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대각등계집(大覺登階集) / 大覺登階集卷之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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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각등계집 제2권(大覺登階集 卷之二)
문文
임성 대사 행장 후서任性大師行狀後序
내가 불교 전수 계통의 족보를 살펴보니 우리나라 승려로 불법을 전한 원류는 고려 시대의 스님 보우普愚1)로, 호가 태고太古이다. 어린 나이에 중국에 들어가2) 하무산霞霧山의 석옥 청공石屋淸珙3) 선사를 참방하고 그에게서 법을 얻어 우리나라로 돌아와서는 환암 혼수幻菴混修4)에게 전하였고, 혼수는 구곡 각운龜谷覺雲5)에게 전하였고, 각운은 등계 대사登階大師 정심淨心에게 전하였다.
정심은 사태沙汰6) 때문에 머리를 기르고 처자식을 거느리고서 황악산黃岳山으로 들어간 후, 이름을 숨기고 고자동古紫洞 수다촌水多村에 거처하면서 자취를 감추었다. 임종 시에는 게송을 남겼으며 벽송 지엄碧松智儼에게 선禪을 전하였고, 지엄은 부용 영관芙蓉靈觀에게 전하였다. 영관에게는 두 사람의 법안法眼7)이 있었으니 청허 휴정淸虛休靜과 부휴 선수浮休善修이다.
청허는 형으로, 도덕과 재기가 남보다 뛰어났으며 문장과 필법 모두 당대에 빛이 났다.
부휴는 아우로서, 불법에 대한 소견이 매우 높았다. 인연이 닿은 납자가 있으면 그들을 지도하여 모인 제자들도 7백 명이 되었으며 이들은 모두 한 시대의 종사宗師가 되었다고 한다.
정심은 정련 법준淨蓮法俊에게 교학敎學을 전하였고, 법준은 『법화경法華經』의 오묘한 뜻에 정통하여 사람들이 그를 ‘준법화俊法華’라고 불렀다.
법준은 백하 선운白霞禪雲에게 전하였고, 선운은 정관 일선靜觀一禪8)에게 전하였다. 일선은 청허가 불법을 강연하는 자리에 만년에 참가하여 청허 대신에 『금강경』과 『능엄경』 등을 강의하였다. 경전을 가르치는 안목이 분명하여 배우는 이들이 공경하고 감복하여 모두 네 마리 용(四龍)9)이 다시 나타났다고 생각하였다. 그가 대중들에게 존경받음이 이와 같았다.
임성 대사任性大師10)는 정관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정관이 설법하는 자리 아래에는 배우는 이들이 많기는 하였으나 깊이 터득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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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323_b_02L大覺登階集卷之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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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323_b_05L任性大師行狀後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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余按釋譜曁東僧傳法源流麗僧普愚
008_0323_b_07L號太古早歲入中國叅霞霧山石屋淸
008_0323_b_08L珙禪師得其法東還乃傳之幻菴混修
008_0323_b_09L混修傳之龜谷覺雲覺雲傳之登階大
008_0323_b_10L士淨心淨心因沙汰長髮畜妻孥
008_0323_b_11L黃岳山隱其名居于古紫洞水多村
008_0323_b_12L晦跡焉將啓手足留偈傳禪于碧松智
008_0323_b_13L智嚴傳之芙蓉靈觀靈觀之門下
008_0323_b_14L傑出二法眼曰淸虛休靜曰浮休善修
008_0323_b_15L淸虗兄也道德拔萃才氣絶倫
008_0323_b_16L章筆法並耀當世浮休弟也法見高
008_0323_b_17L與衲子有緣搥拂之下衆盈七百
008_0323_b_18L俱爲一代宗師云淨心傳敎于淨蓮法
008_0323_b_19L法俊精通法華奧旨人號俊法華
008_0323_b_20L法俊傳之白霞禪雲禪雲傳之靜觀一
008_0323_b_21L一禪晩叅淸虛法席代講金剛楞嚴
008_0323_b_22L等經敎眼明白學者欽服咸以爲四
008_0323_b_23L復出其取重如此任性大師受業
008_0323_b_24L于靜觀靜觀講下聽學雖夥其得之

008_0323_c_01L말고삐를 나란히 하여 멀리 달리거나 채찍을 휘둘러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사람은 오직 호연 태호浩然太浩ㆍ무염 계훈無染戒訓ㆍ임성 충언任性忠彥 등 몇 사람이 있을 뿐이었다. 임성의 학문이 그들 중에서 가장 뛰어났다.
정유년(1657, 효종 8) 봄에 남봉 대사南峰大師 영신英信과 나는 벽암碧嵒 스님이 불법을 강의하는 자리에서 만났다. 남봉 스님은 곧 임성 대사의 적통嫡統을 이어받은 수제자이다. 하루는 나에게 부탁하기를, “우리 스승님께서 돌아가신 지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비석을 세워 언행을 기록한 일도 없고, 또 일생의 행적을 서적으로 간행한 일도 없습니다. 명성이 전하지 않고 앞으로 사라지게 될까 걱정이 됩니다. 바라건대 저의 스승을 위해서 글을 지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예전부터 한번 임성 대사를 만나고 싶었으나 실현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말 한마디라도 하여 대사를 위해 바치겠다고 결심한 지가 오래되었다. 제자 영신의 스승을 위한 정성을 가상히 여겨 감히 몇 마디 말을 지어 대사가 출가한 시종전말을 기록한다. 아울러 짧은 서문을 지어 대사가 불법을 전수받은 근원과 유파를 차례로 기술한다. 스승의 은혜를 생각하는 사람이 이 글을 읽는다면 눈물을 적시는 데 약간의 도움은 줄 수 있을 것이다.
원 동자元童子에게 주는 서문
천지는 지극히 크고 기운은 그 천지 사이에 붙어 있다. 기운에는 높고 낮음과 순수하고 잡박함의 차별이 있다. 인간이 천지 사이에서 생명을 받을 때 동류 중에서 우뚝 뛰어난 것은 모두가 높은 기운을 얻거나 순수한 기운을 천성적으로 받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이 기운이 인간에게 깃들면 성인이나 현인도 되며 학식을 겸비한 도덕군자도 되며, 또 재주가 뛰어난 아이가 되어 태어나기도 한다.
성현은 일단 논하지 않더라도, 전기傳記에 실려 있는 학식을 겸비한 도덕군자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남긴 글을 읽으면 가만히 앉아서 그 사람을 평가할 수 있다. 그렇지만 재주가 뛰어난 아이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드물다.
내가 옛사람에게 터득한 것은 다음과 같다. (후한後漢의) 양수楊脩는 공작새와 놀았고, (공자의 후손인) 공융孔融은 작은 배와 대추를 취하였고,

008_0323_c_01L深入或並轡遐邇或爭鞭後先者
008_0323_c_02L浩然太浩無染戒訓任性忠彥如干軰
008_0323_c_03L而任性之學尤出其右云丁酉春
008_0323_c_04L峰大師英信與余相會碧嵓法席南峯
008_0323_c_05L即任性大師嫡傳神足也一日囑余曰
008_0323_c_06L我師歸全已久苐闕樹石系辭之事
008_0323_c_07L無入榟紀行之跡抑恐名不傳而泯然
008_0323_c_08L將朽矣願子試爲吾師述焉余曾欲一
008_0323_c_09L叅師席而未果則思以一言而效于師
008_0323_c_10L者久矣且嘉信爲師之誠敢綴數語
008_0323_c_11L記其出世之始終并爲小引次其得法
008_0323_c_12L之源派庶乎思師恩者覽之或可以供
008_0323_c_13L抆涕之一助云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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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323_c_15L贈元童子序

008_0323_c_16L
天地至大而氣寓於其間也氣有高下
008_0323_c_17L粹駁之殊而物之受生於天地之間
008_0323_c_18L卓然出乎其類者是皆得是氣之高
008_0323_c_19L是氣之粹者也盖是氣之寓於人也
008_0323_c_20L爲聖爲賢爲文章道德之士而又有奇
008_0323_c_21L童者出焉聖賢姑勿論文章道德之士
008_0323_c_22L俱著于傳記讀其文則可坐而數也
008_0323_c_23L奇童則罕有聞焉抑余之所得於古人
008_0323_c_24L如楊脩之酬孔雀禽孔融之取小梨

008_0324_a_01L(남북조시대 후위後魏 사람) 조형祖瑩은 창문을 막았고, (후한의) 왕수王脩는 사일社日11)에 동네 사람을 감동시켰고, 유서劉恕12)는 공자의 형을 알았고, 안수晏殊13)는 정正 자의 의미를 대답하였고, 구준寇準14)은 〈화산시華山詩〉를 읊었다. 소식蘇軾은 어머니에게 후한의 「범방전范滂傳」에 대하여 질문을 하였고, 구양수歐陽脩는 인자한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았고, 왕우칭王禹偁15)은 앵무새에 대답하였다.
이상의 여러 사람들은 모두가 동료 중에 뛰어난 자들로 하늘에서 받은 기운이 높아서 뛰어난 재주를 지닌 동자가 된 것이다. 세상에 어찌 이러한 사람들이 많겠는가?
원씨元氏의 아들 수천壽天은 나이 13세 때에 내게 와서 공부하였다. 그의 사람됨은 영민함이 무리에서 훨씬 뛰어났으며 천부적으로 타고난 기품이 매우 높았으니 역시 뛰어난 재주를 지닌 동자였다. 그러므로 내가 옛날의 특별한 재능을 가진 동자를 실례로 들어 열거하여 그에게 알려 주고 그의 의지를 격려하였다.
옛날의 군자들이 품부 받은 기氣가 비록 높다 하더라도 독서를 하지 않고 훌륭한 인물이 된 사람은 적다. 부지런히 공부한 사람은 너무 많아 모두 다 셀 수 없음은 누구나 다 안다.
내가 옛사람들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다.
(전한前漢의) 손경孫敬은 (공부를 하다가 졸음이 오면) 상투를 대들보에 매달았고, (전한의) 예관兒寬은 (남의 집에서 품을 팔았지만) 경전을 끼고 다녔으며, (후한의) 고봉高鳳은 (독서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보리가 떠내려가게 했고, (후한의) 광형匡衡은 (기름을 살 돈이 없어) 이웃집 담을 뚫어 (그 불빛을 보고 공부를 하였으며), (동진東晋의) 차윤車胤은 반딧불이 주머니를 만들어 (반딧불이 빛을 통해 책을 읽었고), (동진의) 손강孫康은 눈 빛에 책을 읽었으며, (송宋의) 호원胡瑗은 투간投簡16)하였고, (당唐의) 소원명蘇源明은 땔나무를 태워 나오는 불빛으로 공부하였고, (전국시대) 악양자樂羊子는 아내의 고생으로 학업을 마쳤고, (송의) 사마광司馬光은 졸음을 경계하였다.
이들은 모두 부지런히 공부하여 훌륭한 인물이 된 사람들이다. 어찌 타고난 재주가 뛰어나서였을 뿐이겠는가? 지금 그대는 재주는 높다고 하지만 열심히 공부를 하지 않으면 (재주 많은) 염유冉有(공자 제자)가 안회顏回(공자 제자)에게 미치지 못한 것처럼 될까 걱정이다. 그러므로 옛날에 노력을 해서 훌륭하게 된 인물을 열거해서 말하는 것이다.
만일 발분하여 책을 읽고 우뚝 크게 발전하여 마침내 학식을 겸비한 도덕군자가 된다면 어찌 훌륭한 인물이 됨에 그치겠는가? 내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처원處愿 상인上人을 송별하는 서序
아아, 사도斯道(불법)가 행해지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그 누가 실행하겠는가? 도道는 공기公器이다. 그 적임자가 아니면 행해지지 않고, 그릇된 도를 행하면 널리 퍼지지 않으니,

008_0324_a_01L祖瑩之塞窓牗穴王脩之感里社日
008_0324_a_02L劉恕之知孔子兄晏殊之答正字義
008_0324_a_03L準之吟華山詩蘇軾之問范滂傳歐陽
008_0324_a_04L脩之受慈母敎王禹偁之還鸚鵡對
008_0324_a_05L皆出乎其類禀氣高而爲奇童者也
008_0324_a_06L豈多有哉元氏子壽天年十三從余
008_0324_a_07L其爲人也敏悟絶倫禀氣甚高
008_0324_a_08L奇童子也故余擧古之奇童子而告之
008_0324_a_09L勉其志焉古之君子禀氣雖高不讀
008_0324_a_10L而能成人者鮮矣勤讀者盖多不可盡
008_0324_a_11L數而周知抑余之所聞於古人者如孫
008_0324_a_12L敬之懸髻兒寛之帶經高鳳之漂麥
008_0324_a_13L匡謝 [7] 之鑿壁車胤之螢囊孫康之暎雪
008_0324_a_14L胡瑗之投簡源明之爇薪樂羊子之終
008_0324_a_15L司馬光之警寢是皆勤讀而成人者
008_0324_a_16L豈惟氣高而已哉今童子禀氣雖
008_0324_a_17L畫而不讀則恐爲冉有之不逮顏回
008_0324_a_18L故擧古之成人者而告之若激而讀
008_0324_a_19L嶷然大進遂爲文章道德之士
008_0324_a_20L豈惟成人而已哉知余言之不躗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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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324_a_22L送處愿上人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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斯道之不行久矣其誰爲行之道者
008_0324_a_24L公器也傳非其人則不行行非其道則

008_0324_b_01L도는 손쉽게 주고받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도를 사사롭게 군부君父에게 바치고 자손에게 전할 수 있다면, 어느 누구인들 군부에게 바치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순舜임금에게는 어리석은 아버지 고수瞽叟가 있었고, (만고 충신) 관용봉關龍逢에게는 폭군 걸桀이 있었다.17)
어느 누구인들 자손에게 전하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성군이신 요堯임금에게는 어리석은 아들 단주丹朱가 있었고, 은왕殷王의 손자로는 폭군 주紂가 있었으니,18) 도나 국가 권력이란 손쉽게 주고받을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전국시대의) 소문昭文이 가야금을 연주한 것과, 윤편輪扁이 나무를 다룬 것과, 포정包丁이 소를 잡은 것과, 백락伯樂이 말을 알아본 것이 모두 이와 같은 것이니, 이들은 그 사이에 있어서 그 오묘함을 잘 터득한 사람들이다.
달마達摩 대사가 서쪽으로부터 와서 마음을 전한 법(傳心之法)이 양梁나라와 남북조의 북위北魏 시대에 시작되어 당송 시대에 성행하였다. 종사宗師들은 마음을 전하지 않음이 없었고, 제자들은 마음으로 얻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이런 까닭에 이 도가 크게 행해져 임제종臨濟宗ㆍ조동동曹洞宗ㆍ위앙종潙仰宗ㆍ운문종雲門宗ㆍ법안종法眼宗 등이 적통으로 계승되기도 하고 또는 방계로 내려오게 되었던 것이다.
비록 지역이 각각 다르고 교리를 펼친 곳이 같지 않더라도 그 근원은 모두 심묵心黙(마음으로 깨우침)으로 불법의 기미를 내보이고, 심묵으로 불법의 오묘한 의미를 깨우치지 않음이 없었다. 근래에는 그렇지 못해서, 글자를 가르치는 사람을 스승이라 하고 말을 배우는 사람을 제자라고 한다. 문자에 사로잡히고 언어에 꽉 매여 있다. 불법의 겉뜻만 지닌 채 잊지 않으면 곧 ‘나의 제자’라고 말하고, 입으로 전수함을 게을리하지만 않으면 곧 ‘나의 스승’이라고 한다. 자기와 한편이 되면 옳다고 하고, 남을 경시하면서 그르다고 한다. 대중들을 유혹해 와서 서로 싸우다 쇠락의 길을 걷는다. 심지어는 마구니의 삿된 설과 쭉정이 같은 설법 등이 눈을 어둡게 하고 갈등으로 온몸을 휘감는 사람들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아아! 불법이 실행되지 않으니 애통하다.
도우道友 원 공愿公이 서울 행차를 하게 되어 시 한 편을 짓고는 내게 그 화답을 청하였다. 나는 예의상 차마 사양할 수 없었다. 하지만 도道라는 글자를 들어 그 행차를 만류하고자 한다.
부드러운 옷과 맛있는 음식으로 입과 배를 배불리면서 구도求道할 사람이 누가 있는가?

008_0324_b_01L不流不可承翼而受授也故使道可私
008_0324_b_02L以獻於君父而傳於子孫人莫不獻之
008_0324_b_03L於君父而舜之父有瞽叟龍逢之君有
008_0324_b_04L人莫不傳之於子孫而堯之子有丹
008_0324_b_05L殷王之孫有紂不可承翼而受授者
008_0324_b_06L是也至於昭文之皷琴輪扁之用木
008_0324_b_07L庖丁之解牛伯樂之知馬皆類此
008_0324_b_08L存乎其間而善得其妙者也自達磨西
008_0324_b_09L來傳心之法昉於蕭梁元魏之間盛於
008_0324_b_10L李唐趙宗之際爲宗師者莫不以心傳
008_0324_b_11L而爲弟子者莫不以心得也是以斯道
008_0324_b_12L大行曰臨濟曰曺洞曰潙仰曰雲門
008_0324_b_13L曰法眼之爲嫡嗣爲傍出云者雖藩閫
008_0324_b_14L各異堂室不同其出處莫不以心默
008_0324_b_15L示其機而以心默得其旨者也近世則
008_0324_b_16L不然以訓字爲師以學語爲弟桎梏
008_0324_b_17L於文字膠粘於言辭意持不忘則輒
008_0324_b_18L曰吾弟子也口授不倦則輒曰吾法師
008_0324_b_19L黨己爲是輕他爲非誘衆率徒
008_0324_b_20L相干戈陵夷至於么䯢邪說糠粃眯目
008_0324_b_21L葛藤纒身者不可勝記嗚呼斯道之
008_0324_b_22L不行痛矣道友愿公將啓洛行賦詩一
008_0324_b_23L屬余和之余由禮而不敢讓焉
008_0324_b_24L擧道字而停其行曰孰有軟衣美食

008_0324_c_01L수건을 들고 신을 받쳐 들도록 하는 일에 하인을 시키면서 호도好道할 사람이 누가 있는가? 발우를 받들고 지팡이를 세우고 행각行脚하는 일을 싫어하면서 방도訪道할 사람이 누가 있는가? 그런데 지금 우리 스님 원 공은 쑥물 들인 옷을 입고 나물을 먹으면서 슬퍼하는 표정이 없으니 구도하는 사람이다. 나무를 져서 나르고 쌀을 찧어 먹으면서도 힘들어 지치는 모습이 없으니 호도하는 사람이다. 물을 건너고 산을 넘어 다니면서도 피곤한 기색이 없으니 방도하는 사람이다.
이 세 가지는 사람으로서 잘하기 어려운 일인데, 우리 원 공 스님은 참으로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다 갖추었다. 우리 원 공 스님 같은 분은 도가 전해지지 않고 있는 세상에서 전해지지 않는 마음을 전하고, 도가 행해지지 않는 세상에서 행해지지 않는 도를 행할 분임에 틀림없다.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지금 세상에 불법에 환한 밝은 스승이 없으니 그 누구를 좇아서 스승으로 삼을 것인가? 만일 스승을 찾고자 한다면, 나의 스승 벽암碧嵒 화상이 아마도 그 스승이 아니겠는가?
해 선자海禪子에게 주는 서序
물의 본성은 비었기 때문에 깨끗해질 수 있고, 구름의 본질은 맑기 때문에 뜰 수가 있다. 뜰 수 있기 때문에 진애塵埃(티끌)를 벗어나고, 깨끗하기 때문에 더러움을 뛰어넘을 수 있다. 더러움을 초월하고 진애를 벗어나는 일(超染出塵)은 납자들에게 비교되는 것이다.
그대의 성性이 허정虛靜하니 아마도 물의 청정함을 터득한 사람일 것이다. 그대의 정情이 담담하니 아마도 구름이 떠오르는 경지를 터득한 사람일 것이다.
그대는 지금 높은 지리산에 올라 쌍계사雙溪寺를 향하고 있으니, 쌍계사는 옛날의 선옹仙翁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살았던 곳이다. 아래에 화개동花開洞이 있어서 물소리가 시원하고, 위에 청학봉靑鶴峰이 있어서 구름 빛이 희디희다. 시원한 물소리로 품성을 함양하고 흰 구름으로 성정을 깨끗이 하면, 성정이 담담해져서 높이 떠오를 수 있고, 성이 비워져 더욱더 깨끗해질 수 있을 것이니, 그렇게 되면 운수승雲水僧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노력하고 노력할지어다.

008_0324_c_01L自營口腹而求道者乎孰有執巾奉屨
008_0324_c_02L使令僮僕而好道者乎孰有擎盂卓錫
008_0324_c_03L厭辭行脚而訪道者乎今吾師衣艾
008_0324_c_04L食蔌無悲慼之容是求道者也負柴
008_0324_c_05L舂米無枯槁之態是好道者也渡水
008_0324_c_06L陟巒無疲倦之色是訪道者也此三
008_0324_c_07L人之所難能而吾師苟不闕一而全
008_0324_c_08L則若吾師者其將以傳不傳之心於
008_0324_c_09L不傳之後而行不行之道於不行之世
008_0324_c_10L也必矣雖然今世無明師其從誰而爲
008_0324_c_11L師乎如欲得師我師碧嵒和尙是其
008_0324_c_12L師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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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324_c_14L贈海禪子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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夫水性虛故能淨雲情淡故能浮浮故
008_0324_c_16L出塵淨故超染超染出塵者衲子之
008_0324_c_17L比也爾性虛其得水之淨者耶爾情
008_0324_c_18L其得雲之浮者耶今陟崔嵬還向
008_0324_c_19L雙溪雙溪古仙翁崔孤雲棲息處也
008_0324_c_20L有花開洞水聲泠然上有靑鶴峯
008_0324_c_21L光皓然泠然之水涵其性皓然之雲
008_0324_c_22L潔其情遂使情淡而逾浮性虛而逾淨
008_0324_c_23L則方號雲水僧也勗哉勉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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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설禪敎說-늑 상사勒上士에게 주는 서
대법大法이 동방으로 흘러들어 온 뒤로부터 선禪과 교敎가 병행되었는데, 선은 마음으로써 전해지고, 교는 언어에 기초하여 홍포弘布되었다. 선이 전해지고 교가 홍포되었으므로 우리 불교의 도가 성하게 일어날 수 있었다.
근원의 물결이 다르게 흐르기 시작하자, 선과 교로 문門이 나뉘었다. 선은 돈頓과 오悟, 점漸과 수修로 나뉘었고, 교는 성性과 상相으로 나뉘게 되었다.
그리하여 성이나 상을 받드는 사람들은 각각 공空과 유有를 서로 고집하고, 돈이나 점을 주장하는 무리는 각기 이理와 사事를 분변하지 못하였다. 정情은 갑옷과 화살(凾矢)을 따르고, 법法은 모순矛盾을 좇아서 스스로를 그르치게 되는 사람이 많다. 심지어는 허공에다 서까래를 얹고 허공을 뚫으며, 그릇됨을 따르고 거짓을 이루려 하는 경우도 있었다. 각각 자신의 문호門戶만을 오로지 믿으면서 논쟁을 벌이고 비방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런 무리는 참으로 자신을 그르칠 뿐 아니라 남도 많이 그르치게 된다.
우리 늑 대사의 기품氣品이 넓고 크며 심신心神이 영민하니 나를 흥기興起시켜 줄 사람이라 하겠다. 내가 지금 늑 대사를 위해 간략하나마 불법의 실마리를 거론할 터이니 대사는 수긍할 것이다.
마음으로 전하는 것을 선, 입으로 말하는 것을 교라 한다. 선과 교가 다르지 않으면서 다르고(不異而異), 다르면서 다르지 않은 것은(異而不異) 무슨 까닭인가? 석가세존께서 꽃을 잡았을 때 가섭迦葉이 미소19)를 지었는데, 이것이 바로 선이 전해지게 된 까닭이다. 석가세존이 연설한 것을 제자인 아난阿難이 경전으로 편찬하였는데(結集20)), 이것이 바로 교가 전하게 된 까닭이다. 사실에 근거해서 논한다면 선이 전해진 곳에는 다른 도道가 없고, 교가 퍼진 곳에는 다른 이치가 없다. 이치는 비록 근원이 하나이지만 마음과 입(心口)이 각각 다르니, 다르지 않으면서도 다르다고 한 것이 아니겠는가?
선이란 마음이다. 말없이 침묵하여 말이 있는 근원을 깨달음이다. 교란 가르침이다. 말이 있음에 임시로 의지하여 말이 없는 이치를 설명함이다. 사실에 의거해 말하면, 선이란 근기根機가 뛰어난 사람을 위해 저절로 그렇게 전해진 것이다. 교란 근기가 모자라는 사람을 위해 부득이 말로 설명하는 것이다. 전해지는 것이 선이고 설법하는 것이 교이다. 마음과 입이 다르기는 하지만 이치는 근원이 하나이다. 다르면서 다르지 않다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마음과 말을 고집한다면 선과 교로 문파가 나뉘고, 이치 또한 각각 다르게 된다.

008_0325_a_01L禪敎說贈勒上士序

008_0325_a_02L
自大法東流禪敎並行禪以心傳
008_0325_a_03L藉言弘傳禪弘敎斯道蔚興至於源
008_0325_a_04L派異流禪敎分門禪異頓漸敎分性
008_0325_a_05L性相之徒空有互執頓漸之軰
008_0325_a_06L事難辨情隨凾矢法逐矛楯而自誤
008_0325_a_07L者多矣甚者架空鑿虛踵訛成僞
008_0325_a_08L專門戶爭興訪讟若此之類不亶自
008_0325_a_09L誤人多矣吾師品氣恢偉心神頴
008_0325_a_10L可謂起余者也吾今爲師略擧緖
008_0325_a_11L師其頷之傳於心之謂禪騰於口
008_0325_a_12L之謂敎禪之與敎不異而異異而不
008_0325_a_13L何者世尊拈花迦葉微笑此禪之
008_0325_a_14L所以傳也世尊演說阿難結集此敎
008_0325_a_15L之所以傳也若據實而論之則禪之所
008_0325_a_16L傳無異道敎之所弘無異理理雖一源
008_0325_a_17L心口各異可不謂不異而異者乎禪者
008_0325_a_18L心也默藉無言悟其有言之源敎者
008_0325_a_19L誨也假依有言說其無言之理也
008_0325_a_20L據實而言之則禪者爲根勝者自其
008_0325_a_21L然而傳者也敎者爲根劣者不得已而
008_0325_a_22L說也傳之則禪也說之則敎也心口
008_0325_a_23L雖異理則一源可不謂異而不異者乎
008_0325_a_24L若固執胸談謂禪敎分門理亦各異

008_0325_b_01L즉 옛날에 세존이 가섭에게 전하고 가섭이 아난에게 전했는데도, 세상 사람들은 모두 가섭은 선을 전하고 아난은 교를 전했다고 한다면 이것은 전기傳記에 실린 내용과 큰 차이가 있으므로 믿을 수 없다.
세상의 여론을 따른다면 가섭은 다만 선뿐이니, 교를 전했다는 아난에게 선을 전할 수 없다. 아난은 다만 교뿐이니, 선을 전했다는 가섭에게 선을 받지 못한다. 다만 선을 주고받기만 했다면 모두가 선이고 교는 아닐 것이고, 다만 교를 주고받기만 했다면 모두가 다 교이고 선은 아닐 것이다.
가섭과 아난이 불법을 전해 받고 전해 줄 때에, 전하는 사람은 선으로 전했는데 받는 사람이 교로 알았으며, 받는 사람은 교로 받았는데 전하는 사람이 선으로 전했을까? 만일 전하는 사람은 선으로 전했는데 받는 사람이 교로 받았다면, 백아伯牙와 종자기鍾子期의 관계는 아닐 것이다. 어찌 전했다 하겠는가?
만일 받는 사람이 교로써 받았는데 전하는 사람은 선으로 전했다 한다면, 증삼曾參과 공자 같은 관계는 아닐 것이다. 어찌 전했다 하겠는가?
이런 까닭에 선ㆍ교의 동이同異는 실로 관규管窺(좁은 견문)로 엿볼 것이 아니며, 그리고 쉽게 말을 해서도 안 된다. 다만 활로活路를 투철하게 터득해서 집에 돌아가 편안히 정좌하면, 대장경의 가르침이 모두 선의 심오한 뜻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는, 교를 떠나서 따로 선이 있음이 아니며, 선을 떠나 따로 교가 있음이 아니라는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서를 지어서 준다.
만월당기滿月堂記
당堂을 만월滿月이라 이름 붙였으니, 달은 항상 차 있는 것이 아니고 차면 이지러지는 것이다. 나는 이 당이 완성되면 무너질까 걱정이 된다. 그렇지만 달은 항상 이지러져 있는 것이 아니니, 이지러지면 다시 차게 된다. 나는 이 만월당이 무너지더라도 다시 이루어짐을 믿는다. 그러나 달은 항상 차 있거나 항상 이지러지지는 않는다. 찼다가는 다시 이지러지고 이지러졌다가는 다시 차면서 천지와 더불어 무궁하다.

008_0325_b_01L則昔世尊傳之迦葉迦葉傳之阿難
008_0325_b_02L而世皆稱迦葉傳禪阿難傳敎此與傳
008_0325_b_03L記所載大相徑庭不足信也若從世
008_0325_b_04L則迦葉但禪不可傳禪於傳敎之阿
008_0325_b_05L難也阿難但敎不可受禪於傳禪之迦
008_0325_b_06L葉也但禪則受授者皆禪非敎也
008_0325_b_07L敎則受授者皆敎非禪也苐未知迦葉
008_0325_b_08L阿難受授之際傳者以禪傳而受者以
008_0325_b_09L敎受者乎受者以敎受而傳者以禪傳
008_0325_b_10L者乎若傳者以禪傳而受者以敎受之
008_0325_b_11L則非伯牙之鍾期也胡謂乎傳乎若受
008_0325_b_12L者以敎受而傳者以禪傳之則非曾參
008_0325_b_13L之仲尼也胡謂乎傳乎是故禪敎之同
008_0325_b_14L實非管窺所覩而不可容易言也
008_0325_b_15L但透得活路歸家穩坐則一大藏敎
008_0325_b_16L盡是禪旨也吾所謂非離敎而別有禪
008_0325_b_17L非離禪而別有敎也者是也姑序以
008_0325_b_18L貽之

008_0325_b_19L

008_0325_b_20L滿月堂記

008_0325_b_21L
堂以滿月名月不恒滿滿則虧吾恐
008_0325_b_22L此堂之成則毁也雖然月不恒虧虧則
008_0325_b_23L復滿吾信此堂之毁則復成也雖然月
008_0325_b_24L不以滿虧恒而滿復虧虧復滿與天

008_0325_c_01L당을 만월이라고 이름을 붙인 데에는 깊은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아, 이 만월당 역시 항상 이루어져 있거나 항상 무너져 있는 것은 아니다. 이루어지면 다시 무너지고 무너지면 다시 이루어진다. 천지와 더불어 무궁하겠지만, 후대 사람으로서 누가 무너진 것을 다시 완성하여 천지와 더불어 무궁하게 할 수 있겠는가? 오직 중창重創하는 사람이 있으리니, 중창을 할 사람은 누구인가? 가야산의 스님 석혜釋惠이다.
병술년(1646, 인조 24) 맹춘에 백곡 도인白谷道人은 쓴다.
봉은사 중수기奉恩寺重修記
조선이 세워진 초기에 나라에서는 선禪ㆍ교敎 양종兩宗을 종묘의 문밖에 설치하여 특별히 승과僧科를 열었는데, 관례적으로 국시國試와 같은 날에 과거를 보았다. 그리고는 하관夏官21)을 파견하여 스님 중에서 경전에 통달한 자를 뽑았다. 특별히 갑과ㆍ을과ㆍ병과 세 등급으로 급제자를 뽑고 대선大選이라고 불렀다. 대선이란 곧 유가儒家의 대과大科이다. 다음은 제작制作으로 가끔 발탁되는 사람도 있는데, 이를 참학參學이라 한다. 참학이란 곧 유가의 소과小科이다. 대선을 거쳐 다시 급제한 사람을 중덕中德이라 하는데, 중덕이란 곧 유가의 중시重試22)이다.
절이 정릉에 있는 것을 봉은사奉恩寺라 하였으니 선종 사찰이요, 광릉에 있는 절을 봉선사奉先寺라 하였으니 교종 사찰이다. 선은 문文에, 교는 무武에 견주어 선ㆍ교가 병행하여 우리 불도가 힘차게 일어났으니 가상하고도 성대한 일이다.
가정嘉靖 연간 갑자년(1564, 명종 19)에 조정 회의에서 승과를 없앴기 때문에 선ㆍ교가 위세를 떨치지 못한 지 이에 108년이 되었다. 불교의 도가 쇠망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슬프다. 사찰 또한 불행하게도 병자년(1636, 인조 14) 병자호란 때 모두 타 버리고 오직 방 몇 칸만이 쓸쓸하게 남아 있었으므로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이 안타까워하였다.
선화 대사禪花大師 경림敬林이 앞장서서 법당을 세우자 다른 스님들도 잇따라 요사채23)를 지어 완공하니

008_0325_c_01L地無窮堂以滿月名者其有深旨哉
008_0325_c_02L此堂亦不以成毁恒而成復毁
008_0325_c_03L復成雖與天地無窮而第後之人
008_0325_c_04L能使毁復成而與天地無窮者耶唯如
008_0325_c_05L重葺者能之重葺者誰耶伽耶僧釋惠
008_0325_c_06L丙戌孟春白谷道人記

008_0325_c_07L

008_0325_c_08L奉恩寺重修記

008_0325_c_09L
國初國家設禪敎兩宗於陵寢室皇之
008_0325_c_10L特設僧科例與國試同日開場
008_0325_c_11L遣夏官考選釋子之通經者特授甲乙
008_0325_c_12L丙三等之科曰大選大選者即儒家之
008_0325_c_13L大科也次以制作間有拔擢者曰叅
008_0325_c_14L叅學者即儒家之小科也由大選
008_0325_c_15L而再擧入格者曰中德中德者即儒
008_0325_c_16L家之重試也而寺宇在靖陵者曰奉恩
008_0325_c_17L即禪宗也在光陵者曰奉先即敎宗
008_0325_c_18L禪以例文敎以比武禪敎并行
008_0325_c_19L道之蔚興架矣盛哉粤在嘉靖甲子歲
008_0325_c_20L朝議革除僧科故禪敎之不振者百有
008_0325_c_21L八年於斯矣釋道之淪喪良可悲也
008_0325_c_22L寺亦不幸丙子之亂鞠爲烸惟丈室
008_0325_c_23L數間蕭然獨存行過者嘅焉禪和大
008_0325_c_24L師敬林首建法堂諸衲尾修僧寮

008_0326_a_01L숲과 계곡이 기뻐하고, 전각은 날개를 펼친 듯 웅장하고, 크고 작은 다른 여러 건물들도 먹줄처럼 곧아 몇 년 사이에 힘차게 다시 일어났다. 경림 스님이 앞장서 중창한 공로는 장하다고 평가할 만하다.
이 절은 동으로는 광릉廣陵(경기도 광주)에 닿아 있고, 서로는 파릉巴陵24)을 가리키며, 남으로는 호남으로 가는 길로 통해 있고, 북으로는 서울과 이어져 있는데, 이것이 여기에 임해서 바라다보는 경치의 대략이다. 이곳에서 시를 읊고 노래하였던 시인과 묵객墨客은 수천수만이 넘으며, 간혹 깜짝 놀랄 만한 어구라고 칭찬을 받은 사람도 있다.

舟中回指奉恩寺     배 안에서 돌아보며 봉은사를 가리키니
杜宇一聲僧掩關     두견새 한 소리에 스님은 문을 닫는다.

이는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의 작품이다.

病客孤舟明月在     병든 길손이 탄 외로운 배에 밝은 달빛 쏟아지고
老僧深院落花多     노승이 거처하는 깊은 절간엔 낙화가 흩날리네.

이는 손곡蓀谷 이달李達의 시이다.

紅藕一池風滿院     못에는 붉은 연꽃 피어 있는데, 바람이 절 안에 가득하고
亂蟬千樹雨歸村     나무마다 매미 소리 어지럽고 비 내리는 마을로 돌아간다.

이는 옥봉玉峯 백광훈白光勳이 지은 것이다.
이들 시는 당시에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었고 후대에도 계속해서 전해진 시이다. 지금 사대부 중에서는 동명 정두경 선생이 젊은 시절에 이 절에 유람 와서 지은 시가 있는데 대략 아래와 같다.

城中王亦大       도성에서는 왕이 역시 위대하고
天下佛爲尊       천하에서는 부처님이 존귀하다.

넘쳐 나는 문장의 근원은 노두老杜(두보)와 다투어 볼 만하다. 그리고 위의 세 웅걸의 작품도 격조가 높기는 하지만 단지 남의 글을 흉내 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찌 가슴앓이하는 동명 정두경과 고하를 논할 수 있겠는가?
일반적으로 시인들이 시를 지을 때는 능력을 다 쏟지 않음이 없다. 하지만 꼭 아름다움을 극진히 하려 하지 않았는데도 이처럼 아름답게 표현된 시가 있다. 숨은 의도는 반드시 땅의 신령스러움이 도와서 그렇게 된 것이리라.
당나라 시인도 역시 절을 많이 유람하면서 뛰어난 시구절을 얻은 사람이 있다.

竹經通幽處       대나무 오솔길은 그윽한 곳으로 통하고
禪房花木深       선방禪房에는 꽃과 나무가 무성하다.

이 시는 상건常建의 〈유파산사遊破山寺〉이다.

僧臘階前樹       승랍僧臘은 뜰 앞의 나무 같고
禪心江上山       선심禪心은 강가의 산이라네.

이 시는 한굉韓翃의 〈입천복사入薦福寺〉25)이다.
혹은 이런 시도 있었다.

樹影中流見       중류에서 나무 그림자 보노라니
鐘聲兩岸聞       양쪽 언덕에서 종소리 들려오네.

이 시는 장우張祐의 〈숙금산사宿金山寺〉이다.

008_0326_a_01L成以來林歡澗悅殿閣翼舒廊廡繩
008_0326_a_02L數年之間藹然復興敬林倡啓之
008_0326_a_03L可謂懋矣是寺東臨廣陵西指巴
008_0326_a_04L南通湖路北控京洛此其臨觀之
008_0326_a_05L大略而騷人墨客之吟詠其間者不趐
008_0326_a_06L千萬而或有以警語稱者有曰舟中
008_0326_a_07L回指奉恩寺杜宇一聲僧掩關者崔孤
008_0326_a_08L竹之作也有曰病客孤舟明月在
008_0326_a_09L僧深院落花多者李蓀谷之詠也有曰
008_0326_a_10L紅藕一池風滿院亂蟬千樹雨歸村者
008_0326_a_11L白玉峯之題也此皆當時膾炙而後世
008_0326_a_12L傳誦者也今縉紳中有東溟鄭先生者
008_0326_a_13L少遊是寺題一律其略曰城中王亦
008_0326_a_14L天下佛爲尊者其詞源之汎濫
008_0326_a_15L與老杜爭鋒而上三傑之作雖曰調高
008_0326_a_16L而特是效嚬耳豈與病心之東溟論其
008_0326_a_17L高下哉盖騷人吟詠之際非不致力焉
008_0326_a_18L或未必盡美而其得美如此者意者必
008_0326_a_19L有地靈之助而然耶唐之詩人亦多遊
008_0326_a_20L梵宇而得警句者有曰竹經 [8] 通幽處
008_0326_a_21L禪房花木深者此常建之遊破山寺也
008_0326_a_22L有曰僧臘階前樹禪心江上山者
008_0326_a_23L韓翃之入薦福寺也有曰樹影中流見
008_0326_a_24L鐘聲兩岸聞者此張祐之宿金山寺也

008_0326_b_01L
이런 시들은 고금에 뛰어났으며, 시를 평하는 이들은 “다른 사람은 표현할 수 없는 경지”라고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그 지역에 파산破山의 뛰어난 경치가 있은 후에 상건의 시가 있었으며, 금산金山의 뛰어난 경치가 있은 후에 장우의 시가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어찌 땅 신령의 도움이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이 절이 완공된 것도 다만 스님들이 머물면서 수행을 하는 곳일 뿐만 아니라 시인들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으니 역시 아름다운 곳이라 할 만하다. 이에 기록한다.
봉국사 신창기奉國寺新剏記
예로부터 제왕가帝王家에서는 부모와 자녀 사이에 참으로 존망存亡이 엇갈려 영원히 이별하는 슬픔이 생기면 반드시 가설假設26)에 의탁하여 추도하기를 끝없이 하였다. 그러므로 한 무제漢武帝는 누대를 짓고 망사대望思臺라고 하였는데, 아들 여태자戾太子를 그리워하였기 때문이다. 당 고종唐高宗은 절을 세워 자은사慈恩寺라고 하였는데 어머니의 은혜를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이치로 따진다면 그리운 아들이지만 어찌 다시 살아 돌아오겠으며, 자애로운 어머니이지만 어찌 다시 세상에 올 수 있겠는가? 대개 슬픈 감정이 격발되면 저절로 멈출 수 없어 영혼을 위로하는 집에 마음을 기대어 한없는 슬픔을 실어 보고자 한다.
우리 주상 전하(현종)께서 즉위하신 이후에 왕세자 이외에도 딸이 있었는데 마치 요임금의 두 딸인 아황娥皇과 여영女英 같았다. 장녀는 명혜 공주明惠公主, 차녀는 명선 공주明善公主이다. 배우자를 논의하다가 혼인을 하지 못한 채 1년 동안에 잇따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주상은 애통해하였고 자전慈殿(명성 왕후)은 더욱더 상심함이 끝이 없었다. 저승길에 명복을 비는 데 부처님만 한 분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장례를 마친 이듬해에 명성 왕후께서는 금강산 스님인 축존竺尊에게 명을 내리어 두 무덤 밖 몇 리쯤 되는 곳에 절을 세우도록 하셨다. 절을 지을 때에는 궁중의 사신을 파견하여 감독하도록 하고 절이 완공되자 봉국사奉國寺라는 현판을 내려 주고 향불을 올려 공양하였다.

008_0326_b_01L此等作冠絶古今而詩評者謂他人道
008_0326_b_02L不得處也迹此觀之地必有破山之勝
008_0326_b_03L而後有常建之詩有金山之勝而後
008_0326_b_04L有張祐之詩此豈非地靈之有助而然
008_0326_b_05L然則此寺之成非唯釋子之所棲神
008_0326_b_06L而已其有助於騷人者可知亦可謂勝
008_0326_b_07L也矣是爲記

008_0326_b_08L

008_0326_b_09L奉國寺新剏記

008_0326_b_10L
自古帝王家父母子女之間苟有存亡
008_0326_b_11L永隔之痛則必托於假設追悼無窮
008_0326_b_12L漢武帝作臺曰望思思戾太子也
008_0326_b_13L高宗建寺曰慈恩恩母太后也以理
008_0326_b_14L觀之雖曰思之子豈有歸來乎雖曰
008_0326_b_15L恩之母安得降返乎盖悲情所發
008_0326_b_16L能自已憑斯假設用遣無窮之痛故也
008_0326_b_17L惟我主上殿下即祚以來儲嗣外有女
008_0326_b_18L若帝堯之皇英者二長曰明惠公主
008_0326_b_19L曰明善公主纔議伉儷未及于飛
008_0326_b_20L一年之間相繼云亡上痛悼之慈殿
008_0326_b_21L尤哀傷不已思所以資福於冥路者
008_0326_b_22L若佛氏故葬畢之明年慈殿命金剛山
008_0326_b_23L僧曰竺尊剏寺於雙墳之外里許而遣
008_0326_b_24L中使督成額曰奉國以供香火即廣

008_0326_c_01L즉 광주廣州 관아 서쪽 10리에 있는 성부산星浮山 아래이다.
아아, 이 절이 어찌 부처를 모시기 위해서 지어졌는가? 어려서 죽은 딸이 가엽고 애통하여 부모의 지극한 정을 두고자 하기 때문이다.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유교와 불교가 서로 경쟁한다고 터무니없이 생각하고, 걸핏하면 왕가에서 해야 할 일이 아니라고 한다. 그들이 어찌 일상적인 원칙에서 벗어나지만 임시방편인 권도權道가 있음을 알겠는가?
옛적 한유韓愈는 조주潮州 유배 시절에 넷째 딸이 죽자 섬서성 상남商南 층봉역層峰驛에서 장례를 치르고 애도의 글27)을 지었으며, 송나라 소동파는 아버지의 초상화를 그려 (호사湖寺에 봉안하였으니) 어찌 다른 이유에서였겠는가? 모두가 부처에 의지해서 영원히 추도하려는 것이다.
부자지간이라면 인륜으로 맺어진 이치는 모두가 동등하다. 비록 고귀함이 지존至尊이라 하더라도 정과 사랑은 똑같다. 하물며 옛적에도 남의 부음을 들으면 슬퍼하였다.
학식 있는 군자가 이 절이 이유가 있어서 창건된 사실을 들으면 당연히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리라. 어느 겨를에 쓸데없는 말과 과장된 소리로 유교와 불교 사이의 시비를 다투며 만족해하는가?
때는 갑인년(1674, 현종 15) 중추일中秋日.
겸팔도선교십육종도총섭兼八道禪敎十六宗都總攝 신臣 승僧 처능處能 삼가 쓰다.
유점사 산영루 중수기楡岾寺山影樓重修記
누각을 산 빛과 물그림자 사이에 세우고 산영루山影樓라고 한 것은 두 가지 뜻이 있다. 산과 물을 합해서 말하여 누대 이름을 산영이라 하였으니, 산이란 곧 산 빛깔이며 그림자는 곧 물그림자이다. 대개 산과 물에 자신의 흥을 보내어 이름을 붙인 것으로, 이름에 자신의 뜻을 붙인 첫 번째 뜻이다.
비록 빛과 그림자는 정해진 소속이 없으므로 수광루水光樓나 산영루라 해도 무방하다. 누대의 이름을 산영이라 한 것은, 산은 산이고, 그림자는 산 그림자라는 뜻이다. 다만 산을 사랑해 이름을 붙인 것이니, 이름을 붙인 두 번째 뜻이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 뜻 중에서 어느 것이 낫고 어느 것이 못하며, 어느 것을 취하고 어느 것을 버리겠는가? 만일 버린다면 앞의 수영水影을 버리고,

008_0326_c_01L州治之西十里星浮山之下也寺豈
008_0326_c_02L崇佛而剏哉爲緣哀憐悼痛用寓至情
008_0326_c_03L不知者妄以儒佛相爭輒曰此非
008_0326_c_04L王家之所當爲也豈知夫反經出常而
008_0326_c_05L有所謂權者哉昔韓愈銘女挐於層峯
008_0326_c_06L蘇軾畫先君於湖寺豈有他哉皆所以
008_0326_c_07L憑賴而追悼無窮者也至於父子之間
008_0326_c_08L天理所均雖貴爲至尊情愛則同然
008_0326_c_09L古有聞而悲之者凡有識君子聞此寺
008_0326_c_10L之有爲而剏則當洒涕而悲之奚假以
008_0326_c_11L閑言大語爭是非於儒佛之間而爲快
008_0326_c_12L時甲寅仲秋兼八道禪敎十六
008_0326_c_13L宗都摠攝臣僧處能拜手記

008_0326_c_14L

008_0326_c_15L楡岾寺山影樓重修記

008_0326_c_16L
樓建於山光水影之中而名之曰山影
008_0326_c_17L有二意若合取山水而言則樓名
008_0326_c_18L山影者山則山光也影則水影也
008_0326_c_19L寄興於山水而名者也名之寓意一也
008_0326_c_20L雖然光之與影字無㝎屬亦不妨曰水
008_0326_c_21L山影則樓名山影者山則山也
008_0326_c_22L則山之影也但愛山而名者也名之寓
008_0326_c_23L意二也然則二意之中何優何劣
008_0326_c_24L取奚去曰如可去也去前之水影也

008_0327_a_01L만일 취한다면 뒤의 산영山影을 취할 것이다. 무엇 때문인가? 명승지의 사계절에 물은 다만 푸르고 맑을 뿐이다. 산은 그렇지가 않다. 반드시 각 계절마다 좋은 것이 있다.
봄에는 울긋불긋한 꽃으로 눈길을 주어 구경할 만하고, 여름에는 푸른 나무와 파란 넝쿨이 있으니 몸을 기댈 만하며, 가을에는 알록달록한 단풍과 붉은 잎이 있으니 마음으로 감상할 만하며, 겨울에는 함박눈과 된서리가 있으니 흉금을 씻을 만하다. 이 네 계절의 즐거움은 모두 산 그림자의 도움이다. 그러니 이 산영루에 올라 감흥을 일으키는 사람은 그 수영을 논할 필요가 없고, 단지 산영을 취하더라도 흥취는 이미 넉넉하다.
그런데 누각이 오래되고 기울었으니, 누각을 다시 세운 사람은 누구인가? 승통僧統28) 지십智什 스님이다. 누각이 기울어 다시 세울 때에 기문記文을 짓고 기록한 사람은 누구인가? 백곡 처능이다. 판목에 새긴 것은 어느 해 어느 달인가? 바로 숭정崇禎 후 갑인년(1674, 현종 15) 가을이다.
만국도설萬國圖說
〈만국도萬國圖〉를 나에게 보여 준 사람이 있었다. 그 그림을 보니, 소위 만국은 모두 바다 밖에 있었다. 내가 “많기도 하다. 『시경』과 『서경』이 나온 이후로 역대의 모든 역사서에 모두 실려 있지 않은 나라이다.”라고 하였다.
내가 듣건대, 옛날에 우禹임금이 도산塗山(우임금의 부인)을 만날 때에 옥백玉帛(예물)을 가지고 온 나라가 만국萬國이었다고 한다. 공자는 세상을 바로잡을 도를 펼치기 위해 천하를 돌아다녔다. 이때의 천하란 해내海內(중국 안)에서 구분된 지역이다. 이 〈만국도〉에 기재되어 있는 내용과 비교하면 단지 하나의 거품일 뿐이다.
세상에 전해지는 이야기에 “장건張騫29)이 은하수를 찾아 하늘로 올라갔으며, 직녀織女의 지기석支機石30)을 가지고 돌아왔다.”라고 하니, 장건은 천하의 끝까지 가서 두루 다 본 사람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만국도〉에 실려 있는 나라들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도 없다. 이 〈만국도〉는 누구에게서 나온 것인가?
“석가세존께서 방위를 논할 때에, 세계가 많아서 그 숫자가 모래보다 많다고 하셨다.”라고 나는 들었다. 이 〈만국도〉에 그려져 있는 나라도 역시 많다고 할 수 없다.

008_0327_a_01L如可取也取後之山影也何者名區
008_0327_a_02L四時水但凝碧而澄者也山則不然
008_0327_a_03L必有四可春則丹葩紫蘂目可騁也
008_0327_a_04L則碧樹靑羅身可捿也秋則斑楓赤葉
008_0327_a_05L心可賞也冬則密雪嚴霜襟可滌也
008_0327_a_06L此四可皆山影之助也然則登斯樓而
008_0327_a_07L發興者不必論其水影而但取山影
008_0327_a_08L趣己 [9] 足也樓久而欹改建者誰耶
008_0327_a_09L統智什也樓欹而復建作文而記者誰
008_0327_a_10L白谷處能也刻板者何年月耶
008_0327_a_11L禎後甲寅之秋也

008_0327_a_12L

008_0327_a_13L萬國圖說

008_0327_a_14L
有以萬國圖示余者取其圖而觀之
008_0327_a_15L謂萬國皆在重溟之外者余曰多矣
008_0327_a_16L自詩書以降歷代諸史皆所未載
008_0327_a_17L之國也余聞古者禹會塗山執玉帛者
008_0327_a_18L萬國孔子道窮轍環天下者特謂其海
008_0327_a_19L內區分之域則較此圖所載特一浮漚
008_0327_a_20L世傳張騫尋河上天取織女支機
008_0327_a_21L石而還云可謂窮天下而極覽者也
008_0327_a_22L於此圖之所載亦未嘗一論焉則此圖
008_0327_a_23L初從阿誰出耶抑吾聞大雄氏之論方
008_0327_a_24L位曰世界之多數過塵沙云則雖此

008_0327_b_01L이제 〈만국도〉 끝머리에 이 글을 쓰니 〈만국도〉를 마음껏 감상하는 데 일조가 되었으면 한다.
성명설性命說
하늘이 인간에게 준 것을 명命이라 한다. 자사子思가 “천명天命을 성性이라 한다.”31)라고 하였는데, 바로 이것이다. 인간이 하늘에서 받은 것을 성性이라 한다. 대우大禹(우임금)가 “나는 하늘에서 명을 받았다.”라고 하였는데, 바로 이것이다. 그러므로 성과 명은 하나이다. 다만 주고받음에 명칭이 나뉠 뿐이다.
하늘의 명은 알기 어렵기 때문에 공자도 명을 자주 말하지 않았다. 인간의 성은 알기 쉽기 때문에 맹자가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라고 말하였다. 일반적으로 하늘의 명은 소원疎遠하여 알기 어렵고, 인간의 본성은 친근하여 알기 쉽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공자는 “내가 이 명을 넘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맹자는 “위후魏侯는 천天을 보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는데, 모두 하늘에 있는 명을 말한 것이다.
장자莊子가 말하는 ‘선성繕性’,32) 양자楊子가 말하는 ‘수성修性’33)은 모두 인간의 성을 말한 것이다.
불가佛家에서는 혹은 성명性命이라 하고 혹은 신명身命이라 하여, 성과 명을 나누지 않고 합해서 말하였다. 이는 성이 바로 명이고, 명이 바로 성임을 일컬은 것이니, 이것들이 모두 사람에게 달려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학자들도 이 점을 분명히 알면, 삼교三敎의 성명설에 대해 동이同異를 대략이나마 분별하고 의혹이 없어질 것이다.
인의설仁義說
사람을 사랑하고 만물을 이롭게 함을 인仁이라 하고, 합당하게 일을 처리함을 의義라고 하니, 모두가 나의 본성에 있는 것이고 당연히 실천해야 할 이치이다.
대개 인은 사랑을 위주로 하고, 의는 의리를 주장하지만 경중輕重이 없을 수가 없다. 무엇 때문인가? 인은 의의 머리이며, 의는 인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공자를 추종하는 공문孔門의 학문은 인을 구하는 일을 중요하게 여긴다.

008_0327_b_01L亦不足多也聊書圖末以爲騁懷
008_0327_b_02L之一助云

008_0327_b_03L

008_0327_b_04L性命說

008_0327_b_05L
天授之於人曰命子思之所謂天命之
008_0327_b_06L謂性者是也人受之於天曰性大禹之
008_0327_b_07L所謂吾受命於天者是也故性與命
008_0327_b_08L一也而特授受之分耳雖然天之命難
008_0327_b_09L見故孔子罕言命人之性易知故
008_0327_b_10L子道性善盖在天之命踈遠難見
008_0327_b_11L在人之性親近易知故也是以孔子曰
008_0327_b_12L丘之不濟此命也孟子曰魏侯之不見
008_0327_b_13L天也皆言在天之命也莊子所謂繕性
008_0327_b_14L楊子所謂修性皆言在人之性也佛家
008_0327_b_15L或云性命或云身命等者性與命
008_0327_b_16L分而合言其性即命命即性而稱也
008_0327_b_17L在人者也學者當審乎此則於三敎
008_0327_b_18L性命之說粗分同異而無惑矣

008_0327_b_19L

008_0327_b_20L仁義說

008_0327_b_21L
愛人利物之謂仁隨宜制事之謂義
008_0327_b_22L在我之性而當然之理也盖仁主於愛
008_0327_b_23L義主於義而不無輕重焉何者仁爲義
008_0327_b_24L之首義從仁而生者也孔門之學

008_0327_c_01L그러므로 낚시를 해서 물고기를 잡더라도 그물을 쓰지는 않고, 주살로 새를 잡더라도 자는 새를 쏘지는 않는다. 이것이 성인의 인심仁心이다. 그러므로 (『논어』 「이인里仁」에서) “식사를 하는 짧은 시간에도 인을 어기는 일이 없었다.”라고 하였으며, 또 (「술이述而」에서) “인이 멀리 있는가? 내가 인을 실천하고자 한다면 곧 인이 다가온다.”라고 하였다.
공자의 제자인 중궁仲弓ㆍ자로子路ㆍ염유冉有ㆍ공서화公西華 등은 현인이지만 공자는 그들이 인仁하다고 인정하지 않았다. 오직 안연顔淵을 칭찬하고, (「옹야雍也」에서) “석 달 동안 인을 어기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인을 어기지 않았다’라고 하는 말은 바로 한 칸 정도의 간격쯤 모자란다는 뜻이다.
또 공자는 초나라 영윤令尹인 자문子文의 사람됨에 대해서도 다만 그의 충忠만을 인정하고 그의 인은 인정하지 않았다.34) (『논어』 「공야장公冶長」에서) 진문자陳文子의 사람됨에 대해서는 단지 그의 청淸만을 인정하고 그의 인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관중管仲35)을 평가할 때는 “어진 사람 같다.(如其仁)”라고 하였다. ‘어진 사람 같다’라고 한 것은, 그의 공로를 미화한 것이지 반드시 그가 인하다고 한 것은 아니다.
인도仁道는 지극히 위대하기 때문에 단지 삼현三賢36)에 대해서 “은나라에 세 명의 어진 분이 있다.”라고 하였다. 또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에 대해서는 (『논어』 「술이」에서) “인을 구하고자 하여 인을 얻었다.”라고 평가하였다. 이것이야말로 공자가 찬미한 극치이니, 인이란 쉽게 얻을 수 없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인에는 반드시 의가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공자는 인의仁義를 함께 말하지 않았다. 어찌하여 그런 줄 알겠는가? 삼현을 이미 삼인三仁이라고 하였다. 그러니 삼현이 군주를 사랑한 충성이 바로 의이다. 백이와 숙제를 평가하기를 이미 득인得仁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백이와 숙제가 (주나라 무왕武王의) 말고삐를 붙잡고 간언한 것은 의이다. 이렇게 본다면 의는 인 가운데 있고, 인에는 반드시 의가 들어 있다. 공자께서 인과 의를 함께 말하지 않은 이유도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정자程子는 “공자는 단지 인仁 한 글자만 설명하였고, 맹자는 입만 열면 즉시 인의仁義를 설명하였다.”라고 하였다. 맹자는 양梁나라 혜왕惠王의 “무엇으로써 우리나라를 이롭게 할 것이냐?”라는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하였기 때문에 인의를 함께 설명하였다. 그리고 의 자를 열거하여서 이심利心을 억제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공자 역시 어찌 의를 설명한 적이 없겠는가? 공자는 (「양화陽貨」에서) “군자는 의를 으뜸으로 삼는다.”라고 하였고, 또 (「헌문憲問」에서) “이익을 보면 의리를 생각하라.(見利思義)”라고 하였다. 견리사의見利思義의 의 자는 바로 맹자가 양나라 혜왕에게 대답한 말, 즉 “역시 인의가 있을 뿐이다.”에 나오는 의 자이다.

008_0327_c_01L求仁爲要故釣而不網弋不射宿者
008_0327_c_02L聖人之仁心也故曰無終食之間違仁
008_0327_c_03L又曰仁遠乎哉我欲仁斯仁至矣
008_0327_c_04L故雖以仲弓子路冉有公西華之賢
008_0327_c_05L子不許其仁而獨美顏淵曰回也
008_0327_c_06L月不違仁不違仁者是未達一間者也
008_0327_c_07L夫子又於令尹子文之爲人也只許其
008_0327_c_08L而不許其仁於陳文子之爲人也
008_0327_c_09L許其淸而不許其仁謂管仲曰如其
008_0327_c_10L如其仁者美其功而不必其爲仁也
008_0327_c_11L仁道至大故只於三賢曰殷有三仁
008_0327_c_12L於夷齊曰求仁得仁此迺夫子讃美之
008_0327_c_13L而仁不易得之辭也雖然仁必有義
008_0327_c_14L夫子不並說仁義何以知其然也
008_0327_c_15L三賢旣已謂之三仁而三賢愛君之忠
008_0327_c_16L是義夷齊旣已謂之得仁而夷齊叩馬
008_0327_c_17L之諫是義也跡此觀之義在於仁中
008_0327_c_18L而仁必有義矣夫子不並說仁義從可
008_0327_c_19L知矣程子曰仲尼只說一箇仁字
008_0327_c_20L子開口便說仁義云者盖孟子對惠王
008_0327_c_21L何以利吾國之問故並說仁義而擧義
008_0327_c_22L抑其利心故也夫子亦何甞不說義
008_0327_c_23L故夫子曰君子義以爲上又曰見
008_0327_c_24L利思義其見利思義之義字正是孟子

008_0328_a_01L어찌 공자가 단지 ‘인’ 한 글자만 설명했겠는가? 정자가 “공자는 다만 인 자 하나만 말했다.”라고 한 것은, 공자가 의를 말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인과 의를 함께 말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옛날의 여러 학자들이 인의를 논한 것이 같지 않다. 묵자墨子는 ‘겸애兼愛’를 인이라 하였고, 양자楊子는 ‘위아爲我(자신을 위하는 것)’를 의라고 하였는데, 모두 공자 문하에서 말하는 인의는 아니다.
고자告子는 (『맹자』 「고자告子」 상에서) “인은 안에 있고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의는 밖에 있고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내인외의內仁外義라는 주장이다.
노자老子는 (『도덕경』 19장에서) “인을 끊고 의를 버려야지 백성들이 자慈와 효孝를 회복한다.”라고 하였다.
장자莊子는 (『장자』 「천운天運」에서) “거짓으로 인을 말하고, 핑계로 의에 머문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인의를 모두 바깥에 있는 것으로 본다는 주장이다. 그러므로 장자는 (『장자』 「천운」에서) “인의란 선왕先王의 거려蘧廬(여인숙)이다. 머물러서 하룻밤 정도는 있을 수 있지만 오래 머물 곳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불가에서는 자비를 인, 희사喜捨를 의라 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인과 의가 모두 다 나에게 있음을 의미한다.
배우는 이들은 제자백가들이 논한 인의에 대한 서로 다른 학설에 대하여 깊이 완미하고 상세히 연구를 해야 한다.
석씨원류 발釋氏源流跋37)
아! 불법을 전하고 받은 뜻은 『전등록傳燈錄』38)에 상세히 실려 있고, 신령스럽고 기이한 자취는 『통재通載』39)에 많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전등록』에서는 비바시불毘婆尸佛(석가모니 이전의 부처님 중 처음 나타난 부처)을 첫 번째로 하였고, 『통재』에서는 반고왕盤古王(천지가 개벽할 때 나타난 왕)을 첫 번째로 하였다. 모두 석가모니가 스스로 말한 “오직 내가 홀로 존귀하다.(唯我獨尊)”라는 의미와는 맞지 않는다.
지금 『석씨원류釋氏源流』의 편차를 보니 곧장 석가씨부터 시작하여 담파 국사膽巴國師40)에 이르기까지 부처와 조사가 총 244인인데, 이를 편찬하여 불법 근원의 시작과 끝으로 삼았다. 책의 구성에 조리와 체제가 더욱 정확하여 석가씨를 조상으로 하지 않는 『전등록』이나 『통재』보다 매우 뛰어나다. 근원이 깊으면 멀리 흘러가는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008_0328_a_01L對惠王曰亦有仁義之義字也豈夫子
008_0328_a_02L只說一箇仁字乎程子謂仲尼只說一
008_0328_a_03L箇仁字云者非不說義也不並說仁義
008_0328_a_04L之謂也然古之諸家論仁義不同墨氏
008_0328_a_05L以兼愛爲仁楊氏以爲我爲義皆非孔
008_0328_a_06L門之所謂仁義者也告子曰仁內也非
008_0328_a_07L外也義外也非內也此是內仁外義之
008_0328_a_08L論也老子曰絕仁棄義民復慈孝
008_0328_a_09L子曰假道於仁托宿於義此是仁義
008_0328_a_10L皆外之之論也故其言曰仁義先王之
008_0328_a_11L蘧廬也止可以一宿不可以久處也
008_0328_a_12L佛氏以慈悲爲仁喜捨爲義此是仁義
008_0328_a_13L皆在我之謂也學者當於諸家論仁
008_0328_a_14L義不同之說翫味而詳焉

008_0328_a_15L

008_0328_a_16L釋氏源流跋

008_0328_a_17L
受授之旨備載於傳燈靈奇之跡
008_0328_a_18L多著於通載然傳燈以毗婆佛爲首
008_0328_a_19L載以盤古王爲初皆未叶於釋迦氏自
008_0328_a_20L言惟我獨尊之意也今觀源流之所編
008_0328_a_21L直自釋迦氏以至膽巴國師通得
008_0328_a_22L佛若祖二百四十四人編爲源流之首
008_0328_a_23L末始終有條次第尤的有愈於傳燈通
008_0328_a_24L載之不以釋迦氏爲祖首也可謂源遠

008_0328_b_01L이 책을 편찬한 사람의 의도가 어찌 우연이겠는가?
우리나라에는 원래 이 책이 없었다. 지난 숭정崇禎 4년인 1631년(인조 9) 여름에 호정壺亭 정두원鄭斗源41)이 연경燕京에 사신으로 갔다가 여관에서 중국의 연산燕山 스님 대겸大謙을 만났다. 대겸이 이 책을 꺼내어 정두원이 귀국할 때 주면서 우리나라의 법보法寶로 삼으라고 하였다.
정두원이 돌아온 다음에 금강산 백운암白雲菴에 보관하였다. 당시에 춘파 대사春坡大師가 그 책을 보고 크게 기뻐하여 판각板刻을 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었다. 관서關西 지방 도승통都僧統인 지십智什 스님이 모연募緣하여 간행하였으니 춘파 대사가 남긴 부탁을 따른 것이다.
신해년(1671, 현종 12) 겨울에 재물을 거두어 모으고 임자년(1672, 현종 13) 가을에 작업을 마쳤다. 여러 성인聖人의 진실한 자취를 후세에 환하게 다시 일으키게 되었으니 지십 스님의 마음 씀씀이가 참으로 부지런하다고 할 만하다. 이상의 여러 사실을 근거로 해서 본다면 대겸이 정두원에게 부탁한 것이 묵시적으로 춘파 대사에게 이어졌고, 춘파 대사가 지십 스님에게 부탁한 것도 역시 대겸 스님에게서 은밀히 이어진 것이 분명하지 않겠는가?
도가 서로 들어맞는 것은 진실로 언어와 형태의 모습에 의지하지 않는 것이니, 나라가 같고 다름도 참으로 논할 거리가 못 된다. 지십 스님이 나에게 발문을 요구하므로 나는 그가 일을 시작한 것을 가상하게 여겨 글을 써서 후대에 전하는 데 약간의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대사헌 유 공께 올리는 편지
모월 모일에 백곡 산인白谷山人 처능處能은 머리를 조아리고 두 번 절하며 대사헌 상공에게 글을 올립니다.
지난달에 저는 설성雪城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동주東州(강원도 철원)로 돌아오는 길에 징파강澄波江(임진강)을 지날 때, 날씨가 찌는 듯 더워서 강가의 나무 밑에서 쉬고 있었습니다. 그때 물가의 굽이진 곳에 있는 높은 정자 위에 노선생老先生이 갓을 높이 쓰고 앉아 있음을 보았습니다. 마음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뱃머리에서 낚시질하는 노인에게 누구인지 물었습니다. 노인은 낚싯대를 잡은 채로 인사하면서, “스님은 듣지 못했습니까? 어진 재상인 유 공兪公께서

008_0328_b_01L而流長者也編者之意豈偶然哉
008_0328_b_02L國初無是書徃在崇禎四年夏壼亭鄭
008_0328_b_03L相公斗源氏奉使燕京逆旅中得遇
008_0328_b_04L燕山僧大謙謙出是書付諸鄭相公之
008_0328_b_05L俾爲東方法寶相公使還藏于金剛
008_0328_b_06L山中白雲菴時春坡大師窺其書大悅
008_0328_b_07L將欲鋟榟而未果關西都僧統智什
008_0328_b_08L緣刊行遵春坡之遺囑也鳩財于辛亥
008_0328_b_09L斷工於壬子秋令衆聖人眞迹
008_0328_b_10L然再興於季世什公之用心可謂勤矣
008_0328_b_11L由是觀之大謙之付諸鄭相者不無冥
008_0328_b_12L契乎春坡春坡之囑于什公者亦有密
008_0328_b_13L承于大謙明矣道之相契者固無待於
008_0328_b_14L言語形貌則邦域之同不同固不足論
008_0328_b_15L什徵余文跋其尾余嘉厥緖故
008_0328_b_16L此以爲傳遠之一助云

008_0328_b_17L

008_0328_b_18L上大司憲兪公書

008_0328_b_19L
月日白谷山人處能頓首再拜獻書于
008_0328_b_20L大憲相公閤下前月中某自雪城行脚
008_0328_b_21L歸東州路由澄波江日氣蒸溽憇錫
008_0328_b_22L汀樹間覘其曲渚邊高亭上有老先生
008_0328_b_23L峨冠而坐心訝之問于艙頭釣翁
008_0328_b_24L把竿而揖曰子不聞乎賢宰相大夫兪

008_0328_c_01L임금을 바로 인도하고 나라에 도움이 되고자 한결같이 법대로 하다가, 다른 사람들과 다투어 병을 핑계로 하직하고 돌아와 계십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한번 찾아가 제 속마음을 쏟아내고서 은혜로운 말씀 한마디라도 내려 주었으면 하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외람되게도 비루하고 못난 몸으로 당돌하게 나설 수가 없었고, 또 과연 관대하게 접대를 해 줄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노력하면서 세 번이나 나아갔다가 물러나왔으며 가슴속에 걸린 채 이제 여러 날이 되었습니다.
하고 싶은 일이 있을 때 상대의 대답을 듣지 못하면 단지 마음속에 가득 채워 둘 뿐입니다. 그렇게 되면 끝내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표현도 해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또한 살펴 주시는 은혜를 얻지도 못합니다. 그러므로 감히 어리석고 누추한 말이지만 저의 간절한 정성을 서찰에 담아 올립니다. 합하閤下께서는 어떻게 여길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합하께서는 풍운風雲이 만났을 즈음42)에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역임하시었고 푸른빛 자줏빛 관복 속에 싸여 영화가 지극했다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정사당政事堂에서 인사권을 담당하였습니다. 상을 받을 사람이 있으면 기뻐하시면서 봄날 햇살처럼 따뜻하였고, 벌을 받을 사람이 있으면 노하면서 가을 서리가 차갑게 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정직하게 관직 생활을 하고 분명하게 행정을 보았습니다. 관직 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거짓을 부리는 사람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사물의 경중輕重이 저울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리고 합하께서 현명한 사람을 천거하면 팔개八凱43)가 직책을 맡은 듯하였고, 간악한 사람을 물리칠 때는 사흉四凶44)이 동료를 떠나는 듯하였습니다. 성군인 요임금과 순임금 위에다 우리 임금을 올리고, 은殷나라와 주周나라 세상처럼 우리 백성을 편안히 함이 모두 합하의 손에 달려 있었습니다. 합하의 지위는 존귀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합하께서는 오히려 임금과 신하가 조화를 잃고 나라의 기강이 차츰 쇠퇴해져 사직이 불안하고 조정이 공명정대하게 되지 못함을 걱정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걱정으로 잠을 잊고 식음을 전폐하면서 안타까움을 안고 근심을 머금었습니다. 임금께 간언할 때는 옷자락을 잡고 투쟁하였으며, 재사才士를 맞이할 때에는 머리털을 거머쥐고 맞이하였습니다.45) 합하의 마음은 국가를 간절히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몸이 아프고 병이 들었을 때도 밤낮으로 생각함은 오직 나랏일뿐이었습니다. 그리고 현명한 재상인 제갈량諸葛亮과 (송宋의) 명장 악비岳飛도 끝내는 자신들이 살았던 후한後漢과 송나라에서 능력을 떨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또 병으로 관직을 버리고 강호에 물러나 살게 되자,

008_0328_c_01L匡君輔國一以䂓模與人抹摋
008_0328_c_02L病而歸云擬欲呌閽冀賜以一言之眷
008_0328_c_03L則猥以鄙庸不敢唐突而進又不
008_0328_c_04L知其果許以優容而接之故蹩躠三進
008_0328_c_05L而退鯁鯁于胷次中于今有日矣
008_0328_c_06L然凡有所欲而不得售於人者但滔滔
008_0328_c_07L滿載心腑間而已則是終不現吾心之
008_0328_c_08L所欲言而又不獲曲照之覽詧故敢以
008_0328_c_09L愚陋之言區區懇懇於筆札間而獻焉
008_0328_c_10L苐未知閤下之何謂也伏惟閤下風雲
008_0328_c_11L際會歷職淸要紆靑嚲紫榮幸極矣
008_0328_c_12L况秉鈞軸于政事堂喜有賞則春日舒
008_0328_c_13L怒有罰則秋霜降冷循官以直
008_0328_c_14L政以明人不容僞於其間若物之輕重
008_0328_c_15L不得逃於權衡之㝎而其又進其賢則
008_0328_c_16L八凱補職退其姦則四㐫離羣致君於
008_0328_c_17L堯舜之上安民於商周之世者皆懸於
008_0328_c_18L隻手中閤下之位可謂尊矣然猶恐
008_0328_c_19L其塩梅失和紀綱陵遲則社稷不安
008_0328_c_20L朝廷不正忘寢廢餐抱恨含憂諫主
008_0328_c_21L則牽裾以爭待士則握髮以接閤下之
008_0328_c_22L未甞不慻慻國家凋瘵之間而晝思
008_0328_c_23L夜度國事已矣固知諸葛之賢宰岳飛
008_0328_c_24L之良將終不振彌綸於漢宋則又以病

008_0329_a_01L어부와 목동에 섞여 생활하고 마음은 갈매기에 맹세하였습니다. 자연과 더불어 밭을 갈고 낚시질하면서 하인들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몇 이랑의 오이밭에 호미를 메고 나가서 캐고, 강가의 이끼 낀 돌에서 낚시질하였습니다. 풍년이 들어도 절약해서 생활을 하였으니 역시 노년을 보내기에 풍족합니다.
합하께서 홀로 방에 앉아 계실 때는 세상사의 이해득실을 한 조각 구름처럼 보실 것이니 어떤 즐거움을 여기에 더할 수 있겠습니까? 혹 문을 닫고 책상에 기대어 경전과 역사서를 두루 읽다가 홀연히 고금의 정치적인 안정과 혼란한 상황과 관련된 내용을 보고, 군부君父 사이에서 차마 의리를 잊을 수 없다는 대목을 보시면 합하께서는 반드시 당시의 사건에 대해 비분강개하시면서 안타까워하실 것입니다. 진실로 이와 같이 합하께서 조정에 있었을 때는 (억울하게 유배를 간 한나라) 가의賈誼의 원통함을 생각하였을 것이고, 강호에 있었을 때는 송나라 충신 범중엄范仲淹46)의 근심을 가슴에 품었을 것입니다.
뜬구름 같은 부질없는 한평생에 즐길 만한 것도 하나 없으니 그저 정신만 손상시킬 뿐입니다. 비분강개하면서 애통해하더라도 이미 깨어진 시루와 같으니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합하께서는 마음에 두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금년에 나이 25세입니다. 견문도 병이나 항아리 정도를 넘지 못하고 운수객처럼 편력한 적도 없습니다. 금년 가을에는 평안도 지역으로 방향을 잡아 곧장 묘향산으로 들어가려 합니다. 우뚝 솟은 향로봉 위에 더위잡아 오르면서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넓고 아득한 천지 사이에 눈길을 돌려 마음껏 보고서 마음이 웅대해지고 기운이 용맹해진 연후에 돌아와 합하의 문을 두드리겠습니다. 합하께서 혹시나 방외方外의 도에 뜻이 있어 저를 불러 힘차게 기운을 토해내도록 하고 우리 불가에서 전하지 않는 오묘한 이치를 세세히 논하게 하신다면 유감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합하께서 살펴 주시리라 생각합니다.
어떤 재상에게 올리는 편지
옛적에 상하上下47)가 서로 만날 때는 반드시 예가 있었으니 예는 폐지할 수 없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예물을 윗사람에게 바침을 지贄, 예물을 아랫사람에게 내림을 뇌賚라 합니다.
우禹임금이 도산후塗山侯를 만났을 때에 옥玉을 가져갔으니 이것이 지贄입니다.

008_0329_a_01L退居江湖跡混漁樵心盟
008_0329_a_02L雲畊釣載命僮僕荷鋤則有瓜田數畝
008_0329_a_03L垂綸則有苔磯一江年登而節用則亦
008_0329_a_04L足以自老矣閤下獨坐一室視得失於
008_0329_a_05L一浮雲也則何樂加此而若或閉戶憑
008_0329_a_06L歷閱經史忽覩古今治亂有若不
008_0329_a_07L忍忘義於君父之間必閤下慷慨起憤
008_0329_a_08L於當時事而憾焉苟如是在朝廷則懷
008_0329_a_09L賈傅之痛處江湖則銜仲淹之憂浮生
008_0329_a_10L一世無一可樂而適足以損精傷神
008_0329_a_11L慷慨憂痛奚益於破甑乎哉伏願閤下
008_0329_a_12L毋介懷也不侫年今二十有五見聞不
008_0329_a_13L過乎瓶瓮之間而無山川雲水之遍歷
008_0329_a_14L今秋方向關西仍入玅香若躋攀轉身
008_0329_a_15L於爐峯嵽嵲之上而顧眄騁目乎乾坤
008_0329_a_16L曠漠之間心雄氣猛然後歸以敲閤下
008_0329_a_17L之門閤下其亦有意於方外道而呼之
008_0329_a_18L使前終令吐氣張眉細論吾家不傳之
008_0329_a_19L則庶無憾矣惟閤下鑑裁焉

008_0329_a_20L

008_0329_a_21L上某相公書

008_0329_a_22L
伏以古者上下之相見也必有其禮
008_0329_a_23L不可廢也何者以物獻上曰贄以物
008_0329_a_24L賜下曰賚禹會塗山侯執玉是贄也

008_0329_b_01L(은殷나라의) 이윤伊尹이 신야莘野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을 때 탕湯임금이 폐幣를 주었는데 바로 뇌賚입니다. 상하 간에 각각 예절을 차린 연후에 일이 성사됩니다. 그러므로 월상越裳(베트남 동부에 있던 나라)은 주공周公에게 흰 꿩을 바쳐 은혜를 입었고,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은 진평陳平에게 금을 하사하여 대업을 이루었습니다. 예물을 사용하여 쌍방 간에 바라던 목적을 이루니 예물이란 없어서는 안 됩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한 몸이 생사의 갈림길에 있을 때에도 또한 예물이 없을 수 없습니다. (전국시대 제齊나라의) 맹상군孟嘗君이 (진秦나라에 구금되었을 때) 호구狐裘(여우 가죽 옷)를 예물로 바치지 않았으면 제나라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수가須賈48)는 솜옷이 없었다면 위나라로 되돌아가기 어려웠습니다. 예물이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그 나머지 전국시대의 지사들은 황금과 옥벽玉璧을 보내어 구원을 요청하고, 혹은 자국의 땅을 바쳐 화친을 요구하였습니다. 이들 모두는 예물의 힘을 빌려 그 교분을 두터이 하는 것입니다.
혹은 명예와 절개를 앞세워 더럽다고 여기면서 예물을 받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춘추전국시대 오패五覇의 한 사람인) 진 문공晉文公은 구슬을 되돌려 주었고, (춘추전국시대 진晉나라의 대부인) 한선자韓宣子는 고리를 사양하였고, (공자의 제자인) 자공子貢은 비단을 버렸고, (후한의) 양진楊震은 금을 사양하였습니다. 이들 모두는 예물을 버리고 의리를 고상히 여긴 사람들입니다.
비록 그렇지만 인정과 의리를 병행하였기 때문에 서로 어그러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후한의 유총劉寵49)은 1전錢을 꺼내서 받았으니 이것은 인정을 소중히 여긴 것입니다. (전국시대 제齊나라의 지사인) 노중련魯仲連은 천금千金을 가벼이 여겨 물리쳤으니, 이것은 그 의리를 높이 여긴 것입니다. 인정과 의리는 모두 옛사람도 실행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받고 안 받음은 저쪽 사람에 있고, 예물을 올리고 예의를 실천함은 나에게 있습니다. 나에게 있는 예의를 어찌 모두 폐지할 수 있겠습니까?
합하께서는 재주와 지략이 고금에 으뜸이고 명성은 온 나라에 떨칩니다. 조정에 들어오면 (주나라의) 주공周公과 소공召公 같은 명재상이고, 밖으로 나가면 (전국시대의 명장인) 관중管仲과 악의樂毅 같습니다. 장군과 재상을 오가면서 국사에 마음을 다 쏟고 있음은 길 가는 사람도 모두 알고 있습니다. 인정과 의리의 실행도 역시 그 가운데 있으니 합하의 지위는 존귀하다고 하겠습니다.
우매한 저는 일전에 관청의 일 때문에 존안尊顔을 볼 수 있었으니, 합하의 도량은 넓었으며 저의 행운은 컸습니다. 다만 예상하지도 않은 일 때문에 주제넘게 하찮은 선물을 올렸는데 노골적으로 얼굴빛을 바꾸시며 물리쳤습니다.

008_0329_b_01L尹耕莘野帝用幣是賚也是以上下之
008_0329_b_02L各致其禮然後事乃相濟故越裳
008_0329_b_03L獻雉於周公而蒙聖化漢高賜金於陳
008_0329_b_04L而成大業物所以相濟者不可無
008_0329_b_05L至於一身死生之際亦不可以無物
008_0329_b_06L田文無狐裘則不能歸齊須賈非
008_0329_b_07L綈袍則難以返魏物可無乎其他戰
008_0329_b_08L國之士或齎金璧而請救或納土地而
008_0329_b_09L求和是皆賴其物而厚其情者也
008_0329_b_10L負名節浼焉不受者有之若重耳之反
008_0329_b_11L宣子之辭環子貢之捐幣 [10] 震之
008_0329_b_12L讓金是皆棄其物而高其義者也
008_0329_b_13L然情義並行不相爲悖故劉寵選一錢
008_0329_b_14L而受之是厚其情也魯連輕千金而却
008_0329_b_15L是高其義也情之與義皆古人之
008_0329_b_16L所行也然則或受或不受在彼進物而
008_0329_b_17L行禮在我在我之禮烏可一切廢爲哉
008_0329_b_18L伏惟閤下才略冠古今聲名動遐邇
008_0329_b_19L入則周召出則管樂而將相之間
008_0329_b_20L盡心於國事路人所共知而情義之行
008_0329_b_21L亦在其中閤下之位可謂尊矣不侫
008_0329_b_22L猥以愚昧曩因官事獲蒙賜顏閤下之
008_0329_b_23L度寛而不侫之幸大也第未料事
008_0329_b_24L奉不腆而獻焉則居然色變而却之

008_0329_c_01L이 일로 합하의 고상한 의리를 볼 수 있음은 많고, 합하의 두터운 인정을 얻을 수 있음은 적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물이 도리어 허물로 바뀌고 합하의 고명하신 덕에 죄를 얻게 될 줄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비록 그러하나 예는 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공자가 (『논어』 「팔일八佾」에서) 말하기를, “예는 사치하기보다는 차라리 검소함이 낫다.”라고 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물품이 검소하고 적당하면 예입니다. 사치스럽고 지나치면 뇌물입니다. 제가 올린 선물은 미미한 정성 중의 예의를 차리기 위한 하나의 물건입니다. 뇌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요즈음의 사대부로 스승, 제자라고 운운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속수束脩50)를 실천하는데 어찌 뇌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합하의 명령을 기다린 지 지금 49일이 되었습니다. 관청의 문을 두드리고자 하나 발이 머뭇거리고, 말씀을 올리고자 하나 입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마음속으로 두려워 합하께 가야 할지 물러나야 할지 가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합하께서 저의 어리석음을 불쌍하게 여기시어 저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옛 허물을 마음에 두지 않으시고 저를 구제해 주신다면 이것은 합하의 인정이 두터운 것입니다. 만약 저의 과오를 나무랄 뜻이 여전히 있으면 저를 불러들여 죄를 주십시오. 그런 연후에 저를 만나 주신다면 역시 합하의 인정이 두터운 것입니다.
아아! 석 달을 머물면서 가을을 보내니 주머니는 비고 옷은 해어져 남쪽으로 가고 싶은 생각만 가득합니다.
합하께서 인자한 마음을 내려 주시어 저를 만나기를 허락해 주시어 합하의 넓은 도량 속에서 넉넉히 지내도록 해 주신다면, 일이 끝나는 대로 옷깃을 흔들면서 구름 낀 아득한 산으로 멀리 갈 것이니, 어찌 합하께서 내리신 은덕이 아니겠습니까? 황송한 마음만 더하고 벗어날 곳을 모르겠습니다. 또 감히 인정과 의리와 관련된 설을 올려 존엄성을 범했으니 죽을죄를 졌습니다.
사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행장賜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行狀51)
스님의 이름은 각성覺性, 자字는 징원澄圓, 자호自號는 벽암碧嵓이며, 삼산三山 김씨金氏52)의 후손이다.

008_0329_c_01L獲見閤下之高義則多而得蒙閤下之
008_0329_c_02L厚情則少也豈意禮翻爲咎而獲罪於
008_0329_c_03L閤下之高明哉雖然禮不可廢也孔子
008_0329_c_04L禮與其奢也寧儉凡物儉而行則禮
008_0329_c_05L奢而過則賂也不侫之妄進不過
008_0329_c_06L爲微誠中一禮也可謂之賂乎今士君
008_0329_c_07L曰師曰弟子云者必有束修之事
008_0329_c_08L豈可謂之賂乎待命今四十九日也
008_0329_c_09L叩閽而足趦趄欲進言而口囁嚅中心
008_0329_c_10L恐懼不知進退之可否也伏願閤下
008_0329_c_11L矜其愚而恕其罪不念舊愆而相濟
008_0329_c_12L是閤下之情厚也設若督過之意尙存
008_0329_c_13L則召而罪之然後許之以成事則亦閤
008_0329_c_14L下之情厚也淹留三朔經過九秋
008_0329_c_15L囊空衲弊懷想南遊者多矣閤下倘垂
008_0329_c_16L慈恤果許以成事俾得優游於閤下曠
008_0329_c_17L度之中則事了拂衣長徃雲山豈非
008_0329_c_18L閤下之賜耶唯增惶悚不知逃遁
008_0329_c_19L又敢以情義之說而獻焉干冒尊嚴
008_0329_c_20L罪死罪

008_0329_c_21L

008_0329_c_22L賜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行
008_0329_c_23L

008_0329_c_24L
和上諱覺性字澄圓自號碧嵓生三

008_0330_a_01L선세에 관직을 지낸 사람이 있었는데, 충청도에 좌천되어 왔다가 마침내 삼산에 자리를 잡았다.
10세에 설묵 장로雪黙長老를 따라 출가하고 15세에 머리 깎고 보정 대덕寶晶大德 스님에게 구족계具足戒53)를 받았다.
스님은 키가 작았으나 기상은 의젓하고 단정하였으며 외모는 수려하였다. 치아는 서른아홉 개, 눈빛이 강렬하여 사람들 모두 스님에게 공손하였다.
어머니 조씨曺氏는 오래된 거울 하나가 떨어져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는데, 꿈을 깬 뒤 아이를 가져 만력萬曆 을해년(1575, 선조 8) 12월 23일에 스님을 낳았다.
스님은 어릴 때부터 계율을 지키고 불경을 외우고 익히면서 그 의미를 남김없이 철저히 연구하였다. 당시 부휴 대사浮休大師가 속리산에서 불법을 널리 펼치고 있었다. 스님이 법기法器(불법을 깨우칠 만한 사람)라는 소문을 듣고 방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불법의 진수를 전하자, 동문수학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무술년(1598, 선조 31)에 부휴 대사가 가야산으로 옮겨 가자 스님도 따라갔다. 중국에서 온 장군 이종성李宗城이 명을 받아 일본의 풍신수길豊臣秀吉을 일본 국왕으로 봉하기 위해 내려가다가 해인사에 들렀을 때 스님의 뛰어난 골상骨相을 보고 부휴 대사에게, “백락伯樂의 마굿간에 있는 준마駿馬 중에 뛰어난 말이 많습니다. 선사(부휴)의 시자는 천리마라고 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송운 유정松雲惟政도 부휴 대사에게 서신을 보내어 후계자를 얻은 것을 축하하였다. 그 뒤 얼마 안 되어 부휴 대사가 지리산으로 갈 때에 스님이 역시 부휴 대사를 모시고 갔다. 어떤 관리가 부휴 대사를 방문하여 참선의 의미를 묻다가 제자들에게 각각 시를 짓게 하여 재주가 있는지의 여부를 시험하였다.
당시에는 운곡 충휘雲谷冲徽ㆍ소요 태능逍遙太能ㆍ송월 응상松月應祥을 삼걸三傑이라고 불렀다. 모두 함께 그 자리에 있었는데 스님이 게송 첫 번째 구절을 가장 먼저 지었다.

簾前瘦影僧看月     주렴 앞의 여윈 그림자 스님이 달구경하는 것이요
窓外淸香鳥拂梅     창밖 싱그러운 향기는 새가 매화 가지 스친 것이라.

그러자 삼걸이 다 붓을 놓고 게송 짓기를 중단하였으며 관리도 칭찬하였다. 스님이 지은 시는 신선하고 기이하며, 나머지 시들도 모두 그와 같았다.
스님은 또 삼분오전三墳五典(중국의 고전을 말함)에 뜻을 두어 유교와 도교 그리고 제자백가로부터 여러 가지 역사서와 패관잡기稗官雜記에 이르기까지 두루 읽어 보지 않은 책이 없었다. 또 초서와 예서를 잘 썼으며 필세筆勢가 힘차고 아름다워 서성書聖이라고 일컫는 왕우군王右軍(王羲之)의 필법을 갖추고 있었다. 이보다 앞서 부휴 대사의 모임에 어떤 승려가 병에 걸려 갑자기 사망하였다. 사람들은 모두 전염병이라 하여 꺼렸지마는 스님은 차의衩衣54)로 갈아입고 시체를 허리에 차고 웅덩이에 묻어 주었다.

008_0330_a_01L山金氏先世有簪組左官于湖西遂家
008_0330_a_02L三山十歲隨雪默長老出家十五薙髢
008_0330_a_03L受具於寶晶大德爲人短矬氣象嶷欝
008_0330_a_04L顏容粹美三十九齒目光外射人皆
008_0330_a_05L顒若初母曺媼夢一古鏡墮入懷中
008_0330_a_06L覺而有妊以萬曆乙亥十二月丁亥誕
008_0330_a_07L師焉師旣早從法戒誦習經律究其旨
008_0330_a_08L無蘊餘時浮休大師闡化於俗離聞師
008_0330_a_09L爲法器携入室傳其髓執筳者趨附
008_0330_a_10L戊戌休移伽耶師從之天將李大人宗
008_0330_a_11L受命封倭便道遊海印寺覩師骨
008_0330_a_12L相魁偉謂休曰伯樂之厩多駿駒
008_0330_a_13L師侍者可謂驥之子也松雲政大師
008_0330_a_14L甞以書抵休賀其得嗣無何休赴頭流
008_0330_a_15L師亦摳衣有一宰官訪休扣證禪旨
008_0330_a_16L令門徒各賦偈句試其才否時雲谷
008_0330_a_17L冲徽逍遙太能松月應祥號爲三傑
008_0330_a_18L同在會中師偈先成一聯云簾前瘦影
008_0330_a_19L僧看月窓外淸香鳥拂梅三傑皆束杠
008_0330_a_20L而止宰官歎美之其詩尖新大率類
008_0330_a_21L師又留意墳典自二敎百家以至
008_0330_a_22L諸史稗記靡不遍閱又善草隷筆勢
008_0330_a_23L遵媚有右軍法先是休會下一僧
008_0330_a_24L疫疾暴亡人以傳染忌之師改衩衣

008_0330_b_01L마침 밤이라 달빛도 없고 곰과 호랑이가 울부짖었지만 두려워하지 않았다.
어느 날 스님은 부휴 대사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수국암壽國菴에 머물렀다. 돌덩어리마냥 꼼짝 않고 선정禪定에 들어가 온정신을 쏟아부었다. 열흘이 지나자 물새가 날아와 정수리의 솜을 물고 가고, 또 독사가 땅에서 나와 손가락 하나를 깨물었으나 상처가 나지 않았다.
광해군 때에 부휴 대사가 어떤 미친 중의 무고誣告로 감옥에 가게 되었는데 스님도 또한 그 사건에 연루되었다. 감옥에 있더라도 느긋하게 지내며 동요하지 않자 법을 집행하는 관리가 ‘큰 부처님’, ‘작은 부처님’이라고 불렀다. 다음날 광해군이 궁궐에서 직접 심문하였는데, 두 스님의 도의 기운이 뛰어나고 언사言辭가 곧고 바른 것을 보고는 마음속으로 기이하게 여겼다. 결박을 풀고 한참 동안 질문을 주고받았다. 광해군이 매우 기뻐하면서 비단 가사 두 벌을 가져오게 하여 나누어 주고는 돌아가게 하자, 온 성의 사람들이 모두 달려왔으며 절을 하는 사람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부휴 대사가 세상을 떠나자 많은 사람들이 뒤를 잇기를 요청하였으나 스님은 겸손히 사양하였다. 많은 사람들의 뜻이 더욱 간절하였으므로 칠불암七佛菴에서 설법을 하였는데 뛰어난 스님들이 모여들었다.
스님은 부휴 대사를 모시어 거의 30년 동안 공부하면서 직접 주방일을 하고 스승을 위해 수건을 드리고 발우를 들고 다니면서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다. 의문점이 있으면 질문을 해서 해답을 얻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스승의 학문을 전해 받고 임제종의 교리를 크게 떨쳤다.
무오년(1618, 광해군 10) 가을에 신흥사神興寺로 옮기자 7백 명의 많은 사람이 자리를 메웠다. 스님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을 번거롭게 여겨서 밤에 달아나 태백산 전천동箭川洞으로 들어가 자취를 감추었다. 이듬해에 다시 오대산으로 자리를 옮겨 상원암上院菴에서 겨울 수행인 동안거冬安居를 하였다. 당시 광해군은 청계난야淸溪蘭若55)에서 재齋를 올리면서 궁중의 관리를 보내어 스님을 영접하여 설법을 하도록 하고 금란가사金襴袈裟와 벽수장삼碧繡長衫을 보냈다.
인조 대왕仁祖大王이 왕위에 오른 이듬해인 갑자년(1624, 인조 2)에 조정에서 남한산에 성을 쌓을 때 스님을 불러 팔방도총섭八方都摠攝(전국 승려 총대장)으로 임명하였다. 공사를 마친 뒤에는 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라는 칭호를 하사하였다. 또 의발을 내리고 중사中使56)를 파견하여 술을 보내고 위로하였다. 스님이 무릎을 꿇어 절하고,

008_0330_b_01L其屍窆于礨嵌中屬夜無月熊虎嘷
008_0330_b_02L未甞悸愳也一日辭休棲壽國菴
008_0330_b_03L塊然入㝎若承蜩者浹旬日有澗鶂
008_0330_b_04L飛來含將頂綿而去又有毒虺從地出
008_0330_b_05L噆一指無損傷光海時休爲狂僧所誣
008_0330_b_06L拿至王獄師亦坐是雖在縲絏怡然
008_0330_b_07L不撓理官以大佛小佛稱之翌日光海
008_0330_b_08L鞫治掖庭目其道氣崚言辭誙讜
008_0330_b_09L心異之解其纆繳咨訪良久光海甚
008_0330_b_10L出錦襖二襲分賜之令還傾城駿奔
008_0330_b_11L頂謁者無數休入寂衆請繼踵師撝
008_0330_b_12L謙不居衆志彌䔍迺開堂於七佛蘭若
008_0330_b_13L玄侶臻萃師從休入室者殆三十載
008_0330_b_14L自營厨務凡所以執巾挈盂不辭勞苦
008_0330_b_15L有所疑曀咨諏匪懈旣傳秘印大振
008_0330_b_16L臨濟宗旨戊午秌遷神興衆盈七百
008_0330_b_17L師煩於己事宵遁邁入太白山箭川洞
008_0330_b_18L鞱光越明年轉入五臺山結冬于上
008_0330_b_19L院菴維時光海設齋於淸溪蘭若
008_0330_b_20L宮使迓師說法授金襴袈裟碧繡長衫
008_0330_b_21L仁祖大王踐祚之明年甲子朝廷城南
008_0330_b_22L漢山徵師爲八方都摠攝役訖賜報
008_0330_b_23L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號又錫衣
008_0330_b_24L因遣中使出內醞侑之師膜拜曰

008_0330_c_01L“빈도貧道는 불음계不飮戒를 지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임금님의 은덕이 넓고 크니 어찌 감히 한 잔 마시지 못하겠습니까?”라고 하자, 중사가 의롭게 여겼다.
이때부터 공적과 덕행이 함께 드러나고 명성이 원근에 떨치게 되었다. 명성을 다투는 자들이 스님을 미워하여 비방을 일으켜서 사지死地로 스님을 몰려고 하였으나 스님은 성내는 기색이 없이 그 비방 받기를 냉이처럼 달게 여겼다.57)
임신년(1632, 인조 10)에 화엄사華嚴寺를 수리하자 돈을 내는 사람들이 거리를 메웠으며 성대하게 총림叢林58)이 되었다. 병자호란 때는 의승義僧 3천 명을 모집하여 항마군降魔軍이라 부르고 스님은 승군 대장이 되었다. 호남의 관군官軍과 더불어 도와주는 형세를 이루어 정의를 외치면서 나라의 어려움을 도왔다. 인조는 소식을 듣고 가상하게 여겼다. 난리가 끝나자 지리산으로 돌아갔다.
학자들의 의문과 논쟁을 기본으로 해서 『도중결의圖中決疑』와 『참상선지參商禪旨』 등의 글을 지었다. 논리를 세운 것이 매우 타당하고 이치를 분석함이 매우 적절하여 사람들의 공부에 자극을 준 것이 매우 많았다. 경진년(1640, 인조 18) 봄에 쌍계사로 거처를 옮기어 옛 체제를 보태기도 하고 새로이 만들기도 하였다. 8월에 재상 원두표元斗杓가 호남 안절사按節使로 부임하였다. 조정에 보고하여 스님에게 규정도총섭糾正都摠攝의 인수印綬를 내리고 적상산성赤裳山城에 머물게 하니, 스님들이 안렴사按廉使에게 하소연하여 스님은 송광사松廣寺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이듬해인 임오년(1642, 인조 20)에 스님은 해인사로 돌아왔으며 6월에 조정에서 스님을 불러 일본으로 가는 사신으로 넣자 스님은 말을 타고 서울로 가서 병이 있다고 하여 사신 행차를 면하게 되었다. 백운산白雲山으로 가서 상선암上仙庵에서 은거를 하였다.
이듬해 스님은 보개산寶蓋山으로 가서 법회를 크게 열었다. 마침 관서 관찰사 구봉서具鳳瑞가 스님의 학식과 명성을 흠모하여 묘향산으로 맞아들였다. 효종 대왕孝宗大王이 왕세자로 있을 때 스님은 안릉安陵의 여관에서 인사를 하면서 화엄종의 핵심을 설명하였는데 효종(당시는 왕세자)이 크게 칭찬하였다. 나중에 왕위에 오르자 연성군延城君 이시방李時昉에게 “각성覺性 노선사는 별 탈이 없느냐?”라고 하면서 서너 차례 물었으니, 스님께서 효종에게 받은 은혜가 이와 같았다.
병술년(1646, 인조 24) 가을에 속리산으로 가서 고한 희언孤閑熙彦 노사老師59)와 이웃해 살면서 왕래하였다.

008_0330_c_01L貧道持不飮戒豈甘醨哉苐聖德泱泱
008_0330_c_02L敢不一歃中使義之自是功德並著
008_0330_c_03L聲振遐邇爭名者疾詬侜張興謗
008_0330_c_04L置於死地師無恚色受訕如薺壬申
008_0330_c_05L修葺華嚴寺薦貨者塡衢藹爲䕺林
008_0330_c_06L丙子變募義僧三千號降魔軍師爲
008_0330_c_07L僧大將與湖南官軍爲掎角之勢
008_0330_c_08L義助援仁祖聞而嘉之兵罷還智異
008_0330_c_09L因學者疑爭述圖中決疑叅商禪旨等
008_0330_c_10L立論甚當析理尤的其所以激揚
008_0330_c_11L者盖夥庚辰春移住雙溪精舍增舊
008_0330_c_12L制而新之八月相國元公斗杓按節湖
008_0330_c_13L奏聞授師以紏正都摠攝印綬俾住
008_0330_c_14L赤裳山城緇徒訴干按廉請移松廣寺
008_0330_c_15L爲敎魁明年壬午辭歸海印厥六月
008_0330_c_16L朝廷徵師充日本使价師乘馹如京
008_0330_c_17L謝病免詣白雲山隱居上仙菴明年
008_0330_c_18L之寶盖山大開法席會關西觀察使具
008_0330_c_19L公鳳瑞欽師道譽迎入竗香山孝宗
008_0330_c_20L大王潜邸時師謁於安陵逆旅譚覈
008_0330_c_21L華嚴宗要孝宗大加稱賞及登寶位
008_0330_c_22L謂延城君李公時昉曰性老今無恙否
008_0330_c_23L問之數四其綸恩又若是丙戌秋
008_0330_c_24L笻於俗離與孤閑熈彥老師卜隣徜徉

008_0331_a_01L희언 스님이 입적하자 스님은 화엄사에서 조용히 불법에 정진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스님은 한평생 동안 좌선을 열심히 하였으며 사람들을 가르침에 뛰어났다. 스님들이 불법 수행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요청하면 그들로 하여금 ‘무無’ 자를 깊이 연구하게 하였다. 담론談論에도 매우 뛰어나 사대부도 스님의 날카로운 말솜씨를 감당하지 못하였다. 스님은 사람을 대할 때는 공손하고 정성스러웠으며 교만하거나 방자한 일이 없었으며, 외롭고 곤궁한 이들을 도와주려고 노력하였다. 이시죽반二時粥飯60)하기 위해 찾아온 가난한 사람들이 문에 가득하였다. 까마귀나 솔개가 항상 따라다니므로 손수 음식을 주었다. 물고기 잡는 이나 사냥꾼을 보면 살생을 해서는 안 된다고 타이르니, 어망을 불태우고 참회하는 사람도 있었다.
기해년(1659, 효종 10) 12월 경오일61)에 스님이 가벼운 병세를 보이다가 이듬해인 경자년(1660, 현종 원년) 1월 27일 새벽에 승려들을 불러 영원한 이별을 알리자, 승려들은 슬퍼 흐느끼면서 장실丈室로 모시고 들어가 게송을 청하였다. 스님은 불자拂子를 들고 휘두르면서 승려들을 멀찌감치 서 있도록 한 뒤에 게송 한 구절을 지었다.

拈頌三十篇       염송 삼십 편과
契經八萬偈       계경 팔만 게는
何須打葛滕       무엇하러 언어 문자로 분별하는가?
可笑多事在       일만 많이 벌여 가소롭구나.

그리고는 즉시 붓을 던지고 앉아서 열반하시니, 나이는 86세이고 하랍夏臘은 71년이었다. 길일을 택해 절의 동쪽 고개에서 다비를 하였는데, 장례식에 모여든 사람이 만여 명이나 되었다. 사리를 안치하는 의식과 제사에 올린 음식의 성대함은 예전에도 없었다. 화장하기 위해 불을 붙이자 세 갈래 흰 기운이 허공에 뻗치더니 서쪽으로 갔다. 조금 있더니 상서로운 바람이 갑자기 불어오고 숲은 모습이 변하더니 슬퍼서 우는 듯하였다. 삼 일이 지난 뒤에 제자들이 영골靈骨을 수습하였다. 향탕香湯으로 목욕시키는 간절한 정성으로 반야봉般若峯 금강굴金剛窟에서 기도를 올린 덕분이었다. 사리 세 알을 획득하였으니 모두 하얀색이었다. 이에 영골을 나누어 네 곳에 불탑을 세웠다. 지리산 화엄사, 조계산 송광사, 가야산 해인사, 속리산 법주사이다.
고한 대사 행장孤閑大師行狀
대사의 법휘는 희언熙彦, 속성은 이씨李氏, 본관은 명천明川이다.

008_0331_a_01L旣彥遷化師宴晦于華嚴寺弄餘年
008_0331_a_02L師平生能苦坐善誨人衲子請益
008_0331_a_03L叅箇無字談論甚口士大夫無敢當
008_0331_a_04L其鋒者待人恭勤無驕佚傲放事俵
008_0331_a_05L孤窮二時粥飯貧乞者盈門烏鳶常
008_0331_a_06L手中與食見漁佃者誥以殺戒
008_0331_a_07L至有焚網而懺謝者至己亥十二月庚
008_0331_a_08L示微疾越庚子一月癸未昧爽
008_0331_a_09L衆告訣衆哀噎擁俠丈室索伽陁
008_0331_a_10L拈拂揮令遠立率爾題一偈曰拈頌三
008_0331_a_11L十篇契經八萬偈何須打葛滕可笑
008_0331_a_12L多事在即擲筆而坐蛻春秋八十六
008_0331_a_13L夏臘七十一涓吉日遂茶毗于寺之東
008_0331_a_14L會葬者萬餘其喪龕之儀奠羞之
008_0331_a_15L古未之有方下火有白氣三道
008_0331_a_16L空而西俄而祥飊倐起林麓變色
008_0331_a_17L焦悲噪越三日門人收靈骨以香湯
008_0331_a_18L薰沐之懇禱于般若峯金剛窟獲舍利
008_0331_a_19L三粒皆白色於是分靈骨建方墳者
008_0331_a_20L凡四處智異之華嚴曺溪之松廣
008_0331_a_21L耶之海印俗離之法住云

008_0331_a_22L

008_0331_a_23L孤閑大師行狀

008_0331_a_24L
大師法諱熈彥俗姓李氏明川人也

008_0331_b_01L모친이, 인도 스님이 발우에 가사를 담아서 주는 꿈을 꾸었는데, 깨어나 아이를 가져 신유년(1561, 명종 16) 9월 임신일62)에 낳았다. 대사의 생김새는 얼굴은 길고 눈은 곧게 뻗었고 귀는 크고 코는 높았으며 기상은 뛰어났다. 머리를 깎은 뒤로는 경經과 율律을 정미하게 연구했으나 자신의 본분사를 밝히지 못하여 경전을 버리고 사방을 돌아다니다 덕유산의 부휴 대사浮休大師를 찾아뵈었다. 법성원융法性圓融63)의 뜻을 묻다가 인연이 있어서인지 마침내 3년 동안 모셨다. 밥하고 빨래하는 천한 일부터 의문점을 물어보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수행하고 남는 힘으로는 참선과 역대 조사들이 남긴 어록의 의미를 질문하면서 의미를 철저히 알려고 하였으며, ‘고한 도인孤閑道人’이라고 호를 지었다.
대사는 평생에 맛있는 음식을 먹지 않고 좋은 옷도 입지 않았다. 한 벌 누더기 옷도 역시 세탁을 하지 않았다. 눈 속에서도 맨발로 다녔으며 머리카락이 길어 한 치가 넘도록 깎지 않았다. 간혹 음식을 먹지 않았는데 열흘이나 한 달이 되어도 굶주린 기색 없이 정력적으로 좌선을 하느라 더욱 노력하였다.
우연히 서울에 유람 왔다가 돈의문을 지나는 중에 10여 명의 악동을 만났다. 악동들은 대사를 둘러싸고 모욕을 주었다.
“너는 도를 구하는 중이냐, 너는 밥을 구걸하는 중이냐?”라고 하면서, 즉시 대사를 끌고 가서 모래를 파고 묻어 버리려 하였다. 마침 불교를 믿는 신도가 있어서 달려가 대사를 구해 주었다. 대사가 일어나서 성내는 기색이 없이 합장하고 말하기를, “성불하시오, 성불하시오.”라고 말하니, 악동들은 서로 돌아보고 웃으면서 “진실로 도를 구하는 중이다.”라고 하였다.
대사는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대사는 합장하고 절하면서 “가시오, 가시오!”라고 하였다. 그래도 계속 따라와 곁에 앉으면 지팡이로 쫓아내면서 말하기를, “쯧쯧! 어리석은 사람이로다. 대머리 거사인 나에게 무슨 기특한 점을 보려고 한단 말인가?”라고 하면서, 문을 닫고 정좌하는 것이었다.
잘 차린 음식을 바치면 “나는 남에게 공양 받을 만한 덕이 없다.”라고 하였다. 또 큰스님이라고 추대하면 “나는 진리 수행에 있어서 남에게 존경을 받을 만한 행이 없다.”라고 말하면서 모두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언젠가는 파리한 몸에 때가 더덕더덕 낀 얼굴로 산기슭을 산보하고 있을 때 불교에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초학자가 시골 농부인 줄 잘못 알고서 읍揖을 하면서 “희언 대사는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물었다. 대사는 옷소매를 걷고 겸손히 “어떤 사람인지 모릅니다.”라고 하였다.

008_0331_b_01L母夢梵僧鉢坏中盛袈裟而授之覺而
008_0331_b_02L有孕以辛酉九月壬申生爲人面長目
008_0331_b_03L直耳大鼻隆志氣不羣自落髮精經
008_0331_b_04L以己事未明棄去遊方謁浮休大
008_0331_b_05L師於德裕詰以法性圓融之義忽有契
008_0331_b_06L遂執侍三年自供厮役扣質匪懈
008_0331_b_07L行道餘力問決叅禪語錄之類窮其旨
008_0331_b_08L號孤閑道人師平生食不美膳
008_0331_b_09L不鮮布一衲衣亦不濯浣雪裡赤脚
008_0331_b_10L跳跣而行髮長寸强更不再剃或廢
008_0331_b_11L飮啜者涉旬朔無餒態力坐愈勤
008_0331_b_12L遊京洛過敦義門遇惡少十餘軰
008_0331_b_13L師而詬曰汝是訪道僧汝是乞飯僧
008_0331_b_14L即將師掘沙埋之適有信士奔救師起
008_0331_b_15L無慍容而叉手曰成佛成佛惡少
008_0331_b_16L相顧眄而笑曰眞訪道僧也即尤不喜
008_0331_b_17L逢迎人有逐臭而至輒合掌拜曰去
008_0331_b_18L若戾而從坐則以杖趂出曰咄
008_0331_b_19L漢見我秃居士有甚奇特即閇戶而坐
008_0331_b_20L有以大饌進之者則曰吾於人無應供
008_0331_b_21L之德有以大僧推之者則曰吾於道
008_0331_b_22L無受敬之行並謝不受有時羸形垢面
008_0331_b_23L散步崖逕願學者初叅昧以野叟
008_0331_b_24L之曰彥大師何在師攘袂而遜曰

008_0331_c_01L그렇기는 하지만 간절한 정성으로 도움을 주기를 요청하면 법성원융의 의미를 정성껏 가르쳐 핵심적인 의미를 깨우치는 사람도 있었다.
만력萬曆 임술년(1622, 광해군 14), 대사의 나이 60여 세 때, 나라에서는 청계사淸溪寺에서 재齋를 지내기로 하고 대사를 증사證師(법회를 증명할 임무를 맡은 법사)로 청하고 금란가사를 내려 주었다. 재가 끝나자 대사는 금란가사를 벗어 두고 몰래 떠나 버리니 재에 참가하였던 조정의 관리들은 대사를 높이 평가했다.
임오년(1642, 인조 20)에 대사는 대구 팔공산에 있었다. 벽암 대사碧嵓大師(1575∼1660)가 조정의 명령을 받고 대궐로 가는 도중에 길을 돌아 대사를 찾아가 인사를 올렸는데 서로 의기투합함이 마치 형제와 같았다고 하였다. 얼마 안 있어 대사는 가야산으로 옮겨 갔다. 나이 80여 세에 잡목을 헤쳐 초막을 짓고 작은 집에 만족하면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때 벽암 대사가 묘향산에서 대사를 만나러 왔는데 두 사람은 재회를 매우 기뻐하였다.
이듬해 병술년(1646, 인조 24) 가을에 벽암 대사가 청을 받아 속리산으로 가게 되자 대사는 허둥거리면서 나와 “형께서 지금 나를 버리고 가시면 저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라고 하면서 두 사람은 함께 속리산으로 갔다. 승려와 속인이 길을 메우고 서로 번갈아 찾아와 인사를 올리는 사람이 셀 수도 없었다.
정해년(1647, 인조 25) 11월 13일에 제자 각원覺圓을 불러, “여섯 가지 맛과 여덟 가지 음식으로 이 더러운 몸을 봉양하더라도 끝내는 반드시 소멸한다. 위험하고 약한 이 몸이 어떻게 오래 가겠는가? 나는 영원히 떠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달 22일에 다시 각원을 불러 깨끗한 물을 가져오게 하고서 몸을 씻고는 괴로운 듯 절규하면서, “부질없이 세상에 와서 지옥의 찌꺼기만 되고 말았다. 내 시체는 숲 속에 버려서 새와 짐승의 밥이 되게 하여라.”라고 하였다.
말을 마치자 기분 좋게 눕더니만 세상을 떠났으니, 세상 나이는 88세요, 스님 나이는 72세이다. 유언에 따라 바위 사이에 장례를 치렀는데 스님과 속인들이 정성을 바쳤다. 남긴 유언을 어기고 화장을 하였다. 화장을 하려는 새벽에 안장한 자리를 멀리서 바라보니 연기와 불꽃이 공중에 가득하였다. 대중들은 불이 났다고 생각하고 달려가 보았지만, 그 자리는 그대로이고 불도 없었다. 사람들이 모두 놀라워하면서 삼매진화三昧眞火로 의심하면서도 불을 붙였다. 불꽃이 확확 올라오자 회오리바람이 휙 하니 일더니만 숲 속의 삼나무며 향나무 등의 빛깔이 변하였다. 재가 남게 되자 정수리 뼈에서 나온 둥근 구슬이 소나무 가지에 높이 걸렸다. 그 절의 중 천호天浩가 얻은 것은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008_0331_c_01L不識是何人邪雖然請益勤欵亦有時
008_0331_c_02L提誨庇庥以法性圓融之義蒙指歸者
008_0331_c_03L有焉萬曆壬戌師年六十餘國家設
008_0331_c_04L齋於淸溪寺請師爲證授以金襴袈裟
008_0331_c_05L齋畢師釋袈遁去王使高之壬午歲
008_0331_c_06L師居八公碧嵒大師以朝命赴闕
008_0331_c_07L道造拜相得如兄弟云無何師移伽
008_0331_c_08L年八十餘披榛結幕容膝而憇焉
008_0331_c_09L碧嵒自香峯亦會師欣其再遇明年丙
008_0331_c_10L戌秋碧嵒赴離岳之請師踉蹡而出曰
008_0331_c_11L兄今捨我我安適哉偕詣離岳黑白
008_0331_c_12L塞路迭來頂謁者無數至丁亥十一月
008_0331_c_13L十三日詔門人覺圓曰雖六味八珎
008_0331_c_14L養此穢軀終必有滅危脆此身安取
008_0331_c_15L久長吾將逝矣至其月二十二日
008_0331_c_16L詔覺圓曰取淨水來洗沐已呌苦曰
008_0331_c_17L空來世上特作地獄滓矣命布骸林麓
008_0331_c_18L以飼鳥獸言訖憨臥而逝閱世八十八
008_0331_c_19L坐夏七十二禀遺囑窆于石間道俗
008_0331_c_20L獻悃違敎闍維將茶毗之晨遙望窀
008_0331_c_21L烟熖漲空衆意放火徃覘之依舊
008_0331_c_22L無火衆皆驚愕疑其三昧火也於是
008_0331_c_23L衆相與放火方熾而旋風歘起杉栝變
008_0331_c_24L旣燼而頂骨珠圓超掛松梢寺僧

008_0332_a_01L
사리를 나누었으며 팔공산에는 무덤을 만들고 해인사에는 부도를 세웠다. 그 일은 그 제자 각원과 개사開士 혜원惠遠이 주관하였다. 이듬해 봄에 또 속리산에 부도를 세웠다.
「홍각 등계弘覺登階의 비명과 서문」을 추가함
임제臨濟 후 24세世에 적손嫡孫이 되는 부휴浮休(1543∼1615)가 있다. 부휴는 호이고 법명은 선수善修이다. 속성은 김씨金氏로 남원南原의 오수獒樹 출신이다.
아버지는 적산積山이다. 조상들은 신라의 큰 가문이었는데 신라가 망하자 집안이 몰락하여 서민이 되었다.
처음에 어머니 이씨가 아이를 갖지 못하여 고민하였다. 아들을 낳으면 출가시키겠다고 맹세를 하고서 길가 오래된 바위에서 기도를 드렸는데 열흘이 지나도 쉬지를 않았다.
어느 날 저녁에 눈을 감고 있는 사이에 어떤 신승神僧이 둥근 구슬 하나를 건네주었다. 구슬을 삼킨 뒤에 아기를 가졌고 계묘년(1543, 중종 38) 2월 14일에 태어났다. 어릴 때에 어머니가 고기를 먹이면 즐거워하지 않았다. 억지로 달래어 먹이면 약간의 말린 생선만 먹고 기름진 고기는 입에 대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부모에게 “뜬구름 같은 인생이 부질없이 흘러가니 나는 출가하겠습니다.”라고 하고서는 작별 인사를 하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신명 장로信明長老에게 머리를 깎고, 부용 대사芙蓉大師를 뵙고는 대사가 남긴 불법의 진수를 모두 터득하였다.
대사의 모습은 배가 불뚝하고 눈썹은 길며 키는 크고 볼은 두툼하였으며 다만 왼손을 잘 쓰지 못했다. 불법을 터득한 뒤에는 재상 노수신盧守愼 집의 장서藏書를 빌려 7년 동안에 읽지 않은 책이 없었다. 글씨도 또한 힘차고 아름다워 위魏의 종요鍾繇, 진晉의 왕희지王羲之 서법을 본받았다. 송운 유정松雲惟政과 함께 명성을 날려 당시 이난二難64)이라고 불렀다.
제자 한 명이 대사의 글씨 몇 자를 받아 들고 도성을 지나다가 글씨에 뛰어난 중국 사람을 만난 적이 있었다. 대사의 글씨를 내보였더니 오랫동안 눈길을 주면서 “필법이 정밀하고 힘차니 옛날 사람도 쉽사리 터득할 수 없다. 그렇지만 점획을 보니 반드시 손을 다친 도인이 쓴 것이다.”라고 하였다.
선조宣朝 임진년(1592, 선조 25)에

008_0332_a_01L天浩得之有緣故也分靈骨墳於八
008_0332_a_02L塔於伽耶弟子覺圓開士惠遠主
008_0332_a_03L越明年春又建層冡于離岳云

008_0332_a_04L

008_0332_a_05L追加弘覺登階碑銘并序

008_0332_a_06L
臨濟後二十四世有嫡孫曰浮休浮休
008_0332_a_07L號也法名善修俗姓金氏古帶方獒
008_0332_a_08L樹人也父積山先世爲新羅大姓
008_0332_a_09L遂沒家爲庶初母李悶無胚胎
008_0332_a_10L誓言生子當捨出家即禱于路傍古石
008_0332_a_11L無竭彌旬不怠一夕合眼間有神僧
008_0332_a_12L授一圓珠呑之有妊以癸卯二月戊子
008_0332_a_13L生焉孩提時母飼肉輙不喜戾侑則
008_0332_a_14L蹔唼鮝䱜之薄脊膟膋之膏腴
008_0332_a_15L歲啓父母曰浮生滾冗吾將出世
008_0332_a_16L入頭流山從信明長老髠㔆謁芙蓉大
008_0332_a_17L盡得笆籬邊物爲人皤腹脩眉長身
008_0332_a_18L豊頰惟左手失適得法之後借盧相
008_0332_a_19L國守愼家藏書七閱寒暑書無所不讀
008_0332_a_20L筆亦遒媚效鍾王法與松雲政公齊名
008_0332_a_21L時號二難甞會下一衲索師書數字
008_0332_a_22L撩過王都遇漢人能書者出示之
008_0332_a_23L目久之曰筆精健在古不易得雖然
008_0332_a_24L點畫必手瘢道人所揮也宣廟壬辰

008_0332_b_01L섬 오랑캐인 왜구가 우리 강산을 침범하여 산야山野를 크게 짓밟았다. 당시 대사는 덕유산에 있었다. 계곡으로 몸을 숨기고 왜적들의 칼날을 피하였다. 해가 저물자 왜적이 이미 지나갔다고 생각하여 계곡 길을 따라 암자로 돌아오는데 왜적 수십 명이 숲 속에서 나왔다. 대사가 손을 모아 예를 표시하고 서 있으니 왜적들은 칼을 휘두를 기세를 취하였다. 대사가 태연하게 움직이지 않으니 왜적들은 매우 기이하게 여겨 모두 늘어서서 절하고 흩어졌다.
난리가 평정된 뒤에 대사는 가야산으로 갔다. 마침 중국에서 우리나라를 도우러 온 장군 이종성李宗城이 중국 황제의 명을 받고 관백關白을 봉封하려고 가던 길65)에 중간에 해인사를 들렀다. 대사를 한번 만나 보고는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절에 머물면서 며칠 동안 대사와 대화를 나누었는데 화락한 모습이었다. 헤어질 때 이종성은 시 한 편을 주면서 천 리 멀리 떨어져 있지만 항상 얼굴을 보는 듯이 지내리라고 기약하였다.
얼마 안 있어 대사는 다시 구천동으로 옮겨 조용히 불법에 정진하였다. 어느 날은 눈을 감고 『원각경圓覺經』을 외웠다. 외우기를 다 끝내기 전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는 듯하였다. 눈을 떠 보니 큰 구렁이 한 마리가 섬돌 아래 누워 있었다. 대사는 외우기를 그치고 한 발을 들어 그 구렁이의 꼬리를 밟았다. 구렁이는 머리를 숙이고 굼틀거리다가 달아났는데 쫓아갔으나 보이지 않았다. 그날 밤 꿈에 노인이 대사에게 절을 하고 “스님의 설법에 힘입어 이미 고통을 떠났습니다.”라고 하였으니, 대사의 신이함이 대개 이와 같았다.
광해군 때에 대사가 두류산에 머물고 있었을 때 미친 중의 모함을 입어 옥에 갇혔다. 사건을 조사하던 관리는 대사의 기개와 도량이 당당하고 말이 유창한 것을 보고 광해군에게 보고하였다. 광해군은 대사가 죄가 없음을 환하게 알았다. 다음날 아침에 대궐 안으로 불러 도의 요점을 물어보고는 매우 기뻐하였다. 자란방포紫襴方袍 한 벌, 벽릉장삼碧綾長衫 한 벌, 녹기중유綠綺重襦 한 벌과 금강수주金剛數珠 한 개, 또 그 밖의 진귀한 보배를 넉넉하게 내렸는데 모두 다 기록할 수 없다.
그리고 또 봉인사奉印寺에 재를 열 때 대사를 법회를 증명하는 증사로 삼아 파견하였다. 궁중의 준마 한 필을 내어 대사를 태우고 호위병들로 하여금 앞길을 인도하도록 하였다. 도성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달려와 절을 하고 남보다 뒤처짐을 부끄럽게 여겼다.
재를 마치고 대사가 돌아올 때에는 승려와 속인들이 앞을 다투어 번갈아 가마를 메고 돌아왔다. 대사의 한평생 쌓은 높은 덕이 사방에 멀리 퍼지자 재물을 바치는 사람이 그치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들어오는 대로 나누어 주고 한 물건도 쌓아 두지 않았다.

008_0332_b_01L島夷侵彊大鞣山野師時棲德裕隱身
008_0332_b_02L谼礐中避鋒日晩慮賊已過緣澗路還
008_0332_b_03L有倭十數軰從林麓出師叉手而立
008_0332_b_04L賊作揮刃勢師怡然不動賊大奇之
008_0332_b_05L皆羅拜而散賊平師如伽耶屬天將李
008_0332_b_06L大人宗城受皇帝命來封關白間途
008_0332_b_07L入海印寺一見師輒忘歸留語數日
008_0332_b_08L偘偘如也臨別贈詩一章期爲千里
008_0332_b_09L面目無何師移九千洞宴晦一日瞑目
008_0332_b_10L誦圓覺經讀未及終似有
008_0332_b_11L目示之有一巨蟒偃暴階除下師輟
008_0332_b_12L跂一足㚄其尾蠎俛首蚴蟉而去
008_0332_b_13L追之不見其夜夢翁致拜曰蒙和尙
008_0332_b_14L說法已離苦矣其神異皆此類光海
008_0332_b_15L師住頭流爲狂僧所誣拿繫獄
008_0332_b_16L官覿其氣宇軒輕言說璀璨以白光海
008_0332_b_17L光海洞其非罪翌明召入內詢問道要
008_0332_b_18L大悅賜紫襴方袍一領碧綾長衫一袗
008_0332_b_19L綠綺重襦一襲金剛數珠一串其餘珎
008_0332_b_20L玩厚賚迨不可記即又設齋於奉印寺
008_0332_b_21L遣師爲證鞴出內騕褭一匹俾騎而使
008_0332_b_22L圍人前導之都人望風趍拜恥居後
008_0332_b_23L畢師辭還道俗爭先遆夫輿歸師平
008_0332_b_24L生峻德四遠獻貨者轠轤隨即散之

008_0332_c_01L
기량은 침착하고 굳세며 깊고 또 넓어 잴 수가 없었다. 인연 있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모여들어 문도들이 7백 명이나 되었다.
만력萬曆 갑인년(1614, 광해군 6), 대사의 나이 72세 되던 해에 조계산 송광사에서 지리산 칠불암七佛菴으로 갔는데 임종이 다가왔음을(啓手足66)) 알아차렸다. 이듬해 가을 7월에 가벼운 질병 증세를 보이자 수제자 벽암 대사碧嵓大師를 불러 부촉하면서, “내 뜻은 그대에게 있다. 그대는 공경히 실천하라.”라고 하였다. 11월 초하루, 해가 질 때쯤에 목욕을 마쳤다. 시자侍者를 불러 종이와 붓을 가져오라 하여 게송 한 구절을 썼다.

七十三年遊幻海     73년 동안 환해幻海에서 놀았는데
今朝脫殼返初源     오늘 아침 껍질을 벗고 태초의 근원으로 돌아가네.
廓然空寂元無物     텅 빈 공적空寂이라 원래 아무 물건도 없으니
何有菩提生死根     깨달음과 생사의 근본이 어디 있으랴.

게송을 마치고 담담히 세상을 떠나니, 세상 나이는 73세, 스님으로 산 햇수 57세였다. 제자들이 다비하고 사리를 거두어 네 곳에 부도를 세웠으니, 해인사ㆍ송광사ㆍ칠불암ㆍ백장사百丈寺이다. 5년 후에 광해군이 ‘홍각등계弘覺登階’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臨濟廾四有嫡統     임제臨濟 24대에 적통이 있으니
龍生龍兮鳳生鳳     용이 용을 낳고 봉황이 봉황을 낳은 것이다.
石像抱送不齰爒     석상石像을 안아 보내면서도 악착하지 않으며
身不僬僥書亦誦     몸도 장대하지만 글도 또한 잘 외운다.
挈手揮毫何技癢     손 들어 붓을 휘두를 때 얼마나 재주 뛰어난가?
秋蛇春蚓互引控     가을 뱀과 봄 지렁이가 서로 잡아당긴다.67)
海獠敽干鋥劔光     바다 오랑캐가 침범해 와서 칼을 휘둘렀으나
視若蛜蝛心無恐     하찮은 벌레처럼 보고 두려움이 없었다.
天將東來破賊艘     중국 장군이 동쪽으로 와서 왜적의 배 부수러 갈 때
爲師踟蹰乍停鞚     대사 때문에 잠깐 말을 멈추고 지체했었다.68)
閇目暗哄修多羅     눈을 감고 불경을 외울 때에
虺自何心忝待從     구렁이는 무슨 마음으로 시중을 들었나?
狂狼麽僧謬訴訐     미친 중이 없는 죄를 지어서 참소할 때에
南冠誰也氣屢霜     옥에 갇혔어도 기상은 가을 서리 같았다.
君王對諶笑辴然     군왕君王은 진실한 마음으로 대하고 웃음을 띠면서
勑賜珎奇禮頗重     진기한 보물을 내려 주며 예禮가 자못 두터웠다.
婕妤嬪嬙親鼎爼     아리따운 모든 궁녀들이 손수 음식 장만할 때에
妙味絶勝噉蘆䎫     맛이 뛰어났으나 노창蘆䎫69)을 먹었다.
機盡翩然隻履逝     인연 다해 홀홀히 한 짝 신발 남겨 두고 떠났고70)
傳衣付法留偈頌     의발을 전하고 불법을 맡기면서 게송을 남겼다.
百級四建窣屠波     우뚝 높이 네 개의 부도를 세우니
嗚呼哀贈眞一夢     오호 슬프다, 참으로 인생은 한바탕 꿈이었네.

008_0332_c_01L不㣥一物器量沉毅滉瀁不可
008_0332_c_02L毳徒有緣憧憧坌集衆盈七百萬曆
008_0332_c_03L甲寅師年七十二自曺溪之松廣
008_0332_c_04L方丈之七佛擬啓手足翌年秋七月
008_0332_c_05L示微疾召上足碧嵒大師付法曰
008_0332_c_06L意在汝汝欽哉至十一月初一日
008_0332_c_07L纔中晡沐浴訖喚侍者索紙筆書一
008_0332_c_08L偈曰七十三年遊幻海今朝脫殼返初
008_0332_c_09L廓然空寂元無物何有菩提生死根
008_0332_c_10L偈畢泊然而逝報年七十三坐夏五十
008_0332_c_11L門人闍維收靈骨樹浮屠凡四處
008_0332_c_12L海印松廣七佛百丈也後五年光海追
008_0332_c_13L加弘覺登階銘曰

008_0332_c_14L臨濟廾四有嫡統龍生龍兮鳳生鳳

008_0332_c_15L石像抱送不齰爒身不僬僥書亦誦

008_0332_c_16L挈手揮毫何技癢秋蛇春蚓互引控

008_0332_c_17L海獠敽干鋥劔光視若蛜蝛心無恐

008_0332_c_18L天將東來破賊艘爲師踟蹰乍停鞚

008_0332_c_19L閇目暗哄修多羅虺自何心忝侍從

008_0332_c_20L狂狼麽僧謬訴訐南冠誰也氣屢霜

008_0332_c_21L君王對諶笑辴然勑賜珎奇禮頗重

008_0332_c_22L婕妤嬪嬙親鼎爼妙味絶勝噉蘆䎫

008_0332_c_23L機盡翩然隻履逝傳衣付法留偈頌

008_0332_c_24L百級四建窣屠波嗚呼哀贈眞一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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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림사 사적비명香林寺事蹟碑銘
삼가 『예기禮記』를 조사해 보니, 「유행儒行」편에서 “천자天子에게 신하 노릇을 하지 않고 제후를 섬기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니 유가儒家의 규범도 이와 같은 것이 있다. 하물며 세속에서 벗어나 고상한 행동을 하는 스님들이 어찌 이해利害에 구속받고 영고榮枯에 얽매여 그 마음을 졸이면서 그 도를 잊을 수 있겠는가?
두타頭陀71) 명의明義 스님은 임주林州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도를 배우다가 금강산에서 제월霽月 대사를 뵈옵고는 부엌일과 청소를 열심히 하였다. 쌀밥을 먹지 않고 술을 마시지 않으며 도토리를 먹고 물만 마시면서 10여 년을 지냈다. 천계天啓 경오년(1630, 인조 8)에 홀연히 인간의 참된 근원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몸을 돌려 가림嘉林의 성흥산聖興山(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으로 들어갔다. 그 산에는 절이 있었는데 향림사香林寺라 하였다. 오래되어 좁아서 지내기가 불편하였다. 새로 절을 지으려고 계획을 세울 즈음에 절 옆 남쪽 터에서 마침 종과 경쇠 소리가 여러 날 밤 계속해서 우렁차게 퍼졌다. 명의 스님은 그쪽으로 즉시 가서 그 터를 보고 방위를 분명히 하였다. 산을 깎고 바위를 부수고 나무를 베고 우거진 풀을 없애고서 우뚝 높이 선 절을 지었다. 새로 지은 전각殿閣의 규모와 크기는 예전보다 갑절이나 웅장하여 총림叢林이 되었다. 그리고 또 제월 스님의 초상화를 그려 별당別堂에 모시고 향불을 올렸으니 모두 다 명의 스님이 노력하였기 때문이다.
47년이 지난 병진년(1676, 숙종 2)에 근사남近事男(우바새, 남자 신도) 임운林芸이 명의 스님의 공덕을 흠모하여 아름다운 옥돌에 새기고자 하였다. 옥돌이 준비되니 조영祖瑛 대사가 강을 건너왔다. 그 절에 사는 스님들과 의견을 모아서 나에게 그 명문銘文을 써 달라고 요청하였다. 조영 스님은 나의 제자이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응낙하여 이 글을 쓰게 되었다.
불제자 명의 스님은 그 사람됨이 아름답다. 마음은 시끄러움을 멀리하였고, 육신은 더러움이 없었다. 표주박으로 물을 마시고 이틀에 한 번 음식을 먹었으며 스승을 섬기되 게으르지 않았다. 그가 도를 좋아하는 마음은 참으로 부지런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근원으로 돌아가고자 하여 또 절을 창건하였다. 흙을 나르고 기초를 다지고 목재를 수레로 옮겨 와 절집을 지었다.
그렇게 하여 청정한 보계寶界는

008_0333_a_01L香林寺事跡碑銘

008_0333_a_02L
謹按禮記儒行曰不臣天子不事諸
008_0333_a_03L其䂓爲有如此者况出世高蹤
008_0333_a_04L局促於利害牴牾於榮枯穧其心而忘
008_0333_a_05L其道哉故頭陁明義比丘林州人
008_0333_a_06L歲學道叅謁霽月大師於金剛執勞鼎
008_0333_a_07L服勤苕菷食不秆穫飮不醡釀
008_0333_a_08L橡柶而歃瓽甃者十餘稔矣至天啓庚
008_0333_a_09L午歲忽憶還源返身于嘉林之聖興山
008_0333_a_10L山有招提名曰香林古制隘陋有妨容
008_0333_a_11L方謀新卜之際寺傍午地適有鍾磬之
008_0333_a_12L隆隆數夜義即其處視址而辨方
008_0333_a_13L剷嶬刲嵒誅林斬莽結搆嵬峩其殿
008_0333_a_14L閣之欀楣門閎之棖闑比舊倍簁
008_0333_a_15L爲叢林而且畫霽月之眞影安于別堂
008_0333_a_16L以奉香火皆義之用力也越四十七年
008_0333_a_17L丙辰歲近事男林芸慕義之功將鐫
008_0333_a_18L琬琰之文石旣具大師祖瑛渡江來
008_0333_a_19L其合寺僧之語乞銘於余吾徒也
008_0333_a_20L余應無難色而叙之曰頭陁義公
008_0333_a_21L爲人美哉志絕囂譁身無汚衊單巹
008_0333_a_22L而飮併日而食事師不倦其好道之
008_0333_a_23L可謂勤矣曁其還源也又剏伽籃
008_0333_a_24L挶土而峻基轝材而建宇淸淨寶界

008_0333_b_01L원숭이들의 터전과 사슴들의 마당이 되는 신세를 겨우 면하게 되었다. 그의 공로와 수고가 이와 같다. 어찌 천자의 신하 노릇을 하지 않고 제후를 섬기지 않으면서 그 자신의 뜻만 고상히 여겼을 뿐이겠는가? 또 청신사淸信士 임운은 비석을 세워 불후의 아름다운 공적을 전하려 한다. 역시 현자를 앙모하는 사람이 아닌가? 이것이 소위 (『예기禮記』 「단궁檀弓」에서) “누에가 베를 짜니 게는 광주리가 있고, 벌이 갓을 쓰니 매미는 갓끈이 있다.”라고 한 것이다. 어찌 높고 높은 뜻을 가졌음이 아니겠는가?
아아, 하찮은 내가 이런 성대한 일을 논평함은 참으로 잘못임을 안다. 그러나 파리는 천리마를 타고 멀리 갈 수 있으며, 메추리는 붕새를 비웃으면서 날기를 겨룬다. 내 재주가 미치지 못함을 다시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리하여 명銘을 지으니 내용은 아래와 같다.

嗚呼義也         아아, 명의 스님!
世皆以爲濁子無纍也    세상이 다 혼탁하지만 그대는 얽매이지 않았다.
利名以樂子獨避也     모두가 이익과 명예를 좋아하지만 그대는 홀로 피하였다.
霽月之嫡瑚璉器也     제월 스님의 적통으로 호련瑚璉72) 같은 그릇이다.
還源大有作香林寺也    근원으로 돌아가고자 큰일 했으니 바로 향림사 지은 일이다.
觚稜造極古莫之比也    아름다운 건물은 최고 경지라 옛 건물은 비교되지 않는다.
信士樹石亦盛事也     청신사가 비석을 세움도 역시 성대한 일이로다.
我銘以刻之後來者之視也  내가 명문을 지어 돌에 새기나니, 뒤에 오는 사람들은 보라.

정헌대부 팔도도총섭 겸 승대장 회은 장로 비명正憲大夫八道都摠攝兼僧大將悔隱長老碑銘
현종顯宗 즉위 13년(1672) 봄 3월 15일에,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 회은悔隱(1587∼1672) 스님이 성부산星浮山 천주봉天柱峰 밑에서 나이가 들어 세상을 떠났다. 세상 나이는 86세, 스님 나이는 71세이다. 스님의 자는 응준應俊, 속성은 기씨奇氏, 남원南原 출신으로, 회은은 그의 호이다.
처음에 기씨는 아들이 없었다. 어머니 윤씨尹氏가 지리산 칠성당七星堂에서 기도하였더니, 이상한 광채가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회은 장로를 회임하였다. 장로는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옥섬玉暹 노스님에게서 머리를 깎았다. 그 뒤에 소요逍遙ㆍ호연浩然ㆍ벽암碧嵓 등 여러 큰 종장宗匠에게 나아가 모두 제자의 예를 올렸다.

008_0333_b_01L厪免爲猿獶之所曁麀鹿之攸畽其功
008_0333_b_02L且勞有如此者豈特不臣天子不事
008_0333_b_03L諸侯高尙其志而已哉信士林芸
008_0333_b_04L將樹石垂厥不朽之嘉績抑希顏之徒
008_0333_b_05L是所謂蠶則績而蠏有匡范則冠而
008_0333_b_06L蟬有緌者也豈非嶷嶷然有志哉
008_0333_b_07L余以藐末評玆盛德之事固知左矣
008_0333_b_08L然蠅攀驥而致遠鷃咲鵬而爭飛才之
008_0333_b_09L不及復奚論焉遂爲之銘詞曰
008_0333_b_10L嗚呼義也世皆以爲濁子無纍也利名
008_0333_b_11L以樂子獨避也霽月之嫡瑚璉器也
008_0333_b_12L還源大有作香林寺也觚稜造極古莫
008_0333_b_13L之比也信士樹石亦盛事也我銘以
008_0333_b_14L刻之後來者之視也

008_0333_b_15L

008_0333_b_16L正憲大夫八道都摠攝兼僧大將悔

008_0333_b_17L隱長老碑銘

008_0333_b_18L
顯宗即位之十三年春三月十五日
008_0333_b_19L道都摠攝悔隱長老老卒于星浮山之
008_0333_b_20L天柱峯下閱世八十六坐夏七十一
008_0333_b_21L法字應俊俗姓奇氏南原人悔隱其
008_0333_b_22L號也初奇無子母尹祈七星于智異山
008_0333_b_23L夢異光入懷娠長老焉少出家從玉
008_0333_b_24L暹老師落髮晩叅逍遙浩然碧嵒諸大

008_0333_c_01L
생김새는 널찍한 얼굴에 키가 컸다. 몸은 비록 스님이지만 뜻은 경세제민經世濟民을 생각하였다.
계유년(1633, 인조 11) 봄에 호남湖南 안렴사按廉使가 장로가 그런 뜻을 품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장로를 입암산성笠岩山城(전라남도 장흥)의 성장城將으로 기용하였다. 장로는 그 자리에서 여러 번 공을 이루었다.
병자년(1636, 인조 14) 겨울에 청나라 군사가 갑자기 쳐들어오자 호남 관찰사 이시방李時昉73)이 벽암碧嵓 대사를 의병승義兵僧 대장으로 기용했을 때 장로는 그를 따라가 참모로 있으면서 군사 일을 도왔다. 이듬해 정축년(1637, 인조 15) 여름에 의병을 모집한 공로로 절충장군折衝將軍(정삼품 무관품계)으로 품계가 올라갔으며 양호도총섭兩湖都摠攝(전라도ㆍ충청도 의병 대장)에 임명되었다. 정해년(1647, 인조 25) 봄에 가선대부嘉善大夫(종이품)로 승진하여 팔방도총섭八方都摠攝이 되어 남한산성에 머물렀다.
신묘년(1651, 효종 2) 겨울에 조정에서는 또 남한산성의 옹성甕城74)을 쌓은 공을 가상하게 여겨 가의대부嘉義大夫로 품계를 올렸다. 경자년(1660, 현종 원년) 겨울에는 자헌대부資憲大夫로 품계가 올라 승대장僧大將이 되었다. 계묘년(1663, 현종 4) 여름에는 정헌대부正憲大夫(정이품)로 특진하였다.
그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을 때는 창을 잡고 활을 몸에 지니고 있었다. 앞에는 깃발을 세우고 뒤에는 호위병이 보호하면서 30여 년을 군사 업무에 전력 질주하였다. 평상시에는 간혹 화려한 복장을 하고 다녔다. 몸에 걸친 옷이나 장식물은 모두 비단이나 금붙이였다. 외출할 때는 몸집이 크고 검푸른 색의 좋은 말을 타고서, 아름답게 장식한 칼을 차고 옷 허리띠와 갓끈을 축 늘어뜨리며 다니는 모습이 재상과 같았는데도 감히 험담하는 사람이 없었다. 옛날에 소위 흑의지걸黑衣之傑75)은 바로 장로를 두고 한 말이다.
장로는 또 재산도 매우 많았다. 가난하거나 병든 친구가 있으면 많이 베풀어 주었으며 가진 재산을 아끼지 않았다. 아마도 자비로운 마음으로 백성을 구제해야겠다는 도덕심이 있어서였을 것이다.
그의 문도門徒로는 전 총섭總攝 처상處祥, 첨지僉知 광학廣學, 등평等伻ㆍ옥청玉淸 등이 있다. 그들이 5백 리 먼 북쪽으로 달려와 백곡 처능에게 비명碑銘을 써 달라고 청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 스님께서 생전에 이름을 날렸습니다. 돌아가신 다음에 비명이 없으면 그 공적이 사라지고 전해지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수어사守禦使 식암息菴 김석주金錫冑 공께서 시우쇠(熟鐵) 백 근을 보내어 비석을 세우는 데 보탠다고 하였으니, 우리 스님이 국사國事에 애쓰신 것을 매우 높이 평가하였기 때문입니다.
광양光陽 백운산白雲山은 우리 스님 젊은 시절의 자취가 있는 곳입니다.

008_0333_c_01L宗匠咸執弟子禮爲人魁貌而長身
008_0333_c_02L身雖係桑門志則慕經濟癸酉春
008_0333_c_03L南按廉聞其志署爲笠岩城將累果
008_0333_c_04L立功丙子冬淸兵猝至湖南觀察使
008_0333_c_05L李公時昉起碧嵒大師爲義兵僧大將
008_0333_c_06L長老從之叅謀以助兵勢明年丁丑夏
008_0333_c_07L以募義功加資折衝授兩湖都摠攝
008_0333_c_08L至丁亥春陞嘉善爲八方都摠攝
008_0333_c_09L南漢辛卯冬朝廷又以營築南甕城
008_0333_c_10L益嘉其功陞嘉義庚子冬陞資憲
008_0333_c_11L僧大將癸卯夏特加正憲其在任也
008_0333_c_12L執鐏帶韔韣前竪旄後擁儐僎
008_0333_c_13L驅馳軍務間者三十年許其平居也
008_0333_c_14L或時治盛服衣冠簮組皆綺纈金玉
008_0333_c_15L之屬出入乘驔駽紌綖鞞鞛厲游
008_0333_c_16L纓侔擬宰臣無敢誚者古所謂黑衣
008_0333_c_17L之傑長老之謂也財產亦甚鉅每於
008_0333_c_18L親舊貧病多所施舍不恤畜盖有悲濟
008_0333_c_19L之道也其徒前摠攝處祥僉知廣學等
008_0333_c_20L伻玉淸北走五百里乞銘於白谷處能
008_0333_c_21L我師生有顯也死無銘則恐沉泯
008_0333_c_22L不傳且守禦使息菴金相公錫胄氏
008_0333_c_23L以熟鐵百斤用助鐫鑱之具重愛我師
008_0333_c_24L之劬勤國事故也光陽之白雲即我師

008_0334_a_01L비석 하나를 마련하여 공적을 새기고 산언덕에 세워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 스님이 계셨다는 것을 알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면 즉 살아서나 죽어서나 모두 세상에 알려질 것이고, 우리들 마음에도 원한이 없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 스님을 아는 사람으로는 스님만 한 분이 없습니다. 스님께서는 또한 문장에 뛰어나시니, 스님의 문장이라면 돌에 새겨져서 비명이 되기에 넉넉합니다.”
내가 또 회은 장로의 법제法弟인데 어찌 차마 비문을 짓지 않는다 하겠는가? 그래서 응낙하였고 아래와 같이 글을 짓는다.

奇之氏系        기씨 집안은
世家帶方        대대로 대방帶方(남원)에 살았다.
初無胚胎        처음에는 아이를 갖지 못했는데
晩有禎祥        늦게야 경사스런 징조가 있었다.
山岳降靈        산이 영험한 기운을 내려
夢忽驚姜        꿈에 부인을 놀라게 하였다.
形從出世        외모는 세상을 벗어났으나
志慕經邦        뜻은 나라 경영에 두었다.
魁顏廣眉        훤칠한 용모에 눈썹은 넓고
白而身長        하얀 모습에 키는 크도다.
國步艱危        나라의 운명이 위태롭고
隣敵强梁        이웃 나라 도적들이 함부로 날뛰며
虓豹相        호랑이와 표범이 싸우는 듯한 형세에
民士劻勷        백성들은 이리저리 떠돌아다녔다.
長老叅謀        장로는 그때 참모로 나가
從橫戰場        전쟁터에서 종횡무진 활약했었다.
朝廷褒賞        조정에서는 공로를 포상하여
兩湖金章        전라도와 충청도의 승군 대장 벼슬을 내렸다.
俄而陞秩        곧이어 승진하여
統攝八方        전국을 통솔하는 승군 대장이 되었으니
櫜兠戟纛        갑옷을 입고 창을 들고
卅載彷徉        30년 동안 누빈 결과로다.
平居坐起        일상적인 생활에서도
服飾輝光        의복은 휘황찬란하여
冠帶簮笏        관대冠帶와 치장품 등은
金玉其裝        금과 옥으로 장식하였다.
出入遊行        외출하거나 먼 길 나들이할 때는
靑驄紫韁        푸른 명마와 자주색 고삐를 잡았다.
於古有之        예전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으니
黑衣賢良        남조 제齊나라 스님인 법헌法獻과 현창玄暢이다.
財累雖鉅        재물은 비록 많았지만
拂篋傾箱        재물 상자를 모두 다 털었다.
曰有神足        뛰어난 제자들은
乞銘遑遑        황급히 나에게 비명을 청하고자
訪我于北        북쪽에 있는 나를 방문하려
數百里强        수백 리 길을 달려왔다.
南海之滣        남해 바닷가
縣曰光陽        고을 이름은 광양현光陽縣이다.
樹石係文        그곳에 비석을 세우고 글을 새기니
百歲惟芳        영원토록 아름다운 명성이 퍼지리라.
동회東淮 선생에게 올리는 제문
오호! 어제 선생께서 병이 나셨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지금은 돌아가신 선생님 앞에서 곡합니다.
아아! 애통합니다. 아아! 너무나 슬픕니다.
불길한 예감이 마음을 지배하고 한없는 애통함을 안고 살기보다는,

008_0334_a_01L少日發跡之地也將具一片石刻之樹
008_0334_a_02L山阿令後世知有我師則生死俱有
008_0334_a_03L顯也而於吾心亦無懟矣然知我師者
008_0334_a_04L莫如君君亦能爲文文堪上石盍爲銘
008_0334_a_05L余於長老爲法弟又何忍不銘故應曰

008_0334_a_06L爲之辭曰

008_0334_a_07L奇之氏系世家帶方初無胚胎

008_0334_a_08L晩有禎祥山岳降靈夢忽驚姜

008_0334_a_09L形從出世志慕經邦魁顏廣眉

008_0334_a_10L白而身長國步艱危隣敵强梁

008_0334_a_11L虓豹相民士劻勷長老叅謀

008_0334_a_12L從橫戰場朝廷褒賞兩湖金章

008_0334_a_13L俄而陞秩統攝八方櫜兠戟纛

008_0334_a_14L卅載彷徉平居坐起服飾輝光

008_0334_a_15L冠帶簮笏金玉其裝出入遊行

008_0334_a_16L靑驄紫韁於古有之黑衣賢良

008_0334_a_17L財累雖鉅拂篋傾箱曰有神足

008_0334_a_18L乞銘遑遑訪我于北數百里强

008_0334_a_19L南海之滣縣曰光陽樹石係文

008_0334_a_20L百歲惟芳

008_0334_a_21L

008_0334_a_22L祭東淮先生文

008_0334_a_23L
嗚呼昨聞先生之病而今哭先生之歿
008_0334_a_24L嗚呼痛哉嗚呼痛哉與其有介於心

008_0334_b_01L차라리 함께 죽어 흐느끼는 울음과 애도하는 마음을 없게 하는 것이 훨씬 낫겠습니다.
비록 한번 태어나면 한번은 죽는다고 하지만 구천(九原)에 있는 선생의 음성과 용모는 적막하고, 인생 백 년에 선생의 모습과 그림자는 아득히 멀어졌습니다. 하지만 선생의 살아생전의 일을 추모하고, 남기신 글과 편지에 눈물을 뿌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옛사람은 ‘서럽게 용양龍驤의 무덤을 바라보고76) 복야僕射의 관을 부축한다77)’라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또 시 원고가 들어 있는 상자를 조사하다가 서러움을 삼키는 사람이 있으며, 혹은 옛 역사를 살피다가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러한 일 모두는 한때의 슬픔에서 일어난 특별한 감격이지만 오히려 후대에는 칭송을 받았습니다. 하물며 선생과는 시골에서 10년 동안 함께 지냈습니다. 모임을 만들어 선생을 받들어 모시고서 우주 밖에서 이 육신을 잊고 지냈으며 깊은 계곡에서 흉금을 같이하기로 기약한 사람이야 어떠하겠습니까?
저는 지난달에 참선 수련에서 나와서 서쪽으로 유람 가면서 용만龍灣(의주) 부윤府尹에게 인사하러 갔습니다. 가는 길에 선생의 별장지기를 만나 선생께서 병을 앓고 계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현안지병玄晏之病78)이나 문원지질文園之疾(당뇨병)79)처럼 일상적인 것이라고 여겨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이날 밤 잠시 졸면서 눈을 붙이는 사이에 갑자기 선생과 함께 담소하며 즐거워하면서 평소처럼 정겨웠습니다. 깨어나니 꿈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하기를, 만일 꿈이 헛되지 않으면 선생의 병은 반드시 나았을 것이니 과연 걱정할 것이 없다고 여겼습니다.
제가 산으로 돌아오니 기성箕城(평양)에 계신 견堅 스님이 편지를 보냈는데, 동회 신 선생이 병으로 일어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오호, 지난날에 꾼 꿈이 과연 진실입니까, 아니면 거짓입니까? 장주莊周는 (「제물론齊物論」에서) “꿈에 술을 마시면 낮에 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꿈에 선생과 더불어 정겹게 담소한 것이 어찌 영원히 이별하여 끝이 없는 슬픔을 남겨 두었음이 아니겠습니까?
오호, 선생은 세상에 태어나 57년을 살았습니다. 신분은 고귀하고 행적은 궁궐을 넘나들었습니다.80) 임금은 선생의 충성심을 가상히 여겼으며 조정과 재야에서는 선생의 현명함을 칭찬하였으니, 선생의 덕행은 존귀하다고 평가를 할 수 있습니다.

008_0334_b_01L而抱無涯之痛不若同死而相從無嗚
008_0334_b_02L咽疚悼之爲愈也雖然一存一亡九原
008_0334_b_03L之下音容寂莫百年之間形影阻隔
008_0334_b_04L亦安得不追感存亡而淚自灑於陳篇
008_0334_b_05L遺牘之間哉故古人有望龍驤之塋
008_0334_b_06L僕射之櫬者亦或有檢詩篋而含悲
008_0334_b_07L舊史而流涕者此特激於一時之哀
008_0334_b_08L猶爲後世之稱也則況能與先生十載
008_0334_b_09L林泉結社從遊忘形骸於宇宙之外
008_0334_b_10L而托襟期於嵒壑之間者邪能前月出
008_0334_b_11L㝎西遊謁龍灣大尹路逢先生之別墅
008_0334_b_12L蒼頭聞先生之病意以爲玄晏之病
008_0334_b_13L文園之疾出乎尋常不足憂也是夜
008_0334_b_14L假寐閉目間忽與先生談笑歡娛
008_0334_b_15L若平昔覺則夢也窃自念夢若非虗
008_0334_b_16L先生之病必已痊瘳果不足憂也
008_0334_b_17L能還山而堅師在箕城寄書來云
008_0334_b_18L淮申先生以疾不起嗚呼宿昔之夢
008_0334_b_19L其果眞邪抑非眞邪莊周云夢飮酒
008_0334_b_20L晝而哭泣然則夢與先生欵語團
008_0334_b_21L欒者豈非有此永隔之別而憗遺無窮
008_0334_b_22L之痛者哉嗚呼先生之生於世五十
008_0334_b_23L有七歲身居貴近跡渉宮闈君主嘉
008_0334_b_24L其忠朝野稱其賢先生之德可謂尊

008_0334_c_01L
재주는 (한漢의 문장가) 양웅揚雄과 사마상여司馬相如를 겸하였고, 글씨는 (위魏의) 종요鍾繇와 (진晉의) 왕희지王羲之를 본받았습니다. 당세의 보배이지만 계승할 후인이 없으니 선생의 업적은 위대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거문고 소리를 듣는 사람 중에 귀가 밝은 사람은 이미 없습니다. (친구를 위해 연주한) 아양곡峨洋曲81)과 (이별의 노래인) 절양곡折楊曲82)을 듣고도 뒤섞어 합해 버립니다. 선생의 뜻을 아는 이도 있고 모르는 이도 있습니다. 그러니 선생의 절조節操와 풍류 두 가지에 있어서는, 다른 사람들 중에는 더욱 알지 못하고 오직 저만이 압니다.
광릉廣陵의 동쪽, 두강斗江 옆,83) 저무는 봄날에 물가에 꽃이 필 때, 깊은 가을날 언덕에 단풍이 붉을 때에 조각배 타고 멀리 갔습니다. 작은 술동이를 옆에 두고 조금씩 술을 부어 마셨습니다. 가파른 모래사장 후미진 누대에서 술기운이 올라오면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노를 두드리면서 “소동파蘇東坡가 나와 같고 내가 소동파와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선생께서 고인古人을 흠모하여 무한한 흥취를 일으킨 것이 아니겠습니까?
왕손곡王孫谷84)에 있는 불주암佛住菴 앞에, 석양이 이미 저물고 어둠 속에 달이 막 솟아 나옵니다. 손님을 전송하느라 문밖으로 나오고, 스님을 데리고 절로 들어올 때에 바위로 빙 둘려 있는 험준한 계곡에서 흥이 나면 시를 읊었습니다. 그리고 두건을 벗고, “도연명이 나와 같고, 내가 도연명과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선생께서 전대 현인을 본받아 무궁한 즐거움을 실어 보낸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호! 저승에 있는 사람은 다시 살아날 수 없고, 지음知音도 돌아올 수 없는 아득히 먼 곳에 있습니다. 풍성豊城의 칼과 고죽孤竹의 경쇠와 공상空桑의 거문고와 적수赤水의 구슬85)이 다 보배가 아닌 것은 아니지만, 아는 사람만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릅니다. 그렇다면 선생의 절조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제가 아니면 누구이겠습니까?
오호! 의리상 당연히 찾아가 조문해야 하겠으나 병 때문에 달려가 곡하지 못했습니다. 천 리 밖에서 애처로움만 머금고 단지 슬픈 마음만 보낼 뿐입니다. 선생의 넷째 아들은 저와 도의로 사귄 교분이 있습니다. 봄이 오면 한번 찾아가 그를 조문하고, 또 선생의 묘소에 곡을 한 후에야 비로소 내 마음의 서러움을 모두 풀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 내가 꿈속에서 꿈속의 일을 슬퍼함도 역시 하나의 꿈이 아니겠습니까? 꿈과 꿈이 다 진실이 아니라면 내가 슬퍼함도 또 꿈속의 꿈이 아니겠습니까?

008_0334_c_01L才兼楊馬書效鍾王當世爲寶
008_0334_c_02L人無繼先生之業可謂偉矣然世之
008_0334_c_03L聞絃者旣無佳聰聽峨洋與折楊
008_0334_c_04L然爲和則先生之志人或知或不知
008_0334_c_05L而先生之節操與風流二者他人尤不
008_0334_c_06L能知而唯我獨知也夫廣陵之東
008_0334_c_07L江之傍暮春汀花深秋岸楓孤舟遠
008_0334_c_08L小樽細酌危沙曲臺酒酣則歌
008_0334_c_09L枻而稱曰東坡如我我如東坡乎
008_0334_c_10L先生之慕古人而乘此不盡之興歟
008_0334_c_11L孫谷裏佛住菴前夕陽已沒昏月初
008_0334_c_12L送客出門携僧入寺回嵒絕澗
008_0334_c_13L闌則吟岸幘而稱曰淵明如我我如淵
008_0334_c_14L明乎豈先生之斅前賢而遣此無窮之
008_0334_c_15L樂歟嗚呼九原難作知音冥邈豊城
008_0334_c_16L之劒孤竹之磬空桑之琴赤水之珠
008_0334_c_17L非不寶也知者知而不知者不知
008_0334_c_18L知先生之節非余而誰邪嗚呼義當
008_0334_c_19L徃吊而病不能奔哭含悽千里只寓
008_0334_c_20L一哀而已雖然先生之第四令胤與余
008_0334_c_21L有道交之分春來一訪吊其胤又哭
008_0334_c_22L先生之墓然後方盡吾心之所痛也
008_0334_c_23L余從夢中悲夢事者非亦一夢邪
008_0334_c_24L與夢非實而余之痛悼者非亦夢中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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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슬프고 슬프도다.
논산 석교論山石橋를 중수하므로 선행을 장려하기 위해 쓴 글
물이 고여 길이 막힌 곳에는 반드시 건널 것을 세워 다니기에 편리하게 하는데, 이를 다리라고 한다. 다리는 사람을 건너가도록 해 주는 것으로서 배나 수레 다음가는 것이다. 옛 문헌을 살펴보면 다리를 놓은 곳이 많다. 하늘 위에는 오직 오작교烏鵲橋가 있다는 말을 들었을 뿐이고, 인간 세상에 있는 다리들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고금에서 가장 이름난 다리는 천진교天津橋(낙양)가 있고, 시인들의 시로 읊어지는 것으로는 천태산天台山의 석교石橋, 완화浣花의 만리교萬里橋, 서호西湖의 이십사교二十四橋가 있다. 그 이외에 절벽을 타고 올라가는 잔도棧道와 간단한 외나무다리 등은 어찌 다 기록할 수 있겠는가?
아, 다리가 사람을 건네주는 그 공로는 다리를 항상 왕래하는 장사하는 상인이나 여행객에게만 있을 뿐만이 아니라, 또한 다리에 몸을 맡겨 목숨을 바친 충신도 있고, 다리에 의지해 감정이 격앙된 지사志士도 있다. 무엇 때문인가? (전국시대의 지사인) 예양豫讓86)은 다리에 매복하여 자신의 충성심을 품었다. (한漢의) 사마상여司馬相如는 기둥에 글씨를 새겨(相如題柱87)) 자신의 뜻을 펼쳤으니, 다리가 어찌 헛되이 존재하겠는가?
은진恩津의 상류에 논산교論山橋라는 다리가 있다. 돌을 깎아 기둥을 만들고, 물에 꽂아 다리를 만든 것이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계곡에서 흘러내려 오는 물이 휘돌고, 바다의 세찬 파도에 침식되었다. 기둥뿌리가 완전하지 않아 떨어져 나가지는 않았으나 조만간에는 떨어져 나갈 것이며, 다리의 돌이 견고하지 않아 무너지지는 않았으나 조만간에는 무너질 것이라고 식견이 있는 사람들이 걱정하였다. 청신사淸信士가 다리를 놓으려는 계획을 세우면서 나에게 권선문勸善文을 써 주기를 요청하였다. 나는 “좋습니다. 충신과 지사도 때로는 다리에 몸을 맡겨 자신의 뜻과 사업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였으니, 아마도 다리가 그들에게 도움 되는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물며 항상 오고 가는 장사꾼이나 여행객들이야 앞을 다투어 재물을 내놓아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008_0335_a_01L嗚呼痛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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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335_a_03L論山石橋重修諭善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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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之渟瀦礙阻之處必建梁以爲利涉
008_0335_a_05L曰橋橋所以濟人者舟車之次也
008_0335_a_06L古文而考之建橋處盖多焉天上則唯
008_0335_a_07L聞有烏鵲橋至於人間則不可勝記
008_0335_a_08L而古今㝡名者天津橋也詠於詩人之
008_0335_a_09L詞句者天台之石橋也浣花之萬里橋
008_0335_a_10L西湖之二十四橋也其餘橫棧略彴
008_0335_a_11L之類烏能盡記哉橋之能濟人
008_0335_a_12L功非特在於行商遊客之尋常徃來而已
008_0335_a_13L抑忠臣托之而忘生者有之志士憑之
008_0335_a_14L而激昻者有之何則䂊讓之伏橋懷其
008_0335_a_15L忠也相如之題柱叙其志也橋豈徒
008_0335_a_16L然哉恩津之上䟽有橋曰論山劚石爲
008_0335_a_17L揷水爲橋者於千萬年而溪壑亂
008_0335_a_18L流之所匯溟渤狂瀾之所浸故柱根不
008_0335_a_19L完不缺而將近於缺橋石不固不頹
008_0335_a_20L而將近於頹識者憂之爰有信士
008_0335_a_21L發再造之計求勸善文於余余曰諾
008_0335_a_22L忠臣志士之有時憑托而或冀其志業
008_0335_a_23L之有成則宜若有所助於其間而况行
008_0335_a_24L商遊客之尋常徃來者其可無捨施之

008_0335_b_01L나는 이에 권선문을 쓴다.
불교의 폐지에 대해 간언을 하며 올린 상소문
신臣은 다음과 같이 들었습니다. 공자가 (『논어』 「위령공衛靈公」에서) “함께 말할 수 있는 사람인데 함께 말하지 않으면 사람을 잃게 되고, 함께 말할 수 없는 사람인데 함께 말하면 말을 잃어버린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치에 들어맞게 말을 할 때는 무성의하게 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요임금은 윤수尹壽88)에게 자문을 구했으며, 순임금은 무성務成89)을 방문하였습니다. 요임금ㆍ순임금은 위대한 성인의 자질을 가지고 계신 분이며 모두 매우 고귀한 지위에 있었으니, 깊은 시골에 사는 사람을 취할 필요도 없으며 나무꾼(蒭蕘90) )의 말도 받아들일 필요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사람들(윤수ㆍ무성을 말함)에게 은근한 정성을 나타낸 것은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사람을 쓰면 반드시 현인을 만나고 간언을 받아들이면 반드시 좋은 말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은 반드시 추로鄒魯(공자와 맹자)91)의 말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중니仲尼(공자)가 노담老聃(노자)에게 배웠습니다.92) 사람도 반드시 요순시대의 사람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서백西伯(주나라 문왕)은 여망呂望93)을 스승으로 삼았습니다. 이런 까닭에 지역이 의심스럽다고 해서 그 지역 사람들의 말을 폐기하면 말을 잃게 되는 것이요, 시대가 의심스럽다고 하여 그 시대 사람들을 버리면 사람을 버리는 것입니다. 어찌 살피지 않을 수 있으며, 어찌 분명히 밝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일반적으로 세상이 태평하면 은자들도 세상을 따르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한漢나라에서 사호四皓94)를 존경하였습니다. 풍속이 순박하면 욕심 없는 탈속한 사람들이 간간이 배출됩니다. 그러므로 진晉나라에서는 죽림칠현竹林七賢95)을 높이 받들었습니다. 죽림칠현이 어찌 모두 이윤伊尹ㆍ주공周公ㆍ소공召公ㆍ부열傅說 같은 재상의 재주가 있었겠습니까? 상산사호商山四皓가 어찌 모두가 한신韓信ㆍ팽월彭越ㆍ위청衛靑ㆍ곽거병霍去病 같은 장군의 지략이 있었겠습니까? 그렇지만 모두를 제후로 봉하여 신하로 충당한 것은, 그들이 인자한 임금이 백성을 교화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혹은 성군聖君이 정치를 잘 하도록 도와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백성을 편안히 하는 재주는 반드시 십란十亂(열 명의 어진 신하)96)에 의지하고, 세상을 구제하는 지혜는 역시 삼우三愚97)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것은 마치 엄청나게 큰 종은 한 조각 쇳덩어리로 만들 수 없음과 같습니다. 천 칸 되는 큰 집을 어찌 짧은 시간에 지을 수 있겠습니까?
생각하건대 성인이시고 신적인 능력이 있으시며 문무를 겸비하신(聖神文武)

008_0335_b_01L爭先者哉余於是乎遂書爲勸善文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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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335_b_03L大覺登階白谷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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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335_b_05L諫廢釋敎䟽

008_0335_b_06L
臣聞孔子曰可與言而不與言失人
008_0335_b_07L不可與言而與言失言言或可以有中
008_0335_b_08L聽不可以無誠故堯咨尹壽舜訪務
008_0335_b_09L彼以至聖之資咸居極貴之位
008_0335_b_10L不必取蓬蒿之人不必納蒭蕘之言
008_0335_b_11L所以勤欵者盖益我者存焉何則
008_0335_b_12L人則必見賢人納言則必聞善言言不
008_0335_b_13L必鄒魯之言故仲尼學於老聃人不必
008_0335_b_14L堯舜之人故西伯師於呂望是故若以
008_0335_b_15L邦域爲嫌而廢言失言若以時代
008_0335_b_16L訝而棄人失人可不察哉可不明哉
008_0335_b_17L夫世治則逸人願從故漢遵四皓俗醇
008_0335_b_18L則淸軰間出故晋高七賢七賢豈皆伊
008_0335_b_19L傅周召之相才乎四皓寧盡韓彭衛霍
008_0335_b_20L之將略乎然而咸在提封得充臣妾者
008_0335_b_21L或助仁后之隆化或扶聖君之優治
008_0335_b_22L安民之才必憑十亂濟世之智亦待
008_0335_b_23L三愚其猶洪鍾萬鈞非片銕所鑄
008_0335_b_24L厦千間豈一世所搆哉
伏惟聖神文武

008_0335_c_01L주상 전하(현종)께서는 천명을 받아서 왕위를 계승하였습니다. 왕세자로 있던 시절에는 효성이 대단하여 닭이 울면 문안을 갔으며, 왕위에 오른 이후에는 변란(雉劬98) )이 일어날까 조심하였습니다. 부역을 가볍게 하고 세금을 줄이니 백성들이 즐거운 얼굴을 하였으며, 과부를 불쌍히 여기고 고아를 가엾게 여기니 백성들이 목을 내밀면서 은혜를 갈망하였습니다. 2ㆍ3년 동안 교화가 백성들에게 두루 미쳤고, 수천 리 밖에까지 은혜는 백성들에게 더해졌습니다. 삼왕三王(복희ㆍ신농ㆍ황제)도 어질지 않다면 그만이며, 어질기만 하다면 전하께서 바로 삼왕 같은 분입니다. 오제五帝(소호ㆍ전욱ㆍ제곡ㆍ요ㆍ순)도 성인답지 못하면 그만이지만, 성인 같은 행동을 한다면 전하께서 바로 오제 같은 분입니다. 오늘날에 소巢ㆍ허許99) 같은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찌 옛적의 요순堯舜 같은 임금을 만난다고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예로부터 명군과 성왕의 행정은 분명하였으며 정치도 어질었기는 하지만 자신이 직접 만기萬機(왕의 많은 업무)를 처리해야 하므로 한 가지 실수가 있을까 걱정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서경』에는 임금을 가르치는 글인 고誥100)가 있으며, 『시경』에는 왕을 훈계하는 시가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신분이 낮은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자신을 낮추면서 간언을 받아들임은 임금으로서의 인자함이요, 임금의 존엄성을 범하면서 당돌하게 간언을 올림은 신하의 충성심입니다. 그러므로 『서경』 「열명說命」에서 “나무가 먹줄을 따르면 반듯하게 되고, 임금은 간언을 따르면 성군이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임금이 거울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좌전』 (「소공昭公」 20년 8월 기사)에는 “임금이 하는 말이 옳기는 하지만 부당한 점이 있을 때, 신하는 그 부당성에 대해 의견을 올리면서 임금의 옳은 점을 이루어 준다. 임금이 하는 말이 부당하지만 옳은 점이 있을 때 신하는 임금의 옳은 점에 대해 의견을 올리면서 그 부당한 점은 없앤다.”101)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신하가 본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신은 매우 미천한 사람으로 외람되이 상문桑門(승려)이 되어 축교竺敎(불교)를 더럽히는 인간 세상 군더더기 중에 하나이며, 강과 구름 속에서 떠돌아다니는 외롭고 바싹 마른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군신君臣과 부자父子의 의리에 대해서는 평소 신경을 쓰지 않았으니, 득실得失과 치란治亂의 논의에 대해서 어찌 많은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지금 감히 자신을 ‘신臣’이라고 부르는 것도 참으로 분수에 넘침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옛날에 (북위北魏 시대의) 법과法果 스님은 안성후安城侯로 임명되었고, 당唐의 불공不空 스님은 숙국공肅國公으로 봉해졌습니다. 모두 신하의 대열에 서서 임금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시경』 (「소아」 〈북산北山〉)에서 “왕의 신하가 아닌 사람이 없다.”라고 하였으며, 『서경』 (「중훼지고仲虺之誥」)에서 “우리 임금 오시기를 기다린다.”라고 하였으니, 참으로 피차彼此를 가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신人臣이 비록 볼만한 형상이 없더라도

008_0335_c_01L主上殿下誕膺天命纉承丕位儲宮
008_0335_c_02L之日孝誠趂乎鷄鳴君臨以來恐愳
008_0335_c_03L生乎雉劬輕徭減賦則蒼生怡顏
008_0335_c_04L寡憐孤則赤子延頸二三載之間
008_0335_c_05L冾生靈數千里之外恩添品三王
008_0335_c_06L不仁則已仁則殿下是也五帝不聖則
008_0335_c_07L聖則殿下是也豈意今日之巢許復
008_0335_c_08L遇昔時之堯舜乎雖然自古明君聖王
008_0335_c_09L政非不明也治非不仁也而躬臨萬機
008_0335_c_10L慮有一失故書有訓君之誥詩存戒王
008_0335_c_11L之篇是以矜憐鄙陋枉屈從諫者
008_0335_c_12L父之仁也冒黷尊嚴唐突進言者
008_0335_c_13L子之忠也故說命曰木從繩則正
008_0335_c_14L從諫則聖此君父之所可鑑也春秋傳
008_0335_c_15L君所謂可而有否焉臣獻其可
008_0335_c_16L去其否此臣子之所可效也臣以至微
008_0335_c_17L至賤猥叨桑門謬忝竺敎人世上一
008_0335_c_18L贅物水雲間隻枯容其於君臣父子之
008_0335_c_19L素昧留心得失治亂之談寧能刺
008_0335_c_20L而今敢稱臣者固知濫矣然昔法
008_0335_c_21L果沙門拜安城候 [11] 不空法師封肅國
008_0335_c_22L咸以臣例紆荷主恩則詩所謂
008_0335_c_23L非王臣書所謂徯我后來者固無揀擇
008_0335_c_24L於彼此也然則爲人臣者雖甚無狀

008_0336_a_01L어리석은 계책이나마 있으면 임금에게 말씀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알아보니, 승니僧尼(비구와 비구니) 모두를 사태沙汰(많은 사람을 떨쳐내는 일)시키도록 하여 비구니는 환속시키고 비구들 역시 없애기로 논의하였다고 합니다. 신은 참으로 우매하여 임금님의 생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헤아리지 못하겠습니다.
임금께서 생각하시기를 불교가 서방 인도에서 탄생되었지만 중국에 흘러들어 왔으니 지역이 다르다고 하여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혹은 삼대三代(하ㆍ은ㆍ주) 이후에 나왔으니 상고시대의 법이 아니므로 시대가 다르다고 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혹은 인과를 거짓으로 말하고 응보를 기만하여 널리 알리고 윤회로 백성을 그릇된 길로 끌고 간다고 하여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혹은 농사도 짓지 않고 누에도 치지 않고 하는 일도 없이 놀고먹으면서 재물을 소모시킨다고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혹은 함부로 머리를 깎아 항상 법망에 걸리어 헌정 질서를 손상시킨다고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혹은 불교도라 핑계 대고 구차하게 요역徭役을 회피하며 군대에도 빠진다고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신은 불교가 탄생하게 된 시종을 먼저 말하고, 위에서 말한 몇 가지 조목은 뒤에 설명하고자 합니다. 임금님께 하소연하오니 읽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신臣이 멀리 이전 역사를 살피고 고찰하니, 『주서이기周書異記』102)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부처는 주나라 소왕昭王 24년 갑인년(B.C. 1027)에 세상에 태어났다. 밤에 오색 기운 빛이 있으며 청홍색이었다. 왕이 태사太史인 소유蘇由에게 묻기를 ‘이것은 무슨 상서로운 징조인가?’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서방에 위대한 성인이 태어났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주나라 목왕穆王 53년 임신년(B.C. 949)에 열반에 들었다. 당시 흰 무지개 열한 줄기가 남북을 관통하였다. 목왕이 태사 호다扈多에게 묻기를 ‘무슨 징조인가?’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서방의 위대한 성인이 돌아가셨습니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였습니다.
“오나라 태재太宰(재상)인 백비白嚭가 공자에게 묻기를 ‘선생님은 성자이십니까?’라고 하니, 공자가 대답하기를 ‘나는 학식이 넓고 기억력이 풍부한 사람이지 성인은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누가 성자인가요?’라고 하니, 공자는 조용히 대답하기를 ‘서방에 위대한 성인이 있습니다. 말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믿음이 있으며, 교화를 베풀지 않아도, 교화가 저절로 행해집니다.’”103)
또 『장자』 「제물론齊物論」에서 “만년 후에라도 한번 대 성인을 만나서 그 견해를 인정받는다면, 이것은 아침저녁으로 만나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모두 부처님을 가리키며 한 말입니다.

008_0336_a_01L有愚計不得不禀於君父也
謹因朝報
008_0336_a_02L伏奉聖旨遂令僧尼並從沙汰尼已
008_0336_a_03L還俗僧亦議廢臣實闇斷未窺聖慮
008_0336_a_04L之何謂也聖慮必以佛氏生彼西方
008_0336_a_05L入此華夏有異邦域而然歟抑出三代
008_0336_a_06L非上古法有殊峕代而然歟抑僞
008_0336_a_07L啓因果謬暢報應有誣輪廻而然歟
008_0336_a_08L抑不畊不蠶遊手遊食有耗財帛而然
008_0336_a_09L抑妄爲剃落每罹憲網有傷政敎
008_0336_a_10L而然歟抑托號浮啚苟避徭役有失
008_0336_a_11L偏伍而然歟臣請先言佛興之始終
008_0336_a_12L陳右列之條目仰愬宸襟乞垂睿覽

008_0336_a_13L
臣逖覽前史詳考歷代周書曰佛昭
008_0336_a_14L王二十四年甲寅出世夜有五色光氣
008_0336_a_15L作靑紅色王問太史蘇由曰是何祥也
008_0336_a_16L對曰西方有大聖人生也至穆王五十
008_0336_a_17L三年壬申佛入寂時有白虹一十一道
008_0336_a_18L貫通南北王問太史扈多曰是何徵也
008_0336_a_19L對曰西方有大聖人滅也又吳太宰
008_0336_a_20L問孔子曰夫子聖者歟曰丘愽識强記
008_0336_a_21L非聖人也然則孰爲聖者與夫子動容
008_0336_a_22L而對曰西方有大聖人不言而自信
008_0336_a_23L不化而自行又藏子曰萬歲之後
008_0336_a_24L遇大聖知其解者是朝暯遇之皆指

008_0336_b_01L
진시황제의 시대에 이르러 사문 실리방室利防104) 등이 서역에서 왔을 때 진시황제는 그들의 기이한 풍속을 미워하여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갑자기 신장이 나타나서 옥문을 부수고 그들을 구출해 가자, 진시황제는 두려워서 후하게 예물을 주어 돌려보냈습니다.
또 한나라 무제武帝 때 곽거병이 곤야왕昆耶王105)과 금인金人을 잡았는데 금인의 키가 1장丈 남짓이 되었으므로, 한 무제는 대신大神이라 여기고 감천궁甘泉宮에 안치하였습니다. 또 박망후博望侯 장건張騫을 서쪽 신두身毒 (인도)에 보내어 불법을 구해 오도록 하였습니다. 한나라 원제元帝 때 광록대부光祿大夫 유향劉向106)이 인도 고대 언어로 기록된 불경 20여 권을 구해 자신의 저서인 『열선전列仙傳』에 넣었습니다. 한나라 애제哀帝 때에는 경헌景憲이 월지국月支國107) 사신으로 가자 월지국 국왕이 불경을 바쳤습니다. 후한의 명제明帝 때에는 명제가 꿈에 감응하여 중랑장中郞將 채음蔡愔 등을 서역에 파견하여 불법을 알아보게 하니, 채음이 인도 승려인 마등摩騰과 법란法蘭 두 분 스님을 모시고 돌아왔습니다.108) 이때부터 불교가 유행되기 시작하여 후한後漢과 위魏나라 연간에 점차 퍼졌고 당송唐宋 시대에 왕성하게 되었습니다. 중국 임금과 신하들은 모두 불교에 의지하여 나라를 다스리기도 하고 집안을 다스리기도 하였으니, 이것이 불교가 흥성한 전말의 대략적인 줄거리입니다.
전하께서 혹시 지역이 달라서109) 불교를 없애려고 하십니까? 그렇다면 성인이신 공자의 수레는 고국 노魯나라에 머물고 진陳나라와 채蔡나라까지는 굴러가지 않았을 것이고, 현자이신 맹자의 언변은 고국 추鄒나라에 있고 제齊나라와 양梁나라까지는 통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진秦나라의 15개 성과 바꾸지도 못하는 가치 없는 조벽趙璧110)과 같고, 수레도 비추지 못하여 위魏나라의 자랑거리가 되지도 못하는 수주隋珠111)와 같습니다.112) 동이東夷에서 태어난 순임금과 서강西羌에서 태어난 우임금을 성인이 아니라고 한다면, 포악한 임금인 걸桀과 주紂는 중국에서 태어났으므로 성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융戎에서 태어난 유여由余(춘추시대 현인)와 만蠻113)에서 태어난 계찰季札(춘추시대 현인)을 현인이 아니라고 한다면 춘추시대의 유명한 도둑인 도척盜跖과 장교莊蹻는 중국에서 태어났으므로 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이런 까닭에 공자는 (『논어』 「자한子罕」에서) “구이九夷114)에서 살고 싶다.”라고 하였으며, 중국 사람은 삼한三韓에서 태어나기를 원하였습니다. 수레와 배로 갈 수 있으며, 비와 이슬을 함께 받으며, 이하夷夏(중국과 변경 국가)의 경계가 서로 이어지며, 중국이든 변경 지역이든 어디에서 태어났든지 간에 성인은 다르지가 않습니다. 그러므로 송宋의 학자인 유원성劉元城(이름은 安世)은 “공자와 부처의 말씀은 서로 끝과 처음이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008_0336_b_01L佛而言也逮秦始皇時沙門室利防等
008_0336_b_02L來自西域帝惡其異俗以付獄俄有
008_0336_b_03L神碎獄門而出之帝懼厚賜遣之
008_0336_b_04L漢武帝時霍去病獲昆耶王及金人率
008_0336_b_05L長丈餘帝以爲大神安于甘泉宮
008_0336_b_06L遣愽望候 [12] 張騫西徃身毒獲浮屠法
008_0336_b_07L元帝時光錄大夫得梵本經二十
008_0336_b_08L餘卷編入仙傳哀帝時景憲奉使月
008_0336_b_09L支國其王投獻浮屠經明帝時感夢
008_0336_b_10L遣中郞將蔡愔等西訪其道獲迎摩騰
008_0336_b_11L法蘭二僧而還自是敎法流行漸於
008_0336_b_12L漢曺魏之間盛於李唐趙宋之際聖主
008_0336_b_13L賢臣莫不憑賴或治其國或齊其家
008_0336_b_14L此其佛興始終之大略也
殿下若曰
008_0336_b_15L異邦域而廢之則孔聖之轍止於魯而
008_0336_b_16L不必環於陳蔡孟賢之舌藏於鄒而不
008_0336_b_17L必棹於齊梁其猶趙壁不得連城於秦
008_0336_b_18L隋珠不能照乘於魏誇豈以舜生於
008_0336_b_19L東夷禹出於西羌爲不聖而聖中國
008_0336_b_20L之桀紂乎豈以由余生於戎季札出
008_0336_b_21L於蠻爲不賢而賢中國之跖蹻乎
008_0336_b_22L以魯叟欲居九夷華人願生三韓
008_0336_b_23L舟車所通雨露所同夷夏之境相接
008_0336_b_24L內外之聖不殊故劉元城曰孔子佛之

008_0336_c_01L금金의 학자인 이병산李屛山은 “세 분의 성인115) 모두 주周나라 때에 났다. 마치 해ㆍ달ㆍ별이 부상扶桑(동쪽 해 뜨는 곳) 위에 모여 있고, 강수江水ㆍ하수河水ㆍ회수淮水ㆍ한수漢水가 바닥없는 깊은 대해(尾閭)에 모여 있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상의 사실을 근거로 본다면 『중용』에서 “도는 함께 운행해도 서로 거스르지 않는다.”라고 하였고, 『주역周易』 「계사繫辭」 하에서는 “길은 달라도 귀일점은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성인이 다르지 않음은 화살에 화살촉이 걸려 있는 것과 같으며(하나로 일치한다는 말), 도가 다르지 않음은 부절符節을 합친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지역이 다르기는 하지만 불교를 폐지할 수 없는 첫째 이유입니다.
전하께서 혹시 시대가 다르다고 해서 불교를 없애려고 하십니까? 그렇지만 문자로 기록된 서적을 사용하면 그만이지 새끼를 꼬아서 만든 상고시대로 되돌아갈 필요는 없습니다. 편안히 집에서 살면 그만이지 반드시 위태로운 나무 둥지에서 살면서까지 거처를 바꿀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겨울 음식이 맞지 않는다고 하여 봄부터 미리 곡식을 먹는 것과 같고, 밤잠이 적합하지 않다고 해서 낮부터 마루에 앉아 있는 것과 같습니다. 어찌 은殷나라의 현인인 기자箕子ㆍ비간比干ㆍ미자微子 세 사람이 은나라가 멸망할 즈음에 나왔다고 해서 불충不忠이라 하고, 상고시대의 포악한 무리인 구려九黎를 충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공자의 제자인 십철十哲116)이 주나라 말기에 태어났다고 해서 본받을 수가 없다면 상고시대의 포악한 사흉四凶을 본받겠습니까? 이런 까닭에 상고시대의 황제인 포희庖羲(복희)가 팔괘八卦를 그리자 『주역』의 도가 문왕文王에 의해 발현되었으며, 하나라 우임금이 홍범구주洪範九疇의 뜻을 서술하자 낙서洛書가 기자에 의해 완성되었습니다. 하물며 하늘과 땅이 제 위치에 있고, 해와 달이 세상을 비춤은 고금의 이치가 같습니다. 이전 시대나 이후 시대의 규범이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춘추시대의 조맹趙孟은 “한번은 그때이고, 한번은 이때이다. 어찌 영원한 것이 있는가?”(『좌전』 「소공」 원년)라고 하였습니다. 모자牟子117)는 “저 때도 한때, 이때도 한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사실을 추적해서 본다면 순임금ㆍ우임금이 다시 살아나더라도 반드시 “부처와 우리들은 차이가 없다.”라고 말할 것이고, 탕임금ㆍ무왕이 다시 세상에 나오더라도 반드시 “부처에 대해 우리들이 무슨 말을 하겠는가?”라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공자는 『논어』 (「자한子罕」)에서 “후생가외後生可畏(후배들이 두렵다.)”라고 하였으며, 『춘추좌씨전』(「소공」 원년)에서는 “시원여이視遠如邇(먼 시대에 있는 것을 보기를 가까운 시대에 있는 듯이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시대는 다르나 일은 동일하며, 시대는 다르나 이치는 하나이다.”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시대가 다르다고 해서 불교를 폐지할 수 없는 두 번째 이유입니다.
전하께서 혹시 불교의 윤회설이 백성을 속이므로 불교를 폐지하려고 하십니까? 그렇다면 당나라 천자의 옥소玉簫는 도승道僧에게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고,

008_0336_c_01L相爲終始李屏山曰三聖人者
008_0336_c_02L出於周如日月星辰之合於扶桑之上
008_0336_c_03L江河淮漢之匯於尾閭之涯迹此觀之
008_0336_c_04L中庸所謂道并行而不相悖繫辭所謂
008_0336_c_05L殊途而同歸者可謂聖之不殊若柱箭
008_0336_c_06L道之不異如合符節此不可以有
008_0336_c_07L異邦域而廢者一也
殿下若曰有殊時
008_0336_c_08L代而廢之則書契之籍不必代結繩之
008_0336_c_09L屋宇之安不必易居巢之危其猶
008_0336_c_10L冬食不宜春畊之粒夜眠不合晝坐之
008_0336_c_11L豈以三仁出於殷滅爲不忠而忠
008_0336_c_12L上古之九黎乎豈以十哲生於周衰
008_0336_c_13L爲不法而法上古之四凶乎是以庖犧
008_0336_c_14L晝卦易道顯乎文王夏后叙疇洛書
008_0336_c_15L成乎箕子况乾坤所位日月所臨
008_0336_c_16L今之致同焉前後之䂓一也故趙孟曰
008_0336_c_17L一彼一此何常之有牟子曰彼一時
008_0336_c_18L此一時也迹此觀之如使舜禹復
008_0336_c_19L必曰佛氏吾無間然矣湯武復出
008_0336_c_20L必曰佛氏吾何言哉然則魯論所謂後
008_0336_c_21L生可畏左史所謂視遠如邇者可謂時
008_0336_c_22L異而事同代殊而理一此不可以有殊
008_0336_c_23L時代而廢者二也
殿下若曰有誣輪回
008_0336_c_24L而廢之則唐天子之玉簫不必假道僧

008_0337_a_01L진晉나라 도독都督의 금반지는 이웃 노파가 찾지 못했을 것입니다.118) 윤회설을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지는 노을이 강에 잠기는데 내일 다시 해가 뜨지 않고, 시든 꽃이 언덕에 떨어지는데 내년에 다시 꽃이 피지 않는다고 생각함과 같습니다. 당나라 학자 배휴裵休가 진晉의 허현도許玄度119)가 다시 태어난 몸임을 믿지 않고, 대청 위에 걸려 있는 활이 뱀이라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당나라 위고韋皐120)가 제갈량諸葛亮이 다시 태어난 몸임을 믿지 않고, 길거리의 돌을 호랑이라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진종眞宗이 미소를 지은 것121)은 천존天尊이 탄생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며, 송宋 인종仁宗122)이 울음을 그친 것은 위대한 신선이 세상에 내려왔음을 증명합니다. 더구나 죽음과 삶은 연계되어 있고, 화와 복은 인간이 불러들이는 것이고, 장수와 요절은 천생적으로 정해진 것이며, 상서로움과 재앙의 징조는 드러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漢의) 가의賈誼는 「복조부鵩鳥賦」에서 “천변만화千變萬化는 끝이 없다.”라고 하였으며, 수隋의 이사겸李士謙은 “등애登艾는 소, 서백徐伯은 물고기, 군자는 고라니, 소인은 원숭이가 된다.”123)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사실을 추적해서 본다면 『예기』 「월령月令」에서 “쥐가 변하여 메추라기가 된다.”라고 하였으며, 『장자』 「소요유逍遙遊」에서 “곤鯤이라는 물고기가 변하여 붕鵬이라는 새가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일은 다르지만 이치는 하나요, 말은 다르지만 뜻은 동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의 윤회설이 백성을 속인다고 하여 불교를 폐지할 수 없는 세 번째 이유입니다.
전하께서 혹시 재물을 소모한다고 여기어 불교를 폐지하려고 하십니까? 그렇다면 순임금은 역산歷山에서 쟁기를 잡고 농사를 지으면 그만이지 남면南面(임금은 남쪽을 바라봄)하여 임금 노릇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은나라 재상인 이윤伊尹도 신야莘野에서 낫을 휘두르고 농사를 지으면 그만이지 북면北面(신하는 북쪽을 바라봄)하여 신하가 될 필요는 없었습니다. 노나라 음식이 기杞나라 사람들의 입맛에는 적합하지 않고, 월나라의 구운 고기는 진秦나라 사람들의 입맛에 적합하지 않음과 같습니다. 공자가 노련한 농부보다 농사일을 못한다124)고 하여 천하의 사리에 달통하지 못했다고 여기며, 농사일을 물어본 번수樊須를 천하의 사리에 통달했다고 하겠습니까? 맹자가 사람들에게 봉양을 받는다고 해서 검소하지 않다고 여기며, 짚신을 직접 삼는 허행許行125)을 검소하다고 하겠습니까? 이런 까닭에 도심지에 나와 사는 사람들은 구태여 모두가 농사를 지으면서 생활을 할 필요가 없으며, 안방 깊숙이 사는 여인들도 반드시 길쌈을 하여 옷을 직접 지어 몸을 가릴 필요는 없습니다. 하물며 세상을 다스리는 임금과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는 덕을 근본으로 삼고 재물을 지엽적인 것으로 삼습니다.

008_0337_a_01L而傳晋都督之金環不必因隣媼而得
008_0337_a_02L其猶落暉沉江應無來日之再繼殘花
008_0337_a_03L墜岸必無明春之重敷豈以裴休是
008_0337_a_04L許玄度之奮身爲不信而信堂上之弓
008_0337_a_05L蛇乎豈以韋臯是諸葛亮之前魂
008_0337_a_06L不眞而眞路中之石虎乎是以眞宗開
008_0337_a_07L悟斯天尊之降誕仁宗止啼驗是
008_0337_a_08L大仙之下生况死生所系禍福所召
008_0337_a_09L壽夭之分㝎矣休咎之徵昭焉故賈誼
008_0337_a_10L千變万化未始有極李士謙曰
008_0337_a_11L艾爲牛徐伯爲魚君子爲鵠小人爲
008_0337_a_12L迹此觀之禮記所謂鼠化爲鴽
008_0337_a_13L書所謂鯤變爲鵬者可謂事殊而致一
008_0337_a_14L言異而意同此不可以有誣輪回而廢
008_0337_a_15L者三也
殿下若曰有耗財帛而廢之
008_0337_a_16L則舜虞操耒於歷山而不必南面爲君
008_0337_a_17L伊尹揮鏺於莘野而不必北面爲臣
008_0337_a_18L猶魯食不適杞夫之肥越灸不合秦人
008_0337_a_19L之嗜豈以孔丘不如老農爲不達
008_0337_a_20L達問稼之樊須乎豈以孟軻養於野人
008_0337_a_21L爲不儉而儉捆屨之許行乎是以出遊
008_0337_a_22L闤闠者不必皆耘耔而餬口深居閨室
008_0337_a_23L不必皆績紡而遮身况經世之君
008_0337_a_24L治國之主以德爲本以財爲末故召

008_0337_b_01L그러므로 주나라의 소공召公은 (『서경』 「여오旅獒」에서) “보물로 삼는 것은 오직 어진 사람이니, 가까이 있는 사람이 편안하다.”라고 하였으며, (춘추시대 진晉의) 호언狐偃은 (『대학』에서) “보배로 삼을 것은 별로 없고, 어진 사람과 친하게 지냄을 보배로 삼는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사실을 추적해서 본다면 『대학』에서 “토지를 가지고 있으면 재물이 있다”, 『서경』 「무성武城」에서 “천하에 크게 곡식을 푼다.”라고 한 것은, 즉 토지가 있으면 재물이 모여 소모됨을 걱정하지 않고 재물을 뿌리면 백성이 모이니 쌓아 두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바로 재물을 소모한다고 하여 불교를 폐지할 수 없는 네 번째 이유입니다.
전하께서 혹시 국가 정책과 교육을 손상시킨다고 여기어 불교를 폐지하려고 하십니까? 그렇다면 위에서 가르치지 않은 것이 아닌데 요임금은 단주丹舟라는 어리석은 아들이 있었고, 아래에서 간언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닌데 순임금은 고수瞽瞍라는 못난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악취가 나는 풀이 향기 좋은 난초에 섞여 있고, 원앙새가 봉황새를 어지럽힘과 같습니다. 하나라 예羿와 착浞이 불충不忠하여 죽일 수는 있지만 신하가 되는 길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계신癸辛126)이 불분명하여 추방시킬 수는 있지만 임금 모시는 의리를 끊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까닭에 중이 조정의 법을 어기면 경黥(묵형. 얼굴에 죄수라는 표시의 먹물을 들임)을 해도 좋으며 죽여도 좋습니다. 비구니가 세상에 정한 법을 범했으면 의형劓刑(코를 베는 형벌)을 해도 좋고 죽여도 좋습니다. 어찌 부처를 탓하고 미워하며 불교 전체를 폐지할 수 있습니까? 단지 타고난 성품이 선으로 옮겨 가지 못한 것이지, 불교의 가르침이 악으로 물들인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춘추시대 정鄭나라의 자산子産은 “남의 선행은 내가 본받아 실천하고, 남의 악행은 내가 고친다.”127)라고 하였습니다. 당나라의 이사정李師政은 “유생儒生들이 죄가 있어도 공자의 잘못과는 관계가 없으며 승려가 잘못을 저질러도 어찌 이것이 석가세존의 허물인가?”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사실을 추적해서 본다면 『주역』 (「해괘解卦」)에서 이른바 “과오를 용서하고 죄를 용서한다.”라고 한 것과 『서경』 「다방多方」에서 “덕행을 한 사람을 분명히 밝히고 벌을 줌을 신중히 한다.”라고 한 것 등은, 사람 중에 벌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법은 폐지할 수 없음을 분명히 밝힌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국가 정책과 교육을 손상시킨다고 해서 불교를 폐지할 수 없는 다섯 번째 이유입니다.
전하께서 혹시 승려가 군대 조직에서 빠진다고 해서 불교를 폐지하려고 하십니까? 그렇다면 도성에 산다고 거짓으로 속이면서 세금을 내지 않는 가구는 얼마나 많으며, 지방의 호족에게 거짓으로 몸을 의탁하여

008_0337_b_01L公曰所寶惟賢則邇人安孤偃曰
008_0337_b_02L以爲寶仁親以爲寶迹此觀之經傳
008_0337_b_03L所謂有土此有財武成所謂大賚于四
008_0337_b_04L海者可謂土有則財聚不憂耗也財散
008_0337_b_05L則民聚不願畜也此不可以有耗財帛
008_0337_b_06L而廢者四也
殿下若曰有傷政敎而廢
008_0337_b_07L則上非不敎而堯有丹朱之子下非
008_0337_b_08L不諫而舜有瞽瞍之父其猶薰蕕雜乎
008_0337_b_09L蘭芷之叢鸂鶒亂乎鳳凰之群豈以羿
008_0337_b_10L浞之不忠爲可誅而塞其爲臣之路乎
008_0337_b_11L豈以癸辛之不明爲可放而絕其戴君
008_0337_b_12L之義乎是以僧干朝憲則黥之可也
008_0337_b_13L殺之亦可也尼犯俗刑則劓之可也
008_0337_b_14L誅之亦可也寧咎釋而惡之并與佛而
008_0337_b_15L廢哉但以性品或不遷於善非是敎
008_0337_b_16L能使染於惡故子產曰人之所善
008_0337_b_17L吾則行之人之所惡吾則改之李師
008_0337_b_18L政曰靑衿有罪非關尼父之失皂服
008_0337_b_19L爲非豈是釋尊之咎迹此觀之大易
008_0337_b_20L所謂赦過宥罪多方所謂明德愼罰者
008_0337_b_21L可謂人雖可罰者有矣法不可廢者明
008_0337_b_22L此不可以有傷政敎而廢者五也
殿
008_0337_b_23L下若曰有失偏伍而廢之則矯托於
008_0337_b_24L輦轂之下而戶不出稅者幾多詐欺

008_0337_c_01L장정壯丁으로 등록되지 않은 사람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불교는 세력이 점차 약해져 가지만 승려들의 역할은 매우 많아 호적에 편입된 가구와 동일하고 일반 백성들과 차이가 없습니다. 양서兩西(황해도ㆍ평안도)에는 군적軍籍에 등록된 승려가 많으며, 삼남三南(경상도ㆍ충청도ㆍ전라도)에는 관의 요구에 부응하는 승려가 많습니다. 중국에 종이를 공물로 보내는 것도 모두 승려들에 의해 나왔으며, 상급 관청에 잡다한 물건을 바치는 것도 모두 승려들이 준비한 것입니다. 그 이외 잡역이 수백 가지이고, 독촉하고 요구함이 수만 가지입니다. 관아 문에서 나오자마자 관아의 명령이 계속 이어집니다. 바빠서 날짜를 어기면 간혹 감옥에 잡혀가기도 하고, 순식간에 닥치는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모르면 매질도 당합니다. 각 도의 외곽에 있는 보루堡壘와 남한산성 등에서 보초를 서기 위해서 천 리 길에서 양식을 지고 와 해마다 성곽을 지킵니다. 몸은 파수 보는 사람과 같고 행적은 전쟁 나간 군인과 같습니다. 감색 머리칼과 파란 눈동자는 바람에 머리 빗질을 하고 비로 목욕을 하였으며, 하얀 버선과 하얀 누더기 옷은 진흙을 뒤집어쓰고 먼지로 더럽혀져 있습니다. 놀랄 만한 급한 상황이 생기면 벌떼처럼 개미처럼 모여들며 전쟁터에 나아가서는 번개처럼 우레처럼 달려 나갑니다. 십만 명으로 대부대를 만들고, 오십 명으로 소부대를 만듭니다. 활과 화살을 좌로 당기고 우로 뽑습니다. 크고 긴 창으로 전방 부대는 돌진하고, 후방 부대는 최후까지 남아서 방어를 합니다. 칼을 쓸 때는 진晉나라ㆍ초나라의 강함을 다투고 진을 칠 때는 진秦나라ㆍ월나라의 병법을 익힙니다. 이런 사실을 추적해서 본다면 『시경』 「당풍唐風」 (〈보우鴇羽〉)에서 “나라의 일을 하느라 힘을 다 쏟는다.”라고 한 것과 『시경』 「소아」 (〈하초불황何草不黃〉)에서 “아침저녁으로 겨를이 없다.”라고 한 것 등은, 은혜를 저버린 자는 적고 정의로운 일을 한 사람은 많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군대 조직에서 빠지기는 하였지만 불교를 폐지할 수 없는 여섯 번째 이유입니다.
이상이 위에서 열거한 조목의 대략적인 줄거리입니다. 신의 지혜는 하찮고 정성도 부족하여 이상의 여섯 조목 이외에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불교가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를 하는 데 해로움만 있고 보탬이 없다고 여기십니까? 전대前代에 불법을 숭상한 임금과 불법을 보호한 신하들을 들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임금을 들어 말한다면 불법을 숭상한 임금은 천 명 만 명 이상이 되지만 간략히 몇 명의 임금을 열거하겠습니다.
예악을 천하에 널리 밝힌 이로는 어느 누가 후한後漢 명제明帝만 하겠습니까? 유학과 문인 학자를 크게 일으킨 이로는 어느 누가 후한 효장제孝章帝만 하겠습니까?

008_0337_c_01L於蕃鎭之間而名不添丁者何限
008_0337_c_02L佛道陵遅僧役浩穰有同編戶無異
008_0337_c_03L齊民兩西則占軍籍者多三南則應官
008_0337_c_04L徵者衆紙楮之貢獻中國者皆出於緇
008_0337_c_05L雜物之進納上司者盡偹於白足
008_0337_c_06L餘百役督索万般衙門纔退官令繼
008_0337_c_07L忙迫失期則或遭囚繫創卒罔措
008_0337_c_08L則或被鞭1) [11] 至於諸道郊壘南漢山
008_0337_c_09L千里褁粮每歲守堞身同戍客
008_0337_c_10L等征夫紺髮靑眸櫛風沐雨素襪白
008_0337_c_11L蒙泥染塵粵有警急則蜂屯蟻聚
008_0337_c_12L爰臨戰伐則電掣雷犇千百爲群
008_0337_c_13L伍作隊桃弧棘矢左挽右抽大戟長
008_0337_c_14L前驅後殿鋒爭晋楚之强陣習羸
008_0337_c_15L越之法迹此觀之國風所謂王事靡監
008_0337_c_16L小雅所謂朝夕不暇者可謂孤恩者寡
008_0337_c_17L仗義者多焉此不可以有失偏伍而
008_0337_c_18L廢者六也
此其右列條目之大槩也
008_0337_c_19L智不衛蔡誠非橫草莫是此六之外
008_0337_c_20L別有所害無補於治平而然歟臣誠言
008_0337_c_21L前代崇奉之君護持之臣而質之以君
008_0337_c_22L言之則崇奉之君不趐千萬而略擧數
008_0337_c_23L主焉修明禮樂孰如漢明帝乎隆興
008_0337_c_24L「朴」通「扑」{編}

008_0338_a_01L문무를 겸비한 이로는 어느 누가 양梁나라 무제武帝만 하겠습니까? 천하를 통일한 이로는 어느 누가 수나라 고조만 하겠습니까? 국가의 문물제도를 통일되게 정비한 이로는 어느 누가 당나라 태종만 하겠습니까?
후한의 명제가 세상을 다스릴 때에는 학문이 뛰어났고 위엄도 대단하였으며 공손함과 검소함을 겸비하였습니다. 사치와 화려함이 없고 국가를 다스리는 경략에 뛰어났으며 유학자를 높이 받들고 덕이 있는 사람을 존경하여 나라의 정치가 밝게 되었습니다. 이때에는 길에서는 노인에게 인사를 하였으며 경전을 들고 뜻을 물어보았습니다. 학식 있는 학자와 문장가들이 많았음은 『시경』 「주남周南」 〈인지지麟之趾〉128)처럼 성대하였습니다. 하ㆍ은ㆍ주 삼대 이래로 성대한 학풍이 이처럼 위대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명제는 석가모니의 불상을 현절릉顯節陵과 청량대淸凉臺에 모시도록 하였으며, 당대의 문장가인 반고班固와 부의傅毅는 부처의 공덕을 찬양하였는데 후한의 가장 뛰어난 글이었습니다. 그런데 종리의鍾離意129)가, 특히 명제의 성격이 “편협하고 자질구레하다.”130)라고 그의 전기에다 기록하였으니 어찌 훌륭한 역사적 평가라고 하겠습니까?
후한의 장제가 세상을 다스릴 때에는 유순하고 선량한 사람을 선발해서 등용하여 충간忠諫하는 길을 열었습니다. 정치 체제를 분명히 밝히어 엄한 형벌을 없애고 문장을 좋아하여 유가儒家의 고전을 숭상하였습니다. 이때에는 신작神雀과 신봉神鳳이 왔으며 백조白鳥(학)와 백록白鹿이 나타나는 상서로운 조짐이 있었습니다. 서주 자사徐州刺史 왕경王景131)이 〈부처를 찬송하는 글(金人頌)〉을 올리고 선제先帝(명제)가 부처를 섬긴 공로를 찬미하였는데 『한서漢書』에 실려 있습니다. 그런데 사관들이 참언讒言으로 태자를 폐위시켰으며 해로운 정치를 했다고 썼으니 어찌 진실한 논의라 하겠습니까?
양나라 무제가 세상을 다스릴 때에는 진실로 문무를 겸비하여 유업儒業을 널리 알렸습니다. 예술성과 재주가 많아 무기를 거두어 모았으며(전쟁을 끝냈다는 의미) 덕을 베풀고 인정仁政을 실천하여 은택이 먼 지방까지 두루 퍼졌습니다. 이때에 궁궐에는 오색구름과 여섯 마리 용이 궁궐 기둥을 지켰으며 궁궐 정원에는 삼족오三足烏132)와 공작 두 마리가 계단을 지나갔습니다. 인류의 문화가 시작된 이래로 영험하고 신기한 감응이 이처럼 기이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밤낮으로 재계齋戒하였으며 나이가 들어서도 게으르지 않았습니다. 사관 위징魏徵이

008_0338_a_01L儒雅孰如孝章帝乎文武兼偹孰如
008_0338_a_02L梁武帝乎混同四海孰如隋高祖乎
008_0338_a_03L混一車書孰如唐太宗乎漢明之治世
008_0338_a_04L有文雅威重而恭儉兼焉無奢靡
008_0338_a_05L淫麗而經略能焉有崇儒尙德而政
008_0338_a_06L治明焉于斯時也臨壅拜老执經問
008_0338_a_07L其宿儒文士之濟濟猶周南獜趾之
008_0338_a_08L洋洋三代以來儒風之盛未有若是
008_0338_a_09L之偉而詔以釋迦寶像安顯節陵及淸
008_0338_a_10L凉臺班固傅毅頌其勳德於漢爲最
008_0338_a_11L而惟鍾離意特以帝性褊詧書爲實錄
008_0338_a_12L豈良史哉章帝之治世也選用柔良
008_0338_a_13L而開忠諫之路明愼政躰而除嚴刻之
008_0338_a_14L雅好文章而崇儒術之典于斯時
008_0338_a_15L有神雀神鳳之來儀現白鳥白鹿之
008_0338_a_16L瑞祥徐州刺史王景上金人頌美先
008_0338_a_17L帝致佛之功載于漢書而惟史氏
008_0338_a_18L以譛廢太子書爲害政豈篤論哉
008_0338_a_19L武之治世也允文允武而闡揚儒業
008_0338_a_20L多藝多才而載戢干戈施德施仁
008_0338_a_21L澤周遐裔于斯時也殿有五色雲六隻
008_0338_a_22L龍而守柱庭有三足烏二孔雀而歷階
008_0338_a_23L書契以來靈異之應未有若是之奇
008_0338_a_24L而日夕齋戒到老不倦史官魏徵曰

008_0338_b_01L“양나라 무제는 하늘이 내려 준 인물이며 삼생三生을 알고 있으니 천하의 어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당나라 문장가인 한유韓愈가 “꿀을 찾았으나 오지 않아 아사餓死하였다.”라고 썼으니 어찌 정직한 기록이라고 하겠습니까?
수나라 고조가 세상을 다스릴 때는 모든 지역을 통치하여 아름다운 명성을 열었습니다. 주나라 이후로 내려오는 육관六官133) 제도를 폐지하고 예악을 처음으로 두었으며, 한나라의 삼성三省(중서성ㆍ상서성ㆍ문하성)에 의거하여 법도를 준수하였습니다. 이때에는 “하늘에서는 상서로운 조짐인 구문龜文이 나타났고, 물에서는 오색 기운이 떠올랐으며, 땅에서는 맛있는 물인 예천醴泉이 솟았고, 산山은 만년 세를 누리라.”134)라고 외쳤습니다. 위진魏晉 이후로 국토를 개척한 공로는 이만큼 광대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기주岐州 등 30개 지역에서 절과 탑을 세웠습니다. 『석실론石室論』135)에서 “수나라 문제文帝는 황통皇統을 계승하여 자신의 세대에서 태평성대를 이루었으니 참으로 한 시대의 영명한 군주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당唐의) 두목杜牧이 “지위와 명호名號를 훔쳐 제대로 수명을 누리지 못하였다.”라고 썼으니 어찌 사람을 훈계하는 좋은 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당나라 태종이 세상을 다스릴 때는 반란을 평정하고 쇠약해진 세상 풍속을 혁신하였습니다. 메뚜기를 깡그리 잡아 농사의 재앙을 구제하였으며 군사적인 무력을 떨쳐 먼 지역의 강한 오랑캐를 복종시켰습니다. 이때에는 신령한 다섯 짐승(기린ㆍ거북ㆍ용ㆍ봉황ㆍ백호)과 일각一角(기린)이 서로 모여 상서로운 조짐을 나타내었고, 백호白狐(흰 여우)와 주안朱鴈(붉은 기러기)이 나타나 상서로운 모습을 나타내었습니다. 양한兩漢 이래로 국가의 업적을 떨친 규모가 이보다 큰 적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난 모후母后 목 태후穆太后를 추숭追崇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홍복사弘福寺를 건립하였습니다. 『신당서新唐書』 권2에서 찬미하기를, “성대하다, 태종의 공적이여! 은殷나라의 탕湯임금과 주周나라의 무왕武王과 견줄 만하고, 주나라의 성왕成王과 강왕康王에 가깝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직 송宋나라의 문장가인 구양수歐陽修가 “병력을 동원하여 공적을 얻기를 좋아하니 잘못이다.”라고 썼으니 어찌 진실한 말이겠습니까? 이상의 몇 분 임금들은 모두 세상에 드문 군주였습니다.
신하를 말한다면 불법을 보호한 신하는 수천수만 명이 넘습니다마는 간략히 몇 시대의 인물을 거론하겠습니다.
진대晉代에는 치초郗超ㆍ손작孫綽ㆍ허순許詢ㆍ도잠陶潛ㆍ왕도王導ㆍ주개周凱ㆍ유량庾亮ㆍ왕몽王蒙ㆍ왕공王恭ㆍ왕밀王䛑ㆍ곽문郭文ㆍ사상謝尙ㆍ대규戴逵 등이 있었습니다.
양대梁代에는 임방任昉ㆍ하점何點ㆍ하윤何胤ㆍ심약沈約ㆍ유협劉勰ㆍ부흡傅翕ㆍ부왕傅暀ㆍ

008_0338_b_01L梁武固天攸縱道亞生知可謂天下仁
008_0338_b_02L而惟韓愈特以索蜜不至書爲餓
008_0338_b_03L豈直筆哉隋祖之治世也君臨万
008_0338_b_04L而運啓嘉號廢周六官而剏置禮
008_0338_b_05L依漢三省而聿遵法度于斯時也
008_0338_b_06L天兆龜文而水潤五色地開醴泉
008_0338_b_07L山呼万年魏晋以來開拓之功未有
008_0338_b_08L若是之廣而岐州等三十各建寺塔
008_0338_b_09L石室論曰隋文開統身及太平固一世
008_0338_b_10L之英主而惟杜牧特以偸窃位號
008_0338_b_11L爲不終豈警辭哉唐宗之治世也
008_0338_b_12L㝎禍亂而革季俗之衰掇呑蝗虫
008_0338_b_13L救年榖之災肅振軍旅而服遠夷之强
008_0338_b_14L于斯時也五靈一角雜畓而呈祥
008_0338_b_15L狐朱鴈昭彰而現瑞兩漢以來剏業
008_0338_b_16L之䂓未有若是之宏而追崇穆太后
008_0338_b_17L流涕而建寺唐史賛曰盛哉太宗之
008_0338_b_18L烈也比迹湯武庶幾成康而惟歐陽
008_0338_b_19L特以好功勤兵書爲病疵豈諒言
008_0338_b_20L是皆稀世之君也
以臣言之
008_0338_b_21L持之臣不趐千萬而略擧數代焉晋世
008_0338_b_22L則有郄超孫綽許詢陶潜王導周凱庾亮
008_0338_b_23L王蒙王恭王䛑郭文謝尙戴逵之徒
008_0338_b_24L世則有任昉何點何胤沈約劉勰傅翕傅

008_0338_c_01L소종蕭宗ㆍ이식李寔ㆍ이윤지李胤之ㆍ완효서阮孝緖 등이 있었습니다.
당대唐代에는 유선柳宣ㆍ송경宋景ㆍ장열張說ㆍ왕유王維ㆍ왕진王縉ㆍ양숙梁肅ㆍ이선李詵ㆍ유가劉軻ㆍ육우陸羽ㆍ이고李翺ㆍ최암崔黯ㆍ위주韋宙ㆍ두홍점杜鴻漸ㆍ백거이白居易 등이 있었습니다.
송대宋代에는 전숙錢俶ㆍ왕단王旦ㆍ양걸楊傑ㆍ양억楊億ㆍ위기魏杞ㆍ이구李覯ㆍ소식蘇軾ㆍ소철蘇轍ㆍ이병李邴ㆍ증개曾開ㆍ이준훈李遵勛ㆍ장덕원張德遠 등이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조정의 계획을 돕고 국가 계획에 협동하였으며, 어떤 이들은 산천(煙霞)에 몸을 맡기거나 자연에 은둔하고 살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문장 공부를 원대하게 해서 글재주를 마음껏 펼쳤습니다. 모두가 죽기를 작정하고서 심오한 이치를 탐구하였으며 자신의 육체를 잊고서 불법의 가르침을 받았으니 모두가 견줄 만한 상대가 없는 뛰어난 신하들입니다.
이상의 여러 임금과 신하들은 부처를 더욱 힘써 모셨다고 할 수 있지 치국평천하함에 해를 끼쳤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신은 또 전 시대에 불교를 배척한 임금과 불교를 비방한 신하들에 대해서 질문을 올리고자 합니다.
임금으로 말하자면 불교를 배척한 임금은 몇 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북위北魏의 무제武帝는 불교를 비방하고 배척하여 도가道家의 태평천군太平天君을 모시는 정륜천궁靜輪天宮을 세우면서 인력과 재물을 낭비하다가 마침내는 전염병에 걸렸습니다. 북주北周의 무제武帝는 스님들을 함부로 죽이고 자신은 황의黃衣를 입었는데 진양晉陽에서 열이 올라 말소리도 내지 못한 채 죽었습니다. 당나라 무종武宗은 사찰과 불상을 없애고 신선이 된다는 금단약金丹藥을 먹었습니다. 회창會昌(무종의 연호) 연간에는 사찰의 방이 2백 칸을 넘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일찍 세상을 하직하였습니다. 후주後周의 세종世宗은 불상을 훼손하고 해마다 스님들의 인적 사항이 기재된 승장僧帳을 만들었습니다. 군사를 일으켜 북쪽을 정벌하러 갔다가 악성 종기가 터져 죽었습니다. 이상의 임금들은 모두 쇠퇴한 시대의 임금들입니다.
신하로 말하자면 불교를 배척한 신하는 몇 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당나라의 부혁傅奕이 장도원張道源의 도움에 힘입어 당 태종太宗에게 불교를 혁파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자, 재상 소우蕭禹는 그가 불교를 비방한다는 죄과를 물어 물리쳤으며, 태종은 부혁의 말이 도리어 어긋난다고 미워하여 종신토록 등용하지 않았습니다. 또 북위北魏 재상 최호崔浩가 구겸지寇謙之의 술책을 믿고서 북위 무제에게 승려를 죽여야 한다고 건의를 하였습니다. 사마온공司馬溫公은 그들의 술수를 택한 무지함을 비방하였으며,

008_0338_c_01L蕭宗李寔李胤之阮孝緖之軰唐世
008_0338_c_02L [13] 有柳宣宋景張說王維王縉梁肅李詵
008_0338_c_03L劉軻陸羽李翶崔黯韋宙杜鴻漸白居易
008_0338_c_04L之儔宋世則有錢俶王旦楊傑楊億魏
008_0338_c_05L杞李覯蘇軾蘇轍李邴曾開李遵勗張德
008_0338_c_06L遠之類或翊亮朝猷資諧庙筭或杭
008_0338_c_07L迹烟霞棲身林壑或磅磚文章馳騁
008_0338_c_08L詞句咸誓死而耽玄並忘形而禀敎
008_0338_c_09L是皆空匹之臣也此數君諸公可謂奉
008_0338_c_10L佛尤勤而未聞有害於治平者也
臣又
008_0338_c_11L言前代廢斥之君排毁之臣而質之
008_0338_c_12L君言之則廢斥之君不過數三而惟
008_0338_c_13L魏武帝詆排釋敎建靜輪天宮費竭
008_0338_c_14L人財而終感周武帝殱戮沙門
008_0338_c_15L身服黃衣熱發晋陽而失音抵死
008_0338_c_16L武宗罷除寺像餌金丹藥會昌不滿
008_0338_c_17L而早致崩亡周世宗毁仆鑄像歲造
008_0338_c_18L僧帳擧兵北伐而疽遺殂落是皆衰
008_0338_c_19L世之君也以臣言之則排毁之臣
008_0338_c_20L過數三而惟傅奕附張道源之助
008_0338_c_21L䟽於唐祖請罷釋敎宰相蕭禹斥其
008_0338_c_22L謗佛之罪科而太宗惡奕言悖終身不
008_0338_c_23L又崔浩信冦謙之之術建白於魏武
008_0338_c_24L誅滅沙門司馬溫公譏其擇術之不智

008_0339_a_01L그리고 당시 길 가던 사람들은 최호의 악행을 원망하였으며 최호의 얼굴에 오줌을 뿌렸습니다. 또 북주北周 시대에 도사 장빈張賓이 위효관韋孝寬의 일당과 결탁하여 북주의 무제에게 불교를 헐뜯는 말을 하고 불상을 허물어야 한다고 하자 대부大夫 견란甄鸞이 불법의 정직함을 논변하였고, 후대에 당나라 상서尙書 당림唐臨은 배척을 근거로 해서 (불교설화집인) 『명보기冥報記』를 지었습니다. 또 당나라 도사 조귀진趙歸眞136)이 유현정劉玄靜의 아첨에 따라 당 무종에게 은근히 참소하여 절을 불 지르고 없앴습니다. 그리고 당시 습유拾遺 왕철王哲도 무종에게 불교를 믿는 사람이 너무 많다고 간언하였습니다. 그리고 사관史官도 불교 혁파를 거론하였음은 호오好惡가 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상의 신하들은 모두 혼란한 시대의 신하들이었습니다.
이상의 여러 임금과 여러 신하들은 불교 배척에 매우 철저하였다고 평가를 할 수 있지만 치국평천하에 도움을 주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대체로 전 시대 군주들의 행위는 자신의 손에서 직접 나온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시호市虎137)가 전하는 말이요, 베틀에 앉아 있던 증자의 어머니가 베틀 북을 던지게 된 것138)에 연유하는 것입니다.139)
유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는 송대宋代의 학자인 정자程子140)와 주자朱子보다 뛰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정명도程明道는 불상을 배척하지 않았고, 주회암朱晦菴(주자의 호가 회암)은 불서佛書를 즐겨 보았습니다. 장난을 칠 때에 단지 문자로 배척한 것에 불과합니다. 즉 “고원한 듯하지만 내용이 없고, 이치에 가까운 듯하면서 진실을 어지럽힌다.”라고 하였지 불교를 폐지해야 한다는 글은 보지 못했습니다.
당나라의 학자 한퇴지韓退之(한유)가 「논불골표論佛骨表」를 올려 불교를 배척하자 서촉西蜀 용 선생龍先生141)이 한유의 말이 불교의 교리에 거슬린다고 원통히 여겨 「비한非韓」을 지어 한유를 공격하였습니다. 나중에 한유가 태전太顚 스님과 교유를 하자 상서尙書 맹간孟簡(한유의 제자)이 한유에게 편지를 보내어 미망迷妄을 고친 점을 좋게 평가하였습니다. 송宋나라의 문장가인 황노직黃魯直(황산곡)은 “한유가 태전 스님을 만난 이후로 불교를 배척하는 주장이 조금 줄었다.”라고 평가를 하였습니다. 구양수는 한유의 인간됨을 사모하였고 그가 불교를 배척함을 좋아하였습니다. 구양수가 언젠가 숭산崇山에 유람을 간 적이 있었습니다. 우연히 스님을 만나 대화를 나누다가 자신도 모르게 저절로 무릎을 꿇었다고 하니, 사희심謝希深 (송의 문장가)이 글을 지어 그 사건을 기록하였다고 합니다. 송나라의 학자인 사마광司馬光은 순자荀子와 맹자孟子의 뜻을 계승하여 불교를 없애려고 하였으나 원통 선사圓通禪師142)를 만난 것이 계기가 되어 갑자기 숙세의 원을 깨달았습니다. 마침내 자신의 예기銳氣를 잊고 공공연히 “불법의 정미함이 우리 유가서儒家書에 벗어나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송나라의 장상영張尙英은 공자의 도를 숭상하여

008_0339_a_01L而路人忿浩元惡行溺其面又張賓搆
008_0339_a_02L韋孝寛之黨譎譛於周武猜毁浮啚
008_0339_a_03L大夫甄鸞辨其佛法之正直而尙書唐
008_0339_a_04L因其抵排述㝠報記又趙歸眞
008_0339_a_05L劉玄靜之侫暗訴于唐武焚廢淨坊
008_0339_a_06L拾遺王哲諫其信謟之太過而史氏論
008_0339_a_07L其革罷好惡不同是皆季習之臣也
008_0339_a_08L此數君諸公可謂斥佛尤篤而未聞有
008_0339_a_09L補於治平者也大抵前代君主之所爲
008_0339_a_10L不出於自用皆因市虎之傳言致有機
008_0339_a_11L母之投抒也
業儒之士莫賢乎程朱
008_0339_a_12L而程明道不背塑像朱晦菴喜看佛
008_0339_a_13L爭戱之間只以文字斥之不過
008_0339_a_14L似高而無實近理而亂眞廢佛之論
008_0339_a_15L未之見焉韓退之上表排佛西蜀龍先
008_0339_a_16L憤其言忤著書攻之愈後與太顚
008_0339_a_17L交遊尙書孟簡寄書嘉其改迷故黃
008_0339_a_18L魯直謂韓愈見太顚之後排佛之論少
008_0339_a_19L沮云歐陽脩慕韓愈爲人喜排釋氏
008_0339_a_20L甞遊崈山遇僧談話不覺膝之自屈
008_0339_a_21L故謝希深作文記其事云司馬光繼荀
008_0339_a_22L孟之志方營汰去因謁圓通忽悟宿
008_0339_a_23L遂忘意之自銳故公之言曰其精
008_0339_a_24L微不出吾書云張尙英尊孔氏之道

008_0339_b_01L무불론無佛論을 지으려다가 임제종의 고승인 도솔 종열兜率從悅 스님을 찾아가 마음이 확 트이어 「호법론護法論」을 지었습니다. 나중에 우의정으로 벼슬이 올랐는데, 오랜 가뭄 끝에 비가 내렸으므로 송나라의 문장가인 당자서唐子西(唐庚)가 시를 지어 그의 미덕을 칭송하였습니다.
이들은 모두 걸출한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단지 문자로써 불교를 멀리하였을 뿐이지 불교를 폐지하자는 논의는 또 보지 못했습니다. 즉 불법의 이치를 깊이 음미하는 동안에 마음으로 합치하는 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논한다면 불교를 숭상하고 모신 임금과 신하는 수천수만 이상입니다. 그런데 불교가 세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당시 불교를 믿은 임금과 신하는 모두 잘못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불교를 배척한 임금과 신하는 두세 명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불교가 유해하다고 해서 당시의 임금의 신하는 모두 옳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과연 불교를 받들고 믿음이 잘못이라고 한다면 후한의 명제 같은 임금이 북위 무제보다 못하며, 송경이 장빈 같은 무리보다 뒤떨어질 것입니다. 과연 불교를 폐지하고 배척함이 옳다고 한다면 북주의 무제 같은 임금이 당의 태종보다 뛰어나며, 최호가 부의 같은 인물보다 현명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태평한 시대를 따진다면 반드시 한漢ㆍ당唐을 말하고, 부의ㆍ송경이 사특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듣지 못했습니다. 혼란한 시대를 말한다면 반드시 북위ㆍ북주를 말하고, 최호ㆍ장빈이 나라를 경륜할 만한 솜씨가 있다고 듣지 못했습니다.
전하께서는 반드시 여러 역사를 종합하여 (부처가 없다는) 무불설無佛說에 관하여 단정을 내리십시오. 신 역시 여러 역사를 열거하여 여쭈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옛적 공자가, 노자에게 예를 물었고, 사양師襄에게 거문고를 배웠고, 장홍萇弘에게 음악을 물었고, 담자郯子에게 고대 관직 체제에 대해 배운 것은, 이들 모두에게 취할 만한 점이 있고 『춘추春秋』를 저술하고자 위함이었습니다. 그런즉 담자는 경전에 적히었으며143) 해석하는 이가 관직 명칭의 학설로 기록하였습니다. 나머지 세 사람이 경전에 적혀 있지 않은 것은 편찬하는 이가 이들의 학술이 기예지술技藝之術이라고 여겨 물리쳤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사양ㆍ장홍 등이 어찌 담자보다 현명하지 못하였겠습니까? 대개 관직 명칭은 세상 교화와 관계가 있고 기예는 나라를 다스리는 데 벗어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까닭에 구양수와 송기宋祁가 『신당서新唐書』를 편찬할 때에 구양수는 혜정惠淨의 행적을 삭제하고 오직 일행一行144)이 만든 대연력大衍曆을 남겨 두었습니다.

008_0339_b_01L作無佛論尋叅從悅豁省心地乃著
008_0339_b_02L護法論後登右揆久旱而雨故唐子
008_0339_b_03L西賦詩頌其美云此皆豪傑之士
008_0339_b_04L只以文字斥之廢佛之論又未之見焉
008_0339_b_05L則翫味之間默契者存焉
由是論之
008_0339_b_06L崇奉君臣不趐千萬而佛若無補則當
008_0339_b_07L時君臣盡皆非乎廢斥君臣不過數
008_0339_b_08L而佛若有害則當時君臣盡皆是乎
008_0339_b_09L果以崇奉爲非則漢明諸君劣乎魏武
008_0339_b_10L而宋景短於張賔之儔也果以廢斥爲
008_0339_b_11L則周武諸君拔乎唐宗而崔浩賢
008_0339_b_12L於傅毅之徒也雖然論治日則必曰漢
008_0339_b_13L而未聞傅宋有邪僻之心也語亂世
008_0339_b_14L則必稱魏周而未聞崔張有經綸之手
008_0339_b_15L殿下必謂綜核諸史斷無佛說
008_0339_b_16L亦擧數史而質之昔孔子問禮於老子
008_0339_b_17L學琴於師襄問樂於萇弘學官於郯子
008_0339_b_18L皆有所取而其修春秋也則郯子得書
008_0339_b_19L乎經而釋之者錄其官名之說三子不
008_0339_b_20L書乎經而編之者黜其方技之術襄弘
008_0339_b_21L諸子豈不若郯子賢哉盖官名所以關
008_0339_b_22L於世敎者也方技所以脫於國經者也
008_0339_b_23L是故歐陽脩宋祈修唐史也則歐公偏
008_0339_b_24L削惠淨等迹而唯存一行大衍之作

008_0339_c_01L송기는 현장玄奘 등의 전기는 모두 삭제하고 오직 도홍道弘이 남긴 지리설地理說을 드러냈습니다. 혜정ㆍ현장 등이 어찌 일행ㆍ도홍 등보다 능력이 미치지 못해서 그렇겠습니까? 대개 대연력은 사계절을 통괄하는 것이요, 지리설은 인간의 일에 관계된 것이기 때문이니, 사관들의 기록을 취함이 합당합니다.
사마광이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지을 때, 즉 「태종기太宗紀」에 실린 부혁傅奕이 주술력을 시험한 등의 종류는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기술하고, 현완玄琬145)이 도를 논한 것은 억제하고 싣지도 않았습니다. 어찌 주술력을 시험한 것은 뛰어나고 도를 논한 것은 하열하다고 하겠습니까?
대개 주술력을 시험한 것은 호사자好事者들이 근거도 없이 제시하였으므로 인용하여 불교의 공허한 점(虛)을 폄하한 것입니다. 도리를 논한 것은 이치를 탐구하는 자들이 눈을 부릅뜨고 당당하게 수집하였으므로 물리치고 불교의 참된 점(實)을 숨기고 물리친 것입니다. 그리고 구양수ㆍ송기ㆍ사마광이 지은 『신당서』와 『자치통감』은 저 『춘추』를 본받아서 저술되었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저 『춘추』는 사사로이 편을 드는 것이 없는데, 이 『신당서』와 『자치통감』은 한쪽으로 치우쳐 미워함이 있습니다. 불교의 참된 점은 물리치고 숨기며, 공허한 점은 인용하여 폄하합니다. 어찌 춘추시대의 정직한 역사가인 동호董狐의 붓과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까닭에 불교와 관련된 학설이 역사서에 실리지 않게 된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불교가 없던 예전에는 나라가 태평하고 편안하였는데 불교가 있은 후에는 나라의 존속 기간도 짧고 운수도 다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신 역시 전대의 혼란한 시대를 열거하여 묻도록 하겠습니다.
혼란하여 멸망한 세상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몇 시대만 대략 열거하겠습니다. 사람을 해치고 많이 죽이기로는 어느 누가 하나라 걸왕桀王만 하겠습니까? 의로운 사람을 해치고 선한 사람을 손상시키기로는 어느 누가 은나라 주왕紂王만 하겠습니까? 권력을 탐내고 공적을 좋아하기로는 어느 누가 진시황제만 하겠습니까?
하나라 걸왕이 임금 노릇을 할 때입니다. 그는 탐욕스럽고 포학하였으며 힘은 쇠를 구부릴 정도로 대단하였습니다. 화려한 궁궐과 누대를 지어 총애하는 말희妺喜를 기쁘게 하였으며 산더미 같은 고기와 포를 만들어 백성의 재산을 고갈시켰습니다. 술로 못을 만드니 천 명이 마셨으며, 술지게미로 둑을 쌓으니 십 리 길에서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은덕을 베풀지 않고 포악한 짓을 하니 백성들은 그 괴로움을 참지 못하였으며, 음탕하고 방종한 짓을 하여 백성들을 모두 고생길로 빠뜨렸습니다. 이런 까닭에 하늘이 하나라가 지은 죄에 대하여 벌을 내렸으며,

008_0339_c_01L公並删玄裝等傳而獨著道弘地理之
008_0339_c_02L淨裝諸師豈不及行弘軰哉盖大
008_0339_c_03L衍所以統天時者也地理所以係人事
008_0339_c_04L者也見取於史筆宜矣司馬光修通鑑
008_0339_c_05L則太宗紀所載與傅奕試呪之類
008_0339_c_06L揚而迺書與玄琬談道之比抑而不載
008_0339_c_07L豈試呪爲優而談道爲劣哉盖試呪好
008_0339_c_08L事者孟浪所提故引之而貶訕佛氏之
008_0339_c_09L虗也談道探理者瞋堂所輯故黜之
008_0339_c_10L而諱却佛氏之實也然則抑此三史
008_0339_c_11L彼春秋而作也雖然彼春秋則必無私
008_0339_c_12L而此三史則互有偏疾其於釋氏
008_0339_c_13L宲者黜而諱之虗者引而貶之豈皆
008_0339_c_14L董狐之筆哉此所以佛說之不載於史
008_0339_c_15L氏者也
殿下必謂無佛之前國治邦寧
008_0339_c_16L有僧之後年夭運促臣亦擧前代亂亡
008_0339_c_17L之世而質之亂亡之世不可勝記
008_0339_c_18L擧數代焉賊人多殺孰如夏桀乎殘義
008_0339_c_19L損善孰如殷紂乎貪權好功孰如秦
008_0339_c_20L皇乎夏桀之爲君也貪固肆虐力能
008_0339_c_21L伸鉤悅婦寵於瓊宮瑤臺彈民財於肉
008_0339_c_22L山脯林酒爲池則千人俯飮糟築堤則
008_0339_c_23L十里延望滅德作威不忍其茶毒
008_0339_c_24L婬縱暴盡墜其塗炭是以天降夏氏有

008_0340_a_01L사람들은 “저 태양은 언제 없어지려나.”146)라고 하는 원망을 품었습니다. 그러자 은나라의 탕왕은 백성들에게 걸을 정벌하겠다는 맹세를 하면서 정벌 길에 나섰고, 중훼仲虺는 탕왕에게 훈계하는 「중훼지고仲虺之誥」라는 글을 지었습니다. 마침내 금성탕지金城湯池처럼 견고한 좌측의 하수河水와 제수濟水를 상실하였고, 반석처럼 견고한 우측의 태산과 화산華山이 무너졌으며, 남쪽의 험준한 지역인 이궐伊闕을 빼앗겼으며, 북쪽을 완전히 방비하는 양장산羊腸山이 붕괴되었습니다. 탕임금은 남소南巢147)로 걸을 추방하였습니다. 명조鳴條로 달아난 걸이 죽자 하나라도 역시 곧이어 멸망했습니다. 그러므로 『서경』 「탕서湯誓」에서 “천명으로 걸을 죽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은나라의 주紂임금이 임금 노릇을 할 때입니다. 그는 언변이 뛰어나 거짓을 잘 꾸몄으며 지혜도 넉넉해 간언을 막았습니다. 옥 술잔과 상아 젓가락을 사용하여 사치가 극에 달하였으며 시뻘건 구리 기둥 위로 사람을 걷게 하는 잔혹한 형벌을 행하였습니다. 세금을 많이 거두어 녹대鹿臺(주임금의 보물 창고)에 보물이 가득 찼으며, 잔악한 짓을 행하여 곡식이 거교鉅橋(주임금의 곡식 창고)에 가득하였습니다. 충성스런 어진 신하들에게는 포락지형炮烙之刑148)을 내렸으며, 추운 겨울 아침 강물을 건너오는 충성스런 신하들을 보고는 정강이가 추위를 견디는지 알아본다고 두 정강이를 베었습니다. 간언을 하여 보필하는 신하들의 살을 가르고 어진 신하 비간比干의 일곱 구멍을 쪼갰습니다.
이런 까닭에 하늘은 은나라에 가득 퍼진 포학한 죄에 분노하였으며, 백성은 대대로 원수로 지내는 원통함을 품었습니다. 그리하여 주周나라 무왕은 용감한 병사를 격려하였으며 태공太公 여상呂尙은 직간直諫을 하는 강직한 지사들을 도왔습니다. 마침내 상교商郊(은나라ㆍ주나라가 전투를 벌인 곳)는 화살이 날아가는 전쟁터가 되었고, 목야牧野(은나라와 주나라의 최후 격전지)는 은나라의 군대가 창을 거꾸로 들고 도리어 자신의 군대(은나라)를 공격하는 전쟁터가 되었습니다. 맹문산孟門山(은나라 좌측의 요지)에는 태항산太行山(은나라 우측의 요지)의 먼지가 휘날리고, 북쪽의 항산恒山에는 황하의 물결이 쳤습니다. 군사들이 회동하니 숲처럼 가득하였으며, 죽은 병사들의 피는 방패를 흘려보낼 정도로 치열하였습니다. 은나라의 보물은 모두 불에 탔으며 자신과 국가가 한꺼번에 멸망했습니다. 그러므로 『서경』 「태서泰誓」에서 “천명이 은나라의 주임금을 죽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진나라의 진시황제가 임금 노릇을 할 때입니다. 그는 천성이 모질어 사납고 평소 마음은 탐욕스럽고 잔인하였습니다. 유학자를 구덩이에 파묻어서 어질고 정의로운 사람을 죽였으며 책도 불태웠습니다. 자신의 공적을 칭송하는 사업149)을 크게 일으켰으며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의식도 거행하였습니다. 북쪽 오랑캐가 우환거리가 되자 장군 몽염蒙恬이 북쪽에 만리장성을 쌓았으며, 신선이 되고자 하여 서불徐市로 하여금 동쪽 신선이 산다는 삼신산三神山에 보내어 불로초를 가져오도록 시켰습니다. 백성의 재산을 긁어모으고 부자들은 수도인 함양咸陽으로 이주시켰으며, 백성들의 노동력을 짜내어 위수渭水 남쪽에 아방궁阿房宮을 지었습니다. 2세世 호해胡亥(진시황제 둘째 아들)150)에 이르러서는 권력이 약해져 간사한 자들이 드러낸 야욕이 널리 퍼졌으며, 3세世 자영子嬰에 이르러서는 나라가 망했습니다. 이런 까닭에 구슬이 호지滈池의 임금에게 되돌아가고, 건어물은 진시황제의 시체를 실은 온량거轀輬車151)에 잠기었습니다.
유방劉邦은 패서沛西 지방에서 용처럼 웅크리고 있었으며, 항우項羽는 산동山東 지역에서 호랑이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008_0340_a_01L罪之罰人懷時日曷喪之怨於是成湯
008_0340_a_02L行誓衆之征仲虺作諭王之誥遂使河
008_0340_a_03L濟失湯池之固泰華摧盤石之堅伊闕
008_0340_a_04L割南阻之險羊膓崩北備之完放之南
008_0340_a_05L走於鳴條身終遷死國亦隨亡
008_0340_a_06L湯誓曰天命殛之殷紂之爲君也
008_0340_a_07L能飾非智足拒諫窮奢侈於玉盃象著 [14]
008_0340_a_08L重刑辟於炭火銅柱厚賦稅則財寶鹿
008_0340_a_09L行殘害則粟盈鉅橋炮烙忠良
008_0340_a_10L朝涉之兩脛刳剔諫輔剖比干之七竅
008_0340_a_11L是以天怒1) [12] 罪貫盈之虐民抱乃汝世
008_0340_a_12L讎之寃於是武王勗如熊之夫太公扶
008_0340_a_13L叩馬之士遂使*啇郊爲鳴鏑之場
008_0340_a_14L野作倒戈之地孟門騰太行之塵恒山
008_0340_a_15L沸大河之浪師會若林血流標杵
008_0340_a_16L玉俱焚身國並滅故泰誓曰天命誅之
008_0340_a_17L秦皇之爲君也天性剛戾素心貪殘
008_0340_a_18L剗仁義於坑儒焚書崇事業於頌功封
008_0340_a_19L患胡虜則蒙恬北築萬里慕神仙則
008_0340_a_20L徐市東入三山畜聚人民徙豪富於咸
008_0340_a_21L焦勞心力作宮庭於渭南陵夷至
008_0340_a_22L於胡亥姦回逞志蔓衍及於子嬰
008_0340_a_23L祀不血是以壁返滈池之君鮑濽轀輬
008_0340_a_24L之魄於是劉邦虬據乎沛西項籍虓嚙

008_0340_b_01L마침내 관중關中 지방에서 천하의 패권을 다투는 전투가 일어났습니다. 유방이 패상覇上에 당도하니, 그 지역의 제후들은 양羊을 보내어 항복하였습니다. 효산崤山과 함곡관函谷關에서는 싸우는 소리가 울려 퍼졌고, 농隴과 촉蜀에서는 비릿한 피비린내가 진동하였습니다. 망이궁望夷宮에서 호해는 조고趙高에게 살해당했으며, 자영은 지도軹道152)에서 목에 밧줄을 걸고 항복하였으니, 만년을 위한 계책은 2세世를 지나서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가의賈誼는 「과진론過秦論」에서 “인의仁義를 실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상의 여러 임금들이 통치하던 시대에 불교가 없었는데도 패망하였으며, 나라의 운수 역시 단명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승려가 있지 않은데도 그렇게 된 것이 분명합니다.
오호! 기이합니다.
우리나라의 전대 기록을 조사하니 양梁나라에서 신라에 부처님의 사리를 보내자 모든 관리들이 나가 영접하였습니다. 그 이후로 사찰이 웅장한 모습으로 자리를 잡았으며 불상도 찬란히 빛이 났으며 신승神僧도 간간히 배출되었고 기이한 스님도 계속해서 나왔습니다. 불법을 구하러 서역으로 갈 때는 너른 바다에 배를 띄웠으며, 불법을 구해 동쪽으로 돌아와서는 고구려에 머물기도 하고 백제에 거주하기도 하였습니다.
삼국의 왕과 신하들은 모두 기쁜 마음으로 달려가 부처를 모셨으며 매우 즐겁게 부처를 섬겼습니다. 심지어는 수염과 머리를 깎고 손가락과 온몸을 소신공양燒身供養하면서 국가의 운명이 오래되고 집안이 잘되기를 기대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신라는 992년, 고구려는 705년, 백제는 618년의 왕조를 누렸습니다. 삼국시대에 불교가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유해하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습니다.
고려의 왕씨王氏가 삼한을 통일을 하게 되자 불법이 널리 퍼지고 신도가 많이 늘어났습니다. 높은 관직에 있는 재상에서 재주가 뛰어난 사람들 모두가 마음을 기울여 불교에 귀의하고 불법이 널리 퍼지기를 갈망하였습니다. 혹은 왕족으로 비구니와 스님이 된 사람도 간혹 있었으니 불법이 악을 막고 선을 널리 퍼뜨리는 근본이 되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고려 왕씨가 나라를 475년 동안 통치하였습니다. 고려 왕조 기간 동안에도 불교가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유해하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태조 대왕 전하께서는 천명에 응하여 국운國運을 열었으며 흉악한 적들을 제거하였습니다. 위대한 명성은 임금이 된다는 예언이 있었으며 성인의 덕이 있어 구오지위九五之位(제왕의 지위)에 올랐습니다. 경건하고 지혜롭고 도덕심과 재주는 모든 왕의 으뜸이며, 심오한 지혜와 온화하고 공손함으로 뛰어난 인재들을 많이 포용하였습니다.

008_0340_b_01L乎山東遂使關中迎爭鹿之戰覇上送
008_0340_b_02L納羊之降殽涵轟伐戮之聲隴蜀漲腥
008_0340_b_03L膻之氣弑身望夷繫頸軹道萬歲之
008_0340_b_04L二世而亡故賈誼曰仁義不施
008_0340_b_05L數君之世可謂无佛而敗亡相尋年祚
008_0340_b_06L亦促此非有僧而致然者朙矣
嗚呼异
008_0340_b_07L若稽我東之前籙則梁送佛舍利于
008_0340_b_08L新羅百官郊迎自爾梵宇崎嶇尊容
008_0340_b_09L燦爛神僧間生異釋繼出訪道西遊
008_0340_b_10L則或舫渤桴溟得法東還則或居麗止
008_0340_b_11L三國王臣莫不駿奔而遵雀躍而
008_0340_b_12L至於剪鬚落髮灼指燃身期爲壽
008_0340_b_13L國祐家之助而新羅歷年九百九十二
008_0340_b_14L高麗歷秊七百五年百濟歷秊六百
008_0340_b_15L一十八年此時未聞佛之有害於治道
008_0340_b_16L逮夫王氏之統合也玄綱振紐
008_0340_b_17L樹增芽宰輔之冠冕人倫之羽儀
008_0340_b_18L不倒心而歸投翹首而佇仰或至於王
008_0340_b_19L族之爲尼爲僧者間常有之冀爲遏惡
008_0340_b_20L弘善之本而王氏曆秊四百七十五年
008_0340_b_21L此峕亦未聞佛之有害於治道也
恭惟
008_0340_b_22L我太祖大王殿下應天啓運刜惡除兇
008_0340_b_23L當鴻號四七之符禦龍飛九五之位
008_0340_b_24L明文思邁絶百王濬哲溫恭牢籠千

008_0340_c_01L나라를 세운 초창기와 국가의 기틀을 잡은 후에는 취령鷲嶺에 정신을 두고153) 계원鷄園에 마음을 두고서154) 무학 대사無學大師를 방문하여 한양을 수도로 결정하였습니다.
태종 대왕께서는 진실로 중용中庸의 도를 잡고서 선왕의 덕을 계승하였습니다. 동정서원東征西怨155)의 경사慶事를 가지고 있었으며 노인을 돕고 유약자를 이끌어 주는 인자함을 쌓았습니다. 남을 해치는 잔악한 자를 제거하고 없애면서도 관대한 처분을 내렸으며(湯網156) ), 형벌을 관대히 하고 죄 있는 사람을 사면하고 길을 가다가 죄수를 만나면 수레를 멈추고 죄의 경위를 물어 보았습니다(禹車157)). 문안을 드리는 여가와 정무를 보고 난 한가한 때는 각원覺苑(사찰)을 찾아다니면서 공空의 종지宗旨를 연구하였습니다.
세종世宗ㆍ문종文宗 대에 이르러서는 이제 막 개국한 나라의 초장기에 대단히 신중하게 처신하면서도 공로를 많이 드러내었습니다.
세조世祖 대왕께서는 학문을 진작하는 계획(文謨)을 대대적으로 밝히고 군사적인 공적(武烈)을 널리 드러내었습니다. 덕이 있는 사람을 받들고 현명한 사람을 숭상하는 전통을 이어받고, 도리를 논의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위엄을 세웠습니다. 신성하고 총명한 자질로 아름다운 공적을 세우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엄숙하고도 공손하며 경건하고 조심하여 참으로 영웅의 자질에 딱 들어맞았으며 은혜를 가득 내리는 태양을 돌리고 진실한 교풍敎風을 고무시켜 일으켰습니다.
성종成宗ㆍ중종中宗 대에 이르러서는 역대 왕들의 아름다운 명령을 이어 갔으며 그러한 규범을 후대에 전하였으니, 특별히 승과僧科를 설치하여 나라의 과거 시험과 동급으로 하였습니다.
명종明宗ㆍ선종宣宗 대에 이르러서는 역대 왕들이 남긴 교훈을 실천하느라 부지런히 노력하였으며 그들이 남긴 계획을 경건히 실천하였습니다.
지혜로우신 인조 대왕仁祖大王 전하께서는 역대 왕들의 큰 업적을 모으고 하늘이 내린 천명을 잘 알았습니다. 반란을 제압하고 포악한 사람을 죽이는 도리를 실천하였습니다. 위험한 상황 앞에서는 임기응변으로 처리하는 권도權道를 생각하였습니다. 나라의 재앙이 될 만한 싹이 트면 반드시 자르고 사죄四罪158)에게 벌을 내리고 백성의 농사에 반드시 관심을 가져 육책六責159)으로 스스로를 지켜 나갔으니, 참으로 예로부터 지금까지 짝을 찾기 힘든 참된 군주이며, 현재를 뛰어넘어 영원히 적수가 없을 정도인 성군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연꽃 속에 간직되어 있는 진리와 깨달음의 도를 그대로 두고 고치지 않으며 북돋아 주고 베지를 않았습니다. 훌륭한 왕의 자손들이 대대로 계승하여 내려와 그 자신 한 몸은 경사를 누리며 영원토록 끝이 없는 국가 사업을 후대에 전하였습니다. 이러한 때에도 불법이 나라를 다스리는 도에 해로움이 있다고 듣지 못했습니다.
『시경』 「주송周頌」 (〈민여소자閔予小子〉)에서 “위대한 조상들을 생각한다.”라고 하였으며, 『시경』 「노송魯頌」 (〈반수泮水〉)에서 “자신의 마음을 밝혀 나라를 세운 공로가 많은 조상에게 다가간다.”라고 하였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역대 빛나는 조상들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서경』 「대우모大禹謨」에서 “항상 생각함이 조상의 공로에 있다.”라고 하였으며,

008_0340_c_01L草昧之初權輿之後栖神鷲嶺
008_0340_c_02L情鷄園訪得無學㝎都漢陽太宗大
008_0340_c_03L允執厥中克肖其德蘊東征西怨
008_0340_c_04L之慶貯扶老携幼之仁去殺勝殘
008_0340_c_05L解湯網寛刑赦罪爰停禹車問安之
008_0340_c_06L垂拱之餘鉤深覺苑索隱空宗
008_0340_c_07L于世宗文宗克愼厥緖篤叙乃功
008_0340_c_08L祖大王丕顯文謨維揚武烈承崇德
008_0340_c_09L尙賢之統立論道經邦之威聖神聰明
008_0340_c_10L用勱嘉績嚴恭寅畏允恊英姿輪昇
008_0340_c_11L惠日皷振眞風迄于成宗中宗嗣厥
008_0340_c_12L休命傳此風䂓特設僧科例同國試
008_0340_c_13L及乎明宗宣宗敢勤厥訓祗服斯猷
008_0340_c_14L睿聖仁祖大王殿下集厥大勳顧諟明
008_0340_c_15L行救亂誅暴之道詧臨危制變之權
008_0340_c_16L孽薅必鋤四罪能施稼穡必念六責
008_0340_c_17L自全實曠古難雙之眞主也亦超今永
008_0340_c_18L隻之聖君也然而蓮藏之詮菩提之道
008_0340_c_19L存而不革培而不剪文子文孫乃繼
008_0340_c_20L乃承享一人有慶之禎垂萬歲無疆之
008_0340_c_21L此時亦未聞佛之有害於治道也
008_0340_c_22L頌曰念玆皇祖魯頌曰昭假烈祖
008_0340_c_23L願殿下念玆烈祖禹謨曰念玆在玆
008_0340_c_24L「啇」通用「商」{編}次同

008_0341_a_01L『서경』 「군아君牙」에서 “조상들을 욕되게 하지 마라.”라고 하였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이와 같은 조상들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일반적으로 천하에는 불교가 없는 나라가 없습니다. 이마에 문신을 새기고 이빨에 옻칠을 하는 나라, 짐승처럼 마시고 상투를 치는 풍속이 있는 지역, 풀옷을 입고 털을 먹는 지역, 몸에 문신을 새기고 머리를 늘어뜨리는 지역, 구이팔만九夷八蠻의 바깥 지역, 오융육적五戎六狄의 사이에도 모두 다 승려가 있습니다. 그 지역을 다스리는 임금이나 사대부가 백성을 교화함은 승려들 덕분이고, 승려들에 의해 자신들의 절개를 온전히 지킬 수 있었습니다.
하물며 전하의 아름다운 덕행은 금수를 포용하고 지극한 사랑은 초목에까지 두루 미칩니다. 어찌 소를 양으로 바꾸어 살린 것에 구애받겠습니까?160) 어찌 나무와 기러기의 능력이 다르다고 해서 죽음에 대해 치우친 생각을 하십니까?161)
삼가 역대 고승들의 족보를 보면 국사國師 도선道詵(827∼898)은 우리 동방의 성승聖僧입니다. 당나라에 들어가 일행一行에게 불법을 전수받았습니다. 당나라의 도사道士인 윤음尹愔은 “일행 화상은 참으로 성인이다.”162)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한나라 무제武帝 때의 천문가인) 낙하굉洛下閎이 설명한 6백 년 예언설을 받아들여 『주역』의 대연수大衍數163)를 추측해서 점성가들의 오류를 바로잡았습니다. 도선 대사는 일행 스님의 오묘한 학설을 모두 이어받고 동쪽 신라로 돌아왔습니다. 천지의 이치를 연구하고 음양의 조화를 관통하였습니다. 높고 낮은 산을 올라가 두루 조사해서 사찰을 건립하여 천오백여 개의 비보裨補(도와서 이익이 되게 함)의 장소로 삼았습니다. 비보란 국가를 도와서 이익이 되게 한다는 뜻입니다. 지세地勢가 가장 신령하면 반드시 예언하기를, “이 절이 흥하면 이 나라가 흥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도선 대사의 말이 거짓이고 현실적인 근거가 없다면 그만이지만 그의 학술이 기이하고 징험이 있으면, 즉 사찰을 건립함이 국가에 도움이 되고 나라를 다스리는 도에 손해됨이 없음이 또한 분명합니다.
근래 어지러워진 세상에 이름난 거대한 사찰은 불에 타 없어지고, 또 권세가들에 의해서 절을 많이 빼앗겼습니다. 나라의 큰 기운이 무너지고 산맥의 기운이 쇠약해졌습니다. 불교가 망하겠습니까? 나라가 흥하겠습니까? 그렇지만 도선 대사의 예언으로 본다면 사찰이 있고 없음은 국가의 흥망성쇠와 관계가 있습니다. 신은 항상 국가를 위해서 애통하게 여기고 있으며 나라를 위해서도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또 승려들의 역사를 조사해 보니 제왕이 흥성할 때는 반드시 명망이 있는 고승을 방문하였으며 국사國師라는 호칭을 세웠습니다. 국사란 나라의 임금을 돕는 스승이라는 의미입니다. 고승의 도덕심과 명망은 가장 높아

008_0341_a_01L君陳 [15] 無忝祖考伏願殿下念玆祖
008_0341_a_02L
凡天下未有無佛之國雖彫題漆齒
008_0341_a_03L之邦嘼飮魋結之俗卉服毛茹之疆
008_0341_a_04L文身被髮之域九夷八蠻之外五戎六
008_0341_a_05L狄之間咸皆有僧蒙其君長之化
008_0341_a_06L其操守之節况殿下之懿德涵於禽獸
008_0341_a_07L至仁浹於草管豈隘牛羊互易之生哉
008_0341_a_08L豈偏木鴈異喜之殺哉謹案釋譜國師
008_0341_a_09L道詵我東之聖僧也入唐受法於一行
008_0341_a_10L一行者尹愔所謂聖人者也膺洛下閎
008_0341_a_11L六百年之讖推大衍數紏其數家之繆
008_0341_a_12L詵盡傳其妙秘而東歸縕天地貫幽冥
008_0341_a_13L陟巘登巒歷銓建寺爲一千五百裨補
008_0341_a_14L之所裨補者裨補國家之謂也其地
008_0341_a_15L勢㝡靈則必讖云此寺興則此國興
008_0341_a_16L其言恐訹狂妄則已其術神異徵驗
008_0341_a_17L寺宇之剏有益於國家無損於治道者
008_0341_a_18L亦明矣近世澆灕名籃巨刹鞠爲火
008_0341_a_19L又爲勢奪元氣剝喪山脉凋零
008_0341_a_20L將亡耶國將興耶雖然以讖觀之
008_0341_a_21L宇之成毁有則國家之興亡繫焉臣常
008_0341_a_22L爲國痛之爲國危之又勘僧史帝王
008_0341_a_23L之興也必訪尊宿立國師之號國師
008_0341_a_24L師補國君之謂也其道望㝡高

008_0341_b_01L“나라가 흥하려면 신승神僧이 출현한다.”라고 반드시 기록하였습니다.
중국을 예로 들어 말하겠습니다. 후한後漢 명제明帝 때의 마등摩騰, 양梁나라 무제武帝 때의 보지寶志(418∼514), 수나라의 지의智顗(538∼597), 당나라 태종 때의 현장玄奘(600∼664), 송나라 태조 때의 마의麻衣 등이 바로 그들입니다.
해동海東을 예로 들어 말하겠습니다. 신라 시대의 묵호자墨胡子, 고려 시대의 순도順道, 백제 시대의 난타難陁, 송악의 도선道詵, 한양漢陽의 무학 대사 등이 바로 그들입니다.
이상의 여러 승려들이 교활하고 남을 속였다면 그만이지만 그들의 불도는 넓고도 멀리 퍼졌습니다. 즉 신승이 출현함은 국가에 이익을 주었지만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도 손해가 없음은 또한 분명합니다.
요즈음 세상은 황당하여 큰 덕을 가진 스님은 연기처럼 사라졌고, 불법이 높은 고승들은 거품처럼 사라지고 또 갑자기 단절되었습니다. 불법이 내려오는 계통은 막혔으며, 사찰은 황폐해졌습니다. 불교가 장래에 쇠퇴하겠습니까? 아니면 국가가 미래에 흥성하겠습니까? 그렇지만 비기秘記를 근거로 해서 본다면 신승의 출현 유무에 따라 국가의 흥망성쇠가 관계되어 있습니다. 신은 항상 국가를 위해 안타까이 여기고 나라를 위해 근심을 하고 있습니다.
아! 전체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사찰이 있으면 이익이 있고, 승단이 없으면 손해가 있습니다. 치도治道의 손익은 역시 사찰의 유무와 관련이 있습니다. 하필이면 승단을 없애고 절을 허문 연후에 치국평천하를 이룰 수 있다고 하십니까? 신은 거짓으로 전하를 속이는 것이 아닙니다. 전하께서는 역사서를 섭렵하시어 고금의 일을 환하게 알고 있습니다. 사찰을 없애고 흥한 임금이 몇 분이 됩니까? 승단을 존속시키고서 갑자기 망한 임금이 몇 분이 됩니까?
또 비구니가 있음은 한대漢代에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왕의 후궁인 첩여婕妤164)와 궁녀 등 230여 명은 속세에 염증을 느끼고 불교로 귀의하였습니다. 여혜경呂惠卿165) 등은 도사 628명과 함께 관직을 버리고 승복을 입었습니다. 현종顯宗은 열 군데에 절을 세웠습니다. 성안에 있는 세 곳의 절에는 비구니와 첩여 등을 편안히 거주하도록 하였고, 성 밖의 일곱 개 절은 스님을 안주시키면서 여혜경 등을 머물도록 하였습니다. 성 안팎으로 구분 지은 것은 남녀의 구별이 있기 때문입니다.

008_0341_b_01L必記云國之將興神僧出以中國言
008_0341_b_02L漢明之於摩騰梁武之於寶誌
008_0341_b_03L祖之於智顗唐宗之於玄奘宋祖之於
008_0341_b_04L麻衣是也以我東言之新羅之於墨胡
008_0341_b_05L高麗之於順道百濟之於難陁松嶽之
008_0341_b_06L於道詵漢陽之於無學是也其人黠頑 [16]
008_0341_b_07L欺謎則已其道恢弘廣達則神僧之出
008_0341_b_08L有益於國家無損於治道者亦明矣
008_0341_b_09L世荒唐碩德煙消開士漚滅又爲斗
008_0341_b_10L道統陻塞禪林蕪穢佛將衰耶
008_0341_b_11L將盛耶雖然以記觀之神僧之出沒有
008_0341_b_12L則國家之盛衰係焉臣常爲國慨然
008_0341_b_13L國愀然
合而觀之有寺則在所益
008_0341_b_14L無僧則在所損矣治道之益損
008_0341_b_15L預乎其間而何必曰除僧毁寺然後爲
008_0341_b_16L治平者哉臣非架空而誣罔於殿下也
008_0341_b_17L殿下涉獵圖史曉達古今廢寺而勃興
008_0341_b_18L有幾君乎存僧而忽亡者有幾主
008_0341_b_19L且僧有尼衆始於漢世當時王婕
008_0341_b_20L妤等與宮媛二百三十餘人厭俗歸眞
008_0341_b_21L呂惠卿等與道士六百二十八人投簮
008_0341_b_22L被衲顯宗建寺十所城內三寺安尼
008_0341_b_23L婕妤等住之城外七寺安僧惠卿等住
008_0341_b_24L所以限內外者男女有別故也

008_0341_c_01L
우리 조선에서도 그 법도가 역시 실천되었습니다. 자수원慈壽院166)ㆍ인수원仁壽院167) 두 원院은 궁궐 바깥에 있으니 즉 선대 왕후王后의 내원당內願堂168)입니다. 봉은사奉恩寺(서울 강남구 삼성동)와 봉선사奉先寺(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두 사찰은 능침陵寢 안에 있으니, 즉 선왕先王의 외원당外願堂입니다. 내외內外를 구분 지은 것은 역시 남녀의 구별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일조일석一朝一夕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실로 선왕先王ㆍ선후先后의 제도입니다. 사찰은 국가와 더불어 흥하였고 국가와 함께 망하였습니다. 사찰이 있으면 국가의 경사요, 사찰을 훼손하면 국가의 재앙입니다. 그러므로 『시경』 「대아大雅」 〈첨앙瞻卬〉에서 “사람들이 망한다고 하니, 마음의 근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자수원ㆍ인수원을 철폐하면 전하의 근심이 됩니다. 『시경』 「소아」 〈육아蓼莪〉에서 “병이 비어 있음은, 술잔의 수치이다.”라고 하였으니, 봉은사ㆍ봉선사가 쇠망하면, 즉 전하의 수치일 것입니다. 지금 자수원ㆍ인수원 모두를 철폐해서 비구니를 내쫓아 보내었으며, 봉은사ㆍ봉선사를 모두 폐기해서 노비들을 몰수하였습니다. 우뚝 솟은 사원들이 고대 은나라의 황폐한 도읍지처럼 처참한 모습을 띄고 있으며, 청정한 스님과 비구니들은 모두 곤궁에 처한 사람들의 슬픔을 가지고 있습니다. 회상조용繪像雕容(불상)은 마을 아낙네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방포원정方袍圓頂169)은 마을 어린이들의 눈물을 닦아 줍니다. 전하의 관대한 마음은 충분한데 무엇을 꺼리어 선후가 남긴 내원당의 비구니들을 내쫓으십니까? 전하의 부富 정도면 충분한데 무엇이 부족하기에 선왕이 남긴 외원당의 노비들을 빼앗으십니까?
(『춘추좌씨전』 「소공昭公」 15년에) 목자穆子가 “옛날의 좋은 것을 버리면 상서롭지 못하다.”라고 하였으니, 오늘날 상서롭지 못한 것으로는 사원을 폐기한 것이 가장 큽니다. 우자鄅子가 “나는 돌아갈 곳이 없다.”(「소공」 18년)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돌아갈 곳이 없기로는 비구니들을 쫓아낸 것이 가장 큽니다.
천리天理로 말을 하자면 선왕ㆍ선후의 법도를 따름이 이치에 순응함입니다. 인사人事로 말을 하더라도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논의를 따름은 이치에 위배됩니다. 그러므로 『서경』 「태갑太甲」 상에서 “너의 조상들의 행실을 따른다.”라고 하였으며, 『서경』 「낙고洛誥」에서는 “전대 사람이 이룬 업적을 더욱더 굳건히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이렇게 한다면 천리에 순응하는 것입니다.
『춘주좌씨전』 「성공成公」 9년에서 “선군先君을 잊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며, 『예기』 「교특생郊特生」에서 “조상의 명을 받든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인사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008_0341_c_01L於我東其揆亦行夫慈壽仁壽兩院
008_0341_c_02L在宮掖之外即先后之內願堂也奉恩
008_0341_c_03L奉先兩寺在陵寢之內即先王之外願
008_0341_c_04L堂也所以限內外者亦男女有別故也
008_0341_c_05L此非一朝一夕之剏實是先王先后之
008_0341_c_06L制也與國同興與國同亡有成則國
008_0341_c_07L之慶也有毁則國之殃也故大雅曰
008_0341_c_08L人之云亡心之憂矣兩院廢則殿下之
008_0341_c_09L憂也小雅曰瓶之罄矣惟罍之恥
008_0341_c_10L寺衰則殿下之恥也今兩院盡廢放黜
008_0341_c_11L尼衆兩寺盡棄削沒奴婢岧嶢寺院
008_0341_c_12L帶殷墟之慘淸淨僧尼含楚囚之悲
008_0341_c_13L繪像雕容傷心於巷婦方袍圓頂
008_0341_c_14L淚於閭兒殿下之寛有何所忌而黜
008_0341_c_15L先后內願堂之尼衆乎殿下之富有何
008_0341_c_16L所乏而削先王外願堂之奴婢乎穆子
008_0341_c_17L棄舊不祥今日之不祥孰若寺院
008_0341_c_18L之廢棄哉鄅子曰余无歸矣今日之
008_0341_c_19L無歸孰若尼衆之放逐哉
以天理言之
008_0341_c_20L循先王先后之法則順也以人事言之
008_0341_c_21L從一朝一夕之議則背也故太甲曰
008_0341_c_22L乃祖攸行洛誥曰篤前人成烈苟如
008_0341_c_23L是則順天理者也左傳曰不忘先君
008_0341_c_24L禮記曰受命于祖不如是則背人事者

008_0342_a_01L
일단 임금과 백성의 관계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임금이 있으면 반드시 백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詩』에서 “나만 홀로 백성이 아니랴?”170)라고 하였고, 『서경』 「대우모大禹謨」에서 “사랑해야 할 사람은 임금이 아닌가?”라고 하였습니다.
비구니들이 어찌 전하의 백성이 아니며, 그리고 전하는 비구니들의 임금이 아니겠습니까? 백성은 임금을 받들어 모시며 임금은 백성을 부립니다. 그러므로 백성의 입장에서는 의리상 당연히 정성스럽고 공경해야 합니다. 임금의 입장에서는 백성을 사랑하고 관대하고 어질게 대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존비尊卑의 명분이고 상하 간에 편안히 사는 길입니다. 만약 비구니를 추방시킴이 과연 옳다면 선대 왕들의 영령이 전하에게 부끄러움을 가지게 될 것이요, 사원을 철폐함이 과연 잘못되었다면, 즉 전하께서는 선대 왕들의 영령에 부담감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아! 이상의 일로써 추론해 본다면 사원이 있으면 순리에 따르는 것이요, 비구니를 추방함은 순리에 위배됩니다. 정치가 순리적으로 되어 나갈 것인가 혹은 잘못되어 나갈 것인가의 여부도 역시 사원의 존폐와 비구니의 추방과 연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필 사원을 혁파하고 비구니를 추방시킨 연후에 인정仁政을 실천할 수 있다고 하십니까?
신은 근거도 없이 전하를 현혹시킴이 아닙니다. 전하의 효도는 천심天心을 감동시키고 지혜는 인도人道에 달통하였습니다. 선대 왕후께서 남긴 법도를 생각한다면 어찌 차마 비구니를 추방시킬 수가 있습니까? 선왕의 옛 법도를 생각한다면 어찌 차마 노비들을 빼앗을 수 있겠습니까?
또 절에는 역대 제왕들의 위패를 모셨는데 당대唐代에 시작되었습니다. 개원開元(713∼741) 연간에 활동한 도의 선사道義禪師가 금각사金閣寺를 세웠습니다. 대종代宗이 두 종류의 세금으로 도움을 주니 고조ㆍ태종 이하 일곱 분 왕들의 위패를 모시고 각각 황제의 칭호를 그 위패에 표시하였습니다. 광순문光順門에 모든 관리를 세우고 사찰 안으로 맞이하여 차례로 제사를 올리게 하였으며 이때부터 해마다 지내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습니다. 당시 태묘太廟와 동쪽과 서쪽의 두 궁궐에 영지靈芝가 자라니 황제가 시를 지어 찬미하였습니다.171)
우리 조선에서도 대개 당의 제도를 본받아 내외 원당願堂에 왕의 위패를 모신 지가 수백 년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왈가왈부할 일도 아니요 참으로 공경하고 존중해야 할 의식입니다. 지금 하루아침에 흙더미 속에 위패를 묻어 버렸으며 제단도 붕괴되었고 제사도 끊어졌습니다. 전하께서는 그 지역이 아닌 곳(즉 사찰이라는 의미)에 위치하여 위패를 설치하기가 합당하지 않아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시대가 많이 지나가서 오랜 세월이 흘러 존속시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008_0342_a_01L姑以君民語之有君則必有民
008_0342_a_02L詩云我獨非民書云可愛非君尼衆
008_0342_a_03L豈非殿下之民而殿下豈非尼衆之君
008_0342_a_04L民以君戴君以民使故在民義當
008_0342_a_05L慤謹在君愛宜寛仁此尊卑之名分
008_0342_a_06L上下之安寧也若放尼果是則先靈有
008_0342_a_07L愧於殿下矣若廢院果非則殿下有負
008_0342_a_08L於先靈矣推而觀之存院則在所
008_0342_a_09L順矣放尼則在所背矣政軆之順背
008_0342_a_10L亦與乎其間而何必曰罷院黜尼然後
008_0342_a_11L爲仁政者哉臣非鑿虗而眩亂於殿下
008_0342_a_12L殿下孝感天心明通人道思先后
008_0342_a_13L之遺範則忍黜其尼衆乎念先王之舊
008_0342_a_14L則忍削其奴婢乎
且寺設聖位
008_0342_a_15L於唐世禪師道義建金閣寺代宗助
008_0342_a_16L以二稅設高祖太宗已下七聖位各以
008_0342_a_17L帝號標其上立百僚於光順門迎入寺
008_0342_a_18L以次致祀自是歲爲常准于時太
008_0342_a_19L廟二宮生靈芝帝賦詩美之至於我
008_0342_a_20L盖取諸此夫聖位之設於內外願堂
008_0342_a_21L數百秊矣此非曰可曰否之端
008_0342_a_22L是乃敬乃重之儀也今一朝瘞於沙土
008_0342_a_23L之中壇墠旣崩禘祫斯絶聖慮必謂
008_0342_a_24L處非其地不宜設而然歟抑世數久遠

008_0342_b_01L만약에 그 지역이 아닌 곳에 위치했다고 한다면, 즉 당시 사람들의 식견이 높지 못함이요, 전하의 잘못이 아닙니다. 만약 시대가 많이 지나가서 오랜 세월이 흘러서 그렇게 된 것이라면, 즉 전대의 경전에 근거가 있고 흙더미에 묻힐 것이 아닙니다. 은대殷代에는 삼종三宗172)이 있고 주대周代에는 칠묘七廟173)가 있는데, 이것을 종묘라고 합니다. 종묘의 법은 고대에는 조주祧主174)는 태조묘의 동서쪽 협실에 모셨으며, 흙더미 속에 묻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습니다. 주대周代에 이르러 소昭175)의 자리에 있는 신주를 옮길 때에는 문왕文王의 사당으로 옮기고, 목穆의 자리에 있는 신주를 옮길 때에는 무왕武王의 사당으로 옮기는데, 역시 흙더미에 묻는다는 소리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물며 시조는 백대가 지나더라도 신주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이치가 없습니다.
사원은 본래 불우佛宇라고 불렀습니다. 비록 그 자리가 아니기는 하지만 이미 제왕의 위패를 모셨다면 참으로 종묘와 같습니다. 옛적 춘추시대에 정鄭나라의 자산子産이 향교鄕校를 허물지 않자 공자는 그가 어질다고 여겼고, 이영李榮이 사당의 신주를 헐어야 한다고 논의하자 한유韓愈는 그를 비난하였습니다. 하물며 우리 태조 이하 역대 왕들께서는 어떠한 존귀한 신령이기에 어찌 차마 왕의 호칭이 새겨져 있는 신주를 진흙 속에 묻을 수 있겠습니까?
춘추시대의 채묵蔡墨이 “옛 유적을 허물지 않는다.”(「소공」 32년)라고 하였습니다. 국가의 옛 유적으로 제사를 지내는 장소만큼 중요한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춘추시대의 자어子魚가 “옛날의 제도를 따른다.”(「정공」 4년)라고 하였습니다. 국가의 옛날 제도로 체협지사褅祫之祀176)만큼 중요한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천리를 기준으로 말을 한다면 공경할 만한 귀중한 유적을 지켜 나가면 이득이요, 인사를 기준으로 말을 한다면 왈가왈부하는 논쟁을 일으킨다면 손실입니다.
그러므로 『서경』 「상서商書」 〈열명說命〉 하에서 “선왕들이 완성한 법도를 거울로 삼는다.”라고 하였으며, 『서경』 「주서周書」 〈필명畢命〉에서 “선왕들이 완성한 공적을 공경하며 따른다.”라고 하였습니다. 진실로 이와 같이 한다면 천리를 얻게 될 것입니다.
『주역』 「수괘需卦」 구삼九三에서 “공경하고 신중하면 패배하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며, 「곤괘困卦」 구오九五에서 “제사를 지냄이 이롭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즉 인사를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신이 날짜를 계산해 보니 가뭄과 기근은 신주를 묻은 해에 시작되었으며 지금 4년째로 접어듭니다. 벼를 심지도 못하고 곡식 수확도 못하였으며, 멀건 죽도 솥에는 없습니다. 남아를 데리고 가서 (종으로 만들어) 곡식과 바꾸니 부부가 마주 보고 눈물을 흘리며,

008_0342_b_01L不應存而然歟若曰處非其地則當時
008_0342_b_02L之識見未高非殿下之失也若曰世數
008_0342_b_03L久遠則前代之經典有據非沙土之瘞
008_0342_b_04L殷有三宗周有七廟是謂宗廟
008_0342_b_05L廟之法古者祧主藏於太祖廟之東西
008_0342_b_06L夾室未聞瘞於沙土之中也至周則昭
008_0342_b_07L之遷主藏於文王之廟也穆之遷主
008_0342_b_08L藏於武王之廟也亦未聞瘞於沙土中
008_0342_b_09L况始祖百世無遆遷之義今寺院
008_0342_b_10L本稱佛宇則雖非其地旣設聖位
008_0342_b_11L實同宗廟昔子產不毁鄕校孔子仁
008_0342_b_12L李榮議毁廟主韓愈非之况我太
008_0342_b_13L祖已下列聖是何等尊靈而忍以泥塵
008_0342_b_14L瘞其標號之主哉蔡墨曰不廢舊績
008_0342_b_15L國之舊績曷若壇墠之位乎子魚曰
008_0342_b_16L以率舊職國之舊職曷若禘祫之祀乎
008_0342_b_17L以天理言之遵迺敬迺重之蹟則得也
008_0342_b_18L以人事言之起曰可曰否之諍則失也
008_0342_b_19L1)啇書曰監于先王成憲周書曰
008_0342_b_20L若先王成烈苟如是則得天理者也
008_0342_b_21L之九三曰敬愼不敗困之九五曰
008_0342_b_22L用祭祀不如是則失人事者也
臣以年
008_0342_b_23L月考之旱饉始於瘞主之歲于今四載
008_0342_b_24L秧糓退鎌饘酏辭鼐持男易粟則夫

008_0342_c_01L자식을 팔아 살아 나갈 계책을 세우니 부모자식 간에 서로 이별하고, 유리걸식하면서 돌아다니는 자들은 길을 덮고, 굶어 죽는 사람은 거리를 메웠습니다.
춘추시대의 유하劉夏가 “신이 노하면 그 제사를 받지 않는다.”(『춘추좌씨전』 「소공」 원년)라고 하였습니다. 혹시 선대왕들의 영혼이 노하여 제사를 받지 않아서 나라가 이러한 상황을 불러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춘추시대의 안자晏子가 “신이 노하면 그 나라를 바라보지 않는다.”177)라고 하였습니다. 혹시 선대왕들의 영혼이 노하여 우리나라를 향하지 않아 나라가 이 지경이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어찌 현재 대단히 덕이 많은 임금이 다스리는 시대에 이렇게 비가 내리지 않는 것이 몇 년이나 계속될 수 있습니까? 이것은 필연적인 결과여서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현재의 상황을 근거로 과거를 본다면 더욱더 잘못됨이 있습니다.
용俑178)을 만든 것이 비록 미미하지만 위대한 성인인 공자는 용을 만든 사람이 후손이 없을 것임을 알았습니다. 돌을 땅속에 묻음이 비록 사소한 일이기는 하지만 신령한 부처는 석씨石氏179)가 망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하물며 지금 역대 왕의 위패는 목자木子180)입니다. 웅덩이를 파서 묻는다면 어떠하겠습니까?
조손祖孫 관계로 말해 보겠습니다. 조상이 있으면 반드시 후손이 있습니다. 『서경』 (「태갑太甲」) 중에서 “너의 빛나는 조상을 본받으라.”라고 하였으며, 『시경』 (「상송商頌」 〈나那〉)에서 “오 빛나는 탕의 후손이여!”라고 하였습니다. 역대 왕들이 어찌 전하의 조상이 아니겠으며, 그리고 전하는 어찌 역대 왕의 후손이 아니겠습니까? 후손은 조상을 계승하고 조상은 후손들에 의해 영원한 생명력을 가집니다. 그러므로 후손들의 효도는 당연히 조상들을 추모하고, 조상들의 영혼은 은밀하게 후손들을 도와줍니다. 이것이 바로 저승 세계와 현실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상적인 이치요,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해야 하는 본래의 모습입니다.
신주를 묻음이 과연 옳다면, 즉 선왕들의 영혼은 전하에게 노여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사를 폐지함이 정말로 잘못이라면, 즉 전하는 선왕들의 영혼에 보답하지 못할 것입니다.
아! 거꾸로 살펴본다면 위패를 설치함이 즉 이득이 있고, 제사를 중단하면 즉 손실이 있습니다. 교화의 득실은 역시 그 사이에서 나옵니다. 하필이면 위패를 훼손시키고 제사를 폐지한 연후에 덕교德敎를 실행하려 하십니까?
신은 유언비어에 따라 전하에게 참람되게 말씀드림이 아닙니다. 전하의 도덕심은 천인天人을 관통하고 학문은 심오한 경지까지 도달하였습니다. 제터가 무너짐을 안타까이 여기신다면 어찌 차마 선왕들의 신주를 묻을 수 있겠습니까? 체협褅祫이 끊어짐을 슬퍼한다면, 즉 어찌 차마 그 올리는 제사를 없애려고 하십니까?

008_0342_c_01L妻對泣鬻子謀生則父母相離流亡
008_0342_c_02L者蔽路餓莩者塡衢劉夏曰神怒不
008_0342_c_03L歆其祀或者先靈怒不歆祀而致此耶
008_0342_c_04L晏子曰神怒不嚮其國或者先靈怒
008_0342_c_05L嚮國而至是耶不然豈今至德之治世
008_0342_c_06L有此不雨之連年哉此必然而無疑者
008_0342_c_07L將今視古尤有甚忒作俑雖微
008_0342_c_08L聖知俑人之無後埋石雖小神釋諭石
008_0342_c_09L氏之致亡矧今聖位乃木子也其於
008_0342_c_10L穿坎而故坑之爲何如哉
姑以祖孫語
008_0342_c_11L有祖則必有孫故書云視乃烈祖
008_0342_c_12L詩云於赫湯孫聖位豈非殿下之祖
008_0342_c_13L殿下豈非聖位之孫乎孫以祖承祖以
008_0342_c_14L孫永故在孫孝當追思在祖靈合陰隲
008_0342_c_15L此幽明之常理死生之本然也若瘞主
008_0342_c_16L果是則先靈無怒於殿下矣若廢祀果
008_0342_c_17L則殿下無報於先靈矣逆而觀
008_0342_c_18L設位則在所得也停祀則在所失也
008_0342_c_19L敎化之得失亦出乎其間而何必曰
008_0342_c_20L位廢祀然後爲德敎者哉臣非踵訛
008_0342_c_21L而僣議於殿下也殿下道貫天人學臻
008_0342_c_22L深奧憮壇墠頹崩則忍瘞其標主乎
008_0342_c_23L愴禘祫之停絕則忍廢其享祀乎
詳而
008_0342_c_24L「啇」通用「商」{編}

008_0343_a_01L
상세하게 논의한다면 봉은사ㆍ봉선사 두 절은 쇠망시켜서는 안 되며, 자수원ㆍ인수원 두 원도 폐지해서는 안 됩니다. 두 가지 일을 함께할 수 없다면 차라리 봉은사ㆍ봉선사 두 절을 망하게 하십시오.
비구니는 추방시켜서는 안 되며, 역대 왕들의 위패도 땅에 묻어서는 안 됩니다. 두 가지 일을 함께할 수 없다면 차라리 비구니를 추방시키십시오. 그렇기는 하지만 이것은 부득이해서 하는 설명입니다. 진실에 근거해서 말을 한다면 모두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역대 왕의 신주를 묻은 옛적부터 비구니를 추방한 금년에 이르기까지 비가 제 때에 내렸습니까? 날씨가 조화를 이루었습니까? 오곡이 익었습니까? 백성들이 즐거워하였습니까? 작년의 가뭄은 왕년보다 심하고 금년의 가뭄은 또 작년보다 심합니다. 내년의 가뭄이 금년보다 심하지 않을 것이라고 어찌 알겠습니까?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위로는 역대 왕들이 순리에 따라 업적을 이룬 뜻을 본받으시고, 아래로는 어리석은 신이 감히 간언하는 정성을 살피십시오. 지난 세대에 일어난 일을 깊이 연구하여 미래에 벌어질 일을 막지 마십시오. 그러면 선왕의 영혼들이 아낌없이 돌보고 도움을 줄 것이요, 전하께서는 사찰을 폐지하고 혁파하는 허물이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기뻐하고 귀신도 모두 즐거워합니다. 오전五典181)이 순조롭게 실행되며 모든 관리들의 일이 제때에 시행됩니다. 계절에 따라 칠정七政182)을 고르게 하며,183) 백성들은 친족들과 화목하게 살도록 하니, 곳곳에서 배를 두드리는 노랫소리(鼓腹之歌)가 들리고 사람들은 콧날을 찡그리는 탄식이 없으니 태평한 세상을 이룰 수 있고 융성한 국가의 복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신은 선조先朝(효종)에게 외람되이 지우知遇를 입었으므로 감히 오늘에 목숨을 돌보지 않습니다.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을 감당할 길이 없으며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글자를 새긴 사람들(刻字秩)
무주茂朱의 인명印明, 금구金溝의 성정省淨, 무주의 신청信淸, 태인泰仁의 종원宗元, 임실任實의 원익元益, 금구의 각심覺心ㆍ경한敬閑.강희康熙 22년 계해년(1683, 숙종 9) 3월 모일에 마치다.

008_0343_a_01L論之兩寺不可衰也兩院不可廢也
008_0343_a_02L二事不兼則寧衰兩寺也尼衆不可黜
008_0343_a_03L聖位不可瘞也二事不兼則寧黜
008_0343_a_04L尼衆也雖然此不得已之說也據實而
008_0343_a_05L言之皆不可也何者自瘞主之徃年
008_0343_a_06L至放尼之今年則風雨時乎陰陽調乎
008_0343_a_07L五糓熟乎百姓樂乎前年之旱甚於
008_0343_a_08L徃年而今年又甚於去年則又安知明
008_0343_a_09L年之不甚於今年哉伏願殿下上軆祖
008_0343_a_10L宗奬順之意下察臣愚敢諫之誠深追
008_0343_a_11L旣徃不塞將來則先靈有眷顧之佑
008_0343_a_12L殿下無廢革之人靈咸悅神鬼盡歡
008_0343_a_13L五典克從百揆時叙齊七政於天時
008_0343_a_14L睦九族於民類處處有鼓腹之歌人人
008_0343_a_15L無蹙額之歎太平可致矣洪祚可延矣
008_0343_a_16L臣於先朝猥蒙知名故敢於今日
008_0343_a_17L避隕命焉不勝屏營惴慓之至謹昧死
008_0343_a_18L以聞

008_0343_a_19L
登階集終

008_0343_a_20L
008_0343_a_21L
刻字秩茂朱印明金溝省淨茂朱信淸
008_0343_a_22L泰仁宗元任實元益金溝覺心敬閑

008_0343_a_23L
康熈二十二年癸亥三月日 訖功
  1. 1)보우普愚(1301~1382) : 고려 말 스님으로 법호는 태고太古, 시호는 원증 국사圓證國師이다. 본관 홍주洪州, 속성은 홍씨洪氏이다. 46세가 되던 1346년(충목왕 2)에 중국으로 건너가 석옥 청공石屋淸珙 스님에게서 법을 이어받아 우리나라 임제종臨濟宗의 시조가 되었다. 저서로 『태고화상어록太古和尙語錄』이 있다.
  2. 2)어린 나이에 중국에 들어가 : 실제로는 46세에 중국에 들어갔다. 어린 나이라고 함은 13세에 출가함을 말한다.
  3. 3)석옥 청공石屋淸珙(1277∼1352) : 원元의 고승이다. 고려의 태고 보우와 백운 경한白雲景閑(1298∼1374)이 그에게 공부를 하였다.
  4. 4)환암 혼수幻菴混修(1320∼1392) : 고려 말의 고승으로 태고 보우의 법맥을 이었다.
  5. 5)구곡 각운龜谷覺雲 : 고려 말의 고승으로 환암 혼수의 법맥을 이었다. 글씨에도 뛰어났다고 한다.
  6. 6)사태沙汰 : 조선 시대의 불교 억압 정책을 가리킨다.
  7. 7)법안法眼 : 여기서는 법에 대해 안목이 열린 걸출한 제자를 말한다. 원래의 뜻은 모든 현상을 꿰뚫어 보는 부처의 눈, 모든 현상의 참모습과 중생을 구제하는 방법을 두루 아는 보살의 눈을 말한다.
  8. 8)정관 일선靜觀一禪(1533∼1608) : 조선 중기 스님이다. 백하 선운의 제자로 교학을 전수받았으며, 청허 휴정에게도 가르침을 받았다. 저서로 『정관집靜觀集』이 있다. 사명 유정泗溟惟政ㆍ편양 언기鞭羊彦機ㆍ소요 태능逍遙太能과 함께 휴정의 4대 제자 중 한 사람이다.
  9. 9)네 마리 용(四龍) : 원문에는 ‘四衣’로 되어 있으나, ‘四龍’으로 비정하여 해석한다. 네 분의 훌륭한 대덕을 말한다.
  10. 10)임성 대사任性大師(1567∼1638) : 호는 충언冲彦 또는 충언忠彦으로 정관 일선의 가르침을 받았다. 백곡 처능의 설을 근거로 임성 대사에게까지 이어지는 조선 불교의 맥은 다음과 같다. 태고 보우→환암 혼수→구곡 각운→등계 정심, 또는 벽계 정심碧溪正心(동일 인물)→벽송 지엄→부용 영관→청허 휴정과 부휴 선수. 등계 정심으로부터 교학의 맥이 다시 이어지는데, 등계 정심→정련 법준→백하 선운→정관 일선→임성 충언이다.
  11. 11)사일社日 : 사일은 입춘 후, 입추 후 제5 무일戊日로 춘사일春社日, 추사일秋社日이 있다. 보통 춘사일은 3월 17~26일에, 추사일은 9월 18~27일 사이에 있다. 춘사일에는 부지런히 일하자는 뜻에서, 추사일에는 풍성하게 된 것을 기뻐하자는 뜻에서 지신地神과 농신農神에게 제사를 지냈다. 왕수가 7세 때인 사일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이듬해 사일에 어머니를 생각하고 매우 슬퍼하므로 마을 사람들이 감동하여 사일의 행사를 그만두었다고 한다.
  12. 12)유서劉恕(1032∼1078) : 송나라 학자로 역사학에 정통하였으며 자는 도원道原이다.
  13. 13)안수晏殊(991∼1055) : 송나라 재상으로 자는 동숙同叔이다.
  14. 14)구준寇準(961∼1023) : 송나라 재상으로 자는 평중平仲이다.
  15. 15)왕우칭王禹偁(954∼1001) : 송나라 문장가로 자는 원지元之이다. 「대루원기待漏院記」로 유명하다.
  16. 16)투간投簡 : 대쪽을 던졌다는 뜻이나 그 고사는 미상이다.
  17. 17)순舜임금에게는 어리석은~걸桀이 있었다 : 군부君父가 제 노릇을 하지 못하면 제대로 받들지 않는다는 뜻이다.
  18. 18)성군이신 요堯임금에게는~주紂가 있었으니 : 자식이 제 노릇을 하지 못하면 전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19. 19)미소 : 염화미소拈花微笑를 말한다. 석가세존이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강연을 할 때 꽃을 들고서 대중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응답하는 이가 없었는데 제자인 가섭迦葉이 부처님의 참뜻을 깨닫고 미소를 지었다. 부처가 “나에게 정법안장正法眼藏, 열반묘심涅槃妙心, 실상무상實相無相, 미묘법문微妙法門이 있으니 이제 가섭에게 준다.”라고 하였다.
  20. 20)결집結集 :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에 가르치신 말씀이 흩어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제자들이 저마다 들은 것을 외워서 경전으로 만든 사업이다. 열반하신 직후에 1차 결집, 백 년 후에 2차 결집, 330년 후에 3차 결집, 6백 년 뒤에 4차 결집이 있었다. 십대제자 중 한 사람인 아난은 다문제일多聞第一로 1차 결집 때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21. 21)하관夏官 : 병조兵曹 관리이다. 조선 시대에는 승군僧軍의 역할이 컸으므로 병조에서 승과를 담당하였다.
  22. 22)중시重試 : 현직으로 있는 문무文武 당하관堂下官을 위하여 둔 과거이다. 10년에 한 번씩 실시되었으며 합격한 사람은 품계品階를 올려 주었다.
  23. 23)요사채 : 스님들이 식사를 마련하는 부엌과 식당, 잠자고 쉬는 공간이다. 아울러 기도하러 온 신도들이 잠깐 쉬고 음식을 먹을 수도 있는 곳이다.
  24. 24)파릉巴陵 : 경기도 양천陽川의 옛 이름이다.
  25. 25)〈입천복사入薦福寺〉 : 정확한 제목은 〈제천복사형악선사방題薦福寺衡嶽禪師房〉이다.
  26. 26)가설假設 : 임시로 지은 건물을 말한다. 여기서는 죽은 사람의 영혼을 위로하는 사찰로 이해된다.
  27. 27)한유韓愈는 조주潮州~애도의 글 : 한유는 딸의 죽음을 슬퍼하며 시를 짓기를, “죄 없는 네가 죽은 것은 나의 죄이다. 한평생이 부끄럽고 애통한 눈물이 줄줄 흐른다.(致汝無辜由我罪。 百年慙痛戾闌干。)”라고 하였다.
  28. 28)승통僧統 : 승군僧軍을 통솔하는 승직僧職의 하나로 처능은 당시 관서 도승통都僧統이었다.
  29. 29)장건張騫(?∼B.C. 114) : 한 무제 때 장군으로 서역으로 가는 길을 개척하는 데 많은 공로를 세웠다.
  30. 30)지기석支機石 : 직녀가 베를 짤 때 베틀이 움직이지 않도록 괴었다는 돌이다.
  31. 31)천명天命을 성性이라 한다 : 『중용』 제1장.
  32. 32)선성繕性 : 본성本性을 함양함을 가리킨다. 『장자』 「선성繕性」에서 “繕性於俗”이라고 하였다.
  33. 33)수성修性 : 성정性情을 함양함을 가리킨다. 한漢나라 양웅揚雄의 『법언法言』 「학행學行」에서 “學者所以修性也。 視聽言貌思。 性所有也。 學則正。 否則邪。”라고 하였다.
  34. 34)공자는 초나라~인정하지 않았다 : 『논어』 「공야장公冶長」에 “자장이 묻기를 ‘초나라 영윤인 자문은 세 차례 영윤을 지냈지만 기뻐하는 안색이 없었고, 세 차례 그만두었으나 노여워하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어떻습니까?’라고 하니, 공자가 ‘충성스럽다’라고 하였다. 자장이 말하기를 ‘인합니까?’ 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모르겠다. 어찌 인을 실천했다고 하겠는가?’라고 하였다.(子張問曰。 令尹子文。 三仕爲令尹。 無喜色。 三已之。 無慍色。 何如。 子曰。 忠矣。 曰仁矣乎。 曰未知。 焉得仁。)”라는 구절이 있다.
  35. 35)관중管仲 : 제나라 대부이다. 제 환공을 도와 천하의 패자가 되게 하였으며 관포지교管鮑之交로 유명하다. 『논어』 「헌문憲問」에서 “공자가 말하기를, 환공이 제후들을 아홉 번이나 규합하였을 때 무력을 사용하지 않았음은 관중의 힘이다. 그는 어진 사람 같다. 그는 어진 사람 같다고 하였다.(子曰。 桓公九合諸侯。 不以兵車。 管仲之力也。 如其仁。 如其仁。)”라고 하였다.
  36. 36)삼현三賢 : 은殷나라의 세 분 현자인 미자微子ㆍ기자箕子ㆍ비간比干을 말한다. 『논어』 「미자」에서 “미자는 나라를 떠났고, 기자는 노예가 되었고, 비간은 간하다가 죽었다. 공자가 말하기를, 은나라에는 세 명의 어진 분이 있다고 하였다.(微子去之。 箕子爲之奴。 比干諫而死。 孔子曰。 殷有三仁焉。)”라고 하였다.
  37. 37)『석씨원류釋氏源流』는 명나라 스님 보성寶成이 편찬한 것을 1672년(현종 13)에 간행한 것이다. 내용은 석가모니의 일대기와 석가모니 이후 서역 및 중국에서 불법이 전파된 사실을 400항에 걸쳐 기술하였다. 양주楊州의 불암사佛巖寺에서 중간重刊한 것에 처능이 발문을 쓴 것이다.
  38. 38)『전등록傳燈錄』 :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을 말한다. 송宋나라 도원道源 스님이 지은 것으로 1004년에 간행되었다. 총 30권이다. 인도 선종의 조사들과 달마 이후 중국에서 불법이 전해지는 계통을 밝혔다. 등燈은 중생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는 불법을 비유한 것이다.
  39. 39)『통재通載』 : 『불조역대통재佛祖歷代通載』를 말한다. 원나라 스님 염상念常이 지은 것으로 1341년에 간행되었다. 역대 여러 고승들의 전기와 불교와 관련된 여러 가지 사적이 실려 있다.
  40. 40)담파 국사膽巴國師(1230∼1303) : 원元의 고승인데, 티벳 사람으로 공가갈자사功嘉葛刺思이다.
  41. 41)정두원鄭斗源(1581∼?) : 조선 중기 문신이다. 본관 광주光州이고 자는 정숙丁叔, 호는 호정壺亭이다. 1630년 진주사陳奏使로 명明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할 때 천리경千里鏡ㆍ자명종自鳴鐘 등 서양 기계와 천문학과 관련된 서적을 많이 가져왔다. 『석씨원류』도 이때 가져온 것으로 추측된다.
  42. 42)풍운風雲이 만났을 즈음(風雲際會) : 현명한 군주와 신하가 만난 것을 말한다.
  43. 43)팔개八凱 : 중국 전설상의 임금인 고양씨高陽氏의 뛰어난 아들 여덟 명을 일컫는다. 창서蒼舒ㆍ퇴애隤敱ㆍ도인檮戭ㆍ대림大臨ㆍ방강尨降ㆍ정견庭堅ㆍ중용仲容ㆍ숙달叔達이다.
  44. 44)사흉四凶 : 중국 상고시대 전설상의 순임금 때의 공공共工ㆍ환두驩兜ㆍ삼묘三苗ㆍ곤鯀을 말한다. 『서경』 「순전舜典」에서 “유주로 공공을 유배 보내고, 숭산으로 환두를 추방시키고, 삼위로 삼묘를 쫓아 보내고, 추산으로 곤을 귀양 보냈다. 네 명의 악인에게 죄를 주니 천하의 모든 사람이 복종하였다.(流共工于幽洲。 放驩兜于崇山。 竄三苗于三危。 殛鯀于羽山。 四罪而天下咸服。)”라고 하였다.
  45. 45)재사才士를 맞이할~거머쥐고 맞이하였습니다 : 어진 인재를 구함에 부지런하다는 말이다. 옛날 주공周公이 한 끼 밥을 먹을 때 세 번 밥을 뱉고, 머리 한 번 감을 때 세 번이나 머리털을 거머쥐었다고 한다. 토포악발吐哺握發.
  46. 46)범중엄范仲淹(989∼1052) : 송나라 충신으로 자는 희문希文이다. 「악양루기岳陽樓記」에서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근심하기 이전에 근심하고,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즐거워한 다음에 즐거워한다.(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라고 하였다.
  47. 47)상하上下 : 신분이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 또는 나이가 많은 사람과 젊은 사람을 뜻한다.
  48. 48)수가須賈 : 전국시대 위魏나라 대부이다. 진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옛 친구인 범수范睢에게 솜옷을 선물하여 사신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49. 49)유총劉寵 : 후한의 관리이다. 자는 조영祖榮이고 일명 일전태수一錢太守라고도 한다. 회계현 태수로 부임하다가 중앙의 대신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자 마을의 원로 여섯 명이 각각 1백 전을 보내었는데 유총은 각 개인에게 1전을 받았다고 하는 고사가 있다.
  50. 50)속수束脩 : 속수지례束脩之禮를 말한다. 제자가 되기 위하여 스승을 처음 뵈올 때에 드리는 예물을 일컫는 말이다. 속수는 열 묶음의 육포를 뜻한다. 『논어』 「술이」에서 “공자가 말하기를, ‘속수 이상을 가지고 오면 나는 그를 가르치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하였다.(子曰。 自行束脩以上。 吾未嘗無誨焉。)”라고 하였다.
  51. 51)백곡 처능이 스승인 벽암 각성을 위해 지은 행장이다.
  52. 52)삼산三山 김씨金氏 : 현재에 삼산 김씨가 없으며, 삼산이라는 지명은 충청도에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각성 스님의 본관이 김해金海라고 된 곳도 있다.
  53. 53)구족계具足戒 : 비구나 비구니가 지켜야 할 계율을 말한다. 비구는 250계, 비구니는 348계가 있다. 구족계를 받았다고 함은 정식으로 스님이 되었다는 뜻이다.
  54. 54)차의衩衣 : 일반 남자들이 입는 평상복이다.
  55. 55)청계난야淸溪蘭若 : 청계사를 가리킨다. 난야는 아란야阿蘭若의 줄임말로 사찰을 의미한다. 두보의 시 〈알진제사선사謁眞諦寺禪師〉에 “蘭若山高處”라는 구절이 있다.
  56. 56)중사中使 : 왕명을 전달하는 궁중 내시이다.
  57. 57)냉이처럼 달게 여겼다 : 『시경』 「패풍邶風」 〈곡풍谷風〉에서 “누가 씀바귀를 쓰다고 했나, 내게는 냉이처럼 달다.(誰謂荼苦。 其甘如薺。)”라고 하였다. 어떤 고생도 감수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58. 58)총림叢林 : 승려들의 참선 수행 전문 도량인 선원禪院, 경전 교육기관인 강원講院, 계율 전문 교육기관인 율원律院 등을 모두 갖춘 사찰을 말한다. 현재 송광사ㆍ수덕사ㆍ통도사ㆍ해인사ㆍ백양사 등 국내에 다섯 곳이 있다.
  59. 59)고한 희언孤閑熙彦(1561∼1647) : 부휴 선수의 제자이다.
  60. 60)이시죽반二時粥飯 : 스님들이 옛날에 아침에는 죽, 낮에는 밥으로 하루 두 끼만 먹었음을 말한다. 여기서는 당시 가난한 사람들의 음식을 뜻한다.
  61. 61)경오일 : 1659년 12월에 경오일은 없다. 경오일은 1659년 11월 13일, 또는 1660년 1월 14일이다.
  62. 62)임신일 : 1561년 9월에는 임신일이 없다. 9월 1일 무자일에서 시작하는데 9월에는 임신일이 들어 있지 않다. 착오가 있는 듯하다.
  63. 63)법성원융法性圓融 : 의상 대사의 핵심적인 사상으로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이라고 한다. 존재하는 모든 사물의 본성은 원융하여 두 모습이 없다는 뜻이다.
  64. 64)이난二難 : 난형난제難兄難弟, 즉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는 말이다.
  65. 65)관백關白을 봉封하려고 가던 길 : 관백은 간파쿠, 즉 일본 막부의 최고 책임자를 일컫는다. 1598년에 풍신수길豊臣秀吉을 봉하러 가는 길이다.
  66. 66)계수족啓手足 : 계수계족啓手啓足, 즉 임종이 다가옴을 말한다. 『논어』 「태백泰伯」에서 “증자가 병이 들어 제자를 불러 모아 ‘나의 다리를 들어라, 나의 손을 들어라’라고 했다.(曾子有疾。 召門弟子曰。 啓予足。 啓予手。)”라고 하였다.
  67. 67)가을 뱀과~서로 잡아당긴다 : 필법이 뛰어남을 말한다.
  68. 68)중국 장군이~멈추고 지체했었다 : 이종성이 해인사에 들른 것을 말한다.
  69. 69)노창蘆䎫 : 스님들이 먹는 수수한 음식으로 여겨진다.
  70. 70)한 짝~두고 떠났고 : 달마 대사가 서방으로 돌아갈 때에 한 짝의 신발은 남기고 한 짝은 신고 갔다. 불법을 전하고 갔음을 말한다.
  71. 71)두타頭陀 : ⓢ dhūta의 음역으로 세상의 욕심을 버리고 청정하게 수행에 정진한다는 의미이다. 두타에는 모두 12조항이 있어서 이를 12두타행이라고 부른다. 인가와 떨어진 조용한 숲 속에 머문다, 항상 걸식을 한다는 등의 12조항이 있다.
  72. 72)호련瑚璉 : 곡식을 담아서 종묘에 올리는 제기祭器이다. 뛰어난 사람을 비유할 때 쓴다. 『논어』 「공야장」에서 “공자의 제자인 자공이 ‘저는 어떠합니까?’라고 공자에게 물으니, 공자가 대답하기를 ‘너는 그릇이다’라고 하였다. ‘무슨 그릇입니까?’ 하니, ‘호련瑚璉이다’라고 하였다.(子貢問曰。 賜也。 何如。 子曰。 女器也。 曰何器也。 曰瑚璉也。)”라고 한 고사가 있다.
  73. 73)이시방李時昉(1594∼1660) : 본관은 연안延安이고 자는 계명季明, 호는 서봉西峯이다. 귀貴의 아들이며 영의정 시백時白의 동생이다. 저서로 『서봉일기西峯日記』가 있다.
  74. 74)옹성甕城 : 성문을 보호하고 성을 든든히 지키기 위하여 성문 바로 바깥쪽에 성곽을 둥글게 한 번 더 둘러쳐 방비에 유리하도록 쌓은 작은 성을 말한다.
  75. 75)흑의지걸黑衣之傑 : 검은 옷을 입은 호걸이란 뜻으로, 검은 옷은 스님을 뜻한다. 남조시대 제齊나라 무왕武王 때에 법헌法獻과 현창玄暢이라는 두 분 스님이 가마를 타고서 대궐에 들어갔다고 하여 당시 흑의이걸黑衣二傑이라고 한 고사가 있다.
  76. 76)서럽게 용양龍驤의 무덤을 바라보고 : 두보杜甫의 시 〈증좌복야정국공엄무贈左僕射鄭國公嚴武〉에 ‘悵望龍驤塋’이라는 구절이 있다. 용양은 진晉의 용양 장군 왕선王濬을 가리킨다.
  77. 77)복야僕射의 관을 부축한다 : 두보의 시 〈관에 누워 고향으로 돌아가는 엄 복야를 곡함(哭嚴僕射歸櫬)〉.
  78. 78)현안지병玄晏之病 : 은둔하고 싶은 마음의 병을 말한다. 진晉의 황보밀皇甫謐이 고상한 뜻을 가져 벼슬을 하지 않았으며 자칭 현안 선생이라 하였다. 후대에 현안은 은거하면서 고상하게 산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79. 79)문원지질文園之疾 : 소갈증消渴症, 요즈음의 당뇨병을 말한다. 한漢의 문장가인 사마상여司馬相如가 효문원령孝文園令이란 관직에 있을 때 소갈병에 걸려 후대에 소갈병을 문원병이라고 하였다.
  80. 80)신분은 고귀하고~궁궐을 넘나들었습니다 : 신익성은 선조의 딸 정숙 옹주와 결혼하여 부마駙馬의 지위를 누렸다.
  81. 81)아양곡峨洋曲 : 거문고를 잘 타기로 유명한 백아伯牙가 탔던 악곡樂曲이다. 『열자列子』 「탕문湯問」에서 “백아는 거문고를 잘 탔고, 종자기鍾子期는 소리를 잘 들었다. 백아가 거문고를 타면서 뜻이 높은 산에 있으면 종자기가 말하기를, ‘좋구나! 아아峨峨하기가 태산泰山과 같구나’ 하였고, 뜻이 흐르는 물에 있으면 종자기가 말하기를, ‘좋구나! 양양洋洋하기가 강하江河와 같구나’ 하였다.”라고 하였다.
  82. 82)절양곡折楊曲 : 이별의 노래로 옛날의 악곡樂曲 가운데 이별의 아쉬운 정을 노래한 절양류곡折楊柳曲을 말한다. 옛날에는 이별할 때 버들가지를 꺾어 이별의 아쉬움을 표현하였다.
  83. 83)광릉廣陵의 동쪽, 두강斗江 옆 : 광릉은 경기도 광주廣州로 추정되며, 두강도 광주 주위를 흐르는 강물로 이해된다.
  84. 84)왕손곡王孫谷 : 신익성이 만년에 산 곳이다. 1638년 51세 되던 해에 왕손곡에 집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왕손곡의 정확한 위치는 미상이다.
  85. 85)풍성豊城의 칼과~적수赤水의 구슬 : 풍성ㆍ고죽孤竹ㆍ공상空桑ㆍ적수 모두 중국의 지명이다. 풍성은 전설상의 명검인 용천검과 태아검이 나왔다는 지역이고, 고죽에서는 경쇠와 피리, 공상에서는 거문고, 적수에서는 구슬이 많이 생산되었다고 한다.
  86. 86)예양豫讓 : 전국시대 진晉나라의 의사義士로 지백智伯의 신하였다. 지백이 조양자趙襄子에게 죽자 복수를 하기 위해 몸에 옻칠을 하여 벙어리 행세를 하며 기회를 노렸다. 조양자가 외출할 때 다리 밑에 숨었다가 찔러 죽이려고 하였으나 발각되어 칼로 자결하였다.
  87. 87)상여제주相如題柱 : 한漢나라 문장가인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촉蜀을 떠나 벼슬을 하기 위해 장안長安으로 향할 때, 성도成都의 승선교昇仙橋 다리 기둥에 “네 마리 말이 끄는 붉은 수레를 타지 않고서는 이 다리를 건너오지 않겠다.”라고 써서 포부를 밝혔던 고사가 있다. 『한서漢書』 「사마상여전司馬相如傳」.
  88. 88)윤수尹壽 : 요임금의 스승이라고 알려진 사람이다.
  89. 89)무성務成 : 순임금의 스승이라고 알려진 사람이다.
  90. 90)추요蒭蕘 : 나무꾼 또는 나무꾼과 같은 하찮은 사람의 말이라는 뜻이다. 『시경』 「대아大雅」 〈판板〉에서 “옛날의 현자가 한 말이 있으니, 추요에게도 묻는다.(先民有言。 詢于芻蕘。)”라고 하였다.
  91. 91)추로鄒魯 : 추는 맹자의 고향인 추나라, 노는 공자의 고향인 노나라이다. 추로라고 하면 보통 공자와 맹자, 또는 유가儒家를 의미하는 뜻으로 쓰인다.
  92. 92)중니仲尼가 노담老聃에게 배웠습니다 : 공자가 노자에게 배웠다는 말은,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에서 공자가 노자에게 예禮를 물어보았다는 말에 근거한 것이다. 즉 유가儒家가 도가道家에게 물었다는 말이다. 여기서는 종파를 초월하여 유가가 불가佛家에게 물을 수도 있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깔고 있다.
  93. 93)여망呂望 : 태공망太公望, 강태공姜太公이라고 부른다. 나이 칠십에 낚시를 하다가 주문왕에게 발탁되었다고 한다.
  94. 94)사호四皓 : 상산사호商山四皓를 말한다. 진秦나라 때 학정을 피해 산중에 숨어 살던 동원공東園公ㆍ하황공夏黃公ㆍ녹리선생甪里先生ㆍ기리계綺里季 등 네 노인을 말한다. 한漢나라가 들어서자 세상에 다시 나왔다.
  95. 95)죽림칠현竹林七賢 : 위魏ㆍ진晉의 정권 교체기에 죽림에 모여 거문고와 술을 즐기며 청담淸談으로 세월을 보낸 일곱 명의 선비를 가리킨다. 완적阮籍ㆍ혜강嵆康ㆍ산도山濤ㆍ향수向秀ㆍ유영劉伶ㆍ완함阮咸ㆍ왕융王戎이다.
  96. 96)십란十亂 : 행정에 뛰어난 열 명의 신하를 가리킨다. 난亂은 치治의 뜻이다. 『서경』 「태서泰誓」에서 “予有亂臣十人。 同心同德。”이라고 하였다. 열 명은 주공周公ㆍ소공召公ㆍ태공망太公望ㆍ필공畢公ㆍ영공榮公ㆍ태전太顚ㆍ굉요閎夭ㆍ산의생散宜生ㆍ남궁괄南宫适ㆍ문모文母이다.
  97. 97)삼우三愚 : 『집고금불도논형集古今佛道論衡』에 “세 명의 어리석은 이가 지혜를 이룬다.(三愚成一智)”라는 말이 있다.
  98. 98)치구雉劬 : 치구雉雊로도 쓴다. 꿩이 날아와 제사를 지내는 솥 위에서 울었다는 고사가 있다. 후에 치구는 변란이 일어날 조짐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서경』 「고종융일高宗肜日」의 서문에 보인다.
  99. 99)소巢ㆍ허許 : 요임금 때의 은자인 소부巢父와 허유許由를 말한다.
  100. 100)고誥 : 『서경』에 「주고酒誥」, 「대고大誥」, 「강고康誥」 등의 글이 있다. 고는 훈계할 때 내리는 글이다.
  101. 101)임금이 하는~점은 없앤다 : 처능이 『좌전』을 인용하면서 중간 구절을 빼어 버렸는데 여기서는 전체를 인용하여 번역하여 문맥이 통하도록 하였다. “君所謂可而有否焉。 臣獻其否以成其可。 君所謂否而有可焉。 臣獻其可以去其否。” 밑줄친 부분이 처능이 인용한 부분으로 중간에 두 구절을 빠뜨렸다.
  102. 102)『주서이기周書異記』 : 중국에서 간행된 책으로 부처와 관련된 내용이 다소 많지만 신빙성이 떨어지는 책으로 평가된다.
  103. 103)이상은 『광홍명집廣弘明集』에 나오는 내용이다. 『광홍명집』은 당나라 고승인 도선道宣(596∼667)이 편찬한 저서이다. 총 30권으로 664년에 완성되었다. 유교ㆍ불교ㆍ도교 연구에 귀중한 저서이다.
  104. 104)실리방室利防 : 진시황제 때 불경을 가지고 와서 중국에 전파했다고 하는 서역 스님이다.
  105. 105)곤야왕昆耶王 : 당시 흉노족의 추장이다.
  106. 106)유향劉向 : 전한 시대의 학자이다. 저서로 『설원說苑』, 『열선전列仙傳』, 『열녀전列女傳』 등이 있다.
  107. 107)월지국月支國 : 옛날 서역에 있던 나라로 지금의 감숙성 서부에 해당된다.
  108. 108)명제가 꿈에~모시고 돌아왔습니다 : 명제 10년인 67년에 백마白馬에 불경을 싣고 왔다고 한다.
  109. 109)지역이 달라서 : 불교가 중국에서 탄생된 것이 아니라 변경 국가인 인도에서 탄생되었다는 뜻이다. 당시 중국을 제외한 모든 나라는 오랑캐로 여겼으니, 불교가 인도에서 생성되었으므로 오랑캐 종교라고 본 것이다.
  110. 110)조벽趙璧 : 화씨지벽和氏之璧을 가리킨다. 조趙나라 혜문왕惠文王이 가지고 있었다. 당시 진나라 소양왕昭襄王이 탐을 내어 진나라 15개 성과 바꾸자고 하였다.
  111. 111)수주隋珠 : 수후지주隋侯之珠. 즉 수후가 얻었다는 매우 진귀한 구슬이다. 화씨지벽과 함께 수주화벽隋珠和璧이라고 칭한다.
  112. 112)성인이신 공자의~수주隋珠와 같습니다 : 공자와 맹자가 천하를 돌아다니면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지 못함은 마치 가치가 없는 화씨지벽과 수주 같다는 의미이다. 즉 불교가 온 나라에 널리 전파되지 못하면 아무런 가치를 가지지 못한다는 뜻이다.
  113. 113)만蠻 : 남만南蠻이라고도 하는데 춘추시대에는 남쪽 오랑캐가 사는 지역이라고 하였다. 동이東夷ㆍ서강西羌ㆍ융戎 모두 다 변경 오랑캐가 사는 지역이라 천시하였다.
  114. 114)구이九夷 : 공자가 살던 시대에 구이가 정확히 어디를 가리키는지는 알 수 없지만, 처능은 동이, 즉 조선을 구이로 보고 있는 듯하다.
  115. 115)세 분의 성인 : 요ㆍ순ㆍ우 임금, 또는 우임금ㆍ주공ㆍ공자를 말한다.
  116. 116)십철十哲 : 공자의 뛰어난 열 명의 제자로 공문십철孔門十哲이라고도 한다. 덕행德行에는 안연顔淵ㆍ민자건閔子騫ㆍ염백우冉伯牛ㆍ중궁仲弓, 언어에는 재아宰我ㆍ자공子貢, 정사政事에는 염유冉有ㆍ계로季路, 문학에는 자유子游ㆍ자하子夏가 뛰어났다.
  117. 117)모자牟子(170∼?) : 후한後漢의 불교학자로 이름은 융融, 자는 자박子博이다. 저서로 『이혹론理惑論』이 있다. “彼一時。 此一時。”라는 말은 『맹자』 「공손추하公孫丑下」에도 보인다.
  118. 118)당나라 천자의~못했을 것입니다 : 미상.
  119. 119)허현도許玄度 : 동진 사람으로 왕희지와 교유가 있었다. 조선 시대 무용당 대사無用堂大師(1651∼1719)의 『무용당집無用堂集』에 “3백 년 전의 허현도는, 3백 년 후의 배공미(三百年前許玄度。 三百年後裴公美。)”라는 시구절이 있다.
  120. 120)위고韋皐 : 당나라 사람으로 『당명황잡록唐明皇雜錄』에, 성도城都에서 윤위고尹韋皐가 태어나자 어떤 스님 한 분이 와서 이 사람은 제갈무후의 후신이라고 한 고사가 있다.
  121. 121)진종眞宗이 미소를 지은 것 : 미상.
  122. 122)인종仁宗 : 송나라 진종眞宗의 아들이다. 1010년 5월 그믐에 태어났는데 태어난 후로 계속 울고서 그치지 않자 유명한 고승을 초빙해서 기도를 하여 울음을 그쳤다는 고사가 있다.
  123. 123)등애登艾는 소~원숭이가 된다 : 이 글은 『고금사문류취古今事文類聚』 후집 권5 「전후론신前後論身」 〈수이사겸隋李士謙〉에 보인다.
  124. 124)공자가 노련한~농사일을 못한다 : 공자의 농사와 관련된 고사는 『논어』 「자로子路」에 보인다.
  125. 125)허행許行 : 맹자와 동시대 사람이다. 『맹자』 「등문공滕文公」 상에 관련 기사가 보인다.
  126. 126)계신癸辛 : 송宋의 주밀周密(1232∼1298)이 지은 『계신잡지癸辛雜識』를 말하는 듯하다. 당과 송을 다룬 역사서이다.
  127. 127)남의 선행은~내가 고친다 : 『좌전』 양공 31년의 기사이다.
  128. 128)『시경』 「주남周南」 〈인지지麟之趾〉 : 당시 진실하고 뛰어난 사람들이 많았음을 노래한 시이다. “振振公子。 于嗟麟兮。”
  129. 129)종리의鍾離意 : 후한 초기 사람으로 자는 자아子阿이다. 명제明帝가 귀신을 존중하고 허명을 좋아한다고 비판하였다. 회계 현령을 지냈다.
  130. 130)편협하고 자질구레하다 : 『후한서』 「종리의전」에 기사가 보인다.
  131. 131)왕경王景 : 왕경이 〈부처를 찬송하는 글(金人頌)〉을 올렸다는 기사는 『불조역대통재佛祖歷代通載』 권5에 보인다. 처능도 『불조역대통재』의 문장을 인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132. 132)삼족오三足烏 : 고대 전설에 나오는 신화의 새, 길조라고 한다.
  133. 133)육관六官 : 주대周代의 관직 제도인 천관天官ㆍ지관地官ㆍ춘관春官ㆍ하관夏官ㆍ추관秋官ㆍ동관冬官을 말한다.
  134. 134)이상의 기록은 『불조역대통재』 권10에 보인다.
  135. 135)『석실론石室論』 : 누구의 글인지는 확실하지는 않으나 『불조역대통재』 권10에 『석실론』의 글을 인용한 것이 보인다.
  136. 136)조귀진趙歸眞 : 당나라의 도사로 불교와 유교가 나라를 망친다고 하여 회창법란會昌法亂을 일으킨 사람으로 유명하다. 회창會昌(무종 연호) 5년인 845년 8월에 조귀진이 유교와 불교가 나라를 망친다는 진언을 하자, 당시 무종이 이 말을 듣고 장안과 낙양에는 각각 네 개 사찰만을, 각 주에는 한 주에 한 개 사찰만을 남기고, 전국 4만여 개의 절을 없애고 승려 26만여 명을 환속시켰다. 하지만, 846년 3월 당 무종이 갑작스레 죽고, 4월에는 조귀진도 처형당하며 다시 불교 원래 모습대로 차츰 회복되었다.
  137. 137)시호市虎 : 삼인성시호三人成市虎를 말한다. 시장에 호랑이가 나왔다는 말을 한 사람, 두 사람이 말할 때까지는 믿지 않다가도 세 번째 사람까지 그렇게 말하면 믿게 된다는 뜻이다. 『한비자韓非子』 「내저설內儲說」에 보인다.
  138. 138)베틀에 앉아~된 것 : 증삼살인曾參殺人의 고사를 말한다. 사실이 아닌데도 사실이라고 말하는 자가 많으면 진실이 됨을 비유한 말이다. 증자曾子가 노魯나라의 비費라는 곳에 있을 때의 일이다. 증자와 이름과 성이 같은 사람이 있었는데 살인을 하였다. 사람들이 증자의 어머니에게 달려와 말하였다. “증삼이 사람을 죽였습니다.” 증자의 어머니는 “우리 아들은 사람을 죽이지 않았습니다.”라고 하며 믿지 않고 태연히 짜고 있던 베를 계속 짰다. 얼마 후, 여러 사람이 와서 계속해서 “증삼이 사람을 죽였습니다.”라고 하자 증자의 어머니는 마침내 베틀의 북을 던지고 담을 넘어 달아났다는 고사가 있다. 『전국책戰國策』 「진책秦策」에 보인다.
  139. 139)모두가 시호市虎가~연유하는 것입니다 : 모두 근거 없다는 뜻이다.
  140. 140)정자程子 : 송의 유학자인 정명도程明道와 그의 동생인 정이천程伊川을 말한다. 이정二程이라고 한다.
  141. 141)서촉西蜀 용 선생龍先生 : 서촉 용씨라고도 하는데 「비한非韓」이라는 글 백 편을 지었다고 한다.
  142. 142)원통 선사圓通禪師 : 송대의 고승으로 추측된다. 당시 원통이라는 호칭을 쓰는 스님으로는 원통 수圓通秀 선사와 원통 눌圓通訥 선사가 있었다.
  143. 143)담자는 경전에 적히었으며 : 『춘추』 「소공」 17년에 공자가 담자에게 배웠다는 기록이 있으며, 나머지 세 사람에게 배웠다는 기록이 적혀 있지 않다.
  144. 144)일행一行(683∼727) : 당대의 고승이자 천문학자로 대연력大衍曆을 만들었다. 대연역은 당나라의 역법으로 729년부터 33년 동안 시행되었으며 우수한 역법이라고 전해진다.
  145. 145)현완玄琬(562∼636) : 당대 초기의 고승이다.
  146. 146)저 태양은 언제 없어지려나 : 『서경』 「탕서湯誓」편에서 “이 해는 언제 없어지려나. 내가 너와 함께 망하리라.(時日曷喪。 予及汝皆亡。)”라고 하였다.
  147. 147)남소南巢 : 『서경』 「중훼지고仲虺之誥」에서 “성탕 임금이 남소로 걸을 추방시켰다.(成湯放桀于南巢)”라고 하였다.
  148. 148)포락지형炮烙之刑 : 은나라 주紂임금이 만든 형벌의 명칭이다. 구리 기둥에 기름을 발라 숯불 위에 걸쳐 놓고, 그 위를 맨발로 걸어가게 하여 발이 미끄러져 불 속으로 떨어지면 그대로 타 죽게 만들었다.
  149. 149)자신의 공적을 칭송하는 사업 : 진시황제가 천하를 통일하고 난 다음에 각지를 돌아다니며 칭송하는 글을 새겼다. 대표적인 것이 태산 정상에 세운 〈태산 각석泰山刻石〉(B.C. 219)이다. 이사李斯가 썼다고 한다.
  150. 150)호해胡亥 : 진시황제 둘째 아들이다. 첫째 아들은 부소扶인데 날조된 진시황제의 명령서에 따라 자살하였다. 부소의 아들이 자영子嬰이다
  151. 151)온량거轀輬車 : 진시황제의 시체를 실은 수레를 가리킨다. 『사기』 「진시황기」에 “36년(B.C. 211) 가을에 사신이 길을 가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구슬을 쥐고 길을 막으며 ‘내 대신 호지군滈池君에게 전해 주어라’ 하고, 이어 ‘올해 조룡祖龍이 죽는다’ 하였다.”라고 한다. 조룡은 진시황제를 말한다. 구슬을 호지군에게 준 이듬해 진시황제가 죽었다. 진시황제가 죽었을 때는 마침 무더위가 한창이라서 온량거 안에 있던 시체에서 악취가 풍겨 나오자 진시황제의 죽음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건어물을 잔뜩 실었다고 한다.
  152. 152)지도軹道 : 이곳에서 진시황제 3세世인 자영이 목에 밧줄을 걸고 옥새를 유방에게 바쳤다.
  153. 153)취령鷲嶺에 정신을 두고 : 취령은 부처가 설법한 영취산靈鷲山을 말한다. 불교에 뜻을 두었다는 의미이다.
  154. 154)계원鷄園에 마음을 두고서 : 계원은 인도의 고대 사찰 이름이다. 즉 태조가 불교에 마음을 두었다는 의미이다.
  155. 155)동정서원東征西怨 : 동쪽 사람을 정벌하니 서쪽 사람이 원망한다는 말이다. 여러 지역을 정벌하여 백성들의 환대를 받는다는 뜻으로 쓰인다. 은나라의 탕왕이 하나라 걸왕을 정벌할 때 탕왕의 덕을 칭송하면서 생긴 말이다. 『서경』 「중훼지고」에서 “동쪽을 정벌하니 서쪽 오랑캐가 원망하고, 남쪽을 정벌하니 북쪽 오랑캐가 원망하였다.(東征西夷怨。 南征北狄怨。)”라고 하였다.
  156. 156)탕망湯網 : 탕임금의 그물이라는 뜻으로 관대한 처분을 말한다. 옛날 탕임금이 들에 나가서 사냥을 하였다. 그물을 쳐 짐승을 잡는 사람이 4면에 모두 그물을 치고는 상하 사방의 짐승이 모두 자기의 그물로 들어오라고 기도하는 것을 보고, 그 3면에 친 그물을 제거하고는 “왼쪽으로 달아날 놈은 왼쪽으로 달아나고 오른쪽으로 달아날 놈은 오른쪽으로 달아나라. 다만 달아나기 싫은 놈만 내 그물로 들어오라.”라고 한 고사故事가 있다. 『사기』 「은본기」에 보인다.
  157. 157)우거禹車 : 우임금이 수레를 타고 가다가 죄인을 만나면 내려서 죄의 경과를 물어보았다는 고사가 있다.
  158. 158)사죄四罪 : 순임금이 통치하던 때의 흉악한 네 명의 신하인 공공共工ㆍ환두驩兜ㆍ삼묘三苗ㆍ곤鯀을 말한다. 여기서는 흉악한 신하를 의미한다.
  159. 159)육책六責 : 탕임금이 7년 가뭄이 들었을 때 산천에 기우제를 드리면서 자책한 여섯 가지 조목을 말한다. 정치에 절도가 없는 것, 백성을 병들게 하는 것, 궁궐을 사치스럽게 꾸미는 것, 여자들이 날뛰는 것, 뇌물의 수수, 참소하는 자들의 창성 등이다.
  160. 160)어찌 소를~것에 구애받겠습니까 : 소가 도살장에 끌려가는 것을 측은하게 여겨 양으로 바꾸라고 한 고사가 있다. 『맹자』 「양혜왕」 상에 보인다. 여기서는 모든 존재의 생명은 동일하니 차별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여겨진다.
  161. 161)어찌 나무와~생각을 하십니까 : 나무가 너무 거대하여 쓸모가 없어서 생명을 계속 유지하였고, 오리는 울지 못한다고 쓸모가 없어서 빨리 잡아먹혔다는 고사가 있다. 둘 다 쓸모없는 존재이지만 한쪽은 생명을 유지하고 한쪽은 생명을 유지하지 못했다. 『장자』 「산목山木」에 보인다. 여기서는 생명이 소멸되는 것에 있어서 차별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여겨진다.
  162. 162)일행 화상은 참으로 성인이다 : “一行和尙。 眞聖人也。” 이 말은 『송고승전宋高僧傳』 권5에 보인다.
  163. 163)대연수大衍數 : 『주역』에서 말하는 기본수이며 우주의 기본수라고 하는데 50을 말한다.
  164. 164)첩여婕妤 : 한나라 때 후궁後宮의 한 계급이다. 후궁은 등급에 따라 여러 호칭이 있었는데, 미인美人ㆍ양인良人ㆍ팔자八子ㆍ칠자七子ㆍ장사長使ㆍ소사少使ㆍ첩여婕妤ㆍ경아娙娥ㆍ용화傛華ㆍ충의充依ㆍ소의昭儀ㆍ상가인上家人ㆍ하가인下家人 등이다. 역대로 전한 성제成帝 때 총애를 받은 반첩여班婕妤가 가장 유명하다.
  165. 165)여혜경呂惠卿(1032∼1101) : 북송의 정치가로 자는 길보吉甫이다. 신종神宗ㆍ철종哲宗ㆍ휘종徽宗 연간에 활동하였다. 현종顯宗과의 관계는 확실하지 않으며, 현종도 어느 왕조의 어느 임금을 가리키는지도 불분명하다.
  166. 166)자수원慈壽院 : 원래는 자수궁이었는데, 나중에 자수원이라 하여 후궁이나 승려를 살게 하였다.
  167. 167)인수원仁壽院 : 원래는 인수궁이었는데, 나중에 인수원이라 하여 후궁이나 승려를 살게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1661년(현종 2) 2월 12일 기사에 의하면 자수원과 인수원을 혁파했다고 하였다.
  168. 168)내원당內願堂 : 원당은 원찰願刹이라고도 하며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비는 법당이다. 궁중 안에 둔 것을 내불당 또는 내원당, 내도량內道場이라고 한다.
  169. 169)방포원정方袍圓頂 : 승려를 말한다. 방포方袍는 중이 입는 방형方形의 승복을 말하며, 원정圓頂은 둥근 머리란 뜻으로 모두 중을 뜻한다.
  170. 170)나만 홀로 백성이 아니랴(我獨非民) : 『시경』에 이 구절은 없다.
  171. 171)이상의 기사는 『불조역대통재』 권15에 보이는데 766년(당 대종 대력 원년)에 일어난 일이다.
  172. 172)삼종三宗 : 황제黃帝ㆍ요ㆍ순 임금을 말한다.
  173. 173)칠묘七廟 : 천자의 종묘, 곧 태조의 종묘와 삼소三昭ㆍ삼목三穆의 총칭이다.
  174. 174)조주祧主 : 봉사손奉祀孫과 대수代數가 끊어진 먼 조상의 신주를 말한다.
  175. 175)소昭 : 소목昭穆의 소를 말한다. 소목은 종묘나 사당에 조상의 신주를 모시는 차례이다. 왼쪽 줄을 소라 하고, 오른쪽 줄을 목穆이라 한다. 1세를 가운데에 모시고 2세, 4세, 6세는 소에 모시고, 3세, 5세, 7세는 목에 모신다.
  176. 176)체협지사褅祫之祀 : 임금이 시조에게 올리는 큰 제사를 말한다.
  177. 177)신이 노하면~바라보지 않는다(神怒不嚮其國) : 『안자춘추晏子春秋』에는 “귀신이 그 나라의 제사 음식을 받아먹지 않고 재앙을 내린다.(鬼神不饗其國以禍之)”로 되어 있다.
  178. 178)용俑 : 사람 모양으로 만든 인형을 말한다. 『맹자』 「양혜왕」 상에서 “공자가 말하기를, 처음으로 용을 만든 사람은 아마도 후손이 없을 것이다. 그가 사람의 모습을 본떠서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仲尼曰。 始作俑者。 其無後乎。 爲其象人而用之也。)”라고 하였다.
  179. 179)석씨石氏 :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시대에 후조後趙를 세운 석륵石勒을 말한다.
  180. 180)목자木子 : 나무로 된 위패, 또는 ‘이李’를 말한다. 조선 왕실이 이씨李氏에 의해 건국되었음을 뜻한다.
  181. 181)오전五典 : 오상五常과 같은 말이다.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을 말한다.
  182. 182)칠정七政 : 일월日月과 오성五星(수성ㆍ화성ㆍ목성ㆍ금성ㆍ토성)을 말한다.
  183. 183)오전五典이 순조롭게~고르게 하며 : “五典克從。 百揆時叙。 齊七政。” 『서경』 「순전」에 기사가 보인다.
  1. 1)「朴」通「扑」{編}。
  2. 1)「啇」通用「商」{編}次同。
  3. 1)「啇」通用「商」{編}。