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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323_b_01L대각등계집 제2권(大覺登階集 卷之二)문文임성 대사 행장 후서任性大師行狀後序내가 불교 전수 계통의 족보를 살펴보니 우리나라 승려로 불법을 전한 원류는 고려 시대의 스님 보우普愚1)로, 호가 태고太古이다. 어린 나이에 중국에 들어가2) 하무산霞霧山의 석옥 청공石屋淸珙3) 선사를 참방하고 그에게서 법을 얻어 우리나라로 돌아와서는 환암 혼수幻菴混修4)에게 전하였고, 혼수는 구곡 각운龜谷覺雲5)에게 전하였고, 각운은 등계 대사登階大師 정심淨心에게 전하였다.정심은 사태沙汰6) 때문에 머리를 기르고 처자식을 거느리고서 황악산黃岳山으로 들어간 후, 이름을 숨기고 고자동古紫洞 수다촌水多村에 거처하면서 자취를 감추었다. 임종 시에는 게송을 남겼으며 벽송 지엄碧松智儼에게 선禪을 전하였고, 지엄은 부용 영관芙蓉靈觀에게 전하였다. 영관에게는 두 사람의 법안法眼7)이 있었으니 청허 휴정淸虛休靜과 부휴 선수浮休善修이다.청허는 형으로, 도덕과 재기가 남보다 뛰어났으며 문장과 필법 모두 당대에 빛이 났다.부휴는 아우로서, 불법에 대한 소견이 매우 높았다. 인연이 닿은 납자가 있으면 그들을 지도하여 모인 제자들도 7백 명이 되었으며 이들은 모두 한 시대의 종사宗師가 되었다고 한다.정심은 정련 법준淨蓮法俊에게 교학敎學을 전하였고, 법준은 『법화경法華經』의 오묘한 뜻에 정통하여 사람들이 그를 ‘준법화俊法華’라고 불렀다.법준은 백하 선운白霞禪雲에게 전하였고, 선운은 정관 일선靜觀一禪8)에게 전하였다. 일선은 청허가 불법을 강연하는 자리에 만년에 참가하여 청허 대신에 『금강경』과 『능엄경』 등을 강의하였다. 경전을 가르치는 안목이 분명하여 배우는 이들이 공경하고 감복하여 모두 네 마리 용(四龍)9)이 다시 나타났다고 생각하였다. 그가 대중들에게 존경받음이 이와 같았다.임성 대사任性大師10)는 정관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정관이 설법하는 자리 아래에는 배우는 이들이 많기는 하였으나 깊이 터득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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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323_b_02L大覺登階集卷之二
008_0323_b_03L
008_0323_b_04L文
008_0323_b_05L任性大師行狀後序
008_0323_b_06L余按釋譜。曁東僧傳法源流。麗僧普愚。
008_0323_b_07L號太古。早歲入中國。叅霞霧山石屋淸
008_0323_b_08L珙禪師。得其法東還。乃傳之幻菴混修。
008_0323_b_09L混修傳之龜谷覺雲。覺雲傳之登階大
008_0323_b_10L士淨心。淨心因沙汰。長髮畜妻孥。入
008_0323_b_11L黃岳山。隱其名。居于古紫洞水多村
008_0323_b_12L晦跡焉。將啓手足留偈。傳禪于碧松智
008_0323_b_13L嚴。智嚴傳之芙蓉靈觀。靈觀之門下。
008_0323_b_14L傑出二法眼。曰淸虛休靜。曰浮休善修
008_0323_b_15L也。淸虗兄也。道德拔萃。才氣絶倫。文
008_0323_b_16L章筆法。並耀當世。浮休弟也。法見高
008_0323_b_17L峻。與衲子有緣。搥拂之下。衆盈七百
008_0323_b_18L俱爲一代宗師云。淨心傳敎于淨蓮法
008_0323_b_19L俊。法俊精通法華奧旨。人號俊法華。
008_0323_b_20L法俊傳之白霞禪雲。禪雲傳之靜觀一
008_0323_b_21L禪。一禪晩叅淸虛法席。代講金剛楞嚴
008_0323_b_22L等經。敎眼明白。學者欽服。咸以爲四
008_0323_b_23L依。復出其取重如此。任性大師。受業
008_0323_b_24L于靜觀。靜觀講下。聽學雖夥。其得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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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323_c_01L말고삐를 나란히 하여 멀리 달리거나 채찍을 휘둘러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사람은 오직 호연 태호浩然太浩ㆍ무염 계훈無染戒訓ㆍ임성 충언任性忠彥 등 몇 사람이 있을 뿐이었다. 임성의 학문이 그들 중에서 가장 뛰어났다.정유년(1657, 효종 8) 봄에 남봉 대사南峰大師 영신英信과 나는 벽암碧嵒 스님이 불법을 강의하는 자리에서 만났다. 남봉 스님은 곧 임성 대사의 적통嫡統을 이어받은 수제자이다. 하루는 나에게 부탁하기를, “우리 스승님께서 돌아가신 지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비석을 세워 언행을 기록한 일도 없고, 또 일생의 행적을 서적으로 간행한 일도 없습니다. 명성이 전하지 않고 앞으로 사라지게 될까 걱정이 됩니다. 바라건대 저의 스승을 위해서 글을 지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라고 하였다.나는 예전부터 한번 임성 대사를 만나고 싶었으나 실현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말 한마디라도 하여 대사를 위해 바치겠다고 결심한 지가 오래되었다. 제자 영신의 스승을 위한 정성을 가상히 여겨 감히 몇 마디 말을 지어 대사가 출가한 시종전말을 기록한다. 아울러 짧은 서문을 지어 대사가 불법을 전수받은 근원과 유파를 차례로 기술한다. 스승의 은혜를 생각하는 사람이 이 글을 읽는다면 눈물을 적시는 데 약간의 도움은 줄 수 있을 것이다.원 동자元童子에게 주는 서문천지는 지극히 크고 기운은 그 천지 사이에 붙어 있다. 기운에는 높고 낮음과 순수하고 잡박함의 차별이 있다. 인간이 천지 사이에서 생명을 받을 때 동류 중에서 우뚝 뛰어난 것은 모두가 높은 기운을 얻거나 순수한 기운을 천성적으로 받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이 기운이 인간에게 깃들면 성인이나 현인도 되며 학식을 겸비한 도덕군자도 되며, 또 재주가 뛰어난 아이가 되어 태어나기도 한다.성현은 일단 논하지 않더라도, 전기傳記에 실려 있는 학식을 겸비한 도덕군자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남긴 글을 읽으면 가만히 앉아서 그 사람을 평가할 수 있다. 그렇지만 재주가 뛰어난 아이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드물다.내가 옛사람에게 터득한 것은 다음과 같다. (후한後漢의) 양수楊脩는 공작새와 놀았고, (공자의 후손인) 공융孔融은 작은 배와 대추를 취하였고, -
008_0323_c_01L深入。或並轡遐邇。或爭鞭後先者。唯
008_0323_c_02L浩然太浩。無染戒訓。任性忠彥如干軰。
008_0323_c_03L而任性之學。尤出其右云。丁酉春。南
008_0323_c_04L峰大師英信。與余相會碧嵓法席。南峯
008_0323_c_05L即任性大師嫡傳神足也。一日囑余曰。
008_0323_c_06L我師歸全已久。苐闕樹石系辭之事。且
008_0323_c_07L無入榟紀行之跡。抑恐名不傳而泯然
008_0323_c_08L將朽矣。願子試爲吾師述焉。余曾欲一
008_0323_c_09L叅師席。而未果。則思以一言而效于師
008_0323_c_10L者久矣。且嘉信爲師之誠。敢綴數語
008_0323_c_11L記其出世之始終。并爲小引。次其得法
008_0323_c_12L之源派。庶乎思師恩者覽之。或可以供
008_0323_c_13L抆涕之一助云尒。
008_0323_c_14L
008_0323_c_15L贈元童子序
008_0323_c_16L天地至大。而氣寓於其間也。氣有高下
008_0323_c_17L粹駁之殊。而物之受生於天地之間。其
008_0323_c_18L卓然出乎其類者是。皆得是氣之高。禀
008_0323_c_19L是氣之粹者也。盖是氣之寓於人也。而
008_0323_c_20L爲聖爲賢爲文章道德之士。而又有奇
008_0323_c_21L童者出焉。聖賢姑勿論文章道德之士。
008_0323_c_22L俱著于傳記。讀其文則可坐而數也。而
008_0323_c_23L奇童則罕有聞焉。抑余之所得於古人
008_0323_c_24L者。如楊脩之酬孔雀禽。孔融之取小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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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324_a_01L(남북조시대 후위後魏 사람) 조형祖瑩은 창문을 막았고, (후한의) 왕수王脩는 사일社日11)에 동네 사람을 감동시켰고, 유서劉恕12)는 공자의 형을 알았고, 안수晏殊13)는 정正 자의 의미를 대답하였고, 구준寇準14)은 〈화산시華山詩〉를 읊었다. 소식蘇軾은 어머니에게 후한의 「범방전范滂傳」에 대하여 질문을 하였고, 구양수歐陽脩는 인자한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았고, 왕우칭王禹偁15)은 앵무새에 대답하였다.이상의 여러 사람들은 모두가 동료 중에 뛰어난 자들로 하늘에서 받은 기운이 높아서 뛰어난 재주를 지닌 동자가 된 것이다. 세상에 어찌 이러한 사람들이 많겠는가?원씨元氏의 아들 수천壽天은 나이 13세 때에 내게 와서 공부하였다. 그의 사람됨은 영민함이 무리에서 훨씬 뛰어났으며 천부적으로 타고난 기품이 매우 높았으니 역시 뛰어난 재주를 지닌 동자였다. 그러므로 내가 옛날의 특별한 재능을 가진 동자를 실례로 들어 열거하여 그에게 알려 주고 그의 의지를 격려하였다.옛날의 군자들이 품부 받은 기氣가 비록 높다 하더라도 독서를 하지 않고 훌륭한 인물이 된 사람은 적다. 부지런히 공부한 사람은 너무 많아 모두 다 셀 수 없음은 누구나 다 안다.내가 옛사람들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다.(전한前漢의) 손경孫敬은 (공부를 하다가 졸음이 오면) 상투를 대들보에 매달았고, (전한의) 예관兒寬은 (남의 집에서 품을 팔았지만) 경전을 끼고 다녔으며, (후한의) 고봉高鳳은 (독서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보리가 떠내려가게 했고, (후한의) 광형匡衡은 (기름을 살 돈이 없어) 이웃집 담을 뚫어 (그 불빛을 보고 공부를 하였으며), (동진東晋의) 차윤車胤은 반딧불이 주머니를 만들어 (반딧불이 빛을 통해 책을 읽었고), (동진의) 손강孫康은 눈 빛에 책을 읽었으며, (송宋의) 호원胡瑗은 투간投簡16)하였고, (당唐의) 소원명蘇源明은 땔나무를 태워 나오는 불빛으로 공부하였고, (전국시대) 악양자樂羊子는 아내의 고생으로 학업을 마쳤고, (송의) 사마광司馬光은 졸음을 경계하였다.이들은 모두 부지런히 공부하여 훌륭한 인물이 된 사람들이다. 어찌 타고난 재주가 뛰어나서였을 뿐이겠는가? 지금 그대는 재주는 높다고 하지만 열심히 공부를 하지 않으면 (재주 많은) 염유冉有(공자 제자)가 안회顏回(공자 제자)에게 미치지 못한 것처럼 될까 걱정이다. 그러므로 옛날에 노력을 해서 훌륭하게 된 인물을 열거해서 말하는 것이다.만일 발분하여 책을 읽고 우뚝 크게 발전하여 마침내 학식을 겸비한 도덕군자가 된다면 어찌 훌륭한 인물이 됨에 그치겠는가? 내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처원處愿 상인上人을 송별하는 서序아아, 사도斯道(불법)가 행해지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그 누가 실행하겠는가? 도道는 공기公器이다. 그 적임자가 아니면 행해지지 않고, 그릇된 도를 행하면 널리 퍼지지 않으니, -
008_0324_a_01L棗。祖瑩之塞窓牗穴。王脩之感里社日。
008_0324_a_02L劉恕之知孔子兄。晏殊之答正字義。寇
008_0324_a_03L準之吟華山詩。蘇軾之問范滂傳。歐陽
008_0324_a_04L脩之受慈母敎。王禹偁之還鸚鵡對。是
008_0324_a_05L皆出乎其類。禀氣高而爲奇童者也。世
008_0324_a_06L豈多有哉。元氏子壽天。年十三。從余
008_0324_a_07L學。其爲人也。敏悟絶倫。禀氣甚高。亦
008_0324_a_08L奇童子也。故余擧古之奇童子而告之
008_0324_a_09L勉其志焉。古之君子。禀氣雖高。不讀
008_0324_a_10L而能成人者鮮矣。勤讀者盖多。不可盡
008_0324_a_11L數而周知。抑余之所聞於古人者。如孫
008_0324_a_12L敬之懸髻。兒寛之帶經。高鳳之漂麥。
008_0324_a_13L匡謝 [7] 之鑿壁。車胤之螢囊。孫康之暎雪。
008_0324_a_14L胡瑗之投簡。源明之爇薪。樂羊子之終
008_0324_a_15L業。司馬光之警寢。是皆勤讀而成人者
008_0324_a_16L也。豈惟氣高而已哉。今童子。禀氣雖
008_0324_a_17L高。畫而不讀。則恐爲冉有之不逮顏回
008_0324_a_18L也。故擧古之成人者而告之。若激而讀
008_0324_a_19L之。嶷然大進。遂爲文章道德之士。則
008_0324_a_20L豈惟成人而已哉。知余言之不躗也。
008_0324_a_21L
008_0324_a_22L送處愿上人序
008_0324_a_23L噫。斯道之不行久矣。其誰爲行之道者
008_0324_a_24L公器也。傳非其人則不行。行非其道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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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324_b_01L도는 손쉽게 주고받는 것이 아니다.그러므로 도를 사사롭게 군부君父에게 바치고 자손에게 전할 수 있다면, 어느 누구인들 군부에게 바치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순舜임금에게는 어리석은 아버지 고수瞽叟가 있었고, (만고 충신) 관용봉關龍逢에게는 폭군 걸桀이 있었다.17)어느 누구인들 자손에게 전하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성군이신 요堯임금에게는 어리석은 아들 단주丹朱가 있었고, 은왕殷王의 손자로는 폭군 주紂가 있었으니,18) 도나 국가 권력이란 손쉽게 주고받을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전국시대의) 소문昭文이 가야금을 연주한 것과, 윤편輪扁이 나무를 다룬 것과, 포정包丁이 소를 잡은 것과, 백락伯樂이 말을 알아본 것이 모두 이와 같은 것이니, 이들은 그 사이에 있어서 그 오묘함을 잘 터득한 사람들이다.달마達摩 대사가 서쪽으로부터 와서 마음을 전한 법(傳心之法)이 양梁나라와 남북조의 북위北魏 시대에 시작되어 당송 시대에 성행하였다. 종사宗師들은 마음을 전하지 않음이 없었고, 제자들은 마음으로 얻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이런 까닭에 이 도가 크게 행해져 임제종臨濟宗ㆍ조동동曹洞宗ㆍ위앙종潙仰宗ㆍ운문종雲門宗ㆍ법안종法眼宗 등이 적통으로 계승되기도 하고 또는 방계로 내려오게 되었던 것이다.비록 지역이 각각 다르고 교리를 펼친 곳이 같지 않더라도 그 근원은 모두 심묵心黙(마음으로 깨우침)으로 불법의 기미를 내보이고, 심묵으로 불법의 오묘한 의미를 깨우치지 않음이 없었다. 근래에는 그렇지 못해서, 글자를 가르치는 사람을 스승이라 하고 말을 배우는 사람을 제자라고 한다. 문자에 사로잡히고 언어에 꽉 매여 있다. 불법의 겉뜻만 지닌 채 잊지 않으면 곧 ‘나의 제자’라고 말하고, 입으로 전수함을 게을리하지만 않으면 곧 ‘나의 스승’이라고 한다. 자기와 한편이 되면 옳다고 하고, 남을 경시하면서 그르다고 한다. 대중들을 유혹해 와서 서로 싸우다 쇠락의 길을 걷는다. 심지어는 마구니의 삿된 설과 쭉정이 같은 설법 등이 눈을 어둡게 하고 갈등으로 온몸을 휘감는 사람들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아아! 불법이 실행되지 않으니 애통하다.도우道友 원 공愿公이 서울 행차를 하게 되어 시 한 편을 짓고는 내게 그 화답을 청하였다. 나는 예의상 차마 사양할 수 없었다. 하지만 도道라는 글자를 들어 그 행차를 만류하고자 한다.부드러운 옷과 맛있는 음식으로 입과 배를 배불리면서 구도求道할 사람이 누가 있는가? -
008_0324_b_01L不流。不可承翼而受授也。故使道可私
008_0324_b_02L以獻於君父。而傳於子孫。人莫不獻之
008_0324_b_03L於君父。而舜之父有瞽叟。龍逢之君有
008_0324_b_04L桀。人莫不傳之於子孫。而堯之子有丹
008_0324_b_05L朱。殷王之孫有紂。不可承翼而受授者
008_0324_b_06L是也。至於昭文之皷琴。輪扁之用木
008_0324_b_07L庖丁之解牛。伯樂之知馬。皆類此。妙
008_0324_b_08L存乎其間。而善得其妙者也。自達磨西
008_0324_b_09L來傳心之法。昉於蕭梁元魏之間。盛於
008_0324_b_10L李唐趙宗之際。爲宗師者。莫不以心傳
008_0324_b_11L而爲弟子者。莫不以心得也。是以斯道
008_0324_b_12L大行。曰臨濟。曰曺洞。曰潙仰。曰雲門。
008_0324_b_13L曰法眼之爲嫡嗣。爲傍出云者。雖藩閫
008_0324_b_14L各異。堂室不同。其出處。莫不以心默
008_0324_b_15L示其機。而以心默得其旨者也。近世則
008_0324_b_16L不然。以訓字爲師。以學語爲弟。桎梏
008_0324_b_17L於文字。膠粘於言辭。意持不忘。則輒
008_0324_b_18L曰吾弟子也。口授不倦。則輒曰吾法師
008_0324_b_19L也。黨己爲是。輕他爲非。誘衆率徒。互
008_0324_b_20L相干戈陵夷。至於么䯢邪說糠粃眯目
008_0324_b_21L葛藤纒身者。不可勝記。嗚呼。斯道之
008_0324_b_22L不行痛矣。道友愿公。將啓洛行。賦詩一
008_0324_b_23L章。屬余和之。余由禮而不敢讓焉。且
008_0324_b_24L擧道字。而停其行曰。孰有軟衣美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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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324_c_01L수건을 들고 신을 받쳐 들도록 하는 일에 하인을 시키면서 호도好道할 사람이 누가 있는가? 발우를 받들고 지팡이를 세우고 행각行脚하는 일을 싫어하면서 방도訪道할 사람이 누가 있는가? 그런데 지금 우리 스님 원 공은 쑥물 들인 옷을 입고 나물을 먹으면서 슬퍼하는 표정이 없으니 구도하는 사람이다. 나무를 져서 나르고 쌀을 찧어 먹으면서도 힘들어 지치는 모습이 없으니 호도하는 사람이다. 물을 건너고 산을 넘어 다니면서도 피곤한 기색이 없으니 방도하는 사람이다.이 세 가지는 사람으로서 잘하기 어려운 일인데, 우리 원 공 스님은 참으로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다 갖추었다. 우리 원 공 스님 같은 분은 도가 전해지지 않고 있는 세상에서 전해지지 않는 마음을 전하고, 도가 행해지지 않는 세상에서 행해지지 않는 도를 행할 분임에 틀림없다.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지금 세상에 불법에 환한 밝은 스승이 없으니 그 누구를 좇아서 스승으로 삼을 것인가? 만일 스승을 찾고자 한다면, 나의 스승 벽암碧嵒 화상이 아마도 그 스승이 아니겠는가?해 선자海禪子에게 주는 서序물의 본성은 비었기 때문에 깨끗해질 수 있고, 구름의 본질은 맑기 때문에 뜰 수가 있다. 뜰 수 있기 때문에 진애塵埃(티끌)를 벗어나고, 깨끗하기 때문에 더러움을 뛰어넘을 수 있다. 더러움을 초월하고 진애를 벗어나는 일(超染出塵)은 납자들에게 비교되는 것이다.그대의 성性이 허정虛靜하니 아마도 물의 청정함을 터득한 사람일 것이다. 그대의 정情이 담담하니 아마도 구름이 떠오르는 경지를 터득한 사람일 것이다.그대는 지금 높은 지리산에 올라 쌍계사雙溪寺를 향하고 있으니, 쌍계사는 옛날의 선옹仙翁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살았던 곳이다. 아래에 화개동花開洞이 있어서 물소리가 시원하고, 위에 청학봉靑鶴峰이 있어서 구름 빛이 희디희다. 시원한 물소리로 품성을 함양하고 흰 구름으로 성정을 깨끗이 하면, 성정이 담담해져서 높이 떠오를 수 있고, 성이 비워져 더욱더 깨끗해질 수 있을 것이니, 그렇게 되면 운수승雲水僧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노력하고 노력할지어다. -
008_0324_c_01L自營口腹。而求道者乎。孰有執巾奉屨
008_0324_c_02L使令僮僕。而好道者乎。孰有擎盂卓錫
008_0324_c_03L厭辭行脚。而訪道者乎。今吾師。衣艾
008_0324_c_04L食蔌。無悲慼之容。是求道者也。負柴
008_0324_c_05L舂米。無枯槁之態。是好道者也。渡水
008_0324_c_06L陟巒。無疲倦之色。是訪道者也。此三
008_0324_c_07L者。人之所難能。而吾師苟不闕一而全
008_0324_c_08L備。則若吾師者。其將以傳不傳之心於
008_0324_c_09L不傳之後。而行不行之道於不行之世
008_0324_c_10L也必矣。雖然今世無明師。其從誰而爲
008_0324_c_11L師乎。如欲得師。我師碧嵒和尙。是其
008_0324_c_12L師歟。
008_0324_c_13L
008_0324_c_14L贈海禪子序
008_0324_c_15L夫水性虛故能淨。雲情淡故能浮。浮故
008_0324_c_16L出塵。淨故超染。超染出塵者。衲子之
008_0324_c_17L比也。爾性虛。其得水之淨者耶。爾情
008_0324_c_18L淡。其得雲之浮者耶。今陟崔嵬。還向
008_0324_c_19L雙溪。雙溪古仙翁崔孤雲棲息處也。下
008_0324_c_20L有花開洞。水聲泠然。上有靑鶴峯。雲
008_0324_c_21L光皓然。泠然之水。涵其性。皓然之雲
008_0324_c_22L潔其情。遂使情淡而逾浮。性虛而逾淨。
008_0324_c_23L則方號雲水僧也。勗哉勉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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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325_a_01L선교설禪敎說-늑 상사勒上士에게 주는 서대법大法이 동방으로 흘러들어 온 뒤로부터 선禪과 교敎가 병행되었는데, 선은 마음으로써 전해지고, 교는 언어에 기초하여 홍포弘布되었다. 선이 전해지고 교가 홍포되었으므로 우리 불교의 도가 성하게 일어날 수 있었다.근원의 물결이 다르게 흐르기 시작하자, 선과 교로 문門이 나뉘었다. 선은 돈頓과 오悟, 점漸과 수修로 나뉘었고, 교는 성性과 상相으로 나뉘게 되었다.그리하여 성이나 상을 받드는 사람들은 각각 공空과 유有를 서로 고집하고, 돈이나 점을 주장하는 무리는 각기 이理와 사事를 분변하지 못하였다. 정情은 갑옷과 화살(凾矢)을 따르고, 법法은 모순矛盾을 좇아서 스스로를 그르치게 되는 사람이 많다. 심지어는 허공에다 서까래를 얹고 허공을 뚫으며, 그릇됨을 따르고 거짓을 이루려 하는 경우도 있었다. 각각 자신의 문호門戶만을 오로지 믿으면서 논쟁을 벌이고 비방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런 무리는 참으로 자신을 그르칠 뿐 아니라 남도 많이 그르치게 된다.우리 늑 대사의 기품氣品이 넓고 크며 심신心神이 영민하니 나를 흥기興起시켜 줄 사람이라 하겠다. 내가 지금 늑 대사를 위해 간략하나마 불법의 실마리를 거론할 터이니 대사는 수긍할 것이다.마음으로 전하는 것을 선, 입으로 말하는 것을 교라 한다. 선과 교가 다르지 않으면서 다르고(不異而異), 다르면서 다르지 않은 것은(異而不異) 무슨 까닭인가? 석가세존께서 꽃을 잡았을 때 가섭迦葉이 미소19)를 지었는데, 이것이 바로 선이 전해지게 된 까닭이다. 석가세존이 연설한 것을 제자인 아난阿難이 경전으로 편찬하였는데(結集20)), 이것이 바로 교가 전하게 된 까닭이다. 사실에 근거해서 논한다면 선이 전해진 곳에는 다른 도道가 없고, 교가 퍼진 곳에는 다른 이치가 없다. 이치는 비록 근원이 하나이지만 마음과 입(心口)이 각각 다르니, 다르지 않으면서도 다르다고 한 것이 아니겠는가?선이란 마음이다. 말없이 침묵하여 말이 있는 근원을 깨달음이다. 교란 가르침이다. 말이 있음에 임시로 의지하여 말이 없는 이치를 설명함이다. 사실에 의거해 말하면, 선이란 근기根機가 뛰어난 사람을 위해 저절로 그렇게 전해진 것이다. 교란 근기가 모자라는 사람을 위해 부득이 말로 설명하는 것이다. 전해지는 것이 선이고 설법하는 것이 교이다. 마음과 입이 다르기는 하지만 이치는 근원이 하나이다. 다르면서 다르지 않다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마음과 말을 고집한다면 선과 교로 문파가 나뉘고, 이치 또한 각각 다르게 된다. -
008_0325_a_01L禪敎說贈勒上士序
008_0325_a_02L自大法東流。禪敎並行。禪以心傳。敎
008_0325_a_03L藉言弘。傳禪弘敎。斯道蔚興。至於源
008_0325_a_04L派異流。禪敎分門。禪異頓漸。敎分性
008_0325_a_05L相。性相之徒。空有互執。頓漸之軰。理
008_0325_a_06L事難辨。情隨凾矢。法逐矛楯。而自誤
008_0325_a_07L者多矣。甚者。架空鑿虛。踵訛成僞。各
008_0325_a_08L專門戶。爭興訪讟。若此之類。不亶自
008_0325_a_09L誤。誤人多矣。吾師品氣恢偉。心神頴
008_0325_a_10L悟。可謂起余者也。吾今爲師。略擧緖
008_0325_a_11L餘。師其頷之。傳於心之謂禪。騰於口
008_0325_a_12L之謂敎。禪之與敎。不異而異。異而不
008_0325_a_13L異。何者。世尊拈花。迦葉微笑。此禪之
008_0325_a_14L所以傳也。世尊演說。阿難結集。此敎
008_0325_a_15L之所以傳也。若據實而論之。則禪之所
008_0325_a_16L傳無異道。敎之所弘無異理。理雖一源
008_0325_a_17L心口各異。可不謂不異而異者乎。禪者
008_0325_a_18L心也。默藉無言。悟其有言之源。敎者
008_0325_a_19L誨也。假依有言。說其無言之理也。若
008_0325_a_20L據實而言之。則禪者。爲根勝者。自其
008_0325_a_21L然而傳者也。敎者爲根劣者。不得已而
008_0325_a_22L說也。傳之則禪也。說之則敎也。心口
008_0325_a_23L雖異。理則一源。可不謂異而不異者乎。
008_0325_a_24L若固執胸談。謂禪敎分門。理亦各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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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325_b_01L즉 옛날에 세존이 가섭에게 전하고 가섭이 아난에게 전했는데도, 세상 사람들은 모두 가섭은 선을 전하고 아난은 교를 전했다고 한다면 이것은 전기傳記에 실린 내용과 큰 차이가 있으므로 믿을 수 없다.세상의 여론을 따른다면 가섭은 다만 선뿐이니, 교를 전했다는 아난에게 선을 전할 수 없다. 아난은 다만 교뿐이니, 선을 전했다는 가섭에게 선을 받지 못한다. 다만 선을 주고받기만 했다면 모두가 선이고 교는 아닐 것이고, 다만 교를 주고받기만 했다면 모두가 다 교이고 선은 아닐 것이다.가섭과 아난이 불법을 전해 받고 전해 줄 때에, 전하는 사람은 선으로 전했는데 받는 사람이 교로 알았으며, 받는 사람은 교로 받았는데 전하는 사람이 선으로 전했을까? 만일 전하는 사람은 선으로 전했는데 받는 사람이 교로 받았다면, 백아伯牙와 종자기鍾子期의 관계는 아닐 것이다. 어찌 전했다 하겠는가?만일 받는 사람이 교로써 받았는데 전하는 사람은 선으로 전했다 한다면, 증삼曾參과 공자 같은 관계는 아닐 것이다. 어찌 전했다 하겠는가?이런 까닭에 선ㆍ교의 동이同異는 실로 관규管窺(좁은 견문)로 엿볼 것이 아니며, 그리고 쉽게 말을 해서도 안 된다. 다만 활로活路를 투철하게 터득해서 집에 돌아가 편안히 정좌하면, 대장경의 가르침이 모두 선의 심오한 뜻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는, 교를 떠나서 따로 선이 있음이 아니며, 선을 떠나 따로 교가 있음이 아니라는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서를 지어서 준다.만월당기滿月堂記당堂을 만월滿月이라 이름 붙였으니, 달은 항상 차 있는 것이 아니고 차면 이지러지는 것이다. 나는 이 당이 완성되면 무너질까 걱정이 된다. 그렇지만 달은 항상 이지러져 있는 것이 아니니, 이지러지면 다시 차게 된다. 나는 이 만월당이 무너지더라도 다시 이루어짐을 믿는다. 그러나 달은 항상 차 있거나 항상 이지러지지는 않는다. 찼다가는 다시 이지러지고 이지러졌다가는 다시 차면서 천지와 더불어 무궁하다. -
008_0325_b_01L則昔世尊。傳之迦葉。迦葉傳之阿難
008_0325_b_02L而世皆稱迦葉傳禪。阿難傳敎。此與傳
008_0325_b_03L記所載。大相徑庭。不足信也。若從世
008_0325_b_04L論。則迦葉但禪。不可傳禪於傳敎之阿
008_0325_b_05L難也。阿難但敎。不可受禪於傳禪之迦
008_0325_b_06L葉也。但禪則受授者。皆禪非敎也。但
008_0325_b_07L敎則受授者。皆敎非禪也。苐未知迦葉。
008_0325_b_08L阿難受授之際。傳者以禪傳。而受者以
008_0325_b_09L敎受者乎。受者以敎受。而傳者以禪傳
008_0325_b_10L者乎。若傳者以禪傳。而受者以敎受之。
008_0325_b_11L則非伯牙之鍾期也。胡謂乎傳乎。若受
008_0325_b_12L者以敎受。而傳者以禪傳之。則非曾參
008_0325_b_13L之仲尼也。胡謂乎傳乎。是故禪敎之同
008_0325_b_14L異。實非管窺所覩。而不可容易言也。
008_0325_b_15L但透得活路。歸家穩坐。則一大藏敎
008_0325_b_16L盡是禪旨也。吾所謂非離敎而別有禪
008_0325_b_17L也。非離禪而別有敎也者是也。姑序以
008_0325_b_18L貽之。
008_0325_b_19L
008_0325_b_20L滿月堂記
008_0325_b_21L堂以滿月名。月不恒滿。滿則虧。吾恐
008_0325_b_22L此堂之成則毁也。雖然月不恒虧。虧則
008_0325_b_23L復滿。吾信此堂之毁則復成也。雖然月
008_0325_b_24L不以滿虧。恒而滿復虧。虧復滿。與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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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325_c_01L당을 만월이라고 이름을 붙인 데에는 깊은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아아, 이 만월당 역시 항상 이루어져 있거나 항상 무너져 있는 것은 아니다. 이루어지면 다시 무너지고 무너지면 다시 이루어진다. 천지와 더불어 무궁하겠지만, 후대 사람으로서 누가 무너진 것을 다시 완성하여 천지와 더불어 무궁하게 할 수 있겠는가? 오직 중창重創하는 사람이 있으리니, 중창을 할 사람은 누구인가? 가야산의 스님 석혜釋惠이다.병술년(1646, 인조 24) 맹춘에 백곡 도인白谷道人은 쓴다.봉은사 중수기奉恩寺重修記조선이 세워진 초기에 나라에서는 선禪ㆍ교敎 양종兩宗을 종묘의 문밖에 설치하여 특별히 승과僧科를 열었는데, 관례적으로 국시國試와 같은 날에 과거를 보았다. 그리고는 하관夏官21)을 파견하여 스님 중에서 경전에 통달한 자를 뽑았다. 특별히 갑과ㆍ을과ㆍ병과 세 등급으로 급제자를 뽑고 대선大選이라고 불렀다. 대선이란 곧 유가儒家의 대과大科이다. 다음은 제작制作으로 가끔 발탁되는 사람도 있는데, 이를 참학參學이라 한다. 참학이란 곧 유가의 소과小科이다. 대선을 거쳐 다시 급제한 사람을 중덕中德이라 하는데, 중덕이란 곧 유가의 중시重試22)이다.절이 정릉에 있는 것을 봉은사奉恩寺라 하였으니 선종 사찰이요, 광릉에 있는 절을 봉선사奉先寺라 하였으니 교종 사찰이다. 선은 문文에, 교는 무武에 견주어 선ㆍ교가 병행하여 우리 불도가 힘차게 일어났으니 가상하고도 성대한 일이다.가정嘉靖 연간 갑자년(1564, 명종 19)에 조정 회의에서 승과를 없앴기 때문에 선ㆍ교가 위세를 떨치지 못한 지 이에 108년이 되었다. 불교의 도가 쇠망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슬프다. 사찰 또한 불행하게도 병자년(1636, 인조 14) 병자호란 때 모두 타 버리고 오직 방 몇 칸만이 쓸쓸하게 남아 있었으므로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이 안타까워하였다.선화 대사禪花大師 경림敬林이 앞장서서 법당을 세우자 다른 스님들도 잇따라 요사채23)를 지어 완공하니 -
008_0325_c_01L地無窮。堂以滿月名者。其有深旨哉
008_0325_c_02L噫。此堂亦不以成毁。恒而成復毁。毁
008_0325_c_03L復成。雖與天地無窮。而第後之人。疇
008_0325_c_04L能使毁復成而與天地無窮者耶。唯如
008_0325_c_05L重葺者能之。重葺者誰耶。伽耶僧釋惠
008_0325_c_06L也。丙戌孟春白谷道人記。
008_0325_c_07L
008_0325_c_08L奉恩寺重修記
008_0325_c_09L國初國家。設禪敎兩宗於陵寢室皇之
008_0325_c_10L外。特設僧科。例與國試。同日開場。命
008_0325_c_11L遣夏官。考選釋子之通經者。特授甲乙
008_0325_c_12L丙三等之科。曰大選。大選者。即儒家之
008_0325_c_13L大科也。次以制作。間有拔擢者。曰叅
008_0325_c_14L學。叅學者。即儒家之小科也。由大選
008_0325_c_15L而再擧入格者。曰中德。中德者。即儒
008_0325_c_16L家之重試也。而寺宇在靖陵者。曰奉恩。
008_0325_c_17L即禪宗也。在光陵者。曰奉先。即敎宗
008_0325_c_18L也。禪以例文。敎以比武。禪敎并行。斯
008_0325_c_19L道之蔚興。架矣盛哉。粤在嘉靖甲子歲
008_0325_c_20L朝議革除僧科故。禪敎之不振者。百有
008_0325_c_21L八年於斯矣。釋道之淪喪。良可悲也。
008_0325_c_22L寺亦不幸丙子之亂。鞠爲烸。惟丈室
008_0325_c_23L數間。蕭然獨存。行過者嘅焉。禪和大
008_0325_c_24L師敬林。首建法堂。諸衲尾修僧寮。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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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326_a_01L숲과 계곡이 기뻐하고, 전각은 날개를 펼친 듯 웅장하고, 크고 작은 다른 여러 건물들도 먹줄처럼 곧아 몇 년 사이에 힘차게 다시 일어났다. 경림 스님이 앞장서 중창한 공로는 장하다고 평가할 만하다.이 절은 동으로는 광릉廣陵(경기도 광주)에 닿아 있고, 서로는 파릉巴陵24)을 가리키며, 남으로는 호남으로 가는 길로 통해 있고, 북으로는 서울과 이어져 있는데, 이것이 여기에 임해서 바라다보는 경치의 대략이다. 이곳에서 시를 읊고 노래하였던 시인과 묵객墨客은 수천수만이 넘으며, 간혹 깜짝 놀랄 만한 어구라고 칭찬을 받은 사람도 있다.
舟中回指奉恩寺 배 안에서 돌아보며 봉은사를 가리키니
杜宇一聲僧掩關 두견새 한 소리에 스님은 문을 닫는다.
이는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의 작품이다.
病客孤舟明月在 병든 길손이 탄 외로운 배에 밝은 달빛 쏟아지고
老僧深院落花多 노승이 거처하는 깊은 절간엔 낙화가 흩날리네.
이는 손곡蓀谷 이달李達의 시이다.
紅藕一池風滿院 못에는 붉은 연꽃 피어 있는데, 바람이 절 안에 가득하고
亂蟬千樹雨歸村 나무마다 매미 소리 어지럽고 비 내리는 마을로 돌아간다.
이는 옥봉玉峯 백광훈白光勳이 지은 것이다.이들 시는 당시에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었고 후대에도 계속해서 전해진 시이다. 지금 사대부 중에서는 동명 정두경 선생이 젊은 시절에 이 절에 유람 와서 지은 시가 있는데 대략 아래와 같다.
城中王亦大 도성에서는 왕이 역시 위대하고
天下佛爲尊 천하에서는 부처님이 존귀하다.
넘쳐 나는 문장의 근원은 노두老杜(두보)와 다투어 볼 만하다. 그리고 위의 세 웅걸의 작품도 격조가 높기는 하지만 단지 남의 글을 흉내 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찌 가슴앓이하는 동명 정두경과 고하를 논할 수 있겠는가?일반적으로 시인들이 시를 지을 때는 능력을 다 쏟지 않음이 없다. 하지만 꼭 아름다움을 극진히 하려 하지 않았는데도 이처럼 아름답게 표현된 시가 있다. 숨은 의도는 반드시 땅의 신령스러움이 도와서 그렇게 된 것이리라.당나라 시인도 역시 절을 많이 유람하면서 뛰어난 시구절을 얻은 사람이 있다.
竹經通幽處 대나무 오솔길은 그윽한 곳으로 통하고
禪房花木深 선방禪房에는 꽃과 나무가 무성하다.
이 시는 상건常建의 〈유파산사遊破山寺〉이다.
僧臘階前樹 승랍僧臘은 뜰 앞의 나무 같고
禪心江上山 선심禪心은 강가의 산이라네.
이 시는 한굉韓翃의 〈입천복사入薦福寺〉25)이다.혹은 이런 시도 있었다.
樹影中流見 중류에서 나무 그림자 보노라니
鐘聲兩岸聞 양쪽 언덕에서 종소리 들려오네.
이 시는 장우張祐의 〈숙금산사宿金山寺〉이다. -
008_0326_a_01L成以來。林歡澗悅。殿閣翼舒。廊廡繩
008_0326_a_02L直。數年之間。藹然復興。敬林倡啓之
008_0326_a_03L功。可謂懋矣。是寺東臨廣陵。西指巴
008_0326_a_04L陵。南通湖路。北控京洛。此其臨觀之
008_0326_a_05L大略。而騷人墨客之吟詠其間者。不趐
008_0326_a_06L千萬。而或有以警語稱者。有曰。舟中
008_0326_a_07L回指奉恩寺。杜宇一聲僧掩關者。崔孤
008_0326_a_08L竹之作也。有曰。病客孤舟明月在。老
008_0326_a_09L僧深院落花多者。李蓀谷之詠也。有曰
008_0326_a_10L紅藕一池風滿院。亂蟬千樹雨歸村者。
008_0326_a_11L白玉峯之題也。此皆當時膾炙。而後世
008_0326_a_12L傳誦者也。今縉紳中。有東溟鄭先生者。
008_0326_a_13L少遊是寺。題一律。其略曰。城中王亦
008_0326_a_14L大。天下佛爲尊者。其詞源之汎濫。可
008_0326_a_15L與老杜爭鋒。而上三傑之作。雖曰調高
008_0326_a_16L而特是效嚬耳。豈與病心之東溟。論其
008_0326_a_17L高下哉。盖騷人吟詠之際。非不致力焉。
008_0326_a_18L或未必盡美。而其得美如此者。意者必
008_0326_a_19L有地靈之助而然耶。唐之詩人。亦多遊
008_0326_a_20L梵宇。而得警句者。有曰。竹經 [8] 通幽處
008_0326_a_21L禪房花木深者。此常建之遊破山寺也。
008_0326_a_22L有曰。僧臘階前樹。禪心江上山者。此
008_0326_a_23L韓翃之入薦福寺也。有曰。樹影中流見。
008_0326_a_24L鐘聲兩岸聞者。此張祐之宿金山寺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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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326_b_01L이런 시들은 고금에 뛰어났으며, 시를 평하는 이들은 “다른 사람은 표현할 수 없는 경지”라고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그 지역에 파산破山의 뛰어난 경치가 있은 후에 상건의 시가 있었으며, 금산金山의 뛰어난 경치가 있은 후에 장우의 시가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어찌 땅 신령의 도움이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그렇다면 이 절이 완공된 것도 다만 스님들이 머물면서 수행을 하는 곳일 뿐만 아니라 시인들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으니 역시 아름다운 곳이라 할 만하다. 이에 기록한다.봉국사 신창기奉國寺新剏記예로부터 제왕가帝王家에서는 부모와 자녀 사이에 참으로 존망存亡이 엇갈려 영원히 이별하는 슬픔이 생기면 반드시 가설假設26)에 의탁하여 추도하기를 끝없이 하였다. 그러므로 한 무제漢武帝는 누대를 짓고 망사대望思臺라고 하였는데, 아들 여태자戾太子를 그리워하였기 때문이다. 당 고종唐高宗은 절을 세워 자은사慈恩寺라고 하였는데 어머니의 은혜를 생각하였기 때문이다.이치로 따진다면 그리운 아들이지만 어찌 다시 살아 돌아오겠으며, 자애로운 어머니이지만 어찌 다시 세상에 올 수 있겠는가? 대개 슬픈 감정이 격발되면 저절로 멈출 수 없어 영혼을 위로하는 집에 마음을 기대어 한없는 슬픔을 실어 보고자 한다.우리 주상 전하(현종)께서 즉위하신 이후에 왕세자 이외에도 딸이 있었는데 마치 요임금의 두 딸인 아황娥皇과 여영女英 같았다. 장녀는 명혜 공주明惠公主, 차녀는 명선 공주明善公主이다. 배우자를 논의하다가 혼인을 하지 못한 채 1년 동안에 잇따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주상은 애통해하였고 자전慈殿(명성 왕후)은 더욱더 상심함이 끝이 없었다. 저승길에 명복을 비는 데 부처님만 한 분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장례를 마친 이듬해에 명성 왕후께서는 금강산 스님인 축존竺尊에게 명을 내리어 두 무덤 밖 몇 리쯤 되는 곳에 절을 세우도록 하셨다. 절을 지을 때에는 궁중의 사신을 파견하여 감독하도록 하고 절이 완공되자 봉국사奉國寺라는 현판을 내려 주고 향불을 올려 공양하였다. -
008_0326_b_01L此等作冠絶古今而詩評者。謂他人道
008_0326_b_02L不得處也。迹此觀之地。必有破山之勝
008_0326_b_03L而後。有常建之詩。有金山之勝而後。
008_0326_b_04L有張祐之詩。此豈非地靈之有助而然
008_0326_b_05L耶。然則此寺之成。非唯釋子之所棲神
008_0326_b_06L而已。其有助於騷人者可知。亦可謂勝
008_0326_b_07L也矣。是爲記。
008_0326_b_08L
008_0326_b_09L奉國寺新剏記
008_0326_b_10L自古帝王家父母子女之間。苟有存亡
008_0326_b_11L永隔之痛。則必托於假設。追悼無窮。故
008_0326_b_12L漢武帝作臺曰。望思。思戾太子也。唐
008_0326_b_13L高宗建寺曰。慈恩。恩母太后也。以理
008_0326_b_14L觀之。雖曰思之子。豈有歸來乎。雖曰
008_0326_b_15L恩之母。安得降返乎。盖悲情所發。不
008_0326_b_16L能自已。憑斯假設。用遣無窮之痛故也。
008_0326_b_17L惟我主上殿下。即祚以來。儲嗣外有女。
008_0326_b_18L若帝堯之皇英者二。長曰明惠公主。次
008_0326_b_19L曰明善公主。纔議伉儷。未及于飛。而
008_0326_b_20L一年之間。相繼云亡。上痛悼之。慈殿
008_0326_b_21L尤哀傷不已。思所以資福於冥路者。莫
008_0326_b_22L若佛氏。故葬畢之明年。慈殿命金剛山。
008_0326_b_23L僧曰。竺尊剏寺於雙墳之外里許。而遣
008_0326_b_24L中使督。成額曰。奉國。以供香火。即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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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326_c_01L즉 광주廣州 관아 서쪽 10리에 있는 성부산星浮山 아래이다.아아, 이 절이 어찌 부처를 모시기 위해서 지어졌는가? 어려서 죽은 딸이 가엽고 애통하여 부모의 지극한 정을 두고자 하기 때문이다.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유교와 불교가 서로 경쟁한다고 터무니없이 생각하고, 걸핏하면 왕가에서 해야 할 일이 아니라고 한다. 그들이 어찌 일상적인 원칙에서 벗어나지만 임시방편인 권도權道가 있음을 알겠는가?옛적 한유韓愈는 조주潮州 유배 시절에 넷째 딸이 죽자 섬서성 상남商南 층봉역層峰驛에서 장례를 치르고 애도의 글27)을 지었으며, 송나라 소동파는 아버지의 초상화를 그려 (호사湖寺에 봉안하였으니) 어찌 다른 이유에서였겠는가? 모두가 부처에 의지해서 영원히 추도하려는 것이다.부자지간이라면 인륜으로 맺어진 이치는 모두가 동등하다. 비록 고귀함이 지존至尊이라 하더라도 정과 사랑은 똑같다. 하물며 옛적에도 남의 부음을 들으면 슬퍼하였다.학식 있는 군자가 이 절이 이유가 있어서 창건된 사실을 들으면 당연히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리라. 어느 겨를에 쓸데없는 말과 과장된 소리로 유교와 불교 사이의 시비를 다투며 만족해하는가?때는 갑인년(1674, 현종 15) 중추일中秋日.겸팔도선교십육종도총섭兼八道禪敎十六宗都總攝 신臣 승僧 처능處能 삼가 쓰다.유점사 산영루 중수기楡岾寺山影樓重修記누각을 산 빛과 물그림자 사이에 세우고 산영루山影樓라고 한 것은 두 가지 뜻이 있다. 산과 물을 합해서 말하여 누대 이름을 산영이라 하였으니, 산이란 곧 산 빛깔이며 그림자는 곧 물그림자이다. 대개 산과 물에 자신의 흥을 보내어 이름을 붙인 것으로, 이름에 자신의 뜻을 붙인 첫 번째 뜻이다.비록 빛과 그림자는 정해진 소속이 없으므로 수광루水光樓나 산영루라 해도 무방하다. 누대의 이름을 산영이라 한 것은, 산은 산이고, 그림자는 산 그림자라는 뜻이다. 다만 산을 사랑해 이름을 붙인 것이니, 이름을 붙인 두 번째 뜻이다.그렇다면 이 두 가지 뜻 중에서 어느 것이 낫고 어느 것이 못하며, 어느 것을 취하고 어느 것을 버리겠는가? 만일 버린다면 앞의 수영水影을 버리고, -
008_0326_c_01L州治之西十里星浮山之下也。噫。寺豈
008_0326_c_02L崇佛而剏哉。爲緣哀憐悼痛。用寓至情
008_0326_c_03L也。不知者。妄以儒佛相爭。輒曰此非。
008_0326_c_04L王家之所當爲也。豈知夫反經出常而
008_0326_c_05L有所謂權者哉。昔韓愈銘女挐於層峯。
008_0326_c_06L蘇軾畫先君於湖寺。豈有他哉。皆所以
008_0326_c_07L憑賴而追悼無窮者也。至於父子之間。
008_0326_c_08L天理所均。雖貴爲至尊。情愛則同然。况
008_0326_c_09L古有聞而悲之者。凡有識君子。聞此寺
008_0326_c_10L之有爲而剏。則當洒涕而悲之。奚假以
008_0326_c_11L閑言大語。爭是非於儒佛之間而爲快
008_0326_c_12L哉。時甲寅。仲秋。日。兼八道禪敎十六。
008_0326_c_13L宗都摠攝臣僧處能拜手記。
008_0326_c_14L
008_0326_c_15L楡岾寺山影樓重修記
008_0326_c_16L樓建於山光水影之中。而名之曰山影
008_0326_c_17L者。有二意。若合取山水而言。則樓名
008_0326_c_18L山影者。山則山光也。影則水影也。盖
008_0326_c_19L寄興於山水而名者也。名之寓意一也。
008_0326_c_20L雖然光之與影字無㝎屬。亦不妨曰水
008_0326_c_21L光。山影則樓名。山影者。山則山也。影
008_0326_c_22L則山之影也。但愛山而名者也。名之寓
008_0326_c_23L意二也。然則二意之中。何優何劣。奚
008_0326_c_24L取奚去。曰如可去也。去前之水影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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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327_a_01L만일 취한다면 뒤의 산영山影을 취할 것이다. 무엇 때문인가? 명승지의 사계절에 물은 다만 푸르고 맑을 뿐이다. 산은 그렇지가 않다. 반드시 각 계절마다 좋은 것이 있다.봄에는 울긋불긋한 꽃으로 눈길을 주어 구경할 만하고, 여름에는 푸른 나무와 파란 넝쿨이 있으니 몸을 기댈 만하며, 가을에는 알록달록한 단풍과 붉은 잎이 있으니 마음으로 감상할 만하며, 겨울에는 함박눈과 된서리가 있으니 흉금을 씻을 만하다. 이 네 계절의 즐거움은 모두 산 그림자의 도움이다. 그러니 이 산영루에 올라 감흥을 일으키는 사람은 그 수영을 논할 필요가 없고, 단지 산영을 취하더라도 흥취는 이미 넉넉하다.그런데 누각이 오래되고 기울었으니, 누각을 다시 세운 사람은 누구인가? 승통僧統28) 지십智什 스님이다. 누각이 기울어 다시 세울 때에 기문記文을 짓고 기록한 사람은 누구인가? 백곡 처능이다. 판목에 새긴 것은 어느 해 어느 달인가? 바로 숭정崇禎 후 갑인년(1674, 현종 15) 가을이다.만국도설萬國圖說〈만국도萬國圖〉를 나에게 보여 준 사람이 있었다. 그 그림을 보니, 소위 만국은 모두 바다 밖에 있었다. 내가 “많기도 하다. 『시경』과 『서경』이 나온 이후로 역대의 모든 역사서에 모두 실려 있지 않은 나라이다.”라고 하였다.내가 듣건대, 옛날에 우禹임금이 도산塗山(우임금의 부인)을 만날 때에 옥백玉帛(예물)을 가지고 온 나라가 만국萬國이었다고 한다. 공자는 세상을 바로잡을 도를 펼치기 위해 천하를 돌아다녔다. 이때의 천하란 해내海內(중국 안)에서 구분된 지역이다. 이 〈만국도〉에 기재되어 있는 내용과 비교하면 단지 하나의 거품일 뿐이다.세상에 전해지는 이야기에 “장건張騫29)이 은하수를 찾아 하늘로 올라갔으며, 직녀織女의 지기석支機石30)을 가지고 돌아왔다.”라고 하니, 장건은 천하의 끝까지 가서 두루 다 본 사람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만국도〉에 실려 있는 나라들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도 없다. 이 〈만국도〉는 누구에게서 나온 것인가?“석가세존께서 방위를 논할 때에, 세계가 많아서 그 숫자가 모래보다 많다고 하셨다.”라고 나는 들었다. 이 〈만국도〉에 그려져 있는 나라도 역시 많다고 할 수 없다. -
008_0327_a_01L如可取也。取後之山影也。何者。名區
008_0327_a_02L四時。水但凝碧而澄者也。山則不然
008_0327_a_03L必有四可。春則丹葩紫蘂。目可騁也。夏
008_0327_a_04L則碧樹靑羅。身可捿也。秋則斑楓赤葉
008_0327_a_05L心可賞也。冬則密雪嚴霜。襟可滌也。凡
008_0327_a_06L此四可。皆山影之助也。然則登斯樓而
008_0327_a_07L發興者。不必論其水影。而但取山影
008_0327_a_08L趣己 [9] 足也。樓久而欹。改建者誰耶。僧
008_0327_a_09L統智什也。樓欹而復建。作文而記者誰
008_0327_a_10L耶。白谷處能也。刻板者何年月耶。崇
008_0327_a_11L禎後甲寅之秋也。
008_0327_a_12L
008_0327_a_13L萬國圖說
008_0327_a_14L有以萬國圖示余者。取其圖而觀之。所
008_0327_a_15L謂萬國。皆在重溟之外者。余曰多矣
008_0327_a_16L哉。自詩書以降。歷代諸史。皆所未載
008_0327_a_17L之國也。余聞古者禹會塗山。執玉帛者
008_0327_a_18L萬國。孔子道窮轍環天下者。特謂其海
008_0327_a_19L內區分之域。則較此圖所載。特一浮漚
008_0327_a_20L耳。世傳張騫。尋河上天。取織女支機
008_0327_a_21L石而還云。可謂窮天下而極覽者也。然
008_0327_a_22L於此圖之所載。亦未嘗一論焉。則此圖
008_0327_a_23L初從阿誰出耶。抑吾聞大雄氏之論方
008_0327_a_24L位曰。世界之多。數過塵沙云。則雖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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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327_b_01L이제 〈만국도〉 끝머리에 이 글을 쓰니 〈만국도〉를 마음껏 감상하는 데 일조가 되었으면 한다.성명설性命說하늘이 인간에게 준 것을 명命이라 한다. 자사子思가 “천명天命을 성性이라 한다.”31)라고 하였는데, 바로 이것이다. 인간이 하늘에서 받은 것을 성性이라 한다. 대우大禹(우임금)가 “나는 하늘에서 명을 받았다.”라고 하였는데, 바로 이것이다. 그러므로 성과 명은 하나이다. 다만 주고받음에 명칭이 나뉠 뿐이다.하늘의 명은 알기 어렵기 때문에 공자도 명을 자주 말하지 않았다. 인간의 성은 알기 쉽기 때문에 맹자가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라고 말하였다. 일반적으로 하늘의 명은 소원疎遠하여 알기 어렵고, 인간의 본성은 친근하여 알기 쉽기 때문이다.이런 까닭에 공자는 “내가 이 명을 넘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맹자는 “위후魏侯는 천天을 보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는데, 모두 하늘에 있는 명을 말한 것이다.장자莊子가 말하는 ‘선성繕性’,32) 양자楊子가 말하는 ‘수성修性’33)은 모두 인간의 성을 말한 것이다.불가佛家에서는 혹은 성명性命이라 하고 혹은 신명身命이라 하여, 성과 명을 나누지 않고 합해서 말하였다. 이는 성이 바로 명이고, 명이 바로 성임을 일컬은 것이니, 이것들이 모두 사람에게 달려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학자들도 이 점을 분명히 알면, 삼교三敎의 성명설에 대해 동이同異를 대략이나마 분별하고 의혹이 없어질 것이다.인의설仁義說사람을 사랑하고 만물을 이롭게 함을 인仁이라 하고, 합당하게 일을 처리함을 의義라고 하니, 모두가 나의 본성에 있는 것이고 당연히 실천해야 할 이치이다.대개 인은 사랑을 위주로 하고, 의는 의리를 주장하지만 경중輕重이 없을 수가 없다. 무엇 때문인가? 인은 의의 머리이며, 의는 인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공자를 추종하는 공문孔門의 학문은 인을 구하는 일을 중요하게 여긴다. -
008_0327_b_01L圖。亦不足多也。聊書圖末。以爲騁懷
008_0327_b_02L之一助云。
008_0327_b_03L
008_0327_b_04L性命說
008_0327_b_05L天授之於人曰命。子思之所謂天命之
008_0327_b_06L謂性者是也。人受之於天曰性。大禹之
008_0327_b_07L所謂吾受命於天者是也。故性與命。盖
008_0327_b_08L一也。而特授受之分耳。雖然天之命難
008_0327_b_09L見故。孔子罕言命。人之性易知故。孟
008_0327_b_10L子道性善。盖在天之命。踈遠難見。而
008_0327_b_11L在人之性。親近易知故也。是以孔子曰
008_0327_b_12L丘之不濟此命也。孟子曰魏侯之不見
008_0327_b_13L天也。皆言在天之命也。莊子所謂繕性。
008_0327_b_14L楊子所謂修性。皆言在人之性也。佛家
008_0327_b_15L或云性命。或云身命等者。性與命。不
008_0327_b_16L分而合言。其性即命。命即性而稱也。皆
008_0327_b_17L在人者也。學者當審乎此。則於三敎
008_0327_b_18L性命之說。粗分同異而無惑矣。
008_0327_b_19L
008_0327_b_20L仁義說
008_0327_b_21L愛人利物之謂仁。隨宜制事之謂義。皆
008_0327_b_22L在我之性。而當然之理也。盖仁主於愛
008_0327_b_23L義主於義。而不無輕重焉。何者。仁爲義
008_0327_b_24L之首。義從仁而生者也。孔門之學。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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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327_c_01L그러므로 낚시를 해서 물고기를 잡더라도 그물을 쓰지는 않고, 주살로 새를 잡더라도 자는 새를 쏘지는 않는다. 이것이 성인의 인심仁心이다. 그러므로 (『논어』 「이인里仁」에서) “식사를 하는 짧은 시간에도 인을 어기는 일이 없었다.”라고 하였으며, 또 (「술이述而」에서) “인이 멀리 있는가? 내가 인을 실천하고자 한다면 곧 인이 다가온다.”라고 하였다.공자의 제자인 중궁仲弓ㆍ자로子路ㆍ염유冉有ㆍ공서화公西華 등은 현인이지만 공자는 그들이 인仁하다고 인정하지 않았다. 오직 안연顔淵을 칭찬하고, (「옹야雍也」에서) “석 달 동안 인을 어기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인을 어기지 않았다’라고 하는 말은 바로 한 칸 정도의 간격쯤 모자란다는 뜻이다.또 공자는 초나라 영윤令尹인 자문子文의 사람됨에 대해서도 다만 그의 충忠만을 인정하고 그의 인은 인정하지 않았다.34) (『논어』 「공야장公冶長」에서) 진문자陳文子의 사람됨에 대해서는 단지 그의 청淸만을 인정하고 그의 인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관중管仲35)을 평가할 때는 “어진 사람 같다.(如其仁)”라고 하였다. ‘어진 사람 같다’라고 한 것은, 그의 공로를 미화한 것이지 반드시 그가 인하다고 한 것은 아니다.인도仁道는 지극히 위대하기 때문에 단지 삼현三賢36)에 대해서 “은나라에 세 명의 어진 분이 있다.”라고 하였다. 또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에 대해서는 (『논어』 「술이」에서) “인을 구하고자 하여 인을 얻었다.”라고 평가하였다. 이것이야말로 공자가 찬미한 극치이니, 인이란 쉽게 얻을 수 없음을 말씀하신 것이다.그렇기는 하지만 인에는 반드시 의가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공자는 인의仁義를 함께 말하지 않았다. 어찌하여 그런 줄 알겠는가? 삼현을 이미 삼인三仁이라고 하였다. 그러니 삼현이 군주를 사랑한 충성이 바로 의이다. 백이와 숙제를 평가하기를 이미 득인得仁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백이와 숙제가 (주나라 무왕武王의) 말고삐를 붙잡고 간언한 것은 의이다. 이렇게 본다면 의는 인 가운데 있고, 인에는 반드시 의가 들어 있다. 공자께서 인과 의를 함께 말하지 않은 이유도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다.정자程子는 “공자는 단지 인仁 한 글자만 설명하였고, 맹자는 입만 열면 즉시 인의仁義를 설명하였다.”라고 하였다. 맹자는 양梁나라 혜왕惠王의 “무엇으로써 우리나라를 이롭게 할 것이냐?”라는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하였기 때문에 인의를 함께 설명하였다. 그리고 의 자를 열거하여서 이심利心을 억제하고자 했기 때문이다.공자 역시 어찌 의를 설명한 적이 없겠는가? 공자는 (「양화陽貨」에서) “군자는 의를 으뜸으로 삼는다.”라고 하였고, 또 (「헌문憲問」에서) “이익을 보면 의리를 생각하라.(見利思義)”라고 하였다. 견리사의見利思義의 의 자는 바로 맹자가 양나라 혜왕에게 대답한 말, 즉 “역시 인의가 있을 뿐이다.”에 나오는 의 자이다. -
008_0327_c_01L求仁爲要故。釣而不網。弋不射宿者。
008_0327_c_02L聖人之仁心也。故曰。無終食之間違仁。
008_0327_c_03L又曰。仁遠乎哉。我欲仁。斯仁至矣。是
008_0327_c_04L故雖以仲弓子路冉有公西華之賢。夫
008_0327_c_05L子不許其仁。而獨美顏淵曰。回也。三
008_0327_c_06L月不違仁。不違仁者。是未達一間者也。
008_0327_c_07L夫子又於令尹子文之爲人也。只許其
008_0327_c_08L忠。而不許其仁。於陳文子之爲人也。特
008_0327_c_09L許其淸。而不許其仁。謂管仲曰。如其
008_0327_c_10L仁。如其仁者。美其功而不必其爲仁也。
008_0327_c_11L仁道至大故。只於三賢曰。殷有三仁。
008_0327_c_12L於夷齊曰。求仁得仁。此迺夫子讃美之
008_0327_c_13L極。而仁不易得之辭也。雖然仁必有義
008_0327_c_14L故。夫子不並說仁義。何以知其然也。
008_0327_c_15L三賢旣已謂之三仁。而三賢愛君之忠
008_0327_c_16L是義。夷齊旣已謂之得仁。而夷齊叩馬
008_0327_c_17L之諫是義也。跡此觀之。義在於仁中。
008_0327_c_18L而仁必有義矣。夫子不並說仁義。從可
008_0327_c_19L知矣。程子曰。仲尼只說一箇仁字。孟
008_0327_c_20L子開口。便說仁義云者。盖孟子對惠王。
008_0327_c_21L何以利吾國之問。故並說仁義。而擧義
008_0327_c_22L字。抑其利心故也。夫子亦何甞不說義
008_0327_c_23L乎。故夫子曰。君子義以爲上。又曰見
008_0327_c_24L利思義。其見利思義之義字。正是孟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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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328_a_01L어찌 공자가 단지 ‘인’ 한 글자만 설명했겠는가? 정자가 “공자는 다만 인 자 하나만 말했다.”라고 한 것은, 공자가 의를 말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인과 의를 함께 말하지 않았다는 뜻이다.그런데 옛날의 여러 학자들이 인의를 논한 것이 같지 않다. 묵자墨子는 ‘겸애兼愛’를 인이라 하였고, 양자楊子는 ‘위아爲我(자신을 위하는 것)’를 의라고 하였는데, 모두 공자 문하에서 말하는 인의는 아니다.고자告子는 (『맹자』 「고자告子」 상에서) “인은 안에 있고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의는 밖에 있고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내인외의內仁外義라는 주장이다.노자老子는 (『도덕경』 19장에서) “인을 끊고 의를 버려야지 백성들이 자慈와 효孝를 회복한다.”라고 하였다.장자莊子는 (『장자』 「천운天運」에서) “거짓으로 인을 말하고, 핑계로 의에 머문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인의를 모두 바깥에 있는 것으로 본다는 주장이다. 그러므로 장자는 (『장자』 「천운」에서) “인의란 선왕先王의 거려蘧廬(여인숙)이다. 머물러서 하룻밤 정도는 있을 수 있지만 오래 머물 곳은 아니다.”라고 하였다.불가에서는 자비를 인, 희사喜捨를 의라 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인과 의가 모두 다 나에게 있음을 의미한다.배우는 이들은 제자백가들이 논한 인의에 대한 서로 다른 학설에 대하여 깊이 완미하고 상세히 연구를 해야 한다.석씨원류 발釋氏源流跋37)아! 불법을 전하고 받은 뜻은 『전등록傳燈錄』38)에 상세히 실려 있고, 신령스럽고 기이한 자취는 『통재通載』39)에 많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전등록』에서는 비바시불毘婆尸佛(석가모니 이전의 부처님 중 처음 나타난 부처)을 첫 번째로 하였고, 『통재』에서는 반고왕盤古王(천지가 개벽할 때 나타난 왕)을 첫 번째로 하였다. 모두 석가모니가 스스로 말한 “오직 내가 홀로 존귀하다.(唯我獨尊)”라는 의미와는 맞지 않는다.지금 『석씨원류釋氏源流』의 편차를 보니 곧장 석가씨부터 시작하여 담파 국사膽巴國師40)에 이르기까지 부처와 조사가 총 244인인데, 이를 편찬하여 불법 근원의 시작과 끝으로 삼았다. 책의 구성에 조리와 체제가 더욱 정확하여 석가씨를 조상으로 하지 않는 『전등록』이나 『통재』보다 매우 뛰어나다. 근원이 깊으면 멀리 흘러가는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
008_0328_a_01L對惠王曰亦有仁義之義字也。豈夫子
008_0328_a_02L只說一箇仁字乎。程子謂仲尼只說一
008_0328_a_03L箇仁字云者。非不說義也。不並說仁義
008_0328_a_04L之謂也。然古之諸家論仁義不同。墨氏
008_0328_a_05L以兼愛爲仁。楊氏以爲我爲義。皆非孔
008_0328_a_06L門之所謂仁義者也。告子曰。仁內也非
008_0328_a_07L外也。義外也非內也。此是內仁外義之
008_0328_a_08L論也。老子曰。絕仁棄義。民復慈孝。莊
008_0328_a_09L子曰。假道於仁。托宿於義。此是仁義
008_0328_a_10L皆外之之論也。故其言曰。仁義先王之
008_0328_a_11L蘧廬也。止可以一宿。不可以久處也。
008_0328_a_12L佛氏以慈悲爲仁。喜捨爲義。此是仁義
008_0328_a_13L皆在我之謂也。學者當於諸家論仁
008_0328_a_14L義不同之說。翫味而詳焉。
008_0328_a_15L
008_0328_a_16L釋氏源流跋
008_0328_a_17L噫。受授之旨。備載於傳燈。靈奇之跡。
008_0328_a_18L多著於通載。然傳燈以毗婆佛爲首。通
008_0328_a_19L載以盤古王爲初。皆未叶於釋迦氏自
008_0328_a_20L言惟我獨尊之意也。今觀源流之所編
008_0328_a_21L次。直自釋迦氏。以至膽巴國師。通得
008_0328_a_22L佛若祖二百四十四人。編爲源流之首
008_0328_a_23L末始終。有條次第。尤的有愈於傳燈通。
008_0328_a_24L載之不以釋迦氏爲祖首也。可謂源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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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328_b_01L이 책을 편찬한 사람의 의도가 어찌 우연이겠는가?우리나라에는 원래 이 책이 없었다. 지난 숭정崇禎 4년인 1631년(인조 9) 여름에 호정壺亭 정두원鄭斗源41)이 연경燕京에 사신으로 갔다가 여관에서 중국의 연산燕山 스님 대겸大謙을 만났다. 대겸이 이 책을 꺼내어 정두원이 귀국할 때 주면서 우리나라의 법보法寶로 삼으라고 하였다.정두원이 돌아온 다음에 금강산 백운암白雲菴에 보관하였다. 당시에 춘파 대사春坡大師가 그 책을 보고 크게 기뻐하여 판각板刻을 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었다. 관서關西 지방 도승통都僧統인 지십智什 스님이 모연募緣하여 간행하였으니 춘파 대사가 남긴 부탁을 따른 것이다.신해년(1671, 현종 12) 겨울에 재물을 거두어 모으고 임자년(1672, 현종 13) 가을에 작업을 마쳤다. 여러 성인聖人의 진실한 자취를 후세에 환하게 다시 일으키게 되었으니 지십 스님의 마음 씀씀이가 참으로 부지런하다고 할 만하다. 이상의 여러 사실을 근거로 해서 본다면 대겸이 정두원에게 부탁한 것이 묵시적으로 춘파 대사에게 이어졌고, 춘파 대사가 지십 스님에게 부탁한 것도 역시 대겸 스님에게서 은밀히 이어진 것이 분명하지 않겠는가?도가 서로 들어맞는 것은 진실로 언어와 형태의 모습에 의지하지 않는 것이니, 나라가 같고 다름도 참으로 논할 거리가 못 된다. 지십 스님이 나에게 발문을 요구하므로 나는 그가 일을 시작한 것을 가상하게 여겨 글을 써서 후대에 전하는 데 약간의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대사헌 유 공께 올리는 편지모월 모일에 백곡 산인白谷山人 처능處能은 머리를 조아리고 두 번 절하며 대사헌 상공에게 글을 올립니다.지난달에 저는 설성雪城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동주東州(강원도 철원)로 돌아오는 길에 징파강澄波江(임진강)을 지날 때, 날씨가 찌는 듯 더워서 강가의 나무 밑에서 쉬고 있었습니다. 그때 물가의 굽이진 곳에 있는 높은 정자 위에 노선생老先生이 갓을 높이 쓰고 앉아 있음을 보았습니다. 마음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뱃머리에서 낚시질하는 노인에게 누구인지 물었습니다. 노인은 낚싯대를 잡은 채로 인사하면서, “스님은 듣지 못했습니까? 어진 재상인 유 공兪公께서 -
008_0328_b_01L而流長者也。編者之意。豈偶然哉。東
008_0328_b_02L國初無是書。徃在崇禎四年夏。壼亭鄭
008_0328_b_03L相公斗源氏。奉使燕京。逆旅中。得遇
008_0328_b_04L燕山僧大謙。謙出是書。付諸鄭相公之
008_0328_b_05L歸。俾爲東方法寶。相公使還。藏于金剛
008_0328_b_06L山中白雲菴。時春坡大師。窺其書。大悅。
008_0328_b_07L將欲鋟榟而未果。關西都僧統智什。募
008_0328_b_08L緣刊行。遵春坡之遺囑也。鳩財于辛亥
008_0328_b_09L冬。斷工於壬子秋。令衆聖人眞迹。煥
008_0328_b_10L然再興於季世。什公之用心。可謂勤矣。
008_0328_b_11L由是觀之。大謙之付諸鄭相者。不無冥
008_0328_b_12L契乎春坡。春坡之囑于什公者。亦有密
008_0328_b_13L承于大謙明矣。道之相契者。固無待於
008_0328_b_14L言語形貌。則邦域之同不同。固不足論
008_0328_b_15L也。什徵余文跋其尾。余嘉厥緖故。書
008_0328_b_16L此以爲傳遠之一助云。
008_0328_b_17L
008_0328_b_18L上大司憲兪公書
008_0328_b_19L月日白谷山人處能。頓首再拜。獻書于
008_0328_b_20L大憲相公閤下。前月中。某自雪城行脚
008_0328_b_21L歸東州。路由澄波江。日氣蒸溽。憇錫
008_0328_b_22L汀樹間。覘其曲渚邊高亭上。有老先生
008_0328_b_23L峨冠而坐。心訝之。問于艙頭釣翁。翁
008_0328_b_24L把竿而揖曰。子不聞乎。賢宰相大夫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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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328_c_01L임금을 바로 인도하고 나라에 도움이 되고자 한결같이 법대로 하다가, 다른 사람들과 다투어 병을 핑계로 하직하고 돌아와 계십니다.”라고 하였습니다.한번 찾아가 제 속마음을 쏟아내고서 은혜로운 말씀 한마디라도 내려 주었으면 하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외람되게도 비루하고 못난 몸으로 당돌하게 나설 수가 없었고, 또 과연 관대하게 접대를 해 줄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노력하면서 세 번이나 나아갔다가 물러나왔으며 가슴속에 걸린 채 이제 여러 날이 되었습니다.하고 싶은 일이 있을 때 상대의 대답을 듣지 못하면 단지 마음속에 가득 채워 둘 뿐입니다. 그렇게 되면 끝내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표현도 해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또한 살펴 주시는 은혜를 얻지도 못합니다. 그러므로 감히 어리석고 누추한 말이지만 저의 간절한 정성을 서찰에 담아 올립니다. 합하閤下께서는 어떻게 여길는지는 모르겠습니다.합하께서는 풍운風雲이 만났을 즈음42)에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역임하시었고 푸른빛 자줏빛 관복 속에 싸여 영화가 지극했다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정사당政事堂에서 인사권을 담당하였습니다. 상을 받을 사람이 있으면 기뻐하시면서 봄날 햇살처럼 따뜻하였고, 벌을 받을 사람이 있으면 노하면서 가을 서리가 차갑게 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정직하게 관직 생활을 하고 분명하게 행정을 보았습니다. 관직 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거짓을 부리는 사람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사물의 경중輕重이 저울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리고 합하께서 현명한 사람을 천거하면 팔개八凱43)가 직책을 맡은 듯하였고, 간악한 사람을 물리칠 때는 사흉四凶44)이 동료를 떠나는 듯하였습니다. 성군인 요임금과 순임금 위에다 우리 임금을 올리고, 은殷나라와 주周나라 세상처럼 우리 백성을 편안히 함이 모두 합하의 손에 달려 있었습니다. 합하의 지위는 존귀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그러면서도 합하께서는 오히려 임금과 신하가 조화를 잃고 나라의 기강이 차츰 쇠퇴해져 사직이 불안하고 조정이 공명정대하게 되지 못함을 걱정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걱정으로 잠을 잊고 식음을 전폐하면서 안타까움을 안고 근심을 머금었습니다. 임금께 간언할 때는 옷자락을 잡고 투쟁하였으며, 재사才士를 맞이할 때에는 머리털을 거머쥐고 맞이하였습니다.45) 합하의 마음은 국가를 간절히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몸이 아프고 병이 들었을 때도 밤낮으로 생각함은 오직 나랏일뿐이었습니다. 그리고 현명한 재상인 제갈량諸葛亮과 (송宋의) 명장 악비岳飛도 끝내는 자신들이 살았던 후한後漢과 송나라에서 능력을 떨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또 병으로 관직을 버리고 강호에 물러나 살게 되자, -
008_0328_c_01L公。匡君輔國。一以䂓模。與人抹摋。謝
008_0328_c_02L病而歸云。擬欲呌閽。冀賜以一言之眷
008_0328_c_03L也。則猥以鄙庸。不敢唐突而進。又不
008_0328_c_04L知其果許以優容而接之。故蹩躠三進
008_0328_c_05L而退。鯁鯁于胷次中。于今有日矣。雖
008_0328_c_06L然凡有所欲。而不得售於人者。但滔滔
008_0328_c_07L滿載心腑間而已。則是終不現吾心之
008_0328_c_08L所欲言。而又不獲曲照之覽詧故。敢以
008_0328_c_09L愚陋之言。區區懇懇於筆札間而獻焉。
008_0328_c_10L苐未知閤下之何謂也。伏惟閤下。風雲
008_0328_c_11L際會。歷職淸要。紆靑嚲紫榮。幸極矣。
008_0328_c_12L况秉鈞軸于政事堂。喜有賞則春日舒
008_0328_c_13L輝。怒有罰則秋霜降冷。循官以直。視
008_0328_c_14L政以明。人不容僞於其間。若物之輕重。
008_0328_c_15L不得逃於權衡之㝎。而其又進其賢則
008_0328_c_16L八凱補職。退其姦則四㐫離羣。致君於
008_0328_c_17L堯舜之上。安民於商周之世者。皆懸於
008_0328_c_18L隻手中。閤下之位。可謂尊矣。然猶恐
008_0328_c_19L其塩梅失和。紀綱陵遲。則社稷不安
008_0328_c_20L朝廷不正。忘寢廢餐。抱恨含憂。諫主
008_0328_c_21L則牽裾以爭。待士則握髮以接。閤下之
008_0328_c_22L心。未甞不慻慻國家凋瘵之間。而晝思
008_0328_c_23L夜度國事已矣。固知諸葛之賢宰。岳飛
008_0328_c_24L之良將。終不振彌綸於漢宋。則又以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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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329_a_01L어부와 목동에 섞여 생활하고 마음은 갈매기에 맹세하였습니다. 자연과 더불어 밭을 갈고 낚시질하면서 하인들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몇 이랑의 오이밭에 호미를 메고 나가서 캐고, 강가의 이끼 낀 돌에서 낚시질하였습니다. 풍년이 들어도 절약해서 생활을 하였으니 역시 노년을 보내기에 풍족합니다.합하께서 홀로 방에 앉아 계실 때는 세상사의 이해득실을 한 조각 구름처럼 보실 것이니 어떤 즐거움을 여기에 더할 수 있겠습니까? 혹 문을 닫고 책상에 기대어 경전과 역사서를 두루 읽다가 홀연히 고금의 정치적인 안정과 혼란한 상황과 관련된 내용을 보고, 군부君父 사이에서 차마 의리를 잊을 수 없다는 대목을 보시면 합하께서는 반드시 당시의 사건에 대해 비분강개하시면서 안타까워하실 것입니다. 진실로 이와 같이 합하께서 조정에 있었을 때는 (억울하게 유배를 간 한나라) 가의賈誼의 원통함을 생각하였을 것이고, 강호에 있었을 때는 송나라 충신 범중엄范仲淹46)의 근심을 가슴에 품었을 것입니다.뜬구름 같은 부질없는 한평생에 즐길 만한 것도 하나 없으니 그저 정신만 손상시킬 뿐입니다. 비분강개하면서 애통해하더라도 이미 깨어진 시루와 같으니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합하께서는 마음에 두지 마시기를 바랍니다.저는 금년에 나이 25세입니다. 견문도 병이나 항아리 정도를 넘지 못하고 운수객처럼 편력한 적도 없습니다. 금년 가을에는 평안도 지역으로 방향을 잡아 곧장 묘향산으로 들어가려 합니다. 우뚝 솟은 향로봉 위에 더위잡아 오르면서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넓고 아득한 천지 사이에 눈길을 돌려 마음껏 보고서 마음이 웅대해지고 기운이 용맹해진 연후에 돌아와 합하의 문을 두드리겠습니다. 합하께서 혹시나 방외方外의 도에 뜻이 있어 저를 불러 힘차게 기운을 토해내도록 하고 우리 불가에서 전하지 않는 오묘한 이치를 세세히 논하게 하신다면 유감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합하께서 살펴 주시리라 생각합니다.어떤 재상에게 올리는 편지옛적에 상하上下47)가 서로 만날 때는 반드시 예가 있었으니 예는 폐지할 수 없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예물을 윗사람에게 바침을 지贄, 예물을 아랫사람에게 내림을 뇌賚라 합니다.우禹임금이 도산후塗山侯를 만났을 때에 옥玉을 가져갔으니 이것이 지贄입니다. -
008_0329_a_01L免。退居江湖。跡混漁樵。心盟鷺。烟
008_0329_a_02L雲畊釣。載命僮僕。荷鋤則有瓜田數畝。
008_0329_a_03L垂綸則有苔磯一江。年登而節用。則亦
008_0329_a_04L足以自老矣。閤下獨坐一室。視得失於
008_0329_a_05L一浮雲也。則何樂加此。而若或閉戶憑
008_0329_a_06L几。歷閱經史。忽覩古今治亂。有若不
008_0329_a_07L忍忘義於君父之間。必閤下慷慨起憤
008_0329_a_08L於當時事而憾焉。苟如是在朝廷。則懷
008_0329_a_09L賈傅之痛。處江湖則銜仲淹之憂。浮生
008_0329_a_10L一世。無一可樂。而適足以損精傷神。其
008_0329_a_11L慷慨憂痛。奚益於破甑乎哉。伏願閤下
008_0329_a_12L毋介懷也。不侫年今二十有五。見聞不
008_0329_a_13L過乎瓶瓮之間。而無山川雲水之遍歷。
008_0329_a_14L今秋方向關西。仍入玅香。若躋攀轉身
008_0329_a_15L於爐峯嵽嵲之上。而顧眄騁目乎乾坤
008_0329_a_16L曠漠之間。心雄氣猛然後。歸以敲閤下
008_0329_a_17L之門。閤下其亦有意於方外道。而呼之
008_0329_a_18L使前。終令吐氣張眉。細論吾家不傳之
008_0329_a_19L妙。則庶無憾矣。惟閤下鑑裁焉。
008_0329_a_20L
008_0329_a_21L上某相公書
008_0329_a_22L伏以古者上下之相見也。必有其禮。禮
008_0329_a_23L不可廢也。何者。以物獻上曰贄。以物
008_0329_a_24L賜下曰賚。禹會塗山侯執玉。是贄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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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329_b_01L(은殷나라의) 이윤伊尹이 신야莘野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을 때 탕湯임금이 폐幣를 주었는데 바로 뇌賚입니다. 상하 간에 각각 예절을 차린 연후에 일이 성사됩니다. 그러므로 월상越裳(베트남 동부에 있던 나라)은 주공周公에게 흰 꿩을 바쳐 은혜를 입었고,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은 진평陳平에게 금을 하사하여 대업을 이루었습니다. 예물을 사용하여 쌍방 간에 바라던 목적을 이루니 예물이란 없어서는 안 됩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한 몸이 생사의 갈림길에 있을 때에도 또한 예물이 없을 수 없습니다. (전국시대 제齊나라의) 맹상군孟嘗君이 (진秦나라에 구금되었을 때) 호구狐裘(여우 가죽 옷)를 예물로 바치지 않았으면 제나라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수가須賈48)는 솜옷이 없었다면 위나라로 되돌아가기 어려웠습니다. 예물이 없어서야 되겠습니까?그 나머지 전국시대의 지사들은 황금과 옥벽玉璧을 보내어 구원을 요청하고, 혹은 자국의 땅을 바쳐 화친을 요구하였습니다. 이들 모두는 예물의 힘을 빌려 그 교분을 두터이 하는 것입니다.혹은 명예와 절개를 앞세워 더럽다고 여기면서 예물을 받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춘추전국시대 오패五覇의 한 사람인) 진 문공晉文公은 구슬을 되돌려 주었고, (춘추전국시대 진晉나라의 대부인) 한선자韓宣子는 고리를 사양하였고, (공자의 제자인) 자공子貢은 비단을 버렸고, (후한의) 양진楊震은 금을 사양하였습니다. 이들 모두는 예물을 버리고 의리를 고상히 여긴 사람들입니다.비록 그렇지만 인정과 의리를 병행하였기 때문에 서로 어그러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후한의 유총劉寵49)은 1전錢을 꺼내서 받았으니 이것은 인정을 소중히 여긴 것입니다. (전국시대 제齊나라의 지사인) 노중련魯仲連은 천금千金을 가벼이 여겨 물리쳤으니, 이것은 그 의리를 높이 여긴 것입니다. 인정과 의리는 모두 옛사람도 실행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받고 안 받음은 저쪽 사람에 있고, 예물을 올리고 예의를 실천함은 나에게 있습니다. 나에게 있는 예의를 어찌 모두 폐지할 수 있겠습니까?합하께서는 재주와 지략이 고금에 으뜸이고 명성은 온 나라에 떨칩니다. 조정에 들어오면 (주나라의) 주공周公과 소공召公 같은 명재상이고, 밖으로 나가면 (전국시대의 명장인) 관중管仲과 악의樂毅 같습니다. 장군과 재상을 오가면서 국사에 마음을 다 쏟고 있음은 길 가는 사람도 모두 알고 있습니다. 인정과 의리의 실행도 역시 그 가운데 있으니 합하의 지위는 존귀하다고 하겠습니다.우매한 저는 일전에 관청의 일 때문에 존안尊顔을 볼 수 있었으니, 합하의 도량은 넓었으며 저의 행운은 컸습니다. 다만 예상하지도 않은 일 때문에 주제넘게 하찮은 선물을 올렸는데 노골적으로 얼굴빛을 바꾸시며 물리쳤습니다. -
008_0329_b_01L尹耕莘野。帝用幣。是賚也。是以上下之
008_0329_b_02L間。各致其禮然後。事乃相濟。故越裳
008_0329_b_03L獻雉於周公。而蒙聖化。漢高賜金於陳
008_0329_b_04L平。而成大業。物所以相濟者。不可無
008_0329_b_05L也。至於一身死生之際。亦不可以無物
008_0329_b_06L也。田文無狐裘。則不能歸齊。須賈非
008_0329_b_07L綈袍。則難以返魏。物可無乎。其他戰
008_0329_b_08L國之士。或齎金璧而請救。或納土地而
008_0329_b_09L求和。是皆賴其物。而厚其情者也。或
008_0329_b_10L負名節浼焉。不受者有之。若重耳之反
008_0329_b_11L璧。宣子之辭環。子貢之捐幣。揚 [10] 震之
008_0329_b_12L讓金。是皆棄其物。而高其義者也。雖
008_0329_b_13L然情義並行。不相爲悖故。劉寵選一錢
008_0329_b_14L而受之。是厚其情也。魯連輕千金而却
008_0329_b_15L之。是高其義也。情之與義。皆古人之
008_0329_b_16L所行也。然則或受或不受在彼。進物而
008_0329_b_17L行禮在我。在我之禮。烏可一切廢爲哉。
008_0329_b_18L伏惟閤下。才略冠古今。聲名動遐邇。
008_0329_b_19L入則周召。出則管樂。而將相之間。其
008_0329_b_20L盡心於國事。路人所共知。而情義之行
008_0329_b_21L亦在其中。閤下之位。可謂尊矣。不侫
008_0329_b_22L猥以愚昧。曩因官事。獲蒙賜顏。閤下之
008_0329_b_23L度寛。而不侫之幸大也。第未料事。妄
008_0329_b_24L奉不腆而獻焉。則居然色變而却之。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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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329_c_01L이 일로 합하의 고상한 의리를 볼 수 있음은 많고, 합하의 두터운 인정을 얻을 수 있음은 적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물이 도리어 허물로 바뀌고 합하의 고명하신 덕에 죄를 얻게 될 줄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비록 그러하나 예는 폐할 수 없는 것입니다.공자가 (『논어』 「팔일八佾」에서) 말하기를, “예는 사치하기보다는 차라리 검소함이 낫다.”라고 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물품이 검소하고 적당하면 예입니다. 사치스럽고 지나치면 뇌물입니다. 제가 올린 선물은 미미한 정성 중의 예의를 차리기 위한 하나의 물건입니다. 뇌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요즈음의 사대부로 스승, 제자라고 운운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속수束脩50)를 실천하는데 어찌 뇌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합하의 명령을 기다린 지 지금 49일이 되었습니다. 관청의 문을 두드리고자 하나 발이 머뭇거리고, 말씀을 올리고자 하나 입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마음속으로 두려워 합하께 가야 할지 물러나야 할지 가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합하께서 저의 어리석음을 불쌍하게 여기시어 저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옛 허물을 마음에 두지 않으시고 저를 구제해 주신다면 이것은 합하의 인정이 두터운 것입니다. 만약 저의 과오를 나무랄 뜻이 여전히 있으면 저를 불러들여 죄를 주십시오. 그런 연후에 저를 만나 주신다면 역시 합하의 인정이 두터운 것입니다.아아! 석 달을 머물면서 가을을 보내니 주머니는 비고 옷은 해어져 남쪽으로 가고 싶은 생각만 가득합니다.합하께서 인자한 마음을 내려 주시어 저를 만나기를 허락해 주시어 합하의 넓은 도량 속에서 넉넉히 지내도록 해 주신다면, 일이 끝나는 대로 옷깃을 흔들면서 구름 낀 아득한 산으로 멀리 갈 것이니, 어찌 합하께서 내리신 은덕이 아니겠습니까? 황송한 마음만 더하고 벗어날 곳을 모르겠습니다. 또 감히 인정과 의리와 관련된 설을 올려 존엄성을 범했으니 죽을죄를 졌습니다.사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행장賜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行狀51)스님의 이름은 각성覺性, 자字는 징원澄圓, 자호自號는 벽암碧嵓이며, 삼산三山 김씨金氏52)의 후손이다. -
008_0329_c_01L獲見閤下之高義則多。而得蒙閤下之
008_0329_c_02L厚情則少也。豈意禮翻爲咎。而獲罪於
008_0329_c_03L閤下之高明哉。雖然禮不可廢也。孔子
008_0329_c_04L曰。禮與其奢也寧儉。凡物儉而行則禮
008_0329_c_05L也。奢而過則賂也。不侫之妄進。不過
008_0329_c_06L爲微誠中一禮也。可謂之賂乎。今士君
008_0329_c_07L子。曰師。曰弟子云者。必有束修之事。
008_0329_c_08L豈可謂之賂乎。待命今四十九日也。欲
008_0329_c_09L叩閽而足趦趄。欲進言而口囁嚅。中心
008_0329_c_10L恐懼。不知進退之可否也。伏願閤下
008_0329_c_11L矜其愚而恕其罪。不念舊愆而相濟。則
008_0329_c_12L是閤下之情厚也。設若督過之意尙存
008_0329_c_13L則召而罪之。然後許之以成事。則亦閤
008_0329_c_14L下之情厚也。噫。淹留三朔。經過九秋
008_0329_c_15L囊空衲弊。懷想南遊者多矣。閤下倘垂
008_0329_c_16L慈恤。果許以成事。俾得優游於閤下曠
008_0329_c_17L度之中。則事了拂衣。長徃雲山。豈非
008_0329_c_18L閤下之賜耶。唯增惶悚。不知逃遁。故
008_0329_c_19L又敢以情義之說而獻焉。干冒尊嚴。死
008_0329_c_20L罪死罪。
008_0329_c_21L
008_0329_c_22L賜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行
008_0329_c_23L狀
008_0329_c_24L和上諱覺性。字澄圓。自號碧嵓。生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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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330_a_01L선세에 관직을 지낸 사람이 있었는데, 충청도에 좌천되어 왔다가 마침내 삼산에 자리를 잡았다.10세에 설묵 장로雪黙長老를 따라 출가하고 15세에 머리 깎고 보정 대덕寶晶大德 스님에게 구족계具足戒53)를 받았다.스님은 키가 작았으나 기상은 의젓하고 단정하였으며 외모는 수려하였다. 치아는 서른아홉 개, 눈빛이 강렬하여 사람들 모두 스님에게 공손하였다.어머니 조씨曺氏는 오래된 거울 하나가 떨어져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는데, 꿈을 깬 뒤 아이를 가져 만력萬曆 을해년(1575, 선조 8) 12월 23일에 스님을 낳았다.스님은 어릴 때부터 계율을 지키고 불경을 외우고 익히면서 그 의미를 남김없이 철저히 연구하였다. 당시 부휴 대사浮休大師가 속리산에서 불법을 널리 펼치고 있었다. 스님이 법기法器(불법을 깨우칠 만한 사람)라는 소문을 듣고 방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불법의 진수를 전하자, 동문수학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무술년(1598, 선조 31)에 부휴 대사가 가야산으로 옮겨 가자 스님도 따라갔다. 중국에서 온 장군 이종성李宗城이 명을 받아 일본의 풍신수길豊臣秀吉을 일본 국왕으로 봉하기 위해 내려가다가 해인사에 들렀을 때 스님의 뛰어난 골상骨相을 보고 부휴 대사에게, “백락伯樂의 마굿간에 있는 준마駿馬 중에 뛰어난 말이 많습니다. 선사(부휴)의 시자는 천리마라고 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송운 유정松雲惟政도 부휴 대사에게 서신을 보내어 후계자를 얻은 것을 축하하였다. 그 뒤 얼마 안 되어 부휴 대사가 지리산으로 갈 때에 스님이 역시 부휴 대사를 모시고 갔다. 어떤 관리가 부휴 대사를 방문하여 참선의 의미를 묻다가 제자들에게 각각 시를 짓게 하여 재주가 있는지의 여부를 시험하였다.당시에는 운곡 충휘雲谷冲徽ㆍ소요 태능逍遙太能ㆍ송월 응상松月應祥을 삼걸三傑이라고 불렀다. 모두 함께 그 자리에 있었는데 스님이 게송 첫 번째 구절을 가장 먼저 지었다.
簾前瘦影僧看月 주렴 앞의 여윈 그림자 스님이 달구경하는 것이요
窓外淸香鳥拂梅 창밖 싱그러운 향기는 새가 매화 가지 스친 것이라.
그러자 삼걸이 다 붓을 놓고 게송 짓기를 중단하였으며 관리도 칭찬하였다. 스님이 지은 시는 신선하고 기이하며, 나머지 시들도 모두 그와 같았다.스님은 또 삼분오전三墳五典(중국의 고전을 말함)에 뜻을 두어 유교와 도교 그리고 제자백가로부터 여러 가지 역사서와 패관잡기稗官雜記에 이르기까지 두루 읽어 보지 않은 책이 없었다. 또 초서와 예서를 잘 썼으며 필세筆勢가 힘차고 아름다워 서성書聖이라고 일컫는 왕우군王右軍(王羲之)의 필법을 갖추고 있었다. 이보다 앞서 부휴 대사의 모임에 어떤 승려가 병에 걸려 갑자기 사망하였다. 사람들은 모두 전염병이라 하여 꺼렸지마는 스님은 차의衩衣54)로 갈아입고 시체를 허리에 차고 웅덩이에 묻어 주었다. -
008_0330_a_01L山金氏。先世有簪組。左官于湖西。遂家
008_0330_a_02L三山。十歲隨雪默長老出家。十五薙髢
008_0330_a_03L受具於寶晶大德。爲人短矬。氣象嶷欝。
008_0330_a_04L顏容粹美。三十九齒。目光外射。人皆
008_0330_a_05L顒若。初母曺媼。夢一古鏡。墮入懷中。
008_0330_a_06L覺而有妊。以萬曆乙亥十二月丁亥誕
008_0330_a_07L師焉。師旣早從法戒。誦習經律。究其旨
008_0330_a_08L無蘊餘。時浮休大師。闡化於俗離。聞師
008_0330_a_09L爲法器。携入室。傳其髓。執筳者趨附。
008_0330_a_10L戊戌休移伽耶。師從之。天將李大人宗
008_0330_a_11L城。受命封倭。便道遊海印寺。覩師骨
008_0330_a_12L相魁偉。謂休曰。伯樂之厩多駿駒。禪
008_0330_a_13L師侍者。可謂驥之子也。松雲政大師。
008_0330_a_14L甞以書抵休。賀其得嗣。無何休赴頭流。
008_0330_a_15L師亦摳衣。有一宰官訪休。扣證禪旨。
008_0330_a_16L令門徒各賦偈句。試其才否。時雲谷
008_0330_a_17L冲徽。逍遙太能。松月應祥。號爲三傑。
008_0330_a_18L同在會中。師偈先成一聯云。簾前瘦影
008_0330_a_19L僧看月。窓外淸香鳥拂梅。三傑皆束杠
008_0330_a_20L而止。宰官歎美之。其詩尖新。大率類
008_0330_a_21L是。師又留意墳典。自二敎百家。以至
008_0330_a_22L諸史稗記。靡不遍閱。又善草隷。筆勢
008_0330_a_23L遵媚。有右軍法。先是休會下一僧。遘
008_0330_a_24L疫疾暴亡。人以傳染忌之。師改衩衣。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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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330_b_01L마침 밤이라 달빛도 없고 곰과 호랑이가 울부짖었지만 두려워하지 않았다.어느 날 스님은 부휴 대사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수국암壽國菴에 머물렀다. 돌덩어리마냥 꼼짝 않고 선정禪定에 들어가 온정신을 쏟아부었다. 열흘이 지나자 물새가 날아와 정수리의 솜을 물고 가고, 또 독사가 땅에서 나와 손가락 하나를 깨물었으나 상처가 나지 않았다.광해군 때에 부휴 대사가 어떤 미친 중의 무고誣告로 감옥에 가게 되었는데 스님도 또한 그 사건에 연루되었다. 감옥에 있더라도 느긋하게 지내며 동요하지 않자 법을 집행하는 관리가 ‘큰 부처님’, ‘작은 부처님’이라고 불렀다. 다음날 광해군이 궁궐에서 직접 심문하였는데, 두 스님의 도의 기운이 뛰어나고 언사言辭가 곧고 바른 것을 보고는 마음속으로 기이하게 여겼다. 결박을 풀고 한참 동안 질문을 주고받았다. 광해군이 매우 기뻐하면서 비단 가사 두 벌을 가져오게 하여 나누어 주고는 돌아가게 하자, 온 성의 사람들이 모두 달려왔으며 절을 하는 사람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부휴 대사가 세상을 떠나자 많은 사람들이 뒤를 잇기를 요청하였으나 스님은 겸손히 사양하였다. 많은 사람들의 뜻이 더욱 간절하였으므로 칠불암七佛菴에서 설법을 하였는데 뛰어난 스님들이 모여들었다.스님은 부휴 대사를 모시어 거의 30년 동안 공부하면서 직접 주방일을 하고 스승을 위해 수건을 드리고 발우를 들고 다니면서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다. 의문점이 있으면 질문을 해서 해답을 얻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스승의 학문을 전해 받고 임제종의 교리를 크게 떨쳤다.무오년(1618, 광해군 10) 가을에 신흥사神興寺로 옮기자 7백 명의 많은 사람이 자리를 메웠다. 스님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을 번거롭게 여겨서 밤에 달아나 태백산 전천동箭川洞으로 들어가 자취를 감추었다. 이듬해에 다시 오대산으로 자리를 옮겨 상원암上院菴에서 겨울 수행인 동안거冬安居를 하였다. 당시 광해군은 청계난야淸溪蘭若55)에서 재齋를 올리면서 궁중의 관리를 보내어 스님을 영접하여 설법을 하도록 하고 금란가사金襴袈裟와 벽수장삼碧繡長衫을 보냈다.인조 대왕仁祖大王이 왕위에 오른 이듬해인 갑자년(1624, 인조 2)에 조정에서 남한산에 성을 쌓을 때 스님을 불러 팔방도총섭八方都摠攝(전국 승려 총대장)으로 임명하였다. 공사를 마친 뒤에는 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라는 칭호를 하사하였다. 또 의발을 내리고 중사中使56)를 파견하여 술을 보내고 위로하였다. 스님이 무릎을 꿇어 절하고, -
008_0330_b_01L其屍。窆于礨嵌中。屬夜無月。熊虎嘷
008_0330_b_02L呶。未甞悸愳也。一日辭休。棲壽國菴。
008_0330_b_03L塊然入㝎。若承蜩者。浹旬日有澗鶂
008_0330_b_04L飛來。含將頂綿而去。又有毒虺從地出。
008_0330_b_05L噆一指無損傷。光海時。休爲狂僧所誣。
008_0330_b_06L拿至王獄。師亦坐是。雖在縲絏。怡然
008_0330_b_07L不撓。理官以大佛小佛稱之。翌日光海
008_0330_b_08L鞫治掖庭。目其道氣崚。言辭誙讜。
008_0330_b_09L心異之。解其纆繳。咨訪良久。光海甚
008_0330_b_10L歡。出錦襖二襲。分賜之令還。傾城駿奔。
008_0330_b_11L頂謁者無數。休入寂。衆請繼踵。師撝
008_0330_b_12L謙不居。衆志彌䔍。迺開堂於七佛蘭若
008_0330_b_13L玄侶臻萃。師從休入室者。殆三十載。
008_0330_b_14L自營厨務。凡所以執巾挈盂。不辭勞苦。
008_0330_b_15L有所疑曀。咨諏匪懈。旣傳秘印。大振
008_0330_b_16L臨濟宗旨。戊午秌。遷神興。衆盈七百。
008_0330_b_17L師煩於己事。宵遁。邁入太白山箭川洞。
008_0330_b_18L鞱光。越明年。轉入五臺山。結冬于上
008_0330_b_19L院菴。維時光海。設齋於淸溪蘭若。遣
008_0330_b_20L宮使。迓師說法。授金襴袈裟碧繡長衫。
008_0330_b_21L仁祖大王。踐祚之明年甲子。朝廷城南
008_0330_b_22L漢山。徵師爲八方都摠攝。役訖。賜報
008_0330_b_23L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號。又錫衣
008_0330_b_24L鉢。因遣中使。出內醞侑之。師膜拜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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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330_c_01L“빈도貧道는 불음계不飮戒를 지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임금님의 은덕이 넓고 크니 어찌 감히 한 잔 마시지 못하겠습니까?”라고 하자, 중사가 의롭게 여겼다.이때부터 공적과 덕행이 함께 드러나고 명성이 원근에 떨치게 되었다. 명성을 다투는 자들이 스님을 미워하여 비방을 일으켜서 사지死地로 스님을 몰려고 하였으나 스님은 성내는 기색이 없이 그 비방 받기를 냉이처럼 달게 여겼다.57)임신년(1632, 인조 10)에 화엄사華嚴寺를 수리하자 돈을 내는 사람들이 거리를 메웠으며 성대하게 총림叢林58)이 되었다. 병자호란 때는 의승義僧 3천 명을 모집하여 항마군降魔軍이라 부르고 스님은 승군 대장이 되었다. 호남의 관군官軍과 더불어 도와주는 형세를 이루어 정의를 외치면서 나라의 어려움을 도왔다. 인조는 소식을 듣고 가상하게 여겼다. 난리가 끝나자 지리산으로 돌아갔다.학자들의 의문과 논쟁을 기본으로 해서 『도중결의圖中決疑』와 『참상선지參商禪旨』 등의 글을 지었다. 논리를 세운 것이 매우 타당하고 이치를 분석함이 매우 적절하여 사람들의 공부에 자극을 준 것이 매우 많았다. 경진년(1640, 인조 18) 봄에 쌍계사로 거처를 옮기어 옛 체제를 보태기도 하고 새로이 만들기도 하였다. 8월에 재상 원두표元斗杓가 호남 안절사按節使로 부임하였다. 조정에 보고하여 스님에게 규정도총섭糾正都摠攝의 인수印綬를 내리고 적상산성赤裳山城에 머물게 하니, 스님들이 안렴사按廉使에게 하소연하여 스님은 송광사松廣寺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이듬해인 임오년(1642, 인조 20)에 스님은 해인사로 돌아왔으며 6월에 조정에서 스님을 불러 일본으로 가는 사신으로 넣자 스님은 말을 타고 서울로 가서 병이 있다고 하여 사신 행차를 면하게 되었다. 백운산白雲山으로 가서 상선암上仙庵에서 은거를 하였다.이듬해 스님은 보개산寶蓋山으로 가서 법회를 크게 열었다. 마침 관서 관찰사 구봉서具鳳瑞가 스님의 학식과 명성을 흠모하여 묘향산으로 맞아들였다. 효종 대왕孝宗大王이 왕세자로 있을 때 스님은 안릉安陵의 여관에서 인사를 하면서 화엄종의 핵심을 설명하였는데 효종(당시는 왕세자)이 크게 칭찬하였다. 나중에 왕위에 오르자 연성군延城君 이시방李時昉에게 “각성覺性 노선사는 별 탈이 없느냐?”라고 하면서 서너 차례 물었으니, 스님께서 효종에게 받은 은혜가 이와 같았다.병술년(1646, 인조 24) 가을에 속리산으로 가서 고한 희언孤閑熙彦 노사老師59)와 이웃해 살면서 왕래하였다. -
008_0330_c_01L貧道持不飮戒。豈甘醨哉。苐聖德泱泱。
008_0330_c_02L敢不一歃。中使義之。自是功德並著。
008_0330_c_03L聲振遐邇。爭名者疾詬。侜張興謗。欲
008_0330_c_04L置於死地。師無恚色。受訕如薺。壬申
008_0330_c_05L修葺華嚴寺。薦貨者塡衢。藹爲䕺林。
008_0330_c_06L丙子變。募義僧三千。號降魔軍。師爲
008_0330_c_07L僧大將。與湖南官軍。爲掎角之勢。仗
008_0330_c_08L義助援。仁祖聞而嘉之。兵罷還智異。
008_0330_c_09L因學者疑爭。述圖中決疑。叅商禪旨等
008_0330_c_10L語。立論甚當。析理尤的。其所以激揚
008_0330_c_11L者盖夥。庚辰春。移住雙溪精舍。增舊
008_0330_c_12L制而新之。八月相國元公斗杓。按節湖
008_0330_c_13L南。奏聞授師以紏正都摠攝印綬。俾住
008_0330_c_14L赤裳山城。緇徒訴干按廉。請移松廣寺
008_0330_c_15L爲敎魁。明年壬午。辭歸海印。厥六月
008_0330_c_16L朝廷徵師。充日本使价。師乘馹如京。
008_0330_c_17L謝病免。詣白雲山。隱居上仙菴。明年
008_0330_c_18L之寶盖山。大開法席。會關西觀察使具
008_0330_c_19L公鳳瑞。欽師道譽。迎入竗香山。孝宗
008_0330_c_20L大王。潜邸時。師謁於安陵逆旅。譚覈
008_0330_c_21L華嚴宗要。孝宗大加稱賞。及登寶位
008_0330_c_22L謂延城君李公時昉曰。性老今無恙否。
008_0330_c_23L問之數四。其綸恩又若是。丙戌秋。返
008_0330_c_24L笻於俗離。與孤閑熈彥老師。卜隣徜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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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331_a_01L희언 스님이 입적하자 스님은 화엄사에서 조용히 불법에 정진하면서 여생을 보냈다.스님은 한평생 동안 좌선을 열심히 하였으며 사람들을 가르침에 뛰어났다. 스님들이 불법 수행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요청하면 그들로 하여금 ‘무無’ 자를 깊이 연구하게 하였다. 담론談論에도 매우 뛰어나 사대부도 스님의 날카로운 말솜씨를 감당하지 못하였다. 스님은 사람을 대할 때는 공손하고 정성스러웠으며 교만하거나 방자한 일이 없었으며, 외롭고 곤궁한 이들을 도와주려고 노력하였다. 이시죽반二時粥飯60)하기 위해 찾아온 가난한 사람들이 문에 가득하였다. 까마귀나 솔개가 항상 따라다니므로 손수 음식을 주었다. 물고기 잡는 이나 사냥꾼을 보면 살생을 해서는 안 된다고 타이르니, 어망을 불태우고 참회하는 사람도 있었다.기해년(1659, 효종 10) 12월 경오일61)에 스님이 가벼운 병세를 보이다가 이듬해인 경자년(1660, 현종 원년) 1월 27일 새벽에 승려들을 불러 영원한 이별을 알리자, 승려들은 슬퍼 흐느끼면서 장실丈室로 모시고 들어가 게송을 청하였다. 스님은 불자拂子를 들고 휘두르면서 승려들을 멀찌감치 서 있도록 한 뒤에 게송 한 구절을 지었다.
拈頌三十篇 염송 삼십 편과
契經八萬偈 계경 팔만 게는
何須打葛滕 무엇하러 언어 문자로 분별하는가?
可笑多事在 일만 많이 벌여 가소롭구나.
그리고는 즉시 붓을 던지고 앉아서 열반하시니, 나이는 86세이고 하랍夏臘은 71년이었다. 길일을 택해 절의 동쪽 고개에서 다비를 하였는데, 장례식에 모여든 사람이 만여 명이나 되었다. 사리를 안치하는 의식과 제사에 올린 음식의 성대함은 예전에도 없었다. 화장하기 위해 불을 붙이자 세 갈래 흰 기운이 허공에 뻗치더니 서쪽으로 갔다. 조금 있더니 상서로운 바람이 갑자기 불어오고 숲은 모습이 변하더니 슬퍼서 우는 듯하였다. 삼 일이 지난 뒤에 제자들이 영골靈骨을 수습하였다. 향탕香湯으로 목욕시키는 간절한 정성으로 반야봉般若峯 금강굴金剛窟에서 기도를 올린 덕분이었다. 사리 세 알을 획득하였으니 모두 하얀색이었다. 이에 영골을 나누어 네 곳에 불탑을 세웠다. 지리산 화엄사, 조계산 송광사, 가야산 해인사, 속리산 법주사이다.고한 대사 행장孤閑大師行狀대사의 법휘는 희언熙彦, 속성은 이씨李氏, 본관은 명천明川이다. -
008_0331_a_01L旣彥遷化。師宴晦于華嚴寺。弄餘年
008_0331_a_02L師平生能苦坐。善誨人。衲子請益。令
008_0331_a_03L叅箇無字。談論甚口。士大夫無敢當
008_0331_a_04L其鋒者。待人恭勤。無驕佚傲放。事俵
008_0331_a_05L孤窮。二時粥飯。貧乞者盈門。烏鳶常
008_0331_a_06L隨。手中與食。見漁佃者。誥以殺戒。則
008_0331_a_07L至有焚網而懺謝者。至己亥十二月庚
008_0331_a_08L午。示微疾。越庚子一月。癸未昧爽。集
008_0331_a_09L衆告訣。衆哀噎擁。俠丈室。索伽陁。師
008_0331_a_10L拈拂揮令遠立。率爾題一偈曰。拈頌三
008_0331_a_11L十篇。契經八萬偈。何須打葛滕。可笑
008_0331_a_12L多事在。即擲筆而坐蛻。春秋八十六
008_0331_a_13L夏臘七十一。涓吉日。遂茶毗于寺之東
008_0331_a_14L嶺。會葬者萬餘。其喪龕之儀。奠羞之
008_0331_a_15L盛。古未之有。方下火。有白氣三道。亘
008_0331_a_16L空而西。俄而祥飊倐起。林麓變色。畏
008_0331_a_17L焦悲噪。越三日。門人收靈骨。以香湯
008_0331_a_18L薰沐之懇。禱于般若峯金剛窟。獲舍利
008_0331_a_19L三粒。皆白色。於是分靈骨。建方墳者
008_0331_a_20L凡四處。智異之華嚴。曺溪之松廣。伽
008_0331_a_21L耶之海印。俗離之法住云。
008_0331_a_22L
008_0331_a_23L孤閑大師行狀
008_0331_a_24L大師法諱熈彥。俗姓李氏。明川人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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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331_b_01L모친이, 인도 스님이 발우에 가사를 담아서 주는 꿈을 꾸었는데, 깨어나 아이를 가져 신유년(1561, 명종 16) 9월 임신일62)에 낳았다. 대사의 생김새는 얼굴은 길고 눈은 곧게 뻗었고 귀는 크고 코는 높았으며 기상은 뛰어났다. 머리를 깎은 뒤로는 경經과 율律을 정미하게 연구했으나 자신의 본분사를 밝히지 못하여 경전을 버리고 사방을 돌아다니다 덕유산의 부휴 대사浮休大師를 찾아뵈었다. 법성원융法性圓融63)의 뜻을 묻다가 인연이 있어서인지 마침내 3년 동안 모셨다. 밥하고 빨래하는 천한 일부터 의문점을 물어보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수행하고 남는 힘으로는 참선과 역대 조사들이 남긴 어록의 의미를 질문하면서 의미를 철저히 알려고 하였으며, ‘고한 도인孤閑道人’이라고 호를 지었다.대사는 평생에 맛있는 음식을 먹지 않고 좋은 옷도 입지 않았다. 한 벌 누더기 옷도 역시 세탁을 하지 않았다. 눈 속에서도 맨발로 다녔으며 머리카락이 길어 한 치가 넘도록 깎지 않았다. 간혹 음식을 먹지 않았는데 열흘이나 한 달이 되어도 굶주린 기색 없이 정력적으로 좌선을 하느라 더욱 노력하였다.우연히 서울에 유람 왔다가 돈의문을 지나는 중에 10여 명의 악동을 만났다. 악동들은 대사를 둘러싸고 모욕을 주었다.“너는 도를 구하는 중이냐, 너는 밥을 구걸하는 중이냐?”라고 하면서, 즉시 대사를 끌고 가서 모래를 파고 묻어 버리려 하였다. 마침 불교를 믿는 신도가 있어서 달려가 대사를 구해 주었다. 대사가 일어나서 성내는 기색이 없이 합장하고 말하기를, “성불하시오, 성불하시오.”라고 말하니, 악동들은 서로 돌아보고 웃으면서 “진실로 도를 구하는 중이다.”라고 하였다.대사는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대사는 합장하고 절하면서 “가시오, 가시오!”라고 하였다. 그래도 계속 따라와 곁에 앉으면 지팡이로 쫓아내면서 말하기를, “쯧쯧! 어리석은 사람이로다. 대머리 거사인 나에게 무슨 기특한 점을 보려고 한단 말인가?”라고 하면서, 문을 닫고 정좌하는 것이었다.잘 차린 음식을 바치면 “나는 남에게 공양 받을 만한 덕이 없다.”라고 하였다. 또 큰스님이라고 추대하면 “나는 진리 수행에 있어서 남에게 존경을 받을 만한 행이 없다.”라고 말하면서 모두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언젠가는 파리한 몸에 때가 더덕더덕 낀 얼굴로 산기슭을 산보하고 있을 때 불교에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초학자가 시골 농부인 줄 잘못 알고서 읍揖을 하면서 “희언 대사는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물었다. 대사는 옷소매를 걷고 겸손히 “어떤 사람인지 모릅니다.”라고 하였다. -
008_0331_b_01L母夢梵僧。鉢坏中盛袈裟而授之。覺而
008_0331_b_02L有孕。以辛酉九月壬申生。爲人面長目
008_0331_b_03L直耳大鼻隆。志氣不羣。自落髮。精經
008_0331_b_04L律。以己事未明。棄去遊方。謁浮休大
008_0331_b_05L師於德裕。詰以法性圓融之義。忽有契
008_0331_b_06L緣。遂執侍三年。自供厮役。扣質匪懈。
008_0331_b_07L行道餘力。問決叅禪語錄之類。窮其旨
008_0331_b_08L趣。號孤閑道人。師平生。食不美膳。衣
008_0331_b_09L不鮮布。一衲衣。亦不濯浣。雪裡赤脚
008_0331_b_10L跳跣而行。髮長寸强。更不再剃。或廢
008_0331_b_11L飮啜者。涉旬朔無餒態。力坐愈勤。偶
008_0331_b_12L遊京洛。過敦義門。遇惡少十餘軰。繞
008_0331_b_13L師而詬曰。汝是訪道僧。汝是乞飯僧。
008_0331_b_14L即將師掘沙埋之。適有信士奔救。師起
008_0331_b_15L立。無慍容而叉手曰。成佛成佛。惡少
008_0331_b_16L相顧眄而笑曰。眞訪道僧也。即尤不喜
008_0331_b_17L逢迎。人有逐臭而至。輒合掌拜。曰去
008_0331_b_18L去。若戾而從坐。則以杖趂出。曰咄。獃
008_0331_b_19L漢見我秃居士。有甚奇特。即閇戶而坐。
008_0331_b_20L有以大饌進之者。則曰吾於人無應供
008_0331_b_21L之德。有以大僧推之者。則曰吾於道
008_0331_b_22L無受敬之行。並謝不受。有時羸形垢面
008_0331_b_23L散步崖逕。願學者初叅。昧以野叟。揖
008_0331_b_24L之曰。彥大師何在。師攘袂而遜曰。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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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331_c_01L그렇기는 하지만 간절한 정성으로 도움을 주기를 요청하면 법성원융의 의미를 정성껏 가르쳐 핵심적인 의미를 깨우치는 사람도 있었다.만력萬曆 임술년(1622, 광해군 14), 대사의 나이 60여 세 때, 나라에서는 청계사淸溪寺에서 재齋를 지내기로 하고 대사를 증사證師(법회를 증명할 임무를 맡은 법사)로 청하고 금란가사를 내려 주었다. 재가 끝나자 대사는 금란가사를 벗어 두고 몰래 떠나 버리니 재에 참가하였던 조정의 관리들은 대사를 높이 평가했다.임오년(1642, 인조 20)에 대사는 대구 팔공산에 있었다. 벽암 대사碧嵓大師(1575∼1660)가 조정의 명령을 받고 대궐로 가는 도중에 길을 돌아 대사를 찾아가 인사를 올렸는데 서로 의기투합함이 마치 형제와 같았다고 하였다. 얼마 안 있어 대사는 가야산으로 옮겨 갔다. 나이 80여 세에 잡목을 헤쳐 초막을 짓고 작은 집에 만족하면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때 벽암 대사가 묘향산에서 대사를 만나러 왔는데 두 사람은 재회를 매우 기뻐하였다.이듬해 병술년(1646, 인조 24) 가을에 벽암 대사가 청을 받아 속리산으로 가게 되자 대사는 허둥거리면서 나와 “형께서 지금 나를 버리고 가시면 저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라고 하면서 두 사람은 함께 속리산으로 갔다. 승려와 속인이 길을 메우고 서로 번갈아 찾아와 인사를 올리는 사람이 셀 수도 없었다.정해년(1647, 인조 25) 11월 13일에 제자 각원覺圓을 불러, “여섯 가지 맛과 여덟 가지 음식으로 이 더러운 몸을 봉양하더라도 끝내는 반드시 소멸한다. 위험하고 약한 이 몸이 어떻게 오래 가겠는가? 나는 영원히 떠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달 22일에 다시 각원을 불러 깨끗한 물을 가져오게 하고서 몸을 씻고는 괴로운 듯 절규하면서, “부질없이 세상에 와서 지옥의 찌꺼기만 되고 말았다. 내 시체는 숲 속에 버려서 새와 짐승의 밥이 되게 하여라.”라고 하였다.말을 마치자 기분 좋게 눕더니만 세상을 떠났으니, 세상 나이는 88세요, 스님 나이는 72세이다. 유언에 따라 바위 사이에 장례를 치렀는데 스님과 속인들이 정성을 바쳤다. 남긴 유언을 어기고 화장을 하였다. 화장을 하려는 새벽에 안장한 자리를 멀리서 바라보니 연기와 불꽃이 공중에 가득하였다. 대중들은 불이 났다고 생각하고 달려가 보았지만, 그 자리는 그대로이고 불도 없었다. 사람들이 모두 놀라워하면서 삼매진화三昧眞火로 의심하면서도 불을 붙였다. 불꽃이 확확 올라오자 회오리바람이 휙 하니 일더니만 숲 속의 삼나무며 향나무 등의 빛깔이 변하였다. 재가 남게 되자 정수리 뼈에서 나온 둥근 구슬이 소나무 가지에 높이 걸렸다. 그 절의 중 천호天浩가 얻은 것은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
008_0331_c_01L不識是何人邪。雖然請益勤欵。亦有時
008_0331_c_02L提誨庇庥以法性圓融之義。蒙指歸者
008_0331_c_03L有焉。萬曆壬戌。師年六十餘。國家設
008_0331_c_04L齋於淸溪寺。請師爲證。授以金襴袈裟。
008_0331_c_05L齋畢。師釋袈遁去。王使高之。壬午歲
008_0331_c_06L師居八公。碧嵒大師。以朝命赴闕。枉
008_0331_c_07L道造拜。相得如兄弟云。無何。師移伽
008_0331_c_08L耶。年八十餘披榛結幕。容膝而憇焉。
008_0331_c_09L碧嵒自香峯亦會師。欣其再遇。明年丙
008_0331_c_10L戌秋。碧嵒赴離岳之請。師踉蹡而出曰。
008_0331_c_11L兄今捨我。我安適哉。偕詣離岳。黑白
008_0331_c_12L塞路。迭來頂謁者無數。至丁亥十一月
008_0331_c_13L十三日。詔門人覺圓曰。雖六味八珎
008_0331_c_14L養此穢軀。終必有滅。危脆此身。安取
008_0331_c_15L久長。吾將逝矣。至其月二十二日。復
008_0331_c_16L詔覺圓曰。取淨水來。洗沐已。呌苦曰。
008_0331_c_17L空來世上。特作地獄滓矣。命布骸林麓
008_0331_c_18L以飼鳥獸。言訖憨臥而逝。閱世八十八。
008_0331_c_19L坐夏七十二。禀遺囑。窆于石間。道俗
008_0331_c_20L獻悃。違敎闍維。將茶毗之晨。遙望窀
008_0331_c_21L穸。烟熖漲空。衆意放火。徃覘之。依舊
008_0331_c_22L無火。衆皆驚愕。疑其三昧火也。於是
008_0331_c_23L衆相與放火。方熾而旋風歘起。杉栝變
008_0331_c_24L色。旣燼而頂骨珠圓。超掛松梢。寺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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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332_a_01L사리를 나누었으며 팔공산에는 무덤을 만들고 해인사에는 부도를 세웠다. 그 일은 그 제자 각원과 개사開士 혜원惠遠이 주관하였다. 이듬해 봄에 또 속리산에 부도를 세웠다.「홍각 등계弘覺登階의 비명과 서문」을 추가함임제臨濟 후 24세世에 적손嫡孫이 되는 부휴浮休(1543∼1615)가 있다. 부휴는 호이고 법명은 선수善修이다. 속성은 김씨金氏로 남원南原의 오수獒樹 출신이다.아버지는 적산積山이다. 조상들은 신라의 큰 가문이었는데 신라가 망하자 집안이 몰락하여 서민이 되었다.처음에 어머니 이씨가 아이를 갖지 못하여 고민하였다. 아들을 낳으면 출가시키겠다고 맹세를 하고서 길가 오래된 바위에서 기도를 드렸는데 열흘이 지나도 쉬지를 않았다.어느 날 저녁에 눈을 감고 있는 사이에 어떤 신승神僧이 둥근 구슬 하나를 건네주었다. 구슬을 삼킨 뒤에 아기를 가졌고 계묘년(1543, 중종 38) 2월 14일에 태어났다. 어릴 때에 어머니가 고기를 먹이면 즐거워하지 않았다. 억지로 달래어 먹이면 약간의 말린 생선만 먹고 기름진 고기는 입에 대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부모에게 “뜬구름 같은 인생이 부질없이 흘러가니 나는 출가하겠습니다.”라고 하고서는 작별 인사를 하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신명 장로信明長老에게 머리를 깎고, 부용 대사芙蓉大師를 뵙고는 대사가 남긴 불법의 진수를 모두 터득하였다.대사의 모습은 배가 불뚝하고 눈썹은 길며 키는 크고 볼은 두툼하였으며 다만 왼손을 잘 쓰지 못했다. 불법을 터득한 뒤에는 재상 노수신盧守愼 집의 장서藏書를 빌려 7년 동안에 읽지 않은 책이 없었다. 글씨도 또한 힘차고 아름다워 위魏의 종요鍾繇, 진晉의 왕희지王羲之 서법을 본받았다. 송운 유정松雲惟政과 함께 명성을 날려 당시 이난二難64)이라고 불렀다.제자 한 명이 대사의 글씨 몇 자를 받아 들고 도성을 지나다가 글씨에 뛰어난 중국 사람을 만난 적이 있었다. 대사의 글씨를 내보였더니 오랫동안 눈길을 주면서 “필법이 정밀하고 힘차니 옛날 사람도 쉽사리 터득할 수 없다. 그렇지만 점획을 보니 반드시 손을 다친 도인이 쓴 것이다.”라고 하였다.선조宣朝 임진년(1592, 선조 25)에 -
008_0332_a_01L天浩得之。有緣故也。分靈骨。墳於八
008_0332_a_02L公。塔於伽耶。弟子覺圓。開士惠遠主
008_0332_a_03L焉。越明年春。又建層冡于離岳云。
008_0332_a_04L
008_0332_a_05L追加弘覺登階碑銘并序
008_0332_a_06L臨濟後二十四世。有嫡孫曰浮休。浮休
008_0332_a_07L號也。法名善修。俗姓金氏。古帶方獒
008_0332_a_08L樹人也。父積山。先世爲新羅大姓。羅
008_0332_a_09L亡。遂沒家爲庶。初母李。悶無胚胎。相
008_0332_a_10L誓言生子。當捨出家。即禱于路傍古石
008_0332_a_11L無竭。彌旬不怠。一夕合眼間。有神僧
008_0332_a_12L授一圓珠。呑之有妊。以癸卯二月戊子
008_0332_a_13L生焉。孩提時。母飼肉。輙不喜。戾侑則
008_0332_a_14L蹔唼鮝䱜之薄脊。不膟膋之膏腴。丱
008_0332_a_15L歲啓父母曰。浮生滾冗。吾將出世。辭
008_0332_a_16L入頭流山。從信明長老髠㔆。謁芙蓉大
008_0332_a_17L師。盡得笆籬邊物。爲人皤腹脩眉長身
008_0332_a_18L豊頰。惟左手失適。得法之後。借盧相
008_0332_a_19L國守愼家藏書。七閱寒暑。書無所不讀。
008_0332_a_20L筆亦遒媚。效鍾王法。與松雲政公齊名。
008_0332_a_21L時號二難。甞會下一衲。索師書數字。
008_0332_a_22L撩過王都。遇漢人能書者。出示之。注
008_0332_a_23L目久之曰。筆精健在。古不易得。雖然
008_0332_a_24L點畫必手瘢。道人所揮也。宣廟壬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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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332_b_01L섬 오랑캐인 왜구가 우리 강산을 침범하여 산야山野를 크게 짓밟았다. 당시 대사는 덕유산에 있었다. 계곡으로 몸을 숨기고 왜적들의 칼날을 피하였다. 해가 저물자 왜적이 이미 지나갔다고 생각하여 계곡 길을 따라 암자로 돌아오는데 왜적 수십 명이 숲 속에서 나왔다. 대사가 손을 모아 예를 표시하고 서 있으니 왜적들은 칼을 휘두를 기세를 취하였다. 대사가 태연하게 움직이지 않으니 왜적들은 매우 기이하게 여겨 모두 늘어서서 절하고 흩어졌다.난리가 평정된 뒤에 대사는 가야산으로 갔다. 마침 중국에서 우리나라를 도우러 온 장군 이종성李宗城이 중국 황제의 명을 받고 관백關白을 봉封하려고 가던 길65)에 중간에 해인사를 들렀다. 대사를 한번 만나 보고는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절에 머물면서 며칠 동안 대사와 대화를 나누었는데 화락한 모습이었다. 헤어질 때 이종성은 시 한 편을 주면서 천 리 멀리 떨어져 있지만 항상 얼굴을 보는 듯이 지내리라고 기약하였다.얼마 안 있어 대사는 다시 구천동으로 옮겨 조용히 불법에 정진하였다. 어느 날은 눈을 감고 『원각경圓覺經』을 외웠다. 외우기를 다 끝내기 전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는 듯하였다. 눈을 떠 보니 큰 구렁이 한 마리가 섬돌 아래 누워 있었다. 대사는 외우기를 그치고 한 발을 들어 그 구렁이의 꼬리를 밟았다. 구렁이는 머리를 숙이고 굼틀거리다가 달아났는데 쫓아갔으나 보이지 않았다. 그날 밤 꿈에 노인이 대사에게 절을 하고 “스님의 설법에 힘입어 이미 고통을 떠났습니다.”라고 하였으니, 대사의 신이함이 대개 이와 같았다.광해군 때에 대사가 두류산에 머물고 있었을 때 미친 중의 모함을 입어 옥에 갇혔다. 사건을 조사하던 관리는 대사의 기개와 도량이 당당하고 말이 유창한 것을 보고 광해군에게 보고하였다. 광해군은 대사가 죄가 없음을 환하게 알았다. 다음날 아침에 대궐 안으로 불러 도의 요점을 물어보고는 매우 기뻐하였다. 자란방포紫襴方袍 한 벌, 벽릉장삼碧綾長衫 한 벌, 녹기중유綠綺重襦 한 벌과 금강수주金剛數珠 한 개, 또 그 밖의 진귀한 보배를 넉넉하게 내렸는데 모두 다 기록할 수 없다.그리고 또 봉인사奉印寺에 재를 열 때 대사를 법회를 증명하는 증사로 삼아 파견하였다. 궁중의 준마 한 필을 내어 대사를 태우고 호위병들로 하여금 앞길을 인도하도록 하였다. 도성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달려와 절을 하고 남보다 뒤처짐을 부끄럽게 여겼다.재를 마치고 대사가 돌아올 때에는 승려와 속인들이 앞을 다투어 번갈아 가마를 메고 돌아왔다. 대사의 한평생 쌓은 높은 덕이 사방에 멀리 퍼지자 재물을 바치는 사람이 그치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들어오는 대로 나누어 주고 한 물건도 쌓아 두지 않았다. -
008_0332_b_01L島夷侵彊。大鞣山野。師時棲德裕。隱身
008_0332_b_02L谼礐中避鋒。日晩慮賊已過。緣澗路還
008_0332_b_03L菴。有倭十數軰。從林麓出。師叉手而立。
008_0332_b_04L賊作揮刃勢。師怡然不動。賊大奇之
008_0332_b_05L皆羅拜而散。賊平。師如伽耶。屬天將李
008_0332_b_06L大人宗城。受皇帝命。來封關白。間途
008_0332_b_07L入海印寺。一見師。輒忘歸。留語數日
008_0332_b_08L偘偘如也。臨別贈詩一章。期爲千里
008_0332_b_09L面目。無何。師移九千洞宴晦。一日瞑目。
008_0332_b_10L誦圓覺經。讀未及終。似有聲。開
008_0332_b_11L目示之。有一巨蟒。偃暴階除下。師輟
008_0332_b_12L誦。跂一足。㚄其尾。蠎俛首。蚴蟉而去。
008_0332_b_13L追之不見。其夜夢。翁致拜曰。蒙和尙
008_0332_b_14L說法。已離苦矣。其神異皆此類。光海
008_0332_b_15L時。師住頭流。爲狂僧所誣。拿繫獄。理
008_0332_b_16L官覿其氣宇軒輕。言說璀璨。以白光海。
008_0332_b_17L光海洞其非罪。翌明召入內。詢問道要
008_0332_b_18L大悅。賜紫襴方袍一領。碧綾長衫一袗。
008_0332_b_19L綠綺重襦一襲。金剛數珠一串。其餘珎
008_0332_b_20L玩厚賚。迨不可記。即又設齋於奉印寺。
008_0332_b_21L遣師爲證。鞴出內騕褭一匹。俾騎而使
008_0332_b_22L圍人前導之。都人望風趍拜。恥居後。齋
008_0332_b_23L畢師辭還。道俗爭先。遆夫輿歸。師平
008_0332_b_24L生峻德四遠。獻貨者轠轤。隨即散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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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332_c_01L기량은 침착하고 굳세며 깊고 또 넓어 잴 수가 없었다. 인연 있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모여들어 문도들이 7백 명이나 되었다.만력萬曆 갑인년(1614, 광해군 6), 대사의 나이 72세 되던 해에 조계산 송광사에서 지리산 칠불암七佛菴으로 갔는데 임종이 다가왔음을(啓手足66)) 알아차렸다. 이듬해 가을 7월에 가벼운 질병 증세를 보이자 수제자 벽암 대사碧嵓大師를 불러 부촉하면서, “내 뜻은 그대에게 있다. 그대는 공경히 실천하라.”라고 하였다. 11월 초하루, 해가 질 때쯤에 목욕을 마쳤다. 시자侍者를 불러 종이와 붓을 가져오라 하여 게송 한 구절을 썼다.
七十三年遊幻海 73년 동안 환해幻海에서 놀았는데
今朝脫殼返初源 오늘 아침 껍질을 벗고 태초의 근원으로 돌아가네.
廓然空寂元無物 텅 빈 공적空寂이라 원래 아무 물건도 없으니
何有菩提生死根 깨달음과 생사의 근본이 어디 있으랴.
게송을 마치고 담담히 세상을 떠나니, 세상 나이는 73세, 스님으로 산 햇수 57세였다. 제자들이 다비하고 사리를 거두어 네 곳에 부도를 세웠으니, 해인사ㆍ송광사ㆍ칠불암ㆍ백장사百丈寺이다. 5년 후에 광해군이 ‘홍각등계弘覺登階’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臨濟廾四有嫡統 임제臨濟 24대에 적통이 있으니
龍生龍兮鳳生鳳 용이 용을 낳고 봉황이 봉황을 낳은 것이다.
石像抱送不齰爒 석상石像을 안아 보내면서도 악착하지 않으며
身不僬僥書亦誦 몸도 장대하지만 글도 또한 잘 외운다.
挈手揮毫何技癢 손 들어 붓을 휘두를 때 얼마나 재주 뛰어난가?
秋蛇春蚓互引控 가을 뱀과 봄 지렁이가 서로 잡아당긴다.67)
海獠敽干鋥劔光 바다 오랑캐가 침범해 와서 칼을 휘둘렀으나
視若蛜蝛心無恐 하찮은 벌레처럼 보고 두려움이 없었다.
天將東來破賊艘 중국 장군이 동쪽으로 와서 왜적의 배 부수러 갈 때
爲師踟蹰乍停鞚 대사 때문에 잠깐 말을 멈추고 지체했었다.68)
閇目暗哄修多羅 눈을 감고 불경을 외울 때에
虺自何心忝待從 구렁이는 무슨 마음으로 시중을 들었나?
狂狼麽僧謬訴訐 미친 중이 없는 죄를 지어서 참소할 때에
南冠誰也氣屢霜 옥에 갇혔어도 기상은 가을 서리 같았다.
君王對諶笑辴然 군왕君王은 진실한 마음으로 대하고 웃음을 띠면서
勑賜珎奇禮頗重 진기한 보물을 내려 주며 예禮가 자못 두터웠다.
婕妤嬪嬙親鼎爼 아리따운 모든 궁녀들이 손수 음식 장만할 때에
妙味絶勝噉蘆䎫 맛이 뛰어났으나 노창蘆䎫69)을 먹었다.
機盡翩然隻履逝 인연 다해 홀홀히 한 짝 신발 남겨 두고 떠났고70)
傳衣付法留偈頌 의발을 전하고 불법을 맡기면서 게송을 남겼다.
百級四建窣屠波 우뚝 높이 네 개의 부도를 세우니
嗚呼哀贈眞一夢 오호 슬프다, 참으로 인생은 한바탕 꿈이었네. -
008_0332_c_01L不㣥一物。器量沉毅滉瀁。不可與。
008_0332_c_02L毳徒有緣。憧憧坌集。衆盈七百。萬曆
008_0332_c_03L甲寅。師年七十二。自曺溪之松廣。之
008_0332_c_04L方丈。之七佛。擬啓手足。翌年秋七月
008_0332_c_05L示微疾。召上足碧嵒大師。付法曰。吾
008_0332_c_06L意在汝。汝欽哉。至十一月初一日。日
008_0332_c_07L纔中晡。沐浴訖。喚侍者。索紙筆。書一
008_0332_c_08L偈曰。七十三年遊幻海。今朝脫殼返初
008_0332_c_09L源。廓然空寂元無物。何有菩提生死根。
008_0332_c_10L偈畢。泊然而逝。報年七十三。坐夏五十
008_0332_c_11L七。門人闍維。收靈骨。樹浮屠。凡四處
008_0332_c_12L海印松廣七佛百丈也。後五年。光海追
008_0332_c_13L加弘覺登階。銘曰。
008_0332_c_14L臨濟廾四有嫡統。龍生龍兮鳳生鳳。
008_0332_c_15L石像抱送不齰爒。身不僬僥書亦誦。
008_0332_c_16L挈手揮毫何技癢。秋蛇春蚓互引控。
008_0332_c_17L海獠敽干鋥劔光。視若蛜蝛心無恐。
008_0332_c_18L天將東來破賊艘。爲師踟蹰乍停鞚。
008_0332_c_19L閇目暗哄修多羅。虺自何心忝侍從。
008_0332_c_20L狂狼麽僧謬訴訐。南冠誰也氣屢霜。
008_0332_c_21L君王對諶笑辴然。勑賜珎奇禮頗重。
008_0332_c_22L婕妤嬪嬙親鼎爼。妙味絶勝噉蘆䎫。
008_0332_c_23L機盡翩然隻履逝。傳衣付法留偈頌。
008_0332_c_24L百級四建窣屠波。嗚呼哀贈眞一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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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333_a_01L향림사 사적비명香林寺事蹟碑銘삼가 『예기禮記』를 조사해 보니, 「유행儒行」편에서 “천자天子에게 신하 노릇을 하지 않고 제후를 섬기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니 유가儒家의 규범도 이와 같은 것이 있다. 하물며 세속에서 벗어나 고상한 행동을 하는 스님들이 어찌 이해利害에 구속받고 영고榮枯에 얽매여 그 마음을 졸이면서 그 도를 잊을 수 있겠는가?두타頭陀71) 명의明義 스님은 임주林州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도를 배우다가 금강산에서 제월霽月 대사를 뵈옵고는 부엌일과 청소를 열심히 하였다. 쌀밥을 먹지 않고 술을 마시지 않으며 도토리를 먹고 물만 마시면서 10여 년을 지냈다. 천계天啓 경오년(1630, 인조 8)에 홀연히 인간의 참된 근원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몸을 돌려 가림嘉林의 성흥산聖興山(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으로 들어갔다. 그 산에는 절이 있었는데 향림사香林寺라 하였다. 오래되어 좁아서 지내기가 불편하였다. 새로 절을 지으려고 계획을 세울 즈음에 절 옆 남쪽 터에서 마침 종과 경쇠 소리가 여러 날 밤 계속해서 우렁차게 퍼졌다. 명의 스님은 그쪽으로 즉시 가서 그 터를 보고 방위를 분명히 하였다. 산을 깎고 바위를 부수고 나무를 베고 우거진 풀을 없애고서 우뚝 높이 선 절을 지었다. 새로 지은 전각殿閣의 규모와 크기는 예전보다 갑절이나 웅장하여 총림叢林이 되었다. 그리고 또 제월 스님의 초상화를 그려 별당別堂에 모시고 향불을 올렸으니 모두 다 명의 스님이 노력하였기 때문이다.47년이 지난 병진년(1676, 숙종 2)에 근사남近事男(우바새, 남자 신도) 임운林芸이 명의 스님의 공덕을 흠모하여 아름다운 옥돌에 새기고자 하였다. 옥돌이 준비되니 조영祖瑛 대사가 강을 건너왔다. 그 절에 사는 스님들과 의견을 모아서 나에게 그 명문銘文을 써 달라고 요청하였다. 조영 스님은 나의 제자이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응낙하여 이 글을 쓰게 되었다.불제자 명의 스님은 그 사람됨이 아름답다. 마음은 시끄러움을 멀리하였고, 육신은 더러움이 없었다. 표주박으로 물을 마시고 이틀에 한 번 음식을 먹었으며 스승을 섬기되 게으르지 않았다. 그가 도를 좋아하는 마음은 참으로 부지런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근원으로 돌아가고자 하여 또 절을 창건하였다. 흙을 나르고 기초를 다지고 목재를 수레로 옮겨 와 절집을 지었다.그렇게 하여 청정한 보계寶界는 -
008_0333_a_01L香林寺事跡碑銘
008_0333_a_02L謹按禮記儒行曰。不臣天子。不事諸
008_0333_a_03L侯。其䂓爲有如此者。况出世高蹤。豈
008_0333_a_04L局促於利害。牴牾於榮枯。穧其心而忘
008_0333_a_05L其道哉。故頭陁明義比丘。林州人。早
008_0333_a_06L歲學道。叅謁霽月大師於金剛。執勞鼎
008_0333_a_07L鼏。服勤苕菷。食不秆穫。飮不醡釀。嚃
008_0333_a_08L橡柶而歃瓽甃者。十餘稔矣。至天啓庚
008_0333_a_09L午歲。忽憶還源。返身于嘉林之聖興山
008_0333_a_10L山有招提。名曰香林。古制隘陋。有妨容。
008_0333_a_11L方謀新卜之際。寺傍午地。適有鍾磬之
008_0333_a_12L聲。隆隆數夜。義即其處。視址而辨方。
008_0333_a_13L剷嶬刲嵒。誅林斬莽。結搆嵬峩。其殿
008_0333_a_14L閣之欀楣。門閎之棖闑。比舊倍簁。藹
008_0333_a_15L爲叢林。而且畫霽月之眞影。安于別堂。
008_0333_a_16L以奉香火。皆義之用力也。越四十七年
008_0333_a_17L丙辰歲。近事男林芸。慕義之功。將鐫
008_0333_a_18L琬琰之文石旣具。大師祖瑛。渡江來。致
008_0333_a_19L其合寺僧之語。乞銘於余。瑛。吾徒也。
008_0333_a_20L余應無難色。而叙之曰。頭陁義公。其
008_0333_a_21L爲人美哉。志絕囂譁。身無汚衊。單巹
008_0333_a_22L而飮。併日而食。事師不倦。其好道之
008_0333_a_23L心。可謂勤矣。曁其還源也。又剏伽籃
008_0333_a_24L挶土而峻基。轝材而建宇。淸淨寶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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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333_b_01L원숭이들의 터전과 사슴들의 마당이 되는 신세를 겨우 면하게 되었다. 그의 공로와 수고가 이와 같다. 어찌 천자의 신하 노릇을 하지 않고 제후를 섬기지 않으면서 그 자신의 뜻만 고상히 여겼을 뿐이겠는가? 또 청신사淸信士 임운은 비석을 세워 불후의 아름다운 공적을 전하려 한다. 역시 현자를 앙모하는 사람이 아닌가? 이것이 소위 (『예기禮記』 「단궁檀弓」에서) “누에가 베를 짜니 게는 광주리가 있고, 벌이 갓을 쓰니 매미는 갓끈이 있다.”라고 한 것이다. 어찌 높고 높은 뜻을 가졌음이 아니겠는가?아아, 하찮은 내가 이런 성대한 일을 논평함은 참으로 잘못임을 안다. 그러나 파리는 천리마를 타고 멀리 갈 수 있으며, 메추리는 붕새를 비웃으면서 날기를 겨룬다. 내 재주가 미치지 못함을 다시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리하여 명銘을 지으니 내용은 아래와 같다.
嗚呼義也 아아, 명의 스님!
世皆以爲濁子無纍也 세상이 다 혼탁하지만 그대는 얽매이지 않았다.
利名以樂子獨避也 모두가 이익과 명예를 좋아하지만 그대는 홀로 피하였다.
霽月之嫡瑚璉器也 제월 스님의 적통으로 호련瑚璉72) 같은 그릇이다.
還源大有作香林寺也 근원으로 돌아가고자 큰일 했으니 바로 향림사 지은 일이다.
觚稜造極古莫之比也 아름다운 건물은 최고 경지라 옛 건물은 비교되지 않는다.
信士樹石亦盛事也 청신사가 비석을 세움도 역시 성대한 일이로다.
我銘以刻之後來者之視也 내가 명문을 지어 돌에 새기나니, 뒤에 오는 사람들은 보라.
정헌대부 팔도도총섭 겸 승대장 회은 장로 비명正憲大夫八道都摠攝兼僧大將悔隱長老碑銘현종顯宗 즉위 13년(1672) 봄 3월 15일에,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 회은悔隱(1587∼1672) 스님이 성부산星浮山 천주봉天柱峰 밑에서 나이가 들어 세상을 떠났다. 세상 나이는 86세, 스님 나이는 71세이다. 스님의 자는 응준應俊, 속성은 기씨奇氏, 남원南原 출신으로, 회은은 그의 호이다.처음에 기씨는 아들이 없었다. 어머니 윤씨尹氏가 지리산 칠성당七星堂에서 기도하였더니, 이상한 광채가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회은 장로를 회임하였다. 장로는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옥섬玉暹 노스님에게서 머리를 깎았다. 그 뒤에 소요逍遙ㆍ호연浩然ㆍ벽암碧嵓 등 여러 큰 종장宗匠에게 나아가 모두 제자의 예를 올렸다. -
008_0333_b_01L厪免爲猿獶之所曁。麀鹿之攸畽。其功
008_0333_b_02L且勞。有如此者。豈特不臣天子。不事
008_0333_b_03L諸侯。高尙其志而已哉。信士林芸。又
008_0333_b_04L將樹石。垂厥不朽之嘉績。抑希顏之徒。
008_0333_b_05L歟。是所謂蠶則績而蠏有匡。范則冠而
008_0333_b_06L蟬有緌者也。豈非嶷嶷然有志哉。噫
008_0333_b_07L余以藐末。評玆盛德之事。固知左矣。
008_0333_b_08L然蠅攀驥而致遠。鷃咲鵬而爭飛。才之
008_0333_b_09L不及。復奚論焉。遂爲之銘詞曰。
008_0333_b_10L嗚呼義也。世皆以爲濁。子無纍也。利名
008_0333_b_11L以樂子獨避也。霽月之嫡。瑚璉器也。
008_0333_b_12L還源大有。作香林寺也。觚稜造極。古莫
008_0333_b_13L之比也。信士樹石。亦盛事也。我銘以
008_0333_b_14L刻之。後來者之視也。
008_0333_b_15L
008_0333_b_16L正憲大夫八道都摠攝兼僧大將悔
008_0333_b_17L隱長老碑銘
008_0333_b_18L顯宗即位之十三年春三月十五日。八
008_0333_b_19L道都摠攝悔隱長老。老卒于星浮山之。
008_0333_b_20L天柱峯下。閱世八十六。坐夏七十一。
008_0333_b_21L法字應俊。俗姓奇氏。南原人。悔隱其
008_0333_b_22L號也。初奇無子。母尹祈七星于智異山。
008_0333_b_23L夢異光入懷。娠長老焉。少出家。從玉
008_0333_b_24L暹老師落髮。晩叅逍遙浩然碧嵒諸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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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333_c_01L생김새는 널찍한 얼굴에 키가 컸다. 몸은 비록 스님이지만 뜻은 경세제민經世濟民을 생각하였다.계유년(1633, 인조 11) 봄에 호남湖南 안렴사按廉使가 장로가 그런 뜻을 품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장로를 입암산성笠岩山城(전라남도 장흥)의 성장城將으로 기용하였다. 장로는 그 자리에서 여러 번 공을 이루었다.병자년(1636, 인조 14) 겨울에 청나라 군사가 갑자기 쳐들어오자 호남 관찰사 이시방李時昉73)이 벽암碧嵓 대사를 의병승義兵僧 대장으로 기용했을 때 장로는 그를 따라가 참모로 있으면서 군사 일을 도왔다. 이듬해 정축년(1637, 인조 15) 여름에 의병을 모집한 공로로 절충장군折衝將軍(정삼품 무관품계)으로 품계가 올라갔으며 양호도총섭兩湖都摠攝(전라도ㆍ충청도 의병 대장)에 임명되었다. 정해년(1647, 인조 25) 봄에 가선대부嘉善大夫(종이품)로 승진하여 팔방도총섭八方都摠攝이 되어 남한산성에 머물렀다.신묘년(1651, 효종 2) 겨울에 조정에서는 또 남한산성의 옹성甕城74)을 쌓은 공을 가상하게 여겨 가의대부嘉義大夫로 품계를 올렸다. 경자년(1660, 현종 원년) 겨울에는 자헌대부資憲大夫로 품계가 올라 승대장僧大將이 되었다. 계묘년(1663, 현종 4) 여름에는 정헌대부正憲大夫(정이품)로 특진하였다.그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을 때는 창을 잡고 활을 몸에 지니고 있었다. 앞에는 깃발을 세우고 뒤에는 호위병이 보호하면서 30여 년을 군사 업무에 전력 질주하였다. 평상시에는 간혹 화려한 복장을 하고 다녔다. 몸에 걸친 옷이나 장식물은 모두 비단이나 금붙이였다. 외출할 때는 몸집이 크고 검푸른 색의 좋은 말을 타고서, 아름답게 장식한 칼을 차고 옷 허리띠와 갓끈을 축 늘어뜨리며 다니는 모습이 재상과 같았는데도 감히 험담하는 사람이 없었다. 옛날에 소위 흑의지걸黑衣之傑75)은 바로 장로를 두고 한 말이다.장로는 또 재산도 매우 많았다. 가난하거나 병든 친구가 있으면 많이 베풀어 주었으며 가진 재산을 아끼지 않았다. 아마도 자비로운 마음으로 백성을 구제해야겠다는 도덕심이 있어서였을 것이다.그의 문도門徒로는 전 총섭總攝 처상處祥, 첨지僉知 광학廣學, 등평等伻ㆍ옥청玉淸 등이 있다. 그들이 5백 리 먼 북쪽으로 달려와 백곡 처능에게 비명碑銘을 써 달라고 청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우리 스님께서 생전에 이름을 날렸습니다. 돌아가신 다음에 비명이 없으면 그 공적이 사라지고 전해지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수어사守禦使 식암息菴 김석주金錫冑 공께서 시우쇠(熟鐵) 백 근을 보내어 비석을 세우는 데 보탠다고 하였으니, 우리 스님이 국사國事에 애쓰신 것을 매우 높이 평가하였기 때문입니다.광양光陽 백운산白雲山은 우리 스님 젊은 시절의 자취가 있는 곳입니다. -
008_0333_c_01L宗匠。咸執弟子禮。爲人魁貌而長身。
008_0333_c_02L身雖係桑門。志則慕經濟。癸酉春。湖
008_0333_c_03L南按廉聞其志。署爲笠岩城將。累果
008_0333_c_04L立功。丙子冬。淸兵猝至。湖南觀察使
008_0333_c_05L李公時昉。起碧嵒大師爲義兵僧大將。
008_0333_c_06L長老從之。叅謀以助兵勢。明年丁丑夏
008_0333_c_07L以募義功。加資折衝。授兩湖都摠攝。
008_0333_c_08L至丁亥春。陞嘉善。爲八方都摠攝。居
008_0333_c_09L南漢。辛卯冬。朝廷又以營築南甕城
008_0333_c_10L益嘉其功。陞嘉義。庚子冬。陞資憲。爲
008_0333_c_11L僧大將。癸卯夏。特加正憲。其在任也。
008_0333_c_12L執鐏帶韔韣。前竪旄。後擁儐僎
008_0333_c_13L驅馳軍務間者。三十年許。其平居也。
008_0333_c_14L或時治盛服。衣冠簮組。皆綺纈。金玉
008_0333_c_15L之屬。出入乘驔駽。紌綖鞞鞛。厲游
008_0333_c_16L纓侔。擬宰臣。無敢誚者。古所謂黑衣
008_0333_c_17L之傑。長老之謂也。財產亦甚鉅。每於
008_0333_c_18L親舊貧病。多所施舍不恤畜。盖有悲濟
008_0333_c_19L之道也。其徒前摠攝處祥僉知廣學等
008_0333_c_20L伻玉淸。北走五百里。乞銘於白谷處能
008_0333_c_21L曰。我師生有顯也。死無銘。則恐沉泯
008_0333_c_22L不傳。且守禦使息菴金相公錫胄氏。遺
008_0333_c_23L以熟鐵百斤。用助鐫鑱之具。重愛我師
008_0333_c_24L之劬勤國事故也。光陽之白雲。即我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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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334_a_01L비석 하나를 마련하여 공적을 새기고 산언덕에 세워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 스님이 계셨다는 것을 알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면 즉 살아서나 죽어서나 모두 세상에 알려질 것이고, 우리들 마음에도 원한이 없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 스님을 아는 사람으로는 스님만 한 분이 없습니다. 스님께서는 또한 문장에 뛰어나시니, 스님의 문장이라면 돌에 새겨져서 비명이 되기에 넉넉합니다.”내가 또 회은 장로의 법제法弟인데 어찌 차마 비문을 짓지 않는다 하겠는가? 그래서 응낙하였고 아래와 같이 글을 짓는다.
奇之氏系 기씨 집안은
世家帶方 대대로 대방帶方(남원)에 살았다.
初無胚胎 처음에는 아이를 갖지 못했는데
晩有禎祥 늦게야 경사스런 징조가 있었다.
山岳降靈 산이 영험한 기운을 내려
夢忽驚姜 꿈에 부인을 놀라게 하였다.
形從出世 외모는 세상을 벗어났으나
志慕經邦 뜻은 나라 경영에 두었다.
魁顏廣眉 훤칠한 용모에 눈썹은 넓고
白而身長 하얀 모습에 키는 크도다.
國步艱危 나라의 운명이 위태롭고
隣敵强梁 이웃 나라 도적들이 함부로 날뛰며
虓豹相 호랑이와 표범이 싸우는 듯한 형세에
民士劻勷 백성들은 이리저리 떠돌아다녔다.
長老叅謀 장로는 그때 참모로 나가
從橫戰場 전쟁터에서 종횡무진 활약했었다.
朝廷褒賞 조정에서는 공로를 포상하여
兩湖金章 전라도와 충청도의 승군 대장 벼슬을 내렸다.
俄而陞秩 곧이어 승진하여
統攝八方 전국을 통솔하는 승군 대장이 되었으니
櫜兠戟纛 갑옷을 입고 창을 들고
卅載彷徉 30년 동안 누빈 결과로다.
平居坐起 일상적인 생활에서도
服飾輝光 의복은 휘황찬란하여
冠帶簮笏 관대冠帶와 치장품 등은
金玉其裝 금과 옥으로 장식하였다.
出入遊行 외출하거나 먼 길 나들이할 때는
靑驄紫韁 푸른 명마와 자주색 고삐를 잡았다.
於古有之 예전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으니
黑衣賢良 남조 제齊나라 스님인 법헌法獻과 현창玄暢이다.
財累雖鉅 재물은 비록 많았지만
拂篋傾箱 재물 상자를 모두 다 털었다.
曰有神足 뛰어난 제자들은
乞銘遑遑 황급히 나에게 비명을 청하고자
訪我于北 북쪽에 있는 나를 방문하려
數百里强 수백 리 길을 달려왔다.
南海之滣 남해 바닷가
縣曰光陽 고을 이름은 광양현光陽縣이다.
樹石係文 그곳에 비석을 세우고 글을 새기니
百歲惟芳 영원토록 아름다운 명성이 퍼지리라.동회東淮 선생에게 올리는 제문오호! 어제 선생께서 병이 나셨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지금은 돌아가신 선생님 앞에서 곡합니다.아아! 애통합니다. 아아! 너무나 슬픕니다.불길한 예감이 마음을 지배하고 한없는 애통함을 안고 살기보다는, -
008_0334_a_01L少日發跡之地也。將具一片石刻之樹
008_0334_a_02L山阿。令後世知有我師。則生死俱有
008_0334_a_03L顯也。而於吾心亦無懟矣。然知我師者
008_0334_a_04L莫如君。君亦能爲文。文堪上石盍爲銘
008_0334_a_05L余於長老爲法弟。又何忍不銘。故應曰。
008_0334_a_06L諾。爲之辭曰。
008_0334_a_07L奇之氏系。世家帶方。初無胚胎。
008_0334_a_08L晩有禎祥。山岳降靈。夢忽驚姜。
008_0334_a_09L形從出世。志慕經邦。魁顏廣眉。
008_0334_a_10L白而身長。國步艱危。隣敵强梁。
008_0334_a_11L虓豹相。民士劻勷。長老叅謀。
008_0334_a_12L從橫戰場。朝廷褒賞。兩湖金章。
008_0334_a_13L俄而陞秩。統攝八方。櫜兠戟纛。
008_0334_a_14L卅載彷徉。平居坐起。服飾輝光。
008_0334_a_15L冠帶簮笏。金玉其裝。出入遊行。
008_0334_a_16L靑驄紫韁。於古有之。黑衣賢良。
008_0334_a_17L財累雖鉅。拂篋傾箱。曰有神足。
008_0334_a_18L乞銘遑遑。訪我于北。數百里强。
008_0334_a_19L南海之滣。縣曰光陽。樹石係文。
008_0334_a_20L百歲惟芳。
008_0334_a_21L
008_0334_a_22L祭東淮先生文
008_0334_a_23L嗚呼。昨聞先生之病。而今哭先生之歿。
008_0334_a_24L嗚呼痛哉。嗚呼痛哉。與其有介於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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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334_b_01L차라리 함께 죽어 흐느끼는 울음과 애도하는 마음을 없게 하는 것이 훨씬 낫겠습니다.비록 한번 태어나면 한번은 죽는다고 하지만 구천(九原)에 있는 선생의 음성과 용모는 적막하고, 인생 백 년에 선생의 모습과 그림자는 아득히 멀어졌습니다. 하지만 선생의 살아생전의 일을 추모하고, 남기신 글과 편지에 눈물을 뿌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옛사람은 ‘서럽게 용양龍驤의 무덤을 바라보고76) 복야僕射의 관을 부축한다77)’라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또 시 원고가 들어 있는 상자를 조사하다가 서러움을 삼키는 사람이 있으며, 혹은 옛 역사를 살피다가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러한 일 모두는 한때의 슬픔에서 일어난 특별한 감격이지만 오히려 후대에는 칭송을 받았습니다. 하물며 선생과는 시골에서 10년 동안 함께 지냈습니다. 모임을 만들어 선생을 받들어 모시고서 우주 밖에서 이 육신을 잊고 지냈으며 깊은 계곡에서 흉금을 같이하기로 기약한 사람이야 어떠하겠습니까?저는 지난달에 참선 수련에서 나와서 서쪽으로 유람 가면서 용만龍灣(의주) 부윤府尹에게 인사하러 갔습니다. 가는 길에 선생의 별장지기를 만나 선생께서 병을 앓고 계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현안지병玄晏之病78)이나 문원지질文園之疾(당뇨병)79)처럼 일상적인 것이라고 여겨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이날 밤 잠시 졸면서 눈을 붙이는 사이에 갑자기 선생과 함께 담소하며 즐거워하면서 평소처럼 정겨웠습니다. 깨어나니 꿈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하기를, 만일 꿈이 헛되지 않으면 선생의 병은 반드시 나았을 것이니 과연 걱정할 것이 없다고 여겼습니다.제가 산으로 돌아오니 기성箕城(평양)에 계신 견堅 스님이 편지를 보냈는데, 동회 신 선생이 병으로 일어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오호, 지난날에 꾼 꿈이 과연 진실입니까, 아니면 거짓입니까? 장주莊周는 (「제물론齊物論」에서) “꿈에 술을 마시면 낮에 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꿈에 선생과 더불어 정겹게 담소한 것이 어찌 영원히 이별하여 끝이 없는 슬픔을 남겨 두었음이 아니겠습니까?오호, 선생은 세상에 태어나 57년을 살았습니다. 신분은 고귀하고 행적은 궁궐을 넘나들었습니다.80) 임금은 선생의 충성심을 가상히 여겼으며 조정과 재야에서는 선생의 현명함을 칭찬하였으니, 선생의 덕행은 존귀하다고 평가를 할 수 있습니다. -
008_0334_b_01L而抱無涯之痛。不若同死而相從。無嗚
008_0334_b_02L咽疚悼之爲愈也。雖然一存一亡。九原
008_0334_b_03L之下。音容寂莫。百年之間。形影阻隔。
008_0334_b_04L亦安得不追感存亡。而淚自灑於陳篇
008_0334_b_05L遺牘之間哉。故古人有望龍驤之塋。扶
008_0334_b_06L僕射之櫬者。亦或有檢詩篋而含悲。按
008_0334_b_07L舊史而流涕者。此特激於一時之哀。而
008_0334_b_08L猶爲後世之稱也。則況能與先生。十載
008_0334_b_09L林泉。結社從遊。忘形骸於宇宙之外。
008_0334_b_10L而托襟期於嵒壑之間者邪。能前月出
008_0334_b_11L㝎西遊。謁龍灣大尹。路逢先生之別墅
008_0334_b_12L蒼頭。聞先生之病。意以爲玄晏之病
008_0334_b_13L文園之疾。出乎尋常。不足憂也。是夜
008_0334_b_14L假寐閉目間。忽與先生。談笑歡娛。欵
008_0334_b_15L若平昔。覺則夢也。窃自念夢若非虗。
008_0334_b_16L先生之病。必已痊瘳。果不足憂也。及
008_0334_b_17L能還山。而堅師在箕城。寄書來云。東
008_0334_b_18L淮申先生。以疾不起。嗚呼。宿昔之夢。
008_0334_b_19L其果眞邪。抑非眞邪。莊周云。夢飮酒
008_0334_b_20L者。晝而哭泣。然則夢與先生。欵語團
008_0334_b_21L欒者。豈非有此永隔之別。而憗遺無窮
008_0334_b_22L之痛者哉。嗚呼。先生之生於世。五十
008_0334_b_23L有七歲。身居貴近。跡渉宮闈。君主嘉
008_0334_b_24L其忠。朝野稱其賢。先生之德。可謂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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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334_c_01L재주는 (한漢의 문장가) 양웅揚雄과 사마상여司馬相如를 겸하였고, 글씨는 (위魏의) 종요鍾繇와 (진晉의) 왕희지王羲之를 본받았습니다. 당세의 보배이지만 계승할 후인이 없으니 선생의 업적은 위대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거문고 소리를 듣는 사람 중에 귀가 밝은 사람은 이미 없습니다. (친구를 위해 연주한) 아양곡峨洋曲81)과 (이별의 노래인) 절양곡折楊曲82)을 듣고도 뒤섞어 합해 버립니다. 선생의 뜻을 아는 이도 있고 모르는 이도 있습니다. 그러니 선생의 절조節操와 풍류 두 가지에 있어서는, 다른 사람들 중에는 더욱 알지 못하고 오직 저만이 압니다.광릉廣陵의 동쪽, 두강斗江 옆,83) 저무는 봄날에 물가에 꽃이 필 때, 깊은 가을날 언덕에 단풍이 붉을 때에 조각배 타고 멀리 갔습니다. 작은 술동이를 옆에 두고 조금씩 술을 부어 마셨습니다. 가파른 모래사장 후미진 누대에서 술기운이 올라오면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노를 두드리면서 “소동파蘇東坡가 나와 같고 내가 소동파와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선생께서 고인古人을 흠모하여 무한한 흥취를 일으킨 것이 아니겠습니까?왕손곡王孫谷84)에 있는 불주암佛住菴 앞에, 석양이 이미 저물고 어둠 속에 달이 막 솟아 나옵니다. 손님을 전송하느라 문밖으로 나오고, 스님을 데리고 절로 들어올 때에 바위로 빙 둘려 있는 험준한 계곡에서 흥이 나면 시를 읊었습니다. 그리고 두건을 벗고, “도연명이 나와 같고, 내가 도연명과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선생께서 전대 현인을 본받아 무궁한 즐거움을 실어 보낸 것이 아니겠습니까?오호! 저승에 있는 사람은 다시 살아날 수 없고, 지음知音도 돌아올 수 없는 아득히 먼 곳에 있습니다. 풍성豊城의 칼과 고죽孤竹의 경쇠와 공상空桑의 거문고와 적수赤水의 구슬85)이 다 보배가 아닌 것은 아니지만, 아는 사람만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릅니다. 그렇다면 선생의 절조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제가 아니면 누구이겠습니까?오호! 의리상 당연히 찾아가 조문해야 하겠으나 병 때문에 달려가 곡하지 못했습니다. 천 리 밖에서 애처로움만 머금고 단지 슬픈 마음만 보낼 뿐입니다. 선생의 넷째 아들은 저와 도의로 사귄 교분이 있습니다. 봄이 오면 한번 찾아가 그를 조문하고, 또 선생의 묘소에 곡을 한 후에야 비로소 내 마음의 서러움을 모두 풀 수 있을 것 같습니다.아! 내가 꿈속에서 꿈속의 일을 슬퍼함도 역시 하나의 꿈이 아니겠습니까? 꿈과 꿈이 다 진실이 아니라면 내가 슬퍼함도 또 꿈속의 꿈이 아니겠습니까? -
008_0334_c_01L矣。才兼楊馬。書效鍾王。當世爲寶。後
008_0334_c_02L人無繼。先生之業。可謂偉矣。然世之
008_0334_c_03L聞絃者。旣無佳聰。聽峨洋與折楊。混
008_0334_c_04L然爲和。則先生之志。人或知或不知。
008_0334_c_05L而先生之節操與風流二者。他人尤不
008_0334_c_06L能知。而唯我獨知也。夫廣陵之東。斗
008_0334_c_07L江之傍。暮春汀花。深秋岸楓。孤舟遠
008_0334_c_08L放。小樽細酌。危沙曲臺。酒酣則歌。扣
008_0334_c_09L枻而稱曰。東坡如我。我如東坡乎。豈
008_0334_c_10L先生之慕古人。而乘此不盡之興歟。王
008_0334_c_11L孫谷裏。佛住菴前。夕陽已沒。昏月初
008_0334_c_12L生。送客出門。携僧入寺。回嵒絕澗。興
008_0334_c_13L闌則吟。岸幘而稱曰。淵明如我。我如淵
008_0334_c_14L明乎。豈先生之斅前賢。而遣此無窮之
008_0334_c_15L樂歟。嗚呼。九原難作。知音冥邈。豊城
008_0334_c_16L之劒。孤竹之磬。空桑之琴。赤水之珠。
008_0334_c_17L非不寶也。知者知。而不知者不知。則
008_0334_c_18L知先生之節。非余而誰邪。嗚呼。義當
008_0334_c_19L徃吊。而病不能奔哭。含悽千里。只寓
008_0334_c_20L一哀而已。雖然先生之第四令胤。與余
008_0334_c_21L有道交之分。春來一訪。吊其胤。又哭
008_0334_c_22L先生之墓然後。方盡吾心之所痛也。噫
008_0334_c_23L余從夢中。悲夢事者。非亦一夢邪。夢
008_0334_c_24L與夢非實。而余之痛悼者。非亦夢中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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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335_a_01L아아! 슬프고 슬프도다.논산 석교論山石橋를 중수하므로 선행을 장려하기 위해 쓴 글물이 고여 길이 막힌 곳에는 반드시 건널 것을 세워 다니기에 편리하게 하는데, 이를 다리라고 한다. 다리는 사람을 건너가도록 해 주는 것으로서 배나 수레 다음가는 것이다. 옛 문헌을 살펴보면 다리를 놓은 곳이 많다. 하늘 위에는 오직 오작교烏鵲橋가 있다는 말을 들었을 뿐이고, 인간 세상에 있는 다리들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고금에서 가장 이름난 다리는 천진교天津橋(낙양)가 있고, 시인들의 시로 읊어지는 것으로는 천태산天台山의 석교石橋, 완화浣花의 만리교萬里橋, 서호西湖의 이십사교二十四橋가 있다. 그 이외에 절벽을 타고 올라가는 잔도棧道와 간단한 외나무다리 등은 어찌 다 기록할 수 있겠는가?아, 다리가 사람을 건네주는 그 공로는 다리를 항상 왕래하는 장사하는 상인이나 여행객에게만 있을 뿐만이 아니라, 또한 다리에 몸을 맡겨 목숨을 바친 충신도 있고, 다리에 의지해 감정이 격앙된 지사志士도 있다. 무엇 때문인가? (전국시대의 지사인) 예양豫讓86)은 다리에 매복하여 자신의 충성심을 품었다. (한漢의) 사마상여司馬相如는 기둥에 글씨를 새겨(相如題柱87)) 자신의 뜻을 펼쳤으니, 다리가 어찌 헛되이 존재하겠는가?은진恩津의 상류에 논산교論山橋라는 다리가 있다. 돌을 깎아 기둥을 만들고, 물에 꽂아 다리를 만든 것이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계곡에서 흘러내려 오는 물이 휘돌고, 바다의 세찬 파도에 침식되었다. 기둥뿌리가 완전하지 않아 떨어져 나가지는 않았으나 조만간에는 떨어져 나갈 것이며, 다리의 돌이 견고하지 않아 무너지지는 않았으나 조만간에는 무너질 것이라고 식견이 있는 사람들이 걱정하였다. 청신사淸信士가 다리를 놓으려는 계획을 세우면서 나에게 권선문勸善文을 써 주기를 요청하였다. 나는 “좋습니다. 충신과 지사도 때로는 다리에 몸을 맡겨 자신의 뜻과 사업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였으니, 아마도 다리가 그들에게 도움 되는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물며 항상 오고 가는 장사꾼이나 여행객들이야 앞을 다투어 재물을 내놓아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
008_0335_a_01L耶。嗚呼痛哉。
008_0335_a_02L
008_0335_a_03L論山石橋重修諭善文
008_0335_a_04L水之渟瀦礙阻之處。必建梁以爲利涉
008_0335_a_05L曰橋。橋所以濟人者。舟車之次也。按
008_0335_a_06L古文而考之。建橋處盖多焉。天上則唯
008_0335_a_07L聞有烏鵲橋。至於人間。則不可勝記。
008_0335_a_08L而古今㝡名者。天津橋也。詠於詩人之
008_0335_a_09L詞句者。天台之石橋也。浣花之萬里橋
008_0335_a_10L也。西湖之二十四橋也。其餘橫棧略彴
008_0335_a_11L之類。烏能盡記哉。噫。橋之能濟人。其
008_0335_a_12L功非特在於行商遊客之尋常徃來而已。
008_0335_a_13L抑忠臣托之而忘生者有之。志士憑之
008_0335_a_14L而激昻者有之。何則。䂊讓之伏橋。懷其
008_0335_a_15L忠也。相如之題柱。叙其志也。橋豈徒
008_0335_a_16L然哉。恩津之上䟽有橋。曰論山。劚石爲
008_0335_a_17L柱。揷水爲橋者。於千萬年。而溪壑亂
008_0335_a_18L流之所匯。溟渤狂瀾之所浸。故柱根不
008_0335_a_19L完不缺。而將近於缺。橋石不固不頹
008_0335_a_20L而將近於頹。識者憂之。爰有信士。將
008_0335_a_21L發再造之計。求勸善文於余。余曰諾。
008_0335_a_22L忠臣志士之有時憑托。而或冀其志業
008_0335_a_23L之有成。則宜若有所助於其間。而况行
008_0335_a_24L商遊客之尋常徃來者。其可無捨施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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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335_b_01L나는 이에 권선문을 쓴다.불교의 폐지에 대해 간언을 하며 올린 상소문신臣은 다음과 같이 들었습니다. 공자가 (『논어』 「위령공衛靈公」에서) “함께 말할 수 있는 사람인데 함께 말하지 않으면 사람을 잃게 되고, 함께 말할 수 없는 사람인데 함께 말하면 말을 잃어버린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치에 들어맞게 말을 할 때는 무성의하게 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요임금은 윤수尹壽88)에게 자문을 구했으며, 순임금은 무성務成89)을 방문하였습니다. 요임금ㆍ순임금은 위대한 성인의 자질을 가지고 계신 분이며 모두 매우 고귀한 지위에 있었으니, 깊은 시골에 사는 사람을 취할 필요도 없으며 나무꾼(蒭蕘90) )의 말도 받아들일 필요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사람들(윤수ㆍ무성을 말함)에게 은근한 정성을 나타낸 것은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사람을 쓰면 반드시 현인을 만나고 간언을 받아들이면 반드시 좋은 말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은 반드시 추로鄒魯(공자와 맹자)91)의 말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중니仲尼(공자)가 노담老聃(노자)에게 배웠습니다.92) 사람도 반드시 요순시대의 사람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서백西伯(주나라 문왕)은 여망呂望93)을 스승으로 삼았습니다. 이런 까닭에 지역이 의심스럽다고 해서 그 지역 사람들의 말을 폐기하면 말을 잃게 되는 것이요, 시대가 의심스럽다고 하여 그 시대 사람들을 버리면 사람을 버리는 것입니다. 어찌 살피지 않을 수 있으며, 어찌 분명히 밝혀야 하지 않겠습니까?일반적으로 세상이 태평하면 은자들도 세상을 따르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한漢나라에서 사호四皓94)를 존경하였습니다. 풍속이 순박하면 욕심 없는 탈속한 사람들이 간간이 배출됩니다. 그러므로 진晉나라에서는 죽림칠현竹林七賢95)을 높이 받들었습니다. 죽림칠현이 어찌 모두 이윤伊尹ㆍ주공周公ㆍ소공召公ㆍ부열傅說 같은 재상의 재주가 있었겠습니까? 상산사호商山四皓가 어찌 모두가 한신韓信ㆍ팽월彭越ㆍ위청衛靑ㆍ곽거병霍去病 같은 장군의 지략이 있었겠습니까? 그렇지만 모두를 제후로 봉하여 신하로 충당한 것은, 그들이 인자한 임금이 백성을 교화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혹은 성군聖君이 정치를 잘 하도록 도와주었기 때문입니다.그러므로 백성을 편안히 하는 재주는 반드시 십란十亂(열 명의 어진 신하)96)에 의지하고, 세상을 구제하는 지혜는 역시 삼우三愚97)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것은 마치 엄청나게 큰 종은 한 조각 쇳덩어리로 만들 수 없음과 같습니다. 천 칸 되는 큰 집을 어찌 짧은 시간에 지을 수 있겠습니까?생각하건대 성인이시고 신적인 능력이 있으시며 문무를 겸비하신(聖神文武) -
008_0335_b_01L爭先者哉。余於是乎。遂書爲勸善文云。
008_0335_b_02L
008_0335_b_03L大覺登階白谷集
008_0335_b_04L
008_0335_b_05L諫廢釋敎䟽
008_0335_b_06L臣聞孔子曰。可與言而不與言。失人。
008_0335_b_07L不可與言而與言。失言。言或可以有中。
008_0335_b_08L聽不可以無誠。故堯咨尹壽。舜訪務
008_0335_b_09L成。彼以至聖之資。咸居極貴之位。則
008_0335_b_10L不必取蓬蒿之人。不必納蒭蕘之言。然
008_0335_b_11L所以勤欵者。盖益我者存焉。何則。取
008_0335_b_12L人則必見賢人。納言則必聞善言。言不
008_0335_b_13L必鄒魯之言。故仲尼學於老聃。人不必
008_0335_b_14L堯舜之人。故西伯師於呂望。是故若以
008_0335_b_15L邦域。爲嫌而廢言。失言。若以時代。爲
008_0335_b_16L訝而棄人。失人。可不察哉。可不明哉。
008_0335_b_17L夫世治則逸人願從。故漢遵四皓。俗醇
008_0335_b_18L則淸軰間出。故晋高七賢。七賢豈皆伊
008_0335_b_19L傅周召之相才乎。四皓寧盡韓彭衛霍
008_0335_b_20L之將略乎。然而咸在提封。得充臣妾者。
008_0335_b_21L或助仁后之隆化。或扶聖君之優治。故
008_0335_b_22L安民之才。必憑十亂。濟世之智。亦待
008_0335_b_23L三愚。其猶洪鍾萬鈞。非片銕所鑄。大
008_0335_b_24L厦千間。豈一世所搆哉。伏惟聖神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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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335_c_01L주상 전하(현종)께서는 천명을 받아서 왕위를 계승하였습니다. 왕세자로 있던 시절에는 효성이 대단하여 닭이 울면 문안을 갔으며, 왕위에 오른 이후에는 변란(雉劬98) )이 일어날까 조심하였습니다. 부역을 가볍게 하고 세금을 줄이니 백성들이 즐거운 얼굴을 하였으며, 과부를 불쌍히 여기고 고아를 가엾게 여기니 백성들이 목을 내밀면서 은혜를 갈망하였습니다. 2ㆍ3년 동안 교화가 백성들에게 두루 미쳤고, 수천 리 밖에까지 은혜는 백성들에게 더해졌습니다. 삼왕三王(복희ㆍ신농ㆍ황제)도 어질지 않다면 그만이며, 어질기만 하다면 전하께서 바로 삼왕 같은 분입니다. 오제五帝(소호ㆍ전욱ㆍ제곡ㆍ요ㆍ순)도 성인답지 못하면 그만이지만, 성인 같은 행동을 한다면 전하께서 바로 오제 같은 분입니다. 오늘날에 소巢ㆍ허許99) 같은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찌 옛적의 요순堯舜 같은 임금을 만난다고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예로부터 명군과 성왕의 행정은 분명하였으며 정치도 어질었기는 하지만 자신이 직접 만기萬機(왕의 많은 업무)를 처리해야 하므로 한 가지 실수가 있을까 걱정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서경』에는 임금을 가르치는 글인 고誥100)가 있으며, 『시경』에는 왕을 훈계하는 시가 있습니다.이런 까닭에 신분이 낮은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자신을 낮추면서 간언을 받아들임은 임금으로서의 인자함이요, 임금의 존엄성을 범하면서 당돌하게 간언을 올림은 신하의 충성심입니다. 그러므로 『서경』 「열명說命」에서 “나무가 먹줄을 따르면 반듯하게 되고, 임금은 간언을 따르면 성군이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임금이 거울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좌전』 (「소공昭公」 20년 8월 기사)에는 “임금이 하는 말이 옳기는 하지만 부당한 점이 있을 때, 신하는 그 부당성에 대해 의견을 올리면서 임금의 옳은 점을 이루어 준다. 임금이 하는 말이 부당하지만 옳은 점이 있을 때 신하는 임금의 옳은 점에 대해 의견을 올리면서 그 부당한 점은 없앤다.”101)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신하가 본받아야 하는 것입니다.신은 매우 미천한 사람으로 외람되이 상문桑門(승려)이 되어 축교竺敎(불교)를 더럽히는 인간 세상 군더더기 중에 하나이며, 강과 구름 속에서 떠돌아다니는 외롭고 바싹 마른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군신君臣과 부자父子의 의리에 대해서는 평소 신경을 쓰지 않았으니, 득실得失과 치란治亂의 논의에 대해서 어찌 많은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지금 감히 자신을 ‘신臣’이라고 부르는 것도 참으로 분수에 넘침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옛날에 (북위北魏 시대의) 법과法果 스님은 안성후安城侯로 임명되었고, 당唐의 불공不空 스님은 숙국공肅國公으로 봉해졌습니다. 모두 신하의 대열에 서서 임금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시경』 (「소아」 〈북산北山〉)에서 “왕의 신하가 아닌 사람이 없다.”라고 하였으며, 『서경』 (「중훼지고仲虺之誥」)에서 “우리 임금 오시기를 기다린다.”라고 하였으니, 참으로 피차彼此를 가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신人臣이 비록 볼만한 형상이 없더라도 -
008_0335_c_01L主上殿下。誕膺天命。纉承丕位。儲宮
008_0335_c_02L之日。孝誠趂乎鷄鳴。君臨以來。恐愳
008_0335_c_03L生乎雉劬。輕徭減賦。則蒼生怡顏。恤
008_0335_c_04L寡憐孤。則赤子延頸。二三載之間。化
008_0335_c_05L冾生靈。數千里之外。恩添品。三王
008_0335_c_06L不仁則已。仁則殿下是也。五帝不聖則
008_0335_c_07L已。聖則殿下是也。豈意今日之巢許復
008_0335_c_08L遇昔時之堯舜乎。雖然自古明君聖王
008_0335_c_09L政非不明也。治非不仁也。而躬臨萬機
008_0335_c_10L慮有一失。故書有訓君之誥。詩存戒王
008_0335_c_11L之篇。是以矜憐鄙陋。枉屈從諫者。君
008_0335_c_12L父之仁也。冒黷尊嚴。唐突進言者。臣
008_0335_c_13L子之忠也。故說命曰。木從繩則正。后
008_0335_c_14L從諫則聖。此君父之所可鑑也。春秋傳
008_0335_c_15L曰。君所謂可而有否焉。臣獻其可。以
008_0335_c_16L去其否。此臣子之所可效也。臣以至微
008_0335_c_17L至賤。猥叨桑門。謬忝竺敎。人世上一
008_0335_c_18L贅物。水雲間隻枯容。其於君臣父子之
008_0335_c_19L義。素昧留心。得失治亂之談。寧能刺
008_0335_c_20L口。而今敢稱臣者。固知濫矣。然昔法
008_0335_c_21L果沙門。拜安城候 [11] 。不空法師。封肅國
008_0335_c_22L公。咸以臣例。紆荷主恩。則詩所謂。莫
008_0335_c_23L非王臣。書所謂。徯我后來者。固無揀擇
008_0335_c_24L於彼此也。然則爲人臣者。雖甚無狀。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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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336_a_01L어리석은 계책이나마 있으면 임금에게 말씀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알아보니, 승니僧尼(비구와 비구니) 모두를 사태沙汰(많은 사람을 떨쳐내는 일)시키도록 하여 비구니는 환속시키고 비구들 역시 없애기로 논의하였다고 합니다. 신은 참으로 우매하여 임금님의 생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헤아리지 못하겠습니다.임금께서 생각하시기를 불교가 서방 인도에서 탄생되었지만 중국에 흘러들어 왔으니 지역이 다르다고 하여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혹은 삼대三代(하ㆍ은ㆍ주) 이후에 나왔으니 상고시대의 법이 아니므로 시대가 다르다고 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혹은 인과를 거짓으로 말하고 응보를 기만하여 널리 알리고 윤회로 백성을 그릇된 길로 끌고 간다고 하여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혹은 농사도 짓지 않고 누에도 치지 않고 하는 일도 없이 놀고먹으면서 재물을 소모시킨다고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혹은 함부로 머리를 깎아 항상 법망에 걸리어 헌정 질서를 손상시킨다고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혹은 불교도라 핑계 대고 구차하게 요역徭役을 회피하며 군대에도 빠진다고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신은 불교가 탄생하게 된 시종을 먼저 말하고, 위에서 말한 몇 가지 조목은 뒤에 설명하고자 합니다. 임금님께 하소연하오니 읽어 주시기를 바랍니다.신臣이 멀리 이전 역사를 살피고 고찰하니, 『주서이기周書異記』102)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부처는 주나라 소왕昭王 24년 갑인년(B.C. 1027)에 세상에 태어났다. 밤에 오색 기운 빛이 있으며 청홍색이었다. 왕이 태사太史인 소유蘇由에게 묻기를 ‘이것은 무슨 상서로운 징조인가?’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서방에 위대한 성인이 태어났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주나라 목왕穆王 53년 임신년(B.C. 949)에 열반에 들었다. 당시 흰 무지개 열한 줄기가 남북을 관통하였다. 목왕이 태사 호다扈多에게 묻기를 ‘무슨 징조인가?’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서방의 위대한 성인이 돌아가셨습니다’라고 하였다.”또 말하였습니다.“오나라 태재太宰(재상)인 백비白嚭가 공자에게 묻기를 ‘선생님은 성자이십니까?’라고 하니, 공자가 대답하기를 ‘나는 학식이 넓고 기억력이 풍부한 사람이지 성인은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누가 성자인가요?’라고 하니, 공자는 조용히 대답하기를 ‘서방에 위대한 성인이 있습니다. 말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믿음이 있으며, 교화를 베풀지 않아도, 교화가 저절로 행해집니다.’”103)또 『장자』 「제물론齊物論」에서 “만년 후에라도 한번 대 성인을 만나서 그 견해를 인정받는다면, 이것은 아침저녁으로 만나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모두 부처님을 가리키며 한 말입니다. -
008_0336_a_01L有愚計。不得不禀於君父也。謹因朝報。
008_0336_a_02L伏奉聖旨。遂令僧尼。並從沙汰。尼已
008_0336_a_03L還俗。僧亦議廢。臣實闇斷。未窺聖慮
008_0336_a_04L之何謂也。聖慮必以佛氏。生彼西方。
008_0336_a_05L入此華夏。有異邦域而然歟。抑出三代
008_0336_a_06L後。非上古法。有殊峕代而然歟。抑僞
008_0336_a_07L啓因果。謬暢報應。有誣輪廻而然歟。
008_0336_a_08L抑不畊不蠶。遊手遊食。有耗財帛而然
008_0336_a_09L歟。抑妄爲剃落。每罹憲網。有傷政敎
008_0336_a_10L而然歟。抑托號浮啚。苟避徭役。有失
008_0336_a_11L偏伍而然歟。臣請先言佛興之始終。後
008_0336_a_12L陳右列之條目。仰愬宸襟。乞垂睿覽。
008_0336_a_13L臣逖覽前史。詳考歷代。周書曰。佛昭
008_0336_a_14L王二十四年甲寅出世。夜有五色光氣
008_0336_a_15L作靑紅色。王問太史蘇由曰。是何祥也。
008_0336_a_16L對曰。西方有大聖人生也。至穆王五十
008_0336_a_17L三年壬申。佛入寂。時有白虹一十一道
008_0336_a_18L貫通南北。王問太史扈多曰。是何徵也。
008_0336_a_19L對曰。西方有大聖人滅也。又吳太宰
008_0336_a_20L問孔子曰。夫子聖者歟。曰丘愽識强記。
008_0336_a_21L非聖人也。然則孰爲聖者與。夫子動容
008_0336_a_22L而對曰。西方有大聖人。不言而自信。
008_0336_a_23L不化而自行。又藏子曰。萬歲之後。一
008_0336_a_24L遇大聖。知其解者。是朝暯遇之。皆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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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336_b_01L진시황제의 시대에 이르러 사문 실리방室利防104) 등이 서역에서 왔을 때 진시황제는 그들의 기이한 풍속을 미워하여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갑자기 신장이 나타나서 옥문을 부수고 그들을 구출해 가자, 진시황제는 두려워서 후하게 예물을 주어 돌려보냈습니다.또 한나라 무제武帝 때 곽거병이 곤야왕昆耶王105)과 금인金人을 잡았는데 금인의 키가 1장丈 남짓이 되었으므로, 한 무제는 대신大神이라 여기고 감천궁甘泉宮에 안치하였습니다. 또 박망후博望侯 장건張騫을 서쪽 신두身毒 (인도)에 보내어 불법을 구해 오도록 하였습니다. 한나라 원제元帝 때 광록대부光祿大夫 유향劉向106)이 인도 고대 언어로 기록된 불경 20여 권을 구해 자신의 저서인 『열선전列仙傳』에 넣었습니다. 한나라 애제哀帝 때에는 경헌景憲이 월지국月支國107) 사신으로 가자 월지국 국왕이 불경을 바쳤습니다. 후한의 명제明帝 때에는 명제가 꿈에 감응하여 중랑장中郞將 채음蔡愔 등을 서역에 파견하여 불법을 알아보게 하니, 채음이 인도 승려인 마등摩騰과 법란法蘭 두 분 스님을 모시고 돌아왔습니다.108) 이때부터 불교가 유행되기 시작하여 후한後漢과 위魏나라 연간에 점차 퍼졌고 당송唐宋 시대에 왕성하게 되었습니다. 중국 임금과 신하들은 모두 불교에 의지하여 나라를 다스리기도 하고 집안을 다스리기도 하였으니, 이것이 불교가 흥성한 전말의 대략적인 줄거리입니다.전하께서 혹시 지역이 달라서109) 불교를 없애려고 하십니까? 그렇다면 성인이신 공자의 수레는 고국 노魯나라에 머물고 진陳나라와 채蔡나라까지는 굴러가지 않았을 것이고, 현자이신 맹자의 언변은 고국 추鄒나라에 있고 제齊나라와 양梁나라까지는 통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진秦나라의 15개 성과 바꾸지도 못하는 가치 없는 조벽趙璧110)과 같고, 수레도 비추지 못하여 위魏나라의 자랑거리가 되지도 못하는 수주隋珠111)와 같습니다.112) 동이東夷에서 태어난 순임금과 서강西羌에서 태어난 우임금을 성인이 아니라고 한다면, 포악한 임금인 걸桀과 주紂는 중국에서 태어났으므로 성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융戎에서 태어난 유여由余(춘추시대 현인)와 만蠻113)에서 태어난 계찰季札(춘추시대 현인)을 현인이 아니라고 한다면 춘추시대의 유명한 도둑인 도척盜跖과 장교莊蹻는 중국에서 태어났으므로 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이런 까닭에 공자는 (『논어』 「자한子罕」에서) “구이九夷114)에서 살고 싶다.”라고 하였으며, 중국 사람은 삼한三韓에서 태어나기를 원하였습니다. 수레와 배로 갈 수 있으며, 비와 이슬을 함께 받으며, 이하夷夏(중국과 변경 국가)의 경계가 서로 이어지며, 중국이든 변경 지역이든 어디에서 태어났든지 간에 성인은 다르지가 않습니다. 그러므로 송宋의 학자인 유원성劉元城(이름은 安世)은 “공자와 부처의 말씀은 서로 끝과 처음이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
008_0336_b_01L佛而言也。逮秦始皇時。沙門室利防等
008_0336_b_02L來自西域。帝惡其異俗。以付獄。俄有
008_0336_b_03L神碎獄門而出之。帝懼厚賜遣之。至
008_0336_b_04L漢武帝時。霍去病獲昆耶王及金人率
008_0336_b_05L長丈餘。帝以爲大神。安于甘泉宮。又
008_0336_b_06L遣愽望候 [12] 張騫。西徃身毒。獲浮屠法。
008_0336_b_07L元帝時。光錄大夫向。得梵本經二十
008_0336_b_08L餘卷。編入仙傳。哀帝時。景憲奉使月
008_0336_b_09L支國。其王投獻浮屠經。明帝時。感夢
008_0336_b_10L遣中郞將蔡愔等。西訪其道。獲迎摩騰
008_0336_b_11L法蘭二僧而還。自是敎法流行。漸於
008_0336_b_12L漢曺魏之間。盛於李唐趙宋之際。聖主
008_0336_b_13L賢臣。莫不憑賴。或治其國。或齊其家。
008_0336_b_14L此其佛興始終之大略也。殿下若曰。有
008_0336_b_15L異邦域而廢之。則孔聖之轍。止於魯而
008_0336_b_16L不必環於陳蔡。孟賢之舌。藏於鄒而不
008_0336_b_17L必棹於齊梁。其猶趙壁。不得連城於秦
008_0336_b_18L價。隋珠不能照乘於魏誇。豈以舜生於
008_0336_b_19L東夷。禹出於西羌。爲不聖。而聖中國
008_0336_b_20L之桀紂乎。豈以由余生於戎。季札出
008_0336_b_21L於蠻。爲不賢。而賢中國之跖蹻乎。是
008_0336_b_22L以魯叟。欲居九夷。華人願生三韓。况
008_0336_b_23L舟車所通。雨露所同。夷夏之境相接。
008_0336_b_24L內外之聖不殊。故劉元城曰。孔子佛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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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336_c_01L금金의 학자인 이병산李屛山은 “세 분의 성인115) 모두 주周나라 때에 났다. 마치 해ㆍ달ㆍ별이 부상扶桑(동쪽 해 뜨는 곳) 위에 모여 있고, 강수江水ㆍ하수河水ㆍ회수淮水ㆍ한수漢水가 바닥없는 깊은 대해(尾閭)에 모여 있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상의 사실을 근거로 본다면 『중용』에서 “도는 함께 운행해도 서로 거스르지 않는다.”라고 하였고, 『주역周易』 「계사繫辭」 하에서는 “길은 달라도 귀일점은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성인이 다르지 않음은 화살에 화살촉이 걸려 있는 것과 같으며(하나로 일치한다는 말), 도가 다르지 않음은 부절符節을 합친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지역이 다르기는 하지만 불교를 폐지할 수 없는 첫째 이유입니다.전하께서 혹시 시대가 다르다고 해서 불교를 없애려고 하십니까? 그렇지만 문자로 기록된 서적을 사용하면 그만이지 새끼를 꼬아서 만든 상고시대로 되돌아갈 필요는 없습니다. 편안히 집에서 살면 그만이지 반드시 위태로운 나무 둥지에서 살면서까지 거처를 바꿀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겨울 음식이 맞지 않는다고 하여 봄부터 미리 곡식을 먹는 것과 같고, 밤잠이 적합하지 않다고 해서 낮부터 마루에 앉아 있는 것과 같습니다. 어찌 은殷나라의 현인인 기자箕子ㆍ비간比干ㆍ미자微子 세 사람이 은나라가 멸망할 즈음에 나왔다고 해서 불충不忠이라 하고, 상고시대의 포악한 무리인 구려九黎를 충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공자의 제자인 십철十哲116)이 주나라 말기에 태어났다고 해서 본받을 수가 없다면 상고시대의 포악한 사흉四凶을 본받겠습니까? 이런 까닭에 상고시대의 황제인 포희庖羲(복희)가 팔괘八卦를 그리자 『주역』의 도가 문왕文王에 의해 발현되었으며, 하나라 우임금이 홍범구주洪範九疇의 뜻을 서술하자 낙서洛書가 기자에 의해 완성되었습니다. 하물며 하늘과 땅이 제 위치에 있고, 해와 달이 세상을 비춤은 고금의 이치가 같습니다. 이전 시대나 이후 시대의 규범이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춘추시대의 조맹趙孟은 “한번은 그때이고, 한번은 이때이다. 어찌 영원한 것이 있는가?”(『좌전』 「소공」 원년)라고 하였습니다. 모자牟子117)는 “저 때도 한때, 이때도 한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사실을 추적해서 본다면 순임금ㆍ우임금이 다시 살아나더라도 반드시 “부처와 우리들은 차이가 없다.”라고 말할 것이고, 탕임금ㆍ무왕이 다시 세상에 나오더라도 반드시 “부처에 대해 우리들이 무슨 말을 하겠는가?”라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공자는 『논어』 (「자한子罕」)에서 “후생가외後生可畏(후배들이 두렵다.)”라고 하였으며, 『춘추좌씨전』(「소공」 원년)에서는 “시원여이視遠如邇(먼 시대에 있는 것을 보기를 가까운 시대에 있는 듯이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시대는 다르나 일은 동일하며, 시대는 다르나 이치는 하나이다.”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시대가 다르다고 해서 불교를 폐지할 수 없는 두 번째 이유입니다.전하께서 혹시 불교의 윤회설이 백성을 속이므로 불교를 폐지하려고 하십니까? 그렇다면 당나라 천자의 옥소玉簫는 도승道僧에게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고, -
008_0336_c_01L言。相爲終始。李屏山曰。三聖人者。同
008_0336_c_02L出於周。如日月星辰之合於扶桑之上。
008_0336_c_03L江河淮漢之匯於尾閭之涯。迹此觀之。
008_0336_c_04L中庸所謂道并行而不相悖。繫辭所謂
008_0336_c_05L殊途而同歸者。可謂聖之不殊。若柱箭
008_0336_c_06L鋒。道之不異。如合符節。此不可以有
008_0336_c_07L異邦域而廢者一也。殿下若曰。有殊時
008_0336_c_08L代而廢之。則書契之籍。不必代結繩之
008_0336_c_09L政。屋宇之安。不必易居巢之危。其猶
008_0336_c_10L冬食不宜春畊之粒。夜眠不合晝坐之
008_0336_c_11L堂。豈以三仁。出於殷滅。爲不忠。而忠
008_0336_c_12L上古之九黎乎。豈以十哲。生於周衰。
008_0336_c_13L爲不法。而法上古之四凶乎。是以庖犧
008_0336_c_14L晝卦。易道顯乎文王。夏后叙疇。洛書
008_0336_c_15L成乎箕子。况乾坤所位。日月所臨。古
008_0336_c_16L今之致同焉。前後之䂓一也。故趙孟曰
008_0336_c_17L一彼一此。何常之有。牟子曰。彼一時
008_0336_c_18L也。此一時也。迹此觀之。如使舜禹復
008_0336_c_19L生。必曰佛氏。吾無間然矣。湯武復出。
008_0336_c_20L必曰佛氏。吾何言哉。然則魯論所謂後
008_0336_c_21L生可畏。左史所謂視遠如邇者。可謂時
008_0336_c_22L異而事同。代殊而理一。此不可以有殊
008_0336_c_23L時代而廢者二也。殿下若曰。有誣輪回
008_0336_c_24L而廢之。則唐天子之玉簫。不必假道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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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337_a_01L진晉나라 도독都督의 금반지는 이웃 노파가 찾지 못했을 것입니다.118) 윤회설을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지는 노을이 강에 잠기는데 내일 다시 해가 뜨지 않고, 시든 꽃이 언덕에 떨어지는데 내년에 다시 꽃이 피지 않는다고 생각함과 같습니다. 당나라 학자 배휴裵休가 진晉의 허현도許玄度119)가 다시 태어난 몸임을 믿지 않고, 대청 위에 걸려 있는 활이 뱀이라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당나라 위고韋皐120)가 제갈량諸葛亮이 다시 태어난 몸임을 믿지 않고, 길거리의 돌을 호랑이라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진종眞宗이 미소를 지은 것121)은 천존天尊이 탄생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며, 송宋 인종仁宗122)이 울음을 그친 것은 위대한 신선이 세상에 내려왔음을 증명합니다. 더구나 죽음과 삶은 연계되어 있고, 화와 복은 인간이 불러들이는 것이고, 장수와 요절은 천생적으로 정해진 것이며, 상서로움과 재앙의 징조는 드러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漢의) 가의賈誼는 「복조부鵩鳥賦」에서 “천변만화千變萬化는 끝이 없다.”라고 하였으며, 수隋의 이사겸李士謙은 “등애登艾는 소, 서백徐伯은 물고기, 군자는 고라니, 소인은 원숭이가 된다.”123)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사실을 추적해서 본다면 『예기』 「월령月令」에서 “쥐가 변하여 메추라기가 된다.”라고 하였으며, 『장자』 「소요유逍遙遊」에서 “곤鯤이라는 물고기가 변하여 붕鵬이라는 새가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일은 다르지만 이치는 하나요, 말은 다르지만 뜻은 동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의 윤회설이 백성을 속인다고 하여 불교를 폐지할 수 없는 세 번째 이유입니다.전하께서 혹시 재물을 소모한다고 여기어 불교를 폐지하려고 하십니까? 그렇다면 순임금은 역산歷山에서 쟁기를 잡고 농사를 지으면 그만이지 남면南面(임금은 남쪽을 바라봄)하여 임금 노릇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은나라 재상인 이윤伊尹도 신야莘野에서 낫을 휘두르고 농사를 지으면 그만이지 북면北面(신하는 북쪽을 바라봄)하여 신하가 될 필요는 없었습니다. 노나라 음식이 기杞나라 사람들의 입맛에는 적합하지 않고, 월나라의 구운 고기는 진秦나라 사람들의 입맛에 적합하지 않음과 같습니다. 공자가 노련한 농부보다 농사일을 못한다124)고 하여 천하의 사리에 달통하지 못했다고 여기며, 농사일을 물어본 번수樊須를 천하의 사리에 통달했다고 하겠습니까? 맹자가 사람들에게 봉양을 받는다고 해서 검소하지 않다고 여기며, 짚신을 직접 삼는 허행許行125)을 검소하다고 하겠습니까? 이런 까닭에 도심지에 나와 사는 사람들은 구태여 모두가 농사를 지으면서 생활을 할 필요가 없으며, 안방 깊숙이 사는 여인들도 반드시 길쌈을 하여 옷을 직접 지어 몸을 가릴 필요는 없습니다. 하물며 세상을 다스리는 임금과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는 덕을 근본으로 삼고 재물을 지엽적인 것으로 삼습니다. -
008_0337_a_01L而傳。晋都督之金環。不必因隣媼而得。
008_0337_a_02L其猶落暉沉江。應無來日之再繼。殘花
008_0337_a_03L墜岸。必無明春之重敷。豈以裴休是
008_0337_a_04L許玄度之奮身。爲不信。而信堂上之弓
008_0337_a_05L蛇乎。豈以韋臯是諸葛亮之前魂。爲
008_0337_a_06L不眞。而眞路中之石虎乎。是以眞宗開
008_0337_a_07L咲。悟斯天尊之降誕。仁宗止啼。驗是
008_0337_a_08L大仙之下生。况死生所系。禍福所召。
008_0337_a_09L壽夭之分㝎矣。休咎之徵昭焉。故賈誼
008_0337_a_10L曰。千變万化。未始有極。李士謙曰。鄧
008_0337_a_11L艾爲牛。徐伯爲魚。君子爲鵠。小人爲
008_0337_a_12L猿。迹此觀之。禮記所謂鼠化爲鴽。莊
008_0337_a_13L書所謂鯤變爲鵬者。可謂事殊而致一。
008_0337_a_14L言異而意同。此不可以有誣輪回而廢
008_0337_a_15L者三也。殿下若曰。有耗財帛而廢之。
008_0337_a_16L則舜虞操耒於歷山。而不必南面爲君。
008_0337_a_17L伊尹揮鏺於莘野。而不必北面爲臣。其
008_0337_a_18L猶魯食不適杞夫之肥。越灸不合秦人
008_0337_a_19L之嗜。豈以孔丘不如老農。爲不達。而
008_0337_a_20L達問稼之樊須乎。豈以孟軻養於野人
008_0337_a_21L爲不儉。而儉捆屨之許行乎。是以出遊
008_0337_a_22L闤闠者。不必皆耘耔而餬口。深居閨室
008_0337_a_23L者。不必皆績紡而遮身。况經世之君。
008_0337_a_24L治國之主。以德爲本。以財爲末。故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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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337_b_01L그러므로 주나라의 소공召公은 (『서경』 「여오旅獒」에서) “보물로 삼는 것은 오직 어진 사람이니, 가까이 있는 사람이 편안하다.”라고 하였으며, (춘추시대 진晉의) 호언狐偃은 (『대학』에서) “보배로 삼을 것은 별로 없고, 어진 사람과 친하게 지냄을 보배로 삼는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사실을 추적해서 본다면 『대학』에서 “토지를 가지고 있으면 재물이 있다”, 『서경』 「무성武城」에서 “천하에 크게 곡식을 푼다.”라고 한 것은, 즉 토지가 있으면 재물이 모여 소모됨을 걱정하지 않고 재물을 뿌리면 백성이 모이니 쌓아 두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바로 재물을 소모한다고 하여 불교를 폐지할 수 없는 네 번째 이유입니다.전하께서 혹시 국가 정책과 교육을 손상시킨다고 여기어 불교를 폐지하려고 하십니까? 그렇다면 위에서 가르치지 않은 것이 아닌데 요임금은 단주丹舟라는 어리석은 아들이 있었고, 아래에서 간언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닌데 순임금은 고수瞽瞍라는 못난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악취가 나는 풀이 향기 좋은 난초에 섞여 있고, 원앙새가 봉황새를 어지럽힘과 같습니다. 하나라 예羿와 착浞이 불충不忠하여 죽일 수는 있지만 신하가 되는 길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계신癸辛126)이 불분명하여 추방시킬 수는 있지만 임금 모시는 의리를 끊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까닭에 중이 조정의 법을 어기면 경黥(묵형. 얼굴에 죄수라는 표시의 먹물을 들임)을 해도 좋으며 죽여도 좋습니다. 비구니가 세상에 정한 법을 범했으면 의형劓刑(코를 베는 형벌)을 해도 좋고 죽여도 좋습니다. 어찌 부처를 탓하고 미워하며 불교 전체를 폐지할 수 있습니까? 단지 타고난 성품이 선으로 옮겨 가지 못한 것이지, 불교의 가르침이 악으로 물들인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춘추시대 정鄭나라의 자산子産은 “남의 선행은 내가 본받아 실천하고, 남의 악행은 내가 고친다.”127)라고 하였습니다. 당나라의 이사정李師政은 “유생儒生들이 죄가 있어도 공자의 잘못과는 관계가 없으며 승려가 잘못을 저질러도 어찌 이것이 석가세존의 허물인가?”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사실을 추적해서 본다면 『주역』 (「해괘解卦」)에서 이른바 “과오를 용서하고 죄를 용서한다.”라고 한 것과 『서경』 「다방多方」에서 “덕행을 한 사람을 분명히 밝히고 벌을 줌을 신중히 한다.”라고 한 것 등은, 사람 중에 벌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법은 폐지할 수 없음을 분명히 밝힌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국가 정책과 교육을 손상시킨다고 해서 불교를 폐지할 수 없는 다섯 번째 이유입니다.전하께서 혹시 승려가 군대 조직에서 빠진다고 해서 불교를 폐지하려고 하십니까? 그렇다면 도성에 산다고 거짓으로 속이면서 세금을 내지 않는 가구는 얼마나 많으며, 지방의 호족에게 거짓으로 몸을 의탁하여 -
008_0337_b_01L公曰。所寶惟賢。則邇人安。孤偃曰。無
008_0337_b_02L以爲寶。仁親以爲寶。迹此觀之。經傳
008_0337_b_03L所謂。有土。此有財。武成所謂。大賚于四
008_0337_b_04L海者。可謂土有則財聚。不憂耗也。財散
008_0337_b_05L則民聚。不願畜也。此不可以有耗財帛
008_0337_b_06L而廢者四也。殿下若曰。有傷政敎而廢
008_0337_b_07L之。則上非不敎而堯有丹朱之子。下非
008_0337_b_08L不諫而舜有瞽瞍之父。其猶薰蕕雜乎
008_0337_b_09L蘭芷之叢。鸂鶒亂乎鳳凰之群。豈以羿
008_0337_b_10L浞之不忠爲可誅。而塞其爲臣之路乎。
008_0337_b_11L豈以癸辛之不明爲可放。而絕其戴君
008_0337_b_12L之義乎。是以僧干朝憲。則黥之可也。
008_0337_b_13L殺之亦可也。尼犯俗刑。則劓之可也
008_0337_b_14L誅之亦可也。寧咎釋而惡之。并與佛而
008_0337_b_15L廢哉。但以性品。或不遷於善。非是敎
008_0337_b_16L法。能使染於惡。故子產曰。人之所善。
008_0337_b_17L吾則行之。人之所惡。吾則改之。李師
008_0337_b_18L政曰。靑衿有罪。非關尼父之失。皂服
008_0337_b_19L爲非。豈是釋尊之咎。迹此觀之。大易
008_0337_b_20L所謂。赦過宥罪。多方所謂。明德愼罰者。
008_0337_b_21L可謂人雖可罰者有矣。法不可廢者明
008_0337_b_22L焉。此不可以有傷政敎而廢者五也。殿
008_0337_b_23L下若曰。有失偏伍而廢之。則矯托於
008_0337_b_24L輦轂之下。而戶不出稅者。幾多。詐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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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337_c_01L장정壯丁으로 등록되지 않은 사람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불교는 세력이 점차 약해져 가지만 승려들의 역할은 매우 많아 호적에 편입된 가구와 동일하고 일반 백성들과 차이가 없습니다. 양서兩西(황해도ㆍ평안도)에는 군적軍籍에 등록된 승려가 많으며, 삼남三南(경상도ㆍ충청도ㆍ전라도)에는 관의 요구에 부응하는 승려가 많습니다. 중국에 종이를 공물로 보내는 것도 모두 승려들에 의해 나왔으며, 상급 관청에 잡다한 물건을 바치는 것도 모두 승려들이 준비한 것입니다. 그 이외 잡역이 수백 가지이고, 독촉하고 요구함이 수만 가지입니다. 관아 문에서 나오자마자 관아의 명령이 계속 이어집니다. 바빠서 날짜를 어기면 간혹 감옥에 잡혀가기도 하고, 순식간에 닥치는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모르면 매질도 당합니다. 각 도의 외곽에 있는 보루堡壘와 남한산성 등에서 보초를 서기 위해서 천 리 길에서 양식을 지고 와 해마다 성곽을 지킵니다. 몸은 파수 보는 사람과 같고 행적은 전쟁 나간 군인과 같습니다. 감색 머리칼과 파란 눈동자는 바람에 머리 빗질을 하고 비로 목욕을 하였으며, 하얀 버선과 하얀 누더기 옷은 진흙을 뒤집어쓰고 먼지로 더럽혀져 있습니다. 놀랄 만한 급한 상황이 생기면 벌떼처럼 개미처럼 모여들며 전쟁터에 나아가서는 번개처럼 우레처럼 달려 나갑니다. 십만 명으로 대부대를 만들고, 오십 명으로 소부대를 만듭니다. 활과 화살을 좌로 당기고 우로 뽑습니다. 크고 긴 창으로 전방 부대는 돌진하고, 후방 부대는 최후까지 남아서 방어를 합니다. 칼을 쓸 때는 진晉나라ㆍ초나라의 강함을 다투고 진을 칠 때는 진秦나라ㆍ월나라의 병법을 익힙니다. 이런 사실을 추적해서 본다면 『시경』 「당풍唐風」 (〈보우鴇羽〉)에서 “나라의 일을 하느라 힘을 다 쏟는다.”라고 한 것과 『시경』 「소아」 (〈하초불황何草不黃〉)에서 “아침저녁으로 겨를이 없다.”라고 한 것 등은, 은혜를 저버린 자는 적고 정의로운 일을 한 사람은 많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군대 조직에서 빠지기는 하였지만 불교를 폐지할 수 없는 여섯 번째 이유입니다.이상이 위에서 열거한 조목의 대략적인 줄거리입니다. 신의 지혜는 하찮고 정성도 부족하여 이상의 여섯 조목 이외에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불교가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를 하는 데 해로움만 있고 보탬이 없다고 여기십니까? 전대前代에 불법을 숭상한 임금과 불법을 보호한 신하들을 들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임금을 들어 말한다면 불법을 숭상한 임금은 천 명 만 명 이상이 되지만 간략히 몇 명의 임금을 열거하겠습니다.예악을 천하에 널리 밝힌 이로는 어느 누가 후한後漢 명제明帝만 하겠습니까? 유학과 문인 학자를 크게 일으킨 이로는 어느 누가 후한 효장제孝章帝만 하겠습니까? -
008_0337_c_01L於蕃鎭之間。而名不添丁者。何限。而
008_0337_c_02L佛道陵遅。僧役浩穰。有同編戶。無異
008_0337_c_03L齊民。兩西則占軍籍者多。三南則應官
008_0337_c_04L徵者衆。紙楮之貢獻中國者。皆出於緇
008_0337_c_05L衣。雜物之進納上司者。盡偹於白足。其
008_0337_c_06L餘百役。督索万般。衙門纔退。官令繼
008_0337_c_07L至。忙迫失期。則或遭囚繫。創卒罔措。
008_0337_c_08L則或被鞭1)朴 [11] 。至於諸道郊。壘南漢山
008_0337_c_09L城。千里褁粮。每歲守堞。身同戍客。迹
008_0337_c_10L等征夫。紺髮靑眸。櫛風沐雨。素襪白
008_0337_c_11L衲。蒙泥染塵。粵有警急。則蜂屯蟻聚。
008_0337_c_12L爰臨戰伐。則電掣雷犇。千百爲群。什
008_0337_c_13L伍作隊。桃弧棘矢。左挽右抽。大戟長
008_0337_c_14L鈹。前驅後殿。鋒爭晋楚之强。陣習羸
008_0337_c_15L越之法。迹此觀之。國風所謂。王事靡監。
008_0337_c_16L小雅所謂。朝夕不暇者。可謂孤恩者寡
008_0337_c_17L矣。仗義者多焉。此不可以有失偏伍而
008_0337_c_18L廢者六也。此其右列條目之大槩也。臣
008_0337_c_19L智不衛蔡。誠非橫草。莫是此六之外
008_0337_c_20L別有所害。無補於治平而然歟。臣誠言
008_0337_c_21L前代崇奉之君護持之臣而質之。以君
008_0337_c_22L言之。則崇奉之君。不趐千萬。而略擧數
008_0337_c_23L主焉。修明禮樂。孰如漢明帝乎。隆興
008_0337_c_24L「朴」通「扑」{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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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338_a_01L문무를 겸비한 이로는 어느 누가 양梁나라 무제武帝만 하겠습니까? 천하를 통일한 이로는 어느 누가 수나라 고조만 하겠습니까? 국가의 문물제도를 통일되게 정비한 이로는 어느 누가 당나라 태종만 하겠습니까?후한의 명제가 세상을 다스릴 때에는 학문이 뛰어났고 위엄도 대단하였으며 공손함과 검소함을 겸비하였습니다. 사치와 화려함이 없고 국가를 다스리는 경략에 뛰어났으며 유학자를 높이 받들고 덕이 있는 사람을 존경하여 나라의 정치가 밝게 되었습니다. 이때에는 길에서는 노인에게 인사를 하였으며 경전을 들고 뜻을 물어보았습니다. 학식 있는 학자와 문장가들이 많았음은 『시경』 「주남周南」 〈인지지麟之趾〉128)처럼 성대하였습니다. 하ㆍ은ㆍ주 삼대 이래로 성대한 학풍이 이처럼 위대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명제는 석가모니의 불상을 현절릉顯節陵과 청량대淸凉臺에 모시도록 하였으며, 당대의 문장가인 반고班固와 부의傅毅는 부처의 공덕을 찬양하였는데 후한의 가장 뛰어난 글이었습니다. 그런데 종리의鍾離意129)가, 특히 명제의 성격이 “편협하고 자질구레하다.”130)라고 그의 전기에다 기록하였으니 어찌 훌륭한 역사적 평가라고 하겠습니까?후한의 장제가 세상을 다스릴 때에는 유순하고 선량한 사람을 선발해서 등용하여 충간忠諫하는 길을 열었습니다. 정치 체제를 분명히 밝히어 엄한 형벌을 없애고 문장을 좋아하여 유가儒家의 고전을 숭상하였습니다. 이때에는 신작神雀과 신봉神鳳이 왔으며 백조白鳥(학)와 백록白鹿이 나타나는 상서로운 조짐이 있었습니다. 서주 자사徐州刺史 왕경王景131)이 〈부처를 찬송하는 글(金人頌)〉을 올리고 선제先帝(명제)가 부처를 섬긴 공로를 찬미하였는데 『한서漢書』에 실려 있습니다. 그런데 사관들이 참언讒言으로 태자를 폐위시켰으며 해로운 정치를 했다고 썼으니 어찌 진실한 논의라 하겠습니까?양나라 무제가 세상을 다스릴 때에는 진실로 문무를 겸비하여 유업儒業을 널리 알렸습니다. 예술성과 재주가 많아 무기를 거두어 모았으며(전쟁을 끝냈다는 의미) 덕을 베풀고 인정仁政을 실천하여 은택이 먼 지방까지 두루 퍼졌습니다. 이때에 궁궐에는 오색구름과 여섯 마리 용이 궁궐 기둥을 지켰으며 궁궐 정원에는 삼족오三足烏132)와 공작 두 마리가 계단을 지나갔습니다. 인류의 문화가 시작된 이래로 영험하고 신기한 감응이 이처럼 기이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밤낮으로 재계齋戒하였으며 나이가 들어서도 게으르지 않았습니다. 사관 위징魏徵이 -
008_0338_a_01L儒雅。孰如孝章帝乎。文武兼偹。孰如
008_0338_a_02L梁武帝乎。混同四海。孰如隋高祖乎。
008_0338_a_03L混一車書。孰如唐太宗乎。漢明之治世
008_0338_a_04L也。有文雅威重。而恭儉兼焉。無奢靡
008_0338_a_05L淫麗。而經略能焉。有崇儒尙德。而政
008_0338_a_06L治明焉。于斯時也。臨壅拜老。执經問
008_0338_a_07L義。其宿儒文士之濟濟。猶周南獜趾之
008_0338_a_08L洋洋。三代以來。儒風之盛。未有若是
008_0338_a_09L之偉。而詔以釋迦寶像。安顯節陵及淸
008_0338_a_10L凉臺。班固傅毅。頌其勳德。於漢爲最。
008_0338_a_11L而惟鍾離意。特以帝性褊詧。書爲實錄。
008_0338_a_12L豈良史哉。章帝之治世也。選用柔良。
008_0338_a_13L而開忠諫之路。明愼政躰。而除嚴刻之
008_0338_a_14L刑。雅好文章。而崇儒術之典。于斯時
008_0338_a_15L也。有神雀神鳳之來儀。現白鳥白鹿之
008_0338_a_16L瑞祥。徐州刺史王景。上金人頌。美先
008_0338_a_17L帝致佛之功。載于漢書。而惟史氏。特
008_0338_a_18L以譛廢太子書。爲害政。豈篤論哉。梁
008_0338_a_19L武之治世也。允文允武。而闡揚儒業。
008_0338_a_20L多藝多才。而載戢干戈。施德施仁。而
008_0338_a_21L澤周遐裔。于斯時也。殿有五色雲。六隻
008_0338_a_22L龍而守柱。庭有三足烏二孔雀而歷階。
008_0338_a_23L書契以來。靈異之應。未有若是之奇。
008_0338_a_24L而日夕齋戒。到老不倦。史官魏徵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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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338_b_01L“양나라 무제는 하늘이 내려 준 인물이며 삼생三生을 알고 있으니 천하의 어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당나라 문장가인 한유韓愈가 “꿀을 찾았으나 오지 않아 아사餓死하였다.”라고 썼으니 어찌 정직한 기록이라고 하겠습니까?수나라 고조가 세상을 다스릴 때는 모든 지역을 통치하여 아름다운 명성을 열었습니다. 주나라 이후로 내려오는 육관六官133) 제도를 폐지하고 예악을 처음으로 두었으며, 한나라의 삼성三省(중서성ㆍ상서성ㆍ문하성)에 의거하여 법도를 준수하였습니다. 이때에는 “하늘에서는 상서로운 조짐인 구문龜文이 나타났고, 물에서는 오색 기운이 떠올랐으며, 땅에서는 맛있는 물인 예천醴泉이 솟았고, 산山은 만년 세를 누리라.”134)라고 외쳤습니다. 위진魏晉 이후로 국토를 개척한 공로는 이만큼 광대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기주岐州 등 30개 지역에서 절과 탑을 세웠습니다. 『석실론石室論』135)에서 “수나라 문제文帝는 황통皇統을 계승하여 자신의 세대에서 태평성대를 이루었으니 참으로 한 시대의 영명한 군주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당唐의) 두목杜牧이 “지위와 명호名號를 훔쳐 제대로 수명을 누리지 못하였다.”라고 썼으니 어찌 사람을 훈계하는 좋은 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당나라 태종이 세상을 다스릴 때는 반란을 평정하고 쇠약해진 세상 풍속을 혁신하였습니다. 메뚜기를 깡그리 잡아 농사의 재앙을 구제하였으며 군사적인 무력을 떨쳐 먼 지역의 강한 오랑캐를 복종시켰습니다. 이때에는 신령한 다섯 짐승(기린ㆍ거북ㆍ용ㆍ봉황ㆍ백호)과 일각一角(기린)이 서로 모여 상서로운 조짐을 나타내었고, 백호白狐(흰 여우)와 주안朱鴈(붉은 기러기)이 나타나 상서로운 모습을 나타내었습니다. 양한兩漢 이래로 국가의 업적을 떨친 규모가 이보다 큰 적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난 모후母后 목 태후穆太后를 추숭追崇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홍복사弘福寺를 건립하였습니다. 『신당서新唐書』 권2에서 찬미하기를, “성대하다, 태종의 공적이여! 은殷나라의 탕湯임금과 주周나라의 무왕武王과 견줄 만하고, 주나라의 성왕成王과 강왕康王에 가깝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직 송宋나라의 문장가인 구양수歐陽修가 “병력을 동원하여 공적을 얻기를 좋아하니 잘못이다.”라고 썼으니 어찌 진실한 말이겠습니까? 이상의 몇 분 임금들은 모두 세상에 드문 군주였습니다.신하를 말한다면 불법을 보호한 신하는 수천수만 명이 넘습니다마는 간략히 몇 시대의 인물을 거론하겠습니다.진대晉代에는 치초郗超ㆍ손작孫綽ㆍ허순許詢ㆍ도잠陶潛ㆍ왕도王導ㆍ주개周凱ㆍ유량庾亮ㆍ왕몽王蒙ㆍ왕공王恭ㆍ왕밀王䛑ㆍ곽문郭文ㆍ사상謝尙ㆍ대규戴逵 등이 있었습니다.양대梁代에는 임방任昉ㆍ하점何點ㆍ하윤何胤ㆍ심약沈約ㆍ유협劉勰ㆍ부흡傅翕ㆍ부왕傅暀ㆍ -
008_0338_b_01L梁武固天攸縱道亞生知。可謂天下仁
008_0338_b_02L人。而惟韓愈。特以索蜜不至。書爲餓
008_0338_b_03L死。豈直筆哉。隋祖之治世也。君臨万
008_0338_b_04L國。而運啓嘉號。廢周六官。而剏置禮
008_0338_b_05L樂。依漢三省。而聿遵法度。于斯時也。
008_0338_b_06L天兆龜文。而水潤五色。地開醴泉。而
008_0338_b_07L山呼万年。魏晋以來。開拓之功。未有
008_0338_b_08L若是之廣。而岐州等三十。各建寺塔。
008_0338_b_09L石室論曰。隋文開統。身及太平。固一世
008_0338_b_10L之英主。而惟杜牧。特以偸窃位號。書
008_0338_b_11L爲不終。豈警辭哉。唐宗之治世也。戡
008_0338_b_12L㝎禍亂。而革季俗之衰。掇呑蝗虫。而
008_0338_b_13L救年榖之災。肅振軍旅。而服遠夷之强
008_0338_b_14L于斯時也。五靈一角。雜畓而呈祥。白
008_0338_b_15L狐朱鴈。昭彰而現瑞。兩漢以來。剏業
008_0338_b_16L之䂓。未有若是之宏。而追崇穆太后。
008_0338_b_17L流涕而建寺。唐史賛曰。盛哉。太宗之
008_0338_b_18L烈也。比迹湯武。庶幾成康。而惟歐陽
008_0338_b_19L脩。特以好功勤兵。書爲病疵。豈諒言
008_0338_b_20L哉。是皆稀世之君也。以臣言之。護
008_0338_b_21L持之臣。不趐千萬。而略擧數代焉。晋世。
008_0338_b_22L則有郄超孫綽許詢陶潜王導周凱庾亮
008_0338_b_23L王蒙王恭王䛑郭文謝尙戴逵之徒。梁
008_0338_b_24L世則有任昉何點何胤沈約劉勰傅翕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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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338_c_01L소종蕭宗ㆍ이식李寔ㆍ이윤지李胤之ㆍ완효서阮孝緖 등이 있었습니다.당대唐代에는 유선柳宣ㆍ송경宋景ㆍ장열張說ㆍ왕유王維ㆍ왕진王縉ㆍ양숙梁肅ㆍ이선李詵ㆍ유가劉軻ㆍ육우陸羽ㆍ이고李翺ㆍ최암崔黯ㆍ위주韋宙ㆍ두홍점杜鴻漸ㆍ백거이白居易 등이 있었습니다.송대宋代에는 전숙錢俶ㆍ왕단王旦ㆍ양걸楊傑ㆍ양억楊億ㆍ위기魏杞ㆍ이구李覯ㆍ소식蘇軾ㆍ소철蘇轍ㆍ이병李邴ㆍ증개曾開ㆍ이준훈李遵勛ㆍ장덕원張德遠 등이 있었습니다.어떤 이들은 조정의 계획을 돕고 국가 계획에 협동하였으며, 어떤 이들은 산천(煙霞)에 몸을 맡기거나 자연에 은둔하고 살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문장 공부를 원대하게 해서 글재주를 마음껏 펼쳤습니다. 모두가 죽기를 작정하고서 심오한 이치를 탐구하였으며 자신의 육체를 잊고서 불법의 가르침을 받았으니 모두가 견줄 만한 상대가 없는 뛰어난 신하들입니다.이상의 여러 임금과 신하들은 부처를 더욱 힘써 모셨다고 할 수 있지 치국평천하함에 해를 끼쳤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하였습니다.신은 또 전 시대에 불교를 배척한 임금과 불교를 비방한 신하들에 대해서 질문을 올리고자 합니다.임금으로 말하자면 불교를 배척한 임금은 몇 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북위北魏의 무제武帝는 불교를 비방하고 배척하여 도가道家의 태평천군太平天君을 모시는 정륜천궁靜輪天宮을 세우면서 인력과 재물을 낭비하다가 마침내는 전염병에 걸렸습니다. 북주北周의 무제武帝는 스님들을 함부로 죽이고 자신은 황의黃衣를 입었는데 진양晉陽에서 열이 올라 말소리도 내지 못한 채 죽었습니다. 당나라 무종武宗은 사찰과 불상을 없애고 신선이 된다는 금단약金丹藥을 먹었습니다. 회창會昌(무종의 연호) 연간에는 사찰의 방이 2백 칸을 넘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일찍 세상을 하직하였습니다. 후주後周의 세종世宗은 불상을 훼손하고 해마다 스님들의 인적 사항이 기재된 승장僧帳을 만들었습니다. 군사를 일으켜 북쪽을 정벌하러 갔다가 악성 종기가 터져 죽었습니다. 이상의 임금들은 모두 쇠퇴한 시대의 임금들입니다.신하로 말하자면 불교를 배척한 신하는 몇 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당나라의 부혁傅奕이 장도원張道源의 도움에 힘입어 당 태종太宗에게 불교를 혁파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자, 재상 소우蕭禹는 그가 불교를 비방한다는 죄과를 물어 물리쳤으며, 태종은 부혁의 말이 도리어 어긋난다고 미워하여 종신토록 등용하지 않았습니다. 또 북위北魏 재상 최호崔浩가 구겸지寇謙之의 술책을 믿고서 북위 무제에게 승려를 죽여야 한다고 건의를 하였습니다. 사마온공司馬溫公은 그들의 술수를 택한 무지함을 비방하였으며, -
008_0338_c_01L蕭宗李寔李胤之阮孝緖之軰。唐世
008_0338_c_02L [13] 有柳宣宋景張說王維王縉梁肅李詵
008_0338_c_03L劉軻陸羽李翶崔黯韋宙杜鴻漸白居易
008_0338_c_04L之儔。宋世則有錢俶王旦楊傑楊億魏
008_0338_c_05L杞李覯蘇軾蘇轍李邴曾開李遵勗張德
008_0338_c_06L遠之類。或翊亮朝猷。資諧庙筭。或杭
008_0338_c_07L迹烟霞。棲身林壑。或磅磚文章。馳騁
008_0338_c_08L詞句。咸誓死而耽玄。並忘形而禀敎。
008_0338_c_09L是皆空匹之臣也。此數君諸公。可謂奉
008_0338_c_10L佛尤勤。而未聞有害於治平者也。臣又
008_0338_c_11L言前代廢斥之君排毁之臣而質之。以
008_0338_c_12L君言之。則廢斥之君。不過數三。而惟
008_0338_c_13L魏武帝。詆排釋敎。建靜輪天宮。費竭
008_0338_c_14L人財。而終感疾。周武帝。殱戮沙門。
008_0338_c_15L身服黃衣。熱發晋陽。而失音抵死。唐
008_0338_c_16L武宗。罷除寺像。餌金丹藥。會昌不滿。
008_0338_c_17L而早致崩亡。周世宗。毁仆鑄像。歲造
008_0338_c_18L僧帳。擧兵北伐。而疽遺殂落。是皆衰
008_0338_c_19L世之君也。以臣言之。則排毁之臣。不
008_0338_c_20L過數三。而惟傅奕附張道源之助。奏
008_0338_c_21L䟽於唐祖。請罷釋敎。宰相蕭禹。斥其
008_0338_c_22L謗佛之罪科。而太宗惡奕言悖。終身不
008_0338_c_23L齒。又崔浩信冦謙之之術。建白於魏武
008_0338_c_24L誅滅沙門。司馬溫公。譏其擇術之不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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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339_a_01L그리고 당시 길 가던 사람들은 최호의 악행을 원망하였으며 최호의 얼굴에 오줌을 뿌렸습니다. 또 북주北周 시대에 도사 장빈張賓이 위효관韋孝寬의 일당과 결탁하여 북주의 무제에게 불교를 헐뜯는 말을 하고 불상을 허물어야 한다고 하자 대부大夫 견란甄鸞이 불법의 정직함을 논변하였고, 후대에 당나라 상서尙書 당림唐臨은 배척을 근거로 해서 (불교설화집인) 『명보기冥報記』를 지었습니다. 또 당나라 도사 조귀진趙歸眞136)이 유현정劉玄靜의 아첨에 따라 당 무종에게 은근히 참소하여 절을 불 지르고 없앴습니다. 그리고 당시 습유拾遺 왕철王哲도 무종에게 불교를 믿는 사람이 너무 많다고 간언하였습니다. 그리고 사관史官도 불교 혁파를 거론하였음은 호오好惡가 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상의 신하들은 모두 혼란한 시대의 신하들이었습니다.이상의 여러 임금과 여러 신하들은 불교 배척에 매우 철저하였다고 평가를 할 수 있지만 치국평천하에 도움을 주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대체로 전 시대 군주들의 행위는 자신의 손에서 직접 나온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시호市虎137)가 전하는 말이요, 베틀에 앉아 있던 증자의 어머니가 베틀 북을 던지게 된 것138)에 연유하는 것입니다.139)유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는 송대宋代의 학자인 정자程子140)와 주자朱子보다 뛰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정명도程明道는 불상을 배척하지 않았고, 주회암朱晦菴(주자의 호가 회암)은 불서佛書를 즐겨 보았습니다. 장난을 칠 때에 단지 문자로 배척한 것에 불과합니다. 즉 “고원한 듯하지만 내용이 없고, 이치에 가까운 듯하면서 진실을 어지럽힌다.”라고 하였지 불교를 폐지해야 한다는 글은 보지 못했습니다.당나라의 학자 한퇴지韓退之(한유)가 「논불골표論佛骨表」를 올려 불교를 배척하자 서촉西蜀 용 선생龍先生141)이 한유의 말이 불교의 교리에 거슬린다고 원통히 여겨 「비한非韓」을 지어 한유를 공격하였습니다. 나중에 한유가 태전太顚 스님과 교유를 하자 상서尙書 맹간孟簡(한유의 제자)이 한유에게 편지를 보내어 미망迷妄을 고친 점을 좋게 평가하였습니다. 송宋나라의 문장가인 황노직黃魯直(황산곡)은 “한유가 태전 스님을 만난 이후로 불교를 배척하는 주장이 조금 줄었다.”라고 평가를 하였습니다. 구양수는 한유의 인간됨을 사모하였고 그가 불교를 배척함을 좋아하였습니다. 구양수가 언젠가 숭산崇山에 유람을 간 적이 있었습니다. 우연히 스님을 만나 대화를 나누다가 자신도 모르게 저절로 무릎을 꿇었다고 하니, 사희심謝希深 (송의 문장가)이 글을 지어 그 사건을 기록하였다고 합니다. 송나라의 학자인 사마광司馬光은 순자荀子와 맹자孟子의 뜻을 계승하여 불교를 없애려고 하였으나 원통 선사圓通禪師142)를 만난 것이 계기가 되어 갑자기 숙세의 원을 깨달았습니다. 마침내 자신의 예기銳氣를 잊고 공공연히 “불법의 정미함이 우리 유가서儒家書에 벗어나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송나라의 장상영張尙英은 공자의 도를 숭상하여 -
008_0339_a_01L而路人忿浩元惡。行溺其面。又張賓搆
008_0339_a_02L韋孝寛之黨。譎譛於周武。猜毁浮啚。
008_0339_a_03L大夫甄鸞。辨其佛法之正直。而尙書唐
008_0339_a_04L臨。因其抵排。述㝠報記。又趙歸眞。從
008_0339_a_05L劉玄靜之侫。暗訴于唐武。焚廢淨坊。
008_0339_a_06L拾遺王哲。諫其信謟之太過。而史氏論
008_0339_a_07L其革罷。好惡不同。是皆季習之臣也。
008_0339_a_08L此數君諸公。可謂斥佛尤篤。而未聞有
008_0339_a_09L補於治平者也。大抵前代君主之所爲
008_0339_a_10L不出於自用。皆因市虎之傳言。致有機
008_0339_a_11L母之投抒也。業儒之士。莫賢乎程朱。
008_0339_a_12L而程明道。不背塑像。朱晦菴。喜看佛
008_0339_a_13L書。爭戱之間。只以文字斥之不過。曰
008_0339_a_14L似高而無實。近理而亂眞。廢佛之論。
008_0339_a_15L未之見焉。韓退之上表排佛。西蜀龍先
008_0339_a_16L生。憤其言忤。著書攻之。愈後與太顚
008_0339_a_17L交遊。尙書孟簡寄書。嘉其改迷。故黃
008_0339_a_18L魯直謂。韓愈見太顚之後。排佛之論少
008_0339_a_19L沮云。歐陽脩。慕韓愈爲人。喜排釋氏。
008_0339_a_20L甞遊崈山。遇僧談話。不覺膝之自屈。
008_0339_a_21L故謝希深。作文記其事云。司馬光繼荀
008_0339_a_22L孟之志。方營汰去。因謁圓通。忽悟宿
008_0339_a_23L願。遂忘意之自銳故。公之言曰。其精
008_0339_a_24L微不出吾書云。張尙英尊孔氏之道。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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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339_b_01L무불론無佛論을 지으려다가 임제종의 고승인 도솔 종열兜率從悅 스님을 찾아가 마음이 확 트이어 「호법론護法論」을 지었습니다. 나중에 우의정으로 벼슬이 올랐는데, 오랜 가뭄 끝에 비가 내렸으므로 송나라의 문장가인 당자서唐子西(唐庚)가 시를 지어 그의 미덕을 칭송하였습니다.이들은 모두 걸출한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단지 문자로써 불교를 멀리하였을 뿐이지 불교를 폐지하자는 논의는 또 보지 못했습니다. 즉 불법의 이치를 깊이 음미하는 동안에 마음으로 합치하는 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이런 관점에서 논한다면 불교를 숭상하고 모신 임금과 신하는 수천수만 이상입니다. 그런데 불교가 세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당시 불교를 믿은 임금과 신하는 모두 잘못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불교를 배척한 임금과 신하는 두세 명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불교가 유해하다고 해서 당시의 임금의 신하는 모두 옳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과연 불교를 받들고 믿음이 잘못이라고 한다면 후한의 명제 같은 임금이 북위 무제보다 못하며, 송경이 장빈 같은 무리보다 뒤떨어질 것입니다. 과연 불교를 폐지하고 배척함이 옳다고 한다면 북주의 무제 같은 임금이 당의 태종보다 뛰어나며, 최호가 부의 같은 인물보다 현명할 것입니다.그렇지만 태평한 시대를 따진다면 반드시 한漢ㆍ당唐을 말하고, 부의ㆍ송경이 사특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듣지 못했습니다. 혼란한 시대를 말한다면 반드시 북위ㆍ북주를 말하고, 최호ㆍ장빈이 나라를 경륜할 만한 솜씨가 있다고 듣지 못했습니다.전하께서는 반드시 여러 역사를 종합하여 (부처가 없다는) 무불설無佛說에 관하여 단정을 내리십시오. 신 역시 여러 역사를 열거하여 여쭈어 보도록 하겠습니다.옛적 공자가, 노자에게 예를 물었고, 사양師襄에게 거문고를 배웠고, 장홍萇弘에게 음악을 물었고, 담자郯子에게 고대 관직 체제에 대해 배운 것은, 이들 모두에게 취할 만한 점이 있고 『춘추春秋』를 저술하고자 위함이었습니다. 그런즉 담자는 경전에 적히었으며143) 해석하는 이가 관직 명칭의 학설로 기록하였습니다. 나머지 세 사람이 경전에 적혀 있지 않은 것은 편찬하는 이가 이들의 학술이 기예지술技藝之術이라고 여겨 물리쳤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사양ㆍ장홍 등이 어찌 담자보다 현명하지 못하였겠습니까? 대개 관직 명칭은 세상 교화와 관계가 있고 기예는 나라를 다스리는 데 벗어난 것이기 때문입니다.이런 까닭에 구양수와 송기宋祁가 『신당서新唐書』를 편찬할 때에 구양수는 혜정惠淨의 행적을 삭제하고 오직 일행一行144)이 만든 대연력大衍曆을 남겨 두었습니다. -
008_0339_b_01L作無佛論。尋叅從悅。豁省心地。乃著
008_0339_b_02L護法論。後登右揆。久旱而雨故。唐子
008_0339_b_03L西賦詩。頌其美云。此皆豪傑之士。而
008_0339_b_04L只以文字斥之。廢佛之論。又未之見焉。
008_0339_b_05L則翫味之間。默契者存焉。由是論之。
008_0339_b_06L崇奉君臣。不趐千萬。而佛若無補。則當
008_0339_b_07L時君臣。盡皆非乎。廢斥君臣。不過數
008_0339_b_08L三。而佛若有害。則當時君臣。盡皆是乎。
008_0339_b_09L果以崇奉爲非。則漢明諸君。劣乎魏武。
008_0339_b_10L而宋景短於張賔之儔也。果以廢斥爲
008_0339_b_11L是。則周武諸君。拔乎唐宗。而崔浩賢
008_0339_b_12L於傅毅之徒也。雖然論治日。則必曰漢
008_0339_b_13L唐。而未聞傅宋有邪僻之心也。語亂世
008_0339_b_14L則必稱魏周。而未聞崔張有經綸之手
008_0339_b_15L也。殿下必謂綜核諸史。斷無佛說。臣
008_0339_b_16L亦擧數史而質之。昔孔子問禮於老子。
008_0339_b_17L學琴於師襄。問樂於萇弘。學官於郯子。
008_0339_b_18L皆有所取。而其修春秋也。則郯子得書
008_0339_b_19L乎經。而釋之者錄其官名之說。三子不
008_0339_b_20L書乎經。而編之者黜其方技之術。襄弘
008_0339_b_21L諸子。豈不若郯子賢哉。盖官名所以關
008_0339_b_22L於世敎者也。方技所以脫於國經者也。
008_0339_b_23L是故歐陽脩宋祈修唐史也。則歐公偏
008_0339_b_24L削惠淨等迹。而唯存一行大衍之作。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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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339_c_01L송기는 현장玄奘 등의 전기는 모두 삭제하고 오직 도홍道弘이 남긴 지리설地理說을 드러냈습니다. 혜정ㆍ현장 등이 어찌 일행ㆍ도홍 등보다 능력이 미치지 못해서 그렇겠습니까? 대개 대연력은 사계절을 통괄하는 것이요, 지리설은 인간의 일에 관계된 것이기 때문이니, 사관들의 기록을 취함이 합당합니다.사마광이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지을 때, 즉 「태종기太宗紀」에 실린 부혁傅奕이 주술력을 시험한 등의 종류는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기술하고, 현완玄琬145)이 도를 논한 것은 억제하고 싣지도 않았습니다. 어찌 주술력을 시험한 것은 뛰어나고 도를 논한 것은 하열하다고 하겠습니까?대개 주술력을 시험한 것은 호사자好事者들이 근거도 없이 제시하였으므로 인용하여 불교의 공허한 점(虛)을 폄하한 것입니다. 도리를 논한 것은 이치를 탐구하는 자들이 눈을 부릅뜨고 당당하게 수집하였으므로 물리치고 불교의 참된 점(實)을 숨기고 물리친 것입니다. 그리고 구양수ㆍ송기ㆍ사마광이 지은 『신당서』와 『자치통감』은 저 『춘추』를 본받아서 저술되었습니다.그렇기는 하지만 저 『춘추』는 사사로이 편을 드는 것이 없는데, 이 『신당서』와 『자치통감』은 한쪽으로 치우쳐 미워함이 있습니다. 불교의 참된 점은 물리치고 숨기며, 공허한 점은 인용하여 폄하합니다. 어찌 춘추시대의 정직한 역사가인 동호董狐의 붓과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까닭에 불교와 관련된 학설이 역사서에 실리지 않게 된 것입니다.전하께서는 불교가 없던 예전에는 나라가 태평하고 편안하였는데 불교가 있은 후에는 나라의 존속 기간도 짧고 운수도 다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신 역시 전대의 혼란한 시대를 열거하여 묻도록 하겠습니다.혼란하여 멸망한 세상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몇 시대만 대략 열거하겠습니다. 사람을 해치고 많이 죽이기로는 어느 누가 하나라 걸왕桀王만 하겠습니까? 의로운 사람을 해치고 선한 사람을 손상시키기로는 어느 누가 은나라 주왕紂王만 하겠습니까? 권력을 탐내고 공적을 좋아하기로는 어느 누가 진시황제만 하겠습니까?하나라 걸왕이 임금 노릇을 할 때입니다. 그는 탐욕스럽고 포학하였으며 힘은 쇠를 구부릴 정도로 대단하였습니다. 화려한 궁궐과 누대를 지어 총애하는 말희妺喜를 기쁘게 하였으며 산더미 같은 고기와 포를 만들어 백성의 재산을 고갈시켰습니다. 술로 못을 만드니 천 명이 마셨으며, 술지게미로 둑을 쌓으니 십 리 길에서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은덕을 베풀지 않고 포악한 짓을 하니 백성들은 그 괴로움을 참지 못하였으며, 음탕하고 방종한 짓을 하여 백성들을 모두 고생길로 빠뜨렸습니다. 이런 까닭에 하늘이 하나라가 지은 죄에 대하여 벌을 내렸으며, -
008_0339_c_01L公並删玄裝等傳。而獨著道弘地理之
008_0339_c_02L說。淨裝諸師。豈不及行弘軰哉。盖大
008_0339_c_03L衍所以統天時者也。地理所以係人事
008_0339_c_04L者也。見取於史筆宜矣。司馬光修通鑑
008_0339_c_05L也。則太宗紀所載。與傅奕試呪之類。
008_0339_c_06L揚而迺書。與玄琬談道之比。抑而不載。
008_0339_c_07L豈試呪爲優而談道爲劣哉。盖試呪好
008_0339_c_08L事者。孟浪所提故。引之而貶訕佛氏之
008_0339_c_09L虗也。談道探理者。瞋堂所輯故。黜之
008_0339_c_10L而諱却佛氏之實也。然則抑此三史。法
008_0339_c_11L彼春秋而作也。雖然彼春秋。則必無私
008_0339_c_12L挾。而此三史。則互有偏疾。其於釋氏。
008_0339_c_13L宲者黜而諱之。虗者引而貶之。豈皆
008_0339_c_14L董狐之筆哉。此所以佛說之不載於史
008_0339_c_15L氏者也。殿下必謂無佛之前。國治邦寧
008_0339_c_16L有僧之後。年夭運促。臣亦擧前代亂亡
008_0339_c_17L之世而質之。亂亡之世。不可勝記。略
008_0339_c_18L擧數代焉。賊人多殺。孰如夏桀乎。殘義
008_0339_c_19L損善。孰如殷紂乎。貪權好功。孰如秦
008_0339_c_20L皇乎。夏桀之爲君也。貪固肆虐。力能
008_0339_c_21L伸鉤。悅婦寵於瓊宮瑤臺。彈民財於肉
008_0339_c_22L山脯林。酒爲池則千人俯飮。糟築堤則
008_0339_c_23L十里延望。滅德作威。不忍其茶毒。耽
008_0339_c_24L婬縱暴。盡墜其塗炭。是以天降夏氏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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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340_a_01L사람들은 “저 태양은 언제 없어지려나.”146)라고 하는 원망을 품었습니다. 그러자 은나라의 탕왕은 백성들에게 걸을 정벌하겠다는 맹세를 하면서 정벌 길에 나섰고, 중훼仲虺는 탕왕에게 훈계하는 「중훼지고仲虺之誥」라는 글을 지었습니다. 마침내 금성탕지金城湯池처럼 견고한 좌측의 하수河水와 제수濟水를 상실하였고, 반석처럼 견고한 우측의 태산과 화산華山이 무너졌으며, 남쪽의 험준한 지역인 이궐伊闕을 빼앗겼으며, 북쪽을 완전히 방비하는 양장산羊腸山이 붕괴되었습니다. 탕임금은 남소南巢147)로 걸을 추방하였습니다. 명조鳴條로 달아난 걸이 죽자 하나라도 역시 곧이어 멸망했습니다. 그러므로 『서경』 「탕서湯誓」에서 “천명으로 걸을 죽였다.”라고 하였습니다.은나라의 주紂임금이 임금 노릇을 할 때입니다. 그는 언변이 뛰어나 거짓을 잘 꾸몄으며 지혜도 넉넉해 간언을 막았습니다. 옥 술잔과 상아 젓가락을 사용하여 사치가 극에 달하였으며 시뻘건 구리 기둥 위로 사람을 걷게 하는 잔혹한 형벌을 행하였습니다. 세금을 많이 거두어 녹대鹿臺(주임금의 보물 창고)에 보물이 가득 찼으며, 잔악한 짓을 행하여 곡식이 거교鉅橋(주임금의 곡식 창고)에 가득하였습니다. 충성스런 어진 신하들에게는 포락지형炮烙之刑148)을 내렸으며, 추운 겨울 아침 강물을 건너오는 충성스런 신하들을 보고는 정강이가 추위를 견디는지 알아본다고 두 정강이를 베었습니다. 간언을 하여 보필하는 신하들의 살을 가르고 어진 신하 비간比干의 일곱 구멍을 쪼갰습니다.이런 까닭에 하늘은 은나라에 가득 퍼진 포학한 죄에 분노하였으며, 백성은 대대로 원수로 지내는 원통함을 품었습니다. 그리하여 주周나라 무왕은 용감한 병사를 격려하였으며 태공太公 여상呂尙은 직간直諫을 하는 강직한 지사들을 도왔습니다. 마침내 상교商郊(은나라ㆍ주나라가 전투를 벌인 곳)는 화살이 날아가는 전쟁터가 되었고, 목야牧野(은나라와 주나라의 최후 격전지)는 은나라의 군대가 창을 거꾸로 들고 도리어 자신의 군대(은나라)를 공격하는 전쟁터가 되었습니다. 맹문산孟門山(은나라 좌측의 요지)에는 태항산太行山(은나라 우측의 요지)의 먼지가 휘날리고, 북쪽의 항산恒山에는 황하의 물결이 쳤습니다. 군사들이 회동하니 숲처럼 가득하였으며, 죽은 병사들의 피는 방패를 흘려보낼 정도로 치열하였습니다. 은나라의 보물은 모두 불에 탔으며 자신과 국가가 한꺼번에 멸망했습니다. 그러므로 『서경』 「태서泰誓」에서 “천명이 은나라의 주임금을 죽였다.”라고 하였습니다.진나라의 진시황제가 임금 노릇을 할 때입니다. 그는 천성이 모질어 사납고 평소 마음은 탐욕스럽고 잔인하였습니다. 유학자를 구덩이에 파묻어서 어질고 정의로운 사람을 죽였으며 책도 불태웠습니다. 자신의 공적을 칭송하는 사업149)을 크게 일으켰으며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의식도 거행하였습니다. 북쪽 오랑캐가 우환거리가 되자 장군 몽염蒙恬이 북쪽에 만리장성을 쌓았으며, 신선이 되고자 하여 서불徐市로 하여금 동쪽 신선이 산다는 삼신산三神山에 보내어 불로초를 가져오도록 시켰습니다. 백성의 재산을 긁어모으고 부자들은 수도인 함양咸陽으로 이주시켰으며, 백성들의 노동력을 짜내어 위수渭水 남쪽에 아방궁阿房宮을 지었습니다. 2세世 호해胡亥(진시황제 둘째 아들)150)에 이르러서는 권력이 약해져 간사한 자들이 드러낸 야욕이 널리 퍼졌으며, 3세世 자영子嬰에 이르러서는 나라가 망했습니다. 이런 까닭에 구슬이 호지滈池의 임금에게 되돌아가고, 건어물은 진시황제의 시체를 실은 온량거轀輬車151)에 잠기었습니다.유방劉邦은 패서沛西 지방에서 용처럼 웅크리고 있었으며, 항우項羽는 산동山東 지역에서 호랑이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
008_0340_a_01L罪之罰。人懷時日曷喪之怨。於是成湯
008_0340_a_02L行誓衆之征。仲虺作諭王之誥。遂使河
008_0340_a_03L濟失湯池之固。泰華摧盤石之堅。伊闕
008_0340_a_04L割南阻之險。羊膓崩北備之完。放之南
008_0340_a_05L巢。走於鳴條。身終遷死。國亦隨亡。故
008_0340_a_06L湯誓曰。天命殛之。殷紂之爲君也。言
008_0340_a_07L能飾非。智足拒諫。窮奢侈於玉盃象著 [14] 。
008_0340_a_08L重刑辟於炭火銅柱。厚賦稅則財寶鹿
008_0340_a_09L臺。行殘害則粟盈鉅橋。炮烙忠良。斮
008_0340_a_10L朝涉之兩脛。刳剔諫輔。剖比干之七竅。
008_0340_a_11L是以天怒1)啇 [12] 罪貫盈之虐。民抱乃汝世
008_0340_a_12L讎之寃。於是武王勗如熊之夫。太公扶
008_0340_a_13L叩馬之士。遂使*啇郊爲鳴鏑之場。牧
008_0340_a_14L野作倒戈之地。孟門騰太行之塵。恒山
008_0340_a_15L沸大河之浪。師會若林。血流標杵。寶
008_0340_a_16L玉俱焚。身國並滅。故泰誓曰。天命誅之。
008_0340_a_17L秦皇之爲君也。天性剛戾。素心貪殘。
008_0340_a_18L剗仁義於坑儒焚書。崇事業於頌功封
008_0340_a_19L祀。患胡虜則蒙恬北築萬里。慕神仙則
008_0340_a_20L徐市東入三山。畜聚人民。徙豪富於咸
008_0340_a_21L陽。焦勞心力。作宮庭於渭南。陵夷至
008_0340_a_22L於胡亥。姦回逞志。蔓衍及於子嬰。宗
008_0340_a_23L祀不血。是以壁返滈池之君。鮑濽轀輬
008_0340_a_24L之魄。於是劉邦虬據乎沛西。項籍虓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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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340_b_01L마침내 관중關中 지방에서 천하의 패권을 다투는 전투가 일어났습니다. 유방이 패상覇上에 당도하니, 그 지역의 제후들은 양羊을 보내어 항복하였습니다. 효산崤山과 함곡관函谷關에서는 싸우는 소리가 울려 퍼졌고, 농隴과 촉蜀에서는 비릿한 피비린내가 진동하였습니다. 망이궁望夷宮에서 호해는 조고趙高에게 살해당했으며, 자영은 지도軹道152)에서 목에 밧줄을 걸고 항복하였으니, 만년을 위한 계책은 2세世를 지나서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가의賈誼는 「과진론過秦論」에서 “인의仁義를 실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이상의 여러 임금들이 통치하던 시대에 불교가 없었는데도 패망하였으며, 나라의 운수 역시 단명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승려가 있지 않은데도 그렇게 된 것이 분명합니다.오호! 기이합니다.우리나라의 전대 기록을 조사하니 양梁나라에서 신라에 부처님의 사리를 보내자 모든 관리들이 나가 영접하였습니다. 그 이후로 사찰이 웅장한 모습으로 자리를 잡았으며 불상도 찬란히 빛이 났으며 신승神僧도 간간히 배출되었고 기이한 스님도 계속해서 나왔습니다. 불법을 구하러 서역으로 갈 때는 너른 바다에 배를 띄웠으며, 불법을 구해 동쪽으로 돌아와서는 고구려에 머물기도 하고 백제에 거주하기도 하였습니다.삼국의 왕과 신하들은 모두 기쁜 마음으로 달려가 부처를 모셨으며 매우 즐겁게 부처를 섬겼습니다. 심지어는 수염과 머리를 깎고 손가락과 온몸을 소신공양燒身供養하면서 국가의 운명이 오래되고 집안이 잘되기를 기대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신라는 992년, 고구려는 705년, 백제는 618년의 왕조를 누렸습니다. 삼국시대에 불교가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유해하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습니다.고려의 왕씨王氏가 삼한을 통일을 하게 되자 불법이 널리 퍼지고 신도가 많이 늘어났습니다. 높은 관직에 있는 재상에서 재주가 뛰어난 사람들 모두가 마음을 기울여 불교에 귀의하고 불법이 널리 퍼지기를 갈망하였습니다. 혹은 왕족으로 비구니와 스님이 된 사람도 간혹 있었으니 불법이 악을 막고 선을 널리 퍼뜨리는 근본이 되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고려 왕씨가 나라를 475년 동안 통치하였습니다. 고려 왕조 기간 동안에도 불교가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유해하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습니다.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태조 대왕 전하께서는 천명에 응하여 국운國運을 열었으며 흉악한 적들을 제거하였습니다. 위대한 명성은 임금이 된다는 예언이 있었으며 성인의 덕이 있어 구오지위九五之位(제왕의 지위)에 올랐습니다. 경건하고 지혜롭고 도덕심과 재주는 모든 왕의 으뜸이며, 심오한 지혜와 온화하고 공손함으로 뛰어난 인재들을 많이 포용하였습니다. -
008_0340_b_01L乎山東。遂使關中迎爭鹿之戰。覇上送
008_0340_b_02L納羊之降。殽涵轟伐戮之聲。隴蜀漲腥
008_0340_b_03L膻之氣。弑身望夷。繫頸軹道。萬歲之
008_0340_b_04L計。二世而亡。故賈誼曰。仁義不施。此
008_0340_b_05L數君之世。可謂无佛而敗亡相尋。年祚
008_0340_b_06L亦促。此非有僧而致然者朙矣。嗚呼异
008_0340_b_07L哉。若稽我東之前籙。則梁送佛舍利于
008_0340_b_08L新羅。百官郊迎。自爾梵宇崎嶇。尊容
008_0340_b_09L燦爛。神僧間生。異釋繼出。訪道西遊。
008_0340_b_10L則或舫渤桴溟。得法東還。則或居麗止
008_0340_b_11L濟。三國王臣。莫不駿奔而遵。雀躍而
008_0340_b_12L奉。至於剪鬚落髮。灼指燃身。期爲壽
008_0340_b_13L國祐家之助。而新羅歷年九百九十二
008_0340_b_14L年。高麗歷秊七百五年。百濟歷秊六百
008_0340_b_15L一十八年。此時未聞佛之有害於治道
008_0340_b_16L也。逮夫王氏之統合也。玄綱振紐。道
008_0340_b_17L樹增芽。宰輔之冠冕。人倫之羽儀。靡
008_0340_b_18L不倒心而歸投。翹首而佇仰。或至於王
008_0340_b_19L族之爲尼爲僧者。間常有之。冀爲遏惡
008_0340_b_20L弘善之本。而王氏曆秊四百七十五年。
008_0340_b_21L此峕亦未聞佛之有害於治道也。恭惟
008_0340_b_22L我太祖大王殿下。應天啓運。刜惡除兇。
008_0340_b_23L當鴻號四七之符。禦龍飛九五之位。欽
008_0340_b_24L明文思。邁絶百王。濬哲溫恭。牢籠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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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340_c_01L나라를 세운 초창기와 국가의 기틀을 잡은 후에는 취령鷲嶺에 정신을 두고153) 계원鷄園에 마음을 두고서154) 무학 대사無學大師를 방문하여 한양을 수도로 결정하였습니다.태종 대왕께서는 진실로 중용中庸의 도를 잡고서 선왕의 덕을 계승하였습니다. 동정서원東征西怨155)의 경사慶事를 가지고 있었으며 노인을 돕고 유약자를 이끌어 주는 인자함을 쌓았습니다. 남을 해치는 잔악한 자를 제거하고 없애면서도 관대한 처분을 내렸으며(湯網156) ), 형벌을 관대히 하고 죄 있는 사람을 사면하고 길을 가다가 죄수를 만나면 수레를 멈추고 죄의 경위를 물어 보았습니다(禹車157)). 문안을 드리는 여가와 정무를 보고 난 한가한 때는 각원覺苑(사찰)을 찾아다니면서 공空의 종지宗旨를 연구하였습니다.세종世宗ㆍ문종文宗 대에 이르러서는 이제 막 개국한 나라의 초장기에 대단히 신중하게 처신하면서도 공로를 많이 드러내었습니다.세조世祖 대왕께서는 학문을 진작하는 계획(文謨)을 대대적으로 밝히고 군사적인 공적(武烈)을 널리 드러내었습니다. 덕이 있는 사람을 받들고 현명한 사람을 숭상하는 전통을 이어받고, 도리를 논의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위엄을 세웠습니다. 신성하고 총명한 자질로 아름다운 공적을 세우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엄숙하고도 공손하며 경건하고 조심하여 참으로 영웅의 자질에 딱 들어맞았으며 은혜를 가득 내리는 태양을 돌리고 진실한 교풍敎風을 고무시켜 일으켰습니다.성종成宗ㆍ중종中宗 대에 이르러서는 역대 왕들의 아름다운 명령을 이어 갔으며 그러한 규범을 후대에 전하였으니, 특별히 승과僧科를 설치하여 나라의 과거 시험과 동급으로 하였습니다.명종明宗ㆍ선종宣宗 대에 이르러서는 역대 왕들이 남긴 교훈을 실천하느라 부지런히 노력하였으며 그들이 남긴 계획을 경건히 실천하였습니다.지혜로우신 인조 대왕仁祖大王 전하께서는 역대 왕들의 큰 업적을 모으고 하늘이 내린 천명을 잘 알았습니다. 반란을 제압하고 포악한 사람을 죽이는 도리를 실천하였습니다. 위험한 상황 앞에서는 임기응변으로 처리하는 권도權道를 생각하였습니다. 나라의 재앙이 될 만한 싹이 트면 반드시 자르고 사죄四罪158)에게 벌을 내리고 백성의 농사에 반드시 관심을 가져 육책六責159)으로 스스로를 지켜 나갔으니, 참으로 예로부터 지금까지 짝을 찾기 힘든 참된 군주이며, 현재를 뛰어넘어 영원히 적수가 없을 정도인 성군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연꽃 속에 간직되어 있는 진리와 깨달음의 도를 그대로 두고 고치지 않으며 북돋아 주고 베지를 않았습니다. 훌륭한 왕의 자손들이 대대로 계승하여 내려와 그 자신 한 몸은 경사를 누리며 영원토록 끝이 없는 국가 사업을 후대에 전하였습니다. 이러한 때에도 불법이 나라를 다스리는 도에 해로움이 있다고 듣지 못했습니다.『시경』 「주송周頌」 (〈민여소자閔予小子〉)에서 “위대한 조상들을 생각한다.”라고 하였으며, 『시경』 「노송魯頌」 (〈반수泮水〉)에서 “자신의 마음을 밝혀 나라를 세운 공로가 많은 조상에게 다가간다.”라고 하였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역대 빛나는 조상들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서경』 「대우모大禹謨」에서 “항상 생각함이 조상의 공로에 있다.”라고 하였으며, -
008_0340_c_01L聖。草昧之初。權輿之後。栖神鷲嶺。致
008_0340_c_02L情鷄園。訪得無學。㝎都漢陽。太宗大
008_0340_c_03L王。允執厥中。克肖其德。蘊東征西怨
008_0340_c_04L之慶。貯扶老携幼之仁。去殺勝殘。輒
008_0340_c_05L解湯網。寛刑赦罪。爰停禹車。問安之
008_0340_c_06L暇。垂拱之餘。鉤深覺苑。索隱空宗。至
008_0340_c_07L于世宗文宗。克愼厥緖。篤叙乃功。世
008_0340_c_08L祖大王。丕顯文謨。維揚武烈。承崇德
008_0340_c_09L尙賢之統。立論道經邦之威。聖神聰明。
008_0340_c_10L用勱嘉績。嚴恭寅畏。允恊英姿。輪昇
008_0340_c_11L惠日。皷振眞風。迄于成宗中宗。嗣厥
008_0340_c_12L休命。傳此風䂓。特設僧科。例同國試
008_0340_c_13L及乎明宗宣宗。敢勤厥訓。祗服斯猷
008_0340_c_14L睿聖仁祖大王殿下。集厥大勳。顧諟明
008_0340_c_15L命。行救亂誅暴之道。詧臨危制變之權。
008_0340_c_16L孽薅必鋤。四罪能施。稼穡必念。六責
008_0340_c_17L自全。實曠古難雙之眞主也。亦超今永
008_0340_c_18L隻之聖君也。然而蓮藏之詮。菩提之道。
008_0340_c_19L存而不革。培而不剪。文子文孫。乃繼
008_0340_c_20L乃承。享一人有慶之禎。垂萬歲無疆之
008_0340_c_21L業。此時亦未聞佛之有害於治道也。周
008_0340_c_22L頌曰。念玆皇祖。魯頌曰。昭假烈祖。伏
008_0340_c_23L願殿下。念玆烈祖。禹謨曰。念玆在玆。
008_0340_c_24L「啇」通用「商」{編}次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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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341_a_01L『서경』 「군아君牙」에서 “조상들을 욕되게 하지 마라.”라고 하였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이와 같은 조상들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일반적으로 천하에는 불교가 없는 나라가 없습니다. 이마에 문신을 새기고 이빨에 옻칠을 하는 나라, 짐승처럼 마시고 상투를 치는 풍속이 있는 지역, 풀옷을 입고 털을 먹는 지역, 몸에 문신을 새기고 머리를 늘어뜨리는 지역, 구이팔만九夷八蠻의 바깥 지역, 오융육적五戎六狄의 사이에도 모두 다 승려가 있습니다. 그 지역을 다스리는 임금이나 사대부가 백성을 교화함은 승려들 덕분이고, 승려들에 의해 자신들의 절개를 온전히 지킬 수 있었습니다.하물며 전하의 아름다운 덕행은 금수를 포용하고 지극한 사랑은 초목에까지 두루 미칩니다. 어찌 소를 양으로 바꾸어 살린 것에 구애받겠습니까?160) 어찌 나무와 기러기의 능력이 다르다고 해서 죽음에 대해 치우친 생각을 하십니까?161)삼가 역대 고승들의 족보를 보면 국사國師 도선道詵(827∼898)은 우리 동방의 성승聖僧입니다. 당나라에 들어가 일행一行에게 불법을 전수받았습니다. 당나라의 도사道士인 윤음尹愔은 “일행 화상은 참으로 성인이다.”162)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한나라 무제武帝 때의 천문가인) 낙하굉洛下閎이 설명한 6백 년 예언설을 받아들여 『주역』의 대연수大衍數163)를 추측해서 점성가들의 오류를 바로잡았습니다. 도선 대사는 일행 스님의 오묘한 학설을 모두 이어받고 동쪽 신라로 돌아왔습니다. 천지의 이치를 연구하고 음양의 조화를 관통하였습니다. 높고 낮은 산을 올라가 두루 조사해서 사찰을 건립하여 천오백여 개의 비보裨補(도와서 이익이 되게 함)의 장소로 삼았습니다. 비보란 국가를 도와서 이익이 되게 한다는 뜻입니다. 지세地勢가 가장 신령하면 반드시 예언하기를, “이 절이 흥하면 이 나라가 흥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도선 대사의 말이 거짓이고 현실적인 근거가 없다면 그만이지만 그의 학술이 기이하고 징험이 있으면, 즉 사찰을 건립함이 국가에 도움이 되고 나라를 다스리는 도에 손해됨이 없음이 또한 분명합니다.근래 어지러워진 세상에 이름난 거대한 사찰은 불에 타 없어지고, 또 권세가들에 의해서 절을 많이 빼앗겼습니다. 나라의 큰 기운이 무너지고 산맥의 기운이 쇠약해졌습니다. 불교가 망하겠습니까? 나라가 흥하겠습니까? 그렇지만 도선 대사의 예언으로 본다면 사찰이 있고 없음은 국가의 흥망성쇠와 관계가 있습니다. 신은 항상 국가를 위해서 애통하게 여기고 있으며 나라를 위해서도 불안해하고 있습니다.또 승려들의 역사를 조사해 보니 제왕이 흥성할 때는 반드시 명망이 있는 고승을 방문하였으며 국사國師라는 호칭을 세웠습니다. 국사란 나라의 임금을 돕는 스승이라는 의미입니다. 고승의 도덕심과 명망은 가장 높아 -
008_0341_a_01L君陳 [15] 曰。無忝祖考。伏願殿下。念玆祖
008_0341_a_02L考。凡天下未有無佛之國。雖彫題漆齒
008_0341_a_03L之邦。嘼飮魋結之俗。卉服毛茹之疆。
008_0341_a_04L文身被髮之域。九夷八蠻之外。五戎六
008_0341_a_05L狄之間。咸皆有僧。蒙其君長之化。全
008_0341_a_06L其操守之節。况殿下之懿德涵於禽獸
008_0341_a_07L至仁浹於草管。豈隘牛羊互易之生哉。
008_0341_a_08L豈偏木鴈異喜之殺哉。謹案釋譜。國師
008_0341_a_09L道詵。我東之聖僧也。入唐受法於一行。
008_0341_a_10L一行者。尹愔所謂聖人者也。膺洛下閎
008_0341_a_11L六百年之讖。推大衍數。紏其數家之繆。
008_0341_a_12L詵盡傳其妙。秘而東歸。縕天地。貫幽冥。
008_0341_a_13L陟巘登巒。歷銓建寺。爲一千五百裨補
008_0341_a_14L之所。裨補者。裨補國家之謂也。其地
008_0341_a_15L勢㝡靈。則必讖云。此寺興則此國興。
008_0341_a_16L其言恐訹狂妄則已。其術神異徵驗。則
008_0341_a_17L寺宇之剏。有益於國家。無損於治道者
008_0341_a_18L亦明矣。近世澆灕。名籃巨刹。鞠爲火
008_0341_a_19L熸。又爲勢奪。元氣剝喪。山脉凋零。佛
008_0341_a_20L將亡耶。國將興耶。雖然以讖觀之。寺
008_0341_a_21L宇之成毁有。則國家之興亡繫焉。臣常
008_0341_a_22L爲國痛之。爲國危之。又勘僧史。帝王
008_0341_a_23L之興也。必訪尊宿。立國師之號。國師
008_0341_a_24L者。師補國君之謂也。其道望㝡高。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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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341_b_01L“나라가 흥하려면 신승神僧이 출현한다.”라고 반드시 기록하였습니다.중국을 예로 들어 말하겠습니다. 후한後漢 명제明帝 때의 마등摩騰, 양梁나라 무제武帝 때의 보지寶志(418∼514), 수나라의 지의智顗(538∼597), 당나라 태종 때의 현장玄奘(600∼664), 송나라 태조 때의 마의麻衣 등이 바로 그들입니다.해동海東을 예로 들어 말하겠습니다. 신라 시대의 묵호자墨胡子, 고려 시대의 순도順道, 백제 시대의 난타難陁, 송악의 도선道詵, 한양漢陽의 무학 대사 등이 바로 그들입니다.이상의 여러 승려들이 교활하고 남을 속였다면 그만이지만 그들의 불도는 넓고도 멀리 퍼졌습니다. 즉 신승이 출현함은 국가에 이익을 주었지만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도 손해가 없음은 또한 분명합니다.요즈음 세상은 황당하여 큰 덕을 가진 스님은 연기처럼 사라졌고, 불법이 높은 고승들은 거품처럼 사라지고 또 갑자기 단절되었습니다. 불법이 내려오는 계통은 막혔으며, 사찰은 황폐해졌습니다. 불교가 장래에 쇠퇴하겠습니까? 아니면 국가가 미래에 흥성하겠습니까? 그렇지만 비기秘記를 근거로 해서 본다면 신승의 출현 유무에 따라 국가의 흥망성쇠가 관계되어 있습니다. 신은 항상 국가를 위해 안타까이 여기고 나라를 위해 근심을 하고 있습니다.아! 전체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사찰이 있으면 이익이 있고, 승단이 없으면 손해가 있습니다. 치도治道의 손익은 역시 사찰의 유무와 관련이 있습니다. 하필이면 승단을 없애고 절을 허문 연후에 치국평천하를 이룰 수 있다고 하십니까? 신은 거짓으로 전하를 속이는 것이 아닙니다. 전하께서는 역사서를 섭렵하시어 고금의 일을 환하게 알고 있습니다. 사찰을 없애고 흥한 임금이 몇 분이 됩니까? 승단을 존속시키고서 갑자기 망한 임금이 몇 분이 됩니까?또 비구니가 있음은 한대漢代에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왕의 후궁인 첩여婕妤164)와 궁녀 등 230여 명은 속세에 염증을 느끼고 불교로 귀의하였습니다. 여혜경呂惠卿165) 등은 도사 628명과 함께 관직을 버리고 승복을 입었습니다. 현종顯宗은 열 군데에 절을 세웠습니다. 성안에 있는 세 곳의 절에는 비구니와 첩여 등을 편안히 거주하도록 하였고, 성 밖의 일곱 개 절은 스님을 안주시키면서 여혜경 등을 머물도록 하였습니다. 성 안팎으로 구분 지은 것은 남녀의 구별이 있기 때문입니다. -
008_0341_b_01L必記云。國之將興。神僧出。以中國言
008_0341_b_02L之。漢明之於摩騰。梁武之於寶誌。隋
008_0341_b_03L祖之於智顗。唐宗之於玄奘。宋祖之於
008_0341_b_04L麻衣是也。以我東言之。新羅之於墨胡。
008_0341_b_05L高麗之於順道。百濟之於難陁。松嶽之
008_0341_b_06L於道詵。漢陽之於無學是也。其人黠頑 [16]
008_0341_b_07L欺謎則已。其道恢弘廣達。則神僧之出
008_0341_b_08L有益於國家。無損於治道者亦明矣。近
008_0341_b_09L世荒唐。碩德煙消。開士漚滅。又爲斗
008_0341_b_10L絕。道統陻塞。禪林蕪穢。佛將衰耶。國。
008_0341_b_11L將盛耶。雖然以記觀之。神僧之出沒有
008_0341_b_12L則國家之盛衰係焉。臣常爲國慨然。爲
008_0341_b_13L國愀然。噫。合而觀之。有寺則在所益
008_0341_b_14L矣。無僧則在所損矣。治道之益損。亦
008_0341_b_15L預乎其間。而何必曰除僧毁寺。然後爲
008_0341_b_16L治平者哉。臣非架空而誣罔於殿下也。
008_0341_b_17L殿下涉獵圖史。曉達古今。廢寺而勃興
008_0341_b_18L者。有幾君乎。存僧而忽亡者。有幾主
008_0341_b_19L乎。且僧有尼衆。始於漢世。當時王婕
008_0341_b_20L妤等。與宮媛二百三十餘人。厭俗歸眞
008_0341_b_21L呂惠卿等。與道士六百二十八人。投簮
008_0341_b_22L被衲。顯宗建寺十所。城內三寺安尼
008_0341_b_23L婕妤等住之。城外七寺安僧。惠卿等住
008_0341_b_24L之。所以限內外者。男女有別故也。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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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341_c_01L우리 조선에서도 그 법도가 역시 실천되었습니다. 자수원慈壽院166)ㆍ인수원仁壽院167) 두 원院은 궁궐 바깥에 있으니 즉 선대 왕후王后의 내원당內願堂168)입니다. 봉은사奉恩寺(서울 강남구 삼성동)와 봉선사奉先寺(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두 사찰은 능침陵寢 안에 있으니, 즉 선왕先王의 외원당外願堂입니다. 내외內外를 구분 지은 것은 역시 남녀의 구별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일조일석一朝一夕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실로 선왕先王ㆍ선후先后의 제도입니다. 사찰은 국가와 더불어 흥하였고 국가와 함께 망하였습니다. 사찰이 있으면 국가의 경사요, 사찰을 훼손하면 국가의 재앙입니다. 그러므로 『시경』 「대아大雅」 〈첨앙瞻卬〉에서 “사람들이 망한다고 하니, 마음의 근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자수원ㆍ인수원을 철폐하면 전하의 근심이 됩니다. 『시경』 「소아」 〈육아蓼莪〉에서 “병이 비어 있음은, 술잔의 수치이다.”라고 하였으니, 봉은사ㆍ봉선사가 쇠망하면, 즉 전하의 수치일 것입니다. 지금 자수원ㆍ인수원 모두를 철폐해서 비구니를 내쫓아 보내었으며, 봉은사ㆍ봉선사를 모두 폐기해서 노비들을 몰수하였습니다. 우뚝 솟은 사원들이 고대 은나라의 황폐한 도읍지처럼 처참한 모습을 띄고 있으며, 청정한 스님과 비구니들은 모두 곤궁에 처한 사람들의 슬픔을 가지고 있습니다. 회상조용繪像雕容(불상)은 마을 아낙네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방포원정方袍圓頂169)은 마을 어린이들의 눈물을 닦아 줍니다. 전하의 관대한 마음은 충분한데 무엇을 꺼리어 선후가 남긴 내원당의 비구니들을 내쫓으십니까? 전하의 부富 정도면 충분한데 무엇이 부족하기에 선왕이 남긴 외원당의 노비들을 빼앗으십니까?(『춘추좌씨전』 「소공昭公」 15년에) 목자穆子가 “옛날의 좋은 것을 버리면 상서롭지 못하다.”라고 하였으니, 오늘날 상서롭지 못한 것으로는 사원을 폐기한 것이 가장 큽니다. 우자鄅子가 “나는 돌아갈 곳이 없다.”(「소공」 18년)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돌아갈 곳이 없기로는 비구니들을 쫓아낸 것이 가장 큽니다.천리天理로 말을 하자면 선왕ㆍ선후의 법도를 따름이 이치에 순응함입니다. 인사人事로 말을 하더라도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논의를 따름은 이치에 위배됩니다. 그러므로 『서경』 「태갑太甲」 상에서 “너의 조상들의 행실을 따른다.”라고 하였으며, 『서경』 「낙고洛誥」에서는 “전대 사람이 이룬 업적을 더욱더 굳건히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이렇게 한다면 천리에 순응하는 것입니다.『춘주좌씨전』 「성공成公」 9년에서 “선군先君을 잊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며, 『예기』 「교특생郊特生」에서 “조상의 명을 받든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인사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
008_0341_c_01L於我東。其揆亦行。夫慈壽仁壽兩院
008_0341_c_02L在宮掖之外。即先后之內願堂也。奉恩
008_0341_c_03L奉先兩寺。在陵寢之內。即先王之外願
008_0341_c_04L堂也。所以限內外者。亦男女有別故也。
008_0341_c_05L此非一朝一夕之剏。實是先王先后之
008_0341_c_06L制也。與國同興。與國同亡。有成則國
008_0341_c_07L之慶也。有毁則國之殃也。故大雅曰。
008_0341_c_08L人之云亡。心之憂矣。兩院廢則殿下之
008_0341_c_09L憂也。小雅曰。瓶之罄矣。惟罍之恥。兩
008_0341_c_10L寺衰則殿下之恥也。今兩院盡廢。放黜
008_0341_c_11L尼衆。兩寺盡棄。削沒奴婢岧嶢寺院。
008_0341_c_12L帶殷墟之慘。淸淨僧尼。含楚囚之悲
008_0341_c_13L繪像雕容。傷心於巷婦。方袍圓頂。拭
008_0341_c_14L淚於閭兒。殿下之寛。有何所忌。而黜
008_0341_c_15L先后內願堂之尼衆乎。殿下之富。有何
008_0341_c_16L所乏。而削先王外願堂之奴婢乎。穆子
008_0341_c_17L曰。棄舊不祥。今日之不祥。孰若寺院
008_0341_c_18L之廢棄哉。鄅子曰。余无歸矣。今日之
008_0341_c_19L無歸。孰若尼衆之放逐哉。以天理言之。
008_0341_c_20L循先王先后之法則順也。以人事言之。
008_0341_c_21L從一朝一夕之議則背也。故太甲曰。率
008_0341_c_22L乃祖攸行。洛誥曰。篤前人成烈。苟如
008_0341_c_23L是則順天理者也。左傳曰。不忘先君
008_0341_c_24L禮記曰。受命于祖。不如是則背人事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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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342_a_01L일단 임금과 백성의 관계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임금이 있으면 반드시 백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詩』에서 “나만 홀로 백성이 아니랴?”170)라고 하였고, 『서경』 「대우모大禹謨」에서 “사랑해야 할 사람은 임금이 아닌가?”라고 하였습니다.비구니들이 어찌 전하의 백성이 아니며, 그리고 전하는 비구니들의 임금이 아니겠습니까? 백성은 임금을 받들어 모시며 임금은 백성을 부립니다. 그러므로 백성의 입장에서는 의리상 당연히 정성스럽고 공경해야 합니다. 임금의 입장에서는 백성을 사랑하고 관대하고 어질게 대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존비尊卑의 명분이고 상하 간에 편안히 사는 길입니다. 만약 비구니를 추방시킴이 과연 옳다면 선대 왕들의 영령이 전하에게 부끄러움을 가지게 될 것이요, 사원을 철폐함이 과연 잘못되었다면, 즉 전하께서는 선대 왕들의 영령에 부담감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아! 이상의 일로써 추론해 본다면 사원이 있으면 순리에 따르는 것이요, 비구니를 추방함은 순리에 위배됩니다. 정치가 순리적으로 되어 나갈 것인가 혹은 잘못되어 나갈 것인가의 여부도 역시 사원의 존폐와 비구니의 추방과 연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필 사원을 혁파하고 비구니를 추방시킨 연후에 인정仁政을 실천할 수 있다고 하십니까?신은 근거도 없이 전하를 현혹시킴이 아닙니다. 전하의 효도는 천심天心을 감동시키고 지혜는 인도人道에 달통하였습니다. 선대 왕후께서 남긴 법도를 생각한다면 어찌 차마 비구니를 추방시킬 수가 있습니까? 선왕의 옛 법도를 생각한다면 어찌 차마 노비들을 빼앗을 수 있겠습니까?또 절에는 역대 제왕들의 위패를 모셨는데 당대唐代에 시작되었습니다. 개원開元(713∼741) 연간에 활동한 도의 선사道義禪師가 금각사金閣寺를 세웠습니다. 대종代宗이 두 종류의 세금으로 도움을 주니 고조ㆍ태종 이하 일곱 분 왕들의 위패를 모시고 각각 황제의 칭호를 그 위패에 표시하였습니다. 광순문光順門에 모든 관리를 세우고 사찰 안으로 맞이하여 차례로 제사를 올리게 하였으며 이때부터 해마다 지내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습니다. 당시 태묘太廟와 동쪽과 서쪽의 두 궁궐에 영지靈芝가 자라니 황제가 시를 지어 찬미하였습니다.171)우리 조선에서도 대개 당의 제도를 본받아 내외 원당願堂에 왕의 위패를 모신 지가 수백 년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왈가왈부할 일도 아니요 참으로 공경하고 존중해야 할 의식입니다. 지금 하루아침에 흙더미 속에 위패를 묻어 버렸으며 제단도 붕괴되었고 제사도 끊어졌습니다. 전하께서는 그 지역이 아닌 곳(즉 사찰이라는 의미)에 위치하여 위패를 설치하기가 합당하지 않아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시대가 많이 지나가서 오랜 세월이 흘러 존속시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
008_0342_a_01L也。姑以君民語之。有君則必有民。故
008_0342_a_02L詩云。我獨非民。書云。可愛非君。尼衆
008_0342_a_03L豈非殿下之民。而殿下豈非尼衆之君
008_0342_a_04L哉。民以君戴。君以民使。故在民義當
008_0342_a_05L慤謹。在君愛宜寛仁。此尊卑之名分。
008_0342_a_06L上下之安寧也。若放尼果是。則先靈有
008_0342_a_07L愧於殿下矣。若廢院果非。則殿下有負
008_0342_a_08L於先靈矣。噫。推而觀之。存院則在所
008_0342_a_09L順矣。放尼則在所背矣。政軆之順背。
008_0342_a_10L亦與乎其間。而何必曰。罷院黜尼。然後
008_0342_a_11L爲仁政者哉。臣非鑿虗。而眩亂於殿下
008_0342_a_12L也。殿下孝感天心。明通人道。思先后
008_0342_a_13L之遺範。則忍黜其尼衆乎。念先王之舊
008_0342_a_14L模。則忍削其奴婢乎。且寺設聖位。始
008_0342_a_15L於唐世。禪師道義。建金閣寺。代宗助
008_0342_a_16L以二稅。設高祖太宗已下七聖位。各以
008_0342_a_17L帝號標其上。立百僚於光順門。迎入寺
008_0342_a_18L內。以次致祀。自是歲爲常准。于時太
008_0342_a_19L廟二宮。生靈芝帝。賦詩美之。至於我
008_0342_a_20L東。盖取諸此。夫聖位之設於內外願堂
008_0342_a_21L者。數百秊矣。此非曰可曰否之端。實
008_0342_a_22L是乃敬乃重之儀也。今一朝瘞於沙土
008_0342_a_23L之中。壇墠旣崩。禘祫斯絶。聖慮必謂
008_0342_a_24L處非其地。不宜設而然歟。抑世數久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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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342_b_01L만약에 그 지역이 아닌 곳에 위치했다고 한다면, 즉 당시 사람들의 식견이 높지 못함이요, 전하의 잘못이 아닙니다. 만약 시대가 많이 지나가서 오랜 세월이 흘러서 그렇게 된 것이라면, 즉 전대의 경전에 근거가 있고 흙더미에 묻힐 것이 아닙니다. 은대殷代에는 삼종三宗172)이 있고 주대周代에는 칠묘七廟173)가 있는데, 이것을 종묘라고 합니다. 종묘의 법은 고대에는 조주祧主174)는 태조묘의 동서쪽 협실에 모셨으며, 흙더미 속에 묻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습니다. 주대周代에 이르러 소昭175)의 자리에 있는 신주를 옮길 때에는 문왕文王의 사당으로 옮기고, 목穆의 자리에 있는 신주를 옮길 때에는 무왕武王의 사당으로 옮기는데, 역시 흙더미에 묻는다는 소리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물며 시조는 백대가 지나더라도 신주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이치가 없습니다.사원은 본래 불우佛宇라고 불렀습니다. 비록 그 자리가 아니기는 하지만 이미 제왕의 위패를 모셨다면 참으로 종묘와 같습니다. 옛적 춘추시대에 정鄭나라의 자산子産이 향교鄕校를 허물지 않자 공자는 그가 어질다고 여겼고, 이영李榮이 사당의 신주를 헐어야 한다고 논의하자 한유韓愈는 그를 비난하였습니다. 하물며 우리 태조 이하 역대 왕들께서는 어떠한 존귀한 신령이기에 어찌 차마 왕의 호칭이 새겨져 있는 신주를 진흙 속에 묻을 수 있겠습니까?춘추시대의 채묵蔡墨이 “옛 유적을 허물지 않는다.”(「소공」 32년)라고 하였습니다. 국가의 옛 유적으로 제사를 지내는 장소만큼 중요한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춘추시대의 자어子魚가 “옛날의 제도를 따른다.”(「정공」 4년)라고 하였습니다. 국가의 옛날 제도로 체협지사褅祫之祀176)만큼 중요한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천리를 기준으로 말을 한다면 공경할 만한 귀중한 유적을 지켜 나가면 이득이요, 인사를 기준으로 말을 한다면 왈가왈부하는 논쟁을 일으킨다면 손실입니다.그러므로 『서경』 「상서商書」 〈열명說命〉 하에서 “선왕들이 완성한 법도를 거울로 삼는다.”라고 하였으며, 『서경』 「주서周書」 〈필명畢命〉에서 “선왕들이 완성한 공적을 공경하며 따른다.”라고 하였습니다. 진실로 이와 같이 한다면 천리를 얻게 될 것입니다.『주역』 「수괘需卦」 구삼九三에서 “공경하고 신중하면 패배하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며, 「곤괘困卦」 구오九五에서 “제사를 지냄이 이롭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즉 인사를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신이 날짜를 계산해 보니 가뭄과 기근은 신주를 묻은 해에 시작되었으며 지금 4년째로 접어듭니다. 벼를 심지도 못하고 곡식 수확도 못하였으며, 멀건 죽도 솥에는 없습니다. 남아를 데리고 가서 (종으로 만들어) 곡식과 바꾸니 부부가 마주 보고 눈물을 흘리며, -
008_0342_b_01L不應存而然歟。若曰處非其地。則當時
008_0342_b_02L之識見未高。非殿下之失也。若曰世數
008_0342_b_03L久遠。則前代之經典有據。非沙土之瘞
008_0342_b_04L也。殷有三宗。周有七廟。是謂宗廟。宗
008_0342_b_05L廟之法。古者祧主。藏於太祖廟之東西
008_0342_b_06L夾室。未聞瘞於沙土之中也。至周則昭
008_0342_b_07L之遷主。藏於文王之廟也。穆之遷主。
008_0342_b_08L藏於武王之廟也。亦未聞瘞於沙土中
008_0342_b_09L也。况始祖百世。無遆遷之義。今寺院
008_0342_b_10L本稱佛宇。則雖非其地。旣設聖位。則
008_0342_b_11L實同宗廟。昔子產不毁鄕校。孔子仁
008_0342_b_12L之。李榮議毁廟主。韓愈非之。况我太
008_0342_b_13L祖已下列聖。是何等尊靈。而忍以泥塵
008_0342_b_14L瘞其標號之主哉。蔡墨曰。不廢舊績。
008_0342_b_15L國之舊績。曷若壇墠之位乎。子魚曰。
008_0342_b_16L以率舊職。國之舊職。曷若禘祫之祀乎。
008_0342_b_17L以天理言之。遵迺敬迺重之蹟則得也。
008_0342_b_18L以人事言之。起曰可曰否之諍則失也。
008_0342_b_19L故1)啇書曰。監于先王成憲。周書曰。欽
008_0342_b_20L若先王成烈。苟如是則得天理者也。需
008_0342_b_21L之九三曰。敬愼不敗。困之九五曰。利
008_0342_b_22L用祭祀。不如是則失人事者也。臣以年
008_0342_b_23L月考之。旱饉始於瘞主之歲。于今四載。
008_0342_b_24L秧糓退鎌。饘酏辭鼐。持男易粟。則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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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342_c_01L자식을 팔아 살아 나갈 계책을 세우니 부모자식 간에 서로 이별하고, 유리걸식하면서 돌아다니는 자들은 길을 덮고, 굶어 죽는 사람은 거리를 메웠습니다.춘추시대의 유하劉夏가 “신이 노하면 그 제사를 받지 않는다.”(『춘추좌씨전』 「소공」 원년)라고 하였습니다. 혹시 선대왕들의 영혼이 노하여 제사를 받지 않아서 나라가 이러한 상황을 불러온 것이 아니겠습니까?춘추시대의 안자晏子가 “신이 노하면 그 나라를 바라보지 않는다.”177)라고 하였습니다. 혹시 선대왕들의 영혼이 노하여 우리나라를 향하지 않아 나라가 이 지경이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그렇지 않다면 어찌 현재 대단히 덕이 많은 임금이 다스리는 시대에 이렇게 비가 내리지 않는 것이 몇 년이나 계속될 수 있습니까? 이것은 필연적인 결과여서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현재의 상황을 근거로 과거를 본다면 더욱더 잘못됨이 있습니다.용俑178)을 만든 것이 비록 미미하지만 위대한 성인인 공자는 용을 만든 사람이 후손이 없을 것임을 알았습니다. 돌을 땅속에 묻음이 비록 사소한 일이기는 하지만 신령한 부처는 석씨石氏179)가 망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하물며 지금 역대 왕의 위패는 목자木子180)입니다. 웅덩이를 파서 묻는다면 어떠하겠습니까?조손祖孫 관계로 말해 보겠습니다. 조상이 있으면 반드시 후손이 있습니다. 『서경』 (「태갑太甲」) 중에서 “너의 빛나는 조상을 본받으라.”라고 하였으며, 『시경』 (「상송商頌」 〈나那〉)에서 “오 빛나는 탕의 후손이여!”라고 하였습니다. 역대 왕들이 어찌 전하의 조상이 아니겠으며, 그리고 전하는 어찌 역대 왕의 후손이 아니겠습니까? 후손은 조상을 계승하고 조상은 후손들에 의해 영원한 생명력을 가집니다. 그러므로 후손들의 효도는 당연히 조상들을 추모하고, 조상들의 영혼은 은밀하게 후손들을 도와줍니다. 이것이 바로 저승 세계와 현실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상적인 이치요,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해야 하는 본래의 모습입니다.신주를 묻음이 과연 옳다면, 즉 선왕들의 영혼은 전하에게 노여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사를 폐지함이 정말로 잘못이라면, 즉 전하는 선왕들의 영혼에 보답하지 못할 것입니다.아! 거꾸로 살펴본다면 위패를 설치함이 즉 이득이 있고, 제사를 중단하면 즉 손실이 있습니다. 교화의 득실은 역시 그 사이에서 나옵니다. 하필이면 위패를 훼손시키고 제사를 폐지한 연후에 덕교德敎를 실행하려 하십니까?신은 유언비어에 따라 전하에게 참람되게 말씀드림이 아닙니다. 전하의 도덕심은 천인天人을 관통하고 학문은 심오한 경지까지 도달하였습니다. 제터가 무너짐을 안타까이 여기신다면 어찌 차마 선왕들의 신주를 묻을 수 있겠습니까? 체협褅祫이 끊어짐을 슬퍼한다면, 즉 어찌 차마 그 올리는 제사를 없애려고 하십니까? -
008_0342_c_01L妻對泣。鬻子謀生。則父母相離。流亡
008_0342_c_02L者蔽路。餓莩者塡衢。劉夏曰。神怒不
008_0342_c_03L歆其祀。或者先靈怒。不歆祀而致此耶。
008_0342_c_04L晏子曰。神怒不嚮其國。或者先靈怒。不
008_0342_c_05L嚮國而至是耶。不然。豈今至德之治世。
008_0342_c_06L有此不雨之連年哉。此必然而無疑者
008_0342_c_07L也。將今視古尤有甚忒。作俑雖微。大
008_0342_c_08L聖知俑人之無後。埋石雖小。神釋諭石
008_0342_c_09L氏之致亡。矧今聖位。乃木子也。其於
008_0342_c_10L穿坎而故坑之。爲何如哉。姑以祖孫語
008_0342_c_11L之。有祖則必有孫。故書云。視乃烈祖。
008_0342_c_12L詩云。於赫湯孫。聖位豈非殿下之祖。而
008_0342_c_13L殿下豈非聖位之孫乎。孫以祖承。祖以
008_0342_c_14L孫永。故在孫孝。當追思。在祖靈。合陰隲。
008_0342_c_15L此幽明之常理。死生之本然也。若瘞主
008_0342_c_16L果是。則先靈無怒於殿下矣。若廢祀果
008_0342_c_17L非。則殿下無報於先靈矣。噫。逆而觀
008_0342_c_18L之。設位則在所得也。停祀則在所失也。
008_0342_c_19L敎化之得失。亦出乎其間。而何必曰。毁
008_0342_c_20L位廢祀。然後爲德敎者哉。臣非踵訛
008_0342_c_21L而僣議於殿下也。殿下道貫天人。學臻
008_0342_c_22L深奧。憮壇墠頹崩。則忍瘞其標主乎。
008_0342_c_23L愴禘祫之停絕。則忍廢其享祀乎。詳而
008_0342_c_24L「啇」通用「商」{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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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343_a_01L상세하게 논의한다면 봉은사ㆍ봉선사 두 절은 쇠망시켜서는 안 되며, 자수원ㆍ인수원 두 원도 폐지해서는 안 됩니다. 두 가지 일을 함께할 수 없다면 차라리 봉은사ㆍ봉선사 두 절을 망하게 하십시오.비구니는 추방시켜서는 안 되며, 역대 왕들의 위패도 땅에 묻어서는 안 됩니다. 두 가지 일을 함께할 수 없다면 차라리 비구니를 추방시키십시오. 그렇기는 하지만 이것은 부득이해서 하는 설명입니다. 진실에 근거해서 말을 한다면 모두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역대 왕의 신주를 묻은 옛적부터 비구니를 추방한 금년에 이르기까지 비가 제 때에 내렸습니까? 날씨가 조화를 이루었습니까? 오곡이 익었습니까? 백성들이 즐거워하였습니까? 작년의 가뭄은 왕년보다 심하고 금년의 가뭄은 또 작년보다 심합니다. 내년의 가뭄이 금년보다 심하지 않을 것이라고 어찌 알겠습니까?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위로는 역대 왕들이 순리에 따라 업적을 이룬 뜻을 본받으시고, 아래로는 어리석은 신이 감히 간언하는 정성을 살피십시오. 지난 세대에 일어난 일을 깊이 연구하여 미래에 벌어질 일을 막지 마십시오. 그러면 선왕의 영혼들이 아낌없이 돌보고 도움을 줄 것이요, 전하께서는 사찰을 폐지하고 혁파하는 허물이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기뻐하고 귀신도 모두 즐거워합니다. 오전五典181)이 순조롭게 실행되며 모든 관리들의 일이 제때에 시행됩니다. 계절에 따라 칠정七政182)을 고르게 하며,183) 백성들은 친족들과 화목하게 살도록 하니, 곳곳에서 배를 두드리는 노랫소리(鼓腹之歌)가 들리고 사람들은 콧날을 찡그리는 탄식이 없으니 태평한 세상을 이룰 수 있고 융성한 국가의 복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신은 선조先朝(효종)에게 외람되이 지우知遇를 입었으므로 감히 오늘에 목숨을 돌보지 않습니다.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을 감당할 길이 없으며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글자를 새긴 사람들(刻字秩)
무주茂朱의 인명印明, 금구金溝의 성정省淨, 무주의 신청信淸, 태인泰仁의 종원宗元, 임실任實의 원익元益, 금구의 각심覺心ㆍ경한敬閑.강희康熙 22년 계해년(1683, 숙종 9) 3월 모일에 마치다. -
008_0343_a_01L論之。兩寺不可衰也。兩院不可廢也。
008_0343_a_02L二事不兼。則寧衰兩寺也。尼衆不可黜
008_0343_a_03L也。聖位不可瘞也。二事不兼。則寧黜
008_0343_a_04L尼衆也。雖然此不得已之說也。據實而
008_0343_a_05L言之。皆不可也。何者。自瘞主之徃年。
008_0343_a_06L至放尼之今年。則風雨時乎。陰陽調乎。
008_0343_a_07L五糓熟乎。百姓樂乎。前年之旱。甚於
008_0343_a_08L徃年。而今年又甚於去年。則又安知明
008_0343_a_09L年之不甚於今年哉。伏願殿下。上軆祖
008_0343_a_10L宗奬順之意。下察臣愚敢諫之誠。深追
008_0343_a_11L旣徃。不塞將來。則先靈有眷顧之佑。
008_0343_a_12L殿下無廢革之。人靈咸悅。神鬼盡歡。
008_0343_a_13L五典克從。百揆時叙。齊七政於天時。
008_0343_a_14L睦九族於民類。處處有鼓腹之歌。人人
008_0343_a_15L無蹙額之歎。太平可致矣。洪祚可延矣。
008_0343_a_16L臣於先朝。猥蒙知名故。敢於今日。不
008_0343_a_17L避隕命焉。不勝屏營惴慓之至。謹昧死
008_0343_a_18L以聞。
008_0343_a_19L登階集終。
008_0343_a_20L
008_0343_a_21L刻字秩。茂朱印明。金溝省淨。茂朱信淸。
008_0343_a_22L泰仁宗元。任實元益。金溝覺心。敬閑。
008_0343_a_23L康熈二十二年。癸亥。三月。日 訖功。
- 1)보우普愚(1301~1382) : 고려 말 스님으로 법호는 태고太古, 시호는 원증 국사圓證國師이다. 본관 홍주洪州, 속성은 홍씨洪氏이다. 46세가 되던 1346년(충목왕 2)에 중국으로 건너가 석옥 청공石屋淸珙 스님에게서 법을 이어받아 우리나라 임제종臨濟宗의 시조가 되었다. 저서로 『태고화상어록太古和尙語錄』이 있다.
- 2)어린 나이에 중국에 들어가 : 실제로는 46세에 중국에 들어갔다. 어린 나이라고 함은 13세에 출가함을 말한다.
- 3)석옥 청공石屋淸珙(1277∼1352) : 원元의 고승이다. 고려의 태고 보우와 백운 경한白雲景閑(1298∼1374)이 그에게 공부를 하였다.
- 4)환암 혼수幻菴混修(1320∼1392) : 고려 말의 고승으로 태고 보우의 법맥을 이었다.
- 5)구곡 각운龜谷覺雲 : 고려 말의 고승으로 환암 혼수의 법맥을 이었다. 글씨에도 뛰어났다고 한다.
- 6)사태沙汰 : 조선 시대의 불교 억압 정책을 가리킨다.
- 7)법안法眼 : 여기서는 법에 대해 안목이 열린 걸출한 제자를 말한다. 원래의 뜻은 모든 현상을 꿰뚫어 보는 부처의 눈, 모든 현상의 참모습과 중생을 구제하는 방법을 두루 아는 보살의 눈을 말한다.
- 8)정관 일선靜觀一禪(1533∼1608) : 조선 중기 스님이다. 백하 선운의 제자로 교학을 전수받았으며, 청허 휴정에게도 가르침을 받았다. 저서로 『정관집靜觀集』이 있다. 사명 유정泗溟惟政ㆍ편양 언기鞭羊彦機ㆍ소요 태능逍遙太能과 함께 휴정의 4대 제자 중 한 사람이다.
- 9)네 마리 용(四龍) : 원문에는 ‘四衣’로 되어 있으나, ‘四龍’으로 비정하여 해석한다. 네 분의 훌륭한 대덕을 말한다.
- 10)임성 대사任性大師(1567∼1638) : 호는 충언冲彦 또는 충언忠彦으로 정관 일선의 가르침을 받았다. 백곡 처능의 설을 근거로 임성 대사에게까지 이어지는 조선 불교의 맥은 다음과 같다. 태고 보우→환암 혼수→구곡 각운→등계 정심, 또는 벽계 정심碧溪正心(동일 인물)→벽송 지엄→부용 영관→청허 휴정과 부휴 선수. 등계 정심으로부터 교학의 맥이 다시 이어지는데, 등계 정심→정련 법준→백하 선운→정관 일선→임성 충언이다.
- 11)사일社日 : 사일은 입춘 후, 입추 후 제5 무일戊日로 춘사일春社日, 추사일秋社日이 있다. 보통 춘사일은 3월 17~26일에, 추사일은 9월 18~27일 사이에 있다. 춘사일에는 부지런히 일하자는 뜻에서, 추사일에는 풍성하게 된 것을 기뻐하자는 뜻에서 지신地神과 농신農神에게 제사를 지냈다. 왕수가 7세 때인 사일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이듬해 사일에 어머니를 생각하고 매우 슬퍼하므로 마을 사람들이 감동하여 사일의 행사를 그만두었다고 한다.
- 12)유서劉恕(1032∼1078) : 송나라 학자로 역사학에 정통하였으며 자는 도원道原이다.
- 13)안수晏殊(991∼1055) : 송나라 재상으로 자는 동숙同叔이다.
- 14)구준寇準(961∼1023) : 송나라 재상으로 자는 평중平仲이다.
- 15)왕우칭王禹偁(954∼1001) : 송나라 문장가로 자는 원지元之이다. 「대루원기待漏院記」로 유명하다.
- 16)투간投簡 : 대쪽을 던졌다는 뜻이나 그 고사는 미상이다.
- 17)순舜임금에게는 어리석은~걸桀이 있었다 : 군부君父가 제 노릇을 하지 못하면 제대로 받들지 않는다는 뜻이다.
- 18)성군이신 요堯임금에게는~주紂가 있었으니 : 자식이 제 노릇을 하지 못하면 전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 19)미소 : 염화미소拈花微笑를 말한다. 석가세존이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강연을 할 때 꽃을 들고서 대중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응답하는 이가 없었는데 제자인 가섭迦葉이 부처님의 참뜻을 깨닫고 미소를 지었다. 부처가 “나에게 정법안장正法眼藏, 열반묘심涅槃妙心, 실상무상實相無相, 미묘법문微妙法門이 있으니 이제 가섭에게 준다.”라고 하였다.
- 20)결집結集 :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에 가르치신 말씀이 흩어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제자들이 저마다 들은 것을 외워서 경전으로 만든 사업이다. 열반하신 직후에 1차 결집, 백 년 후에 2차 결집, 330년 후에 3차 결집, 6백 년 뒤에 4차 결집이 있었다. 십대제자 중 한 사람인 아난은 다문제일多聞第一로 1차 결집 때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 21)하관夏官 : 병조兵曹 관리이다. 조선 시대에는 승군僧軍의 역할이 컸으므로 병조에서 승과를 담당하였다.
- 22)중시重試 : 현직으로 있는 문무文武 당하관堂下官을 위하여 둔 과거이다. 10년에 한 번씩 실시되었으며 합격한 사람은 품계品階를 올려 주었다.
- 23)요사채 : 스님들이 식사를 마련하는 부엌과 식당, 잠자고 쉬는 공간이다. 아울러 기도하러 온 신도들이 잠깐 쉬고 음식을 먹을 수도 있는 곳이다.
- 24)파릉巴陵 : 경기도 양천陽川의 옛 이름이다.
- 25)〈입천복사入薦福寺〉 : 정확한 제목은 〈제천복사형악선사방題薦福寺衡嶽禪師房〉이다.
- 26)가설假設 : 임시로 지은 건물을 말한다. 여기서는 죽은 사람의 영혼을 위로하는 사찰로 이해된다.
- 27)한유韓愈는 조주潮州~애도의 글 : 한유는 딸의 죽음을 슬퍼하며 시를 짓기를, “죄 없는 네가 죽은 것은 나의 죄이다. 한평생이 부끄럽고 애통한 눈물이 줄줄 흐른다.(致汝無辜由我罪。 百年慙痛戾闌干。)”라고 하였다.
- 28)승통僧統 : 승군僧軍을 통솔하는 승직僧職의 하나로 처능은 당시 관서 도승통都僧統이었다.
- 29)장건張騫(?∼B.C. 114) : 한 무제 때 장군으로 서역으로 가는 길을 개척하는 데 많은 공로를 세웠다.
- 30)지기석支機石 : 직녀가 베를 짤 때 베틀이 움직이지 않도록 괴었다는 돌이다.
- 31)천명天命을 성性이라 한다 : 『중용』 제1장.
- 32)선성繕性 : 본성本性을 함양함을 가리킨다. 『장자』 「선성繕性」에서 “繕性於俗”이라고 하였다.
- 33)수성修性 : 성정性情을 함양함을 가리킨다. 한漢나라 양웅揚雄의 『법언法言』 「학행學行」에서 “學者所以修性也。 視聽言貌思。 性所有也。 學則正。 否則邪。”라고 하였다.
- 34)공자는 초나라~인정하지 않았다 : 『논어』 「공야장公冶長」에 “자장이 묻기를 ‘초나라 영윤인 자문은 세 차례 영윤을 지냈지만 기뻐하는 안색이 없었고, 세 차례 그만두었으나 노여워하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어떻습니까?’라고 하니, 공자가 ‘충성스럽다’라고 하였다. 자장이 말하기를 ‘인합니까?’ 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모르겠다. 어찌 인을 실천했다고 하겠는가?’라고 하였다.(子張問曰。 令尹子文。 三仕爲令尹。 無喜色。 三已之。 無慍色。 何如。 子曰。 忠矣。 曰仁矣乎。 曰未知。 焉得仁。)”라는 구절이 있다.
- 35)관중管仲 : 제나라 대부이다. 제 환공을 도와 천하의 패자가 되게 하였으며 관포지교管鮑之交로 유명하다. 『논어』 「헌문憲問」에서 “공자가 말하기를, 환공이 제후들을 아홉 번이나 규합하였을 때 무력을 사용하지 않았음은 관중의 힘이다. 그는 어진 사람 같다. 그는 어진 사람 같다고 하였다.(子曰。 桓公九合諸侯。 不以兵車。 管仲之力也。 如其仁。 如其仁。)”라고 하였다.
- 36)삼현三賢 : 은殷나라의 세 분 현자인 미자微子ㆍ기자箕子ㆍ비간比干을 말한다. 『논어』 「미자」에서 “미자는 나라를 떠났고, 기자는 노예가 되었고, 비간은 간하다가 죽었다. 공자가 말하기를, 은나라에는 세 명의 어진 분이 있다고 하였다.(微子去之。 箕子爲之奴。 比干諫而死。 孔子曰。 殷有三仁焉。)”라고 하였다.
- 37)『석씨원류釋氏源流』는 명나라 스님 보성寶成이 편찬한 것을 1672년(현종 13)에 간행한 것이다. 내용은 석가모니의 일대기와 석가모니 이후 서역 및 중국에서 불법이 전파된 사실을 400항에 걸쳐 기술하였다. 양주楊州의 불암사佛巖寺에서 중간重刊한 것에 처능이 발문을 쓴 것이다.
- 38)『전등록傳燈錄』 :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을 말한다. 송宋나라 도원道源 스님이 지은 것으로 1004년에 간행되었다. 총 30권이다. 인도 선종의 조사들과 달마 이후 중국에서 불법이 전해지는 계통을 밝혔다. 등燈은 중생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는 불법을 비유한 것이다.
- 39)『통재通載』 : 『불조역대통재佛祖歷代通載』를 말한다. 원나라 스님 염상念常이 지은 것으로 1341년에 간행되었다. 역대 여러 고승들의 전기와 불교와 관련된 여러 가지 사적이 실려 있다.
- 40)담파 국사膽巴國師(1230∼1303) : 원元의 고승인데, 티벳 사람으로 공가갈자사功嘉葛刺思이다.
- 41)정두원鄭斗源(1581∼?) : 조선 중기 문신이다. 본관 광주光州이고 자는 정숙丁叔, 호는 호정壺亭이다. 1630년 진주사陳奏使로 명明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할 때 천리경千里鏡ㆍ자명종自鳴鐘 등 서양 기계와 천문학과 관련된 서적을 많이 가져왔다. 『석씨원류』도 이때 가져온 것으로 추측된다.
- 42)풍운風雲이 만났을 즈음(風雲際會) : 현명한 군주와 신하가 만난 것을 말한다.
- 43)팔개八凱 : 중국 전설상의 임금인 고양씨高陽氏의 뛰어난 아들 여덟 명을 일컫는다. 창서蒼舒ㆍ퇴애隤敱ㆍ도인檮戭ㆍ대림大臨ㆍ방강尨降ㆍ정견庭堅ㆍ중용仲容ㆍ숙달叔達이다.
- 44)사흉四凶 : 중국 상고시대 전설상의 순임금 때의 공공共工ㆍ환두驩兜ㆍ삼묘三苗ㆍ곤鯀을 말한다. 『서경』 「순전舜典」에서 “유주로 공공을 유배 보내고, 숭산으로 환두를 추방시키고, 삼위로 삼묘를 쫓아 보내고, 추산으로 곤을 귀양 보냈다. 네 명의 악인에게 죄를 주니 천하의 모든 사람이 복종하였다.(流共工于幽洲。 放驩兜于崇山。 竄三苗于三危。 殛鯀于羽山。 四罪而天下咸服。)”라고 하였다.
- 45)재사才士를 맞이할~거머쥐고 맞이하였습니다 : 어진 인재를 구함에 부지런하다는 말이다. 옛날 주공周公이 한 끼 밥을 먹을 때 세 번 밥을 뱉고, 머리 한 번 감을 때 세 번이나 머리털을 거머쥐었다고 한다. 토포악발吐哺握發.
- 46)범중엄范仲淹(989∼1052) : 송나라 충신으로 자는 희문希文이다. 「악양루기岳陽樓記」에서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근심하기 이전에 근심하고,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즐거워한 다음에 즐거워한다.(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라고 하였다.
- 47)상하上下 : 신분이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 또는 나이가 많은 사람과 젊은 사람을 뜻한다.
- 48)수가須賈 : 전국시대 위魏나라 대부이다. 진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옛 친구인 범수范睢에게 솜옷을 선물하여 사신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 49)유총劉寵 : 후한의 관리이다. 자는 조영祖榮이고 일명 일전태수一錢太守라고도 한다. 회계현 태수로 부임하다가 중앙의 대신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자 마을의 원로 여섯 명이 각각 1백 전을 보내었는데 유총은 각 개인에게 1전을 받았다고 하는 고사가 있다.
- 50)속수束脩 : 속수지례束脩之禮를 말한다. 제자가 되기 위하여 스승을 처음 뵈올 때에 드리는 예물을 일컫는 말이다. 속수는 열 묶음의 육포를 뜻한다. 『논어』 「술이」에서 “공자가 말하기를, ‘속수 이상을 가지고 오면 나는 그를 가르치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하였다.(子曰。 自行束脩以上。 吾未嘗無誨焉。)”라고 하였다.
- 51)백곡 처능이 스승인 벽암 각성을 위해 지은 행장이다.
- 52)삼산三山 김씨金氏 : 현재에 삼산 김씨가 없으며, 삼산이라는 지명은 충청도에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각성 스님의 본관이 김해金海라고 된 곳도 있다.
- 53)구족계具足戒 : 비구나 비구니가 지켜야 할 계율을 말한다. 비구는 250계, 비구니는 348계가 있다. 구족계를 받았다고 함은 정식으로 스님이 되었다는 뜻이다.
- 54)차의衩衣 : 일반 남자들이 입는 평상복이다.
- 55)청계난야淸溪蘭若 : 청계사를 가리킨다. 난야는 아란야阿蘭若의 줄임말로 사찰을 의미한다. 두보의 시 〈알진제사선사謁眞諦寺禪師〉에 “蘭若山高處”라는 구절이 있다.
- 56)중사中使 : 왕명을 전달하는 궁중 내시이다.
- 57)냉이처럼 달게 여겼다 : 『시경』 「패풍邶風」 〈곡풍谷風〉에서 “누가 씀바귀를 쓰다고 했나, 내게는 냉이처럼 달다.(誰謂荼苦。 其甘如薺。)”라고 하였다. 어떤 고생도 감수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58)총림叢林 : 승려들의 참선 수행 전문 도량인 선원禪院, 경전 교육기관인 강원講院, 계율 전문 교육기관인 율원律院 등을 모두 갖춘 사찰을 말한다. 현재 송광사ㆍ수덕사ㆍ통도사ㆍ해인사ㆍ백양사 등 국내에 다섯 곳이 있다.
- 59)고한 희언孤閑熙彦(1561∼1647) : 부휴 선수의 제자이다.
- 60)이시죽반二時粥飯 : 스님들이 옛날에 아침에는 죽, 낮에는 밥으로 하루 두 끼만 먹었음을 말한다. 여기서는 당시 가난한 사람들의 음식을 뜻한다.
- 61)경오일 : 1659년 12월에 경오일은 없다. 경오일은 1659년 11월 13일, 또는 1660년 1월 14일이다.
- 62)임신일 : 1561년 9월에는 임신일이 없다. 9월 1일 무자일에서 시작하는데 9월에는 임신일이 들어 있지 않다. 착오가 있는 듯하다.
- 63)법성원융法性圓融 : 의상 대사의 핵심적인 사상으로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이라고 한다. 존재하는 모든 사물의 본성은 원융하여 두 모습이 없다는 뜻이다.
- 64)이난二難 : 난형난제難兄難弟, 즉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는 말이다.
- 65)관백關白을 봉封하려고 가던 길 : 관백은 간파쿠, 즉 일본 막부의 최고 책임자를 일컫는다. 1598년에 풍신수길豊臣秀吉을 봉하러 가는 길이다.
- 66)계수족啓手足 : 계수계족啓手啓足, 즉 임종이 다가옴을 말한다. 『논어』 「태백泰伯」에서 “증자가 병이 들어 제자를 불러 모아 ‘나의 다리를 들어라, 나의 손을 들어라’라고 했다.(曾子有疾。 召門弟子曰。 啓予足。 啓予手。)”라고 하였다.
- 67)가을 뱀과~서로 잡아당긴다 : 필법이 뛰어남을 말한다.
- 68)중국 장군이~멈추고 지체했었다 : 이종성이 해인사에 들른 것을 말한다.
- 69)노창蘆䎫 : 스님들이 먹는 수수한 음식으로 여겨진다.
- 70)한 짝~두고 떠났고 : 달마 대사가 서방으로 돌아갈 때에 한 짝의 신발은 남기고 한 짝은 신고 갔다. 불법을 전하고 갔음을 말한다.
- 71)두타頭陀 : ⓢ dhūta의 음역으로 세상의 욕심을 버리고 청정하게 수행에 정진한다는 의미이다. 두타에는 모두 12조항이 있어서 이를 12두타행이라고 부른다. 인가와 떨어진 조용한 숲 속에 머문다, 항상 걸식을 한다는 등의 12조항이 있다.
- 72)호련瑚璉 : 곡식을 담아서 종묘에 올리는 제기祭器이다. 뛰어난 사람을 비유할 때 쓴다. 『논어』 「공야장」에서 “공자의 제자인 자공이 ‘저는 어떠합니까?’라고 공자에게 물으니, 공자가 대답하기를 ‘너는 그릇이다’라고 하였다. ‘무슨 그릇입니까?’ 하니, ‘호련瑚璉이다’라고 하였다.(子貢問曰。 賜也。 何如。 子曰。 女器也。 曰何器也。 曰瑚璉也。)”라고 한 고사가 있다.
- 73)이시방李時昉(1594∼1660) : 본관은 연안延安이고 자는 계명季明, 호는 서봉西峯이다. 귀貴의 아들이며 영의정 시백時白의 동생이다. 저서로 『서봉일기西峯日記』가 있다.
- 74)옹성甕城 : 성문을 보호하고 성을 든든히 지키기 위하여 성문 바로 바깥쪽에 성곽을 둥글게 한 번 더 둘러쳐 방비에 유리하도록 쌓은 작은 성을 말한다.
- 75)흑의지걸黑衣之傑 : 검은 옷을 입은 호걸이란 뜻으로, 검은 옷은 스님을 뜻한다. 남조시대 제齊나라 무왕武王 때에 법헌法獻과 현창玄暢이라는 두 분 스님이 가마를 타고서 대궐에 들어갔다고 하여 당시 흑의이걸黑衣二傑이라고 한 고사가 있다.
- 76)서럽게 용양龍驤의 무덤을 바라보고 : 두보杜甫의 시 〈증좌복야정국공엄무贈左僕射鄭國公嚴武〉에 ‘悵望龍驤塋’이라는 구절이 있다. 용양은 진晉의 용양 장군 왕선王濬을 가리킨다.
- 77)복야僕射의 관을 부축한다 : 두보의 시 〈관에 누워 고향으로 돌아가는 엄 복야를 곡함(哭嚴僕射歸櫬)〉.
- 78)현안지병玄晏之病 : 은둔하고 싶은 마음의 병을 말한다. 진晉의 황보밀皇甫謐이 고상한 뜻을 가져 벼슬을 하지 않았으며 자칭 현안 선생이라 하였다. 후대에 현안은 은거하면서 고상하게 산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 79)문원지질文園之疾 : 소갈증消渴症, 요즈음의 당뇨병을 말한다. 한漢의 문장가인 사마상여司馬相如가 효문원령孝文園令이란 관직에 있을 때 소갈병에 걸려 후대에 소갈병을 문원병이라고 하였다.
- 80)신분은 고귀하고~궁궐을 넘나들었습니다 : 신익성은 선조의 딸 정숙 옹주와 결혼하여 부마駙馬의 지위를 누렸다.
- 81)아양곡峨洋曲 : 거문고를 잘 타기로 유명한 백아伯牙가 탔던 악곡樂曲이다. 『열자列子』 「탕문湯問」에서 “백아는 거문고를 잘 탔고, 종자기鍾子期는 소리를 잘 들었다. 백아가 거문고를 타면서 뜻이 높은 산에 있으면 종자기가 말하기를, ‘좋구나! 아아峨峨하기가 태산泰山과 같구나’ 하였고, 뜻이 흐르는 물에 있으면 종자기가 말하기를, ‘좋구나! 양양洋洋하기가 강하江河와 같구나’ 하였다.”라고 하였다.
- 82)절양곡折楊曲 : 이별의 노래로 옛날의 악곡樂曲 가운데 이별의 아쉬운 정을 노래한 절양류곡折楊柳曲을 말한다. 옛날에는 이별할 때 버들가지를 꺾어 이별의 아쉬움을 표현하였다.
- 83)광릉廣陵의 동쪽, 두강斗江 옆 : 광릉은 경기도 광주廣州로 추정되며, 두강도 광주 주위를 흐르는 강물로 이해된다.
- 84)왕손곡王孫谷 : 신익성이 만년에 산 곳이다. 1638년 51세 되던 해에 왕손곡에 집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왕손곡의 정확한 위치는 미상이다.
- 85)풍성豊城의 칼과~적수赤水의 구슬 : 풍성ㆍ고죽孤竹ㆍ공상空桑ㆍ적수 모두 중국의 지명이다. 풍성은 전설상의 명검인 용천검과 태아검이 나왔다는 지역이고, 고죽에서는 경쇠와 피리, 공상에서는 거문고, 적수에서는 구슬이 많이 생산되었다고 한다.
- 86)예양豫讓 : 전국시대 진晉나라의 의사義士로 지백智伯의 신하였다. 지백이 조양자趙襄子에게 죽자 복수를 하기 위해 몸에 옻칠을 하여 벙어리 행세를 하며 기회를 노렸다. 조양자가 외출할 때 다리 밑에 숨었다가 찔러 죽이려고 하였으나 발각되어 칼로 자결하였다.
- 87)상여제주相如題柱 : 한漢나라 문장가인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촉蜀을 떠나 벼슬을 하기 위해 장안長安으로 향할 때, 성도成都의 승선교昇仙橋 다리 기둥에 “네 마리 말이 끄는 붉은 수레를 타지 않고서는 이 다리를 건너오지 않겠다.”라고 써서 포부를 밝혔던 고사가 있다. 『한서漢書』 「사마상여전司馬相如傳」.
- 88)윤수尹壽 : 요임금의 스승이라고 알려진 사람이다.
- 89)무성務成 : 순임금의 스승이라고 알려진 사람이다.
- 90)추요蒭蕘 : 나무꾼 또는 나무꾼과 같은 하찮은 사람의 말이라는 뜻이다. 『시경』 「대아大雅」 〈판板〉에서 “옛날의 현자가 한 말이 있으니, 추요에게도 묻는다.(先民有言。 詢于芻蕘。)”라고 하였다.
- 91)추로鄒魯 : 추는 맹자의 고향인 추나라, 노는 공자의 고향인 노나라이다. 추로라고 하면 보통 공자와 맹자, 또는 유가儒家를 의미하는 뜻으로 쓰인다.
- 92)중니仲尼가 노담老聃에게 배웠습니다 : 공자가 노자에게 배웠다는 말은,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에서 공자가 노자에게 예禮를 물어보았다는 말에 근거한 것이다. 즉 유가儒家가 도가道家에게 물었다는 말이다. 여기서는 종파를 초월하여 유가가 불가佛家에게 물을 수도 있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깔고 있다.
- 93)여망呂望 : 태공망太公望, 강태공姜太公이라고 부른다. 나이 칠십에 낚시를 하다가 주문왕에게 발탁되었다고 한다.
- 94)사호四皓 : 상산사호商山四皓를 말한다. 진秦나라 때 학정을 피해 산중에 숨어 살던 동원공東園公ㆍ하황공夏黃公ㆍ녹리선생甪里先生ㆍ기리계綺里季 등 네 노인을 말한다. 한漢나라가 들어서자 세상에 다시 나왔다.
- 95)죽림칠현竹林七賢 : 위魏ㆍ진晉의 정권 교체기에 죽림에 모여 거문고와 술을 즐기며 청담淸談으로 세월을 보낸 일곱 명의 선비를 가리킨다. 완적阮籍ㆍ혜강嵆康ㆍ산도山濤ㆍ향수向秀ㆍ유영劉伶ㆍ완함阮咸ㆍ왕융王戎이다.
- 96)십란十亂 : 행정에 뛰어난 열 명의 신하를 가리킨다. 난亂은 치治의 뜻이다. 『서경』 「태서泰誓」에서 “予有亂臣十人。 同心同德。”이라고 하였다. 열 명은 주공周公ㆍ소공召公ㆍ태공망太公望ㆍ필공畢公ㆍ영공榮公ㆍ태전太顚ㆍ굉요閎夭ㆍ산의생散宜生ㆍ남궁괄南宫适ㆍ문모文母이다.
- 97)삼우三愚 : 『집고금불도논형集古今佛道論衡』에 “세 명의 어리석은 이가 지혜를 이룬다.(三愚成一智)”라는 말이 있다.
- 98)치구雉劬 : 치구雉雊로도 쓴다. 꿩이 날아와 제사를 지내는 솥 위에서 울었다는 고사가 있다. 후에 치구는 변란이 일어날 조짐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서경』 「고종융일高宗肜日」의 서문에 보인다.
- 99)소巢ㆍ허許 : 요임금 때의 은자인 소부巢父와 허유許由를 말한다.
- 100)고誥 : 『서경』에 「주고酒誥」, 「대고大誥」, 「강고康誥」 등의 글이 있다. 고는 훈계할 때 내리는 글이다.
- 101)임금이 하는~점은 없앤다 : 처능이 『좌전』을 인용하면서 중간 구절을 빼어 버렸는데 여기서는 전체를 인용하여 번역하여 문맥이 통하도록 하였다. “君所謂可而有否焉。 臣獻其否以成其可。 君所謂否而有可焉。 臣獻其可以去其否。” 밑줄친 부분이 처능이 인용한 부분으로 중간에 두 구절을 빠뜨렸다.
- 102)『주서이기周書異記』 : 중국에서 간행된 책으로 부처와 관련된 내용이 다소 많지만 신빙성이 떨어지는 책으로 평가된다.
- 103)이상은 『광홍명집廣弘明集』에 나오는 내용이다. 『광홍명집』은 당나라 고승인 도선道宣(596∼667)이 편찬한 저서이다. 총 30권으로 664년에 완성되었다. 유교ㆍ불교ㆍ도교 연구에 귀중한 저서이다.
- 104)실리방室利防 : 진시황제 때 불경을 가지고 와서 중국에 전파했다고 하는 서역 스님이다.
- 105)곤야왕昆耶王 : 당시 흉노족의 추장이다.
- 106)유향劉向 : 전한 시대의 학자이다. 저서로 『설원說苑』, 『열선전列仙傳』, 『열녀전列女傳』 등이 있다.
- 107)월지국月支國 : 옛날 서역에 있던 나라로 지금의 감숙성 서부에 해당된다.
- 108)명제가 꿈에~모시고 돌아왔습니다 : 명제 10년인 67년에 백마白馬에 불경을 싣고 왔다고 한다.
- 109)지역이 달라서 : 불교가 중국에서 탄생된 것이 아니라 변경 국가인 인도에서 탄생되었다는 뜻이다. 당시 중국을 제외한 모든 나라는 오랑캐로 여겼으니, 불교가 인도에서 생성되었으므로 오랑캐 종교라고 본 것이다.
- 110)조벽趙璧 : 화씨지벽和氏之璧을 가리킨다. 조趙나라 혜문왕惠文王이 가지고 있었다. 당시 진나라 소양왕昭襄王이 탐을 내어 진나라 15개 성과 바꾸자고 하였다.
- 111)수주隋珠 : 수후지주隋侯之珠. 즉 수후가 얻었다는 매우 진귀한 구슬이다. 화씨지벽과 함께 수주화벽隋珠和璧이라고 칭한다.
- 112)성인이신 공자의~수주隋珠와 같습니다 : 공자와 맹자가 천하를 돌아다니면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지 못함은 마치 가치가 없는 화씨지벽과 수주 같다는 의미이다. 즉 불교가 온 나라에 널리 전파되지 못하면 아무런 가치를 가지지 못한다는 뜻이다.
- 113)만蠻 : 남만南蠻이라고도 하는데 춘추시대에는 남쪽 오랑캐가 사는 지역이라고 하였다. 동이東夷ㆍ서강西羌ㆍ융戎 모두 다 변경 오랑캐가 사는 지역이라 천시하였다.
- 114)구이九夷 : 공자가 살던 시대에 구이가 정확히 어디를 가리키는지는 알 수 없지만, 처능은 동이, 즉 조선을 구이로 보고 있는 듯하다.
- 115)세 분의 성인 : 요ㆍ순ㆍ우 임금, 또는 우임금ㆍ주공ㆍ공자를 말한다.
- 116)십철十哲 : 공자의 뛰어난 열 명의 제자로 공문십철孔門十哲이라고도 한다. 덕행德行에는 안연顔淵ㆍ민자건閔子騫ㆍ염백우冉伯牛ㆍ중궁仲弓, 언어에는 재아宰我ㆍ자공子貢, 정사政事에는 염유冉有ㆍ계로季路, 문학에는 자유子游ㆍ자하子夏가 뛰어났다.
- 117)모자牟子(170∼?) : 후한後漢의 불교학자로 이름은 융融, 자는 자박子博이다. 저서로 『이혹론理惑論』이 있다. “彼一時。 此一時。”라는 말은 『맹자』 「공손추하公孫丑下」에도 보인다.
- 118)당나라 천자의~못했을 것입니다 : 미상.
- 119)허현도許玄度 : 동진 사람으로 왕희지와 교유가 있었다. 조선 시대 무용당 대사無用堂大師(1651∼1719)의 『무용당집無用堂集』에 “3백 년 전의 허현도는, 3백 년 후의 배공미(三百年前許玄度。 三百年後裴公美。)”라는 시구절이 있다.
- 120)위고韋皐 : 당나라 사람으로 『당명황잡록唐明皇雜錄』에, 성도城都에서 윤위고尹韋皐가 태어나자 어떤 스님 한 분이 와서 이 사람은 제갈무후의 후신이라고 한 고사가 있다.
- 121)진종眞宗이 미소를 지은 것 : 미상.
- 122)인종仁宗 : 송나라 진종眞宗의 아들이다. 1010년 5월 그믐에 태어났는데 태어난 후로 계속 울고서 그치지 않자 유명한 고승을 초빙해서 기도를 하여 울음을 그쳤다는 고사가 있다.
- 123)등애登艾는 소~원숭이가 된다 : 이 글은 『고금사문류취古今事文類聚』 후집 권5 「전후론신前後論身」 〈수이사겸隋李士謙〉에 보인다.
- 124)공자가 노련한~농사일을 못한다 : 공자의 농사와 관련된 고사는 『논어』 「자로子路」에 보인다.
- 125)허행許行 : 맹자와 동시대 사람이다. 『맹자』 「등문공滕文公」 상에 관련 기사가 보인다.
- 126)계신癸辛 : 송宋의 주밀周密(1232∼1298)이 지은 『계신잡지癸辛雜識』를 말하는 듯하다. 당과 송을 다룬 역사서이다.
- 127)남의 선행은~내가 고친다 : 『좌전』 양공 31년의 기사이다.
- 128)『시경』 「주남周南」 〈인지지麟之趾〉 : 당시 진실하고 뛰어난 사람들이 많았음을 노래한 시이다. “振振公子。 于嗟麟兮。”
- 129)종리의鍾離意 : 후한 초기 사람으로 자는 자아子阿이다. 명제明帝가 귀신을 존중하고 허명을 좋아한다고 비판하였다. 회계 현령을 지냈다.
- 130)편협하고 자질구레하다 : 『후한서』 「종리의전」에 기사가 보인다.
- 131)왕경王景 : 왕경이 〈부처를 찬송하는 글(金人頌)〉을 올렸다는 기사는 『불조역대통재佛祖歷代通載』 권5에 보인다. 처능도 『불조역대통재』의 문장을 인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 132)삼족오三足烏 : 고대 전설에 나오는 신화의 새, 길조라고 한다.
- 133)육관六官 : 주대周代의 관직 제도인 천관天官ㆍ지관地官ㆍ춘관春官ㆍ하관夏官ㆍ추관秋官ㆍ동관冬官을 말한다.
- 134)이상의 기록은 『불조역대통재』 권10에 보인다.
- 135)『석실론石室論』 : 누구의 글인지는 확실하지는 않으나 『불조역대통재』 권10에 『석실론』의 글을 인용한 것이 보인다.
- 136)조귀진趙歸眞 : 당나라의 도사로 불교와 유교가 나라를 망친다고 하여 회창법란會昌法亂을 일으킨 사람으로 유명하다. 회창會昌(무종 연호) 5년인 845년 8월에 조귀진이 유교와 불교가 나라를 망친다는 진언을 하자, 당시 무종이 이 말을 듣고 장안과 낙양에는 각각 네 개 사찰만을, 각 주에는 한 주에 한 개 사찰만을 남기고, 전국 4만여 개의 절을 없애고 승려 26만여 명을 환속시켰다. 하지만, 846년 3월 당 무종이 갑작스레 죽고, 4월에는 조귀진도 처형당하며 다시 불교 원래 모습대로 차츰 회복되었다.
- 137)시호市虎 : 삼인성시호三人成市虎를 말한다. 시장에 호랑이가 나왔다는 말을 한 사람, 두 사람이 말할 때까지는 믿지 않다가도 세 번째 사람까지 그렇게 말하면 믿게 된다는 뜻이다. 『한비자韓非子』 「내저설內儲說」에 보인다.
- 138)베틀에 앉아~된 것 : 증삼살인曾參殺人의 고사를 말한다. 사실이 아닌데도 사실이라고 말하는 자가 많으면 진실이 됨을 비유한 말이다. 증자曾子가 노魯나라의 비費라는 곳에 있을 때의 일이다. 증자와 이름과 성이 같은 사람이 있었는데 살인을 하였다. 사람들이 증자의 어머니에게 달려와 말하였다. “증삼이 사람을 죽였습니다.” 증자의 어머니는 “우리 아들은 사람을 죽이지 않았습니다.”라고 하며 믿지 않고 태연히 짜고 있던 베를 계속 짰다. 얼마 후, 여러 사람이 와서 계속해서 “증삼이 사람을 죽였습니다.”라고 하자 증자의 어머니는 마침내 베틀의 북을 던지고 담을 넘어 달아났다는 고사가 있다. 『전국책戰國策』 「진책秦策」에 보인다.
- 139)모두가 시호市虎가~연유하는 것입니다 : 모두 근거 없다는 뜻이다.
- 140)정자程子 : 송의 유학자인 정명도程明道와 그의 동생인 정이천程伊川을 말한다. 이정二程이라고 한다.
- 141)서촉西蜀 용 선생龍先生 : 서촉 용씨라고도 하는데 「비한非韓」이라는 글 백 편을 지었다고 한다.
- 142)원통 선사圓通禪師 : 송대의 고승으로 추측된다. 당시 원통이라는 호칭을 쓰는 스님으로는 원통 수圓通秀 선사와 원통 눌圓通訥 선사가 있었다.
- 143)담자는 경전에 적히었으며 : 『춘추』 「소공」 17년에 공자가 담자에게 배웠다는 기록이 있으며, 나머지 세 사람에게 배웠다는 기록이 적혀 있지 않다.
- 144)일행一行(683∼727) : 당대의 고승이자 천문학자로 대연력大衍曆을 만들었다. 대연역은 당나라의 역법으로 729년부터 33년 동안 시행되었으며 우수한 역법이라고 전해진다.
- 145)현완玄琬(562∼636) : 당대 초기의 고승이다.
- 146)저 태양은 언제 없어지려나 : 『서경』 「탕서湯誓」편에서 “이 해는 언제 없어지려나. 내가 너와 함께 망하리라.(時日曷喪。 予及汝皆亡。)”라고 하였다.
- 147)남소南巢 : 『서경』 「중훼지고仲虺之誥」에서 “성탕 임금이 남소로 걸을 추방시켰다.(成湯放桀于南巢)”라고 하였다.
- 148)포락지형炮烙之刑 : 은나라 주紂임금이 만든 형벌의 명칭이다. 구리 기둥에 기름을 발라 숯불 위에 걸쳐 놓고, 그 위를 맨발로 걸어가게 하여 발이 미끄러져 불 속으로 떨어지면 그대로 타 죽게 만들었다.
- 149)자신의 공적을 칭송하는 사업 : 진시황제가 천하를 통일하고 난 다음에 각지를 돌아다니며 칭송하는 글을 새겼다. 대표적인 것이 태산 정상에 세운 〈태산 각석泰山刻石〉(B.C. 219)이다. 이사李斯가 썼다고 한다.
- 150)호해胡亥 : 진시황제 둘째 아들이다. 첫째 아들은 부소扶인데 날조된 진시황제의 명령서에 따라 자살하였다. 부소의 아들이 자영子嬰이다
- 151)온량거轀輬車 : 진시황제의 시체를 실은 수레를 가리킨다. 『사기』 「진시황기」에 “36년(B.C. 211) 가을에 사신이 길을 가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구슬을 쥐고 길을 막으며 ‘내 대신 호지군滈池君에게 전해 주어라’ 하고, 이어 ‘올해 조룡祖龍이 죽는다’ 하였다.”라고 한다. 조룡은 진시황제를 말한다. 구슬을 호지군에게 준 이듬해 진시황제가 죽었다. 진시황제가 죽었을 때는 마침 무더위가 한창이라서 온량거 안에 있던 시체에서 악취가 풍겨 나오자 진시황제의 죽음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건어물을 잔뜩 실었다고 한다.
- 152)지도軹道 : 이곳에서 진시황제 3세世인 자영이 목에 밧줄을 걸고 옥새를 유방에게 바쳤다.
- 153)취령鷲嶺에 정신을 두고 : 취령은 부처가 설법한 영취산靈鷲山을 말한다. 불교에 뜻을 두었다는 의미이다.
- 154)계원鷄園에 마음을 두고서 : 계원은 인도의 고대 사찰 이름이다. 즉 태조가 불교에 마음을 두었다는 의미이다.
- 155)동정서원東征西怨 : 동쪽 사람을 정벌하니 서쪽 사람이 원망한다는 말이다. 여러 지역을 정벌하여 백성들의 환대를 받는다는 뜻으로 쓰인다. 은나라의 탕왕이 하나라 걸왕을 정벌할 때 탕왕의 덕을 칭송하면서 생긴 말이다. 『서경』 「중훼지고」에서 “동쪽을 정벌하니 서쪽 오랑캐가 원망하고, 남쪽을 정벌하니 북쪽 오랑캐가 원망하였다.(東征西夷怨。 南征北狄怨。)”라고 하였다.
- 156)탕망湯網 : 탕임금의 그물이라는 뜻으로 관대한 처분을 말한다. 옛날 탕임금이 들에 나가서 사냥을 하였다. 그물을 쳐 짐승을 잡는 사람이 4면에 모두 그물을 치고는 상하 사방의 짐승이 모두 자기의 그물로 들어오라고 기도하는 것을 보고, 그 3면에 친 그물을 제거하고는 “왼쪽으로 달아날 놈은 왼쪽으로 달아나고 오른쪽으로 달아날 놈은 오른쪽으로 달아나라. 다만 달아나기 싫은 놈만 내 그물로 들어오라.”라고 한 고사故事가 있다. 『사기』 「은본기」에 보인다.
- 157)우거禹車 : 우임금이 수레를 타고 가다가 죄인을 만나면 내려서 죄의 경과를 물어보았다는 고사가 있다.
- 158)사죄四罪 : 순임금이 통치하던 때의 흉악한 네 명의 신하인 공공共工ㆍ환두驩兜ㆍ삼묘三苗ㆍ곤鯀을 말한다. 여기서는 흉악한 신하를 의미한다.
- 159)육책六責 : 탕임금이 7년 가뭄이 들었을 때 산천에 기우제를 드리면서 자책한 여섯 가지 조목을 말한다. 정치에 절도가 없는 것, 백성을 병들게 하는 것, 궁궐을 사치스럽게 꾸미는 것, 여자들이 날뛰는 것, 뇌물의 수수, 참소하는 자들의 창성 등이다.
- 160)어찌 소를~것에 구애받겠습니까 : 소가 도살장에 끌려가는 것을 측은하게 여겨 양으로 바꾸라고 한 고사가 있다. 『맹자』 「양혜왕」 상에 보인다. 여기서는 모든 존재의 생명은 동일하니 차별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여겨진다.
- 161)어찌 나무와~생각을 하십니까 : 나무가 너무 거대하여 쓸모가 없어서 생명을 계속 유지하였고, 오리는 울지 못한다고 쓸모가 없어서 빨리 잡아먹혔다는 고사가 있다. 둘 다 쓸모없는 존재이지만 한쪽은 생명을 유지하고 한쪽은 생명을 유지하지 못했다. 『장자』 「산목山木」에 보인다. 여기서는 생명이 소멸되는 것에 있어서 차별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여겨진다.
- 162)일행 화상은 참으로 성인이다 : “一行和尙。 眞聖人也。” 이 말은 『송고승전宋高僧傳』 권5에 보인다.
- 163)대연수大衍數 : 『주역』에서 말하는 기본수이며 우주의 기본수라고 하는데 50을 말한다.
- 164)첩여婕妤 : 한나라 때 후궁後宮의 한 계급이다. 후궁은 등급에 따라 여러 호칭이 있었는데, 미인美人ㆍ양인良人ㆍ팔자八子ㆍ칠자七子ㆍ장사長使ㆍ소사少使ㆍ첩여婕妤ㆍ경아娙娥ㆍ용화傛華ㆍ충의充依ㆍ소의昭儀ㆍ상가인上家人ㆍ하가인下家人 등이다. 역대로 전한 성제成帝 때 총애를 받은 반첩여班婕妤가 가장 유명하다.
- 165)여혜경呂惠卿(1032∼1101) : 북송의 정치가로 자는 길보吉甫이다. 신종神宗ㆍ철종哲宗ㆍ휘종徽宗 연간에 활동하였다. 현종顯宗과의 관계는 확실하지 않으며, 현종도 어느 왕조의 어느 임금을 가리키는지도 불분명하다.
- 166)자수원慈壽院 : 원래는 자수궁이었는데, 나중에 자수원이라 하여 후궁이나 승려를 살게 하였다.
- 167)인수원仁壽院 : 원래는 인수궁이었는데, 나중에 인수원이라 하여 후궁이나 승려를 살게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1661년(현종 2) 2월 12일 기사에 의하면 자수원과 인수원을 혁파했다고 하였다.
- 168)내원당內願堂 : 원당은 원찰願刹이라고도 하며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비는 법당이다. 궁중 안에 둔 것을 내불당 또는 내원당, 내도량內道場이라고 한다.
- 169)방포원정方袍圓頂 : 승려를 말한다. 방포方袍는 중이 입는 방형方形의 승복을 말하며, 원정圓頂은 둥근 머리란 뜻으로 모두 중을 뜻한다.
- 170)나만 홀로 백성이 아니랴(我獨非民) : 『시경』에 이 구절은 없다.
- 171)이상의 기사는 『불조역대통재』 권15에 보이는데 766년(당 대종 대력 원년)에 일어난 일이다.
- 172)삼종三宗 : 황제黃帝ㆍ요ㆍ순 임금을 말한다.
- 173)칠묘七廟 : 천자의 종묘, 곧 태조의 종묘와 삼소三昭ㆍ삼목三穆의 총칭이다.
- 174)조주祧主 : 봉사손奉祀孫과 대수代數가 끊어진 먼 조상의 신주를 말한다.
- 175)소昭 : 소목昭穆의 소를 말한다. 소목은 종묘나 사당에 조상의 신주를 모시는 차례이다. 왼쪽 줄을 소라 하고, 오른쪽 줄을 목穆이라 한다. 1세를 가운데에 모시고 2세, 4세, 6세는 소에 모시고, 3세, 5세, 7세는 목에 모신다.
- 176)체협지사褅祫之祀 : 임금이 시조에게 올리는 큰 제사를 말한다.
- 177)신이 노하면~바라보지 않는다(神怒不嚮其國) : 『안자춘추晏子春秋』에는 “귀신이 그 나라의 제사 음식을 받아먹지 않고 재앙을 내린다.(鬼神不饗其國以禍之)”로 되어 있다.
- 178)용俑 : 사람 모양으로 만든 인형을 말한다. 『맹자』 「양혜왕」 상에서 “공자가 말하기를, 처음으로 용을 만든 사람은 아마도 후손이 없을 것이다. 그가 사람의 모습을 본떠서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仲尼曰。 始作俑者。 其無後乎。 爲其象人而用之也。)”라고 하였다.
- 179)석씨石氏 :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시대에 후조後趙를 세운 석륵石勒을 말한다.
- 180)목자木子 : 나무로 된 위패, 또는 ‘이李’를 말한다. 조선 왕실이 이씨李氏에 의해 건국되었음을 뜻한다.
- 181)오전五典 : 오상五常과 같은 말이다.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을 말한다.
- 182)칠정七政 : 일월日月과 오성五星(수성ㆍ화성ㆍ목성ㆍ금성ㆍ토성)을 말한다.
- 183)오전五典이 순조롭게~고르게 하며 : “五典克從。 百揆時叙。 齊七政。” 『서경』 「순전」에 기사가 보인다.
- 1)「朴」通「扑」{編}。
- 1)「啇」通用「商」{編}次同。
- 1)「啇」通用「商」{編}。
ⓒ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 임재완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