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법계도기총수록(法界圖記叢髓錄) / 法界圖記叢髓錄卷上之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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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계도기총수록 상권 2(法界圖記叢髓錄 卷上之二)
『일승법계도』 원문 二
이제 글을 해석하고자 함에 두 문으로 분별한다. 첫째는 도인의 뜻을 통틀어 해석하고, 둘째는 도인의 모양을 나누어 풀이한다.
어째서 도인에 의거하였는가?
석가여래의 가르침의 그물에 포섭되는 세 가지 세간이 해인삼매로부터 번다하게 나타난 것임을 표현하려고 한 까닭이다. 이른바 세 가지 세간이란 첫째는 기세간器世間이고, 둘째는 중생세간衆生世間이며, 셋째는 지정각세간智正覺世間이다. 지정각이란 불ㆍ보살이다. 세 가지 세간이 법을 다 포섭하기 때문에 다른 것은 논하지 않는다. 자세한 뜻은 『화엄경』에서 설하는 것1)과 같다.

둘째, (도인의) 모양을 나누어 (풀이하는) 문 가운데 세 문으로 나눈다. 첫째는 도인(印文)의 모양을 설명하고, 둘째는 글자의 모양을 밝히고, 셋째는 글의 뜻을 해석한다.

첫 번째,
어째서 도인에 오직 한 길만 있는가?
여래의 일음一音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른바 하나의 훌륭하고 교묘한 방편이다.
어째서 번다하게 도는 굴곡이 많이 있는가?
중생의 근기와 욕망이 같지 않은 것을 따르기 때문이다. 곧 이 뜻은 삼승의 가르침에 해당한다.

어째서 한 길에 시작과 끝이 없는가?
훌륭하고 교묘한 (방편)은 (일정한) 방법이 없어서 법계에 응하여 들어맞고, 십세에 상응하여 원융만족함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곧 이 뜻은 원교에 해당한다.
어째서 네 면(四面)과 네 각(四角)이 있는가?
사섭법(四攝)과 사무량심(四無量)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 뜻은 삼승에 의거하여 일승一乘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도인의 모양은 이와 같다.

두 번째,
어째서 글자 가운데 시작과 끝이 있는가?
수행의 방편을 기준으로 하여 원인과 결과가 같지 않음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어째서 글자 가운데 굴곡이 많은가?
삼승의 근기와 욕망이 달라서 같지 않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어째서 시작과 끝의 두 글자를 한가운데에 두었는가?
원인과 결과의 두 자리가 법성의 집(法性家) 안의 진실한 덕용德用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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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791_b_02L法界圖記叢髓錄卷上之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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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791_b_04L[一乘法界圖原文二]
1)文云 [92] 將欲釋文二門分別一惣釋
006_0791_b_05L印意二別解印相2) [93] 故依印
006_0791_b_06L表釋迦如來敎網所攝三種世間從海
006_0791_b_07L印三昧3) [94] 出現4) [95] [121] 所謂三種世間
006_0791_b_08L一器世間二衆生世間三智正覺世間
006_0791_b_09L智正覺者佛菩薩也三種世間5)
006_0791_b_10L [96] 不論餘者廣義者如花 [122] 嚴經說
006_0791_b_11L第二別相門中三門分別一說印文相
006_0791_b_12L二明字相三釋文6) [97]

006_0791_b_13L
何故印文唯有一道表如來一
006_0791_b_14L音故所謂一善巧方便何故多有7) [98]
006_0791_b_15L廻屈曲以隨衆生機欲不同故即是
006_0791_b_16L8) [99] 當三乘敎何故一道無有始終 *現
006_0791_b_17L示善巧無方應稱法界十世相應圓融
006_0791_b_18L滿足故即是義當圓敎何故有四面四
006_0791_b_19L彰四攝四無量故此義依三乘*現
006_0791_b_20L一乘9) [100] 印相如是

006_0791_b_21L
何故字中有始終耶約修行方
006_0791_b_22L便 *現因果不同故何故字中多10) [101]
006_0791_b_23L *現三乘根欲差別不同故何故始
006_0791_b_24L終兩字安置當中表因果兩位法性家

006_0791_c_01L성性이 중도에 있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글자의 모양은 이와 같다.

위에서 이르기를, “원인과 결과가 같지 않다.”라고 하고, “한 집의 진실한 덕德이며 성性이 중도에 있다.”라고 하니, 이유를 알지 못하겠다. 그 뜻이 무엇인가?
이 뜻은 실로 이해하기 어렵다. 비록 그러하나, 천친 논주天親論主가 육상六相의 방편으로써 뜻을 세운 분제分齊2)에 의거하면, 뜻의 도리에 준하여 분수 따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열 구절에 근거하여 육상을 변별하면 아래에 설함과 같다. 이제 우선 도인의 모습에 근거하여 육상을 밝혀서, 일승과 삼승이 주主와 반伴을 서로 이루어 법을 드러내는 분제를 보인다.

이른바 육상이란, 총상總相ㆍ별상別相ㆍ동상同相ㆍ이상異相ㆍ성상成相ㆍ괴상壞相이다. 총상이란 근본의 인(根本印)이다. 별상이란 나머지 굴곡들이니 별別이 인印을 의지하되 그 인印을 만족시키기 때문이다. 동상이란 인印이기 때문이니, 이른바 굴곡은 다르지만 한 가지 인印이기 때문이다. 이상이란 늘어나는 모습이기 때문이니, 이른바 첫 번째, 두 번째 등 굴곡들이 달라서 수가 늘어나기 때문이다. 성상이란 간략히 설하기 때문이니, 이른바 인印을 이루기 때문이다. 괴상이란 널리 설하기 때문이니, 이른바 번다하게 도는 굴곡들이 각각 스스로 달라서 본래 짓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모든 연緣으로 생겨난 법이 육상으로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다.

이른바 총상은 뜻이 원교에 해당하며, 별상은 뜻이 삼승교에 해당한다. 총상ㆍ별상ㆍ성상ㆍ괴상 등이 즉卽하지도 않고 여의지도 않으며, 하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아니하여 항상 중도에 있듯이,3) 일승과 삼승도 또한 이와 같다.

006_0791_c_01L眞實德用性在中道故字相如是
006_0791_c_02L上云因果不同 11) [102] 一家實德性在
006_0791_c_03L中道未知所由其義云何此義其
006_0791_c_04L實難解雖然依天親論主以六相方
006_0791_c_05L便立義分齊准義道理隨分可解
006_0791_c_06L約十句以辨六相如下說今且約印
006_0791_c_07L以明六相示一乘三乘主伴相成現
006_0791_c_08L法分齊第上之二第一張 所謂六相者
006_0791_c_09L捴相別相同相異相成相壞相
006_0791_c_10L相者根本印別相者餘屈曲別依止
006_0791_c_11L滿彼印故同相12) [103] 印故所謂曲別
006_0791_c_12L而同印故異相者增相故所謂第一第
006_0791_c_13L二等曲別增13) [104] 成相者略說故
006_0791_c_14L謂成印故壞相者廣說故所謂*盤廻
006_0791_c_15L屈曲各各自14) [105] 本來不作故一切緣
006_0791_c_16L生法無不六相成也所謂捴相者義
006_0791_c_17L當圓敎別相者義當三乘敎如捴相
006_0791_c_18L別相成相壞相等不即不離不一不異
006_0791_c_19L常在中道一乘三乘亦復如是主伴
006_0791_c_20L「文云」無有{甲}「何」下有「以」{甲}「繁」
006_0791_c_21L作「槃」又冠註曰槃疑繁{甲}
「現」作「顯」{甲}次
006_0791_c_22L
「法盡」作「盡法」{甲}「下」無有{甲}
006_0791_c_23L「盤」作「繁」 又冠註曰繁疑槃下同{甲}次同

006_0791_c_24L「義」無有{甲}
「故」無有{甲}「有」無有{甲}
006_0791_c_25L「而」無有{甲}
「者」下有▣又冠註曰▣疑入一
006_0791_c_26L本者印連續{甲}
「數」作「安」{甲}「則」無有
006_0791_c_27L{甲}

006_0792_a_01L주主와 반伴이 서로 도와 즉卽하지도 않고 여의지도 않으며, 하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으니, 비록 중생을 이롭게 하나 오직 중도에 있어서 주主와 반伴을 서로 이루어 법을 드러냄이 이와 같다. 일승의 별교別敎와 삼승의 별교도 뜻에 준하여 이해할 수 있다.

그대가 문의한 것도 뜻이 또한 이와 같다. 처음의 굴곡은 원인과 같고 뒤의 굴곡은 결과와 같다. 처음과 뒤가 같지 아니하나 오직 한가운데에 있는 것과 같이, 비록 원인과 결과가 뜻은 다르나 오직 스스로 그러함(自如)에 머무른다. 삼승의 방편의 가르침에 의하므로 높고 낮음이 같지 않으나, 일승의 원교에 의하므로 앞과 뒤가 없다. 까닭을 알 수 있는 것은 경에서 설하기를, “또 모든 보살에게 불가사의한 모든 부처님의 법의 광명을 설하여 지혜의 지地에 들어가게 하려는 까닭이다.”4)라고 한 것과 같다.

논에서 말한다.5)

‘모든 보살(一切菩薩)’이란 신信ㆍ행行ㆍ지地에 머무르는 이를 말한다. ‘불가사의한 모든 부처님의 법(不可思議諸佛法)’이란 출세간도의 덕목(出世間道品)이다. ‘광명(明)’이란 봄(見)과 지혜(智)와 얻음(得)과 깨달음(證)이다. ‘설한다(說)’는 것은 그 가운데서 분별하는 것이다. ‘들어간다(入)’란 믿고 좋아하며 얻고 깨닫는 것이다. ‘지혜의 지地’란 십지十地의 지혜를 말함이니, 본문 중에서 설한 것과 같다. 이것이 근본의 들어감(根本入)이니, 경에서 “또 모든 보살에게 불가사의한 모든 부처님의 법의 광명을 설하여 지혜의 지地에 들어가게 하려는 까닭이다.”6)라고 한 것과 같다.

이 경(修多羅)7) 중에 근본의 들어감(根本入)에 의하여 아홉 가지의 들어감(九種入)이 있음을 설하고 있다.
첫째는 포섭의 들어감(攝入)이다. 문혜聞慧 가운데 모든 선근을 포섭하기 때문이다. 경에서 “모든 선근을 포섭하(게 하려)는 까닭이다.”8)라고 한 것과 같다.
둘째는 생각하고 헤아림의 들어감(思議入)이다. 사혜思慧가 모든 도의 덕목(道品) 가운데 지혜의 방편이기 때문이다. 경에서 “모든 부처님의 법을 잘 분별해서 선택하(게 하려)는 까닭이다.”9)라고 한 것과 같다.
셋째는 법의 모양의 들어감(法相入)이다. 저러저러한 뜻(義) 가운데 한량없이 갖가지로 알기 때문이다. 경에서 “모든 법을 널리 알(게 하려)는 까닭이다.”10)라고 한 것과 같다.

넷째는 교화의 들어감(敎化入)이다. 생각하고 헤아린 것을 따라서 말(名字)이 갖추어져 법을 잘 설하기 때문이다. 경에서 “모든 법을 잘 결정하여 설하(게 하려)는 까닭이다.”11)라고 한 것과 같다.
다섯째는 깨달음의 들어감(證入)이다. 모든 법에 평등한 지혜가 견도見道하는 때에 매우 청정하기 때문이다.

006_0792_a_01L相資不即不離不一不異雖利益衆
006_0792_a_02L而唯在中道主伴相成 *現法如是
006_0792_a_03L一乘別敎三乘別敎准義可解汝所
006_0792_a_04L問疑義亦如是初曲如因 1) [106] 曲如果
006_0792_a_05L如初後不同而唯在當中雖因果義別
006_0792_a_06L而唯住自如依三乘方便敎門故高下
006_0792_a_07L不同依一乘圓敎故無有前後所以
006_0792_a_08L得知如經說又一切菩薩不可思議諸
006_0792_a_09L佛法明說令入智2) [107] [123] 地故論曰一切
006_0792_a_10L菩薩者謂住信行地不可思議諸佛法
006_0792_a_11L是出世間道品明者見智得3)
006_0792_a_12L於中分別入者信樂得訂智*惠地
006_0792_a_13L謂十地智如本分中說此是根本
006_0792_a_14L如經又一切菩薩不可思議諸佛法
006_0792_a_15L明說令入智*惠地故此脩多羅中
006_0792_a_16L依根本入有九種入一者攝入聞*惠
006_0792_a_17L中攝一切善根故如經攝一切善根故
006_0792_a_18L二者思議入思*惠於一切道品中智
006_0792_a_19L方便故第上之二第二張 如經善分別
006_0792_a_20L選擇一切佛4) [108] 三者法相入彼彼義中
006_0792_a_21L無量種種知 [124] 如經廣知諸法故四者
006_0792_a_22L敎化入隨所思5) [109] 名字具足善說法
006_0792_a_23L如經6)決定 [110] 說諸法故五者訂入
006_0792_a_24L於一切法平等智見道時中善淸淨故

006_0792_b_01L경에서 “무분별한 지혜가 청정하여 잡되지 않(게 하려)는 까닭이다.”12)라고 한 것과 같다. 보살이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 곧 스스로 불법을 이루는 것이니, 그러므로 남을 이롭게 하는 것(利他) 또한 자기를 이롭게 하는 것(自利)이라고 이름한다.

여섯째는 게으르지 않음의 들어감(不放逸入)이다. 수도修道하는 때 가운데 모든 번뇌의 장애를 멀리 여의기 때문이다. 경에서 “일체 마법魔法이 능히 물들이지 못하(게 하려)는 까닭이다.”13)라고 한 것과 같다.
일곱째는 지地에서 지地로 옮김의 들어감(地地轉入)이다. 세간을 벗어나는 도의 덕목인 무탐無貪 등의 선근이 청정하기 때문이다. 경에서 “세간을 벗어나는 법인 선근을 청정하(게 하려)는 까닭이다.”14)라고 한 것과 같다. 다시 선근이 있어서 세간을 벗어나는 도의 덕목의 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덟째는 보살로서 다함의 들어감(菩薩盡入)이다. 제십지第十地 가운데 모든 여래의 비밀스러운 지혜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경에서 “불가사의한 경계를 얻(게 하려)는 까닭이다.”15)라고 한 것과 같다.
아홉째는 부처로서 다함의 들어감(佛盡入)이다. 일체의 지혜에 들어가는 지혜이기 때문이다. 경에서 “내지 일체의 지혜를 (갖춘) 사람의 지혜의 경계를 얻(게 하려)는 까닭이다.”16)라고 한 것과 같다.
이 모든 들어감(諸入)은 지혜의 뜻의 차별을 비교한 것이니 차례로 더욱 뛰어나지만 근본의 들어감(根本入)은 아니다.

일체 설한 바 열 구절(十句) 가운데 모두 여섯 종류의 차별 모양의 문이 있으니 이것은 언설의 해석이다. 마땅히 사事는 제외됨을 알아야 하니, 사事란 오온(陰)ㆍ십팔계(界)ㆍ십이처(入) 등이다.
여섯 종류의 모양은 총상ㆍ별상ㆍ동상ㆍ이상ㆍ성상ㆍ괴상이다. 총상은 근본의 들어감이고, 별상은 나머지 아홉 가지 들어감이니, 별別이 근본(本)을 의지하되 그 근본을 만족시키기 때문이다. 동상은 들어감이기 때문이고, 이상은 늘어나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성상은 간략히 설하기 때문이고, 괴상은 널리 설하기 때문이니, 세계가 이루어지고 무너지는 것과 같다. 나머지 모든 열 구절(十句) 가운데도 뜻을 따라 미루어 알 수 있을 것이다.17)

논의 글이 이와 같으니, 오직 논주가 근본(宗)을 세운 도리이다. 그러므로 알라. 비록 원인과 결과인 신信ㆍ해解ㆍ행行ㆍ회향廻向ㆍ지地ㆍ불佛이 자기 자리를 움직이지 아니하되 앞과 뒤가 없다. 무슨 까닭인가? 모든 법이 각각 달라서 스스로 여여如如함에 머무르기 때문이며, 하나의 여여함(一如)과 많은 여여함(多如)의 여여한 모양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묻는다. 무엇이 부처님의 법을 깊이 믿는 것인가?

006_0792_b_01L如經無分別智淸淨不7) [111] 菩薩敎化
006_0792_b_02L衆生即是自成佛法是故利他亦名
006_0792_b_03L自利六者不放逸入於脩道時中
006_0792_b_04L離一切8)煩惱 [112] [125] 如經一切魔法
006_0792_b_05L能染故七者地地轉入出世間道品
006_0792_b_06L貪等善根淨故如經出世間法善根
006_0792_b_07L淸淨故復有善根能爲出世間道品因
006_0792_b_08L八者菩薩盡入9)弟十地10) [113]
006_0792_b_09L一切如來秘密智故如經得不可思議
006_0792_b_10L境界故九者佛盡入於一切智11) [114]
006_0792_b_11L智故如經乃至得一切智12) [115] 智境界故
006_0792_b_12L是諸入爲13) [116] 量智義差別次*弟轉勝
006_0792_b_13L非根本入一切所說十句中皆有六種
006_0792_b_14L差別相門此言說解釋應知除事
006_0792_b_15L謂陰界入等14) [117] 相者謂捴相別
006_0792_b_16L15) [118] 16)同相異相 [119] 成相壞相捴相者是根
006_0792_b_17L本入別相者餘九17) [120] 別依止本滿彼
006_0792_b_18L本故同相者入故異相者增相故
006_0792_b_19L相者略說故壞相者廣說故如世界成
006_0792_b_20L18) [121] 餘一切十句中隨義類知論文
006_0792_b_21L如是 19) [122] 是論主立宗道理故知雖因
006_0792_b_22L果信解行廻地佛自位不動而無前後
006_0792_b_23L20) [123] 21) [124] 諸法各異住自如故一如
006_0792_b_24L多如如如相不可得故是故經云

006_0792_c_01L답한다. 일체 모든 법이 오직 부처님만 아시는 바이고 나의 경계가 아니니, 만약 이러하다면 이름이 부처님의 법을 깊이 믿음이 된다.”18)라고 하니, 이것이 그 뜻이다.

육상六相은 무슨 뜻을 나타내기 위한 것인가?
연기의 무분별한 도리를 바로 나타내기 위한 까닭이다. 이 육상의 뜻으로써 비록 한 부의 경전(一部經)19)이 일곱 장소와 여덟 번의 모임과 품의 종류가 같지 않으나, 오직 「십지품十地品」에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까닭이 무엇인가? 이 근본이 법을 모두 포섭하기 때문이다. 「십지품」 가운데 비록 십지十地가 같지 않으나 오직 첫째 지(初地)에 있다.
무슨 까닭인가? 한 지地에서 일어나지 않고 널리 일체 모든 지地의 공덕을 포섭하기 때문이다.

한 지地 중에도 비록 많은 부분이 같지 않으나 오직 일념一念에 있다. 무슨 까닭인가? 삼세三世와 구세九世가 곧 일념이기 때문이니, 일체가 곧 하나인 까닭이다. 일념처럼 다념多念도 또한 이와 같다. 하나가 곧 일체이니 일념이 곧 다념 등인 것이다. 앞과 반대로 해도 곧 옳다.

이 이법(理)으로써 다라니법은 주主와 반伴이 서로 이루어진다. 한 법 듦을 따라서 일체를 다 포섭한다. 만약 모임(會)을 기준으로 설하면, 모임ㆍ모임 가운데 일체를 다 거둔다. 만약 품品을 기준으로 설하면, 품ㆍ품이 일체를 다 포섭하며, 내지 만약 문장을 기준으로 설하면 문장ㆍ문장과 구절ㆍ구절이 일체를 다 포섭한다. 무슨 까닭인가? 만약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며, 다라니의 법이 으레 그러하기 때문이다. 아래에서 설하는 것과 같다.

006_0792_c_01L云何深信佛法一切諸法唯佛所知
006_0792_c_02L第上之二第三張 非我境界若如是者
006_0792_c_03L名爲深信佛法是其義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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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相者爲*現何義22) [125] *現綠起
006_0792_c_05L無分別理故以此六相義故當知雖一
006_0792_c_06L部經七處八會及品類不同而唯在地
006_0792_c_07L所以者何23) [126] 是根本攝法盡故
006_0792_c_08L品中雖十地不同而唯在初地何以故
006_0792_c_09L不起一地普攝一切諸地功德故一地
006_0792_c_10L中雖多分不同而唯在一念何以故
006_0792_c_11L三世九世即一念故一切即一故如一
006_0792_c_12L多念亦如是一即一切一念即多
006_0792_c_13L念等反前即是以此理故陁羅尼
006_0792_c_14L主伴相成隨擧一法盡攝一切
006_0792_c_15L約會說會會中盡攝一切若約品說
006_0792_c_16L品品盡攝一切乃至若約文說文文句
006_0792_c_17L盡攝一切何以故若無此彼不成
006_0792_c_18L「後」上有「乃至」{甲}「惠」作「慧」{甲}次同
006_0792_c_19L
「訂」通「證」於此書{編}次同「法」下有「故」
006_0792_c_20L{甲}
「議」作「義」{甲}「決定」無有{甲}「雜」
006_0792_c_21L作「離」{甲}
「煩惱」作「菩薩」{甲}「弟」作「第」
006_0792_c_22L{甲}{乙}次同
「中」無有{甲}冠註曰入一作人
006_0792_c_23L次同{甲}
「人」作「入」{甲}「挍」作「校」{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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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種」下有「差」{甲}冠註曰相下疑脫同相異
006_0792_c_25L相四字{甲}
「同相異相」無有{甲}「入」無有
006_0792_c_26L{甲}
「壞」下有「故」{甲}「准」作「唯」{甲}
006_0792_c_27L註曰何下入以字見{甲}
「以」無有{甲}「正」無
006_0792_c_28L有{甲}
「以」無有{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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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석문釋文 1 (總釋印意ㆍ別解印相 중 說印文相, 明字相)
〔1〕 도인의 뜻(印意)
‘어째서 도인에 의거하였는가?’부터 ‘불ㆍ보살이다’까지20)

진수기
『진기』에 이른다.
‘어째서 도인에 의거하였는가? 답한다. 석가여래의 가르침의 그물에 거두어지는 등을 나타내고자 함’이란, ‘석가여래의 가르침의 그물’은 곧 깊고 얕음이 비록 다르나 이름과 모습이 있는 세계를 총체적으로 취하여 이른 것이다.

() ‘세 가지 세간이 해인삼매로부터 번다하게 나타난 것’에서 세 가지 세간의 법이 번다하게 나온 것은 곧 해인의 체를 여읜 것인가?
세 가지 세간의 법이 곧 해인이니 전체가 나타나서 본래 여의지 않은 것이다.
세 가지 세간을 거두어서 총상의 부처님으로 삼는다면, 총상과 별상이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네 가지 세간이 되는 것인가?
지정각세간에는 남을 상대하는 뜻이 있으며 상대를 끊은 뜻이 있다. 이 두 가지 뜻이 하나가 아님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네 가지 세간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두 가지 뜻이 다르지 않음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다만 세 가지 세간이라고 한 것이다.

기器와 중생은 마땅히 세간이라고 하겠으나 지정각은 이미 세간을 벗어난 것인데 어찌 세간이라고 하는가?
비로소 정각을 이룬 때(時) 가운데(中) 세 가지 세간의 법이 두렷이 밝게 나타나기 때문에 세간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때(時)는 세世이고 가운데(中)는 간間이기 때문이다.
지상至相 스님은 보살로 중생에 합하였는데21) 무슨 까닭에 여기에서는 불ㆍ보살을 합하여 지정각으로 삼는가?
깨달음이 같음을 기준으로 해서 이르는 것일 뿐이다.
〔2〕 도인의 모습(印相)
1. 도인의 모습(印文相) 何故印文現一乘故
‘어째서 도인에’부터 ‘일승을 나타내기 때문이다’까지22)

何故印文現一乘故
대기
『대기』에 이른다. ‘어째서 도인에 오직 한 길만 있는가?’란 네 번째 해인23)에 서서 이 질문을 일으킨 것이다. 말하자면 이미 근기와 욕망에 따라서 굴곡을 이루었다면 어째서 한 길이라고 하는가라고 이렇게 물은 것이다. ‘여래의 일음’이란 「입법계품」에 이르기를, “나는 법계가 한 성품임을 아니 여래의 일음一音을 일체중생이 요달하지 못함이 없기 때문이다. 이상.24)라고 한 것이다.

006_0793_a_01L陁羅尼法法如是故如下說

006_0793_a_02L[註釋]
[印意]
何故依印至佛菩薩也眞記云何故
006_0793_a_03L依印答欲表釋迦如來敎網所攝等
006_0793_a_04L釋迦敎網則深淺雖殊有名相
006_0793_a_05L捴取云也三種世間從海印三昧
006_0793_a_06L繁出現現者三世間法繁出則離海
006_0793_a_07L印體耶三世間法即是海印全
006_0793_a_08L體現現本不離也攝三世間爲捴
006_0793_a_09L相佛則捴別不一故爲四世間耶
006_0793_a_10L智正覺中有待他之義有絶待義
006_0793_a_11L約此二義不一故亦可得云四種世
006_0793_a_12L然約二義不異故但云三種世間
006_0793_a_13L器及衆生冝云世間智正覺者
006_0793_a_14L旣已出世何云世間耶始成正覺
006_0793_a_15L時中三世間法圓明現現故云世
006_0793_a_16L謂時爲世中爲間故也至相
006_0793_a_17L以菩薩合於衆生何故此中合佛菩
006_0793_a_18L薩爲智正覺耶約覺同云耳第上
006_0793_a_19L之二第四張

006_0793_a_20L[印相]
何故印文 現一乘故大記云何故
006_0793_a_21L印文唯有一道者立在1)弟四重海印
006_0793_a_22L起此問也謂旣隨根欲而成屈曲
006_0793_a_23L故云一道耶如是問也如來一音者
006_0793_a_24L法界品云我知法界一性如來一音

006_0793_b_01L
만약 일체중생이 일음을 이해한다면 이는 각각 이해함이 아니고, 만약 각각 이해한다면 일음을 이해하지 못함이 없는 것이 아니다. 운운.
() 만약 이러한 힐난에 상대한다면 총상과 별상 둘로써 답한다. 말하자면 굴곡을 무너뜨리지 않고 능히 평등하게 두루하기 때문에 일음이며, 평등하게 두루함을 움직이지 않고 운율이 차이나기 때문에 능히 굴곡을 이룬다. 이 가운데 능히 평등하게 두루함을 이루는 것은 총상이다. 음의 운율이 차이나는 것은 별상이다. 별상이 곧 총상인 까닭에 비록 중생이 각각 이해하나 일음을 이해한다. 총상이 곧 별상인 까닭에 비록 일음이나 각각 이해한다.

진수기
『진기』에 이른다. 여래의 일음이란 총상의 음이다. 『입법계품』에 이르기를, “나는 법계가 한 성품임을 아니, 여래의 일음 운운.25)이라 하였다. 이 뜻은 일체중생의 갖가지 차별 있는 음성 등이 곧 여래의 일음일 뿐인 것이다.
이는 수호야신 선지식이 일음을 깨달아 보고서 “나는 법계가 한 성품임을 안다.”라고 한 것인데 무슨 까닭에 일체중생이라고 하는가? 만약 일체중생을 본다면 어째서 “나는 법계가 한 성품임을 안다.”라고 하는가?
법계가 한 성품임을 보기 때문에 일음 가운데 일체의 종류가 있음을 안다. 총상을 얻음으로써 나뉘지 않는 별상을 알기 때문이다. ‘집’이라는 한마디 말이 기둥을 세우고 대들보를 걸치는 모든 연을 합해서 부르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만약 세우고 걸치는 모든 연에 맞지 않는다면 ‘집’이라는 한마디 말이 어디에서 일어나겠는가?

법융기
『법기』에 이른다. ‘구불구불 돌고 돌아 구부러지고 굽어져서’라는 것은,
() 이미 법계가 한 성품임을 알았다면 삼승이 없으므로 따라서 또한 도인 중에 각곡角曲이 없는 것인가?
이상이 있기 때문에 성품에 들어맞는 움직이지 않는 각곡이 있다.
만약 그렇다면 삼승이 있는 것인가?
일승의 각곡이 온전히 도인의 원만함을 다하므로 따라서 삼승의 한 쪽으로 치우친 각곡은 없다.

006_0793_b_01L一切衆生無不了故已上若一切衆
006_0793_b_02L生了一音者非是各得解也若各得
006_0793_b_03L解者非是一音無不了也云云 若對
006_0793_b_04L此難以摠別二相答也謂不壞屈曲
006_0793_b_05L而能等遍故是一音不動等遍而差
006_0793_b_06L韵故能成屈曲此中能成等遍者
006_0793_b_07L摠相也音韵差者別相也別即摠
006_0793_b_08L雖衆生各得解而了一音也
006_0793_b_09L即別故雖是一音而各解也

006_0793_b_10L
眞記云如來一音者摠相音也
006_0793_b_11L界品云我知法界一性如來一音云云
006_0793_b_12L此義者一切衆生種種差別音聲等
006_0793_b_13L即是如來一音耳問此守護夜神善
006_0793_b_14L知識訂見一音云我知法界一性也
006_0793_b_15L何故云一切衆生耶若見一切衆生
006_0793_b_16L何云我知法界一性耶答見法界
006_0793_b_17L一性故知一音中有一切種也以得
006_0793_b_18L摠相知不分之別相故如家之一言
006_0793_b_19L契柱立梁橫諸綠而呼故也若不契
006_0793_b_20L立橫諸綠則家之一言何處起耶

006_0793_b_21L
法記云盤廻屈曲者旣知法界一性
006_0793_b_22L則無三乘故亦無印中角曲耶
006_0793_b_23L異相故有稱性不動之角曲也
006_0793_b_24L有三乘耶一乘角曲全盡印

006_0793_c_01L
진수기
『진기』에 이른다. ‘훌륭하고 교묘한 (방편)은 (일정한) 방법이 없어서’란 치우쳐 따르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앞의 ‘(일정한) 방법이 없다’에서 풀이한 것과 같다.26) ‘법계에 응하여 들어맞고’란 법계를 가로로 다하기 때문이고, ‘십세에 상응하여’란 삼세(三際)를 세로로 꿰뚫기 때문이다.

법융기
『법기』에 이른다. ‘원융만족’이란 마치 허공이 일체의 사물을 거두어들이는 것과 같다. 이 하나의 기둥을 기준으로 하면 열 가지 보법을 포섭하여 남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법장』에서 이르기를, “모든 부처님의 훌륭하고 교묘한 (방편은) 법계를 융회하되 원통자재하여 보고 들음(見聞)을 떠나지 않는다. 이상.27)라고 하였다. 일승 가운데는 보고 듣는 것이 원통의 법이므로 견문見聞의 지위에서 바로 구경의 부처님의 과위를 만족하게 되므로 ‘보고 들음을 떠나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진수기
『진기』에 이른다. ‘뜻은 원교에 해당한다’란 (다음과 같다.) 삼승별교와 삼승동교가 있고 일승동교와 일승별교가 있으며 일승원교가 있다. 만약 누각(樓觀)을 취하여 논한다면, 안의 장식莊飾은 일승이고 밖의 엄식嚴飾은 삼승이며 문은 곧 동교이다. 이른바 문이란 안과 밖에 통하기 때문에 안이 비록 일승이라도 문 안은 곧 동교일승이다.28) 또 이 동교는 삼승 이상의 뜻을 기준으로 하면 즉 별교일승이 되는 것 또한 가능하니, 목표로 하는 것(所目)을 기준으로 하여 별교를 삼기 때문이다.

목표로 하는 것(所目)의 삼승은 뜻이 밖에 해당하니 장엄하는 것이 삼승인데 어째서 별교일승이라고 하는가?
이 경 안의 흘러나오는 것(所流)과 목표로 하는 것(所目)의 삼승이 두 가지 뜻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첫째는 저 아래 근기로 하여금 나의 법과 같다고 헤아리게 하는 뜻이며,

006_0793_c_01L故無三乘一邊之角曲也

006_0793_c_02L
眞記云善巧無方者無偏順之方所
006_0793_c_03L如前無方中釋也應稱法界者
006_0793_c_04L第上之二第五張 橫盡法界故十世
006_0793_c_05L相應者竪貫三際故也

006_0793_c_06L
法記云圓融滿足者猶如虛空攝
006_0793_c_07L一切物約此一柱包攝十種普法
006_0793_c_08L所遺餘故也是故普法章云諸佛善
006_0793_c_09L會融法界圓通自在不離見聞已上
006_0793_c_10L以一乘中見聞圓通之法故見聞位
006_0793_c_11L即得滿足究竟佛果故云不離見
006_0793_c_12L聞也

006_0793_c_13L
眞記云義當圓敎者有三乘別敎
006_0793_c_14L三乘同敎有一乘同敎一乘別敎
006_0793_c_15L有一乘圓敎也若就樓觀而論者
006_0793_c_16L莊一乘外嚴三乘門則同敎也所謂
006_0793_c_17L門者通內外故內雖一乘而門內
006_0793_c_18L則同敎一乘也又此同敎約三乘已
006_0793_c_19L上之義即爲別敎一乘亦得以約所
006_0793_c_20L目爲別敎故所目三乘義當於外
006_0793_c_21L是嚴三乘何云別敎一乘耶
006_0793_c_22L經之內所流所目之三乘具含二
006_0793_c_23L一者令彼下機計謂同於我法之
006_0793_c_24L「弟」作「第」{乙}次同

006_0794_a_01L둘째는 그들로 하여금 자신이 얻은 법이 온전히 화엄의 큰 허공임을 알도록 하는 뜻이다. 처음 뜻을 기준으로 하면 문 밖에 해당하기 때문에 삼승이니 바깥의 엄식이 된다. 뒤의 뜻을 기준으로 하면 문 안에 해당하기 때문에 일승이니 안의 장식이 된다. 지금은 뒤의 뜻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목표로 하는 것으로 동교일승을 삼으며 내지 별교일승이라고 이름할 뿐이다. 바로 누각의 안을 기준해야만 비로소 자체의 별교일승이다. 맨 처음부터 삼승을 보지 않기 때문에 자체의 별교라고 하는 것이다.

‘원교’란 앞의 사교四敎를 통틀어 행하는(履) 것이다.
이것은 곧 저 동교의 일승과 삼승이 화합하는 뜻과 어떻게 다른가?
아래 근기를 (자기에게) 이끌어 화합시키고자 하는 것은 동교이다. (삼승을) 자신의 참된 덕으로 삼아 통틀어 행하고자 하는 것은 원교이다. 따라서 옛사람이 이르기를, “동교는 대지와 같으니 삼승의 풀과 나무를 기르기 때문이고, 별교는 큰 바다와 같으니 삼승의 죽은 시체를 머무르게 하지 않기 때문이며, 원교는 허공과 같으니 (대지와 큰 바다) 둘의 의지하는 바가 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고기

‘고기’에 이른다. 동교와 별교가 나뉨이 아홉 가지가 있다. 말하자면 첫째, 황소의 수레는 동교이니 양과 사슴(의 수레)과 같기 때문이다. 큰 흰 소의 수레는 별교이니 삼승의 밖이기 때문이다. 둘째, 큰 흰 소의 수레는 동교이고 왕의 상투 중의 구슬(王髻中珠)29)은 별교이다. 운운. 셋째, 법화는 동교이고 화엄은 별교이다. 운운. 넷째, 제2회부터 「여래수호광명공덕품如來隨好光明功德品」30)까지는 동교이고, 「보현행품」 이후는 별교이다. 운운. 다섯째, 보현의 말을 나타냄은 문자에 떨어져 있기 때문에 동교이고, 보현의 안으로 증득함은 문자를 여의고 언설을 끊었기 때문에 별교이다.

여섯째, 보현의 안으로 증득함은 인분因分이기 때문에 동교이고, 부처님의 밖으로 향하심은 과분果分이기 때문에 별교이다.

006_0794_a_01L二者令彼解其自所得法全是花
006_0794_a_02L嚴大虛之義也約初義則當於門外
006_0794_a_03L故是三乘爲外嚴也約後義則當於
006_0794_a_04L門內故是一乘爲內莊也今約後義
006_0794_a_05L以所目爲同敎一乘乃至亦名別
006_0794_a_06L敎一乘耳直約樓觀之內方自體別
006_0794_a_07L敎一乘也初初不見三乘故云自體
006_0794_a_08L別敎也圓敎者通履前四敎也
006_0794_a_09L是則與彼同敎一三和合之義何異
006_0794_a_10L欲引下機而和合者是同敎也
006_0794_a_11L欲爲自家實德而通履者是圓敎也
006_0794_a_12L故古人云同敎如大地長養三乘草
006_0794_a_13L木故別敎如大海不宿三乘死尸故
006_0794_a_14L第上之二第六張 圓敎如虛空爲二
006_0794_a_15L所依故也

006_0794_a_16L
古記云同敎別敎分有九種
006_0794_a_17L一黃牛車同共羊鹿故大白牛車
006_0794_a_18L三乘外故二大白牛車同
006_0794_a_19L髻中珠別云云 三法花同花嚴別
006_0794_a_20L云云四*弟二會至隨好品同
006_0794_a_21L賢行品以去別云云 五普賢現語
006_0794_a_22L墮在文字故同普賢內訂離文
006_0794_a_23L字絶言說故別六普賢內訂是因
006_0794_a_24L分故同佛外向是果分故別七佛

006_0794_b_01L일곱째, 부처님의 밖으로 향하심은 근기와 연(機緣)을 향하기 때문에 동교이고, 부처님의 안으로 향하심은 곧 비록 화엄삼매 속에서 과덕의 대중을 위하여 국토의 바다와 같은 법을 보이셨지만 인분의 근기를 등지고 여의었기 때문에 별교이다. 여덟째, 부처님의 안으로 향하심은 등짐과 향함이 있기 때문에 동교이고, 해인삼매 속의 법성을 설할 수 없음은 등짐과 향함을 여의었기 때문에 별교이다. 아홉째, 위에서부터 밝혀 온 설함과 설할 수 없음 등은 우수함과 열등함, 깊음과 얕음이 있기 때문에 동교이고, 이 해인삼매의 법성을 설할 수 없는 가운데 설함과 설할 수 없음은 둘이 없으니 곧 분별이 없기 때문에 별교이다.

의상 화상이 이르기를, “만약 정情을 기준으로 하여 설한다면 증분과 교분의 두 법이 항상 두 변에 있게 되나, 만약 이법(理)을 기준으로 하여 말한다면 증분과 교분의 두 법이 예부터 중도中道이며, 하나로서 무분별이다.”31)라고 한 것이 대개 이를 일컫는 것이다. 이상은 우선 이법의 분제를 기준으로 한 것이고, 만약 글의 뜻의 분제에 의거한다면 같고 다름이 하나가 아니다. 말하자면 한 부(의 『화엄경』)을 통틀어서 이를 나누면, 곧 차별의 연은 동교이고 본래의 진실은 별교이다. 만약 하나의 교화의 처음과 끝에 의거한다면, 곧 여러 많은 다른 뜻을 하나의 말로 통틀어 제목하기 때문에 동교이고, 근기에 따라서 각각 다르기 때문에 별교이다.

대기
『대기』에 이른다. ‘사섭법과 사무량심’이란 (다음과 같다.) 이 사섭법과 사무량심의 두 가지 네 인과로써 아래 사교의 인과인 여덟 지위를 나타낸다. 만약 73개의 도장 가운데 일一 자의 도장으로 그것을 도장 찍으면 곧 이 여덟 인과의 지위를 움직이지 않음이 곧 일승의 곁이 없는 인과이다. 이 일승의 인과로 앞의 여덟 (인과)에 더하면 곧 열이 된다. 다섯 인因은 보살이고 다섯 과果는 부처님이다. 그 네 부처님으로 사방에 나누어 배치하고 일승의 부처님으로 한가운데에 안치한다. 다섯 보살로 나누어 배치하는 것 또한 이러하다. 이와 같은 인과가 다만 내 마음 안에 본래 갖추어져 있는 법일 뿐이다.

006_0794_b_01L外向向機綠故同佛內向則雖花
006_0794_b_02L嚴定中爲果德衆示國土海法
006_0794_b_03L背離因機故別八佛內向有背向
006_0794_b_04L故同海印定中法性不可說離背
006_0794_b_05L向故別九上來所明說不說等
006_0794_b_06L勝劣深淺故同此海印定法性不
006_0794_b_07L可說中說不說無二則無分別故別
006_0794_b_08L相和尙云若約情說訂敎
006_0794_b_09L兩法常在二邊若約理云訂敎
006_0794_b_10L兩法舊來中道一無分別蓋謂
006_0794_b_11L此乎上來且約理分若據文義分
006_0794_b_12L同別非一謂通於一部分之
006_0794_b_13L則差別綠同敎本實則別敎若據
006_0794_b_14L一化始終則衆多別義一言通目
006_0794_b_15L故同隨機各別故別也

006_0794_b_16L
大記云四攝四無量者以此四攝四
006_0794_b_17L無量之二四因果表下四敎因果八
006_0794_b_18L若以七十三印之中一字印印之
006_0794_b_19L則不動此八因果之位即是一乘無
006_0794_b_20L側因果也第上之二第七張以此一乘
006_0794_b_21L因果加於前八即成十也五因是
006_0794_b_22L菩薩五果是佛也以其四佛分置四
006_0794_b_23L以一乘佛安置當中以五菩薩
006_0794_b_24L置亦爾如是因果但我心內本具之

006_0794_c_01L
이 중에 사방 및 육방, 팔방, 시방 등은 삼승에 의거하여 나눈 것이다. 말하자면 성문은 사제四諦를 밝히기 때문에 이에 의거하여 사방으로 나눈다. 연각은 12지(연기)를 관하니 이는 2 곱하기 6이기 때문에 이에 의거하여 육방으로 나눈다. 시교와 종교 가운데 통틀어서 사섭법과 사무량심이 있으니 2 곱하기 4는 곧 8이기 때문에 이에 의거하여 팔방으로 나눈다. 동교에는 곧 그 같음 중에 별교의 10 곱하기 10의 다함없는 뜻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이에 의거하여 시방으로 나눈다. 만약 머무름 없는 별교를 기준으로 하면 곧 본래 방소方所가 없다. 이런 까닭에 글에 이르기를 “훌륭하고 교묘한 (방편)은 (일정한) 방법이 없다.”라고 하며 내지 “뜻은 원교에 해당한다.”라고 한 것이다.

시교와 종교의 두 가르침도 또한 시방을 밝히는데 무슨 까닭에 오직 팔방이라고 이르는가?
이것은 여덟 잎의 궤칙32)을 기준으로 하여 이른 것일 뿐이다. 또 시교와 종교에서는 통틀어 사섭의 인과 등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팔방으로 나눈 것뿐이다.
만약 돈교 중의 인과를 함께 취하면 돈교에서도 또한 팔방으로 나누는가?
실제를 기준으로 하면 통한다. 그러나 인과는 지위이니 돈교 중에서는 지위의 모습이 숨어 있기 때문에 우선 제외했을 뿐이다.
무엇이 여덟 잎의 궤칙인가?
이것은 『비로자나경毘盧遮那經』33)과 『불지경佛地經』34) 중의 여덟 잎으로 부처님을 짓는 궤칙이다.

‘삼승에 의거하여 일승을 나타낸 것이다’란 (다음과 같다.) 일승의 원만한 도인에는 비록 각角과 면面이 없지만 이 도인이 일체의 법을 거두어서 다하기 때문에 네 면과 네 각의 모습을 갖추니, 삼승에서 사방ㆍ육방ㆍ팔방ㆍ시방 등으로 나눔으로써 일승의 방소가 없는 원만한 도인을 점차로 나타내기 때문이다. 만약 오직 각과 면만을 본다면 오로지 삼승일 뿐이고, 오직 원만한 도인만을 본다면 오로지 일승일 뿐이다. 만약 각과 면에 의거하여 원만한 도인을 본다면 곧 동교이다. 그래서 ‘삼승에 의거하여 일승을 나타낸다’라고 한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앞의 굴곡도

006_0794_c_01L法也此中四方及六方八方十方等
006_0794_c_02L依三乘分也謂聲聞明四諦故依此
006_0794_c_03L分四方緣覺觀十二支而是二六
006_0794_c_04L依此分六方始終敎中通有四攝
006_0794_c_05L四無量而二四即八故依此分八方
006_0794_c_06L同敎中即其同中含有別敎十十無
006_0794_c_07L盡義故依此分十方也若約無住別
006_0794_c_08L則本無方也是故文云善巧無
006_0794_c_09L乃至云義當圓敎也始終二
006_0794_c_10L亦明十方何故唯云八方耶
006_0794_c_11L此約八葉之軌云耳又始終敎中
006_0794_c_12L約四攝因果等故分八方耳若并
006_0794_c_13L取頓敎中因果則頓敎中亦分八方
006_0794_c_14L約實則通然因果是位頓敎
006_0794_c_15L之中位相隱故且除耳何是八葉
006_0794_c_16L軌耶此是毗盧遮那經及佛地經
006_0794_c_17L八葉作佛之軌也依三乘現一乘
006_0794_c_18L一乘圓印雖無角面此印攝盡
006_0794_c_19L一切法故具其四面四角相以分三
006_0794_c_20L乘四方六方八方十方等漸現一乘
006_0794_c_21L無方之圓印故也若唯見角面則一
006_0794_c_22L向三乘唯見圓印則一向一乘
006_0794_c_23L依角面見圓印則是同敎也故云依
006_0794_c_24L三乘現一乘也若爾前之屈曲

006_0795_a_01L혹 오직 굴곡만을 본다면 오로지 삼승이나, 혹 굴곡에 의거하여 원만한 도인을 본다면 또한 삼승에 의거하여 일승을 나타내는 것인가? 이 각과 면은 곧 동교이고 앞의 굴곡은 다만 삼승에 따로 집착하는 것인가?
굴곡 또한 한 길로 된 붉은 도인의 능히 따르는 덕이기 때문에, 그래서 또한 삼승에 의거하여 일승을 나타내는 뜻이 있다.
2. 글자의 모습(字相) : 육상원융 何故字中性在中道
‘어째서 글자 중에’부터 ‘성性이 중도에 있음’까지35)

법융기
『법기』에 이른다.
“() 어째서 글자 중에 시작과 끝이 있는가? 수행의 방편을 기준으로 하여 원인과 결과가 같지 않음을 드러낸다.”란, 말한 바 수행방편은 일승의 수행인가, 삼승의 수행인가?
다만 삼승의 수행방편일 뿐이다.
무슨 까닭에 일승에는 수행방편이 없는가?
일승에는 원인과 결과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무슨 까닭에 아래에서 “원인과 결과의 두 자리가 법성의 집 안의 진실한 덕용이며, 성性이 중도에 있다.”라고 하는가?
다만 삼승의 원인이 먼저이고 결과가 나중이라고 집착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원인과 결과가 동시인 뜻을 나타내는 까닭에 말한 것일 뿐이다. 만약 실제를 기준으로 하여 말한다면 이 종宗 중에는 원인과 결과의 이름이 없다.

만약 그렇다면 결과를 온전히 한 원인과 원인을 온전히 한 결과도 또한 없는가?
그렇다. 그래서 지상 스님이 이르기를, “원인은 결과와 다름이 없는 원인이고, 결과는 원인과 다름이 없는 결과이다. 그러나 인과의 명칭은 연緣에 기대어 나타나는 것이니 줄어들거나 가득 차는 것이 저로부터이고 나36)에게서 됨은 없다.”37)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일승에 곁이 없는 인과(無側因果)도 또한 세우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도인의 오십사각이 하나하나가 도인의 원만함을 온전히 다함이 이와 같다면 도인을 온전히 한 각도 또한 버려야만 하는가?
만약 우리의 종宗을 기준으로 한다면 이와 같은 일이 없으니 어찌 다시 버리겠는가? 증분 가운데는 원인과 결과, 증분과 교분, 일승과 삼승, 동교와 별교 등의 일이 없기 때문이다.

006_0795_a_01L若唯見屈曲則一向三乘若依屈
006_0795_a_02L曲見圓印則亦是依三乘現一乘耶
006_0795_a_03L此角面則是同敎也前之屈曲但是
006_0795_a_04L別執三乘耶屈曲亦是一道朱印
006_0795_a_05L之能隨之德故第上之二第八張
006_0795_a_06L以亦有依三現一之義也

006_0795_a_07L
何故字中 性在中道法記云何故
006_0795_a_08L字中有始終耶答約修行方便現因
006_0795_a_09L果不同者所言修行方便則一乘修
006_0795_a_10L行耶三乘修行耶但是三乘修行
006_0795_a_11L方便耳何故一乘無修行方便耶
006_0795_a_12L以一乘中無因果故若尒何故
006_0795_a_13L下云因果兩位法性家內眞實德用
006_0795_a_14L性在中道耶只爲三乘執因先果
006_0795_a_15L後之人現因果同時義故云耳若約
006_0795_a_16L實云此宗之中無因果名若尒
006_0795_a_17L全果之因全因之果亦無耶尒也
006_0795_a_18L故至相云因無異果之因果無異因
006_0795_a_19L之果然因果之稱寄現於綠虧盈
006_0795_a_20L自彼於我無爲故知一乘無側因果
006_0795_a_21L亦不立也印之五十四角一一全
006_0795_a_22L盡印圓如是全印之角亦應捨耶
006_0795_a_23L若約自宗無如是事何更捨也以訂
006_0795_a_24L分中無有因果訂分敎分一乘三乘

006_0795_b_01L연기분 가운데 비로소 원인과 결과, 증분과 교분, 일승과 삼승, 동교와 별교 등의 갖가지 일을 설할 뿐이다. 이런 까닭에 연기분에 나아가서 “원인과 결과의 두 자리가 성性이 중도에 있다.”라고 한 것이다.

만약 진실로 인과를 세우지 않는다면 어찌 인과가 없다고 부정하는 큰 삿된 견해가 아니겠는가?
인과를 뛰어넘은 곳에 서서 인과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니 어찌 없다고 부정하는 것이겠는가? 그러므로 (의상) 화상이 다른 이에게 이 뜻을 질문하게 하여 이르기를, “법성 중에 인과가 있는가, 인과가 없는가? 만약 법성 중에 인과가 있다면 마땅히 법성이 아닐 것이니, 법성 중에는 인과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또 답하게 하여 이르기를, “인과가 없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근본의 들어감(根本入) 중에 펼친 바 아홉 개의 들어감(九入)이 근본을 만족시키지 않는가?
만족시킨다.
만약 그렇다면 어째서 인과가 없다고 하는가?
그대가 집착하는 바 포섭(攝)과 생각하고 헤아림(思議) 등으로 저 (근본의 들어감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낱낱의 들어감(入入)이 저 근본을 만족시킨다. 이런 까닭에 그것에 인과가 없는 것이다. 만약 낱낱의 들어감을 기준으로 하여 포섭과 생각하고 헤아림 등을 따라서 알음알이를 낸다면 수승함과 열등함의 인과의 지위가 있기 때문에 이는 동교이다. 만약 포섭 등을 기준으로 하여 낱낱의 들어감에 따라서 알음알이를 낸다면 성性이 중도에 있어서 수승함과 열등함의 인과가 없으나 또한 동교이다. 만약 낱낱의 들어감을 제외하고 다만 포섭과 생각하고 헤아림 등을 기준으로 하면 곧 삼승별교이다. 만약 바로 근본의 들어감을 기준으로 한다면 일승별교이다. 이 세 가지 뜻을 기준으로 하여 도인의 뜻을 나타내며, 또한 『화엄대경』에 많은 뜻을 갖추고 있음도 나타낸다.

대기
『대기』에 이른다. ‘어째서 글자 중에 굴곡이 많은가? 삼승의 근기와 욕망 등을 드러내고자’라고 한 것은, 실제를 기준으로 하면 글자 중의 굴곡은 삼도三途와 인ㆍ천人天에도 통한다. 그러나 글자는 알음알이를 내는 말(詮)이기 때문에

006_0795_b_01L同敎別敎等事綠起分中方說因果
006_0795_b_02L訂敎一三同別敎等種種事耳是故
006_0795_b_03L就綠起分云因果兩位性在中道也
006_0795_b_04L若實不立因果豈不是撥無因果
006_0795_b_05L之大邪見耶立在過越因果之處
006_0795_b_06L言無因果豈是撥無耶故和尙令人
006_0795_b_07L難此義云法性之中有因果耶無因
006_0795_b_08L果耶若法性中有因果者應非法
006_0795_b_09L以法性中無因果故又令答云
006_0795_b_10L無因果也然則根本入中所開九
006_0795_b_11L不滿本耶滿也若尒何云
006_0795_b_12L無因果耶第上之二第九張非汝
006_0795_b_13L所執攝思議等能滿彼也但是入入
006_0795_b_14L能滿彼1) [127] [126] 是故於彼無因果也
006_0795_b_15L約入入隨攝思議等而生解則有
006_0795_b_16L勝劣因果之位故是同敎若約攝等
006_0795_b_17L隨於入入而生解則有性在中道
006_0795_b_18L勝劣之因果亦是同敎若除入入
006_0795_b_19L但約攝思議等即是三乘別敎若直
006_0795_b_20L約根本入則是一乘別敎也約此三
006_0795_b_21L以現印義亦現大經具含多義
006_0795_b_22L大記云何故字中多有屈曲現三乘
006_0795_b_23L根欲等者約實則字中屈曲通於三
006_0795_b_24L途人天然而字者是生解之詮故

006_0795_c_01L우선 알음알이의 가르침(敎相)이 나타남을 기준으로 해서, 다만 ‘삼승의 근기와 욕망’이라고 했을 뿐이다.
‘어째서 시작과 끝의 두 글자를 한가운데에 두었는가’ 등이란 (다음과 같다.) ‘법法’ 자는 원인이고 ‘불佛’ 자는 결과이니 일승과 삼승에 통한다. 삼승의 앞과 뒤의 인과가 곧 법성의 덕용이며 성이 중도에 있음을 나타내고자 하는 까닭에 처음과 끝의 두 글자를 한가운데에 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오직 삼승의 인과만을 기준으로 하여 논한 것인데 어째서 인과가 일승에도 통한다고 하는가?
만약 실제의 도리를 기준으로 한다면 모든 법이 각각 스스로 여여한 지위에 머물러 본래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삼승의 사람은 오직 앞과 뒤만을 보지만 일승은 그렇지 아니하여 필요에 따라서 자재하다. 이런 까닭에 앞과 뒤의 인과를 기준으로 하여 성性이 중도에 있다는 뜻이 일승에 있음을 나타내기 때문에 일승에도 통한다고 한 것이다.

‘법성의 집(法性家)’은 두 가지가 있다. 말하자면 증분의 법성과 머무름 없는 별교의 법성이다. 실상과 총상과 법신과 중도 등도 또한 두 가지 뜻에 통한다. 시설문 중에는 증분과 교분을 나누어 보이는 뜻이 있고 일승과 삼승을 나누어 보이는 뜻이 있다. 그래서 인과가 일승과 삼승에 통하고 법성이 증분과 교분에 통한다고 한 것이다.

진수기
『진기』에 이른다. ‘법성의 집(法性家)’이란 오늘의 연緣 중에 일어난 법을 기준으로 하면 증분과 연기분의 법성이 된다. 혹은 증분과 교분을 나누지 않는 중도라야 비로소 법성의 집이 된다고 한다.

1) 법계도인法界圖印

‘위에서 이르기를, 원인과 결과가’부터 ‘앞과 뒤가 없다’까지38)

법융기
『법기』에 이른다. “위에서 이르기를, ‘원인과 결과가 같지 않다.’라고 하고” 내지 ‘그 뜻이 무엇인가’ 등이란 (다음과 같다.) 이 질문을 일으킨 뜻은, 앞에서 “수행의 방편을 기준으로 하여 원인과 결과가 같지 않음을 드러낸다.”라고 하고,

006_0795_c_01L且約解敎相現但云三乘根欲耳
006_0795_c_02L故始終兩字安置當中等者法字是
006_0795_c_03L佛字是果通一乘三乘也欲現
006_0795_c_04L三乘之前後因果即是法性德用
006_0795_c_05L在中道故以始終二字安置當中也
006_0795_c_06L若尒唯約三乘因果而論何云因
006_0795_c_07L果通一乘耶若約實道理諸法各
006_0795_c_08L住自如位本來不動然三乘之人
006_0795_c_09L唯見前後一乘不尒隨須自在
006_0795_c_10L故約前後因果現性在中道之義在
006_0795_c_11L於一乘故云通一乘也法性家者
006_0795_c_12L謂訂分之法性及無住別敎之法
006_0795_c_13L性也實相捴相法身中道等亦通二
006_0795_c_14L義也施設門中有分示訂敎之義
006_0795_c_15L有分示一乘三乘之義故云因果通
006_0795_c_16L一乘三乘法性通訂分敎分

006_0795_c_17L
眞記云法性家者約今日綠中所起
006_0795_c_18L之法爲訂分及綠起分之法性也
006_0795_c_19L云訂敎不分之中道方爲法性家也
006_0795_c_20L第上之二第一○張

006_0795_c_21L
上云因果 無有前後法記云上云
006_0795_c_22L因果不同乃至其義云何等者起此
006_0795_c_23L問意前云約修行方便現因果不同
006_0795_c_24L▣字體磨滅{底}ㆍ作「本」{乙}」

006_0796_a_01L다음에 또 이르기를, “원인과 결과의 두 자리가 법성의 집 안의 진실한 덕용德用이며, 성性이 중도에 있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라고 하니, 이 뜻을 알지 못해서 이와 같이 물은 것이다.

앞에서 도인의 모습을 마침에 다시 별다른 질문이 없었는데, 무슨 까닭에 이 중에 글자의 모습을 풀이하고서 또다시 이 질문과 대답을 시설하는가?
그 도인의 길은 글자의 모습을 따라서 그린 것이기 때문에 글자의 모습을 자세히 풀이하면 도인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기
『대기』에 이른다. ‘천친 논주가 육상의 방편으로써 뜻을 세운 등에 의거하면’이란 (다음과 같다.) 부처님이 네 가지 보살행의 글(四種菩薩行文)39)에서 육상의 뜻을 나타내신 것은, 만약 모든 보살이 법의 체體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반드시 육상으로써 그 마음을 원융하게 단련하여야 비로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논주는 부처님의 뜻을 얻었기 때문에 열 가지 들어가는(十入) 곳에서 육상 방편을 밝혀서 삼승의 포섭의 들어감(攝入) 등은 삼현이고 내지 부처님으로서 다함의 들어감(佛盡入)은 부처님의 과위이니 이와 같이 차례로 거듭 더욱 수승해진다는 집착을 다스리니, 그 포섭의 들어감 등 아홉 가지 들어감이 근본의 들어감에 들어맞으면 수승함과 열등함이 없음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므로 옛말에 이르기를, “천친보살이 열 가지 들어가는(十入) 곳에서 육상을 밝히는 날에 비로소 부처님의 은혜를 갚았다.”라고 하였다. (의상) 화상이 이 논주의 뜻을 얻었기 때문에 “천친 논주가 뜻을 세운 분제分齊에 의거하면, 그 도리에 준하여 삼승의 앞과 뒤의 인과가 성품이 중도에 있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육상방편의 말을 기준으로 하여 융질 대덕(融質德)40)이 이르기를, “육상이란 오직 교문敎門의 시설일 뿐이니 법의 체에 있어서는 관련된 바가 없다. 그래서 방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상) 화상이 이르기를 ‘법성의 집에 들어가는 중요한 문이며, 다라니의 곳집(藏)을 여는 좋은 열쇠’41)라고 한 것이다. 법장(康藏) 스님은 이르기를 ‘이 방편으로써 일승을 깨닫는다’42)라고 하고, 또 ‘4구四句와 육상43)이 함께 법에 들어가는 방편이 된다. 이상.44)라고 하였으니, 다만 능히 설하는(能詮) 교문의 방편임을 안다.”라고 하였다.

006_0796_a_01L而次又云因果兩位法性家內眞實德
006_0796_a_02L性在中道故未知此意如是問
006_0796_a_03L前印相終更無別問何故此中
006_0796_a_04L釋字相已更復設此問答耶其印
006_0796_a_05L則隨字相而畫故委釋字相
006_0796_a_06L可解印相故也

006_0796_a_07L
大記云依天親論主以六相方便
006_0796_a_08L義等者佛於四種菩薩行文現六相
006_0796_a_09L意者若諸菩薩欲入法體要以六
006_0796_a_10L相融鍊其心方可得入故也論主得
006_0796_a_11L佛意故於十入處明六相方便以治
006_0796_a_12L三乘攝入等是三賢乃至佛盡入是
006_0796_a_13L佛果如是次1)轉勝之執現其攝
006_0796_a_14L等九入稱根本入無勝劣也故古辭
006_0796_a_15L天親菩薩於十入處明六相日
006_0796_a_16L始報佛恩也和尙得此論主意故云
006_0796_a_17L依天親論主立義分齊准其道理
006_0796_a_18L三乘之前後因果性在中道所由可解
006_0796_a_19L約此六相方便之言融質德云
006_0796_a_20L相者唯是敎門施設耳於法體上
006_0796_a_21L所關也故言方便也故和尙云入法
006_0796_a_22L性家之要門開陁羅尼藏好鑰匙
006_0796_a_23L藏云以此方便會一乘又云四句與
006_0796_a_24L六相俱爲入法方便已上 故知但是

006_0796_b_01L
사유 대덕(思惟德)45)은 이르기를, “육상이란 다만 법의 체의 교묘한 모습을 모아 이룬 것에 근거하여 방편이라고 이름할 뿐이니, 이 외에 다시 들어갈 바 법의 체는 없다. 그러므로 (의상) 화상은 ‘모든 연緣으로 생겨난 법이 육상으로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다’46)라고 하고, 또 ‘육상이란 연기의 무분별한 도리를 바르게 나타내는 것’47)이라 하며, 내지 ‘이 이법(理)인 까닭에 다라니법은 주主와 반伴이 서로 이룬다’48)라고 하였다. 강장 스님은 이르기를, ‘네 번째는 모아 이룬 방편이니 모든 법의 동일한 체體의 교묘한 모습을 모아 이루기 때문에 방편이라고 이름한다. 『지론智論』에 이르기를, “이 법이 훌륭하고 교묘하게 모아 이루기 때문에 방편이라 이름한다. 이상.49)라 한다’50)고 하였다. 그러므로 다만 설해지는 법의 체를 기준으로 하여 방편이라 함을 안다.”라고 하였다.

풀이하여 말하면51) 이 위의 두 가지 설은 만약 치우쳐 집착하면 둘 모두 허물이 있다. 말하자면 각각 한 모퉁이에 막혀 있어서 이치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도리에 의거하면 각각 의지하는 바가 있어서 두 가지 설이 모두 옳다. 무엇인가? (육상은) 만약 동교에서라면 고정되어 집착하는 견해를 깨뜨리기 때문에 다만 교문敎門의 법에 들어가는 방편이다. 만약 별교에서라면 바로 법의 체를 밝히기 때문에 곧 원융한 법의 훌륭하고 교묘하게 모아 이루는 방편이다.

‘일승과 삼승이 주主와 반伴을 서로 이룬다’란, 머무름 없는 별교는 주主이고 달리 집착하는 삼승은 권속으로서 반伴이다. 이 가운데 주主와 반伴의 법의 체를 세우는 까닭에 주主와 반伴의 모습을 이룬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아래에서는 주主와 반伴이 서로 돕는다고 하는가?
주主와 반伴의 법을 세우고 나서 그 달리 집착하는 삼승인 반伴으로 하여금 인연과 연기 등의 삼관52)을 익혀서 그 마음을 수련하게 하기 때문이다. 흘러나오는 것(所流)으로서 삼승인 반伴은 성기性起의 다음에 이르러 머무름 없는 별교인 주主와 서로 도와서, 두렷이 밝은 주主와 반伴을 이루기 때문이다.

법융기
『법기』에 이른다. ‘주主와 반伴이 서로 이루어 법의 분제를 나타낸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006_0796_b_01L能詮敎門之方便也思惟德云六相
006_0796_b_02L但約法體巧相集成名方便耳
006_0796_b_03L外更無所入法體也故和尙云一切
006_0796_b_04L綠生法無不六相成又云六相者
006_0796_b_05L現緣起無分別理 第上之二第一一張
006_0796_b_06L乃至云以此理故陁羅尼法主伴相
006_0796_b_07L康藏云*弟四集成方便諸法同體
006_0796_b_08L巧相集成故名方便智論云此法善
006_0796_b_09L巧集成故名方便已上 故知但約所
006_0796_b_10L詮法體爲方便也解云此上二說
006_0796_b_11L偏執則二俱有過謂各滯一隅不當
006_0796_b_12L理故若據道理各有所憑二說俱
006_0796_b_13L何者如同敎中破定執見故
006_0796_b_14L是敎門入法方便也若別敎中直明
006_0796_b_15L法體故即是圓融之法善巧集成方
006_0796_b_16L便也一乘三乘主伴相成者無住
006_0796_b_17L別敎是主別執三乘是眷屬伴
006_0796_b_18L中立主伴法體故云成主伴相也
006_0796_b_19L若尒何故下云主伴相資耶
006_0796_b_20L主伴法已令其別執三乘之伴習因
006_0796_b_21L綠綠起等三觀修鍊其心故所流三
006_0796_b_22L乘之伴至於性起之後際與無住別
006_0796_b_23L敎之主相資得成圓明主伴故也

006_0796_b_24L
法記云主伴相成現法分齊者餘處

006_0796_c_01L다른 곳의 삼승은 다만 권속일 뿐이며 반伴이 될 수 없으나, 이 가운데의 뜻은 도인의 원만함은 일승이기 때문에 주主이고, 오십사각은 삼승이기 때문에 반伴이다. 모든 각을 말미암기 때문에 도인의 원만함을 이루고, 도인의 원만함을 말미암기 때문에 모든 각을 이룬다. 이런 까닭에 일승과 삼승이 서로 이루는 것이다. 그 하나하나의 각이 도인의 원만함을 온전히 다한다는 것은 나타난 바의 분제이다.

대기
『대기』에 이른다. 육상이란 총상과 별상 둘은 법의 다함없음을 드러내고, 동상과 이상 둘은 법의 걸림 없음을 나타내며, 성상과 괴상 둘은 법의 곁이 없음을 보인다. 일승의 법의 뜻은 이 셋을 벗어나지 않는다. 만약 개별적으로 풀이하면 총상은 머무름 없는 법의 자체를 바로 표방하고, 별상은 머무름 없는 총상의 다함없음을 가리키며, 동상은 다함없음의 걸림 없음을 나타내고, 이상은 걸림 없음의 어긋남 없음을 풀이하며, 성상은 어긋남 없음의 곁이 없음을 보이고, 괴상은 곁이 없음의 움직이지 않음을 나타낸다.

머무름 없는 법의 자체는 무엇인가?
법계의 법이 합해서 한 몸이 된 것이 이것이다.
법계의 법이 움직이기 때문에 한 몸을 이룸이 되는가?
다만 움직이지 않음을 말미암아 한 몸을 이룬다. 만약 이 하나의 집을 기준으로 하여 논한다면, 서까래 등의 모든 연이 각자 움직이지 않아야 비로소 하나의 총상인 집을 이룰 수 있다.
‘별상은 다함없음을 나타낸다’ 등은 무엇인가?
별상은 서까래 등의 모든 연이 각각 다르므로 하나의 총상인 집 가운데 하나가 아닌 덕을 나타내기 때문에, “별상은 총상의 다함없음을 가리킨다.”라고 한 것이다.

서까래 등의 연 가운데 동상이 필요하면 곧 일장 이척(丈二)의 서까래가 이십 보二十步53)의 집에 칭합하고 다른 연 또한 그러하다. 그러므로 “동상은 다함없음의 걸림 없음을 나타낸다.”라고 한 것이다.

006_0796_c_01L三乘但是眷屬不得爲伴此中意
006_0796_c_02L印圓則一乘故是主五十四角
006_0796_c_03L則三乘故是伴也由諸角故得成印
006_0796_c_04L由印圓故得成諸角是故一乘
006_0796_c_05L三乘互相成也其一一角全盡印圓
006_0796_c_06L是所現分齊也

006_0796_c_07L
大記云六相者 捴別二相表法無盡
006_0796_c_08L同異二相現法無㝵成壞二相示法
006_0796_c_09L無側一乘法義不出此三也若別釋
006_0796_c_10L 捴相直標無住法之自體別相
006_0796_c_11L指無住捴之無盡同相現無盡之無
006_0796_c_12L異相釋無㝵之無違成相示無違
006_0796_c_13L之無側第上之二第一二張 壞相表無
006_0796_c_14L側之不動也無住法之自體云何
006_0796_c_15L法界之法混爲一身是法界之
006_0796_c_16L爲是動故成一身耶只由不動
006_0796_c_17L成一身耳若約此一堂論則椽等諸
006_0796_c_18L各自不動方得成一摠相堂耳
006_0796_c_19L別相表無盡等者何耶別相者
006_0796_c_20L等諸緣各差別故現一摠相堂中非
006_0796_c_21L一之德故云別相指摠相之無盡也
006_0796_c_22L椽等綠中須同相則丈二之椽稱二
006_0796_c_23L十步堂餘緣亦尒故云同相現無盡
006_0796_c_24L「弟」作「第」{乙}次同

006_0797_a_01L또 이 연 가운데 이상이 필요하면 곧 일장 이척의 서까래가 비록 이십 보의 집에 칭합하나 스스로 일장 이척(丈二)의 자리를 움직이지 않으며 다른 연 또한 그러하다. 그러므로 “이상은 걸림 없음의 어긋남 없음을 밝힌다.”라고 한 것이다.

그 일장 이척(丈二)의 서까래가 이 집을 이룸을 볼 때 곁에 다른 연이 없으므로 이 하나의 서까래가 곧 곁이 없으며 다른 연 또한 그러하다. 그러므로 “성상은 어긋남 없음의 곁이 없음을 보인다.”라고 한 것이다.
무너지는 것(壞)은 이루어지는 곳에서 무너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괴상은 곁이 없음의 움직이지 않음을 나타낸다.”라고 한 것이다.

무슨 까닭에 오직 여섯이며 많지도 않고 적지도 않은가?
총상과 별상의 한 쌍은 상근기가 들어가고, 동상과 이상의 한 쌍은 중근기가 들어가며, 성상과 괴상의 한 쌍은 하근기가 들어간다. 진실로 하근기는 동상과 이상 가운데 총상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줄어서 넷이나 다섯에 이르지 않는다. 비록 하근기라도 두루 성상과 괴상을 배운다면 반드시 총상에 들어가기 때문에 늘어나서 일곱이나 여덟에 이르지 않는다.

강장 스님은 이르기를, “총상은 하나가 많은 덕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별상은 많은 덕이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며, 별이 총에 의지하되 그 총을 만족시키기 때문이다. 이상.54)라고 하였다.
“하나가 많은 덕을 포함한다.”란 총과 총으로서의 많은 덕인가, 별과 별로서의 많은 덕인가?
두 뜻을 함께 얻는다. 말하자면 별을 잡아서 총을 이루기 때문에 ‘별과 별로서의 많은 덕’이라고 하는 것도 또한 얻는다. 그러나 그 총 가운데 갖춘 바 별로서의 덕이 하나하나가 모두 총을 온전히 다하기 때문에 ‘총과 총으로서의 많은 덕’이라고 하는 것도 또한 얻는다.

만약 그렇다면 마땅히 다함없는 총을 세워야 하는가?
비록 ‘많은 덕’이라고 하지만 하나 밖의 많음이 아니기 때문에 이 어려움은 없다.
이미 이르기를, “총상은 하나가 많은 덕을 포함하기 때문이다.”라고 했으니, 포함되는 많은 덕이 포함하는 하나와 뜻의 문이 각각 다를 것인데 어째서 하나 밖의 많음이 아니라고 하는가?
다만 그 많은 덕이 합해지는 곳을 지목하여 포함하는 하나의 총이라고 했을 뿐이다. 이런 까닭에 하나 밖의 많음, 많음 밖의 하나가 아닌 것이다.

006_0797_a_01L之無碍也又此綠中須異相則丈二
006_0797_a_02L之椽雖稱於二十步堂而不動自文
006_0797_a_03L二位餘綠亦尒故云異相明無碍之
006_0797_a_04L無違也見其丈二椽之成此堂時
006_0797_a_05L無餘綠故此一椽即是無側餘綠亦
006_0797_a_06L故云成相示無違之無側也壞於
006_0797_a_07L成處壞故云壞相表無側之不動也
006_0797_a_08L何故唯六不多不小惣別一對
006_0797_a_09L上根得入同異一對中根得入成壞
006_0797_a_10L一對下根得入良以下根於同異中
006_0797_a_11L不能得惣故不減至四五也雖是下
006_0797_a_12L歷學成壞必得入惣故不增至七
006_0797_a_13L八也康藏云惣相者一含多德故
006_0797_a_14L別相者多德非一故別依止惣滿彼
006_0797_a_15L惣故已上一含多德者惣惣多德
006_0797_a_16L別別多德1) [128] 義俱得謂攬別成惣
006_0797_a_17L云別別多德亦得然其惣中所具
006_0797_a_18L別德一一皆全盡惣故云惣惣多德
006_0797_a_19L亦得若尒應立無盡惣耶雖云
006_0797_a_20L多德非是一外之多故此難也
006_0797_a_21L旣云惣相者一含多德故所含多
006_0797_a_22L第上之二第一三張 與能含一義門
006_0797_a_23L各異何云非是一外之多耶但其
006_0797_a_24L多德合處目爲能含一惣耳是故非

006_0797_b_01L
‘별이 총에 의지하되 그 총을 만족시킨다’란,
만약 종류로써 각각 육상을 나누면 총상ㆍ동상ㆍ성상이 한 가지가 되며, 별상ㆍ이상ㆍ괴상이 한 가지가 된다. 이미 총상과 한 종류이므로 동상에는 총상과 동일한 뜻이 있고, 성상에는 총상을 성립시키는 뜻이 있으나, 무슨 까닭에 별상은 이상ㆍ괴상과 한 종류인데 총상을 만족시키는 뜻이 있는가?
만약 총상을 얻는다면 별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만 아직 (총상을) 얻지 못한 근기에게 총상을 보여주고자 하기 때문에 (별상을) 연 것이다. 별상을 열 때 총상의 뜻이 이미 나타난다. 이런 까닭에 별상 중에 총상을 만족시키는 뜻이 있는 것이다.
만족시킴에 이르는가, 이르지 않는가?
만족시킴에 이른다.
이것은 별상을 해석하는 뜻이기 때문에 마땅히 본래의 총상을 만족시킴에 이르지 않아야 하는데 어째서 이른다고 하는가?
이미 총을 나눌 때 총을 여는 것을 말미암은 까닭에 저 별의 덕을 나타내니 도리어 별로써 총을 만족시킬 때 만족시킴에 이르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총 가운데 별의 모양이 있는가?
없다. 무엇인가? 본래 별의 모습이 없는 총 가운데 연 바이기 때문에 비록 그 별상이 본래의 총을 만족시킴에 이르더라도 총 가운데 별의 모습이 없다.
만약 그렇다면 삼승에서 차별의 세속을 없애고 평등의 진실로 돌아가는 것과는 어떻게 다른가?
일승 가운데 분별은 온전히 무분별이며 무분별이 온전히 분별이다. 분별을 없애야만 비로소 무분별에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이런 까닭에 다르다.

동상同相이란 총의 덕을 나타내 보이고자 별상을 열었으나 이미 별상을 열고 나서, 어떤 미혹한 사람이 그 별상이 총과 전혀 다르다고 할 것을 염려하는 까닭에, 그로 하여금 그 별상이 총과 온전히 같음을 알게 하기 위하여 별상 다음에 동상을 밝힌 것이다. 동同에 많은 뜻이 있으니 말하자면 상동ㆍ하동과 내동ㆍ외동이다. 만약 이 집을 기준으로 하여 논하면 모든 연이 총인 집과 같은 것은 상동이고,

006_0797_b_01L是一外之多多外之一也別依止惣
006_0797_b_02L滿彼惣者若以類各分六相
006_0797_b_03L惣同成爲一際別異壞爲一際也
006_0797_b_04L與惣爲一類故同有同惣義成有成
006_0797_b_05L惣義何故別相與異壞爲一類而有
006_0797_b_06L滿惣之義耶若得惣相不須別相
006_0797_b_07L但於未得機中欲示惣相故開也
006_0797_b_08L別之時惣義已現是故別中有滿惣
006_0797_b_09L及滿耶不及耶及滿也
006_0797_b_10L此是別相釋義故應不及滿本惣
006_0797_b_11L云及耶旣分惣之時由開惣故
006_0797_b_12L現彼別德還以別滿惣之時及滿也
006_0797_b_13L若尒惣中有別皃耶無也
006_0797_b_14L本於無別皃之惣中所開故雖其
006_0797_b_15L別相及滿本惣惣中無別皃也
006_0797_b_16L與三乘泯差別俗歸平等眞何異
006_0797_b_17L一乘中分別全無分別無分
006_0797_b_18L別全分別非泯分別方歸無分別
006_0797_b_19L故異也同相者欲現惣德故開別
006_0797_b_20L旣開別已恐有惑人謂其別相
006_0797_b_21L逈別於惣故欲令其知彼別相全
006_0797_b_22L同於惣故於別相之次明同相也
006_0797_b_23L同有多義謂上同下同內同外同
006_0797_b_24L若約此舍論者諸綠同於惣舍者上

006_0797_c_01L총인 집이 모든 연과 같은 것은 하동이다. 상동 가운데 나아가 모든 연이 집과 같은 것은 안으로 향하는 동(內向同)이고, 모든 연이 서로 바라보아 집을 이루는 힘의 뜻이 가지런히 같은 것은 밖으로 향하는 동(外向同)이다. 또 분동分同과 만동滿同의 두 가지 뜻이 있다. 말하자면 한 척(一尺)의 기와가 한 척의 힘을 내어서 이십 보二十步의 집과 같은 것은 분동이고, 한 척의 기와가 이십 보의 힘을 내어서 이십 보의 집과 같은 것은 만동이다.

이상異相은 그 능히 이루는 모든 연의 모습과 종류가 다르고, 각각의 자리가 움직이지 않는 뜻을 보이는 것이다.
만약 실제로 다르다면 마땅히 같지 않은 것인가?
다만 다름을 말미암기 때문에 같음의 뜻이 있을 수 있다. 만약 다르지 않다면, 기와가 이미 한 척이면 서까래 또한 한 척이어서 본래 연의 자리에서 어긋나 앞의 가지런히 같이 집을 짓는 뜻을 잃는다.

만약 그렇다면 한 척의 기와가 이십 보의 힘을 내서 이십 보의 집과 같아지고 서까래 또한 이와 같다면, 이 또한 어찌 본래의 연의 자리를 잃는 것이 아니겠는가?
기와가 만약 자신의 한 척의 자리를 움직여서 서까래의 일장 이척(二丈)의 자리와 같아지고, 그런 후에 이십 보의 힘을 내며, 서까래 또한 이와 같다면, 마땅히 본래의 자리를 잃는 것이다. 기와가 스스로 본래의 한 척의 자리를 움직이지 않고 서까래 또한 일장 이척의 자리를 움직이지 아니하되 각각 이십 보의 힘을 내어서 집과 같기 때문에, 비록 함께 이십 보의 힘을 내더라도 기와는 일장 이척이 아니고 서까래는 한 척이 아니라, 각각 스스로의 자리에 머무르는 까닭에 어긋나지 않는다.

성상成相은 짓지 않음의 지음을 밝히는 것이다. 말하자면 모든 연 등이 각각의 자리를 움직이지 않고 집을 이루는 것이다. 앞의 동상에서는 서까래 등의 모든 연이 서로 바라보고 서로 거두어서 집을 이루는 힘의 뜻이 가지런히 같다. 또 서까래 등의 모든 연이 총을 바라봄을 기준으로 하면 집이 서까래를 거느리고, 총이 연을 바라보면 서까래가 집을 거느린다.

006_0797_c_01L惣舍同於諸綠者下同就上同中
006_0797_c_02L諸綠同於舍者內向同諸綠相望
006_0797_c_03L舍力義齊同者外向同也又有分同
006_0797_c_04L滿同二義謂一尺之瓦出一尺之力
006_0797_c_05L第上之二第一四張 同於二十步堂者
006_0797_c_06L分同一尺瓦出二十步力同於二
006_0797_c_07L十步堂者滿同也異相者示其能
006_0797_c_08L成諸綠形類差別各位不動之義也
006_0797_c_09L若實異者應非同耶只由異故
006_0797_c_10L得有同義若不異者瓦旣一尺
006_0797_c_11L亦一尺違本緣位失前齊同作舍之
006_0797_c_12L若爾一尺之瓦出二十步力
006_0797_c_13L同於二十步堂椽亦如是者此亦豈
006_0797_c_14L非失本綠位耶瓦若動自一尺之
006_0797_c_15L同於椽之丈二之位然後出二十
006_0797_c_16L步力緣亦如是者應失本位瓦自
006_0797_c_17L不動本一尺位椽亦不動丈二之位
006_0797_c_18L而各出二十步力同於堂故雖並出
006_0797_c_19L二十步力瓦非丈二緣非一尺
006_0797_c_20L住自位故不違也成相者明不作
006_0797_c_21L之作謂諸綠等各位不動得成舍也
006_0797_c_22L前同相中緣等諸綠相望相攝
006_0797_c_23L舍力義齊同又約椽等諸綠望於惣
006_0797_c_24L則舍帶於椽惣望於綠則椽帶於舍
006_0797_c_25L「二」作「一一」{乙}

006_0798_a_01L그런 까닭에 (동상에) 서로 바라보고 서로 거두며 서로 거느리는 뜻이 있는 것이다.
이 성상 중에는 하나의 연을 기준으로 함을 따라서 곧 바로 총이니 상대를 끊고 곁이 없으며 능히 이루는 연 외에 달리 이루어지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서로 바라보고 서로 거두는 뜻을 설하지 않는다.

괴상壞相은 지음의 짓지 않음을 밝힌다. 말하자면 서까래 등의 모든 연이 각각 자기의 법에 머물러서 본래 움직이지 않는다.
이 가운데 움직이지 않음이 앞의 이상 가운데 움직이지 않음과 어떻게 다른가?
앞의 이상에서는 자리(位)가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기와의 한 척의 자리가 서까래의 일장 이척의 자리와 더불어 각각 비록 움직이지 아니하되 서로 바라보는 뜻이 있다. 이 가운데는 체가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법과 법이 각각 서로 알지 못한다. 성상의 집을 기준으로 모든 연에 대해서 물어보기를 기둥이 (집을) 이루는가, 내지 기와가 이루는가라고, 이같이 두루 물어보아도 한 물건도 그 집을 이루는 것이 없다. 이와 같으므로 성상의 집이 구경이다. 곧 짓되 짓지 않기 때문에 괴상이 곧 성립되며, 없어지고 무너짐의 괴상은 아니다.

고기

‘고기’에 이른다.
옛 대덕이 이르기를, “인연의 집은 지으면 이루어지고 짓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연기의 집은 지으면 이루어지지 않고 짓지 않으면 이루어진다.”라고 하였다. 이 뜻이 무엇인가?
동상의 집은 지음이 있는 지음이고 성상의 집은 지음이 없는 지음이기 때문이다. 동상과 성상을 상대하여 설하면 동상은 연기가 앞에 나타나는 뜻이고 성상은 연기가 자성이 없는 뜻이다. 성상과 괴상을 상대하여 설하면 성상은 짓지 않음의 지음이기 때문에 자성이 없는 연기의 뜻이고, 괴상은 지음의 짓지 않음이기 때문에 연기가 자성이 없는 뜻이다.

옛말(古辭)에 이르기를, “주춧돌로부터 시작해서 들보 위의 기와를 마쳐야 비로소 온전한 집을 세우는 것은 변계의 집이다.

006_0798_a_01L故有相望相攝相帶之義此成相中
006_0798_a_02L隨約一綠即正是惣絶待無側能成
006_0798_a_03L綠外無別所成是故不說相望相攝
006_0798_a_04L之義壞相者明作之不作謂椽等
006_0798_a_05L諸綠各住自法本來不動也此中
006_0798_a_06L不動與前異相中不動何別前異
006_0798_a_07L相中位不動故瓦一尺位與椽丈
006_0798_a_08L二位各雖不動而有相望之義
006_0798_a_09L中體不動故法法各各不相知也
006_0798_a_10L成相堂詰於諸綠柱成耶乃至瓦成
006_0798_a_11L如是遍詰無有一物成彼堂
006_0798_a_12L如是故成相堂究竟也即作而不作
006_0798_a_13L壞相即成非滅壞之壞也第上之
006_0798_a_14L二第一五張

006_0798_a_15L
古記云古德云因緣堂作則得
006_0798_a_16L不作則不得成緣起堂作則不
006_0798_a_17L得成不作則得成此義云何
006_0798_a_18L同相舍有作之作成相舍無作之
006_0798_a_19L作故也同相成相相對說則同相
006_0798_a_20L緣起現前義成相者綠起無
006_0798_a_21L性義成相壞相相對說則成相者
006_0798_a_22L不作之作故無性綠起義壞相者
006_0798_a_23L作之不作故緣起無性義也古辭
006_0798_a_24L始從柱底石終梁上瓦方立

006_0798_b_01L도끼를 쥐고 나무를 찍음에 한 번 한 번 찍음을 따라서 온전한 집을 세우는 것은 인연의 집이다. 도끼가 나무를 내려찍지 않고 나무가 도끼에 찍히지 않아도 온전한 집을 세우는 것은 연기의 집이다. 나무의 싹이 푸를 때 온전한 집을 세우는 것은 성기의 집이다. 성기에 나아가 나무의 종자를 심을 때 온전한 집을 세우는 것은 머무름 없음의 집이다. 종자가 곧 참 (집)인 것은 실상의 집이다.”라고 하였다.

강장 스님이 이르기를, “무엇이 집인가? 서까래가 곧 집이다. 무슨 까닭인가? 서까래가 온전히 홀로 집을 짓기 때문이다. 내지 묻는다. 만약 서까래가 온전히 홀로 집을 지을 수 있다면 기와 등이 있지 않아도 또한 마땅히 집을 짓는가? 답한다. 아직 기와 등이 있지 않을 때에는 서까래가 아니기 때문에 짓지 않는다. 이상.55)라고 하였다.

비록 기와 등이 없어도 서까래임을 분명히 보는데, 무슨 까닭에 기와가 없을 때에는 서까래가 아니라고 하는가?
변계의 힐난일 뿐이다. 『화엄대경』에 이르기를, “지혜의 바다가 너르고 가없어서 헤아릴 수 없어 도리어 비방을 늘린다.”56)라고 하니 가히 삼가지 않겠는가? 생멸이 있는 마음으로 실상의 이법을 의심하지 말라. 나의 이 보법에서 인연의 서까래는 스스로 하나의 서까래가 곧 자기 종류의 나머지 서까래를 포섭하니, 혹 한 척(一尺)의 기둥머리와 혹 여덟 척의 기둥과 내지 기와ㆍ돌ㆍ나무를 다듬는 목공, 기와를 굽는 화부 등, 일체의 모든 법을 널리 다 끝까지 거두어서 집을 지어 끝낸 연후에야 비로소 서까래가 되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오늘 기둥을 베어서 어제 이미 이루어진 집을 짓고자 한다고 하니, 만약 그렇다면 어제 이미 이루어진 집은 기둥 없이 이루어진 것인가? 이미 이르기를 ‘오늘 기둥을 베어서 어제 이미 이루어진 집을 짓고자 한다’라고 했으니, 그러므로 어제 이미 이루어진 집이 기둥 없이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안다. 이상.”라고 하였다.

006_0798_b_01L全舍者遍計堂荷斧打木隨一
006_0798_b_02L一打立全舍者因綠堂斧不墮木
006_0798_b_03L木不犯斧立全舍者綠起堂
006_0798_b_04L芽靑時立全舍者性起堂也
006_0798_b_05L於性起中木種下時立全舍者
006_0798_b_06L住堂種即眞者實相堂也康藏云
006_0798_b_07L何是舍耶椽即是舍何以故
006_0798_b_08L椽全獨能作舍故乃至問若椽全
006_0798_b_09L獨能作舍者未有瓦等亦應作舍
006_0798_b_10L未有瓦等時不是椽故不1) [129]
006_0798_b_11L已上雖無瓦等現見是椽
006_0798_b_12L故云無瓦時不是椽耶遍計之
006_0798_b_13L難耳大經云智海廣無涯未測
006_0798_b_14L返增謗可不愼哉母以有生滅心
006_0798_b_15L疑實相理我此普法因緣之椽
006_0798_b_16L是一椽即攝自類餘椽若一尺栱
006_0798_b_17L若八尺柱乃至瓦焉石焉鍊木之
006_0798_b_18L燔瓦之父等一切諸法普皆
006_0798_b_19L攝盡作舍究竟然後方得爲是椽
006_0798_b_20L是以爾也古人云今日採柱
006_0798_b_21L欲作昨日已成之舍若爾昨日已
006_0798_b_22L成之舍第上之二第一六張 無柱而
006_0798_b_23L成耶旣云今日採柱欲作昨日已
006_0798_b_24L成之舍故知昨日已成之舍非無

006_0798_c_01L그러므로 집이 이루어져야 비로소 기둥이며, 또 집이 이루어져야 비로소 서까래인 것이다.

진수기
『진기』에 이른다. 이른바 육상이란 (다음과 같다.) 이 가운데 대의大意는 노사나불盧舍那佛57)이 가장 존귀하고 수승하며 우리들 중생은 가장 비천하고 하열하니, 노사나불은 총상이고 중생은 별상이다. 중생의 몸은 따로 자체가 없고 온전히 노사나불의 몸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지금은 둘이 각각 다른 뜻을 보인다. 남(他)이 아니기 때문에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며,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일어난다고 한다. 그래서 강장 스님은 이르기를, “지말은 근본에 의거하여 일어남과 일어나지 않음이 있다.”58)라고 하였다.

동상은 중생의 몸을 기준으로 하면 다른 사물이 없고 오직 부처님의 몸일 뿐이다. 그러므로 중생의 몸이 저 부처님을 거느리고 있다. 이상은 비록 중생의 몸이 저 부처님의 몸을 거느리고 있으나 능히 거느림을 움직이지 않고 항상 중생인 것이다. 거느림의 뜻을 기준으로 하면 같음(同)이 있다고 하고, 중생의 뜻을 기준으로 하면 다름(異)이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강장 스님은 이르기를, “저 일어난 지말이 이미 근본을 거느리고 있으니, 이런 까닭에 서로 바라봄에 같음이 있고 다름이 있다.”59)라고 하였다.

성상은 비천한 중생의 몸이 곧 바로 존귀한 부처님의 몸이니, 털끝만큼도 부처님의 몸과 다른 때가 없으므로 저와 같게 하는 것이 아니다. 동상을 관하는 것은 저와 같게 하는 것이고, 성상을 관하는 것은 곧 바로 하나일 뿐인 것이다. 괴상은 법계의 차별 있는 법이 각각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니, 곧 중생의 몸 가운데의 진실한 덕용이며 성性이 중도에 있음이니, 곧 바로 하나일 뿐이므로 존재함이 있다고 하고, 각각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므로 무너짐(壞)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강장 스님이 이르기를, “저 근본을 거느리는 지말이 이미 근본에 거두어짐이 되니, 이런 까닭에 당체가 존재함이 있고 무너짐이 있다.”60)라고 하였다.

고기

‘고기’에 이른다. 예전에 신림 대덕이 당나라에 들어가 융순 스님에게 나아가서 의문을 지어 질문하기를, “이미 성불했다면 처음부터 범부의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입니까?”라고 하니,

006_0798_c_01L柱而成矣已上 是故舍成方是柱
006_0798_c_02L又舍成方是椽也

006_0798_c_03L
眞記云所謂六相者此中大意
006_0798_c_04L舍那佛最尊勝我等衆生最卑劣
006_0798_c_05L那是惣相衆生是別相衆生身者
006_0798_c_06L無別自體全以舍那身成然今示二
006_0798_c_07L各別義也不他故云不起不一故云
006_0798_c_08L起也故康藏云末依於本有起不
006_0798_c_09L同相者約衆生身無餘物唯是
006_0798_c_10L佛身故衆生身帶有彼佛異相者
006_0798_c_11L雖衆生身帶彼佛身而不動能帶恒
006_0798_c_12L衆生也約帶義云有同約衆生義
006_0798_c_13L有異也故康藏云彼所起末旣帶
006_0798_c_14L於本是故相望有同有異成相者
006_0798_c_15L卑衆生身即正尊佛身無毫末許
006_0798_c_16L佛身別時故不令同於彼同相觀者
006_0798_c_17L令同於彼成相觀者即正一耳
006_0798_c_18L相者法界差別之法各自不動
006_0798_c_19L是衆生身中眞實德用性在中道也
006_0798_c_20L即正一耳故云有存各自不動故
006_0798_c_21L云有壞也故康藏云彼帶本之末
006_0798_c_22L旣爲本攝是故當體有存有壞也

006_0798_c_23L
古記云昔林德入唐就融順師
006_0798_c_24L難而問旣已成佛初初不動凡身
006_0798_c_25L「作」作「住」{乙}

006_0799_a_01L융순 스님이 이르기를, “육상 가운데 동상과 이상이 있으니 어찌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이상.”라고 하였다.

어째서 육상이 있기 때문이라고 통틀어 말하지 않고, 다만 특별히 동상과 이상만을 취하여 말하는가?
만약 집을 기준으로 하여 말하면 별상은 곧 서까래 등의 모든 연이 총상의 집과 다른 것일 뿐이고, 그 모양과 굴곡, 길고 짧음을 보는 것을 일컫는 것은 아니다. 또 그 괴상이란 다만 모든 연이 각각 자기의 법에 머물러서 본래 짓지 않음을 보는 것이다. 오직 동상과 이상만이 하나의 연을 기준으로 함을 따라서 모든 연을 거두고 거느려서 만족된 집을 이룬다. 힘의 뜻이 가지런히 같으나 기둥은 팔척八尺이고 서까래는 곧 일장 이척(二丈)이며 기와는 일척 남짓(尺餘)이다. 이와 같이 길고 짧은 차별의 지위가 각각 스스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다만 이 뜻을 취하여 답한 것이다.

육상장

『육상장六相章』61)에 이른다.

一卽具多名摠相    하나가 곧 많음을 갖춘 것은 총상이라 이름하고
多卽非一是別相    많음이 곧 하나가 아닌 것은 별상이다.
多類自同成於摠    많은 부류가 스스로 같아서 총을 이루고
各體別異現於同    각각의 체가 달라서 같음을 나타낸다.
一多緣起理妙成    하나와 많음의 연기의 이법이 묘하게 이루어지고
壞住自法常不作    무너짐은 자신의 법에 머물러 항상 짓지 않는다.
唯智境界非事識    오직 지혜의 경계이고, 현상에 대한 알음알이(事識)가 아니니
以此方便會一乘    이 방편으로써 일승을 깨닫는다.

대기
『대기』에 이른다. ‘총상이란 근본인이다. 별상이란 나머지 굴곡들이니 별別이 인印을 의지하되 그 인印을 만족시키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근본인’은 별을 여읜 총이고, ‘그 인印을 만족시킨다’는 별을 거느린 총이다. 그러나 비록 두 가지 뜻이 있으나 두 가지 총은 없으니, 이른바 총이란 상대할 별이 없기 때문에 ‘별別을 여읜다’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이 별을 여읜 총이 이미 별을 가지고 이루어지기 때문에 ‘별을 거느린다’라고 한 것이다. 총을 의거하여 별을 여는 것에 부분적으로 여는 것(分開)과 완전히 여는 것(滿開)이 있기 때문에, 완전히 여는 뜻을 기준으로 하여 ‘그 인印을 만족시킨다’라고 한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별 이외에 다시 근본의 총이 없는데 어째서 도인에 의지함과 도인을 만족시킴을 말하는가?

006_0799_a_01L順云六相之中有同異也
006_0799_a_02L何難哉已上何不通云有六相
006_0799_a_03L而但特取同異云耶若約舍
006_0799_a_04L別則椽等諸綠別於捴舍而已
006_0799_a_05L第上之二第一七張 非謂見其形曲
006_0799_a_06L長短又其壞者但見諸綠各住
006_0799_a_07L自法本不作耳唯同異相隨約
006_0799_a_08L一緣攝帶諸緣成滿足舍力義齊
006_0799_a_09L而柱則八尺椽則丈二瓦則
006_0799_a_10L尺餘如是長短差別之位各自不
006_0799_a_11L動故但取此義而答也

006_0799_a_12L
六相章云一即具多名捴相
006_0799_a_13L即非一是別相多類自同成於摠
006_0799_a_14L各體別異現於同一多緣起理妙
006_0799_a_15L壞住自法常不作唯智境界非
006_0799_a_16L事識以此方便會一乘

006_0799_a_17L
大記云摠相者根本印別相者
006_0799_a_18L屈曲別依止印滿彼印故者根本印
006_0799_a_19L離別之摠滿彼印者帶別之摠
006_0799_a_20L然雖有二義而無二摠所謂摠
006_0799_a_21L者無別可對故云離別然此離別
006_0799_a_22L之摠旣攬別成故云帶別耳依摠開
006_0799_a_23L有分開滿開故約滿開之義
006_0799_a_24L滿彼印也若尒別外更無本摠

006_0799_b_01L
실제를 기준으로 하여 말하면, 곧 마땅히 도인에 의지함과 도인을 만족시킴을 말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곁이 없음을 깨달아 서로 알지 못하는 곳에 이르게 하기 위한 까닭에, 우선 주체와 대상을 구분하여 이와 같이 말한 것일 뿐이다.

‘동상이란 인印이기 때문이다’란 모든 굴곡 등이 하나하나가 비록 다르나 한 가지 원만한 도인이기 때문이다. 같음(同)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말하자면 동등하기 때문에 같음과 하나이기 때문에 같음이다. 동등하기 때문에 같은 것은 육상의 나열된 문의 동상인 까닭에 여러 연이 서로 바라보아 힘의 뜻이 가지런히 같은 것이다. 하나이기 때문에 같은 것은 동상의 한 연이 모든 연을 거두어 다하니 곧 총이다.

‘이상이란 늘어나는 모습이기 때문이다’란 처음의 굴곡과 다음의 굴곡이 각각 달라서 늘어나는 수이기 때문이다. 늘어남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말하자면 안으로 향하여 늘어남과 밖으로 향하여 늘어남이다. 말하자면 총과 같은 모든 연이 서로 같지 않은 것은 안으로 향하여 늘어남이고, 서로 바라봄에 조화롭게 통하는 모든 연이 서로 같지 않은 것은 밖으로 향하여 늘어남이다.

‘성상이란 간략히 설하기 때문이다’란 말하자면 모든 굴곡이 합하여 하나의 도인을 이루기 때문이다. 모든 연의 구경의 자리에 이르러서 단지 하나의 연이 곧 바로 총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간략히 설한다’고 한 것이다. ‘괴상이란 널리 설하기 때문이다’란 모든 굴곡이 각각 머물러서 본래 지음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연을 두루 살펴서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는 스스로 그러한(自如) 곳에 이르게 하는 까닭에 ‘널리 설한다’라고 한 것이다.

법융기
『법기』에 이른다. ‘총상이란 근본인이다. 별상이란 나머지 굴곡들이다’라는 것은, 총은 하나가 많은 덕을 포함한 것이고 별은 많은 덕이 하나가 아닌 것이다.
‘하나’는 무엇이며 ‘많은 덕’은 무엇인가?
법계의 법이 듦을 따라서 곁이 없는 뜻이 ‘하나’이다. 이 곁이 없는 하나의 다함없는 뜻이 ‘많은 덕’이다.
곁이 없는 하나의 다함없는 뜻을 어떻게 보는가?

006_0799_b_01L何云依印與滿印耶約實而言
006_0799_b_02L不應云依印滿印然欲令解無側
006_0799_b_03L至不相知處故 1) [130] 分能所如是云耳
006_0799_b_04L同相者印故者諸屈曲等一一雖別
006_0799_b_05L而同是圓印故也同有二義謂等故
006_0799_b_06L一故同也等故同者六相列門
006_0799_b_07L之同相故諸綠相望力義齊同也
006_0799_b_08L故同者同相一緣攝盡諸緣即是
006_0799_b_09L摠也異相者增相故者初曲次曲
006_0799_b_10L各異增數故也增有二義謂內向增
006_0799_b_11L外向增也謂同於摠之諸緣不相是
006_0799_b_12L內向增互望和通之諸緣不相是
006_0799_b_13L第上之二第一八張 外向增也
006_0799_b_14L相者略說故者謂諸屈曲合成一印
006_0799_b_15L故也至於諸緣究竟之際只言一
006_0799_b_16L綠即正是摠故云略說也壞相者
006_0799_b_17L廣說故者諸曲各住本無爲作故也
006_0799_b_18L遍徵諸緣令至不增不減自如之處
006_0799_b_19L云廣說也

006_0799_b_20L
法記云摠相者根本印別相者餘屈
006_0799_b_21L曲者摠則一含多德別則多德非一
006_0799_b_22L一者是何多德是何法界
006_0799_b_23L法之隨擧無側之義是一也此無側
006_0799_b_24L一之無盡之義是多德也無側一

006_0799_c_01L
우선 이 연緣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집을 기준으로 하여 말하면, 매 하나하나의 연이 모두 집을 만족시키는 것이 이것이다. 말하자면 하나의 법을 듦에 따라 곁이 없이 일어나서 구경에 상대를 끊은 것은 곁이 없는 하나이다. 이 하나가 포함하는 바 별의 덕도 또한 각각 모두 포함하여 하나하나가 구경인 까닭에 매 하나하나의 연이 모두 법을 만족시키는 것은 다함없는 덕이다.

만약 예를 들어 말하면 문수보살 선지식은 지혜와 비춤이 두 가지 모습이 없다. 만약 의지하는 바를 따라 풀어서 설하면, 선재동자가 문수보살을 볼 때 곧 삼천세계 티끌 수의 선지식을 본다. 말하자면 능히 비추는 지혜가 비추어지는 경계와 다만 하나이기 때문에, 하나의 문수를 볼 때 의지하는 바 삼천세계가 곧 선지식이니, 따라서 ‘삼천세계 티끌 수의 선지식을 본다’는 것이다. 만약 의지하는 바를 버리고 설하면, 곧 법계의 모든 법을 모두 잡아 지녀 하나의 문수를 이루기 때문에, 하나의 문수를 볼 때에 다만 삼천세계 티끌 수의 선지식을 볼 뿐만 아니라, 또한 법계의 티끌 수의 모든 선지식(善友)을 단박 참견參見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하나의 문수가 법계의 경계를 다하는 것을 기준으로 하면, 삼천세계 티끌 수의 선지식이 하나하나 또한 법계의 경계를 다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의 문수인가, 여러 문수인가?
기준으로 하는 바를 따라서 기준이 하나의 문수이며, 기준으로 하는 바를 따라서 기준이 하나의 집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문수 또한 가능하고 여러 문수 또한 가능하며, 하나의 집 또한 가능하고 여러 집 또한 가능하다.

‘동상이란 인印이기 때문이다’란 오십사각五十四角이 한 가지 하나의 원만한 도인이기 때문에 ‘굴곡은 다르지만 한가지 인印’이라고 하는 것이다.
분동分同과 만동滿同의 뜻은 무엇인가?
나누어서 다르게 할 수 없는 큰 허공을 나누어서 시방으로 하여,

006_0799_c_01L之無盡之義如何見耶且約此緣
006_0799_c_02L成一堂云則每一一緣皆滿足堂者
006_0799_c_03L是也謂隨擧一法無側起而究竟
006_0799_c_04L絶待者是無側一此一所含別德
006_0799_c_05L各統包一一究竟故每一一緣皆滿
006_0799_c_06L足法者是無盡之德也若引例而言
006_0799_c_07L文殊知識是智照無二相若隨
006_0799_c_08L所依而散說則善財見文殊時即見
006_0799_c_09L三千世界塵數知識謂能照智與所
006_0799_c_10L照境只是一故見一文殊時所依
006_0799_c_11L三千即是知識故云即見三千世界
006_0799_c_12L塵數知識也若捨所依而說則摠攬
006_0799_c_13L法界諸法成一文殊故見一文殊時
006_0799_c_14L非但得見三千世界塵數知識亦得
006_0799_c_15L頓叅法界塵數諸善友也是故約一
006_0799_c_16L文殊盡法界際三千世界塵數知識
006_0799_c_17L一一亦盡法界際也然則一文殊
006_0799_c_18L多文殊耶隨所約約是一文殊
006_0799_c_19L隨所約約是一堂也是故一文殊亦
006_0799_c_20L多文殊亦得一堂亦得多堂亦得
006_0799_c_21L第上之二第一九張 同相者印故者
006_0799_c_22L五十四角同一印圓故云曲別而同
006_0799_c_23L印也分同滿同之義云何不可
006_0799_c_24L「且」作「具」{乙}

006_0800_a_01L한 방향의 허공이 큰 허공과 같을 때 시방의 허공이 동시에 같은 것은 만동이다. 오직 한 방향의 같은 것만을 보고 나머지 방향(의 허공이 큰 허공과) 같은 것을 보지 않는 것은 분동이다.

‘이상이란 늘어나는 모습이기 때문이다’란 (다음과 같다.)
수數가 늘어나는 것인가, 자리(位)가 늘어나는 것인가?
혹은 이르기를, “첫 번째 각, 두 번째 각, 이렇게 세기 때문에 그 수가 늘어남을 따라서 자리 또한 늘어난다.”라고 한다. 혹은 이르기를, “첫 번째, 두 번째, 이렇게 세기 때문에 수가 늘어난다고 한다. 그러나 각이 늘어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자리가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한다.

‘성상이란 간략히 설하기 때문이다’란,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집 앞에 서서 ‘사람 (있느냐?)’는 한마디 말로 집 안의 대중을 부르면 대중이 모두 입으로 대답(口許)하는 것과 같으니, 이와 같이 ‘도인(印)’이라는 한마디 말로 도인을 부를 때 오십사각이 모두 도인인 것이다. 그러므로 강장 스님이 이르기를, “연緣으로 이루어져 화합한 것을 간략히 말해서 표방해 나타내는 것이다.”62)라고 하였다.
동상 가운데 하나하나의 각이 원만한 도인과 같다는 뜻을 밝혔는데, 이 중에서는 무슨 뜻을 밝히는가?
하나의 각곡角曲을 따라서 매 (각곡)마다 곧 도인인 것이 성상이 될 뿐이고, 모든 각이 도인을 이룬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괴상이란 널리 설하기 때문이다’란, 마치 사람의 몸에 국집하여 그 ‘사람’의 이름을 따져봄에 (사람 몸 중의) 한 물건도 적합하게 ‘사람’의 이름을 받음이 없는 것과 같이, 이와 같이 널리 분별하여 오십사각을 차례로 살펴보아도 한 각도 ‘원만한 도인’의 이름을 받음이 없다. 그러므로 강장 스님이 이르기를, “연緣이 흩어져 지음이 없으니 널리 인연을 분별하는 것이다.”63)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 도인 가운데 도인의 원만함은 총상이고, 원만한 도인의 모든 각곡은 별상이다. 모든 각곡의 하나하나가 가지런히 한 가지 도인인 것은 동상이고, 가지런히 한 가지 도인이지만 움직이지 않고 각각 다른 것은 이상이다. 움직이지 않고 다르지만 치우쳐 해당되는 바 없이 곧 바른 도인인 것은 성상이고, 곧 바른 도인이면서 각각 스스로 머물러 짓지 않는 것은 괴상이다.

006_0800_a_01L分異之大虛分爲十方一方虛空
006_0800_a_02L同大虛時十方虛空同時同者滿同
006_0800_a_03L唯見一方同不見餘方同者分同也
006_0800_a_04L異相者增相故者數增耶位增耶
006_0800_a_05L一云1)弟一角*弟二角如是而數
006_0800_a_06L故隨其數增位亦增也一云*弟一
006_0800_a_07L*弟二如是而數故云數增然非角
006_0800_a_08L增故非位增也成相者略說故者
006_0800_a_09L比如有人立在堂前以人一言呼堂
006_0800_a_10L內衆衆皆口許如是以印一言呼印
006_0800_a_11L之時五十四角皆即是印故康藏
006_0800_a_12L綠成和合略言標現同相中
006_0800_a_13L明一一角同於圓印之義此中明何
006_0800_a_14L義耶隨一角曲每即是印爲成相
006_0800_a_15L非謂諸角成於印也壞相者廣說
006_0800_a_16L故者如執人身詰其人名無有一物
006_0800_a_17L的受人名如是廣辨五十四角次*弟
006_0800_a_18L詰之無有一角受圓印名故康藏云
006_0800_a_19L緣散無作廣辨因緣也故此印中印
006_0800_a_20L之圓滿者是摠相也圓滿印之諸角
006_0800_a_21L曲者是別相也諸角曲之二 [127] 齊同
006_0800_a_22L印者是同相也齊同印而不動各異
006_0800_a_23L是異相也不動異而無所偏當即
006_0800_a_24L正印者是成相也即正印而各各自

006_0800_b_01L이 육상의 문이 바로 일승의, 함께하지 않는 방편이며 또한 함께하지 않는 법의 체體이다.

이 육상으로 또 삼관三觀에 배대하면 별상은 변계이고, 동상과 이상은 인연관이며, 성상과 괴상은 연기관이고, 근본의 총상은 성기관이다. 이는 지위에 의해서 말한 것이고, 만약 일승을 기준으로 하면 인연ㆍ연기ㆍ성기의 삼관이 얕고 깊음이 없다.

‘총상은 뜻이 원교에 해당하고, 별상은 뜻이 삼승교에 해당한다’라는 것은,
원교는 동교인가, 별교인가?
동교이다. 말하자면 도인의 원만함은 원교이고 오십사각은 삼승이다. 그러므로 원교와 삼승이 모두 동교이다. 무엇인가? 도인의 원만함을 여의고는 모든 각곡이 없으며, 모든 각곡을 여의고는 도인의 원만함이 없기 때문이다.

대기
『대기』에 이른다. 신림 대덕은 이 도리를 의거하여 오중의 총상과 별상을 세웠다. 말하자면 첫째는 별을 여읜 총이니, 오중해인의 첫 해인이다. 둘째는 별을 거느리되 별을 여읜 총이며 또한 연 가운데 나타나되 연을 여읜 총이라고도 하니, 제2해인이다. 셋째는 총이 곧 별이고 별이 곧 총이니, 제3해인이다. 넷째는 또한 총이고 또한 별이니, 제4해인이다. 다섯째는 총도 아니고 별도 아니니, 제5해인이다. 말하자면 별을 잡아 지녀 총을 이루기 때문에 총이 아니고, 총을 의지해서 별을 이루기 때문에 별이 아니니 아울러 형체를 빼앗기기 때문이다.

이 오중 안에서 처음은 총이고 다음은 별이며, 또 제2는 총이고 제3은 별 등이니 이와 같이 서로 바라보아 총과 별을 짓는다. 또 이 하나하나가 각각 총과 별을 갖춘다. 말하자면 첫 해인을 제외하고 제이중해인에서 부처님의 증득하신 마음은 총이고 나타난 삼세간은 별이니, 이 별이 총보다 하열하지 않다.

006_0800_b_01L住不爲作者是壞相也此六相門
006_0800_b_02L正是一乘不共方便亦是不共法體
006_0800_b_03L以此六相且配三觀則別相是遍
006_0800_b_04L計也同異則因緣觀成壞則緣起觀
006_0800_b_05L第上之二第二○張 本摠則性起觀也
006_0800_b_06L此則寄位言耳若約一乘則因綠綠
006_0800_b_07L起性起三觀無淺深也惣相者義當
006_0800_b_08L圓敎別相者義當三乘敎者
006_0800_b_09L敎者是同敎耶是別敎耶是同
006_0800_b_10L敎也謂印圓是圓敎五十四角是三
006_0800_b_11L是故圓敎及三乘皆同敎也何者
006_0800_b_12L離印圓無諸角離諸角無印圓故也
006_0800_b_13L大記云林德依此處立五重惣別
006_0800_b_14L一離別之惣是五重海印之初海印
006_0800_b_15L二帶別而離別之惣亦云緣中
006_0800_b_16L現而離緣之惣是*弟二海印也
006_0800_b_17L惣即別別即惣是*弟三海印四亦
006_0800_b_18L惣亦別是*弟四海印也五非惣非
006_0800_b_19L是*弟五海印也謂攬別成捴故
006_0800_b_20L非捴 依捴成別故非別並形奪故也
006_0800_b_21L於此五重之內初捴次別又*弟二
006_0800_b_22L*弟三別等如是相望而作捴別
006_0800_b_23L又此二 [128] 各具捴別也謂除初海印
006_0800_b_24L*弟二重佛訂心是捴 所現三世間

006_0800_c_01L이 가운데 동ㆍ이ㆍ성ㆍ괴는 없으니, 이 총과 별이 다만 한 체이기 때문이다. 이는 연기인 육상이 들어가는 바인 참된 근원이다. 제삼중해인에서는 육상을 쓰는 데 방해롭지 않으나, 이 또한 법의 체이고 방편의 육상은 아니다.

제사중 이후를 기준으로 하여 인연ㆍ연기ㆍ성기 등의 삼관을 배대하면, 세 가지 뜻을 포함하고 있다. 말하자면 첫째는 총상이란 머무름 없는 별교이고 별상은 흘러나온 바 삼승이다. 목표로 하는 바(所目) 중에서 동상ㆍ이상은 인연관이고 성상은 연기관이며 괴상은 성기관이다. 이 가운데 다스리는 바 병을 기준으로 하여 별상으로 삼을 뿐이고, 능히 다스리는 육상 가운데 별상은 아니다. 둘째는 머무름 없는 별교와 달리 집착하는 삼승을 제하고 목표로 하는 바에 나아가면, 총상ㆍ별상은 성기관이고 동상ㆍ이상은 인연관이며 성상ㆍ괴상은 연기관이다. 또 이 삼관이 하나하나가 각각 육상을 갖춘다. 이 제사중 이후는 방편의 육상이다. 이 오중(五重海印)으로 곳곳의 문장을 해석함에 뜻과 이치가 비로소 다하니, 지금 이 글 중에도 오중을 갖춘다.

고기

‘고기’에 이른다. 의상 화상이 총장總章 원년(668) 10월 11일 청선사淸禪寺64) 반야원般若院에서 지엄 스님에게 여쭈었다. “보법의 궤칙을 받아 지니는 것이 무엇입니까?” 스님이 이르기를, “그대가 지닐 수 있겠는가? 우선 옷깃을 들면 털이 가지런해지고 벼리를 집으면 그물눈이 바르게 된다.”라고 하였다. (의상 스님이) 여쭈었다. “이 뜻이 무엇입니까?” 스님이 이르기를, “아래로는 세속의 법에 이르기까지 모두 중도의 실상이다.”라고 하고, 이어서 십중의 총상과 별상을 설하여 이를 보였다.

006_0800_c_01L此別不劣於捴也此中無同異成
006_0800_c_02L此之捴別只 是一體故是綠起
006_0800_c_03L六相之所入眞源也於*弟三重
006_0800_c_04L防用六相也此亦法體非方便六相
006_0800_c_05L約*弟四重以去配因綠緣起性
006_0800_c_06L起等三觀含有三義謂一捴相者
006_0800_c_07L住別敎別相者所流三乘於所目
006_0800_c_08L同異相者因緣觀成相者緣起
006_0800_c_09L壞相者性起觀此中約所治之
006_0800_c_10L爲別相耳非能治六相中別相也
006_0800_c_11L二除無住別敎及別執三乘就所目
006_0800_c_12L 捴別相者性起觀同異相者因
006_0800_c_13L綠觀成壞相者緣起觀也又此三
006_0800_c_14L第上之二第二一張 一一各具六相
006_0800_c_15L此*弟四重以去是方便六相也
006_0800_c_16L以此五重釋處處文義理方盡今此
006_0800_c_17L文中具五重也

006_0800_c_18L
古記云相和尙捴章元年十月十
006_0800_c_19L一日在淸禪寺般若院中問於儼
006_0800_c_20L受持普法軌則云何師曰
006_0800_c_21L能持否且擧領毛齊2) [131] [129] 目正也
006_0800_c_22L是義云何師曰下至世俗之法
006_0800_c_23L皆是中道實相也遂說十重捴別
006_0800_c_24L「弟」作「第」{乙}次同「網」作「綱」{乙}

006_0801_a_01L지엄 스님의 행장 중 총과 별의 글이 바로 이것이다.

첫째는 수순함이 총摠이고 거스름이 별別이다. 말하자면 총상인 과법이 티끌 수의 연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수순함이 총이다. 총을 이루는 연이 다르기 때문에 거스름이 별이다.
둘째는 거스름이 총이고 수순함이 별이다. 말하자면 총을 이루는 연이 자기의 자리를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거스름이 총이다. 자기의 자리를 움직이지 아니하나 능히 이루기 때문에 수순함이 별이다.
셋째는 별과 같은 총이며 총과 같은 별이다. 말하자면 별이 온전히 총이기 때문에 별과 같은 총이다. 총이 온전히 별이기 때문에 총과 같은 별이다.

넷째는 별을 알지 못하는 총이며 총을 알지 못하는 별이다. 말하자면 이루어지는 총 가운데 별의 모습이 없기 때문에 별을 알지 못하는 총이다. 능히 이루는 연 가운데 총의 모습이 없기 때문에 총을 알지 못하는 별이다.
다섯째는 별을 여읜 총이며 총을 여읜 별이다. 말하자면 총상인 과법 가운데 연이 총 아님이 없기 때문에 별을 여읜 총이다. 총과 다른 별이 없기 때문에 총을 여읜 별이다.

여섯째는 머무름 없음이 총이고 머무름 없음이 별이다. 말하자면 머무름이 없다는 것은 자재하지 않다는 뜻이니, 총상인 과법이 자신에게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 머무름 없음이 총이라고 한다. 이 머무름 없는 총이 티끌 수의 연 가운데 치우쳐 해당되는 바가 없기 때문에 머무름 없음이 별이다.
일곱째는 실상이 총이고 실상이 별이다. 말하자면 총상인 과법이 지智의 분별하여 깨달아 앎을 여의었기 때문에 실상이 총이다. 연이 별상이 없기 때문에 실상이 별이니 이른바 모습이 없음이다.

여덟째는 법성이 총이고 법성이 별이다. 말하자면 총상인 과법이 성性이 스스로 원만히 통하여 연을 만나면 이에 수순하기 때문에 법성이 총이다. 이 수순하는 법이 온전히 온전히 곁이 없이 일어나기 때문에 법성이 별이라고 한다.

006_0801_a_01L以示之儼師行錄中捴別之文
006_0801_a_02L是此也一順捴違別謂捴相果法
006_0801_a_03L以塵數緣成故順則捴 成捴緣別
006_0801_a_04L違則別也二違捴順別謂成
006_0801_a_05L捴之緣自位不動故違則捴
006_0801_a_06L位不動而能成故順則別也三如
006_0801_a_07L別之捴 如捴之別謂別全是捴故
006_0801_a_08L如別之捴 捴全是別故如捴之別
006_0801_a_09L四別不知之捴 捴不知之別
006_0801_a_10L謂所成捴中無別皃故別不知之
006_0801_a_11L 能成緣中無捴皃故 捴不知之
006_0801_a_12L別也五離別之捴 離捴之別
006_0801_a_13L捴相果中緣而無不捴故離別之
006_0801_a_14L 無異捴之別故離捴之別也
006_0801_a_15L六無住捴無住別謂無住者不自
006_0801_a_16L在義以捴相果法不住於自
006_0801_a_17L云無住捴 此無住捴 塵數緣中
006_0801_a_18L無所偏當故無住別也七實相捴
006_0801_a_19L實相別謂捴相果法離於智之分
006_0801_a_20L別了知故實相捴 緣無別相故
006_0801_a_21L實相別也所謂無相也八法性捴
006_0801_a_22L法性別謂捴相果法性自圓通
006_0801_a_23L觸緣斯順故第上之二第二二張
006_0801_a_24L性捴 斯順之法全全無側起故

006_0801_b_01L
아홉째는 해인이 총이고 해인이 별이다. 말하자면 다함없는 법수法數가 두렷이 밝게 몰록 나타나 남음이 없기 때문에 해인이 총이라고 한다. 몰록 나타난 법이 각각 서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해인이 별이라고 한다.
열째는 증득이 총이고 증득이 별이다. 말하자면 총상인 과법은 오직 부처님만 증득하시는 자리이기 때문에 증득이 총이라고 한다. 이 증득 중에 모든 법이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증득이 별이라고 한다.

신림 대덕이 이르기를, “이 열 가지의 총과 별로 법을 평등하게 한 후에야 비로소 하나의 티끌, 하나의 개미가 노사나불과 더불어 원래 한 몸임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뜻에 의거하여야 비로소 동시에 갖추어짐(同時具足)과 인드라그물의 미세한 경계65) 등이 있다.”라고 하였다.

넷째의 총ㆍ별이 다섯째와 어떻게 다른가?
넷째는 비록 서로 알지 못하나 두 지위의 다름이 없는 것은 아니며, 다섯째는 하나의 체體에서 총을 말하고 별을 말하는 까닭에 다르다.
여섯째의 머무름 없음이 총ㆍ별인 것은 일곱째의 실상이 총ㆍ별인 것과 어떻게 다른가?
실상은 지智의 분별을 여읜 것을 말하니, 곧 여섯째의 머무름 없는 지智를 가려낸 것이다. 여덟째 법성을 구족함에 이르러서 이지理智를 알 수 있다.

대기
『대기』에 이른다. ‘총상ㆍ별상’에서 ‘항상 중도에 있다’66)까지는 두 가지 해석이 있다. 말하자면 하나의 뜻은 총상으로부터 중도에 이르러 비로소 ‘같다(如)’라는 것이고,67) (다른) 하나의 뜻은 총상ㆍ별상 다음에 바로 ‘같다’라는 것이다.68)

풀이하면, 처음 뜻은 총은 별이 아니고 별은 총이 아니며 성은 괴가 아니고 괴는 성이 아닌 것 등인 까닭에 ‘즉하지도 않고’, ‘하나도 아니고’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총이 온전히 별이고 별이 온전히 총이기 때문에 ‘여의지도 않으며’, ‘다르지도 아니하여’ 등이라고 한 것이다.
뒤의 뜻은 ‘즉하지도 않고 여의지도 않으며’는 성상ㆍ괴상이고, ‘하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아니하여’는 동상ㆍ이상이다.

006_0801_b_01L云法性別也九海印捴海印別
006_0801_b_02L無盡法數圓1) [132] 頓現無遺故
006_0801_b_03L海印捴頓現之法各不相知故
006_0801_b_04L海印別也十訂捴訂別謂捴相果
006_0801_b_05L唯佛訂處故云訂捴 於此訂
006_0801_b_06L諸法不動故云訂別也林德
006_0801_b_07L以此十重捴別平法然後方能
006_0801_b_08L得見一塵一蟻與舍那佛元是一
006_0801_b_09L依如是等義方有同時具足
006_0801_b_10L及因陁羅網微細境界等也2)
006_0801_b_11L四捴別與*弟五何別*弟四重
006_0801_b_12L雖不相知非無二位之殊 *弟五
006_0801_b_13L則於一體上云捴云別故別也
006_0801_b_14L*弟六無住捴別與*弟七實相
006_0801_b_15L捴別何別實相云離於智之分
006_0801_b_16L則簡於*弟六無住之智也
006_0801_b_17L於*弟八法性具足理智可知也

006_0801_b_18L
大記云如捴相別相乃至常在中道
006_0801_b_19L有二釋謂一意從捴相至中道
006_0801_b_20L云如字一意於捴相別相下即云如
006_0801_b_21L解云初意則捴非別別非捴 成非
006_0801_b_22L壞非成等故云不即不一然而捴
006_0801_b_23L全別別全捴 故云不離不異等也
006_0801_b_24L則不即不離則成壞相也不一不

006_0801_c_01L말하자면 아래 가르침의 사람이 구경의 과보의 자리에 이르름에 진실과 허망이 같은 체라고 집착하므로 괴상의 도장으로 도장 찍으면, 진실과 허망이 각자 머물러 본래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즉하지도 않고’라고 한다. 성상의 도장으로 도장 찍으면 진실과 허망이 진실이기 때문에 ‘여의지도 않는다’라고 한다. 또 시각이 본각과 같은 지위를 만남에 범부와 성인이 하나다, 다르다라는 병이 있기 때문에 동상(과 이상)으로써 이를 다스린다.69) 말하자면 (시각이) 본각과 즉하여 같아지는 날에 범부와 성인이 한 몸이라고 집착하기 때문에, 이상으로써 이를 다스리면 범부와 성인이 각각 다르므로 ‘하나도 아니고’라고 하며, 동상으로써 이를 다스리면 범부와 성인이 하나이므로 ‘다르지도 아니하여’라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연ㆍ연기(ㆍ성기) 등의 삼관으로써, 다르다고 집착하는 삼승의 ‘즉함’과 ‘여읨’과 ‘하나’와 ‘다름’의 병을 상대하여 다스리기 때문에, 그 삼승의 권속이 일승의 주主와 더불어 즉하지도 않고 여의지도 않는 반伴이 되어서, 두렷이 밝으며 덕을 갖춘 주主와 반伴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육상을 쓰면 병이 마땅히 이미 다 나을 것인데 어째서 다시 4구를 쓸 필요가 있는가?
만약 총상을 얻으면 4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르다고 계탁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4구를 설하는 것뿐이다.

‘일승과 삼승이 주主와 반伴을 서로 이룬다’란,
한결같이 일승은 주主이고 삼승은 반伴인가, 혹은 이와 반대로 해서도 말하는가?
어떤 이는 뒤와 같다고 말한다. 비록 그러나 오직 한결같이 일승이 주主이고 삼승은 반伴이다. 말하자면 한결같이 근본의 들어감(根本入)을 총상이라 이름하고 아홉 가지 들어감(九入)을 별상이라 이름할 뿐이다. 근본의 들어감의 이름으로 별상을 삼고 나머지 아홉 가지 들어감의 이름으로 총상을 삼는 것이 아니고, 다만 일승의 이름으로 총상을 삼고 주主를 삼으며, 삼승의 이름으로 별상을 삼고 반伴을 삼는다.

만약 그렇다면 어째서 “주主와 반伴을 서로 이룬다.”라고 말하는가?

006_0801_c_01L異則同異相也謂下敎人至究竟果
006_0801_c_02L執眞妄同體故以壞相印印之
006_0801_c_03L則眞妄各住本來不動故云不即
006_0801_c_04L成相印印之則眞妄眞故云不離也
006_0801_c_05L又當始覺同本覺之位有凡聖一異
006_0801_c_06L之病故以同相治之謂即同本覺之
006_0801_c_07L執凡聖一身故以異相治之
006_0801_c_08L聖各異故云不一以同相治之
006_0801_c_09L聖一量故云不異也如是以因緣緣
006_0801_c_10L起等三觀第上之二第二三張 對治別
006_0801_c_11L執三乘即離一異之病故其三乘眷
006_0801_c_12L與一乘主爲不即不離之伴得成
006_0801_c_13L圓明具德之主伴也用六相則病
006_0801_c_14L應已盡何須更用四句耶若得捴
006_0801_c_15L則不須四句然爲3) [133] 別之人
006_0801_c_16L四句耳一乘三乘主伴相成者
006_0801_c_17L向一乘主三乘伴耶或反此而云耶
006_0801_c_18L有云如後雖然唯是一向一乘是
006_0801_c_19L三乘是伴也謂一向根本入名爲
006_0801_c_20L 九入名爲別耳非以根本入之名
006_0801_c_21L爲別餘九入名爲惣故但以一乘之
006_0801_c_22L爲捴爲主三乘之名爲別爲伴也
006_0801_c_23L若爾何故云主伴相成耶
006_0801_c_24L▣高麗大藏經影印本作「明」{編}「弟」作「第」
006_0801_c_25L{乙}次同
「計」作「許」{乙}

006_0802_a_01L
일승을 말미암기 때문에 삼승이 있고 삼승을 말미암기 때문에 일승이 있다. 그러므로 일승은 삼승을 모두 포함하여 주主가 되고, 삼승은 반드시 일승에 의거하여 반伴이 되기 때문에 ‘서로 이룬다’라고 한 것이다.

‘일승의 별교와 삼승의 별교도 뜻에 준하여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육상의 뜻을 쓰면 오직 동교의 문이기 때문에 일승별교와 삼승별교를 제외한다. 그러나 만약 자세하게 설하면, 일승별교가 주主가 되고 삼승별교가 권속으로서 반伴이니, 이를 기준으로 하여 중도의 뜻을 나타내 보이면 준하여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혹은 이르기를, “앞에서 말한 원교와 삼승은 모두 동교인데, 지금 이 일승별교는 동교보다 깊고 삼승별교는 동교보다 낮으니, 뜻에 준하여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법융기
『법기』에 이른다. ‘오직 스스로 그러함(自如)에 머무른다’란, 삼승의 모습은 융섭하지만 체는 융섭하지 않는 평등한 진여가 아니다. 체와 모습이 함께 융섭되어 분별이 없는 자리와 더불어 괴상 가운데 본래 짓지 않으며 각각 스스로 그러함에 머무는 뜻을 기준으로 하여 이른 것이다. “삼승방편의 가르침의 문에 의하므로 높고 낮음이 같지 않다.” 등이란 만약 삼승방편의 수행을 기준으로 하면 원인과 결과를 차례로 늘어놓아(行布) 위와 아래가 같지 않으나, 만약 일승의 진실한 뜻에 의하면 원인과 결과가 원융하여 법성의 덕용德用이 다만 중도에 있으므로 ‘앞과 뒤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간의장

『간의장簡義章』70)에 이른다. 원융과 항포行布에 네 가지 문이 있음을 설한다.
첫째, 삼승은 항포이고 일승은 원융이다. 『법계도』의 본문에서 “삼승방편의 가르침에 의하므로 높고 낮음이 같지 않으며 일승원교에 의하므로 앞과 뒤가 없다.”라는 등으로 말한 것과 같다.
둘째, 이 『(화엄)경』 가운데 나아가 바깥 모습(外相)이 동교인 것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상동上同이니, 71)

006_0802_a_01L一乘故有三乘由三乘故有一乘
006_0802_a_02L一乘則捴含三乘爲主三乘則要
006_0802_a_03L依一乘爲伴故云相成也一乘別敎
006_0802_a_04L三乘別敎准義可解者用六相義
006_0802_a_05L同敎門故除一乘別敎及三乘別敎
006_0802_a_06L然若委說則一乘別敎爲主三乘別
006_0802_a_07L敎是眷屬伴約此現示中道之義
006_0802_a_08L准解也一云前云圓敎及三乘皆是
006_0802_a_09L同敎今此一乘別敎深於同敎
006_0802_a_10L乘別敎淺於同敎准義可解故也

006_0802_a_11L
法記云唯住自如者非是三乘相融
006_0802_a_12L體不融之平等眞如也約體相俱融
006_0802_a_13L無分別之處與壞相中本來不作
006_0802_a_14L各住自如之義云也依三乘方便敎
006_0802_a_15L門故高下不同等者若約三乘方便
006_0802_a_16L修行則行布因果高下不同若依一
006_0802_a_17L乘實意則因果圓融法性德用但在
006_0802_a_18L中道故云無有前後也第上之二第二
006_0802_a_19L四張

006_0802_a_20L
簡義章云圓融行布說有四門
006_0802_a_21L三乘行布一乘圓融如圖文云
006_0802_a_22L三乘方便敎門故高下不同依一
006_0802_a_23L乘圓敎故無有前後等二就此經
006_0802_a_24L外相同敎有二一上同以空

006_0802_b_01L둘째는 하동下同이니, 아래로 땅에 (그린) 그림과 비슷하여 앞과 뒤가 있기 때문이다. 상동은 원융의 뜻이고 하동은 항포의 뜻이다. 「십지품」에서 한 마리 새의 자취가 두 가지에 통하는 것72)과 같기 때문이다.

셋째, 바깥 모습이 동교인 것으로 항포를 삼고 자체의 별교로 원융을 삼는다. 「소전차별장」에 이르기를, “모든 가르침을 안립하는 데 두 가지 선교가 있다.”73)라고 하는 등과 같다. 또 『과간科簡』74)에 이르기를, “보현의 지위가 둘이 있다.”75)라고 하는 등이 이것이다.
넷째, 자체의 별교에 나아가 본래의 지위를 무너뜨리지 않는 것이 항포이고 걸림 없이 원융한 것이 원융이다. 말하자면 광대함과 협소함 가운데 나눔과 나눔이 없음이다.76) 또 상입문에서 본성이 없음과 무너지지 않음이다. 또 자기의 자리를 움직이지 않으면서 항상 가고 오는 것이다. 또 육상 중에서 셋은 원융이고 셋은 항포 등이다.77)

2) 십입十入

‘모든 보살이란’부터 ‘오온(陰)ㆍ십팔계(界)ㆍ십이처(入) 등이다’까지78)

법융기
『법기』에 이른다. ‘논에서 말한다. 모든 보살(一切菩薩)이란 신信ㆍ행行ㆍ지地에 머무르는 자를 말한다’라고 한 것은, 신信은 십신十信이고, 행行은 삼현三賢이며, 지地는 십지十地이다. 만약 크게 나누는 문에 의하면 신信ㆍ행行의 지위는 삼현이고 증득을 얻음은 십지이다.
‘불가사의한 모든 부처님의 법(不可思議諸佛法)이란 출세간도의 품류이다’라고 한 것은 ‘불가사의한 부처님의 법’은 곧 부처님의 안으로 증득하심(內證)이다. 말하자면 마치 연못의 물이 그림자를 갖추어 포함하는 것과 같으니 두 가지 뜻이 있다. 말하자면 모든 모양을 거두어들이는 뜻과 모든 모양을 나타내는 뜻으로, 어떤 한 사람이 연못가에 서서 이 모든 모양을 보고 다른 이를 위해 설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부처님이 증득하신 세 가지 세간이 자신의 몸과 마음이 됨은 저 물 가운데 모든 모양을 거두어들이는 것과 같고, 자신의 안으로 증득함으로써 근기에 임하여 밖을 향하여 십지를 나누어 보이는 것은 저 물 가운데 모든 모양을 나타내는 것과 같다.

006_0802_b_01L畫向空即體同空隨分無㝵
006_0802_b_02L下同下似地畫有前後故上同
006_0802_b_03L是圓融義下同是行布義如地品
006_0802_b_04L以一鳥跡通於二故三外相
006_0802_b_05L同敎爲行布自體別敎爲圓融
006_0802_b_06L所詮章云安立諸敎有二善巧等
006_0802_b_07L又科簡云普賢位有二等是也
006_0802_b_08L就自體別敎不壞本位是行布
006_0802_b_09L㝵圓融是圓融謂廣1)俠中分無分
006_0802_b_10L又相入門無性不壞又不動自位
006_0802_b_11L而恒去來又六相中三圓融三行
006_0802_b_12L布等也

006_0802_b_13L
一切菩薩 陰界入等法記云論曰
006_0802_b_14L一切菩薩者謂住信行地者信者十
006_0802_b_15L行者三賢地者十地也若約大
006_0802_b_16L分門則信行地者三賢2)訂者十
006_0802_b_17L地也不可思議諸佛法者是出世間
006_0802_b_18L道品者不思議佛法則是佛內訂也
006_0802_b_19L謂猶如池水具含影像有二義也
006_0802_b_20L攝入諸像義及現現諸像義而有
006_0802_b_21L一人立在池邊見此諸像爲他說也
006_0802_b_22L如是佛訂三種世間爲自身心如彼
006_0802_b_23L水中攝入諸像以自內訂臨機外向
006_0802_b_24L分示十地如彼水中現現諸像

006_0802_c_01L
금강장보살이 삼매79) 중에서 부처님의 밖으로 향하시는 법을 잘 받고 삼매에서 나온 후에 근기를 위하여 설하는 것은, 저 한 사람이 연못가에 서서 물속의 영상을 보고 다른 이에게 설하는 것과 같다. 말하자면 만약 안으로 증득함을 기준으로 하면 오직 불가사의한 법이고 십지의 모습은 없다. 그러나 앞의 근기가 삼승이 많기 때문에 부처님의 뜻이 십지를 설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밖으로 향하는 마음에 십지를 나누어 보이는 것은 뜻이 큼(義大)이니 설할 수 없다. 금강장보살이 삼매에 들어가서 그 법을 잘 받고 삼매에서 나온 이후에 설한 십지는 설함이 큼(說大)이니 말할 수 있다.80)
그러므로 지상 스님이 이르기를, “지地에 두 부분이 있으니, 첫째는 원인이고 둘째는 결과이다. 원인은 말하자면 세간의 방편행을 닦는 것이니, 곧 가행의 지地의 영역이다. 결과는 말하자면 세간을 벗어나 모습을 여읜 진실을 증득하는 것으로 곧 바르게 증득한 지혜의 영역이다.”81)라고 하였다.

‘출세간도의 품류’란,
어째서 출세간의 자리에서 도道에 품류가 있는가?
만약 불가사의한 법을 기준으로 하면 비록 도道에 품류가 없지만 그러나 근기의 인연을 위하여 십지를 나누어 보이기 때문에 도道에 품류가 있다. 그러므로 지상 스님은 이르기를, “지금 이 십지는 부처님의 원인의 지위를 거두어 일승ㆍ삼승ㆍ성문ㆍ인천人天이 함께 그 가운데 있어서 오승五乘82)의 관觀하는 바가 된다. 보현보살이 증득한 지위는 부처님 과보가 거두어 작용하는 것이 걸림 없이 자재하여 일체를 모두 다한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십지의 법이 중생을 거두는 가운데 가장 첫 문이기 때문이며, (십)지의 법이 매우 깊어서 깨달아 구별하기가 가장 어렵기 때문이다.”83)라고 하였다.

‘광명(明)이란 봄(見)과 지혜(智)와 얻음(得)과 깨달음(證)이다’라는 것은, 깨달아 보는 지혜로써 중생의 몸과 마음이 불가사의한 부처님의 법임을 깨닫는 것이다.
무슨 까닭에 중생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가?
만약 깨달아 보는 지혜를 기준으로 한다면, 움직이지 않는 오늘의 낱낱 중생의 몸과 마음이 곧 불가사의한 부처님의 법이며, 곧 세간도世間道의 품류이다.

006_0802_c_01L剛藏之定中稱受佛外向法出定已
006_0802_c_02L爲機而說如彼一人立在池邊
006_0802_c_03L見水中像與他說也謂如約內訂
006_0802_c_04L則唯不思議法無十地相然以前機
006_0802_c_05L多三乘故第上之二第二五張 佛意欲
006_0802_c_06L令爲說十地故於外向心頭分示十
006_0802_c_07L是義大不可說剛藏入定稱受
006_0802_c_08L其法出定已後所說十地是說大
006_0802_c_09L可說也故至相云地有二分一因
006_0802_c_10L二果因謂世間方便行修即加行地
006_0802_c_11L分齊果謂出世離相眞訂即正訂智
006_0802_c_12L分齊也出世間道品者何故出世
006_0802_c_13L間處道有品耶若約不思議法
006_0802_c_14L雖無道品然爲機緣分示十地故
006_0802_c_15L道品是故至相云今此十地者
006_0802_c_16L佛因位一乘三乘聲聞人天並在其
006_0802_c_17L爲五乘所觀普賢訂位佛果攝
006_0802_c_18L無㝵自在一切皆盡何以故
006_0802_c_19L地之法攝衆生中最初門故地法甚
006_0802_c_20L最難了別故也明者見智得訂者
006_0802_c_21L以訂見之智得訂衆生身心是不思
006_0802_c_22L議佛法也何故衆生不知不見耶
006_0802_c_23L若約訂見之智不動今日箇箇衆
006_0802_c_24L生之身心即是不思議佛法即是世
006_0802_c_25L「俠」作「狹」{乙}「訂」通「證」於此書{編}次同

006_0803_a_01L그러나 다만 범부가 스스로 알지 못할 뿐이다.
무슨 까닭에 지상 스님은 이르기를, “앞의 둘은 관의 깨침(觀解)이고 뒤의 둘은 행의 깨침(行解)이니, 봄(見)은 시작이고 지혜(智)는 끝이며 얻음(得)은 시작이고 깨달음(證)은 끝이다.”84)라고 하였는가?
이것은 다만 수행에 기대어 말한 것이다. 만약 임시방편으로 말한다면, 두 부처님 세계의 티끌 수의 겁 동안 연기의 실상 다라니를 닦는 것은 관의 깨침(觀解)이고, 찰나찰나 얻고 깨닫는 것은 행의 깨침(行解)이다.

‘설한다(說)란 그중에서 분별하는 것이다’라는 것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만약 부처님의 마음을 기준으로 하면 비록 십지가 없으나, 인도되는 근기가 삼승이 많으므로 금강장보살에게 가피하여 십지를 설하게 하여, 신信ㆍ행行ㆍ지地의 보살이 지혜의 지地에 깨달아 들어가게 하려는 까닭에, 이에 후에 얻는 필筆 중에서 십지를 나누어 보이는 것으로 설함을 삼는다. 둘째는 금강장보살이 삼매 중에서 잘 받아 후에 얻는 말(言說)로 설함을 삼는다. 말하자면 부처님은 말이 없음으로 그 설함을 삼기 때문에 이는 말이 없는 가르침의 근본이며, 금강장보살의 잘 받음도 또한 말이 없으나 말을 기다리는 가르침의 근본이 된다.85)

‘들어간다(入)란 믿고 좋아하며 얻고 깨닫는 것이다’라는 것은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미 닦아 익힌 것은 그대의 몸과 마음을 깨닫는 것이니, 그대들은 다시 다른 일이 없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라고 하셨는데, 무슨 까닭에 우리들은 아직 알지 못하는가? 다만 믿음이 없기 때문에 알지 못할 뿐이고, 믿으면 곧 알 수 있으니 반드시 믿음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자기의 몸과 마음이 불가사의한 부처님의 법임을 믿을 수 있기 때문에 ‘믿음(信)’이라고 한다. 이 믿음을 버리지 않고 항상 지킬 수 있기 때문에 ‘좋아함(樂)’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믿고 좋아하므로 자기의 몸과 마음을 직접 깨닫기 때문에 ‘얻음과 깨달음(得證)’이라고 한다.

‘지혜의 지地란 십지의 지혜를 말한다’란 지상 스님과 혜원 스님이 같이 이 구절86)로 근본의 들어감(根本入)을 삼았다.87)
가피로 이루려는 바(加所爲)88)의 이십 구89)는 (부처님이) 바로 설하시는 때의 말씀인가? 경전을 (전한) 사람(經家)이 열거한 것인가?90)

006_0803_a_01L間道品然但凡夫自不知耳何故
006_0803_a_02L至相云前二觀解後二行解見始
006_0803_a_03L智終得始訂終耶此但寄修云耳
006_0803_a_04L若假言者二佛世界塵數劫中修緣
006_0803_a_05L起實相陁羅尼者是觀解念念得訂
006_0803_a_06L是行解也說者於中分別者
006_0803_a_07L一若約佛心則雖無十地由所引
006_0803_a_08L機多三乘故加金剛藏爲說十地
006_0803_a_09L令信行地菩薩訂入智惠地故乃於
006_0803_a_10L後得筆中分示十地以爲說也二剛
006_0803_a_11L藏菩薩定中稱受後得言說以爲說
006_0803_a_12L謂佛以無言爲其說故是無言
006_0803_a_13L敎之本也剛藏之稱受亦是無言
006_0803_a_14L第上之二第二六張 而爲待言敎之本
006_0803_a_15L入者信樂得訂者佛言我已修
006_0803_a_16L訂汝身心汝等應知更無異事
006_0803_a_17L故我等未得知耶但以無信故不得
006_0803_a_18L信則能知要須信也是故能信
006_0803_a_19L自己身心是不思議佛法故云信也
006_0803_a_20L不捨此信而能恒守故云樂也由如
006_0803_a_21L是信樂故親訂自己身心 1) [134] 云得訂
006_0803_a_22L智惠地者謂十地智者至相與遠
006_0803_a_23L同以此句爲根本入也加所
006_0803_a_24L爲二十句者爲是正說時言耶爲是

006_0803_b_01L
문장을 기준으로 하면 경전을 (전한) 사람이고, 뜻을 기준으로 하면 바로 설하신 것이다.
만약 뜻을 기준으로 하면 바로 설하신 것이라고 한다면, 부처님의 구업口業에 거두어지는가, 의업意業에 거두어지는가?
구업이다.
부처님이 선정 가운데 계셔서 구업으로 짓는 말씀이 없는데 어째서 구(업)이라고 하는가?
가르침의 일어나는 바가 구업으로부터이기 때문이다. 이 일어나는 바 가르침이 어디로부터 일어나는가? 본래 설하지 않음으로 근본을 삼기 때문에 이는 의업이다. 만약 모습을 드러냄을 기준으로 하면 광명을 놓고 정수리를 어루만지며 손을 맞잡고 눈을 맞추는 등의 법을 보이는 궤칙은 신업에 거두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구업은 큰 허공에 들어맞기 때문에 일어난 가르침 또한 큰 허공에 들어맞는다.

‘포섭의 들어감(攝入)’이란 불가사의한 법을 믿고 듣는 마음 가운데 그 법이 몰록 나타나기 때문에 ‘포섭(攝)’이라 하고, 마음이 법에 계합하여 들어맞기 때문에 ‘들어감(入)’이라고 한다. ‘들음에 의한 지혜(聞慧) 가운데 일체 선근을 거둔다’는 것은, 불타삼장佛陀三藏91)이 이르기를, “체體에 들어맞는 들음에 의한 지혜가 원종圓宗의 이법(理)을 거두어 이법과 상응하니 귀중함이 된다. 이상.”라고 하였다. ‘체에 들어 맞는다’란 해인의 체體에 들어맞는 것이다. 비유하면 뭇 싹들이 다 대지에 의거하는 것과 같이, 세간과 출세간의 일체 선근도 해인에 의거하지 않고 일어나며 해인에 의거하지 않고 머무르는 것이 없다. 이 해인의 법이 믿는 마음 가운데 분명하게 몰록 나타나기 때문에 ‘들음에 의한 지혜(聞慧) 가운데 일체 선근을 거둔다’라고 한다.

‘생각하고 헤아림의 들어감(思議入)’이란 들음에 의한 지혜로 들은 바를 생각하여 잃지 않는 것이다. ‘헤아림(議)’은 생각에 의한 지혜 가운데 생각하는 바 법을 뜻과 말로 관觀하여 그 모습을 깨닫는 것이다. ‘들어감(入)’은 위와 같다. ‘일체 도의 품류(道品)’는 불가사의한 법이다. ‘지혜의 방편(智方便)’이란 만약 법을 들을 때 마음이 밖으로 반연攀緣하지 않고 오로지 이 법에 의거하여 계속 사유함이 ‘방方’이며,

006_0803_b_01L經家所列耶約文則經家約義則
006_0803_b_02L正說也若約義則正說者爲佛
006_0803_b_03L口業所攝耶意業所攝耶口業
006_0803_b_04L佛在定中無有口業爲作之說
006_0803_b_05L何云口耶以敎之所起從口業故
006_0803_b_06L此所起之敎從何而起耶本以
006_0803_b_07L不說爲根故是意業若約現相放光
006_0803_b_08L摩頂執手觸目等示法之軌則是身
006_0803_b_09L業所攝也然佛口業稱大虛故所起
006_0803_b_10L之敎亦稱大虛也攝入者信聞不
006_0803_b_11L思議法之心中其法頓現故云攝也
006_0803_b_12L心契稱法故云入也聞惠中攝一切
006_0803_b_13L善根者佛陁三藏云稱體聞惠攝圓
006_0803_b_14L宗理與理相應爲可貴也已上 稱體
006_0803_b_15L稱海印體也比如衆苗皆依大
006_0803_b_16L世出世間一切善根無有不依海
006_0803_b_17L印而起不依海印而住也此海印之
006_0803_b_18L於信心中了了頓現故云聞惠
006_0803_b_19L中攝一切善根也思議入者聞惠
006_0803_b_20L所聞思而不失也議者於思惠中
006_0803_b_21L所思之法以意言觀了其相狀入者
006_0803_b_22L同上一切道品者不思議法也
006_0803_b_23L方便者第上之二第二七張 若聞法時
006_0803_b_24L心不外緣專依此法相續思惟

006_0803_c_01L이와 같음을 말미암아 마음이 법에 익숙한 것이 ‘편便’이다. ‘분별하여 선택함’이란 그 마음이 들은 바 법을 행하여 그 거스름과 수순함을 분별함이니, 이와 같음을 말미암아 그 수순하는 법을 취하는 것은 ‘선選’이고 그 거스르는 법을 버리는 것은 ‘택擇’이다.

‘법의 모습의 들어감(法相入)’이란 생각하는 바 법이 마음에 나타나 명료하고 분명하기 때문이다. ‘저러저러한 뜻(彼彼義)’은 불가사의한 법이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량없이 갖가지로 안다’는 것은, 무릇 접촉해서 향하여 대면하는 대상이 불가사의한 부처님 법이 아님이 없기 때문에, 앎의 대상인 법이 이미 한량이 없으며 앎의 주체인 지혜 또한 한량이 없는 것이다.

‘교화의 들어감(敎化入)’이란 (다음과 같다.) 앞의 ‘포섭의 들어감’에서는 불가사의한 법을 들으며, ‘생각하고 헤아림의 들어감’에서는 그 법의 모습을 생각하고 살피며, ‘법의 모습의 들어감’에서는 그 불가사의한 법이 그 마음에 나타난다. 보살이 최초에 서원을 일으키는 것은 먼저 자기를 제도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 남을 제도하고자 하므로, 그 마음에 나타난 법으로써 모든 중생을 교화하기 때문에 ‘교화의 들어감’이라고 하는 것이다.
‘생각하고 헤아린 바를 따라서 말(名字)이 갖추어져 법을 잘 설한다’라는 것은, 그 생각에 의한 지혜의 생각한 바 법으로 중생을 교화하기 때문에 ‘생각하고 헤아린 바를 따라서’라고 한 것이다. 앞의 들음에 의한 지혜의 들은 바 법에 알맞게 이름을 세워 교화하기 때문에 ‘말이 갖추어져’라고 한 것이다. ‘잘 결정하여 설한다’란 만약 오로지 들은 법을 전하는 것으로 다른 이를 교화한다면 곧 잘 결정하여 설하는 것이 아니다. 비유하면 손바닥의 진주를 분명하게 보는 것과 같다. 마음에서 법을 깨닫는 것 또한 이와 같으니, 이같이 자기가 얻은 법으로 다른 이를 위하여 연설하는 까닭에 ‘잘 결정하여 설한다’라고 하는 것이다.

‘깨달음의 들어감(證入)’이란 자신이 얻은 법으로써 중생을 교화할 때 자신의 수행이 곧 가득차기 때문이다. ‘모든 법’이란 불가사의한 법이다.

006_0803_c_01L方也由如是故心便於法是便也
006_0803_c_02L分別選擇者其心行於所聞之法
006_0803_c_03L其逆順由如是故取其順法是選
006_0803_c_04L捨其逆法者是擇也法相入者
006_0803_c_05L所思之法於心現現了了分明故也
006_0803_c_06L彼彼義者以不思議法非一故也
006_0803_c_07L無量種種知者凡所觸向對面無非
006_0803_c_08L不思議佛法故所知之法旣無有量
006_0803_c_09L能知之智亦無量也敎化入者
006_0803_c_10L攝入中聞不思議法思議入中思察
006_0803_c_11L其法相法相入中彼不思議法現其
006_0803_c_12L心也菩薩最初發誓願者非先自度
006_0803_c_13L欲先度他故以其心所現之法敎諸
006_0803_c_14L衆生故云敎化入也隨所思議名字
006_0803_c_15L具足善說法者以其思惠所思之法
006_0803_c_16L敎化衆生故云隨所思議也稱前聞
006_0803_c_17L惠所聞之法立名敎化故云名字具
006_0803_c_18L足也善決定說者若以傳聞之法而
006_0803_c_19L敎他則非善決定說也比如明見掌
006_0803_c_20L中之珠心中了法亦復如是而以
006_0803_c_21L如是自所得法爲他演說故云善
006_0803_c_22L決定說也訂入者以自所得之法
006_0803_c_23L化衆生時自行即滿故也一切法者
006_0803_c_24L▣字體磨滅{底}ㆍ作「故」{乙}

006_0804_a_01L‘평등한 지혜’는 이 보살의 마음이 저 법을 증득할 때 그 마음이 법과 나누어질 수 없으니, 비유하면 그릇으로 연못의 물을 길어 가득 채웠다가 다시 연못 가운데 부으면, 이것이 그릇의 물이고 이것이 연못의 물이라고 구분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래서 ‘평등한 지혜’라고 하는 것이다.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 곧 스스로 부처님의 법을 이루는 것이다’라는 것은,
무슨 까닭에 ‘깨달음의 들어감’에 이르른 후에 비로소 교화의 들어감을 해석하는가?
‘깨달음의 들어감’을 변별할 때 비로소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 곧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이라는 뜻이 나타난다. 말하자면 보살이 서원을 일으키는 것이 다만 다른 이를 제도하고자 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먼저 다른 이를 제도할 때 법이 본래 그러하여 스스로 진여의 법을 증득하기 때문에 ‘깨달음의 들어감’에 이르른 후에 ‘교화의 들어감’을 해석하는 것이다.

‘방일하지 않음의 들어감(不放逸入)’이란, 마치 기둥을 반연할 때 마음이 만약 움직임이 있으면 곧 ‘방放’이고, 그 ‘방放’으로 말미암아 다른 경계로 나아감이 곧 ‘일逸’인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보살이 불가사의한 부처님의 법에 의거하여 그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또 다른 경계에 마음이 또한 나아가지 아니하므로 ‘방일하지 않음의 들어감’이라고 한 것이다.
‘일체 마법魔法이 물들이지 못하(게 하려)는 까닭이다’라고 말한 것은 마魔에 네 종류가 있다. 첫째는 천天이고, 둘째는 인人이며, 셋째는 음陰이고, 넷째는 번뇌煩惱이다. 번뇌마는 세 가지 독이 뿌리가 되어 일어난 번뇌이다. 말하자면 수행하는 마음이 어기거나 따르는 경계를 대하여 혹 화를 내고 혹 탐하여서 적정하지 못하는 것이 번뇌마이다. 음마란 오온(五陰) 가운데 넷은 마음이고 하나는 색色이다. 수행할 때 옷ㆍ음식 등과 그리고 다섯 가지 티끌(五塵)92)의 경계를 탐하여 구하는 것은 색마色魔이고, 탐하여 구하는 마음은 심마心魔이다. 인마란 수행할 때 부모와 시주(檀越)와 나쁜 친구와 색色을 좋아하는 이 등의 부류가 모두 인마이다. 천마란 수행할 때 여섯 번째 하늘(第六天)93)의 (천)마가 곧 스스로 생각하기를,

006_0804_a_01L是不思議法也平等智者此菩薩心
006_0804_a_02L得彼法時其心與法不可得分比如
006_0804_a_03L以器汲盈池水還注池中不可得分
006_0804_a_04L此是器水此是池水故云平等智也
006_0804_a_05L敎化衆生即是自成佛法者
006_0804_a_06L至訂入後方釋敎化入耶辨訂
006_0804_a_07L入時方現利他即是自利之義也
006_0804_a_08L菩薩發誓第上之二第二八張 只欲度
006_0804_a_09L然先度他時法爾自訂眞如法故
006_0804_a_10L至訂入後釋敎化入也不放逸入者
006_0804_a_11L如緣柱時心若有轉即是放也
006_0804_a_12L其放故趣於他境即是逸也如是
006_0804_a_13L菩薩依不思議佛法其心不轉
006_0804_a_14L於他境心亦不趣故云不放逸入也
006_0804_a_15L言一切魔法不能染者魔有四種
006_0804_a_16L二人三陰四煩惱也煩惱魔者
006_0804_a_17L毒爲根所起煩惱也謂修行之心
006_0804_a_18L違順境或嗔或貪不能寂靜是煩
006_0804_a_19L惱魔也陰魔者五陰之中四是心
006_0804_a_20L一是色修行之時貪求衣食等及
006_0804_a_21L五塵境界是色魔貪求之心是心魔
006_0804_a_22L人魔者修行之時父母檀越惡
006_0804_a_23L友好色等類皆人魔也天魔者
006_0804_a_24L行之時 1)弟六天魔即自思惟此人

006_0804_b_01L‘이 사람이 그 수승한 마음을 일으켜 수승한 행을 닦으면 반드시 수승한 과보를 얻을 것이니 나의 권속이 아니다’라고 하여, 그러므로 이 사람을 떠나지 않고 항상 괴롭히고 혼란스럽게 하려 하며, 만약 괴롭히고 혼란스럽게 할 수 없으면 곧 그가 죽게 하고자 하니 이러한 것이 천마이다.

‘지地에서 지地로 옮김의 들어감(地地轉入)’이란 (다음과 같다.) 일곱 번째 지(七地)94) 이전에서는 비록 능히 나아가 모습이 없이 닦지만, 그러나 공들여 힘씀(功用)이 있는 지위이기 때문에 오히려 가행加行의 마음작용(作意)을 일으켜서 자기 마음의 수행의 힘에 올라타서 닦는다. 여덟 번째 지(八地)95) 이상은 모습이 없이 관觀하는 지혜가 구경에 앞에 나타나기 때문에, 본래의 서원과 법의 힘에 올라타서 뜻대로 나아가 닦는 까닭에 ‘지地에서 지地로 옮김의 들어감’이라고 한 것이다.
‘무탐無貪 등의 선근이 청정하다’란 불가사의한 법에 본래 세 가지 독이 없기 때문에, 무탐 등의 선善이 비롯함이 없는 때로부터 있다. 그러나 지위에 의지함을 기준으로 하면 일곱 번째 지地 이전은 공용이 있는 지위이니 집착하는 마음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세 종류 선근(三種善根)96)의 청정한 뜻이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여덟 번째 지地의 뜻대로 되는 지위에 이르러서 세 종류 선근의 청정한 뜻이 구경에 나타나기 때문에 ‘무탐 등의 선근이 청정하다’라고 한 것이다.

‘또 선근이 있어’ 등은 의심을 결정하여 굴복시키는 것이다. 십지 가운데 하나하나의 지地가 모두 지地 이전의 가행에 의한 선근이 있으며, 지地 이상의 선근이 있기 때문에, 지地 이전의 가행을 기준으로 하여 말하면 ‘또 선근이 있다’고 하고, 지地 이상의 선근을 기준으로 삼으면 불가사의한 부처님의 법이다. 의심하여 이르기를, “일곱 번째 지地 이전의 가행에 의한 선근이 여덟 번째 지地 이상의 선근을 낳는 것인가?”라고 하니, 이 의심을 해결하기 위한 까닭에 “오직 여덟 번째 지地의 가행에 의한 선근만 그 여덟 번째 지地의 선근을 낳는다.”라고 한다. 이런 까닭에 “또 선근이 있어 세간을 벗어나는 도의 품류의 원인이 될 수 있다.”라고 한 것이다.

‘보살로서 다함의 들어감(菩薩盡入)’ 가운데 ‘여래의 비밀스러운 지혜’란 불가사의한 부처님의 법을 기준으로 하면 비록 열 가지 거듭(十重)됨이 없지만,

006_0804_b_01L起其勝心修其勝行必得勝果
006_0804_b_02L我眷屬是故不離此人常欲惱亂
006_0804_b_03L若不能惱亂即欲令其死此等是天
006_0804_b_04L魔也地地轉入者七地已前雖能
006_0804_b_05L趣向無相而修然是有功用位故
006_0804_b_06L猶起加行作意乘於自心行力而修
006_0804_b_07L八地已上無相觀智現前究竟故
006_0804_b_08L本誓願及與法力任運進修故云地
006_0804_b_09L地轉入也無貪等善根淨者不思議
006_0804_b_10L法中本無三毒故無貪等善無始時
006_0804_b_11L然約寄位則七地以前有功用
006_0804_b_12L執心不捨故三種善根淸淨之義
006_0804_b_13L不得現前至於八地任運之位三種
006_0804_b_14L善根淨義竟現故云無貪等善根淨
006_0804_b_15L復有善根等者決伏疑也於十
006_0804_b_16L地中第上之二第二九張 一一地
006_0804_b_17L有地前加行善根有地上善根故
006_0804_b_18L地前加行云復有善根約地上
006_0804_b_19L根則是不思議佛法也疑云七地以
006_0804_b_20L前加行善根生於八地以上善根耶
006_0804_b_21L爲決此疑故云唯八地之加行善根
006_0804_b_22L生其八地善根也是故云復有善根
006_0804_b_23L能爲出世間道品因也菩薩盡入中
006_0804_b_24L如來秘密智者約不思議佛法則雖

006_0804_c_01L지위에 의지함을 따라서 또한 열 가지 비밀스러운 지혜로 나누는 것이다. 이 비밀스러운 지혜가 불가사의한 법인 까닭에 이 법을 얻는 것을 기준으로 하여 “일체 여래의 비밀스러운 지혜에 들어간다.”라고 한 것이다.

‘부처님으로서 다함의 들어감(佛盡入)’ 가운데 ‘일체의 지혜에 들어가는 지혜’란 ‘일체의 지혜’는 부처님의 일체지인 일체종지一切種智이다. ‘들어가는 지혜(入智)’는 보살의 지혜이다. 보살의 지혜로 말미암아 부처님의 원만한 지혜에 들어가기 때문에 보살의 지혜도 또한 원만한 지혜를 이루는 것이다.

‘보살로서 다함의 들어감’에서 말한 ‘여래의 비밀스러운 지혜에 들어감’은 ‘부처님으로서 다함의 들어감’에서 말한 ‘부처님의 일체지에 들어감’과 더불어 어떻게 다른가?
‘보살로서 다함의 들어감’ 중에서는 불가사의한 부처님의 법을 얻으나 다만 결과를 다한 원인의 지위이고, ‘부처님으로서 다함의 들어감’ 중에서 불가사의한 법을 얻는 것은 원인을 다하는 결과의 지위이기 때문에 다르다.
혜원 스님은 ‘부처님으로서 다함의 들어감’으로써 원인 중에 있음을 삼았으니, ‘보살로서 다함의 들어감’과 어떻게 다른가?97)
세움(建立)을 기준으로 하면 ‘보살로서 다함의 들어감’은 열 번째 지地에 세우고, ‘부처님으로서 다함의 들어감’은 부처님의 과위에 세운다. 그런데 부처님으로서 다함으로 원인 중의 결과를 삼은 것은 신信ㆍ행行ㆍ지地의 보살이 불가사의한 부처님의 법을 얻은 까닭에 원인 중의 결과로 삼아 부처님의 과보로서의 덕德을 얻었다고 하는 것이지, 부처님으로서 다함이 원인에 있음을 삼는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이 모든 들어감은 비교해 헤아림이 된다’는 등은, ‘이 모든 들어감’으로부터 ‘차별’에 이르기까지 비교하여 헤아리는 바가 되는 것은 혜원 스님의 뜻98)이고, ‘모든 들어감’으로부터 ‘더욱 뛰어남’에 이르기까지 비교하여 헤아리는 바가 되는 것은 법장 스님의 뜻99)이다.
혜원 스님의 뜻은 삼현三賢과 십지十地의 차례로 더욱 뛰어난 지위가 의지할 바이기 때문에 떨칠 바이고, 아홉 가지 들어감의 차별은 ‘근본의 들어감’ 중에서 덕德의 뜻이 차별한 것이기 때문에 떨칠 바가 아니라는 것이다.

006_0804_c_01L無十重而隨寄位且分十種秘密智
006_0804_c_02L此秘密智是不思議法故約得
006_0804_c_03L此法云入一切如來秘密智也佛盡
006_0804_c_04L入中於一切智入智者一切智者
006_0804_c_05L佛一切智一切種智也入智者菩薩
006_0804_c_06L智也由菩薩智入佛圓智故菩薩
006_0804_c_07L之智亦成圓智也菩薩盡入中
006_0804_c_08L入如來秘密智與佛盡入中云入佛
006_0804_c_09L一切智何別菩薩盡入中得不
006_0804_c_10L思議佛法而但是盡果之因位佛盡
006_0804_c_11L入中得不思議法是盡因之果位故
006_0804_c_12L別也遠公以佛盡入爲在因中
006_0804_c_13L菩薩盡入何別約建立則菩薩盡
006_0804_c_14L入立*弟十地佛盡入立佛果位
006_0804_c_15L以佛盡爲因中之果者以信行地菩
006_0804_c_16L薩得不思議佛法故以爲因中果
006_0804_c_17L而云得佛果德非謂佛盡爲在因也
006_0804_c_18L是諸入爲挍量等者從是諸入至差
006_0804_c_19L別爲所挍量者是遠公之意從諸
006_0804_c_20L入至轉勝爲所挍量者是藏師之意
006_0804_c_21L遠公意則三賢十地次*弟轉勝之
006_0804_c_22L是所寄故是所拂也九入差別
006_0804_c_23L是根本入中德義差別故非所拂也
006_0804_c_24L「弟」作「第」{乙}次同

006_0805_a_01L법장 스님의 뜻은 곧 삼현과 십지가 온전히 불가사의한 부처님의 법의 지위이고, 포섭의 들어감 등 아홉 가지 들어감도 또한 온전히 불가사의한 부처님의 법이니, 그러므로 아홉 가지 들어감의 차별과 그리고 삼현ㆍ십지의 더욱 뛰어남을 다 버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곧 지혜의 뜻의 차별인 아홉 가지 들어감과 차례로 더욱 뛰어난 삼현ㆍ십지가 다 떨칠 바가 아니다. 그러므로 비교하여 헤아리지만 버리지 않는 것이며, 그 삼승 가운데 항포行布ㆍ차례(次第)ㆍ차별ㆍ더욱 뛰어남(轉勝)ㆍ결정 등은 모두 버릴 바이다.

이미 온전히 불가사의한 법인 삼현ㆍ십지라면 마땅히 수승함과 열등함이 없어야 하는데, 어째서 더욱 뛰어남이 있다고 하는가?
비록 망정으로 헤아리는 수승함과 열등함은 없으나, 또한 연기의 수승함과 열등함은 있다.

연기의 수승함과 열등함은 무엇인가?
마치 병 중에 큰 허공을 머금고 있고 옹기 중에도 또한 그러하지만 그러나 큰 허공을 머금은 병은 어린아이가 들 수 있으나 큰 허공을 머금은 옹기는 어린아이가 쉽게 들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처럼 십신十信의 지위에서 법계를 거두어 다하고 십주 등의 지위에서도 또한 법계를 거두니, 비록 법계를 거두는 뜻은 같으나 지위에 따라서 다르기 때문에 법계를 거두는 십신은 열등함이고 법계를 거두는 십주 등은 수승함이다. 따라서 연기의 차별이 떨칠 바가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의 믿음의 지위에서 부처를 이루는 뜻에 근거하여 순범順梵과 행장行將100)의 두 대덕은 세워서 원만한 부처님(圓滿佛)이라 하였고, 다른 사람들은 세워서 분수에 따른 부처님(隨分佛)이라 하였다. 이에 신림 대덕이 이 두 뜻을 들어 상원 스님에게 나아가 물으니, 상원 스님이 이르기를, “모두 (의상) 화상의 뜻이 아니다. 십신의 한 지위로써 십주 등을 형용하는 것은 문門이 다르기 때문에 분수에 따른 부처님이라고 한다. 그러나 법계를 온전히 거두어서 구경에 곁이 없기 때문에 원만한 부처님이라고 한다. 이로써 일승은 어느 한 지위를 따라서 부처를 이룰 때에 분수와 원만의 두 뜻을 갖추는 것이다. 이상.”라고 하였다.

006_0805_a_01L第上之二第三○張 藏師意則三賢十
006_0805_a_02L是全不思議佛法之位也攝等九
006_0805_a_03L亦全不思議佛法也是故九入差
006_0805_a_04L別及三賢十地之轉勝皆不捨也
006_0805_a_05L是則智義差別之九入次*弟轉勝三
006_0805_a_06L賢十地皆非所拂是故挍量而不捨
006_0805_a_07L其三乘中行布次*弟差別轉勝
006_0805_a_08L決定者皆所捨也旣全不思議法
006_0805_a_09L之三賢十地應無勝劣何云有轉勝
006_0805_a_10L雖無情計之勝劣亦有緣起之
006_0805_a_11L勝劣也緣起勝劣云何猶如瓶
006_0805_a_12L中含大虛空甕中亦爾然含大空之
006_0805_a_13L童稚能提含大空之甕童不易
006_0805_a_14L如是十信位中攝盡法界十住
006_0805_a_15L等位亦攝法界雖攝法界義同
006_0805_a_16L隨位別故攝法界之十信是劣攝法
006_0805_a_17L界之十住等是勝也故緣起差別
006_0805_a_18L所拂也是故約一信位成佛之義
006_0805_a_19L梵行將二德立爲圓滿佛餘人等
006_0805_a_20L爲隨分佛於是林德擧此二義
006_0805_a_21L問相元元曰俱非和尙之意則以十
006_0805_a_22L信一位形十住等爲門別故云隨分
006_0805_a_23L然全攝法界究竟無側故云圓滿
006_0805_a_24L佛也是以一乘隨何一位成佛之時

006_0805_b_01L따라서 법장 스님의 뜻은 아홉 가지 들어감 가운데 들어감은 ‘근본의 들어감’의 들어감이고, 아홉 가지 들어감 가운데 포섭 등의 아홉 가지는 ‘근본의 들어감’ 가운데 지혜의 지地이므로 다 버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언설로 해석한 것이다’란 세 가지 뜻이 있다. 혜원 스님은 “이 아홉 가지 들어감의 언설에서 육상으로 해석한 뜻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101)라고 하였다. 법장 스님의 두 가지 해석은 소䟽102)와 같다. ‘사事는 제외되니, 사事란 오온(陰)ㆍ십팔계(界)’ 등이란, 이 뜻은 실로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신림 대덕이 대승경공大乘冏公에게 물으니, 경공이 이르기를, “오온(陰)ㆍ십팔계(界)ㆍ십이처(入)에 육상이 필요하니 그것을 융섭하면 어려움이 없으나, ‘제외한다’고 말한 것은 삼과三科103)ㆍ백법百法104)에 육상을 쓰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만약 오온ㆍ십팔계ㆍ십이처를 제외한다면 어느 곳에 육상을 쓸 것인가? 따라서 내가 알 수 있는 바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다른 스님은 이르기를, “육상은 삼승을 이끌 때 쓰는 방편이다. 그러나 그 집착하는 바 체성이 각각 다르니 삼과의 법에 육상을 쓰면 그 법이 잡되고 어지럽게 되어 이익을 얻지 못한다. 그래서 ‘사事를 제외한다’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융순 화상은 이르기를, “반드시 육상의 언설로 『화엄경』을 설해야 한다. 만약 삼과ㆍ백법으로 설하면 삼승이다. 그래서 ‘사事를 제외한다’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화엄경탐현기

법장 스님의 소䟽105)에 (이른다.) 가피로 이루려는 바(加所爲)를 해석하는 가운데 이십 구문106)을 두 가지 이익에 의거하여 나눈다. 처음 열 가지는 남과 함께하는 자리自利이고, 뒤의 열 가지는 자기와 함께하는 이타利他이다. 운운. 앞 가운데 (세친) 논주는 네 가지 문의 해석을 지었다. 첫째는 총체적으로 해석하여 근본을 나타낸다. 운운.107) 넷째는 근본과 지말이 걸림 없는 것이다.
처음에 총체적으로 (십)지의 법을 논하면 연기에 여섯 가지 뜻이 있다.
첫째, ‘일체 보살이란 신信ㆍ행行ㆍ지地이다’라는 것은 가피할 바의 근기를 든 것이다.

006_0805_b_01L具足分滿二義也已上 故藏師之意
006_0805_b_02L九入中入者是根本入之入也九入
006_0805_b_03L中攝等九者是根本入中智惠地也
006_0805_b_04L故皆不捨也此言說解釋者有三義
006_0805_b_05L遠公云此九入言說中以六相解釋
006_0805_b_06L之義應知也藏師二釋如䟽除事
006_0805_b_07L者謂陰界等者此義實難可解
006_0805_b_08L第上之二第三一張 林德問於大乘冏
006_0805_b_09L冏云於陰界入須六相則融之無
006_0805_b_10L而言除者言三科百法不用六相
006_0805_b_11L然而若除陰界入何處用六相耶
006_0805_b_12L故非吾所可知也餘師云六相者
006_0805_b_13L引三乘時之所用方便也然彼所執
006_0805_b_14L體性各別三科法上用六相則其法
006_0805_b_15L雜亂不得利益故云除事也融順和
006_0805_b_16L尙云要以六相言說說花嚴經
006_0805_b_17L以三科百法說則是三乘故云除
006_0805_b_18L事也

006_0805_b_19L
藏䟽釋加所爲中二十句文依二
006_0805_b_20L利分初十共他自利後十共自利
006_0805_b_21L云云 前中論王 [130] 四門解釋
006_0805_b_22L捴釋現本云云 四本末無碍初中
006_0805_b_23L捴論地法緣起有六義一一切菩
006_0805_b_24L薩是信行地者擧所被機謂地前

006_0805_c_01L말하자면 지地 이전 보살은 진여를 아직 깨닫지 못하고, 다만 믿는 마음에 의거하여 행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운운.

(둘째,) ‘불가사의한 모든 부처님의 법이란 출세간도의 품류(品)이다’라는 것은, 이것은 얻는 바 법이다. 그러나 두 가지 해석이 있다. 첫째는 원인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말하자면 십지의 법의 체體는 출세간의 흐름이 없는 법이니, 마음과 말의 길이 끊어짐을 ‘불가사의’라고 이름한다. 통틀어 불과佛果를 낳기 때문에 이름하여 ‘도道’라고 하니, 아래에서 이르기를, 위대한 성인의 길은 저 원인이다라고 한 까닭이다.108) 십지 지위의 품류의 종류가 차별한 것을 ‘품류’라고 이름한다. 운운. 둘째는 결과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말하자면 부처님이 얻으신 법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법’이라고 이름한다. 아래의 지위가 추측하지 못함을 ‘불가사의’라고 이름한다. 지地 이상의 보살이 이 법을 부분적으로 깨닫게 하는 것을 ‘출세간도의 품류’라고 이름한다. 지地의 지혜가 노니는 바를 ‘도道’라고 이름한다. 부분적으로 깨달아 아직 원만하지 않음을 ‘품류’라고 이름한다.

셋째, ‘광명(明)’이란 비로소 바라보는 것을 ‘봄(見)’이라고 이름하고, 자세히 비추는 것을 ‘지혜(智)’라고 이름하며, 지혜로 비추는 것이고 추론(比)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얻음(得)’이라고 이름하고, 그윽한 정신에 계합하기 때문에 다시 ‘깨달음(證)’이라고 이름한다. 운운.
넷째, ‘설한다(說)란 그 가운데 분별하는 것이다’라는 것은, 능히 깨달아 얻는 주체와 대상의 법 가운데 말로써 십위의 차별을 분석하여 지혜의 행行의 우열과 공덕과 지혜의 같고 다름을 밝히기 때문이다.

다섯째, ‘들어간다(入)란 믿음(信)과 좋아함(樂)과 얻음(得)과 깨달음(證)이다’라는 것은, 말하자면 지地 이전의 믿음과 좋아함에는 들어감의 뜻이 멀리 있고, 지地 이상의 깨달아 얻음에는 서로 들어감이 바로 앞에서 이루어진다. 들어감의 뜻을 통틀어서 논하면, 반드시 여기로부터 저기에 이르기 때문에 처음과 끝을 갖추는 것이다. 또한 믿음은 처음이고 좋아함은 끝이며 얻음은 처음이고 깨달음은 끝이다.

여섯째, ‘지혜의 지地란 십지의 지혜를 말하니, 본문 중에서 설한 것과 같다’는 것은, 말하자면 이 이치를 깨닫는 성스러운 지혜에 부처님의 과보를 생성하고 머물러 유지하는 등의 작용이 있음을 ‘지위(地)’라고 이름한다. 처음의 환희지로부터 마지막의 법운지에 이르기까지 본문 중에 나타나 있음을 알 수 있다.

006_0805_c_01L菩薩未訂眞如但依信心而起行
006_0805_c_02L云云 不可思議諸佛法者是出
006_0805_c_03L世間道品者此是所得之法然有
006_0805_c_04L二釋一約因謂十地法體是出
006_0805_c_05L世間無流之法心言路絕名不
006_0805_c_06L思議通生佛果故名爲道下云
006_0805_c_07L大聖道者是彼因故十位品類
006_0805_c_08L別名品云云 二約果謂佛所得之
006_0805_c_09L法故名佛法非下位圖1) [135] [131] 名不
006_0805_c_10L思議令地上菩薩分訂此法名出
006_0805_c_11L世間道品地智所遊曰道分訂未
006_0805_c_12L圓名品三明者 [132] 創矚名見委照
006_0805_c_13L名智智照非比故名爲得冥神
006_0805_c_14L契合故復名訂云云 四說者於中
006_0805_c_15L分別者於此能所訂得法中以言
006_0805_c_16L分釋十位差別 第上之二第三二張
006_0805_c_17L明智行優劣功惠等異故也五入
006_0805_c_18L者信樂得訂者謂地前信樂遠
006_0805_c_19L有入義地上訂得現成交入通論
006_0805_c_20L入義必從此至彼故具始終也
006_0805_c_21L亦信始樂終得始訂終六智惠地
006_0805_c_22L謂十地智如本分中說謂此訂
006_0805_c_23L理聖智有生成住持佛果等用名地
006_0805_c_24L始從歡喜終至法雲本分中現
006_0805_c_25L「托」作「杔」{乙}

006_0806_a_01L이상의 여섯 가지 뜻이 융합하여 걸림이 없어서 가르침과 뜻에 통하고, 깨달음과 추론에 통하며, 경계와 지혜에 통하고, 사람과 법에 통하며, 원인과 결과에 통하여, 어우러져 통해서 걸림이 없어 총체적으로 한 덩어리가 됨을 ‘십지의 법’이라고 이름한다. 혹 뒤에 갖가지 차별을 전개해도 모두 다 이 총괄하는 구句 중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이것을 ‘근본의 들어감’이라고 이름한다.

두 번째는 근본에 의거하여 지말을 여는 것이니, 아홉 구절로 나누어 이루어진다. 그중의 네 가지 지위는 말하자면 원하고 좋아함(願樂)의 지위, 봄(見)의 지위, 닦음(修)의 지위, 구경의 지위이다. 처음 넷은 지地 이전의 원하고 좋아함(願樂)의 지위에 의거하고, 다음 하나는 초지에 의거하며, 다음 셋은 닦음(修)의 지위에 의거하고, 마지막 하나는 구경의 지위를 밝힌다.109)

여기에서는 바로 십지의 법을 설하는 것인데, 무슨 까닭에 지地 이전과 부처님의 과보를 설하는가?
십지가 앞으로는 아래를 일으키는 공덕이 있고 뒤로는 위를 이루는 뜻이 있음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또 해석하면, 십지의 깨달음의 지혜로 아함阿含110)의 광명을 놓으니, 이런 까닭에 지地 이전은 이 십지의 아함에 부분적으로 거두어지는 것이다. 이 지地의 지혜가 과분果分의 바다에 의거하여 이루어지는 까닭에 (십지에) 부처님의 과보가 있는 것이다. 위의 ‘불가사의한 부처님의 법’과 아래의 새의 자취가 의거하는 바 허공111) 등이 모두 이 일이다.

처음 가운데 첫 하나112)에서는 들음에 의한 지혜를 기준으로 하여 선근을 닦는 것을 ‘일체를 거둔다’라고 이름한다. 둘째는 생각에 의한 지혜의 처음을 밝힌 것이니, 도리를 간택함이다. 논에서 ‘지혜의 방편’이란 (경문의) ‘잘 분별하여’를 풀이한 것이고, ‘도의 품류’는 ‘부처님의 법’을 해석한 것이다. 셋째는 생각에 의한 지혜의 마지막이다. 말하자면 생각으로 인해 널리 아는 것이다. ‘저러저러한 뜻(彼彼義)’은 ‘모든 법’을 풀이한 것이고, ‘갖가지로 안다’는 ‘널리 알(게 하려)는’을 해석한 것이다. 넷째는 닦음에 의한 지혜를 밝힌 것이니 걸림 없이 가르침을 세워 믿을 수 있기 때문에 ‘결정하여 설한다’라고 한 것이다. 말하자면 닦음은 두 가지 이익에 통하나 지금은 남을 이롭게 함(利他)을 든 것이다. 보살이 남을 교화하는 것이 곧 스스로 부처님의 법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를 이롭게 함(自利)에 거두어들여지는 것이다.

006_0806_a_01L此上六義融合無碍通敎及
006_0806_a_02L1)訂及比通境及智通人及
006_0806_a_03L通因及果混通無碍捴爲一圑
006_0806_a_04L名十地法若展於後種種差別
006_0806_a_05L悉於此捴句中出是故名此爲根
006_0806_a_06L本入二依本開末分成九句於中
006_0806_a_07L四位謂願樂位見位修位究竟
006_0806_a_08L初四寄前 [133] 地前願樂位次一寄
006_0806_a_09L初地次三寄修位後一明究竟位
006_0806_a_10L此中正爲說十地法何故乃說
006_0806_a_11L地前及佛果爲現十地前有起
006_0806_a_12L下之功後有成上之義又釋由十
006_0806_a_13L地訂智放阿含光是故地前是
006_0806_a_14L此十地阿含分攝由此地智依果
006_0806_a_15L海成故有佛果上不思議佛法
006_0806_a_16L及下鳥跡所依空等並是其事
006_0806_a_17L中初一約聞惠修善根名攝一切
006_0806_a_18L二明思惠之始簡擇道理論中智
006_0806_a_19L方便者釋善分別也道品釋佛法
006_0806_a_20L三思惠之終謂因思廣知
006_0806_a_21L彼義釋諸法種種2) [136] [134] 釋廣知
006_0806_a_22L明修惠無疑立敎可信故云決定
006_0806_a_23L謂修通二利第上之二第三三張
006_0806_a_24L今擧利他菩薩化他即是自成佛

006_0806_b_01L논에서 ‘생각하고 헤아린 것을 따라서’는 생각에 의한 지혜가 생각하는 바이고, ‘말(名字)이 갖추어져’는 들음에 의한 지혜가 지니는 바이기 때문에 ‘결정하여 설하는 것’이다.

이제까지는 믿음과 좋아함을 나타내었고, 아래로는 얻음과 깨달음을 변별한다. 다섯째는 봄의 지위(見位)이다. 운운. 논에서 ‘모든 법에 평등한 지혜’는 ‘분별없는 지혜’를 풀이한 것이다. 말하자면 초지에서 바로 진여를 깨달아서 주체(能)와 대상(所)의 두 모습이 없기 때문에 ‘평등’하다고 하는 것이다. ‘견도見道하는 때에 매우 청정하다’는 ‘매우 청정하여 잡되지 않음’을 해석한 것이다. 말하자면 두 가지 아我113)와 분별과 수면隨眠114)을 여의는 것이다. 여섯째는 도道를 닦는 지위를 밝히는 가운데 지地와 지地에서 하나의 무명을 따로 끊기 때문에 번뇌장 또한 영원히 굴복시켜 여읜다. 따라서 세상의 법에 뒤섞이지 않음을 ‘방일하지 않음의 들어감’이라고 이름한다. 마법은 세상의 법이다. 일곱째는 닦음의 지위(修位)를 밝히는 가운데 지혜의 행이 더욱 나아감을 ‘지地에서 지地로 옮김의 들어감’이라고 이름한다. 말하자면 흐름이 없는 선근이 일체의 세 가지 선善하지 않은 법을 영원히 여의는 것이다. 무탐無貪 등의 선근 등은 성내지 않음(無嗔)과 어리석지 않음(無癡)을 똑같이 취하는 것이다. ‘또 선근이 있어 세간을 벗어나는 도의 품류의 원인이 된다’는 것은, 모든 지地에서의 가행선근이다.

여덟째는 십지의 배움이 다함을 ‘보살로서 다함의 들어감’이라고 이름한다. 아래 큰 다함의 부분(大盡分)115)에서 밝히는 것과 같으니, 열 번째 지地의 보살이 여래의 열 가지 비밀스러운 지혜(如來十種秘密智)116)에 들어가 비밀스럽고 은밀하며 깊고 그윽하여 헤아려 알기 어렵기 때문에 ‘부사의’라고 이름한다. 아홉째는 구경의 자리이니 원인의 도道가 이미 원만하여 부처님의 과보가 이에 수승함을 밝히는 것이다. 끝까지 가득찬 과보가 원만함을 ‘부처님으로서 다함의 들어감’이라고 이름한다. 논에서 ‘들어가는 지혜(入智)’는 (경의) ‘얻는다(得)’라는 글자를 풀이한 것이다.

세 번째는 지말을 모아 근본에 돌아가는 것이니, ‘모든 들어감’이라고 말한 것은 위의 아홉 가지 들어감을 합한 것이다. ‘비교하여 헤아림이 된다’ 등은 그 차별 없음의 차별을 나타낸 것이다. 말하자면 지地 이전, 지地 이상 내지 부처님의 지위(佛地)를 의지하여

006_0806_b_01L法故入自利3) [137] [135] 論中隨所思議
006_0806_b_02L是思惠所思名字具足是聞惠所
006_0806_b_03L故決定說也上來現信樂
006_0806_b_04L下辨得訂五見位云云 論中一切
006_0806_b_05L法平等智釋無分別智謂於初地
006_0806_b_06L正訂眞如無能所二相故云平等 [136]
006_0806_b_07L見道時中善淸淨者釋善淨不雜
006_0806_b_08L謂離二我分別隨眠 [137] 六明修道位
006_0806_b_09L地地別斷一無明故於煩惱
006_0806_b_10L亦永伏離故云世法不雜名
006_0806_b_11L不放逸入魔法是4) [138] 法也七明
006_0806_b_12L修位中智行轉進名地地轉入
006_0806_b_13L謂無流善根永離一切三不善法
006_0806_b_14L無貪等善根等者等取無嗔無癡
006_0806_b_15L復有善根能爲出世間道品因
006_0806_b_16L是諸地中加行善根也八十
006_0806_b_17L地學窮名菩薩盡入如下大盡分
006_0806_b_18L中明5)弟十地菩薩入如來十種
006_0806_b_19L秘密智以秘隱深密難可測知
006_0806_b_20L名不思議 [138] 九究竟位明因道旣
006_0806_b_21L佛果斯尅窮滿果圓名佛盡
006_0806_b_22L論中入智者釋得字也三會
006_0806_b_23L末歸本言是諸入者牒上九入
006_0806_b_24L爲挍量等者現其無別之別謂寄

006_0806_c_01L지위의 지혜(地智)의 차별과 차례로 더욱 뛰어난 모습을 비교하여 헤아린 것이고, 근본의 들어감 가운데 또한 이와 같은 등의 항포行布와 차례(次第)와 결정의 차별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지말을 융섭하여 근본으로 돌아가서 둘이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앞은 근본에 의거하여 지말을 일으켜서 다름없음의 다름을 밝히고, 지금은 지말을 모아 근본에 돌아가서 다르되 다름없음을 밝히기 때문이다.

네 번째, 근본과 지말이 걸림 없다는 것이란, 말하자면 육상의 총상과 별상이 걸림 없음을 밝히기 때문이다. 이 육상의 뜻을 풀이하는 데 여섯 가지 문을 짓는다.

첫째, 가르침이 일어난 뜻을 밝힌다. 말하자면 고정되어 집착하는 견해를 깨뜨려서 연기의 원융한 법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이법이 앞에 나타나면 일체 미혹의 장애는 하나가 멸하면 일체가 멸하고, 일체 행行의 지위는 하나가 이루어지면 일체가 이루어지는 등이다.

둘째, 종류이니, (다음과 같다.) 자기도 아니고 남도 아님 등의 4구와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음 등의 4구,117) 그리고 태어남도 아니고 등의 팔불八不118)과 십불十不119) 등이 모두 다 현상(事)을 모아 이법(理)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 흐름의 부류는 다만 저러한 것 등이 이법에 들어가서 하나의 적정에 따르는 것이다. 이제 이 이법에 들어감은 저 현상을 원융하여 상즉상입하게 해서 보현의 법을 이루는 것이니, 이에 왼쪽과 오른쪽만 있을 뿐이다.
셋째, 나온 바를 밝히는 것이다. 이 글은 아래 경문의 네 번째 대원 가운데 나오니,120) 경을 전하는 사람(經家)이 스스로 설한 것이고, (『십지경론』의) 논주가 임의로 지은 것이 아니다.

넷째, 건립을 밝히는 것이다. ‘무슨 까닭에 오직 여섯이며 많지도 않고 적지도 않은가’란, 말하자면 무릇 모든 연기법이 세 문이 있어야 한다. 첫째는 지말이 근본에서 일어남과 일어나지 않음이 있다.

006_0806_c_01L地前地上乃至佛地挍量地智
006_0806_c_02L差別次*弟轉勝之相非謂根本入
006_0806_c_03L中亦如此等行布次*弟決定差
006_0806_c_04L是故融末歸本現無二矣
006_0806_c_05L依本起末明無別之別今會末歸
006_0806_c_06L明別而無別故也四本末無碍
006_0806_c_07L第上之二第三四張 謂明六相捴
006_0806_c_08L別無碍故也釋此六相義作六門
006_0806_c_09L一明敎興意謂破定執見以現緣
006_0806_c_10L起圓融之法此理現前一切惑障
006_0806_c_11L一滅一切滅一切行位一成一切
006_0806_c_12L成等二種類者不自不他等四句
006_0806_c_13L及不有不無等四句并不生等八
006_0806_c_14L十不等皆悉會事入理是此流
006_0806_c_15L但彼等入理以順一寂今此入
006_0806_c_16L圓融彼事使相即相入成普
006_0806_c_17L賢法有斯6) [139] [139] 右耳 7) [140] [140] 明所出者
006_0806_c_18L此文出在下經*弟四大願中經家
006_0806_c_19L自說非是論主率意而作四明
006_0806_c_20L建立者何故唯六不多不小者
006_0806_c_21L汎諸緣起法要有三門一末於本
006_0806_c_22L「訂」通「證」於此書{編}次同脚註曰知疑智
006_0806_c_23L{乙}
「收」作「攝」{乙}「世」作「母」{乙}「弟」
006_0806_c_24L作「第」{乙}次同
▣字體磨滅{底}ㆍ作「左」{乙}
006_0806_c_25L
「二」作「三」{乙}

006_0807_a_01L둘째는 저 일어난 지말이 이미 근본을 거둔다. 이 까닭에 서로 바라봄에 같음이 있고 다름이 있다. 셋째는 저 근본을 거느린 지말이 이미 근본에 거두어짐이 된다. 그러므로 당체에 존재함이 있고 무너짐이 있다. 만약 이 셋을 갖추지 않으면 연기를 이루지 못한다. 셋 가운데 각각 둘이기 때문에 다만 오직 여섯일 뿐이다.

다섯째, 문답으로 결정하여 택하는 것이니, 둘이 있다. 첫 번째는 거스름(逆)이니, 말하자면 총도 아니고 별도 아닌 등이 각각 서로서로 모든 모습을 빼앗아서 모든 모습이 다 다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따름(順)이니, 말하자면 또한 총이고 또한 별인 등이 각각 모습을 따라서 성취하는 등이다. 생각하고 준하여서 지은 것이다.

여섯째, 글을 해석하는 것이니, 다섯이 있다.
첫 번째는 법을 기준으로 하여 수數를 드는 것이다. 말하자면 설해진 법에 여섯 종류의 모습이 있는 등이다.
두 번째는 가르침의 뜻을 정함을 변별하는 것이다. ‘이것은 언설로 해석한 것이다’란, 가르침을 정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 가운데 이 육상의 언설을 안립하는 것은 경문을 해석하고자 하는 것이니, 마땅히 이 뜻을 알아야 한다. 또 이를 풀이한 가운데 육상을 해석한 것은, 이곳의 경문이 아니라 다만 논주가 해석한 뜻일 뿐이다. ‘사事는 제외됨을 알아야하니, (사事란) 말하자면 오온(陰)ㆍ십팔계(界)ㆍ십이처(入) 등이다’라는 것은, 이것은 그 뜻을 정함을 변별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도리를 기준으로 하여 융통을 설한 것이고, 오온 등 현상의 모습 중에서 변별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것을 제하여 가려내는 것이다.

세 번째는 이름을 열거하는 것이니 알 수 있을 것이다.
네 번째는 모습을 풀이하는 가운데, 별상 내에서 ‘별別이 본本에 의지하되’는 총에 의지하여 별을 여는 것을 밝힌 것이다. ‘저 근본을 만족시킨다’는 (별이) 다시 능히 총을 이루는 것이다. 말하자면 반드시 본에 의지해야 하는 별이 바야흐로 능히 본을 만족시키기 때문이다.
‘늘어나는 모습’은 앞의 아홉 가지 들어감의 점차 늘어나는 모습이니 ‘다름(異)’을 나타내는 것이다.
연緣이 이루어져 화합함을 간략한 말로 표현하고, 연緣이 흩어져 지음이 없음은 널리 인연을 변별한다. ‘세계가 이루어지고 무너지는 것과 같다’는 것은 비유를 들어서 나타낸 것이니, 말하자면 마치 백억의 사천하가 합하여 하나의 사바세계를 이루는 것을 간략한 말로 표현하면 ‘이룸(成)’이 되고,

006_0807_a_01L有起不起二彼所起末旣帶於本
006_0807_a_02L是故相望有同有異三彼帶本之
006_0807_a_03L旣爲本1) [141] [141] 是故當體有存有
006_0807_a_04L若不具此三不成緣起三中各
006_0807_a_05L故但唯六五問答決擇者有二
006_0807_a_06L初逆謂非捴非別等各各互相形
006_0807_a_07L奪諸相皆盡故也二順謂亦捴
006_0807_a_08L亦別等各各順相成就等思准作
006_0807_a_09L六釋文有五一約法擧數謂於
006_0807_a_10L所說法中有六種相等二辨定敎
006_0807_a_11L此言說解釋者是定敎謂於此
006_0807_a_12L安此六相之言說爲欲解釋經
006_0807_a_13L應知此義又釋此中釋六相
006_0807_a_14L是此處經文但是論主解釋之意
006_0807_a_15L應知除事謂陰界入等者此辨定
006_0807_a_16L其義謂約道理說融通非是陰等
006_0807_a_17L事相中辨第上之二第三五張 故除
006_0807_a_18L簡之三列名可知四釋相中別內
006_0807_a_19L別依本者明依捴開別滿彼本者
006_0807_a_20L還能成捴 謂要依本之別方能滿
006_0807_a_21L本故也增相者是前九入漸增之
006_0807_a_22L以現異也緣成和合略言標
006_0807_a_23L緣散無作廣辨因緣如世界成
006_0807_a_24L壞者擧喩以現謂如百億四天合

006_0807_b_01L만약 백억의 차별을 분별하여 널리 설하면 하나의 사바세계가 의거하여 머무를 바가 없게 하기 때문에 ‘무너짐(壞)’이 된다.
다섯 번째, ‘나머지 모든’은 모든 곳에서 (육상의 가르침을) 권하는 것이니, 준하여 견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고기

‘고기’에 이른다. 법장 스님의 소䟽에 이르기를, “(세친) 논주가 네 가지 문의 해석을 지었다. 운운.121)라고 한다. 이 네 가지 문의 이름은 비록 소䟽를 지은 이가 스스로 지은 것이나, 그러나 저 『(십지경)론』 가운데 본래 그 뜻을 갖추고 있다. 따라서 “(세친) 논주가 네 가지 문을 지었다.”라고 한 것이다.

이 네 가지 문은 다 일승인가, 혹은 삼승인가?
어떤 이는 이른다. 네 가지 문이 다 일승이다. 무엇인가? 처음 문은 “가르침과 뜻에 통하고 내지 원인과 결과에 통하여, 합하여 통틀어서 장애가 없어 운운.”라 하니, 이와 같이 열 가지 보법의 이름을 기준으로 한다. 둘째 문은 ‘다름없음의 다름’이고, 셋째 문은 ‘다르되 다름없음’이며, 넷째 문은 ‘총상과 별상이 걸림 없음’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이른다. 처음과 뒤의 두 문은 앞의 해석과 같다. 둘째는 근본의 들어감에 의거하여 아홉 가지 들어감의 지말을 여니, 삼승이 한마음(一心)의 근본에 의거하여 흘러서 육도六道를 이루는 것과 같다. 셋째는 아홉 가지 들어감의 지말을 모아서 근본의 들어감으로 돌아가니, 또한 삼승이 육도의 차별을 모아서 평등한 한마음으로 돌아가는 뜻과 같다. 따라서 이 두 문은 모두 삼승이다.

어떤 이는 이른다. 첫 하나는 일승이고 다음의 둘은 삼승이니 또한 앞의 해석과 같다. 넷째 문은 비록 육상을 밝히나 육상의 가르침이 일어난 뜻에 이르기를, ‘고정되어 집착하는 견해를 깨뜨려서 연기를 나타낸다’고 한다. 이미 이르기를, 집착을 깨뜨린 후에 덕을 나타낸다고 한 까닭에, 이는 모습을 닦는 문의 원융한 뜻이므로 처음 문의 총체적으로 해석한, 근본을 나타내는 일승에 상대하는 것이다. 따라서 삼승이라고 한다.

006_0807_b_01L成一娑婆略言標現爲成若分別
006_0807_b_02L廣說百億差別令一娑婆無所
006_0807_b_03L依住故爲壞五餘一切者勸於
006_0807_b_04L一切處准類知之

006_0807_b_05L
古記云藏䟽云論主作四門解釋
006_0807_b_06L云云 此四門名雖是䟽主自作
006_0807_b_07L彼論中本具其義故云論主作四
006_0807_b_08L門也此四門者皆一乘耶
006_0807_b_09L三乘耶一云四門皆是一乘
006_0807_b_10L初門則通敎及義乃至通因
006_0807_b_11L及果混通無碍云云 如是約十種
006_0807_b_12L普法名 2)弟二門則無別之別 *弟
006_0807_b_13L三門則別而無別 *弟四門則捴別
006_0807_b_14L無㝵故一云初後二門同前釋也
006_0807_b_15L*弟二則依根本入開九入末
006_0807_b_16L於三乘依一心本流成六道 *弟
006_0807_b_17L三則會九入末歸根本入亦同三
006_0807_b_18L乘會六道差別歸平等一心之義
006_0807_b_19L此二門並三乘也一云初一一乘
006_0807_b_20L次二三乘亦同前釋 *弟四門則
006_0807_b_21L雖明六相六相敎興意云破定執
006_0807_b_22L以現緣起旣云破執而後現德
006_0807_b_23L是修相門之圓融義故對初門
006_0807_b_24L捴釋現本之一乘故云三乘也

006_0807_c_01L
어떤 이는 이른다. 논주가 앞의 세 문에서 육상을 밝히지 않고 넷째 문에 이르러 육상을 논하기 때문에, 이 논의 글의 모습을 기준으로 하면 분명하게 나타나니, 앞의 셋은 삼승이고 뒤의 하나는 일승이다. 그러나 넷째 문이 육상을 밝힐 때 앞의 세 문의 근본과 지말을 가지고 논하기 때문에, 넷째 문을 기준으로 하여 보면 앞의 세 문도 다 또한 일승이다.122)

이 넷째의 ‘근본과 지말의 걸림 없음’은 그 뜻이 무엇인가?
어떤 이는 이른다. (『화엄경』) 여덟 번째 모임에 대한 주석(䟽)에서, ‘근본 모임을 펴서(舒) 지말 모임이 되고, 지말 모임을 말아 거두어(卷) 근본 모임이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123) 지금 이 또한 그러하여, 근본의 총상을 열어서 아홉 가지 들어감의 지말을 이루고, 아홉 가지 들어감의 지말을 모아서 근본의 총을 이룬다.

어떤 이는 이른다. 일승 가운데 정해진 근본과 지말이 없기 때문에 하나를 들면 주主가 되고 나머지는 반伴이 된다. 그러므로 열 가지 들어감에서 듦을 따라 근본이 되고 나머지는 지말이 된다.
어떤 이는 이른다. 근본은 스스로 항상 근본이고 지말도 또한 스스로 항상 지말이나 걸림이 없다. 말하자면 한결같이 근본의 들어감을 이름하여 총상이라 하고 나머지 아홉 가지 들어감으로써 이름하여 총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며, 한결같이 나머지 아홉 가지 들어감을 이름하여 별이라 하고 근본의 들어감으로써 이름하여 별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근본과 지말이 걸림 없음을 이루는가?
총에 의거하여 별을 열 때 만약 근본인 총을 깨뜨려서 아홉 가지 들어감인 지말을 이룬다면 곧 별이 총에 걸리는 것이다. 별을 모아 총을 이룰 때도 또한 만약 그러하다면 총이 별에 걸리는 것이다. 그러나 총이 움직이지 아니하되 별을 이루고 별이 움직이지 아니하되 총을 이루기 때문에, 근본은 항상 근본이고 지말은 항상 지말이지만 능히 걸림 없음을 이룬다.

006_0807_c_01L論主於前三門不明六相
006_0807_c_02L*弟四門第上之二第三六張 論六
006_0807_c_03L相故約此論文相現著則前三三
006_0807_c_04L後一一乘也然*弟四門明六
006_0807_c_05L相時將前三門本末論故約*弟
006_0807_c_06L四門看則前之三門皆亦一乘
006_0807_c_07L此*弟四本末無㝵其義云
006_0807_c_08L一云*弟八會䟽云本會舒
006_0807_c_09L爲末會末會卷爲本會故今此亦
006_0807_c_10L開根本摠成九入末會九入末
006_0807_c_11L成根本摠也一云一乘中無定本
006_0807_c_12L末故擧一爲主餘則爲伴是以
006_0807_c_13L於十入中隨擧爲本餘則爲末也
006_0807_c_14L一云本則自恒本末亦自恒末
006_0807_c_15L無㝵也謂一向根本入名爲摠
006_0807_c_16L非以餘九入名爲摠一向餘九入
006_0807_c_17L名爲別非以根本入名爲別也
006_0807_c_18L若尒何成本末無㝵耶依摠
006_0807_c_19L開別時若破根本摠而成九入末
006_0807_c_20L則別㝵於摠也會別成摠時亦若
006_0807_c_21L尒則摠㝵於別也然而摠不動而
006_0807_c_22L成別別不動而成摠故本則恒本
006_0807_c_23L末則恒末而能成無㝵也六相
006_0807_c_24L「收」作「攝」{乙}「弟」作「第」{乙}次同

006_0808_a_01L
『육상장』에 이르기를, “서까래가 곧 집이므로 총상이라 이름하고 집이 곧 서까래이므로 별상이라 이름한다.이상.124)라고 한다. 이 글에 의거하면 근본이 도리어 지말이 되고 지말이 도리어 근본이 됨을 허용하는 것인가?
일승에서는 만약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만이거니와 이루어지면 처음과 끝을 여읜 까닭”125)에 비록 ‘서까래가 곧 집이다’라고 하더라도, 이미 집일 때에는 처음과 끝을 여의었으므로 먼저 별인 서까래가 있고 후에 집을 이루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근본이 도리어 지말이 되고 지말이 도리어 근본이 된다고 하지 않는다.

서까래는 별의 연緣인데 이미 “서까래가 곧 집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또한 포섭의 들어감 등의 별이 총이 되는 뜻도 있기 때문에 또 지말이 도리어 근본이 되는 뜻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어째서 그렇지 않은가?
만약 포섭의 들어감 등이 총이 되는 뜻이라면 곧 이것은 근본의 들어감이기 때문에, 다만 총으로써 이름하여 총이라고 하고 별로써 이름하여 총이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포섭의 들어감 등이 만약 총이 된다면 다만 근본의 들어감이라고 할 뿐이다.

고기

‘고기’에 이른다. 근본의 들어감의 큰 허공 가운데 여덟 가지 어려움이 있다. 만약 이 여덟 가지 어려움을 안다면 비록 그 본 소䟽를 보지 못하더라도 『십지경론』의 오묘한 뜻을 안다고 할 수 있으나, 만약 이 여덟 가지 어려움을 알지 못한다면 비록 열 명, 스무 명의 주석가의 소䟽를 얻더라도 『십지경론』의 뜻을 안다고 할 수 없다.
말하자면 첫째, 이 큰 허공 중에 비록 총과 별의 모습이 없으나 총과 별을 나눌 수 있는 뜻이 있으니 이것을 보기 어렵다. 말하자면 위의 오중五重의 총과 별126)에서 처음 삼중을 기준으로 하여 본다.

둘째, 이 큰 허공 중에 비록 여러 가르침의 수행의 지위가 없으나 여러 가르침의 수행의 지위를 나눌 수 있으니 또한 보기 어렵다. 흘러나온 바 삼승의 아홉 가지 들어감의 자리에서 본다.

006_0808_a_01L章云椽即是舍故名摠相舍即
006_0808_a_02L是椽故名別相已上 依此文則
006_0808_a_03L許本還爲末末還爲本耶一乘
006_0808_a_04L之中若不成則已成則離始終故
006_0808_a_05L雖云椽即是舍旣是舍時離始終
006_0808_a_06L非是先有別椽後成舍也是故
006_0808_a_07L不云本還爲末末還爲本也
006_0808_a_08L是別緣旣云椽即是舍故亦有攝
006_0808_a_09L入等別爲摠之義故亦可云末還
006_0808_a_10L爲本之義何不然耶若攝入等
006_0808_a_11L第上之二第三七張 爲摠之義
006_0808_a_12L是根本入故但以摠名爲摠不以
006_0808_a_13L別名爲摠也是以攝入等若爲摠
006_0808_a_14L則但云根本入也

006_0808_a_15L
古記云根本入大虛之中有八難
006_0808_a_16L若得知此八難則雖不見其本
006_0808_a_17L可謂得知地論之妙旨若不知
006_0808_a_18L此八難則雖得一十二十家䟽
006_0808_a_19L可謂知地論之旨也謂一此大虛
006_0808_a_20L雖無摠別之相而有可分摠別
006_0808_a_21L之義此難見也謂於上五重摠別
006_0808_a_22L約初三重見也二此大虛中雖無
006_0808_a_23L諸敎行位而有可分諸敎行位
006_0808_a_24L亦難見也於所流三乘九入處見

006_0808_b_01L
셋째, 이 큰 허공 중에 비록 항상함과 항상함이 없음(無常)도 없으나, 항상함의 지혜가 장애를 끊음과 항상함이 없음의 지혜가 장애를 끊음이 있으니 또한 보기 어렵다. ‘또 선근이 있어’127) 등의 문구를 기준으로 하여 본다. 만약 품品과 모임(會)을 기준으로 하면, 차별과 평등의 두 가지 두루한 인과(差別平等二周因果)128)와 수생修生과 본유本有129)의 두 지혜이다.

넷째, 이 큰 허공 중에 항상함과 항상함이 없음에 대한 지혜가 합하여 하나의 흐름이 없는 지혜를 이룸이 있으니 또한 보기 어렵다. 말하자면 첫 모임의 사십 부류130)의 법체法體와 법계 모임의 신중神衆은 유위有爲이며 보현보살과 문수보살 등의 한가지로 태어난 무리(同生衆)131)는 곧 무위無爲이다. 이 유위와 무위가 합하여 법신인 비로자나(부처님) 자체의 지혜를 이룬다.132)

다섯째, 이 큰 허공 중에 생멸과 생멸하지 않음이 합하여 법의 체體를 이룸이 있으니 또한 보기 어렵다. 이는 머무름이 없는 별교의 문 가운데 얕고 깊음이 없는 삼관三觀133)의 생멸과 증분 가운데 생겨남이 없는 부처님 법의 생멸하지 않음이다.
여섯째, 이 큰 허공 중에 움직이지 않는 근본 무명이 곧 법의 체體를 만족시키니 또한 보기 어렵다. 종교終敎의 근본과 지말 등의 무명에 대해서 ‘보普’ 자의 도장으로 도장 찍어 정해서 본다.

일곱째, 이 큰 허공 중에 부처님으로서 다함의 들어감에서 발심하고, 포섭의 들어감의 지위에서 성불하니 또한 보기 어렵다. ‘이 모든 들어감은 지혜의 뜻의 차별을 비교해 헤아림이 된다’는 등의 문구를 기준으로 하여 본다.
여덟째, 이 큰 허공 중에 지옥의 지위에서 발심하는 사람은 없으나, 그러나 지옥에서 발심하여 성불함이 있으니 또한 보기 어렵다. “이것은 언설로 해석한 것이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의 문구에 의거하여 본다.

3) 연기무분별리緣起無分別理

‘모든 법이 각각 달라서’부터 ‘모든 지地의 공덕’까지134)

법융기
『법기』에 이른다. ‘모든 법이 각각 달라서 스스로 여여如如함에 머무르기 때문이며,

006_0808_b_01L三此大虛中雖無常無常
006_0808_b_02L有常智斷障無常智斷障亦難見
006_0808_b_03L約復有善根等文見也若約品
006_0808_b_04L會者是差別平等二周因果修
006_0808_b_05L生本有之二智也四此大虛中
006_0808_b_06L常無常智合成一無流智亦難見
006_0808_b_07L謂初會四十類法體及法界會
006_0808_b_08L神衆則有爲也普賢文殊等同生
006_0808_b_09L則無爲也此有爲無爲合成法
006_0808_b_10L身毗1) [142] 遮那自體智也五此大
006_0808_b_11L虛中有生滅不生滅合成法體
006_0808_b_12L難見也是無住別敎門中無淺深
006_0808_b_13L三觀之生滅訂分中無生佛法之
006_0808_b_14L不生滅也六此大虛中不動根本
006_0808_b_15L無明即是滿足法體亦難見也
006_0808_b_16L於終敎根本枝末等無明以普字
006_0808_b_17L印定而見也七此大虛中
006_0808_b_18L佛盡入發心第上之二第三八張
006_0808_b_19L攝入位成佛亦難見也約是諸入
006_0808_b_20L爲挍量智義差別等文見也八此
006_0808_b_21L大虛中無地獄位發心之人
006_0808_b_22L有地獄中發心成佛亦難見也
006_0808_b_23L依此言說解釋應知之文見也

006_0808_b_24L
諸法各異 諸地功德法記云諸法

006_0808_c_01L하나의 여여함과 많은 여여함의 여여한 모습을 얻을 수 없다’라는 것은 오십사각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여여함’이라고 하나, 이것이 ‘제1각의 여如이고 이것이 제2각의 여如이다’라는 등으로 나눌 수 없기 때문에 ‘모습을 얻을 수 없다’고 한다. (제)1각을 기준으로 할 때가 곧 오십사각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여함’이라고 하며, 제2각을 기준으로 하는 것 또한 이와 같다. 이에 이르러 마침내 앞의 질문에서 “위에서 이르기를, ‘원인과 결과가 같지 않다고 하고, 한 집의 참된 덕德이며 성性이 중도에 있다’고 하니 이유를 알지 못하겠다.”135)라고 한 뜻에 답하는 것이다.

대기
『대기』에 이른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묻는다. 무엇이 부처님의 법을 깊이 믿는 것인가? 답한다. 일체 모든 법이 오직 부처님만이 아시는 바이고 나의 경계가 아니다.’”라고 한 것 등은, 『승만경』을 인용하여 위의 것을 증명하며 스스로는 겸손히 한 것이다. 말하자면 앞에서 이르기를, ‘이 뜻은 실로 이해하기 어렵다. 비록 그러하나, 천친 논주에 의거하면 내지 분한 따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 것은, 뜻으로는 오직 부처님만이 아시는 바이고 내 자신이 알 수 있는 바가 아니라고 하지만, 그러나 가르침과 이법(理)에 의거하여 분수 따라 이 뜻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 가운데 우러러 미루는 지혜를 인용하여 증명을 삼은 것이다. 저 경에서 이르기를 ‘매우 깊은 법의 지혜를 성취함’은 첫 번째 사람을 위한 것이고, ‘수순하는 법의 지혜를 성취함’은 두 번째 사람을 위한 것이고, ‘여래에게 우러러 미루며 나의 경계가 아니다’라는 것은 세 번째 사람을 위한 것이다.136) 풀이하면 처음은 깨달은 지혜이고 다음은 삼현三賢이며 마지막은 십신十信이다.

법융기
『법기』에 이른다. “일곱 장소와 여덟 모임과 품의 종류가 같지 않으나 오직 「십지품十地品」에 있으니, 까닭이 무엇인가? 이 근본으로써 법을 모두 거두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실담장悉曇章」137)과 같다. 일체 모든 글자는 첫 장章이 근본이 되니 이와 같이 세간과 출세간의 일체 모든 법은 십지가 근본이 된다.138)

006_0808_c_01L各異住自如故一如多如如如相
006_0808_c_02L可得者約五十四角故云如如而不
006_0808_c_03L可分此是2)弟一角如此是*弟二角
006_0808_c_04L如等故云相不可得約一角時
006_0808_c_05L約五十四角故云如如約*弟二角
006_0808_c_06L亦如是也至此竟答前問上云因果
006_0808_c_07L不同而一家實德性在中道未知
006_0808_c_08L所由之義

006_0808_c_09L
大記云是故經云問云何深信佛
006_0808_c_10L一切諸法唯佛所知非我境
006_0808_c_11L界等者引勝鬘經訂上自謙也
006_0808_c_12L前云此義其實難解雖然依天親論
006_0808_c_13L乃至隨分可解云者意云唯佛所
006_0808_c_14L知非我自分所解然依敎理隨分
006_0808_c_15L現此義也是故引經中仰推之智而
006_0808_c_16L爲訂也彼經云成就甚深法智
006_0808_c_17L*弟一人成就隨順法智爲*弟二人
006_0808_c_18L仰推如來非我境界爲*弟三人
006_0808_c_19L初則訂智次則三賢後則十信也
006_0808_c_20L法記云七處八會及品類不同而唯
006_0808_c_21L在地品所以者何以是根本得 [142] 法盡
006_0808_c_22L故者如悉曇章一切諸字初章爲
006_0808_c_23L如是世出世間一切諸法十地爲
006_0808_c_24L「蘆」作「盧」{乙}「弟」作「第」{乙}次同

006_0809_a_01L따라서 ‘법을 모두 거둔다’라고 하는 것이다.
고기

‘고기’에 이른다.
일승의 십지를 어떻게 보는가?
부석산 40일 법회에서 의상 화상이 “일승의 십지는 가로(橫)이며 세로(竪)이다.”라고 하였다. 상원相元 스님과 지통智通 스님 등이 화상의 뜻을 이미 얻었다고 말하고 그 법회가 마침에 이르러 각자 깨달은 바를 바치자, 화상이 이르기를, “모두 얻지 못하였다. 일승의 십지는 적멸도량에서 비로소 바른 깨달음을 이루신 부처님의 마음에 의지해서 본다.”라고 하였다. 후에 신림 대덕이 풀이하여 말하기를, “초회의 십지는 태어나면서 장님인 사람이 색상을 보고 본다는 것과 같다. 「광명각품」 이후의 십지는 태어나면서 귀머거리인 사람이 소리를 듣고 본다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말하자면 초회의 근본에 의지해서 뒤의 「광명각품」의 십지를 일으키니 수생修生의 십지, 불과佛果의 십지, 본유本有의 십지, 이세간의 십지, 입법계의 십지이다.

일승의 다함없는 십지를 어떻게 보는가?
삼승 중에는 삼천세계의 법의 광명에 의거하고, 일승의 수순하는 문(一乘隨門)139)에서도 또한 세계(界)의 법의 광명에 의거하고, 우리 별교에서는 (세계)종種의 법의 광명에 의거하여 (본다).
삼승의 십지는 초지는 백 개 잎의 연꽃의 광명에 의지한다. 말하자면 두루 만족된 진여(遍滿眞)를 안으로 가득히 증득한 타수용신他受用身이 의거하는 바이며 또한 응신應身이다. 그 백 개의 잎에서 전체를 총괄하는 하나의 잎이 정토의 변화이다. 또 하나하나의 잎 가운데 각각 백억의 석가모니부처님이 있으니 예토의 변화이다. 둘째 지地는 천 개 잎 연꽃의 광명에 의한다. 앞에 준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내지 열째 지地는 수없는 잎의 연꽃의 광명에 의한다.

006_0809_a_01L故云攝法盡也

006_0809_a_02L
古記云一乘十地如何見耶
006_0809_a_03L石山四十日會和尙云一乘十地
006_0809_a_04L1) [143] [143] 也竪也相元智通等以謂已
006_0809_a_05L得和尙之意第上之二第三九張
006_0809_a_06L其會終各呈所領和尙曰並不
006_0809_a_07L得也一乘十地者依寂滅道場
006_0809_a_08L始成正覺佛心而見也後林徳釋
006_0809_a_09L初會十地者如生盲人見色
006_0809_a_10L而見也光明覺品以去十地者
006_0809_a_11L生聾人聞聲而見也謂依初會本
006_0809_a_12L起後光明覺品十地修生十地
006_0809_a_13L佛果十地本有十地離世間十地
006_0809_a_14L入法界十地也一乘無盡十地
006_0809_a_15L如何見耶三乘中依三千界法
006_0809_a_16L明也一乘隨門中亦依界法明也
006_0809_a_17L自別敎中依於種法明也三乘十
006_0809_a_18L地者初地依百葉蓮花明也
006_0809_a_19L仲密訂遍滿眞他受用身之所依也
006_0809_a_20L亦是應身也其百葉中全統一葉
006_0809_a_21L則淨土之化也又一一葉中各有
006_0809_a_22L百億釋迦則穢土之化也二地則
006_0809_a_23L依千葉蓮花明也准前可知
006_0809_a_24L2)弟十地則依無數葉蓮花明也

006_0809_b_01L또한 앞에 준하여 안다.
이 삼승 가운데 연꽃이란 십지의 보살이 의지하여 머무는 바이다.140) 일승의 연꽃은 곧 십지의 체體이다. 일승의 수순하는 문에서 세계(界)의 법에 의거하여 변별하는 것은 삼승과 같으나, 다만 육상으로 이루기 때문에 다를 뿐이다. ‘(세계)종種에 의거하여 변별한다’고 말하는 것은 초회에 합하여 오십여섯 거듭(五十六重)의 십지가 있다. 말하자면 교분의 한 거듭과 증분의 오십다섯 거듭이다.

교분의 한 거듭이라고 말한 것은 세계바다에 열 가지 말할 수 없는 부처님 국토의 티끌수 향물바다(香水海)가 있는데, 가장 가운데 바다에 큰 연꽃이 생겨나고 이 연꽃 위에 세계종世界種이 있다. 이 하나의 세계종에 스무 거듭의 세계가 있으니 이 스무 거듭이 곧 십지이다. 십지에 각각 자분自分과 앞으로 나아감이 있기 때문에 스무 거듭이 있다. 이 하나의 세계종이 이미 십지가 있는 것과 같이 나머지 낱낱의 세계종에도 모두 십지가 있기 때문에 열 말할 수 없는 세계의 티끌 수 십지가 있다. 따라서 ‘다함없는 십지’라고 한 것이다. 이것이 한 거듭이다. 만약 나아가 보면 곧 거듭거듭 다함없는 십지가 있으니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증분의 십지’라고 말한 것은 다섯 바다(五海)와 열 지혜(十智)141)를 기준으로 하여 보는 것이다. 말하자면 바다로써 지혜에 들어가기 때문에 오십 바다가 있으니, 다섯 거듭의 십지이다. 지혜로써 바다에 들어가기 때문에 오백 지혜가 있으니, 오십 거듭의 십지이다. 그러므로 증분 가운데 합하여 오십다섯 거듭의 십지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수행문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만약 나아가 보면 곧 거듭거듭 다함없는 십지가 있으니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삼승은 환희歡喜와 이구離垢 등으로써 십지를 삼는다. 일승에서는 무엇으로써 이름하는가?

006_0809_b_01L亦准前知此三乘中蓮花者十地
006_0809_b_02L菩薩之所依住也一乘蓮花則是
006_0809_b_03L十地體也一乘隨門中依界法辨
006_0809_b_04L同於三乘但以六相成故別耳
006_0809_b_05L言依種辨者初會中合有五十六
006_0809_b_06L重十地謂敎分之一重訂分之五
006_0809_b_07L十五重也言敎分一重者世界海
006_0809_b_08L有十不可說佛刹塵數之香水
006_0809_b_09L最中央海出大蓮花此蓮花
006_0809_b_10L有世界種此一種中有二十
006_0809_b_11L重世界此二十重即是十地十地
006_0809_b_12L各有自分勝進故有二十重也
006_0809_b_13L此一種第上之二第四○張 旣有十
006_0809_b_14L餘一一種皆有十地故有十
006_0809_b_15L不可說世界塵數十地故云無盡
006_0809_b_16L十地也此則一重耳若進見者
006_0809_b_17L即有重重無盡十地可思言訂分
006_0809_b_18L十地者約五海十智見也謂以海
006_0809_b_19L入智故有五十海則五重十地
006_0809_b_20L以智入海故有五百智則五十重
006_0809_b_21L十地是故訂分中合有五十五重
006_0809_b_22L十地也是約一行門也若進見者
006_0809_b_23L即有重重無盡十地可思三乘
006_0809_b_24L以歡喜離垢等爲十地一乘中

006_0809_c_01L
동교의 수순하는 문에서는 삼승과 같다. 만약 별교에서라면 세계의 이름, 바다의 이름, 지혜의 이름 등이 다 십지의 이름이다. 원교의 문에서는 환희 등의 이름과 세계 등의 이름이 다 십지의 이름이다. 말하자면 삼승 중에는 오직 이름만 있을 뿐이고 실제 법의 체體가 없다. 원교 중에는 법의 체體를 갖춤으로써 십지를 삼는다. 또 삼승 초교의 십지는 세로(竪)의 지위이다. 말하자면 십신과 십주로부터 점차 부처님의 과보에 이르기 때문이다. 숙교의 십지는 가로(橫)의 지위이다. 말하자면 한 여래장의 체體 가운데 나누어 세운 것이기 때문이다.
일승 중에서는 가로와 세로를 갖춘다. 말하자면 가로로 허공법계를 포함하고 세로로 구세와 십세를 꿰뚫기 때문이다. 십신과 십주 등은 다 십지로부터 일어난 것이다. 그래서 법장 스님이 이르기를, “십지는 앞으로는 지地 이전을 거두고 위로는 부처님의 과보를 거둔다. 모임과 모임의 근본되는 부분에 다 바다가 있다고 하니, 이에 모두 십지로 근본을 삼음을 안다.”라고 하였다. (의상) 화상의 뜻도 마땅히 그러할 뿐임을 알아야 한다.

법융기
『법기』에 이른다. ‘하나의 지地에서 일어나지 않고 널리 일체 모든 지地의 공덕을 거둔다’라고 한 것 등은 이 가운데 연기법을 바로 밝히기 때문에 ‘하나가 일체를 거둔다’라고 하는 것이다.
만약 연기의 만족하여 곁이 없는 법을 기준으로 한다면, 곧 그 ‘하나’라는 말이 이미 충분하니 어째서 거듭 ‘널리 거둔다(普攝)’라고 말할 필요가 있는가?
실제로는 이처럼 다만 ‘하나의 지地’를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다만 필요에 따라서 이른 것뿐이다.

006_0809_c_01L以名耶同敎隨門中與三乘同
006_0809_c_02L若別敎中世界名海名智名等
006_0809_c_03L十地名也圓敎門中歡喜等名世
006_0809_c_04L界等名皆十地名謂三乘中
006_0809_c_05L有名耳無實法體圓敎之中
006_0809_c_06L具法體爲十地也又三乘初敎十
006_0809_c_07L地者竪位也謂從十信十住漸
006_0809_c_08L至佛果故也熟敎十地者橫位
006_0809_c_09L謂於一如來藏體中之所分立
006_0809_c_10L故也一乘中具橫竪也謂橫包虛
006_0809_c_11L空法界竪貫九世十世故也
006_0809_c_12L信十住等皆從十地而起也故藏
006_0809_c_13L師云3) [144] [144] 地者4) [145] [145] 地前上攝佛
006_0809_c_14L果也會會本分皆云有海是知
006_0809_c_15L皆以十地爲根本也和尙之意
006_0809_c_16L知爾耳

006_0809_c_17L
法記云不起一地普攝一切諸地功
006_0809_c_18L德等者此中正明緣起法故云一攝
006_0809_c_19L一切也若約緣起滿足無側法者
006_0809_c_20L即其一言已足何必重言普攝耶
006_0809_c_21L實則如是只言一地足矣但隨5) [146] [146]
006_0809_c_22L第上之二第四一張

006_0809_c_23L「撗」作「橫」{乙}「弟」作「第」{乙}「十」無有
006_0809_c_24L{乙}
」作「攝」{乙}「須」作「順」{乙}

006_0810_a_01L
고기

‘고기’에 이른다. 지상 스님이 경 가운데 “하나의 지地에서 일체 모든 지地를 널리 거둔다.”142)는 문구를 주석하여 이르기를, “수행의 모습이 차례로 하여 마지막에 궁극적인 실제의 자체에 이르는 것에 나아가 논한다. 요약하면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시작이기 때문에 마지막을 생기게 할 수 있으며, 마침내 끝까지 만족시키기 때문에 ‘거둠’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둘째는 비록 처음의 시작이지만 그러나 모든 지地에서 행하는 바 모든 법을 능히 행하여 다름이 없기 때문에, ‘거둠’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루는 바의 행은 다만 자신의 분상(自分) 가운데 존재하니, 위와 아래의 우열은 단지 밝음과 어두움으로 다름이 될 뿐이다. 셋째는 다만 처음의 시작이 곧 일체 모든 지地의 공덕을 거두기 때문에 ‘거둠’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넷째는 처음과 나중이기 때문에 ‘거둠’이라고 이름하는 것은 아니고, 다만 처음의 시작이 곧 바로 마지막이기 때문에 ‘거둠’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상.143)라고 하였다. 풀이하면 어떤 이는 말하기를 “처음 둘은 시교와 종교이고, 뒤의 둘은 일승이다. 일승의 둘 가운데 처음은 연기분이고 뒤는 과분이다.”라고 한다. 어떤 이는 “(일승의 둘 가운데) 처음은 중문이고 뒤는 즉문이다.”라고 한다.

『법계도기총수록』 상권 2

006_0810_a_01L
古記云至相釋經中在於一地普
006_0810_a_02L攝一切諸地之文云就行相次1)
006_0810_a_03L終至窮實自體以論要略有四
006_0810_a_04L以於始故能生於後終竟滿足故
006_0810_a_05L言攝也二雖是初始然能行於諸
006_0810_a_06L地所行諸法無2) [147] [147] 言攝也
006_0810_a_07L所成之行但在自分中上下優劣
006_0810_a_08L但以明昧爲異耳三但是初始即
006_0810_a_09L攝一切諸地功德故名攝也四非
006_0810_a_10L謂以初後故名攝但是初始即
006_0810_a_11L正是終故名攝也已上 解云一云
006_0810_a_12L初二始終敎後二一乘一乘二中
006_0810_a_13L初緣起分後果分一云初中門
006_0810_a_14L後即門也第上之二第四二張

006_0810_a_15L
法界圖記叢髓錄卷上之二

006_0810_a_16L「弟」作「第」{乙}「姝」作「殊」{乙}
  1. 1)『화엄경』에는 해인삼매의 세력으로 인해 일체를 다 나타내 남김이 없다는 「현수보살품」의 게송 등 이 구절과 맥을 같이하는 설이 여러 군데 보인다. 법장도 이러한 게송 등을 근거로 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인 『화엄경』이 삼라만상森羅萬象, 즉 세 가지 세간을 모두 거두며 바로 해인삼매 중에 나타난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화엄경탐현기』(K47, 469c26~470a3; T35, 119c11~15).
  2. 2)분제分齊의 의미는 나누어 가지런히 한다는 것으로 같은 것끼리 모아 나누는 것이니 경계, 부문, 영역 등으로 번역된다.
  3. 3)‘총상ㆍ별상’에서 ‘중도에 있듯이’까지의 해석에 대해 『대기』에서는 또 다른 해석의 예를 소개하고 있다. 『총수록』 상권 2 각주 68) 참조.
  4. 4)세친의 『십지경론』에서 『십지경』 원문 중 일부를 인용한 것이다.(K15, 3a8~9; T26, 124b19~20)
  5. 5)이하의 인용문은 『십지경』에서 금강장불金剛藏佛이 금강장보살의 입정入定을 열 가지로 칭찬하시는 경문〔『십지경론』(K15, 3a8~14; T26, 124b19~24)〕을 세친이 『십지경론』에서 주석한 부분이다.(K15, 3b1~c13; T26, 124c5~125a6)
  6. 6)세친의 『십지경론』에서 『십지경』 원문 중 일부를 인용한 것이다.(K15, 3a8~9; T26, 124b19~20)
  7. 7)이 경(修多羅)은 『십지경』을 가리킨다.
  8. 8)『십지경』(『십지경론』, K15, 3a9; T26, 124b20).
  9. 9)『십지경』(『십지경론』, K15, 3a10; T26, 124b20~21).
  10. 10)『십지경』(『십지경론』, K15, 3a10~11; T26, 124b21).
  11. 11)『십지경』(『십지경론』, K15, 3a11; T26, 124b21~22).
  12. 12)『십지경』(『십지경론』, K15, 3a11~12; T26, 124b22).
  13. 13)『십지경』(『십지경론』, K15, 3a12; T26, 124b22~23).
  14. 14)『십지경』(『십지경론』, K15, 3a12~13; T26, 124b23).
  15. 15)『십지경』(『십지경론』, K15, 3a13~14; T26, 124b23~24).
  16. 16)『십지경』(『십지경론』, K15, 3a14; T26, 124b24).
  17. 17)앞의 “모든 보살(一切菩薩)”부터 “뜻을 따라 미루어 알 수 있을 것이다.(隨義類知)”까지는 『십지경론』(K15, 3b1~c13; T26, 124c5~125a6)에서 인용한 부분이다.
  18. 18)『총수록』의 주석(『大記』, H6, 808c9~19; K45, 184b9~16)에 의하면 이 구절은 『勝鬘經』의 인용이다. 상권 2 각주 136) 참조.
  19. 19)한 부의 경전(一部經) : 7처, 8회, 34품, 60권으로 이루어진 『대방광불화엄경』을 가리킨다.
  20. 20)『총수록』(H6, 793a2). 이에 해당하는 『일승법계도』 원문은 H2, 1b2~6; H6, 791b3~7.
  21. 21)지엄의 『수현기』(K47, 67c9~10; T35, 88b22~24)에서는 「입법계품」의 근본법회〔『육십화엄』(K8, 305a16~b2; T9, 677b25~c6)〕를 주석하면서 기수급고독원의 대장엄중각大莊嚴重閣을 기세간으로, 여래의 모임을 지정각세간으로, 보살의 모임을 중생세간으로 분류하는 구절이 보인다. “初莊重閣等卽器世間。 二如來集卽智正覺。 三菩薩集卽衆生世間耳。” 그러나 『공목장』 「三世間章」(T45, 568c17~569a8)에서는 보살이 중생신을 나투는 것은 중생들의 믿고 좋아함을 알아서 자재하게 차별신을 나타내 보이는 것으로 풀이하고도 있다.
  22. 22)『총수록』(H6, 793a20). 이에 해당하는 『일승법계도』 원문은 H2, 1b10~16; H6, 791b 11~18.
  23. 23)네 번째 해인 : 오중해인 가운데 네 번째인 ‘보현이 삼매에 들어가 관하는 해인(普賢入定觀海印)’을 가리킨다. 『대기』(H6, 768b14~15)는 앞에서 이 해인을 『일승법계도』 제목 가운데 굴곡을 나타내는 ‘오십사각’에 배대하였다.
  24. 24)『팔십화엄』 「입법계품」의 37번째 선지식인 수호일체성증장위력주야신守護一切城增長威力主夜神의 설법 중 일부분이다.(K8, 879c8~9; T10, 388b26~27) 참고로 『육십화엄』과 『사십화엄』의 해당 경문을 아울러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구분선지식경문출전
    『팔십화엄』守護一切城增長威力主夜神我知法界一性 如來一音 一切衆生無不了故K8, 879c8~9;T10, 388b26~27
    『육십화엄』妙德守護諸城夜天知法界一 如來妙音 一切衆生無不聞故K8, 372c4~5;T9, 738b15~16
    『사십화엄』守護一切城增長威德主夜神我知法界一性 入於如來圓滿言音 隨衆生心無不了故K36, 122c10~11;T10, 761a16~18
  25. 25)위의 각주 24)와 같음.
  26. 26)『일승법계도』(H2, 1a3; H6, 768a5)의 ‘無方’에 대한 『진수기』(H6, 772c17~19)의 주석을 가리킨다.
  27. 27)『보법장』으로 인용된 이 구절은 지엄의 『공목장』 「初會十門料簡一經意」(T45, 537a 15~16) 중의 일부분이다. 상권 1 각주 38) 참조.
  28. 28)『총수록』(H6, 838a18~b1)에서 삼승과 일승, 동교와 별교의 관계를 설명할 때 누각(樓)을 이용하는 경우는 뒤의 ‘고기古記’에서 지엄의 설을 인용하면서 한 번 더 소개된다. 현존하는 지엄의 저술에 ‘고기’의 인용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구절은 없지만 『화엄오십요문답』(T45, 522a18~29)에 이와 동일한 맥락의 내용이 보인다.
  29. 29)왕의 상투 중의 구슬(王髻中珠) :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안락행품安樂行品」(K9, 770b11~771c22; T9, 38c4~39c17)에 나오는 비유로서, 구슬은 『법화경』을 뜻한다. 이 비유에서는 전륜성왕이 전쟁을 할 때 부하들에게 그 전공戰功에 따라 갖가지 상을 내리지만 오직 자신의 상투에 있는 보석은 그들이 놀랄까 봐 주지 않다가 다른 여러 상을 준 후에 마지막에 주는 것과 같이, 여래도 또한 중생들에게 갖가지 경 등을 설하지만 이 믿기 어려운 『법화경』만은 끝까지 설하지 않다가 이제 중생들이 일체지를 얻게 하고자 설하신다고 한다.
  30. 30)『팔십화엄』의 제2회 「여래명호품」부터 제7회 제35품 「여래수호광명공덕품」까지를 가리킨다.
  31. 31)『일승법계도』(H2, 4中3~4; H6, 812a9~10).
  32. 32)여덟 잎의 궤칙(八葉之軌) : 『대일경』에 근거한 만다라의 작법 도상 한가운데 대일여래가 자리한 중대팔엽원中臺八葉院이 여덟 잎을 가진 연꽃으로 묘사되어 있음에 의한 것이다. 이 경전에서는 이 만다라 수행을 통한 일체지의 획득, 즉 성불을 위한 수행법을 설하고 있다.
  33. 33)『毘盧遮那經』 : 『大毘盧遮那成佛神變加持經』, 속칭 『대일경』을 가리킨다. 선무외善無畏와 일행一行이 725년에 역출하였다.
  34. 34)『佛地經』 : 현존하는 경전 목록에 『불지경』과 연관시킬 수 있는 경전은 당唐의 현장玄奘이 645년에 번역한 『佛說佛地經』이 있으나 이 경에는 ‘여덟 잎(八葉)’과 관련된 구절이 보이지 않는다. 또한 『불설불지경』에 대한 인도 친광보살親光菩薩의 주석서 『佛地經論』(현장 역, 649)에도 이와 관련된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35. 35)『총수록』(H6, 795a7). 이에 해당하는 『일승법계도』 원문은 H2, 1b18~22; H6, 791b 19~c1.
  36. 36)저(彼)는 삼승이고, 나(我)는 일승, 차종此宗을 뜻한다.
  37. 37)지엄의 『수현기』 가운데 『화엄경』 「현수품」에 대한 주석 중 일부이다. 원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결과는 원인과 다름이 없는 결과이고, 원인은 결과와 다름이 없는 원인이나, 인과의 명칭은 연緣에 기대어 나타난 것이다. 그 연이 차이나서 다른 흐름들이 함께 갈마드니 줄어들고 가득 차는 것은 저로부터이고 나에게서 됨은 없다.(果無異因之果。 因無異果之因。 而因果之稱。 寄顯於緣。 其緣乃差。 殊流同軼。 虧盈自彼。 於我無爲。)”(K47, 17b11~13; T35, 32a10~12)
  38. 38)『총수록』(H6, 795c21). 이에 해당하는 『일승법계도』 원문은 H2, 1b23~2a5; H6, 791c2~792a7.
  39. 39)네 가지 보살행의 글(四種菩薩行文) : 『화엄경』 「십지품」과 『십지경』의 십대원 중 육상의 명목이 나오는 제4원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 제4원은 바라밀을 육상의 방법으로 행하여 중생의 마음이 증장되기를 원하는 것이다.(T9, 545b25~c3; T10, 181c23~28; T26, 139a14~20)
  40. 40)융질 대덕(融質德) : 『대기』의 이곳 인용문 외에 균여의 『십구장원통기』에 8회 정도 인용되고 있다. 이를 통해 융질이 법융의 『십구장』에 주석을 가했던 것을 알 수 있으며 따라서 9세기 전반 이후에 활동했던 의상계 화엄학승으로 추정된다.
  41. 41)『일승법계도』(H2, 7c9~10; H6, 831c5).
  42. 42)법장, 『화엄일승교의분제장』 「의리분제장」(T45, 509a3)에서 육상원융을 설하는 마지막 구절이다. 이 구절은 「육상송」으로 불린다. 지엄이 지은 「육상송」 또는 『육상장』의 일부분이라고 전해지기도 한다. 상권 2 각주 61) 참조.
  43. 43)4구四句와 육상 : 법장은 『화엄일승교의분제장』 「義理分齊」 중 두 번째, ‘연기인문육의緣起因門六義’에 대해서 4구와 육상을 이용하여 설명한다. 육상은 총ㆍ별ㆍ동ㆍ이ㆍ성ㆍ괴의 육상이다. 4구는 체體를 기준으로 할 때와 작용(用)을 기준으로 할 때의 두 가지로 구분한다. 전자는 있음(有)ㆍ없음(無)ㆍ있기도 하고 없기도 함(亦有亦無)ㆍ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음(非有非無)의 4구이며 후자는 자기에 의해 생기는 것이 아님(不自生也)ㆍ남에 의해 생기는 것이 아님(不他生也)ㆍ둘 모두에 의해 생기는 것이 아님(不共生也)ㆍ원인 없이 생기는 것이 아님(非無因生也)의 4구이다. 『화엄일승교의분제장』(T45, 502b17~28).
  44. 44)법장, 『화엄일승교의분제장』(T45, 503a7~8).
  45. 45)사유 대덕(思惟德) : 『일승법계도』에 대하여 해석을 가한 것으로 보아 의상계 화엄학승으로 추정된다.
  46. 46)『일승법계도』(H2, 1c12; H6, 791c15~16).
  47. 47)『일승법계도』(H2, 2b23~24; H6, 792c4~5).
  48. 48)『일승법계도』(H2, 2c8~9; H6, 792c13~14).
  49. 49)『십지경론』(K15, 4b16~17; T26, 125b19), “此法善巧成。 是故名方便。”
  50. 50)법장(康藏)의 설로 인용되는 이 구절은 현존하는 법장의 문헌에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집성방편’과 관련된 논의는 『화엄경탐현기』 가운데 「십지품」 주석 부분에서 법장은 방편을 네 가지가 아닌 ‘발기방편發起方便’ㆍ‘무주방편無住方便’ㆍ‘집성방편集成方便’의 세 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한다.(T35, 283c26~284a2) 집성방편을 포함하여 방편을 네 가지로 설명하는 것은 정영사 혜원의 저술에 다수 보인다. 『대승의장』(T44, 766a10~17), “四集成方便。 諸法同體巧相集成。 一備一切一切成一。 故曰方便。 故地經中說六相門以爲方便。 又彼論言。 此法巧成名方便矣。”, 「十地經論義記」(卍71, 307a13~16), “四集成方便。 如下第四大願中說。 彼說六相以爲方便。 諸法同體巧相集成。 故名方便。 今據第四故。 言此法善巧成故名方便矣。”
  51. 51)육상방편에 대해서 융질 대덕과 사유 대덕이 언급한 두 가지 설에 대한 『대기』의 풀이이다.
  52. 52)『대기』(H6, 800c5~17)는 아래 부분에서 삼관을 인연ㆍ연기ㆍ성기의 삼관으로 밝히고 있다.
  53. 53)보步 : 토지 및 건물 넓이의 단위를 나타내는 말. 1보는 여섯 자 제곱으로 약 3.3㎡이다. 이는 1평에 해당되므로 20보는 20평가량 된다.
  54. 54)법장, 『화엄일승교분기』(T45, 507c6~7), “總相者。 一舍多德故。 別相者。 多德非一故。 別依比總滿彼總故。” 교감주에서 이본에는 ‘舍’가 ‘含’으로, ‘比’가 ‘止’로 되어 있다고 밝히고 있다.
  55. 55)법장, 『화엄일승교의분제장』(T45, 507c21~508a1), “何者是舍耶。 答椽卽是舍。 何以故。 爲椽全自獨能作舍故。 若離於椽。 舍卽不成。 若得椽時。 卽得舍矣。 問若椽全自獨作舍者。 未有瓦等。 亦應作舍。 答未有瓦等時。 不是椽故不作。”
  56. 56)『사십화엄』(K36, 69a12; T10, 717c15~17), “지혜의 바다가 너르고 헤아리기 어려워라. 측량하지 못하여 도리어 비방을 늘린다. 소가 물을 마시면 우유를 이루고 뱀이 물을 마시면 독을 이룬다.(智海廣難量。 不測反增謗。 牛飮水成乳。 蛇飮水成毒。)” 이 경문은 『사십화엄』에만 있으며, 대경大經인 『육십화엄』과 『팔십화엄』에는 해당 구절이 보이지 않는다.
  57. 57)여기서 노사나盧舍那는 비로자나를 줄인 말로 볼 수 있다. 『진수기』는 신라 하대 『팔십화엄』이 신라에 전래된 이후, 『팔십화엄』에 의거하고 있음을 9회설 인용으로도 알 수 있다. 비로자나불은 노사나불이니 석가모니불과 다르지 않고 원융한 법신불이다.
  58. 58)법장, 『화엄경탐현기』(T35, 282b2).
  59. 59)법장, 『화엄경탐현기』(T35, 282b2~3).
  60. 60)법장, 『화엄경탐현기』(T35, 282b3~4), “彼帶本之末旣爲本收。 是故當體有存有壞。”
  61. 61)『六相章』 : 『六相章』의 내용은 「六相頌」이라고도 한다. 법장의 『화엄일승교의분제장』(T45, 508c24~509a3)에 ‘頌曰’이라 하여 수록되어 있다. 대각 의천大覺義天의 『圓宗文類』에서 “華嚴六相頌。 終南山。 儼尊者述。 義分齊中承用。”이라 하여 법장의 『화엄일승교의분제장』 「의리분제」에 보이는 「육상송」이 지엄의 『육상장』에서 발췌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음을, 『화엄일승교의분제장』에 대한 후대 주석서인 선희善熹, 『華嚴一乘敎義分齊章復古記』(卍58, 369a13~14) 등에서 인용하여 전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이 「육상송」의 내용은 지엄이 지은 『육상장』의 일부이거나 혹은 전체로 생각할 수 있다. 한편 『총수록』 중 ‘고기’(H6, 807c23~808a2)와 균여, 『일승법계도원통기』(H4, 15b6~14), 「釋華嚴敎分記圓通鈔」(H4, 15b 등)는 ‘육상장六相章’이라는 이름으로 법장의 『화엄일승교의분제장』 「의리분제장」 가운데 ‘육상원융의六相圓融義’를 인용하고 있다. 즉 그 당시에는 『화엄일승교의분제장』의 ‘육상원융의’를 ‘육상장’이라는 명칭으로도 불렀음을 알 수 있다.
  62. 62)법장, 『화엄경탐현기』(T35, 282b18~19).
  63. 63)법장, 『화엄경탐현기』(T35, 282b19).
  64. 64)법장이 지은 『華嚴經傳記』(T51, 163c28~164a1)에는 지엄이 총장 원년(668) 10월 29일 청정사淸淨寺에서 67세를 일기로 입적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여기의 ‘淸禪寺’는 ‘淸淨寺’와 동일한 장소로 보인다.
  65. 65)동시에 갖추어짐(同時具足)과 인드라그물의 미세한 경계 등(同時具足及因陁羅網微細境界等) : 동시구족상응문同時具足相應門과 인드라망경계문(因陁羅網境界門) 등으로 구성되는 십현문十玄門을 가리킨다.
  66. 66)H6, 791c17~19, “如摠相別相成相等不卽不離不一不異常在中也。”
  67. 67)이에 의하면, “총상ㆍ별상ㆍ동상ㆍ이상ㆍ성상ㆍ괴상이 즉하지도 않고 여의지도 않으며 하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아니하여 항상 성이 중도에 있는 것과 같이”로 번역된다.
  68. 68)이에 의하면, “총상ㆍ별상과 같이 동상ㆍ이상ㆍ성상ㆍ괴상이 즉하지도 않고 여의지도 않으며 하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아니하여 항상 성이 중도에 있다.”로 번역된다.
  69. 69)이곳의 ‘동상으로써 이를 다스린다(以同相治之)’는 구절은 ‘謂’ 이후에 이상과 동상의 두 가지를 통해 시각과 본각의 같고 다름을 논하는 것을 고려할 때 ‘異相’이 생략된 것으로 보인다. 즉 ‘동상과 이상으로써 이를 다스린다(以同相異相治之)’고 해야 뒤의 ‘謂’ 이후의 논의와 대구가 맞는다.
  70. 70)『簡義章』 : 저자 미상. 현존하지 않는다. 『간의장』에 『일승법계도』가 인용되어 있음을 볼 때 의상계 화엄 문헌인 것으로 추정된다.
  71. 71)허공에 (그린) 그림으로 허공을 향함에 곧 (그림의) 체가 허공과 같아서 분한 따라 걸림이 없다.허공에 그린 그림의 비유는 『화엄경』에 여러 번 나타난다. 『십지경론』(K15, 9b17~18; T26, 129a11~12)의 해당 경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허공에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허공의 바람 모습처럼, 지혜도 이와 같아서 분별하여 부처님의 번뇌 없음을 보기 어렵다.(如彩畫虛空。 如虛空風相。 智如是分別。 難見佛無漏。)” 『십지경론』(K15, 9b19~c6; T26, 129a13~22)에서는 이 구절에 대해 허공에 그린 그림도 그림이므로 벽壁에 그린 그림과 같아 없지 않지만, 허공에 그려 머물지 않으므로 있지 않다고 풀이한다. 법장은 『화엄경탐현기』(T35, 291a23~25)에서 허공은 평등한 과분果分을, 허공의 그림은 십지에 대한 언설의 법문을, 허공의 그림이 그려진 곳은 인분因分인 십지의 체體를 비유한 것으로 주석한다.
  72. 72)「십지품」 서분(T10, 180c27~28)에 나오는 비유이다. “허공 가운데 새의 자취처럼 설하기 어렵고 보이기 어렵다. 이와 같이 십지의 뜻은 마음으로 요달하기 어렵다.(如空中鳥迹。 難說難可示。 如是十地義。 心意不能了。)” 『십지경론』(K15, 15c20~21; T26, 132b18~19; 133c7~8)의 해당 경문은 “허공 가운데 새의 자취처럼 설하기 어렵고 보기 어렵다. 십지의 뜻도 이와 같아서 설하고 들을 수 없다.(如空中鳥跡。 難說不可見。 十地義如是。 不可得說聞。)”이다. 법장은 『화엄경탐현기』(T35, 298a11~b1)에서 이에 대해 허공을 과해果海로, 새가 날 때 자취의 자리를 십지(因分)의 체體로, 자취의 모습을 십지의 모습으로, 새의 자취 자체는 십지에 대한 말로 된 가르침으로 풀이한다. 또 법장은 새가 모래를 지날 때 자취를 남기듯이 소승의 가르침은 말에 의한 뜻을 드러내지만 허공을 날 때의 자취로 비유된 십지법문은 대승의 가르침으로 말을 여읜 뜻을 나타낸다고 설한다. 따라서 여기에서 두 가지에 통한다는 것은 허공을 나는 새의 자취가, 허공과 모래땅의 자취 두 가지, 즉 상동과 하동인 원융과 항포에 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73. 73)법장의 『화엄일승교의분제장』 「소전차별장」(T45, 490a21~27)에서 세 번째, 행위行位의 분제를 밝히는 가운데 한 지위가 일체의 지위를 갖춘다는 설에 대한 문답 중 일부이다. 본문에서는 ‘모든 가르침(諸敎)’으로 되어 있으나 「소전장」에는 ‘모든 지위(諸位)’로 되어 있다. 문답의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문 만약 그렇다면(첫 지위가 마지막 지위를 갖추고 있다면) 어떻게 모든 지위가 단계로 내려가 차례를 이룬다고 설하는가? 답 이 경에 모든 지위를 안립하는 데 두 가지 선교가 있다. 첫째는 모습을 기준으로 문에 나아가 지위의 앞과 뒤를 나누어 삼승과 같음에 의탁하여 저 (삼승을) 인도하는 방편이니 동교이다. 둘째는 체體를 기준으로 법에 나아가 앞과 뒤가 상입하고 원융자재하여 저 삼승과 다르니 별교이다. 다만 문을 옮기지 않고서 항상 상즉하고 상즉을 무너뜨리지 않고서 항상 앞과 뒤이니 이런 까닭에 두 가지 뜻이 융통하여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問。 若爾。 云何說得諸位階降次弟。 答。 以此經中。 安立諸位。 有二善巧。 一約相就門。 分位前後。 寄同三乘。 引彼方便。 是同敎也。 二約體就法。 前後相入。 圓融自在。 異彼三乘。 是別敎也。 但以不移門。 而恒相卽。 不壞卽而恒前後。 是故二義融通。 不相違也。”
  74. 74)『과간科簡』 : 저술명으로 생각되나 현존하는 화엄종 문헌 목록에는 보이지 않는다. 과간은 과목요간, 과목분류의 의미이다. 만약 『科簡』을 『料簡』의 잘못으로 본다면 『東域傳燈目錄』(T55, 1147a13; a16)에 『華嚴經料簡』과 『華嚴經要集料簡』이라는 저술이 있기는 하지만 현존하지 않아 그 내용을 파악할 수 없다.
  75. 75)지엄은 보현위 가운데 신信에서 십지까지 인因과 과果인 보살과 불의 지위로 나누고(普賢位中從信已上乃至十地。 皆通因果菩薩及佛。 復爲五門。 此依普賢阿含說。) 『大方廣佛華嚴經搜玄分齊通智方軌』(T35, 27c9~11), 법장은 아함위와 증위의 둘로 나누고 있다.(約普賢位相。 此有二分。 一阿含位。 如此品說。 二證位。 如十地品說。) 『화엄경탐현기』(T35, 197c12~16).
  76. 76)이 구절은 법장의 『화엄경지귀』 중 다음 구절을 이용하여 구성한 것으로 보인다. “항상 본래의 지위분제를 무너뜨리지 않는다. 이는 곧 나눔이 바로 나눔이 없음으로 광대함과 협소함이 걸림 없다.(恒不壞本位分齊。 此卽分則無分廣狹無礙。)”(T45, 594b7~8).
  77. 77)앞의 ‘셋’은 총상ㆍ동상ㆍ성상을, 뒤의 ‘셋’은 별상ㆍ이상ㆍ괴상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총수록』에서 육상을 이처럼 두 가지로 구분하는 예는 H6, 797b가 참조된다.
  78. 78)『총수록』(H6, 802b13). 이에 해당하는 『일승법계도』 원문은 H2, 2a7~b11; H6, 792a 8~b15.
  79. 79)보살대지혜광명삼매菩薩大智慧光明三昧. 『육십화엄』 「십지품」(K8, 162c16~17; T9, 542b13~14), 『팔십화엄』 「십지품」(K8, 633c18~19; T10, 179a8~9). 『십지경론』(K15, 2c7; T26, 124a26)에는 ‘보살대승광명삼매菩薩大乘光明三昧’로 되어 있다.
  80. 80)부처님의 증득과 가르침을 ‘의대義大’와 ‘설대說大’로 구분하는 것은, 지엄의 『공목장』 「청분의 끝에 증득과 가르침의 두 가지 큼에 대한 장(請分未*證敎二大章)」(T45, 562b5~c1)에서 ‘의대義大’와 ‘교대敎大’로 나누어 설하는 부분과 유사하다. 『공목장』에서 뜻이 큼(義大)은 증분을 가리키며 가르침이 큼(敎大)은 교분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뜻(義)은 증득하는 법의 뜻이기 때문이고, 가르침(敎)은 지목하는 방편이기 때문이다. 또 큼(大)은 증분과 교분(證敎)의 덕이 작지 않음을 나타낸다. 이러한 뜻이 큼과 가르침이 큼은 일승에 속하며 삼승에도 통하지만, 소승에는 단지 가르침만을 설하고, 또한 그 덕이 크지 않기 때문에 통하지 않는다. 일승원교에서는 보고 들음(見聞)은 가르침이 큼에, 보현의 증득(普賢證)은 뜻이 큼에 배대된다.
  81. 81)지엄, 『수현기』 가운데 「십지품」 주석(T35, 53b26~29)의 일부분이다. “地有二分。 一因二果。 因謂世間方便行修。 卽加行智分齊也。 果謂出生離相眞證。 卽正證分齊。”
  82. 82)오승五乘 : 『공목장』(T45, 560b26~29)에서 지엄은 오승을 인천승人天乘ㆍ성문연각승聲聞緣覺乘ㆍ점오승漸悟乘(漸敎所爲)ㆍ돈오승頓悟乘(頓敎所爲)ㆍ구경승究竟乘(一乘)으로 밝히고 있다.
  83. 83)지엄, 『공목장』(T45, 560b22~26).
  84. 84)지엄, 『수현기』(K47, 34a6~7; T35, 50b9~10).
  85. 85)이와 같은 설함에 대한 두 가지 구분은 앞의 ‘의대’와 ‘설대’의 구분과 그 문장이나 문맥 등이 유사하다.
  86. 86)세친이 『십지경론』(K15, 3a9; T26, 124b19~20)에서 열 가지 들어감으로 풀이하는 경문 가운데 첫 구절인 “지혜의 지地에 들어가게 하려는 까닭이다.(令入智慧地故)”를 가리킨다.
  87. 87)정영사 혜원과 지엄은 세친이 『십지경론』(K47, 34a4~12; T35, 50b7~16)에서 열 가지 들어감(十入) 가운데 앞의 첫 구절을 근본의 들어감(根本入)으로 풀이한 것을 받아들였다. 지엄은 『수현기』에서 이 열 가지 들어감이 교화되는 이를 대상으로 하여 가피로 이루려는 바(加所爲)를 밝힌 것으로서 그 가운데 첫째는 총總이고 나머지는 별別이라고 설한다. 혜원은 『十地經論義記』(卍71, 299a10~13)에서 이 구절을 근본의 들어감으로 해석하며 다른 아홉 구절을 바라보기에 이것을 근본이라고 하는 것이고, 원인과 결과에서의 근본을 말하는 것은 아니니, 경에 붙인 경명과 같다고 설한다.
  88. 88)가피로 이루려는 바(加所爲) : 부처님의 가피加被에 관한 경문을 지론종과 화엄종에서 셋으로 나누어 주석하는데, 그 가운데 두 번째이다. 셋은 문헌에 따라 약간씩 다르다. 법장의 『화엄경탐현기』(K47, 620b24~25; T35, 280b17~18)에서는 가피의 인(加所因)ㆍ가피로 이루려는 바(加所爲)ㆍ가피의 모습(加相)으로 나눈다.
  89. 89)이십 구 : ‘가피로 이루려는 바(加所爲)’로 주석되는 『십지경』(혹은 「십지품」)의 이십 구절을 가리킨다. 『육십화엄』(K8, 162c23~163a10; T9, 542b21~c3), 『팔십화엄』(K8, 634a2~13; T10, 179a16~27), 세친, 『십지경론』(K15, 3a8~21; T26, 124b19~c2) 등.
  90. 90)경전의 내용을 경전을 전한 경가經家에 의한 부분과 부처님이 직접 설하신 부분으로 나누어 볼 때, 가피로 이루려는 바(加所爲)에 대한 이십 구가 어디에 속하는가를 묻는 물음이다. 이에 대해 정영사 혜원은 『십지경론의기』(卍71, 299a13~16)에서 이 이십 구가 경가가 열거한 부분이라고 설하고 있다. 반면 징관은 『청량소』(T35, 633c15~16)에서 「십주품」 첫 부분에 나오는 가피로 이루려는 바에 대한 경문을 풀이하면서 이를 바로 부처님이 설하신 것이라 한다.
  91. 91)불타삼장佛陀三藏 : 『신편제종교장총록』(T55, 1167a1)에 『指歸兩卷』이 불타삼장의 저술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이어서 인용되는 구절이 일본 가나자와문고(金沢文庫)에 현존하는 『華嚴經兩卷旨歸』에 보이는 것을 볼 때, 여기의 불타삼장은 『화엄경양권지귀』의 저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92. 92)다섯 가지 티끌(五塵) : 감각의 대상인 여섯 가지 경계 가운데 법法을 제외한 색色ㆍ소리(聲)ㆍ향기(香)ㆍ맛(味)ㆍ감촉(觸)을 가리킨다.
  93. 93)여섯 번째 하늘(第六天) : 욕계ㆍ색계ㆍ무색계로 구성되는 불교의 우주관에서 욕계의 하늘 중에서 여섯 번째인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을 가리킨다.
  94. 94)일곱 번째 지(七地) : 보살의 계위를 나타내는 열 가지 지위(十地) 중에서 일곱 번째인 원행지遠行地(ⓢ dūraṃgamābhūmi)를 가리킨다.
  95. 95)여덟 번째 지(八地) : 보살의 계위를 나타내는 열 가지 지위 중에서 여덟 번째인 부동지不動地(ⓢ acalābhūmi)를 가리킨다.
  96. 96)세 종류 선근(三種善根) : 세 가지 독(三毒), 즉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이 없는 것을 가리킨다.
  97. 97)혜원慧遠은 『십지경론의기』에서 “부처님으로서 다함에서도 처음은 이름을 나열한다. 비록 원인 중에 있지만 부처님의 덕德을 모두 거두어서 ‘부처님으로서 다함’이라고 이름한다.(佛盡之中。 亦初列名。 雖在因中。 備攝佛德名爲佛盡。)”라고 하고, 또한 아홉 가지 들어감을 십지에 배대하면서도 부처님으로서 다함의 들어감을 부처님의 지위가 아닌 열 번째 지地에 해당시킨다.(卍71, 300b18~301a1) 이에 반해 법장 등 후대의 화엄가들은 부처님으로서 다함의 들어감을 보살십지가 아닌 부처님의 과위인 구경위에 배대한다. 참고로 혜원과 법장의 아홉 가지 들어감에 대한 배대를 도표로 나타내면 아래와 같다.
    慧遠九入法藏
    世間(加行位)聞慧地前① 攝入地前聞慧(加行位)
    思慧② 思議入思慧
    ③ 法相入
    修慧④ 敎化入修慧
    出世間初地⑤ 訂入初地見道位
    二地~七地⑥ 不放逸入二地~九地修道位
    ⑦ 地地轉入
    八地~九地⑧ 菩薩盡入十地
    十地⑨ 佛盡入究竟位究竟位
    『십지경론의기』卍71, 299a5~300a3『십지경론』K15, 3a8~14;T26, 124b19~24『화엄경탐현기』T35, 281a4~282a12
  98. 98)혜원, 『십지경론의기』, ‘모든 들어감’이란 포섭의 들어감 등 아홉 가지의 들어감이다. ‘지혜의 뜻의 차별을 비교한 것’이라고 말한 것은, 들어감의 지혜의 지地 중에서 덕德의 뜻의 차별을 임시로 비교하여 헤아린 것이기 때문에 세간으로부터 부처님의 지위에 이르기까지 의지한 것이다.(是諸入者。 是攝入等九種入也。 言爲校量智義別者。 爲假校量入智地中德義差別故。 寄世間乃至佛地。)”(卍71, 301a5~11)
  99. 99)법장, 『화엄경탐현기』, ‘모든 들어감’이라고 말한 것은 위의 아홉 가지 들어감을 합한 것이다. ‘비교하여 헤아린 것’ 등은 그 차별 없음의 차별을 나타낸 것이다. 말하자면 지地 이상으로부터 부처님의 지위에 이르기까지 의거하여 지위의 지혜의 차별과 차례로 더욱 뛰어난 모습을 비교하여 헤아린 것이다.(言是諸入者。 牒上九入。 爲校量等者。 顯其無別之別。 謂寄地上乃至佛地。 校量地智差別次第轉勝之相。)”(K47, 622a12~15; T35, 282a14~16)
  100. 100)순범順梵과 행장行將 : 생몰 연대나 활동 분야 등의 전기를 알 수 없다. 다만 신림이 상원에게 한 질문이 순범과 행장의 원만불에 관한 것으로 볼 때, 순범과 행장은 늦어도 신림, 상원과 동시대의 화엄 관련 승려로 간주된다. 상원은 의상의 직제자로서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초중반에 활동하였고, 신림은 상원의 제자로서 8세기 중엽에 활동한 것으로 생각된다.
  101. 101)혜원, 『십지경론의기』(K71, 301b3~4; 卍45, 40b6~7).
  102. 102)법장은 『화엄경탐현기』(K47, 622b7~10; T35, 282b10~13)에서 이 구절을 두 가지로 풀이한다. 첫째는 ‘언설’을 육상으로, ‘해석’의 대상을 이곳의 경문으로 본다. 둘째는 ‘해석’의 대상이 육상이지만 이것을 해석하는 언설은 경문이 아니라 『십지경론』의 저자인 세친이 해석한 뜻일 뿐이라고 주석한다. “‘이것은 언설로 해석한 것이다’란 가르침을 정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여기에서 이 육상의 언설을 안립하는 것은 경문을 해석하고자 하는 것이니, 마땅히 이 뜻을 알아야 한다. 또 풀이하면, 여기에서 육상을 해석한 것은 이곳의 경문이 아니라 다만 논주가 해석한 뜻일 뿐이다.(此言說解釋者是定敎。 謂於此中。 安此六相之言說。 爲欲解釋經文。 應知此意。 又釋。 此中釋六相。 非是此處經文。 但是論主解釋之意。)”
  103. 103)삼과三科 : 오온五蘊ㆍ십이처十二處ㆍ십팔계十八界를 합쳐서 가리키는 말이다.
  104. 104)백법百法 : 유식학파에서 유위ㆍ무위의 모든 법을 총괄하여 백 가지 법으로 나타낸 것이다.
  105. 105)법장, 『화엄경탐현기』(K47, 621a10~622b19; T35, 281a4~282b23). 『총수록』에서는 『화엄경탐현기』의 본문 내용 중 일부분을 생략하면서 인용하고 있다.
  106. 106)『십지경』 처음 부분에 금강장보살이 삼매에 들자, 시방의 금강장불이 금강장보살을 가피하는 가운데 설해지는 가피의 이유 또는 가피로 이루려는 바에 대한 이십 구문을 가리킨다. 『십지경론』(K15, 3a8~21; T26, 124b19~c2).
  107. 107)생략된 내용은 네 가지 문 가운데 둘째와 셋째의 문이다. “둘째는 근본에 의거하여 지말을 연다. 셋째는 지말을 모아 근본에 돌아감을 밝힌다.(二依本開末 三明會末歸本)”(T35, 281a)
  108. 108)세친, 『십지경론』(K15, 14b17~c1; T26, 132c8~15), “‘미묘하여 성인의 도道는 알기 어려우니 분별이 아니고 생각을 여의었다’ 이 게송은 무슨 뜻에 의거하여 설하는가?……다시 말한다. 왜 알기 어려운가? 위대한 성인의 길은 알기 어렵다. 위대한 성인이란 이른바 모든 부처님이다. 이런 까닭에 ‘미묘하다’라고 말한다. ‘도道’는 원인이다. 이 도를 수행하여 성스러운 곳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微難知聖道。 非分別離念。 此偈依何義說〈中略〉復云何難知。 大聖道難知。 大聖者所謂諸佛。 是故言微。 道者是因。 修行此道。 能到聖處故。)”
  109. 109)이상의 네 가지 지위와 아홉 가지 들어감의 배대를 도시하면 다음과 같다.
    九入攝入思議入法相入敎化入證入不放逸入地地轉入菩薩盡入佛盡入
    四位願樂位見位修位究竟位
    階位地前初地第二地~第十地
  110. 110)아함阿含 : ⓢ āgama. 부처님의 입(金口)으로 설해져 전해진 가르침을 의미한다. 법장은 『화엄경탐현기』(K47, 617c10~28; T35, 277b14~c5)에서 「십지품」에 대해 총總으로는 십지의 증행證行을 근본으로 하며 개별로는 열 가지 뜻이 있다고 밝히면서, 그 중 일곱 번째로 지위를 기준으로 십지의 지위를 구분하여 깨달음(證)의 지위와 아함의 지위로 나눈다. 또 법장은 혜원〔『십지경론의기』(卍71, 302b15~304a2)〕과 지엄〔『수현기』(K47, 34a14~b14; T35, 50b18~c22)〕의 논의를 받아들여 『십지경론』에 의거하면 아홉 가지 아함과 깨달음(證)의 상대가 있다고 풀이한다.(T35, 282c3~283a14)
  111. 111)『십지경』 서분에 나오는 비유이다. 상권 2 각주 72) 참조.
  112. 112)원하고 좋아함(願樂)의 지위에 배대되는 네 가지 들어감 가운데 첫 번째인 포섭의 들어감(攝入)을 가리킨다.(상권 2 각주 97) 참조) 여기서 풀이하는 『십지경론』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포섭의 들어감(攝入)이니, 들음에 의한 지혜(聞慧) 가운데 일체 선근을 거두는 까닭이다. 경經에서 ‘일체불법을 잘 분별하여 선택하는 까닭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一者。 攝入聞慧中。 攝一切善根故。 如經攝一切善根故。)” 『십지경론』(T26, 125), 『총수록』(H6, 792a16~17).
  113. 113)두 가지 아我 : 인아人我와 법아法我를 가리킨다.
  114. 114)수면隨眠 : ⓢ anuśaya. 번뇌의 다른 이름이다.
  115. 115)큰 다함의 부분(大盡分) : 세친이 『십지경론』(K15, 104c4~10; T26, 193c6~11)에서 열 번째 지인 법운지法雲地를 여덟 부분으로 나누어 해석하는 가운데, 네 번째인 ‘큰 다함에 들어가는 부분(入大盡分)’을 가리킨다. 『십지경론』(K15, 107c15~109c9; T26, 195c18~197a14)에 이에 해당하는 경문과 주석이 있다.
  116. 116)여래의 열 가지 비밀스러운 지혜(如來十種秘密智) : 법장은 이 열 가지 지혜가 무엇인지 여기서 직접 밝히고 있지는 않으나, 『육십화엄』 「십지품」(K47, 709c15~21; T35, 375c23~376a1)의 아래 구절을 주석하면서 이 열 가지를 비밀스러운 자리에 대한 지혜(密處智)를 밝히는 것이라고 한다. “또 모든 부처님의 비밀스러운 자리, 이른바 몸의 비밀스러움, 입의 비밀스러움, 뜻의 비밀스러움, 때와 때 아님을 아시는 비밀스러움, 보살에게 수기하시는 비밀스러움, 중생을 거두어 조복시키시는 비밀스러움, 모든 승乘이 차별한 비밀스러움, 8만4천 모든 근기가 차별한 비밀스러움, 업이 실답게 짓는 바의 비밀스러움, 행行이 보리를 얻는 비밀스러움, 이러한 등의 비밀스러움을 모두 여실하게 안다.(又諸佛密處。 所謂。 身密。 口密。 意密。 知時非時密。 與菩薩授記密。 攝伏衆生密。 諸乘差別密。 八萬四千諸根差別密。 業如實所作密。 行得菩提密。 如是等密。 皆如實知。)”(K8, 192b4~7; T9, 572c14~18) 징관도 『청량소초』(T36, 413c21~414a4)에서 『팔십화엄』(K8, 666c3~7; T10, 206b20~24)의 해당하는 구절을 주석하면서 이것이 열 가지 비밀스러운 지혜라고 풀이한다.
  117. 117)『총수록』 상권 2 각주 43) 참조.
  118. 118)태어남도 아니고 등의 팔불八不 : 용수龍樹의 『中論』 귀경송 등을 비롯하여 대승경론에 보이는 네 쌍으로 이루어진 여덟 가지 부정을 가리킨다. ① 생겨나지도 않고(不生), ② 사라지지도 않으며(不滅), ③ 항상하지도 않고(不常), ④ 끊어지지도 않으며(不斷), ⑤ 하나도 아니고(不一), ⑥ 다르지도 않으며(不異), ⑦ 오지도 않고(不來), ⑧ 가지도 않는다(不去). 『중론』(K16, 350b17~19; T30, 1b14~17).
  119. 119)십불十不 : 팔불八不과 마찬가지로 다섯 대립쌍의 동시부정을 통해 일체법의 실상을 밝히는 방편으로서 『대반열반경』에 나오는 다음 십이인연에 대한 십불이 대표적이다.(K38, 961a1~3; T12, 768b19~21) ① 나지도 않고(不出), ② 사라지지도 않으며(不滅), ③ 항상하지도 않고(不常), ④ 끊어지지도 않으며(不斷), ⑤ 하나도 아니고(非一), ⑥ 둘도 아니며(非二), ⑦ 오지도 않고(不來), ⑧ 가지도 않으며(不去), ⑨ 원인도 아니고(非因), ⑩ 결과도 아니다(非果). 참고로 법장은 『화엄경탐현기』(K47, 576a12~13; T35, 233a20~22)에서 『육십화엄』 「菩薩十無盡藏品」(K8, 84a13~16; T9, 475a17~20)의 다음 구절을 ‘십불十不’로 표현하기도 한다. “시방 일체세계의 낱낱 세계 가운데 삼세의 한량없고 수없는 모든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셔서 부처님의 일을 베풀어 행하시고 반열반하신다. 저 모든 부처님의 지혜는 늘어나지도 않고 줄지도 않으며, 생겨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으며, 다하지도 않고 가지도 않으며, 가깝지도 않고 멀지도 않으며, 앎도 아니고 혼란도 아니다.(十方一切世界。 一一世界中。 三世無量無數諸佛。 出興於世。 施行佛事。 而般涅槃。 彼諸佛智慧。 不增不減。 不生不滅。 不盡不去。 不近不遠。 不智不亂。)”
  120. 120)세친, 『십지경론』(K15, 23c20~24a4; T26, 139a14~20).
  121. 121)법장, 『화엄경탐현기』(K47, 621a13; T35, 281a7).
  122. 122)이상의 논의를 네 가지 문의 이름과 간략히 도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六相四門解釋① 一云② 一云③ 一云④ 一云
    一. 總釋顯本一乘一乘一乘三乘一乘
    二. 依本開末三乘三乘
    三. 會末歸本
    四. 本末無礙一乘一乘
  123. 123)『육십화엄』에 대한 주석서 중에 이와 같은 구절을 찾기 어렵다. 다만 법장은 『화엄경탐현기』에서 제8회 「입법계품」을 근본법회와 지말법회로 나누어, 근본법회는 지말법회와 다르지 않기 때문에 비록 말아져 있더라도(卷) 항상 펼쳐져 있고(舒), 지말법회는 근본법회와 다르지 않기 때문에 비록 펼쳐져 있더라도(舒) 항상 말아져 있다고 풀이하고 있다.(K47, 778c13~16; T35, 450b15~18).
  124. 124)『육상장』으로 출전을 밝히고 있는 이 구절은 법장의 『화엄일승교의분제장』 「의리분제장」(T45, 508a27~28)에서 ‘육상원융의六相圓融義’ 가운데 일부분이다. 『육상장』에 대해서는 상권 2 각주 42)와 61) 참조.
  125. 125)법장, 『화엄일승교의분제장』 「의리분제장」(T45, 504b3~4).
  126. 126)『총수록』에 실려 있는 『대기』(H6, 800b13~c17)는 신림의 설로서 다음의 오중 총별설을 전하고 있다. ① 별을 여읜 총(離別之摠), ② 별을 거느리되 별을 여읜 총상(帶別而離別), ③ 총이 곧 별이고 별이 곧 총(摠卽別別卽摠), ④ 또한 총이고 또한 별(亦摠亦別), ⑤ 총도 아니고 별도 아님(非摠非別).
  127. 127)『십지경론』(K15, 3b23; T26, 124c23)에서 열 가지 들어감 중 지말의 들어감에서 일곱 번째, 지地에서 지地로 옮김의 들어감(地地轉入)을 풀이하는 구절 중 일부분이다.
  128. 128)차별과 평등의 두 가지 두루한 인과(差別平等二周因果) : 오주인과에서 두 번째와 세 번째에 해당한다. 법장의 『화엄경탐현기』에 따르면 차별인과는 『육십화엄』의 「如來名號品」부터 「佛小相光明功德品」까지, 평등인과는 「普賢菩薩行品」부터 「寶王如來性起品」까지에 배대되며 이 둘은 모두 성해인과成解因果에 해당한다. 오주인과의 출전과 내용은 상권 1 각주 20) 참조.
  129. 129)수생修生과 본유本有 : 화엄종에서 부처님의 공덕 또는 법계연기 가운데 정법연기를 설명하는 방편 가운데 하나이다. 지엄은 『수현기』(K47, 45a15~b13; T35, 62c27~63a29)에서 『화엄경』에 의거하여 법계연기를 정법연기와 염법연기로 나누고 정법연기를, ① 본유本有, ② 본유수생本有修生, ③ 수생修生, ④ 수생본유修生本有로 구분하여 설한다. 이 가운데 본유에 대해서는 연기의 본래 실체라 하며 「성기품」의 경문을 예로 들고, 또 수생에 대해서는 신信 등의 선근이 아직 현전하지 않다가 지금 청정한 가르침에 대해서 연緣에 기대어 비로소 일어나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법장은 『화엄경탐현기』(K47, 724a23~28; T35, 392a15~20)에서 이에 대해 모든 부처님의 공덕이 수생과 본유 두 가지를 넘지 않으며, 이 두 가지가 서로 상대하면 모두 네 구가 있게 된다고 한다. 첫째, 수생에 대해 곧 신信 등의 선근은 본래는 없으나 지금 있기 때문이고, 둘째, 본유는 곧 진여가 항하의 모래 수처럼 많은 성性 공덕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한다.
  130. 130)첫 모임의 사십 부류 : 『화엄경』 첫 모임 첫 품(『육십화엄』은 「世間淨眼品」, 『팔십화엄』은 「世主妙嚴品」)에 등장하는 보현보살을 위시한 보살대중과 39류의 신중을 가리킨다. 39류의 신중과 관련하여 『육십화엄』과 『팔십화엄』이 순서와 항목에는 차이를 보인다.
  131. 131)한가지로 태어난 무리(同生衆) : 『화엄경』에서 첫모임에 모인 대중 가운데 보현보살을 위시한 보살대중을 가리킨다. 이 모든 보살들은 다 여래의 선근바다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 모든 보살들이 옛적에 다 비로자나여래와 더불어 한가지 선근을 모아서 보살행을 닦아서 다 여래선근의 바다로부터 태어났다.(此諸菩薩。 往昔皆與毘盧遮那佛如來共集善根。 修菩薩行。 皆從如來善根海生。)”(『大方廣佛華嚴經』 卷1, T10, 2a25~27) 여기서 보살대중 외의 39류 화엄성중들은 다르게 태어난 무리(異生衆)라고 부른다. 세친, 『십지경론』(K15, 8b19~20; T26, 128b5~7) 등. 『청량소』(T35, 535a4~12)에서도 첫 모임의 40부류 전체를 두 무리로 나누고 그 가운데 첫 번째인 보살을 한가지로 태어난 무리로, 나머지를 다르게 태어난 무리로 구분하며 그 의미에 대해서 다음 두 가지로 풀이한다. 첫째, 보살은 법성의 몸을 얻어서 사람과 같이 한 부류의 보살의 모습을 짓기 때문이고, 여러 부류(雜類)는 다양하게 다른 생과 갖가지의 모습을 짓기 때문이다. 둘째, 보살은 모든 지위에 통하기 때문이고, 신중은 법계의 차별된 덕이기 때문이다.
  132. 132)지엄은 『수현기』(K47, 4a17~19; T35, 17a22~23)에서 한가지로 태어난 무리인 보살은 무위연집無爲緣集의 무리, 다르게 태어난 무리인 화엄성중은 유위연집有爲緣集의 무리를 밝힌 것으로 풀이한다. 무위와 유위가 합하여 자체의 지혜를 이룬다는 구절은 지론종의 독특한 3종 연집설(유위연집ㆍ무위연집ㆍ자체연집)의 영향이 보인다.
  133. 133)삼관三觀 : 화엄종의 별교일승에는 여러 삼관이 있지만, 여기에서 언급되는 삼관은 의상계 화엄에서 중요하게 언급되는 인연관ㆍ연기관ㆍ성기관의 삼관으로 생각된다. “만약 일승을 기준으로 하면 인연ㆍ연기ㆍ성기의 삼관은 얕음과 깊음이 없다.(若約一乘。 則因緣緣起性起三觀。 無淺深也。)”(H6, 800b6~7)
  134. 134)『총수록』(H6, 808b24). 이에 해당하는 『일승법계도』 원문은 H2, 2b19~c4; H6, 792b 23~c9.
  135. 135)『일승법계도』(H2, 1b23~24; H6, 791c2~3).
  136. 136)『승만경』(K6, 1369a24~b7; T12, 222c20~25)의 다음 구절을 줄여서 인용한 것이다. “세 종류의 선남자와 선여인이 매우 깊은 뜻에 대해 자신이 다치고 상함을 여의고 큰 공덕을 내어 대승의 길에 들어갑니다. 무엇이 셋이 되는가 하면, 혹 선남자와 선여인이 매우 깊은 법의 지혜를 스스로 성취하거나, 혹 선남자와 선여인이 수순하는 법의 지혜를 성취하거나, 혹 선남자와 선여인이 모든 깊은 법에 대해 스스로 깨달아 알지 못하고는, 세존을 우러러 생각하며 나의 경계가 아니라 오직 부처님이 아실 바이다라 하면 이를 선남자와 선여인이 여래를 우러러 생각한다고 이름합니다.(三種善男子善女人。 於甚深義。 離自毀傷。 生大功德。 入大乘道。 何等爲三。 謂若善男子善女人。 自成就甚深法智。 若善男子善女人。 成就隨順法智。 若善男子善女人。 於諸深法。 不自了知。 仰惟世尊。 非我境界。 唯佛所知。 是名善男子善女人仰惟如來。)”
  137. 137)「悉曇章」 : 고대 인도 문법학(vyākaraṇa) 문헌의 첫 장章을 가리키며 고대 인도어인 산스크리트의 음운론, 즉 소리의 형성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실담(ⓢ siddham 또는 siddhām)’은 ‘성취’를 뜻하는데 첫 장의 처음에 나오는 귀경게의 일부를 들어 장章의 이름으로 삼은 것이다. 따라서 이어서 언급된 ‘첫 장(初章)’은 「실담장」을 가리킨다.
  138. 138)이 구절은 『화엄경』 「십지품」(K8, 164a10~13; T9, 543c5~9)의 다음 내용을 줄여서 인용한 것이다. “비유하면 일체의 문자가 모두 첫 장章에 거두어지며, 첫 장章이 근본이 되어 한 글자도 첫 장章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불자야, 십지는 이 일체 부처님 법의 근본이며 보살이 이 십지를 갖추어 행하면 일체의 지혜를 얻을 수 있다.(譬如一切文字。 皆初章所攝。 初章爲本。 無有一字不入初章者。 如是。 佛子。 十地者。 是一切佛法之根本。 菩薩具足行是十地。 能得一切智慧。)”
  139. 139)일승의 수순하는 문(一乘隨門) : 아래의 ‘동교의 수순하는 문(同敎隨門)’이라는 문구로 볼 때 문맥상 일승 가운데 동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140. 140)삼승의 십지에 대해서 연꽃의 수를 다르게 하며 비유하는 이 구절은 『大乘本生心地觀經』(K37, 491b4~23; T3, 298c25~299a12) 등의 구절과 문맥이 유사하다. 해당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모든 선남자야! 두 번째는 여래의 타수용신이니……일체의 여래는 십지의 모든 보살대중을 교화하기 위하여 열 가지 타수용신을 나타내신다. 첫 번째 부처님의 몸은 백 개 잎 연꽃에 앉으시어 초지 보살을 위하여 백 가지 법의 광명문을 설하신다. 보살이 깨닫고서는 큰 신통을 일으켜 변화가 백 가지 부처님 세계에 가득차고 이익이 무수한 중생을 안락하게 한다. 두 번째 부처님의 몸은 천 개 잎 연꽃에 앉으시어 제2지 보살을 위하여 천 가지 법의 광명문을 설하신다……내지 제10지의 타수용신은 말할 수 없는 오묘한 보배 연꽃에 앉으시어 제10지 보살을 위하여 말할 수 없는 여러 법의 광명문을 설하신다.(諸善男子。 二者如來佗受用身〈中略〉一切如來。 爲化十地諸菩薩衆。 現於十種佗受用身。 第一佛身。 坐百葉蓮華。 爲初地菩薩。 說百法明門。 菩薩悟已。 起大神通。 變化滿於百佛世界。 利益安樂無數衆生。 第二佛身。 坐千葉蓮華。 爲二地菩薩。 說千法明門〈中略〉乃至十地佗受用身。 坐不可說妙寶蓮華。 爲十地菩薩。 說不可說諸法明門。)” 『청량소초』(T36, 31c17~32a4)에서는 이러한 설을 소개한 후 참된 구극의 설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며 비판한다.
  141. 141)열 지혜(十智) : 『육십화엄』 「盧舍那佛品」(K8, 17b17~c2; T9, 409a3~12)에서 보현보살이 다섯 가지 바다와 같이 한량없는 경계를 관찰하고서 설하는 열 가지 불가사의한 지혜를 가리킨다. 구체적으로는, ① 모든 부처님의 일체 세계의 이루어짐과 무너짐에 대한 청정한 지혜(諸佛一切世界海成敗清淨智), ② 불가사의한 일체중생계의 일어남에 대한 지혜(不可思議一切衆生界起智), ③ 법계를 관찰함에 대한 지혜(觀察法界智), ④ 일체 여래의 자재로움에 대한 지혜(一切如來自在智), ⑤ 청정한 서원으로 법륜을 굴림에 대한 지혜(清淨願轉法輪智), ⑥ 힘이 있어 두려운 바가 없는 함께하지 않는 법에 대한 지혜(力無所畏不共法智), ⑦ 광명과 찬탄하는 음성에 대한 지혜(光明讚歎音聲智), ⑧ 세 가지로 중생을 교화함에 대한 지혜(三種敎化衆生智), ⑨ 한량없는 삼매법문의 무너지지 않음에 대한 지혜(無量三昧法門不壞智), ⑩ 여래의 갖가지 자재로움에 대한 지혜(如來種種自在智)이다. 지엄은 『수현기』(K47, 9a3~4; T35, 22b15~16)에서 이 열 가지 지혜가 『화엄경』 정종분의 본분本分인 다섯 바다(五海)에 대한 지혜이자 삼세간에 대한 지혜라고 풀이한다. 『팔십화엄』에서 대응하는 곳은 「世界成就品」(K10, 465a13~b25; T10, 34b10~c17)에 보이며, 다섯 바다는 열 바다, 열 지혜는 스물아홉 지혜로 되어 있다.
  142. 142)『육십화엄』 「세간정안품」(K8, 1c3; T9, 395b25~26), “하나의 지地에 머물러 일체 모든 지地의 공덕을 널리 거둔다.(住於一地。 普攝一切諸地功德。)”
  143. 143)지엄, 『수현기』(K47, 4b3~9; T35, 17b8~16).
  1. 1)「文云」無有{甲}。
  2. 2)「何」下有「以」{甲}。
  3. 3)「繁」作「槃」又冠註曰槃疑繁{甲}。
  4. 4)「現」作「顯」{甲}次同。
  5. 5)「法盡」作「盡法」{甲}。
  6. 6)「下」無有{甲}。
  7. 7)「盤」作「繁」 又冠註曰繁疑槃下同{甲}次同。
  8. 8)「義」無有{甲}。
  9. 9)「故」無有{甲}。
  10. 10)「有」無有{甲}。
  11. 11)「而」無有{甲}。
  12. 12)「者」下有▣。又冠註曰▣疑入一本者印連續{甲}。
  13. 13)「數」作「安」{甲}。
  14. 14)「則」無有{甲}。
  15. 1)「後」上有「乃至」{甲}。
  16. 2)「惠」作「慧」{甲}次同。
  17. 3)「訂」通「證」於此書{編}次同。
  18. 4)「法」下有「故」{甲}。
  19. 5)「議」作「義」{甲}。
  20. 6)「決定」無有{甲}。
  21. 7)「雜」作「離」{甲}。
  22. 8)「煩惱」作「菩薩」{甲}。
  23. 9)「弟」作「第」{甲}{乙}次同。
  24. 10)「中」無有{甲}。
  25. 11)冠註曰入一作人次同{甲}。
  26. 12)「人」作「入」{甲}。
  27. 13)「挍」作「校」{乙}。
  28. 14)「種」下有「差」{甲}。
  29. 15)冠註曰相下疑脫同相異相四字{甲}。
  30. 16)「同相異相」無有{甲}。
  31. 17)「入」無有{甲}。
  32. 18)「壞」下有「故」{甲}。
  33. 19)「准」作「唯」{甲}。
  34. 20)冠註曰何下入以字見{甲}。
  35. 21)「以」無有{甲}。
  36. 22)「正」無有{甲}。
  37. 23)「以」無有{甲}。
  38. 1)「弟」作「第」{乙}次同。
  39. 1)▣字體磨滅{底}ㆍ作「本」{乙}」。
  40. 1)「弟」作「第」{乙}次同。
  41. 1)「二」作「一一」{乙}。
  42. 1)「作」作「住」{乙}。
  43. 1)「且」作「具」{乙}。
  44. 1)「弟」作「第」{乙}次同。
  45. 2)「網」作「綱」{乙}。
  46. 1)▣高麗大藏經影印本作「明」{編}。
  47. 2)「弟」作「第」{乙}次同。
  48. 3)「計」作「許」{乙}。
  49. 1)「俠」作「狹」{乙}。
  50. 2)「訂」通「證」於此書{編}次同。
  51. 1)▣字體磨滅{底}ㆍ作「故」{乙}。
  52. 1)「弟」作「第」{乙}次同。
  53. 1)「托」作「杔」{乙}。
  54. 1)「訂」通「證」於此書{編}次同。
  55. 2)脚註曰知疑智{乙}。
  56. 3)「收」作「攝」{乙}。
  57. 4)「世」作「母」{乙}。
  58. 5)「弟」作「第」{乙}次同。
  59. 6)▣字體磨滅{底}ㆍ作「左」{乙}。
  60. 7)「二」作「三」{乙}。
  61. 1)「收」作「攝」{乙}。
  62. 2)「弟」作「第」{乙}次同。
  63. 1)「蘆」作「盧」{乙}。
  64. 2)「弟」作「第」{乙}次同。
  65. 1)「撗」作「橫」{乙}。
  66. 2)「弟」作「第」{乙}。
  67. 3)「十」無有{乙}。
  68. 4)」作「攝」{乙}。
  69. 5)「須」作「順」{乙}。
  70. 1)「弟」作「第」{乙}。
  71. 2)「姝」作「殊」{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