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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10_b_01L법계도기총수록 하권 1(法界圖記叢髓錄 卷下之一)『일승법계도』 원문 三글에 이른다. 셋째, 글의 뜻을 풀이한다. 글에 7언 30구가 있다. 이 중에 크게 나누면 셋이 있으니, 처음 18구는 자리행自利行을 기준으로 한 것이고, 다음 4구는 이타행利他行을 밝힌 것이며, 다음 8구는 수행자의 수행방편과 이익 얻음을 변별한 것이다.
처음 문에 나아가 두 가지가 있다. 처음 4구는 증분證分을 나타내 보이고, 둘째, 다음 14구는 연기분緣起分을 나타낸다. 이 중에 처음 2구는 연기의 체體를 가리킨다. 둘째, 다음 2구는 다라니의 이理와 덕용(用)을 기준으로 하여 법을 포섭하는 분제分齊를 변별한 것이다. 셋째, 다음 2구는 사법事法에 즉하여 법을 포섭하는 분제를 밝힌 것이다. 넷째, 다음 4구는 시간(世時)을 기준으로 하여 법을 포섭하는 분제를 보인 것이다. 다섯째, 다음 2구는 계위를 기준으로 하여 법을 포섭하는 분제를 밝힌 것이다. 여섯째, 다음 2구는 위의 뜻을 통틀어 논한 것이다. 비롯 여섯 부문이 같지 않으나 오직 연기 다라니법을 나타낸 것이다.1)
처음에 말한 ‘연기의 체體’는 곧 일승의 다라니법이다. 하나가 곧 일체이고 일체가 곧 하나인, 걸림 없는 법계의 법이다. 이제 우선 하나의 문에 근거하여 연기의 뜻을 나타낸다.
이른바2) “연기란 위대한 성인이 중생을 섭수하여 이理에 계합하고 사事를 버리도록 하려는 것이다. 범부는 사事를 보면 곧 이理에 미혹하나, 성인은 이理를 얻어서 이미 사事가 없다. 그러므로 이제 참된 이理를 들어서 미혹한 유정을 깨닫게 하여 모든 유정들로 하여금 사事가 곧 없으며 사事가 곧 이理에 계합함을 알게 하려는 까닭에 이 가르침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므로 『십지경론』에서 말한다.3) ‘자상自相’은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과보의 상(報相)이니, 명색名色이 아리야식과 함께 생기는 것이다. 경에서 ‘삼계三界의 땅에 다시 싹이 생겨남이 있으니, 이른바 명색이 함께 생긴다’4)라고 한 까닭이다. ‘명색이 함께 생긴다’는 것은 명색이 저 (아리야식과) 함께 생기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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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10_b_02L法界圖記叢髓錄卷下之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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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10_b_04L[一乘法界圖原文三]1)文云。 [148] 三釋文2)下 [149] [148] 意。文有七言三十句。
006_0810_b_05L此中大分有三。初十八句。約自利行。
006_0810_b_06L次四句。3)明 [150] 利他行。次八句。4)弁 [151] 行者
006_0810_b_07L5)修行 [152] 方便及得利益。
006_0810_b_08L就初門中有二。初四句。現示6)訂分。二
006_0810_b_09L次十四句。 7)現 [153] [149] 緣起分。此中初二句。指
006_0810_b_10L緣起體。二次二句。約陁羅尼理用。以
006_0810_b_11L辨攝法分齊。三次二句。即8)事 [154] 9)法明 [155] 攝
006_0810_b_12L法分齊。四次四句。約世時示攝法分齊。
006_0810_b_13L五次二句。約位以彰攝法分齊。六次二
006_0810_b_14L句。摠論上意。雖六門不同。而唯*現緣
006_0810_b_15L起陁羅尼法。初10)云 [156] [150] 緣起體者。即是一
006_0810_b_16L乘陁羅尼法。一即一切。一切即一。無
006_0810_b_17L障㝵法11)界法 [157] 也。今且約一門。*現緣起
006_0810_b_18L義。所謂緣起者。大聖攝生。欲令契理
006_0810_b_19L捨事。凡夫見事。即迷於理。聖人得理。
006_0810_b_20L旣 [151] 無於事。故今擧實理。以會迷情。令諸
006_0810_b_21L有情。知事即無。12)即事 [158] 會理。故興 [152] 此敎。
006_0810_b_22L故地論*云。自相者。有三種。一者報相。
006_0810_b_23L名色共阿梨 [153] 耶識生。如經。於三界地。復
006_0810_b_24L有13)芽 [159] 生。所謂名色共生故。名色共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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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10_c_01L둘째는 저것으로 인한 상(彼因相)이니, 이 명색이 저 (아리야식)을 여의지 않고, 저 (아리야식)에 의지하여 함께 생기기 때문이다. 경에서 ‘여의지 않는다’5)라고 한 까닭이다.
셋째는 저것의 과보가 차례를 이루는 상(彼果次第相)이니, 육입六入에서부터 유有에 이르는 것이다.6) 경에서 “이 명색이 자라서는 육입의 무더기를 이루고, 내지乃至7) 유有의 인연인 까닭에, 태어남ㆍ늙음ㆍ아픔ㆍ죽음ㆍ근심ㆍ슬픔ㆍ고통ㆍ번뇌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중생은 고통의 무더기를 자라나게 하나, 이 가운데 나(我)와 나의 것(我所)을 여의었으며 지知도 없고 각覺도 없으니 풀과 나무와 같다.”8)라고 한 것이다. 이 중에 ‘나와 나의 것을 여의었다’라고 하는 것은 이 둘이 공空을 보이는 것이다. ‘지知도 없고 각覺도 없다’라는 것은 자체가 무아이기 때문이다. ‘풀과 나무와 같다’는 것은 중생의 수가 아님을 보인 때문이다9)라고 하였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십이인연 등은 곧 자체의 성품이 공空하여 저 아리야식을 의지하여 생겨난다. 아리야식은 미세하고 자체가 무아이며 십이인연을 낳는다. 십이인연도 다 무아이니, 따라서 연緣으로 생겨난 것들은 별다른 법이 있지 않다. 부처님은 연기를 관하는 문(緣起觀門)을 들어서 모든 법이 일체가 무분별이며 곧 참된 성품을 이룸을 알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지경론』에서 이르기를, ‘세제世諦를 따라 관觀하여 곧 제일의제第一義諦에 들어간다’10)라고 하니 이것이 그 일이다.11) 이 뜻은 삼승에 있으나 또한 일승에도 통한다. 무슨 까닭인가? 일승을 목표로 하는 바이기 때문이다.”12)
만약 별교일승을 기준으로 하면, “간략히 열 가지 문을 설한다. -
006_0810_c_01L者。名色共彼生故。二者彼因相14)者。 [160] 是
006_0810_c_02L名色不離彼。依彼共生故。 15)如 [161] [154] 經。不離
006_0810_c_03L故。三者彼果次16)弟相。從六入乃至於
006_0810_c_04L有。如經。此名色增長。已成六入聚乃至
006_0810_c_05L有因緣故。有生老病死憂悲苦惱。如是
006_0810_c_06L衆生。生長苦聚。是中離我我所。無17)▣ [162] [155]
006_0810_c_07L無 [156] 覺。如草木也。第下之一第一張 此中
006_0810_c_08L離我我所者。此二18)示 [163] 空。無知無覺者。
006_0810_c_09L自體無我故。19)如 [164] 草木者。示非衆生數故。
006_0810_c_10L當知。十二因緣等。即自20)體 [165] [157] 性空。依彼
006_0810_c_11L阿21)賴 [166] 耶識生。梨耶微細。自體無我。生
006_0810_c_12L十二因緣。十二因緣。22)亦 [167] 皆無我。故緣
006_0810_c_13L生等。無23)有 [168] 別法。佛擧緣起觀門。以會
006_0810_c_14L諸法一切無分別即成實性。故地論
006_0810_c_15L云。隨順觀世諦。即入*弟一義諦。是其
006_0810_c_16L事也。此義在三乘。亦通一乘。何以故。
006_0810_c_17L一乘所目故。若約別敎一乘。略說十
006_0810_c_18L「文云」無有{甲}。「下」無有{甲}。「明」無有
006_0810_c_19L{甲}。「弁」下有「修」{甲}。「修行」無有{甲}。
006_0810_c_20L「訂」通「證」於此書{編}次同。「現」作「顯」{甲}次
006_0810_c_21L同。冠註曰事下疑脫顯字{甲}。「法明」無有
006_0810_c_22L{甲}。「云」作「言」{甲}次同。「界法」作「法界」
006_0810_c_23L{甲}。「即事」作「事即」{甲}。「芽」作「牙」{甲}。
006_0810_c_24L「者」無有{甲}。「如」作「知」{甲}。「弟」作「第」
006_0810_c_25L{甲}{乙}。▣字體磨滅{底}ㆍ作「知」{甲}ㆍ作「如」{乙}。
006_0810_c_26L「示」下有「現」{甲}。「如」無有{甲}。「體」下
006_0810_c_27L有「自」{甲}。「賴」作「梨」{甲}。「亦」作「示」{甲}。
006_0810_c_28L冠註曰有一作分{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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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11_a_01L이른바 인연은 나뉘어 차례가 있는 까닭이며, 한마음(一心)에 포섭되는 까닭이며, 자상과 업으로 이루기 때문이며, 서로 버리거나 여의지 않기 때문이며, 세 길(三道)이 끊어지지 않기 때문이며, 과거와 미래를 관하기 때문이며, 세 고통(三苦)이 모인 것이기 때문이며, 인연으로 생기기 때문이며, 인연의 생함과 멸함에 묶여 있기 때문이며, 있음과 다함을 따르는 관觀이기 때문이다.13) 이와 같은 열 번의 십이인연은 일승一乘의 뜻에 거두어진다.”14)
무슨 이유로 열 번을 헤아려 설하는가? 한량없음을 나타내고자 하기 때문이다.문 열 번의 인연은 앞과 뒤에 해당하는가, 동시(一時)에 해당하는가?답 곧 앞과 뒤이기도 하고, 곧 앞과 뒤가 없기도 하다. 까닭을 알 수 있는 것은 문門이 같지 않기 때문에 곧 앞과 뒤이고, 육상六相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곧 앞과 뒤가 없다. 그 뜻은 무엇인가? 열 번이 비록 다르나 한 가지 무아를 이루기 때문이다.“『영락경瓔珞經』15)의 열 번의 인연16)은 삼승三乘의 뜻에 포섭된다. 무슨 까닭인가? 가르침에 따라서 차별되어 같지 않기 때문이다.”17) 자세히는 『십지경론』에서 설한 것과 같다.18) 십이인연의 설과 같이, 나머지 연緣으로 생겨난 모든 법도 예에 준하여 알 수 있다.
둘째, ‘다라니법陀羅尼法’은 아래에서 설하는 것19)과 같다.셋째, ‘사事에 즉하여 법을 포섭한다’라는 것은 인다라니와 미세(다라니)를 나타내기 때문이니, 자세한 뜻은 경經과 같다.넷째, ‘시간(世時)을 기준으로 하여’라는 것은, 이른바 구세九世는 과거의 과거ㆍ과거의 현재ㆍ과거의 미래ㆍ현재의 과거ㆍ현재의 현재ㆍ현재의 미래ㆍ미래의 과거ㆍ미래의 현재ㆍ미래의 미래세이다. 삼세三世가 상즉하고 더불어 상입하여 그 일념一念을 이루니, 총總과 별別을 합하여 이름 붙인 까닭에 십세十世가 된다. 일념은 현상으로서의 순간(事念)을 기준으로 하여 설한 것이다.다섯째, ‘지위를 기준으로 한다’는 것은 육상의 방편으로써 뜻에 따라서 풀어 나가면 이해할 수 있다. 육상은 또한 위에서 설한 것과 같다.
문 ‘연기’라는 한마디 말 중에 모든 법이 둘이 없어서 곧 일이 끝남20)이 드러났는데 왜 많은 문이 필요한가?답 체體를 알면 곧 그러하여 멀리서 구함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
006_0811_a_01L門。所謂因緣有分次*弟故。一心所攝
006_0811_a_02L故。自業成故。不相捨離故。三道不斷
006_0811_a_03L故。觀1)先 [169] 後際故。三苦集故。因緣生故。
006_0811_a_04L因緣生滅縛故。隨順有盡觀故。如是
006_0811_a_05L2)十番 [170] 十二因緣。一乘義攝。何故3)十 [171] 數
006_0811_a_06L說。欲*現無量故。問。十番因緣。爲當前
006_0811_a_07L後。爲當一時耶。答。即前後。即無前後。
006_0811_a_08L4)所 [172] 以得知。門不同故。即前後。六相成故。
006_0811_a_09L5)即6)無 [173] 前後。其義云何。十番雖別。而
006_0811_a_10L同成無我故。7)纓絡 [174] 經十番因緣。三乘
006_0811_a_11L義攝。何以故 8)准 [175] [158] 敎差別不同。廣9)義 [176]
006_0811_a_12L如地論說。如十二因緣說。餘緣生諸法。
006_0811_a_13L准例可解。二陁羅尼法者。如下說。三
006_0811_a_14L即事攝法者。 *現因陁10)羅尼 [177] 及微11)細 [178] 故。
006_0811_a_15L廣義如經。四12)約世時者。 [179] 所謂九世者。
006_0811_a_16L過去過去過去現在。過去未來。現在
006_0811_a_17L過去。現在現在。現在未來。未來過去。
006_0811_a_18L未來現在。未來未來13)世。 [180] 三世相即及
006_0811_a_19L與相入。成其一念。摠別合14)明。 [181] 故15)爲 [182]
006_0811_a_20L十世。一念者。約事念說也。五約位者。
006_0811_a_21L第下之一第二張 以六相方便。隨義消
006_0811_a_22L息 16)可 [183] 解也。六相者。亦 [159] 如上說。問。17)於 [184]
006_0811_a_23L緣起一言中。諸法無二。即*現了18)手。 [185]
006_0811_a_24L何須多門。答。體解即是。不須遠求。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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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11_b_01L그러므로 경에 이르기를, “음욕(婬)과 분노(怒)와 어리석음(癡)의 성품이 곧 보리菩提이다.”21)라고 한 것이다. 이와 같은 것 등에서 미혹하여 극히 멀리 있으니,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일곱 가지 괴로움에 대한 진리 이외에 따로 보리가 있어, 헤아릴 수 없는 겁 동안 설하신 대로 수행하여야 (피안彼岸으로) 건너갈 수 있다고 가르치신 것이다. 미혹한 자를 위하여 많은 문의 설명이 필요한 것이다.
문 만약 그렇다면 법문이 수없을 것인데 어째서 오직 여섯 문의 설명뿐인가?답 여섯 문으로 설한 것은 모든 법을 예에 준하여 마땅히 알 수 있기 때문에 간략히 이와 같이 설하였으니, 실로 말 그대로이다.여섯째, ‘그윽하여 분별이 없다’라는 것은 연기의 법이 으레 그러하기 때문이니, 위에 준하여 생각할 수 있다.
둘째는 이타행 중에 나아감이니, ‘해인海印’이란 비유를 들어서 이름 붙인 것이다. 무엇인가? 큰 바다는 매우 깊고 밝고 맑아 밑바닥까지 비치니, 천제天帝가 아수라와 싸울 때 모든 병사들과 모든 무기들이 그 가운데에 나타나 분명히 드러남이 마치 글자를 도장 찍은 것과 같기 때문에 ‘해인’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능히 삼매에 들어가는 것 또한 이와 같다. 법성을 완전히 증득하여 밑바닥이 없어서 끝까지 청정하고 맑고 밝아서 세 가지 세간이 그 가운데 나타나므로 이름하여 ‘해인’이라고 한다.
‘번다하다(繁)’란 치성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나타낸다(出)’는 것은 솟아나오는 것이 다함없기 때문이다.‘여의如意’란 비유를 따라 이름 붙인 것이다. 여의보왕如意寶王이 무심히 보배를 비 내려 중생을 이익되게 하되 연緣을 따라 끝이 없다. 석가여래의 훌륭하고 교묘한 방편 또한 이와 같아서 일음一音으로 펼치는 바가 중생계에 응하여 악惡을 없애고 선善을 일으켜 중생을 이익되게 하니, 어디든 쓰일 곳에 따라서 여의하지 않음이 없는 까닭에 ‘여의’라고 이름한 것이다.
셋째는 수행의 방편을 기준으로 한 것이니, 이 중에 둘이 있다. 첫째, 수행의 방편을 밝힌 것이고, 둘째, 이익 얻음을 변별한 것이다.첫째 문에서 ‘행자行者’란 일승의 보법普法을 보고 들은 이후 아직 보법을 원만히 증득하기 이전까지를 말한다. 곧 이것은 별교일승을 기준으로 하여 설한 것이다. 만약 방편일승方便一乘을 기준으로 하여 설하면, -
006_0811_b_01L故經*云。婬19)怒 [186] 癡性。即是菩提。如是
006_0811_b_02L等迷20)之 [187] 極遠。是故佛敎。七種苦諦以
006_0811_b_03L外。別有菩提。三無數刧。如說修行。乃
006_0811_b_04L可得度。爲迷之者。須多門說。問。若如
006_0811_b_05L是者。法門無數。何故。唯六門說耶。答。
006_0811_b_06L以六門說。諸法准例。應可解故。略如是
006_0811_b_07L說。其實如言。六㝠 [160] 然無分別者。緣起
006_0811_b_08L法法如是故。 21)准 [188] [161] 上可思。
006_0811_b_09L二就利他行中。 22)海 [189] 印者。約喩得名。何
006_0811_b_10L者。 23)大 [190] 海極深。明淨徹底。天帝共阿修
006_0811_b_11L羅鬪諍時。一切兵衆。一切兵具。於中
006_0811_b_12L24)現 [191] 現。了了分明。如25)印 [192] 文字。故名海印。
006_0811_b_13L能26)人 [193] [162] 三27)䏞。 [194] 亦復如是。窮訂法性。無
006_0811_b_14L有源底。 28)究 [195] 竟淸淨。湛然明白。三種世
006_0811_b_15L間。於中*現現。名曰海印。繁者熾盛
006_0811_b_16L義故。出者涌出無盡故。如意者從喩
006_0811_b_17L得名。如意寶王。無心而雨寶益生。隨緣
006_0811_b_18L無窮。釋迦如來善巧方便。亦復如是。
006_0811_b_19L一音所暢。應衆生界。滅惡生善。利益
006_0811_b_20L衆生。隨何用處。無不如意。故名如意。
006_0811_b_21L三約修行方便者。此中有29)二一 [196] 明修
006_0811_b_22L行方便。二30)辨 [197] 得利益。初門行31)者 [198] 者。謂
006_0811_b_23L見聞一乘普法已去。未滿32)圓 [199] 訂普法已
006_0811_b_24L還。 33)即 [200] 是此約別敎一乘說也。若約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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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11_c_01L오승五乘이 모두 일승에 들어가 포섭된다. 무슨 까닭인가? 일승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바(一乘所流)이고, 일승을 목표로 하는 바(一乘所目)이며, 일승의 방편(一乘方便)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 뜻을 기준으로 하면 오승을 모두 포섭하니, 일승의 수행자도 또한 가능하다.
‘흘러나오는 바(所流)’와 ‘목표로 하는 바(所目)’는 연기의 도리를 기준으로 한 말이고, ‘방편’은 지혜를 기준으로 한 말이다. 무슨 까닭인가? 나아가 머무르지 않는 것을 방편이라 이름하고, 마음을 돌이키지 않은 것을 방편이라 이름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성자의 뜻을 기준으로 설한 것이기도 하다. 무슨 까닭인가? 훌륭하고 교묘한 방편으로 중생을 이끌어 맞아들이기 때문이니 오승의 설과 같다. 사람(人)과 법法, 원인(因)과 결과(果), 앎(解)과 행行, 이법(理)과 현상(事), 가르침(敎)과 뜻(義) 등의 일체 모든 법도 예에 준하면 이와 같다.
문 이른바 오승五乘 등의 법은 설하는 가르침(能詮敎法)인가, 설해지는 뜻(所詮義)인가?답 설하고 설해지는 일체 모든 법은 다 말(言) 가운데 있다. -
006_0811_c_01L便一乘說。五乘摠是入一乘攝。何以故。
006_0811_c_02L第下之一第三張 以一乘所流一乘所
006_0811_c_03L目一乘方便故。若約此義 捴攝五乘。
006_0811_c_04L一乘修行者亦得。所流所目者。約緣起
006_0811_c_05L道理語。方便者。約智語。何以故。進
006_0811_c_06L趣不住。名34)曰。 [201] [163] 不廻心者。不名方便故。
006_0811_c_07L亦可約聖者意說。何以故。以善35)巧 [202]
006_0811_c_08L方便。引接衆生故。如五乘說。人法因
006_0811_c_09L果36)解37)行 [203] 理事敎義等。一切諸法。准例
006_0811_c_10L如是。
006_0811_c_11L問。所謂五乘等法。爲是能詮敎法耶。爲
006_0811_c_12L是所詮38)之 [204] 義耶。答。能詮所詮一切諸法。
006_0811_c_13L「先」作「前」{甲}。「十番」無有{甲}。「十」下有
006_0811_c_14L「番」{甲}。「所」作「何」{甲}。冠註曰即下疑脫
006_0811_c_15L無字{甲}。「無」無有{甲}。「纓絡」作「瓔珞」{甲}。
006_0811_c_16L「准」作「唯」{甲}。「義」無有{甲}。「羅尼」無有
006_0811_c_17L{甲}。「細」下有「陀」 又冠註曰陀字更勘{甲}。
006_0811_c_18L「約世時者」無有{甲}。冠註曰世疑也{甲}。「明」
006_0811_c_19L作「名」{甲}。「爲」無有{甲}。「可」上有「即」{甲}。
006_0811_c_20L「於」無有{甲}。「手」作「乎」又冠註曰乎疑耳
006_0811_c_21L{甲}。「怒」作「惱」又冠註曰惱疑怒{甲}。「之」
006_0811_c_22L無有{甲}。「准」作「準」{甲}。「海」無有{甲}。
006_0811_c_23L「大」上有「是」{甲}。「現」作「離」又冠註曰離
006_0811_c_24L疑顯{甲}。「印」下有「顯」{甲}。「人」作「入」{甲}。
006_0811_c_25L「䏞」作「昧」{甲}。「究」上有「以」{甲}。「二一」
006_0811_c_26L作「三」{乙}。「辨」作「辯」{乙}。「者」無有{甲}。
006_0811_c_27L「圓」無有{甲}。「即」無有{甲}。「曰」下有「方便」
006_0811_c_28L{甲}。「巧」無有{甲}。冠註曰解下一有行字{甲}。
006_0811_c_29L「行」無有{甲}。「之」無有{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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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12_a_01L그 뜻이 무엇인가? 설해지는 법은 말의 모습(言相)이 모두 끊어졌으나 모든 부처님 세존께서는 대자비와 본래 서원의 힘(本願力)인 까닭이며, 모든 부처님집의 법이 으레 그러한 까닭에 말로 된 가르침(言敎)을 베풀어 중생을 위하여 설하신 것이다. 이 뜻으로써 가르침의 그물에 포섭된 바 일체 모든 법이 모두 다 말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일체 모든 법이 단지 이름(名字)만 있을 뿐이다.”22)라고 한 것이 곧 그 뜻이다.
문 증분의 법은 말의 모습(言相)으로 미치지 못하고 언교의 법(言敎之法)은 현상(事) 가운데 있다면, 증분과 교분敎分의 두 법이 항상 두 변에 있게 되는 허물일 것이다.답 만약 정情을 기준으로 하여 설하면, 증분과 교분의 두 법이 항상 두 변에 있게 된다. 만약 이법(理)을 기준으로 하여 말하면, 증분과 교분의 두 법이 예부터 중도이고 하나로서 무분별이다. 까닭을 알 수 있는 것은, 변계遍計는 모양(相)이 없고 의타依他는 생겨남이 없으며 진실은 성품이 없어서 세 가지의 자성이 항상 중도에 있으니 세 법 이외에 다시 증분과 교분이 없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하나로서 무분별이니, 그러므로 지인至人은 이 이법(理)을 얻은 까닭에 이름의 모습(名相)으로 미치지 못하나, 중생을 위하여 설하기 때문에 말이 현상(事) 가운데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經의 게偈에서 이르기를, “일체 모든 여래께서 부처님의 법을 설하심이 없으나 그 응하여 교화하실 바를 따라서 위하여 법을 연설하신다.”23)라고 한 것이 그 뜻이다. 그러므로 성자聖者가 변계를 따르는 까닭에 세 가지 자성을 세워서 우선 궁핍한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점점 이후에 세 가지 자성이 없음(三無性)을 나타내 꿈꾸는 사람을 깨우니, 이것이 곧 성자의 큰 훌륭하고 교묘한 (방편)이다.
문 『섭대승론』에서 이르기를 변계소집은 범부의 경계이고 의타와 진실은 성자의 지혜경계라고 하였는데, 무엇 때문에 성자가 변계를 따르는 것인가?답 변계의 모든 법은 잘못 거꾸로 되었기(顚倒) 때문에 있다. 그러므로 논論에서 ‘범부의 경계’24)라고 말한 것이다. 필경에 공空인 까닭에 상대할 만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논論 가운데 성자의 경계가 아니라는 것은 공空을 아는 것이 성자의 경계가 아니라고 한 것이 아니다. -
006_0812_a_01L皆在言中。其義如1)何。 [205] 所詮之法。 2)言 [206]
006_0812_a_02L相皆絕。諸佛世尊。以大慈悲本願力故。
006_0812_a_03L諸佛家法法如是故。施設言敎。爲衆
006_0812_a_04L生說。以是義故。敎3)網 [207] [164] 4)▣ [208] [165] 攝一切諸法。
006_0812_a_05L皆悉在言。是故經5)云。 [209] 一切諸法。但有
006_0812_a_06L名字。即其義也。
006_0812_a_07L問。訂6)令 [210] [166] 之法。言相不及。言敎之法。在
006_0812_a_08L於事中者。訂敎兩法。常在二邊過。 7)答。 [211]
006_0812_a_09L若約情說。訂敎兩法。常在二邊。若約
006_0812_a_10L8)理 [212] 9)云。 [213] 訂敎兩法。舊來中道。一無分別。
006_0812_a_11L所以得知。遍計無相。依他無生。眞實無
006_0812_a_12L性。三種自性。常在中道。三法以外。更
006_0812_a_13L無訂敎。是故當知。一無分別。是故至
006_0812_a_14L人。得此理故。名相不及。爲10)衆 [214] 生說。故
006_0812_a_15L言在事中。故經偈云。一切諸如來。無
006_0812_a_16L有說佛法。隨其所應化。而爲演說法。
006_0812_a_17L即其義也。是故聖者。隨遍計故。建立
006_0812_a_18L三性。且安窮心。漸漸已後。現三無性。
006_0812_a_19L覺悟夢人。此即聖者大善巧也。
006_0812_a_20L問。如攝論云。遍計所執。凡夫境界。依
006_0812_a_21L他眞實。第下之一第四張 聖智境界。何
006_0812_a_22L故聖者隨遍計耶。答。遍計諸法。顚
006_0812_a_23L倒故有。是故論云。凡夫境界。畢竟空
006_0812_a_24L故。無所可對。是故論中。非聖境界。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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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12_b_01L그러므로 성자는 자비의 방편으로 눈병을 따르는 까닭에 허공의 꽃(空華)을 말한 것이니 무슨 비방이나 논란이 있겠는가? 의미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의타기상은 인연을 따라 생겨난 것이라, 자성이 없어서 두 변의 잘못을 여의었으니 무아와 더불어 같다. 원성실성은 평등한 법성으로서 저것과 이것을 원융하여 분별할 수 없으니 예부터 한 맛이다. 이 뜻 때문에 분별이 미치지 못한다. 그러므로 논에서 ‘성자의 지혜의 경계’라고 한 것이다. 다른 의미는 이와 같다.
만약 실제를 기준으로 하여 설하면, 세 가지 자성이 모두 범부의 경계이다. 무슨 까닭인가? 중생(情)을 따라서 현상(事)을 설하여 세 가지를 세운 것이기 때문이다. 세 가지 자성은 곧 성자의 지혜의 경계이다. 무슨 까닭인가? 지혜를 따라서 이법(理)을 드러내어 세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에서 〔또한 어떤 곳에서는 세 가지 자성 이외에 세 가지 자성 없음(三無性)을 세우지 않고〕25) 또한 어떤 곳에서는 세 가지 자성 이외에 세 가지 자성 없음을 따로 세우는 것이다.26) 까닭이 무엇인가? 망정(情)을 따라서 세운 것은 이해의 문(解門)을 기준으로 한 까닭에 세 가지 자성 없음을 따로 세운 것이나 지혜를 따라서 이법(理)을 드러낸 것은 수행의 문(行門)을 기준으로 한 까닭에 세 가지 자성 이외에 세 가지 자성 없음을 세우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두 자성27) 이외에 진실이 없으니, 어찌 하물며 세 가지 자성 이외에 세 가지 자성 없음이 따로 있겠는가? 까닭을 알 수 있는 것은 모양 없는 평등한 지혜가 앞에 나타나 끝내 상대할 만한 법이 없고 오직 중도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가르침을 세우는 이유를 알아야 한다.
문 위에서 말한 증분의 법과 연기분의 법은 무슨 차별이 있는가?답 차별되기도 하고 차별되지 않기도 하다. 그 뜻은 무엇인가? 증분의 법은 실상實相을 기준으로 하여 설함이니 오직 증득한 이가 알 바이고, 연기분의 법은 중생을 위해 설함이니 연緣과 상응한다. 그러므로 완전히 차별된다. 연기의 법은 뭇 연緣으로부터 생겨나 자성이 없어서 근본과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차별되지 않는다. -
006_0812_b_01L謂11)知 [215] 空非聖境界。是故聖者。慈悲方
006_0812_b_02L便。隨眼病故。言說空12)花。 [216] 有何防 [167] 難。
006_0812_b_03L13)意 [217] 在於此。依他起相。從因緣生。無有
006_0812_b_04L自性。離二邊過。與無我同。圓成實性。
006_0812_b_05L平等法14)性。 [218] 圓融彼此。不可分別。舊來
006_0812_b_06L一味。以此義故。分別不及。是故論15)云。 [219]
006_0812_b_07L聖智境界。別意如是。若約實說。三種
006_0812_b_08L自性。皆是凡夫境界。何以故。隨16)情 [220] 說
006_0812_b_09L事。安17)立 [221] 18)三故。 [222] 三19)種 [223] 自性。即20)是 [224] 聖智
006_0812_b_10L境界。何以故。隨智*現理。非安立故。
006_0812_b_11L是故經中。亦有處三性以外 21)別 [225] [168] 立三
006_0812_b_12L無22)性。 [226] [169] 所以者何。隨情安立。約解門
006_0812_b_13L故。別立三無性。隨智*現理。約行門故。
006_0812_b_14L23)三24)性 [227] 以外。不立三無性。尙二*性以
006_0812_b_15L外。無有眞實。何況三性以外。別有三
006_0812_b_16L無性。所以得知。無相等智現前。 25)究 [228] 竟
006_0812_b_17L無法可對。唯在中道故。是故須解26)立
006_0812_b_18L敎 [229] 所由。
006_0812_b_19L問。如上所言訂分之法及緣起分法。
006_0812_b_20L有何差別。答。別不別。其義云何。訂分
006_0812_b_21L之法。約實相說。唯訂27)所 [230] 28)知。 [231] 緣起分
006_0812_b_22L法。爲29)衆生 [232] 說。與緣相應。是故全別。緣
006_0812_b_23L起之法。從衆緣生。無有自性。與本不
006_0812_b_24L異。是故不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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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12_c_01L문 만약 이와 같다면 자신이 깨달은 것으로써 중생을 위하여 설하는 것은 지말과 다르지 않다. 보통은 차별인가?답 또한 그 뜻도 가능하다. 만약 깨달은 것이 말(言)에 있다고 하면 지말과 다르지 않다. 말(言說)이 깨달음에 있으면 근본과 다르지 않다. 근본과 다르지 않으므로 작용하되 항상 고요하며, 말하되 말하지 않는다. 지말과 다르지 않으므로 고요하되 항상 작용하며, 말하지 아니하되 말한다. 말하지 아니하되 말하는 까닭에 말하지 않는 것이 곧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말하되 말하지 않는 까닭에 말하는 것이 곧 말하지 않는 것이다. 말하는 것이 곧 말하지 않는 것인 까닭에 말하는 것을 곧 얻을 수 없고, 말하지 않는 것이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닌 까닭에 말하지 않는 것을 곧 얻을 수 없다. 둘을 함께 얻을 수 없으므로 둘이 함께 서로 방해하지 않는다.
이 뜻으로써 말함과 말하지 않음이 평등하여 차별이 없으며, 생겨남과 생겨나지 않음이 평등하여 차별이 없으며, 움직임과 움직이지 않음이 평등하여 차별이 없다. 일체 차별의 상대하는 법문을 예에 준하면 이와 같다. -
006_0812_c_01L問。若如是者。以自所30)訂。爲衆31)生。 [233] [170] 與末
006_0812_c_02L不異。尋常差別耶。答。32)亦 [234] 得其義。若爲
006_0812_c_03L所訂在言。與末不異。言說在訂。與本
006_0812_c_04L不異。與本不異故。第下之一第五張 用
006_0812_c_05L而常寂。說而不說。與末不異故。寂而
006_0812_c_06L常用。不說而說。不說而說故。不說即
006_0812_c_07L非不說。說而不說故。說即非說。說即
006_0812_c_08L非說故。說即不可得。不說即非不說故。
006_0812_c_09L不說即33)非不說。 [235] [171] 二俱不可得故。二俱
006_0812_c_10L不相34)防。 [236] 以35)此 [237] 義故。說與不說。等無
006_0812_c_11L差別。生與不生。等無差別。動與不動。
006_0812_c_12L等無差別。一切差別相對法門。准例如
006_0812_c_13L「何」無有{甲}。「言」無有{甲}。「網」作「綱」
006_0812_c_14L{甲}。▣字體磨滅{底}ㆍ作「所」{甲}{乙}。「云」作
006_0812_c_15L「言」{甲}。「令」作「分」{甲}。「答」上有「爲」
006_0812_c_16L{甲}。冠註曰理下疑脫說{甲}。「云」無有{甲}。
006_0812_c_17L「衆」無有{甲}。「知」作「智」{甲}。「花」作「華」
006_0812_c_18L{甲}。「意」作「竟」又冠註曰竟疑意{甲}。「性」
006_0812_c_19L無有{甲}。「云」作「言」{甲}。「情」作「性」又冠
006_0812_c_20L註曰性疑情{甲}。冠註曰立下疑脫故字{甲}。
006_0812_c_21L「三故」無有{甲}。冠註曰種下疑脫無字{甲}。
006_0812_c_22L「是」無有{甲}。「別」作「不」{甲}。「性」下有「亦
006_0812_c_23L有處三性以外別立三無性」{甲}。冠註曰三下
006_0812_c_24L疑脫性字{甲}。「性」無有{甲}次同。「究」作「畢」
006_0812_c_25L{甲}。「立敎」作「敎立」{甲}。冠註曰所下疑脫知
006_0812_c_26L字{甲}。「知」作「故」{甲}。「衆生…之法」十五
006_0812_c_27L字無有{甲}。「訂」通「證」於此書{編}次同。「生」
006_0812_c_28L下有「說」{甲}。「亦」無有{甲}。「非不說」作「不
006_0812_c_29L可得」{甲}。「防」作「妨」{甲}。「此」作「是」{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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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13_a_01L그러므로 경에 이르기를, “유위와 무위의 일체 모든 법은 부처님이 계시거나 부처님이 계시지 않거나, 성품과 모양이 항상 머물러서 변하여 달라짐이 없다.”28)라고 한 것이 그 뜻이다.
또한 바르게 말한 법 중에는 말 이외에 다시 다른 뜻이 없으니 말로써 뜻을 삼는다. 바른 뜻의 법 중에는 바른 뜻 이외에 다시 다른 말이 없으니 뜻으로써 말을 삼는다. 뜻으로써 말을 삼으므로 말은 뜻 아님이 없고, 말로써 뜻을 삼으므로 뜻은 말 아님이 없다. 뜻이 말 아님이 없으므로 뜻은 곧 뜻이 아니고, 말이 뜻 아님이 없으므로 말은 곧 말이 아니다. 말이 곧 말이 아니며 뜻이 곧 뜻이 아니므로 둘을 함께 모두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일체 법이 본래 중도에 있으니 중도는 말과 말 아닌 것에 통한다. 무슨 까닭인가? 모든 법의 실상實相은 말 가운데 있지 않으니, 이름의 성품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말의 법은 진성眞性에 있지 않으니 근기(機)의 이익에 있기 때문이다. 근기의 이익에 있으므로 이름에는 진성이 없으며, 이름의 성품을 여의었으므로 이름하되 이름이 없다. 이름하되 이름이 없으므로 이름으로써 실상(實)을 구하나 실상을 얻을 수 없다. 이름에 진성이 없으므로 이름하되 무아와 같으며, 이름하되 무아와 같으므로 이름의 성품을 얻을 수 없다. 이 뜻으로써 둘을 함께 얻을 수 없으니 오직 증득한 이만 알 바이고 다른 경계가 아니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일체 모든 법은 오직 부처님만 아시는 바이고 나의 경계가 아니다.”29)라고 한 것이다.
문 앞과 뒤의 두 뜻이 무슨 차별이 있는가?답 앞의 뜻은 근본과 지말이 상즉하고 상융相融함으로써 중도의 뜻을 드러내고, 뒤의 뜻은 이름(名)과 뜻(義)이 서로 객客이 됨으로써 무아의 뜻을 드러낸다. 드러나는 도리는 다르지 않으나 설명하는 방편이 다르다. 이는 곧 근본과 지말이 서로 돕고 이름과 뜻이 서로 객이 되어서 중생을 깨우쳐 인도하여 자체의 이름 없는 참된 근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니, 교화함과 교화됨의 핵심(宗要)이 여기에 있다. -
006_0813_a_01L是。 1)是 [238] 故經云。有爲無爲。一切諸法。有
006_0813_a_02L佛無佛。性相常住。無有變異。是其義也。
006_0813_a_03L亦可正說法中。言說以外。更無別義。
006_0813_a_04L以言爲義。正義法中。正義以外。更無
006_0813_a_05L別言。以義爲言。以義爲言故。言無非
006_0813_a_06L義。以言爲義故。義無非言。義無非言
006_0813_a_07L故。義即非義。言無非義故。言即2)非 [239] 言。
006_0813_a_08L言3)即非言義 [240] 即非義故。二俱不可得。
006_0813_a_09L是故。一切法。本來在中道。中道者。通
006_0813_a_10L言非言。何以故。諸法實相。不在言中。
006_0813_a_11L離名性故。言說4)之 [241] 法。不在眞性。在機
006_0813_a_12L益故。 5)在機益故。 [242] 名無眞性。離名性故。
006_0813_a_13L名而無名。名而無名故。以名求實。實
006_0813_a_14L不可得。名無眞性故。名而無6)我同。 [243] 名
006_0813_a_15L而無我同故。名性不可得。以此義故。二
006_0813_a_16L俱不可得。唯訂所知。非餘境界。是故
006_0813_a_17L經云。一切諸法。唯佛所知。非我境界。
006_0813_a_18L問。前後兩義。 7)有 [244] 何8)差 [245] 別。答。前9)義。 [246] 以
006_0813_a_19L本末相10)即 [247] 相融。11)現中道12)義。 [248] 後義。以
006_0813_a_20L名義互爲13)客。 [249] *現無我義。所*現道理。不
006_0813_a_21L14)異。 [250] 第下之一第六張 能詮方便別。此
006_0813_a_22L15)則 [251] 本末相資。名義互*客。開16)導 [252] 衆生。
006_0813_a_23L令致17)自 [253] 18)體 [254] 無名眞源。能化所化宗要
006_0813_a_24L在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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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13_b_01L문 이 뜻은 돈교頓敎의 근본(宗)에 해당하는데 무슨 까닭으로 여기서 설하는가?답 위에서 설한 것처럼 설함(說)과 설하지 않음이 평등하여 차별이 없다. 무슨 까닭인가? 모두 참된 덕이므로 비방하고 힐난할 것이 없으며 우선 분별을 막기 위하여 삼승의 설에 따른 것이니, 대개 지혜로운 이의 수승하고 오묘한 능력이다. 위와 같은 증분과 연기분의 뜻은 논30) 가운데 뜻이 큼(義大)과 가르침이 큼(敎大)에 해당한다.
분별을 반대로 되돌려 무분별을 얻는 것을 ‘연이 없다(無緣)’라고 이름한다. 이법(理)을 따라서 머무르지 아니하므로 ‘훌륭하고 교묘한 (방편)’이라고 이름한다. 말씀대로 수행하여 성자의 뜻을 얻으므로 ‘잡는다(捉)’라고 이름한다. ‘여의如意’는 앞과 같다.31)
‘집으로 돌아간다(歸家)’란 본성을 증득한 까닭이다. ‘집(家)’은 무슨 뜻인가? 그늘지게 덮는다는 뜻이며 머무르는 곳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법성의 참된 공空은 깨달은 이가 머무르는 곳이므로 ‘집(宅)’이라고 이름하고, 대비大悲의 훌륭하고 교묘한 (방편)으로써 중생을 그늘지게 덮어주는 것을 이름하여 ‘집(舍)’이라고 한다. 이 뜻은 삼승에 있으니, 일승이라야 비로소 구경이 된다. 무슨 까닭인가? 법계와 상응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법계다라니의 집과 인다라니의 집과 미세(다라니)의 집 등이다. 이것이 성자가 의거하여 머무르는 곳이므로 이름하여 ‘집(家)’이라고 한다. ‘분수를 따른다(隨分)’란 원만하지 않은 뜻이기 때문이다. ‘자량資糧’이란 보리를 돕는 덕목(助菩提分)이기 때문이다. 아래 경의 「이세간품」 가운데 2천 가지의 답 등과 같은 것이 이것이다.주석석문釋文 2 (別解印相 중 釋文意)〔1〕 자리행1. 연기분‘처음에 말한 연기의 체體는’부터 ‘예에 준하여 알 수 있다’까지32)
대기『대기』에 이른다. ‘처음에 말한 연기의 체體는 곧 일승의 다라니이다’라고 한 것 등에서 연기의 체體는 열 보법에 통한다. 그러나 진성은 오직 유정有情의 문을 기준으로 한 것이라는 것은, 이하의 글에서 “이제 우선 하나의 문에 근거하여 연기의 뜻을 드러내겠다.”라고 하고 12지十二支를 기준으로 하여 해석하기 때문이다.33)
문 앞34)에서 행실만行實滿의 뜻으로 증분에 배대한 것은 무엇인가?답 만약 어느 수행자가 오직 증분에 의지해서 수행하거나 오직 교분에 의지해서 수행한다면 진실행이 아니다. -
006_0813_b_01L問。此19)義 [255] 當頓敎宗。何故此間說。答。如
006_0813_b_02L上說。說與不說。等無差別。何以故。
006_0813_b_03L捴是實德故。無有妨難。且護分別故。
006_0813_b_04L順三乘說。蓋是智者勝妙能也。如上
006_0813_b_05L訂分及緣起分義。當論中義大敎大也。
006_0813_b_06L背反分別。得無分別。名曰無緣。順
006_0813_b_07L理不住故。名善巧。如說20)修 [256] 行。得聖者
006_0813_b_08L意。故名爲21)捉。 [257] [172] 如意如前。歸家者。訂
006_0813_b_09L本性故。家者何義。陰覆義。住處義故。
006_0813_b_10L所謂法性眞空。覺者所住故。名22)曰 [258] 爲
006_0813_b_11L宅。大悲善巧。23)陰 [259] 覆衆生。名曰爲舍。此
006_0813_b_12L義在三乘。一乘方究竟。何以故。應法
006_0813_b_13L界故。所謂法界陁羅尼家及因陁羅尼
006_0813_b_14L家微細家等。此是聖者所依住故。名
006_0813_b_15L曰爲家。隨分者。未滿義故。資24)糧 [260] 者。
006_0813_b_16L助菩提分故。如下經離世間品中。二千
006_0813_b_17L答等是也。
006_0813_b_18L[註釋][自利行]初云緣起體至准例可解。大記云。初
006_0813_b_19L云緣起體者。即是一乘陁羅尼等者。
006_0813_b_20L緣起之體。通十普法。然云眞性唯約
006_0813_b_21L有情門者。以下文云。今且約一門。現
006_0813_b_22L緣起義。而約十二支解釋故也。問。前
006_0813_b_23L以行實滿義。配訂分者云何。答。若有
006_0813_b_24L行者。唯依訂分而修。唯依敎分而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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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13_c_01L(의상) 화상의 뜻은 증분과 교분을 쌍으로 실천하여 닦음을 진실행으로 삼기 때문에 그러하다.(문) 증만證滿의 뜻으로 연기분에 배대한 것은 무엇인가?(답) 총상이 갖춘 바 법을 보일 때 그 별상을 여는 것과 같으니, 이와 같이 증분 가운데 만족된 법을 나타내고자 하는 까닭이며 진성을 변별하기 때문에 그러하다.
법융기『법기』에 이른다. ‘우선 하나의 문에 근거하여 연기의 뜻을 드러내겠다’란 진성을 가리킨다.문 무슨 까닭에 법성을 풀이하지 않고 바로 진성을 변별하는가?답 저 증분은 가리켜 보일 수 없기 때문이다.
‘위대한 성인이 중생을 섭수하여’라고 한 것 등은 비유하면 술 취한 사람이 뜰의 그루터기를 보고서 진짜 귀신이라고 이르는 것과 같으니, 이와 같이 중생이 12지十二支가 곧 매우 깊은 진성의 체體임을 미혹하여, 계탁해서 생사의 법으로 삼는 것이다. 그러므로 위대한 성인이 대자비를 일으켜 그로 하여금 12지가 곧 매우 깊은 진성의 체體임을 알게 하려는 까닭에 “모든 유정들로 하여금 현상(事)이 곧 없으며 곧 현상(事)이 이법(理)에 계합함을 알게 한다.”라고 말한 것이다.(문) 위대한 성인은 그루터기와 귀신을 통틀어 보는가? -
006_0813_c_01L則非實行也。和尙之意。則雙踐訂敎
006_0813_c_02L而修。爲實行故爾也。以訂滿義配緣
006_0813_c_03L起分者云何。第下之一第七張 如示
006_0813_c_04L捴相所具法時。開其別相。如是欲
006_0813_c_05L現訂分之中滿足法故。辨眞性故
006_0813_c_06L爾也。
006_0813_c_07L法記云。且約一門現緣起義者。指眞
006_0813_c_08L性也。問。何故不釋法性。25)直 [261] 辨眞性
006_0813_c_09L耶。答。以彼訂分不可指示故也。大聖
006_0813_c_10L攝生等者。比如醉人。見庭中杌。謂爲
006_0813_c_11L實鬼。如是衆生。迷其十二有支即是
006_0813_c_12L甚深眞性之體。計爲生死之法。是故
006_0813_c_13L大聖。起大悲慈。令其得知十二有支。
006_0813_c_14L即是甚深眞性之體。故云。令諸有情。
006_0813_c_15L知事即無即事會理也。大聖通見
006_0813_c_16L「是」無有{甲}。「非」作「不」{甲}。「即非言義」
006_0813_c_17L無有{甲}。「之」無有{甲}。「在機益故」無有{甲}。
006_0813_c_18L「我同名而無我同故」此文中「名而無我同」五
006_0813_c_19L字缺落。而冠註曰我等三字疑衍{甲}。「有」無
006_0813_c_20L有{甲}。「差」無有{甲}。「義」下有「可別」又冠
006_0813_c_21L註曰可別疑衍{甲}。「即」下有「相即」 又冠註
006_0813_c_22L曰相即疑衍{甲}。「現」作「顯」{甲}次同。「義」
006_0813_c_23L無有{甲}。冠註曰客一作容次同{甲}次同。
006_0813_c_24L「異」作「理」 又冠註曰理一作異{甲}。「則」作
006_0813_c_25L「即」{甲}。「導」作「噵」{甲}。冠註曰自下一有
006_0813_c_26L還字{甲}。「體」無有{甲}。「義」下有「義」{甲}。
006_0813_c_27L「修」作「終」{甲}。「捉」作「提」{甲}。「曰」無有
006_0813_c_28L{甲}。「陰」作「蔭」{甲}。「糧」作「粮」{甲}。「直」
006_0813_c_29L作「眞」{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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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14_a_01L답 그렇다. 아래 글에서 이르기를, “성인은 병든 눈을 따르는 까닭에 허공의 꽃(空花)을 말하는 것이니 어떤 비방이나 논란이 있겠는가?”35)라고 하였기 때문에 통틀어 보는 줄 안다.
『십지경론』에서 ‘자상自相’ 등이라고 한 것은36) (다음과 같이 풀이된다.) ‘자상’은 자신을 가리킨다. ‘과보의 상(報相)’은 오직 색色일 때에도 과보가 아니고 오직 마음(心)일 때에도 또한 과보가 아니다. 이 마음이 깨끗하지 않은 색色을 품은 때를 기준으로 하여 과보의 상을 삼는다. ‘명색名色’이란 색이 아닌 네 가지 온(四陰)37)은 모습이 없어 그윽하고 적막하여 이름(名)이 아니면 나타내지 못하기 때문에 ‘명名’이라고 한 것이다. 색은 모습이 거칠기 때문에 당체當體를 일컬어 ‘색’이라고 하는 것이다. 또 풀이하면, 오직 마음일 때에는 이름을 세울 수 없고, 오직 색일 때도 또한 이름을 세울 수 없으니, 다만 이 마음이 깨끗하지 않은 색을 잡는 첫 찰나를 기준으로 지목해서 사람의 몸을 삼으며, 지목해서 말(馬)의 몸을 삼기 때문에 명색이라고 하는 것이다.
‘(명색이) 아리야식과 함께 생기는 것이다’는 생生을 추구하는 중유中有가 종자를 간직하는 아리야식을 가지고 생기니,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자루 가운데 물건을 가득 담아 (이것을) 가지고 물속으로 가거나 (이것을) 가지고 불 속으로 가거나 뜻대로 가는 것과 같다. 근본되는 식識은 밭과 같고 무명과 행行은 심는 종자와 같으니, 심는 종자는 다섯 결과(五果)38)를 내는 종자이다. 애愛와 취取의 두 지支는 흙과 물과 같다. 그 유有의 지支는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을 생기게 하는 업이다. 그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은 생겨난 결과이다.
문 다섯 결과는 종자인가?답 다섯 결과는 종자가 아니고 다만 다섯 종류39)의 종자를 능히 생기게 할 뿐이다.문 다섯 결과의 종자는 무엇인가?답 아려야식 중의 삼성三性40)이 종자이다. 이 종자는 세 번째의 식지識支의 자리 중에 있다. 이 때문에 이 종자를 합하여 식識으로 삼는다.‘삼계三界의 땅에 다시 싹이 생기니’라는 것은, 이것은 모든 성인이 매우 깊은 대비大悲의 근심을 가장 잘 일으키는 곳이다. -
006_0814_a_01L杌與鬼耶。答。爾也。以下文云。聖人
006_0814_a_02L隨病眼故。言說空花。有何防難。故
006_0814_a_03L知通見也。論云自相等者。自相者
006_0814_a_04L指自身也。報相者唯是色時非是
006_0814_a_05L報也。唯是心時亦非是報。約此心
006_0814_a_06L之抱不淨色時。爲報相也。名色者。
006_0814_a_07L非色四陰。無相溟漠。非名莫現。故云
006_0814_a_08L名也。色相麁故。當體云色也。又釋。
006_0814_a_09L唯是心時。不可立名。唯是色時。亦不
006_0814_a_10L立名。但約此心把不淨色之初刹那。
006_0814_a_11L目爲人身。目爲馬身。故云名色也。
006_0814_a_12L共阿梨耶識生者。求生中有。將種子
006_0814_a_13L藏梨耶識生。猶如有人。帒中盛物。
006_0814_a_14L將去水中。將去火中。隨意往也。本
006_0814_a_15L識如田。無明1)及 [262] 行。如下種子。所下
006_0814_a_16L種子。是生五果之種也。愛取二支。如
006_0814_a_17L土與水。其有支則是能生生老死之
006_0814_a_18L業也。其生老死則是所生果也。問。
006_0814_a_19L五果是種耶。第下之一第八張 答。五
006_0814_a_20L果非種。但能生五種之種也。問。五
006_0814_a_21L果之種是何。答。2)黎 [263] 耶識中。三性種也。
006_0814_a_22L此種在於3)弟三識支位中。是故此種
006_0814_a_23L合爲識也。於三界地。復有芽生者。
006_0814_a_24L此是諸聖最起甚深大悲憂之處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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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14_b_01L‘다시(復)’는 갔다가 다시 오고, 갔다가 다시 오기 때문에 ‘다시’라고 하는 것이다.
‘저것으로 인한 상(彼因相)’이란, ‘저것으로 인한(彼因)’은 아려야식(黎耶識)이고, ‘상相’은 명색이다. ‘저것의 과보가 차례로 이루어지는 상(彼果次第相)’이란, 그 가운데 여섯 지(六支)41)가 있다. ‘이 둘이 공空을 보이는 것이다’ 등이란, 색色을 기준으로 미루어 보아도 색에는 병이나 고통(病苦)이 없고, 마음을 기준으로 미루어 보아도 마음에는 병이나 고통이 없다. 이와 같이 지知도 없고 각覺도 없기 때문에 자체가 무아인 것이다. ‘중생의 품수가 아니다’란, 색色과 마음이 합하여야 비로소 곳곳에서 생生을 받으니, 만약 색과 마음이 떨어져서 단지 색일 때에는 생生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중생의 품수가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다.
‘곧 참된 성품을 이룬다’라는 것은, 하나의 티끌이 자성이 없어서 일체법으로 자성을 삼기 때문에 한 법도 하나의 티끌의 성품이 아닌 것이 없다. 그러므로 ‘참된 성품을 이룬다’라고 한 것이다. 이 티끌이 곧 해인의 체이기 때문에 ‘참된 성품’이라고 한 것이다. ‘세제世諦를 따라 관觀하여’ 등이란, 비유하면 물(水) 가운데 모든 형상을 거두어들이는 것은 자리이기 때문에 진제眞諦가 되고, 물이 다시 형상을 나타내는 것은 이타이기 때문에 속제가 된다. 그러므로 만약 세속을 따르면 곧 진실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제일의제가 밖으로 향하는 뜻으로 속제의 십이인연을 삼기 때문에 ‘세제를 따라 관觀하여 곧 제일의제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화엄경탐현기
『탐현기』에 이른다.42) 두 번째, 모든 고통을 구족함에 셋이 있다. 첫째는 십이연기의 모습을 나타낸 것이고, 둘째 ‘이와 같이’43) 아래는 고통의 무더기를 엮어서 이룬 것이며, 셋째 ‘이 가운데’44) 아래는 연기의 체體가 공함을 밝혀서 존재(有)가 전도된 것임을 드러낸 것이다. 『십지경론』 중에 앞의 첫 번째 단 안에서 앞의 세 지(三支)45)를 합하여 한 부분으로 삼고, 둘째로 ‘삼계에’ 아래에서 뒤의 아홉 지支를 변별한 것이다.46)
그중에 논주는 세 모습으로 나누었으니 첫째는 자상自相이고, 둘째는 동상同相이며, 셋째는 전도상顚倒相이다. -
006_0814_b_01L復者。往而復來往而復來。故云復
006_0814_b_02L也。彼因相者。彼因者黎耶識也。相
006_0814_b_03L者名色也。彼果次*弟相者。於中有
006_0814_b_04L六支也。此二示空等 [173] 者。約色而推。
006_0814_b_05L色無病苦。約心而推。心無病苦。如是
006_0814_b_06L無知無覺故。自體無我也。非衆生數
006_0814_b_07L者。色與心合。方得處處受生。若色心
006_0814_b_08L離而但是色時。不得受生。故云非
006_0814_b_09L衆生數也。即成實性者。一塵無自性。
006_0814_b_10L以一切法爲自性故。無有一法非
006_0814_b_11L一塵性。是故云成實性也。此塵即
006_0814_b_12L是海印之體。故云實性也。隨順觀世
006_0814_b_13L諦等者。猶如水中。攝入諸像。是自利
006_0814_b_14L故。爲眞諦。水還現像。是利他故。爲
006_0814_b_15L俗諦也。是故。若順世俗。即得入眞也。
006_0814_b_16L以*弟一義諦向外之義爲俗諦十二
006_0814_b_17L因緣故。隨順觀世諦即入*弟一義
006_0814_b_18L諦也。
006_0814_b_19L探玄云。 *弟二具足諸苦中有三。
006_0814_b_20L初現十二緣相。二如是下。結成苦
006_0814_b_21L聚。三是中下。明緣體空彰有是倒。
006_0814_b_22L論中。於前初段內。前之三支。合爲
006_0814_b_23L一分。二於三界下。辨後九支。於中
006_0814_b_24L論主分爲三相。一自相二同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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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14_c_01L해석에 두 문이 있다. 첫 번째는 구분된 자리(分位)47)를 기준으로 한 것이고, 두 번째는 뜻에 따름(隨義)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앞(分位) 가운데 자상이란 말하자면 현재 인연의 체體의 상태를 밝히기 때문이다. 둘째, 동상이란 미래의 인연이 현재와 같기 때문이다. 이법상 실제로는 현재에도 또한 생生과 노老 등이 있고 미래에도 또한 식識과 명색 등이 있다. 지금은 구분된 자리(分位)를 기준으로 모습을 나누었기 때문에 (자상과 동상의) 두 모습을 세운 것이다. 셋째, 전도상이란 연기의 체體가 실제로는 공함을 나타내어 존재(有)에 집착함이 전도된 것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두 번째, 뜻에 따름을 기준으로 한 것에서, 첫째는 원인을 따름을 기준으로 하여 미세한 행상行相을 낳는 것이 연기의 자상이다. 둘째는 결과의 모습을 기준으로 하여 연기의 허물과 근심이 결과의 자리에 두루 통함을 나타내 드러내기 때문에 동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셋째는 연기가 실제로는 무아이나 허망하게 취함을 전도顚倒로 삼는 것이다.
문 동상 가운데 두 지(二支)48)는 오로지 결과이고 오로지 현행이다. 자상의 일곱 지(七支)49)는 현행하는 결과가 되며 원인인 종자가 된다. 설사 그런들 무슨 과실인가? 함께 있는(俱有) 허물이기 때문이다. 만약 원인인 종자를 취한다면 “삼계의 땅에 싹이 생긴다.”라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만약 현행하는 결과를 취한다면 곧 저 앞의 넷50)은 생生 등51)과 다르지 않을 것이고, 뒤의 셋52)은 다시 생겨난 결과에 거두어지는 것이 아닐 것이다.답 이들은 모두 현재 생겨난 결과의 자리에 도리어 원인의 이름을 말하여서 자상을 나타낸 것이다.
자상의 일곱 지(七支) 안에 나아가면, 『십지경론』은 나누어 셋으로 한다.첫째, ‘과보의 상(報相)이니, 명색이 아려야식과 함께 생겨난다’라는 것은 말하자면 명색의 지支 가운데 일체의 명언종자를 통틀어 거두는 뜻이 있다. 아뢰야, 즉 식지識支는 통틀어 세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잡집론』53) 제4권54)에 의하면 업業의 종자로 식지識支를 삼는 까닭에 -
006_0814_c_01L三顚倒相。釋有二門。一約分位。
006_0814_c_02L二約隨義。第下之一第九張 前中
006_0814_c_03L自相者。謂明現在因緣體狀故。二
006_0814_c_04L同相者。謂未來因緣同現在故。理
006_0814_c_05L實現在亦有生老等。未來亦有識
006_0814_c_06L名色等。今約分位分相故立二相。
006_0814_c_07L三顚倒者。現緣體實空現執有是
006_0814_c_08L倒。二約隨義者。一約從因。生微
006_0814_c_09L細行相。是緣起自相。二約果相。
006_0814_c_10L現彰緣起過患遍通果位。故云同
006_0814_c_11L相。三緣實無我。妄取爲倒。問。同
006_0814_c_12L相中二支。一向是果。一向現行。
006_0814_c_13L自相七支。爲現果。爲因種。設爾何
006_0814_c_14L失。俱有過故。若取因種。則不應
006_0814_c_15L言三界地生芽。若取現果。即彼前
006_0814_c_16L四不異生等。後三復非所生果攝。
006_0814_c_17L答。此等並是現生果位。却談因名。
006_0814_c_18L以現自相。就自相七支內。論分爲
006_0814_c_19L三。一報相名色共阿黎耶識生者。
006_0814_c_20L謂名色支中有義通攝一切名言
006_0814_c_21L種子。阿賴耶即識4)支。 [264] 通有三義。
006_0814_c_22L一依雜集論*弟四。以業種爲識支。
006_0814_c_23L「及」作「反」{乙}。「黎」作「梨」{乙}。「弟」作
006_0814_c_24L「第」{乙}次同。「支」底本作「攴」編者改書爲
006_0814_c_25L「支」前後倣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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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15_a_01L이끄는 주체(能引)에 속하고 식識의 종자는 명지名支에 들어가 거두어진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 앞의 세 지를 한 곳에서 해석하는 것은 모두 이끄는 주체(能引)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본식本識의 종자로 식지를 삼는다. 그러므로 이 가운데 식識의 종자와 명색 등의 종자가 무명(惑)과 업業의 이끌어 윤택하게 하는 힘 때문에 이 종자를 일으켜 고통의 결과를 생겨나게 한다.
셋째는 현행하는 제8(식)이 또한 식지이다. 그러므로 이 가운데 (저것으로) 인한 상(因相)을 “명색이 본식을 여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이다. 말하자면 이것이 식識과 함께 생겨나는 바이고 명색이 생겨나서는 현행하는 제8(식)에 의거하여 저(8식)를 붙잡아 지니기 때문에 ‘(저것으로 인한 상)’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이법상 실제로는 이 가운데 식識 등의 다섯 종자55)가 앞의 훈습이 일어남으로 말미암아 동시에 생겨나지만 다만 앞으로 구분된 자리(分位)를 나타내 일으킴에 차례가 있는 것에 의거하는 까닭에 앞과 뒤로 설한 것이다. 그러므로 ‘저것의 과보가 차례를 이루는 상(彼果次第相)’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애愛와 취取와 유有의 셋은 비록 생겨나는 대상(所生)은 아니나 그러나 바로 생겨날 때 이것을 갖추어 있기 때문에 『성유식론成唯識論』에서 ‘생겨남과 이끔이 동시’56)라고 한 것이 이 뜻이다. 운운. 이것은 본식이 능히 의지하는 (주체)와 화합함을 이름하여 과보의 상이라고 함을 밝힌 것이다.
둘째, 능히 의지하는 주체(能依)에 체體가 없어 의지하는 바 대상(所依)에 의거하기 때문에 이 식識을 ‘(저것으로) 인한 상(因相)’으로 이름함을 나타낸 것이다.셋째, 능히 의지하는 주체의 모습이 다하고 오직 의지하는 바 대상이 바뀌어 저 자리에 바뀌어 들어가는 것을 결과라고 이름한다. 또한 본식이 바뀜으로 이 결과를 삼는다. 그러므로 점차 간략히 하여 나머지 모습이 모두 다하고 오직 식이 있을 뿐이다. 이상은 시교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만약 종교를 기준으로 하면 이 본식이 여래장이니, 처음에는 물듦(染)과 화합하고, 다음에는 물든 법이 진여(眞)에 의거하며, 나중에는 물듦이 진여와 다르지 않기 때문에 오직 진여가 바뀐 것일 뿐이다. ‘이와 같이 인연’57) 아래는 고통의 무더기를 매듭지은 것이다. -
006_0815_a_01L故屬能引。識種入名支攝。是故。此
006_0815_a_02L文前三支一處釋者。以俱是能引
006_0815_a_03L故。二以本識種爲識支。是故。此中
006_0815_a_04L識種及名色等種。爲 [174] 惑業引潤力
006_0815_a_05L故。起此種子。令生苦果。三現行
006_0815_a_06L1)弟八亦是識支。是故。此中因相
006_0815_a_07L云名色不離本識故。謂此共識所
006_0815_a_08L生。名色生已。依於現行*弟八。爲
006_0815_a_09L彼執持。故名因相。理實此中識等
006_0815_a_10L五種。由前熏發。同特 [175] 而生。但依當
006_0815_a_11L來現起分位。第下之一第一○張 有
006_0815_a_12L次*弟故。說爲前後。是故。名爲彼
006_0815_a_13L果次*弟相也。愛取有三。雖非所
006_0815_a_14L生。然正生時。具有此故。唯識論說
006_0815_a_15L生引同時。是此義也。云云。 此明本
006_0815_a_16L識與能依和合名爲報相。二現能
006_0815_a_17L依無體於 [176] 於所依故說此識名爲
006_0815_a_18L因相。三能依相盡。唯所依轉。轉
006_0815_a_19L入彼位名果。亦以本識轉爲此果。
006_0815_a_20L是故漸略。餘相皆盡。唯有識在。此
006_0815_a_21L上約始敎。若約終敎。則此本識
006_0815_a_22L是如來藏。初則與染和合。次則染
006_0815_a_23L法依眞。後乃染不異眞故。唯眞轉
006_0815_a_24L也。如是因緣下。結苦聚也。是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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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15_b_01L‘이 가운데 나가 없고’58) 아래는 전도상顚倒相을 나타낸 것이니 『십지경론』의 해석과 같다.
십이인연관
징관 스님의 『십이인연관』59)에서 이른다. 십이인연은 이에 생사生死의 큰 나무이며 또한 생사의 큰 강이라고도 이름한다. 무슨 까닭에 나무라고 이름하는가? 세간의 나무가 뿌리ㆍ줄기ㆍ가지ㆍ잎ㆍ꽃ㆍ열매가 있어 서로 이어서 생겨나듯이 십이인연 또한 다시 이와 같다. 과거에 두 원인이 있으니 이를 이름하여 뿌리라고 한다. 두 원인이란 첫째는 무명지無明支이고, 둘째는 행지行支이다. 현재에 다섯 결과가 있다. 다섯 결과란 첫째는 식지識支, 둘째는 명색지名色支, 셋째는 육입지六入支, 넷째는 촉지觸支, 다섯째는 수지受支이다. 현재에 세 원인이 있다. 세 원인이란 첫째는 애지愛支이고, 둘째는 취지取支이며, 셋째는 유지有支이다. 미래에 두 과보가 있다. 두 과보는 첫째는 생지生支이고, 둘째는 노사지老死支이다.
과거의 두 원인 가운데 첫째의 무명지는 말하자면 과거 일체의 번뇌를 무명지라고 이름하고, 또 연緣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을 무명이라 이름한다. 둘째의 행지는 말하자면 일체 몸과 입과 마음의 선악 등의 업을 모두 다 행行이라고 이름하니, 무명인 까닭에 행行을 발생시킨다. 무명과 행行의 두 가지가 과거의 두 원인이다. 행行이란 생사의 업이다. 이 둘이 현재의 다섯 결과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이를 이름하여 뿌리라고 한다.
현재의 다섯 결과 가운데 첫째의 식지識支는 과거의 행업이 있어서 현재의 식識인 정신을 일으키는 것이다. 처음 생生을 받을 때 태胎에 들어가는 한 찰나의 마음을 이름하여 식識이라고 한다.둘째의 명색지名色支는 생을 받은 식識이 있기 때문에 명색을 일으키는 것이다. 명색이란 오온이다. 말하자면 두 번째 찰나 이후의 마음이 -
006_0815_b_01L無我下。現顚倒相。並如論釋。
006_0815_b_02L觀師十二因緣觀云。十二因緣者。
006_0815_b_03L乃是生死大樹。亦名生死大河。何
006_0815_b_04L故名樹。如世間樹有根莖枝葉花
006_0815_b_05L果。相續而生。十二因緣亦復如
006_0815_b_06L是。過去有二因。名之爲根。二因
006_0815_b_07L者。一無明支。二行支。現在有五
006_0815_b_08L果。五果者。一識支。二名色支。三
006_0815_b_09L六入支。四觸支。五受支。現在有
006_0815_b_10L三因。三因者。一愛支。二取支。三
006_0815_b_11L有支。未來有二報。二報。一生支。
006_0815_b_12L二老死支。過去2)上 [265] [177] 因中。一無明
006_0815_b_13L支者。謂過去一切煩惱名無明支。
006_0815_b_14L又云於緣不了名無明。二行支者。
006_0815_b_15L謂一切身口意善惡等業。悉皆名
006_0815_b_16L行。以無明故發生於行。無明與
006_0815_b_17L行二種。第下之一第一一張 是過去
006_0815_b_18L二因也。行者。生死業也。此二。能
006_0815_b_19L感現在五果故。名之爲根。現在五
006_0815_b_20L果中。一識支者。以有過去行業。
006_0815_b_21L發起現在識神。初受生時。入胎一
006_0815_b_22L念心。名之爲識。二名色支者。以
006_0815_b_23L有受生識故。發起名色。名色者。
006_0815_b_24L五蘊也。謂*弟二念已去心也。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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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15_c_01L부모의 붉고 흰 정혈精血과 합하여 백 일에 이르기까지이다. 모든 포개져 있는 (신체기관들이) 아직 열리지 않아서 다만 한 덩어리의 육신(肉團)일 뿐 아직 눈ㆍ귀ㆍ코ㆍ혀의 모습을 이루지 않아 다만 색色과 마음(心)만 있기 때문에 명색이라고 이름한다.셋째의 육입지六入支는 명색을 말미암아 육입을 발생시키는 것이니 육입이란 육근이 식識의 길을 통틀어 생기게 하기 때문에 육입이 된다. 이것은 말하자면 태 안에 있은 지 백 일 이후이다. 한 덩어리의 육신 안에 업으로 생겨난 바람이 일어나 부니 한 덩어리의 육신이 열리고 펼쳐져 모든 육근의 모습을 변화시켜 짓는 것을 이름하여 육입지라고 한다.
넷째, 촉지觸支는 육입을 말미암아 발생하는 것이니 근根과 진塵과 식識 등의 세 가지가 화합하여 만나고 상대하는 것을 촉觸이라고 이름한다. 이것은 말하자면 태어난 이후 두 살(까지)이다. 다른 대상(塵)은 분별하지 못하고 다만 배고픔ㆍ목마름ㆍ더위ㆍ추위만을 느낄 수 있다. 불에 데거나 독에 닿으면 소리 내어 눈물 흘리며 우는 것을 촉지라고 이름한다.다섯째, 수지受支는 대상에 닿음(觸)으로 말미암아 수受를 발생시키는 것이니 받아들임(領納)을 수受라고 이름한다. 이것은 말하자면 두 살 이후에 마음이 점차 모든 대상을 분별하여 다섯 살, 여섯 살까지를 수지受支라고 이름한다. 이 다섯 지支가 과거의 두 원인에 응대하니 현재의 다섯 결과라고 이름한다.
세간의 나무에 이미 나무 몸통이 있으면 반드시 가지와 줄기와 꽃과 열매가 있는 것처럼, 애愛와 취取와 유有의 세 원인이 다시 미래의 생生과 노병사老病死의 두 과보를 불러일으킨다. 현재의 세 원인 가운데 첫째의 애지愛支는 받아들임(領納)으로 말미암아 애愛를 발생시키니, 연緣에 대해서 물듦(染)을 일으키는 것을 애愛라고 이름한다. 이것은 말하자면 일곱 살 이후부터 열다섯 살까지, 꽃을 사랑하고 열매를 탐하여 마음이 바라고 추구함을 이름하여 애愛라고 한다. -
006_0815_c_01L父母赤白精血和合。乃至百日。諸
006_0815_c_02L包未開。但是肉團。未成眼耳鼻舌
006_0815_c_03L相。但有色心。故名名色。三六入
006_0815_c_04L支者。由名色故。發生六入。六入
006_0815_c_05L者。六根通3)生 [266] 識道故。爲六入。此
006_0815_c_06L謂在胎內百日已外也。肉團之內。
006_0815_c_07L起業生風吹。肉團開敷。變作諸根
006_0815_c_08L相。名爲六入支。四觸支者。由六
006_0815_c_09L入故發生。根塵識等三事和合觸
006_0815_c_10L對。名觸。此謂出胎已去兩歲也。未
006_0815_c_11L分別餘塵。但能覺飢渴熱寒。犯火
006_0815_c_12L觸毒。則啼哭之。名爲觸支。五受支
006_0815_c_13L者。由觸境故發生於受。領納名
006_0815_c_14L爲受。此謂兩歲已去。心漸分別諸
006_0815_c_15L塵。五六歲已來。名爲受支。此五
006_0815_c_16L支。酬過去二因。名爲現在五果。如
006_0815_c_17L世間樹。旣有樹身。須有枝柯花果。
006_0815_c_18L愛取有三因。復感未來生老病死
006_0815_c_19L二報。現在三因中。一愛支者。由
006_0815_c_20L領納故。發生於愛。於緣起染名
006_0815_c_21L爲愛也。此謂七歲已去。十五已來。
006_0815_c_22L愛花貪果。心欲追求。名之爲愛。
006_0815_c_23L「弟」作「第」{乙}次同。「上」作「二」{乙}。「生」
006_0815_c_24L作「住」{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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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16_a_01L둘째의 취지取支는 물든 애愛로 말미암아 취取를 발생시키니 연緣에 대한 물듦(染)에 들어가 집착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이름하여 취取라고 한다. 셋째의 유지有支는 취하여 집착함으로 말미암아 유有를 발생시킨다. 몸과 입과 마음의 지음(造作)이 미래의 존재를 부르니, 미래의 결과로 지목하여 현재의 세 원인으로 삼기 때문에 유有라고 이름한다. 이것은 말하자면 그 취하는 대상에 따라서 재물ㆍ색色ㆍ살생ㆍ도둑질ㆍ삿된 음행을 취득하여 손에 넣어서 본래 마음에 칭합하고 순응하니 기억하고 생각하여 업業을 이루어 미래의 결과가 있음을 이름하여 유지有支라고 한다.
꽃이 열매를 맺음에 이 꽃이 뒤의 열매를 생기게 하는 것을 다시 원인이라고 이름하는 것처럼, 이미 그 원인이 있어서 미래의 두 과보를 불러일으킨다. 두 과보란 첫째, 생지生支는 현재로 말미암아 일어나서 미래에 삶을 받음이 있게 하니, 법에 있어서 처음 일어나는 것을 이름하여 생生이라고 한다. 둘째, 노사지老死支는 생生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노사老死를 일으키니, 생生이 노사의 연이기 때문에 생生을 연緣한 노사이다. 이 두 지支는 뒤에 생겨나는 결과이며, 결과는 다시 원인이 되어서 원인과 결과가 서로를 낳음이 마치 큰 나무와 같다.
일체중생이 모두 십이인연에 떴다가 가라앉으며 흘러 돌아다님이 되어서 생사를 따라 좇으며 삼계의 감옥 가운데를 오고 가서 고통을 받음이 끝이 없으니, 세간의 강에 떴다가 가라앉는 것과 같다. 범부가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이는 깨달아 통달하면 흐름을 따르지 않고 도道를 닦아 끊어 제하여 곧 벗어나게 된다. 무릇 십이인연은 생사에 얽어매는 인연이니, 반드시 이 인연을 없애야만 생사를 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경에 이르기를, “무명이 멸하면 행行이 멸하고, 내지 생生이 멸하면 늙음과 죽음이 멸한다.”60)라고 한 것이다. 이 인연을 멸하는 것은 반드시 도道를 닦는 것이 필요하다. -
006_0816_a_01L第下之一第一二張 二取支者。由
006_0816_a_02L染愛故。發生於取。於緣染入。有所
006_0816_a_03L執故。名之爲取。三有支者。由取着
006_0816_a_04L故。發起於有。身口意造作。能招
006_0816_a_05L未來有。以未來果。目爲現在三
006_0816_a_06L因。故名有也。此謂隨其所取財色
006_0816_a_07L殺盜邪婬。取得入手。稱遂本心。
006_0816_a_08L憶思成業。能有當來果。名爲有支。
006_0816_a_09L如花結果。此花能生後果。復名爲
006_0816_a_10L因。旣有其因。能感未來兩報。兩
006_0816_a_11L報者。一生支。由現在發起。令有
006_0816_a_12L未來受生。於法始起。名爲生也。
006_0816_a_13L二老死支者。由有生故。起於老死。
006_0816_a_14L生是老死之緣故。生緣老死。此二
006_0816_a_15L支是後生果。果復爲因。因果相
006_0816_a_16L生。猶如大樹。一切衆生。皆爲十二
006_0816_a_17L因緣漂沒流轉。隨逐生死。往來三
006_0816_a_18L界牢獄之中。受苦無窮。如世間
006_0816_a_19L河漂沒相似。凡夫不覺故。智者了
006_0816_a_20L達。則不從流。修道斷除。即得出
006_0816_a_21L離。夫十二因緣者。生死繫縛之因
006_0816_a_22L緣也。必須滅此因緣。乃得1)免 [267] 於
006_0816_a_23L生死。是故經云。無明滅則行滅。
006_0816_a_24L乃至生滅則老死滅。滅此因緣。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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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16_b_01L문 어떻게 도道를 닦는가?답 십이인연의 근본을 추구한다면 이는 곧 무명이다. 무명으로 인한 까닭에 번뇌의 업을 일으키고, 업으로 인한 까닭에 과보를 일으키고, 과보가 있기 때문에 고통이 있으니, 다 무명으로 근본을 삼음으로 인하여 생사에 흘러 돌아다니며 삼세에 나뉘어 떨어짐이 나무와 같고 강과 같다. 지혜로운 이는 깨달아 알고 그 뿌리를 베고 그 근원을 끊고자 한다. 마치 나무를 베려면 먼저 그 뿌리를 베는 것과 같고, 또한 물을 끊으려면 먼저 그 근원을 끊는 것과 같이, 지금 십이인연의 나무와 강을 베고 끊고자 한다면 먼저 무명을 끊어야 한다.
문 무명이란 무엇인가?답 깨닫지 못하는 마음이 이것이다.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허망되게 분별을 일으켜 마음 밖의 경계를 보고는, 있다고 하고 없다고 하며, 옳다고 하고 그르다고 하며, 얻었다고 하고 잃었다고 한다. 모든 과보의 법인 몸과 마음 등의 고통이 다 무명의 힘이다.
내가 지금 무명을 끊고자 하니 먼저 마음의 근원을 스스로 깨닫는 것이 필요하다. 마음을 따라 일어난 일체 망상이 모두 깨닫지 못한 마음을 따라 생겨난 것이다. 지금 자기 마음의 본성이 생겨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옴도 없고 감도 없음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문) 어떻게 일체의 망념이 홀연히 허망되게 일어난 것임을 알 수 있는가?(답) 깨달으면 생겨나지 않는다.
(문) 무엇을 깨달음이라고 하는가?(답)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일어날 때 도리어 자기의 마음으로 관찰하고 생각하고 헤아려 추구하는 것과 같다. 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어떤 형상이 있는가, 푸른가 노란가, 과거인가 미래인가 현재인가, 안에 밖에 중간에 있는가라고,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추구해도 도무지 형상이 없다. 만약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본래 있다면 오늘 깨달을 때에도 또한 마땅히 볼 수 있어야 하나 지금 깨달으면 곧 없기 때문에, 깨닫지 못한 까닭에 홀연히 허망되게 일어남을 안다. -
006_0816_b_01L須修道。問。云何修道。答。推求十二
006_0816_b_02L因緣根本乃是無明。因無明故。
006_0816_b_03L起煩惱業。因業故。起果報。有果報
006_0816_b_04L故。有苦。皆因無明爲根本。流轉生
006_0816_b_05L死。分離三世。如樹如河。智者了
006_0816_b_06L知。欲伐其根及斷其源。猶如
006_0816_b_07L伐樹。第下之一第一三張 先伐其根。
006_0816_b_08L亦如斷水。先斷其源。今欲伐斷十
006_0816_b_09L二因緣樹河。先斷無明。問。無明何
006_0816_b_10L者是。答。不覺心是。以不覺故。妄
006_0816_b_11L起分別。心外見境。謂有謂無。謂
006_0816_b_12L是謂非。謂得謂失。諸果報法。身心
006_0816_b_13L等苦。皆是無明之力。我今欲斷無
006_0816_b_14L明。先須自覺心源。隨心所起一切
006_0816_b_15L妄想。皆從不覺心生。今須知自心
006_0816_b_16L之本性無生無滅無來無往。何
006_0816_b_17L得知一切妄念忽然妄起。覺則不
006_0816_b_18L生。云何名覺。如貪嗔癡起時。還
006_0816_b_19L以自心觀察思量推求。此貪嗔癡
006_0816_b_20L有何形狀。爲靑爲黃。爲過去爲未
006_0816_b_21L來爲現在。爲在2)▣▣▣ [268] [178] 間。推求
006_0816_b_22L貪嗔癡。都無形狀。若貪嗔癡本來
006_0816_b_23L是有。今日覺時。亦應可見。今覺
006_0816_b_24L即無故。知由不覺故忽然妄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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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16_c_01L깨달으면 생겨나지 않기 때문에 깨달음은 무명을 대하여 다스리는 것이니, 이 깨달음이 현재에 있으면 무명은 마음에 있을 수 없다. 무명이 없기 때문에 일체의 망상과 번뇌가 생겨나지 않는다. 번뇌가 생겨나지 않기 때문에 업이 생겨나지 않는다. 업이 생겨나지 않기 때문에 과거의 두 원인이 없다. 두 원인이 없기 때문에 현재의 다섯 결과가 생겨나지 않는다. 다섯 결과가 생겨나지 않기 때문에 애愛와 취取와 유有의 세 원인이 생겨나지 않는다. 세 원인이 생겨나지 않기 때문에 미래의 두 과보가 생겨나지 않는다. (이를) 십이인연의 큰 나무를 끊고 십이인연의 큰 강을 말리는 것이라고 이름한다. 이 십이인연이 없는 것을 이름하여 열반이라 하고, 이 스스로 깨달은 성인의 지혜를 이름하여 보리菩提라고 한다.
진수기『진기』에 이른다. ‘위대한 성인이 중생을 섭수하여 이理에 계합하고 사事를 버리게 하려는 것이다’ 등이란, 이것은 동교의 뜻을 기준으로 하여 말한 것이다. 첫째, ‘과보의 상(報相)’이란 여래장이 물듦(染)과 화합하여 명색의 과보를 이루는 것이니, 큰 바다의 물이 바람으로 인하여 파도를 이루는 것과 같다. 둘째, ‘저것으로 인한 상(彼因相)’이란 일으켜진 명색이 곧 여래장진식인 것이니, 일으켜진 파도가 곧 물인 것과 같다. 셋째, ‘저것의 과보가 차례를 이루는 상(彼果次第相)’이란, 저 일으켜진 결과가 다른 것이 없고 오직 하나의 진심이 돌고 돈 것이니, 차이나서 구별되는 파도 파도가 오직 하나의 바닷물이 돌고 돈 것인 것과 같다. ‘이 중에는 나(我)와 나의 것(我所)을 여의었으며’란, 오직 하나의 진심의 체體이고 다른 것이 없으니 무엇이 나이고 무엇이 나의 것이겠는가? ‘중생의 품수가 아님’은 마치 흐르는 물이 항상 흘러 끊이지 않아 싫어하여 버리는 때가 없으니 생각이 없음을 말미암은 까닭인 것과 같다. -
006_0816_c_01L覺則不生故。覺是無明對治。此覺
006_0816_c_02L現在。無明不得在心。以無無明故。
006_0816_c_03L一切妄想煩惱不生。煩惱不生故。
006_0816_c_04L業不生。業不生故。無過去二因。
006_0816_c_05L無二因故。現在五果不生。五果不
006_0816_c_06L生故。愛取有三因不生。三因不生
006_0816_c_07L故。未來二報不生。名斷十二因緣
006_0816_c_08L大樹涸十二因緣大河。此十二因
006_0816_c_09L緣無處。名爲涅槃。此自覺聖智。
006_0816_c_10L名爲菩提。
006_0816_c_11L眞記云。大聖攝生欲令契理捨事等
006_0816_c_12L者。此約同敎義云也。一報相者。如
006_0816_c_13L來藏與染和合成名色報。如大海水。
006_0816_c_14L第下之一第一四張 因風成波也。二
006_0816_c_15L彼因相者。所起名色。即是如來藏眞
006_0816_c_16L識。如所起波。即是水也。三彼果次
006_0816_c_17L3)弟相者。彼所起果。無有餘物。唯一
006_0816_c_18L眞心之所廻轉。如差別波。波唯一海
006_0816_c_19L水所廻轉也。此中離我我所者。唯
006_0816_c_20L一眞心之體。無有餘物。何者是我。
006_0816_c_21L何是我所乎。非衆生數者。猶如流水。
006_0816_c_22L恒流不絕。無猒捨時。由無念故也。
006_0816_c_23L「免」作「兌」又脚註曰兌疑脫字耶{乙}。▣▣
006_0816_c_24L▣字體磨滅{底}ㆍ作「內外中」{乙}。「弟」作「第」
006_0816_c_25L{乙}次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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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17_a_01L중생도 또한 그러하여 생사에 흐르고 굴러서 끊고 그만두는 이가 없는 것은 다만 자체가 무아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이런 까닭에 중생의 품수가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아려야식은 미세하고’란 아려야식은 곧 여래장이기 때문이다. ‘곧 참된 본성을 이룸’이란, 삼승을 기준으로 하여 말하면 여래장의 참된 본성이다. 일승을 기준으로 하여 말하면 매우 깊은 진성이다. 아래에서 이르기를, “이 뜻이 삼승에 있으나 또한 일승에도 통한다.”라고 한 까닭이다.
고기
‘고기’에 이른다. 신림 대덕이 당唐에 들어가 융순 화상을 만나서 물었다. “일승에서 아려야식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융순 화상이 말하였다. “일체 모든 법이 다 아려야식으로 근본을 삼으니 넓게는 한량없지만 간략하게는 다섯 가지가 있다. 말하자면 첫째는 희고 청정한 무기식(白淨無記識)이니 삼성三性61)의 종자를 지닌다. 둘째는 아마라식阿摩羅識62)이니 갠지스강의 모래와 같이 (수많은) 덕을 지닌다. 셋째는 성기식性起識이니 열 보법을 지닌다. 넷째는 법계안립식法界安立識이니 세 가지 세간63)의 법을 지닌다. 다섯째는 법계인다라식法界因陀羅識이니 다함없는 인드라 다라니의 법을 지닌다. (이 다섯이) 온전한 법계의 유위이며 온전한 법계의 무위이다. 따라서 ‘아려야식이 선善 등의 삼성과 무위가 함께 모여 일어난 것이다’64)라고 한 것이다.”
법융기『법기』에 이른다. ‘이른바 인연이 나뉘어 차례가 있음’에서 ‘인연’은 중생의 12지인연이다. ‘있음(有)’은 세 존재(三有)65)이다. ‘나뉘어(分)’는 12지의 구별이다. ‘차례(次第)’는 처음 무명지에서 마지막 노사지까지이다.‘한마음(一心)에 포섭된다’에서 한마음은 포섭의 주체(能攝)이고, 포섭의 대상(所攝)은 십이인연이다.‘자상과 업으로 이룬다’란 다른 삿된 원인을 가려내고 자신의 불법 가운데 먼 연緣은 가려내지 않는 것이다. 앞의 문에서 십이인연이 한마음이 지은 것이라고 하니, -
006_0817_a_01L衆生亦尒。流轉生死。無斷絕者。只由
006_0817_a_02L自體無我故尒。是故云非衆生數也。
006_0817_a_03L黎耶微細者。黎耶即如來藏故也。即
006_0817_a_04L成實性者。約三乘云。如來藏實性也。
006_0817_a_05L約一乘云。甚深眞性也。下云此義在
006_0817_a_06L三乘亦通一乘故也。
006_0817_a_07L古記云。林德入唐。得逢融順和尙。
006_0817_a_08L問云。一乘中言黎耶者何耶。順曰。
006_0817_a_09L一切諸法。皆以黎耶爲本。廣則無
006_0817_a_10L量。略則有五。謂一白淨無記識。
006_0817_a_11L持三性種。二阿摩羅識。持恒沙德。
006_0817_a_12L三性起識。持十普法。四法界安立
006_0817_a_13L識。持三種世間法。五法界因陁羅
006_0817_a_14L識。持無盡因陁羅尼法。全法界之
006_0817_a_15L有爲。全法界之無爲。故云黎耶
006_0817_a_16L共善等三性及無爲集起。
006_0817_a_17L法記云。所謂因緣有分次*弟者。因
006_0817_a_18L緣者。生十二支因緣也。有者。三有
006_0817_a_19L也。分者。十二支別也。次*弟者。初
006_0817_a_20L無明支乃至最後老死支也。一心所
006_0817_a_21L攝者。第下之一第一五張 一心是能攝
006_0817_a_22L也。所攝是十二因緣也。自業成者。
006_0817_a_23L簡他邪因。不簡自佛法中踈緣義也。
006_0817_a_24L前門中云。十二因緣是一心所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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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17_b_01L어떤 이가 의심하여 “오직 한마음이 짓는다면 연緣을 기다리지 않는 것인가?”라고 할까 염려한 까닭에 반드시 업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십이인연을 지음을 밝힌 것이다.
‘서로 버리거나 여의지 않는다’란, 앞의 지支가 뒤의 지支를 여의지 않고 뒤의 지支가 앞의 지支를 여의지 않기 때문이다. 앞의 문(자상과 업으로 이룸)에서는 자신의 원인으로 생겨나는 가운데 증상연이 십이인연을 이루는 뜻을 드러냈으며, 이 관觀에서는 자신의 원인으로 생겨나는 가운데 인연이 십이인연을 이루는 뜻을 드러낸 것이다.‘세 길(三道)이 끊어지지 않는다’란 세 길을 끊지 않기 때문에 12지가 서로 여의지 않음을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과거와 미래를 관한다’란, 앞의 문에서 세 길을 끊지 않음이 과거의 무명으로 현재의 다섯 결과를 낳고, 현재의 세 원인으로 미래의 노사를 낳는 것임을 밝히기 때문이다.‘세 괴로움(三苦)이 모인 것이다’란, 삼세의 원인으로 이 세 괴로움을 갖춘 몸을 얻음을 나타낸 것이다. 이 관觀은 원인으로 얻은 결과를 취하여 세운 것이고 생기게 하는 원인을 취한 것은 아니다.‘인연으로 생긴다’란, 인연은 속제의 의지하는 바이고 생긴다(生)는 생겨난 결과의 법이다. 인연의 가깝고 먼 치우친 힘을 깨뜨리고 온전한 힘으로 결과를 낳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인연의 생함과 멸함에 묶여 있다’란, 속제가 의거하는 바를 증거한 것이다. ‘생함(生)’은 생겨난 결과의 법이고 ‘멸함(滅)’은 곧 인연으로 생겨난 결과의 힘을 여읜다는 뜻이다. ‘묶여 있다(縛)’는 수순하여 묶여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생겨나면 멸滅에 수순하여 묶이고, 멸하면 생生에 수순하여 묶이기 때문이다.의상 화상이 이르기를, “생은 곁이 없는 생이니 이 생은 곧 생이 없음이다. 멸은 곁이 없는 멸이니 이 멸은 곧 멸이 없음이다. 이 둘의 둘 없음이 만족된 생과 멸이다.”라고 하였다. 멸로써 생을 묶을 때 생은 비록 멸이 아니나 또한 멸을 여의지도 않는다. 비유하면 새끼줄로 두 사람을 묶어 놓으면 비록 서로 여의지 않으나 또한 합하여 하나의 몸이 되는 것도 아닌 것과 같다. 이것은 부분적인 비유이고 원만한 비유는 아니다. 이 가운데 생과 멸은 오늘 사용하는 법이니 -
006_0817_b_01L恐有疑云。唯一心作。不待緣耶。故明
006_0817_b_02L要由業故作十二因緣也。不相捨離
006_0817_b_03L者。前支不離後支。後支不離前支故
006_0817_b_04L也。前門現自因生中增上緣之成十
006_0817_b_05L二緣義。此觀現自因生中因緣之成
006_0817_b_06L十二緣義。三道不斷者。欲現不斷三
006_0817_b_07L道故十二支不相離也。觀先後際者。
006_0817_b_08L明前門中不斷三道者。以過去無明
006_0817_b_09L生現在五果。以現在三因生未來老
006_0817_b_10L死故也。三苦集者。現其以三際因
006_0817_b_11L得此具足三苦之身。此觀取因所得
006_0817_b_12L果以立也。不取能生因也。因緣生者。
006_0817_b_13L因緣是俗諦所依也。生是所生果法
006_0817_b_14L也。破因緣親踈偏力。現全力生果義
006_0817_b_15L也。因緣生滅縛者。牒俗諦所依也。
006_0817_b_16L生者。所生果法也。滅者。即離因緣。
006_0817_b_17L生果之力義也。縛者。順縛也。謂生則
006_0817_b_18L順縛於滅。滅則順縛於生故。和尙云。
006_0817_b_19L生是無側之生。此生即無生也。滅是
006_0817_b_20L無側之滅。此滅即無滅也。此二無二。
006_0817_b_21L是滿足生滅也。以滅縛生時。生雖非
006_0817_b_22L滅亦不離滅。猶如以繩縛置二人。
006_0817_b_23L雖不相離。亦非合爲一身。此則分喩。
006_0817_b_24L非是滿喩也。此中生滅。則今1)日 [269] 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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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17_c_01L앞에 나타남을 생으로 삼고 본래 생하지 않음을 멸로 삼는다. 그러므로 멸로 생을 묶으면 멸은 능히 묶는 것이고 생은 묶이는 것이다. 생으로 멸을 묶는 것도 또한 이와 같다. 이 관觀은 앞의 온전한 힘으로 결과를 낳는 뜻을 깨뜨려서 힘도 없고 낳음도 없는 연緣을 도와 결과의 법을 낳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또는 이른다. 마음이 미혹됨이란 세간과 출세간의 마음의 번뇌이다. 세간법에 미혹함을 세간의 마음의 번뇌라고 이름하고 출세간법에 미혹함을 출세간의 마음의 번뇌라고 이름한다. 이와 같이 집착의 대상인 법에 더욱 집착하여 그 이법과 현상에 미혹함을 사람과 법의 두 아我에 대한 집착이라고 이름한다. 이 두 아我에 대한 집착은 앞의 여덟 번째 관觀이 그것을 다스리고 미혹하는 마음은 이 관觀에서 다스린다.
‘있음과 다함을 따르는 관觀’이라는 것은,문 무슨 까닭에 이 성기문 중에 앞의 연기문의 힘도 없고 낳음도 없는 연緣이 공空한 결과를 낳는 뜻으로 다스리는 대상을 삼는 것인가?답 성기문 중에 공空과 유有가 함께 나타나기 때문에 앞의 문의 치우친 공空의 집착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
‘열 번이 비록 다르나 한가지로 무아를 이룬다’라는 것은, 일승에서는 해인삼매의 체體로 무아를 삼는다.‘십이인연의 설과 같이, 나머지 연緣으로 생겨난 모든 법도 예에 준하여 알 수 있다’라는 것은, 위에서 법성을 바로 나타냈지만 근기가 깨달음을 얻기 어려운 까닭에 진성이라 고쳐 말하고 연기의 체體를 가리켜 장차 습득하게 하고자 한 것이다. 또 중생의 12지를 기준으로 하여 열 번의 관觀으로써 그것을 가리켜 보였기 때문에 다른 일체법 또한 그렇게 관觀한다. 이와 같이 가르쳐 보이기 때문에 ‘예에 준하여 알 수 있다’라고 한 것이다.
진수기『진기』에 이른다. ‘만약 별교일승을 기준으로 하면, 간략히 열 가지 문을 설한다’란 (다음과 같다.) 앞에서 『십지경론』을 인용하여 이르기를, “세제世諦를 따라 관觀하여 곧 제일의제第一義諦에 들어간다.”66)라고 한 것은, 동교이다. -
006_0817_c_01L用之法。現前爲生。以本不生爲滅也。
006_0817_c_02L是故。以滅縛生。滅是能縛。生是所縛。
006_0817_c_03L以生縛滅。亦如是也。此觀破前全力
006_0817_c_04L生果之義。第下之一第一六張 以現資
006_0817_c_05L於無力無生之緣生果法義也。又云。
006_0817_c_06L心惑者。世出世間心煩惱也。迷世間
006_0817_c_07L法。名爲世間心煩惱也。迷出世法。
006_0817_c_08L名出世間心煩惱也。如是增執於所
006_0817_c_09L執法。迷其理事。名爲人法二我執也。
006_0817_c_10L此二我執。前*弟八觀治之。能迷之
006_0817_c_11L心。於此觀中治也。隨順有盡觀者。
006_0817_c_12L問。何故。此性起門中。以前緣起門無
006_0817_c_13L力無生之緣生空果之義爲所治耶。
006_0817_c_14L答。性起門中。空有並現故。能治於前
006_0817_c_15L門偏空之執也。十番雖別而同成無
006_0817_c_16L我者。一乘中以海印體爲無我也。
006_0817_c_17L如十二因說。餘緣生諸法。准例可解
006_0817_c_18L者。上來直現法性。而機難得訂故。
006_0817_c_19L改云眞性。指緣起體。將欲令習。且約
006_0817_c_20L衆生十二支。以十番觀。而指示之故。
006_0817_c_21L餘一切法。亦爾觀也。如是敎誨故。
006_0817_c_22L云准例可解也。
006_0817_c_23L眞記云。若約別敎一乘略說十門者。
006_0817_c_24L前引論云。隨順觀世諦即入*弟一義
006_0817_c_25L「日」作「曰」{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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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18_a_01L지금 열 번의 뜻을 바로 변별하기 때문에 ‘만약 별교일승을 기준으로 하면’ 등이라고 한 것이다. 만약 열 번으로 첫째 무명지를 관하면 삼세간을 갖추어 첫째 무명지의 체體를 이루기 때문에 허물과 근심을 움직이지 않음이 곧 성性이 중도에 있는 법이다. 첫째 무명지와 같아서 내지 노사 등도 다 또한 이러하다.
문 관하는 바(所觀)가 이와 같다면 능히 관함(能觀)은 어떠한가?답 능히 관함도 또한 그러하다. 처음 하나의 ‘인연이 나뉘어 (차례가) 있음’ 가운데 나머지 아홉을 갖추어 거두고 나머지 아홉 또한 그러하다. 그러나 비록 각각 나머지 아홉을 거두나 처음은 나뉘어 차례가 있음을 관하고, 둘째는 열 가지의 성기심(十種性起心)67)을 관하고, 내지 여덟째는 인연, 아홉째는 연기, 열째는 성기(를 관하니) 이와 같이 문을 달리 하는 것이다.문 『영락경』의 열 번68)이 『화엄경』의 열 번과 어떻게 다른가?답 『영락경』의 열 번은 하나의 법계의 체體를 그린 것이고, 이 경의 열 번은 다함없는 법계를 그린 것이다. 그러므로 ‘가르침에 따라서 차별되어 같지 않다’라고 한 것이다.
대기『대기』에 이른다. 진정 대덕은 열 번에 대해 세 가지 생멸로 풀이한다. 말하자면 앞의 일곱은 변계의 생멸이고, 여덟 번째는 인연의 생멸이며, 뒤의 둘은 도리의 생멸이다.신림 대덕은 네 가지 생멸로 풀이한다. 말하자면 앞은 인연의 생멸이고, 아홉 번째는 연기의 생멸이며, 열 번째는 성기의 생멸이고, 유정有情의 견해를 뛰어넘은 자리는 머무름 없는 생멸이다.
표훈 대덕은 다섯 가지 생멸로 풀이한다. 말하자면 중간의 다섯 관觀은 변계의 생멸이고, 여덟 번째는 인연의 생멸이며, 아홉 번째는 연기의 생멸이고, 열 번째는 성기의 생멸이며, 처음 두 관觀은 머무름 없는 생멸이다. 지금 표훈 대덕의 뜻에 의거하여 풀이하면, 머무름 없는 생멸 가운데 두 번째 관觀의 후반69)은 머무름 없음의 체體이고, -
006_0818_a_01L諦者。是同敎也。今直辨十番意故。
006_0818_a_02L云若約別敎一乘等也。若以十番觀
006_0818_a_03L一無明支。則具三世間。成一無明支
006_0818_a_04L體故。不動過患。即是性在中道之法
006_0818_a_05L也。如一無明。乃至老死等。皆亦爾也。
006_0818_a_06L問。所觀如是。能觀云何。答。能觀亦爾。
006_0818_a_07L初一因緣有分中。具攝餘九。餘九亦
006_0818_a_08L爾也。然雖各攝餘九。而初則觀有分
006_0818_a_09L次1)弟。二則觀十種性起心。乃至八
006_0818_a_10L因緣。九緣起。十性起。如是爲門別也。
006_0818_a_11L第下之一第一七張 問。瓔珞經十番。
006_0818_a_12L與花嚴經十番。何別耶。答。瓔珞經十
006_0818_a_13L番。畫於一法界體。此經十番。則畫
006_0818_a_14L於無盡法界。故云准敎差別不同也。
006_0818_a_15L大記云。眞定德。於十番中。以三生滅
006_0818_a_16L釋也。謂前七遍計生滅。 *弟八因緣
006_0818_a_17L生滅。後二道理生滅也。林德。以四生
006_0818_a_18L滅釋也。謂前因緣生滅。 *弟九緣起
006_0818_a_19L生滅。*弟十性起生滅。越情見處無
006_0818_a_20L住生滅也。訓德。以五生滅釋也。謂中
006_0818_a_21L間五觀則遍計生滅。 *弟八因緣生
006_0818_a_22L滅。 *弟九緣起生滅。 *弟十性起生滅。
006_0818_a_23L初二觀無住生滅也。今依訓德之意
006_0818_a_24L釋。則無住生滅中。 *弟二觀後半。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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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18_b_01L첫 번째 관觀과 두 번째 관觀의 처음 반은 머무름 없음의 지위이다. 그 십이인연의 모습 등으로 머무름 없는 별교 가운데 22위70)를 삼기 때문이다.
청량소
청량의 제6지 주석에 이른다.71) 지금 경문에서 간략히 열 가지 거듭을 나타내어 체성(性)과 모습(相)을 궁구하여서 다함없음을 나타내니, 오직 지위에 기대어 이승과 같은 것은 아니다. 열 가지 거듭이라고 말한 것은, 첫째는 존재(有)의 지支가 서로 이어짐이고, 둘째는 한마음에 포섭되어 돌아감이고, 셋째는 자상과 업으로 도와 이룸이고, 넷째는 서로 버리거나 여의지 않음이고, 다섯째는 세 길이 끊어지지 않음이고, 여섯째는 삼세에 윤회함이고, 일곱째는 세 괴로움이 모여 이룸이고, 여덟째는 인연으로 생함과 멸함이고, 아홉째는 생함과 멸함에 얽혀 묶임이고, 열째는 있지 않음과 다함에 수순함이다. 각기 거스름과 수순함이 있으므로 곧 스물을 이룬다. 그러므로 아래의 경에서 이르기를, “이와 같이 거스름과 수순함으로 관찰한다.”72)라고 한 것이다. 거스르면 연이 멸하고, 수순하면 연이 생겨난다. 운운.
연기에 대해 세 가지 관觀을 논하면, 첫째는 모습(相)과 진리(諦)로 차별하는 관觀이고, 둘째는 대비大悲로 수순하는 관觀이며, 셋째는 일체의 모습(相)에 대한 지혜의 관觀이다. 첫째는 다만 두 진리(二諦)를 관觀하여 유위에 나(我)가 있지 않기 때문에 곧 대비를 으뜸으로 하는 관이다. 둘째는 대비가 중생(物)을 따라 늘어나니 곧 대비가 증상하는 관이다. 셋째는 곧 인연의 체성과 모습의 모든 문을 자세히 다 궁구하는 관이기 때문에 곧 대비가 만족된 관이다.73) 처음 하나는 아래로 이승의 일체지와 같고, 다음 하나는 보살도의 모습에 대한 지혜를 스스로 나타내며, 마지막은 곧 위로 모든 부처님의 일체종지一切種智와 같다.
따라서 『열반경』에 이르기를, “십이인연을 하열한 지혜(下智)로 관하기 때문에 성문의 보리를 얻고, 중간의 지혜(中智)로 관하기 때문에 연각의 보리를 얻으며, 뛰어난 지혜(上智)로 관하기 때문에 보살의 보리를 얻고, 가장 뛰어난 지혜(上上智)로 관하기 때문에 부처님의 보리를 얻는다.”74)라고 한 것이다. -
006_0818_b_01L無住體。初觀及*弟二觀初半。是無
006_0818_b_02L住位也。以其十二緣相等。爲無住
006_0818_b_03L別敎中二十二位故也。
006_0818_b_04L淸凉*弟六地䟽云。今經文內。略
006_0818_b_05L現十重。窮究性相。以現無盡。非
006_0818_b_06L唯寄位同於二乘。言十重者。一有
006_0818_b_07L支相續。二攝歸一心。三自業助成。
006_0818_b_08L四不相捨離。五三道不斷。六三際
006_0818_b_09L輪廻。七三苦集成。八因緣生滅。
006_0818_b_10L九生滅繫縛。十隨順無所有盡。各
006_0818_b_11L有逆順。即成二十。故下經 [179] 云。如
006_0818_b_12L是逆順觀察。逆則緣滅。順則緣生。
006_0818_b_13L云云。 於緣起論三觀者。一相諦
006_0818_b_14L差別觀。二大悲隨順觀。三一切相
006_0818_b_15L智觀。初但觀二諦有爲無有我故。
006_0818_b_16L即大悲爲首觀也。二悲隨物增即
006_0818_b_17L大悲增上觀。三即委悉窮究因緣
006_0818_b_18L性相諸門觀故。 第下之一第一八張
006_0818_b_19L即大悲滿足觀。初一下同二乘一
006_0818_b_20L切智也。次一自現菩薩道相智。後
006_0818_b_21L即上同諸佛一切種智。故涅槃云。
006_0818_b_22L十二因緣。下智觀故。得聲聞菩提。
006_0818_b_23L中智觀故。得緣覺菩提。上智觀故。
006_0818_b_24L得菩薩菩提。上上智觀故。得佛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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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18_c_01L처음 두 보리는 곧 첫째 관觀의 뜻이고, 나머지 두 (보리)는 각각 하나씩이니 알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는 중생을 위함을 기준으로 하여 셋 모두 ‘대비’라고 일컬었으며75) 지금은 관觀하는 마음을 기준으로 하니 셋 모두 지혜의 관觀이다.76) 이로써 세 구절에 각각 대비와 지혜가 서로 인도함이 있음을 안다. 이 세 관을 원융하게 함이 오직 한마음에 있으니, 매우 깊은 지혜(般若)가 이에 나타난다.
화엄경탐현기77)
『탐현기』에 이른다.78) 무엇이 열 가지 관觀인가? 첫째는 인연이 나뉘어 차례가 있음이고 운운. 열째는 있지 않음과 다함에 수순함이다. 그중에 각각 따르는 관觀과 거스르는 관觀이 있기 때문에 스무 문이 있다. 말하자면 따르는 관觀은 대비大悲이니 열반에 머무르지 않고, 거스르는 관觀은 대지大智이니 생사에 머무르지 않는 까닭에 머무르지 않는 도道라고 이름한다. 운운.
첫째, 인연이 나뉘어 차례가 있음 가운데 존재(有)의 지支가 무아無我임을 바로 나타낸다. 그중에 두 가지가 있다. 처음은 나(我)가 있다고 거꾸로 집착하여 망령되이 인연을 일으키는 분위를 밝힌다. 두 번째는 모든 진리의 이법에 미혹하여 인연을 일으키는 차례를 밝힌다. 처음 가운데 셋이 있다. 첫째는 무아를 변별하여 정하는 것이고, 둘째는 미혹하여 연기를 이루는 것이고, 셋째는 운운.79) 첫째 가운데 두 구절80)에서 첫째에 “세간에서 몸 받음은 모두 나에 집착함을 말미암은 까닭이다.”라고 한 것은, 미혹된 생각(惑情)을 반대로 들어 나(我)가 이법이 아님을 밝힌 것이다. 만약 나에게 이법이 있다면 나에 집착함은 이법에 따르는 것이라 마땅히 세간을 벗어나야 할 것이나, 이미 세간에 태어났으니 나(我)가 이법이 아님을 밝혔다. 둘째에 “만약 나에 집착함을 여의면 곧 태어남이 없다.”라는 것은, 이해하는 마음을 따라서 들어 이법이 나가 아님을 밝힌 것이다. 만약 이법에 나가 있다면 나를 여읨은 이법을 위배하는 것이라 마땅히 세간에 태어나야 할 것이나 이미 세간을 벗어났으니 이법이 무아임을 밝혔다. 두 번째는 이 무아에 미혹하여 저 존재(有)의 지支를 일으킴을 밝힌 것이다. 그중에 먼저 연기를 따라서 관觀하고 나중에 무아를 거꾸로 관觀한다. 운운.
둘째, 한마음에 포섭된 바에서 “삼계가 허망하여 오직 한마음이 지은 것이다.”81)라고 설한 -
006_0818_c_01L提。初二菩提即初觀意。餘二各
006_0818_c_02L一。可知。前約爲物。三皆稱悲。今
006_0818_c_03L約觀心。三皆智觀。是知三句各有
006_0818_c_04L悲智相導。融此三觀。唯在一心。甚
006_0818_c_05L深般若。於是而現。探玄云。何者
006_0818_c_06L十觀。一因緣分次*弟。云云。 十隨順
006_0818_c_07L無所有盡。於中各有順觀逆觀故。
006_0818_c_08L有二十門也。謂順觀大悲不住涅
006_0818_c_09L槃。逆觀大智不住生死。故名不
006_0818_c_10L住道。云云。 一因緣分次*弟中。正
006_0818_c_11L現有支無我。於中有二。初明倒
006_0818_c_12L執有我妄起緣分。二明迷諸諦理
006_0818_c_13L起緣次*弟。初中有三。一辨定無
006_0818_c_14L我。二迷成緣起。三云云。 初中二
006_0818_c_15L句。初言世間受身皆由2)着 [270] 我者。
006_0818_c_16L反擧惑情。明我非理。若我理有。
006_0818_c_17L*着我順理。應得出世。旣生世間。
006_0818_c_18L明我非理。二若離*着我即無生
006_0818_c_19L者。順擧解心。明理非我。若理有
006_0818_c_20L我。離我違理。應生世間。旣得出世。
006_0818_c_21L明理無我。二 [180] 明迷此無我起彼有
006_0818_c_22L支。於中先順觀緣起。後逆觀無我。
006_0818_c_23L云云。 二一心所攝中。言三界虛妄
006_0818_c_24L「弟」作「第」{乙}次同。「着」作「著」{乙}次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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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19_a_01L이 한 경문을 여러 논이 함께 인용하여 유식을 이룸을 증명하였다. 지금 이 설한 바는 어떠한 것들이 ‘마음’이고 무엇을 ‘지은 것’이라고 이름하는가? 이제 이 뜻을 해석한다. 여러 훌륭한 가르침에 의거하여 여러 문이 있음을 설한다. 첫째는 상분相分과 견분見分82)이 함께 있기 때문에 유식이라고 설한다. 둘째는 상분을 거두어 견분에 돌아가기 때문에 유식이라고 설한다. 셋째는 심소(數)를 거두어 심왕(王)으로 돌아간다. 운운. 넷째는 지말로써 근본으로 돌아간다. 다섯째는 모습을 거두어 체성에 돌아간다. 여섯째는 진실(眞)을 굴려서 현상(事)을 이룬다. 일곱째는 이법과 현상을 함께 융섭한다. 여덟째는 현상을 융섭하여 상입한다. 아홉째는 전체의 현상이 상즉한다. 열째는 인드라그물의 걸림 없음이다. 그중에 처음 셋은 초교를 기준으로 하여 설한 것이고, 다음 넷은 종교와 돈교를 기준으로 하여 설한 것이며, 뒤의 셋은 원교 중 별교를 기준으로 하여 설한 것이다. 전부 열 문을 갖춘 것은 동교를 기준으로 하여 설한 것이다. 운운.
셋째, 자상과 업으로 도와 이룸에서, 이 12지가 모두 두 뜻이 있다. 첫째는 자신의 행상을 밝히는 것이고, 둘째는 뒤의 작용을 도와 이루는 것이다. 말하자면 연緣 가운데 어리석음과 미혹은 무명의 자상이고, 행行에 원인을 지어 주는 것은 도와 이루는 업이다.
넷째, 서로 버리거나 여의지 않음에서, 앞은 뒤를 능히 일으키고 뒤를 여의고는 앞이 없으며, 뒤는 앞에 의지해서 일어나니 앞을 여의고는 뒤가 없다. 서로 여의지 않기 때문에 각각 자성이 없고, 자성이 없이 연기하니 환상(幻)이 앞에 나타나는 것과 같다.
다섯째, 세 길이 끊어지지 않음이란 정의보살淨意菩薩의 『십이인연론』83)에서 이르는 바와 같다.
번뇌는 첫째와 여덟째와 아홉째이고, 업은 둘째와 열째이며,
나머지 일곱은 괴로움이라 설하니, 셋이 열두 법을 거둔다.
세 (번뇌)를 따라서 두 (업)을 낳고,
두 (업)을 따라서 일곱 (괴로움)을 낳으며
일곱 (괴로움)을 따라서 다시 세 (번뇌)를 낳으니,
그러므로 바퀴가 도는 것과 같다.
일체의 세간법은 오직 인과일 뿐 중생(人)은 없으니,
다만 공한 법을 따라서 다시 공한 법을 낳는다.
풀이하면 이것은 세 길이 서로 낳음을 변별하여 두 무아를 나타낸 것이다. -
006_0819_a_01L唯一心作。此之一文。諸論同引。訂
006_0819_a_02L成唯識。今此所說。是何等心。云
006_0819_a_03L何名作。第下之一第一九張 今釋此
006_0819_a_04L義。依諸聖敎。說有多門。一相見
006_0819_a_05L俱存。故說唯識。二攝相歸見。故說
006_0819_a_06L唯識。三攝數歸王。云云。 四以末歸
006_0819_a_07L本。五攝相歸性。六轉眞成事。七
006_0819_a_08L理事俱融。八融事相入。九全事相
006_0819_a_09L即。十帝網無㝵。於中初三。約初
006_0819_a_10L敎說。次四約終頓說。後三約圓敎
006_0819_a_11L中別敎說。摠具十門。約同敎說。
006_0819_a_12L云云。 三自業助成中。此十二支。
006_0819_a_13L皆有二義。一明自行相。二助成後
006_0819_a_14L用。謂緣中癡惑。是無明自相。與行
006_0819_a_15L作因。是助成業。四不相捨離中。
006_0819_a_16L前能起後。離後無前。後依前起。
006_0819_a_17L離前無後。不相離故。各無自性。
006_0819_a_18L無性緣起。如幻現前。五三道不斷
006_0819_a_19L中。如淨意菩薩十二緣論云。煩惱
006_0819_a_20L初八九。業二及與十。餘七說爲苦。
006_0819_a_21L三攝十二盡。 [181] 從三故生二。從二故
006_0819_a_22L生七。從七復生三。是故如輪轉。
006_0819_a_23L一切世間法。唯因果無人。但從於 [182]
006_0819_a_24L空法。還 [183] 生於空法。解云。此辨三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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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19_b_01L여섯째, 먼저(先際)와 나중(後際)을 분별함 중에서, 이 12지의 처음 둘은 능인能引이고 다음 다섯은 소인所引이며 다음 셋은 능생能生이고 마지막 둘은 소생所生이다.84) 운운. (그중에 삼세를 분별함에 여러 훌륭한 가르침 중에 간략히 세 가지 설이 있다.)85) 첫째는 이 경에 의거하여 능인과 소인을 열어서 먼저와 중간을 구분하고, 능생과 소생을 합하여 통틀어 나중으로 삼는다. 이끎(引)은 멀기 때문에 열고, 낳음(生)은 가깝기 때문에 합한 것이다.
일곱째, 세 괴로움을 분별함에 두 문이 있다. 첫째는 이법과 실제로서 두루 통하는 문이다. 운운. 둘째는 모습에 따라서 더하여 나타나는 문이다. 이 경에서 설한 것과 같다. 말하자면 처음 다섯 지支는 옮겨 흐르는 모습이 나타나기 때문에 행고行苦라 일컫는다. 촉觸과 수受 두 가지는 접촉하여 상대해서 괴로움을 낳기 때문에 고고苦苦라고 한다. 나머지가 괴고壞苦가 된다는 것은 단지 즐거움이 무너지는 것을 괴고라고 이름할 뿐이다. 노사老死의 지支는 이미 무너질 즐거움이 없는데 어째서 괴고라고 이름하는가? 해석하면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즐거움이 무너지는 것을 괴로움으로 삼는 것이니 무너지는 바를 바라보아 설한 것이다. 둘째는 무너짐이 괴로움이기 때문에 괴고라고 한다. 이 노사의 지支가 능히 삶(生)을 무너뜨리기 때문에 괴고에 속한다.
여덟째, 인연으로 생김에서, 이법상 실제로 무명이 행行을 바라봄에 인연의 뜻이 없으나, 인연으로 행行을 낳는다고 말하는 것86)은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행行) 자신의 종자가 인因이 되고 무명이 연緣이 되어 합하여 설하기 때문에 인연이라고 하지만, 그러나 저 가까운 (인因) 종자를 숨기고 이 수승한 연緣을 드러내기 때문에 무명의 인연이라고 하는 것이다. 둘째는 다만 저 (무명의) 증상연으로 (행行) 자신의 증상과를 바라보면 도리어 가까운 인因이 되기 때문에 무명이 행行의 인연이 된다고 설한 것이다. 나머지 또한 이와 같다. 결과는 스스로 일어나지 않고 반드시 인연을 따라야 함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인연의 나타남을 빼앗아 다시 각각 본성이 없으니 이런 까닭에 인연으로 생김이 곧 생김이 없음을 나타낸다고 말한다. 이것은 순관과 같다. -
006_0819_b_01L相生。現二無我。六分別先後際
006_0819_b_02L中。此十二支。初二是能引。次五
006_0819_b_03L是所引。次三是能生。後二是所生。
006_0819_b_04L云云。 一依此經。開能所引。分先際
006_0819_b_05L中際。合能所生。摠爲後際。以引遠
006_0819_b_06L故開之。生近故合也。七三苦分別
006_0819_b_07L中。有二門。一理實遍通門。云云。 二
006_0819_b_08L隨相增現門。如此經說。謂初五支
006_0819_b_09L迁流相現。故稱行苦。觸受二種。觸
006_0819_b_10L對生苦。第下之一第二○張 故云苦
006_0819_b_11L苦。餘爲壞苦者。但壞樂名壞苦。
006_0819_b_12L老死支旣無樂可壞。何故名壞苦
006_0819_b_13L耶。釋有二。一樂壞爲苦。望所壞
006_0819_b_14L說。二以壞是苦。故云壞苦。此老
006_0819_b_15L死1)▣。 [271] [184] 能壞生故。屬壞苦也。八因
006_0819_b_16L緣生中。理實無明望行。無因緣義。
006_0819_b_17L而言因緣生行者。有二義。一自種
006_0819_b_18L爲因。無明爲緣。合說故云因緣。
006_0819_b_19L然隱彼親種。現此勝緣。故云無明
006_0819_b_20L因緣也。二但彼增上緣。望自增上
006_0819_b_21L果。還是親因。故說無明爲行因緣。
006_0819_b_22L餘亦如是。欲明果不自起要從因
006_0819_b_23L緣。因緣形奪。復各無性。是故言
006_0819_b_24L因緣生乃現無生。此猶順觀。逆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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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19_c_01L역관은 한결같이 없어짐으로서 생김과 생기지 않음이 아니니 알 수 있을 것이다. 운운.이 깊은 관(深觀)87) 중에서 뒤의 세 문(三門)88)을 거두어, 합해서 네 구를 이룬다. 첫째는 스스로 생겨나지 않음이고, 둘째는 남에게서 생겨나지 않음이고, 셋째는 함께함에서 생겨나지 않음이고, 넷째는 원인 없이 생겨나지 않음이다.
이 네 구를 해석함에 여러 논이 같지 않으나 간략히 다섯 가지 설이 있다.첫 번째는 외도를 깨뜨리는 것을 기준으로 하는 해석이다. 말하자면 모든 법은 그윽한 진리인 자성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스스로 생겨나지 않음이라고 한다. 둘째는 범천이나 자재천 등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남에게서 생겨나지 않음이라고 한다. 셋째는 또한 미세한 티끌과 같은 사대종四大種의 화합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함께함에서 생겨나지 않음이라고 한다. 넷째는 또한 원인 없이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원인 없이 생겨나지 않음이라고 한다.
두 번째는 이승을 깨뜨리는 것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다. 첫째는 말하자면 모든 법이 결정코 자신의 동류인同類因89)으로부터 생겨나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생겨나지 않음이라고 한다. 둘째는 결정코 이숙인異熟因90)으로부터 생겨나지 않기 때문에 남에게서 생겨나지 않음이라고 한다. 셋째는 또한 저 구유인俱有因91)에서 생겨나지 않기 때문에 함께함에서 생겨나지 않음이라고 한다. 넷째는 소승 가운데 무명지 앞에 바르지 않은 생각이 허공에 의탁하여 일어나는 것을 허용하여92) 원인이 없는 것 같으나, 이제는 또한 그렇지 않기 때문에 원인이 없음을 여읜다.
세 번째는 법을 기준으로 해서 공空을 나타내는 것이다. 첫째는 결과가 스스로 일어나지 않음을 스스로 생겨나지 않음이라고 이름한다. 둘째는 자신을 이미 세우지 않았는데 무엇을 대하여 남을 변별할 것인가? 또 남 또한 각자가 모두 자신을 이루지 않는데 어떻게 남에게서 생겨난다고 하는가? 따라서 남에게서 생겨나지 않음이라고 한다. 셋째는 자신과 남의 인과가 이미 각각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자신과 남이) 함께 함에서 생겨나지 않음이라고 한다. 넷째는 인연을 여읜 밖에 다른 결과의 법이 없기 때문에 원인 없이 생겨나지 않음이라고 한다. 이상의 세 거듭은 『반야등론』93)과 『중론』94) 등에서 설한 것과 같다.
네 번째는 인연의 나타남을 빼앗는 것을 기준으로 한다. -
006_0819_c_01L一泯。非生不生。可知。云云。 此深觀
006_0819_c_02L中。攝後三門。合成四句。一不自生。
006_0819_c_03L二不他生。三不共生。四不無因生。
006_0819_c_04L釋此四句。諸論不同。略有五說。
006_0819_c_05L一約破外道釋。謂諸法不從冥諦
006_0819_c_06L自性生。故云不自生。二不從梵天
006_0819_c_07L自在天等生。故云不他生。三亦非
006_0819_c_08L微塵大種和合生。故云不共生。四
006_0819_c_09L亦非無因自然而起。故云不無因
006_0819_c_10L生。二約破二乘。一謂諸法不定
006_0819_c_11L從自同類因生。故云不自生。二不
006_0819_c_12L定從異熟因生。故云不他生。三又
006_0819_c_13L亦非彼俱有因生。故云不共生。
006_0819_c_14L四小乘中。許無明支前不正思惟
006_0819_c_15L托虛而起。似若無因。今亦不尒。
006_0819_c_16L故離無因。三第下之一第二一張 約
006_0819_c_17L法現空。一果不自起。名不自生。
006_0819_c_18L二自旣不立。對誰辨他。又他亦各
006_0819_c_19L自皆不成自。云何他生。故云不他
006_0819_c_20L生。三自他因果。旣各不成。故云
006_0819_c_21L不共生。四離因緣外。無別果法。
006_0819_c_22L故云不無因生。此上三重。如般若
006_0819_c_23L燈論及中論等說。四約因緣形奪。
006_0819_c_24L▣字體磨滅{底}ㆍ作「支」{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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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20_a_01L『대법론』95)에 이르기를, “자신의 종자가 있기 때문에 남을 따르지 않고 뭇 연을 기다리기 때문에 자신이 짓는 것이 아니다. 작용이 없기 때문에 함께 생겨나지 않고 공능功能이 있기 때문에 원인이 없는 것이 아니다. 무릇 모든 연기에서 둘을 부정하는 두 구절도 이미 매우 심오한데 하물며 모두 부정하는 네 구절이겠는가? 그러므로 연기는 매우 가장 깊이 심오한 것이다.”96)라고 한다.
다섯째는 연기의 걸림 없는 문을 기준으로 한다. 다만 인연이 결과를 낳으나 인연이 서로 바라봄에 각각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온전히 힘이 있는 것이고, 둘째는 온전히 힘이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因이 결과를 바라봄에 온전히 생겨나지 않음이 있고, 연緣에서 반드시 온전히 생겨난다. 그러므로 “인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연에서 생겨나기 때문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둘째는 연緣이 결과를 바라봄에 또한 온전히 생겨나지 않고, 인에서 반드시 생겨난다. 그러므로 “연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인에서 생겨나기 때문이다.”라고 하는 것이다.97) 셋째는 (인과 연의) 두 힘이 함께하지 않기 때문에 (인과 연이) 함께함에서 생겨나지 않는다. 넷째는 두 힘이 없음 또한 함께하지 않기 때문에 원인 없이 생겨나지 않는다.
이 문에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힘(力)에 있음과 있지 않음을 갖춘 뜻에 의거하므로 상입하게 한다. 말하자면 인因이 힘이 있을 때 연緣에는 반드시 힘이 없다. 그러므로 인이 힘이 있음을 말미암은 까닭에 남을 거둘 수 있고, 연에 힘이 없음을 말미암은 까닭에 남에게 들어갈 수 있다. 저 연의 힘을 모아서 모두 인의 힘으로 돌아가게 함을, 남에게서 생겨나지 않음이라고 이름한다. 비록 남에게서 (생겨남이) 아니라고 말하나 반대로 뒤집으면 자신에게서 생겨남을 나타내는 것이다. 인의 힘이 연으로 돌아가 자신에게서 (생겨나지) 않음도 또한 이러하다. 앞을 뒤집어서 생각하라. (인과 연의) 두 힘과 두 힘 없음이 각각 함께하지 않으므로 저것이 상입하지 않음이 없고, 하나의 힘과 하나의 힘 없음이 서로 돌아가기 때문에 항상 상입한다. 서로 장애하지 아니하여 증상연이 넓기 때문에 일체 모든 법이 상입하지 않음이 없다.「십인품」에 이르기를, “보살이 연기법을 잘 관하여 하나의 법에서 여러 많은 법을 이해하고 여러 많은 법에서 하나의 법을 이해하여 깨닫는다.”98)라고 하니, -
006_0820_a_01L對法論云。自種有故不從他。待
006_0820_a_02L衆緣故非自作。無作用故不共生。
006_0820_a_03L有功能故非無因。凡諸緣起。雙
006_0820_a_04L1)亡 [272] [185] 二句。已爲甚深。 [186] 況摠*亡四句。
006_0820_a_05L是故緣起。最極甚深。五約緣起無
006_0820_a_06L㝵門。但因緣生果。因緣相望。各
006_0820_a_07L有二義。一全有力。二全無力。謂
006_0820_a_08L因望於果。有全不生。緣必全生。
006_0820_a_09L故云因不生緣生故。二緣望於果。
006_0820_a_10L亦全不生。因必生。故云緣不生自
006_0820_a_11L因生故。三二力不俱故。不共生。
006_0820_a_12L四二無力亦不俱故。不無因生。此
006_0820_a_13L門有二義。一據力具有不有義。故
006_0820_a_14L令相入。謂因有力時。緣必無力。
006_0820_a_15L是故。由因有力故能攝他。由緣無
006_0820_a_16L力故能入他。會彼緣力。摠歸因力。
006_0820_a_17L名不他生。雖言不他。反現自生。
006_0820_a_18L因力歸緣。不自亦尒。反前思之。
006_0820_a_19L以二力二無力各不俱故。無彼不
006_0820_a_20L相入。一力一無力相歸故。恒時相
006_0820_a_21L入。以不相障㝵增上緣寛故。一
006_0820_a_22L切諸法。無不相入。十2)忍 [273] 品云。菩
006_0820_a_23L薩善觀緣起法。於一法中。解衆多
006_0820_a_24L法。衆多法中。解了一法。第下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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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20_b_01L진실로 이 문을 말미암은 까닭이다.둘째는 체體에 공함과 공하지 않음이 있는 뜻에 의거하므로 상즉이 있다. 말하자면 인의 힘이 연에 돌아가 그 상입함을 밝힐 뿐만 아니라, 또한 인의 체가 연을 말미암아 인의 체성이 공하며 연에 거두어져 같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무엇인가? 말하자면 만약 연이 없으면 곧 인이 없기 때문이다. 결과를 낳는 것을 인이라고 이름하며, 연이 없으면 결과가 생겨나지 않는다. 이때는 인이라고 이름하지 않는다. 이 인이 저 연을 만나 돌아가서 자신에게서 생겨나지 아니함을 분명히 안다. 그러므로 연은 있음의 뜻이니 능히 거두지 않음이 없으며, 인은 공의 뜻이니 거둠을 받지 않음이 없다. 인이 거둠을 받기 때문에 자기를 폐하여 연과 같고, 연이 거두기 때문에 인을 거두어 자기와 같다. 나머지 인이 거두고 연이 받는 등도 아울러 준하여 생각하면 알 것이다. 이 뜻을 말미암은 까닭에 모든 법이 상즉하여 장애되는 바가 없다. 위 경문에서 이르기를, “하나가 곧 많음이고 많음이 곧 하나임을 안다.”99)라고 한 등이 모두 이 뜻이다. 그러므로 다함없는 대연기법의 걸림 없는 자재로움이 모두 이 문으로부터 펼쳐져 나타난 것이다.
아홉째, 인연에 묶여 있음을 설함 가운데, 인연의 생함에 묶여 있음은 말하자면 이 연기가 서로서로 묶여서 머무르니 생함을 얻을 수 없고, 이 묶임 때문에 다시 멸함도 아니다. ‘묶임(縛)’ 한 글자로 이 법의 체體를 도장 찍어서 모든 분별을 여읜다. 그러나 이 연기가 묶여 있음의 모습 또한 여의었기 때문에 말에 기대어 나타낸 것이다. 그러므로 ‘묶여 있음을 설함’이라고 한 것이니, 이 묶여 있음이 다만 설하는 가운데 있음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이 문은 연기법이 현상의 모습을 향하여 다함에 이법의 체성이 장차 나타나는 매우 미묘한 곳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논에서 “세제를 따라 관觀하여 곧 제일의제에 들어간다.”라고 말한 것이 이 문이다.
열째, 있지 않음(無所有)과 다함(盡) 가운데 이 존재(有)의 지支의 허망한 모습이 이미 다함에 있지 않음(無所有)을 수순하여 제일의에 철저히 도달함을 밝힌다. -
006_0820_b_01L一第二二張 良由此門故也。二據
006_0820_b_02L體有空不空義。故有相即。謂非直
006_0820_b_03L因力歸緣明其相入。亦乃因體
006_0820_b_04L由緣。現因性空攝同於緣。何者。
006_0820_b_05L謂若無緣。即無因故。以生果名因。
006_0820_b_06L無緣果不生。是時不名因。明知此
006_0820_b_07L因會歸彼緣爲不自生。是故緣是
006_0820_b_08L有義。無不能攝。因是空義。無不
006_0820_b_09L受攝。因受攝故。癈己同緣。緣能
006_0820_b_10L攝故。攝因同己。餘因攝緣受等。
006_0820_b_11L並准思知。由此義故。諸法相即。無
006_0820_b_12L所障㝵。上文云。知一即多多即一
006_0820_b_13L等。皆此義也。是故無盡大緣起法
006_0820_b_14L無㝵自在。皆從此門而開現矣。九
006_0820_b_15L因緣縛說中。因緣生縛者。謂此緣
006_0820_b_16L起。互相縛住。不得是生。以是縛故。
006_0820_b_17L復非是滅。以一縛字。印此法體。離
006_0820_b_18L諸分別。然是緣起縛相亦離故。
006_0820_b_19L寄言以現。故云縛說。爲明此縛但
006_0820_b_20L在說中。此門現緣起法。事相向盡。
006_0820_b_21L理性將現。極微妙處故。論云。隨
006_0820_b_22L順觀世諦。即入3)弟一義諦。是此
006_0820_b_23L門也。十無所有盡中。明此有支
006_0820_b_24L虛相旣盡。隨順無所有徹到*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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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20_c_01L이것은 세속을 무너뜨리지 않고서 항상 진실임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무명을 인연으로 모든 행이 생겨나니 이것이 있지 않음을 수순하는 것이다.”100)라고 한 것이다.
문 무명이 행行을 생기게 하는 것은 있음을 수순하는 것인데, 무슨 까닭에 “있지 않음을 수순한다.”라고 설하는 것인가?답 앞의 여러 문의 차례를 거쳐 여기에 이르러 저 무명이 바로 행行을 생기게 하는 때에 생겨남이 없음을 따라서 이법에 들어감을 밝히기 때문이다. 운운.
(문) 무슨 까닭에 경에서는 없음을 따르고 논에서는 있음을 따른다고 이름하는가?(답) 경의 뜻을 풀이하면 연緣으로써 이법에 돌아가는 것이고, 논의 뜻을 설하면 체성으로써 모습을 따르는 것이니, 설함이 각각 다른 뜻을 나타내므로 이 말을 한 것이다. 운운.
첫째는 존재의 지支의 나열, 둘째는 한마음에 포섭되어 돌아감, 셋째는 힘과 작용이 서로 낳음, 넷째는 앞과 뒤가 서로 이어짐, 다섯째는 세 길이 바퀴처럼 돌아감, 여섯째는 삼세의 원인과 결과, 일곱째는 세 괴로움의 과실, 여덟째는 인연을 따라 체성이 없음, 아홉째는 있음과 비슷하지만 없음과 같음, 열째는 없어져 같고 평등함이니, 앞의 열 가지에 배대하여 맺으면 문장이 나타내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수현기
『수현기』에 이른다.101) 첫째, 인연이 나뉜 차례에 대한 관觀은, 나(我)라는 견해에 집착함을 다스린다. 운운. 둘째, 한마음에 의지함에 대한 관은 저 바깥 경계가 자성이 (있다고) 집착함을 다스린다. 운운. 셋째, 자신의 인연에 대한 관은 인연을 다르다고 헤아려 집착함을 다스린다. 운운. 넷째, 버리거나 여의지 않음에 대한 관은 원인과 결과가 다른 때라고 헤아림을 다스린다. 다섯째, 세 길에 대한 관은 인연에서 현상을 폐하고 이법을 헤아려 집착함을 다스린다. 여섯째, 삼세에 대한 관은 원인이 없다고 집착함을 다스린다. 일곱째, 세 괴로움에 대한 관은 즐거움과 깨끗함에 집착함을 다스린다.
여덟째, 인연에 대한 관은 단지 원인에 힘이 있어서 결과를 생기게 한다고 (집착함을) 다스린다. 운운. 인연의 생겨남의 이법은 인에는 결정하는 작용이 있고 -
006_0820_c_01L一義。此現不壞俗而恒眞也。故云。
006_0820_c_02L無明因緣諸行生。是隨順無所有。
006_0820_c_03L問。無明生行。是順所有。何故乃言
006_0820_c_04L順無所有。答。乘前諸門次*弟至
006_0820_c_05L此。現彼無明正生行時即順無生
006_0820_c_06L入理故也。云云。 何故。經中順無。論
006_0820_c_07L名順有。第下之一第二三張 釋經意。
006_0820_c_08L以緣歸理。說論意。以性從相。說各
006_0820_c_09L現別意故。作是說。云云。 一有支行
006_0820_c_10L列。二攝歸一心。三力用相生。四
006_0820_c_11L前後相屬。五三道輪環。六三際因
006_0820_c_12L果。七三苦過失。八從因無性。九
006_0820_c_13L似有若無。十泯同平等。配結前十。
006_0820_c_14L文4)垷 [274] [187] 可見。
006_0820_c_15L搜玄云。初因緣分次*弟觀。治我
006_0820_c_16L見執。云云。 二依止一心觀。治彼外
006_0820_c_17L境自性執。云云。 三自因觀。治異計
006_0820_c_18L因緣執。四不捨離觀。治因果異時
006_0820_c_19L計。五三道觀。治因緣癈事計理執。
006_0820_c_20L六三際觀。治無因執。七三苦觀。
006_0820_c_21L治樂淨執。八因緣觀。治單因有力
006_0820_c_22L生果。云云。 因緣生理。因有決定用。
006_0820_c_23L「亡」作「土」{乙}次同。「忍」作「忽」{乙}。「弟」
006_0820_c_24L作「第」{乙}次同。「垷」作「現」{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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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21_a_01L연에는 결과를 일으키는 능력이 있어 비로소 법이 생겨날 수 있다. 만약 다만 인의 힘뿐이고 연이 결과를 일으키는 능력이 없으면 그 인因의 여섯 가지 뜻102)이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운운.또 소승에 의하면 육인六因ㆍ사연四緣이고, 만약 삼승에 의하면 곧 십인十因103)ㆍ이십인二十因104) 등이다. 만약 일승에 의하면 곧 법에 따라서 인을 변별하니 하나하나의 인연이 이법과 현상에 각각 달라서 법계와 더불어 같다. 지금 여섯 가지 인의 뜻은 오직 일승이라야 능히 끝까지 다하니 이것은 별교를 기준으로 하여 설한 것이다.
아홉째, 인연의 생함과 멸함에 묶여 있음에 대한 관에서, 이 아래 두 관은 다만 마음의 번뇌를 다스리니 공통된 뜻은 알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인과 연이 함께하는 힘으로 결과를 불러일으킨다는 집착이다. 운운. 앞의 인연에서 결과가 생겨남은 생겨남의 뜻이 두드러지고 공의 뜻이 미미하니, 인연법이 생겨남에 수순하여 미혹이 두드러지게 되기 때문이다. 지금 연에 묶여 있는 법은 공의 뜻이 늘어나고 생겨나는 힘의 뜻이 미미하니 연기법이, 생겨남에 대한 분별없는 지혜를 수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래의 경에서 이르기를, “연기의 법이 있음과 없음을 여읜 것이다.”105)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비록 생겨남의 힘이 없으나 공의 뜻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자성으로 생겨남을 여읜다. 경에서 이르기를, “머무름이 없음을 근본으로 한다.”106)라고 하기 때문이다.
열째, 있지 않음과 다함의 관에서 다스리는 대상은 마음의 번뇌에 국한되지만 또한 모든 번뇌를 통섭할 수 있으니 (모든 번뇌가) 속제에 통섭되기 때문이다. (번뇌는) 집착의 인연이 되어 다만 속제에 응하는 모습만 있을 뿐, 자신의 체體인 공空의 뜻은 앞에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장애이다. 운운. 모든 연으로 생겨난 법은 일어나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일어나면 곧 (속제의 모습과 공의 뜻이) 쌍으로 나타난다. 저 목마른 사슴이 신기루의 물을 보면 건조함과 습함이 함께 나타나는 것과 같으며, 또 거울의 영상에 물듦과 깨끗함이 함께 나타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이 바른 이법이다.
문 그 나타난 공은 진제인가, 속제인가? 또 이 관법은 앞의 인연으로 생겨남(에 대한 관) 및 (인연의) 생함에 묶여 있음(에 대한 관)과는 어떻게 다르게 취해야 하는가? -
006_0821_a_01L緣有發果能。方得法生。若但因力。
006_0821_a_02L無緣發果能者。其因六義不現在
006_0821_a_03L前。云云。 又依小乘。六因四緣。若依
006_0821_a_04L三乘。即十因二十因等。若依一
006_0821_a_05L乘。即隨法辨因。爲1)一一 [275] 因緣理
006_0821_a_06L事各別。與法界等。今六因義。唯
006_0821_a_07L一乘能窮。此約別敎說也。九因緣
006_0821_a_08L生滅縛觀。此下二觀。但治心惑。
006_0821_a_09L通義可知。謂因緣共力能感果執。
006_0821_a_10L云云。 前因緣生果。生義是增。空
006_0821_a_11L義是微。爲因緣法順生迷增故。
006_0821_a_12L今緣縛法。空義是增。生力義微。
006_0821_a_13L爲緣起法順生無分別智故。故下
006_0821_a_14L經云。緣起之法。離有無也。此雖
006_0821_a_15L無生力。以空義成故。離自性生。經
006_0821_a_16L云。第下之一第二四張 無住爲本故。
006_0821_a_17L十無所有盡觀。所治局心惑。亦可
006_0821_a_18L通諸使。俗諦通攝故。爲執因緣。
006_0821_a_19L但有應俗相。自體空義。不現在前
006_0821_a_20L故。是障也。云云。 諸緣生法。不起
006_0821_a_21L則已。起則雙現。如彼渴鹿。見陽炎
006_0821_a_22L水。乾濕並彰。又如鏡像。染淨雙現。
006_0821_a_23L此是正理。問。其所現空。爲是眞諦。
006_0821_a_24L爲是俗諦。又此觀法。與前緣生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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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21_b_01L답 인연(으로 생겨남)과 묶여 있음은 오직 있음(有)에 수순함만을 이룬다. 지금의 열째 관은 공空과 유有를 함께 수순한다. 또 이 공과 유는 아울러 속제이다. 무릇 진제와 속제를 밝힘에 여기에는 많은 뜻이 있다. 첫째는 체體와 상相의 상대이고, 둘째는 공과 유有의 상대이다. 이와 같이 진제와 속제를 나눔에 그 뜻이 하나가 아니다. 만약 공과 유로 진제와 속제를 나누면 유는 속제가 되고 공은 진제가 되니 곧 증득한 지혜로 알 바이다. 만약 체와 상으로 상대하면 공과 유를 서로 논할 수 있기 때문에, 만약 이 뜻을 기준으로 하면 속제가 공과 유를 통섭하니, 이 공은 자신의 체가 공한 것이고 현상이 공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논에서 이르기를, “이 심진여의 모습이 마하연의 체를 능히 보여준다.”107)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알라. 비록 진여라는 이름을 얻었으나 속제의 모습이 체는 아니다. 이것은 공과 유가 한가지로 하나의 모습이 되어서 연으로써 본성을 따르니 이법과 현상이 이 관의 체가 된다. 그러므로 위의 경문에서 이르기를, “십이인연으로 생함이 무위이다.”108)라고 한 것이다.
열 가지의 관에도 또한 서로 생겨남의 차례가 있다. 모든 허망함의 허물을 알기 위한 까닭에, 그러므로 첫째가 있다. 이미 허망함을 알지만 허망한 법이 무엇에 의거하여 생겨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둘째가 있다. 의거하는 바 대상을 인식하여 알지만 무슨 이법이 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셋째가 있다. 생겨남의 이법을 이미 알지만 어느 때에 의거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넷째가 있다. 때는 인식하여 알지만 무슨 뜻을 기준으로 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다섯째를 밝히고 있다.
그 뜻을 이미 알지만 무엇이 근본이고 지말인가라 하기 때문에 여섯째가 있다. 근본과 지말을 이미 알지만 어떤 허물이 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일곱째가 있다. 그 허물을 이미 알지만 어떻게 현상에 대하여 이루어지는가라고 하기 때문에 여덟째가 있다. 이루어짐을 이미 알지만 어떠한 모습이 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아홉째가 있다. -
006_0821_b_01L以生縛。云何取別。答。因緣及縛。唯
006_0821_b_02L成順有。今2)弟十觀。空有俱順。又
006_0821_b_03L此空有。並是俗諦。汎明眞俗。此
006_0821_b_04L有多義。一體相相對。二空有相對。
006_0821_b_05L如此分眞俗。其義非一。若空有分
006_0821_b_06L眞俗。有則爲俗。空則爲眞。即3)訂
006_0821_b_07L智所知。若體相相對。空有可以相
006_0821_b_08L論故。若約此義。俗諦通空有。此
006_0821_b_09L空是自體空。非事空也。故論云。
006_0821_b_10L是心眞如相。能示摩訶衍體。故知。
006_0821_b_11L雖是眞如。得名俗相。不是體也。
006_0821_b_12L此則空有同爲一相。以緣順性。理
006_0821_b_13L事爲此觀體。故上文云。十二緣
006_0821_b_14L生。是無爲也。十觀亦有相生次
006_0821_b_15L*弟。爲知諸虛妄過故。故有*弟一。
006_0821_b_16L旣識妄已。未知妄法依何得生。故
006_0821_b_17L有*弟二。識知所依。未知有何理。故
006_0821_b_18L有*弟三。已知生理。未知依何時。
006_0821_b_19L故有*弟四。識知時已。未知約何
006_0821_b_20L義。故明*弟五。知其義已。有何
006_0821_b_21L本末。故有*弟六。知本末已。未知
006_0821_b_22L有何過。故有*弟七。知其過已。云
006_0821_b_23L何對事成。第下之一第二五張 故有
006_0821_b_24L*弟八。知成已。未知有何相。故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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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21_c_01L모습을 이미 알지만 의심하여 이법에 어긋난다고 하기 때문에 열째가 있다. 경에 의거한 열 번을 마친다.
추혈기109)
『추혈기錐穴記』에서 열째 관觀에 대해 이른다.110) 이것이 곧 인연이 스스로 여여함에서 다하는 것이다. 이것은 곧 속제가 분별을 여읜 때이다. 이 이후의 곳에서는 곧 처음의 가장 거친 근심과 어리석음과 전도顚倒가 바로 이 매우 깊은 법이다. 하나를 듦에 따라서 일체의 다함없음을 거두니 자재로운 연기법이 바로 열의 수로 나타난 바이며 보법의 연기도리이다.2. 육문 분별‘연기라는 한마디 말’부터 ‘분별이 없다는 것’까지111)
대기『대기』에 이른다. ‘연기라는 한마디 말’로부터 내지 ‘왜 많은 문이 필요한가’ 등에서, 이 질문을 일으킨 뜻은, 처음에 진성을 나타내어 연기의 체體를 보이니 곧 분별이 없는 이법이 이미 드러나 있는데 왜 번거롭게 다시 중문과 즉문 등의 여러 문을 설하는가? 이와 같이 질문한 것이다. 답한다. 맡김과 빼앗음을 갖추었으니112) 글이 나타내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문 어째서 여섯 번째 문을 풀이하지 않고서 문답하는가?답 여섯 번째 문은 위의 뜻을 총괄하여 끝맺은 까닭이며, 다섯 문을 풀이함으로써 그 뜻이 이미 다했기 때문이다. 손을 마쳤다(了手)는 것은 일이 끝났다는 말이다.
법융기『법기』에 이른다. ‘음욕(婬)과 분노(怒)와 어리석음(癡)의 성품이 곧 보리菩提이다’라는 것은, 옛사람이 이르기를, “다만 물을 써서 물건을 깨끗하게 할 줄만 알고 더러운 물을 깨끗하게 할 줄은 모른다.”라고 하였으니 이 뜻이 무엇인가? 말하자면 마치 물을 깨끗하게 하려고 (바닥의) 돌을 집으면 물은 깨끗해지지 않고, 흙과 돌을 움직이지 않아야 물이 비로소 스스로 깨끗해지는 것과 같다. 자기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것 또한 이와 같아서 만약 세 가지 독의 번뇌를 끊어 없애고자 한다면 마음이 깨끗함을 얻을 수 없다. 세 가지 독을 움직이지 아니하여야 마음이 스스로 청정해진다. 그러므로 무릇 승열 바라문 선지식의 처소에 나아가서 어리석음의 법문을 받음이 곧 편안히 머물러 밝게 비춤을 얻는 것이고, -
006_0821_c_01L*弟九。知相已。疑謂乖理。故有*弟
006_0821_c_02L十。依經十番訖。錐穴記*弟十觀
006_0821_c_03L4)幺。 [276] [188] 此即因緣 [189] 盡於自如也。此即
006_0821_c_04L俗諦 [190] 離分別之際。自此去所。即是
006_0821_c_05L初最麁愚 [191] 癡顚倒即此甚深法。
006_0821_c_06L隨擧一盡攝一切無盡自在緣起法。
006_0821_c_07L正十數所現普法緣起道理也。
006_0821_c_08L緣起一言至無分別者。大記云。緣起
006_0821_c_09L一言。乃至何須多門等者。起此問意。
006_0821_c_10L初標眞性。示緣起體。即無分別理。
006_0821_c_11L已現了手。何煩更說中即等多門耶。
006_0821_c_12L如是問也。答具縱奪。文現可知。問。
006_0821_c_13L何不釋六門而問答耶。答。*弟六門者。
006_0821_c_14L摠結上意。故釋五門。其義已盡故也。
006_0821_c_15L了手者。事畢之言也。
006_0821_c_16L法記云。婬怒癡性即是菩提者。古人
006_0821_c_17L云。只知用水令淨於物。不知令淨濁
006_0821_c_18L水也。此意云何。謂如欲淨於水。若
006_0821_c_19L取於石。水不得淨。不動土石。水方
006_0821_c_20L自淨。淨自心者。亦復如是。若欲斷
006_0821_c_21L除三毒煩惱。則心不得淨。三毒不
006_0821_c_22L動。心自淸淨。是故。凡詣勝熱婆羅門
006_0821_c_23L善知識所。受癡法門。即得安住照明。
006_0821_c_24L「一一」作「二」{乙}。「弟」作「第」{乙}次同。
006_0821_c_25L「訂」通「證」於此書{編}次同。「幺」作「云」{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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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22_a_01L만족왕 선지식을 만나서 성냄의 법문을 받음이 곧 편안히 즐거운 삼매를 얻는 것이고, 바수밀다 선지식을 만나서 탐냄의 법문을 받음이 곧 욕망을 여읜 실제를 얻는 것이다.113)
화엄경탐현기
『화엄경탐현기』에서 방편명方便命 선지식을 주석하여 이른다.114) 이와 같이 반대로 된 도道가 위아래의 경문 가운데 모두 세 종류가 있다. 첫째는 이 자리이니 삿된 견해와 같고, 둘째는 만족왕 선지식이니 성냄과 같고, 셋째는 바수밀다 선지식이니 탐하여 애착함과 같다. 그러므로 세 가지 독의 모습이 바른 법과 함께 있다.
그런데 (여기에) 네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마주한 모습이 곧 공하기 때문이다. 『제법무행경』에 이르기를, “탐욕이 곧 도이고 성냄과 어리석음 또한 그러하니, 이 세 가지 일에 한량없는 부처님의 법이 있다.”115)라고 한다. 풀이하면 이것은 (세 가지 일이) 곧 공한 것이 부처님의 법임을 기준으로 한 것이고, (세 가지) 일이 곧 부처님의 법은 아니다. 둘째는 교묘하게 중생을 거두는 것을 기준으로 하여 부처님의 법이 됨을 설하는 것이고, (세 가지 일이) 바로 이 (부처님의 법)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정명경淨名經』에서 “먼저 욕망으로써 잡아 끌어당기고 나중에 부처님의 지혜에 들어오게 한다.”116) 등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셋째는 번뇌에 머물러 중생을 윤택하게 하여 보살도를 기르는 것을 부처님의 법이 있다고 설하는 것이고, (세 가지 독이) 바로 이 (부처님의 법)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정명경』에서 “일체의 번뇌가 여래의 종자가 된다.”117)라고 하는 것과 같다. 넷째는 마주하는 모습이 바로 이 (부처님의 법)이니 앞의 셋과 같지 않다.
법융기『법기』에 이른다. ‘일곱 가지 괴로움의 진리’는 일곱 가지 생사生死이다. 말하자면 분단分段에 셋이 있고 변역變易에 넷이 있다. 분단의 셋이란 삼계이다. 변역의 넷이란 첫째는 방편의 생사, 둘째는 인연의 생사, 셋째는 유유有有의 생사, 넷째는 무유無有의 생사이다.
섭대승론석소
법상法常118) 공의 『섭론소』에 이른다. 첫째, 방편의 생사는 곧 무명으로 연緣을 삼아 생사를 불러일으키니 가까운 인(親因)이 아니기 때문에 방편이라고 일컫는다. -
006_0822_a_01L遇滿足王知識。受嗔法門。即得安樂
006_0822_a_02L三昧。遇婆須密知識。受貪法門。即
006_0822_a_03L得離欲實際也。
006_0822_a_04L探玄。方便命知識䟽云。如是反道。
006_0822_a_05L上下文中。摠有三類。一此位同邪
006_0822_a_06L見。二滿足王同嗔恚。三婆須密同
006_0822_a_07L貪愛。第下之一第二六張 是故三毒
006_0822_a_08L相並有正法。然有四義。一當相
006_0822_a_09L即空故。諸法無行經云。貪欲即是
006_0822_a_10L道。恚癡亦復然。於此三事中。有
006_0822_a_11L無量佛法。解云。此約即空是佛法。
006_0822_a_12L非事 [192] 即是佛法。二約巧攝生說爲
006_0822_a_13L佛法。非謂即是。如淨名云。先以欲
006_0822_a_14L抅牽。後令入佛智等。三留惑潤生。
006_0822_a_15L長菩薩道。說有佛法。非謂即是。如
006_0822_a_16L淨名云。一切煩惱。爲如來種。四當
006_0822_a_17L相即是。不同前三。
006_0822_a_18L法記云。七種苦諦者。七種生死也。
006_0822_a_19L謂分段有三。變易有四。分段三者。
006_0822_a_20L是三界也。變易四者。一方便生死。
006_0822_a_21L二因緣生死。三有有生死。四無有
006_0822_a_22L生死。
006_0822_a_23L法常公攝論䟽云。一方便生死。即
006_0822_a_24L以無明爲緣。1)感 [277] 生死。非是親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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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22_b_01L둘째, 인연의 생사는 곧 무루의 업으로 인因을 삼아 생사를 불러일으키니 가까운 인因을 말미암기 때문에 인연이라고 이름한다. 셋째, 유유(의 생사)는 앞의 인연을 말미암아 존재(有)의 결과를 불러일으켜 생기게 하니 이 결과가 있기 때문에 유유라고 이름한다. 넷째, 무유(의 생사)는 노사의 지支가 시들어 지나가(落謝) 그 과보가 다하니 뒤에 다시 존재(有)의 결과가 있지 않기 때문에 무유라고 한다. 운운.
청량소초
『청량연의』에 이른다.119) 『무상의경無上依經』에 이르기를, “아라한ㆍ벽지불ㆍ대지보살은 네 가지 장애로 인해 여래법신의 네 가지 덕120)을 얻지 못한다. 첫째는 생겨남의 연인 번뇌(生緣惑)이고, 둘째는 생겨남의 인인 번뇌(生因惑)이고, 셋째는 유유이고, 넷째는 무유이다. 무엇이 생겨남의 연인 번뇌인가? 곧 무명주지無明住地121)로서 일체의 행行을 낳으니 무명이 업業을 낳는 것과 같다. 무엇이 생겨남의 인인 번뇌인가? 무명주지에 의해 생겨나는 모든 행이니 비유하면 무명이 낳는 모든 업과 같다. 무엇이 유유인가? 무명주지를 연으로 하고 무명주지를 인으로 해서 일어나는 무루의 행이 일으키는 세 종류의 의생신意生身122)이다. 비유하면 네 가지 취取123)를 연으로 하고 세 가지 유루의 업124)을 인으로 해서 일으키는 세 종류의 존재(有)125)이다. 무엇이 무유인가? 세 종류의 의생신을 연으로 하여 깨달아 알지 못하고 미세하게 사라짐에 떨어지는 것이니 비유하면 세 가지 존재 가운데 생生을 연으로 하여 찰나찰나 늙고 죽는 것(老死)이다. 운운.
삼계에 네 종류의 어려움이 있으니, 첫째는 번뇌의 어려움이고, 둘째는 업業의 어려움이고, 셋째는 생生으로서의 과보의 어려움이고, 넷째는 과실過失의 어려움이다. 무명주지가 일으키는 방편의 생사는 삼계 안의 번뇌의 어려움과 같다. -
006_0822_b_01L故穪方便。二因緣生死。即以無漏
006_0822_b_02L業爲因。*感生死。由是親因。故名
006_0822_b_03L因緣。三有有。則由前因緣。*感生
006_0822_b_04L有果。有此果故。名有有。四無有。
006_0822_b_05L則老死支謝。其報盡。後更無有有
006_0822_b_06L果。故曰無有。云云。
006_0822_b_07L淸凉演義云。無上依經云。阿羅漢
006_0822_b_08L辟支佛大地菩薩。爲四種障。不得
006_0822_b_09L如來法身四德。一者生緣*感。 [193] 二
006_0822_b_10L者生因惑。三者有有。四者無有。何
006_0822_b_11L者生緣惑。即是無明住地。生一切
006_0822_b_12L行。如無明生業。何者是生因惑。
006_0822_b_13L是無明住地第下之一第二七張 所
006_0822_b_14L生諸行。比如無明所生諸業。何者
006_0822_b_15L有有。緣無明住地。因無明住地。所
006_0822_b_16L起無漏行。起三種意生身。比如四
006_0822_b_17L取爲緣。三有漏業爲因。起三種有。
006_0822_b_18L何者無有。緣三種意生身。不可覺
006_0822_b_19L知。微細墮滅。比如緣三有中生。
006_0822_b_20L念念老死。云云。 於三界中。有四種
006_0822_b_21L難。一者煩惱難。二者業難。三者
006_0822_b_22L生報難。四者過失難。無明住地所
006_0822_b_23L起方便生死。如三界內煩惱難。無
006_0822_b_24L明住地所起因緣生死。如三界內
-
006_0822_c_01L무명주지가 일으키는 인연의 생사는 삼계 안의 업의 어려움과 같다. 무명주지가 일으키는 유유의 생사는 삼계 안의 생으로서의 과보의 어려움과 같다. 무명주지가 일으키는 무유의 생사는 삼계 안의 과실의 어려움과 같다.”126)라고 한다.
법융기『법기』에 이른다. ‘분별이 없다는 것’이란,문 각각 상즉하지 않음 등의 네 구127)를 합해 취하여 이르는 것인가?답 그렇다. 말하자면 앞의 세 구는 즉문인 까닭에 체體의 문이다. 상즉하지 않음의 구는 중문인 까닭에 자리가 움직이지 않는 문(位不動門)이다. 자리가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비로소 상입하여 일치될 수 있다. 그러므로 상즉하지 않음의 뜻을 합해 취하여 ‘그윽하여 분별이 없다’라고 하는 것이다.〔2〕 이타행‘비유를 기준으로 하여 이름을 붙인 것이다’부터 ‘뜻대로 아님이 없는’까지128)
대기『대기』에 이른다. ‘해인海印이란 비유를 기준으로 하여 이름을 붙인 것이다’란, 아수라와 제석천이 서로 싸울 때 모든 무기 등이 밝고 깨끗한 바다에 나타나는 뜻으로, 그 세 가지 독의 바로 그 모습을 움직이지 않음이 곧 안으로 증득한 해인(삼매)의 궁극의 법체인 것에 비유한 까닭이다.
고기
‘고기’에 이른다. 운화 존자雲華尊者129)가 이르기를, “오직 『화엄경』에 설해진 법만 해인삼매에 의거하여 일어난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때 지적국통智積國統이 있어 힐난해 이르기를, “『대집경』에 ‘마치 염부제의 일체 중생의 몸과 외부의 색色, 이와 같은 색상色相이 바다에 모두 도장 찍힌 모습(印相)이 있으니, 이 까닭에 큰 바다를 이름하여 인印이라 하는 것처럼, 보살도 그러하여 대해인삼매를 얻어서 일체중생의 마음행동을 본다. 운운.’130)라고 한다. 곧 아래의 네 가르침의 법 또한 해인삼매에 의거하여 일어난 것인데 무슨 까닭에 그렇지 않다고 하는가.”라고 하였다.
운화 존자가 답하여 이르기를, “해인에는 다섯 가지가 있다.첫째는 세 대아승지겁을 지내도록 수행한 제석천이 법공法空수미산 정상에 올라 -
006_0822_c_01L業難。無明住地所起有有生死。如
006_0822_c_02L三界內生報難。無明住地所起無
006_0822_c_03L有生死。如三界內過失難。
006_0822_c_04L法記云。無分別者者。問。各各不相即
006_0822_c_05L等四句合取云耶。答。尒也。謂前三
006_0822_c_06L句。即門故是體門也。不相即句。是
006_0822_c_07L中門故。位不動門也。位不動故。方
006_0822_c_08L得相入。能成一致。是故合取不相
006_0822_c_09L即義。云㝠然無分別也。
006_0822_c_10L[利他行]約喩得名至無不如意。大記云。海印
006_0822_c_11L者。約喩得名者。以修羅帝釋相戰之
006_0822_c_12L時。諸兵具等。現於明淨海中之義。
006_0822_c_13L喩其三毒當相不動即是內訂海印。
006_0822_c_14L究竟法禮故也。
006_0822_c_15L古記云。雲華尊者云。唯花嚴經所
006_0822_c_16L說之法依海印定起也。時有智積
006_0822_c_17L國統。難云。第下之一第二八張 大集
006_0822_c_18L經云。如閻浮提一切衆生身及外
006_0822_c_19L色。如是色相。海中皆有印相。是
006_0822_c_20L故名大海爲印。菩薩亦尒。得大海
006_0822_c_21L印三昧。見一切衆生心行。云云。 則
006_0822_c_22L下四敎法。亦依海印定起。何故云
006_0822_c_23L不尒耶。雲華答曰。海印有五。一
006_0822_c_24L者。三大阿僧祗劫歷修之帝釋。昇
006_0822_c_25L「感}通「惑」{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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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23_a_01L소지장所知障131)아수라와 서로 싸울 때 삼과백법132)의 형상이 대원경지大圓鏡智133)의 바다 가운데 나타나는 해인이다.둘째는 셀 수 없는 겁을 지내도록 수행한 제석천이 본각本覺수미산의 정상에 올라 근본무명아수라와 서로 싸울 때 갠지스강의 모래처럼 (많은) 성공덕性功德의 형상이 한마음 진여의 바다에 나타나는 해인이다.134)
셋째는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는 제석천이 일행삼매一行三昧수미산의 정상에 올라 망상妄想아수라와 서로 싸울 때 모습도 없고 분별도 없는 형상이 둘 없는 실상實相의 바다에 나타나는 해인이다.넷째는 두 부처님 국토의 티끌 수처럼 (많은) 겁을 지내도록 수행한 제석천이 총상摠相수미산의 정상에 올라 변계아수라와 서로 싸울 때 열 가지 보법의 형상이 세계해에 나타나는 해인이다.다섯째는 열 부처님의 제석천이 법성수미산의 정상에 올라 머무름이 없는 실상아수라와 서로 싸울 때 삼종세간의 형상이 국토해에 나타나는 해인이다. 이상.”라고 하였다.
이 다섯 가지 가운데 앞의 셋은 차례대로 시교ㆍ종교ㆍ돈교이고, 뒤의 둘은 차례대로 밖으로 교화함과 안으로 증득함이다. 여기에 인因으로서의 해인을 기준으로 한 것을 덧붙여 논하면 여섯 가지가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보현의 제석천이 해행解行수미산의 정상에 올라 백 가지 장애135) 아수라와 서로 싸울 때 다함없는 보법의 형상이 정광파려의 거울에 나타나는 해인이다. 만약 앞의 세 거듭의 뜻을 기준으로 하면 삼승도 분수에 따라서 해인을 논한다. 그러나 삼승이 모두 해인삼매 밖에서 설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일승의 해인을 기준으로 하여 이른 것일 뿐이다. -
006_0823_a_01L法空須彌山頂。與所知障阿修羅
006_0823_a_02L鬪戰之時。三科百法像。現於大圓
006_0823_a_03L鏡智海中之海印也。二者。不可數
006_0823_a_04L劫歷修之帝釋。升本覺須彌頂。與
006_0823_a_05L根本無明阿修羅相戰之時。恒沙
006_0823_a_06L性德像。現於一心眞如海之海印
006_0823_a_07L也。三者。一念不生之帝釋。升一
006_0823_a_08L行三昧須彌頂。與妄想阿修羅相
006_0823_a_09L戰之時。無相無分別像。現於不二
006_0823_a_10L實相海之海印也。四者。二佛刹微
006_0823_a_11L塵數劫歷修之帝釋。升摠相須彌
006_0823_a_12L頂。與遍計阿修羅相戰之時。十種
006_0823_a_13L普法像。現於世界海之海印也。五
006_0823_a_14L者。十佛之帝釋。升法性須彌頂。與
006_0823_a_15L無住實相阿修羅相戰之時。三種
006_0823_a_16L世間像。現於國土海之海印也。已上。
006_0823_a_17L此五之中。前三如次始終頓也。後
006_0823_a_18L二如次外化內證也。於此加論約
006_0823_a_19L因海印。應有六種。謂普賢之帝釋。
006_0823_a_20L升解行須彌頂。與百障阿修羅相
006_0823_a_21L戰之時。無盡普法像。現於錠光玻
006_0823_a_22L瓈鏡之海印也。若約前三重意。則
006_0823_a_23L三乘隨分第下之一第二九張 亦論
006_0823_a_24L海印也。而言三乘皆是海印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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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23_b_01L청량소
『청량소』에서 해인을 풀이하여 이른다.136) 열 가지 뜻으로 이것을 풀이하여 다함없는 작용을 드러낸다. 첫째는 무심히 능히 나타내는 뜻이다. 둘째는 나타내되 나타나는 바가 없는 뜻이다. 셋째는 나타내는 것과 나타나는 바가 하나가 아닌 뜻이다. 넷째는 (나타내는 것과 나타나는 바가) 다르지 않은 뜻이다. 다섯째는 (나타내는 것과 나타나는 바가) 가고 옴이 없는 뜻이다. 여섯째는 (나타냄이) 광대한 뜻이다. 일곱째는 널리 나타나는 뜻이다. 여덟째는 몰록 나타나는 뜻이다. 아홉째는 항상 나타나는 뜻이다. 열째는 나타나지 않아도 나타나는 뜻이다.
대기『대기』에 이른다. ‘여의如意란 비유를 따라 이름 붙인 것이다. 내지 뜻대로 아님이 없는’ 등은 (다음과 같다.) 마치 여의주왕을 복덕이 없는 사람이 얻으면 변하여 독사가 되어 오히려 그 사람을 해치고, 만약 복덕이 있는 사람이 얻으면 그 뜻에 좋아함에 따라서 다함없는 보배를 비 내려 가난한 사람들에게 널리 베푸는 것과 같이, 일승보법의 의리義理도 또한 그러하다. 만약 원만한 믿음이 없는 하열한 근기가 이것을 들으면 자신의 망정妄情으로 인한 견해에 집착하여 의심을 내어 비방을 일으키니 도리어 악도에 떨어져 다함없는 고통을 받는다. 만약 큰 마음에 바른 믿음이 있는 사람이 이것을 들으면 겨우 듣자마자 곧 믿어서 곧 일승의 본성에 칭합하는 이익을 얻어 자신과 남을 널리 이롭게 하여 뜻과 같지 않음이 없다.〔3〕 수행방편1. 일승과 오승‘일승(의 보법)을 보고 들은’부터 ‘오승의 설과 같다’까지137)
대기『대기』에 이른다. ‘행자行者란 일승을 보고 보법을 탄 이후 아직 보법을 원만히 증득하기 이전까지를 말한다’ 등에서, 만약 머무름 없는 별교를 기준으로 하면 보고 들음이 곧 원만한 증득이다. 지금은 지위에 기댐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일승을 보고 들음’을 말하고, 내지 ‘아직 보법을 원만히 증득하지 않음’ 등을 말하는 것이다.
고기
‘고기’에 이른다. 삼생에 많은 거듭이 있다. 첫 번째, 과보를 기준으로 하면 과거는 견문見聞이고 현재는 해행解行이며 미래는 증입證入이다. -
006_0823_b_01L外所說者。約一乘海印云耳。
006_0823_b_02L淸凉釋海印云。以十義釋之。表無
006_0823_b_03L盡之用。一無心能現義。二現無所
006_0823_b_04L現義。三能現與所現非一義。四非
006_0823_b_05L異義。五無去來義。六廣大義。七
006_0823_b_06L普現義。八頓現義。九常現義。十
006_0823_b_07L非現現義。
006_0823_b_08L大記云。如意者從喩得名乃至無
006_0823_b_09L不如意等者。猶如如意珠王。無福德
006_0823_b_10L人得之。則變爲毒蛇。 反害其人。若
006_0823_b_11L有福德之人得。則隨其意樂。雨無盡
006_0823_b_12L寶。廣施貧人。一乘普法義理亦尒。若
006_0823_b_13L無圓信下劣之機聞之。則執已情見。
006_0823_b_14L生疑起謗。反墮惡道。受無盡苦。若
006_0823_b_15L有大心正信之人聞之。則纔聞即信。
006_0823_b_16L即得一乘稱性之益。廣利自他。無不
006_0823_b_17L如意也。
006_0823_b_18L[修行方便]見聞一乘 至如五乘說。大記云。行者
006_0823_b_19L者。謂見一乘乘普法已去。未滿圓1)訂
006_0823_b_20L普法等者。若約無住別敎。則見聞即
006_0823_b_21L是圓訂。今約寄位故云見聞一乘。
006_0823_b_22L乃至云未滿圓訂普法等也。
006_0823_b_23L古記云。三生有多重。一約報。則過
006_0823_b_24L去見聞。現在解行。未來訂入。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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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23_c_01L두 번째, 세계를 기준으로 하면 세계 안은 견문이고 출세出世는 법을 얻음이며 출출세出出世는 증득하여 이룸이다. 또 세계 안은 견문과 해행에 통하고 출세는 법을 얻음(得法)이며 출출세는 증득하여 이룸(證成)이다. 세 번째, 자신 분위에 의해 위로 나아감(自分勝進)을 기준으로 하면, 십신 이전은 견문이고 십신은 해행이며 십신이 원만한 마음이 앞으로 나아감은 증입이다. 네 번째, 신해信解를 증장하는 문을 기준으로 하면 십신은 견문이고 삼현은 해행이며 십지는 증입이다.
다섯 번째, 증득을 비교하는 것을 기준으로 하면 지 이전(地前)은 견문이고 초지부터 일곱째 지(七地)까지는 해행이고 여덟째 지(八地) 이상은 증입이다. 여섯 번째, 일승과 삼승을 기준으로 하면 넷째 지地는 견문이고 다섯째, 여섯째, 일곱째 지地는 해행이며 여덟째 지地는 증입이다. 일곱 번째, 오승으로 일승에 문을 배대하는 뜻을 기준으로 하면, 여덟째 지地는 견문이고 아홉째 지地는 해행이며 열째 지地는 증입이다. 여덟 번째, 선지식을 기준으로 하면 문수는 견문이 되고 덕운 이후는 해행이다. 미륵보살이 “앞으로 나를 보게 될 것이다.”138)라고 고하여 이른 것은 증입이 된다. 또 보현보살 선지식은 증득한 과보의 바다가 된다.139)
지통기
『지통기』에 이른다.문 견문 등의 세 지위는 보법의 바른 지위입니까?답 아니다. 다만 삼승을 따라서 이 말을 할 뿐이다. 만약 보법의 바른 법이라면 곧 지위도 없고 지위 아님도 없으니, 일체의 육도와 삼계의 법계에 대한 법문이 보법의 바른 지위 아님이 없다. 또 한 지위가 일체의 지위이고 일체의 지위가 한 지위이다. 지위의 법문과 같이 일체의 행, 가르침(敎)과 뜻(義) 등의 법문도 또한 그러하니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문 만약 그렇다면 보법 가운데 무엇으로 처음을 삼습니까? -
006_0823_c_01L約界。則界內見聞。出世得法。出出
006_0823_c_02L世訂成。又界內通見聞解行。出世
006_0823_c_03L得法。第下之一第三○張 出出世訂
006_0823_c_04L成。三約自分勝進。則十信已前見
006_0823_c_05L聞。十信解行。十信滿心勝進訂入。
006_0823_c_06L四約信解增長門。則十信見聞。三
006_0823_c_07L賢解行。十地訂入。五約比訂。則
006_0823_c_08L地前見聞。從初地至七地解行。八
006_0823_c_09L地以上訂入。六約一乘三乘。則四
006_0823_c_10L地見聞。五六七地解行。八地訂入。
006_0823_c_11L七約五乘配門一乘義。則八地見
006_0823_c_12L聞。九地解行。 2)弟十地訂入。八約
006_0823_c_13L知識。則文殊爲見聞。德雲以去
006_0823_c_14L3)解 [278] 行。彌4)勤 [279] [194] 告云當來見我爲訂
006_0823_c_15L入。又普賢知識爲訂果海也。
006_0823_c_16L智通記云。問。見聞等三位。普法正
006_0823_c_17L位耶。答。不也。但從三乘。作是說耳。
006_0823_c_18L若普法正法。即無位無不位。一切
006_0823_c_19L六道三界法界法門。無不普法正
006_0823_c_20L位。又一位一切位。一切位一位。
006_0823_c_21L如位法門。一切行敎義等法門亦
006_0823_c_22L尒。可思。問。若尒普法中以何爲始。
006_0823_c_23L「訂」通「證」於此書{編}次同。「弟」作「第」{乙}。
006_0823_c_24L「解」作「能」{乙}。「勤」作「勒」{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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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24_a_01L답 하나의 법문 얻음으로 시작을 삼는다. 이것은 곧 마지막과 다름이 없다.
대종지현문본론
『대종지현문론大宗地玄文論』140)에 이른다.141) ‘차례를 뛰어넘음 없이 점차 나아가는 지위’란 게송에 이르기를, “51위五十一位142) 가운데 차례대로 뛰어넘음 없이 나아가니 하나에 일체를 갖추는 것을 ‘점차 나아가는 지위’라고 이름한다.”라고 한다. 논에서 풀이하여 말한다. 오직 한 수행자만 쉰한 가지의 다른 모습의 지위 가운데 그 차례대로이니 법을 뛰어넘음이 없다.
‘남음 없이 구경에 모두 지니는 지위’란 게송에 이른다. “오십일위 가운데 먼저 들어간 바에 따라서 일체와 일체를 거두니 ‘남음 없는 구경’이라고 이름한다.” 논에서 풀이하여 말한다. 오십일위의 다른 모습 가운데 혹 어떤 수행자는 믿음으로써 나아가 들어가고, 혹 어떤 수행자는 진여의 지위로써 나아가 들어가고, 혹 어떤 수행자는 대극大極의 지위로써 나아가 들어간다. 운운. 등은, 먼저 들어간 바에 따라서 일체의 일체 지위를 다 거두어 구경에 남음이 없으며, 또한 옮겨 다님도 없으며, 또한 나고 듦도 없어서 하나하나 희고 희다.
‘널리 두루하여 원만하고 광대한 지위’란 게송에 이른다. “쉰한(五十一) 종류의 지위가 앞뒤가 없어 한 때에 함께 옮겨가고(轉) 함께 행해지기 때문에 ‘널리 두루하여 원만함’이라고 이름한다.” 논에서 풀이하여 말한다. 쉰하나의 지위는 앞뒤가 없어 한 때에 함께 옮겨가고 함께 행해져서 남는 바가 없다. 또한 쉰하나의 다른 모습의 지위 가운데 있는 바 한량없고 가없는 모든 지위가 앞뒤가 없어 한 때에 함께 옮겨가고 함께 행해져서, 맘대로 옮겨감에 향함이 없는 도인(橫轉無向道人)143)이다.
‘일체의 모든 법이 함께 아닌 지위’란 게송에 이른다. “모든 한량없고 가없는 일체의 갖가지 지위가 모두 다 건립된 것이 아닌 것을 ‘함께 아닌 지위’라고 이름한다.” -
006_0824_a_01L答。得一法門以爲始。此則與終無
006_0824_a_02L別也。
006_0824_a_03L大宗地玄文論云。無超次1)弟漸轉
006_0824_a_04L位者。偈云。五十一位中。如次無超
006_0824_a_05L轉。一中具一切。名爲漸轉位。論
006_0824_a_06L釋曰。唯一行者。五十一種別相位
006_0824_a_07L中。 [195] 如其次*弟。無超過法也。無餘
006_0824_a_08L究竟摠持位者。偈曰。五十一位中。
006_0824_a_09L隨其先得入。攝一切一切。2)名 [280] 無
006_0824_a_10L餘究竟。論釋曰。第下之一第三一張
006_0824_a_11L五十一位別相中。或有行者。以信
006_0824_a_12L趣入。或有行者。以眞如地趣入。
006_0824_a_13L或有行者。以大極地趣入。云云。等
006_0824_a_14L隨先得入。盡攝一切一切位地。究
006_0824_a_15L竟無餘。亦無移轉亦無出入。一一
006_0824_a_16L白白也。周遍圓滿廣大位者。偈曰。
006_0824_a_17L五十一種位無前後。一時俱轉俱
006_0824_a_18L行故。名周遍圓滿。論釋曰。五十
006_0824_a_19L一位。無有前後。一時俱轉 [196] 俱行。
006_0824_a_20L無有所餘。亦五十一別相位中。所
006_0824_a_21L有無量無邊諸位。無有前後。一時
006_0824_a_22L俱轉一時俱行。橫轉無向道人也。
006_0824_a_23L一切諸法俱非位者。偈曰。諸無量
006_0824_a_24L無邊。一切種種位。皆悉非建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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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24_b_01L논에서 풀이하여 말한다. 원인도 아니고 결과 등도 아니다. 운운. 그 아님(非)의 뜻으로 지위를 세우기 때문이다.‘일체의 모든 법이 함께 그것인 지위’란 게송에 이른다. “일체의 갖가지 법이 금강의 몸이 아님이 없다. 한 몸의 뜻인 까닭에 함께 그것인 문이라고 이름한다.” 논에서 풀이하여 말한다. 이는 병病 없는 도인이라 이름한다.한 몸인 금강보륜산왕은 그 모습이 어떠한가? 게송에 이른다. “점차가 끝까지 다해서 원만하여 아니다. 한 때와 앞과 뒤, 함께와 함께 아님, 하나와 다른 때와 장소에서 옮겨간다.”144)
대기『대기』에 이른다. ‘오승이 모두 일승에 들어가 포섭된다. 일승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一乘所流)이고, 일승을 목표로 하는 것(一乘所目)이고, 일승의 방편(一乘方便)이기 때문이다’란 다음과 같다. ‘흘러나오는 것’이라고 말한 것은 마치 백 개의 내(川)가 저 큰 바다로부터 흐르지 않음이 없는 것과 같이, 삼승과 오승 등 일체의 모든 법이 근본의 일승으로부터 흘러서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목표로 하는 것이란 삼승을 기준으로 하면 안목의 뜻이 되고, 일승을 기준으로 하면 명목의 뜻이 된다. 삼승에서 안목이 된다고 말한 것은 그 훈습되는 일체 모든 법이 온전히 일승의 보법이기 때문에 이 상즉으로 화엄보법에 들어가는 안목을 삼는 것이다. 일승에서 명목이 된다는 것은 만약 생겨남이 없는 부처님의 법을 기준으로 하면 이름하여 지목(名目)할 수 없으나, 그러나 근기의 연緣을 위하여 여러 이름으로 제목하여 보인 것이다.
방편이란 마치 높은 집에 오르고자 함에 용감하고 빠른 사람은 한번 뛰어 바로 올라가지만, 저 끝의 사람은 서너 걸음 정도를 물러나 가도록 가르쳐 물러나 걸을 때부터 이미 집에 오르는 힘을 얻는 것과 같다. 이처럼 상근기의 사람은 한 번 보법을 듣고 바로 일승에 들어가지만, 중ㆍ하근기는 일승의 보법에 바로 들어갈 수 없어서 -
006_0824_b_01L名俱非位地。論釋曰。非因非果等。
006_0824_b_02L云云。 以其非義立爲位故也。一切
006_0824_b_03L諸法俱是位者。偈曰。一切種種法。
006_0824_b_04L無非金剛身。以一身義故。名爲俱
006_0824_b_05L是門。論釋曰。是名無病道人也。
006_0824_b_06L一身金剛寶輪山王。其相云何。偈
006_0824_b_07L曰。漸是盡非滿。 [197] 一時及前後。與俱
006_0824_b_08L并俱非。一異時處轉。
006_0824_b_09L大記云。五乘摠是入一乘攝。以一乘
006_0824_b_10L所流一乘所目一乘方便故者。言所
006_0824_b_11L流者。猶如百川。無不從彼大海而
006_0824_b_12L流。三乘五乘等一切諸法。無不從
006_0824_b_13L本一乘而流成也。所目者。約三乘則
006_0824_b_14L爲眼目之義也。約一乘則爲名目之
006_0824_b_15L義也。言三乘中爲眼目者。其所熏習
006_0824_b_16L一切諸法。第下之一第三二張 全是一
006_0824_b_17L乘普法故。以此即爲入花嚴普法之
006_0824_b_18L眼目也。一乘中爲名目者。若約無生
006_0824_b_19L佛法。則不可名目。然爲機緣。以諸
006_0824_b_20L名字題目而示也。方便者。猶如欲
006_0824_b_21L登高堂。勇疾之人。一躍便登。如其
006_0824_b_22L末者。敎令退行三四步許。從却步時。
006_0824_b_23L已得升堂之力。如是上根之人。一聞
006_0824_b_24L普法。直入一乘。中下之根。未能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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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24_c_01L부처님께서 대비로써 삼승을 베풀어 펼치셔서 일승에 들어가는 방편을 삼는 것이다.
‘흘러나오는 것(所流)과 목표로 하는 것(所目)은 연기의 도리를 기준으로 한 말’이라는 것은 대연기의 도리를 일컫는 것이 아니다. 일승의 법이 근기의 연緣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방편은 지혜를 기준으로 한 말’이란 아래 가르침의 근기가 자신의 삼승이 임시로 베풀어 펼쳐진 것임을 알고 돌이켜 일승에 들어가는 지혜를 기준으로 하여 이른 것이다. ‘또한 성자의 뜻을 기준으로 설한 것’이란 교화하는 위대한 성인이 훌륭한 방편으로써 일승 가운데 삼승을 나누어 설하여 중ㆍ하근기를 이끌어 근본의 일승으로 들이는 뜻이다. 그러므로 ‘성자의 뜻을 기준으로 설한 것’이라고 한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훌륭하고 교묘한 방편으로 중생을 맞아들여 이끌기 때문이다.
십구장원통기
『십구장기』145)에 이른다.146) 목표로 하는 것(所目)은 이 경이고, 흘러나오는 것(所流)과 방편 등은 아래의 네 가르침이다.문 근기와 연緣에서 일어남은 어느 근기와 연緣을 기준으로 하는 것인가?답 아래 가르침의 근기와 연緣이다.문 만약 그렇다면 목표로 하는 것 또한 아래 가르침인가?답 『화엄경』 중 목표로 하는 법이 밖으로 향하여 흘러서 아래 가르침의 근기의 연緣 가운데 일어난 것이다. 이 연緣 가운데 일어난 아래 가르침의 법이 본래 『화엄경』 중의 목표로 하는 것임을 나타내고자 하기 때문에, 그 이유로 목표로 하는 것을 함께 논한 것일 뿐이다.
대기『대기』에 이른다. ‘오승의 설과 같다. 사람(人)과 법法, 원인(因)과 결과(果) 내지 예에 준하면 이와 같다’ 등에서, 오승은 삼승ㆍ소승ㆍ인천승이고, ‘예에 준하면 이와 같다’ 등은 근기와 연緣에 따라서 오승이 비록 다르나 그 오승의 법이 일승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말하자면 앞에서는 근기에 따라서 나뉜 오승을 기준으로 하여 수행자를 논하였고, -
006_0824_c_01L入一乘普法。佛以大悲。施設三乘。爲
006_0824_c_02L入一乘之方便也。所流所目約緣起
006_0824_c_03L道理語者。非謂大緣起道理也。一乘
006_0824_c_04L之法。於機緣中起故也。方便者約智
006_0824_c_05L語者。約下敎機知自三乘是假施
006_0824_c_06L設廻入一乘之智云也。亦可約聖者
006_0824_c_07L意者。能化大聖。以善方便。於一乘
006_0824_c_08L中。分說三乘。引中下根。入本一乘之
006_0824_c_09L意也。是故云。約聖者意說。何以故。
006_0824_c_10L以善巧方便。接引衆生故。
006_0824_c_11L十句章記云。所目者是此經。所
006_0824_c_12L流方便等者。是下四敎也。問。於
006_0824_c_13L機緣中起者。約何機緣耶。答。下敎
006_0824_c_14L機緣也。問。若爾。所目亦是下敎耶。
006_0824_c_15L答。花嚴經中所目之法。向外而流。
006_0824_c_16L於下敎機緣中起也。爲欲現此緣
006_0824_c_17L中所起下敎之法本是花嚴經中
006_0824_c_18L所目故。所以并論所目耳。
006_0824_c_19L大記云。如五乘說。人法因果乃至准
006_0824_c_20L例如是等者。第下之一第三三張 五乘
006_0824_c_21L則三乘小乘人天乘也。准例如是等
006_0824_c_22L者。隨機緣而五乘雖別。其五乘法。
006_0824_c_23L與一乘不異也。謂前約隨機所分五
006_0824_c_24L「弟」作「第」{乙}次同。「名」作「各」{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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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25_a_01L여기에서는 그 법을 기준으로 하니 예에 준하여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일승의 열 가지 보법을 기준으로 하여 ‘예에 준하면’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다. 오승 중에 있는 사람과 법 등을 기준으로 하여 말한 것일 뿐이다. 말하자면 오승을 거두어 일승 중에 들어가면 그 오승에 있는 사람과 법 등도 또한 모두 거두어 일승에 들어가기 때문이다.”라고 한다.2. 증교證敎 무분별 : 칠종 문답‘이른바 오승’에서 ‘수승하고 오묘한 능력’까지147)
대기『대기』에 이른다.문 ‘이른바 오승 등의 법은 설하는 가르침(能詮敎法)인가, 설해지는 뜻(所詮義)인가’ 등에서, 이 아래에 일곱 거듭의 문답이 있다.148) 이 첫 문답 가운데 질문의 뜻은 오승의 가르침 밖에 별도로 말을 여의고 모습을 끊은 뜻(旨)이 있는지를 나타내고자 하기 때문에, 또 저 오승의 가르침의 법이 곧 이름과 모습을 여읜 설해지는 바인지를 나타내고자 하기 때문에 물은 것이다.
답의 뜻은 (다음과 같다.) 옛 대덕이 이르기를, “이것은 저 누런 잎을 가져 곧 바로 진짜 황금이다라고, 이와 같이 손가락으로 가리켜서 가르치는 곳이다.”149)라고 하였다. 옛말에 이르기를, “원효 스님이 의상 화상을 만나서 의심을 해결한 것이 세 가지가 있다. 말하자면 첫째는 시각이 본각과 같으니 범부가 되고 성인이 되는 뜻이고, 둘째는 습기를 지나는 바다의 갖가지 마음의 뜻150)이고, 셋째는 이 설하는 가르침과 설해지는 뜻이 모두 말 가운데 있는 자리이다.”라고 하였다. 원효 스님의 뜻은 곧 말하자면 아래 가르침 가운데 실제로 법의 체體가 있다고 했는데 이 글을 보고서 설하는 가르침과 설해지는 뜻이 모두 말 가운데 있고 실제의 법의 체體가 없음을 알았다는 것이다.
문 이 ‘설하는 가르침과 설해지는 뜻이 모두 말 가운데 있다’는 것은 어느 자리에 서서 말하는 것인가?답 보현보살이 흘러나오는 것과 목표로 하는 것의 근기를 위하여 생겨남도 없고 이름도 없는 곳에 갖가지 이름으로 제목을 붙이니, 이때에 설하는 가르침과 설해지는 뜻이 차별을 이루기 때문에 이 자리를 기준으로 하여 ‘모두 말 가운데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 여기에서 더 나아가 말하면 부처님이 밖으로 향하여 산왕山王151)의 근기를 위해서 항상 설하시고 두루 설하시기 때문에 -
006_0825_a_01L乘。論行者已。此中約其法則准例可
006_0825_a_02L知也。一云。非約一乘十種普法言准
006_0825_a_03L例也。約五乘中所有人法等云耳。
006_0825_a_04L謂如攝五乘入一乘中。其五乘所有
006_0825_a_05L人法等。亦得摠攝入一乘故也。
006_0825_a_06L所謂五乘 至勝妙能也。大記云。問。所
006_0825_a_07L謂五乘等法。爲是能詮敎法耶。爲是
006_0825_a_08L所詮之義耶等者。此下有七重問答。
006_0825_a_09L此初問答中問意。欲現五乘敎外別
006_0825_a_10L有離言絕相之旨故也。又欲現彼五
006_0825_a_11L乘敎法即是離名相之所詮故問也。
006_0825_a_12L答意。則古德云。此是將彼黃葉即正
006_0825_a_13L眞金。如是指誨之處也。古辭云。曉
006_0825_a_14L師遇相和尙。決疑有三。謂一始覺同
006_0825_a_15L本覺爲凡爲聖之義。二濕過海種種
006_0825_a_16L心之義。三此能詮所詮皆在言中之
006_0825_a_17L處也。曉師之意。則謂下敎中實有法
006_0825_a_18L體。及見此文。乃知能詮所詮。皆在
006_0825_a_19L言中無實法體也。問。此能詮所詮。
006_0825_a_20L皆在言中者。立在何處云耶。答。普賢
006_0825_a_21L爲所流所目之機。於無生無名處。以
006_0825_a_22L種種名題目。於此時中。能詮所詮。
006_0825_a_23L成差別故。約此處云。皆在言中也。
006_0825_a_24L又進此而云。佛乃向外。爲山王機。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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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25_b_01L이때에 십현문과 열 가지 법이 구족하고 자재하다. 그런데 또한 위로 열 부처님의 안으로 증득하심을 바라보면 오히려 이것도 가르침과 상응하기 때문에 이 자리를 기준으로 해서 또한 ‘모두 말 가운데 있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큰 자비와 본원의 힘인 까닭에 내지 말로 된 가르침(言敎)을 베풀어’ 등은 (다음과 같다.) 모든 부처님 세존께서 성품 바다의 과분(性海分)을 따라서 대비의 서원을 일으켜 스스로 깨달으신 법으로써 밖으로 근기의 마음을 향해 두 가지 언설을 일으키신다. 말하자면 법계문 중에 세계해의 이루어짐과 무너짐에 관한 청정한 지혜 등의 불가사의를 설하시고, 반야문 중에 부처님 국토의 불가사의를 설하시는 것이다.152) 이 두 가지 언설은 비록 보현보살과 문수보살이 선정에서 나온 이후이지만, 그러나 지상 스님의 과분의 지위인 다섯 바다와 열 지혜(五海十智)153)의 뜻에 의거하면 사자분신삼매(奮迅定)154) 가운데 이 언설을 일으키신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 국토의 불가사의에 대한 언설은 안으로 증득함의 국토바다에 칭합하여 일어난 것이며, 보현보살과 문수보살 등은 이 언설에 칭합하여 증득하기 때문에 증분을 직접 증득한다고 한다. 따라서 이 문에서 부처님과 보살이 하나의 상속이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안으로 향하면 열 부처님이고 밖으로 향하면 보현보살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문 보현보살의 안으로 증득하는 정장삼매가 부처님이 밖으로 향하신 것이다. 무슨 까닭에 “안으로 향하면 열 부처님이고 밖으로 향하면 보현보살이기 때문에 하나의 상속이다.”라고 하는가?답 부처님이 밖으로 향하실 때 보현보살의 원만한 인因을 함께 아우른다. 이 원만한 인因이 안을 향하면 열 부처님이기 때문에 “하나의 상속이다.”라고 한 것이다.
법융기『법기』에 이른다. ‘본원의 힘’이란 부처님이 인행因行을 닦으실 때 곧 서원을 일으켜 생각하기를, ‘내가 마땅히 부처를 이루어 삼승의 근기를 위하여 가르침을 베풀어서 자취에 머무르게 하지 않고 반드시 일승의 실체로 돌아가 들어가게 하리라’라고 이렇게 서원을 일으키시는 것이다. ‘법이 으레 이러하다’란 삼세 모든 부처님이 바른 깨달음을 이루실 때 -
006_0825_b_01L說遍說。故第下之一第三四張 於此時。
006_0825_b_02L十玄十法具足自在。然亦望上十佛
006_0825_b_03L內訂。則猶是與敎相應故。約此處。亦
006_0825_b_04L得可云皆在言中也。以大慈悲本願
006_0825_b_05L力故。乃至施設言敎等者。諸佛世尊。
006_0825_b_06L從性海分。發大悲願。以自證法。外向
006_0825_b_07L機心。起二言說。謂法界門中說世
006_0825_b_08L界海成敗淸淨智等不思議。般若門
006_0825_b_09L中說佛國土不可思議也。此二言
006_0825_b_10L說。雖普賢文殊出定以去。然依至相
006_0825_b_11L果地五海十智之義。則奮迅定中
006_0825_b_12L起此言說也。是故佛土不思議之言。
006_0825_b_13L稱於內訂土海而起。普賢文殊等。稱
006_0825_b_14L此言說而訂故。云親訂訂分。故此門
006_0825_b_15L中。佛與菩薩。一相續也。是故云。向
006_0825_b_16L內則十佛。向外則普賢也。問。普賢內
006_0825_b_17L訂之淨藏三昧。是佛外向也。何故向
006_0825_b_18L內則十佛。向外則普賢故。是一相續
006_0825_b_19L也耶。答。佛外向際。並普賢圓因。此
006_0825_b_20L圓因向內。則是十佛故。云一相續也。
006_0825_b_21L法記云。本願力者。佛修因時。即發
006_0825_b_22L誓念。我當成佛。爲三乘機。施設敎
006_0825_b_23L已。不令住跡。要必廻入一乘實體。
006_0825_b_24L如是起願也。法如是者。三世諸佛。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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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25_c_01L법이 으레 이러하여 이 서원을 일으키시는 것이다.대기『대기』에 이른다. 두 번째 문답의 질문에서 ‘증분과 교분의 두 법이 항상 두 변에 있게 되는 허물’이라는 것은, 앞에서 “설해지는 법은 말의 모습이 미치지 못한다.”라고 하고, 또 “일체 모든 법이 모두 다 말에 있다.”라고 한 까닭에 그 두 말을 근거로 하여 이 질문을 일으킨 것이다. 답에서 먼저 두 가지 뜻155)을 들어서 바로 답한다. ‘까닭을 알 수 있는 것은’이란 거듭 물은 것이고, ‘변계는 모습이 없고’ 아래는 거듭 답한 것이다.
법융기『법기』에 이른다. ‘증분과 교분의 두 법이 예부터 중도이고 하나로서 무분별이다’란, 비유하면 물에 여러 영상이 나타나는데 물가에 있는 사람이 다만 그 물이 영상과 다른 것만 보니, 단지 그 물로 안목을 삼지 않음을 말미암을 뿐인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만약 해인(삼매)로 안목을 삼지 않으면 삼세간의 법이 곧 해인(삼매)임을 보지 못한다. 만약 해인(삼매)로 안목을 삼으면 모든 법이 곧 해인(삼매)의 체體임을 보게 된다. 해인(삼매)에 나타나는 삼세간은 교분이고 삼세간을 거두는 해인(삼매)는 곧 증분이다. 그러므로 “증분과 교분의 두 법이 하나로서 무분별이다.”라고 한다.
‘변계遍計는 모습(相)이 없고 의타依他는 생겨남이 없으며 진실은 성품이 없어서 세 가지의 자성이 항상 중도에 있으니’ 등에서, 세 가지 자성은 교분이고 세 가지 자성이 없음은 증분이다. 그러므로 증분과 교분을 구족한다.
만약 망정을 기준으로 하여 말하면, 변계가 모습이 없다는 것은 실제로 집착함이 없는 것이고 사유似有가 없는 것이 아니다. 의타가 생겨남이 없다는 것은 사유似有가 없는 것이고 자체가 공한 것이 아니다. 원성이 성품이 없다는 것은 자체가 공한 것이고 연緣이 성품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세 가지 자성을 없애어 세 가지 자성이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다.만약 이법을 기준으로 하여 말하면, 다만 하나의 진실이 -
006_0825_c_01L正覺時。法爾如是。起此願也。
006_0825_c_02L大記云。 1)弟二問答。問中訂敎兩法
006_0825_c_03L常在二邊過者。前云所詮之法。言相
006_0825_c_04L不及。第下之一第三五張 又云一切諸
006_0825_c_05L法皆悉在言故。牒其二言。起此問也。
006_0825_c_06L答中先擧二義正答。所以得知者重
006_0825_c_07L問。遍計無相下重答也。
006_0825_c_08L法記云。訂敎兩法。舊來中道。一無分
006_0825_c_09L別者。猶如水中現現諸像。在水邊
006_0825_c_10L人。但見其水與像別異。只由不以
006_0825_c_11L其水爲眼故也。如是若不以海印爲
006_0825_c_12L眼。則不見三世間法即是海印。若
006_0825_c_13L以海印爲眼目。則得見諸法即海印
006_0825_c_14L體。海印所現三世間。是敎分也。攝
006_0825_c_15L三世間之海印。即是訂分也。是故云。
006_0825_c_16L訂敎二法。一無分別也。遍計無相。
006_0825_c_17L依他無生。眞實無性。三種自性。常在
006_0825_c_18L中道等者。三性是敎。三無性是訂。
006_0825_c_19L是故具訂敎也。若約情云。遍計無相。
006_0825_c_20L是實執之無。非似有之無。依他無生。
006_0825_c_21L是似有之無。非自體空。圓成無性。
006_0825_c_22L是自體空。非緣之無性。是故遣三性。
006_0825_c_23L現三無性也。若約理云。只是一眞。
006_0825_c_24L「弟」作「第」{乙}次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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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26_a_01L곧 모습이 없음이며 곧 성품이 없음 등일 뿐이므로, 곧 이것이 변계의 모습 없음을 없애고 이것이 의타의 생겨남 없음을 없앤다는 등으로 나눌 수가 없다. 따라서 세 가지 자성 없음이 곧 한 경계이다. 다만 하나의 진실에 의거하여 셋으로 나눈 것이기 때문에 세 가지 자성 또한 한 경계이다. 그러므로 “세 가지의 자성이 항상 중도에 있다.”라고 하는 것이다.
만약 나무숲을 기준으로 하여 논하면, 이것은 세 가지 자성을 설하여 뜻하기 때문에 초교이다. 만약 금을 나누어 셋으로 함을 기준으로 하여 세 가지 자성을 논하면 세 가지 자성의 뜻을 설하여 뜻함이 있고 또 숙교 중의 뜻이 있다. 만약 연유(酥)를 셋으로 나누는 것을 기준으로 하여 세 가지 자성을 논하면 숙교의 종宗에 해당한다. 만약 허공을 나누어 셋으로 함을 기준으로 하여 세 가지 자성을 논하면 동교일승에 해당한다.두 번째 뜻에 나아가서 금을 셋으로 나눔에 경우마다 다른 것이 세 가지 자성이다. 그 경우가 다름을 따라서 금의 형상 또한 다른 것은 세 가지 자성 없음이다. 이것은 거듭이 있기 때문에 세 가지 자성을 설하여 뜻하는 것(초교)이다. 만약 금의 체를 기준으로 하면, 세 경우의 금이 오직 한 종류인 것은 세 가지 자성 없음이고, 세 경우의 금의 형상이 한 가지 금으로 이루어진 것은 세 가지 자성이다. 이 뜻은 숙교에 해당한다.
세 번째 뜻에 나아가서 연유를 나누어 셋으로 한 것은 세 가지 자성이다. 세 그릇의 연유가 체體와 덕德이 가지런히 하나인 것은 세 가지 자성 없음이다. 만약 이법의 실제를 기준으로 하면, 세 가지 자성은 초교 중에서는 분수 따라 논한 것이고 숙교의 처음에서는 끝까지 논한 것이며 숙교의 마지막에서는 쓰지 않는 것이다.동교일승 중에서는 삼승의 세 가지 자성에 익숙한 사람을 이끌어 들이고자 그 익숙한 세 가지 자성의 법칙에 의거하여 우선 큰 허공을 나누어 셋으로 그리기 때문에 하나를 들면 전체를 거두어들여서 나눌 수가 없는 것이다.156) -
006_0826_a_01L即是無相。即是無性等故。即不可分
006_0826_a_02L此是遣遍計之無相此是遣依他之
006_0826_a_03L無生等。故三無性即一際也。但依
006_0826_a_04L一眞所分三故。三性亦一際也。是故
006_0826_a_05L云。三種自性。常在中道也。若約樹林
006_0826_a_06L論。則是詮旨三性故。初敎也。若約析
006_0826_a_07L金爲三。論三性則有詮旨三性義。又
006_0826_a_08L有熟敎中義。若約以酥分三論三性。
006_0826_a_09L1)則 [281] 當熟敎宗。若約分虛空爲三而
006_0826_a_10L論三性。第下之一第三六張 則當同敎
006_0826_a_11L一乘也。就*弟二義中。以金分於三。
006_0826_a_12L處處別者。是三性。隨其處別。金像
006_0826_a_13L亦別者。是三無性。此則有重故。是
006_0826_a_14L詮旨三性也。若約金體。則三處之金。
006_0826_a_15L唯一種者。是三無性也。三處金像。
006_0826_a_16L是一金所成。是三性也。此義當熟敎
006_0826_a_17L也。就*弟三義中。分酥爲三者。是三
006_0826_a_18L性。三器之酥。體德齊一者。三無性也。
006_0826_a_19L若約理實。則三性者。初敎之中。隨
006_0826_a_20L分而論。熟敎之初。究竟而論。熟敎
006_0826_a_21L之終。不用也。同敎一乘中。欲引三
006_0826_a_22L乘習三性之人。依其所習三性之
006_0826_a_23L軌。且分大空以爲三畫故。擧一全
006_0826_a_24L收。不可分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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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26_b_01L진수기『진기』에 이른다. ‘변계는 모습이 없고 의타는 생겨남이 없으며, 내지 세 법 이외에 다시 증분과 교분이 없다’란, 일승의 증분과 교분을 바로 변별하는 것이 가장 어렵기 때문에 저 숙교에서 논하는 세 가지 자성에 기대어서 이 뜻을 보인 것이다. 첫째, 변계는 모습이 없음에 나아가면 이해의 문(解門)과 수행의 문(行門)이 있다. 이해의 문이란 변계의 정유情有를 여의고 의타의 사유似有 등에 들어가는 것이다. 수행의 문이란 정유情有가 곧 진실의 자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강장 스님이 이르기를, “연緣에 별도의 연緣이 없고 체體가 곧 연緣이다. 그러므로 차별 있는 연기가 곧 매우 깊은 국토의 바다이다.”157)라고 한 것이다.
대기『대기』에 이른다. 세 번째 문답 가운데 질문의 뜻은 앞의 “성자가 변계를 따른다.”라는 말로 인하여 『섭대승론』을 인용하여 힐난한 것이다. 답 가운데 처음부터 ‘다른 의미는 이와 같다’까지는, 말에 나타난 질문을 바로 답한 것이다. ‘만약 실제를 기준으로 설하면’ 아래는 뜻에 갖추어진 질문을 겸하여 답한 것이다. ‘허공의 꽃(空花)을 말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깨끗한 눈의 사람은 허공의 꽃을 보지 않지만 그 병든 눈을 따라서 그 허공의 꽃을 말하는 것처럼, 성자 또한 그러하여 이미 변계가 공함을 통달하였으나 변계의 사람을 따라서 세 가지 자성을 세우는 것이다. 혹은 이 허공 꽃의 비유가 다섯 가르침에 통한다고 한다. 말하자면 소승에서는 인공人空의 허공 꽃을 설하고, 내지 돈교에서는 한 생각도 나지 않음의 허공 꽃을 설하고, 일승에서는 움직이지 않음의 허공 꽃을 설하니 변계가 곧 보현의 머무름 없는 별교의 구경법인 것이다.
법융기『법기』에 이른다. ‘세 가지 자성은 모두 범부의 경계이다’라는 것은 의타와 원성은 범부의 경계가 아니나, 그러나 “이것이 변계이며, 이것이 의타이고 원성이다.”라고 설하여 보여주기 때문에 범부가 성품 없음에 들어가는 까닭이다.
‘이해의 문(解門)을 기준으로 한 까닭에 세 가지 자성 없음을 따로 세운 것’에서, -
006_0826_b_01L眞記云。遍計無相。依他無生。乃至三
006_0826_b_02L法以外。更無訂敎者。直辨一乘訂敎
006_0826_b_03L最難故。寄彼熟敎所論三性。示此義
006_0826_b_04L也。就一遍計無相中。有解門行門也。
006_0826_b_05L解門者。離遍計情有。入依他似有等
006_0826_b_06L也。行門者。情有即是眞位也。故康
006_0826_b_07L藏云。緣無別緣。以體盡 [198] 緣。是故差別
006_0826_b_08L緣起即是甚深土海也。
006_0826_b_09L大記云。 *弟三問答中。問意則因前
006_0826_b_10L聖者隨遍計之言。引論而難也。答
006_0826_b_11L中從初至別義如是者。正答言現之
006_0826_b_12L問。若約實說下。兼答意具之問也。言
006_0826_b_13L說空花者。如淨眼人不見空花。隨
006_0826_b_14L其病眼。說其空花。第下之一第三七張
006_0826_b_15L聖者亦尒。已達遍計之空。隨遍計人。
006_0826_b_16L建立三性也。一云。此空花喩。通於五
006_0826_b_17L敎。謂小乘中說人空之空花。乃至
006_0826_b_18L頓敎中說一念不生之空花。一乘之
006_0826_b_19L中不動空花。遍計即是普賢無住別
006_0826_b_20L敎究竟法也。
006_0826_b_21L法記云。三種自性。皆是凡夫境界者。
006_0826_b_22L依他圓成。非凡夫境。然爲說示此
006_0826_b_23L是遍計此是依圓故。凡夫得入無性
006_0826_b_24L故也。約解門故。別立三無性者。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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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26_c_01L문 이해의 문 가운데 세 가지 자성 없음은 무엇인가?답 이무理無가 사유似有에 미치지 못하고, 무성無性이 수연隨緣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숙교 중에서는 삼계가 오직 무명이 지은 바이고, 또는 진실과 허망이 화합하여 지은 바라고 하고, 또는 오직 하나의 진심이 지은 바라고 한다. 이 세 거듭의 지은 바를 버려서 없앰의 이치를 나타내기 때문에 변계의 이무理無가 진실과 허망의 사유似有에 미치지 못하고 이 사유의 무성이 진여의 수연에 미치지 못하는 까닭이다.158)
‘수행의 문(行門)을 기준으로 한 까닭에 세 가지 자성 이외에 세 가지 자성 없음을 세우지 않은 것’에서,문 수행의 문 중에 만약 따로 세 가지 자성 없음을 세우지 않는다면 무엇을 기준으로 하여 세 가지 자성 없음을 삼는가?답 다만 없음을 말미암기 때문에 세 가지 자성 없음이라고 할 뿐이다. 만약 있음이라면 어떻게 자성 없음이겠는가?문 만약 그렇다면 무슨 까닭에 (『수현기』에서) 여섯 째 지地를 주석하여 이르기를, “실제를 버려서 경계가 없어질 때 곧 일부분의 모습 없음의 성품을 얻는다. 모습 없음이 나타나기 때문에 오직 식識이어서 영상과 경계가 함께 곧 생겨나지 않음을 성품 없음의 성품이라고 이름한다. 이것이 수행의 문의 유식관법이다.”159)라고 하였는가?답 다만 버림을 말미암기 때문에 비로소 없음을 아는 것뿐이다.
도신장
『도신장』에 이른다. 일승 중에서 만약 의타가 아니면 변계가 없다라면 변계는 결과이고 의타는 원인이 된다. 만약 변계가 아니면 의타가 없다라면, 의타는 결과이고 변계는 원인이 된다. 이러한 뜻이 곧 연기일 뿐이다.문 변계가 연기가 된다면 그루터기 중에 진짜 귀신(實鬼)이 있는 것인가?답 그루터기 중에 비슷한 귀신과 진짜 귀신으로 삼는 뜻이 있음을 말미암기 때문에 계탁하여 귀신으로 삼는 것이다. 만약 그루터기에 진짜 귀신으로 삼는 뜻이 없다면 마땅히 그루터기 중에서 계탁하여 진짜 귀신으로 삼음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운운. -
006_0826_c_01L解門中三無性云何。答。理無不及似
006_0826_c_02L有。無性不及隨緣。謂熟敎中三界
006_0826_c_03L唯是無明所作。又云眞妄和合所作。
006_0826_c_04L又云唯一眞心所作。遣此三重所作。
006_0826_c_05L以現滅理故。遍計之理無。不及眞妄
006_0826_c_06L之似有。此似有之無性。不及眞如之
006_0826_c_07L隨緣故也。約行門故。三性以外。不
006_0826_c_08L立三無性者。問。行門中。若不別立三
006_0826_c_09L無性者。約何爲三無性耶。答。只由無
006_0826_c_10L故得云三無性耳。若是有者。云何
006_0826_c_11L無性耶。問。若尒。何故六地䟽云。遣
006_0826_c_12L實境滅時。即得一分 [199] 無相性。無相現
006_0826_c_13L故。唯識想境並即不生。名得無性
006_0826_c_14L性。此是行門唯識觀耶。答。只由遣故
006_0826_c_15L方知無耳。
006_0826_c_16L道身章云。一乘中。若非依他無遍
006_0826_c_17L計。則遍計是果。依他爲因。若非
006_0826_c_18L遍計無依他。則依他是果。遍計爲
006_0826_c_19L因。如是之義。即是緣起耳。問。遍
006_0826_c_20L計爲緣起者。第下之一第三八張 杌
006_0826_c_21L中有實鬼耶。答。杌中由有爲似鬼
006_0826_c_22L及實鬼之義故。計爲鬼也。若杌中
006_0826_c_23L無爲實鬼之義。應無杌中計爲實
006_0826_c_24L「則」作「別」{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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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27_a_01L또 이른다. 세 가지 자성을 버려서 세 가지 자성 없음을 변별하는 것은 두 종宗이 같지 않다. 시교에서는 다만 변계를 버린다. 또 단지 집착하는 바(所執)로 변계를 삼고 집착하는 마음(能執)은 의타에 속하여 거두어진다.
만약 그렇다면 세 가지 자성을 버려서 세 가지 자성 없음을 나타내는 것은 무엇인가? 다만 변계 중의 세 가지 자성을 버릴 뿐이다. 이른바 푸른색 등을 계탁하여 실제라고 하는 것은 변계의 변계가 된다. 집착하는 마음을 계탁하여 실제로 삼는 것은 의타 중의 변계가 된다. 만약 원성을 계탁하여 실제로 삼으면 원성 중의 변계가 된다. 이 종은 이해의 문(解門)에 해당한다. 종교에서는 삼성 모두를 버리고 또한 계탁하는 마음을 합하여 변계라 한다. 이것은 수행의 문(行門)에 해당한다. 또 이른다. 세 가지 자성을 하나(一際)로 합하는 것은 세 가지 자성이 곧 세 가지 (자성) 없음인 것과, 셋이 아닌 수행의 문의 세 가지 자성을 기준으로 하여, 세 가지 자성의 원융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이것은 방편으로 나아간 것이니 일승의 다함없는 성품을 나타내기 위함일 뿐이다.
대기『대기』에 이른다. ‘오히려 두 자성 이외에 진실이 없으니’라는 것은, 모습 없는 지혜로써 변계로 집착하는 바 분별의 경계를 버릴 때에 능히 취하는 의타도 함께 곧 생겨나지 않는다. 모습이 나타남이 없기 때문에 이 외에 달리 원성의 실제가 없는 것이다. ‘모습 없는 평등한 지혜가 앞에 나타나’란 모습 없는 지혜가 나타남에 의타의 마음과 경계가 모두 없기 때문에 ‘모습 없는 평등한 지혜가 나타나’라는 것이다. ‘상대할 만한 법이 없고’란 의타가 생겨남이 없어서 진리가 나타날 때에 다시 원성의 진실이 없기 때문이다.
법융기『법기』에 이른다. ‘반드시 가르침을 세우는 이유를 알아야 한다’란, 앞에서 비록 증분과 교분의 중도와 세 가지 자성 외에 세 가지 자성 없음이 없는 도리를 나타내었으나, 만약 가르침을 세우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하면 이것이 숙교의 세 가지 자성과 세 가지 자성 없음의 중도인지, 이것이 일승의 중도인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
006_0827_a_01L鬼故。云云。 又云。遣三性辨三無性。
006_0827_a_02L兩宗不同。始敎但遣遍計。又但以
006_0827_a_03L所執爲遍計。能執之心。屬依他攝。
006_0827_a_04L若尒。遣三性現三無性者何。但遣
006_0827_a_05L遍計中三性耳。所謂計靑色等謂
006_0827_a_06L實爲遍計遍計。計能執心爲實
006_0827_a_07L爲依他中遍計。若計圓成爲實。爲
006_0827_a_08L圓成中遍計。此宗當解門。終敎三
006_0827_a_09L性皆遣亦能計心合爲遍計。此
006_0827_a_10L當行門。又云合三性一際者。約三
006_0827_a_11L性即三無非三之行門三性。示現
006_0827_a_12L三性圓融。此是方便所趣。爲現一
006_0827_a_13L乘無盡性耳。
006_0827_a_14L大記云。尙二性以外無有眞實等者。
006_0827_a_15L以無相智。遣遍計所執分別境時。能
006_0827_a_16L取依他。並即不生。無相現故。此外
006_0827_a_17L無別圓成實也。無相等智現前者。無
006_0827_a_18L相智現。依他心境皆無。故云無相等
006_0827_a_19L智現也。無法可對者。依他無生眞理
006_0827_a_20L現時。更無圓成眞實故也。
006_0827_a_21L法記云。須解立敎所由者。前雖已現
006_0827_a_22L訂敎中道及三性外無三無性之道
006_0827_a_23L理。若不解其立敎所由。則不得知此
006_0827_a_24L是熟敎三性三無性之中道此是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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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27_b_01L또 숙교 중에 비록 세 가지 자성을 버려서 세 가지 자성 없음을 나타낸다고 하나 다만 그 모습을 융섭하여 진실의 본성에 돌아가게 하는 것일 뿐이고, 일승이라야 비로소 체體가 융섭된 진실을 말하기 때문이다. 곧 이것은 앞에 있는 기둥(露柱)의 이름과 모습이 바로 해인(삼매)의 구경의 법체이기 때문에 “증분과 교분의 두 법이 항상 중도에 있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릇 들은 바에 대해서 삼가 말대로 뜻을 취하지 말고 반드시 이유를 알아야 한다.
도신장
『도신장』에 이른다. 일승의 연기법은 망정(情)으로 미칠 바가 아니다. 비록 망정으로 미칠 바가 아니나 멀리서 구할 것도 아니니, 망정을 돌이키면 곧 이것이다.문 망정을 돌이키는 방편은 무엇인가?답 방편은 한량없으나 그 요점은 보는 곳을 따라서 마음에 집착하지 않음이 그것이다. 들은 법을 따라서 문장대로 취하지 않고 곧 그 이유를 깨달으며 또 법의 실상을 깨닫는 것이다.
문 이 말은 무엇인가?답 무릇 성인의 말씀이 일어나는 것이 모두 근기와 연緣의 말미암은 바이다. 말하자면 가르침은 좋은 약이라 중생의 병을 다스릴 수 있다. 만약 생겨남으로 다스릴 수 있으면 생겨남으로 하고, 만약 생겨나지 않음으로 다스릴 수 있으면 생겨나지 않음으로 한다. 만약 법이 결정코 생겨남이나 생겨나지 않음이라면, 생겨남으로 옳음을 삼으면 생겨나지 않음은 곧 그르고, 생겨나지 않음으로 옳음을 삼으면 생겨남이 옳지 않다. 그 법은 생겨남과 생겨나지 않음에 있지 않기 때문에, 능히 생겨남과 생겨나지 않음으로써 병을 다스림에 걸림이 없다.160)
십구장
『십구장』에서 두 번째 구를 풀이하여 이른다.161) 두 번째, 문장을 따라서 뜻을 취함에 다섯 종류의 허물이 있다는 것은 운운. 만약 범부의 이름을 듣고 성자 등이 아니라고 한다면 곧 다섯 가지 허물이 있다. 첫째는 바르게 믿지 않음이고, 둘째는 용맹함에서 물러남이고, 셋째는 남을 속임이고, 넷째는 부처님을 비방함이고, 다섯째는 법을 가벼이 여김이다.162) -
006_0827_b_01L乘之中道故也。第下之一第三九張 又
006_0827_b_02L熟敎中。雖云遣三性現三無性。但融
006_0827_b_03L其相令歸眞性耳。一乘方云體融
006_0827_b_04L眞故。即此在前露柱名相正是海印
006_0827_b_05L究竟法體故。云訂敎兩法常在中道。
006_0827_b_06L是故凡於所聞。愼勿如言取義。須解
006_0827_b_07L所由也。
006_0827_b_08L道身章云。一乘緣起法。非情所及。
006_0827_b_09L雖非情及而不遠求。反情即是。
006_0827_b_10L問。反情方便云何。答。方便無量。而
006_0827_b_11L其要者。隨所見處。不1)着 [282] 心爲是。
006_0827_b_12L隨所聞法。不取如文。即能解其所
006_0827_b_13L由。又解法實相。問。此言何耶。答。
006_0827_b_14L凡聖言起。皆機緣之所由。謂敎是
006_0827_b_15L良藥。能治生病。若以生可治。則以
006_0827_b_16L生。若以不生可治。則以不生。若法
006_0827_b_17L定是生不生者。以生爲是。不生即
006_0827_b_18L非。不生爲是。生則非是。其法不在
006_0827_b_19L於生不生故。能以生不生。治病
006_0827_b_20L無障。
006_0827_b_21L十句章釋2)弟二句云。二隨文取義。
006_0827_b_22L有五種過者。云云。 若聞凡名非聖
006_0827_b_23L等者。即有五過。一不正信。二退
006_0827_b_24L勇猛。三詐他。四謗佛。五輕法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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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27_c_01L대기『대기』에 이른다. 네 번째 문답 가운데 망정을 기준으로 함과 이법을 기준으로 함에 통틀어 근거해서 질문한 까닭에 다름과 다르지 않음으로써 차례대로 답한 것이다. 혹은 앞에서는 세 가지 자성과 세 가지 자성 없음의 설을 기준으로 하여 증분과 교분의 중도를 나타내었고, 지금은 근본과 지말이 서로 돕는 등의 뜻을 기준으로 하여 중도를 나타내는 까닭에 질문하는 것이고, 답 가운데 다름과 다르지 않음의 뜻은 모두 이법의 문을 기준으로 한 것이라고 한다. 혹은 앞에서는 증분과 교분을 기준으로 하여 하나의 분별없는 뜻을 밝힌 까닭이고, 만약 그렇다면 증분과 교분은 어떻게 다른가, 이와 같이 묻는 것이라고 한다.
표훈 대덕의 뜻은 이 네 번째 문답 이하에 네 단계의 뜻이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문 위에서 말한 바’부터 ‘그러므로 다르지 않다’까지는 ‘표시함(標)’이다. ‘문 만약 이와 같다면’부터 ‘둘이 함께 서로 방해하지 않는다’까지는 ‘풀이함(釋)’이다. ‘말함과 말하지 않음’ 등은 ‘맺음(結)’이다. ‘그러므로 경에 이르기를’ 아래는 ‘인용하여 증명함(引證)’이다.
표시함 가운데 처음 표시함은 증분과 교분이 상대하여 다른 뜻을 밝히고, 뒤의 표시함은 근본과 지말이 상대하여 다르지 않음을 밝힌다. 두 번째, 풀이함 가운데 다섯이 있다. 첫째, ‘문 만약 이와 같다면’부터 ‘근본과 다르지 않다’까지는 근본과 지말의 상대를 풀이한다. 둘째, ‘근본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부터 ‘말하지 아니하되 말한다’까지는 고요함과 작용함이 걸림 없는 것으로 뜻과 설함의 상대를 풀이한다. 셋째, ‘말하지 아니하되 말하기 (때문에)’부터 ‘말하는 것이 곧 말하는 것이 아니다’까지는 위의 증분 또한 설할 수 있고 교분 또한 설할 수 없는 뜻을 풀이한 것이다. 넷째, ‘말하는 것이 곧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부터 ‘말하지 않는 것을 곧 얻을 수 없다’까지는 증분과 교분의 두 법의 성性이 중도에 있어서 한 맛인 뜻을 풀이한다. 다섯째, ‘둘을 함께 얻을 수 없기 (때문에)’는 갖가지가 장애하지 않고 한 맛임을 나타내기 때문에 설함과 설하지 않음을 갖춘다. 이상 다섯 단계의 풀이하는 구절은 오중해인에 준한 것이다.
세 번째, 맺음에서 ‘말함과 말하지 않음’의 뜻은 두 가지 큼(二大)163)을 설하는 것이다. -
006_0827_c_01L大記云。*弟四問答中。通據約情約
006_0827_c_02L理問故。以別不別。如次答也。一云。前
006_0827_c_03L約三性三無性之詮。現訂敎中道。今
006_0827_c_04L約本末相資等義。現中道故問也。答
006_0827_c_05L中別不別義。第下之一第四○張 並約
006_0827_c_06L理門也。一云。前約訂敎。明一無分別
006_0827_c_07L之義故。若爾。訂敎云何別耶。如是問
006_0827_c_08L也。訓德之意。則此*弟四問答以下。
006_0827_c_09L有四段義。謂從問如上所言至是故
006_0827_c_10L不別者。標也。問若如是至二俱不相
006_0827_c_11L防者。釋也。說與不說等者。結也。是
006_0827_c_12L故經云下。引訂也。標中初標。訂敎相
006_0827_c_13L對。以明別義。後標。本末相對。以明
006_0827_c_14L不別。二釋中有五。一問若如是至
006_0827_c_15L與本不異者。釋本末相對。二與本不
006_0827_c_16L異至不說而說者。是寂用無㝵。釋義
006_0827_c_17L說相對。三不說而說至說則非說者。
006_0827_c_18L釋上訂分亦是可說敎分亦是不可
006_0827_c_19L說義。四說即非說至不說即不可
006_0827_c_20L得者。釋訂敎兩法性在中道一味之
006_0827_c_21L義也。五二俱不可得者。現種種不㝵
006_0827_c_22L一味故。具說不說也。此上五段釋句。
006_0827_c_23L准於五重海印也。三結中。說與不說
006_0827_c_24L「着」作「著」{乙}。「弟」作「第」{乙}次同。
-
006_0828_a_01L‘생겨남과 생겨나지 않음’은 ‘서원이 잘 결정되어 있다(願善決定)’에서 여섯 가지 결정되어 있음의 자리164)이다. ‘움직임과 움직이지 않음’은 근본의 들어감과 아홉 가지 들어감 등이다.165)
대기『대기』에 이른다. 다섯 번째 문답에서 질문의 뜻은 앞의 문답 가운데 다만 연기가 자성이 없어서 근본과 다르지 않은 것만을 밝히고, 그 근본이 지말과 다르지 않은 것을 나타내지 아니한 까닭에 이 뜻을 드러내고자 이 질문을 일으킨 것이다. 답 가운데 먼저 그 뜻을 총괄하여 답한다. ‘만약……한다면’은 거듭 묻는 것이다. ‘깨달은 것이 말(言)에 있다’ 아래는 널리 답한 것이다. 이 널리 답한 것에서 앞의 다름과 다르지 않음의 뜻을 함께 나타낸다. 그 가운데 둘이 있다. 먼저 교분과 증분의 중도를 밝히고, 나중에 ‘또한 바르게 설한’ 아래는 바른 뜻(正義)과 바른 말(正說)의 둘이 없는 중도를 나타낸다. 이 바른 뜻과 바른 말은, 혹은 바른 뜻은 안으로 증득함이고 바른 말은 밖으로 교화함이라고 한다. 그러나 바른 뜻은 일승이고 바른 말은 삼승이다.
‘모든 법의 실상實相은 말에 있지 않으니’에서,문 말로 뜻을 삼으면 말이 중도인데 어째서 실상이 말에 있지 않다고 하는가?답 말과 뜻이 구경인 곳에는 말이 바로 뜻이니 곧 중도인 까닭에 말에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근기의 이익에 있으므로 이름에 진성이 없으며’라는 것은, ‘진성에 있지 않으니’를 근거로 하여 진성이 없음을 삼은 것이 아니다. 자성의 실체가 없음을 기준으로 한 까닭에 ‘진성이 없으며’라고 한 것이다. ‘(제법의 실상은) 이름의 성품을 여의었으므로 이름하되 이름이 없다’ 아래는 ‘모든 법의 실상實相은 말에 있지 않으니’의 뜻을 근거로 하여 나타낸 것이다. ‘이름에 진성이 없으므로’ 아래는 ‘말의 법은 진성眞性에 있지 않으니’의 뜻을 근거로 하여 나타낸 것이다.
법융기『법기』에 이른다. ‘중도는 말과 말 아닌 것에 통한다. 무슨 까닭인가? 모든 법의 실상實相은 말에 있지 않으니’ 등에서,문 중도와 실상이 어떻게 다른가?답 중도는 이미 말과 말 아닌 것에 통한다고 한 까닭에 증분과 교분에 통한다. -
006_0828_a_01L義。說二大。生與不生。願善決定六決
006_0828_a_02L定處。動與不動者。根本入九入等也。
006_0828_a_03L大記云。 1)弟五問答中。問意。則前問
006_0828_a_04L答中。但明緣起無性與本不異。不現
006_0828_a_05L其本與末不異故。欲現此義。起此問
006_0828_a_06L也。答中先摠答其義。若爲者。牒問。
006_0828_a_07L所訂在言下。廣答。此廣答中。并現
006_0828_a_08L前中別不別之義。於中有二。先明
006_0828_a_09L敎訂中道。後亦可正說下。現正義正
006_0828_a_10L說無二中道。第下之一第四一張 此正
006_0828_a_11L義正說者。一云。正義內訂。正說外化
006_0828_a_12L也。然正義則一乘。正說則三乘也。
006_0828_a_13L諸法實相不在言中者。問。以言爲義。
006_0828_a_14L則言是中道。何云實相不在言耶。答。
006_0828_a_15L言義究竟之處。言正是義。即是中道。
006_0828_a_16L故云不在言也。在機益故名無眞性
006_0828_a_17L者。非是牒上不在眞性爲無眞性。
006_0828_a_18L約無自性之實。故云無眞性也。離名
006_0828_a_19L性故名而無名下。牒現諸法實相
006_0828_a_20L不在言中之義。名無眞性故下。牒現
006_0828_a_21L言說之法不在眞性之義也。
006_0828_a_22L法記云。中道者。通言非言。何以故。
006_0828_a_23L諸法實相不在言中等者。問。中道與
006_0828_a_24L實相何別。答。中道則旣云通言非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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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28_b_01L실상은 이미 말에 있지 않은 까닭에 오직 증분일 뿐이다. 말하자면 뜻으로 가르침을 삼으면 가르침 밖에 뜻이 없다. 가르침에 곁이 없기 때문에 가르침이 중도이다. 뜻 또한 이와 같기 때문에 증분이 중도이다.
대기『대기』에 이른다. 여섯 번째 문답에서 ‘앞과 뒤의 두 뜻’이란 ‘또한 바르게 말한 법 중에는’을 기준으로 하여, 위는 앞의 뜻이고 아래는 뒤의 뜻이다. ‘근본과 지말이 상즉’ 등에서, 근본은 부처님이며 일승이고 지말은 중생이며 소승ㆍ삼승이다. 이들은 모두 법성의 집안의 진실한 덕용이기 때문이다. ‘이름(名)과 뜻(義)이 서로 객客이 됨으로써’는 일체 모든 법이 이름과 뜻을 벗어나지 않으니, 이름과 뜻의 자성에 고정되어 집착하는 사람을 위하여 그 서로 객이 되어 자성이 없는 도리를 나타낸 것이다. ‘자체의 이름 없는 참된 근원’은, 바로는 증분이며 겸으로는 연기이니 머무름 없는 별교이다.
문 참된 근원은 곧 근본과 지말이 서로 도와서 나타나는 바이기 때문에 깊다면, 서로 돕는 근본은 비록 증분이라 할지라도 오히려 얕은가?답 우선 삼승을 따라서 이 말을 할 뿐이고, 만약 실제를 기준으로 하면 한가지로 한 자리이다.이 중도로써 중생을 교화하는 것은 구경은 바로 일승이기 때문에 “교화함과 교화됨의 핵심(宗要)이 여기에 있다.”라고 한 것이다.
법융기『법기』에 이른다. ‘근본과 지말이 상즉하고’는 (다음과 같다.) 숙교에서는 근본에 의거하여 일어난 지말을 없애 근본으로 되돌이켜야 비로소 한마음을 드러낸다. 그것에 기대어서 일승의 증분과 교분의 두 법의 성이 중도에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이름(名)과 뜻(義)이 서로 객客이 됨’은 (다음과 같다.) 초교에서는 이름과 뜻이 서로 객이 됨으로써 이름과 뜻의 무아의 도리를 나타낸다. 그것에 기대어서 일승의 증분과 교분의 두 법의 자성이 없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
006_0828_b_01L故。通於訂敎。實相則旣不在言故。
006_0828_b_02L唯是訂也。謂以義爲敎。敎外無義。
006_0828_b_03L敎無側故。敎是中道。義亦如是故。
006_0828_b_04L是訂中道也。
006_0828_b_05L大記云。 *弟六問答中。前後兩義者。
006_0828_b_06L約亦可正說法中以上爲前義。以下
006_0828_b_07L爲後義也。本末相即等者。本則佛也
006_0828_b_08L一乘也。末則衆生也小乘三乘也。此
006_0828_b_09L等摠是法性家內眞實德用故也。名
006_0828_b_10L義互爲客者。一切諸法。不出名義也。
006_0828_b_11L爲定執名義自性之人。現其互相爲
006_0828_b_12L客無有自性之道理也。自體無名
006_0828_b_13L眞源者。第下之一第四二張 正是訂分。
006_0828_b_14L兼是緣起。無住別敎也。問。眞源則本
006_0828_b_15L末相資之所現故深也。相資之本。雖
006_0828_b_16L云是訂而猶淺耶。答。且順三乘作
006_0828_b_17L是說耳。若約實則同是一處也。以此
006_0828_b_18L中道。化衆生者。究竟正是一乘。故云
006_0828_b_19L能化所化宗要在此也。
006_0828_b_20L法記云。本末相即者。熟敎中。泯依本。
006_0828_b_21L所起之末。還歸於本。方現一心。寄彼
006_0828_b_22L以現一乘訂敎二法性在中道也。名
006_0828_b_23L義互爲客者。初敎中。以名義互2)爲 [283] 客。
006_0828_b_24L現名及義無我道理。寄彼以現一乘
-
006_0828_c_01L‘드러나는 도리는 다르지 않으나 설명하는 방편이 다르다’라는 것은, 초교와 숙교가 세우는 바 뜻은 다르나 그것에 기대어서 나타나는 바 무아와 중도의 뜻은 일승의 증분과 교분의 둘이 없는 뜻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대기)166)일곱 번째 문답에서 질문의 뜻은 곧 차별을 없애서 중도에 돌아가는 것은 종교 가운데 이 뜻을 논할 수 있으나, 그러나 맨 끝을 기준으로 한 까닭에 ‘이 뜻은 돈교頓敎의 근본(宗)에 해당하는데’라고 한 것이다. 대답의 뜻은 곧 유마는 문수보살의 말을 떨쳐 버리고 오로지 적막한 가운데에서 침묵하나, 여덟 번 모임(八會)167)의 부처님의 침묵은 말을 움직이지 않는 침묵이기 때문에 다르다. 말하자면 그 말함과 말하지 않음, 이름과 뜻, 근본과 지말을 없애서 중도에 돌아가게 하는 것은 또한 삼승의 설에 따르는 것이다. 만약 일승의 실제의 뜻을 기준으로 하면 이름과 뜻, 근본과 지말을 움직이지 않음이 곧 법성의 집 안의 진실한 덕이기 때문에 돈교의 근본(宗)에 해당하지 않는다.
법융기『법기』에 이른다. ‘우선 분별을 막기 위하여 삼승의 설에 따른 것이니’등은 바로 삼승의 사람이 그 익숙한 바를 버리고 일승에 들어가게 하면 믿어서 받아들이기 어려울까 염려한 까닭에 방편으로 그 집착에 기대어 따라서 분별을 막는 것이다. 어떤 이는 이른다. 비록 아래의 사교四敎가 모두 진실한 덕이지만 만약 소승과 초교 등이 곧 일승이라고 말하면 그 익힌 바를 드러내어 분별을 더하므로 저 삼승의 차별하는 병이 다하는 돈교의 뜻에 기대어 설하였기 때문에, “우선 분별을 막기 위하여 삼승의 설에 따른 것이니, 대개 지혜로운 이의 수승하고 오묘한 능력이다.”라고 한 것이다.3. 귀가歸家‘말씀대로 수행하여’부터 ‘이름하여 집(家)이라고 한다’까지168)
대기『대기』에 이른다. -
006_0828_c_01L訂敎二法無自性義也。所現道理不
006_0828_c_02L異能詮方便別者。初敎熟敎所立義
006_0828_c_03L別。而寄彼所現無我及中道之義。以
006_0828_c_04L現一乘訂敎無二之義故也。
006_0828_c_05L*弟七問答中。問意。則泯差別歸中道。
006_0828_c_06L終敎之中。得論此義。然約最極。故
006_0828_c_07L云此義當頓敎宗也。答意。則維摩拂
006_0828_c_08L文殊之言。默於一寂。八會佛默。不動
006_0828_c_09L言說之默故。別也。謂泯其說與不說
006_0828_c_10L名義本末。令歸中道者。且順三乘之
006_0828_c_11L說。若約一乘實意。則不動名義本末。
006_0828_c_12L即是法性家內眞實德故。不當頓敎
006_0828_c_13L宗也。
006_0828_c_14L法記云。且護分別故順三乘說等者。
006_0828_c_15L直令三乘之人第下之一第四三張 捨
006_0828_c_16L其所習入於一乘。恐難信受。故以
006_0828_c_17L方便。寄順其執。護分別也。一云。雖下
006_0828_c_18L四敎摠是實德。若言小乘及初敎等
006_0828_c_19L即是一乘。則稱其所習增分別故。寄
006_0828_c_20L彼三乘差別病盡頓敎義說。故云且
006_0828_c_21L護分別故順三乘說盖是智者勝
006_0828_c_22L妙能也。
006_0828_c_23L如說修行 至名曰爲家。大記云。如說
006_0828_c_24L「弟」作「第」{乙}次同。「爲」作「憑」{乙}。
-
006_0829_a_01L‘말씀대로 수행하여 성자의 뜻을 얻음’이란, 수행은 깨달음에 나아가야 비로소 옳으니 모든 부처님께서 미혹한 무리가 필경에 마침내 법성의 집에 이르게 하려는 까닭이다. (이것이) 말로 된 가르침을 시설하는 큰 뜻이다. ‘법성의 참된 공空’은 구경을 기준으로 하면 증분의 법성의 집이다. 그러나 이 가운데의 뜻은 증분과 교분을 나누지 않고 총괄하여 수행자의 수행방편을 밝히기 때문에 증분과 교분을 통틀은 것이다. ‘법계다라니’는 증분이고 ‘인다라니의 집’ 등은 교분이니 머무름 없는 별교이다.
법융기『융기』에 이른다. ‘집(宅)’은 증분이고 ‘집(舍)’은 연기분이다. ‘법계다라니의 집’은 이법이고 ‘인다라니와 미세’ 등은 현상(事)이다. 말하자면 한 법을 기준으로 하여 법계를 온전히 거두어 곁이 없고 남음이 없는 것은 법계다라니이다. 하나하나의 법법마다 거듭거듭 서로 거두어 끝이 없고 끝이 없는 것은 인다라니이다. 하나의 법에 일체 모든 법이 가지런히 함께 나타나는 것은 미세(다라니)이다. ‘성자가 의거하여 머무르는 곳이므로 이름하여 ‘집(家)’이라고 한다’라는 것은 십현문이다.문 이 십현문은 교분이 되는가, 또한 증분인가?답 만약 자신의 깨달음을 기준으로 하면 증분이고 남을 위해 시설한 것이라면 교분이다.
『법계도기총수록』 하권 1 -
006_0829_a_01L修行得聖者意者。修行趣訂方得。諸
006_0829_a_02L佛欲令群迷畢竟終至法性家故。施
006_0829_a_03L設言敎之大意也。法性眞空者。約究
006_0829_a_04L竟。則訂分法性家也。然此中意。不分
006_0829_a_05L訂敎。 捴明行者修行方便故。通訂
006_0829_a_06L敎也。法界陁羅尼者。訂分。因陁羅
006_0829_a_07L尼家等者。敎分。無住別敎也。
006_0829_a_08L融記云。宅者訂分。舍者緣記分也。
006_0829_a_09L法界陁羅尼家者理也。因陁羅尼及
006_0829_a_10L微細等者事也。謂約一法。全攝法界。
006_0829_a_11L無側無遺者。法界陁羅尼也。一一法
006_0829_a_12L法。重重相攝。無盡無盡者。因陁羅尼
006_0829_a_13L也。於一法中。一切諸法。齊頭並現者
006_0829_a_14L微細也。聖者所依住故名曰爲家
006_0829_a_15L者。十玄門也。問。此十玄門。爲是敎分。
006_0829_a_16L亦訂分耶。答。若約自訂則訂分。爲
006_0829_a_17L他施設則敎分也。第下之一第四四張。
006_0829_a_18L法界圖記叢髓錄卷下之一。
- 1)이상의 「법성게」 분과를 도시하면 다음과 같다.釋文意科門約自利行現示證分顯緣起分指緣起體約陀羅尼理用 以辨攝法分齊卽事法明攝法分齊約世時示攝法分齊約位以彰攝法分齊總論上意利他行辨修行者方便及得利益明修行方便辨得利益法性偈①②③④⑤⑥⑦⑧⑨⑩⑪⑫⑬⑭⑮⑯⑰⑱⑲⑳㉑㉒㉓㉔㉕㉖㉗㉘㉙㉚
- 2)다음의 ‘연기란(緣起者)’부터 ‘일승을 목표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一乘所目故)’까지는 지엄의 『공목장』(T45, 563c9~29)을 인용한 것이다.
- 3)이 『십지경론』의 인용문은 지엄이 『공목장』(T45, 563c12~22)에서 세친의 『십지경론』(K15, 28c6~19; T26, 142b12~23)을 인용한 부분이다. 여기 인용된 『십지경론』 내에서 또 인용된 경은 『십지경론』이 소의로 한 『십지경』(K15, 28b18~c3; T26, 142b2~9)이다.
- 4)『십지경』(『십지경론』, K15, 28b18~19; T26, 142b2).
- 5)『십지경』(『십지경론』, K15, 28b19; T26, 142b3).
- 6)육입六入에서부터 유有에 이르는 것이다 : 십이연기 중 육입六入ㆍ촉觸ㆍ수受ㆍ애愛ㆍ취取ㆍ유有의 여섯 지支를 가리킨다.
- 7)‘내지乃至’로 생략된 부분은 “육입을 이루고 나서는 안과 밖이 상대하여 촉觸을 발생시킨다. 촉觸의 인연 때문에 수受를 발생시킨다. 깊이 수受를 좋아하는 까닭에 갈애渴愛를 발생시킨다. 갈애가 증장하는 까닭에 취取를 발생시킨다. 취가 증장하는 까닭에 다시 뒤의 유有를 일으킨다.(成六入已。 內外相對生觸。 觸因緣故生受。 深樂受故生渴愛。 渴愛增長故生取。 取增長故復起後有。)”이다. 『십지경론』(K15, 28b20~22; T26, 142b18~20).
- 8)『십지경』(『십지경론』, K15, 28b19~c2; T26, 142b3~8).
- 9)인연의 자상自相에 대해서 세 가지로 설하고 있는 이상의 인용문은 지엄이 『공목장』에서 인용한 세친의 『십지경론』 부분을 의상이 재인용한 것이다.(권하 1 각주 3)과 같음.) 그런데 그 내용에 있어서 글자나 구절에 약간의 차이가 보이기도 한다. 의상은 『십지경론』이나 『공목장』의 내용에 『십지경』 원문을 보충하여 인용함으로써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 10)지엄이 『공목장』에서 『십지경론』(K15, 68b2; T26, 169a17)을 인용한 부분이다. 이 구절은 『십지경』 중 제6현전지의 “삼계가 허망하니 단지 한마음이 지은 것이다.”라는 경문을 해석하는 부분이다. 『육십화엄』(K8, 178c24~25; T9, 558c9~10) 참조.
- 11)『공목장』에는 이 아래에 ‘緣起觀門。 有如是益。’이 있다.
- 12)위의 ‘연기란(緣起者)’부터 여기 ‘일승을 목표로 하는 바이기 때문이다(一乘所目故)’까지가 의상이 지엄의 『공목장』(T45, 563c9~29)을 인용한 부분이다. 하권 1 각주 2) 참조. 『공목장』에는 ‘일승을 목표로 하는 바이기 때문이다’가 ‘일승을 목표로 하는 바가 되기 때문이다(爲是所目故)’로 되어 있다.
- 13)이상을 열 가지 거듭으로 십이인연을 관하는 것(十重十二因緣觀)이라고 한다. 경론에서의 해당 위치는 다음과 같다. 『십지경론』(K15, 70b15~19; T26, 170c4~8), 『육십화엄』(K8, 179b17~b20; T9, 559a24~27). 이 가운데 열 번째 ‘있음과 다함을 따르는 관(隨順有盡觀)’은 『육십화엄』에는 ‘없음과 다함의 관(無所有觀)’으로 되어 있다.
- 14)이 인용문(“간략히~거두어진다.”)은 지엄의 『공목장』 「緣生章」(T45, 568b3~7)에서 「십지품」 중 제6지 현전지現前地의 보살이 십중十重으로 십이인연을 관하는 구절에 대해 설명한 부분을 의상이 인용한 것이다.
- 15)「瓔珞經』 : 『菩薩瓔珞本業經』의 줄임말이다. 현존본은 요진晀秦의 축불념竺佛念이 건원建元 12년에서 14년(376~378) 간에 번역한 것으로 2권본이다. 『화엄경』과 깊은 관련이 있으며, 『범망경』과 함께 동아시아불교의 대승계율에 있어서 중요 경전으로 여겨져 왔다.
- 16)열 번의 인연 : 『菩薩瓔珞本業經』 「賢聖學觀品」(K14, 381a21~b5; T24, 1015a22~28)에서 열 가지 관하는 마음이 관하는 법(十觀心所觀法) 중 여섯 번째 법의 연기에 통달하는 지혜(達有法緣起智)를 설하는 부분을 가리킨다. 『영락경』의 열 번의 인연관은, ① 아견我見, ② 심위心爲, ③ 무명無明, ④ 상연유相緣由, ⑤ 조성助成, ⑥ 삼업三業, ⑦ 삼세三世, ⑧ 삼고三苦, ⑨ 성공性空, ⑩ 박생縛生의 십이인연을 관하는 것이다.
- 17)이 구절은 지엄의 『공목장』(T45, 568b7~8)을 인용한 것이다.
- 18)세친의 『십지경론』(K15, 70b15~71c4; T26, 170c4~171b15)에서 『십지경』의 제6현전지 중 열 가지의 인연관因緣觀에 대하여 해석한 부분을 가리킨다.
- 19)아래에서 열 개의 동전을 세는 법(數十錢法)을 설하는 부분을 가리킨다. 『일승법계도』(H2, 6a22~7b7). 여기에서 의상은 만약 연기의 실상인 다라니법을 관觀하고자 한다면 동전 열 개를 세는 법을 깨달아야 한다고 설한다. 또한 이익 얻음을 밝히는 부분에서 다라니는 아래에서 동전 열 개를 세는 법 가운데 설하는 것과 같다고 밝히고 있다.(H2, 5b21~22)
- 20)『총수록』 『대기』(H6, 821c15; K45, 199a12)에서 ‘了手’를 ‘일을 마친다(事畢)’는 뜻으로 풀이하고 있다.
- 21)이와 같은 내용은 여러 경전에 보이며, 그 한 예는 다음과 같다. “부처님께서 음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의 본성이 곧 해탈이라고 설하셨다.(佛說婬怒癡性卽是解脫)” 『유마힐소설경』(K9, 992c21; T14, 548a17~18).
- 22)이 내용과 상응하는 구절은 여러 경전에서 찾을 수 있으며, 그중 몇 가지 예는 다음과 같다. 『육십화엄』(K8, 259b16; T9, 636a15), “일체의 법은 문자이다.(一切法文字)”, 『대반야바라밀다경』(K1, 28b18~29a21; T5, 17c17~18a29), “연으로부터 생겨난 모든 법이 단지 이름만 있을 뿐이다.(從緣所生諸法但有名)”
- 23)『육십화엄』(K8, 74c12; T9, 466a27~28).
- 24)세친, 『섭대승론석』(K16, 1157a13~b7; T31, 195b19~c6).
- 25)『해심밀경』 「一切法相品」(K10, 715c3~716c13; T16, 693a5~c14).
- 26)『해심밀경』 「無自性相品」(K10, 716c14~722b15; T16, 693c15~697c6).
- 27)두 자성 : 세 가지 자성 중에 변계소집성과 의타기성을 가리킨다. 『총수록』(H6, 827a14~17; K45, 205b14~16).
- 28)『육십화엄』 「십지품」(K8, 184c3~4; T9, 564c11~12), “일체 법의 성품과 일체 법의 모습은 부처님이 계시거나 부처님이 계시지 않거나 항상 머물러 다르지 않다.(一切法性。 一切法相。 有佛無佛。 常住不異。)” 『십지경』(K15, 85b17~18; T26, 180c12~13)에는 “이 일체법 중의 법성은 부처님이 계시거나 부처님이 계시지 않거나 법계에 항상 머무른다.(此一切法中法性。 有佛無佛。 法界常住。)”로 되어 있다.
- 29)『승만경』(K6, 1369b5~7; T12, 222c23~25). 자세한 내용은 상권 2 각주 136) 참조.
- 30)『공목장』(T45, 562b5~c1).
- 31)앞의 이타행 가운데 해석한 부분을 가리킨다.(H2, 3c18~4a4; H6, 811b9~20)
- 32)『총수록』(H6, 813b18). 이에 해당하는 『일승법계도』 원문은 H2, 3a3~b16; H6, 810b13~811a13.
- 33)『일승법계도』에서 진성을 12지연기를 통해 해석하는 것으로써 진성이 오직 중생을 기준으로 한 것임을 알 수 있다는 주장은 앞서 『진기』에서 소개하는 일설과 같은 내용인데, 『진기』(H6, 777b19~c4)에서는 이 설에 대해 실제를 기준으로 하면 진성은 곧 법성일 뿐이라고 한다.
- 34)『대기』(H6, 776a1~19)에서 사만의四滿義, 즉 행실만行實滿ㆍ증만證滿ㆍ법만法滿ㆍ인만人滿으로 「법성게」를 구분하는 설을 가리킨다. 『대기』는 이 설을 표훈이 상원上元 원년(674)에 황복사에서 설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 35)『일승법계도』(H2, 4b20~21; H6, 812b1~2).
- 36)하권 1 각주 3) 참조.
- 37)네 가지 온(四陰) : 오온五蘊 가운데 색온을 제외한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을 가리킨다.
- 38)다섯 결과(五果) : 십이연기 가운데 식識ㆍ명색名色ㆍ육입六入ㆍ촉觸ㆍ수受의 다섯을 가리킨다. 부파불교에서 십이연기를 이해하는 대표적인 이론인 삼세양중인과설三世兩重因果說에 의하면 무명과 행行은 과거세에 지은 현재세의 원인이고, 식識부터 수受는 현재세의 결과이며(과거-현재의 인과), 애愛와 취取와 유有는 현재세에 짓는 미래세의 원인이고, 생生과 노사老死는 미래세의 결과이다.(현재―미래의 인과) 세친, 『아비달마구사론』(K27, 521a16~b13; T29, 48a23~b11), 아래 『관사십이인연관』 참조.
- 39)원문의 ‘오종五種’은 뒤에 바로 이어지는 ‘오과지종五果之種’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과, 과果(能熏, 所引)와 종자種子(所熏, 能引)의 관계를 고려할 때 ‘오과五果’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된다.
- 40)삼성三性 : 선善ㆍ불선不善ㆍ무기無記의 세 성품을 가리킨다. 상권 1 각주 51), 196) 참조.
- 41)여섯 지(六支) : 십이연기 중 육입六入ㆍ촉觸ㆍ수受ㆍ애愛ㆍ취取ㆍ유有의 여섯 지支를 가리킨다.
- 42)『화엄경탐현기』(K47, 649c14~650c16; T35, 311c9~312c18). 『육십화엄』 「십지품」에서 십대원十大願 이후 이를 바탕으로 한 행行을 설하는 가운데 두 번째와 세 번째 행상인 대자大慈와 대비大悲의 행을 둘로 나누어 풀이하는 가운데 두 번째 부분이다. 이에 해당하는 『육십화엄』(K8, 166c21~167a11; T9, 546b13~28) 부분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모든 범부의 마음이 삿된 견해에 떨어져……끝내 부처님 길의 즐거움에 머물게 하리라 하고 곧 대자大慈의 지혜를 낸다.(而諸凡夫心。 墮邪見〈中略〉令住畢竟佛道之樂。 卽生大慈智慧。)”
- 43)이에 해당하는 『육십화엄』 「십지품」(K8, 167a6~7; T9, 546b22~23) 구절은 다음과 같다. “이와 같이 인연이 모든 고통의 무더기를 모아서 모든 고통과 번뇌를 받는다.(如是因緣。 集諸苦聚。 受諸苦惱。)”
- 44)이에 해당하는 『육십화엄』 「십지품」(K8, 167a7~11; T9, 546b23~28) 구절은 다음과 같다. “이 가운데 나가 없고 나의 것이 없으며……곧 대자大慈의 지혜를 낸다.(是中無我無我所。〈中略〉卽生大慈智慧。)”
- 45)앞의 세 지(三支) : 십이연기 가운데 무명ㆍ행行ㆍ식識을 가리킨다.
- 46)『화엄경탐현기』(K47, 649c18~650a28; T35, 311c12~312a27)에는 『십지경론』이 십이연기의 모습을 나타낸 첫째에서 앞의 세 지支(무명ㆍ행行ㆍ식識)를 합하여 한 부분으로 삼고, 나머지 아홉 지支와 ‘이와 같이’로 시작하는 둘째와 ‘이 가운데’로 시작하는 셋째를 한 부분으로 삼아서, 이 두 단으로 모든 고통을 구족함을 구분한다고 설하는 부분이 이어진다. 이처럼 아래에도 인용문 곳곳에 생략된 부분이 있다.
- 47)구분된 자리(分位) : 십이연기에 대한 아비달마의 네 가지 해석인 찰나刹那ㆍ원속遠續ㆍ연박連縛ㆍ분위分位 가운데 분위, 즉 구분된 자리 또는 두드러진 상태에 따른 해석을 의미한다. 분위연기란 12지가 삼세에 걸쳐 무간에 오온이 상속하지만 두드러진 상태(分位)에 근거하여 무명이나 생生ㆍ노사老死 등 각각의 지분의 명칭을 설정한다는 것이다. 유부에서는 이 중에서 분위연기설을 정설로 취하고 이를 바탕으로 십이연기를 삼세양중인과설三世兩重因果說로 해석하였다.
- 48)두 지(二支) : 십이연기 가운데 생生ㆍ노사老死를 가리킨다.
- 49)일곱 지(七支) : 십이연기 가운데 명색ㆍ육입六入ㆍ촉觸ㆍ수受ㆍ애愛ㆍ취取ㆍ유有를 가리킨다. 유부의 삼세양중인과설에 의하면 이 가운데 명색부터 수受까지는 현재세에 현행하는 결과이고 애愛와 취取와 유有는 미래세의 원인인 종자가 된다. 따라서 자상인 일곱 지支 안에는 현행하는 결과와 원인인 종자가 함께 있게 된다.
- 50)저 앞의 넷 : 자상의 일곱 지支 가운데 앞의 명색ㆍ육입六入ㆍ촉觸ㆍ수受를 가리킨다.
- 51)생生 등 : 미래세의 현행하는 결과인 동상, 즉 생生과 노사老死를 가리킨다.
- 52)뒤의 셋 : 자상의 일곱 지支 가운데 뒤의 애愛ㆍ취取ㆍ유有를 가리킨다.
- 53)『잡집론』 : ⓢ Mahāyānābhidharmasamuccayavyākhyā. 『大乘阿毘達磨雜集論』(이하 『잡집론』)을 가리킨다. 또는 『아비달마잡집론』, 『對法論』이라고도 한다. 무착이 『瑜伽師地論』 등에 근거하여 유가학파의 법상法相을 해설하는 『대승아비달마집론』에 대한 그의 제자 사자각師子覺의 주석을 안혜安慧가 편집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唐의 현장이 번역(646)하였으며 티베트역도 현존한다. 후대 법상종에서는 『유가사지론』의 교의를 잘 해석한 이른바 유가십지론瑜伽十支論의 하나로 일컬어진다. 16권 8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에 대한 주석서로는 규기의 『大乘阿毘達磨雜集論述記』, 신배信培의 『述記貫練編』이 현존한다.
- 54)『잡집론』 「本事分中三法品」(K16, 254a6~256c4; T31, 711b5~713a11)에서 연생緣生에 대해 밝히는 부분으로 생각된다. 여기에서는 12지연기를 원인일 때의 능인能引(무명ㆍ행ㆍ식)과 소인所引(명색ㆍ육입ㆍ촉ㆍ수), 그리고 결과일 때의 능생能生(애ㆍ취ㆍ유)과 소생所生(생ㆍ노사)으로 구분하고 이 가운데 식識이 능인에 속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 55)식識 등의 다섯 종자 : 식識ㆍ명색名色ㆍ육입六入ㆍ촉觸ㆍ수受의 종자를 가리킨다.
- 56)『성유식론成唯識論』(K17, 572b10; T31, 43c15).
- 57)하권 1 각주 43) 참조.
- 58)하권 1 각주 44) 참조.
- 59)『십이인연관』 : 『총수록』에서 관사觀師의 저작으로 인용하고 있는 이 문헌은 의천의 『신편제종교장총록』(T55, 1166c23)과 일본의 화엄종 승려 교넨(凝然, 1240~1321)의 『華嚴宗經論章疏目錄』(『大日本佛敎全書』 1卷)에서는 징관의 저작으로 전하고 있다. 여기 인용문 외에는 그동안 일실된 것으로 전해졌지만 20세기 초에 일본 가나자와문고에서 전문이 발견되었다. 여기 인용문은 전문의 처음부터로서 분량은 전체의 3분의 2 정도에 해당한다. 가나자와문고판에는 『십이인연관』 또는 『십이인연관문』이라는 제목은 기록되어 있지만 저자는 밝히고 있지 않다. 여기에 인용되어 있지 않은 후반부에는 십이인연을 관하는 구체적인 방법으로서 의상계 화엄의 독특한 관법으로 간주되는 인연관ㆍ연기관ㆍ성기관의 삼관三觀을 들고 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에 이 문헌의 저자가 징관이 아니라 혹 의상계 화엄과 관련된 인물이 아닌가 의심되기도 한다.
- 60)『팔십화엄』 「십지품」(K8, 652a10~11; T10, 194b9).
- 61)삼성三性 : 여러 가지를 가리킬 수 있지만 문맥상 선善ㆍ불선不善ㆍ무기無記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상권 1 각주 51) 참조.
- 62)아마라식阿摩羅識 : ⓢ amalavijñāna. 무구식無垢識, 청정식淸淨識으로 의역하며 제9식이라고도 한다. 진제계에 속하는 섭론종에서 주장하는 식識으로 중생의 본래 마음이 청정하여 미혹함이 없음을 가리킨다. 제8아뢰야식이 전의轉依하여 청정무구식인 아마라식이 된다고 설한다. 지론종과 천태종에서도 제9식설을 수용했지만 현장계의 법상종은 청정의 측면을 아뢰야식에 포함시켜서 별도의 청정식인 제9아마라식을 부정했다.
- 63)세 가지 세간(三種世間) : 지정각세간ㆍ중생세간ㆍ기세간을 가리킨다. 상권 1 각주 34) 참조.
- 64)지엄의 『수현기』(K47, 14a17~18; T35, 28b6~7)에서 『육십화엄』 「보살명란품」의 열 가지 매우 깊음을 설하는 가운데 첫 번째, 연기의 매우 깊음을 풀이하는 구절 중 일부분이다.
- 65)세 존재(三有) : ‘삼유三有’는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일 수 있지만 여기에서는 중생의 삶을 구분하여 차례대로 살펴보는 십이인연의 문맥상 생유生有(잉태하는 순간의 존재)ㆍ본유本有(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존재)ㆍ사유死有(죽는 순간의 존재)의 삼유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 66)『십지경론』(K15, 68b2; T26, 169a17). 하권 1 각주 10) 참조.
- 67)열 가지의 성기심(十種性起心) : 『육십화엄』 「보왕여래성기품」(K8, 244c10~247b7; T9, 622b12~625a13)에서 열 가지 비유를 통해 설해지는 여래의 마음으로 여래의 지혜와 동일시된다. 화엄교학에서는 이것을 열 가지 성기심으로 풀이하여 왔다. 지엄, 『수현기』(K47, 61a1; T35, 80c14). 특히 열 번째 비유인 미진경권유微塵經卷喩, 즉 티끌 하나에 삼천대천세계와 같은 경권이 들어 있는데 중생들이 이익을 얻지 못하나, 어느 지혜 있는 사람이 이를 꺼내어 중생들을 이롭게 하리라는 비유는 여래장사상과 여래성기사상에 있어서 중요한 경증이기도 하다.
- 68)하권 1 각주 16) 참조.
- 69)두 번째 관觀의 후반 : 열 가지 십이인연관에서 두 번째 한마음에 포섭되는 관(一心所攝觀)을 둘로 나눈 가운데 뒷부분을 가리킨다. 두 번째 관觀에 해당하는 경문은 다음과 같다. “삼계는 허망하여 다만 마음이 지은 것이다. 십이인연분도 모두 마음에 의지한다.……(三界虛妄但是心作。 十二緣分是皆依心。 〈後略〉)” 『육십화엄』(K8, 178c24~179a6; T9, 558c10~16). 이 가운데 ‘삼계는~’이 앞 부분이고 ‘십이인연분은~’이 뒷부분이다. 법장은 이에 대해 앞은 마음이 삼계를 짓는 것을 밝힘이니 모아 일어나는 문(集起門)을 기준으로 한 것이고, 뒤는 마음이 십이인연을 지니는 것을 밝힘이니 의거하여 지니는 문(依持門)을 기준으로 한 것이라고 구분하고 있다. 『화엄경탐현기』(K47, 682b26~27; T35, 346c27~28).
- 70)22위 : 상권 1 각주 145) 참조.
- 71)『청량소』(T35, 802b8~802c3).
- 72)『팔십화엄』에서 다음 구절의 뜻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열 가지의 거스름과 수순함으로 모든 연기를 관觀한다.(菩薩摩訶薩。 如是十種逆順。 觀諸緣起。)”(K8, 652b2; T10, 194b24~25)
- 73)십중십이인연관을 세 가지 관법으로 거듭 관하는 것은 세친의 『십지경론』에 처음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서 징관이 자신의 해석을 가한 것이다.
- 74)『대반열반경』에는 이와 유사한 구절이 두 군데 있다. (1) 「師子吼菩薩品」(K38, 961b2~9; T12, 524b1~8), “선남자야! 십이인연을 관하는 지혜에는 무릇 네 종류가 있다. 첫째는 하열, 둘째는 중간, 셋째는 뛰어남, 넷째는 가장 뛰어남이다. 하열한 지혜로 관하면 불성을 보지 못하니 보지 못하기 때문에 성문의 길을 얻는다. 중간의 지혜로 관하면 불성을 보지 못하니 보지 못하기 때문에 연각의 길을 얻는다. 뛰어난 지혜로 관하면 명료하게 깨닫지 못하니 명료하게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십주의 지위에 머무른다. 가장 뛰어난 지혜로 관하면 (불성을) 보고 명료하게 깨닫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길을 얻는다. 이러한 뜻 때문에 십이인연을 불성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善男子。 觀十二緣智。 凡有四種。 一者下。 二者中。 三者上。 四者上上。 下智觀者。 不見佛性。 以不見故。 得聲聞道。 中智觀者。 不見佛性。 以不見故。 得緣覺道。 上智觀者。 見不了了。 不了了故。 住十住地。 上上智觀者。 見了了故。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道。 以是義故。 十二因緣名爲佛性。)” (2) 「憍陳如品」(K38, 1082a23~b3; T12, 852a13~16), “선남자야! 이 모습(相)은 법계 구극의 지혜이고 제일의제이며 제일의공이다. 하열한 지혜로 관하기 때문에 성문의 보리를 얻고 중간쯤의 지혜로 관하기 때문에 연각의 보리를 얻으며 뛰어난 지혜로 관하기 때문에 위없는 보리를 얻는다.(善男子。 是相。 法界畢竟智。 第一義諦。 第一義空。 下智觀故。 得聲聞菩提。 中智觀故。 得緣覺菩提。 上智觀故。 得無上菩提。)”
- 75)앞에서 연기에 대한 세 관觀을 대비를 기준으로 해서 대비를 으뜸으로 하는 관(大悲爲首觀)ㆍ대비가 증상하는 관(大悲增上觀)ㆍ대비가 만족된 관(大悲滿足觀)으로 일컬은 것을 가리킨다.
- 76)연기에 대한 세 관觀을 지혜를 기준으로 해서 이승의 일체지ㆍ보살도의 모습에 대한 지혜ㆍ부처님의 일체종지一切種智로 일컬은 것을 가리킨다.
- 77)저본은 ‘탐현운探玄云’이 청량소 내의 인용문처럼 편집되어 있으나 이는 『청량소』와 별도로 『총수록』의 편자가 인용한 것이다. 高에도 각각 별도의 인용으로 구분되어 있다.
- 78)『화엄경탐현기』(K47, 680a26~687c16; T35, 344b11~352b22).
- 79)이 ‘운운’은 “자리에 의지한 행을 맺는다.(結依位行)”를 생략한 것이다.
- 80)『육십화엄』 「十地品」(K8, 178b25~c3; T9, 558b14~15)의 다음 구절을 가리킨다. “세간의 있는 바 몸 받아 (어떤) 곳에 태어남은 모두 나를 탐하고 집착하기 때문이다. 만약 나에 집착함을 여의면 (어떤) 곳에 태어남이 없을 것이다.(世間所有受身生處。 皆以貪著我故。 若離著我則無生處。)”
- 81)『육십화엄』 「十地品」(K8, 178c24~25; T9, 558c10).
- 82)상분相分과 견분見分 : 유식학파에서 인식작용을 그 기능에 따라 구분한 것이다. 상분의 ‘상相’은 ‘상상相狀’으로서 인식작용의 대상(所緣)인 영상을, 견분의 ‘견見’은 ‘견조見照’로서 인식작용의 주체(能緣)를 의미한다. 인식작용을 이렇게 둘로 나눈 것을 이분설이라고 하며 인도의 십대 유식논사 중 난타難陀(ⓢ Nanda)의 이분설이 대표적이다.
- 83)『십이인연론』 : 『고려대장경』이나 『대정신수대장경』 등에는 ‘정의보살淨意菩薩’ 지음으로 되어 있으나, 현존하는 범본과 티베트역에는 용수龍樹의 저작으로 되어 있다. 6세기 초 보리류지가 한역하였다. 12지연기에 대해서 게송으로 설하고 이를 주석한 것이다. 이역본으로 용맹보살勇猛菩薩의 『因緣心論頌因緣心論釋』이 있다.
- 84)능인能引ㆍ소인所引ㆍ능생能生ㆍ소생所生에 대해서는 하권 1 각주 54) 참조.
- 85)이해를 위해 인용문 중 생략된 부분을 『화엄경탐현기』(K47, 684c29~685a1; T35, 349b17~18)에서 보충한 것이다. “於中分別三際。 諸聖敎中。 略有三說。”
- 86)이 구문에 대해서 『화엄경탐현기』가 근거하고 있는 『성유식론』은 이 구절을 『잡집론』의 설로서 설명하고 있다. 『성유식론』(K17, 574a6~9; T31, 44c25~27), “그러나 『잡집론』에서 무명이 행을 바라봄에 인연이 있다고 설한 것은 무명에 의지할 때의 업의 습기를 설한 것이다. 무명이 함께하기 때문에 무명이라고 짐짓 설한 것이니 실제로는 행行의 종자이다.(而集論說。 無明望行。 有因緣者。 依無明時。 業習氣說。 無明俱故。 假說無明。 實是行種。)” 『잡집론』(K16, 254c5~6; T31, 711c13), “또 무명이 행을 바라봄에 전생의 습기 때문에 인연이 되는 것과 같다.(且如無明望行。 前生習氣故。 得爲因緣。)”
- 87)깊은 관(深觀) : 『십지경론』(K15, 67b8~71b22; T26, 168b21~171b12)에서 십중 십이인연관을 다시 관법으로 거듭 구분하는 가운데 한 관법이다. 이를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대비수순관에 4종이 있고 일체상지분별관에 9종이 있는 것은 표에서 생략하였다.)相諦差別觀成答相差別 成差別 答差別 相差別第一義諦差別世諦差別染染依止觀因觀攝過觀護過觀不厭厭觀深觀 非他作自因生 非自作緣生 非二作但隨順生 非無因作隨順有大悲隨順觀一切相智分別觀
- 88)뒤의 세 문(三門) : 10종의 십이인연관 가운데 제8ㆍ제9ㆍ제10의 삼관(八因緣觀。 九因緣生滅觀。 十隨順有盡觀。)을 가리킨다.
- 89)동류인同類因 : ⓢ sabhāgahetu. 유부 아비달마에 의하면 원인을 여섯 가지로 나눈 육인六因 가운데 하나로서 일체법 가운데 그것이 일으키는 결과(等流果)와 유사한 성질(同類)을 지니면서 시간상 무간無間으로 선행하는 원인을 가리킨다. 즉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 등에서 원인이다. 육인 가운데 변행인遍行因(ⓢ sarvatragahetu)은 그것의 결과(등류과)에 무간으로 선행하며 유사한 성질을 지닌다는 점에서 동류인과 비슷하지만 일체의 번뇌와 염오심에 두루 작용(遍行)하는 변행혹에만 한정된다는 점에서 다르다.
- 90)이숙인異熟因 : ⓢ vipākahetu. 육인 가운데 하나로서 일체법 가운데 그것이 일으키는 결과(異熟果)와 시간상 무간으로 선행하면서 결과와는 성질이 다른(異熟) 원인을 가리킨다. 즉 선인락과善因樂果, 악인고과惡因苦果에서 원인이다.
- 91)구유인俱有因 : ⓢ sahabhūhetu. 육인 가운데 하나로서 일체법 가운데 그것이 일으키는 결과(士用果)와 동시에 존재하면서 서로가 서로의 원인과 결과가 되거나 많은 법이 동시에 하나의 법의 원인이 되는 것을 가리킨다. 구유인 가운데 마음(心)과 마음작용(心所)의 동시적 상호 인과 관계에만 한정한 것을 상응인相應因(ⓢ saṃprayuktahetu)이라고 한다.
- 92)법장은 무명지 이전에 바르지 않은 생각이 허공에 의탁하여 일어나서 무명의 원인이 되며 따라서 최초의 원인인 바르지 않은 생각이 원인 없이 일어나는 것이라는 주장을 소승, 그중에서도 경량부의 설로서 소개하고 있음을 『十二門論宗致義記』(T42, 228b22~23)에서 알 수 있다. “넷째, 원인 없이 짓는다에 대해 혹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경부사經部師는 무명지 전에 허공에 의탁하여 일어나기 때문에 또한 원인이 없다(고 한다.)(四無因作。 或云。 經部師。 無明支前。 託空而起。 故亦無因。)” 이와 관련하여 세친의 『아비달마구사석론』(K27, 281c16~18; T29, 206b7~8)에서 다음 구절을 참조할 수 있다. “어떤 다른 사람(師)은 설한다. 다른 경에서 설하기를 무명은 바르지 않은 생각을 원인으로 삼고 바르지 않은 생각은 무명을 원인으로 삼는다.(有餘師說。 於餘經中說。 無明以不正思惟爲因。 不正思惟以無明爲因。)”
- 93)『반야등론』 : 용수龍樹의 『中頌』을 6세기경에 활약한 인도 중관학파의 논사 분별명分別明, 즉 청변淸辯(ⓢ Bhāvaviveka, 또는 Bhavya)이 주석한 『般若燈論釋』(15권)을 가리킨다. 여기에서는 『반야등론석』 「觀因果和合品」(K16, 490b4~495a17; T30, 111a18~114b18)의 내용을 가리킨다.
- 94)『중론』 : 용수龍樹의 『中頌』을 4세기경 인도의 중관학파 논사 청목靑目(ⓢ Piṅgalnetra)이 주석한 것이다. 혹은 『중송』 자체를 『중론』으로 부르기도 한다. 여기에서는 『중송』이 포함된 청목의 주석을 구마라집이 번역한 『중론』 「觀因緣品」(K16, 351c9~353b8; T30, 2b6~3c4)의 일부 구절을 가리킨다.
- 95)『대법론』 : 『잡집론』을 가리킨다. 하권 1 각주 53) 참조.
- 96)『잡집론』(K16, 256a15~17; T31, 712c10~14).
- 97)첫째와 둘째의 인용문(“因不生緣生故”, “緣不生自因生故”)의 출처를 법장은 그의 다른 저술에서 다음과 같이 『십지경론』으로 밝히고 있다. 『화엄일승교의분제장』(T45, 502b28~c1), “『십지경론』에 이르기를, ‘인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연에서 생겨나기 때문이다. 연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인에서 생겨나기 때문이다. (인과 연이) 함께함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아는 이가 없기 때문이고 짓는 때에 머무르지 않기 때문이다. 원인 없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존재(有)에 수순하기 때문이다.(地論云。 因不生。 緣生故。 緣不生。 自因生故。 不共生。 無知者故。 作時不住故。 不無因生。 隨順有故。)” 그러나 『십지경론』에 이와 정확히 일치하는 구절은 없고 다음 구절의 뜻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십지경론』(K15, 70a22~b7; T26, 170b19~26), “깊은 관(深觀)에 네 종류가 있다. 첫째는 존재의 분위를 남이 짓는 것이 아니니 자신의 인에서 생겨나기 때문이다. 둘째는 자신이 짓는 것이 아니니 연에서 생겨나기 때문이다.……셋째는 (인과 연) 둘이 짓는 것이 아니니 다만 생겨남에 수순하기 때문이고 아는 이가 없기 때문이고 짓는 때에 머무르지 않기 때문이다.……넷째는 원인 없이 짓는 것이 아니니 존재에 수순하기 때문이다.(深觀者有四種。 一者有分非他作。 自因生故。 二者非自作。 緣生故〈中略〉三者非二作但。 隨順生故。 無知者故。 作時不住故〈中略〉四者非無因作。 隨順有故。)”
- 98)『육십화엄』(K8, 200c3~5; T9, 580c27~29).
- 99)『육십화엄』 「십주품」(K8, 55c7~8; T9, 446a5).
- 100)『육십화엄』 「십지품」(K8, 179b15~16; T9, 559a22~23).
- 101)『수현기』(K47, 45c20~49a20; T35, 63c12~67b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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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인因의 여섯 가지 뜻에 대해서 『수현기』에는 바로 이어지는 생략된 부분에서 『섭대승론』을 재해석하여 다음과 같이 설한다. “무엇이 여섯 가지 뜻이 되는가? 첫째는 찰나찰나 멸함(念念滅)이니 이 멸함은 공하고 힘이 있어 바깥의 연을 기다리지 않는다(空有力不待外緣). 힘이 있어서 연을 기다리지 않는 까닭은 인의 체가 연의 일을 기다리지 않고서 스스로 옮겨 움직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함께 있음(俱有)이니 공하고 힘이 있어도 연을 기다린다(空有力待緣). 그 까닭은 바깥의 연을 얻음은 오직 체가 공하여 함께 힘의 작용을 이룸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셋째는 따라 좇아서 다스림의 끝에 다다름(隨逐至治際)이니 (체體가) 있고 힘이 없어서 연을 기다린다(有無力待緣). 알 수 있는 까닭은 남을 따르기에 없을 수 없고 연을 거스를 수 없기에 힘이 없기 때문이다. 넷째는 결정됨(決定)이니 (체體가) 있고 힘이 있어 연을 기다리지 않는다(有有力不待緣). 알 수 있는 까닭은 바깥의 연이 이르지 않아도 체성이 바뀌지 않고 스스로 이루기 때문이다. 다섯째, 인과 연을 관함(觀因緣)이니 공하고 힘이 없어 연을 기다린다(空無力待緣). 알 수 있는 까닭은 바깥의 연을 기다림은 오직 가까운 인이 있지 않아 힘이 없어도 결과를 생기게 함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자신의 결과를 이끌어 나타냄과 같음(如引顯自果)이니 (체體가) 있고 힘이 있어도 연을 기다린다(有有力待緣). 알 수 있는 까닭은 바깥의 연을 얻을 때 오직 자신의 인이 자신의 결과를 얻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출전은 아래) 참고로 『화엄일승교의분제장』과 『섭대승론』에 보이는 이 여섯 가지 인의 뜻에 대한 명목을 아울러 비교 도시하면 다음과 같다.
진제 역『섭대승론』 『수현기』 『화엄일승교의분제장』 현장 역『섭대승론』 種子六種 因六義 緣起因門六義 種子六種 ① 念念滅 ① 念念滅 空有力不待外緣 ① 刹那滅 空有力不待緣 ① 刹那滅 ② 俱有 ② 俱有 空有力待緣 ② 俱有 空有力待緣 ② 俱有 ③ 隨逐至治際 ③ 隨逐至治際 有無力待緣 ⑥ 恒隨轉 有無力待緣 ③ 恒隨轉 ④ 決定 ④ 決定 有有力不待緣 ④ 決定 有有力不待緣 ④ 決定 ⑤ 觀因緣 ⑤ 觀因緣 空無力待緣 ③ 待衆緣 空無力待緣 ⑤ 待衆緣 ⑥ 如引顯自果 ⑥ 如引顯自果 有有力待緣 ⑤ 引自果 有有力待緣 ⑥ 唯能引自果 K16, 1056b21~23;T31, 115c1~4 K47, 48a2~11;T35, 66a23~b4 T45, 501c28~502a23 K16,1288c17~19;T31, 135a23~26 -
103)십인十因 : 『수현기』나 현존하는 지엄의 다른 저술에서는 10인의 항목을 정확하게 명시하고 있지 않지만 지엄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 정영사 혜원의 『대승의장』이나 지엄과 법장을 계승한 징관의 『청량소초』에서는 10인의 항목을 『유가사지론』과 그 부분역인 『보살지지경』 등에 의거하여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유가사지론』(K15, 498c14~17; T30, 301b9~12)『청량소초』(T36, 442a16~19) ① 隨說因 ② 觀待因 ③ 牽引因 ④ 生起因 ⑤ 攝受因 ⑥ 引發因 ⑦ 定異因 ⑧ 同事因 ⑨ 相違因 ⑩ 不相違因 『보살지지경』(K14, 92c3~7; T30, 977a5~8)『대승의장』(T44, 540b19~21) ① 隨說因 ② 以有因 ③ 種殖因 ④ 攝因 ⑤ 生因 ⑥ 長因 ⑦ 自種因 ⑧ 共事因 ⑨ 相違因 ⑩ 不相違因 - 104)이십인二十因 : 지엄의 『공목장』 「보장엄동자의 처소에서 인과를 세우는 장(普莊嚴童子處立因果章)」(T45, 539b17~540b3)에서 삼승의 초교를 기준으로 하여 육인 중 능작인의 자성차별에 따라서 이십인으로 구별하고 있다.
- 105)『육십화엄』 「이세간품」(K8, 301c10; T9, 672c29~673a1)의 다음 게송을 뜻에 따라 취한 것으로 보인다. “연기법이 있지도 않고 또한 없지도 않다고 연설하여 진실한 뜻을 깊이 이해하니 그것에 집착하는 바가 없다.(演說緣起法。 非有亦非無。 深解眞實義。 於彼無所著。)”
- 106)『유마힐소설경』(K9, 992b14; T14, 547c20).
- 107)『대승기신론』(K17, 614b21~22; T32, 575c23~23).
- 108)『육십화엄』 「菩薩十無盡藏品」(K8, 85a16~18; T9, 476a9~10)의 다음 구절의 뜻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무엇을 무위법이라고 하는가? 이른바 허공, 열반, 택멸(數緣滅), 비택멸(非數緣滅), 십이연기 및 법계이다.(何等爲無爲法。 所謂。 虛空。 涅槃。 數緣滅。 非數緣滅。 十二緣起及法界。)”
- 109)저본의 『추혈기』는 『수현기』에서 인용한 것처럼 보이나 『총수록』의 편자가 인용한 것이다. 『高』에도 각각 별도의 인용으로 구분되어 있다.
- 110)『추혈기』 즉 『지통기』의 이본으로 추정되는 『화엄경문답』(T45, 606a14~23)에서 상응하는 구절과 차이 나는 곳이 있다.(『華嚴經問答』에는 ‘緣’ 다음에 ‘法’이 있고, 『華嚴經問答』에는 ‘諦’가 ‘事’로 되어 있고, 『華嚴經問答』에는 ‘初最麁愚’가 ‘移衆庶盡’으로 되어 있다.)
- 111)『총수록』(H6, 821c8). 이에 해당하는 『일승법계도』 원문은 H2, 3c1~9; H6, 811a 23~24.
- 112)맡김은 물음의 뜻을 일단 긍정하는 것으로 『일승법계도』에서 체를 알면 멀리서 구할 필요가 없다고 한 부분이다. 빼앗음은 힐난을 부정하고 어리석은 자들을 위해 많은 문이 필요하다고 설한 것을 가리킨다.
- 113)승열 바라문과 만족왕과 바수밀다 선지식은 『화엄경』 「입법계품」의 선지식 중에서 특히 탐ㆍ진ㆍ치와 관련된 법문으로 논소에서 자주 거론된다. 이와 관련하여 상권 1 각주 126) 참조.
- 114)『화엄경탐현기』(K47, 790c6~15; T35, 463a29~b10).
- 115)『諸法無行經』(K10, 1168a19~20; T15, 759c13~15), “탐욕이 열반이고 성냄과 어리석음 또한 이와 같다. 이와 같은 세 가지 일에 한량없는 부처님의 도가 있다.(貪欲是涅槃。 恚癡亦如是。 如此三事中。 有無量佛道。)”
- 116)『유마힐소설경』(K9, 995b23~24; T14, 550b6~7), “혹은 음탕한 여인으로 나타나 모든 호색한을 이끄니 먼저 욕망의 갈고리로써 끌어당기고는 나중에 부처님의 도道에 들어오게 한다.(或現作婬女。 引諸好色者。 先以欲鉤牽。 後令入佛道。)”
- 117)『유마힐소설경』(K9, 994c8~9; T14, 549b13).
- 118)법상法常(567~645) : 당대唐代의 승려로서 남양백수南陽白水(하남성) 출신이며 속성은 장張이다. 『속고승전』(T50, 540c14~541b23)에 의하면 담연曇延(516~588)의 제자로서 열반ㆍ화엄ㆍ유마ㆍ승만 등의 경과 『섭대승론』 등에 주석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의천의 『신편제종교장총록』(T55, 1176b25)은 『攝大乘論釋疏』 16권(혹은 8권)을 법상 또는 도증道證의 저술일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
- 119)『청량소초』(T36, 57a23~b20).
- 120)『불설무상의경』(K11, 474b5~c4; T16, 471c7~472a1)에서는 여기 인용된 경문 앞부분에서 여래법신의 네 가지 덕을 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으로 설하고 있다.
- 121)무명주지無明住地 : ⓢ avidyāvāsabhūmi. 일체 번뇌의 근본으로서 아라한ㆍ벽지불ㆍ대지보살도 끊지 못하고 오직 여래의 지혜로만 끊을 수 있는 것으로 설해진다. 『승만경』(K6, 1364a21~1366a18; T12, 219b5~220c7) 등에 의하면 번뇌는 주지번뇌住地煩惱와 이로부터 일어나는 기번뇌起煩惱의 두 종류가 있다. 견일처주지見一處住地ㆍ욕애주지欲愛住地ㆍ색애주지色愛住地ㆍ유애주지有愛住地의 네 종류인 주지번뇌는 두루 다양한 기번뇌를 일으키지만 이 주지번뇌 또한 무명주지를 근본으로 하며, 이를 합하여 다섯 가지 주지번뇌(五住地惑)라고도 한다. 아라한ㆍ벽지불ㆍ대지보살은 무명주지를 연緣으로 하여 의생신을 일으키며 앞의 네 주지번뇌는 끊지만 이 무명주지를 끊지 못하기 때문에 누진지漏盡智를 깨달아 알지 못해서 남음이 있는 해탈과 청정과 공덕을 얻는다고 한다.
- 122)세 종류의 의생신意生身 : 아라한ㆍ벽지불ㆍ대지보살을 가리킨다.
- 123)네 가지 취取 : ⓢ catvāry upādānāni. 욕취欲取(ⓢ kāmopādāna)ㆍ견취見取(ⓢ dṛṣṭyupādāna)ㆍ계금취戒禁取(ⓢ śīlavratopādāna)ㆍ아어취我語取(ⓢ ātmavādopādāna)를 가리킨다.
- 124)세 가지 유루의 업 : 요遼나라 도종道宗(재위 1055~1100) 때의 화엄학승 선연鮮演이 지은 『華嚴經談玄抉擇』(卍11, 950b15)에서는 이 구절의 세 가지 유루의 업을 풀이하여 결과에 있을 때에는 욕계ㆍ색계ㆍ무색계이며 원인에 있을 때에는 복福ㆍ복 아님ㆍ움직이지 않음으로 풀이한다. 한편 원元나라 때의 승려인 보서普瑞가 지은 『華嚴懸談會玄記』(卍12, 348a6~7)에서는 이를 선ㆍ악ㆍ움직이지 않음의 세 가지 업으로 풀이한다.
- 125)세 종류의 존재(有) : 선연의 『화엄경담현결택』(卍11, 950b15~16)과 보서의 『화엄현담회현기』(卍12, 348a7~8)에서 모두 욕계ㆍ색계ㆍ무색계의 존재로 풀이한다.
- 126)『佛說無上依經』(K11, 475a13~b19; T16, 472a24~b20).
- 127)각각 상즉하지 않음 등의 네 구 : 『일승법계도』(H2, 6a15~17; H6, 830al~3)에 보이는 상즉상입과 관련된 네 구절을 가리킨다. “이법(理)과 이법(理)의 상즉 또한 가능하고, 현상(事)과 현상(事)의 상즉 또한 가능하며, 이법(理)과 현상(事)의 상즉 또한 가능하며, 각각 상즉하지 않음 또한 가능하다.(理理相卽亦得。 事事相卽亦得。 理事相卽亦得。 各各不相卽亦得。)” 여기에서 앞의 세 구는 즉문을, 뒤의 한 구는 불상즉문 곧 중문을 나타낸다.
- 128)『총수록』(H6, 822c10). 이에 해당하는 『일승법계도』 원문은 H2, 3c11~4a4; H6, 811b9~20.
- 129)운화 존자雲華尊者 : 지엄 스님이 말년에 운화사雲華寺에 머물렀기 때문에 ‘운화 존자’라고도 부른다.(『唐大薦福寺故寺主翻經大德法藏和尙傳』, T50, 281b2 등)
- 130)『大方等大集經』(K7, 156c21~157a5; T13, 106c11~16).
- 131)소지장所知障 : ⓢ jñeyāvaraṇa. 두 종류의 장애(二障) 가운데 하나로서 지장智障ㆍ지애智礙라고도 한다. 알아야 할 바를 장애한다는 의미로서 알아야 할 대상에 대한 지혜를 장애하는 무지無知의 측면을 가리킨다. 두 종류의 장애 중 다른 하나인 번뇌장煩惱障(ⓢ kleśāvaraṇa)은 열반을 장애하는 번뇌인 장애로서 나에 대한 집착으로 말미암은 것이고, 소지장은 법공에 대한 무지로 인해 일어나는 것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 132)삼과백법三科百法 : 일체법을 구분하는 방법이다. ‘삼과’는 오온五蘊ㆍ십이처十二處ㆍ십팔계十八界로 구분하는 방법으로서 불교 전반에 걸쳐서 통용된다. ‘백법’은 유식법상종에서 일체법을 나누는 방법으로 이를 다시 다섯 가지로 나누어 ‘오위백법’이라고도 한다. 그 다섯 가지는 심왕心王ㆍ심소心所ㆍ색色ㆍ심불상응心不相應ㆍ무위無爲이다.
- 133)대원경지大圓鏡智 : ⓢ ādarśajñāna. 유식학파에서 설하는 부처님의 지혜로서 모든 법을 여실하게 비추는 큰 거울과 같은 지혜이다. 유식학파에 의하면 전의轉依에 의해 염오식이 네 종류의 청정한 지혜로 바뀌는데 그중 네 번째의 지혜로서 알라야식이 지혜로 변한 것이다.
- 134)뒤에서 종교終敎의 설로 밝힌 이 해인은 본각―근본무명―성공덕의 조합과 그 내용을 볼 때 『대승기신론』에 바탕한 것으로 보인다.
- 135)백 가지 장애 : 『육십화엄』 「보현보살행품」(K8, 230b10~231a3; T9, 607a12~b25. 『팔십화엄』은 「보현행품」)에 설해지는, 보살이 한 번 성내는 마음을 일으켰을 때 얻게 되는 장애이다.
- 136)『청량소』(T35, 621b16~c23).
- 137)『총수록』(H6, 823b18). 이에 해당하는 『일승법계도』 원문은 H2, 4a6~15; H6, 811b23~c8.
- 138)『육십화엄』 「입법계품」(K8, 420b4~5; T9, 783b8~9), “선남자야, 내가 거기에서 수명을 다하여 아래에 태어나 바른 깨달음을 이룰 때 너와 문수사리보살이 함께 나를 보게 될 것이다.(善男子。 我於彼中。 壽終下生。 成正覺時。 汝及文殊師利。 俱得見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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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이상의 다중삼생多重三生을 도시하면 다음과 같다.
번호 기준 見聞 解行 證入 1 報 과거 현재 미래 2 界 界內 出世(界內) 出出世 3 自分勝進 十信 이전 十信 十信滿心勝地 4 信解增長門 十信 三賢 十地 5 地證 地前 初地~七地 八地 이상 6 一乘三乘 四地 五, 六, 七地 第八地 7 五乘配門一乘義 八地 九地 第十地 8 知識 文殊 德雲이후 彌勒(當來見我)普賢(訂果海) - 140)『大宗地玄文論』 : 『大宗地玄文本論』이다. 마명馬鳴 지음, 진제眞諦 번역으로 전해지지만 위작僞作으로 의심되며 내용적으로는 도교의 영향 또한 보인다. 전체 20권으로 구성되어 있고 7세기 후반에 성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 141)『대종지현문본론』 「一種金剛道路大決擇分」(K37, 957b3~ 959c15; T32, 671a15~ 671c18).
- 142)51위五十一位 : 한 종류의 금강의 길에 다섯 종류가 있으며 그것이 각각 쉰한 가지의 차별을 지니고 있다고 설하고 있다. 차례를 뛰어넘음 없이 점차 나아가는 지위는 이 다섯 종류 가운데 첫 번째로서, 허가광명분虛假光明分이 40종, 진금강眞金綱이 10종, 대극자연다라니지大極自然陀羅尼地가 1종 등 쉰한 가지로 설명된다.(K37, 957b3~958a21; T32, 671a15~671c12)
- 143)맘대로 옮겨감에 향함이 없는 도인(橫轉無向道人) : 『대종지현문본론』에서는 『法界法輪無盡中藏修多羅』로부터 인용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러한 이름의 경은 현존하지 않으며 현존하는 경록에도 그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 144)이 게송에 대해서 『대종지현문본론』(K37, 959c2~8; T32, 672c7~12)에서는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지금 이 게송에서는 어떤 뜻을 밝히려고 하는가? 한 몸인 금강대력보륜산왕의 체體에서 차례로 점차 옮겨가니 모든 법이 똑같이 남음 없이 구경에 널리 두루하고 원만하여 다 끊어지고 여의지 아니함을 나타내 보이고자 하는 것이다. 이 다섯 가지 지위는 한 때에 옮겨가고 앞과 뒤로 옮겨가며, 다 바뀜이 있고 다 바뀌지 않으며, 또는 한 때에 옮겨가거나 또는 여러 때에 옮겨가며, 또는 한 곳에서 옮겨가거나 또는 여러 곳에서 옮겨가 구족하고 구족하여 자재하고 자재하니 장애되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今此偈中爲明何義。 爲欲現示。 一身金剛大力寶輪山王體中。 次第漸轉。 諸法等是無餘究竟周遍圓滿俱非絶離。 此五種位。 一時轉前後轉。 俱有轉俱非轉。 亦一時轉亦異時轉。 亦一處轉亦異處轉。 具足具足自在自在無所障礙故)”
- 145)『십구장기』 : 『십구장원통기』를 가리킨다. 『십구장원통기』는 지엄이 지은 요의要意 5권 첫 쪽의 ‘10구十句’에 대해 법융(또는 융불 등)이 주석한 『십구장』에 대하여 균여(927~973)가 다시 풀이한 것이다. 전체 2권이며 10구 하나하나에 먼저 『십구장』을 인용하고 이어서 균여가 해석을 가하는 구성으로 되어 있다. 상권 1 각주 148) 참조.
- 146)『십구장원통기』의 두 부분(K47, 100a27~28; 101a13~17)을 합쳐서 인용한 것으로 내용이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는다.
- 147)『총수록』(H6, 825a6). 이에 해당하는 『일승법계도』 원문은 H2, 4a18~5b9; H6, 811c11~813b4.
-
148)일곱 문답의 출전은 아래와 같다.
문답 『일승법계도』 1 H2, 4a18~24; H6, 811c11~812a6. 2 H2, 4b1~13; H6, 812a7~19. 3 H2, 4b14~c11; H6, 812a20~812b18. 4 H2, 4c12~16; H6, 812b19~24. 5 H2, 4c17~5a23; H6, 812a1~813a17. 6 H2, 5a24~b5; H6, 813a18~24. 7 H2, 5b5~9; H6, 813b1~4. - 149)누런 잎과 황금에 관한 비유는 『대반열반경』 「嬰兒行品」(K38, 903b14~17; T12, 729a3~6)의 다음 구절이 대표적이며 이후 여러 논서에 이용된다. “마치 저 어린아이가 큰 소리로 울 때 부모가 곧 버드나무의 누런 잎으로 그 아이에게 ‘울지마라 울지마라, 우리가 너에게 황금을 줄 것이다’라고 말하자 어린아이가 보고서는 진짜 황금이라는 생각을 내어 문득 그쳐 울지 않았지만 이 누런 잎이 실제로 황금이 아닌 것과 같다.(如彼嬰兒啼哭之時。 父母卽以楊樹黃葉而語之言莫啼莫啼。 我與汝金。 嬰兒見已。 生真金想。 便止不啼。 然此楊*葉實非金也)” * 다른 판본에는 ‘楊’이 ‘黃’으로 되어 있다.
- 150)이에 대해서는 상권 1 각주 178) 참조.
- 151)산왕山王 : 상권 1 각주 256) 참조.
- 152)이와 관련하여 법장은 『화엄경』 「입법계품」의 모든 선지식의 법문을 법계문과 반야문으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법계문은 보현보살로 대표되는데 들어가는 바(所入)를 나타내고 반야문은 문수보살을 상수로 하여 들어가는 주체(能入)를 드러내서 이 둘이 함께 ‘법계에 들어감(入法界)’을 보여준다고 한다.(K47, 770c14~18; T35, 441c24~28)
- 153)다섯 바다와 열 지혜(五海十智) : 『육십화엄』 「노사나불품」에서 보현보살이 일체여래정장삼매 속에서 다섯 바다를 관찰하고 열 지혜를 설한다. 지엄은 이에 대해 『화엄경』 정종분의 본분本分을 밝히는 구절이라고 중시하며 과분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오해십지五海十智’를 사용한다. 다섯 바다와 열 지혜에 대해서는 각각 상권 1 각주 168), 상권 2 각주 141) 참조.
- 154)사자분신삼매(奮迅定) : ⓢ siṃhavijṛmbhitasamādhi. 사자빈신삼매師子嚬伸三昧라고도 한다. 『화엄경』 「입법계품」의 근본법회(K8, 304b22~24; T9, 677a11~14)에서 부처님께서 입정하시는 삼매이다. 법장은 『화엄경탐현기』(K47, 772c26~773a6; T35, 444a21~28)에서 이 삼매에 대해 마치 사자가 기지개를 켜며 포효하면 그 위세가 드러나 다른 모든 짐승이 힘을 잃고 엎드리지만 사자새끼들은 더욱 용맹해지는 것처럼, 지금 부처님이 이 삼매로 대비법계의 몸을 떨치고 대비의 문을 열며 법계의 법문을 포효하면 이승은 숨어서 귀머거리와 장님이 되지만 보살들은 그 삼매와 다라니가 더욱 증장되기 때문에 비유로써 이 삼매의 이름을 붙였다고 설한다.
- 155)두 가지 뜻 : 『일승법계도』(H6, 812a9~10)에서 두 번째 물음에 대한 답에서 ‘망정(情)’과 ‘이법(理)’ 두 가지를 기준으로 답하는 것을 가리킨다.
- 156)이상의 내용은 세 가지 자성(三性)과 세 가지 자성 없음(三無性)을 초교와 종교(숙교)와 동교일승에서 자주 쓰는 비유를 통해 설명한 것이다. 첫째, 나무숲의 비유는 초교 즉 법상유식에 해당한다. 둘째, 금의 비유를 통한 이해는 초교와 종교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금의 비유는 금으로 여러 가지 장신구 등을 만드는 경우로서 『대반열반경』 등에 보이며, 『대승기신론』에 보이는 물과 파도의 비유와도 비슷하다. 셋째, 연유의 비유는 종교에 대응하는 것으로 『대반열반경』 등에 보이며, 우유로부터 유즙(酪)ㆍ연유(酥)ㆍ제호醍醐 등이 생겨나는 것을 통한 비유이다. 마지막으로 동교일승에서 세 가지 자성 등을 허공에 비유한 것은 허공을 그어서 셋으로 나누어 셋으로 삼아도 허공에는 구분이 없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 157)『화엄경탐현기』(K47, 517b8~9; T35, 170b6~7).
- 158)이것은 법장의 『화엄일승교의분제장』(T45, 499a9~501c28)에서 설하는 ‘세 가지 자성의 같음과 다름의 뜻(三性同異義)’을 끌어와서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 본문의 이해를 위해 법장의 설명을 간략히 도시하면 아래와 같다.
- 159)『수현기』(K47, 46c11~13; T35, 64c15~17).
- 160)이와 거의 동일한 구절이 『화엄경문답』(T45, 60a14~25)에도 수록되어 있다.
- 161)이 구절이 『십구장』으로부터 직접 인용한 것인지, 균여의 『십구장원통기』(K47, 88a29~b1)로부터 재인용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 162)이에 대해 균여는 『석화엄교분기원통초』(K47, 241a19~25)에서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문 무슨 까닭에 범부의 이름을 듣고 부처님과 보살이 아니라는 것에 다섯 가지 허물이 있는가? 답 연기법 중에 범부와 성인이 다르지 않으니 대연기법을 믿지 않기 때문에 범부의 이름을 듣고 계탁하여 부처님과 보살이 아닌 것으로 삼기 때문에 ‘바르게 믿지 않음’이라고 한다. 연기법을 굳건히 믿기 때문에 능히 용맹정진하여 끝내 퇴전하지 않는데, 믿지 않기 때문에 ‘용맹함에서 물러남’이라고 한다. 스스로 연기법을 믿기 때문에 비로소 남을 위해 설하여 남이 미혹하지 않게 하는데, 대연기법을 믿지 않기 때문에 범부와 성인이 다르다고 계탁하여 남을 속여서 설하기 때문에 ‘남을 속임’이라고 한다. 부처님의 세계가 곧 범부의 세계이고 범부의 세계가 곧 부처님의 세계라 범부와 성인이 둘이 없는데, 범부와 성인을 다르다고 계탁하기 때문에 ‘부처님을 비방함’이라고 한다. 이와 같기 때문에 또한 ‘법을 가벼이 여김’인 것이다.(問。 何故聞凡名。 不是佛菩薩者。 有五過耶。 答緣起法中。 凡聖不異。 以不信大緣起法故。 聞凡名計爲非是佛菩薩故。 云不正信也。 以於緣起法。 決定信故。 能勇猛精進。 永不退轉。 爲不信故。 云退勇猛也。 以自信緣起法故。 方爲他說。 不令他迷。 以不信大緣起法。 計凡聖異。 誑他而說故。 云誑他也。 佛界卽凡界。 凡界卽佛界。 凡聖無二而計凡聖別故。 云謗佛也。 由如是故。 亦輕法也。)”
- 163)두 가지 큼(二大) : 뜻이 큼(義大)과 가르침이 큼(敎大)을 가리킨다. 상권 2 각주 80) 참조.
-
164)‘서원이 잘 결정되어 있다(願善決定)’는 『화엄경』 「십지품」에서 금강장보살이 삼매에서 일어나 바로 십지의 이름을 열거하기 전에 설하는 구절의 일부분이다. 세친은 『십지경론』에서 이 구절을 여섯 가지(六種)의 ‘잘 결정되어 있음(善決定)’으로 풀이한 후 이를 육상설로 회통시키고 있다. 여섯 가지 선결정을 『십지경론』의 해당 『십지경』 구절과 함께 도시하면 다음과 같다.
六善決定 『십지경론』 『십지경』 (願善決定) (諸佛子。 是諸菩薩。 願善決定。) ① 觀相善決定 無雜 ② 眞實善決定 不可見 ③ 勝善決定 廣大如法界 ④ 因善決定 成無常愛果因善決定 究竟如虛空 常果因善決定 盡未來際 ⑤ 大善決定 覆護一切衆生界 ⑥ 不怯弱善決定 佛子。 是諸菩薩乃能入過去諸佛智地。 乃能入未來諸佛智地。 乃能入現在諸佛智地。 출전 : K15, 6a11~c9; T26, 126b27~127a11 -
165)표훈이 시설한 이상의 4단의 내용을 『일승법계도』 원문과 함께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表訓四段義 『일승법계도』 標 初標 問。 如上所言訂分之法及緣起分法。 有何差別。 答。 別不別。 其義云何。 訂分之法。 約實相說。 唯訂所知。 緣起分法。 爲衆生說。 與緣相應。是故全別。 제4문답 後標 緣起之法。 從衆緣生。 無有自性。 與本不異。 是故不別。 釋 一 問。 若如是者。 以自所訂。 爲衆生。 與末不異。 尋常差別耶。 答。 亦得其義。 若爲所訂在言。 與末不異。 言說在訂。 與本不異。 제5문답중 전반부 二 與本不異故。 用而常寂。 說而不說。 與末不異故。 寂而常用。 不說而說。 三 不說而說故。 不說卽非不說。 說而不說故。 說卽非說。 四 說卽非說故。 說卽不可得。 不說卽非不說故。 不說卽不可得。✽ 『高』에는 ‘불가득不可得’이 ‘비불설非不說’로 되어 있다. 갑본과 이곳 『대기』에는 ‘불가득’으로 되어 있으며 번역에서는 ‘불가득’으로 바꾸었다. 五 二俱不可得(故。 二俱不相防) 結 說二大 以此義故。 說與不說。(等無差別。) 願善決定六決定處 生與不生。(等無差別。) 根本入九入 動與不動。(等無差別。) (一切差別相對法門。 准例如是。) 引訂 是故經云。 有爲無爲一切諸法。 有佛無佛。 性相常住。 無有變異。 是其義也。 - 166)저본과 『高』에는 『대기』로 명시하고 있지 않으나, 앞에서 『대기』가 『일승법계도』의 해당 구절을 일곱 문답으로 구분하고 여기서 일곱 번째 문답을 풀이하는 등의 문맥으로 볼 때 『대기』로부터의 인용으로 보인다.
- 167)『육십화엄』을 가리킨다.
- 168)『총수록』(H6, 828c23). 이에 해당하는 『일승법계도』 원문은 H2, 5b12~5b19; H6, 813b7~15.
- 1)「文云」無有{甲}。
- 2)「下」無有{甲}。
- 3)「明」無有{甲}。
- 4)「弁」下有「修」{甲}。
- 5)「修行」無有{甲}。
- 6)「訂」通「證」於此書{編}次同。
- 7)「現」作「顯」{甲}次同。
- 8)冠註曰事下疑脫顯字{甲}。
- 9)「法明」無有{甲}。
- 10)「云」作「言」{甲}次同。
- 11)「界法」作「法界」{甲}。
- 12)「即事」作「事即」{甲}。
- 13)「芽」作「牙」{甲}。
- 14)「者」無有{甲}。
- 15)「如」作「知」{甲}。
- 16)「弟」作「第」{甲}{乙}。
- 17)▣字體磨滅{底}ㆍ作「知」{甲}ㆍ作「如」{乙}。
- 18)「示」下有「現」{甲}。
- 19)「如」無有{甲}。
- 20)「體」下有「自」{甲}。
- 21)「賴」作「梨」{甲}。
- 22)「亦」作「示」{甲}。
- 23)冠註曰有一作分{甲}。
- 1)「先」作「前」{甲}。
- 2)「十番」無有{甲}。
- 3)「十」下有「番」{甲}。
- 4)「所」作「何」{甲}。
- 5)冠註曰即下疑脫無字{甲}。
- 6)「無」無有{甲}。
- 7)「纓絡」作「瓔珞」{甲}。
- 8)「准」作「唯」{甲}。
- 9)「義」無有{甲}。
- 10)「羅尼」無有{甲}。
- 11)「細」下有「陀」 又冠註曰陀字更勘{甲}。
- 12)「約世時者」無有{甲}。
- 13)冠註曰世疑也{甲}。
- 14)「明」作「名」{甲}。
- 15)「爲」無有{甲}。
- 16)「可」上有「即」{甲}。
- 17)「於」無有{甲}。
- 18)「手」作「乎」又冠註曰乎疑耳{甲}。
- 19)「怒」作「惱」又冠註曰惱疑怒{甲}。
- 20)「之」無有{甲}。
- 21)「准」作「準」{甲}。
- 22)「海」無有{甲}。
- 23)「大」上有「是」{甲}。
- 24)「現」作「離」又冠註曰離疑顯{甲}。
- 25)「印」下有「顯」{甲}。
- 26)「人」作「入」{甲}。
- 27)「䏞」作「昧」{甲}。
- 28)「究」上有「以」{甲}。
- 29)「二一」作「三」{乙}。
- 30)「辨」作「辯」{乙}。
- 31)「者」無有{甲}。
- 32)「圓」無有{甲}。
- 33)「即」無有{甲}。
- 34)「曰」下有「方便」{甲}。
- 35)「巧」無有{甲}。
- 36)冠註曰解下一有行字{甲}。
- 37)「行」無有{甲}。
- 38)「之」無有{甲}。
- 1)「何」無有{甲}。
- 2)「言」無有{甲}。
- 3)「網」作「綱」{甲}。
- 4)▣字體磨滅{底}ㆍ作「所」{甲}{乙}。
- 5)「云」作「言」{甲}。
- 6)「令」作「分」{甲}。
- 7)「答」上有「爲」{甲}。
- 8)冠註曰理下疑脫說{甲}。
- 9)「云」無有{甲}。
- 10)「衆」無有{甲}。
- 11)「知」作「智」{甲}。
- 12)「花」作「華」{甲}。
- 13)「意」作「竟」又冠註曰竟疑意{甲}。
- 14)「性」無有{甲}。
- 15)「云」作「言」{甲}。
- 16)「情」作「性」又冠註曰性疑情{甲}。
- 17)冠註曰立下疑脫故字{甲}。
- 18)「三故」無有{甲}。
- 19)冠註曰種下疑脫無字{甲}。
- 20)「是」無有{甲}。
- 21)「別」作「不」{甲}。
- 22)「性」下有「亦有處三性以外別立三無性」{甲}。
- 23)冠註曰三下疑脫性字{甲}。
- 24)「性」無有{甲}次同。
- 25)「究」作「畢」{甲}。
- 26)「立敎」作「敎立」{甲}。
- 27)冠註曰所下疑脫知字{甲}。
- 28)「知」作「故」{甲}。
- 29)「衆生…之法」十五字無有{甲}。
- 30)「訂」通「證」於此書{編}次同。
- 31)「生」下有「說」{甲}。
- 32)「亦」無有{甲}。
- 33)「非不說」作「不可得」{甲}。
- 34)「防」作「妨」{甲}。
- 35)「此」作「是」{甲}。
- 1)「是」無有{甲}。
- 2)「非」作「不」{甲}。
- 3)「即非言義」無有{甲}。
- 4)「之」無有{甲}。
- 5)「在機益故」無有{甲}。
- 6)「我同名而無我同故」此文中「名而無我同」五字缺落。而冠註曰我等三字疑衍{甲}。
- 7)「有」無有{甲}。
- 8)「差」無有{甲}。
- 9)「義」下有「可別」又冠註曰可別疑衍{甲}。
- 10)「即」下有「相即」 又冠註曰相即疑衍{甲}。
- 11)「現」作「顯」{甲}次同。
- 12)「義」無有{甲}。
- 13)冠註曰客一作容次同{甲}次同。
- 14)「異」作「理」 又冠註曰理一作異{甲}。
- 15)「則」作「即」{甲}。
- 16)「導」作「噵」{甲}。
- 17)冠註曰自下一有還字{甲}。
- 18)「體」無有{甲}。
- 19)「義」下有「義」{甲}。
- 20)「修」作「終」{甲}。
- 21)「捉」作「提」{甲}。
- 22)「曰」無有{甲}。
- 23)「陰」作「蔭」{甲}。
- 24)「糧」作「粮」{甲}。
- 25)「直」作「眞」{乙}。
- 1)「及」作「反」{乙}。
- 2)「黎」作「梨」{乙}。
- 3)「弟」作「第」{乙}次同。
- 4)「支」底本作「攴」編者改書爲「支」前後倣此。
- 1)「弟」作「第」{乙}次同。
- 2)「上」作「二」{乙}。
- 3)「生」作「住」{乙}。
- 1)「免」作「兌」又脚註曰兌疑脫字耶{乙}。
- 2)▣▣▣字體磨滅{底}ㆍ作「內外中」{乙}。
- 3)「弟」作「第」{乙}次同。
- 1)「日」作「曰」{乙}。
- 1)「弟」作「第」{乙}次同。
- 2)「着」作「著」{乙}次同。
- 1)▣字體磨滅{底}ㆍ作「支」{乙}。
- 1)「亡」作「土」{乙}次同。
- 2)「忍」作「忽」{乙}。
- 3)「弟」作「第」{乙}次同。
- 4)「垷」作「現」{乙}。
- 1)「一一」作「二」{乙}。
- 2)「弟」作「第」{乙}次同。
- 3)「訂」通「證」於此書{編}次同。
- 4)「幺」作「云」{乙}。
- 1)「感}通「惑」{編}。
- 1)「訂」通「證」於此書{編}次同。
- 2)「弟」作「第」{乙}。
- 3)「解」作「能」{乙}。
- 4)「勤」作「勒」{乙}。
- 1)「弟」作「第」{乙}次同。
- 2)「名」作「各」{乙}。
- 1)「弟」作「第」{乙}次同。
- 1)「則」作「別」{乙}。
- 1)「着」作「著」{乙}。
- 2)「弟」作「第」{乙}次同。
- 1)「弟」作「第」{乙}次同。
- 2)「爲」作「憑」{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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