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송운대사분충서난록(松雲大師奮忠紓難錄) / 松雲大師奮忠紓難錄

ABC_BJ_H0153_T_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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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운대사분충서난록松雲大師奮忠紓難錄
총목차總目次
분충서난록 소서小序
분충서난록 서문
갑오년 4월에 청정의 진영에 들어가서 정탐한 기록(甲午四月入淸正營中探情記)
별도로 왜적의 정세를 보고한 글(別告賊情)
갑오년 5월에 유 독부를 찾아가 뵙고서 말한 것을~(甲午五月徃謁劉督府言事記)
갑오년 7월에 재차 청정의 진영에 들어가서~(甲午七月再入淸正陣中探情記)
갑오년 9월에 서울에 달려가 소를 올려~(甲午九月馳進京師上疏言討賊保民事)
갑오년 12월에 다시 청정의 진영에 들어가서~(甲午十二月復入淸正營中探情記)
유 도독이 송운에게 유시한 첩문(附劉都督諭松雲帖)
유 도독이 청정에게 세 차례 답한 글(又附劉都督答淸正三書)
을미년에 파병한 뒤에 비변사에서 올린 계사(乙未罷兵後備邊司啓)
을미년에 상소하여 시사時事를 말하다(乙未上疏言事)
원광 원길 장로에게 준 글(與圓光元佶長老書)
승태 서소 장로에게 준 글(與承兌西笑長老書)
현소에게 준 글(與玄蘇書)
숙로 선사에게 준 글(與宿蘆禪師書)
판서 이수광이 지은 『지봉유설』 중에~(李判書粹光所著芝峯類說中記松雲事蹟)
유몽인이 지은 『어우야담』 중에 기록된~(柳夢寅所著於于野譚中記松雲事蹟)
홍만종이 지은 『순오지』 중에 기록된~(洪萬宗所著旬五志中記松雲事蹟)
오대산의 승려 취혜가 소장한 문고 안에~(五臺山僧就惠所藏文藁中記松雲事蹟)
남원의 고 진사 조경남의 집에 소장된~(南原故進士趙慶男家所藏經亂錄中~)

008_0079_c_01L松雲大師奮忠紓難錄

008_0079_c_02L

008_0079_c_03L1)申維翰編

008_0079_c_04L2)總目次

008_0079_c_05L
甲午四月入淸正營中探情記

008_0079_c_06L別告賊情

008_0079_c_07L甲午五月徃謁劉督府言事記

008_0079_c_08L甲午七月再入淸正陣中探情記

008_0079_c_09L甲午九月馳進京師上疏言討賊保民事疏

008_0079_c_10L甲午十二月復入淸正營中探情記

008_0079_c_11L附劉都督諭松帖

008_0079_c_12L又附劉都督答淸正三書

008_0079_c_13L乙未罷兵後備邊司啓

008_0079_c_14L乙未上疏言事

008_0079_c_15L與圓光元佶長老書

008_0079_c_16L與承兌西笑長老書

008_0079_c_17L與玄蘇書

008_0079_c_18L與宿蘆禪師書

008_0079_c_19L李判書粹光所著芝峯類說中記松雲事蹟

008_0079_c_20L柳夢寅所著於于野譚中記松雲事蹟

008_0079_c_21L洪萬宗所著旬五志中記松雲事蹟

008_0079_c_22L五臺山僧就惠所藏文藁中記松雲事蹟

008_0079_c_23L南原故進士趙慶男家所藏經亂錄中載松雲

008_0079_c_24L事蹟

008_0079_c_25L撰者名依卷末申維翰跋文而補入{編}目次
008_0079_c_26L編者作成補入

008_0080_a_01L또 『밀주지』에 보이는 송운의 사적(又事蹟出密州誌)
송운의 영당에 급복을 허락한 전지(松雲影堂給復承傳)
부록 1
시詩(19편)
만사挽詞(1편)
진찬眞賛(3편)
분충서난록 발문(奮忠紓難錄跋)
새로 판각한 송운 대사의 『분충서난록』 발문(新刻松雲大師奮忠紓難錄跋)
부록한 밀주지의 발문(附密州誌跋)
부록 2
밀양 표충사 송운 대사 영당 비명 병서密陽表忠祠松雲大師影堂碑銘幷序
표충사 기문 부록表忠祠記文付錄
[송운에게 찰밥을 보내며(送糯飯于松雲)
환성사로 송운을 찾아가다(環城寺訪松雲)
송운에게 주다(贈松雲)
송운이 풍악에 들어가는 것을 전송하다(送松雲入楓嶽)
송운 스님에게 드리다(贈松雲師)
승대장 송운에게 드리다(贈僧大將松雲)]
비국이 하달한 공문(備局甘結關)
[본문]
갑오년 4월에 청정의 진영에 들어가서 정탐한 기록
삼가 『선묘보감宣廟寶鑑』을 상고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계사년(1593, 선조 26) 5월에 청정淸正(加藤淸正)이 물러나 울산蔚山 서생포西生浦에 주둔하였다. 중국에서 사천四川의 총병摠兵 유정劉綎을 파견하였는데, 그가 복건福建ㆍ서촉西蜀ㆍ남만南蠻 등지에서 소모召募한 병력 5천을 이끌고 성주星州로 와서 주둔하였다. 도원수都元帥 김명원金命元은 의령宜寧에 주둔하였다.
6월에 청정이 우리나라의 두 왕자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 및 재신宰臣 등을 돌려보내었다.
7월에 심유경沈惟敬이 왜영倭營에서 돌아오면서평행장平行長(小西行長)이 김해金海에 주둔하였다. 수길秀吉(豊臣秀吉)이 납관納款(귀순)하는 표문表文을 가지고 왔으며, 왜관倭官 소서비小西飛(小西飛彈守)18)를 데리고 왔다.
갑오년(1594, 선조 27) 3월에 도독都督 유정劉綎이 성주에서 남원으로 진영을 옮겼다.
또 『선묘보감』에서 말하기를, “유정劉綎이 청정과 사자使者를 교환하며 뜻을 통하였다.”라고 하였다.
대개 계사년 이후로 명나라 장수들이 화의和議를 극력 주장하였다. 심유경은 평행장과 의논하여 수길을 일본 국왕으로 봉함으로써 그 군대를 철수시키려 하였고, 유정은 청정과 통하여 청정으로 하여금 기회를 틈타 책봉을 받고 스스로 관백關白이 된 뒤에 수길을 반격하게끔 유도하려고 하였다.

008_0080_a_01L又事蹟出密州誌

008_0080_a_02L松雲影堂給復承傳

008_0080_a_03L附錄一

008_0080_a_04L詩十九篇

008_0080_a_05L挽詞一篇

008_0080_a_06L眞贊三篇

008_0080_a_07L附錄二

008_0080_a_08L密陽表忠祠松雲大師影堂碑銘

008_0080_a_09L表忠祠記文付錄

008_0080_a_10L

008_0080_a_11L[本文]
甲午四月入淸正營中探情記

008_0080_a_12L
謹按宣廟寶鑑癸巳五月淸正退
008_0080_a_13L屯蔚山西生浦皇朝遣四川摠兵
008_0080_a_14L劉綎率福建西蜀南蠻等處召募
008_0080_a_15L兵五千來屯星州都元帥金命元
008_0080_a_16L屯宜寧六月淸正還我兩王子臨海

008_0080_a_17L順和
及宰臣等七月沈惟敬自倭
008_0080_a_18L營回平行長
屯金海
持秀吉納欵表文
008_0080_a_19L挾倭官小西飛來甲午三月都督
008_0080_a_20L劉綎自星州移鎭南原又云綎與
008_0080_a_21L淸正交使通意盖自癸巳以後
008_0080_a_22L天將力主和議沈惟敬與平行長
008_0080_a_23L欲封秀吉爲日本國王以撤其
008_0080_a_24L而劉綎則來通淸正欲使淸正
008_0080_a_25L乘時受封自爲關白反擊秀吉

008_0080_b_01L그래서 유정이 특별히 송운을 보내어 청정의 본심을 탐지하려고 한 것이다.
이 글은 송운이 청정을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을 기록한 것이다. 그래서 청정이 말을 대부분 모호하게 하면서 확실히 드러내지 않고 있는데, 그런 중에서도 청정의 흉중에 따로 다른 의사가 있다는 것을 대체로 알 수 있다.
본월本月(4월) 9일에, 전일에 왜적의 진영에서 나온 정보년鄭寶年을 왜적의 부장副將 희팔喜八에게 사자로 보내었습니다. 그에게 서간을 써 주어 먼저 들여보내었는데, 그 서간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조선의 사인士人 이겸수李謙受19)는 고한다. 조선의 사신인 대선사大禪師 북해北海 송운이 독부督府의 군영에서 와서 귀 진陣에 들어가 대상관大上官과 함께 화해和諧할 일을 선유宣諭하려 하니, 모름지기 하인 약간 명을 내보내어 중로中路의 근심이 없게 해주면 매우 다행이겠다.”
12일에 이겸수 및 도원수의 군관軍官인 수문장守門將 신의인申義仁, 출신出身 양몽해梁夢海, 통사通事 출신 김언복金彦福 등과 함께 승속의 인원 20여 명이 좌병사左兵使의 진영에서 나와 이겸수를 앞세우고 길을 떠나 저녁에 울산군 전탄천箭灘川 가에서 묵었습니다.
이튿날 13일 아침에 출발하여 울산군 남면南面 소등천所等川 가에 와서 말에게 꼴을 먹였습니다. 이때 우리나라 사람으로 포로가 된 박쥐똥(朴注叱同) 등 일곱 명이 오다가 냇가에 이르러 우리들을 보고는 앞으로 나와 고하였습니다.
“뭔가 팔아먹으며 목숨을 이어보려고, 이엉 이을 풀을 베어 가기 위해서 왔습니다.”
우리가 물었습니다.
“얼마 전에 정보년에게 서한을 가지고 들어가게 하였는데, 도착했는지 여부를 아는가?”
답하였습니다.
“어제 진중陣中에 도착하였습니다.”
또 말하였습니다.
“부왜副倭가 인마人馬를 이끌고 영접하러 오기로 이미 정했는데, 요즈음 비가 내려 물이 불어서 지금 여기에 오지 못한 모양입니다.”
그들 두 명을 먼저 들여보내 우리 소식을 전하게 하였습니다. 우리 일행이 공수곶公須串 앞 들판에 이르렀을 때, 나무하는 왜적 수천여 명이 도로를 가득 메우고 우리 일행을 보더니, 여기저기에 떼로 모여서

008_0080_b_01L故特遣松雲以探本情而此爲松
008_0080_b_02L初見淸正時所記故語多含糊
008_0080_b_03L不發然槩可見淸正胷中別有他
008_0080_b_04L般意思矣

008_0080_b_05L
本月初九日使前日自賊中出來鄭寶
008_0080_b_06L倭副將喜八處書簡書給先入送
008_0080_b_07L其簡辭云朝鮮士人李謙受白
008_0080_b_08L鮮使大禪師北海松雲來自督府營下
008_0080_b_09L欲入貴陣與大上官宣諭和諧事
008_0080_b_10L出送下人若干使無中路之患幸甚
008_0080_b_11L十二日與李謙受及都元帥軍官守門
008_0080_b_12L將申義仁出身梁夢海通事出身金彥
008_0080_b_13L僧俗并二十餘名出自左兵使陣
008_0080_b_14L以李謙受爲前導而行夕宿于蔚山郡
008_0080_b_15L箭灘川邊明十三日朝發至于郡南面
008_0080_b_16L所等川邊秣馬時我國被擄人朴注叱
008_0080_b_17L同等七名來到于川邊見我等進告
008_0080_b_18L以賣食連命事欲刈取盖草而來耳
008_0080_b_19L問曰昨令鄭寶年持書入送而未知到
008_0080_b_20L答曰昨日到陣矣又云副倭率人馬
008_0080_b_21L迎來事已㝎而近日雨水故今未來此
008_0080_b_22L使其人等二名先入送先聲而行
008_0080_b_23L到于公須串前野則樵倭類數千餘徒
008_0080_b_24L彌漫道路見我等之行處處屯集

008_0080_c_01L혹 칼을 뽑아 휘두르기도 하고, 혹 조총鳥銃을 쏘기도 하면서 위세를 부렸습니다.
적진賊陣에서 10리쯤 되는 곳에 이르자, 부장副將 희팔랑喜八郞이라고 불리는 왜적이 안장을 갖춘 말 네 필과 조총을 든 군졸 40여 명을 직접 거느리고 영접하러 나와서 우리에게 말을 갈아타게 하고는 앞장서서 인도하였습니다.
서생포西生浦의 옛 성을 지나 적의 성문 밖에 이르니,20) 뭇 왜적들이 조선의 사자가 왔다는 기별을 듣고는 앞을 다투어 성문에 나와 길 양쪽에서 구경하는 자가 거의 5천여 명에 이르렀습니다. 부장 희팔의 거소로 인도되어 들어가니, 왜적들이 모두 오느라 수고했다고 위로하였습니다.
이때에 명나라 사람 강옥호康玉湖라는 자가 우리를 찾아와서 글로 써서 보였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항상 악한 짓을 습관적으로 하니, 조심해서 가볍게 말하지 말라.”
희팔이 물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디에서 왔으며, 또 무엇 하는 승려인가?”
답하였습니다.
“독부의 군영에서 왔다. 그리고 조선 도원수의 명령도 함께 받고 왔다.”
또 거짓으로 기만하여 말하였습니다.
“나는 나이 겨우 16~17세 때에 조정에서 벼슬하다가 18세 때부터 세상을 피해서 금강산에 은거하며 자취를 감추고 정신을 수양하였다. 그러다가 중년에 이르러 명나라에 들어가서 독부와 교분을 맺었는데, 지금 너희가 일으킨 병란을 만나 독부가 군사를 거느리고 나오면서 나를 불렀기 때문에 내가 나와서 독부의 군영에 머물게 되었다. 그런데 달리 믿을 만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너희 진중에 나를 보내어 장래 화해할 뜻을 타진하게 한 것이다.”
왜적이 기뻐하는 기색으로 말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큰일을 의논할 때는 고승을 불러서 상의하는데, 귀국도 고승을 보내온 것은 이 일을 중하게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는 매우 기뻐하며 돈독하게 믿었습니다. 희팔은 대개 청정이 총애하는 장수로서 함께 일을 꾀하는 자였습니다. 이 왜장이 말을 듣고 있다가 청정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더니 한참 뒤에 나와서 물었습니다.
“여러분이 독부의 군영에서 왔다면, 독부의 서신을 가지고 왔는가? 또 왕자군王子君의 서신도 가지고 왔는가?”
답하였습니다.
“독부의 서신은 가지고 왔다. 그러나 왕자군은 평안도에 들어가서

008_0080_c_01L抽刀揮鍔或放鳥銃以示其威至于
008_0080_c_02L賊陣十里許則副將喜八郞稱號倭
008_0080_c_03L鞍馬四匹及鳥銃軍四十餘名親率迎
008_0080_c_04L使我等更騎其馬前導引歸過西
008_0080_c_05L生浦舊城至賊門外則羣賊聞朝鮮使
008_0080_c_06L入來之奇爭先出城來道觀者幾至
008_0080_c_07L五千餘數也引入于副將喜八之居
008_0080_c_08L倭皆以慰行時又有大明人康玉湖
008_0080_c_09L見我等書示曰日本之人常爲習惡
008_0080_c_10L愼勿輕語云喜八問曰君等從何處來
008_0080_c_11L又何如僧也答曰自督府營下兼承朝
008_0080_c_12L鮮都元帥命令而來矣佯僞語曰年纔
008_0080_c_13L十六七仕於朝自十八歲避世去隱于
008_0080_c_14L金剛山晦跡養神中年入大明與督
008_0080_c_15L府有素今遭汝兵督府領兵出來召我
008_0080_c_16L我出住于督府營下他無可信之人
008_0080_c_17L令送于汝陣與論將來和諧之意耳
008_0080_c_18L倭有喜色曰我國議大事則以高僧召
008_0080_c_19L議矣貴國亦以高僧送來者以重此事
008_0080_c_20L悅之深信之篤喜八盖淸正寵將同
008_0080_c_21L謀者也同倭聞言入于淸正處久而
008_0080_c_22L出來問曰君等自督府營下而來則持
008_0080_c_23L督府書來耶王子君書亦持來耶答曰
008_0080_c_24L督府書則來矣王子君則入平安道

008_0081_a_01L명나라 장수를 만난 뒤에 천자의 부름을 받고 명나라에 들어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서신을 보내지 못했다.”
그가 물었습니다.
“독부의 마음속에 있는 일을 자세히 알고 왔는가? 과연 무슨 일인가?”답하였습니다.
“독부의 마음속에 있는 일을 우리들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다만 독부가 전에 서신을 보냈는데 회답을 보니, 이름에 서명署名도 없고 도장 자국도 없었으므로, 이는 필시 중간에서 농간을 부린 것이라고 여긴 나머지, 우리를 보내 허실虛實을 알아보려고 해서 우리가 여기에 오게 된 것이다.”
또 그가 물었습니다.
“일본에서 나온 소서비小西飛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답하였습니다.
“소서비라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
왜인이 ‘소서비는 심 유격沈遊擊과 함께 명나라에 들어간 자이다’라는 내용의 글을 써서 보여 주며 물었습니다.
“심 유격이 제안한 강화講和의 조목들을 모두 알고 있는가?”
우리들이 고의로 모른다고 대답했더니, 그가 물었습니다.
“여러분이 독부에서 왔다면서 어찌하여 심 유격의 일을 모른다고 하는가?”
그리고는 천자天子와 결혼한다는 조목과 조선의 4도道를 할양割讓한다는 조목, 두 가지를 글로 써서 보여 주며 말하였습니다.
“이것이 심 유격과 행장行長이 강화하는 조건인데, 어찌하여 모른다고 하는가?”
이에 우리가 답하였습니다.
“이것이 심 유격과 행장이 강화하는 조건이라면, 만에 하나도 성사될 리가 없다. 상관上官이 바라는 것도 여기에 있는가?”
왜인이 답하였습니다.
“상관이 바라는 것은 이것과 다르다.”
이와 같이 묻고 답하기를 몇 번씩 하였는데, 그 뜻을 살펴보건대 모두 행장이 하는 일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눈치였습니다.
이날 초저녁에 우리를 안내하여 청정이 있는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우리가 먼저 들어가서 좌정坐定을 하자, 그 뒤에 청정이 문을 밀고 나와 우리를 보고서, 먼저 먼 길에 오느라 수고했다고 위로하고는 물음을 던졌습니다.
“심 유격의 일이 어째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는가?”
우리가 보기에 그 왜적이 마음속으로 심 유격의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기뻐하는 듯하기에 그의 본심을 떠볼 작정으로 답하였습니다.
“심 유격의 일은 절대로 이루어질 수가 없다.”
청정이 말하였습니다.
“일은 기밀機密이 귀한 것인데, 말로 통하면 사람의 입으로 전파될까 두렵다. 내가 방에 들어가서 글로 보일 터이니, 귀하도 글로 답해서 보여 주면 좋겠다.”

008_0081_a_01L天將而後仍承天子命召入大明
008_0081_a_02L還故今未送書耳問曰督府心中事細
008_0081_a_03L知而來耶果何事耶答曰督府心中事
008_0081_a_04L我等何足以知之但督府自前送書而
008_0081_a_05L見答則名無着署又無印跡必是中
008_0081_a_06L間所弄耳玆送我等欲驗虛實故
008_0081_a_07L等至此耳問曰日本出來小西飛今在
008_0081_a_08L何處答曰不知小西飛爲人也倭以書
008_0081_a_09L示曰小西飛與沈游擊同入大明者也
008_0081_a_10L問曰沈游擊講和條條事知耶否我等
008_0081_a_11L故故以不知答也問曰君等自督府而
008_0081_a_12L則何不知沈事云耶因書示與天子
008_0081_a_13L結婚割朝鮮四道兩條曰此沈游擊行
008_0081_a_14L長講和事也何以云不知耶答曰此沈
008_0081_a_15L行講和事則萬無成事之理上官之所
008_0081_a_16L欲亦在此耶倭答曰上官之所欲與此
008_0081_a_17L異也如此而問如此而答者數三遍
008_0081_a_18L原其情則皆不肯行長之爲也是日初
008_0081_a_19L引我等入于淸正在處我等先入坐
008_0081_a_20L㝎而後淸正推門出來見我先慰遠
008_0081_a_21L行而後問曰沈游擊事云何不成耶
008_0081_a_22L我等觀其賊喜彼不成之心欲摘其情
008_0081_a_23L答曰沈事萬萬不成也淸正曰事貴機
008_0081_a_24L以言通之則恐播人口我入房書

008_0081_b_01L
그리고는 즉시 일어나 방에 들어가서 글로 써 주는 것을 보니, 모두 행장과 심 유격의 강화講和가 성사될지 성사되지 않을지, 앞으로 어떻게 될지를 묻는 것들이었는데, 우리가 성사되지 않을 것이라고 답하면서 그의 본심을 살펴보건대, 대개는 성사되지 않는 것을 좋아하는 눈치였습니다.
또 일본에서 온 왜승 두 명이 흰 비단 장삼長衫을 착용하고, 또 금란가사金襴袈裟를 걸치고서 엄숙하게 청廳 중에 나와 앉았는데, 본묘사本妙寺 주지 일진日眞21)이라고 하는 한 승려는 서화書畫를 조금 알았습니다. 그래서 문답하는 일은 전적으로 이들 승려에게 맡겨서 쓰게 하였습니다. 술이 세 순배 돌고 나서 밤이 깊었으므로 그만 물러가서 자기로 하였습니다.
날이 새어 14일 아침에 밥을 먹고 나서 여러 왜인과 부장 등이 모두 와서 보았습니다. 얼마 뒤에 희팔이 청정의 거소에서 와서 심 유격의 강화 조건이라는 것을 보여 주며 말하였습니다.
“이 일이 이루어질지 이루어지지 않을지에 대해서 자세히 답변해 주면 좋겠다.”
그 조목은, 첫째, 천자天子와 결혼하는 것, 둘째, 조선을 할양割讓하여 일본에 소속시키는 것, 셋째, 옛날처럼 교린交隣하는 것, 넷째, 왕자王子 한 사람을 일본에 들여보내어 영주永住시키는 것, 다섯째, 조선의 대신大臣과 대관大官을 일본에 볼모로 들여보내는 것 등 다섯 가지의 일이었습니다.
이에 우리가 상의하여 답서를 작성하였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였습니다.
첫째, 천자와 결혼하는 일에 대하여.
옛날에 한漢나라 황제가 하나의 궁녀를 보내어 선우單于와 화친和親하였는데, 지금까지 천년이 지나도록 그 일을 가지고 한나라 황제가 구설수에 오르곤 한다.22) 지금 이 시대에는 성천자聖天子가 요순堯舜과 같은 덕德과 일월日月과 같은 밝음으로 천하에 군림하고 있는데, 어찌 자기 성녀聖女를 만만리萬萬里 떨어진 창파滄波 밖으로 결혼시키겠는가. 소 먹이고 나무하는 아이들이라도 이 일이 결국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임을 확실히 알 것이다. 그런데 더군다나 유 독부劉督府로 말하면, 천자의 조정의 절조 높은 인사로서, 문무文武를 겸전兼全하여 성패成敗의 도수度數를 분명히 알고 작전을 세우는 것이 고명高明하며,

008_0081_b_01L貴亦以書答示可也即起入房書示
008_0081_b_02L則皆以行長沈游擊講和成不成如何等
008_0081_b_03L說爲問而我等以不成爲答以干其情
008_0081_b_04L則盖以不成爲喜也又自日本來倭僧
008_0081_b_05L二名着白綃長衫又着金襴袈裟
008_0081_b_06L然出坐于廳中一僧名本妙寺住持日
008_0081_b_07L粗知書畫故問答事專委此等僧書
008_0081_b_08L酒三行因夜深許退而宿明十四
008_0081_b_09L日朝飯後羣倭副將等皆來見之
008_0081_b_10L而副將喜八自淸正處而來示沈游擊
008_0081_b_11L講和條辭曰此成不成事細細答示可
008_0081_b_12L
其條曰
008_0081_b_13L一與天子結婚事一割朝鮮屬日本
008_0081_b_14L一如前交隣一王子一人入送日
008_0081_b_15L本永住事一朝鮮大臣大官入質日
008_0081_b_16L本事五件事也
◆我等相議書答以
008_0081_b_17L其答曰
008_0081_b_18L一與天子結婚事則昔漢帝以一宮女
008_0081_b_19L與單于和親至于今千載以漢帝口實
008_0081_b_20L當此時聖天子以堯舜之德日月之明
008_0081_b_21L覆臨天下豈以其聖女結婚於萬萬里
008_0081_b_22L滄波外耶雖牧子柴童決知此事之終
008_0081_b_23L不成也況劉督府以天子庭耿介之士
008_0081_b_24L乃文乃武明知成敗之數運籌高明

008_0081_c_01L의義와 불의不義의 이치에 대해서 통달하고 있으니, 어찌 그 일이 이루어질지 이루어지지 않을지의 여부를 미리 알지 못하겠는가.
둘째, 조선을 할양하여 일본에 소속시키는 일에 대하여.
사해四海의 안은 어디이건 왕의 땅 아닌 곳이 없으니,23) 한 조각 땅이나 한 치의 풀이라도, 모두 성천자聖天子의 손아귀 속에 들어 있는 물건이다. 빼앗거나 주거나 천자 자신이 마음속으로 어떻게 결단하느냐에 달려 있는데, 심 유격 한 사람이 어떻게 뺏어라 주어라 할 수가 있겠는가. 대저 일본이 천만뜻밖에도 이유 없이 군대를 일으켜 천자의 영역을 마음대로 짓밟고 생령을 도탄에 빠뜨리는 등 이런 극한의 상황에까지 이르게 하였으므로, 천자도 어쩔 수 없이 여기에 대응하는 군대를 일으켜 3년을 방어하면서 아직도 그만두지 않고 있는데, 어찌 할양해 줄 리가 있겠는가.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니, 이를 통해서도 행장과 유격의 계책이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임을 알 수 있다.
셋째, 옛날처럼 교린하며 화합하는 일에 대하여.
군부君父의 원수를 잊고서 형제의 교분을 맺는다는 것은 더욱 안 될 일임을 알 수 있으니, 천지 사이에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는가. 우리가 돌아가서 독부에게 고하면, 독부가 어떤 방식으로든 처치할 것이다.
넷째, 왕자 한 사람을 일본에 들여보내어 영주시키는 일에 대하여.
이것은 더더욱 절대로 안 될 일이다. 일본이 이유 없이 군대를 움직여 생민生民을 짓밟아 죽이고 우리의 종사宗社를 도탄에 빠뜨리고 우리의 윤기倫紀를 무너뜨리고 우리의 실려室廬를 결딴내게 만들었으니, 신하가 되고 자식이 된 마음으로서는 우리 백성 백만 명을 일본에 보내어 그들의 목숨을 한 번 뺏고 두 번 뺏게 하여 무궁한 원수를 갚도록 한다 해도, 생령生靈의 원한을 씻을 수가 없을 것이다. 이 때문에 영웅의 눈물이 비록 밥을 먹는 사이라 하더라도 마를 때가 없는데, 어느 겨를에 왕자를 거친 바다 밖으로 보내어 이국異國에서 영주하게 하겠는가. 나 송운과 같은 일개 승려의 몸으로서도 백 번 죽는 일을 달게 받을지언정, 행장과 유격이 왕자를 보내는 의논은 한사코 따를 수가 없는데, 하물며 우리 성천자가 천하의 주인이요 억조億兆의 어버이로서 어떻게 심 공沈公 등이 꾸미는 이런 졸렬한 일을 허여하시겠는가. 절대로 이런 이치는 없으니,

008_0081_c_01L曉達義不義之理豈不先知其事之成
008_0081_c_02L不成如何也一割朝鮮屬日本事則四
008_0081_c_03L海之內莫非王土雖片地寸草皆爲
008_0081_c_04L聖天子掌握中物奪與在於聖心中自
008_0081_c_05L斷如何耳沈游擊一人豈能使天子奪
008_0081_c_06L與哉大抵日本萬萬慮外動無名之師
008_0081_c_07L擅踏天子之域塗炭生靈至於此極
008_0081_c_08L天子不得已亦動應兵防禦三年
008_0081_c_09L自不已豈有割與之理哉萬萬無此事
008_0081_c_10L以此知行長游擊之策決不成也一如
008_0081_c_11L前交隣和合事則忘君父之讎結爲兄
008_0081_c_12L弟之交益知其不可也天地間寧有是
008_0081_c_13L我等歸而告督府則在督府處置如
008_0081_c_14L何耳一王子送日本永住事則萬萬尤
008_0081_c_15L不可日本無故動衆踐殺生民塗炭
008_0081_c_16L我宗社陷沒我倫紀傾蕩我室廬
008_0081_c_17L臣爲子之心雖輸我民百萬奪彼命一
008_0081_c_18L以酬無窮之讎難洗生靈之寃
008_0081_c_19L此英雄之淚雖飯食間不乾而奚暇送
008_0081_c_20L王子於鯨海之外永住於異國也哉
008_0081_c_21L如我僧一松雲亦百死甘心而行長游
008_0081_c_22L送王子之議則萬死不從矣況我
008_0081_c_23L聖天子以天下之主億兆之父庸與
008_0081_c_24L沈公等有如此劣劣事耶萬萬無此理

008_0082_a_01L이를 통해서도 심沈과 행行의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임을 알 수 있다. 유 독부는 중국 조정의 대신大臣으로, 본래 예악禮樂 가운데에서 생성生成된 인물이기 때문에 일찍부터 이런 의리를 일월처럼 훤히 알고 있으니, 어찌 오늘을 기다려서야 알겠는가.
다섯째, 조선의 대신과 대관을 일본에 볼모로 들여보내는 일에 대하여.
이 역시 더더욱 절대로 안 될 일이다. 예전의 전성기에 교린의 관계로 대할 때에도 이런 일을 듣지 못하였는데, 지금 원한을 잊고 대신을 보내어 형제의 교분을 맺는 것이 될 법이나 한 일인지 나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런 일은 모두 유 독부가 천자에게 계품啓稟한 뒤에 어떻게든 처리하겠지만, 이상 다섯 가지 사항은 모두 대의大義에 합당하지 않은 만큼, 행장行長과 심 공沈公의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임을 확신한다. 우리가 아는 것이 이러할 뿐만 아니라, 유 독부 역시 이러한 의리를 일찍부터 알고 있다. 지금 이러한 때에 대상관大上官과 유 독부가 화해하는 일을 논의한다면, 지금이 반드시 일을 이룰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니, 잘 처리하고 잘 헤아리기 바란다.
이 답서를 받은 뒤에 희팔이 청정의 뜻을 써서 보여 주었습니다.
“심 공과 행장의 협약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일본 군사가 다시 바다를 건너서 곧바로 명나라로 향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조선 백성이 일시에 굶어 죽고 남아나지 않을 것인데, 어떻게 할 것인가?”
이에 다음과 같이 답하였습니다.
“우리 조선은 천자에게 명을 받고 예의禮義에 죽는 나라이다. 당초에 일본이 천만뜻밖에도 이유 없이 군대를 동원하였을 때에는, 우리나라가 미처 대응하지 못해서 짓밟혀 죽고 내몰려 사로잡혔으나, 지금은 천자가 중국에서 양향糧餉을 운송하여 연속해서 접제接濟하고 있으며, 남병南兵 50만을 징발하여 우리나라의 의분義憤에 찬 군대와 함께 요기妖氣를 완전히 쓸어버리려 하고 있다. 더군다나 백번 죽는 것도 마음에 달게 여기면서 심沈과 행行의 계책을 따르지 않을 것인 데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청정은 이날 술 네 통을 보내면서 말하였습니다.
“함께 어울려 술잔을 권하며 대접하고 싶지만, 번거로운 폐단이 있을 듯해서 그렇게 하지 못한다.”

008_0082_a_01L以此知沈行之事不成也劉督府以中
008_0082_a_02L朝大臣本以禮樂中生成人物曾知此
008_0082_a_03L皎如日月何待今日然後知也
008_0082_a_04L朝鮮大臣大官入質于日本事則萬萬
008_0082_a_05L尤不可前日全盛時對以交隣而未
008_0082_a_06L聞此事今則忘其怨送大臣結爲兄弟
008_0082_a_07L吾未知其可也然而此等事皆在於劉
008_0082_a_08L督府啓禀聖天子然後處之如何耳
008_0082_a_09L如右五件事皆不合大義決知行長沈
008_0082_a_10L公之事不成也非唯我等所知如此也
008_0082_a_11L劉督府亦知此義夙矣當此時大上官
008_0082_a_12L與劉督府論議和諧事則此必成事之
008_0082_a_13L秋也幸斯善處之裁度之

008_0082_a_14L
喜八以淸正之意書示曰沈公行長之
008_0082_a_15L約不成則日本之兵更爲渡海直向
008_0082_a_16L大明之國也當此時朝鮮之民一時
008_0082_a_17L餓死無餘矣當如之何也答曰我朝鮮
008_0082_a_18L受命於天子而死於禮義之國也當初
008_0082_a_19L日本萬萬慮外動無名之師我國不
008_0082_a_20L及應兵以至於踐殺驅擄也今則聖天
008_0082_a_21L運中國糧餉連續接濟發南兵五
008_0082_a_22L十萬與我國奮義之士健擬掃氣
008_0082_a_23L況甘心百死而不從沈行之策也耶
008_0082_a_24L日送酒四桶曰欲與親酌慰接而事涉

008_0082_b_01L
이튿날 15일에 청정이 희팔을 보내어 물었습니다.
“내가 영안永安(함경도)에 있을 적에 왕자군의 장인丈人인 황 호군黃護軍24)이 매양 칭하기를, ‘강원 금강산에 귀승貴僧이 있다’라고 하였다. 지금 대사가 필시 그 사람일 것인데, 일부러 와서 나를 만났으니 이런 행운이 없다.”
그리고는 장지狀紙 한 권과 부채 열두 자루를 보내면서 말하였습니다.
“필적筆跡을 받기를 원한다.”
즉시 ‘의리에 입각해서 바르게 하고, 이끗은 꾀하지 말라’25)라는 말과, ‘밝은 곳에서는 일월이 내려다보고, 어두운 곳에서는 귀신이 살펴본다’라는 말과, ‘나의 소유가 아니면 털끝만큼이라도 취하면 안 된다’26)라는 말을 써 주었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뒤로 왜인들이 그 소문을 듣고는 부채를 가지고 와서 글씨를 받아 간 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27)
이날 정오에 안내를 받고 청정이 있는 곳에 들어가니, 청정이 별도로 금병풍을 치게 하고 이겸수와 나를 끌어다 앉히고는 문답을 주고받았는데, 그 내용은 모두 심 유격과 평행장의 강화가 이루어질지의 여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때에 또 희팔로 하여금 쪽지 하나를 써서 우리에게 건네게 하였는데, 대개 우리가 어제 대답한 심과 장의 강화에 대한 일을 거듭 써서 보인 것으로서, 이는 바로 우리의 의사를 탐지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쪽지에서 말하였습니다.
“보내온 글을 읽어 보니 분명한 의논이 아무것도 없다. 사자使者에게서 그 뜻을 찾아보려고 이야기해 보았지만 역시 분변하기 어렵다. 그러나 심 유격의 조건에 의거해서 조목별로 답할 것이니 잘 처리하기 바란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첫째, 명나라와 결혼하는 일과 관련하여, 선우와 결혼하게 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구설수에 오른다는 말은 이해할 수가 없다. 일본 황제는 문무천황文武天皇의 후예이니, 한漢나라 황제와 그 지위가 같은 것을 어떻게 숨기겠는가.
둘째, 조선의 4개 도道를 할양하여 일본이 관할하게 하는 것이 분수에 맞지 않는 일이라고 하였으나, 우리는 8개 도를 모두 우리 손에 넣을 수도 있는데, 구애될 것이 뭐가 있겠는가.
셋째, 진공進貢을 사퇴辭退하는 것은 법도에 맞지 않는 일이다. 중간에 끊어진 관계를 예전처럼 좋게 하자는 것인데, 안 될 것이 뭐가 있는가.

008_0082_b_01L煩弊未果耳明十五日淸正使喜八來
008_0082_b_02L問曰我在永安時王子君丈人黃護軍
008_0082_b_03L每稱曰江原金剛山有貴僧云而今大
008_0082_b_04L師必其人也委來見我幸甚因以狀
008_0082_b_05L紙一卷扇子十二柄送來曰願受書跡
008_0082_b_06L即以正其誼不謀其利明有日月
008_0082_b_07L有鬼神苟非吾之所有雖一毫而莫取
008_0082_b_08L等語書給則自此而後群倭聞奇
008_0082_b_09L扇受書者不知其數日午引入于淸正
008_0082_b_10L則淸正令別設金屛引坐我與李謙
008_0082_b_11L隨問隨答皆以沈游擊平行長講和
008_0082_b_12L成不成等事也而時又使喜八書給一
008_0082_b_13L片紙盖以昨日所答沈長等講和事
008_0082_b_14L覆書示乃以要探我等之意也
其言曰
008_0082_b_15L來書披見之處何無曆然之議于使
008_0082_b_16L雖有尋覓口上亦難辨然奉沈游擊
008_0082_b_17L箇條以目案使然使答處之事一至
008_0082_b_18L大明國結婚事令單于結婚至于今
008_0082_b_19L爲口實之議不得意日本皇帝忝文
008_0082_b_20L武天皇後胤帝位和漢焉焉廋廋
008_0082_b_21L一割朝鮮四箇道日本可所知事
008_0082_b_22L分之由有之是又八箇道悉可歸掌
008_0082_b_23L握事有誰妨乎一進貢辭退是則
008_0082_b_24L非法之儀也中絕之政可焉前代事

008_0082_c_01L
넷째, 조선의 왕자 한 사람을 일본에 두는 것이 어렵다고 하였으나 이는 도리가 분명하지 않은 것이다. 예전에 전쟁터에서 사로잡았는데, 그때 생명을 해쳤어도 어떻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다섯째, 조선의 기로耆老 대신이 일본에 볼모로 들어오는 것을 또 마땅치 않게 여기는데, 이것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 왕자가 일본에 있으면, 임금을 따르는 것이 신하의 도리인데, 사양할 것이 뭐가 있는가.
여섯째, 유격의 화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일본의 군대가 바다를 건너 명나라를 침입할 것이니, 열흘쯤 지나면 형세가 어떻게 되겠는가. 그렇다면 물이 흐르는 근원을 막아야 할 것이니, 멀리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일곱째, 문서에 도장을 찍지 않았다고 탓하였는데, 이는 받아들일 수 없다. 화해의 의논이 정해지는 것은 도장 문제가 아닐 듯하다. 이것은 도량度量에 의해 결단하는 것이지, 도장으로 결단하는 것이겠는가. 이 점을 멀리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상 그들의 조목별 대답을 살펴보건대) 이 더러운 놈들은 문맥도 알지 못해서, 써서 보여 주는 글이라는 것이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으며, 추하고 껄끄럽기만 할 뿐 조리가 없어서 말의 맥락이 통하지 않았으므로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통사通事를 매개하여 물어보게 하면서 그 어세語勢를 살펴보니, 모두 전에 대답한 다섯 건의 일을 거꾸로 힐난하며 겁주려는 것일 뿐 다른 뜻은 별로 없었으므로, 우리가 답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일들은 저번의 답서에서 이미 죄다 밝혔으니, 또 다른 말을 할 것이 없다. 돌아가서 독부에게 보고한 뒤에 통지할 것이니, 또한 잘 가리도록 하라.”
청정이 또 종이에 써서 보였습니다.
“독부가 무엇 때문에 전라도로 진陣을 옮겼는가?”
답하였습니다.
“중국 군대 수십만이 전라도 연해沿海의 각 고을에 많이 주둔해 있다. 그래서 총부總府가 병력을 조발調發하려다 보니, 남원이 바로 도로의 중심이 되기 때문에 진영을 이곳으로 옮기고, 전라와 경상 2도의 병력을 함께 지휘하게 된 것이다.”
청정이 또 써서 보였습니다.
“독부의 나이가 지금 몇 살인가?”
답하였습니다.
“지금 33세이다.”
또 써서 보였습니다.
“평안ㆍ영안永安(함경도)ㆍ충청ㆍ경기의 4도는 중국 장수 누가 군대를 거느리는가?”

008_0082_c_01L何有非分乎一朝鮮王子一人在日
008_0082_c_02L難澁澁事理不明也其故先於
008_0082_c_03L干戈之場擒雖及生害無爲奈者也
008_0082_c_04L一朝鮮耆老各入質在日本是又不
008_0082_c_05L肯事無理屈也王子在日本則隨
008_0082_c_06L君臣也何可辭讓乎一游擊議不成
008_0082_c_07L則日本兵渡海侵大明十日在何處
008_0082_c_08L然則可塞涓涓遠慮專可乎一書
008_0082_c_09L中無判形之尤是則不勘乎和諧議
008_0082_c_10L㝎似莫稜乎及決斷量抑於斷形乎
008_0082_c_11L遠慮在斯者乎

008_0082_c_12L
此醜奴不解文脉其所示書辭無頭無
008_0082_c_13L醜澁無理語脉不通使人不得通
008_0082_c_14L然而介于通使而問之仍觀語勢
008_0082_c_15L則皆以前所答五件事逆詰而畏之耳
008_0082_c_16L別無它意也我等答曰此等事已盡前
008_0082_c_17L更無它言歸告督府而後通示矣
008_0082_c_18L亦採之淸正又書示曰督府緣何移
008_0082_c_19L陣于全羅道耶答曰天兵數十萬多住
008_0082_c_20L于全羅沿海各官故總府欲爲調兵
008_0082_c_21L南原乃道路之中玆移營陣 [4] 兼領全羅
008_0082_c_22L慶尙二道兵耳又書示曰督府時年幾
008_0082_c_23L答曰時年三十三矣又書示曰
008_0082_c_24L安永安忠淸京畿四道則天將何人領

008_0083_a_01L
답하였습니다.
“송 경략宋經略이름은 응창應昌이다.과 이 제독李提督이름은 여송如松이다.은 이미 회군回軍하였고, 고 시랑顧侍郞이름은 양겸養謙이다.이 제장諸將과 군병 30여 만을 통솔하고 이미 평안도에 도착해서 4도의 군대를 함께 지휘하고 있다.”
청정이 또 통사를 시켜서 말을 전하였습니다.
“조선은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모두 명나라에 미루고는 성실하게 답변을 하지 않는다. 또 왕자군이 답서를 보내는 일도 명나라에 미루고는 지금까지 보내오지 않고 있다. 어찌하여 이렇게까지 신의가 없는 것인가?”
우리가 물었습니다.
“대상관大上官이 왕자군과 작별할 임시에 무슨 약속이나 무슨 맹약을 한 것이 있는가?”
그가 대답하였습니다.
“아니, 특별히 약속을 하거나 무슨 맹약을 한 것은 없다. 다만 그와 함께 오랫동안 같이 있었던 처지에서 헤어질 임시에 서로 잘 지내자고 언약하였는데, 지금까지 한 글자도 소식이 없으니 인정상 정말 이럴 수가 있는가?”
우리가 답하였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어찌 신의가 없다고 말하는가. 왕자군이 명나라에 들어갔다가 조만간 돌아오면 답서를 보내는 것이야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또 우리나라는 명나라의 속국屬國이니 어떤 일이든 명나라에 미루는 것이 또한 당연하지 않은가.”
그가 또 글로 써서 보였습니다.
“독부의 마음속을 당신들이 자세히 알 것이 분명한데, 굳이 숨기고 말을 하지 않으니, 당신들에게도 책임이 있다.”
글로 써서 답하였습니다.
“독부는 덕스럽게 포용하며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니, 우리가 어떻게 그 마음속의 일을 알겠는가. 다만 매양 우리에게 말하기를, ‘서생포에 주둔한 장수인 청정은 대대로 지방관地方官을 지낸 가문의 후예이고, 게다가 호걸스러운 사람인데, 어찌하여 관백關白과 같은 용렬한 사람 밑에서 지휘를 받는단 말인가. 만약 다른 나라에 있었다면 그 꼭대기에 이르렀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상관上官을 위해 늘 탄식하였다.”
청정이 미소만 짓고 답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글로 써서 보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관백을 일본의 국왕으로, 상관을 신하로 알고 있다. 그래서 상관을 이 나라에 보낸 것이라고 하는데, 그러한가?”
글로 써서 답하였습니다.
“나는 관백의 신하가 아니라 국왕의 신하이다. 관백은 악인惡人인데, 지금 무예武藝를 믿고서 서국西國에 머물고 있다.”

008_0083_a_01L兵耶答曰宋經略名應
李提督名如
曾已
008_0083_a_02L回兵面顧侍郞名養
統率諸將兵三十
008_0083_a_03L餘萬已到平安道兼領四道兵耳
008_0083_a_04L令通事傳言曰朝鮮之事無大小
008_0083_a_05L皆委諸大明而答不以實又王子君修
008_0083_a_06L答事亦推諸大明而迄未送來何無
008_0083_a_07L信至斯耶問曰大上官與王子君臨別
008_0083_a_08L有何約束又何㝎盟也曰否也別無
008_0083_a_09L約束又何㝎盟但與之同住久矣臨分
008_0083_a_10L約與相好而至于今無一字相問
008_0083_a_11L情固如是乎答曰何以云無信耶王子
008_0083_a_12L君入大明早晩還來則送答書何難
008_0083_a_13L之有哉又我國則大明屬國事事委諸
008_0083_a_14L大明不亦宜乎又書示曰督府心腹
008_0083_a_15L君等必詳知而堅諱不布爲君等有咎
008_0083_a_16L答書示曰督府包含德容不露情抱
008_0083_a_17L我等何以知其心事而但每與我等言
008_0083_a_18L西生陣將淸正世守地方官後裔
008_0083_a_19L加以豪傑人也如何見麾於如關白庸
008_0083_a_20L人之下若住於異國至於此極常爲
008_0083_a_21L上官慨嘆而已淸正微笑而不答我等
008_0083_a_22L書示曰我國以關白爲日本國王而以
008_0083_a_23L土官爲臣今送此國云然耶答書示曰
008_0083_a_24L我非關白之臣乃國王之臣關白惡人

008_0083_b_01L
청정이 물었습니다.
“왕자군을 잡은 것도 나요, 놓아준 것도 나인데, 한 번도 소식을 보내지 않으니, 대단히 신의가 없다.”
우리가 답하였습니다.
“왕자를 놓아준 공이 상관에게 있다는 것은 독부 혼자만 알고 있고, 명나라와 조선에서는 상관의 공이라는 것을 모두 모른다. 왜 그러냐 하면, 평행장이 우리나라에 자기의 공을 과시하며 말하기를, ‘왕자군은 내가 청정에게 놓아주게 하였으니, 내가 아니면 풀려나기 어려웠을 것이다’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청정이 미소를 지으며 말하였습니다.
“왕자군이 내 손안에 있었는데, 행장이 또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 행장은 단지 심 유격에게 함께 가도록 했을 뿐이다.”
우리가 또 말하였습니다.
“상관은 독부의 마음속을 알고 싶어 하면서, 정작 상관의 마음속은 털어놓지 않았다. 상관의 마음속의 일을 듣고 돌아가서 독부에게 보고하고자 한다.”
청정이 웃으며 말하였습니다.
“나의 마음속은 심이나 행장과는 다르다. 그들의 일이 만약 이루어지지 않으면, 당신도 들어오고 나도 사람을 보내어 독부와 서로 통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하루아침에 결정될 것이니, 오래 끌 것이 뭐가 있겠는가?”
얼마 뒤에 청정이 말하였습니다.
“당신과 이미 친숙해졌는데, 신물信物로 줄 만한 것은 없고, 나에게 있는 종이 몇 권과 부채 몇 자루로 성의를 표할까 한다.”
백지白紙 열 권과 부채 열 자루를 꺼내어 나에게 주며 말하였습니다.
“멀리 타국에 있는 처지라서 별로 보물이 될 만한 것이 없어서 그러니, 야박하게 여기지 말라.”
우리가 거절하고 받지 않으려 했으나, 바야흐로 강화講和할 일을 의논하는 중인데, 그가 우리를 믿지 않을까 해서 억지로 받아 가지고 물러나왔습니다.
이날 우리가 혹시라도 사패射牌를 데리고 와서 후로後路에 숨어 있게 했을까 하고 그들이 의심한 나머지, 군병 천여 명을 몰래 출동시켜 진영에서 30리쯤 떨어진 산야山野까지 모두 수색하고 오도록 하였습니다. 이는 대개 전일에 이겸수가 갔다가 돌아온 즉시, 사패 등이 공수곶 북쪽 산에 숨어 있다가 왜적의 목 4급級을 베어 왔기 때문에 그런 것이었습니다.
이튿날 16일 아침에 밥을 먹고 나서, 희팔과 왜승 일진이 술과 안주를 가지고 조총군鳥銃軍 50여 명을 데리고서 공수곶 앞까지 호송하였습니다.

008_0083_b_01L今以武藝住西國淸正問曰王子君執
008_0083_b_02L拘是我放送亦我而一未送信音
008_0083_b_03L無信也答曰王子放送之功在於上官
008_0083_b_04L則督府獨知而大明及朝鮮皆不知
008_0083_b_05L上官之功也何以然耶平行長與我國
008_0083_b_06L耀功曰王子君則我令淸正放送而非
008_0083_b_07L我則難放也淸正微笑曰王子君在我
008_0083_b_08L行長又何言行長只令沈游擊偕徃
008_0083_b_09L我等又曰 1) [3] 官欲知督府心腹
008_0083_b_10L上官心腹曾不吐露願聽心中所爲
008_0083_b_11L歸告督府耳淸正笑曰我心腹與沈長
008_0083_b_12L異也沈長事若不成則君亦入來
008_0083_b_13L亦送人與督府相通則一朝可決
008_0083_b_14L有久乎俄而淸正曰與君已爲親切
008_0083_b_15L贈無信物我有紙卷扇柄聊表耳
008_0083_b_16L出白紙十卷扇十柄與我曰遠在異國
008_0083_b_17L別無寶物勿以爲薄我等欲拒不受
008_0083_b_18L而方議和事彼不信我故强持而退
008_0083_b_19L是日疑我輩率射牌令隱後路故潜出
008_0083_b_20L軍兵千餘數距陣三十里許山野皆以
008_0083_b_21L搜探而來盖前日李謙受往還卽時
008_0083_b_22L牌等隱於公須串北山斬倭四級而來
008_0083_b_23L故然耳明十六日早飯喜八及倭僧日
008_0083_b_24L持酒與肴率鳥銃軍五十餘名

008_0083_c_01L그리고 나무 그늘 아래에 전별餞別의 자리를 마련하고는 시를 지어 서로 화답하며 은근히 위로하고 다음에 만날 것을 기약하며 전송하였습니다. 청정이 또 종이 10여 장을 보내 필적을 받아 가지고 돌아갔습니다. 작별할 임시에 청정이 사자를 보내어 말하였습니다.
“심과 행장이 약속한 일이 이루어지느냐 이루어지지 않느냐 등의 기별을 계속 서로 연락해서 소식이 끊어지지 않게 하면 그런 다행이 없겠다.”
이에 답하였습니다.
“한결같이 말한 대로 하겠다.”
대저 의등矣等(저희들)이 적장賊將에게 화해할 뜻을 선유宣諭하는 한편으로, 왜적의 형세를 관찰해 보건대, 성을 쌓은 것이 견고하고 호령號令은 나날이 새로웠으며, 군수품은 풍족하고 생활 형편은 여유가 있었습니다. 혹은 몇 층의 누각을 짓기도 하고, 혹은 큰 가옥을 짓기도 하였으며, 청정이 거처하는 곳은 마루 전체에 돗자리를 화려하게 깔고 금병풍을 둘러치고서 좋은 음식을 만끽하였으며, 한번 호령하면 모두 그대로 행해지면서 위령威令이 바람 일듯 하였습니다. 오래 머물러 있을 계책을 크게 세우고서, 바다를 건너갈 기세는 조금도 없었으며, 사치스럽고 참람僭濫하기가 왕후王侯의 생활보다도 더하였으므로 통분함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모某 등의 소원은, 중국에 들어가서 위로 천자에게 진달하고 아래로 조정에 고하여 중국의 양향糧餉 거만鉅萬을 운송하고 남병南兵 다수를 조발調發한 뒤에, 곧장 왜적의 소굴을 박살내어 살아 있는 종자가 없게 하고야 마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이상의 내용을 빠짐없이 품계稟啓해 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별도로 왜적의 정세를 보고한 글
청정이 반복해서 행장과 심유경이 서로 약속한 일이 이루어질지의 여부에 대해서 물었고, 우리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하면 얼굴에 기쁜 기색을 띄곤 하였습니다. 청정의 저의가 어디에 있는지 분명히 알 수는 없었습니다만, 그 언사言辭를 관찰하며 짐작해 보건대, 만약 행장의 일이 이루어지지 않아 상국上國을 침범하는 거사가 있게 될 경우에는, 행장과 관백의 죄를 성토하며 반기를 들려고 하는 뜻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008_0083_c_01L還于公須串前樹陰下設餞題詩共爲
008_0083_c_02L和答慇懃慰禮以期後會而送淸正
008_0083_c_03L亦送紙十餘張受書跡而歸臨別淸正
008_0083_c_04L送使曰沈行約束事成不成等奇連續
008_0083_c_05L相通使不阻音極斯幸甚幸甚云
008_0083_c_06L曰一如所示也大抵矣等與賊將宣諭
008_0083_c_07L和諧之意仍觀賊勢城基牢固號令
008_0083_c_08L日新軍需周給生道有餘或造層閣
008_0083_c_09L或造大屋至於淸正所居處則滿堂華
008_0083_c_10L繞以金屛喫以美食一呼而百諾
008_0083_c_11L俱至威令生風大有久住之計小無
008_0083_c_12L渡海之勢奢侈僭濫有甚於王侯之狀
008_0083_c_13L不勝痛憤某等願入中國上達于天子
008_0083_c_14L下告于朝廷運中國糧餉鉅萬發南兵
008_0083_c_15L多數直擣巢穴使無遺類然後已也
008_0083_c_16L伏乞一一枚啓幸甚

008_0083_c_17L

008_0083_c_18L別告賊情

008_0083_c_19L
淸正反覆行長與惟敬相約之事成不
008_0083_c_20L成如何而曰不成則喜動於色雖不
008_0083_c_21L能的知淸正微意所在觀其言辤而斟
008_0083_c_22L則若行長之事不成而有犯上國之
008_0083_c_23L則聲罪行長與關白而欲反戈之意
008_0083_c_24L「上」作「二」{甲}

008_0084_a_01L
그리고 청정이 말끝마다 “수길은 왕이 아니고 우리 왕이 따로 있다. 운운.” 하였는데, 그가 말하는 왕이라는 자가 원씨源氏의 어떤 후예를 말하는 것인지, 일본에서 말하는 황제를 가리켜 말하는 것인지 힐문詰問을 해 보고, 이에 대해서 그가 어떻게 말하는지 들어 보면, 그 내용을 알아낼 수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만, 제가 원씨의 일을 알지 못해서 상세히 물어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상 탐정기는 원문에 제목 없이 기록되어 모처某處에 보고된 것이다. 그런데 왕래한 날짜를 상고해 보면, 이 한 통은 도원수에게 먼저 올려서 치계馳啓하도록 했을 것이고, 또 한 통은 독부 유정劉綎에게 바쳤을 것이다.
◆ 『선묘보감宣廟寶鑑』을 상고해 보건대, 갑오년(1594, 선조 27) 9월에 심유경이 왜의 차인差人 소서비小西飛와 함께 다시 왜영倭營에 들어갔다고 하였다. 또 소서비가 명나라에 들어갔을 적에 중국 조정에서 세 가지 일을 힐문하였는데, 그 내용은, 첫째 책봉冊封만 청하고 조공朝貢은 청하지 말 것, 둘째 한 사람의 왜인도 부산에 머물지 말 것, 셋째 영원히 조선을 침략하지 말 것 등이었으며, 만약 이 약속대로 하면 바로 책봉해 주겠지만 약속대로 하지 않으면 불가하다고 하니, 소서비가 약속을 준수하겠다고 하면서 하늘을 가리켜 맹서하였다. 이에 왜를 책봉하는 일을 마침내 결정한 뒤에 소서비를 보내도록 명하여 다시 왜영에 들어가서 책봉을 허락한 일을 선유宣諭하게 하고, 주둔한 군사를 모조리 철수하게 했다고 하였다.
그런데 지금 이 송운의 일기를 보면, 청정이 보여 준 강화의 다섯 가지 조건을 심유경과 행장의 모책謀策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사리에 근사하지 않은 듯하다. 심유경이 명나라의 신자臣子로서 결단코 적노賊奴가 구혼求婚한다는 등의 말을 가지고 중국 조정에 감히 주달奏達하지 못했을 것이니, 이는 필시 청정 자신이 흉측한 말을 조작하여 화의의 계책을 저지하려고 꾸민 꾀일 것이다. 그럼에도 봉왜사封倭使28)가 사명使命을 욕되게 한 뒤로 이 설이 일제히 퍼지면서 심유경의 죄가 무슨 수로도 용서받을 수 없게 되었으니, 애석한 일이다.
◆ 또 서애西厓(柳成龍)의 『징비록懲毖錄』을 상고해 보건대,

008_0084_a_01L言必稱秀吉非王也有吾王也云云
008_0084_a_02L若詰問所謂王者有源氏之裔而云乎
008_0084_a_03L指日本所謂皇帝而云乎以此而聽其
008_0084_a_04L則庶乎探得其意而某不知源氏之
008_0084_a_05L而不能詳問也云

008_0084_a_06L
右探情記本草無題面所錄某處
008_0084_a_07L呈納然考其往來月日則此一通
008_0084_a_08L當先呈于都元帥使之馳啓又以
008_0084_a_09L一通納于劉督府
◆按宣廟寶鑑
008_0084_a_10L甲午九月沈惟敬與倭差人小西
008_0084_a_11L還入倭營云而小西飛之入大
008_0084_a_12L明也皇朝詰以三事一但求封不
008_0084_a_13L求貢二一倭不留釜山三永不侵
008_0084_a_14L朝鮮如約即封不如約不可
008_0084_a_15L西飛請遵約束指天爲誓於是封
008_0084_a_16L倭事遂決命遣小西飛還入倭營
008_0084_a_17L宣諭許封令盡撤屯云今此松
008_0084_a_18L雲日記中淸正所示講和五件事
008_0084_a_19L謂是沈行之策云者似不近理
008_0084_a_20L敬以大明臣子決不敢以賊奴求
008_0084_a_21L婚等語奏諸天朝此必是淸正
008_0084_a_22L自做兇言沮遏和議之計而封倭
008_0084_a_23L使辱命之後此說一播而惟敬
008_0084_a_24L之罪百無可赦惜哉
◆又按西厓

008_0084_b_01L심유경이 상국相國 김명원金命元에게 보낸 글이 실려 있는데, 거기에서 일컬은 송운의 설화說話는 이것과는 조금 다르다. 거기에서는 8도道를 할양한다거나 국왕이 바다를 건넌다는 등의 말로 또 한층 더 나아갔고, 이에 대해서 입이 마르도록 스스로 변론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의 일을 대체적으로 논하건대, 행장은 한 번 평양에서 패한 뒤로 돌아가서 수길에게 보고할 면목이 없었기 때문에 왕으로 봉해 주는 하나의 일을 얻어서 자기의 공으로 삼으려고 하였고, 심유경은 왜병을 철수시키는 것으로 자기의 공을 삼으려 하면서 혹시라도 요행히 성공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적정賊情을 상세히 아뢸 겨를이 없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청정은 사람됨이 본시 사납고 용맹스러워 일내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서 그 용맹을 자부하며 자기가 향하는 곳에 대적할 자가 없다고 말하였는데, 행장의 무리가 하는 일에 분개한 나머지 이런 다섯 가지 패악스럽기 그지없는 말을 지어내어 우리나라 사람들을 마음속으로 겁먹게 한 것이다. 그래서 “나의 속생각은 심이나 행장과 다르다.”라고 하면서 그들의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면 기뻐하는 기색을 드러낸 것이니, 송운을 세 차례나 그의 진영에 들어가게 했어도 어떻게 하나라도 좋은 소식을 얻을 수 있었겠는가.
◆ 내가 일본에 갔을 적에 그들 가운데 대관大官을 보아도 모두 글을 지을 줄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더러 필담筆談으로 문답을 할 때면, 비루하고 유치해서 말이 두서가 없고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 부장 희팔이 여러 가지 일을 힐문하며 써 준 말들을 살펴보아도 애매모호하고 연결이 되지 않아 전연 맥락이 닿지 않으니, 이것이 바로 왜관인倭官人의 문자의 본색이다. 그러니 청정의 장막 아래에서 〈칙륵가勑勒歌〉29)의 솜씨를 얻어 볼 수나 있겠는가. 한번 웃을 따름이다.
갑오년 5월에 유 독부를 찾아가 뵙고서 말한 것을 기록한 글
지난달 24일에 원수부元帥府의령宜寧에 주둔하였다. ◆ 계사년 6월에 진주성晉州城이 함락된 뒤에 권율權慄에게 명하여 김명원金命元을 대신해서 도원수都元帥가 되게 하였다.를 출발하여

008_0084_b_01L懲毖錄載沈惟敬抵金相國命元
008_0084_b_02L書所稱松雲說話與此小異其曰
008_0084_b_03L割八道曰國王渡海等語又加一
008_0084_b_04L極口自辨然盖論當時事
008_0084_b_05L長則一敗於平壞無面目歸報秀
008_0084_b_06L吉故欲得封王一事以爲功惟敬
008_0084_b_07L則欲以撤倭兵爲功僥倖其或成
008_0084_b_08L未及詳奏賊情而淸正爲人
008_0084_b_09L本是梟雄喜事者耳自負其勇
008_0084_b_10L可以所向無敵而憤於行長軰所
008_0084_b_11L出此五件絕悖之言以怯我國
008_0084_b_12L人心所以曰我心腹與沈行異也
008_0084_b_13L所以言沈事不成則喜動於色使
008_0084_b_14L松雲三入彼陣那有一個好消息
008_0084_b_15L可得
◆余赴日本時見彼中大官
008_0084_b_16L皆不解屬文或以筆談酬問則陋
008_0084_b_17L朴癡呆語無倫序讀不能句
008_0084_b_18L觀副將喜八所書給諸般詰問之語
008_0084_b_19L儱侗斷續全沒脉理的是倭官人
008_0084_b_20L文字本色淸正帳下安得有勑勒
008_0084_b_21L歌手段一笑

008_0084_b_22L

008_0084_b_23L甲午五月徃謁劉督府言事記

008_0084_b_24L
去月二十四日自元帥府屯宜寧◆癸巳六
月普州陷後命權

008_0084_c_01L28일에 남원에 도착하였다. 그날 비를 맞아 의복과 행장이 모두 젖었으므로 독부督府에 나아가 뵙지도 못하였고, 초탐기哨探記와 청정의 답서도 올리지 못하였다.
이튿날 29일에 먼저 접반사또接伴使道에게 나아가 뵈었다. 그리고는 동행한 지휘사指揮使 이겸수가 초탐기와 청정의 글을 가지고 가서 독부에게 올렸다. 독부가 초탐기와 청정 적추賊酋의 답서를 두세 번 읽은 뒤에 이겸수를 돌아보며 말하였다.
“그대들이 승냥이와 범의 굴을 왕복하면서도 몸에 탈이 없으니 내 마음이 매우 기쁘오. 송운도 여기에 함께 왔소?”
이겸수가 대답하였다.
“그도 밖에 와 있습니다.”
이에 밥과 술을 대접하라고 명하고는 말하였다.
“그대들은 우선 머물러 쉬도록 하시오. 천천히 부를 터이니 그때 만나서 계책을 의논합시다.”
물러나와 성 서쪽 대국사大國寺30)에 묵었다. 그런데 초삼일이 되어도 부르는 명이 없었으므로 이겸수로 하여금 통사通事 유의빈柳依儐을 통하여 하직하고 돌아가겠다는 뜻을 가만히 비추게 하고는, 이와 함께 곶감 두 접과 잣 두 말을 소단小單에 구록具錄하여 독부에 직접 바치게 하니, 독부가 바치는 것을 허락하고는 통사에게 명하여 말을 전하였다.
“내일 오도록 하라.”
이튿날 초사일에 함께 독부에 나아가서 통사 이희인李希仁을 통해 알현을 요청했더니, 외청外廳에 머물러 있으라고 명하고 음식을 대접하였다. 명을 기다리며 저물 때까지 있었으나 제장諸將의 회음會飮 때문에 나아가 알현하지 못하고서 물러나와 산성山城의 절에서 묵었다.
이튿날 초오일에 독부가 관리를 보내어 나와 이겸수를 명소命召하기에 즉시 독부에 달려갔다. 아직 들어가 뵙지 못한 채 밖에 머물러 기다리던 중에 먼저 유첩諭帖과 왜倭에게 답하는 편지 등의 글을 보여 주었다. 이윽고 들어오라는 명이 있기에 나와 이겸수가 아래에서 절하고 앞으로 나아가니 자리에 앉도록 권하였다. 그리고는 독부가 간곡하게 말하였다.
“그대들이 어렵고 힘든 것도 마다하지 않고 적의 소굴에 들어갔다가 탈 없이 잘 돌아왔으니 얼마나 수고가 많았겠소. 그대들을 위하여 치하하는 바이오.”

008_0084_c_01L慄代金命元
爲都元帥
發行二十八日到南原同日
008_0084_c_02L冒雨衣裝盡濕未得到謁于督府
008_0084_c_03L未呈哨探記與淸正答書而明二十九
008_0084_c_04L先進于接伴使道仍同道指揮使李
008_0084_c_05L謙受持哨探記與淸正書納呈于督
008_0084_c_06L督府歷覽哨探記與淸正賊酋答書
008_0084_c_07L數三遍而後顧李謙受曰汝等徃復豺
008_0084_c_08L虎之窟身尙無恙予心所悅松雲亦
008_0084_c_09L來耶答曰亦來在外耳仍命饋飯與酒
008_0084_c_10L汝等姑爲留歇徐當召入相見計
008_0084_c_11L退宿于城西大國寺至于初三日
008_0084_c_12L不有召命故使李謙受因通事柳依儐
008_0084_c_13L微諷辭歸之意仍以乾杮二貼栢子二
008_0084_c_14L具錄小單親納于督府督府許納
008_0084_c_15L命通事傳言曰明當進來矣明初四日
008_0084_c_16L齊進于府下因通事李希仁請見命留
008_0084_c_17L外廳仍饋飯待命至暮以諸將會飮
008_0084_c_18L不得進謁而退宿山城寺明初五日
008_0084_c_19L督府使吏命召我與李謙受即馳進于
008_0084_c_20L府下召未入謁留待外處先示以諭
008_0084_c_21L帖與答倭等書旣而命進于座下我與
008_0084_c_22L李謙受拜下而進則俯惠坐汝之命
008_0084_c_23L仍諄諄命曰汝等不避艱險冒入賊窟
008_0084_c_24L無恙好還不其勞乎爲汝等取之

008_0085_a_01L
우리가 답하였다.
“나라의 일 때문에 왕복하였는데, 수고한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나 같은 중은 본래 산에 있어야 할 사람인데, 때마침 왜란을 당하였으므로 병세兵勢를 도우려는 뜻을 지니고서 감히 위의危疑한 때에 생사를 무릅쓰게 되었습니다. 비록 중의 도리에는 미안한 점이 있을지라도, 다만 촌심寸心은 우리 주상을 위하여 간절할 따름입니다.”
독부가 말하였다.
“지금 급박한 시대를 당하여 그대가 일개 승려인 산인山人의 신분으로 나라의 일에 힘쓸 것을 생각하여 승속僧俗의 도리가 다른 것을 헤아리지 않고 떨쳐 일어나 적을 섬멸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인인仁人 군자의 마음이 아니겠소. 남아의 지절志節은 본래 이와 같아야 할 것이니, 승속이 무슨 관계가 있으리오.”
내가 엎드려 사례하고 말하였다.
“나 같은 중은 일찍이 조정에서 벼슬한 일도 없고, 또 중국에 가서 관광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황차 독부와 어떻게 반면半面의 연분이라도 가질 수가 있었겠습니까.31) 그런데 왜놈과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거짓말을 많이 하게 되었으니, 독부께서 죄를 주시기를 기다릴 따름입니다.”
독부가 답하였다.
“당시 상황에 따라서 일을 그렇게 처리한 것이니, 무슨 허물이 있겠소? 귀승貴僧이 잘 응대한 것을 가상하게 여기는 바이오.”
유첩諭帖을 보여 주며 말하였다.
“옛날 우리 명나라에 요 대사姚大師32)라는 승려가 있었는데, 귀승처럼 나랏일을 잘 도모하였소. 그래서 우리 명나라가 그를 의뢰하였으므로 그 풍성한 공렬功烈이 지금까지도 사람의 이목에 빛나고 있다오. 그대가 나랏일을 도모하는 것도 이와 같이 해야 할 것이니, 그러면 포상褒賞의 은전恩典이 중국과 외국에 어찌 차이가 있으리오?”
내가 엎드려 사례하고 일어나서 말하였다.
“심 유격沈游擊은 어떤 사람입니까. 혼인을 청하고, 땅을 떼어 준다는 두 가지 일은 비록 나무하고 소 먹이는 자들이라도 차마 입에 올리지 못할 터인데, 더군다나 신하의 직분으로서 그렇게 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천조天朝의 위령威靈이 혁혁한데, 그 사람의 악한 마음이 이 정도일 줄은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독부가 말하였다.
“귀승의 말이 옳소. 저 심沈이란 자는 단지 왜왕을 책봉하고 조공을 허락하는 일로 왕복하였을 뿐, 구혼이나 할지割地 등의 일은 천자의 조정에서 감히 입도 벙긋하지 못하는 형편이오. 그런데 그가 와서 왜인들과 말하는 것을 보면 이와 같으니, 끝내 어떻게 될는지 알 수가 없소. 그 사람은 일개 소인일 뿐이오.33) 구혼 등의 일은 비록 품팔이꾼이나 걸식하는 자의 딸이라 할지라도 가볍게 허락할 리가 만무한데,

008_0085_a_01L曰以王事而往復何勞之有我僧本在
008_0085_a_02L山人適當倭亂志助兵勢敢以冒生
008_0085_a_03L死於危疑之際雖未安於僧道而但寸
008_0085_a_04L心切爲我主耳府曰時丁孔棘汝僧一
008_0085_a_05L介山人念勤國務不計僧俗之異道
008_0085_a_06L奮起殲賊不其仁人君子之心乎男兒
008_0085_a_07L志節固當如是僧俗何關伏而謝曰
008_0085_a_08L我僧曾無仕朝之事又無觀周之理
008_0085_a_09L與督府其有半面之分乎其與倭奴相
008_0085_a_10L多發僞言仰督府待罪耳答曰臨
008_0085_a_11L機處事如是安是有咎爲汝僧嘉乃
008_0085_a_12L其善應仍示諭帖曰昔我大明有僧
008_0085_a_13L姚大師如汝僧善謀國事故大明倚賴
008_0085_a_14L其豊功盛烈至于今耀人耳目汝圖國
008_0085_a_15L亦當如此則褒賞之典中外何異
008_0085_a_16L伏而謝起而言曰沈游擊何如人也
008_0085_a_17L婚割地兩事雖在芻牧之軰尙未忍置
008_0085_a_18L況爲臣之職其可耶未知其可也
008_0085_a_19L以天朝威靈赫赫而不圖其人爲惡之
008_0085_a_20L至於斯也府曰汝僧之言是矣彼沈
008_0085_a_21L只以封王准貢往復耳求婚割地等
008_0085_a_22L莫敢出口於天子之庭而其來與倭
008_0085_a_23L言則如是未知終若何也其爲人一小
008_0085_a_24L人耳求婚等事則雖以傭丐之女

008_0085_b_01L천자의 성녀聖女를 어떻게 왜놈의 나라에 보낼 수가 있겠소? 절대로 그럴 리는 없소이다.”
이에 내가 답하였다.
“우리 소방小邦이 위로 대국에 소속된 까닭에 군대를 만 리 먼 길에 수고롭게 하시니, 환란을 구제하는 그 은혜야말로 자손의 나라를 대하는 것과 같은 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놈의 잔당殘黨이 아직도 바닷가를 점거하고서 흉악하고 교활한 짓을 멋대로 행하고 있으니, 이러한 때를 당하여 독부께서 혹시라도 철병撤兵하는 거조를 취하신다면, 우리나라의 남은 백성이 어디에 의지하여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그저 승냥이와 호랑이 입 속의 피와 고기가 되고 말 것이니, 종사宗社를 위해서 통곡할 따름입니다.”
독부가 다시 말하였다.
“세勢에는 강약이 있어도 병兵에는 다소多少가 없는 법이니, 내가 나의 병력 5천을 가지고 교전交戰을 할 만하면 교전을 해서 성패成敗 간에 한번 결판을 내었을 것인데, 내가 주장主將에게 절제節制를 받는 몸이라서 주장의 명령이 없으면 감히 경솔하게 군대를 움직일 수 없는 사연이 있소이다. 내가 7월~8월 사이에는 군대를 이끌고 돌아갈 것인데, 그 전에 다행히 일이 결판이 난다면, 모두 그대들의 공로라고 할 것이니, 더욱 힘쓰기 바라오.”
청포靑布 1단段과 면주綿紬 1단을 나에게 주고, 또 면주 1단을 이겸수에게 주면서 말하였다.
“내가 먼 길 다녀온 그대들을 위로하는 뜻으로 주는 것이오.”
우리가 선물을 받고 사례하며 말하였다.
“우리의 수고라고 한다면 모두 신자臣子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인데, 지금 대인大人의 은사恩賜를 받음에 상을 주시는 것 같으니, 우리 마음에 유독 부끄러움이 없겠습니까. 오히려 마음이 편치 못합니다.”
독부가 답하였다.
“내가 그대들의 뜻을 귀하게 여겨서 그런 것일 뿐이니, 어찌 은사랄 것이 있겠소?”
그리고는 유첩과 왜에 답하는 글을 건네주며 말하였다.
“귀승은 관계되는 바가 매우 중하니, 몸을 조심하여 가벼이 출입하지 마시오.”
이겸수를 가리켜 말하였다.
“지금 이 편지는 수재秀才를 시켜서 잘 전하게 하는 것이 좋겠소. 내가 도모하는 일이 있으면 귀승과 그대를 부를 것이니, 그때 와서 적의 소굴에 들어갈지의 여부를 다시 상의합시다.”
우리가 절하고 사례하며 말하였다.
“독부의 명이 지극하고 극진하니, 삼가 가르침대로 따르겠습니다.”
독부가 또 쌀 서 말과 말먹이 콩 다섯 말을 주도록 명하고는 말하였다.
“그대가 거느린 사람들을 먹이고 돌려보내도록 하오.”

008_0085_b_01L無輕許之理以天子聖女豈有委之於
008_0085_b_02L倭奴之國乎萬萬無理矣答曰我小邦
008_0085_b_03L仰屬于大國勞師萬里其恤患之恩
008_0085_b_04L有同子姓之國而倭奴餘孽尙據海陲
008_0085_b_05L放逞兇猾當此之時督府倘有撤兵之
008_0085_b_06L則我國餘民倚何得保徒爲豺虎
008_0085_b_07L口血肉而已爲宗社痛哭耳府曰勢有
008_0085_b_08L强弱而兵無多少我以我兵五千
008_0085_b_09L以交戰則戰矣於成敗間一決而我受
008_0085_b_10L節制於主將者耳不有主將之令則未
008_0085_b_11L敢輕易動兵故也予當還兵于七八月
008_0085_b_12L之間其前幸有事決則悉以汝等之功
008_0085_b_13L勉哉勉哉因以靑布一段綿紬一段許
008_0085_b_14L又綿紬一段許李謙受曰予慰遠
008_0085_b_15L行矣我等受賜而謝曰我等之勞
008_0085_b_16L出於臣子之所當爲而今受大人之賜
008_0085_b_17L涉於施賞於我心獨無愧乎反爲未安
008_0085_b_18L答曰予貴汝等之志耳何有賜乎仍授
008_0085_b_19L諭帖與答倭書曰汝僧則所係甚重
008_0085_b_20L勿輕易出入指李謙受曰今書則使秀
008_0085_b_21L才善傳可也我有圖事則呼汝僧汝
008_0085_b_22L當來議更入賊巢當否我等拜謝曰
008_0085_b_23L督府之命至矣盡矣謹受敎矣又命
008_0085_b_24L賜米三斗馬太五斗曰饋汝率人而還

008_0085_c_01L
또 명하였다.
“힘쓰고 힘쓰시오. 내가 군대를 이끌고 돌아가게 되면, 그대의 왕에게 자세히 말해서 각별히 포상하게 하겠소. 아무쪼록 힘쓰기 바라오.”
우리가 재삼 절하고 사례하며 말하였다.
“신자臣子가 된 도리로서는 단지 그 마음을 다해야 할 뿐이니, 어찌 감히 포상을 바라겠습니까?”
그리고는 물러나와 산성의 절에서 묵었다. 이튿날 초육일에 다시 독부에 들어가서 쌀과 콩을 준 것을 사례하고, 그 길로 접반사또接伴使道에게 나아가 사유를 갖추어 치계馳啓하게 하였다. 그리고는 이튿날 초칠일에 비로소 출발하여 돌아왔다.
송운이 독부와 문답한 것을 보면, 모두 심유경에게 책임을 돌리고 있으나, 구혼求婚과 할지割地 등의 말이 또 어찌 참으로 유경의 입에서 나왔겠는가. 유경은 우리나라의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공은 크고 죄는 적다. 단기單騎로 적진에 치달려 들어간 것이 세 번이고, 능히 몇 마디 말로 적병賊兵을 천 리나 물러나게 하였다. 단지 왜왕을 책봉하는 일에 한 번 실패한 뒤로 왜적이 다시 바다를 건너오면서 죄가 유경에게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나 유경의 일은 『징비록懲毖錄』 가운데 자세히 실려 있으니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갑오년 7월에 재차 청정淸正의 진영에 들어가서 정탐한 기록
7월 초육일에 울산 군수의 군관인 장희춘蔣希春34)을 보내 먼저 통지하게 하였다. 그 내용은 송운 및 좌병사左兵使 군관軍官 북부주부北部主簿인 이겸수와 충청방사忠淸防使 군관 판관判官 최복한崔福漢과 경상방사慶尙防使 군관 주부 김언복金彦福, 그리고 송운이 인솔한 수문장守門將 김사식金思湜과 출신出身 임언호林彦豪ㆍ김유엄金有儼 및 아병牙兵 등 37인이 동행한다는 것이었다.
7일에 장마로 불은 물에 길이 막혀서 9일에야 물을 건너 10일에 곧바로 적진에 도착하였다.
그때 마침 적장賊將 청정은 부산에 가서 돌아오지 않았고, 부장副將 희팔喜八도 마중하러 나가 있었는데,

008_0085_c_01L可也又命曰勉旃勉旃我當還兵
008_0085_c_02L言于汝王各別褒賞耳十分勉旃
008_0085_c_03L等再三拜謝曰爲臣之道但當盡其心
008_0085_c_04L敢以褒賞爲耶退宿于山城寺
008_0085_c_05L初六日更入府下謝賜糧太仍進于接
008_0085_c_06L伴使道具由馳啓明初七日始發還行

008_0085_c_07L
松雲之與督府問答莫不致責於
008_0085_c_08L沈惟敬而求婚割地等語亦豈眞
008_0085_c_09L出於惟敬之口耶惟敬於我國事
008_0085_c_10L功大罪小單騎馳入賊陣者三
008_0085_c_11L以片言退賊兵千里只以封倭事
008_0085_c_12L一敗之後賊復渡海而罪歸惟敬
008_0085_c_13L然惟敬事具在懲毖錄中可以叅
008_0085_c_14L

008_0085_c_15L

008_0085_c_16L甲午七月再入淸正陣中探情記

008_0085_c_17L
七月初六日使蔚山郡守軍官蔣希春
008_0085_c_18L付送先聲松雲及左兵使軍官北部主
008_0085_c_19L簿李謙受忠淸防使軍官判官崔福漠
008_0085_c_20L慶尙防使軍官主簿金彥福松雲所率
008_0085_c_21L守門將金思湜出身林彥豪金有儼及
008_0085_c_22L牙兵等三十七人同行七日滯雨阻水
008_0085_c_23L九日渡水十日直到賊陣適賊將淸正
008_0085_c_24L徃釜山未還副將喜八亦以迎逢出歸

008_0086_a_01L조금 뒤에 청정과 함께 돌아왔다. 희팔이 우리를 보고 반가워하며 글로 써서 보였다.
“송운은 어째서 서울에 갔다가 이렇게 늦게 오는가? 대상관大上官이 무척 기다렸다.”
답하였다.
“그렇게 되었다.”
밤중에 희팔이 청정을 만나고 와서 청정의 말로 우리에게 말하였다.
“장마가 져서 땅이 질척거리는데 오게 하느라 노고를 끼쳐서 매우 미안하다. 당장에 서로 만나 보면 좋겠으나 피차 피로할 터이니 날이 밝기를 기다려서 상의하는 것이 좋겠다.”
11일, 아침을 먹은 뒤에 희팔이 물었다.
“독부의 마음속의 일을 자세히 알아 가지고 왔는가?”
답하였다.
“매우 잘 안다.”
그가 또 물었다.
“송운은 서울에 갔으니, 국왕의 마음속의 일도 잘 아는가?”
답하였다.
“성상의 마음은 독부의 마음과 한가지이다.”
그가 또 물었다.
“도독부가 제일 높은 상관인가, 아니면 별도로 상관이 또 있는가?”
답하였다.
“독부는 대장군大將軍이라서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모두 혼자 결단하여 천자에게 품달稟達한다.”
그가 또 물었다.
“유격游擊이라는 것은 무슨 벼슬인가?”
답하였다.
“이 제독李提督(李如松)의 하관下官이다.”
그가 물었다.
“하관의 신분이라면 어떻게 행장行長과 강화講和를 한단 말인가?”
답하였다.
“그러니까 성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가 또 물었다.
“지난달 25일에 명나라 관원이라고 칭하는 자가 행장의 처소에서 와서 화의和議가 이미 정해졌다고 했다는데, 그러한가?”
답하였다.
“전한 자가 멋대로 전한 것이다. 화의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행장은 몰라도 나는 잘 안다.”
그가 또 물었다.
“내가 영안永安(함경도)에 있을 적에 명나라 사람 풍숙굉馮淑紘과 병부兵部 원 노야袁老爺35)가 함께 와서 나를 보았는데, 이 두 분은 어느 곳 사람인가?”
답하였다.
“이들은 모두 명나라 사람이라서 우리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이날 저녁에 희팔이 청정의 처소에 들어가서 우리를 맞아 서로 만나게 하려 할 즈음에 마침 송운이 신기身氣가 불편하여 사양했더니, 밤이 깊어지자 나와서 청정의 전하는 말로 송운의 신기가 불편한 것을 위로하고는, 이겸수를 청하여 희팔의 개인 숙소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통사通事 김삼근金三斤을 통하여 청정의 말을 전하였다.

008_0086_a_01L俄而與淸正俱還喜八見我等欣慰書
008_0086_a_02L示曰松雲何以上京遲來耶大上官待
008_0086_a_03L之苦矣答曰唯唯夜半喜八入見淸
008_0086_a_04L正出來以淸正言語我曰霖雨泥濘
008_0086_a_05L行李勞苦甚爲未安卽當相敍而彼
008_0086_a_06L此俱勞待明相議可也十一日朝後
008_0086_a_07L喜八問曰督府心事備知而來耶答曰
008_0086_a_08L甚知又問松雲徃京城國王心事亦知
008_0086_a_09L答曰聖心與督府心一也又問都督
008_0086_a_10L府最上官乎別有上官耶答曰督府大
008_0086_a_11L將軍事無大小擧皆自斷禀于天子
008_0086_a_12L又問游擊者何官乎答曰李提督下
008_0086_a_13L官也曰旣爲下官則何與行長講和乎
008_0086_a_14L答曰玆所以不成也又問前月二十五
008_0086_a_15L大明官稱云者來于行長所和議
008_0086_a_16L已㝎云然耶答曰傳之者妄也和議不
008_0086_a_17L行長則不知而我則甚知也又問
008_0086_a_18L我在永安時大明人馮淑絃 [5] 兵部袁老
008_0086_a_19L同來見我此二公何處之人乎
008_0086_a_20L此皆大明之人我等未詳知也是日暮
008_0086_a_21L喜八入淸正處欲邀相見之際適松雲
008_0086_a_22L以氣不平辭焉夜深出來以淸正之言
008_0086_a_23L慰松雲不平之氣請李謙受入喜八私
008_0086_a_24L宿處與通事金三斤以淸正之言傳言

008_0086_b_01L
“여러분은 전일에 여기에 왔다가 떠난 뒤로 어찌하여 이처럼 오래 있다가 돌아왔는가? 이는 필시 행장 등과 몰래 통하며 왕래하고 나서 청정을 속임수로 꼬드기려 하여 억지로 지금 온 것일 뿐이다. 그리고 송운이 지난 4월에 들어와서 우리를 유인하여 맥추麥秋(보리 수확기)를 무사히 넘겼는데, 지금 또 와서 유인하는 것 역시 가을 곡식을 수확하고자 하는 꾀일 뿐이니, 어찌 참으로 강화하려고 하는 것이겠는가?”
답하였다.
“그렇지 않다. 너희들이 감히 우리나라를 침구侵寇하게 된 단서는 모두 행장行長과 의지義智 등에게서 나왔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은 비록 삼척동자라도 모두 이를 갈면서 그 고기를 씹어 먹으려고 한다. 우리나라가 너희들의 손에 모두 망할지라도 행장과 강화할 리는 절대로 없다는 것을 너희는 알아야 한다. 우리가 상관上官과 강화를 의논하려는 것은, 대개 상관이 우리나라에 와서 함부로 죽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왕자와 대신을 예우하며 돌려보내 준 은혜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 성상聖上께서도 치사致謝하려고 하시지만, 지금은 나랏일을 크고 작은 것 없이 모두 중국 장수가 결정을 하기 때문에 아직 감히 못하고 있을 뿐이니, 어찌 상관에게 무심해서 그런 것이겠는가?”
희팔이 속으로는 수긍하면서도, 말로는 거역하면서 또 말하였다.
“독부가 이미 명나라의 장수이고 보면, 유격과 행장의 화의가 이루어지고 이루어지지 않는지를 어찌 모르겠는가? 독부가 이미 화의가 이루어진 것을 알면서도 우리를 안심시키기 위해 그런 것인가?”
답하였다.
“심沈과 행장行長의 일이 이미 이루어졌다면, 독부에게 무슨 기공奇功이 있기에 도리어 우리를 보냈겠는가. 그리고 독부는 그들의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모두 알고 있기 때문에 상관과 강화를 의논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가 또 말하였다.
“지난해 3월 보름께 서울에 있을 적에 판관判官이라고 칭하는 사람을 시켜 화의할 뜻을 부쳐 보내었고, 그전에 평안도에 있을 때에는 중국 사신 두 사람이 우리를 보고 돌아가서는 아무 소식도 없었다. 지금 당신들이 출입하는 것도 이런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답하였다.
“그때는 행장이 ‘청정은 지위가 낮아서 일을 이룰 수 없다’라고 하면서 서로 통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008_0086_b_01L君等前日來此而去何如此之久而
008_0086_b_02L還來耶必與行長等潜通徃來後
008_0086_b_03L與誘誣淸正故强爲今來耳且松雲去
008_0086_b_04L四月八 [6] 來誘我等安過麥秋今又來
008_0086_b_05L誘者亦欲收穫西成之謀豈眞有講和
008_0086_b_06L者也答曰不然汝等敢寇我邦之端
008_0086_b_07L皆出於行長義智等我國之人雖三尺
008_0086_b_08L之童皆切齒欲食其肉雖我國盡滅
008_0086_b_09L於汝等之手萬無與行長講和也汝宜
008_0086_b_10L諒之我等欲與上官和議者盖上官於
008_0086_b_11L我國有不嗜妄殺而禮還王子及大臣
008_0086_b_12L之惠我聖上亦欲致謝而時則國之事
008_0086_b_13L無大小皆決於天將故未敢耳豈無
008_0086_b_14L意於上官耶喜八心肯而言則逆
008_0086_b_15L督府旣爲大明將則游擊行長和議
008_0086_b_16L成不成何以不知耶督府雖知已成
008_0086_b_17L而欲安我等之心故然耶答曰沈行事
008_0086_b_18L已成則於督府有何奇功而反送我也
008_0086_b_19L且督府悉知沈行事之不成故欲與上
008_0086_b_20L官論和耳又曰去年三月望在京城時
008_0086_b_21L使判官稱名人和議付送其前在平安
008_0086_b_22L天使二人見我等還後絶無消息
008_0086_b_23L今汝等出入不過如此答曰其時則行
008_0086_b_24L以淸正爲卑下而事不成者也使

008_0086_c_01L그러나 지금은 행장의 일이 이미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우리가 출입하는 것이 어찌 헛되겠는가?”
이겸수가 또 청정이 반기叛旗를 들게 할 꼬투리를 끄집어낼 목적으로 말을 만들어서 물었다.
“상관上官이 관백과 함께 군대를 일으켰는데, 관백은 무슨 덕이 있기에 왕이 되었고, 청정은 무슨 잘못이 있기에 신하가 되었는가?”
답하였다.
“청정과 관백은 한 마을 사람인데, 청정이 나이가 어려서 못된 것이다.”
이에 다시 물었다.
“대상관이 지금 이미 대장부가 되었고, 그 병세兵勢도 관백에게 조금도 꿀리지 않는데, 어찌하여 동해東海(일본)의 수장首將이 되지 못하는가?”
희팔이 말하였다.
“우리나라의 법에 의하면, 왕은 만세토록 바꾸지 않게 되어 있는데, 관백은 왕이 아니라 무관武官의 어른이다. 청정은 관백의 부장副將이니 어떻게 왕이 되겠는가?”
우리가 또 글로 써서 보였다.
“상관이 비록 왕은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유독 관백이야 될 수 없겠는가. 내가 이제 심과 행장의 화의가 이루어지지 않을 단서를 말할 것이니, 너희는 잘 듣도록 하라. 대저 관백은 시골 출신의 노복奴僕으로 요행히 뜻을 얻어 자기 군상君上을 죽이고 찬탈簒奪하였으니, 그 죄는 죽어도 용서받을 수가 없다. 그런데 지금 또 군사를 일으켜 일본 제도諸島의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이웃나라에까지 해를 끼쳤으므로 천하 사람들이 관백을 미워하고 원망하며 원수 정도로 여길 뿐만이 아니니, 이것이 바로 관백의 화의 요청을 듣지 않는 까닭이다. 그러나 만약 다른 사람이 관백을 대신하여 화의를 요청한다면, 어려울 것이 뭐가 있겠는가. 그리고 청정은 대대로 작록爵祿을 받고 인민을 사랑하며 왕자王者의 기상氣象을 지니고 있는데, 어째서 관백의 하인이 된단 말인가. 독부가 청정을 위하여 이 점을 애석하게 여기고 있다. 지금 청정이 만약 관백을 도모하고자 한다면, 독부가 힘껏 조력할 것이니, 그 일이 손바닥 뒤집는 것처럼 쉬울 것이다.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희팔이 말없이 한참 있다가 말하였다.
“이것은 불가하다. 관백은 이미 관백이 되었고, 청정은 그의 부하 장수가 되었으니, 우리나라의 법으로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이 될 수가 없다.”
이에 우리가 답하였다.
“그렇다면 관백은 본래 아랫사람이었는데,

008_0086_c_01L不得相通故然耳今則行長之事已爲
008_0086_c_02L不成我等之出入豈爲虗也李謙受
008_0086_c_03L又欲起淸正回戈之端設辭而問曰
008_0086_c_04L官與關白同起兵關白有何德而爲王
008_0086_c_05L淸正有何惡而爲臣耶答曰淸正與關
008_0086_c_06L一村之人淸正少故不爲也問曰
008_0086_c_07L大上官今旣爲大丈夫而其兵勢與關
008_0086_c_08L白略不上下何不爲首將於東海也
008_0086_c_09L八曰我國之法王者則萬世不改
008_0086_c_10L白非王乃武官之長淸正是關白之副
008_0086_c_11L將也何以爲王也又書示曰上官雖
008_0086_c_12L不爲王獨不爲關白耶我今請陳沈行
008_0086_c_13L不成之端汝其聽之夫關白村人之
008_0086_c_14L僕夫僥倖得志篡滅其君罪不容誅
008_0086_c_15L今又動兵盡殺日本諸島之人害及于
008_0086_c_16L隣國天下之嫉怨關白不啻如仇讎
008_0086_c_17L玆不聽關白之請和也若他人代關白
008_0086_c_18L而請和則何難之有且淸正世受爵祿
008_0086_c_19L慈愛人民有王者氣象則何以爲關白
008_0086_c_20L之下人耶督府爲淸正惜之也今者淸
008_0086_c_21L正若欲圖關白則督府一力擔當易如
008_0086_c_22L反掌此事如何喜八默而良久曰
008_0086_c_23L不可也關白已爲關白淸正爲下將
008_0086_c_24L我國之法下不爲上也答曰然則關白

008_0087_a_01L지금 어떻게 윗사람이 되었는가? 먼 옛날부터 지금까지 제왕帝王도 바꾸었는데, 하물며 관백 정도이겠는가? 청정이 관백이 되는 것은 지금이 좋은 기회이다.”
희팔이 거역하며 말하였다.
“불가하다.”
그러면서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비치더니, 조금 뒤에 물러가서 자게 하였다.
12일, 아침을 먹은 뒤에 왜승인 일진日眞ㆍ재전在田ㆍ천우天祐 등 세 명이 우리들을 찾아와 나란히 앉아서 모두 심과 행장의 화의가 이루어질지의 여부와 우리나라가 강화할 것인지의 일 등에 대해서 문답을 주고받았다. 정오 무렵에 청정이 아끼는 자라는 한 어린 왜인이 송운을 찾아와서 필적을 받기를 청하면서 소매 속에서 부채와 홍색ㆍ황색의 종이 10여 첩貼을 꺼내고, 또 2첩을 내놓고는 말하였다.
“이것은 왕자군王子君이 써 준 것이다.”
우리들이 건네받아 살펴보니, 거기에 쓴 시는 “대궐 위에서 곤룡포袞龍袍가 해와 달처럼 밝았는데, 동서로 나뉜 먼 길에서 뉘에게 안부를 물을거나.”라는 두 구절이었고, 그 끝에 또 계사년(1593, 선조 26) 4월 모일에 임해군臨海君이 썼다는 표시가 있었다.36) 또 다른 한 종이에는 “두 가닥 물 졸졸 흘러 집 주위를 울리는데, 향로에는 햇빛 비쳐 보랏빛 연기 모락모락.”이라는 두 구절이 있었고, 그 끝에 계사년 청화淸和(4월)에 호군護軍37)이 썼다는 말이 있었다.
저물녘에 희팔이 송운과 이겸수와 장희춘 및 통사 김언복 등을 인도하여 청정의 처소로 들어가니, 청정이 먼저 당중堂中에 앉아서 왜승 일진 등 3인과 이야기하다가 우리를 맞아 자리에 나란히 앉게 하였다. 내가 독부의 서신을 청정에게 내어 주니, 청정이 왜승의 무리로 하여금 펼쳐 보게 한 뒤에 청정이 붓을 쥐고 일본 말로 써서 왜승에게 주자, 왜승이 한문으로 써서 우리에게 보여 주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전일에 천자와 결혼한다는 일은 어떻게 되었는가?
둘째, 조선의 왕자 한 사람을 일본에 들여보낸다는 일은 어떻게 되었는가?
셋째, 조선의 네 개 도를 떼어서 일본에 귀속시킨다는 일은 어떻게 되었는가?
넷째, 조선의 대신을 일본에 볼모로 들여보낸다는 일은 어떻게 되었는가?

008_0087_a_01L本以下人今何爲上也萬萬古以來
008_0087_a_02L帝王尙有遆易況關白乎淸正爲關白
008_0087_a_03L此其時也喜八逆曰不可也面有不
008_0087_a_04L便之色已而許退宿十二日朝後
008_0087_a_05L本僧倭日眞在田天祐等三僧來見我
008_0087_a_06L等列坐皆以沈行和議成不成及我國
008_0087_a_07L和不和等事隨問隨答及午有一少倭
008_0087_a_08L乃淸正所愛者來見松雲請受書跡
008_0087_a_09L袖出扇柄及紅黃二色紙十餘貼又出
008_0087_a_10L二貼曰此王子君書跡也我等手閱見
008_0087_a_11L其所書之詩則殿上袞衣明日月
008_0087_a_12L遠路東西欲問誰兩絶而末端又書癸
008_0087_a_13L巳四月日臨海君着書矣其一紙則二
008_0087_a_14L水潺潺鳴屋際日照香爐生紫烟兩絶
008_0087_a_15L而末端書癸巳淸和護軍云及暮喜八
008_0087_a_16L引松雲李謙受蔣希春及通事金彥福等
008_0087_a_17L入于淸正處則淸正先坐於堂中與僧
008_0087_a_18L倭日眞等三人對話引我等列坐我以
008_0087_a_19L督府書給淸正淸正使僧倭軰開見後
008_0087_a_20L淸正執筆以日本之書書給僧倭僧倭
008_0087_a_21L以此國書書示我等其辭曰
008_0087_a_22L一前日與天子結婚事如何一朝鮮
008_0087_a_23L王子一人入送日本事如何一割朝
008_0087_a_24L鮮四箇道屬日本事何如一朝鮮大

008_0087_b_01L
다섯째, 예전과 같이 교린한다는 일은 어떻게 되었는가?
여기에 또 두 조목을 다음과 같이 추가하였다.
여섯째, 명나라 사람 하나를 볼모로 보내는 일은 어떠한가?
일곱째, 명나라는 무슨 물건을 가지고 일본과 통신할 것인가?
이에 우리가 답하였다.
“앞의 다섯 가지 일은 송운이 전일에 왔을 때 분명히 글로 답하였다. 또 지금 가지고 온 독부의 편지 속에도 전일의 송운의 답으로 답했으니, 다시 논할 수가 없다. 그리고 유격과 행장의 화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도 이 일이니, 다시 논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아래의 두 조목은 우리들이 마음대로 의논하여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요, 단지 독부가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
청정이 반문하였다.
“일본이 명나라와 화의하려는 것도 바로 이 다섯 가지 일이다.”
답하였다.
“전날 왔을 때에 대상관이 ‘내가 바라는 것은 심沈과 행장行長 등과는 같지 않다’라고 말하였으므로 우리가 이런 뜻으로 독부에게 고했더니, 독부 역시 이런 뜻으로 답한 것이다. 지금 가지고 온 편지도 대상관의 본심이 무엇인지 알고자 한 것인데, 이 다섯 가지 일은 유격과 행장이 이루지 못한 것이니, 다시 논할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이에 청정이 말하였다.
“그렇다면 독부가 일본과 화의하려고 하는 것은 무슨 일인가?”
답하였다.
“독부의 심사心事는 앞의 다섯 가지 조건과는 전혀 같지 않다.”
그리고 종이 쪽지에 글을 써서 보여 주었다.
“독부는 마음속으로 ‘상관이 호걸스러운 사람으로서 관백의 하인이 되는 것을 감수하고 있다’라고 생각하며 실로 개탄하고 있다. 그리하여 천자에게 아뢰어 상관을 일본의 관백으로 봉하고 군대로 도우려는 것이다.”
왜승 등이 이를 펼쳐 보고 읽자, 청정은 귀를 기울이고 들으면서 잠자코 다른 말이 없었으며, 왜승 일진이 붓으로 선을 둘러 표했다. 청정이 말하였다.
“왕년에 안변安邊과 서울에 있을 적에 중국 사신 풍숙굉과 병부의 원 노야가 첩문牒文을 지니고서 화의를 구하려고 한번 왕래한 뒤로 가타부타 아무 말이 없으니,

008_0087_b_01L臣入質日本事如何一如前交隣如
008_0087_b_02L又加二條曰一大明一人入質事
008_0087_b_03L如何一大明則以何物爲日本通信
008_0087_b_04L
008_0087_b_05L答曰前五條事松雲前日來時分明書
008_0087_b_06L又今來督府書中亦以前日松雲之
008_0087_b_07L答答之不可更論且游擊行長之不成
008_0087_b_08L亦此事也何須更論下二條非我
008_0087_b_09L等擅論㝎議者只在督府處之如何耳
008_0087_b_10L淸正問曰日本與大明和議者亦此五
008_0087_b_11L事也答曰前日來時大上官曰我所
008_0087_b_12L欲與沈行等不同云故我等持此意告
008_0087_b_13L督府督府亦以此意答今來之書
008_0087_b_14L知大上官本意也此五條事游擊行長
008_0087_b_15L之所不成者也何必更論淸正曰
008_0087_b_16L則督府與日本和議者是何事耶答曰
008_0087_b_17L督府心事與前五條甚不同遂以片紙
008_0087_b_18L書示曰督府心事則以爲上官以豪傑
008_0087_b_19L之人甘爲關白之下人實自慨然
008_0087_b_20L奏于天子以上官封爲日本關白以兵
008_0087_b_21L助之耳僧倭等開讀而淸正傾耳聽之
008_0087_b_22L默無他言倭僧日眞以筆區下淸正曰
008_0087_b_23L徃在安邊與京城唐使馮淑紘兵部袁
008_0087_b_24L老爺持牒求和一來一徃後無黑白

008_0087_c_01L이것이 일본이 기만을 당한 첫 번째 일이다. 유격游擊 등이 화의를 이루겠다고 맹서하여 나를 퇴각하게 하고는 명나라에 출입한 지 지금 몇 년이 지났는데도 여태 결정적인 말이 없으니, 이것이 일본이 기만을 당한 두 번째 일이다. 왕자군을 송환할 적에 약속한 것이 많이 있는데 한번 떠나간 뒤로 소식이 전혀 없으니, 이것이 일본이 기만을 당한 세 번째 일이다. 이와 같이 세 번이나 신의를 지키지 않았으니, 너희도 나를 속이기 위해서 왔을 것이다.”
송운이 답하였다.
“나는 산인山人으로 세상의 버림을 받고 오랫동안 산방에서 좌선한 사람인데, 감히 내가 속이기 위해서 왔다고 생각하는가? 그리고 왕자군이 약속했다는 글을 한번 보고 싶다.”
청정이 말하였다.
“당신네 나라에는 송운 한 사람만 거짓이 없고, 그 나머지는 모두 속이고 거짓말을 한다.”
또 말하였다.
“너희들 모두가 앞의 다섯 가지 일은 모두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무슨 일을 가지고 화의를 이룰 수 있단 말인가. 왕자군의 글은 꺼내어 보여 줄 요량이다.”
우리들이 상의한 결과, 항상 다섯 가지 일을 단호하게 거부만 하면, 그가 실정을 죄다 토로하지 않을 염려도 있겠기에 교린의 한 조목을 거론하여 그의 속마음을 낚아 볼 목적으로 말하였다.
“예전처럼 교린한다는 하나의 일은 앞으로 의논해 볼 여지가 있다. 그러나 기타 네 조목은 심 유격이 중국 조정에서 감히 거론하지도 못한 일인데, 지금 어떻게 감히 다시 논하겠는가?”
청정이 물었다.
“지난해에 심과 행장이 강화한 것은 속임수라서 실제로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내가 논의하는 것은 확실하고 거짓이 없는데, 어찌 이루어지지 못한단 말인가?”
답하였다.
“행장의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사리상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상관이 바라는 것도 이 다섯 가지 일로서 심이나 행장과 다를 것이 없으니, 어떻게 앞으로 이루어질 수가 있겠는가?”
이에 청정이 말하였다.
“이 다섯 가지 일은 바로 관백의 명이니, 이루지 않으면 안 된다.”
답하였다.
“비록 관백의 명이라 할지라도, 중국 조정의 뜻에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의리에도 전혀 합당하지 않으니,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한이 있어도, 이런 논의는 끝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청정이 물었다.
“그렇다면 무슨 일을 가지고 화의를 이룬단 말인가?”
답하였다.

008_0087_c_01L日本被欺一也游擊等以和自誓使我
008_0087_c_02L退下出入大明今已累歲迨無決言
008_0087_c_03L日本被斯二也王子君送還時多有所
008_0087_c_04L一去而絕無音信日本被欺三也
008_0087_c_05L有此三不信汝等亦欲欺我而來也
008_0087_c_06L雲答曰我則山人爲世所棄長年禪
008_0087_c_07L坐山房敢以欲僞而來耶且王子君約
008_0087_c_08L書欲見耳淸正曰汝國一松雲無僞
008_0087_c_09L其餘則皆詐僞也淸正又曰汝等皆曰
008_0087_c_10L前五事皆不成云然則以何事可成和
008_0087_c_11L議也王子君書則出示爲料我等相議
008_0087_c_12L以爲常以五條牢逆則疑彼不盡其實
008_0087_c_13L擧交隣一條欲釣其情曰如前交隣一
008_0087_c_14L則容有將議之勢其餘四條則沈
008_0087_c_15L游擊所不敢擧論於天庭者今何敢更
008_0087_c_16L淸正問曰去年沈行講和則僞也
008_0087_c_17L實不可成矣今我論議則的實無僞
008_0087_c_18L敢不成乎答曰行長之事不成理固然
008_0087_c_19L上官所欲亦此五事與沈行無
008_0087_c_20L豈有將成之理也淸正曰此五條事
008_0087_c_21L是關白之命不可不成答曰雖關白之
008_0087_c_22L不唯不合於天朝意也亦大不合於
008_0087_c_23L義理假使天地覆墜此議終不成也
008_0087_c_24L淸正問曰然則以何事而成和議也

008_0088_a_01L
“혹시 다른 좋은 소식이 있다면 몰라도, 다섯 가지 조목의 일 같은 것은 전에 이미 말을 다하였다. 이는 우리들이 다시 논의할 것이 아니니, 그저 돌아가서 독부에게 보고하여 처리하게 할 따름이다.”
청정이 말하였다.
“화의에 대한 일은 송운이 깊이 생각해서 서면으로 전달하라.”
답하였다.
“송운도 특별히 생각할 것이 없다. 독부의 글 속에 모두 들어 있으니, 또 무슨 말을 하겠는가?”
청정이 또 물었다.
“이 다섯 가지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무슨 일을 가지고 강화라고 칭하겠는가?”
답하였다.
“앞의 다섯 가지 일 중에 교린에 관한 한 가지 일은 비록 군부의 원수이긴 하지만 그래도 용서할 수 있으나, 그 나머지는 논의할 수가 없으니, 어떻게 하겠는가?”
청정이 말하였다.
“만약 교린을 가지고 논의한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
답하였다.
“조선은 몇 세대에 걸쳐 원씨源氏와 통상通商을 하면서 있는 물건과 없는 물건을 서로 교역하며 좋게 지냈을 뿐이다.38) 이 밖에 또 무엇을 더하겠는가?”
청정이 말하였다.
“이렇게 할 뿐이라면, 3년 동안 수고롭게 전쟁을 하고서도 끝내 아무런 공도 없게 되니, 이를 어찌하는가?”
답하였다.
“일본이 비록 10년 동안 전쟁을 했다 하더라도, 이는 이유 없는 군사를 일으켜 천하의 백성을 소란스럽게 한 것이다. 자기가 일으켜 자기가 수고한 것이니,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한사漢史』에서 ‘군대가 교만하면 멸망을 당한다’39)라고 하였다. 일본이 멸망을 자초한 것이니,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청정이 발끈하여 말하였다.
“행장과 의지 등은 절도絶島 속에서 소금 팔던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처음에 평안도를 침범하였을 때에 가는 곳마다 오래 머물러 시일을 지체한 나머지 국왕이 있는 곳을 놓쳐 버렸는가 하면, 날을 허비하면서 지구전을 벌이다가 끝내는 평양에서 패전을 당하였고, 또 중국인에게 기만을 당해 군사를 퇴각하여 남쪽으로 내려왔다. 그러나 나로 말하면, 위엄을 드날리며 향하는 곳마다 싸워서 이기지 못한 적이 없다. 북도北道(함경도)에 가서는 왕자와 여러 대신들을 사로잡기도 하였다. 북변北邊의 장수들 중에 나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자가 누가 있는가? 호지胡地에 깊이 들어가서 사로잡아 죽이고 도륙하며 못할 일 없이 하였는데 한 사람도 감히 대드는 자가 없었다. 지난해 여름에 행장 등이 진주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려다가 위태해지자 스스로 물러났는데,

008_0088_a_01L曰倘有別成好消息則可也如曰五事
008_0088_a_02L則前已盡言非我等所可更論只可歸
008_0088_a_03L告督府處之而已淸正曰和議事
008_0088_a_04L松雲甚思書進答曰松雲別無可思
008_0088_a_05L府書中已盡之又何可爲又問曰
008_0088_a_06L五事不成則以何事稱講和也答曰前
008_0088_a_07L五事中交隣一事則雖有君父之讎
008_0088_a_08L可容恕其餘則無可議者奈何淸正曰
008_0088_a_09L若以交隣論之如何則可也答曰朝鮮
008_0088_a_10L累世與源氏相通以物之有無相易
008_0088_a_11L徃來相好而已復何加焉淸正曰
008_0088_a_12L此而已則三年用兵之勞竟爲無功
008_0088_a_13L如何如何答曰日本雖用兵十年動無
008_0088_a_14L名之師騷天下之民自動自勞於我
008_0088_a_15L何與漢史曰兵驕者滅日本自取其
008_0088_a_16L何干我人哉淸正艴然曰行長義
008_0088_a_17L智等不過絶島中賣鹽之人初犯平安
008_0088_a_18L處處淹留延時引日玆致失王之
008_0088_a_19L曠日持久終見平壤之敗又被唐
008_0088_a_20L人之欺退兵南下矣如我則揚威所向
008_0088_a_21L戰無不克至於北道坐虜王子及諸大
008_0088_a_22L北邊諸將能脫我手者誰也深入
008_0088_a_23L胡地擒殺屠戮無所不至而一無敢
008_0088_a_24L去歲之夏行長等攻陷晋城幾乎

008_0088_b_01L나는 한 번 공격해서 곧바로 승첩勝捷을 거뒀다. 당신들은 진주성을 함락시킨 자가 누구라고 들었는가? 가령 나의 군대를 서쪽으로 향하게 했더라면, 나는 당장에 평안도로 가서 이틀 길을 하루에 달려 추격했을 것이다. 그렇게 했더라면 당신들 나라의 신민臣民이 비록 충의가 태산과 같다 하더라도, 당신들의 왕을 보위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 바닷가 모퉁이에 주둔하고 있는 것은, 당신들 나라를 이기지 못해서가 아니라, 단지 당신들 나라의 생령을 불쌍히 여겨서이다. 그래서 억지로 주둔하고 나가지 않으면서 당신들 나라가 어찌하는지 기다려 보려고 하는 것이다.”
답하였다.
“너희 일본이 우리나라와 화의를 하려고 한다면, 어찌 위력威力으로 될 수가 있겠는가. 우리나라 군사는 전투에 익숙하니 그 정예로움이 너의 군사 정도일 뿐만이 아니다. 여기에 또 중국 군대와 합세하면, 웃고 이야기하는 사이에 너희 군대를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청정이 말하였다.
“교린을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앞에서 말한 대로 4도道 중에 2도를 떼어 주고 왕자를 볼모로 보내야만 가능할 것이다.”
답하였다.
“땅을 떼어 주고 왕자를 볼모로 보낸다면 교린이 될 수 있겠는가? 사세事勢가 부득이하면 병력으로 결판을 낼 것이다.”
청정이 말하였다.
“교린을 한다면, 전일에 대마도에 지급한 물목物目(물품의 목록)을 써서 보여 줄 수 있겠는가?”
답하였다.
“그 물목은 우리들이 감히 알 수가 없다. 돌아가서 우리 조정에 보고하여 처리할 따름이다.”
이때 그들의 표정을 보니 기뻐하는 마음이 얼굴빛에 나타났다. 술을 권하고 숙소로 돌아와 잤다.
13일, 아침을 먹은 뒤에 희팔이 청정의 명으로 송운과 이겸수ㆍ장희춘ㆍ김언복을 인도하여 청정의 집으로 들어갔다. 당중堂中에 나란히 앉아 있는데, 청정이 바로 나오지 않고서 우선 희팔을 시켜 글로 써서 보였다.
“옛날부터 조선은 일본에 속하였다. 사람들이 이 사실을 어떻게 숨기겠는가?”
답하였다.
“만만고萬萬古 이래로 우리들은 그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
청정이 또 글로 써서 보였다.
“옛날 2백 년 전에 대마도를 일본에 귀속시켰다. 이것은 사실이 아닌가?”
답하였다.
“대마도는 바다 속의 외로운 섬이니 일본에 속한다 해도 놔두고 묻지 않겠으나,

008_0088_b_01L自退我則一擧而即捷汝等聞陷晋城
008_0088_b_02L者誰也如使我軍向西我當直到平安
008_0088_b_03L倍日追逐則汝國臣民雖忠義如山
008_0088_b_04L將不能捍衛汝王矣今屯海隅非不勝
008_0088_b_05L汝國只憐汝國生靈强屯不出欲俟
008_0088_b_06L汝國所爲耳答曰汝日本與我國欲爲
008_0088_b_07L相和則詎以威力爲耶我國之卒
008_0088_b_08L於戰伐其爲精銳不啻汝兵也又與
008_0088_b_09L唐兵合勢則談笑而可制汝兵矣淸正
008_0088_b_10L交隣雖曰可爲而前言四道中
008_0088_b_11L給二道送王子質之然後可爲也
008_0088_b_12L曰割地而給送王子而質之則可爲交
008_0088_b_13L隣乎勢不得已以兵力决也淸正曰
008_0088_b_14L交隣則前日對馬島所給物目可得書
008_0088_b_15L示耶答曰其物目則我等未敢知也
008_0088_b_16L歸告我朝廷處之耳時見彼人之面
008_0088_b_17L喜悅之心現於色矣勸酒退宿十三
008_0088_b_18L日朝後喜八以淸正之命引松雲李謙
008_0088_b_19L受蔣希春金彥福入淸正家列坐於堂
008_0088_b_20L淸正則未即出來姑使喜八書示曰
008_0088_b_21L自昔朝鮮屬日本人焉廋哉答曰萬萬
008_0088_b_22L古以來我等未聞此事也淸正又書示
008_0088_b_23L昔二百年前以對馬島屬日本
008_0088_b_24L其然乎答曰對馬島則海中孤島

008_0088_c_01L조선을 일본에 소속시켰다는 말은 이해할 수가 없다.”
청정이 또 글로 써서 보였다.
“일본의 군대를 가지고 다시 북쪽으로 향하여 무력으로 취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리고는 그때 다시 청정이 문을 밀고 나와서 자리에 앉더니, 통사를 시켜서 말을 전하였다.
“우리들이 군대를 거느리고 한번 나가면 조선인들은 먹는 양식을 혹 풀 속에 묻어 두었다가 도둑을 당하기도 하고, 혹 땅속에 묻어 두었다가 썩히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 군대가 한번 석권席捲하면 토적土賊이 또 따라서 횡포를 부릴 것이니, 양식을 잃은 조선인들이 혹 우리에게 귀부歸附하기도 하고, 혹 굶어 죽기도 할 것은 형세로 볼 때 필연적인 일이다. 우리들이 그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 감히 참고서 군대를 거두고 있는 것은, 너희 나라가 어떻게 하는지 기다려 보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답하며 글로 써서 보였다.
“병가兵家의 승패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옛날에 항우項羽는 백전백승했지만 한 번 이기지 못해서 천하를 잃었고, 한 고조漢高祖는 백전백패했지만 한 번 이겨서 천하를 얻었다. 사람들은 그와 같이 되기를 바라더라도, 하늘의 이치는 꼭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니, 어찌 저쪽만 유독 이기고 이쪽은 이기지 못한다는 하늘의 이치가 있겠느냐. 대저 군자는 덕으로 하고 힘으로는 하지 않나니, 어찌 감히 병과兵戈의 승패를 가지고 이 사이에서 논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심 유격과 행장이 상의한 것으로 말하면, 단지 왜왕倭王으로 책봉하고 조공하는 두 가지 일을 가지고 명나라 천자에게 가서 상주上奏하는 것이었는데, 천자가 허락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독부가 대상관과 함께 힘을 합쳐서 성사시키고자 하여 우리를 보내 상관의 말을 듣고 결정하려 한 것인데, 당신은 항상 병력을 가지고 강약을 비교하려 하는가?”
청정이 말하였다.
“그렇다면 독부가 말하는 강화의 조건은 어떤 것인가?”
우리가 상의한 결과, 저 사람이 글을 모르는 자라서 앞에 기록한 내용을 자세히 알지 못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송운이 바로 통사의 귀에 대고 말하여 그로 하여금 청정에게 말을 전하게 하였다.
“독부는 천문天文을 잘 보고 인사人事도 잘 살핀다. 상관이 영안永安에 있을 때부터 천기天氣를 보니 상관이 머문 곳에 정기精氣가 모여 있었으므로

008_0088_c_01L屬日本置而莫問也以朝鮮屬日本
008_0088_c_02L則未可知也淸正又書示曰以日
008_0088_c_03L本之兵更爲北向以兵刃取則如何
008_0088_c_04L時又淸正推戶出坐又與通事傳言曰
008_0088_c_05L我等持兵一出則朝鮮人以其所食之
008_0088_c_06L或埋草而見偸或埋土而見腐
008_0088_c_07L兵一捲土賊又從而作梗朝鮮之失糧
008_0088_c_08L或附我或餓死者其勢必然也
008_0088_c_09L等知其所以而敢忍歛兵者欲俟汝國
008_0088_c_10L之所爲耳答書示曰兵家勝敗未可
008_0088_c_11L知也昔項羽百戰百勝一不勝而失之
008_0088_c_12L漢祖百戰百敗一勝而得之人願如此
008_0088_c_13L天理未然豈有彼獨勝而此不勝之天
008_0088_c_14L大抵君子以德不以力敢以兵戈勝
008_0088_c_15L論乎其間哉且沈游擊與行長相議
008_0088_c_16L則只以封王准貢兩事徃奏于大明天
008_0088_c_17L天子不許故督府欲與大上官
008_0088_c_18L力成功送我等聽上官之言可決
008_0088_c_19L恒以兵力較强弱耶淸正曰然則督
008_0088_c_20L府之所謂和事如何我等相議以爲彼
008_0088_c_21L人不知書者也前所記事必不詳知故
008_0088_c_22L松雲遽與通事附耳而言使之傳言于
008_0088_c_23L淸正曰督府能觀天象又察人事
008_0088_c_24L上官在永安時觀天氣聚精于上官住

008_0089_a_01L상관을 도와서 일본 국왕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조근朝覲과 상공賞功의 예禮를 일체 중국의 제도와 같이하여 일본과 조선과 명나라가 함께 화합함으로써 만만세토록 변치 않게 하고자 함이니, 이렇게 하는 것이 상관의 마음에도 통쾌하지 않겠는가?”
청정이 노여워하지도 않고 대답하지도 않고서 다른 데를 돌아보고는 딴 소리를 하였다.
“만약 교린의 일을 이루려면, 반드시 독부가 경주慶州에 와서 얼굴을 맞대고 의논해야만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답하였다.
“우리들이 돌아가서 보고하여 처리하도록 할 생각이다.”
청정이 여러 왜승들과 상의하더니 한참 뒤에 말하였다.
“그렇다면 송운은 여기에 머물러 있고, 이겸수 등이 왕래하며 뜻을 통하는 것이 좋겠다.”
송운이 거짓으로 좋아하는 척하면서 말하였다.
“송운은 진실로 여기에 있고 싶다. 다만 두려운 것은 독부가 의심을 하고 왕래하는 사자들도 의심을 해서 일이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에 청정이 말하였다.
“이제야 비로소 너의 하는 일이 거짓임을 알았다. 송운이 여기에 있다고 해서 어찌 일이 이루어지지 않겠느냐?”
답하였다.
“나 같은 일개 산인이 여기에 있다고 해도 우리나라에는 손해될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나 만약 서로 뜻을 통하고자 한다면, 오늘뿐만이 아니라 뒤에 서로 통하는 일이 있더라도 의심할 여지가 영원히 없어지게 한 뒤에야 가능할 것이다. 옛날에 우리나라 사자使者가 일본에 가고 일본의 사자가 조선에 오면서도 방해될 것이 조금도 없었던 것은,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청정이 웃으면서 말하였다.
“송운의 말이 옳다. 내가 당신들의 마음을 떠보려고 한 말이니, 당신은 의심하지 말라. 그리고 당신들은 생각해 보라. 의지義智 등은 예전부터 경극전京極殿이라는 일본의 작위를 빙자하고 당신 나라에 교통하면서 재화를 많이 취했을 뿐만 아니라, 당신네 조선을 기만하고 또 일본을 기만하였다. 관백이 그 소문을 듣고는 의지 등을 소환하여 문초를 할 적에 이들이 대답하기를, ‘우리들이 잠시 조선과 상통相通했는데 조선이 우리나라 사람을 박대하는 평소의 습성이 있으니, 차라리 이번에 군대를 일으켜 그들을 정벌하여 항복을 받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관백이 군대를 일으켜

008_0089_a_01L故欲助上官爲日本國王凡朝覲賞
008_0089_a_02L功之禮一如中國之制日本朝鮮大明
008_0089_a_03L同爲和合萬萬世不替也於上官之心
008_0089_a_04L不亦快乎淸正不怒不答顧而言他
008_0089_a_05L淸正又曰欲成交隣事則必須督府
008_0089_a_06L到慶州面議然後可成也答曰我等歸
008_0089_a_07L處之爲料淸正與諸倭僧相議良久
008_0089_a_08L然則松雲在此李謙受等徃來通
008_0089_a_09L意可也松雲佯爲喜悅曰松雲在此固
008_0089_a_10L所願也而只恐督府疑之凡徃來使者
008_0089_a_11L亦疑之使事不易成也淸正曰今始
008_0089_a_12L知汝事僞也松雲在此事何不成
008_0089_a_13L曰如我一山人雖在此固無所損於我
008_0089_a_14L而若欲相通非徒今日後雖有相
008_0089_a_15L通之事永絶疑路然後可也古者我國
008_0089_a_16L使者通日本日本使者來朝鮮少無
008_0089_a_17L相妨者以其無疑路也淸正笑曰
008_0089_a_18L雲之言是矣我欲觀汝等之心而發也
008_0089_a_19L汝當無疑且君等思之義智等則自前
008_0089_a_20L依憑京極殿等爵交通汝國取貨旣多
008_0089_a_21L欺汝朝鮮又欺日本關白聞其奇
008_0089_a_22L義智等推問之際此等人答曰吾等
008_0089_a_23L暫與朝鮮相通而朝鮮薄待我人有素
008_0089_a_24L今者莫若擧兵伐以降之云故關白

008_0089_b_01L의지 등을 선봉으로 삼아 바다를 건너게 하였고, 우리들도 뒤따라 여기에 오게 된 것이다. 지금 행장 등이 평양에서 패하고는 그 죄를 면해 보려고 명나라와 통화通和한다는 것을 명분으로 삼아 바다 모퉁이에 물러나 주둔하고는, 일본의 처벌을 받을까 두려워하여 항상 여기에 머물려고 하고 있다. 나는 본토를 떠난 지 오래되었으므로 매번 돌아가고자 하나, 군대를 일으킨 지 3년이 되도록 무슨 일을 이루어 놓았다고 바다를 건너 돌아가겠는가. 지금 당신네 나라가 교린을 하려면 조속히 의논을 결정해 주면 좋겠다. 그러면 나는 당장에 바다를 건너갈 것이다.”
좌중의 여러 왜인들이 교린의 의논을 듣고는 모두 기뻐하는 기색이었다. 종일토록 논의했지만 조금도 거역하는 빛이 없었고, 날이 저물 무렵에는 떡을 만들어 먹여 주기도 하였다. 이로부터는 항상 독부가 경주에 올 것이냐의 여부 및 천자의 허혼許婚 여부,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일본에 보내는 물품의 다소 등에 관한 일을 물어 왔고, 우리들의 대답도 혹 수긍하거나 혹 거부하거나 하며 이런 식으로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저녁에 밥 먹을 때에는 온갖 정성을 다하여 대접하고는 물러가서 쉬게 하였다. 이날 밤이 반이나 지나서 희팔이 통사 김삼근을 시켜 이겸수를 몰래 불러내어 자기 숙소로 데려가더니, 통사를 통해 말을 전하였다.
“교린의 일에 대해서 당신들은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답하였다.
“우리가 돌아가서 독부에게 보고하고, 또 우리 성상에게 아뢴 뒤에 결정할 일이다. 우리가 어떻게 미리 결정할 수 있겠는가?”
희팔이 말하였다.
“우리 대상관이 여기에 있으면서 도모하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으니, 당신은 아무쪼록 부지런히 왕래하여 속히 결정하도록 하라. 만약 일이 이루어지면 나는 당신네 나라에서 벼슬을 받고 영원히 좋게 지낼 것이니, 이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또 통사에게 귓속말로 가만히 말하였다.
“관백이 만약 왕자를 요구하면 교린이 또 필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당신네 나라에서 만약 다른 사람 자식으로 나이 8~9세쯤 되는 자를 왕자라고 거짓 속여서 들여보낸다면 일이 속히 이루어질 것이니, 당신은 돌아가서 그렇게 되도록 처리하라.”
또 쪽지에 적은 것을 꺼내 놓으며 말하였다.

008_0089_b_01L起兵以義智等爲先鋒渡海我等隨
008_0089_b_02L至此耳今者行長等旣敗於平壤
008_0089_b_03L免其罪以通和大明爲名退屯海陬
008_0089_b_04L恐被日本之罪欲恒居于此也我則離
008_0089_b_05L本土久矣每欲回去而擧兵三年
008_0089_b_06L何事而還渡也今汝國若欲交隣
008_0089_b_07L速決議則吾即渡海云坐中諸倭
008_0089_b_08L交隣之議皆有喜色終日論議少無
008_0089_b_09L違忤欲暮造餅饋之自此之後恒以
008_0089_b_10L督府來慶州與否及天子許婚與否
008_0089_b_11L我國送日本物數多小等事爲問我等
008_0089_b_12L答之或順或逆以此終日及暮對飯
008_0089_b_13L極致精備已而許退宿是夜過半
008_0089_b_14L八使通事金三斤隱招李謙受引來私
008_0089_b_15L宿處使通事傳言曰交隣之事汝等
008_0089_b_16L以爲可成耶答曰吾歸告督府及啓我
008_0089_b_17L聖上然後可決耳我等何以預決也
008_0089_b_18L喜八曰我大上官在此圖之則事無
008_0089_b_19L不成汝須勤勤徃來速決可也若成事
008_0089_b_20L則我受爵於汝國永以爲好不亦可乎
008_0089_b_21L又與通事附耳潜言曰關白若求王子
008_0089_b_22L則交隣亦必不成矣汝國若取他人之
008_0089_b_23L年可八九者假稱王子而入送
008_0089_b_24L事當速成汝歸處置又出片紙所記曰

008_0089_c_01L
“이 일에 대해서는, 당신이 이 쪽지를 가지고 돌아가 보고하여 처리하도록 하라.”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심 유격과 행장의 화의는 성사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명나라와 조선 사람이 청정과 함께 삼국의 화합을 도모해야 할 것이요, 이를 일본 태합太閤 전하에게 빨리 보고해야 할 것이다. 이 화합이 성립되기를 크게 바라는 마음에서 다른 것은 그만두고라도, 첫째 조선은 매년 대마도에 두미斗米를 원수員數대로 보낼 것이요, 둘째 대마도는 조선의 국서國書를 받아 올 것이요, 셋째 대마도는 조선국인 수 명을 받을 것이다.”
우리가 답하였다.
“다른 일은 돌아가서 조정에 보고하여 처리하도록 하겠지만, 왕자에 대한 일은 기필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희팔이 또 말하였다.
“지난번에는 비가 계속 내려서 속히 왕래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비도 그쳤으니 속히 통지하도록 하라. 나는 날짜를 꼽으며 기다릴 생각이다.”
답하였다.
“내가 돌아가서 독부에게 보고하면, 독부는 명나라 주장에게 품달할 것이니, 그런 뒤에야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희팔이 말하였다.
“독부에게도 주장이 있는가?”
답하였다.
“있다. 주장主將 고 시랑顧侍郞은 군대를 거느리고 서울에 있고, 손 시랑孫侍郞은 군대를 거느리고 평양에 있고, 왕 경략王經略은 군대를 거느리고 요동遼東에 있다. 독부는 이 세 장수의 절제節制를 받는다. 내가 돌아가서 독부에게 보고하면, 독부는 반드시 서울에 가서 고 시랑에게 품달한 뒤에야 경주에 올 수 있다.”
희팔이 말하였다.
“그렇다면 독부의 상경 여부를 당신이 먼저 통지해 달라. 우리는 날짜를 꼽아 기다릴 생각이다.”
그리고는 물러가서 잤다. 다음 날인 14일과 15일은 빗물로 인해 그대로 머물렀다. 접대하는 예가 극진하고 은근하여 조금도 빠진 것이 없었다.
16일, 아침을 먹은 뒤에 희팔이 답서 세 통과 부채 한 상자를 우리들에게 직접 주면서 말하였다.
“일이 이루어지는 것을 10월로 기약하고 기다리겠다.”
우리가 그곳을 떠나 돌아올 적에 희팔이 직접 공수곶公須串 큰길까지 우리를 호송해 주고 돌아갔다.

008_0089_c_01L此事汝傳書歸告處之其辭云沈游
008_0089_c_02L擊行長和議不成事也故大明朝鮮之
008_0089_c_03L欲與淸正三國和合早奏日本大閤
008_0089_c_04L殿下此和議成給者大望也餘者不宣
008_0089_c_05L一自朝鮮每年送對馬島斗米員數矣
008_0089_c_06L一自對馬島來朝鮮國書矣一自對馬
008_0089_c_07L來朝鮮國人數名矣答曰他餘事
008_0089_c_08L而告朝廷處之而王子事則未可必也
008_0089_c_09L喜八又曰徃時則雨水連綿勢未能速
008_0089_c_10L徃來也今則雨水可收當以速通
008_0089_c_11L計日待之爲料答曰吾歸告督府督府
008_0089_c_12L禀于大明主將然後可決矣喜八曰
008_0089_c_13L督府有主將耶答曰有主將顧侍郞
008_0089_c_14L兵住京城孫侍郞領兵住平壞王經
008_0089_c_15L略領兵住遼東而督府則受節制於此
008_0089_c_16L三將者也吾歸告督府則督府必委進
008_0089_c_17L於京城取禀於顧侍郞然後可來慶州
008_0089_c_18L喜八曰然則督府上京與否汝先
008_0089_c_19L通示則吾等計日待之是計也退宿
008_0089_c_20L明十四日十五日因雨水留滯凡接待
008_0089_c_21L之禮極致慇懃少無虧欠十六日朝
008_0089_c_22L喜八以答書等三度扇子一箱面給
008_0089_c_23L我等曰凡事之成十月爲期以待也云
008_0089_c_24L仍發還行喜八親自護送于公須串大

008_0090_a_01L
내가 일본에 갔을 적에 여러 왜인들과 이 일을 상세히 논하였다. 대개 이 나라는 천지가 개벽한 이래로 토지와 인민이 한 번도 중국의 제도를 접하지 못한 가운데, 천황天皇은 혼자서 그 나라의 제왕이 되고 신하는 자기들끼리 세습世襲을 하면서 만고토록 변함이 없었다. 지금 보니, 희팔이 “일본 왕자는 만세토록 바뀌지 않는다.”라고 말한 것은, 참으로 현실 그대로의 말이다.
하늘이 수길秀吉을 이 세상에 내어놓아 한 시대를 멋대로 어지럽히게 한 것은, 사해四海의 인민에게 일대 겁살劫殺의 운세를 안겨 준 것이다. 수길의 힘이 그 나라를 차지하기에 충분하였으나, 당시에 가강家康이 그래도 동쪽 변방을 점거하고 있었고, 일본 백성은 단지 원씨源氏가 왕이라는 것만 알고 있었으니, 설령 수길이 진실로 명나라 천자에게 명을 받고 작위가 올라 왕이 된다 하더라도, 중국의 후왕侯王처럼 그 땅에서 대대로 자리를 전할 수 없으리라는 것은 수길 자신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저 청정이라는 망나니는 단지 수길의 집안에서 꼬리치는 개로서 걸桀(夏나라의 폭군)을 도와 포학한 짓을 자행하였으니, 이는 하늘이 그의 악행이 쌓이도록 그냥 놔둔 방편이라고나 해야 할 것이다.40) 그래서 사납고 강포强暴하게 굴면서 생령生靈을 도살屠殺할 수 있었던 것이니, 유총劉聰과 석륵石勒과 모용수慕容垂41)와 같은 무리가 중국에 할거割據하면서 제왕 자리를 다툰 것과는 습기習氣가 본래 같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애초에 중국의 황제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알지도 못하였으니, 이는 또한 임금님의 힘(帝力)이 나와 무슨 상관인가42)라고 혼자 말하는 격이라고나 하겠다. 그러니 가령 괴통蒯通으로 하여금 그의 등의 골격을 보게 했다고 하더라도, 필시 그 말이 들어갈 틈이 없었을 것이다.43)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운이 하나의 나한羅漢으로, 가리왕歌利王44)의 세계에 종유從遊하면서 마침내 천문天文을 운운하는 이야기까지 하였으나, 어떻게 청정의 심장心腸을 바꿔 놓을 수 있었겠는가. 이는 바로 유 도독이 중국 땅에서 생장하여 영웅으로 미루어 짐작한 나머지 일본인을 잘못 가지고 놀았던 대목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앞에서 말한

008_0090_a_01L路而後還

008_0090_a_02L
余赴日本時與諸倭論此事詳矣
008_0090_a_03L盖自開闢以來土地人民一不格
008_0090_a_04L於中朝之制天皇之自帝其國
008_0090_a_05L臣之自爲世襲則亘萬古不易矣
008_0090_a_06L今觀喜八所謂日本王子萬世不
008_0090_a_07L眞是實際語也天生秀吉
008_0090_a_08L亂一時所以應四海人民一大劫
008_0090_a_09L力足以有其國矣而是時家康
008_0090_a_10L尙據東垂日本之民只知有源氏
008_0090_a_11L設令秀吉眞受命於大明天子
008_0090_a_12L爵爲王其不能如中國侯王之世
008_0090_a_13L傳其土則秀吉亦自知也彼淸正
008_0090_a_14L竪子特以秀吉家嗾犬助桀爲虐
008_0090_a_15L天使之厚其毒者故鷙悍强暴
008_0090_a_16L可以屠割生靈而本與劉聰石勒
008_0090_a_17L慕容垂輩割據中土爭帝爭王者
008_0090_a_18L習氣不同初不識中朝皇帝之貴
008_0090_a_19L亦自謂帝力何有也雖使蒯通
008_0090_a_20L而相其背必將無間而可入松雲
008_0090_a_21L一羅漢乃從歌利王世界驟談天
008_0090_a_22L怎麽幻做了淸正心膓此是劉
008_0090_a_23L都督生長中土揣摩英雄錯把
008_0090_a_24L弄日本人處
◆至此而方信向所

008_0090_b_01L다섯 가지 화의의 조목이 심沈과 행장行長에게서 나온 꾀가 아니라 청정의 말이라는 것을 바야흐로 알 수가 있다. 수길의 심복 가운데 청정보다 더 친밀한 자가 없고 보면, 청정의 말이 바로 수길의 마음이라고 할 것이니, 사신의 일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왜적이 다시 침입할 것은 굳이 지자智者를 기다리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갑오년 4월에 송운이 이런 말을 청정의 진영에서 들었고, 왜적의 마음이 패려하기 그지없다는 것은 우리나라 사람만 아는 것이 아니라, 동정東征한 중국 장수들도 익히 들어서 알았을 터인데, 이해 9월에 중국 조정에서 왜왕의 책봉을 허락하는 명을 내렸다는 점이다. 심유경沈惟敬의 안중에는 오직 행장만 있고, 청정이 있는 것은 몰랐단 말인가. 한번 웃을 일이다.
내가 강호江戶(동경)의 객관客館에 있을 적에 왜인 하나가 송운의 필적 몇 장을 가지고 와서 말하기를, “이것은 우리 집에서 백 년 동안 보물처럼 보관해 온 물건이다.”라고 하였는데, 홍색과 황색의 종이는 색깔이 변해서 거무스름하였고, 글자는 크기가 까마귀 정도 되었다. 그리고 진한 먹을 묻혀서 행초行草로 썼는데, 초법草法이 중후하고 질박하였으며, 종이 끝에는 모두 ‘송운서松雲書’라는 세 글자가 들어 있었다. 어디서 얻었는지 물어보았더니, 그가 말하기를, “옛일을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대개 전란 중에 왕래했을 때와 을사년에 사신으로 왔을 때에 남긴 필적이 매우 많은데, 이것도 그중의 하나일 것이다. 지금까지 일본 사람들이 사들여 소장하는 것들을 보면 이런 정도일 뿐만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내가 혼자서 탄식을 하였다. 오산五山 차천로車天輅는 문장文章으로 자부했던 인물이다. 만력萬曆 신묘년(1591, 선조 24)에 통신사의 제술관製述官으로 일본에 갔을 적에 필시 비바람이 몰아치듯 시묵詩墨을 휘갈겼을 것인데, 왜인 중에 지금 그의 이름을 아는 자가 없어서 그 한 조각 말(言)을 찾아보려 해도 찾을 수가 없고, 송운의 필적만 홀로 해외에 전하고 있으니, 세상에서 말하는 대로 불후不朽하게 전해지는 것은 사람에게 있지 기예技藝에 있지 않다고 하겠다. 지금 일기를 보건대,

008_0090_b_01L謂五條和議非出於沈與行長之
008_0090_b_02L而淸正之言也秀吉之爪牙
008_0090_b_03L莫深於淸正淸正之言即秀吉之
008_0090_b_04L心也使事之不諧賊鋒之再噬
008_0090_b_05L固不待智者而見矣余所未解者
008_0090_b_06L甲午四月松雲得此說於淸正營
008_0090_b_07L賊情之絕悖不唯我國人知之
008_0090_b_08L東征天將亦已稔聞而是年九月
008_0090_b_09L皇朝有許封之命沈惟敬眼中
008_0090_b_10L有行長而不知有淸正乎一笑
008_0090_b_11L余在江戶客館有一倭持松雲筆
008_0090_b_12L跡數紙而來曰此吾百年珍藏物
008_0090_b_13L紅黃紙色渝而黯字大如鴉
008_0090_b_14L濃墨行草草法重厚多質紙末皆
008_0090_b_15L有松雲書三字問其所從得則曰
008_0090_b_16L故事無徵而盖於兵戈中徃來
008_0090_b_17L乙巳奉使時留蹟甚衆至今日本
008_0090_b_18L貨而藏之者不特如此云
008_0090_b_19L竊嘆曰車五山天輅以文章自名
008_0090_b_20L萬曆辛卯以通信製述官到日本
008_0090_b_21L揮洒詩墨必如風雨而倭俗
008_0090_b_22L今無識其名者求其片語而不可
008_0090_b_23L得矣松雲筆跡獨傳於海外
008_0090_b_24L所謂不朽在人而不在藝也今觀

008_0090_c_01L청정이 진중에서 총애하는 어린 왜인이 홍색과 황색의 종이에 글씨를 받았다고 하였다. 내가 본 고지古紙가 그때의 그 종이인지는 모르겠으나, 지난 일이 어제처럼 여겨지기에 여기에 부기附記한다.
또 보건대, 왜관倭官 중에 부호인 집에서는 으레 용모가 월등히 뛰어난 미소년을 기르며 여색보다도 더 즐기면서 예뻐하였는데, 그들이 왕왕 부채를 안고 우리나라 사람을 찾아와 시를 얻고는 이를 영광으로 삼곤 하였다. 청정과 같은 악소년惡少年도 백전百戰의 전쟁터에서 회소懷素45)의 초서草書를 얻어 장막 속의 미동美童에게 환심을 사려 하였으니, 이것도 자기들 본토의 풍광風光이라서 그저 웃음이 나올 뿐이다.
갑오년 9월에 서울에 달려가 소를 올려 왜적을 토벌하고 민생을 보호할 일을 아뢴 글
신은 풍천豊川 임씨任氏의 후예로, 조부가 영남 밀양 땅으로 본적을 옮긴 것을 계기로 해서 그 부府의 백성이 되었습니다.46) 그러다가 불행히 신의 몸에 이르러서 15세에 모친을 먼저 잃었고, 16세에 잇따라 부친을 잃었습니다. 눈을 들어 바라보아도 친척 하나 없이 혈혈단신이 되어 마침내 무부無父 무군無君의 한 죄인47)이 되었습니다. 부평초와 쑥대 같은 신세요, 뜬구름과 날짐승 같은 생애를 보내며 산에 들어가고 숲에 들어가 살면서도 오직 더 깊은 곳이 없을까 걱정하였습니다.
신의 나이가 지금 벌써 51세입니다. 지나간 세월이 모두 성명聖明의 은택이니, 어찌 감히 치류緇流(승려)라고 스스로 소외시키며 한 끼 밥을 먹는 동안인들 군부를 잊었겠습니까.
비통하게도 독사와 전갈 같은 이 왜적이 우리나라에 독기를 부려 생민生民이 어육魚肉이 된 것은 본디 말할 것도 없습니다만, 종사宗社가 몽진蒙塵하고 승여乘輿(大駕)가 파월播越하였으니, 혈기를 지닌 자라면 팔뚝을 걷고 분개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행동은 미록麋鹿(고라니와 사슴)과 같아도, 조금 지각이 있는 신의 경우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난리가 처음 일어났을 때 신은 강원도 개골산皆骨山에 있었습니다.48) 이 큰 변란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는 두 번이나 적중에 들어가서 적과 문답을 하였으며,49)

008_0090_c_01L日記淸正陣中有所愛少倭
008_0090_c_02L紅黃紙受書余所見古紙雖未知
008_0090_c_03L出於其時而徃事如昨附記之
008_0090_c_04L又見倭官富豪家必蓄兒男治容
008_0090_c_05L絶美者躭狎蠱媚甚於姬色
008_0090_c_06L徃抱扇乞詩於我國人作爲光耀
008_0090_c_07L淸正惡少年乃於百戰干戈塲
008_0090_c_08L得懷素草書以侈帳中嬋娟亦自
008_0090_c_09L本土風光好笑

008_0090_c_10L

008_0090_c_11L甲午九月馳進京師上䟽言訂賊
008_0090_c_12L保民事䟽曰

008_0090_c_13L
臣以豊川任氏之裔因祖父移籍于嶺
008_0090_c_14L南密陽地仍爲府民不幸至臣之身
008_0090_c_15L十五歲先喪母十六歲繼喪父擧目無
008_0090_c_16L親孤惸孑立遂爲無父無君之一罪人
008_0090_c_17L萍蓬身世雲鳥生涯入山入林惟恐
008_0090_c_18L不深臣年今已五十一過去歲月
008_0090_c_19L是聖明之澤敢以緇流自外忘君父於
008_0090_c_20L一飯之頃哉痛此虺蝎肆毒大邦生民
008_0090_c_21L魚肉固不足說宗社蒙塵乘輿播越
008_0090_c_22L凡有血氣莫不扼腕況臣雖行同麋鹿
008_0090_c_23L粗有知覺者乎亂初臣在江原道皆骨
008_0090_c_24L逢此大變再入賊中與賊問答

008_0091_a_01L마침내 의승義僧을 개유開諭하여 그런대로 1백여 명을 얻고는 바야흐로 춘천과 원주의 왜적을 토벌하러 가려 하면서 이 적과는 하늘 아래 함께 살지 않겠다고 맹서하였습니다. 그런데 마침 도총섭都總攝의 관자關字(공문)를 보건대, 그 안에 군민軍民에게 유시하신 성지聖旨를 인용한 것이 있었는데, 이를 보고는 두 눈이 눈물로 범벅이 되고 글자마다 피로 물들어서 차마 끝까지 읽지를 못하였습니다.
신은 원래 거느린 의승 150명 이외에 60명을 더 얻은 뒤에 서쪽을 향하여 급히 치달려 순안順安 관아에 도착하였습니다. 거기에서 행재行在(임금의 임시 거처)로 달려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였으나, 당시에 왜적이 평양을 점거하였으므로 감히 놔두고 갈 수가 없어서 체찰사體察使 도원수都元帥 휘하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서 지휘를 받았습니다. 그때 신을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으로 삼고 도총섭의 의승을 주시니, 모두 2천여 명으로 대동강 남쪽을 건너 평양과 중화中和를 왕래하는 적을 차단하라는 임무를 맡았습니다.50)
신은 본래 고라니와 사슴과 짝하는 몸이라서 병가兵家의 일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왜적을 하나라도 죽여서 성상의 망극한 은혜를 갚고 싶어 하는 마음이야 어찌 의관衣冠들보다 뒤질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스스로 군량을 마련하려니 시종 유지하기 어려워서 끝내는 절반이나 굶주려 흩어졌으며, 신도 늙고 병들어 고산故山으로 돌아가 시체를 구학丘壑 속에 놔두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피하려고 꾀한다는 이름을 취할까 두려워서 속절없이 전장戰場에 머물러 있으려니 일을 이룬 것이 전혀 없어서 나라를 저버린 죄를 역시 용서받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다가 4월 그믐께에 유 독부劉督府의 분부와 도원수의 절제節制를 받고서, 곧바로 서생포의 적진에 들어가 적정을 탐지하였고, 10월 보름께에 또 독부의 지휘와 원수元帥의 명령을 받고서 재차 적진에 들어가 적의 정세를 상세히 정탐하였습니다.
그런데 용렬한 신이 생각할 때 의혹되는 마음이 더해지기에 조정에 진달하는 일을 조금이라도 늦춰서는 안 되겠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이달 초에 의령宜寧의 본진本陣을 출발하여 직로直路를 통해 치달렸는데, 날은 짧고 길은 험해서 하루 종일 달려도 얼마 가지 못하여 이달 21일에야 도성에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우선 신이 알아낸 적의 정세 및

008_0091_a_01L開諭義僧僅得百餘名方欲徃討春原
008_0091_a_02L之賊誓不與俱生而適見都總攝關字
008_0091_a_03L關內有引諭軍民聖旨雙眼淚暗字字
008_0091_a_04L染血讀不忍終焉臣原率義僧百五十
008_0091_a_05L加得六十名西望疾驅以到順安
008_0091_a_06L切欲奔詣行在而當時賊據平壤
008_0091_a_07L不敢舍去仍留軆察使都元帥處聽指
008_0091_a_08L揮也以臣爲義僧都大將授以都總攝
008_0091_a_09L義僧并二千餘名渡大同江南使之
008_0091_a_10L把截平壤中和往來之賊臣本以麋鹿
008_0091_a_11L之身不識兵家之事然而欲殺一賊
008_0091_a_12L以報聖上罔極之恩則豈有下於衣冠
008_0091_a_13L但自備兵糧難保始終卒半飢散
008_0091_a_14L臣又老病玆欲返于故山置屍丘壑
008_0091_a_15L恐取謀避之名空淹戰塲事無一成
008_0091_a_16L負國之罪亦難容赦而四月晦時
008_0091_a_17L劉督府分付及都元帥節制直入西生
008_0091_a_18L浦賊陣覷探賊情十月望時又依督
008_0091_a_19L府指揮及元帥之令再入賊陣詳細
008_0091_a_20L哨探賊之情勢而以臣之庸劣益添愚
008_0091_a_21L陳達朝廷不宜少緩本月初發自
008_0091_a_22L宜寧本陣由直路馳進日短路險
008_0091_a_23L日之行不過一息本月二十一日
008_0091_a_24L得入城姑以臣之所知賊之情勢及討

008_0091_b_01L왜적 토벌과 민생 보호에 대한 의견을 아래에 기록하여 한두 가지 말씀을 올리려 하니, 삼가 바라옵건대 굽어 살펴 주소서.
대체로 왜적의 병력에 대해서는, 신과 이모李某(李謙受)ㆍ장모蔣某(蔣希春) 등이 재차 적의 소굴에 들어가서 며칠 동안 머물렀으나 적세의 증감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마침 왜승 일진日眞과 대화를 나누다가, 좌도左道에 있는 적진의 병력과 우도右道의 적추賊酋인 행장行長과 의지義智 등이 거느린 병력에 이야기가 미치자, 일진이 글로 써서 보였습니다.
“청정의 사람됨으로 말하면 그 성질이 사납고 오만해서 부하들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군사가 그래도 1만 8천이나 되고 포수가 5천여 명이기 때문에 이것으로 자부하는 것이다. 동래와 부산 등의 제장諸將이 거느린 군사는 모두 5만 명이고, 우도의 김해ㆍ웅천熊川ㆍ천성泉城ㆍ가덕加德에 있는 군사도 4만 6천~4만 7천을 밑돌지 않는다.”
그러나 신의 생각에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여겨지기에 다시 적승賊僧 원룡元龍과 대화를 해 보았습니다만, 역시 일진이 써서 보여 준 것과 같아서 조금도 증감이 없었고, 또 마침 희팔에게서 병력의 총록總錄을 얻어 보았더니, 그것 역시 일진 등이 말한 것과 조금도 증감이 없었으니, 좌우도의 적의 숫자를 모두 합쳐서 계산하면 거의 9만여 명에 이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경주慶州에서 투항한 왜적에게 물어보았더니, 그는 다만 좌도의 적이 1만 8천 명이라는 것만 말하고, 우도의 적은 숫자가 얼마인지 알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앞에서 말한 10만의 숫자는 죄다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신이 억측으로 말씀드리건대, 청정의 군사가 가장 강성하다고 일컬어지는데도 1만 8천에 불과하다면, 제적諸賊의 병력도 모두 합해 보아야 필시 4만~5만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니, 어찌 10만의 대병력이 되기야 하겠습니까.
그렇지만 우리나라는 군수軍需가 고갈되고 민생이 거의 결딴난 가운데 원문轅門(軍營)에서 급변에 대기하는 군사는 2천에 불과한 실정입니다. 이렇듯 강약이 현격히 달라서 복수가 용이하지 않은 형편이니,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신의 심정이 여기에 이르면 책략이 궁해지고 계모가 끊어져서 그저 통곡을 금하지 못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적들이 떠날 것인지 머물 것인지는

008_0091_b_01L賊保民等意錄之于下陳其一二
008_0091_b_02L惟垂察焉大抵賊之多少則臣與李某
008_0091_b_03L蔣某等再入賊窟留數日不知賊勢增
008_0091_b_04L而適與日眞對話語及左道賊陣軍
008_0091_b_05L及右道賊酋行長義智等所率軍數
008_0091_b_06L則日眞書示曰淸正爲人其性桀驁
008_0091_b_07L下率不愛然其軍僅一萬八千而砲手
008_0091_b_08L五千餘也以是自負矣東萊釜山諸將
008_0091_b_09L所率并五萬兵也右道金海熊川泉城
008_0091_b_10L加德亦不下四萬六七千也云臣以爲
008_0091_b_11L不然也又與賊僧元龍對語則亦如日
008_0091_b_12L眞書示少無增減而適得喜八處軍數
008_0091_b_13L捴錄則與日眞等所言亦無增減
008_0091_b_14L計左右道賊數幾至九萬餘矣又問於
008_0091_b_15L在慶州投降之賊則只言左道賊一萬
008_0091_b_16L八千之數而不知右道賊數之多少也
008_0091_b_17L然則前之十萬之數未可盡信也
008_0091_b_18L以臣臆料言之淸正之軍稱其最爲强
008_0091_b_19L而不過萬八千則諸賊都數必四
008_0091_b_20L五萬餘耳何至此十萬之盛也然而我
008_0091_b_21L國軍需蕩竭民生幾盡轅門待變之士
008_0091_b_22L不過二千而强弱逈然復讎有未易之
008_0091_b_23L不知如之何則可也臣情到此
008_0091_b_24L窮計絶不勝痛哭至於賊情去留

008_0091_c_01L그들이 워낙 흉측하고 간특해서 헤아리기 어렵습니다만, 다만 저 적들이 스스로 과시하는 정상情狀을 가지고 요량해 보겠습니다.
행장과 의지 등은 자기들이 선봉이 되어 크게 승리해 보려고 했으나, 바다를 건너온 이래로 분탕질과 살육과 약탈만 자행했을 뿐이요, 끝내는 평양 전투에서 패배를 당하여 정신없이 도망쳐 돌아왔고, 형륙刑戮을 면할 계책으로 진주성을 함락시켰다고 핑계 대려 하였으나 도리어 청정에게 공을 뺏긴 결과가 되고 말았으며, 중국과 화의를 꾀한다고 칭하면서도 그것 역시 아직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청정의 마음을 유추해 보면, 처음에 한후장捍後將(후방을 막는 장수)으로 건너왔지만, 위세를 드날리며 향하는 곳에 한 사람도 대적하는 자가 없었고, 왕자와 대신을 추격하여 호지胡地까지 짓쳐 들어가 호종胡種을 참살斬殺하였으며, 진주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킬 적에 또 으뜸가는 공을 차지하였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가 교린交隣의 이름을 얻어 철병撤兵하고 돌아가려 하고 있는데, 이는 다름이 아니라 행장과 의지의 무리가 죽임을 당하게 하고, 자기 혼자 공을 독점하려 해서입니다. 사세事勢로 볼 때에는 필시 그럴 것이라고 여겨집니다만, 적의 모략은 헤아리기 어려워서 이렇게 할는지도 알 수가 없으니, 더더욱 통분함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우선 급히 해야 할 일에는 오직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토적討賊하여 복수하는 계책으로는, 남북에서 아직 징발하지 않은 백성들을 노소를 막론하고 징발하여 평안ㆍ함경ㆍ황해ㆍ강원 등의 군사는 그 도道의 병사兵使와 감사監司가 몇 달치의 양식을 가지고 날짜를 정하여 전소戰所로 집결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노약老弱의 군사로 외병外兵에 배정하여 군위軍威의 성대함을 과시하고, 정예 군사 3만 5천~3만 6천을 가려 뽑아 모두 절강浙江 보병步兵의 군의軍儀를 차리게 한 뒤에 대장으로 하여금 손에 취모검吹毛劍을 쥐고 뒤에 서서 독전督戰하게 함으로써 후퇴하거나 궤멸됨이 없게 하며, 사졸士卒들에게 살아서 돌아가려는 마음을 갖지 않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비록 추악한 종자들을 모조리 소탕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국가의 수치를 그런대로 조금 씻을 수도 있고, 종사宗社의 원수에게 조금 복수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방휼蚌鷸(조개와 황새)처럼 서로 버티기만 하면서51) 오늘도 이와 같이 하고 내일도 이와 같이 한다면, 무정한 세월만 한바탕 꿈속에 나는 듯 지나가고, 하루살이 같은 생민生民은 한순간에 죄다 없어져서

008_0091_c_01L兇慝難料獨以彼賊自誇之狀料之
008_0091_c_02L長義智等自爲先鋒以要大捷而渡
008_0091_c_03L海來焚蕩殺掠而已終見平壤之敗
008_0091_c_04L顚沛迯還謀免刑戮托陷晋城而反
008_0091_c_05L見奪功於淸正雖稱與中國謀和而又
008_0091_c_06L未得遂淸正之心則以爲初以捍後將
008_0091_c_07L而揚威所向無一人當鋒追及王
008_0091_c_08L子大臣長驅胡地斬殺胡種攻陷晋
008_0091_c_09L功又居首今欲得交隣之名而撤還
008_0091_c_10L此無他欲使行長義智之徒就戮而自
008_0091_c_11L擅其功也事勢必其然也然而賊謀難
008_0091_c_12L此亦未可知也尤不勝痛憤當此
008_0091_c_13L時急先之務只有二焉討賊復讎之策
008_0091_c_14L則發南北未發之民勿論老少而平安
008_0091_c_15L咸鏡黃海江原等道軍則令其道兵使
008_0091_c_16L監司并持數朔粮㝎日聚會于戰所
008_0091_c_17L以老弱之軍㝎爲外兵以示軍威之盛
008_0091_c_18L抄擇精銳軍三萬五六千使之皆作浙
008_0091_c_19L江步兵軍儀使大將手握吹毛立後而
008_0091_c_20L督戰使無退潰示士卒無還心則雖
008_0091_c_21L不得盡掃醜種亦可小雪國家之羞
008_0091_c_22L可少復宗社之讎也不然而蚌鷸相持
008_0091_c_23L今日也如此明日也如此無情歲月
008_0091_c_24L一夢中飛過蜉蝣生民一瞬間澌盡

008_0092_a_01L2백 년을 내려온 예악禮樂과 문물文物의 나라가 그냥 초목만이 우거진 여우와 토끼의 놀이터가 되고 말 것이니, 아무리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신의 심정이 이에 이르면 통곡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혹시라도 방천防川이 한꺼번에 무너져서 막을 수 없는 것과 같은 형세가 되면, 걷잡을 수 없이 위태해져서 어떤 계책도 쓸 수가 없게 될 것이니, 미리 생각해 두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지금 저 적이 돌아갈 것을 생각하는 날을 당하여, 월왕越王이 20년 동안 교훈敎訓하고 생취生聚한 계책52)을 본받아서 거짓으로 교린을 허락하는 척하며 보낸다면, 이것이 비록 장구한 계책은 아니라 하더라도, 백성들이 조금은 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뒤에 사람이 없는 곳에는 유민流民을 불러 모아 힘이 닿는 대로 둔전屯田을 하며 밭 갈고 씨 뿌리게 하고, 모든 것이 갖추어진 곳에서는 그들로 하여금 본업에 힘쓰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군수를 계속해서 댈 수 있고, 기계機械를 계속해서 마련할 수 있을 것이며, 민력民力을 보전하는 동시에 산성을 쌓고 요새지를 설치하는 일도 거의 이룰 수 있을 것이니, 종사의 원수도 조금 갚을 수 있을 것이요, 국가의 중흥도 지금부터 바로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두 가지 계책을 어기면 일의 성패를 알 수 없으니, 삼가 바라옵건대 성명聖明께서는 재량裁量하고 헤아려 주소서. 그리하여 한 가지 계책만이라도 윤허해 주신다면, 신이 비록 늙고 병들었어도 다시 남은 군사를 이끌고 전쟁터에 뛰어들어 맹세코 왜적과는 함께 살지 않을 것이며, 혹 국사國使의 뒤를 따라가서 다시 교린을 함께 논하라고 보내신다면 그 일을 결정지은 뒤에야 그만두겠습니다.
신은 정신이 혼매昏昧한 데다 정성은 넘쳐도 문사文辭는 위축되어 자못 미진한 바가 있으니, 삼가 바라옵건대 잠시라도 금문金門(궁궐 문) 아래에 나아가 일일이 진계陳啓하게 해주셨으면 합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성명께서는 굽어 살펴 주소서.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이 소疏를 비변사備邊司에 내리고 전교하였습니다.
“소에서 ‘금문 아래에 나아가 일일이 진계陳啓하게 해주면 좋겠다’라고 하였다. 그를 만나 볼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이 승려는 다른 승려와는 다르니, 차비문差備門(궁궐의 편전 앞문. 연희문)에 초치招致하여 자세히 물어보도록 하라.”
또 전교하였습니다.
“승장 유정은 산인山人의 신분으로 의리에 입각하여 왜적을 토벌하였는데, 그 군대가 자못 정예로워서 머리를 벤 공을 많이 세웠고, 적을 추격하여 남으로 내려가서 지금은 바야흐로 적과 보루堡壘를 마주하고 있으며,

008_0092_a_01L二百年禮樂文物之邦坐成草樹狐免
008_0092_a_02L之塲耳雖噬臍而何及臣情到此
008_0092_a_03L勝痛哭如或勢若防川一潰而莫遏
008_0092_a_04L則岌岌殆哉策無所施不可不預慮也
008_0092_a_05L今當彼賊思歸之日翻依越王廿年敎
008_0092_a_06L訓生聚之策佯許交隣而送之則此雖
008_0092_a_07L不久之計民得以少歇矣然後無人之
008_0092_a_08L則諭聚流民隨力所及使之屯田
008_0092_a_09L耕種完全之境使之致力本業則軍
008_0092_a_10L需可以繼措機械可以繼備民力可以
008_0092_a_11L保完山城設險之事庶幾及就而亦
008_0092_a_12L可小報宗社之讎而中興可立以待也
008_0092_a_13L違此二策則事之成敗未可知也
008_0092_a_14L願聖明裁之度之允可一策則臣雖老
008_0092_a_15L更領殘兵從事於赴戰誓不俱生
008_0092_a_16L或隨國使之後更與論交而送
008_0092_a_17L事㝎而後已也臣精神昏昧情溢辭蹙
008_0092_a_18L頗有所未盡伏願暫就金門下一一陳
008_0092_a_19L伏惟聖明垂察焉謹昧死以聞

008_0092_a_20L
䟽下備邊司傳曰䟽內願就金門下一
008_0092_a_21L一陳啓云渠則不可見矣此僧與他
008_0092_a_22L僧有異招致差備門問焉知悉又傳
008_0092_a_23L曰僧將惟政以山人仗義討賊其兵
008_0092_a_24L頗銳多立斬級之功追賊南下今方

008_0092_b_01L심지어는 누차 적중賊中에 출입하여 적장과 쟁변爭辨하였다. 이는 사람이 능히 하기 어려운 일이니, 비변사는 후하게 위무慰撫해야 옳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군중軍中에 공을 세우고서도 상을 받지 못한 자가 없지 않을 것이니, 그의 말을 자세히 물어서 아뢰면 일일이 논상論賞할 것이다. 또 그가 건의할 일이 있다고 하거든, 자세히 묻고 채택하여 시행하라고 비변사에 일러라.”
또 전교하였습니다.
“왕자가 군부君父의 원수인 왜적에게 서신을 통할 수는 없는 일이나, 중의衆議가 만약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면, 내가 어찌 꼭 굳이 저지하겠느냐?이 한 조목은, 송운이 재차 적진에 들어갔을 때에 청정이 왕자에게 보낸 서신이 있는 만큼, 비국備局이 답서가 없을 수 없다는 뜻으로 논품論稟했기 때문에 이 하교가 있게 된 것으로 보인다. 군대의 화약과 기계를 넉넉히 유정에게 속히 주어서 가지고 가게 해주고, 그 수량을 서계書啓하라. 다만 중국 화약은 내가 가지고 와서 시험해 본 결과 쓸 수가 없었으니, 우리나라에서 만든 화약을 주는 것이 좋겠다. 군공軍功도 오직 유정의 말을 들어 하나하나 급속히 거행함으로써 그가 가지고 가서 반포하여 군사를 격려하도록 하라.”
또 차비문에 초치하고 하교하였습니다.
“그대가 산인의 신분으로 의기義氣를 떨쳐 왜적을 토벌해서 전공을 많이 세웠고, 지금도 적과 대치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적의 소굴에 출입하며 온갖 위험을 겪었으니, 나라를 위하는 정성이 지극해서 내가 가상하게 여기는 바이다. 가계는 사인士人 출신인가, 사인이 아닌가? 송운이라는 이름은 별호인가, 아니면 적중에 들어가기 위해서 임시로 붙인 칭호인가? 변란 이전에는 늘 어느 산에 있었는가? 향산香山의 명선名禪인 휴정은 스승으로 섬겼는가, 벗으로 지냈는가? 황해도의 승려 의엄義嚴을 아는가? 의엄은 어떤 사람인가, 그도 명승인가? 변란 때에 무슨 인연으로 의병을 일으켜서 장수가 되었는가? 군중軍中에서 말하고 싶은 것과 청정淸正 적중의 일을 모두 말해 보라.
지금 국가의 형세가 위급한데, 어떻게 하면 흉적을 소탕하겠는가? 계책은 어떻게 세워야 하겠는가? 거느린 군사의 양향粮餉과 기계는 어디에서 마련하였는가?

008_0092_b_01L與賊對壘至於累度出入賊中與賊將
008_0092_b_02L爭辨此則人所難能備邊司宜可厚慰
008_0092_b_03L且其軍中不無有功而不得蒙賞者
008_0092_b_04L詳問其言以啓則一一論賞且如有可
008_0092_b_05L言之事詢問采施言于備邊司
008_0092_b_06L又傳曰王子無通書於君父讎之賊之
008_0092_b_07L然衆議若以爲不可不爲則子 [7] 何必
008_0092_b_08L强爲止之此一段似因松雲再入賊陣時淸正有
書於王子備局以不可無荅書之意論

008_0092_b_09L故有
此下敎
軍火器械優數速付於惟政使
008_0092_b_10L之持去其數書啓但唐火藥予取來
008_0092_b_11L試之則不可用矣冝以我國所煮火藥
008_0092_b_12L給之軍功亦聽惟政之言一一急速擧
008_0092_b_13L使之持去頒布聳動其軍
008_0092_b_14L又招致差備門下敎曰爾以山人奮義
008_0092_b_15L討賊多立戰功于今與賊對壘至於
008_0092_b_16L出入賊窟備經危險爲國之誠至矣
008_0092_b_17L予用嘉焉系出士人乎非士人乎
008_0092_b_18L雲之名是別號乎抑因入去賊中而
008_0092_b_19L假稱乎變前常在何山香山名禪休靜
008_0092_b_20L師事之乎友之乎黃海道僧義嚴知之
008_0092_b_21L義嚴是何許人是亦名僧乎變時
008_0092_b_22L緣何起義爲將軍中所欲言者及淸
008_0092_b_23L正賊中事可盡言之今國勢危急
008_0092_b_24L以則掃平兇賊計將安出所率之軍粮

008_0092_c_01L데리고 있는 군사의 수는 얼마나 되는가? 부장副將은 누구인가? 진중陣中에서 공이 있는 장수는 누구인가? 사사射士는 몇 명인가? 포수도 있는가? 군대의 화약과 기계를 군기시軍器寺로 하여금 지급하게 하였는데, 이미 받아내었는가? 진중에 군공이 있는데도 아직 상을 받지 못한 자에 대해서는, 비변사로 하여금 일일이 논상하게 하라고 전교하였는데, 이미 적어서 올렸는가?
옛날 유병충劉秉忠과 요광효姚廣孝53)는 모두 산인의 신분으로 특수한 공훈을 세워서 이름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지금 나라의 형세가 이와 같으니, 그대가 만약 환속을 한다면, 응당 백 리의 소임을 맡길 것이요, 삼군三軍의 장수를 제수할 것이다. 이것도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어떻게 생각하는가?”
성상이 이처럼 융숭하게 돌아보고 포장褒獎하였으니, 이 아래에 조목별로 대답한 말들이 필시 볼 만한 점이 있었을 것인데, 병란의 와중에서 바랑의 문부文簿가 태반이나 소실되어 뒷사람이 수습할 수 없게 하였으니, 아, 정말 애석한 일이다.
◆ 유 독부의 명령으로 재차 적진에 들어가서 적정賊情을 분명히 파악한 뒤에 독부가 위촉한 일을 결코 이룰 수 없다는 것과 청정의 흉봉兇鋒을 끝내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급급히 조정에 달려가 고하면서 앞에 놓인 젓가락을 빌려 대책을 강구하려 하였으니,54) 이는 바로 국궁진췌鞠躬盡瘁55)하여 죽은 뒤에나 그만두겠다는 심사心事였다. 그의 소疏를 읽어 보면, 가슴속에 가득한 뜨거운 피가 종사宗社와 생민生民을 위하는 그의 지극한 정성과 비통한 심정 가운데에서 쏟아져 나온 것 아님이 없고, 진달進達한 내용도 한 시대의 훌륭한 계책이요, 문장 또한 항건亢健하고 진솔하여 서생書生의 교만한 꾸밈새를 짓지 않았으니, 우주 사이에 문자를 모르는 호걸은 있지 않다는 것을 비로소 믿겠다.
◆ 일찍이 듣건대, 석씨釋氏(불교)는 군신과 부자간의 얽매임을 두려워하여 산림으로 도망쳐 들어간다고 하였다. 그러나 세상의 치도緇徒(佛徒)가 이 기록을 읽는다면, 이 늙은이의 흉중에는 한 점의 망념도 붙지 않고,

008_0092_c_01L餉器械從何辦出所帶軍數幾許
008_0092_c_02L將爲誰陣中有功之將爲誰射士幾許
008_0092_c_03L亦有砲手乎軍火器械令軍器寺給之
008_0092_c_04L已爲受出否陣中有軍功而未得蒙賞
008_0092_c_05L令備邊司一一論賞事傳敎已爲
008_0092_c_06L書呈否昔劉秉忠姚廣孝俱以山人
008_0092_c_07L建立殊勳名流後世今國勢如此
008_0092_c_08L若還俗則當委以百里之任授以三軍
008_0092_c_09L之帥矣不亦美如何哉

008_0092_c_10L
聖眷褒獎之隆如此此下條對之
008_0092_c_11L必有可觀而兵戈道途中
008_0092_c_12L囊文簿太半歸於子虗使後人收
008_0092_c_13L拾不得咄咄可惜
◆以劉督府命
008_0092_c_14L再入賊陣洞見賊情然後
008_0092_c_15L督府所囑決不可遂而淸正兇鋒
008_0092_c_16L終不可遏則汲汲奔告于朝欲借
008_0092_c_17L前箸而籌之便是鞠躬盡瘁死而
008_0092_c_18L後已底心事讀其䟽則滿腔熱血
008_0092_c_19L莫非爲宗社生民至誠痛怛中寫
008_0092_c_20L出來所陳亦一時良策文又亢健
008_0092_c_21L眞率不作書生矯飾態始信宇宙
008_0092_c_22L未有不識字豪傑
◆嘗聞釋氏
008_0092_c_23L怕君臣父子累迯入山林世之緇
008_0092_c_24L讀是錄者見此老胸中不着

008_0093_a_01L또 털끝만큼도 어리석은 생각이 일어나지 않음을 알 것이니, 세간의 대의리大義理에 입각하는 곳에 절로 무상의 반야바라밀이 있게 된다는 사실을 비로소 믿게 될 것이다.
◆ 우리 국가의 열성列聖이 교화하고 배식培埴한 공효功效가 용사龍蛇의 액운56)을 당하여 크게 드러났다. 즉 낭묘廊廟의 제현諸賢은 말할 것도 없고, 조중봉趙重峰(趙憲)ㆍ고제봉高霽峰(高敬命)이 모두 은퇴하여 집에 있다가 향리에서 일어났고, 곽재우郭再祐ㆍ김덕령金德齡ㆍ정기룡鄭起龍ㆍ고언백高彦伯이 모두 초야에서 일어났으며, 송운松雲ㆍ의엄義嚴ㆍ처영處英ㆍ영규靈圭ㆍ해안海眼 등 제승諸僧이 또 쌍수바라문雙樹婆羅門(불법 수행자)의 신분에서 일어났다. 그리하여 하나같이 충절을 모두 바쳐 국은國恩에 보답하는 장부가 되었으니, 이로써 국운國運이 억만년토록 무궁히 이어질 것이다.
갑오년 12월에 다시 청정의 진영에 들어가서 정탐한 기록
이때 심유경沈惟敬과 평행장平行長의 화의和議가 이미 결정되었고, 명나라 조정에서도 이미 왜왕으로 책봉한다는 명이 있었다. 그러나 청정은 가장 강포한 자로서 그 마음이 행장과 서로 다른 만큼 뜻밖의 변고가 있게 될까 두려웠다. 그래서 비변사가 품지稟旨한 뒤에, 다시 송운으로 하여금 왕자군王子君의 답서 및 응자鷹子(매)ㆍ호피 등의 물건을 가지고 가서 청정을 만나 보고 그의 동태를 살피게 하였다.
◆ 왕자군이 청정에게 답한 서신을 부기하면 다음과 같다.
한번 영중營中을 떠나오고 나서 어느새 해가 바뀌었다. 비록 전쟁이 그치지 않고 각종 사고가 많았던 탓으로 한 장의 서신을 보내어 조금이나마 사적으로 사례하는 뜻을 펴지는 못했지만, 장군이 이 몸을 수화水火 중에서 구해 준 은혜만은 실로 폐부에 새기고 감히 잠시라도 잊은 적이 없다.
지난해에 귀환한 뒤에

008_0093_a_01L一種妄念又不起一毫癡想方信
008_0093_a_02L世間大義理立脚處自有無上般
008_0093_a_03L若波羅蜜
◆我國家列聖敎化培
008_0093_a_04L埴之功至龍蛇之厄而大著即無
008_0093_a_05L論廊廟諸賢趙重峰高霽峰俱以
008_0093_a_06L家食起鄕廬郭再祐金德齡鄭起
008_0093_a_07L龍高彥伯皆從草野松雲義嚴
008_0093_a_08L處英靈圭海眼諸僧又從雙樹婆
008_0093_a_09L羅門便做箇輸忠盡節報國恩丈
008_0093_a_10L所以億萬無疆

008_0093_a_11L

008_0093_a_12L甲午十二月
008_0093_a_13L復入淸正營中探情記

008_0093_a_14L
是時沈惟敬與平行長和議已決
008_0093_a_15L皇朝已有封倭之命而淸正最强
008_0093_a_16L其心與行長相左恐有意外之變
008_0093_a_17L故備邊司禀旨後復使松雲持王
008_0093_a_18L子君荅書及鷹子虎皮等物徃見
008_0093_a_19L淸正以觀俯仰
◆附王子君荅淸
008_0093_a_20L正書曰一自離去營中忽忽經歲
008_0093_a_21L雖緣干戈未息事故多端不得以
008_0093_a_22L一紙書信少伸私謝而惟將軍拯
008_0093_a_23L己水火之恩則實銘諸肺腑而不
008_0093_a_24L敢暫忘也上年還歸之後即以大

008_0093_b_01L바로 대명大明 천황제天皇帝의 명을 받들어 오랫동안 신경神京에 가 있다가이것도 송운이 처음 적진에 들어갔을 때 청정에게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이와 같이 말한 것이다. 이제야 수레를 돌리게 되었다. 그런데 평양에 있는 경략經略의 군문軍門에 발길이 이르렀을 때에 마침 한양 사람 이겸수를 만났는데, 그가 전한 송운松雲 노선老禪의 말과 장군의 서신을 얻어 보고는 소식을 알게 되었으므로 멀리서 생각하던 마음이 많이 위로되었다.
우리 조선과 일본은 대대로 교린交隣을 돈독히 하며 털끝만큼도 간격이 없었다. 오늘날의 화란禍亂은 단지 한두 명의 불량한 무리가 난리를 일으켜서 이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천지 귀신도 이미 싫어하고 있는 터이다. 그런데 장군이 홀로 전쟁을 그만두고 옛날의 우호 관계를 되찾으려는 뜻을 지니고 있으니, 참으로 좋은 일이다.
이 일은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일체 중국과의 약속을 따라야 하기 때문에 감히 스스로 결단할 수가 없고, 또 장군이 어떻게 처치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할 것이다. 대저 어떤 일이든 극한에 이르면 반대로 바뀌고, 너무 지나치면 위태로운 법이다. 장군은 이역異域에서 군사를 수고롭게 하여 비바람을 맞은 것이 오래되었다. 예로부터 항상 이기는 군대는 없었으니, 만약 고인古人의 경계를 생각하고 스스로 반성하는 방도를 꾀하여 두 나라의 생령들이 모두 도탄을 면하게 한다면, 장군의 아름다운 덕의德義가 오늘과 내일에 더욱 빛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답서를 올리게 되었으나, 마음속의 할 말은 다하지 못하였다.
우리들은 11월 6일에 서울을 출발하여 21일에 원수부元帥府에 도착하여 며칠 동안 머물며 우도右道의 적의 정세를 상세히 탐지하였습니다. 12월 9일에 경주에 도착하여 12일에 이겸수ㆍ장희춘ㆍ통사 김언복을 시켜 적장 청정에게 서신을 보내었습니다.
“송운이 경구京口(京江, 즉 한강 어귀)에서 중풍에 걸려 온갖 병증病症이 함께 도져서 40여 일을 신음하는 바람에 이렇게 시일을 지체하여 장군을 의심하게 만들었으니, 정말 유감스럽다. 동짓달 6일에 와서야 겨우 병든 몸을 부축 받고 돌아와

008_0093_b_01L明天皇帝命久在神京此亦以松雲
初入賊陣時

008_0093_b_02L所言於淸正者
如此故云
今纔旋車行到平壤
008_0093_b_03L經略軍門適逢漢陽人李謙受
008_0093_b_04L傳松雲老禪語兼得將軍書憑審
008_0093_b_05L動靜良慰遠想我朝鮮與日本
008_0093_b_06L世篤隣交無纖毫間隙今日之禍
008_0093_b_07L特出於一二不逞之徒交亂至此
008_0093_b_08L天地鬼神亦已厭之矣將軍獨能
008_0093_b_09L有意止戈重尋舊好甚善甚善
008_0093_b_10L此事在弊邦一從天朝約束不敢
008_0093_b_11L自斷而亦在於將軍處置如何耳
008_0093_b_12L夫物極則反致至則危將軍勞師
008_0093_b_13L異域暴露久矣自古無常勝之家
008_0093_b_14L若念古人之戒圖所以自反之道
008_0093_b_15L使兩國生靈俱免塗炭則將軍德
008_0093_b_16L義之美益有光於來今矣草此奉
008_0093_b_17L言不盡意

008_0093_b_18L
某等十一月初六日京城離發二十一
008_0093_b_19L到元帥府留數日詳探右道賊奇
008_0093_b_20L十二月初九日到慶州十二日使李謙
008_0093_b_21L受蔣希春通事金彥福通書于賊將淸
008_0093_b_22L正曰松雲在京口中風百病俱發
008_0093_b_23L呻四十餘日遲緩至此致令將軍發疑
008_0093_b_24L可恨至至月初六日僅得扶病而還

008_0093_c_01L지금 경주에 이르렀으나, 병이 아직 낫지 않아서 정신이 혼미하고 음식을 먹지도 못하니 걱정스럽다. 장군과 중로中路에서 만나 조용히 회포를 풀고 싶으니, 장군이 날짜와 장소를 지정해서 보내 주는 것이 어떻겠는가?”
20일에야 회답을 보내었습니다.
“이달 21일이나 22일 사이에 울산 성황당이 있는 강 어구에서 만나자.”
이에 내가 23일에 좌병사左兵使 군관軍官 정正 변익성邊翼星, 주부主簿 정희소鄭希韶, 방사防使 군관 권응두權應斗, 출신出身 송인해宋仁海, 사복司僕 이학남李鶴男, 주부 이겸수李謙受, 직장直長 장희춘, 통사通事 김언복과 내가 인솔한 정正 김사식金思湜ㆍ김응진金應珍, 부정副正 안순장安順長 및 아병牙兵 30여 인과 함께 곧장 좌병영左兵營의 성 동쪽, 왜놈들이 군대를 매복한 곳으로 갔더니, 왜놈들이 우리 군사 일행을 멀리서 바라보고는 그 장수에게 달려가 보고하였습니다. 이에 부장 희팔과 적승賊僧 일진이 각각 10여 명의 강한 왜놈들을 이끌고 와서 우리를 맞고는, 마침내 형초荊草(옛정을 나누는 마음)를 자리에 깔고 들판에 앉아서 말하였습니다.
“날도 춥고 길도 먼데 왕래하느라 힘들게 수고했다. 송운에게 미안하고 미안하다.”
일진이 청정의 뜻을 글로 써서 보였습니다.
“우총병右總兵이 행장ㆍ의지의 무리와 이미 강화를 하고, 부산ㆍ동래ㆍ기장 등 진陣에 통보한 것이 오래되었다. 송운도 행장 등과 통호通好하여 벌써 화의를 이루어 놓고는, 다시 와서 우리들을 유인한들 무슨 좋은 일이 있겠는가?”
송운이 말하였습니다.
“내가 경구에서 병들어 누운 것이 40여 일이요, 중로에 이르러 아파서 누운 것이 20여 일이다. 행보하기가 곤란했지만, 장군과의 약속을 어기는 일을 중난重難하게 여겨서 총총히 돌아와 원수부에 도착하였다. 여기에서 행장의 무리가 김해 부사府使를 통하여 우총병을 만나 보기를 청했다는 말은 잠깐 들었으나, 아직 강화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희팔이 말하였습니다.
“송운이 사실과 다르게 우리를 속이는 것이 이 정도로 극에 이르렀다.

008_0093_c_01L今到慶州病猶未去精神恍惚至廢
008_0093_c_02L食飮可慮可慮要與將軍期會于中
008_0093_c_03L穩叙懷抱惟將軍㝎日指處而送何
008_0093_c_04L至二十日乃回書曰今二十一二
008_0093_c_05L日之間要與會晤于蔚山城隍堂江口
008_0093_c_06L某二十三日與左兵使軍官正邊翼
008_0093_c_07L主簿鄭希韶防使軍官權應斗
008_0093_c_08L身宋仁海司僕李鶴男主簿李謙受
008_0093_c_09L直長蔣希春通事金彥福某所率正金
008_0093_c_10L思湜金應珍副正安順長及牙兵并三
008_0093_c_11L十餘人直到左兵營城東倭奴伏兵處
008_0093_c_12L而賊奴輩望見我軍之行走報其將
008_0093_c_13L則副將喜八賊僧日眞各率十餘强奴
008_0093_c_14L來見遂班荆而坐野曰天寒遠路徃來
008_0093_c_15L勞苦爲松雲未安未安日眞以淸正意
008_0093_c_16L書示曰右總兵與行長義智輩已爲講
008_0093_c_17L而通報于釜山東萊機張等陣久矣
008_0093_c_18L松雲亦與行長等通好業已成和而更
008_0093_c_19L與我等誘之耳有何好事哉松雲
008_0093_c_20L我在京口臥病四十餘日至中路
008_0093_c_21L臥痛二十餘日不堪行步而重違將軍
008_0093_c_22L之約寸寸歸來到元帥府暫聞行長
008_0093_c_23L因金海府使求見右總兵云未聞
008_0093_c_24L講和也喜八曰松雲翻爲欺我至於

008_0094_a_01L청정이 와서 만나 보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송운이 말하였습니다.
“나는 부처님의 제자이다. 어려서부터 불망어不妄語와 불살생不殺生의 계율을 지켰는데, 어찌 사람을 속일 리가 있겠는가. 행장의 무리가 중국 장수와 논의한다는 말은 예전에 들었어도, 우리 조선과 강화한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일진이 글로 써서 보였습니다.
“전해 듣건대, 송운이 승군의 도대장都大將이라고 하던데, 어찌 참으로 망어하지 않고 살생하지 않았다고 하겠는가?”
송운이 말하였습니다.
“나를 대장이라고 지목한 말은 어떤 사람의 입에서 나온 것인가?”
희팔이 말하였습니다.
“이는 모두 조선 사람의 말이다. 우리들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날이 벌써 어두워지고 날씨도 매우 추웠습니다. 희팔이 말하였습니다.
“송운과 변익성ㆍ이겸수ㆍ장희춘ㆍ통사 김언복 등은 나와 함께 강을 건너 강변 막사에 머물러 묵도록 하고, 그 나머지 데리고 온 사람과 말은 여기에 머물러 있는 것이 좋겠다.”
내가 밤 2경 초에 적들과 강을 건너 왜놈이 쳐 놓은 장막 속에 들어갔더니, 추위가 뼛속까지 사무치고 손발이 얼어붙어 견디기 어려운 형편이었는데, 적이 탄불을 피워 주어 조금 숨을 쉴 수 있었습니다. 이후로는 다시 그들과 말을 하지 않고 마침내 더불어 동반同伴하며 머리를 교차하고 무릎을 맞댄 채 앉아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습니다. 희팔이 말하였습니다.
“송운은 경주로 돌아가고, 이 공李公과 장 공蔣公과 변 공邊公은 우리 상관을 보러 가자.”
송운이 말하였습니다.
“내가 여기에서 돌아가면 필시 장군과 용이하게 만날 수 없을 것이다. 통사를 보내어 서신을 전하고, 장군과의 회견을 청해서 이야기를 나눈 뒤에 작별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희팔이 말하였습니다.
“우도右道의 일이 해결되지 않으면, 백 번 글을 보내 청해도 안 될 것이다.”
송운이 말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가겠다. 어찌 꼭 머물러 기다리겠는가?”
그리고는 곧장 왕자군의 서한을 이겸수 등에게 건네주어 적장賊將과 통하게 하고 나서 마침내 교린의 가부에 관한 대의大義를 종이 한 장에 적어서 주홍으로 도장을 찍고 말하였습니다.

008_0094_a_01L此極也淸正不來相見亦以此也
008_0094_a_02L雲曰我是佛之徒也自少持不妄語不
008_0094_a_03L殺生戒烏有以欺人哉曾聞行長輩
008_0094_a_04L與天將論議未聞與我朝鮮講和也
008_0094_a_05L眞書示曰憑聞松雲爲僧軍都大將云
008_0094_a_06L豈眞有不妄語不殺生哉松雲曰指我
008_0094_a_07L爲將之言出於何人之口耶喜八曰
008_0094_a_08L此皆朝鮮人之語也我等何得以知之
008_0094_a_09L語未終日已暮矣天寒又極喜八曰
008_0094_a_10L松雲及邊翼星李謙受蔣希春通事金彥
008_0094_a_11L福等與我渡江止宿于江幕中其餘
008_0094_a_12L所率人馬留此可也云某於二更初
008_0094_a_13L與賊輩渡江至賊奴結幕中寒逼肌骨
008_0094_a_14L手足腁胝勢似難保而賊以炭火向之
008_0094_a_15L稍爲通息更不與語而遂與同伴
008_0094_a_16L頭接膝坐而待明喜八曰松雲則還
008_0094_a_17L向慶州李公蔣公邊公可徃見我上官
008_0094_a_18L也云松雲曰我從此去則必與將軍
008_0094_a_19L不得容易相會也送通事致書請將軍
008_0094_a_20L相見打話而別如何喜八曰右道事
008_0094_a_21L未決則雖百書邀之而不可得也
008_0094_a_22L雲曰然吾當去矣何必留待即以王
008_0094_a_23L子君書准授李謙受等使之通于賊將
008_0094_a_24L遂寫交隣可否大義於一紙以朱紅印

008_0094_b_01L
“조선이 일본과 교린을 맺은 지 지금 2백 년이 된다. 그들이 본국에서 오면 우리 조선이 그들을 예우하며 환영하고 위로해 준 것이 또한 오래되었다. 그리고 통신사로 말하면, 의리가 금석과 같아서 털끝만큼도 틈이 없었는데, 일본이 혼자 흔단釁端을 만들어내어 천하를 괴롭히고 어지럽혔으니, 이것이 누구의 잘못인가.
만약 예전처럼 교린을 하고 싶다면, 마땅히 군사를 거두어 속히 돌아가서 이러한 뜻을 관백에게 상세히 고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 나라에서 사신의 예를 갖추어 내빙할 경우, 우리나라에서 어떻게 대할지는 그때 가 봐야 알 것이니, 오직 장군은 취사하기 바란다.
부도씨浮屠氏가 말하기를, ‘사람이 땅으로 인해 넘어졌으면 다시 땅을 짚고 일어나야 하는 것과 같다’57)라고 하였다. 사람이 스스로 넘어졌다가 스스로 일어나는 것이지, 땅이 넘어진 사람에게 어떻게 해줄 수가 있겠는가? 그러니 또 무슨 말을 하겠는가?”
또 유정이 사서私書를 지어 청정에게 부치며 말하였습니다.
“송운이 왕자군의 서신을 받고 또 조정의 명령을 받들고서 장군과의 약속을 어기는 것을 중난하게 여겨 풍찬노숙風餐露宿을 하며 총총히 돌아왔다. 또 장군이 ‘울산의 성황당이 있는 강 어구에서 만나고 싶다’라고 글을 보냈기에 송운은 온갖 병을 앓다가 살아남은 몸으로 매우 기뻐하며 찾아왔다. 그런데 장군이 약속을 어기고는 늙고 병든 나로 하여금 혼자 자고서 돌아가게 하다니, 우습고 우스울 뿐이다.
처음에 나는 장군을 세상에 드물게 나오는 영웅으로 생각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하나의 작은 꼬투리를 트집 잡아 약속을 저버리다니, 인정상 참으로 이럴 수가 있는 것인가. 일이 이루어지고 이루어지지 않는 것도 운수運數에 관계된다고 하겠다.
그리고 우도右道의 행장과 의지 등 제장諸將이 대국大國과 강화를 한다 하더라도, 똑같은 일본의 신하의 입장에서는 지극히 잘된 일로 볼 수도 있다. 더구나 중국 조정이 책봉을 허락했다고 하는 것이야 송운이 그 전말에 대해서는 상세히 알지 못하겠으나, 우리 조정의 일에 대해서야 무슨 일인들 알지 못하겠는가. 단지 우총병과 행장의 무리가 잠시 담화했을 뿐이요, 강화의 성사 여부는 기필할 수가 없는 것인데, 장군이 중간에서 일내기 좋아하는 자들의 지껄이는 소리를 듣고는 송운이 공들인 일을 이렇게까지 심하게 저버리다니, 그윽이 장군을 위하여 개탄하는 심정이다.

008_0094_b_01L之曰朝鮮與日本結爲隣好二百年
008_0094_b_02L于玆渠以本國來之則我朝鮮以禮遇
008_0094_b_03L來之勞之亦已多時至於通信使
008_0094_b_04L義同金石罔間秋毫日本自作障難
008_0094_b_05L惱亂天下是誰之過也倘欲如前交隣
008_0094_b_06L當撤兵駚歸以是義具告於關白以其
008_0094_b_07L國使禮來聘則我國輕重當視於此時
008_0094_b_08L惟將軍取捨之浮屠氏曰如人因
008_0094_b_09L地而倒還依地而起人自倒自起耳
008_0094_b_10L地向倒人曾何謀哉又何言哉又作
008_0094_b_11L惟政私書寄淸正曰松雲受王子君書
008_0094_b_12L又承朝廷命令重違將軍之約露宿風
008_0094_b_13L寸寸而歸又得將軍書欲會晤于
008_0094_b_14L蔚山城隍堂江口云松雲以萬病餘生
008_0094_b_15L顚喜而來將軍違之使老病獨宿而還
008_0094_b_16L可笑可笑初意以將軍爲間世英雄
008_0094_b_17L到此因一小機負之人情固若是乎
008_0094_b_18L之成敗亦關於數也且右道行長義智
008_0094_b_19L等諸將雖與大邦講和同是日本之臣
008_0094_b_20L極是好事也況中朝封許則松雲雖未
008_0094_b_21L詳端倪我朝廷事則何事不知但右
008_0094_b_22L總兵與行長輩暫時談話耳講和成不
008_0094_b_23L成未可期也惟將軍聽中間好事者弄
008_0094_b_24L而負松雲有功至於此極竊爲將

008_0094_c_01L
그리고 왕자군의 서신 1봉은 이겸수 등에게 주어 보낸다. 또 조정이 최상등의 매(鷹) 12연連과 해동청海東靑 1좌坐와 금빛 점무늬가 박힌 호랑이 가죽 1영令은 장군 족하에게 봉정하고, 상등의 매 1연과 사금 점무늬가 박힌 표범 가죽 1영은 아장亞將 희팔에게 증정하고, 또 상등 황주黃紬 1단端은 선사 일진에게 증정하고, 또 1단은 선사 재전在田에게 증정하고, 백주白紬 1단은 선사 천우天祐에게 증정한다. 이로써 왕자와 대신을 예우하며 돌려보낸 후의에 사례하는 바이니, 장군은 받아 주기 바란다.”
이와 같은 문서를 모두 이겸수와 통사 김언복 등에게 주어서 들여보내고, 그들로 하여금 왕자군에 대한 답서를 받아 오게 한 뒤에 나는 마침내 적과 헤어져서 돌아왔습니다.
28일에 이겸수 등이 돌아와서 말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희팔ㆍ일진의 무리와 함께 판옥板屋의 큰 배를 타고 바다에 떠서 가는데, 이날 저녁에 대풍大風이 일어 물결이 하늘에 닿으니 타고 가는 가벼운 배가 물결 따라 오르락내리락하였습니다. 뭇 왜인들이 힘을 다하여 노를 저으니 나는 듯이 빨리 달려서 황혼에 적진 아래에 배를 대었습니다. 희팔이 가만히 말하였습니다.
“일이 기밀을 요하니, 당신들은 각자 매를 가지고 우리와 함께 들어가되, 옆에서 뭐하는 사람이냐고 물으면, 당신들은 매를 파는 사람이라고 대답하라.”
이겸수 등이 답하였습니다.
“우리가 전일부터 출입을 했어도 이런 일이 없었다. 이번 걸음에 어찌 꼭 다르게 해야만 하는가?”
희팔이 말하였습니다.
“당신들이 출입한다는 소문이 우도 사람들의 귀에 퍼질까 두려워서 그렇다.”58)
밤이 깊어서야 비로소 희팔의 집에 도착하였습니다. 바로 음식을 대접하였는데, 접대하는 것은 예전과 같았습니다. 희팔이 청정의 집에 들어가서 사유를 상세히 설명하니, 청정이 사람을 보내어 우리가 멀리 온 것을 위로하고, 또 매를 다룰 줄 아는 자를 보내어 매를 팔뚝 위에 얹고서 들게 하였습니다.
25일 아침 식사 뒤에 청정이 희팔을 보내어 말하였습니다.
“내가 당신들을 불러서 만나 보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다.

008_0094_c_01L軍不取也就以王子君書一封授李謙
008_0094_c_02L受等進送且朝廷以上上好鷹十二連
008_0094_c_03L海東靑一坐金紋點虎皮一令奉將軍
008_0094_c_04L足下上鷹子一連沙金點豹皮一令
008_0094_c_05L贈亞將喜八又以上黃紬一端贈禪師
008_0094_c_06L日眞又一端贈禪師在田白紬一端
008_0094_c_07L贈禪師天祐以謝王子大臣禮還之厚
008_0094_c_08L意也惟將軍頷之以此等文書都以
008_0094_c_09L准授李謙受通事金彥福等入送使之
008_0094_c_10L受答王子君書遂與賊分手而還二十
008_0094_c_11L八日李謙受等還來言曰與喜八日眞
008_0094_c_12L乘板屋巨艫浮海而徃是夕大風
008_0094_c_13L波浪連空所乘輕舟隨濤上下
008_0094_c_14L倭並力而其疾如飛黃昏到泊于賊陣
008_0094_c_15L喜八潜語曰事貴機密君等各持
008_0094_c_16L鷹子與我同入而傍有問如何人
008_0094_c_17L君等答以賣鷹人可也李謙受等答曰
008_0094_c_18L吾等自前日出入未曾有此等事此行
008_0094_c_19L何必有異喜八曰君等出入之奇
008_0094_c_20L播右人之聞也至夜深始到喜八家
008_0094_c_21L即饋飯凡接待事如前喜八入淸正家
008_0094_c_22L具陳所以淸正使人慰我等遠來又送
008_0094_c_23L知鷹者臂鷹而入二十五日朝後
008_0094_c_24L正使喜八來言曰我非不欲引來相見

008_0095_a_01L당신네 나라가 바야흐로 행장의 무리와 강화를 하는 때에 그들에게 혐의를 입을까 두렵기 때문이다. 이제 재전과 천우 두 고승을 보내노니, 그들은 나와 뜻을 같이하는 자들이다. 당신들이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이 승려들과 기탄없이 모두 말하도록 하라.”
얼마 뒤에 재전과 천우가 와서 보고는 말하였습니다.
“당신들이 서울에 갔다가 무사히 돌아와서 매우 기쁘고 위로된다.”
재전이 글로 써서 보였습니다.
“조선이 청정과 화의하는 일은 이미 결정이 되었는가?”
우리가 답하여 보였습니다.
“조선이 청정과 화의하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대명大明의 명命이 아니면 결정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우리 조선이 유 독부에게 상세히 통보했으니, 독부가 필시 천황제에게 품달했을 것이다. 또 왕자군의 서신과 조정에서 보낸 글 속에 내용이 다 들어 있다. 그 밖에는 별다른 일이 없다.”
두 왜승이 글로 써서 보였습니다.
“조선 사람은 일을 하면서 속이기 때문에 청정이 와서 보지 않는 것이다.”
우리들이 글로 써서 답하였습니다.
“조선이 속이는 것이 아니다. 당신들이 중간의 낭설浪說에 미혹되어 우리를 보지 않는 것이니, 이는 스스로 화의를 끊는 것이다. 대장부 사나이가 하는 일이 고작 이 모양인가?”
두 왜승이 글로 써서 보였습니다.
“조선이 바야흐로 우도에서 화의하고 있는데, 청정이 어떻게 그들이 하는 일을 빼앗아서 자기가 한다고 하겠는가?”
우리들이 통사를 시켜서 말을 전하였습니다.
“우도의 일은 화의가 아니다. 단지 행장 등이 우총병을 보기를 청하기에 부득이 한 번 만났을 뿐이지 무슨 다른 뜻이 있겠는가. 다만 중국 사신이 내려온다고 하자, 당신들이 이 소식을 듣고는 우리를 멀리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도 일본의 일인데, 짜증낼 것이 뭐가 있는가?”
두 왜승이 글로 써서 보였습니다.
“중국에서 책봉을 허락하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기는 하나, 관백의 마음에 들지 않는 데야 어찌하겠는가. 예전의 다섯 가지 조건 중에서 한 가지 일이라도 성사된다면, 필시 관백의 마음에 들어맞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책봉을 허락하는 일이 있다 해도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008_0095_a_01L汝國方與行長輩講和恐被嫌於彼人
008_0095_a_02L玆送在田天祐兩高僧與我同志者
008_0095_a_03L君等如有所欲言當與此僧等盡言無
008_0095_a_04L諱可也俄而在田天祐來見曰君等上
008_0095_a_05L無事還來欣慰欣慰在田書示曰
008_0095_a_06L朝鮮與淸正和議事能已㝎否我等答
008_0095_a_07L示曰朝鮮與淸正和議雖非難事
008_0095_a_08L大明之命則難決矣故我朝鮮具通
008_0095_a_09L于劉督府督府必禀于天皇帝矣又具
008_0095_a_10L於王子君書及朝廷書中也此外無別
008_0095_a_11L兩僧書示曰朝鮮人作事詐僞故
008_0095_a_12L淸正不來見也我等書答曰非朝鮮詐
008_0095_a_13L僞也汝等惑於中間之說而不見我等
008_0095_a_14L是自絶和也大丈夫漢子作事固如是
008_0095_a_15L兩僧書示曰朝鮮方議於右道
008_0095_a_16L淸正何以奪彼所爲而自爲也哉我等
008_0095_a_17L使通事傳言曰右道事則非和議也
008_0095_a_18L是行長等求見右總兵矣而不得已一
008_0095_a_19L場相見也有何別意乎但天朝使下來
008_0095_a_20L汝等聞此奇必踈我也彼亦日本
008_0095_a_21L之事也何可生憎兩僧書示曰天朝
008_0095_a_22L之封許雖美於關白之心不好奈何
008_0095_a_23L前五條內有一事成之則必合於關白
008_0095_a_24L之心不然則雖有封許事何關於我哉

008_0095_b_01L
또 써서 보였습니다.
“조선이 임해군臨海君의 아우 순화군順和君과 사신使臣 두세 사람을 내려 보내고, 청정도 믿을 만한 사람으로 하여금 배행陪行하게 하여 관백의 처소에 보내면 하루아침에 화의가 결정될 것이다. 만약 믿지 못한다면, 청정의 아들을 또 조선에 보내어 서로 볼모로 삼아도 좋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천 가지 만 가지 계책을 써도 일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들이 써서 답하였습니다.
“장군과 논의하며 드나들기를 이처럼 오래하였는데도, 장군이 항상 의롭지 못한 일을 논의하니,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한이 있어도 일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침과枕戈하고 상담嘗膽하느라 겨를이 없으며,59) 영웅의 눈물이 밤낮으로 마를 때가 없는데, 어떻게 왕자를 보내어 교린을 의논하겠는가. 더군다나 조종하는 권한이 중국 조정에 있음에랴.”
왜승이 은연隱然히 써서 보였습니다.
“산승山僧이 망어를 하지 않고 직언으로 일러 주겠다. 저 행장 등이 하는 일이 비록 우리의 일은 아니라 할지라도, 일이 빨리 이루어진다면 그만이지만, 만약 지체될 경우에는 3월~4월 사이에 반드시 대규모 공격이 있을 것이다. 당신이 내 말을 듣고 돌아가서는, 우리가 다시 공격할 적에 내 말이 거짓이 아님을 징험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하루 종일 문답을 하였으며, 희팔이 호피 등의 봉물封物을 가지고 청정의 처소로 들어갔습니다.
26일에 일진과 재전과 천우가 번갈아 드나들면서 청정의 아들을 볼모로 삼고, 그 대가로 왕자를 일본에 들여보내는 일을 상호 문답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날이 저물자 일진이 우리를 이끌고 사찰로 돌아와서 『시전詩傳』 10권과 『주역周易』 10권과 『황산곡시집黃山谷詩集』 20권을 들고 나와서 보여 주며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나의 보물이다.”
이에 우리들이 펼쳐 보니, 『시전』은 풍아송風雅頌의 장구章句의 체계가 우리나라의 『시전』과 조금 같고 크게 달랐습니다. 우리가 물었습니다.
“당신이 갖고 싶은 물건과 교환할 수 있겠는가?”
머리를 저으며 말하였습니다.
“만 냥의 은자를 준다 해도 나는 응하지 않을 것이다. 단지 송운과 함께 조선을 유람했으면 하는데,

008_0095_b_01L又書不曰朝鮮以臨海君弟順和君及
008_0095_b_02L使臣二三員下送而淸正亦使可信人
008_0095_b_03L陪進于關白處則一朝和議決矣如不
008_0095_b_04L信則淸正之子亦送于朝鮮相以爲質
008_0095_b_05L可也如其不然雖用千萬謀策事終
008_0095_b_06L不成也我等書答曰與將軍論議出入
008_0095_b_07L如此其久矣將軍常以不義論議雖天
008_0095_b_08L地覆墜事終不成也我國枕戈嘗膽之
008_0095_b_09L不暇而英雄之淚晝夜不乾何有送
008_0095_b_10L王子論交哉況操縱在天朝乎倭僧隱
008_0095_b_11L然書示曰山僧不妄語以直言諭之
008_0095_b_12L彼行長等雖非我事事若速成則已矣
008_0095_b_13L若遲緩則三四月間必有大擧矣汝聞
008_0095_b_14L我言而歸驗我無罔於來時可也如此
008_0095_b_15L問答終日至夜深喜八持虎皮等封物
008_0095_b_16L入淸正處二十六日日眞在田天祐
008_0095_b_17L互相出入以淸正之子爲質換王子
008_0095_b_18L入送事互相問答及日暮日眞率我
008_0095_b_19L等歸寺以手執詩傳十卷周易十卷
008_0095_b_20L山谷詩集二十卷出示曰此我之寶也
008_0095_b_21L我等披閱詩傳風雅頌章句之體與我
008_0095_b_22L國詩傳小同大異我等問曰以汝所
008_0095_b_23L欲換之得否僧掉頭曰雖以萬兩銀子
008_0095_b_24L我不要也只要與松雲同游於彼國

008_0095_c_01L그때가 되면 전사傳寫를 해도 좋다. 내 마음을 송운에게 허락한 지 오래되었으니, 그를 따라 노닐어 보고 싶다. 내가 전일에 이러한 뜻을 청정에게 고했더니, ‘조선의 대장이 반드시 너의 목을 벨 터인데 어떻게 하려느냐?’라고 하였다. 하지만 2월~3월 사이에 내가 나와서 송운과 노닐게 될는지도 알 수 없으니, 그때는 부디 송운이 와서 나를 데리고 가게 해 달라.”
그리고 국수와 술을 대접하며 지극히 은근한 뜻을 표하고는, 헤어질 무렵에 귓속말로 말하였습니다.
“모든 일을 3월 이전에 속히 이루도록 하라. 그렇지 않으면 이들이 군사를 일으키는 것으로 일이 이미 정해졌으니, 모쪼록 속히 이루는 것이 좋을 것이다.”
희팔의 집으로 돌아와 자는데, 밤이 깊어서 희팔이 우리를 불러내더니 각자에게 일본의 무명베 5단씩을 내주면서 말하였습니다.
“왕자군 전하殿下왜인의 풍속은 이름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부른다. 그래서 사람들끼리 공경하며 전殿과 어御라는 칭호를 붙인다.에게도 해외의 신물信物을 올려야 하고, 송운에게도 정을 표하는 신물을 보내야 하겠지만, 우도의 사람들이 만약 들으면 필시 우리가 조선에 뇌물을 바쳐 화의를 청한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서서히 형세를 보아 가며 우리 사람을 보내어 전달할 계획이다. 지금 이 물건은 여기까지 찾아온 노고를 잠시 위로하기 위함일 뿐이요, 감히 무엇을 주려고 함이 아니다.
당신들이 서울에서 우도에 돌아와서는, 총병總兵으로 하여금 먼저 행장 등을 접하게 한 뒤에 다시 우리를 유인하러 왔으니, 이는 우리의 군대 출동을 조금 늦춰 보려는 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또 어떻게 일을 이룰 수 있겠는가. 그렇긴 하지만 피아 간에 일이 빨리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그 기쁨을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들이 원하는 것은 속히 돌아가 바다를 건너는 것일 뿐이니, 당신들 조정에 돌아가 보고하여 속히 일을 이루도록 하라.
그리고 중국 사신이 내려온 뒤에 무슨 일이 결정되고 이루어졌는지 그 소식을 모쪼록 속히 통보해 주고, 만약 이루어지지 않았으면 행장 등이 통지한 문서들을 모두 찾아내어 봉함해서 우리에게 보내 달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고 총병高總兵즉 고언백高彦伯이다. 이때 군대를 거느리고 의령宜寧의 진중陣中에 있었다.과 송운과 당신들이 명나라의 가장 깊숙한 곳에 가 있을지라도 반드시 그 자취를 추격하여 분을 풀고야 말 것이다.”
이상이 이겸수 등이 돌아와서 말한 내용입니다.
대저 장희춘과 이겸수 등은

008_0095_c_01L當此時傳寫可也心許松雲久矣願從
008_0095_c_02L游之前日告請于淸正則曰朝鮮大將
008_0095_c_03L必斬汝首如何然而二三月間不意我
008_0095_c_04L當出與松雲游也須使松雲來率我去
008_0095_c_05L饋麪饋酒極致慇懃臨別附耳言
008_0095_c_06L凡事速成於三月前不然則此輩擧
008_0095_c_07L事已㝎矣須速成之可也還宿于
008_0095_c_08L喜八家至夜深喜八呼我等以日本
008_0095_c_09L木各五端許之曰王子君殿下倭俗不避
僣諱所以

008_0095_c_10L凡人相敬
稱殿稱御
可呈海外之信松雲處亦送
008_0095_c_11L情信也右道之人若聞之則必以我
008_0095_c_12L爲納賂於朝鮮而求和也云云徐當
008_0095_c_13L見勢使我人委送計之矣今此之物
008_0095_c_14L暫慰委來之勞而已非敢有遺也汝等
008_0095_c_15L自京城還來于右道使總兵先接行
008_0095_c_16L長等然後更來誘我不過稍緩發兵而
008_0095_c_17L復何成事哉然而彼我間速成
008_0095_c_18L其喜可言我等所欲不過速還渡海耳
008_0095_c_19L歸告汝朝廷速成可也天朝使下來後
008_0095_c_20L㝎成何事之奇須速通之若不成
008_0095_c_21L行長等相通之書並須推覓封入我所
008_0095_c_22L不然則高總兵卽高彥伯時領
在宜寧陣中
松雲及
008_0095_c_23L汝等雖往大明國最深處必追蹤雪憤
008_0095_c_24L而後已也云大抵蔣希春李謙受等

008_0096_a_01L나와 함께 동심동력同心同力하며 오랫동안 출입하였습니다만, 말하는 것이 심상尋常하기만 해서 명백하게 알아내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마침 변익성이 그들과 함께 들어가서 상세히 정탐하였으므로 적세賊勢와 적정賊情을 전한 것이 지극히 명백합니다. 그리고 왕자군에게 답한 적의 서신 1봉封과 송운에게 답한 글 1장을 모두 감독하여 봉인해서 올리니, 또 잘 아뢰어 주시기 바랍니다.
이상의 기록은 직통으로 비변사에 보고되었다.
◆ 이때에 와서 청정의 분노가 심해졌으니, 그가 송운을 만나지 않은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군사를 단속하여 해가 지나도록 꾹 참고 그대로 머물면서 행장의 성패를 엿보다가 병신년 5월에 중국 사신이 부산에 오게 되자, 그 뒤에 바로 성채城寨를 불사르고 철군하여 바다를 건너 돌아갔으니, 사신의 일을 저지하여 실패하게 하고 정유년에 재침再侵하는 일이 있게 한 것은 모두 청정이 걸桀을 부추긴 꾀에서 나온 것이었다. 가령 수길이 그 이듬해에 죽지 않았더라면, 봄 숲에 제비가 둥지를 트는 일60)이 이르지 않는 데가 없었을 것이니, 생각만 해도 머리칼이 곤두서고 가슴이 떨린다.
◆ 일진日眞의 무리가 송운에게 연연하여 반드시 종유從游하고 싶다고 말한 것을 보면, 이는 바로 그 본정本情에서 우러나온 것이라고 하겠다.61) 왜인의 습성은 본래 경조輕佻하기 때문에 비록 악독한 창자와 괴팍한 허파로 곧잘 원망하고 화를 잘 내어 한마디 말이 자기 뜻을 거스르면 칼을 휘두르며 죽음도 불사하지만, 어떤 사람과 서로 친해져서 끈끈한 정으로 맺어지면, 곰살궂게 술잔을 권하고 구구하게 눈물을 쥐어짜는 등 부녀자의 정태를 보이곤 한다. 그래서 청정처럼 악독한 자도 그 언어나 접대하는 것을 보면 왕왕 성의를 보였던 것이었다.
◆ 일본의 서점에 있는 옛사람들의 시문은 모두 남경南京의 무역상62)을 통해 구매한 것이기 때문에 경적經籍이나 백가百家의 서적이 우리나라와 다를 것이 없다. 그런데 이겸수의 무리가 일진의 수중에 있는 것을 보고는,

008_0096_a_01L某同心同力出入久矣而語涉尋常
008_0096_a_02L似不得分曉矣今則適有邊翼星與之
008_0096_a_03L同入詳細偵探所傳賊勢賊情極爲
008_0096_a_04L明白矣且答王子君賊書一封答松雲
008_0096_a_05L書一張並監封上司亦以善啓事

008_0096_a_06L
右記直呈備邊司
◆至此而淸正
008_0096_a_07L之憤怒深矣其不見松雲固也
008_0096_a_08L且歛兵經年隱忍遲留以窺行長
008_0096_a_09L之成敗至丙申五月皇朝使且到
008_0096_a_10L釜山而後即燒寨撤兵渡海而去
008_0096_a_11L所以沮敗使事而有丁酉再犯之
008_0096_a_12L擧者皆出於淸正助桀之謀也使
008_0096_a_13L秀吉而不死於其明年則春林巢
008_0096_a_14L何所不至令人髮竪心寒

008_0096_a_15L觀日眞軰戀戀松雲必欲從游之
008_0096_a_16L乃其本情所發耳倭人習性
008_0096_a_17L本來輕佻雖其毒膓恠肺急於怨
008_0096_a_18L片言忤意白刃可蹈然至於
008_0096_a_19L與人相愛繾綣處則杯觴昵昵
008_0096_a_20L泣區區便有婦女情態所以毒如
008_0096_a_21L淸正者亦見其言語饋遺徃徃輸
008_0096_a_22L
◆日本書肆所有古人詩文
008_0096_a_23L自南京海賈貿販而來者故經籍
008_0096_a_24L百家與我國無異李謙受軰所見

008_0096_b_01L풍아송風雅頌의 장구의 체재가 우리나라 『시전詩傳』과 소동대이小同大異하다고 말한 것은 참으로 뜻밖의 말이다. 그리고 황산곡黃山谷의 시집이 또 어떻게 20권이나 된다는 말인가. 그날 송운이 그 자리에 있지 않아서, 단지 원거鶢鶋로 하여금 종고鍾鼓 소리에 놀라게 하였으니,63) 이는 바보에게 꿈 이야기를 해준 것64)과 비슷하다고 하겠다.
유 도독이 송운에게 유시한 첩문갑오년 5월에 남원으로 가서 독부를 만났을 때이다.
그대가 방외方外의 승려로서 나라의 일에 마음을 두니, 충근忠勤한 그 일념을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다만 기밀機密에 관한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비밀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시기를 살피고 형세를 헤아려서 만전의 방책을 취한다면, 중국의 요 대사姚大師65)의 공렬功烈과 나란히 하여 빛을 다툴 것이니, 동방에서 의뢰하는 것이 어찌 적다고 하겠는가.
힘쓰고 힘쓸지어다. 이것이 바로 나의 소망이니, 이 유시로는 할 말을 다하지 못하겠다.
유 도독이 청정에게 세 차례 답한 글
송운이 돌아오는 길에 당신의 서신을 얻어 보고는 당신의 뜻을 잘 알았다. 대장부가 하는 일은 본래 이와 같아야 한다. 다만 시기를 살피고 형세를 살펴서 만전을 기해야만 할 것이다.갑오년 5월 일
지난번 서신에서 말한 것에 대해서는 특별히 의논할 것이 없다. 대개 전일에 송운이 말한 다섯 가지 일을 조목별로 답한 내용을 자세히 살피면 좋겠다. 더 이상 다른 뜻은 없다. 다만 본부本府와는 거리가 꽤 멀리 떨어져 있는 만큼 당신이 만약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일이 있거든, 고 총병高總兵에게 상세히 이야기하라. 고 총병도 조선의 정관正官이니 숨길 필요가 없다.
대저 호걸이 일을 할 때에는 기밀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요컨대 마음속으로 서로 헤아려야 할 것이니, 지필紙筆로 모두 드러낼 수는 없는 일이다. 당신이 만약 시종 의심하지 않는다면, 본부本府도 힘껏 담당하여 결코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7월 일
마침 보내온 첩문帖文을 받고서 당신의 간절한 심정을 알았다.

008_0096_b_01L於日眞手中者風雅頌章句之體
008_0096_b_02L與我國詩傳小同大異云誠是意
008_0096_b_03L外之言山谷詩集亦何至於二十
008_0096_b_04L卷乎當日松雲不在坐只令鷄 [8]
008_0096_b_05L駭鐘鼓似是癡人說夢耳

008_0096_b_06L

008_0096_b_07L附劉都督諭松雲帖甲午五月徃南
謁督府時
[9]

008_0096_b_08L
汝以方外之僧留心國中之務忠勤一
008_0096_b_09L深可褒嘉但機事欲成圖之貴密
008_0096_b_10L倘能相時度勢以策萬全即天朝姚大
008_0096_b_11L師之烈行且比爍爭光矣東方倚賴
008_0096_b_12L詎曰少少乎哉勉旃勉旃是予所望
008_0096_b_13L此諭不盡

008_0096_b_14L

008_0096_b_15L又附劉都督答淸正三書 [10]

008_0096_b_16L
松雲回得汝之書備知汝意大丈夫
008_0096_b_17L所爲固當如是但審時度勢以保萬
008_0096_b_18L全可矣甲午五
月日

008_0096_b_19L
昨來云無別議者盖前日松雲所稱條
008_0096_b_20L答五事幸詳再無他意也但本府相距
008_0096_b_21L頗遠汝若有心事可對高總兵備細
008_0096_b_22L言之高總兵亦朝鮮正官也不必隱諱
008_0096_b_23L大抵豪傑作事貴乎機密要在以心相
008_0096_b_24L不可盡形之紙筆汝若始終不疑
008_0096_b_25L本府一力擔當決無相負七月
適接來

008_0096_c_01L본부本府가 국왕을 만나서 그대와 같은 충직한 호걸이 귀순한다고 말을 하니 매우 기뻐하였다. 다만 진실한 마음으로 귀순하여 시종을 같이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본부와 조선이 합동으로 천황에게 아뢰어서 당신에게 고관高官을 가하고 대대로 토지를 소유하게 할 것이다.
행장은 질투하는 마음을 품고서 당신을 매우 원망하며 몇 번이나 당신을 해치는 일에 대해 물어 왔다. 그러나 본부는 본래 당신이 용렬한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제 조선과 회의하여 그의 참언讒言을 듣고 호걸을 해치는 일은 결코 하지 않을 작정이다. 당신이 꼭 본부를 면회하고 싶다면, 화의가 정해지는 날을 기다려서 필마匹馬로 동래東萊로 가는 것도 어려울 것이 없다. 보낸 부채는 잘 받았다. 송운이 병 때문에 아직 오지 않았으니, 그를 만나고 나서 다시 자세히 답하겠다.

이상의 기록은 본고本藁에 수록되어 있던 것이다.
첫 번째 서신은 송운이 처음 적진에 들어갔을 때 청정이 보낸 서신에 대해서 독부가 답한 것이다. 두 번째 서신은 청정이 앞의 서신에서 특별히 논의한 것이 없기 때문에 다시 문의한 것에 대해서 독부가 다시 답한 것이다. 세 번째 서신은 월일月日을 기록하지 않았으나, 송운이 병 때문에 오지 못했다는 말로 미루어 보면, 갑오년 9월에 송운이 상경上京한 뒤에 청정이 또 서신을 보내 독부에게 통지한 것에 대해서 독부가 다시 답한 글일 것이다.
대개 그 당시에 청정과 독부가 사신을 계속 보내고 문서도 줄을 이었을 테니, 이 기록에 누락된 것이 또한 많다고 하겠다. 생각건대 청정은 행장의 무리가 행하는 일을 매우 미워하여 매양 별건別件의 일을 독부에게 요망하였는데, 독부가 대답한 것을 보면 안부를 묻거나 위로하는 말을 하지 않았을 뿐더러 한두 가지 속마음을 토로하며 이해 관계를 개진開陳한 곳도 없으니, 정말 산국궁山鞠窮과 같은 은어隱語66)라는 느낌이 든다.
답서 중에 “국왕을 만나서 그대와 같은 충직한 호걸이 귀순한다고 말을 하니 매우 기뻐하였다.”라는 말이 있고, 또 “진실한 마음으로 귀순하여 시종을 같이해야 할 것이다.”라고 권면한 말이 있는 것을 보면,

008_0096_c_01L知汝惓惓本府會國王言汝忠直
008_0096_c_02L好漢來歸甚喜但要實心效順有始有
008_0096_c_03L本府與該國一同奏上天皇加汝
008_0096_c_04L高官世守土地行長心懷嫉妬深恨
008_0096_c_05L於汝屢有禀來殘害而本府素知汝勇
008_0096_c_06L今與朝鮮會議決不聽彼䜛言
008_0096_c_07L壞好漢如汝必欲本府面會俟議㝎之
008_0096_c_08L匹馬東萊亦無難也來扇收入
008_0096_c_09L雲因病未到待彼會後又當詳復

008_0096_c_10L
右本藁所錄而第一書則松雲初
008_0096_c_11L入賊陣時淸正有書而督府答之
008_0096_c_12L第二書則淸正以前書無所
008_0096_c_13L別論故更來禀告而更答之也
008_0096_c_14L第三書不錄月日然以松雲被病
008_0096_c_15L未到之語觀之當於甲午九月
008_0096_c_16L雲上京之後淸正又有書通於督
008_0096_c_17L而又答之也盖於其時淸正
008_0096_c_18L與督府交使相望箋牘絡繹
008_0096_c_19L於此錄者亦多意者淸正深嫉行
008_0096_c_20L長軰所爲每以別件事望於督府
008_0096_c_21L而督府所答不作暄凉勞問之辭
008_0096_c_22L又無一二披露開陳利害處正如
008_0096_c_23L山鞠窮隱語其曰會國王言汝忠
008_0096_c_24L直好漢來歸甚喜云云及勉以實

008_0097_a_01L필시 청정이 중국에 귀순하려는 뜻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청정의 서신이 하나도 수록되지 않아서 뒷사람이 본말을 자세히 상고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애석한 일이다.
◆ 두 번째 서신에서 말한 고 총병高總兵은 필시 고언백高彦伯일 것이다. 언백은 사람됨이 기민하여 적정을 잘 탐지하였는데, 당시에 군대를 거느리고 의령宜寧에 주둔하며 송운과 같은 진중에 있었다. 그래서 독부가 또 언백으로 하여금 함께 정탐하며 왕래하게 하였으므로 청정에게 이와 같이 말한 것이다.
을미년에 파병한 뒤에 비변사에서 올린 계사
“아룁니다. 승대장僧大將 유정이 저번에 경상도에서 올라왔는데, 그가 거느린 군사 60여 명은 시종 적진에 출입하여 모두 정용精勇하고 전투에 익숙합니다. 그런데 본래 정착할 곳이 없는 사람들인 만큼, 지금 만약 그들을 해산해서 보내면 뒷날 조발調發하기 어려우니, 유정이 그대로 인솔하게 하여 남한산성에 들어가 있게 함으로써 급할 때의 쓰임에 대비하게 하고, 그들에게 지급할 양향糧餉과 지휘하는 일은 도체찰사都體察使로 하여금 상량商量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그리고 그 관하管下에 군공軍功이 있는 자들이 많이 승려의 이름으로 직책을 받았는데, 지금은 모두 머리를 기르고 환속하였으니, 바라옵건대 속명으로 고쳐서 병조兵曹로 하여금 명백히 조사하여 직첩職牒을 다시 발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답하였습니다.
“아뢴 대로 하라.”
을미년에 상소하여 시사時事를 말하다
신臣 유정은 미록麋鹿과 같이 산야에 사는 몸으로 이륜彛倫(인륜)에 버림받은 물건인지라, 부자의 은혜도 모르는데 하물며 군신의 의리를 알겠습니까.
시변時變이 하늘까지 잇닿아 혈기 있는 자는 모두가 일어났으니, 심산궁곡도 누워 있을 곳이 못되어서

008_0097_a_01L心效順有始有終云者此必淸正
008_0097_a_02L有輸欵天朝之意而惜不錄淸正
008_0097_a_03L一書使後人無以備攷本末
◆第
008_0097_a_04L二書中所謂高總兵必是高彥伯
008_0097_a_05L彥伯爲人機警善伺賊時領兵在
008_0097_a_06L冝寧與松雲同陣故督府亦使彥
008_0097_a_07L共爲偵探徃來而言于淸正者
008_0097_a_08L如此

008_0097_a_09L

008_0097_a_10L乙未罷兵後備邊司啓

008_0097_a_11L
啓曰僧大將惟政頃者自慶尙道上來
008_0097_a_12L其所率之軍六十餘名終始出入賊陣
008_0097_a_13L皆是精勇慣戰而本無根着之人今若
008_0097_a_14L散遣則後日調發爲難使惟政仍爲
008_0097_a_15L領率入處南漢山城以備緩急之用
008_0097_a_16L其所支糧餉及指揮之事令都體察使
008_0097_a_17L商量施行且其管下有軍功者多以僧
008_0097_a_18L名受職而今皆長髮還俗願改以俗名
008_0097_a_19L令兵曺明白査考職牒改成給何如
008_0097_a_20L依啓

008_0097_a_21L

008_0097_a_22L乙未上䟽言事

008_0097_a_23L
臣惟政麋鹿野蹤彛倫棄物尙未識
008_0097_a_24L父子之恩况知君臣之義乎時變極天
008_0097_a_25L血氣皆動窮山深谷亦非可臥之地

008_0097_b_01L나무를 깎아 들고 일어난 것67)은 형세상 부득이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성은이 하늘처럼 덮어 주시어 윤명綸命을 땅에 내려 주셨으니, 이 어찌 고목枯木과 같은 미천한 신이 감당할 수 있는 바이겠습니까.
부우負羽68)한 지 4년이 되도록 아직 조그마한 공도 세우지 못했으니, 나라를 욕되게 하고 나라를 저버린 그 죄는 만 번 죽어도 갚을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송구스러운 마음을 품고 날마다 처벌이 내리기만을 기다리면서 여태 남은 몸뚱이를 보존하고 있었는데, 다시 성상의 돌보심을 입었으므로 반성하고 근심하며 무슨 면목으로 성세聖世를 대할지 실로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늘에 죽게 해 달라고 빌었는데, 하늘의 꾸지람이 과연 이르러 이수二竪69)가 침노하고 백 가지 질병이 번갈아 공격하여 성명性命을 보전하기 어려움을 스스로 알게 되었으니, 이제는 철의鐵衣를 벗고 도로 송관松冠(송낙)을 쓰고서 구학丘壑에 물러나 죽는 것이 소원입니다. 하지만 구구하나마 나라를 걱정하는 미천한 마음을 끝내 잊을 수가 없으니, 시사時事를 목격하고서도 어떻게 감히 지위를 벗어나는 일이라고 혐의한 나머지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천양泉壤(황천)에까지 한을 안고 갈 수야 있겠습니까. 삼가 시휘時諱에 저촉되더라도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오니, 삼가 원하옵건대 성명聖明께서는 굽어 살펴 너그러이 용납해 주소서.
신이 듣건대, 무재務材와 훈농訓農70)은 위衛나라 문공文公이 한 일이고, 생취生聚와 교훈敎訓은 월越나라 구천勾踐이 한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저 두 군주의 경우에도 나라를 회복恢復하는 기초가 백성을 기르는 것 이외에 따로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는데, 거룩하고 밝은 주상이 위에 계시면서 어찌 그들에게 뒤처질 수 있겠습니까.
아, 2백 년 동안 휴양休養한 민생이 죄다 결딴나고 말았습니다. 흉봉兇鋒이 향하는 곳에 살아남은 자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황량하게 변한 옛터는, 혹 봄 제비가 둥지 틀 곳을 찾아다니는 것처럼 되었는데, 백성을 기르는 책임을 맡은 자들은 모르겠습니다만 공황龔黃71) 같은 사람입니까, 소두召杜72) 같은 사람입니까. 시세에 편승하여 부정한 이익을 꾀하고 백주에 남에게 교만하게 굴며 염치도 없고 의기義氣도 없는 자가 태반입니다. 심장 위의 고기를 떼어내어 호랑虎狼의 뱃속을 채우는지라, 물은 더 깊어지고 불은 더 뜨거워져서 사방으로 전전하니, 어떤 사람에게 훈농을 할 것이며, 어느 때에 생취를 하겠습니까.
신은 바라옵건대, 수령의 선발을 중하게 하고 출척黜陟(축출과 승진)하는 법을 엄하게 하셨으면 합니다. 그리하여 일체 백성을 사랑하며 기르는 것으로 급선무를 삼고, 탐람하며 염치없는 무리로 하여금 우리 유민遺民을 어육魚肉으로 만들지 못하게 하시면, 국가의 억만년 중흥의 기틀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008_0097_b_01L斬木而起勢不得已聖恩天覆綸命
008_0097_b_02L下地此豈枯木賤臣所可堪承而負羽
008_0097_b_03L四年尙欠寸效其辱國負國之罪
008_0097_b_04L非萬死可贖常懷悚蹙日俟誅責
008_0097_b_05L尙保殘骸更紆宸眷撫躬耿耿實不
008_0097_b_06L知何面於聖世用是祝死于天天譴果
008_0097_b_07L二竪爲侵百疾交攻自知性命難
008_0097_b_08L則願釋鐵衣還着松冠退死於丘
008_0097_b_09L而區區憂國之賤心終不可忘
008_0097_b_10L擊時事安敢以越位爲嫌而不出一言
008_0097_b_11L抱恨於泉壤間哉謹觸時諱昧死仰陳
008_0097_b_12L伏願聖明曲加優容焉臣聞務材訓農
008_0097_b_13L衛文公也生聚敎訓越勾踐也在彼
008_0097_b_14L二君猶知恢復之基不出養民之外
008_0097_b_15L則聖明在上豈出於其下哉嗚呼
008_0097_b_16L百年休養民生糜爛盡矣兇鋒所指
008_0097_b_17L存者有幾荒墟遺址或同春燕之尋巢
008_0097_b_18L而爲其字牧者不知龔黃歟召杜歟
008_0097_b_19L時射利白晝驕人而無廉恥無義氣者
008_0097_b_20L太半也剜心頭之肉充虎狼之腹
008_0097_b_21L深火熱轉而之四方訓農何人也生聚
008_0097_b_22L何時也臣願重守令之選嚴黜陟之法
008_0097_b_23L一切以愛養爲之急而勿使貪婪無恥
008_0097_b_24L之輩魚肉我遺民則國家億萬年中興

008_0097_c_01L
신은 듣건대, 융적戎狄은 개돼지와 같아서 인仁으로 맺을 수도 없고 의義로 교화시킬 수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어찌 강화講和라고 하는 하나의 일을 가지고 백 년 동안 근심이 없으리라고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전송前宋과 후송後宋도 모두 화和라고 하는 한 글자에서 잘못되었으니, 이 명백한 은감殷鑑73)을 성명께서는 환히 알고 계시리라고 믿습니다.
오직 저들은 시랑豺狼과 같아서 인의는 부족하고 흉교凶狡는 넘쳐나니, 신의 망령된 생각으로는, 오늘날 중국과 강화한 것이 전일에 우리나라와 교린한 것과 같지 않으리라고 어떻게 보장하겠습니까. 임금과 어버이의 원수는 한가지요, 생령이 굴욕을 당하는 것은 똑같습니다. 나라의 형세가 꺾이고 꿀려서 비록 흉적을 제거하여 수치를 씻을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와신상담하는 생각만은 어찌 잠시라도 잊어서야 되겠습니까.
그런데 지금은 강화라는 고식적인 계책을 편히 여긴 나머지, 비어備禦해야 할 장책長策에는 벌써 어둡기만 합니다. 아, 옛날의 성왕聖王은 사방 오랑캐가 귀순하는 날을 당해서도 오히려 우환이 없을 적에 미리 경계하였습니다.74) 그런데 더구나 지금이 어떤 시절인데, 감히 변방의 방비를 소홀히 한단 말입니까.
신은 바라옵건대, 한 사람의 중신에게 위임하여 강변에서 군대를 사열하게 했으면 합니다. 그리하여 파목頗牧75)ㆍ한백韓白76)과 같은 장수는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중에서 조금 군졸을 무휼撫恤하고 기계를 잘 다루는 자가 있으면 표창하여 장려하고, 허무맹랑하여 실속이 없거나 탐욕스럽고 방자하며 금품을 착취하는 자는 내쫓아 징계해야 할 것입니다. 무릇 책응策應하고 요리料理함에 빠짐없이 계산해서 행한다면, 옛날의 훌륭한 장수를 오늘날에 혹 볼 수도 있을 것이며, 변방을 대비하는 일도 끝내 어린애 장난으로 귀결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민력民力을 사랑하여 기르고 군정軍政을 닦아 밝히는 것도 모두 적임자를 얻는 데 있다고 할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옛날에 사람을 쓸 때에는 문벌을 논하지 않고 허위虛僞에 미혹되지 않았으며, 오직 현능賢能한지의 여부만을 따졌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고도鼓刀77)에서 기용하기도 하고, 고반考槃(隱者)에서 발탁하기도 하고, 도적盜賊 중에서 추천하기도 하고, 관고管庫78)에서 등용하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얼룩소의 새끼는 비록 털이 붉고 뿔이 제대로 났어도 버림을 받고,79) 한혈汗血의 망아지80)는 노둔하고 절뚝거리는 말처럼 대우하며 타고 다닙니다.

008_0097_c_01L之本不外是矣臣聞戎狄犬豕也
008_0097_c_02L可以仁結不可以義化豈可以講和一
008_0097_c_03L保百年無虞哉前宋後宋皆誤於
008_0097_c_04L和之一字昭昭殷鑑聖明之所洞照也
008_0097_c_05L惟彼豺狼仁義不足而凶狡有餘臣之
008_0097_c_06L妄意安知今日講和於天朝者有不似
008_0097_c_07L前日交隣於我朝乎君父之讎一也
008_0097_c_08L靈之辱均矣國勢摧屈雖不能除凶雲
008_0097_c_09L而臥薪甞膽之念豈忘於斯須之頃
008_0097_c_10L今也安於講和姑息之計而已昧備
008_0097_c_11L禦之長策嗚呼古之聖王當四夷來
008_0097_c_12L賔之日尙且儆戒無虞況此何等時也
008_0097_c_13L而敢忽邊備也哉臣願委任一重臣
008_0097_c_14L師江上雖不得如頗牧韓白之爲將
008_0097_c_15L其中稍有撫恤軍卒器械超庸者則褒
008_0097_c_16L而獎之浮浪無實貪恣掊克者則黜
008_0097_c_17L而勵之凡所以策應料理筭無遺慮
008_0097_c_18L則古之良將或見於今日而邊備之事
008_0097_c_19L不終歸於兒戱矣然則愛養民力修明
008_0097_c_20L軍政悉在於得人臣聞古之用人也
008_0097_c_21L勿論門閥勿惑虛僞惟其賢而已
008_0097_c_22L有擧於鼓刀擢於考槃薦於盜賊
008_0097_c_23L於管庫者今則不然犁牛之子雖有
008_0097_c_24L騂角而棄之汗血之駒或用駑蹇而乘

008_0098_a_01L먼 변방의 외진 곳에 있으면 명당을 지을 좋은 재목이 있어도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고, 외모를 꾸미고 공손한 척하는 무리는 개와 염소의 가죽에 호랑이와 표범의 문채를 덮어쓰고 있습니다. 이름이 없는 자는 우연한 한 번의 실수로 퇴각을 당하고, 허명虛名을 자랑하는 자는 시대의 쓰임에 합당하지 않아도 승진합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뜻이 있는 인사가 어떻게 자기의 포부를 펼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옵건대, 성명께서 사방의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사방의 눈으로 자신의 눈을 밝게 하며81) 천지와 같은 도량을 지니신다면, 이 세상을 위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신은 듣건대, 나라에 정치가 있는 것은 그물에 벼리가 있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물에 벼리가 없어도 간추릴 수가 없는데, 하물며 나라의 경우이겠습니까. 신이 삼가 근일近日의 폐해를 살펴보건대, 만약 기강을 확립하여 진작시키지 않는다면, 어떤 일을 설행設行하든 간에 모두 맥이 빠지고 해이해지는 지경으로 돌아가고 말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죄다 받들어 행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국가의 정령政令이 아침에 바뀌고 저녁에 변하며, 달마다 다르고 해마다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한 가지 영令을 보면 곧 일시적인 영이라고 하고, 한 가지 정政을 들으면 일시적인 정이라고 하면서 오래도록 시행하여 얻게 되는 효과를 믿지 않으니, 이것이 바로 고식적이 되어 이루기 어렵게 된 까닭입니다.
신은 바라옵건대, 하지 않는다면 모르지만 한다면 반드시 이루어지도록 하고, 행하지 않는다면 모르지만 행한다면 반드시 오래 행해지도록 했으면 합니다. 그리하여 위엄을 세우기를 귀신과 같이 하고, 신실하게 행하기를 사시四時와 같이 하면서 기강을 세워 민력을 기르고 기강을 세워 군정을 닦으면, 국가는 이로써 부유해지고, 군대는 이로써 막강해져서 넉넉하게 여유가 있게 될 것입니다.
신은 듣건대,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삼는다고 하였는데,82) 가장 중요한 먹을 것의 근본은 또 농우農牛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 지금 10실室의 마을에 소 한 마리가 없고, 백 가家의 시골에 소 한 마리가 없는데, 목민관牧民官들은 공공연히 소를 잡아먹고, 여항閭巷 사이에서 이익을 꾀하는 무리는 날마다 도살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아, 소 한 마리를 죽이면 백 사람의 목숨이 쇠잔해지고, 소 열 마리를 죽이면 천 사람의 목숨이 쇠잔해집니다.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것이야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008_0098_a_01L遐荒僻陋之地則明堂杞梓亦不
008_0098_a_02L爲人所知而粉飾象恭之輩則犬羊之
008_0098_a_03L而被之虎豹之文矣無名者偶因
008_0098_a_04L一失而退之妄譽者不合時用而進之
008_0098_a_05L如是而有志之士安能展布其蘊負乎
008_0098_a_06L伏願聖明闢四門達四聦以天地爲
008_0098_a_07L度量則斯世幸甚臣聞國之有政
008_0098_a_08L網之有綱網無綱尙不可統紀況於
008_0098_a_09L國乎臣竊觀近日之弊若不立綱振紀
008_0098_a_10L則凡百設施皆歸於委靡偸惰而止耳
008_0098_a_11L此豈在下者不盡奉行而然哉國家政
008_0098_a_12L朝更夕變月異而歲不同故見一
008_0098_a_13L令則曰一時之令也聞一政則曰一時
008_0098_a_14L之政也不信其悠久積累之效此所以
008_0098_a_15L姑息而難成者也臣願不爲則已爲之
008_0098_a_16L必要其成不行則已行之必要其久
008_0098_a_17L威如鬼神信如四時立綱而養民力
008_0098_a_18L立綱而修軍政則國以之富兵以之强
008_0098_a_19L恢恢乎有餘刃矣臣聞國以民爲本
008_0098_a_20L以食爲天食天之本又在農牛今或
008_0098_a_21L十室之村無一牛白家之鄕無一牛
008_0098_a_22L字牧者公然宰牛閭巷間賭利之輩
008_0098_a_23L事椎屠嗚呼殺一牛而百人之命殘矣
008_0098_a_24L殺十牛而千人之命殘矣天使供厨

008_0098_b_01L그 밖의 것이야 어찌 그만둘 수 있는데도 그만두지 않는 것입니까. 신은 바라옵건대, 소 잡는 금법禁法을 거듭 밝혀서 사람을 죽인 죄보다 더 중하게 다스렸으면 합니다.
산성에 요새를 설치한 것은 조종조祖宗朝의 장구하고 원대한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축적해 둔 것이 많지 않고 비어備禦할 기구가 없다면, 저 산성을 장차 어디에 쓰겠습니까.
축적하는 방책은 둔전屯田보다 요긴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둔전하는 계책은 반드시 군대를 주관하는 자로 하여금 농사를 지으면서 동시에 수비하게 해야 할 것이니,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백성을 괴롭히고 대중을 동원하여 도리어 평민들이 생업을 잃는 탄식을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하물며 지리地利가 인화人和만은 못하고, 인화는 또 인심을 얻는 데에 있는 데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산성을 지키는 장수는 더욱 신중하게 가려서 중신으로 하여금 책임지고 이루게 하는 것이 옳을 줄 압니다.
신이 듣건대, 침학侵虐을 하면 도적이 되고 편안하게 하면 백성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일반 서민들도 그러한데, 더구나 각사各寺의 의지할 곳 없는 승려들이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온갖 방법으로 그들을 침학하여 편안히 거하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신은 바라옵건대, 그들도 백성들이니 특별히 안정시킬 방도를 강구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장정은 병기 다루는 법을 익혀 적을 토벌하게 하고, 늙고 병든 자는 보인保人으로 편성하여 양향糧餉을 돕게 하면서 그들로 하여금 급한 변고가 있을 때 함께 힘쓰게 하고, 과科 외의 잡역에 침해 당하지 않도록 해준다면, 국가를 위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아, 신 유정이 산야의 금수와 같은 몸으로 이렇게 진언을 하는 것이 성조聖朝를 오욕汚辱되게 하는 것인 줄 잘 알고 있습니다마는, 삼가 성명께서 산야의 금수와 같은 이 몸을 버리지 않는 은혜를 내리셨기에 신도 감히 산야의 금수로 자처하여 성은을 저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지금 암랑巖廊 조정의 아래와 곤기閫寄(군영)의 안에 온갖 일이 모여들어 혹 미처 구명究明하지 못하는 일이 있을 수도 있는 데야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그래서 신처럼 천루賤陋한 자가 부앙俯仰하며 관찰하매 기인杞人의 근심83)이 없을 수 없기에 감히 추요蒭蕘의 말씀84)을 진달하게 되었으니, 삼가 바라옵건대 성명께서는 사람이 미천하다고 말까지 버리지 마시고 조금이라도 유념해 주소서. 그러면 시폐時弊를 구하는 데에 만에 하나라도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니, 신이 비록 저녁에 죽더라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을미년의 사태로 말하면, 중국 조정에서 강화를 허락하는 명을 내려서 잠시 군사를 거두고 쉴 수 있게 되었으나,

008_0098_b_01L不得已而其他則豈非得已而不已者
008_0098_b_02L臣願申明殺牛之禁有甚殺人之罪
008_0098_b_03L可也山城設險祖宗朝長遠之慮也
008_0098_b_04L而蓄積不多備禦無具則將焉用彼山
008_0098_b_05L城哉蓄積之策莫要於屯田而屯田
008_0098_b_06L之策必使主兵者且耕且守也不然
008_0098_b_07L則勞民動衆反致平民失業之歎況地
008_0098_b_08L利不如人和人和又在於得人臣謂山
008_0098_b_09L城之將尤當愼擇而使重臣責成可也
008_0098_b_10L臣聞侵則爲盜安則爲民在凡民尙然
008_0098_b_11L況於各寺無賴之僧乎今也百塗侵虐
008_0098_b_12L使不得安接臣願彼亦民也別加安集
008_0098_b_13L之方壯丁則習兵訂賊老病則籍保助
008_0098_b_14L使彼並力於緩急之變而勿使見侵
008_0098_b_15L於科外之役則國家幸甚嗚呼臣惟政
008_0098_b_16L以山禽野獸有是進言固知汚辱聖朝
008_0098_b_17L而伏蒙聖明不以山禽野獸而棄之
008_0098_b_18L亦不敢以山禽野獸自處而辜負聖恩
008_0098_b_19L矧今巖廊之下閫寄之中百務所萃
008_0098_b_20L或有所未究而如臣賤陋仰觀俯察
008_0098_b_21L不無杞人之憂敢陳芻蕘之說伏乞聖
008_0098_b_22L不以人廢言少留睿念則其於時弊
008_0098_b_23L亦或有萬一之助而臣雖夕死無悔矣

008_0098_b_24L
乙未之事以皇朝許和之命乍得

008_0098_c_01L국가에 조석으로 근심이 일어나는 것은 바로 장작을 쌓아 놓고 누워서 그 밑에 불을 놓은 것과도 같았다. 이때를 당하여 낭묘廊廟(의정부)에서 대책을 강구하느라 밤낮으로 겨를이 없었을 것이니, 그야말로 “육식자가 잘 알아서 할 텐데, 또 뭣 때문에 끼어들겠느냐?”85)라고 할 수도 있었을 것인데, 송운 노사 한 사람이 소순蔬笋86)의 속마음을 모두 토로하여 이처럼 박직朴直한 말씀을 아뢰었으니, 이는 실로 성명이 위에 계시어 초야에 훌륭한 계책이 남아 있지 않게 했기 때문이요,87) 종사의 신령이 우리가 중흥의 공을 이루도록 도와주신 덕분이다. 뒷날 보는 자들은 두자미杜紫薇가 소릉昭陵을 바라본 것과 같은 감회를 느낄 것이다.88)
◆ 상소문에서 제시한바, 승도에게 병기 사용법을 익히게 하자는 계책은 당시에 목전의 일을 위한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지금도 경외京外의 산성에 총섭이니 승장이니 의승이니 하는 것들이 있는 것을 보면, 대체로 이 계책을 채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평화로운 시대에는 전량錢糧을 부과하는 폐해만 끼치다가 변란이 발생함에 병기도 쓸 줄 모르는 병사를 만든다면, 백 명의 송운을 얻는다 하더라도, 단지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의 화두처럼 되고 말 것이다.89) 그러나 해내海內에서 불학佛學을 배우는 승도를 모두 군사로 만들어서 칼 쓰는 법을 배우고 활 쏘는 법을 배우게 하여 변란을 대처하는 현장에서 종사하게 한다면, 확탕지옥鑊湯地獄이나 노탄지옥爐炭地獄이라도 회피하지 않을 것이니, 자기 몸이나 보전하고 처자나 보호하려는 병사와 비교하면 용감하고 강인한 것이 백 배는 될 것이다. 그러니 참으로 급박할 적에 충분히 믿고 쓸 수 있을 것이나, 다만 모를 것은 이 법이 한번 시행되면 관음보살의 자비로움은 어디에 있게 될까 하는 점이다.
원광 원길 장로에게 준 글
서축西竺에서 온 한 곡조를 형과 함께 부르다가 헤어진 것이 바로 어제 같은데,

008_0098_c_01L撤兵休息而國家朝夕之憂正如
008_0098_c_02L臥積薪而厝火其下當是時
008_0098_c_03L猷廟筭夙夜焦遑眞所謂肉食者
008_0098_c_04L謀之又何間焉而松雲一老師
008_0098_c_05L瀝盡蔬笋之膓奏此朴直之言
008_0098_c_06L由聖明在上野無遺策故也所以
008_0098_c_07L宗社神靈佑我中興之烈矣後之
008_0098_c_08L覽者當有如杜紫薇望昭陵之感

008_0098_c_09L
◆䟽內僧徒習兵之策不過爲當
008_0098_c_10L時目前事今之京外山城有曰總
008_0098_c_11L曰僧將曰義僧云者盖用此
008_0098_c_12L而昇平則有賦錢之弊臨亂則
008_0098_c_13L爲不習之兵雖得百松雲只管他
008_0098_c_14L庭前栢樹子話矣如使海內學佛
008_0098_c_15L之徒盡化爲兵學劒學射而從
008_0098_c_16L事於待變之塲則鑊湯爐炭無所
008_0098_c_17L回避其視全軀保妻子之兵勇强
008_0098_c_18L百倍誠爲緩急足恃之用而第
008_0098_c_19L未知此法一行觀音菩薩在甚
008_0098_c_20L麽處

008_0098_c_21L

008_0098_c_22L1)與圓光元佶長老書 [4]

008_0098_c_23L
西來一曲子曾與兄吹之瞥然如昨
008_0098_c_24L此書已載於四溟堂大師集(本書第八册六
008_0098_c_25L六頁){編}

008_0099_a_01L벌써 두 번이나 춘추가 바뀌었습니다. 무정한 세월이 전광석화와 같으니 길게 탄식할 뿐 어찌하겠습니까. 멀리 생각건대, 노형은 무위진인無位眞人90)의 면목 위에 대광명을 발하여 제도諸島의 생령을 도탈度脫하고 계실 것이니, 얼마나 그 풍도가 높다고 하겠습니까.
저번에 내가 선사先師의 교시를 받들고 남쪽으로 마도馬島에 갔다가 귀국으로 건너가서 원광圓光 노형과 서소西笑 장로와 오산五山의 제덕諸德을 만나 보고는 임제의 광풍狂風을 성대히 논하고 종지를 별도로 밝혔으니, 이것도 어찌 대단한 일이 아니었겠습니까마는, 나의 본원本願은 오직 적자赤子를 모두 쇄환하여 생령을 널리 구제하라는 선사의 가르침에 부응하려고 했던 것인데,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한 채 빈손으로 돌아왔으니 섭섭한 심정을 가눌 수가 없습니다.
나 자신은 서쪽으로 돌아온 뒤로 쇠하고 병든 상태가 이미 깊어져서 이내 묘향산으로 들어와 분수를 지키며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침 일본으로 가는 사신의 행차가 있다는 말을 듣고는 곧바로 한훤寒暄(안부를 묻는 것)의 두 글자를 가지고 멀리 노형의 봄꿈을 깨워 드리게 되었습니다.
오직 형께서는 본래의 뜻을 어기는 일이 없이, 응당 중생을 구제하는 소원을 가지고 대장군에게 나아가 고함으로써 생령을 모두 쇄환하여 전날의 맹약을 저버리지 않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변변치 않은 선물이나마 모두 웃고 받아 주시기 바라며 이만 줄입니다.
운손雲孫(종이) 1권, 청향淸香 4봉, 진홀眞笏 6속, 약삼藥參 1근, 관성管城 (붓) 20병.
승태 서소 장로에게 준 글
해성海城에서 한 번 이별한 뒤로 성상星霜이 두 번 바뀌었습니다. 고래 등 같은 파도가 하늘에 잇닿았으니, 머리를 돌려 바라본들 어떻게 하겠습니까.
봄빛이 지금 제도諸島에도 돋아났겠지요. 멀리 생각건대 노형은 시절에 따라 복락을 누리며 도안道眼이 더욱 높아져서 도용횡념到用橫拈91)을 하며 곧장 서래西來(달마)의 도장으로 도장을 찍으시어 해외海外의 중생으로 하여금 모두 윤택을 받게 함으로써 제불의 막대한 은혜를 갚고 계시리라 여겨집니다. 이는 경희慶喜가 말한바, “이 깊은 마음을 가지고 진찰塵刹을 받드나니, 이것이 곧 불은을 갚는다고 하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니,92) 이 또한 아름답지 않습니까.
송운은 서쪽으로 돌아온 뒤로

008_0099_a_01L再換春秋無情歲月如石火電影
008_0099_a_02L吁耳奈何遙想老兄於無位眞人面目
008_0099_a_03L能發大光明度脫諸島生靈高哉
008_0099_a_04L高哉向者余以先師諦南遊馬島
008_0099_a_05L至貴國得見圓光老兄與西笑長老
008_0099_a_06L五山諸德盛論臨濟狂風別明宗旨
008_0099_a_07L不亦多乎余之本願只要盡刷赤子
008_0099_a_08L以副先師普濟生靈之訣願莫之遂
008_0099_a_09L手而還無任缺然余自西還衰病已
008_0099_a_10L仍入妙香山自守待盡矣適來聞
008_0099_a_11L有使行即以寒暄二字遠驚老兄春睡
008_0099_a_12L去也惟兄無違本志當以度生願
008_0099_a_13L告大將軍盡刷生靈無冷舊盟幸甚
008_0099_a_14L不腆薄物統希笑領不宣
008_0099_a_15L雲孫一卷淸香四封眞笏六束
008_0099_a_16L參一斤管城二十柄

008_0099_a_17L

008_0099_a_18L與承兌西笑長老書

008_0099_a_19L
海城一別星霜再換鯨波接天回首
008_0099_a_20L奈何春生諸島遙想老兄順時珍福
008_0099_a_21L道眼益高到用橫拈直以西來印印之
008_0099_a_22L使海外衆生咸蒙潤澤以報諸佛莫大
008_0099_a_23L之恩慶喜所謂將此深心奉塵刹
008_0099_a_24L則名爲報佛恩者不亦休乎松雲西還

008_0099_b_01L쇠병衰病이 잇따라 침노해서 곧장 묘향산으로 들어가 이 보신報身을 마치려고 기약하였는데, 마침 바다를 건너는 사신의 행차가 있다고 들었기에 그 편에 안부 편지를 부치게 되었습니다.
저번에 송운이 선사先師의 유훈을 받들어 생령을 널리 구제하는 것으로 임무를 삼아 남쪽으로 마도馬島에 갔다가 마침내 귀국에 이르렀습니다. 그리하여 녹원 대장로鹿苑大長老이신 서소西笑 사형과 원광圓光 장로 및 오산五山의 제덕을 만나 보고 종지를 성대히 논하여 소종래所從來를 밝혔는데, 형이 또한 선사의 정안正眼을 욕되게 하지 않았고, 나 역시 동종同宗(임제종)의 일맥이 동해에서 찬란하게 빛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 또한 전생의 인연이니, 어찌 사람의 힘으로 될 일이겠습니까.
당시에 내가 널리 구제하는 임무를 띠고 가서 보니, 조선의 적자赤子가 이역에 떨어져 있는 것이, 비유하면 물속에 빠지고 불 속에 타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들을 구제하여 데려오지 못했으니, 내 마음이 어떻게 편안하겠습니까.
장군이 처음에는 쇄환刷還하려는 뜻이 있더니 끝내 그렇게 하지 않았으므로 내가 그만 빈손으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지금 사신의 행차가 있기에 말이 여기에 미치게 되었으니, 오직 형께서는 대장군에게 잘 보고해서 당시에 돌려보내지 않은 백성들을 모조리 돌려보냄으로써 예전에 약속했던 말이 어긋나지 않게 해주십시오.
이것이 노승과 관련된 일은 아니라 하더라도, 다만 사람을 건져 주고 구해 줄 생각으로 멀리 건너갔다가 대장군을 비롯해서 제장과 여러 대장로의 지우知遇를 받았기에 감히 이런 말을 올리게 되었으니, 형은 원만하게 살펴 주십시오.
변변치 않은 선물이나마 모두 웃고 받아 주시기 바라며 이만 줄입니다.운손雲孫 1권, 청향淸香 4봉, 진홀眞笏 6속, 약삼藥參 3근, 관성管城 20병.
현소에게 준 글
헤어진 것이 어제만 같은데 그동안 성상星霜이 두 번이나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워하는 한 생각은 잠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그저 백초百草 어디에나 조사의 뜻이 들어 있다93)는 것으로 자신을 위로할 뿐입니다. 다른 것이야 말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옛날 도력이 높은 스님들은 혹 망주정望州亭에서 서로 보기도 하고,

008_0099_b_01L衰病侵尋即入妙香山以盡此報身爲
008_0099_b_02L聞有渡海使臣之行仍付以候狀焉
008_0099_b_03L向者松雲因奉先師遺諦以普濟爲任
008_0099_b_04L南遊馬島遂至貴國得見鹿苑大長老
008_0099_b_05L西笑師兄與圓光長老五山諸德
008_0099_b_06L論宗旨以明所從來兄亦不辱先師正
008_0099_b_07L余亦得知同宗一脉盛光於東海也
008_0099_b_08L此亦宿緣夫豈人力致之曩時余旣以
008_0099_b_09L普濟爲任而前去則朝鮮赤子之陷異
008_0099_b_10L域者譬猶墊溺水火不此濟導而心
008_0099_b_11L何慊焉將軍初欲有意刷還而竟爲不
008_0099_b_12L余乃空手而還今因有使行語及
008_0099_b_13L此耳唯兄善報大將軍盡刷其時之不
008_0099_b_14L施者無食前言此非干老僧事只以
008_0099_b_15L拯人濟人爲念而遠游見知於大將軍
008_0099_b_16L與諸將諸大長老敢以是進焉惟兄
008_0099_b_17L圓照不腆薄物統希笑領不宣
008_0099_b_18L雲孫一卷淸香四封眞笏六束
008_0099_b_19L參三斤管城二十柄

008_0099_b_20L

008_0099_b_21L與玄蘇書

008_0099_b_22L
別來如昨星霜再換相思一念未甞
008_0099_b_23L暫忘只以百草頭上祖師意自寬耳
008_0099_b_24L餘何足道哉古德或以望州亭相見

008_0099_c_01L오석령鳥石嶺에서 보기도 했다 합니다.94) 이런 도안道眼을 가지고 본다면, 장로가 눈으로 본 것이 바로 송운이 본 것이요, 송운이 눈으로 본 것이 바로 장로가 본 것이니, 어떻게 달리 상량商量해서야 되겠습니까.
나는 서쪽으로 돌아온 뒤로 쇠하고 병든 상태가 점점 심해져서 서쪽으로 묘향산에 들어와 혼자 분수를 지키며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데, 마침 사신의 행차가 있다는 말을 듣고는 상사相思의 문자를 부쳐서 노형의 안부가 혹 어떠한지 묻게 되었습니다.
지난번에 내가 선사의 유명遺命을 받들고 남쪽으로 귀 도島(대마도)에 갔다가 형 및 유천柳川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서 서소西笑 노형과 원광圓光 장로와 오산五山의 제덕을 만나 보고는 종지를 성대히 논하고 소종래所從來를 갖추어 밝혔으니 좋기는 좋은 일이었습니다만, 본래의 소원을 이루지 못한 채 돌아와서 섭섭한 심정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형께서 더욱 마음을 다하여 생령을 모두 쇄환토록 함으로써 예전의 약속을 저버리지 않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변변치 않은 예물이나마 모두 웃고 받아 주시기를 바라며 이만 줄입니다.
태수太守에게 내가 문후問候하더라고 전해 주십시오. 내가 병으로 먼 산속에 엎드려 있어서 편지 쓸 겨를이 없으니 부끄럽고 죄송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뒤에 들으니 유천柳川이 선거仙去했다고 하는데, 몸도 좋고 뼈도 강한 이 사람이 이토록 쉽게 돌아갈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를 위해 애통해하는 바입니다.
풍전豊前은 작별할 임시에 나에게 청기와와 옛 벼루 등 약간의 물건을 부탁하였는데, 나 자신이 서쪽으로 돌아와서는 곧장 먼 산속에 들어가 병들어 나다닐 수 없었던 탓으로 사신의 행차에 부쳐 보내지 못하게 되었으니, 부끄럽고 죄송할 따름입니다. 이런 뜻으로 각각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운손雲孫 1권, 청향淸香 4봉, 진홀眞笏 5속, 약삼藥參 1근, 관성管城 20병.
숙로 선사에게 준 글
도는 형체가 없으니 막히는 것이 뭐가 있겠으며, 마음은 자취가 없으니 누가 감히 가고 머물게 하겠습니까. 가고 머무는 것이 없고 형체와 자취가 없다 해도, 감흥이 일어날 때 그저 정신으로 만나면 되는 것입니다.

008_0099_c_01L以烏石嶺相看以是道眼看來則長老
008_0099_c_02L之眼松雲之見松雲之眼長老之見
008_0099_c_03L云何以別商量去也余乃西還衰病侵
008_0099_c_04L西入妙香山自守待盡矣適來聞
008_0099_c_05L使臣之行爲寄相思字以問老兄安否
008_0099_c_06L萬一也向者余以先師遺訣南遊至貴
008_0099_c_07L與兄及柳川前至日本得見圓光
008_0099_c_08L長老五山諸德盛論宗旨具明所從
008_0099_c_09L佳則佳矣未遂本願而回無任缺
008_0099_c_10L惟兄更爲盡心盡刷生靈無落前
008_0099_c_11L幸甚不腆薄物統希笑領不宜
008_0099_c_12L太守處爲告問候狀余病伏遠山
008_0099_c_13L及修狀慚負且晩聞柳川仙去云此人
008_0099_c_14L體冨骨勁誰知乘化至此易也爲之
008_0099_c_15L痛焉豊前臨別求我以靑瓦古硯等若
008_0099_c_16L干物余自西還即入遠山病未能出
008_0099_c_17L未及備付使行慚負慚負以是意
008_0099_c_18L各報之是仰
008_0099_c_19L雲孫一卷淸香四封眞笏五束
008_0099_c_20L參一斤管城二十柄

008_0099_c_21L

008_0099_c_22L與宿蘆禪師書

008_0099_c_23L
道無形何有所隔心無跡誰敢去留
008_0099_c_24L無去留無形跡興來獨與精神會

008_0100_a_01L그렇다면 만 리를 떨어져 있어도 항상 만날 수 있는 것이니, 스님과 내가 또 그 사이에 무슨 말을 할 것이 있겠습니까. 스님도 이런 눈으로 바라보시리라 믿습니다. 변변치 않은 예물이나마 모두 웃고 받아 주시기 바라며, 이만 줄입니다.
운손雲孫 1권, 청향淸香 3봉, 진홀眞笏 3속, 관성管城 10병, 약삼藥參 1근.
이상 네 통의 서한은 정미년에 통신사가 바다를 건너갈 때 송운이 왜승에게 부친 글들이다. 원광圓光ㆍ승태承兌ㆍ현소玄蘇ㆍ숙로宿蘆 4인은 왜국의 이름난 중들이다.
◆ 일본의 승법僧法 역시 치의緇衣와 가사를 착용한다. 오산五山의 주지는 모두 명복命服이 있어서 자의紫衣와 황의黃衣를 입고 장로라고 부르는데, 무릇 국중國中의 문사文史와 관련된 일에는 모두 장로를 차송差送하였다. 대마도는 우리나라와 교신交信하는 곳이기 때문에 부府의 동쪽 종벽산鍾碧山에 암자 하나를 따로 설치하고 장로승을 뽑아 주지하게 하였으며, 달마다 쌀과 돈을 지급하고 30삭朔의 임기가 차면 교체하였다. 도중島中의 서계書契를 우리나라에 바칠 때나 조정의 회답하는 글들은 반드시 장로에게 펼쳐 보이고 나서 본국에 보고하였다.
현소라는 자는 그중에서 걸출한 자로, 글을 잘 지었다. 수길 때부터 이미 대마도를 관장하였으며, 평의지平義智와 함께 우리나라의 신묘년의 사행使行95)을 접반接伴하였고, 송운이 왕래할 적에도 함께 글을 주고받은 것이 매우 많았다. 지금 종벽산의 옛 암자가 그대로 남아있는데, 현소가 정유생丁酉生이기 때문에 후인이 사모하여 그 이름을 이정암以酊菴이라고 부르고 있으니 가소로운 일이다. 내가 대마도에 갔을 적에 이정암의 장로가 또 나를 초청하였으므로 그 암자에서 한 번 만나 불법을 대략 논하기도 하였다.
일본의 선교禪敎는

008_0100_a_01L則在萬里長相見師與我又何容聲於
008_0100_a_02L其間哉師亦以此眼照之不腆薄物
008_0100_a_03L統希笑領不宣
008_0100_a_04L雲孫一卷淸香三封眞笏三束
008_0100_a_05L城十柄藥參一斤

008_0100_a_06L
已上四度書丁未通信使渡海時
008_0100_a_07L松雲附書於倭僧而圓光承兌
008_0100_a_08L玄蘇宿蘆四人是倭國名僧

008_0100_a_09L日本僧法亦緇衣袈裟而有五山
008_0100_a_10L住持皆有命服着紫衣黃衣
008_0100_a_11L曰長老凡於國中文史之役悉以
008_0100_a_12L長老差送而對馬島接欵我邦故
008_0100_a_13L別置一菴於府東鍾碧山差長老
008_0100_a_14L僧住持月給米錢仕滿三十朔遆
008_0100_a_15L島中書契呈于我邦者及朝
008_0100_a_16L廷報答之辭必於長老前開視後
008_0100_a_17L狀達本國玄蘇者彼中傑出
008_0100_a_18L屬文自秀吉時已管對馬島
008_0100_a_19L平義智共接我邦辛卯使行及松
008_0100_a_20L雲徃來時所與酬酢甚多至今鍾
008_0100_a_21L碧山古菴依舊以玄蘇丁酉生故
008_0100_a_22L後人慕之名曰以酊菴可笑
008_0100_a_23L至馬島時以酊菴長老亦甞邀余
008_0100_a_24L一會於其菴略論佛法日本禪敎

008_0100_b_01L단지 임제종 1파가 있을 뿐이요,96) 우리나라의 승법 역시 하나의 임제종일 뿐이다. 지금 송운이 이 서신에서 “임제의 광풍狂風을 성대히 논했다.”라고 하고, 또 “동종同宗의 일맥이다. 운운.” 한 것은, 불도의 소종래所從來가 같기 때문이었다.
◆ 현소에게 보낸 서신의 마지막 부분에 태수라고 칭한 것은 대마도주對馬島主를 말한다. 유천柳川이라는 것은 도중島中의 왜관倭官의 별호이고, 풍전豊前이라는 것은 왜국의 주명州名인데, 왜인의 직호職號에는 원래 모지某地를 지키는 자라고 그냥 칭하는 것이 있다. 이들은 모두 도중島中의 관원들인데, 송운이 그곳에 갔을 적에 그들과 깊이 사귀었기 때문에 그와 같이 말한 것이다.
◆ 원광과 승태 두 장로에게 보낸 서신에서 대장군이라고 칭한 것은 바로 관백關白을 가리킨다. 관백은 국사國事를 총람總攬하기 때문에 그 나라 사람들이 우러러보며 군왕으로 섬긴다. 그런데 일본의 장로승은 모두 들어가서 군장君長을 시봉하며 정무政務를 의논할 수 있다. 송운이 포로가 된 백성 중에 쇄환하지 못한 자가 많이 남아 있고, 또 여러 왜승과 뒷날 다시 청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편지 속에서 그 일을 언급한 것이다.
◆ 내가 송운의 서신 속에 운운한 말을 살펴보건대, 갑진년(1604, 선조 37)의 송운의 행차는 답사答使로 보내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알겠다. 가강家康이 나라를 세운 뒤에 비록 교린하자는 청이 있었으나, 조정에서는 그들의 속마음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송운의 대명大名이 평소 왜추倭酋의 경복敬服을 받았으므로 특별히 명하여 배와 행장을 성대히 차리게 한 뒤에 옛날에 달마가 동쪽으로 건너왔던 행차처럼 꾸미고는, 군국郡國을 유람한다는 명분을 내걸고서 그 지역의 인심을 두루 살피게 하는 한편, 자비를 내세우는 교리를 이용하여 포로가 된 백성들을 죄다 데려오게 하려고 함이었다. 그리하여 부처를 사모하고 복덕을 구하는 저들 무리로 하여금 이르는 곳마다 환영하며 손을 모아 이마에 대고 부처라 칭하고 조사라 칭하게 하였으니, 이는 형세상 당연한 일이었다.

008_0100_b_01L只有臨濟宗一派我國僧法亦一
008_0100_b_02L臨濟宗今此松雲書中有曰盛論
008_0100_b_03L臨濟狂風有曰同宗一脉云云者
008_0100_b_04L以道之所從來同故也
◆抵玄蘇
008_0100_b_05L書末幅所稱太守者對馬島主也
008_0100_b_06L柳川者島中倭官別號也豊前者
008_0100_b_07L倭國州名而倭人職號本有虛稱
008_0100_b_08L某地守者此皆島中諸官而松雲
008_0100_b_09L到彼時與之交深故所言如此
008_0100_b_10L◆抵圓光承兌二長老書所稱大
008_0100_b_11L將軍即關白也關白總攬國事
008_0100_b_12L國人仰之爲君王日本長老僧
008_0100_b_13L能入侍君長奉議政務松雲以被
008_0100_b_14L虜人民多有未盡刷者且與諸僧
008_0100_b_15L有後日更請之約故書中及之

008_0100_b_16L余觀松雲書所云云之語迺知甲
008_0100_b_17L辰松雲之行非出於報使之意
008_0100_b_18L於家康立國之後雖有交隣之請
008_0100_b_19L而朝廷未信彼中情實故以松雲
008_0100_b_20L大名素爲倭酋所服特命厚給舩
008_0100_b_21L如古達摩東渡之行托以盤游
008_0100_b_22L郡國遍觀其地人心又以慈悲之
008_0100_b_23L欲得盡刷俘氓令彼慕佛求福
008_0100_b_24L之俗所至驩迎攅手至頂稱佛

008_0100_c_01L그리고 가강이 송운을 시험해 보려고 괴이한 짓을 꾸민 것도 불사佛事를 숭중崇重했기 때문인데, 송운이 한두 가지 영험靈驗을 드러내 보여 주자 빗자루를 쥐고(擁篲) 받들어 모시며 못하는 일이 없이 한 것97)도 당연한 일로서, 필경에는 교린의 화친을 이루고 백성의 목숨을 구제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가 돌아와서 조정에 보고하기를 기다린 뒤에 비로소 통신사를 보내 예전처럼 친목을 다지게 하였으니, 당시에 송운을 보낸 한 가지 일은 참으로 상책上策을 얻은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만 번 죽을 위기의 전쟁을 치른 뒤에 한 척의 배로 바다를 건너가서 이무기와 독사 같은 저들과 이마를 맞대고 흔쾌히 담판을 하였으니, 담력이 크고 마음이 통달한 사람이 아니면 어떻게 이런 일을 감당해낼 수가 있겠는가. 생각할수록 늠연凜然하기만 하다.
◆ 정미년(1607, 선조 40) 사신使臣의 일기를 보면, 비변사가 관원을 차송差送하여 송운이 일본 승려에게 보낸 서찰과 예물을 가지고 뒤쫓아 왔다는 말이 들어 있다. 그렇다면 송운이 편지를 부친 것은 원래 조정의 명령이 있어서이고, 예물로 보낸 물건도 조가朝家에서 마련해서 관원을 보내 가져가게 한 것이다. 이 글은 의조儀曺(예조)에 등록되어 있는데, 사신이 돌아올 때에 왜승이 답서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였는지 알 수가 없으니 한스럽다.
판서 이수광이 지은 『지봉유설』 중에 기록된 송운의 사적
승려 유정은 호가 송운이다. 임진왜란 뒤에 의승장이 되어 영남에 주둔하였다. 왜장 청정淸正이 만나자고 요구하자 송운이 왜영倭營에 들어갔는데, 왜적들이 몇 리나 줄지어 서서 창과 칼이 다발을 묶어 세운 듯하였으나, 송운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청정을 만나서 태연히 담소하였다. 청정이 송운에게 말하였다.
“귀국에 보배가 있는가?”
송운이 답하였다.
“우리나라에 다른 보배는 없고, 오직 그대의 머리를 보배로 여긴다.”
청정이 말하였다.
“무슨 말이냐?”

008_0100_c_01L稱師勢固然矣家康之設驗眩恠
008_0100_c_02L亦由於崇重佛事而及其一二現
008_0100_c_03L則擁篲供奉冝無所不至
008_0100_c_04L竟講成鄰和拯濟民命待其歸告
008_0100_c_05L朝廷而後始遣通信使修睦如故
008_0100_c_06L當時遣松雲一欵誠得上策然萬
008_0100_c_07L死兵戈之餘一㠶駕海與蛟虺摩
008_0100_c_08L頸而嬉非膽大心通人安能當此
008_0100_c_09L思之凛然
◆丁未使臣日記中
008_0100_c_10L有備邊司差官持松雲抵日本僧
008_0100_c_11L人書札及禮物追到之語松雲附
008_0100_c_12L自有朝命饋遺之物亦自朝
008_0100_c_13L家辦給而至於差官領付矣此書
008_0100_c_14L錄在儀曺而使還時倭僧答書
008_0100_c_15L未知有何說話可恨

008_0100_c_16L

008_0100_c_17L李判書粹光所著芝峯類說中記松
008_0100_c_18L雲事蹟

008_0100_c_19L
僧惟政號松雲壬辰變後爲義僧將
008_0100_c_20L于嶺南倭將淸正要與相見松雲入
008_0100_c_21L倭營賊衆列立數里槍劒如束松雲
008_0100_c_22L無怖色見淸正從容談笑淸正謂松
008_0100_c_23L雲曰貴國有寶乎松雲答曰我國無
008_0100_c_24L他寶唯以汝頭爲寶淸正曰何謂也

008_0101_a_01L
송운이 답하였다.
“우리나라에서 그대의 머리를 황금 1천 근과 읍邑 1만 호戶에 사려고 하니, 보배가 아니고 무엇인가?”
청정이 크게 웃었다.
◆ 『지봉유설』에 또 이런 기록이 있다.
유정은 또 사명 산인四溟山人이라고 호號하였다. 왜노倭奴가 임진란 이후로 감히 통화通和를 하지 못하다가 계묘년(1603, 선조 36)에 들어와서 통신사를 청하니 사람들이 모두 분개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흔단釁端이 생길까 걱정한 나머지, 사명 산인을 보내 적정賊情을 탐지하게 하였다. 산인이 이별하는 시문을 사대부들에게 널리 구했으므로 내가 시를 지어 전송하였다.

盛世多名將        성세에 명장이 많다 하지만
奇功獨老師        기이한 공은 오직 우리 노사뿐
舟行魯連海        배는 노련98)의 바다를 건너가고
舌騁陸生辭        혀는 육생99)의 변설을 치달리리.
變詐夷無厭        오랑캐의 속임수는 한이 없으니
覊縻事恐危        기미100)하는 일 위태할까 두려워라.
腰間一長劒        허리에 찬 한 자루 장검이여
今日愧男兒        오늘날 남아 되기 부끄럽구나.
차오산車五山(車天輅)이 이 시를 보고는 붓을 던져 버렸다.101)
이 판서李判書는 호가 지봉芝峯으로, 문장을 잘하였으며, 저서에 『지봉집芝峯集』이 있다.
◆ 상고해 보건대, 송운과 청정의 문답 중에 나오는 이른바 “머리를 보배로 여긴다.”라는 이야기는, 세 차례에 걸쳐 적진에 들어갔을 때의 일기에는 실려 있지 않다. 이는 필시 임란 초기에 관동關東에서 재차 적중에 들어가 문답할 때 운운한 말일 것이다. 그런데 유몽인柳夢寅의 야담野談(『於于野譚』) 중에도 이 말이 들어 있으니, 이는 실제로 있었던 일이 전해지는 과정에서 착오를 빚은 것이라고 하겠다.
◆ 갑진년(1604, 선조 37)에 바다를 건너갈 때에 사대부와 명사들이 전송한 시가 매우 많았을 텐데 유실되어 남아 있지 않다. 제공諸公의 문집에 실려 있겠지만 그것들도 일일이 찾아 모으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유몽인이 지은 『어우야담』 중에 기록된 송운의 사적
유정은 우리나라의 호걸스러운 승려이다. 자호自號는 송운으로, 휴정의 제자이다. 일찍이 오대산 월정사에 있다가 만력 임진년(1592, 선조 25)에 금강산 유점사에 머물렀다.
이때 왜병이 대규모로 몰려오자 같이 거하던 승려들과 함께 깊은 골짜기로 피난하였는데,

008_0101_a_01L答曰我國購汝頭金千斤邑萬家
008_0101_a_02L寶何淸正大笑
◆又曰惟政 亦號四溟
008_0101_a_03L山人倭奴自壬辰後不敢通和至癸
008_0101_a_04L來請信使人皆憤惋而朝廷恐其
008_0101_a_05L生釁遣山人徃試賊情山人遍求別
008_0101_a_06L章于搢紳間余贈之曰盛世多名將
008_0101_a_07L奇功獨老師舟行魯連海舌騁陸生辭
008_0101_a_08L變詐夷無厭覊縻事恐危腰間一長劒
008_0101_a_09L今日愧男兒車五山見之1) [5]

008_0101_a_10L
李判書號芝峯能文章有芝峯集
008_0101_a_11L◆按松雲與淸正問答中首寶之說
008_0101_a_12L不載於三入賊陣時日記此必亂
008_0101_a_13L自關東再入賊中問答時所云
008_0101_a_14L云者而柳夢寅野談中亦有此語
008_0101_a_15L當是實事而錯傳者
◆甲辰渡海
008_0101_a_16L搢紳名士送行之詩甚多
008_0101_a_17L散逸不存雖載於諸公文集者
008_0101_a_18L未及一一搜聚可恨

008_0101_a_19L

008_0101_a_20L柳夢寅所著於于野譚中記松雲事
008_0101_a_21L

008_0101_a_22L
惟政者東或豪僧也自號松雲休靜
008_0101_a_23L弟子也甞居五臺山月精寺萬曆壬辰
008_0101_a_24L居金剛山楡店寺倭兵大至與同舍僧

008_0101_b_01L어떤 승려가 가서 엿보니 왜적이 유점사에 들어가서 거승居僧 수십 인을 묶어 놓고 금은보화를 찾으며 내놓지 않으면 죽이려고 하는 것이었다. 유정이 이 말을 듣고는 가서 구하려고 하자, 승려들이 모두 만류하며 말하였다.
“우리 스님이 같이 거하던 스님들을 죽음에서 구하려 하시니 그 자비는 더없이 큽니다마는, 범의 주둥이를 더듬고 범의 수염을 잡으려 하는 것은 아무 이익이 없고 화만 부를 뿐입니다.”
유정은 그 말을 듣지 않고 난병亂兵 속으로 들어가며 옆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행동하니 왜병들도 괴이하게 여겼다. 절의 문간에 이르니 왜적들이 혹은 앉고 혹은 누워서 칼과 창을 서로 휘둘렀는데, 유정이 아는 체하거나 돌아보거나 머뭇거리지 않고 지팡이를 끌고서 손을 휘저으며 들어가니, 왜적들이 물끄러미 쳐다보며 금하지 않았다. 산영루山影樓를 지나 법당 아래에 이르니, 승려들이 모두 양쪽 행랑 아래에 묶여 있다가 유정을 보고 울었으나 유정은 그들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어떤 왜적이 선당禪堂 밖에서 군목軍目 비슷한 문서를 다루고 있었는데, 유정이 서서 보아도 왜병이 또 금하거나 뭐라고 하지 않았다. 그 문자를 보아도 알 수 없었으므로 곧장 법당으로 올라가니 여러 왜장倭將이 모두 의자를 나란히 하고 앉아 있었다. 유정이 손을 내려뜨린 채 아는 체하지도 않고 마치 치인癡人처럼 이리저리 다니면서 돌아다보니, 어떤 왜장이 글을 써서 물었다.
“당신은 글자를 아는가?”
유정이 말하였다.
“조금 문자를 안다.”
또 물었다.
“당신의 나라에서도 칠조七祖를 높이는가?”
유정이 답하였다.
“육조六祖가 있지, 칠조가 어디에 있는가?”
그가 말하였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
이에 유정이 곧바로 육조를 차례로 써서 보여 주니, 왜장이 대단히 경이롭게 여겼다. 그리고는 말하였다.
“이 절에 금은보화가 있을 터이니, 네가 모두 내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죽일 것이다.”
유정이 말하였다.
“우리나라는 금은을 보배로 삼지 않고, 단지 쌀과 베를 쓸 뿐이다. 금은 같은 보배는 온 나라를 통틀어도 흔치 않은데, 하물며 산속의 중들이겠는가. 그들은 단지 불공을 일삼고 채식과 초의草衣로 살아가며, 혹 곡기穀氣를 끊고 솔잎을 먹기도 하며, 혹 마을에서 걸식하면서 살 뿐이니, 어찌 금은 같은 보배를 모아 두었겠는가. 그리고 장군을 보건대, 불사佛事와 육조가 있음을 잘 알고 있는데, 불법은 완전히 자비와 불살생을 으뜸으로 삼는 바이다. 지금 보건대, 죄 없는 어리석은 중들을

008_0101_b_01L避寇深谷間有僧徃覘倭入楡店寺
008_0101_b_02L居僧數十人索金銀諸寶不出將殺之
008_0101_b_03L政聞之欲徃救之僧皆挽之曰吾師
008_0101_b_04L欲爲同舍僧救其死其慈悲莫大
008_0101_b_05L探虎口將虎鬚無益只取禍耳政不從
008_0101_b_06L入亂兵中傍若無人倭兵恠之至沙
008_0101_b_07L諸倭或坐或臥劒戟交鎩政不拜
008_0101_b_08L不顧眄不留行曳笻揮手而入
008_0101_b_09L熟視而不之禁歷山影樓至法堂下
008_0101_b_10L僧皆縳在兩廡下見政而泣政不之顧
008_0101_b_11L有倭在禪堂外治文書如軍目者政立
008_0101_b_12L倭兵亦不禁呵觀其文字不可曉
008_0101_b_13L直上法堂諸倭將皆列椅而坐政垂手
008_0101_b_14L不爲禮彷徨縱觀之如癡人有一將以
008_0101_b_15L文字問曰爾解字否政曰粗解文字
008_0101_b_16L又問之曰爾國尊七祖乎政曰有六祖
008_0101_b_17L焉有七祖曰願聞之即列書六祖視之
008_0101_b_18L倭將大異之曰此寺有金銀諸寶爾可
008_0101_b_19L盡出之不然當殺之政曰我國不寶金
008_0101_b_20L只用米布金銀諸寶擧一國所罕
008_0101_b_21L況山之僧只事供佛菜食草衣
008_0101_b_22L絶粒飡松或乞食村閭以爲生豈有蓄
008_0101_b_23L金銀之寶且觀將軍能知佛事有六祖
008_0101_b_24L佛法全以慈悲不殺爲上今觀無罪愚

008_0101_c_01L행랑 아래에 묶어 놓고 진귀한 재물을 내놓으라고 다그치는데, 저들은 지팡이 하나로 1천 산을 돌아다니며 민간에서 밥을 얻어 아침저녁 끼니를 메우는 자들이니, 비록 몸을 쪼개고 뼈를 가루로 만든다 해도 한 치의 보화인들 어디서 나오겠는가. 바라건대 장군은 그들을 살려 주도록 하라.”
이에 여러 왜적들이 그 글을 돌려보고는 안색이 변하여 하졸下卒을 돌아보며 뭐라고 지시를 하니, 하졸이 법당에서 내려가 양쪽 행랑에 있던 20여 명의 승려를 모두 풀어 주었다. 유정이 다시 소매를 휘저으며 지팡이를 끌고 나오니, 왜장이 큰 글자로 큰 널빤지에 써서 절의 문간에 “이 절에는 도를 아는 고승이 있으니, 모든 군사들은 다시 들어가지 말라.”라고 걸어 놓고는 즉시 군대를 거두어 떠나갔으며, 그 뒤로는 왜병이 다시 유점사에 들어가지 않았다.
조정이 유정을 승장僧將에 제수하여 8도의 승군을 통솔하게 하고, 왜적의 진영에 출입하며 유세하는 임무를 부여하였다. 유정이 일찍이 적진에 들어가서 왜장 청정을 만났는데, 청정이 말하였다.
“당신의 나라는 무슨 보배가 가장 귀한가?”
유정이 말하였다.
“우리나라는 보배로 삼는 것이 없다. 보배로 삼을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장군의 머리이다.”
청정이 억지로 웃었으나 속으로는 실로 꺼림칙하게 여겼다.
난이 평정된 뒤에 조정의 명을 받들고 일본국에 들어갔다. 가강家康이 설면자雪綿子 2만 근을 주었는데 사양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자 대마도주 귤지정橘智正에게 모조리 주고 돌아왔다.102)
조정에서 묘궐廟闕을 중수할 때에 유정이 온 나라의 승군을 모아 역사役事를 도왔다.
내가 일찍이 유정을 묘향산 보현사에서 보았는데, 머리는 깎았으나 수염은 남겨 두어 그 길이가 허리에까지 닿았으며 백색이었다. 그때에 그는 가선대부嘉善大夫103)였다. 치악산에서 죽으니104) 나이가 70이 못되었다. 문집이 남아 있다.
유몽인柳夢寅은 호가 어우자於于子이다. 문장에 능했으며, 선묘조宣廟朝에 등제登第하였다.혼조昏朝(광해군) 때에 벼슬을 역임하다가 반정反正 뒤에 복주伏誅되었다.
◆ 상고해 보건대, 송운의 갑오년(1594, 선조 27) 상소문에 “임진왜란 초에 신이 개골산皆骨山에 있으면서 두 번 적중에 들어가 왜적과 문답하였습니다. 운운.”의 내용이 들어 있다. 이 『어우야담』에 기록된 유점사의 일은

008_0101_c_01L縳在廡下責以珍貨彼一笻千山
008_0101_c_02L寄食民間以度朝夕者雖刲身粉骨
008_0101_c_03L豈有一寸寶願將軍活之諸倭傳示其
008_0101_c_04L動色顧下卒云云下卒趍下堂
008_0101_c_05L解兩廡二十餘僧政又揮袖曳笻而出
008_0101_c_06L倭將以大字書大板掛沙 [11] 門曰此寺有
008_0101_c_07L知道高僧諸兵勿更入即罷兵而去
008_0101_c_08L自此倭兵更不入楡店寺朝廷除政僧
008_0101_c_09L統管八道僧軍出入倭陣以遊說
008_0101_c_10L爲任甞入賊陣見倭將淸正淸正曰
008_0101_c_11L爾國何寶最貴政曰我國無所寶所寶
008_0101_c_12L惟將軍之首也淸正强笑而中實憚之
008_0101_c_13L亂旣㝎奉朝命入日本國家康以雪
008_0101_c_14L綿子二萬斤與之辭不得盡與對馬島
008_0101_c_15L主橘智正而歸及朝廷重修廟闕政鳩
008_0101_c_16L一國僧軍以助役余甞見政於香山普
008_0101_c_17L賢寺剃髮存髯髯長至帶而白時爲
008_0101_c_18L嘉善大夫死於雉岳山年未七十
008_0101_c_19L文集

008_0101_c_20L
柳夢寅號於于子能文章宣廟朝

008_0101_c_21L登第歷仕昏朝
正後以罪誅
◆按松雲甲午䟽

008_0101_c_22L有曰壬辰變初臣在皆骨山再入

008_0101_c_23L賊中與賊問答云云此記中所錄

008_0101_c_24L「茟」通用「筆」{編}次同

008_0102_a_01L대개 당시에 실제로 있었던 사적事蹟일 터인데, 상세히 알 수 없는 것이 유감이다.
◆ 또 상고해 보건대, 승려 해안海眼이 지은 「송운 대사 행적松雲大師行蹟」에는 “정미년 가을에 벼슬을 그만두고 치악산으로 돌아갔다가 무신년(1608, 선조 41)에 선묘宣廟의 휘음諱音(부음)을 듣고 서울에 달려와서 배곡拜哭하고는, 그 일로 인하여 병이 들어 가야산에 들어가 병을 조섭調攝하다가 경술년(1610, 광해군 2)에 시적示寂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이 『어우야담』에서 송운이 치악산에서 죽었다고 말한 것은 잘못이다. 송운은 가정嘉靖 갑진년(1544, 중종 39)에 태어나서 만력萬曆 경술년에 향년 67세로 죽었다.
홍만종이 지은 『순오지』 중에 기록된 송운의 사적
승려 유정의 호는 송운이다. 임진왜란에 창의倡義하여 왜적을 쳐서 포로로 잡은 것이 매우 많았다. 이에 상이 특별히 승대장僧大將에 임명하니, 이름이 두 나라에 가득하였다.
난이 평정된 뒤에 원가강源家康이 일본의 관백이 되어 우리 조정에 통신사를 요청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분개하였으나, 조정에서는 변방에 흔단釁端이 일어나지 않을까 염려하여 유정을 일본에 보내 적정을 탐지하게 하였다.
왜인들은 평소에 그의 명망을 중히 여겼는데, 그의 절의節義를 시험해보려고 위협하며 항복하게 하니, 유정이 말하였다.
“내가 우리 왕의 명을 받들고 이웃나라에 사신으로 왔으니, 너희들이 나를 깔보며 침해하면 안 될 것이다. 내가 너희들에게 무릎을 굽힐 수는 없다.”
왜인들이 또 숯불을 크게 피워 이글거리는 홍로紅爐처럼 해 놓고는 유정에게 불 속으로 뛰어들게 하였는데, 유정이 안색을 변하지 않고 불 옆에 향해 서서 뛰어들 것처럼 하니, 하늘에서 홀연히 퍼붓듯 비가 내려 불이 절로 금방 꺼졌다.105) 왜인들이 이것을 보고 신神이라고 생각하여 마침내 벌여 서서 절하며 말하였다.
“하늘이 이처럼 도와주니 대사는 참으로 생불生佛이시다.”
그리고는 즉시 금으로 만든 교자轎子에 태워 모셨으며, 이로부터는 뒷간에 갈 때라도 번번이 그 교자로 받들어 모시곤 하였다.
장차 돌아오려고 할 때에 관백이 물었다.
“대사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내가 반드시 공경히 받들 것이니, 어디 한번 말해 보시오.”
유정이 말하였다.
“산인山人은 본래 원하는 것이 없소이다. 다만 바라는 것은 우리나라의 불화佛畵 한 폭을 돌려주었으면 하는 것이오.”
관백이 말하였다.

008_0102_a_01L楡店寺一事盖其時實蹟而恨未

008_0102_a_02L詳悉
◆又按僧海眼所撰松雲行蹟

008_0102_a_03L丁未秋乞骸還雉岳山戊申聞宣

008_0102_a_04L廟諱音奔入京師拜哭因得病入

008_0102_a_05L伽倻山調治庚戌示寂此記云死

008_0102_a_06L於雉岳山者誤矣松雲生於嘉靖

008_0102_a_07L甲辰卒於萬曆庚戌享年六十七

008_0102_a_08L

008_0102_a_09L洪萬宗所著旬五志中記松雲事蹟

008_0102_a_10L
僧惟政號松雲壬辰之亂倡義擊倭
008_0102_a_11L虜獲甚多上特拜僧大將名滿兩國
008_0102_a_12L亂㝎後源家康爲日本關白請信使于
008_0102_a_13L我朝人皆憤惋而朝廷恐生邊釁
008_0102_a_14L惟政于日本以試賊情倭素重其名
008_0102_a_15L欲試其節䝱之使降政曰吾奉命於吾
008_0102_a_16L通使于鄰國爾等不宜侵凌吾膝
008_0102_a_17L不可爲汝屈倭又大熾炭火烈若紅爈
008_0102_a_18L使政投入火中政不動顏色立向火邊
008_0102_a_19L若將躍入者天忽下雨如注火即自滅
008_0102_a_20L倭見之以爲神遂羅拜曰天佑如此
008_0102_a_21L大師眞生佛也即以金轎舁之自是雖
008_0102_a_22L如厠時輙舁奉之將返關白問以大
008_0102_a_23L師所欲吾必敬承試言之政曰山人
008_0102_a_24L本無欲唯願還我國佛畫一幀關白曰

008_0102_b_01L
“우리나라가 비록 작지만 그래도 귀중한 보배가 많은데, 어찌하여 이런 것은 놔두고 저것을 취하려 하오?”
유정이 말하였다.
“이 부처님이 매우 영험하여 비와 바람을 빌 수도 있고, 재앙을 물리치고 상서를 이룰 수도 있소이다. 그래서 돌려받았으면 하는 것이오.”
그러자 관백 이하의 사람들이 일제히 소리쳐 말하였다.
“대사도 바람을 부르고 비를 부를 수 있는데, 하필 부처님 탱화를 돌려달라고 요구하십니까?”
유정이 더 이상 강박强迫하지 못하고 돌아왔는데, 이런 일이 있은 뒤로는 왜노倭奴가 감히 다시는 공갈을 치지 못하였다. 지금도 송운의 필적을 구매하려면 반드시 비싼 가격을 주어야 하고, 혹시라도 잃어버릴까 두려워한다고 한다.
홍만종洪萬宗의 호는 현묵자玄默子로 숙묘조肅廟朝의 사람이며, 글을 잘했으나 등제登第하지 못하였다.
◆ 대구 팔공산에 옛날 한 도승道僧이 있었는데, 연시燕市(燕京)에서 대견大絹(폭이 넓은 비단) 여덟 필疋을 사서 한 폭으로 이은 다음에 장륙금신丈六金身(불상)을 그려 탱화를 만들 목적으로 8도를 두루 돌아다니며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을 널리 모집하였으나 몇 년 동안 만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마침 풍악楓岳의 승려가 수륙재水陸齋를 크게 벌이자 승속僧俗이 모두 모여들어 무려 수천 명이나 되었는데, 화주승化主僧이 대중에게 널리 고하여 불화佛畵 그리는 사람을 얻고자 하였으나 응하는 자가 없었다. 그런데 자리 끝에 비쩍 마른 승려 하나가 응모하여 자진해서 나왔으므로 그와 함께 돌아왔는데, 그가 목욕재계를 하고 나서 화주승에게 말하였다.
“이 일은 30일이 차야만 이룰 수 있다. 나는 불전佛殿에 거하여 몸을 숨기고서 일을 할 것이니, 부디 밖에서 엿보지 말라.”
그리고는 사방 벽을 발라서 틈이 없도록 하고, 단지 밥을 넣어 주는 구멍 하나만 내어 사흘에 한 번씩 밥을 넣어 주되, 넣을 때에도 곁눈으로 엿보지 말게 하였으므로 화주승이 그 말대로 하여 감히 엿보지 않았다. 그러다가 29일째 되는 날에 화주승이 생각하기를, 비록 하루가 차지 않았으나 그림은 필시 완성되었을 것이라고 여기고는, 잠깐 곁눈으로 흘려보았다. 그러자 화사畵師가 크게 놀라며 붓을 던지고 일어나서 말하였다.
“그림을 다 그리지 못하겠구나.”
그러더니 황작黃雀 한 마리가 밥 넣는 구멍에서 나와 날아갔는데, 그 뒤로는 그림자도 소리도 없이 적막하기만 하였다.

008_0102_b_01L敝國雖小尙多重寶何捨此而取彼
008_0102_b_02L政曰此佛甚靈可以祈風禱雨可以禳
008_0102_b_03L灾致祥故願還也關白以下齊聲言曰
008_0102_b_04L大師亦能呼風喚雨何必求還佛幀
008_0102_b_05L不復强迫而歸自是倭奴不敢復喝
008_0102_b_06L至今購得松雲*茟蹟必以重價貿之
008_0102_b_07L恐失之云

008_0102_b_08L
洪萬宗號玄默子肅廟朝人能文
008_0102_b_09L不第
◆大丘八公山古有一道僧
008_0102_b_10L買大絹八疋于燕市聯作一幅
008_0102_b_11L畫丈六金身爲幀周行八道廣募
008_0102_b_12L能畫者數年不得適値楓岳僧
008_0102_b_13L大張水陸僧俗咸聚無慮數千人
008_0102_b_14L化主僧遍告大衆願得畫佛手
008_0102_b_15L有應者坐末疲癃一僧應募自出
008_0102_b_16L與之偕歸齋沐而請僧曰此事滿
008_0102_b_17L三十日乃成吾處於佛殿隱身而
008_0102_b_18L爲之愼勿覘視塗其四壁使無
008_0102_b_19L孔隙只存納飯一竅三日一納
008_0102_b_20L而納時亦勿邪睇化主僧依其言
008_0102_b_21L不敢窺至二十九日自料雖未
008_0102_b_22L滿一日畫必已就暫流眄而視之
008_0102_b_23L畫師大驚擲*茟起立曰畫不就矣
008_0102_b_24L即有黃雀出自飯孔而飛去影響

008_0102_c_01L화주승이 괴이하게 여겨 들어가서 보니, 부처의 그림은 다 그렸으나 한쪽 발을 완성하지 못하여 그냥 새의 발자국을 그려서 붙이고 떠나간 것이었다. 이에 곧장 그 탱화를 동화사桐華寺에 걸어 두었는데, 수재水災나 한재旱災 그리고 역질疫疾이 돌 때마다 반드시 이 부처님에게 빌면 메아리같이 신험神驗이 응하였다. 임란 때에 왜놈들이 이 그림을 도둑질해 갔으므로 송운이 이 때문에 돌려 달라고 청한 것인데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106)
오대산의 승려 취혜가 소장한 문고 안에 기록된 송운의 사적
송운 대사가 왜변을 겪은 뒤로 가야산 해인사에 은둔해 있던 중에107) 갑진년(1604, 선조 37) 정월 23일에 법사인 서산의 열반 소식을 듣고 분상奔喪하다가 경기도 양근楊根 오빈역娛嬪驛에 이르렀을 때에 상의 명초命招를 받았으므로 미처 분상하지 못한 채 역마驛馬를 타고 서울에 이르니, 상이 하교하였다.
“아, 그대 유정이여. 미친 저 왜구는 실로 우리의 원수이다. 6년 동안의 병진兵塵에 만백성이 근심하며 괴로워하니, 내 마음이 편치 못하다. 그대는 가서 왜추倭酋를 만나 보고 상세히 적정을 탐지할 것이요, 그리고 나서 화친을 체결하고 돌아오도록 하라.”
대사가 명을 받고 물러나와 즉시 행장을 차렸다. 그리하여 이해 봄 3월 4일에 길을 떠났는데, 위의를 갖추어 기복器服ㆍ자장資裝ㆍ예대禮待 등의 절목節目을 일체 사신의 전례에 의거하였다. 20일에 동래에 이르러 순풍을 기다려서 배에 올라타고 바다를 건너갔다. 대마도에서 다시 바다를 건너 몇 달 동안 나아가 왜인의 도성에 도착하니, 왜인이 위의를 성대히 하고 대기하였다.
왜인의 도성에서 30리 떨어진 곳에서부터 금수錦繡의 보장步障108)을 설치하고 좌우에 금은의 병풍을 벌여 세웠으며, 병풍에는 모두 왜국 사람들이 지은 시들을 써 놓았는데, 대사는 길을 가면서

008_0102_c_01L寂然化主僧恠而入視之畫佛已
008_0102_c_02L而一足未就仍畫着鳥跡而去
008_0102_c_03L即以其幀挂于桐華寺凡有水旱
008_0102_c_04L疾疫必禱此佛神驗如響壬亂
008_0102_c_05L時倭奴竊偸而去松雲以此請還
008_0102_c_06L而竟不得

008_0102_c_07L

008_0102_c_08L五臺山僧就惠所藏文藁中記松雲
008_0102_c_09L事蹟

008_0102_c_10L
松雲大師自經倭變之後隱遯於伽倻
008_0102_c_11L山海印寺甲辰正月二十三日遭法師
008_0102_c_12L西山涅槃奔喪至京郡楊根娛嬪驛
008_0102_c_13L上命招1) [6] 由奔喪乘馹至京師上下
008_0102_c_14L敎曰咨爾惟政狂彼倭冦實我仇讐
008_0102_c_15L而六載兵塵萬民憂苦予心不安
008_0102_c_16L其徃見倭酋詳探賊情因通和好而還
008_0102_c_17L大師拜命而退即治行李是年春
008_0102_c_18L三月初四日啓程具威儀器服資裝
008_0102_c_19L禮待之節一依使臣前例二十日至東
008_0102_c_20L候風登舟渡海自對馬島復開洋
008_0102_c_21L前進數月而達倭都倭人盛儀以待
008_0102_c_22L都三十里設錦繡步幛左右列立金銀
008_0102_c_23L屛間盡寫倭國人所製詩辭大師於
008_0102_c_24L「末」與「未」義通{編}

008_0103_a_01L슬쩍 스쳐보았을 뿐인데도 그 시를 모두 기억하였다. 그러다가 관소館所에 이르러 왜인의 접반사接伴使와 함께 그 나라의 시품詩品을 논하면서 번번이 병풍 사이의 시를 한 글자도 착오가 없이 모조리 외우니, 접반사가 경탄하며 기이하게 여겨 자기 왕에게 보고하였다.
이에 그 왕이 대사의 도술道術을 시험해 볼 목적으로, 10여 길의 구덩이를 파고, 그 속에 포악한 코끼리와 독사를 채워 넣은 뒤에 그 위에다 유리를 덮어 모든 형체가 다 드러나게 함으로써 마치 흐르는 물의 표면에 그 짐승들이 이리저리 다니는 것처럼 느끼게 하여 사람이 겁을 먹게 하였다. 그리고는 대사를 맞이하여 들어가 앉게 하였는데, 대사도 그것이 물인가 의심하여 염주를 던져서 그것이 유리인 것을 확인한 뒤에 들어가 앉으니, 왜인들이 그 지혜에 더욱 감복하였다.
다음날 아침에 장차 왜왕을 보려고 할 적에 왜왕이 철마鐵馬를 통로에 세워 두고 그 아래에는 숯불을 피워 사면을 둘러 놓고는 대사에게 철마를 타고 들어오라고 하였다. 대사가 즉시 서쪽을 향하여 묵도黙禱를 하자 청천백일에 조각구름이 조선 쪽에서 다가오더니 큰비가 갑자기 내려 숯불이 모두 꺼져 버렸다. 왜국의 군신이 이것을 보고 모두 놀라고 두려워하면서 말하였다.
“이분은 신승神僧이요 생불生佛이시다.”
그리고는 곧바로 상품의 금련金輦에 태워 내정內庭으로 들여 큰 잔치를 베풀고 스승으로 섬기며 대사가 말하는 것은 모두 따랐다.
대사가 군국郡國을 유람하고 산천을 감상하겠다는 핑계를 대고, 왜국의 경내를 두루 돌아다니며 그 나라의 물정과 인심을 모두 정탐하였다. 을사년 4월에 이르러 환국하려 하자 왜왕과 여러 신하들이 위아래 할 것 없이 각각 재화와 보배를 받들어 예물로 바쳤으나, 대사는 모두 물리치고 받지 않았다. 그리고는 맨 먼저 화친을 하여 나라를 편안히 할 일을 말하고, 다음은 청정淸正의 머리를 요구하고, 다음은 포로로 잡혀간 우리나라 인민을 되돌려 줄 것을 언급하였다. 이에 왜왕이 송구스럽게 여기고는 즉시 임진년, 계사년 이래로 포로가 된 남녀 3천여 명을 돌려보내되, 배와 식량을 갖춰서 대사와 함께 돌아가게 하였다.
7월 13일에 서울에 돌아와 숙배肅拜하니, 상이 크게 포상을 가하고 특별히 1품의 직질職秩(官位)을 하사하였다. 대사가 부득이 들어가서 은명恩命에 사례하고 사흘을 머물다가

008_0103_a_01L道上暼然看過悉記其詩及至館
008_0103_a_02L倭接伴使論其國中詩品輙能盡誦屛
008_0103_a_03L間詩無一差錯使者驚異之告于其
008_0103_a_04L其王欲試其道術掘坑十餘丈
008_0103_a_05L惡象毒蛇充入坑中布琉璃其上使
008_0103_a_06L群形畢露有若縱橫於流水之面者
008_0103_a_07L邀大師入坐大師亦疑其爲水
008_0103_a_08L擲念珠知其琉璃而後入坐倭益服其
008_0103_a_09L翌朝將見于倭王倭王立鐵馬以通
008_0103_a_10L其下熾炭火四圍使大師緣鐵馬而
008_0103_a_11L大師即西向默禱靑天白日有片
008_0103_a_12L來自朝鮮大雨旋下炭火皆滅
008_0103_a_13L君臣見者莫不驚怖曰此神僧也
008_0103_a_14L佛也輙以上品金輦舁入內庭設大
008_0103_a_15L師事之所言皆從大師托以盤遊
008_0103_a_16L郡國賞翫山川周遊倭境盡探其國
008_0103_a_17L物情人心至乙巳四月將還倭王及
008_0103_a_18L羣臣上下各奉貨寶以爲贐大師悉却
008_0103_a_19L不受首言交和寧國之事次求淸正之
008_0103_a_20L次及刷還我國被虜人民倭君悚然
008_0103_a_21L即令刷出壬癸以來被虜者男女并三
008_0103_a_22L千餘口具舟粮以送使與俱還七月十
008_0103_a_23L三日還京祗肅上大加褒賞特賜一
008_0103_a_24L品秩大師不得已入謝恩命留三日

008_0103_b_01L물러가겠다고 청하여 다시 가야산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취혜就惠는 어떤 승려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호남의 여러 사찰에서 들은 송운의 사적은 모두 이 기록을 베껴서 전한 것이기 때문에 지금 남붕南鵬 상좌의 요청에 따라 여기에 부록하였다.
◆ 상고해 보건대, 『선묘보감』에는 단지 갑진년(1604, 선조 37)에 일본 관백 원가강源家康이 사신을 보내어 예전처럼 통신하자고 구걸하므로 조정이 특별히 승려 유정을 보내어 적정을 탐지해 오게 하였는데, 이듬해인 을사년에 돌아올 적에 포로가 된 남녀 3천여 명을 쇄환하였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 승려가 왕명을 받들고 다른 나라에 사신으로 간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그때 갖춰 보낸 물품과 예우禮遇한 절목節目을 필시 묘당廟堂에서 계품啓禀하여 시행했을 것인데, 하나의 기록도 세상에 전하는 것이 없다.그리고 송운의 문필로 볼 때, 왕명을 받들
그리고 송운의 문필로 볼 때, 왕명을 받들고 바다를 건너가 제주諸州의 산천과 인물을 살펴보고, 만왕蠻王(왜왕)과 이해를 변론하여 허다한 생령生靈을 수화水火 속에서 구제하는 그 책임이 매우 중하고, 그 유람한 범위가 지극히 광대한 만큼 필시 그가 지은 일기日記109)가 있어서 찬연히 볼 만할 것인데, 지금 한 구절도 세상에 남아 있는 것이 없다.
또 그 법등法燈을 전한 의발이 가장 많아서 백여 년 이래로 사명四溟의 가풍을 입으로 외우면서도 당시의 일기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면 모른다고 하고, 함께 배를 탄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모른다고 하면서 번번이 위음왕威音王의 나반那畔110)의 일이나, 달마가 중국에 건너오기 이전의 막연한 일쯤으로 치부하곤 한다. 그래서 두세 가지 부회傅會하는 말이 비록 산림이나 민간에서 나와도 대부분 와전되고 잘못되어 신빙할 수가 없으니, 탄식만 나올 뿐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내가 이를 통해서 선가禪家의 서계書契(문자)라는 것은, 본래 눈밭의 기러기 발자국111)과 같이

008_0103_b_01L乞退還入伽倻山云

008_0103_b_02L
就惠不知何如僧而湖南諸刹所
008_0103_b_03L聞松雲蹟者皆以此錄謄傳故
008_0103_b_04L依鵬上座所請附錄于此
◆按宣
008_0103_b_05L廟寶鑑只載甲辰年日本關白源
008_0103_b_06L家康遣使乞通信如故朝廷特遣
008_0103_b_07L僧惟政徃探賊情至明年乙巳乃
008_0103_b_08L而刷還被虜男女三千餘口云
008_0103_b_09L我國僧人之奉王命使他邦者
008_0103_b_10L無前例則其時資送之物與禮待
008_0103_b_11L諸節必自廟堂啓禀施行而無一
008_0103_b_12L錄傳於世者且以松雲文*茟
008_0103_b_13L命越海覽諸州山川人物與蠻王
008_0103_b_14L辯論利害能濟許多生靈於水火
008_0103_b_15L之中其責甚重其游極大必有所
008_0103_b_16L撰日記粲然可觀而今無一句語
008_0103_b_17L在世者又其傳燈衣鉢最爲衆多
008_0103_b_18L百餘年來口誦四溟家風而問當
008_0103_b_19L時日記何在則曰不知問所與同
008_0103_b_20L舟者爲誰則曰不知便作威音王
008_0103_b_21L那畔事達磨未來中土時事所以
008_0103_b_22L二三傳會之辭雖出於山林閭巷
008_0103_b_23L而率多訛謬不可憑信咄咄奈何
008_0103_b_24L余於是乃悟禪家書契本如雪中

008_0103_c_01L모두 한바탕 허깨비마냥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으로 취급한 것임을 알았다. 그리고 “복덕을 받지 않는 곳에서는 실제로 멸도滅度를 얻는 중생이 없다.”112)라고 한 것은, 바로 석가가 49년 동안 이 세상에 머물면서 설한 8만의 경문 안에 나오는데, 이런 토각장兔角杖과 귀모불龜毛拂113)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 이 기록은 길가에서 얻어 들은 이야기에서 나온 것이다. 독사의 구덩이 위에 유리를 덮어 깔았다거나 철마鐵馬의 등짝 주위로 숯불을 피웠다는 말 등은 그가 당한 곡절을 전혀 알 수 없을 뿐더러 내용이 황당하기만 하다. 그러나 왜인의 심보는 사람을 시험하는 짓이 본래 요망하고 환술적인 면이 많으니, 이런 일이 있었다고 말해야 송운의 지혜가 무애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에 불과할 뿐이다.
또 『순오지旬五志』에 기록된 바 송운을 협박하여 항복하게 했다는 이야기도 실제로 있었던 일은 아닌 듯하다. 이때에 가강家康의 본의本意는 화친에 있었지 협박하는 데에 있지 않았다. 이미 그가 수길秀吉을 소탕하고 나서 수길이 한 일과는 완전히 반대로 하였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이웃나라에 화친을 청하면서 사신으로 온 자를 모욕할 수가 있겠는가. 보는 자들은 양쪽 내용 모두 참작하고 시비를 따지지 말 것이다.
남원의 고 진사 조경남의 집에 소장된 『경란록』 중에 기록된 송운의 사적
갑진년(1604, 선조 37) 봄에 왜인 귤지정橘智正이 와서 통신通信하기를 간청하자, 승총섭僧摠攝 유정에게 명하여 일본에 가서 적정을 상세히 탐지하게 하였다. 유정이 바다를 건너가서 제국諸國을 유람하며 산천을 완상玩賞한다는 것으로 명분을 삼으니, 왜인들이 더욱 기특하게 여겨 가마를 보내 초청하며 거의 쉬는 날이 없었다. 그러다가 대판大坂114)에 이르러서 맨 먼저 서로 화친하여 나라를 편안히 할 일을 말하고, 다음으로 우리나라 사람을 쇄환할 일을 언급하니, 가강이 말하였다.
“임진년의 전역戰役은 나와는 실로 관계가 없지만, 두 나라가 아무 일 없이 서로 편안히 태평하게 지내면 또한 좋지 않겠는가?”
그리고는 즉시 포로가 된 인민을 내주어 함께 돌아가게 하였다.

008_0103_c_01L鴻跡都做了一塲幻滅至其不受
008_0103_c_02L福德處寶無衆生得滅度者即䆁
008_0103_c_03L迦住世四十九年說得八萬經文
008_0103_c_04L免角杖龜毛佛在甚麽處

008_0103_c_05L此錄出於塗聽之譚其曰毒蛇坑
008_0103_c_06L布琉璃及鐵馬背圍炭火者全未
008_0103_c_07L詳所遭曲折而語涉誕妄然倭情
008_0103_c_08L試人之術故多妖幻不過曰如是
008_0103_c_09L然後可驗松雲慧智之無碍而已
008_0103_c_10L旬五志所記䝱降之說似非實際
008_0103_c_11L是時家康本意在和而不在䝱
008_0103_c_12L已掃蕩秀吉而一反其所爲則焉
008_0103_c_13L有乞和於鄰國而辱其來使者乎
008_0103_c_14L覽者當兩存而不議

008_0103_c_15L

008_0103_c_16L南原故進士趙慶男家所藏經亂錄
008_0103_c_17L中載松雲事蹟

008_0103_c_18L
甲辰春倭人橘智正來懇乞通信
008_0103_c_19L僧捴攝惟政徃日本詳探賊情政渡海
008_0103_c_20L托以盤遊諸國玩賞山川倭人益奇之
008_0103_c_21L肩輿邀請殆無虗日及至大坂首言
008_0103_c_22L交和寧國之事次及刷還我人之言
008_0103_c_23L康以爲壬辰之役吾實未知兩國無事
008_0103_c_24L相安太平不亦可乎即令刷出被虜人

008_0104_a_01L다만 요시라要時羅(일본의 첩자)의 일을 가지고 우리에게 트집을 잡았는데, 유정이 말하였다.
“우리나라가 일본에 대해서 비록 만세토록 잊지 못할 원수라고 하더라도, 교린의 약속에 대해서는 본디 너희들을 저버린 적이 없다. 왜인 한 사람이 있고 없는 것이 승패에 무슨 관계가 있기에 군대가 물러간 뒤에 왕래하는 사신을 죽이려고 꾀했겠는가. 모년 모월에 요추要酋(요시라)가 중국에서 돌아오자 우리나라가 예전처럼 접대하여 동년 모월 모일에 부산釜山으로 그를 호송하였다. 그것이 지금으로부터 벌써 몇 년 전의 일인데, 일본이 이것으로 트집을 잡으려 하니, 이는 필시 사실을 숨기고서 흔단釁端을 일으키려 함이요, 그렇지 않다면 푸른 바다에 조각배가 표류하여 익사溺死하는 환란이 있었을 것이다.”
왜추倭酋 등이 그럴 수도 있겠다고 여기고는 더 말하지 않았으며, 유정에게 다시 오라고 요청하였다.
을사년 4월에 유정이 장차 돌아오려 할 적에 먼저 두루 정탐한 왜국의 실정을 조정에 갖추 보고하였다. 그리고 이와 함께 귀국하는 배가 정박하는 날에 주사舟師의 제장諸將으로 하여금 부산에 집결하여 군용軍容을 장엄하게 함으로써 함께 타고 온 왜인들이 이를 바라보고 삼엄한 느낌을 갖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청하였는데, 이날 통제사統制使 이경준李慶濬이 주사舟師를 이끌고 부산으로 오다가 역풍을 만나 제때에 대지 못해서 결국은 사기師期(군사작전의 시기)를 그르치고 말았다.
유정이 쇄환한 3천여 명115)을 이경준에게 부탁하여 온편穩便한 방법으로 나누어 보내게 하자, 경준이 여러 선장船將에게 분부하여 그들의 소원대로 들어주게 하였는데, 선장 등이 남녀를 이익의 대상으로 여기고는 뒤질세라 앞을 다투며 붙잡아 묶어 놓고 억류하는 것이 포로 취급하는 것보다도 심하였다. 그리고 혹 가계家系를 물어서 대답하지 못하면어릴 때 잡혀간 자는 조선 사람이라는 것만 알 뿐 가계와 부모의 이름을 알지 못하였다. 모두 자기의 노비라고 칭했으며, 예쁜 여자가 있으면 그 남편을 묶어 바다에 던지고는 멋대로 자기 소유로 만들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작태가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원망하는 소리가 널리 퍼지자, 하늘 같은 임금님이 아래 백성의 소리를 듣고는 즉시 이경준을 파직하고, 이운룡李雲龍식성군息城君을 대신 통제사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각 도道 수사水使에게 방자하게 행동한 변장邊將을 적발하도록 하였으나, 수사 등이 형식적인 공문公文으로 치부하고는 끝내 고발하지 않았다고 한다.

008_0104_a_01L使與俱還但以要時羅事歸曲
008_0104_a_02L政曰我國與日本雖是萬世不忘之讐
008_0104_a_03L而交鄰之約素不負汝一倭有無
008_0104_a_04L關勝敗而兵退之後謀殺徃來之使乎
008_0104_a_05L某年某月要酋回自中原我國如前接
008_0104_a_06L同年某月日護送于釜山今已累
008_0104_a_07L日本以此歸咎是必諱隱要開釁
008_0104_a_08L不然扁舟滄海應有漂溺之患耳
008_0104_a_09L倭酋等猶以爲然更不言及要政再來
008_0104_a_10L乙巳四月惟政將還先以歷探倭情
008_0104_a_11L具報朝廷兼請回泊之日宜令舟師諸
008_0104_a_12L聚屯釜山以壯軍容俾嚴護行
008_0104_a_13L倭之瞻視云云是日統制使李慶濬
008_0104_a_14L舟師赴釜山風逆未及竟誤師期
008_0104_a_15L政以刷還人三千餘口付李慶濬使之
008_0104_a_16L從便分送慶濬分付諸船將聽其所願
008_0104_a_17L船將等利其男女爭先恐後縶之維
008_0104_a_18L甚於搶擄或問所係而不能答
008_0104_a_19L少時被虜者徒知朝鮮
而不知所係及父母名字
並稱己奴美女則
008_0104_a_20L縳其夫投海而任作己物如此者非一
008_0104_a_21L怨聲傳播天高聽卑即罷李慶濬
008_0104_a_22L李雲龍息城
代之因令各道水使摘發
008_0104_a_23L邊將之恣行者水使等視以文具竟不
008_0104_a_24L發告云

008_0104_b_01L
조경남趙慶男은 진사進士 출신으로 임진란 때에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는데, 그가 지은 잡록雜錄을 보면 실제로 있었던 일을 많이 기재하고 있다.
예컨대 “임진년(1592, 선조 25) 10월에 평안도 향산香山의 노승 휴정이 치도緇徒(승려) 천여 명을 모집하고 유정을 부장副將으로 삼아 군량과 병기를 마련해서 적을 토벌하였다. 운운.” 한 것이나, “11월에 명하여 휴정을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품계를 올리고 팔도승병도총섭八道僧兵都摠攝을 삼았으며, 유정은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올리고 부총섭副摠攝으로 삼았는데,116) 적을 토벌한 공이 많았기 때문에 이런 명이 있었다. 운운.” 한 것이나, “계사년(1593, 선조 26) 7월 8일에 의병장 유정이 영남嶺南에서 군대를 이끌고 남원부로 들어갔다. 운운.” 한 것이나, “갑오년(1594, 선조 27) 4월에 전라 감사全羅監司 권율權慄이 승총섭僧摠攝 유정으로 하여금 울산 서생포에서 청정을 만나 화호和好를 개유開諭하게 하니, 청정이 ‘조선의 3도道를 떼어서 일본에 소속시킨다면 군대를 파하고 본국으로 돌아가겠다’라고 했다. 운운.” 한 것이나, “무술년(1598, 선조 31) 8월 29일에 승총섭 유정이 군사 3백여 명을 거느리고 서울에서 남원에 도착하여 주포周浦에 진을 쳤다. 운운.” 한 것 등은, 모두 실적實蹟에 근거해서 그 대략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따라서 갑진년(1604, 선조 37)과 을사년(1605, 선조 38)에 일본을 왕래한 일도 이 기록을 가지고 그 대략을 파악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 을미년(1595, 선조 28)에 군대를 파한 뒤에 비변사가 진계陳啓하기를, “유정으로 하여금 휘하 승병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에 들어가 거처하게 하여 급할 때의 쓰임에 대비하도록 하소서.”라고 하였다. 그런데 지금 이 기록에 의하면, 무술년(1598, 선조 31) 8월에 서울에서 남원에 도착했다고 하였으니, 이는 필시 조정에서 왜구가 다시 침범한다는 보고를 들었기 때문에 다시 유정을 보내 남원에 진을 치게 한 것일 터인데, 당시의 전공戰功이 조금도 기록에 실려 있지 않으니 한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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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慶男以進士壬辰亂中爲義兵
008_0104_b_02L所撰雜錄多載實事其曰壬
008_0104_b_03L辰十月平安道香山老僧休靜
008_0104_b_04L聚緇徒千餘名以惟政爲副將
008_0104_b_05L粮械討賊云云十一月命陞休靜
008_0104_b_06L嘉善爲八道僧兵都捴攝惟政折
008_0104_b_07L衝爲副捴攝討賊功多有是命云
008_0104_b_08L癸巳七月初八日義兵將惟政
008_0104_b_09L自嶺南領軍入南原府云云甲午
008_0104_b_10L四月全羅監司權慄使僧捴攝惟
008_0104_b_11L見淸正于蔚山西生浦諭以和
008_0104_b_12L淸正曰割朝鮮三道以屬日
008_0104_b_13L則罷兵還國云云戊戌八月二
008_0104_b_14L十九日僧捴攝惟政領軍三百餘
008_0104_b_15L自京到南原陣于周浦云云
008_0104_b_16L皆據實蹟而記其大略甲辰乙巳
008_0104_b_17L日本徃還時事亦當以此錄見其
008_0104_b_18L梗槩耳
◆乙未罷兵後備邊司陳
008_0104_b_19L請令惟政領所帶僧兵入處
008_0104_b_20L南漢山城以待緩急之用而今此
008_0104_b_21L錄中戊戌八月自京到南原云者
008_0104_b_22L必是朝廷聞倭寇再犯之報而更
008_0104_b_23L遣惟政陣于南原然其時戰功略
008_0104_b_24L不載錄可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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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밀주지』117)에 보이는 송운의 사적
유정惟政은 장악원 정掌樂院正 임효곤任孝昆의 증손이요, 증贈 형조판서刑曺判書 수성守城의 아들이다.
어린 나이에 출가하였으며, 임진왜란 때에 창의唱義하여 군사를 모집해서 왜적을 막았다.
계사년(1593, 선조 26)과 갑오년(1594, 선조 27) 사이에 조정의 명령으로 세 차례나 적진에 들어가서 사로잡힌 두 왕자를 돌아오게 하였으며, 또 적정을 탐지하였다.
을미년(1595, 선조 28)과 병신년(1596, 선조 29) 사이에 또 조정의 명령으로 공산公山ㆍ용기龍起ㆍ금오金烏의 세 성城을 쌓았다.
정유년(1597, 선조 30) 겨울에 중국 장수인 제독提督 마귀麻貴를 따라 울산에서 싸웠고, 무술년(1598, 선조 31)에 또 총병摠兵 유정劉綎을 따라 순천에서 싸웠다.
기해년(1599, 선조 32) 봄에 사사로이 흥판興販(장사)을 하여 3천여 석石의 곡물로 군량을 도왔다.
신축년(1601, 선조 34)에 부산성釜山城을 쌓았다.
갑진년(1604, 선조 37)에 사명使命을 받들고 일본에 가서 포로로 잡혀간 수천여 명을 쇄환하였다.
병오년(1606, 선조 39)에 승도를 이끌고 종묘와 궁궐을 영선營繕하는 공사를 감독하였다.
선묘宣廟가 그 공적을 가상히 여겨 특별히 가의嘉義의 품계를 가하고, 원종공신原從功臣 1등에 녹훈錄勳하였으며, 3대代를 추증追贈하게 하였다.
사명四溟과 종봉鍾峯과 송운松雲은 바로 그의 호이다.
송운의 영당에 급복118)을 허락한 전지119)
무오년(1738, 영조 14) 2월 29일에 대신大臣과 비국備局(備邊司) 당상堂上을 인견引見하여 입시入侍했을 때에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아뢰었다.
“일찍이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인 승려 유정의 일을 아뢴 바가 있습니다만, 최근에 『사명집四溟集』이라는 것을 얻어 보니, 바로 유정의 문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글이 참으로 좋았을 뿐더러, 또 장악원 정掌樂院正의 후손이고 보면 바로 사대부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임진왜란 때에 창의倡義하여 왜적을 쳐서 목을 베고 노획한 것이 매우 많으니 그것만으로도 공렬功烈이 탁월하다고 할 것인데, 여기에 또 다시 바람과 파도를 무릅쓰고 일본에 들어가서 끝내 화친을 이루고 사재私財를 털어 포로 된 사람 수천 명을 쇄환하기까지 하였습니다.

008_0104_c_01L又事蹟出密州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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惟政掌樂正任孝昆之曾孫贈刑曺判
008_0104_c_03L書守城之子妙年出家壬辰之亂
008_0104_c_04L義募兵以捍賊癸甲之間以朝命
008_0104_c_05L入賊陣還兩王子又探賊情乙未丙
008_0104_c_06L申之間又以朝命築公山龍起金烏三
008_0104_c_07L丁酉冬隨天將提督麻貴戰于蔚山
008_0104_c_08L戊戌又隨劉捴兵綎戰于順天己亥春
008_0104_c_09L私自興販以糓三千餘石助兵食辛丑
008_0104_c_10L築釜山城甲辰奉使日本刷還被擄數
008_0104_c_11L千餘口丙午領僧徒蕫宗廟宮闕營繕
008_0104_c_12L之役宣廟嘉其功績特加嘉義錄勳
008_0104_c_13L原從一等追贈三代四溟鍾峯松雲
008_0104_c_14L乃其號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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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104_c_16L松雲影堂結復承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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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午二月二十九日大臣備局堂上引
008_0104_c_18L見入侍時右議政宋寅明所啓曾以壬
008_0104_c_19L辰義兵將僧惟政事有所仰達矣近間
008_0104_c_20L得見所謂四溟集則乃惟政之文集也
008_0104_c_21L其文信好且是掌樂正之孫則乃是士
008_0104_c_22L未矣壬辰之亂其倡義擊倭斬獲甚
008_0104_c_23L功烈已卓然又復冒風濤入日本
008_0104_c_24L卒成和好出私財刷還被虜人累千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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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나라를 위해 수고한 것이 이와 같기 때문에 선묘조宣廟朝에 궁궐로 불러들여 특별히 가자加資하는 은사를 내리되, 통정대부通政大夫에서 가선대부嘉善大夫까지 연속해서 초탁超擢을 하였고, 포증褒贈하는 은혜가 3대代에까지 미치게 하였던 것이었습니다.
듣건대 그의 영당影堂이 영남에 있는데, 선조先朝(경종) 때에 또 특별히 춘추의 제수祭需를 관청에서 지급하게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곳이 높은 봉우리의 맨 꼭대기에 있는 관계로 승인僧人이 거할 수가 없기 때문에 요즈음에는 매우 퇴락하여 향화香火가 끊길 지경이고 위전位田도 모두 잃어버려서 수호할 길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영남의 수백 명 승인이 연명聯名으로 비국에 와서 호소하며, 다른 사우祠宇의 예에 의거하여 복호復戶해 줄 것을 청하였습니다.
유정의 공적은 다른 조신朝臣에 비해 훨씬 가상하게 여길 만한데, 향사享祀하는 곳이 이처럼 퇴폐하였다면, 조가朝家에서 각별히 돌보며 도와주는 것이 당연하고, 이와 함께 풍성風聲을 수립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도 있으니, 5결結을 한도로 하여 특별히 급복給復을 해서 수호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상이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008_0105_a_01L其爲國效勞如此故宣廟朝召入
008_0105_a_02L內闥特賜加資自通政至嘉善連加
008_0105_a_03L超擢褒贈至及三代聞其影堂在於
008_0105_a_04L嶺南而先朝又特令官給春秋祭需
008_0105_a_05L其處在高峰絶頂故僧人不能居接
008_0105_a_06L甚頹圯將廢香火位田亦皆見失
008_0105_a_07L護無路云嶺南累有僧人聯名來訴於
008_0105_a_08L備局依他祠宇例請得復戶惟政之
008_0105_a_09L比他朝臣尤爲可嘉而亭祀之地
008_0105_a_10L如是頹廢則朝家宜有各別顧助之事
008_0105_a_11L而亦足爲樹風聲之一道限五結特爲
008_0105_a_12L給復俾得守護何如上曰依爲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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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8)소서비小西飛 : 일명 요시라要時羅 또는 내등여안內藤如安이라고도 한다. 조선말을 잘하는 소서행장의 부하로 이중간첩이었으며, 심유경과 중국으로 들어갔다가 행방불명되었다.
  2. 19)이겸수李謙受 : 울산 출신 의병장으로서 임진란에 공훈을 세웠다. 세종 연간에 수십 차례 대마도와 유구琉球에 파견되었던 외교관 이예李藝의 후예이다. 여러 차례 사명당을 안내하여 가등청정과 회담하는 일을 도왔다.
  3. 20)서생포西生浦의 옛~밖에 이르니 : 1592년 가등청정 등이 침입한 다음 함경도에서 후퇴한 뒤 울주군 서생포에 왜성을 쌓고 장기전에 대비하였다.
  4. 21)일진日眞 : 1558∼1626. 일련종日蓮宗 승려이다. 청정의 법화신앙을 위한 정신적 지주로서 임진년 침략 시에 대동한 몇몇 종군승려들 가운데 중심인물이다. 전후 귀국해서는 구주九州 웅본熊本의 영주로서 웅본성을 쌓고 그의 부친을 위해 본묘사本妙寺를 세웠다.
  5. 22)옛날에 한漢나라~오르곤 한다 : 한 원제漢元帝 때에 흉노匈奴의 호한야呼韓邪 선우單于에게 왕소군王昭君이라는 후궁을 보낸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원제는 후궁이 워낙 많아서 화공畫工에게 궁녀의 그림을 그리게 하고는 그 그림에 의거하여 궁녀를 골라 총애하곤 하였기 때문에 궁녀들이 화공에게 다투어 뇌물을 주곤 하였는데, 후궁 중 최고의 미인이었던 왕소군만은 그렇게 하지 않아서 화공이 추하게 그린 까닭에 황제의 은총을 입지 못했을 뿐더러, 흉노가 선우의 연지閼氏가 될 미인을 요구했을 때에도 왕소군이 뽑혀서 가게 되었다고 한다. 『漢書』 「匈奴傳」 하, 『後漢書』 「南匈奴傳」, 『西京雜記』 권2.
  6. 23)사해四海의 안은~곳이 없으니 : 천하가 중국 황제의 통치권 아래에 들어 있다는 말이다. 참고로 『詩經』 「小雅」 〈北山〉에 “하늘 아래는 어디이건 왕의 땅 아닌 곳이 없으며, 땅의 모든 물가에 이르기까지 왕의 신하 아님이 없다.(普天之下。 莫非王土。 率土之濱。 莫非王臣。)”라는 말이 나온다.
  7. 24)황 호군黃護軍 : 순화군順和君의 장인인 황혁黃赫을 말한다. 순화군은 선조宣祖의 여섯째 아들이고, 황혁은 장계부원군長溪府院君 황정욱黃廷彧의 아들이다.
  8. 25)의리에 입각해서~꾀하지 말라 : 『近思錄』 「爲學類」에 나오는 말인데, 송宋나라 정명도程明道가 한漢나라 동중서董仲舒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근사록』에는 ‘誼’가 ‘義’로 되어 있다.
  9. 26)나의 소유가~안 된다 : 소식蘇軾의 「前赤壁賦」에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물건은 각각 주인이 있으니, 나의 소유가 아니면 털끝만큼이라도 취하면 안 된다.(天地之間。 物各有主。 苟非吾之所有。 雖一毫而莫取。)”라는 말이 나온다.
  10. 27)이런 일이~없이 많았습니다 : 종군승 일진도 그들 가운데 하나로서, 당시에 일진에게 써 준 법어 두 장이 현재 웅본 본묘사에 소장되어 있다. 그러나 그날 청정에게 써 주었다는 세 장의 휘필들은 청정이 따로 가져갔는지 이 절에는 없다.
  11. 28)봉왜사封倭使 : 명나라 조정에서 일본 책봉 정사日本冊封正使로 임명한 임회훈위도독첨사臨淮勳衛都督僉事 이종성李宗誠을 말한다. 개국공신 이문충李文忠의 후손으로 귀하게만 커서 어리석고 일에 경험이 없었는데, 복건福建에서 포로가 되어 일본에 귀화한 소학명蕭鶴鳴과 왕삼외王三畏가 그를 왜영으로 찾아와서 겁주는 말을 하자, 밤중에 사복私服으로 변장을 하고 도망쳐 달아났다. 이에 부사副使 양방형楊邦亨이 정사로 대신 임명되어 임무를 수행하였다.
  12. 29)〈칙륵가敕勒歌〉 : 악부樂府 잡가雜歌의 편명인데, 여기에서는 제법 잘 지은 오랑캐의 노래라는 뜻으로 쓰였다. 칙륵은 흉노의 후예로 중국 북방 민족의 하나이다. 철륵鐵勒이라고도 한다. 북제北齊의 고환高歡이 북주北周의 옥벽성玉壁城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사졸士卒의 거의 절반이 죽게 되자, 그의 장수인 곡률금斛律金으로 하여금 선비어鮮卑語로 된 〈칙륵가〉를 짓게 하여 사기士氣를 고무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北史』 「齊紀」 상, 『樂府詩集』 「雜歌謠辭」 〈敕勒歌〉.
  13. 30)대국사大國寺 : 이 절은 다른 문헌에는 보이지 않는다. 단지 송운 대사가 유정 도독을 방문할 때 남원성에 있던 도독부의 서쪽에 있던 이 절에 머물렀다는 사실을 통해 그 존재를 알 수 있을 뿐이다.
  14. 31)독부와 어떻게~수가 있었겠습니까 : 사명당이 유정劉綎과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는 말이다. 반면半面의 연분은 과거에 잠깐 동안이라도 만난 일이 있다는 뜻으로 쓰는 말이다. 후한後漢의 응봉應奉이 나이 20세에 원하袁賀를 찾아갔을 적에, 수레를 만드는 장인匠人이 문을 열고 얼굴 반쪽만 내 보이면서 원하가 외출 중이라고 알려 주었으므로 곧장 발길을 돌렸는데, 수십 년이 지난 뒤에 응봉이 거리에서 그 장인을 알아보고는 반갑게 불렀다는 반면지식半面之識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後漢書』 「應奉傳」.
  15. 32)요 대사姚大師 : 요광효姚廣孝를 말한다. 원래의 이름은 천희天禧, 혹은 도연道衍이라고 하며, 자字는 사도斯道이다. 14세 때에 불문佛門에 들어갔다가 명나라 태조太祖의 넷째 아들인 연왕燕王, 즉 성조聖祖를 도와 태조의 황태손皇太孫으로 제위에 오른 혜제惠帝를 축출하고 정난靖難 일등공신에 책봉되었으며, 이때 광효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太祖實錄』과 『永樂大典』을 편찬했으며, 그의 문집으로 『逃虛集』이 세상에 전한다. 『明史』 권145.
  16. 33)그 사람은~소인일 뿐이오 : 명 병부상서 석성石星은 평양성에 웅거한 소서행장을 상대로 적세를 정탐할 만한 인물을 구하였다. 이에 절강浙江 가흥嘉興 출신으로 일본어와 일본 사정을 다소 알고, 또한 담력이 있던 시중의 무뢰배 심유경이 응모하였다. 그래서 그를 유격장군遊擊將軍으로 삼아 강화에 임하도록 파견하였으므로 소인이라 한 것이다.
  17. 34)장희춘蔣希春 : 1556~1618. 울산 출신으로서 왜란이 발발하자 경주 등지에서 의병활동으로 전공을 세워 무관에 임명되었으며, 일본어를 할 줄 알아 사명당을 따라 서생포 왜성에 드나들었다.
  18. 35)원 노야袁老爺 : 원황(1533~1606)을 말한다. 명나라 신종神宗 만력萬曆 14년(1586, 선조 19)의 진사進士 출신으로, 임진왜란 때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의 참모장인 군전찬획軍前贊劃으로 조선에 건너왔다가, 이여송李如松의 무함誣陷으로 억울하게 탄핵을 받았으나, 그의 사후에 신원伸寃을 받고 추증追贈되었다.
  19. 36)임해군臨海君이 썼다는 표시가 있었습니다 : 현재 웅본 본묘사에 소장되어 있는 임해군의 시 묵필이 3점 있으나, 이 시는 보이지 않는다.
  20. 37)호군護軍 : 황혁黃赫을 말한다.
  21. 38)조선은 몇~지냈을 뿐이다 : 조선 태조 3년(1394)에서 세종 25년(1439)까지 약 15회에 걸쳐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그 명칭은 회례사回禮使ㆍ국사國使ㆍ보빙사報聘使ㆍ통신사通信使 등으로 불렸다.
  22. 39)군대가 교만하면 멸망을 당한다 : 『漢書』 「魏相傳」에 “나라가 크다고 으스대고 인구가 많다고 뽐내면서 상대에게 위세를 보이려 하는 것을 교만한 군대라고 하는데, 군대가 교만하면 멸망을 당하게 되어 있다.(恃國家之大。 矜民人之衆。 欲見威於敵者。 謂之驕兵。 兵驕有滅。)”라는 말이 나온다.
  23. 40)이는 하늘이~할 것이다 : 교만방자하게 굴다가 결국에는 천벌을 받을 자라는 뜻이다. 참고로 『春秋左氏傳』 「昭公」 4년에 “초楚나라 왕이 지금 한창 교만을 부리고 있는데, 하늘이 어쩌면 그가 자기 마음대로 하여 그의 악이 쌓이게 한 뒤에 벌을 내릴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楚王方侈。 天或者欲逞其心。 以厚其毒而降之罰。 未可知也。)”라는 말이 나온다.
  24. 41)유총劉聰과 석륵石勒과 모용수慕容垂 :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시대의 전조前趙와 후조後趙와 후연後燕의 황제가 된 인물들이다.
  25. 42)임금님의 힘(帝力)이~무슨 상관인가 : 요堯임금이 다스리던 시대에 나이 80이 된 노인이 길가에서 땅을 치며 노래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이를 보고서 “위대하도다, 임금님의 덕이여.(大哉。 帝之德也。)”라고 찬탄을 하자, 그 노인이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쉬면서 내 우물 파서 물을 마시고 내 밭을 갈아서 밥을 먹는데, 임금님의 힘이 나에게 도대체 무슨 상관인가?(日出而作。 日入而息。 鑿井而飮。 耕田而食。 帝力於我何有哉。)”라고 대답했다는 고사가 진晉나라 황보밀皇甫謐의 『帝王世紀』에 전한다. 이 노래를 격양가擊壤歌라고 하여 보통 태평성대를 비유하는 말로 쓰이는데, 여기서는 중국 황제의 위대함을 모르는 필부의 넋두리라는 뜻으로 전용轉用하였다.
  26. 43)괴통蒯通으로 하여금~없었을 것이다 : 어떤 뛰어난 변론가가 나오더라도 가등청정이 풍신수길을 배반하게 만들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한신韓信이 제왕齊王이 되었을 적에 괴통이 찾아가서 유세하며 삼분천하三分天下의 계책을 제시하였는데, 이때 한신이 괴통에게 자기의 관상을 봐 달라고 요청하자, “당신의 얼굴을 보면 제후에 봉해지는 정도에 불과하고 또 위험하여 안전하지 않지만, 당신의 등의 골격을 보면 귀하게 되는 정도를 말로 형용할 수가 없다.(相君之面。 不過封侯。 又危不安。 相君之背。 貴乃不可言。)”라고 하고, 또 “대저 공이라는 것은 이루기는 어려워도 잃기는 쉬우며, 기회라는 것은 얻기는 어려워도 잃기는 쉽다. 이와 같이 좋은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니, 바라건대 족하는 자세히 살피시라.(夫功者難成而易敗。 時者難得而易失也。 時乎時乎不再來。 願足下詳察之。)”라고 하면서, 유방劉邦과의 관계를 청산하고(背) 스스로 제위帝位에 오를 것을 권유하였으나, 한신이 유방의 여러 가지 은혜를 떠올리고는 “내가 어떻게 이익을 좇아 의리를 배반할 수가 있겠는가?(吾豈可以鄕利倍義乎)”라면서 차마 한 고조를 배반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것을 보고는, 아예 발을 끊고서 양광佯狂하며 무당 행세를 했던 고사가 전한다. 『史記』 「淮陰侯列傳」.
  27. 44)가리왕歌利王 : 가리는 범어 Kaliṅgarāja 혹은 Kalirāja의 음역으로, 불타의 본생담 중에 나오는 왕의 이름이다. 또 가리왕哥利王ㆍ갈리왕羯利王ㆍ가리왕迦梨王ㆍ가릉가왕迦陵伽王ㆍ갈릉가왕羯陵伽王ㆍ가람부왕迦藍浮王이라고도 하며, 투쟁왕鬪諍王ㆍ악생왕惡生王ㆍ악세왕惡世王ㆍ악세무도왕惡世無道王 등으로 의역된다. 불타가 과거세에 인욕 선인忍辱仙人으로 수행할 적에, 이 왕이 극악무도하였는데, 어느 날 그의 궁녀 한 사람이 인욕 선인에게 가서 설법을 듣자, 왕이 악심惡心을 내어 선인의 지체肢體를 잘랐다는 설화가 전한다. 『賢愚經』 권2, 『大智度論』 권14.
  28. 45)회소懷素 : 당나라 승려로, 초서草書에 능했다. 그가 술이 거나하여 흥이 나면 절간의 벽과 마을의 담장에 글씨를 휘갈겨 썼다고 하는데, 이를 읊은 이백李白의 〈草書歌行〉에 “일어나서 벽을 향해 손을 멈추지 않나니, 한 줄에 몇 글자 크기가 말(斗)만 하다네.(起來向壁不停手。 一行數字大如斗。)”라는 표현이 나온다.
  29. 46)조부가 영남~백성이 되었습니다 : 교산의 「유명조선국 자통광제존자 사명당 송운 대사 석장 비명 병서」와 해안의 「유명조선국 자통광제존자 사명당 송운 대사 행적」에 “증조 효곤이 일찍이 대구 수령을 지낸 인연으로 밀양으로 이사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그러므로 증조부가 대구에 살았던 인연으로 조부 때 밀양으로 이사한 것이다. 현재 대사의 고향 고라리 뒷산에는 대사의 조부모와 부모의 묘소가 마을 사람들의 보살핌으로 지금까지 보전되어 오고 있다.
  30. 47)무부無父 무군無君의 한 죄인 : 임금과 어버이를 부정하고 출가한 승려라는 뜻으로 쓴 겸칭이다. 원래 무부와 무군은 겸애설兼愛說을 주장한 묵적墨翟과 위아설爲我說을 주장한 양주楊朱의 학설을 비판한 말인데, 『맹자』 「등문공」 하에 이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참고로 이 구절은 대사의 출가 시기와도 관련된다. 대사의 모친과 부친이 그가 15세, 16세 되는 해에 연달아 세상을 떠났다면, 대사는 부친이 세상을 떠난 1년 후 소상과 탈상을 마친 다음 17세에 출가하였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 생각된다.
  31. 48)난리가 처음~개골산皆骨山에 있었습니다 : 대사가 당시 개골산 유점사와 표훈사 언저리에 주석하고 있을 때 왜적이 유점사로 침범한 것을 가리킨다.
  32. 49)두 번이나~문답을 하였으며 : 한 번은 왜적이 유점사로 침범한 뒤 승려 10여 명을 결박하여 협박하므로 대사가 설득하여 석방한 것이고, 또 한 번은 그 수일 후 고성高城에 있던 왜적의 본부로 찾아가 살육을 하지 말 것을 설득하여 영동嶺東의 9군을 구제한 사실이다. 이에 대해서는 「석장 비명」을 참조할 것.
  33. 50)그때 신을~임무를 맡았습니다 : 당시 도총섭이었던 서산 대사가 그 직을 사명당에게 맡기려고 생각하였으나, 부총섭으로 의엄義嚴이 있던 상황이었으므로 사명당에게 의승도대장의 직에서 승군의 업무를 총괄하게 하였다. 「석장 비명」과 「송운 대사 행적」 그리고 『분충서난록』의 「밀양 표충사 송운 대사 영당 비명 병서」 등을 보면, 이 부분을 기술함에 있어 마치 사명당이 평양에 도착하자 서산 대사가 도총섭의 직을 사명당에게 내어 준 것처럼 되어 있으나, 서산이 후사를 부탁한 시기는 그 뒤였다. 즉 왜적이 3남 지방으로 후퇴한 뒤, 이를 따라 남하하던 사명과 처영의 의승군이 안성에 진을 치고 있을 때 서산이 따라가 후사를 부탁하고 입산한 것이다. 그러므로 도총섭은 사명당이 제수 받은 것이 아니며, 이때 그는 여전히 의승도대장의 직에 머물러 있었다.
  34. 51)방휼蚌鷸(조개와 황새)처럼 서로 버티기만 하면서 : 아예 타협할 줄을 모르고 서로 이기려고만 하다가는 양자 모두 결딴이 날 뿐 이익이 될 것이 전혀 없다는 말이다. 큰 조개가 입을 벌리고 있을 적에 지나가던 황새가 쪼아 먹으려다가 조개가 입을 닫자 주둥이가 물렸는데, 계속 서로 버티다가 어부에게 모두 잡혔다는 방휼지쟁蚌鷸之爭의 이야기가 『戰國策』 「燕策」 2에 나온다.
  35. 52)월왕越王이 20년~생취生聚한 계책 : 월왕은 구천勾踐을 말한다. 교훈敎訓은 백성을 가르치고 훈련시키는 일을 말하고, 생취生聚는 인구를 늘리고 재물을 비축하는 것을 말한다. 춘추시대 때 오왕吳王 부차夫差가 월왕 구천을 부초夫椒에서 크게 이기고 나서 이 기회에 항복을 받아야 한다는 오원伍員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월왕의 화의和議를 받아들이자, 오원이 “월나라가 10년 동안 생취하고 10년 동안 교훈한다면, 앞으로 20년쯤 뒤에는 오나라가 완전히 망하여 못으로 변하고 말 것이다.(越十年生聚。 十年敎訓。 二十年之外。 吳其爲沼乎。)”라고 하였는데, 과연 그 뒤에 구천이 와신상담한 끝에 오나라를 멸망시킨 고사가 전한다. 『春秋左氏傳』 「哀公」 元年.
  36. 53)유병충劉秉忠과 요광효姚廣孝 : 유병충은 원나라 초기의 학자 겸 정치가이다. 20여 세의 나이에 승려가 되어 법명을 자총子聰이라고 하였다. 원 헌종元憲宗 6년(1256)에 지금의 내몽고 지역의 길지吉地를 택해서 개평성開平城, 즉 상도上都를 건설하였다. 세조世祖 원년(1264)에 유지有旨를 받들어 환속한 뒤에 대도大都, 즉 북경성北京城 건설을 주도하였으며, 세조에게 건의하여 국호를 대원大元으로 확정하였다. 문집에 『藏春集』이 있다. 『元史』 권157. 요광효는 명나라 성조聖祖 때의 인물이다.
  37. 54)앞에 놓인~강구하려 하였으니 : 신하가 임금을 위해서 필승의 전략을 세우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한왕漢王 유방劉邦이 식사하는 도중에 장량張良이 밖에서 들어와 배알을 하자, 유방이 역생酈生의 말을 들려주며 의견을 물으니, 장량이 “신이 앞에 있는 젓가락을 가지고 대왕을 위해 계책을 세워 보겠습니다.(臣請藉前箸爲大王籌之)”라고 하고는 대책을 강구한 차저借箸의 고사가 전한다. 『史記』 「留侯世家」.
  38. 55)국궁진췌鞠躬盡瘁 : 국궁진력鞠躬盡力과 같은 말로, 마음과 몸을 다 바쳐서 나랏일에 이바지하는 것을 뜻한다. 제갈량諸葛亮의 「後出師表」 맨 마지막에 “모든 일이 이와 같아서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기가 어려우니, 저로서는 국궁진췌하여 죽은 뒤에야 그만둘 것이요, 성공과 실패나 이로움과 불리함 같은 것이야 신의 지혜로 미리 헤아릴 수 있는 바가 아니라고 하겠습니다.(凡事如是。 難可逆見。 臣鞠躬盡瘁。 死而後已。 至於成敗利鈍。 非臣之明所能逆覩也。)”라는 말이 나온다.
  39. 56)용사龍蛇의 액운 : 임진왜란을 말한다. 용과 사는 12지支의 진辰과 사巳로, 임진년壬辰年과 계사년癸巳年을 뜻한다.
  40. 57)사람이 땅으로~것과 같다 : 『五燈會元』 권1 「四祖 優波毱多尊者」에 “땅으로 인해 넘어졌다가 다시 땅을 짚고 일어나는 것과 같으니, 땅을 떠나서 일어나려고 한다면, 끝내 그렇게 될 수가 없을 것이다.(若因地倒。 還因地起。 離地求起。 終無其理。)”라는 말이 나온다.
  41. 58)당신들이 출입한다는~두려워서 그렇다 : 사명당 일행이 울산으로 가기 직전에 행장行長의 요청으로 우총병 김응서金應瑞를 만나 자기들의 회담 내용이 청정의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당부한 일이 있었다. 이 일을 두고 청정 편에서는 조선에서 이중 교섭을 하면서도 이를 감추었고, 송운 역시 거짓으로 온 것으로 의심하여 만나 주지 않은 것이다.
  42. 59)침과枕戈하고 상담嘗膽하느라 겨를이 없으며 : 기필코 왜적을 섬멸하여 원수를 갚겠다는 굳은 의지를 비유한 말이다. 침과는 창을 머리에 베고 잠든다는 말로, 동진東晉의 유곤劉琨이 “내가 창을 머리에 베고 아침을 기다리면서 항상 오랑캐 섬멸할 날만을 기다려 왔다.(吾枕戈待旦。 志梟逆虜。)”라고 말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世說新語』 「賞譽」 하. 상담嘗膽은 섶나무 위에 눕고 쓸개를 맛본다는 뜻의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준말로, 춘추시대 월越나라의 제2대 왕 구천勾踐이 오吳나라 왕 부차夫差와 싸우다가 크게 패하여 회계산會稽山에서 굴욕적인 화의를 체결하고 귀국한 뒤에 20년 동안 와신상담한 끝에 부차를 죽이고 오나라를 멸망시켜 회계의 치욕을 씻은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史記』 「越王勾踐世家」.
  43. 60)봄 숲에~트는 일 : 제비는 원래 사람의 집에 둥지를 트는데, 전쟁이 일어나면 가옥이 불타 없어지기 때문에 제비가 숲에 둥지를 틀 수밖에 없다는 뜻으로, 전란戰亂의 참화慘禍를 비유하는 말이다.
  44. 61)일진日眞의 무리가~것이라고 하겠다 : 사명당 일행은 갑오년 12월 23일 울산까지 갔지만 청정이 면회를 거부하여 혹한에 강변 왜병 막사에서 추위에 떨며 밤을 지내고 돌아가야 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일진은 글씨를 청하였으므로 송운이 붓을 들어 다음 몇 마디를 써 주었다. “묘한 것은 스님과 내가 서로 마주한 면목에 다시 다른 뜻이 없다는 것이다. 하하, 살펴 주시오.(妙者。 師與我相見之面目。 更無別意。 阿。 照之。) 갑오 12월 23일 송운 씀.” 이에 대한 인용은, 조영록, 『사명당평전』(서울: 한길사, 2009), p.296 참조.
  45. 62)남경南京의 무역상 : 당송 시대 한일 양국은 주로 남경에 가까운 양주揚州의 상인들로부터 서적을 구입하였다. 그러나 명 태조는 해금정책을 열어 일본에 대하여 ‘10년 1공貢의 감합무역勘合貿易’을 실시하였다. 이로 인해 영파寧波 일항에 시박사市舶司를 설치하여 사신이 북경을 다녀오는 동안 따라온 상인들에게만 무역을 허가하였다. 당시 일본 무역 상인들 간에는 주도권 다툼이 있었는데, 급기야는 1523년에 영파 사건을 일으켜 공무역이 사라지게 되었고, 이후부터 왜구가 창궐하게 되었다.
  46. 63)원거鶢鶋로 하여금~놀라게 하였으니 : 이겸수 등이 식견이 넓지 못해서 일본의 책들을 보고는 괜히 놀랐다고 신유한이 조롱한 말이다. 원거는 해조海鳥의 이름이다. 원거爰居라고도 한다. 이 새가 노魯나라 교외郊外에 날아와 앉자, 임금이 그 새를 정중히 모셔다가 종묘에서 환영연을 베풀면서 순舜임금의 소악韶樂을 연주하고, 소ㆍ양ㆍ돼지 고기의 요리로 대접하니, 그 새는 눈이 부시고 근심과 슬픔이 교차하여 고기 한 점도 먹지 못하고 술 한 잔도 마시지 못한 채 3일 만에 죽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장자』 「至樂」에 나온다.
  47. 64)바보에게 꿈~해준 것 : 허무맹랑한 남의 이야기를 사실인 양 받아들여 그대로 전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가룡삭伽龍朔이라는 기승奇僧에게 어떤 사람이 무슨 성(何姓)이냐고 묻자 하성何姓이라고 대답하고, 어느 나라 사람(何國人)이냐고 묻자 하국인何國人이라고 대답하였는데, 당唐나라 이옹李邕이 비문을 쓰면서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채 “대사의 성은 하씨요, 하나라 사람이다.”라고 기록하였다. 이것은 바보에게 해준 꿈 이야기를 그대로 믿은 것과 같다는 ‘치인설몽癡人說夢’의 고사로서 송宋나라 석혜홍釋惠洪이 지은 『冷齋夜話』 권9에 나온다.
  48. 65)요 대사姚大師 : 요광효姚廣孝를 말한다.
  49. 66)산국궁山鞠窮과 같은 은어隱語 : 춘추시대 소蕭나라가 초楚나라의 공격을 받고 위기에 처하자, 소나라의 선무사還無社가 초나라의 신숙전申叔展을 불러서 자기를 구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그때 신숙전과 선무사 사이에 “맥국麥麯이 있느냐?”, “없다.”, “그러면 산국궁은 있느냐?”, “없다.”, “두 가지가 다 없으면 하어복질河魚腹疾을 어떻게 할 것이냐?”, “물 없는 우물 속을 잘 들여다보고서 나를 구해 달라.(目於眢井而拯之)”, “알았다. 띠풀로 수질首絰을 만들어서 우물 위에 얹어놓아라. 우물에서 곡을 하면 그 사람이 나인 줄 알아라.”라는 대화가 오갔다. 맥국이 있느냐는 말은 보리처럼 들에 숨어 있겠느냐는 말이고, 산국궁이 있느냐는 말은 산에 숨어 있겠느냐는 말이고, 하어복질 운운은 물속에 숨으면 숨이 막혀 죽을 텐데 어떻게 할 것이냐는 말이다. 『春秋左氏傳』 「宣公」 12년.
  50. 67)나무를 깎아~일어난 것 : 의승義僧을 규합하여 전장에 뛰어든 것을 말한다. 한漢나라 가의賈誼의 「過秦論」 상에 “나무를 깎아 무기를 만들고, 대를 들어 깃발을 만드니, 천하가 구름처럼 모여들고 메아리처럼 응하면서 양식을 싸들고 그림자처럼 따랐다.(斬木爲兵。 揭竿爲旗。 天下雲會而響應。 贏糧而景從。)”라는 말이 나온다.
  51. 68)부우負羽 : 화살통을 등에 진다는 뜻으로, 종군從軍 혹은 출정出征을 비유하는 말이다.
  52. 69)이수二竪 : 병마病魔를 뜻한다. 춘추시대 진 경공晉景公의 꿈에 병마가 더벅머리 두 아이(二竪)로 변해서 고황膏肓으로 들어갔는데, 결국은 병을 고치지 못하고 죽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춘추좌씨전」 「成公」 10년.
  53. 70)무재務材와 훈농訓農 : 무재의 해석은 다양하다. 인재 양성에 힘쓰는 것, 목재를 축적하는 것, 재용財用, 즉 재정을 충실히 하는 것 등으로 풀이한다. 훈농은 농민에게 농사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춘추좌씨전』 「閔公」 2년에 “위나라 문공이 거친 베의 옷을 입고, 거친 명주의 관을 쓰며, 무재務材하고, 농민을 잘 인도하며, 물자를 원활하게 유통시키고, 공인工人들에게 혜택을 주며, 교육을 중시하고, 학문을 권장하며, 관원의 도리를 가르치고, 능력 있는 인재를 등용했다. 그래서 그의 원년에 전차가 30대이던 것이, 그의 말년에는 3백 대가 되었다.(衛文公大布之衣。 大帛之冠。 務材訓農。 通商惠工。 敬敎勸學。 授方任能。 元年。 革車三十乘。 季年。 乃三百乘。)”라는 말이 나온다.
  54. 71)공황龔黃 : 한漢나라 때 지방장관으로 선정善政을 베풀어 치민治民 제일로 꼽혔던 발해 태수渤海太守 공수龔遂와 영천 태수潁川太守 황패黃覇를 아울러 칭한 말이다.
  55. 72)소두召杜 : 전한前漢의 소신신召信臣과 후한後漢의 두시杜詩를 가리킨다. 이들은 앞뒤로 남양 태수南陽太守가 되어 다 같이 덕정德政을 베풀었으므로 민간에서 말하기를, “앞에는 소부召父가 있고, 뒤에는 두모杜母가 있다.”라고 하였다. 후세에 선정善政을 베푼 수령으로는 으레 이들을 첫손에 꼽았다. 『漢書』 권69 「召信臣傳」, 『後漢書』 권31 「杜詩傳」.
  56. 73)은감殷鑑 : 은殷나라 주왕紂王이 거울(鑑)로 삼아야 할 일은 바로 전대前代의 하夏나라 걸왕桀王이 무도한 정치를 하다가 망한 데에 있다는 뜻으로, 본보기로 삼아야 할 선례先例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57. 74)우환이 없을~미리 경계하였습니다 : 순舜임금에게 익益이 건의한 말인데, 『書經』 「大禹謨」에 나온다.
  58. 75)파목頗牧 : 전국시대 조趙나라의 명장인 염파廉頗와 이목李牧을 병칭한 말이다.
  59. 76)한백韓白 : 고대 중국의 명장인 한漢나라 한신韓信과 진秦나라 백기白起의 병칭이다.
  60. 77)고도鼓刀 : 능숙하게 칼을 놀리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백정을 가리키는데, 태공망太公望 여상呂尙이 뜻을 얻지 못했을 때에 조가朝歌에서 칼을 놀리며 백정 노릇을 하다가 주 문왕周文王을 만난 고사가 전한다. 참고로 『楚辭』 「離騷」에 “여망은 칼을 놀리다가 주 문왕을 만나 발탁되었다.(呂望之鼓刀兮。 遭周文而得擧。)”라는 말이 나온다.
  61. 78)관고管庫 : 창고 관리인을 가리킨다. 참고로 진晉나라 조문자趙文子가 “나라에 인재를 천거할 적에 창고지기 등 천직賤職에 있는 현능한 인물을 천거한 것이 70여 명에 이르렀다.(所擧於晉國。 管庫之士。 七十有餘家。)”라는 말이 『禮記』 「檀弓」 하에 나온다.
  62. 79)얼룩소의 새끼는~버림을 받고 : 출신 성분이 미천하면 천대를 받는다는 말이다. 공자孔子의 제자 중궁仲弓은 부친의 출신이 미천하고 행실이 좋지 않았는데, 공자가 중궁을 털이 붉고 뿔이 제대로 난 얼룩소의 새끼(犁牛之子騂且角)에 비유하며 격려하고 칭찬한 말이 『논어』 「雍也」에 나온다.
  63. 80)한혈汗血의 망아지 : 흘리는 땀방울이 마치 피처럼 붉은 망아지라는 뜻으로, 대원大宛의 준마를 가리키는데, 보통 똑똑한 남의 아들을 비유할 때 쓰는 말이다.
  64. 81)사방의 눈으로~밝게 하며 : 『서경』 「舜典」에 순임금이 즉위하고 나서 “사악에게 자문을 구하며 사방의 문을 활짝 열어 놓고는 사방의 눈으로 자신의 눈을 밝게 하고 사방의 귀로 자신의 귀를 통하게 하였다.(詢于四岳。 闢四門。 明四目。 達四聰。)”라는 말이 나온다.
  65. 82)나라는 백성을~삼는다고 하였는데 : 참고로 『서경』 「五子之歌」에 “백성이 바로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굳건해야 나라가 안정된다.(民惟邦本。 本固邦寧。)”라는 말이 나오고, 『史記』 「陸賈傳」에 “다스리는 자는 백성을 하늘로 삼고,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삼는다.(王者以民人爲天。 而民人以食爲天。)”라는 말이 나온다.
  66. 83)기인杞人의 근심 : 앞일에 대해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는 뜻의 겸사謙辭이다. 옛날 중국 “기杞나라에 살던 사람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면 몸 둘 곳이 없다고 걱정하며 침식을 잊었다.(杞國有人。 憂天地崩墜。 身亡所寄。 廢寢食者。)”라는 이야기에서 나온 것이다. 『列子』 「天瑞」.
  67. 84)추요蒭蕘의 말씀 : 보잘것없이 들리는 나무꾼의 말이라는 뜻으로, 자신의 발언에 대한 겸사이다. 『시경』 「大雅」 〈板〉의 “옛날 성현 말씀에 나무꾼의 말이라도 들어 보라 하셨다네.(先民有言。 詢于芻蕘。)”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68. 85)육식자가 잘~ 때문에 끼어들겠느냐? : 육식자는 고기 먹는 자들이라는 뜻으로, 보통 벼슬아치들을 낮춰 부를 때 쓰는 말이다. 『춘추좌씨전』 「莊公」 10년에 “육식자들이 잘 알아서 할 텐데, 또 뭣 때문에 끼어드는가?(肉食者謀之。 又何間焉。)”라고 마을 사람이 묻자, “고기 먹는 높은 분들은 식견이 낮아서 멀리 꾀하지 못하니까.(肉食者鄙。 未能遠謀。)”라고 대답한 조귀曹劌의 말이 나온다.
  69. 86)소순蔬笋 : 채소와 죽순이라는 뜻으로, 승려처럼 채식이나 하는 방외인方外人을 가리킨다. 소순蔬筍이라고도 한다.
  70. 87)초야에 훌륭한~했기 때문이요 : 참고로 『서경』 「大禹謨」에 “진실로 이와 같이 하면 훌륭한 말이 숨어 있지 않게 될 것이며, 초야에 유능한 이가 남아 있지 않게 되어 만국이 모두 안정될 것이다.(允若茲。 嘉言罔攸伏。 野無遺賢。 萬邦咸寧。)”라는 말이 나온다.
  71. 88)뒷날 보는~느낄 것이다 : 왜란의 참화를 입게 한 당시의 무능한 통치 계급을 원망하면서 옛날의 훌륭했던 임금을 그리워하는 심회를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다. 두자미杜紫薇는 만당晩唐의 시인인 두목杜牧의 칭호이다. 그가 상서랑尙書郞에서 군수郡守로 외방外方에 나갈 때 지은 칠언절구 중에 “맑은 시대 풍미風味가 있다만 나는야 무능해서 그냥 일없이 외로운 구름과 중이나 사랑한다네. 강해의 수령으로 떠나려 하는 지금, 낙유원 위에 올라 멀리 소릉을 바라보네.(淸時有味是無能。 閒愛孤雲靜愛僧。 欲把一麾江海去。 樂游原上望昭陵。)”라는 시가 있다. 낙유원은 한 선제漢宣帝의 침묘寢廟가 있는 곳이고, 소릉은 당 태종唐太宗의 능 이름이다. 두목이 당시의 잘못된 정치 상황을 비판하면서 옛날의 명군明君인 선제와 태종의 시대를 만나지 못해 불우한 자기의 신세를 우회적으로 비유한 것이다. 첫 구절의 맑은 시대라는 말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또 당나라 때에 신민臣民 가운데 억울한 자가 있으면 소릉에 와서 곡하며 호소하게 한 곡소릉哭昭陵의 고사도 있다. 『樊川詩集』 권2 「將赴吳興登樂遊原」.
  72. 89)단지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의~말 것이다 : 머릿속으로만 생각할 뿐, 현실적으로는 어떻게 대처하지 못하는 무용지물이 되고 말 것이라는 말이다. ‘정전백수자’는 선종의 화두 중의 하나이다. 어떤 승려가 당나라의 조주 종심趙州從諗 선사에게,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의 화두를 거론하여 묻자, ‘뜰 앞의 잣나무(庭前柏樹子)’라고 대답했던 일화에서 유래한 것이다. 『聯燈會要』 권6 「趙州從諗條」. ‘조사서래의’는 달마가 서쪽 인도에서 중국에 건너와 불법을 전한 진의眞意가 무엇인지를 묻는 선종의 화두이다.
  73. 90)무위진인無位眞人 : 임제종의 창시자 임제 의현臨濟義玄이 애용한 말로, 사람마다 본래 갖추고 있는 진여眞如 불성佛性을 뜻하는 선림禪林의 용어인데, “고깃덩어리 속에 하나의 무위진인이 있어서 항상 여러분들의 감각기관을 통해 들락거리고 있다.(赤肉團上有一無位眞人。 常從汝等諸人面門出入。)”라는 임제의 말이 『臨濟錄』에 실려 있다.
  74. 91)도용횡념到用橫拈 : 종횡무진으로 자유자재하게 교화를 펼친다는 뜻의 선림禪林의 용어이다. 횡념수방橫拈豎放이라고도 한다.
  75. 92)경희慶喜가 말한바~하는 것이니 : 경희는 범어 Ānanda의 의역인데, 음역인 아난阿難 혹은 아난다阿難陀로 더 유명하다. 불타의 십대 제자 중 하나로, 다문 제일多聞第一로 일컬어지는데, 불경은 모두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如是我聞)”라는 그의 말로 시작된다. 『大般若經』 등에서는 대부분 경희라는 이름으로 나오고, 아난이라는 이름은 드물게 보인다. 본문에 인용된 내용은 『楞嚴經』 권3의 게송에 나온다. 진찰塵刹은 미진수微塵數의 무량세계를 말한다.
  76. 93)백초百草 어디에나~들어 있다 : 당나라 방 거사龐居士 집안의 일화에서 나온 말로, 몸은 비록 멀리 떨어져 있어도 뜻은 서로 통할 것이라는 말이다. 방온龐蘊 거사가 어느 날 혼잣말로 “힘들겠네, 열 가마니 참깨를 나무에 널어 말릴 일이.(難難。 十碩油麻樹上攤。)”라고 중얼거리니, 방파龐婆, 즉 거사의 처가 그 소리를 듣자마자 “그거야 쉬운 일이지요. 백초 어디나 조사의 뜻이 들어 있는걸요.(易易。 百草頭邊祖師意。)”라고 하였고, 거사의 딸 영조靈照는 “어려울 것도 쉬울 것도 없지요. 배고프면 밥을 먹고 피곤하면 잠드는걸요.(也不難也不易。 飢來喫飯困來睡。)”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聯燈會要』 권6 「江西馬祖道一禪師法嗣 襄州龐蘊居士」. 참고로 『佛祖綱目』 권32 「馬祖道一傳法龐蘊」조에는, 백초 운운의 말이 영조의 말로 나오고, 그 말도 “也不難也不易。 百草頭上祖師意。”로 약간 다르게 되어 있다.
  77. 94)망주정望州亭에서 서로~했다 합니다 : 직접 만나 보지 않더라도 옛날의 기억을 되새기며 그리운 마음을 풀 수도 있다는 뜻으로, 당나라 설봉 의존雪峯義存 선사의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망주정은 설봉이 주석한 설봉산雪峯山에 있는 정자의 이름이고, 오석령烏石嶺은 그 산의 고개 이름인데, 『碧巖錄』 5칙 「雪峯塵大地」에 “망주정에서도 너희들을 상대하였고, 오석령에서도 너희들을 상대하였고, 승당 앞에서도 너희들을 상대하였다.(望州亭與汝相見了也。 烏石嶺與汝相見了也。 僧堂前與汝相見了也。)”라는 말이 나온다.
  78. 95)신묘년의 사행使行 :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1년 전인 선조 24년(1591)에 일본에 통신사를 보낸 것을 말한다. 이때 정사正使는 황윤길黃允吉이었고, 부사副使는 김성일金誠一이었다.
  79. 96)일본의 선교禪敎는~있을 뿐이요 : 일본에는 조동종 등의 다른 종파도 있었지만, 막부의 권력층에서 임제종을 신봉한 것을 말한다. 이로 인해 오산문학도 성행하였다.
  80. 97)빗자루를 쥐고(擁篲)~한 것 : 송운에게 제자의 예를 갖추었다는 말이다. 『史記』 「孟子荀卿列傳」에 “추자騶子가 연燕나라로 가자, 소왕昭王이 빗자루를 쥐고 앞에서 달리며(擁篲先驅) 제자의 자리에 앉아서 수업 받기를 청하였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81. 98)노련魯連 : 전국시대 제齊나라의 고사高士인 노중련魯仲連을 말한다. 그가 위魏나라 사자인 신원연辛垣衍과 담판을 하면서 만약 포악무도한 진秦나라가 황제로 천하에 군림할 경우에는 “동해 바다를 밟고서 죽을지언정 차마 그 백성으로 살아갈 수는 없다.(連有蹈東海而死耳。 吾不忍爲之民也。)”라고 말한 노련도해魯連蹈海의 고사가 전한다. 『史記』 권83 「魯仲連鄒陽列傳」.
  82. 99)육생陸生 : 육가陸賈를 말한다. 한漢나라 때 남월왕南越王 조타趙佗가 무제武帝라고 자칭하며 중국의 변방을 침입하자 여후呂后가 군대를 보내 토벌하였으나 실패하고 회군하였는데, 문제文帝 때에 다시 변설에 능한 육가를 사신으로 보내 그를 설득하여 수호修好하게 하면서 자치自治를 허락하니, 조타가 그때부터는 제호帝號를 버리고 다시 남월왕으로 처신하며 춘추로 중국 조정에 조회했던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南越列傳」.
  83. 100)기미羈縻 : 임시방편으로 회유하여 우호 관계를 유지하는 외교 정책을 말한다.
  84. 101)유정은 또~던져 버렸다 : 『芝峯類說』 권13 「文章部」 6 〈東詩〉에 나온다.
  85. 102)가강家康이 설면자雪綿子~주고 돌아왔다 : 사신에게 선물을 주는 것은 고금의 상례인 점으로 보아 대사에게 내려진 선물(雪綿子 : 허드레 솜)을 귤지정橘智正 등을 통해 양식으로 바꾸어 피로인被擄人 송환 시에 사용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석장 비명」과 「행적」에는 포로를 데리고 오면서 “스스로 곡식을 마련하여 그들을 먹이면서 돌아왔다.”라고 되어 있다. 그러므로 대사가 우리 조정에서 받은 여비와 함께 일본에서 받은 설면자 등을 귤지정 등을 통해 팔아 양곡으로 바꾸어 포로들을 ‘먹이면서 돌아왔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대해서는 조영록, 『사명당평전』(서울: 한길사, 2009), pp.541~543 참조.
  86. 103)가선대부嘉善大夫 : 대사가 일본에서 피로인들을 데리고 돌아온 뒤, 왕으로부터 받은 직함에 대해 「송운 대사 행적」에서는 가선대부嘉善大夫라 하고, 「비명」에서는 가의대부嘉義大夫라고 하는데, 여러 가지 사실로 보면 2품계 가의대부가 마땅한 것으로 보인다. 조영록, 위의 책, pp.588∼590 참조.
  87. 104)치악산에서 죽으니 : 사명당은 가야산 해인사에 머물다가 1610년 8월 26일 입적하였다. 이 점에 대해서는 신유한 역시 뒤에서 지적하고 있다.
  88. 105)왜인들이 또~금방 꺼졌다 : 이 이야기는 객관적인 근거가 없다.
  89. 106)신유한은 홍만종의 불화 이야기에 덧붙여 그 불화가 동화사 소장이었으며, 대사가 일본에서 구해 오려다가 실패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출처가 어디인지는 알 수 없다.
  90. 107)가야산 해인사에~있던 중에 : 당시 사명당은 오대산에 있었다. 이 밖에도 이 글에서 기술한 일시들은 틀린 것이 많고, 일본에서 겪은 사실들은 전부 허황된 설화류로 가득하여 믿기가 어렵다. 신유한이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
  91. 108)보장步障 : 옛날에 귀인이 출행할 때에 바람과 먼지를 가리기 위하여 길 좌우에 친 휘장을 말하는데, 진晉나라 때 부호인 석숭石崇이 너무도 사치스러워서 50리 길이의 비단 보장을 만들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世說新語』 「汰侈」.
  92. 109)일기日記 : 사명당이 처음 일본에 파견될 때는 대마도주를 개유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다만 조정에서는 덕천가강이 진실로 강화할 뜻이 있다면 본토까지 가도 좋다는 권한을 암암리에 준 뒤, 정부 관리 손문욱을 딸려 보냈다. 다시 말해 당시 이들은 비공식 사절단이었으므로 일기를 쓸 수 없었다. 다만 귀국 후 행한 구두 보고의 일부가 현재 남아 있다.(조영록, 『사명당평전』, 위의 책, pp.501~502 참조) 대신 시작詩作 활동은 자유로워 시 가운데는 사명당이 대마도나 경도에서 머문 사찰이나 만난 인물 등이 적지 않게 보이고 있다. 이는 『사명당대사집』 권6~권7에 나타난다. 참고로 당시 일본 측에는 녹원원鹿苑院(金閣寺)의 원주 유절서보有節瑞保가 기록한 것으로, 당시 사명당이 참석한 법회 등의 불교 활동을 알려 주는 일록日錄이 있다.(조영록, 위의 책, pp.504~506 참조)
  93. 110)위음왕威音王의 나반那畔 : 까마득한 옛날 장엄겁莊嚴劫 최초의 불佛인 위음왕불威音王佛이 세상에 나오기 이전의 절대 무한의 경계를 뜻하는 선림禪林의 용어로, ‘부모미생이전父母未生以前’과 비슷한 표현이다.
  94. 111)눈밭의 기러기 발자국 : 조금 지나면 아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무상한 자취라는 말인데, 소식蘇軾의 “인생길 이르는 곳 무엇과 비슷하다 할까. 녹기 시작하는 눈밭의 기러기 발자국과 같다 하리. 우연히 발톱 자국 남겨 놓았을 뿐, 날아가면 어찌 다시 동쪽 서쪽 따지리오.(人生到處知何似。 應似飛鴻蹈雪泥。 泥上偶然留指爪。 鴻飛那復計東西。)”라는 시구에서 비롯된 것이다. 『蘇東坡詩集』 권3 〈和子由澠池懷舊〉.
  95. 112)복덕을 받지~중생이 없다 : 『금강경』에 “이와 같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생을 멸도했지만 실제로 멸도를 얻은 중생은 없다.……보살이 복덕을 지을 때는 응당 탐착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복덕을 받지 않는다고 설하는 것이다.(如是滅度無量無數無邊衆生。 實無衆生得滅度者。 ……菩薩所作福德不應貪著。 是故說不受福德。)”라는 말이 나온다.
  96. 113)토각장兔角杖과 귀모불龜毛拂 : 토끼 뿔로 만든 지팡이와 거북 털로 만든 먼지떨이라는 뜻으로, 이 세상에 있을 수 없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말이다.
  97. 114)대판大坂 : 이는 “경도京都”라고 해야 한다.
  98. 115)3천여 명 : 이는 “약 2천 명”이라고 해야 한다.
  99. 116)유정은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부총섭副摠攝으로 삼았는데 : 이는 “유정은 의승도대장으로 삼고, 뒤에 절충장군으로 올렸는데”라고 해야 한다.
  100. 117)『밀주지』 : 이는 밀양문화원 국역, 『밀주지』 「지리편」 ‘상서면上西面 둔지리芚只里’(2001)에 보인다.
  101. 118)급복給復 : 조세租稅와 부역賦役을 면제해 주는 것을 말한다. 복호復戶라고도 한다.
  102. 119)이는 『조선왕조실록』 「영조」 ‘14년 2월 29일조’에 보인다.
  1. 1)撰者名。依卷末申維翰跋文而補入{編}。
  2. 2)目次編者作成補入。
  3. 1)「上」作「二」{甲}。
  4. 1)此書。已載於四溟堂大師集(本書。第八册六六頁){編}。
  5. 1)「茟」通用「筆」{編}次同。
  6. 1)「末」與「未」義通{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