 구획된 세계를 논하여 보면 넓은 데에서부터 재어본다하여도 마침내 이수(里數)로써는 헤아릴 것이 아니다.
또 『지도론(智度論)』에서 말한 것과 같다.
“색계(色界)의 하늘로부터 하나의 큰 돌[石]이 내려오면서 1만 8383년을 지나야 비로소 땅에 닿는다.”
이 상하(上下)와 방유(方維)를 묶어서 한 분의 부처님께서 법왕으로 계시게되는 국토라고 한다.[곧 대천(大千)의 철위산(鐵圍山)으로써 봉강(封疆)의 구역을 삼는다.]

2. 통섭편(統攝篇)

상고하건대 색하세계의 철위산(鐵圍山) 안에 포섭되어 있는 국토는 만억(萬億)이나 된다.
무엇으로 알 수 있느냐 하면 지금과 같이 머무르는 곳이 바로 하나의 국토인데 이 국토에는 따로 하나의 소미로산(蘇迷盧山)이 있으니 곧 경에서 말하는 수미산(須彌山)이다. 대해(大海) 가우데 있으면서 금(金)으로 된 바퀴의 표면에 의지하여 반(半)이 바다 위로 나온 곳이 8만 유순(由旬)이며 해와 달이 그 허리를 빙빙 돌아다닌다. 그 바깥은 금산(金山)이 일곱 겹으로 둘러싸고 있고 그 안에는 각각의 바닷물이 여덟 가지 공덕(功德)을 갖추고 있으며, 그 바깥의 짠 바다는 끝없이 넓고 바다 밖으로 있는 산은 바로 쇠로 되어 있다.
사방을 에워싸는 바다 가운데에 살 만한 곳은 대략 넷 정도가 있다. 즉 소미산에 의거하여 방면(方面)을 나눈다면 동쪽의 주(洲)를 비제하(毘提訶)라 하고 남쪽의 주를 섬부(贍部)라 하며 서쪽의 주를 구다니(瞿陁尼)라 하고 북쪽의 주를 구로(拘盧)라고 한다. 이 4주(洲)는 또한 4유(有)라고 하며 사람들이 살고 부처님께서 법왕으로 계신다. 이거에 준해 보면 곁의 철위산(鐵圍山)과 바다 안에 오직 네 주가 있는 것이다.
소미산 위로는 28천(天)이 있고 아울러 하나의 해와 달로써 하나의 국토로 삼는데 이러한 국토의 수랴이 천(千)에 이르고 철위산으로 모두 둘러싸인 것을 소천세계(小千世界)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소천세계의 수량이 천(千)에 이르고 철위산으로 모두 둘러싸인 것을 중천(中千)세계라 하며, 이러한 중천세계의 수량이 천에 이르고 철위산으로 모두 둘러싸인 것을 대천(大千)세계라 한다.
이 삼천대천세계를 상고하건대 그 가운데는 4주와 산왕(山王)과 해와 달과 나아가 유정(有頂)이 만억(萬億)이나 있는 처소이며, 모두가 부처님께서 도맡아 다스리고 다 같이 성교(聲敎)를 따르는 것이다.

3. 중변편(中邊篇)

무릇 법왕께서 거느린 곳은 곧 대천(大千)의 안이 속하게 되는데 만일 다스리는 도읍에 의거한다면 바로 이 주(洲)에서 언제나 머물러 계시기 때문이다.
이 한 주[一洲]는 소미산(蘇迷山)의 남쪽 바다 안에 있으며 물과 육지를 지나는 것이 동서로 24만 리(里)요, 남북으로 28만 리이다.
또 논(論)에서는 세 가장자리는 길이가 똑같이 2천 유순이요, 남쪽 가장자리는 3유순 반(半)이라고 말하였으니, 그렇다면 북쪽은 넓으면서 남쪽은 좁은 것이 사람 얼굴 모양이라 할 수 있다.
또 『범기(凡記)』에 의하면 인물(人物)이 살고 있는 데는 동서가 11만 6천 리요, 남북의 거리도 대략 그와 동일하며 도읍으로 정해진 곳은 부처님께서 탄생하신 나라인 가비라성(迦毘羅城)이 바로 그것의 중앙에 해당하나니 이를테면 네겹으로 된 철위산(鐵圍山) 안에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경에서 말하였다.
“3천의 해와 달과 1만 2천의 하늘과 땅의 중앙이니 부처님의 위신력(威神力)으로 변두리에서는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땅이 경사지기 때문에 중천축국(中天竺國)의 여래께서 도(道)를 이룬 나무 아래에는 금강좌(金剛座)가 있어 부처님을 받들었다.”
이것에 의거하여 논한다면 그 밖의 다른 천하들도 그 때문에 그 중앙으로 정한 것이니 만일 이 주(洲)의 경우에는 그 이치가 다섯 가지의 경우에는 일에 결부되어 중앙임을 밝힐 수 있다. 이른바 이름[名]ㆍ거리[里]ㆍ때[時]ㆍ물[水]ㆍ사람[人]으로 다섯 가지이다.
첫 번째 말한 이름이란 모두가 말하는 서역(西域)을 중앙의 나라로 여겨 또한 중천축국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이름난 현인(賢人)들이 나라의 순서를 정하면서 또한 서쪽의 천하[西宇]를 가리켜 중앙의 나라로 삼았다고 하니, 만일 중앙이 아니라면 법부와 성인 모두 중(中)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옛날 송나라 동해(東海)의 하승천(何承天)이라는 이는 만물에 박식한 것으로 이름이 드러났고 많은 뛰어난 이들 가운데에서 뛰어났는데 사문 혜엄(慧嚴)에게 물었다.
“부처님 나라는 어떤 역법(曆法)에 의하여 중앙으로 부르게 된 것입니까?”
혜엄이 말하였다.
“천축(天竺)의 나라는 하지(夏至)날이 되면 방위의 중앙인지라 그림자가 없으니 이른바 하늘과 땅의 중평(中平)입니다. 우리나라의 중원(中原)은 경규(景圭)로 측정하기 때문에 여분(餘分)이 있으며, 치력(致曆)에는 3대(代)와 대(大)ㆍ소(小)의 두 가지가 있지만 그 밖의 다른 데는 더하고 감하는 계산을 할적에 문득 들쭉날쭉하는 기후가 되므로 중앙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승천은 더 대항할 말이 없었는데 문제(文帝)가 그 말을 듣고 이에 칙명을 내려 관직을 미리 받게 하였다.
무릇 여덟 가지 재난[八難]으로써 표시되는 데는 변두리 땅으로 조용한 데가 아니다. 범부에서 벗어나 성인으로 들어갈 때는 반드시 먼저 중앙의 나라에 태어난다. 때문에 대하(大夏)는 친히 음성과 모습을 받들 수 있었고 동화(東華)는 느즈막에야 가르침의 자취를 열게 되었으니 이치상 그렇게 되는 것이다.
두 번째 말하는 거리[里]라 함은 대개 이 한 주(洲)는 크게 셋으로 나뉘어져서 두 부분은 북쪽으로 토지가 넓고 사람이 드물며 오랑캐[獯狁]들이 사는 곳이어서 도(道)에 힘쓰기에는 적당하지 못하며, 한 부분 남쪽으로 세 바다에 접해 있으며 사람들에게 정밀하고 굳센 기상이 많은지라 성인의 교화를 받을 만하다. 때문에 도의 수승함에 의거하여 큰 성인이 도읍으로 정하셨다.
그러므로 성광자(成光子)는 말하였다.
“중천축국은 동쪽의 진단국(振旦國)까지 5만 8천 리(里)[진단(振旦)은 곧 신주(神洲)의 이름이다. 그 사람은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요, 남쪽의 금지국(金地國)까지도 5만 8천 리이며, 서쪽의 아구차국(阿拘遮國)까지도 5만 8천 리요, 북쪽의 소향산(小香山)과 아뇩달지(阿耨達池)까지도 5만 8천 리이다.”
이렇게 관통하고 포섭한 것을 관찰하고 그것의 멀고 가까움을 취하면 가지런히 그 중앙으로 결정되는데 이르니 그러한 이치는 쉽게 드러난다.
세 번째 말하는 때[時]라 함은 설산(雪山)의 남쪽을 중앙의 나라라 하느데 땅이 평탄하면서 바르고 겨울과 여름의 날씨가 화창하여 풀과 나무가 언제나 무성하며 큰 물이나 서리가 내리지 않는 것을 말하니 그 밖의 다른 변두리 지역을 어찌 족히 말하겠는가?
네 번째 말하는 물[水]이라 함은 이 주(洲)의 중심에 아나타답다(阿那陁答多)라는 큰 못이 하나 있는데 당나라 말로는 무열뇌(無熱惱)라 하니 곧 경에서 말하는 아뇩달지를 뜻한다.
향산(香山)의 남쪽이요, 대설산(大雪山)의 북쪽에 있으며 산꼭대기 위로는 범부가 이를 곳이 아니다. 못의 둘레는 8백 리요, 네 언덕은 보배로 장식하였으며 정남(正南) 쪽은 평지와 맞닿아 있으며 지옥들이 있다. 그러므로 금강좌(金剛座)는 동쪽으로 치우쳐서 5천 리나 떨어져 있다.
또 못의 정남쪽은 주(洲)의 뾰족한 곳에 해당하고 그 북쪽은 미라천(謎羅川)의 북쪽에 해당하며 또 총령(葱嶺)의 북쪽 천천(千泉)에 해당한다. 위의 허공은 바로 북진성(北辰星)에 해당하는데 지금 다섯 번째 별을 바라보면 서쪽으로 기울어진 듯하며 장차 하늘 위로는 1촌(寸)의 거리요, 땅 아래로는 1천이 떨어져 있다. 천천과 서울은 8천여 리쯤 떨어져 있으나 하늘에서 보면 1척도 안 된다.
그 못의 북쪽에서 발로라국(鉢露羅國)과의 거리는 천 리가 좀 못되고 동남쪽의 굴로다국(屈露多國)과 서남쪽의 계빈국(罽賓國)과는 각각 천여 리쯤 된다.
그러나 4해(海)는 구렁의 물이 모이는 극점이 되므로 이 하나의 못에서 네 개의 강이 나뉘어 흐르고 지세(地勢)에 따라 각각 한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그러므로 총령(葱嶺) 동쪽의 물은 동해(東海)로 흘러 들어가고 달친(達儭) 남쪽의 물은 남해(南海)로 흘러 들어가며 설산(雪山) 서쪽의 물은 서해(西海)로 흘러 들어가고 대진(大秦) 북쪽의 물은 북해(北海)로 흘러 들어간다. 그러므로 땅이 높은 곳에서 물이 근원하여 그 가운데로 흘러드는 것이므로 이것이 바닷가에 있다 하여도 변두리란 이름으로는 빼앗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 불경(佛經)은 굉장히 방대하여 모든 일이 두루 망라되어 있고 널리 성현(聖賢)을 뵙는 것이므로 의미를 무턱대고 버릴 것이 아니니 위에 나열한 것은 모두 지도(地圖)와 부합된다.
그러나 이 신주(神州)에서 지어진 글[書]이나 사기[史]에는 빗댄 말과 잘못된 추측으로 과장되고 지나친 내용이 매우 많다. 때로는 불경에 근거하여 다시금 그런 부류를 늘리고 있으나 도무지 모두 황폐하고 너저분한 것이다. 시험삼아 그것을 들어보기로 하자.
『수경(水經)』에서는 “무열구(無熱丘)는 곧 곤륜산(崑崙山)이다”라고 말하였고, 또 『부남전(扶南傳)』에서는 “아뇩달산(阿耨達山)은 곧 곤륜산이다”라고 말하였다.
또 『산해경(山海經)』에서는 “남쪽 흐르는 사막의 끝으로 적수(赤水)의 뒤 흑수(黑水)의 앞에는 큰 산이 있는데 곤륜산이라 한다”라고 말하였다. 또한 말하기를 “종산(鍾山) 서쪽의 6백 리에 곤륜산이 있으며 다섯 개의 강물을 낸다”라고 말하였다.
『목천자전(穆天子傳)』에서 말한 것을 상고하면 용산(舂山)의 음(音)은 종(鍾)이라고 하였고, 또 바다 안의 곤륜산은 서북제(西北帝)의 아래에 있고 사방 8백 리이며 높이는 만 길이라고 하였다.
또 『십주기(十州記)』에서는 “곤륜릉(崑崙陵)이 곧 곤산(崑山)이다. 북해(北海)의 해지(亥地)에 있고 해안에서 13만 리 떨어져 있다”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대강 불경에서의 소미산(蘇迷山)을 가리킨 것일 것이다.
또는 동해(東海) 가운데의 산을 방장(方丈)이라 하기도 하고 또한 곤륜이라고도 한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서왕모(西王母)가 주목(周穆)에게 ‘산은 함양(咸陽)에서 36만리 떨어져 있고 높이는 평지에서 3만 6천 리이다”라고 하였다.
또 『주목전술서왕모(周穆傳述西王母)』에서는 “종주(宗周)의 전간(癲澗)9)에서 1만 1천1백 리 떨어져 있다”고 말하였다. 『신이경(神異經)』에서는 “곤륜산에는 구리 기둥이 있는데 그 높이는 하늘 속으로 들어갔고 둘레는 3천 리이다”고 말하였다.
영씨(榮氏)의 주(注)에서 주주(柱洲)인 곤륜산은 동남쪽으로 1만 2천 리요, 그 바깥에는 산이 없다고 풀이하였다. 『사기(史記)』에서는 “곤륜산은 숭산[嵩高]과 5만 리 떨어졌고 높이는 1만 1천 리이다”라고 말하였다.
곽박(郭璞)은 높이를 2천5백여 리라고 하였고, 회남(淮南)은 높이를 1만 1천 1백 리(里) 14보(步) 2척(尺) 5촌(寸)이라고 하였다.
도경(道經)인 「조립천지기(造立天地記)」에서는 “곤륜산은 높이가 4천8백 리이다”라고 말하였다. 또 『전형제고경(轉形濟苦經)』에서 높이를 1만 9천 이라고 하였으며, 또 이 산이 비상하여 둥둥 떠 있다고 하였고, 또한 곤산(崑山)의 남쪽으로 30리마다 차례로 천(千) 개의 곤산이 있는 것을 소천세계(小千世界)라고 말하였다.
『화호경(化胡經)』에서는 “곤산은 높이 아홉 겹[九重]으로 되었는데 서로의 거리가 각각 9천 리이다”고 말하였다. 또 “높이는 만만(萬萬) 5천 리이다”고 말하였다.
이 앞의 유교(儒敎)와 도교(道敎) 양쪽의 설명은 비록 모양과 크기에는 차이가 있으나 곤륜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살펴보건대 곤륜이 가까운 산이라면 곧 서량(西涼)의 주천(酒泉) 땅이요, 목후(穆后)가 서왕모(西王母)를 보았던 곳이니, 『도경(圖經)』에 갖춰져 있다. 만일 곤륜이 먼 산이라면 곧 향산(香山)과 설산(雪山)의 중간이며 황하의 근원[河源]이 흘러 나오는 곳이다. 그러므로 『이아(爾雅)』에서 “황하는 곤륜의 골짜기에서 나온다고 말하였다. 곽박(郭璞)의 『도찬(圖贊)』에서 ”곤륜은 2층(層)이요 이름은 천주(天柱)라 하며 실로 그것은 황하의 근원이요 강물의 영부(靈府)이다”라고 말하였다.
『서경(書經)』의 「우공(禹貢)」 편에서 말한 것을 상공하건대 황하의 발원지는 적석(積石)이라고 하였는데 다만 복류(伏流)의 출처에 의거해서 이름했을 뿐이니, 만일 그 본원(本源)을 검토한다면 진실로 유래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불경에서 이 무열지(無熱池) 동쪽에는 은(銀)으로 된 소의 아가리에서 긍가하(殑伽河)가 나오는데 곧 옛날에 말하던 항하(恒河)로서 오른편으로 몸의 둘레를 돌아서 동남쪽의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남쪽에는 금으로 된 코끼리의 아가리에서 신도하(信度河)가 나오는데 곧 옛날의 신두하(辛頭河)로서 오른편으로 못의 둘레를 돌아서 서남쪽의 바다로 흘러 들어가며 서쪽에는 유리로 된 말의 아가리에서 박추하(縛蒭河)가 나오는데 곧 옛날의 박차하(博叉河)로서 위에서와 같이 못을 돌아 서북쪽의 바다로 흘러 들어가고 북쪽에는 파지(頗胝)로 된 사자의 아가리에서 사다하(徙多河)가 나오는데 곧 옛날의 사타하(私陀河)로서 위에서와 같이 못을 돌아 동북쪽의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하도(河圖)』를 상고하면 곤륜산의 동방(東方)으로 5천 리(里)를 신주(神州)라 하고 또한 적현(赤縣)이라고 말하였다.
또 『서(書)』에서 말한 것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황하의 근원[河源]은 동북쪽에서 흘러 나와 총령(葱嶺)의 기사(岐沙) 골짜기에서 두 갈래 물로 나눠지고, 동북쪽의 지류(支流)는 전남산(闐南山)을 지나서 나라의 서북쪽에서 나간다. 또 동쪽으로 큰 강이 흘러 갈반타성(朅盤陀城)의 동남쪽을 경유한다. 또는 소륵국(疎勒國)의 서쪽을 경유한다. 또 동북쪽으로 성(城)아래에 이른다. 또 나라의 남쪽으로 5백여 리를 돌아서 오살국(烏鎩國)의 남쪽에 이른다. 또 동북쪽은 소륵국의 북쪽 6백 10리까지 이르고 오손계(烏孫界)의 적곡성(赤谷城)까지 이른다. 또 동쪽으로 2백7십 리는 고묵국(姑墨國)의 남쪽을 경유한다. 또는 동쪽으로 6백7십 리에서 구자국(龜玆國)의 남쪽을 경유한다. 또 동쪽으로 3백5십 리에서 오루국(烏壘國)을 경유하는데 여기는 곧 한(漢)나라 때에 도호(都護)가 다스리던 곳이다. 서남쪽으로 소륵국과의 거리가 2천1백10리이고 동남쪽으로 선선국(鄯善國)과 1천7백85리가 떨어졌으며 동북쪽으로는 오기국(烏耆國)과 4백 리가 떨어졌다.
황하는 또는 동남쪽으로 3백4십 리에서 거리국(渠梨國)의 남쪽을 경유한다. 또 동쪽으로 2백4십 리에서 흑산국(黑山國)의 남쪽을 경유하는데 이는 동쪽의 옥문관(玉門關)에서 2천6백6십 리의 거리이다. 황하는 또한 동쪽으로 연성(連城)과 주빈성(注賓城)의 남쪽을 경유하여 차말국(且末國)의 북쪽에서 지류와 합쳐진다. 황하는 또한 동쪽으로 누란(婁蘭)의 땅을 경유한다. 또 동쪽으로 선선국(鄯善國)의 성(城) 남쪽을 경유하여 동북쪽으로 수백 리를 지나 포창해(蒲昌海)로 들어가고 그 바다 동쪽면의 조금 북쪽은 옥문(玉門)과 1천3백 리 떨어졌다. 또 동북쪽은 양관(陽關)에서 3백 리 떨어지고 이 강물은 포창(蒲昌)과 복류(伏流)의 남쪽에서 조금 서쪽으로 수천 리를 지나 적석산(積石山)으로 들어가서 강소당(羌燒黨) 가운데에 있게 된다.”
『서(書)』에서는 “적석(積石)은 곤륜구(崑崙丘)에서 1천7백40리 떨어졌다”고 말하였다. 혹은 복류(伏流)는 1만 3천 리라고 말하였으나 이 모든 것은 잘못된 추측의 말로서 자세히 궁구하기 어렵다.
황하는 적석의 서남쪽에서 나와 구굴(九屈)로 흐르고 동북쪽에서 흐르는 물이 합쳐져 석지(析支) 땅을 경유하는데 이것이 바로 하곡(河曲)이며 또 동북쪽은 변방으로 유입되어 돈황(燉煌)과 장액(張棭)의 남쪽을 지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황하의 근원[河源]이다.
이 실록(實錄)을 상고하여 강물의 근원을 찾아 보면 궁극에는 무열지(無熱池)가 있는 곳으로 이르니 비로소 탐구하는 것의 마지막이 된다. 그러나 이 지신(池神)이 사는 곳은 사람들이 미칠 데가 아니다. 또 이것은 북천(北天)과 설산(雪山)의 지역이며 남쪽으로 중토(中土)인 부처님께서 태어나신 땅에 접하였으니 높고 수승한 곳에 처했기 때문에 변두리가 아니다.
다섯 번째 말하는 사람[人]이란 범부와 성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범인(凡人)으로서 최고의 지위를 전륜성왕이라 하고, 성인으로서 최고의 지위는 법왕(法王)인 것이니, 대개 이 두 분의 왕은 태어나지 않으면 그만이거니와 태어나게 되면 반드시 중앙에 살게 된다. 또 산천(山川)이나 국읍(國邑)은 사람의 의보(依報)로서 사람이 수승하면 의보도 수승한 것이기 때문에 이 두 분의 왕은 그런 곳에 사는 것이다. 또 전륜왕에는 네 왕이 있는데 4주(洲)를 통괄하는 것에 의거한다. 금륜왕(金輪王)은 전체 4유(有)를 다스리고 은륜왕(銀輪王)은 세 방면으로 북주(北洲)가 제외되며 동륜왕(銅輪王)은 두 방면으로 서주(西洲)ㆍ북주(北洲)가 제외되고 철륜왕(鐵輪王)은 남(南)쪽에 있으면서 3유(有)에서 제외된다.
섬부(贍部)라고 하는 말은 중범천(中梵天)의 음(音)이요, 당나라 말로는 전륜왕이 사는 곳이 된다. 네 전륜왕이 전체를 다스리는지 국부를 다스리는지 하는 것은 다르지만 반드시 남유(南有)에는 머무르게 된다.
이 주(洲)는 옛 번역으로 좋은 금이 나는 땅[好金地]이라 하였으니 이는 염부단금(閻浮檀金)이 주의 북쪽 언덕 바다 안에 있다는 말이다. 금빛이 바다 위로 떠오르고 그 곁에는 염부수(閻浮樹)의 숲이 있는데 그 열매는 지극히 크다. 신통을 얻은 이라야 비로소 거기에 이르게 된다. 지금 말하는 이 주는 전륜왕으로 인하여 붙인 이름이므로 양쪽에서 그 이치를 베풀었을 뿐이다.
또 이 1주는 네 주인이 통솔하게 된다. 설산의 남쪽에서부터 남해(南海)까지는 상주(象主)라고 한다. 이 땅은 덥고 습기가 차서 오직 코끼리가 살기에 마땅하기 때문에 왕은 상병(象兵)으로써 그 나라를 편안하게 하고 풍속은 성급하면서 사납고 기이한 술법을 배우기에 열중한 곳이니 여기서 바로 인도국(印度國)이다. 그리고 인도라는 이름을 혹은 현두(賢豆)라 하기도 하고 혹은 천축(天竺)이라고도 하며 혹은 신독(身毒)ㆍ천독(天篤) 등이라고도 하는데 모두가 잘못하여 굳어져서 전해졌을 뿐이다. 그러므로 인도가 바른 말이며 당나라 말로는 번역될 수 없다.
설산의 서쪽에서 서해(西海)까지는 보주(寶主)라고 한다. 땅은 서해에 접하였고 기이한 보배들이 지나치게 많으며 예절은 가벼이 여기면서 재화는 중히 여기는 곳을 바로 오랑캐 나라이다.
설산의 북쪽에서 북해(北海)까지는 땅이 춥고 말이 살기에 마땅하므로 마주(馬主)라고 한다. 그 풍속은 흉포(凶暴)하고 짐승[衣毛]들을 죽이기까지 하는 곳이니 여기가 돌궐국(突厥國)이다.
설산의 동쪽에서 동해(東海)까지는 인주(人主)라고 한다. 토양이 화창하고 풍속은 인의(仁義)만을 행하며 국토를 편안히 하기 위해 거듭 옮겨다니는 곳이니 바로 지나(至那)이며 곧 옛날에 진단국(振旦國)이라 부른 곳이다.
위에서 나열한 네 주인은 우선 1주(洲)에 의거한 것이요, 지경을 나누면서도 왕은 그 주(洲)의 중앙에 머무르는 것이니 전륜왕이 바로 중앙에 있게 되고 왕은 변두리에 있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바뀌지 않는다.
우리 나라의 모든 유생(儒生)들은 공자(孔子)의 가르침에 막혀 있어 이것을 중심으로 삼고 그 밖의 것은 변두리로 삼기 때문에 따로 낙양(洛陽)을 가리켜서 중국(中國)을 삼고 있으니 이에 헌원(軒轅)과 오악(五岳)에 결부시켜 말한다면 아직 전 지역을 크게 살펴보지 못하고 있다.
또 서번(西蕃)을 가리켜 통상 오랑캐 나라라고 하지만 부처님께서 나시어 여기저기 돌아다니셨으므로 설산의 남쪽은 바라문국(婆羅門國)이라고 부르며 오랑캐와는 완전히 단절되어 글[書]과 말[語]이 같지 않다. 때문에 5천축(天竺)의 모든 바라문은 글을 천서(天書)로 여기고 말을 천어(天語)로 여기니 이것은 겁초(劫初)가 성립할 때에 범천(梵天)이 내려와서 땅의 기름을 맛봄으로써 곧 사람이 생기게 되었으나 본래의 말과 글을 따르기 때문에 하늘의 법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그들의 풍속에는 하늘을 섬기는 일이 많으니 그렇게 생긴 데는 까닭이 있어서이다.
오랑캐는 본래 서융(西戎)이라 도술(道術)을 들은 적이 없고 글과 말은 나라마다 달라서 번역을 전해 주어야 비로소 통하였다. 신주(神州)에서는 글과 말이 나오기는 하였으나 책은 없었으므로 우선 서계(書契)를 논하여 일을 볼 수 있었다.
복희(伏羲)의 8괘(卦)는 문왕(文王)이 중히 여겼고, 창힐(蒼頡)이 새 발자국을 보고 글을 만들었으나 쓰이지 않았으며 한(漢)나라 때에 허신(許愼)이 설문(說文)을 내어 글자를 다만 9천 종류에 따라 나열하였으나 지금은 점차로 세간의 글과 말이 3만이나 되었으니 이것은 곧 사람과 시대에 따라 뜻에 맞도록 만들어 낸 것이므로 5천축의 글과 말이 일정한 것과는 비교되지 않는다.
위에서 다섯 가지의 뜻[五義]으로써 중앙[中]과 변두리[邊]를 규정하면서 모든 것을 비추어 볼 수 있었지만 그 밖은 마치 수(隋)나라 총 위군(魏郡)의 사문 영유(靈裕)의 『성적기(聖迹記)』의 기술(記述)과 같다.

4. 유적편(遺跡篇) ①

한(漢)나라 때부터 당(唐)나라에 이르기까지 인도에 간 이들의 길[道]은 너무 많아서 말로는 다할 수 없으므로 뒤에서 기록한 것과 같이 우선 대당(大唐)에 의거하도록 하겠다.
옛날의 사자(使者)들은 곧 세 가지의 길이 있었으니, 지나간 길에 의거해 우선 유적(遺跡)을 살펴보면서 곧 차례대로 진술하겠다.
동쪽의 길로는 하주(河州)의 서북쪽에서 대하(大河)를 건너 만천령(曼天嶺)에서 4백 리(里)를 좀 못가면 선성(鄯城)에 이르는 진고주(鎭古州)의 땅이다. 또 서남쪽으로 백리를 좀 못가면 옛 승풍술(承風戌)에 이르는데 이것은 수호시(隨互市)의 땅이요, 또 서쪽으로 2백 리를 좀 못가면 청해(淸海)에 이르며 바다 가운데 조그마한 산이 있고 바다의 둘레는 7백 리이며 바다의 서남쪽으로 가면 토곡혼(吐谷渾)의 아장(衙帳)에 이른다. 또 서남쪽으로 가면 국경에 이르는데 이름은 백란강(白蘭羌)이라 하며, 북쪽의 국경은 적어성(積魚城)에 이른다. 서북쪽으로 가면 다미국(多彌國)에 이르며 또 서남쪽으로 가면 소비국(蘇毘國)에 이른다. 또 서남쪽으로 가면 감국(敢國)에 이르고 또 남쪽에서 조금 동쪽으로 가면 토번국(吐蕃國)에 이른다. 또 서남쪽으로 가면 소양동국(小羊同國)에 이르고 또 서남쪽으로 가서 달창(呾倉)을 건너 관문[關]을 지나면 토번의 남쪽 국경이다.
또 동쪽에서 조금 남쪽으로 말상(末上)을 건너 삼비관(三鼻關)의 동남쪽에 이르러 골짜기를 들어가서 열세 개의 높은 사다리[飛梯]와 열아홉 개의 높은 다리[棧道]를 지나가며 또 동남쪽 혹은 서남쪽으로 칡 넝쿨과 등나무를 부여잡고 기어서 들판으로 40여 일쯤 가면 북인도(北印度)의 니파라국(尼波羅國)[이 나라는 토번에서 약 9천 리쯤 떨어졌다]에 이르게 된다.
중간으로 가는 길은 선주(鄯州)의 동천(東川)으로부터 백여 리를 가고 다시 북쪽으로 6백여 리를 나아가 양주(凉州)에 이르며, 동쪽으로는 경사(京師)를 떠나 2천 리를 가서 양주의 서쪽으로부터 조금 북쪽으로 4백70리를 가면 감주(甘州)에 이른다.
또 서쪽으로 4백 리를 가면 숙주(肅州)에 이르고 다시 서쪽에서 조금 북쪽으로 7천5리를 가면 옛날의 옥문관(玉門關)에 이르게 되는데 관문은 남쪽과 북쪽산의 사이에 있다. 또 서쪽으로 4백 리 좀 못가면 과주(瓜州)에 이르고 다시 서남쪽으로 자갈밭을 지나 3백여 리를 가면 사주(沙州)에 이르며 또는 서남쪽의 자갈밭으로 7백여 리를 가면 납박파(納縛波)의 옛 나라인 누란(婁蘭)의 땅에 이르게 되는데 또한 선선(鄯善)이라고도 한다.
또 서남쪽으로 천여 리를 가면 절마타나(析摩陁那)의 옛 나라인 달말(呾末)의 땅에 이르고 또 서쪽으로 6백여 리 가면 도라(都羅)의 옛 나라에 이르는데 모두가 황폐된 성(城)일 뿐이다. 또 서쪽의 고비사막을 들어가 4백여 리를 가면 구살달나국(瞿薩呾那國)의 동쪽 국경[곧 한사(漢史)에서 말한 우전국(于闐國)이다. 도호(都護)가 있던 곳으로 한(漢)나라가 수비하였다. 동쪽의 장안(長安)과는 9천6백70리 떨어졌다]에 이르며 그 관문을 니양성(尼壤城)이라 하며 그 땅은 스스로 우둔국(于遁國)이라 한다. 그 나라의 둘레는 4천여 리인데 모래와 자갈밭이 태반이며 사찰은 백여 군데 있고 승려는 5천이 넘는데 모두 대승을 배우는 이들이다.
관문에서 비마천(媲摩川)에 이르러 2백여 리를 가면 비마성(媲摩城)이 있고 그 가운데는 높이 두 길[丈] 남짓한 크기의 전단(栴檀)으로 만든 입상(立像)이 있는데 매우 신령하고 기이한 광명을 많이 뿜어 병든 이가 자신의 아픈 곳을 따라 금박(金薄)을 불상 위에다 붙이면 곧 나았다. 그 불상은 본래 교상미국(憍賞彌國)에 있었으며 오타연나왕(鄔陁衍那王)이 조성하였는데 허공을 날아 이 나라로 왔다고 한다.
북쪽의 갈로락가성(曷勞落迦城)에는 이상한 나한(羅漢)이 있는데 늘 가서 그에게 예배한다고 한다. 왕이 처음엔 믿지 않고 모래와 흙을 나한에게 쏟자 곧 공경하며 신심있는 이들에게 말해주었다.
“이로부터 7일 후에 모래와 흙이 성(城)에 가득 찰 것이요, 그로부터 2일 후에는 보배의 비가 내려서 거리에 가득 찰 것이다.”
그리고는 이렛날 밤이 되자 과연 흙비가 내려서 성을 가득히 메워 버렸으므로 남아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먼저 알려주었던 이는 미리 땅에 구멍을 만들어 두었다가 그 구멍을 통해 나와 동쪽으로 갔는데 비마상(媲摩像)도 역시 같이 이르렀다고 한다.
어떤 기록에서는 말하였다.
“법이 무너질 적에 이 상(像)은 용궁으로 들어가리라.”
그런데 그 갈로성(曷勞城)은 지금 큰 흙무더기로 덮여 있으며 왕이 보배를 파려고 하면 반드시 큰바람의 환란을 만났다고 한다.
또 비마성(媲摩城)에서 서쪽으로 3백30리를 가면 국성(國城)와 왕도(王都)에 이르며 남쪽으로 10리 되는 데에 큰 절이 있는데 선왕(先王)이 세운 것이다. 서남쪽으로 10여 리쯤 되는 곳의 절에는 협저(夾紵)로 만든 입상(立像)이 있는데 굴지국(屈支國)에서 왔다고 한다.
옛날 이곳의 어떤 신하가 그 입상에 예배하고 공경을 드렸는데 그 신하가 본국(本國)으로 돌아와서도 멀리 염(念)하기를 그치지 않자 그 입상이 드디어 밤에 찾아오게 되었으므로 이에 집을 버리고 절을 만들었다고 한다.
도성(都城)의 서쪽으로 3백여 리에는 발가이성(勃伽夷城)이 있고 7척 높이의 좌상(坐像)이 있는데 상호(相好)는 견줄 것이 없으며 머리에는 보관(寶冠)을 썼는데 때때로 광명이 나타난다고 한다.
도성에서 서쪽으로 1백60리를 가면 길 가운데에 큰 자갈밭이 있고 쥐처럼 생긴 흙뭉치가 있는데 모양이 크고 마치 고슴도치 같으며 털은 금빛과 은빛이 났다. 옛날 흉노(匈奴)가 쳐들어와서 도적질할 때 왕이 이 쥐의 영혼에게 기원하자 밤에 도적과 말을 깨물고 병기(兵器)를 잘라서 망가드렸으므로 스스로 물러나 도망쳤다고 한다.
도성에서 서쪽으로 5리쯤 되는 절에는 높이 백여 척이나 되는 부도(浮圖)가 있으며 광명을 많이 나타냈는데 왕이 감동하여 사리(舍利) 수백 개를 바치자 나한이 오른손으로 부도를 들어올려 함(函) 안에 안치하고 다시 내려 놓았는데 기울거나 흔들림이 없었다고 한다.
도성에서 서남쪽으로 10여 리 되는 곳에 구실릉가산(瞿室𩜁伽山)[우리나라 말로는 소뿔이다]이 있고 사찰이 있으며 불상에서 광명이 나타났는데 부처님께서 일찍이 여기에서 노니실 적에 하늘과 사람들을 위하여 설법하시면서 거기에 절이 서게 되어 대승(大乘)을 숭상하며 배울 것이라고 수기(授記)하셨다고 하며 산 바위의 석실(石室)에는 한 나한이 멸심정(滅心定)에 들어 자씨불(慈氏佛)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수백 년 전에 절벽이 무너지면서 그 문을 막아버렸다고 한다.
그 나라의 남쪽 국경은 동녀국(東女國)과 인접하여 있고 나라의 성에서 서쪽으로 산골짜기를 넘어 8백여 리를 가면 작구가국(斫句迦國)[곧 저거(沮渠)이다]의 남쪽 국경에 이른다. 그 나라는 둘레가 1천여 리요, 부처님을 모신 사찰이 10여 군데이며, 승려의 무리는 백이 넘는데 모두 대승을 배우는 이들이다.
나라 남쪽의 산에는 다라탑(多羅塔)이 서 있으며 소나무가 무성하고 생물이 흐르며 석실(石室)은 깊고 깨끗하여 세 분의 아라한이 현재 멸진정(滅盡定)에 들어 계시는데 수염과 머리칼이 길 때마다 승려들이 언제나 깎아준다고 하며 5인도(印度)의 승려로서 과보를 증득한 이라면 대개 이 석실에 와서 머무른다고 한다.
또 북쪽으로 3백 리를 채 못가면 도성(都城)에 이르게 되는데 둘레는 10여 리요, 토산(土山)이 끊어지지 않고 죽 이어졌으며 양쪽으로 하천(河川)이 마주 흐르고 있다.
또 나라의 서북쪽으로 큰 사막의 언덕을 오르고 사다하(徙多河)를 건너서 5백여 리를 가면 거사국(佉沙國)[곧 소륵(疎勒)이다]에 이른다. 이 나라의 둘레는 5천여 리요, 사찰의 숫자는 백 군데이며 승려는 수만 명인데, 소승(小乘)의 유부(有部)를 익히고 있다. 땅에는 돌과 자갈이 많고 그 곳의 풍속에 아이를 낳으면 머리를 눌러서 납작하게 만든다고 한다.
여기에서 남쪽으로 산과 들과 자갈밭을 지나 5백여 리 가면 오살국(烏鎩國)에 이른다. 이 나라의 둘레는 천여 리요, 도성의 둘레는 10여 리이며, 남쪽은 사다하(徙多河)와 만나고 부처님 법을 믿으며 사찰은 10여 군데요, 승려는 천 명이 좀 못되며 소승의 학문을 익히고 있다.
성(城)의 서쪽으로 2백여 리 가면 대산(大山)에 이르고 고개 위에는 탑이 있는데, 수백 년 전에 산의 절벽이 저절로 무너졌다고 한다. 그 가운데에 어떤 비구가 눈을 감고 앉아 있었는데 형상이 매우 위대하였고 수염과 머리카락이 아래로 드리워져서 어깨와 얼굴을 덮고 있었으므로 국왕이 그에게 소유(蘇油)를 붓고 건추(揵搥)를 치자 비구가 올려다 보며 말하였다고 한다.
“제 스승은 가섭파(迦葉波)입니다. 지금에야 비로소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만 이미 열반하셨습니까?”
또 물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세간에 출현하셨습니까?”
이미 멸도(滅度)하셨다고 알려 주자 곧 공중으로 올라가서 변화로 불을 내어 몸을 태웠다고 한다.
그 나라는 백예(白瑿)와 청옥(靑玉) 등이 나오고 나라의 성으로부터 서쪽으로 강을 건너고 총령(葱嶺)을 오르며 동쪽으로 산등성이를 타고 8백여 리를 가면 복사(福舍)에 이른다. 그 땅은 네 개의 산 가운데에 있고 사방은 백여 이랑[頃]이 되고 나무는 없으며 가는 풀들만 나 있는데 그러한 까닭은 별도로 설명한 것과 같다.
또 서남쪽으로 큰 고개를 넘으면 거반타국(朅盤阤國)에 이른다. 그 둘레는 2천여 리요, 도성의 둘레는 50여 리이며, 북쪽으로 사다하(徙多河)를 등졌고, 부처님 법을 공경하였으며, 사찰은 10여 군데요, 승려는 5백여 명이며, 소승의 유부(有部)를 익힌다.
그 나라의 동남쪽에 큰 석실(石室)이 있는데 두 개의 입구가 있어 각각 한 분씩의 아라한이 멸진정에 들어서 7백여 년을 지냈으며 그 수염과 머리칼이 생기면 해마다 깎아준다고 한다.
또 서북쪽으로 3백여 리를 가면 비로소 왕도(王都)에 이르는데 동남쪽으로 사다하(徙多河)와 접해 있고 산의 고개들은 끊어지지 않고 죽 이어졌으며 또 서쪽에서 조금 남쪽으로 산을 올라서 얼음과 눈이 있는 5백여 리를 가면 파미라천(波謎羅天)에 이른다.
동서(東西)로 1천여 리요, 남북(南北)으로 백여 리이며, 혹 좁은 곳은 10리도 못되고 남북으로는 대설산의 사이에 놓여 있다. 토지는 소금기가 있고 돌이 많으며 풀과 나무는 아주 드물고 사는 사람이 없다. 하천에서 남쪽으로 산을 넘어가면 발로라국(鉢露羅國)이 있다. 이 하천은 대총령(大葱嶺) 위에 있고 남섬부주(南贍部洲)의 한 주로서 땅이 가장 높다. 그 가운데에 큰 용의 연못이 있는데 동서로 3백여 리요 나북으로 50여 리이며 큰 알[大卵]이 나왔다고 한다.
그 물은 서쪽으로 흘러 달마실제국(達磨悉帝國)의 동쪽 국경에 이르면 박추하(縛蒭河)와 합쳐진다. 그러므로 이 물은 서수(西水)와 함께 서쪽으로 흐르면서 동쪽으로 하나의 지류가 갈라져 나오는데 동북쪽으로 거사국(佉沙國)의 서쪽 국경에 이르러 사다하(徙多河)와 합쳐지니 여기부터는 모든 물이 동쪽으로 흐르게 된다.
용의 연못의 정남(正南)쪽은 무열지(無熱池)와 마주하고 북쪽은 천천천(千泉川)과 마주하며 남쪽은 지대령(池大嶺)과 마주하는데 그 이름은 바라서라(婆羅犀羅)이며 남북으로 3ㆍ4백 리나 되고 산의 지대가 매우 높다. 못의 북쪽이 곧 대총령으로 『수경(水經)』에서 말하였다.
“높이는 가히 천여 리가 되면서 양 편 가장자리에서 점차 아래로 내려가고 남북의 높은 고개는 통로의 수효가 지극히 많아 백여 가닥이나 된다.”
산에서 나는 파[葱]가 많고 낭떠러지가 험하면서 푸른 빛[葱翠]을 띠고 있으므로 그렇게 이름 붙인 것이다. 고개의 남쪽은 대설산(大雪山)에 접하고 북쪽은 천천(千泉)이므로 의당 2천5백여 리쯤 되고 동쪽은 오살(烏살)을 끝으로 하고 서쪽은 활국(活國)까지 이르게 되니 의당 3천여 리는 될 것이다.
또 하천의 서남쪽에서 산이 험한 곳을 지나 7백여 리를 가면 상미국(商彌國)에 이른다. 둘레는 2천 6백 리요 땅에는 자황(雌黃)이 나오며 나라 사람들은 부처님을 믿고 사찰은 두 군데 있는데 승려 역시 적다.
북쪽으로 달마실제(達磨悉帝)라는 큰 바위산을 넘으면 시기니국(尸棄尼國)에 이르는데 둘레는 2천여 리이며, 산과 자갈밭으로 들판이 죽 이어졌다.
또 남쪽으로 산과 하천을 넘으면 달마철실제국(達磨鐵悉帝國)[일명 호간국(護侃國)이라고도 한다]에 이르게 되는데 바로 도화라(覩貨羅)가 전에 살던 땅이다. 두 산 사이에 있고 동서로 1천5백 리요, 남북으로 백 리가 좀 못되며 혹은 좁은 곳이라고 10리를 넘지 않으며 동쪽은 박추하에 닿아 있다. 사찰은 10여 군데 있고 승려의 수효는 적다.
성에 있는 절의 석상(石像) 위에는 금과 구리로 된 둥근 일산[蓋]이 걸려 있는데 뭇 보배로 장식되어 있으며 사람이 돌 주위를 돌면 일산도 따라 돌고 사람이 그치면 그것도 그친다. 사방은 석벽(石壁)으로 되어 있어 그것이 그렇게 하는 까닭을 헤아릴 수 없는데 어떤 이는 성인의 힘으로 그렇게 한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신비한 장치라고 말한다.
또 서남쪽으로 산을 올라서 골짜기를 5백여 리쯤 들어가면 굴랑나국(屈浪那國)에 이르는데 역시 옛 땅이다. 둘레는 2천여 리요, 불법을 믿고 따르는 이는 조금 밖에 없다.
또 서북쪽으로 고개를 넘어 3백여 리를 가면 음박건국(淫薄健國)에 이르는데 역시 전에 살던 땅이다. 둘레는 1천여 리요, 도성(都城)은 10여 리이다.
또 서북쪽의 산골짜기로 2백여 리를 가면 발탁창나국(鉢鐸創那國)에 이르는데 역시 예전에 살던 땅이다. 둘레는 3천여 리요, 산과 하천이 반반이며 견고한 성(城)이 수십 개나 있다.
서쪽으로 산골짜기를 넘어 3백여 리를 가면 흘율슬마국(訖栗瑟摩國)에 이르는데 역시 예전에 살던 땅이다. 동서로는 10여 리요, 남북으로는 3백 리이며, 도성의 둘레는 15리이다.
북쪽으로 가면 발리갈국(鉢利曷國)에 이르는데 이 역시 예전에 살던 땅이다. 넓이는 백여 리요, 남북으로 3백여 리이며 도성은 2백여 리이다.
또 흘율국(訖栗國)에서 서쪽으로 가파른 곳을 넘고 깊은 골[洞]을 지나 하천과 성(城)을 따라 3백여 리쯤 가면 몽건국(瞢健國)에 이르는데 이것도 역시 전에 살던 땅이다. 둘레는 4백여 리요, 도성의 둘레는 16리이다.
북쪽으로 하천을 건너면 아리니국(阿利尼國)에 이르는데 역시 예전에 살던 땅이다. 둘레는 3백여 리요, 박추하의 양 언덕이 빙 둘러져 있으며, 큰 성의 둘레는 15리이다.
동쪽으로 하천을 건너면 알라호국(遏羅胡國)에 이르는데 역시 예전에 살던 땅이다. 북쪽은 앞으로 하천이 흐르고 둘레는 2백여 리이며 큰 성의 둘레는 15리이다.
또 몽건국으로부터 서쪽으로 백여 리를 가면 총령(葱嶺)의 서쪽 끝이 나오며 산을 찾아서 내려가면 활국(活國)에 이르는데 역시 여기도 예전에 살던 땅이다. 둘레는 2천여 리요, 왕성(王城)의 둘레는 20여 리이며, 그 왕은 돌궐(突厥)이다. 철문(鐵門)에서부터 남쪽의 여러 작은 나라는 거의 돌궐에 속한다. 땅은 평평하여 고르고 풍속은 대부분이 부처님을 믿으며 사찰은 10여 군데요, 승려 수효는 백이며, 대승ㆍ소승을 겸하여 배운다.
서쪽으로 4ㆍ5백 리를 가면 박갈국(縛曷國)이 나오고 동남쪽으로 산골짜기와 모든 성(城)을 넘어 3백여 리를 가면 활실다국(闊悉多國)에 이르는데 여기도 역시 예전에 살던 땅이다. 나라의 둘레는 천 리가 좀 못되고 도성(都城)은 10여리이며 산은 많고 시내들은 좁으며 바람이 매우 많고 춥다. 사찰은 세 군데이고 승려들 역시 적을 뿐이다.
동남쪽의 골짜기로 들어가 고개를 넘고 여러 작은 성들을 지나 4백여 리쯤 가면 안달라박국(安呾羅縛國)에 이르는데 여기도 역시 예정에 살던 땅이다. 둘레는 3천여 리요, 왕성(王城)의 둘레는 15리이며, 돌궐에 속한다. 사찰은 세 군데있고 승려는 수십 명이 있다. 아육왕(阿育王)이 세운 하나의 탑이 있고 토산(土山)이 끊이지 않고 이어져 있으며 몹시 추위가 심하다.
이로부터 서남쪽으로 대설산을 올라가 바라서라령(婆羅犀羅嶺)의 동쪽 끝으로 3일을 가면 또 가장 정상에 도달하는데 섬부(贍部) 1주(洲)의 모든 산은 모두 사방 아래로 두루 바라다보게 된다.
또 고개를 찾아 아래로 역시 3일을 내려가면 매우 가파르고 구비가 많은 골짜기로 얼음을 파면서 건너가야 한다. 서쪽으로 가필식국(迦畢式國)의 변두리 성(城)과 조그만 마을[邑] 수십 군데를 지나고 다시 서남쪽으로 수백 리를 가야 비로소 왕도(王都)에 이른다.
또 서쪽에서 조금 남쪽으로 1천3백 리를 가서 산과 하천을 넘으면 불율시살당나국(弗栗恃薩儻那國)에 이른다. 넓이는 2천여 리요, 남북으로 천여 리이며 왕성의 둘레는 20여 리요, 불법을 믿고 있다.
이로부터 남쪽으로 5백여 리를 가면 조구타국(漕矩吒國)[또한 조리(早利)라고도 한다]에 이른다. 둘레는 7천여 리요, 왕성의 둘레는 30여 리이며, 산과 하천이 반반이다. 사찰은 백여 군데가 있고 승려의 무리도 수만이며 모두가 대승(大乘)을 배운다. 아육왕(阿育王)이 세운 탑이 열 군데에 있고 천사(天祠)도 수십군데이나 숫자상 외도(外道)들이 더 많다 토지는 울금향(鬱金香)풀이 나기에 알맞고 흥구초(興瞿草)가 났으며 나마(羅摩)가 난다.
인도천(印度川)의 남쪽 국경은 묘나희라산(䅦那呬羅山)이며 왕성(王城)은 동남쪽으로 2천 리요, 서인도(西印度)의 벌랄나국(伐剌那國)에 이르러야 비로소 북쪽 길[北道]과 합쳐져 남쪽으로 부처님의 나라에 나아가게 된다.
북쪽의 길로 인도에 들어가는 이는 경사(京師)로부터 서북쪽으로 3천3백여 리를 가서 과주(瓜州)에 이르러 다시 서북쪽으로 8백여 리를 가면 자갈밭이 나오면서 유원현(柔遠縣)에 이른다.
또 서남쪽으로 1백60리를 가면 이주(伊州)에 이르고 다시 서쪽으로 7백여 리쯤 가면 포창현(蒲昌縣)에 이르며 또 서쪽으로 백여 리쯤 가면 서주(西州)에 이르는데 곧 고창(高昌)이 옛날에 소유했던 땅이요, 한(漢)나라 때는 의화도위(宜禾都尉)가 다스렸던 곳이며 뒤에는 저거량왕(沮渠涼王)이 그 땅으로 피난하였고 지금은 변방의 안쪽에 위치하고 있다.
또 서쪽으로 7백여 리를 가면 아기니국(阿耆尼國)[곧 오기(烏耆)이다]에 이른다. 동서로 6백여 리요, 남북으로 4백여 리이며, 도성의 둘레는 6ㆍ7리이다. 승려와 사찰은 10여 군데에 2천여 명이 있으며 다 같이 소승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를 배우고 계행(戒行)에 힘쓰며 세 가지의 정육(淨肉)을 먹는다.
이로부터 흑령(黑嶺)의 오랑캐들은 재물을 중히 여기고 의리를 가벼이 여기며 예의가 없고 공경심이 없으며 아내가 높고 남편이 낮으며 양민과 천민이 다 같이 평등하며 길할 때는 흰 옷[吉素]을 흉할 때는 검은 옷으로 복제(服制)를 삼는다.
또 서남쪽으로 2백여 리 가서 조그만 산을 하나 넘고 두 개의 큰 하천을 넘어 7백여 리를 가면 굴지국(屈支國)[곧 구자(丘慈)이다]에 이른다. 동서로 천여 리요, 남북으로 6백 리이며, 성의 둘레는 17ㆍ18리이다. 사찰이 백여 군데나 있고 승려는 5천여 명이며 다 같이 소승의 설일체유부를 배운다. 위에서와 같이 세가지의 정육을 먹고 속인들이 크게 부처님을 믿었으므로 왕성이나 백성의 집에 상(像)과 탑들을 많이 세워 놓아 기록할 수조차 없다.
동쪽 국경의 큰 성(城) 가운데 천사(天祠)가 있다. 못에서는 용이 때때로 나와서 암말과 교접하여 용의 망아지를 낳았는데 처음 낳았을 때는 거칠고 사나우나 새끼를 잘 길들여 탔으므로 나라에는 좋은 말이 많았다. 왕이 가까이하는 금화(金花)라는 이가 용이라고 생각하며 어거하여 왕을 태웠는데 끝내려고 할 때 채찍을 그의 귀에 대었더니 곧 숨어 사라져서 사람의 여인과 통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사납고도 용맹스러웠다. 왕이 돌궐과 짜고 이 성의 사람들을 살해하였기 때문에 텅 비고 황폐하게 되었다고 한다.
성의 북쪽으로 40여 리 가면 동쪽에 소호리사(昭怙釐寺)가 있고 그 불당(佛堂) 안에는 사방 2척(尺)이 되는 옥석(玉石)이 있는데 그 위에는 부처님의 발자국 길이 1척 8촌(寸)에, 너비가 6촌의 부처님 발자국이 찍혀 있으며, 재일(齋日)에는 광명이 뿜어져 나왔다.
왕성(王城)의 서문(西門) 밖의 길 좌우에는 각각 높이 90여 척이 되는 입불(立佛)이 있고 거기에 광장을 만들어 5년마다 한 번씩 모이고 있었다.
서쪽으로는 아사리이사(阿奢理貳寺)가 있는데 당나라 말로는 기특(奇特)하다는 뜻이다. 옛날 왕이 바깥을 유관(遊觀)하고 다니면서 성인들의 자취를 순례할 적에 동복(同腹)의 아우가 남아서 나라를 지키고 있었는데 허구를 지어내어 참소하려는 것을 막기 위하여 스스로를 거세(去勢)하였고 왕은 몹시 특이하게 여겼다. 그 아우는 뒷날 어떤 사람이 5백 마리 소를 거세하려는 것을 목격하고 가엾이 여겨 돈을 주어 면하게 해주었다. 이러한 인자함과 선근(善根)의 힘으로 남근(男根)이 갑자기 생겨났으나 끝내 궁으로 들어오지 않았으므로 왕은 의아하고 기특하게 여겼고 인하여 그 자리에 절을 지었다고 한다.
또 서쪽으로 작은 자갈밭을 지나서 6백여 리를 가면 발록가국(跋祿迦國)[옛 이름은 성묵(姓墨)이라고 하며 또 함묵(函墨)이라고도 한다]에 이른다. 동서로 6백여 리요, 남북으로 3백여 리이며, 왕성의 둘레는 50리이다. 사찰의 수효는 열군데이고 승려는 천여 명이 되며 다 같이 소승을 배운다.
서북쪽으로 3백여 리를 가서 돌 자갈밭을 건너면 능산(凌山)에 이르는데 곧 총령의 북쪽 언덕이다. 물은 대체로 동쪽으로 흐르며 이 길에서는 붉은 옷을 입거나 바가지[瓠]를 지니거나 소리를 크게 지를 수 없는데 이떤 이라도 범하게 되면 용이 바람과 비와 모래를 뿌리게 되고 그런 일을 당하면 반드시 모두 죽고 만다고 한다.
산으로 지나면서 서쪽으로 4백여 리를 가면 대청지(大淸池)[또는 이름을 열해(熱海)라고도 하고 또 함해(鹹海)라고도 한다]에 이른다. 둘레는 천여 리요, 동서로 길며 사면에는 산이 있는데 길가는 사람들이 복을 빈다.
또 서북쪽으로 5백여 리를 가면 소엽수성(素葉水城)에 이른다. 둘레는 6ㆍ7리쯤 되고 장사는 오랑캐들이 섞여 살며 이로부터 서쪽에 있는 수십 개의 고립된 성들도 역시 그러하다.
또 서쪽으로 4백여 리를 가면 천천(千泉)에 이른다. 샘물이 솟아나서 사방 2백여 리까지 많이 흘러가며 남쪽으로 설산(雪山)과 만나는 곳에는 세 방향으로 드리워진 평평한 육지가 있다.
또 서쪽으로 1백50리를 가면 달라사성(呾羅私城)에 이르며 다시 서남쪽으로 2백여 리 가면 공경성(恭敬城)에 이른다.
또 남쪽으로 50리를 가면 노적건국(笯赤建國)에 이르며 둘레는 1천여 리이다.
또 서쪽으로 2백여 리를 가면 자시국(赭時國)[당나라 말로는 돌나라[石國]이다]에 이른다. 둘레는 천여 리이며 서쪽으로는 엽하(葉河)와 만난다.
또 동남쪽으로 천여 리를 가면 패한국[㤄捍國]에 이른다. 둘레는 4천여 리이며 산이 사방으로 둘러져 있다.
또 서쪽으로 1천여 리를 가면 솔도리슬나국(窣覩利瑟那國)에 이른다. 둘레는 1천 4백 리요, 동쪽은 엽하(葉河)와 만나며, 엽하는 총령의 북쪽에서 나와 서북쪽으로 흐른다.
또 서북쪽으로 큰 자갈밭으로 들어가 5백여 리쯤 가면 삽말건국(颯末建國)[당나라 말로는 강국(康國)이다]에 이른다. 둘레는 1천6백여 리요, 남북으로 좁으며, 도성(都城)의 둘레는 20여 리로 그들의 처소는 지극히 험하고 견고하다.
여기에서 동남쪽으로 가면 미말하국(弭末賀國)[미국(米國)이다]에 이르며, 둘레는 4ㆍ5백 리쯤 되고 동서로 좁다.
또 서북쪽으로 가면 겁포달나국(劫布呾那國)[조국(曹國)이다]에 이르며, 둘레는 1천 4ㆍ5백 리쯤 되고 동서로 길다.
또 서쪽으로 3백여 리쯤 가면 굴상니가국(屈霜儞迦國)[하국(何國)이다]에 이르며, 둘레는 조국(曹國)과 동일하면서 동서로 좁다.
또 서쪽으로 2백여 리쯤 가면 갈한국(噶捍國)[동안국(東安國)이다]에 이르며 둘레는 1천여 리쯤 된다.
또 서쪽으로 4백여 리쯤 가면 포한국(捕捍國)[중안국(中安國)이다]에 이르며, 둘레는 1천7백여 리요, 동서로 길다.
또 서쪽으로 4백여 리쯤 가면 벌지국(伐地國)[서안국(西安國)이다]에 이르며, 둘레는 4백여 리쯤 된다.
또 서남쪽으로 5백여 리쯤 가면 화리습미국(貨利習彌國)에 이르며, 박추하(縛芻河)의 양쪽 언덕을 따라 동서로 30리는 족히 되며 남북으로 5백여 리이다.
또 삽말건국(颯袜建國)에서 서남쪽으로 3백여 리쯤 가면 갈상나국(羯霜那國)[운사국(云史國)이다]에 이르며 둘레는 1천5백 리가 족히 된다.
또 서남쪽으로 2백여 리를 가면 큰 산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산길이 몹시 험하고 또 사람들도 적다.
동남쪽의 산에서 3백여 리쯤 가면 철문관(鐵門關)에 이르는데 좌우에 있는 석벽(石壁)의 빛이 철(鐵)과 같으며 철로 단단히 닫힌 문짝에 방울을 달아 놓은 것이 지금까지 남아있는데 곧 한(漢)나라 변방의 서문(西門)이다.
철문관을 나오면 곧 도화라국(覩貨邏國)[옛날에는 토출라(吐出邏)라고 하였다]의 옛 땅에 이른다.
남북으로 1천여 리요, 동서로 3천여 리이며, 동쪽은 총령을 등지고, 서쪽은 파사(波斯)에 접하며 북쪽은 철문(鐵門)에 의지해 있다.
박추(縛蒭)라는 큰 강물은 나라의 중간에서 서쪽으로 흐르되 그 안은 스스로 27개의 나라로 분류되어 승려들은 12월 16일에 안거(安居)하게 되는데 따뜻하고 더우면서 비가 많기 때문이다.
강[縛蒭河]의 북쪽을 따라 내려오면 달밀국(呾蜜國)에 이른다. 동서로 6백여리요, 남북으로 4백여 리이며, 왕성의 둘레는 20여 리이다. 사찰은 열 몇 군데요, 승려는 천 명이 넘으며 큰 솔도파(窣覩波)[곧 옛 탑(塔)의 다른 이름이니 투바(偸婆) 등과 같다]가 있으며 신령하고 기이한 불상이 있다.
또 동쪽으로 가면 적악연나국(赤鄂衍那國)에 이른다. 동서로 4백여 리요, 남북으로 5백여 리이며, 왕성의 둘레는 10여 리요, 사찰은 다섯 군데이며, 승려의 수가 적다.
또 동쪽으로 가면 분로마국(忿露摩國)에 이른다. 동서로 백여 리요, 남북으로 3백여 리이며, 왕성의 둘레는 16ㆍ17리요, 사찰은 두 군데 있으며, 승려는 백여명정도이다.
또 동쪽으로 수만국(愉漫國)10)에 이르며 너비는 4백여 리요, 세로는 1백여 리이며, 왕성의 둘레는 10여 리이다. 사찰은 두 군데 있고 승려 또한 많지 않다.
서남쪽이 박추하에 임하고 곧 국화연나국(鞠和衍那國)에 이른다. 너비는 2백여 리요, 세로는 3백여 리이며, 왕성은 10여 리이다. 사찰은 세 군데 있고 승려는 백여 명정도 된다.
또 동쪽으로 가면 확사국(鑊沙國)에 이른다. 너비는 3백여 리요, 세로는 5백여 리이며, 왕성의 둘레는 16ㆍ17리쯤 된다.
또 동쪽으로 가면 가돌라국(珂咄邏國)에 이른다. 너비와 세로는 천여 리이며 왕성의 둘레는 20여 리이다.
동쪽으로 총령(葱嶺)을 따라 가면 구미타국(拘謎陁國)에 이른다. 너비는 2천여 리가 되고, 세로는 2백여 리가 되며, 대총령의 중앙을 따라 있고, 왕성의 둘레는 20여 리이다. 서남쪽은 박추하에 임하여 있고 나라의 남쪽은 시기니국(尸棄尼國)에 접하여 있으며 남쪽에서 이 강물을 건너면 달마실제(達摩悉帝) 등의 나라에 이르는데 앞의 중간의 길[中道]에서 인용한 바와 같다.
또 철문(鐵門)의 남쪽에서 조금 동쪽으로 5백여 리 가면 박가랑국(嚩伽浪國)[박갈국(縛喝國)의 한 길[道]은 구미(拘謎)의 서남쪽으로도 이르게 된다]에 이른다. 너비는 50여 리요, 세로는 2백여 리이며, 도성(都城)은 십여 리이다.
또 남쪽으로는 흘로실민건국(紇露悉泯健國)에 이른다. 둘레는 1천여 리요, 도성의 둘레는 15리쯤이 된다.
또 서북쪽으로 가면 홀름국(忽懍國)에 이른다. 둘레는 8백여 리요, 도성의 둘레는 15리 남짓이며, 사찰은 10여 군데이며 승려는 5백 명이나 된다.
또 서쪽으로 가면 박갈국(縛喝國)에 이른다. 너비는 8백여 리요, 세로는 4백여 리이며, 북쪽은 박추하에 임해 있고 왕성의 둘레는 20여 리이며, 풍속은 아름답다.
그 나라를 소왕사성(小王舍城)이라고 기록하는데 사찰이 백여 군데 있고 승려는 2천여 명 정도이며 다 같이 소승을 배우고 있다.
성 밖의 서남쪽으로 납박(納縛)[우리나라 말로는 신(新)이라는 뜻이다]이라는 사찰이 설산의 북쪽에 있는데 논(論)을 지은 모든 논사(論師)들은 이 절에서 기반이 되는 사업이 쇠하지 않은 것을 칭찬하고 소중하게 여긴다. 불상은 이름 있는 보배로 장식하였으며 비사문의 상[毘沙門像]이 호위하고 있다. 돌궐의 섭호(葉護)가 사찰을 습격하여 보배를 취하려고 군사를 절 곁에 주둔시켰는데 밤에 꿈속에서 천왕(天王)이 긴 창으로 가슴을 꿰뚫어 땀을 흘리고 염통이 아파서 곧 죽었다.
불당 안에는 한 되 남짓한 부처님께서 쓰신 주전자가 있는데 여러 가지 색으로 광채가 빛나서 금인지 돌인지 이름하기 어려우며, 또 부처님의 어금니가 있는데 길이는 한 치 남짓하고 너비는 8ㆍ9분(分)이 되며 색깔은 황백색(黃白色)인데 빛깔이 깨끗하다.
부처님의 빗자루는 가사초(迦奢草)로 만들어졌는데 길이가 2척 남짓하고 둘레는 7촌(寸)이 족히 되며 여러 가지 보배로 자루를 장식하였다.
이 세 물건에 재일(齋日)에는 법속(法俗)이 느낄 만큼 큰 광명을 놓는다.
높이 2백여 척이나 되는 큰 부도(浮圖)는 금강(金剛)을 이겨 발랐고 보배로 장식되었다. 부처님 사리(舍利)도 있는데 때때로 신령한 광명을 내뿜는다.
또 모든 아라한으로서 열반에 든 이들은 신통을 보이면서 탑을 세우는데 비록 증과(證果)가 있더라도 신통을 나타내지 못하는 이는 곧 봉수(封樹)하지 않는다.
왕성의 서북쪽으로 50여 리 되는 곳에는 제위성(提謂城)이 있고 왕성의 북쪽으로 곧장 40여 리 되는 곳에는 파리성(波利城)이 있다. 각각 부도의 높이는 세 길[丈]쯤 되는데 곧 석가(釋迦)께서 처음 법을 세우셨을 때 헌초(獻麨)장자가 머리카락과 손톱으로 세운 것이다.
부처님의 승가지(僧伽胝)ㆍ울다라승(鬱多羅僧)ㆍ승각기(僧却崎), 또 발우[鉢]를 엎어 두고 석장(錫杖)을 세워서 차례대로 벌여 놓았으며 탑을 세운 의식과 법령에 의거하여 숭고하게 건립하였다.
왕성(王城)의 서쪽 70리 되는 데는 가섭파불(迦葉波佛) 때 세워진 높이 두 길[丈] 남짓되는 부도가 있다.
또 큰 성의 서남쪽의 설산으로 들어가 강에서 30여 리를 가면 예말타국(銳末陀國)에 이른다. 너비는 5ㆍ6백 리쯤 되고 세로는 백여 리쯤 되며 왕성은 둘레가 10여 리이다.
또 서남쪽으로 3백 리를 가면 호식건국(胡寔建國)에 이른다. 넓이는 5백여 리쯤 되고 세로는 천여 리이며 왕성의 둘레는 20여 리이고 산과 시내가 많다.
또 서북쪽으로 가면 달랄건국(呾剌建國)에 이른다. 너비는 전항과 같고 세로는 50여 리이며 왕성은 10여 리가 되고 서쪽은 파랄사국(波剌斯國)의 국경에 접해 있다.
또 박갈국(縛喝國)의 동쪽은 홀름국(忽懍國)이고 여기에서 동남쪽으로 흘로실민건국(紇露悉泯健國)까지 1천여 리가 된다. 여기서 북쪽으로 박가랑국(縛伽浪國)이 가깝고 동서로 50여 리가 되며 이 나라의 동북쪽은 활국(活國)에 접해 있다.
또 발갈국으로부터 남쪽으로 백여 리 가면 게직국(揭職國)에 이른다. 너비는 5백여 리요, 세로는 3백여 리이며 도성의 둘레는 5리쯤 된다. 사찰은 10여 군데있고 승려는 3백여 명 정도 되며 다 같이 소승을 배운다. 언덕과 토산(土山)들이 끊이지 않고 죽 이어졌고 동남쪽으로 대설산에 들어가 6백여 리를 가면 도화라(覩貨羅)의 옛 땅이 나온다.
또 범연나국(梵衍那國)에 이르게 되는데 너비는 2천여 리 되고 세로는 3백여리가 되며 설산 가운데에 있고 성(城)은 험한 바위에 의거하여 있다. 사찰이 수십 군데 있고 승려는 천 명정도 되며 소승의 출세부(出世部)를 배우고 있다.
왕성의 동북쪽으로 산이 우묵하게 들어간 곳에는 큰 석불(石佛)이 있는데 높이는 1백5척(尺)이며 금과 보배로 장엄되어 있다.
또 동쪽 절의 왼편에는 유석(鍮石)으로 된 석가의 입상이 있는데 높이는 백여척이 되며 분신(分身)을 따로 주조(鑄造)하여 성의 동쪽 3리 되는 데에 세웠다. 절에는 열반하실 때의 와소불(臥素佛)이 있는데 길이는 천여 척이나 되며 역시 금과 보배로써 장식되어 있다.
동남쪽으로 2백여 리 가서 대설산의 동쪽을 건너면 절에 부처님의 치아와 겁초(劫初) 때의 독각(獨覺)의 치아가 있으며 길이는 5촌(寸) 남짓 되고 너비는 4촌이 좀 못된다.
또 금륜왕(金輪王)의 치아도 있는데 길이가 3촌이요, 너비는 2촌이다.
또 상락가박사(商諾迦縛娑)[곧 상나화수(商那和修)이며 법을 전한 제3의 스승이다] 대아라한이 가진 아홉 되의 쇠발우와 구조(九條)로 된 진홍색의 승가지가 있는데 설락초(說諾草)의 가죽으로 짜여져 있다. 그것은 전생에 여름 안거(安居)를 마친 날에 이 풀을 가져다 스님들께 보시하였는데 그 복의 힘을 입게 되어 5백 생 동안 중음신(中陰身)에서 태어날 적마다 항상 그 옷을 입었고 태(胎)에서 나올 때부터 함께 입고 나와서 몸이 자라는데 그것도 따라 커졌으며 아난(阿難)이 제도할 때에는 변하여 법복(法服)이 되었고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후에는 또 변하여 9조(條)로 된 것이다. 그의 치마와 발우도 함께 금으로 봉함되어 있다. 아라한이 적멸을 증득하여 변제정(邊際定)에 들자 지혜와 원력 때문에 가사(袈裟)가 남아 있으면서 남겨진 법이 다하기를 기다렸는데 이제야 변하고 헐어서 지금은 이미 조금 손상되어 있다. 진실로 미묘함이 있다.
대설산(大雪山)의 동쪽으로는 작은 시내와 못에 이르고 동쪽으로 설산을 들어가 흑령(黑嶺)을 넘으면 가필시국(迦畢試國)에 이른다. 둘레는 4천여 리이며 북쪽은 설산의 세 방향으로 펼쳐 흑령을 등지고 있으며 도성(都城)의 둘레는 10여리이다.
절은 백여 군데 있고 승려는 6천여 명이나 되며 대부분 대승을 배우고 있다. 그 왕은 부처님을 믿으면서 해마다 한 길[丈] 8척(尺)이 되는 은상(銀像)을 조성하여 스스로 공양을 닦고 있다. 천사(天祠)는 수십 군데이며 다른 종교를 믿는 이들도 천여 명이나 된다.
왕성의 동쪽에서 3리쯤 가면 북쪽 산 아래에 부처님의 큰 사원(寺院)이 있고 동쪽문의 남쪽에는 대신왕상(大神王像)에 있는데 그 오른쪽 발 아래에 큰 보배가 저장되어 있다. 요즘에 어떤 외국의 왕이 스님들을 쫓아내고 파내려 하였는데 신관(神冠) 속의 앵무새 상(像)이 깃털을 퍼덕이며 울부짖자 땅이 진동하여 왕의 군사들을 모두 쓰러뜨렸으므로 일어나 용서를 빌고 돌아갔다고 한다.
절 북쪽의 고개 위에는 몇 개의 석실(石室)이 있고 역시 보배가 많이 저장되어 있는데 사사로이 가지려고 하면 약차(藥叉)가 사자나 독사나 벌레로 변하여 와서는 성을 내며 덤빈다고 한다.
석실의 서쪽으로 3리쯤 되는 곳의 큰 고개 위에는 관자재상(觀自在像)이 있는데 정성을 다해 빌면 상이 미묘한 몸을 나타내어 말하고 행한 이를 편안하게 한다.
성의 동남쪽으로 30여 리 되는 곳의 갈라호라사(曷邏怙羅寺)는 대신(大臣)이 지은 것으로 그의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높이 백여 척 되는 부도(浮圖)가 있는데 옛날에 한 대신이 밤 중 꿈에 부도를 조성하려고 왕에게 사리(舍利)를 청하기 위해 아침에 궁중으로 갔는데 어떤 사람이 사리를 담은 병을 가지고 있었다. 대신은 사리를 놓아 두게 하고 그 사람을 먼저 들여보내고 이에 병을 가지고 탑으로 올라가서 엎어 놓은 발우를 열어 사리를 안치하였다. 왕의 사자(使者)가 뒤를 쫓아왔으나 둘은 이미 합해져 있었다. 재일(齋日)에는 광명을 놓았고 검은 기름이 흘러 나왔으며 밤에는 음악이 들렸다고 한다.
성의 서북쪽으로 2백여 리쯤 가면 대설산의 꼭대기에 용의 연못이 있고 산 아래에는 용을 위한 절이 세워져 있다. 탑 안에는 부처님의 골육(骨肉)의 사리가 한 되 남짓 들어 있는데 어떤 때는 연기가 일어나기도 하고 혹은 사나운 불길이 일기도 하는데 점차로 꺼지고 나서야 비로소 사리를 보게 된다고 한다. 그 모양은 마치 흰 구슬과 같고 기둥을 돌아서 구름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탑 안으로 들어온다고 한다.
성의 서북쪽은 대하(大河)의 남쪽 언덕이다. 고왕사(古王寺) 안에는 부처님의 어린 시절의 치아가 들어있고 길이는 한 촌 남짓하며 또 이 동남쪽의 왕고왕사(往古往寺)에는 부처님의 정수리뼈 한 조각이 있는데 길이는 한 촌 남짓하며 빛깔은 황백(黃白)색이요, 머리카락 구멍이 분명히 남아있다. 부처님의 머리카락은 청(靑)색이며 소라 껍데기 같이 되어 오른편으로 말려 있으면서 끌어 당기면 길이가 한 자 남짓한데 말리면 한 치 정도 되었다.
또 서남쪽의 고왕비사(古王妃寺)에는 금동(金銅)으로 된 부도(浮圖)가 있어 높이는 백여 척이나 되었고 부처님의 사리는 한 되 남짓하며 매 달 15일 밤에는 광명을 놓아 기반(基盤)을 빙빙 돌다가 날이 밝아지면 탑 안으로 들어간다 한다.
성의 서남쪽 비라바락산(比羅婆絡山)[상견(象堅)이라고 한다] 정상의 반석(盤石) 위에는 높이 백여 척이나 되는 탑이 서 있고 사리는 한 되 남짓하며 산의 북쪽 바위에 있는 샘물은 바로 부처님께서 산신(山神)의 밥을 받아 드신 뒤에 입안을 헹구고 버드나무 가지를 씹으실 때 생겼다고 하는데 지금은 무성한 숲으로 되어 있으며 절 이름은 양지사(楊枝寺)라고 한다.
또 용의 연못에서 동쪽으로 6백여 리 가서 설산을 넘고 흑령(黑嶺)을 지나면 북인도(北印度)의 국경에 이른다. 이미 앞에서 말한 모든 읍(邑)은 오랑캐나라라고 한다.
북쪽에 이르면 중간의 길[中間道]과 합해지는데 그 땅의 이름을 남파국(濫波國)[북인도에 속한다. 천축의 바라문 땅으로 들어가게 된다]이라 한다. 그것은 5인도(印度)의 국경이며 둘레는 9만여 리가 되고 세 방향으로 큰 바다와 맞닿아 있으며 북쪽으로는 설산을 등지고, 북쪽은 넓으며 남쪽은 좁은 것이 마치 반달[半月]같고 70여 개의 나라가 동일한 왕의 명령을 받는다.
남파국은 무열지(無熱地)의 서쪽에 있고 북쪽 오랑캐인 활국(活國)에 의지해 동남쪽의 세 방향으로는 흑령(黑嶺)과 만나고 북쪽은 설산과 닿아 있다. 도성의 둘레는 10여 리이며 사찰은 십여 군데 있고 승려의 수효도 적으며 대부분 대승을 배우고 있다. 천사(天祠)는 수십 군데요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특히 많다.
동남쪽으로 1백여 리쯤 가서 큰 고개와 큰 강을 넘으면 나가라갈국(那伽羅曷國)[북인도에 속하며 옛날의 화씨성(花氏城)이다]에 이른다. 너비는 6백여 리요, 길이는 2백여 리가 되며 산이 국경의 사방에 둘러 있고 도성의 둘레는 20여 리이다. 사찰은 많지만 승려는 적으며 천사(天祠)는 다섯 군데요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백 명이나 된다.
성의 동쪽 2리 쯤 되는 곳에 높이 3백 척이 되는 석탑(石塔)이 돌로 엮어져 우뚝 솟아 있는데 아로새긴 것이 평범하지 않다. 여기는 옛날 연등(然燈)부처님을 만나 사슴 가죽옷과 머리카락을 땅에 깔아 진흙을 묻지 않게 한 곳인데 겁(劫)이 지났는데도 오히려 남아 있다.
무우왕(無憂王)은 법을 소중히 여겼으므로 여기에 석탑(石塔)을 세워서 그 일을 기록하였는데 매 번 재일(齋日)마다 하늘에서 갑자기 꽃 비가 내리고 대중들은 모여서 구경한다고 한다.
서쪽에 있는 부처님 절에는 남쪽으로 작은 탑이 있는데 여기서 진흙을 묻지않게 한 곳이다. 왕은 큰 길을 피하여 후미진 데에 세웠고 성안에 큰 탑이 있었던 옛 터는 본래대로 있다. 부처님 치아를 모신 다른 탑은 높이가 3길[丈] 남짓한데 허공에서 왔다고 하는데 이미 사람의 솜씨가 아니며 여기에는 영험하고 기이한 일이 많다고 한다.
성 남쪽의 10여 리쯤 되느 곳에 탑이 있는데 이것은 부처님께서 중인도(中印度)에서 허공을 날아 오셔서 자취를 보이신 곳이다.
다음으로 동쪽에도 탑이 있으니 옛날 연등부처님을 만나 꽃을 사셨던 곳이다.
성의 동남쪽으로 20여 리쯤 되는 곳의 작은 돌 고개 위에 높이 2백여 척이나 되는 탑이 있고, 서남쪽으로 깊은 산 계곡에 있는 폭포는 절벽에서 흘러 내려오며, 동쪽 언덕에 있는 석벽(石壁)으로 이루어진 큰 동굴은 바로 용왕(龍王)이 살았던 곳으로 문으로 들어가는 길이 좁고 어둡다.
옛날 부처님께서 이 곳에서 용을 교화하고 그림자를 남기셨는데 분명하게 나타난다고 한다.
동굴 밖의 네모진 돌에는 부처님 발자국이 남아 있고 수레바퀴 형태[輸相]11)에서는 광명이 발한다. 동굴의 서북쪽 귀퉁이에 있는 탑은 부처님께서 오가며 거니셨던 곳이다.
또 곁에는 머리카락과 손톱을 모신 탑이 있는데 온계탑(蘊界塔)이라고도 말하며 동굴 서쪽에 있는 큰 반석(盤石) 위에는 가사(袈裟)를 빨았던 무늬가 있다.
성의 동남쪽으로 30여 리쯤 가면 혜라성(醯羅城)이 있는데 사방의 주변이 아주 험하다. 그곳에는 중각(重閣)이 있고 그 위에 부처님의 정수리뼈를 안치하였는데 둘레는 1천 2촌이요 그 빛깔은 황백(黃白)색이며 머리카락의 구멍이 분명히 남아있다. 선(善)과 악(惡)을 알기 위해 향을 이겨 거기에 바르면 마음먹은 대로 나타나게 된다.
부처님 해골[髑髏]의 형상은 마치 연(蓮) 잎사귀와 같고 빛깔은 정골과 같으며 부처님의 눈동자도 있는데 크기는 마치 능금 정도 되고 맑고 희면서 사무치게 빛나며 7보(寶)로 된 작은 탑(塔)에 앞의 세 가지 흔적들이 보배 함(函)에 담겨져 봉함되어 있다.
부처님의 큰 옷이 있는데 가는 모전으로 되고 황색(黃色)이며 보배함 속에 담겨 있으며 조금 훼손된 모양이 있다. 그 안에는 부처님의 석장이 있고 백철(白鐵)로 고리[環]를 만들었고 전단(栴檀)으로 줄기가 되었으며 보배 통에 담겨져 있다. 근자에 왕이 세력을 믿고 공중 안으로 가지고 들어갔는데 곧 본래 있던 대로 돌아왔다고 한다.
이 다섯 가지 성인의 유물들은 다섯 가지 청정한 행을 하는 왕으로 하여금 모시면서 보호하게 하며, 보고자 하는 이라면 세금 1전(錢)을 내어야 하며 세금 5전 이상의 값어치를 주고 청해야만 거듭 살펴보며 찬찬히 예배할 수 있다.
중각(重閣) 서북쪽에 있는 탑은 작지만 영험이 많아서 사람이 손을 그 위에 대거나 하면 방울이 떨리면서 움직인다.
여기에서 동남쪽의 산골짜기 안으로 5백여 리쯤 가면 건타라국(健陀羅國)[북인도이다]에 이른다. 넓이는 1천여 리요, 길이는 8백 리이며 동쪽은 신도하(信度河)에 닿아 있다. 도성의 둘레는 40여 리가 되고 조금은 비고 황폐해져 있다. 사찰은 십여 군데 있으나 천사(天祠)는 백 군데나 있으며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섞여 살고 있다.
성 안의 동북쪽의 옛 터에는 바로 부처님 발우를 놓은 보대(寶臺)가 있는데 수백 년이 지났으며 지금은 바사닉왕(波斯匿王)의 궁전에서 공양 올리고 있다.
성의 동남쪽으로 8ㆍ9리에 비발라수(卑鉢羅樹)가 있는데 높이가 백여 척이요 가지와 잎이 빽빽이 들어서서 무성하며 옛날 네 부처님의 자리 아래에는 좌상(坐像)이 보인다.
전(傳)의 말로는 현겁(賢劫)의 모든 부처님께서 그 아래 앉으셨다고 한다. 옛날 석가 여래께서는 여기에 앉으신 뒤에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뒷날 가니색가왕(迦膩色迦王)이 나의 골육(骨肉)을 모아서 여기에 두리라.”
왕은 뒷날 남쪽에 탑터를 세웠으니 둘레가 1리 반이며 금과 동을 두른 것만도 25겹이었다.
어떤 이는 말하였다.
“40층(層)으로 되어 온 높이가 5백50척이요, 사리(舍利)는 한 섬이 될 것이다.”
처음으로 소치는 사람을 교화한 숲 사이에 3척의 작은 탑을 조성하였는데 왕이 그것을 던져 버리게 하고는 곧 큰 탑을 만들었으므로 둘째 층 아래의 돌로된 기반 곁에는 작은 탑이 반쯤 나타나 있으며, 병든 이가 와서 귀의하면 금방 낫는다고 한다.
그 큰 탑의 동쪽 돌층계 아래에는 옛날에 크기가 손가락이나 보리 알 정도 되는 금빛의 개미들이 있었는데 서로 석벽(石壁)을 갉아서 그 무늬가 마치 아로새긴 것 같이 남아 있다. 금모래를 섞어 만든 가부좌(跏趺坐)한 두 개의 불상이 있으며 높이가 4백56척이나 된다.
또 남쪽 돌층계에는 부처님의 여섯 길[丈] 되는 형상이 그려져 있다. 옛날에 어떤 두 가난한 사람이 저마다 1전(錢)씩을 보시하여 함께 한 분의 형상을 그려 놓고는 신변(神變)을 나투시기를 청하자 형상이 곧 가슴 위는 두 몸으로 나누어지고 아래는 합쳐 하나의 몸이 되었다고 한다.
다음에 남쪽으로 백여 걸음 가면 높이 한 길 여섯 자의 흰 돌로 된 불상이 있어 얼굴은 북쪽을 향해 있는데 광명을 놓으며 밤에는 나와서 탑을 돈다고 하며 도적이 물건을 훔치러 오면 불상이 그를 맞이하고 도적이 물러가면 불상도 되돌아간다고 한다.
큰 탑 좌우에는 작은 탑이 수백 개나 되며 공장의 솜씨가 아주 묘하고 향기와 음향이 모두 기이하여 선성(仙聖)들이 주위를 돈다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이 큰 탑에 관하여 일곱 번 불에 타고 일곱 번 세워지면 불법은 소멸하게 되리라고 수기하셨다고 하는데 이미 세 번 탔으며 지금은 조성하고 있다.
서쪽에 옛 사찰이 있는데 다 같이 전왕(前王)이 세웠다고 하며 모든 큰 논사(論師)인 세친보살(世親菩薩)과 뜻대로 설하는 논사 협존자(脇尊者)12) 등이 경(經)의 주석서인 비바사(毘婆沙)를 만들었던 곳이다.
사찰 동북쪽으로 50여 리쯤 가서 큰 강을 건너면 포갈라벌지성(布羯邏伐底城)에 이르며 둘레는 14ㆍ15리쯤 된다. 동쪽으로는 네 부처님께서 설법하신 탑이 있는데 무우왕(無憂王)이 건립하였고 높이는 수백 척이며 아로새겨 놓은 것이 세간에서 보기 드문 것이다.
성 북쪽의 5리 되는 곳에 옛 절의 동쪽 탑이 있는데 높이는 수백 척으로 곧 보살(菩薩)이 천 개의 눈[眼]을 버렸던 곳이다.
그 동쪽에도 석탑(石塔)이 있는데 높이는 백여 척으로 범왕(梵王)과 제석(帝釋)이 처음 조성하여 기묘한 보배로 잘 장식되었는데 부처님께서 멸도하시자 보배가 변하여 지금은 돌이 되어 있다.
또 서북쪽으로 50여 리에 있는 탑은 바로 상막가보살(商莫迦菩薩)[여기서는 말로는 섬(睒)이다]이 왕의 화살을 맞았던 처소이다.
또 동남쪽으로 약 2백 리에 있는 파로사성(跛魯沙城)에서 북동쪽으로 20여 리에 있는 탄다락가산(彈多落迦山)[바로 단특산(檀特山)이다]의 고개 위에 탑이 있는데 이 곳은 소달나(蘇達拏)[선아(善牙)라 말한다]가 세상을 피해 살았던 곳이며 바라문(婆羅門)이 남녀를 매로 때렸던 처소로서 피가 흘러 땅에 고여 있어서 지금도 초목들이 모두 똑같이 진홍색이다. 바위 사이의 석실(石室)은 비(妃)가 선정을 익혔던 곳이다.
또 서북쪽으로 백여 리 가서 작은 산을 넘어 큰 산에 이르면 남쪽으로 한 사찰에 탑이 있고 승려들은 대승을 배운다. 옛날 독각대선(獨角大仙)이 선타(扇陀)라는 여인의 유혹을 받았던 곳이다.
사성(沙城)의 동북쪽으로 50리 되는 곳의 큰 산에는 큰 천사(天祠)가 있고 그 천사의 동남쪽으로 1백5십 리를 가면 오탁가한다성(烏鐸迦漢茶城)에 이르는데 둘레가 20여 리나 되고 남쪽으로 신도하(信渡河)에 임해 있다.
여기에서 성의 북쪽으로 산을 넘어 6백 리를 가면 오장나국(烏仗那國)[북인도의 정식 국가이며 옛날에는 오장(烏長)이라 하였다]에 이른다. 산골짜기가 서로 이어져 있고 둘레는 5천 리이며 옛날 전륜왕(轉輪王)의 동산이었다. 토지는 울금향(鬱金香)이 나오기에 알맞고 협소바솔도하(夾蘇婆窣堵河)가 있다.
왕성(王城)의 둘레는 14ㆍ15 리쯤 되고 사찰이 1천4백 군데이며 승려는 1만 8천 명으로 모두 대승(大乘)을 배우고 있는데 지금은 거의 황폐하여 줄어들었으나 역시 대승을 익히고 있다.
문자를 통일하여 뜻을 요약한 율의(律儀)를 전하고 가르쳤는데 5부(部)가 있었다. 1부는 법밀부(法密部)요, 2부는 화지부(化地部)요, 3부는 음광부(飮光部)요, 4부는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요, 5부는 대중부(大衆部)이다.
천사(天祠)가 10여 군데 있고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뒤섞여 살았으며 왕도(王都)는 몽게리성(瞢揭釐城)이다.
그 동쪽으로 5리 되는 곳의 큰 탑에는 많은 상서가 있었다. 여기서는 바로 부처님께서 옛날 인욕선인(忍辱仙人)이었을 때 갈리(羯利)[우리나라 말로는 투쟁(鬪爭)이다]라는 왕에게 온몸을 갈갈이 찢겼던 처소이다.
성의 동북쪽으로 2백60리를 가서 큰 산으로 들어가면 아파라(阿波邏)라는 용의 샘물[龍泉]에 이르며 곧 앞으로 흐르는 강의 근원이다. 지류는 서남쪽으로 흐르며 봄과 여름 모두 얼음이 얼고 새벽이나 저녁에는 눈이 날린다.
부처님께서 옛날 난폭한 용(龍)을 교화하실 적에 금강공이[金剛杵]로써 절벽을 치자 용은 두려워서 귀의하며 부처님께 비를 내리겠다고 청하였으므로 이에 허락하시어 사람들로 하여금 양식을 거두게 하였고 12년 만에 비가 내린 것으로 수재(水災)가 났다고 한다.
또 샘의 서남쪽으로 30여 리에서 물의 북쪽 언덕에 있는 큰 바위는 부처님께서 용을 조복시키시고 발자국을 남기면서 그에게 마음먹은 대로 길고 짧게 되는 것을 보이신 곳이다. 흐름을 따라 30여 리 가면 부처님께서 옷을 세탁하신 돌이 있는데 가사(袈裟)의 무늬가 마치 조각을 한 것과 같다.
성의 남쪽으로 4백여 리 되는 곳에 있는 혜라산(醯羅山) 골짜기에서 물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서 동쪽으로 오르면 꽃과 열매들이 절벽에 붙어 있고 혹은 시끄럽게 떠드는 말소리와 음악소리가 들리기도 하며 네모진 돌이 서로 이어져 놓여 있다. 여기는 바로 옛날 부처님께서 게송의 나머지 반을 듣기 위하여 몸을 버리려고 했던 곳이다.
성 남쪽의 2백여 리 되는 곳의 큰 산 곁에는 마하벌나사(摩訶伐那寺)[우리나라 말로는 큰 숲이다]가 있다. 부처님께서 옛날 살박달라왕(薩縛達羅王)[곧 일체시(一切施)이다]이 되어 나라를 잃고 피난하였던 땅으로 한 가난한 사람을 위하여 포박당하여 보내졌던 곳이다.
사찰의 서북쪽으로 산을 내려와 40여 리를 가면 절의 탑이 있는데 높이가 백여 척이나 된다. 그 곁의 네모진 돌 위에는 부처님 발자국 모양이 있어 광명을 뿜어 절을 비추니 하늘들을 위하여 본생(本生)을 말씀하셨던 곳이며, 탑 아래의 돌에는 황백(黃白)색의 진액이 묻어 있는데 여기는 옛날 부처님께서 법을 듣기 위하여 뼈를 끊고 경전을 베꼈던 처소이다.
또 서쪽으로 70리를 가면 탑이 있는데 여기는 옛날 부처님께서 시비가왕(尸毘迦王)[여기의 말로는 가마[輿]이다]때 몸을 베어 비둘기의 목숨을 대신했던 곳이다.
또 서쪽으로 2백여 리 가서 산니라암천(珊尼羅闇川)의 살부살(薩裒殺)[뱀의 약[蛇藥]을 말한다] 땅에 있는 사찰의 탑은 높이가 80척이다. 부처님께서 옛날 제석(帝釋)이셨을 때 큰 이무기로 쓰러져 죽어서 가난하고 전염병이 든 이들에게 보시했던 처소이다.
그 곁의 소마탑(蘇摩塔)은 부처님께서 변화로 소마사(蘇摩蛇)가 되어 그것을 먹은 사람들의 병을 낫게 한 처소이며 시냇가의 북쪽 절벽의 탑(塔)은 병든 이가 와서 기하면 거의 낫는다고 한다.
또 곁에서 솟아나오는 샘물은 부처님께서 옛날 공작왕(孔雀王)이었을 때 부리로 쪼아 내어 질병을 구했던 곳이다.
성의 서남쪽으로 70리 떨어져 있는 대하(大河)의 동쪽에 탑이 있는데 높이가 60척이나 된다. 이것은 온달라서나(嗢呾羅犀那)[상군(上君)이라는 말이다]왕이 조성하였다. 부처님께서는 사리(舍利)를 왕에게 나누어 주어 강가에 탑을 세우게 하였는데 왕이 흰 코끼리르 타고 돌아갈 때에 코끼리가 변하여 돌이 되었다고 한다.
성의 서쪽으로 50여 리를 가서 대하(大河)를 건너면 노혜달가탑(魯醯呾迦塔)[붉다는 뜻이다]이 있는데 높이는 50여 척이다. 부처님께서 옛날 자력왕(慈力王)이었을 때 찔러서 피를 내어 다섯 약차(藥叉)에게 마시게 했던 곳이다.
성의 동쪽으로 30리 되는 곳에 알부다(遏部多)[기특(奇特)하다는 말이다]라는 석탑(石塔)이 있는데 높이가 40척이나 된다. 부처님께서 사람과 하늘들을 위하여 설법하실 때에 탑이 땅에서 솟아 나왔는데 현재까지 남아 있다.
또 서쪽으로 대하(大河)를 건너 40리를 가면 정사(精舍)가 있고 아박려지저(阿縛慮枳抵)[관(觀)이라는 말이다]ㆍ이습벌라(伊濕伐羅)[자재(自在)라는 말이다]ㆍ보살상(菩薩像)[곧 관세음(觀世音)이다]이 있는데 감응과 영험으로 멀리까지 비추었다.
여기서 서쪽으로 1백4십 리가 되는 산 고개에는 용의 연못이 있고 둘레는 30여 리이며 왕성의 동북쪽으로 산골짜기를 넘어 위로 거슬러 올라가면 신도하(信渡河)인데 길이 몹시 험하여 매우 놓은 것을 잡고 잔교(棧橋)를 건너며 쇠사슬을 걸치고 말뚝을 박으면서 비탈을 밟고 올라가야 한다.
그리고 천여 리를 가면 달려라천(達麗羅川)에 이르는데 오장나(烏仗那)가 옛날 도읍했던 곳이다. 큰 절 안에는 나무로 조각한 매달려야(梅呾麗耶)[옛날에는 미륵(彌勒)이라 하고 당나라 말로는 자씨(慈氏)이다] 보살의 상(像)이 있으며 금빛이 번쩍거리며 높이는 백여 척이나 된다. 말전지가(末田底迦)[곧 말전지(末田地)이다] 아라한이 조성하였는데 신통력으로 공장(工匠)을 이끌고 도사다천(覩史多天)[곧 도솔천(兜率天)이다]을 세 번이나 올라가 상호를 자세히 살펴보았기 때문에 이렇게 잘 조성하였다고 한다. 이 상이 생긴 뒤로부터 법이 바야흐로 동방(東方)에 유포되었다.
동쪽으로 가다가 고개를 넘어서 신도하를 거슬러 험한 잔교를 밟고 5백여 리를 가야 이 강물을 다 건넌다.
또 동쪽으로 박추하(縛蒭河)를 건너 위험한 곳을 오르면 발로라국(鉢露羅國)에 이른다. 둘레는 4천 리요 큰 설산 가운데 있으며 동서로 길다. 사찰은 수백군데요 승려도 수천이며, 스승에게 계행(戒行)을 배우지만 대개가 함부로 행한다. 그 나라는 인도가 총괄하는 곳이 아니며 얼음과 눈이 많고 토지에는 금이 나오는데 불빛[火色]과 같다.
북쪽으로는 바라서라(婆羅犀羅)라는 큰 고개와 마주하고 있고 다시 돌아서 건타라국(健馱邏國)과 오탁가성(烏鐸迦城)의 남쪽으로부터 신도하를 건너게 되는데 넓이가 4리쯤 되는 거울과 같이 맑은 물이 서남쪽으로 흐른다. 독룡(毒龍)과 나쁜 짐승들이 굴 안에 살고 있으며 사리보화(舍利寶花)를 가진 사람은 누구나 배[船]가 침목한다고 한다.
강을 건너면 달차시라국(呾叉始羅國)[북인도(北印度)이다]에 이른다. 둘레는 2천여 리요 도성(都城)의 둘레는 10여 리이며 사찰은 많으나 승려는 적고 다 같이 대승을 배우는 이들이다.
성의 서북쪽으로 70여 리 되는 곳에 이라발용(伊羅鉢龍)의 연못이 있어 둘레는 백여 보(步) 된다. 못의 동남쪽으로 30리쯤 가면 양쪽 산 사이에 탑이 있어 높이는 백여 척이 된다. 옛날 부처님께서 자씨(慈氏)가 세간에 출현하면 4대장(大藏) 중 한 장(藏)이 이 땅에서 나오게 되기 때문에 진동이 있을 것이라고 수기(授記)하셨는데 이 둘레는 백 보(步)로 일찍이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으며 어떤 이라도 발굴하려고 들면 땅이 진동하여 사람이 쓰러져 죽는다고 한다.
성 북쪽으로 12리 되는 곳의 탑은 재일(齋日)이면 언제나 신령한 광명을 놓으며 신선이 꽃을 뿌리고 하늘의 음악이 울린다고 한다. 요즘에 어떤 나환자(癩患者)가 탑에 예배하고 참회를 드리면서 더러운 때를 닦고 향을 발랐더니 얼마 있지 않아 곧 나았으며 몸도 향기롭고 깨끗해졌다. 옛날 부처님께서 전달라발랄바왕(戰達羅鉢剌婆王)[월광(月光)이라 한다]이셨을 때 머리를 보시했던 곳으로 모두 천 년 동안 보시했다고 하며 그 탑의 이름은 월광탑(月光塔)이다.
성의 동쪽 남산(南山)에 있는 탑은 높이가 10장(丈)쯤 되며 결목왕(決目王)이 터를 닦고 아육왕(阿育王)이 조성하였다.
또 동남쪽으로 산골짜기를 넘어 7백여 리를 가면 승가보라국(僧伽補羅國)[북인도이다]에 이른다. 둘레는 3천5백 리요 서쪽은 신도하(信渡河)에 임해 있으며 큰 성의 둘레는 14ㆍ15리쯤 된다. 성의 동쪽 50리 되는 곳에 석탑(石塔)이 있는데 높이는 20여 장(丈)으로 부처님께서 노닐던 곳이며 연못과 늪이 10여 개나 되어 그 안의 사방은 온통 연꽃으로 뒤덮여 있다.
여기에서 남쪽으로 돌아가면 달차시라국(呾叉始羅國)의 북쪽 국경에 이르며 신도하를 건너 동쪽으로 2백여 리를 가서 큰 돌문을 거너면 바로 마하살타(摩訶薩埵)왕자가 몸을 버리어 호랑이 밥이 된 곳이 나온다. 동쪽으로는 사찰이 있고 승려는 백여 명이 된다.
또 남쪽으로 1백5십 리 떨어져 있는 석탑은 살타께서 대나무를 가지고 자기 몸을 찔러서 피를 내어 짐승에게 먹였던 곳이다. 땅과 초목이 지금까지도 진홍색이다.
다음 북쪽 석탑은 높이가 20여 장(丈)으로 광명을 뿜어 신심을 일깨워 주며 병든 자가 귀의하면 거의 나았다.
또 동쪽으로 50여 리 가면 홀로 떨어져 있는 산에 사찰의 탑이 있는데 높이는 2백여 척이다. 승려의 무리는 2백 명이며 모두 대승을 배우고 있다. 부처님께서 옛날 약차(藥叉)에게 고기를 먹지 않도록 교화한 곳이다.
또 동남쪽의 산으로 5백여 리를 가면 오자시국(烏刺尸國)[북인도이다]에 이른다. 둘레는 2천여 리가 되고 토산(土山)이 서로 이어져 있으며 도성의 둘레는 18리이다. 부처님 법을 믿지 않으며 가습미라(迦濕彌羅)왕국에 속한다. 부처님탑이 있는데 높이는 20여 장(丈)이며 아육왕이 조성하였다. 사찰은 있지만 승려는 적으며 대승의 가르침을 배우고 있다.
또 동남쪽으로 산을 올라 철교(鐵橋)를 지나 천여 리 가면 가습미라국(迦濕彌羅國)[북인도이며 옛날은 계빈(罽賓)이라 하였다]에 이른다. 둘레는 7천 리요 사면이 산으로 되어 있으며 비록 문이 있다고 해도 길이 좁아서 교통하기에 나쁘다.
성의 서쪽은 대하(大河)에 임해 있고 길이는 13리이며 넓이는 4리쯤 된다. 사찰은 백여 군데요 승려는 5천여 명이며 토지에서는 용종마(龍種馬)와 울금(鬱金)과 화주(火珠)가 나왔다.
네 곳에 부도(浮圖)가 있는데 각각 사리(舍利)가 한 되 남짓씩 있으며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 4백 년이 되어 협존자(脅尊者)가 나이 80에야 비로소 출가하여 무학(無學)을 증득한 뒤 5백 명의 아라한들을 데리고 이 곳에 와서 10만의 게송[頌]으로 『오파제삭석(鄔波弟鑠釋)』과 『소달람장(素呾纜藏)』[곧 우바제사론(優婆提舍論)ㆍ수다라장(修多羅藏)의 다른 이름이다]을 지었고 다음에는 10만의 게송으로 『비나야비바사론(毘奈耶毘婆沙論)』을 지었으며 다음에는 10만의 게송으로 『아비건마론(阿毘建摩論)』을 지었으니 무릇 6백60만의 단어로써 삼장을 갖추어 해석하였다.
신성(新城)의 동남쪽으로 10여 리에 있는 옛 성의 북쪽에는 대산양사(大山陽寺)의 탑이 있고 승려의 무리가 3백 명이며 길이 1촌 반이 되느 부처님의 어금니는 빛깔이 황백(黃白)색인데 재일(齋日)마다 광명을 뿜는다.
또 남쪽으로 15리 되는 곳에는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의 입상(立像)이 있는데 어떤 이라도 뵙기를 원하여 단식(斷食)을 하면 곧 뵙게 된다.
왕성(王城)의 서북쪽으로 2백여 리 가면 상림사(商林寺)에 이른다.
성의 서쪽으로 5백10리에 있는 대하(大河)는 북쪽으로 산에 맞닿아 있는데 절이 있고 승려는 백여 인이다.
이로부터 서남쪽으로 산을 넘어 7백여 리를 가면 반노차국(半笯蹉國)[북인도이며 계빈(罽賓)에 속한다]에 이른다. 둘레가 2천여 리요 절은 다섯 군데 있으며 산과 하천이 많다.
동남쪽으로 4백여 리 가면 알라사보라국(遏羅闍補羅國)[정식의 북인도는 아니며 바로 황복국(荒服國)이다]에 이른다. 둘레는 4천여 리요 도성의 둘레는 천여 리이며 사찰은 열 군데요 승려는 아주 적으며 천사(天祠)는 한 군데인데도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
남파달(濫波達)부터는 형체가 더럽고 경박하며 인도의 정식 국경이 아니다. 여기에서 산을 내려가 동남쪽으로 가면 다 같이 큰 시내들이며 먼 곳까지 이르러도 밭두둑이 없고 오직 하천(河川)으로 나라의 경계를 나누어 있을 뿐이다. 비록 작은 산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은 모두 외로이 서있다.
이로부터 북쪽으로는 전체가 설산과 이어져 있고 동쪽으로 가면 신주(神州)에 이르며 양부(涼部)로부터 남쪽은 모두가 설산이다. 이 산을 상고하건대 역시 섬부(贍部)가 크게 땅을 누르는 것일 것이다.
이 성(城)에서 동남쪽으로 편편한 곳을 내려가 물을 건너고 7백여 리를 가면 책가국(磔迦國)[북인도이다]에 이른다. 둘레는 1만여 리요 동쪽은 비파사하(毘播奢河)를 의지하며 서쪽은 신도하(信渡河)에 임해 있다. 도성의 둘레는 20여 리요 세속에서 부처님을 믿는 이들은 적고 천신(天神)을 많이 섬기므로 사찰은 10여 군데가 있을 뿐이나, 천사는 수백 군데나 된다.
성에서 서남쪽으로 15리 되는 곳에 있는 사갈라(奢羯羅)의 옛 성(城)에는 절의 탑이 있고 높이는 20여 장(丈)인데 옛날 네 부처님께서 설법하시고 오가며 거니시던 곳이다.
또 서북쪽으로 6리쯤 되는 곳에 탑이 있는데 높이는 20여 장이며 역시 네 분의 부처님께서 설법하셨던 곳이다.
새 도성(都城)의 동북쪽으로 10여 리 되는 곳에 있는 석탑은 높이가 20여 장이며 사리가 많이 있고 재일에는 광명을 뿜는다.
동쪽으로 5백여 리 가면 나복지국(那僕之國)[북인도이다]에 이른다. 둘레는 2천여 리요 도성의 둘레는 14ㆍ15리쯤 되며 사찰은 열 군데이고 천사는 여덟 군데이다.
성의 동남쪽으로 5백여 리 가면 사림사(闍林寺)에 이르고 둘레는 20여 리이며 부처님의 사리탑(舍利塔) 수효는 백 또는 천 구(區)이다. 아울러 석실(石室) 등이 있고 승려는 3백 명이 있으며 소승의 설유부(說有部)를 배운다. 덕행은 맑고 높되 학문에 박식(博識)한 이는 적다.
현겁(賢劫)의 천불(千佛)이 다 같이 여기서 설법하시게 된다. 석가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의 3백 년이 되는 때에 가다연나(迦多衍那)[가전연(迦栴延)이다]가 여기서 『발지론(發智論)』을 지었으며 절의 탑 높이는 20여 장(丈)이요 네 분의 부처님께서 다니고 앉았던 흔적이 있는 곳이다.
이로부터 동쪽으로 1백 50리를 가면 사란달나국(闍爛達那國)[북인도이다]에 이른다. 동서로 천여 리요 남북으로 6백여 리이며 도성의 둘레는 10여 리이다. 사찰은 50군데 있고 승려는 2천여 명이며 대승ㆍ소승을 다 닦았다. 천사는 세 군데이고 외도(外道)들은 5백 인이다.
동북쪽으로 산을 넘어서 7백여 리를 가면 굴로다라국(屈露多羅國)[북인도이다]에 이른다. 산이 사방으로 둘러싸여 있고 도성의 둘레는 14ㆍ15리이며 사찰은 20여 군데에 있고 승려는 1천여 명이며 대부분이 대승을 배운다. 천사는 15군데 있고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뒤섞여 살고 있다. 화주(火珠)와 우석(雨石)이 나오고 세속에서는 혹[癭]이 나고 또한 수중다리[尰]를 앓는 이가 많았다. 성안에 탑기(塔記)가 있었는데 부처님께서 일찍이 여기에 노니시면서 설법하셨다고 한다.
이로부터 북쪽으로 약 2천여 리를 가면 산길이 위험한 곳에 낙호라국(洛護羅國)[북인도이다]이 있다. 또 북쪽의 산으로 2천여 리를 가면 눈이 내리고 추위가 아주 심하며 말라사국(秣邏娑國)[북인도이다]에 도달한다.
또 굴로라(屈露羅)로부터 남쪽으로 7백여 리를 가서 산제하(山濟河)를 건너면 설다도로국(說多圖盧國)[북인도이다]에 이른다. 둘레는 2천여 리요 서쪽으로는 대하(大河)에 임하며 도성은 17ㆍ18리이다. 불법이 크게 성행한데도 성 안팎에 있는 사찰을 10여 군데요 승려도 역시 적을 뿐이다.
성의 동쪽으로 3리를 가면 탑의 높이가 20여 장(丈)이며 아육왕이 조성하였다. 곁에는 네 분의 부처님께서 다니시고 앉았던 흔적이 있다.
이로부터 서남쪽으로 8백여 리를 가면 파리야달라국(波狸夜呾羅國)[중인도(中印度)에 속한다]에 이른다. 둘레는 3천여 리 되고 도성의 둘레는 15리이며 사찰은 여덟 군데 있고 승려도 역시 적을 뿐이며 세속에서는 외도(外道)를 믿어서 열 군데의 천사에 이교도들이 천여 명이나 있다. 땅에는 벼농사를 지어 60일 만에 수확한다.
동쪽으로 5백여 리를 가면 말토라국(秣菟羅國)[중인도이며 옛날의 마투라(摩偸羅)이다]에 이른다. 둘레는 5천여 리요 도성은 20여 리이며 사찰은 20여 군데 있고 승려는 2천여 명이며 대승과 소승을 다 배운다. 천사는 다섯 군데이며 이교도들이 뒤섞여 살고 있다. 토지에는 암몰라과(菴沒羅果)를 심는데 작은 것은 날것일 때는 푸르다가 익으면 노랗게 되었고 큰 것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청색이다.
성 안에는 세 개의 탑과 네 부처님의 남은 흔적이 아주 많다. 그리고 사리자(舍利子)와 몰특가라자(沒特伽羅子)[목건련(目乾連)이라 이름한다]와 만자자(滿慈子)[부루나(富婁那)이다]와 우파리(優婆釐)[우바리(優波離)이다]와 아난타(阿難陀)와 라호라(羅怙羅)와 만수실리(曼殊室利) 등의 탑이 모두 있다.
매양 삼장(三長) 6월에는 모든 승니(僧尼)들이 모이는데 아비달마(阿毘達磨) 대중은 사리불의 탑에 공양하고 선정[定]을 익힌 대중들은 목건련의 탑에 공양하며 경을 독송하는 대중은 만자자의 탑에 공양하고 비나야(毘奈耶)의 대중은 우파리의 탑에 공양하며 비구니 대중은 아난의 탑에 공양하고 구족계를 받지 않을 대중은 나호라의 탑에 공양하며 대승(大乘)의 대중은 모든 보살의 탑에 고양하였다.
이 모든 탑을 살펴서 헤아리건대 반드시 유골이 있는 것은 아니며 다만 상(像)만을 세워 공양을 시설하면서 그로써 마음을 바치려고 조성했을 뿐이니 마치 라호라나 문수(文殊)가 아직 멸도(滅度)하지 않은 것으로도 금방 알 수 있다.
성의 동쪽으로 6리를 가면 산애사(山崖寺)가 있는데 이것은 존자 오파국다(烏波麴多)[근호(近護)라고 한다]가 조성하였으며 부처님의 지조탑(指爪塔)이 있다.
절 북쪽의 바위로 된 암자는 높이가 2장(丈)이요 넓이는 3장인데 4촌(寸) 정도의 가는 산가지가 그곳을 채우고 있다. 요즘 호도(護導) 부부[夫妻]가 함께 아라한을 증득하였으나 산가지 한 개를 보내어 여기에는 어긋났으므로 석실의 기록에는 있지 않았다.
또 석실의 동남쪽으로 20여 리쯤 가서 말라버린 큰 못 곁에 탑이 있느데 부처님께서 일찍이 여기에서 노니실 때에 어떤 원숭이가 꿀을 가져다 부처님께 드렸는데 부처님께서 물을 타서 온 대중이 함께 마시게 하자 원숭이는 기뻐하다가 구덩이에 빠져 죽어 곧 인간세상에 태어났다고 한다.
못의 북쪽의 숲 속은 네 부처님께서 오가며 다니시던 곳으로 커다란 유적(遺迹)이 있다.
또 동북쪽으로 5백여 리를 가면 살타니습벌라국(薩埵泥濕伐羅國)[중인도이다]에 이른다. 둘레는 7천여 리요 도성의 둘레는 20여 리이며 사찰은 세 군데가 있고 승려는 7백 명인데 모두 소승을 배운다. 천사는 백여 군데나 되고 이교도들이 아주 많다.
성의 서북쪽으로 4리쯤 되는 곳의 탑은 높이가 20여 장(丈)으로 사리는 한 되가 있으며 때로 큰 광명을 뿜었다. 그리고 성의 남쪽으로 백여 리를 가면 불사(佛寺)에 이른다.
또 동북쪽으로 4백여 리를 가면 솔록륵나국(窣祿勒那國)[중인도이다]에 이른다. 둘레는 6천여 리이고 조금 황폐해졌다. 동쪽의 국경은 긍가하(殑伽河)[곧 옛날의 항하(恒河)이다]에 임하고 북쪽은 큰 산성(山城)에 접하였으며 동남쪽은 염모나하(閻牟挪河)인데 나라의 서북쪽 산에서부터 중앙의 국경으로 나와 흐른다.
도성의 둘레는 20여 리요 동쪽은 염모하(閻牟河)에 임하였으며 사찰은 다섯 군데 있고 승려는 천여 명인데 대부분 소승을 배우고 있다. 천사는 백여 군데인데 이교도들이 매우 많다. 염모하의 서쪽에 있는 큰 절과 동쪽 문 밖에 있는 탑은 부처님께서 일찍이 설법하고 사람들을 제도하신 곳이며 그 옆에는 부처님의 머리카락과 손톱을 모신 탑이 있다.
염모하의 동쪽으로 8백여 리를 가면 긍가강의 근원이 된다. 넓이는 3ㆍ4리며 동남쪽에서 바다로 들어가는 데 넓이는 10여 리가 된다. 물빛은 푸르며 맛은 달고, 모래는 가늘며 물을 따라서 흘러간다. 세속에서는 복스러운 물로 여겨 목욕을 하게 되면 죄가 없어진다고 생각한다. 어떤 이는 목숨을 가볍게 여겨 스스로 물에 빠져 죽어 천상에 태어나서 쾌락을 얻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승가라국(僧伽羅國)의 제바보살(提婆菩薩)이 외도들을 교화하여 바른 법(法)을 받도록 한 곳이다.
긍가하를 건너 동쪽으로 가면 말지보라국(秣底補羅國)[중인도이다]에 이른다. 둘레는 6천여 리요 도성의 둘레는 20여 리이며 부처님을 믿지 않고 하늘을 공경한다. 사찰은 10여 군데 있고 승려는 8백 명이며 대부분 소승을 배우는 이들이다. 천사는 50여 군데나 있고 이교도들끼리 뒤섞여 산다.
나라의 서북쪽의 국경이며 긍가하의 동쪽 언덕에 있는 마유라성(摩裕羅城)의 둘레는 20여 리이며 유석(鍮石)과 수정(水精)이 나온다. 성 옆은 큰 강에 임하여 있고 큰 천사(天祠)가 있어서 위엄 있는 영험이 많이 있다. 못이 있었는데 돌을 쌓아서 언덕이 되었고 강물을 끌어서 갯벌을 만들었다.
5인도(印度)에서는 긍가하의 문(門)을 복이 생기고 죄가 소멸하는 곳으로 여기므로 언제나 백천(百千)의 사람들이 목욕을 한다.
마유(摩裕)로부터 북쪽으로 3백 리를 가면 바라흡마보라국(婆羅吸摩補羅國)[북인도이다]에 이른다. 둘레는 4천여 리가 되고 산이 사방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도성의 두레는 20여 리이다. 사찰은 다섯 군데요 승려는 적으며 천사는 열 군데이고 이교도들이 뒤섞여 살고 있다.
나라의 북쪽은 대설산(大雪山)이며 소벌라나구달라국(蘇伐剌那瞿呾羅國)[금씨(金氏)라고 말한다]이 있다. 아주 좋은 품질의 황금(黃金)이 나오고 동서로 길며 바로 동녀국(東女國)으로서 인도에 속한 곳이 아니다. 또는 대양동국(大羊同國)이라고 한다.
동쪽은 토번(土蕃)에 접하고 서쪽은 삼파하(三波訶)에 접하며 북쪽은 우전(于闐)에 접하여 있는데 이 나라는 대대로 여인을 왕으로 삼고 있으며 그 남편도 역시 와이 되기는 하지만 나라의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남자들은 정벌(征伐)을 나가고 농사를 짓고 있을 뿐이다.
또 말지보라국(秣底補羅國)으로부터 동남쪽으로 4백여 리를 가면 구비상나국(瞿毘霜那國)[중인도(中印度)이다]에 이른다. 둘레는 2천여 리요 도성(都城)은 14ㆍ15리이며 사찰은 두 군데 있고 승려는 1백여 명이며 소승을 익히고 있다. 천사는 30여 군데나 되고 이교도들이 섞여 살고 있으며 성은 견고하고 험준하다. 그 곁에 있는 옛 절의 탑은 높이가 20여 장(丈)인데 일찍이 부처님께서 이곳에서 한 달 동안 설법하셨다. 머리카락과 손톱이 있는 두 탑의 높이는 각각 한 길[丈] 남짓하며 곁에는 네 부처님께서 앉으셨던 흔적이 있다.
또 동남쪽으로 4백여 리를 가면 악혜제달라국(堊醯掣呾邏國)[중인도이다]에 이른다. 둘레는 3천여 리요 도성의 둘레는 17ㆍ18리쯤 되며 사찰은 10여 군데 있고 승려는 1천여 명이 있으며 소승의 정량부(正量部)를 익히고 있다. 천사는 아홉 군데 있고 외도(外道)는 3백여 명이나 되며 성(城)은 험준하고 견고한 데에 의지하고 있다. 그 바깥의 못 곁은 부처님께서 용을 위하여 7일 동안 설법하신 곳이다. 탑이 세워진 곁에는 네 부처님께서 다니고 앉으셨던 자취가 있는데 탑을 세워 그것을 표시하고 있다.
또 남쪽으로 2백70리를 가서 긍가하를 건너고 서남쪽으로 들어오면 비라산나국(毘羅珊拏國)[중인도이다]에 이른다. 두레는 2천여 리요 도성의 둘레는 10여리로 외도를 믿고 불법을 공경하는 이들은 적다. 사찰은 두 군데 있고 승려의 무리는 3백여 명이며 모두 대승을 배우고 있다. 천사(天祠)는 다섯 군데 있다. 성 안에 있는 절의 탑은 높이가 10여 장이나 되는데 부처님께서 일찍이 여기서 7일 동안 온(蘊)ㆍ계(界)의 법을 말씀하셨으며 네 부처님께서 다니고 앉으셨던 유적(遺迹)이 아직 남아 있다.
동쪽으로 2백여 리를 가면 겁비타국(劫比他國)[중인도이며 옛날의 승가사(僧伽舍)이다]에 이른다. 둘레는 2천여 리요 도성의 둘레는 20여 리이며 사찰은 네 군데 있고 승려는 1천여 인이 된다. 천사는 열 군데이고 다 같이 대자재천(大自在天)을 섬기면서 모두 천상(天像)을 만드는데 그 형상에서 사람의 남근을 아주 길고 크게 만들었다. 속인들은 그것을 나쁘게 여기지 않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모든 중생들은 하늘의 남근으로 생겨났다.”
성의 동쪽으로 20여 리 떨어진 큰 절 안에는 승려가 수백 인이고 정인(淨人)이 수만 명이었는데 모두가 집을 절 곁에 두고 있다.
큰 담 안에는 하늘 제석(帝釋)이 만든 세 개의 보배 계단이 있는데 가운데 계단은 황금으로 만들고 왼쪽 계단은 수정(水精)으로 만들며 오른쪽 계단은 백은(白銀)으로 만들었다. 남쪽에서 북쪽까지 줄을 지어 놓았고 동쪽으로 닿는 것은 땅 아래에 놓아 두었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서다림(逝多林)[곧 기타림(祇阤林)이다]으로부터 하늘의 선법당(善法堂)으로 올라가시어 어머니를 위하여 세 달 동안 설법하시다가 내려오신 곳이다. 백 년 전만 하여도 계단이 남아 있었다는데 지금은 모두 없어져 버렸다.
뒷날에 왕이 그것을 본받아 높이 70여 척으로 만들어 그 위에 정사(精舍)를 세웠다. 그 곁에는 돌기둥이 있어 빛이 반짝거리는데 사람의 죄와 복에 따라서 그림자가 기둥 가운데서 나온다고 하였다. 섬돌 곁에 아육왕이 조성한 부도(浮圖)가 있고 네 부처님께서 다니고 앉으셨던 흔적도 있다.
부처님께서 씻고 목욕하셨던 곳에 탑을 세웠는데 거기에는 부처님께서 방으로 사용하시던 정사(精舍)가 있다. 또 그 곁에는 부처님께서 오가며 다니셨던 돌의 흠집이 있고 길이는 50보(步)이며 높이는 7척이나 된다. 발로 밟으셨던 곳에는 모두 연꽃 무늬가 있고 그 좌우의 작은 탑은 범왕(梵王)이 조성하였다.
그 중 앞의 것은 바로 연화비구니[蓮華尼]가 변화로 전륜왕(轉輪王)이 되어 먼저 부처님을 뵈었던 곳인데 부처님께서는 비구니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먼저가 아니니라. 소부지(蘇部底)[수보리(須菩提)이다]가 석실(石室)에 좌선[宴坐]하고 있으면서 모든 법이 공(空)한 것을 알고 나의 법신(法身)을 보았느니라.”
다음 동남쪽의 못에는 용이 살고 있는데 항상 성인의 유적을 지키고 있으므로 가볍게 범할 수 없다고 한다.
여기에서 서북쪽으로 2백 리를 좀 못 가면 갈야국사국(羯若鞠闍鞠)[중인도의 곡녀성(曲女城)이다]에 이른다. 둘레는 4천여 리요 도성의 서쪽은 긍가하와 가까운데 길이는 20여 리나 되고 넓이는 4ㆍ5리쯤 된다. 사도(邪道)와 정도(正導)를 믿는 이가 반반인데 사찰은 백여 군데요 승려의 무리는 만 명이나 되며 대승ㆍ소승을 겸하여 배우고 있다. 천사는 2백여 군데나 되고 이교도들은 수천 명이 있다.
5인도(印度)를 거느리는 도왕(都王)의 이름은 바로 시라일다(尸羅逸多)[계일(戒日)을 말한다]요, 폐사(吠奢)가 성(姓)이다. 처음 왕위에 등극하려 할 적에 긍가(殑伽)의 언덕에 있는 관자재상(觀自在像)이 그에게 청하였다.
“그대는 본래 이 숲에 있던 난야(蘭若)의 비구였습니다. 금이(金耳)의 월왕(月王)은 이미 불법을 멸망시켰으나 왕은 마땅히 거듭 부흥시켜야 합니다. 만물을 가엾게 여기는 생각을 품어야 비로소 다섯 나라의 왕노릇을 하리니 부디 사자좌(師子座)에 오르거나 대왕(大王)이란 호칭을 쓰지 마십시오.”
왕은 이에 동자왕(童子王)과 함께 외도와 월왕(月王)의 무리들을 평정하였으며 또 엄격한 법령을 다음과 같이 제정하였다‘
“고기를 먹는 사람은 혀를 자를 것이오. 살생을 하는 사람은 손을 벨 것이다.”
그리고는 과부(寡婦)가 된 누이동생과 함께 나라의 일을 맡아보았다.
긍가하 곁에 1천(千)의 부도(浮圖)를 세우니 각각의 높이는 백여 척이었고, 도시나 시골의 길거리에까지 정사(精舍)를 세웠으며 음식을 저장하고 의약(醫藥)을 충분히 준비해 두어 자유가 없고 가난한 이들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성인의 유적이 있는 곳에는 모두 절을 세웠고 20년 동안 5년에 한 번씩 집회를 열었으며 마을의 창고를 기울여 뭇 백성들을 구제하였고 병기(兵器)는 마련해 두되 다만 뜻밖에 일어날 일을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처음 집회를 연 날에는 모드 나라의 승려를 모아서 21일 동안 네 가지의 일[四事]로 공양하였고 서로 논의하여 계행(戒行)이 곧고 견고하며 도덕(道德)이 뛰어난 이를 사자좌(師子座)에 오르게 하였다. 왕은 그에게 계(戒)를 받았으며 청정한 무학(無學)에게는 숭앙하는 마음을 나타내었고 더러운 행동이 드러난 이는 나라의 영토 밖으로 쫓아버렸으며 왕의 신하로서 복을 심는 데 게으르지 않는 이들은 누구나 손을 이끌어 같이 앉았거니와 이와 다른 이들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왕은 돌아다니면서 지방의 풍속을 살피느라 언제나 가만히 앉아 있지 않았다. 다닐 때에는 반드시 4병(兵)이 엄중하게 수행하였고 배를 띄우고 코끼리를 타며 북을 치고 소라를 불면서 상군(象軍) 8만으로 사방의 먼 곳까지 위세를 떨쳤다.
오직 두 세 달 동안은 밖으로 돌아다니지 않고 궁중에서 매일 모든 사문들에게 공양을 대접하였으니 승려는 1천여 명이었고 바라문은 5백 명이었다.
하루는 세 때[三時]로 나누어서 한 때는 나라의 일을 처리하고 두 때는 복을 빌었으며 또한 고기를 먹지 않았고 날마다 한 번씩 규정을 두어 예배드렸다.
하서사(河西寺)의 동쪽에 보대(寶臺)를 세웠는데 높이는 백여 척으로 그 안에 등신(等身)의 금상(金像)이 있다. 다음 남쪽에 세운 보단(寶壇)은 불상(佛像)을 목욕시키는 곳이었다.
여기에서 동북쪽으로 15리쯤 되는 곳에 따로 행궁(行宮)을 지었고 사찰에서 궁중에 이르는 좁은 길에는 누각을 세워 갖가지 장식을 다하였으며 악기를 연주하는 이들을 옮기지 않고 번갈아 연주하게 하였다.
또 3척의 금상(金像)을 남들이 보지 못하게 큰 코끼리에다 싣고 그 위에 보배 휘장을 쳤다. 왕은 제석상(帝釋像)을 만들어 보배 일산을 들고 왼편에서 모시게 하였고 가마루파국(迦摩鏤波鞠)의 구마라왕(拘摩羅王)[동자(童子)라고 말한다]은 범왕상(梵王像)을 만들어 불자(拂子)를 들고 오른편에서 모시게 하였으며 각각 5백의 상군에게 갑옷을 입히어 함께 호위하게 하고 앞뒤로 각각 백 마리의 큰 코끼리들이 따랐고 그 위에 탄 악인(樂人)들이 북을 치고 연주하며 소리를 내었다.
계일왕(戒日王)은 또 진주(眞珠) 등의 여러 가지 보배와 금ㆍ은으로 된 모든 꽃을 나가면서 계속 사방에 뿌리어 3보(寶)에게 공양하였다.
5인도에는 비구니 사찰이 드물며 비록 비구니가 있다 하더라도 비구승들과 같은 문중이라 밥을 같은 장소에서 먹으나 계율에 어그러짐이 없었다.
그리고 동자왕(童子王)은 찰제리(刹帝利)의 종성(種姓)으로 사인(使人) 이의표(李義表)에게 말하였다.
“윗 대(代)로부터 서로 이어 내려온 지 4천 년이 되는데 앞서의 신령한 성왕(聖王)은 한(漢)나라 땅에서 날아 오셨다고 합니다.”
왕의 국토에서 성(城)의 서북쪽에 있는 탑은 아육왕이 조성하였는데 옛날 부처님께서 여기에서 7일 동안 설법하셨다고 하며 그 곁에는 머리카락과 손톱을 모신 탑이 있고 네 분의 부처님께서 다니고 앉으셨던 흔적이 있다.
또 남쪽으로 긍가하에 임해 있는 세 사찰은 담은 같으나 문이 다르며 불상은 엄숙하면서도 화려하다.
부처님의 어금니는 길이가 1촌 반이고 빛깔이 변할까 염려하여 보배 함에 담아 두었는데 멀고 가까운 곳에서 보려고 오는 이가 하루에도 백천이나 되었다. 지키는 이가 번거롭게 여겨 막중한 세금으로 보배를 요구하였으나 즐겁게 예배하려는 이들은 귀중한 재화(財貨)도 사양하지 않았다. 재일(齋日)에는 꺼내어 높은 자리 위에 안치하였는데 뿌린 꽃이 비록 쌓이게 되어도 어금니를 모신 함은 묻히지 않았었다.
절의 승려들은 청정하면서 엄숙하였고 사원의 노복들[淨人]은 수천 호(戶)였다. 절 앞과 좌우의 정사(精舍)는 높이가 백여 척이나 되었고 돌로 기초를 쌓고 벽돌로 된 방안의 상(像)은 보배로 장엄하거나 혹은 순수한 금과 은으로 만들기도 하였다.
다음 동남쪽의 큰 정사에 있는 돌로 기초를 쌓고 벽돌로 만든 방은 높이가 20여 장(丈)이나 되었는데 여기는 부처님께서 몸은 영원하지 않고[無常] 괴로우며[苦] 공(空)하고 깨끗하지 않다[不淨]고 설법하셨던 곳이며 또 네 부처님께서 다니고 앉으셨던 흔적이 남아 있다.
성의 동남쪽으로 6ㆍ7리를 가면 긍가하의 남쪽 강가가 나오고 위의 성에서 동남쪽으로 백여 리를 가면 납박제바성(納縛提婆城)이 있는데 긍가하의 동쪽 강가에 의지하여 있다.
세 절이 담은 같이 하였으나 문이 달랐으며 둘레는 20여 리요 다음으로 2백여 보(步) 앞에 있는 탑은 높이가 20여 장이며 부처님께서 일찍이 7일 동안 설법한 곳이었다. 그 속에는 사리(舍利)가 있어서 때로 광명을 뿜었고 그 곁에는 네 부처님께서 다니고 앉으셨던 흔적이 남아 있다.
사찰 북쪽으로 4리 되는 곳에 긍가하의 언덕을 마주하고 있는 탑은 높이가 20여 장으로 부처님께서 일찍이 7일 동안 설법하신 곳이며 4백의 아귀(餓鬼)들이 깨달아 천상에 태어났다고 한다. 그 곁에는 머리카락과 손톱을 모신 탑이 있고 그 다음에는 다시 네 부처님께서 다니고 앉으셨던 흔적이 남아 있다.
또 동남쪽으로 6백여 리를 지나 긍가하를 건너고 남쪽으로 가면 아수타국(阿輸阤鞠)[중인도이다]에 이른다. 둘레는 5천여 리요 도성의 둘레는 20여 리이며 절은 1백여 군데 있고 승려는 3천여 명이며 대승ㆍ소승을 겸하여 배웠다. 천사는 열 군데가 있고 이교도들은 적을 뿐이다.
성안의 옛 사찰은 바로 벌소반도(伐蘇畔度)보살[세친(世親)을 말한다]이 수십년 동안에 대ㆍ소승의 논서를 지었던 곳이며 성 북쪽으로 5리 되는 곳에 긍가하의 강가가 있고 큰 절 안의 탑은 높이가 20여 장으로 부처님께서 하늘과 사람들을 위하여 세 달 동안 여기서 설법하셨다. 그 곁에는 탑이 있는데 네 부처님께서 다니고 앉으셨던 흔적이다.
절에서 서쪽으로 5리쯤 떨어져서 부처님의 머리카락과 손톱을 모셔놓은 탑이 있으며 성의 서남쪽으로 대암몰라(大菴沒羅) 숲 속의 옛 절은 바로 아승가보살(阿僧伽菩薩)[무착(無著)을 말한다]이 밤에 천궁(天宮)으로 올라가 자씨(慈氏)의 처소에서 유가(瑜伽)와 장엄(藏嚴)의 『대승경론(大乘經論)』과 『변중변론(辯中邊論)』 등을 받아와서 날이 밝으면 중생들을 위해 설하였으며 숲의 서북쪽으로 백여 보(步) 떨어져서 부처님의 머리카락과 손톱을 모신 탑이 있다.
여기에서 동쪽으로 3백여 리를 지나 긍가하를 건너 북쪽으로 가면 아야목거국(阿耶穆佉鞠)[중인도이다]에 이른다. 둘레는 2천5백 리요 도성은 강에 임하여 있으며 둘레는 20여 리이다. 사찰은 다섯 군데 있고 승려는 1천여 명이며 소승을 익히고 배웠다. 천사는 열 군데요 이교도들이 뒤섞여 살고 있다.
성의 동남쪽은 긍가하와 만나고 탑의 높이는 20여 장(丈)이며 부처님께서 일찍이 세 달 동안 설법하셨던 곳이다. 머리카락과 손톱을 모신 푸른 돌로 된 탑이 있으며 네 부처님께서 다니고 앉으셨던 흔적이 남아 있다.
또 동남쪽으로 7백여 리를 지나 긍가하를 건너 남염모나하(南閻牟那河)의 북쪽으로 가면 발라가야국(鉢羅伽耶鞠)[중인도이다]에 이른다. 둘레는 5천여 리요 도성은 두 하천이 교차하는 곳에 의거하여 있으며 둘레는 20여 리이다. 사찰은 두 군데요 승려들은 적으며 천사는 수백 군데이고 이교도들이 특히 많다.
성의 서남쪽은 염모하(閻牟河)에 임해 있고 강의 구비가 2ㆍ3천 리에 이어져 있으며 동북쪽으로 흐르면서 합쳐진 사이에는 첨박가(瞻博迦) 꽃이 있으며 숲속에 있는 탑은 높이가 10여 장이다. 일찍이 부처님께서 외도를 항복시키셨다. 머리카락과 손톱을 모셔놓은 탑과 오가며 다니신 흔적이 남아 있으며 또 제바보살(提婆菩薩)이 『광백론(廣百論)』을 지은 곳이다.
성 안에 있는 천사(天祠)의 건물 앞의 큰 나무는 가지와 잎이 빽빽이 우거져서 무성한데 식인귀(食人鬼)가 그것에 의지하여 있으며 좌우에는 죽은 사람의 뼈들이 더미를 이루고 있다. 천사 안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목숨을 가벼이 여기지 않는 이가 없으므로 나무에 올라가 아래로 떨어지도록 귀신의 유혹을 받는다.
성 동쪽으로 두 하천의 사이가 교차한 곳은 10여 리나 되며 토지는 편편하면서 시원하게 펼쳐졌고 가는 모래가 가득 깔려 있으며 예전에나 현재의 왕호(王豪)로서 보시를 한 이는 누구나 머물지 않는 이가 없었으므로 크게 보시하는 마당[大施場]이라고 불렀으며 계일대왕(戒日大王)도 역시 여기서 선업[業]을 닦았다.
그 광장의 동쪽으로 강물이 합류(合流)하는 어귀에는 날마다 수백 명이 스스로 빠져 죽었는데 그곳 풍속에 “천상에 나게 되는 곳”이라고 하였다. 어떤 이라도 그러한 법을 행하고자 하면 7일 동안 여기서 먹지 않고 있다가 스스로 중류(中流)에 빠져서 멀거나 가까운 데로 흘러가는 것이며 이에 산의 원숭이나 들의 사슴에 이르기까지 떼를 지어 물가에서 놀며 아무 것도 먹지 않다가 물 속에 빠져 죽었다.
계일왕(戒日王)이 보시를 할 때에는 어느 두 원숭이가 있었는데 암컷이 개에게 물려 죽자 수컷이 그 시체를 업어다 이 강물 속에 던지고 그도 또한 스스로 굶다가 여러 날만에 죽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서남쪽으로 큰 숲과 들판을 지나 5백여 리를 가면 교상미국(憍賞彌鞠)[중인도이다]에 이른다. 둘레는 6천 리요 도성의 둘레는 30여 리이며 사찰은 10여 군데 있고 승려는 3백여 명이며 천사는 50군데요 외도들이 아주 많다.
성안의 옛 궁전에 있는 큰 정사(精舍)는 높이가 60여 척이며 전단(栴檀)으로 조성한 불상이 있고 그 위는 돌 덮개[石蓋]로 씌워져 있다. 곧 오타연나왕(鄔阤延那王)[옛날의 우타연(優陀延)이며 당(唐)나라 말로는 출애(出愛)이다]이 조성하였다. 사이에서 신령한 광명이 일어났는데 모든 왕이 힘써 들어올리고자 하였으나 끝내 옮기지 못하였다고 한다.
옛날 부처님께서 어머니를 위하여 천상에 올라가 설법하실 때에 왕이 목련(目連)에게 청하여 신통한 힘으로 공장(工匠)을 데리고 천상으로 올라가 상호(相好)를 본떠 와서 조성하였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천상에서 내려오시자 상(像)이 문득 일어나서 맞이 하였으므로 부처님께서 다음과 같이 위로하셨다고 한다.
“이제는 그대가 불사(佛事)를 일으킬 것이니라.”
정사의 동쪽으로 백여 보(步) 떨어져서 네 부처님께서 다니고 앉으셨던 흔적이 남아있고 부처님께서 욕실(浴室)로 삼았던 우물에는 지금도 물이 가득차 있다.
서안의 동남쪽 귀퉁이에는 구사라장자(具史羅長者)의 집과 부처님의 정사와 머리카락과 손톱을 모셔 놓은 탑이 있고 그 탑 곁에는 네 부처님께서 다니고 앉으셨던 흔적이 남아 있다.
성의 서쪽으로 9리 떨어진 석굴(石窟)에서는 일찍이 부처님께서 노닐면서 독룡(毒龍)을 항복시키셨으며 석굴 곁의 큰 탑은 높이가 20여 장(丈)이나 되며 그 옆에는 부처님께서 오가며 다니셨던 흔적과 머리카락과 손톱을 모셔 놓은 탑이 있는데 병든 이가 빌면 대부분 나았다.
석가께서 유포하신 법이 멸망할 일이 이 나라에 있었으므로 귀한 이나 천한이나 영토 안으로 들어오면 저절로 마음으로 느껴 슬퍼하였다.
굴의 동북쪽의 큰 숲 속으로 7백여 리를 가서 긍가하의 북쪽 언덕을 건너면 가사포라성(迦奢布羅城)에 이른다. 둘레는 10리쯤이 되며 여기는 호법보살(護法菩薩)의 외도(外道)를 조복 받은 곳이다. 탑의 높이는 20여 장인데 일찍이 부처님께서 여기서 여섯 달 동안 설법하셨다. 오가며 다니신 흔적과 머리카락과 손톱을 모셔 놓은 탑이 있다.
북쪽에서 1백 80리를 가면 비색가국(鞞索迦鞠)[중인도이다]에 이른다. 둘레는 4천여 리요 도성의 둘레는 17리이며 사찰은 20군데 있고 승려는 3천 명이며 천사는 50군데 인데 외도들이 아주 많다.
성의 남쪽 길의 좌우에 있는 절 탑은 높이가 20여 장이요 일찍이 부처님께서 여기서 6년 동안 설법하셨으며 그 곁에는 높이 70척이나 되는 기이한 나무가 있는데 봄이나 겨울이나 변하지 않는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이쑤시개 버린 것이 무성하다는 것으로 삿된 견해를 지닌 이들이 모두 다투어 와서 베어 버려도 곧 다시 예전처럼 살아 있다고 한다. 그 곁에 네 부처님께서 다니고 앉으셨던 흔적과 아울러 머리카락과 손톱을 모셔 놓은 탑이 터전의 모퉁이에 서로 연접해 있어서 숲 속의 못에 그림자가 비친다.
여기에서 동북쪽으로 5백여 리를 가면 실라벌실지국(室羅伐悉底鞠)[중인도이며 곧 사위(舍衛)이다]에 이른다. 둘레는 6천여 리이고 도성은 황폐하였으며 옛 터의 둘레는 20여 리이다. 사찰은 수백 군데이나 승려의 무리는 적으며 천사는 백여 군데 되어 외도들이 아주 많다.
황폐한 성(城)의 옛 전각의 동쪽 터에 있는 작은 탑은 바로 발라서나시다왕(鉢羅犀那恃多王)[옛날의 파사닉(波斯匿)이며 당나라 말로는 승군(勝軍)이다]이 부처님을 위하여 당(堂)을 지어 드린 곳으로 그 곁에 있는 옛 터 위의 탑은 바로 왕이 부처님의 이모(姨母) 발라사발지(鉢羅闍鉢底)[옛날 말로 파사파제(波闍波提)이며 우리나라 말로는 생주(生主)이다] 비구니를 위하여 정사를 지어준 곳이다.
다음으로 동쪽의 탑은 바로 소달다(蘇達多)[선시(善施)라고 한다]의 옛 집이며 곁에 있는 큰 탑은 바로 앙루리마라(鴦寠利摩羅)[지만(指鬘)을 말한다]가 삿된 견해를 버린 곳이다.
성의 남쪽으로 6리쯤에 있는 서다림(逝多林)은 바로 급고원(給孤園)으로 태자(太子)가 절을 지었던 곳인데 지금은 황폐해져서 높이 70여 척의 석주(石柱)만이 남아 있다.
아육왕(阿育王)이 지었던 벽돌 방[甎室] 하나가 남아 있을 뿐이요 나머지는 다 같이 없어졌으며 방 안에는 어머니를 위하여 설법한 금상(金像)이 있다.
동북쪽에는 부처님께서 병든 스님을 씻어 주신 탑이 있으며 서북쪽에는 목련(目連)과 신자(身子)의 의탑(衣塔)이 있고 거기서 멀지 않게 있는 탑은 부처님께서 물을 길어 쓰셨던 곳이다.
또 사리불(舍利弗)과 부처님께서 오가며 다니셨던 길과 설법한 처소를 표시한 탑이 있는데 신령한 약과 기이한 향이 언제나 그 곳에 내렸다고 한다.
또 외도가 여인을 살해하고 그것으로 부처님을 비방했던 처소에는 탑을 세워 표시하여 놓았다.
절의 동쪽으로 백 보(步)정도 되는 곳의 크고 깊은 구덩이는 바로 조달(調達)이 독(毒)으로 부처님을 해치려 하다가 산 채로 빠져 죽은 곳이요 남쪽에도 큰 구덩이가 있는데 이것은 바로 구가리비구(瞿伽離比丘)가 부처님을 비방하다가 산 채로 빠져 죽은 곳이며 또 남쪽으로 8백 보 되는 곳의 크고 깊은 구덩이는 바로 전차바라문(戰遮婆羅門)의 딸이 부처님을 비방하다가 산 채로 무간지옥으로 빠진 곳이다. 이 세 구덩이는 모두가 휑하게 뚫려서 밑이 없는지라 큰 비가 마구 흘러 들어가도 끝까지 멈추거나 쓰러지는 일이 없다.
절의 동북쪽으로 70보 되는 곳의 정사(精舍)는 영복(影覆)이라 부르고 높이는 60척이며 그 안에는 동쪽을 향하고 있는 좌상(坐像)이 있는데 외도와 논의하시던 처소이다.
다음의 동쪽에 있는 천사(天祠)는 크기가 정사와 똑같다. 처음 해가 뜨고 서쪽으로 질 때에 부처니의 정사는 가리지 않는데 천사는 해가 저물거나 동쪽에 그늘이 지면 마침내 덮이어 가려진다.
또 동쪽으로 4리 되는 곳의 바짝 마른 큰 연못은 바로 비로석가왕(毘盧釋迦王)[옛 번역으로는 유리(流離)이다]이 빠져 들어가 죽은 곳인데 뒷날 사람들이 탑을 세우고 그것을 기록하여 두었다.
또 사리불[身子]이 처음 절을 짓고자 했을 때 외도와 재주를 겨루던 곳에도 역시 탑을 세워 기록해 두었다.
절 서북쪽으로 4리 되는 곳의 득안림(得眼林) 안에는 부처님께서 오가며 다니셨던 흔적을 기리는 탑이 있다. 그곳의 인연은 승군왕(勝軍王)이 5백 명의 도적들의 눈을 후벼내어 버렸느데 그 일을 들으신 부처님께서는 인자한 힘으로 한번에 본래대로 회복시키고 몽둥이를 버리고 눈이 생기게 하셨다고 한다.
성의 서북쪽으로 60리에 있는 오래된 성(城)은 바로 사람의 수명이 2만 세일 때 가섭파불(迦葉波佛)께서 태어나신 본고자이요 성의 북쪽에 있는 탑은 바로 이 부처님의 전신사리(全身舍利)를 모신 곳으로 아육왕이 탑을 조성하고서 표시하여 놓았다.
또 동남쪽으로 5백여 리를 가면 겁비라벌솔도국(劫比羅伐窣堵鞠)[중인도이며 옛날에는 가비라(迦毘羅)라고 하였다]에 이른다. 둘레는 4천여 리요 비어 있는 성(城)이 수십 군데이며 모두 사람이 살고 있지 않다.
궁성의 둘레는 15리쯤 되고 벽돌로 지었으며 옛 절은 1천여 군데요 궁성(宮城)은 하나이다. 사찰의 승려는 30여 명 저도 되고 천사는 두 군데 인데 외도들이 뒤섞여 살고 있다. 성 안의 정전(正殿) 터 위에 있는 정사(精舍) 안에는 왕의 상(像)이 만들어져 있다.
강신(降神)하신 상(相)의 날짜에 논의가 동일하지 않다. 상좌부(上座部)에서는 당나라의 5월 15일에 해당한다고 하며 여러 부(部)에서는 또한 이곳의 5월 8일에 해당한다고 하는데 아마 듣고 본 것의 차이일 뿐이다.
그 옆에는 선상탑(仙相塔)이 있고 성의 남쪽에 있는 탑은 바로 태자(太子)가 힘을 겨룰 때 코끼리를 던져 성을 넘어 땅으로 떨어지면서 큰 구덩이가 생긴 곳이다.
그 곁에도 정사가 있는데 태자의 상과 학업을 받는 상을 만들어 놓았으며, 그 곁에 있는 정사는 비(妣)의 침전(寢殿)이 있던 처소로서 야수다라(耶輸阤羅)와 라호라(羅怙羅)의 상(像)이 있다.
별본(別本)에서는 “태자는 초저녁에 성(城)을 열고 북쪽문을 나와 떠나갔다”라고 말하였다.
또 성의 동남쪽 귀퉁이에 있는 정사에는 태자가 백마(白馬)를 타고 허공을 날아 성을 넘고 있는 상을 만들어 놓았으며 네 개의 성문에는 각각 정사가 있는데 노(老)ㆍ병(病)ㆍ사(死)ㆍ사문(沙門)의 상(像)이 만들어져 있다.
성의 남쪽으로 4리 되는 니구로(尼拘盧)숲에 있는 탑은 부처님께서 도(道)를 얻으시고 하늘과 사람들을 위하여 설법하신 곳이다.
성의 남쪽 50리에 있는 옛 성안의 탑은 바로 사람의 수명이 6만 세였을 때 가라가촌타(迦羅迦村馱)부처님께서 태어나셨던 본고장의 성(城)을 표시하며 성의 동남쪽에 있는 탑은 곧 이 부처님의 유신(遺身)이 모셔져 있는데 무우왕(無憂王)이 그 앞에 높이 3장(丈) 남짓의 돌기둥을 세웠다.
또 동북쪽으로 30여 리에 있는 옛 성안의 탑은 바로 사람의 수명이 4만 세였을 때 가락가모니(迦諾迦牟尼)부처님께서 태어나셨던 본고장의 성(城)을 표시하며 성 동북쪽에 있는 탑은 곧 이 부처님의 유신(遺身)을 모셨다. 무우왕이 돌기둥을 세워서 새겨 놓았는데 높이는 2장 남짓하다.
성의 동북쪽으로 40리에는 태자가 나무 아래 앉았던 곳을 표시하는 탑이 있으며 큰 성(城)의 서북쪽에는 수백천 개의 탑이 있는데 이것은 바로 석씨들을 죽인 탑이다.
네 분의 석(釋)씨 자손이 적군(敵軍)에게 항거하였으므로 성의 사람들은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국경 밖으로 내쫓아 버렸는데 한 분은 오장왕(烏丈王)이 되었고 세 분은 범연(梵衍) 등의 왕이 되었으며 지금까지도 후손들이 끊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성의 남쪽 니구율수(尼拘律樹)에 있는 탑은 바로 부처님께서 처음 오셔서 부왕(父王)을 뵈었던 곳이며 성의 남문(南門) 밖의 탑은 바로 활쏘기를 겨루던 곳이다.
동남쪽으로 30여 리 되는 곳은 바로 태자가 쏜 화살이 땅으로 들어가면서 샘물이 솟아나온 곳인데 세속에서는 전천(箭泉)으로 전해지며, 병든 이가 마시면 거의 낫게 되며 혹은 그 진흙을 가져다 이마에 붙이면 그대로 아픈 것이 모두 낫는다고 한다.
또 동북쪽으로 90리에 있는 납벌니림(臘伐尼林)에는 석씨종족들이 목욕하는 못이 있어 꽃이 물에 서로 비치며, 그 북쪽 20보(步)되는 곳의 무우화(無憂花) 나무는 이미 말라 죽었는데 부처님께서 탄생하셨던 곳이다.
어떤 이는 그날은 이곳의 3월 8일에 해당한다고 하며, 상좌부(上座部)에서는 이곳의 3월 15일에 해당한다고도 한다.
다음에 동쪽으로 있는 탑은 두 마리 용이 태자를 목욕시킨 곳이며, 처음 부처 님께서 태어나신 뒤 부축을 받지 않고 사방으로 각각 일곱 걸음씩을 밟으셨던 곳에는 큰 연꽃이 나 있다.
이미 오른쪽 겨드랑이에서 태어나자마자 제석(帝釋)이 옷으로 싸 안고 4왕(王) 이 그를 받들어 금으로 된 안석 위에 안치한 장소에는 네 개의 탑과 돌 기 등을 세워 놓고 그 일을 표기(表記)하였다.
곁에 있는 작은 하천은 동남쪽으로 흐르며 세속에서는 유하(油河)라고 부르니 이것이 바로 태자가 태어나신 뒤에 하늘이 이 땅을 변화하여 반짝거리게 해서 목욕하면서 풍허(風虛)를 제거시켰는데, 지금은 변화하여 강물이 되었으며 아직도 반짝 거리는 것이 마치 기름과 같다.
여기에서 동쪽으로 2백여 리의 거친 속을 지나가면 남마국(藍摩國)[중인도이다]에 이르는데 거의 텅빈 성(城)이다. 동남쪽에 있는 부처님의 탑은 백 척이 좀 못되며 옛날에 처음 8등분으로 나눈 사리(舍利) 중의 한부분이 있어 때때로 신령한 빛이 일어난다. 그 곁에 있는 맑은 못의 용이 뱀으로 변하여 그 탑의 둘레를 돌았고 들판의 코끼리가 꽃을 따다 뿌렸는데, 무우왕(無憂王)이 열려고 하였으나 용이 수호하면서 허락하지 않았다.
또 동쪽의 큰 숲으로 백여 리에 있는 큰 탑은 바로 태자가 이곳에 와서 보배 옷 안의 마니주[末尼珠]를 풀어서 천탁가(闡鐸迦)에게 맡기면서 부왕(父王)에게 로 돌려 보낸 곳이다.
또 동쪽에는 섬부(贍部) 나무가 있는데 마른 줄기가 아직도 남아있으며, 그곳의 작은 탑은 바로 태자가 입고 있던 옷을 사슴 가죽과 바꿨던 곳이다.
그 곁의 탑은 머리를 깎은 곳인데 그 때의 나이도 일정치 않다. 혹은 19세라 하기도 하고 29세라고 하기도 한다.
또 동남쪽의 들판으로 1백90리를 가면 니구타(尼拘陀) 숲에 탑이 있는데 높이는 3장(丈) 남짓하다. 옛날에 사람들이 부처님을 화장(火葬)한 땅에 남아있던 재와 숯을 거두어 여기에 탑을 세운 것인데 병든 이들이 기원하면 낫게 된다고 한다.
네 부처님께서 다니고 앉으셨던 흔적이 남아있고 탑의 높이는 백여 척이며 좌 우에는 수백 개의 작은 탑들이 있다.
또 동북쪽의 큰 숲으로 험한 길을5백 리쯤 가면 구시나게라국(拘尸那揭羅國)[중인도이다]에 이르며 성은 쓰러져 황폐하며 사람들도 적다.
그 안의 동북 귀퉁이에 있는 탑은 바로 준타(准陀)의 옛 집이며 그 우물은 아직도 맛이 있는지라 먹기 위하여 뚫려져 있다.
성의 서북쪽으로 4리를 가면 아시다벌지하(阿恃多伐底河)를 건너게 되는데 우리나라 말로 유금(有金)이라 한다. 가까이 서쪽 언덕에 있는 사라림(娑羅林)은 양쪽 숲 사이로 서로 떨어진 것이 수십 보(步)이며, 그 가운데에 네 그루의 나무가 있는데 매우 높다.
큰 벽돌로 된 정사(精舍)안에는 부처님께서 열반하실 때의 상(像)이 조성되어 있는데 북쪽으로 머리를 하고 누우셨으며, 곁에 있는 탑은 높이가 2백여 척이며, 그 앞에 있는 돌기둥에는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상(相)이 기록되어 있다.
그날을 어떤 이는 우리나라의 3월 15일에 해당한다고 하고 설유부(說有部)에서는 우리나라의 9월 8일에 해당한다고 하며, 제부이의(諸部異議)에서는 지금이 정관(貞觀) 20년(646)이라 곧1천2백12년이 지났다고 하였다. 이것은 보리사(菩提寺)의 돌기둥의 기록에 의한 것이다. 혹은 1천3백 년이 되었다고 하고 혹은 1천5백여 년 되었다고도 하며, 혹은 9백 년은 지났고 아직 1천 년은 되지 않았다고도 한다.
정사 곁에는 부처님께서 옛날 꿩왕[雉王]이었을 적에 불을 껐고, 사슴으로 중생을 구제한 곳이 있는데 각각 하나의 탑으로 세워졌으며, 다음의 서쪽 탑은 바로 소발다라(蘇跋陀羅)[수보리[善賢]를 말한다]가 멸진정을 증득한 곳이다.
다음에 하나의 탑이 있는데 이것은 집금강신(執金剛神)이 앉은뱅이가 된 땅이요, 다음의 곁에 있는 탑은 바로 관(棺)이 7일 동안 머물렀던 곳이며, 그 곁에 있는 탑은 바로 아니루타(阿泥樓陀)가 천상에 올라가서 어머니에게 알리고 내려와서 부처님을 보며 통곡했던 곳이다.
성의 북쪽으로 니련선나하(尼連禪那河)를 건너서 3백 보(步)쯤 떨어져 있는 탑은 바로 부처님께서 열첩반나(涅疊般那)[불로 태운다는 말이다]하신 곳인데, 땅은 지금도 흑황색 흙으로 재와 숯이 섞였으며, 기원하여 감응이 있는 이라면 누구나 사리를 얻게 된다.
그 곁에 있는 탑은 부처님께서 대가섭파(大迦葉波)를 위하여 두 발을 나타내신 곳이며 다음의 또 하나의 탑 앞에 세운 돌기둥에는 여덟 나라에서 사리를 나눈 일을 기록해 놓았다.
여기서 서남쪽으로 2백여 리를 가면 대읍(大邑)에 이른다.
또 큰 숲으로 5백여 리를 가면 바라닐사국(婆羅痆斯鞠)[중인도이며 옛날의 바라내(波羅奈)이다]에 이른다. 둘레는 4천여 리요 도성(都城)의 서쪽은 긍가하에 임하며 길이는 20리가 조금 못되고 넓이는 6리 정도이다. 사람들이 아주 많이 살며 외도를 많이 믿는다. 사찰은 30여 군데요 승려는 3천여 명이며 모두 소승의 정량부(正量部)에 속한다. 천사(天祠)는 백여 군데요 외도는 만여 명이 되며 대부분 대자재천(大自在天)의 남근을 섬긴다. 큰 성안의 천사 20군데에 있는 자재천의 남근은 높이가 백여 척이나 된다.
성의 동북쪽은 바라닐하(婆羅痆河)이며 서쪽에 있는 탑은 아육왕이 조성하였고 높이는 10여 장(丈)이며 앞에 세운 돌기둥은 옥돌처럼 산뜻하며 부처님이 나타나 있다.
강의 동북쪽으로 10여 리 가면 녹야사(鹿野寺)가 있다. 여덟 구역으로 나뉘어 있고 담을 이어져 빙둘러 살며 층과 처마는 중각(重閣)으로 되었다. 승려의 무리는 1천5백 명이요 다 같이 소승의 정량부에 속한다.
부처님의 정사가 있는데 높이는 20여 장이며 벽돌로 된 감(龕)은 사면으로 합쳐졌고 마디의 층급은 백 몇 개인데 모두 금상(金像)과 유석불(鍮石佛) 등을 잘보이지 않게 세워 놓았다.
다음 서남쪽에 있는 탑은 높이가 백여 척이며 앞에 있는 돌기둥은 높이가 70여 척이며 환히 통하면서 깨끗하고 정성에 감응하면 상(像)이 그의 선악에 따라 나타난다. 곧 도(道)를 이룬 뒤에 처음 법륜(法輪)을 굴리셨던 곳이다.
그 옆의 3기(基)의 탑은 곧 옛날 세 분의 부처님께서 다니고 앉으셨던 곳이며 곁에 있는 모든 탑은 5백 명의 독각(獨覺)이 열반에 든 장소이다. 또 곁의 1기의 탑은 자씨보살(慈氏菩薩)이 수기(授記)를 받은 처소이며 또 서쪽에 있는 1기의 탑은 바로 부처님께 과거에 호명보살(護明菩薩)이셨을 때 가섭파부처님[迦葉波佛]께서 이제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주신 곳이다.
다음의 남쪽은 네 분의 부처님께서 오가며 다니셨던 처소인데 길이 50보(步)에 넓이 7척의 푸른 돌을 쌓아 만들었고 위에는 석가부처님께서 오가며 거니시는 상(像)이 있다. 그 상의 형상은 특이하게도 살상투[肉髻]의 위 끝이 머리카락 끝으로 뾰족하게 나와 있어 신기하면서도 증험이 있다.
절의 흔적을 지극히 많아서 정사와 부도가 이에 수백 개가 되었으므로 그 일을 다 갖추어 말할 수조차 없다.
절 서쪽에 있는 맑은 못은 둘레가 2백 보(步)이고 부처님께서 일찍이 손을 씻고 목욕을 한 곳이요 다음 서쪽의 작은 못은 부처님께서 일찍이 그릇을 씻은 곳이며, 다음 북쪽의 작은 못은 부처님께서 일찍이 옷을 빨았던 곳이다. 세 개의 못에는 용이 머물러 있고 맛이 달면서 또한 깨끗하여 어떤 이라도 부질없이 접촉하면 금비라(金毘羅)라는 짐승이 곧 그를 해쳤다.
그 곁에는 네모진 돌이 있고 돌 위에는 부처님의 가사(袈裟) 무늬의 흔적이 있으며 외도나 흉악한 사람이 경솔하게 밟거나 하면 못에 있는 용이 갑자기 바람과 비를 일으켰다.
그 곁에는 부도가 있는데 부처님께서 일찍이 여섯 개의 어금니를 가진 상왕(象王)이셨을 때 사냥꾼의 법의(法衣)를 입고 있는 것을 보고 일부러 어금니를 뽑아서 그에게 주셨던 곳이다.
곁에 있는 1기(基)의 탑은 부처님께서 옛날에 까마귀와 원숭이와 코끼리를 위하여 누가 큰가를 서로 물었던 곳이다.
또 큰 숲 속의 탑은 부처님과 조달(調達)이 옛날 사슴왕이셨을 때 부처님께서 새끼 밴 사슴의 목숨을 대신한 곳으로 녹야(鹿野)라는 이름은 이로 인하여 생겼다고 한다.
적의 서남쪽 3리에 있는 큰 탑은 높이가 30장(丈)이나 되며 터가 우뚝 솟아있어 장엄하고 화려하였다.
곁에 있는 1기의 탑은 바로 다섯 사람이 부처님을 영접하였던 장소이며 큰 숲의 동쪽으로 3리 떨어진 탑은 부처님께서 옛날 토끼셨을 때 모든 짐승들을 위하여 스스로 몸이 작은 것을 알고 몸을 태워 그들에게 대접하였던 곳으로 그로 인하여 천제석이 감동하여 내려와서는 칭찬하면서 일부러 달 속에 토끼의 형상이 나타나게 하였다고 한다.
절의 동쪽으로 긍가하(殑伽河)를 따라 3백여 리쯤 가면 동쪽으로 전주국(戰主國)[중인도이다]에 이른다. 둘레는 2천여 리요 도성(都城)은 긍가하에 임하였으며 둘레는 20여 리이다. 사람들이 가득 차있고 사찰은 열 군데이며 승려는 천명이 못되며 모두 소승이다. 천사는 스무 군데인데 이교도들이 뒤섞여 살고 있다.
성의 서북쪽에 있는 절의 탑은 부처님의 사리가 한 되 모셔져 있다. 옛날 부처님은 여기에서 7일 동안 설법하셨고 아울러 네 부처님께서 다니고 앉으셨던 흔적도 남아 있으며 자씨보살(慈氏菩薩)의 상(像)이 있는데 형상은 작으나 위덕(威德)이 크다고 한다.
성의 동북쪽으로 30여 리 되는 곳에 귀신을 항복시킨 탑이 있는데 반(半)은 이미 땅에 파묻혀 있다. 앞에 돌기둥은 높이가 2장(丈) 남짓하며 곧 부처님께서 사람을 잡아 먹는 귀신을 위하여 설법하셨던 곳이다. 귀신은 돌자리 수천개와 무성한 숲과 많은 못을 만들어 놓았으며,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몇 개의 절에는 모두 승려들이 머물러 대승(大乘)을 배우고 있다.
또 동남쪽으로 강을 건너 백여 리 되는 곳의 탑은 사리를 나눈 병(甁)과 남았던 사리를 모셨는데 매양 재일(齋日)에는 광명을 놓았다.
또 동북쪽으로 긍가하를 건너 1백50리를 가면 폐사리국(吠舍釐國)[중인도이며 옛날에는 비사리(毘舍離)라고 하였다]에 이른다. 둘레는 50여 리요 사도(邪道)와 정도(正道)가 반반이며 사찰은 수백 군데이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선너 개 정도이며 승려도 적을 뿐이다. 천사는 수십 군데이고 옷을 벗고 맨몸을 드러내는 외도들이 많다.
성은 이미 쓰러져 황폐하였고 옛 터의 둘레는 70리쯤 되며 궁성(宮城)의 둘레는 5리 정도이고 적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궁성의 서북쪽으로 6리 되는 곳에 있는 절의 탑은 바로 유마거사[淨名]가 설법한 장소이다.
또 동쪽에는 사리불[身子]의 증과탑(證果塔)이 있고 또 동쪽에 있는 큰 탑은 바로 왕(王)이 얻은 일부분의 사리가 한 섬쯤 되며 무우왕(無憂王)은 아홉 되를 가지고 균등하게 그 밖의 탑을 조성하였다. 뒷날에 어떤 왕이 열려고 하였으나 땅이 진동하였으므로 마침내 그만두었다.
서북쪽으로 있는 탑은 돌기둥의 높이가 6장(丈)이며 그 다음 남쪽에는 원숭이가 부처님을 위하여 판 못이 있고 못의 서쪽은 원숭이떼들이 부처님의 발우를 가지고 나무로 올라가서 꿀을 딴 곳이며 못의 남쪽은 원숭이들이 꿀을 바친 곳이다. 각각 탑에 기록되어 있다.
사찰의 동북쪽으로 4리쯤 되는 곳의 탑은 바로 정명(淨名)의 옛 집터인데 아직도 신령한 일이 많고 그 집은 벽돌을 포개어 지었다. 전(傳)에서는 돌로 쌓았다고 하였는데 바로 설법하면서 병환을 나타낸 곳이다.
근래의 사자(使者) 왕현책(王玄策)이 홀(笏)을 가지고 방을 재어 보았더니 1장(丈)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방장(方丈)이라는 이름은 이로부터 생겨났다. 아울러 보적(寶積)장자의 집과 암라(菴羅)여인의 집이 있으니 부처님의 이모(姨母)가 열반에 든 곳이기도 하다. 모두 표기(表記)가 쓰여 있다.
절의 북쪽으로 4리에 있는 탑은 부처님께서 구시성(拘尸城)에 가시려 할 때 하늘과 사람들이 전송하면서 울었던 처소이다.
다음의 1기(基)의 탑은 바로 부처님께서 최후에 성읍(城邑)을 살펴보셨던 곳이요 다음의 남쪽은 바로 암라여인이 부처님께 동산을 보시한 곳이며, 그 옆의 1기의 탑은 바로 부처님께서 세 번이나 아난에게 더 머물러 살 것인지 열반할 것인지를 말씀하셨던 곳이다.
또 곁에 있는 1기의 탑은 바로 천의 아들[千子]들이 부모를 보았던 곳이니 바로 현겁(賢劫)의 천불(千佛)이다. 동쪽의 옛 중각강당(重閣講堂)의 터에 있는 탑은 때때로 광명을 놓는데 이곳은 부처님께서 『보문경(普門經)』을 설하신 곳이다.
성의 서북쪽으로 60리에 있는 큰 탑은 바로 부처님께서 율첩바자(栗呫婆子)를 이별하셨던 곳이다.
큰 성(城)의 서북쪽으로 2백 리가 조금 못되는 곳에 있는 옛 성의 탑은 부처님께서 일찍이 대천륜왕(大天輪王)이 되었던 본생(本生)의 일을 말씀하셨던 곳이다.
나라의 성 동남쪽으로 15리에 있는 큰 탑은 바로 7백 명의 현성(賢聖)들이 거듭하여 결집(結集)하였던 처소이며 또 남쪽으로 백 리를 좀 못가서 있는 큰 절을 층대(層臺)를 겹쳐서 지었는데 승려들이 대승(大乘)을 배웠고 네 분의 부처님께서 다니고 앉으셨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옆으로 있는 1기의 탑은 바로 부처님께서 남쪽으로 마게타(摩揭阤)로 나아가시다 북쪽으로 폐사리성(吠舍釐城)을 돌아보시면서 도중에 쉬어가신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이다.
절 동쪽으로 30리를 가서 긍가하의 남쪽 언덕과 북쪽 언덕에 있는 각각 1기씩의 탑은 바로 아난타(阿難陀)가 몸을 나누어서 두 나라에 주었던 곳이다.
북쪽의 언덕에서 동북쪽으로 5백여 리를 가면 불율시국(弗栗恃國)[북인도이며 사람들은 삼벌시(三伐恃)라고 말한다]에 이른다. 둘레는 4천여 리요 동쪽에서 서쪽으로 길다. 사찰은 10여 군데 있고 승려는 천 명이 못되며 대승ㆍ소승을 통틀어 배운다. 천사는 수십 군데며 외도들이 많다.
옛 궁성(宮城) 가운데에는 3천의 집들이 있으며 긍가하의 동북쪽 언덕에 있는 탑은 높이가 2장(丈) 남짓하다. 남쪽으로 바라보이는 긴 강은 부처님께서 5백명의 고기잡이들을 제도하신 곳인데 잡혔던 큰 고기는 열여덟 개의 머리가 있었고 하나의 머리에는 각각 두 개씩의 눈이 있었다.
또 동북쪽으로 백여 리 되는 데에 있는 옛 성의 서쪽 탑은 높이가 백여 척이나 되는데 부처님께서 일찍이 여섯 달 동안 설법하시면서 사람을 제도하셨으며, 또 북쪽으로 1백50리 가면 부처님의 머리카락과 손톱을 모신 탑이 있다.
또 서북쪽으로 1천5백 리를 가서 산골짜기로 들어서면 니파라국(尼波羅國)[북인도이다]에 이른다. 둘레는 4천여 리요 설산(雪山) 안에 있으며 도성의 둘레는 20여 리쯤 된다. 여러 가지를 믿고 있으므로 사찰과 천사가 지극히 많으며 승려들은 2천여 명이나 되고 대승ㆍ소승을 모두 배운다. 왕은 순수하게 부처님을 신봉한다.
성 안에 있는 각(閣)은 높이가 2백여 척이요 둘레는 80보(步)이며 그 위에는 1만 명이 들어갈 수 있다. 면(面)마다 따로 세 겹이 겹쳐 있고 겹친 데마다 따로 일곱 층으로 되어 있어서 사면의 처마를 이리저리 거닐 수 있으며 기이한 조각과 진기한 보배로 장식되어져 있다.
성의 동남쪽으로 멀지 않는 곳에 수화촌(水火村)이 있고 동쪽으로 1리쯤 되는 곳에는 아기파여수(阿耆波沴水)가 있는데 둘레는 20보(步)이다. 급히 일렁이는 물결이면서도 잔잔하게 흐르지 않으면서 언제나 끓고 있으므로 집에서 불을 거기에 던지면 온 못에 불이 일어나 연기와 불길이 수척이나 오른다. 물을 불에다 뿌리면 불이 더욱 왕성하게 타고 부서진 흙을 던져도 역시 다 타버리므로 던진 것은 물을 것도 없이 모두 재가 되어 버린다. 가마솥을 물 위에 걸어 밥을 지으면 곧 다 되어 버린다.
예전에는 이 물 안에 금궤(金匭)가 있어서 어느 나라의 왕이 사람들을 거느리고 그것을 취하여 궤가 이미 진흙으로 나왔는데 사람들과 코끼리가 끌어당겨도 꿈쩍하지 않았다. 그런데 밤에 신(神)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바로 자씨(慈氏)부처님의 관(冠)이다. 세간에 내려와 나실 때에 쓰실 것이므로 가져 갈 수 없다. 화룡(火龍)이 보호하고 있다.”
성의 남쪽으로 10여 리 되는 곳에 따로 있는 산은 아주 빼어나고 사찰이 거듭 세워져 있는데 그 형상이 마치 구름과 놀 안의 소나무와 대나무 같다. 고기와 용은 사람들에게 길들여져 있어서 사람들에게로 가서 먹이를 받아 먹었으나 범(犯)하려고 하면 그의 한 집안은 다 죽여 버렸다. 요사이 나라의 명령으로 이 나라에 다녀온 적이 있는데 지금은 토번(吐藩)에 속한다.
또 폐사(吠舍)로부터 남쪽으로 1백50리를 가서 긍가하를 건너면 마게타국(摩揭陀國)에 이르는데 곧 언제나 말하는 마갈제(摩竭提)의 왕사성(王舍城)이다.
030_0748_c_01L釋迦方志序終南太一山釋氏惟夫大唐之有天下也將四十載風洽而澆俗改文德修而武功暢使靑丘丹穴之候竝入堤封龍砂鴈塞之區聿遵聲教英髦稽首顯朝宗之羽儀輸賝奉贄表懷柔之盛德然則八荒內外前史具舒五竺方維來罕述豈非時也雖復周穆西狩屆昆丘舜禹南巡不踰滄海秦皇畫近袤臨洮漢武封疆關開鐵路斯以降遐討未詳所以崆峒問道在酒泉之地崑崙謁聖實惟玉門之至於弱水洞庭三危九隴煙然龍沙障黎河具曆夏書咸圖雍部博望之尋河也創聞大夏之名軒皇之遊夢也初述華胥之國貳師之伐大宛定遠之開鐵門由余入秦日磾仕漢聲榮覆於蔥嶺帝德亘於耆山赫弈皇華其徒繁矣而方土所記人物所宜風俗之沿革山川之卓詭陳之油素略無可紀豈不以經途遼遊詣之者希乎以事討論縱有傳皆祖行人信非躬睹相從奔競爲實錄何以知其然耶故積石河源西瞻赤縣崑崙天柱東顧神州鳴砂以外咸稱胡國安用遠籌空傳緗簡是知身毒之說重譯臻焉神異等傳斷可知矣自佛教道東榮光燭漢流十代年將六百輶軒繼接備盡觀百有餘國咸歸風化莫不挮山貢職望日來王而前後傳錄差互不同事迹罕述稱謂多惑覆尋斯致宗歸譯人隋代東都上林園翻經館沙門彦琮著西域傳一部十篇廣布風略於佛事得在洽聞失於信本以爲八相顯道三乘陶化四儀所設莫不逗機二嚴攸被皆宗慧解今聖迹靈相雜沓於華胥神光瑞影氤氳於宇內義須昌明形量動發心靈貞觀譯經嘗參位席傍出西記具如別詳但以紙墨易繁閱鏡難盡佛之遺緖釋門共歸故撮綱猷略爲一卷貽諸後學序之云爾釋迦方志一部八篇封疆篇第一 統攝篇第二中邊篇第三 遺迹篇第四遊履篇第五 通局篇第六時住篇第七 教相篇第八仰尋諸佛之降靈也不可以形相求隨機顯晦故得以言章述矣然學教者統擧爲先傍窮枝葉終非遠致故於篇首摽其致焉釋迦方志卷上封疆 統攝 中邊 遺迹釋迦方志封疆篇第一佛之所王土也號曰索訶世界卽古翻經爲娑婆矣經中所謂忍土者也謂此土人强識力念能忍苦樂堪任道器故佛王之案此封疆周輪鐵山山外是空空不可測山下是地地下是金金下是水水下是風其風堅實逾於金剛衆生心力同業所感能持世界不令傾墜自風以外卽是虛空約此周輪從下而上至無色窮名爲有頂論其畫界從廣所經卒非里數之所度也且如智度論從色界天下一大石經一萬八千三百八十三年方始至地約此上下方維名爲一佛所王土也卽以大千鐵圍而爲封疆之域釋迦方志統攝篇第二索訶世界鐵輪山內所攝國土萬億也何以知之如今所住卽是一國別一蘇迷盧山卽經所謂須彌山也在大海中據金輪表半出海上八萬由旬日月迴轉於其腰也外有金山七重圍之中各海水具八功德外鹹海廣於無際海外有山是鐵所四周遶之海中可居者大略有四約蘇迷山用分方面東洲名毘提訶南洲名贍部西洲名瞿陁尼北洲名拘盧也此之四洲亦名四有人之所居佛之所王准此傍及鐵圍海內有四洲蘇迷山已上二十八天幷一日月爲一國土卽此爲量數至一千鐵圍都繞名小千世界卽此小千數至一千鐵圍都繞名中千世界卽此中千數至一千鐵圍都繞名爲大千世界案此三千大千世界其中四洲山王日月乃至有頂則有萬億之所皆爲佛之統攝俱遵聲教釋迦方志中邊篇第三惟夫法王所部則大千之內攝焉據成都則此洲常爲所住故此一洲則在蘇迷山南之海中也水陸所經東西二十四萬里南北二十八萬里又依論說三邊等量二千由旬南邊三由旬半是則北闊而南狹人面象又依凡記人物所居則東西一十一萬六千里南北遠近略亦同之都定所則以佛所生國迦毘羅城應是其中謂居四重鐵圍之內故經云三千日月萬二千天地之中央也之威神不生邊地地爲傾斜故中天竺國如來成道樹下有金剛座用承佛焉據此爲論約餘天下以定其中若當此洲義約五事以明中也所謂爲五矣所言名者咸謂西域以爲中國又亦名爲中天竺國此土名賢談邽之次復指西宇而爲中國若非中者凡聖兩說不應名中宋朝東海何承天博物著名群英之最問沙門慧嚴佛國用何曆術而號中乎嚴云竺之國夏至之日方中無影所謂天地之中平也此國中原景圭測之故有餘分致曆有三代大小二餘增損積筭時輒差候明非中也承天無以抗言文帝聞之乃勅任豫受焉夫以八難所摽邊地非攝出凡入聖必先中國故大夏親奉音形東華晚開教迹理數然矣二言里者夫此一洲大分三量二分以北土曠人希獯狁所居無任道務一分以南盡于三海人多精爽堪受聖化故約道勝大聖都焉故成光子中天竺國東至振旦國五萬八千振旦卽神洲之號也彼人目之南至金地國五萬八千里西至阿拘遮國五萬八千里至小香山阿耨達池五萬八千里此通攝取其遐邇齊致以定厥中理易顯三言時者謂雪山以南名爲中國然平正冬夏和調卉木常榮流霜不自餘邊鄙安足語哉四言水者此洲中心有一大池名阿那陁答多唐言無熱惱也卽經所謂阿耨達池在香山南大雪山北山頂上非凡所至池周八百里四岸寶飾正南當於平地地獄所居故金剛座東僻至五千里又池正南當洲尖處其北當謎羅川卽北又當蔥嶺北千泉也上空定約當北辰星今望第五似如西欹且天上一寸地下一千泉去京八千餘里焉約天無一尺矣其池北去鉢露羅國減千里東南屈露多國西南罽賓各千餘里然四海爲壑水趣所極故此一池分出四河各隨地勢而注一故蔥嶺以東水注東海達儭以南水注南海雪山以西水注西海大秦以北水注北海故地高水本注是其中此居海濱邊名難奪又佛經宏大擧事周博見聖賢義非妄委於上所咸符地圖然此神洲所著書史言臆度浮濫極多約佛經更廣其都皆蕪薉試爲擧之水經云無熱丘者卽崑崙山 又扶南傳云耨達山卽崑崙山 又山海經云流沙濱赤水後黑水前有大山名崑崙丘 又云鍾山西六百里有崑崙山出五水 案穆天子傳云舂山音又云海內崑崙丘在西北帝之下八百高萬仞 又十洲記云崑崙陵卽崑山也在北海亥地去岸十三萬里此約指佛經蘇迷山也又東海中山名方丈亦名崑崙又云西王母告周穆云山去咸陽三十六萬里高平地三萬六千里又周穆傳述西王母云去宗周瀍㵎一萬一千一百里 神異經崑崙山有銅柱其高入天圍三千里榮氏注云柱洲崑崙山東南萬二千里有無外 史記云崑崙山去嵩高五萬里高萬一千里郭璞云高二千五百餘里 淮南云高萬一千一百里四步二尺六寸道經造立天地記云崑崙山高四千八百里轉形濟苦經云高萬九千里又云此山飛浮 又云崑山南三十次第有千崑山名小千世界化胡經云崑山高九重相去各九千里 又云高萬萬五千里已前儒道兩說雖形量差異莫越崑尋崑崙近山則西涼酒泉之地后見西王母之所具彼圖經若崑崙遠山則香山雪山之中也河源出焉故爾雅云河出崑崙墟郭璞圖贊云崑崙三層號曰天柱實惟河源水之靈府案禹貢云導河自積石者但據伏流所出處而名之若討本源誠有由矣故佛經云此無熱池東有銀牛口出殑伽河卽古所謂恒河也右繞池帀流入東南海南有金象口出信度卽古辛頭河也右繞池帀流入西南海西有瑠璃馬口出縛芻河卽古博叉河也如上繞池入西北海北有頗胝師子口出徙多河卽古私陁河如上繞池入東北海案河圖云崙山東方五千里名曰神洲亦名赤又依書云河源東北流出蔥嶺岐沙谷分爲兩水東北支流經于闐南山於國西北出又東流大河經朅盤陁城東南又經疏勒國西又東北至城下又迴流國南五百餘里至烏鎩國南又東北至疏勒國北六百一十里至烏孫界赤谷城又東二百七十里經姑墨國南又東六百七十里龜茲國南又東三百五十里經烏壘國南此卽漢時都護所治也西南去疏勒二千一百一十里東南去鄯善千七百八十五里東北去烏耆國四百里河又東南三百四十里經渠梨國南又東二百四十里經黑山國此東去玉門關二千六百六十里又東經連城注賓城南且末國北合支水河又東經婁蘭地又東經鄯善國城南過東北數百里入蒲昌海其海東面少北去玉門一千三百里又東北去陽關三百里此河於蒲昌伏流南而少西數千里入積石山羌燒瓽中書云積石去崑崙丘千七百四十里或云伏流萬三千里斯諸臆難以究詳河出積石西南流九屈東北合流經折支地是爲河曲又東北入塞過燉煌張棭南是爲河源矣案此實錄以尋河源窮至無熱池所方爲討極然此池神居非人所及又是北天雪山之域南接中土佛生之以處高勝故非邊矣五謂人者不出凡聖凡人極位名曰輪聖人極位名曰法王蓋此二王不生則已生必居中又山川國邑人之依報人勝則依勝故此二王居焉輪王有四王約統四洲金輪王者則通四有銀輪三方除北一洲銅輪二除西北方鐵輪在南除於三有贍部者中梵天音唐言譯爲輪王居言四輪王通局乃殊住必南有也翻此洲云好金地謂閻浮檀金在洲北岸海中金光浮出海上其傍有閻浮樹林其果極大得神通者方至於今言此洲輪王得名兩設其致耳又一此洲四主所統雪山已南至于南名象主也地惟暑濕偏宜象住故王以象兵而安其國風俗躁烈篤學異術是爲印度國然印度之名或云賢豆或云天竺或云身毒天篤等皆傳之訛僻耳然以印度爲正唐無以雪山之西至于西海名寶主也接西海偏饒異珍而輕禮重貨是爲胡國雪山以北至于北海地寒宜馬名馬主也其俗兇暴忍殺衣毛是突厥國雪山以東至于東海名人主也地惟和暢俗行仁義安土重遷是至那國卽古所謂振旦國也上列四主且據一洲分界而王以洲定中輪王爲正居中王邊古今不改此土諸儒於孔教以此爲中餘爲邊攝別指雒以爲中國乃約軒轅五嶽以言是通方之巨觀也又指西蕃例爲胡然佛生遊履雪山以南名婆羅門與胡隔絕書語不同故五天竺諸婆羅門書爲天書語爲天語謂劫初成梵天來下因味地肥便有人焉本語書天法不斷故彼風俗事天者以生有所因故也胡本西戎無聞道術書語國別傳譯方通神州書語所出無本且論書契可以事求伏羲八卦文王重之蒼頡鳥迹其文不行漢時許愼方出說文字止九千以類而序今漸被世文言三萬此則隨人隨代會意出生不比五天書語一定上以五義以定中邊可以鏡諸餘如隋初魏郡沙門靈裕聖迹記述釋迦方志遺迹篇第四自漢至唐往印度者其道衆多未可言盡如後所紀且依大唐往年使者有三道依道所經具睹遺迹卽而序其東道者從河州西北度大河上曼天嶺減四百里至鄯州又西減百至鄯城鎭古州地也又西南減百至故承風戍是隨互市地也又西減二百里至淸海海中有小山海周七百餘里海西南至吐谷渾衙帳西南至國界名白蘭羌北界至積魚西北至多彌國又西南至蘇毘國又西南至敢國又南少東至吐蕃國又西南至小羊同國又西南度呾倉去關吐蕃南界也又東少南度末上加三鼻關東南入谷經十三飛梯十九棧道又東南或西南緣葛攀藤行四十餘日至北印度尼波羅國此國土吐蕃約爲九千里其中道者從鄯州東川行百餘里又北出六百餘里至涼州東去京師二千里從涼西而少北四百七十里至甘州又西四百里至肅州又西少北七千五里至故玉門關關在南北山閒又西減四百里至瓜州又西南入磧三百餘里至沙州又西南入磧七百餘里至納縛波故國卽婁蘭地亦名鄯善又西南千餘里至析摩陁那故國卽咀末地又西六百餘里至都羅故國皆荒城耳又西入大流沙行四百餘里至 瞿薩呾那國東境卽漢史所謂于殿國也都護所居漢之所守東去長安九千六百七十里 其關名尼壤城彼土自謂于遁國也周四千餘里沙磧太半寺有百餘僧出五千大乘學者從關至媲摩川二百餘里有媲摩城中有栴檀立像高二丈餘極多靈異光明疾者隨痛以金薄帖像上便愈其像本在憍賞彌國是鄔陁衍那王所造凌空至此國北曷勞落迦城有異羅漢每往禮之王初不信以沙土坌羅漢乃告敬信者曰卻後七日沙土滿城於後二日乃雨寶滿至七日夜果雨土塡城略無遺人其先告者預作地穴從孔而出東趣媲摩像亦同至有記云法滅之時入龍宮也其曷勞城今爲大堆王欲掘寶必遭風變又於媲摩城西行三百三十里方至國城王都南十里有大寺先王所立西南十餘里寺有夾紵立像從屈支國來此有臣於彼禮敬臣還本國遙念無已像遂夜至乃捨宅爲寺都城西三百餘里勃伽夷城有坐像高七尺相好無比首有寶冠光明時現都城西百六十里中大磧惟有鼠壤形大如蝟毛金銀匈奴來寇王祈鼠靈乃夜齧人兵器斷壞自然走退都城西五里寺有浮圖高百餘尺多現光相感舍利數百粒羅漢以右手擧浮圖安之函內乃下之無傾動也都城西南十餘里有瞿室𩜁伽山此云牛角寺像現光明佛曾遊此爲天人說法記其建國崇學大乘山巖石室有一羅漢入滅心定待慈氏佛數百年前崖崩塞戶其國南界接東女國從國城西越山谷行八百餘里斫句迦國卽沮渠也南境其國周千餘里佛寺十餘僧徒出百學大乘者國南有山立多羅塔松泉流茂石室深淨有三羅漢現入滅定鬚髮恒長僧常剃之五印度僧有證果者多止此室又北減三百里方至都城周十餘里山阜連屬臨帶兩河又於國西北大沙嶺度徙多河五百餘里佉沙國卽疏勒也 周五千餘里寺數百僧數萬習小乘有部地多石磧其俗生押頭匾㔸從此南行山野石磧五百餘里至烏鎩國周千餘里都城周十餘里臨徙多河信佛法寺十餘僧減千人習小乘學城西二百餘里至大山嶺有塔數百年前山崖自崩中有比丘冥目而坐形甚偉大鬚髮下垂于肩面國王以酥油灌之擊揵搥丘高視曰我師迦葉波也今始乃聞已涅槃耶又問釋迦佛出世耶告云已滅度矣卽昇空化火焚身其土出白瑿靑玉等從國城西度河登蔥嶺東岡八百餘里至福舍其地在四山之中方百餘頃無樹木有細草緣如別說又西南踰大嶺朅盤陁國周二千餘里都城周五十餘里北背徙多河敬佛法寺十餘五百餘人小乘有部其國東南大石室二口各一羅漢入滅心定經七百餘歲其鬚髮生年別爲剃又西北行三百餘里方至王都東南臨徙多河山嶺連屬又西少南登山冰雪五百餘里至波謎羅川東西千餘里南北百餘里或狹無十里據南北大雪山地鹹鹵多石草木希少絕無人住川南越山有鉢露羅國此川在大蔥嶺上贍部一洲地最高也中有大龍東西三百餘里南北五十餘里大卵出焉其水西流至達摩悉帝國界與縛芻河合故此已西水竝西流東出一流東北至佉沙國西界與徙多河合自此諸水皆東流也龍池正南當無熱池北當千泉川南當池大名婆羅犀羅南北三四百里山地極高池北卽大蔥嶺也水經云高可千餘里兩邊漸下南北豎嶺行數極多百餘條矣多有山蔥崖險蔥翠以名焉嶺南接大雪山北至千泉有二千五百許里東極烏鎩西達活應三千餘里又從川西南入山險七百餘里商彌國周二千六百里土出雌黃人信佛寺有二所僧亦少耳北越達摩悉帝大石山至尸棄尼國周二千餘里山磧連野南越山河至達摩鐵悉帝國一名鑊侃國一名護密國卽睹貨羅之故地也在兩山閒東西一千五百里南北減百里或狹不踰里東臨縛芻寺有十餘僧數蓋少城寺石像上懸金銅圓蓋衆寶飾之人有旋繞亦隨轉人止便止四周石壁莫測其然說聖力使之或謂機關之秘又西南登入谷五百餘里屈浪拏國亦故地也周二千餘里有信向又西北踰嶺三百餘里淫薄健國亦故地也周千餘里都城十餘里又西北山谷行二百餘里鉢鐸創那國亦故地也周二千餘里都城山崖上周六七里寺有四所亦少耳山谷西行二百餘里呬摩呾羅國亦故地也周三千餘里山川相半堅城數十西越山谷三百餘里訖栗瑟摩國亦故地也東西十餘里南北三百里都城周十五里北至鉢利曷國亦是故地廣百餘里南北三百餘里都城二十餘里又從訖栗國西越峻入洞經川城三百餘里瞢健國亦是故地周四百餘里都城周十六里北度河至 阿利尼國故地也周三百餘里帶縛芻河兩岸大城周十五里東渡河至 遏羅胡亦故地也北臨前河周二百餘里大城周十五里又從瞢健國西行百餘里出蔥嶺西頭也尋山而下至於活國亦是故地周二千餘里王城周二十餘里其王突厥也鐵門已南小國多屬突厥地安平俗多信佛十餘僧數百大小兼學西至縳曷國四五百里東南越山谷諸城三百餘里至 闊悉多國亦是故地周減千都城十餘里山多川狹極風僧寺三所衆亦少耳東南入谷嶺度諸小城四百餘里至安呾羅縛亦是故地周三千餘里王城周十五里屬突厥寺有三所僧有數十育王一塔山阜連屬極寒厲也從此西南上大雪山婆羅屖羅嶺東頭經三日行又至極頂通望贍部一洲諸山竝皆四下又尋嶺下行亦三日極峻曲谷鑿冰而度西經迦畢式國邊城小邑數十又西南數百里方至王都又西少南一千三百里越山川至 弗栗恃薩儻那國廣二千餘里南北千餘里王城周二十餘里信佛從此南行五百餘里漕矩咤國亦曰早利周七千餘里王城周三十餘里山川相半寺有百數僧徒數皆學大乘育王塔十所天祠數計多外道也土宜鬱金香草興瞿草生羅摩印度川南境䅦那呬羅山王城東南二千餘里至西印度伐剌拏國方合北道南趣佛國其北道入印度者從京師西北行三千三百餘里至瓜州又西北三百餘里至莫賀延磧口又西北八百餘里磧至柔遠縣又西南百六十里至伊又西七百餘里至蒲昌縣又西百餘里至西洲卽高昌故地漢時宜禾都尉所治處也後沮渠涼王避地彼今爲塞內又西七百餘里至阿耆尼國卽烏耆也東西六百餘里南北四百餘里都城周六七里僧寺十餘千餘人竝學小乘說一切有戒行精勤食三淨肉從此黑嶺胡類群分財輕義無禮無敬婦尊夫卑良賤一等吉素凶皁以爲服制又西南行二百餘里踰一小山越二大河川行七百餘里至屈居勿反支國卽丘慈也東西千餘南北六百里城周十七八里寺有百餘僧五千餘竝學小乘說一切有如上三淨俗大信佛王城民宅多樹像塔不可勝記東境大城中有天祠池龍時出與牝馬合而生龍駒初生𢤱悷子方馴駕故國多善馬近王名金花者感龍馭乘王欲終時鞭觸其耳因卽潛隱與人婦通生子驍勇搆突厥殺此城人故令空荒城北四十餘里東昭怙釐寺佛堂中有玉石方二尺上有佛足迹長尺八寸廣六寸齋日放光王城西門外路左右有立佛各高九十餘尺於此建場五年一西有阿奢理貳寺唐言奇特也王外遊觀禮聖迹母弟留守因自割勢爲防讒搆王深異之弟後遇人犍五百牛遂愍贖之慈善根力男形欻生遂不入宮王訝奇特故因置寺又西經小磧六百餘里跋祿迦國古名姓墨又名函墨東西六百餘里南北三百餘里王城周五十里寺數十千餘人竝小乘學西北行三百餘里度石磧至凌山卽蔥嶺北原也水多東流此路不得赭衣持瓠及聲叫犯者龍能飛風雨沙遇必皆沒山行自西四百餘里至大淸池又名熱海亦名鹹海千餘里東西長四面有山行人祈福又西北五百餘里至素葉水城周六七商胡雜居已西數十孤城亦爾西四百餘里至千泉泉涌多出方二百餘里南面雪山三垂平陸又西百五十里至呾邏私城又西南二百餘至恭敬城又南五十里奴故赤建國周千餘里又西二百餘里至赭時國唐言石國周千餘里西臨葉河又東南千餘里至㤄敷世捍國周四千餘里山周四境又西行千餘里窣睹利瑟那國周千四百里東臨葉葉河出蔥嶺北西北流又西北入大磧應五百餘里至颯末建國唐言康國千六百餘里南北狹都城周二十餘處極險固自此東南至弭末賀米國也周繞四五百里東西狹又西北至劫布呾那國曹國也周千四五百里東西長又西三百餘里至屈霜你迦何國也周同曹國而東西狹又西二百餘里至喝捍國東安國也周千餘里又西四百餘里捕捍國中安國也周千七百餘里東西長又西四百餘里至伐地國西安國也周四百餘又西南行行五百餘里至貨利習彌國順縛芻河兩岸東西可三十里南北五百餘里又從颯祙建國西南行三百餘里羯霜那國云史國也周可千五百里又西南二百餘里入大山山路絕險又少人物東南山行三百餘里至鐵門關左右石壁其色如鐵鐵固門扉懸鈴尚在卽漢塞之西門也出鐵門關便至睹貨邏國古云吐出羅也之故地也南北千餘東西三千餘東拒蔥嶺西接波斯南大雪山北據鐵門縛芻大河中境西其中自分二十七國僧以十二月十六日安居由溫熱多雨故也順河北下至呾蜜國東西六百餘南北四百餘王城周二十餘里寺十數僧出千人大有窣睹波卽古塔之別名如偸婆等佛像靈又東至赤鄂衍那國東西四百北五百餘王城周十餘里寺五僧少東至忿露摩國東西百餘南北三百王城周十六七里寺有二所僧百餘耳東至愉朔俱漫國廣四百餘從百餘王城周十餘里寺二所僧亦不多西南臨縛芻河便至鞠和衍那國二百餘從三百餘王城十餘里寺三所僧百餘又東至鑊沙國廣三百餘五百餘王城周十六七里又東至珂咄羅國廣從千餘里王城周二十餘里東接蔥嶺至拘謎陁國廣二千餘里從二百餘里據大蔥嶺之中城周二十餘里西南臨縛芻河國接尸棄尼國南度此河至達摩悉帝等國如前中道所引也又從鐵門南而少東五百餘里至縛喝國一道拘謎西南至嚩伽浪廣五十餘里從二百餘里都城十餘里又南至紇露悉泯健國周千餘都城周十五里許又西北至忽懍國周八百餘里都城周十五里餘寺十餘僧五百又西至縛喝國廣八百餘四百餘北臨縛芻河王城周二十餘俗美其國詺爲小王舍城寺有百僧二千餘人竝小乘學城外西南有納縛此云新也寺在雪山北作論諸師贊重此寺基業不替像鎣名珍毘沙門像衛之突厥葉護欲襲寺取寶軍寺側夜夢天王長戟貫胸可汗心因爾便死堂中有佛澡灌受可升雜色炫燿金石難名又有佛牙長寸餘廣八九分色黃白而光淨佛掃帚者用迦奢草長二尺餘圍可七寸雜寶飾柄三物齋日法俗所感放大光明有大浮圖高二百餘尺金剛泥塗以寶莊之有佛舍利時放神光諸羅漢入涅槃者示通立塔雖有證果不現通者則不封樹王城西北五十餘里有提謂城王城正北四十餘里波利城各有浮圖高三丈許卽釋迦開元獻麨長者髮爪之所建也佛以僧伽胝鬱多羅僧僧卻崎又覆盋豎錫杖次第安布立塔儀式令依崇建王城西七十里迦葉波佛時所建浮圖高二丈餘又從大城西南入雪山河三十餘里至銳末陁國廣五六百里百餘里王城周十餘里又西南行三百里至胡寔建國廣五百餘從千餘王城周二十餘里多山川又西北至呾剌健國廣同前從五十餘里王城十餘里西接波剌斯國界又縛喝國東至忽懍國於此東南至紇露悉泯健國千餘里於此北近縛伽浪國東西五十餘里此國東北接活國又從縛喝南百餘里至揭職國廣五百餘三百餘都城周五里許寺十餘僧三百餘人竝小乘學陵阜相連東南入大雪山六百餘里出睹貨羅故地至梵衍那國廣二千餘從三百餘里在雪山中城依巖險寺有數十僧數千人學小乘出世部王城東北山阿大石佛高一百五十尺金寶莊嚴東寺左有鍮石釋迦立像高百餘尺身別鑄合成立之城東三里寺有涅槃臥素佛長千餘尺亦金寶莊之東南二百餘里度大雪山東寺有佛齒及劫初獨覺齒長五寸餘廣減四又有金輪王齒長三寸廣二寸有商諾迦縛娑卽商那和修傳法第三師大阿羅漢鐵鉢受九升許幷九條僧伽胝絳赤色設諾草皮之所績成以其先世於解夏持此草施僧福力所被五百中陰生恒服之從胎俱出逐身而長難度時變爲法服受具已後又變爲九條其齒鉢等竝金緘之羅漢證滅入邊際定智願力故留袈裟待遺法方乃變壞今已少損信有徵矣雪山東至小川澤東入雪山踰黑嶺迦畢試國周四千餘里北背雪山三垂黑嶺都城周十餘里寺有百餘僧六千餘人多學大乘其王信佛歲造丈八銀像自修供之天祠數十異道千餘 王城東三里北山下有大寺佛院東門南大神王像右足下有大寶藏近有外王逐僧欲掘神冠中鸚鵡鳥奮羽鳴呼地動王軍皆仆起謝而寺北嶺上有數石室亦多藏寶私䦕者藥叉變爲師子蛇虫來震怒室西三里大嶺上有觀自在像願者像示妙身安言行者城東南三十餘里曷邏怙羅寺大臣所造以名目之浮啚高百餘尺昔臣夜夢令造浮啚從王請舍利也及旦至宮有人持舍利甁臣留舍利令人先入乃持甁登塔覆鉢自開安舍利訖王使追之石已合矣齋日放光流出黑油夜聞音樂城西北二百餘里大雪山頂有龍池山下爲龍立寺塔中有佛骨肉舍利升餘有時煙起或如火猛焰漸滅之方見舍利狀如白珠繞柱入雲下塔中 城西北大河南岸古王寺有佛弱齡齔齒長一寸餘 又此東南往古王寺有佛頂骨一片廣寸餘色黃白髮孔分明佛髮靑色螺旋右縈引長尺餘卷可寸許又西南古王妃寺金銅浮啚高百餘佛舍利升餘每十五日夜放光繞盤曉入塔中城西南比羅婆絡山云象堅也頂盤石上起高百餘尺舍利升餘山北巖泉佛受山神飯已漱口嚼楊枝因生今爲茂林寺號楊枝也又從龍池東行六百餘里越雪山度黑嶺至北印度已前諸邑竝名胡國至此方合中間道也其地名曰 濫波國北印度所攝也入天竺婆羅門地也其五印度之境周帀九萬餘里三垂大海北背雪山北廣南狹如半月也七十餘國同一王命 濫波國者在無熱池西倚北胡活國東南三垂黑嶺北約雪山都城周十餘里十餘僧數亦少多學大乘天祠數十異道特多東南百餘里踰大嶺大河至那伽羅曷國屬北印度古花氏城廣六百餘長二百餘里山周四境都城周二十餘寺多僧少天祠五所異道百人城東二里有石塔高三百尺編石突起雕鏤非常此卽昔時値然燈佛鹿皮衣髮布掩泥之地也經劫猶存無憂王重法建此石塔以誌之每於齋天輒雨花大衆集觀西有佛寺南小塔是掩泥處王避大路遂僻建立城內大塔故基舊有佛齒別塔高三丈餘云從空來旣非人工寔多靈異城西南十餘里有塔是佛自中印度陵空來降迹處次東有塔是昔値燃燈佛買花處 城東南二十餘里小石嶺上塔高二百餘尺西南深㵎瀑布飛流懸崖東岸石壁大洞穴龍王所居門徑狹闇昔佛於此化龍留煥若眞形至誠請者乃暫明現外方石有佛足迹輪相發光窟西北隅塔者佛經行處又側髮爪塔又說薀界塔窟西大盤石上有濯袈裟文城東南三十餘里有醯羅城四周險中有重閣上安佛頂骨周尺二寸其色黃白髮孔分明欲知善惡香泥印之隨心而現有佛髑髏狀如荷葉色同頂骨有佛眼睛大如奈許淸白映徹竝七寶小塔盛前三迹又以寶函盛而緘封有佛大衣細㲲黃色置寶函中微有壞相中有佛錫杖白鐵作環栴檀爲笴寶筒盛之近王恃力將入宮中尋復故處斯五聖迹王令五淨行者執侍掌護有須見者稅一金錢請仰稅五科寶乃重觀禮彌繁閣西北塔小而多靈人以手觸其上鈴震自此東南山谷中行五百餘里健陁邏國北印度也廣千餘里長八百里東臨信渡河都城周四十餘里少空荒有十餘天祠百所異道雜居 城內東北故基是佛鉢寶臺經數百年在波斯王宮供養城東南八九里卑鉢羅樹高百餘尺枝葉蒙密昔四佛座下見有坐像傳云賢劫諸佛皆坐其下釋迦如來於此坐已告阿難後迦膩色迦王集吾骨肉在此王後在南建塔基周一里半金銅相輪二十五重或云四十層者擧高五百五十有舍利一斛初有化牧牛人林閒造三尺小塔王擲棄之乃於大塔第二級下石基之側半現小塔疾者歸其大塔東面石陛上有金色蟻大如指如麥相從嚙石壁文如鏤廁以金砂作二加趺佛像高四五六尺又於南面石陛畫佛丈六之形昔有二貧人各施一金錢共畫一像請現神變像卽現胸以上分爲兩身下合爲一次南百餘步白石佛像高一丈六尺面北放光夜出繞塔賊欲盜物像出迎之賊退像還大塔左右小塔數百莊工極巧香音兩異仙聖旋繞佛記此大塔七燒七立佛法方滅燒至三今現營搆西有故寺竝前王所立諸大論師世親菩薩如意論師脅尊者等造毘婆沙處寺東北五十餘里渡大河至布羯邏伐底城周十四五東有四佛說法塔無憂王建之數百尺彫鏤希世 城北五里故寺塔高數百尺卽菩薩捨千眼處有石塔高百餘尺梵釋初作妙珍鎣佛滅寶變金爲石也 又西北行五十餘里塔者是佛化鬼子母處又北五十餘里塔者是商莫迦菩薩此云睒也被王射處 又東南約二百里跋魯沙城北東二十餘里彈多落迦卽檀特也山嶺上塔是蘇達拏云善牙也棲隱之所婆羅門捶男女處流血塗地今諸草木皆同絳色巖閒石室妃習定處又西北行百餘里越小山至大山有一寺塔僧學大乘獨角大仙爲女亂處 沙城東北五十里大山大天祠祠東南行百五十里至烏鐸迦漢荼城周二十餘里南臨信渡從此城北越山行六百里烏仗那國北印度之正國也古謂烏長山谷相連周五千里昔日輪王菀也土宜鬱金香夾蘇婆窣堵河王城周十四五里有一千四百僧有一萬八千竝大乘今多荒少其習大乘統文略義律儀傳訓有五部焉一法密部二化地部三飮光部四說一切有部五大衆部天祠十餘異道雜居 王都瞢揭釐城其東五里大塔多瑞佛昔作忍仙爲羯利此云鬪諍王支解之處城東北二百六十里入大山至阿波邏龍泉卽前河源也沠流西南春夏合凍晨夕飛雪佛昔化暴龍金剛以杵擊崖龍怖歸依請佛放雨乃許之令人收糧十二年一雨水災又泉西南三十餘里水北岸大石上佛伏龍已留迹示之隨心長短順流三十餘里有佛濯衣石袈裟文如鏤城南四百餘里醯羅山谷尋水逆流東上花果緣崖或聞諠話音樂聲方石相接是佛昔聞半偈捨身處城南二百餘里大山側有摩訶伐那寺此云大林昔爲薩縛達羅王卽一切施也失國避地爲貧人故令縛送處寺西北下山四十餘里有寺塔高百餘尺側方石上佛足迹相放光照寺爲天說本生處塔下有石黃白津膩是佛昔爲聞法折骨寫經處 又西七十里塔是佛昔爲尸毘迦王此云輿也割身代鴿處又西二百餘里珊尼羅闍川薩襃殺言蛇藥也寺塔高八十尺佛昔爲帝釋身作大蟒僵死以施貧疫處側有蘇摩塔是佛變爲蘇摩蛇噉病愈事川北崖塔病求多愈又側有涌泉佛昔爲孔雀王嘴啄而出用救疾處 城西南七十里大河東塔高六十尺是嗢呾羅犀那言上軍也王所造佛令以舍利與王分在河濱立塔王以白象負歸象變爲石 城西五十餘里渡大河有盧醯呾迦塔言赤也高五十餘佛昔爲慈力王刺血飮五藥叉處城東北三十里遏部多言奇特也石塔高四十佛爲人天說法塔從地出現卽存 又西渡大河四十里寺精舍有阿縛盧抧抵云觀也伊濕伐羅云自在也菩薩像卽觀世音者感靈遠照此西百五十里山嶺龍池周三十餘里 王城東北踰山谷逆上信渡河途路極險乘緪棧梁鎖杙躡隥千有餘里至達麗羅川烏仗那舊所都也大寺中有刻木梅呾麗古云彌勒唐言慈氏菩薩像金色晃朗高百餘尺末田底迦卽末田地阿羅漢所造以通力引匠升睹史多卽兜率也天三返觀相乃成其好自有此像法方東流也東行越嶺逆信渡河履險飛梁五百餘里渡又東渡縛芻河登危鉢露羅國周四千里大雪山中東西寺數百僧數千學師戒行多濫國非印度所統多冰雪其土出金如火北對婆羅犀羅大嶺還從健馱邏烏鐸迦城南渡信渡河廣四里許西南流淸澄如鏡毒龍惡狩窟穴其有持舍利寶花者船多沈沒渡河至呾叉始羅國北印度也周二千餘里都城周十餘里寺多僧少竝大乘學城西北七十餘里有伊羅鉢龍池百餘步池東南三十里兩山閒塔高百餘尺佛昔記慈氏興世四大藏者此地出一故有振動斯周百步曾無一搖有欲發者地振人仆城北十二塔於齋日常放神光仙花天樂有癩者於塔禮懺除穢塗香不久便愈身又香潔昔佛爲戰達羅鉢剌婆王云月光也以頭施處凡經千施卽塔名月光也 城東南山塔高十丈許目王所治育王所造又東南越山谷七百餘里僧伽補羅國北印度也周三千五百里西臨信渡河大城周十四五里城東五十里有石塔高二十餘丈佛所遊處池沼十餘四色蓮花彌覆其內從此南返至呾叉始羅國北界渡信渡河東行二百餘里度大石門是摩訶薩埵王子捨身飤虎處東有寺百餘又南百五十里石塔者薩埵以竹自刺血啗獸處地及草木今猶絳次北石塔高二十餘丈放光開信病歸多愈又東五十餘里孤山有寺塔高二百餘尺僧徒二百人竝大乘佛昔化藥叉不食肉處又東南山行五百餘里烏剌尸國北印度也周二千餘里山阜相屬都城周十八里不信佛法屬迦濕彌有佛塔高二十餘丈育王所造寺僧少學大乘教又東南登山鐵橋千餘里至迦濕彌羅國北印度也古曰罽賓周七千里四面負雖有門徑狹而劣通城西臨大河十三里廣四里許寺百餘僧五千餘土出龍種馬鬱金火珠有四浮啚各有舍利一升餘佛滅後第四百年脅尊者年八十方出家證無學將五百羅漢來此造十萬頌鄔波弟鑠釋素呾纜藏卽優婆提舍論修多羅藏異名也次造十萬頌毘柰耶毘婆沙論次造十萬頌阿毘達摩論凡六百六十萬言備釋三藏新城東南十餘里故城北大山陽寺塔僧徒三百人佛牙長寸半色黃白齋日便放光又南十五里有觀自在菩薩立像有願見者斷食便睹王城西北二百餘里至商林寺城西百五十里大河北接山有寺僧百餘人從此西南越山行七百餘里至半笯蹉國北印度屬罽賓周二千餘里寺有五所多山川東南行四百餘里遏邏闍補羅國非正北印度乃荒服國也周四千餘都城周千餘里寺十所僧甚少祠一外道甚多自濫波達此形體鄙非印度之正境也從此下山東南竝是大川達遠無畔惟以河國而分界部雖有小山竝是孤住自此以北通連雪山東達神州涼部以南諸雪山也案此山亦卽贍部之巨鎭地於此城東南下平渡水行七百餘磔迦國北印度也周萬餘里東據毘播奢西臨信渡河都城周二十餘里少信佛多事天神寺有十餘天祠數城西南十五里奢羯羅故城寺塔高二十餘丈昔四佛說法經行處西北六里許塔高二十餘丈亦四佛說法處 新都城東北十餘里石塔高二十餘丈多有舍利齋日放光行五百餘里那僕底國北印度周二千餘里都城周十四五里寺十天祠八城東南五百餘至闍林寺周二十餘里佛舍利塔數百千區幷石室等僧有三百人學小乘說有部也德行淸高小學之博劫千佛竝此說法釋迦滅後第三百年迦多衍那迦栴延也於此造發智論寺塔高二十餘丈有四佛行坐迹處從此東行百五十里至 闍爛達那國北印度也東西千餘南北六百里都城周十餘寺有五十僧二千餘人大小專門天祠三所外道五百人東北越山七百餘里屈露多羅國北印度也山周四境都城周十四五里寺二十餘僧千餘人多大乘學天祠十五異道雜居出火珠雨俗癭且尰城內有塔記佛曾遊於此說法自斯北行近二千里山路危險至洛護羅國北印度也又北山行二千餘里雪寒更甚達秣邏娑國又名三波訶北印度攝又從屈露羅南行七百餘里越山濟河至設多圖盧國北印度也周二千餘里西臨大河都城十七八里佛法大盛城內外寺十所僧亦少耳城東三里塔高二十餘丈育王所造傍有四佛行坐迹自此西南行八百餘里波狸夜呾羅國入中印度也周三千里都城周十五里寺有八所僧亦少耳俗信外道天祠十所異道千餘土有稻種六十日收東行五百餘里秣菟羅國中印度也古云摩偸羅周五千餘里都城二十餘里寺二十餘僧二千餘人大小兼學天祠五所異道雜居土植菴沒羅果小者生靑熟黃大者始終靑色城中三塔四佛遺迹甚多及舍利子沒特伽羅子謂目乾連也滿慈子富婁那也優婆釐優波離也阿難陁羅怙羅曼殊室利等諸塔每三長月六時諸僧尼集阿毘達磨衆供養舍利弗塔習定供目犍連塔誦經衆供滿慈塔毘柰耶衆供優波釐塔尼衆供阿難塔具衆供羅怙羅塔大乘衆供諸菩薩尋斯諸塔不必遺身但立像設供用呈心造如羅怙文殊未取滅度可知矣城東六里有山崖寺是尊者烏波鞠多云近護也之所造也有佛指爪塔寺北石巖室高二丈廣三丈細籌四寸塡之近護導夫妻俱證羅漢者一籌乖此不在室記又室東南二十餘里大涸池側有塔佛曾遊此有獼猴持蜜施佛佛令水和遍衆同飮喜墮坑而死便生人中池北林中四佛經行處大有遺迹又東北五百餘薩陁泥濕伐羅國中印度也周七千餘里都城周二十餘里寺有三所僧七百皆小乘者天祠百餘異道甚多西北四里塔高二十餘丈舍利一升時放大光城南百餘里至佛寺東北四百餘里窣祿勒那國中印度也周六千餘里少荒東境臨殑伽河卽古恒河北接大山城東南閻牟挪河從國西北山中出中境而都城周二十餘里東臨閻牟河有五所僧千餘人多小乘學天祠百異道甚多河西大寺東門外塔曾於此說法度人其側有佛髮爪塔閻牟河東八百餘里至殑伽源廣三四里東南入海廣十餘里水色滄浪味甘沙細隨水而流俗謂福水有沐除或有輕命自沈云生天受樂有僧伽羅國提婆菩薩化外道受正法處渡河東秣底補羅國中印度周六千餘里都城周二十餘里不信佛而敬天寺有十餘僧八百人多小乘者天祠五十餘異道雜住國西北境殑伽東岸摩裕羅城周二十餘里出鍮石水精城側臨大河有大天祠多有威靈有池編石爲岸引河爲浦五印度以爲殑伽河門福滅罪處常有百千人澡濯從摩北行三百里婆羅吸摩補羅國北印度周四千餘里山周四境都城周二十餘里寺五僧天祠有十異道雜住國北大雪山有蘇伐剌拏瞿呾羅國言金氏也出上黃東西地長卽東女國非印度攝卽名大羊同國東接土蕃西接三波訶北接于闐其國世以女爲王亦爲王不知國政男夫征伐種田而又從末底補羅國東南行四百餘瞿毘霜那國中印度周二千餘里都城十四五里寺二所僧百餘人而習小乘祠三十餘異道雜住城固險峻其側古寺塔高二十餘丈佛曾於此一月說法有髮爪二塔各高丈餘旁有四佛坐迹又東南行四百餘里至堊醯掣呾邏國中印度周三千餘里都城周十七八里寺十餘所僧有千餘習小乘正量部天祠有九外道三百餘人城依險固其外池側佛爲龍說法七日處立塔側有四佛行坐迹立塔表又南二百七十里渡殑伽河西南毘羅刪拏國中印度周二千餘里都城周十餘里信外道少敬佛法寺二所徒三百人皆大乘學天祠五所城中寺塔高十餘丈佛曾於此七日說薀界法四佛行坐遺迹尚存於此東行二百餘里劫比他國中印度古僧伽舍也周二千餘里都城周二十餘里寺有四所僧千餘人祠十所同事大自在天皆作天像其狀人根形甚長偉俗人不以爲惡謂諸衆生從天根生也城東二十餘里大寺中僧數百人淨人數萬頭皆宅寺側大垣內有天帝造三寶階中階黃金左以水精右用白銀南北而列東面下地是佛從逝多林卽祇陁林升天善法爲母三月說法下降處百年前階尚在今竝沒盡後王倣之猶高七十餘上起精舍 側有石柱光潤映現隨其罪福影出柱中育王所造階側浮圖四佛行坐迹也 佛澡浴處立塔其所有佛入室精舍又其側佛經行石基長五十步高七尺足所履處皆蓮花文基左右小塔梵王所造次前是蓮花尼化爲輪王先見佛處佛告尼曰非汝先也有蘇部底須菩提也宴坐石室知諸法空見吾法身次東南池有龍居焉恒護聖迹不可輕犯從此西北減二百里羯若鞠闍國中印度曲女城也周四千餘里都城西近殑伽河長二十餘里廣四五里邪正相半寺百餘僧徒盈萬大小兼天祠二百餘所異道數千人卽統五印度之都王也號尸羅逸多言戒日也吠奢姓初欲登位殑伽岸有觀自在乃請之告曰汝本此林蘭若比丘耳月王旣滅佛法王當重興愍物在懷方王五境愼勿昇師子座及稱大王號也王乃共童子王平殄外道月王徒衆又約嚴令有噉肉者當截舌生當斬手乃與寡妹共知國事於殑伽側建千浮啚各高百餘尺城邑鄕聚達巷交衢立精舍儲食止醫藥惠羈貧聖迹之所皆爲立寺二十年來五年一會傾及府藏拯濟群有惟留兵器用備不虞初作會日集諸國僧三七日中四事供養令相論議若戒行貞固道德優洽者升師子座便受戒淸淨無學示有崇仰穢行彰露者驅出國界諸有王臣植福無怠者攜手同坐異此不顧王巡省方俗不常其居行必四兵導引嚴設舟乘象擊鼓吹螺象軍八萬以威四惟兩三月不外遊行宮中每日飯諸沙門僧有千人婆羅門五百日分三時一時理務兩時營福又絕血食日例一頓於河西寺東起寶臺高百餘尺中有等身金像次南起寶壇浴佛像處於此東北十五里許別築行宮從寺至宮夾道爲閣窮諸彫飾樂伎不移遞奏而已又以三尺隱起金載以大象寶幰其上王爲帝釋像執寶蓋左侍有迦摩縷波國拘摩羅言童子也作梵王像執拂右侍各五百象軍被鎧同衛前後各百大象樂人於上鼓奏音聲戒日王又以眞珠雜寶金銀諸花隨出四散供養三寶其五印度尼寺稀少縱有尼者與僧同門亦同處無虧戒約然童子王剎帝利語使人李義表曰上世相承四千先人神聖從漢地飛來王於此土城西北塔育王所造昔佛於此七日說法其側有髮爪塔四佛行坐迹南臨殑伽河三寺同垣異門佛像嚴佛牙長寸半光色變改寶函盛之遠近瞻者日有百千守者煩撓重稅金寶而樂禮者不辭重貨齋日便出置高座上散花雖積牙函不沒寺僧淸肅淨人數千戶寺前左右精舍百餘尺石基甎室中像寶莊或純金 次東南大精舍石基甎室高二十餘丈是佛六月說身無常淨處又有四佛行坐迹在城東南六七里殑伽南岸上城東南百餘里納縛提婆城據殑伽河東岸三寺同垣異門周二十餘里 次前二百餘步塔高二十餘丈佛曾七日說法中有舍利放光明其側四佛行坐迹寺北四里臨殑伽岸塔高二十餘丈佛曾七日說法四百餓鬼解悟生天其側又有髮爪塔次側又有四佛行坐迹又東南行六百餘里渡殑伽河南至阿輸陁國中印度周五千餘里都城周二十餘里寺有百餘僧三千餘人大小兼學天祠有十異道少耳 城中故寺是伐蘇畔度菩薩言世親也數十年中作大小乘論處城北五里殑伽岸大寺中塔高二十餘丈佛爲天人三月於此說法側有佛塔四佛行坐迹西五里有佛髮爪塔城西南五里菴沒羅林中故寺是阿僧伽菩薩云無著也夜升天宮於慈氏所受瑜伽莊嚴大乘經論及中邊等曉爲衆說林西北百餘步佛髮爪塔自此東行三百餘里度殑伽北至阿耶穆佉國中印度周二千五百里都城臨河周二十里寺五所僧千餘人學小乘天祠十所異道雜居 城東南臨殑伽塔高二十餘丈佛曾三月說法處有髮爪靑石塔有四佛行坐又東南行七百餘里渡殑伽河閻牟那河北至鉢羅伽耶國中印度周五千餘里都城據兩河交周二十餘里寺二僧少天祠數異道特多城西南臨閻牟河曲二三千里東北流合閒有瞻博迦花中塔高十餘丈佛曾於此降外道處有髮爪塔經行迹又有提婆菩薩廣百論處 城中天祠堂前大樹葉蒙密食人鬼依之左右遺骸爲𧂐至祠中無不輕命上樹投下爲鬼所 城東兩河閒交廣十餘里土地平細沙彌布古今王豪諸有捨施不止焉號大施場戒日大王亦修此業場東合流口日數百人自溺而死彼俗名爲生天所也有欲行法七日於此絕粒自沈中流遠近相趣乃至山猿野鹿群遊水濱絕食沈水當戒日王行施之時有二獼猴雌爲狗殺雄者負屍擲此河中其又自餓累日而死自此西南大林野行五百餘里至憍賞彌國中印度周六千里都城周三十餘里寺十餘僧三百餘人天祠五十外道衆多城內故宮大精舍高六十餘尺刻檀佛像上懸石蓋卽鄔陁衍那王古優陁延也唐云出愛之所造也靈光閒起諸王以力欲擧終莫之移昔佛爲母上天說法王請目連神力接工就天摸及佛下天像便起迎佛慰喩曰方爲佛事舍東百餘步四佛行坐迹浴室井今猶充汲城內東南隅具史羅長者宅有佛精舍髮爪塔其大塔又有四佛行坐迹城西九里石窟曾遊此伏毒龍也側有大塔高二十餘丈旁有佛經行迹及髮爪塔病求多愈釋迦遺法滅在此國貴賤入境自然感傷窟東北大林中行七百餘度殑伽北岸至迦奢布羅城周十里許是護法菩薩伏外道處塔高二十餘丈佛曾於此六月說法有經行迹及髮爪塔自北行一百八十里鞞索迦國中印度周四千餘里都城周十七里寺二十僧三千人天祠五十道巨多城南道左右寺塔高二十餘佛曾於此六年說法側有奇樹七十尺春冬不改是佛齒木棄而茂諸邪見者競來殘伐尋生如故有四佛行坐迹幷髮爪塔基角相連林池交影自此東北五百餘里室羅伐悉底國中印度卽舍衛也周六千餘里都城荒毀故基周二十餘里寺數百僧徒少天祠百餘外道甚衆 荒城故殿東基上小塔是鉢羅犀那恃多古云波斯匿唐言勝軍也爲佛造堂處次側故基上塔是王爲佛姨母鉢羅闍鉢底古云波闍波提此云生主比丘尼造精舍處次東塔是蘇達多云善施也之故宅也側有大塔是鴦寠利摩羅言指鬘也捨邪處也城南六里逝多林是給孤園太子所造寺也今荒廢尚有石柱高七十餘尺育王造之甎室一存餘竝湮沒室中有爲母說法金像東北有佛洗病僧塔西北有目連擧身子衣塔不遠幷塔佛所汲用又舍利弗與佛經行道說法處竝有表塔靈藥異香常降其所又外道殺女以謗佛處立塔表之寺東百大深坑是調達欲毒害佛生陷處南有大坑是瞿伽離比丘毀佛生陷又南八百步大深坑是戰遮婆羅門女毀謗佛生陷處此三坑皆洞達無洪雨大注終無停偃寺東七十步精舍名曰影覆高六十尺中有東面坐像與外道論處 次東天祠量同精舍初日影西不蔽佛舍晚日蔭東遂覆天祠又東四里大涸池是毘盧釋迦王舊云流離也陷入地處後人立塔記之 又有身子初造寺時與外道捔處亦立塔記寺西北四里有得眼林中有佛經行塔其緣勝軍王抉五百賊眼聞佛慈力一時平復捨扙遂生城西北六十里故城是人壽二萬歲時迦葉波佛本生處其北有塔卽此佛全身舍利之所育王造塔表之 又東南行五百餘里劫比羅伐窣堵國中印度古云迦毘羅也周四千餘空城十數竝無人住宮城周十五里許以甎成之故寺千餘宮城一寺僧三十餘天祠二所外道雜住城內正殿基上精舍中作王像其側是摩訶摩耶言大術也夫人寢殿基上精舍作夫人像其側精舍中作菩薩神降之相彼執不同上座部云唐國五月十五日諸部又云當此五月八日此蓋聞見之異耳其側有仙相塔城南有塔是太子捔力擲象越城墮地爲大坑處側有精舍作太子像及受業像 其傍精舍是妃寢處作耶輸陁羅幷羅怙羅像 別本云太子初夜開城北門出去又城東南隅精舍中作太子乘白馬凌空踰城處四城門各有精舍作老死沙門像城南四里尼拘盧林塔佛得道與天人說法之所城南五十里故城中是人壽六萬歲時迦羅迦村馱佛本生城城東南塔卽此佛遺身也憂王於前建石柱高三丈餘 又東北三十餘里故城中塔是人壽四萬歲時迦諾迦牟尼佛本生城城東北塔此佛遺身也無憂王爲建石柱銘記高二丈餘城東北四十餘里有太子坐樹下塔大城西北數百千塔誅釋子塔有四釋子拒軍城人不受被放出境一爲烏仗王三爲梵衍等王至今不絕 城南尼拘律樹塔佛初來見父王處 城南門外塔捔射處東南三十餘里是太子射矢沒地因涌泉流俗傅箭泉病飮多愈或持泥傅額隨苦皆愈又東北九十里臘伐尼林釋種浴池花水相映北二十五步無憂花樹今已枯悴誕處也有說云當此三月八日者上座部云當此三月十五日者 次東有塔龍浴太子處初佛生已不扶而行四方各七步所蹈之處出大蓮花旣右脅生天帝衣接四王捧之置金几上凡施四塔幷立石柱表之旁有小河南而流俗號油河是太子產已天化此池光潤令沐以除風虛今變水河尚膩如油從此東行二百餘里荒林藍摩國中印度多空城東南佛塔減百尺初八分之一舍利也靈光時起側有淸池龍變爲蛇出繞其塔野象採花以散之無憂王欲開龍護不許又東大林百餘里大塔是太子至此解寶衣中末尼珠付闡鐸迦還父王處 又東有贍部樹枯株尚在小塔是太子以餘衣易鹿皮處其側塔者剃髮處年自不定或云十九二十九者 又東南野行百九十里尼拘陁林塔高三丈餘昔人於佛焚地收餘灰炭於此起塔病者祈愈有四佛行坐迹塔高百餘尺左右數百小塔又東北大林路險五百里拘尸那揭羅國中印度城頹荒人物少也內東北角塔是准陁故宅其井猶羙營供所穿城西北四里度阿恃多伐底河此云有金也近西岸娑羅林兩林閒相去數十步中有四樹特高大甎精舍中作佛涅槃像北首而臥塔高二百餘尺前有石柱記佛滅相有云當此土三月十五日者說有部云當此九月八日諸部異議云至今貞觀二十年則經一千二百一十二年矣此依菩提寺石柱記也或云千三百或千五百餘年或云始過九百未千年者精舍側有佛昔爲雉王救火及鹿救生各立一塔 次西塔者是蘇跋陁羅言善賢也滅證處次有一塔是執金剛神躄地處次側一塔是停棺七日處 次側一塔是阿泥樓陁上天告母降來哭佛處 城北度尼連禪那河三百步塔者是佛涅疊般那言焚燒也處也地今黃黑土雜灰炭有祈感咸獲舍利次側一塔佛爲大迦葉波現雙足處次又一塔前立石柱記八國分舍利事此西南行二百餘至大邑又大林行五百餘里婆羅痆女黠廝國中印度古波羅柰也周四千餘里都城西臨殑河長減二十里廣六里許人居盛滿多信外道寺三十餘僧三千餘竝小乘正量部天祠百餘道萬餘多事大自在天根也大城中天祠二十所天根高百餘尺城東北婆羅痆河西塔育王造高十餘丈前立石柱碧蘚現佛 河東北十餘里鹿野寺也區界八分連垣周堵層軒重僧徒一千五百人竝小乘正量部有佛精舍高二十餘丈甎龕四合節級百數皆隱起金像鍮石佛等次西南塔高百餘尺前有石柱高七十餘洞澈淸淨誠感像現隨其善惡成道已初轉法輪處 其側三塔昔三佛行坐處傍有諸塔五百獨覺入滅處又側一塔慈氏菩薩受記處又西一塔是佛過去爲護明菩薩迦葉波佛授今成佛處 次南四佛經行處長五十步高七尺靑石積成作釋迦經行像像形特異肉髻上髾頭抽出神而有徵寺迹極多精舍浮啚乃數百事不可具也寺西淸池周二百步佛嘗盥浴次西小池佛嘗滌器 次北小池佛嘗浣衣三池龍止味甘且淨有慢觸者金毘羅獸卽而害之側有方石上有佛袈裟文迹道兇人有輕蹈者池龍輒興風雨側有浮圖佛曾作六牙象王見獵者被法衣故拔牙與處 側又一塔佛昔爲鳥與獼猴象相問誰大處 又大林中塔佛與調達昔爲鹿王佛代孕鹿命處鹿野之號因而生焉 寺西南三里大塔高三十丈基歭壯麗又一塔是五人迎佛處大林東三里塔者佛昔爲兔與諸獸聚自知形燒身饋之因感天帝下讚故使月輪有兔像現寺東順殑伽河三百餘里東至戰主國中印度周二千餘里都城臨殑河周十餘里人盛滿寺十所減千人竝小乘天祠二十所異道雜城西北寺塔佛舍利一升昔佛於此七日說法幷四佛行坐迹有慈氏菩薩像形小而威德大城東北二百餘里至阿避陁羯賴拏寺云不穿耳因緣北方僧也寺東南渡殑河百餘里大邑河北岸那羅延天祠重閣甚嚴又東南三十餘里有降鬼塔半已陷前建石柱高二丈餘卽佛爲噉人鬼說法處鬼置石座千數茂林池不遠數寺皆有僧住學大乘者又東南渡河百餘里塔者卽分舍利甁及餘舍利也每齋日放光又東北渡殑伽河百五十里吠舍釐國中印度古云毘舍離也周五十餘里邪正兼半寺數百現存五三僧少耳天祠數十露形多之城已頹毀故基周七十許里宮城周五里許少人居住城西北六里寺塔是說淨名處又東身子證果塔 又東大塔是王得一分舍利一斛許無憂王取九升造餘塔後更有王欲開地震遂止西北有塔石柱高六丈次南獼猴爲佛穿池池西群猴持佛鉢上樹取蜜 池南猴奉蜜處各有塔記寺東北四里許塔是淨名故宅基尚多靈其舍疊甎傳云積石卽說法現疾處也近使者王玄策以笏量之止有一丈故方丈之名因而生焉幷長者寶積宅菴羅女宅佛姨母入滅處皆立表記 寺北四里塔佛將往拘尸天人送立處 次復一塔是佛最後觀城邑處 次南是菴羅女以園施佛處其側一塔是佛三告阿難住壽涅槃處 又側一塔是千子見父母處卽賢劫千佛也 東故重閣講堂基時放光明是佛說普門經處城西北六十里大塔是佛別栗呫婆子處 大城西北減二百里故城塔說本生曾於此爲大天輪王事國城東南十五里大塔是七百賢聖重結集處 又南減百里大寺層臺重起僧學大乘四佛行坐迹側又一是佛南趣摩揭陁北顧吠舍釐城中息迹處寺東三十里殑伽河南北岸各一塔是阿難陁分身與二國處從北岸東北行五百餘里弗栗恃國北印度也人謂三伐恃周四千餘里東西長寺十餘僧減千人大小通學祠數十外道衆矣故宮城中有三千殑伽東北岸塔高二丈餘南望長流佛度五百漁人處由捕得大魚十八頭頭各兩眼 又東北百餘里故城西塔高百餘尺佛嘗六月說法度又北百五十里佛髮爪塔又西北千五百里入山谷尼波羅國北印度周四千餘里在雪山都城周二十餘里雜信寺及天寺極多僧二千餘人大小兼學王純信城內有閣高二百餘尺周八十步上容萬人面別三疊疊別七層俳佪四廈刻以奇異珍寶飾之城東南不遠有水火村東一里許有阿耆波沴水周二十步旱澇湛然不流常沸家火投之遍池火起焰數尺以水洒火火更增熾碎土以亦卽燃盡無問投者竝成灰燼釜水上煮食立熟云此水中先有金有國王將人取之櫃已出泥人挽之不動夜神告曰此是慈氏佛冠下生擬著不可得也火龍所護城南十餘里孤山特秀寺居重疊狀若雲霞松竹魚龍隨人馴附就人取食犯者滅門比者國命竝從此國而往還矣今屬吐蕃又從吠舍南百五十里渡殑伽河至摩揭陁國卽常所謂摩竭提王舍城也釋迦方志卷上癸卯歲高麗國分司大藏都監奉勅彫造
  1. 1)훌륭한 태도로 조정에 출사(出仕)함니다.
  2. 2)지금의 감숙성(甘肅省)의 현 이름이다.
  3. 3)감숙성 돈황 부근에 있는 서역에 통하는 관문이다.
  4. 4)지금의 섬서성(陝西省) 북부와 감숙성 서북부 지방이다.
  5. 5)한무제가 장건을 박망후로 봉한 곳으로 안휘성 당도현(唐塗縣)이다.
  6. 6)한무제 때 설치한 벼슬 이름. 흉노의 이사성을 정복하여 생긴 이름이다.
  7. 7)한무제 때 사람으로 김일제(金日磾)이다.
  8. 8)현재 파미르 고원이다.
  9. 9)하남성 맹진현(孟津縣)에서 발원하여 동으로 흐르는 낙수(洛水)의 지류이다.
  10. 10)고려대장경 원문에는 투(愉)자 뒤에 삭구(朔俱)라는 원주(原註)가 있으므로 ‘수’로 발음한다.
  11. 11)탑의 정상에 있는 윤형(輪形) 혹은 윤축(輪蓄)이다.
  12. 12)인도의 소승유부(小乘有部) 승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