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송운대사분충서난록(松雲大師奮忠紓難錄) / [附錄]

ABC_BJ_H0153_T_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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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부록 1附錄一
[시詩]
尺劍初揮雲水間      척검120)을 처음 운수 사이에 휘두르자
威名藉甚種楡關      위명이 왁자하게 유관121)까지 퍼졌다네
腥塵纔歇扶桑海      성진이 가시자마자 부상의 바다로122)
歸夢旋摧楓岳山      귀몽이 뒤이어 재촉하리 풍악산으로
勳業不煩三箭定      삼전123)을 쓸 것도 없이 정해진 훈업이요
行裝終付一笻還      끝내 지팡이 하나로 돌아올 행장이라
他年萬二千峯裏      다른 해 일만 이천 봉우리 길목에서
半日忙中半日閑      한나절 바쁜 속에 한나절 한가하리124)
백사 이 공125)白沙李公

風塵擾擾未休兵      풍진이 요란하여 병란은 멈추지 않는데
草木欣欣又向榮      초목은 싱글벙글 다시 무성해지려 하네
猛士遲回猶惜死      맹사도 주저하며 죽음을 되레 아끼건만
老禪奔走獨傷情      노선사가 분주하며 홀로 가슴 아파하네
固知忠節驚人世      인간 세상 놀라게 한 그 충절 알고말고
能使倭奴識姓名      왜놈들도 성명을 제대로 알게 하였는걸
會待功成飛錫去      마침 공 이루고 석장 날려 가는 길
故山松月十分明      고산의 송월도 십분 밝게 비춰 주리

008_0105_a_14L[附錄]

008_0105_a_15L「附錄1) [7]

008_0105_a_16L「詩十九篇」

008_0105_a_17L
尺劒初揮雲水間威名藉甚種楡關

008_0105_a_18L腥塵纔 [12] 楓岳山

008_0105_a_19L勳業不煩三箭㝎行裝終付一笻還

008_0105_a_20L他年萬二千峯裏 [13] 半日忙中半日閑

008_0105_a_21L
白沙李公

008_0105_a_22L
風塵擾擾未休兵草木欣欣又向榮

008_0105_a_23L猛士遲回猶惜死老禪奔走獨傷情

008_0105_a_24L固知忠節驚人世能使倭奴識姓名

008_0105_a_25L會徒功成飛錫去故山松月十分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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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음 이 공126)漢陰李公

爲尋支遁隱        지둔127)의 은거지 찾아보려고
扶杖遠相過        지팡이 짚고 멀리서 왔소
白杜懸燈淨        백사128)에 걸린 등불 조촐하고
靑山啼鳥多        청산에 우는 새들 많기도 해라
飛泉響樹抄        나무 끝에선 폭포 소리 메아리치고
淸磬出巖阿        산굽이에선 경쇠 소리 울려나오네
雲物皆鄕思        경물 모두 고향 생각 자아내는데
其如歸未何        돌아가지 못하니 이를 어찌할거나129)

昨過三淸洞        어제 삼청동에 들른 김에
仍逢雲老師        송운 노스님 찾아뵈었네
塵衣掛蘿幌        진의에는 나황이 걸려 있고130)
淨社依荒祠        정사131)는 황폐한 사당에 의지했네
瞑壑鍾初動        어둑한 골에 종소리 막 울리는 때
苔壇席屢移        이끼 낀 단에 자리 누차 옮겼어라
重遊莫遲緩        다시 노니는 일 늦추면 안 될지니
山月惜將虧        산 달이 아쉽게 이지러지려 하니까
월사 이 공132)月沙李公

三十年前靑眼契      삼십 년 전 청안의 옛날 벗님133)
九重天上紫泥榮      구중궁궐 자니134)의 영예 입었네
松因獨秀能全節      솔은 여전히 홀로 빼어나 절개가 온전하고
雲自閑飛却有情      구름은 절로 한가히 날며 정을 머금었네135)
休道出家無事業      출가한 중은 할 일이 없다 말하지 마오
不應殉國爲功名      나랏일 힘쓴 것도 공명 위함이 아니라오
秋風杖錫關東路      갈바람에 석장 날려 관동으로 향하나니
好向山中弄月明      산속에서 밝은 달과 노는 게 하 좋아서
아계 이 공136)鵝溪李公

盛世多名將        성세에 명장이 많다 하지만
奇功獨老師        기이한 공은 오직 우리 노사뿐
舟行魯連海        배는 노련137)의 바다를 건너가고
舌騁陸生辭        혀는 육생(陸賈)의 변설을 치달리리
變詐夷無厭        오랑캐의 속임수는 한이 없으니
覊縻事恐危        기미하는 일 위태할까 두려워라
腰間一長劒        허리에 찬 한 자루 장검이여
今日愧男兒        오늘날 남아 되기 부끄럽구나
지봉 이 공138)芝峯李公

當空白月了無生      공중의 흰 달과 같아 무생을 깨달았고139)
解虎餘威七十城      범을 다룬 넘치는 위엄 칠십 성을 감쌌네140)
濟難秪今浮海老      국난을 구하러 지금 바다 건너는 노스님
報恩從昔下山情      예전에도 은혜 갚으러 산을 내려오셨지
孤雲杳爾三千里      외로운 구름 아득해라 삼천리 먼 길에서
寸舌賢於十萬兵      한 치의 혀가 십만의 군대보다 나으리라
肉食鄙謀吾有愧      육식자141)의 못난 꾀에 우리 부끄러워하며
艱危此路送君行      어렵고 위태한 이 길 그대 전송하노라
동악 이 공142)東岳李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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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陰李公

008_0105_b_02L
爲尋支遁隱扶杖遠相過

008_0105_b_03L白杜 [14] 懸燈淨靑山啼鳥多

008_0105_b_04L飛泉響樹抄淸磬出岩阿

008_0105_b_05L雲物皆鄕思其如歸未何

008_0105_b_06L昨過三淸洞仍逢雲老師

008_0105_b_07L塵衣掛蘿幌淨社依荒祠

008_0105_b_08L [15] 壑鍾初動苔壇席屢移

008_0105_b_09L重遊莫遲緩山月惜將虧

008_0105_b_10L
月沙李公

008_0105_b_11L
三十年前靑眼契 [16] 九重天上紫泥榮

008_0105_b_12L松因獨秀能全節雲自閑飛却有情

008_0105_b_13L休道出家無事業不應殉國爲功名

008_0105_b_14L秋風杖錫關東路好向山中弄月明

008_0105_b_15L
鵝溪李公

008_0105_b_16L
盛世多名將奇功獨老師

008_0105_b_17L舟行魯連海舌騁陸生辭

008_0105_b_18L變詐夷無厭縻事恐危

008_0105_b_19L腰間一長劒今日愧男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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芝峯李公

008_0105_b_21L
當空白月了無生解虎餘威七十城

008_0105_b_22L濟難秪今浮海老報恩從昔下山情

008_0105_b_23L孤雲杳爾三千里寸舌賢於十萬兵

008_0105_b_24L肉食鄙謀吾有愧艱危此路送君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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制敵無長算        왜적을 제압할 좋은 계책이 없어서
雲林起老師        구름 숲에서 노스님 일으켜 세웠다네
行裝冲海遠        행장 꾸려 먼 바다 급히 건너가는 몸
肝膽許天知        철석간장鐵石肝腸은 하늘도 알아준다오
試掉三禪舌        삼선143)의 혀 한 번만 놀리면 그만인 것을
何煩六出奇        육출기계六出奇計144) 쓸 것이 뭐가 있겠소
歸來報明主        돌아와서 임금님께 보고한 뒤엔
依舊一筇枝        예전대로 지팡이 짚고 산으로 돌아가리
택당 이 공145)澤堂李公

辭却烟蘿帶甲兵      연라146)를 하직하고 갑병을 띠었으나
徃來非是要恩榮      오고 감이 은영을 요구함은 아니로다
西城曉月歸時恨      서쪽 성곽 새벽달은 돌아갈 때의 한이요
南嶺梅花別後情      남쪽 고개 매화꽃은 이별 뒤의 정이로다
白首有身應許國      흰머리로 나라에 바칠 몸은 있지만
靑山無地可迯名      푸른 산에 이름 피할 땅은 없도다
他年倘遂同栖約      뒷날 같이 살자는 약속 이룰 수 있다면
流水仙桃眼共明      흐르는 물 복사꽃에 눈이 함께 밝으련만
동명 김 공147)東溟金公

詩多三百笑諸生      우스워라 시 삼백 편 잘 외우는 제생이여148)
險道方知仗化城      험한 길 바야흐로 화성149)에 의지할 줄이야
異地江山來客夢      이역의 강산 찾아가는 나그네의 꿈이라면
一天滄海送君情      하늘 끝 푸른 바다 그대 보내는 정이로세
未應禦敵無長策      적을 막을 좋은 계책이 없기야 하겠소만
須信攻謀是上兵      공격이 최상의 작전임을 믿어야 하겠지요
佗拜莫遲奇計在      타佗의 절이 늦지 않음은 기계가 있어서이니150)
樓蘭古多選將行      누란151)에는 예로부터 장수를 골라 보냈느니라
벽오 이 공152)碧梧李公

慈航本欲濟群生      자비의 배는 본래 중생을 구하려는 것
飛錫飄然出漢城      석장을 날려 표연히 한성을 나서도다
蓮社襟期陸生舌      연사에 기대하는 육생의 말솜씨요153)
湯休別怨退之情      탕휴와 이별하는 퇴지의 정이로다154)
歸來不屑金盈槖      돌아올 때 황금 전대는 달가워하지 않고155)
談笑應看海洗兵      담소하며 병진兵塵 씻긴 바다를 바라보리
疲病叨叅大夫後      대부의 말석을 차지한 파리하고 병든 이 몸
愧無籌策賛君行      그대의 여행길 도와줄 계책이 없어 부끄럽네
동명 정 공156)東溟鄭公

[1]
手中笻杖辭京月      수중의 지팡이 하나로 서울 달을 하직하면
身上袈裟拂海嵐      몸에 두른 가사장삼 바다 안개에 나부끼리
邂逅一杯千里別      해후하고 한잔 술 그리고 천 리의 이별
赤間關外夢終南      적간관157) 너머에서 종남산을 꿈꾸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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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岳李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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制敵無長筭雲林起老師

008_0105_c_03L行裝冲海遠肝膽許天知

008_0105_c_04L試掉三禪舌何煩六出奇

008_0105_c_05L歸來報明主依舊一笻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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澤堂李公

008_0105_c_07L
辭却烟蘿帶甲兵徃來非是要恩榮

008_0105_c_08L西城曉月歸時恨南嶺梅花別後情

008_0105_c_09L白首有身應許國靑山無地可迯名

008_0105_c_10L他年倘遂同栖約流水仙桃眼共明

008_0105_c_11L
東溟金公

008_0105_c_12L
詩多三百笑諸生險道方知仗化城

008_0105_c_13L異地江山來客夢一天滄海送君情

008_0105_c_14L未應禦敵無長策須信攻謀是上兵

008_0105_c_15L侘拜莫遲奇計在樓蘭古多選將行

008_0105_c_16L
碧梧李公

008_0105_c_17L
慈航本欲濟群生飛錫飄然出漢城

008_0105_c_18L蓮社襟期陸生舌湯休別怨退之情

008_0105_c_19L歸來不屑金盈槖談笑應看海洗兵

008_0105_c_20L疲病叨叅大夫後愧無籌策賛君行

008_0105_c_21L
東溟鄭公

008_0105_c_22L
手中笻杖辭京月身上袈裟拂海嵐

008_0105_c_23L邂逅一杯千里別赤間關外夢終南(一)

008_0105_c_24L「一」補入{編}

008_0106_a_01L[2]
萬里鯨波一幅帆      만 리 고래 등 물결에 한 폭의 돛배
接天島嶼似浮嵐      하늘에 닿은 섬들은 산속의 이내 같으렷다
此去藩酋應拱北      이번에 가면 왜놈 추장 응당 공북158)해야지
須敎關白更和南      기필코 관백이 다시 예배하게 하라
도원수 권 공159)都元帥權公

暫出俄千里        잠깐의 나들이가 어느새 천 리
新從日本歸        지금 막 일본에서 돌아왔다오
還山春夢罷        산으로 돌아갈 봄꿈이 깨졌나니
浮海此身非        바다에 떠서는 내 몸이 아니었으리
養鶴今應乳        기르던 학도 이제는 새끼를 낳고
栽松已可圍        심은 솔도 벌써 한 아름 되었으리
玆遊窮物相        이번 여행에 물상을 실컷 보면서
三笑玩天機        셋이 웃으며 천기를 희롱했으리라160)
고죽 최 공161)孤竹崔公

五臺山中何所有      오대산 속에 무엇이 있느냐면
松下白雲如白羽      솔과 그 아래 백우162) 같은 흰 구름
師占松雲以自號      스님이 송운을 점하고 자호했나니
松雲亦與師有素      송운도 스님과 교분이 있음이라163)
鉢能莊龍杖解虎      발우에 용을 담고 지팡이로 범 말리며164)
高臥不出山前路      높이 누워 산 앞길을 나오지 않았는데
底事徃來戎馬間      무슨 일로 융마 사이를 왕래하면서
蹤跡逼仄勞心官      종적이 노심하는 관원과 흡사했는가165)
達者所見不規規      달자의 소견은 편협하게 막히지 않나니
坐穴一榻徒爾爲      의자에 앉아서 공연히 구멍만 내겠는가166)
廟堂豈無制勝算      묘당에 어찌 적을 이길 계책이 없으랴만
師有異術聊試之      스님의 신이한 도술 한번 시험해 보려고
萬里風飄掣滄海      만 리 바람에 돛달고 창해를 건넘은
雲衲欲拂扶桑樹      운납을 부상 나무에 떨쳐 보고 싶어서
師曾氣壓虜萬衆      스님은 수많은 왜적을 기세로 제압했었나니
白刃交前色不動      칼날이 앞에 번득여도 안색이 태연했더니라
弘辯今憑一麈尾      이제 주미167) 휘두르며 웅변을 토해내어
國勢應措九鼎重      나라의 형세를 구정168)보다 중하게 하고
佇聞談鋒破兇膽      예리한 논변으로 흉적의 간담 박살내어
偃彼甲兵長不用      무기를 녹여 길이 쓰지 못하게 하리라
靑松尙保歲寒姿      푸른 솔은 여전히 세한의 자태를 보존하고
白雲堪臥師早歸      흰 구름 누울 만하니 스님이여 얼른 돌아오소
죽음 조 공169)竹陰趙公

瀛海東風別遠公      [1]영해의 동풍에 원 공을 송별하였나니
楚雲吳月夢西峰      초운과 오월 보며 서봉을 꿈꾸리라170)
師乎知我相思否      그리는 나의 마음 스님은 아실는지
莫惜松窓一札封      송창의 편지 한 통 아끼지 마시기를
耿耿丹心不顧身      [2]나라 위한 일편단심 이 한 몸 돌아보랴
秋風一葦泝天津      가을바람에 일위171)로 하늘 나루 건너가네
可憐萬里滄溟月      부럽도다 만 리 푸른 바다의 저 달이여
分照孤山臥病人      고산에 병들어 누운 이 몸도 비춰 주었으면

008_0106_a_01L萬里鯨波一幅帆接天島嶼似浮嵐

008_0106_a_02L此去藩酋應掑北須敎關白更和南(二)

008_0106_a_03L
都元帥權公

008_0106_a_04L
暫出俄千里新從日本歸

008_0106_a_05L還山春夢罷浮海此身非

008_0106_a_06L養鶴今應乳栽松已可圍

008_0106_a_07L玆遊窮物相 [17] 三笑玩天機

008_0106_a_08L
孤竹崔公

008_0106_a_09L
五臺山中何所有松下白雲如白羽

008_0106_a_10L師占松雲以自號松雲亦與師有素

008_0106_a_11L鉢能莊 [18] 龍杖解虎高臥不出山前路

008_0106_a_12L底事徃來戎馬間蹤跡逼 [19] 仄勞心官

008_0106_a_13L達者所見不䂓䂓坐穴一榻徒爾爲

008_0106_a_14L廟堂豈無制勝筭師有異術聊試之

008_0106_a_15L萬里風飄 [20] 掣滄海雲衲欲拂扶桑樹

008_0106_a_16L師曾氣壓虜萬衆白刃交前色不動

008_0106_a_17L弘辯今憑一塵尾國勢應措九鼎重

008_0106_a_18L佇聞談鋒破兇膽偃彼甲兵長不用

008_0106_a_19L靑松尙保歲寒姿白雲堪臥師早歸

008_0106_a_20L
竹陰趙公

008_0106_a_21L
瀛海東風別遠公楚雲吳月夢西峰

008_0106_a_22L師乎知我相思否莫惜松窓一札封(一)

008_0106_a_23L耿耿丹心不顧身秋風一葦泝天津

008_0106_a_24L可憐萬理滄溟月分照孤山臥病人(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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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산 이 공172)玉山李公

羞將高節媚春陽      높은 절조로 봄볕에 아첨하기 부끄러워
玉立亭亭百尺長      옥돌 깎은 듯 백 자 길이로 우뚝 서 있네
剩得風烟爲我有      넘치는 바람과 연기 모두 내가 차지하고
滿山氷雪獨蒼蒼      산 가득 얼음과 눈 속에 홀로 푸르러라
이는 솔(松)을 읊은 것이다.(右詠松。)

無思無慮又無牽      생각도 걱정도 끌리는 것도 없이
閑徃閑來任自然      한가히 왔다 갔다 자연에 내맡길 뿐
只得溪山何所事      그저 산과 골에서 무슨 일 하냐고요
好隨烟月度年年      연월 따라 세월을 보내는 게 좋다네요
이는 구름(雲)을 읊은 것이다.(右詠雲。)스님이 송운松雲으로 자호自號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上人以松雲自虎故云。

吸露餐霞臥碧山      [1]이슬 마시고 노을 먹으며 푸른 산에 누워
半生長笑未雲閑      구름처럼 한가하지 못함을 반평생 비웃었으니
遙知腥海殘星夜      멀리 알겠네 비린 바다 남은 별 빛나는 밤
魂夢時尋水石間      꿈속에 혼이 때때로 수석 사이를 찾을 줄을
兵戈衰世幾人閑      [2]창칼 부딪는 말세에 어떤 이가 한가할까
雲水詩仙亦未安      운수 간의 시선 역시 편안하지 못했다오
病縮山中無一事      병으로 산속에 움츠려 하는 일 하나 없이
臥看新月出林端      숲 끝에 나오는 초승달 누워서 바라볼 뿐
早喫淸眞道大通      [3]일찍 청진 만끽하여 도를 크게 통하더니
暮年勳業擅豪雄      모년에는 훈업으로 호웅을 독점하였도다
丈夫生世當如此      장부가 세상에 태어나 이 정도는 되어야지
抱病窮山面發紅      궁벽한 산속에 병을 안고 얼굴만 붉힌다오
노탄 곽 공 삼길蘆灘郭公三吉

[1]
鶴書天上飛        학서173)가 하늘 위에서 날아와서
金剛訪名釋        금강산의 명승名僧을 찾았나니
瑞花自明滅        서화174) 혼자 피고 지는 곳에서
果得鳩摩什        과연 구마라집175)을 얻었다오
朅來遊行宮        오고 가며 행궁에 노닐자
君王許朝謁        군왕이 조알을 허락했는데
是時猰㺄滿        이때 알유176)가 득시글하여
三都日流血        삼도가 날로 피를 흘렸다오
煩惱固已脫        번뇌야 물론 벌써 벗어났지만
慈悲豈虛擲        자비심을 아무 데나 던져 줄 수야
擧手揮金椎        손을 들어서 쇠몽치를 휘두르매
英聲自此發        영명한 명성이 이로부터 드러났도다
虎穴旣平蕩        범의 소굴을 소탕하여 평정하니
魔言亦凋歇        마귀의 말도 시들어서 막힐밖에
功成身不居        공을 이뤄도 자신이 차지하지 않고177)
隱現任所適        숨고 나타남을 마음 가는 대로 하여
遂令空門人        마침내 불문佛門의 사람들로 하여금
藉藉仰高跡        자자하게 높은 자취 우러르게 하였도다

[2]
南風久不競        남풍이 오래도록 활기가 없고
鳥嶺高崔嵬        조령이 우뚝 높이 솟아 있는 때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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玉山李公

008_0106_b_02L
羞將高節媚春陽玉立亭亭百尺長

008_0106_b_03L剩得風烟爲我有滿山氷雪獨蒼蒼

008_0106_b_04L
右詠松

008_0106_b_05L
無思無慮又無牽閑徃閑來任自然

008_0106_b_06L只得溪山何所事好隨烟月度年年

008_0106_b_07L
右詠雲上人以松雲
自虎故云

008_0106_b_08L
吸露餐霞臥碧山半生長笑未雲閑

008_0106_b_09L遙知腥海殘星夜魂夢時尋水石間(一)

008_0106_b_10L兵戈衰世幾人閑雲水詩仙亦未安

008_0106_b_11L病縮山中無一事臥看新月出林端(二)

008_0106_b_12L早喫淸眞道大通暮年勳業擅豪雄

008_0106_b_13L丈夫生世當如此抱病窮山面發紅(三)

008_0106_b_14L
蘆灘郭公三吉

008_0106_b_15L
鶴書天上飛金剛訪名釋

008_0106_b_16L瑞花自明滅果得鳩摩什

008_0106_b_17L朅來遊行宮君王許朝謁

008_0106_b_18L是時猰㺄滿三都日流血

008_0106_b_19L煩惱固已脫慈悲豈虗擲

008_0106_b_20L擧手揮金椎英聲自此發

008_0106_b_21L虎穴旣平蕩魔言亦凋歇

008_0106_b_22L功成身不居隱現任所適

008_0106_b_23L遂令空門人藉藉仰高跡(一)

008_0106_b_24L南風久不競鳥嶺高崔嵬

008_0106_c_01L長程一千里        천 리 머나먼 길을
飛錫飄然來        석장 날려 표연히 왔네
縱橫制勝算        종횡으로 필승 전략 발휘하다가
酒酣正徘徊        술이 거나하여 정히 배회하면서
拂拭倚天劍        의천검 먼지를 떨어 버리고
獨登海雲臺        홀로 해운대에 올라서니179)
長虹貫白日        긴 무지개가 흰 해를 꿰뚫고180)
壯氣凌蓬萊        장한 기백이 봉래181)를 압도하네
逖野逝已遠        적야182)는 세상을 떠난 지 이미 오래
徐市安在哉        서불183)은 지금 어느 곳에 있는고
何必早頒璽        하필 일찌감치 새서璽書를 반포하여
行當且渡盃        무작정 술잔184) 타고 건너가게 하는지
不然北闕下        그렇지 않으면 북궐 아래에
繫頸蠻酋廻        만추의 목을 묶어 돌아올 텐데185)
명고186) 임 공 전鳴皐任公錪

山中蕭洒烟霞趣      산중의 소쇄한 연하의 취미에 비하면
世上尋常軒冕榮      세상의 헌면187)의 영예는 심상할 따름
鳥獸同羣非素志      조수와 함께 사는 것188)이 본의가 아니거니
君臣大義忍忘情      군신의 대의에 대한 생각을 차마 잊으리오
驅馳五載干戈際      간과 사이를 다섯 해 동안 치달리며
樹立平生男子名      남아의 한평생 이름을 수립하였도다
遙想舊林叅念地      멀리 생각건대 옛 동산 참선하던 곳
一方天月到今明      한쪽 하늘의 달이 지금도 밝으리라
진암 손 공 기양189)眞巖孫公起陽
만사挽詞
久嗟坡老悼鄕緇      향치에 대한 파로의 만사挽詞190)에 오래 탄식하였는데
永樂文師只解詩      영락의 문 스님은 그저 시를 알았을 따름이니
爭似松雲肝膽奮      송운이 간담을 떨쳐 그의 성명을
能全草木姓名知      초목이 알게 한 것과 어떻게 비교하랴191)
身輕義重傾朝著      몸보다 의리 중하게 여겨 조정이 경도傾倒했고
首寶言狂襲島夷      머리가 보배라는 대언大言에 왜적이 떨었도다
慟哭不緣方外契      방외의 인연 때문에 슬퍼함이 아니거니
挽詞豈是爲吾私      애사가 어찌 나의 사정私情 때문이겠는가
동인192)仝人
진찬
병석甁錫193)으로 텅 빈 산에 거할 때에는 삭막하여 고목枯木과 사회死灰194)와 같았으니, 어쩌면 그토록 고요하였던가. 그러다가 하루아침에 칼을 짚고 일어나서 왜적을 삼대 베듯 베었으니, 어쩌면 그토록 용감하였던가. 불씨佛氏는 체體만 있고 용用은 없다는 말195)을 나는 믿지 못하겠다. 풍원군豊原君 조현명趙顯命.196)

008_0106_c_01L長程一千里飛錫飄然來

008_0106_c_02L縱橫制勝筭酒酣正徘徊

008_0106_c_03L拂拭倚天劒獨登海雲臺

008_0106_c_04L長虹貫白日壯氣凌蓬萊

008_0106_c_05L逖野逖野
日本始祖
逝已遠徐市安在哉

008_0106_c_06L何必早頒璽行當且渡盃

008_0106_c_07L不然北闕下繫頸變酋廻(二)

008_0106_c_08L
鳴皐任公錪

008_0106_c_09L
山中蕭洒烟霞趣世上尋常軒冕榮

008_0106_c_10L鳥獸同羣非素志君臣大義忍忘情

008_0106_c_11L驅馳五載干戈際樹立平生男子名

008_0106_c_12L遙想舊林叅念地一方天月到今明

008_0106_c_13L
眞巖孫公起陽

008_0106_c_14L挽詞

008_0106_c_15L
久嗟坡老悼鄕緇永樂文師只解詩

008_0106_c_16L爭似松雲肝膽奮能全 [21] 草木姓名知

008_0106_c_17L身輕義重傾朝著首寶言狂襲 [22] 島夷

008_0106_c_18L慟哭 [23] 詞豈是爲吾私

008_0106_c_19L
仝人

008_0106_c_20L「眞 [24] 賛三篇」

008_0106_c_21L
瓶錫空山索然若枯木死灰何其靜也
008_0106_c_22L一日杖釼而起䂨賊如麻何其勇也
008_0106_c_23L吾不信佛氏之有體而無用也

008_0106_c_24L
豊原君趙顯命

008_0107_a_01L
서산 대사의 진찬즉 송운의 스승이다.
송운松雲은 대사에게는 유후留侯197)와 같은 존재이다. 황석공黃石公은 공적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하나의 몸이 천억이 되는 도리를 은밀히 가르쳤다. 상상컨대 하나의 장명등長明燈 아래에서 도제徒弟를 가르친 것이 군신君臣의 대의大義에 관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지 않다면 종국宗國이 위난危難에 처했을 때에 분란紛亂을 해소하며 어떻게 그와 같이 성취하게 할 수가 있었겠는가.
경주부윤慶州府尹 조명겸趙明謙.
진찬
백우선白羽扇을 휘두르니 경예鯨鯢198)가 흉악한 짓을 그만두었고, 폭포수처럼 웅변을 토해내니 효경梟獍199)이 정성을 바쳤도다. 점잖게 육조六祖의 문답을 나누었고,200) 백 척의 배에 실어 생령生靈을 구제하였도다. 그 훈공勳功을 기린다면 기린각麒麟閣201)에 그림을 걸어야 할 것이요, 그 자비를 찬양한다면 황금 털 사자202)라고 해야 할 것이다. 청고淸高한 저 유상遺像이 어찌 칠푼인들 방불할까마는, 삽상한 영령英靈은 천년토록 제향祭享에 감통感通하시리라.
홍문교리弘文校理 유최기兪㝡基.
분충서난록 발문
나는 선가禪家의 문자文字에 수응酬應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직 승려 남붕南鵬이 그의 조사인 송운을 위해 시를 청했을 때만은 흔연히 허락하고 써 주었다. 그리고 남붕으로부터 송운의 유적遺蹟인 이른바 『분충서난록奮忠紓難錄』이라는 것을 얻어서 손을 씻고 읽어 보고는 재삼 감개感慨하였다. 아, 어쩌면 이렇게까지 사람을 경모敬慕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임진왜란 때에 의병을 일으켜 국난에 몸을 바친 중봉重峯(趙憲)이나 제봉霽峯(高敬命) 등과 같은 여러 선정先正들은 바로 평일에 성현聖賢의 글을 읽은 분들이니, 천리와 민이民彝(인륜)의 중함에 대해서 평소에 강구한 것이 있는 만큼 탁월하게 수립할 수 있었던 것도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저 송운이 배운 것은 어떤 것이었던가. 우리 유자儒者가 군친君親을 저버리고 윤상倫常을 등진다고 나무라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런데도 창졸간에 소매를 걷어붙이고서 거의擧義하였고, 위난危難의 즈음에 칼날을 무릅쓰고 절의節義를 온전히 하였다. 그가 임금에게 충성하고 인륜에 독실한 것이 이와 같았으니, 이는 바로 병이秉彝(양심)를 똑같이 받고 태어나서

008_0107_a_01L西山大師眞賛即松雲之師

008_0107_a_02L
松雲於師留侯黃不顯績陰敎一體
008_0107_a_03L千億想像一燈長明之下講授徒弟
008_0107_a_04L無乃是君臣大義不然宗國危亂之秋
008_0107_a_05L解紛釋難何能使成就如彼

008_0107_a_06L
慶州府尹趙明謙

008_0107_a_07L眞賛

008_0107_a_08L
揮羽扇而鯨鯢戢凶騁舌河而梟獍效
008_0107_a_09L居然六祖之問答救了百艘之生靈
008_0107_a_10L蹟其勳伐具畫閣麒麟讃其慈悲
008_0107_a_11L金毛獅子淸高遺像豈彷髴乎七分
008_0107_a_12L颯爽英靈蠁於千祀

008_0107_a_13L
弘文校理兪㝡基

008_0107_a_14L
008_0107_a_15L

008_0107_a_16L奮忠紓難錄跋

008_0107_a_17L
余不喜酬應禪家文字而獨於僧南鵬之
008_0107_a_18L爲其祖師松雲求詩也旣欣然爲之題
008_0107_a_19L從南鵬得松雲遺蹟所謂奮忠紓難錄者
008_0107_a_20L盥手而讀之三復感慨何令人敬慕
008_0107_a_21L一至於此也壬辰之亂倡義兵而殉國難
008_0107_a_22L如重峯霽峯諸先正即平日讀聖賢書者
008_0107_a_23L其於天理民彝之重講之有素則是
008_0107_a_24L宜樹立之卓然而彼松雲所學何事也
008_0107_a_25L非吾儒所詆以棄君親背倫常者也而顧
008_0107_a_26L於蒼卒之間投袂起義危難之際冒刃
008_0107_a_27L全節其忠於君而篤於倫如此此其秉

008_0107_b_01L꼭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아도 그렇게 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 불씨佛氏가 말하는 바 진심眞心과 진성眞性이라는 것도 번쩍번쩍 빛나는 곳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여기에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송운과 같은 분은 참다운 여래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요, 또 우리 유도儒道 속의 인물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관심觀心하고 견성見性하려는 저들도 부질없이 구자狗子203)나 시궐矢橛204)과 같은 망언 속에서 구하려 하지 말고, 바로 이 한 권의 『분충서난록』에서 구한다면 또한 충분할 것이다. 내가 이렇게 써서 남붕에게 돌려주면서 세상의 사문沙門이 된 자들에게 거듭 바라는 바이다.
무오년(1738, 영조 14) 양월陽月(10월)에 장밀헌藏密軒에서 쓰다.
우의정右議政 송인명宋寅明.
만력 연간의 도이島夷(왜적)의 난難에 진신搢紳으로서 가식家食205)을 하는 자들이 각처에서 의려義旅(의병)를 일으킨 것이 여기저기에서 줄을 이었다. 그리고 이교異敎의 사문으로서 서산과 송운 두 대사와 같은 이도 치류緇流(僧徒)를 규합하여 뜻을 가다듬고 적을 섬멸하여 싸울 때마다 공을 세웠다. 특히 송운 대사는 일찍이 여러 차례나 적의 보루堡壘에 들어가서 그 사정事情을 엿보았으며, 또 사명使命을 받들고 바다를 건너가서 그 교만한 왜추倭酋를 꺾었으므로 이 일로 더욱 공적이 드러났다.
대사가 세상을 떠난 뒤에 국가가 밀양密陽 지역에 사당을 세워서 그의 공을 보답하는 제사를 지내게 하였고, 그 뒤에 또 서산도 함께 제사지내도록 하였다. 그 사전祀典의 광화光華가 이미 중봉重峰(趙憲)ㆍ제봉霽峰(高敬命) 등 여러 군자들과 나란히 서게 되었으니, 이 의의가 또 어찌 적다고 하겠는가.
금년 여름에 대사의 법손인 남붕南鵬이 대사의 『난중일기亂中日記』를 가지고 경사京師에 달려와서 조정에 있는 대인大人들을 두루 찾아보고는 대사의 일을 드러내 주기를 청하였다. 이에 상국相國 김 공金公(金在魯)이 신군申君 유한維翰에게 위촉하여 일기에 미비한 부분을 더욱 수집해서 한 권의 책으로 편찬하게 하고는 그 이름을 『분충서난록奮忠紓難錄』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천신薦紳(搢紳, 즉 고관)인 여러 대부들이 또 성대하게 시와 글을 지어서 칭송하였는데, 그 문사文辭가 모두 훌륭하고 찬란해서 여한이 없이 천양闡揚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다만 그 어의語意가 귀결되는 것을 보면, 대부분 대사의 의열義烈과 훈적勳績이 마치 불력佛力이나 선교禪敎의 도움을 받아서 그렇게 된 것처럼 하였는데, 이는 일단 불자佛者를 위한 말인 만큼 말할 때에는 역시 이렇게 해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불교는 군신君臣을 버리고 부자를 떠나는 종교이다. 그리고 널리 구제하며 자비를 행하도록 하는데, 그것도 선악을 논하지 않고

008_0107_b_01L彜之所同得自有不期然而然者佛氏所
008_0107_b_02L謂眞心眞性其不在於光爍爍地而在於
008_0107_b_03L此可知也然則如松雲者雖謂之眞如來
008_0107_b_04L可也又雖謂之吾道中人亦可也彼之欲
008_0107_b_05L觀心見性者毋徒求之於狗子矢橛之妄
008_0107_b_06L而即此一部奮忠紓難錄者而求之亦足
008_0107_b_07L余旣書此以復南鵬重爲世之爲沙
008_0107_b_08L門者望之

008_0107_b_09L
戊午陽月藏密軒題右議政宋寅明

008_0107_b_10L
008_0107_b_11L
萬曆島夷之難搢紳家食者所在爲義旅
008_0107_b_12L錯落相望而異敎沙門如西山松雲二大
008_0107_b_13L亦糾率緇流厲志纎賊比有戰功
008_0107_b_14L師盖甞屢入賊壘覘其事情又甞奉使浮
008_0107_b_15L折其驕酋尤以此著績師旣歿國家
008_0107_b_16L爲立祠密陽地以報祀之後又以西山并
008_0107_b_17L其祀典光華已並列於重峰霽峰諸
008_0107_b_18L君子此義又曷可少哉今年夏師之法孫
008_0107_b_19L南鵬持師亂中日記走京師遍謁在朝
008_0107_b_20L大人求其發揮師者相國金公屬申君
008_0107_b_21L維翰益裒其所未備彙爲成書名之曰
008_0107_b_22L奮忠紓難錄薦紳諸大夫又盛爲詩若文
008_0107_b_23L稱道之其文辭皆薈蔚炳烺闡揚無餘
008_0107_b_24L而獨其語意旨歸多以師義烈勳績
008_0107_b_25L爲若有佛力禪敎之助者此旣爲佛者言
008_0107_b_26L則其言亦不得不如是歟佛氏棄君臣去
008_0107_b_27L父子其爲普濟慈悲之設者亦不論其善

008_0107_c_01L일체 불살생으로 계율을 삼으니, 우리 유자儒者가 포악한 난적亂賊을 제거하여 살리는 도(生道)로 사람을 죽이는 것과는 또 거리가 멀다고 할 것이다.
간혹 탁이卓異하고 웅준雄俊하여 안으로는 유가儒家이면서 밖으로는 선가禪家인 척하는 우리 대사와 같은 경우는, 이미 그 차이점을 자각하였으면서도 그 설에 구애되어 되돌아오지 못할 수가 있는데, 그럴 때에는 또 반드시 어떤 일을 계기로 해서 밖으로 드러내어 기위奇偉한 공을 스스로 세우게 되는 것이다. 대저 전신傳神206)은 초상화에 들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대사가 수염을 깎지 않은 것을 보면 대사의 은미隱微한 뜻이 어디에 있는지 거기에서 벌써 알 수 있을 듯도 하다.
대개 그는 맑은 기운이 모여 서리고 신령한 지혜가 흘러넘치는 가운데 참다운 충심忠心과 의로운 용기가 찬연히 구슬을 꿴 듯한 인물이다. 그래서 일찌감치 마음속으로 계합契合하여 깨달았음은 물론이요,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교악蛟鰐을 범하면서, 혹은 작전 계획을 세우기도 하고, 혹은 변설을 토해내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군부君父의 위급함을 구하려고 달려가는 것을 대사 또한 스스로 그만둘 수가 없었으니, 어떻게 그 사이에 불력佛力과 같은 것을 용인할 수가 있겠는가.
세상의 말에 의하면, 석가釋家에는 두 교파가 있는데, 좌선을 주로 하는 쪽에서는 대사가 그 가르침에 순수하지 못하다고 하여 약간 헌지軒輊(비평)하는 일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대사에게는 참으로 그런 점이 있기도 하다. 오직 대사가 그 가르침에 순수하지 못한 것은, 바로 우리 유도儒道에 가까운 점이 있기 때문이니, 만약 그렇지 않다면 향화香火를 올려 대사를 제사지내는 것이 유독 총림叢林에만 있지 않고 묘조廟朝의 인사人士들 사이에도 있는 것은 또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대사의 대사다운 소이所以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것이다.
대사의 법명은 유정惟政이다. 선묘가 일찍이 홍제弘濟라는 호를 내렸다.207) 송운松雲이라는 것은 또 대사가 자호自號한 것이라고 한다.
무오년(1738, 영조 14) 8월에 포암병부圃嚴病夫는 쓰다.
이조참판 윤봉조尹鳳朝.
새로 판각한 송운 대사의 『분충서난록』 발문
무오년(1738, 영조 14) 봄에 내가 서울에 있을 적에 영남嶺南의 승려 남붕南鵬이 내방하여 바랑 속에서 낡은 종이에 쓰인 해어진 책 한 권을 꺼내 보여 주며 말하였다.
“이것은 우리 조사 송운 공松雲公이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할 때 기록한 것으로, 병진兵塵의 와중에 습득하여 바랑과 함께 전승된 것인데, 백에 한둘도 보존되지 못하였고, 보존된 것도 그 연월일이 상세하지 못합니다.

008_0107_c_01L一以殺生爲戒與吾儒之誅暴去亂
008_0107_c_02L以生道殺人者又相遠矣間或有卓異雄
008_0107_c_03L內儒而外禪如吾師者已能自覺其
008_0107_c_04L而拘其說而不能返則又必因事表見
008_0107_c_05L自樹其奇偉夫以傳神之在眞像者而不
008_0107_c_06L去其髯髭師之微意已似有可見矣
008_0107_c_07L其淸氣鍾毓神解洋溢誠忠義勇燦然
008_0107_c_08L若貫珠者早已契悟於其心而冒矢石犯
008_0107_c_09L蛟鰐或發之兵謨或發之辯舌以之赴
008_0107_c_10L君父之急者師亦有不能自住况焉容佛
008_0107_c_11L力於其間哉世言釋家有二敎其主坐禪
008_0107_c_12L或以師不純於其敎而微有軒輊
008_0107_c_13L則誠有是矣惟其不純於彼敎所以有近
008_0107_c_14L於吾道苟非然也香火而尸祝師者
008_0107_c_15L獨在叢林而乃在廟朝人士之間者又何
008_0107_c_16L師之所以爲師者其在斯歟師法名
008_0107_c_17L惟政宣廟甞賜號弘濟而松雲者又師
008_0107_c_18L之所自號云

008_0107_c_19L
戊午仲秋圃嚴病夫書吏曺叅判尹
008_0107_c_20L鳳朝

008_0107_c_21L

008_0107_c_22L1)新刻松雲大師奮忠紓難錄跋 [8]

008_0107_c_23L
戊午春余在都下有嶺南僧南鵬來訪
008_0107_c_24L出示橐中故紙爛草一卷曰此吾祖師
008_0107_c_25L松雲公倡義討賊時所錄而兵塵中拾得
008_0107_c_26L與鉢囊傳承百不能一二存存者亦未詳
008_0107_c_27L自此至卷末甲本無有

008_0108_a_01L지금 백여 년이 지나도록 이 기록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채 점점 좀이 먹고 거미가 줄을 치기에, 변변찮은 사리闍黎208) 몇 사람이 오직 수화水火의 액운을 당할까 두려워한 나머지 간행할 것을 꾀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소매 속에 책을 넣어 가지고 경사京師에 노닐면서 청사淸沙209) 김 상국金相國 문하에 한번 질의하였더니, 문득 차상嗟賞하며 ‘분충서난록奮忠紓難錄’이라고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부디 그대가 은혜를 베풀어 어로魚魯210)를 정리하고 갑을을 차례 지워 토론하고 수식함으로써 후인의 눈이 어둡지 않게 해주었으면 합니다.”
내가 그 책을 받아서 한번 읽어 보니, 참으로 송운의 당일의 일을 분명히 알 수가 있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 엉성하고 자디잔 문묵文墨이 전도되고 질서가 없기에 마침내 국사國史를 상고하고 왜어倭語를 가져다가 증험하는 한편, 틈틈이 나의 뜻을 붙여 평론도 하였으며, 다른 기록들을 취해 덧붙여서 열흘 만에 편찬을 마쳤다. 그리고는 말미에 다음과 같이 썼다.
불씨佛氏의 가르침은 정定과 혜慧로 일심을 다스리고, 자비로 만물을 구제한다. 그 글은 육경六經과 다르고, 그 행실은 오륜五倫과 다르며, 그 습속은 백성과 달라서, 사는 것은 산 위에 구름이 떠 있는 것이요, 죽는 것은 들판의 불이 꺼지는 것처럼 여기기 때문에 유가儒家에서 극력 배척하여 마지않는 것이다.
그러나 시험 삼아 불교를 배우는 무리에게 이 기록을 읽어 보게 한다면 송운의 풍도를 사모하게 될 것이다. 그가 맨손으로 근왕勤王하여 만사萬死에 나아가되 7척의 자기 몸을 아랑곳하지 않고, 도산검수刀山劍樹를 평지처럼 여긴 것을 본다면, 이것이 바로 선정禪定이 아니겠는가. 그가 지성至誠으로 임금에게 보답하고 하늘에 복수하기를 맹서하며, 종사宗社를 걱정하고 생령生靈을 구휼하여 중흥의 계책을 힘껏 협찬한 것을 본다면, 이것이 바로 진혜眞慧가 아니겠는가. 그가 한 척의 돛단배로 창해滄海를 건너가서 만왕蠻王의 죄를 차례로 힐난하며, 포로로 잡혀간 수천 명의 백성을 고래와 악어의 입에서 구출한 것을 본다면, 이것이 바로 대자비大慈悲가 아니겠는가. 이것이야말로 무상보리반야無上菩提般若의 종법宗法인 것이니, 뇌정雷霆도 범할 수 있고 금석金石도 뚫을 수 있으며, 무쇠 이마(鐵額)의 치우蚩尤211)도 감히 강함을 다투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이 물건인 것이다.
이를 따르면 천당에 올라가고 이를 어기면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외를 심으면 외가 나고 종을 치면 종소리가 울리듯이, 한 생각(一念)의 인과因果로 인해 부처도 되고 중생도 되는 것이니, 그렇다면 그 법이 오륜과 무엇이 다르며, 그 마음이 백성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것이 바로 조가朝家가 표충사表忠祠를 세우도록 명한 뜻이요, 또 상국이 이 기록을 그렇게 명명한 뜻이다.
남붕이여, 그대는 돌아가서 쌍림雙林212)의 여러 법려法侶에게 고하되, 얼른 판각해서 세상에 전해지도록 하라. 그리고 나 대신 그들에게 말을 전하되, “지금 왕의 덕택이 산야에 미쳤으니,

008_0108_a_01L其歲月日迨今百餘年來此錄不現於世
008_0108_a_02L駸駸蠧蝕而蛛絲之藐玆數惟水火
008_0108_a_03L是惧謀所以繡諸梓袖卷而遊京師
008_0108_a_04L質於淸沙金相國門下輒蒙嗟賞命名曰
008_0108_a_05L奮忠紓難錄幸以子之惠而整其魚魯
008_0108_a_06L第其甲乙討論之修餙之俾後人不瞢
008_0108_a_07L可乎余受而寓目信晳晳乎松雲當日事
008_0108_a_08L惜其零文瑣墨顚倒無秩遂考諸國
008_0108_a_09L驗以倭語間用己意而評隲焉益取
008_0108_a_10L他錄而增附焉浹旬而編成手書其尾曰
008_0108_a_11L佛氏之敎以㝎慧治一心以慈悲濟萬物
008_0108_a_12L其書與六經異其行與五倫異其俗與百
008_0108_a_13L姓異生如峀雲沒爲野火儒家輒力排
008_0108_a_14L之不休然試使學佛之徒讀是錄而慕松
008_0108_a_15L雲之風觀其隻手勤王出萬死不知七
008_0108_a_16L尺之軀視刀山劍樹如平地即非禪㝎乎
008_0108_a_17L觀其至誠報主誓天復讎憂宗社恤生靈
008_0108_a_18L力賛中興之策即非眞慧乎觀其一帆滄
008_0108_a_19L歷詆蠻王脫數千俘氓於鯨鰐之口
008_0108_a_20L即非大慈悲乎其斯爲無上菩提般若宗
008_0108_a_21L而雷霆可犯金石可貫鐵額蚩尤
008_0108_a_22L敢與爭强者皆是物也由是而升天堂
008_0108_a_23L反是而墮地獄種瓜得瓜鼓鐘聞鐘
008_0108_a_24L念因果爲佛爲衆即其法與五倫奚異
008_0108_a_25L其心與百姓奚異此朝家命立表忠祠意
008_0108_a_26L又相國名是錄意也鵬乎汝歸告雙林
008_0108_a_27L諸法侶趣刻而傳之爲我謝曰今王德

008_0108_b_01L그대들이 송운처럼 되고 싶으면 이 기록이 있다.”라고 하라.
금상今上 14년 무오년 5월에 청천靑泉 신유한申維翰은 말미에 쓰다.
부록한 밀주지의 발문
내가 일찍이 밀주지密州誌를 열람하다가 선사인 송운당松雲堂의 유적을 얻어 보고는 팔을 걷어붙이고 강개慷慨하여 말하였다.
“아, 우리 선사께서 불행히도 천지가 결딴나고 창해가 육침陸沈하는 때에 태어나서 충심을 품고 의기를 떨쳐 큰 변란에 임해서도 성기聲氣를 변동하지 않고 국가의 형세를 태산처럼 편안하게 안정시켰으니, 이런 분을 고금의 역사에서 찾아보아도 몇 사람이나 있겠는가?”
그리고는 내가 매양 무릎을 치며 이 일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속의 피가 저절로 끓어오르면서 은연중에 적진 속으로 뛰어들어 순국殉國할 뜻을 갖곤 하였다.
그러다가 동문同門의 벗인 남붕이 본사本祠(표충사)의 승려인 취안翠眼ㆍ상현尙玄 등과 함께 두루 서울을 돌아다니며 진신搢紳의 뛰어난 사대부들이 선사를 위해 포장鋪張(宣揚)한 글을 얻어 장차 출판하려는 것을 보았는데, 이는 조가朝家의 처분213)이었으므로 나도 밀주지에서 얻은 내용을 선사의 일기 속에 첨가해 넣는 것으로 그치고자 하였다. 그러자 남붕 스님이 나에게 말하였다.
“이번에 거행하는 것은 사문師門의 막대한 일이다. 이것으로 책임을 메울 수는 없으니, 응당 크게 드러내야 할 것이다.”
내가 말하였다.
“우리 선사의 높은 공훈과 장한 의열義烈은 지부해함地負海涵214)과 같다고 할 것이니, 비록 백천만년을 지난다고 해도 일월과 같아서 가릴 수가 없을 것이다. 더구나 당세에 문장으로 이름난 호걸의 인사들이 다투어 시문을 지어 주어 빠진 것이 없고 보면, 나처럼 천박한 자가 선사에게 무슨 경중輕重이 될 수 있겠는가. 비록 그렇지만 내가 사양할 수 없는 것은, 선사의 의발이 전해진 것이 지금 설송자雪松子 연초演初에게 있는데,215) 나도 그 문인이기 때문이다. 그 존모尊慕하는 정성과 흠앙하는 사정私情이 실로 천부적인 양심에서 우러나왔고 보면, 어찌 한마디 말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에 삼가 발문跋文을 짓게 되었다.
기미년(1739, 영조 15) 7월 7일에 규산圭山 사문沙門 명학明學은 손을 씻고 삼가 발문을 쓰다.
금상今上 15년(1739, 영조 15) 기미년 7월 일에 밀주密州 영취산靈鷲山 표충사表忠祠에서 개간開刊하다.

008_0108_b_01L澤曁山野爾欲爲松雲是錄在

008_0108_b_02L
十四年戊午仲夏靑泉申維翰跋

008_0108_b_03L

008_0108_b_04L附密州誌跋

008_0108_b_05L
不侫甞閱密州誌得先師松雲堂遺蹟
008_0108_b_06L腕慷慨曰嗟夫吾先師不幸生於天地
008_0108_b_07L板蕩滄海陸沉之秋懷忠奮義臨大變而
008_0108_b_08L不動聲氣 國勢於泰山之安者求諸古
008_0108_b_09L有幾人哉不侫每擊節念此腔血自
008_0108_b_10L因隱然有赴敵殉國之志矣及見同門
008_0108_b_11L友南鵬與本祠僧翠眼尙玄輩踏遍洛下
008_0108_b_12L得搢紳賢士大夫爲先師鋪張之1) [9]
008_0108_b_13L擬壽梓此則朝家處分不侫亦以密誌所
008_0108_b_14L得語添入先師日記中而止則鵬師謂不
008_0108_b_15L侫曰今番設施師門莫大之擧不可以
008_0108_b_16L此塞責冝張大焉不侫曰吾先師嵬勳
008_0108_b_17L壯烈地負海涵雖歷百千萬歲如日月之
008_0108_b_18L不可掩而况當世文章號傑之士爭爲題
008_0108_b_19L撰無遺則顧余膚淺有何爲先師輕重哉
008_0108_b_20L雖然辭不獲者先師衣鉢之傳在今雪松
008_0108_b_21L則僕亦其門人也其尊慕之誠仰止
008_0108_b_22L之私實出於秉彜之天則烏得無一言乎
008_0108_b_23L於是乎謹跋

008_0108_b_24L
己未七月七日圭山沙門明學盥手
008_0108_b_25L謹跋

008_0108_b_26L
008_0108_b_27L
上之十五年己未七月密州靈鷲山
008_0108_b_28L表忠祠開刊

008_0108_c_01L
선교양종禪敎兩宗 겸 도대주관都大主管 설송당雪松堂 연초演初.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 겸 영남규정도嶺南糾定都 송운松雲 5대 법손 태허당太虛堂 남붕南鵬.
각수질
도감都監 겸 수두首頭 : 의청儀淸.
도찰都察 겸 공원公員 : 원신圓信ㆍ영성靈性ㆍ관청管淸ㆍ계붕戒鵬ㆍ한익漢益ㆍ가준可俊ㆍ지순智淳ㆍ면화綿華ㆍ유만필兪萬必.
연판鍊板 : 이세춘李世春.
도별좌都別座 : 평해評解.
화상和尙 : 치화致和.
수승首僧 : 민주敏珠.
서기書記 : 즉청即淸.
삼보三寶 : 신학神學.
부록2附錄二
밀양 표충사 송운 대사 영당 비명 병서
우리 소경대왕昭敬大王(선조)이 즉위하신 지 25년째 되는 해에 일본의 도적이 대규모로 군대를 동원하여 침입하였다. 주상이 불행히도 서쪽 변방으로 파천播遷하고, 흉봉兇鋒이 팔로八路에 가득하였는데, 중외中外에서 국록國祿을 먹는 자들 대부분이 꿩이나 토끼처럼 도망치니, 왜적이 마침내 마음대로 짓밟았다.
이때 송운 대사 유정이 불교인의 신분으로 석장錫杖을 날려 고성固城에 들어가서 살생을 좋아하지 말라고 적을 타일렀는데, 적이 대사의 의용儀容이 늠름한 것을 보고는 즉시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켜 그 무리를 단속하였으므로 그 덕분에 영동의 아홉 고을(九郡)이 도륙屠戮되는 참화를 면하였다.
그리고 얼마 뒤에 강개慷慨한 어조로 승려들에게 말하였다.
“우리들이 편히 노닐며 마시고 먹는 것은 모두 성상의 은혜 덕분이다. 지금 나라가 위태로운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앉아서 보기만 하고 구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그리고는 승병을 모으니 수백 명에 이르렀으므로 급히 순안順安으로 달려갔다. 이때 대사의 스승인 휴정이 바야흐로 제도諸道의 승병을 총섭摠攝하고 있다가 늙었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대사를 천거하여 자신을 대리하게 하였다.216) 그리하여 대사가 마침내 체찰사體察使 유성룡柳成龍을 따라

008_0108_c_01L
禪敎兩宗兼都大主管雪松堂演初

008_0108_c_02L
八道都捴攝兼嶺南紏定都

008_0108_c_03L
松雲五代法孫太虛堂南鵬

008_0108_c_04L
刻手秩都監兼首頭儀淸都察兼公員
008_0108_c_05L圓信靈性管淸戒鵬漢益可俊智淳
008_0108_c_06L錦華兪萬必鍊板李世春都別座
008_0108_c_07L和尙致和首僧敏珠書記即淸
008_0108_c_08L三寶神學

008_0108_c_09L
008_0108_c_10L

008_0108_c_11L2)「附錄二 [10]

008_0108_c_12L密陽表忠詞松雲大師

008_0108_c_13L
影堂碑銘并序

008_0108_c_14L
粤我昭敬大王在宥之二十五年日本
008_0108_c_15L賊大擧兵入寇主上鄙在西陲 [25] 鋒彌
008_0108_c_16L滿八路中外食焉者多雉兔逃賊遂
008_0108_c_17L肆意蹂躪維時松雲大師惟政佛者流
008_0108_c_18L飛錫入高城諭賊勿嗜殺賊見其
008_0108_c_19L儀容凛然即起敬戒其徒由是嶺東
008_0108_c_20L九郡得免屠戮之慘旣而慷慨語諸僧
008_0108_c_21L吾等優游飮啄皆聖恩也今國危
008_0108_c_22L至此坐視不救可乎乃募衆至數百
008_0108_c_23L亟赴順安時師之師休靜方總諸道僧
008_0108_c_24L辭以老擧師自代遂從體察使柳
008_0108_c_25L「茟」通用「筆」{編}「附錄二」三字補入{編}
008_0108_c_26L自此至卷末無有{乙}

008_0109_a_01L중국 장수와 협동하여 평양의 적을 격파하고, 도원수 권율權慄을 따라 영남으로 내려가서 누차 적을 베고 노획하였다.
이에 상이 가상하게 여겨 품계品階를 당상堂上으로 올리는 한편, 총병總兵 유정劉綎의 지시에 따라 왜영倭營에 들어가서 청정淸正을 선유宣諭하게 하였는데, 세 차례 왕래할 때마다 모두 요령을 얻었다. 이때 청정이 물었다.
“조선에 보배가 있는가?”
대사가 대답하였다.
“없다. 보배는 일본에 있다. 그대의 머리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자 청정의 안색이 변하였다.
대사가 돌아오자 상이 대궐 안으로 불러들여 사정을 두루 물어보고는 하교하였다.
“옛날에 유병충劉秉忠과 요광효姚廣孝217)는 모두 산인의 신분으로 국가에 공을 세웠다. 그대가 만약 머리를 기른다면, 백 리의 소임을 맡기거나 삼군三軍의 장수를 명하거나 안 될 것이 없을 것이다.”
대사가 감히 감당할 수 없다고 사양하니, 상도 그 뜻을 꺾지 않고 특별히 무고武庫의 갑옷과 병장기를 내주며 남은 왜적을 초격抄擊하게 하였다.
대사는 얼마 뒤에 또 성곽을 쌓고 양식을 비축하여 보장保障218)을 완전히 하는 일을 돕고는, 곧바로 인수印綬를 바치고 글을 올려 물러나게 해줄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정유년(1597, 선조 30)에 왜적이 다시 침입하자 마귀麻貴와 유정劉綎의 두 독부督府를 따라 모두 공로를 세워 특별히 가선嘉善으로 승진되었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신축년(1601, 선조 34)에 또 부산성釜山城을 쌓았다.
갑진년(1604, 선조 37)에 국서國書를 받들고 일본에 가니, 여러 왜인들이 서로 돌아다보고 경탄하며 약속 받기를 오직 삼갔다. 포로로 잡혀간 남녀 3천여 명219)을 데리고 와서 복명復命을 하니, 가의嘉義의 품계를 더해 주고, 우악하게 은상恩賞을 내려 장려하였다.
이후로 더욱 나이를 먹자 은퇴할 것을 청하여 치악산에서 가야산으로 들어갔다가 경술년(1610, 광해군 2) 가을에 시적示寂하니, 세수가 67이요 승하僧夏(법랍)가 57이었다.220) 다비하던 저녁에 사리 1구를 얻어 석종石鍾에 간직하고 탑(窣堵波)을 세웠다.
대사는 풍천豐川 임씨任氏이다. 부친 수성守成이 달성達城 서씨徐氏에게 장가들어 가정嘉靖 갑진년(1544, 중종 39)에 대사를 낳았다. 어려서부터 재질이 특이하였는데, 조금 자라서 글을 읽다가 홀연히 계오契悟한 바가 있어 황악산黃岳山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자字를 이환離幻이라고 하였다.
재사才思가 숙성夙成하여 소재蘇齋(盧守愼)ㆍ사암思菴(朴淳)ㆍ고봉高峰(奇大升)ㆍ제봉霽峰(高敬命) 등 여러 명공名公의 인정을 받았고,

008_0109_a_01L成龍恊司天將破平壤賊隨都元帥
008_0109_a_02L權慄下嶺南婁有斬獲上嘉歎進階
008_0109_a_03L堂上使隨劉總兵綎入倭營諭意淸
008_0109_a_04L三徃三返盡得要領正問朝鮮有
008_0109_a_05L寶乎曰無有寶在日本若頭是也
008_0109_a_06L色沮及還上召至內闥歷問事情
008_0109_a_07L敎曰昔劉秉忠姚廣孝俱以山人
008_0109_a_08L在國家爾若長髮百里之寄三軍之
008_0109_a_09L無所不可師辭以不敢上亦不屈
008_0109_a_10L其志特給武庫鎧仗俾抄擊餘賊
008_0109_a_11L又助築城埤飭儲胥完保障即上印
008_0109_a_12L抗章乞休不許丁酉倭再逞從麻
008_0109_a_13L劉二督府具有勞勩特陞嘉善拜同
008_0109_a_14L知中樞辛丑又築釜山城甲辰奉國書
008_0109_a_15L徃日本諸倭相顧驚憚受約束惟謹
008_0109_a_16L還被虜男婦三千餘口復命加階嘉義
008_0109_a_17L優錫以奬之是後年益老乞骸自雉
008_0109_a_18L岳入伽倻山至庚戌秋示寂世壽六十
008_0109_a_19L僧夏五十七荼毘之夕得舍利一
008_0109_a_20L藏之石鍾堵波師豊川任氏
008_0109_a_21L父守成娶達城徐氏生師於嘉靖甲
008_0109_a_22L幼有異質稍長讀書忽有契悟
008_0109_a_23L黃岳山薙髮字曰離幻才思夙詣
008_0109_a_24L蘇齋思菴高峯霽峰諸名公所賞識

008_0109_b_01L시인 최가운崔駕運(崔慶昌)ㆍ허미숙許美淑ㆍ임자순林子順(林悌)ㆍ이익지李益之(李達) 등과 노닐었다. 그의 시를 보면 맑고 씩씩하여 볼 만한 점이 있는데, 세상에 『사명집四溟集』이 전한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모두 대사의 토저土苴(두엄 풀)요 비강粃糠(쭉정이와 겨)일 뿐이니 본디 말할 것이 못된다. 오직 품기稟氣가 호일豪逸하여 자연히 달식達識과 명지明智가 있었기 때문에 이교異敎를 좇으면서도 그 교리에 갇히지 않았고, 세간을 벗어났으면서도 국란을 평정할 뜻을 품었으며, 윤상倫常을 떠났으면서도 국가를 보위保衛할 정성이 독실하였던 것이다.
왜적의 기세가 조수처럼 밀려오고 요망한 기운이 하늘을 뒤덮는 때를 당하여 북받치는 충의의 마음을 스스로 억제하지 못하여 한마디 말로 추악한 무리를 절복折伏하고, 한 자의 칼로 특수한 공적을 건립하였으니, 공空을 말하고 환幻을 설하는 일개 고선枯禪과 비교해 견줄 수 없는 일이다. 성상이 하교하면서 옛 영걸英傑을 인용하여 책면責勉한 것도 대개 대사의 포부가 범상치 않음을 깊이 알았기 때문이니, 어찌 한 시대의 의연毅然한 장부요 세상을 뒤덮는 기개의 위인이 아니겠는가.
영남의 밀양에 표충사221)를 세워 대사를 제향祭享하였다. 그리고 휴정休靜 스님은 최초에 난리를 평정한 공이 있고, 영규靈圭는 적을 섬멸한 공렬이 현저하며 또 끝내 순절殉節하였으므로 대사와 함께 제향을 받게 하였다. 또 숙종조肅宗朝에는 관가에 명하여 제수祭需를 공급하게 하였고, 당저當宁(영조)는 또 급복給復(부역 면제)을 명하였으니, 이는 풍성風聲을 세워 후인을 권장하기 위해서였다.
대사는 일찍이 수염을 남겨 두고 깎지 않아서 그 길이가 허리띠까지 닿았다. 그 일이 또한 기이한데, 지금 유상遺像이 사당 안에 남아 있다.
나는 평소에 석자釋子를 위해 문자를 짓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와서 청하는 자가 있으면 번번이 거절하곤 하였다. 그러나 오직 대사의 경우만은 사적事跡이 너무도 기특해서 의리상 똑같은 예로 물리치기 어렵기에 마침내 명銘을 지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人有五倫         사람에게 오륜이 있는데
一則君臣         첫째가 임금과 신하이다
臨難奮義         국난을 당하면 의기를 떨쳐
有國無身         나라만 생각하고 몸을 잊나니
斯爲正理         이것이 올바른 도리로서
名敎攸遵         명교222)가 준행하는 바이다
呪梵持鉢         주문을 외우고 발우를 든
佛也匪人         불교의 중은 사람이 아니다
獨守空門         홀로 공문을 고수하며
自甘夷淪         이적夷狄에 빠짐을 달게 여길 뿐
視世危亂         세상이 위란함을 본다고 해도
寧肯嚬呻         어찌 찌푸리며 괴로워나 하랴
偉哉松雲         위대하도다 송운 대사여
跡幻心眞         자취는 환이지만 마음은 진이라서
存髯至膝         수염을 길러 무릎에 닿았나니

008_0109_b_01L詩人崔嘉運許美叔林子順李益之軰游
008_0109_b_02L爲詩淸遒可觀有四溟集行于世
008_0109_b_03L斯皆師之土苴粃糠爾固不足道也
008_0109_b_04L是禀氣豪逸自有達識明智從異敎而
008_0109_b_05L不爲其敎所囿出世而懷弭亂之志
008_0109_b_06L倫而篤衛國之誠當賊勢潮驅雰雺匝
008_0109_b_07L忠義鬱律不能自禦片言折伏羣
008_0109_b_08L尺劒建立殊績有不可以談空說幻
008_0109_b_09L之一枯禪比而倫之聖敎引古英傑策
008_0109_b_10L勉者盖亦深知其抱負之不常則豈不
008_0109_b_11L爲一時之毅夫盖代之偉男也哉嶺南
008_0109_b_12L之密陽有表忠祠以享師而休師以有
008_0109_b_13L最初勘難之功靈圭以殲賊著烈終又
008_0109_b_14L殉節與師並腏肅宗朝命官供祭需
008_0109_b_15L當宁又命結復所以樹風聲勸來後也
008_0109_b_16L師甞存髯不去其長至帶亦異矣今遠
008_0109_b_17L像留在祠中余雅不喜爲釋子作文字
008_0109_b_18L有來請輒麾之唯師事跡絶奇義難一
008_0109_b_19L例斥却遂爲之銘其詞曰

008_0109_b_20L
人有五倫一則君臣臨難奮義

008_0109_b_21L有國無身斯爲正理名敎攸遵

008_0109_b_22L呪梵持鉢佛也匪人獨守空門

008_0109_b_23L自甘夷淪視世危亂寧肯嚬呻

008_0109_b_24L偉哉松雲跡幻心眞存髯至膝

008_0109_c_01L有燁精神         그 정신 분명히 있음이로다
想厥雅意         평소의 뜻을 상상해 보건대
不屑緇巾         먹물 옷이 달갑지 않았으리라
蠻警卒起         왜적의 난리가 졸지에 일어나자
誓淸氛塵         요기를 소탕하겠다 맹서를 하고
裒兵選徒         군사를 모집하고 무리를 선별하니
師律一新         군대의 기율이 한결 새로워졌다
楡岾救衆         유점사 대중을 구할 적에는
化彼兇嚚         저 흉악한 무리를 감화시켜서
九郡安帖         아홉 고을이 편안해진 덕분에
全活惟均         똑같이 목숨을 보전하였다오
西山讓先         서산이 대사에게 양보를 하며
用徹重宸         임금님에게 사정을 아뢰고 나서
歷載從戎         몇 년 동안 종군從軍을 하였나니
箕壘鼎津         평양성과 정암鼎巖 나루 등에서
鹵獲侯多         노획한 것이 실로 많은지라
特侈徘銀         비은223)이 특별히 융숭하였다오
釜營三返         부산 왜영224)에 세 번 왕래하며
尤竭忱恂         더욱 일편단심을 기울였나니
說寶語壯         보배를 설명한 말 얼마나 장한가
氣薄秋旻         그 기개 가을 하늘에 사무쳤네
以舌代鋒         혀끝으로 칼날을 대신하자
遠懾强鄰         멀리 강퍅한 이웃이 벌벌 떨었고
七年兵戈         칠 년 전쟁을 치르는 동안
功在南民         공은 남쪽 백성에게 있었다네
聖情眷倚         성상이 대사를 중히 의지하며
諭敎諄諄         하교하여 간절히 타이르기를
曰昔劉姚         옛날 유요225)로 말하면
勳比麒麟         공훈이 기린(기린각 : 공신각)과 짝하였다
爾能屈志         그대도 능히 뜻을 굽혀서
佑我昌辰         나의 성대盛代를 보우한다면
百里三軍         백 리이든 삼군이든 어떤 것이든
嘉命可申         아름다운 명을 펼 수 있으리라
師拜稽首         대사가 절하고 머리 조아리며
其敢逡巡         감당치 못한다고 뒷걸음치며
臣老無能         신은 늙은 데다 무능하오니
願垂慈仁         바라건대 자인을 드리우소서
秪林道場         그저 숲속의 도량에서
猿鳥相親         잔나비와 새와 친하게 지냄이
是臣本懷         신의 본래의 회포입니다
悃欵畢陳         이처럼 속마음을 모두 아뢰고는
翩然歸卧         훨훨 떨치고 돌아와 누웠나니
雉岳嶙峋         치악산이 우뚝 높이 솟았네
恩奬稠疊         은상을 내려 계속 장려하며
表節之純         절의를 표창함이 순수하였는데
毫光遽閟         호광226)이 갑자기 사라지니
法運終湮         법운이 끝내 인멸湮滅되었도다
塔廟湧空         탑과 묘가 허공에 솟았으니
玄珠示珍         현주227)의 진귀함을 보였음이라
凝川報祀         응천228)의 보답하는 제사는
永綏千春         일천 봄에 길이 전해지리니
遺像在堂         유상이 사당 안에 자리하여
爽氣氳氤         삽상한 기운이 서려 있도다
給需賜復         제수祭需도 주고 부역도 면제하며
寵章式頻         은총을 빈번히 내려주었나니
惟此一着         오직 이 하나의 일은
盖飭戎袀         대개 장사將士를 신칙하려 함이요
非如前代         과거 고려시대와 같이
渠敎是因         불교에 따르려 함이 아니로다
三師齊享         대사 세 분을 나란히 제향하여
共作主賓         함께 주인이 되고 손님이 되었나니
酬功彰烈         공로에 보답하고 의열義烈을 드러내어
施及無垠         무한히 후대에 미치게 하였도다
我述其事         내가 그 일을 서술하여
刻之貞珉         빗돌에 새기게 하는 것은
爰俾鶖子         이렇게 함으로써 추자229)로 하여금
師義寔循         대사의 의리를 따르게 함이니
毋泥虛寂         허무한 공적 속에 빠지지 말고
追師濟屯         대사를 따라 환란을 구할지어다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의현李宜顯 지음.

008_0109_c_01L有燁精神想厥雅意不屑緇巾

008_0109_c_02L蠻警卒起誓淸氛塵裒兵選徒

008_0109_c_03L師律一新楡岾救衆化彼兇嚚

008_0109_c_04L九郡安帖全活惟均西山讓先

008_0109_c_05L用徹重宸歷載從戎箕壘鼎津

008_0109_c_06L鹵獲侯多特侈徘 [26] 釜營三返

008_0109_c_07L尤竭忱恂說寶語壯氣薄秋旻

008_0109_c_08L以舌代鋒遠懾强隣七年兵戈

008_0109_c_09L功在南民聖情眷倚諭敎諄諄

008_0109_c_10L曰昔劉姚勳比麒麟爾能屈志

008_0109_c_11L佑我昌辰百里三軍嘉命可申

008_0109_c_12L師拜稽首其敢逡巡臣老無能

008_0109_c_13L願垂慈仁秪林道塲猿鳥相親

008_0109_c_14L是臣本懷悃欵畢陳翩然歸臥

008_0109_c_15L雉岳嶙峋恩獎稠疊表節之純

008_0109_c_16L毫光遽閟法運終湮㙮廟湧空

008_0109_c_17L玄珠示珎凝川報祀永綏千春

008_0109_c_18L遺像在堂爽氣氳氤結需賜復

008_0109_c_19L寵章式頻惟此一着盖飭戎袀

008_0109_c_20L非如前代渠敎是因三師齊享

008_0109_c_21L共作主賔酬功彰烈施及無垠

008_0109_c_22L我述其事刻之貞珉爰俾鶖子

008_0109_c_23L師義寔循毋泥虗寂追師濟屯

008_0109_c_24L
大匡轉國崇錄大去領中樞府事

008_0110_a_01L
표충사 기문 부록230)表忠祠記文付錄
1. 표충사의 기문
영남의 밀주(밀양)에 고故 의장義將 유정 대사의 유사遺祠가 있다. 대사는 밀주 사람이다. 선묘가 일찍이 그 지역에 사당을 세우라고 명하고,231) 그 이름을 표충사表忠祠라고 하였다. 그 뒤에 또 그의 스승인 휴정 대사도 그 사전祀典에 함께 배향配享하게 하였다.
임진왜란 때에 두 분 대사가 동시에 의병을 일으켰는데, 국가의 향사享祀가 유정을 먼저하고, 그의 스승을 나중에 한 것은 유정의 공이 더욱 드러났기 때문이다.
경성京城을 수복하고 나서 선묘宣廟가 환도할 적에 휴정이 호가扈駕하여 서울에 돌아와서 상에게 청하였다.
“신이 늙어서 곧 죽게 되었으니, 바라건대 군대의 일을 제자인 유정에게 맡기고 해골을 빌어 돌아갔으면 합니다.”
선묘가 그 뜻을 갸륵하게 여기고 윤허하였다. 이에 유정이 마침내 그 무리를 통솔하였으며, 왕명을 받들고 바다를 건너가서 만왕蠻王(왜왕)을 설득하여 화의和議를 이루었다.
내가 임진일기壬辰日記232)를 읽다가 화의가 이루어진 대목에 이르러 개연慨然히 탄식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때를 당하여 충신과 의사義士로서 국난에 달려가고 군부君父의 원수 갚는 것을 급하게 여긴 자들이 앞으로 나아가도 죽을 만한 땅이 없었고 보면, 휴정이 떠나간 것도 필시 이유가 있음을 내가 알겠다. 그런데 유정의 경우는 그의 스승과 거취를 같이하지 않았고, 또 화의를 성사시키기 위해 힘껏 협찬하였으니, 도대체 그 이유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이는 아마도 휴정은 경經에 가까워서 그 절개가 높아졌을 것이고, 유정은 권權에 가까워서 그 공이 넓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화의를 이루려고 한 것은 세상의 경대부卿大夫들이 많이 그 일을 주장하였으니, 유정이 아니라도 화의가 이루어지지 않을 걱정은 없다고 하겠지만, 유세遊說하는 사람이, 남이 겉으로 동의하는 것을 얻기는 쉬워도 남을 심복心服시키기는 어려운 법인데, 겉으로만 동의하면 그 이익이 한때에 그치고, 심복시키면 그 공이 후세에까지 미치게 되는 것이다.
저 섬 오랑캐는 본래 불교를 숭상하기 때문에 요순의 도를 가지고 교화시킬 수 없고 보면,

008_0110_a_01L宜顯撰

008_0110_a_02L

008_0110_a_03L表忠祠記文付錄

008_0110_a_04L表忠祠記

008_0110_a_05L
嶺南之密州有故義將惟政大師遺祠
008_0110_a_06L師密人也宣廟甞命就其地立祠而名
008_0110_a_07L爲表忠祠其後又以其師休靜大師
008_0110_a_08L腏其祀典壬辰之亂兩大師同時倡義
008_0110_a_09L而國家享祀先惟政而後其師者惟政
008_0110_a_10L之功尤著也京城旣復宣廟將旋軫
008_0110_a_11L休靜扈駕還都請於上曰臣老且死
008_0110_a_12L願以兵事付弟子惟政乞骸骨歸
008_0110_a_13L廟嘉其志許之惟政遂統其衆而奉命
008_0110_a_14L渡海說蠻王成其和議余讀壬辰日
008_0110_a_15L至和議之成慨然嘆曰當是時
008_0110_a_16L臣義士赴國難而急君讐者進無可
008_0110_a_17L死之地則休靜之去吾知其必有以也
008_0110_a_18L如惟政者不與其師同其去就而又
008_0110_a_19L爲之力賛其議抑又何哉盖休靜近於
008_0110_a_20L經而其節高惟政近於權而其功慱
008_0110_a_21L和議之成世之卿大夫多主其事
008_0110_a_22L非惟政而不患其不成而遊說之士
008_0110_a_23L得人之貌易服人之心難得其貌者
008_0110_a_24L利止於一時服其心者功反 [27] 於後世
008_0110_a_25L彼島夷者素崇佛敎堯舜之道所不

008_0110_b_01L진정 그 형세에 따라 유도해야 하는 일도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유정이 마침내 불씨佛氏의 설을 가지고 그들을 유도하자, 그들이 감탄하고 탄식하며 바람에 풀이 쓸리듯 심복한 것이니, 이것이 어찌 구구한 변설辯舌을 가지고 얻을 수 있는 것이겠는가. 국가가 그 이익을 향유한 것이 지금 어언 백여 년이 되었고 보면, 유정이 휴정과 같이 떠나가지 않은 그 뜻이 또한 위대하다고 하겠다.
내 생각에, 휴정은 뒤로 물러가서 도를 지켰고, 유정은 몸을 굽혀 중생을 제도하였으나, 이는 각기 의의가 있는 일로서 나라를 위한 충성심은 매한가지라고 여겨진다.
대사의 법손인 남붕南鵬이 사기祠記를 나에게 부탁하기에 내가 특별히 두 대사의 일은 다르지만 마음은 같다는 것을 써서 후세의 군자로 하여금 상론尙論233)하게 하는 바이다.
무오년(1738, 영조 14) 9월에 연안延安 이천보李天輔 의숙宜叔은 기문記文을 짓다.
2. 영남 밀주부 영취산 표충사 홍제당의 기문
임진왜변 때에 승의장이었던 홍제 존자弘濟尊者 유정의 5세 법손인 남붕이 남쪽 재를 넘어 경사京師에 와서 유정의 스승인 보제 존자普濟尊者 휴정 및 그 동문 사리闍梨인 기허당騎虛堂 영규靈圭를 유정의 예에 의거하여 똑같이 향사享祀하게 해 달라고 상신相臣을 통해 상에게 아뢰어 윤허를 받았다. 이에 이른바 표충사를 밀주 영취산 삼강동三綱洞234)에 중건하여 세 대사의 유상遺像을 봉안하고 당액堂額을 홍제弘濟라고 내걸었으니, 이는 대개 홍제와 보제 모두 선묘가 하사한 호235)이지만 삼강三綱이 바로 홍제 대사가 병석甁錫을 머문 옛 땅이기 때문이었다.
남붕이 와서 나에게 그 일을 기록해 달라며 근실하게 재삼 청하여 마지않기에 내가 사양할 수 없어서 마침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 당黨의 사람들이 부도浮屠를 공격할 때에는 으레 말하기를, “저들은 머리를 깎고 먹물 옷을 입고서 성리性理를 떠나고 윤강倫綱을 버린 이교異敎의 사람들이니 마땅히 배척해야지 인정하면 안 된다.”라고 한다.
대저 윤강은 군사君師보다 큰 것이 없고,

008_0110_b_01L可化則事固有因其勢而導之者惟政
008_0110_b_02L遂以佛氏之說誘之彼迺咨嗟太息
008_0110_b_03L然嚮服是豈區區辯說所可得者
008_0110_b_04L國家之享有其利至今百有餘年則惟
008_0110_b_05L政之不去者其志亦偉矣吾謂休靜之
008_0110_b_06L退身守道惟政之屈己濟物各有其義
008_0110_b_07L而其忠於爲國一也師之法孫南鵬
008_0110_b_08L祠記屬余余特書兩師之事異而心同
008_0110_b_09L使後之君子尙論焉

008_0110_b_10L
戊午季秋延安李天輔宜叔記

008_0110_b_11L

008_0110_b_12L嶺南密州府靈鷲山表忠祠弘濟堂記

008_0110_b_13L
壬辰倭變時僧義將弘濟尊者惟政五世
008_0110_b_14L法孫南鵬踰南嶺至京師以惟政之師
008_0110_b_15L普濟尊者休靜及其同門闍梨騎虛堂
008_0110_b_16L靈圭依惟政例一體享祀事因相臣
008_0110_b_17L白于上蒙可乃重建其所謂表忠祠于
008_0110_b_18L密州靈鷲山三綱洞將以奉三大師遺
008_0110_b_19L揭堂額曰弘濟盖弘濟普濟皆宣
008_0110_b_20L廟御賜號而三綱即弘濟大師甁錫故
008_0110_b_21L地也鵬來請余記其事至再三猶勤
008_0110_b_22L余不能辭逐爲之言曰吾黨之士
008_0110_b_23L浮屠必曰彼髠而緇離性理而斁倫
008_0110_b_24L異敎也宜絀而不宜與夫倫綱莫

008_0110_c_01L성리性理는 충신忠信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저들이 비록 머리를 깎고 먹물 옷을 입었다 하더라도, 그 스승과 제자가 참으로 신심을 가지고 서로 주고받으며, 군신의 대의에까지 미루어 나아가 각기 그 충절을 다하였다면, 이와 같은 자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이교라고 탓할지라도 나는 우리 당의 사람이라고 추천하고자 한다.
세상에서 소위 유관儒冠을 쓰고 성현을 숭상하며 서로 스승과 제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나름대로 한번 살펴보건대, 평소에 강론할 때에는 스스로 성리에 밝다고 하지만 성리는 더욱 어두워지고, 또 윤강을 바로잡는다고 하지만 윤강은 날로 문란해져서 결국에는 성취한 바가 도리어 이교의 아래에 나오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저들이 실행하는 것은 없이 한갓 노망鹵莾한 것으로 서로들 속이려 하기 때문이니, 이렇게 되는 것도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다고 하겠다.
아, 임진왜란을 어떻게 차마 말하겠는가. 흉악한 칼날이 온 나라에 가득 차서 열군列郡이 와해되고 경사京師 역시 지키지 못하여 선묘宣廟가 용만龍灣(의주)으로 거둥하였으니, 국가의 위망이 호흡 사이에 박두하였다.
이런 때에 부도 휴정이 묘향산에서 그 무리를 이끌고 창의倡義하여 칼을 차고 행재行在에 나아가니, 선묘가 소견召見하고 손수 그린 묵죽도墨竹圖를 특별히 하사하며 가장嘉獎하는 한편 그를 명하여 팔도도통섭의병장八道都統攝義兵將으로 삼았다.
얼마 뒤에는 제자 해안海眼이 진주에서 일어났고, 유정이 관동에서 일어났고, 영규가 금성錦城(나주)에서 일어났다. 세 사람이 각자 승도를 모집하여 왜적을 토벌하였는데, 유정과 영규가 더욱 분발하여 스스로 격려하며 군사君師를 저버리지 않으리라 맹서하였다. 이때를 당하여 초야의 의사義士로서 국난에 달려간 자가 한둘이 아니었으나, 부도 휴정의 무리가 더욱 성대하였으니, 이 또한 기이한 일이었다고 하겠다.
휴정은 도독都督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평양의 왜적을 격파하는 공을 세우고 나서 곧장 늙고 병들었다는 이유로 사양하며 돌아갔고, 영규는 중봉 선생重峰先生 조헌趙憲을 따라 금산錦山의 전투에서 순국하니, 그 절의節義가 탁연卓然하였다.
오직 유정만은 시종 충의를 떨쳐 국난을 구제하였으니, 그 공이 두 대사에 비해서 더욱 드러났다.

008_0110_c_01L大於君師而性理不外乎忠信彼雖髠
008_0110_c_02L而緇其師弟子苟有能以信心相授受
008_0110_c_03L推至於君臣大義各盡其忠節焉則若
008_0110_c_04L是者人病其異敎而吾則欲進之吾黨
008_0110_c_05L竊甞觀夫世之所謂儒冠而宗聖賢
008_0110_c_06L相號爲師弟子者平居講討自以爲明
008_0110_c_07L性理而性理愈晦又以爲整倫綱
008_0110_c_08L倫綱日紊畢竟所成就乃反出異敎下
008_0110_c_09L何哉彼無其實而徒欲以鹵莾相詐焉
008_0110_c_10L無恠乎其如此也嗚呼壬辰之變
008_0110_c_11L豈忍言哉㐫鋒充斥列郡瓦解京師
008_0110_c_12L亦不能守宣廟幸龍灣國之危亡
008_0110_c_13L于呼吸於是浮屠休靜自妙香山
008_0110_c_14L其徒倡義帶釼而詣行在宣廟召見
008_0110_c_15L特賜御畫竹圖嘉獎焉仍命爲八道都
008_0110_c_16L統攝義兵將已而弟子海眼起于晋州
008_0110_c_17L惟政起于關東靈圭起于錦城三人各
008_0110_c_18L自募衆討賊而惟政靈圭尤奮發自勵
008_0110_c_19L誓不負君師當是時草野義士赴國
008_0110_c_20L難者非一而浮屠休靜之徒尤盛其亦
008_0110_c_21L奇矣哉休靜與李都督如松破平壤賊
008_0110_c_22L有功旋辭以老病歸靈圭從重峰先生
008_0110_c_23L趙憲同殉于錦山之戰其節卓然
008_0110_c_24L唯惟政終始忠紓難其功視兩師尤

008_0111_a_01L그리고 가령 전진戰陣에 출입하여 담소하며 교만한 적을 제압한 것은 역생酈生236)의 기변奇辯이요, 사지死地에 임금의 명을 받들고 가서 불의에 항거하며 사명使命을 욕되지 않게 한 것은 부정공富鄭公237)의 정기正氣요, 상소하여 둔전책屯田策을 아뢰고 군대의 작전을 설명한 내용 모두가 시행할 만했던 것은 조영평趙營平238)의 방략方略이었다. 고인古人의 세 가지 어려운 일을 한 몸에 갖추었으니, 이 얼마나 위대하다고 하겠는가.
아, 세 분 대사의 공렬이 이와 같이 기위奇偉한 것은 근본적으로 연유하는 바가 있으니, 그것은 대개 그들이 평일에 주고받은 것이 오직 신심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신심이 이미 두터워진 위에 서로 의지하는 것이 또 깊어진 상태에서 하루아침에 서로 감발感發함에 미쳐서는 감응하는 것이 귀신과 같았기 때문에, 비록 각 사람이 천 리 밖에 떨어져 있더라도 한 사람이 선창先唱하자 다른 사람들이 모두 떨쳐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불살생의 그 계율에 구애받지 않고 격발激發된 것이 의기義氣이기 때문에 권유하기를 기다릴 필요도 없이 일제히 충절로 달려간 것이니, 나아가고 물러갈 때와 살고 죽을 때에 자취는 비록 달라도 마음은 동일하여 마침내 임금과 신하의 의리와 스승과 제자의 도가 모두 유감이 없게 된 것이다. 세 분 대사와 같은 이는 참으로 종교는 다르지만 우리 당黨을 도운 분들이라고 하겠다.
아,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의 침략을 당하지 않은 것이 백여 년이 되었는데, 인심은 날로 더욱 투박해지고 세도世道는 날로 더욱 저하되는 실정이다. 지금 이후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만이지만, 불행히도 임진왜란 때와 같이 창졸간에 변란이 일어난다면, 세상의 소위 유관儒冠을 썼다고 하는 자들은 믿을 것이 못 된다는 것을 내가 본시 알고 있다. 충의를 바쳐 공을 세울 수 있는 것은 그래도 이교의 사람들에게 바랄 수 있겠기에 지금 내가 이 당堂의 기문을 쓰면서 거듭 이 때문에 크게 탄식하는 바이다.
무오년(1738, 영조 14) 9월 하순에 풍양豊壤 조재호趙載浩 경대敬大는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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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과 송운 두 대사의 사적事蹟에 대해서는 기술한 자들이 많으니, 내가 또 무슨 말을 하겠는가.
아, 저 불자佛者들은 어떤 자들인가. 눈썹을 치켜뜨고 눈알을 부라리며

008_0111_a_01L至若出入戰壘談笑而制驕敵酈生
008_0111_a_02L之奇辯也奉君命於死地抗義而不辱
008_0111_a_03L富鄭公之正氣也䟽奏屯田指畫兵機
008_0111_a_04L其言皆可施用趙營平之方略也一身
008_0111_a_05L而備古人之三難何其偉也嗚呼
008_0111_a_06L大師功烈若是其奇偉者其本有自
008_0111_a_07L盖其平日所授受唯在乎信心信心旣
008_0111_a_08L相須也深至其一朝相感發其應如
008_0111_a_09L神故雖各在千里外而一人先倡
008_0111_a_10L人俱奮不抱乎其戒律而所激者義氣
008_0111_a_11L不必待其勸誘而一趨於忠節其進退
008_0111_a_12L生死之際跡雖殊而心則同卒之君臣
008_0111_a_13L之義師弟子之道俱無憾焉如三大
008_0111_a_14L師者眞可謂異敎而翼吾黨者也
008_0111_a_15L我國不見他國干戈已百年餘矣人心
008_0111_a_16L日以益婾世道日以益下自今而徃
008_0111_a_17L苟無事則已不幸有倉卒之變如壬辰
008_0111_a_18L則世所謂儒冠者吾固知其無足恃
008_0111_a_19L其能效忠義而有樹立猶有望於異
008_0111_a_20L今吾記是堂而重爲之太息焉耳

008_0111_a_21L
戊午九月下澣豊壤趙載浩敬大記

008_0111_a_22L
008_0111_a_23L
西山松雲二師之蹟記述者衆矣吾復
008_0111_a_24L何說而噫彼佛者何也撑眉弩眼

008_0111_b_01L몽둥이질을 하고 총채를 곧추세우는 것을 본시 본지풍광으로 삼을 뿐, 군신의 의리와 윤상倫常의 중함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이 자비심을 발휘하여 널리 구제한다(普濟慈悲)고 하는 설도 오직 살리는 것을 좋아하고 죽이는 것을 싫어하는 것으로 마음을 삼으니, 우리 유자儒者들이 포악한 난적亂賊을 제거하여 살리는 도(生道)로 사람을 죽이는 것과는 거리가 멀 뿐만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저 두 대사는 그들의 율법에 얽매이지 않고서 능히 창졸의 사이에 기의起義를 하였고, 위란危亂의 즈음에 절의를 온전히 하였다. 그리하여 마니摩尼에 전루戰壘의 피를 물들이고, 보장寶杖에 만추蠻酋의 머리를 매달아 끝내 성취한 것이 거의 중봉重峰(趙憲)ㆍ제봉霽峰(高敬命) 등 제 선생의 반열에 오르내릴 정도가 되었다.
그렇다면 그들이 평일에 법석에 앉아서 현리玄理를 설한 것이 바로 군신의 대의를 강론하고 윤상의 정도正道를 궁구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어찌하여 그들이 수립한 바가 포악한 난적을 제거하는 우리 유자의 도와 어긋나지 않게 되었단 말인가.
아, 돌아보건대 유자의 관을 쓰고 유자의 옷을 입고서도 웅어熊魚를 구별하지 못하는 저들239)이 이 두 대사의 기풍을 얻어듣는다면 어찌 부끄러워서 그 이마에 땀이 흐르지 않겠는가. 내가 두 대사의 충의를 장하게 여기는 동시에 말세의 기절氣節이 나른해진 것을 개탄하여 이렇게 써서 후인의 경계로 삼는 바이다.
기미년 1월 하순에 임천林川 조덕유趙德鍒는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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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東國의 사대부가 임진왜란 때에 죽을 수 없었고 보면, 죽는 것보다는 나은 화의和議 하나가 있었을 뿐이다. 당시에 중국 조정의 장수와 재상 가운데 화의를 말하는 자가 반절은 되었는데, 천하가 함께 이를 주창하여 관개冠蓋(사신의 수레)가 교악蛟鰐 사이에 서로 바라다보일 정도였으나, 담설談說이 갈수록 많아지면서 시간이 오래 흘러도 합의를 보지 못하였다.
그런데 유정이 불교인의 신분으로 석장杖錫을 짚고 바다를 건너가 조용히 칼과 창의 숲에서 담소하며 처리하자, 올빼미 심장과 돼지 창자를 지닌 평행장平行長240) 같은 자까지도 납작 엎드려서 대사의 말을 들었으니, 지금 2백 년이 되도록 변방의 이졸吏卒들이 무사한 것은 실로 송운 유정이 힘쓴 덕분이라고 하겠다.

008_0111_b_01L搥竪拂者自是本地風光而不知有君
008_0111_b_02L臣之義倫常之重且其所謂普濟慈悲
008_0111_b_03L之說唯以好生惡殺爲心與吾儒誅暴
008_0111_b_04L去亂以生道殺人者不翅相遠而彼兩
008_0111_b_05L不拘其法能起義於倉卒之間
008_0111_b_06L節於危亂之際摩尼染戰壘之血寶杖
008_0111_b_07L懸蠻酋之䤋畢竟成就殆欲上下於重
008_0111_b_08L峰霽峰諸先生之列則其平日坐法說
008_0111_b_09L玄者無乃講君臣之大義究倫常之正
008_0111_b_10L道耶不然何其所樹立不背於誅暴亂
008_0111_b_11L之吾道也顧彼冠儒服儒而忘君負
008_0111_b_12L不卞熊魚者聞此二師之風豈能
008_0111_b_13L不泚於其顙歟吾旣壯二師之忠義
008_0111_b_14L慨叔季氣節之骪骳書此以爲後人戒

008_0111_b_15L
歲己未上春下澣林川趙德鍒

008_0111_b_16L
008_0111_b_17L
東國士大夫不能死於壬辰之難則惟
008_0111_b_18L有和議愈於死而已當時天朝將相
008_0111_b_19L言和者半天下同唱之冠盖相望於蛟
008_0111_b_20L鰐之間談說愈萬而久猶不諧焉
008_0111_b_21L政佛人也杖錫渡海從容於刀鋋之藪
008_0111_b_22L談笑而處之惟其梟心豕膓至有如平
008_0111_b_23L行長而俯伏而聽之至今二百年
008_0111_b_24L吏卒無事繄松雲惟政實有力焉

008_0111_c_01L
밀주密州에 사당이 있으니, 이는 선묘가 일찍이 세우게 하여241) 그 충성을 표창한 것이다. 그 이름을 표충表忠이라고 한 것도 어찌 이 때문이 아니겠는가.
사당 한쪽에 노선老禪을 배향하였는데, 그 이름은 휴정이니, 곧 대사의 스승이다. 대사가 의병을 규합하여 국난에 달려가서 본시 스승과 함께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그 발우를 전함에도 유법遺法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배향하게 된 것이다.
그의 법손인 남붕이 『난중일기』를 가지고 와서 두루 진신縉紳 사이를 찾아다니며 시문을 빌어 대사의 공을 선양하려고 하였다. 나는 글에 능하지 못하니, 어떻게 우리 스님의 성의에 부응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스님이 근일에 출발한다면서 나를 더욱 독촉하기에 그를 위해 기록해서 나의 이름을 전축牋軸의 말미에 붙이고 수염을 기른 대사의 위엄을 돕게 되었다.
무오년 9월 하순 총융사摠戎使 ▣▣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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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에 칠치漆齒242)가 짓쳐들어와서 사직社稷이 전복되고 난여鑾輿가 초망草莽으로 파천播遷하였다. 이때에 지혜와 용기가 모두 다하여 아무도 감당할 수가 없었는데, 송운 대사 유정이 그만 부도浮屠의 신분으로 일어나서 무리를 모아 적을 섬멸하는 한편, 왕명을 받들고 적에게 사신으로 가서 활약한 그 공업功業이 탁월하여 매우 성대하였다.
아, 불자佛者에게는 임금이 없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비록 입주출노入主出奴의 설을 극력 주장하는 자243)라고 할지라도 과소평가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내가 알겠다. 그래서 조정에서 그를 위해 영남의 밀주密州에 사당을 세워서 향화로 보답하게 한 것이다.
지금 그 법손인 남붕이라는 자가 대사의 유사遺事를 가지고 와서 좌승상인 김 공 재로在魯에게 서문을 요청하고,244) 또 당세의 유명한 문장가들에게 부탁하여 노래하며 읊고 찬탄하게 하였다.
나는 본래 거칠고 누추하여 그의 요구에 부응할 수가 없으나, 그가 잘못 듣고서 세 번이나 내 집을 찾아와서는 간청해 마지않았다. 아, 유정이 나라를 위해 죽음을 잊은 것이나 남붕이 스승을 위해 서원誓願을 발한 것 모두가 귀중하게 여길 일로서, 아마도 명교名敎(儒敎) 내에서 찾아보아도 이에 짝할 만한 자가 드물겠기에

008_0111_c_01L之州有祠宣廟之所甞立祠以表其忠
008_0111_c_02L名曰表忠豈不以此也祠之堧有以老
008_0111_c_03L禪配者其名休靜靜即大師師也
008_0111_c_04L合義旅赴王師難固未嘗不與師同
008_0111_c_05L而其盂鉢之傳槩有遺法之故也其法
008_0111_c_06L孫南鵬袖亂中日記遍謁縉紳間
008_0111_c_07L詩若文以張大之余則不閑於文
008_0111_c_08L足以副吾師之勤意而師之行以近日
008_0111_c_09L督余尤力故爲之記得以厠名於
008_0111_c_10L牋軸之末彷象於髯鬚之威云爾

008_0111_c_11L
戊午暮秋下澣捴戎使▣▣潝

008_0111_c_12L
008_0111_c_13L
壬辰之燹㓒齒長驅社㮨翦焉鑾輿越
008_0111_c_14L在草莽惟時知勇俱竭莫之誰何
008_0111_c_15L雲師惟政迺以浮屠起募衆殲賊
008_0111_c_16L命使敵功業卓焉甚茂噫 其可謂佛
008_0111_c_17L者無君哉雖力爲入主出奴之說者
008_0111_c_18L知其不可少也朝廷爲立祠于嶺南之
008_0111_c_19L以香火酬之今其法孫南鵬者
008_0111_c_20L持師遺事徵序于左承相金公 [28] 又屬之
008_0111_c_21L當世名能文者歌咏賛歎之余固荒陋
008_0111_c_22L無能塞其求者鵬也過聽三踵門索之
008_0111_c_23L不已烏雽政之圖 [29] 國忘死鵬之爲師發
008_0111_c_24L俱可貴重殆名敎內罕與疇者

008_0112_a_01L마침내 한참 동안 감탄하다가 시축詩軸 중의 운韻에 맞게 시를 지어서 그에게 주었다.245)
지평持平 정기안鄭基安.
송운에게 찰밥을 보내며246), 247)(送糯飯于松雲)
欲問君民世已徂      군민을 묻고 싶어도 세상이 이미 멀어
區區炊飯報啣書      구구히 찰밥 지어 편지 전한 보답 하네248)
悲歡不及前朝▣      비환은 전조의 예우에 미치지 못하오나
願飼吾師屋上烏      우리 스님 지붕의 까마귀 먹여 주셨으면249)
환성사로 송운을 찾아가다250)(環城寺訪松雲)
九十韶光病裏過      구십 일 봄빛을 병중에 보내면서
有時來到法王家      이따금 부처의 집 찾곤 하는데
宿雲未散還歸去      묵은 구름 걷히기 전에 돌아가야지
恐有山中含笑花      산중에 함소화 있을지도 모르니까251)
송운에게 주다252)(贈松雲)
世間交道易親踈      세간의 사귐은 쉽게도 친했다 멀어졌다
獨喜山中全鶴書      오직 기뻐라 산중의 학서에 온전한 분253)
月上西窓人定後      인정254) 지나 달이 서쪽 창에 오르는 때
臥思今古到桑輿      누워서 고금 생각하다 상여255)에 이르렀소
송운이 풍악에 들어가는 것을 전송하다256)(送松雲入楓嶽)
楓嶽岡巒第幾層      풍악의 강만 제 몇 층에 오를 때까지
須知步步著金繩      걸음마다 금승257)을 잡으실 줄 알고말고
蒼茫未了鴻泥迥      창망히 홍니258) 멀어지매 미련이 남아
縹緲難廻鶴夢凝      표묘히 학몽259) 엉겨 돌리기 어려워라
雙筆爭傳數萬甲      쌍필은 수만 갑을 다투어 전하고260)
一枝分照百千燈      일지는 백천 등으로 나뉘어 비추리261)
天香滿院烏肩靜      천향 가득한 사원에 고요한 오견262)이여
栢樹柔桑是後徵      잣나무와 어린 뽕이 뒤에 증명하리라263)
송운 스님에게 드리다264)(贈松雲師)
楓嶽之高在雲間      스님 계신 풍악은 높이 구름 사이에 있고
環城之山接塵區      내가 있는 환성의 산은 속세와 접해 있네
雲間本無金章紫綬之貴人  구름 사이엔 금장 자수265)의 귀인이 본래 없나니
塵區安有五通六通之道流  속세에 어찌 오통 육통266)의 도류가 있으리오
偶然得遇不我捨      우연히 만난 인연을 나는 잊지 못하건만
本自無之寧我求      본시 없다 여기리니 나를 어찌 찾으리오
彼不求此不捨      그대 찾지 않아도 나는 잊지 못하는데
造物從令馬虺隤      조물이 또 나의 말을 비루먹게 하는구려267)
吾聞大觀不在物      내 듣건대 대관268)은 외물에 있지 않나니
秋毫太山同崔嵬      추호나 태산이나 높은 것은 마찬가지269)
靑蓮汚泥有何妨      청련이 진흙에 있은들 무슨 상관이리오
須信維摩住城裏      유마가 마을에 거한 것을 믿어야 하리이다
安知亦念孫儒仙      그래도 손유선270)을 생각하여 때때로 멀리
有遠傳蓮經義      연경의 뜻 전해줄는지 어찌 알겠소만
不如俯循山靈意      그보단 산령의 뜻 따르는 게 나을지도271)
山中亂石且有耳      산중의 난석도 들을 귀가 있을 테니까272)
승대장 송운에게 드리다273)(贈僧大將松雲)
斗南東院兩超常      두남과 동원 둘 다 비범하신 분이건만274)
忘揖猶須更臥床      망읍275)은 오히려 또 침상에 누울 수밖에
鬼火却收橫釼手      귀화를 칼 비껴든 손으로 문득 수습하니
宗風吹送望雲香      종풍이 망운의 향기를 불어 보내네276)
世間名字黃金重      황금보다 중한 세간의 명성이요
像外禪心白日長      해가 길기만 한 물외의 선심이라
擬借末容容四大      말용을 빌려 사대를 담고도 싶소마는277)
石頭行滑滿蹊霜      석두의 길 미끄럽고 서리 가득하니 원278)

지산芝山 조 선생曹先生은 휘가 호익好益이고 자는 사우士友이며, 도잠서원道岑書院에서 제향祭享을 받고 있다. 선생의 6세손인 덕신德臣이 송운의 친필 시찰詩札을 표충사에 보냈기에 감격하여 전운前韻에 차次하였는데, 그 시는 다음과 같다.

芥緣恨末幷時生      개연279)은 동시대에 태어나지 못함이 한스러워
願聽圓音拜覺城      원음圓音을 듣고 각성覺城에 절하고 싶었다오
滿地干戈悲國勢      땅 가득 병화病禍 입은 국세國勢를 슬퍼하고
和戎籌策慰輿情      화전和戰의 계책으로 여정輿情을 위로했다네
飛笻北岳重尋約      북악에 석장錫杖 날려 다시 약속 지켰나니280)
留績東華久罷兵      오래 군대 파한 업적 도성에 남겼다오
何幸騷仙傳舊律      소선蘇仙281)이 옛 시 전해 줘서 얼마나 다행인지
爲營秋祀促南行      가을 제사 준비하러 얼른 남으로 떠나야지

무술년(1778, 정조 2) 봄에 내가 종정宗正의 직임을 받아 8월에 향사享祀하러 남으로 내려가던 도중에 영지사靈芝寺에 머물러 묵었는데, 아침에 한 소선騷仙을 뵈었으니, 그는 바로 도잠서원에 배향된 조 선생曹先生의 6세손 덕신이었다. 한번 보고는 옛날부터 안 것처럼 기뻐하였으니, 그것은 나도 송운의 9세손이기 때문이었다. 그가 곧바로 오래된 상자 속에서 한 폭의 시찰을 꺼내어 보여 주었는데, 그것은 바로 법조法祖가 도해渡海할 적에 간청한 친필이었으며, 이와 함께 또 그 시질詩帙 중에서 약간 편을 보여 주었는데 그것 역시 간절히 위촉하는 내용이었다. 크도다, 고로古老의 방외의 우정과 금인의 통가通家의 우호가 어찌 시詩로 인한 인연이 아니겠는가. 대개 이 시운詩韻은 당시에 제로諸老가 모두 수창酬唱한 것인데, 지금 또 선생의 보타寶唾(시)를 보니 원율元律을 따라 차운次韻한 것이라서 기쁘기만 하다. 이를 간행하여 후세에 보여 주면 장차 보고 느끼는 점이 있을 것이다.
건륭乾隆 43년(1778, 정조 2) 무술년 9월 모일에 9세 법손 의민毅旻은 삼가 발문을 쓰다.
비국이 하달한 공문
예조禮曹에서 거행하는 일이다.
이번에 비변사에서 받은 감결甘結282)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표충사의 삼대三大 현사賢師를 향사하는 한 조목은 실로 충성을 표창하고 의기義氣를 장려하려는 조가朝家의 성의盛意에서 나온 것이니, 사당을 세우고 초상을 그리고 제례를 모시는 제반 절차를 반드시 신성하게 수정修整한 뒤에야 듣는 모든 이들을 용동聳動시킬 것이다.
사명 대사의 『분충서난록奮忠紓難錄』 2권도 목판을 얻어서 경사京師에 진상하고, 또 인쇄하여 팔로八路의 여러 사찰과 산성山城에 보내되, 도총섭都摠攝은 묘당廟堂이 분부한 사의辭意를 가지고 개유開諭하여 보낼 것이다.
춘추로 제향祭享하는 날짜는 일체 각 관官의 서원書院의 예에 의거하여 시행하되, 헌관獻官과 유사有司는 경학經學과 재지才知로 명망이 있는 대사大師를 차정差定하여 거행하고, 재랑齋郞과 축사祝司는 과거에 남북한총섭南北漢摠攝의 경력이 있는 자를 또 차정하여 시행함으로써 아무렇게나 자리를 메우는 폐단이 없도록 할 것이다.
사당을 지키고 제물을 받드는 자에 대해서는, 이미 비국備局의 관문關文(공문) 안에 잡역을 면제하고 수호하게 하라는 영令이 있으니, 그 승도들 중에서 택하여 정할 것이다.
이번에 도총섭은 이미 묘당의 명령을 받아서 선교도총禪敎都摠으로 특별히 차임하였으니, 승풍을 바로잡고 아름답지 못한 폐단을 징치懲治할 것이다.
무릇 이렇게 설시設施하는 거조는 예전과는 자별한 만큼, 반드시 주관하는 도대선사都大禪師를 두어서 상의하여 거행할 것인바, 그 직첩을 만들어 보낼 것이다. 이는 모두 예사로운 격식이 아니니, 남북한총섭이 다 함께 관문을 통해 서로 호응할 것이요,

008_0112_a_01L感歎良久次軸中韻以貽之

008_0112_a_02L
持平鄭基安

008_0112_a_03L

008_0112_a_04L1)備局甘結關

008_0112_a_05L
禮曺爲擧行事今此備邊司捧甘內表
008_0112_a_06L忠祠三大賢師享祀一欵實出於朝家
008_0112_a_07L褒忠獎義之盛意是置建祠繪像享禮
008_0112_a_08L諸節必須神明修整然後可以聳動羣
008_0112_a_09L聽是旀四溟大師奮忠紓難錄二卷
008_0112_a_10L得刊板以爲進上京師而亦爲印送于
008_0112_a_11L八路諸寺刹諸山城是乎矣都捴攝以
008_0112_a_12L廟堂分付內辭意論開以送爲旀春秋
008_0112_a_13L祭享日字一依各官書院例施行是乎
008_0112_a_14L獻官有司段經學才知有名聞大
008_0112_a_15L差定擧行而齋郞祝司段置曾經
008_0112_a_16L南北漢捴攝亦爲差定施行俾無苟簡
008_0112_a_17L充位之弊爲旀守廟及祭物奉侍段
008_0112_a_18L有備局關內除雜役守護之令則以其
008_0112_a_19L僧徒中擇定爲旀今此都捴攝旣荷
008_0112_a_20L廟堂之令而以禪敎都捴特差則紏正
008_0112_a_21L僧風懲勵不美之弊是旀凡此設施之
008_0112_a_22L與前自別必有主管都大禪師
008_0112_a_23L議擧行是乎等以職帖成送此皆不是
008_0112_a_24L常格是去乎南北漢捴攝并以通關相

008_0112_b_01L조정의 명령이 있으면 즉각 거행하여 영구히 폐단 없이 준행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그래서 공문을 보내는 바이니 살펴보고 시행하도록 하라. 이상.


유공질有功秩시임時任
선교양종정사禪敎兩宗正事 국일도대선사등계國一都大禪師登階 설송당雪松堂 연초演初.
선교대선사禪敎大禪師 양종도총섭兩宗都摠攝 수호규정守護糾正 취암당翠巖堂 낭총朗聰.

종사질宗師秩유공有功
월화당月華堂 뇌진雷振, 호암당虎巖堂 체정體淨, 사송 최백四松最白, 탄원坦圓, 설순雪淳, 계봉 혜정雞峯慧淨, 월암 채숙月岩采淑, 선축善竺, 능찬能賛, 수안秀眼, 금화錦華, 행언幸彦, 설담雪湛, 기성 쾌현璣城快賢, 이열以悅, 지명智明, 법린法獜, 청변淸卞, 벽오 삼성碧悟三性, 시유사時有司 학림鶴林, 금곡 희유金谷禧有, 협해狹海, 진흘眞屹, 최탄最坦, 나식懶湜, 혜심慧心, 응진應眞.

비변사備邊司유공有功
고세유高世瑜, 엄한붕嚴漢朋, 김창린金昌獜.

예조禮曹유공有功
강후상姜後尙, 송시성宋時聖.

수어청守御廳유공有功
김여창金麗昌.

경상본영慶尙本營유공有功
김유형金有亨, 김재명金再鳴, 김용손金龍孫, 권한장權漢章, 권숭성權崇聖, 김후명金厚鳴, 이대근李大根, 김태륜金泰崙, 윤정린尹廷獜, 권택항權宅恒, 김운손金雲孫, 박봉택朴鳳澤, 김동욱金東郁, 권성흥權聖興, 김응명金應鳴, 김덕유金德裕, 권창동權昌東, 윤삼징尹三徵, 김지린金趾獜『분충록奮忠錄』을 서사書寫하였다., 담화曇華, 지성智性, 인찬仁賛, 조감照鑑, 명찬明賛, 신눌信訥, 임초任初, 명학明學, 최정호崔廷湖.

본부本府유공有功
호戶 엄세덕嚴世德, 이吏 정취도丁就道, 예禮 백명채白明采,

008_0112_b_01L凡有朝令劃即擧行而以爲永久
008_0112_b_02L無弊遵行之地宜當合下行照驗施行
008_0112_b_03L須至帖者右帖下

008_0112_b_04L
2)有功秩時任 [11]

008_0112_b_05L
禪敎兩宗正事國一都大禪師登階雪松
008_0112_b_06L堂演初
008_0112_b_07L禪敎大禪師兩宗都捴攝守護紏正翠巖
008_0112_b_08L堂朗聦

008_0112_b_09L
宗師秩
月華堂雷振虎巖堂體淨
008_0112_b_10L四松最白坦圓雪淳雞峯慧淨月岩
008_0112_b_11L采淑善笁能賛秀眼錦華幸彥
008_0112_b_12L雪湛璣城快賢以悅智明法獜
008_0112_b_13L淸卞碧悟三性時有司鶴林金谷禧有
008_0112_b_14L狹海眞屹最坦懶湜慧心應眞

008_0112_b_15L
備邊司
高世瑜嚴漢朋金昌獜

008_0112_b_16L
禮曹
差後尙宋時聖

008_0112_b_17L
守御廳
金麗昌

008_0112_b_18L
慶尙本營
金有亨金再鳴金龍孫
008_0112_b_19L權漢章權崇聖金厚鳴李大根金泰
008_0112_b_20L尹廷獜權宅恒金雲孫朴鳳澤
008_0112_b_21L東郁權聖興金應鳴金德裕權昌東
008_0112_b_22L尹三徵金趾獜奮忠
書寫
曇華智性仁賛
008_0112_b_23L照鑑明賛信訥任初明學崔廷湖
008_0112_b_24L本府
戶嚴世德吏丁就道禮白明

008_0112_c_01L

008_0112_c_01L此上甲本有文如下「送糯飯于松雲欲問君民
008_0112_c_02L世已徂區區炊飯報啣書悲歡不及前朝(缺)
008_0112_c_03L飼吾師屋上烏環城寺訪松雲九十韶光病裏過
008_0112_c_04L有時來到法王家宿雲未散還歸去恐有山中含
008_0112_c_05L笑花贈松雲世間交道易親踈獨喜山中全鶴書
008_0112_c_06L月上西窓人定後臥思今古到枽輿送松雲入楓
008_0112_c_07L楓嶽岡巒苐幾層須知步步著金繩蒼茫未了
008_0112_c_08L鴻泥迥縹緲難廻鶴夢凝雙筆爭傳數萬甲一枝
008_0112_c_09L分照百千燈天香滿院烏肩靜栢樹柔桑是後徵
008_0112_c_10L贈松雲師楓嶽之高在雲間環城之山接塵區
008_0112_c_11L間本無金章紫綬之貴人塵區安有五通六通之
008_0112_c_12L道流偶然得遇不我捨本自無之寧我求彼不求
008_0112_c_13L此不捨造物從令馬虺隤吾聞大觀不在物秋毫
008_0112_c_14L太山同崔嵬靑蓮汚泥有何妨須信維摩住城裏
008_0112_c_15L安知亦念孫儒屳有遠傳蓮經義不如俯循山靈
008_0112_c_16L山中亂石且有耳(時) 贈僧大將松雲斗南東
008_0112_c_17L院兩超常忘揖猶須更臥床鬼火却收橫釼手
008_0112_c_18L風吹送望雲香世間名字黃金重像外禪心白日
008_0112_c_19L擬借末容容四大石頭行滑滿蹊霜芝山曹
008_0112_c_20L先生諱好益字士友享道岑書院六世孫德臣
008_0112_c_21L送松雲親筆詩札于表忠祠感次前韻芥緣恨末
008_0112_c_22L幷時生願聽圓音拜覺城滿地干戈悲國勢和戎
008_0112_c_23L籌策慰輿情飛笻北岳重尋約留績東華久罷兵
008_0112_c_24L何幸騷仙傳舊律爲營秋祀促南行戊戌春余忝
008_0112_c_25L荷宗正任至秋八月享祀次南行正宿于靈芝寺
008_0112_c_26L朝拜一騷仙即道岑院所享曹先生六世孫德臣
008_0112_c_27L喜有一見舊知余爲松雲九世孫故也即與舊篋
008_0112_c_28L中一幅詩札乃法祖渡海時所恳親筆仍又示其
008_0112_c_29L詩帙中略干篇眷眷有囑偉歟古老方外之契
008_0112_c_30L今人通家之好豈非詩緣盖此詩韻諸老皆酬
008_0112_c_31L而今又見先生之寶唾可喜元律追步壽榟示後
008_0112_c_32L將有觀感也夫乾隆四十三季戊戌九月日 九
008_0112_c_33L世法孫毅旻謹跋」
自此至「天學(次頁中段十
008_0112_c_34L五行)」甲本無有

008_0113_a_01L성조색成造色 황해징黃海澄.

감역監役유공有功
전前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 겸 규정糾正 취안翠眼, 전前 총섭摠攝 광헌廣軒, 가선嘉善 청우淸雨, 전前 총섭摠攝 학휘學輝, 경주진慶州鎭 도승통都僧統 운정雲淨, 안동 도유나都唯那 선인善仁, 영남 도공원都公員 대구진大丘鎭 순기順己, 진주진晋州鎭 도공원都公員 귀숙歸淑, 상주진尙州鎭 도공원都公員 신엄信嚴, 동래진東萊鎭 도공원都公員 건옥建玉.
경주진慶州鎭 열읍列邑 : 도령장都領將 임택任擇, 공원公員 귀민龜敏, 김해진金海鎭 소철邵哲, 성주진星州鎭 자담自淡, 가산진架山鎭 ▣▣, 선산진善山鎭 ▣▣, 인동진仁同鎭 ▣▣, 선눌禪訥, 벽한碧漢, 도준道峻, 치신致信, 장기長鬐 지안智安, 언양彦陽 충신忠信, 연일延日 두수斗秀, 청하淸河 육철陸哲.

영남총섭嶺南摠攝 대초서기大初書記 순한順漢, ▣▣▣▣ 가선嘉善 각철覺哲, 가선嘉善 최일最日.

각판刻板유공有功
도감都監 가선嘉善 의청義淸, 도찰都察 통정通政 원신圓信, 판사判事 관청管淸, 남한도총섭南漢都摠攝 겸 승대장僧大將 운계雲桂.특별히 지휘한 공로가 있었다.

영장질領將秩
무은武訔, 문익文益, 자해自海, 총안聰眼, 풍감豊甘, 건찰建察, 덕찬德賛.
울산蔚山 도령장都領將 성천性天, 공원公員 초백楚白, 영장領將 붕열朋悅ㆍ실영實英ㆍ혜심惠心ㆍ채청采淸.
영천永川 : 명주明珠, 공원公員 찬식賛湜.
흥해興海 : 회간會侃, 공원公員 순담順談.
안동진安東鎭 열읍列邑 : 도령都領 ▣▣, 청송靑松 학혜學惠ㆍ국징國澄, 영해寧海 최엄最嚴, 군위軍威 대근大根, 의성義城 신총信聰, 의흥義興 ▣▣, 예안禮安 ▣▣.
진주진晋州鎭 열읍列邑 : 도령장都領將 통정通政 본각本覺, 공원公員 인호印湖, 의령宜寧 영승領僧 유일惟日, 공원公員 현인玄印,

008_0113_a_01L成造色黃海澄

008_0113_a_02L
監役
前禪敎都捴攝兼紏正翠眼
008_0113_a_03L捴攝廣軒嘉善淸雨前捴攝學輝
008_0113_a_04L州鎭都僧統雲淨安東都唯那善仁
008_0113_a_05L南都公員大丘鎭順己晋州鎭都公員
008_0113_a_06L歸淑尙州鎭都公員信嚴東萊鎭都公
008_0113_a_07L員建玉慶州鎭列邑都領將任擇公員
008_0113_a_08L龜敏金海鎭邵哲星州鎭自淡架山
008_0113_a_09L善山鎭仁同鎭禪訥碧漢道峻
008_0113_a_10L致信長鬐智安彥陽忠信延日斗秀
008_0113_a_11L淸河陸哲

008_0113_a_12L
嶺南捴攝大初書記順漢▣▣▣▣
008_0113_a_13L善覺哲嘉善最日

008_0113_a_14L
刻板
都監嘉善義淸都察通政圓信
008_0113_a_15L判事管淸南漢都捴攝兼僧大將雲桂
008_0113_a_16L別有指
揮之勞

008_0113_a_17L
領將秩 武訔文益自海聦眼豊甘
008_0113_a_18L建察德賛蔚山都領將性天公員楚
008_0113_a_19L領將朋悅實英惠心采淸永川
008_0113_a_20L明珠公員賛湜興海會侃公員順談
008_0113_a_21L安東鎭列邑都領靑松學惠國澄
008_0113_a_22L寧海最嚴軍威大根義城信聰義興
008_0113_a_23L禮安晋州鎭列邑都領將通政本覺
008_0113_a_24L公員印湖宜寧領僧惟日公員玄印

008_0113_b_01L초계草溪 영승領僧 문익文益, 공원公員 치묵致默, 거제巨濟 유간有侃ㆍ지명智明, 남해南海 청안淸眼.
김해진金海鎭 열읍列邑 : 도령都領 낭심朗心, 채원采員 능택能擇, 서기書記 천안天眼, 영승領僧 찬영賛英 채순釆順, 창원昌原 도령都領 인해印梅, 공원公員 채안采安, 서기書記 최한最閑, 웅주熊州 영승領僧 선눌禪訥, 공원公員 선찰禪察, 칠원柒原 영승領僧 상륜尙倫, 공원公員 영각靈覺, 고성固城 영승領僧 보연寶演ㆍ혜징惠澄, 공원公員 법명法明.
대구진大丘鎭 열읍列邑 : 전前 총섭摠攝 가의嘉義 해숙海淑승손僧孫이기 때문에 특별히 고조顧助한 공이 있다., 청도淸道 도령都領 ▣▣, 공원公員 ▣▣.
밀양密陽 : 도령都領 영휘永輝ㆍ증혜證慧, 공원公員 준민俊敏, 영산靈山 옥림玉林, 창녕昌寧 영훈永勳ㆍ채명采明, 자인慈仁 한특漢特ㆍ현찰玄察ㆍ정원淨元, 경산慶山 재보再寶ㆍ덕순德淳, 현풍玄風 상민尙敏ㆍ위종位宗.
칠곡진읍㓒谷鎭邑 : 신녕新寧 도령都領 설순雪淳, 공원公員 도원道元, 하양河陽 영승領僧 선각善覺.
동래진읍東萊鎭邑 : 도령都領 계총戒聰ㆍ복성福性, 서기書記 금초錦初, 기장機長 영승領僧 ▣▣, 도서기都書記 광혜廣惠, 열읍도령장列邑都領將 천학天學.

부종수교扶宗樹敎 국일도대선사國一都大禪師 홍각등계弘覺登階 겸 선교양종정사禪敎兩宗正事 연초演初.

건륭 3년(1738, 영조 14) 9월, 판서判書 ▣▣, 참판叅判 ▣▣, 참의叅議 ▣▣, 정랑正郞 ▣▣, 좌랑佐郞 ▣▣.

008_0113_b_01L草溪領僧文益公員致默巨濟有侃
008_0113_b_02L智明南海淸眼金海鎭列邑都領朗
008_0113_b_03L采員能擇書記天眼領僧賛英
008_0113_b_04L昌原都領印梅公員采安書記最
008_0113_b_05L熊州領僧禪訥公員禪察㭍原領
008_0113_b_06L僧尙倫公員靈覺固城領僧寶演
008_0113_b_07L公員法明大丘鎭列邑前捴攝嘉
008_0113_b_08L義海淑僧孫故別
有顧助
淸道都領公員密陽
008_0113_b_09L都領永輝證慧公員俊敏靈山玉林
008_0113_b_10L昌寧永勳采明慈仁漢特玄察淨元
008_0113_b_11L慶山再寶德淳玄風尙敏位宗㓒谷
008_0113_b_12L鎭邑新寧都領雪淳公員道元河陽
008_0113_b_13L領僧善覺東萊鎭邑都領戒聰福性
008_0113_b_14L書記錦初機長領僧都書記廣惠
008_0113_b_15L邑都領將天學

008_0113_b_16L
扶宗樹敎國一都大禪師弘覺登階兼禪
008_0113_b_17L敎兩宗正事演初乾隆三年九月判書
008_0113_b_18L叅判叅議正郞佐郞
  1. 120)척검尺劍 : 삼척검三尺劍의 준말로, 칼을 뜻하는 시어詩語이다. 옛날에는 검의 길이가 거의 대부분 석 자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데,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천하를 통일한 뒤에 “나는 포의의 신분으로 일어나서 3척의 검을 손에 쥐고 천하를 취했으니, 이것이 천명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吾以布衣提三尺劍取天下。 此非天命乎。)”라고 말한 고사가 유명하다. 『史記』 「高祖本紀」.
  2. 121)유관楡關 : 산해관山海關의 옛 이름이다. 투관渝關ㆍ임유관臨楡關ㆍ임투관臨渝關이라고도 한다.
  3. 122)성진腥塵이 가시자마자 부상의 바다로 : 전쟁이 일단 끝나 성진, 즉 섬 오랑캐인 왜적의 비린내가 가시자마자 사명당이 다시 일본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다는 말이다. 부상扶桑의 바다는 일본으로 건너가는 바다라는 말이다. 부상은 동해 속에 있다는 상상의 신목神木 이름으로, 해가 뜰 때에는 이 나무 가지를 흔들고서 올라온다고 하는데, 여기서는 일본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4. 123)삼전三箭 : 화살 세 대라는 뜻으로, 당唐나라 설인귀薛仁貴의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그가 천산天山의 돌궐突厥을 공격할 적에 화살 세 발을 발사하여 세 명을 연달아 사살하자 10여 만이나 되는 돌궐의 군사들이 사기가 꺾여 모두 항복하였는데, 이에 군중軍中이 “장군이 화살 세 대로 천산을 평정하니, 장사들이 길이 노래하며 한관에 들어가네.(將軍三箭定天山。 壯士長歌入漢關。)”라고 노래 불렀다고 한다. 『新唐書』 「薛仁貴傳」.
  5. 124)다른 해~한나절 한가하리 : 뒷날 금강산에 가서 송운을 만나 한담을 나눌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표명한 말이다. 당唐나라 이섭李涉의 〈題鶴林寺僧舍〉라는 시에 “절간을 지나다가 스님과 만나 나눈 얘기, 떠도는 몸 한나절의 한가함을 또 얻었네.(因過竹院逢僧話。 又得浮生半日閑。)”라는 명구가 나온다.
  6. 125)백사白沙 이 공李公 : 백사는 이항복李恒福(1556~1618)의 호인데, 그를 저자로 기록한 것은 편집자의 착오이다. 이 시는 손기양孫起陽(1559~1617)이 지은 것으로, 그의 문집인 『聱漢集』 권1 「排悶錄」에 〈한 순상의 시에 차운하여 송운 스님을 전송하다(次韓廵相韻 送松雲師)〉라는 제목으로 나온다.
  7. 126)한음漢陰 이 공李公 : 한음은 이덕형李德馨(1561~1613)의 호인데, 그의 문집에서는 이 시가 발견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시의 운韻이 영榮ㆍ정情ㆍ명名ㆍ명明으로 이어지는 것을 볼 때, 뒤에 나오는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의 시를 감안한다면, 송운이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임명된 갑오년(1594, 선조 27) 봄에 이 시가 지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8. 127)지둔支遁 : 동진東晉의 명승名僧이다. 허순許詢 및 왕희지王羲之 등과 막역하게 지냈으므로 승려와 문사文士의 교유를 비유할 때 지허支許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9. 128)백사白社 : 은사隱士의 거소를 뜻한다. 위진魏晉 때의 도사道士인 동위련董威輦이 항상 낙양의 건춘문建春門 동쪽에 있는 백사에 은거했던 고사에서 나온 것이다. 『晉書』 「隱逸傳」, 『抱朴子』 「雜應」.
  10. 129)지둔支遁의 은거지~이를 어찌할거나 : 대본은 이 시를 월사月沙의 시에 소속시켰으나, 이는 편집자의 착오이다. 박이장朴而章(1540~1602)의 문집인 『龍潭集』 권1에 〈명수사에 들러 유 스님을 찾다(過溟水寺尋惟上人)〉라는 제목으로 실린 오언율시 2수 중 둘째 시인데, 첫째 시도 아울러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만 리 이역異域에서 돌아와서는, 지 공을 어디에서 찾아뵈리오. 좁은 산길은 풀 속에 묻혀 있고, 깊숙한 절문엔 구름이 어두워라. 한낮에 들리는 맑은 범종 소리여, 푸른 연에 객의 마음 조촐해지네. 깨달음의 길을 열 수 있다면, 내 생각도 숲속에 살고 싶어라.(萬里來殊域。 支公何處尋。 草迷山逕狹。 雲暗寺門深。 白日聞淸梵。 靑蓮淨客心。 若能開覺路。 吾意欲棲林。)”
  11. 130)진의塵衣에는 나황蘿幌이 걸려 있고 : 속진俗塵에 물든 월사의 옷(塵衣)에는 휘장처럼 늘어진 담쟁이덩굴(蘿幌)의 그림자가 비친다는 말이다. 참고로 두보杜甫의 시에 “갈포 옷에는 담쟁이덩굴 그림자가 걸려 있고, 서늘한 달빛이 그 위에 하얗게 부서지네.(絺衣掛蘿薜。 涼月白紛紛。)”라는 표현이 보인다. 『杜少陵詩集』 권2 〈陪鄭廣文遊何將軍山林〉 10수 중 제9수.
  12. 131)정사淨社 : 정토淨土의 결사結社를 말한다. 진晉나라 고승 혜원慧遠이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에서 승속僧俗의 18현賢과 함께 정토의 염불결사를 한 고사가 유명하다. 그 절의 못에 백련白蓮이 있었으므로 백련결사 혹은 줄여서 연사蓮社라고도 칭하였다. 『蓮社高賢傳』 「慧遠法師」.
  13. 132)월사月沙 이 공李公 : 월사는 이정귀李廷龜(1564~1635)의 호이다. 이 시는 『月沙集』 권17 「倦應錄」 중에 나오는데, 거기에 “추부樞府의 여러 재신宰臣들과 화원花園의 공관에서 업무를 마치고는 이어서 송운 노사를 방문하였다. 노사는 이때 삼청三淸 초사醮祠의 곁에 결사結社를 하였는데, 그곳이 자못 청정하여 사랑할 만하였으므로 마침내 종일토록 술을 마시며 시를 읊다가 달빛을 띠고 돌아왔다. 이튿날 노사가 사문 삼응三應을 시켜 편지를 보내 위로해 주고 아울러 시권詩卷을 보여 주기에 마침내 차운하여 부치면서 어제의 좋은 추억을 기록해 두었다.(與樞府諸宰勘課於花園公廨。 仍訪松雲老師。 師時結社於三淸醮祠之傍。 頗淸淨可愛。 遂觴詠終日。 帶月而歸。 翌日。 雲師遣沙門三應。 以書來慰。 兼示詩卷。 遂次韻却寄。 以記前日勝跡云。)”라는 서문이 붙어 있다.
  14. 133)청안靑眼의 옛날 벗님 : 뜻이 서로 통하는 지기知己였다는 말이다. 청안은 다정한 눈길을 말한다. 삼국시대 위魏나라 완적阮籍이 속된 사람을 만나면 백안白眼, 즉 흰 눈자위를 드러내어 경멸하는 뜻을 보이고, 의기투합하는 사람을 만나면 청안靑眼, 즉 검은 눈동자로 대하여 반가운 뜻을 드러낸 고사가 전한다. 『世說新語』 「簡傲」.
  15. 134)자니紫泥 : 조서詔書의 별칭이다. 임금의 조칙詔勅은 자니, 즉 보라색 진흙으로 봉했던 데에서 나온 말로, 여기서는 송운을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제수한 왕명을 가리킨다.
  16. 135)솔은 여전히~정을 머금었네 : 솔(松)과 구름(雲) 운운은 유정의 호가 송운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17. 136)아계鵝溪 이 공李公 : 아계는 이산해李山海(1538~1609)의 호이다. 이 시는 『鵝溪遺藁』 권4 후집後集 「雙門錄」에 〈산인 유정이 산으로 돌아갈 때 증정하다(贈山人惟政還山)〉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는데, 이와 함께 “유정이 새로 절충장군折衝將軍이 되었다. 그의 호는 송운이다.(政新爲折衝。 號松雲。)”라는 자주自註가 붙어 있다.
  18. 137)노련魯連 : 전국시대 제齊나라의 고사高士인 노중련魯仲連을 말한다. 그가 위魏나라 사자使者인 신원연辛垣衍과 담판을 하면서, 만약 포악무도한 진秦나라가 황제로 천하에 군림할 경우에는 “동해 바다를 밟고서 죽을지언정 차마 그 백성으로 살아갈 수는 없다.(連有蹈東海而死耳。 吾不忍爲之民也。)”라고 말한 노련도해魯連蹈海의 고사가 전한다. 『史記』 권83 「魯仲連鄒陽列傳」.
  19. 138)지봉芝峯 이 공李公 : 지봉은 이수광(1563~1628)의 호이다. 이 시는 앞에도 소개된 바 있는데, 『芝峯集』 권3에 〈사명 산인이 일본에 갈 적에 증정하다(贈四溟山人往日本)〉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으며, “산인은 바로 승려 유정인데, 송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때 대마도의 왜인이 화친을 청하자, 조정이 우선 그들을 회유할 목적으로, 유정에게 가서 적정을 탐지하게 하였다.(山人卽僧惟政也。 亦號松雲。 時對馬倭乞和。 朝廷姑欲羈縻。 令惟政往探賊情。)”라는 자주自註가 붙어 있다. 『芝峯類說』 권13 「文章部」 6 〈東詩〉에도 이와 관련된 사연과 시가 실려 있다.
  20. 139)공중의 흰~무생을 깨달았고 : 송운이 허공의 밝은 달처럼 티 없이 맑은 마음으로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요달了達했다는 말이다. 참고로 두보杜甫가 문 공文公이라는 스님을 찾아뵙고 지은 시에 “하자 하나 없는 큰 구슬이라 할까, 허공에 매달린 흰 달이라 할까.(大珠脫玷翳。 白月當空虛。)”라며 그의 인품을 찬미한 구절이 나온다. 『杜少陵詩集』 권11 〈謁文公上方〉.
  21. 140)범을 다룬~성을 감쌌네 : 송운이 전쟁의 종식을 위해 청정을 찾아가 담판하며 화친을 주선한 결과 왜적이 둔거하고 있던 영남의 칠십 고을이 그 덕분에 평온해졌다는 말이다. 북제北齊의 승조僧稠 선사가 선정禪定을 닦을 적에 호랑이 두 마리가 싸우는 소리를 듣고 나가서 석장錫杖으로 싸움을 말려 각자 떠나가게 했다는 해호석解虎錫의 고사가 전한다. 수隋나라 담순曇詢 선사에게도 이 고사가 있다. 『續高僧傳』 권16 「僧稠傳」, 「曇詢傳」.
  22. 141)육식자肉食者 : 고기 먹는 자들이라는 뜻으로, 보통 벼슬아치들을 낮춰 부를 때 쓰는 말이다. 『춘추좌씨전』 「莊公」 10년에 “육식자들이 잘 알아서 할 텐데, 또 뭣 때문에 끼어드는가?(肉食者謀之。 又何間焉。)”라고 마을 사람이 묻자, “고기 먹는 높은 분들은 식견이 낮아서 멀리 꾀하지 못하니까.(肉食者鄙。 未能遠謀。)”라고 대답한 조귀曹劌의 말이 나온다.
  23. 142)동악東岳 이 공李公 : 동악은 이안눌李安訥(1571~1637)의 호인데, 이 시의 저자는 그가 아니고, 벽오碧梧 이시발李時發(1569~1626)이다. 그의 문집인 『碧梧遺稿』 권1에 〈차운하여 송운에게 증정하다(次贈松雲)〉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으며, ‘이때 스님이 일본으로 갔다(時師有日本之行)’라는 부제副題와 함께, “만력 갑오년(1594, 선조 27) 여름에 내가 병조의 낭관郎官에 보임補任되어 비변사에 있을 적에 처음으로 스님의 얼굴을 알았다. 당시에 섬 오랑캐가 변방을 점거하고 있었는데, 우리 스님이 칼을 쥐고 눈썹을 치켜 올리며 분란紛亂을 해결하겠다고 말했으므로 내가 장하게 여겼었다. 그 뒤 11년이 지난 갑진년(1604, 선조37) 7월에 우리 스님이 다시 왕명을 받들고 동해를 건너가게 되었다. 아, 임금님이 남쪽을 돌아보는 걱정이 아직도 예전과 같은데, 묘당廟堂의 계책은 또 이렇게 나왔단 말인가. 아, 우리 스님은 불교를 배우는 자이니, 그 뜻이 본디 관작官爵을 나눠 받는 데에 있지 않건마는, 유독 군신의 대의에 간절한 심정으로 거친 바다를 건너 범의 소굴을 탐색하면서도 어렵다고 말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는 또한 오늘날 시서詩書를 외우는 자들이 혹 제대로 하지 못해서가 아니겠는가. 내가 이에 스님의 인품을 더욱 장하게 여겨 한마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기에 그가 떠날 적에 다음과 같이 시를 엮어 보았다.(萬曆甲午夏。 余補騎省郞。 在備邊司。 始識吾師面。 時島醜竊據邊庭。 吾師仗劍揚眉。 以解紛難爲言。 吾嘗壯之。 越十一年甲辰秋七月。 吾師復以王命東蹈海。 嗚呼。 至尊南顧之憂猶夫前。 而廟謨又出於此耶。 噫。 吾師學浮屠者也。 其志固不在於分珪緤組。 而獨惓惓以君臣大義。 越鯨海探虎穴。 不言難。 何哉。 無亦今之誦詩書者或不能歟。 余於是益壯其爲人。 不能無言。 於其去。 係之以詩云。)”라는 서문이 함께 붙어 있다. 모두 세 수가 실려 있는데, 지금 이 시는 두 번째 시이고, 뒤에 나오는 ‘시다삼백소제생詩多三百笑諸生’ 운운의 시가 세 번째 시이다. 첫 번째 시는 칠언절구인데, 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동방의 일만 산을 모두 답사한 오늘날, 또 들으니 바다 밖에 구주九州가 있다 하네. 이제 가서 천하의 일을 홀로 담당하시려니, 세간의 사람들은 봉후封侯만 찾고 있건마는.(靑丘踏盡萬峯秋。 海外還聞有九州。 此去獨當天下事。 世間人自覓封侯。)”
  24. 143)삼선三禪 : 불교에서 말하는 색계色界의 제3 선천第三禪天으로 이희묘락지離喜妙樂地를 말한다. 그 뜻은 앞 단계의 희喜를 여의고 수승한 낙을 얻는다는 뜻이다. 불교에서는 선정삼매禪定三昧의 심천深淺을 모두 아홉 단계로 나누는데, 그것을 구지九地 혹은 구유九有라고 한다. 이희묘락지는 네 번째 단계에 속하는데, 『楞嚴經』에 “안온한 마음 가운데 환희가 모두 갖추어져 있는 것을 삼선三禪이라고 한다.(安穩心中。 歡喜畢具。 名爲三禪。)”라는 말이 나온다.
  25. 144)육출기계六出奇計 : 진평陳平이 한 고조漢高祖를 위해 여섯 차례나 내놓았던 뛰어난 비책秘策을 말한다.
  26. 145)택당澤堂 이 공李公 : 택당은 이식李植(1584~1647)의 호이다. 이 시는 『澤堂集』 권1에 〈일본에 사신으로 가는 송운 승장을 전송하며(送松雲僧將使日本)〉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갑진년이라는 주도 붙어 있다.
  27. 146)연라烟蘿 : 불교 사원의 별칭으로 쓰는 시어詩語이다.
  28. 147)동명東溟 김 공金公 : 동명은 김세렴金世濂(1593~1646)의 호인데, 그의 생몰 연대로 볼 때에 이 시의 저자로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 이 시 역시 압운押韻한 것을 보면, 송운이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임명된 갑오년(1594, 선조 27)의 작품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아니면 동명이라는 호를 지닌 김 공이 따로 있는 것일 수도 있다.
  29. 148)우스워라 시~외우는 제생諸生이여 : 유자儒者들은 『詩經』 3백 편의 시만 잘 외울 뿐, 정작 일본에 사신으로 들어가서 전대專對, 즉 임기응변을 잘하지 못하는 것이 우습게 느껴진다는 말이다. 『論語』 「子路」에 “『시경』 3백 편의 시를 외우면서도 제대로 전대를 하지 못한다면, 비록 많이 외우고 있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誦詩三百。 不能專對。 雖多。 亦奚以爲。)”라는 공자孔子의 말이 나온다.
  30. 149)화성化城 : 환화幻化의 성이라는 뜻으로, 사원 혹은 도력道力이 높은 고승의 비유로 쓰인다. 험난한 여행길에 지친 사람들을 쉬게 할 목적으로 도사導師가 신통력을 발휘하여 큰 성 하나를 화작化作해서 제공했다는 『법화경』 「化城喩品」의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31. 150)타佗의 절이~기계가 있어서이니 : 송운이 육가陸賈와 같은 능력을 발휘하여 왜왕이 굴복하고 칭신稱臣하게 할 것이라는 말이다. 타佗의 절은, 조타趙佗가 고개 숙여 중국 황제에게 절을 했다는 말이다. 한漢나라 때 남월왕南越王 조타가 무제武帝라고 자칭하며 중국의 변방을 침입하자 여후呂后가 군대를 보내 토벌하였으나 실패하고 회군하였는데, 문제文帝 때에 다시 변설辯舌에 능한 육가陸賈를 사신으로 보내 그를 설득하여 수호修好하면서 자치自治를 허락하니, 조타가 그때부터는 제호帝號를 버리고 다시 남월왕으로 처신하면서 춘추春秋로 중국 조정에 조공朝貢을 바쳤던 고사가 『史記』 권113 「南越列傳」에 나온다.
  32. 151)누란樓蘭 : 서역西域에 있던 나라 이름이다. 그 나라의 왕이 흉노匈奴와 결탁하여 중국 사신을 누차 죽이자, 한 소제漢昭帝 때에 부개자傅介子가 그곳에 사신으로 가서 왕을 유인해 술에 취하게 한 다음 목을 베어 돌아와 한나라 조정에 귀부歸附하게 하고, 나라 이름을 선선鄯善으로 고친 고사가 전한다. 『漢書』 권7, 권70, 권96.
  33. 152)벽오碧梧 이 공李公 : 벽오는 이시발李時發의 호인데, 그의 시에 대해서는 앞에서 설명한 바 있다. 이 시 역시 그의 문집인 『碧梧遺稿』 권1에 나오는데, 이 시 말미에 “스님이 일찍이 바다를 건너는 꿈을 꾸었으므로 이렇게 언급하였다.(師曾有渡海之夢。 故及之。)”라는 자주自註가 붙어 있다.
  34. 153)연사蓮社에 기대하는 육생의 말솜씨요 : 송운이 능란한 외교술을 발휘해 주기를 기대한다는 말이다.
  35. 154)탕휴湯休와 이별하는 퇴지退之의 정이로다 : 유자儒者가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불승佛僧과 헤어질 때의 아쉬운 정을 표현한 말이다. 탕휴는 남조南朝 송宋의 시승詩僧 탕혜휴湯惠休를 말한다. 휴 상인休上人이라고도 한다. 그는 포조鮑照와 이름을 나란히 하며 친하게 교유하였는데, 그의 속성俗姓이 탕씨湯氏이기 때문에 탕휴湯休 혹은 탕 공湯公, 탕사湯師로도 일컬어졌다. 현재 그의 시 10여 수가 『藝文類聚』ㆍ『初學記』ㆍ『玉臺新詠』 등에 산견되는데, 특히 〈怨別〉이라는 그의 오언고시 중에 나오는 “해가 지자 푸른 구름은 서로 합하는데, 정든 님은 왜 이렇게 오지 않는지.(日暮碧雲合。 佳人殊未來。)”라는 구절은 지금까지 명구로 회자된다. 여기에서 유래하여 후대에 시승의 작품을 벽운碧雲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퇴지는 한유韓愈의 호이다. 그가 조주 자사潮州刺史로 있을 적에 노승老僧 태전太顚과 친하게 지내다가 작별할 적에 자신의 의복을 남겨 주기까지 했던 이야기가 그의 「與孟尙書書」에 실려 있으므로 여기에서 그를 인용한 것이다.
  36. 155)돌아올 때~달가워하지 않고 : 한漢나라 육가陸賈가 남월南越에 사신으로 갔을 적에 남월왕 위타尉他가 그를 무척 좋아한 나머지 몇 달 동안 함께 술을 마시며 즐거워하다가 귀환할 무렵에는 ‘그의 행장에 천금의 가치가 있는 보물을 싸 주며 선물했던(賜陸生橐中裝直千金)’ 고사가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史記』 권97 「陸賈列傳」.
  37. 156)동명東溟 정 공鄭公 : 동명은 정두경鄭斗卿(1597~1673)의 호인데, 그의 생몰 연대로 볼 때 이 시의 저자로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 이 시는 송운이 갑진년(1604, 선조 37)에 일본에 건너갈 때 전송한 것이라고 보여지는바, 아마도 편집자의 착오가 아닐까 한다.
  38. 157)적간관赤間關 : 일본의 하관下關(시모노세키)을 말한다.
  39. 158)공북拱北 : 뭇 별들이 북두성을 옹위擁衛하는 것처럼 신하가 임금을 모시는 것을 말하는데, 『논어』 「爲政」의 “덕정德政을 펴게 되면, 북두성이 가만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어도 뭇 별들이 옹위하는 것처럼 될 것이다.(爲政以德。 譬如北辰居其所。 而衆星共之。)”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40. 159)도원수都元帥 권 공權公 : 권율權慄(1537~1599)을 말한다. 이 시 역시 송운이 갑진년(1604, 선조 37)에 일본에 건너갈 때 전송한 것이라고 본다면, 권율의 시는 아니라고 할 것인데, 누구의 작품인지는 미상이다.
  41. 160)셋이 웃으며 천기를 희롱했으리라 : 송운이 일본에 건너가서 그곳의 양심적인 지식인들과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누며 심회를 토로했으리라는 말이다. 동진東晉의 고승 혜원慧遠이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 앞의 호계虎溪를 건너는 일이 없었는데, 도연명陶淵明과 육수정陸修靜이 찾아왔을 때에는 그들을 전송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그 시내를 건너고는 세 사람이 의기투합하여 모두 크게 웃었다는 호계삼소虎溪三笑의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蓮社高賢傳』 「百二十三人傳」.
  42. 161)고죽孤竹 최 공崔公 : 고죽은 최경창崔慶昌(1539~1583)의 호이다. 그의 생몰 연대로 볼 때 이 시는 그가 지었을 리가 없다. 이 시는 오봉五峯 이호민李好閔(1553~1634)의 작품으로, 그의 문집인 『五峯集』 권3에 나오는데, 그 제목에 “을사년(1605, 선조 38) 칠석 전날에 산인 혜구惠球가 사명四溟의 편지를 가지고 와서 시를 청하였다. 혜구는 사명의 사제師弟이다. 이때 일본에서 돌아와서 오대산으로 들어갈 예정이라고 하였다.(乙巳七夕前日。 山人惠球以其師四溟書求詩。 球四溟弟也。 時回自日本。 將入五臺山云。)”라고 되어 있다.
  43. 162)백우白羽 : 촉한蜀漢의 승상 제갈량諸葛亮이 손에 쥐고 군사를 지휘했다는 백우선白羽扇을 가리킨다. 진晉나라 배계裵啓의 『語林』에 “제갈량이 사마의司馬懿와 위수渭水에서 전투를 벌일 적에 흰색의 깃털 부채(白羽扇)로 삼군三軍을 지휘하니, 군사들 모두가 그 부채의 움직임에 따라 진퇴를 하였다.”라는 말이 나온다.
  44. 163)송운도 스님과 교분이 있음이라 : 참고로 소식蘇軾의 시에 “고인은 원래 산과 벗으로 지내는 교분이 있는지라, 부르지 않아도 산이 내 집에 가득 내려와 앉네.(高人自與山有素。 不待招邀滿庭戶。)”라는 구절이 있다. 『蘇東坡詩集』 권7 〈越州張中舍壽樂堂〉.
  45. 164)발우에 용을~범 말리며 : 참고로 당唐나라 선승 영가 현각永嘉玄覺의 『證道歌』 1권에 “화룡火龍을 항복받은 발우와 범의 싸움을 말린 석장錫杖이여, 양고兩鈷의 쇠고리가 쩌렁쩌렁 울리나니, 모양을 뽐내려고 허투루 지님이 아니요, 여래의 보배 주장자의 자취를 본받음이라네.(降龍鉢解虎錫。 兩鈷金環鳴歷歷。 不是標形虛事持。 如來寶杖親蹤跡。)”라는 말이 나온다.
  46. 165)무슨 일로~관원과 흡사했는가 : 송운이 승려의 신분인데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세상일을 책임진 벼슬아치처럼 전쟁터를 누비며 동분서주했느냐는 말이다. 노심勞心은 마음으로 수고한다는 뜻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위치에 있는 자를 뜻하는 말이다. 『孟子』 「滕文公」 상에 “마음으로 수고하는 자는 남을 다스리고, 힘으로 수고하는 자는 남의 다스림을 받는다.(勞心者治人。 勞力者治於人。)”라는 말이 나온다.
  47. 166)의자에 앉아서~구멍만 내겠는가 : 관녕管寧의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후한後漢 영제靈帝 말년에 관녕이 난리를 피해서 요동遼東으로 건너간 뒤에 초당을 짓고 은거하면서 조정의 부름에도 일체 응하지 않은 채 항상 검은 사모紗帽를 쓰고 나무 의자(木榻)에 앉아 검소하게 생활하며 사람들에게 예절을 가르쳐서 현자賢者의 칭송을 받았는데, 진晉나라 황보밀皇甫謐이 지은 『高士傳』 하에 “관녕이 항상 하나의 나무 의자 위에 앉아서 50여 년의 세월을 보냈는데, 그동안 한 번도 다리를 뻗지 않고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으므로 의자 위에 무릎이 닿은 곳 모두가 닳아져서 구멍이 뚫렸다.(管寧常坐一木榻。 積五十餘年。 未嘗箕股。 其榻上當膝處皆穿。)”라는 말이 나온다.
  48. 167)주미麈尾 : 고라니의 꼬리털을 매단 불자拂子를 가리키는데, 위진魏晉 시대 때 사람들이 항상 손에 쥐고서 청담淸談을 펼쳤으며, 나중에는 불교의 승려들도 설법할 때에 많이 애용하였다. 『世說新語』 「容止」.
  49. 168)구정九鼎 : 하우씨夏禹氏가 구주九州의 쇠붙이를 모아 주조鑄造했다는 솥을 말하는데, 하夏ㆍ은殷ㆍ주周 시대를 전해 내려오면서 천하를 차지한 제왕 혹은 왕조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보배로 여겨져 왔다. 『史記』 권12 「武帝紀」. 또 전국시대 조趙나라 평원군平原君이 초楚나라에 가서 모수毛遂 덕분에 큰 외교 성과를 거두고는, “모 선생이 한번 초나라에 와서 우리 조나라를 구정대려九鼎大呂보다도 중하게 하였으니, 모 선생의 세 치의 혀가 백만 군대보다도 강하다.(毛先生一至楚。 而使趙重於九鼎大呂。 毛先生以三寸之舌。 彊於百萬之師。)”라고 칭찬한 고사가 전한다. 『史記』 「平原君虞卿列傳」 대려大呂는 주周나라 종묘宗廟의 대종大鍾이다.
  50. 169)죽음竹陰 조 공趙公 : 죽음은 조희일趙希逸(1575~1638)의 호이다. 이 칠언고시는 『竹陰集』 권10에 〈송운 대사가 바다를 건너갈 때 증정하다(贈松雲師浮海)〉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51. 170)영해瀛海의 동풍에~서봉을 꿈꾸리라 : 송운이 일본에 가서는 고국의 서산西山을 그리워할 것이라는 말이다. 영해는 전국시대 추연鄒衍이 중국을 적현신주赤縣神州라고 하고, 중국 밖에 적현신주와 같은 것이 아홉 개 있으니 그것을 구주九州라고 하며, 구주와 그 바깥을 둘러싸고 있는 바다를 영해라고 칭한다고 한 고사에서 유래하여 보통은 대해大海의 뜻으로 쓰인다. 『史記』 권74 「孟子荀卿列傳」, 『淮南子』 권4 「地形訓」. 그러나 여기서는 선산仙山의 하나인 영주瀛洲가 동해에 있다는 전설과, 또 일본을 영주라고 대칭하는 데에서 유래하여 일본으로 건너가는 바다라는 뜻으로 쓰였다. 초운楚雲과 오월吳月은 남방에 있는 초나라와 오나라의 구름과 달이라는 말로, 일본의 풍경을 비유한 것이다.
  52. 171)일위一葦 : 갈댓잎 하나라는 뜻으로, 배를 비유하는 시어詩語이다. 『詩經』 「衛風」 〈河廣〉의 “하수河水가 넓다고 누가 말하는가. 갈댓잎 하나로 건너갈 수 있는걸.(誰謂河廣。 一葦杭之。)”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인데, 참고로 소식蘇軾의 「前赤壁賦」에 “한 조각 작은 배가 떠가는 대로 맡겨 두고, 아득히 만경창파를 건너가노라.(縱一葦之所如。 凌萬頃之茫然。)”라는 명구가 나온다. 또 달마가 양 무제梁武帝를 만나 문답한 뒤에 갈댓잎 하나를 꺾어 타고서 장강을 건너 북위北魏의 수도 낙양으로 갔다는 전설도 있다.
  53. 172)옥산玉山 이 공李公 : 옥산은 이우李瑀(1542~1609)의 호이다. 이 시는 『玉山詩稿』에 〈송운에게 부치다(寄松雲)〉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그는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아우이다.
  54. 173)학서鶴書 : 초야의 현사賢士를 초빙하는 조서詔書를 말한다. 참고로 남조南朝 송宋의 공치규孔稚珪가 지은 「北山移文」에 “사자使者를 태운 말이 울음소리를 내면서 골짜기에 들어오고, 조정에서 부르는 학서가 산언덕을 넘어왔다.(鳴騶入谷。 鶴書赴隴。)”라는 말이 나온다.
  55. 174)서화瑞花 : 영서화靈瑞花의 준말로, 범어 uḍumbara, 즉 우담발화優曇鉢華의 의역意譯이다. 공기화空起花ㆍ기공화起空花라고도 한다. 우담발화는 꽃이 꽃턱(花托) 속에 숨어 있다가 한 번 피고 나면 곧바로 오므라들어서 사람들이 쉽게 볼 수 없기 때문에 무화과無花果 꽃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불교 전설에 의하면, 3천 년에 한 번씩 핀다고 하여 부처가 세상에 출현하여 설법하는 희유한 일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곤 한다. 참고로 『無量壽經』 권상에 “부처의 설법은 무량억겁 동안 만나기 어렵고 보기 어려우니, 이를 비유하자면 영서화가 때가 되어야 피는 것과 같다.(無量億劫難値難見。 猶靈瑞華時時乃出。)”라는 말이 나온다.
  56. 175)구마라집 : 범명 Kumārajīva의 음역이다. 서역 구자국 출신으로, 중국 4대 역경가의 한 사람이다. 후진後秦 홍시弘始 5년(403)에 역경에 착수한 뒤로, 『三論』ㆍ『般若』ㆍ『法華』ㆍ『大智度論』ㆍ『阿彌陀經』ㆍ『維摩經』ㆍ『十誦律』 등 수많은 경론經論을 번역하여 중국 불교의 발전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여기서는 명망이 높은 고승의 뜻으로 쓰였다. 참고로 4대 역경가는 구마라집과 남조南朝 양梁의 진제眞諦와 당나라의 의정義淨과 현장玄奘을 말한다.
  57. 176)알유猰㺄 : 고대 전설에 나오는바, 사람을 잡아먹는 맹수의 이름으로, 흉악한 인간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는데, 여기서는 왜적을 가리킨다.
  58. 177)공을 이뤄도~차지하지 않고 : 참고로 『老子』 2장에 “성인은 만물을 생장시키면서도 자기 소유로 하지 않고, 만물을 육성시키면서도 자기 능력을 과시하지 않고, 공을 이루고서도 자신이 차지하지 않고 물러난다.(生而不有。 爲而不恃。 功成而不居。)”라는 말이 나온다.
  59. 178)남풍이 오래도록~있는 때 : 왜적의 기세가 꺾여서 도망친 것을 비유한 말이다. 춘추시대 진晉나라가 제齊나라를 공격하자 제나라 군대가 밤에 도망쳤는데, 이때 사광師曠이 “새들의 소리가 즐거우니, 제나라 군대가 도망쳤을 것이다.(鳥烏之聲樂。 齊師其遁。)”라고 말했던 고사와, 초楚나라 군사가 동원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남방의 노래는 활기가 없어서 죽어 가는 소리가 많으니, 초나라 군사는 필시 아무 공도 거두지 못하고 돌아갈 것이다.(南風不競。 多死聲。 楚必無功。)”라고 평한 고사가 『춘추좌씨전』 「襄公」 18년조에 나온다. 사광은 진 평공晉平公의 악사樂師로, 태어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했으며 귀가 워낙 밝아서 미묘한 소리를 잘 분간했다고 한다.
  60. 179)의천검倚天劍 먼지를~해운대에 올라서니 : 참고로 이백李白의 시에 “의천검 먼지를 떨어 버리고, 서쪽으로 악양루에 올라섰네.(拂拭倚天劍。 西登岳陽樓。)”라는 구절이 있다. 『李太白集』 권14 〈留別賈舍人至〉.
  61. 180)긴 무지개가~해를 꿰뚫고 : 의기義氣가 하늘에 사무쳐서 감응하는 것을 이르는 말로, 송운이 일본으로 떠날 때의 기상을 비유한 말이다. 전국시대에 자객 섭정聶政이 한괴韓傀를 죽일 때와, 자객 형가荊軻가 연燕 태자 단丹의 의리를 사모하여 진왕秦王을 죽이려고 떠날 때에 모두 흰 무지개가 태양을 꿰뚫는(白虹貫日) 이변이 있었다고 한다. 『戰國策』 「魏策」 4, 『漢書』 권51 「鄒陽傳」 〈留別賈舍人至〉.
  62. 181)봉래蓬萊 : 동래東萊의 옛 이름이다.
  63. 182)적야逖野 : 대본에 “적야逖野는 일본의 시조始祖이다.”라는 주註가 붙어 있는데, 전거 미상이다. 혹 협야狹野를 말하려고 한 것은 아닐까 추측해 본다.
  64. 183)서불徐巿 : 진시황秦始皇 때의 방사方士 서복徐福을 가리킨다. 그가 동해東海의 삼신에 불사약不死藥이 있다고 진시황을 속인 뒤에 동남동녀 수천 명을 배에 태우고 바다로 나간 뒤에 소식이 없었다는 기록이 『史記』 「秦始皇本紀」에 전한다. 전설에 의하면 이들 남녀가 왜인倭人의 조상이 되었다고 하는데, 일본 기이신궁산紀伊新宮山에 서불의 묘가 있다고 하며, 또 그의 사당을 세우고서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65. 184)술잔 : 목배木杯, 즉 승려가 타고 가는 배를 가리킨다. 남조南朝 송宋의 어떤 기승奇僧이 항상 나무로 만든 술잔(木杯)을 타고 강을 건너곤 하였으므로 배도 화상杯渡和尙이라고 일컬어졌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梁高僧傳』 권10.
  66. 185)만추蠻酋의 목을~돌아올 텐데 : 송운이 왜왕倭王을 밧줄로 묶어 끌고 올 것이라는 말이다. 한 무제漢武帝 때의 간의대부諫議大夫 종군終軍이, 긴 밧줄(長纓) 하나만 주면 남월南越에 가서 그 추장을 결박하여 궐하闕下에 바치겠다고 청한 고사가 전한다. 『漢書』 「終軍傳」.
  67. 186)명고鳴皐 : 임전任錪(1560~1611)의 호이다. 성혼成渾의 문인이며, 임진왜란 때 김천일金千鎰의 휘하에서 활약하였다. 이 시는 『鳴皐集』 권6에 〈승려 유정이 일본에 가는 것을 전송하며(送僧惟政往日本)〉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68. 187)헌면軒冕 : 수레와 면류관이라는 말로, 관작과 봉록 등 높은 벼슬을 뜻하는데, 『장자』 「善性」에 “헌면이 몸에 있는 것은 본래 성명性命처럼 내 몸에 있는 것이 아니고, 외물外物이 뜻밖에 우연히 와서 잠시 붙어 있는 것이다.(軒冕在身。 非性命也。 物之儻來寄也。)”라는 말이 나온다.
  69. 188)조수鳥獸와 함께 사는 것 : 은자隱者나 승려 등 방외인方外人의 생활을 비유하는 말이다. 『논어』 「微子」에 “조수와는 함께 살 수가 없다. 내가 사람의 무리와 함께하지 않고 누구와 더불어 살겠는가.(鳥獸不可與同群。 吾非斯人之徒與而誰與。)”라고 말하면서 은자인 장저長沮와 걸닉桀溺을 비판한 공자의 탄식이 나온다.
  70. 189)손 공孫公 기양起陽 : 손기양을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손기양의 호는 오한聱漢이다. 광해 연간에 손기양이 관직에서 물러나 향리인 밀양 진암眞巖 아래 칠리탄七里灘에 장수藏修하는 집을 짓고 독서하였으나 세월이 흘러 집이 쇠락하였다. 그 후손이 영조 초에 중건하여 진암서당眞巖書堂이라 하였으며, 그 뒤에 다시 중건하여 칠탄정七灘亭이라 하였다. 진암이란 손기양의 향리 후배로 그 사정을 잘 아는 신유한이 붙일 수 있는 호이다. 이 시는 그의 문집인 『聱漢集』 권1 「排悶錄」에 〈아계 이상국의 시에 차운하여 송운 대사에게 증정하다(次鵝溪李相國韻贈松雲大師)〉라는 제목으로 나온다.
  71. 190)향치鄕緇에 대한 파로坡老의 만사挽詞 : 향치는 동향同鄕의 승려라는 말이다. 파로는 동파東坡 소식蘇軾을 말한다. 『蘇東坡詩集』 권11에 〈영락의 보본선원報本禪院에 들렀더니 문 장로文長老가 이미 죽었기에 애도하는 시를 짓다(過永樂文長老已卒)〉라는 제목의 칠언율시가 나오는데, 그 5구~6구에 “존망은 하도 많이 봐서 눈물도 안 나오지만, 고향은 잊기 어려워 그래도 마음에 걸리누나.(存亡慣見渾無淚。 鄕井難忘尙有心。)”라는 표현이 보인다.
  72. 191)초목이 알게~어떻게 비교하랴 : 송운이 산천초목도 벌벌 떨 정도로 위명威名을 널리 떨쳤다는 말이다. 참고로 『舊唐書』 권152 「張萬福傳」에 “강회江淮의 초목도 그대의 위명을 알고 있으리라고 짐은 생각한다.(朕謂江淮草木亦知爾威名)”라는 말이 나온다.
  73. 192)동인仝人 : 이 시는 손기양의 『오한집』 권1 「排悶錄」에 〈송운 대사에 대한 만사(輓松雲大師)〉라는 제목으로 나오며, 또한 『밀주지』 「지리편」 ‘上西面 芚只里’에도 보인다.
  74. 193)병석甁錫 : 승려의 필수품인 병발甁鉢과 석장錫杖을 가리킨다.
  75. 194)고목枯木과 사회死灰 : 마른나무와 식은 재라는 뜻으로, 마음이 외물外物에 동요되지 않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장자』 「제물론」의 “형체를 진실로 말라죽은 나무와 같이 할 수 있고, 마음을 진실로 불 꺼진 재처럼 할 수 있는 것인가.(形固可使如枯木。 而心固可使如死灰乎。)”라는 구절에서 나온 것이다.
  76. 195)불씨佛氏는 체體만~없다는 말 : 『近思錄』 권13 「辨異端」조에 “저 석씨釋氏의 학문은 경이직내敬以直內의 측면은 있으나, 의이방외義以方外의 측면은 있지 않다.(彼釋氏之學。 於敬以直內。 則有之矣。 義以方外。 則未之有也。)”라는 정명도程明道의 말이 나오는데, 그 밑에 “석씨는 선정禪定을 익혀 이 마음을 수렴해서 텅 비고 고요하게 하려고 하니, 또한 이른바 경이직내와 비슷한 점이 있다. 그러나 체體만 있고 용用은 없어서 윤리를 끊어 없애니, 어떻게 의義에 대한 측면이 있겠는가.(釋氏習定。 欲得此心收斂虛靜。 亦若所謂敬以直內。 然有體而無用。 絶滅倫理。 何有於義。)”라는 주註가 붙어 있다.
  77. 196)조현명趙顯命 : 영조英祖 때의 우의정으로서, 좌의정 송인명과 함께 사우祠宇의 건립 등을 논의하던 인물이다.
  78. 197)유후留侯 : 한漢나라의 개국 공신 장량張良을 가리킨다. 그가 황석공黃石公이라는 노인을 흙다리 위에서 만나 노인이 일부러 다리 밑으로 내던진 신발을 주워 준 인연으로 태공太公의 병법을 전수받고, 한 고조漢高祖의 작전을 도와 천하를 평정한 뒤에 유후의 봉작을 받고 나서 “바라건대 인간 세상의 일을 버리고 신선인 적송자를 따라 노닐고 싶다.(願棄人間事。 欲從赤松子遊耳。)”라고 말하고는 벽곡辟穀과 도인導引의 술법을 행한 고사가 『史記』 「留侯世家」에 나온다. 여기서 황석공은 송운의 스승인 서산 대사를 비유한 말이다.
  79. 198)경예鯨鯢 : 잔 물고기를 탐욕스럽게 먹어 치우는 큰 고래라는 뜻으로, 왜적을 가리킨다.
  80. 199)효경梟獍 : 왜적을 비유한 말이다. 효는 어미를 잡아먹는 악조惡鳥이고, 경은 아비를 잡아먹는 악수惡獸라고 한다.
  81. 200)점잖게 육조六祖의 문답을 나누었고 : 유점사楡岾寺에 침입한 왜적이 칠조七祖에 대해서 묻자, 송운이 “육조가 있지, 칠조가 어디에 있는가?”라고 대답하고는, 차례로 써서 보여 주어 왜적을 감복시킨 고사를 말한다.
  82. 201)기린각麒麟閣 : 한 선제漢宣帝 때에 곽광霍光 등 공신 11인의 초상화를 그려 걸어 놓았던 공신각功臣閣의 이름이다.
  83. 202)황금 털 사자 : 부처를 비유하는 말이다. 삼계三界에서 무외자재無畏自在한 것이, 마치 백수百獸의 왕인 사자와 같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84. 203)구자狗子 :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의 화두를 말한다. 당唐나라의 고승인 조주 종심趙州從諗 선사에게 어떤 승려가 “개에게도 불성이 있는가?(狗子還有佛性也)”라고 묻자, 조주가 “없다.(無)”라고 대답하였는데, 승려가 다시 “일체 중생이 모두 불성을 지니고 있는데, 개는 어째서 없는 것인가?”라고 물으니, 조주가 “그에게 업식業識이 있기 때문이다.” 하였다. 그런데 다른 승려가 또 “개에게도 불성이 있는가?” 하고 물었을 때, 조주가 “있다.(有)”라고 하자, 그 승려가 “일단 불성이 있다고 한다면 어째서 저 가죽 부대 속에 들어갔는가?” 하고 물으니, 조주가 “그가 알고도 짐짓 범하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하였는데, 어째서 조주가 있다고도 하고 없다고도 했는지, 그 본래의 참뜻을 깨닫게 하는 것이 이 화두의 목적이다. 조주구자趙州狗子ㆍ조주불성趙州佛性ㆍ조주유무趙州有無라고도 칭한다. 『無門關』 제1칙, 『從容錄』 제18칙 등에 나온다.
  85. 204)시궐矢橛 : 간시궐乾屎橛의 준말이다. 시궐은 인도에서 사람의 똥을 닦을 때 쓰는 나무 조각으로, 즉 마른 똥 막대기를 가리킨다. 이처럼 더럽기 그지없는 물건에도 불법이 들어 있다는 뜻으로, 범부의 집착을 타파할 목적으로 선종에서 사용하는 공안인데, 어떤 승려가 운문雲門 선사에게 어떤 것이 부처냐고 묻자, 운문이 “마른 똥 막대기(乾屎橛)”라고 대답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無門關』 제21칙 「雲門屎橛」.
  86. 205)가식家食 : 국가에서 맡은 직책이 없어서 봉록을 받지 않고 집에서 한가히 거하는 것을 말한다. 『周易』 「大畜卦」의 괘사卦辭에 “집에서 먹지 않게 되면 길하다.(不家食吉)”라는 말이 나오고, 단사彖辭에 “집에서 먹지 않게 되면 길하다고 한 이유는 국가가 현인에게 봉록을 주어서 길러 주기 때문이다.(不家食吉。 養賢也。)”라는 말이 나오는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87. 206)전신傳神 : 형태를 핍진逼眞하게 묘사하여 생명력을 불어넣는 고차원의 예술 기법을 가리킨다. 진晉나라의 저명한 화가 고개지顧愷之가 초상화를 그리면서 몇 년 동안 눈동자를 찍지 않았는데, 그 이유를 묻자, “그림 속에 정신을 전해서 살아나게 하는 것은 바로 눈동자 속에 있기 때문이다.(傳神寫照。 正在阿堵中。)”라고 대답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世說新語』 「巧藝」.
  88. 207)선묘가 일찍이~호를 내렸다 : 홍제라는 호는 허균이 지은 것이다. 1610년 사명당이 해인사에서 입적하고 3년상을 맞아 영당을 짓고 문집을 간행하며 석장비를 세우는 일을 동시에 진행할 때, 교산 허균이 그 문집의 서문과 비문을 찬술하였다. 이때 그는 대사와 같은 위인의 비문에 마땅히 시호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여겨 자기가 사시私諡를 지었다. 즉 ‘조선국 선종 제14대 직전 서산청허부종수교보제등계의 입실전법제자 사명자통홍제존자(朝鮮國禪宗第十四代直傳西山淸虛扶宗樹敎普濟登階入室傳法弟子四溟慈通弘濟尊者)’라 하고, “위는 송운 노사의 시호이다. 말법을 붙들어 구한 것을 자慈라 하고, 한 교에 구애되지 아니함을 통通이라 하며, 은택이 많은 백성들에게 끼친 것을 홍弘이라 하고, 그 공이 국토를 거듭 회복한 것을 제濟라 하니, 이것이 (시호를 내려) 이름을 바꾸는 것이다.”라고 해설하였다. 교산의 이 사시기私諡記가 세간에 전하는 것이다. 후세 불교계에서는 대사를 홍제 존자라 추존하고, 해인사와 밀양 삼강동의 표충사表忠祠에 있는 대사의 영당을 홍제암이라 불렀다.
  89. 208)사리闍黎 : 범어 ācārya의 음역인 아사리阿闍黎의 준말로, 원래는 제자를 바른 길로 인도하며 가르치는 모범적인 스승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그냥 불교 승려라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궤범사軌範師ㆍ정행正行 등으로 의역되며, 도사導師로 칭해지기도 한다. 사리闍梨로 쓰기도 한다.
  90. 209)청사淸沙 : 김재로金在魯(1682~1759)의 호이다. 자字는 중례仲禮이다. 참고로 나이는 신유한申維翰보다 한 살 어리지만, 문과 급제는 숙종 36년(1710)으로 신유한보다 3년 빠르다.
  91. 210)어로魚魯 : 모양이 서로 비슷해서 글자를 잘못 쓴 것을 말한다. 『抱朴子』 「遐覽」에 “글자를 세 번 베껴 쓰다 보면 어魚가 로魯로 변하고, 허虛가 호虎로 변한다.(書三寫。 魚成魯。 虛成虎。)”라는 말이 나온다.
  92. 211)무쇠 이마(鐵額)의 치우蚩尤 : 대단히 사납고 흉맹한 족속을 비유하는 말이다. 치우는 황제黃帝 헌원씨軒轅氏와 탁록涿鹿의 들판에서 싸웠다는 부족을 말한다. 남조南朝 양梁 임방任昉의 『述異記』 권상에 “헌원씨가 처음 즉위했을 적에 치우씨가 있었는데, 그들 형제 72인이 모두 구리 머리에 무쇠 이마를 지니고 있었다.(軒轅之初立也。 有蚩尤氏。 兄弟七十二人。 銅頭鐵額。)”라는 말이 나온다.
  93. 212)쌍림雙林 : 보통 사원寺院의 별칭으로 쓰인다. 석가모니가 사라쌍수娑羅雙樹에서 입멸入滅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94. 213)조가朝家의 처분 : 남붕을 비롯한 표충사 승려들이 활동한 결과, 조정 대신들의 글을 얻어 송운 대사의 전쟁일기(『분충서난록』)와 비문 등을 조가朝家, 즉 국가적 사업으로 추진하게 된 것을 말한다. 이는 대사가 해인사에서 입적한 뒤 문집을 간행하고 석장비를 건립한 것이 사찰의 사업으로 진행된 것과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95. 214)지부해함地負海涵 : 대지가 만물을 그 위에 실어 주듯, 바다가 온갖 물줄기를 다 받아들이듯, 넓고 큰 인물의 덕을 표현하는 말이다.
  96. 215)비록 그렇지만~연초演初에게 있는데 : 이는 설송당 연초가 사명당의 의발을 전수받았으며, 그 문인 남붕이나 명학 자신도 표충사의 승려로서 사우의 소재와 계보의 적통이 밀양에 있음을 주장한 것이다. 더구나 전해(1738) 조정에서 우의정 송인명의 아룀으로 ‘영당급복影堂給復의 전승傳承’이 있게 되면서 해인사 측의 반대가 한층 심해진 상태에서 표충사 측의 보다 적극적인 정통성 주장이 여기에 표출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97. 216)이때 대사의~대리하게 하였다 : 이는 서산 대사가 사명당을 의승도대장으로 추천하여 도체찰사 서애 유성룡의 지시를 받게 하였다는 말이다.
  98. 217)유병충劉秉忠과 요광효姚廣孝 : 유병충은 원나라 초기의 학자 겸 정치가이다. 20여 세의 나이에 승려가 되어 법명을 자총子聰이라고 하였다. 원元 헌종憲宗 6년(1256)에 지금의 내몽고 지역의 길지吉地를 택해서 개평성開平城, 즉 상도上都를 건설하였다. 세조世祖 원년(1264)에 유지를 받들어 환속한 뒤에 대도大都, 즉 북경성北京城 건설을 주도하였으며, 세조에게 건의하여 국호를 대원大元으로 확정하였다. 문집에 『藏春集』이 있다. 『元史』 권157. 요광효姚廣孝는 처음에 이름을 천희天禧, 혹은 도연道衍이라고 하였으며, 자字는 사도斯道였다. 14세 때에 불문佛門에 들어갔다가 명나라 태조太祖의 넷째 아들인 연왕燕王, 즉 성조聖祖를 도와 태조의 황태손皇太孫으로 제위에 오른 혜제惠帝를 축출하고 정난靖難 일등공신에 책봉되었으며, 이때 광효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太祖實錄』과 『永樂大典』을 편찬했으며, 그의 문집으로 『逃虛集』이 세상에 전한다. 『明史』 권145.
  99. 218)보장保障 : 민생을 안정시키고 변방을 견고히 함으로써 국가의 최후의 의지처가 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전국시대 조간자趙簡子가 윤탁尹鐸을 진양 태수晋陽太守로 임명하자, 윤탁이 “세금을 많이 걷을까요, 아니면 백성을 안정시켜 나라의 보장이 되게 할까요?(爲繭絲乎。 抑爲保障乎。)” 하고 물으니, 보장이 되게 하라고 대답하였으므로 윤탁이 그 호구戶口의 수를 줄여서 백성의 부세賦稅를 경감하였는데, 그 뒤에 조간자의 아들 조양자趙襄子 때에 지백智伯이 침입하여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을 때, 마지막으로 진양으로 피신해서 지백의 군대를 대파하고 나라를 중흥한 고사가 전한다. 『國語』 「晉語」 9.
  100. 219)남녀 3천여 명 : 실제로는 “약 2천 명”이다.
  101. 220)세수가 67이요 승하僧夏(법랍)가 57이었다 : 법랍이 57이면 10세에 출가한 것이 된다. 그런데 이는 앞서 나온 「갑오년 9월에 서울에 달려가 소를 올려 왜적을 토벌하고 민생을 보호할 일을 아뢴 글(甲午九月馳進京師上疏言討賊保民事)」에서 사명당이 자신의 모친과 부친이 15세, 16세에 연달아 세상을 떠난 뒤 출가하였다고 하는 기록과는 차이가 있다.
  102. 221)표충사表忠祠 : 밀양 표충사는 대사의 5세 법손인 남붕을 주축으로, 1738년에서 1742년 사이에 대사의 고향 삼강동(둔지리) 영취산에 세워졌다. 그러나 사우가 협소하여 1839년 주지 천유가 재약산 영정사로 옮기게 되었는데, 이때 표충사는 표충서원表忠書院과 표충사表忠寺로 바뀌게 됨으로써 유불 공존의 독특한 면모를 띠게 되었다.
  103. 222)명교名敎 : 인륜人倫의 명분을 밝히는 종교라는 뜻으로, 유교를 가리킨다.
  104. 223)비은緋銀 : 홍색 조복인 비의緋依와 은으로 장식한 띠인 은대銀帶의 합칭으로, 고위 관직을 제수 받은 것을 가리킨다.
  105. 224)부산 왜영 : 울산 서생포 왜성이 부산과 가까우므로 부산 왜영이라 한 것 같다.
  106. 225)유요劉姚 : 유병충劉秉忠과 요광효姚廣孝의 합칭이다. 자세한 내용은 주 217 참조.
  107. 226)호광毫光 : 여래 32상相의 하나인 백호白毫, 즉 미간의 백옥과 같은 흰 털에서 발산하여 시방세계를 비춘다는 대광명大光明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사명당의 빛나는 공적이 부처에 못지 않다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쓰였다.
  108. 227)현주玄珠 : 사리舍利를 비유한 말이다.
  109. 228)응천凝川 : 밀양密陽의 별칭이다.
  110. 229)추자鶖子 : 부처의 십대 제자 중 지혜 제일로 꼽히는 사리불舍利弗의 별칭인데, 여기서는 일반 승려를 뜻하는 말로 쓰였다.
  111. 230)모두 다섯 종류의 기문이 있는데, 편의상 기문 앞에 1~5까지의 숫자를 붙였다.
  112. 231)선묘가 일찍이~세우라고 명하고 : 선조는 사명당보다 먼저 승하하였으므로 사당을 세우라고 할 수 없다. 아마도 전쟁이 끝난 뒤 사명당이 그 조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건립한 백하란야白霞蘭若를 두고 한 말인 것 같지만, 이 일도 선조가 간여한 적이 없다. 이는 18세기 들어서면서 지방 유림에서 대사를 위한 사우의 건립을 건의한 뒤 조정에서 따른 일을 두고 한 말인 것 같다.
  113. 232)임진일기壬辰日記 : 여기 ‘임진일기’는 필시 덕천가강과의 회담을 일컫는 것 같지만 당시의 일기는 없다. 이는 아마 가등청정과의 대화록과 덕천가강과의 회담을 통틀어서 말한 것 같다.
  114. 233)상론尙論 : 옛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서 옛사람과 벗하며 평론하는 것을 말한다. 『맹자』 「萬章」 하에 나오는 “이 세상의 훌륭한 선비와 벗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못하면 다시 옛 시대로 올라가서 옛사람을 논한다. 그의 시를 낭송하고 그의 글을 읽으면서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모른대서야 말이 되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당시의 그의 삶을 논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옛 시대로 올라가서 벗하는 것이다.(以友天下之善士爲未足。 又尙論古之人。 讀其書誦其詩。 不知其人可乎。 是以論其世也。 是尙友也。)”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115. 234)삼강동三綱洞 : 본래 둔지리芚只里(古羅里)였으나, 이 지역 출신인 사명당이 임진란에 공을 세우고, 교수敎授 노개방盧蓋邦과 의병장 손인갑孫仁甲이 순사하였으므로 이후 삼강동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 지역민들은 노개방과 손인갑을 위하여 먼저 충효사忠孝祠를 세워 향사하였으며, 1714년에는 사명 대사를 위한 사우도 건립할 것을 조정에 청원하였다. 이리하여 대사가 일찍이 마을 뒤 영취산에 세웠던 백하란야 자리에 표충사를 건립하여 대사를 비롯한 서산西山ㆍ기허騎虛 세 대사의 충절을 칭송하는 향화를 올리게 된 것이다.
  116. 235)홍제弘濟와 보제普濟~하사한 호 : 휴정에게 내린 보제라는 당호는 선묘가 생전에 내린 것이지만, 유정에게 바친 홍제라는 시호는 사명당 사후에 허균이 사사로이 지어 바친 것이다.
  117. 236)역생酈生 : 초한楚漢 시대의 변사辯士인 역이기酈食其를 가리킨다. 『史記』 「淮陰侯列傳」에 “역생이 일개 선비의 신분으로 수레에 기댄 채 세 치의 혀를 놀려서 제齊나라의 70여 성을 항복받았다.(酈生一士。 伏軾掉三寸之舌。 下齊七十餘城。)”라는 말이 나온다.
  118. 237)부정공富鄭公 : 정국공鄭國公에 진봉進封된 송宋나라 부필富弼을 말한다. 인종仁宗 때에 거란에 사신으로 가서 땅을 할양하라는 그들의 요구를 일축하고 정당한 언변으로 사명使命을 욕되게 하지 않은 고사가 전한다.
  119. 238)조영평趙營平 : 한 무제漢武帝 때부터 흉노를 무찔러 명성을 떨치고 선제宣帝 때에 영평후營平侯에 봉해진 조충국趙充國을 말한다. 그는 또 논책論策에 능해서 상소한 글 모두가 경세經世의 글로 일컬어지는데, 선제宣帝 신작神爵 원년(B.C. 61)에 건의한 둔전책屯田策은 그중에서도 명문으로 전해진다. 『漢書』 권69.
  120. 239)웅어熊魚를 구별하지 못하는 저들 : 목숨보다도 의리를 더 중시하는 선비 정신을 모르는 자들이라는 말이다. 『맹자』 「告子」 상에, 물고기(魚)보다는 곰 발바닥(熊掌) 요리를 더 좋아하는 것처럼 목숨보다는 의리를 따라야 한다는 취지의 말이 나온다.
  121. 240)평행장平行長 : 풍신수길 사후 1600년에 일본은 양분되어 패권을 다투는 전쟁을 벌였는데, 평행장(小西行長)은 그때 패하여 참수 당하였다. 그러므로 대사가 1604년에 도일하여 강화한 사람은 덕천가강德川家康이다.
  122. 241)선묘가 일찍이 세우게 하여 : 선묘는 사명당보다 먼저 승하하였으므로 사명당의 사당을 세우라고 할 수는 없다.
  123. 242)칠치漆齒 : 이를 검게 물들인다는 뜻으로, 남만南蠻의 부족에 대한 멸칭蔑稱인데, 여기서는 왜적을 가리킨다.
  124. 243)입주출노入主出奴의 설을~주장하는 자 : 당唐나라 한유韓愈처럼 불교를 극력 배척하는 자라는 말이다. 입주출노入主出奴는 ‘입자주지入者主之 출자노지出者奴之’의 준말로, 어느 종교나 당파에 가입하면 그 교파만을 주인으로 삼아 존중하고, 그 교파가 아닌 것은 노예로 삼아 배척한다는 뜻이다. 한유가 지은 원도原道의 “도덕과 인의를 말하는 자가 양주楊朱에 들어가지 않으면 묵적墨翟으로 들어가고, 노장老莊에 들어가지 않으면 불교佛敎로 들어가게 되었다. 저기로 들어가면 반드시 여기에서 나오게 되는데, 들어가는 곳은 주인으로 여기고, 나가는 곳은 노예로 여겼다.(其言道德仁義者。 不入於楊。 則入於墨。 不入於老。 則入於佛。 入於彼。 必出乎此。 入者主之。 出者奴之。)”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125. 244)좌승상인 김~서문을 요청하고 : 정기안鄭基安의 문집인 『晩慕遺稿』 권1 「寄題表忠祠」에 의거하여 김 공 뒤에 재로在魯를 첨가하여 번역하였다. 김재로의 자字는 중례仲禮이고, 호는 청사淸沙이다.
  126. 245)『만모유고』에는 이 뒤에 “임금의 옷을 입고 임금의 밥을 먹으면서 국난을 당하면 피하기나 하고, 함장函丈에서 구의摳衣하다가 창을 돌려서 치는 저자들은 유독 무슨 심보인가.(彼衣食焉辟其難。 摳衣函丈而倒其戈者。 獨何心哉。)”라는 글이 더 붙어 있고, 그 다음에 칠언율시가 나오는데, 참고로 그 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맹사를 임금의 문에서 백 년을 길렀건만, 국난을 구한 큰 공은 나무 술잔 배로다. 귀신처럼 출입한 교타의 굴이요, 성일처럼 찬란한 색상의 천이로다. 상검을 성내 휘둘러 나라에 보답하고는, 금장을 웃으며 풀고서 다시 참선으로. 혈성이 복을 구함이 아님을 정녕 알겠노니, 새 사당의 향화는 정연淨緣이 쌓인 것이로다.(猛士君門養百年。 濟艱功大木杯船。 鬼神出入蛟鼉窟。 星日輝光色相天。 霜劍怒揮能報國。 金章笑解更參禪。 定知血性非要福。 香火新祠累淨緣。)”
  127. 246)송운에게 찰밥을 보내며 : 이 시는 출처 미상이다. 아래에 나오는 시들과 설명을 감안하면, 이 시 역시 지산芝山 조호익曺好益(1545~1609)의 작품일 것으로 생각되나, 현재 그의 문집인 『芝山集』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이 시는 아마도 정월 대보름 무렵에 지은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신라 소지왕炤知王 10년(488) 1월 15일에 왕이 경주의 금오산金鰲山 동쪽 기슭에 있는 천천정天泉亭에 거둥하였을 때, 까마귀가 쥐와 더불어 이상한 행동을 보이다가 날아가므로 뒤쫓게 하니, 갑자기 까마귀는 사라지고 한 노인이 못(池) 속에서 나와 편지 봉투를 전하였는데, 그 속에 “빨리 거문고 갑匣을 쏘라.”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왕이 곧 입궁入宮하여 활로 거문고 갑을 쏘았더니, 그 속에 왕비와 간통하면서 그날 왕을 시해하려고 했던 승려가 숨어 있었다. 이에 감동한 백성이 1월 16일을 오기일烏忌日이라 하여 찰밥을 지어 까마귀에게 제사를 드렸고, 그 못은 글이 나온 못이라고 하여 ‘서출지書出池’라고 불렀다는 고사가 전한다. 『三國遺事』 권1 「紀異」 〈射琴匣〉
  128. 247)여기서부터 「備局甘結關」 앞(pp.249~256)까지는 『한국불교전서』 제8책 p.112에 나오는 주석 ①을 번역한 것이다. 사명당과 관련된 자료가 부족한 지금의 상황에서 이 부분도 하나의 보충 자료로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사료되기에 이번 기회에 번역하여 본문에 수록하였다.
  129. 248)군민을 묻고~보답 하네 : 세월이 많이 흘러 신라시대는 이미 까마득히 멀어졌지만, 까마귀는 그때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으니, 그 까마귀에게 보답하고 싶다는 말이다. 여기서 까마귀는 국난을 구제한 송운을 비유한 말이다.
  130. 249)우리 스님~먹여 주셨으면 : 어떤 사람을 좋아하다 보면 그 사람과 관련된 모든 것이 좋아지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尙書大傳』 「牧誓大戰」의 “어떤 사람을 좋아하면 지붕 위의 까마귀도 좋아지게 마련이고, 어떤 사람을 좋아하지 않으면 담벼락의 모서리도 미워지는 법이다.(愛人者。 兼其屋上之烏。 不愛人者。 及其胥餘。)”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참고로 두보杜甫의 시에 “장인의 집 지붕 위의 까마귀여, 주인이 좋으니 까마귀 너도 좋구나.(丈人屋上烏。 人好烏亦好。)”라는 표현이 나온다. 『杜少陵詩集』 권11 〈奉贈射洪李四丈〉.
  131. 250)환성사로 송운을 찾아가다 : 이 시는 조호익曺好益의 『芝山集』 권1에 나온다. 환성사는 대구 팔공산 기슭에 있는 사찰 이름인데, 산이 성처럼 절을 둥글게 에워싸고 있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사명당은 1601년 부산성을 수축한 뒤 겨울에 환성사에 가서 쉬었는데, 다음 해 봄에 영천에 우거하던 지산이 사명당을 방문하여 이 시를 지었다.
  132. 251)묵은 구름~있을지도 모르니까 : 구름이 흩어져서 주위가 환해지면 함소화含笑花가 자신의 모습을 보고는 신선을 찾으러 왔다고 비웃을까 걱정이 된다는 뜻의 해학적인 표현이다. 함소화는 목란과木蘭科에 속하는 상록관목常綠灌木으로 초여름에 꽃이 피는데, 항상 만개滿開하지 않은 모습이 웃음을 머금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참고로 소식蘇軾의 시에 “지금은 그저 꽃이 웃음을 머금고서 신선 배우려는 진시황 비웃고 있는 듯.(而今只有花含笑。 笑道秦皇欲學仙。)”이라는 구절이 보인다. 『蘇東坡詩集』 권38 〈廣州蒲澗寺〉.
  133. 252)송운에게 주다 : 이 시도 지산의 작품으로 생각되나, 출처 미상이다.
  134. 253)오직 기뻐라~온전한 분 : 조정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고 산중에 거하고 있는 송운을 생각하면 마음이 기쁘다는 말이다. 학서鶴書는 교서敎書를 말한다. 참고로 남조南朝 송宋의 공치규孔稚珪가 지은 「北山移文」에 “사자使者를 태운 말이 울음소리를 내면서 골짜기에 들어오고, 조정에서 부르는 학서가 산언덕을 넘어왔다.(鳴騶入谷。 鶴書赴隴。)”라는 말이 나온다.
  135. 254)인정人定 : 옛날에 야간 통행금지를 알릴 목적으로 종을 치던 일을 말한다. 저녁 2경에 28수宿를 상징하여 28번 큰 종을 치고 성문을 닫았다. 그러다가 5경 3점이 되면 삼십삼천三十三天의 뜻으로 33번 쇠북을 치고 통행금지를 풀었는데, 이것을 파루罷漏라고 하였다.
  136. 255)상여桑輿 : 자상子桑과 자여子輿의 준말로, 절친한 친구를 뜻한다. 『장자』 「대종사」에, 열흘 동안 장맛비가 잇따라 내리자 자여가 자상을 걱정해서 밥을 싸들고 찾아가 사람의 운명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는 대목이 나온다. 지산芝山은 송운보다 한 해 늦게 태어나서 한 해 일찍 세상을 떠났다.
  137. 256)송운이 풍악에~것을 전송하다 : 『지산집』 권1에 〈送惟政入楓岳〉이라는 제목으로 나온다. 사명당은 1603년 여름에 부산에 있다가 금강산으로 들어가 유점사에서 스승 서산 대사를 만났다. 지산의 이 시는 대사가 금강산으로 들어갈 때 석별의 정을 나눈 작품이다.
  138. 257)금승金繩 : 이구국離垢國의 길에 경계를 구별하기 위해 설치한 황금 새끼줄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속세와 격리된 출세간의 사찰로 가는 험한 길에 설치된 쇠줄을 비유하는 말로 쓰였다. 이구離垢는 사리불舍利弗이 화광여래華光如來로 성불하여 다스리는 나라 이름인데, 그 나라는 “땅이 유리로 되어 있고, 길이 팔방으로 나 있으며, 황금으로 새끼줄을 만들어 그 옆에 설치했다.(琉璃爲地。 有八交道。 黃金爲繩。 以界其側。)”라는 말이 『法華經』 「譬喩品」에 나온다. 참고로 이백李白의 시에도 “황금 새끼줄로 깨달음의 길을 인도하고, 보배로운 뗏목으로 미혹의 내를 건넌다.(金繩開覺路。 寶筏渡迷川。)”라는 표현이 나온다. 『李太白集』 권13 〈春日歸山寄孟浩然〉.
  139. 258)홍니鴻泥 : 녹기 시작한 눈 위에 남긴 기러기 발자국(鴻爪雪泥)이라는 말로, 아무 흔적도 없이 금방 사라져 없어질 인생의 허무한 발자취라는 말인데, 여기서는 송운의 자취를 뜻한다. 소동파蘇東坡의 “인생길 이르는 곳 무엇과 비슷하다 할까. 녹기 시작하는 눈밭의 기러기 발자국과 같다 하리. 우연히 발톱 자국 남겨 놓았을 뿐, 날아가면 어찌 다시 동쪽 서쪽 헤아리리.(人生到處知何似。 應似飛鴻蹈雪泥。 泥上偶然留指爪。 鴻飛那復計東西。)”라는 시구에서 비롯된 것이다. 『蘇東坡詩集』 권3 〈和子由澠池懷舊〉.
  140. 259)학몽鶴夢 : 세간을 초월하여 학처럼 훨훨 날아가고픈 꿈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송운을 따라가고 싶은 심정을 비유한 것이다.
  141. 260)쌍필雙筆은 수만~다투어 전하고 : 유명한 문장가들이 다투어 송운의 병략兵略을 칭송하여 후세에 전하고 있다는 말이다. 쌍필은 당나라 이교李嶠가 아동 때에 신인神人으로부터 쌍필을 받는 꿈을 꾸고 나서 학업이 진보됐다는 고사에서 나온 것으로, 관직에 출사하거나 문재가 출중한 사람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舊唐書』 권94 「李嶠列傳」. 수만 갑 운운은 송宋나라 범중엄范仲淹의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그가 연주延州를 다스리자 하인夏人이 서로 경계하여 말하기를, “연주에 뜻을 두지 말라. 소범 노자의 뱃속에는 수만 갑병이 들어 있다.(毋以延州爲意。 小范老子腹中。 有數萬甲兵。)”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송나라 공평중孔平仲의 『孔氏談苑』 「軍中有范西賊破膽」 조에 나온다.
  142. 261)일지一枝는 백천~나뉘어 비추리 : 보리달마로 시작된 중국의 선종이 육조 혜능을 거쳐 임제종을 비롯한 오가칠종五家七宗으로 나뉘어 전성기를 맞이하였는데, 임제종을 받아들인 조선의 불교가 다시 송운으로부터 뿌리를 나누어 마치 백천의 등불처럼 더욱 번창할 것이라는 말이다.
  143. 262)오견烏肩 : 까마귀가 어깨에 둥지를 튼다는 뜻의 오소견烏巢肩의 준말로, 치열하게 구도하는 수행승의 모습을 비유한 말이다. 소식蘇軾의 시에 “서방의 진인을 누가 눈으로 보았기에 칠보의 옷을 입히고 두 마리 사자가 따르는 그림을 그렸는가. 당시에 무척 고생하며 도를 닦았기에 양 팔꿈치에는 잣나무가 돋아나고 어깨에는 까마귀가 둥지를 틀었다네.(西方眞人誰所見。 衣被七寶從雙狻。 當時修道頗辛苦。 柏生兩肘烏巢肩。)”라는 말이 나온다. 『蘇東坡詩集』 권4 〈記所見開元寺吳道子畫佛滅度以答子由〉.
  144. 263)잣나무와 어린~뒤에 증명하리라 : 송宋나라 시인 간재簡齋 진여의陳與義의 시에 “잣나무도 설법을 알아듣고, 뽕잎도 선에 능통했다네.(栢樹解説法。 桑葉能通禪。)”라는 구절이 보인다. 『簡齋集』 권2 〈書懷示友〉 10수 중 제5수.
  145. 264)송운 스님에게 드리다 : 『芝山集』 권1에 〈贈惟政〉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는 고시古詩이다.
  146. 265)금장金章 자수紫綬 : 황금 도장과 자줏빛 인끈이란 뜻으로, 고위 관원을 가리킨다.
  147. 266)오통五通 육통六通 : 육통은 육신통六神通을 갖춘 불佛을 가리키고, 오통은 육통에서 1통이 모자란 신선神仙을 가리킨다. 불은 생生도 없고 사死도 없는(不生不滅) 반면에, 신선은 사死가 없을 뿐이라고 한다. 참고로 육통은 신족통神足通ㆍ천이통天耳通ㆍ타심통他心通ㆍ숙명통宿命通ㆍ천안통天眼通ㆍ누진통漏盡通을 말한다. 소식蘇軾의 시에 “문득 납의 입고 옥국관玉局觀에 돌아오니, 나 스스로 오통의 신선이 된 것만 같네.(却著衲衣歸玉局。 自疑身是五通仙。)”라는 구절이 있다. 『蘇東坡詩集』 권14 〈南華老師示四韻事忙姑以一偈答之〉.
  148. 267)조물이 또~비루먹게 하는구려 : 지산이 송운을 찾아가려 해도 자꾸만 차질이 생겨서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시경』 「周南」 〈卷耳〉에 “저 높은 산에 올라가려 해도, 내 말이 그만 비루먹었네.(陟彼崔嵬。 我馬虺隤。)”라는 말이 나온다.
  149. 268)대관大觀 : 멀리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큰 차원에서 살펴보는 것을 말한다. 한漢나라 가의賈誼의 「鵩鳥賦」에 “작은 지식의 소유자는 자기 위주로 생각하기 때문에 상대방은 천하게 여기고 자기는 귀하게 여기지만, 달관한 사람은 대관을 하기 때문에 상대가 누구이든지 불가할 것이 없다.(小智自私兮。 賤彼貴我。 達人大觀兮。 物無不可。)”라는 말이 나온다.
  150. 269)추호秋毫나 태산이나~것은 마찬가지 : 참고로 『장자』 「秋水」에 “천지가 돌피 낱알처럼 작은 것이 될 수 있음을 알고, 가느다란 터럭 끝이 언덕이나 산처럼 큰 것이 될 수 있음을 안다면, 사물의 차별의 이치가 어떠한 것인지 이해하게 될 것이다.(知天地之爲稊也。 知豪末之爲丘山也。 則差數覩矣。)”라는 말이 나온다.
  151. 270)손유선孫儒仙 : 진晉나라 손작孫綽을 말한다. 그가 10여 년 동안 산수山水를 유람한 뒤에 번잡한 인간 세상을 떠나 산림山林에 은거하려고 마음먹은 처음의 뜻을 마침내 이루게 되었다는 내용으로 「遂初賦」를 지은 고사가 전한다. 그의 「天台山賦」도 유명하다. 여기서는 지산 자신을 비유하는 말로 쓰였다.
  152. 271)그보단 산령의~게 나을지도 : 산에 은거하는 것이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는 말이다. 산령은 북산北山의 신령을 말한다. 남조南朝 제齊의 주옹周顒이 북산에 은거하다가 벼슬에 나아간 뒤 다시 이 산을 거쳐서 가게 되자, 공치규孔稚珪가 북산의 산신령을 가탁하여 그의 변절을 풍자한 「北山移文」이라는 글이 유명하다.
  153. 272)산중의 난석도~있을 테니까 : 동진東晉의 축도생竺道生이 강소江蘇 호구산虎丘山에서 여기저기 흩어진 돌들(亂石)을 모아 놓고 『涅槃經』의 천제성불闡提成佛의 설을 강의하면서 “나의 이야기가 불심佛心과 계합契合하는가?” 하고 물으니, 그 돌들이 모두 머리를 끄덕였다는 ‘생공설법生公說法 완석점두頑石點頭’의 고사가 전한다. 『蓮社高賢傳』 「道生法師」, 『佛祖統紀』 권26.
  154. 273)승대장僧大將 송운에게 드리다 : 『지산집』 권1에 〈贈僧將惟政〉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는 칠언율시이다.
  155. 274)두남斗南과 동원東院~비범하신 분이건만 : 사신으로서의 외교 역량과 수행자로서의 선禪의 경지 두 가지 모두가 월등하다고 송운을 찬미하는 말이다. 두남은 북두이남北斗以南의 준말로 온 세상이라는 말과 같은데, 당唐나라 적인걸狄仁傑이 곤경에 처한 어떤 사람을 대신하여 어려운 사신의 일을 자청하고 나서자, “우리 적 공狄公의 어진 덕성으로 말하면, 북두이남에서 오직 한 사람밖에 없다고 할 것이다.(狄公之賢。 北斗以南。 一人而已。)”라고 칭송했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新唐書』 「狄仁傑傳」. 동원東院은 조주趙州 관음원觀音院의 별칭인데, 당나라 조주 종심趙州從諗 선사가 이 동원에 머물며 선풍禪風을 떨치다가 120세의 나이로 입적入寂한 고사에서 유래하여 선원 혹은 선풍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156. 275)망읍忘揖 : 읍양揖讓과 같은 형식적인 예의가 필요 없을 정도로 절친한 사이를 뜻하는 말인데, 여기서는 지산 자신을 가리킨다.
  157. 276)귀화鬼火를 칼~불어 보내네 : 일본에 건너가서 화의를 타결하고 돌아와서는 스승인 서산 대사를 그리워하며 산으로 돌아가려 한다는 말이다. 오대산 승려 취혜就惠가 소장한 문고文藁의 기록에 의하면, 송운은 가야산 해인사에 은둔해 있던 중에 갑진년(1604, 선조 37) 정월 23일에 서산 대사의 열반 소식을 듣고 분상奔喪하다가 경기도 양근楊根 오빈역娛嬪驛에 이르렀을 때에 상의 명초命招를 받았으므로 미처 분상하지 못한 채 역마를 타고 서울로 와서 일본 사신의 명을 받고 건너간 뒤에 이듬해에 귀국하여 7월 13일에 복명復命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 시는 아마도 이즈음에 지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귀화는 도깨비불이라는 뜻으로, 왜적이 일으킨 변란을 가리킨다. 종풍宗風은 종문宗門, 즉 선종의 바람이라는 말이다. 망운望雲은 구름을 바라본다는 뜻으로, 고향의 어버이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을 비유하는 말인데, 여기서는 스승에 대한 그리움을 뜻하는 말로 전용轉用되었다. 당나라 적인걸狄仁傑이 태항산太行山을 넘어가던 중에 흰 구름이 외로이 떠가는 남쪽 하늘을 바라보면서 “저 구름 아래에 어버이가 계신다.(吾親所居。 在此雲下。)”라고 하고는 한참 동안 머물러 있다가 구름이 다른 곳으로 옮겨 간 뒤에 다시 길을 떠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舊唐書』 「狄仁傑傳」.
  158. 277)말용末容을 빌려~담고도 싶소마는 : 송운이 약간의 관용을 베풀어 주기만 하면 그를 따라가 산에서 함께 지내고 싶다는 뜻의 해학적인 표현이다. 말용은 말째, 즉 맨 끝의 관용이라는 말이고, 사대四大는 지ㆍ수ㆍ화ㆍ풍으로 이루어진 육신이라는 말이다.
  159. 278)석두石頭의 길~가득하니 원 : 조사의 예리한 기봉機鋒을 당해낼 자신이 없다는 뜻의 해학적인 표현이다. 석두는 당나라 선승 석두 희천石頭希遷을 말한다. 일찍이 육조 혜능을 참알參謁하였으며, 청원 행사靑原行思의 인가를 받았다. 당시에 ‘강서江西의 마조 도일馬祖道一, 호남湖南의 석두 희천’으로 일컬어지며 크게 선풍을 떨쳤다. 등은봉鄧隱峯이 마조를 하직하고 석두를 찾아가려 하자, 마조가 “석두의 길은 미끄럽다.(石頭路滑)”라면서 만류하였는데, 과연 그 뒤에 석두에게 곤욕만 당하고 아무 소득도 없이 그냥 돌아온 고사가 전한다. 『宋高僧傳』 권9, 『傳燈錄』 권14, 『五燈會元』 권5, 『聯燈會要』 권4 「馬祖道一」. 『지산집』에는 이 뒤에 “산으로 돌아갈 뜻이 있었기 때문에 석두의 고사를 인용하여 면려하였다.(有還山之意。 故用石頭之語以勉之。)”라는 자주自註가 붙어 있다.
  160. 279)개연芥緣 : 겨자씨 인연이라는 뜻으로, 매우 드문 인연을 비유하는 말이다. 도리천忉利天에서 겨자씨 하나가 아래로 떨어져서 염부제閻浮提에 곧추 세운 바늘 위에 꽂히는 것처럼 불법을 만나기 어렵다는 ‘추개투침봉墜芥投針鋒’의 비유가 『北本涅槃經』 권2에 실려 있다.
  161. 280)북악에 석장錫杖~약속 지켰나니 : 북악은 북산이문北山移文의 북산으로, 은거하겠다는 은자의 약속을 지키러 다시 산에 들어갔다는 뜻이다.
  162. 281)소선蘇仙 : 소동파蘇東坡의 애칭인데, 여기서는 덕신德臣에 대한 미칭으로 쓰였다.
  163. 282)감결甘結 : 상급 관아에서 하급 관아에 보내는 공문을 말한다.
  1. 1)「一」補入{編}。
  2. 1)自此至卷末。甲本無有。
  3. 1)「茟」通用「筆」{編}。
  4. 2)「附錄二」三字補入{編}。自此至卷末。無有{乙}。
  5. 1)此上甲本有文如下「送糯飯于松雲。欲問君民世已徂。區區炊飯報啣書。悲歡不及前朝(缺)。願飼吾師屋上烏。環城寺訪松雲。九十韶光病裏過有時來到法王家。宿雲未散還歸去。恐有山中含笑花贈松雲。世間交道易親踈。獨喜山中全鶴書月上西窓人定後。臥思今古到枽輿。送松雲入楓嶽。楓嶽岡巒苐幾層。須知步步著金繩。蒼茫未了鴻泥迥。縹緲難廻鶴夢凝。雙筆爭傳數萬甲。一枝分照百千燈。天香滿院烏肩靜。栢樹柔桑是後徵贈松雲師。楓嶽之高在雲間。環城之山接塵區。雲間本無金章紫綬之貴人。塵區安有五通六通之道流偶然得遇不我捨。本自無之寧我求。彼不求此不捨。造物從令馬虺隤。吾聞大觀不在物。秋毫太山同崔嵬。靑蓮汚泥有何妨。須信維摩住城裏安知亦念孫儒屳。有遠傳蓮經義。不如俯循山靈意。山中亂石且有耳(時) 贈僧大將松雲。斗南東院兩超常忘揖猶須更臥床。鬼火却收橫釼手。宗風吹送望雲香。世間名字黃金重。像外禪心白日長。擬借末容容四大。石頭行滑滿蹊霜。芝山曹先生。諱好益。字士友。享道岑書院。六世孫德臣送松雲親筆詩札于表忠祠。感次前韻。芥緣恨末幷時生。願聽圓音拜覺城。滿地干戈悲國勢。和戎籌策慰輿情。飛笻北岳重尋約。留績東華久罷兵。何幸騷仙傳舊律。爲營秋祀促南行。戊戌春。余忝荷宗正任。至秋八月。享祀次南行。正宿于靈芝寺。朝拜一騷仙。即道岑院所享。曹先生六世孫德臣喜有一見舊知。余爲松雲九世孫故也。即與舊篋中一幅詩札。乃法祖渡海時。所恳親筆。仍又示其詩帙中略干篇。眷眷有囑。偉歟。古老方外之契今人通家之好。豈非詩緣。盖此詩韻。諸老皆酬而今又見先生之寶唾。可喜元律追步。壽榟示後將有觀感也夫。乾隆四十三季戊戌九月。日 九世法孫毅旻謹跋」。
  6. 2)自此至「天學(次頁中段十五行)」甲本無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