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법계도기총수록(法界圖記叢髓錄) / 法界圖記叢髓錄卷下之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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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계도기총수록 하권 1(法界圖記叢髓錄 卷下之一)
『일승법계도』 원문 三
글에 이른다. 셋째, 글의 뜻을 풀이한다. 글에 7언 30구가 있다. 이 중에 크게 나누면 셋이 있으니, 처음 18구는 자리행自利行을 기준으로 한 것이고, 다음 4구는 이타행利他行을 밝힌 것이며, 다음 8구는 수행자의 수행방편과 이익 얻음을 변별한 것이다.

처음 문에 나아가 두 가지가 있다. 처음 4구는 증분證分을 나타내 보이고, 둘째, 다음 14구는 연기분緣起分을 나타낸다. 이 중에 처음 2구는 연기의 체體를 가리킨다. 둘째, 다음 2구는 다라니의 이理와 덕용(用)을 기준으로 하여 법을 포섭하는 분제分齊를 변별한 것이다. 셋째, 다음 2구는 사법事法에 즉하여 법을 포섭하는 분제를 밝힌 것이다. 넷째, 다음 4구는 시간(世時)을 기준으로 하여 법을 포섭하는 분제를 보인 것이다. 다섯째, 다음 2구는 계위를 기준으로 하여 법을 포섭하는 분제를 밝힌 것이다. 여섯째, 다음 2구는 위의 뜻을 통틀어 논한 것이다. 비롯 여섯 부문이 같지 않으나 오직 연기 다라니법을 나타낸 것이다.1)

처음에 말한 ‘연기의 체體’는 곧 일승의 다라니법이다. 하나가 곧 일체이고 일체가 곧 하나인, 걸림 없는 법계의 법이다. 이제 우선 하나의 문에 근거하여 연기의 뜻을 나타낸다.

이른바2) “연기란 위대한 성인이 중생을 섭수하여 이理에 계합하고 사事를 버리도록 하려는 것이다. 범부는 사事를 보면 곧 이理에 미혹하나, 성인은 이理를 얻어서 이미 사事가 없다. 그러므로 이제 참된 이理를 들어서 미혹한 유정을 깨닫게 하여 모든 유정들로 하여금 사事가 곧 없으며 사事가 곧 이理에 계합함을 알게 하려는 까닭에 이 가르침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므로 『십지경론』에서 말한다.3) ‘자상自相’은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과보의 상(報相)이니, 명색名色이 아리야식과 함께 생기는 것이다. 경에서 ‘삼계三界의 땅에 다시 싹이 생겨남이 있으니, 이른바 명색이 함께 생긴다’4)라고 한 까닭이다. ‘명색이 함께 생긴다’는 것은 명색이 저 (아리야식과) 함께 생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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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10_b_02L法界圖記叢髓錄卷下之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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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10_b_04L[一乘法界圖原文三]
1)文云 [148] 三釋文2) [149] [148] 文有七言三十句
006_0810_b_05L此中大分有三初十八句約自利行
006_0810_b_06L次四句3) [150] 利他行次八句4) [151] 行者
006_0810_b_07L5)修行 [152] 方便及得利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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就初門中有二初四句現示6)訂分
006_0810_b_09L次十四句 7) [153] [149] 緣起分此中初二句
006_0810_b_10L緣起體二次二句約陁羅尼理用
006_0810_b_11L辨攝法分齊三次二句8) [154] 9)法明 [155]
006_0810_b_12L法分齊四次四句約世時示攝法分齊
006_0810_b_13L五次二句約位以彰攝法分齊六次二
006_0810_b_14L摠論上意雖六門不同而唯*現緣
006_0810_b_15L起陁羅尼法10) [156] [150] 緣起體者即是一
006_0810_b_16L乘陁羅尼法一即一切一切即一
006_0810_b_17L障㝵法11)界法 [157] 今且約一門*現緣起
006_0810_b_18L所謂緣起者大聖攝生欲令契理
006_0810_b_19L捨事凡夫見事即迷於理聖人得理
006_0810_b_20L [151] 無於事故今擧實理以會迷情令諸
006_0810_b_21L有情知事即無12)即事 [158] 會理故興 [152] 此敎
006_0810_b_22L故地論*云自相者有三種一者報相
006_0810_b_23L名色共阿梨 [153] 耶識生如經於三界地
006_0810_b_24L13) [159] 所謂名色共生故名色共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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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는 저것으로 인한 상(彼因相)이니, 이 명색이 저 (아리야식)을 여의지 않고, 저 (아리야식)에 의지하여 함께 생기기 때문이다. 경에서 ‘여의지 않는다’5)라고 한 까닭이다.

셋째는 저것의 과보가 차례를 이루는 상(彼果次第相)이니, 육입六入에서부터 유有에 이르는 것이다.6) 경에서 “이 명색이 자라서는 육입의 무더기를 이루고, 내지乃至7) 유有의 인연인 까닭에, 태어남ㆍ늙음ㆍ아픔ㆍ죽음ㆍ근심ㆍ슬픔ㆍ고통ㆍ번뇌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중생은 고통의 무더기를 자라나게 하나, 이 가운데 나(我)와 나의 것(我所)을 여의었으며 지知도 없고 각覺도 없으니 풀과 나무와 같다.”8)라고 한 것이다. 이 중에 ‘나와 나의 것을 여의었다’라고 하는 것은 이 둘이 공空을 보이는 것이다. ‘지知도 없고 각覺도 없다’라는 것은 자체가 무아이기 때문이다. ‘풀과 나무와 같다’는 것은 중생의 수가 아님을 보인 때문이다9)라고 하였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십이인연 등은 곧 자체의 성품이 공空하여 저 아리야식을 의지하여 생겨난다. 아리야식은 미세하고 자체가 무아이며 십이인연을 낳는다. 십이인연도 다 무아이니, 따라서 연緣으로 생겨난 것들은 별다른 법이 있지 않다. 부처님은 연기를 관하는 문(緣起觀門)을 들어서 모든 법이 일체가 무분별이며 곧 참된 성품을 이룸을 알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지경론』에서 이르기를, ‘세제世諦를 따라 관觀하여 곧 제일의제第一義諦에 들어간다’10)라고 하니 이것이 그 일이다.11) 이 뜻은 삼승에 있으나 또한 일승에도 통한다. 무슨 까닭인가? 일승을 목표로 하는 바이기 때문이다.”12)

만약 별교일승을 기준으로 하면, “간략히 열 가지 문을 설한다.

006_0810_c_01L名色共彼生故二者彼因相14) [160]
006_0810_c_02L名色不離彼依彼共生故 15) [161] [154] 不離
006_0810_c_03L三者彼果次16)弟相從六入乃至於
006_0810_c_04L如經此名色增長已成六入聚乃至
006_0810_c_05L有因緣故有生老病死憂悲苦惱如是
006_0810_c_06L衆生生長苦聚是中離我我所17) [162] [155]
006_0810_c_07L [156] 如草木也第下之一第一張 此中
006_0810_c_08L離我我所者此二18) [163] 無知無覺者
006_0810_c_09L自體無我故19) [164] 草木者示非衆生數故
006_0810_c_10L當知十二因緣等即自20) [165] [157] 性空依彼
006_0810_c_11L21) [166] 耶識生梨耶微細自體無我
006_0810_c_12L十二因緣十二因緣22) [167] 皆無我故緣
006_0810_c_13L生等23) [168] 別法佛擧緣起觀門以會
006_0810_c_14L諸法一切無分別即成實性故地論
006_0810_c_15L隨順觀世諦即入*弟一義諦是其
006_0810_c_16L事也此義在三乘亦通一乘何以故
006_0810_c_17L一乘所目故若約別敎一乘略說十
006_0810_c_18L「文云」無有{甲}「下」無有{甲}「明」無有
006_0810_c_19L{甲}
「弁」下有「修」{甲}「修行」無有{甲}
006_0810_c_20L「訂」通「證」於此書{編}次同
「現」作「顯」{甲}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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冠註曰事下疑脫顯字{甲}「法明」無有
006_0810_c_22L{甲}
「云」作「言」{甲}次同「界法」作「法界」
006_0810_c_23L{甲}
「即事」作「事即」{甲}「芽」作「牙」{甲}
006_0810_c_24L
「者」無有{甲}「如」作「知」{甲}「弟」作「第」
006_0810_c_25L{甲}{乙}
▣字體磨滅{底}ㆍ作「知」{甲}ㆍ作「如」{乙}
006_0810_c_26L
「示」下有「現」{甲}「如」無有{甲}「體」下
006_0810_c_27L有「自」{甲}
「賴」作「梨」{甲}「亦」作「示」{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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冠註曰有一作分{甲}

006_0811_a_01L이른바 인연은 나뉘어 차례가 있는 까닭이며, 한마음(一心)에 포섭되는 까닭이며, 자상과 업으로 이루기 때문이며, 서로 버리거나 여의지 않기 때문이며, 세 길(三道)이 끊어지지 않기 때문이며, 과거와 미래를 관하기 때문이며, 세 고통(三苦)이 모인 것이기 때문이며, 인연으로 생기기 때문이며, 인연의 생함과 멸함에 묶여 있기 때문이며, 있음과 다함을 따르는 관觀이기 때문이다.13) 이와 같은 열 번의 십이인연은 일승一乘의 뜻에 거두어진다.”14)

무슨 이유로 열 번을 헤아려 설하는가? 한량없음을 나타내고자 하기 때문이다.
열 번의 인연은 앞과 뒤에 해당하는가, 동시(一時)에 해당하는가?
곧 앞과 뒤이기도 하고, 곧 앞과 뒤가 없기도 하다. 까닭을 알 수 있는 것은 문門이 같지 않기 때문에 곧 앞과 뒤이고, 육상六相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곧 앞과 뒤가 없다. 그 뜻은 무엇인가? 열 번이 비록 다르나 한 가지 무아를 이루기 때문이다.
“『영락경瓔珞經』15)의 열 번의 인연16)은 삼승三乘의 뜻에 포섭된다. 무슨 까닭인가? 가르침에 따라서 차별되어 같지 않기 때문이다.”17) 자세히는 『십지경론』에서 설한 것과 같다.18) 십이인연의 설과 같이, 나머지 연緣으로 생겨난 모든 법도 예에 준하여 알 수 있다.

둘째, ‘다라니법陀羅尼法’은 아래에서 설하는 것19)과 같다.
셋째, ‘사事에 즉하여 법을 포섭한다’라는 것은 인다라니와 미세(다라니)를 나타내기 때문이니, 자세한 뜻은 경經과 같다.
넷째, ‘시간(世時)을 기준으로 하여’라는 것은, 이른바 구세九世는 과거의 과거ㆍ과거의 현재ㆍ과거의 미래ㆍ현재의 과거ㆍ현재의 현재ㆍ현재의 미래ㆍ미래의 과거ㆍ미래의 현재ㆍ미래의 미래세이다. 삼세三世가 상즉하고 더불어 상입하여 그 일념一念을 이루니, 총總과 별別을 합하여 이름 붙인 까닭에 십세十世가 된다. 일념은 현상으로서의 순간(事念)을 기준으로 하여 설한 것이다.
다섯째, ‘지위를 기준으로 한다’는 것은 육상의 방편으로써 뜻에 따라서 풀어 나가면 이해할 수 있다. 육상은 또한 위에서 설한 것과 같다.

‘연기’라는 한마디 말 중에 모든 법이 둘이 없어서 곧 일이 끝남20)이 드러났는데 왜 많은 문이 필요한가?
체體를 알면 곧 그러하여 멀리서 구함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006_0811_a_01L所謂因緣有分次*弟故一心所攝
006_0811_a_02L自業成故不相捨離故三道不斷
006_0811_a_03L1) [169] 後際故三苦集故因緣生故
006_0811_a_04L因緣生滅縛故隨順有盡觀故如是
006_0811_a_05L2)十番 [170] 十二因緣一乘義攝何故3) [171]
006_0811_a_06L欲*現無量故十番因緣爲當前
006_0811_a_07L爲當一時耶即前後即無前後
006_0811_a_08L4) [172] 以得知門不同故即前後六相成故
006_0811_a_09L5)6) [173] 前後其義云何十番雖別
006_0811_a_10L同成無我故7)纓絡 [174] 經十番因緣三乘
006_0811_a_11L義攝何以故 8) [175] [158] 敎差別不同9) [176]
006_0811_a_12L如地論說如十二因緣說餘緣生諸法
006_0811_a_13L准例可解二陁羅尼法者如下說
006_0811_a_14L即事攝法者 *現因陁10)羅尼 [177] 及微11) [178]
006_0811_a_15L廣義如經12)約世時者 [179] 所謂九世者
006_0811_a_16L過去過去過去現在過去未來現在
006_0811_a_17L過去現在現在現在未來未來過去
006_0811_a_18L未來現在未來未來13) [180] 三世相即及
006_0811_a_19L與相入成其一念摠別合14) [181] 15) [182]
006_0811_a_20L十世一念者約事念說也五約位者
006_0811_a_21L第下之一第二張 以六相方便隨義消
006_0811_a_22L16) [183] 解也六相者 [159] 如上說17) [184]
006_0811_a_23L緣起一言中諸法無二即*現了18) [185]
006_0811_a_24L何須多門體解即是不須遠求

006_0811_b_01L그러므로 경에 이르기를, “음욕(婬)과 분노(怒)와 어리석음(癡)의 성품이 곧 보리菩提이다.”21)라고 한 것이다. 이와 같은 것 등에서 미혹하여 극히 멀리 있으니,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일곱 가지 괴로움에 대한 진리 이외에 따로 보리가 있어, 헤아릴 수 없는 겁 동안 설하신 대로 수행하여야 (피안彼岸으로) 건너갈 수 있다고 가르치신 것이다. 미혹한 자를 위하여 많은 문의 설명이 필요한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법문이 수없을 것인데 어째서 오직 여섯 문의 설명뿐인가?
여섯 문으로 설한 것은 모든 법을 예에 준하여 마땅히 알 수 있기 때문에 간략히 이와 같이 설하였으니, 실로 말 그대로이다.
여섯째, ‘그윽하여 분별이 없다’라는 것은 연기의 법이 으레 그러하기 때문이니, 위에 준하여 생각할 수 있다.

둘째는 이타행 중에 나아감이니, ‘해인海印’이란 비유를 들어서 이름 붙인 것이다. 무엇인가? 큰 바다는 매우 깊고 밝고 맑아 밑바닥까지 비치니, 천제天帝가 아수라와 싸울 때 모든 병사들과 모든 무기들이 그 가운데에 나타나 분명히 드러남이 마치 글자를 도장 찍은 것과 같기 때문에 ‘해인’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능히 삼매에 들어가는 것 또한 이와 같다. 법성을 완전히 증득하여 밑바닥이 없어서 끝까지 청정하고 맑고 밝아서 세 가지 세간이 그 가운데 나타나므로 이름하여 ‘해인’이라고 한다.

‘번다하다(繁)’란 치성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나타낸다(出)’는 것은 솟아나오는 것이 다함없기 때문이다.
‘여의如意’란 비유를 따라 이름 붙인 것이다. 여의보왕如意寶王이 무심히 보배를 비 내려 중생을 이익되게 하되 연緣을 따라 끝이 없다. 석가여래의 훌륭하고 교묘한 방편 또한 이와 같아서 일음一音으로 펼치는 바가 중생계에 응하여 악惡을 없애고 선善을 일으켜 중생을 이익되게 하니, 어디든 쓰일 곳에 따라서 여의하지 않음이 없는 까닭에 ‘여의’라고 이름한 것이다.

셋째는 수행의 방편을 기준으로 한 것이니, 이 중에 둘이 있다. 첫째, 수행의 방편을 밝힌 것이고, 둘째, 이익 얻음을 변별한 것이다.
첫째 문에서 ‘행자行者’란 일승의 보법普法을 보고 들은 이후 아직 보법을 원만히 증득하기 이전까지를 말한다. 곧 이것은 별교일승을 기준으로 하여 설한 것이다. 만약 방편일승方便一乘을 기준으로 하여 설하면,

006_0811_b_01L故經*云19) [186] 癡性即是菩提如是
006_0811_b_02L等迷20) [187] 極遠是故佛敎七種苦諦以
006_0811_b_03L別有菩提三無數刧如說修行
006_0811_b_04L可得度爲迷之者須多門說若如
006_0811_b_05L是者法門無數何故唯六門說耶
006_0811_b_06L以六門說諸法准例應可解故略如是
006_0811_b_07L其實如言六㝠 [160] 然無分別者緣起
006_0811_b_08L法法如是故 21) [188] [161] 上可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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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就利他行中 22) [189] 印者約喩得名
006_0811_b_10L 23) [190] 海極深明淨徹底天帝共阿修
006_0811_b_11L羅鬪諍時一切兵衆一切兵具於中
006_0811_b_12L24) [191] 了了分明25) [192] 文字故名海印
006_0811_b_13L26) [193] [162] 27) [194] 亦復如是窮訂法性
006_0811_b_14L有源底 28) [195] 竟淸淨湛然明白三種世
006_0811_b_15L於中*現現名曰海印繁者熾盛
006_0811_b_16L義故出者涌出無盡故如意者從喩
006_0811_b_17L得名如意寶王無心而雨寶益生隨緣
006_0811_b_18L無窮釋迦如來善巧方便亦復如是
006_0811_b_19L一音所暢應衆生界滅惡生善利益
006_0811_b_20L衆生隨何用處無不如意故名如意
006_0811_b_21L三約修行方便者此中有29)二一 [196] 明修
006_0811_b_22L行方便30) [197] 得利益初門行31) [198]
006_0811_b_23L見聞一乘普法已去未滿32) [199] 訂普法已
006_0811_b_24L 33) [200] 是此約別敎一乘說也若約方

006_0811_c_01L오승五乘이 모두 일승에 들어가 포섭된다. 무슨 까닭인가? 일승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바(一乘所流)이고, 일승을 목표로 하는 바(一乘所目)이며, 일승의 방편(一乘方便)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 뜻을 기준으로 하면 오승을 모두 포섭하니, 일승의 수행자도 또한 가능하다.

‘흘러나오는 바(所流)’와 ‘목표로 하는 바(所目)’는 연기의 도리를 기준으로 한 말이고, ‘방편’은 지혜를 기준으로 한 말이다. 무슨 까닭인가? 나아가 머무르지 않는 것을 방편이라 이름하고, 마음을 돌이키지 않은 것을 방편이라 이름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성자의 뜻을 기준으로 설한 것이기도 하다. 무슨 까닭인가? 훌륭하고 교묘한 방편으로 중생을 이끌어 맞아들이기 때문이니 오승의 설과 같다. 사람(人)과 법法, 원인(因)과 결과(果), 앎(解)과 행行, 이법(理)과 현상(事), 가르침(敎)과 뜻(義) 등의 일체 모든 법도 예에 준하면 이와 같다.

이른바 오승五乘 등의 법은 설하는 가르침(能詮敎法)인가, 설해지는 뜻(所詮義)인가?
설하고 설해지는 일체 모든 법은 다 말(言) 가운데 있다.

006_0811_c_01L便一乘說五乘摠是入一乘攝何以故
006_0811_c_02L第下之一第三張 以一乘所流一乘所
006_0811_c_03L目一乘方便故若約此義 捴攝五乘
006_0811_c_04L一乘修行者亦得所流所目者約緣起
006_0811_c_05L道理語方便者約智語何以故
006_0811_c_06L趣不住34) [201] [163] 不廻心者不名方便故
006_0811_c_07L亦可約聖者意說何以故以善35) [202]
006_0811_c_08L方便引接衆生故如五乘說人法因
006_0811_c_09L36)37) [203] 理事敎義等一切諸法准例
006_0811_c_10L如是

006_0811_c_11L
所謂五乘等法爲是能詮敎法耶
006_0811_c_12L是所詮38) [204] 義耶能詮所詮一切諸法
006_0811_c_13L「先」作「前」{甲}「十番」無有{甲}「十」下有
006_0811_c_14L「番」{甲}
「所」作「何」{甲}冠註曰即下疑脫
006_0811_c_15L無字{甲}
「無」無有{甲}「纓絡」作「瓔珞」{甲}
006_0811_c_16L
「准」作「唯」{甲}「義」無有{甲}「羅尼」無有
006_0811_c_17L{甲}
「細」下有「陀」 又冠註曰陀字更勘{甲}
006_0811_c_18L「約世時者」無有{甲}
冠註曰世疑也{甲}「明」
006_0811_c_19L作「名」{甲}
「爲」無有{甲}「可」上有「即」{甲}
006_0811_c_20L
「於」無有{甲}「手」作「乎」又冠註曰乎疑耳
006_0811_c_21L{甲}
「怒」作「惱」又冠註曰惱疑怒{甲}「之」
006_0811_c_22L無有{甲}
「准」作「準」{甲}「海」無有{甲}
006_0811_c_23L「大」上有「是」{甲}
「現」作「離」又冠註曰離
006_0811_c_24L疑顯{甲}
「印」下有「顯」{甲}「人」作「入」{甲}
006_0811_c_25L
「䏞」作「昧」{甲}「究」上有「以」{甲}「二一」
006_0811_c_26L作「三」{乙}
「辨」作「辯」{乙}「者」無有{甲}
006_0811_c_27L「圓」無有{甲}
「即」無有{甲}「曰」下有「方便」
006_0811_c_28L{甲}
「巧」無有{甲}冠註曰解下一有行字{甲}
006_0811_c_29L
「行」無有{甲}「之」無有{甲}

006_0812_a_01L그 뜻이 무엇인가? 설해지는 법은 말의 모습(言相)이 모두 끊어졌으나 모든 부처님 세존께서는 대자비와 본래 서원의 힘(本願力)인 까닭이며, 모든 부처님집의 법이 으레 그러한 까닭에 말로 된 가르침(言敎)을 베풀어 중생을 위하여 설하신 것이다. 이 뜻으로써 가르침의 그물에 포섭된 바 일체 모든 법이 모두 다 말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일체 모든 법이 단지 이름(名字)만 있을 뿐이다.”22)라고 한 것이 곧 그 뜻이다.

증분의 법은 말의 모습(言相)으로 미치지 못하고 언교의 법(言敎之法)은 현상(事) 가운데 있다면, 증분과 교분敎分의 두 법이 항상 두 변에 있게 되는 허물일 것이다.
만약 정情을 기준으로 하여 설하면, 증분과 교분의 두 법이 항상 두 변에 있게 된다. 만약 이법(理)을 기준으로 하여 말하면, 증분과 교분의 두 법이 예부터 중도이고 하나로서 무분별이다. 까닭을 알 수 있는 것은, 변계遍計는 모양(相)이 없고 의타依他는 생겨남이 없으며 진실은 성품이 없어서 세 가지의 자성이 항상 중도에 있으니 세 법 이외에 다시 증분과 교분이 없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하나로서 무분별이니, 그러므로 지인至人은 이 이법(理)을 얻은 까닭에 이름의 모습(名相)으로 미치지 못하나, 중생을 위하여 설하기 때문에 말이 현상(事) 가운데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經의 게偈에서 이르기를, “일체 모든 여래께서 부처님의 법을 설하심이 없으나 그 응하여 교화하실 바를 따라서 위하여 법을 연설하신다.”23)라고 한 것이 그 뜻이다. 그러므로 성자聖者가 변계를 따르는 까닭에 세 가지 자성을 세워서 우선 궁핍한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점점 이후에 세 가지 자성이 없음(三無性)을 나타내 꿈꾸는 사람을 깨우니, 이것이 곧 성자의 큰 훌륭하고 교묘한 (방편)이다.

『섭대승론』에서 이르기를 변계소집은 범부의 경계이고 의타와 진실은 성자의 지혜경계라고 하였는데, 무엇 때문에 성자가 변계를 따르는 것인가?
변계의 모든 법은 잘못 거꾸로 되었기(顚倒) 때문에 있다. 그러므로 논論에서 ‘범부의 경계’24)라고 말한 것이다. 필경에 공空인 까닭에 상대할 만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논論 가운데 성자의 경계가 아니라는 것은 공空을 아는 것이 성자의 경계가 아니라고 한 것이 아니다.

006_0812_a_01L皆在言中其義如1) [205] 所詮之法 2) [206]
006_0812_a_02L相皆絕諸佛世尊以大慈悲本願力故
006_0812_a_03L諸佛家法法如是故施設言敎爲衆
006_0812_a_04L生說以是義故3) [207] [164] 4) [208] [165] 攝一切諸法
006_0812_a_05L皆悉在言是故經5) [209] 一切諸法但有
006_0812_a_06L名字即其義也

006_0812_a_07L
6) [210] [166] 之法言相不及言敎之法
006_0812_a_08L於事中者訂敎兩法常在二邊過 7) [211]
006_0812_a_09L若約情說訂敎兩法常在二邊若約
006_0812_a_10L8) [212] 9) [213] 訂敎兩法舊來中道一無分別
006_0812_a_11L所以得知遍計無相依他無生眞實無
006_0812_a_12L三種自性常在中道三法以外
006_0812_a_13L無訂敎是故當知一無分別是故至
006_0812_a_14L得此理故名相不及10) [214] 生說
006_0812_a_15L言在事中故經偈云一切諸如來
006_0812_a_16L有說佛法隨其所應化而爲演說法
006_0812_a_17L即其義也是故聖者隨遍計故建立
006_0812_a_18L三性且安窮心漸漸已後現三無性
006_0812_a_19L覺悟夢人此即聖者大善巧也

006_0812_a_20L
如攝論云遍計所執凡夫境界
006_0812_a_21L他眞實第下之一第四張 聖智境界
006_0812_a_22L故聖者隨遍計耶遍計諸法
006_0812_a_23L倒故有是故論云凡夫境界畢竟空
006_0812_a_24L無所可對是故論中非聖境界

006_0812_b_01L그러므로 성자는 자비의 방편으로 눈병을 따르는 까닭에 허공의 꽃(空華)을 말한 것이니 무슨 비방이나 논란이 있겠는가? 의미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의타기상은 인연을 따라 생겨난 것이라, 자성이 없어서 두 변의 잘못을 여의었으니 무아와 더불어 같다. 원성실성은 평등한 법성으로서 저것과 이것을 원융하여 분별할 수 없으니 예부터 한 맛이다. 이 뜻 때문에 분별이 미치지 못한다. 그러므로 논에서 ‘성자의 지혜의 경계’라고 한 것이다. 다른 의미는 이와 같다.

만약 실제를 기준으로 하여 설하면, 세 가지 자성이 모두 범부의 경계이다. 무슨 까닭인가? 중생(情)을 따라서 현상(事)을 설하여 세 가지를 세운 것이기 때문이다. 세 가지 자성은 곧 성자의 지혜의 경계이다. 무슨 까닭인가? 지혜를 따라서 이법(理)을 드러내어 세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에서 〔또한 어떤 곳에서는 세 가지 자성 이외에 세 가지 자성 없음(三無性)을 세우지 않고〕25) 또한 어떤 곳에서는 세 가지 자성 이외에 세 가지 자성 없음을 따로 세우는 것이다.26) 까닭이 무엇인가? 망정(情)을 따라서 세운 것은 이해의 문(解門)을 기준으로 한 까닭에 세 가지 자성 없음을 따로 세운 것이나 지혜를 따라서 이법(理)을 드러낸 것은 수행의 문(行門)을 기준으로 한 까닭에 세 가지 자성 이외에 세 가지 자성 없음을 세우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두 자성27) 이외에 진실이 없으니, 어찌 하물며 세 가지 자성 이외에 세 가지 자성 없음이 따로 있겠는가? 까닭을 알 수 있는 것은 모양 없는 평등한 지혜가 앞에 나타나 끝내 상대할 만한 법이 없고 오직 중도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가르침을 세우는 이유를 알아야 한다.

위에서 말한 증분의 법과 연기분의 법은 무슨 차별이 있는가?
차별되기도 하고 차별되지 않기도 하다. 그 뜻은 무엇인가? 증분의 법은 실상實相을 기준으로 하여 설함이니 오직 증득한 이가 알 바이고, 연기분의 법은 중생을 위해 설함이니 연緣과 상응한다. 그러므로 완전히 차별된다. 연기의 법은 뭇 연緣으로부터 생겨나 자성이 없어서 근본과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차별되지 않는다.

006_0812_b_01L11) [215] 空非聖境界是故聖者慈悲方
006_0812_b_02L便隨眼病故言說空12) [216] 有何防 [167]
006_0812_b_03L13) [217] 在於此依他起相從因緣生無有
006_0812_b_04L自性離二邊過與無我同圓成實性
006_0812_b_05L平等法14) [218] 圓融彼此不可分別舊來
006_0812_b_06L一味以此義故分別不及是故論15) [219]
006_0812_b_07L聖智境界別意如是若約實說三種
006_0812_b_08L自性皆是凡夫境界何以故16) [220]
006_0812_b_09L17) [221] 18)三故 [222] 19) [223] 自性20) [224] 聖智
006_0812_b_10L境界何以故隨智*現理非安立故
006_0812_b_11L是故經中亦有處三性以外 21) [225] [168] 立三
006_0812_b_12L22) [226] [169] 所以者何隨情安立約解門
006_0812_b_13L別立三無性隨智*現理約行門故
006_0812_b_14L23)24) [227] 以外不立三無性尙二*性以
006_0812_b_15L無有眞實何況三性以外別有三
006_0812_b_16L無性所以得知無相等智現前 25) [228]
006_0812_b_17L無法可對唯在中道故是故須解26)
006_0812_b_18L [229] 所由

006_0812_b_19L
如上所言訂分之法及緣起分法
006_0812_b_20L有何差別別不別其義云何訂分
006_0812_b_21L之法約實相說唯訂27) [230] 28) [231] 緣起分
006_0812_b_22L29)衆生 [232] 與緣相應是故全別
006_0812_b_23L起之法從衆緣生無有自性與本不
006_0812_b_24L是故不別

006_0812_c_01L
만약 이와 같다면 자신이 깨달은 것으로써 중생을 위하여 설하는 것은 지말과 다르지 않다. 보통은 차별인가?
또한 그 뜻도 가능하다. 만약 깨달은 것이 말(言)에 있다고 하면 지말과 다르지 않다. 말(言說)이 깨달음에 있으면 근본과 다르지 않다. 근본과 다르지 않으므로 작용하되 항상 고요하며, 말하되 말하지 않는다. 지말과 다르지 않으므로 고요하되 항상 작용하며, 말하지 아니하되 말한다. 말하지 아니하되 말하는 까닭에 말하지 않는 것이 곧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말하되 말하지 않는 까닭에 말하는 것이 곧 말하지 않는 것이다. 말하는 것이 곧 말하지 않는 것인 까닭에 말하는 것을 곧 얻을 수 없고, 말하지 않는 것이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닌 까닭에 말하지 않는 것을 곧 얻을 수 없다. 둘을 함께 얻을 수 없으므로 둘이 함께 서로 방해하지 않는다.

이 뜻으로써 말함과 말하지 않음이 평등하여 차별이 없으며, 생겨남과 생겨나지 않음이 평등하여 차별이 없으며, 움직임과 움직이지 않음이 평등하여 차별이 없다. 일체 차별의 상대하는 법문을 예에 준하면 이와 같다.

006_0812_c_01L
若如是者以自所30)爲衆31) [233] [170] 與末
006_0812_c_02L不異尋常差別耶32) [234] 得其義若爲
006_0812_c_03L所訂在言與末不異言說在訂與本
006_0812_c_04L不異與本不異故第下之一第五張
006_0812_c_05L而常寂說而不說與末不異故寂而
006_0812_c_06L常用不說而說不說而說故不說即
006_0812_c_07L非不說說而不說故說即非說說即
006_0812_c_08L非說故說即不可得不說即非不說故
006_0812_c_09L不說即33)非不說 [235] [171] 二俱不可得故二俱
006_0812_c_10L不相34) [236] 35) [237] 義故說與不說等無
006_0812_c_11L差別生與不生等無差別動與不動
006_0812_c_12L等無差別一切差別相對法門准例如
006_0812_c_13L「何」無有{甲}「言」無有{甲}「網」作「綱」
006_0812_c_14L{甲}
▣字體磨滅{底}ㆍ作「所」{甲}{乙}「云」作
006_0812_c_15L「言」{甲}
「令」作「分」{甲}「答」上有「爲」
006_0812_c_16L{甲}
冠註曰理下疑脫說{甲}「云」無有{甲}
006_0812_c_17L「衆」無有{甲}
「知」作「智」{甲}「花」作「華」
006_0812_c_18L{甲}
「意」作「竟」又冠註曰竟疑意{甲}「性」
006_0812_c_19L無有{甲}
「云」作「言」{甲}「情」作「性」又冠
006_0812_c_20L註曰性疑情{甲}
冠註曰立下疑脫故字{甲}
006_0812_c_21L「三故」無有{甲}
冠註曰種下疑脫無字{甲}
006_0812_c_22L「是」無有{甲}
「別」作「不」{甲}「性」下有「亦
006_0812_c_23L有處三性以外別立三無性」{甲}
冠註曰三下
006_0812_c_24L疑脫性字{甲}
「性」無有{甲}次同「究」作「畢」
006_0812_c_25L{甲}
「立敎」作「敎立」{甲}冠註曰所下疑脫知
006_0812_c_26L字{甲}
「知」作「故」{甲}「衆生…之法」十五
006_0812_c_27L字無有{甲}
「訂」通「證」於此書{編}次同「生」
006_0812_c_28L下有「說」{甲}
「亦」無有{甲}「非不說」作「不
006_0812_c_29L可得」{甲}
「防」作「妨」{甲}「此」作「是」{甲}

006_0813_a_01L그러므로 경에 이르기를, “유위와 무위의 일체 모든 법은 부처님이 계시거나 부처님이 계시지 않거나, 성품과 모양이 항상 머물러서 변하여 달라짐이 없다.”28)라고 한 것이 그 뜻이다.

또한 바르게 말한 법 중에는 말 이외에 다시 다른 뜻이 없으니 말로써 뜻을 삼는다. 바른 뜻의 법 중에는 바른 뜻 이외에 다시 다른 말이 없으니 뜻으로써 말을 삼는다. 뜻으로써 말을 삼으므로 말은 뜻 아님이 없고, 말로써 뜻을 삼으므로 뜻은 말 아님이 없다. 뜻이 말 아님이 없으므로 뜻은 곧 뜻이 아니고, 말이 뜻 아님이 없으므로 말은 곧 말이 아니다. 말이 곧 말이 아니며 뜻이 곧 뜻이 아니므로 둘을 함께 모두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일체 법이 본래 중도에 있으니 중도는 말과 말 아닌 것에 통한다. 무슨 까닭인가? 모든 법의 실상實相은 말 가운데 있지 않으니, 이름의 성품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말의 법은 진성眞性에 있지 않으니 근기(機)의 이익에 있기 때문이다. 근기의 이익에 있으므로 이름에는 진성이 없으며, 이름의 성품을 여의었으므로 이름하되 이름이 없다. 이름하되 이름이 없으므로 이름으로써 실상(實)을 구하나 실상을 얻을 수 없다. 이름에 진성이 없으므로 이름하되 무아와 같으며, 이름하되 무아와 같으므로 이름의 성품을 얻을 수 없다. 이 뜻으로써 둘을 함께 얻을 수 없으니 오직 증득한 이만 알 바이고 다른 경계가 아니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일체 모든 법은 오직 부처님만 아시는 바이고 나의 경계가 아니다.”29)라고 한 것이다.

앞과 뒤의 두 뜻이 무슨 차별이 있는가?
앞의 뜻은 근본과 지말이 상즉하고 상융相融함으로써 중도의 뜻을 드러내고, 뒤의 뜻은 이름(名)과 뜻(義)이 서로 객客이 됨으로써 무아의 뜻을 드러낸다. 드러나는 도리는 다르지 않으나 설명하는 방편이 다르다. 이는 곧 근본과 지말이 서로 돕고 이름과 뜻이 서로 객이 되어서 중생을 깨우쳐 인도하여 자체의 이름 없는 참된 근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니, 교화함과 교화됨의 핵심(宗要)이 여기에 있다.

006_0813_a_01L 1) [238] 故經云有爲無爲一切諸法
006_0813_a_02L佛無佛性相常住無有變異是其義也
006_0813_a_03L亦可正說法中言說以外更無別義
006_0813_a_04L以言爲義正義法中正義以外更無
006_0813_a_05L別言以義爲言以義爲言故言無非
006_0813_a_06L以言爲義故義無非言義無非言
006_0813_a_07L義即非義言無非義故言即2) [239]
006_0813_a_08L3)即非言義 [240] 即非義故二俱不可得
006_0813_a_09L是故一切法本來在中道中道者
006_0813_a_10L言非言何以故諸法實相不在言中
006_0813_a_11L離名性故言說4) [241] 不在眞性在機
006_0813_a_12L益故 5)在機益故 [242] 名無眞性離名性故
006_0813_a_13L名而無名名而無名故以名求實
006_0813_a_14L不可得名無眞性故名而無6)我同 [243]
006_0813_a_15L而無我同故名性不可得以此義故
006_0813_a_16L俱不可得唯訂所知非餘境界是故
006_0813_a_17L經云一切諸法唯佛所知非我境界
006_0813_a_18L前後兩義 7) [244] 8) [245] 9) [246]
006_0813_a_19L本末相10) [247] 相融11)現中道12) [248] 後義
006_0813_a_20L名義互爲13) [249] *現無我義所*現道理
006_0813_a_21L14) [250] 第下之一第六張 能詮方便別
006_0813_a_22L15) [251] 本末相資名義互*客16) [252] 衆生
006_0813_a_23L令致17) [253] 18) [254] 無名眞源能化所化宗要
006_0813_a_24L在此

006_0813_b_01L
이 뜻은 돈교頓敎의 근본(宗)에 해당하는데 무슨 까닭으로 여기서 설하는가?
위에서 설한 것처럼 설함(說)과 설하지 않음이 평등하여 차별이 없다. 무슨 까닭인가? 모두 참된 덕이므로 비방하고 힐난할 것이 없으며 우선 분별을 막기 위하여 삼승의 설에 따른 것이니, 대개 지혜로운 이의 수승하고 오묘한 능력이다. 위와 같은 증분과 연기분의 뜻은 논30) 가운데 뜻이 큼(義大)과 가르침이 큼(敎大)에 해당한다.

분별을 반대로 되돌려 무분별을 얻는 것을 ‘연이 없다(無緣)’라고 이름한다. 이법(理)을 따라서 머무르지 아니하므로 ‘훌륭하고 교묘한 (방편)’이라고 이름한다. 말씀대로 수행하여 성자의 뜻을 얻으므로 ‘잡는다(捉)’라고 이름한다. ‘여의如意’는 앞과 같다.31)

‘집으로 돌아간다(歸家)’란 본성을 증득한 까닭이다. ‘집(家)’은 무슨 뜻인가? 그늘지게 덮는다는 뜻이며 머무르는 곳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법성의 참된 공空은 깨달은 이가 머무르는 곳이므로 ‘집(宅)’이라고 이름하고, 대비大悲의 훌륭하고 교묘한 (방편)으로써 중생을 그늘지게 덮어주는 것을 이름하여 ‘집(舍)’이라고 한다. 이 뜻은 삼승에 있으니, 일승이라야 비로소 구경이 된다. 무슨 까닭인가? 법계와 상응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법계다라니의 집과 인다라니의 집과 미세(다라니)의 집 등이다. 이것이 성자가 의거하여 머무르는 곳이므로 이름하여 ‘집(家)’이라고 한다. ‘분수를 따른다(隨分)’란 원만하지 않은 뜻이기 때문이다. ‘자량資糧’이란 보리를 돕는 덕목(助菩提分)이기 때문이다. 아래 경의 「이세간품」 가운데 2천 가지의 답 등과 같은 것이 이것이다.
주석
석문釋文 2 (別解印相 중 釋文意)
〔1〕 자리행
1. 연기분
‘처음에 말한 연기의 체體는’부터 ‘예에 준하여 알 수 있다’까지32)

대기
『대기』에 이른다. ‘처음에 말한 연기의 체體는 곧 일승의 다라니이다’라고 한 것 등에서 연기의 체體는 열 보법에 통한다. 그러나 진성은 오직 유정有情의 문을 기준으로 한 것이라는 것은, 이하의 글에서 “이제 우선 하나의 문에 근거하여 연기의 뜻을 드러내겠다.”라고 하고 12지十二支를 기준으로 하여 해석하기 때문이다.33)

34)에서 행실만行實滿의 뜻으로 증분에 배대한 것은 무엇인가?
만약 어느 수행자가 오직 증분에 의지해서 수행하거나 오직 교분에 의지해서 수행한다면 진실행이 아니다.

006_0813_b_01L
19) [255] 當頓敎宗何故此間說
006_0813_b_02L上說說與不說等無差別何以故
006_0813_b_03L捴是實德故無有妨難且護分別故
006_0813_b_04L順三乘說蓋是智者勝妙能也如上
006_0813_b_05L訂分及緣起分義當論中義大敎大也
006_0813_b_06L背反分別得無分別名曰無緣
006_0813_b_07L理不住故名善巧如說20) [256] 得聖者
006_0813_b_08L故名爲21) [257] [172] 如意如前歸家者
006_0813_b_09L本性故家者何義陰覆義住處義故
006_0813_b_10L所謂法性眞空覺者所住故22) [258]
006_0813_b_11L大悲善巧23) [259] 覆衆生名曰爲舍
006_0813_b_12L義在三乘一乘方究竟何以故應法
006_0813_b_13L界故所謂法界陁羅尼家及因陁羅尼
006_0813_b_14L家微細家等此是聖者所依住故
006_0813_b_15L曰爲家隨分者未滿義故24) [260]
006_0813_b_16L助菩提分故如下經離世間品中二千
006_0813_b_17L答等是也

006_0813_b_18L[註釋]
[自利行]
初云緣起體至准例可解大記云
006_0813_b_19L云緣起體者即是一乘陁羅尼等者
006_0813_b_20L緣起之體通十普法然云眞性唯約
006_0813_b_21L有情門者以下文云今且約一門
006_0813_b_22L緣起義而約十二支解釋故也
006_0813_b_23L以行實滿義配訂分者云何若有
006_0813_b_24L行者唯依訂分而修唯依敎分而修

006_0813_c_01L(의상) 화상의 뜻은 증분과 교분을 쌍으로 실천하여 닦음을 진실행으로 삼기 때문에 그러하다.
() 증만證滿의 뜻으로 연기분에 배대한 것은 무엇인가?
() 총상이 갖춘 바 법을 보일 때 그 별상을 여는 것과 같으니, 이와 같이 증분 가운데 만족된 법을 나타내고자 하는 까닭이며 진성을 변별하기 때문에 그러하다.

법융기
『법기』에 이른다. ‘우선 하나의 문에 근거하여 연기의 뜻을 드러내겠다’란 진성을 가리킨다.
무슨 까닭에 법성을 풀이하지 않고 바로 진성을 변별하는가?
저 증분은 가리켜 보일 수 없기 때문이다.

‘위대한 성인이 중생을 섭수하여’라고 한 것 등은 비유하면 술 취한 사람이 뜰의 그루터기를 보고서 진짜 귀신이라고 이르는 것과 같으니, 이와 같이 중생이 12지十二支가 곧 매우 깊은 진성의 체體임을 미혹하여, 계탁해서 생사의 법으로 삼는 것이다. 그러므로 위대한 성인이 대자비를 일으켜 그로 하여금 12지가 곧 매우 깊은 진성의 체體임을 알게 하려는 까닭에 “모든 유정들로 하여금 현상(事)이 곧 없으며 곧 현상(事)이 이법(理)에 계합함을 알게 한다.”라고 말한 것이다.
() 위대한 성인은 그루터기와 귀신을 통틀어 보는가?

006_0813_c_01L則非實行也和尙之意則雙踐訂敎
006_0813_c_02L而修爲實行故爾也以訂滿義配緣
006_0813_c_03L起分者云何第下之一第七張 如示
006_0813_c_04L捴相所具法時開其別相如是欲
006_0813_c_05L現訂分之中滿足法故辨眞性故
006_0813_c_06L爾也

006_0813_c_07L
法記云且約一門現緣起義者指眞
006_0813_c_08L性也何故不釋法性25) [261] 辨眞性
006_0813_c_09L以彼訂分不可指示故也大聖
006_0813_c_10L攝生等者比如醉人見庭中杌謂爲
006_0813_c_11L實鬼如是衆生迷其十二有支即是
006_0813_c_12L甚深眞性之體計爲生死之法是故
006_0813_c_13L大聖起大悲慈令其得知十二有支
006_0813_c_14L即是甚深眞性之體故云令諸有情
006_0813_c_15L知事即無即事會理也大聖通見
006_0813_c_16L「是」無有{甲}「非」作「不」{甲}「即非言義」
006_0813_c_17L無有{甲}
「之」無有{甲}「在機益故」無有{甲}
006_0813_c_18L
「我同名而無我同故」此文中「名而無我同」五
006_0813_c_19L字缺落而冠註曰我等三字疑衍{甲}
「有」無
006_0813_c_20L有{甲}
「差」無有{甲}「義」下有「可別」又冠
006_0813_c_21L註曰可別疑衍{甲}
「即」下有「相即」 又冠註
006_0813_c_22L曰相即疑衍{甲}
「現」作「顯」{甲}次同「義」
006_0813_c_23L無有{甲}
冠註曰客一作容次同{甲}次同
006_0813_c_24L「異」作「理」 又冠註曰理一作異{甲}
「則」作
006_0813_c_25L「即」{甲}
「導」作「噵」{甲}冠註曰自下一有
006_0813_c_26L還字{甲}
「體」無有{甲}「義」下有「義」{甲}
006_0813_c_27L「修」作「終」{甲}
「捉」作「提」{甲}「曰」無有
006_0813_c_28L{甲}
「陰」作「蔭」{甲}「糧」作「粮」{甲}「直」
006_0813_c_29L作「眞」{乙}

006_0814_a_01L
그렇다. 아래 글에서 이르기를, “성인은 병든 눈을 따르는 까닭에 허공의 꽃(空花)을 말하는 것이니 어떤 비방이나 논란이 있겠는가?”35)라고 하였기 때문에 통틀어 보는 줄 안다.

『십지경론』에서 ‘자상自相’ 등이라고 한 것은36) (다음과 같이 풀이된다.) ‘자상’은 자신을 가리킨다. ‘과보의 상(報相)’은 오직 색色일 때에도 과보가 아니고 오직 마음(心)일 때에도 또한 과보가 아니다. 이 마음이 깨끗하지 않은 색色을 품은 때를 기준으로 하여 과보의 상을 삼는다. ‘명색名色’이란 색이 아닌 네 가지 온(四陰)37)은 모습이 없어 그윽하고 적막하여 이름(名)이 아니면 나타내지 못하기 때문에 ‘명名’이라고 한 것이다. 색은 모습이 거칠기 때문에 당체當體를 일컬어 ‘색’이라고 하는 것이다. 또 풀이하면, 오직 마음일 때에는 이름을 세울 수 없고, 오직 색일 때도 또한 이름을 세울 수 없으니, 다만 이 마음이 깨끗하지 않은 색을 잡는 첫 찰나를 기준으로 지목해서 사람의 몸을 삼으며, 지목해서 말(馬)의 몸을 삼기 때문에 명색이라고 하는 것이다.

‘(명색이) 아리야식과 함께 생기는 것이다’는 생生을 추구하는 중유中有가 종자를 간직하는 아리야식을 가지고 생기니,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자루 가운데 물건을 가득 담아 (이것을) 가지고 물속으로 가거나 (이것을) 가지고 불 속으로 가거나 뜻대로 가는 것과 같다. 근본되는 식識은 밭과 같고 무명과 행行은 심는 종자와 같으니, 심는 종자는 다섯 결과(五果)38)를 내는 종자이다. 애愛와 취取의 두 지支는 흙과 물과 같다. 그 유有의 지支는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을 생기게 하는 업이다. 그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은 생겨난 결과이다.

다섯 결과는 종자인가?
다섯 결과는 종자가 아니고 다만 다섯 종류39)의 종자를 능히 생기게 할 뿐이다.
다섯 결과의 종자는 무엇인가?
아려야식 중의 삼성三性40)이 종자이다. 이 종자는 세 번째의 식지識支의 자리 중에 있다. 이 때문에 이 종자를 합하여 식識으로 삼는다.
‘삼계三界의 땅에 다시 싹이 생기니’라는 것은, 이것은 모든 성인이 매우 깊은 대비大悲의 근심을 가장 잘 일으키는 곳이다.

006_0814_a_01L杌與鬼耶爾也以下文云聖人
006_0814_a_02L隨病眼故言說空花有何防難
006_0814_a_03L知通見也論云自相等者自相者
006_0814_a_04L指自身也報相者唯是色時非是
006_0814_a_05L報也唯是心時亦非是報約此心
006_0814_a_06L之抱不淨色時爲報相也名色者
006_0814_a_07L非色四陰無相溟漠非名莫現故云
006_0814_a_08L名也色相麁故當體云色也又釋
006_0814_a_09L唯是心時不可立名唯是色時亦不
006_0814_a_10L立名但約此心把不淨色之初刹那
006_0814_a_11L目爲人身目爲馬身故云名色也
006_0814_a_12L共阿梨耶識生者求生中有將種子
006_0814_a_13L藏梨耶識生猶如有人帒中盛物
006_0814_a_14L將去水中將去火中隨意往也
006_0814_a_15L識如田無明1) [262] 如下種子所下
006_0814_a_16L種子是生五果之種也愛取二支
006_0814_a_17L土與水其有支則是能生生老死之
006_0814_a_18L業也其生老死則是所生果也
006_0814_a_19L五果是種耶第下之一第八張
006_0814_a_20L果非種但能生五種之種也
006_0814_a_21L果之種是何2) [263] 耶識中三性種也
006_0814_a_22L此種在於3)弟三識支位中是故此種
006_0814_a_23L合爲識也於三界地復有芽生者
006_0814_a_24L此是諸聖最起甚深大悲憂之處也

006_0814_b_01L‘다시(復)’는 갔다가 다시 오고, 갔다가 다시 오기 때문에 ‘다시’라고 하는 것이다.

‘저것으로 인한 상(彼因相)’이란, ‘저것으로 인한(彼因)’은 아려야식(黎耶識)이고, ‘상相’은 명색이다. ‘저것의 과보가 차례로 이루어지는 상(彼果次第相)’이란, 그 가운데 여섯 지(六支)41)가 있다. ‘이 둘이 공空을 보이는 것이다’ 등이란, 색色을 기준으로 미루어 보아도 색에는 병이나 고통(病苦)이 없고, 마음을 기준으로 미루어 보아도 마음에는 병이나 고통이 없다. 이와 같이 지知도 없고 각覺도 없기 때문에 자체가 무아인 것이다. ‘중생의 품수가 아니다’란, 색色과 마음이 합하여야 비로소 곳곳에서 생生을 받으니, 만약 색과 마음이 떨어져서 단지 색일 때에는 생生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중생의 품수가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다.

‘곧 참된 성품을 이룬다’라는 것은, 하나의 티끌이 자성이 없어서 일체법으로 자성을 삼기 때문에 한 법도 하나의 티끌의 성품이 아닌 것이 없다. 그러므로 ‘참된 성품을 이룬다’라고 한 것이다. 이 티끌이 곧 해인의 체이기 때문에 ‘참된 성품’이라고 한 것이다. ‘세제世諦를 따라 관觀하여’ 등이란, 비유하면 물(水) 가운데 모든 형상을 거두어들이는 것은 자리이기 때문에 진제眞諦가 되고, 물이 다시 형상을 나타내는 것은 이타이기 때문에 속제가 된다. 그러므로 만약 세속을 따르면 곧 진실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제일의제가 밖으로 향하는 뜻으로 속제의 십이인연을 삼기 때문에 ‘세제를 따라 관觀하여 곧 제일의제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화엄경탐현기

『탐현기』에 이른다.42) 두 번째, 모든 고통을 구족함에 셋이 있다. 첫째는 십이연기의 모습을 나타낸 것이고, 둘째 ‘이와 같이’43) 아래는 고통의 무더기를 엮어서 이룬 것이며, 셋째 ‘이 가운데’44) 아래는 연기의 체體가 공함을 밝혀서 존재(有)가 전도된 것임을 드러낸 것이다. 『십지경론』 중에 앞의 첫 번째 단 안에서 앞의 세 지(三支)45)를 합하여 한 부분으로 삼고, 둘째로 ‘삼계에’ 아래에서 뒤의 아홉 지支를 변별한 것이다.46)

그중에 논주는 세 모습으로 나누었으니 첫째는 자상自相이고, 둘째는 동상同相이며, 셋째는 전도상顚倒相이다.

006_0814_b_01L復者往而復來往而復來故云復
006_0814_b_02L彼因相者彼因者黎耶識也
006_0814_b_03L者名色也彼果次*弟相者於中有
006_0814_b_04L六支也此二示空等 [173] 約色而推
006_0814_b_05L色無病苦約心而推心無病苦如是
006_0814_b_06L無知無覺故自體無我也非衆生數
006_0814_b_07L色與心合方得處處受生若色心
006_0814_b_08L離而但是色時不得受生故云非
006_0814_b_09L衆生數也即成實性者一塵無自性
006_0814_b_10L以一切法爲自性故無有一法非
006_0814_b_11L一塵性是故云成實性也此塵即
006_0814_b_12L是海印之體故云實性也隨順觀世
006_0814_b_13L諦等者猶如水中攝入諸像是自利
006_0814_b_14L爲眞諦水還現像是利他故
006_0814_b_15L俗諦也是故若順世俗即得入眞也
006_0814_b_16L以*弟一義諦向外之義爲俗諦十二
006_0814_b_17L因緣故隨順觀世諦即入*弟一義
006_0814_b_18L諦也

006_0814_b_19L
探玄云 *弟二具足諸苦中有三
006_0814_b_20L初現十二緣相二如是下結成苦
006_0814_b_21L三是中下明緣體空彰有是倒
006_0814_b_22L論中於前初段內前之三支合爲
006_0814_b_23L一分二於三界下辨後九支於中
006_0814_b_24L論主分爲三相一自相二同相

006_0814_c_01L해석에 두 문이 있다. 첫 번째는 구분된 자리(分位)47)를 기준으로 한 것이고, 두 번째는 뜻에 따름(隨義)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앞(分位) 가운데 자상이란 말하자면 현재 인연의 체體의 상태를 밝히기 때문이다. 둘째, 동상이란 미래의 인연이 현재와 같기 때문이다. 이법상 실제로는 현재에도 또한 생生과 노老 등이 있고 미래에도 또한 식識과 명색 등이 있다. 지금은 구분된 자리(分位)를 기준으로 모습을 나누었기 때문에 (자상과 동상의) 두 모습을 세운 것이다. 셋째, 전도상이란 연기의 체體가 실제로는 공함을 나타내어 존재(有)에 집착함이 전도된 것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두 번째, 뜻에 따름을 기준으로 한 것에서, 첫째는 원인을 따름을 기준으로 하여 미세한 행상行相을 낳는 것이 연기의 자상이다. 둘째는 결과의 모습을 기준으로 하여 연기의 허물과 근심이 결과의 자리에 두루 통함을 나타내 드러내기 때문에 동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셋째는 연기가 실제로는 무아이나 허망하게 취함을 전도顚倒로 삼는 것이다.

동상 가운데 두 지(二支)48)는 오로지 결과이고 오로지 현행이다. 자상의 일곱 지(七支)49)는 현행하는 결과가 되며 원인인 종자가 된다. 설사 그런들 무슨 과실인가? 함께 있는(俱有) 허물이기 때문이다. 만약 원인인 종자를 취한다면 “삼계의 땅에 싹이 생긴다.”라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만약 현행하는 결과를 취한다면 곧 저 앞의 넷50)은 생生 등51)과 다르지 않을 것이고, 뒤의 셋52)은 다시 생겨난 결과에 거두어지는 것이 아닐 것이다.
이들은 모두 현재 생겨난 결과의 자리에 도리어 원인의 이름을 말하여서 자상을 나타낸 것이다.

자상의 일곱 지(七支) 안에 나아가면, 『십지경론』은 나누어 셋으로 한다.
첫째, ‘과보의 상(報相)이니, 명색이 아려야식과 함께 생겨난다’라는 것은 말하자면 명색의 지支 가운데 일체의 명언종자를 통틀어 거두는 뜻이 있다. 아뢰야, 즉 식지識支는 통틀어 세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잡집론』53) 제4권54)에 의하면 업業의 종자로 식지識支를 삼는 까닭에

006_0814_c_01L三顚倒相釋有二門一約分位
006_0814_c_02L二約隨義第下之一第九張 前中
006_0814_c_03L自相者謂明現在因緣體狀故
006_0814_c_04L同相者謂未來因緣同現在故
006_0814_c_05L實現在亦有生老等未來亦有識
006_0814_c_06L名色等今約分位分相故立二相
006_0814_c_07L三顚倒者現緣體實空現執有是
006_0814_c_08L二約隨義者一約從因生微
006_0814_c_09L細行相是緣起自相二約果相
006_0814_c_10L現彰緣起過患遍通果位故云同
006_0814_c_11L三緣實無我妄取爲倒
006_0814_c_12L相中二支一向是果一向現行
006_0814_c_13L自相七支爲現果爲因種設爾何
006_0814_c_14L俱有過故若取因種則不應
006_0814_c_15L言三界地生芽若取現果即彼前
006_0814_c_16L四不異生等後三復非所生果攝
006_0814_c_17L此等並是現生果位却談因名
006_0814_c_18L以現自相就自相七支內論分爲
006_0814_c_19L一報相名色共阿黎耶識生者
006_0814_c_20L謂名色支中有義通攝一切名言
006_0814_c_21L種子阿賴耶即識4) [264] 通有三義
006_0814_c_22L一依雜集論*弟四以業種爲識支
006_0814_c_23L「及」作「反」{乙}「黎」作「梨」{乙}「弟」作
006_0814_c_24L「第」{乙}次同
「支」底本作「攴」編者改書爲
006_0814_c_25L「支」前後倣此

006_0815_a_01L이끄는 주체(能引)에 속하고 식識의 종자는 명지名支에 들어가 거두어진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 앞의 세 지를 한 곳에서 해석하는 것은 모두 이끄는 주체(能引)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본식本識의 종자로 식지를 삼는다. 그러므로 이 가운데 식識의 종자와 명색 등의 종자가 무명(惑)과 업業의 이끌어 윤택하게 하는 힘 때문에 이 종자를 일으켜 고통의 결과를 생겨나게 한다.

셋째는 현행하는 제8(식)이 또한 식지이다. 그러므로 이 가운데 (저것으로) 인한 상(因相)을 “명색이 본식을 여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이다. 말하자면 이것이 식識과 함께 생겨나는 바이고 명색이 생겨나서는 현행하는 제8(식)에 의거하여 저(8식)를 붙잡아 지니기 때문에 ‘(저것으로 인한 상)’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이법상 실제로는 이 가운데 식識 등의 다섯 종자55)가 앞의 훈습이 일어남으로 말미암아 동시에 생겨나지만 다만 앞으로 구분된 자리(分位)를 나타내 일으킴에 차례가 있는 것에 의거하는 까닭에 앞과 뒤로 설한 것이다. 그러므로 ‘저것의 과보가 차례를 이루는 상(彼果次第相)’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애愛와 취取와 유有의 셋은 비록 생겨나는 대상(所生)은 아니나 그러나 바로 생겨날 때 이것을 갖추어 있기 때문에 『성유식론成唯識論』에서 ‘생겨남과 이끔이 동시’56)라고 한 것이 이 뜻이다. 운운. 이것은 본식이 능히 의지하는 (주체)와 화합함을 이름하여 과보의 상이라고 함을 밝힌 것이다.

둘째, 능히 의지하는 주체(能依)에 체體가 없어 의지하는 바 대상(所依)에 의거하기 때문에 이 식識을 ‘(저것으로) 인한 상(因相)’으로 이름함을 나타낸 것이다.
셋째, 능히 의지하는 주체의 모습이 다하고 오직 의지하는 바 대상이 바뀌어 저 자리에 바뀌어 들어가는 것을 결과라고 이름한다. 또한 본식이 바뀜으로 이 결과를 삼는다. 그러므로 점차 간략히 하여 나머지 모습이 모두 다하고 오직 식이 있을 뿐이다. 이상은 시교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만약 종교를 기준으로 하면 이 본식이 여래장이니, 처음에는 물듦(染)과 화합하고, 다음에는 물든 법이 진여(眞)에 의거하며, 나중에는 물듦이 진여와 다르지 않기 때문에 오직 진여가 바뀐 것일 뿐이다. ‘이와 같이 인연’57) 아래는 고통의 무더기를 매듭지은 것이다.

006_0815_a_01L故屬能引識種入名支攝是故
006_0815_a_02L文前三支一處釋者以俱是能引
006_0815_a_03L二以本識種爲識支是故此中
006_0815_a_04L識種及名色等種 [174] 惑業引潤力
006_0815_a_05L起此種子令生苦果三現行
006_0815_a_06L1)弟八亦是識支是故此中因相
006_0815_a_07L云名色不離本識故謂此共識所
006_0815_a_08L名色生已依於現行*弟八
006_0815_a_09L彼執持故名因相理實此中識等
006_0815_a_10L五種由前熏發同特 [175] 而生但依當
006_0815_a_11L來現起分位第下之一第一○張
006_0815_a_12L次*弟故說爲前後是故名爲彼
006_0815_a_13L果次*弟相也愛取有三雖非所
006_0815_a_14L然正生時具有此故唯識論說
006_0815_a_15L生引同時是此義也云云 此明本
006_0815_a_16L識與能依和合名爲報相二現能
006_0815_a_17L依無體於 [176] 於所依故說此識名爲
006_0815_a_18L因相三能依相盡唯所依轉
006_0815_a_19L入彼位名果亦以本識轉爲此果
006_0815_a_20L是故漸略餘相皆盡唯有識在
006_0815_a_21L上約始敎若約終敎則此本識
006_0815_a_22L是如來藏初則與染和合次則染
006_0815_a_23L法依眞後乃染不異眞故唯眞轉
006_0815_a_24L如是因緣下結苦聚也是中

006_0815_b_01L
‘이 가운데 나가 없고’58) 아래는 전도상顚倒相을 나타낸 것이니 『십지경론』의 해석과 같다.

십이인연관

징관 스님의 『십이인연관』59)에서 이른다. 십이인연은 이에 생사生死의 큰 나무이며 또한 생사의 큰 강이라고도 이름한다. 무슨 까닭에 나무라고 이름하는가? 세간의 나무가 뿌리ㆍ줄기ㆍ가지ㆍ잎ㆍ꽃ㆍ열매가 있어 서로 이어서 생겨나듯이 십이인연 또한 다시 이와 같다. 과거에 두 원인이 있으니 이를 이름하여 뿌리라고 한다. 두 원인이란 첫째는 무명지無明支이고, 둘째는 행지行支이다. 현재에 다섯 결과가 있다. 다섯 결과란 첫째는 식지識支, 둘째는 명색지名色支, 셋째는 육입지六入支, 넷째는 촉지觸支, 다섯째는 수지受支이다. 현재에 세 원인이 있다. 세 원인이란 첫째는 애지愛支이고, 둘째는 취지取支이며, 셋째는 유지有支이다. 미래에 두 과보가 있다. 두 과보는 첫째는 생지生支이고, 둘째는 노사지老死支이다.

과거의 두 원인 가운데 첫째의 무명지는 말하자면 과거 일체의 번뇌를 무명지라고 이름하고, 또 연緣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을 무명이라 이름한다. 둘째의 행지는 말하자면 일체 몸과 입과 마음의 선악 등의 업을 모두 다 행行이라고 이름하니, 무명인 까닭에 행行을 발생시킨다. 무명과 행行의 두 가지가 과거의 두 원인이다. 행行이란 생사의 업이다. 이 둘이 현재의 다섯 결과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이를 이름하여 뿌리라고 한다.

현재의 다섯 결과 가운데 첫째의 식지識支는 과거의 행업이 있어서 현재의 식識인 정신을 일으키는 것이다. 처음 생生을 받을 때 태胎에 들어가는 한 찰나의 마음을 이름하여 식識이라고 한다.
둘째의 명색지名色支는 생을 받은 식識이 있기 때문에 명색을 일으키는 것이다. 명색이란 오온이다. 말하자면 두 번째 찰나 이후의 마음이

006_0815_b_01L無我下現顚倒相並如論釋

006_0815_b_02L
觀師十二因緣觀云十二因緣者
006_0815_b_03L乃是生死大樹亦名生死大河
006_0815_b_04L故名樹如世間樹有根莖枝葉花
006_0815_b_05L相續而生十二因緣亦復如
006_0815_b_06L過去有二因名之爲根二因
006_0815_b_07L一無明支二行支現在有五
006_0815_b_08L五果者一識支二名色支
006_0815_b_09L六入支四觸支五受支現在有
006_0815_b_10L三因三因者一愛支二取支
006_0815_b_11L有支未來有二報二報一生支
006_0815_b_12L二老死支過去2) [265] [177] 因中一無明
006_0815_b_13L支者謂過去一切煩惱名無明支
006_0815_b_14L又云於緣不了名無明二行支者
006_0815_b_15L謂一切身口意善惡等業悉皆名
006_0815_b_16L以無明故發生於行無明與
006_0815_b_17L行二種第下之一第一一張 是過去
006_0815_b_18L二因也行者生死業也此二
006_0815_b_19L感現在五果故名之爲根現在五
006_0815_b_20L果中一識支者以有過去行業
006_0815_b_21L發起現在識神初受生時入胎一
006_0815_b_22L念心名之爲識二名色支者
006_0815_b_23L有受生識故發起名色名色者
006_0815_b_24L五蘊也謂*弟二念已去心也

006_0815_c_01L부모의 붉고 흰 정혈精血과 합하여 백 일에 이르기까지이다. 모든 포개져 있는 (신체기관들이) 아직 열리지 않아서 다만 한 덩어리의 육신(肉團)일 뿐 아직 눈ㆍ귀ㆍ코ㆍ혀의 모습을 이루지 않아 다만 색色과 마음(心)만 있기 때문에 명색이라고 이름한다.
셋째의 육입지六入支는 명색을 말미암아 육입을 발생시키는 것이니 육입이란 육근이 식識의 길을 통틀어 생기게 하기 때문에 육입이 된다. 이것은 말하자면 태 안에 있은 지 백 일 이후이다. 한 덩어리의 육신 안에 업으로 생겨난 바람이 일어나 부니 한 덩어리의 육신이 열리고 펼쳐져 모든 육근의 모습을 변화시켜 짓는 것을 이름하여 육입지라고 한다.

넷째, 촉지觸支는 육입을 말미암아 발생하는 것이니 근根과 진塵과 식識 등의 세 가지가 화합하여 만나고 상대하는 것을 촉觸이라고 이름한다. 이것은 말하자면 태어난 이후 두 살(까지)이다. 다른 대상(塵)은 분별하지 못하고 다만 배고픔ㆍ목마름ㆍ더위ㆍ추위만을 느낄 수 있다. 불에 데거나 독에 닿으면 소리 내어 눈물 흘리며 우는 것을 촉지라고 이름한다.
다섯째, 수지受支는 대상에 닿음(觸)으로 말미암아 수受를 발생시키는 것이니 받아들임(領納)을 수受라고 이름한다. 이것은 말하자면 두 살 이후에 마음이 점차 모든 대상을 분별하여 다섯 살, 여섯 살까지를 수지受支라고 이름한다. 이 다섯 지支가 과거의 두 원인에 응대하니 현재의 다섯 결과라고 이름한다.

세간의 나무에 이미 나무 몸통이 있으면 반드시 가지와 줄기와 꽃과 열매가 있는 것처럼, 애愛와 취取와 유有의 세 원인이 다시 미래의 생生과 노병사老病死의 두 과보를 불러일으킨다. 현재의 세 원인 가운데 첫째의 애지愛支는 받아들임(領納)으로 말미암아 애愛를 발생시키니, 연緣에 대해서 물듦(染)을 일으키는 것을 애愛라고 이름한다. 이것은 말하자면 일곱 살 이후부터 열다섯 살까지, 꽃을 사랑하고 열매를 탐하여 마음이 바라고 추구함을 이름하여 애愛라고 한다.

006_0815_c_01L父母赤白精血和合乃至百日
006_0815_c_02L包未開但是肉團未成眼耳鼻舌
006_0815_c_03L但有色心故名名色三六入
006_0815_c_04L支者由名色故發生六入六入
006_0815_c_05L六根通3) [266] 識道故爲六入
006_0815_c_06L謂在胎內百日已外也肉團之內
006_0815_c_07L起業生風吹肉團開敷變作諸根
006_0815_c_08L名爲六入支四觸支者由六
006_0815_c_09L入故發生根塵識等三事和合觸
006_0815_c_10L名觸此謂出胎已去兩歲也
006_0815_c_11L分別餘塵但能覺飢渴熱寒犯火
006_0815_c_12L觸毒則啼哭之名爲觸支五受支
006_0815_c_13L由觸境故發生於受領納名
006_0815_c_14L爲受此謂兩歲已去心漸分別諸
006_0815_c_15L五六歲已來名爲受支此五
006_0815_c_16L酬過去二因名爲現在五果
006_0815_c_17L世間樹旣有樹身須有枝柯花果
006_0815_c_18L愛取有三因復感未來生老病死
006_0815_c_19L二報現在三因中一愛支者
006_0815_c_20L領納故發生於愛於緣起染名
006_0815_c_21L爲愛也此謂七歲已去十五已來
006_0815_c_22L愛花貪果心欲追求名之爲愛
006_0815_c_23L「弟」作「第」{乙}次同「上」作「二」{乙}「生」
006_0815_c_24L作「住」{乙}

006_0816_a_01L둘째의 취지取支는 물든 애愛로 말미암아 취取를 발생시키니 연緣에 대한 물듦(染)에 들어가 집착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이름하여 취取라고 한다. 셋째의 유지有支는 취하여 집착함으로 말미암아 유有를 발생시킨다. 몸과 입과 마음의 지음(造作)이 미래의 존재를 부르니, 미래의 결과로 지목하여 현재의 세 원인으로 삼기 때문에 유有라고 이름한다. 이것은 말하자면 그 취하는 대상에 따라서 재물ㆍ색色ㆍ살생ㆍ도둑질ㆍ삿된 음행을 취득하여 손에 넣어서 본래 마음에 칭합하고 순응하니 기억하고 생각하여 업業을 이루어 미래의 결과가 있음을 이름하여 유지有支라고 한다.

꽃이 열매를 맺음에 이 꽃이 뒤의 열매를 생기게 하는 것을 다시 원인이라고 이름하는 것처럼, 이미 그 원인이 있어서 미래의 두 과보를 불러일으킨다. 두 과보란 첫째, 생지生支는 현재로 말미암아 일어나서 미래에 삶을 받음이 있게 하니, 법에 있어서 처음 일어나는 것을 이름하여 생生이라고 한다. 둘째, 노사지老死支는 생生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노사老死를 일으키니, 생生이 노사의 연이기 때문에 생生을 연緣한 노사이다. 이 두 지支는 뒤에 생겨나는 결과이며, 결과는 다시 원인이 되어서 원인과 결과가 서로를 낳음이 마치 큰 나무와 같다.

일체중생이 모두 십이인연에 떴다가 가라앉으며 흘러 돌아다님이 되어서 생사를 따라 좇으며 삼계의 감옥 가운데를 오고 가서 고통을 받음이 끝이 없으니, 세간의 강에 떴다가 가라앉는 것과 같다. 범부가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이는 깨달아 통달하면 흐름을 따르지 않고 도道를 닦아 끊어 제하여 곧 벗어나게 된다. 무릇 십이인연은 생사에 얽어매는 인연이니, 반드시 이 인연을 없애야만 생사를 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경에 이르기를, “무명이 멸하면 행行이 멸하고, 내지 생生이 멸하면 늙음과 죽음이 멸한다.”60)라고 한 것이다. 이 인연을 멸하는 것은 반드시 도道를 닦는 것이 필요하다.

006_0816_a_01L第下之一第一二張 二取支者
006_0816_a_02L染愛故發生於取於緣染入有所
006_0816_a_03L執故名之爲取三有支者由取着
006_0816_a_04L發起於有身口意造作能招
006_0816_a_05L未來有以未來果目爲現在三
006_0816_a_06L故名有也此謂隨其所取財色
006_0816_a_07L殺盜邪婬取得入手稱遂本心
006_0816_a_08L憶思成業能有當來果名爲有支
006_0816_a_09L如花結果此花能生後果復名爲
006_0816_a_10L旣有其因能感未來兩報
006_0816_a_11L報者一生支由現在發起令有
006_0816_a_12L未來受生於法始起名爲生也
006_0816_a_13L二老死支者由有生故起於老死
006_0816_a_14L生是老死之緣故生緣老死此二
006_0816_a_15L支是後生果果復爲因因果相
006_0816_a_16L猶如大樹一切衆生皆爲十二
006_0816_a_17L因緣漂沒流轉隨逐生死往來三
006_0816_a_18L界牢獄之中受苦無窮如世間
006_0816_a_19L河漂沒相似凡夫不覺故智者了
006_0816_a_20L則不從流修道斷除即得出
006_0816_a_21L夫十二因緣者生死繫縛之因
006_0816_a_22L緣也必須滅此因緣乃得1) [267]
006_0816_a_23L生死是故經云無明滅則行滅
006_0816_a_24L乃至生滅則老死滅滅此因緣

006_0816_b_01L
어떻게 도道를 닦는가?
십이인연의 근본을 추구한다면 이는 곧 무명이다. 무명으로 인한 까닭에 번뇌의 업을 일으키고, 업으로 인한 까닭에 과보를 일으키고, 과보가 있기 때문에 고통이 있으니, 다 무명으로 근본을 삼음으로 인하여 생사에 흘러 돌아다니며 삼세에 나뉘어 떨어짐이 나무와 같고 강과 같다. 지혜로운 이는 깨달아 알고 그 뿌리를 베고 그 근원을 끊고자 한다. 마치 나무를 베려면 먼저 그 뿌리를 베는 것과 같고, 또한 물을 끊으려면 먼저 그 근원을 끊는 것과 같이, 지금 십이인연의 나무와 강을 베고 끊고자 한다면 먼저 무명을 끊어야 한다.

무명이란 무엇인가?
깨닫지 못하는 마음이 이것이다.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허망되게 분별을 일으켜 마음 밖의 경계를 보고는, 있다고 하고 없다고 하며, 옳다고 하고 그르다고 하며, 얻었다고 하고 잃었다고 한다. 모든 과보의 법인 몸과 마음 등의 고통이 다 무명의 힘이다.

내가 지금 무명을 끊고자 하니 먼저 마음의 근원을 스스로 깨닫는 것이 필요하다. 마음을 따라 일어난 일체 망상이 모두 깨닫지 못한 마음을 따라 생겨난 것이다. 지금 자기 마음의 본성이 생겨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옴도 없고 감도 없음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
() 어떻게 일체의 망념이 홀연히 허망되게 일어난 것임을 알 수 있는가?
() 깨달으면 생겨나지 않는다.

() 무엇을 깨달음이라고 하는가?
()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일어날 때 도리어 자기의 마음으로 관찰하고 생각하고 헤아려 추구하는 것과 같다. 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어떤 형상이 있는가, 푸른가 노란가, 과거인가 미래인가 현재인가, 안에 밖에 중간에 있는가라고,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추구해도 도무지 형상이 없다. 만약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본래 있다면 오늘 깨달을 때에도 또한 마땅히 볼 수 있어야 하나 지금 깨달으면 곧 없기 때문에, 깨닫지 못한 까닭에 홀연히 허망되게 일어남을 안다.

006_0816_b_01L須修道云何修道推求十二
006_0816_b_02L因緣根本乃是無明因無明故
006_0816_b_03L起煩惱業因業故起果報有果報
006_0816_b_04L有苦皆因無明爲根本流轉生
006_0816_b_05L分離三世如樹如河智者了
006_0816_b_06L欲伐其根及斷其源猶如
006_0816_b_07L伐樹第下之一第一三張 先伐其根
006_0816_b_08L亦如斷水先斷其源今欲伐斷十
006_0816_b_09L二因緣樹河先斷無明無明何
006_0816_b_10L者是不覺心是以不覺故
006_0816_b_11L起分別心外見境謂有謂無
006_0816_b_12L是謂非謂得謂失諸果報法身心
006_0816_b_13L等苦皆是無明之力我今欲斷無
006_0816_b_14L先須自覺心源隨心所起一切
006_0816_b_15L妄想皆從不覺心生今須知自心
006_0816_b_16L之本性無生無滅無來無往
006_0816_b_17L得知一切妄念忽然妄起覺則不
006_0816_b_18L云何名覺如貪嗔癡起時
006_0816_b_19L以自心觀察思量推求此貪嗔癡
006_0816_b_20L有何形狀爲靑爲黃爲過去爲未
006_0816_b_21L來爲現在爲在2)▣▣▣ [268] [178] 推求
006_0816_b_22L貪嗔癡都無形狀若貪嗔癡本來
006_0816_b_23L是有今日覺時亦應可見今覺
006_0816_b_24L即無故知由不覺故忽然妄起

006_0816_c_01L깨달으면 생겨나지 않기 때문에 깨달음은 무명을 대하여 다스리는 것이니, 이 깨달음이 현재에 있으면 무명은 마음에 있을 수 없다. 무명이 없기 때문에 일체의 망상과 번뇌가 생겨나지 않는다. 번뇌가 생겨나지 않기 때문에 업이 생겨나지 않는다. 업이 생겨나지 않기 때문에 과거의 두 원인이 없다. 두 원인이 없기 때문에 현재의 다섯 결과가 생겨나지 않는다. 다섯 결과가 생겨나지 않기 때문에 애愛와 취取와 유有의 세 원인이 생겨나지 않는다. 세 원인이 생겨나지 않기 때문에 미래의 두 과보가 생겨나지 않는다. (이를) 십이인연의 큰 나무를 끊고 십이인연의 큰 강을 말리는 것이라고 이름한다. 이 십이인연이 없는 것을 이름하여 열반이라 하고, 이 스스로 깨달은 성인의 지혜를 이름하여 보리菩提라고 한다.

진수기
『진기』에 이른다. ‘위대한 성인이 중생을 섭수하여 이理에 계합하고 사事를 버리게 하려는 것이다’ 등이란, 이것은 동교의 뜻을 기준으로 하여 말한 것이다. 첫째, ‘과보의 상(報相)’이란 여래장이 물듦(染)과 화합하여 명색의 과보를 이루는 것이니, 큰 바다의 물이 바람으로 인하여 파도를 이루는 것과 같다. 둘째, ‘저것으로 인한 상(彼因相)’이란 일으켜진 명색이 곧 여래장진식인 것이니, 일으켜진 파도가 곧 물인 것과 같다. 셋째, ‘저것의 과보가 차례를 이루는 상(彼果次第相)’이란, 저 일으켜진 결과가 다른 것이 없고 오직 하나의 진심이 돌고 돈 것이니, 차이나서 구별되는 파도 파도가 오직 하나의 바닷물이 돌고 돈 것인 것과 같다. ‘이 중에는 나(我)와 나의 것(我所)을 여의었으며’란, 오직 하나의 진심의 체體이고 다른 것이 없으니 무엇이 나이고 무엇이 나의 것이겠는가? ‘중생의 품수가 아님’은 마치 흐르는 물이 항상 흘러 끊이지 않아 싫어하여 버리는 때가 없으니 생각이 없음을 말미암은 까닭인 것과 같다.

006_0816_c_01L覺則不生故覺是無明對治此覺
006_0816_c_02L現在無明不得在心以無無明故
006_0816_c_03L一切妄想煩惱不生煩惱不生故
006_0816_c_04L業不生業不生故無過去二因
006_0816_c_05L無二因故現在五果不生五果不
006_0816_c_06L生故愛取有三因不生三因不生
006_0816_c_07L未來二報不生名斷十二因緣
006_0816_c_08L大樹涸十二因緣大河此十二因
006_0816_c_09L緣無處名爲涅槃此自覺聖智
006_0816_c_10L名爲菩提

006_0816_c_11L
眞記云大聖攝生欲令契理捨事等
006_0816_c_12L此約同敎義云也一報相者
006_0816_c_13L來藏與染和合成名色報如大海水
006_0816_c_14L第下之一第一四張 因風成波也
006_0816_c_15L彼因相者所起名色即是如來藏眞
006_0816_c_16L如所起波即是水也三彼果次
006_0816_c_17L3)弟相者彼所起果無有餘物唯一
006_0816_c_18L眞心之所廻轉如差別波波唯一海
006_0816_c_19L水所廻轉也此中離我我所者
006_0816_c_20L一眞心之體無有餘物何者是我
006_0816_c_21L何是我所乎非衆生數者猶如流水
006_0816_c_22L恒流不絕無猒捨時由無念故也
006_0816_c_23L「免」作「兌」又脚註曰兌疑脫字耶{乙}▣▣
006_0816_c_24L▣字體磨滅{底}ㆍ作「內外中」{乙}
「弟」作「第」
006_0816_c_25L{乙}次同

006_0817_a_01L중생도 또한 그러하여 생사에 흐르고 굴러서 끊고 그만두는 이가 없는 것은 다만 자체가 무아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이런 까닭에 중생의 품수가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아려야식은 미세하고’란 아려야식은 곧 여래장이기 때문이다. ‘곧 참된 본성을 이룸’이란, 삼승을 기준으로 하여 말하면 여래장의 참된 본성이다. 일승을 기준으로 하여 말하면 매우 깊은 진성이다. 아래에서 이르기를, “이 뜻이 삼승에 있으나 또한 일승에도 통한다.”라고 한 까닭이다.

고기

‘고기’에 이른다. 신림 대덕이 당唐에 들어가 융순 화상을 만나서 물었다. “일승에서 아려야식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융순 화상이 말하였다. “일체 모든 법이 다 아려야식으로 근본을 삼으니 넓게는 한량없지만 간략하게는 다섯 가지가 있다. 말하자면 첫째는 희고 청정한 무기식(白淨無記識)이니 삼성三性61)의 종자를 지닌다. 둘째는 아마라식阿摩羅識62)이니 갠지스강의 모래와 같이 (수많은) 덕을 지닌다. 셋째는 성기식性起識이니 열 보법을 지닌다. 넷째는 법계안립식法界安立識이니 세 가지 세간63)의 법을 지닌다. 다섯째는 법계인다라식法界因陀羅識이니 다함없는 인드라 다라니의 법을 지닌다. (이 다섯이) 온전한 법계의 유위이며 온전한 법계의 무위이다. 따라서 ‘아려야식이 선善 등의 삼성과 무위가 함께 모여 일어난 것이다’64)라고 한 것이다.”

법융기
『법기』에 이른다. ‘이른바 인연이 나뉘어 차례가 있음’에서 ‘인연’은 중생의 12지인연이다. ‘있음(有)’은 세 존재(三有)65)이다. ‘나뉘어(分)’는 12지의 구별이다. ‘차례(次第)’는 처음 무명지에서 마지막 노사지까지이다.
‘한마음(一心)에 포섭된다’에서 한마음은 포섭의 주체(能攝)이고, 포섭의 대상(所攝)은 십이인연이다.
‘자상과 업으로 이룬다’란 다른 삿된 원인을 가려내고 자신의 불법 가운데 먼 연緣은 가려내지 않는 것이다. 앞의 문에서 십이인연이 한마음이 지은 것이라고 하니,

006_0817_a_01L衆生亦尒流轉生死無斷絕者只由
006_0817_a_02L自體無我故尒是故云非衆生數也
006_0817_a_03L黎耶微細者黎耶即如來藏故也
006_0817_a_04L成實性者約三乘云如來藏實性也
006_0817_a_05L約一乘云甚深眞性也下云此義在
006_0817_a_06L三乘亦通一乘故也

006_0817_a_07L
古記云林德入唐得逢融順和尙
006_0817_a_08L問云一乘中言黎耶者何耶順曰
006_0817_a_09L一切諸法皆以黎耶爲本廣則無
006_0817_a_10L略則有五謂一白淨無記識
006_0817_a_11L持三性種二阿摩羅識持恒沙德
006_0817_a_12L三性起識持十普法四法界安立
006_0817_a_13L持三種世間法五法界因陁羅
006_0817_a_14L持無盡因陁羅尼法全法界之
006_0817_a_15L有爲全法界之無爲故云黎耶
006_0817_a_16L共善等三性及無爲集起

006_0817_a_17L
法記云所謂因緣有分次*弟者
006_0817_a_18L緣者生十二支因緣也有者三有
006_0817_a_19L分者十二支別也次*弟者
006_0817_a_20L無明支乃至最後老死支也一心所
006_0817_a_21L攝者第下之一第一五張 一心是能攝
006_0817_a_22L所攝是十二因緣也自業成者
006_0817_a_23L簡他邪因不簡自佛法中踈緣義也
006_0817_a_24L前門中云十二因緣是一心所作

006_0817_b_01L어떤 이가 의심하여 “오직 한마음이 짓는다면 연緣을 기다리지 않는 것인가?”라고 할까 염려한 까닭에 반드시 업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십이인연을 지음을 밝힌 것이다.

‘서로 버리거나 여의지 않는다’란, 앞의 지支가 뒤의 지支를 여의지 않고 뒤의 지支가 앞의 지支를 여의지 않기 때문이다. 앞의 문(자상과 업으로 이룸)에서는 자신의 원인으로 생겨나는 가운데 증상연이 십이인연을 이루는 뜻을 드러냈으며, 이 관觀에서는 자신의 원인으로 생겨나는 가운데 인연이 십이인연을 이루는 뜻을 드러낸 것이다.
‘세 길(三道)이 끊어지지 않는다’란 세 길을 끊지 않기 때문에 12지가 서로 여의지 않음을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과거와 미래를 관한다’란, 앞의 문에서 세 길을 끊지 않음이 과거의 무명으로 현재의 다섯 결과를 낳고, 현재의 세 원인으로 미래의 노사를 낳는 것임을 밝히기 때문이다.
‘세 괴로움(三苦)이 모인 것이다’란, 삼세의 원인으로 이 세 괴로움을 갖춘 몸을 얻음을 나타낸 것이다. 이 관觀은 원인으로 얻은 결과를 취하여 세운 것이고 생기게 하는 원인을 취한 것은 아니다.
‘인연으로 생긴다’란, 인연은 속제의 의지하는 바이고 생긴다(生)는 생겨난 결과의 법이다. 인연의 가깝고 먼 치우친 힘을 깨뜨리고 온전한 힘으로 결과를 낳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인연의 생함과 멸함에 묶여 있다’란, 속제가 의거하는 바를 증거한 것이다. ‘생함(生)’은 생겨난 결과의 법이고 ‘멸함(滅)’은 곧 인연으로 생겨난 결과의 힘을 여읜다는 뜻이다. ‘묶여 있다(縛)’는 수순하여 묶여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생겨나면 멸滅에 수순하여 묶이고, 멸하면 생生에 수순하여 묶이기 때문이다.
의상 화상이 이르기를, “생은 곁이 없는 생이니 이 생은 곧 생이 없음이다. 멸은 곁이 없는 멸이니 이 멸은 곧 멸이 없음이다. 이 둘의 둘 없음이 만족된 생과 멸이다.”라고 하였다. 멸로써 생을 묶을 때 생은 비록 멸이 아니나 또한 멸을 여의지도 않는다. 비유하면 새끼줄로 두 사람을 묶어 놓으면 비록 서로 여의지 않으나 또한 합하여 하나의 몸이 되는 것도 아닌 것과 같다. 이것은 부분적인 비유이고 원만한 비유는 아니다. 이 가운데 생과 멸은 오늘 사용하는 법이니

006_0817_b_01L恐有疑云唯一心作不待緣耶故明
006_0817_b_02L要由業故作十二因緣也不相捨離
006_0817_b_03L前支不離後支後支不離前支故
006_0817_b_04L前門現自因生中增上緣之成十
006_0817_b_05L二緣義此觀現自因生中因緣之成
006_0817_b_06L十二緣義三道不斷者欲現不斷三
006_0817_b_07L道故十二支不相離也觀先後際者
006_0817_b_08L明前門中不斷三道者以過去無明
006_0817_b_09L生現在五果以現在三因生未來老
006_0817_b_10L死故也三苦集者現其以三際因
006_0817_b_11L得此具足三苦之身此觀取因所得
006_0817_b_12L果以立也不取能生因也因緣生者
006_0817_b_13L因緣是俗諦所依也生是所生果法
006_0817_b_14L破因緣親踈偏力現全力生果義
006_0817_b_15L因緣生滅縛者牒俗諦所依也
006_0817_b_16L生者所生果法也滅者即離因緣
006_0817_b_17L生果之力義也縛者順縛也謂生則
006_0817_b_18L順縛於滅滅則順縛於生故和尙云
006_0817_b_19L生是無側之生此生即無生也滅是
006_0817_b_20L無側之滅此滅即無滅也此二無二
006_0817_b_21L是滿足生滅也以滅縛生時生雖非
006_0817_b_22L滅亦不離滅猶如以繩縛置二人
006_0817_b_23L雖不相離亦非合爲一身此則分喩
006_0817_b_24L非是滿喩也此中生滅則今1) [269]

006_0817_c_01L앞에 나타남을 생으로 삼고 본래 생하지 않음을 멸로 삼는다. 그러므로 멸로 생을 묶으면 멸은 능히 묶는 것이고 생은 묶이는 것이다. 생으로 멸을 묶는 것도 또한 이와 같다. 이 관觀은 앞의 온전한 힘으로 결과를 낳는 뜻을 깨뜨려서 힘도 없고 낳음도 없는 연緣을 도와 결과의 법을 낳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또는 이른다. 마음이 미혹됨이란 세간과 출세간의 마음의 번뇌이다. 세간법에 미혹함을 세간의 마음의 번뇌라고 이름하고 출세간법에 미혹함을 출세간의 마음의 번뇌라고 이름한다. 이와 같이 집착의 대상인 법에 더욱 집착하여 그 이법과 현상에 미혹함을 사람과 법의 두 아我에 대한 집착이라고 이름한다. 이 두 아我에 대한 집착은 앞의 여덟 번째 관觀이 그것을 다스리고 미혹하는 마음은 이 관觀에서 다스린다.

‘있음과 다함을 따르는 관觀’이라는 것은,
무슨 까닭에 이 성기문 중에 앞의 연기문의 힘도 없고 낳음도 없는 연緣이 공空한 결과를 낳는 뜻으로 다스리는 대상을 삼는 것인가?
성기문 중에 공空과 유有가 함께 나타나기 때문에 앞의 문의 치우친 공空의 집착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

‘열 번이 비록 다르나 한가지로 무아를 이룬다’라는 것은, 일승에서는 해인삼매의 체體로 무아를 삼는다.
‘십이인연의 설과 같이, 나머지 연緣으로 생겨난 모든 법도 예에 준하여 알 수 있다’라는 것은, 위에서 법성을 바로 나타냈지만 근기가 깨달음을 얻기 어려운 까닭에 진성이라 고쳐 말하고 연기의 체體를 가리켜 장차 습득하게 하고자 한 것이다. 또 중생의 12지를 기준으로 하여 열 번의 관觀으로써 그것을 가리켜 보였기 때문에 다른 일체법 또한 그렇게 관觀한다. 이와 같이 가르쳐 보이기 때문에 ‘예에 준하여 알 수 있다’라고 한 것이다.

진수기
『진기』에 이른다. ‘만약 별교일승을 기준으로 하면, 간략히 열 가지 문을 설한다’란 (다음과 같다.) 앞에서 『십지경론』을 인용하여 이르기를, “세제世諦를 따라 관觀하여 곧 제일의제第一義諦에 들어간다.”66)라고 한 것은, 동교이다.

006_0817_c_01L用之法現前爲生以本不生爲滅也
006_0817_c_02L是故以滅縛生滅是能縛生是所縛
006_0817_c_03L以生縛滅亦如是也此觀破前全力
006_0817_c_04L生果之義第下之一第一六張 以現資
006_0817_c_05L於無力無生之緣生果法義也又云
006_0817_c_06L心惑者世出世間心煩惱也迷世間
006_0817_c_07L名爲世間心煩惱也迷出世法
006_0817_c_08L名出世間心煩惱也如是增執於所
006_0817_c_09L執法迷其理事名爲人法二我執也
006_0817_c_10L此二我執前*弟八觀治之能迷之
006_0817_c_11L於此觀中治也隨順有盡觀者
006_0817_c_12L何故此性起門中以前緣起門無
006_0817_c_13L力無生之緣生空果之義爲所治耶
006_0817_c_14L性起門中空有並現故能治於前
006_0817_c_15L門偏空之執也十番雖別而同成無
006_0817_c_16L我者一乘中以海印體爲無我也
006_0817_c_17L如十二因說餘緣生諸法准例可解
006_0817_c_18L上來直現法性而機難得訂故
006_0817_c_19L改云眞性指緣起體將欲令習且約
006_0817_c_20L衆生十二支以十番觀而指示之故
006_0817_c_21L餘一切法亦爾觀也如是敎誨故
006_0817_c_22L云准例可解也

006_0817_c_23L
眞記云若約別敎一乘略說十門者
006_0817_c_24L前引論云隨順觀世諦即入*弟一義
006_0817_c_25L「日」作「曰」{乙}

006_0818_a_01L지금 열 번의 뜻을 바로 변별하기 때문에 ‘만약 별교일승을 기준으로 하면’ 등이라고 한 것이다. 만약 열 번으로 첫째 무명지를 관하면 삼세간을 갖추어 첫째 무명지의 체體를 이루기 때문에 허물과 근심을 움직이지 않음이 곧 성性이 중도에 있는 법이다. 첫째 무명지와 같아서 내지 노사 등도 다 또한 이러하다.

관하는 바(所觀)가 이와 같다면 능히 관함(能觀)은 어떠한가?
능히 관함도 또한 그러하다. 처음 하나의 ‘인연이 나뉘어 (차례가) 있음’ 가운데 나머지 아홉을 갖추어 거두고 나머지 아홉 또한 그러하다. 그러나 비록 각각 나머지 아홉을 거두나 처음은 나뉘어 차례가 있음을 관하고, 둘째는 열 가지의 성기심(十種性起心)67)을 관하고, 내지 여덟째는 인연, 아홉째는 연기, 열째는 성기(를 관하니) 이와 같이 문을 달리 하는 것이다.
『영락경』의 열 번68)이 『화엄경』의 열 번과 어떻게 다른가?
『영락경』의 열 번은 하나의 법계의 체體를 그린 것이고, 이 경의 열 번은 다함없는 법계를 그린 것이다. 그러므로 ‘가르침에 따라서 차별되어 같지 않다’라고 한 것이다.

대기
『대기』에 이른다. 진정 대덕은 열 번에 대해 세 가지 생멸로 풀이한다. 말하자면 앞의 일곱은 변계의 생멸이고, 여덟 번째는 인연의 생멸이며, 뒤의 둘은 도리의 생멸이다.
신림 대덕은 네 가지 생멸로 풀이한다. 말하자면 앞은 인연의 생멸이고, 아홉 번째는 연기의 생멸이며, 열 번째는 성기의 생멸이고, 유정有情의 견해를 뛰어넘은 자리는 머무름 없는 생멸이다.

표훈 대덕은 다섯 가지 생멸로 풀이한다. 말하자면 중간의 다섯 관觀은 변계의 생멸이고, 여덟 번째는 인연의 생멸이며, 아홉 번째는 연기의 생멸이고, 열 번째는 성기의 생멸이며, 처음 두 관觀은 머무름 없는 생멸이다. 지금 표훈 대덕의 뜻에 의거하여 풀이하면, 머무름 없는 생멸 가운데 두 번째 관觀의 후반69)은 머무름 없음의 체體이고,

006_0818_a_01L諦者是同敎也今直辨十番意故
006_0818_a_02L云若約別敎一乘等也若以十番觀
006_0818_a_03L一無明支則具三世間成一無明支
006_0818_a_04L體故不動過患即是性在中道之法
006_0818_a_05L如一無明乃至老死等皆亦爾也
006_0818_a_06L所觀如是能觀云何能觀亦爾
006_0818_a_07L初一因緣有分中具攝餘九餘九亦
006_0818_a_08L爾也然雖各攝餘九而初則觀有分
006_0818_a_09L1)二則觀十種性起心乃至八
006_0818_a_10L因緣九緣起十性起如是爲門別也
006_0818_a_11L第下之一第一七張瓔珞經十番
006_0818_a_12L與花嚴經十番何別耶瓔珞經十
006_0818_a_13L畫於一法界體此經十番則畫
006_0818_a_14L於無盡法界故云准敎差別不同也
006_0818_a_15L大記云眞定德於十番中以三生滅
006_0818_a_16L釋也謂前七遍計生滅 *弟八因緣
006_0818_a_17L生滅後二道理生滅也林德以四生
006_0818_a_18L滅釋也謂前因緣生滅 *弟九緣起
006_0818_a_19L生滅*弟十性起生滅越情見處無
006_0818_a_20L住生滅也訓德以五生滅釋也謂中
006_0818_a_21L間五觀則遍計生滅 *弟八因緣生
006_0818_a_22L *弟九緣起生滅 *弟十性起生滅
006_0818_a_23L初二觀無住生滅也今依訓德之意
006_0818_a_24L則無住生滅中 *弟二觀後半

006_0818_b_01L첫 번째 관觀과 두 번째 관觀의 처음 반은 머무름 없음의 지위이다. 그 십이인연의 모습 등으로 머무름 없는 별교 가운데 22위70)를 삼기 때문이다.

청량소

청량의 제6지 주석에 이른다.71) 지금 경문에서 간략히 열 가지 거듭을 나타내어 체성(性)과 모습(相)을 궁구하여서 다함없음을 나타내니, 오직 지위에 기대어 이승과 같은 것은 아니다. 열 가지 거듭이라고 말한 것은, 첫째는 존재(有)의 지支가 서로 이어짐이고, 둘째는 한마음에 포섭되어 돌아감이고, 셋째는 자상과 업으로 도와 이룸이고, 넷째는 서로 버리거나 여의지 않음이고, 다섯째는 세 길이 끊어지지 않음이고, 여섯째는 삼세에 윤회함이고, 일곱째는 세 괴로움이 모여 이룸이고, 여덟째는 인연으로 생함과 멸함이고, 아홉째는 생함과 멸함에 얽혀 묶임이고, 열째는 있지 않음과 다함에 수순함이다. 각기 거스름과 수순함이 있으므로 곧 스물을 이룬다. 그러므로 아래의 경에서 이르기를, “이와 같이 거스름과 수순함으로 관찰한다.”72)라고 한 것이다. 거스르면 연이 멸하고, 수순하면 연이 생겨난다. 운운.

연기에 대해 세 가지 관觀을 논하면, 첫째는 모습(相)과 진리(諦)로 차별하는 관觀이고, 둘째는 대비大悲로 수순하는 관觀이며, 셋째는 일체의 모습(相)에 대한 지혜의 관觀이다. 첫째는 다만 두 진리(二諦)를 관觀하여 유위에 나(我)가 있지 않기 때문에 곧 대비를 으뜸으로 하는 관이다. 둘째는 대비가 중생(物)을 따라 늘어나니 곧 대비가 증상하는 관이다. 셋째는 곧 인연의 체성과 모습의 모든 문을 자세히 다 궁구하는 관이기 때문에 곧 대비가 만족된 관이다.73) 처음 하나는 아래로 이승의 일체지와 같고, 다음 하나는 보살도의 모습에 대한 지혜를 스스로 나타내며, 마지막은 곧 위로 모든 부처님의 일체종지一切種智와 같다.

따라서 『열반경』에 이르기를, “십이인연을 하열한 지혜(下智)로 관하기 때문에 성문의 보리를 얻고, 중간의 지혜(中智)로 관하기 때문에 연각의 보리를 얻으며, 뛰어난 지혜(上智)로 관하기 때문에 보살의 보리를 얻고, 가장 뛰어난 지혜(上上智)로 관하기 때문에 부처님의 보리를 얻는다.”74)라고 한 것이다.

006_0818_b_01L無住體初觀及*弟二觀初半是無
006_0818_b_02L住位也以其十二緣相等爲無住
006_0818_b_03L別敎中二十二位故也

006_0818_b_04L
淸凉*弟六地䟽云今經文內
006_0818_b_05L現十重窮究性相以現無盡
006_0818_b_06L唯寄位同於二乘言十重者一有
006_0818_b_07L支相續二攝歸一心三自業助成
006_0818_b_08L四不相捨離五三道不斷六三際
006_0818_b_09L輪廻七三苦集成八因緣生滅
006_0818_b_10L九生滅繫縛十隨順無所有盡
006_0818_b_11L有逆順即成二十故下經 [179]
006_0818_b_12L是逆順觀察逆則緣滅順則緣生
006_0818_b_13L云云 於緣起論三觀者一相諦
006_0818_b_14L差別觀二大悲隨順觀三一切相
006_0818_b_15L智觀初但觀二諦有爲無有我故
006_0818_b_16L即大悲爲首觀也二悲隨物增即
006_0818_b_17L大悲增上觀三即委悉窮究因緣
006_0818_b_18L性相諸門觀故 第下之一第一八張
006_0818_b_19L即大悲滿足觀初一下同二乘一
006_0818_b_20L切智也次一自現菩薩道相智
006_0818_b_21L即上同諸佛一切種智故涅槃云
006_0818_b_22L十二因緣下智觀故得聲聞菩提
006_0818_b_23L中智觀故得緣覺菩提上智觀故
006_0818_b_24L得菩薩菩提上上智觀故得佛菩

006_0818_c_01L처음 두 보리는 곧 첫째 관觀의 뜻이고, 나머지 두 (보리)는 각각 하나씩이니 알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는 중생을 위함을 기준으로 하여 셋 모두 ‘대비’라고 일컬었으며75) 지금은 관觀하는 마음을 기준으로 하니 셋 모두 지혜의 관觀이다.76) 이로써 세 구절에 각각 대비와 지혜가 서로 인도함이 있음을 안다. 이 세 관을 원융하게 함이 오직 한마음에 있으니, 매우 깊은 지혜(般若)가 이에 나타난다.

화엄경탐현기77)

『탐현기』에 이른다.78) 무엇이 열 가지 관觀인가? 첫째는 인연이 나뉘어 차례가 있음이고 운운. 열째는 있지 않음과 다함에 수순함이다. 그중에 각각 따르는 관觀과 거스르는 관觀이 있기 때문에 스무 문이 있다. 말하자면 따르는 관觀은 대비大悲이니 열반에 머무르지 않고, 거스르는 관觀은 대지大智이니 생사에 머무르지 않는 까닭에 머무르지 않는 도道라고 이름한다. 운운.

첫째, 인연이 나뉘어 차례가 있음 가운데 존재(有)의 지支가 무아無我임을 바로 나타낸다. 그중에 두 가지가 있다. 처음은 나(我)가 있다고 거꾸로 집착하여 망령되이 인연을 일으키는 분위를 밝힌다. 두 번째는 모든 진리의 이법에 미혹하여 인연을 일으키는 차례를 밝힌다. 처음 가운데 셋이 있다. 첫째는 무아를 변별하여 정하는 것이고, 둘째는 미혹하여 연기를 이루는 것이고, 셋째는 운운.79) 첫째 가운데 두 구절80)에서 첫째에 “세간에서 몸 받음은 모두 나에 집착함을 말미암은 까닭이다.”라고 한 것은, 미혹된 생각(惑情)을 반대로 들어 나(我)가 이법이 아님을 밝힌 것이다. 만약 나에게 이법이 있다면 나에 집착함은 이법에 따르는 것이라 마땅히 세간을 벗어나야 할 것이나, 이미 세간에 태어났으니 나(我)가 이법이 아님을 밝혔다. 둘째에 “만약 나에 집착함을 여의면 곧 태어남이 없다.”라는 것은, 이해하는 마음을 따라서 들어 이법이 나가 아님을 밝힌 것이다. 만약 이법에 나가 있다면 나를 여읨은 이법을 위배하는 것이라 마땅히 세간에 태어나야 할 것이나 이미 세간을 벗어났으니 이법이 무아임을 밝혔다. 두 번째는 이 무아에 미혹하여 저 존재(有)의 지支를 일으킴을 밝힌 것이다. 그중에 먼저 연기를 따라서 관觀하고 나중에 무아를 거꾸로 관觀한다. 운운.

둘째, 한마음에 포섭된 바에서 “삼계가 허망하여 오직 한마음이 지은 것이다.”81)라고 설한

006_0818_c_01L初二菩提即初觀意餘二各
006_0818_c_02L可知前約爲物三皆稱悲
006_0818_c_03L約觀心三皆智觀是知三句各有
006_0818_c_04L悲智相導融此三觀唯在一心
006_0818_c_05L深般若於是而現探玄云何者
006_0818_c_06L十觀一因緣分次*弟云云 十隨順
006_0818_c_07L無所有盡於中各有順觀逆觀故
006_0818_c_08L有二十門也謂順觀大悲不住涅
006_0818_c_09L逆觀大智不住生死故名不
006_0818_c_10L住道云云 一因緣分次*弟中
006_0818_c_11L現有支無我於中有二初明倒
006_0818_c_12L執有我妄起緣分二明迷諸諦理
006_0818_c_13L起緣次*弟初中有三一辨定無
006_0818_c_14L二迷成緣起云云 初中二
006_0818_c_15L初言世間受身皆由2) [270] 我者
006_0818_c_16L反擧惑情明我非理若我理有
006_0818_c_17L*着我順理應得出世旣生世間
006_0818_c_18L明我非理二若離*着我即無生
006_0818_c_19L順擧解心明理非我若理有
006_0818_c_20L離我違理應生世間旣得出世
006_0818_c_21L明理無我 [180] 明迷此無我起彼有
006_0818_c_22L於中先順觀緣起後逆觀無我
006_0818_c_23L云云 二一心所攝中言三界虛妄
006_0818_c_24L「弟」作「第」{乙}次同「着」作「著」{乙}次同

006_0819_a_01L이 한 경문을 여러 논이 함께 인용하여 유식을 이룸을 증명하였다. 지금 이 설한 바는 어떠한 것들이 ‘마음’이고 무엇을 ‘지은 것’이라고 이름하는가? 이제 이 뜻을 해석한다. 여러 훌륭한 가르침에 의거하여 여러 문이 있음을 설한다. 첫째는 상분相分과 견분見分82)이 함께 있기 때문에 유식이라고 설한다. 둘째는 상분을 거두어 견분에 돌아가기 때문에 유식이라고 설한다. 셋째는 심소(數)를 거두어 심왕(王)으로 돌아간다. 운운. 넷째는 지말로써 근본으로 돌아간다. 다섯째는 모습을 거두어 체성에 돌아간다. 여섯째는 진실(眞)을 굴려서 현상(事)을 이룬다. 일곱째는 이법과 현상을 함께 융섭한다. 여덟째는 현상을 융섭하여 상입한다. 아홉째는 전체의 현상이 상즉한다. 열째는 인드라그물의 걸림 없음이다. 그중에 처음 셋은 초교를 기준으로 하여 설한 것이고, 다음 넷은 종교와 돈교를 기준으로 하여 설한 것이며, 뒤의 셋은 원교 중 별교를 기준으로 하여 설한 것이다. 전부 열 문을 갖춘 것은 동교를 기준으로 하여 설한 것이다. 운운.

셋째, 자상과 업으로 도와 이룸에서, 이 12지가 모두 두 뜻이 있다. 첫째는 자신의 행상을 밝히는 것이고, 둘째는 뒤의 작용을 도와 이루는 것이다. 말하자면 연緣 가운데 어리석음과 미혹은 무명의 자상이고, 행行에 원인을 지어 주는 것은 도와 이루는 업이다.

넷째, 서로 버리거나 여의지 않음에서, 앞은 뒤를 능히 일으키고 뒤를 여의고는 앞이 없으며, 뒤는 앞에 의지해서 일어나니 앞을 여의고는 뒤가 없다. 서로 여의지 않기 때문에 각각 자성이 없고, 자성이 없이 연기하니 환상(幻)이 앞에 나타나는 것과 같다.

다섯째, 세 길이 끊어지지 않음이란 정의보살淨意菩薩의 『십이인연론』83)에서 이르는 바와 같다.

번뇌는 첫째와 여덟째와 아홉째이고, 업은 둘째와 열째이며,
나머지 일곱은 괴로움이라 설하니, 셋이 열두 법을 거둔다.
세 (번뇌)를 따라서 두 (업)을 낳고,
두 (업)을 따라서 일곱 (괴로움)을 낳으며
일곱 (괴로움)을 따라서 다시 세 (번뇌)를 낳으니,
그러므로 바퀴가 도는 것과 같다.
일체의 세간법은 오직 인과일 뿐 중생(人)은 없으니,
다만 공한 법을 따라서 다시 공한 법을 낳는다.

풀이하면 이것은 세 길이 서로 낳음을 변별하여 두 무아를 나타낸 것이다.

006_0819_a_01L唯一心作此之一文諸論同引
006_0819_a_02L成唯識今此所說是何等心
006_0819_a_03L何名作第下之一第一九張 今釋此
006_0819_a_04L依諸聖敎說有多門一相見
006_0819_a_05L俱存故說唯識二攝相歸見故說
006_0819_a_06L唯識三攝數歸王云云 四以末歸
006_0819_a_07L五攝相歸性六轉眞成事
006_0819_a_08L理事俱融八融事相入九全事相
006_0819_a_09L十帝網無㝵於中初三約初
006_0819_a_10L敎說次四約終頓說後三約圓敎
006_0819_a_11L中別敎說摠具十門約同敎說
006_0819_a_12L云云 三自業助成中此十二支
006_0819_a_13L皆有二義一明自行相二助成後
006_0819_a_14L謂緣中癡惑是無明自相與行
006_0819_a_15L作因是助成業四不相捨離中
006_0819_a_16L前能起後離後無前後依前起
006_0819_a_17L離前無後不相離故各無自性
006_0819_a_18L無性緣起如幻現前五三道不斷
006_0819_a_19L如淨意菩薩十二緣論云煩惱
006_0819_a_20L初八九業二及與十餘七說爲苦
006_0819_a_21L三攝十二盡 [181] 從三故生二從二故
006_0819_a_22L生七從七復生三是故如輪轉
006_0819_a_23L一切世間法唯因果無人但從於 [182]
006_0819_a_24L空法 [183] 生於空法解云此辨三道

006_0819_b_01L
여섯째, 먼저(先際)와 나중(後際)을 분별함 중에서, 이 12지의 처음 둘은 능인能引이고 다음 다섯은 소인所引이며 다음 셋은 능생能生이고 마지막 둘은 소생所生이다.84) 운운. (그중에 삼세를 분별함에 여러 훌륭한 가르침 중에 간략히 세 가지 설이 있다.)85) 첫째는 이 경에 의거하여 능인과 소인을 열어서 먼저와 중간을 구분하고, 능생과 소생을 합하여 통틀어 나중으로 삼는다. 이끎(引)은 멀기 때문에 열고, 낳음(生)은 가깝기 때문에 합한 것이다.

일곱째, 세 괴로움을 분별함에 두 문이 있다. 첫째는 이법과 실제로서 두루 통하는 문이다. 운운. 둘째는 모습에 따라서 더하여 나타나는 문이다. 이 경에서 설한 것과 같다. 말하자면 처음 다섯 지支는 옮겨 흐르는 모습이 나타나기 때문에 행고行苦라 일컫는다. 촉觸과 수受 두 가지는 접촉하여 상대해서 괴로움을 낳기 때문에 고고苦苦라고 한다. 나머지가 괴고壞苦가 된다는 것은 단지 즐거움이 무너지는 것을 괴고라고 이름할 뿐이다. 노사老死의 지支는 이미 무너질 즐거움이 없는데 어째서 괴고라고 이름하는가? 해석하면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즐거움이 무너지는 것을 괴로움으로 삼는 것이니 무너지는 바를 바라보아 설한 것이다. 둘째는 무너짐이 괴로움이기 때문에 괴고라고 한다. 이 노사의 지支가 능히 삶(生)을 무너뜨리기 때문에 괴고에 속한다.

여덟째, 인연으로 생김에서, 이법상 실제로 무명이 행行을 바라봄에 인연의 뜻이 없으나, 인연으로 행行을 낳는다고 말하는 것86)은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행行) 자신의 종자가 인因이 되고 무명이 연緣이 되어 합하여 설하기 때문에 인연이라고 하지만, 그러나 저 가까운 (인因) 종자를 숨기고 이 수승한 연緣을 드러내기 때문에 무명의 인연이라고 하는 것이다. 둘째는 다만 저 (무명의) 증상연으로 (행行) 자신의 증상과를 바라보면 도리어 가까운 인因이 되기 때문에 무명이 행行의 인연이 된다고 설한 것이다. 나머지 또한 이와 같다. 결과는 스스로 일어나지 않고 반드시 인연을 따라야 함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인연의 나타남을 빼앗아 다시 각각 본성이 없으니 이런 까닭에 인연으로 생김이 곧 생김이 없음을 나타낸다고 말한다. 이것은 순관과 같다.

006_0819_b_01L相生現二無我六分別先後際
006_0819_b_02L此十二支初二是能引次五
006_0819_b_03L是所引次三是能生後二是所生
006_0819_b_04L云云 一依此經開能所引分先際
006_0819_b_05L中際合能所生摠爲後際以引遠
006_0819_b_06L故開之生近故合也七三苦分別
006_0819_b_07L有二門一理實遍通門云云
006_0819_b_08L隨相增現門如此經說謂初五支
006_0819_b_09L迁流相現故稱行苦觸受二種
006_0819_b_10L對生苦第下之一第二○張 故云苦
006_0819_b_11L餘爲壞苦者但壞樂名壞苦
006_0819_b_12L老死支旣無樂可壞何故名壞苦
006_0819_b_13L釋有二一樂壞爲苦望所壞
006_0819_b_14L二以壞是苦故云壞苦此老
006_0819_b_15L1) [271] [184] 能壞生故屬壞苦也八因
006_0819_b_16L緣生中理實無明望行無因緣義
006_0819_b_17L而言因緣生行者有二義一自種
006_0819_b_18L爲因無明爲緣合說故云因緣
006_0819_b_19L然隱彼親種現此勝緣故云無明
006_0819_b_20L因緣也二但彼增上緣望自增上
006_0819_b_21L還是親因故說無明爲行因緣
006_0819_b_22L餘亦如是欲明果不自起要從因
006_0819_b_23L因緣形奪復各無性是故言
006_0819_b_24L因緣生乃現無生此猶順觀逆觀

006_0819_c_01L역관은 한결같이 없어짐으로서 생김과 생기지 않음이 아니니 알 수 있을 것이다. 운운.
이 깊은 관(深觀)87) 중에서 뒤의 세 문(三門)88)을 거두어, 합해서 네 구를 이룬다. 첫째는 스스로 생겨나지 않음이고, 둘째는 남에게서 생겨나지 않음이고, 셋째는 함께함에서 생겨나지 않음이고, 넷째는 원인 없이 생겨나지 않음이다.

이 네 구를 해석함에 여러 논이 같지 않으나 간략히 다섯 가지 설이 있다.
첫 번째는 외도를 깨뜨리는 것을 기준으로 하는 해석이다. 말하자면 모든 법은 그윽한 진리인 자성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스스로 생겨나지 않음이라고 한다. 둘째는 범천이나 자재천 등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남에게서 생겨나지 않음이라고 한다. 셋째는 또한 미세한 티끌과 같은 사대종四大種의 화합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함께함에서 생겨나지 않음이라고 한다. 넷째는 또한 원인 없이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원인 없이 생겨나지 않음이라고 한다.

두 번째는 이승을 깨뜨리는 것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다. 첫째는 말하자면 모든 법이 결정코 자신의 동류인同類因89)으로부터 생겨나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생겨나지 않음이라고 한다. 둘째는 결정코 이숙인異熟因90)으로부터 생겨나지 않기 때문에 남에게서 생겨나지 않음이라고 한다. 셋째는 또한 저 구유인俱有因91)에서 생겨나지 않기 때문에 함께함에서 생겨나지 않음이라고 한다. 넷째는 소승 가운데 무명지 앞에 바르지 않은 생각이 허공에 의탁하여 일어나는 것을 허용하여92) 원인이 없는 것 같으나, 이제는 또한 그렇지 않기 때문에 원인이 없음을 여읜다.

세 번째는 법을 기준으로 해서 공空을 나타내는 것이다. 첫째는 결과가 스스로 일어나지 않음을 스스로 생겨나지 않음이라고 이름한다. 둘째는 자신을 이미 세우지 않았는데 무엇을 대하여 남을 변별할 것인가? 또 남 또한 각자가 모두 자신을 이루지 않는데 어떻게 남에게서 생겨난다고 하는가? 따라서 남에게서 생겨나지 않음이라고 한다. 셋째는 자신과 남의 인과가 이미 각각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자신과 남이) 함께 함에서 생겨나지 않음이라고 한다. 넷째는 인연을 여읜 밖에 다른 결과의 법이 없기 때문에 원인 없이 생겨나지 않음이라고 한다. 이상의 세 거듭은 『반야등론』93)과 『중론』94) 등에서 설한 것과 같다.

네 번째는 인연의 나타남을 빼앗는 것을 기준으로 한다.

006_0819_c_01L一泯非生不生可知云云 此深觀
006_0819_c_02L攝後三門合成四句一不自生
006_0819_c_03L二不他生三不共生四不無因生
006_0819_c_04L釋此四句諸論不同略有五說
006_0819_c_05L一約破外道釋謂諸法不從冥諦
006_0819_c_06L自性生故云不自生二不從梵天
006_0819_c_07L自在天等生故云不他生三亦非
006_0819_c_08L微塵大種和合生故云不共生
006_0819_c_09L亦非無因自然而起故云不無因
006_0819_c_10L二約破二乘一謂諸法不定
006_0819_c_11L從自同類因生故云不自生二不
006_0819_c_12L定從異熟因生故云不他生三又
006_0819_c_13L亦非彼俱有因生故云不共生
006_0819_c_14L四小乘中許無明支前不正思惟
006_0819_c_15L托虛而起似若無因今亦不尒
006_0819_c_16L故離無因第下之一第二一張
006_0819_c_17L法現空一果不自起名不自生
006_0819_c_18L二自旣不立對誰辨他又他亦各
006_0819_c_19L自皆不成自云何他生故云不他
006_0819_c_20L三自他因果旣各不成故云
006_0819_c_21L不共生四離因緣外無別果法
006_0819_c_22L故云不無因生此上三重如般若
006_0819_c_23L燈論及中論等說四約因緣形奪
006_0819_c_24L▣字體磨滅{底}ㆍ作「支」{乙}

006_0820_a_01L『대법론』95)에 이르기를, “자신의 종자가 있기 때문에 남을 따르지 않고 뭇 연을 기다리기 때문에 자신이 짓는 것이 아니다. 작용이 없기 때문에 함께 생겨나지 않고 공능功能이 있기 때문에 원인이 없는 것이 아니다. 무릇 모든 연기에서 둘을 부정하는 두 구절도 이미 매우 심오한데 하물며 모두 부정하는 네 구절이겠는가? 그러므로 연기는 매우 가장 깊이 심오한 것이다.”96)라고 한다.

다섯째는 연기의 걸림 없는 문을 기준으로 한다. 다만 인연이 결과를 낳으나 인연이 서로 바라봄에 각각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온전히 힘이 있는 것이고, 둘째는 온전히 힘이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因이 결과를 바라봄에 온전히 생겨나지 않음이 있고, 연緣에서 반드시 온전히 생겨난다. 그러므로 “인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연에서 생겨나기 때문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둘째는 연緣이 결과를 바라봄에 또한 온전히 생겨나지 않고, 인에서 반드시 생겨난다. 그러므로 “연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인에서 생겨나기 때문이다.”라고 하는 것이다.97) 셋째는 (인과 연의) 두 힘이 함께하지 않기 때문에 (인과 연이) 함께함에서 생겨나지 않는다. 넷째는 두 힘이 없음 또한 함께하지 않기 때문에 원인 없이 생겨나지 않는다.

이 문에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힘(力)에 있음과 있지 않음을 갖춘 뜻에 의거하므로 상입하게 한다. 말하자면 인因이 힘이 있을 때 연緣에는 반드시 힘이 없다. 그러므로 인이 힘이 있음을 말미암은 까닭에 남을 거둘 수 있고, 연에 힘이 없음을 말미암은 까닭에 남에게 들어갈 수 있다. 저 연의 힘을 모아서 모두 인의 힘으로 돌아가게 함을, 남에게서 생겨나지 않음이라고 이름한다. 비록 남에게서 (생겨남이) 아니라고 말하나 반대로 뒤집으면 자신에게서 생겨남을 나타내는 것이다. 인의 힘이 연으로 돌아가 자신에게서 (생겨나지) 않음도 또한 이러하다. 앞을 뒤집어서 생각하라. (인과 연의) 두 힘과 두 힘 없음이 각각 함께하지 않으므로 저것이 상입하지 않음이 없고, 하나의 힘과 하나의 힘 없음이 서로 돌아가기 때문에 항상 상입한다. 서로 장애하지 아니하여 증상연이 넓기 때문에 일체 모든 법이 상입하지 않음이 없다.
「십인품」에 이르기를, “보살이 연기법을 잘 관하여 하나의 법에서 여러 많은 법을 이해하고 여러 많은 법에서 하나의 법을 이해하여 깨닫는다.”98)라고 하니,

006_0820_a_01L對法論云自種有故不從他
006_0820_a_02L衆緣故非自作無作用故不共生
006_0820_a_03L有功能故非無因凡諸緣起
006_0820_a_04L1) [272] [185] 二句已爲甚深 [186] 況摠*亡四句
006_0820_a_05L是故緣起最極甚深五約緣起無
006_0820_a_06L㝵門但因緣生果因緣相望
006_0820_a_07L有二義一全有力二全無力
006_0820_a_08L因望於果有全不生緣必全生
006_0820_a_09L故云因不生緣生故二緣望於果
006_0820_a_10L亦全不生因必生故云緣不生自
006_0820_a_11L因生故三二力不俱故不共生
006_0820_a_12L四二無力亦不俱故不無因生
006_0820_a_13L門有二義一據力具有不有義
006_0820_a_14L令相入謂因有力時緣必無力
006_0820_a_15L是故由因有力故能攝他由緣無
006_0820_a_16L力故能入他會彼緣力摠歸因力
006_0820_a_17L名不他生雖言不他反現自生
006_0820_a_18L因力歸緣不自亦尒反前思之
006_0820_a_19L以二力二無力各不俱故無彼不
006_0820_a_20L相入一力一無力相歸故恒時相
006_0820_a_21L以不相障㝵增上緣寛故
006_0820_a_22L切諸法無不相入2) [273] 品云
006_0820_a_23L薩善觀緣起法於一法中解衆多
006_0820_a_24L衆多法中解了一法第下之

006_0820_b_01L진실로 이 문을 말미암은 까닭이다.
둘째는 체體에 공함과 공하지 않음이 있는 뜻에 의거하므로 상즉이 있다. 말하자면 인의 힘이 연에 돌아가 그 상입함을 밝힐 뿐만 아니라, 또한 인의 체가 연을 말미암아 인의 체성이 공하며 연에 거두어져 같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무엇인가? 말하자면 만약 연이 없으면 곧 인이 없기 때문이다. 결과를 낳는 것을 인이라고 이름하며, 연이 없으면 결과가 생겨나지 않는다. 이때는 인이라고 이름하지 않는다. 이 인이 저 연을 만나 돌아가서 자신에게서 생겨나지 아니함을 분명히 안다. 그러므로 연은 있음의 뜻이니 능히 거두지 않음이 없으며, 인은 공의 뜻이니 거둠을 받지 않음이 없다. 인이 거둠을 받기 때문에 자기를 폐하여 연과 같고, 연이 거두기 때문에 인을 거두어 자기와 같다. 나머지 인이 거두고 연이 받는 등도 아울러 준하여 생각하면 알 것이다. 이 뜻을 말미암은 까닭에 모든 법이 상즉하여 장애되는 바가 없다. 위 경문에서 이르기를, “하나가 곧 많음이고 많음이 곧 하나임을 안다.”99)라고 한 등이 모두 이 뜻이다. 그러므로 다함없는 대연기법의 걸림 없는 자재로움이 모두 이 문으로부터 펼쳐져 나타난 것이다.

아홉째, 인연에 묶여 있음을 설함 가운데, 인연의 생함에 묶여 있음은 말하자면 이 연기가 서로서로 묶여서 머무르니 생함을 얻을 수 없고, 이 묶임 때문에 다시 멸함도 아니다. ‘묶임(縛)’ 한 글자로 이 법의 체體를 도장 찍어서 모든 분별을 여읜다. 그러나 이 연기가 묶여 있음의 모습 또한 여의었기 때문에 말에 기대어 나타낸 것이다. 그러므로 ‘묶여 있음을 설함’이라고 한 것이니, 이 묶여 있음이 다만 설하는 가운데 있음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이 문은 연기법이 현상의 모습을 향하여 다함에 이법의 체성이 장차 나타나는 매우 미묘한 곳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논에서 “세제를 따라 관觀하여 곧 제일의제에 들어간다.”라고 말한 것이 이 문이다.

열째, 있지 않음(無所有)과 다함(盡) 가운데 이 존재(有)의 지支의 허망한 모습이 이미 다함에 있지 않음(無所有)을 수순하여 제일의에 철저히 도달함을 밝힌다.

006_0820_b_01L一第二二張
良由此門故也二據
006_0820_b_02L體有空不空義故有相即謂非直
006_0820_b_03L因力歸緣明其相入亦乃因體
006_0820_b_04L由緣現因性空攝同於緣何者
006_0820_b_05L謂若無緣即無因故以生果名因
006_0820_b_06L無緣果不生是時不名因明知此
006_0820_b_07L因會歸彼緣爲不自生是故緣是
006_0820_b_08L有義無不能攝因是空義無不
006_0820_b_09L受攝因受攝故癈己同緣緣能
006_0820_b_10L攝故攝因同己餘因攝緣受等
006_0820_b_11L並准思知由此義故諸法相即
006_0820_b_12L所障㝵上文云知一即多多即一
006_0820_b_13L皆此義也是故無盡大緣起法
006_0820_b_14L無㝵自在皆從此門而開現矣
006_0820_b_15L因緣縛說中因緣生縛者謂此緣
006_0820_b_16L互相縛住不得是生以是縛故
006_0820_b_17L復非是滅以一縛字印此法體
006_0820_b_18L諸分別然是緣起縛相亦離故
006_0820_b_19L寄言以現故云縛說爲明此縛但
006_0820_b_20L在說中此門現緣起法事相向盡
006_0820_b_21L理性將現極微妙處故論云
006_0820_b_22L順觀世諦即入3)弟一義諦是此
006_0820_b_23L門也十無所有盡中明此有支
006_0820_b_24L虛相旣盡隨順無所有徹到*弟

006_0820_c_01L이것은 세속을 무너뜨리지 않고서 항상 진실임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무명을 인연으로 모든 행이 생겨나니 이것이 있지 않음을 수순하는 것이다.”100)라고 한 것이다.

무명이 행行을 생기게 하는 것은 있음을 수순하는 것인데, 무슨 까닭에 “있지 않음을 수순한다.”라고 설하는 것인가?
앞의 여러 문의 차례를 거쳐 여기에 이르러 저 무명이 바로 행行을 생기게 하는 때에 생겨남이 없음을 따라서 이법에 들어감을 밝히기 때문이다. 운운.

() 무슨 까닭에 경에서는 없음을 따르고 논에서는 있음을 따른다고 이름하는가?
() 경의 뜻을 풀이하면 연緣으로써 이법에 돌아가는 것이고, 논의 뜻을 설하면 체성으로써 모습을 따르는 것이니, 설함이 각각 다른 뜻을 나타내므로 이 말을 한 것이다. 운운.

첫째는 존재의 지支의 나열, 둘째는 한마음에 포섭되어 돌아감, 셋째는 힘과 작용이 서로 낳음, 넷째는 앞과 뒤가 서로 이어짐, 다섯째는 세 길이 바퀴처럼 돌아감, 여섯째는 삼세의 원인과 결과, 일곱째는 세 괴로움의 과실, 여덟째는 인연을 따라 체성이 없음, 아홉째는 있음과 비슷하지만 없음과 같음, 열째는 없어져 같고 평등함이니, 앞의 열 가지에 배대하여 맺으면 문장이 나타내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수현기

『수현기』에 이른다.101) 첫째, 인연이 나뉜 차례에 대한 관觀은, 나(我)라는 견해에 집착함을 다스린다. 운운. 둘째, 한마음에 의지함에 대한 관은 저 바깥 경계가 자성이 (있다고) 집착함을 다스린다. 운운. 셋째, 자신의 인연에 대한 관은 인연을 다르다고 헤아려 집착함을 다스린다. 운운. 넷째, 버리거나 여의지 않음에 대한 관은 원인과 결과가 다른 때라고 헤아림을 다스린다. 다섯째, 세 길에 대한 관은 인연에서 현상을 폐하고 이법을 헤아려 집착함을 다스린다. 여섯째, 삼세에 대한 관은 원인이 없다고 집착함을 다스린다. 일곱째, 세 괴로움에 대한 관은 즐거움과 깨끗함에 집착함을 다스린다.

여덟째, 인연에 대한 관은 단지 원인에 힘이 있어서 결과를 생기게 한다고 (집착함을) 다스린다. 운운. 인연의 생겨남의 이법은 인에는 결정하는 작용이 있고

006_0820_c_01L一義此現不壞俗而恒眞也故云
006_0820_c_02L無明因緣諸行生是隨順無所有
006_0820_c_03L無明生行是順所有何故乃言
006_0820_c_04L順無所有乘前諸門次*弟至
006_0820_c_05L現彼無明正生行時即順無生
006_0820_c_06L入理故也云云 何故經中順無
006_0820_c_07L名順有第下之一第二三張 釋經意
006_0820_c_08L以緣歸理說論意以性從相說各
006_0820_c_09L現別意故作是說云云 一有支行
006_0820_c_10L二攝歸一心三力用相生
006_0820_c_11L前後相屬五三道輪環六三際因
006_0820_c_12L七三苦過失八從因無性
006_0820_c_13L似有若無十泯同平等配結前十
006_0820_c_14L4) [274] [187] 可見

006_0820_c_15L
搜玄云初因緣分次*弟觀治我
006_0820_c_16L見執云云 二依止一心觀治彼外
006_0820_c_17L境自性執云云 三自因觀治異計
006_0820_c_18L因緣執四不捨離觀治因果異時
006_0820_c_19L五三道觀治因緣癈事計理執
006_0820_c_20L六三際觀治無因執七三苦觀
006_0820_c_21L治樂淨執八因緣觀治單因有力
006_0820_c_22L生果云云 因緣生理因有決定用
006_0820_c_23L「亡」作「土」{乙}次同「忍」作「忽」{乙}「弟」
006_0820_c_24L作「第」{乙}次同
「垷」作「現」{乙}

006_0821_a_01L연에는 결과를 일으키는 능력이 있어 비로소 법이 생겨날 수 있다. 만약 다만 인의 힘뿐이고 연이 결과를 일으키는 능력이 없으면 그 인因의 여섯 가지 뜻102)이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운운.
또 소승에 의하면 육인六因ㆍ사연四緣이고, 만약 삼승에 의하면 곧 십인十因103)ㆍ이십인二十因104) 등이다. 만약 일승에 의하면 곧 법에 따라서 인을 변별하니 하나하나의 인연이 이법과 현상에 각각 달라서 법계와 더불어 같다. 지금 여섯 가지 인의 뜻은 오직 일승이라야 능히 끝까지 다하니 이것은 별교를 기준으로 하여 설한 것이다.

아홉째, 인연의 생함과 멸함에 묶여 있음에 대한 관에서, 이 아래 두 관은 다만 마음의 번뇌를 다스리니 공통된 뜻은 알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인과 연이 함께하는 힘으로 결과를 불러일으킨다는 집착이다. 운운. 앞의 인연에서 결과가 생겨남은 생겨남의 뜻이 두드러지고 공의 뜻이 미미하니, 인연법이 생겨남에 수순하여 미혹이 두드러지게 되기 때문이다. 지금 연에 묶여 있는 법은 공의 뜻이 늘어나고 생겨나는 힘의 뜻이 미미하니 연기법이, 생겨남에 대한 분별없는 지혜를 수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래의 경에서 이르기를, “연기의 법이 있음과 없음을 여읜 것이다.”105)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비록 생겨남의 힘이 없으나 공의 뜻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자성으로 생겨남을 여읜다. 경에서 이르기를, “머무름이 없음을 근본으로 한다.”106)라고 하기 때문이다.

열째, 있지 않음과 다함의 관에서 다스리는 대상은 마음의 번뇌에 국한되지만 또한 모든 번뇌를 통섭할 수 있으니 (모든 번뇌가) 속제에 통섭되기 때문이다. (번뇌는) 집착의 인연이 되어 다만 속제에 응하는 모습만 있을 뿐, 자신의 체體인 공空의 뜻은 앞에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장애이다. 운운. 모든 연으로 생겨난 법은 일어나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일어나면 곧 (속제의 모습과 공의 뜻이) 쌍으로 나타난다. 저 목마른 사슴이 신기루의 물을 보면 건조함과 습함이 함께 나타나는 것과 같으며, 또 거울의 영상에 물듦과 깨끗함이 함께 나타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이 바른 이법이다.

그 나타난 공은 진제인가, 속제인가? 또 이 관법은 앞의 인연으로 생겨남(에 대한 관) 및 (인연의) 생함에 묶여 있음(에 대한 관)과는 어떻게 다르게 취해야 하는가?

006_0821_a_01L緣有發果能方得法生若但因力
006_0821_a_02L無緣發果能者其因六義不現在
006_0821_a_03L云云 又依小乘六因四緣若依
006_0821_a_04L三乘即十因二十因等若依一
006_0821_a_05L即隨法辨因1)一一 [275] 因緣理
006_0821_a_06L事各別與法界等今六因義
006_0821_a_07L一乘能窮此約別敎說也九因緣
006_0821_a_08L生滅縛觀此下二觀但治心惑
006_0821_a_09L通義可知謂因緣共力能感果執
006_0821_a_10L云云 前因緣生果生義是增
006_0821_a_11L義是微爲因緣法順生迷增故
006_0821_a_12L今緣縛法空義是增生力義微
006_0821_a_13L爲緣起法順生無分別智故故下
006_0821_a_14L經云緣起之法離有無也此雖
006_0821_a_15L無生力以空義成故離自性生
006_0821_a_16L第下之一第二四張 無住爲本故
006_0821_a_17L十無所有盡觀所治局心惑亦可
006_0821_a_18L通諸使俗諦通攝故爲執因緣
006_0821_a_19L但有應俗相自體空義不現在前
006_0821_a_20L是障也云云 諸緣生法不起
006_0821_a_21L則已起則雙現如彼渴鹿見陽炎
006_0821_a_22L乾濕並彰又如鏡像染淨雙現
006_0821_a_23L此是正理其所現空爲是眞諦
006_0821_a_24L爲是俗諦又此觀法與前緣生及

006_0821_b_01L
인연(으로 생겨남)과 묶여 있음은 오직 있음(有)에 수순함만을 이룬다. 지금의 열째 관은 공空과 유有를 함께 수순한다. 또 이 공과 유는 아울러 속제이다. 무릇 진제와 속제를 밝힘에 여기에는 많은 뜻이 있다. 첫째는 체體와 상相의 상대이고, 둘째는 공과 유有의 상대이다. 이와 같이 진제와 속제를 나눔에 그 뜻이 하나가 아니다. 만약 공과 유로 진제와 속제를 나누면 유는 속제가 되고 공은 진제가 되니 곧 증득한 지혜로 알 바이다. 만약 체와 상으로 상대하면 공과 유를 서로 논할 수 있기 때문에, 만약 이 뜻을 기준으로 하면 속제가 공과 유를 통섭하니, 이 공은 자신의 체가 공한 것이고 현상이 공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논에서 이르기를, “이 심진여의 모습이 마하연의 체를 능히 보여준다.”107)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알라. 비록 진여라는 이름을 얻었으나 속제의 모습이 체는 아니다. 이것은 공과 유가 한가지로 하나의 모습이 되어서 연으로써 본성을 따르니 이법과 현상이 이 관의 체가 된다. 그러므로 위의 경문에서 이르기를, “십이인연으로 생함이 무위이다.”108)라고 한 것이다.

열 가지의 관에도 또한 서로 생겨남의 차례가 있다. 모든 허망함의 허물을 알기 위한 까닭에, 그러므로 첫째가 있다. 이미 허망함을 알지만 허망한 법이 무엇에 의거하여 생겨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둘째가 있다. 의거하는 바 대상을 인식하여 알지만 무슨 이법이 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셋째가 있다. 생겨남의 이법을 이미 알지만 어느 때에 의거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넷째가 있다. 때는 인식하여 알지만 무슨 뜻을 기준으로 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다섯째를 밝히고 있다.

그 뜻을 이미 알지만 무엇이 근본이고 지말인가라 하기 때문에 여섯째가 있다. 근본과 지말을 이미 알지만 어떤 허물이 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일곱째가 있다. 그 허물을 이미 알지만 어떻게 현상에 대하여 이루어지는가라고 하기 때문에 여덟째가 있다. 이루어짐을 이미 알지만 어떠한 모습이 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아홉째가 있다.

006_0821_b_01L以生縛云何取別因緣及縛
006_0821_b_02L成順有2)弟十觀空有俱順
006_0821_b_03L此空有並是俗諦汎明眞俗
006_0821_b_04L有多義一體相相對二空有相對
006_0821_b_05L如此分眞俗其義非一若空有分
006_0821_b_06L眞俗有則爲俗空則爲眞3)
006_0821_b_07L智所知若體相相對空有可以相
006_0821_b_08L論故若約此義俗諦通空有
006_0821_b_09L空是自體空非事空也故論云
006_0821_b_10L是心眞如相能示摩訶衍體故知
006_0821_b_11L雖是眞如得名俗相不是體也
006_0821_b_12L此則空有同爲一相以緣順性
006_0821_b_13L事爲此觀體故上文云十二緣
006_0821_b_14L是無爲也十觀亦有相生次
006_0821_b_15L*弟爲知諸虛妄過故故有*弟一
006_0821_b_16L旣識妄已未知妄法依何得生
006_0821_b_17L有*弟二識知所依未知有何理
006_0821_b_18L有*弟三已知生理未知依何時
006_0821_b_19L故有*弟四識知時已未知約何
006_0821_b_20L故明*弟五知其義已有何
006_0821_b_21L本末故有*弟六知本末已未知
006_0821_b_22L有何過故有*弟七知其過已
006_0821_b_23L何對事成第下之一第二五張 故有
006_0821_b_24L*弟八知成已未知有何相故有

006_0821_c_01L모습을 이미 알지만 의심하여 이법에 어긋난다고 하기 때문에 열째가 있다. 경에 의거한 열 번을 마친다.

추혈기109)

『추혈기錐穴記』에서 열째 관觀에 대해 이른다.110) 이것이 곧 인연이 스스로 여여함에서 다하는 것이다. 이것은 곧 속제가 분별을 여읜 때이다. 이 이후의 곳에서는 곧 처음의 가장 거친 근심과 어리석음과 전도顚倒가 바로 이 매우 깊은 법이다. 하나를 듦에 따라서 일체의 다함없음을 거두니 자재로운 연기법이 바로 열의 수로 나타난 바이며 보법의 연기도리이다.
2. 육문 분별
‘연기라는 한마디 말’부터 ‘분별이 없다는 것’까지111)

대기
『대기』에 이른다. ‘연기라는 한마디 말’로부터 내지 ‘왜 많은 문이 필요한가’ 등에서, 이 질문을 일으킨 뜻은, 처음에 진성을 나타내어 연기의 체體를 보이니 곧 분별이 없는 이법이 이미 드러나 있는데 왜 번거롭게 다시 중문과 즉문 등의 여러 문을 설하는가? 이와 같이 질문한 것이다. 답한다. 맡김과 빼앗음을 갖추었으니112) 글이 나타내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어째서 여섯 번째 문을 풀이하지 않고서 문답하는가?
여섯 번째 문은 위의 뜻을 총괄하여 끝맺은 까닭이며, 다섯 문을 풀이함으로써 그 뜻이 이미 다했기 때문이다. 손을 마쳤다(了手)는 것은 일이 끝났다는 말이다.

법융기
『법기』에 이른다. ‘음욕(婬)과 분노(怒)와 어리석음(癡)의 성품이 곧 보리菩提이다’라는 것은, 옛사람이 이르기를, “다만 물을 써서 물건을 깨끗하게 할 줄만 알고 더러운 물을 깨끗하게 할 줄은 모른다.”라고 하였으니 이 뜻이 무엇인가? 말하자면 마치 물을 깨끗하게 하려고 (바닥의) 돌을 집으면 물은 깨끗해지지 않고, 흙과 돌을 움직이지 않아야 물이 비로소 스스로 깨끗해지는 것과 같다. 자기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것 또한 이와 같아서 만약 세 가지 독의 번뇌를 끊어 없애고자 한다면 마음이 깨끗함을 얻을 수 없다. 세 가지 독을 움직이지 아니하여야 마음이 스스로 청정해진다. 그러므로 무릇 승열 바라문 선지식의 처소에 나아가서 어리석음의 법문을 받음이 곧 편안히 머물러 밝게 비춤을 얻는 것이고,

006_0821_c_01L*弟九知相已疑謂乖理故有*弟
006_0821_c_02L依經十番訖錐穴記*弟十觀
006_0821_c_03L4) [276] [188] 此即因緣 [189] 盡於自如也此即
006_0821_c_04L俗諦 [190] 離分別之際自此去所即是
006_0821_c_05L初最麁愚 [191] 癡顚倒即此甚深法
006_0821_c_06L隨擧一盡攝一切無盡自在緣起法
006_0821_c_07L正十數所現普法緣起道理也

006_0821_c_08L
緣起一言無分別者大記云緣起
006_0821_c_09L一言乃至何須多門等者起此問意
006_0821_c_10L初標眞性示緣起體即無分別理
006_0821_c_11L已現了手何煩更說中即等多門耶
006_0821_c_12L如是問也答具縱奪文現可知
006_0821_c_13L何不釋六門而問答耶*弟六門者
006_0821_c_14L摠結上意故釋五門其義已盡故也
006_0821_c_15L了手者事畢之言也

006_0821_c_16L
法記云婬怒癡性即是菩提者古人
006_0821_c_17L只知用水令淨於物不知令淨濁
006_0821_c_18L水也此意云何謂如欲淨於水
006_0821_c_19L取於石水不得淨不動土石水方
006_0821_c_20L自淨淨自心者亦復如是若欲斷
006_0821_c_21L除三毒煩惱則心不得淨三毒不
006_0821_c_22L心自淸淨是故凡詣勝熱婆羅門
006_0821_c_23L善知識所受癡法門即得安住照明
006_0821_c_24L「一一」作「二」{乙}「弟」作「第」{乙}次同
006_0821_c_25L「訂」通「證」於此書{編}次同
「幺」作「云」{乙}

006_0822_a_01L만족왕 선지식을 만나서 성냄의 법문을 받음이 곧 편안히 즐거운 삼매를 얻는 것이고, 바수밀다 선지식을 만나서 탐냄의 법문을 받음이 곧 욕망을 여읜 실제를 얻는 것이다.113)

화엄경탐현기

『화엄경탐현기』에서 방편명方便命 선지식을 주석하여 이른다.114) 이와 같이 반대로 된 도道가 위아래의 경문 가운데 모두 세 종류가 있다. 첫째는 이 자리이니 삿된 견해와 같고, 둘째는 만족왕 선지식이니 성냄과 같고, 셋째는 바수밀다 선지식이니 탐하여 애착함과 같다. 그러므로 세 가지 독의 모습이 바른 법과 함께 있다.

그런데 (여기에) 네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마주한 모습이 곧 공하기 때문이다. 『제법무행경』에 이르기를, “탐욕이 곧 도이고 성냄과 어리석음 또한 그러하니, 이 세 가지 일에 한량없는 부처님의 법이 있다.”115)라고 한다. 풀이하면 이것은 (세 가지 일이) 곧 공한 것이 부처님의 법임을 기준으로 한 것이고, (세 가지) 일이 곧 부처님의 법은 아니다. 둘째는 교묘하게 중생을 거두는 것을 기준으로 하여 부처님의 법이 됨을 설하는 것이고, (세 가지 일이) 바로 이 (부처님의 법)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정명경淨名經』에서 “먼저 욕망으로써 잡아 끌어당기고 나중에 부처님의 지혜에 들어오게 한다.”116) 등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셋째는 번뇌에 머물러 중생을 윤택하게 하여 보살도를 기르는 것을 부처님의 법이 있다고 설하는 것이고, (세 가지 독이) 바로 이 (부처님의 법)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정명경』에서 “일체의 번뇌가 여래의 종자가 된다.”117)라고 하는 것과 같다. 넷째는 마주하는 모습이 바로 이 (부처님의 법)이니 앞의 셋과 같지 않다.

법융기
『법기』에 이른다. ‘일곱 가지 괴로움의 진리’는 일곱 가지 생사生死이다. 말하자면 분단分段에 셋이 있고 변역變易에 넷이 있다. 분단의 셋이란 삼계이다. 변역의 넷이란 첫째는 방편의 생사, 둘째는 인연의 생사, 셋째는 유유有有의 생사, 넷째는 무유無有의 생사이다.

섭대승론석소

법상法常118) 공의 『섭론소』에 이른다. 첫째, 방편의 생사는 곧 무명으로 연緣을 삼아 생사를 불러일으키니 가까운 인(親因)이 아니기 때문에 방편이라고 일컫는다.

006_0822_a_01L遇滿足王知識受嗔法門即得安樂
006_0822_a_02L三昧遇婆須密知識受貪法門
006_0822_a_03L得離欲實際也

006_0822_a_04L
探玄方便命知識䟽云如是反道
006_0822_a_05L上下文中摠有三類一此位同邪
006_0822_a_06L二滿足王同嗔恚三婆須密同
006_0822_a_07L貪愛第下之一第二六張 是故三毒
006_0822_a_08L相並有正法然有四義一當相
006_0822_a_09L即空故諸法無行經云貪欲即是
006_0822_a_10L恚癡亦復然於此三事中
006_0822_a_11L無量佛法解云此約即空是佛法
006_0822_a_12L非事 [192] 即是佛法二約巧攝生說爲
006_0822_a_13L佛法非謂即是如淨名云先以欲
006_0822_a_14L抅牽後令入佛智等三留惑潤生
006_0822_a_15L長菩薩道說有佛法非謂即是
006_0822_a_16L淨名云一切煩惱爲如來種四當
006_0822_a_17L相即是不同前三

006_0822_a_18L
法記云七種苦諦者七種生死也
006_0822_a_19L謂分段有三變易有四分段三者
006_0822_a_20L是三界也變易四者一方便生死
006_0822_a_21L二因緣生死三有有生死四無有
006_0822_a_22L生死

006_0822_a_23L
法常公攝論䟽云一方便生死
006_0822_a_24L以無明爲緣1) [277] 生死非是親因

006_0822_b_01L둘째, 인연의 생사는 곧 무루의 업으로 인因을 삼아 생사를 불러일으키니 가까운 인因을 말미암기 때문에 인연이라고 이름한다. 셋째, 유유(의 생사)는 앞의 인연을 말미암아 존재(有)의 결과를 불러일으켜 생기게 하니 이 결과가 있기 때문에 유유라고 이름한다. 넷째, 무유(의 생사)는 노사의 지支가 시들어 지나가(落謝) 그 과보가 다하니 뒤에 다시 존재(有)의 결과가 있지 않기 때문에 무유라고 한다. 운운.

청량소초

『청량연의』에 이른다.119) 『무상의경無上依經』에 이르기를, “아라한ㆍ벽지불ㆍ대지보살은 네 가지 장애로 인해 여래법신의 네 가지 덕120)을 얻지 못한다. 첫째는 생겨남의 연인 번뇌(生緣惑)이고, 둘째는 생겨남의 인인 번뇌(生因惑)이고, 셋째는 유유이고, 넷째는 무유이다. 무엇이 생겨남의 연인 번뇌인가? 곧 무명주지無明住地121)로서 일체의 행行을 낳으니 무명이 업業을 낳는 것과 같다. 무엇이 생겨남의 인인 번뇌인가? 무명주지에 의해 생겨나는 모든 행이니 비유하면 무명이 낳는 모든 업과 같다. 무엇이 유유인가? 무명주지를 연으로 하고 무명주지를 인으로 해서 일어나는 무루의 행이 일으키는 세 종류의 의생신意生身122)이다. 비유하면 네 가지 취取123)를 연으로 하고 세 가지 유루의 업124)을 인으로 해서 일으키는 세 종류의 존재(有)125)이다. 무엇이 무유인가? 세 종류의 의생신을 연으로 하여 깨달아 알지 못하고 미세하게 사라짐에 떨어지는 것이니 비유하면 세 가지 존재 가운데 생生을 연으로 하여 찰나찰나 늙고 죽는 것(老死)이다. 운운.

삼계에 네 종류의 어려움이 있으니, 첫째는 번뇌의 어려움이고, 둘째는 업業의 어려움이고, 셋째는 생生으로서의 과보의 어려움이고, 넷째는 과실過失의 어려움이다. 무명주지가 일으키는 방편의 생사는 삼계 안의 번뇌의 어려움과 같다.

006_0822_b_01L故穪方便二因緣生死即以無漏
006_0822_b_02L業爲因*感生死由是親因故名
006_0822_b_03L因緣三有有則由前因緣*感生
006_0822_b_04L有果有此果故名有有四無有
006_0822_b_05L則老死支謝其報盡後更無有有
006_0822_b_06L故曰無有云云

006_0822_b_07L
淸凉演義云無上依經云阿羅漢
006_0822_b_08L辟支佛大地菩薩爲四種障不得
006_0822_b_09L如來法身四德一者生緣*感 [193]
006_0822_b_10L者生因惑三者有有四者無有
006_0822_b_11L者生緣惑即是無明住地生一切
006_0822_b_12L如無明生業何者是生因惑
006_0822_b_13L是無明住地第下之一第二七張
006_0822_b_14L生諸行比如無明所生諸業何者
006_0822_b_15L有有緣無明住地因無明住地
006_0822_b_16L起無漏行起三種意生身比如四
006_0822_b_17L取爲緣三有漏業爲因起三種有
006_0822_b_18L何者無有緣三種意生身不可覺
006_0822_b_19L微細墮滅比如緣三有中生
006_0822_b_20L念念老死云云 於三界中有四種
006_0822_b_21L一者煩惱難二者業難三者
006_0822_b_22L生報難四者過失難無明住地所
006_0822_b_23L起方便生死如三界內煩惱難
006_0822_b_24L明住地所起因緣生死如三界內

006_0822_c_01L무명주지가 일으키는 인연의 생사는 삼계 안의 업의 어려움과 같다. 무명주지가 일으키는 유유의 생사는 삼계 안의 생으로서의 과보의 어려움과 같다. 무명주지가 일으키는 무유의 생사는 삼계 안의 과실의 어려움과 같다.”126)라고 한다.

법융기
『법기』에 이른다. ‘분별이 없다는 것’이란,
각각 상즉하지 않음 등의 네 구127)를 합해 취하여 이르는 것인가?
그렇다. 말하자면 앞의 세 구는 즉문인 까닭에 체體의 문이다. 상즉하지 않음의 구는 중문인 까닭에 자리가 움직이지 않는 문(位不動門)이다. 자리가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비로소 상입하여 일치될 수 있다. 그러므로 상즉하지 않음의 뜻을 합해 취하여 ‘그윽하여 분별이 없다’라고 하는 것이다.
〔2〕 이타행
‘비유를 기준으로 하여 이름을 붙인 것이다’부터 ‘뜻대로 아님이 없는’까지128)

대기
『대기』에 이른다. ‘해인海印이란 비유를 기준으로 하여 이름을 붙인 것이다’란, 아수라와 제석천이 서로 싸울 때 모든 무기 등이 밝고 깨끗한 바다에 나타나는 뜻으로, 그 세 가지 독의 바로 그 모습을 움직이지 않음이 곧 안으로 증득한 해인(삼매)의 궁극의 법체인 것에 비유한 까닭이다.

고기

‘고기’에 이른다. 운화 존자雲華尊者129)가 이르기를, “오직 『화엄경』에 설해진 법만 해인삼매에 의거하여 일어난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때 지적국통智積國統이 있어 힐난해 이르기를, “『대집경』에 ‘마치 염부제의 일체 중생의 몸과 외부의 색色, 이와 같은 색상色相이 바다에 모두 도장 찍힌 모습(印相)이 있으니, 이 까닭에 큰 바다를 이름하여 인印이라 하는 것처럼, 보살도 그러하여 대해인삼매를 얻어서 일체중생의 마음행동을 본다. 운운.130)라고 한다. 곧 아래의 네 가르침의 법 또한 해인삼매에 의거하여 일어난 것인데 무슨 까닭에 그렇지 않다고 하는가.”라고 하였다.

운화 존자가 답하여 이르기를, “해인에는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세 대아승지겁을 지내도록 수행한 제석천이 법공法空수미산 정상에 올라

006_0822_c_01L業難無明住地所起有有生死
006_0822_c_02L三界內生報難無明住地所起無
006_0822_c_03L有生死如三界內過失難

006_0822_c_04L
法記云無分別者者各各不相即
006_0822_c_05L等四句合取云耶尒也謂前三
006_0822_c_06L即門故是體門也不相即句
006_0822_c_07L中門故位不動門也位不動故
006_0822_c_08L得相入能成一致是故合取不相
006_0822_c_09L即義云㝠然無分別也

006_0822_c_10L[利他行]
約喩得名至無不如意大記云海印
006_0822_c_11L約喩得名者以修羅帝釋相戰之
006_0822_c_12L諸兵具等現於明淨海中之義
006_0822_c_13L喩其三毒當相不動即是內訂海印
006_0822_c_14L究竟法禮故也

006_0822_c_15L
古記云雲華尊者云唯花嚴經所
006_0822_c_16L說之法依海印定起也時有智積
006_0822_c_17L國統難云第下之一第二八張 大集
006_0822_c_18L經云如閻浮提一切衆生身及外
006_0822_c_19L如是色相海中皆有印相
006_0822_c_20L故名大海爲印菩薩亦尒得大海
006_0822_c_21L印三昧見一切衆生心行云云
006_0822_c_22L下四敎法亦依海印定起何故云
006_0822_c_23L不尒耶雲華答曰海印有五
006_0822_c_24L三大阿僧祗劫歷修之帝釋
006_0822_c_25L「感}通「惑」{編}

006_0823_a_01L소지장所知障131)아수라와 서로 싸울 때 삼과백법132)의 형상이 대원경지大圓鏡智133)의 바다 가운데 나타나는 해인이다.
둘째는 셀 수 없는 겁을 지내도록 수행한 제석천이 본각本覺수미산의 정상에 올라 근본무명아수라와 서로 싸울 때 갠지스강의 모래처럼 (많은) 성공덕性功德의 형상이 한마음 진여의 바다에 나타나는 해인이다.134)

셋째는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는 제석천이 일행삼매一行三昧수미산의 정상에 올라 망상妄想아수라와 서로 싸울 때 모습도 없고 분별도 없는 형상이 둘 없는 실상實相의 바다에 나타나는 해인이다.
넷째는 두 부처님 국토의 티끌 수처럼 (많은) 겁을 지내도록 수행한 제석천이 총상摠相수미산의 정상에 올라 변계아수라와 서로 싸울 때 열 가지 보법의 형상이 세계해에 나타나는 해인이다.
다섯째는 열 부처님의 제석천이 법성수미산의 정상에 올라 머무름이 없는 실상아수라와 서로 싸울 때 삼종세간의 형상이 국토해에 나타나는 해인이다. 이상.”라고 하였다.

이 다섯 가지 가운데 앞의 셋은 차례대로 시교ㆍ종교ㆍ돈교이고, 뒤의 둘은 차례대로 밖으로 교화함과 안으로 증득함이다. 여기에 인因으로서의 해인을 기준으로 한 것을 덧붙여 논하면 여섯 가지가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보현의 제석천이 해행解行수미산의 정상에 올라 백 가지 장애135) 아수라와 서로 싸울 때 다함없는 보법의 형상이 정광파려의 거울에 나타나는 해인이다. 만약 앞의 세 거듭의 뜻을 기준으로 하면 삼승도 분수에 따라서 해인을 논한다. 그러나 삼승이 모두 해인삼매 밖에서 설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일승의 해인을 기준으로 하여 이른 것일 뿐이다.

006_0823_a_01L法空須彌山頂與所知障阿修羅
006_0823_a_02L鬪戰之時三科百法像現於大圓
006_0823_a_03L鏡智海中之海印也二者不可數
006_0823_a_04L劫歷修之帝釋升本覺須彌頂
006_0823_a_05L根本無明阿修羅相戰之時恒沙
006_0823_a_06L性德像現於一心眞如海之海印
006_0823_a_07L三者一念不生之帝釋升一
006_0823_a_08L行三昧須彌頂與妄想阿修羅相
006_0823_a_09L戰之時無相無分別像現於不二
006_0823_a_10L實相海之海印也四者二佛刹微
006_0823_a_11L塵數劫歷修之帝釋升摠相須彌
006_0823_a_12L與遍計阿修羅相戰之時十種
006_0823_a_13L普法像現於世界海之海印也
006_0823_a_14L十佛之帝釋升法性須彌頂
006_0823_a_15L無住實相阿修羅相戰之時三種
006_0823_a_16L世間像現於國土海之海印也已上
006_0823_a_17L此五之中前三如次始終頓也
006_0823_a_18L二如次外化內證也於此加論約
006_0823_a_19L因海印應有六種謂普賢之帝釋
006_0823_a_20L升解行須彌頂與百障阿修羅相
006_0823_a_21L戰之時無盡普法像現於錠光玻
006_0823_a_22L瓈鏡之海印也若約前三重意
006_0823_a_23L三乘隨分第下之一第二九張 亦論
006_0823_a_24L海印也而言三乘皆是海印定

006_0823_b_01L
청량소

『청량소』에서 해인을 풀이하여 이른다.136) 열 가지 뜻으로 이것을 풀이하여 다함없는 작용을 드러낸다. 첫째는 무심히 능히 나타내는 뜻이다. 둘째는 나타내되 나타나는 바가 없는 뜻이다. 셋째는 나타내는 것과 나타나는 바가 하나가 아닌 뜻이다. 넷째는 (나타내는 것과 나타나는 바가) 다르지 않은 뜻이다. 다섯째는 (나타내는 것과 나타나는 바가) 가고 옴이 없는 뜻이다. 여섯째는 (나타냄이) 광대한 뜻이다. 일곱째는 널리 나타나는 뜻이다. 여덟째는 몰록 나타나는 뜻이다. 아홉째는 항상 나타나는 뜻이다. 열째는 나타나지 않아도 나타나는 뜻이다.

대기
『대기』에 이른다. ‘여의如意란 비유를 따라 이름 붙인 것이다. 내지 뜻대로 아님이 없는’ 등은 (다음과 같다.) 마치 여의주왕을 복덕이 없는 사람이 얻으면 변하여 독사가 되어 오히려 그 사람을 해치고, 만약 복덕이 있는 사람이 얻으면 그 뜻에 좋아함에 따라서 다함없는 보배를 비 내려 가난한 사람들에게 널리 베푸는 것과 같이, 일승보법의 의리義理도 또한 그러하다. 만약 원만한 믿음이 없는 하열한 근기가 이것을 들으면 자신의 망정妄情으로 인한 견해에 집착하여 의심을 내어 비방을 일으키니 도리어 악도에 떨어져 다함없는 고통을 받는다. 만약 큰 마음에 바른 믿음이 있는 사람이 이것을 들으면 겨우 듣자마자 곧 믿어서 곧 일승의 본성에 칭합하는 이익을 얻어 자신과 남을 널리 이롭게 하여 뜻과 같지 않음이 없다.
〔3〕 수행방편
1. 일승과 오승
‘일승(의 보법)을 보고 들은’부터 ‘오승의 설과 같다’까지137)

대기
『대기』에 이른다. ‘행자行者란 일승을 보고 보법을 탄 이후 아직 보법을 원만히 증득하기 이전까지를 말한다’ 등에서, 만약 머무름 없는 별교를 기준으로 하면 보고 들음이 곧 원만한 증득이다. 지금은 지위에 기댐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일승을 보고 들음’을 말하고, 내지 ‘아직 보법을 원만히 증득하지 않음’ 등을 말하는 것이다.

고기

‘고기’에 이른다. 삼생에 많은 거듭이 있다. 첫 번째, 과보를 기준으로 하면 과거는 견문見聞이고 현재는 해행解行이며 미래는 증입證入이다.

006_0823_b_01L外所說者約一乘海印云耳

006_0823_b_02L
淸凉釋海印云以十義釋之表無
006_0823_b_03L盡之用一無心能現義二現無所
006_0823_b_04L現義三能現與所現非一義四非
006_0823_b_05L異義五無去來義六廣大義
006_0823_b_06L普現義八頓現義九常現義
006_0823_b_07L非現現義

006_0823_b_08L
大記云如意者從喩得名乃至無
006_0823_b_09L不如意等者猶如如意珠王無福德
006_0823_b_10L人得之則變爲毒蛇 反害其人
006_0823_b_11L有福德之人得則隨其意樂雨無盡
006_0823_b_12L廣施貧人一乘普法義理亦尒
006_0823_b_13L無圓信下劣之機聞之則執已情見
006_0823_b_14L生疑起謗反墮惡道受無盡苦
006_0823_b_15L有大心正信之人聞之則纔聞即信
006_0823_b_16L即得一乘稱性之益廣利自他無不
006_0823_b_17L如意也

006_0823_b_18L[修行方便]
見聞一乘 如五乘說大記云行者
006_0823_b_19L謂見一乘乘普法已去未滿圓1)
006_0823_b_20L普法等者若約無住別敎則見聞即
006_0823_b_21L是圓訂今約寄位故云見聞一乘
006_0823_b_22L乃至云未滿圓訂普法等也

006_0823_b_23L
古記云三生有多重一約報則過
006_0823_b_24L去見聞現在解行未來訂入

006_0823_c_01L두 번째, 세계를 기준으로 하면 세계 안은 견문이고 출세出世는 법을 얻음이며 출출세出出世는 증득하여 이룸이다. 또 세계 안은 견문과 해행에 통하고 출세는 법을 얻음(得法)이며 출출세는 증득하여 이룸(證成)이다. 세 번째, 자신 분위에 의해 위로 나아감(自分勝進)을 기준으로 하면, 십신 이전은 견문이고 십신은 해행이며 십신이 원만한 마음이 앞으로 나아감은 증입이다. 네 번째, 신해信解를 증장하는 문을 기준으로 하면 십신은 견문이고 삼현은 해행이며 십지는 증입이다.

다섯 번째, 증득을 비교하는 것을 기준으로 하면 지 이전(地前)은 견문이고 초지부터 일곱째 지(七地)까지는 해행이고 여덟째 지(八地) 이상은 증입이다. 여섯 번째, 일승과 삼승을 기준으로 하면 넷째 지地는 견문이고 다섯째, 여섯째, 일곱째 지地는 해행이며 여덟째 지地는 증입이다. 일곱 번째, 오승으로 일승에 문을 배대하는 뜻을 기준으로 하면, 여덟째 지地는 견문이고 아홉째 지地는 해행이며 열째 지地는 증입이다. 여덟 번째, 선지식을 기준으로 하면 문수는 견문이 되고 덕운 이후는 해행이다. 미륵보살이 “앞으로 나를 보게 될 것이다.”138)라고 고하여 이른 것은 증입이 된다. 또 보현보살 선지식은 증득한 과보의 바다가 된다.139)

지통기

『지통기』에 이른다.
견문 등의 세 지위는 보법의 바른 지위입니까?
아니다. 다만 삼승을 따라서 이 말을 할 뿐이다. 만약 보법의 바른 법이라면 곧 지위도 없고 지위 아님도 없으니, 일체의 육도와 삼계의 법계에 대한 법문이 보법의 바른 지위 아님이 없다. 또 한 지위가 일체의 지위이고 일체의 지위가 한 지위이다. 지위의 법문과 같이 일체의 행, 가르침(敎)과 뜻(義) 등의 법문도 또한 그러하니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보법 가운데 무엇으로 처음을 삼습니까?

006_0823_c_01L約界則界內見聞出世得法出出
006_0823_c_02L世訂成又界內通見聞解行出世
006_0823_c_03L得法第下之一第三○張 出出世訂
006_0823_c_04L三約自分勝進則十信已前見
006_0823_c_05L十信解行十信滿心勝進訂入
006_0823_c_06L四約信解增長門則十信見聞
006_0823_c_07L賢解行十地訂入五約比訂
006_0823_c_08L地前見聞從初地至七地解行
006_0823_c_09L地以上訂入六約一乘三乘則四
006_0823_c_10L地見聞五六七地解行八地訂入
006_0823_c_11L七約五乘配門一乘義則八地見
006_0823_c_12L九地解行 2)弟十地訂入八約
006_0823_c_13L知識則文殊爲見聞德雲以去
006_0823_c_14L3) [278] 4) [279] [194] 告云當來見我爲訂
006_0823_c_15L又普賢知識爲訂果海也

006_0823_c_16L
智通記云見聞等三位普法正
006_0823_c_17L位耶不也但從三乘作是說耳
006_0823_c_18L若普法正法即無位無不位一切
006_0823_c_19L六道三界法界法門無不普法正
006_0823_c_20L又一位一切位一切位一位
006_0823_c_21L如位法門一切行敎義等法門亦
006_0823_c_22L可思若尒普法中以何爲始
006_0823_c_23L「訂」通「證」於此書{編}次同「弟」作「第」{乙}
006_0823_c_24L
「解」作「能」{乙}「勤」作「勒」{乙}

006_0824_a_01L
하나의 법문 얻음으로 시작을 삼는다. 이것은 곧 마지막과 다름이 없다.

대종지현문본론

『대종지현문론大宗地玄文論』140)에 이른다.141) ‘차례를 뛰어넘음 없이 점차 나아가는 지위’란 게송에 이르기를, “51위五十一位142) 가운데 차례대로 뛰어넘음 없이 나아가니 하나에 일체를 갖추는 것을 ‘점차 나아가는 지위’라고 이름한다.”라고 한다. 논에서 풀이하여 말한다. 오직 한 수행자만 쉰한 가지의 다른 모습의 지위 가운데 그 차례대로이니 법을 뛰어넘음이 없다.

‘남음 없이 구경에 모두 지니는 지위’란 게송에 이른다. “오십일위 가운데 먼저 들어간 바에 따라서 일체와 일체를 거두니 ‘남음 없는 구경’이라고 이름한다.” 논에서 풀이하여 말한다. 오십일위의 다른 모습 가운데 혹 어떤 수행자는 믿음으로써 나아가 들어가고, 혹 어떤 수행자는 진여의 지위로써 나아가 들어가고, 혹 어떤 수행자는 대극大極의 지위로써 나아가 들어간다. 운운. 등은, 먼저 들어간 바에 따라서 일체의 일체 지위를 다 거두어 구경에 남음이 없으며, 또한 옮겨 다님도 없으며, 또한 나고 듦도 없어서 하나하나 희고 희다.

‘널리 두루하여 원만하고 광대한 지위’란 게송에 이른다. “쉰한(五十一) 종류의 지위가 앞뒤가 없어 한 때에 함께 옮겨가고(轉) 함께 행해지기 때문에 ‘널리 두루하여 원만함’이라고 이름한다.” 논에서 풀이하여 말한다. 쉰하나의 지위는 앞뒤가 없어 한 때에 함께 옮겨가고 함께 행해져서 남는 바가 없다. 또한 쉰하나의 다른 모습의 지위 가운데 있는 바 한량없고 가없는 모든 지위가 앞뒤가 없어 한 때에 함께 옮겨가고 함께 행해져서, 맘대로 옮겨감에 향함이 없는 도인(橫轉無向道人)143)이다.

‘일체의 모든 법이 함께 아닌 지위’란 게송에 이른다. “모든 한량없고 가없는 일체의 갖가지 지위가 모두 다 건립된 것이 아닌 것을 ‘함께 아닌 지위’라고 이름한다.”

006_0824_a_01L得一法門以爲始此則與終無
006_0824_a_02L別也

006_0824_a_03L
大宗地玄文論云無超次1)弟漸轉
006_0824_a_04L位者偈云五十一位中如次無超
006_0824_a_05L一中具一切名爲漸轉位
006_0824_a_06L釋曰唯一行者五十一種別相位
006_0824_a_07L [195] 如其次*弟無超過法也無餘
006_0824_a_08L究竟摠持位者偈曰五十一位中
006_0824_a_09L隨其先得入攝一切一切2) [280]
006_0824_a_10L餘究竟論釋曰第下之一第三一張
006_0824_a_11L五十一位別相中或有行者以信
006_0824_a_12L趣入或有行者以眞如地趣入
006_0824_a_13L或有行者以大極地趣入云云
006_0824_a_14L隨先得入盡攝一切一切位地
006_0824_a_15L竟無餘亦無移轉亦無出入一一
006_0824_a_16L白白也周遍圓滿廣大位者偈曰
006_0824_a_17L五十一種位無前後一時俱轉俱
006_0824_a_18L行故名周遍圓滿論釋曰五十
006_0824_a_19L一位無有前後一時俱轉 [196] 俱行
006_0824_a_20L無有所餘亦五十一別相位中
006_0824_a_21L有無量無邊諸位無有前後一時
006_0824_a_22L俱轉一時俱行橫轉無向道人也
006_0824_a_23L一切諸法俱非位者偈曰諸無量
006_0824_a_24L無邊一切種種位皆悉非建立

006_0824_b_01L논에서 풀이하여 말한다. 원인도 아니고 결과 등도 아니다. 운운. 그 아님(非)의 뜻으로 지위를 세우기 때문이다.
‘일체의 모든 법이 함께 그것인 지위’란 게송에 이른다. “일체의 갖가지 법이 금강의 몸이 아님이 없다. 한 몸의 뜻인 까닭에 함께 그것인 문이라고 이름한다.” 논에서 풀이하여 말한다. 이는 병病 없는 도인이라 이름한다.
한 몸인 금강보륜산왕은 그 모습이 어떠한가? 게송에 이른다. “점차가 끝까지 다해서 원만하여 아니다. 한 때와 앞과 뒤, 함께와 함께 아님, 하나와 다른 때와 장소에서 옮겨간다.”144)

대기
『대기』에 이른다. ‘오승이 모두 일승에 들어가 포섭된다. 일승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一乘所流)이고, 일승을 목표로 하는 것(一乘所目)이고, 일승의 방편(一乘方便)이기 때문이다’란 다음과 같다. ‘흘러나오는 것’이라고 말한 것은 마치 백 개의 내(川)가 저 큰 바다로부터 흐르지 않음이 없는 것과 같이, 삼승과 오승 등 일체의 모든 법이 근본의 일승으로부터 흘러서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목표로 하는 것이란 삼승을 기준으로 하면 안목의 뜻이 되고, 일승을 기준으로 하면 명목의 뜻이 된다. 삼승에서 안목이 된다고 말한 것은 그 훈습되는 일체 모든 법이 온전히 일승의 보법이기 때문에 이 상즉으로 화엄보법에 들어가는 안목을 삼는 것이다. 일승에서 명목이 된다는 것은 만약 생겨남이 없는 부처님의 법을 기준으로 하면 이름하여 지목(名目)할 수 없으나, 그러나 근기의 연緣을 위하여 여러 이름으로 제목하여 보인 것이다.

방편이란 마치 높은 집에 오르고자 함에 용감하고 빠른 사람은 한번 뛰어 바로 올라가지만, 저 끝의 사람은 서너 걸음 정도를 물러나 가도록 가르쳐 물러나 걸을 때부터 이미 집에 오르는 힘을 얻는 것과 같다. 이처럼 상근기의 사람은 한 번 보법을 듣고 바로 일승에 들어가지만, 중ㆍ하근기는 일승의 보법에 바로 들어갈 수 없어서

006_0824_b_01L名俱非位地論釋曰非因非果等
006_0824_b_02L云云 以其非義立爲位故也一切
006_0824_b_03L諸法俱是位者偈曰一切種種法
006_0824_b_04L無非金剛身以一身義故名爲俱
006_0824_b_05L是門論釋曰是名無病道人也
006_0824_b_06L一身金剛寶輪山王其相云何
006_0824_b_07L漸是盡非滿 [197] 一時及前後與俱
006_0824_b_08L并俱非一異時處轉

006_0824_b_09L
大記云五乘摠是入一乘攝以一乘
006_0824_b_10L所流一乘所目一乘方便故者言所
006_0824_b_11L流者猶如百川無不從彼大海而
006_0824_b_12L三乘五乘等一切諸法無不從
006_0824_b_13L本一乘而流成也所目者約三乘則
006_0824_b_14L爲眼目之義也約一乘則爲名目之
006_0824_b_15L義也言三乘中爲眼目者其所熏習
006_0824_b_16L一切諸法第下之一第三二張 全是一
006_0824_b_17L乘普法故以此即爲入花嚴普法之
006_0824_b_18L眼目也一乘中爲名目者若約無生
006_0824_b_19L佛法則不可名目然爲機緣以諸
006_0824_b_20L名字題目而示也方便者猶如欲
006_0824_b_21L登高堂勇疾之人一躍便登如其
006_0824_b_22L末者敎令退行三四步許從却步時
006_0824_b_23L已得升堂之力如是上根之人一聞
006_0824_b_24L普法直入一乘中下之根未能直

006_0824_c_01L부처님께서 대비로써 삼승을 베풀어 펼치셔서 일승에 들어가는 방편을 삼는 것이다.

‘흘러나오는 것(所流)과 목표로 하는 것(所目)은 연기의 도리를 기준으로 한 말’이라는 것은 대연기의 도리를 일컫는 것이 아니다. 일승의 법이 근기의 연緣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방편은 지혜를 기준으로 한 말’이란 아래 가르침의 근기가 자신의 삼승이 임시로 베풀어 펼쳐진 것임을 알고 돌이켜 일승에 들어가는 지혜를 기준으로 하여 이른 것이다. ‘또한 성자의 뜻을 기준으로 설한 것’이란 교화하는 위대한 성인이 훌륭한 방편으로써 일승 가운데 삼승을 나누어 설하여 중ㆍ하근기를 이끌어 근본의 일승으로 들이는 뜻이다. 그러므로 ‘성자의 뜻을 기준으로 설한 것’이라고 한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훌륭하고 교묘한 방편으로 중생을 맞아들여 이끌기 때문이다.

십구장원통기

『십구장기』145)에 이른다.146) 목표로 하는 것(所目)은 이 경이고, 흘러나오는 것(所流)과 방편 등은 아래의 네 가르침이다.
근기와 연緣에서 일어남은 어느 근기와 연緣을 기준으로 하는 것인가?
아래 가르침의 근기와 연緣이다.
만약 그렇다면 목표로 하는 것 또한 아래 가르침인가?
『화엄경』 중 목표로 하는 법이 밖으로 향하여 흘러서 아래 가르침의 근기의 연緣 가운데 일어난 것이다. 이 연緣 가운데 일어난 아래 가르침의 법이 본래 『화엄경』 중의 목표로 하는 것임을 나타내고자 하기 때문에, 그 이유로 목표로 하는 것을 함께 논한 것일 뿐이다.

대기
『대기』에 이른다. ‘오승의 설과 같다. 사람(人)과 법法, 원인(因)과 결과(果) 내지 예에 준하면 이와 같다’ 등에서, 오승은 삼승ㆍ소승ㆍ인천승이고, ‘예에 준하면 이와 같다’ 등은 근기와 연緣에 따라서 오승이 비록 다르나 그 오승의 법이 일승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앞에서는 근기에 따라서 나뉜 오승을 기준으로 하여 수행자를 논하였고,

006_0824_c_01L入一乘普法佛以大悲施設三乘
006_0824_c_02L入一乘之方便也所流所目約緣起
006_0824_c_03L道理語者非謂大緣起道理也一乘
006_0824_c_04L之法於機緣中起故也方便者約智
006_0824_c_05L語者約下敎機知自三乘是假施
006_0824_c_06L設廻入一乘之智云也亦可約聖者
006_0824_c_07L意者能化大聖以善方便於一乘
006_0824_c_08L分說三乘引中下根入本一乘之
006_0824_c_09L意也是故云約聖者意說何以故
006_0824_c_10L以善巧方便接引衆生故

006_0824_c_11L
十句章記云所目者是此經
006_0824_c_12L流方便等者是下四敎也
006_0824_c_13L機緣中起者約何機緣耶下敎
006_0824_c_14L機緣也若爾所目亦是下敎耶
006_0824_c_15L花嚴經中所目之法向外而流
006_0824_c_16L於下敎機緣中起也爲欲現此緣
006_0824_c_17L中所起下敎之法本是花嚴經中
006_0824_c_18L所目故所以并論所目耳

006_0824_c_19L
大記云如五乘說人法因果乃至准
006_0824_c_20L例如是等者第下之一第三三張 五乘
006_0824_c_21L則三乘小乘人天乘也准例如是等
006_0824_c_22L隨機緣而五乘雖別其五乘法
006_0824_c_23L與一乘不異也謂前約隨機所分五
006_0824_c_24L「弟」作「第」{乙}次同「名」作「各」{乙}

006_0825_a_01L여기에서는 그 법을 기준으로 하니 예에 준하여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일승의 열 가지 보법을 기준으로 하여 ‘예에 준하면’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다. 오승 중에 있는 사람과 법 등을 기준으로 하여 말한 것일 뿐이다. 말하자면 오승을 거두어 일승 중에 들어가면 그 오승에 있는 사람과 법 등도 또한 모두 거두어 일승에 들어가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2. 증교證敎 무분별 : 칠종 문답
‘이른바 오승’에서 ‘수승하고 오묘한 능력’까지147)

대기
『대기』에 이른다.
‘이른바 오승 등의 법은 설하는 가르침(能詮敎法)인가, 설해지는 뜻(所詮義)인가’ 등에서, 이 아래에 일곱 거듭의 문답이 있다.148) 이 첫 문답 가운데 질문의 뜻은 오승의 가르침 밖에 별도로 말을 여의고 모습을 끊은 뜻(旨)이 있는지를 나타내고자 하기 때문에, 또 저 오승의 가르침의 법이 곧 이름과 모습을 여읜 설해지는 바인지를 나타내고자 하기 때문에 물은 것이다.

답의 뜻은 (다음과 같다.) 옛 대덕이 이르기를, “이것은 저 누런 잎을 가져 곧 바로 진짜 황금이다라고, 이와 같이 손가락으로 가리켜서 가르치는 곳이다.”149)라고 하였다. 옛말에 이르기를, “원효 스님이 의상 화상을 만나서 의심을 해결한 것이 세 가지가 있다. 말하자면 첫째는 시각이 본각과 같으니 범부가 되고 성인이 되는 뜻이고, 둘째는 습기를 지나는 바다의 갖가지 마음의 뜻150)이고, 셋째는 이 설하는 가르침과 설해지는 뜻이 모두 말 가운데 있는 자리이다.”라고 하였다. 원효 스님의 뜻은 곧 말하자면 아래 가르침 가운데 실제로 법의 체體가 있다고 했는데 이 글을 보고서 설하는 가르침과 설해지는 뜻이 모두 말 가운데 있고 실제의 법의 체體가 없음을 알았다는 것이다.

이 ‘설하는 가르침과 설해지는 뜻이 모두 말 가운데 있다’는 것은 어느 자리에 서서 말하는 것인가?
보현보살이 흘러나오는 것과 목표로 하는 것의 근기를 위하여 생겨남도 없고 이름도 없는 곳에 갖가지 이름으로 제목을 붙이니, 이때에 설하는 가르침과 설해지는 뜻이 차별을 이루기 때문에 이 자리를 기준으로 하여 ‘모두 말 가운데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 여기에서 더 나아가 말하면 부처님이 밖으로 향하여 산왕山王151)의 근기를 위해서 항상 설하시고 두루 설하시기 때문에

006_0825_a_01L論行者已此中約其法則准例可
006_0825_a_02L知也一云非約一乘十種普法言准
006_0825_a_03L例也約五乘中所有人法等云耳
006_0825_a_04L謂如攝五乘入一乘中其五乘所有
006_0825_a_05L人法等亦得摠攝入一乘故也

006_0825_a_06L
所謂五乘 勝妙能也大記云
006_0825_a_07L謂五乘等法爲是能詮敎法耶爲是
006_0825_a_08L所詮之義耶等者此下有七重問答
006_0825_a_09L此初問答中問意欲現五乘敎外別
006_0825_a_10L有離言絕相之旨故也又欲現彼五
006_0825_a_11L乘敎法即是離名相之所詮故問也
006_0825_a_12L答意則古德云此是將彼黃葉即正
006_0825_a_13L眞金如是指誨之處也古辭云
006_0825_a_14L師遇相和尙決疑有三謂一始覺同
006_0825_a_15L本覺爲凡爲聖之義二濕過海種種
006_0825_a_16L心之義三此能詮所詮皆在言中之
006_0825_a_17L處也曉師之意則謂下敎中實有法
006_0825_a_18L及見此文乃知能詮所詮皆在
006_0825_a_19L言中無實法體也此能詮所詮
006_0825_a_20L皆在言中者立在何處云耶普賢
006_0825_a_21L爲所流所目之機於無生無名處
006_0825_a_22L種種名題目於此時中能詮所詮
006_0825_a_23L成差別故約此處云皆在言中也
006_0825_a_24L又進此而云佛乃向外爲山王機

006_0825_b_01L이때에 십현문과 열 가지 법이 구족하고 자재하다. 그런데 또한 위로 열 부처님의 안으로 증득하심을 바라보면 오히려 이것도 가르침과 상응하기 때문에 이 자리를 기준으로 해서 또한 ‘모두 말 가운데 있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큰 자비와 본원의 힘인 까닭에 내지 말로 된 가르침(言敎)을 베풀어’ 등은 (다음과 같다.) 모든 부처님 세존께서 성품 바다의 과분(性海分)을 따라서 대비의 서원을 일으켜 스스로 깨달으신 법으로써 밖으로 근기의 마음을 향해 두 가지 언설을 일으키신다. 말하자면 법계문 중에 세계해의 이루어짐과 무너짐에 관한 청정한 지혜 등의 불가사의를 설하시고, 반야문 중에 부처님 국토의 불가사의를 설하시는 것이다.152) 이 두 가지 언설은 비록 보현보살과 문수보살이 선정에서 나온 이후이지만, 그러나 지상 스님의 과분의 지위인 다섯 바다와 열 지혜(五海十智)153)의 뜻에 의거하면 사자분신삼매(奮迅定)154) 가운데 이 언설을 일으키신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 국토의 불가사의에 대한 언설은 안으로 증득함의 국토바다에 칭합하여 일어난 것이며, 보현보살과 문수보살 등은 이 언설에 칭합하여 증득하기 때문에 증분을 직접 증득한다고 한다. 따라서 이 문에서 부처님과 보살이 하나의 상속이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안으로 향하면 열 부처님이고 밖으로 향하면 보현보살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보현보살의 안으로 증득하는 정장삼매가 부처님이 밖으로 향하신 것이다. 무슨 까닭에 “안으로 향하면 열 부처님이고 밖으로 향하면 보현보살이기 때문에 하나의 상속이다.”라고 하는가?
부처님이 밖으로 향하실 때 보현보살의 원만한 인因을 함께 아우른다. 이 원만한 인因이 안을 향하면 열 부처님이기 때문에 “하나의 상속이다.”라고 한 것이다.

법융기
『법기』에 이른다. ‘본원의 힘’이란 부처님이 인행因行을 닦으실 때 곧 서원을 일으켜 생각하기를, ‘내가 마땅히 부처를 이루어 삼승의 근기를 위하여 가르침을 베풀어서 자취에 머무르게 하지 않고 반드시 일승의 실체로 돌아가 들어가게 하리라’라고 이렇게 서원을 일으키시는 것이다. ‘법이 으레 이러하다’란 삼세 모든 부처님이 바른 깨달음을 이루실 때

006_0825_b_01L說遍說第下之一第三四張 於此時
006_0825_b_02L十玄十法具足自在然亦望上十佛
006_0825_b_03L內訂則猶是與敎相應故約此處
006_0825_b_04L得可云皆在言中也以大慈悲本願
006_0825_b_05L力故乃至施設言敎等者諸佛世尊
006_0825_b_06L從性海分發大悲願以自證法外向
006_0825_b_07L機心起二言說謂法界門中說世
006_0825_b_08L界海成敗淸淨智等不思議般若門
006_0825_b_09L中說佛國土不可思議也此二言
006_0825_b_10L雖普賢文殊出定以去然依至相
006_0825_b_11L果地五海十智之義則奮迅定中
006_0825_b_12L起此言說也是故佛土不思議之言
006_0825_b_13L稱於內訂土海而起普賢文殊等
006_0825_b_14L此言說而訂故云親訂訂分故此門
006_0825_b_15L佛與菩薩一相續也是故云
006_0825_b_16L內則十佛向外則普賢也普賢內
006_0825_b_17L訂之淨藏三昧是佛外向也何故向
006_0825_b_18L內則十佛向外則普賢故是一相續
006_0825_b_19L也耶佛外向際並普賢圓因
006_0825_b_20L圓因向內則是十佛故云一相續也
006_0825_b_21L法記云本願力者佛修因時即發
006_0825_b_22L誓念我當成佛爲三乘機施設敎
006_0825_b_23L不令住跡要必廻入一乘實體
006_0825_b_24L如是起願也法如是者三世諸佛

006_0825_c_01L법이 으레 이러하여 이 서원을 일으키시는 것이다.
대기
『대기』에 이른다. 두 번째 문답의 질문에서 ‘증분과 교분의 두 법이 항상 두 변에 있게 되는 허물’이라는 것은, 앞에서 “설해지는 법은 말의 모습이 미치지 못한다.”라고 하고, 또 “일체 모든 법이 모두 다 말에 있다.”라고 한 까닭에 그 두 말을 근거로 하여 이 질문을 일으킨 것이다. 답에서 먼저 두 가지 뜻155)을 들어서 바로 답한다. ‘까닭을 알 수 있는 것은’이란 거듭 물은 것이고, ‘변계는 모습이 없고’ 아래는 거듭 답한 것이다.

법융기
『법기』에 이른다. ‘증분과 교분의 두 법이 예부터 중도이고 하나로서 무분별이다’란, 비유하면 물에 여러 영상이 나타나는데 물가에 있는 사람이 다만 그 물이 영상과 다른 것만 보니, 단지 그 물로 안목을 삼지 않음을 말미암을 뿐인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만약 해인(삼매)로 안목을 삼지 않으면 삼세간의 법이 곧 해인(삼매)임을 보지 못한다. 만약 해인(삼매)로 안목을 삼으면 모든 법이 곧 해인(삼매)의 체體임을 보게 된다. 해인(삼매)에 나타나는 삼세간은 교분이고 삼세간을 거두는 해인(삼매)는 곧 증분이다. 그러므로 “증분과 교분의 두 법이 하나로서 무분별이다.”라고 한다.

‘변계遍計는 모습(相)이 없고 의타依他는 생겨남이 없으며 진실은 성품이 없어서 세 가지의 자성이 항상 중도에 있으니’ 등에서, 세 가지 자성은 교분이고 세 가지 자성이 없음은 증분이다. 그러므로 증분과 교분을 구족한다.

만약 망정을 기준으로 하여 말하면, 변계가 모습이 없다는 것은 실제로 집착함이 없는 것이고 사유似有가 없는 것이 아니다. 의타가 생겨남이 없다는 것은 사유似有가 없는 것이고 자체가 공한 것이 아니다. 원성이 성품이 없다는 것은 자체가 공한 것이고 연緣이 성품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세 가지 자성을 없애어 세 가지 자성이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만약 이법을 기준으로 하여 말하면, 다만 하나의 진실이

006_0825_c_01L正覺時法爾如是起此願也

006_0825_c_02L
大記云 1)弟二問答問中訂敎兩法
006_0825_c_03L常在二邊過者前云所詮之法言相
006_0825_c_04L不及第下之一第三五張 又云一切諸
006_0825_c_05L法皆悉在言故牒其二言起此問也
006_0825_c_06L答中先擧二義正答所以得知者重
006_0825_c_07L遍計無相下重答也

006_0825_c_08L
法記云訂敎兩法舊來中道一無分
006_0825_c_09L別者猶如水中現現諸像在水邊
006_0825_c_10L但見其水與像別異只由不以
006_0825_c_11L其水爲眼故也如是若不以海印爲
006_0825_c_12L則不見三世間法即是海印
006_0825_c_13L以海印爲眼目則得見諸法即海印
006_0825_c_14L海印所現三世間是敎分也
006_0825_c_15L三世間之海印即是訂分也是故云
006_0825_c_16L訂敎二法一無分別也遍計無相
006_0825_c_17L依他無生眞實無性三種自性常在
006_0825_c_18L中道等者三性是敎三無性是訂
006_0825_c_19L是故具訂敎也若約情云遍計無相
006_0825_c_20L是實執之無非似有之無依他無生
006_0825_c_21L是似有之無非自體空圓成無性
006_0825_c_22L是自體空非緣之無性是故遣三性
006_0825_c_23L現三無性也若約理云只是一眞
006_0825_c_24L「弟」作「第」{乙}次同

006_0826_a_01L곧 모습이 없음이며 곧 성품이 없음 등일 뿐이므로, 곧 이것이 변계의 모습 없음을 없애고 이것이 의타의 생겨남 없음을 없앤다는 등으로 나눌 수가 없다. 따라서 세 가지 자성 없음이 곧 한 경계이다. 다만 하나의 진실에 의거하여 셋으로 나눈 것이기 때문에 세 가지 자성 또한 한 경계이다. 그러므로 “세 가지의 자성이 항상 중도에 있다.”라고 하는 것이다.

만약 나무숲을 기준으로 하여 논하면, 이것은 세 가지 자성을 설하여 뜻하기 때문에 초교이다. 만약 금을 나누어 셋으로 함을 기준으로 하여 세 가지 자성을 논하면 세 가지 자성의 뜻을 설하여 뜻함이 있고 또 숙교 중의 뜻이 있다. 만약 연유(酥)를 셋으로 나누는 것을 기준으로 하여 세 가지 자성을 논하면 숙교의 종宗에 해당한다. 만약 허공을 나누어 셋으로 함을 기준으로 하여 세 가지 자성을 논하면 동교일승에 해당한다.
두 번째 뜻에 나아가서 금을 셋으로 나눔에 경우마다 다른 것이 세 가지 자성이다. 그 경우가 다름을 따라서 금의 형상 또한 다른 것은 세 가지 자성 없음이다. 이것은 거듭이 있기 때문에 세 가지 자성을 설하여 뜻하는 것(초교)이다. 만약 금의 체를 기준으로 하면, 세 경우의 금이 오직 한 종류인 것은 세 가지 자성 없음이고, 세 경우의 금의 형상이 한 가지 금으로 이루어진 것은 세 가지 자성이다. 이 뜻은 숙교에 해당한다.

세 번째 뜻에 나아가서 연유를 나누어 셋으로 한 것은 세 가지 자성이다. 세 그릇의 연유가 체體와 덕德이 가지런히 하나인 것은 세 가지 자성 없음이다. 만약 이법의 실제를 기준으로 하면, 세 가지 자성은 초교 중에서는 분수 따라 논한 것이고 숙교의 처음에서는 끝까지 논한 것이며 숙교의 마지막에서는 쓰지 않는 것이다.
동교일승 중에서는 삼승의 세 가지 자성에 익숙한 사람을 이끌어 들이고자 그 익숙한 세 가지 자성의 법칙에 의거하여 우선 큰 허공을 나누어 셋으로 그리기 때문에 하나를 들면 전체를 거두어들여서 나눌 수가 없는 것이다.156)

006_0826_a_01L即是無相即是無性等故即不可分
006_0826_a_02L此是遣遍計之無相此是遣依他之
006_0826_a_03L無生等故三無性即一際也但依
006_0826_a_04L一眞所分三故三性亦一際也是故
006_0826_a_05L三種自性常在中道也若約樹林
006_0826_a_06L則是詮旨三性故初敎也若約析
006_0826_a_07L金爲三論三性則有詮旨三性義
006_0826_a_08L有熟敎中義若約以酥分三論三性
006_0826_a_09L1) [281] 當熟敎宗若約分虛空爲三而
006_0826_a_10L論三性第下之一第三六張 則當同敎
006_0826_a_11L一乘也就*弟二義中以金分於三
006_0826_a_12L處處別者是三性隨其處別金像
006_0826_a_13L亦別者是三無性此則有重故
006_0826_a_14L詮旨三性也若約金體則三處之金
006_0826_a_15L唯一種者是三無性也三處金像
006_0826_a_16L是一金所成是三性也此義當熟敎
006_0826_a_17L就*弟三義中分酥爲三者是三
006_0826_a_18L三器之酥體德齊一者三無性也
006_0826_a_19L若約理實則三性者初敎之中
006_0826_a_20L分而論熟敎之初究竟而論熟敎
006_0826_a_21L之終不用也同敎一乘中欲引三
006_0826_a_22L乘習三性之人依其所習三性之
006_0826_a_23L且分大空以爲三畫故擧一全
006_0826_a_24L不可分也

006_0826_b_01L
진수기
『진기』에 이른다. ‘변계는 모습이 없고 의타는 생겨남이 없으며, 내지 세 법 이외에 다시 증분과 교분이 없다’란, 일승의 증분과 교분을 바로 변별하는 것이 가장 어렵기 때문에 저 숙교에서 논하는 세 가지 자성에 기대어서 이 뜻을 보인 것이다. 첫째, 변계는 모습이 없음에 나아가면 이해의 문(解門)과 수행의 문(行門)이 있다. 이해의 문이란 변계의 정유情有를 여의고 의타의 사유似有 등에 들어가는 것이다. 수행의 문이란 정유情有가 곧 진실의 자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강장 스님이 이르기를, “연緣에 별도의 연緣이 없고 체體가 곧 연緣이다. 그러므로 차별 있는 연기가 곧 매우 깊은 국토의 바다이다.”157)라고 한 것이다.

대기
『대기』에 이른다. 세 번째 문답 가운데 질문의 뜻은 앞의 “성자가 변계를 따른다.”라는 말로 인하여 『섭대승론』을 인용하여 힐난한 것이다. 답 가운데 처음부터 ‘다른 의미는 이와 같다’까지는, 말에 나타난 질문을 바로 답한 것이다. ‘만약 실제를 기준으로 설하면’ 아래는 뜻에 갖추어진 질문을 겸하여 답한 것이다. ‘허공의 꽃(空花)을 말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깨끗한 눈의 사람은 허공의 꽃을 보지 않지만 그 병든 눈을 따라서 그 허공의 꽃을 말하는 것처럼, 성자 또한 그러하여 이미 변계가 공함을 통달하였으나 변계의 사람을 따라서 세 가지 자성을 세우는 것이다. 혹은 이 허공 꽃의 비유가 다섯 가르침에 통한다고 한다. 말하자면 소승에서는 인공人空의 허공 꽃을 설하고, 내지 돈교에서는 한 생각도 나지 않음의 허공 꽃을 설하고, 일승에서는 움직이지 않음의 허공 꽃을 설하니 변계가 곧 보현의 머무름 없는 별교의 구경법인 것이다.

법융기
『법기』에 이른다. ‘세 가지 자성은 모두 범부의 경계이다’라는 것은 의타와 원성은 범부의 경계가 아니나, 그러나 “이것이 변계이며, 이것이 의타이고 원성이다.”라고 설하여 보여주기 때문에 범부가 성품 없음에 들어가는 까닭이다.

‘이해의 문(解門)을 기준으로 한 까닭에 세 가지 자성 없음을 따로 세운 것’에서,

006_0826_b_01L
眞記云遍計無相依他無生乃至三
006_0826_b_02L法以外更無訂敎者直辨一乘訂敎
006_0826_b_03L最難故寄彼熟敎所論三性示此義
006_0826_b_04L就一遍計無相中有解門行門也
006_0826_b_05L解門者離遍計情有入依他似有等
006_0826_b_06L行門者情有即是眞位也故康
006_0826_b_07L藏云緣無別緣以體盡 [198] 是故差別
006_0826_b_08L緣起即是甚深土海也

006_0826_b_09L
大記云 *弟三問答中問意則因前
006_0826_b_10L聖者隨遍計之言引論而難也
006_0826_b_11L中從初至別義如是者正答言現之
006_0826_b_12L若約實說下兼答意具之問也
006_0826_b_13L說空花者如淨眼人不見空花
006_0826_b_14L其病眼說其空花第下之一第三七張
006_0826_b_15L聖者亦尒已達遍計之空隨遍計人
006_0826_b_16L建立三性也一云此空花喩通於五
006_0826_b_17L謂小乘中說人空之空花乃至
006_0826_b_18L頓敎中說一念不生之空花一乘之
006_0826_b_19L中不動空花遍計即是普賢無住別
006_0826_b_20L敎究竟法也

006_0826_b_21L
法記云三種自性皆是凡夫境界者
006_0826_b_22L依他圓成非凡夫境然爲說示此
006_0826_b_23L是遍計此是依圓故凡夫得入無性
006_0826_b_24L故也約解門故別立三無性者

006_0826_c_01L
이해의 문 가운데 세 가지 자성 없음은 무엇인가?
이무理無가 사유似有에 미치지 못하고, 무성無性이 수연隨緣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숙교 중에서는 삼계가 오직 무명이 지은 바이고, 또는 진실과 허망이 화합하여 지은 바라고 하고, 또는 오직 하나의 진심이 지은 바라고 한다. 이 세 거듭의 지은 바를 버려서 없앰의 이치를 나타내기 때문에 변계의 이무理無가 진실과 허망의 사유似有에 미치지 못하고 이 사유의 무성이 진여의 수연에 미치지 못하는 까닭이다.158)

‘수행의 문(行門)을 기준으로 한 까닭에 세 가지 자성 이외에 세 가지 자성 없음을 세우지 않은 것’에서,
수행의 문 중에 만약 따로 세 가지 자성 없음을 세우지 않는다면 무엇을 기준으로 하여 세 가지 자성 없음을 삼는가?
다만 없음을 말미암기 때문에 세 가지 자성 없음이라고 할 뿐이다. 만약 있음이라면 어떻게 자성 없음이겠는가?
만약 그렇다면 무슨 까닭에 (『수현기』에서) 여섯 째 지地를 주석하여 이르기를, “실제를 버려서 경계가 없어질 때 곧 일부분의 모습 없음의 성품을 얻는다. 모습 없음이 나타나기 때문에 오직 식識이어서 영상과 경계가 함께 곧 생겨나지 않음을 성품 없음의 성품이라고 이름한다. 이것이 수행의 문의 유식관법이다.”159)라고 하였는가?
다만 버림을 말미암기 때문에 비로소 없음을 아는 것뿐이다.

도신장

『도신장』에 이른다. 일승 중에서 만약 의타가 아니면 변계가 없다라면 변계는 결과이고 의타는 원인이 된다. 만약 변계가 아니면 의타가 없다라면, 의타는 결과이고 변계는 원인이 된다. 이러한 뜻이 곧 연기일 뿐이다.
변계가 연기가 된다면 그루터기 중에 진짜 귀신(實鬼)이 있는 것인가?
그루터기 중에 비슷한 귀신과 진짜 귀신으로 삼는 뜻이 있음을 말미암기 때문에 계탁하여 귀신으로 삼는 것이다. 만약 그루터기에 진짜 귀신으로 삼는 뜻이 없다면 마땅히 그루터기 중에서 계탁하여 진짜 귀신으로 삼음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운운.

006_0826_c_01L解門中三無性云何理無不及似
006_0826_c_02L無性不及隨緣謂熟敎中三界
006_0826_c_03L唯是無明所作又云眞妄和合所作
006_0826_c_04L又云唯一眞心所作遣此三重所作
006_0826_c_05L以現滅理故遍計之理無不及眞妄
006_0826_c_06L之似有此似有之無性不及眞如之
006_0826_c_07L隨緣故也約行門故三性以外
006_0826_c_08L立三無性者行門中若不別立三
006_0826_c_09L無性者約何爲三無性耶只由無
006_0826_c_10L故得云三無性耳若是有者云何
006_0826_c_11L無性耶若尒何故六地䟽云
006_0826_c_12L實境滅時即得一分 [199] 無相性無相現
006_0826_c_13L唯識想境並即不生名得無性
006_0826_c_14L此是行門唯識觀耶只由遣故
006_0826_c_15L方知無耳

006_0826_c_16L
道身章云一乘中若非依他無遍
006_0826_c_17L則遍計是果依他爲因若非
006_0826_c_18L遍計無依他則依他是果遍計爲
006_0826_c_19L如是之義即是緣起耳
006_0826_c_20L計爲緣起者第下之一第三八張
006_0826_c_21L中有實鬼耶杌中由有爲似鬼
006_0826_c_22L及實鬼之義故計爲鬼也若杌中
006_0826_c_23L無爲實鬼之義應無杌中計爲實
006_0826_c_24L「則」作「別」{乙}

006_0827_a_01L또 이른다. 세 가지 자성을 버려서 세 가지 자성 없음을 변별하는 것은 두 종宗이 같지 않다. 시교에서는 다만 변계를 버린다. 또 단지 집착하는 바(所執)로 변계를 삼고 집착하는 마음(能執)은 의타에 속하여 거두어진다.

만약 그렇다면 세 가지 자성을 버려서 세 가지 자성 없음을 나타내는 것은 무엇인가? 다만 변계 중의 세 가지 자성을 버릴 뿐이다. 이른바 푸른색 등을 계탁하여 실제라고 하는 것은 변계의 변계가 된다. 집착하는 마음을 계탁하여 실제로 삼는 것은 의타 중의 변계가 된다. 만약 원성을 계탁하여 실제로 삼으면 원성 중의 변계가 된다. 이 종은 이해의 문(解門)에 해당한다. 종교에서는 삼성 모두를 버리고 또한 계탁하는 마음을 합하여 변계라 한다. 이것은 수행의 문(行門)에 해당한다. 또 이른다. 세 가지 자성을 하나(一際)로 합하는 것은 세 가지 자성이 곧 세 가지 (자성) 없음인 것과, 셋이 아닌 수행의 문의 세 가지 자성을 기준으로 하여, 세 가지 자성의 원융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이것은 방편으로 나아간 것이니 일승의 다함없는 성품을 나타내기 위함일 뿐이다.

대기
『대기』에 이른다. ‘오히려 두 자성 이외에 진실이 없으니’라는 것은, 모습 없는 지혜로써 변계로 집착하는 바 분별의 경계를 버릴 때에 능히 취하는 의타도 함께 곧 생겨나지 않는다. 모습이 나타남이 없기 때문에 이 외에 달리 원성의 실제가 없는 것이다. ‘모습 없는 평등한 지혜가 앞에 나타나’란 모습 없는 지혜가 나타남에 의타의 마음과 경계가 모두 없기 때문에 ‘모습 없는 평등한 지혜가 나타나’라는 것이다. ‘상대할 만한 법이 없고’란 의타가 생겨남이 없어서 진리가 나타날 때에 다시 원성의 진실이 없기 때문이다.

법융기
『법기』에 이른다. ‘반드시 가르침을 세우는 이유를 알아야 한다’란, 앞에서 비록 증분과 교분의 중도와 세 가지 자성 외에 세 가지 자성 없음이 없는 도리를 나타내었으나, 만약 가르침을 세우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하면 이것이 숙교의 세 가지 자성과 세 가지 자성 없음의 중도인지, 이것이 일승의 중도인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006_0827_a_01L鬼故云云 又云遣三性辨三無性
006_0827_a_02L兩宗不同始敎但遣遍計又但以
006_0827_a_03L所執爲遍計能執之心屬依他攝
006_0827_a_04L若尒遣三性現三無性者何但遣
006_0827_a_05L遍計中三性耳所謂計靑色等謂
006_0827_a_06L實爲遍計遍計計能執心爲實
006_0827_a_07L爲依他中遍計若計圓成爲實
006_0827_a_08L圓成中遍計此宗當解門終敎三
006_0827_a_09L性皆遣亦能計心合爲遍計
006_0827_a_10L當行門又云合三性一際者約三
006_0827_a_11L性即三無非三之行門三性示現
006_0827_a_12L三性圓融此是方便所趣爲現一
006_0827_a_13L乘無盡性耳

006_0827_a_14L
大記云尙二性以外無有眞實等者
006_0827_a_15L以無相智遣遍計所執分別境時
006_0827_a_16L取依他並即不生無相現故此外
006_0827_a_17L無別圓成實也無相等智現前者
006_0827_a_18L相智現依他心境皆無故云無相等
006_0827_a_19L智現也無法可對者依他無生眞理
006_0827_a_20L現時更無圓成眞實故也

006_0827_a_21L
法記云須解立敎所由者前雖已現
006_0827_a_22L訂敎中道及三性外無三無性之道
006_0827_a_23L若不解其立敎所由則不得知此
006_0827_a_24L是熟敎三性三無性之中道此是一

006_0827_b_01L또 숙교 중에 비록 세 가지 자성을 버려서 세 가지 자성 없음을 나타낸다고 하나 다만 그 모습을 융섭하여 진실의 본성에 돌아가게 하는 것일 뿐이고, 일승이라야 비로소 체體가 융섭된 진실을 말하기 때문이다. 곧 이것은 앞에 있는 기둥(露柱)의 이름과 모습이 바로 해인(삼매)의 구경의 법체이기 때문에 “증분과 교분의 두 법이 항상 중도에 있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릇 들은 바에 대해서 삼가 말대로 뜻을 취하지 말고 반드시 이유를 알아야 한다.

도신장

『도신장』에 이른다. 일승의 연기법은 망정(情)으로 미칠 바가 아니다. 비록 망정으로 미칠 바가 아니나 멀리서 구할 것도 아니니, 망정을 돌이키면 곧 이것이다.
망정을 돌이키는 방편은 무엇인가?
방편은 한량없으나 그 요점은 보는 곳을 따라서 마음에 집착하지 않음이 그것이다. 들은 법을 따라서 문장대로 취하지 않고 곧 그 이유를 깨달으며 또 법의 실상을 깨닫는 것이다.

이 말은 무엇인가?
무릇 성인의 말씀이 일어나는 것이 모두 근기와 연緣의 말미암은 바이다. 말하자면 가르침은 좋은 약이라 중생의 병을 다스릴 수 있다. 만약 생겨남으로 다스릴 수 있으면 생겨남으로 하고, 만약 생겨나지 않음으로 다스릴 수 있으면 생겨나지 않음으로 한다. 만약 법이 결정코 생겨남이나 생겨나지 않음이라면, 생겨남으로 옳음을 삼으면 생겨나지 않음은 곧 그르고, 생겨나지 않음으로 옳음을 삼으면 생겨남이 옳지 않다. 그 법은 생겨남과 생겨나지 않음에 있지 않기 때문에, 능히 생겨남과 생겨나지 않음으로써 병을 다스림에 걸림이 없다.160)

십구장

『십구장』에서 두 번째 구를 풀이하여 이른다.161) 두 번째, 문장을 따라서 뜻을 취함에 다섯 종류의 허물이 있다는 것은 운운. 만약 범부의 이름을 듣고 성자 등이 아니라고 한다면 곧 다섯 가지 허물이 있다. 첫째는 바르게 믿지 않음이고, 둘째는 용맹함에서 물러남이고, 셋째는 남을 속임이고, 넷째는 부처님을 비방함이고, 다섯째는 법을 가벼이 여김이다.162)

006_0827_b_01L乘之中道故也第下之一第三九張
006_0827_b_02L熟敎中雖云遣三性現三無性但融
006_0827_b_03L其相令歸眞性耳一乘方云體融
006_0827_b_04L眞故即此在前露柱名相正是海印
006_0827_b_05L究竟法體故云訂敎兩法常在中道
006_0827_b_06L是故凡於所聞愼勿如言取義須解
006_0827_b_07L所由也

006_0827_b_08L
道身章云一乘緣起法非情所及
006_0827_b_09L雖非情及而不遠求反情即是
006_0827_b_10L反情方便云何方便無量
006_0827_b_11L其要者隨所見處1) [282] 心爲是
006_0827_b_12L隨所聞法不取如文即能解其所
006_0827_b_13L又解法實相此言何耶
006_0827_b_14L凡聖言起皆機緣之所由謂敎是
006_0827_b_15L良藥能治生病若以生可治則以
006_0827_b_16L若以不生可治則以不生若法
006_0827_b_17L定是生不生者以生爲是不生即
006_0827_b_18L不生爲是生則非是其法不在
006_0827_b_19L於生不生故能以生不生治病
006_0827_b_20L無障

006_0827_b_21L
十句章釋2)弟二句云二隨文取義
006_0827_b_22L有五種過者云云 若聞凡名非聖
006_0827_b_23L等者即有五過一不正信二退
006_0827_b_24L勇猛三詐他四謗佛五輕法也

006_0827_c_01L
대기
『대기』에 이른다. 네 번째 문답 가운데 망정을 기준으로 함과 이법을 기준으로 함에 통틀어 근거해서 질문한 까닭에 다름과 다르지 않음으로써 차례대로 답한 것이다. 혹은 앞에서는 세 가지 자성과 세 가지 자성 없음의 설을 기준으로 하여 증분과 교분의 중도를 나타내었고, 지금은 근본과 지말이 서로 돕는 등의 뜻을 기준으로 하여 중도를 나타내는 까닭에 질문하는 것이고, 답 가운데 다름과 다르지 않음의 뜻은 모두 이법의 문을 기준으로 한 것이라고 한다. 혹은 앞에서는 증분과 교분을 기준으로 하여 하나의 분별없는 뜻을 밝힌 까닭이고, 만약 그렇다면 증분과 교분은 어떻게 다른가, 이와 같이 묻는 것이라고 한다.

표훈 대덕의 뜻은 이 네 번째 문답 이하에 네 단계의 뜻이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 위에서 말한 바’부터 ‘그러므로 다르지 않다’까지는 ‘표시함(標)’이다. ‘ 만약 이와 같다면’부터 ‘둘이 함께 서로 방해하지 않는다’까지는 ‘풀이함(釋)’이다. ‘말함과 말하지 않음’ 등은 ‘맺음(結)’이다. ‘그러므로 경에 이르기를’ 아래는 ‘인용하여 증명함(引證)’이다.

표시함 가운데 처음 표시함은 증분과 교분이 상대하여 다른 뜻을 밝히고, 뒤의 표시함은 근본과 지말이 상대하여 다르지 않음을 밝힌다. 두 번째, 풀이함 가운데 다섯이 있다. 첫째, ‘ 만약 이와 같다면’부터 ‘근본과 다르지 않다’까지는 근본과 지말의 상대를 풀이한다. 둘째, ‘근본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부터 ‘말하지 아니하되 말한다’까지는 고요함과 작용함이 걸림 없는 것으로 뜻과 설함의 상대를 풀이한다. 셋째, ‘말하지 아니하되 말하기 (때문에)’부터 ‘말하는 것이 곧 말하는 것이 아니다’까지는 위의 증분 또한 설할 수 있고 교분 또한 설할 수 없는 뜻을 풀이한 것이다. 넷째, ‘말하는 것이 곧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부터 ‘말하지 않는 것을 곧 얻을 수 없다’까지는 증분과 교분의 두 법의 성性이 중도에 있어서 한 맛인 뜻을 풀이한다. 다섯째, ‘둘을 함께 얻을 수 없기 (때문에)’는 갖가지가 장애하지 않고 한 맛임을 나타내기 때문에 설함과 설하지 않음을 갖춘다. 이상 다섯 단계의 풀이하는 구절은 오중해인에 준한 것이다.

세 번째, 맺음에서 ‘말함과 말하지 않음’의 뜻은 두 가지 큼(二大)163)을 설하는 것이다.

006_0827_c_01L
大記云*弟四問答中通據約情約
006_0827_c_02L理問故以別不別如次答也一云
006_0827_c_03L約三性三無性之詮現訂敎中道
006_0827_c_04L約本末相資等義現中道故問也
006_0827_c_05L中別不別義第下之一第四○張 並約
006_0827_c_06L理門也一云前約訂敎明一無分別
006_0827_c_07L之義故若爾訂敎云何別耶如是問
006_0827_c_08L訓德之意則此*弟四問答以下
006_0827_c_09L有四段義謂從問如上所言至是故
006_0827_c_10L不別者標也問若如是至二俱不相
006_0827_c_11L防者釋也說與不說等者結也
006_0827_c_12L故經云下引訂也標中初標訂敎相
006_0827_c_13L以明別義後標本末相對以明
006_0827_c_14L不別二釋中有五一問若如是至
006_0827_c_15L與本不異者釋本末相對二與本不
006_0827_c_16L異至不說而說者是寂用無㝵釋義
006_0827_c_17L說相對三不說而說至說則非說者
006_0827_c_18L釋上訂分亦是可說敎分亦是不可
006_0827_c_19L說義四說即非說至不說即不可
006_0827_c_20L得者釋訂敎兩法性在中道一味之
006_0827_c_21L義也五二俱不可得者現種種不㝵
006_0827_c_22L一味故具說不說也此上五段釋句
006_0827_c_23L准於五重海印也三結中說與不說
006_0827_c_24L「着」作「著」{乙}「弟」作「第」{乙}次同

006_0828_a_01L‘생겨남과 생겨나지 않음’은 ‘서원이 잘 결정되어 있다(願善決定)’에서 여섯 가지 결정되어 있음의 자리164)이다. ‘움직임과 움직이지 않음’은 근본의 들어감과 아홉 가지 들어감 등이다.165)

대기
『대기』에 이른다. 다섯 번째 문답에서 질문의 뜻은 앞의 문답 가운데 다만 연기가 자성이 없어서 근본과 다르지 않은 것만을 밝히고, 그 근본이 지말과 다르지 않은 것을 나타내지 아니한 까닭에 이 뜻을 드러내고자 이 질문을 일으킨 것이다. 답 가운데 먼저 그 뜻을 총괄하여 답한다. ‘만약……한다면’은 거듭 묻는 것이다. ‘깨달은 것이 말(言)에 있다’ 아래는 널리 답한 것이다. 이 널리 답한 것에서 앞의 다름과 다르지 않음의 뜻을 함께 나타낸다. 그 가운데 둘이 있다. 먼저 교분과 증분의 중도를 밝히고, 나중에 ‘또한 바르게 설한’ 아래는 바른 뜻(正義)과 바른 말(正說)의 둘이 없는 중도를 나타낸다. 이 바른 뜻과 바른 말은, 혹은 바른 뜻은 안으로 증득함이고 바른 말은 밖으로 교화함이라고 한다. 그러나 바른 뜻은 일승이고 바른 말은 삼승이다.

‘모든 법의 실상實相은 말에 있지 않으니’에서,
말로 뜻을 삼으면 말이 중도인데 어째서 실상이 말에 있지 않다고 하는가?
말과 뜻이 구경인 곳에는 말이 바로 뜻이니 곧 중도인 까닭에 말에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근기의 이익에 있으므로 이름에 진성이 없으며’라는 것은, ‘진성에 있지 않으니’를 근거로 하여 진성이 없음을 삼은 것이 아니다. 자성의 실체가 없음을 기준으로 한 까닭에 ‘진성이 없으며’라고 한 것이다. ‘(제법의 실상은) 이름의 성품을 여의었으므로 이름하되 이름이 없다’ 아래는 ‘모든 법의 실상實相은 말에 있지 않으니’의 뜻을 근거로 하여 나타낸 것이다. ‘이름에 진성이 없으므로’ 아래는 ‘말의 법은 진성眞性에 있지 않으니’의 뜻을 근거로 하여 나타낸 것이다.

법융기
『법기』에 이른다. ‘중도는 말과 말 아닌 것에 통한다. 무슨 까닭인가? 모든 법의 실상實相은 말에 있지 않으니’ 등에서,
중도와 실상이 어떻게 다른가?
중도는 이미 말과 말 아닌 것에 통한다고 한 까닭에 증분과 교분에 통한다.

006_0828_a_01L說二大生與不生願善決定六決
006_0828_a_02L定處動與不動者根本入九入等也
006_0828_a_03L大記云 1)弟五問答中問意則前問
006_0828_a_04L答中但明緣起無性與本不異不現
006_0828_a_05L其本與末不異故欲現此義起此問
006_0828_a_06L答中先摠答其義若爲者牒問
006_0828_a_07L所訂在言下廣答此廣答中并現
006_0828_a_08L前中別不別之義於中有二先明
006_0828_a_09L敎訂中道後亦可正說下現正義正
006_0828_a_10L說無二中道第下之一第四一張 此正
006_0828_a_11L義正說者一云正義內訂正說外化
006_0828_a_12L然正義則一乘正說則三乘也
006_0828_a_13L諸法實相不在言中者以言爲義
006_0828_a_14L則言是中道何云實相不在言耶
006_0828_a_15L言義究竟之處言正是義即是中道
006_0828_a_16L故云不在言也在機益故名無眞性
006_0828_a_17L非是牒上不在眞性爲無眞性
006_0828_a_18L約無自性之實故云無眞性也離名
006_0828_a_19L性故名而無名下牒現諸法實相
006_0828_a_20L不在言中之義名無眞性故下牒現
006_0828_a_21L言說之法不在眞性之義也

006_0828_a_22L
法記云中道者通言非言何以故
006_0828_a_23L諸法實相不在言中等者中道與
006_0828_a_24L實相何別中道則旣云通言非言

006_0828_b_01L실상은 이미 말에 있지 않은 까닭에 오직 증분일 뿐이다. 말하자면 뜻으로 가르침을 삼으면 가르침 밖에 뜻이 없다. 가르침에 곁이 없기 때문에 가르침이 중도이다. 뜻 또한 이와 같기 때문에 증분이 중도이다.

대기
『대기』에 이른다. 여섯 번째 문답에서 ‘앞과 뒤의 두 뜻’이란 ‘또한 바르게 말한 법 중에는’을 기준으로 하여, 위는 앞의 뜻이고 아래는 뒤의 뜻이다. ‘근본과 지말이 상즉’ 등에서, 근본은 부처님이며 일승이고 지말은 중생이며 소승ㆍ삼승이다. 이들은 모두 법성의 집안의 진실한 덕용이기 때문이다. ‘이름(名)과 뜻(義)이 서로 객客이 됨으로써’는 일체 모든 법이 이름과 뜻을 벗어나지 않으니, 이름과 뜻의 자성에 고정되어 집착하는 사람을 위하여 그 서로 객이 되어 자성이 없는 도리를 나타낸 것이다. ‘자체의 이름 없는 참된 근원’은, 바로는 증분이며 겸으로는 연기이니 머무름 없는 별교이다.

참된 근원은 곧 근본과 지말이 서로 도와서 나타나는 바이기 때문에 깊다면, 서로 돕는 근본은 비록 증분이라 할지라도 오히려 얕은가?
우선 삼승을 따라서 이 말을 할 뿐이고, 만약 실제를 기준으로 하면 한가지로 한 자리이다.
이 중도로써 중생을 교화하는 것은 구경은 바로 일승이기 때문에 “교화함과 교화됨의 핵심(宗要)이 여기에 있다.”라고 한 것이다.

법융기
『법기』에 이른다. ‘근본과 지말이 상즉하고’는 (다음과 같다.) 숙교에서는 근본에 의거하여 일어난 지말을 없애 근본으로 되돌이켜야 비로소 한마음을 드러낸다. 그것에 기대어서 일승의 증분과 교분의 두 법의 성이 중도에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이름(名)과 뜻(義)이 서로 객客이 됨’은 (다음과 같다.) 초교에서는 이름과 뜻이 서로 객이 됨으로써 이름과 뜻의 무아의 도리를 나타낸다. 그것에 기대어서 일승의 증분과 교분의 두 법의 자성이 없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006_0828_b_01L通於訂敎實相則旣不在言故
006_0828_b_02L唯是訂也謂以義爲敎敎外無義
006_0828_b_03L敎無側故敎是中道義亦如是故
006_0828_b_04L是訂中道也

006_0828_b_05L
大記云 *弟六問答中前後兩義者
006_0828_b_06L約亦可正說法中以上爲前義以下
006_0828_b_07L爲後義也本末相即等者本則佛也
006_0828_b_08L一乘也末則衆生也小乘三乘也
006_0828_b_09L等摠是法性家內眞實德用故也
006_0828_b_10L義互爲客者一切諸法不出名義也
006_0828_b_11L爲定執名義自性之人現其互相爲
006_0828_b_12L客無有自性之道理也自體無名
006_0828_b_13L眞源者第下之一第四二張 正是訂分
006_0828_b_14L兼是緣起無住別敎也眞源則本
006_0828_b_15L末相資之所現故深也相資之本
006_0828_b_16L云是訂而猶淺耶且順三乘作
006_0828_b_17L是說耳若約實則同是一處也以此
006_0828_b_18L中道化衆生者究竟正是一乘故云
006_0828_b_19L能化所化宗要在此也

006_0828_b_20L
法記云本末相即者熟敎中泯依本
006_0828_b_21L所起之末還歸於本方現一心寄彼
006_0828_b_22L以現一乘訂敎二法性在中道也
006_0828_b_23L義互爲客者初敎中以名義互2) [283]
006_0828_b_24L現名及義無我道理寄彼以現一乘

006_0828_c_01L‘드러나는 도리는 다르지 않으나 설명하는 방편이 다르다’라는 것은, 초교와 숙교가 세우는 바 뜻은 다르나 그것에 기대어서 나타나는 바 무아와 중도의 뜻은 일승의 증분과 교분의 둘이 없는 뜻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대기)166)
일곱 번째 문답에서 질문의 뜻은 곧 차별을 없애서 중도에 돌아가는 것은 종교 가운데 이 뜻을 논할 수 있으나, 그러나 맨 끝을 기준으로 한 까닭에 ‘이 뜻은 돈교頓敎의 근본(宗)에 해당하는데’라고 한 것이다. 대답의 뜻은 곧 유마는 문수보살의 말을 떨쳐 버리고 오로지 적막한 가운데에서 침묵하나, 여덟 번 모임(八會)167)의 부처님의 침묵은 말을 움직이지 않는 침묵이기 때문에 다르다. 말하자면 그 말함과 말하지 않음, 이름과 뜻, 근본과 지말을 없애서 중도에 돌아가게 하는 것은 또한 삼승의 설에 따르는 것이다. 만약 일승의 실제의 뜻을 기준으로 하면 이름과 뜻, 근본과 지말을 움직이지 않음이 곧 법성의 집 안의 진실한 덕이기 때문에 돈교의 근본(宗)에 해당하지 않는다.

법융기
『법기』에 이른다. ‘우선 분별을 막기 위하여 삼승의 설에 따른 것이니’등은 바로 삼승의 사람이 그 익숙한 바를 버리고 일승에 들어가게 하면 믿어서 받아들이기 어려울까 염려한 까닭에 방편으로 그 집착에 기대어 따라서 분별을 막는 것이다. 어떤 이는 이른다. 비록 아래의 사교四敎가 모두 진실한 덕이지만 만약 소승과 초교 등이 곧 일승이라고 말하면 그 익힌 바를 드러내어 분별을 더하므로 저 삼승의 차별하는 병이 다하는 돈교의 뜻에 기대어 설하였기 때문에, “우선 분별을 막기 위하여 삼승의 설에 따른 것이니, 대개 지혜로운 이의 수승하고 오묘한 능력이다.”라고 한 것이다.
3. 귀가歸家
‘말씀대로 수행하여’부터 ‘이름하여 집(家)이라고 한다’까지168)

대기
『대기』에 이른다.

006_0828_c_01L訂敎二法無自性義也所現道理不
006_0828_c_02L異能詮方便別者初敎熟敎所立義
006_0828_c_03L而寄彼所現無我及中道之義
006_0828_c_04L現一乘訂敎無二之義故也

006_0828_c_05L
*弟七問答中問意則泯差別歸中道
006_0828_c_06L終敎之中得論此義然約最極
006_0828_c_07L云此義當頓敎宗也答意則維摩拂
006_0828_c_08L文殊之言默於一寂八會佛默不動
006_0828_c_09L言說之默故別也謂泯其說與不說
006_0828_c_10L名義本末令歸中道者且順三乘之
006_0828_c_11L若約一乘實意則不動名義本末
006_0828_c_12L即是法性家內眞實德故不當頓敎
006_0828_c_13L宗也

006_0828_c_14L
法記云且護分別故順三乘說等者
006_0828_c_15L直令三乘之人第下之一第四三張
006_0828_c_16L其所習入於一乘恐難信受故以
006_0828_c_17L方便寄順其執護分別也一云雖下
006_0828_c_18L四敎摠是實德若言小乘及初敎等
006_0828_c_19L即是一乘則稱其所習增分別故
006_0828_c_20L彼三乘差別病盡頓敎義說故云且
006_0828_c_21L護分別故順三乘說盖是智者勝
006_0828_c_22L妙能也

006_0828_c_23L
如說修行 名曰爲家大記云如說
006_0828_c_24L「弟」作「第」{乙}次同「爲」作「憑」{乙}

006_0829_a_01L‘말씀대로 수행하여 성자의 뜻을 얻음’이란, 수행은 깨달음에 나아가야 비로소 옳으니 모든 부처님께서 미혹한 무리가 필경에 마침내 법성의 집에 이르게 하려는 까닭이다. (이것이) 말로 된 가르침을 시설하는 큰 뜻이다. ‘법성의 참된 공空’은 구경을 기준으로 하면 증분의 법성의 집이다. 그러나 이 가운데의 뜻은 증분과 교분을 나누지 않고 총괄하여 수행자의 수행방편을 밝히기 때문에 증분과 교분을 통틀은 것이다. ‘법계다라니’는 증분이고 ‘인다라니의 집’ 등은 교분이니 머무름 없는 별교이다.

법융기
『융기』에 이른다. ‘집(宅)’은 증분이고 ‘집(舍)’은 연기분이다. ‘법계다라니의 집’은 이법이고 ‘인다라니와 미세’ 등은 현상(事)이다. 말하자면 한 법을 기준으로 하여 법계를 온전히 거두어 곁이 없고 남음이 없는 것은 법계다라니이다. 하나하나의 법법마다 거듭거듭 서로 거두어 끝이 없고 끝이 없는 것은 인다라니이다. 하나의 법에 일체 모든 법이 가지런히 함께 나타나는 것은 미세(다라니)이다. ‘성자가 의거하여 머무르는 곳이므로 이름하여 ‘집(家)’이라고 한다’라는 것은 십현문이다.
이 십현문은 교분이 되는가, 또한 증분인가?
만약 자신의 깨달음을 기준으로 하면 증분이고 남을 위해 시설한 것이라면 교분이다.

『법계도기총수록』 하권 1

006_0829_a_01L修行得聖者意者修行趣訂方得
006_0829_a_02L佛欲令群迷畢竟終至法性家故
006_0829_a_03L設言敎之大意也法性眞空者約究
006_0829_a_04L則訂分法性家也然此中意不分
006_0829_a_05L訂敎 捴明行者修行方便故通訂
006_0829_a_06L敎也法界陁羅尼者訂分因陁羅
006_0829_a_07L尼家等者敎分無住別敎也

006_0829_a_08L
融記云宅者訂分舍者緣記分也
006_0829_a_09L法界陁羅尼家者理也因陁羅尼及
006_0829_a_10L微細等者事也謂約一法全攝法界
006_0829_a_11L無側無遺者法界陁羅尼也一一法
006_0829_a_12L重重相攝無盡無盡者因陁羅尼
006_0829_a_13L於一法中一切諸法齊頭並現者
006_0829_a_14L微細也聖者所依住故名曰爲家
006_0829_a_15L十玄門也此十玄門爲是敎分
006_0829_a_16L亦訂分耶若約自訂則訂分
006_0829_a_17L他施設則敎分也第下之一第四四張

006_0829_a_18L
法界圖記叢髓錄卷下之一
  1. 1)이상의 「법성게」 분과를 도시하면 다음과 같다.釋文意科門約自利行現示證分顯緣起分指緣起體約陀羅尼理用 以辨攝法分齊卽事法明攝法分齊約世時示攝法分齊約位以彰攝法分齊總論上意利他行辨修行者方便及得利益明修行方便辨得利益法性偈①②③④⑤⑥⑦⑧⑨⑩⑪⑫⑬⑭⑮⑯⑰⑱⑲⑳㉑㉒㉓㉔㉕㉖㉗㉘㉙㉚
  2. 2)다음의 ‘연기란(緣起者)’부터 ‘일승을 목표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一乘所目故)’까지는 지엄의 『공목장』(T45, 563c9~29)을 인용한 것이다.
  3. 3)이 『십지경론』의 인용문은 지엄이 『공목장』(T45, 563c12~22)에서 세친의 『십지경론』(K15, 28c6~19; T26, 142b12~23)을 인용한 부분이다. 여기 인용된 『십지경론』 내에서 또 인용된 경은 『십지경론』이 소의로 한 『십지경』(K15, 28b18~c3; T26, 142b2~9)이다.
  4. 4)『십지경』(『십지경론』, K15, 28b18~19; T26, 142b2).
  5. 5)『십지경』(『십지경론』, K15, 28b19; T26, 142b3).
  6. 6)육입六入에서부터 유有에 이르는 것이다 : 십이연기 중 육입六入ㆍ촉觸ㆍ수受ㆍ애愛ㆍ취取ㆍ유有의 여섯 지支를 가리킨다.
  7. 7)‘내지乃至’로 생략된 부분은 “육입을 이루고 나서는 안과 밖이 상대하여 촉觸을 발생시킨다. 촉觸의 인연 때문에 수受를 발생시킨다. 깊이 수受를 좋아하는 까닭에 갈애渴愛를 발생시킨다. 갈애가 증장하는 까닭에 취取를 발생시킨다. 취가 증장하는 까닭에 다시 뒤의 유有를 일으킨다.(成六入已。 內外相對生觸。 觸因緣故生受。 深樂受故生渴愛。 渴愛增長故生取。 取增長故復起後有。)”이다. 『십지경론』(K15, 28b20~22; T26, 142b18~20).
  8. 8)『십지경』(『십지경론』, K15, 28b19~c2; T26, 142b3~8).
  9. 9)인연의 자상自相에 대해서 세 가지로 설하고 있는 이상의 인용문은 지엄이 『공목장』에서 인용한 세친의 『십지경론』 부분을 의상이 재인용한 것이다.(권하 1 각주 3)과 같음.) 그런데 그 내용에 있어서 글자나 구절에 약간의 차이가 보이기도 한다. 의상은 『십지경론』이나 『공목장』의 내용에 『십지경』 원문을 보충하여 인용함으로써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10. 10)지엄이 『공목장』에서 『십지경론』(K15, 68b2; T26, 169a17)을 인용한 부분이다. 이 구절은 『십지경』 중 제6현전지의 “삼계가 허망하니 단지 한마음이 지은 것이다.”라는 경문을 해석하는 부분이다. 『육십화엄』(K8, 178c24~25; T9, 558c9~10) 참조.
  11. 11)『공목장』에는 이 아래에 ‘緣起觀門。 有如是益。’이 있다.
  12. 12)위의 ‘연기란(緣起者)’부터 여기 ‘일승을 목표로 하는 바이기 때문이다(一乘所目故)’까지가 의상이 지엄의 『공목장』(T45, 563c9~29)을 인용한 부분이다. 하권 1 각주 2) 참조. 『공목장』에는 ‘일승을 목표로 하는 바이기 때문이다’가 ‘일승을 목표로 하는 바가 되기 때문이다(爲是所目故)’로 되어 있다.
  13. 13)이상을 열 가지 거듭으로 십이인연을 관하는 것(十重十二因緣觀)이라고 한다. 경론에서의 해당 위치는 다음과 같다. 『십지경론』(K15, 70b15~19; T26, 170c4~8), 『육십화엄』(K8, 179b17~b20; T9, 559a24~27). 이 가운데 열 번째 ‘있음과 다함을 따르는 관(隨順有盡觀)’은 『육십화엄』에는 ‘없음과 다함의 관(無所有觀)’으로 되어 있다.
  14. 14)이 인용문(“간략히~거두어진다.”)은 지엄의 『공목장』 「緣生章」(T45, 568b3~7)에서 「십지품」 중 제6지 현전지現前地의 보살이 십중十重으로 십이인연을 관하는 구절에 대해 설명한 부분을 의상이 인용한 것이다.
  15. 15)「瓔珞經』 : 『菩薩瓔珞本業經』의 줄임말이다. 현존본은 요진晀秦의 축불념竺佛念이 건원建元 12년에서 14년(376~378) 간에 번역한 것으로 2권본이다. 『화엄경』과 깊은 관련이 있으며, 『범망경』과 함께 동아시아불교의 대승계율에 있어서 중요 경전으로 여겨져 왔다.
  16. 16)열 번의 인연 : 『菩薩瓔珞本業經』 「賢聖學觀品」(K14, 381a21~b5; T24, 1015a22~28)에서 열 가지 관하는 마음이 관하는 법(十觀心所觀法) 중 여섯 번째 법의 연기에 통달하는 지혜(達有法緣起智)를 설하는 부분을 가리킨다. 『영락경』의 열 번의 인연관은, ① 아견我見, ② 심위心爲, ③ 무명無明, ④ 상연유相緣由, ⑤ 조성助成, ⑥ 삼업三業, ⑦ 삼세三世, ⑧ 삼고三苦, ⑨ 성공性空, ⑩ 박생縛生의 십이인연을 관하는 것이다.
  17. 17)이 구절은 지엄의 『공목장』(T45, 568b7~8)을 인용한 것이다.
  18. 18)세친의 『십지경론』(K15, 70b15~71c4; T26, 170c4~171b15)에서 『십지경』의 제6현전지 중 열 가지의 인연관因緣觀에 대하여 해석한 부분을 가리킨다.
  19. 19)아래에서 열 개의 동전을 세는 법(數十錢法)을 설하는 부분을 가리킨다. 『일승법계도』(H2, 6a22~7b7). 여기에서 의상은 만약 연기의 실상인 다라니법을 관觀하고자 한다면 동전 열 개를 세는 법을 깨달아야 한다고 설한다. 또한 이익 얻음을 밝히는 부분에서 다라니는 아래에서 동전 열 개를 세는 법 가운데 설하는 것과 같다고 밝히고 있다.(H2, 5b21~22)
  20. 20)『총수록』 『대기』(H6, 821c15; K45, 199a12)에서 ‘了手’를 ‘일을 마친다(事畢)’는 뜻으로 풀이하고 있다.
  21. 21)이와 같은 내용은 여러 경전에 보이며, 그 한 예는 다음과 같다. “부처님께서 음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의 본성이 곧 해탈이라고 설하셨다.(佛說婬怒癡性卽是解脫)” 『유마힐소설경』(K9, 992c21; T14, 548a17~18).
  22. 22)이 내용과 상응하는 구절은 여러 경전에서 찾을 수 있으며, 그중 몇 가지 예는 다음과 같다. 『육십화엄』(K8, 259b16; T9, 636a15), “일체의 법은 문자이다.(一切法文字)”, 『대반야바라밀다경』(K1, 28b18~29a21; T5, 17c17~18a29), “연으로부터 생겨난 모든 법이 단지 이름만 있을 뿐이다.(從緣所生諸法但有名)”
  23. 23)『육십화엄』(K8, 74c12; T9, 466a27~28).
  24. 24)세친, 『섭대승론석』(K16, 1157a13~b7; T31, 195b19~c6).
  25. 25)『해심밀경』 「一切法相品」(K10, 715c3~716c13; T16, 693a5~c14).
  26. 26)『해심밀경』 「無自性相品」(K10, 716c14~722b15; T16, 693c15~697c6).
  27. 27)두 자성 : 세 가지 자성 중에 변계소집성과 의타기성을 가리킨다. 『총수록』(H6, 827a14~17; K45, 205b14~16).
  28. 28)『육십화엄』 「십지품」(K8, 184c3~4; T9, 564c11~12), “일체 법의 성품과 일체 법의 모습은 부처님이 계시거나 부처님이 계시지 않거나 항상 머물러 다르지 않다.(一切法性。 一切法相。 有佛無佛。 常住不異。)” 『십지경』(K15, 85b17~18; T26, 180c12~13)에는 “이 일체법 중의 법성은 부처님이 계시거나 부처님이 계시지 않거나 법계에 항상 머무른다.(此一切法中法性。 有佛無佛。 法界常住。)”로 되어 있다.
  29. 29)『승만경』(K6, 1369b5~7; T12, 222c23~25). 자세한 내용은 상권 2 각주 136) 참조.
  30. 30)『공목장』(T45, 562b5~c1).
  31. 31)앞의 이타행 가운데 해석한 부분을 가리킨다.(H2, 3c18~4a4; H6, 811b9~20)
  32. 32)『총수록』(H6, 813b18). 이에 해당하는 『일승법계도』 원문은 H2, 3a3~b16; H6, 810b13~811a13.
  33. 33)『일승법계도』에서 진성을 12지연기를 통해 해석하는 것으로써 진성이 오직 중생을 기준으로 한 것임을 알 수 있다는 주장은 앞서 『진기』에서 소개하는 일설과 같은 내용인데, 『진기』(H6, 777b19~c4)에서는 이 설에 대해 실제를 기준으로 하면 진성은 곧 법성일 뿐이라고 한다.
  34. 34)『대기』(H6, 776a1~19)에서 사만의四滿義, 즉 행실만行實滿ㆍ증만證滿ㆍ법만法滿ㆍ인만人滿으로 「법성게」를 구분하는 설을 가리킨다. 『대기』는 이 설을 표훈이 상원上元 원년(674)에 황복사에서 설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35. 35)『일승법계도』(H2, 4b20~21; H6, 812b1~2).
  36. 36)하권 1 각주 3) 참조.
  37. 37)네 가지 온(四陰) : 오온五蘊 가운데 색온을 제외한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을 가리킨다.
  38. 38)다섯 결과(五果) : 십이연기 가운데 식識ㆍ명색名色ㆍ육입六入ㆍ촉觸ㆍ수受의 다섯을 가리킨다. 부파불교에서 십이연기를 이해하는 대표적인 이론인 삼세양중인과설三世兩重因果說에 의하면 무명과 행行은 과거세에 지은 현재세의 원인이고, 식識부터 수受는 현재세의 결과이며(과거-현재의 인과), 애愛와 취取와 유有는 현재세에 짓는 미래세의 원인이고, 생生과 노사老死는 미래세의 결과이다.(현재―미래의 인과) 세친, 『아비달마구사론』(K27, 521a16~b13; T29, 48a23~b11), 아래 『관사십이인연관』 참조.
  39. 39)원문의 ‘오종五種’은 뒤에 바로 이어지는 ‘오과지종五果之種’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과, 과果(能熏, 所引)와 종자種子(所熏, 能引)의 관계를 고려할 때 ‘오과五果’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된다.
  40. 40)삼성三性 : 선善ㆍ불선不善ㆍ무기無記의 세 성품을 가리킨다. 상권 1 각주 51), 196) 참조.
  41. 41)여섯 지(六支) : 십이연기 중 육입六入ㆍ촉觸ㆍ수受ㆍ애愛ㆍ취取ㆍ유有의 여섯 지支를 가리킨다.
  42. 42)『화엄경탐현기』(K47, 649c14~650c16; T35, 311c9~312c18). 『육십화엄』 「십지품」에서 십대원十大願 이후 이를 바탕으로 한 행行을 설하는 가운데 두 번째와 세 번째 행상인 대자大慈와 대비大悲의 행을 둘로 나누어 풀이하는 가운데 두 번째 부분이다. 이에 해당하는 『육십화엄』(K8, 166c21~167a11; T9, 546b13~28) 부분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모든 범부의 마음이 삿된 견해에 떨어져……끝내 부처님 길의 즐거움에 머물게 하리라 하고 곧 대자大慈의 지혜를 낸다.(而諸凡夫心。 墮邪見〈中略〉令住畢竟佛道之樂。 卽生大慈智慧。)”
  43. 43)이에 해당하는 『육십화엄』 「십지품」(K8, 167a6~7; T9, 546b22~23) 구절은 다음과 같다. “이와 같이 인연이 모든 고통의 무더기를 모아서 모든 고통과 번뇌를 받는다.(如是因緣。 集諸苦聚。 受諸苦惱。)”
  44. 44)이에 해당하는 『육십화엄』 「십지품」(K8, 167a7~11; T9, 546b23~28) 구절은 다음과 같다. “이 가운데 나가 없고 나의 것이 없으며……곧 대자大慈의 지혜를 낸다.(是中無我無我所。〈中略〉卽生大慈智慧。)”
  45. 45)앞의 세 지(三支) : 십이연기 가운데 무명ㆍ행行ㆍ식識을 가리킨다.
  46. 46)『화엄경탐현기』(K47, 649c18~650a28; T35, 311c12~312a27)에는 『십지경론』이 십이연기의 모습을 나타낸 첫째에서 앞의 세 지支(무명ㆍ행行ㆍ식識)를 합하여 한 부분으로 삼고, 나머지 아홉 지支와 ‘이와 같이’로 시작하는 둘째와 ‘이 가운데’로 시작하는 셋째를 한 부분으로 삼아서, 이 두 단으로 모든 고통을 구족함을 구분한다고 설하는 부분이 이어진다. 이처럼 아래에도 인용문 곳곳에 생략된 부분이 있다.
  47. 47)구분된 자리(分位) : 십이연기에 대한 아비달마의 네 가지 해석인 찰나刹那ㆍ원속遠續ㆍ연박連縛ㆍ분위分位 가운데 분위, 즉 구분된 자리 또는 두드러진 상태에 따른 해석을 의미한다. 분위연기란 12지가 삼세에 걸쳐 무간에 오온이 상속하지만 두드러진 상태(分位)에 근거하여 무명이나 생生ㆍ노사老死 등 각각의 지분의 명칭을 설정한다는 것이다. 유부에서는 이 중에서 분위연기설을 정설로 취하고 이를 바탕으로 십이연기를 삼세양중인과설三世兩重因果說로 해석하였다.
  48. 48)두 지(二支) : 십이연기 가운데 생生ㆍ노사老死를 가리킨다.
  49. 49)일곱 지(七支) : 십이연기 가운데 명색ㆍ육입六入ㆍ촉觸ㆍ수受ㆍ애愛ㆍ취取ㆍ유有를 가리킨다. 유부의 삼세양중인과설에 의하면 이 가운데 명색부터 수受까지는 현재세에 현행하는 결과이고 애愛와 취取와 유有는 미래세의 원인인 종자가 된다. 따라서 자상인 일곱 지支 안에는 현행하는 결과와 원인인 종자가 함께 있게 된다.
  50. 50)저 앞의 넷 : 자상의 일곱 지支 가운데 앞의 명색ㆍ육입六入ㆍ촉觸ㆍ수受를 가리킨다.
  51. 51)생生 등 : 미래세의 현행하는 결과인 동상, 즉 생生과 노사老死를 가리킨다.
  52. 52)뒤의 셋 : 자상의 일곱 지支 가운데 뒤의 애愛ㆍ취取ㆍ유有를 가리킨다.
  53. 53)『잡집론』 : ⓢ Mahāyānābhidharmasamuccayavyākhyā. 『大乘阿毘達磨雜集論』(이하 『잡집론』)을 가리킨다. 또는 『아비달마잡집론』, 『對法論』이라고도 한다. 무착이 『瑜伽師地論』 등에 근거하여 유가학파의 법상法相을 해설하는 『대승아비달마집론』에 대한 그의 제자 사자각師子覺의 주석을 안혜安慧가 편집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唐의 현장이 번역(646)하였으며 티베트역도 현존한다. 후대 법상종에서는 『유가사지론』의 교의를 잘 해석한 이른바 유가십지론瑜伽十支論의 하나로 일컬어진다. 16권 8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에 대한 주석서로는 규기의 『大乘阿毘達磨雜集論述記』, 신배信培의 『述記貫練編』이 현존한다.
  54. 54)『잡집론』 「本事分中三法品」(K16, 254a6~256c4; T31, 711b5~713a11)에서 연생緣生에 대해 밝히는 부분으로 생각된다. 여기에서는 12지연기를 원인일 때의 능인能引(무명ㆍ행ㆍ식)과 소인所引(명색ㆍ육입ㆍ촉ㆍ수), 그리고 결과일 때의 능생能生(애ㆍ취ㆍ유)과 소생所生(생ㆍ노사)으로 구분하고 이 가운데 식識이 능인에 속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55. 55)식識 등의 다섯 종자 : 식識ㆍ명색名色ㆍ육입六入ㆍ촉觸ㆍ수受의 종자를 가리킨다.
  56. 56)『성유식론成唯識論』(K17, 572b10; T31, 43c15).
  57. 57)하권 1 각주 43) 참조.
  58. 58)하권 1 각주 44) 참조.
  59. 59)『십이인연관』 : 『총수록』에서 관사觀師의 저작으로 인용하고 있는 이 문헌은 의천의 『신편제종교장총록』(T55, 1166c23)과 일본의 화엄종 승려 교넨(凝然, 1240~1321)의 『華嚴宗經論章疏目錄』(『大日本佛敎全書』 1卷)에서는 징관의 저작으로 전하고 있다. 여기 인용문 외에는 그동안 일실된 것으로 전해졌지만 20세기 초에 일본 가나자와문고에서 전문이 발견되었다. 여기 인용문은 전문의 처음부터로서 분량은 전체의 3분의 2 정도에 해당한다. 가나자와문고판에는 『십이인연관』 또는 『십이인연관문』이라는 제목은 기록되어 있지만 저자는 밝히고 있지 않다. 여기에 인용되어 있지 않은 후반부에는 십이인연을 관하는 구체적인 방법으로서 의상계 화엄의 독특한 관법으로 간주되는 인연관ㆍ연기관ㆍ성기관의 삼관三觀을 들고 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에 이 문헌의 저자가 징관이 아니라 혹 의상계 화엄과 관련된 인물이 아닌가 의심되기도 한다.
  60. 60)『팔십화엄』 「십지품」(K8, 652a10~11; T10, 194b9).
  61. 61)삼성三性 : 여러 가지를 가리킬 수 있지만 문맥상 선善ㆍ불선不善ㆍ무기無記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상권 1 각주 51) 참조.
  62. 62)아마라식阿摩羅識 : ⓢ amalavijñāna. 무구식無垢識, 청정식淸淨識으로 의역하며 제9식이라고도 한다. 진제계에 속하는 섭론종에서 주장하는 식識으로 중생의 본래 마음이 청정하여 미혹함이 없음을 가리킨다. 제8아뢰야식이 전의轉依하여 청정무구식인 아마라식이 된다고 설한다. 지론종과 천태종에서도 제9식설을 수용했지만 현장계의 법상종은 청정의 측면을 아뢰야식에 포함시켜서 별도의 청정식인 제9아마라식을 부정했다.
  63. 63)세 가지 세간(三種世間) : 지정각세간ㆍ중생세간ㆍ기세간을 가리킨다. 상권 1 각주 34) 참조.
  64. 64)지엄의 『수현기』(K47, 14a17~18; T35, 28b6~7)에서 『육십화엄』 「보살명란품」의 열 가지 매우 깊음을 설하는 가운데 첫 번째, 연기의 매우 깊음을 풀이하는 구절 중 일부분이다.
  65. 65)세 존재(三有) : ‘삼유三有’는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일 수 있지만 여기에서는 중생의 삶을 구분하여 차례대로 살펴보는 십이인연의 문맥상 생유生有(잉태하는 순간의 존재)ㆍ본유本有(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존재)ㆍ사유死有(죽는 순간의 존재)의 삼유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66. 66)『십지경론』(K15, 68b2; T26, 169a17). 하권 1 각주 10) 참조.
  67. 67)열 가지의 성기심(十種性起心) : 『육십화엄』 「보왕여래성기품」(K8, 244c10~247b7; T9, 622b12~625a13)에서 열 가지 비유를 통해 설해지는 여래의 마음으로 여래의 지혜와 동일시된다. 화엄교학에서는 이것을 열 가지 성기심으로 풀이하여 왔다. 지엄, 『수현기』(K47, 61a1; T35, 80c14). 특히 열 번째 비유인 미진경권유微塵經卷喩, 즉 티끌 하나에 삼천대천세계와 같은 경권이 들어 있는데 중생들이 이익을 얻지 못하나, 어느 지혜 있는 사람이 이를 꺼내어 중생들을 이롭게 하리라는 비유는 여래장사상과 여래성기사상에 있어서 중요한 경증이기도 하다.
  68. 68)하권 1 각주 16) 참조.
  69. 69)두 번째 관觀의 후반 : 열 가지 십이인연관에서 두 번째 한마음에 포섭되는 관(一心所攝觀)을 둘로 나눈 가운데 뒷부분을 가리킨다. 두 번째 관觀에 해당하는 경문은 다음과 같다. “삼계는 허망하여 다만 마음이 지은 것이다. 십이인연분도 모두 마음에 의지한다.……(三界虛妄但是心作。 十二緣分是皆依心。 〈後略〉)” 『육십화엄』(K8, 178c24~179a6; T9, 558c10~16). 이 가운데 ‘삼계는~’이 앞 부분이고 ‘십이인연분은~’이 뒷부분이다. 법장은 이에 대해 앞은 마음이 삼계를 짓는 것을 밝힘이니 모아 일어나는 문(集起門)을 기준으로 한 것이고, 뒤는 마음이 십이인연을 지니는 것을 밝힘이니 의거하여 지니는 문(依持門)을 기준으로 한 것이라고 구분하고 있다. 『화엄경탐현기』(K47, 682b26~27; T35, 346c27~28).
  70. 70)22위 : 상권 1 각주 145) 참조.
  71. 71)『청량소』(T35, 802b8~802c3).
  72. 72)『팔십화엄』에서 다음 구절의 뜻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열 가지의 거스름과 수순함으로 모든 연기를 관觀한다.(菩薩摩訶薩。 如是十種逆順。 觀諸緣起。)”(K8, 652b2; T10, 194b24~25)
  73. 73)십중십이인연관을 세 가지 관법으로 거듭 관하는 것은 세친의 『십지경론』에 처음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서 징관이 자신의 해석을 가한 것이다.
  74. 74)『대반열반경』에는 이와 유사한 구절이 두 군데 있다. (1) 「師子吼菩薩品」(K38, 961b2~9; T12, 524b1~8), “선남자야! 십이인연을 관하는 지혜에는 무릇 네 종류가 있다. 첫째는 하열, 둘째는 중간, 셋째는 뛰어남, 넷째는 가장 뛰어남이다. 하열한 지혜로 관하면 불성을 보지 못하니 보지 못하기 때문에 성문의 길을 얻는다. 중간의 지혜로 관하면 불성을 보지 못하니 보지 못하기 때문에 연각의 길을 얻는다. 뛰어난 지혜로 관하면 명료하게 깨닫지 못하니 명료하게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십주의 지위에 머무른다. 가장 뛰어난 지혜로 관하면 (불성을) 보고 명료하게 깨닫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길을 얻는다. 이러한 뜻 때문에 십이인연을 불성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善男子。 觀十二緣智。 凡有四種。 一者下。 二者中。 三者上。 四者上上。 下智觀者。 不見佛性。 以不見故。 得聲聞道。 中智觀者。 不見佛性。 以不見故。 得緣覺道。 上智觀者。 見不了了。 不了了故。 住十住地。 上上智觀者。 見了了故。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道。 以是義故。 十二因緣名爲佛性。)” (2) 「憍陳如品」(K38, 1082a23~b3; T12, 852a13~16), “선남자야! 이 모습(相)은 법계 구극의 지혜이고 제일의제이며 제일의공이다. 하열한 지혜로 관하기 때문에 성문의 보리를 얻고 중간쯤의 지혜로 관하기 때문에 연각의 보리를 얻으며 뛰어난 지혜로 관하기 때문에 위없는 보리를 얻는다.(善男子。 是相。 法界畢竟智。 第一義諦。 第一義空。 下智觀故。 得聲聞菩提。 中智觀故。 得緣覺菩提。 上智觀故。 得無上菩提。)”
  75. 75)앞에서 연기에 대한 세 관觀을 대비를 기준으로 해서 대비를 으뜸으로 하는 관(大悲爲首觀)ㆍ대비가 증상하는 관(大悲增上觀)ㆍ대비가 만족된 관(大悲滿足觀)으로 일컬은 것을 가리킨다.
  76. 76)연기에 대한 세 관觀을 지혜를 기준으로 해서 이승의 일체지ㆍ보살도의 모습에 대한 지혜ㆍ부처님의 일체종지一切種智로 일컬은 것을 가리킨다.
  77. 77)저본은 ‘탐현운探玄云’이 청량소 내의 인용문처럼 편집되어 있으나 이는 『청량소』와 별도로 『총수록』의 편자가 인용한 것이다. 高에도 각각 별도의 인용으로 구분되어 있다.
  78. 78)『화엄경탐현기』(K47, 680a26~687c16; T35, 344b11~352b22).
  79. 79)이 ‘운운’은 “자리에 의지한 행을 맺는다.(結依位行)”를 생략한 것이다.
  80. 80)『육십화엄』 「十地品」(K8, 178b25~c3; T9, 558b14~15)의 다음 구절을 가리킨다. “세간의 있는 바 몸 받아 (어떤) 곳에 태어남은 모두 나를 탐하고 집착하기 때문이다. 만약 나에 집착함을 여의면 (어떤) 곳에 태어남이 없을 것이다.(世間所有受身生處。 皆以貪著我故。 若離著我則無生處。)”
  81. 81)『육십화엄』 「十地品」(K8, 178c24~25; T9, 558c10).
  82. 82)상분相分과 견분見分 : 유식학파에서 인식작용을 그 기능에 따라 구분한 것이다. 상분의 ‘상相’은 ‘상상相狀’으로서 인식작용의 대상(所緣)인 영상을, 견분의 ‘견見’은 ‘견조見照’로서 인식작용의 주체(能緣)를 의미한다. 인식작용을 이렇게 둘로 나눈 것을 이분설이라고 하며 인도의 십대 유식논사 중 난타難陀(ⓢ Nanda)의 이분설이 대표적이다.
  83. 83)『십이인연론』 : 『고려대장경』이나 『대정신수대장경』 등에는 ‘정의보살淨意菩薩’ 지음으로 되어 있으나, 현존하는 범본과 티베트역에는 용수龍樹의 저작으로 되어 있다. 6세기 초 보리류지가 한역하였다. 12지연기에 대해서 게송으로 설하고 이를 주석한 것이다. 이역본으로 용맹보살勇猛菩薩의 『因緣心論頌因緣心論釋』이 있다.
  84. 84)능인能引ㆍ소인所引ㆍ능생能生ㆍ소생所生에 대해서는 하권 1 각주 54) 참조.
  85. 85)이해를 위해 인용문 중 생략된 부분을 『화엄경탐현기』(K47, 684c29~685a1; T35, 349b17~18)에서 보충한 것이다. “於中分別三際。 諸聖敎中。 略有三說。”
  86. 86)이 구문에 대해서 『화엄경탐현기』가 근거하고 있는 『성유식론』은 이 구절을 『잡집론』의 설로서 설명하고 있다. 『성유식론』(K17, 574a6~9; T31, 44c25~27), “그러나 『잡집론』에서 무명이 행을 바라봄에 인연이 있다고 설한 것은 무명에 의지할 때의 업의 습기를 설한 것이다. 무명이 함께하기 때문에 무명이라고 짐짓 설한 것이니 실제로는 행行의 종자이다.(而集論說。 無明望行。 有因緣者。 依無明時。 業習氣說。 無明俱故。 假說無明。 實是行種。)” 『잡집론』(K16, 254c5~6; T31, 711c13), “또 무명이 행을 바라봄에 전생의 습기 때문에 인연이 되는 것과 같다.(且如無明望行。 前生習氣故。 得爲因緣。)”
  87. 87)깊은 관(深觀) : 『십지경론』(K15, 67b8~71b22; T26, 168b21~171b12)에서 십중 십이인연관을 다시 관법으로 거듭 구분하는 가운데 한 관법이다. 이를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대비수순관에 4종이 있고 일체상지분별관에 9종이 있는 것은 표에서 생략하였다.)相諦差別觀成答相差別 成差別 答差別 相差別第一義諦差別世諦差別染染依止觀因觀攝過觀護過觀不厭厭觀深觀 非他作自因生 非自作緣生 非二作但隨順生 非無因作隨順有大悲隨順觀一切相智分別觀
  88. 88)뒤의 세 문(三門) : 10종의 십이인연관 가운데 제8ㆍ제9ㆍ제10의 삼관(八因緣觀。 九因緣生滅觀。 十隨順有盡觀。)을 가리킨다.
  89. 89)동류인同類因 : ⓢ sabhāgahetu. 유부 아비달마에 의하면 원인을 여섯 가지로 나눈 육인六因 가운데 하나로서 일체법 가운데 그것이 일으키는 결과(等流果)와 유사한 성질(同類)을 지니면서 시간상 무간無間으로 선행하는 원인을 가리킨다. 즉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 등에서 원인이다. 육인 가운데 변행인遍行因(ⓢ sarvatragahetu)은 그것의 결과(등류과)에 무간으로 선행하며 유사한 성질을 지닌다는 점에서 동류인과 비슷하지만 일체의 번뇌와 염오심에 두루 작용(遍行)하는 변행혹에만 한정된다는 점에서 다르다.
  90. 90)이숙인異熟因 : ⓢ vipākahetu. 육인 가운데 하나로서 일체법 가운데 그것이 일으키는 결과(異熟果)와 시간상 무간으로 선행하면서 결과와는 성질이 다른(異熟) 원인을 가리킨다. 즉 선인락과善因樂果, 악인고과惡因苦果에서 원인이다.
  91. 91)구유인俱有因 : ⓢ sahabhūhetu. 육인 가운데 하나로서 일체법 가운데 그것이 일으키는 결과(士用果)와 동시에 존재하면서 서로가 서로의 원인과 결과가 되거나 많은 법이 동시에 하나의 법의 원인이 되는 것을 가리킨다. 구유인 가운데 마음(心)과 마음작용(心所)의 동시적 상호 인과 관계에만 한정한 것을 상응인相應因(ⓢ saṃprayuktahetu)이라고 한다.
  92. 92)법장은 무명지 이전에 바르지 않은 생각이 허공에 의탁하여 일어나서 무명의 원인이 되며 따라서 최초의 원인인 바르지 않은 생각이 원인 없이 일어나는 것이라는 주장을 소승, 그중에서도 경량부의 설로서 소개하고 있음을 『十二門論宗致義記』(T42, 228b22~23)에서 알 수 있다. “넷째, 원인 없이 짓는다에 대해 혹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경부사經部師는 무명지 전에 허공에 의탁하여 일어나기 때문에 또한 원인이 없다(고 한다.)(四無因作。 或云。 經部師。 無明支前。 託空而起。 故亦無因。)” 이와 관련하여 세친의 『아비달마구사석론』(K27, 281c16~18; T29, 206b7~8)에서 다음 구절을 참조할 수 있다. “어떤 다른 사람(師)은 설한다. 다른 경에서 설하기를 무명은 바르지 않은 생각을 원인으로 삼고 바르지 않은 생각은 무명을 원인으로 삼는다.(有餘師說。 於餘經中說。 無明以不正思惟爲因。 不正思惟以無明爲因。)”
  93. 93)『반야등론』 : 용수龍樹의 『中頌』을 6세기경에 활약한 인도 중관학파의 논사 분별명分別明, 즉 청변淸辯(ⓢ Bhāvaviveka, 또는 Bhavya)이 주석한 『般若燈論釋』(15권)을 가리킨다. 여기에서는 『반야등론석』 「觀因果和合品」(K16, 490b4~495a17; T30, 111a18~114b18)의 내용을 가리킨다.
  94. 94)『중론』 : 용수龍樹의 『中頌』을 4세기경 인도의 중관학파 논사 청목靑目(ⓢ Piṅgalnetra)이 주석한 것이다. 혹은 『중송』 자체를 『중론』으로 부르기도 한다. 여기에서는 『중송』이 포함된 청목의 주석을 구마라집이 번역한 『중론』 「觀因緣品」(K16, 351c9~353b8; T30, 2b6~3c4)의 일부 구절을 가리킨다.
  95. 95)『대법론』 : 『잡집론』을 가리킨다. 하권 1 각주 53) 참조.
  96. 96)『잡집론』(K16, 256a15~17; T31, 712c10~14).
  97. 97)첫째와 둘째의 인용문(“因不生緣生故”, “緣不生自因生故”)의 출처를 법장은 그의 다른 저술에서 다음과 같이 『십지경론』으로 밝히고 있다. 『화엄일승교의분제장』(T45, 502b28~c1), “『십지경론』에 이르기를, ‘인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연에서 생겨나기 때문이다. 연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인에서 생겨나기 때문이다. (인과 연이) 함께함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아는 이가 없기 때문이고 짓는 때에 머무르지 않기 때문이다. 원인 없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존재(有)에 수순하기 때문이다.(地論云。 因不生。 緣生故。 緣不生。 自因生故。 不共生。 無知者故。 作時不住故。 不無因生。 隨順有故。)” 그러나 『십지경론』에 이와 정확히 일치하는 구절은 없고 다음 구절의 뜻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십지경론』(K15, 70a22~b7; T26, 170b19~26), “깊은 관(深觀)에 네 종류가 있다. 첫째는 존재의 분위를 남이 짓는 것이 아니니 자신의 인에서 생겨나기 때문이다. 둘째는 자신이 짓는 것이 아니니 연에서 생겨나기 때문이다.……셋째는 (인과 연) 둘이 짓는 것이 아니니 다만 생겨남에 수순하기 때문이고 아는 이가 없기 때문이고 짓는 때에 머무르지 않기 때문이다.……넷째는 원인 없이 짓는 것이 아니니 존재에 수순하기 때문이다.(深觀者有四種。 一者有分非他作。 自因生故。 二者非自作。 緣生故〈中略〉三者非二作但。 隨順生故。 無知者故。 作時不住故〈中略〉四者非無因作。 隨順有故。)”
  98. 98)『육십화엄』(K8, 200c3~5; T9, 580c27~29).
  99. 99)『육십화엄』 「십주품」(K8, 55c7~8; T9, 446a5).
  100. 100)『육십화엄』 「십지품」(K8, 179b15~16; T9, 559a22~23).
  101. 101)『수현기』(K47, 45c20~49a20; T35, 63c12~67b29).
  102. 102)인因의 여섯 가지 뜻에 대해서 『수현기』에는 바로 이어지는 생략된 부분에서 『섭대승론』을 재해석하여 다음과 같이 설한다. “무엇이 여섯 가지 뜻이 되는가? 첫째는 찰나찰나 멸함(念念滅)이니 이 멸함은 공하고 힘이 있어 바깥의 연을 기다리지 않는다(空有力不待外緣). 힘이 있어서 연을 기다리지 않는 까닭은 인의 체가 연의 일을 기다리지 않고서 스스로 옮겨 움직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함께 있음(俱有)이니 공하고 힘이 있어도 연을 기다린다(空有力待緣). 그 까닭은 바깥의 연을 얻음은 오직 체가 공하여 함께 힘의 작용을 이룸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셋째는 따라 좇아서 다스림의 끝에 다다름(隨逐至治際)이니 (체體가) 있고 힘이 없어서 연을 기다린다(有無力待緣). 알 수 있는 까닭은 남을 따르기에 없을 수 없고 연을 거스를 수 없기에 힘이 없기 때문이다. 넷째는 결정됨(決定)이니 (체體가) 있고 힘이 있어 연을 기다리지 않는다(有有力不待緣). 알 수 있는 까닭은 바깥의 연이 이르지 않아도 체성이 바뀌지 않고 스스로 이루기 때문이다. 다섯째, 인과 연을 관함(觀因緣)이니 공하고 힘이 없어 연을 기다린다(空無力待緣). 알 수 있는 까닭은 바깥의 연을 기다림은 오직 가까운 인이 있지 않아 힘이 없어도 결과를 생기게 함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자신의 결과를 이끌어 나타냄과 같음(如引顯自果)이니 (체體가) 있고 힘이 있어도 연을 기다린다(有有力待緣). 알 수 있는 까닭은 바깥의 연을 얻을 때 오직 자신의 인이 자신의 결과를 얻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출전은 아래) 참고로 『화엄일승교의분제장』과 『섭대승론』에 보이는 이 여섯 가지 인의 뜻에 대한 명목을 아울러 비교 도시하면 다음과 같다.
    진제 역『섭대승론』『수현기』『화엄일승교의분제장』현장 역『섭대승론』
    種子六種因六義緣起因門六義種子六種
    ① 念念滅① 念念滅空有力不待外緣① 刹那滅空有力不待緣① 刹那滅
    ② 俱有② 俱有空有力待緣② 俱有空有力待緣② 俱有
    ③ 隨逐至治際③ 隨逐至治際有無力待緣⑥ 恒隨轉有無力待緣③ 恒隨轉
    ④ 決定④ 決定有有力不待緣④ 決定有有力不待緣④ 決定
    ⑤ 觀因緣⑤ 觀因緣空無力待緣③ 待衆緣空無力待緣⑤ 待衆緣
    ⑥ 如引顯自果⑥ 如引顯自果有有力待緣⑤ 引自果有有力待緣⑥ 唯能引自果
    K16, 1056b21~23;T31, 115c1~4K47, 48a2~11;T35, 66a23~b4T45, 501c28~502a23K16,1288c17~19;T31, 135a23~26
    * 각 항목의 원숫자는 설해진 순서를 나타낸 것이다.
  103. 103)십인十因 : 『수현기』나 현존하는 지엄의 다른 저술에서는 10인의 항목을 정확하게 명시하고 있지 않지만 지엄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 정영사 혜원의 『대승의장』이나 지엄과 법장을 계승한 징관의 『청량소초』에서는 10인의 항목을 『유가사지론』과 그 부분역인 『보살지지경』 등에 의거하여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유가사지론』(K15, 498c14~17; T30, 301b9~12)『청량소초』(T36, 442a16~19)① 隨說因 ② 觀待因 ③ 牽引因 ④ 生起因 ⑤ 攝受因 ⑥ 引發因 ⑦ 定異因 ⑧ 同事因 ⑨ 相違因 ⑩ 不相違因
    『보살지지경』(K14, 92c3~7; T30, 977a5~8)『대승의장』(T44, 540b19~21)① 隨說因 ② 以有因 ③ 種殖因 ④ 攝因 ⑤ 生因 ⑥ 長因 ⑦ 自種因 ⑧ 共事因 ⑨ 相違因 ⑩ 不相違因
  104. 104)이십인二十因 : 지엄의 『공목장』 「보장엄동자의 처소에서 인과를 세우는 장(普莊嚴童子處立因果章)」(T45, 539b17~540b3)에서 삼승의 초교를 기준으로 하여 육인 중 능작인의 자성차별에 따라서 이십인으로 구별하고 있다.
  105. 105)『육십화엄』 「이세간품」(K8, 301c10; T9, 672c29~673a1)의 다음 게송을 뜻에 따라 취한 것으로 보인다. “연기법이 있지도 않고 또한 없지도 않다고 연설하여 진실한 뜻을 깊이 이해하니 그것에 집착하는 바가 없다.(演說緣起法。 非有亦非無。 深解眞實義。 於彼無所著。)”
  106. 106)『유마힐소설경』(K9, 992b14; T14, 547c20).
  107. 107)『대승기신론』(K17, 614b21~22; T32, 575c23~23).
  108. 108)『육십화엄』 「菩薩十無盡藏品」(K8, 85a16~18; T9, 476a9~10)의 다음 구절의 뜻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무엇을 무위법이라고 하는가? 이른바 허공, 열반, 택멸(數緣滅), 비택멸(非數緣滅), 십이연기 및 법계이다.(何等爲無爲法。 所謂。 虛空。 涅槃。 數緣滅。 非數緣滅。 十二緣起及法界。)”
  109. 109)저본의 『추혈기』는 『수현기』에서 인용한 것처럼 보이나 『총수록』의 편자가 인용한 것이다. 『高』에도 각각 별도의 인용으로 구분되어 있다.
  110. 110)『추혈기』 즉 『지통기』의 이본으로 추정되는 『화엄경문답』(T45, 606a14~23)에서 상응하는 구절과 차이 나는 곳이 있다.(『華嚴經問答』에는 ‘緣’ 다음에 ‘法’이 있고, 『華嚴經問答』에는 ‘諦’가 ‘事’로 되어 있고, 『華嚴經問答』에는 ‘初最麁愚’가 ‘移衆庶盡’으로 되어 있다.)
  111. 111)『총수록』(H6, 821c8). 이에 해당하는 『일승법계도』 원문은 H2, 3c1~9; H6, 811a 23~24.
  112. 112)맡김은 물음의 뜻을 일단 긍정하는 것으로 『일승법계도』에서 체를 알면 멀리서 구할 필요가 없다고 한 부분이다. 빼앗음은 힐난을 부정하고 어리석은 자들을 위해 많은 문이 필요하다고 설한 것을 가리킨다.
  113. 113)승열 바라문과 만족왕과 바수밀다 선지식은 『화엄경』 「입법계품」의 선지식 중에서 특히 탐ㆍ진ㆍ치와 관련된 법문으로 논소에서 자주 거론된다. 이와 관련하여 상권 1 각주 126) 참조.
  114. 114)『화엄경탐현기』(K47, 790c6~15; T35, 463a29~b10).
  115. 115)『諸法無行經』(K10, 1168a19~20; T15, 759c13~15), “탐욕이 열반이고 성냄과 어리석음 또한 이와 같다. 이와 같은 세 가지 일에 한량없는 부처님의 도가 있다.(貪欲是涅槃。 恚癡亦如是。 如此三事中。 有無量佛道。)”
  116. 116)『유마힐소설경』(K9, 995b23~24; T14, 550b6~7), “혹은 음탕한 여인으로 나타나 모든 호색한을 이끄니 먼저 욕망의 갈고리로써 끌어당기고는 나중에 부처님의 도道에 들어오게 한다.(或現作婬女。 引諸好色者。 先以欲鉤牽。 後令入佛道。)”
  117. 117)『유마힐소설경』(K9, 994c8~9; T14, 549b13).
  118. 118)법상法常(567~645) : 당대唐代의 승려로서 남양백수南陽白水(하남성) 출신이며 속성은 장張이다. 『속고승전』(T50, 540c14~541b23)에 의하면 담연曇延(516~588)의 제자로서 열반ㆍ화엄ㆍ유마ㆍ승만 등의 경과 『섭대승론』 등에 주석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의천의 『신편제종교장총록』(T55, 1176b25)은 『攝大乘論釋疏』 16권(혹은 8권)을 법상 또는 도증道證의 저술일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
  119. 119)『청량소초』(T36, 57a23~b20).
  120. 120)『불설무상의경』(K11, 474b5~c4; T16, 471c7~472a1)에서는 여기 인용된 경문 앞부분에서 여래법신의 네 가지 덕을 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으로 설하고 있다.
  121. 121)무명주지無明住地 : ⓢ avidyāvāsabhūmi. 일체 번뇌의 근본으로서 아라한ㆍ벽지불ㆍ대지보살도 끊지 못하고 오직 여래의 지혜로만 끊을 수 있는 것으로 설해진다. 『승만경』(K6, 1364a21~1366a18; T12, 219b5~220c7) 등에 의하면 번뇌는 주지번뇌住地煩惱와 이로부터 일어나는 기번뇌起煩惱의 두 종류가 있다. 견일처주지見一處住地ㆍ욕애주지欲愛住地ㆍ색애주지色愛住地ㆍ유애주지有愛住地의 네 종류인 주지번뇌는 두루 다양한 기번뇌를 일으키지만 이 주지번뇌 또한 무명주지를 근본으로 하며, 이를 합하여 다섯 가지 주지번뇌(五住地惑)라고도 한다. 아라한ㆍ벽지불ㆍ대지보살은 무명주지를 연緣으로 하여 의생신을 일으키며 앞의 네 주지번뇌는 끊지만 이 무명주지를 끊지 못하기 때문에 누진지漏盡智를 깨달아 알지 못해서 남음이 있는 해탈과 청정과 공덕을 얻는다고 한다.
  122. 122)세 종류의 의생신意生身 : 아라한ㆍ벽지불ㆍ대지보살을 가리킨다.
  123. 123)네 가지 취取 : ⓢ catvāry upādānāni. 욕취欲取(ⓢ kāmopādāna)ㆍ견취見取(ⓢ dṛṣṭyupādāna)ㆍ계금취戒禁取(ⓢ śīlavratopādāna)ㆍ아어취我語取(ⓢ ātmavādopādāna)를 가리킨다.
  124. 124)세 가지 유루의 업 : 요遼나라 도종道宗(재위 1055~1100) 때의 화엄학승 선연鮮演이 지은 『華嚴經談玄抉擇』(卍11, 950b15)에서는 이 구절의 세 가지 유루의 업을 풀이하여 결과에 있을 때에는 욕계ㆍ색계ㆍ무색계이며 원인에 있을 때에는 복福ㆍ복 아님ㆍ움직이지 않음으로 풀이한다. 한편 원元나라 때의 승려인 보서普瑞가 지은 『華嚴懸談會玄記』(卍12, 348a6~7)에서는 이를 선ㆍ악ㆍ움직이지 않음의 세 가지 업으로 풀이한다.
  125. 125)세 종류의 존재(有) : 선연의 『화엄경담현결택』(卍11, 950b15~16)과 보서의 『화엄현담회현기』(卍12, 348a7~8)에서 모두 욕계ㆍ색계ㆍ무색계의 존재로 풀이한다.
  126. 126)『佛說無上依經』(K11, 475a13~b19; T16, 472a24~b20).
  127. 127)각각 상즉하지 않음 등의 네 구 : 『일승법계도』(H2, 6a15~17; H6, 830al~3)에 보이는 상즉상입과 관련된 네 구절을 가리킨다. “이법(理)과 이법(理)의 상즉 또한 가능하고, 현상(事)과 현상(事)의 상즉 또한 가능하며, 이법(理)과 현상(事)의 상즉 또한 가능하며, 각각 상즉하지 않음 또한 가능하다.(理理相卽亦得。 事事相卽亦得。 理事相卽亦得。 各各不相卽亦得。)” 여기에서 앞의 세 구는 즉문을, 뒤의 한 구는 불상즉문 곧 중문을 나타낸다.
  128. 128)『총수록』(H6, 822c10). 이에 해당하는 『일승법계도』 원문은 H2, 3c11~4a4; H6, 811b9~20.
  129. 129)운화 존자雲華尊者 : 지엄 스님이 말년에 운화사雲華寺에 머물렀기 때문에 ‘운화 존자’라고도 부른다.(『唐大薦福寺故寺主翻經大德法藏和尙傳』, T50, 281b2 등)
  130. 130)『大方等大集經』(K7, 156c21~157a5; T13, 106c11~16).
  131. 131)소지장所知障 : ⓢ jñeyāvaraṇa. 두 종류의 장애(二障) 가운데 하나로서 지장智障ㆍ지애智礙라고도 한다. 알아야 할 바를 장애한다는 의미로서 알아야 할 대상에 대한 지혜를 장애하는 무지無知의 측면을 가리킨다. 두 종류의 장애 중 다른 하나인 번뇌장煩惱障(ⓢ kleśāvaraṇa)은 열반을 장애하는 번뇌인 장애로서 나에 대한 집착으로 말미암은 것이고, 소지장은 법공에 대한 무지로 인해 일어나는 것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132. 132)삼과백법三科百法 : 일체법을 구분하는 방법이다. ‘삼과’는 오온五蘊ㆍ십이처十二處ㆍ십팔계十八界로 구분하는 방법으로서 불교 전반에 걸쳐서 통용된다. ‘백법’은 유식법상종에서 일체법을 나누는 방법으로 이를 다시 다섯 가지로 나누어 ‘오위백법’이라고도 한다. 그 다섯 가지는 심왕心王ㆍ심소心所ㆍ색色ㆍ심불상응心不相應ㆍ무위無爲이다.
  133. 133)대원경지大圓鏡智 : ⓢ ādarśajñāna. 유식학파에서 설하는 부처님의 지혜로서 모든 법을 여실하게 비추는 큰 거울과 같은 지혜이다. 유식학파에 의하면 전의轉依에 의해 염오식이 네 종류의 청정한 지혜로 바뀌는데 그중 네 번째의 지혜로서 알라야식이 지혜로 변한 것이다.
  134. 134)뒤에서 종교終敎의 설로 밝힌 이 해인은 본각―근본무명―성공덕의 조합과 그 내용을 볼 때 『대승기신론』에 바탕한 것으로 보인다.
  135. 135)백 가지 장애 : 『육십화엄』 「보현보살행품」(K8, 230b10~231a3; T9, 607a12~b25. 『팔십화엄』은 「보현행품」)에 설해지는, 보살이 한 번 성내는 마음을 일으켰을 때 얻게 되는 장애이다.
  136. 136)『청량소』(T35, 621b16~c23).
  137. 137)『총수록』(H6, 823b18). 이에 해당하는 『일승법계도』 원문은 H2, 4a6~15; H6, 811b23~c8.
  138. 138)『육십화엄』 「입법계품」(K8, 420b4~5; T9, 783b8~9), “선남자야, 내가 거기에서 수명을 다하여 아래에 태어나 바른 깨달음을 이룰 때 너와 문수사리보살이 함께 나를 보게 될 것이다.(善男子。 我於彼中。 壽終下生。 成正覺時。 汝及文殊師利。 俱得見我。)”
  139. 139)이상의 다중삼생多重三生을 도시하면 다음과 같다.
    번호기준見聞解行證入
    1과거현재미래
    2界內出世(界內)出出世
    3自分勝進十信 이전十信十信滿心勝地
    4信解增長門十信三賢十地
    5地證地前初地~七地八地 이상
    6一乘三乘四地五, 六, 七地第八地
    7五乘配門一乘義八地九地第十地
    8知識文殊德雲이후彌勒(當來見我)普賢(訂果海)
  140. 140)『大宗地玄文論』 : 『大宗地玄文本論』이다. 마명馬鳴 지음, 진제眞諦 번역으로 전해지지만 위작僞作으로 의심되며 내용적으로는 도교의 영향 또한 보인다. 전체 20권으로 구성되어 있고 7세기 후반에 성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141. 141)『대종지현문본론』 「一種金剛道路大決擇分」(K37, 957b3~ 959c15; T32, 671a15~ 671c18).
  142. 142)51위五十一位 : 한 종류의 금강의 길에 다섯 종류가 있으며 그것이 각각 쉰한 가지의 차별을 지니고 있다고 설하고 있다. 차례를 뛰어넘음 없이 점차 나아가는 지위는 이 다섯 종류 가운데 첫 번째로서, 허가광명분虛假光明分이 40종, 진금강眞金綱이 10종, 대극자연다라니지大極自然陀羅尼地가 1종 등 쉰한 가지로 설명된다.(K37, 957b3~958a21; T32, 671a15~671c12)
  143. 143)맘대로 옮겨감에 향함이 없는 도인(橫轉無向道人) : 『대종지현문본론』에서는 『法界法輪無盡中藏修多羅』로부터 인용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러한 이름의 경은 현존하지 않으며 현존하는 경록에도 그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144. 144)이 게송에 대해서 『대종지현문본론』(K37, 959c2~8; T32, 672c7~12)에서는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지금 이 게송에서는 어떤 뜻을 밝히려고 하는가? 한 몸인 금강대력보륜산왕의 체體에서 차례로 점차 옮겨가니 모든 법이 똑같이 남음 없이 구경에 널리 두루하고 원만하여 다 끊어지고 여의지 아니함을 나타내 보이고자 하는 것이다. 이 다섯 가지 지위는 한 때에 옮겨가고 앞과 뒤로 옮겨가며, 다 바뀜이 있고 다 바뀌지 않으며, 또는 한 때에 옮겨가거나 또는 여러 때에 옮겨가며, 또는 한 곳에서 옮겨가거나 또는 여러 곳에서 옮겨가 구족하고 구족하여 자재하고 자재하니 장애되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今此偈中爲明何義。 爲欲現示。 一身金剛大力寶輪山王體中。 次第漸轉。 諸法等是無餘究竟周遍圓滿俱非絶離。 此五種位。 一時轉前後轉。 俱有轉俱非轉。 亦一時轉亦異時轉。 亦一處轉亦異處轉。 具足具足自在自在無所障礙故)”
  145. 145)『십구장기』 : 『십구장원통기』를 가리킨다. 『십구장원통기』는 지엄이 지은 요의要意 5권 첫 쪽의 ‘10구十句’에 대해 법융(또는 융불 등)이 주석한 『십구장』에 대하여 균여(927~973)가 다시 풀이한 것이다. 전체 2권이며 10구 하나하나에 먼저 『십구장』을 인용하고 이어서 균여가 해석을 가하는 구성으로 되어 있다. 상권 1 각주 148) 참조.
  146. 146)『십구장원통기』의 두 부분(K47, 100a27~28; 101a13~17)을 합쳐서 인용한 것으로 내용이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는다.
  147. 147)『총수록』(H6, 825a6). 이에 해당하는 『일승법계도』 원문은 H2, 4a18~5b9; H6, 811c11~813b4.
  148. 148)일곱 문답의 출전은 아래와 같다.
    문답『일승법계도』
    1H2, 4a18~24; H6, 811c11~812a6.
    2H2, 4b1~13; H6, 812a7~19.
    3H2, 4b14~c11; H6, 812a20~812b18.
    4H2, 4c12~16; H6, 812b19~24.
    5H2, 4c17~5a23; H6, 812a1~813a17.
    6H2, 5a24~b5; H6, 813a18~24.
    7H2, 5b5~9; H6, 813b1~4.
  149. 149)누런 잎과 황금에 관한 비유는 『대반열반경』 「嬰兒行品」(K38, 903b14~17; T12, 729a3~6)의 다음 구절이 대표적이며 이후 여러 논서에 이용된다. “마치 저 어린아이가 큰 소리로 울 때 부모가 곧 버드나무의 누런 잎으로 그 아이에게 ‘울지마라 울지마라, 우리가 너에게 황금을 줄 것이다’라고 말하자 어린아이가 보고서는 진짜 황금이라는 생각을 내어 문득 그쳐 울지 않았지만 이 누런 잎이 실제로 황금이 아닌 것과 같다.(如彼嬰兒啼哭之時。 父母卽以楊樹黃葉而語之言莫啼莫啼。 我與汝金。 嬰兒見已。 生真金想。 便止不啼。 然此楊*葉實非金也)” * 다른 판본에는 ‘楊’이 ‘黃’으로 되어 있다.
  150. 150)이에 대해서는 상권 1 각주 178) 참조.
  151. 151)산왕山王 : 상권 1 각주 256) 참조.
  152. 152)이와 관련하여 법장은 『화엄경』 「입법계품」의 모든 선지식의 법문을 법계문과 반야문으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법계문은 보현보살로 대표되는데 들어가는 바(所入)를 나타내고 반야문은 문수보살을 상수로 하여 들어가는 주체(能入)를 드러내서 이 둘이 함께 ‘법계에 들어감(入法界)’을 보여준다고 한다.(K47, 770c14~18; T35, 441c24~28)
  153. 153)다섯 바다와 열 지혜(五海十智) : 『육십화엄』 「노사나불품」에서 보현보살이 일체여래정장삼매 속에서 다섯 바다를 관찰하고 열 지혜를 설한다. 지엄은 이에 대해 『화엄경』 정종분의 본분本分을 밝히는 구절이라고 중시하며 과분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오해십지五海十智’를 사용한다. 다섯 바다와 열 지혜에 대해서는 각각 상권 1 각주 168), 상권 2 각주 141) 참조.
  154. 154)사자분신삼매(奮迅定) : ⓢ siṃhavijṛmbhitasamādhi. 사자빈신삼매師子嚬伸三昧라고도 한다. 『화엄경』 「입법계품」의 근본법회(K8, 304b22~24; T9, 677a11~14)에서 부처님께서 입정하시는 삼매이다. 법장은 『화엄경탐현기』(K47, 772c26~773a6; T35, 444a21~28)에서 이 삼매에 대해 마치 사자가 기지개를 켜며 포효하면 그 위세가 드러나 다른 모든 짐승이 힘을 잃고 엎드리지만 사자새끼들은 더욱 용맹해지는 것처럼, 지금 부처님이 이 삼매로 대비법계의 몸을 떨치고 대비의 문을 열며 법계의 법문을 포효하면 이승은 숨어서 귀머거리와 장님이 되지만 보살들은 그 삼매와 다라니가 더욱 증장되기 때문에 비유로써 이 삼매의 이름을 붙였다고 설한다.
  155. 155)두 가지 뜻 : 『일승법계도』(H6, 812a9~10)에서 두 번째 물음에 대한 답에서 ‘망정(情)’과 ‘이법(理)’ 두 가지를 기준으로 답하는 것을 가리킨다.
  156. 156)이상의 내용은 세 가지 자성(三性)과 세 가지 자성 없음(三無性)을 초교와 종교(숙교)와 동교일승에서 자주 쓰는 비유를 통해 설명한 것이다. 첫째, 나무숲의 비유는 초교 즉 법상유식에 해당한다. 둘째, 금의 비유를 통한 이해는 초교와 종교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금의 비유는 금으로 여러 가지 장신구 등을 만드는 경우로서 『대반열반경』 등에 보이며, 『대승기신론』에 보이는 물과 파도의 비유와도 비슷하다. 셋째, 연유의 비유는 종교에 대응하는 것으로 『대반열반경』 등에 보이며, 우유로부터 유즙(酪)ㆍ연유(酥)ㆍ제호醍醐 등이 생겨나는 것을 통한 비유이다. 마지막으로 동교일승에서 세 가지 자성 등을 허공에 비유한 것은 허공을 그어서 셋으로 나누어 셋으로 삼아도 허공에는 구분이 없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157. 157)『화엄경탐현기』(K47, 517b8~9; T35, 170b6~7).
  158. 158)이것은 법장의 『화엄일승교의분제장』(T45, 499a9~501c28)에서 설하는 ‘세 가지 자성의 같음과 다름의 뜻(三性同異義)’을 끌어와서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 본문의 이해를 위해 법장의 설명을 간략히 도시하면 아래와 같다.
  159. 159)『수현기』(K47, 46c11~13; T35, 64c15~17).
  160. 160)이와 거의 동일한 구절이 『화엄경문답』(T45, 60a14~25)에도 수록되어 있다.
  161. 161)이 구절이 『십구장』으로부터 직접 인용한 것인지, 균여의 『십구장원통기』(K47, 88a29~b1)로부터 재인용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162. 162)이에 대해 균여는 『석화엄교분기원통초』(K47, 241a19~25)에서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문 무슨 까닭에 범부의 이름을 듣고 부처님과 보살이 아니라는 것에 다섯 가지 허물이 있는가? 답 연기법 중에 범부와 성인이 다르지 않으니 대연기법을 믿지 않기 때문에 범부의 이름을 듣고 계탁하여 부처님과 보살이 아닌 것으로 삼기 때문에 ‘바르게 믿지 않음’이라고 한다. 연기법을 굳건히 믿기 때문에 능히 용맹정진하여 끝내 퇴전하지 않는데, 믿지 않기 때문에 ‘용맹함에서 물러남’이라고 한다. 스스로 연기법을 믿기 때문에 비로소 남을 위해 설하여 남이 미혹하지 않게 하는데, 대연기법을 믿지 않기 때문에 범부와 성인이 다르다고 계탁하여 남을 속여서 설하기 때문에 ‘남을 속임’이라고 한다. 부처님의 세계가 곧 범부의 세계이고 범부의 세계가 곧 부처님의 세계라 범부와 성인이 둘이 없는데, 범부와 성인을 다르다고 계탁하기 때문에 ‘부처님을 비방함’이라고 한다. 이와 같기 때문에 또한 ‘법을 가벼이 여김’인 것이다.(問。 何故聞凡名。 不是佛菩薩者。 有五過耶。 答緣起法中。 凡聖不異。 以不信大緣起法故。 聞凡名計爲非是佛菩薩故。 云不正信也。 以於緣起法。 決定信故。 能勇猛精進。 永不退轉。 爲不信故。 云退勇猛也。 以自信緣起法故。 方爲他說。 不令他迷。 以不信大緣起法。 計凡聖異。 誑他而說故。 云誑他也。 佛界卽凡界。 凡界卽佛界。 凡聖無二而計凡聖別故。 云謗佛也。 由如是故。 亦輕法也。)”
  163. 163)두 가지 큼(二大) : 뜻이 큼(義大)과 가르침이 큼(敎大)을 가리킨다. 상권 2 각주 80) 참조.
  164. 164)‘서원이 잘 결정되어 있다(願善決定)’는 『화엄경』 「십지품」에서 금강장보살이 삼매에서 일어나 바로 십지의 이름을 열거하기 전에 설하는 구절의 일부분이다. 세친은 『십지경론』에서 이 구절을 여섯 가지(六種)의 ‘잘 결정되어 있음(善決定)’으로 풀이한 후 이를 육상설로 회통시키고 있다. 여섯 가지 선결정을 『십지경론』의 해당 『십지경』 구절과 함께 도시하면 다음과 같다.
    六善決定 『십지경론』『십지경』
    (願善決定)(諸佛子。 是諸菩薩。 願善決定。)
    ① 觀相善決定無雜
    ② 眞實善決定不可見
    ③ 勝善決定廣大如法界
    ④ 因善決定成無常愛果因善決定究竟如虛空
    常果因善決定盡未來際
    ⑤ 大善決定覆護一切衆生界
    ⑥ 不怯弱善決定佛子。 是諸菩薩乃能入過去諸佛智地。 乃能入未來諸佛智地。 乃能入現在諸佛智地。
    출전 : K15, 6a11~c9; T26, 126b27~127a11
  165. 165)표훈이 시설한 이상의 4단의 내용을 『일승법계도』 원문과 함께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表訓四段義『일승법계도』
    初標問。 如上所言訂分之法及緣起分法。 有何差別。 答。 別不別。 其義云何。 訂分之法。 約實相說。 唯訂所知。 緣起分法。 爲衆生說。 與緣相應。是故全別。제4문답
    後標緣起之法。 從衆緣生。 無有自性。 與本不異。 是故不別。
    問。 若如是者。 以自所訂。 爲衆生。 與末不異。 尋常差別耶。 答。 亦得其義。 若爲所訂在言。 與末不異。 言說在訂。 與本不異。제5문답중 전반부
    與本不異故。 用而常寂。 說而不說。 與末不異故。 寂而常用。 不說而說。
    不說而說故。 不說卽非不說。 說而不說故。 說卽非說。
    說卽非說故。 說卽不可得。 不說卽非不說故。 不說卽不可得。✽ 『高』에는 ‘불가득不可得’이 ‘비불설非不說’로 되어 있다. 갑본과 이곳 『대기』에는 ‘불가득’으로 되어 있으며 번역에서는 ‘불가득’으로 바꾸었다.
    二俱不可得(故。 二俱不相防)
    說二大以此義故。
    說與不說。(等無差別。)
    願善決定六決定處生與不生。(等無差別。)
    根本入九入動與不動。(等無差別。)
    (一切差別相對法門。 准例如是。)
    引訂是故經云。 有爲無爲一切諸法。 有佛無佛。 性相常住。 無有變異。 是其義也。
  166. 166)저본과 『高』에는 『대기』로 명시하고 있지 않으나, 앞에서 『대기』가 『일승법계도』의 해당 구절을 일곱 문답으로 구분하고 여기서 일곱 번째 문답을 풀이하는 등의 문맥으로 볼 때 『대기』로부터의 인용으로 보인다.
  167. 167)『육십화엄』을 가리킨다.
  168. 168)『총수록』(H6, 828c23). 이에 해당하는 『일승법계도』 원문은 H2, 5b12~5b19; H6, 813b7~15.
  1. 1)「文云」無有{甲}。
  2. 2)「下」無有{甲}。
  3. 3)「明」無有{甲}。
  4. 4)「弁」下有「修」{甲}。
  5. 5)「修行」無有{甲}。
  6. 6)「訂」通「證」於此書{編}次同。
  7. 7)「現」作「顯」{甲}次同。
  8. 8)冠註曰事下疑脫顯字{甲}。
  9. 9)「法明」無有{甲}。
  10. 10)「云」作「言」{甲}次同。
  11. 11)「界法」作「法界」{甲}。
  12. 12)「即事」作「事即」{甲}。
  13. 13)「芽」作「牙」{甲}。
  14. 14)「者」無有{甲}。
  15. 15)「如」作「知」{甲}。
  16. 16)「弟」作「第」{甲}{乙}。
  17. 17)▣字體磨滅{底}ㆍ作「知」{甲}ㆍ作「如」{乙}。
  18. 18)「示」下有「現」{甲}。
  19. 19)「如」無有{甲}。
  20. 20)「體」下有「自」{甲}。
  21. 21)「賴」作「梨」{甲}。
  22. 22)「亦」作「示」{甲}。
  23. 23)冠註曰有一作分{甲}。
  24. 1)「先」作「前」{甲}。
  25. 2)「十番」無有{甲}。
  26. 3)「十」下有「番」{甲}。
  27. 4)「所」作「何」{甲}。
  28. 5)冠註曰即下疑脫無字{甲}。
  29. 6)「無」無有{甲}。
  30. 7)「纓絡」作「瓔珞」{甲}。
  31. 8)「准」作「唯」{甲}。
  32. 9)「義」無有{甲}。
  33. 10)「羅尼」無有{甲}。
  34. 11)「細」下有「陀」 又冠註曰陀字更勘{甲}。
  35. 12)「約世時者」無有{甲}。
  36. 13)冠註曰世疑也{甲}。
  37. 14)「明」作「名」{甲}。
  38. 15)「爲」無有{甲}。
  39. 16)「可」上有「即」{甲}。
  40. 17)「於」無有{甲}。
  41. 18)「手」作「乎」又冠註曰乎疑耳{甲}。
  42. 19)「怒」作「惱」又冠註曰惱疑怒{甲}。
  43. 20)「之」無有{甲}。
  44. 21)「准」作「準」{甲}。
  45. 22)「海」無有{甲}。
  46. 23)「大」上有「是」{甲}。
  47. 24)「現」作「離」又冠註曰離疑顯{甲}。
  48. 25)「印」下有「顯」{甲}。
  49. 26)「人」作「入」{甲}。
  50. 27)「䏞」作「昧」{甲}。
  51. 28)「究」上有「以」{甲}。
  52. 29)「二一」作「三」{乙}。
  53. 30)「辨」作「辯」{乙}。
  54. 31)「者」無有{甲}。
  55. 32)「圓」無有{甲}。
  56. 33)「即」無有{甲}。
  57. 34)「曰」下有「方便」{甲}。
  58. 35)「巧」無有{甲}。
  59. 36)冠註曰解下一有行字{甲}。
  60. 37)「行」無有{甲}。
  61. 38)「之」無有{甲}。
  62. 1)「何」無有{甲}。
  63. 2)「言」無有{甲}。
  64. 3)「網」作「綱」{甲}。
  65. 4)▣字體磨滅{底}ㆍ作「所」{甲}{乙}。
  66. 5)「云」作「言」{甲}。
  67. 6)「令」作「分」{甲}。
  68. 7)「答」上有「爲」{甲}。
  69. 8)冠註曰理下疑脫說{甲}。
  70. 9)「云」無有{甲}。
  71. 10)「衆」無有{甲}。
  72. 11)「知」作「智」{甲}。
  73. 12)「花」作「華」{甲}。
  74. 13)「意」作「竟」又冠註曰竟疑意{甲}。
  75. 14)「性」無有{甲}。
  76. 15)「云」作「言」{甲}。
  77. 16)「情」作「性」又冠註曰性疑情{甲}。
  78. 17)冠註曰立下疑脫故字{甲}。
  79. 18)「三故」無有{甲}。
  80. 19)冠註曰種下疑脫無字{甲}。
  81. 20)「是」無有{甲}。
  82. 21)「別」作「不」{甲}。
  83. 22)「性」下有「亦有處三性以外別立三無性」{甲}。
  84. 23)冠註曰三下疑脫性字{甲}。
  85. 24)「性」無有{甲}次同。
  86. 25)「究」作「畢」{甲}。
  87. 26)「立敎」作「敎立」{甲}。
  88. 27)冠註曰所下疑脫知字{甲}。
  89. 28)「知」作「故」{甲}。
  90. 29)「衆生…之法」十五字無有{甲}。
  91. 30)「訂」通「證」於此書{編}次同。
  92. 31)「生」下有「說」{甲}。
  93. 32)「亦」無有{甲}。
  94. 33)「非不說」作「不可得」{甲}。
  95. 34)「防」作「妨」{甲}。
  96. 35)「此」作「是」{甲}。
  97. 1)「是」無有{甲}。
  98. 2)「非」作「不」{甲}。
  99. 3)「即非言義」無有{甲}。
  100. 4)「之」無有{甲}。
  101. 5)「在機益故」無有{甲}。
  102. 6)「我同名而無我同故」此文中「名而無我同」五字缺落。而冠註曰我等三字疑衍{甲}。
  103. 7)「有」無有{甲}。
  104. 8)「差」無有{甲}。
  105. 9)「義」下有「可別」又冠註曰可別疑衍{甲}。
  106. 10)「即」下有「相即」 又冠註曰相即疑衍{甲}。
  107. 11)「現」作「顯」{甲}次同。
  108. 12)「義」無有{甲}。
  109. 13)冠註曰客一作容次同{甲}次同。
  110. 14)「異」作「理」 又冠註曰理一作異{甲}。
  111. 15)「則」作「即」{甲}。
  112. 16)「導」作「噵」{甲}。
  113. 17)冠註曰自下一有還字{甲}。
  114. 18)「體」無有{甲}。
  115. 19)「義」下有「義」{甲}。
  116. 20)「修」作「終」{甲}。
  117. 21)「捉」作「提」{甲}。
  118. 22)「曰」無有{甲}。
  119. 23)「陰」作「蔭」{甲}。
  120. 24)「糧」作「粮」{甲}。
  121. 25)「直」作「眞」{乙}。
  122. 1)「及」作「反」{乙}。
  123. 2)「黎」作「梨」{乙}。
  124. 3)「弟」作「第」{乙}次同。
  125. 4)「支」底本作「攴」編者改書爲「支」前後倣此。
  126. 1)「弟」作「第」{乙}次同。
  127. 2)「上」作「二」{乙}。
  128. 3)「生」作「住」{乙}。
  129. 1)「免」作「兌」又脚註曰兌疑脫字耶{乙}。
  130. 2)▣▣▣字體磨滅{底}ㆍ作「內外中」{乙}。
  131. 3)「弟」作「第」{乙}次同。
  132. 1)「日」作「曰」{乙}。
  133. 1)「弟」作「第」{乙}次同。
  134. 2)「着」作「著」{乙}次同。
  135. 1)▣字體磨滅{底}ㆍ作「支」{乙}。
  136. 1)「亡」作「土」{乙}次同。
  137. 2)「忍」作「忽」{乙}。
  138. 3)「弟」作「第」{乙}次同。
  139. 4)「垷」作「現」{乙}。
  140. 1)「一一」作「二」{乙}。
  141. 2)「弟」作「第」{乙}次同。
  142. 3)「訂」通「證」於此書{編}次同。
  143. 4)「幺」作「云」{乙}。
  144. 1)「感}通「惑」{編}。
  145. 1)「訂」通「證」於此書{編}次同。
  146. 2)「弟」作「第」{乙}。
  147. 3)「解」作「能」{乙}。
  148. 4)「勤」作「勒」{乙}。
  149. 1)「弟」作「第」{乙}次同。
  150. 2)「名」作「各」{乙}。
  151. 1)「弟」作「第」{乙}次同。
  152. 1)「則」作「別」{乙}。
  153. 1)「着」作「著」{乙}。
  154. 2)「弟」作「第」{乙}次同。
  155. 1)「弟」作「第」{乙}次同。
  156. 2)「爲」作「憑」{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