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법계도기총수록(法界圖記叢髓錄) / 法界圖記叢髓錄卷下之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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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계도기총수록 하권 2(法界圖記叢髓錄 卷下之二)
『일승법계도』 원문 四
글에 이른다. 두 번째 이익 얻음이다. ‘다라니’라고 하는 것은 모두 지니기(總持) 때문이다. 아래의 열 개의 동전을 세는 법(數十錢法) 가운데 설하는 것과 같다. ‘실제實際’란 법성을 끝까지 다하기 때문이다. ‘중도’란 두 변邊을 원융하게 하기 때문이다. ‘자리에 앉는다(坐床)’란 일체를 섭수하기 때문이다. 법계의 열 가지 열반의 광대한 보배자리에 편안히 앉아서 일체를 섭수하므로 ‘자리에 앉는다’라고 이름한 것이다. ‘보배’란 귀하기 때문이며, ‘자리(床)’란 곧 섭수하여 지니는 뜻인 까닭이다. ‘열 가지 열반’은 아래 경의 「이세간품」에서 설한 것1)과 같다.

‘예부터 움직이지 않는다.(舊來不動)’란 예부터 부처를 이루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열 부처님이니 『화엄경』에서 설하는 것과 같다. 첫째는 무착불無着佛이니 세간에 편안히 머물러 바른 깨달음을 이루기 때문이다. 둘째는 원불願佛이니 출생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업보불業報佛이니 믿기 때문이다. 넷째는 지불持佛이니 따라주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열반불涅槃佛이니 영원히 건너갔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법계불法界佛이니 이르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일곱째는 심불心佛이니 편안히 머무르기 때문이다. 여덟째는 삼매불三昧佛이니 한량없이 집착 없기 때문이다. 아홉째는 성불性佛이니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열째는 여의불如意佛이니 두루 덮기 때문이다.
어째서 열의 수로 설하는가? 많은 부처님을 드러내고자 하는 까닭이다. 이 뜻은 모든 법의 참된 근원이며 구경의 오묘한 핵심(宗)이어서 매우 깊고 난해하니 깊이 생각해야 한다.

얽매여 있는 중생이 아직 번뇌를 끊지 못했고 아직 복덕과 지혜를 이루지 못했는데 무슨 뜻으로 예부터 부처를 이루었다고 하는가?
번뇌를 아직 끊지 못했으면 부처를 이루었다고 이름하지 않는다. 번뇌를 다 끊고 복덕과 지혜를 이루어 마쳐야, 이로부터 이후로 이름하여 ‘예부터 부처를 이루었다’라고 한다.

번뇌를 끊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십지경론』에서 설한 것2)과 같이, 처음도 아니고 중간도 나중도 아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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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29_b_02L法界圖記叢髓錄卷下之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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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29_b_04L[一乘法界圖原文四]
1)文云 [284] 得益謂陁羅尼者摠持故
006_0829_b_05L如下數十錢法中說實際者窮法性故
006_0829_b_06L中道者融二邊故2) [285] [200] 攝一切故
006_0829_b_07L3) [286] 法界十種涅槃廣大寶4) [287] 攝一
006_0829_b_08L切故名曰坐床寶者可貴故床者
006_0829_b_09L5)攝持 [288] 義故十種涅槃者如下經離世
006_0829_b_10L間品說舊來不動者舊來6) [289] 佛義故
006_0829_b_11L所謂十佛7) [290] 嚴經8) [291] 一無9) [292]
006_0829_b_12L安住世間成正覺故二願佛出生故
006_0829_b_13L三業報佛信故四持佛隨順故
006_0829_b_14L10)涅槃 [293] [201] 11) [294] 度故六法界佛無處不至
006_0829_b_15L七心佛安住故八三昧佛12) [295]
006_0829_b_16L無*着故九性佛決定故十如意佛
006_0829_b_17L普覆故何故十數說13) [296] 多佛故
006_0829_b_18L諸法之眞源究竟之玄宗甚深難解
006_0829_b_19L14) [297] 可深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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具縛有情 15) [298] 16)煩惱 [299] 未成福智
006_0829_b_21L以何義故舊來成佛17) [300] *煩惱未斷
006_0829_b_22L不名成佛 *煩惱斷盡福智成竟自此
006_0829_b_23L已去名爲舊來成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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斷惑云何如地論說非初非中後

006_0829_c_01L앞과 가운데와 뒤에서 취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끊는가? 허공과 같다. 이와 같이 끊으므로 아직 끊기 이전을 ‘끊었다’라고 이름하지 않고, 이미 끊은 이후를 ‘예부터 끊었다(舊來斷)’라고 이름한다. 마치 꿈을 깸(覺)과 꿈을 꿈(夢), 잠을 잠(睡)과 잠을 깸(悟)이 같지 않은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이룸(成)과 이루지 않음, 끊음과 끊지 않음 등을 세우지만, 그 참된 도리는 모든 법의 실상實相이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으며 본래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번뇌의 법 가운데 한 법도 줄어드는 것을 보지 못하며, 청정한 법 가운데 한 법도 늘어나는 것을 보지 못한다.”3)라고 한 것이 그 일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와 같은 등의 경문은 이법(理)에 즉함을 기준으로 하여 설한 것이고 현상(事)에 즉하여 설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만약 삼승의 방편 가르침의 문을 기준으로 하면 합당히 이 뜻이 있으나, 일승의 실다운 가르침의 문을 의거하면 그 이치를 다하지 못한다. 이법과 현상이 그윽하여 하나로서 분별이 없으며 체體와 용用이 원융하여 항상 중도에 있으니, 자기의 일 이외에 어디에서 이법을 얻겠는가?

삼승의 가르침 가운데 또한 고요하되 항상 작용하고 작용하되 항상 고요함이 있는데, 이와 같은 뜻을 무슨 까닭에 위에서 이법에 즉한 문에 치우치고 현상에 즉하지 않아서 자재롭지 않다고 말하였는가?
이법과 현상이 상즉하므로 이와 같은 뜻이 있다. 현상과 현상이 상즉함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무슨 까닭인가? 삼승의 가르침에서는 분별하는 병을 다스리고자 현상을 모아서 이법에 들어가는 것을 근본으로 하기 때문이다.

006_0829_c_01L前中後取故云何斷如虛空如是斷
006_0829_c_02L未斷已還不名爲斷 18) [301] 斷已去
006_0829_c_03L名爲舊來斷也猶如覺夢睡悟不同
006_0829_c_04L建立成不成斷不斷等其實道理諸法
006_0829_c_05L實相不增不減本來不動是故經19) [302]
006_0829_c_06L第下之二第一張 *煩惱法中不見一
006_0829_c_07L法減淸淨法中不見一法增是其事
006_0829_c_08L有人說*云如是等經文約即理說
006_0829_c_09L非即事說若約三乘方便敎門合有
006_0829_c_10L此義若依一乘如實敎門不盡其理
006_0829_c_11L理事㝠 [202] 一無分別體用圓融常在
006_0829_c_12L中道自事以外何處得理

006_0829_c_13L
三乘敎中亦有寂而常用用而常寂
006_0829_c_14L如是等義何故上*云 20) [303] [203] 即理門
006_0829_c_15L即事中不自在耶理事相即故有如
006_0829_c_16L是義非謂事事相即何以故三乘敎
006_0829_c_17L欲治分別病會事入理爲宗故
006_0829_c_18L「文云二」作「二明」{甲}「坐」作「床」{甲}
006_0829_c_19L「坐」作「在」{甲}
「床」作「牀」{甲}「攝持」作
006_0829_c_20L「即攝攝」{甲}
「成」無有{甲}「花」作「華」{甲}
006_0829_c_21L
「說」無有{甲}「着」作「著」{甲}次同「涅槃」
006_0829_c_22L作「化」{甲}
冠註曰永一作求{甲}冠註曰量一
006_0829_c_23L作碍{甲}
「現」作「顯」{甲}次同「且」作「宜」
006_0829_c_24L{甲}
「未」作「永」又冠註曰永疑未{甲}「煩
006_0829_c_25L惱」作「菩薩」又冠註曰菩薩疑煩惱下同{甲}次
006_0829_c_26L
「耶」作「也」{甲}「旣」作「現」{甲}「云」
006_0829_c_27L作「言」{甲}次同
「徧」作「偏」{甲}ㆍ作「遍」{乙}

006_0830_a_01L만약 별교일승에 의하면 이법과 이법의 상즉 또한 가능하고, 현상과 현상의 상즉 또한 가능하며, 이법과 현상의 상즉 또한 가능하며, 각각 상즉하지 않음도 또한 가능하다. 무슨 까닭인가? 중中과 즉卽이 같지 않기 때문이며, 또한 이법의 인다라니因陀羅尼와 현상의 인다라니 등의 법문을 구족함이 있기 때문이다. 열 부처님과 보현(보살)의 법계의 집 가운데 이 같은 등의 걸림 없는 법계의 법문이 있어서 매우 자재하기 때문이다. 그 나머지 거스름(逆)과 따름(順), 주主와 반伴의 서로 이루는 등의 법문은, 예에 준하여 서로 거두면 뜻에 따라 풀이할 수 있다.

만약 연기의 실상인 다라니법을 관觀하고자 한다면, 먼저 열 개의 동전을 세는 법(數十錢法)을 배워야 한다. 이른바 한 동전(一錢) 내지 열 동전(十錢)이다. 열(十)을 말한 까닭은 한량없음을 나타내고자 하는 까닭이다. 이 가운데 둘이 있다. 첫째는 하나 가운데 열이고 열 가운데 하나이다. 둘째는 하나가 곧 열이고 열이 곧 하나이다.

첫째 문 가운데 둘이 있으니, 첫 번째는 위로 향하여 오고(向上來) 두 번째는 아래로 향하여 간다(向下去). 위로 향하여 온다고 말한 가운데 열 문이 있어 같지 않다. 첫째는 하나이다. 무슨 까닭인가? 연緣으로 이루어지는 까닭이니 곧 근본수이다. 내지 열째는 하나 가운데 열이다. 무슨 까닭인가? 만약 하나가 없으면 열은 곧 이루어지지 않으며 또한 열은 하나가 아닌 까닭이다. 나머지 문 또한 이와 같으니 예에 준하면 알 수 있다.

아래로 향하여 간다고 말한 가운데 또한 열 문이 있다. 첫째는 열이다. 무슨 까닭인가? 연緣으로 이루어지는 까닭이다. 내지 열째는 열 가운데 하나이다. 무슨 까닭인가? 만약 열이 없으면 하나는 곧 이루어지지 않으며 또한 하나는 열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머지 또한 이와 같다. 이와 같이 오가며 견주어 맞추어 보면 곧 낱낱의 동전 가운데 열 문이 갖추어졌음을 안 것이다. 근본과 지말의 두 동전 가운데 열 문이 갖추어진 것처럼, 나머지 여덟 동전 가운데도 예에 준하면 알 수 있다.

이미 하나라고 말했다면 어떻게 하나 가운데 열이라고 이름할 수 있는가?
대연기의 다라니법에는 만약 하나가 없으면 일체가 곧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이와 같이 그 모습이 어떠한지 알아야 한다.

006_0830_a_01L依別敎一乘理理相即亦得事事相即
006_0830_a_02L亦得理事相即亦得各各不相即亦
006_0830_a_03L1) [304] 何以故中即不同故亦有具足理
006_0830_a_04L因陁羅 [204] 及事因2) [305] 等法門故十佛普
006_0830_a_05L賢法界宅中有如是等無障㝵法界法
006_0830_a_06L極自在故其餘逆順主3) [306] 相成等
006_0830_a_07L法門准例相攝隨義消息若欲觀緣
006_0830_a_08L起實相陁羅尼法者先應4) [307] 數十錢法
006_0830_a_09L所謂一錢乃至十錢所以說十者
006_0830_a_10L*現無量故此中有二一者一5) [308] 十十
006_0830_a_11L中一二者一即十十即一初門中有二
006_0830_a_12L一者向上來二者向下去言向上來中
006_0830_a_13L有十門不同一者一何以故緣成故
006_0830_a_14L即是本數乃至十者一中十何以故
006_0830_a_15L若無一十即不成仍十非6) [309] 餘門亦
006_0830_a_16L如是第下之二第二張 准例可知言向
006_0830_a_17L下去中亦有十門一者十何以故
006_0830_a_18L成故乃至十者十中一何以故若無
006_0830_a_19L一即不成仍一非十故餘亦如是
006_0830_a_20L7)如是往反 [310] 勘當即知一一錢中具足
006_0830_a_21L十門如本末兩錢中具足十門餘八
006_0830_a_22L錢中准例可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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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311] 言一者何得一中名爲十9) [312]
006_0830_a_24L大緣起陁羅尼法若無一一切即不成

006_0830_b_01L말한 바 하나란 자성으로서의 하나가 아니라 연緣으로 이루어지는 까닭에 하나이며, 내지 열이란 자성으로서의 열이 아니라 연緣으로 이루어지는 까닭에 열이다. 일체의 연緣으로 생겨나는 법은 한 법도 결정코 자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없다. 자성이 없기 때문에 곧 자재하지 않다. 자재하지 않다란 곧 생겨나되 생겨나지 않고 생겨나지 않되 생겨남이다. 생겨나지 않되 생겨남이란 곧 머무르지 않음의 뜻이다. 머무르지 않음의 뜻이란 곧 중도의 뜻이다. 중도의 뜻이란 곧 생겨남과 생겨나지 않음에 통한다. 그러므로 용수龍樹가 이르기를, “인연으로 생겨난 법을 나는 곧 공이라고 설하며, 또한 가명假名이라고 설하며, 또한 곧 중도의 뜻이라고 한다.”4)라고 하니, 곧 그 뜻이다. 중도의 뜻이란 무분별의 뜻이다. 무분별의 법은 자성을 고수하지 않기 때문에 연緣을 따라 다함이 없으며 또한 머무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라. 하나 가운데 열과 열 가운데 하나는 서로 용납하여 걸림 없으나 또한 상즉(相是)은 아니다. 이미 하나의 문 가운데 열 문을 갖추므로 하나의 문 가운데 다함없는 뜻이 있음을 분명하게 안다. 하나의 문과 같이 나머지 또한 이와 같다.

하나의 문 가운데 열을 포섭하여 다하는가, 다하지 않는가?
다하기도 하고 다하지 않기도 하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다함을 구하면(須) 곧 다하고, 다하지 않음을 구하면 곧 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뜻은 무엇인가? 하나의 일(一事)로써 하나의 많음을 변별하는 까닭에 곧 다하고, 다른 일(異事)로써 하나의 많음을 변별하는 까닭에 곧 다하지 않는다. 또 하나의 일 가운데 하나와 많음의 뜻은 상즉(相是)하지 않으니 곧 많음이고, 하나의 일인 까닭에 곧 하나이다. 네 구절로 잘못을 막고 틀림을 제거하여 덕을 나타내니,5) 이것에 준하면 이해할 수 있다. 다른 일 또한 준하여 같다.

‘구함(須)’이란 무슨 뜻인가?
‘구함’이란 연緣으로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무슨 까닭인가? 인연법은 하나로서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다르고 다른 모든 현상(事)의 부문 가운데도 예에 준하면 이와 같다. 연기의 오묘한 이법(理)은 마땅히 이와 같이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첫째 문을 마친다.

006_0830_b_01L10) [313] 定知如是其相如11) [314] 所言一者
006_0830_b_02L非自性一緣成故一乃至十者非自
006_0830_b_03L性十緣成故十一切緣生法無有
006_0830_b_04L一法定12)有自 [315] 無自性故即不自在
006_0830_b_05L13)不自在 [316] 即生14)不生 [317] 不生生不生生
006_0830_b_06L即是不住義不住義者即是中道
006_0830_b_07L15) [318] 16) [319] 義者即通生不生故龍樹
006_0830_b_08L因緣所生法我說即是空亦說17)
006_0830_b_09L假名 18) [320] 是中道義即其義也19) [321]
006_0830_b_10L是無分別義無分別法不守自性
006_0830_b_11L隨緣無盡亦是不住是故當知
006_0830_b_12L中十十中一相容無㝵仍不相是 [205]
006_0830_b_13L一門中具足十門故20) [322] 一門中有
006_0830_b_14L無盡義如一門餘亦如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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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門中攝十盡不21) [323] 盡不盡
006_0830_b_16L以者何須盡即盡須不盡即不盡故
006_0830_b_17L義云何以一事辨一多故即盡以異事
006_0830_b_18L辨一多故即不盡22) [324] 一事中一多義不
006_0830_b_19L相是即是多一事故 23) [325] 是一四句護
006_0830_b_20L24) [326] 25) [327] 准之可解異事亦准同
006_0830_b_21L須者 [206] 何義第下之二第三張須者
006_0830_b_22L緣成義何以故因緣法一不差26) [328]
006_0830_b_23L別諸事門中准例如是緣起妙理
006_0830_b_24L27) [329] 知故 28) [330] 一門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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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문은 이 가운데 두 가지 문이 (있다.) 첫 번째는 위로 향하여 가고(向上去), 두 번째는 아래로 향하여 온다(向下來). 첫 번째 문 가운데 열 문이 같지 않다. 첫째는 하나이다. 무슨 까닭인가? 연緣으로 이루어지는 까닭이다. 내지 열째는 하나가 곧 열이다. 무슨 까닭인가? 만약 하나가 없으면 열은 곧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며, 연緣으로 이루어지는 까닭이다.
두 번째 문 가운데도 또한 열 문이 있다. 첫째는 열이다. 무슨 까닭인가? 연緣으로 이루어지는 까닭이다. 내지 열째는 열이 곧 하나이다. 만약 열이 없으면 하나가 곧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예에 준한다. 이 뜻으로 인한 까닭에 마땅히 알아라. 하나하나의 동전 가운데 열 문을 갖춘다.

위와 같은 많은 문이 일시에 함께 원만한가, 앞과 뒤가 같지 않은가?
곧 원만하기도 하고 곧 앞과 뒤가 같지 않기도 하다. 무슨 까닭에 이와 같은가? 원만함을 구하면 곧 원만하고 앞과 뒤를 구하면 곧 앞과 뒤이다. 무슨 까닭인가? 법성의 집 안에 덕용德用이 자재하여 걸림이 없기 때문이니 연緣으로 이루어지는 까닭에 모두 이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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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弟二門此中二門一者向上29) [331] 二者
006_0830_c_02L向下來初門中十門不同一者一
006_0830_c_03L以故緣成故乃至十者一即十何以
006_0830_c_04L若無一十即不成故緣成故第二
006_0830_c_05L門中亦有十門一者十何以故緣成
006_0830_c_06L乃至十者十即一若無十一即不
006_0830_c_07L成故餘者准例以此義故當知一一
006_0830_c_08L錢中具足十門

006_0830_c_09L
如上多門一時俱圓耶前後不同耶
006_0830_c_10L即圓即前後不同何故如是須圓即
006_0830_c_11L須前後即前後何以故法性家內
006_0830_c_12L德用自在無障 [207] 㝵故由緣成故皆得
006_0830_c_13L如是

006_0830_c_14L「得」下有「相即」{甲}「陁」下有「羅尼」{甲}
006_0830_c_15L
「伴」作「半」{甲}「學」作「覺」{甲}「中」作
006_0830_c_16L「即」又冠註曰即疑中{甲}
「一」下有「故」{甲}
006_0830_c_17L
「如是往反」作「生變如是」{甲}「旣」作「現」
006_0830_c_18L{甲}
「耶」作「也」{甲}「故」無有{甲}「何」
006_0830_c_19L無有{甲}
「有自」作「相有」{甲}「不自在」無有
006_0830_c_20L{甲}
「不生」無有{甲}「義中」無有{甲}冠註
006_0830_c_21L曰道上疑脫中字{甲}
「是」上有「爲」 又冠註
006_0830_c_22L曰是字疑剩{甲}
「復」作「亦」{甲}「道」下有
006_0830_c_23L「義」{甲}
「知」作「中智」{甲}「盡」無有{甲}
006_0830_c_24L「又」作「文」 又冠註曰文疑又{甲}
「即」下有
006_0830_c_25L「多」{甲}
「去」作「失」{甲}「現」作「離」又冠
006_0830_c_26L註曰離疑顯{甲}
「失」作「故」{甲}「是」下有
006_0830_c_27L「可」{甲}
「弟」作「第」{甲}{乙}次同「去」下有
006_0830_c_28L「之」 又冠註曰一無之字{甲}

006_0831_a_01L
위에서 설한 바와 같은 오고 감의 뜻은 그 모양이 어떠한가?
자기 자리를 움직이지 아니하되 항상 오고 간다. 무슨 까닭인가? ‘오고 감’이란 연緣을 따르는 뜻이니 곧 인연의 뜻이다. ‘움직이지 않음’이란 근본을 향하는 뜻이니 곧 연기의 뜻이다.

인연과 연기는 어떻게 다른가?
다르기도 하고 같기도 하다. 이른바 다르다는 뜻은, 인연은 속제俗諦의 차별을 따른다. 곧 인因과 연緣이 서로 바라보아 자성이 없는 뜻을 나타내니, 바로 속제의 체體이다. 연기는 성품의 분별없음을 따른다. 곧 상즉하고 상융하여 평등의 뜻을 나타내니, 바로 제일의제第一義諦의 체體를 따른다. 속제는 자성이 없기 때문에 제일의제를 따른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세제世諦를 따라 관觀하여 곧 제일의제에 들어간다.”6)라고 하니, 곧 그 뜻이다. 다른 뜻은 이와 같다. 같은 뜻은 앞의 용수보살의 해석7)과 같다. 낱낱의 동전에 나아가 동시에 구족함(同時具足) 등의 열 가지 문에 의해서 돌려보면, 그것에 준하여 이해할 수 있다. 열 가지 문은 아래에 설하는 것과 같다.8)

동전 가운데 첫 번째 내지 열 번째가 같지 않으나 상즉하고 상입하여 걸림 없이 서로 이루어지는 것과 같이, 비록 원인(因)과 결과(果), 이법(理)과 현상(事), 사람(人)과 법法, 앎(解)과 행行, 가르침(敎)과 뜻(義), 주主와 반伴 등의 여러 많은 문이 다르나 한 문에 의탁함을 따라 일체를 다 포섭한다. 나머지 뜻도 이에 준한다.
위에서의 동전을 세는 법이란 우선 변계遍計인 현상(事)의 동전에 의지하여 의타依他인 인연과 연기의 동전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또한 가리킴에 의지하여 보일 수는 있지만 연으로 생겨난 일체 모든 법은 끝내 얻을 수 없다. 변계의 사물에 집착하여 연기의 법에 미혹하면 법을 나타내어 머무름이 전혀 다르다.

경에 이르기를, “처음 발심한 보살의 일념一念 공덕이 다할 수 없다.”9)라고 한 것이 첫째 동전과 같다. 무슨 까닭인가? 하나의 문을 기준으로 하여 다함없음을 나타내는 까닭이다. “어찌 하물며 한량없고 가없는 모든 지地의 공덕이겠는가?”10)라고 한 것은 둘째 동전 이후와 같다.

006_0831_a_01L
如上所說來去義其相云何自位
006_0831_a_02L不動而恒來去何以故來去者隨緣
006_0831_a_03L即是因緣義不動者向本義即是
006_0831_a_04L緣起義

006_0831_a_05L
1) [332] 因緣2) [333] 緣起何別亦別亦同
006_0831_a_06L謂別義者因緣者3) [334] 4) [335] 即是因
006_0831_a_07L緣相望 *現無自性義正俗諦體也
006_0831_a_08L起者5) [336] 性無分別即是相即相融 *現
006_0831_a_09L平等義正*順第一義體也俗諦無自
006_0831_a_10L性故6) [337] 一義是故經云隨順觀世
006_0831_a_11L即入*弟一義諦7) [338] 8) [339] 別義
006_0831_a_12L如是同義如前龍樹釋就一一錢中
006_0831_a_13L依同時具足等9) [340] 以廻轉者准之
006_0831_a_14L可解十門10) [341] 第下之二第四張
006_0831_a_15L錢中*弟一乃至*弟十不同而相即相
006_0831_a_16L無㝵相11) [342] 雖因果理事人法解行敎
006_0831_a_17L義主伴等衆多門別而隨12) [343] 一門
006_0831_a_18L攝一切餘義准之上來數錢法者
006_0831_a_19L依遍計事錢 *現示依他因緣緣起錢也
006_0831_a_20L亦可依指示13) [344] 生一切諸法終不可得
006_0831_a_21L執遍計物迷緣起法 *現法逗留全別
006_0831_a_22L經云初發心菩薩一念功德不可盡者
006_0831_a_23L如*弟一錢何以故約一門*現無盡故
006_0831_a_24L何況無量無邊諸地功德者如*弟二錢

006_0831_b_01L무슨 까닭인가? 다른 문을 기준으로 하여 설한 까닭이다. “처음 발심할 때에 문득 바른 깨달음을 이룬다.”11)라고 한 것은, 하나의 동전이 곧 열 (동전)인 것과 같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인가? 수행의 체體를 기준으로 하여 설한 까닭이다.

‘처음 발심한 보살’이란 믿음의 지위(信地)의 보살이니 곧 제자의 지위이다. ‘바른 깨달음을 이룬다’란 부처님의 지위이니, 곧 대사大師의 지위이다. 높고 낮음이 같지 않고 지위가 전혀 다르다. 무엇 때문에 같은 곳에 머리와 다리를 나란히 두는가?
삼승의 방편법과 원교일승의 법은 법의 작용과 머무름이 각각 달라서 섞어 쓸 수 없다. 그 뜻이 어떠한가? 삼승의 법은 머리와 다리가 각각 다르고 아버지와 아들의 나이(年月)가 같지 않다. 무엇 때문에 이와 같은가? 모양을 기준으로 하여 설하기 때문이고, 믿는 마음을 내게 하려는 까닭이다. 원교일승의 법은 머리와 다리가 모두 하나이며, 아버지와 아들의 나이가 모두 같다. 무슨 까닭인가? 연緣으로 이루어짐을 말미암은 까닭이고 도리를 기준으로 하여 설한 까닭이다.

‘하나(一)’란 무슨 뜻인가?
‘하나’란 하나로서 분별이 없다는 뜻이다.
또,
‘같다(同)’란 무슨 뜻인가?
‘같다’란 머무르지 않는다는 뜻이다. 분별이 없고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 처음과 끝이 같은 곳이며 스승과 제자가 머리를 나란히 한다.
‘같은 곳에 머리를 나란히 한다’란 무슨 뜻인가?
‘같은 곳에 머리를 나란히 한다’란 서로 알지 못하는 뜻이다. 왜냐면 분별이 없기 때문이다.

또,
‘분별이 없다’란 무슨 뜻인가?
‘분별이 없다’란 연緣으로 생겨난다는 뜻이다. 곧 처음과 마지막 등이 둘이 없고 다름이 없다. 무엇 때문에 이와 같은가? 일체 연緣으로 생겨나는 법은 짓는 자도 없으며 이루는 자도 없으며 아는 자도 없다. 고요함과 작용함이 한 모양이며 높음과 낮음이 한 맛이니 마치 허공과 같다. 모든 법이 으레 그러하여 예부터 이와 같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일체법이 생겨남도 없으며 없어짐도 없으나 인연으로 있음을 관한다.”12)라고 한, 이와 같은 등의 문장이 그 뜻이다.

006_0831_b_01L已去何以故約異門說故初發心時
006_0831_b_02L便成正覺者如一錢即十故何以故
006_0831_b_03L約行體說故

006_0831_b_04L
初發心菩薩者信地菩薩即是弟子
006_0831_b_05L成正覺者佛地即是大師位高下
006_0831_b_06L不同位地14) [345] 15) [346] 故同處並頭脚耶
006_0831_b_07L三乘方便法 16) [347] [208] 圓敎一乘法法用
006_0831_b_08L逗留各別不得雜用 17) [348] 義云何三乘
006_0831_b_09L18) [349] 頭脚各別 19)阿耶 [350] 兒子年月不同
006_0831_b_10L何故如是約相說故生信心故圓敎
006_0831_b_11L一乘法者頭脚摠一阿耶兒子年月皆
006_0831_b_12L20) [351] 何以故由緣成故約道理說故

006_0831_b_13L
一者何義一者一無分別義又問
006_0831_b_14L同者何義同者 [209] 不住義無分別不住
006_0831_b_15L始終同處21) [352] 並頭

006_0831_b_16L
同處並頭者何義同處並頭者
006_0831_b_17L相知義何以故無分別故又問無分
006_0831_b_18L別者何義無分別者第下之二第五張
006_0831_b_19L緣生義即是始終等是無二22) [353]
006_0831_b_20L故如是一切緣生法無有作者無有成
006_0831_b_21L無有知者寂用一相高下一味
006_0831_b_22L如虛空諸法法尒舊來如是是故經
006_0831_b_23L觀一切法 23) [354] 生*不滅因緣而有
006_0831_b_24L如是等文 24) [355] 其義也

006_0831_c_01L
믿음의 지위의 보살 내지 부처님이 같은 곳에 머리를 나란히 두는 것을 알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 아래의 경에 이르기를, “처음 발심할 때 문득 바른 깨달음을 이룬다.”13)라고 함과 같으며, 또한 『십지경론』에서 해석하기를 ‘믿음의 지위의 보살 내지 부처님이 육상으로 이루어진 까닭이다’14)라고 함과 같으니, 이와 같은 뜻이 있음을 분명하게 안다. 육상은 위와 같으니, 이 말은 법성의 집에 들어가고자 하는 중요한 문이며 다라니의 곳집(藏)을 여는 좋은 열쇠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밝힌 것은 오직 일승다라니의 대연기법을 나타내 보인 것이며, 또한 일승의 걸림 없는 변재辯才의 체體를 논한 것이니 삼승의 분제分際는 아니다.
초교初敎 이후는 일체 모든 법이 곧 공空하고 곧 여여(如)하여 하나로서 분별이 없으니, 무슨 까닭에 위에서 머리와 다리가 각각 다르다고 말했는가?
이 뜻이 없지 않으나 아직 원만하지 않은 까닭에 아래로부터 말한 것이다.

삼승으로부터 이외에 따로 원교일승의 분제가 있음을 알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 아래 경에서 이르기를, “일체 세계의 많은 중생(群生)들의 무리가,

006_0831_c_01L
所以得知信位菩薩乃至佛同處並
006_0831_c_02L如下經云初發心時便成正覺
006_0831_c_03L如地論釋信地菩薩乃至佛六相成
006_0831_c_04L明知有如是義六相如上此語
006_0831_c_05L入法性家要門開陁羅尼藏好25)鑰匙 [356]
006_0831_c_06L上來所明者唯*現示一乘陁羅尼
006_0831_c_07L大緣起法亦可論一乘無㝵辯26) [357]
006_0831_c_08L非三乘分齊

006_0831_c_09L
初敎已去一切諸法即空即如
006_0831_c_10L無分別何故上言頭脚各別耶非無
006_0831_c_11L此義27) [358] 從下爲言

006_0831_c_12L
所以得知自三乘以外別有圓敎一
006_0831_c_13L乘分齊如下經28) [359] 一切世界群生類
006_0831_c_14L「問」作「間」{乙}「與」作「焉」{乙}「隨」下
006_0831_c_15L有「隨」 又冠註曰隨一作相{甲}
「差」作「義」
006_0831_c_16L{甲}
「順」作「隨」{甲}次同「弟」作「第」{甲}次
006_0831_c_17L
冠註曰其下疑脫義字{甲}「義」無有{甲}
006_0831_c_18L
「十」作「一」{甲}「下」作「上」{甲}「成」
006_0831_c_19L無有{甲}
「托」作「說」{甲}「緣」作「顯」{甲}次
006_0831_c_20L
「全」作「今一」又冠註曰今一一作亦{甲}
006_0831_c_21L
「何」下有「以」{甲}「與」作「焉」{乙}「其」
006_0831_c_22L下有「其」又冠註曰其字疑剩{甲}
「者」無有
006_0831_c_23L{甲}
「阿耶」作「何耶」 又冠註曰何耶疑阿爺
006_0831_c_24L{甲}
「同」下有「總」又冠註曰總字疑剩{甲}
006_0831_c_25L
「弟」下有「子」{甲}「無」無有{甲}「不」作
006_0831_c_26L「無」{甲}次同
「是」作「即」{甲}「鑰匙」作「
006_0831_c_27L」{甲}
「才」作「大」{甲}「圓」作「滿」{甲}
006_0831_c_28L「云」作「言」{甲}

006_0832_a_01L성문의 길을 구하고자 하는 자 적고, 연각을 구하는 자는 더욱 적으며, 대승을 구하는 자는 매우 드물다. 대승을 구하는 것은 오히려 쉬우나, 이 법을 믿을 수 있는 것이 매우 어렵다.”15)라고 하고, “만약 중생이 하열하여 그 마음에 싫어하는 자이면 성문도로써 보여 뭇 고통에서 벗어나게 한다. 만약 다시 어떤 중생이 모든 근기가 조금 밝고 예리하여 인연법을 좋아하면 (그를) 위하여 벽지불을 설한다. 만약 어떤 이가 근기가 밝고 예리하여 큰 자비심이 있어서 중생을 이롭게 한다면 (그를) 위하여 보살도를 설한다. 만약 위없는 마음이 있어서 결정코 큰 일을 좋아하면 (그를) 위하여 부처님 몸을 보여서 다함없는 부처님의 법을 설한다.”16)라고 한 것과 같다. 성스러운 말씀이 손바닥의 밝은 구슬과 같으니 놀라고 의심할 필요가 없다.

일승과 삼승의 분제가 다른 뜻을 무엇으로 인하여 알 수 있는가?
우선 열 가지 문에 의거하면 곧 안다.
첫째, 동시에 구족하여 상응하는 문(同時具足相應門)이다. 그 가운데 열 가지 문이 있다. 이른바 사람과 법, 이법과 현상, 가르침과 뜻, 앎과 행, 원인과 결과이다. 이들 열 가지 문17)이 상응하여 앞과 뒤가 없다. 둘째, 인드라그물의 경계인 문(因陀羅網境界門)이다. 이 가운데 앞의 열 가지 문을 갖추었으나 다만 뜻이 비유를 따라서 다를 뿐이다. 나머지도 이에 준할 수 있다. 셋째, 비밀스럽게 숨은 것과 나타난 것이 함께 이루는 문(袐密隱顯俱成門)이다. 이 또한 앞의 열 가지 문을 갖추었으나 다만 뜻이 연緣을 따라 다를 뿐이다.

넷째, 미세한 것도 서로 용납하여 안립하는 문(微細相容安立門)이다. 이 또한 앞의 열 가지 문을 갖추었으나 다만 뜻이 모양을 따라 다를 뿐이다. 다섯째, 십세十世가 법과 나뉘어 달리 이루는 문(十世隔法異成門)이다. 이 또한 앞의 열 가지 문을 갖추었으나 다만 뜻이 때(世)를 따라 다를 뿐이다. 여섯째, 순수하고 잡박한 것을 모두 갈무리하여 덕을 갖춘 문(諸藏純雜具德門)이다. 이 또한 앞의 열 가지 문을 갖추었으나 다만 뜻이 문門을 따라 다를 뿐이다. 일곱째, 하나와 많음이 서로 용납하나 같지 않은 문(一多相容不同門)이다. 이 또한 앞의 열 가지 문을 갖추었으나 다만 뜻이 이理를 따라 다를 뿐이다.

여덟째, 모든 법이 상즉하여 자재하는 문(諸法相卽自在門)이다. 이 또한 앞의 열 가지 문을 갖추었으나 다만 뜻이 작용(用)을 따라 다를 뿐이며, 또한 성품을 의지하는 것이기도 하다.

006_0832_a_01L尠有欲求聲聞道求緣覺者轉復少
006_0832_a_02L大乘者甚1) [360] [210] 求大乘者猶爲易
006_0832_a_03L信是法甚爲難若衆生下劣其心猒
006_0832_a_04L沒者示以聲聞道令出於衆苦若復
006_0832_a_05L有衆生諸根小明利樂於因緣法
006_0832_a_06L說辟支佛2) [361] 根明利有大慈悲心
006_0832_a_07L3) [362] [211] 益於衆生爲說菩薩道若有無上
006_0832_a_08L決定樂大事爲示於佛身說無盡
006_0832_a_09L佛法聖言如4) [363] 明珠不須驚怪 [212] 第下
006_0832_a_10L之二第六張

006_0832_a_11L
一乘三乘分齊別義因何得知
006_0832_a_12L依十門即知也5) [364] [213] 具足相應門
006_0832_a_13L中有十6) [365] 謂人法理事敎義解行因
006_0832_a_14L此等十門相應無有前後二因陁
006_0832_a_15L羅網境界門此中具前十門 7) [366] 義從
006_0832_a_16L喩異耳餘可准之三秘密隱*現俱成
006_0832_a_17L此亦具前十門 *但義從緣異耳
006_0832_a_18L微細相容安立門此亦具前十門 *但
006_0832_a_19L8) [367] 相異耳五十世隔法異成門
006_0832_a_20L亦具前十門 *但義從世異耳六諸藏
006_0832_a_21L純雜具德門此亦具前十門 *但義從
006_0832_a_22L9) [368] 異耳七一多相容不同門此亦具
006_0832_a_23L前十門 *但義從理異耳八諸法相即
006_0832_a_24L自在門此亦具前十門*但義從用異

006_0832_b_01L아홉째, 오직 마음이 회전하여 잘 이루는 문(唯心廻轉善成門)이다. 이 또한 앞의 열 가지 문을 갖추었으나 다만 뜻이 마음(心)을 따라 다를 뿐이다. 열째, 현상(事)에 의탁해서 법을 나타내어 이해를 내는 문(托事顯法生解門)이다. 이 또한 앞의 열 가지 문을 갖추었으나 다만 뜻이 지혜(智)를 따라 다를 뿐이다. 나머지는 이에 준할 수 있다.

위의 열 가지 현묘한 문은 아울러 다 다르다. 만약 가르침과 뜻의 분제가 이것과 상응한다면 곧 일승원교와 돈교頓敎에 거두어진다. 만약 모든 가르침과 뜻의 분제가 이와 상응하되 구족하지 못하면 곧 삼승의 점교漸敎에 거두어진다. 이와 같이 안다. 이와 같은 열 가지 문이 구족하여 원만한 것은 『화엄경』의 설과 같다. 나머지 넓은 뜻은 경經과 논論과 소疏와 초抄와 『공목孔目』과 『문답問答』 등에서 분별한 것과 같다.

일승법계도의 시詩와 하나의 도인圖印을 합한 것은 『화엄경』과 『십지론』에 의거하여 원교의 핵심(宗要)을 나타낸 것이다. 총장總章 원년元年18) 7월 15일에 기록하다.

무슨 까닭에 지은 사람(集者)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가?
연緣으로 생겨나는 모든 법은 주인이 없음을 나타내는 까닭이다.
또,
무슨 까닭에 해와 달(年月)의 이름이 있는가?
일체 법이 연緣에 의거하여 생겨남을 보이는 까닭이다.
또,
연緣은 어느 곳으로부터 오는가?
전도顚倒된 마음 가운데로부터 온다.

전도된 마음은 어느 곳으로부터 오는가?
비롯함이 없는 무명으로부터 온다.
비롯함이 없는 무명은 어느 곳으로부터 오는가?
여여如如로부터 온다.
여여는 어느 곳에 있는가?
여여는 자기의 법성法性에 있다.
자기의 법성은 무엇으로 모양을 삼는가?
분별이 없음으로써 모양을 삼는다. 그러므로 일체의 법은 보통 중도에 있으니 무분별 아님이 없다. 이 뜻인 까닭에 글 첫머리의 시詩에서 “법성은 원융하여 두 모양 없고,”19) 내지 “예부터 움직이지 아니함을 이름하여 부처라 한다.”20)라고 하였으니 뜻이 여기에 있다.
시詩에 의지한 까닭은 헛됨(虛)에 즉하여 참됨(實)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006_0832_b_01L亦可依性10) [369] 心廻轉善成門
006_0832_b_02L亦具前十門*但義從心異耳11) [370]
006_0832_b_03L*現法生解門此亦具12) [371] 13)十門* [372] 但義
006_0832_b_04L從智異耳餘可准之上十14)門玄 [373] [214] 並皆
006_0832_b_05L別異若敎義分齊 15) [374] 此相應者即是
006_0832_b_06L一乘圓敎及頓敎攝若諸敎義分16) [375]
006_0832_b_07L與此相應而不具足者即是三乘漸敎
006_0832_b_08L17) [376] 如是知也如是十門具足圓者
006_0832_b_09L18) [377] 嚴經說餘廣義者如經論䟽抄孔
006_0832_b_10L目問答等分別也

006_0832_b_11L
一乘法界圖合詩一印依*花嚴經及
006_0832_b_12L十地論表圓敎宗要總章元年七月十
006_0832_b_13L五日記

006_0832_b_14L
何故不19) [378] [215] 集者名字第下之二第七
006_0832_b_15L
表緣生諸法無有主者故又問
006_0832_b_16L何故20) [379] 年月名示一21) [380] 法依緣生
006_0832_b_17L又問緣從何處來從顚倒心中來
006_0832_b_18L顚倒心從何處來從無始無明來無始
006_0832_b_19L無明從何處來從如如來如如在何處
006_0832_b_20L如如在自法性 22) [381] 法性以何爲相
006_0832_b_21L無分別爲相是故一切23) [382] 尋常在中
006_0832_b_22L無非無分別以此義故文首詩24) [383]
006_0832_b_23L法性圓融無二相乃至舊來不動名爲
006_0832_b_24L意在於此所以依詩即虛 [216] *現實故

006_0832_c_01L
서원한다. 일승의 보법의 이름과 뜻을 보고 듣고 닦아 모아서 이 선근으로 일체중생에게 돌려 베푸니, 널리 훈습하고 널리 닦아서 온 중생계가 일시에 성불하여지이다.21)
주석
석문釋文 3 (別解印相 중 釋文意 : 〔4〕 得益)
1. 십불十佛
‘이른바 열 부처님’부터 ‘매우 깊고 난해하니’까지22)

대기
『대기』에 이른다. ‘이른바 열 부처님’이란 만약 ‘부처님(佛)’ 자의 도장으로 도장 찍으면 증분의 열 부처님이고, 만약 ‘보普’ 자의 도장으로 도장 찍으면 교분의 열 부처님이다.

법융기
『법기』에 이른다. ‘첫째는 무착불無着佛이니 세간에 편안히 머물러 바른 깨달음을 이루기 때문이다’란 (다음과 같다.) 집착 없음이 곧 집착이며 집착하되 집착이 없음이다. ‘세간에 편안히 머무름’이란 삼승에서는 세간을 벗어나 부처님을 이루기 때문에 편안히 머무름이 아니며, 일승에서는 삼세간으로 자기의 몸과 마음을 삼기 때문에 ‘세간에 편안히 머무름’이라고 하는 것이다. 깨달은 마음으로 보면 다만 마음일 뿐이니 상대하는 바 경계가 집착할 것임이 없으니 분별하는 의식이 별도의 대상을 취하여 집착하는 것과는 같지 않다.

006_0832_c_01L誓願見聞修集一乘普法名字及義
006_0832_c_02L斯善根廻施一切衆生25) [384] 26) [385]
006_0832_c_03L衆生界一時成27) [386]

006_0832_c_04L[註釋]
所謂十佛至甚深難解大記云所謂
006_0832_c_05L十佛者若以佛字印印之則訂分十
006_0832_c_06L若以普字印印之則是敎分十
006_0832_c_07L佛也

006_0832_c_08L
法記云一無28) [387] 佛安住世間成正
006_0832_c_09L覺故者無*着即*着*着而無*着也
006_0832_c_10L安住世間者三乘中出世成佛故非
006_0832_c_11L安住一乘中以三世間爲自身心
006_0832_c_12L故云安住世間也以訂心看只是心
006_0832_c_13L無所對境是爲*着也非如分
006_0832_c_14L」作「希」{甲}ㆍ作「又布」{乙}「人」作「有」
006_0832_c_15L{甲}
「饒」作「余」又冠註曰全疑樂{甲}「掌」
006_0832_c_16L作「常」又冠註曰常一作掌{甲}
「同」下有「時」
006_0832_c_17L{甲}
「門所」作「相」{甲}「但」作「俱」{甲}次同
006_0832_c_18L
「從」下有「緣」{甲}「門」作「事」{甲}「唯」作
006_0832_c_19L「隨」{甲}
「托」作「託」{甲}冠註曰前下疑脫
006_0832_c_20L二字{甲}
「十門」無有{甲}「門玄」作「玄門」
006_0832_c_21L{甲}
「與」作「焉」{甲}「齊」無有{甲}「攝」無
006_0832_c_22L有{甲}
「花」作「華」{甲}次同「着」作「看」又
006_0832_c_23L冠註曰看一作著{甲}ㆍ作「著」{乙}
「存」作「在」
006_0832_c_24L{甲}
「切」下有「諸」{甲}「自」無有{甲}「法」
006_0832_c_25L無有{甲}
「言」無有{甲}「熏」作「重」 又冠註
006_0832_c_26L曰重疑熏{甲}
「普」無有{甲}「佛」下甲本有
006_0832_c_27L如下門「法界圖章一乘法界圖終華嚴宗香鳥大
006_0832_c_28L師末葉非人釋題頭法師之執筆也建曆二年三
006_0832_c_29L月三日子始許於高山以法勝寺仝本一校賢穴
006_0832_c_30L八吁」
「着」作「著」{乙}次同

006_0833_a_01L‘집착 없음이 곧 집착’이란 비록 마음이 경계를 보지 아니하되 일체의 경계가 내 마음 아님이 없는 것이다. ‘집착하되 집착 없음’이란 일체가 내 마음의 태양이 무릇 나아가 향한 바 아님이 없지만, 기준으로 하는 것마다 곁이 없는 것이다.

‘바른 깨달음을 이룸’이란 마치 안식眼識이 안근과 티끌(塵)로 체體를 삼지만 고름과 피와 피부의 깨끗하지 않음에 물드는 바가 되지 않으면서 청정한 안식을 이루는 것과 같다. 만약 귓구멍에 침을 놓아서 고름과 피를 제거하게 하면 청정한 안식을 이루지 못한다. 지혜의 바른 깨달음 또한 이와 같다. 삼세간으로 자기의 몸과 마음을 삼으나 중생의 업과 번뇌에 물드는 바가 되지 않으면서 바른 깨달음을 이룬다. 그러나 대연기 가운데는 한 법을 제거함을 따라서 일체 모든 법이 전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중생의 업으로 인한 미혹과 번뇌에 대해서 만약 하나라도 제거한다면23) 바른 깨달음을 이루지 못한다.

‘둘째는 원불願佛이니 출생하기 때문이다’란 (다음과 같다.) 해인삼매 중에 삼세간의 일체 모든 법을 출생시키고 또 삼세간의 낱낱의 법은 법계의 모든 법을 출생시킨다. 찰나찰나에 새롭고 새로우며 다함없고 다함없기 때문에 이 뜻을 기준으로 하여 ‘출생’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법과 법은 혹 수행하거나 수행하지 않거나 일체중생의 몸과 마음 가운데 항상 그러하고 항상 그러하다. 그 까닭에 여래가 이 법을 나타내 보이는 것은 다만 서원함을 말미암기 때문에 능히 이러한 법을 출생시키는 것이다. 중생이 보지 못하는 것은 다만 능히 서원하지 못함을 말미암기 때문이다. 이 출생의 뜻을 기준으로 하여 ‘원불’이라고 한다.

‘셋째는 업보불業報佛이니 믿기 때문이다’란 (다음과 같다.) 세간인 육도의 원인과 출세인 성문ㆍ연각ㆍ보살의 원인 등을 업業으로 삼는다. 제9지地의 업행 조림稠林24)의 글25)에서 볼 수 있다. ‘보報’는 육도의 결과와 성문ㆍ연각ㆍ모든 부처님 등의 결과를 보報로 삼는다. 이것이 곧 해인삼매의 두렷하고 밝은 법이니, 그러므로 ‘업보불’이라고 한다.

006_0833_a_01L別意識取*着別境也無*着即*着者
006_0833_a_02L雖心不見境而一切境無非我心也
006_0833_a_03L*着而無*着者一切無非我心之日
006_0833_a_04L凡所趣向約約無側也成正覺者
006_0833_a_05L如眼識第下之二第八張 以眼根塵
006_0833_a_06L爲體而不爲膿血皮膚不淨所染
006_0833_a_07L淨眼識若針耳孔許除膿血則淨眼
006_0833_a_08L不成智正覺者亦復如是以三世
006_0833_a_09L間爲自身心而不爲衆生業煩惱
006_0833_a_10L所染得成正覺然大緣起中隨去一
006_0833_a_11L一切諸法擧體不立故於衆生
006_0833_a_12L業惑煩惱若云一物不成正覺也
006_0833_a_13L願佛出生故者海印中出生三世間
006_0833_a_14L一切諸法又三世間一一之法出生
006_0833_a_15L法界諸法於念念中新新無盡無盡
006_0833_a_16L約此義云出生也如是法法若修
006_0833_a_17L不修一切衆生身心之中常然常然
006_0833_a_18L所以如來現見此法者只由願故
006_0833_a_19L出生如是法也衆生不見者只由不
006_0833_a_20L能願故約此出生義云願佛也三業
006_0833_a_21L報佛信故者世間六道之因出世聲
006_0833_a_22L聞緣覺菩薩因等爲業 1) [388] 九地業行
006_0833_a_23L稠林文可見報者六道之果聲聞緣
006_0833_a_24L覺諸佛等果爲報此乃海印圓明之

006_0833_b_01L일체 중생이 자신의 참된 부처가 그 몸과 마음에 있음을 알지 못하는 것은 다만 믿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믿는 마음만으로 업보불을 이룰 수 있기 때문에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넷째는 지불持佛이니 따라주기 때문이다’란 (다음과 같다.) 만약 한 티끌을 들면 곁이 남김없이 일어나기 때문에 곁이 없이 그것을 다하는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일체 모든 법이 한 티끌을 따르지 않음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따르지 않는다면 이 한 티끌이 어찌 일체의 법을 다할 수 있겠는가? 나머지 모든 법에서도 이와 같이 준하여 생각하라. 하나가 곧 일체이고 일체가 곧 하나이다와 주主와 반伴이 구족해서 한량없이 자재하다는 도리는 모두 이 뜻이다. 이와 같이 듦에 따라서 거두어 지니는 뜻을 기준으로 ‘지불’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다섯째는 열반불涅槃佛이니 영원히 건너갔기 때문이다’란 (다음과 같다.) 삼승에서는 반드시 생사를 버려야 비로소 열반을 증득하니 이를 말미암아 도리어 생사 가운데 빠지기 때문에 ‘영원히 건너감’이 아니다. 말하자면 둘이 있기 때문에 중생이고 둘이 없기 때문에 곧 부처이다. 그러므로 만약 생사와 열반 가운데 둘이 있다고 본다면 어찌 생사 중에 빠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일승에서는 또한 내 몸의 별보別報26)인 하나의 눈동자가 곧 해인의 구경의 경계를 꿰뚫으니 이 이상 다시 옮겨갈 곳이 없다. 그러므로 ‘영원히 건너감’이라고 한다. 다른 일체법도 기준으로 하고 기준으로 하는 것이 모두 그러하다. 이러한 뜻을 기준으로 하여 부처님의 이름으로 삼은 것이다.

‘여섯째는 법계불法界佛이니 이르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란 (다음과 같다.) 만약 이 집 위의 용마루 서쪽 끝에 집착하여 서쪽의 분제를 구한다면 서쪽 허공을 다하더라도 그 분제를 얻지 못할 것이다. 동쪽 허공을 다하도록 이 서쪽 끝을 구하여 이르지 않은 곳이 없더라도 그 서쪽 분제는 끝내 얻을 수 없다. 무슨 까닭인가? 법계의 서쪽 끝이기 때문이며 서쪽이 곧 동쪽이기 때문이다.

006_0833_b_01L故云業報佛也一切衆生所以
006_0833_b_02L不知自眞佛之在其身心者只由不
006_0833_b_03L唯於信心得成業報佛故云信也
006_0833_b_04L四持佛隨順故者若擧一塵側無遺
006_0833_b_05L起故無側而盡之所以者何一切
006_0833_b_06L諸法無不隨順一2) [389] 若不隨順
006_0833_b_07L則此一*塵那得盡一切法乎餘諸法
006_0833_b_08L如是准思一即一切一切即一
006_0833_b_09L主伴具足無盡自在之道理皆此義
006_0833_b_10L第下之二第九張 約如是隨擧攝
006_0833_b_11L持之義名爲持佛也五涅槃佛永度
006_0833_b_12L故者三乘中要捨生死3)訂涅槃
006_0833_b_13L由是還沒生死之中故非永度也
006_0833_b_14L有二故衆生無二故即佛是故若於
006_0833_b_15L生死涅槃之中見有二者何得不沒
006_0833_b_16L生死中哉一乘中且約吾身別報一
006_0833_b_17L眼瞳子即徹海印究竟之際於此以
006_0833_b_18L更無轉處故云永度餘一切
006_0833_b_19L約約皆然約如是義爲佛名也
006_0833_b_20L六法界佛無處不至故者若執此舍
006_0833_b_21L上棟之西4) [390] [217] 求西分齊盡西方虛
006_0833_b_22L空而不得分齊盡東方虛空求此西
006_0833_b_23L無處不至其西分齊終不可得
006_0833_b_24L所以者何法界西末故西方即東方

006_0833_c_01L나머지 쪽도 모두 그러하다. 이 한 용마루와 같이 일체 모든 법도 다 또한 이와 같다. 하나하나의 법과 법이 들고 들며 잡고 잡음에 곳마다 이르지 않음이 없으니 이것이 ‘법계불’이다.

‘일곱째는 심불心佛이니 편안히 머무르기 때문이다’란 (다음과 같다.) 만약 마음을 말할 때면 일체 모든 법이 마음 아님이 없다. 이 뜻은 (일체 모든 법이) 식識 가운데 두루하기 때문에 (일체 모든 법을) 마음이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며, 진심이 이루는 바이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허망한 마음이 짓는 바이기 때문도 아니다. 다만 마음을 볼 때 단지 마음뿐이기 때문에 ‘심불’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한 법계의 성기심과 조림심 등이다. 삼승 가운데 마음은 반연하고 생각함(緣慮)이며 색色은 질량으로 인한 장애(質礙)이다. 일승 가운데 마음은 여러 가지(種種)라는 뜻이며 색은 질량으로 인한 장애가 없다는 뜻이다. 이미 마음이 여러 가지라는 뜻이기 때문에 마음을 볼 때 마음 아닌 사물이 없고 이미 색이 질량으로 인한 장애가 없다는 뜻이기 때문에 만약 색을 말할 때면 색 아닌 사물이 없다. 만약 습기를 뛰어넘는 바다의 뜻을 기준으로 하여 이를 밝히면 뛰어넘는 가운데의 진실을 ‘마음’이라고 이름한다. 일체 모든 법이 자신의 자리를 움직이지 않음이 바로 곧 이 ‘마음’이기 때문에 ‘편안히 머무른다’라고 한다. 이와 같은 뜻을 기준으로 하여 ‘심불’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여덟째는 삼매불三昧佛이니 한량없이 집착 없기 때문이다’란 (다음과 같다.) 「현수품」 가운데 열 가지 대삼매27)와 모든 모임모임의 모든 대삼매가 다 삼매불이다. 하나의 삼매를 따라서 일체 모든 법이 만족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한량없음’이라고 한다. 한량없음에 나아가 매 하나하나의 법마다 듦에 따라서 곁이 없기 때문에 ‘집착 없음’이라고 한다. 삼매에 의거하여 법을 보는 것이 이와 같기 때문에 ‘삼매불’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아홉째는 성불性佛이니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다’는 (다음과 같다.) ‘성性’은 머무름 없는 법성을 일컫는다.

006_0833_c_01L餘方皆然如此一棟一切諸法
006_0833_c_02L亦如是一一法法擧擧約約無處不
006_0833_c_03L是法界佛也七心佛安住故者
006_0833_c_04L若心言時一切諸法無不是心此義
006_0833_c_05L非謂遍於識中故5)云心 [391] 非謂眞
006_0833_c_06L心之所成故亦非妄心之所作故
006_0833_c_07L心見時只是心耳故云心佛謂一
006_0833_c_08L法界性起心稠林心等也三乘中
006_0833_c_09L是緣慮色是質㝵一乘中心是種種
006_0833_c_10L義也色是無質㝵義也旣心是種種
006_0833_c_11L義故以心見時無物不心旣色是
006_0833_c_12L無質㝵義故若色云時無物不色
006_0833_c_13L若約濕過海義明之過中實而名心
006_0833_c_14L第下之二第一○張 一切諸法自位
006_0833_c_15L不動正即是心故云安住約如是
006_0833_c_16L名爲心佛也八三昧佛無量無
006_0833_c_17L*着故者賢首品中十種大三昧
006_0833_c_18L諸會會諸大三昧皆爲三昧佛也
006_0833_c_19L一三昧一切諸法無不滿足故云
006_0833_c_20L無量就無量中每一一法隨擧無側
006_0833_c_21L故云無*着依於三昧見法如是
006_0833_c_22L名三昧佛也九性佛決定故者性謂
006_0833_c_23L「弟」作「第」{乙}「塵」作「坐」{乙}次同「訂」
006_0833_c_24L通「證」於此書{編}次同
「未」作「末」{乙}「云
006_0833_c_25L心」作「忘」{乙}

006_0834_a_01L일체의 법과 법이 모두 결정코 머무름이 없다는 이법은 부처님이 계시거나 부처님이 계시지 않거나 본성과 모습이 항상 머무른다.28) 이와 같은 뜻을 기준으로 하여 부처님의 명호로 삼는 것이다.

‘열째는 여의불如意佛이니 널리 덮기 때문이다’란 (다음과 같다.) 사갈라용왕娑竭羅龍王29)의 궁전에 여의보왕이 있으니 이름이 ‘생겨남이 다함없음’이다. 이 여의보주왕은 바다와 육지 일체의 진귀한 보물과 큰 바다의 물을 능히 생겨나게 한다. 큰 바다의 일체중생 무리는 이 물을 집으로 삼고 이 물을 먹을 것으로 하여 다 태어나 자라난다. 큰 바다로 인하여 큰 땅이 있을 수 있으며 강과 시내와 모든 연못과 우물이 일체 풀과 나무와 모든 곡식과 과일에 물을 주어 더욱 자라게 하고 중생을 기른다. 만약 이 ‘다함없음’ 여의보왕이 없다면 바닷물이 마르고 곡식과 과일이 시들 것이니 물과 육지의 중생들이 무엇으로 성장하는 이익을 얻을 수 있겠는가? 이 여의보왕은 모든 부처님의 중생을 성장시키려는 본원에 인해서 생겨나는 바이다. 만약 모든 부처님의 본원의 힘이 없다면 이 여의보왕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일체중생이 성장하는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까닭은 다 여의불이 덮어주고 길러주는 덕德임을 안다.

이와 같은 뜻은 오직 내 몸과 마음인 참 부처가 지니는 도리를 열 가지 이름으로 설하여 보인 것일 뿐이다.

‘이 뜻은 모든 법의 참된 근원이며’란 (다음과 같다.)
이 자리에 또한 열 이름이 있는가?
없다. 말하자면 연기분에 열 이름이 있을 뿐이니, 증분 중에는 열 이름이 없다.
그렇다면 이 열 부처님의 이름은 증분의 바깥인가?
증분 가운데 실제 이름이 있다.
「열 가지 정토의 장(十種淨土章)」에서 이르기를, “분량을 알고자 하면 그 열 부처님에 준하여 곧 알 수 있다.”30)라고 하니 그 뜻이 무엇인가?
‘무착’이다, ‘원’이다 등은

006_0834_a_01L無住法性也一切法法皆是決定無
006_0834_a_02L住之理有佛無佛性相常住約如
006_0834_a_03L是義而爲佛名也十如意佛普覆故
006_0834_a_04L娑竭羅龍王宮殿之中有如意
006_0834_a_05L寶王名出生無盡此寶珠王能生海
006_0834_a_06L陸一切珍寶及大海水大海之中一
006_0834_a_07L切生類此水爲家此水爲食皆得
006_0834_a_08L生長因於大海得有大地若河若
006_0834_a_09L川及諸池井潤益生長一切草木及
006_0834_a_10L1) [392] 養育衆生如其無此無盡
006_0834_a_11L寶王則海水乾渴糓菓焦枯水陸
006_0834_a_12L衆生由何能得長養利也此如意
006_0834_a_13L唯因諸佛長養衆生本願所生也
006_0834_a_14L若無諸佛本願力則無此寶王故知
006_0834_a_15L一切衆生所以能得長養利益者
006_0834_a_16L如意佛之蔭焉養焉之德也如是等
006_0834_a_17L唯吾身心眞佛之所有道理以十
006_0834_a_18L種名說示之耳此義諸法之眞源者
006_0834_a_19L此處尙有十名耶無也謂緣起
006_0834_a_20L分有十名耳第下之二第一一張 訂分
006_0834_a_21L之中無十名也然則此十佛名訂
006_0834_a_22L分外耶訂分之中有實名也
006_0834_a_23L十種淨土章云欲知分量准其十佛
006_0834_a_24L即可知之其義云何無*着也願

006_0834_b_01L다만 이름을 설한 것일 뿐이고, 부처님은 설할 수 없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이름 등은 다만 말의 모습(詮相)을 설한 것일 뿐이다. 국토해는 설할 수 없기 때문에31) ‘준하여 알 수 있다’라고 한 것이다.

대기
『대기』에 이른다. ‘모든 법의 참된 근원’은 연기분이고, ‘구경의 오묘한 핵심(宗)’은 증분이다. 이 뜻은 증분과 교분의 둘에 통틀어 열 부처님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오직 증분 가운데에만 열 부처님이 있다면, 증분이 교분의 근원이기 때문에 ‘참된 근원’이라고 한 것이다. 또 수업秀業32)의 뜻은 ‘참된 근원’은 지혜(智)이고, ‘오묘한 핵심’은 대상(境)이다. 참 지혜가 보는 대상이라야 비로소 ‘오묘하다’고 할 수 있을 뿐이니, 그래서 ‘매우 깊고 난해하니’라고 한 것이다.

고기

‘고기’에 이른다.
의상 화상이 태백산 대로방에 머무를 때 진정 스님과 지통 스님 등을 위하여 설하였다. “수행인이 열 부처님을 보고자 한다면 마땅히 먼저 안목을 지어야 한다.”
지통 스님 등이 여쭈었다. “무엇이 안목입니까?” 의상 화상이 말씀하였다. “『화엄경』으로 자신의 안목을 삼는다. 이른바 문장과 문장, 구절과 구절이 모두 열 부처님이니 이 이외에 부처님 보기를 구한다면 세세생생 끝내 보지 못할 것이다.”

의상 화상이 말씀하였다. “이른바 ‘무착불이니 세간에 편안히 머물러 바른 깨달음을 이루기 때문이다’란 (다음과 같다.) 오늘 내 오척 되는 몸을 세간이라고 이름하며, 이 몸이 허공법계에 두루 가득 차서 이르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에 ‘바른 깨달음’이라고 한다. 세간에 편안히 머무르기 때문에 열반에 대한 집착을 여의고, 바른 깨달음을 이루기 때문에 생사에 대한 집착을 여읜다. 만약 실제를 기준으로 하여 말하면 세 가지 세간이 원만히 밝고 자재하기 때문에 ‘무착불’이라고 한다.

‘원불이니 출생하기 때문이다’란 (다음과 같다.) 백사십원百四十願33)ㆍ십회향원十廻向願34)

006_0834_b_01L也等者但說名耳佛則不可說
006_0834_b_02L是種種名等但說詮相耳土海則不
006_0834_b_03L可說故云准可知也

006_0834_b_04L
大記云諸法之眞源者緣起分
006_0834_b_05L竟之玄宗者訂分也此義訂敎二分
006_0834_b_06L通有十佛故也若唯訂分之中有十
006_0834_b_07L則訂分是敎分之源故云眞源也
006_0834_b_08L又秀業之意則眞源則智玄宗則境
006_0834_b_09L眞智所見之境方得云玄耳
006_0834_b_10L云甚深難解也

006_0834_b_11L
古記云相和尙住大伯山大蘆房
006_0834_b_12L爲眞定智通等說行人欲見十
006_0834_b_13L佛者應先作眼目通等問云何是
006_0834_b_14L眼目耶和尙曰以花嚴經爲自
006_0834_b_15L眼目所謂文文句句皆是十佛
006_0834_b_16L自此以外求觀佛者生生劫刼
006_0834_b_17L不見也和尙曰所謂無*着佛安
006_0834_b_18L住世間成正覺故者今日吾五尺
006_0834_b_19L之身名爲世間此身遍滿虛空法
006_0834_b_20L無處不至故曰正覺安住世
006_0834_b_21L間故離涅槃之*着成正覺故
006_0834_b_22L生死之*着若約實而言三種世
006_0834_b_23L間圓明自在故曰無*着佛也
006_0834_b_24L佛出生故者百四十願十廻向願

006_0834_c_01L초지원初地願35) 및 성기원性起願36) 등이 모두 원불이다. 이 부처님은 머무름이 없음(無住)으로써 몸을 삼기 때문에 한 물건도 부처님의 몸 아님이 없다. 이른바 한 법을 듦에 따라서 일체를 다 거두어 법계에 들어맞아 두루함을 원불이라고 이름한다.

‘업보불이니 믿기 때문이다’란 (다음과 같다.) 22위의 법이 본래 움직이지 아니하며 두렷이 밝게 비추니, 만약 모든 수행인이 능히 이와 같이 믿으면 곧 ‘믿음’이라고 한다. 만약 실제 도리를 들어서 설하면 위로 묘각으로부터 아래로 지옥에 이르기까지 모두 부처님 일(佛事)이다. 그러므로 만약 사람이 이 일을 공경히 믿으면 ‘업보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불持佛이니 따라주기 때문이다’란 (다음과 같다.) 법계의 삼라 모든 법을 비록 다함없다고 하여도 만약 해인삼매로써 도장 찍어 정하면 오직 하나의 해인삼매의 법일 뿐이니, 저가 나를 지니고 내가 저를 지니기 때문에 ‘따라준다’고 한다. 그러므로 세계로써 부처님을 지니고 부처님으로써 세계를 지니니, 이 이름이 ‘지불’이다.

‘열반불이니 영원히 건너갔기 때문이다’란 생사와 열반이 본래 평등함을 증득하여 보기 때문에 ‘영원히 건너감’이라고 한다. 이른바 생사가 시끄럽게 요동함이 아니고 열반이 평온하게 고요함이 아닌 것이 이 뜻이다.

‘법계불이니 이르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란, 하나의 티끌법계, 소나무법계, 밤나무법계 내지 시방삼세의 허공법계가 모두 부처님의 몸이다. 이른바 진여는 지나간 때에도 없어지지 않으며, 뒤의 때에도 생겨나지 않으며, 현재에도 움직이지 않는다. 여래도 또한 이러하여 과거에도 없어짐이 없으며, 미래에도 생겨남이 없으며, 현재에도 움직임이 없다. 형태도 없고, 모습도 없어서 허공계와 같다. 헤아릴 수 없기 때문에

006_0834_c_01L第下之二第一二張 初地願及性
006_0834_c_02L起願等皆願佛也此佛以無住爲
006_0834_c_03L身故無有一物非佛身者所謂隨
006_0834_c_04L擧一法盡攝一切稱周法界名爲
006_0834_c_05L願佛也業報佛信故者二十二位
006_0834_c_06L之法本來不動圓明照矚若諸
006_0834_c_07L行人能如是信即云信也若擧
006_0834_c_08L實道理而說上自妙覺下至地獄
006_0834_c_09L皆是佛事是以若人敬信此事
006_0834_c_10L噵業報佛也持佛隨順故者法界
006_0834_c_11L森羅諸法雖云無盡若以海印印
006_0834_c_12L則唯一海印定法彼持我我持
006_0834_c_13L故云隨順是故以世界持佛
006_0834_c_14L以佛持世界是名持佛也涅槃佛
006_0834_c_15L永度故者訂見生死涅槃本來平
006_0834_c_16L故云永度所謂生死非暄動
006_0834_c_17L涅槃非寂靜是此義也法界佛無
006_0834_c_18L處不至故者一塵法界松木法界
006_0834_c_19L栗木法界乃至十方三際虛空法
006_0834_c_20L摠是佛身所謂眞如前際不
006_0834_c_21L後際不生現在不動如來亦
006_0834_c_22L過去無滅未來無生現今無
006_0834_c_23L無形無相如虛空界不可量
006_0834_c_24L「糓」作「殺」{乙}

006_0835_a_01L백천만 겁 동안 이미 설했고, 지금 설하며, 앞으로 설하여도 끝내 다할 수 없으며, 가장자리가 없기 때문에 ‘법계불’이라고 한다.

‘심불이니 편안히 머무르기 때문이다’란, 마음을 쉬면 곧 부처님이고 마음을 일으키면 부처님이 아니다. 마치 사람이 물로 그릇을 깨끗하게 하나 더러워진 물을 깨끗하게 할 줄은 모르는 것과 같다. 물이 깨끗하면 그림자도 밝고 물이 탁하면 그림자도 어두우니 마음법 또한 그러하여 마음을 쉬면 법계가 두렷이 밝고 마음을 일으키면 법계가 차별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편안하게 머무르면 법계의 모든 법이 내 오척 되는 몸에 나타나는 것이다.

‘삼매불이니 한량없이 집착 없기 때문이다’란, 해인삼매의 법은 들고 들며 잡고 잡음에 머물러 집착함이 없기 때문에 한량없이 집착 없는 삼매불이라고 하는 것이다.

‘성불이니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다’란, 법성에 두 가지가 있다. 이른바 큰 법성과 작은 법성이다. 무엇인가? 만약 한 법이 일어나 삼세의 끝까지 다하면 안도 없고 밖도 없으므로 ‘큰 법성’이라고 한다. 한 법의 지위가 일체 가운데 두루하여야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은 ‘작은 법성’이라고 이름한다. 이른바 하나의 기둥이 법계의 끝을 다하도록 다만 기둥인 것은 ‘큰 법성’이라고 이름하고, 이 하나의 기둥 가운데 서까래와 대들보와 기둥 등의 모든 지위가 나타나는 것은 ‘작은 법성’이라고 이름한다.

‘여의불이니 두루 덮기 때문이다’란 (다음과 같다.) 마치 큰 용왕이 큰 보왕寶王을 가지고 있으니 만약 이 보배가 없으면 일체중생이 입고 먹을 것이 없으므로 다섯 곡식과 아홉 곡식과 천 가지 만 가지 모두 이루어지는 것은 오직 이 보왕의 덕인 것처럼, 여의불의 은혜 또한 이와 같다.

정원신역화엄경소37)

『정원경貞元經』38)의 길상운 선지식(吉祥雲知識)39)을 주석하여 이른다.40)
법문이 한량없는데 왜 첫 선지식이 바로 염불을 가르치는가?

006_0835_a_01L百千萬刼已說今說當說
006_0835_a_02L不可盡無有邊際故曰法界佛也
006_0835_a_03L心佛安住故者息心即佛起心非
006_0835_a_04L如人以水淨器不知能淨濁水
006_0835_a_05L水淨影明水濁影昏心法亦
006_0835_a_06L第下之二第一三張 息心法界圓
006_0835_a_07L起心法界差別是故心安住
006_0835_a_08L則法界諸法現於吾五尺身也
006_0835_a_09L昧佛無量無*着故者海印三昧之
006_0835_a_10L擧擧約約無住*着故曰無量
006_0835_a_11L無*着三昧佛也性佛決定故者
006_0835_a_12L法性有二所謂大性及與小性
006_0835_a_13L若一法起竟三世際無內無
006_0835_a_14L故曰大性一法之位遍一切中
006_0835_a_15L方得成者是名小性所謂一柱盡
006_0835_a_16L法界際但是柱者名爲大性
006_0835_a_17L一柱中椽栿瓦等諸位現者名爲
006_0835_a_18L小性也如意佛普覆故者如大龍
006_0835_a_19L有大寶王若無此寶一切衆生
006_0835_a_20L無所衣食故五糓九糓千種萬種
006_0835_a_21L並成熟者唯此1) [393] 王之德也
006_0835_a_22L意佛恩亦如是也

006_0835_a_23L
貞元經吉祥雲知識䟽云法門
006_0835_a_24L無量何以初友便敎念佛

006_0835_b_01L
간략히 열 가지 뜻이 있다. 첫째, 염불삼매가 뭇 수행에 우선하기 때문이다. 둘째, 부처님에 의지해야 비로소 수승한 행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공덕이 높고 쉽게 나아갈 수 있어서 중생들에게 권하기 때문이다. 넷째, 관觀이 깊음과 얕음을 통틀어서 능히 두루 거두기 때문이다. 다섯째, 두터운 장애를 없애서 수승한 연緣이 되기 때문이다. 여섯째, 사람과 법을 쌍으로 겸하여 쉽게 가호加護하기 때문이다. 일곱째, 십지의 보살이 모두 염불하기 때문이다.

여덟째, 삼보三寶의 길상을 경의 처음에서 설하기 때문이다. 처음 이것은 염불이고, 해운海雲41)은 법을 설하며,42) 묘주妙住43)는 승僧에 의지하는 것44)으로 차례를 삼기 때문이다. 아홉째, 마음에 즉하고 부처님에 즉하여 하나의 경계로 바꾸기 때문이다.45) 열째, 초주初住46)에 부처님을 반연하여 발심해서 즐겁게 공양함을 보이기 위한 까닭이다. 운운.

간략히 세 문이 된다.47) 첫 번째는 염念하는 대상의 차별을 밝힌다. 두 번째는 경문을 모아서 풀이한다. 세 번째는 염念하는 주체로써 모아서 묶는다.
이제 처음은 말하자면 십신十身과 삼신三身이니 관觀하는 것이 같지 않은 것이다. 간략히 열 종류가 된다. 운운. 열 종류라고 말한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만약 이 관觀을 지음에 부처님은 법으로 몸을 삼아 청정하기가 허공과 같고 염念함이 없는 염念이라면 곧 진여를 염念하는 것이니, 이것은 법신을 염念하는 것이다.
둘째, 화장세계해이니 법계에 차별이 없어서 진실에 의지하여 머무르고 국토에 의지하지 않으니, 이것은 성토性土를 염念하는 것이다.

셋째, 열 연화장의 티끌 수의 모습이니, 이들은 모두 보신報身의 모습을 염念하는 것이다.
넷째, 다함없는 덕이 있어서 하나하나 생각하기 어려우니, 보신 안의 덕을 염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위의 경에서 이르기를, “일체의 위의 가운데 항상 부처님의 공덕을 염念하여 밤낮으로 잠깐도 끊어짐이 없으니 이와 같은 업을 마땅히 지어야 한다.”48)라고 한 것이다.
다섯째, 화장세계의 한량없는 보배장엄의 양이 법계에 두루함을 관觀하는 것이니, 이것은 보토報土를 염念하는 것이다.

여섯째, 혹은 부처님의 모습이 삼십이상을 갖춘 것을 혹은 총摠으로 혹은 별別로, 혹은 역으로, 혹은 순으로, (혹은) 1장 6척(丈六)으로, (혹은) 천 척千尺으로49) 관觀하는 것이니,

006_0835_b_01L有十義一念佛三昧衆行先故
006_0835_b_02L依佛方能成勝行故三功高易就
006_0835_b_03L2) [394] [218] 物故四觀通深淺能遍攝故
006_0835_b_04L五消滅重障爲勝緣故六雙兼人
006_0835_b_05L法易加護故七十 [219] 地菩薩皆念佛
006_0835_b_06L八三寶吉祥經初說故初此念
006_0835_b_07L海雲說法妙住依僧爲次3) [395]
006_0835_b_08L九即心即佛易一境故十爲表
006_0835_b_09L初住緣佛發心樂供養故云云
006_0835_b_10L爲三門第下之二第一四張 一明所
006_0835_b_11L念差別二會釋經文三以能念
006_0835_b_12L4) [396] [220] 今初謂十身三身爲觀不
006_0835_b_13L略爲十種云云 言十種者一若
006_0835_b_14L作是觀佛以法爲身淸淨如虛空
006_0835_b_15L無念念者即念眞如是念法身
006_0835_b_16L二花藏世界海法界無差別依眞
006_0835_b_17L而住不依國土是念性土三十
006_0835_b_18L蓮花藏塵數相此等皆是念報身
006_0835_b_19L四有無盡德一一難思念報
006_0835_b_20L內德故上經云一切威儀中
006_0835_b_21L念佛功德晝夜無暫斷如是業
006_0835_b_22L應作五觀花藏刹無量寶嚴量
006_0835_b_23L周法界是念報土六或觀佛相
006_0835_b_24L具三十二若摠若別若逆若順

006_0835_c_01L이들은 모두 화신의 모습을 염念하는 것이다. 일곱째, 십력十力과 사무외四無畏와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이니, 이들은 모두 화신의 모습을 염念하는 것이다. 여덟째, 다른 곳의 정토의 물과 새와 나무숲이니, 이들은 모두 화신의 의보依報를 염하는 것이다. 아홉째, 앞의 둘은 체성(性)이고 뒤의 여섯은 모습(相)이니 모습 밖에 본성이 없고 본성 밖에 모습이 없어서 서로 사무침이 참 부처님이고 참 국토이다. 이것이 아홉째, 체성과 모습이 걸림 없음을 염念하는 것이다.

열째, 체성(性)으로써 모습(相)을 융섭하고 모습이 체성을 따라 융섭되어 앞의 아홉 문이 합해져 하나의 도리가 되게 하기 때문에, 덕과 덕이 다함없고 모습과 모습이 끝이 없으며 티끌과 티끌이 국토에 가득 차니 마치 인드라그물과 같다. 이것이 열째, 거듭거듭 융섭함을 염念하는 것이다. 뒤의 두 문을 얻어야 앞이 모두 진실이니, 경에서 비록 달리 설하나 뜻은 반드시 모두 융섭된다. 운운.

세 번째, 염念하는 주체를 모아 묶음에 간략히 다섯 종류가 있다. 첫째, 반연하는 경계를 바로 관觀하는 염불문이다. 혹 법신, 혹 응신과 혹 의보依報, 혹 정보正報가 모두 경계이기 때문이다. 이름만 부르는 것(稱名)은 ‘입에 속함(屬口)’이니, 참된 염念이 아니기 때문에 생략하여 말하지 않는다.
둘째, 경계를 거두어 오직 마음뿐인 염불문이다. “이 마음이 부처이고 마음이 부처를 지으니 모든 부처님의 바르고 두루한 지혜의 바다가 마음의 생각(心想)으로부터 생겨난다.”50) 하물며 “마음과 부처와 중생의 셋이 차별이 없다.”51)라는 것이겠는가?

셋째, 마음과 경계가 함께 없는 염불문이다. 마음이 곧 부처이니 마음은 곧 마음이 아니다. 부처가 곧 마음이니 부처 또한 부처가 아니다.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어서 일체를 멀리 여읜다. 그러므로 염念하는 바가 없어야 비로소 참된 염念이 된다.
넷째, 마음과 경계가 걸림 없는 염불문이다. 현상(事)과 이법(理)을 함께 비추어 있음과 없음에 걸림이 없다. 평등한 참된 문이 고요하고 고요하니 무엇이 부처이고 무엇이 마음인가? 차별한 현상과 이법이 밝고 밝으니

006_0835_c_01L丈六千尺此等皆是念化身相
006_0835_c_02L十力無畏十八不共此等皆是念
006_0835_c_03L化身相八餘方淨土水鳥樹林
006_0835_c_04L等皆是念化身依九前二是性
006_0835_c_05L六是相相外無性性外無相
006_0835_c_06L徹眞佛眞土是念*弟九性相無㝵
006_0835_c_07L十以性融相相隨性融令前九門
006_0835_c_08L合爲一揆故德德無盡相相無窮
006_0835_c_09L塵塵刹滿猶如帝網是*弟十念
006_0835_c_10L重重融攝得後二門前皆眞實
006_0835_c_11L經雖別說義必該融云云*弟三能
006_0835_c_12L念*略有五種一緣境正觀
006_0835_c_13L念佛門若眞若應若依若正皆是
006_0835_c_14L境故稱名屬口非眞念故略而
006_0835_c_15L不言第下之二第一五張 二攝境唯
006_0835_c_16L心念佛門是心是佛是心作佛
006_0835_c_17L諸佛正遍知海從心想生況心佛
006_0835_c_18L衆生三無差別三心境俱泯念佛
006_0835_c_19L心即是佛心即非心佛即是
006_0835_c_20L佛亦非佛非心非佛遠離一
006_0835_c_21L故無所念方爲眞念四心境
006_0835_c_22L無㝵念佛門雙照事理存亡無㝵
006_0835_c_23L等眞門之寂寂何佛何心鑒事
006_0835_c_24L「寶」作「室} {乙}「㢡」作「將寸」{乙}「弟」
006_0835_c_25L作「第」{乙}次同
」作「收」{乙}次同

006_0836_a_01L언제나 마음이고 언제나 부처이다. 쌍으로 잊고 바르게 들어가면 고요함과 비춤이 쌍으로 흐른다.

다섯째, 거듭거듭 다함없는 염불문이다. 이법이 이미 다함없으니 이법으로써 현상을 융섭하면 현상 또한 다함이 없다. 그러므로 한 문을 따라서 일체의 문을 거둔다. 이 다섯 문을 융섭하여 일치되게 하니 곧 이 중에 염念하는 주체인 마음이 앞의 열 부처님의 경계와 합해져서 합함도 아니고 흩어짐도 아닌 것으로 거듭거듭 생각하기 어려운 경계에 좇아 들어간다.

염불의 한 문을 모든 가르침에서 찬탄하는 바이니 이치가 깊고 멀어서 세상에서 많이 함께 행하기 때문에 다시 간략히 서술하니 번쇄함을 마다하지 않고 설한다. 운운.

보현보살 선지식52)을 주석하여 이른다.53) 첫 번째, 모든 부처님을 예경하는 것이다. 문장의 세 단락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이름을 근거로 하는 것이다. 마음으로 공경함을 말미암아 몸과 입을 움직여서 두루 예경하기 때문에 아만의 장애를 제거하고 공경하여 믿음의 선善을 일으킨다. 늑나마제 삼장(勒那三藏)54)이 ‘칠종례七種禮’55)를 설했는데 이제 덧붙여서 열 가지로 한다.

말하자면 첫째는 아만례我慢禮이다. 방아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듯이 공경하는 마음이 없다. 둘째는 창화례唱和禮이다. 높은 소리로 시끄럽고 잡되어 말만 어지럽다. 이 둘은 예의가 아니다. 셋째는 공경례恭敬禮이다. 오체(五輪)를 땅에 대고 (부처님의) 발을 받들기를 정성스럽게 하는 것이다. 넷째는 무상례無相禮이다. 깊이 법성에 들어가 주체와 대상의 모습을 여의는 것이다. 다섯째는 작용을 일으키는 예(起用禮)이다. 비록 주체와 대상이 없지만 널리 몸과 마음을 움직임이 그림자와 같아서 널리 두루 예경할 수 없는 것에 예경하는 것이다.

여섯째는 안으로 관하는 예(內觀禮)이다. 다만 몸 안의 법신인 참 부처님만을 예경하고 밖을 향해서 구하지 않는 것이다. 일곱째는 실상의 예(實相禮)이다. 혹 안과 혹 밖이 동일한 실상인 것이다. 여덟째는 대비의 예(大悲禮)이다. 하나하나의 예를 따라서 널리 중생을 대신하는 것이다. 아홉째는 모두 거두는 예(摠攝禮)이다. 앞의 여섯 문56)을 거두어 하나의 관觀으로 삼는 것이다. 열째는 다함없는 예(無盡禮)이다. 인드라그물의 경계에 들어가서 혹 부처님과 혹 예경이 거듭거듭 다함없는 것이다.

006_0836_a_01L理之明明常心常佛雙亡正入
006_0836_a_02L寂照雙流五重重無盡念佛門
006_0836_a_03L旣無盡以理融事事亦無盡
006_0836_a_04L隨一門攝一切門融斯五門
006_0836_a_05L爲一致即是此中能念之心與前 [221]
006_0836_a_06L十佛境合非合非散渉入重重
006_0836_a_07L難思境也念佛一門諸敎攸 [222]
006_0836_a_08L理致深遠世多共行故復略叙
006_0836_a_09L猒繁說云云 普賢知識䟽云1)
006_0836_a_10L一禮敬諸佛文三段者 *弟一牒名
006_0836_a_11L由心恭敬運於身口而遍禮故
006_0836_a_12L我慢障起敬信善勒那三藏說七
006_0836_a_13L種禮今加爲十謂一我慢禮
006_0836_a_14L碓上下無恭敬心二唱和禮
006_0836_a_15L聲喧雜辭句渾亂此二非儀
006_0836_a_16L恭敬禮五輪2)着地捧足殷重
006_0836_a_17L無相禮深入法性離能所相
006_0836_a_18L起用禮雖無能所普運身心
006_0836_a_19L影普遍禮不可禮六內觀禮
006_0836_a_20L禮身內法身眞佛不向外求
006_0836_a_21L實相禮第下之二第一六張 若內若
006_0836_a_22L同一實相八大悲禮隨一一
006_0836_a_23L普代衆生九摠攝禮攝前六
006_0836_a_24L以爲一觀十無盡禮入帝網

006_0836_b_01L
추혈기

『추혈문답』에 이른다.57)
자신의 미래불이 도리어 자신의 현재를 교화한다는 것은 어느 글로써 아는가?
『영락경』 제8지 보살에 이르기를, “자기 몸의 미래의 과보인 모든 부처님이 정수리를 만지며 법을 설하시는 것을 스스로 본다.”58)라고 한 까닭에 성인의 말씀임을 밝게 알 수 있다. 또 이미 여러 경에 이르기를, “삼세의 모든 부처님을 예배하고 공경하기 때문에 모든 죄업이 없어진다.”라고 하니 미래의 모든 부처님이란 누구이겠는가?

이것은 남이 이미 이룬 부처님을 예배하는 뜻이니 어떻게 자기의 아직 이루지 않은 부처님이 되는가?
남의 부처님을 예배하는 뜻이 없지는 않으나 멀고 성글다. 까닭은 무릇 모든 부처님이 중생을 위하여 부처님의 덕을 설하시니, 뜻이 중생 스스로 또한 그 과보를 얻게 하고자 함이기 때문에 수행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이 자신의 미래에 얻을 과덕을 바라보아 그것을 얻고자 하기 때문에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수행하는 것이고, 남의 부처님의 과보를 얻기 위해서 수행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바로 내가 발심하여 수행하게 하는 부처님은 다만 나의 미래의 과보이며 이미 이룬 부처님은 남의 부처님이 아니다. 이 뜻은 의심하거나 괴이하게 여길 것이 아니다. 또 남이 이미 이룬 부처님이 곧 나의 미래의 과보인 부처님이다. 무슨 까닭인가? 남이 부처님을 이룰 때 곧 삼세 부처님의 평등한 과보를 얻는다. 또 나의 미래의 과보인 부처님은 곧 남이 지금 이룬 부처님이다. 무슨 까닭인가? 내가 미래의 과보인 부처님을 얻을 때 곧 삼세 부처님의 평등한 법을 얻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반복하여 다시 서로 평등하니 평등하여 차별 없는 과덕이다.59) 또 이 나의 부처님이 일체 법계의 유정과 무정 가운데 완전하고 완전히 계시니, 한 사물도 나의 체體로서의 부처님 아님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자체불自體佛을 예배할 수 있다면 예배할 바 아닌 사물이 없다.

006_0836_b_01L若佛若禮重重無盡

006_0836_b_02L
錐穴問答云自未來佛還化自
006_0836_b_03L現在者以何文知乎纓絡經
006_0836_b_04L*弟八地菩薩云自見己身當果
006_0836_b_05L諸佛摩頂說法故則聖說炳然可
006_0836_b_06L又旣諸經云三世諸佛拜敬故
006_0836_b_07L諸罪業滅未來諸佛者何乎
006_0836_b_08L他已成佛拜義何爲自未成佛乎
006_0836_b_09L拜他佛之義非無而遠疎 [223] 所以
006_0836_b_10L凡諸佛爲衆生說佛德意爲欲 [224]
006_0836_b_11L衆生自亦得彼果故令修行
006_0836_b_12L衆生望 [225] 自當來所得之果德
006_0836_b_13L欲得彼不惜身命修行不爲得他
006_0836_b_14L佛果故修行是故正令吾發心修
006_0836_b_15L行佛但吾當果已成佛非他佛也
006_0836_b_16L此義不疑恠也又他已成佛即是
006_0836_b_17L自當果佛所以者何他成佛時
006_0836_b_18L即得三世佛平等果又吾當果佛
006_0836_b_19L即是他今成佛所以者何吾得當
006_0836_b_20L果佛時即得三世佛平等法故
006_0836_b_21L是轉展更互平等平等無差別果
006_0836_b_22L [226] 又此吾佛於一切法界有情無
006_0836_b_23L情中全全即作在 [227] 無一物非吾體
006_0836_b_24L佛故若能拜自體佛者無物不

006_0836_c_01L이것이 매우 큰 핵심이니 항상 생각해야 할 것이다.

자체불관론

『자체불관론自體佛觀論』60)에 이른다.
무엇이 자성계自性界이며, 무엇이 자체불自體佛인가?
머무름 없음(無住)이 자성계이며, 실상實相이 자체불이다.
이 자체불은 어떻게 관觀하는가?
게송으로 답하여 이른다.

모든 연緣의 근본은 나이며,
일체법의 근원은 마음이며,
말(語言)은 매우 중요한 근본이니,
진실한 선지식이다.61)

이 뜻은 무엇인가?
‘일체법의 근원은 마음이다’라는 것은 자체불이다. ‘매우 중요한 근본’은 자체의 원만한 원인이다. ‘진실한 선지식’은 자체의 원만한 결과이다. 세 뜻을 갖춘 까닭에 ‘나(我)’이다. 이것이 곧 자체불이다.
이 불과佛果는 닦음이 있는가, 닦지 않는가?
닦음과 닦지 않음을 가려내지 않으며 유정과 무정을 택하지 않으니, 삼세간에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 부처님은 중생을 교화하여 제도하시는가?
큰 허공 안에 모든 법이 큰 허공 아님이 없다. 그러므로 허공이 허공을 교화하는 것과 같으니, 이 이름이 자체불의 교화이다.어느 본에는 이르기를, “자체불 안에 자체불 아님이 없는 것이, 이 이름이 자체불의 교화일 뿐이다.”라고 한다.

알지 못하겠다. 무엇이 ‘말(語言)’인가?
너의 ‘알지 못하겠다’는 말(語言)과 같으니 이 말이 매우 중요하다.
이 말은 무엇인가?
연기제緣起際의 말과 같다.
무엇이 연기제인가?
나의 마음은 움직이고 큰 허공은 움직이지 않으니, 움직임과 움직이지 않음을 여의는 것이 연기제가 된다.

연기제를 기준으로 하면 그 법은 항상 그러하니, 처음 닦는 사람이 어떻게 그 마음에서 노니는가?
법을 기준으로 하여 논하면 닦음과 닦지 않음을 여의나, 시험삼아 나의 마음과 나의 몸에 처음 나아가 어느 본에는 ‘처음 일으켜’라고 한다. 서로 말하게 함을 밝힌다.

006_0836_c_01L所拜此甚大要第下之二第一七張
006_0836_c_02L常可思之

006_0836_c_03L
自體佛觀論云何自性界
006_0836_c_04L自體佛耶無住自性界實相
006_0836_c_05L自體佛此自體佛何觀耶
006_0836_c_06L偈答曰諸緣根本我一切法源心
006_0836_c_07L語言大要宗眞實善知識此義
006_0836_c_08L云何一切法源心是自體佛
006_0836_c_09L大要宗是自體圓因眞實善知識
006_0836_c_10L是自體滿果具三義故我也此即
006_0836_c_11L自體佛也此佛果有修耶不修
006_0836_c_12L不簡修不修不擇情非情
006_0836_c_13L三世間不動故此佛化度衆生
006_0836_c_14L大虛之內諸法無不大虛
006_0836_c_15L是故如虛空化虛空是名自體佛
006_0836_c_16L化也一本云自體佛內無不自
體佛者是名自體佛化耳
不知
006_0836_c_17L云何語言乎如汝不知語言
006_0836_c_18L言甚大也此言云何如緣起
006_0836_c_19L際言也何緣起際耶我心是
006_0836_c_20L大虛不動離動不動爲緣起
006_0836_c_21L際也約緣起際其法常然
006_0836_c_22L修之人何遊其心耶約法論
006_0836_c_23L離修不修也試明初趣一本云
初起

006_0836_c_24L「弟」作「第」{乙}「着」作「著」{乙}

006_0837_a_01L말하자면 마음을 가지고 몸을 찾고 몸을 가지고 마음을 찾으니, 마음이 몸에 두루하고 몸이 마음에 두루한다. 그러니 이름하여 ‘말(語言)’이라고 한다.
서로 두루하기 때문에 다시 말하는 바가 없으니 무엇을 ‘말’이라고 하는가?
마음을 말할 때에는 말 이외에 말하는 바가 없고, 몸을 말할 때에는 말 이외에 말하는 바가 없다. 그러므로 말이 없는 말이고, 들음이 없는 들음이다.

이것은 다만 나의 마음과 나의 몸인데, 어째서 ‘일체법의 근원’이라고 하는가?
나의 마음의 끝을 구하는 것은 법계의 끝을 다하는 것이니, 내 몸의 사대四大도 또한 다시 이와 같다.
만약 이와 같다면 오직 나의 몸과 마음인데, 어째서 ‘진실한 선지식’이라고 하는가?
법계의 모든 법은 나의 몸과 마음 아닌 것이 없으니, 모두 수순함을 이름하여 ‘선지식’이라고 한다.
만약 그렇다면 미혹과 깨달음의 다름이 없는데, 무엇을 ‘부처’라고 이름하는가?
둘이 있기 때문에 중생이고 둘이 없기 때문에 곧 자체불이다. 이와 같이 관觀하면 바른 관觀이 된다.

대법계의 연기란, ‘모든 연緣의 근본인 나’는 불보佛寶이고, ‘일체법의 근원인 마음’은 승보僧寶이며, ‘말(語言)이 매우 중요한 근본’인 것은 법보法寶이니, ‘진실한 선지식’이다. 이 대법계 연기의 뜻을 마음에 얻은 사람은 비록 육도六道와 사생四生에 가더라도 결정코 의심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를 자체의 삼보三寶라고 하니, 말하자면 신업身業이 불보이고 구업口業이 법보이며 의업意業이 승보이다. ‘불佛’이란 말하자면 연緣이 합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고, ‘법’이란 일체법이 솟아나오기 때문이며, ‘승僧’이란 일체법 가운데 걸림이 없기 때문이다. 이 부처님을 섬기는 사람은 삼업의 가사를 입으니, 신업은 오조五條이고 구업은 칠조七條이며 의업은 구조九條이다.62) 이러한 세 가사를 모든 곳에서 입으면,

006_0837_a_01L心及我身令相語言也謂將心而
006_0837_a_02L尋身將身而尋心心遍於身
006_0837_a_03L遍於心然名爲語言也相遍故
006_0837_a_04L更無所語何曰語言耶心言時
006_0837_a_05L言以外無所語身言時言以外
006_0837_a_06L無所語是故無言言無聞聞也
006_0837_a_07L此但我心我身何云一切法源耶
006_0837_a_08L求我心邊際盡法界際我身
006_0837_a_09L四大第下之二第一八張 亦復如是
006_0837_a_10L若如是者唯我身心何云眞實
006_0837_a_11L善知識耶法界諸法無不我身
006_0837_a_12L皆順名爲善知識也若尒
006_0837_a_13L無迷悟別何名佛耶有二故衆
006_0837_a_14L無二故即自體佛如是觀者
006_0837_a_15L爲正觀也大法界緣起者諸緣根
006_0837_a_16L本我佛寶一切法源心僧寶語言
006_0837_a_17L大要宗法寶眞實善知識此大法
006_0837_a_18L界緣起義心得人雖往六道四生
006_0837_a_19L決定不疑畏此云自體三寶謂身
006_0837_a_20L業佛寶口業法寶意業僧寶
006_0837_a_21L者謂緣合成故法者一切法湧
006_0837_a_22L出故僧者一切法中無障㝵故
006_0837_a_23L此佛仕人三業袈1) [397] 身業五條
006_0837_a_24L口業七條意業九條如是三袈

006_0837_b_01L이 부처님을 모시는 사람은 오래지 않아 끝까지 참된 법계의 법을 볼 것이며, 다시 보고 보는 곳곳에 세 종류 세간을 갖추어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세 가지 세간이 옳지 않음이 없다.
2. 구래단舊來斷
‘얽매여 있는 유정’부터 ‘뜻에 따라 풀이할 수 있다’까지63)

대기
『대기』에 이른다. ‘얽매여 있는 유정은 아직 번뇌를 끊지 못했고 아직 복덕과 지혜를 이루지 못했는데 무슨 뜻으로 예부터 부처를 이루었다고 하는가?’라는 것은, 이 물음을 일으킨 뜻은 (다음과 같다.) 만약 열 부처님을 기준으로 하면 법계의 모든 법이 부처님 아님이 없다. 그러나 이것은 오늘 우리들은 눈이 먼 범부이니 어떻게 곧 열 부처님일 수 있는가? 이와 같이 힐난한 것이다. 답의 뜻은 망정을 뛰어넘는 법은 망정을 돌이키면 바로 이것인 것이다. 만약 망정을 돌이켜 보면 법계가 두렷이 밝아서 일체중생이 번뇌를 끊어 다하고 복덕과 지혜를 이루어 마치니 어찌 부처님이 아니겠는가? 이와 같이 답한 것이다. 무릇 이와 같이 묻고 답하는 뜻은 저 삼승의 장애를 끊어서 부처를 이루는 뜻에 기대어, 일승의 예부터 부처를 이룸을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본래 번뇌를 끊은 것인가, 본래 번뇌가 움직이지 않음을 아는 것인가?
본래 끊어진 것임을 알 뿐이다. 꿈을 깬 자는 꿈꾸는 사람이 보는 바 오척의 귀신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용된 경 가운데 “번뇌의 법 가운데 한 법도 줄어드는 것을 보지 못한다.”라는 뜻에 어긋나는 것인가?
본래 없으므로 어떻게 ‘줄어드는 것’을 보겠는가?

진수기
『진기』에 이른다. ‘처음도 아니고 중간도 나중도 아니니’란 (다음과 같다.) 세 찰나로 나누어서 끊을 바 장애를 구함이니, 저 첫 찰나에 지혜에 의거하여 장애를 구하면 지혜의 체體 아님이 없어서 (장애를) 끊을 수가 없다. 가운데와 뒤의 (찰나도) 또한 그러하기 때문이다.
‘앞과 가운데와 뒤에서 취하기 때문이다’란, 끊지 아니하되 끊기 때문이다. ‘허공과 같다. 이 같이 끊으므로’란,

006_0837_b_01L*娑*着一切處此佛仕人不久窮
006_0837_b_02L實法界法見也復見見處處三種
006_0837_b_03L世間具得也故三種世間無不是
006_0837_b_04L

006_0837_b_05L
具縛有情 隨義消息大記云具縛
006_0837_b_06L有情未斷煩惱未成福智以何義
006_0837_b_07L舊來成佛耶者起此問意若約
006_0837_b_08L十佛則法界諸法無非是佛然此
006_0837_b_09L今日我等盲冥凡夫何能即是十佛
006_0837_b_10L如是難也答意則超情之法
006_0837_b_11L情即是若反情見法界圓明一切衆
006_0837_b_12L煩惱斷盡福智成竟豈非佛耶
006_0837_b_13L如是答也凡如是問答意者寄彼三
006_0837_b_14L乘斷障成佛之義 第下之二第一九張
006_0837_b_15L欲現一乘舊來成佛也爲是本來
006_0837_b_16L斷煩惱耶爲知本來煩惱不動耶
006_0837_b_17L知本來斷耳以覺者不見夢人所
006_0837_b_18L見五尺鬼故然則違於所引經中
006_0837_b_19L煩惱法中不見一法減之義耶
006_0837_b_20L來無故云何見減

006_0837_b_21L
眞記云非初非中後者分三刹那
006_0837_b_22L所斷障如初刹那擧智求障無非智
006_0837_b_23L不可得斷中後亦爾故也前中
006_0837_b_24L後取故者不斷而斷故也如虛空

006_0837_c_01L만약 지위에 기대어 말하면 허공은 사물이 없는 뜻이기 때문에 끊는 주체와 대상이 없는 것이 허공과 같이 끊음이 된다. 일승을 기준으로 하면 허공은 곁이 없는 뜻이기 때문에 지혜와 장애의 체體가 서로 곁이 없다. 곁이 없음의 뜻으로 허공과 같이 이와 같이 끊음이 될 뿐이다.

법융기
『법기』에 이른다. ‘마치 꿈을 깸(覺)과 꿈을 꿈(夢), 잠을 잠(睡)과 잠을 깸(悟)이 같지 않은 것과 같다’란 (다음과 같다.) 두 사람이 있어서 함께 한 침상에 있음에, 한 사람은 처음부터 잠을 자지 않은 까닭에 세 때에 꿈을 구해도 첫 때에 얻지 못하고 중간과 뒤에도 또한 그러하였으며, 그 다른 한 사람은 밤이 끝나도록 잔 까닭에 세 때에 항상 꿈을 꾼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일승의 장애를 끊고 부처를 이룸을 기준으로 하면, 온전히 남을 자신으로 삼아서 항상 깨어 있는 까닭에 처음부터 잠을 자지 않으며, 온전히 자기를 남으로 삼아서 항상 꿈을 꾸는 까닭에 언제나 항상 깨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삼승의 장애를 끊음은 아직 끊지 않음을 끊는 곳에는 이르지 못하고, 일승은 아직 끊지 않음을 끊는 곳에 이른다. 삼승의 부처님이 끊음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상속 이외의 중생의 장애이고, 일승의 부처님이 끊는 곳에 이름은 자신이 증득한 중생바다(衆生海)의 장애이다. 일체중생이 오늘 발심하여 장애를 끊고 수행하여 증득함은 모든 부처님의 다함없는 문의 덕德이다.

‘그 참된 도리는 모든 법의 실상實相이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으며’란 (다음과 같다.) 중생과 부처님이 이미 하나의 법성의 침상에 함께 있으니, 비록 중생이라고 하여도 모자라거나 남는 것이 없고, 비록 모든 부처님이라고 하여도 보태거나 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법과 이법의 상즉’ 등이란, 앞의 세 구는 즉문이고 뒤의 한 구는 중문이다.
이법과 이법의 상즉은 (이법과 이법) 두 공함이 함께하는가?
함께하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상즉하지 않는가?

006_0837_c_01L如是斷者若寄位云則虛空者無物
006_0837_c_02L義故無能所斷爲如虛空斷也
006_0837_c_03L一乘則虛空者無側義故智與障體
006_0837_c_04L互無側也以無側義爲如虛空如
006_0837_c_05L是斷耳

006_0837_c_06L
法記云猶如覺夢2) [398] 悟不同者如有
006_0837_c_07L二人共在一床一人初初不*
006_0837_c_08L三時求夢初時不得中後亦爾其一
006_0837_c_09L人則竟夜*三時恒夢如是約
006_0837_c_10L一乘斷障成佛則全他爲自而恒覺
006_0837_c_11L初初不* 全自爲他而恒夢故
006_0837_c_12L常常不悟是故三乘斷障者不及斷
006_0837_c_13L於未斷之處一乘及斷未斷之處
006_0837_c_14L乘之佛不及斷者自相續外衆生之
006_0837_c_15L一乘之佛及斷之處是自所訂衆
006_0837_c_16L生海之障也一切衆生今日發心
006_0837_c_17L斷障修訂即是諸佛不盡門德也
006_0837_c_18L實道理諸法實相不增不減者生佛
006_0837_c_19L旣共一法性床第下之二第二○張
006_0837_c_20L云衆生無所3) [399] 雖云諸佛無所
006_0837_c_21L添除故也理理相即等者前三句即
006_0837_c_22L後一句中門也理理相即者
006_0837_c_23L空並耶不並也若爾不相即耶
006_0837_c_24L「娑」作「裟」{乙}次同」作「睡」{乙}次同
006_0837_c_25L
「欠」作「缺」{乙}

006_0838_a_01L
상즉하기 때문에 함께하지 않는다.

대기
『대기』에 이른다. ‘열 부처님과 보현보살의 법계의 집’이란, 곧 위의 법성의 집(法性家)과 법계다라니의 집 등이니, 바로 밖으로 교화함을 기준으로 하여 안으로 증득함을 통틀은 것이다. ‘그 나머지 거스름(逆)과 따름(順), 주主와 반伴이 서로 이룸 등’이란, 거스름은 오열五熱과 아중비(衆鞞)64)이고, 따름은 십바라밀의 바른 수행 등이다. 이것으로써 으뜸으로 삼아 일체 다함없는 법을 통틀어 취하기 때문에 ‘예에 준하여 서로 거두면 뜻에 따라 풀이할 수 있다’라고 한 것이다.
3. 수십전법數十錢法
‘연기를 관觀하고자 한다면’부터 ‘까닭이 전혀 다르다’까지65)

대기
『대기』에 이른다. ‘연기를 관하고자 한다면, 내지 열 개의 동전을 헤아린다’란 (다음과 같다.) 개종開宗이 이르기를, “열 개의 동전을 세는 법(數十錢法)은 집착의 병을 다스리는 제일의 약이고 걸림 없는 덕을 이루는 가장 수승한 문이다.”66)라고 하였다. 풀이하면 혹 이 동전 세는 법을 체달하는 자는 날마다 쓰는 모든 경계에서 듣고 보는 바에 따라서 취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으니, 하나하나의 털구멍과 하나하나의 티끌에서 일체의 부처님을 보고 일체의 법을 듣는다.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움직이며 다리를 올리고 다리를 내림의 무릇 베풀어 행하는 바가 구경 아님이 없어서 부처님의 일을 만족시킨다. 그러므로 ‘병을 다스리는 제일의 약이고 덕을 이루는 가장 수승한 문이다’라고 한 것이다.

고기

‘고기’에 이른다. 운화 존자가 이르기를, “하나의 누각이 있으니 안의 장엄은 일승이고 밖의 장엄은 삼승이다. 여기에 문이 있으니 ‘깨달음의 문’이라고 이름한다. 보리수를 향해 있으나 모든 중생의 망상과 번뇌(纏縛)가 이 문을 막아서, 이러함을 말미암은 까닭에 일승의 진귀한 보배장엄을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천친보살이 육상의 열쇠로 이 문을 열어 보였으나 천축 사람들이 육상을 이해하지 못한 까닭에 그 익숙한 실담장의 총지법으로 가르쳐서 보인 것이다. 이상.67)라고 하였다.

006_0838_a_01L相即故不並也

006_0838_a_02L
大記云十佛普賢法界宅者即上法
006_0838_a_03L性家及法界陁羅尼家等正約外化
006_0838_a_04L而通內訂也其餘逆順主伴相成等
006_0838_a_05L逆則五熱衆鞞順則十度正行等
006_0838_a_06L以此爲首通取一切無盡之法
006_0838_a_07L故云准例相攝隨義消息

006_0838_a_08L
欲觀緣起至逗留全別大記云若欲
006_0838_a_09L觀緣起乃至數十錢者開宗云
006_0838_a_10L十錢法治執1)着病之2)弟一藥成無
006_0838_a_11L㝵德之最勝門也解云若得體達此
006_0838_a_12L數錢之法者於諸境界日用之中
006_0838_a_13L所聞見不取不*着一一毛孔一一塵
006_0838_a_14L見一切佛聞一切法起心動念
006_0838_a_15L擧足下足凡所施爲無非究竟滿足
006_0838_a_16L佛事故云治病之*弟一藥成德之最
006_0838_a_17L勝門也

006_0838_a_18L
古記云雲華尊者曰有一樓觀
006_0838_a_19L內莊一乘外嚴三乘此中有門
006_0838_a_20L名曰覺門向菩提樹而諸衆生
006_0838_a_21L妄想纒縛以障此門由如是故
006_0838_a_22L不見一乘珍寶莊嚴是故天親菩
006_0838_a_23L以六相鑰匙示開此門而天
006_0838_a_24L竺人未解六相故以其所習悉曇

006_0838_b_01L동쪽 땅의 사람들은 또 그 실담장의 총지법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이런 까닭에 운화 존자가 그 익숙한 동전 세는 법으로 가리켜 보인 것이다.

이 실담장과 동전 세는 비유는 성스러운 가르침 중에 있는가, 없는가?
있다. 말하자면 실담의 비유는 「십지품」에서 설하고,68) 수를 세는 법의 비유는 제4회의 정진림보살의 게송에 이르기를, “비유하면 수를 세는 법과 같으니 하나에서 늘어나 무량에 이른다. 수를 세는 법은 체성이 없으니 지혜인 까닭에 차별하다.”69)라고 한다.

이 동전 가운데 무엇이 변계이며 무엇이 인연인가?
이와 같은 열 개의 동전이 첫 번째, 두 번째 내지 열 번째가 모두 자성이 있기 때문에 하나를 취하면 하나가 없고 둘을 취하면 둘이 없는 것 등은 변계의 동전이다. 인연의 동전은 이 하나의 동전의 지위가 중문과 즉문을 갖추었기 때문에, 만약 나머지 아홉 개가 없으면 곧 이 하나의 동전도 또한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러므로 이 하나의 동전이 곧 다함없는 하나이다.

이 열 개 동전의 비유로써 어린이처럼 몽매한 이(童蒙)를 처음 인도하는 방편은 무엇인가?
의상 화상이 어린이처럼 몽매한 이에게 가르쳐 일렀다. “너는 먼저 열 개의 동전을 세로로 나열해 보아라.” 그 사람이 지시에 따라서 세로로 나열하니, 의상 화상이 말씀하였다. “이 열 개의 동전이 자성의 열인가, 연기로서 자성이 없는 열인가?” 그 사람이 아뢰었다. “이 동전은 실로 자성의 열입니다.” 의상 화상이 말씀하였다. “그런 말을 하지 말라. 이 열은 이에 연緣으로 이루어진 열인 까닭에 하나하나가 열을 갖추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어리석은 사람은 아직 이 뜻을 깨닫지 못하니,

006_0838_b_01L章摠持之法 [228] 誨示也已上 東土之
006_0838_b_02L第下之二第二一張 又不解其
006_0838_b_03L悉曇章摠持之法是故雲華尊者
006_0838_b_04L以其所習3) [400] 錢之法而指示也
006_0838_b_05L此悉曇章及數錢之喩於聖敎中
006_0838_b_06L有耶無耶有之也謂悉曇之
006_0838_b_07L十地品中說之數法之喩 *弟四
006_0838_b_08L會精進林菩薩頌曰比如筭數法
006_0838_b_09L增一至無量數法無體性智惠故
006_0838_b_10L差別此錢之中何是遍計
006_0838_b_11L是因緣耶如是十錢 *弟一
006_0838_b_12L*弟二乃至*弟十皆有自性故
006_0838_b_13L取一則無一取二則無二等者
006_0838_b_14L遍計錢也因緣錢者此一錢位
006_0838_b_15L中即故若無餘九即此一錢
006_0838_b_16L不得成是故此一錢即是無盡之
006_0838_b_17L一也

006_0838_b_18L
以此十錢之喩初導童蒙方便
006_0838_b_19L云何和尙告童蒙曰汝先竪
006_0838_b_20L列十錢其人應命竪列和尙曰
006_0838_b_21L此十錢爲是自性十耶爲是緣起
006_0838_b_22L無性十耶其人白云此錢實是自
006_0838_b_23L性十也和尙曰莫作是說此十乃
006_0838_b_24L是緣成十故一一具十耳然其迷

006_0838_c_01L의상 화상이 가르쳐 일렀다. “만약 이 열 개의 동전이 모두 자성의 열 개 동전이라면 너는 마땅히 그것을 세어 보아라.” 어리석은 사람이 지시에 따라서 그 동전을 세어서 “하나, 둘,……열”이라고 하였다.

그때에 의상 화상이 첫 번째 하나의 동전을 치워 버리고 물었다. “몇 개가 있는가?” (어리석은 사람이) 아뢰었다. “다만 아홉 개가 있을 뿐입니다.” 의상 화상이 말씀하였다. “너는 다시 세어 보아라.” 그 사람이 세어서 “하나, 둘,……아홉”이라고 하였다. 의상 화상이 말씀하였다. “너는 전에는 이미 말하기를 ‘이 열이 결정코 자성의 열이다’라고 했는데, 어째서 너는 이전의 두 번째 (동전)으로 첫 번째를 삼고 내지 이전의 열 번째로 아홉 번째를 삼는가?” (그 사람이) 아뢰었다. “화상이 하나의 동전을 치워 버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에 화상이 다시 하나의 동전을 놓고는 물었다. “몇 개가 있는가?” (그 사람이) 답하였다. “열 개가 있습니다.” 화상이 말씀하였다. “너는 마땅히 다시 세어 보아라.” 그 사람이 지시를 받들어 다시 그것을 세어서, “하나, 둘 내지 열”이라 하고는 아뢰었다. “화상이 하나의 동전을 치워 버렸을 때는 두 번째로 첫 번째를 삼았으나 화상이 다시 하나의 동전을 놓으니 또한 다시 첫 번째로써 두 번째 등을 삼았습니다. 그러므로 자성의 열이 아닙니다. 마땅히 하나를 말미암아 열이 있고 열을 말미암아 하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하나가 연기로서 자성이 없을 뿐입니다.”

법융기
『법융(기)』에 이른다. ‘첫 번째는 위로 향하여 옴(向上來)’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다.) 어떤 이는 “이 문의 첫 번째 동전은 다만 감(去)의 뜻만 있고 옴(來)의 뜻은 없으며, 열 번째 동전에는 다만 옴의 뜻만 있고 감의 뜻은 없다.”라고 한다. 어떤 이는 “이와 반대이다. 말하자면 첫 번째 동전이 힘이 있으면 열 동전을 가지고 오기 때문에 ‘옴’이라고 하고,

006_0838_c_01L未會此意和尙吿曰若此十
006_0838_c_02L悉是自性十箇錢者汝當數之
006_0838_c_03L迷人應命數其錢云一二乃至十
006_0838_c_04L爾時和尙去却*弟4)一一 [401]
006_0838_c_05L有幾耶 5) [402] [229] 只有九耳和尙曰
006_0838_c_06L汝可更數其人數云一二乃至九
006_0838_c_07L和尙曰汝前旣云此十定是自性
006_0838_c_08L之十何故汝令以前*弟二爲*弟
006_0838_c_09L第下之二第二二張 乃至前十爲
006_0838_c_10L九耶白云由和尙去却一錢故爾
006_0838_c_11L於是和尙還置一錢問有幾何
006_0838_c_12L答有十也和尙曰汝應復數
006_0838_c_13L人承命復數之云一二乃至十
006_0838_c_14L和尙去却一錢時以*弟二爲
006_0838_c_15L*弟一等和尙還置一錢亦得復
006_0838_c_16L以*弟一爲*弟二等然則非自性
006_0838_c_17L應是由一有十由十有一是故
006_0838_c_18L一一緣起無性耳

006_0838_c_19L
法融云一者向上來者一云此門初
006_0838_c_20L但有去義無來義 *弟十錢中
006_0838_c_21L但有來義無去義一云反此也
006_0838_c_22L初錢有力將十錢來故云來 *弟十
006_0838_c_23L「着」作「著」{乙}次同「弟」作「第」{乙}次同
006_0838_c_24L
「數」作「敎」{乙}脚註曰一一疑二{乙}「曰」
006_0838_c_25L作「白」{乙}

006_0839_a_01L열 번째 동전이 힘이 있으면 열 동전을 가지고 가기 때문에 ‘감’이라고 한다.”라고 한다.

‘근본수(本數)’라는 것은,
‘근본의 하나(本一)’가 ‘근본수(本數)’와 어떻게 다른가?
지위를 주지 않았을 때에는 ‘하나’를 부르면 열 개가 모두 응하여 “나도 하나이다.”, “나도 하나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첫 번째 내지 열 번째 등의 지위를 줄 때, 첫 번째의 하나가 본래 하나이기 때문에 첫 번째의 지위를 주는 까닭에 ‘근본수인 하나’라고 하는 것이다. 또 열을 세는 것의 처음 하나이기 때문에 ‘근본의 하나’라고 한다.

대기
『대기』에 이른다. ‘첫째는 하나이다. 내지 곧 근본수이다’에서,
첫 번째 하나가 ‘근본법’이라는 이름을 받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부처님이 스스로 증득하신 법은 하나나 둘이라는 말을 여의어서 자성을 고수하지 않고 연緣을 따라 이룰 때, 만약 ‘하나’를 부르면 온 법계가 하나이다. (그러나) 이미 지위를 주어서 이르기를 ‘하나이다, 둘이다, 내지 열이다’라고 하는 까닭에, 첫 번째 하나가 근본법이라고 일컬어지는 이름을 받는다고 하는 것이다.

이미 가로로 열 개의 동전을 나열하고, 내가 드는 바를 따라서 첫 번째로 삼아 세기 때문에 열 개가 모두 근본수인가?
이미 드는 바를 따라서 첫 번째로 삼아 세어야 비로소 근본수가 된다. 드는 바를 따름을 말미암아서 차례로 두 번째, 세 번째 등의 이름을 받기 때문에 지말수(末數)이다.

만약 이 (의상) 화상이 하나로 근본을 삼으면, 경 가운데 “비유하면 열을 세는 법과 같으니, 모두 다 근본수이다.”70)라는 문장을 어떻게 회통하는가?
이 하나의 열이기 때문에 열을 든 것뿐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열이기 때문에 열이 모두 하나이다. 따라서 “모두 다 근본수이다.”라고 한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마땅히 열이 모두 근본수이어야 하는데, 어째서 그렇지 않은가?
그 지위를 줄 때에 이미 ‘둘’, ‘셋’ 등이라고 한 까닭에 오직 첫 번째 하나만 근본수이다. 그러나 그 열이 하나의 열이기 때문에 모두 근본수이다.

006_0839_a_01L錢有力將十錢1) [403] 故云去也本數
006_0839_a_02L本一與本數何別位不授時
006_0839_a_03L呼一則十皆應2) [404] 吾亦一吾亦
006_0839_a_04L故授3)弟一乃至*弟十等位時
006_0839_a_05L*弟一之一本是一故授*弟一位
006_0839_a_06L故云本數一也又以數十之初一故
006_0839_a_07L云本一也

006_0839_a_08L
大記云一者一乃至即是本數者
006_0839_a_09L何知初一受本法名耶佛自訂法
006_0839_a_10L離一二詮而不守自性隨緣成時
006_0839_a_11L呼一則全法界是一也旣授位云一
006_0839_a_12L也二也乃至十也故云初一得受
006_0839_a_13L稱本法名也旣橫列十錢隨我所
006_0839_a_14L爲初而數故十皆本數耶
006_0839_a_15L隨所擧爲初而數方爲本數由隨
006_0839_a_16L所擧次*弟受二三等名故是末數也
006_0839_a_17L若此和尙以一爲本則經中比如
006_0839_a_18L數法第下之二第二三張 十皆悉是本
006_0839_a_19L數之文如何通耶是一之十故
006_0839_a_20L擧十耳是故一之十故十皆是一
006_0839_a_21L故云皆悉是本數也若爾應是十
006_0839_a_22L皆本數何不爾耶授其位時
006_0839_a_23L云二三等故唯初一是本數也然而
006_0839_a_24L其十是一之十故皆是本數也

006_0839_b_01L
법융기
『법융(기)』에 이른다. ‘곧 생겨나되 생겨나지 않고’ 등이란, ‘곧 생겨나되’는 무명의 인연으로 행行의 결과가 생겨나기 때문에 ‘곧 생겨나되’이다. 생겨남에 묶여 있는 것을 설하는 것은 ‘생겨나지 않고’이다. ‘생겨나지 않되 생겨남’이란, 무명이 멸하기 때문에 행行이 멸한다는 것은 ‘생겨나지 않되’이다. 멸함에 묶여 있는 것을 설하는 것은 ‘생겨남’이다. ‘머무르지 않음의 뜻’이란, 또한 하나의 티끌이 자기의 자리에 머무르지 않음을 기준으로 하여 법계를 다하는 것이니, 기준으로 하고 기준으로 하는 것이 모두 그렇기 때문이다. ‘중도의 뜻’이란, 듦을 따라서 곁이 없기 때문이다.

대기
『대기』에 이른다. ‘자재하지 않다’란, 자기가 공하다는 뜻이다. ‘곧 생겨나되 생겨나지 않고 생겨나지 않되 생겨남이다’란 두 가지 뜻을 포함하고 있다. 첫째, ‘생겨나되 생겨나지 않음’은 중생과 부처님의 법이 없는 증분이다. ‘생겨나지 않되 생겨남’은 연기분이다. 둘째, 연기분에 나아가서 ‘생겨나지 않음’은 연기관이니 힘이 없어서 생겨남이 없기 때문이다. ‘생겨남’은 인연관이니 힘이 있어서 생겨남이 있기 때문이다. ‘용수가 이르기를, 인연으로 생겨난 법’ 등이라는 것은 두 가지 해석이 있다. 어떤 이는, 처음 세 구는 동교이고 뒤의 한 구는 별교라고 한다. 어떤 이는, ‘곧 공이다’는 연기관이고, ‘가명이다’는 인연관이고, ‘중도의 뜻’은 성기관이라고 한다.

법융기
『법융(기)』에 이른다. ‘무분별’이란 이 열 개의 동전 가운데 매 하나하나의 동전이 듦을 따라 곁이 없어서 표시하여 가리킬 수 없기 때문이다. ‘자성을 고수하지 않는다’란 둘이 자성을 고수하지 않고 셋과 넷과 열도 또한 자성을 고수하지 않고 하나의 체體를 이루기 때문에 ‘연緣을 따른다’라고 하니, 그러므로 ‘머무르지 않는다’라고 한다.

‘하나의 일(一事)로써 하나의 많음을 변별한다’란 (다음과 같다.) 하나를 말미암아 열이 있기 때문에 만약 그 하나를 취해 버리면 둘과 셋 내지 열이 다 이루어지지 않으므로, ‘하나’를 부를 때 열이 모두 대답하기를, ‘나도 하나다’, ‘나도 하나다’라고 한다. 하나의 많음이기 때문에 ‘하나의 많음을 변별하는 까닭에 곧 다함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006_0839_b_01L
法融云即生不生等者即生者
006_0839_b_02L明因緣行果生故即生也生縛說者
006_0839_b_03L不生也不生生者無明滅故行滅
006_0839_b_04L則不生也滅縛說者生也不住義者
006_0839_b_05L且約一塵不住於自位盡於法界
006_0839_b_06L約約皆然故也中道義者隨擧無側
006_0839_b_07L故也

006_0839_b_08L
大記云不自在者自己空義也
006_0839_b_09L生不生不生生者含有二意一生不
006_0839_b_10L生者無生佛法之訂分也不生生者
006_0839_b_11L緣起分也二就緣起分不生者緣
006_0839_b_12L起觀無力無生故生者因緣觀有力
006_0839_b_13L有生故龍樹云因緣所生法等者
006_0839_b_14L有二釋一云初三句同敎後一句別
006_0839_b_15L敎也一云即是空者緣起觀是假
006_0839_b_16L名者因緣觀中道義者性起觀也
006_0839_b_17L法融云無分別者此十錢中每一
006_0839_b_18L一錢隨擧無側不可摽指故也
006_0839_b_19L守自性者二不守性三四及十
006_0839_b_20L不守自成一之體故云隨緣故云不
006_0839_b_21L住也以一事辨一多者由一有十故
006_0839_b_22L若取其一則二三乃至十皆不成故
006_0839_b_23L呼一之時十皆口許吾亦一吾亦一
006_0839_b_24L以一之多故云辨一多故即盡也

006_0839_c_01L
‘다른 일(異事)로써 하나의 많음을 변별한다’ 등이란, ‘둘’을 부를 때 열이 모두 대답하되, ‘나는 둘이다’ 등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일로써 하나의 많음을 변별하는 까닭에 다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둘로써 열을 다하고, 셋으로써 열을 다하고, 내지 열로써 열을 다하는 것이 다 첫 번째 하나의 동전의 다하지 않는 덕德이다.

둘의 일(二事)로써 둘의 많음을 변별하는 것은 두 번째 동전의 다함이다. 이 두 번째 (동전)의 다하지 않음은 무엇인가?
하나의 일로써 하나의 많음을 변별하고, 셋의 일로써 셋의 많음을 변별하는 것 등은 모두 두 번째 (동전)의 다하지 않음이다.
법장 스님이 이르는 바 ‘하나 가운데 열이기 때문에 다한다’71)의 하나가 ‘열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에 다하지 않는다’72)의 하나와 어떻게 다른가?
같다.

만약 그렇다면 무슨 까닭에 열 가운데 하나가 다하지 않음인가?
하나 가운데 열을 갖추니, 그러므로 ‘하나 가운데 열이기 때문에 다한다’라고 한다. 열을 갖춘 하나는 다만 첫 번째의 하나가 되어서 열을 다할 뿐이고, 두 번째, 세 번째 내지 열 번째가 되어서 열을 다하는 것이 아닌 까닭에, ‘열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에 다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 가운데 열의 하나는 둘을 갖추고 셋을 갖추고, 내지 열을 갖춘 하나이다. 열 가운데 하나의 하나는 둘이 되어서 열을 거두지 못하며, 셋이 되어서 열을 거두지 못하며, 내지 열이 되어서 열을 거두지 못하는 하나이다.

대기
『대기』에 이른다.
‘하나의 일(一事)로써 하나의 많음을 변별’하는 것은 열 동전에 통하는가?
그렇다. 말하자면 동전의 체體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이다. 또 지위에 따라서 말하면 둘의 일(二事)로써 둘의 많음을 변별하는 것 등도 또한 가능하며, 다른 문도 예에 따라 그러하니 말하자면 동전의 지위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동전의 체體를 기준으로 하여 말한 것이다.

006_0839_c_01L第下之二第二四張 以異事辨一多等
006_0839_c_02L呼二之時十皆口許我是二等
006_0839_c_03L故云以異事辨一多故不盡也謂以
006_0839_c_04L二盡十以三盡十乃至以十盡十
006_0839_c_05L皆初一錢之不盡德也以二事辨
006_0839_c_06L二多者是*弟二錢之盡也此*弟二
006_0839_c_07L之不盡何耶以一事辨一多
006_0839_c_08L三事辨三多等皆是*弟二之不盡也
006_0839_c_09L藏師所云一中十故盡之一與十
006_0839_c_10L中一故不盡之一何別同也
006_0839_c_11L若爾何故十中一則不盡耶一中
006_0839_c_12L具十故云一中十故盡也具十之一
006_0839_c_13L但爲*弟一之一而盡十不爲*弟二
006_0839_c_14L*弟三乃至*弟十而盡十故云十中
006_0839_c_15L一故不盡也謂一中十之一者具二
006_0839_c_16L具三乃至具十之一也十中一之一
006_0839_c_17L不能爲二攝十不能爲三攝十
006_0839_c_18L乃至不能爲十攝十之一也

006_0839_c_19L
大記云以一事辨一多者通十錢
006_0839_c_20L爾也謂約錢體故又隨位云
006_0839_c_21L以二事辨二之多等亦得餘門例爾
006_0839_c_22L謂約錢位故此中約錢體云也此中
006_0839_c_23L「去」作「云」{乙}「口」無有{乙}「弟」作「第」
006_0839_c_24L{乙}次同

006_0840_a_01L이 가운데 ‘다른 일(異事)로써’ 등은 (다음과 같다.) 변계의 사람으로 하여금 인연을 익히게 하려는 까닭에 나열된 지위의 이구지離垢地 등의 다른 일을 기준으로 한다. 만약 인연의 사람으로 하여금 연기를 익히게 한다면 하나하나가 열을 갖추기 때문에 그 환희지歡喜地가 갖춘 열 가운데의 이구지 등을 기준으로 하여 다른 일로써 삼을 뿐이고, 나열된 지위의 이구지 등을 기준으로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래에서 또 해석하는 중에 하나의 문을 기준으로 하여 다함과 다하지 않음을 변별한 것이다.73) 그러므로 처음의 뜻을 기준으로 하면 다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하지 않음이고, 나중의 뜻을 기준으로 하면 다함이 없기 때문에 다하지 않음이다.74)

‘다른 일로써’는 다만 환희지가 갖춘 이구지 등일 뿐이고, 나열된 지위의 이구지가 아님을 어떻게 아는가?
법장 스님이 이르기를, “() 다만 자기의 하나의 문의 다함없음만을 거두는가, 또한 나머지 다른 문의 다함없음도 거두는가? 혹은 함께 거두고 혹은 다만 자기 하나의 문의 다함없음만을 거둔다. 무슨 까닭인가? 만약 자기 하나의 문의 다함없음이 없다면 나머지 일체 문 중의 다함없음도 모두 다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첫 문의 동체同體가 곧 동체와 이체異體 두 문 중의 다함없음과 다함없음을 거두어 그 원만한 궁극의 법계를 다하여 거두어 다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이상.75)라고 하였다. 옛 스님이 이르기를, “‘나머지 다른 문’이란 위에서 이른 하나의 문에 이미 열이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열이 다시 스스로 상즉상입하여 거듭거듭 다함없음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거둔 바를 기준으로 하여 나머지 다른 문을 삼는 까닭에 나열된 지위의 이구지가 아님을 안다.

법융기
『법기』에 이른다. ‘또 하나의 일 가운데의 뜻은 상즉(相是)하지 않으니 곧 많음이고’ 등이란, 어떤 이는 “이것은 이 가운데 다함과 다하지 않음의 뜻이다.”라고 한다. 그러나 첫 다함의 구절 가운데 ‘하나의 많음’의 뜻을 거듭 풀이한 것일 뿐이다.
‘네 구절로 잘못을 막고’ 등이란,
만약 하나라고 집착하면 어떤 허물이 있는가?
단斷과 상常의 허물이다. 말하자면 열이 있어야 비로소 하나가 있는데 열이 없이 하나를 말하는 것은 단斷이다.

006_0840_a_01L以異事等者令遍計人習因緣故
006_0840_a_02L約列位之離垢等異事若令因緣人
006_0840_a_03L習緣起則以一一具十故約其歡喜
006_0840_a_04L所具十中離垢等爲異事耳不約
006_0840_a_05L列位之離垢等也故下又釋中約一
006_0840_a_06L門辨盡不盡是故約初義則不能盡
006_0840_a_07L故不盡也約後義則以無盡故不盡
006_0840_a_08L問何知以異事者但是歡喜所具
006_0840_a_09L離垢等耳非列位之離垢耶答藏師
006_0840_a_10L第下之二第二五張 爲但攝自一門
006_0840_a_11L無盡 [230] 1) [405] [231] 爲亦攝餘異門無盡耶
006_0840_a_12L或俱攝或但攝自一門無盡何以故
006_0840_a_13L若無自一門無盡餘一切門中無盡
006_0840_a_14L皆悉不成是故初門同體即攝同異
006_0840_a_15L二門中無盡無盡 [232] 窮其圓極法界
006_0840_a_16L不攝盡已上 古德云餘異門者
006_0840_a_17L云一門中旣有十然此十復自相即
006_0840_a_18L重重成無盡也是故約自所攝爲
006_0840_a_19L餘異門故知非是列位之離垢也

006_0840_a_20L
法記云又一事中義不相是即是多
006_0840_a_21L等者有云此是此中盡不盡義也
006_0840_a_22L重釋初盡句中一多之義耳四句護
006_0840_a_23L過等者若執爲一有何過耶
006_0840_a_24L常過也謂有十方有一無十謂一

006_0840_b_01L열이 없이 하나에 집착하기 때문에 상常이다.

‘틀림을 제거하여’란, 하나인가? 아니다. 하나가 곧 열이기 때문이다. 열인가? 아니다. 열이 곧 하나이기 때문이다.
하나이기도 하고 열이기도 한가? 아니다. 서로 어긋남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하나도 아니고 열도 아닌가? 아니다. 희론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덕을 나타내니’란 하나인가? 그렇다. 열이 곧 하나이기 때문이다. 열인가? 그렇다. 하나가 곧 열이기 때문이다. 하나이기도 하고 열이기도 한가? 그렇다. 둘이 존재하는데 걸림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도 아니고 열도 아닌가? 그렇다. 상대를 끊고 모습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다른 일 또한 준하여 같다’란, 첫 번째 동전에서 다함과 다하지 않음 그리고 네 구절로 잘못을 막음 등을 논한 것과 같이, 두 번째 동전 등에서도 또한 그러하니 준하여 알 수 있다.

‘구함(須)이란 연緣으로 이루어진다는 뜻’은 (다음과 같다.) 어떤 곳에서는 연緣은 구함의 뜻이고 구함은 남(他)이 없다는 뜻이라고 하며, 어떤 곳에서는 구함은 연緣의 뜻이고 연緣은 남(他)이 없다는 뜻이라고 한다.
‘첫 번째는 위로 향하여 가고(向上去) 두 번째는 아래로 향하여 온다(向下來)’란 (다음과 같다.) 오직 첫 하나의 동전 전체가 둘이 되며, 내지 열이 되기 때문에 ‘향하여 간다’라고 할 뿐이지, 가지고 감을 기준으로 해서 ‘간다’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열로부터 하나를 향하여 전체로서 오기 때문에 온다고 할 뿐이지, 가지고 옴을 기준으로 해서 ‘온다’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이 즉문은 형체를 빼앗는 문인 까닭에 그 자체의 가고 오는 뜻을 기준으로 하여 ‘감’이고 ‘옴’이라고 할 뿐이다. 앞의 중문은 모습을 따르는 뜻인 까닭에 가지고 오고 가지고 가는 뜻을 기준으로 하여 ‘간다’, ‘온다’라고 하는 것이다.

‘자기 자리를 움직이지 아니하되 항상 오고 간다’란,
앞의 중문은 곧 힘의 문(力門)이기 때문에 ‘움직이지 않는다’라고 할 수 있으나, 이 즉문은 체體의 문이기 때문에 자리가 움직이는 문이다. 어떻게 ‘자신의 자리를 움직이지 않는다’라고 할 수 있는가?
비록 이르기를, “하나가 곧 둘이다. 하나가 곧 셋이다. 내지 하나가 곧 열이다.”라고 하지만, ‘하나’라는 이름을 버리지 않고서

006_0840_b_01L斷也無十而執一故是常也去非
006_0840_b_02L一耶不也一即十故
006_0840_b_03L不也十即一故亦一亦十耶
006_0840_b_04L不也離相違故非一非十耶不也
006_0840_b_05L離戱論故現德者一耶是也十即
006_0840_b_06L一故十耶是也一即十故亦一亦
006_0840_b_07L十耶是也雙存無㝵故非一非十
006_0840_b_08L是也絕待離相故異事亦准同
006_0840_b_09L2)弟一錢論盡不盡及以四句
006_0840_b_10L護過等 *弟二錢等亦爾准知也
006_0840_b_11L者緣成義者或處云緣者須義
006_0840_b_12L者無他義或處云須者緣義緣者
006_0840_b_13L無他義也一者向上去二者向下來
006_0840_b_14L唯初一錢擧體爲二乃至爲十
006_0840_b_15L云向去耳第下之二第二六張 非約
006_0840_b_16L將去云去也從十向一擧體而來
006_0840_b_17L云來耳非約將來云來也謂此即門
006_0840_b_18L是形奪門故約其自體去來之義
006_0840_b_19L去來耳前中門是相順義故約將來
006_0840_b_20L將去之義云來去也自位不動而恒
006_0840_b_21L來去者前中門則是力門故
006_0840_b_22L云不動此即門者是體門故位動
006_0840_b_23L門也何云自位不動耶雖云一
006_0840_b_24L即二一即三乃至一即十而不捨

006_0840_c_01L열 번째 동전에 이르기 때문에 “자기 자리를 움직이지 아니하되 오고 간다.”라는 것이다.

대기
『대기』에 이른다. ‘오고 감이란 연緣을 따른다는 뜻이니 곧 인연의 뜻이다. 움직이지 않음이란 근본을 향하는 뜻이니 곧 연기의 뜻이다’란 (다음과 같다.) 법장 스님이 이르기를, “가고 옴과 움직이지 않음은 곧 하나의 사물이기 때문이다. 이상.76)라고 하였다. 각각 한 뜻을 나타내기 때문에 또한 서로 허용한다. 평등하여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연기라고 이름한다. 그러므로 ‘근본을 향하는 뜻이니 곧 연기의 뜻이다’라는 것이다.

법융기
『법융기』에 이른다. ‘인因과 연緣이 서로 바라보아’ 등이란 (다음과 같다.) 인연의 동전은 하나하나가, 힘이 있어서 생겨나게 할 수 있는 온전한 힘을 서로 빌려서 열 개의 동전을 이룬다. 연기의 동전은, 힘이 없어서 생겨남이 없는 공空의 힘을 빌려서 열 개의 동전이 있다. 만약 힘이 없어서 생겨남이 없는 공空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연緣이 흩어지면 곧 없고 연緣이 모이면 곧 있다. 성기의 동전은 자체가 공空하기 때문에 연緣이 모이고 연緣이 흩어짐에 늘거나 줄어들지 않는다.

대기
『대기』에 이른다. ‘우선 변계遍計인 현상(事)의 동전에 의지하여 의타依他인 인연과 연기의 동전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또한 가리킴에 의지하여 보일 수는 있으나 연으로 생겨난’ 등에서, 첫 구절은 변계의 동전에 의거하여 인연과 연기의 동전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에 동전으로써 비유를 삼은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삼성의 차례대로 변계의 사물에 의거하여 의타의 법을 나타내고 의타의 법을 기준으로 하여 인연과 연기 등을 나타내는 것이다. 뒤 구절의 뜻은 동전으로써 설명을 한 것이다.

어떤 이는 이른다. 처음은 다시 얕은 곳에서부터 깊은 것을 나타내니, 문장과 같이 알 수 있다. ‘또한 (가리킴을) 의거하여’ 아래에서는 이 세는 법을 밝힌 까닭이

006_0840_c_01L一名至*弟十錢故云自位不動而來
006_0840_c_02L去也

006_0840_c_03L
大記云來去者隨緣義即是因緣
006_0840_c_04L不動者向本義即是緣起義者
006_0840_c_05L藏師云去來不動即一物故已上
006_0840_c_06L現一義故亦互許也平等不起故名
006_0840_c_07L緣起故云向本義即是緣起義也

006_0840_c_08L
法融記云因緣相望等者因緣錢者
006_0840_c_09L一一相資有力能生之全力而成十
006_0840_c_10L緣起錢者資無力無生之空力
006_0840_c_11L而有十錢若不資無力無生之空力
006_0840_c_12L則不立故緣散即無緣集即有
006_0840_c_13L起錢者自體空故緣集緣散不增減
006_0840_c_14L

006_0840_c_15L
3) [406] 記云且依遍計事錢現示依他
006_0840_c_16L因緣緣起錢也亦可依指示緣生等
006_0840_c_17L初節則依遍計錢現示因緣緣起
006_0840_c_18L錢故不以錢爲喩也謂如三性次
006_0840_c_19L*弟依遍計事現依他法約依他法
006_0840_c_20L因緣緣起等也後節意則以錢爲詮
006_0840_c_21L一云初復次從淺現深如文可知
006_0840_c_22L第下之二第二七張 亦可依下所以
006_0840_c_23L「即」作「耶」{乙}「弟」作「第」{乙}次同「大」
006_0840_c_24L作「六」{乙}

006_0841_a_01L미혹하고 어리석은 이를 깨우치게 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거듭 해석하여 이르기를, 연緣으로 생겨난 법은 자성이 없으며 이름과 모습을 여의었기 때문에 끝내 얻을 수 없음을 바로 가리켜 보인 것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또한 변계의 사물에 집착하여 연기의 법에 미혹한 사람이 이해하는 열 개의 동전에 의거하여서 세는 법을 나타낸 것이 위에서 밝힌 바 모습을 여읜 법과 까닭이 전혀 다르다. 말하자면 또한 이 세속에서 아는 바 동전 세는 법도 오히려 이와 같이 매우 깊고 현묘한데 하물며 저 성스러운 지혜로 깨닫는 바인 말을 여의고 모습을 끊은 법이겠는가? 이와 같이 나타낸 것이다. 다만 ‘의依’의 글자가 앞에 있기 때문에 문장의 모습이 벼줄기의 끝과 같아서 숨어 있을 뿐이다. ‘두류逗留’란 일의 까닭(事由)이다.

남악관공기

『남악관공기』에 이른다. 동전에는 일곱 가지가 있다. 말하자면 변계ㆍ의타ㆍ인연ㆍ연기ㆍ성기ㆍ무주ㆍ실상이다.
첫째, 변계의 동전에 둘이 있으니 범부와 이승이 보는 바이다. 범부는 단지 이 동전이 모나고 둥근 모습만 볼 뿐 사대四大와 사진四塵77)이 합하여 이루어진 것인지는 보지 않는다. 또한 다만 하나이고 둘이 아니며 셋이 아니라는 등의 차별된 모습만을 볼 뿐 끝내 동전에 자성이 없음을 보지 않는다. 이승은 점차 임시로 모인 공空의 모습을 보지만 이 또한 오히려 변계의 동전일 뿐이다. 이승이 비록 사상四相78)을 보더라도 아직 법공法空의 이치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상을 함께 변계의 동전이라고 이름한다.

삼승의 사람은 이 동전이 다른 인연을 의지하여 일어나니 일어날 때 생겨남이 없음을 비로소 이해하기 때문에 의타라고 이름하지만, 인연에 가까움과 멂의 둘이 없음을 아직 이해하지 못한다.

일승에 나아가서 이 인연에 가까움과 멂이 없음을 밝히기 때문에 인연의 동전이라고 이름한다. 그러나 앞의 병을 따라서 그 병을 다스리기 때문에 인연이라고 이름할 뿐이다. 삼승도 가까움과 멂이 없는 뜻을 부분적으로 설하지만, 그러나 지금은 일승이 가까움과 멂에 둘이 없는 뜻을 바로 밝히는 것이다.

006_0841_a_01L明此數法者欲解迷愚故重釋云
006_0841_a_02L直指示緣生之法無有自性離名相
006_0841_a_03L故終不可得是故且依執遍計物
006_0841_a_04L迷緣起法者之所解十錢以現數法
006_0841_a_05L與上所明離相之法逗留全別
006_0841_a_06L且此世俗所知數錢之法尙能如是
006_0841_a_07L甚深玄妙況彼聖智所訂離言絕相
006_0841_a_08L之法乎如是現也但依字在前故
006_0841_a_09L文相稍似隱耳逗留者事由也

006_0841_a_10L
南岳觀公記云錢有七重謂遍計
006_0841_a_11L依他因緣緣起性起無住實相
006_0841_a_12L一遍計錢有二凡夫二乘所見
006_0841_a_13L凡夫但見此錢方圓之相不見
006_0841_a_14L四大四塵之所合成亦但見一非
006_0841_a_15L二非三等差別相終不見錢無自
006_0841_a_16L二乘漸見假集空相此亦猶爲
006_0841_a_17L遍計錢耳以二乘雖見四相而未
006_0841_a_18L得解法空理故此上並名遍計錢
006_0841_a_19L三乘之人方解此錢依他因緣
006_0841_a_20L而起起時無生故名依他而未解
006_0841_a_21L因緣親疎無二就一乘中明此因
006_0841_a_22L緣無親疎故名因緣錢然從前
006_0841_a_23L治其病故名因緣耳三乘分
006_0841_a_24L說無親疎義然今直明一乘親疎

006_0841_b_01L그런데 오히려 이 문은 다만 연기하여 앞에 나타나면 힘이 있어서 결과를 낳는 뜻을 밝힐 뿐이다.
다음은 연기가 본성이 없어서 공空하고 평등한 뜻을 나타내기 때문에 연기의 동전이라고 이름한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평등하여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연기라고 이름한다.”79)라고 하였다.
다음은 공空과 있음이 둘이 아니니 합하여 일체가 되고 그 자체가 공空하다는 뜻을 밝히기 때문에 성기관이라고 이름한다. 이것들은 십이연생에 대한 열 번의 관觀을 많이 기준으로 하여 세운 것이다. 그래서 혹은 삼승의 뜻에 따른다고도 한다.

위 세 문보다 어떤 수승한 곳이 있길래 다시 무주無住와 실상實相 등을 설하는가?
다시 또한 수승함이 있다. 말하자면 머무름이 없음(無住)을 논할 때에는 공空을 말하면 곧 만족하니 ‘있다(有)’는 말을 덧붙이지 않는다. ‘있다’를 말함도 또한 그러하다. 그 한 척尺을 말하면 곧 법을 만족시키니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는다. 들고 듦에 곧 만족하고 본성과 본성이 함께 원만하다. 본래의 자리를 고치지 않고 만족시키며, 앞의 이름을 바꾸지 않고 원만하게 하며, 좁은 것을 펼치지 않고 넓게 하며, 낮음을 높이지 않고 높게 한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이르기를, “무주는 움직이지 않음의 다른 이름이다.”라고 하였다. 실상은 처음에 이름 없는 참된 근원의 문에 들어가, 마지막에 연기의 구극의 끝을 없애는 것이다. 앎이 끝나 행에 들어가고 행이 이루어져 깨달음에 들어간다.
4. 발심공덕發心功德
‘보살의 일념’부터 ‘걸림 없는 변재’까지80)

대기
『대기』에 이른다. ‘처음 발심한 보살의 일념一念 공덕 내지 하나의 문을 기준으로 하여’ 등은 첫 번째 문의 동체同體이다. ‘하물며 한량없고 가없는 모든 지地의 공덕이겠는가? 내지 다른 문을 기준으로 하여’는 두 번째 문 이후의 동체이다. ‘처음 발심할 때에 내지 수행의 체體를 기준으로 하여’는 이체異體의 문이다.81) 그러나 비록 이 뜻이 있으나 지금 해석하는 뜻은, 동체와 이체를 묻지 않고

006_0841_b_01L無二之義然猶此門但明緣起現
006_0841_b_02L前有力生果義耳次現緣起無性
006_0841_b_03L空平等義故名緣起錢是故經云
006_0841_b_04L平等不起故名緣起次明空有
006_0841_b_05L不二第下之二第二八張 混爲一體
006_0841_b_06L自體空義故名性起觀此等多約
006_0841_b_07L十二緣生十番觀立是故或云
006_0841_b_08L順三乘義於上三門有何勝處
006_0841_b_09L復說無住實相等耶更亦有勝
006_0841_b_10L謂論無住時語空即足不加有語
006_0841_b_11L語有亦尒語其一尺即滿足法
006_0841_b_12L不加餘語據據即足性性並圓
006_0841_b_13L不改本位以令滿不轉前名而使
006_0841_b_14L不布俠而令寛不崇卑而令高
006_0841_b_15L故古人云無住者不動之異名也
006_0841_b_16L實相者初入無名眞源之門終消
006_0841_b_17L緣起究竟之際解終入行行成入
006_0841_b_18L訂也

006_0841_b_19L
菩薩一念至無㝵辯才大記云初發
006_0841_b_20L心菩薩一念功德乃至約一門等者
006_0841_b_21L初門同體也無量無邊諸地功德
006_0841_b_22L至約異門者*弟二門以去同體也
006_0841_b_23L發心時乃至約行體者是異體門也
006_0841_b_24L然雖有是義今釋之義無問同異體

006_0841_c_01L하나의 문을 기준으로 하여 다함없음을 나타내는 것 등은 첫 번째 동전이 다함없음을 나타내는 것이고, 동체와 이체를 묻지 않고 다른 문을 기준으로 하여 설하는 것은 두 번째 동전 이후의 뜻이다.

‘하나의 동전이 곧 열인 것과 같고 수행의 체體를 기준으로 하여 설한 까닭이다’란 (다음과 같다.) 위에서부터 비록 하나의 문이 다함없음을 나타내는 것을 밝혔고, 또 ‘다른 문을 기준으로 하여 설한다’고도 말했으나, 그 갖춘바 다함없음의 거듭거듭을 밝히지 않은 까닭에 지금 하나의 문과 다른 문 안에 갖춘 것을 가리키기 때문에 ‘하나의 동전이 곧 열인 것과 같기 때문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수행의 체體를 기준으로 하여 설한다’라는 것은, 어떤 이는 이르기를, “처음 발심함이 곧 모든 수행의 체體이기 때문이며, 또 믿음이 원만하여 성불함이 행불行佛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아버지와 아들의 나이가 모두 같다’란, 일념이 곧 구세九世이기 때문에 아들의 나이가 적지 않고, 구세가 곧 일념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나이가 많지 않다. 그래서 옛글(古辭)에 이르기를, “한 살의 여자가 50년 동안 임신하여 출산해서 쉰 살의 대장부를 얻었다.”82)라고 한다. 말하자면 처음 발심한 보살이 50위를 거두어서 곧 묘각妙覺의 지위를 이루는 것이다.
‘하나란 분별이 없다는 뜻이다’라는 것은, 모든 법의 체體가 하나이기 때문이다. ‘같다란 머무르지 않는다는 뜻이다’라는 것은, 이것이 자재하지 않기 때문에 저것과 같고 저것이 자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것과 같은 것이다. ‘같은 자리에 머리를 함께한다란 서로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라는 것은, 머리를 들면 머리 외에 다리가 없고 다리를 들어도 또한 그러하여 상대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곧 서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

‘짓는 자도 없으며’란 작용이 없다는 뜻이다. ‘이루는 자도 없으며’란 체體의 본성이 없다는 뜻이다. ‘아는 자도 없다’란 체體와 작용이 함께 없다는 뜻이다. 이것은 연기관이니 체體와 작용이 없음을 말미암아야 비로소 공空한 결과를 이루기 때문이다.
‘법성의 집’은 증분이고 ‘다라니의 곳집(藏)’은 연기분이다. 말하자면 머무름 없는 별교의 문에서 법의 도리를 기준으로 하여 육상을 밝히는 것은 증분의 집에 들어가는 중요한 문이다.

006_0841_c_01L約一門現無盡等者是*弟一錢現無
006_0841_c_02L盡也無問同異體約異門說者
006_0841_c_03L*弟二錢以去義如一錢即十約行體
006_0841_c_04L說故者上來雖明一門現無盡又云
006_0841_c_05L約異門說也而不明其所具之無盡
006_0841_c_06L重重故今指一門及異門內所具故
006_0841_c_07L云如一錢即十故也約行體說者
006_0841_c_08L以初發心即萬行體故又信滿成
006_0841_c_09L是行佛故也阿耶兒子年月皆同
006_0841_c_10L一念即九世故第下之二第二九張
006_0841_c_11L兒年非小九世即一念故父歲非多
006_0841_c_12L故古辭云一歲女妊五十年產得五
006_0841_c_13L十歲大丈夫也謂初發心菩薩攝五
006_0841_c_14L十位即成妙覺位也一者無分別義
006_0841_c_15L諸法體一故同者不住義者
006_0841_c_16L不自在故同於彼彼不自在故
006_0841_c_17L於此也同處並頭者不相知義者
006_0841_c_18L擧頭則頭外無足擧足亦尒無可對
006_0841_c_19L即不相知也無有作者無作用義
006_0841_c_20L無有成者無體性義無有知者
006_0841_c_21L用俱無義此是緣起觀由無體用
006_0841_c_22L方成空果故也法性家者訂分也
006_0841_c_23L陁羅尼藏者緣起分也謂無住別敎
006_0841_c_24L門中約法道理明六相者是入訂

006_0842_a_01L동교의 문에서 방편인 육상을 설하는 것은 머무름 없는 별교의 곳간을 여는 좋은 열쇠이다.

‘집에 들어가는 좋은 문’과 ‘곳집을 여는 열쇠’는 육상 이외에 별도로 들어가는 곳과 여는 곳 등이 있는가?
어떤 이는 이르기를, “들어가는 곳은 증분이고 육상은 바로 연기분이기 때문에 다르다.”라고 한다. 어떤 이는 이르기를, “육상이 곧 법성의 집과 다라니의 곳간이기 때문에 다시 들어가는 곳과 여는 것은 없다. 그러나 ‘육상방편’이라고 하는 것은 법의 체體의 빼어난 모습을 모아 이룬 방편이다.”라고 한다.83)
‘걸림 없는 변재辯才의 체體가 삼승의 분제分際가 아니다’라는 것은, 비록 머무름 없는 별교이나 육상방편으로 언설을 삼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별교 중에 비록 뜻이 곧 말이며 말이 곧 뜻이나 말과 뜻이 섞이지 않는 것이다.
5. 십현문十玄門
‘동시에 구족하여’부터 ‘『화엄경』(의 설)과 같다’까지84)

대기
『대기』에 이른다. ‘동시에 구족하여 상응한다(同時具足相應)’는 것은 여러 뜻의 해석이 있다. 혹은 대소大䟽(『화엄경탐현기』)의 “같음과 다름이 원만하게 갖추어짐 가운데 말하자면 앞의 아홉 문을 전부 합하여 하나의 대연기의 법으로 삼아서 다양한 종류의 뜻의 문이 동시에 구족하게 한다.”85)라는 글에 의거하여 오직 총상이고 별상이 아니라고 한다. 혹은 강목綱目86)의 “말하자면 이 하나의 티끌이 위의 열 가지 쌍(十對)을 거두고, 동시에 구족함도 또한 뒤의 아홉 문의 현묘한 뜻을 거둔다.”87)라는 글에 의거하여, 앞의 구절은 별상의 동시라는 뜻이고 뒤의 구절은 총상의 동시라는 뜻이라고 한다. 지금은 두 뜻이 모두 그러하니 부분에 집착하지 말라고 이른다. ‘동시’라고 말한 것은, 어떤 이는 해인(삼매)가 두렷이 밝은 때라고 하고, 어떤 이는 세상의 물든 열두 때를 나눈 것 중에 어떤 (때)를 따라 이르는 것일 뿐이라고 한다. 또 이 두 설이 또한 모두 이치가 있는 말이다.

‘그 가운데 열 가지 문이 있다. 이른바 사람(人)과 법法, 이법(理)과 현상(事)’ 등이라고 말한 것은,

006_0842_a_01L分家之要門也同敎門中說方便六
006_0842_a_02L相者是開無住別敎藏之好鑰匙也
006_0842_a_03L入家之要門開藏之鑰匙則六相
006_0842_a_04L以外別有所入所開等耶一云
006_0842_a_05L入乃是1)訂分六相正是緣起分故
006_0842_a_06L別也一云六相即是法性家及陁羅
006_0842_a_07L尼藏故更無所入所開也然云六相
006_0842_a_08L方便者是約法體巧相集成方便也
006_0842_a_09L無㝵辯才體非三乘分齊者雖是無
006_0842_a_10L住別敎而以六相方便爲言說故也
006_0842_a_11L謂別敎中雖義即是言言即是義
006_0842_a_12L而言義不雜也

006_0842_a_13L
同時具足至如華嚴經大記云同時
006_0842_a_14L具足相應者有多義釋或依大䟽同
006_0842_a_15L異圓備中第下之二第三○張 謂前九
006_0842_a_16L門摠合爲一大緣起法令多種義
006_0842_a_17L同時具足之文而云唯摠非別也
006_0842_a_18L或依2) [407] [233] 目謂此一塵攝上十對同
006_0842_a_19L時具足亦攝後之九門玄義之文
006_0842_a_20L云初節別同時義後節摠同時義也
006_0842_a_21L今云二義皆然不可局執言同時者
006_0842_a_22L有云海印圓明之時也有云於世染
006_0842_a_23L分十二時中隨何云耳又此二說
006_0842_a_24L亦皆有理言於中有十門所謂人法

006_0842_b_01L「보법장」88)에 의하면 오직 다섯 쌍의 열 법으로 묶으니, 대소大䟽89) 등의 열 쌍의 이십 법과 같지 않다. 다만 열고 합한 것일 뿐으로 뜻에는 더하고 덜함이 없다. ‘열 가지 문’이라고 말한 것에서, 무슨 까닭에 열 가지 법法인데 ‘문門’이라고 말하는가? 말하자면 지혜로써 들어가는 바의 뜻이 같은 까닭일 뿐이다. ‘상응하여 앞과 뒤가 없다’라고 말한 것에서, 어떤 이는 시간과 법이 상응하는 것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열 보법 가운데 매 하나하나의 법이 서로 알지 못하는 뜻이라고 한다.

‘인드라그물의 경계(因陁羅網境界)’란 (다음과 같다.) 인드라신(帝釋)의 궁전의 오색구슬 그물이 서로 영상을 그려내어(瀉)90) 거듭거듭 끝이 없는 것과 같이, 연기의 법과 법이 으레 그러하여 서로 거두되 거두어진 것이 다시 거두는 것이 되어서 거듭거듭 서로 거두어 다함이 없다. 다함이 없기 때문에 안으로 향하여 중심을 찾음에 들어가고 들어가도 오히려 밖이고, 밖으로 향하여 가장자리를 찾음에 나가고 나가도 오히려 안이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이르기를, “비유하면 (다음과) 같다. 왕궁에 여러 겹의 문이 있어서 밖으로부터 안으로 들어갈 때에 이 문을 들어가면 곧 안이라고 하나 그 문 안에 다시 다른 문이 있기 때문에 전에 들어간 곳이 도리어 밖이며, 또 여기로 들어가면 곧 안이라고 하나 그 문 안에 또 다른 문이 있기 때문에 전에 들어간 곳이 도리어 밖이다. 이와 같이 거듭거듭인 까닭에 들어가고 들어가도 도리어 밖이다. 안으로부터 밖으로 나갈 때에 이 문을 나가면 곧 밖이라고 하나 그 문 밖에 또 다른 문이 있기 때문에 전에 나간 곳이 도리어 안이다. 이와 같이 거듭거듭인 까닭에 나가고 나가도 도리어 안이다.”라고 하였다.

‘경계’라고 말한 것은 다른 문을 가려내는 것이니 (다른 문도) 어찌 증득한 지혜의 경계가 아니겠는가? 무슨 까닭에 이 문만 치우쳐 이 말을 얻는 것인가?
『십지경론』에서 이르기를, “인드라그물의 차별이란 진실한 뜻의 모습이니, 진실한 뜻의 모습은 증득한 자의 경계이기 때문이다.”91)라고 하였다.

006_0842_b_01L理事等者依普法章唯束五對十
006_0842_b_02L不同大䟽等十對二十法也
006_0842_b_03L開合耳義無加減也言十門者
006_0842_b_04L故十法而云門耶謂以智之所入義
006_0842_b_05L同故耳言相應無有前後者一云
006_0842_b_06L法相應也一云十普法中 3) [408] 一一
006_0842_b_07L不相知義也因陁羅網境界者
006_0842_b_08L如帝釋殿五色珠網 4) [409] 相瀉影
006_0842_b_09L重無極緣起法法法尒相攝所攝復
006_0842_b_10L爲能攝重重相攝無盡無盡故
006_0842_b_11L內尋心入入猶外向外尋邊出出
006_0842_b_12L猶內也故古人云比如王宮有多
006_0842_b_13L重門從外入內之時謂入此門
006_0842_b_14L爲內也而其門內復有異門故前
006_0842_b_15L所入還是外也又謂入此即爲內也
006_0842_b_16L而其門內又有異門故前所入
006_0842_b_17L是外也如是重重故入入猶外也
006_0842_b_18L從內出外之時謂出此門即是外也
006_0842_b_19L而其門外又有異門故前所出
006_0842_b_20L是內也如是重重故出出猶內也
006_0842_b_21L言境界者簡餘門豈非訂智境界
006_0842_b_22L何故此門第下之二第三一張 偏得此
006_0842_b_23L言耶地論云帝綱差別者眞實
006_0842_b_24L義相眞實義相訂者境界故從此

006_0842_c_01L이 논의 글을 따라서 이 문의 이름을 세웠을 뿐이고 나머지 문이 지혜의 경계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이 가운데 앞의 열 가지 문을 갖추었으며’란,
() 한 종류의 열 보법이 되는가, 문을 따라서 각각 따로 세우게 되는가?
두 뜻 모두 가능하다. 말하자면 문과 문마다 모두 앞의 열(十)을 갖춘다고 하기 때문에 한 종류 또한 가능하다. 그러나 문을 따라서 섞이지 아니하고, 내지 백 문, 천 문에 각각 갖추는 바가 있기 때문에 각각 따로 또한 가능하다.

‘비유를 따라서 다르다’란 법을 기준으로 하면 마땅히 거듭거듭 다함없음을 따라서 다를 뿐이라고 하여야 한다.
무슨 까닭에 첫 문에는 (‘비유를 따라 다를 뿐이다’와 같은) 이 가려내는 말이 없는가?
이미 첫 문이므로 나머지와 섞이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뒤의 모든 문을 대하여 가려낸다면 “앞과 뒤가 없음을 따라서 다를 뿐이다.”라고 할 수 있다.
‘나머지도 준하여 알 수 있다’란 (다음과 같다.) 앞 문의 열 가지 법을 함께 구족하니, 구족하기 때문에 이에 준하면 마땅히 ‘사람(人)과 법法의 인드라(그물) 내지 원인과 결과의 인드라’ 등이라고 해야 하며, 다른 문의 예도 이러하다. 이런 까닭에 열 번째 문의 마지막에 또 이 말이 있는 것이다.92)

‘비밀스럽게 숨은 것과 나타난 것이 함께 이룬다(秘密隱現俱成)’란 (다음과 같다.) 어떤 글에서는 이르기를, “하나의 미세한 티끌에서 삼매(正受)에 들어가고 하나의 털 끝머리에서 삼매로부터 일어난다. 이와 같이 자재로이 저기서 숨고 여기에서 나타나 삼매와 삼매로부터 일어남이 동시에 비밀스럽게 이루어진다.”93)라고 한다. 어떤 글에서는 이르기를, “숨음은 비밀이고 나타남은 나타나 드러남이니 ‘비밀스럽게 숨은 것과 나타난 것이 함께 이루는 문’이라 이름한다.”94)라고 한다. 처음 뜻은 숨음이 나타남과 한 때에 함께 이루어지기 때문에 비밀이라고 하는 것이다. 뒤의 뜻은 비밀스러운 숨음이 나타남과 함께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이다.
‘연緣을 따라 다르다’란 (연緣은) 근기의 연緣이다. 그러므로 『십현장』에 이르기를, “연緣을 따라서 보는 바이기 때문에 늘어남과 줄어듦이 있다.”95)라고 하였다. 또는 구하는 바의 연緣이라고도 한다. 말하자면 열 보법 가운데 사람을 구하면 사람이 나타나고 다른 것은 숨으며,

006_0842_c_01L論文立此門名耳非謂餘門非智
006_0842_c_02L境界也此中具前十門者爲是一種
006_0842_c_03L十普法耶爲是隨門各別立耶
006_0842_c_04L二義皆得謂門門皆云具前十故
006_0842_c_05L一種亦得然而隨門不雜乃至百門
006_0842_c_06L千門各有所具故各別亦得從喩
006_0842_c_07L異者約法應云從重重無盡異耳
006_0842_c_08L何故初門無此簡辭旣是初門
006_0842_c_09L餘不濫故若對後之諸門簡者可云
006_0842_c_10L從無前後異耳餘可准知 [234] 前門十
006_0842_c_11L法並具足具足故准此應云人法因
006_0842_c_12L陁羅乃至因果因陁羅等餘門例爾
006_0842_c_13L是故5)弟十門末亦有此言也秘密
006_0842_c_14L隱現俱成者有文云於一微塵入正
006_0842_c_15L一毛端頭三昧起如是自在
006_0842_c_16L隱此現正受起定同時秘密成矣
006_0842_c_17L有文云隱則秘密現則現著名爲
006_0842_c_18L秘密隱現俱成門也初意云隱與
006_0842_c_19L一時俱成故秘密也後意云秘密
006_0842_c_20L隱與現俱成也從緣異者是機緣也
006_0842_c_21L故十玄章云隨緣所見故有增減也
006_0842_c_22L又云所須緣也謂十普法中須人則
006_0842_c_23L「訂」通「證」於此書{編}次同「網」作「綱」{乙}
006_0842_c_24L
「每」作「海」{乙}「互」作「玄」{乙}「弟」作
006_0842_c_25L「第」{乙}

006_0843_a_01L다른 것을 구함도 또한 이와 같기 때문이다.
‘미세한 것도 서로 용납하여 안립한다(微細相容安立)’란 (다음과 같다.) ‘미세’는 품는 주체를 지목한 것이고, ‘서로 용납함’은 품는 대상을 지목한 것이며, ‘안립함’은 주체와 대상을 통틀은 것이다. 혹은 이와 반대로 ‘미세’는 품는 대상이고, ‘서로 용납함’은 품는 주체이며, ‘안安’은 안립의 주체이고, ‘립立’은 안립의 대상이라고 한다.
아래의 ‘하나와 많음이 서로 용납하는 문’은 하나가 많음을 용납하고 많음이 하나를 용납하는 등의 두 가지 뜻을 갖추었는데, 이 미세의 문은 하나가 많음을 용납하는 뜻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그래서 옛사람이 이르기를, “유리병에 담긴 많은 겨자와 같다.”96)라고 하였다.

또 이른다. ‘미세’란 알기 어렵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티끌이 큰 것으로 바뀌지 아니하되 세계를 용납할 수 있고, 세계가 작은 것으로 바뀌지 아니하되 티끌에 들어갈 수 있으니, 이러한 도리는 매우 깊어서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서로 용납함’이란 하나가 많음을 용납할 수 있기 때문이며, 또 하나하나의 법이 모두 또한 이와 같기 때문이다. ‘안립’이란 하나와 많음이 무너지지 않기 때문이다. 또 이르기를, 만약 신통 변화의 지은 바라면 안립이라고 하지 않는다. 곧바로 연기의 실덕이며 으레 그러하여 서로 용납하기 때문에 ‘안립’이라고 하는 것이다. ‘모습(相)을 따라 다르다’란, 이것은 모습에 나아가 설한 것이니, 말하자면 작은 모습과 큰 모습, 하나인 모습과 많은 모습 등이다.

‘십세十世가 법과 떨어져서 달리 이룬다(十世隔法異成)’란 (다음과 같다.)
마땅히 ‘구세九世가 법과 떨어져서’라고 해야 하는데, 무슨 까닭에 총상의 일념을 함께 취하여 ‘법과 떨어져서’라고 하였는가?
총상과 별상의 시간으로 총상과 별상의 법과 떨어지는 것이 또한 어려움이 없다.
‘때(世)를 따라 다르다’란, 하나하나의 때(世)에 각각 열 가지 법을 갖추니 이것이 때의 문이 갖추는 바이기 때문이다.

‘모든 갈무리의 순수하고 잡박한 것이 덕을 갖춘다(諸藏純雜具德)’란 「십무진장품」에 의거하여 세운 것이다. ‘문門을 따라 다르다’란 하나의 행을 오래 닦으면 ‘순수한 문’이라고 하고, 온갖 행을 가지런히 닦으면 ‘잡박한 문’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와 많음이 서로 용납하되 같지 않다(一多相容不同)’란 (다음과 같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미세하게 서로 용납함과 하나와 많음이 서로 용납함의 두 문은 어떻게 다른가?

006_0843_a_01L人現餘隱須餘亦如是故也微細相
006_0843_a_02L容安立者微細目能含相容目所含
006_0843_a_03L安立通能所也或反此云微細則所
006_0843_a_04L相容則能含第下之二第三二張
006_0843_a_05L則能安立則所立也下一多相容門
006_0843_a_06L具一容多多容一等二義此微細門
006_0843_a_07L約一容多之義故古人云如瑠璃瓶
006_0843_a_08L盛多芥子也又云微細者難知之義
006_0843_a_09L謂塵不轉大而能容刹刹不轉小而
006_0843_a_10L能入塵如是道理甚深難知故也
006_0843_a_11L容者一能容多故又一一1) [410]
006_0843_a_12L亦如是故也安立者一多不壞故也
006_0843_a_13L又云若是神通變化所作非謂安立
006_0843_a_14L直是緣起實德法爾相容故云安立
006_0843_a_15L從相異者此就相說謂小相大相
006_0843_a_16L一相多相等也十世隔法異成者
006_0843_a_17L應云九世隔法何故并取摠一念云
006_0843_a_18L隔法耶以摠別時隔捴別法亦無
006_0843_a_19L難也從世異者一一世中各具十
006_0843_a_20L此是世門所具故也諸藏純雜具
006_0843_a_21L德者依十無盡藏品立也從門異者
006_0843_a_22L一行長修則云純門萬行齊2) [411]
006_0843_a_23L云雜門也一多相容不同者古人云
006_0843_a_24L微細相容一多相容二門何別耶

006_0843_b_01L서로 용납함은 비록 같으나 뜻이 다르다. 말하자면 ‘무엇이 서로 용납하는가’라는 까닭에 하나와 많음이 서로 용납하는 문이 있고, ‘서로 용납하는 모양이 어떠한가’라는 까닭에 미세하게 서로 용납하는 문이 있다.”라고 한다. ‘이理를 따라 다르다’란 진여의 이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인과의 도리이다. 말하자면 원인이 결과를 갖출 수 있고, 하나가 많은 것을 갖출 수 있는 것 등이기 때문이다.

‘모든 법이 상즉하여 자재하다(諸法相卽自在)’란 (다음과 같다.) 인연의 당체가 곧 원인이고 곧 결과이니, 이루는 주체인 원인 이외에 따로 이루어지는 대상인 결과의 법이 없다. ‘작용(用)을 따라 다르다’란 덕德의 작용이 자재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전체가 상즉하는 작용이다. ‘또한 본성을 의거하는 것이기도 하다’란 머무름 없는 법성이다.
다른 문은 어째서 머무름 없는 법성에 의거하는 것이 아닌가?
비록 모두 법성에 의거하지만 멀고 가까움의 다름이 없는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중문은 다만 역용을 기준으로 하여 논한 것이고, 여기에서는 머무름 없는 본성의 이루는 바 법이 당체가 곧 공空하여 전체가 상즉함을 밝힌 것이니 법성과 극히 가깝기 때문이다.

‘오직 마음이 회전하여 잘 이룬다(唯心廻轉善成)’란, (마음은) 열하나의 조림심(十一稠林心)97)과 열 가지의 성기심(十種性起心)98) 등이다. ‘마음(心)을 따라 다르다’란 오직 마음이 회전하되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현상(事)에 의탁해서 법을 나타내어 이해를 낸다(托事現法生解)’란, 의탁되는 현상의 모습이 바로 곧 나타나는 다함없는 법의 체體이니 이것에 의탁하여 달리 드러나는 바가 있는 것은 아니다. ‘지혜(智)를 따라 다르다’라는 것은 이해를 생겨나게 함을 기준으로 하여 말한 것이다.

대화엄경략책

『화엄략책華嚴略策』99)에 이른다.100) 열 번째는 다함없음을 나타낸다. 하나하나가 현묘함을 지어내어 한 법을 듦에 따라서 곧 열을 갖춘다. 말하자면, 첫째, 동시에 구족하여 상응하는 문이다. 바다의 한 물방울이 백 개의 내(川)의 맛을 갖추는 것과 같다. 둘째, 넓음과 좁음이 자재하여 걸림 없는 문이다. 직경 한 척의 거울에서 천 리의 영상을 보는 것과 같다. 셋째, 하나와 많음이 서로 용납하되 같지 않은 문이다. 한 방의 천 개 등이 빛과 빛이 사귀어 들어가는 것과 같다.

006_0843_b_01L相容雖同而義別也謂何者相容
006_0843_b_02L有一多相容門相容之皃如何故有
006_0843_b_03L微細相容門也從理異者非謂眞
006_0843_b_04L如之理是因果道理也謂因能具果
006_0843_b_05L一能具多等故也諸法相即自在者
006_0843_b_06L因緣當體即因即果能成因外
006_0843_b_07L別所成果法也從用異者德用自在
006_0843_b_08L故也謂擧體相即之用也亦可依
006_0843_b_09L性者無住法性也第下之二第三三張
006_0843_b_10L餘門何不依無住法性耶雖皆
006_0843_b_11L依性非無遠近之殊謂中門者
006_0843_b_12L約力用而論此中明無住本性所成
006_0843_b_13L之法當體即空全體相即與性切
006_0843_b_14L近故也唯心廻轉善成者十一稠林
006_0843_b_15L及十種性起心等也從心異者
006_0843_b_16L心廻轉而不動故也托事現法生解
006_0843_b_17L所托事相正即所現無盡法體
006_0843_b_18L非是托此別有所表也從智異者者
006_0843_b_19L約生解云也

006_0843_b_20L
花嚴略策云十表無盡一一浩玄
006_0843_b_21L隨擧一法即具十謂一同時具足
006_0843_b_22L相應門如海一滴具百川味
006_0843_b_23L廣俠自在無㝵門如徑尺鏡見千
006_0843_b_24L里影三一多相容不同門一室千

006_0843_c_01L넷째, 모든 법이 상즉하여 자재하는 문이다. 금과 금 색깔이 둘이 서로 여의지 않는 것과 같다. 다섯째, 비밀스럽게 숨은 것과 나타나는 것이 함께 이루는 문이다. 맑은 하늘의 조각달에 어두움과 밝음이 서로 함께하는 것과 같다.

여섯째, 미세하게 서로 용납하여 안립하는 문이다. 유리병에 담긴 많은 겨자와 같다. 일곱째, 인드라그물의 경계인 문이다. 두 거울이 서로 비춤에 빛을 전하여 서로 그려내니 번갈아 나타남이 끝이 없다. 여덟째, 현상(事)에 의탁해서 법을 나타내어 이해를 내는 문이다. 서 있는 불상과 들어 올린 팔, 눈 닿는 것이 모두 도道이다. 아홉째, 십세十世가 법과 떨어져서 달리 이루는 문이다. 한밤의 꿈에 백 년을 돌아다니는 것이다. 열째, 주主와 반伴이 두렷이 밝아서 덕을 갖춘 문이다. 북극성이 머무는 곳을 뭇 별들이 받드는 것이다.

원통수좌기

『원통수좌기圓通首座記』101)에 이른다.102) 또 내 몸을 기준으로 하여 열 가지 쌍의 열 문을 논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나의 오척 되는 몸이 중생으로 하여금 깨닫도록 함을 나타내는 것은 가르침(敎)이고, 곧 이것이 설하는 바는 뜻(義)이다. 둘째, 내 오척 되는 몸이 곧 법성과 같은 것은 이법(理)이다. 경에 이르기를, “중생이 곧 법신이고 법신이 곧 중생이다.”103)라고 하기 때문이다. 오체五體104)와 사대가 분명하게 차별되는 것은 현상(事)이다. 셋째, 내 오척 되는 몸이 머리부터 발까지 공空하고 고요하여 걸림 없는 것이 관觀의 대상인 경계(境)이고, 이와 같이 관觀하는 것인 내 마음의 지혜가 관觀의 주체인 지혜(智)이다.

넷째, 내가 짓는 선善ㆍ악惡ㆍ무기 등의 행위가 행行이고, 이 행을 말미암기 때문에 얻는 범부의 지위 등이 지위(位)이다. 다섯째, 내가 짓는 업이 원인(因)이고, 이 업을 말미암기 때문에 불러오는 과보가 결과(果)이다. 여섯째, 내 오척 되는 몸이 8만 마리 벌레들의 의거하는 곳이기 때문이며,

006_0843_c_01L燈光光渉入四諸法相即自在門
006_0843_c_02L如金金色二不相離五秘密隱現
006_0843_c_03L俱成門澄空片月晦明相映 [235]
006_0843_c_04L微細相容安立門如瑠璃瓶盛多
006_0843_c_05L芥子七因陁羅網境界門兩鏡
006_0843_c_06L3) [412] 傳輝相瀉 [236] 遆出無窮八托
006_0843_c_07L事現法生解門立像竪臂觸目皆
006_0843_c_08L九十世隔法異成門一夕之夢
006_0843_c_09L翺翔百年十主伴圓明具德門
006_0843_c_10L辰居所衆星拱之

006_0843_c_11L
圓通首座記云且約吾身論十對
006_0843_c_12L十門者一吾五尺身表令生解爲
006_0843_c_13L即是所詮爲義二吾五尺身
006_0843_c_14L即同法性爲理經云衆生即法身
006_0843_c_15L法身即衆生第下之二第三四張
006_0843_c_16L五體 [237] 四大歷然差別爲事三吾五
006_0843_c_17L尺身從頭至足 [238] 空寂無㝵爲所
006_0843_c_18L觀境如是觀者是吾心智爲能
006_0843_c_19L觀智四吾之所造善惡無記等行
006_0843_c_20L爲行由此行故 [239] 凡夫位等爲位
006_0843_c_21L五吾所造業爲因由此業故 [240] 所感
006_0843_c_22L之報爲果六吾五尺身八萬戶虫
006_0843_c_23L「法」作「皆」{乙}「修」作「終」{乙}「互」作
006_0843_c_24L「玄」{乙}

006_0844_a_01L또 모든 부처님이 내 털구멍에 두루하면서 법을 설하시고, 또 경에 이르기를, “중생 형태의 세계이다.”라고 하기 때문에 의보(依)이고, 그러면서도 유정이기 때문에 정보(正)이다. 일곱째, 나의 본래 깨달음의 성품이 본래 항상 머물러 옮기지 않고 움직이지 않음이 체體이고, (그 체體가) 완연히 나타남이 작용(用)이다.

여덟째, 내 오척 되는 몸이 사람(人)이고, 연기법에 거두어지는 바이기 때문에 법法이다. 아홉째, 내가 짓는 선하지 않은 법이 진실을 거스르기 때문에 거스름(逆)이고, 지은 바가 선한 행위와 비슷함은 따름(順)이다. 열째, 나의 당래 과보로서의 부처님이 안으로 내 몸을 훈습하여 잠시도 버려둠이 없으니 내가 만약 선善을 지으면 도와서 더욱 늘어나게 하고, 내가 만약 악惡을 지으면 싫어함에 의지해서 벗어나게 함이 응應이고, 이는 나의 미혹한 마음이 얻는 바이기 때문에 감感이다.105)

이와 같이 나의 오척 되는 몸이 본래 스스로 만족하여 원만하거나 부분이거나 곧 가르침(敎) 등의 열 가지 쌍을 갖추니 동시에 구족하여 상응하는 문이 된다. 오척을 움직이지 아니하고 시방삼세에 두루하니 넓음과 좁음이 자재하여 걸림 없는 문 등이 된다. 그러므로 수행자가 이 관觀을 닦으면 움직이지 않는 범부의 몸이, 곧 자체의 비로자나불이며 다함없는 법의 바다이며 총상으로서의 보현이며 곧 안으로 깨닫는 국토이며 또한 화장세계이며 또한 『대방광불화엄경』이라고 일컬을 수 있다.

규봉 선사圭峯禪師106)의 『행원품초』 가운데 “피부를 벗겨서 종이로 삼고 피를 내서 먹으로 삼고 뼈를 꺾어 붓으로 삼아 경전을 베껴 쓴다.”107)는 등의 문장을 풀이하여 이르기를,108) “둘째, 관觀하는 지혜를 기준으로 하여 풀이한다. 말하자면 이 몸을 관찰하면 피부나 뼈가 도무지 정해진 실체가 없으니 전체가 완전히 공空하여 나와 나의 것이 없다.

006_0844_a_01L所依處故又諸佛遍吾毛孔說法 [241]
006_0844_a_02L又經云衆生形世界故爲依而是
006_0844_a_03L有情故爲正七吾本覺性本來常
006_0844_a_04L1) [413] 不動爲體宛然現現 [242] 爲用
006_0844_a_05L八吾五尺身爲人以緣起法之所
006_0844_a_06L攝故爲法九吾所造作不善之法
006_0844_a_07L逆於眞故爲逆所造相似善行 [243]
006_0844_a_08L十吾當果佛內熏我身無暫
006_0844_a_09L捨頃我若作善助令增長我若
006_0844_a_10L作惡依猒令脫爲應是我迷心之
006_0844_a_11L所得故爲感如是吾五尺身本自
006_0844_a_12L滿足若圓若分即具敎等十對
006_0844_a_13L爲同時具足相應門不動五尺
006_0844_a_14L遍十方三際 [244] 爲廣2) [414] 自在無㝵門
006_0844_a_15L [245] 是故行者若修此觀不動
006_0844_a_16L凡身即是自體毗蘆無盡法海
006_0844_a_17L相普賢即是內訂國土亦是花藏
006_0844_a_18L世界亦可謂之大方廣佛花嚴經
006_0844_a_19L [246]

006_0844_a_20L
圭峰禪師行願品抄 [247] 釋剝皮爲
006_0844_a_21L第下之二第三五張 刺血爲黑
006_0844_a_22L折骨爲3) [415] [248] 書寫經典等文云
006_0844_a_23L約觀智釋謂觀察此身若皮若骨
006_0844_a_24L都無定實擧體全空無我我所

006_0844_b_01L비록 그러나 눈으로 보면 몸의 모습이 있는 듯하지만, 그것은 마치 거품이 모인 것과 물거품과 불꽃과 파초와 같다. 이미 자체가 없어서 원래로 법계와 같다. 이와 같이 미루어 궁구하면 세 진리(三諦)109)가 구족하여 공空ㆍ가假ㆍ중中의 미묘한 세 관觀을 이룬다. 이 뜻을 설함에 이 앎을 내어서 마음의 기틀에 계합하면 곧 이것이 경전을 베껴 쓰는 것이다. 경전은 설하여 나타내어 앎을 생겨나게 하는 뜻이기 때문이다. 만약 관찰하지 않으면 마음이 미혹하여 모습을 취하니 곧 경전이 없는 것이다. 이상.”라고 하니, 또한 이 뜻에 해당한다.화엄의 학인이 어찌 힘쓰지 않겠는가?

남악관공기

『남악관공기南嶽觀公記』에 이른다.
열 가지 문이 매우 깊어 보기가 어려우니, 청컨대 우선 문의 모습을 시설하여 주십시오.
열 가지 연기의 도리가 있다. 말하자면 첫째, 동시에 구족하여 (상응하는 문)은 법계의 상응하는 도리이다. 둘째, 인드라그물의 (경계인 문)은 법계의 다함없는 도리이다. 셋째, 비밀스럽게 숨는 것과 나타나는 것이 (함께 이루는 문)은 법계의 서로 이루는 도리이다. 넷째, 미세하게 서로 용납하여 (안립하는 문)은 법계의 가지런히 나타나는 도리이다. 다섯째, 십세十世가 법과 떨어져서 (달리 이루는 문)은 법계의 흘러 바뀌는 도리이다. 여섯째, 모든 갈무리의 순수하고 잡박한 것이 (덕을 갖춘 문)은 법계의 덕을 갖추는 도리이다. 일곱째, 하나와 많음이 서로 용납하되 (같지 않은 문)은 법계의 인과도리이다. 여덟째, 모든 법이 상즉하여 (자재하는 문)은 법계의 덕의 작용(德用) 도리이다. 아홉째, 오직 마음이 돌아 바뀌어 (잘 이루는 문)은 법계의 모여 일어나는 도리이다. 열째, 현상(事)에 의탁해서 법을 나타내어 (이해를 내는 문)은 법계의 앞에 나타나는 도리이다. 깊이 생각할 것이다.

열 가지 현묘한 연기(十玄緣起)의 관법을 어떻게 이룰 수 있습니까? 만약 열 가지 문을 따라서 열 가지 관觀을 이루면 정진하는 마음이 흩어져 비어서 한 관觀도 이루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열 가지 문의 다름을 따라서 그 마음에 노닐기 때문입니다. 만약 열 가지 문을 버린다면 관행이 좁아져서 다함없음에 응하지 못하니 곧 삼승과 같습니다.

006_0844_b_01L雖然目4) [416] 似有身 [249] 其猶聚沫
006_0844_b_02L泡熖芭蕉 [250] 旣無自體元同法界
006_0844_b_03L如是 [251] 推窮 [252] 三諦具足成空假中微
006_0844_b_04L妙三觀詮於此義生得此解
006_0844_b_05L合心機即是寫經以經是詮表
006_0844_b_06L生解義故若不觀察 [253] 心迷取相
006_0844_b_07L即無經也 [254] 已上 亦當此義花嚴學
006_0844_b_08L胡不勉旃 [255]

006_0844_b_09L
南岳觀公記云十門甚深難可
006_0844_b_10L得見請且施設門相有十種緣
006_0844_b_11L起道理謂一同時具足者法界相
006_0844_b_12L應道理二因陁羅網者法界無盡
006_0844_b_13L道理三秘密隱現者法界相成道
006_0844_b_14L四微細相容者法界齊現道理
006_0844_b_15L五十世隔法者法界流轉道理
006_0844_b_16L諸藏純雜者法界具德道理七一
006_0844_b_17L多相容者法界因果道理八諸法
006_0844_b_18L相即者法界德用道理九唯心廻
006_0844_b_19L轉者法界集起道理十托事現法
006_0844_b_20L法界現前道理深思之矣
006_0844_b_21L十玄緣起觀法如何可成若隨十
006_0844_b_22L門而成十觀進心曠蕩不成一觀
006_0844_b_23L何以故隨十門別遊其心故若捨
006_0844_b_24L十門觀行局促不應無盡即同三

006_0844_c_01L
이 뜻은 실로 어렵다. 그러나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이해를 냄(生解)과 행을 이룸(成行)이다. 혹은 이해를 냄을 기준으로 하여 열 가지 문을 갖추어 설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함없는 이해를 낼 수 없기 때문이다. 혹은 행行을 이룸을 기준으로 하여 열 가지 문을 갖추어 설한다. 말하자면 ‘연기’라는 한마디 말에 모든 법이 둘이 아님이 곧 이미 드러나 있는데 왜 많은 문을 필요로 하겠는가?110) 그러나 하나를 말하는 것이 많음을 어기지 않고, 많음을 말하는 것이 하나를 어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경에 이르기를, “만약 연기법을 보면 곧 노사나불을 뵙는다.”111)라고 하니 이것을 일컫는 것이다. 만약 하나의 연기관을 이룬다면 열 가지 문이 상응한다.

그 성해의 과분은 인드라(그물의 경계) 등을 논하지 않으니 마음 지혜의 길이 끊어져서 오직 성해를 관觀하면 족한데, 왜 열 가지 문의 관觀을 이룰 필요가 있습니까?
다만 성해만을 관觀한다면 그 관觀이 치우침이 있다. 저 삼승의 보살도 오히려 두 진리를 함께 비추어 공空과 있음에 함께 노님을 머무름 없음이라고 이름하는데, 하물며 일승이겠는가! 일어나지 않으면 그만이나, 일어나면 처음과 마지막을 여읜다. 그러므로 일어남이 일어나지 않음과 합하여 하나의 경계(際)가 되어야 비로소 머무름 없는 연기의 중도관이 된다.

일승의 행자가 어느 지위에 이르러야 열 가지 문의 걸림 없는 작용이 있습니까?
해행解行의 지위에 이르러야 비로소 큰 작용이 있다. 만약 견문見聞의 중생이라면 겨우 금강의 종자를 이룰 뿐이다. 또 견문 가운데 곧 걸림 없는 큰 작용을 일으킨다.

넓음과 좁음이 (자재하여 걸림 없는) 문에서 4구四句와 6구六句를 어떻게 봅니까?
혹은 넓어서 끝이 없으며, 혹은 분한이 역연하며, 혹은 넓음과 좁음이 함께 있으며, 혹은 넓음과 좁음이 함께 없다. 혹은 앞의 넷을 갖추니, 이해의 경계(解境)이기 때문이다.

006_0844_c_01L第下之二第三六張此義實難
006_0844_c_02L然有二義生解成行若約生解
006_0844_c_03L具說十門不爾不得生無盡之解
006_0844_c_04L故也若約成行具說十門謂緣
006_0844_c_05L起一言諸法無二即現了手何須
006_0844_c_06L多門然言一不違多言多不違一
006_0844_c_07L故經云若見緣起法即見盧舍那
006_0844_c_08L此之謂也若成一緣起觀則十門
006_0844_c_09L相應也其性海果分不論因陁
006_0844_c_10L羅等心智路絕唯觀性海足矣
006_0844_c_11L何須成十門觀耶但觀性海
006_0844_c_12L觀有偏彼三乘菩薩尙雙照二諦
006_0844_c_13L俱遊空有名爲無住況乎一乘
006_0844_c_14L起則已起則離始終故起與不起
006_0844_c_15L合爲一際方爲無住緣起中道觀
006_0844_c_16L一乘行者至於何位有十門
006_0844_c_17L無㝵用耶至解行位方有大用
006_0844_c_18L若見聞生纔成金剛種耳又見聞
006_0844_c_19L即起無㝵大用廣*俠門中
006_0844_c_20L四句六句云何見耶或廣無際
006_0844_c_21L或分限歷然或廣*俠俱存或廣
006_0844_c_22L*俠俱泯或具前四是解境故
006_0844_c_23L「迁」作「還」{乙}「俠」作「狹」{乙}次同「茟」
006_0844_c_24L作「筆」{乙}
「覩」作「觀」{乙}

006_0845_a_01L혹은 앞의 다섯을 끊으니, 행의 경계(行境)이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앞의 세 구는 연기가 앞에 나타나는 뜻이고, 다음 한 구는 연기가 생겨남이 없는 뜻이다.
무슨 까닭에 앞의 네 구를 갖추는 것이 이해의 경계입니까?
이해를 일으킨 사람이 모든 법의 두루함(普)과 개별(別), 본성(性)과 모습(相)을 따로 알아야 비로소 바른 이해를 일으킨다. 만약 따로 알지 못하면 곧 삿된 견해에 집착한다. 그러므로 앞의 두 구는 두루함과 개별이 서로 마주한 것이고 뒤의 두 구는 본성과 모습이 서로 마주한 것이다.

그러므로 「유전장流轉章」112)에 이르기를, “ 한 문113)의 생각 없음(無念)이 바로 충분하거늘 어찌 위와 같이 널리 분별함을 필요로 하는가?
만약 앞과 같이 그 뜻을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면 견해가 굴복되지 않고 생겨난다. 만약 이해(解)와 행行이 다름을 구별하여 알지 못한다면 곧 망령되게 이해로 행行을 삼아서 망정을 깨뜨리지 못한다. 설령 총체적으로 앎이 없더라도 다만 억지로 마음을 억눌러서 여러 관觀을 짓는다. 아울러 그중에 짓는다고 말하나 참된 행行이 아니니, 끝내는 악한 견해를 늘려서 마魔의 그물에 들어가 이익을 이룰 수 없다. 그러므로 경에 이르기를, ‘백천의 벙어리 양羊 같은 중(瘂羊僧)114)은 지혜 없이 삼매(精慮)를 닦으니 설령 백천 겁이라도 열반을 얻는 이 하나 없고, 총민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능히 법을 듣고 법을 설하니 바란다고 생각하는 잠깐 사이에 빠르게 열반에 이를 수 있다’115)고 하였다.”116)라고 한다.

무슨 까닭에 혹은 앞의 다섯을 끊음이 행의 경계(行境)입니까?
오직 관법을 총괄하면 한 몸이기 때문에 다섯 구의 차별이 없다. 그러므로 운화 존자가 이르기를, “많은 말을 하지 말라. 다만 하나를 말할 뿐이기 때문이다.”117)라고 하였다. 또 경에 이르기를, “모든 법에 두 가지 이해를 내지 않는다.”118)라고 하였다.

관법을 총괄하면 한 몸이어서, 넒음 등의 4구를 짓지 않는다면 넓음과 좁음이 (자재하여 걸림 없는 문)에 거두어지지 않는 것입니까?
비록 하나의 관觀을 갖추어도 머무름이 없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서 걸림이 없다.

006_0845_a_01L絕前五是行境故此中前三句
006_0845_a_02L是緣起現前義次一句是緣起無
006_0845_a_03L生義何故具前四句是解境耶
006_0845_a_04L起解之人以別知諸法普別性
006_0845_a_05L方起正解若不別知即滯邪見
006_0845_a_06L是故前二句是普別相對後二
006_0845_a_07L第下之二第三七張 是性相相對
006_0845_a_08L故流轉章云一門無念便足
006_0845_a_09L須如上廣分別耶若不如前深
006_0845_a_10L思彼義則見不伏生若不別 [256] 知解
006_0845_a_11L行別者即妄以解爲行情謂不破
006_0845_a_12L設捴無知但强伏心而作諸觀
006_0845_a_13L謂中作非是眞行究竟增惡見
006_0845_a_14L入於魔網不能成益故經云百千
006_0845_a_15L [257] 羊僧無惠修靜慮設於百千刼
006_0845_a_16L無一得涅槃聰敏智惠人能聽法
006_0845_a_17L說法 1) [417] [258] 念須臾頃能速至涅槃
006_0845_a_18L何故或絕前五是行境耶
006_0845_a_19L是捴觀法是一身故無五句差別
006_0845_a_20L是故雲華云莫須多噵只言
006_0845_a_21L一故又經云於諸法中不生二
006_0845_a_22L捴觀法是一身不作廣等四
006_0845_a_23L句者不爲廣*俠攝耶雖具一
006_0845_a_24L而是無住故隨須無㝵如雲

006_0845_b_01L운화 존자가 이르는 바와 같이, “무분별하여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 뭇 일을 이룰 수 있다.”119)라고 한 것과 같다.

이해(解) 중의 네 구는 어째서 무분별이 아닙니까? 또 행의 경계에서 비록 하나의 관觀이지만 네 구를 방해하지 않는다면 이해와 행行의 차별을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
(이해와 행의) 둘이 아울러 각각 통하지만 그러나 치우쳐 더함이 있다. 말하자면 이해(解)를 이루고자 하면 하나의 많은 뜻으로써 그 이해가 치우치지 않고, 만약 행行을 이루고자 하면 바로 많음의 하나인 관觀으로 그 행行이 어지럽지 않다.

무슨 까닭에 다만 함께 끊음으로 행行을 삼습니까? 마땅히 보현의 행行 가운데에 모든 구절의 걸림 없는 작용을 갖추었다고 해야 합니까?
운화 존자가 이르기를, “진제와 속제 두 진리는 분별로 아는 것이 아니다. 다만 유정의 견해에 상대하기 때문에 두 모습으로 나눈 것뿐이다. 오직 유정의 견해를 넘는다면 역관과 순관이 상응할 것이다.”120)라고 하였다. 이로써 그 다섯 (구)를 끊는 것은 오직 유정의 견해를 넘게 하고자 할 뿐임을 안다.

앞의 다섯 구를 끊어서 그 하나의 관觀을 이룬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만약 넓다고 말하면 다른 말은 필요 없고 좁다고 말하는 것도 또한 그러하다. 그러나 유정의 견해를 넘으면 넓음과 좁음이 상응한다. 또 옛사람이 이르기를, “걸음을 걷는 것은 이해이고 걸음을 걷지 않는 것은 행行이다.”라고 하였으니 이 말이 일리가 있다. 신림 대덕이 이르기를, “별상을 여읜 총상이 있으니 모든 법의 구경의 체體이다.”121)라고 하였다. 넒음 등의 네 구를 끊어야 비로소 넒음 등이 구경이 되는 까닭에 별상인 모든 연을 모두 끊음이 바로 구경의 총상임을 안다. 또 어떤 이는 이른다. 이해란 닦음에 나아가는 사람의 이해이다. 경계란 넒음과 좁음 등의 법이다. 처음 수행하는 사람은 연기분의 걸림 없는 법으로 이해의 대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행行이란 연기분의 보현의 행行이다. 경계란 열 부처님의 성해性海이다.

006_0845_b_01L華所云無分別不住故能成衆事
006_0845_b_02L解中四句豈非無分別耶又行
006_0845_b_03L境中雖是一觀不防四句者解行
006_0845_b_04L差別云何可見二並各通
006_0845_b_05L有偏增謂欲成解則以一之多義
006_0845_b_06L其解不偏若欲成行便是多之一
006_0845_b_07L其行不亂何故但以俱絕爲
006_0845_b_08L行耶應云普賢行中具足諸句無
006_0845_b_09L㝵用耶雲華云眞俗二諦
006_0845_b_10L分別知但對情見 [259] 故分二相 [260] 唯越
006_0845_b_11L情見第下之二第三八張 逆順相應
006_0845_b_12L以此故知絕其五者唯是令越情
006_0845_b_13L見耳絕前五句成其一觀者
006_0845_b_14L何耶若言廣不須餘語言*俠
006_0845_b_15L亦爾然越情見廣*俠相應也
006_0845_b_16L故人云行步是解不行步是行
006_0845_b_17L此言有在也林德云有離別捴相
006_0845_b_18L是諸法究竟之體也以絕廣等四
006_0845_b_19L句方爲廣等究竟故知都絕別
006_0845_b_20L相諸緣正是究竟捴相也又有云
006_0845_b_21L解者是進修者解也境者廣*俠
006_0845_b_22L等法也初修之人以緣起分無
006_0845_b_23L㝵之法爲所解故行者是緣起分
006_0845_b_24L普賢之行境是十佛性海謂緣起

006_0845_c_01L말하자면 연기분의 행行하는 사람이 저 성해로 행의 경계(行境)를 삼기 때문이다. 저 옛사람이 “일승의 행자는 오직 국토해를 닦는다.”라고 함이 바로 여기에 있다.

대기
『대기』에 이른다. ‘『화엄경』과 같다’란 (다음과 같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대경』의 제목 중에서 ‘대방大方’은 기세간이다. ‘광불廣佛’은 부처님의 세계이다. ‘화花’는 원인이니 위로 등각等覺에서부터 아래로 육취에 이르기까지 곧 중생계이다. ‘엄嚴’은 이 셋이 연기하여 서로 융섭하고 즉卽해서 두렷이 밝고 자재한 것이다. ‘경經’은 앞의 경계를 육상으로 관觀하는 지혜로써 이해(解)와 행行을 꿰뚫어 지녀서 잃어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관觀하는 지혜에 사이가 있다면 서로 이어져서 꿰뚫어 지니지 못하니 곧 ‘경經’이 아니다. 총상은 일곱 글자의 제목이고, 별상은 다함없는 품과 모임이며, 동상은 품과 모임이 모두 같은 것이고, 이상은 품과 모임이 각각 다른 것이며, 성상은 연기하여 모아 이루는 것이고, 괴상은 품과 모임이 각각 머무는 것이다.

화엄금관초

『화엄금관초花嚴錦冠鈔』122)에 이른다. 첫 번째, 경의 제목을 해석한다. 운운. ‘대大’ 등 일곱 글자를 간략히 일곱 문으로 분별한다. 운운.
네 번째 펼쳐서 폄에 끝이 없음은 미세한 것에서 분명한 것에 이르기까지 간략히 여덟 거듭이 있고 자세히는 열 거듭이다. 처음, 가장 청정한 법계를 굳이 이법(理)과 지혜(智)의 두 문으로 나누니 곧 보리와 열반의 다름이다. 둘째, 이법에 체體와 모습(相)과 작용(用)을 열어서 ‘대방광大方廣’으로 삼고, 지혜에 원인과 결과를 열어서 ‘불화엄佛華嚴’으로 삼으니 ‘엄嚴’은 원인과 결과에 통하기 때문이다. 연결하여 합해서 말을 이루니 이에 ‘경經’이라고 이름한다. 곧 제목 중 일곱 글자에서 위의 둘123)은 법을 펼친 것이고 아래는 모두 장소를 펼친 것이다.

셋째, 일곱 글자를 펼쳐서 (『화엄경』의) 첫 모임을 이룬다.

006_0845_c_01L分行人以彼性海爲行境故
006_0845_c_02L古人言一乘行者唯修國土海
006_0845_c_03L正在玆乎

006_0845_c_04L
大記云如花嚴經者古人云大經
006_0845_c_05L題名中大方則器界廣佛則佛界
006_0845_c_06L花則是因上從等覺下至六趣即是
006_0845_c_07L生界嚴則此三緣起互相融即
006_0845_c_08L明自在經則於前境界以六相觀智
006_0845_c_09L是解是行貫持不失故也若觀智有
006_0845_c_10L不得相續貫持則非經矣捴則
006_0845_c_11L七字題名別則無盡品會同則品會
006_0845_c_12L皆同異則品會各異成則緣起集成
006_0845_c_13L壞則品會各住

006_0845_c_14L
花嚴錦冠鈔云 2)弟一釋經題目
006_0845_c_15L
大等七字第下之二第三九張
006_0845_c_16L以七門分別云云 *弟四展演無窮
006_0845_c_17L從微至著略有八重廣則十
006_0845_c_18L初於最淸淨法界强分理智二
006_0845_c_19L即菩提涅槃之異二於理開體
006_0845_c_20L相用爲大方廣於智開因果爲佛
006_0845_c_21L花嚴嚴通因果故連合成詮
006_0845_c_22L名爲經即題中七字上二展法
006_0845_c_23L下皆展處三展七字以成初會
006_0845_c_24L「歛」作「欲」{乙}「弟」作「第」{乙}次同

006_0846_a_01L첫 모임은 총摠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열 바다124)와 열 지혜가 있다. 열 바다 가운데 체體와 모습(相)과 작용(用)이 있으니 곧 ‘대방광大方廣’이고, 열 지혜 가운데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으니 곧 ‘불화엄佛華嚴’이다. 이것을 말로 풀이하니 곧 이름하여 ‘경經’이라고 한다. 나머지는 모두 이것을 예로 한다.

넷째, 첫 모임을 펼쳐서 뒤의 여덟 모임을 이룬다. 여덟 모임 가운데 네 거듭의 원인과 결과가 있다. 그 관觀의 대상과 증득의 대상이 곧 ‘대방광大方廣’이고 관觀의 주체와 증득의 주체가 모두 ‘불화엄佛華嚴’이다. 다섯째, 펼쳐서 법계의 같은 부류의 세계에 변만하니 모두 아홉 모임이 있다. 여섯째, 같은 부류의 세계의 티끌에 변만하다. 일곱째, 법계의 다른 부류의 세계에 변만하다.

여덟째, 법계의 다른 부류의 세계의 티끌에 변만하다. 혹은 같고 혹은 다름에 각각 주主와 반伴을 겸하여서 곧 열 거듭을 이룬다.125) 혹은 허공의 티끌길126)의 인드라그물 세계(刹土)에 변만함으로써 열 거듭을 삼는다. 이것은 법계 안에는 한 티끌, 한 세계(刹)도 이 경을 설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경』에 이르기를, “비로자나불의 원력이 법계에 두루하니, 일체 국토 가운데 항상 위없는 법륜을 굴린다.”127)라고 하고, 또 “이곳에서 부처님이 앉아 계시는 것을 보는 것처럼, 일체의 티끌에서도 또한 그러하다. 부처님의 몸은 가심도 없고 또한 오심도 없으나, 있는 바 국토에서 모두 분명하게 본다.”128)라고 한 것이다.

다섯 번째 말아서 거둠이 서로 다함은 (다음과 같다.) 말하자면 다른 부류의 세계의 티끌에서 설하는 바가 다른 부류의 세계 가운데 설하는 바와 다르지 않다. 다른 부류의 세계 가운데 설하는 바가 같은 부류의 세계의 티끌에서 설하는 바와 다르지 않다. 같은 부류의 세계의 티끌에서 설하는 바가 같은 부류의 세계에서 설하는 바와 다르지 않다. 같은 부류의 세계에서 설하는 바는 보광명전 (이후의) 여덟 모임에서 설하는 바와 다르지 않다. 여덟 모임에서 설하는 바는 첫 모임에서 설하는 바와 다르지 않다. 첫 모임에서 설하는 바는 제목의 일곱 글자를 벗어나지 않는다.

006_0846_a_01L初會摠故彼有十海十智十海之
006_0846_a_02L有體相用即大方廣十智之
006_0846_a_03L有因有果即佛花嚴詮釋於
006_0846_a_04L即名爲經餘皆例此四展初
006_0846_a_05L會以成後八會八會之中有四
006_0846_a_06L重因果其所觀所1)即大方廣
006_0846_a_07L能觀能訂皆佛花嚴五展遍於法
006_0846_a_08L界同類刹中皆有九會六遍同
006_0846_a_09L類刹塵七遍法界異類刹中八遍
006_0846_a_10L法界異類刹塵若同若異各兼主
006_0846_a_11L即成十重或以遍虛空塵道
006_0846_a_12L帝網刹土以爲十重斯則法界之
006_0846_a_13L無有一塵一刹不說此經也
006_0846_a_14L故大經云毗蘆遮那佛願力周法
006_0846_a_15L一切國土中恒轉無上輪又如
006_0846_a_16L於此處見佛坐一切塵中亦復然
006_0846_a_17L佛身無去亦無來所有國土皆明
006_0846_a_18L *弟五卷攝相盡者謂異類刹
006_0846_a_19L塵所說不殊異類刹中所說異類
006_0846_a_20L刹中所說不殊同類刹塵所說
006_0846_a_21L類刹塵所說不殊同類刹中所說
006_0846_a_22L同類刹中所說不殊普光八會所
006_0846_a_23L第下之二第四○張 八會所說
006_0846_a_24L殊初會所說初會所說不出題中

006_0846_b_01L제목의 일곱 글자는 이법과 지혜를 벗어나지 않는다. 이법과 지혜는 청정한 법계를 벗어나지 않는다. 다만 이 ‘청정한 법계’라는 이름 또한 안립한 것일 뿐이니 체體는 얻을 수 없다. 이것은 곧 자취가 없고 흔적이 끊어졌으니 말과 생각으로는 미치지 못한다. 그러므로 『대경』에 이르기를, “법성은 본래 공空하고 고요하여 취함도 없고 또한 봄도 없다. 성품이 공함이 곧 부처이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다.”129)라 하고, 또 “혹 진실하고 혹 진실하지 않고 혹 허망하고 허망하지 않음이 세간과 출세간에 다만 임시의 말만 있을 뿐이다.”130)라고 한 것이다.

여섯 번째, 펼치는 것과 마는 것이 걸림이 없음은 운운. 펼치는 것과 마는 것이 한 때이니 걸림이 없다. 자세함이 곧 간략함이고 간략함이 곧 자세함이어서 모두 걸림이 없기 때문이다.

일곱 번째, 마음을 관觀하는 데로 거두어 돌아감은, 이제까지는 가르침의 말과 뜻을 기준으로 하여 많은 문이 있었으나, 만약 한마음에 거두어 돌아가지 않으면 내가 어디에 참예하겠는가. 지금은 마음을 일으켜 수행하게 하는 행이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말한 바 ‘대大’란 곧 마음의 체體이니, 마음의 체體는 가없어서 ‘대大’라고 이름한다. ‘방方’은 마음의 모습(相)이니, 마음이 덕 있는 모습의 법을 갖추었기 때문에 ‘방方’이라고 이름한다. ‘광廣’은 마음의 작용(用)이니, 마음에 체體에 걸맞는 작용이 있기 때문에 ‘광廣’이라고 이름한다. ‘불佛’은 마음의 결과이니, 마음이 해탈한 곳을 이름하여 ‘불佛’이라고 한다. ‘화花’는 마음의 원인이니, 마음이 행하는 바의 행行을 ‘화花’로 비유한 것이다. ‘엄嚴’은 마음의 공용功用이니, 마음이 훌륭하고 교묘하게 장엄하고 꾸밀 수 있음을 지목하여 ‘엄嚴’이라고 한다. ‘경經’은 마음의 가르침이니, 마음이 이름과 말을 일으켜서 말이 여기에 나타나기 때문에 이름하여 ‘경經’이라고 한다.

이것은 ‘대大’ 등의 일곱 글자가 함께 마음을 여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마음(心)’이라는 한 글자는 체體도 아니고 작용도 아니며, 원인도 아니고 결과도 아니며, 뜻도 아니고 가르침도 아니다. 비록 일체가 아니나 일체가 될 수 있다. 무슨 까닭인가? 하나의 법계의 마음은 상대를 끊은 법이기 때문이다.

006_0846_b_01L七字題中七字不出理智理智
006_0846_b_02L不出淸淨法界只此淸淨法界之
006_0846_b_03L亦是安立體不可得斯則泯蹤
006_0846_b_04L絕跡言思所不及也故大經云
006_0846_b_05L法性本空寂無取亦無見性空即
006_0846_b_06L是佛不可得思量又云若實若不
006_0846_b_07L若妄若不妄 [261] 世間出世間
006_0846_b_08L有假言說 *弟六展卷無㝵云云
006_0846_b_09L卷一時無有障㝵廣即是略
006_0846_b_10L即是廣皆無障㝵故 *弟七攝歸
006_0846_b_11L觀心者上來約敎詮義有是多門
006_0846_b_12L若不攝歸一心則於我何預今則
006_0846_b_13L令知有行發意修行所言大者
006_0846_b_14L是心體心體無邊故名爲大
006_0846_b_15L是心相心具德相之法故名爲
006_0846_b_16L廣是心用心有稱體之用
006_0846_b_17L名爲廣佛是心果心解脫處
006_0846_b_18L之爲佛花是心因心所行行喩之
006_0846_b_19L以花嚴是心之功用心能善巧嚴
006_0846_b_20L目之爲嚴經是心敎心起名言
006_0846_b_21L詮現於此故名爲經斯則大等七
006_0846_b_22L並不離心然心之一字非體
006_0846_b_23L非用非因非果非義非敎雖非
006_0846_b_24L一切能爲一切何以故以一法

006_0846_c_01L
말한 바 관행觀行은 행하는 모습이 어떠한가?
운운. 현상과 현상이 걸림 없는 법계(事事無礙法界)를 마주하여 곧 현상과 현상이 걸림 없음에 대한 관觀을 이루기 때문에 상즉상입하여, 넓음과 좁음, 숨음과 나타남, 주主와 반伴이 서로 참여하여 거듭거듭 다함없음 등도 또한 법을 근본으로 한다. 이와 같이 법에 의거하여 관觀하는 까닭에 이름하여 ‘관觀’이라고 한다. 관觀에 의거하여 행行을 일으키니 행行 또한 이와 같다.

사대상전법륜관

『사대상전법륜관四大常轉法輪觀』131)에 이른다. 이 경의 뜻을 얻고자 하면 합하여 세 단이 있다. 첫째는 ‘대방광불大方廣佛’ 등의 일곱 글자를 설하는 것이고, 둘째는 39품의 큰 뜻(大意)을 해석하는 것이며, 셋째는 도리를 나타냄에 관觀에 의거하여 자세히 해석하는 것이다.

첫째, 제목을 설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대방광大方廣’은 관觀하는 대상인 경계이고 ‘불화엄佛華嚴’은 관觀하는 주체인 마음이며 ‘경經’은 경계와 지혜에 통한다. 이른바 ‘대大’는 사대이고 ‘방方’은 사대의 띠끌이며 ‘광廣’은 하나하나의 티끌의 모습이 법계허공계와 구세ㆍ십세에 두루하지 않는 바가 없는 것이다. ‘불佛’은 이 이법을 이해하는 마음이다. ‘화花’는 이 마음이 청정하여 맑고 물듦을 여읜 것이다. ‘엄嚴’은 물듦을 여읜 마음에 거스름과 따름의 덕을 갖춘 것이다. ‘경經’은 주체와 대상(能所)에 둘이 없는 것이다.
셋째, 도리를 나타냄에 관觀에 의거하여 자세히 해석하는 것은, 먼저 마음의 모습을 융섭하여 이 경의 뜻을 풀이한다.

006_0846_c_01L界心是絕待法故所言觀行者
006_0846_c_02L行相如何云云 對事事無㝵法
006_0846_c_03L即成事事無㝵觀故相即相入
006_0846_c_04L2)俠隱現主伴交叅重重無盡
006_0846_c_05L亦以法本如此依法而觀
006_0846_c_06L名爲觀依觀起行行亦如之第下
006_0846_c_07L之二第四一張

006_0846_c_08L
四大常轉法輪觀云欲得此經意
006_0846_c_09L合有三段一說大方廣佛等七字
006_0846_c_10L二釋三十九品大意三現道理依
006_0846_c_11L觀廣釋初說題目者大方廣者
006_0846_c_12L所觀之境佛花嚴者能觀之心
006_0846_c_13L經者通於境智所謂大者四大
006_0846_c_14L方者四大之塵廣者一一塵相
006_0846_c_15L法界虛空界九世十世中無所不
006_0846_c_16L佛者解此理心花者此心淸
006_0846_c_17L湛然離染嚴者離染心中
006_0846_c_18L逆順德經者能所無二二釋品
006_0846_c_19L大意說有摠別摠者三毒即三
006_0846_c_20L一一智中具十德故是爲三十
006_0846_c_21L又一智中具三世具見聞解行
006_0846_c_22L具三世間故是爲九品別者
006_0846_c_23L云云 三現道理依觀廣釋者先融
006_0846_c_24L「訂」通「證」於此書{編}次同「俠」作「狹」{乙}

006_0847_a_01L무엇이 마음의 모습을 융섭하는 것인가? 한 생각도 내지 않는 바른 생각으로 마음을 관觀하여 실상의 이법과 상응하는 때에 모든 마음의 모습을 여읜다. 이때 세 가지의 이익을 갖추어 얻는다. 하나는 열 가지 외도가 행하여 짓는 일을 뛰어넘는 것이다. 둘은 열 가지 이익을 얻는 것이다. 셋은 자기의 몸과 마음 중에 모든 법을 갖추어 보는 것이니, 밝은 거울을 집어 얼굴의 모습을 스스로 보는 것과 같다.

열 가지 이익이란 (다음과 같다.) 첫째, 자기의 몸과 마음에 계戒와 선정과 지혜의 일체 법을 갖춘다. 경에 이르기를, “마음을 한 곳에 제어하니 변별하지 않는 일이 없다.”132)라고 한 것과 같다. 마음을 묶어 한 곳에 두면 지혜의 문을 열 수 있다. 하나를 지켜 옮기지 아니하면 정신이 흩어지지 않고 온갖 영령이 돕고 지킨다. 처음 부사의한 삼매를 배움에 마음을 하나의 연緣에 묶어서 만약 오래 익히는 자이면, 마음을 관觀하는 것을 성취하고 다시 마음의 모습이 없어서 항상 선정과 함께 한다. 일체의 마음의 모습이 곧 마음이 아니기 때문에 부사의한 선정이라고 이름한다. 운운.

경經에 다섯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일체경이고, 둘째는 한마음의 경(一心經)이고, 셋째는 자체의 경(自體經)이고, 넷째는 머무름 없음의 경(無住經)이고, 다섯째는 참모습의 경(實相經)이다. 말하자면 하나의 법계에 한마음의 도장으로써 모든 연緣의 체體에 도장 찍으면 일체의 모든 연緣이 도장의 무늬가 아님이 없기 때문에 일체경이다. 이 일체경이 오직 한마음의 양이기 때문에 한마음의 경이다. 마음의 모든 법이 체體가 있기 때문에 자체의 경이다. 자체가 ‘나’가 없어서 일체에 집착이 없기 때문에 머무름 없음의 경이다. 이 머무름 없음의 경은 맑아서 모습이 없기 때문에 참모습의 경이다. 첫째는 문자의 경이고, 다음은 뜻의 경(義經)이고, 다음은 관의 경(觀經)이고, 다음은 선정의 경(定經)이고, 마지막 하나는 법의 경(法經)이다.

006_0847_a_01L心相解此經意云何融心相
006_0847_a_02L念無生正念觀心與實相理相應
006_0847_a_03L時中離諸心相尒時具得三種利
006_0847_a_04L一者超過十種外道所爲作事
006_0847_a_05L二者獲得十種利三者自身心中
006_0847_a_06L具見諸法如執明鏡自見面像
006_0847_a_07L十種利益者一者自身心中具戒
006_0847_a_08L定惠一切法如經云制心一處
006_0847_a_09L無事不辨繫心在一處能開智惠
006_0847_a_10L守一不移精神不散萬靈扶
006_0847_a_11L初學不思議三昧繫心一緣
006_0847_a_12L若久習者觀心成就更無心相
006_0847_a_13L恒與定俱一切心相即非心故
006_0847_a_14L是名不思議定云云 經有五種
006_0847_a_15L一切經第下之二第四二張1) [418]
006_0847_a_16L心經三自體經四無住經五實
006_0847_a_17L相經謂於一法界以一心印
006_0847_a_18L諸緣體一切諸緣無不印文故
006_0847_a_19L一切經也此一切經唯一心量故
006_0847_a_20L一心經也心之諸法有體故自體
006_0847_a_21L經也自體無我於一切中2)
006_0847_a_22L無住經也此無住經湛然無
006_0847_a_23L相故實相經也初文字經次則
006_0847_a_24L義經次則觀經次則定經後一

006_0847_b_01L
심륜초

『심륜초心輪鈔』에 이른다. 비로소 바른 깨달음을 이룬 부처님이 해인삼매에 들어가 증득하는 바 법문에 간략히 여섯 거듭의 경이 있다. 첫째는 안과 밖을 여읜 경이다. 둘째는 안을 향하는 경이다. 셋째는 밖을 향하는 경이다. 넷째는 안과 밖이 상응하는 경이다. 다섯째는 안에서 간략히 설하는 경이다. 여섯째는 근기를 위하여 장차 설하는 경이다. 이른바 앞의 세 경은 과분果分의 자리自利이기 때문에 과분의 별교이고, 뒤의 세 경은 인분因分의 자리自利이기 때문에 인분의 별교이다.

원통수좌기

『원통수좌기圓通首座記』133)에 이른다. 『화엄경』 첫머리의 ‘여시아문如是我聞’ 네 글자를 해석함에 세 가지 뜻이 있다. 이것에 대하여 아래의 ‘시성정각始成正覺’도 또한 세 가지 뜻이 있다. 첫 번째는 말을 여읜 현묘하고 고요한 곳이다. 말하자면 모습이 끊어져 지목할 수 없는 법성이 현묘하고 미세하게 뛰어넘어서 생각 밖(意外)의 곳이다. 지목할 수 없는 법성이란 법계의 법의 이름과 지위가 움직이지 않는 곳이다. 만약 지금 내 오척 되는 몸이라면 오직 오척이 이것일 뿐이다. 이 오척에 다시 부처님의 이름, 법의 이름을 지목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목할 수 없는 법성’이라고 한 것이다. 이 ‘오척이라는 이름이 바로 곧 법의 체體인데 이 이름이 법 위에 세워진 것이라고 하니 이와 같이 헤아리는 자는 미치지 못하는 곳이므로 ‘뛰어넘어서 생각 밖’이라 하고, 또 ‘모습이 끊어져’라고 하는 것이다.

‘오직 오척이 이것일 뿐이다’란, 연기의 경계에서는 이 뜻을 허용할 수 있지만 어째서 성해性海라고 하는가?
이 ‘오척’이라는 이름의 연緣 가운데 오척의 법을 세우는 것은 연기의 인분이고, 이 이름 이외에 다시 한 법도 세울 수 없는 것은 성해의 과분이다.

006_0847_b_01L法經也

006_0847_b_02L
心輪鈔云始成正覺佛入海印三
006_0847_b_03L所訂法門略有六重經一者
006_0847_b_04L離內外經二者向內經三者向外
006_0847_b_05L四者內外相應經五者內中略
006_0847_b_06L說經六者爲機將說經所謂前三
006_0847_b_07L是果分自利故果分別敎
006_0847_b_08L三經是因 [262] 分自利故因分別敎

006_0847_b_09L
圓通首座記云花嚴經首如是我
006_0847_b_10L聞四字釋有三義對此則下始
006_0847_b_11L成正覺亦有三義也3)弟一離言
006_0847_b_12L玄寂之處謂絕相不可目法性
006_0847_b_13L微超出意外之處也不可目之法
006_0847_b_14L性者法界法之名位不動處也
006_0847_b_15L今我五尺身者唯五尺是耳此五
006_0847_b_16L尺上不許更目佛名法名故云不
006_0847_b_17L可目之法性也此五尺名正即法
006_0847_b_18L而謂此名是法上所立如是
006_0847_b_19L計者所不及處故云超出意外
006_0847_b_20L又云絕相也唯五尺是耳者
006_0847_b_21L起之際第下之二第四三張 可許此
006_0847_b_22L何云性海耶於此五尺名之
006_0847_b_23L緣中立五尺法者緣起因分也
006_0847_b_24L此名以外更無一法可立者性海

006_0847_c_01L그러므로 법장 스님이 이르기를, “연緣이 별도의 연緣이 없어서 체體로써 연緣을 다하니, 따라서 차별 있는 연기가 곧 매우 깊은 국토의 바다이다.”134)라고 한다. 또 의상 화상이 이르기를, “말이 깨달음에 있으면 근본과 다르지 않다.”135)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교분 가운데 말은 설하는 것이고 설해지는 뜻을 설하지만, 지금 이 가운데 말은 곧 깨달음의 체體이기 때문에 설함과 설해짐의 차이가 없다.

내 오척에 다시 부처님과 법의 이름을 허용하지 않는 뜻을 무엇으로 증명을 삼아서 알 수 있는가?
이와 같이 일어난 내 말이 증명이 된다. 그러나 겸하여 증명할 것을 찾으면 「광명각품」에 이르기를, “많음 가운데 하나의 성품이 없고 하나도 또한 많음이 없다.”136)라고 한다. 지상 스님은 이를 인용하여 즉문의 경증으로 삼았다.137) 그러나 말한 바 ‘많음’이란 다만 많음일 뿐이니, 많음 가운데 다시 하나를 이루는 성품은 없다. 말한 바 ‘하나’란 다만 하나일 뿐이니, 하나 가운데 다시 많음을 이루는 성품은 없다. 이런 까닭에 오직 내 오척이 이것일 뿐이니, 여기에 부처님과 법의 이름을 얻을 수 없다.

이 뜻으로써 이 글을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여如’는 진여(如)이니 곧 법의 근본인 ‘여如’는 ‘같아서 균등한 것’이다. 그러므로 바로 곧 ‘이것이 내가 들은 것’이다. 이 뜻은 오직 내가 들었을 뿐이니, 내가 들은 것인 이상 다시 다른 말을 붙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미 ‘나’를 기준으로 해서 논한 까닭에 다만 나일 뿐이고 위에 다시 부처님과 보살의 이름이나 지위 등을 붙이지 않는다. 듣는 것은 나에게 국한된 것이다.

이미 이름을 끊고 모습을 여의었다면, 어째서 ‘오척’이라는 이름을 거론하는가?
이 증분에서는 ‘오척’이라는 이름이 곧 참된 법의 체體이다.

006_0847_c_01L果分也是故藏師云緣無別緣
006_0847_c_02L以體盡 [263] 是故差別緣起即是甚
006_0847_c_03L深土海又相和尙云言說在訂
006_0847_c_04L與本不異也然則敎分之中言是
006_0847_c_05L能詮詮所詮義今此之中言即訂
006_0847_c_06L體故無能所詮之異也吾五尺
006_0847_c_07L不可更許佛之與法名目之義
006_0847_c_08L以何爲訂而得知耶如是所發
006_0847_c_09L我言爲訂4)不見 [419] [264] 兼訂者光明
006_0847_c_10L覺品云多中無一性一亦無有多
006_0847_c_11L至相引此爲即門之訂也然而所
006_0847_c_12L言多者只是多耳多中更無成一
006_0847_c_13L之性所言一者只是一耳一中
006_0847_c_14L更無成多之性是故唯吾尺是耳
006_0847_c_15L此上不得佛法名目也以此義釋
006_0847_c_16L此文者如者如也即是法本如
006_0847_c_17L者如均也是故正即是我聞也
006_0847_c_18L此意者唯我聞耳我聞以上
006_0847_c_19L不加餘語也旣約我論故但我耳
006_0847_c_20L上不更加佛與菩薩名位等也
006_0847_c_21L聞者局於我也旣絕名離相
006_0847_c_22L何故擧五尺名耶此訂分中
006_0847_c_23L「一」無有{乙}「着」作「著」{乙}「弟」作「第」
006_0847_c_24L{乙}
「不見」覔」{乙}

006_0848_a_01L이 이름 이외에 다시 법의 체體가 없기 때문이다. 연기분 중에서는 이름과 뜻의 두 지위가 같지 않기 때문에 상즉하게 하나, 지금 이 증분 중에서는 곧 이와 같지 않다.

두 번째는 닦음을 여의고 깨달음을 여읜 원만하고 지극한 도道이다. 장소와 사람을 가리지 않으니 기준으로 하는 것을 따라 부처님이고, 정보(主)와 의보(器)를 구별하지 않으니 현상(事)을 대함이 이와 같다. 그러므로 「광명각품」에 이르기를, “국토와 중생이 동일함과 다름을 얻을 수 없으니, 이와 같이 잘 관찰함을 부처님 법의 뜻을 안다고 이름한다.”138)라고 한다. 장소와 사람을 가리지 않고 정보와 의보(主器)를 구분하지 않으며 기세간과 중생이 본래 다르지 않으니, 하나의 부처님의 체體이기 때문이다. 또한 동일하지도 않으니 각각 자신의 이름과 지위를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 말미암아 알 수 있으니, 비록 삼세간이 하나의 부처님의 체體이지만 셋을 융섭하여야 비로소 하나가 되는 것은 아니다. 비록 하나의 부처님의 체體가 삼세간에 즉하나 하나를 나누어서 셋을 짓는 것은 아니다. 그런즉 삼세간의 이름과 지위가 움직이지 않음이 곧 부처님이다.

이 뜻으로 이 글을 풀이하면 ‘여如’는 ‘나(我)’와 ‘들음(聞)’이 하나가 되는 때(一時)이니 곧 부처님이다. 이상의 두 거듭의 뜻을 기준으로 하여 그것을 말하면 ‘여시아문’의 네 글자가 바로 곧 구경의 법의 체體이기 때문에, 이로써 머리를 삼아 아래 글의 목표로 하는 바(所目)를 헤아려 가려내는 뜻은 없다.139)

세 번째는 바른 깨달음의 지혜의 해가 보리수(道樹)에 떠오름이다. 말하자면 부처님을 기준으로 부처님을 논하면 법계의 모든 법이 부처님 아님이 없다. 그러나 중생의 연緣을 따라서 부처를 이룸이 있음을 보이고 법을 설함이 있음을 보이기 때문에 보리수에서 비로소 바른 깨달음을 이룬다.
이 뜻을 기준으로 하여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006_0848_a_01L尺之名即實法體此名以外
006_0848_a_02L無法體故也緣起分中名之與義
006_0848_a_03L二位不同故令相即今此訂分之
006_0848_a_04L中即不如是1)弟二離修離訂圓
006_0848_a_05L極至道也第下之二第四四張 不簡
006_0848_a_06L處之與人隨約是佛不別主之與
006_0848_a_07L觸事如是是故光明覺品云
006_0848_a_08L土及衆生一異不可得如是善
006_0848_a_09L觀察名知佛法義處人不簡
006_0848_a_10L器不分器與衆生本非異也
006_0848_a_11L一佛體故又亦非一以各各不動
006_0848_a_12L自名位故由是得知2) [420] 三世間
006_0848_a_13L是一佛體而非融三方爲一也
006_0848_a_14L一佛體即三世間而非分一以
006_0848_a_15L作三也然則三世間之名位不動
006_0848_a_16L是即佛也以此義釋此文者如者
006_0848_a_17L我與聞爲一之時即是佛也約此
006_0848_a_18L上二重之義言之則如是我聞四
006_0848_a_19L正即究竟法體故無以此爲首
006_0848_a_20L3) [421] 簡下文所目之義也*弟三正
006_0848_a_21L覺智日出於道樹謂約佛論佛
006_0848_a_22L則法界諸法無非是佛也然而隨
006_0848_a_23L衆生緣示有成佛示有說法故
006_0848_a_24L於道樹始成正覺約此義釋者

006_0848_b_01L일곱 장소 여덟 모임의 법은 부처님이 설하신 바인데, 결집한 사람이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공목장』을 지은 저자(章主)가 이 뜻에 의거하여 “아래 글의 목표로 하는 바를 헤아려 가려내는 뜻이다.”140)라고 한 것이다.

위의 셋 중에 나아가 첫 번째 부처님은 깨닫는 대상이고, 두 번째 부처님은 깨닫는 주체이다. 이 두 부처님을 갖추는 것이 해인삼매이다. 이 삼매와 깨닫는 주체인 지혜를 함께하여 큰 허공(大空)이라고 이름한다. 이 큰 허공은 근기가 필요로 하는 바를 따라서 갖가지 이름을 이룬다. 이루는 바 법은 티끌의 수처럼 궁구하기 어려우나 중요한 것만 간추려 말하면 열 가지를 벗어나지 않는다. 삼승에서 밝히는 바인 삼과백법三科百法은 이숙식異熟識을 따라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주主와 반伴이 서로 이루는 뜻을 논하지 않는다. 지금 이 열 가지 법은 깨달음의 지혜인 큰 허공을 근본으로 하는 가운데 온전히 완전하게 목표로 하는 바이기 때문에 주主와 반伴이 이루어진 종지(宗)라고 한다. 또 세 부처님 중 처음 두 부처님은 비로소 바른 깨달음을 이룸의 증분이고, 세 번째 부처님은 비로소 바른 깨달음을 이룸의 교분이다. 증분에 나아가 첫 번째 뜻은 증득하는 바이고, 두 번째 뜻은 증득하는 주체인 원만한 지혜이다. 교분은 곧 이 원만한 지혜가 연緣과 상응하는 뜻이다.

만약 처음의 풀이로써 보면 ‘진여 이것(如是)’이 곧 ‘내가 들은 것(我聞)’이다. ‘비로소 바른 깨달음을 이루다(始成正覺)’는 어떻게 풀이하는가?
아울러 이 예로써 풀이한다. 말하자면 ‘한 때(一時)’란 또한 곧 법성을 만족한 것이니 다시 더하는 것이 없고 장소 또한 그러하다. ‘비로소 바른 깨달음을 이루다(始成正覺)’란 또한 예전에 미혹했다가 지금 깨닫는 것이 아니라, 법계에 응하여 들어맞고 삼세의 때를 다하니 곧 구경의 법체를 만족한 것이며, 내지 60권 『(화엄)경』 끝의 “중생의 마음은 미세한 티끌”141) 등의 게송도 또한 이와 같다.

006_0848_b_01L處八會之法是佛所說而結集人
006_0848_b_02L言如是我聞也是故章主依此義
006_0848_b_03L料簡下文所目之義也就上三
006_0848_b_04L*弟一佛所訂*弟二佛能訂也
006_0848_b_05L具此二佛是海印定與此定俱
006_0848_b_06L能訂之智名爲大空此大虛空
006_0848_b_07L隨機所須成種種名也所成之法
006_0848_b_08L塵筭難窮要略而言不出十種也
006_0848_b_09L三乘所明三科百法從異熟識之
006_0848_b_10L所生故不論主伴相成之義今此
006_0848_b_11L十法本於訂智大虛空中全全所
006_0848_b_12L目故云主伴成宗也又三佛中
006_0848_b_13L二佛第下之二第四五張 則始成正
006_0848_b_14L覺之訂分也*弟三佛則始成正覺
006_0848_b_15L之敎分也就訂分中初義則所訂
006_0848_b_16L*弟二義則能訂圓智也敎分
006_0848_b_17L即此圓智與緣相應之義也
006_0848_b_18L若以初釋見者如是即我聞也
006_0848_b_19L始成正覺則如何釋耶並以此
006_0848_b_20L例釋也謂一時者亦即滿足法性
006_0848_b_21L更無所加處亦爾也始成正覺者
006_0848_b_22L亦非古迷今覺應稱法界竟三世
006_0848_b_23L即是滿足究竟法體乃至六
006_0848_b_24L十卷經末衆生心微塵等偈亦如

006_0848_c_01L
만약 두 번째 풀이로써 보면 ‘여如’는 ‘나(我)’와 ‘들음(聞)’이 하나가 되는 때(一時)이니 곧 부처님이다. ‘나’는 듣는 주체이고 ‘들음’은 듣는 대상이니 듣는 주체인 내가 듣는 법과 둘이면서 둘이 아니라서 오직 하나의 체體인 것이 곧 부처님의 체體와 같음(如)이다. 장소(處)는 보리도량이 부처님의 체體이다. 원만하게 나타남을 기준으로 하여 본다면 ‘비로소 정각을 이루다’는 세 번째 부처님이다.142) 이러한 뜻 등으로써 (『화엄경』) 한 부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풀이해야 비로소 ‘묘함(妙)’이 될 것이다.

고기

‘고기’에 이른다. 『대경』에 간략히 열 거듭의 해석이 있다. 말하자면 첫 번째는 『영락경』의 삼현십지三賢十地는 삼승이고, 이 경에서 변별하는 삼현십지는 일승이다. 만약 이 뜻을 기준으로 하여 이 경문을 풀이하면,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일시에 부처님께서 비로소 바른 깨달음을 이루시고’, 첫째의 적멸도량에서 화장세계를 설하시고, 둘째의 보광법당에서 십신十信을 설하시고, 내지 여덟째의 사위국舍衛國에서 입법계를 설하신다.

두 번째는 이 경에 나아가 항포行布의 차례는 삼승이고 육상원융은 일승이다.

006_0848_c_01L是也若以*弟二釋見者如者是
006_0848_c_02L我與聞爲一之時即是佛也我是
006_0848_c_03L能聞聞是所聞能聞之我與所
006_0848_c_04L聞法二而不二唯是一體者
006_0848_c_05L是如佛體也處者菩提場是佛體
006_0848_c_06L約圓現而見也始成正覺者
006_0848_c_07L*弟三佛也以此義等釋一部始
006_0848_c_08L方爲妙也

006_0848_c_09L
古記云大經略有十重解釋
006_0848_c_10L*弟一瓔珞經三賢十地三乘
006_0848_c_11L經所辨三賢十地一乘若約此義
006_0848_c_12L釋此經文則如是我聞一時佛始
006_0848_c_13L成正覺於*弟一寂滅場中說花藏
006_0848_c_14L世界*弟二普光堂中說十信
006_0848_c_15L至*弟八舍衛國中說入法界*弟
006_0848_c_16L就此經中行布次*弟者三乘
006_0848_c_17L六相圓融者一乘約此義釋
006_0848_c_18L是我聞乃至寂滅場中說花藏世
006_0848_c_19L*弟4) [422] [265] 寂滅場內普光堂中
006_0848_c_20L十信第下之二第四六張 乃至*弟
006_0848_c_21L八寂滅場內舍衛國中說入法界
006_0848_c_22L*弟三前二是表相故三乘內則
006_0848_c_23L「弟」作「第」{乙}次同「雖」作「離」{乙}「科」
006_0848_c_24L作「料」{乙}
「一」作「二」{乙}

006_0849_a_01L이 뜻을 기준으로 하여 풀이하면,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내지 적멸도량에서 화장세계를 설하시고, 둘째의 적멸도량 내 보광법당에서 십신을 설하시고, 내지 여덟째의 적멸도량 내 사위국에서는 입법계를 설하신다.

세 번째는 앞의 둘은 모습을 표시하기 때문에 삼승이고 안은 일승이다. 이 뜻을 기준으로 하여 풀이하면,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내지 첫째의 사위국에서 화장세계를 설하시고, 둘째의 보광법당에서 십신을 설하시고, 셋째의 타화자재천궁에서 십주十住를 설하시고, 넷째의 도솔천궁에서 십행十行을 설하시고, 내지 여덟째의 적멸도량에서는 입법계를 설하신다. 이 뜻은 보현 22위가 지위에 즉하여서 지위를 벗어나기 때문에 수승함과 열등함이 없다. 『명란기明難記』143)에서 밝힌 것과 같다.

네 번째는 앞의 안에서 표시한 것은 함께 삼승이고 보현의 다함없는 법의 수를 나타내는 것은 일승이다. 이 뜻을 기준으로 하여 풀이하면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내지 적멸도량에서는 화장세계를 설하고, 둘째의 적멸도량에서는 십신을 설하고, 내지 여덟째의 적멸도량에서는 입법계를 설한다. 다섯 번째는 앞은 함께 종이와 먹으로 쓰인 것이기 때문에 삼승이고, 문자가 없는 허공이 일승이다.

여섯 번째는 문자가 없는 허공은 삼승이고 문자가 있는 허공은 일승이다. 일곱 번째는 앞은 함께 교분이니 보현의 인문因門이기 때문에 삼승이고, 부처님의 밖으로 향함은 일승이다. 여덟 번째는 부처님의 밖으로 향함은 삼승이고, 부처님의 안으로 향함은 일승이다. 아홉 번째는 부처님의 안으로 향함은 삼승이고, 향함과 등짐을 여의는 것은 일승이다. 열 번째는 향함과 등짐을 여의는 것은 삼승이고, 법성은 일승이다.

이것은 범체梵體 대덕이 전한 것이며 윤현潤玄 대덕144)이 받은 것이다. 범체 대덕이 이르기를, “옛적에 질응 대덕이 세달사(世達藪)145)에 있으면서 『기신론』을 강의할 때, ‘만약 『화엄경』 중 열 거듭의 해석을 알 수 없다면

006_0849_a_01L一乘約此義釋則如是我聞乃
006_0849_a_02L1)弟一舍衛國中說花藏世界
006_0849_a_03L*弟二普光堂中說十信*弟三他
006_0849_a_04L化天宮說十住*弟四兜率天宮
006_0849_a_05L十行乃至*弟八寂滅場中說入法
006_0849_a_06L此義者是普賢二十二位
006_0849_a_07L位脫位故無勝劣如明難記所明
006_0849_a_08L*弟四前之內表並是三乘普賢
006_0849_a_09L無盡法數現者是一乘也約此義
006_0849_a_10L如是我聞乃至寂滅場中
006_0849_a_11L花藏世界*弟二寂滅場說十信
006_0849_a_12L乃至*弟八寂滅場說入法界*弟
006_0849_a_13L前並紙墨所載故是三乘無文
006_0849_a_14L字之虛空是一乘也*弟六無文
006_0849_a_15L字之虛空是三乘有文字之虛空
006_0849_a_16L是一乘也*弟七前並敎分是普
006_0849_a_17L賢因門故是三乘佛外向是一
006_0849_a_18L乘也*弟八佛外向是三乘佛內
006_0849_a_19L向是一乘也*弟九佛內向是三
006_0849_a_20L離向背是一乘也*弟十
006_0849_a_21L向背是三乘法性是一乘也
006_0849_a_22L此是梵體德所傳潤玄德所受也
006_0849_a_23L梵體德云昔質應德在世達藪
006_0849_a_24L講起信論時云若不得知花嚴經

006_0849_b_01L끝내 『화엄경』의 글의 뜻을 얻을 수 없을 것이고, 또 만약 『기신론』 중 여덟 거듭의 해석을 알지 못하면 또한 이 논의 글의 뜻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라 하였다.”라고 한다.

화엄경행원품소초146)

법장 스님(賢首大師)의 『화엄삼매관문花嚴三昧觀門』147) 중,
중생이 수행함에 반드시 성인의 가르침을 받아 지녀야 하는가, 가르침을 버려야 하는가?
열 부류가 있다. 첫째는 스스로 중생이 (가르침을) 알지 못해서 성인의 말씀을 미리 버리고 자신의 어리석은 마음을 스승으로 삼으며, 또 나쁜 벗을 따라서 가르침에 어긋나게 수행하여 교묘한 거짓으로 속이고 미혹함이 있으니 이는 악인惡人이다. 둘째는 중생이 또한 성스러운 가르침을 등지고 순박하고 곧은 마음으로 (앞의 교묘한 거짓의 사람을 따르며) 벗어나는 중요한 (길)이라고 생각해서 고된 수행을 열심히 하지만 끝내 이익되는 바가 없음이 있다. 이 두 사람은 함께 성스러운 가르침을 버리고 뜻과 이치에 의거하지 않는다.

셋째는 성인의 말씀을 오직 외우기만 할 뿐 뜻과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며 성인의 가르침에 의거하여 명성을 구하고 이익을 구하면서 자신이 외운 바를 거스르니 또한 악인이다.
넷째는 오직 문구만을 좇아서 뜻과 이법을 알지 못하니 다만 곧은 마음으로 읽고 외울 뿐이니, 비록 교묘한 거짓은 없으나 또한 이익되는 바도 없다. 이상의 두 사람은 함께 가르침을 버리지는 않으나 뜻과 이법을 얻지 못한다. 이상의 네 문은 모두 의지해서는 안 된다.

다섯째는 성인의 가르침을 읽고 외워서 해解와 행行을 조금 알지만 문구를 많이 읽고 조금 수행함이 있다. 여섯째는 성인의 가르침을 널리 생각하여 해解와 행行을 두루 안다. 성인의 말씀을 점차 간략히 하고 뜻을 취하여 오로지 닦는다. 일곱째는 받아 지님에 뜻을 얻어서 오직 수행에 있고 다시 말을 생각하지 않는다. 여덟째는 가르침을 생각하고 뜻을 얻어서 일체법이 본성에 걸맞지 않음이 없음을 안다. 이런 까닭에 가르침에 대해서도 또한 버림을 기다리지 않는다. 곧 이 말로 된 가르침이 본성에 들어맞아 가르침을 기준으로 하여 수행한다.

006_0849_b_01L中十重解釋者終不能得花嚴文
006_0849_b_02L又若不知起信論中八重解釋
006_0849_b_03L則亦不能得此論文義也第下之二
006_0849_b_04L第四七張

006_0849_b_05L
賢首大師花嚴三昧觀門中問云
006_0849_b_06L衆生修行爲要受持聖敎耶爲須
006_0849_b_07L捨敎耶有十類一者自有衆生
006_0849_b_08L無識 [266] 懸捨聖言師自愚心復隨邪
006_0849_b_09L違敎修行巧僞誑惑此爲惡
006_0849_b_10L人也2) [423] 有衆生亦背聖敎以質
006_0849_b_11L直心 [267] 謂爲出要勤苦修行竟無所
006_0849_b_12L此二人俱捨聖敎不依義理
006_0849_b_13L三者唯誦聖言不解義意依傍聖
006_0849_b_14L求名求利違自所誦亦爲惡
006_0849_b_15L四者唯逐文句不知義理
006_0849_b_16L以直心讀誦雖無巧僞亦無所益
006_0849_b_17L此上二人俱不捨敎不得義理
006_0849_b_18L此上四門皆不可依五者讀誦聖
006_0849_b_19L分知解行多讀文句少有修
006_0849_b_20L六者廣尋聖敎3) [424] 知解行
006_0849_b_21L略聖言取意專修七者受持得意
006_0849_b_22L唯在修行不復尋言八者尋敎得
006_0849_b_23L知一切法無不稱性是故
006_0849_b_24L敎亦不持捨 [268] 即此言敎稱性

006_0849_c_01L아홉째는 본성에 들어맞는 말을 항상 지니고 버리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으며, 말을 끊은 이법을 항상 관觀하여 그만두지도 않고 막혀 있지도 않다. 이상의 다섯 문은 아직 궁극의 경계가 아니다.

열째는 가르침을 생각하여 참된 이법을 얻어서 이법과 가르침에 걸림이 없다. 항상 이법을 관觀하나 가르침을 지니는 데 걸리지 않고 항상 가르침을 지니나 공空을 관하는 데 걸리지 않는다. 이는 곧 가르침과 이법이 함께 융섭되어 합하여 하나의 관觀이 된 것이니 비로소 궁극의 경계라고 이름한다.

이상의 열 가지 문에서 앞의 넷은 전적으로 의지할 수 없다. 다음의 다섯은 얕은 곳에서 깊은 곳으로 나아가 근기에 따라서 깨달아 들어가지만, 범부를 바꾸어 성인을 이루는 방편이니 아직 궁극의 경계가 아니다. 오직 열 번째 문만이 비로소 궁극의 경계가 된다.

또 현수 대사가 이른다.148) 대승경전을 받아 지님에 반드시 다섯 법을 알아야 한다. 첫 번째, 그 문장을 밝힘에 다섯이 있다. 말하자면 문단이 일어나고 다함과, 앞과 뒤가 서로 이어짐과, 차례로 연결되어 합해짐과, 설하는 뜻의 원만함과, 늘어남도 없고 줄어듦도 없음을 잘 아는 것이다.
두 번째, 그 일(事)을 이해함도 또한 다섯이다. 말하자면 설하는 곳과 설하는 주체와 (듣는) 대중과 (설법을) 청하는 위의와 원만한 음성으로 설해지는 바를 아는 것이다.

세 번째, 그 뜻에 다다름도 또한 다섯이다. 말하자면 강요를 간략히 나타냄과, 자세히 풀이하여 의심을 제거함과, 비유하여 이해하게 함과, 일을 들어서 깨달음을 이루게 함과, 이익을 들어서 배우기를 권함이다.
네 번째, 그 뜻을 얻음도 또한 다섯이다. 큰 마음을 일으키게 함과, 진리를 관觀함과, 번뇌를 굴복시킴과, 자비로 중생을 구제함과, 부지런히 온갖 행行을 닦음이다.

다섯 번째, 그 행行을 닦음에 스스로 다섯 종류가 있다.
첫째, 들은 바 법을 행行함이 몸과 마음에 있어서 일찍이 잠시도 쉬지 않는 것이다. 둘째, 앞의 네 문을 지나면서 차례로 수승한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다.

006_0849_c_01L敎修行九者常持稱性之言不捨
006_0849_c_02L4)恒觀絕言之理不棄不滯
006_0849_c_03L此上五門猶未究竟尋敎得實
006_0849_c_04L理敎無㝵常觀理而不㝵持敎
006_0849_c_05L常持敎而不㝵觀空此則敎理俱
006_0849_c_06L合爲一觀方名究竟此上十
006_0849_c_07L前四全不可依次五從淺轉深
006_0849_c_08L隨根悟入然革凡成聖之方便
006_0849_c_09L未究竟唯*弟十門方爲究竟也
006_0849_c_10L第下之二第四八張 又賢首大師
006_0849_c_11L [269] 受持大乘經須知五法一明其
006_0849_c_12L文有五謂善知分段起盡前後相
006_0849_c_13L次*弟連合詮義圓滿無增無減
006_0849_c_14L二解其事亦五謂說處說主徒衆
006_0849_c_15L請儀及知圓音所說三達其義亦
006_0849_c_16L謂略摽 [270] 5) [425] [271] 廣釋除疑譬喩
006_0849_c_17L令解引事訂成擧益勸學四得
006_0849_c_18L其意亦五令發大心觀眞理伏煩
006_0849_c_19L慈悲救物勤修萬行五修 [272] 其行
006_0849_c_20L自有五種一於所聞法行在身心 [273]
006_0849_c_21L未曾暫息二歷前四門次 [274] 起勝心
006_0849_c_22L「弟」作「第」{乙}次同「二」作「三」{乙}「徧」
006_0849_c_23L作「遍」{乙}
「着」作「著」{乙}「網」作「綱」
006_0849_c_24L{乙}

006_0850_a_01L앞의 (첫 번째) 글로 된 가르침에 대해서 만나기 어렵다는 생각을 일으킨다. 앞의 (두 번째) 일의 모습에 대해서 존중하는 마음을 일으켜 부처님을 만나 뵙기 어렵다고 찬탄하며 자기가 복이 적음을 근심한다. 앞의 (세 번째) 뜻과 이법에 대해서는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마음을 일으킨다. 앞의 (네 번째) 의지에 대해서는 슬픔과 기쁨이 번갈아 모인다.

셋째, 바른 법을 받아 지니는 것이다. 말하자면 (앞의) 글로 된 가르침에 대해 서사하여 유통시키고 그 일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서 부처님의 법회를 나타내고 뜻의 취지를 간략히 취하여 행行하는 사람에게 자세히 보여준다. 넷째, 자신의 행行을 증장하는 것이다. 착한 벗을 가까이하며 생각을 집중하여 사유한다. 다섯째, 걸림 없는 행行을 이루는 것이다. 말하자면 뜻을 얻어 말을 잊기 때문에 (가르침을) 고수할 수 없으며, 말을 잊음이 가르침을 말미암기 때문에 (가르침을) 버릴 수 없다. 이런 까닭에 가르침에 대해 고수함도 없고 버림도 없는 행行을 낸다.

지금 여기에 비록 열 가지를 열었지만, 법의 행行은 다만 뭇 연緣이 도와 이루고 바른 행(正)과 돕는 행(助)이 서로 겸한 것이니 총괄하여 받아 지녀 닦아 익힘이라고 한다. 이것을 온전히 의거하는 자는 인因을 원만하게 하였다고 할 만하니, 부지런히 닦아서 물러나지 아니하여 모두 원만한 과보를 증득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으로부터 (지금의) 당唐에 이르기까지 고금에 법에 의거하여 배움을 닦아서 신령스러운 상서로움을 통감한 것은 그 부류가 실로 많으니 갖추어서 『화엄경전기華嚴經傳記』와 『찬영기纂靈記』149)에 설한 바와 같다.

법계도기총수록 하권 2

006_0850_a_01L於前文敎起難遭想於前事相
006_0850_a_02L起尊重心 [275] 佛難逢傷己 [276] 薄祐
006_0850_a_03L於前義理起愛樂心於前意旨
006_0850_a_04L悲喜交集三受持正法謂於文 [277]
006_0850_a_05L [278] 寫流通1) [426] [279] [280] 表佛法會
006_0850_a_06L撮略義趣 [281] 曲示行人四自行增長 [282]
006_0850_a_07L爲親 [283] 善友繫念思惟五成無㝵行
006_0850_a_08L謂得旨忘詮故不可守2) [427] 詮由
006_0850_a_09L敎故不可捨是故於敎生無守無
006_0850_a_10L捨行今此雖開爲十法行但是
006_0850_a_11L緣資成正助相兼摠曰受持修習
006_0850_a_12L全依此者可謂圓因勤修不退
006_0850_a_13L皆訂滿果自敎至唐 [284]
006_0850_a_14L修學 [285] 通感靈瑞 [286] 其類實繁具如
006_0850_a_15L花嚴傳 [287] 及纂靈記 [288] 所說第下之二第
006_0850_a_16L四九張

006_0850_a_17L
法界圖記叢髓錄卷下之二

006_0850_a_18L「畫」作「盡」{乙}「忘」作「志」{乙}
  1. 1)『육십화엄』 「이세간품」(K8, 299a18~b9; T9, 669a26~b12).
  2. 2)『십지경론』(K15, 15a4~b17; T26, 133a8~b12).
  3. 3)『십지경론』(K15, 52b5~6; T26, 158b21~22). 『육십화엄』에서의 해당 위치는 다음과 같다. K8, 173a11~12; T9, 552b13.
  4. 4)용수龍樹, 『中論』 「觀四諦品」(K16, 392b14; T30, 33b11~12), “뭇 인연으로 생겨나는 법을, 나는 곧 무無라고 설한다. 또한 가명假名이 되며 또한 중도의 뜻이다.(衆因緣生法。 我說卽是無。 亦爲是假名。 亦是中道義。)”
  5. 5)‘잘못을 막고 틀림을 제거하여 덕을 나타내니(護過去非現德)’에 대해 『법융기』는 세 개의 항목(護過ㆍ去非ㆍ現德)으로 풀이한 반면, 균여는 세 개의 항목으로 보는 풀이를 소개하면서도 두 개의 항목(護過去非ㆍ現德)으로 해석한다. 『총수록』(H6, 840a22~b8), 『일승법계도원통기』(H4, 30c15~20).
  6. 6)『십지경론』(K15, 68b2; T26, 169a17).
  7. 7)H2, 6b20~22; H6, 830b7~9.
  8. 8)뒤의 십현문을 구체적으로 설하는 부분을 가리킨다.(H2, 8a10~b7; H6, 832a12~b10).
  9. 9)『육십화엄』 「初發心菩薩功德品」(K8, 40c23~24; T9, 432c29~433a3)의 전체 내용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10. 10)『육십화엄』 「현수보살품」(K8, 40c25; T9, 433a4~5)에 있는 다음 구절이 참조된다. “어찌 하물며 한량없고 무수하고 가없는 겁에 모든 바라밀을 갖추어 닦은 모든 지地의 공덕이겠는가?(何況於無量。 無數無邊劫。 具足修諸度。 諸地功德行。)”
  11. 11)『육십화엄』 「梵行品」(K8, 60a16; T9, 449c14).
  12. 12)『십지경론』(K15, 52b5~6; T26, 158b21~22).
  13. 13)『육십화엄』 「梵行品」(K8, 60a16; T9, 449c14).
  14. 14)『십지경론』(K15, 3a~c; T26, 124c~125a).
  15. 15)『육십화엄』 「賢首菩薩品」(K8, 51a14~16; T9, 441a14~16).
  16. 16)『육십화엄』 「十地品」(K8, 187b12~15; T9, 567c13~20).
  17. 17)人ㆍ法, 理ㆍ事, 敎ㆍ義, 解ㆍ行, 因ㆍ果 : 『수현기』(K47, 2b18~21; T35, 15b2~5)는 다음과 같은 열 가지의 구족을 설하고 있다. ① 가르침(敎)과 뜻(義), ② 이법(理)과 현상(事), ③ 앎(解)과 행行, ④ 원인(因)과 결과(果), ⑤ 사람(人)과 법法, ⑥ 분제와 경계(境位), ⑦ 스승(師)과 제자(弟), 법法과 지혜(智), ⑧ 주主와 반伴, 의보(依)와 정보(正), ⑨ 역逆과 순順, 체體와 용用의 자재, ⑩ 중생의 근기와 욕구에 따라 나타냄.
  18. 18)총장總章은 당唐 고종高宗의 연호로서 원년元年은 서기 668년이다.
  19. 19)『일승법계도』(H2, 1a〈반시〉; H6, 768a).
  20. 20)『일승법계도』(H2, 1a〈반시〉; H6, 768a).
  21. 21)『韓』ㆍ『卍』ㆍ『大』에는 다음의 내용이 부기되어 있다. “「법계도장」 『일승법계도』 끝.” “화엄종 향조 대사香鳥大師는 말엽의 뛰어난 분으로서 제목을 해석하였고 두 법사頭法師가 집필하였다. 건력建曆 2년(1212) 3월 3일에 고산高山에서 법승사法勝寺의 동본同本으로써 한 번 교감하는 것을 허락받았다. 현혈팔우賢穴八吁.”(H2, 8c1~4)
  22. 22)『총수록』(H6, 832c4). 이에 해당하는 『일승법계도』 원문은 H2, 5c4~5c11; H6, 829b9~16.
  23. 23)저본에는 ‘云’으로 되어 있으나 여기서는 ‘去’로 바꾸어 ‘제거한다면’으로 번역하였다. 참고로 지정각과 안식의 비유 관계를 도시하면 아래와 같다.
    眼識眼根塵爲體不爲膿血皮膚不淨所染成淨眼識若針耳孔許除膿血淨眼不成
    智正覺以三世間爲自身心不爲衆生業煩惱所染得成正覺於衆生業惑煩惱若去一物不成正覺
  24. 24)조림稠林 : ⓢ gahana. 번뇌를 포함한 중생의 마음의 여러 모습들을 빽빽한 밀림이 무성하고 헤쳐나오기 어렵고 알기 어려운 것 등에 비유한 것이다. 세친은 조림을 많다는 뜻과 알기 어렵다는 뜻으로 풀이한다. 『십지경론』(K15, 94c8; T26, 187a2~3).
  25. 25)『화엄경』 「십지품」 또는 『십지경』 제9선혜지善慧地에서는 11조림稠林을 설하는데 그 가운데 세 번째 조림이 업행조림이다. 『십지경론』(K15, 94b17~21; T26, 186c19~23), 『팔십화엄』(K8, 661b22~25; T10, 202a23~26), 『육십화엄』에는 ‘稠林’이 ‘難’으로 되어 있다.(K8, 187c7~9; T9, 568a12~14) 경에서는 업행조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한다. “이 보살은 (다음을) 여실하게 안다. 모든 업의 선ㆍ불선ㆍ무기의 모습, 지음과 짓지 않음의 모습, 마음과 함께 생겨나 여의지 않는 모습, 자성을 인하여 결과를 다 모음에 순서를 잃지 않는 모습, 과보가 있고 과보가 없는 모습, 검은 업과 흰 업과 검기도 하고 희기도 한 업과 검지도 않고 희지도 않은 업보를 바르게 받는 업의 차별된 모습, 업의 원인이 한량없는 모습, 성인과 세간이 차별된 모습, 현생에 받는 과보ㆍ내생에 받는 과보ㆍ내생 이후에 받는 과보의 모습, 승乘과 승乘 아님에 정해지고 정해지지 않은 모습과 내지 8만 4천의 모든 업의 차별된 모습을 여실하게 안다.(是菩薩如實知。 諸業善不善無記相。 有作未作相。 心共生不離相。 因自性盡集果7不失次第相。 有報無報相。 黑業白業黑白業不黑不白業。 正受業差別相。 業因無量相。 聖世間差別相。 現報生報後報相。 乘非乘定不定相。 乃至如實知八萬四千諸業差別相。)”〔『십지경론』(K15, 95b17~c1; T26, 187b19~24)〕 세친은 이 가운데 ‘모든 업의 선ㆍ불선ㆍ무기의 모습’을 도道의 원인의 차별을 나타낸 것으로 풀이하고〔『십지경론』(K15, 95c2~4; T26, 187b25~26)〕 법장은 이를 업業이 육도六道의 원인이 되는 것을 나타낸 것으로 해석한다.〔『화엄경탐현기』(K47, 702b17~20; T35, 368a7~10)〕
  26. 26)별보別報 : 과보를 총(總報)과 별(別報)로 구분한 것 가운데 하나이다. 대소승에 따라서 설명이 다르지만, 법상종의 『成唯識論述記』(T43, 299b25~c12)에 의하면 제8식이 총보이고 전6식이 별보이다. 이때 총보(異熟)를 불러일으키는 강력한 업(異熟習氣)을 인업引業이라고 하고 총보가 있어야 생겨나는 별보(異熟生)를 일으키는 약한 업을 만업滿業이라고 한다. 이에 따르면 사람은 총보이고 사람의 사지나 개별 인식 등은 별보이다.
  27. 27)「현수품」 가운데 열 가지 대삼매(총 200頌 半)의 이름과 경에서의 해당 위치를 밝히면 아래와 같다.
    대삼매의 이름게송 수(200頌 半)해당 경문해당 위치
    圓明海印三昧門5頌 半或有剎土無有佛~海印三昧勢力故K8, 42c9~19;T9, 434b25~c6
    華嚴妙行三昧門2頌 半不可思議莊嚴剎~華嚴三昧勢力故K8, 42c20~24;T9, 434c7~11
    因陀羅網三昧門4頌入微塵數諸三昧~亦無量稱解脫力K8, 42c25~43a8;T9, 434c12~19
    手出廣供三昧門17頌若欲供養一切佛~大仙三昧自在力K8, 43a9~b18;T9, 434c20~435a24
    現諸法門三昧門8頌欲安一切衆生類~是自在勝三昧力K8, 43b19~c10;T9, 435a25~b11
    四攝攝生三昧門16頌 1句出生隨樂勝三昧~如是方便無有量K8, 43c11~44a19;T9, 435b12~c15
    窮同世間三昧門17頌 1句隨順世間度衆生~是名說法三昧力K8, 44a19~c5;T9, 435c16~436a20
    毛光覺照三昧門89頌安隱衆生勝三昧~速成無上功德幢K8, 44c6~47c10;T9, 436a21~438b2
    主伴嚴麗三昧門6頌出生微妙勝三昧~示現三昧自在力K8, 47c11~22;T9, 438b3~14
    寂用無涯三昧門35頌十方世界有緣故~不思議劫說不盡K8, 47c23~48c20;T9, 438b15~439a26
  28. 28)‘부처님이 계시거나 부처님이 계시지 않거나 본성과 모습이 항상 머무른다’에 대한 경전 출전은 하권 1 각주 28) 참조.
  29. 29)사갈라용왕娑竭羅龍王 : ⓢ Sāgaranāgarāja. 용왕들 가운데 하나. ‘사갈라’는 바다를 뜻한다. 『화엄경』에서는 「세주묘엄품」에 세주로서 등장하며, 또 「여래출현품」에서는 여래음성의 열 번째 모습에서 사갈라용왕이 큰 구름을 일으켜 음성을 비롯한 갖가지 방편으로 중생을 이롭게 한다는 비유를 설한다. 『팔십화엄』(K8, 742b5~743b20; T10, 269b29~270b29). 징관은 사갈라의 뜻을 바다로 해석하면서 다른 용왕도 바다에 머무르지만 이 사갈라용왕이 가장 존귀하기 때문에 이 용왕만 홀로 바다를 이름으로 한다고 풀이한다. 『청량소』(T35, 539b22~23).
  30. 30)지엄, 『공목장』(T45, 541a25~26).
  31. 31)법장은 ‘세계해’를 해석하면서 일승에는 설할 수 없는 과분의 열 부처님 자체의 국토해와 중생을 거두어 교화하는 곳을 기준으로 하는 세계해의 두 종류가 있다고 한다. 이 가운데 첫째, 과분의 열 부처님 자체의 국토해는 설할 수 없지만 연緣에 기대어 열 가지로 설할 수 있으니 제2회에 설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 『화엄경탐현기』(K47, 505c22~506a23; T35, 158a8~b12).
  32. 32)수업秀業 : 『일승법계도』에 대한 해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의상계 승려로 보이지만 생몰 연대나 저서 등은 알려진 바가 없으며 현존 자료에는 이곳에만 이름이 보인다.
  33. 33)백사십원百四十願 : 『화엄경』 「淨行品」의 백사십일원을 가리킨다. 보살이 어떻게 신身ㆍ구口ㆍ의意 삼업을 수승하게 할 수 있는지 등 지수보살智首菩薩의 질문에 문수보살이 답하면서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 다양한 서원을 일으키도록 권한 것이다.
  34. 34)십회향원十廻向願 : 『화엄경』 「십회향품」 전체를 가리킨다. 화엄교학에서는 「십회향품」이 원願을 체體로 삼는다고 풀이하여 「십회향품」을 「십회향원」 또는 「십회향대원」으로 불러왔다. 법장, 『화엄경탐현기』(K47, 586a23; T35, 244a6).
  35. 35)초지원初地願 : 『화엄경』 「십지품」(또는 『십지경』)의 초환희지에 설해진 열 가지 서원(十大願)을 가리킨다. 『육십화엄』(K8, 165c8~166b23; T9, 545b10~546a18), 『팔십화엄』(K8, 636c8~637b17; T10, 181c11~182b11), 『십지경론』(K15, 22c9~26a18; T26, 138b4~140c7).
  36. 36)성기원性起願 : 『육십화엄』 「보왕여래성기품」 전체를 일컫는다. 지엄, 『수현기』(K47, 16a24~27; T35, 30c11~15)와 법장, 『화엄경탐현기』(K47, 585b7~8; T35, 243a12~13)도 성기법문을 서원으로 풀이하고 있다.
  37. 37)『貞元新譯華嚴經疏』 : 징관이 『사십화엄』을 풀이한 주석서이다.
  38. 38)『貞元經』 : 40권본 『화엄경』을 가리킨다. 갖춘 경명은 『大方廣佛華嚴經入不思議解脫境界普賢行願品』이다. 『육십화엄』과 『팔십화엄』의 「입법계품」에 해당하며, 제40권의 「보현행원품」이 추가되었다. 당唐 정원貞元 연간(795~798)에 계빈국 반야삼장에 의해 번역되었기 때문에 ‘『정원경』’이라고도 한다.
  39. 39)길상운 선지식(吉祥雲知識) : 『정원경』에서 선재동자가 처음 문수보살의 권유에 의해 찾아간 비구 선지식이다. 현존 범본에는 ‘Meghaśri’로 되어 있으며, 『육십화엄』에는 ‘공덕운功德雲’, 『팔십화엄』에는 ‘덕운德雲’으로 번역되어 있다. 여기에 인용되어 있는 『화엄경행원품소』는 길상운 선지식이 그를 찾아온 선재동자에게 스물한 가지 염불해탈문에 대해 설하는 부분에 대한 주석이다. 『사십화엄』(K36, 23a11~b22; T10, 680a12~b19).
  40. 40)『화엄경행원품소』(卍7, 571a12~573b5).
  41. 41)해운海雲 : 범어로는 sāgaranegha이며 비구선지식으로서 53선지식 중 세 번째 선지식이다.
  42. 42)해운 비구가 12년간 바다를 관찰할 때 바다에 큰 연화가 생겨나 그 연화 위의 여래로부터 ‘보안법문普眼法門’을 듣고 이를 여러 중생들에게 설하는 것을 가리킨다. 『사십화엄』(K36, 24c3~25c22; T10, 681a26~682b3).
  43. 43)묘주妙住 : 범어로는 supratiṣḥita이며 『육십화엄』과 『팔십화엄』에서는 선주善住로 번역되어 있다. 53선지식 중 네 번째로서 비구선지식이다. 12년간 바다를 관찰하는 것은 12연기관十二緣起觀을 상징하며 연기법을 법보의 대표로 설정한 것으로 여겨진다.
  44. 44)징관은 묘주 비구를 풀이하는 곳에서 “또한 비구란 도道에 들어간 지 오래되지 않아서 마땅히 승가에 의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앞 선지식은 법이고 이 선지식은 승가이니 뜻의 차례이기 때문이다.(亦比丘者。 入道未久。 宜依僧故。 前法此僧。 義次第故。)”라고 하여 묘주 선지식의 법문을 승가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卍7, 577a12~13).
  45. 45)『청량소초』(T36, 667b10)는 “아홉째, 마음에 즉하고 부처님에 즉하여 하나의 경계가 되기 때문이다.(九卽心卽佛爲一境故)”로 설하고 있다.
  46. 46)징관을 비롯한 화엄교가들은 「입법계품」의 선지식을 화엄계위에 배대할 때 덕운 비구를 십주十住 가운데 초발심주初發心住에 해당시킨다. 『화엄경행원품소』(卍7, 568b6).
  47. 47)『화엄경행원품소』의 이 세 문은 덕운 비구가 스물한 가지 염불문을 설하는 경문을 주석하는 부분이다. 『사십화엄』(K36, 23a14~b22; T10, 680a15~b19).
  48. 48)이 구절은 『팔십화엄』 「광명각품」(K8, 499a22; T10, 64a27~28)의 한 게송이다.
  49. 49)여러 경전에서 석가모니부처님의 키는 1장 6척(丈六), 미륵불은 천척千尺이라 설한다. 『生經』(K19, 983a2~5; T03, 87b2~5), 『佛說彌勒下生成佛經』(K11, 214a5~14; T14, 424b10~18 등). 징관은 이에 대해 이러한 화신불의 키의 차이는 다만 교화의 대상인 중생에 따라서 그런 것일 뿐이라고 풀이한다. 『청량소초』(T36, 197c16~19).
  50. 50)『佛說觀無量壽佛經』(K11, 180a20~21; T12, 343a21~22).
  51. 51)『육십화엄』 「夜摩天宮菩薩說偈品」(K8, 74b21; T9, 465c28~29)에서 여래림보살如來林菩薩이 마음을 화가에 비유하며 읊는 게송의 일부분이다. “마음과 같아서 부처 또한 그러하다. 부처와 같아서 중생 또한 그러하다.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이 차별이 없다.(如心佛亦爾。 如佛衆生然。 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
  52. 52)보현보살 선지식은 『사십화엄』에서 선재동자가 역참하는 선지식 가운데 마지막으로 등장한다. 여기에 인용되어 있는 『화엄경행원품소』는 선재동자와 보현보살이 예경에 대해 문답하는 부분에 대한 주석이다. 『사십화엄』(K36, 225c13~24; T10, 844b29~c11).
  53. 53)『화엄경행원품소』(卍7, 760a10~b1).
  54. 54)늑나마제 삼장(勒那三藏) : ⓢ Ratnamati. 북위北魏의 역경승으로 중인도 출신이다. 북위 선무제宣武帝 정시正始 5년(508)에 낙양에 와서 보리류지와 함께 세친의 『십지경론』을 번역하고, 후에 『妙法蓮華經論優波提舍』, 『究竟一乘寶性論』 등을 역출하였다. 『歷代三寶紀』(K31, 553c18~22; T49, 86b26~c2)와 『속고승전』(K32, 913c11~24; T50, 429a5~17) 등에서는 『십지경론』의 이해와 관련하여 보리류지와 늑나마제 사이에 차이가 있었다고 한다. 『십지경론』 연구를 중심으로 하는 지론종 가운데 혜광慧光을 시조로 하는 남도파는 늑나마제의 『십지경론』 이해를 따르고, 도총道寵에서 시작된 북도파는 보리류지의 입장을 바탕으로 한다는 설이 『속고승전』 「도총전」 등에 전한다.(K32, 990c6~991a24; T50, 482b16~c23).
  55. 55)칠종례七種禮 : 북위 늑나마제가 번역 또는 설했다고 전해지는 일곱 가지 예경법으로서 도세道世의 『法苑珠林』(K39, 462a09~463b19; T53, 435a8~4367)과 도선道宣의 『釋門歸敬儀』(T45, 865a2~c10) 등에 인용되어 있다. 또한 지엄의 『공목장』 「第二會名號品初禮佛儀式章」에도 칠종예법과 유사한 내용이 설해져 있다.
  56. 56)앞의 여섯 문 : 예의가 아닌 첫째와 둘째를 제외한 셋째부터 여덟째 예를 가리킨다.
  57. 57)이와 거의 같은 내용이 『화엄경문답』(T45, 604c20~605a17)에도 수록되어 있다.
  58. 58)『보살영락본업경』(K14, 385c9~10; T24, 1018a20~21).
  59. 59)『화엄경문답』(T45, 605a7~11)에는 다음 구절도 있다. “이 뜻 또한 없지 않기 때문이다. 혹은 지금 나의 몸 전체가 여래장불 등인 것이 이것이다. 지금의 나는 곧 나를 반연한 성性으로서의 부처님이나 이에 즉하여 알지 못하기 때문에 슬픔과 괴이함을 일으킨다. 지극한 마음으로 수행하여 미혹함을 돌이키고자 하니, 그러므로 나를 교화하는 부처님이 곧 나의 체體로서의 부처님임을 관하는 것이다. 멀리서 남의 부처님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이 뜻이 올바로 관觀하는 행자의 큰 핵심이다.(其義亦非無故也。 或今吾身全體如來藏佛等是也。 今吾卽緣吾性佛。 以卽是而不知故悲怪發。 至心修行欲返迷。 是故其觀化吾佛卽是吾體佛。 非遠求他佛。 此義其正觀行者大要也。)”
  60. 60)『自體佛觀論』 : 현존하는 자료로는 여기 『총수록』에 1회 인용되어 있는 것이 유일하며 저자나 저술 시기 또한 알 수 없다. 다만 자체불自體佛에 대한 논의를 의상이 그의 제자들에게 설했다는 사구게로써 설명하는 점 등을 볼 때 의상이나 의상계 문헌으로 보인다. 의상의 사구게를 『대기』에서 소개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자체불관론』의 논자가 혹 『대기』의 저자와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61. 61)이 게송은 표훈과 진정 등이 의상 스님에게 움직이지 않는 내 몸이 바로 법신 자체의 뜻임을 어떻게 볼 수 있는지 질문한 것에 답한 의상 스님의 사구게이다. 『총수록』(H6, 775b9~15).
  62. 62)5조五條와 7조七條와 9조九條는 석가모니부처님 당시부터 인도의 불교승단에서 허용된 세 종류의 가사(三衣, ⓢ trīṇi cīvarāṇi)를 가리킨다. 이 가운데 9조 가사(僧伽梨, ⓢ saṃghāti)는 아홉에서 스물다섯 조각의 천으로 기워 지으며 법석에 오르거나 탁발을 하거나 왕궁에 출입할 때 입고, 대의大衣라고도 한다. 7조 가사(鬱多羅僧, ⓢ uttarāsaṅga)는 일곱 조각의 천으로 기워 지으며 예배ㆍ청강ㆍ포살 등을 할 때 입고, 상의上衣라고도 한다. 5조 가사(安陀會, ⓢ antarvāsa)는 다섯 조각의 천으로 기워 지으며 일상생활이나 취침 때 입고, 내의內衣라고도 한다.
  63. 63)『총수록』(H6, 837b5). 이에 해당하는 『일승법계도』 원문은 H2, 5c12~6a21; H6, 829b19~830a7.
  64. 64)오열五熱과 아중비(衆鞞) : 『화엄경』 「입법계품」의 승열 바라문과 바수밀다녀의 법문을 가리킨다. 자세한 내용은 상권 1 각주 127) 참조.
  65. 65)『총수록』(H6, 838a8). 이에 해당하는 『일승법계도』 원문은 H2, 6a22~7b2; H6, 830a7~831a21.
  66. 66)‘개종開宗’이 사람 이름인지 문헌의 이름인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균여의 『일승법계도원통기』(H4, 25b4~6; 26c13~16)에 「開宗記」라는 이름으로 두 번 인용되어 있는 가운데 처음 인용문이 이와 동일한 내용이다.
  67. 67)이 인용문 가운데 앞의 누각의 비유는 지엄의 『화엄오십요문답』(T45, 522a18~29)에 보인다. 그러나 세친보살 이하 뒷부분의 실담장에 관련된 부분의 출전은 분명하지 않다.
  68. 68)실담 비유의 출전과 내용은 상권 2 각주 137), 138) 참조.
  69. 69)『팔십화엄』의 제4회 설법 중 「夜摩宮中偈讚品」에 나오는 게송이다.(K8, 540b25; T10, 101b17~18) 이에 해당하는 『육십화엄』 「夜摩天宮菩薩說偈品」(K8, 74a10; T9, 465a22~23)의 게송은 다음과 같다. “비유하면 열을 세는 법과 같으니 하나에서 늘어나 무량에 이른다. 모두 다 근본수이니 지혜인 까닭에 차별하다.(譬如數法十。 增一至無量。 皆悉是本數。 智慧故差別。)”
  70. 70)하권 2 각주 69) 참조.
  71. 71)법장, 『화엄일승교의분제장』(T45, 503c22).
  72. 72)법장, 『화엄일승교의분제장』(T45, 503c22~23).
  73. 73)‘다른 일(異事)로써’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다음의 구절을 가리킨다. “또 하나의 일 가운데 하나와 많음의 뜻은 상즉(相是)하지 않으니 곧 많음이고, 하나의 일인 까닭에 곧 하나이다. 네 구절로 잘못을 막고 틀림을 제거하여 덕을 나타내니, 이것에 준하면 이해할 수 있다.(又一事中一多義不相是卽是多。 一事故卽是一。 四句護過。 去非現德。 准之可解。)”(H2, 6c7~9; H6, 830b18~20)
  74. 74)처음의 뜻은 변계의 사람을 위하여 나열된 지위 가운데의 이구지 등을 다른 일로 삼아서 변별하여 다하지 못함을, 나중의 뜻은 인연의 사람을 위하여 환희지 하나가 갖추는 열 가운데의 이구지 등을 다른 일로 삼아서 변별하여 다하지 못함을 가리킨다.
  75. 75)『화엄일승교의분제장』(T45, 504c8~14).
  76. 76)『화엄일승교의분제장』(T45, 504a27~28).
  77. 77)사진四塵 : 색(형태와 색깔)ㆍ향기ㆍ맛ㆍ감촉을 가리킨다. 지수화풍의 사대에 의해 구성되기 때문에 사대소조四大所造라고도 한다. 동전과 같은 색법은 최소한 사대와 사진의 여덟 법(八事 혹은 八物)이 함께해야 이루어진다. 세친, 『아비달마구사론』(K27, 478a13~14; T29, 18b23~25).
  78. 78)사상四相 : 생生ㆍ주住ㆍ이異ㆍ멸滅을 말한다.
  79. 79)『대반야바라밀다경』(K4, 1223b14~15; T7, 1069a25), “평등하여 일어남이 없기 때문에 연기라고 이름한다.(平等無起故名緣起)”
  80. 80)『총수록』(H6, 841b19). 이에 해당하는 『일승법계도』 원문은 H2, 7b2~7c12; H6, 831a22~c7.
  81. 81)이와 동일한 구절을 균여는 『일승법계도원통기』(H4, 33b23~c11)에서 ‘영관덕靈觀德’의 설로서 소개하고 있다.
  82. 82)균여의 『일승법계도원통기』(H4, 34a9~11)에서 인용한 옛글(古辭)에는 쉰한 살로 되어 있다. “한 살의 어머니가 50년 동안 임신하여 쉰한 살의 대장부를 낳았다.(一年母懷五十年。 生五十一年大丈夫也。)”
  83. 83)『총수록』의 『대기』는 육상에 대한 두 입장을 상권 2에서는 융질 대덕과 사유 대덕의 설로서 소개하고 있다. 상권 2 각주 40)과 45) 및 해당 본문 참조.
  84. 84)『총수록』(H6, 842a13). 이에 해당하는 『일승법계도』 원문은 H2, 8a10~8b6.
  85. 85)법장, 『화엄경탐현기』(T35, p124c24~26), “열 번째, 같음과 다름이 원만하게 갖추는 뜻이다. 말하자면 앞의 아홉 문을 전부 합하여 하나의 대연기를 삼기 때문에 다양한 종류의 뜻의 문이 동시에 구족하게 하기에 이른다.(十同異圓備義。 謂以前九門總合爲一大緣起故。 致令多種義門同時具足也。)”
  86. 86)강목綱目 : 이름만으로는 법장의 『花嚴經文義綱目』으로 생각되지만 이 문헌에는 이 구절과 유사한 부분이 없다. 아래에 밝혔듯이 이 구절은 징관의 『대방광불화엄경소』의 이른바 「玄談」의 한 구절로부터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87. 87)『청량소』(T35, 515a26~28), “한 송이 연꽃잎 혹은 하나의 미세한 티끌이 가르침 등의 열 가지 쌍을 갖추고, 동시에 상응하여 구족함이 원만함도 또한 뒤의 아홉 문을 갖춘다.(一蓮華葉。 或一微塵。 則具敎等十對。 同時相應具足圓滿。 亦具後之九門。)”
  88. 88)「보법장」의 출전은 상권 1 각주 38) 참조.
  89. 89)대소大䟽(『화엄경탐현기』)의 출전은 상권 1 각주 38) 참조.
  90. 90)그려내어(瀉) : ‘瀉’는 뒤에 인용되어 있는 『花嚴略策』에도 보이며 그 인용 원문에는 ‘寫’로 되어 있다. 여기서도 ‘寫’로 해석하였다.
  91. 91)『십지경론』(K15, 24c19~22; T26, 139c14~17), “인드라그물의 차별과 같다는 것은 진실한 뜻의 모습이기 때문이다.……진실한 뜻의 모습은 오직 지혜로만 알 수 있다.(如帝網差別者。 眞實義相故。 〈中略〉眞實義相者。 唯智能知。)”
  92. 92)십현문 열 번째 문인 현상(事)에 의탁해서 법을 나타내어 이해를 내는 문(托事顯法生解門)의 마지막에도 “나머지는 이에 준할 수 있다.(餘可准之)”라는 구절이 있음을 가리킨다. 『일승법계도』(H2, 8b1).
  93. 93)법장, 『화엄일승교의분제장』(T45, 506b26~28).
  94. 94)법장의 『大方廣佛華嚴經金師子章』의 한 구절이다. 이 문헌은 그 주석서에 원문이 실려 있고 다른 화엄관련 문헌에도 인용되어 있다. 정원淨源, 『金師子章雲間類解』(T45, 665c3~5), 승천承遷, 『華嚴經金師子章註』(T45, 669c4~5), 심승審乘, 『華嚴五教章問答抄』(T72, 670b8~9) 등.
  95. 95)지엄, 『華嚴一乘十玄門』(T45, 516c12).
  96. 96)징관, 『청량소초』(T36, 10a19) 등.
  97. 97)열하나의 조림심(十一稠林心) : 『화엄경』 「십지품」의 제9선혜지에 설해진다. 자세한 내용은 하권 2 각주 25) 참조.
  98. 98)열 가지의 성기심(十種性起心) : 『화엄경』 「보왕여래성기품」에서 여래출현법의 네 번째로 설해지는, 열 가지 여래의 마음을 가리킨다. 하권 1 각주 67) 참조.
  99. 99)『華嚴略策』 : 청량 징관이 80권 『화엄경』을 주석한 『대방광불화엄경소』를 다시 42개의 항목으로 요약한 것으로서 『大華嚴經略策』이라고도 한다.
  100. 100)징관, 『대화엄경략책』(T36, 707b12~23).
  101. 101)『圓通首座記』 : 여기에서는 법장의 『화엄일승교분기』에 대한 균여의 주석서인 『釋華嚴教分記圓通鈔』를 가리킨다.
  102. 102)균여, 『석화엄교분기원통초』(K47, 233a7~31). 여기의 인용 구절과 『고려대장경』의 『석화엄교분기원통초』가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는다. 크게 차이나는 부분은 해당 개소에서 밝히기로 한다.
  103. 103)『佛說不增不減經』(K13, 1311a9~10; T16, 467b17~18), “중생계가 곧 법신이고 법신이 곧 중생계이다.(衆生界卽法身。 法身卽衆生界。)”
  104. 104)오체五體 : 사람의 신체 전체를 가리킨다. 구체적인 항목은 머리와 사지四肢를 가리키며, 혹은 근육(筋)ㆍ혈맥(脈)ㆍ살(肉)ㆍ뼈(骨)ㆍ털피부(毛皮)를 가리키기도 한다.
  105. 105)부처와 중생과의 교화 관계에 대해 감응感應을 구분하여 설명하는 것에 대해서는 상권 1 각주 128) 참조.
  106. 106)규봉 선사圭峯禪師 : 규봉 종밀圭峯宗密(780~841). 선종 하택계의 선사로도 알려져 있다. 중국 화엄종 제5조이며 당나라 과주果州 서충西充(사천성) 출신으로 속성은 하何이다. 섬서陝西 악현鄠縣의 규봉 초당사草堂寺에 주로 머물러 규봉 대사 또는 규산 대사圭山大師라고도 하며, 시호는 정혜 선사定慧禪師이다. 807년 도원 선사道圓禪師에게서 가르침을 받고 출가하였으며, 810년 청량 징관淸涼澄觀에게서 화엄의 교의를 배웠다. 교선일치敎禪一致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기울였으며 화엄과 선 관련에 대해 많은 저술을 남겼다. 대표적으로 『禪源諸詮集』 100권의 서문인 「都序」ㆍ『華嚴經行願品行疏鈔』ㆍ『注華嚴法界觀門』ㆍ『圓覺經大疏』ㆍ『圓覺經大疏鈔』와 『禪源諸詮集』 100권 등이 현존한다.
  107. 107)보현보살의 십대행원에서 여덟 번째, 항상 부처님을 따라서 배우겠다는 원(恒隨佛學願) 가운데 한 구절이다. 『사십화엄』(K36, 227a11~12; T10, 845c7~8).
  108. 108)종밀의 『화엄경행원품소초』의 이 인용 부분은 직접 인용이 아니라 앞에서 인용된 균여의 『석화엄교분기원통초』로부터의 간접 인용이다. 저본에서는 앞의 『석화엄교분기원통초』와 『화엄경행원품소초』를 각각 개별의 인용으로 편집하고 있지만 高에는 『원통수좌기』 중의 인용으로 되어 있다. 『화엄경행원품소초』의 해당 부분 출전은 다음과 같다.(卍7, 935a18~b6).
  109. 109)세 진리(三諦) : 제법실상諸法實相의 진리를 공空ㆍ가假ㆍ중中의 세 가지로 구분한 것을 가리킨다.
  110. 110)『일승법계도』(H2, 3c1~2; H6. 811a23~24).
  111. 111)이와 관련하여 다음 구절 등이 참조된다. 『佛說稻芉經』(K11, 605a9~10; T16, 816c24~25), “십이인연을 보는 것이 곧 법을 보는 것이고 곧 부처님을 보는 것이다.(見十二因緣。 卽是見法。 卽是見佛。)”, 『대반열반경』(K38, 961a22~b1; T12, 768c9~10), “만약 어떤 사람이 십이인연을 보면 곧 법을 보는 것이고 법을 보는 것이 곧 부처님을 보는 것이다.(若有人見十二緣者。 卽是見法。 見法者。 卽是見佛。)”, 『육십화엄』(K8, 52c4; T9, 442c5~6), “일체법이 모두 다 진실함이 없음을 분별하여 이와 같이 모든 법을 알면 곧 노사나불을 뵙는다.(分別一切法。 皆悉無眞實。 如是解諸法。 則見盧舍那。)”
  112. 112)법장의 『華嚴經明法品內立三寶章』 중 「流轉章」을 가리킨다. 이 구절은 삶과 죽음의 흘러 바뀜(流轉)을 열 항목으로 나누어 설하는 가운데 열 번째 항목인 관을 이룸(成觀) 중의 구절이다.
  113. 113)「유전장」의 열 번째 항목인 관을 이룸(成觀)에서 마지막으로 논하는 이해(解)와 행行 가운데 무념을 내용으로 하는 행行에 관한 문을 가리킨다.
  114. 114)벙어리 양羊 같은 중(瘂羊僧) : 지혜가 없는 승려를 벙어리 양에 비유한 것이다. 『대지도론』(K14, 520c7~11; T25, 80a18~22)에서 다음과 같이 설한다. “누구를 벙어리 양 같은 중이라고 이름하는가? 비록 계를 파하지 않아도 근기가 둔하고 지혜가 없어서 좋음과 추함을 구별하지 못하고 가벼움과 중대함을 알지 못하고 죄가 있음과 죄가 없음을 알지 못한다. 혹 승가의 일이 있어서 두 사람이 함께 싸워도 결단을 내릴 수 없어서 잠자코 말이 없다. 비유하면 흰 양羊이 사람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었는데도 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를 벙어리 양羊 같은 중이라고 이름한다.(云何名啞羊僧。 雖不破戒。 鈍根無慧。 不別好醜。 不知輕重。 不知有罪無罪。 若有僧事。 二人共諍。 不能斷決。 默然無言。 譬如白羊。 乃至人殺。 不能作聲。 是名啞羊僧。)”
  115. 115)『本事經』(K20, 1014b2~5; T17, 679b19~22), “백천의 벙어리 양 같은 중은 지혜 없이 삼매를 닦으니 설령 백천 년을 지난다 해도 열반을 얻는 이 하나 없고, 열심히 닦는 지혜로운 사람은 즐겨 법을 듣고 법을 설하니 바란다고 생각하는 잠깐 사이에 열반을 빠르게 증득할 수 있다.(百千瘂羊僧。 無慧修靜慮。 設經百千歲。 無一得涅槃。 勤修智慧人。 樂聽法說法。 歛念須臾頃。 能速證涅槃。)”
  116. 116)법장, 『화엄경명법품내입삼보장』 「유전장」(T45, 619c11~19).
  117. 117)『총수록』에 인용된 『도신장』(H6, 783a11~19)에 같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118. 118)『팔십화엄』 「범행품」(K8, 526a8; T10, 89a1).
  119. 119)『수현기』(K47, 14a23~24; T35, 28b13~14).
  120. 120)『수현기』(K47, 49c9~11; T35, 68a25~27).
  121. 121)『총수록』의 『대기』(H6, 800b13~c17)는 신림의 설로서 다섯 가지 총상과 별상을 소개하는데 첫째가 별상을 여읜 총상으로서 오중해인 가운데 첫 번째, 모습을 잊은 해인(忘像海印)에 배대하고 있다.
  122. 122)『花嚴錦冠鈔』 : 의천의 『신편제종교장총록』(T55, 1167b6)에는 ‘錦冠鈔四卷。或二卷。 傳奧述。’로 되어 있으나 현존하지 않는다. 전오傳奧는 규봉 종밀에게서 화엄을 전해 받았다고 전해지며 속성은 한韓이다. 북경北京 석벽사石壁寺에 머무르며 화엄을 비롯한 여러 분야에 다양한 저술을 지었으나 현존하는 것은 『梵網經記』(2권)뿐이다. 『盂蘭盆經疏鈔餘義』(卍94, 826a2~4) 등.
  123. 123)위의 둘은 『대방광불화엄경』 제목 일곱 글자를 일곱 문으로 분별하는 가운데 첫 번째(理智分別)와 두 번째(體相用因果分別)를 가리킨다.
  124. 124)열 바다(十海) : 『팔십화엄』 「世界成就品」에서 보현보살이 관찰하는 바다와 같이 한량없고 불가사의한 열 가지 경계를 가리킨다.(K10, 465a13~17; T10, 34b10~14) 구체적으로는, ① 일체 세계(一切世界海), ② 일체중생(一切衆生海), ③ 일체 모든 부처님(一切諸佛海), ④ 일체 법계(一切法界海), ⑤ 일체중생의 업(一切衆生業海), ⑥ 일체중생의 근기와 욕구(一切衆生根欲海), ⑦ 일체 모든 부처님의 법륜(一切諸佛法輪海), ⑧ 일체 삼세(一切三世海), ⑨ 일체 여래의 원력(一切如來願力海), ⑩ 일체 여래의 신통변화(一切如來神變海)이다. 『육십화엄』에서 대응하는 곳은 「盧舍那佛品」(K10, 465a13~17; T10, 34b10~14)에 보이며 열 바다가 아니라 다섯 바다(五海)로 되어 있다. 상권 1 각주 167) 참조.
  125. 125)같은 부류의 세계가 주主와 반伴을 겸하는 것이 아홉째이고, 다른 부류의 세계가 주主와 반伴을 겸하는 것이 열째가 되어, 합하여 열 거듭을 이룬다는 것이다.
  126. 126)상권 1 각주 92) 참조.
  127. 127)『팔십화엄』 「여래현상품」(K8, 462c19; T10, 32c11~12).
  128. 128)『팔십화엄』 「세주묘엄품」(K8, 450c21~22; T10, 21c23~25), “이 모임에서 부처님이 앉아 계시는 것을 보는 것처럼, 일체의 티끌에서도 다 이와 같다. 부처님의 몸은 가심도 없고 또한 오심도 없으나, 있는 바 국토에서 모두 분명하게 나타나신다.(如於此會見佛坐。 一切塵中悉如是。 佛身無去亦無來。 所有國土皆明現。)”
  129. 129)『팔십화엄』 「수미정상게찬품」(K8, 518b13; T10, 81c15~16).
  130. 130)『팔십화엄』 「보살문명품」(K8, 501b22; T10, 66b24~25).
  131. 131)『四大常轉法輪觀』 : 현존하는 불전 목록류에는 이러한 이름의 저술이 보이지 않는다. 또 다른 문헌에 인용된 것도 보이지 않는다.
  132. 132)『佛垂般涅槃略說敎誡經』〔속칭 『遺敎經』(K13, 1180b19 ~20; T12, 1111a20)〕, “그것을 한 곳에 제어하니 변별하지 않는 일이 없다.(制之一處。 無事不辦。)”
  133. 133)『圓通首座記』 : 여기 인용문에도 저술의 이름 없이 『圓通首座記』로만 되어 있다. 앞의 『원통수좌기』는 『석화엄교분기원통초』이나(하권 2 각주 102) 참조) 여기의 구절은 현존하는 균여의 저술에 일치하는 부분이 없다. 그런데 인용문 가운데 지엄의 『공목장』의 한 구절을 ‘장주章主’라는 표현과 함께 설하고 있으며, 균여가 그의 현존 저술에서 그가 주석하고 있는 저술의 저자를 ‘장주章主’로 표현하고 있는 점을 볼 때, 이 인용문은 혁련정이 지은 『균여전』(K47, 260b02)에 소개되어 있는 균여의 저술 중 현존하지 않는 『孔目章記』일 것으로 생각된다.
  134. 134)『화엄경탐현기』(K47, 517b8~9; T35, 170b6~7).
  135. 135)『일승법계도』(H2, 4c19~20; H6, 812c3~4).
  136. 136)『팔십화엄』 「광명각품」(K8, 499c25; T10, 65a10), 『육십화엄』 「광명각품」(K8, 34a24; T9, 425a13)의 해당하는 구절은 다음과 같다. “여러 많은 법 가운데 하나의 모습이 없고 하나의 법 가운데 또한 많음이 없다.(衆多法中無一相。 於一法中亦無多。)”
  137. 137)지엄은 『수현기』(K47, 13a21~b4; T35, 27a27~b11)에서 해당 구절을 진수보살進首菩薩의 제7지 게송으로 주목하지만 이에 대해 즉문, 중문, 수십법 등을 설하지는 않는다. 단 그전의 목수보살目首菩薩의 제6지 게송으로 설해지는, “하나가 능히 한량없음이 되고, 한량없음이 능히 하나가 된다.(一能爲無量。 無量能爲一。)”(K8, 33c19; T9, 424c9~10) 등의 부분을 주석하며 중문과 즉문에 대해서 풀이한다. 또한 지엄의 저술로 전해지지만 위찬설이 제기되는 『화엄일승십현문』(T45, 514b17~19)에서는 「광명각품」(K8, 32b5; T9, 423a1~2)의 “하나 가운데 한량없음을 알고 한량없음 가운데 하나를 안다. 변화하여 생겨나 진실이 아니니 지혜로운 자는 두려운 바가 없다.(一中解無量。 無量中解一。 展轉生非實。 智者無所畏。)”라는 구절을 수십법 가운데 중문의 경증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138. 138)『팔십화엄』 「광명각품」(K8, 500a2; T10, 65a14~15). 경에는 ‘衆生及國土’이니 ‘衆生’과 ‘國土’의 자리가 전후로 바뀌어 있다.
  139. 139)지엄의 『공목장』 중 한 구절이다. 출전은 하권 2 각주 140) 참조.
  140. 140)지엄, 『공목장』(T45, 536c21~22), “初會如是我聞首。 料簡下文。 所目之義。”
  141. 141)『육십화엄』 「입법계품」(K8, 424c13~14; T9, 788a27~b1)의 가장 마지막 게송을 가리킨다. “중생의 마음은 미세한 티끌과 바다의 물방울 (같아도) 셀 수 있으며 허공 또한 헤아릴 수 있지만 부처님의 덕을 설함은 다함이 없다. 이 법을 듣고 환희하며 믿는 마음에 걸림이 없는 자는 위없는 도를 빠르게 이룰 것이니 모든 여래와 더불어 동등하다.(衆生心微塵。 海水渧可數。 虛空亦可量。 佛德說無盡。 聞此法歡喜。 信心無疑者。 速成無上道。 與諸如來等。)”
  142. 142)두 번째 뜻에 의하면 ‘如是我聞一時佛’이 첫 번째 부처님, ‘摩竭提國寂滅道場’이 두 번째 부처님, ‘始成正覺’이 세 번째 부처님이 된다.
  143. 143)『明難記』 : 『육십화엄』의 「보살명란품」의 해석 부분인 것으로 보이나 누구의 어떤 주석서인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보현 22위’설은 지엄의 『수현기』에 보인다.
  144. 144)윤현潤玄 대덕 : 윤현 대덕은 이곳 ‘고기’에서 전하는 것처럼 범체 대덕에게서 『화엄경』의 열 가지 대의를 전해 받았고 ‘윤현덕潤玄德’이라고 호칭되는 것으로 보아 의상계 화엄학승으로 보인다.
  145. 145)세달사(世達藪) : 『삼국사기』(권50 「열전」 〈궁예〉조)와 『삼국유사』 「洛山二大聖觀音正趣調信」(H6, 331c9~332a1) 등에 의하면, 세달사는 고려 전기에 흥교사興敎寺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新增東國輿地勝覽』이 경기도 풍덕군豊德郡의 백련산(권13)과 강원도 영월군寧越郡 태화산 서쪽(권46)에 소재하는 두 곳의 흥교사를 기록하고 있어 논란이 있었으나, 근래에 영월군 태화산 서쪽의 흥교사지가 세달사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균여는 『십구장원통기』(H4, 40a12~13)에서 신림을 ‘세달사문신림世達寺沙門神林’으로 부르고, 의천은 신림에 대해 「興敎寺禮神林祖師影」이라는 찬讚을 남기고 있다.(『大覺國師文集』 권18) 또한 질응과 범체가 세달사에서 강의를 했다는 이 본문의 기록 등을 볼 때 세달사는 의상계 화엄 승려들과 깊은 연관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삼국사기』에 의하면 세달사는 궁예弓裔(?~918)가 출가하여 수도한 곳이기도 하다.
  146. 146)아래의 인용문은 종밀의 『화엄경행원품소초』에서 법장의 저술을 인용한 것을 『총수록』의 편자가 재인용한 것이다.(卍7, 955b2~956b4).
  147. 147)『花嚴三昧觀門』 : 법장의 『화엄경탐현기』(K47, 6다3a26~27; T35, 347c3~4)와 『화엄경전기』(T51, 172b12), 그리고 최치원의 『법장화상전』(T50, 281a5) 등에서는 법장의 저술로 『華嚴三昧觀』 1권을 들고 있다. 이 문헌은 현존 대장경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지만 일본 고산사高山寺에 송宋나라 때의 판본이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한편 이 문헌은 법장의 저술로 전해지는 『華嚴發菩提心章』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으니, 일례로 여기에 ‘화엄삼매관문’이라는 제목으로 인용되어 있는 부분이 『화엄발보리심장』(T45, 651b28~652a4)에 거의 그대로 수록되어 있는 점을 들 수 있다. 『화엄발보리심장』은 전체 1권으로서, 첫 번째, 마음을 일으킴(發心第一)ㆍ두 번째, 가르침을 가려냄(簡敎第二)ㆍ세 번째, 잘못을 드러냄(顯過第三)ㆍ네 번째, 덕을 표시함(表德第四)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여기 인용된 부분은 그중 두 번째 전체에 해당한다. 그러나 종밀이 이 부분을 ‘네 번째, 가르침을 가려내는 문(第四簡敎門)’이라고 인용하는 점과 『화엄경전기』에 ‘화엄삼매관 1권 열 문(華嚴三昧觀一卷十門)’으로 기록되어 있는 점 등을 볼 때, 현존 『화엄발보리심장』이 『화엄삼매관』과 동일하지는 않음을 알 수 있다. 아래에서는 종밀의 『화엄경행원품소초』와 법장의 『화엄발보리심장』의 해당 부분과 교감하여 내용상 크게 차이나는 부분만을 밝힌다.
  148. 148)이곳에 현수 법장의 설로서 인용되는 부분은 현존하지 않는 법장 저술의 일부분인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문헌의 이름은 알 수 없다.
  149. 149)『華嚴經傳記』와 『纂靈記』 : 이 두 문헌의 관계에 대해서는 예로부터 이견이 있어 왔다. 최치원의 『법장화상전』(T50, 283a3~8)에는 법장의 저술로 『화엄경전기』 5권을 들고 있는데 이를 ‘찬영기’라고도 하며 법장이 스스로 마치지 못하여 그의 제자 혜원慧苑과 혜영慧英이 마쳤다고 전한다. 이에 따르면 『화엄경전기』와 『찬영기』는 같은 책으로서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러나 의천의 『신편제종교장총록』(T55, 1167c12~14)에는 법장의 저술로 『화엄경전기』 5권을 소개하면서 동시에 그의 제자 혜원慧苑의 저술로서 『찬영기』 5권을 별도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시기상 앞의 두 기록보다 앞서는 이곳의 인용문, 즉 종밀의 『화엄경행원품소초』에서는 『화엄경전기』 5권과 『찬영기』 2권을 다른 책으로 들고 있다. 따라서 이 두 자료에 따르면 『화엄경전기』와 『찬영기』는 서로 다른 저술로 생각된다. 한편 화엄 관련 문헌에 『화엄경전기』 혹은 『찬영기』로 인용되는 내용을 현존하는 『화엄경전기』에서 확인하여 보면 『찬영기』로 인용되는 상당 부분이 현존 『화엄경전기』에서 찾아지지만 일부의 경우 현존 『화엄경전기』에 없는 경우가 있다. 종밀의 『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略疏』에 ‘찬영기’로 인용되는 부분(T39, 528b29~c1)이 그러하며 또한 최치원의 『법장화상전』에서도 『찬영기』를 인용하여 법장의 전기를 서경西京(長安) 화엄사華嚴寺 승려 천리千里가 지었다는 내용을 전한다. 이 구절은 현존 『화엄경전기』에 없을 뿐만 아니라 내용상으로도 법장이 지은 문헌에 있을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면 법장이 저술하다 마치지 못한 『화엄경전기』의 원형과 후에 혜원과 혜영이 끝마친 『화엄경전기』의 보완본의 두 종류가 있는데 이를 시대와 사람에 따라서 『화엄경전기』와 『찬영기』라는 두 이름으로 구분하거나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여 혼란이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1. 1)「文云二」作「二明」{甲}。
  2. 2)「坐」作「床」{甲}。
  3. 3)「坐」作「在」{甲}。
  4. 4)「床」作「牀」{甲}。
  5. 5)「攝持」作「即攝攝」{甲}。
  6. 6)「成」無有{甲}。
  7. 7)「花」作「華」{甲}。
  8. 8)「說」無有{甲}。
  9. 9)「着」作「著」{甲}次同。
  10. 10)「涅槃」作「化」{甲}。
  11. 11)冠註曰永一作求{甲}。
  12. 12)冠註曰量一作碍{甲}。
  13. 13)「現」作「顯」{甲}次同。
  14. 14)「且」作「宜」{甲}。
  15. 15)「未」作「永」又冠註曰永疑未{甲}。
  16. 16)「煩惱」作「菩薩」又冠註曰菩薩疑煩惱下同{甲}次同。
  17. 17)「耶」作「也」{甲}。
  18. 18)「旣」作「現」{甲}。
  19. 19)「云」作「言」{甲}次同。
  20. 20)「徧」作「偏」{甲}ㆍ作「遍」{乙}。
  21. 1)「得」下有「相即」{甲}。
  22. 2)「陁」下有「羅尼」{甲}。
  23. 3)「伴」作「半」{甲}。
  24. 4)「學」作「覺」{甲}。
  25. 5)「中」作「即」又冠註曰即疑中{甲}。
  26. 6)「一」下有「故」{甲}。
  27. 7)「如是往反」作「生變如是」{甲}。
  28. 8)「旣」作「現」{甲}。
  29. 9)「耶」作「也」{甲}。
  30. 10)「故」無有{甲}。
  31. 11)「何」無有{甲}。
  32. 12)「有自」作「相有」{甲}。
  33. 13)「不自在」無有{甲}。
  34. 14)「不生」無有{甲}。
  35. 15)「義中」無有{甲}。
  36. 16)冠註曰道上疑脫中字{甲}。
  37. 17)「是」上有「爲」 又冠註曰是字疑剩{甲}。
  38. 18)「復」作「亦」{甲}。
  39. 19)「道」下有「義」{甲}。
  40. 20)「知」作「中智」{甲}。
  41. 21)「盡」無有{甲}。
  42. 22)「又」作「文」 又冠註曰文疑又{甲}。
  43. 23)「即」下有「多」{甲}。
  44. 24)「去」作「失」{甲}。
  45. 25)「現」作「離」又冠註曰離疑顯{甲}。
  46. 26)「失」作「故」{甲}。
  47. 27)「是」下有「可」{甲}。
  48. 28)「弟」作「第」{甲}{乙}次同。
  49. 29)「去」下有「之」 又冠註曰一無之字{甲}。
  50. 1)「問」作「間」{乙}。
  51. 2)「與」作「焉」{乙}。
  52. 3)「隨」下有「隨」 又冠註曰隨一作相{甲}。
  53. 4)「差」作「義」{甲}。
  54. 5)「順」作「隨」{甲}次同。
  55. 6)「弟」作「第」{甲}次同。
  56. 7)冠註曰其下疑脫義字{甲}。
  57. 8)「義」無有{甲}。
  58. 9)「十」作「一」{甲}。
  59. 10)「下」作「上」{甲}。
  60. 11)「成」無有{甲}。
  61. 12)「托」作「說」{甲}。
  62. 13)「緣」作「顯」{甲}次同。
  63. 14)「全」作「今一」又冠註曰今一一作亦{甲}。
  64. 15)「何」下有「以」{甲}。
  65. 16)「與」作「焉」{乙}。
  66. 17)「其」下有「其」又冠註曰其字疑剩{甲}。
  67. 18)「者」無有{甲}。
  68. 19)「阿耶」作「何耶」 又冠註曰何耶疑阿爺{甲}。
  69. 20)「同」下有「總」又冠註曰總字疑剩{甲}。
  70. 21)「弟」下有「子」{甲}。
  71. 22)「無」無有{甲}。
  72. 23)「不」作「無」{甲}次同。
  73. 24)「是」作「即」{甲}。
  74. 25)「鑰匙」作「」{甲}。
  75. 26)「才」作「大」{甲}。
  76. 27)「圓」作「滿」{甲}。
  77. 28)「云」作「言」{甲}。
  78. 1)」作「希」{甲}ㆍ作「又布」{乙}。
  79. 2)「人」作「有」{甲}。
  80. 3)「饒」作「余」又冠註曰全疑樂{甲}。
  81. 4)「掌」作「常」又冠註曰常一作掌{甲}。
  82. 5)「同」下有「時」{甲}。
  83. 6)「門所」作「相」{甲}。
  84. 7)「但」作「俱」{甲}次同。
  85. 8)「從」下有「緣」{甲}。
  86. 9)「門」作「事」{甲}。
  87. 10)「唯」作「隨」{甲}。
  88. 11)「托」作「託」{甲}。
  89. 12)冠註曰前下疑脫二字{甲}。
  90. 13)「十門」無有{甲}。
  91. 14)「門玄」作「玄門」{甲}。
  92. 15)「與」作「焉」{甲}。
  93. 16)「齊」無有{甲}。
  94. 17)「攝」無有{甲}。
  95. 18)「花」作「華」{甲}次同。
  96. 19)「着」作「看」又冠註曰看一作著{甲}ㆍ作「著」{乙}。
  97. 20)「存」作「在」{甲}。
  98. 21)「切」下有「諸」{甲}。
  99. 22)「自」無有{甲}。
  100. 23)「法」無有{甲}。
  101. 24)「言」無有{甲}。
  102. 25)「熏」作「重」 又冠註曰重疑熏{甲}。
  103. 26)「普」無有{甲}。
  104. 27)「佛」下甲本有如下門「法界圖章一乘法界圖終。華嚴宗香鳥大師末葉非人釋題。頭法師之執筆也。建曆二年三月三日。子始許於高山以法勝寺仝本一校賢穴八吁」。
  105. 28)「着」作「著」{乙}次同。
  106. 1)「弟」作「第」{乙}。
  107. 2)「塵」作「坐」{乙}次同。
  108. 3)「訂」通「證」於此書{編}次同。
  109. 4)「未」作「末」{乙}。
  110. 5)「云心」作「忘」{乙}。
  111. 1)「糓」作「殺」{乙}。
  112. 1)「寶」作「室} {乙}。
  113. 2)「㢡」作「將寸」{乙}。
  114. 3)「弟」作「第」{乙}次同。
  115. 4)」作「收」{乙}次同。
  116. 1)「弟」作「第」{乙}。
  117. 2)「着」作「著」{乙}。
  118. 1)「娑」作「裟」{乙}次同。
  119. 2)」作「睡」{乙}次同。
  120. 3)「欠」作「缺」{乙}。
  121. 1)「着」作「著」{乙}次同。
  122. 2)「弟」作「第」{乙}次同。
  123. 3)「數」作「敎」{乙}。
  124. 4)脚註曰一一疑二{乙}。
  125. 5)「曰」作「白」{乙}。
  126. 1)「去」作「云」{乙}。
  127. 2)「口」無有{乙}。
  128. 3)「弟」作「第」{乙}次同。
  129. 1)「即」作「耶」{乙}。
  130. 2)「弟」作「第」{乙}次同。
  131. 3)「大」作「六」{乙}。
  132. 1)「訂」通「證」於此書{編}次同。
  133. 2)「網」作「綱」{乙}。
  134. 3)「每」作「海」{乙}。
  135. 4)「互」作「玄」{乙}。
  136. 5)「弟」作「第」{乙}。
  137. 1)「法」作「皆」{乙}。
  138. 2)「修」作「終」{乙}。
  139. 3)「互」作「玄」{乙}。
  140. 1)「迁」作「還」{乙}。
  141. 2)「俠」作「狹」{乙}次同。
  142. 3)「茟」作「筆」{乙}。
  143. 4)「覩」作「觀」{乙}。
  144. 1)「歛」作「欲」{乙}。
  145. 2)「弟」作「第」{乙}次同。
  146. 1)「訂」通「證」於此書{編}次同。
  147. 2)「俠」作「狹」{乙}。
  148. 1)「一」無有{乙}。
  149. 2)「着」作「著」{乙}。
  150. 3)「弟」作「第」{乙}。
  151. 4)「不見」覔」{乙}。
  152. 1)「弟」作「第」{乙}次同。
  153. 2)「雖」作「離」{乙}。
  154. 3)「科」作「料」{乙}。
  155. 4)「一」作「二」{乙}。
  156. 1)「弟」作「第」{乙}次同。
  157. 2)「二」作「三」{乙}。
  158. 3)「徧」作「遍」{乙}。
  159. 4)「着」作「著」{乙}。
  160. 5)「網」作「綱」{乙}。
  161. 1)「畫」作「盡」{乙}。
  162. 2)「忘」作「志」{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