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C_BJ_H0164_T_004
-
008_0305_a_06L취미 대사 행장翠微大師行狀선대사先大師의 휘는 수초守初이고 자는 태혼太昏이며, 취미翠微는 그의 호이다. 성은 성成씨로 창녕이 본관이니, 본조의 명신 성삼문成三問의 방계 후손이다.만력萬曆 경인년(1590,
일에 경성 반궁頖宮164) 북쪽에서 태어났다. 태몽에 얽힌 이야기와 태어날 때의 상서祥瑞가 없지 않으나 모두 생략한다.아동기에 놀이를 할 때면 반드시 불사佛事를 행하였고, 그 일이 끝나면 우뚝 앉아서 마치 선정禪定에 든 승려의 모습을 짓곤 하였으므로, 보는 이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기며 속세의 사람이 아니라고 하였다.부구賦鷗의 나이에 부모를 잃고 형수에 의지하였다. 15세(志學)가 되어서는 재물을 버리고 대범(倜儻)한 기개를 숭상하였다. 어느 날 저녁 잠자리에 들었을 적에 비몽사몽간에 범승梵僧이 급히 부르며 “오는 것이 왜 이렇게 늦는가?”라고 말하였는데, 두 번이나 이와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급히 일어나 앉아서 새벽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형에게 꿈 이야기를 하며 출가하겠다고 청하니, 형이 손으로 입을 막으면서 “다시는 이런 말을 꺼내지 말라.” 하였다. 이에 아무 말 없이 물러났으나 며칠 동안이나 마음이 즐겁지 않았다. 그리하여 열흘이 지난 어느 날 밤에 곧장 성을 넘어서 빠져나왔다.설악의 덕 높은(耆宿) 경헌敬軒에게 의탁하여 머리를 깎고 행자行者가 되었다. 병오년(1606, 선조 39)에 남쪽으로 지리산(頭流)에 이르러 먼저 부휴浮休를 찾아뵙고 계율(尸羅)을 갖추어 시봉하였다(執巾匜). 좌우에서 모실 적에 벽암碧巖 사옹師翁이 소장로小長老로서 제일좌第一座에 거하고 있었다. 하루는 부휴가 스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제일좌에게 말하기를 “뒷날 나의 도를 성대하게 할 사람은 -
008_0305_a_06L
008_0305_a_07L1)翠微大師行狀 [2]
008_0305_a_08L先大師諱守初。字太昏。翠微其號。成
008_0305_a_09L姓。系出昌寧。本朝名臣三問之旁裔也。
008_0305_a_10L萬曆庚寅六月初三。生于京城頖宮之
008_0305_a_11L北。娠夕之夢。誕旦之瑞。不無而可略
008_0305_a_12L也。爲兒嬉戱。則必爲佛事。已則傲兀
008_0305_a_13L而坐。凷然如入定僧。見者咸異之曰。
008_0305_a_14L非是塵臼中人。賦𩿨之歲。喪考妣。唯
008_0305_a_15L兄嫂是依。及志學。唾財賄尙倜儻。一
008_0305_a_16L夕薦枕。形未及交。怳然有梵僧疾嘑曰
008_0305_a_17L來何遲。如是者再。急起坐。遲明告兄
008_0305_a_18L以所夢。求出家。即以手窒口曰。勿復
008_0305_a_19L出此語橽矣。嘿然而退。不樂者數日。
008_0305_a_20L才浹旬晨夜。便踰城走。依雪嶽耆宿敬
008_0305_a_21L軒。落䰂擁毳。丙午南抵頭流。首謁浮
008_0305_a_22L休。具尸羅執巾匜。侍左右時。碧嵓師
008_0305_a_23L翁。以小長老。居第一座。一日休摩師
008_0305_a_24L會撮。而謂第一座曰。異日大吾道者。
-
008_0305_b_01L반드시 이 사미沙彌일 것이다. 나는 나이 많고 병이 들었으니 세상에 오래 있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그대에게 부탁하는 바이니 잘 보살펴 주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부휴가 스님의 그릇을 인정하고 중하게 여긴 것이 이와 같았다.성년이 되고 나서 각지를 두루 답사하며 숙장宿匠을 찾아다녔는데, 가는 곳마다 법석에서 창槍을 들지 않는 때가 없었다.165) 그러고는 탄식하기를 “옛날에 덕을 품고 도를 행한 이들은 거의 모두 다른 종교와 학술을 섭렵하여, 유교를 만나면 유교를 논하고 노장老莊을 만나면 노장을 논하였다. 그리하여 불법을 비난하지 못하게 하여 불성佛聖의 교화를 성대하게 하였으니, 어찌 지금처럼 마음이 꽉 막혀 담벼락을 맞댄 것과 같았겠는가.”라고 하고는, 곧장 경성으로 돌아와 한상翰相의 문에 출입하면서 귀족과 사대부들을 사우師友로 삼아 문헌(墳典)을 토론하고 정화精華를 저작咀嚼하는 일을 날마다 멈추지 않았다. 한번은 어느 암자에 묵고 있을 적에, 유생 네다섯 명이 구오癯烏를 운韻으로 하여 시를 짓기를 청하자 스님이 즉시 읊었는데, 그 말구에 “평생에 남는 물건은 없고, 까만 대지팡이 하나 있을 뿐(平生無長物。唯有竹枝烏。)”이라고 하였으므로 당시에 ‘죽지오 스님(竹枝烏僧)’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하였다.그때 벽암이 관동에서 교화를 펼치고 있었는데, 스님이 홀연히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일단 승복을 입었으면 조사의 도에 심취하는 것을 낙으로 삼아야 할 것인데, 어찌 줄곧 속전俗典에 눈길을 주어서야 되겠는가.’ 하고는 석장을 들고 곧장 그곳으로 나아갔다. 그러고는 벽암이 자리에 오르는 것을 기다렸다가 법상法牀 주위를 세 바퀴 돌고 나서 좌구坐具를 펴고 예를 표한 뒤에 안부를 물으려 하자, 벽암이 말하기를 “어디에서 임바紝婆166)의 씨 보따리를 메고 왔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스님이 “집착이 없는 곳에 내려놓고 싶습니다.”라고 하니, 벽암이 “짐을 푼 뒤에 보도록 하자.” 하였다. 스님이 소매를 떨치고 승방(僧寮)으로 돌아가니, 벽암이 부휴의 부탁을 생각해서 빠짐없이 가르침을 베풀며 종횡으로 격발激發하자, 스님이 마음과 뜻으로 조용히 깨달아(冥會) 마치 화살과 칼날이 서로 부딪치는 것만 같았다.167) 벽암이 수레를 남쪽으로 돌리자 스님이 수행하며 돌아와 오래도록 모시고서 마음속의 잡목을 제거하고 빗장을 활짝 열어젖혀 현묘한 도의 세계로 깊이 들어가니, 벽암이 종문의 모범(準的)이라고 인가하였다.이때 무염훈無染熏 공이 교학으로 명성을 떨치자 세상의 학인들이 너도나도 모여들어 경론을 가지고 토론하였으므로 스님이 또 그를 깍듯이 모시면서 더욱 정밀하게 공부하여 경론의 심오한 뜻을 계합하였다. 이로부터 선禪은 돈점頓漸을 겸하고 교敎는 성상性相을 아울렀으며, -
008_0305_b_01L必此沙彌。吾耄且疾。非久於世。以付
008_0305_b_02L汝。好自將護。其器重如此。旣勝冠。遍
008_0305_b_03L踏區宇。叩叅宿匠。所至法席。莫不操
008_0305_b_04L戈。嘗歎曰。古之抱德行道者。率皆漁獵
008_0305_b_05L他宗異學。對儒談儒。逢老談老。禦其
008_0305_b_06L侮誚。俾昌熾佛聖之化。豈若今之蓬心
008_0305_b_07L墻面者哉。即返京輦。出入翰相之門。
008_0305_b_08L師友貴游薦紳。討論墳典。咀嚼菁華。
008_0305_b_09L進之無已。寓一庵宿。有靑衿四五軰。
008_0305_b_10L以癯烏爲韻。請賦詩。師立吟。其末句云。
008_0305_b_11L平生無長物。唯有竹枝烏。時稱竹枝烏
008_0305_b_12L僧云。會碧嵓轉化關東。師忽心語曰。夫
008_0305_b_13L零染之士。醉心祖道爲樂。何一向寓目
008_0305_b_14L於俗典耶。荷楖標徑造。而値其陞座。
008_0305_b_15L即遶牀三匝。展坐具設。禮儗問訊。嵓曰
008_0305_b_16L何處得一擔紝婆子來。師曰欲放下無
008_0305_b_17L着處。嵓曰卸後相見。師擺袖歸寮。嵓
008_0305_b_18L以休之囑。密指顯諭。縱橫激發。師心冥
008_0305_b_19L意會。箭鋒交拄。旣象駕南旋。師隨御
008_0305_b_20L而歸。陪侍積稔。芟其枿拔其樁。洞啓
008_0305_b_21L關鍵。深入淵玄。嵓印之曰。宗門準的。
008_0305_b_22L是時無染熏公。以敎場傑魁。八表義學
008_0305_b_23L風趍駿奔。橫經問難。師又禮事之。益
008_0305_b_24L精練契經奧義。自是禪兼頓漸。敎會性
-
008_0305_c_01L경사자집經史子集도 널리 탐구하여 여유작작하게 되었다. 그래서 스님이 한번 말을 하면 모두 머리를 조아리며 풀이 바람에 쓸리듯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리고 사제 간에 선기禪機를 주고받는 것을 보면 간혹 뺨을 치고 수염을 뽑는 것 같은 광경을 연출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보통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에, 마치 임제168)와 황벽169)의 관계처럼 대부분 너무나 엉뚱하여 상정常情에 근사하지 않다고 생각하였다.몇 년 동안 대중과 함께 생활하다가 숭정 기사년(1629, 인조 7)에 출세出世의 요청을 받고는 옥천의 영취靈鷲에 개당하니 학도가 몰려들었다. 이때 상국 장유張維 공이 희고 상인希古上人에게 북산에 결사結社할 것을 명하고는, 스님의 도풍을 사모하여 누차 서한을 보내 청하였으나, 스님이 난색을 표하며 굳게 사양하고 응하지 않으니, 상국이 더욱 존중하여 차거硨璖170) 염주를 선물하기도 하였다.임신년(1632, 인조 10)에 요청을 받고 관북에 가서 오도悟道와 설봉雪峯 등 제산諸山에서 도를 펼쳤다. 도가 높다는 명성이 널리 전파되어 사방의 승려가 모두 모여들어 법석이 성황을 이루면서 영남(嶺外)에 크게 떨쳤으니, 선학禪學이 융성해진 것은 이로부터 비롯되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바다 서쪽으로 항해航海하여 남은 의문을 해결할 목적으로 마침내 동지 4인과 모임을 결성하고는 삿갓을 메고 떠났으나, 양덕에 이르렀을 때 마침 오랑캐가 동방을 유린하는 사태가 발생하여 길이 막혔으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정축년(1637, 인조 15)에 동쪽으로 태백으로 가서 일백一白을 경유하여 이듬해에 남쪽으로 돌아와 벽암을 찾아뵈었는데, 벽암은 그때 막 의려義旅를 파한 상태였다. 그리하여 방장方丈의 옛 거처로 돌아왔다가 뒤이어 계족의 정혜定慧와 백운의 용문龍門에서 교화를 펼쳤다.계미년(1643, 인조 21)에 진주목사晉州牧使 이소한李昭漢 공이 칠불암七佛庵으로 옮길 것을
명을 채웠는데, 대중을 제접提接하고 자기를 다스리면서 조석으로 나태하지 않았다. 강대수姜大遂 공이 이 공의 뒤를 이어 부임하여 누차 선사禪社에 들어와 담론하면서 하루해를 넘기곤 하였는데, 현묘한 대화가 끝없이 이어지며 막힘없이 전개되자 기이하게 여겨 “참으로 승려 중의 기재杞梓171)이다.”라고 평하였다.임진년(1652, 효종 3)에 장성의 진원珍原에서 지리산으로 석장을 돌렸다. -
008_0305_c_01L相。且經史子集。該綜慱究。綽有餘裕。
008_0305_c_02L師出一言若崩。厥角罔不靡。然趍下風
008_0305_c_03L矣。至於師資激敭。或能批頰捋鬚。此
008_0305_c_04L非中容下士所能擬議故。多以爲大甚
008_0305_c_05L逕莛。不近常情。若臨濟之於黃蘗焉。陸
008_0305_c_06L沉于衆有年。崇禎己巳。衆請出世。乃
008_0305_c_07L開堂于玉川之靈鷲。學徒臻湊。時相國
008_0305_c_08L張公維。命希古上人。結社於北山。嚮
008_0305_c_09L師道風。屢以折簡請。師重席。牢讓不
008_0305_c_10L赴。益重之。遺以𤥭璖數珠一串。壬申被
008_0305_c_11L請抵關北。唱道於悟道雪峰諸山。道聲
008_0305_c_12L遐布。四來玄侶。坌然畢萃。法席蔚然。
008_0305_c_13L大振嶺外。禪學之盛。自此始。居無何
008_0305_c_14L欲航游海西。諮決餘疑。遂結同志四人
008_0305_c_15L擔簦而邁。至陽德時。値逮夷東躪。路
008_0305_c_16L梗不得達。丁丑東之太白經一白。明年
008_0305_c_17L南還。省碧嵓。嵓方罷義旅。歸方丈舊
008_0305_c_18L栖。尋闡化於雞足之㝎慧。白雲之龍門。
008_0305_c_19L癸未晉牧李公昭漢。請移七佛。衆盈三
008_0305_c_20L百。接人治己。昒昕匪懈。姜公大遂。繼
008_0305_c_21L涖玆邦。累入社談。論必移日。玄言舋
008_0305_c_22L舋。注瀉無竭。莞然奇之曰。眞僧中杞
008_0305_c_23L梓也。壬辰自長之珍原。回錫智異。適
008_0305_c_24L此上底本有「附錄」二字。編者除之。
-
008_0306_a_01L그때 마침 이지온李之蘊 공이 용성龍城의 수재守宰로 나왔다가 주곽州郭에서 영입하여 며칠 동안 머물렀는데, 이 공이 자못 고상한 의론을 음미하고서 말하기를 “선학禪學의 고명함을 스님에게서 보았다.” 하고는 항상 자字를 부르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병신년(1656, 효종 7)에 보개寶蓋에서 반룡盤龍으로 갔다. 내한內翰 신최申最 공이 관북의 좌막佐幕으로 나가면서 덕원을 지나다가 우졸郵卒을 보내 글을 전하기를 “유순由旬의 거리밖에 안 되는 지역에서 우러러 뵙지 못하다니 제자의 인연이 기박하기만 합니다.”라고 하였으니, 스님을 존경한 것이 또한 이와 같았다.기해년(1659, 효종 10) 초겨울에 벽암이 늙고 병들었으므로 돌아가 시봉하면서 화엄 법회를 개설하였다. 이듬해 정월에 벽암이 순적順寂하였다. 이로부터 정해진 거소가 없이 혹은 남쪽 혹은 북쪽에 있으면서 오로지 교조敎詔를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 학자들을 유도할 적에는 반드시 진실된 자애의 마음으로 선도하면서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격려하며 조금도 싫어하는 기색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공경히 복종하였다.스님의 조예造詣는 고금을 뛰어넘어 의지하는 바가 전혀 없이 산을 치달리고 바다를 막아 하나의 맛으로 융회融會하였다. 그리고 학자들의 수주守株와 각주刻舟172)의 병통을 예리하게 지적하였는데, 의원의 문에는 환자가 많은 것처럼 의심과 질문이 벌 떼처럼 일어나더라도 마치 물이 흐르듯 시원하게 해결해 주었다. 이를 비유하자면 큰 물고기(鯤鯨)와 작은 쥐(蝘鼠)가 함께 하해河海의 물을 마시더라도 각각 자기의 배를 채우는 것과 같았으며, 텅 비어서 왔다가 꽉 채워서 돌아가곤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끊임없이 모여들었다.조계曹溪의 도량에 거한
년이었다. 사원의 사대전四大殿에 초상이 없자 공장工匠에게 초상을 빚도록
구軀를 봉안하였으며, 그림으로 그리는 것도 그와 같이 하였는데, 어디에 주찰駐札하든 그렇게 해서 그림으로 그리고 조각으로 빚은 숫자가 수천에 이르렀다. 혹자가 이에 대해서 “어째서 유위有爲의 일을 하는가. 반드시 무위無爲로 해야 한다.”라고 힐난하면, 스님은 답하기를 “그대는 한쪽 발로만 걸어 다니는 것을 보았는가. 부처의 부처 된 소이는 복혜福慧 두 가지를 아울러 행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족존兩足尊이라고 칭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스님이 지키는 것이 한쪽에만 치우치지 않은 것이 대개 이와 같았다.병오년(1666, 현종 7)에 구월의 원정元淨에서 법석을 베풀었다. 이듬해(1667년)에 황강의 심원深源에서 석장을 쉬었다. 절도사 성익成杙 공과 별승別乘 윤우갑尹遇甲 공이 모두 스님의 불도에 귀의하였다. 얼마 뒤에 스님이 병에 걸리자 절도사가 자주 -
008_0306_a_01L李公之蘊。出守龍城。迎入州郭。留數日。
008_0306_a_02L頗味高論曰。禪學高明。於師見矣。常
008_0306_a_03L字而不名。丙申自寶盖之盤龍。內翰申
008_0306_a_04L公最。出佐關北幕。行過德源。遣郵卒
008_0306_a_05L致書曰。由旬之地。未獲瞻仰。弟子緣
008_0306_a_06L薄。其欽重又若是。己亥初冬。以嵓老且
008_0306_a_07L病。歸侍。華嚴開。春正月嵓順寂。繇是
008_0306_a_08L居無㝎所。或南或北。專以敎詔爲己任。
008_0306_a_09L誘迪學者。必以眞慈善導。不爲表▼(示+暴)
008_0306_a_10L激滯磨昏。少無忤色。人皆敬服。師之
008_0306_a_11L所詣。超今古絶依倚。駈山塞海。融會
008_0306_a_12L爲一味。深砭學者守株刻舟之病。醫
008_0306_a_13L門多疾。疑難鋒出。辨決如流。譬如鯤
008_0306_a_14L鯨蝘鼠。共飮河海。不過滿腹而已。虛
008_0306_a_15L而徃實而歸。憧憧不絶。坐曹溪道場
008_0306_a_16L前後一紀。寺有四大殿𨷂肖像。命工揑
008_0306_a_17L而塑之。四殿實六𨈬。從而繪畫者如之。
008_0306_a_18L凡諸駐札。繪若塑其數幾千。或難之
008_0306_a_19L何以有爲爲。必無爲爲。荅曰爾見獨足
008_0306_a_20L而行者乎。佛之爲佛。以福慧雙行而已。
008_0306_a_21L故稱兩足尊。其所守不偏大致類是。丙
008_0306_a_22L午施絳紗于九月之元淨。越明年。憇錫
008_0306_a_23L于黃岡之深源。節度使成公杙。別乘尹
008_0306_a_24L公遇甲。皆馥師之道。俄有疾。節度數
-
008_0306_b_01L사자使者를 시켜 문안하며 약을 보내었다. 그해 가을 7월에 묘향산으로 자리를 옮기니, 그곳으로 몰려간 바닷가의 대중이 수백여 인에 이르렀다.이에 앞서 스님이 『선문염송禪門拈頌』을 열람하다가 정엄 수수淨嚴守遂 선사의 “봄날에 위와 아래의 경치 모두 아리따운데, 비 지나간 숲속에 울리는 두견이 소리(承春高下盡嬋姸。雨過喬林呌杜鵑。)”라는 게송을 접하고는, 마치 한 잔의 강기탕降氣湯을 마신 것처럼 가슴속이 시원해졌으므로, 책을 덮고서 말하기를 “모든 언어 문자는 모두 술 찌꺼기일 뿐이니, 어찌 다른 맛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그러다가 이때에 이르러 사자좌에 앉아 총채를 휘두르며 선지禪旨를 펼치는 그 문풍이 초준峭峻하였으므로, 참석한 사람들 모두가 눈을 크게 뜨고 귀를 쫑긋 세우면서 일찍이 없었던 일이라고 하였으며, 심지어는 눈물을 흘리면서 경하하는 자까지 있었다. 하지만 식견이 얕은 자들은 그 규모를 알지 못한 채 탄식을 하며 물러나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이듬해(1668년) 봄 정월에 대중에게 고하기를 “이 하나의 보신報身을 버려서 돌아갈 곳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라고 하고는 영북으로 행장行裝을
월 갑신에 중주 오봉五峯의 삼장三藏으로 거처를 옮겼다. 여름철 4월 기사에 가벼운 질병 증상을 보이자, 부백府伯 홍석구洪錫龜 공이 자주 병문안을 하며 약을 보냈는데, 스님이 물리치면서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모두 운명인데 약을 써서 무엇 하겠는가.”라고 하였다.6월 을유에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에 종고鍾鼓를 쳐서 대중과 결별하며 말하기를 “아침에 걷기 시작해서 저녁이 되면 쉬는 법이다. 항상 걸어 다니기만 하고 쉬지 않는 경우는 있지 않으니, 내가 이제 휴식을 취하려 한다. 그대들은 각자 자기의 마음을 의지하고, 밖을 향해 쓸데없이 치달리지 말라. 노승은 태어나서 79년이
년을 보내었으니, 나이가 많지 않은 것이 아니요 법랍이 높지 않은 것도 아니다. 서운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괴로워하지 말고 후하게 장례를 치르거나 탑을 세우지도 말라.”라고 하였다. 그리고 명銘을 청하자 세 손가락을 굽혀서 보여 주었다. 또 누가 임종게를 청하자 스님이 말하기를 “내가 항상 제방諸方이 하는 일을 비웃었는데, 더군다나 나 자신이 그런 일을 하겠는가. 부디 동요하지 말고 마음을 편히 지니도록 하라.”라고 하였다.그로부터 사흘 뒤인 정해일丁亥日 오시午時가 될 무렵에 시승侍僧을 불러 “오늘은 재齋를 빨리 지내도록 하라.” 하고는, 재가 파하자 장유長幼가 방장실에 둘러앉아서 각자 -
008_0306_b_01L以价問。遺之以藥。厥秋七月。遷席玅
008_0306_b_02L香。海衆駢趍。至數百餘指。先是閱禪
008_0306_b_03L門拈頌。至淨嚴遂禪師偈曰。承春高下
008_0306_b_04L盡嬋妍。雨過喬林呌杜鵑。如服一杯降
008_0306_b_05L氣湯。胸次灑然。乃掩卷曰。凡諸語言
008_0306_b_06L文字。盡爲糟粕。豈有餘味也。至是據
008_0306_b_07L猊座。談柄一揮。顓暢禪旨。門風峭峻
008_0306_b_08L一席皆瞪目聳聽曰。曾未之有。至有涕
008_0306_b_09L洟而慶法者。持蠡之徒。莫能闚其涯涘
008_0306_b_10L望洋。而退者盖夥。次年春王正月。告衆
008_0306_b_11L曰。捨此一報身。必有所將歸。嶺北理
008_0306_b_12L杖屨。二月甲申。移入仲州五峰之三藏。
008_0306_b_13L夏四月己巳。示微恙。府伯洪公錫龜
008_0306_b_14L數問之與成藥。師却之曰。死生有數。
008_0306_b_15L安用藥爲。六月乙酉。靧浴更衣。鳴楗
008_0306_b_16L椎。訣衆曰。從朝而行。及暮而息。未有
008_0306_b_17L長行而不息者。吾將息矣。汝等各信自
008_0306_b_18L心。勿外邊浪走。老僧生七十有九。坐
008_0306_b_19L六十有五。年非不耆。臘非不高。何所
008_0306_b_20L慊焉。毋懊惱。毋厚葬。毋封塔。求諸銘。
008_0306_b_21L屈三指示之。有索辭世偈者。師曰。吾常
008_0306_b_22L笑諸方所爲。况自爲之耶。幸勿聒撓㝎
008_0306_b_23L心。後三日丁亥日至禺中。喚侍僧曰。
008_0306_b_24L今日早齋。齋罷。幼艾環擁丈室。令各籲
-
008_0306_c_01L무량수불을 열 번씩 부르게 한 뒤에 결가부좌를 하고 서쪽을 향하여 손을 모으고 앉아서 입적하였다.그로부터 7일이 지난 계사일癸巳日에 사원의 동쪽 산기슭에서 다비를 행할 적에 여섯 고을에서 승속僧俗이 모두 모여 참석하였다. 그때 정문頂門의 뼈 하나가 불길 밖으로 튀어나왔으므로, 문인 각흘覺屹 등이 수습하여 설봉산 벽송대碧松臺로 돌아가 주송呪誦을 하며 간절히 구한 지
과顆를 얻었으니, 이때가 바로 이듬해인 3월 초칠일이었다. 사리탑을 세워 봉안한 곳이 모두 세 곳이니, 중주의 오봉과 학성鶴城의 설봉과 승평昇平의 조계가 그곳이다. 돌아가신 때부터 탑을 세울 때까지의 상서로운 징조가 한두 가지가 아닌데,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당초에 교리校理 조중려趙重呂 공이 벼슬길에 오르기 이전부터 뛰어난 명성으로 한 세상을 울렸는데, 스님과 방외의 교분을 맺었다. 당세의 명공名公 괴사魁士로서 참된 가르침(眞乘)을 사모하는 자는 스님과 친하게 지내지 않은 자가 거의 없었는데, 그중에서도 동악東嶽 이안눌李安訥 공과 택당澤堂 이식李植 공과 상국 김육金堉 공과 시랑侍郞 임유후任有後 공과 가장 친하게 지냈다.스님은 선연禪宴의 여가에 또 게구揭句를 잘 지어서 지금 가시歌詩 1권이 있다. 문제자門弟子 중에 스님의 가죽과 골수를 얻어서 다른 사람의 사범師範이 된 자가 32인인데, 그중 설봉의 해란海蘭과 천관의 민기敏機와 오봉의 철조喆照와 반룡의 광륵廣泐과 구월의 천눌天訥이 첫손에 꼽힌다. 또 암혈에 숨어서 홀로 선善을 닦는 자도 있고, 신명身命을 바쳐서 불법을 위호衞護하는 자도 있는데, 이들도 70여 인에 달한다. 전인前人의 빛을 이어받아 후인의 몽매함을 일깨우며 임제의 종풍을
년에 이르니, 이는 실제로 부휴가 앞서 말한 바와 같았다.성총性聰은 일찍이 선사先師의 문하에서 수업하면서 법시法施의 홍은鴻恩을 가장 많이 받았다. 그런데 대들보가 홀연히 부러지고 덕음德音이 영원히 막히면서 하루아침에 갑자기 천고千古의 비통함을 맛보게 되었으니 그 마음을 어떻게 형언할 수가 없다. 이에 세상 사람들이 모두 보고 들어서 훤히 드러난 사실을 간추려 삼가 행장을 짓는 바이다.『취미대사시집』 끝 -
008_0306_c_01L無量壽佛盡十聲。結趺向西。合爪而坐
008_0306_c_02L化。經七日癸巳。遂闍維於寺之東麓。
008_0306_c_03L六郡緇素畢集。頂門一骨。爆出香薪之
008_0306_c_04L外。門人覺屹等。奉歸雪峰山碧松臺。
008_0306_c_05L誦呪懇求三七日。獲舍利兩粒。即明年
008_0306_c_06L三月初七日也。起方墳度安者凡三所。
008_0306_c_07L仲州之五峯。鶴城之雪峯。昇平之曹溪
008_0306_c_08L也。自易簀比樹塔之日。瑞徵非一。不
008_0306_c_09L可殫記。初校理趙公重呂。自未釋褐。英
008_0306_c_10L聲振一世。與師結方外交。當世名公魁
008_0306_c_11L士之慕眞乘者。鮮不與善。唯東嶽李公
008_0306_c_12L安訥。澤堂李公植。相國金公堉。侍郞
008_0306_c_13L任公有後。最相厚。禪宴之隟。又善偈句。
008_0306_c_14L有歌詩一卷。門弟子各得皮髓。爲人師
008_0306_c_15L範者。三十有二人。雪峯海蘭。天冠敏
008_0306_c_16L機。五峯喆照。盤龍廣泐。九月天訥。爲之首。
008_0306_c_17L或藏嵓穴而獨善。或委𨈬命以衛護者。
008_0306_c_18L逮七十有奇。胚胎前光。彜範來蒙。大闡
008_0306_c_19L臨㴉宗風。垂四十載。果如休所誌。性聦
008_0306_c_20L早游先師之門。最承法施澒 [5] 恩。樑木忽
008_0306_c_21L摧。德音永閟。一旦奄成千古悲。不勝懷
008_0306_c_22L摭其世人所共聞見之章章者。謹狀。
008_0306_c_23L翠微大師集。
- 164)반궁頖宮 : 성균관成均館의 별칭.
- 165)창槍을 들지~때가 없었다 : 스승을 능가하는 면모를 보였다는 말이다. 주 158 참조.
- 166)임바紝婆 : ⓢ nimba의 음역으로, 인도의 교목 이름이다. 씨앗과 뿌리, 가지가 모두 쓴맛을 내기 때문에 중생의 고통과 죄업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당나라 한산寒山의 시에 “이 썩은 나무배를 타고서 저 임바의 씨를 딴다.(乘玆朽木船。 采彼紝婆子。 )”라는 표현이 나온다.
- 167)화살과 칼날이~것만 같았다 : 불교에서 말하는 최상승 근기의 소유자들이 만나서 불꽃 튀는 선기禪機로 서로의 경지를 시험하며 대결하는 것을 말한다. 『景德傳燈錄』 서문에 “근기와 인연이 맞아떨어져 서로 격돌함에 마치 화살과 칼날이 부딪치며 불꽃을 튀기는 것만 같다.(機緣交激。 若拄於箭鋒。 )”라는 말이 나온다.
- 168)임제臨濟 : 당나라 때 진주鎭州 임제원臨濟院에 머물렀던 혜조慧照 선사 의현義玄.
- 169)황벽黃檗 : 홍주 황벽산에서 출가하여 백장 회해百丈懷海의 법을 이어받았다.
- 170)차거硨璖 : 칠보의 하나로서 백산호나 조개껍데기로 만들며 자거라고도 한다.
- 171)기재杞梓 : 멀구슬나무와 가래나무로, 대표적인 좋은 목재이다. 일반적으로 유용한 인재를 상징한다.
- 172)수주守株와 각주刻舟 : 사람이 미련해서 구습舊習만을 고수하며 변통할 줄 모르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한 농부가 밭을 갈고 있을 적에 토끼 한 마리가 달아나다가 나무 그루터기에 부딪혀서 목이 부러져 죽자, 이때부터 일손을 놓고는 그 그루터기만 지켜보며 토끼가 다시 오기를 기다렸으나 토끼는 끝내 다시 오지 않았다는 수주대토守株待兔의 고사가 『韓非子』 「五蠹」에 나온다. 또 배를 타고 가다가 칼을 물속에 떨어뜨린 사람이 칼이 떨어진 뱃전에 표시해 두고는 배가 정박한 뒤에 칼을 찾으려 했다는 각주구검刻舟求劍의 고사가 『呂氏春秋』 「察今」에 나온다.
- 1)此上底本有「附錄」二字。編者除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