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이 대당(大唐)이 천하를 다스린 지 40년 동안에 순박한 풍화가 두루 미치면서 경박한 습속이 고쳐졌으며, 문덕(文德)이 닦이고 무공(武功)이 빛나게 되었다. 때문에 청구(靑丘)ㆍ단혈(丹穴)의 제후를 나란히 제봉(堤封)으로 들어오게 하고 용사(龍砂)ㆍ안새(雁塞)의 지방으로 하여금 마침내 성교(聲敎)를 좇게 하여 빼어난 이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조종(朝宗)에서 우의(羽儀)1)를 드러내었고 정성을 다한 폐백을 바치게 되면 어루만지고 달래는 성덕(盛德)을 나타내었다. 그러한지라 팔방(八方)의 변방의 안팎은 앞서의 역사가 자세히 서술되어 있거니와 오축(五竺) 지역[方維]의 내력은 드물게 적혀 있으니 어찌 시기[時]가 아니겠는가? 비록 또 주(周)나라 목왕(穆王)이 서쪽으로 순찰하였지만 곤구(昆丘)에 그쳤고 순(舜)ㆍ우(禹)가 남쪽으로 순행하였지만 창해(滄海)를 넘지 못했으며, 진시황(秦始皇)이 들판을 구획했지만 임조(臨洮) 가까이에 걸쳤고 한(漢)나라 무제(武帝)가 제후(諸候)에게 땅을 봉(封)하였지만 관문(關門)은 철로(鐵路)를 열었을 뿐이요, 이 이후로는 멀리까지 토벌한 일이 상세히 알려진 것이 없다. 그런 까닭에 공동산(崆峒山)에서 도(道)를 물었으나 주천(酒泉)2)의 땅에 국한되었고 곤륜산(崑崙山)에서 임금이 성현[聖]을 참배하였으나 실로 옥문관(玉門關)3)의 곁이었을 뿐이었다. 약수(弱水)와 동정(洞庭)이며 삼위(三危)ㆍ구롱(九隴)에 이르러서는 연기가 임금이 타는 말의 굴레에 피어 올랐고, 사장(沙障)과 여하(黎河)에 관하여는 『하서(夏書)』에 낱낱이 기록되어 있는데 다 함께 오부(雍部)4)를 도모하였다. 박망(博望 : 장건)5)이 황하를 찾았을 적에 비로소 대하(大夏)라는 이름이 들리게 되었고 헌황(軒皇)이 낮잠을 자 꿈에 노닐 적에 맨 처음 화서(華胥)라는 나라를 이야기하였으며 이사(貳師)6) 장군이 대원(大宛)을 정벌하였고 정원(定遠)이 철문(鐵門)을 개척하였다. 그 밖의 나라는 진(秦)으로 들어갔었다. 일제(日磾)7)가 한(漢)나라를 섬길 때는 그 명성과 번영이 총령(葱嶺)8)을 뒤덮었고 제왕의 덕(德)은 기산(耆山)에 뻗쳤으니 천자의 위의가 빛났고 그 무리들도 번성하였다. 그러나 방토(方土)로서 기록한 것과 인물(人物)로서 마땅한 이와 풍속이 변하여 온 내력과 산천(山川)이 뛰어나게 기이한 것을 비록 말하여 밝혔다 하더라도 나가지 못하여 평소에 데면데면 하였고 기록할 만한 것이 없었으니 어찌 지나갈 길이 너무 멀어 나아가 유람한 이가 드물지 않았겠는가? 이런 일로써 토론(討論)하건대 비록 전해 내려온 말[傳說]이 있었으나 조상들의 행인(行人)은 진실로 몸소 본 것이 아니거늘 서로 다투면서 거짓으로 실록(實錄)처럼 꾸며 놓았으니 무엇으로써 그것이 그렇다는 것을 알겠는가? 때문에 황하의 근원이 되는 적석(積石)은 서쪽으로 적현(赤縣)을 쳐다보고, 하늘을 괴고 있는 기둥인 곤륜은 동쪽으로 신주(神州)를 돌아보았으며, 명사(鳴砂)의 바깥은 모두 오랑캐 나라라고 일컬었으며 편안하게 먼 데의 산가지[遠籌]를 이용하고 공연히 당황색 헝겊의 편지[緗簡]만을 전할 뿐이었다. 이로써 신독(身毒)에 관한 설명이 재차 번역[重譯]되어 이르른 것임을 알 수 있고 신이(神異)한 일 등의 전설이 끊어졌음을 알 수 있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도(道)가 동쪽으로 전해져 그 영화스런 빛이 한(漢)나라를 비추면서부터 정치적으로는 10대(代)를 흐르고 햇수로는 장차 6백 년을 지나는 동안 칙사(勅使)가 탄 수레[輶軒]가 잇달아 만나 여러 지방을 모두 갖추어 돌아보았는데, 백여 나라가 다 함께 교화에 귀의하여 험한 산에 사다리를 놓고와서 공물을 바치거나 뭇 왕이 와서 부처님을 우러르지 아니함이 없었다. 그러나 앞뒤의 전해진 기록은 들쭉날쭉하여 서로 같지 않고 일의 자취를 기술한 것이 드물어서 의혹만이 많다고 일컬었으니 다시 이렇게 이른 것을 찾아 보면 그 근본은 번역하는 사람에게로 돌아간다. 옛날 수(隋 : 606)나라 때 동도(東都)의 상림원(上林園)에서 번경관(翻經館) 사문(沙門) 언종(彦琮)이 『서역전(西域傳)』 1부(部) 10편(篇)을 저술하여 널리 풍속으로 폈으면서도 부처님 일[佛事]은 생략했었으므로 넉넉히 들을 수 있음은 좋으나 믿음의 근본[信本]에서 잘못되었다. 나는 생각건대 8상(相)으로는 도(道)를 드러내고 3승(乘)으로는 선도하여 교화하며 4의(儀)가 베푼 것은 근기에 맞추지 않음이 없고 2엄(嚴)의 영향은 모두 혜해(慧解)를 근본으로 한다. 지금은 성스런 자취와 신령한 모습이 화서(華胥)에 한데 모여 섞이었고 신령한 빛과 상서로운 그림자는 세상 안에 어리어 있나니 뜻은 모름지기 형량(形量)을 창성하게 밝히고 심령(心靈)을 움직여 일으켜야 한다. 정관(貞觀) 연간에 역경할 때[645]에 일찍이 자리에 참여하여 곁으로 서기(西記)를 번역해 내어 갖추어진 것이 특별히 상세한 듯하다. 다만 지묵(紙墨)으로써는 번거롭기 쉽고 거울처럼 보기에는 다하기 어려울 뿐이다. 부처님께서 남기신 업적은 석문(釋門)이 함께 돌아갈 곳이기 때문에 강요(綱要)를 추려 모아 대략 한 권을 만들어 모든 후학(後學)에게 물려 주면서 서문을 썼다. 『석가방지(釋迦方志)』는 1부(部)가 8편(篇)으로 되어 있다. 즉 제1 봉강편(封疆篇), 제2 통섭편(統攝篇), 제3 중변편(中邊篇), 제4 유적편(遺跡篇), 제5 유리편(遊履篇), 제6 통국편(通局篇), 제7 시주편(時住篇), 제8 교상편(敎相篇)이다. 우러러 살피건대 모든 부처님의 강령(降靈)은 형상(形相)으로 구할 수 없고 그 근기[機]에 따라 나타나거나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말과 글로써 기술하여 얻을 뿐이다. 그러므로 가르침을 배우는 이는 한데 모아 드는[統擧] 것을 우선으로 해야지 옆으로 지엽(枝葉)적인 것을 궁구하게 되면 끝내 원대한 데에 이르지 못한다. 때문에 편(篇)의 첫머리에서 그 의취를 표방하는 것이다.
석가방지(釋迦方志) 상권
석도선(釋道宣) 지음
1. 봉강편(封疆篇)
부처님께서 법왕(法王)으로 계시는 국토는 이름을 색하(索訶)세계라 하는데 이는 곧 옛 경전에서 번역하여 사바(娑婆)라고 한 것이니 경 가운데 이른바 인토(忍土)라고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 국토에 있는 사람은 억지로라도 기억하고 힘써 생각하면서 괴로움과 즐거움을 능히 참아내며 도를 담아낼 그릇이 될 만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법왕으로 계신다. 이 국토의 경계를 상고하건대 둘레는 쇠로 된 산[鐵山]으로 되어 있고, 산 바깥은 허공이며, 그 허공은 측량할 수가 없다. 산 아래는 땅이요, 땅 아래는 금(金)이며, 금 아래는 물[水]이요, 물 아래는 바람[風]이며, 그 바람의 단단하고 충실함은 금강(金剛)보다 뛰어나다. 중생의 마음과 힘은 동일한 업(業)으로 느끼게 되므로 이 세계를 능히 유지하면서 기울거나 떨어지지 않게 한다. 바람으로부터 바깥은 바로 허공이며 이 둘레를 말하여 보면 아래로부터 위로 무색계(無色界)에 이르는데, 맨 끝은 유정(有頂)이라고 한다. 그 구획된 세계를 논하여 보면 넓은 데에서부터 재어본다하여도 마침내 이수(里數)로써는 헤아릴 것이 아니다. 또 『지도론(智度論)』에서 말한 것과 같다. “색계(色界)의 하늘로부터 하나의 큰 돌[石]이 내려오면서 1만 8383년을 지나야 비로소 땅에 닿는다.” 이 상하(上下)와 방유(方維)를 묶어서 한 분의 부처님께서 법왕으로 계시게되는 국토라고 한다.[곧 대천(大千)의 철위산(鐵圍山)으로써 봉강(封疆)의 구역을 삼는다.]
2. 통섭편(統攝篇)
상고하건대 색하세계의 철위산(鐵圍山) 안에 포섭되어 있는 국토는 만억(萬億)이나 된다. 무엇으로 알 수 있느냐 하면 지금과 같이 머무르는 곳이 바로 하나의 국토인데 이 국토에는 따로 하나의 소미로산(蘇迷盧山)이 있으니 곧 경에서 말하는 수미산(須彌山)이다. 대해(大海) 가우데 있으면서 금(金)으로 된 바퀴의 표면에 의지하여 반(半)이 바다 위로 나온 곳이 8만 유순(由旬)이며 해와 달이 그 허리를 빙빙 돌아다닌다. 그 바깥은 금산(金山)이 일곱 겹으로 둘러싸고 있고 그 안에는 각각의 바닷물이 여덟 가지 공덕(功德)을 갖추고 있으며, 그 바깥의 짠 바다는 끝없이 넓고 바다 밖으로 있는 산은 바로 쇠로 되어 있다. 사방을 에워싸는 바다 가운데에 살 만한 곳은 대략 넷 정도가 있다. 즉 소미산에 의거하여 방면(方面)을 나눈다면 동쪽의 주(洲)를 비제하(毘提訶)라 하고 남쪽의 주를 섬부(贍部)라 하며 서쪽의 주를 구다니(瞿陁尼)라 하고 북쪽의 주를 구로(拘盧)라고 한다. 이 4주(洲)는 또한 4유(有)라고 하며 사람들이 살고 부처님께서 법왕으로 계신다. 이거에 준해 보면 곁의 철위산(鐵圍山)과 바다 안에 오직 네 주가 있는 것이다. 소미산 위로는 28천(天)이 있고 아울러 하나의 해와 달로써 하나의 국토로 삼는데 이러한 국토의 수랴이 천(千)에 이르고 철위산으로 모두 둘러싸인 것을 소천세계(小千世界)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소천세계의 수량이 천(千)에 이르고 철위산으로 모두 둘러싸인 것을 중천(中千)세계라 하며, 이러한 중천세계의 수량이 천에 이르고 철위산으로 모두 둘러싸인 것을 대천(大千)세계라 한다. 이 삼천대천세계를 상고하건대 그 가운데는 4주와 산왕(山王)과 해와 달과 나아가 유정(有頂)이 만억(萬億)이나 있는 처소이며, 모두가 부처님께서 도맡아 다스리고 다 같이 성교(聲敎)를 따르는 것이다.
3. 중변편(中邊篇)
무릇 법왕께서 거느린 곳은 곧 대천(大千)의 안이 속하게 되는데 만일 다스리는 도읍에 의거한다면 바로 이 주(洲)에서 언제나 머물러 계시기 때문이다. 이 한 주[一洲]는 소미산(蘇迷山)의 남쪽 바다 안에 있으며 물과 육지를 지나는 것이 동서로 24만 리(里)요, 남북으로 28만 리이다. 또 논(論)에서는 세 가장자리는 길이가 똑같이 2천 유순이요, 남쪽 가장자리는 3유순 반(半)이라고 말하였으니, 그렇다면 북쪽은 넓으면서 남쪽은 좁은 것이 사람 얼굴 모양이라 할 수 있다. 또 『범기(凡記)』에 의하면 인물(人物)이 살고 있는 데는 동서가 11만 6천 리요, 남북의 거리도 대략 그와 동일하며 도읍으로 정해진 곳은 부처님께서 탄생하신 나라인 가비라성(迦毘羅城)이 바로 그것의 중앙에 해당하나니 이를테면 네겹으로 된 철위산(鐵圍山) 안에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경에서 말하였다. “3천의 해와 달과 1만 2천의 하늘과 땅의 중앙이니 부처님의 위신력(威神力)으로 변두리에서는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땅이 경사지기 때문에 중천축국(中天竺國)의 여래께서 도(道)를 이룬 나무 아래에는 금강좌(金剛座)가 있어 부처님을 받들었다.” 이것에 의거하여 논한다면 그 밖의 다른 천하들도 그 때문에 그 중앙으로 정한 것이니 만일 이 주(洲)의 경우에는 그 이치가 다섯 가지의 경우에는 일에 결부되어 중앙임을 밝힐 수 있다. 이른바 이름[名]ㆍ거리[里]ㆍ때[時]ㆍ물[水]ㆍ사람[人]으로 다섯 가지이다. 첫 번째 말한 이름이란 모두가 말하는 서역(西域)을 중앙의 나라로 여겨 또한 중천축국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이름난 현인(賢人)들이 나라의 순서를 정하면서 또한 서쪽의 천하[西宇]를 가리켜 중앙의 나라로 삼았다고 하니, 만일 중앙이 아니라면 법부와 성인 모두 중(中)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옛날 송나라 동해(東海)의 하승천(何承天)이라는 이는 만물에 박식한 것으로 이름이 드러났고 많은 뛰어난 이들 가운데에서 뛰어났는데 사문 혜엄(慧嚴)에게 물었다. “부처님 나라는 어떤 역법(曆法)에 의하여 중앙으로 부르게 된 것입니까?” 혜엄이 말하였다. “천축(天竺)의 나라는 하지(夏至)날이 되면 방위의 중앙인지라 그림자가 없으니 이른바 하늘과 땅의 중평(中平)입니다. 우리나라의 중원(中原)은 경규(景圭)로 측정하기 때문에 여분(餘分)이 있으며, 치력(致曆)에는 3대(代)와 대(大)ㆍ소(小)의 두 가지가 있지만 그 밖의 다른 데는 더하고 감하는 계산을 할적에 문득 들쭉날쭉하는 기후가 되므로 중앙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승천은 더 대항할 말이 없었는데 문제(文帝)가 그 말을 듣고 이에 칙명을 내려 관직을 미리 받게 하였다. 무릇 여덟 가지 재난[八難]으로써 표시되는 데는 변두리 땅으로 조용한 데가 아니다. 범부에서 벗어나 성인으로 들어갈 때는 반드시 먼저 중앙의 나라에 태어난다. 때문에 대하(大夏)는 친히 음성과 모습을 받들 수 있었고 동화(東華)는 느즈막에야 가르침의 자취를 열게 되었으니 이치상 그렇게 되는 것이다. 두 번째 말하는 거리[里]라 함은 대개 이 한 주(洲)는 크게 셋으로 나뉘어져서 두 부분은 북쪽으로 토지가 넓고 사람이 드물며 오랑캐[獯狁]들이 사는 곳이어서 도(道)에 힘쓰기에는 적당하지 못하며, 한 부분 남쪽으로 세 바다에 접해 있으며 사람들에게 정밀하고 굳센 기상이 많은지라 성인의 교화를 받을 만하다. 때문에 도의 수승함에 의거하여 큰 성인이 도읍으로 정하셨다. 그러므로 성광자(成光子)는 말하였다. “중천축국은 동쪽의 진단국(振旦國)까지 5만 8천 리(里)[진단(振旦)은 곧 신주(神洲)의 이름이다. 그 사람은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요, 남쪽의 금지국(金地國)까지도 5만 8천 리이며, 서쪽의 아구차국(阿拘遮國)까지도 5만 8천 리요, 북쪽의 소향산(小香山)과 아뇩달지(阿耨達池)까지도 5만 8천 리이다.” 이렇게 관통하고 포섭한 것을 관찰하고 그것의 멀고 가까움을 취하면 가지런히 그 중앙으로 결정되는데 이르니 그러한 이치는 쉽게 드러난다. 세 번째 말하는 때[時]라 함은 설산(雪山)의 남쪽을 중앙의 나라라 하느데 땅이 평탄하면서 바르고 겨울과 여름의 날씨가 화창하여 풀과 나무가 언제나 무성하며 큰 물이나 서리가 내리지 않는 것을 말하니 그 밖의 다른 변두리 지역을 어찌 족히 말하겠는가? 네 번째 말하는 물[水]이라 함은 이 주(洲)의 중심에 아나타답다(阿那陁答多)라는 큰 못이 하나 있는데 당나라 말로는 무열뇌(無熱惱)라 하니 곧 경에서 말하는 아뇩달지를 뜻한다. 향산(香山)의 남쪽이요, 대설산(大雪山)의 북쪽에 있으며 산꼭대기 위로는 범부가 이를 곳이 아니다. 못의 둘레는 8백 리요, 네 언덕은 보배로 장식하였으며 정남(正南) 쪽은 평지와 맞닿아 있으며 지옥들이 있다. 그러므로 금강좌(金剛座)는 동쪽으로 치우쳐서 5천 리나 떨어져 있다. 또 못의 정남쪽은 주(洲)의 뾰족한 곳에 해당하고 그 북쪽은 미라천(謎羅川)의 북쪽에 해당하며 또 총령(葱嶺)의 북쪽 천천(千泉)에 해당한다. 위의 허공은 바로 북진성(北辰星)에 해당하는데 지금 다섯 번째 별을 바라보면 서쪽으로 기울어진 듯하며 장차 하늘 위로는 1촌(寸)의 거리요, 땅 아래로는 1천이 떨어져 있다. 천천과 서울은 8천여 리쯤 떨어져 있으나 하늘에서 보면 1척도 안 된다. 그 못의 북쪽에서 발로라국(鉢露羅國)과의 거리는 천 리가 좀 못되고 동남쪽의 굴로다국(屈露多國)과 서남쪽의 계빈국(罽賓國)과는 각각 천여 리쯤 된다. 그러나 4해(海)는 구렁의 물이 모이는 극점이 되므로 이 하나의 못에서 네 개의 강이 나뉘어 흐르고 지세(地勢)에 따라 각각 한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그러므로 총령(葱嶺) 동쪽의 물은 동해(東海)로 흘러 들어가고 달친(達儭) 남쪽의 물은 남해(南海)로 흘러 들어가며 설산(雪山) 서쪽의 물은 서해(西海)로 흘러 들어가고 대진(大秦) 북쪽의 물은 북해(北海)로 흘러 들어간다. 그러므로 땅이 높은 곳에서 물이 근원하여 그 가운데로 흘러드는 것이므로 이것이 바닷가에 있다 하여도 변두리란 이름으로는 빼앗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 불경(佛經)은 굉장히 방대하여 모든 일이 두루 망라되어 있고 널리 성현(聖賢)을 뵙는 것이므로 의미를 무턱대고 버릴 것이 아니니 위에 나열한 것은 모두 지도(地圖)와 부합된다. 그러나 이 신주(神州)에서 지어진 글[書]이나 사기[史]에는 빗댄 말과 잘못된 추측으로 과장되고 지나친 내용이 매우 많다. 때로는 불경에 근거하여 다시금 그런 부류를 늘리고 있으나 도무지 모두 황폐하고 너저분한 것이다. 시험삼아 그것을 들어보기로 하자. 『수경(水經)』에서는 “무열구(無熱丘)는 곧 곤륜산(崑崙山)이다”라고 말하였고, 또 『부남전(扶南傳)』에서는 “아뇩달산(阿耨達山)은 곧 곤륜산이다”라고 말하였다. 또 『산해경(山海經)』에서는 “남쪽 흐르는 사막의 끝으로 적수(赤水)의 뒤 흑수(黑水)의 앞에는 큰 산이 있는데 곤륜산이라 한다”라고 말하였다. 또한 말하기를 “종산(鍾山) 서쪽의 6백 리에 곤륜산이 있으며 다섯 개의 강물을 낸다”라고 말하였다. 『목천자전(穆天子傳)』에서 말한 것을 상고하면 용산(舂山)의 음(音)은 종(鍾)이라고 하였고, 또 바다 안의 곤륜산은 서북제(西北帝)의 아래에 있고 사방 8백 리이며 높이는 만 길이라고 하였다. 또 『십주기(十州記)』에서는 “곤륜릉(崑崙陵)이 곧 곤산(崑山)이다. 북해(北海)의 해지(亥地)에 있고 해안에서 13만 리 떨어져 있다”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대강 불경에서의 소미산(蘇迷山)을 가리킨 것일 것이다. 또는 동해(東海) 가운데의 산을 방장(方丈)이라 하기도 하고 또한 곤륜이라고도 한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서왕모(西王母)가 주목(周穆)에게 ‘산은 함양(咸陽)에서 36만리 떨어져 있고 높이는 평지에서 3만 6천 리이다”라고 하였다. 또 『주목전술서왕모(周穆傳述西王母)』에서는 “종주(宗周)의 전간(癲澗)9)에서 1만 1천1백 리 떨어져 있다”고 말하였다. 『신이경(神異經)』에서는 “곤륜산에는 구리 기둥이 있는데 그 높이는 하늘 속으로 들어갔고 둘레는 3천 리이다”고 말하였다. 영씨(榮氏)의 주(注)에서 주주(柱洲)인 곤륜산은 동남쪽으로 1만 2천 리요, 그 바깥에는 산이 없다고 풀이하였다. 『사기(史記)』에서는 “곤륜산은 숭산[嵩高]과 5만 리 떨어졌고 높이는 1만 1천 리이다”라고 말하였다. 곽박(郭璞)은 높이를 2천5백여 리라고 하였고, 회남(淮南)은 높이를 1만 1천 1백 리(里) 14보(步) 2척(尺) 5촌(寸)이라고 하였다. 도경(道經)인 「조립천지기(造立天地記)」에서는 “곤륜산은 높이가 4천8백 리이다”라고 말하였다. 또 『전형제고경(轉形濟苦經)』에서 높이를 1만 9천 이라고 하였으며, 또 이 산이 비상하여 둥둥 떠 있다고 하였고, 또한 곤산(崑山)의 남쪽으로 30리마다 차례로 천(千) 개의 곤산이 있는 것을 소천세계(小千世界)라고 말하였다. 『화호경(化胡經)』에서는 “곤산은 높이 아홉 겹[九重]으로 되었는데 서로의 거리가 각각 9천 리이다”고 말하였다. 또 “높이는 만만(萬萬) 5천 리이다”고 말하였다. 이 앞의 유교(儒敎)와 도교(道敎) 양쪽의 설명은 비록 모양과 크기에는 차이가 있으나 곤륜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살펴보건대 곤륜이 가까운 산이라면 곧 서량(西涼)의 주천(酒泉) 땅이요, 목후(穆后)가 서왕모(西王母)를 보았던 곳이니, 『도경(圖經)』에 갖춰져 있다. 만일 곤륜이 먼 산이라면 곧 향산(香山)과 설산(雪山)의 중간이며 황하의 근원[河源]이 흘러 나오는 곳이다. 그러므로 『이아(爾雅)』에서 “황하는 곤륜의 골짜기에서 나온다고 말하였다. 곽박(郭璞)의 『도찬(圖贊)』에서 ”곤륜은 2층(層)이요 이름은 천주(天柱)라 하며 실로 그것은 황하의 근원이요 강물의 영부(靈府)이다”라고 말하였다. 『서경(書經)』의 「우공(禹貢)」 편에서 말한 것을 상공하건대 황하의 발원지는 적석(積石)이라고 하였는데 다만 복류(伏流)의 출처에 의거해서 이름했을 뿐이니, 만일 그 본원(本源)을 검토한다면 진실로 유래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불경에서 이 무열지(無熱池) 동쪽에는 은(銀)으로 된 소의 아가리에서 긍가하(殑伽河)가 나오는데 곧 옛날에 말하던 항하(恒河)로서 오른편으로 몸의 둘레를 돌아서 동남쪽의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남쪽에는 금으로 된 코끼리의 아가리에서 신도하(信度河)가 나오는데 곧 옛날의 신두하(辛頭河)로서 오른편으로 못의 둘레를 돌아서 서남쪽의 바다로 흘러 들어가며 서쪽에는 유리로 된 말의 아가리에서 박추하(縛蒭河)가 나오는데 곧 옛날의 박차하(博叉河)로서 위에서와 같이 못을 돌아 서북쪽의 바다로 흘러 들어가고 북쪽에는 파지(頗胝)로 된 사자의 아가리에서 사다하(徙多河)가 나오는데 곧 옛날의 사타하(私陀河)로서 위에서와 같이 못을 돌아 동북쪽의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하도(河圖)』를 상고하면 곤륜산의 동방(東方)으로 5천 리(里)를 신주(神州)라 하고 또한 적현(赤縣)이라고 말하였다. 또 『서(書)』에서 말한 것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황하의 근원[河源]은 동북쪽에서 흘러 나와 총령(葱嶺)의 기사(岐沙) 골짜기에서 두 갈래 물로 나눠지고, 동북쪽의 지류(支流)는 전남산(闐南山)을 지나서 나라의 서북쪽에서 나간다. 또 동쪽으로 큰 강이 흘러 갈반타성(朅盤陀城)의 동남쪽을 경유한다. 또는 소륵국(疎勒國)의 서쪽을 경유한다. 또 동북쪽으로 성(城)아래에 이른다. 또 나라의 남쪽으로 5백여 리를 돌아서 오살국(烏鎩國)의 남쪽에 이른다. 또 동북쪽은 소륵국의 북쪽 6백 10리까지 이르고 오손계(烏孫界)의 적곡성(赤谷城)까지 이른다. 또 동쪽으로 2백7십 리는 고묵국(姑墨國)의 남쪽을 경유한다. 또는 동쪽으로 6백7십 리에서 구자국(龜玆國)의 남쪽을 경유한다. 또 동쪽으로 3백5십 리에서 오루국(烏壘國)을 경유하는데 여기는 곧 한(漢)나라 때에 도호(都護)가 다스리던 곳이다. 서남쪽으로 소륵국과의 거리가 2천1백10리이고 동남쪽으로 선선국(鄯善國)과 1천7백85리가 떨어졌으며 동북쪽으로는 오기국(烏耆國)과 4백 리가 떨어졌다. 황하는 또는 동남쪽으로 3백4십 리에서 거리국(渠梨國)의 남쪽을 경유한다. 또 동쪽으로 2백4십 리에서 흑산국(黑山國)의 남쪽을 경유하는데 이는 동쪽의 옥문관(玉門關)에서 2천6백6십 리의 거리이다. 황하는 또한 동쪽으로 연성(連城)과 주빈성(注賓城)의 남쪽을 경유하여 차말국(且末國)의 북쪽에서 지류와 합쳐진다. 황하는 또한 동쪽으로 누란(婁蘭)의 땅을 경유한다. 또 동쪽으로 선선국(鄯善國)의 성(城) 남쪽을 경유하여 동북쪽으로 수백 리를 지나 포창해(蒲昌海)로 들어가고 그 바다 동쪽면의 조금 북쪽은 옥문(玉門)과 1천3백 리 떨어졌다. 또 동북쪽은 양관(陽關)에서 3백 리 떨어지고 이 강물은 포창(蒲昌)과 복류(伏流)의 남쪽에서 조금 서쪽으로 수천 리를 지나 적석산(積石山)으로 들어가서 강소당(羌燒黨) 가운데에 있게 된다.” 『서(書)』에서는 “적석(積石)은 곤륜구(崑崙丘)에서 1천7백40리 떨어졌다”고 말하였다. 혹은 복류(伏流)는 1만 3천 리라고 말하였으나 이 모든 것은 잘못된 추측의 말로서 자세히 궁구하기 어렵다. 황하는 적석의 서남쪽에서 나와 구굴(九屈)로 흐르고 동북쪽에서 흐르는 물이 합쳐져 석지(析支) 땅을 경유하는데 이것이 바로 하곡(河曲)이며 또 동북쪽은 변방으로 유입되어 돈황(燉煌)과 장액(張棭)의 남쪽을 지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황하의 근원[河源]이다. 이 실록(實錄)을 상고하여 강물의 근원을 찾아 보면 궁극에는 무열지(無熱池)가 있는 곳으로 이르니 비로소 탐구하는 것의 마지막이 된다. 그러나 이 지신(池神)이 사는 곳은 사람들이 미칠 데가 아니다. 또 이것은 북천(北天)과 설산(雪山)의 지역이며 남쪽으로 중토(中土)인 부처님께서 태어나신 땅에 접하였으니 높고 수승한 곳에 처했기 때문에 변두리가 아니다. 다섯 번째 말하는 사람[人]이란 범부와 성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범인(凡人)으로서 최고의 지위를 전륜성왕이라 하고, 성인으로서 최고의 지위는 법왕(法王)인 것이니, 대개 이 두 분의 왕은 태어나지 않으면 그만이거니와 태어나게 되면 반드시 중앙에 살게 된다. 또 산천(山川)이나 국읍(國邑)은 사람의 의보(依報)로서 사람이 수승하면 의보도 수승한 것이기 때문에 이 두 분의 왕은 그런 곳에 사는 것이다. 또 전륜왕에는 네 왕이 있는데 4주(洲)를 통괄하는 것에 의거한다. 금륜왕(金輪王)은 전체 4유(有)를 다스리고 은륜왕(銀輪王)은 세 방면으로 북주(北洲)가 제외되며 동륜왕(銅輪王)은 두 방면으로 서주(西洲)ㆍ북주(北洲)가 제외되고 철륜왕(鐵輪王)은 남(南)쪽에 있으면서 3유(有)에서 제외된다. 섬부(贍部)라고 하는 말은 중범천(中梵天)의 음(音)이요, 당나라 말로는 전륜왕이 사는 곳이 된다. 네 전륜왕이 전체를 다스리는지 국부를 다스리는지 하는 것은 다르지만 반드시 남유(南有)에는 머무르게 된다. 이 주(洲)는 옛 번역으로 좋은 금이 나는 땅[好金地]이라 하였으니 이는 염부단금(閻浮檀金)이 주의 북쪽 언덕 바다 안에 있다는 말이다. 금빛이 바다 위로 떠오르고 그 곁에는 염부수(閻浮樹)의 숲이 있는데 그 열매는 지극히 크다. 신통을 얻은 이라야 비로소 거기에 이르게 된다. 지금 말하는 이 주는 전륜왕으로 인하여 붙인 이름이므로 양쪽에서 그 이치를 베풀었을 뿐이다. 또 이 1주는 네 주인이 통솔하게 된다. 설산의 남쪽에서부터 남해(南海)까지는 상주(象主)라고 한다. 이 땅은 덥고 습기가 차서 오직 코끼리가 살기에 마땅하기 때문에 왕은 상병(象兵)으로써 그 나라를 편안하게 하고 풍속은 성급하면서 사납고 기이한 술법을 배우기에 열중한 곳이니 여기서 바로 인도국(印度國)이다. 그리고 인도라는 이름을 혹은 현두(賢豆)라 하기도 하고 혹은 천축(天竺)이라고도 하며 혹은 신독(身毒)ㆍ천독(天篤) 등이라고도 하는데 모두가 잘못하여 굳어져서 전해졌을 뿐이다. 그러므로 인도가 바른 말이며 당나라 말로는 번역될 수 없다. 설산의 서쪽에서 서해(西海)까지는 보주(寶主)라고 한다. 땅은 서해에 접하였고 기이한 보배들이 지나치게 많으며 예절은 가벼이 여기면서 재화는 중히 여기는 곳을 바로 오랑캐 나라이다. 설산의 북쪽에서 북해(北海)까지는 땅이 춥고 말이 살기에 마땅하므로 마주(馬主)라고 한다. 그 풍속은 흉포(凶暴)하고 짐승[衣毛]들을 죽이기까지 하는 곳이니 여기가 돌궐국(突厥國)이다. 설산의 동쪽에서 동해(東海)까지는 인주(人主)라고 한다. 토양이 화창하고 풍속은 인의(仁義)만을 행하며 국토를 편안히 하기 위해 거듭 옮겨다니는 곳이니 바로 지나(至那)이며 곧 옛날에 진단국(振旦國)이라 부른 곳이다. 위에서 나열한 네 주인은 우선 1주(洲)에 의거한 것이요, 지경을 나누면서도 왕은 그 주(洲)의 중앙에 머무르는 것이니 전륜왕이 바로 중앙에 있게 되고 왕은 변두리에 있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바뀌지 않는다. 우리 나라의 모든 유생(儒生)들은 공자(孔子)의 가르침에 막혀 있어 이것을 중심으로 삼고 그 밖의 것은 변두리로 삼기 때문에 따로 낙양(洛陽)을 가리켜서 중국(中國)을 삼고 있으니 이에 헌원(軒轅)과 오악(五岳)에 결부시켜 말한다면 아직 전 지역을 크게 살펴보지 못하고 있다. 또 서번(西蕃)을 가리켜 통상 오랑캐 나라라고 하지만 부처님께서 나시어 여기저기 돌아다니셨으므로 설산의 남쪽은 바라문국(婆羅門國)이라고 부르며 오랑캐와는 완전히 단절되어 글[書]과 말[語]이 같지 않다. 때문에 5천축(天竺)의 모든 바라문은 글을 천서(天書)로 여기고 말을 천어(天語)로 여기니 이것은 겁초(劫初)가 성립할 때에 범천(梵天)이 내려와서 땅의 기름을 맛봄으로써 곧 사람이 생기게 되었으나 본래의 말과 글을 따르기 때문에 하늘의 법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그들의 풍속에는 하늘을 섬기는 일이 많으니 그렇게 생긴 데는 까닭이 있어서이다. 오랑캐는 본래 서융(西戎)이라 도술(道術)을 들은 적이 없고 글과 말은 나라마다 달라서 번역을 전해 주어야 비로소 통하였다. 신주(神州)에서는 글과 말이 나오기는 하였으나 책은 없었으므로 우선 서계(書契)를 논하여 일을 볼 수 있었다. 복희(伏羲)의 8괘(卦)는 문왕(文王)이 중히 여겼고, 창힐(蒼頡)이 새 발자국을 보고 글을 만들었으나 쓰이지 않았으며 한(漢)나라 때에 허신(許愼)이 설문(說文)을 내어 글자를 다만 9천 종류에 따라 나열하였으나 지금은 점차로 세간의 글과 말이 3만이나 되었으니 이것은 곧 사람과 시대에 따라 뜻에 맞도록 만들어 낸 것이므로 5천축의 글과 말이 일정한 것과는 비교되지 않는다. 위에서 다섯 가지의 뜻[五義]으로써 중앙[中]과 변두리[邊]를 규정하면서 모든 것을 비추어 볼 수 있었지만 그 밖은 마치 수(隋)나라 총 위군(魏郡)의 사문 영유(靈裕)의 『성적기(聖迹記)』의 기술(記述)과 같다.
4. 유적편(遺跡篇) ①
한(漢)나라 때부터 당(唐)나라에 이르기까지 인도에 간 이들의 길[道]은 너무 많아서 말로는 다할 수 없으므로 뒤에서 기록한 것과 같이 우선 대당(大唐)에 의거하도록 하겠다. 옛날의 사자(使者)들은 곧 세 가지의 길이 있었으니, 지나간 길에 의거해 우선 유적(遺跡)을 살펴보면서 곧 차례대로 진술하겠다. 동쪽의 길로는 하주(河州)의 서북쪽에서 대하(大河)를 건너 만천령(曼天嶺)에서 4백 리(里)를 좀 못가면 선성(鄯城)에 이르는 진고주(鎭古州)의 땅이다. 또 서남쪽으로 백리를 좀 못가면 옛 승풍술(承風戌)에 이르는데 이것은 수호시(隨互市)의 땅이요, 또 서쪽으로 2백 리를 좀 못가면 청해(淸海)에 이르며 바다 가운데 조그마한 산이 있고 바다의 둘레는 7백 리이며 바다의 서남쪽으로 가면 토곡혼(吐谷渾)의 아장(衙帳)에 이른다. 또 서남쪽으로 가면 국경에 이르는데 이름은 백란강(白蘭羌)이라 하며, 북쪽의 국경은 적어성(積魚城)에 이른다. 서북쪽으로 가면 다미국(多彌國)에 이르며 또 서남쪽으로 가면 소비국(蘇毘國)에 이른다. 또 서남쪽으로 가면 감국(敢國)에 이르고 또 남쪽에서 조금 동쪽으로 가면 토번국(吐蕃國)에 이른다. 또 서남쪽으로 가면 소양동국(小羊同國)에 이르고 또 서남쪽으로 가서 달창(呾倉)을 건너 관문[關]을 지나면 토번의 남쪽 국경이다. 또 동쪽에서 조금 남쪽으로 말상(末上)을 건너 삼비관(三鼻關)의 동남쪽에 이르러 골짜기를 들어가서 열세 개의 높은 사다리[飛梯]와 열아홉 개의 높은 다리[棧道]를 지나가며 또 동남쪽 혹은 서남쪽으로 칡 넝쿨과 등나무를 부여잡고 기어서 들판으로 40여 일쯤 가면 북인도(北印度)의 니파라국(尼波羅國)[이 나라는 토번에서 약 9천 리쯤 떨어졌다]에 이르게 된다. 중간으로 가는 길은 선주(鄯州)의 동천(東川)으로부터 백여 리를 가고 다시 북쪽으로 6백여 리를 나아가 양주(凉州)에 이르며, 동쪽으로는 경사(京師)를 떠나 2천 리를 가서 양주의 서쪽으로부터 조금 북쪽으로 4백70리를 가면 감주(甘州)에 이른다. 또 서쪽으로 4백 리를 가면 숙주(肅州)에 이르고 다시 서쪽에서 조금 북쪽으로 7천5리를 가면 옛날의 옥문관(玉門關)에 이르게 되는데 관문은 남쪽과 북쪽산의 사이에 있다. 또 서쪽으로 4백 리 좀 못가면 과주(瓜州)에 이르고 다시 서남쪽으로 자갈밭을 지나 3백여 리를 가면 사주(沙州)에 이르며 또는 서남쪽의 자갈밭으로 7백여 리를 가면 납박파(納縛波)의 옛 나라인 누란(婁蘭)의 땅에 이르게 되는데 또한 선선(鄯善)이라고도 한다. 또 서남쪽으로 천여 리를 가면 절마타나(析摩陁那)의 옛 나라인 달말(呾末)의 땅에 이르고 또 서쪽으로 6백여 리 가면 도라(都羅)의 옛 나라에 이르는데 모두가 황폐된 성(城)일 뿐이다. 또 서쪽의 고비사막을 들어가 4백여 리를 가면 구살달나국(瞿薩呾那國)의 동쪽 국경[곧 한사(漢史)에서 말한 우전국(于闐國)이다. 도호(都護)가 있던 곳으로 한(漢)나라가 수비하였다. 동쪽의 장안(長安)과는 9천6백70리 떨어졌다]에 이르며 그 관문을 니양성(尼壤城)이라 하며 그 땅은 스스로 우둔국(于遁國)이라 한다. 그 나라의 둘레는 4천여 리인데 모래와 자갈밭이 태반이며 사찰은 백여 군데 있고 승려는 5천이 넘는데 모두 대승을 배우는 이들이다. 관문에서 비마천(媲摩川)에 이르러 2백여 리를 가면 비마성(媲摩城)이 있고 그 가운데는 높이 두 길[丈] 남짓한 크기의 전단(栴檀)으로 만든 입상(立像)이 있는데 매우 신령하고 기이한 광명을 많이 뿜어 병든 이가 자신의 아픈 곳을 따라 금박(金薄)을 불상 위에다 붙이면 곧 나았다. 그 불상은 본래 교상미국(憍賞彌國)에 있었으며 오타연나왕(鄔陁衍那王)이 조성하였는데 허공을 날아 이 나라로 왔다고 한다. 북쪽의 갈로락가성(曷勞落迦城)에는 이상한 나한(羅漢)이 있는데 늘 가서 그에게 예배한다고 한다. 왕이 처음엔 믿지 않고 모래와 흙을 나한에게 쏟자 곧 공경하며 신심있는 이들에게 말해주었다. “이로부터 7일 후에 모래와 흙이 성(城)에 가득 찰 것이요, 그로부터 2일 후에는 보배의 비가 내려서 거리에 가득 찰 것이다.” 그리고는 이렛날 밤이 되자 과연 흙비가 내려서 성을 가득히 메워 버렸으므로 남아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먼저 알려주었던 이는 미리 땅에 구멍을 만들어 두었다가 그 구멍을 통해 나와 동쪽으로 갔는데 비마상(媲摩像)도 역시 같이 이르렀다고 한다. 어떤 기록에서는 말하였다. “법이 무너질 적에 이 상(像)은 용궁으로 들어가리라.” 그런데 그 갈로성(曷勞城)은 지금 큰 흙무더기로 덮여 있으며 왕이 보배를 파려고 하면 반드시 큰바람의 환란을 만났다고 한다. 또 비마성(媲摩城)에서 서쪽으로 3백30리를 가면 국성(國城)와 왕도(王都)에 이르며 남쪽으로 10리 되는 데에 큰 절이 있는데 선왕(先王)이 세운 것이다. 서남쪽으로 10여 리쯤 되는 곳의 절에는 협저(夾紵)로 만든 입상(立像)이 있는데 굴지국(屈支國)에서 왔다고 한다. 옛날 이곳의 어떤 신하가 그 입상에 예배하고 공경을 드렸는데 그 신하가 본국(本國)으로 돌아와서도 멀리 염(念)하기를 그치지 않자 그 입상이 드디어 밤에 찾아오게 되었으므로 이에 집을 버리고 절을 만들었다고 한다. 도성(都城)의 서쪽으로 3백여 리에는 발가이성(勃伽夷城)이 있고 7척 높이의 좌상(坐像)이 있는데 상호(相好)는 견줄 것이 없으며 머리에는 보관(寶冠)을 썼는데 때때로 광명이 나타난다고 한다. 도성에서 서쪽으로 1백60리를 가면 길 가운데에 큰 자갈밭이 있고 쥐처럼 생긴 흙뭉치가 있는데 모양이 크고 마치 고슴도치 같으며 털은 금빛과 은빛이 났다. 옛날 흉노(匈奴)가 쳐들어와서 도적질할 때 왕이 이 쥐의 영혼에게 기원하자 밤에 도적과 말을 깨물고 병기(兵器)를 잘라서 망가드렸으므로 스스로 물러나 도망쳤다고 한다. 도성에서 서쪽으로 5리쯤 되는 절에는 높이 백여 척이나 되는 부도(浮圖)가 있으며 광명을 많이 나타냈는데 왕이 감동하여 사리(舍利) 수백 개를 바치자 나한이 오른손으로 부도를 들어올려 함(函) 안에 안치하고 다시 내려 놓았는데 기울거나 흔들림이 없었다고 한다. 도성에서 서남쪽으로 10여 리 되는 곳에 구실릉가산(瞿室𩜁伽山)[우리나라 말로는 소뿔이다]이 있고 사찰이 있으며 불상에서 광명이 나타났는데 부처님께서 일찍이 여기에서 노니실 적에 하늘과 사람들을 위하여 설법하시면서 거기에 절이 서게 되어 대승(大乘)을 숭상하며 배울 것이라고 수기(授記)하셨다고 하며 산 바위의 석실(石室)에는 한 나한이 멸심정(滅心定)에 들어 자씨불(慈氏佛)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수백 년 전에 절벽이 무너지면서 그 문을 막아버렸다고 한다. 그 나라의 남쪽 국경은 동녀국(東女國)과 인접하여 있고 나라의 성에서 서쪽으로 산골짜기를 넘어 8백여 리를 가면 작구가국(斫句迦國)[곧 저거(沮渠)이다]의 남쪽 국경에 이른다. 그 나라는 둘레가 1천여 리요, 부처님을 모신 사찰이 10여 군데이며, 승려의 무리는 백이 넘는데 모두 대승을 배우는 이들이다. 나라 남쪽의 산에는 다라탑(多羅塔)이 서 있으며 소나무가 무성하고 생물이 흐르며 석실(石室)은 깊고 깨끗하여 세 분의 아라한이 현재 멸진정(滅盡定)에 들어 계시는데 수염과 머리칼이 길 때마다 승려들이 언제나 깎아준다고 하며 5인도(印度)의 승려로서 과보를 증득한 이라면 대개 이 석실에 와서 머무른다고 한다. 또 북쪽으로 3백 리를 채 못가면 도성(都城)에 이르게 되는데 둘레는 10여 리요, 토산(土山)이 끊어지지 않고 죽 이어졌으며 양쪽으로 하천(河川)이 마주 흐르고 있다. 또 나라의 서북쪽으로 큰 사막의 언덕을 오르고 사다하(徙多河)를 건너서 5백여 리를 가면 거사국(佉沙國)[곧 소륵(疎勒)이다]에 이른다. 이 나라의 둘레는 5천여 리요, 사찰의 숫자는 백 군데이며 승려는 수만 명인데, 소승(小乘)의 유부(有部)를 익히고 있다. 땅에는 돌과 자갈이 많고 그 곳의 풍속에 아이를 낳으면 머리를 눌러서 납작하게 만든다고 한다. 여기에서 남쪽으로 산과 들과 자갈밭을 지나 5백여 리 가면 오살국(烏鎩國)에 이른다. 이 나라의 둘레는 천여 리요, 도성의 둘레는 10여 리이며, 남쪽은 사다하(徙多河)와 만나고 부처님 법을 믿으며 사찰은 10여 군데요, 승려는 천 명이 좀 못되며 소승의 학문을 익히고 있다. 성(城)의 서쪽으로 2백여 리 가면 대산(大山)에 이르고 고개 위에는 탑이 있는데, 수백 년 전에 산의 절벽이 저절로 무너졌다고 한다. 그 가운데에 어떤 비구가 눈을 감고 앉아 있었는데 형상이 매우 위대하였고 수염과 머리카락이 아래로 드리워져서 어깨와 얼굴을 덮고 있었으므로 국왕이 그에게 소유(蘇油)를 붓고 건추(揵搥)를 치자 비구가 올려다 보며 말하였다고 한다. “제 스승은 가섭파(迦葉波)입니다. 지금에야 비로소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만 이미 열반하셨습니까?” 또 물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세간에 출현하셨습니까?” 이미 멸도(滅度)하셨다고 알려 주자 곧 공중으로 올라가서 변화로 불을 내어 몸을 태웠다고 한다. 그 나라는 백예(白瑿)와 청옥(靑玉) 등이 나오고 나라의 성으로부터 서쪽으로 강을 건너고 총령(葱嶺)을 오르며 동쪽으로 산등성이를 타고 8백여 리를 가면 복사(福舍)에 이른다. 그 땅은 네 개의 산 가운데에 있고 사방은 백여 이랑[頃]이 되고 나무는 없으며 가는 풀들만 나 있는데 그러한 까닭은 별도로 설명한 것과 같다. 또 서남쪽으로 큰 고개를 넘으면 거반타국(朅盤阤國)에 이른다. 그 둘레는 2천여 리요, 도성의 둘레는 50여 리이며, 북쪽으로 사다하(徙多河)를 등졌고, 부처님 법을 공경하였으며, 사찰은 10여 군데요, 승려는 5백여 명이며, 소승의 유부(有部)를 익힌다. 그 나라의 동남쪽에 큰 석실(石室)이 있는데 두 개의 입구가 있어 각각 한 분씩의 아라한이 멸진정에 들어서 7백여 년을 지냈으며 그 수염과 머리칼이 생기면 해마다 깎아준다고 한다. 또 서북쪽으로 3백여 리를 가면 비로소 왕도(王都)에 이르는데 동남쪽으로 사다하(徙多河)와 접해 있고 산의 고개들은 끊어지지 않고 죽 이어졌으며 또 서쪽에서 조금 남쪽으로 산을 올라서 얼음과 눈이 있는 5백여 리를 가면 파미라천(波謎羅天)에 이른다. 동서(東西)로 1천여 리요, 남북(南北)으로 백여 리이며, 혹 좁은 곳은 10리도 못되고 남북으로는 대설산의 사이에 놓여 있다. 토지는 소금기가 있고 돌이 많으며 풀과 나무는 아주 드물고 사는 사람이 없다. 하천에서 남쪽으로 산을 넘어가면 발로라국(鉢露羅國)이 있다. 이 하천은 대총령(大葱嶺) 위에 있고 남섬부주(南贍部洲)의 한 주로서 땅이 가장 높다. 그 가운데에 큰 용의 연못이 있는데 동서로 3백여 리요 나북으로 50여 리이며 큰 알[大卵]이 나왔다고 한다. 그 물은 서쪽으로 흘러 달마실제국(達磨悉帝國)의 동쪽 국경에 이르면 박추하(縛蒭河)와 합쳐진다. 그러므로 이 물은 서수(西水)와 함께 서쪽으로 흐르면서 동쪽으로 하나의 지류가 갈라져 나오는데 동북쪽으로 거사국(佉沙國)의 서쪽 국경에 이르러 사다하(徙多河)와 합쳐지니 여기부터는 모든 물이 동쪽으로 흐르게 된다. 용의 연못의 정남(正南)쪽은 무열지(無熱池)와 마주하고 북쪽은 천천천(千泉川)과 마주하며 남쪽은 지대령(池大嶺)과 마주하는데 그 이름은 바라서라(婆羅犀羅)이며 남북으로 3ㆍ4백 리나 되고 산의 지대가 매우 높다. 못의 북쪽이 곧 대총령으로 『수경(水經)』에서 말하였다. “높이는 가히 천여 리가 되면서 양 편 가장자리에서 점차 아래로 내려가고 남북의 높은 고개는 통로의 수효가 지극히 많아 백여 가닥이나 된다.” 산에서 나는 파[葱]가 많고 낭떠러지가 험하면서 푸른 빛[葱翠]을 띠고 있으므로 그렇게 이름 붙인 것이다. 고개의 남쪽은 대설산(大雪山)에 접하고 북쪽은 천천(千泉)이므로 의당 2천5백여 리쯤 되고 동쪽은 오살(烏살)을 끝으로 하고 서쪽은 활국(活國)까지 이르게 되니 의당 3천여 리는 될 것이다. 또 하천의 서남쪽에서 산이 험한 곳을 지나 7백여 리를 가면 상미국(商彌國)에 이른다. 둘레는 2천 6백 리요 땅에는 자황(雌黃)이 나오며 나라 사람들은 부처님을 믿고 사찰은 두 군데 있는데 승려 역시 적다. 북쪽으로 달마실제(達磨悉帝)라는 큰 바위산을 넘으면 시기니국(尸棄尼國)에 이르는데 둘레는 2천여 리이며, 산과 자갈밭으로 들판이 죽 이어졌다. 또 남쪽으로 산과 하천을 넘으면 달마철실제국(達磨鐵悉帝國)[일명 호간국(護侃國)이라고도 한다]에 이르게 되는데 바로 도화라(覩貨羅)가 전에 살던 땅이다. 두 산 사이에 있고 동서로 1천5백 리요, 남북으로 백 리가 좀 못되며 혹은 좁은 곳이라고 10리를 넘지 않으며 동쪽은 박추하에 닿아 있다. 사찰은 10여 군데 있고 승려의 수효는 적다. 성에 있는 절의 석상(石像) 위에는 금과 구리로 된 둥근 일산[蓋]이 걸려 있는데 뭇 보배로 장식되어 있으며 사람이 돌 주위를 돌면 일산도 따라 돌고 사람이 그치면 그것도 그친다. 사방은 석벽(石壁)으로 되어 있어 그것이 그렇게 하는 까닭을 헤아릴 수 없는데 어떤 이는 성인의 힘으로 그렇게 한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신비한 장치라고 말한다. 또 서남쪽으로 산을 올라서 골짜기를 5백여 리쯤 들어가면 굴랑나국(屈浪那國)에 이르는데 역시 옛 땅이다. 둘레는 2천여 리요, 불법을 믿고 따르는 이는 조금 밖에 없다. 또 서북쪽으로 고개를 넘어 3백여 리를 가면 음박건국(淫薄健國)에 이르는데 역시 전에 살던 땅이다. 둘레는 1천여 리요, 도성(都城)은 10여 리이다. 또 서북쪽의 산골짜기로 2백여 리를 가면 발탁창나국(鉢鐸創那國)에 이르는데 역시 예전에 살던 땅이다. 둘레는 3천여 리요, 산과 하천이 반반이며 견고한 성(城)이 수십 개나 있다. 서쪽으로 산골짜기를 넘어 3백여 리를 가면 흘율슬마국(訖栗瑟摩國)에 이르는데 역시 예전에 살던 땅이다. 동서로는 10여 리요, 남북으로는 3백 리이며, 도성의 둘레는 15리이다. 북쪽으로 가면 발리갈국(鉢利曷國)에 이르는데 이 역시 예전에 살던 땅이다. 넓이는 백여 리요, 남북으로 3백여 리이며 도성은 2백여 리이다. 또 흘율국(訖栗國)에서 서쪽으로 가파른 곳을 넘고 깊은 골[洞]을 지나 하천과 성(城)을 따라 3백여 리쯤 가면 몽건국(瞢健國)에 이르는데 이것도 역시 전에 살던 땅이다. 둘레는 4백여 리요, 도성의 둘레는 16리이다. 북쪽으로 하천을 건너면 아리니국(阿利尼國)에 이르는데 역시 예전에 살던 땅이다. 둘레는 3백여 리요, 박추하의 양 언덕이 빙 둘러져 있으며, 큰 성의 둘레는 15리이다. 동쪽으로 하천을 건너면 알라호국(遏羅胡國)에 이르는데 역시 예전에 살던 땅이다. 북쪽은 앞으로 하천이 흐르고 둘레는 2백여 리이며 큰 성의 둘레는 15리이다. 또 몽건국으로부터 서쪽으로 백여 리를 가면 총령(葱嶺)의 서쪽 끝이 나오며 산을 찾아서 내려가면 활국(活國)에 이르는데 역시 여기도 예전에 살던 땅이다. 둘레는 2천여 리요, 왕성(王城)의 둘레는 20여 리이며, 그 왕은 돌궐(突厥)이다. 철문(鐵門)에서부터 남쪽의 여러 작은 나라는 거의 돌궐에 속한다. 땅은 평평하여 고르고 풍속은 대부분이 부처님을 믿으며 사찰은 10여 군데요, 승려 수효는 백이며, 대승ㆍ소승을 겸하여 배운다. 서쪽으로 4ㆍ5백 리를 가면 박갈국(縛曷國)이 나오고 동남쪽으로 산골짜기와 모든 성(城)을 넘어 3백여 리를 가면 활실다국(闊悉多國)에 이르는데 여기도 역시 예전에 살던 땅이다. 나라의 둘레는 천 리가 좀 못되고 도성(都城)은 10여리이며 산은 많고 시내들은 좁으며 바람이 매우 많고 춥다. 사찰은 세 군데이고 승려들 역시 적을 뿐이다. 동남쪽의 골짜기로 들어가 고개를 넘고 여러 작은 성들을 지나 4백여 리쯤 가면 안달라박국(安呾羅縛國)에 이르는데 여기도 역시 예정에 살던 땅이다. 둘레는 3천여 리요, 왕성(王城)의 둘레는 15리이며, 돌궐에 속한다. 사찰은 세 군데있고 승려는 수십 명이 있다. 아육왕(阿育王)이 세운 하나의 탑이 있고 토산(土山)이 끊이지 않고 이어져 있으며 몹시 추위가 심하다. 이로부터 서남쪽으로 대설산을 올라가 바라서라령(婆羅犀羅嶺)의 동쪽 끝으로 3일을 가면 또 가장 정상에 도달하는데 섬부(贍部) 1주(洲)의 모든 산은 모두 사방 아래로 두루 바라다보게 된다. 또 고개를 찾아 아래로 역시 3일을 내려가면 매우 가파르고 구비가 많은 골짜기로 얼음을 파면서 건너가야 한다. 서쪽으로 가필식국(迦畢式國)의 변두리 성(城)과 조그만 마을[邑] 수십 군데를 지나고 다시 서남쪽으로 수백 리를 가야 비로소 왕도(王都)에 이른다. 또 서쪽에서 조금 남쪽으로 1천3백 리를 가서 산과 하천을 넘으면 불율시살당나국(弗栗恃薩儻那國)에 이른다. 넓이는 2천여 리요, 남북으로 천여 리이며 왕성의 둘레는 20여 리요, 불법을 믿고 있다. 이로부터 남쪽으로 5백여 리를 가면 조구타국(漕矩吒國)[또한 조리(早利)라고도 한다]에 이른다. 둘레는 7천여 리요, 왕성의 둘레는 30여 리이며, 산과 하천이 반반이다. 사찰은 백여 군데가 있고 승려의 무리도 수만이며 모두가 대승(大乘)을 배운다. 아육왕(阿育王)이 세운 탑이 열 군데에 있고 천사(天祠)도 수십군데이나 숫자상 외도(外道)들이 더 많다 토지는 울금향(鬱金香)풀이 나기에 알맞고 흥구초(興瞿草)가 났으며 나마(羅摩)가 난다. 인도천(印度川)의 남쪽 국경은 묘나희라산(䅦那呬羅山)이며 왕성(王城)은 동남쪽으로 2천 리요, 서인도(西印度)의 벌랄나국(伐剌那國)에 이르러야 비로소 북쪽 길[北道]과 합쳐져 남쪽으로 부처님의 나라에 나아가게 된다. 북쪽의 길로 인도에 들어가는 이는 경사(京師)로부터 서북쪽으로 3천3백여 리를 가서 과주(瓜州)에 이르러 다시 서북쪽으로 8백여 리를 가면 자갈밭이 나오면서 유원현(柔遠縣)에 이른다. 또 서남쪽으로 1백60리를 가면 이주(伊州)에 이르고 다시 서쪽으로 7백여 리쯤 가면 포창현(蒲昌縣)에 이르며 또 서쪽으로 백여 리쯤 가면 서주(西州)에 이르는데 곧 고창(高昌)이 옛날에 소유했던 땅이요, 한(漢)나라 때는 의화도위(宜禾都尉)가 다스렸던 곳이며 뒤에는 저거량왕(沮渠涼王)이 그 땅으로 피난하였고 지금은 변방의 안쪽에 위치하고 있다. 또 서쪽으로 7백여 리를 가면 아기니국(阿耆尼國)[곧 오기(烏耆)이다]에 이른다. 동서로 6백여 리요, 남북으로 4백여 리이며, 도성의 둘레는 6ㆍ7리이다. 승려와 사찰은 10여 군데에 2천여 명이 있으며 다 같이 소승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를 배우고 계행(戒行)에 힘쓰며 세 가지의 정육(淨肉)을 먹는다. 이로부터 흑령(黑嶺)의 오랑캐들은 재물을 중히 여기고 의리를 가벼이 여기며 예의가 없고 공경심이 없으며 아내가 높고 남편이 낮으며 양민과 천민이 다 같이 평등하며 길할 때는 흰 옷[吉素]을 흉할 때는 검은 옷으로 복제(服制)를 삼는다. 또 서남쪽으로 2백여 리 가서 조그만 산을 하나 넘고 두 개의 큰 하천을 넘어 7백여 리를 가면 굴지국(屈支國)[곧 구자(丘慈)이다]에 이른다. 동서로 천여 리요, 남북으로 6백 리이며, 성의 둘레는 17ㆍ18리이다. 사찰이 백여 군데나 있고 승려는 5천여 명이며 다 같이 소승의 설일체유부를 배운다. 위에서와 같이 세가지의 정육을 먹고 속인들이 크게 부처님을 믿었으므로 왕성이나 백성의 집에 상(像)과 탑들을 많이 세워 놓아 기록할 수조차 없다. 동쪽 국경의 큰 성(城) 가운데 천사(天祠)가 있다. 못에서는 용이 때때로 나와서 암말과 교접하여 용의 망아지를 낳았는데 처음 낳았을 때는 거칠고 사나우나 새끼를 잘 길들여 탔으므로 나라에는 좋은 말이 많았다. 왕이 가까이하는 금화(金花)라는 이가 용이라고 생각하며 어거하여 왕을 태웠는데 끝내려고 할 때 채찍을 그의 귀에 대었더니 곧 숨어 사라져서 사람의 여인과 통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사납고도 용맹스러웠다. 왕이 돌궐과 짜고 이 성의 사람들을 살해하였기 때문에 텅 비고 황폐하게 되었다고 한다. 성의 북쪽으로 40여 리 가면 동쪽에 소호리사(昭怙釐寺)가 있고 그 불당(佛堂) 안에는 사방 2척(尺)이 되는 옥석(玉石)이 있는데 그 위에는 부처님의 발자국 길이 1척 8촌(寸)에, 너비가 6촌의 부처님 발자국이 찍혀 있으며, 재일(齋日)에는 광명이 뿜어져 나왔다. 왕성(王城)의 서문(西門) 밖의 길 좌우에는 각각 높이 90여 척이 되는 입불(立佛)이 있고 거기에 광장을 만들어 5년마다 한 번씩 모이고 있었다. 서쪽으로는 아사리이사(阿奢理貳寺)가 있는데 당나라 말로는 기특(奇特)하다는 뜻이다. 옛날 왕이 바깥을 유관(遊觀)하고 다니면서 성인들의 자취를 순례할 적에 동복(同腹)의 아우가 남아서 나라를 지키고 있었는데 허구를 지어내어 참소하려는 것을 막기 위하여 스스로를 거세(去勢)하였고 왕은 몹시 특이하게 여겼다. 그 아우는 뒷날 어떤 사람이 5백 마리 소를 거세하려는 것을 목격하고 가엾이 여겨 돈을 주어 면하게 해주었다. 이러한 인자함과 선근(善根)의 힘으로 남근(男根)이 갑자기 생겨났으나 끝내 궁으로 들어오지 않았으므로 왕은 의아하고 기특하게 여겼고 인하여 그 자리에 절을 지었다고 한다. 또 서쪽으로 작은 자갈밭을 지나서 6백여 리를 가면 발록가국(跋祿迦國)[옛 이름은 성묵(姓墨)이라고 하며 또 함묵(函墨)이라고도 한다]에 이른다. 동서로 6백여 리요, 남북으로 3백여 리이며, 왕성의 둘레는 50리이다. 사찰의 수효는 열군데이고 승려는 천여 명이 되며 다 같이 소승을 배운다. 서북쪽으로 3백여 리를 가서 돌 자갈밭을 건너면 능산(凌山)에 이르는데 곧 총령의 북쪽 언덕이다. 물은 대체로 동쪽으로 흐르며 이 길에서는 붉은 옷을 입거나 바가지[瓠]를 지니거나 소리를 크게 지를 수 없는데 이떤 이라도 범하게 되면 용이 바람과 비와 모래를 뿌리게 되고 그런 일을 당하면 반드시 모두 죽고 만다고 한다. 산으로 지나면서 서쪽으로 4백여 리를 가면 대청지(大淸池)[또는 이름을 열해(熱海)라고도 하고 또 함해(鹹海)라고도 한다]에 이른다. 둘레는 천여 리요, 동서로 길며 사면에는 산이 있는데 길가는 사람들이 복을 빈다. 또 서북쪽으로 5백여 리를 가면 소엽수성(素葉水城)에 이른다. 둘레는 6ㆍ7리쯤 되고 장사는 오랑캐들이 섞여 살며 이로부터 서쪽에 있는 수십 개의 고립된 성들도 역시 그러하다. 또 서쪽으로 4백여 리를 가면 천천(千泉)에 이른다. 샘물이 솟아나서 사방 2백여 리까지 많이 흘러가며 남쪽으로 설산(雪山)과 만나는 곳에는 세 방향으로 드리워진 평평한 육지가 있다. 또 서쪽으로 1백50리를 가면 달라사성(呾羅私城)에 이르며 다시 서남쪽으로 2백여 리 가면 공경성(恭敬城)에 이른다. 또 남쪽으로 50리를 가면 노적건국(笯赤建國)에 이르며 둘레는 1천여 리이다. 또 서쪽으로 2백여 리를 가면 자시국(赭時國)[당나라 말로는 돌나라[石國]이다]에 이른다. 둘레는 천여 리이며 서쪽으로는 엽하(葉河)와 만난다. 또 동남쪽으로 천여 리를 가면 패한국[㤄捍國]에 이른다. 둘레는 4천여 리이며 산이 사방으로 둘러져 있다. 또 서쪽으로 1천여 리를 가면 솔도리슬나국(窣覩利瑟那國)에 이른다. 둘레는 1천 4백 리요, 동쪽은 엽하(葉河)와 만나며, 엽하는 총령의 북쪽에서 나와 서북쪽으로 흐른다. 또 서북쪽으로 큰 자갈밭으로 들어가 5백여 리쯤 가면 삽말건국(颯末建國)[당나라 말로는 강국(康國)이다]에 이른다. 둘레는 1천6백여 리요, 남북으로 좁으며, 도성(都城)의 둘레는 20여 리로 그들의 처소는 지극히 험하고 견고하다. 여기에서 동남쪽으로 가면 미말하국(弭末賀國)[미국(米國)이다]에 이르며, 둘레는 4ㆍ5백 리쯤 되고 동서로 좁다. 또 서북쪽으로 가면 겁포달나국(劫布呾那國)[조국(曹國)이다]에 이르며, 둘레는 1천 4ㆍ5백 리쯤 되고 동서로 길다. 또 서쪽으로 3백여 리쯤 가면 굴상니가국(屈霜儞迦國)[하국(何國)이다]에 이르며, 둘레는 조국(曹國)과 동일하면서 동서로 좁다. 또 서쪽으로 2백여 리쯤 가면 갈한국(噶捍國)[동안국(東安國)이다]에 이르며 둘레는 1천여 리쯤 된다. 또 서쪽으로 4백여 리쯤 가면 포한국(捕捍國)[중안국(中安國)이다]에 이르며, 둘레는 1천7백여 리요, 동서로 길다. 또 서쪽으로 4백여 리쯤 가면 벌지국(伐地國)[서안국(西安國)이다]에 이르며, 둘레는 4백여 리쯤 된다. 또 서남쪽으로 5백여 리쯤 가면 화리습미국(貨利習彌國)에 이르며, 박추하(縛芻河)의 양쪽 언덕을 따라 동서로 30리는 족히 되며 남북으로 5백여 리이다. 또 삽말건국(颯袜建國)에서 서남쪽으로 3백여 리쯤 가면 갈상나국(羯霜那國)[운사국(云史國)이다]에 이르며 둘레는 1천5백 리가 족히 된다. 또 서남쪽으로 2백여 리를 가면 큰 산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산길이 몹시 험하고 또 사람들도 적다. 동남쪽의 산에서 3백여 리쯤 가면 철문관(鐵門關)에 이르는데 좌우에 있는 석벽(石壁)의 빛이 철(鐵)과 같으며 철로 단단히 닫힌 문짝에 방울을 달아 놓은 것이 지금까지 남아있는데 곧 한(漢)나라 변방의 서문(西門)이다. 철문관을 나오면 곧 도화라국(覩貨邏國)[옛날에는 토출라(吐出邏)라고 하였다]의 옛 땅에 이른다. 남북으로 1천여 리요, 동서로 3천여 리이며, 동쪽은 총령을 등지고, 서쪽은 파사(波斯)에 접하며 북쪽은 철문(鐵門)에 의지해 있다. 박추(縛蒭)라는 큰 강물은 나라의 중간에서 서쪽으로 흐르되 그 안은 스스로 27개의 나라로 분류되어 승려들은 12월 16일에 안거(安居)하게 되는데 따뜻하고 더우면서 비가 많기 때문이다. 강[縛蒭河]의 북쪽을 따라 내려오면 달밀국(呾蜜國)에 이른다. 동서로 6백여리요, 남북으로 4백여 리이며, 왕성의 둘레는 20여 리이다. 사찰은 열 몇 군데요, 승려는 천 명이 넘으며 큰 솔도파(窣覩波)[곧 옛 탑(塔)의 다른 이름이니 투바(偸婆) 등과 같다]가 있으며 신령하고 기이한 불상이 있다. 또 동쪽으로 가면 적악연나국(赤鄂衍那國)에 이른다. 동서로 4백여 리요, 남북으로 5백여 리이며, 왕성의 둘레는 10여 리요, 사찰은 다섯 군데이며, 승려의 수가 적다. 또 동쪽으로 가면 분로마국(忿露摩國)에 이른다. 동서로 백여 리요, 남북으로 3백여 리이며, 왕성의 둘레는 16ㆍ17리요, 사찰은 두 군데 있으며, 승려는 백여명정도이다. 또 동쪽으로 수만국(愉漫國)10)에 이르며 너비는 4백여 리요, 세로는 1백여 리이며, 왕성의 둘레는 10여 리이다. 사찰은 두 군데 있고 승려 또한 많지 않다. 서남쪽이 박추하에 임하고 곧 국화연나국(鞠和衍那國)에 이른다. 너비는 2백여 리요, 세로는 3백여 리이며, 왕성은 10여 리이다. 사찰은 세 군데 있고 승려는 백여 명정도 된다. 또 동쪽으로 가면 확사국(鑊沙國)에 이른다. 너비는 3백여 리요, 세로는 5백여 리이며, 왕성의 둘레는 16ㆍ17리쯤 된다. 또 동쪽으로 가면 가돌라국(珂咄邏國)에 이른다. 너비와 세로는 천여 리이며 왕성의 둘레는 20여 리이다. 동쪽으로 총령(葱嶺)을 따라 가면 구미타국(拘謎陁國)에 이른다. 너비는 2천여 리가 되고, 세로는 2백여 리가 되며, 대총령의 중앙을 따라 있고, 왕성의 둘레는 20여 리이다. 서남쪽은 박추하에 임하여 있고 나라의 남쪽은 시기니국(尸棄尼國)에 접하여 있으며 남쪽에서 이 강물을 건너면 달마실제(達摩悉帝) 등의 나라에 이르는데 앞의 중간의 길[中道]에서 인용한 바와 같다. 또 철문(鐵門)의 남쪽에서 조금 동쪽으로 5백여 리 가면 박가랑국(嚩伽浪國)[박갈국(縛喝國)의 한 길[道]은 구미(拘謎)의 서남쪽으로도 이르게 된다]에 이른다. 너비는 50여 리요, 세로는 2백여 리이며, 도성(都城)은 십여 리이다. 또 남쪽으로는 흘로실민건국(紇露悉泯健國)에 이른다. 둘레는 1천여 리요, 도성의 둘레는 15리쯤이 된다. 또 서북쪽으로 가면 홀름국(忽懍國)에 이른다. 둘레는 8백여 리요, 도성의 둘레는 15리 남짓이며, 사찰은 10여 군데이며 승려는 5백 명이나 된다. 또 서쪽으로 가면 박갈국(縛喝國)에 이른다. 너비는 8백여 리요, 세로는 4백여 리이며, 북쪽은 박추하에 임해 있고 왕성의 둘레는 20여 리이며, 풍속은 아름답다. 그 나라를 소왕사성(小王舍城)이라고 기록하는데 사찰이 백여 군데 있고 승려는 2천여 명 정도이며 다 같이 소승을 배우고 있다. 성 밖의 서남쪽으로 납박(納縛)[우리나라 말로는 신(新)이라는 뜻이다]이라는 사찰이 설산의 북쪽에 있는데 논(論)을 지은 모든 논사(論師)들은 이 절에서 기반이 되는 사업이 쇠하지 않은 것을 칭찬하고 소중하게 여긴다. 불상은 이름 있는 보배로 장식하였으며 비사문의 상[毘沙門像]이 호위하고 있다. 돌궐의 섭호(葉護)가 사찰을 습격하여 보배를 취하려고 군사를 절 곁에 주둔시켰는데 밤에 꿈속에서 천왕(天王)이 긴 창으로 가슴을 꿰뚫어 땀을 흘리고 염통이 아파서 곧 죽었다. 불당 안에는 한 되 남짓한 부처님께서 쓰신 주전자가 있는데 여러 가지 색으로 광채가 빛나서 금인지 돌인지 이름하기 어려우며, 또 부처님의 어금니가 있는데 길이는 한 치 남짓하고 너비는 8ㆍ9분(分)이 되며 색깔은 황백색(黃白色)인데 빛깔이 깨끗하다. 부처님의 빗자루는 가사초(迦奢草)로 만들어졌는데 길이가 2척 남짓하고 둘레는 7촌(寸)이 족히 되며 여러 가지 보배로 자루를 장식하였다. 이 세 물건에 재일(齋日)에는 법속(法俗)이 느낄 만큼 큰 광명을 놓는다. 높이 2백여 척이나 되는 큰 부도(浮圖)는 금강(金剛)을 이겨 발랐고 보배로 장식되었다. 부처님 사리(舍利)도 있는데 때때로 신령한 광명을 내뿜는다. 또 모든 아라한으로서 열반에 든 이들은 신통을 보이면서 탑을 세우는데 비록 증과(證果)가 있더라도 신통을 나타내지 못하는 이는 곧 봉수(封樹)하지 않는다. 왕성의 서북쪽으로 50여 리 되는 곳에는 제위성(提謂城)이 있고 왕성의 북쪽으로 곧장 40여 리 되는 곳에는 파리성(波利城)이 있다. 각각 부도의 높이는 세 길[丈]쯤 되는데 곧 석가(釋迦)께서 처음 법을 세우셨을 때 헌초(獻麨)장자가 머리카락과 손톱으로 세운 것이다. 부처님의 승가지(僧伽胝)ㆍ울다라승(鬱多羅僧)ㆍ승각기(僧却崎), 또 발우[鉢]를 엎어 두고 석장(錫杖)을 세워서 차례대로 벌여 놓았으며 탑을 세운 의식과 법령에 의거하여 숭고하게 건립하였다. 왕성(王城)의 서쪽 70리 되는 데는 가섭파불(迦葉波佛) 때 세워진 높이 두 길[丈] 남짓되는 부도가 있다. 또 큰 성의 서남쪽의 설산으로 들어가 강에서 30여 리를 가면 예말타국(銳末陀國)에 이른다. 너비는 5ㆍ6백 리쯤 되고 세로는 백여 리쯤 되며 왕성은 둘레가 10여 리이다. 또 서남쪽으로 3백 리를 가면 호식건국(胡寔建國)에 이른다. 넓이는 5백여 리쯤 되고 세로는 천여 리이며 왕성의 둘레는 20여 리이고 산과 시내가 많다. 또 서북쪽으로 가면 달랄건국(呾剌建國)에 이른다. 너비는 전항과 같고 세로는 50여 리이며 왕성은 10여 리가 되고 서쪽은 파랄사국(波剌斯國)의 국경에 접해 있다. 또 박갈국(縛喝國)의 동쪽은 홀름국(忽懍國)이고 여기에서 동남쪽으로 흘로실민건국(紇露悉泯健國)까지 1천여 리가 된다. 여기서 북쪽으로 박가랑국(縛伽浪國)이 가깝고 동서로 50여 리가 되며 이 나라의 동북쪽은 활국(活國)에 접해 있다. 또 발갈국으로부터 남쪽으로 백여 리 가면 게직국(揭職國)에 이른다. 너비는 5백여 리요, 세로는 3백여 리이며 도성의 둘레는 5리쯤 된다. 사찰은 10여 군데있고 승려는 3백여 명 정도 되며 다 같이 소승을 배운다. 언덕과 토산(土山)들이 끊이지 않고 죽 이어졌고 동남쪽으로 대설산에 들어가 6백여 리를 가면 도화라(覩貨羅)의 옛 땅이 나온다. 또 범연나국(梵衍那國)에 이르게 되는데 너비는 2천여 리 되고 세로는 3백여리가 되며 설산 가운데에 있고 성(城)은 험한 바위에 의거하여 있다. 사찰이 수십 군데 있고 승려는 천 명정도 되며 소승의 출세부(出世部)를 배우고 있다. 왕성의 동북쪽으로 산이 우묵하게 들어간 곳에는 큰 석불(石佛)이 있는데 높이는 1백5척(尺)이며 금과 보배로 장엄되어 있다. 또 동쪽 절의 왼편에는 유석(鍮石)으로 된 석가의 입상이 있는데 높이는 백여척이 되며 분신(分身)을 따로 주조(鑄造)하여 성의 동쪽 3리 되는 데에 세웠다. 절에는 열반하실 때의 와소불(臥素佛)이 있는데 길이는 천여 척이나 되며 역시 금과 보배로써 장식되어 있다. 동남쪽으로 2백여 리 가서 대설산의 동쪽을 건너면 절에 부처님의 치아와 겁초(劫初) 때의 독각(獨覺)의 치아가 있으며 길이는 5촌(寸) 남짓 되고 너비는 4촌이 좀 못된다. 또 금륜왕(金輪王)의 치아도 있는데 길이가 3촌이요, 너비는 2촌이다. 또 상락가박사(商諾迦縛娑)[곧 상나화수(商那和修)이며 법을 전한 제3의 스승이다] 대아라한이 가진 아홉 되의 쇠발우와 구조(九條)로 된 진홍색의 승가지가 있는데 설락초(說諾草)의 가죽으로 짜여져 있다. 그것은 전생에 여름 안거(安居)를 마친 날에 이 풀을 가져다 스님들께 보시하였는데 그 복의 힘을 입게 되어 5백 생 동안 중음신(中陰身)에서 태어날 적마다 항상 그 옷을 입었고 태(胎)에서 나올 때부터 함께 입고 나와서 몸이 자라는데 그것도 따라 커졌으며 아난(阿難)이 제도할 때에는 변하여 법복(法服)이 되었고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후에는 또 변하여 9조(條)로 된 것이다. 그의 치마와 발우도 함께 금으로 봉함되어 있다. 아라한이 적멸을 증득하여 변제정(邊際定)에 들자 지혜와 원력 때문에 가사(袈裟)가 남아 있으면서 남겨진 법이 다하기를 기다렸는데 이제야 변하고 헐어서 지금은 이미 조금 손상되어 있다. 진실로 미묘함이 있다. 대설산(大雪山)의 동쪽으로는 작은 시내와 못에 이르고 동쪽으로 설산을 들어가 흑령(黑嶺)을 넘으면 가필시국(迦畢試國)에 이른다. 둘레는 4천여 리이며 북쪽은 설산의 세 방향으로 펼쳐 흑령을 등지고 있으며 도성(都城)의 둘레는 10여리이다. 절은 백여 군데 있고 승려는 6천여 명이나 되며 대부분 대승을 배우고 있다. 그 왕은 부처님을 믿으면서 해마다 한 길[丈] 8척(尺)이 되는 은상(銀像)을 조성하여 스스로 공양을 닦고 있다. 천사(天祠)는 수십 군데이며 다른 종교를 믿는 이들도 천여 명이나 된다. 왕성의 동쪽에서 3리쯤 가면 북쪽 산 아래에 부처님의 큰 사원(寺院)이 있고 동쪽문의 남쪽에는 대신왕상(大神王像)에 있는데 그 오른쪽 발 아래에 큰 보배가 저장되어 있다. 요즘에 어떤 외국의 왕이 스님들을 쫓아내고 파내려 하였는데 신관(神冠) 속의 앵무새 상(像)이 깃털을 퍼덕이며 울부짖자 땅이 진동하여 왕의 군사들을 모두 쓰러뜨렸으므로 일어나 용서를 빌고 돌아갔다고 한다. 절 북쪽의 고개 위에는 몇 개의 석실(石室)이 있고 역시 보배가 많이 저장되어 있는데 사사로이 가지려고 하면 약차(藥叉)가 사자나 독사나 벌레로 변하여 와서는 성을 내며 덤빈다고 한다. 석실의 서쪽으로 3리쯤 되는 곳의 큰 고개 위에는 관자재상(觀自在像)이 있는데 정성을 다해 빌면 상이 미묘한 몸을 나타내어 말하고 행한 이를 편안하게 한다. 성의 동남쪽으로 30여 리 되는 곳의 갈라호라사(曷邏怙羅寺)는 대신(大臣)이 지은 것으로 그의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높이 백여 척 되는 부도(浮圖)가 있는데 옛날에 한 대신이 밤 중 꿈에 부도를 조성하려고 왕에게 사리(舍利)를 청하기 위해 아침에 궁중으로 갔는데 어떤 사람이 사리를 담은 병을 가지고 있었다. 대신은 사리를 놓아 두게 하고 그 사람을 먼저 들여보내고 이에 병을 가지고 탑으로 올라가서 엎어 놓은 발우를 열어 사리를 안치하였다. 왕의 사자(使者)가 뒤를 쫓아왔으나 둘은 이미 합해져 있었다. 재일(齋日)에는 광명을 놓았고 검은 기름이 흘러 나왔으며 밤에는 음악이 들렸다고 한다. 성의 서북쪽으로 2백여 리쯤 가면 대설산의 꼭대기에 용의 연못이 있고 산 아래에는 용을 위한 절이 세워져 있다. 탑 안에는 부처님의 골육(骨肉)의 사리가 한 되 남짓 들어 있는데 어떤 때는 연기가 일어나기도 하고 혹은 사나운 불길이 일기도 하는데 점차로 꺼지고 나서야 비로소 사리를 보게 된다고 한다. 그 모양은 마치 흰 구슬과 같고 기둥을 돌아서 구름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탑 안으로 들어온다고 한다. 성의 서북쪽은 대하(大河)의 남쪽 언덕이다. 고왕사(古王寺) 안에는 부처님의 어린 시절의 치아가 들어있고 길이는 한 촌 남짓하며 또 이 동남쪽의 왕고왕사(往古往寺)에는 부처님의 정수리뼈 한 조각이 있는데 길이는 한 촌 남짓하며 빛깔은 황백(黃白)색이요, 머리카락 구멍이 분명히 남아있다. 부처님의 머리카락은 청(靑)색이며 소라 껍데기 같이 되어 오른편으로 말려 있으면서 끌어 당기면 길이가 한 자 남짓한데 말리면 한 치 정도 되었다. 또 서남쪽의 고왕비사(古王妃寺)에는 금동(金銅)으로 된 부도(浮圖)가 있어 높이는 백여 척이나 되었고 부처님의 사리는 한 되 남짓하며 매 달 15일 밤에는 광명을 놓아 기반(基盤)을 빙빙 돌다가 날이 밝아지면 탑 안으로 들어간다 한다. 성의 서남쪽 비라바락산(比羅婆絡山)[상견(象堅)이라고 한다] 정상의 반석(盤石) 위에는 높이 백여 척이나 되는 탑이 서 있고 사리는 한 되 남짓하며 산의 북쪽 바위에 있는 샘물은 바로 부처님께서 산신(山神)의 밥을 받아 드신 뒤에 입안을 헹구고 버드나무 가지를 씹으실 때 생겼다고 하는데 지금은 무성한 숲으로 되어 있으며 절 이름은 양지사(楊枝寺)라고 한다. 또 용의 연못에서 동쪽으로 6백여 리 가서 설산을 넘고 흑령(黑嶺)을 지나면 북인도(北印度)의 국경에 이른다. 이미 앞에서 말한 모든 읍(邑)은 오랑캐나라라고 한다. 북쪽에 이르면 중간의 길[中間道]과 합해지는데 그 땅의 이름을 남파국(濫波國)[북인도에 속한다. 천축의 바라문 땅으로 들어가게 된다]이라 한다. 그것은 5인도(印度)의 국경이며 둘레는 9만여 리가 되고 세 방향으로 큰 바다와 맞닿아 있으며 북쪽으로는 설산을 등지고, 북쪽은 넓으며 남쪽은 좁은 것이 마치 반달[半月]같고 70여 개의 나라가 동일한 왕의 명령을 받는다. 남파국은 무열지(無熱地)의 서쪽에 있고 북쪽 오랑캐인 활국(活國)에 의지해 동남쪽의 세 방향으로는 흑령(黑嶺)과 만나고 북쪽은 설산과 닿아 있다. 도성의 둘레는 10여 리이며 사찰은 십여 군데 있고 승려의 수효도 적으며 대부분 대승을 배우고 있다. 천사(天祠)는 수십 군데요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특히 많다. 동남쪽으로 1백여 리쯤 가서 큰 고개와 큰 강을 넘으면 나가라갈국(那伽羅曷國)[북인도에 속하며 옛날의 화씨성(花氏城)이다]에 이른다. 너비는 6백여 리요, 길이는 2백여 리가 되며 산이 국경의 사방에 둘러 있고 도성의 둘레는 20여 리이다. 사찰은 많지만 승려는 적으며 천사(天祠)는 다섯 군데요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백 명이나 된다. 성의 동쪽 2리 쯤 되는 곳에 높이 3백 척이 되는 석탑(石塔)이 돌로 엮어져 우뚝 솟아 있는데 아로새긴 것이 평범하지 않다. 여기는 옛날 연등(然燈)부처님을 만나 사슴 가죽옷과 머리카락을 땅에 깔아 진흙을 묻지 않게 한 곳인데 겁(劫)이 지났는데도 오히려 남아 있다. 무우왕(無憂王)은 법을 소중히 여겼으므로 여기에 석탑(石塔)을 세워서 그 일을 기록하였는데 매 번 재일(齋日)마다 하늘에서 갑자기 꽃 비가 내리고 대중들은 모여서 구경한다고 한다. 서쪽에 있는 부처님 절에는 남쪽으로 작은 탑이 있는데 여기서 진흙을 묻지않게 한 곳이다. 왕은 큰 길을 피하여 후미진 데에 세웠고 성안에 큰 탑이 있었던 옛 터는 본래대로 있다. 부처님 치아를 모신 다른 탑은 높이가 3길[丈] 남짓한데 허공에서 왔다고 하는데 이미 사람의 솜씨가 아니며 여기에는 영험하고 기이한 일이 많다고 한다. 성 남쪽의 10여 리쯤 되느 곳에 탑이 있는데 이것은 부처님께서 중인도(中印度)에서 허공을 날아 오셔서 자취를 보이신 곳이다. 다음으로 동쪽에도 탑이 있으니 옛날 연등부처님을 만나 꽃을 사셨던 곳이다. 성의 동남쪽으로 20여 리쯤 되는 곳의 작은 돌 고개 위에 높이 2백여 척이나 되는 탑이 있고, 서남쪽으로 깊은 산 계곡에 있는 폭포는 절벽에서 흘러 내려오며, 동쪽 언덕에 있는 석벽(石壁)으로 이루어진 큰 동굴은 바로 용왕(龍王)이 살았던 곳으로 문으로 들어가는 길이 좁고 어둡다. 옛날 부처님께서 이 곳에서 용을 교화하고 그림자를 남기셨는데 분명하게 나타난다고 한다. 동굴 밖의 네모진 돌에는 부처님 발자국이 남아 있고 수레바퀴 형태[輸相]11)에서는 광명이 발한다. 동굴의 서북쪽 귀퉁이에 있는 탑은 부처님께서 오가며 거니셨던 곳이다. 또 곁에는 머리카락과 손톱을 모신 탑이 있는데 온계탑(蘊界塔)이라고도 말하며 동굴 서쪽에 있는 큰 반석(盤石) 위에는 가사(袈裟)를 빨았던 무늬가 있다. 성의 동남쪽으로 30여 리쯤 가면 혜라성(醯羅城)이 있는데 사방의 주변이 아주 험하다. 그곳에는 중각(重閣)이 있고 그 위에 부처님의 정수리뼈를 안치하였는데 둘레는 1천 2촌이요 그 빛깔은 황백(黃白)색이며 머리카락의 구멍이 분명히 남아있다. 선(善)과 악(惡)을 알기 위해 향을 이겨 거기에 바르면 마음먹은 대로 나타나게 된다. 부처님 해골[髑髏]의 형상은 마치 연(蓮) 잎사귀와 같고 빛깔은 정골과 같으며 부처님의 눈동자도 있는데 크기는 마치 능금 정도 되고 맑고 희면서 사무치게 빛나며 7보(寶)로 된 작은 탑(塔)에 앞의 세 가지 흔적들이 보배 함(函)에 담겨져 봉함되어 있다. 부처님의 큰 옷이 있는데 가는 모전으로 되고 황색(黃色)이며 보배함 속에 담겨 있으며 조금 훼손된 모양이 있다. 그 안에는 부처님의 석장이 있고 백철(白鐵)로 고리[環]를 만들었고 전단(栴檀)으로 줄기가 되었으며 보배 통에 담겨져 있다. 근자에 왕이 세력을 믿고 공중 안으로 가지고 들어갔는데 곧 본래 있던 대로 돌아왔다고 한다. 이 다섯 가지 성인의 유물들은 다섯 가지 청정한 행을 하는 왕으로 하여금 모시면서 보호하게 하며, 보고자 하는 이라면 세금 1전(錢)을 내어야 하며 세금 5전 이상의 값어치를 주고 청해야만 거듭 살펴보며 찬찬히 예배할 수 있다. 중각(重閣) 서북쪽에 있는 탑은 작지만 영험이 많아서 사람이 손을 그 위에 대거나 하면 방울이 떨리면서 움직인다. 여기에서 동남쪽의 산골짜기 안으로 5백여 리쯤 가면 건타라국(健陀羅國)[북인도이다]에 이른다. 넓이는 1천여 리요, 길이는 8백 리이며 동쪽은 신도하(信度河)에 닿아 있다. 도성의 둘레는 40여 리가 되고 조금은 비고 황폐해져 있다. 사찰은 십여 군데 있으나 천사(天祠)는 백 군데나 있으며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섞여 살고 있다. 성 안의 동북쪽의 옛 터에는 바로 부처님 발우를 놓은 보대(寶臺)가 있는데 수백 년이 지났으며 지금은 바사닉왕(波斯匿王)의 궁전에서 공양 올리고 있다. 성의 동남쪽으로 8ㆍ9리에 비발라수(卑鉢羅樹)가 있는데 높이가 백여 척이요 가지와 잎이 빽빽이 들어서서 무성하며 옛날 네 부처님의 자리 아래에는 좌상(坐像)이 보인다. 전(傳)의 말로는 현겁(賢劫)의 모든 부처님께서 그 아래 앉으셨다고 한다. 옛날 석가 여래께서는 여기에 앉으신 뒤에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뒷날 가니색가왕(迦膩色迦王)이 나의 골육(骨肉)을 모아서 여기에 두리라.” 왕은 뒷날 남쪽에 탑터를 세웠으니 둘레가 1리 반이며 금과 동을 두른 것만도 25겹이었다. 어떤 이는 말하였다. “40층(層)으로 되어 온 높이가 5백50척이요, 사리(舍利)는 한 섬이 될 것이다.” 처음으로 소치는 사람을 교화한 숲 사이에 3척의 작은 탑을 조성하였는데 왕이 그것을 던져 버리게 하고는 곧 큰 탑을 만들었으므로 둘째 층 아래의 돌로된 기반 곁에는 작은 탑이 반쯤 나타나 있으며, 병든 이가 와서 귀의하면 금방 낫는다고 한다. 그 큰 탑의 동쪽 돌층계 아래에는 옛날에 크기가 손가락이나 보리 알 정도 되는 금빛의 개미들이 있었는데 서로 석벽(石壁)을 갉아서 그 무늬가 마치 아로새긴 것 같이 남아 있다. 금모래를 섞어 만든 가부좌(跏趺坐)한 두 개의 불상이 있으며 높이가 4백56척이나 된다. 또 남쪽 돌층계에는 부처님의 여섯 길[丈] 되는 형상이 그려져 있다. 옛날에 어떤 두 가난한 사람이 저마다 1전(錢)씩을 보시하여 함께 한 분의 형상을 그려 놓고는 신변(神變)을 나투시기를 청하자 형상이 곧 가슴 위는 두 몸으로 나누어지고 아래는 합쳐 하나의 몸이 되었다고 한다. 다음에 남쪽으로 백여 걸음 가면 높이 한 길 여섯 자의 흰 돌로 된 불상이 있어 얼굴은 북쪽을 향해 있는데 광명을 놓으며 밤에는 나와서 탑을 돈다고 하며 도적이 물건을 훔치러 오면 불상이 그를 맞이하고 도적이 물러가면 불상도 되돌아간다고 한다. 큰 탑 좌우에는 작은 탑이 수백 개나 되며 공장의 솜씨가 아주 묘하고 향기와 음향이 모두 기이하여 선성(仙聖)들이 주위를 돈다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이 큰 탑에 관하여 일곱 번 불에 타고 일곱 번 세워지면 불법은 소멸하게 되리라고 수기하셨다고 하는데 이미 세 번 탔으며 지금은 조성하고 있다. 서쪽에 옛 사찰이 있는데 다 같이 전왕(前王)이 세웠다고 하며 모든 큰 논사(論師)인 세친보살(世親菩薩)과 뜻대로 설하는 논사 협존자(脇尊者)12) 등이 경(經)의 주석서인 비바사(毘婆沙)를 만들었던 곳이다. 사찰 동북쪽으로 50여 리쯤 가서 큰 강을 건너면 포갈라벌지성(布羯邏伐底城)에 이르며 둘레는 14ㆍ15리쯤 된다. 동쪽으로는 네 부처님께서 설법하신 탑이 있는데 무우왕(無憂王)이 건립하였고 높이는 수백 척이며 아로새겨 놓은 것이 세간에서 보기 드문 것이다. 성 북쪽의 5리 되는 곳에 옛 절의 동쪽 탑이 있는데 높이는 수백 척으로 곧 보살(菩薩)이 천 개의 눈[眼]을 버렸던 곳이다. 그 동쪽에도 석탑(石塔)이 있는데 높이는 백여 척으로 범왕(梵王)과 제석(帝釋)이 처음 조성하여 기묘한 보배로 잘 장식되었는데 부처님께서 멸도하시자 보배가 변하여 지금은 돌이 되어 있다. 또 서북쪽으로 50여 리에 있는 탑은 바로 상막가보살(商莫迦菩薩)[여기서는 말로는 섬(睒)이다]이 왕의 화살을 맞았던 처소이다. 또 동남쪽으로 약 2백 리에 있는 파로사성(跛魯沙城)에서 북동쪽으로 20여 리에 있는 탄다락가산(彈多落迦山)[바로 단특산(檀特山)이다]의 고개 위에 탑이 있는데 이 곳은 소달나(蘇達拏)[선아(善牙)라 말한다]가 세상을 피해 살았던 곳이며 바라문(婆羅門)이 남녀를 매로 때렸던 처소로서 피가 흘러 땅에 고여 있어서 지금도 초목들이 모두 똑같이 진홍색이다. 바위 사이의 석실(石室)은 비(妃)가 선정을 익혔던 곳이다. 또 서북쪽으로 백여 리 가서 작은 산을 넘어 큰 산에 이르면 남쪽으로 한 사찰에 탑이 있고 승려들은 대승을 배운다. 옛날 독각대선(獨角大仙)이 선타(扇陀)라는 여인의 유혹을 받았던 곳이다. 사성(沙城)의 동북쪽으로 50리 되는 곳의 큰 산에는 큰 천사(天祠)가 있고 그 천사의 동남쪽으로 1백5십 리를 가면 오탁가한다성(烏鐸迦漢茶城)에 이르는데 둘레가 20여 리나 되고 남쪽으로 신도하(信渡河)에 임해 있다. 여기에서 성의 북쪽으로 산을 넘어 6백 리를 가면 오장나국(烏仗那國)[북인도의 정식 국가이며 옛날에는 오장(烏長)이라 하였다]에 이른다. 산골짜기가 서로 이어져 있고 둘레는 5천 리이며 옛날 전륜왕(轉輪王)의 동산이었다. 토지는 울금향(鬱金香)이 나오기에 알맞고 협소바솔도하(夾蘇婆窣堵河)가 있다. 왕성(王城)의 둘레는 14ㆍ15 리쯤 되고 사찰이 1천4백 군데이며 승려는 1만 8천 명으로 모두 대승(大乘)을 배우고 있는데 지금은 거의 황폐하여 줄어들었으나 역시 대승을 익히고 있다. 문자를 통일하여 뜻을 요약한 율의(律儀)를 전하고 가르쳤는데 5부(部)가 있었다. 1부는 법밀부(法密部)요, 2부는 화지부(化地部)요, 3부는 음광부(飮光部)요, 4부는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요, 5부는 대중부(大衆部)이다. 천사(天祠)가 10여 군데 있고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뒤섞여 살았으며 왕도(王都)는 몽게리성(瞢揭釐城)이다. 그 동쪽으로 5리 되는 곳의 큰 탑에는 많은 상서가 있었다. 여기서는 바로 부처님께서 옛날 인욕선인(忍辱仙人)이었을 때 갈리(羯利)[우리나라 말로는 투쟁(鬪爭)이다]라는 왕에게 온몸을 갈갈이 찢겼던 처소이다. 성의 동북쪽으로 2백60리를 가서 큰 산으로 들어가면 아파라(阿波邏)라는 용의 샘물[龍泉]에 이르며 곧 앞으로 흐르는 강의 근원이다. 지류는 서남쪽으로 흐르며 봄과 여름 모두 얼음이 얼고 새벽이나 저녁에는 눈이 날린다. 부처님께서 옛날 난폭한 용(龍)을 교화하실 적에 금강공이[金剛杵]로써 절벽을 치자 용은 두려워서 귀의하며 부처님께 비를 내리겠다고 청하였으므로 이에 허락하시어 사람들로 하여금 양식을 거두게 하였고 12년 만에 비가 내린 것으로 수재(水災)가 났다고 한다. 또 샘의 서남쪽으로 30여 리에서 물의 북쪽 언덕에 있는 큰 바위는 부처님께서 용을 조복시키시고 발자국을 남기면서 그에게 마음먹은 대로 길고 짧게 되는 것을 보이신 곳이다. 흐름을 따라 30여 리 가면 부처님께서 옷을 세탁하신 돌이 있는데 가사(袈裟)의 무늬가 마치 조각을 한 것과 같다. 성의 남쪽으로 4백여 리 되는 곳에 있는 혜라산(醯羅山) 골짜기에서 물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서 동쪽으로 오르면 꽃과 열매들이 절벽에 붙어 있고 혹은 시끄럽게 떠드는 말소리와 음악소리가 들리기도 하며 네모진 돌이 서로 이어져 놓여 있다. 여기는 바로 옛날 부처님께서 게송의 나머지 반을 듣기 위하여 몸을 버리려고 했던 곳이다. 성 남쪽의 2백여 리 되는 곳의 큰 산 곁에는 마하벌나사(摩訶伐那寺)[우리나라 말로는 큰 숲이다]가 있다. 부처님께서 옛날 살박달라왕(薩縛達羅王)[곧 일체시(一切施)이다]이 되어 나라를 잃고 피난하였던 땅으로 한 가난한 사람을 위하여 포박당하여 보내졌던 곳이다. 사찰의 서북쪽으로 산을 내려와 40여 리를 가면 절의 탑이 있는데 높이가 백여 척이나 된다. 그 곁의 네모진 돌 위에는 부처님 발자국 모양이 있어 광명을 뿜어 절을 비추니 하늘들을 위하여 본생(本生)을 말씀하셨던 곳이며, 탑 아래의 돌에는 황백(黃白)색의 진액이 묻어 있는데 여기는 옛날 부처님께서 법을 듣기 위하여 뼈를 끊고 경전을 베꼈던 처소이다. 또 서쪽으로 70리를 가면 탑이 있는데 여기는 옛날 부처님께서 시비가왕(尸毘迦王)[여기의 말로는 가마[輿]이다]때 몸을 베어 비둘기의 목숨을 대신했던 곳이다. 또 서쪽으로 2백여 리 가서 산니라암천(珊尼羅闇川)의 살부살(薩裒殺)[뱀의 약[蛇藥]을 말한다] 땅에 있는 사찰의 탑은 높이가 80척이다. 부처님께서 옛날 제석(帝釋)이셨을 때 큰 이무기로 쓰러져 죽어서 가난하고 전염병이 든 이들에게 보시했던 처소이다. 그 곁의 소마탑(蘇摩塔)은 부처님께서 변화로 소마사(蘇摩蛇)가 되어 그것을 먹은 사람들의 병을 낫게 한 처소이며 시냇가의 북쪽 절벽의 탑(塔)은 병든 이가 와서 기하면 거의 낫는다고 한다. 또 곁에서 솟아나오는 샘물은 부처님께서 옛날 공작왕(孔雀王)이었을 때 부리로 쪼아 내어 질병을 구했던 곳이다. 성의 서남쪽으로 70리 떨어져 있는 대하(大河)의 동쪽에 탑이 있는데 높이가 60척이나 된다. 이것은 온달라서나(嗢呾羅犀那)[상군(上君)이라는 말이다]왕이 조성하였다. 부처님께서는 사리(舍利)를 왕에게 나누어 주어 강가에 탑을 세우게 하였는데 왕이 흰 코끼리르 타고 돌아갈 때에 코끼리가 변하여 돌이 되었다고 한다. 성의 서쪽으로 50여 리를 가서 대하(大河)를 건너면 노혜달가탑(魯醯呾迦塔)[붉다는 뜻이다]이 있는데 높이는 50여 척이다. 부처님께서 옛날 자력왕(慈力王)이었을 때 찔러서 피를 내어 다섯 약차(藥叉)에게 마시게 했던 곳이다. 성의 동쪽으로 30리 되는 곳에 알부다(遏部多)[기특(奇特)하다는 말이다]라는 석탑(石塔)이 있는데 높이가 40척이나 된다. 부처님께서 사람과 하늘들을 위하여 설법하실 때에 탑이 땅에서 솟아 나왔는데 현재까지 남아 있다. 또 서쪽으로 대하(大河)를 건너 40리를 가면 정사(精舍)가 있고 아박려지저(阿縛慮枳抵)[관(觀)이라는 말이다]ㆍ이습벌라(伊濕伐羅)[자재(自在)라는 말이다]ㆍ보살상(菩薩像)[곧 관세음(觀世音)이다]이 있는데 감응과 영험으로 멀리까지 비추었다. 여기서 서쪽으로 1백4십 리가 되는 산 고개에는 용의 연못이 있고 둘레는 30여 리이며 왕성의 동북쪽으로 산골짜기를 넘어 위로 거슬러 올라가면 신도하(信渡河)인데 길이 몹시 험하여 매우 놓은 것을 잡고 잔교(棧橋)를 건너며 쇠사슬을 걸치고 말뚝을 박으면서 비탈을 밟고 올라가야 한다. 그리고 천여 리를 가면 달려라천(達麗羅川)에 이르는데 오장나(烏仗那)가 옛날 도읍했던 곳이다. 큰 절 안에는 나무로 조각한 매달려야(梅呾麗耶)[옛날에는 미륵(彌勒)이라 하고 당나라 말로는 자씨(慈氏)이다] 보살의 상(像)이 있으며 금빛이 번쩍거리며 높이는 백여 척이나 된다. 말전지가(末田底迦)[곧 말전지(末田地)이다] 아라한이 조성하였는데 신통력으로 공장(工匠)을 이끌고 도사다천(覩史多天)[곧 도솔천(兜率天)이다]을 세 번이나 올라가 상호를 자세히 살펴보았기 때문에 이렇게 잘 조성하였다고 한다. 이 상이 생긴 뒤로부터 법이 바야흐로 동방(東方)에 유포되었다. 동쪽으로 가다가 고개를 넘어서 신도하를 거슬러 험한 잔교를 밟고 5백여 리를 가야 이 강물을 다 건넌다. 또 동쪽으로 박추하(縛蒭河)를 건너 위험한 곳을 오르면 발로라국(鉢露羅國)에 이른다. 둘레는 4천 리요 큰 설산 가운데 있으며 동서로 길다. 사찰은 수백군데요 승려도 수천이며, 스승에게 계행(戒行)을 배우지만 대개가 함부로 행한다. 그 나라는 인도가 총괄하는 곳이 아니며 얼음과 눈이 많고 토지에는 금이 나오는데 불빛[火色]과 같다. 북쪽으로는 바라서라(婆羅犀羅)라는 큰 고개와 마주하고 있고 다시 돌아서 건타라국(健馱邏國)과 오탁가성(烏鐸迦城)의 남쪽으로부터 신도하를 건너게 되는데 넓이가 4리쯤 되는 거울과 같이 맑은 물이 서남쪽으로 흐른다. 독룡(毒龍)과 나쁜 짐승들이 굴 안에 살고 있으며 사리보화(舍利寶花)를 가진 사람은 누구나 배[船]가 침목한다고 한다. 강을 건너면 달차시라국(呾叉始羅國)[북인도(北印度)이다]에 이른다. 둘레는 2천여 리요 도성(都城)의 둘레는 10여 리이며 사찰은 많으나 승려는 적고 다 같이 대승을 배우는 이들이다. 성의 서북쪽으로 70여 리 되는 곳에 이라발용(伊羅鉢龍)의 연못이 있어 둘레는 백여 보(步) 된다. 못의 동남쪽으로 30리쯤 가면 양쪽 산 사이에 탑이 있어 높이는 백여 척이 된다. 옛날 부처님께서 자씨(慈氏)가 세간에 출현하면 4대장(大藏) 중 한 장(藏)이 이 땅에서 나오게 되기 때문에 진동이 있을 것이라고 수기(授記)하셨는데 이 둘레는 백 보(步)로 일찍이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으며 어떤 이라도 발굴하려고 들면 땅이 진동하여 사람이 쓰러져 죽는다고 한다. 성 북쪽으로 12리 되는 곳의 탑은 재일(齋日)이면 언제나 신령한 광명을 놓으며 신선이 꽃을 뿌리고 하늘의 음악이 울린다고 한다. 요즘에 어떤 나환자(癩患者)가 탑에 예배하고 참회를 드리면서 더러운 때를 닦고 향을 발랐더니 얼마 있지 않아 곧 나았으며 몸도 향기롭고 깨끗해졌다. 옛날 부처님께서 전달라발랄바왕(戰達羅鉢剌婆王)[월광(月光)이라 한다]이셨을 때 머리를 보시했던 곳으로 모두 천 년 동안 보시했다고 하며 그 탑의 이름은 월광탑(月光塔)이다. 성의 동쪽 남산(南山)에 있는 탑은 높이가 10장(丈)쯤 되며 결목왕(決目王)이 터를 닦고 아육왕(阿育王)이 조성하였다. 또 동남쪽으로 산골짜기를 넘어 7백여 리를 가면 승가보라국(僧伽補羅國)[북인도이다]에 이른다. 둘레는 3천5백 리요 서쪽은 신도하(信渡河)에 임해 있으며 큰 성의 둘레는 14ㆍ15리쯤 된다. 성의 동쪽 50리 되는 곳에 석탑(石塔)이 있는데 높이는 20여 장(丈)으로 부처님께서 노닐던 곳이며 연못과 늪이 10여 개나 되어 그 안의 사방은 온통 연꽃으로 뒤덮여 있다. 여기에서 남쪽으로 돌아가면 달차시라국(呾叉始羅國)의 북쪽 국경에 이르며 신도하를 건너 동쪽으로 2백여 리를 가서 큰 돌문을 거너면 바로 마하살타(摩訶薩埵)왕자가 몸을 버리어 호랑이 밥이 된 곳이 나온다. 동쪽으로는 사찰이 있고 승려는 백여 명이 된다. 또 남쪽으로 1백5십 리 떨어져 있는 석탑은 살타께서 대나무를 가지고 자기 몸을 찔러서 피를 내어 짐승에게 먹였던 곳이다. 땅과 초목이 지금까지도 진홍색이다. 다음 북쪽 석탑은 높이가 20여 장(丈)으로 광명을 뿜어 신심을 일깨워 주며 병든 자가 귀의하면 거의 나았다. 또 동쪽으로 50여 리 가면 홀로 떨어져 있는 산에 사찰의 탑이 있는데 높이는 2백여 척이다. 승려의 무리는 2백 명이며 모두 대승을 배우고 있다. 부처님께서 옛날 약차(藥叉)에게 고기를 먹지 않도록 교화한 곳이다. 또 동남쪽의 산으로 5백여 리를 가면 오자시국(烏刺尸國)[북인도이다]에 이른다. 둘레는 2천여 리가 되고 토산(土山)이 서로 이어져 있으며 도성의 둘레는 18리이다. 부처님 법을 믿지 않으며 가습미라(迦濕彌羅)왕국에 속한다. 부처님탑이 있는데 높이는 20여 장(丈)이며 아육왕이 조성하였다. 사찰은 있지만 승려는 적으며 대승의 가르침을 배우고 있다. 또 동남쪽으로 산을 올라 철교(鐵橋)를 지나 천여 리 가면 가습미라국(迦濕彌羅國)[북인도이며 옛날은 계빈(罽賓)이라 하였다]에 이른다. 둘레는 7천 리요 사면이 산으로 되어 있으며 비록 문이 있다고 해도 길이 좁아서 교통하기에 나쁘다. 성의 서쪽은 대하(大河)에 임해 있고 길이는 13리이며 넓이는 4리쯤 된다. 사찰은 백여 군데요 승려는 5천여 명이며 토지에서는 용종마(龍種馬)와 울금(鬱金)과 화주(火珠)가 나왔다. 네 곳에 부도(浮圖)가 있는데 각각 사리(舍利)가 한 되 남짓씩 있으며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 4백 년이 되어 협존자(脅尊者)가 나이 80에야 비로소 출가하여 무학(無學)을 증득한 뒤 5백 명의 아라한들을 데리고 이 곳에 와서 10만의 게송[頌]으로 『오파제삭석(鄔波弟鑠釋)』과 『소달람장(素呾纜藏)』[곧 우바제사론(優婆提舍論)ㆍ수다라장(修多羅藏)의 다른 이름이다]을 지었고 다음에는 10만의 게송으로 『비나야비바사론(毘奈耶毘婆沙論)』을 지었으며 다음에는 10만의 게송으로 『아비건마론(阿毘建摩論)』을 지었으니 무릇 6백60만의 단어로써 삼장을 갖추어 해석하였다. 신성(新城)의 동남쪽으로 10여 리에 있는 옛 성의 북쪽에는 대산양사(大山陽寺)의 탑이 있고 승려의 무리가 3백 명이며 길이 1촌 반이 되느 부처님의 어금니는 빛깔이 황백(黃白)색인데 재일(齋日)마다 광명을 뿜는다. 또 남쪽으로 15리 되는 곳에는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의 입상(立像)이 있는데 어떤 이라도 뵙기를 원하여 단식(斷食)을 하면 곧 뵙게 된다. 왕성(王城)의 서북쪽으로 2백여 리 가면 상림사(商林寺)에 이른다. 성의 서쪽으로 5백10리에 있는 대하(大河)는 북쪽으로 산에 맞닿아 있는데 절이 있고 승려는 백여 인이다. 이로부터 서남쪽으로 산을 넘어 7백여 리를 가면 반노차국(半笯蹉國)[북인도이며 계빈(罽賓)에 속한다]에 이른다. 둘레가 2천여 리요 절은 다섯 군데 있으며 산과 하천이 많다. 동남쪽으로 4백여 리 가면 알라사보라국(遏羅闍補羅國)[정식의 북인도는 아니며 바로 황복국(荒服國)이다]에 이른다. 둘레는 4천여 리요 도성의 둘레는 천여 리이며 사찰은 열 군데요 승려는 아주 적으며 천사(天祠)는 한 군데인데도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 남파달(濫波達)부터는 형체가 더럽고 경박하며 인도의 정식 국경이 아니다. 여기에서 산을 내려가 동남쪽으로 가면 다 같이 큰 시내들이며 먼 곳까지 이르러도 밭두둑이 없고 오직 하천(河川)으로 나라의 경계를 나누어 있을 뿐이다. 비록 작은 산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은 모두 외로이 서있다. 이로부터 북쪽으로는 전체가 설산과 이어져 있고 동쪽으로 가면 신주(神州)에 이르며 양부(涼部)로부터 남쪽은 모두가 설산이다. 이 산을 상고하건대 역시 섬부(贍部)가 크게 땅을 누르는 것일 것이다. 이 성(城)에서 동남쪽으로 편편한 곳을 내려가 물을 건너고 7백여 리를 가면 책가국(磔迦國)[북인도이다]에 이른다. 둘레는 1만여 리요 동쪽은 비파사하(毘播奢河)를 의지하며 서쪽은 신도하(信渡河)에 임해 있다. 도성의 둘레는 20여 리요 세속에서 부처님을 믿는 이들은 적고 천신(天神)을 많이 섬기므로 사찰은 10여 군데가 있을 뿐이나, 천사는 수백 군데나 된다. 성에서 서남쪽으로 15리 되는 곳에 있는 사갈라(奢羯羅)의 옛 성(城)에는 절의 탑이 있고 높이는 20여 장(丈)인데 옛날 네 부처님께서 설법하시고 오가며 거니시던 곳이다. 또 서북쪽으로 6리쯤 되는 곳에 탑이 있는데 높이는 20여 장이며 역시 네 분의 부처님께서 설법하셨던 곳이다. 새 도성(都城)의 동북쪽으로 10여 리 되는 곳에 있는 석탑은 높이가 20여 장이며 사리가 많이 있고 재일에는 광명을 뿜는다. 동쪽으로 5백여 리 가면 나복지국(那僕之國)[북인도이다]에 이른다. 둘레는 2천여 리요 도성의 둘레는 14ㆍ15리쯤 되며 사찰은 열 군데이고 천사는 여덟 군데이다. 성의 동남쪽으로 5백여 리 가면 사림사(闍林寺)에 이르고 둘레는 20여 리이며 부처님의 사리탑(舍利塔) 수효는 백 또는 천 구(區)이다. 아울러 석실(石室) 등이 있고 승려는 3백 명이 있으며 소승의 설유부(說有部)를 배운다. 덕행은 맑고 높되 학문에 박식(博識)한 이는 적다. 현겁(賢劫)의 천불(千佛)이 다 같이 여기서 설법하시게 된다. 석가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의 3백 년이 되는 때에 가다연나(迦多衍那)[가전연(迦栴延)이다]가 여기서 『발지론(發智論)』을 지었으며 절의 탑 높이는 20여 장(丈)이요 네 분의 부처님께서 다니고 앉았던 흔적이 있는 곳이다. 이로부터 동쪽으로 1백 50리를 가면 사란달나국(闍爛達那國)[북인도이다]에 이른다. 동서로 천여 리요 남북으로 6백여 리이며 도성의 둘레는 10여 리이다. 사찰은 50군데 있고 승려는 2천여 명이며 대승ㆍ소승을 다 닦았다. 천사는 세 군데이고 외도(外道)들은 5백 인이다. 동북쪽으로 산을 넘어서 7백여 리를 가면 굴로다라국(屈露多羅國)[북인도이다]에 이른다. 산이 사방으로 둘러싸여 있고 도성의 둘레는 14ㆍ15리이며 사찰은 20여 군데에 있고 승려는 1천여 명이며 대부분이 대승을 배운다. 천사는 15군데 있고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뒤섞여 살고 있다. 화주(火珠)와 우석(雨石)이 나오고 세속에서는 혹[癭]이 나고 또한 수중다리[尰]를 앓는 이가 많았다. 성안에 탑기(塔記)가 있었는데 부처님께서 일찍이 여기에 노니시면서 설법하셨다고 한다. 이로부터 북쪽으로 약 2천여 리를 가면 산길이 위험한 곳에 낙호라국(洛護羅國)[북인도이다]이 있다. 또 북쪽의 산으로 2천여 리를 가면 눈이 내리고 추위가 아주 심하며 말라사국(秣邏娑國)[북인도이다]에 도달한다. 또 굴로라(屈露羅)로부터 남쪽으로 7백여 리를 가서 산제하(山濟河)를 건너면 설다도로국(說多圖盧國)[북인도이다]에 이른다. 둘레는 2천여 리요 서쪽으로는 대하(大河)에 임하며 도성은 17ㆍ18리이다. 불법이 크게 성행한데도 성 안팎에 있는 사찰을 10여 군데요 승려도 역시 적을 뿐이다. 성의 동쪽으로 3리를 가면 탑의 높이가 20여 장(丈)이며 아육왕이 조성하였다. 곁에는 네 분의 부처님께서 다니시고 앉았던 흔적이 있다. 이로부터 서남쪽으로 8백여 리를 가면 파리야달라국(波狸夜呾羅國)[중인도(中印度)에 속한다]에 이른다. 둘레는 3천여 리 되고 도성의 둘레는 15리이며 사찰은 여덟 군데 있고 승려도 역시 적을 뿐이며 세속에서는 외도(外道)를 믿어서 열 군데의 천사에 이교도들이 천여 명이나 있다. 땅에는 벼농사를 지어 60일 만에 수확한다. 동쪽으로 5백여 리를 가면 말토라국(秣菟羅國)[중인도이며 옛날의 마투라(摩偸羅)이다]에 이른다. 둘레는 5천여 리요 도성은 20여 리이며 사찰은 20여 군데 있고 승려는 2천여 명이며 대승과 소승을 다 배운다. 천사는 다섯 군데이며 이교도들이 뒤섞여 살고 있다. 토지에는 암몰라과(菴沒羅果)를 심는데 작은 것은 날것일 때는 푸르다가 익으면 노랗게 되었고 큰 것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청색이다. 성 안에는 세 개의 탑과 네 부처님의 남은 흔적이 아주 많다. 그리고 사리자(舍利子)와 몰특가라자(沒特伽羅子)[목건련(目乾連)이라 이름한다]와 만자자(滿慈子)[부루나(富婁那)이다]와 우파리(優婆釐)[우바리(優波離)이다]와 아난타(阿難陀)와 라호라(羅怙羅)와 만수실리(曼殊室利) 등의 탑이 모두 있다. 매양 삼장(三長) 6월에는 모든 승니(僧尼)들이 모이는데 아비달마(阿毘達磨) 대중은 사리불의 탑에 공양하고 선정[定]을 익힌 대중들은 목건련의 탑에 공양하며 경을 독송하는 대중은 만자자의 탑에 공양하고 비나야(毘奈耶)의 대중은 우파리의 탑에 공양하며 비구니 대중은 아난의 탑에 공양하고 구족계를 받지 않을 대중은 나호라의 탑에 공양하며 대승(大乘)의 대중은 모든 보살의 탑에 고양하였다. 이 모든 탑을 살펴서 헤아리건대 반드시 유골이 있는 것은 아니며 다만 상(像)만을 세워 공양을 시설하면서 그로써 마음을 바치려고 조성했을 뿐이니 마치 라호라나 문수(文殊)가 아직 멸도(滅度)하지 않은 것으로도 금방 알 수 있다. 성의 동쪽으로 6리를 가면 산애사(山崖寺)가 있는데 이것은 존자 오파국다(烏波麴多)[근호(近護)라고 한다]가 조성하였으며 부처님의 지조탑(指爪塔)이 있다. 절 북쪽의 바위로 된 암자는 높이가 2장(丈)이요 넓이는 3장인데 4촌(寸) 정도의 가는 산가지가 그곳을 채우고 있다. 요즘 호도(護導) 부부[夫妻]가 함께 아라한을 증득하였으나 산가지 한 개를 보내어 여기에는 어긋났으므로 석실의 기록에는 있지 않았다. 또 석실의 동남쪽으로 20여 리쯤 가서 말라버린 큰 못 곁에 탑이 있느데 부처님께서 일찍이 여기에서 노니실 때에 어떤 원숭이가 꿀을 가져다 부처님께 드렸는데 부처님께서 물을 타서 온 대중이 함께 마시게 하자 원숭이는 기뻐하다가 구덩이에 빠져 죽어 곧 인간세상에 태어났다고 한다. 못의 북쪽의 숲 속은 네 부처님께서 오가며 다니시던 곳으로 커다란 유적(遺迹)이 있다. 또 동북쪽으로 5백여 리를 가면 살타니습벌라국(薩埵泥濕伐羅國)[중인도이다]에 이른다. 둘레는 7천여 리요 도성의 둘레는 20여 리이며 사찰은 세 군데가 있고 승려는 7백 명인데 모두 소승을 배운다. 천사는 백여 군데나 되고 이교도들이 아주 많다. 성의 서북쪽으로 4리쯤 되는 곳의 탑은 높이가 20여 장(丈)으로 사리는 한 되가 있으며 때로 큰 광명을 뿜었다. 그리고 성의 남쪽으로 백여 리를 가면 불사(佛寺)에 이른다. 또 동북쪽으로 4백여 리를 가면 솔록륵나국(窣祿勒那國)[중인도이다]에 이른다. 둘레는 6천여 리이고 조금 황폐해졌다. 동쪽의 국경은 긍가하(殑伽河)[곧 옛날의 항하(恒河)이다]에 임하고 북쪽은 큰 산성(山城)에 접하였으며 동남쪽은 염모나하(閻牟挪河)인데 나라의 서북쪽 산에서부터 중앙의 국경으로 나와 흐른다. 도성의 둘레는 20여 리요 동쪽은 염모하(閻牟河)에 임하였으며 사찰은 다섯 군데 있고 승려는 천여 명인데 대부분 소승을 배우고 있다. 천사는 백여 군데인데 이교도들이 매우 많다. 염모하의 서쪽에 있는 큰 절과 동쪽 문 밖에 있는 탑은 부처님께서 일찍이 설법하고 사람들을 제도하신 곳이며 그 옆에는 부처님의 머리카락과 손톱을 모신 탑이 있다. 염모하의 동쪽으로 8백여 리를 가면 긍가강의 근원이 된다. 넓이는 3ㆍ4리며 동남쪽에서 바다로 들어가는 데 넓이는 10여 리가 된다. 물빛은 푸르며 맛은 달고, 모래는 가늘며 물을 따라서 흘러간다. 세속에서는 복스러운 물로 여겨 목욕을 하게 되면 죄가 없어진다고 생각한다. 어떤 이는 목숨을 가볍게 여겨 스스로 물에 빠져 죽어 천상에 태어나서 쾌락을 얻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승가라국(僧伽羅國)의 제바보살(提婆菩薩)이 외도들을 교화하여 바른 법(法)을 받도록 한 곳이다. 긍가하를 건너 동쪽으로 가면 말지보라국(秣底補羅國)[중인도이다]에 이른다. 둘레는 6천여 리요 도성의 둘레는 20여 리이며 부처님을 믿지 않고 하늘을 공경한다. 사찰은 10여 군데 있고 승려는 8백 명이며 대부분 소승을 배우는 이들이다. 천사는 50여 군데나 있고 이교도들끼리 뒤섞여 산다. 나라의 서북쪽의 국경이며 긍가하의 동쪽 언덕에 있는 마유라성(摩裕羅城)의 둘레는 20여 리이며 유석(鍮石)과 수정(水精)이 나온다. 성 옆은 큰 강에 임하여 있고 큰 천사(天祠)가 있어서 위엄 있는 영험이 많이 있다. 못이 있었는데 돌을 쌓아서 언덕이 되었고 강물을 끌어서 갯벌을 만들었다. 5인도(印度)에서는 긍가하의 문(門)을 복이 생기고 죄가 소멸하는 곳으로 여기므로 언제나 백천(百千)의 사람들이 목욕을 한다. 마유(摩裕)로부터 북쪽으로 3백 리를 가면 바라흡마보라국(婆羅吸摩補羅國)[북인도이다]에 이른다. 둘레는 4천여 리가 되고 산이 사방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도성의 두레는 20여 리이다. 사찰은 다섯 군데요 승려는 적으며 천사는 열 군데이고 이교도들이 뒤섞여 살고 있다. 나라의 북쪽은 대설산(大雪山)이며 소벌라나구달라국(蘇伐剌那瞿呾羅國)[금씨(金氏)라고 말한다]이 있다. 아주 좋은 품질의 황금(黃金)이 나오고 동서로 길며 바로 동녀국(東女國)으로서 인도에 속한 곳이 아니다. 또는 대양동국(大羊同國)이라고 한다. 동쪽은 토번(土蕃)에 접하고 서쪽은 삼파하(三波訶)에 접하며 북쪽은 우전(于闐)에 접하여 있는데 이 나라는 대대로 여인을 왕으로 삼고 있으며 그 남편도 역시 와이 되기는 하지만 나라의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남자들은 정벌(征伐)을 나가고 농사를 짓고 있을 뿐이다. 또 말지보라국(秣底補羅國)으로부터 동남쪽으로 4백여 리를 가면 구비상나국(瞿毘霜那國)[중인도(中印度)이다]에 이른다. 둘레는 2천여 리요 도성(都城)은 14ㆍ15리이며 사찰은 두 군데 있고 승려는 1백여 명이며 소승을 익히고 있다. 천사는 30여 군데나 되고 이교도들이 섞여 살고 있으며 성은 견고하고 험준하다. 그 곁에 있는 옛 절의 탑은 높이가 20여 장(丈)인데 일찍이 부처님께서 이곳에서 한 달 동안 설법하셨다. 머리카락과 손톱이 있는 두 탑의 높이는 각각 한 길[丈] 남짓하며 곁에는 네 부처님께서 앉으셨던 흔적이 있다. 또 동남쪽으로 4백여 리를 가면 악혜제달라국(堊醯掣呾邏國)[중인도이다]에 이른다. 둘레는 3천여 리요 도성의 둘레는 17ㆍ18리쯤 되며 사찰은 10여 군데 있고 승려는 1천여 명이 있으며 소승의 정량부(正量部)를 익히고 있다. 천사는 아홉 군데 있고 외도(外道)는 3백여 명이나 되며 성(城)은 험준하고 견고한 데에 의지하고 있다. 그 바깥의 못 곁은 부처님께서 용을 위하여 7일 동안 설법하신 곳이다. 탑이 세워진 곁에는 네 부처님께서 다니고 앉으셨던 자취가 있는데 탑을 세워 그것을 표시하고 있다. 또 남쪽으로 2백70리를 가서 긍가하를 건너고 서남쪽으로 들어오면 비라산나국(毘羅珊拏國)[중인도이다]에 이른다. 두레는 2천여 리요 도성의 둘레는 10여리로 외도를 믿고 불법을 공경하는 이들은 적다. 사찰은 두 군데 있고 승려의 무리는 3백여 명이며 모두 대승을 배우고 있다. 천사(天祠)는 다섯 군데 있다. 성 안에 있는 절의 탑은 높이가 10여 장이나 되는데 부처님께서 일찍이 여기서 7일 동안 온(蘊)ㆍ계(界)의 법을 말씀하셨으며 네 부처님께서 다니고 앉으셨던 유적(遺迹)이 아직 남아 있다. 동쪽으로 2백여 리를 가면 겁비타국(劫比他國)[중인도이며 옛날의 승가사(僧伽舍)이다]에 이른다. 둘레는 2천여 리요 도성의 둘레는 20여 리이며 사찰은 네 군데 있고 승려는 1천여 인이 된다. 천사는 열 군데이고 다 같이 대자재천(大自在天)을 섬기면서 모두 천상(天像)을 만드는데 그 형상에서 사람의 남근을 아주 길고 크게 만들었다. 속인들은 그것을 나쁘게 여기지 않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모든 중생들은 하늘의 남근으로 생겨났다.” 성의 동쪽으로 20여 리 떨어진 큰 절 안에는 승려가 수백 인이고 정인(淨人)이 수만 명이었는데 모두가 집을 절 곁에 두고 있다. 큰 담 안에는 하늘 제석(帝釋)이 만든 세 개의 보배 계단이 있는데 가운데 계단은 황금으로 만들고 왼쪽 계단은 수정(水精)으로 만들며 오른쪽 계단은 백은(白銀)으로 만들었다. 남쪽에서 북쪽까지 줄을 지어 놓았고 동쪽으로 닿는 것은 땅 아래에 놓아 두었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서다림(逝多林)[곧 기타림(祇阤林)이다]으로부터 하늘의 선법당(善法堂)으로 올라가시어 어머니를 위하여 세 달 동안 설법하시다가 내려오신 곳이다. 백 년 전만 하여도 계단이 남아 있었다는데 지금은 모두 없어져 버렸다. 뒷날에 왕이 그것을 본받아 높이 70여 척으로 만들어 그 위에 정사(精舍)를 세웠다. 그 곁에는 돌기둥이 있어 빛이 반짝거리는데 사람의 죄와 복에 따라서 그림자가 기둥 가운데서 나온다고 하였다. 섬돌 곁에 아육왕이 조성한 부도(浮圖)가 있고 네 부처님께서 다니고 앉으셨던 흔적도 있다. 부처님께서 씻고 목욕하셨던 곳에 탑을 세웠는데 거기에는 부처님께서 방으로 사용하시던 정사(精舍)가 있다. 또 그 곁에는 부처님께서 오가며 다니셨던 돌의 흠집이 있고 길이는 50보(步)이며 높이는 7척이나 된다. 발로 밟으셨던 곳에는 모두 연꽃 무늬가 있고 그 좌우의 작은 탑은 범왕(梵王)이 조성하였다. 그 중 앞의 것은 바로 연화비구니[蓮華尼]가 변화로 전륜왕(轉輪王)이 되어 먼저 부처님을 뵈었던 곳인데 부처님께서는 비구니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먼저가 아니니라. 소부지(蘇部底)[수보리(須菩提)이다]가 석실(石室)에 좌선[宴坐]하고 있으면서 모든 법이 공(空)한 것을 알고 나의 법신(法身)을 보았느니라.” 다음 동남쪽의 못에는 용이 살고 있는데 항상 성인의 유적을 지키고 있으므로 가볍게 범할 수 없다고 한다. 여기에서 서북쪽으로 2백 리를 좀 못 가면 갈야국사국(羯若鞠闍鞠)[중인도의 곡녀성(曲女城)이다]에 이른다. 둘레는 4천여 리요 도성의 서쪽은 긍가하와 가까운데 길이는 20여 리나 되고 넓이는 4ㆍ5리쯤 된다. 사도(邪道)와 정도(正導)를 믿는 이가 반반인데 사찰은 백여 군데요 승려의 무리는 만 명이나 되며 대승ㆍ소승을 겸하여 배우고 있다. 천사는 2백여 군데나 되고 이교도들은 수천 명이 있다. 5인도(印度)를 거느리는 도왕(都王)의 이름은 바로 시라일다(尸羅逸多)[계일(戒日)을 말한다]요, 폐사(吠奢)가 성(姓)이다. 처음 왕위에 등극하려 할 적에 긍가(殑伽)의 언덕에 있는 관자재상(觀自在像)이 그에게 청하였다. “그대는 본래 이 숲에 있던 난야(蘭若)의 비구였습니다. 금이(金耳)의 월왕(月王)은 이미 불법을 멸망시켰으나 왕은 마땅히 거듭 부흥시켜야 합니다. 만물을 가엾게 여기는 생각을 품어야 비로소 다섯 나라의 왕노릇을 하리니 부디 사자좌(師子座)에 오르거나 대왕(大王)이란 호칭을 쓰지 마십시오.” 왕은 이에 동자왕(童子王)과 함께 외도와 월왕(月王)의 무리들을 평정하였으며 또 엄격한 법령을 다음과 같이 제정하였다‘ “고기를 먹는 사람은 혀를 자를 것이오. 살생을 하는 사람은 손을 벨 것이다.” 그리고는 과부(寡婦)가 된 누이동생과 함께 나라의 일을 맡아보았다. 긍가하 곁에 1천(千)의 부도(浮圖)를 세우니 각각의 높이는 백여 척이었고, 도시나 시골의 길거리에까지 정사(精舍)를 세웠으며 음식을 저장하고 의약(醫藥)을 충분히 준비해 두어 자유가 없고 가난한 이들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성인의 유적이 있는 곳에는 모두 절을 세웠고 20년 동안 5년에 한 번씩 집회를 열었으며 마을의 창고를 기울여 뭇 백성들을 구제하였고 병기(兵器)는 마련해 두되 다만 뜻밖에 일어날 일을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처음 집회를 연 날에는 모드 나라의 승려를 모아서 21일 동안 네 가지의 일[四事]로 공양하였고 서로 논의하여 계행(戒行)이 곧고 견고하며 도덕(道德)이 뛰어난 이를 사자좌(師子座)에 오르게 하였다. 왕은 그에게 계(戒)를 받았으며 청정한 무학(無學)에게는 숭앙하는 마음을 나타내었고 더러운 행동이 드러난 이는 나라의 영토 밖으로 쫓아버렸으며 왕의 신하로서 복을 심는 데 게으르지 않는 이들은 누구나 손을 이끌어 같이 앉았거니와 이와 다른 이들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왕은 돌아다니면서 지방의 풍속을 살피느라 언제나 가만히 앉아 있지 않았다. 다닐 때에는 반드시 4병(兵)이 엄중하게 수행하였고 배를 띄우고 코끼리를 타며 북을 치고 소라를 불면서 상군(象軍) 8만으로 사방의 먼 곳까지 위세를 떨쳤다. 오직 두 세 달 동안은 밖으로 돌아다니지 않고 궁중에서 매일 모든 사문들에게 공양을 대접하였으니 승려는 1천여 명이었고 바라문은 5백 명이었다. 하루는 세 때[三時]로 나누어서 한 때는 나라의 일을 처리하고 두 때는 복을 빌었으며 또한 고기를 먹지 않았고 날마다 한 번씩 규정을 두어 예배드렸다. 하서사(河西寺)의 동쪽에 보대(寶臺)를 세웠는데 높이는 백여 척으로 그 안에 등신(等身)의 금상(金像)이 있다. 다음 남쪽에 세운 보단(寶壇)은 불상(佛像)을 목욕시키는 곳이었다. 여기에서 동북쪽으로 15리쯤 되는 곳에 따로 행궁(行宮)을 지었고 사찰에서 궁중에 이르는 좁은 길에는 누각을 세워 갖가지 장식을 다하였으며 악기를 연주하는 이들을 옮기지 않고 번갈아 연주하게 하였다. 또 3척의 금상(金像)을 남들이 보지 못하게 큰 코끼리에다 싣고 그 위에 보배 휘장을 쳤다. 왕은 제석상(帝釋像)을 만들어 보배 일산을 들고 왼편에서 모시게 하였고 가마루파국(迦摩鏤波鞠)의 구마라왕(拘摩羅王)[동자(童子)라고 말한다]은 범왕상(梵王像)을 만들어 불자(拂子)를 들고 오른편에서 모시게 하였으며 각각 5백의 상군에게 갑옷을 입히어 함께 호위하게 하고 앞뒤로 각각 백 마리의 큰 코끼리들이 따랐고 그 위에 탄 악인(樂人)들이 북을 치고 연주하며 소리를 내었다. 계일왕(戒日王)은 또 진주(眞珠) 등의 여러 가지 보배와 금ㆍ은으로 된 모든 꽃을 나가면서 계속 사방에 뿌리어 3보(寶)에게 공양하였다. 5인도에는 비구니 사찰이 드물며 비록 비구니가 있다 하더라도 비구승들과 같은 문중이라 밥을 같은 장소에서 먹으나 계율에 어그러짐이 없었다. 그리고 동자왕(童子王)은 찰제리(刹帝利)의 종성(種姓)으로 사인(使人) 이의표(李義表)에게 말하였다. “윗 대(代)로부터 서로 이어 내려온 지 4천 년이 되는데 앞서의 신령한 성왕(聖王)은 한(漢)나라 땅에서 날아 오셨다고 합니다.” 왕의 국토에서 성(城)의 서북쪽에 있는 탑은 아육왕이 조성하였는데 옛날 부처님께서 여기에서 7일 동안 설법하셨다고 하며 그 곁에는 머리카락과 손톱을 모신 탑이 있고 네 분의 부처님께서 다니고 앉으셨던 흔적이 있다. 또 남쪽으로 긍가하에 임해 있는 세 사찰은 담은 같으나 문이 다르며 불상은 엄숙하면서도 화려하다. 부처님의 어금니는 길이가 1촌 반이고 빛깔이 변할까 염려하여 보배 함에 담아 두었는데 멀고 가까운 곳에서 보려고 오는 이가 하루에도 백천이나 되었다. 지키는 이가 번거롭게 여겨 막중한 세금으로 보배를 요구하였으나 즐겁게 예배하려는 이들은 귀중한 재화(財貨)도 사양하지 않았다. 재일(齋日)에는 꺼내어 높은 자리 위에 안치하였는데 뿌린 꽃이 비록 쌓이게 되어도 어금니를 모신 함은 묻히지 않았었다. 절의 승려들은 청정하면서 엄숙하였고 사원의 노복들[淨人]은 수천 호(戶)였다. 절 앞과 좌우의 정사(精舍)는 높이가 백여 척이나 되었고 돌로 기초를 쌓고 벽돌로 된 방안의 상(像)은 보배로 장엄하거나 혹은 순수한 금과 은으로 만들기도 하였다. 다음 동남쪽의 큰 정사에 있는 돌로 기초를 쌓고 벽돌로 만든 방은 높이가 20여 장(丈)이나 되었는데 여기는 부처님께서 몸은 영원하지 않고[無常] 괴로우며[苦] 공(空)하고 깨끗하지 않다[不淨]고 설법하셨던 곳이며 또 네 부처님께서 다니고 앉으셨던 흔적이 남아 있다. 성의 동남쪽으로 6ㆍ7리를 가면 긍가하의 남쪽 강가가 나오고 위의 성에서 동남쪽으로 백여 리를 가면 납박제바성(納縛提婆城)이 있는데 긍가하의 동쪽 강가에 의지하여 있다. 세 절이 담은 같이 하였으나 문이 달랐으며 둘레는 20여 리요 다음으로 2백여 보(步) 앞에 있는 탑은 높이가 20여 장이며 부처님께서 일찍이 7일 동안 설법한 곳이었다. 그 속에는 사리(舍利)가 있어서 때로 광명을 뿜었고 그 곁에는 네 부처님께서 다니고 앉으셨던 흔적이 남아 있다. 사찰 북쪽으로 4리 되는 곳에 긍가하의 언덕을 마주하고 있는 탑은 높이가 20여 장으로 부처님께서 일찍이 7일 동안 설법하신 곳이며 4백의 아귀(餓鬼)들이 깨달아 천상에 태어났다고 한다. 그 곁에는 머리카락과 손톱을 모신 탑이 있고 그 다음에는 다시 네 부처님께서 다니고 앉으셨던 흔적이 남아 있다. 또 동남쪽으로 6백여 리를 지나 긍가하를 건너고 남쪽으로 가면 아수타국(阿輸阤鞠)[중인도이다]에 이른다. 둘레는 5천여 리요 도성의 둘레는 20여 리이며 절은 1백여 군데 있고 승려는 3천여 명이며 대승ㆍ소승을 겸하여 배웠다. 천사는 열 군데가 있고 이교도들은 적을 뿐이다. 성안의 옛 사찰은 바로 벌소반도(伐蘇畔度)보살[세친(世親)을 말한다]이 수십년 동안에 대ㆍ소승의 논서를 지었던 곳이며 성 북쪽으로 5리 되는 곳에 긍가하의 강가가 있고 큰 절 안의 탑은 높이가 20여 장으로 부처님께서 하늘과 사람들을 위하여 세 달 동안 여기서 설법하셨다. 그 곁에는 탑이 있는데 네 부처님께서 다니고 앉으셨던 흔적이다. 절에서 서쪽으로 5리쯤 떨어져서 부처님의 머리카락과 손톱을 모셔놓은 탑이 있으며 성의 서남쪽으로 대암몰라(大菴沒羅) 숲 속의 옛 절은 바로 아승가보살(阿僧伽菩薩)[무착(無著)을 말한다]이 밤에 천궁(天宮)으로 올라가 자씨(慈氏)의 처소에서 유가(瑜伽)와 장엄(藏嚴)의 『대승경론(大乘經論)』과 『변중변론(辯中邊論)』 등을 받아와서 날이 밝으면 중생들을 위해 설하였으며 숲의 서북쪽으로 백여 보(步) 떨어져서 부처님의 머리카락과 손톱을 모신 탑이 있다. 여기에서 동쪽으로 3백여 리를 지나 긍가하를 건너 북쪽으로 가면 아야목거국(阿耶穆佉鞠)[중인도이다]에 이른다. 둘레는 2천5백 리요 도성은 강에 임하여 있으며 둘레는 20여 리이다. 사찰은 다섯 군데 있고 승려는 1천여 명이며 소승을 익히고 배웠다. 천사는 열 군데요 이교도들이 뒤섞여 살고 있다. 성의 동남쪽은 긍가하와 만나고 탑의 높이는 20여 장(丈)이며 부처님께서 일찍이 세 달 동안 설법하셨던 곳이다. 머리카락과 손톱을 모신 푸른 돌로 된 탑이 있으며 네 부처님께서 다니고 앉으셨던 흔적이 남아 있다. 또 동남쪽으로 7백여 리를 지나 긍가하를 건너 남염모나하(南閻牟那河)의 북쪽으로 가면 발라가야국(鉢羅伽耶鞠)[중인도이다]에 이른다. 둘레는 5천여 리요 도성은 두 하천이 교차하는 곳에 의거하여 있으며 둘레는 20여 리이다. 사찰은 두 군데요 승려들은 적으며 천사는 수백 군데이고 이교도들이 특히 많다. 성의 서남쪽은 염모하(閻牟河)에 임해 있고 강의 구비가 2ㆍ3천 리에 이어져 있으며 동북쪽으로 흐르면서 합쳐진 사이에는 첨박가(瞻博迦) 꽃이 있으며 숲속에 있는 탑은 높이가 10여 장이다. 일찍이 부처님께서 외도를 항복시키셨다. 머리카락과 손톱을 모셔놓은 탑과 오가며 다니신 흔적이 남아 있으며 또 제바보살(提婆菩薩)이 『광백론(廣百論)』을 지은 곳이다. 성 안에 있는 천사(天祠)의 건물 앞의 큰 나무는 가지와 잎이 빽빽이 우거져서 무성한데 식인귀(食人鬼)가 그것에 의지하여 있으며 좌우에는 죽은 사람의 뼈들이 더미를 이루고 있다. 천사 안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목숨을 가벼이 여기지 않는 이가 없으므로 나무에 올라가 아래로 떨어지도록 귀신의 유혹을 받는다. 성 동쪽으로 두 하천의 사이가 교차한 곳은 10여 리나 되며 토지는 편편하면서 시원하게 펼쳐졌고 가는 모래가 가득 깔려 있으며 예전에나 현재의 왕호(王豪)로서 보시를 한 이는 누구나 머물지 않는 이가 없었으므로 크게 보시하는 마당[大施場]이라고 불렀으며 계일대왕(戒日大王)도 역시 여기서 선업[業]을 닦았다. 그 광장의 동쪽으로 강물이 합류(合流)하는 어귀에는 날마다 수백 명이 스스로 빠져 죽었는데 그곳 풍속에 “천상에 나게 되는 곳”이라고 하였다. 어떤 이라도 그러한 법을 행하고자 하면 7일 동안 여기서 먹지 않고 있다가 스스로 중류(中流)에 빠져서 멀거나 가까운 데로 흘러가는 것이며 이에 산의 원숭이나 들의 사슴에 이르기까지 떼를 지어 물가에서 놀며 아무 것도 먹지 않다가 물 속에 빠져 죽었다. 계일왕(戒日王)이 보시를 할 때에는 어느 두 원숭이가 있었는데 암컷이 개에게 물려 죽자 수컷이 그 시체를 업어다 이 강물 속에 던지고 그도 또한 스스로 굶다가 여러 날만에 죽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서남쪽으로 큰 숲과 들판을 지나 5백여 리를 가면 교상미국(憍賞彌鞠)[중인도이다]에 이른다. 둘레는 6천 리요 도성의 둘레는 30여 리이며 사찰은 10여 군데 있고 승려는 3백여 명이며 천사는 50군데요 외도들이 아주 많다. 성안의 옛 궁전에 있는 큰 정사(精舍)는 높이가 60여 척이며 전단(栴檀)으로 조성한 불상이 있고 그 위는 돌 덮개[石蓋]로 씌워져 있다. 곧 오타연나왕(鄔阤延那王)[옛날의 우타연(優陀延)이며 당(唐)나라 말로는 출애(出愛)이다]이 조성하였다. 사이에서 신령한 광명이 일어났는데 모든 왕이 힘써 들어올리고자 하였으나 끝내 옮기지 못하였다고 한다. 옛날 부처님께서 어머니를 위하여 천상에 올라가 설법하실 때에 왕이 목련(目連)에게 청하여 신통한 힘으로 공장(工匠)을 데리고 천상으로 올라가 상호(相好)를 본떠 와서 조성하였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천상에서 내려오시자 상(像)이 문득 일어나서 맞이 하였으므로 부처님께서 다음과 같이 위로하셨다고 한다. “이제는 그대가 불사(佛事)를 일으킬 것이니라.” 정사의 동쪽으로 백여 보(步) 떨어져서 네 부처님께서 다니고 앉으셨던 흔적이 남아있고 부처님께서 욕실(浴室)로 삼았던 우물에는 지금도 물이 가득차 있다. 서안의 동남쪽 귀퉁이에는 구사라장자(具史羅長者)의 집과 부처님의 정사와 머리카락과 손톱을 모셔 놓은 탑이 있고 그 탑 곁에는 네 부처님께서 다니고 앉으셨던 흔적이 남아 있다. 성의 서쪽으로 9리 떨어진 석굴(石窟)에서는 일찍이 부처님께서 노닐면서 독룡(毒龍)을 항복시키셨으며 석굴 곁의 큰 탑은 높이가 20여 장(丈)이나 되며 그 옆에는 부처님께서 오가며 다니셨던 흔적과 머리카락과 손톱을 모셔 놓은 탑이 있는데 병든 이가 빌면 대부분 나았다. 석가께서 유포하신 법이 멸망할 일이 이 나라에 있었으므로 귀한 이나 천한이나 영토 안으로 들어오면 저절로 마음으로 느껴 슬퍼하였다. 굴의 동북쪽의 큰 숲 속으로 7백여 리를 가서 긍가하의 북쪽 언덕을 건너면 가사포라성(迦奢布羅城)에 이른다. 둘레는 10리쯤이 되며 여기는 호법보살(護法菩薩)의 외도(外道)를 조복 받은 곳이다. 탑의 높이는 20여 장인데 일찍이 부처님께서 여기서 여섯 달 동안 설법하셨다. 오가며 다니신 흔적과 머리카락과 손톱을 모셔 놓은 탑이 있다. 북쪽에서 1백 80리를 가면 비색가국(鞞索迦鞠)[중인도이다]에 이른다. 둘레는 4천여 리요 도성의 둘레는 17리이며 사찰은 20군데 있고 승려는 3천 명이며 천사는 50군데 인데 외도들이 아주 많다. 성의 남쪽 길의 좌우에 있는 절 탑은 높이가 20여 장이요 일찍이 부처님께서 여기서 6년 동안 설법하셨으며 그 곁에는 높이 70척이나 되는 기이한 나무가 있는데 봄이나 겨울이나 변하지 않는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이쑤시개 버린 것이 무성하다는 것으로 삿된 견해를 지닌 이들이 모두 다투어 와서 베어 버려도 곧 다시 예전처럼 살아 있다고 한다. 그 곁에 네 부처님께서 다니고 앉으셨던 흔적과 아울러 머리카락과 손톱을 모셔 놓은 탑이 터전의 모퉁이에 서로 연접해 있어서 숲 속의 못에 그림자가 비친다. 여기에서 동북쪽으로 5백여 리를 가면 실라벌실지국(室羅伐悉底鞠)[중인도이며 곧 사위(舍衛)이다]에 이른다. 둘레는 6천여 리이고 도성은 황폐하였으며 옛 터의 둘레는 20여 리이다. 사찰은 수백 군데이나 승려의 무리는 적으며 천사는 백여 군데 되어 외도들이 아주 많다. 황폐한 성(城)의 옛 전각의 동쪽 터에 있는 작은 탑은 바로 발라서나시다왕(鉢羅犀那恃多王)[옛날의 파사닉(波斯匿)이며 당나라 말로는 승군(勝軍)이다]이 부처님을 위하여 당(堂)을 지어 드린 곳으로 그 곁에 있는 옛 터 위의 탑은 바로 왕이 부처님의 이모(姨母) 발라사발지(鉢羅闍鉢底)[옛날 말로 파사파제(波闍波提)이며 우리나라 말로는 생주(生主)이다] 비구니를 위하여 정사를 지어준 곳이다. 다음으로 동쪽의 탑은 바로 소달다(蘇達多)[선시(善施)라고 한다]의 옛 집이며 곁에 있는 큰 탑은 바로 앙루리마라(鴦寠利摩羅)[지만(指鬘)을 말한다]가 삿된 견해를 버린 곳이다. 성의 남쪽으로 6리쯤에 있는 서다림(逝多林)은 바로 급고원(給孤園)으로 태자(太子)가 절을 지었던 곳인데 지금은 황폐해져서 높이 70여 척의 석주(石柱)만이 남아 있다. 아육왕(阿育王)이 지었던 벽돌 방[甎室] 하나가 남아 있을 뿐이요 나머지는 다 같이 없어졌으며 방 안에는 어머니를 위하여 설법한 금상(金像)이 있다. 동북쪽에는 부처님께서 병든 스님을 씻어 주신 탑이 있으며 서북쪽에는 목련(目連)과 신자(身子)의 의탑(衣塔)이 있고 거기서 멀지 않게 있는 탑은 부처님께서 물을 길어 쓰셨던 곳이다. 또 사리불(舍利弗)과 부처님께서 오가며 다니셨던 길과 설법한 처소를 표시한 탑이 있는데 신령한 약과 기이한 향이 언제나 그 곳에 내렸다고 한다. 또 외도가 여인을 살해하고 그것으로 부처님을 비방했던 처소에는 탑을 세워 표시하여 놓았다. 절의 동쪽으로 백 보(步)정도 되는 곳의 크고 깊은 구덩이는 바로 조달(調達)이 독(毒)으로 부처님을 해치려 하다가 산 채로 빠져 죽은 곳이요 남쪽에도 큰 구덩이가 있는데 이것은 바로 구가리비구(瞿伽離比丘)가 부처님을 비방하다가 산 채로 빠져 죽은 곳이며 또 남쪽으로 8백 보 되는 곳의 크고 깊은 구덩이는 바로 전차바라문(戰遮婆羅門)의 딸이 부처님을 비방하다가 산 채로 무간지옥으로 빠진 곳이다. 이 세 구덩이는 모두가 휑하게 뚫려서 밑이 없는지라 큰 비가 마구 흘러 들어가도 끝까지 멈추거나 쓰러지는 일이 없다. 절의 동북쪽으로 70보 되는 곳의 정사(精舍)는 영복(影覆)이라 부르고 높이는 60척이며 그 안에는 동쪽을 향하고 있는 좌상(坐像)이 있는데 외도와 논의하시던 처소이다. 다음의 동쪽에 있는 천사(天祠)는 크기가 정사와 똑같다. 처음 해가 뜨고 서쪽으로 질 때에 부처니의 정사는 가리지 않는데 천사는 해가 저물거나 동쪽에 그늘이 지면 마침내 덮이어 가려진다. 또 동쪽으로 4리 되는 곳의 바짝 마른 큰 연못은 바로 비로석가왕(毘盧釋迦王)[옛 번역으로는 유리(流離)이다]이 빠져 들어가 죽은 곳인데 뒷날 사람들이 탑을 세우고 그것을 기록하여 두었다. 또 사리불[身子]이 처음 절을 짓고자 했을 때 외도와 재주를 겨루던 곳에도 역시 탑을 세워 기록해 두었다. 절 서북쪽으로 4리 되는 곳의 득안림(得眼林) 안에는 부처님께서 오가며 다니셨던 흔적을 기리는 탑이 있다. 그곳의 인연은 승군왕(勝軍王)이 5백 명의 도적들의 눈을 후벼내어 버렸느데 그 일을 들으신 부처님께서는 인자한 힘으로 한번에 본래대로 회복시키고 몽둥이를 버리고 눈이 생기게 하셨다고 한다. 성의 서북쪽으로 60리에 있는 오래된 성(城)은 바로 사람의 수명이 2만 세일 때 가섭파불(迦葉波佛)께서 태어나신 본고자이요 성의 북쪽에 있는 탑은 바로 이 부처님의 전신사리(全身舍利)를 모신 곳으로 아육왕이 탑을 조성하고서 표시하여 놓았다. 또 동남쪽으로 5백여 리를 가면 겁비라벌솔도국(劫比羅伐窣堵鞠)[중인도이며 옛날에는 가비라(迦毘羅)라고 하였다]에 이른다. 둘레는 4천여 리요 비어 있는 성(城)이 수십 군데이며 모두 사람이 살고 있지 않다. 궁성의 둘레는 15리쯤 되고 벽돌로 지었으며 옛 절은 1천여 군데요 궁성(宮城)은 하나이다. 사찰의 승려는 30여 명 저도 되고 천사는 두 군데 인데 외도들이 뒤섞여 살고 있다. 성 안의 정전(正殿) 터 위에 있는 정사(精舍) 안에는 왕의 상(像)이 만들어져 있다. 강신(降神)하신 상(相)의 날짜에 논의가 동일하지 않다. 상좌부(上座部)에서는 당나라의 5월 15일에 해당한다고 하며 여러 부(部)에서는 또한 이곳의 5월 8일에 해당한다고 하는데 아마 듣고 본 것의 차이일 뿐이다. 그 옆에는 선상탑(仙相塔)이 있고 성의 남쪽에 있는 탑은 바로 태자(太子)가 힘을 겨룰 때 코끼리를 던져 성을 넘어 땅으로 떨어지면서 큰 구덩이가 생긴 곳이다. 그 곁에도 정사가 있는데 태자의 상과 학업을 받는 상을 만들어 놓았으며, 그 곁에 있는 정사는 비(妣)의 침전(寢殿)이 있던 처소로서 야수다라(耶輸阤羅)와 라호라(羅怙羅)의 상(像)이 있다. 별본(別本)에서는 “태자는 초저녁에 성(城)을 열고 북쪽문을 나와 떠나갔다”라고 말하였다. 또 성의 동남쪽 귀퉁이에 있는 정사에는 태자가 백마(白馬)를 타고 허공을 날아 성을 넘고 있는 상을 만들어 놓았으며 네 개의 성문에는 각각 정사가 있는데 노(老)ㆍ병(病)ㆍ사(死)ㆍ사문(沙門)의 상(像)이 만들어져 있다. 성의 남쪽으로 4리 되는 니구로(尼拘盧)숲에 있는 탑은 부처님께서 도(道)를 얻으시고 하늘과 사람들을 위하여 설법하신 곳이다. 성의 남쪽 50리에 있는 옛 성안의 탑은 바로 사람의 수명이 6만 세였을 때 가라가촌타(迦羅迦村馱)부처님께서 태어나셨던 본고장의 성(城)을 표시하며 성의 동남쪽에 있는 탑은 곧 이 부처님의 유신(遺身)이 모셔져 있는데 무우왕(無憂王)이 그 앞에 높이 3장(丈) 남짓의 돌기둥을 세웠다. 또 동북쪽으로 30여 리에 있는 옛 성안의 탑은 바로 사람의 수명이 4만 세였을 때 가락가모니(迦諾迦牟尼)부처님께서 태어나셨던 본고장의 성(城)을 표시하며 성 동북쪽에 있는 탑은 곧 이 부처님의 유신(遺身)을 모셨다. 무우왕이 돌기둥을 세워서 새겨 놓았는데 높이는 2장 남짓하다. 성의 동북쪽으로 40리에는 태자가 나무 아래 앉았던 곳을 표시하는 탑이 있으며 큰 성(城)의 서북쪽에는 수백천 개의 탑이 있는데 이것은 바로 석씨들을 죽인 탑이다. 네 분의 석(釋)씨 자손이 적군(敵軍)에게 항거하였으므로 성의 사람들은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국경 밖으로 내쫓아 버렸는데 한 분은 오장왕(烏丈王)이 되었고 세 분은 범연(梵衍) 등의 왕이 되었으며 지금까지도 후손들이 끊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성의 남쪽 니구율수(尼拘律樹)에 있는 탑은 바로 부처님께서 처음 오셔서 부왕(父王)을 뵈었던 곳이며 성의 남문(南門) 밖의 탑은 바로 활쏘기를 겨루던 곳이다. 동남쪽으로 30여 리 되는 곳은 바로 태자가 쏜 화살이 땅으로 들어가면서 샘물이 솟아나온 곳인데 세속에서는 전천(箭泉)으로 전해지며, 병든 이가 마시면 거의 낫게 되며 혹은 그 진흙을 가져다 이마에 붙이면 그대로 아픈 것이 모두 낫는다고 한다. 또 동북쪽으로 90리에 있는 납벌니림(臘伐尼林)에는 석씨종족들이 목욕하는 못이 있어 꽃이 물에 서로 비치며, 그 북쪽 20보(步)되는 곳의 무우화(無憂花) 나무는 이미 말라 죽었는데 부처님께서 탄생하셨던 곳이다. 어떤 이는 그날은 이곳의 3월 8일에 해당한다고 하며, 상좌부(上座部)에서는 이곳의 3월 15일에 해당한다고도 한다. 다음에 동쪽으로 있는 탑은 두 마리 용이 태자를 목욕시킨 곳이며, 처음 부처 님께서 태어나신 뒤 부축을 받지 않고 사방으로 각각 일곱 걸음씩을 밟으셨던 곳에는 큰 연꽃이 나 있다. 이미 오른쪽 겨드랑이에서 태어나자마자 제석(帝釋)이 옷으로 싸 안고 4왕(王) 이 그를 받들어 금으로 된 안석 위에 안치한 장소에는 네 개의 탑과 돌 기 등을 세워 놓고 그 일을 표기(表記)하였다. 곁에 있는 작은 하천은 동남쪽으로 흐르며 세속에서는 유하(油河)라고 부르니 이것이 바로 태자가 태어나신 뒤에 하늘이 이 땅을 변화하여 반짝거리게 해서 목욕하면서 풍허(風虛)를 제거시켰는데, 지금은 변화하여 강물이 되었으며 아직도 반짝 거리는 것이 마치 기름과 같다. 여기에서 동쪽으로 2백여 리의 거친 속을 지나가면 남마국(藍摩國)[중인도이다]에 이르는데 거의 텅빈 성(城)이다. 동남쪽에 있는 부처님의 탑은 백 척이 좀 못되며 옛날에 처음 8등분으로 나눈 사리(舍利) 중의 한부분이 있어 때때로 신령한 빛이 일어난다. 그 곁에 있는 맑은 못의 용이 뱀으로 변하여 그 탑의 둘레를 돌았고 들판의 코끼리가 꽃을 따다 뿌렸는데, 무우왕(無憂王)이 열려고 하였으나 용이 수호하면서 허락하지 않았다. 또 동쪽의 큰 숲으로 백여 리에 있는 큰 탑은 바로 태자가 이곳에 와서 보배 옷 안의 마니주[末尼珠]를 풀어서 천탁가(闡鐸迦)에게 맡기면서 부왕(父王)에게 로 돌려 보낸 곳이다. 또 동쪽에는 섬부(贍部) 나무가 있는데 마른 줄기가 아직도 남아있으며, 그곳의 작은 탑은 바로 태자가 입고 있던 옷을 사슴 가죽과 바꿨던 곳이다. 그 곁의 탑은 머리를 깎은 곳인데 그 때의 나이도 일정치 않다. 혹은 19세라 하기도 하고 29세라고 하기도 한다. 또 동남쪽의 들판으로 1백90리를 가면 니구타(尼拘陀) 숲에 탑이 있는데 높이는 3장(丈) 남짓하다. 옛날에 사람들이 부처님을 화장(火葬)한 땅에 남아있던 재와 숯을 거두어 여기에 탑을 세운 것인데 병든 이들이 기원하면 낫게 된다고 한다. 네 부처님께서 다니고 앉으셨던 흔적이 남아있고 탑의 높이는 백여 척이며 좌 우에는 수백 개의 작은 탑들이 있다. 또 동북쪽의 큰 숲으로 험한 길을5백 리쯤 가면 구시나게라국(拘尸那揭羅國)[중인도이다]에 이르며 성은 쓰러져 황폐하며 사람들도 적다. 그 안의 동북 귀퉁이에 있는 탑은 바로 준타(准陀)의 옛 집이며 그 우물은 아직도 맛이 있는지라 먹기 위하여 뚫려져 있다. 성의 서북쪽으로 4리를 가면 아시다벌지하(阿恃多伐底河)를 건너게 되는데 우리나라 말로 유금(有金)이라 한다. 가까이 서쪽 언덕에 있는 사라림(娑羅林)은 양쪽 숲 사이로 서로 떨어진 것이 수십 보(步)이며, 그 가운데에 네 그루의 나무가 있는데 매우 높다. 큰 벽돌로 된 정사(精舍)안에는 부처님께서 열반하실 때의 상(像)이 조성되어 있는데 북쪽으로 머리를 하고 누우셨으며, 곁에 있는 탑은 높이가 2백여 척이며, 그 앞에 있는 돌기둥에는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상(相)이 기록되어 있다. 그날을 어떤 이는 우리나라의 3월 15일에 해당한다고 하고 설유부(說有部)에서는 우리나라의 9월 8일에 해당한다고 하며, 제부이의(諸部異議)에서는 지금이 정관(貞觀) 20년(646)이라 곧1천2백12년이 지났다고 하였다. 이것은 보리사(菩提寺)의 돌기둥의 기록에 의한 것이다. 혹은 1천3백 년이 되었다고 하고 혹은 1천5백여 년 되었다고도 하며, 혹은 9백 년은 지났고 아직 1천 년은 되지 않았다고도 한다. 정사 곁에는 부처님께서 옛날 꿩왕[雉王]이었을 적에 불을 껐고, 사슴으로 중생을 구제한 곳이 있는데 각각 하나의 탑으로 세워졌으며, 다음의 서쪽 탑은 바로 소발다라(蘇跋陀羅)[수보리[善賢]를 말한다]가 멸진정을 증득한 곳이다. 다음에 하나의 탑이 있는데 이것은 집금강신(執金剛神)이 앉은뱅이가 된 땅이요, 다음의 곁에 있는 탑은 바로 관(棺)이 7일 동안 머물렀던 곳이며, 그 곁에 있는 탑은 바로 아니루타(阿泥樓陀)가 천상에 올라가서 어머니에게 알리고 내려와서 부처님을 보며 통곡했던 곳이다. 성의 북쪽으로 니련선나하(尼連禪那河)를 건너서 3백 보(步)쯤 떨어져 있는 탑은 바로 부처님께서 열첩반나(涅疊般那)[불로 태운다는 말이다]하신 곳인데, 땅은 지금도 흑황색 흙으로 재와 숯이 섞였으며, 기원하여 감응이 있는 이라면 누구나 사리를 얻게 된다. 그 곁에 있는 탑은 부처님께서 대가섭파(大迦葉波)를 위하여 두 발을 나타내신 곳이며 다음의 또 하나의 탑 앞에 세운 돌기둥에는 여덟 나라에서 사리를 나눈 일을 기록해 놓았다. 여기서 서남쪽으로 2백여 리를 가면 대읍(大邑)에 이른다. 또 큰 숲으로 5백여 리를 가면 바라닐사국(婆羅痆斯鞠)[중인도이며 옛날의 바라내(波羅奈)이다]에 이른다. 둘레는 4천여 리요 도성(都城)의 서쪽은 긍가하에 임하며 길이는 20리가 조금 못되고 넓이는 6리 정도이다. 사람들이 아주 많이 살며 외도를 많이 믿는다. 사찰은 30여 군데요 승려는 3천여 명이며 모두 소승의 정량부(正量部)에 속한다. 천사(天祠)는 백여 군데요 외도는 만여 명이 되며 대부분 대자재천(大自在天)의 남근을 섬긴다. 큰 성안의 천사 20군데에 있는 자재천의 남근은 높이가 백여 척이나 된다. 성의 동북쪽은 바라닐하(婆羅痆河)이며 서쪽에 있는 탑은 아육왕이 조성하였고 높이는 10여 장(丈)이며 앞에 세운 돌기둥은 옥돌처럼 산뜻하며 부처님이 나타나 있다. 강의 동북쪽으로 10여 리 가면 녹야사(鹿野寺)가 있다. 여덟 구역으로 나뉘어 있고 담을 이어져 빙둘러 살며 층과 처마는 중각(重閣)으로 되었다. 승려의 무리는 1천5백 명이요 다 같이 소승의 정량부에 속한다. 부처님의 정사가 있는데 높이는 20여 장이며 벽돌로 된 감(龕)은 사면으로 합쳐졌고 마디의 층급은 백 몇 개인데 모두 금상(金像)과 유석불(鍮石佛) 등을 잘보이지 않게 세워 놓았다. 다음 서남쪽에 있는 탑은 높이가 백여 척이며 앞에 있는 돌기둥은 높이가 70여 척이며 환히 통하면서 깨끗하고 정성에 감응하면 상(像)이 그의 선악에 따라 나타난다. 곧 도(道)를 이룬 뒤에 처음 법륜(法輪)을 굴리셨던 곳이다. 그 옆의 3기(基)의 탑은 곧 옛날 세 분의 부처님께서 다니고 앉으셨던 곳이며 곁에 있는 모든 탑은 5백 명의 독각(獨覺)이 열반에 든 장소이다. 또 곁의 1기의 탑은 자씨보살(慈氏菩薩)이 수기(授記)를 받은 처소이며 또 서쪽에 있는 1기의 탑은 바로 부처님께 과거에 호명보살(護明菩薩)이셨을 때 가섭파부처님[迦葉波佛]께서 이제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주신 곳이다. 다음의 남쪽은 네 분의 부처님께서 오가며 다니셨던 처소인데 길이 50보(步)에 넓이 7척의 푸른 돌을 쌓아 만들었고 위에는 석가부처님께서 오가며 거니시는 상(像)이 있다. 그 상의 형상은 특이하게도 살상투[肉髻]의 위 끝이 머리카락 끝으로 뾰족하게 나와 있어 신기하면서도 증험이 있다. 절의 흔적을 지극히 많아서 정사와 부도가 이에 수백 개가 되었으므로 그 일을 다 갖추어 말할 수조차 없다. 절 서쪽에 있는 맑은 못은 둘레가 2백 보(步)이고 부처님께서 일찍이 손을 씻고 목욕을 한 곳이요 다음 서쪽의 작은 못은 부처님께서 일찍이 그릇을 씻은 곳이며, 다음 북쪽의 작은 못은 부처님께서 일찍이 옷을 빨았던 곳이다. 세 개의 못에는 용이 머물러 있고 맛이 달면서 또한 깨끗하여 어떤 이라도 부질없이 접촉하면 금비라(金毘羅)라는 짐승이 곧 그를 해쳤다. 그 곁에는 네모진 돌이 있고 돌 위에는 부처님의 가사(袈裟) 무늬의 흔적이 있으며 외도나 흉악한 사람이 경솔하게 밟거나 하면 못에 있는 용이 갑자기 바람과 비를 일으켰다. 그 곁에는 부도가 있는데 부처님께서 일찍이 여섯 개의 어금니를 가진 상왕(象王)이셨을 때 사냥꾼의 법의(法衣)를 입고 있는 것을 보고 일부러 어금니를 뽑아서 그에게 주셨던 곳이다. 곁에 있는 1기(基)의 탑은 부처님께서 옛날에 까마귀와 원숭이와 코끼리를 위하여 누가 큰가를 서로 물었던 곳이다. 또 큰 숲 속의 탑은 부처님과 조달(調達)이 옛날 사슴왕이셨을 때 부처님께서 새끼 밴 사슴의 목숨을 대신한 곳으로 녹야(鹿野)라는 이름은 이로 인하여 생겼다고 한다. 적의 서남쪽 3리에 있는 큰 탑은 높이가 30장(丈)이나 되며 터가 우뚝 솟아있어 장엄하고 화려하였다. 곁에 있는 1기의 탑은 바로 다섯 사람이 부처님을 영접하였던 장소이며 큰 숲의 동쪽으로 3리 떨어진 탑은 부처님께서 옛날 토끼셨을 때 모든 짐승들을 위하여 스스로 몸이 작은 것을 알고 몸을 태워 그들에게 대접하였던 곳으로 그로 인하여 천제석이 감동하여 내려와서는 칭찬하면서 일부러 달 속에 토끼의 형상이 나타나게 하였다고 한다. 절의 동쪽으로 긍가하(殑伽河)를 따라 3백여 리쯤 가면 동쪽으로 전주국(戰主國)[중인도이다]에 이른다. 둘레는 2천여 리요 도성(都城)은 긍가하에 임하였으며 둘레는 20여 리이다. 사람들이 가득 차있고 사찰은 열 군데이며 승려는 천명이 못되며 모두 소승이다. 천사는 스무 군데인데 이교도들이 뒤섞여 살고 있다. 성의 서북쪽에 있는 절의 탑은 부처님의 사리가 한 되 모셔져 있다. 옛날 부처님은 여기에서 7일 동안 설법하셨고 아울러 네 부처님께서 다니고 앉으셨던 흔적도 남아 있으며 자씨보살(慈氏菩薩)의 상(像)이 있는데 형상은 작으나 위덕(威德)이 크다고 한다. 성의 동북쪽으로 30여 리 되는 곳에 귀신을 항복시킨 탑이 있는데 반(半)은 이미 땅에 파묻혀 있다. 앞에 돌기둥은 높이가 2장(丈) 남짓하며 곧 부처님께서 사람을 잡아 먹는 귀신을 위하여 설법하셨던 곳이다. 귀신은 돌자리 수천개와 무성한 숲과 많은 못을 만들어 놓았으며,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몇 개의 절에는 모두 승려들이 머물러 대승(大乘)을 배우고 있다. 또 동남쪽으로 강을 건너 백여 리 되는 곳의 탑은 사리를 나눈 병(甁)과 남았던 사리를 모셨는데 매양 재일(齋日)에는 광명을 놓았다. 또 동북쪽으로 긍가하를 건너 1백50리를 가면 폐사리국(吠舍釐國)[중인도이며 옛날에는 비사리(毘舍離)라고 하였다]에 이른다. 둘레는 50여 리요 사도(邪道)와 정도(正道)가 반반이며 사찰은 수백 군데이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선너 개 정도이며 승려도 적을 뿐이다. 천사는 수십 군데이고 옷을 벗고 맨몸을 드러내는 외도들이 많다. 성은 이미 쓰러져 황폐하였고 옛 터의 둘레는 70리쯤 되며 궁성(宮城)의 둘레는 5리 정도이고 적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궁성의 서북쪽으로 6리 되는 곳에 있는 절의 탑은 바로 유마거사[淨名]가 설법한 장소이다. 또 동쪽에는 사리불[身子]의 증과탑(證果塔)이 있고 또 동쪽에 있는 큰 탑은 바로 왕(王)이 얻은 일부분의 사리가 한 섬쯤 되며 무우왕(無憂王)은 아홉 되를 가지고 균등하게 그 밖의 탑을 조성하였다. 뒷날에 어떤 왕이 열려고 하였으나 땅이 진동하였으므로 마침내 그만두었다. 서북쪽으로 있는 탑은 돌기둥의 높이가 6장(丈)이며 그 다음 남쪽에는 원숭이가 부처님을 위하여 판 못이 있고 못의 서쪽은 원숭이떼들이 부처님의 발우를 가지고 나무로 올라가서 꿀을 딴 곳이며 못의 남쪽은 원숭이들이 꿀을 바친 곳이다. 각각 탑에 기록되어 있다. 사찰의 동북쪽으로 4리쯤 되는 곳의 탑은 바로 정명(淨名)의 옛 집터인데 아직도 신령한 일이 많고 그 집은 벽돌을 포개어 지었다. 전(傳)에서는 돌로 쌓았다고 하였는데 바로 설법하면서 병환을 나타낸 곳이다. 근래의 사자(使者) 왕현책(王玄策)이 홀(笏)을 가지고 방을 재어 보았더니 1장(丈)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방장(方丈)이라는 이름은 이로부터 생겨났다. 아울러 보적(寶積)장자의 집과 암라(菴羅)여인의 집이 있으니 부처님의 이모(姨母)가 열반에 든 곳이기도 하다. 모두 표기(表記)가 쓰여 있다. 절의 북쪽으로 4리에 있는 탑은 부처님께서 구시성(拘尸城)에 가시려 할 때 하늘과 사람들이 전송하면서 울었던 처소이다. 다음의 1기(基)의 탑은 바로 부처님께서 최후에 성읍(城邑)을 살펴보셨던 곳이요 다음의 남쪽은 바로 암라여인이 부처님께 동산을 보시한 곳이며, 그 옆의 1기의 탑은 바로 부처님께서 세 번이나 아난에게 더 머물러 살 것인지 열반할 것인지를 말씀하셨던 곳이다. 또 곁에 있는 1기의 탑은 바로 천의 아들[千子]들이 부모를 보았던 곳이니 바로 현겁(賢劫)의 천불(千佛)이다. 동쪽의 옛 중각강당(重閣講堂)의 터에 있는 탑은 때때로 광명을 놓는데 이곳은 부처님께서 『보문경(普門經)』을 설하신 곳이다. 성의 서북쪽으로 60리에 있는 큰 탑은 바로 부처님께서 율첩바자(栗呫婆子)를 이별하셨던 곳이다. 큰 성(城)의 서북쪽으로 2백 리가 조금 못되는 곳에 있는 옛 성의 탑은 부처님께서 일찍이 대천륜왕(大天輪王)이 되었던 본생(本生)의 일을 말씀하셨던 곳이다. 나라의 성 동남쪽으로 15리에 있는 큰 탑은 바로 7백 명의 현성(賢聖)들이 거듭하여 결집(結集)하였던 처소이며 또 남쪽으로 백 리를 좀 못가서 있는 큰 절을 층대(層臺)를 겹쳐서 지었는데 승려들이 대승(大乘)을 배웠고 네 분의 부처님께서 다니고 앉으셨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옆으로 있는 1기의 탑은 바로 부처님께서 남쪽으로 마게타(摩揭阤)로 나아가시다 북쪽으로 폐사리성(吠舍釐城)을 돌아보시면서 도중에 쉬어가신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이다. 절 동쪽으로 30리를 가서 긍가하의 남쪽 언덕과 북쪽 언덕에 있는 각각 1기씩의 탑은 바로 아난타(阿難陀)가 몸을 나누어서 두 나라에 주었던 곳이다. 북쪽의 언덕에서 동북쪽으로 5백여 리를 가면 불율시국(弗栗恃國)[북인도이며 사람들은 삼벌시(三伐恃)라고 말한다]에 이른다. 둘레는 4천여 리요 동쪽에서 서쪽으로 길다. 사찰은 10여 군데 있고 승려는 천 명이 못되며 대승ㆍ소승을 통틀어 배운다. 천사는 수십 군데며 외도들이 많다. 옛 궁성(宮城) 가운데에는 3천의 집들이 있으며 긍가하의 동북쪽 언덕에 있는 탑은 높이가 2장(丈) 남짓하다. 남쪽으로 바라보이는 긴 강은 부처님께서 5백명의 고기잡이들을 제도하신 곳인데 잡혔던 큰 고기는 열여덟 개의 머리가 있었고 하나의 머리에는 각각 두 개씩의 눈이 있었다. 또 동북쪽으로 백여 리 되는 데에 있는 옛 성의 서쪽 탑은 높이가 백여 척이나 되는데 부처님께서 일찍이 여섯 달 동안 설법하시면서 사람을 제도하셨으며, 또 북쪽으로 1백50리 가면 부처님의 머리카락과 손톱을 모신 탑이 있다. 또 서북쪽으로 1천5백 리를 가서 산골짜기로 들어서면 니파라국(尼波羅國)[북인도이다]에 이른다. 둘레는 4천여 리요 설산(雪山) 안에 있으며 도성의 둘레는 20여 리쯤 된다. 여러 가지를 믿고 있으므로 사찰과 천사가 지극히 많으며 승려들은 2천여 명이나 되고 대승ㆍ소승을 모두 배운다. 왕은 순수하게 부처님을 신봉한다. 성 안에 있는 각(閣)은 높이가 2백여 척이요 둘레는 80보(步)이며 그 위에는 1만 명이 들어갈 수 있다. 면(面)마다 따로 세 겹이 겹쳐 있고 겹친 데마다 따로 일곱 층으로 되어 있어서 사면의 처마를 이리저리 거닐 수 있으며 기이한 조각과 진기한 보배로 장식되어져 있다. 성의 동남쪽으로 멀지 않는 곳에 수화촌(水火村)이 있고 동쪽으로 1리쯤 되는 곳에는 아기파여수(阿耆波沴水)가 있는데 둘레는 20보(步)이다. 급히 일렁이는 물결이면서도 잔잔하게 흐르지 않으면서 언제나 끓고 있으므로 집에서 불을 거기에 던지면 온 못에 불이 일어나 연기와 불길이 수척이나 오른다. 물을 불에다 뿌리면 불이 더욱 왕성하게 타고 부서진 흙을 던져도 역시 다 타버리므로 던진 것은 물을 것도 없이 모두 재가 되어 버린다. 가마솥을 물 위에 걸어 밥을 지으면 곧 다 되어 버린다. 예전에는 이 물 안에 금궤(金匭)가 있어서 어느 나라의 왕이 사람들을 거느리고 그것을 취하여 궤가 이미 진흙으로 나왔는데 사람들과 코끼리가 끌어당겨도 꿈쩍하지 않았다. 그런데 밤에 신(神)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바로 자씨(慈氏)부처님의 관(冠)이다. 세간에 내려와 나실 때에 쓰실 것이므로 가져 갈 수 없다. 화룡(火龍)이 보호하고 있다.” 성의 남쪽으로 10여 리 되는 곳에 따로 있는 산은 아주 빼어나고 사찰이 거듭 세워져 있는데 그 형상이 마치 구름과 놀 안의 소나무와 대나무 같다. 고기와 용은 사람들에게 길들여져 있어서 사람들에게로 가서 먹이를 받아 먹었으나 범(犯)하려고 하면 그의 한 집안은 다 죽여 버렸다. 요사이 나라의 명령으로 이 나라에 다녀온 적이 있는데 지금은 토번(吐藩)에 속한다. 또 폐사(吠舍)로부터 남쪽으로 1백50리를 가서 긍가하를 건너면 마게타국(摩揭陀國)에 이르는데 곧 언제나 말하는 마갈제(摩竭提)의 왕사성(王舍城)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